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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室朴氏文 維歲甲子九月辛亥朔三日癸丑。夫靑皐李承鶴操數行文。哭告于亡室朴孺人之靈曰。嗚呼。卿卿去。將安之。千里返櫬。生行死歸。是誰之咎。子欲養而入京。不得養而一病篤。至斯矣。復誰咎也。雖然。年逾稀而有夫焉。有子焉。孫曾又在前。以夫人之事言之。是可曰了債。而五十二年同居之餘。京鄕相分。病報晩時。又失車便。後一日而去。則方入黑酣。鄕已無及矣。不聞永訣一言。薄情哉。此行若是恝乎。兒輩相傳苦待之言。我在鄕山。孫在海外。使人哽咽。萬事已矣。人生如夢。係戀尼私愛憎之說。復歸何處。維我細君。君性慈仁。我性峭直。多有終風之暴。必多難堪。而吾亦有時後悔。若言琴瑟。則不同而和耶。嗟。我命道崎嶇。一生經歷。無非雲雷水山。結髮以來。但見辛苦。不知安樂。心無怨怒。入我門三月。而擔任鼎臼。身無完裳。口無兼味。家有異顔之親。又有媵母。幷八男妹。及所生七箇兒。視同撫恤。皆知感化。而稔累間言。尊舅亦悅豫矣。未幾遽當終天之痛。初欲讀書以成家者。百口計誏。無他委任。故不得專治。再擬門戶之計。而空事奔走。乃自疑于心曰。吾家世積仁累德。宜無子孫之久屈。而必是先兆之不卜吉坎。使堪輿家相之。晝宵竭力。三十年于玆矣。生計益薄落。世變無窮。兒不從命。盡室于京。使君作九原之恨。而幾傾之家業。不至覆敗。維君之內助居多。君性好施。每値凶荒飢寒。亦自不堪。而推食食之。解衣衣之。吾欲有施與。則輒勸之不吝。憫其同己弟之不能完其親葬。每流淚告我。我無暇及。則使我經紀。竟遂孝思。是亦人之難能。吁。京居吾先之古宮。始興吾家之先兆。自初終以至葬埋。具儀如禮。不後京俗。二十里長安萬目。皆知朴氏之葬。生前困苦。爲身後一時之光乎。二期已滿。家屬歸鄕。或恐魂魄之無依。又以壙中憂虞。不如還葬故山。將以來日甲寅。形歸窀穸。茫茫人世。我生幾何。死不同穴。生前已言之矣。預我壽藏。卜在不遠。異日相望。庶魂靈之可相慰歟。言有不能盡。而恨何旣。嗚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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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第二男文 維歲次丙戌四月甲子朔初七日。阿爹自京來。聞汝之化去報于境上。顚倒入門。不見汝之影響。眞耶夢耶。傳者信耶。汝捨我何之忍痛飮恨。越七日丙子。始收拾飮魄。以淸酒過脯之具。告我第二男太授之靈。嗚呼。昔汝之生時。吾遊淳化而歸。墮地爲三日。汝之祖父。謂汝父曰。此吾家之寶也。從而愛之益篤。暫不離乃祖側。吾亦托情於汝。異諸汝之同氣。汝祖考下世後。觀汝之情狀。每啾然若無依若有失焉。吾每尋常知之。以爲情理之使然。孰知汝棄我。而下恃於泉臺耶。其然乎其不然耶。非汝之命道至此。使汝不免于水火。爲父者之罪也。仲春之月。吾發西裝。汝時微痛一夜。似感似疹。不爲深憂。竟乃登途。心雖未忘。意謂無慮。在京得汝仲父書。謂輕痛姑無顯發云。下道聞善經之報。自謂之幸。安知餘外之頉。作惡報耶。痛矣痛矣。莫非乃父殃咎。流於汝躬。致此也。無知者人也。難堪者理也。汝之玉質蘭儀。何處復見乎。汝之解語後。一不逆乃父意。慧性日長。粹朗出群。人共譽之將謂承乃祖風。吾亦信之無異。有望於汝。奈之何。使汝父作胸釘之恨。而折一臂於中道耶。命乎理乎。九曲猿腸。寸寸欲消。雖質之神明。非命也非理也。不偶生而偶死者。夭札也。使汝不免夭札。是誰之罪。入地者。亦應含寃。在世者。無窮抱恨。與生俱亡矣。若知其如此。雖萬乘之公相。吾不以一日輟汝而就也。使汝至此。不知可曰人乎。登途日。汝不求他。願史略一卷書。書雖求。來汝先何去。不能摩挲眼前。耳畔無淸亮一句讀聲音耶。永訣之語。以此遮面乎。聞于汝母。汝方疾劇。呼我無已。今我來矣。何不一呼。薄情哉。汝父功名何物。喪我天倫。向誰擡顧。何處寓樂乎。日暮獨坐。森森然在我傍。而撫之則無跡。呼之無應。汝其忘我耶。我何爲生。空山寂寂。風蕭蕭。雨冥冥。汝之完完。何以堪耐。將誰與爲儔乎。吾聞魂氣無不之。抑在吾之傍而不知乎。與汝之弟妹。侍於乃祖之側乎。不可得以知也。雖不可知。依吾之終身也。哀哉哀哉。生死不欲汝父知。若是恝乎。非汝也汝父之自招也。將欲一痛泄哀。以辦幽明。而哀未泄而臆先塞。將奈之何。太授太授。汝其知耶不知耶。嗚呼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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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액을 청하는 계사 請額啓辭 현종(顯宗) 병오년(1666년) 9월 11일에 대신 병조판서(兵曹判書) 소결청 당상(疏決廳堂上)을 인견할 때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30)가 아뢰기를 "찬성에 추증된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킨 사적은 이미 함경 감사(咸鏡監司) 민정중(閔鼎重)의 계문(啓聞) 및 전 평사(評事) 이단하(李端夏)의 상소 중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신이 다시 전하의 귀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으니, 조정에서 이미 포상하는 법을 내렸고 특히 총장(寵章)을 베풀었으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이에 북방(北方) 선비들이 존모하고 받들어 의병을 일으킨 지역에 서당을 세우고 그 당시 함께 거의한 이붕수(李鵬壽) · 강문우(姜文佑) · 최배천(崔配天) · 지달원(池達源) 등을 배향(配享)하여 제사지낼 곳으로 삼고서 사액을 청하고자 하였으나 먼 지방 사람들이 임금에게 알릴 길이 없으므로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합니다. 성상께서 만약 특별히 사액을 하신다면 교화를 수립하고 인심을 굳게 뭉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주상께서 "해조에 말하여 품처하라."라고 전교를 내렸다.또 다시 아뢰기를31) "정 문부가 의병을 일으킨 공은 오래 되어도 사라지지 않아 70여 년이 지난 뒤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서 소급하여 포상하는 은전을 입었으니 북방 인심이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이에 사우를 세워 그때 함께 거의(擧義)한 여러 사람을 배향하면 더욱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니 특별히 사액을 내려주어 먼 지방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여 주면 참으로 격려와 권면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되므로 아래에서 멋대로 결단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가하여 주심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계하(啓下)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顯宗丙午九月十一日, 大臣兵曹判書疏決廳堂上, 引見時, 司諫呂聖齊所啓 '贈贊成鄭文孚倡義事蹟, 已悉於咸鏡監司閔鼎重啓聞及前評事李端夏陳疏中, 臣不必更瀆, 而朝廷旣下追褒之典, 特施寵章, 甚盛擧也。北方士子, 向慕尊奉, 營立祠宇於倡義之地, 以其時同事李鵬壽姜文佑崔配天池達源配享, 以爲香火之所, 欲爲請額, 而遠方之人, 無路上聞, 故敢此仰達。自上若特爲賜額, 則可以樹立風聲, 固結人心矣。' 上曰: "言于該曹稟處事," 傳敎矣。'鄭文孚倡義之功, 久而不泯, 至於七十餘年之後, 始蒙朝家追褒之典, 北方人心, 大有所聳動, 而立祠宇, 以其時同事諸人配享者, 尤可見尊慕之誠, 特賜恩額, 以副遠人之望, 誠合激勸之道, 而事係恩典, 自下不得擅便, 上裁何如,' 啓依所啓施行。 여성제(呂聖齊) 1625~1691.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1689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러 사직, 행중추부판사(行中樞府判事)로 전임했다. 이때 남인(南人)들이 성혼(成渾) ·이이(李珥)를 무고하고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려 하자 그 관계관으로서 스스로 청죄(請罪)한 뒤 낙향하였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廢位)를 반대하는 상소를 위해 상경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울분으로 발병, 고향에서 죽었다. 또 다시 아뢰기를 원문은 임금이 한 말처럼 주어가 구별되지 않았으나, 내용상 이 부분은 여성제가 다시 아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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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子厚 如玉其人。常常在心目之間。但稽山鏡水。若隔在雲端耳。此時何時。詩禮樽爼。已屬先天。携手同行。嘆將安歸。俯仰天地。寧不忉怛。聞溪南丈入會。稽山中與仙庄相近否。羽客之遇。聯鞭追隨。剡棹之興。溯洄相訪。其超然風味。足可想像。瞻望東雲。願擇梅福之隣。未知山椒水涯。旁隙之地。不惜鷦鷯一枝之棲耶。未審此時體候。何如。益勵勁節。卒究遠業。遙遙慰祝。此外何有。弟平生。以憂故自繞。而駸駸然。年力已至衰替矣。學無定力。而遽遭世變。其於所向。安得不迷哉。惟依日新左右之。尙爾支捱耳。伏想吾兄之庇庥於溪艾兩丈。如弟之仰日新。則吾輩今日揭厲之方。何患無依歸處耶。遙以奉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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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贊炯【永煥】 靑城歸路。一宵奉晤。如讀十年書。伊後復漠然。三夏亭上。每思故人淸風。而竟不可得已。而新凉入庭樹。可續此餘意否。若得遂從容。因復款聽。春間遊覽歷歷之語。是爲一副快事也。鄙先立言之筆。實賴吾兄周章。感威可忘。前此令郞之行。多在臨時直發。未能一番修候。倘或厚恕耶。令郞喫苦經夏。似無離膝之憂。可知其志之有在也。志之如此。何患不見其成就耶。謹詢春堂迎泰。竹柏凝祥。晨昏之暇。溫習舊業。新味津津。天之祿我。何其厚哉。願兄。益思所以勉副天餉之意也。弟下根之質。又以懶散成習。只是一箇蠧衣蝗粟之物也。自顧此生。豈不可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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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朴大奎【奎鎭】 陽來日。兄書亦來。天時人事。無非大來消息。感仰亡已。矧伊陽春高調。錯出於一幅之間。敬玩不釋。足令警惰而惺昏。詩人之無金玉其音。良有以也。來書。以鄙家四父子。讀書稱譽者。以至歟。以實歟。十年泰山。一人讀之。于古白石。一人讀之。未聞有父子兄弟同堂咿唔。然後方云讀書也。大抵讀書。而帶伐齊之名。難容一身之罪。而況四父子乎。以鄙所見。德門賢輩。實心讀書。凡幾父子乎。汝穎之賢星。復見於今日矣。欽艶之極。只自慚愧而已。吾兩人阻闊。今爲幾年。茫然不可追記矣。然各自盡力於自家分上。則這便是朝暮遇也。如何。時因便風。惠以種種䂓警是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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吊告文 趙性熹 七松安處士。讀聖賢書。居窮處約。不以榮利智能累其心。日與其友鄭日新。講道林樊。與性意未相見面。因日新而聞性憙日新懋實甚。盖因傳聞之誤。若以性意爲可與語者遂降屈賢德贈處無間處士從以吹噓之竿牘之問時月踵至性憙闇劣復不無自知每有推詡。輒蹙然不自安。旣而交淺言深。道義相勉。各以累牽。終無過從。然思戀之係。期望之切。又未嘗以日月間斷。山川阻遠有間也。處士族人安君圭星。遊性憙門。十月。往修其歲事于寶城。歸傳處士委化之報。其族䣊相聚。必非傳訛。性憙猶如夢醉。將信而復疑者屢矣。臘月性憙敝宗順濟。來致日新十一月十一日書。書中幷付處士家訃書。處士果以十月十四日。得疾不起矣。日新書云。前月失一知已友。郞七松安某也。之人也。樂善好義。愷悌勤飭。實南服偉人。叔世眞儒。今忽至此。尤無以依賴。且云。某秋間。聞尊駕南遊。掃庭除備茶果。將迎候于路。竟相違而止。盖其居常。不跡城府。不見權貴。獨於此。惓惓而不已。其胷中涇渭去就。卓然不苟者。如此。性憙發書而長號。旣而曰。人之死生何限。孫子荊所云。諸人不死。而使武子死者。盖深惜之。而猶有所激。呂東萊所云。人物渺然。伏紙流涕者。爲道之憂者也。處士。志於道而不克有終。人物之感。則誠有所不可已者。而如性憙鹵莽滅學。老且陳廢。而猶蝗梁黍。支離斯世。亦足可愧也已。日新。眞儒偉人之云。日新非姑息愛人者也。處士之平生見矣。處士之身後微矣。九月。性憙。欲往遊天冠月出諸山。行至竹樹。將訪處士及日新之居。有事沮敗之。徑還不果尋。雖無從容約誓之言。至今思之。車過腹痛。竟不免負心於幽明。又甚悲夫。乃爲文而吊之。曰夫人之死。各以類悲。由親及疎。疇非哭私。性憙之於處士。非親戚與面交。淚汍瀾而無從。夫孰爲余之敎憫吾道之日竆。讀書者竟無命也。獨有耿然之不泯。亦莫不以死生而正性。嗚呼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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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1) 錦湖遺事序(1) 도(道)란 사람으로서 항상 지켜야할 도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요 배우는 자가 부지런히 날마다 익히는 것은 이 도를 구하여 이 도를 행하는 일 뿐이니, 이것이 천성의 밖에 있겠는가. 유자(有子)가 “군자는 근본에 힘써,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기니, 효도와 우애는 인을 행하는 근본일 따름이다.” $주 군자는 …… 따름이다 :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라고 했으니 우리 외고조 금호(錦湖) 나공 같은 분은 인을 행하는 근본을 터득함이 있는 분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녔으니 진실로 이미 신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또한 스승과 벗들 사이에서 학문을 익힘에 가정에서는 수양함이 있었고 나라에서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하나의 관직을 맡겨 시험해 보니 한 달의 교화에 그 백성들로 하여금 “어질고 현명하다.”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횡역에 걸려 예측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임금께서 용서하시며 “효자이다.”라고 하셨으니, 아, 사람으로서 항상 지켜야할 도리가 이 분에게 있다. 이에 지금 4대손 상사 나두동 씨가 백 수십 년 뒤에 선조의 유적을 수집하여 《금호유사》 한 권을 편성하고 장차 간행하여 오래 전하게 하고자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아! 나는 이전에도 외람되게 공의 〈사실기〉를 지었는데, 어떻게 또 중언부언 $주 중언부언 : 원문 ‘疊床架屋’은 상 위에 상을 놓고,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얻는다는 것으로, 반복됨을 말한다.으로 유사의 서문을 쓰겠는가. 그러나 공의 유사가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람으로서 항상 지켜야할 도리에 느끼는 바가 있고 인륜에 보탬이 될 것이요 자손들에게만 다행한 일이 아닐 터이니 감히 서문을 쓰지 않겠는가.숭정(崇禎) 후(後) 두 번째 병오년(1726) 초여름, 외현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쓴다. 道以彛倫爲重, 學者孜孜日講, 所以求此道, 行此道而已, 此有待於性分之外也. 有子曰 :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 若吾外高祖錦湖羅公, 其有得於爲仁之本者哉. 童而至性, 固已格神明矣, 而又講磨師友, 有修于家, 有聞于邦矣. 至其試諸一官, 期月之化, 令其民頌之曰 : “仁賢也.” 不幸罹橫逆, 臨不測之地, 聖主原之曰 : “孝子也.” 嗟乎! 彛倫在是矣. 迺今四世孫上舍斗冬氏, 蒐集先蹟於百有數十年之下, 編成錦湖遺事一卷, 將壽諸梓, 俾重元序之. 噫! 重元前旣猥爲公事實記矣, 奚用又以疊床架屋之說序遺事焉. 顧公遺事不泯于世, 可以感秉彛益人倫, 非特子孫之爲幸而已也, 敢不書. 崇禎後再丙午孟夏, 外玄孫八溪鄭重元, 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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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世系 나 씨의 본관은 나주이다. 대대로 거주함에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시조 이후로 세대는 증거로 삼을만한 것이 없고 족보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12세 이하이다. • 시조 부(富) 【고려시대 정의대부(正議大夫) $주 정의대부(正議大夫) : 고려시대 정4품 문관의 품계이다.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을 지냈다.】 • 득규(得虬)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 자(子) 중윤(仲允) 【영동정을 지냈다.】 • 자(子) 송기(松奇) 【영동정을 지냈다.】 • 자(子) 수영(守永)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 자(子) 원(遠) 【통사랑(通仕郞) 사온서(司醞署) $주 사온서(司醞署) : 궁중 안에서 쓸 주류(酒類)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이다. 직장(直長) 동정(同正) $주 동정(同正) : 실제 직무를 집행하지 아니하고 벼슬자리의 명목만을 띠는 벼슬로, 차함(借銜)의 벼슬 이름 아래에 붙여 쓰던 칭호이다.을 지냈다. 묘는 나주 남쪽 송현(松峴)에 있다.】 • 자(子) 진(璡)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묘는 송현에 있다.】 • 자(子) 공언(公彦)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우왕 7년(1381) 전라도 순문사(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다. 묘는 나주 서쪽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부인은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흥위위 보승랑장(興威衛保勝郞將) 유번(柳蕃)의 따님이다.】 • 자(子) 집(諿)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주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 나라의 중요한 격식(格式)을 의정(議政)하던 기관이다.를 지냈다. 묘는 무안군(務安郡) 주룡 나루 판문치(板門峙)에 있다.】 • 자(子) 자강(自康)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다. 묘는 주룡 나루에 있다. 부인은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둘째 따님이다.】 • 자(子) 계조(繼祖)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성화(成化) 갑오년(성종 5, 1574) 5월 25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장흥동에 있다. 부인은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전라 감목관(全羅監牧官) $주 감목감(監牧官) :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의 무관 벼슬이다. 조여경(趙餘慶)의 따님이다.】 • 자(子) 일손(逸孫) 【자는 안지(安之)이다. 선무랑(宣務郞) 행(行) 전연사(典涓司) 직장(直長)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으며 3월 초파일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장흥동에 있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된 창원 공씨(昌原孔氏)로, 생원(生員) 장원(壯元) 공섬승(孔贍勝)의 따님이다.】 • 자(子) 질(晊) 【자는 백승(伯升)이다. 홍치(弘治) 무신년(성종19, 1488)에 태어나, 가정(嘉靖) 무자년(중종 23, 1528) 무과에 합격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되었다. 가정(嘉靖) 병신년(중종31, 1536) 10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 묘소는 장흥동에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강진 최씨(康津崔氏)로,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추증된 호(號)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따님이다.】 • 자(子) 사침(士忱) 【자는 중부(仲孚)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지냈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의금부 좌찬성(議政府坐贊成)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사적은 사실기와 묘문에 자세히 보인다. 첫째 부인은 경부인(敬夫人)으로 추증된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아들 셋을 두었다. 둘째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 광주 정씨(光州鄭氏)이며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 자(子) 덕명(德明)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기축년(선조 22, 1589)의 화를 당하여 경성(鏡城)으로 귀양 갔다. 임진란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변방에 사는 백성으로서 왜적에 응하여 난을 선동한 자를 포획하여 목을 베었다. 이 일은 《북관지》에 실려 있다.】 • 자(子) 이소(以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 자(子) 인소(因素)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결(羅袺)과 나격(羅䙐)이고, 서자가 하나 있는데 나겹(羅裌)이다.】 • 자(子) 성소(成素)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서자가 셋 있었으니,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 자(子) 취소(就素) 【자식이 없다.】 • 자(子) 덕준(德峻)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을 스승으로 모셨다. 품행과 도의로 천거되었으며, 벼슬은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이르렀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어버이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두 번째 어머니 모시기를 친어머니처럼 하였다. 고을 사람들 가운데 자손들을 가르치거나 두 번째 어머니를 모시는 자들은 반드시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 여(女) 사위 김잡(金磼)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숲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갑자기 밤에 깜짝 놀란 일이 생겨 부부가 서로 헤어졌는데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음으로써 열녀의 정각을 표창 받았다.】 • 자(子) 찬소(纘素) 【사위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나겹(羅裌)이며, 선교랑을 지냈다.】 • 자(子) 계소(纘素)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와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다. 서자가 있는데, 이름은 나진(羅袗)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 자(子) 위소(緯素) 【생원과 문과에 합격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염(羅袡)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정랑을 지냈고, 나반(羅襻)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부사(府使)를 지냈고, 나진(羅袗)은 출계(出繼)하였다.】 • 여(女) 사위 최광헌(崔光憲) 【선무랑(宣敎郞)을 지냈다.】 • 자(子) 치소(緻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기(羅衤基 )는 통덕랑(通德郞)을, 나겸(羅衤兼 )은 선교랑(宣敎郞)을, 나균(羅袀)은 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을, 나형(羅衤瑩)은 통덕랑을 지냈다.】 • 자(子) 경소(經素)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적(羅襀)은 통정랑(通德郞)을, 나단(羅襢)과 나선(羅䙋)은 문과에 합격하여 장령(掌令)을 지냈다.】 • 서자(庶子) 함소(緘素) • 자(子) 덕윤(德潤)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곤재(困齋)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품행과 도의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 자(子) 회소(繪素) 【무과에 합격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이천 부사(伊川府使)를 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나성(羅衤成 )은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나첨(羅襜)은 출계하였다.】 • 자(子) 유소(由素)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나일(羅衵)이다.】 • 자(子) 의소(宜素) 【진사와 문과에 합격하여 예조 정랑(禮曺正郞)을 지냈다. 서자 나첨(羅襜)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 여(女) 사위 윤항(尹沆) 【충절위(忠義衛)를 지냈다. 정유왜란 때 아우 덕윤의 부인 정 씨와 함께 치마끈을 같이 묶고서 주룡나루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열녀의 정각을 표창 받았다.】 • 자(子) 우탕(佑湯) • 자(子) 덕현(德賢) 【곤재의 문인이다. 천성이 효우를 지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죽을 먹고 물만 조금 마셨다.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달아나 숨어 엎드려 있었는데, 적들이 갑자기 이르자 그가 어머니를 안고 처연히 비통하게 울부짖으니 적들이 해치지 않고 떠나서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인조가 이 일을 듣고는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하였다. 부인은 하동 정씨(河東鄭氏)인데 또한 주룡 해구에 목숨을 바쳤기에 열녀로서 정각으로 표창을 받았다.】 • 자(子) 익소(益素)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우(羅祐)와 나호(羅祜)는 진사에 합격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태학에 추천을 받았으며,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 여(女) 사위 정오(鄭澳) • 자(子) 후소(後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직(羅衤直), 나찬(羅襸), 나탁(羅袥), 나예(羅袣)이다.】 • 자(子) 득소(得素) 【천성이 지극한 효성을 지녔다. 19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3년 동안 하면서 계속 피눈물을 흘리며 점차 야위며 $주 점차 야위며 : 원문 ‘시훼(柴毁)’는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이 몹시 여위는 것을 말한다. 《주역》 설괘(說卦)의 괘상(卦象)에 보면 ‘시(柴)’자에 ‘척(瘠)’의 뜻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으니, 인조께서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 자(子) 상소(尙素)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유(羅裕)는 무과사마(武科司果)에 합격하였고, 섬(襳)과 완(衤完)이 있다. 서자(庶子)는 한 명 있는데 ▣이다.】 • 자(子) 중소(重素)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연(羅䙇)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나식(羅衤式)이 있다.】 • 자(子) 덕신(德慎)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와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병신년(선조 29, 1596)의 어려움을 만난 뒤 재기하여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다. 무술년(선조 31, 1598)에 노량(露梁) 전투에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선봉에서 왜적과 싸운 공이 있었으니, 당시 나이가 31세였다. 선무종훈(宣武從熏)에 1등에 녹훈(錄勳)되었다.】 • 여(女) 사위 민희일 (閔喜一) • 여(女) 사위 유천(柳遷) 【충의위(忠義衛)를 지냈다.】 • 여(女) 사위 위홍주(魏弘宙).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 자(子) 산보(山寶)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다.】 • 자(子) 정보(廷寶)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 자(子) 국보(國寶) • 자(子) 덕헌(德憲)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과 경기 수사(折衝京圻水使)를 지냈다. 병자년(인조14, 1636) 봄에 명을 받들어 심양(瀋陽)으로 들어갔는데 오랑캐가 황제라고 부르고 축하하라고 하면서 참가한 하반(賀班) $주 하반(賀班) : 국가와 왕실의 경사 때 조정에서 하례하는 반열을 말한다.들을 위협하였다. 공은 절의를 지켜 굴복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소무(蘇武) $주 소무(蘇武) : 소무는 한 무제(漢武帝) 당시의 사신이다. 한무제가 흉노와의 친선을 위하여 소무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흉노 선우는 소무에게 한나라를 배반하고 자신의 노복이 되어 달라고 강요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소무는 황야로 보내져 19년에 걸친 억류생활을 하면서도 흉노에게 굴복하지 않았으며, 무제의 아들 소제(昭帝) 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에 견주었다. 가도 도독(椵島都督)이 이러한 일을 황조에 아뢰니 숙종께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표창하여 추증하였다.】 • 여(女) 사위 김용건(金用健) • 여(女) 사위 이준신(李儁臣) 【진사에 합격하였다.】 • 자(子) 수소(守素)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부인은 언양 김씨(彦陽金氏)이며 충신으로서 정려문을 표창 받았다. 안주 목사(安州牧使)이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장무공(壯武公) 김준(金浚)의 따님이다. 정묘호란 때 안주성이 함락되자, 장무공은 스스로 몸을 태워 목숨을 바쳤다. 김 씨 또한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바쳤기에 열녀로서 정각의 표창을 받았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위(羅褘)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 자(子) 정소(貞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회(羅襘)이다.】 羅氏本官羅州. 世居不出鄕, 而始祖以後世代, 無徵譜牒所詳載者, 只是十二世祖以下.始祖 富 【高麗正議大夫 監門衛上將軍.】得虬 【令同正】子 仲允 【令同正】子 松奇 【令同正】子 守永 【進士】子 源 【通仕郞 司醞署直長 同正. 墓在松峴】子 璡 【嘉善大夫 工曹典書. 墓在松峴】子 公彦 【中顯大夫 典農寺正. 辛禑七年, 從全羅都 巡問使李乙珍, 克倭有功. 墓在羅州西長興洞. 配高興柳氏, 興威衛保勝郞將 蕃之女.】子 諿 【式目都監錄事. 墓在務安南住龍渡板門峙.】子 自康 【通訓大夫 行 務安縣監. 墓在住龍渡. 配永川崔氏有中之女.】子 繼祖 【將仕郞. 成化甲午五月二十五日卒. 墓在長興洞. 配淳昌趙氏 全羅監牧官餘慶之女.】子 逸孫 【字安之, 宣務郞行典涓司直長,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三月初八日卒. 墓在長興洞. 配贈淑夫人, 昌原孔氏, 生員壯元贍勝之女】子 晊 【字伯升, 弘治戊申生. 嘉靖戊子武科, 通訓大夫 行司憲府監察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官. 嘉靖丙辰十一月初九日卒. 享年六十九. 墓在長興洞. 配 贈貞夫人, 康津崔氏, 弘文館副應敎, 贈禮曺參判, 號錦南溥之女.】子 士忱 【字仲孚, 號錦湖, 通訓大夫行尼山縣監 贈崇政大夫 議政府坐贊成 兼 判義禁府事. 事蹟詳見事實記及墓文. 前配贈貞敬夫人坡平尹氏, 有三子. 後配 贈貞敬夫人光州鄭氏, 有三子二女.子 德明 【進士, 義禁府都事. 嘗被己丑禍謫鏡城, 當壬辰亂, 與北評事鄭文孚等, 謨起義兵, 捕斬邊民, 煽亂應倭者, 事載北關誌.】子 以素 【有四子褕 襑 袿 袨.】子 因素 【有二子袺, 䙐庶子一裌.】子 成素 【武科, 宣傳官. 有庶子三表, 衤方 , 袁.】子 就素 【無后.】子 德峻 【師事鄭困齋介淸, 以行誼被薦. 官至報恩縣監. 贈戶曹參判. 天性孝友, 奉親以誠, 事繼母如事所生, 鄕人訓子孫事繼母者, 必以爲法云.】女 金磼 【主簿. 壬辰倭亂, 隱避林藪, 忽因夜驚, 夫妻相失, 自縊死, 以烈女旌閣.】 子 纘素 【宣務郞. 有一子裌, 宣敎郞.】子 繼素 【武科 通政价川郡守, 有繼子, 袗, 生員, 都事.】子 緯素 【生員文科, 同知中樞. 贈議政府左參贊, 有三子, 袡 生員正郞, 襻 生員府使, 袗出繼.】女 【崔光憲, 宣敎郞.】子 緻素 【有四子衤基 通德郞衤兼 宣敎郞, 袀折衝副護軍, 衤瑩通德郞.】子 經素 【有三子, 襀通德郞, 襢䙋 文科掌令.】庶子 緘素子 德潤 【進士, 司憲府監察. 師事困齋, 以行誼著名.】子 繪素 【武科, 通政伊川府使, 有二子. 衤成武科, 宣傳, 官襜出繼.】子 由素 【宣敎郞. 有一子, 衵.】子 宜素 【進士 文科, 禮曺正郞. 有繼子, 襜通德郞.】女 尹沆 【忠義衛. 丁酉倭亂, 與弟德顯妻鄭氏, 同結裳帶, 投死住龍海口, 以烈女旌閭.】子 佑湯子 德賢 【困齋文人. 天性孝友, 居憂之日, 啜粥疏飮. 丁酉倭亂, 負母竄伏, 賊徒猝至, 見其抱母, 悲號惻然棄去, 人謂孝感. 仁祖朝, 事聞, 贈司饔院參奉. 妻河東鄭氏, 亦投死住龍海口, 以烈女旌閭.】子 益素 【宣敎郞. 有二子, 祐 祜, 進士以孝被太學薦, 官參奉.】女 鄭澳子 後素 【有四子衤直 襸 袥 袣.】子 得素 【性至孝. 十九歲丁外憂, 廬墓三年, 泣盡繼血柴毁自盡. 仁祖朝, 事聞, 旌閭.】子 尙素 【宣敎郞. 有三子, 裕武科司果, 襳衤完. 庶子一▣.】子 純素 【有一子䘻, 庶子二▣複.】子 重素 【有二子, 䙇 武科 衤式.】子 德慎 【武科, 通政靈岩郡守. 丙申遭艱後, 起復爲茂長縣監. 戊戌露梁之役, 以統制使 李舜臣前鋒將捷倭有功, 時年三十一. 錄宣武從熏一等.】女 閔喜一女 柳遷 【忠義衛.】女 魏弘宙 【贈參議.】子 山寶 【武科縣令.】子 廷寶 【文科縣監.】子 國寶子 德憲 【武科 折衝 京圻水使. 丙子春, 奉使入瀋中, 虜稱帝需賀, 而脅使參賀班. 公抗節不屈, 人比之蘇武. 椵島都督, 以其事奏聞皇朝, 肅宗朝, 褒贈兵曹參判.】女 金用健女 李儁臣 【進士】子 守素 【宣務郞. 妻彦陽金氏旌表忠臣, 安州牧使 贈左贊成 壯武公 浚之女. 丁卯狄亂, 安州城陷, 壯務公自焚死, 金氏亦自剄死, 以烈女旌閭. 有一子褘生員.】子 貞素 【有一子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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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崖集序 不侫少也嘗讀我五代祖參判公文集中送姊兄洪君之京序知所謂洪君爲南崖先生而欽其爲親爲國竗庶遠役者久矣近得先生遺集而讀之益不自已曠世之慕未嘗不掩卷歔欷曰以若學問之博孝思之至經綸之富遭値晟世而遇知於賢君誠千古奇絶之事也奈之何遽爾龍飛鼎湖天又局賢者之年使上不能著糜賢之效下不得試壽民之丹歟可霣志士之淚於千古也先生侍親癠而千里間關返于鄕廬十載克盡刀圭之效使親宿祟漸可孝思具於甲辰日錄天顔咫尺竗歲獻賦恩批三上內賜書硯而寵異之學文著於御考試券登才行薦叙職寢郞進足食之策經綸可於農疏得矣先生其可曰行於家國隨遇而修其當然之則也盖先生襲家學之正又得師三山金文敬公慥慥不舍以充其天賦之美富有日新而油然著於日用之間發爲文辭燁燁其采飄飄其氣義嚴仁熟可爲法於後世豈候蟲月露組奇鉤巧衒人耳目者之比哉先生諸孫皆師我先子蘆沙先生曾孫石川公師我叔祖松翁丙申從師門擧義可謂能世其家矣文將付印而公諸世主鬯玄孫復憙問序於余葮莩後生淵源世好其敢辭諸以道不能行於當世爲先生惜者爲家學之不替反爲先生賀又以斯集之能行于世爲後生之幸敢穢卷端以露景仰之私云爾歲在甲辰重陽節後學幸州奇老章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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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訣文 崔濟泰 濟泰。痛哭再拜。覆上于松下兄靈筵。去年至月聞兄逝。臘月。見兄八月二十二日發書。兄之在世顔面。完然在紙上。感泣拭淚而讀之。書略曰。每欲得凌風之翰。一蹴飛到。而不可得也。嗚呼。尙今未得耶。將有飛到之日也耶。又曰只被朋友之援引。猥參詠亭會輔之列。嗚呼。間又一周年矣。詠亭之更會。能幾度也耶。與日新翁。更幾度講磨也耶。詠歸亭。暮春之日。新秋之月。遙想幾人。淚沾臆也耶。又曰欲勝已者親。無如改過之不吝。則只自存意於寡過之地。嗚呼。此雖兄自謙之語。而其求道之實心。推可知也。於泰之無似者。如是許心。則兄之平日。遜友求益之意。亦推可知也。嗚呼。濟泰於知兄。一則曰幸。一則曰不幸也。若無去年之行。則必有倂世不得見之歎。若知有今日事。則不如初不相知。而無此摧心之痛矣。嗚呼。今世何世。何賢人君子。晨星以沒。此道終不可復明於世也耶。嗚乎痛哉。追思兄此書。便是告訣。告訣之書。不能無答。兄其知耶。不知耶。路遠世亂。寢門一哭。恐難如誠。區區數字。咽不成腔。嗚乎痛哉伏惟鑑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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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徐子崇【相敦】 夫心之爲物。兼該形氣神理。管攝動靜體用者也。朱子所謂其體則易。其理則道。其用則神是也。然所謂心統性情。所謂心爲太極。以理言者也。所謂心猶陰陽。所謂心屬火。以氣言者也。然則合理與氣而立名者也。而人或執一固滯。論心。言理而遺氣。言氣。而遺理。二者俱失之偏。心旣如是。則豈爲一身之主宰。萬事之統領乎哉。且所謂理一分殊者。論其本原。則固無人物貴賤之殊。而惟氣有通塞之不同。故理乘氣而運行。隨其形而各正性命。是則分在氣者而人或言分殊。已在理一中。化生萬物之理。元不待氣。而自有許多差別。若恁地說。則天理亦有偏全矣。所諭得之。然但所謂理一分殊者。朱子曰有天地之性。有氣質之性。天地之性。則太極本然之妙。萬殊之一本也。氣質。二氣交運而生。而生一本而萬殊也。觀此則吾賢所喩。分在氣者。是說氣質之性也。或人所論。分殊已在理一中者。是說天地之性也。合此二說然後。理一分殊之體用完備。而理無不全。氣不能無偏者。亦可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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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張子維【昌鉉】 來喩大槩得之。然字句之間。辭或未瑩。朱子曰虛靈。自是心之本體。本體。是本然之體。非體用之體。蓋心之爲物。虛靈知覺。神妙不測。而其體則具有衆理。其用則神竗萬物。是則所謂明德也。若以虛靈二字。釋明德之全體。則未備。故張子曰心統性情。朱子又曰心者。性情之主。又云德也者。得於心而無所勉者。此可考也。至若意情之分。蓋意是心之發。而營爲謀度底。情是性之發。而流注運用處。愛惡那物是情。所以去愛惡那物是意。意是主張。要如此者也。且釋仁而曰惻隱。曰愛之理云者。則惻隱是仁之端。指情而言也。愛之理。愛是情。仁是性。乃由情而言仁也。父喪中母喪云云。儀禮父卒。則爲母三年之文。旣明白。而賈氏錯解。故尤菴已駁其疏。陶菴。引本經而釋之曰。父先卒母後死。雖一日之間。亦可伸三年。據此諸說。則亦何論父喪葬不葬乎。以夫爲妻禫之說推之。則其子服母。亦從其父。而不敢專。故禫後卽心喪而畢三年。父旣卒。則夫爲妻禫之制。不行矣。然則其子豈可服朞乎。況世俗之旣葬後。猶服朞者。恐不待辨而審其謬矣。且鉛槧二字。昔楊雄有懷鉛提槧。從諸計吏訪殊方絶俗之語。作方言之事耳。槩詳諸問。辭意縝密。自此有前進之望。可欽可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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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安良善 百變滄桑。眼無開處。乃自深藏窮山。日吟病情而已。忽承崇椷。圭復以還。心神甦回。但推借失當。相愛之地。豈容如是。所喩惟斅學半之義。前此誤認。而今始得本旨云者。儘好消息也。舊有人質余以此句曰。斅是已學之進亦半。余曰已學旣成是半。推以斅人亦半。那人始若不信余勸。以更玩本傳矣。大抵舊曰。學者專汨功令之業。不細究文義。故往往有此病。今賢者斅人。而因得本旨。則已功亦進。而敎人不誤。可欽可賀。至若治心之喩善矣。然不如存心之爲要。心本虛明靈覺。而萬理咸備。是所謂本心也。道心也。人能存之養之。則內而浮泛思慮。不得萌動。外而雜亂物累。不能撓奪。有以全其本然之體。而必有事勿正。心勿忘。勿助長之間氣不逐物。而常守其理。則心不待治而自正矣。未知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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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타잠 戒惰箴 내가 칠정을 아쉽게 여기는 건게으름이 이름에 없는 것이다44)무릇 나의 한 뜻을세움이 견정하지 않아서그 죄에 따라 벌을 받는 것은모두 게으름으로 인해 생긴다사체가 이미 게으르게 되면그로 인해 총명을 잃는다겉이 이미 장중하지 않으면안도 따라서 태만해지니음란한 생각과 난잡한 상념은그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되며배움이 실추되어 황폐해지고성도 따라서 어두워진다그 허물을 깊이 생각해보면불경이 과오가 된 것이니마음이 주일무적한다면외물과 함께 변화하지 않는다종일토록 공경하여상제를 마주 대한 듯하면비록 태만하고 싶어도어찌 감히 스스로 방종하랴엄연한 천군45)이오직 나의 엄한 스승이라엄숙하고 단정해야 하니감히 조금이라도 방자하랴혹시라도 어김이 있으면이 잠언의 말을 볼지어다 我惜七情。 惰惟無名。 凡我一志。 立不堅貞。 案伏其罪。 儘從惰生。 四軆旣惰。 仍失聰明。 外旣不莊。 內從而慢。 淫思亂想。 仍此多端。 學墜而荒。 性隨而昏。 深思厥咎。 不敬爲過。 心若主一。 不與物化。 欽欽終日。 對越在上。 雖欲惰慢。 豈敢自放。 儼然天君。 惟我嚴師。 肅拱端默。 其敢小肆。 如或有違。 視此箴辭。 칠정을……것이다 '칠정(七情)' 가운데 '惰'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무엇이 칠정인가,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두려움과 사랑함과 미워함이다.[何謂七情, 喜怒哀懼愛惡欲.]" 하였다. 천군(天君) 마음을 가리킨다. 《순자(荀子)》 〈천론(天論)〉에 이르기를, "마음이 한가운데 빈자리에 있으면서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다스리는 까닭에 마음을 하늘의 임금이라고 하는 것이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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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용잠 九容箴 빠르게 달리면 넘어지니허둥대지 않고 어찌하랴편안히 가면 몸이 펴지니군자의 화평함이다발걸음의 경중에서그 마음을 볼 수 있으니빨리 하려는 자는 달려서혈기를 누르기가 어렵다발은 겨우 문을 나서면서뜻은 천리를 넘어가는데넓고 큰 자는 서행하나니예경이 그리 만든 것이다한 걸음을 막 나아가면뜻이 한 걸음에 있어야 한다힘쓸 지어다 소자야뛰어넘지 말고 조급히 하지 말라【위는 족용중(右足容重)】손은 한 몸에서으뜸으로 일을 한다그것으로 절과 읍을 하니예와 경이 나오는 곳이다잡고 쥐고 치고 박으며받들고 받으며 마시고 먹으니일상의 만사를손이 만들어 낸다한 손가락이라도 망동하면바로 예용을 잃게 되니조처할 때 필히 공경히 하고멈출 때도 필히 공손히 하라힘쓸 지어다 소자야열 개 손이 가리킨다【위는 수용공(右手容恭)】곁으로 보지 말고흘겨보지 말며빨리 돌아보지 말며찡그려 보지 말라수레에서는 눈길이 식(軾)을 넘지 않고앉아서는 모서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니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몰래 태만함이 밝음을 가리니보아도 볼 수 없게 되어소경에 가까울 것이다힘쓸 지어다 소자야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위는 목용단(右目容端)】목소리를 내고 음악46)을 하며음식을 먹고 말을 한다전쟁을 일으키고 우호를 내기도 하며선행을 하고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그 시작은 어디인가입으로부터 생긴다팔진미가 풍성해도의가 아니면 맛보지 않으며만종의 녹47)이 쌓여 있어도예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어눌하되 민첩하려 하고48)묵묵하되 깨어 있으려 한다힘쓸 지어다 소자야입 지키기를 병처럼 하라49)【위는 구용지(右口容止)】목소리는 마음에서 나오니마음이 바르면 목소리는 조용하다목소리는 기에게 부려지니기가 사나우면 목소리도 매섭다거울이 감응하는 것처럼저울이 공평한 것처럼감출 수가 없으니참으로 은폐하기 어렵다힘쓸 지어다 소자야목소리를 너무 사납게 하지 말라【위는 성용정(右聲容靜)】맨 위에 있으면서 원기를 체행하고오관이 자리한 곳이니위의의 법도가 되고시선의 준칙이 된다더욱 공경하고 더욱 장중하며오직 엄숙하고 오직 공손히 하라공손하되50) 곧게 세움이이 덕의 모습이다힘쓸 지어다 소자야잠시라도 방자하지 말라【위는 두용직(右頭容直)】기는 한 몸에서기르기가 어려우니온화하게 하면 쉽게 방종하고편안하게 하면 너무 느슨해진다무엇이 정숙함만 하겠는가유순하고 온화함으로 이루며보옥을 받들고 대야를 받들 듯이살얼음을 밟고 강에 임한 듯이 하라51)잠시라도 방심하면방탕한 기운이 바로 채워진다힘쓸 지어다 소자야두려워하고 경계하라【위는 기용숙(右氣容肅)】한결같이 곧은 내면이라야경이 있을 곳이고의를 바르게 하여야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다52)방정함에는 요체가 있으니서 있는 모양이 중요하다치우치거나 기울이지 말고비뚤어지거나 구부리지 말라바르고 크며 빛나고 밝아서엄연하게 덕스러워야 한다안이 바르고 겉이 순수하며겉과 속이 단정하고 엄숙하면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니53)성현과 똑같은 경지이다힘쓸 지어다 소자야공경히 훈계를 명심하라【위는 입용덕(右立容德)】그 기운을 온화하게 하고그 안색을 늠름하게 하여온화하되 위엄 있고엄숙하되 관대히 하라공경하지 않음이 없게 하여내면을 채우면 얼굴에 드러나니54)힘쓸 지어다 소자야장중하고 공경하도록 노력하라【위는 색용장(右色容莊)】 疾趍而蹶。 非狂而何。 安行而舒。 君子之和。 足之輕重。 可觀其心。 欲速者趍。 血氣難禁。 足纔出門。 意越千里。 涵弘者徐。 禮敬所至。 一步方進。 意在一步。 勖哉小子。 毋躐毋躁。【右足容重】手於一身。 用功之宗。 拜揖以之。 禮敬攸從。 操持擊拍。 奉受飮食。 日用萬事。 惟手之出。 一指妄動。 便失禮容。 措必以敬。 靜必以恭。 勖哉小子。 十手所指。【右手容恭】毋傾側視。 毋流邪睇。 毋疾顧眄。 毋嚬蹙眦。 驂不出式。 坐不外方。 一瞬或放。 陰怠蔽明。 視不見之。 殆乎暗盲。 勖哉小子。 非禮勿視。【右目容端】聲音律呂。 飮食言語。 興戎出好。 作善起爭。 其始維何。 由口而生。 八珍雖昌。 非義不嘗。 萬鍾雖積。 非禮不食。 欲訥而敏。 欲默而惺。 勖哉小子。 守口如甁。【右口容止】聲出於心。 心正聲靜。 聲使於氣。 氣厲聲猛。 如鑑之應。 如衡斯平。 不可揜矣。 誠難隱閉。 勖哉小子。 聲莫淫厲。【右聲容靜】首居軆元。 五官所宅。 威儀之法。 瞻視之則。 愈敬愈莊。 惟肅惟恭。 翼翼竦直。 斯德之容。 勖哉小子。 毋或暫肆。【右頭容直】氣於一身。 養之爲難。 和之易流。 舒之太寬。 孰若正肅。 濟以巽和。 奉玉承盤。 履淵臨河。 造次或放。 蕩氣卽塞。 勖哉小子。 戰戰戒欶。【右氣容肅】一以直內。 敬之所在。 惟義之正。 可以方外。 方之有要。 立容爲大。 不偏不倚。 毋邪毋曲。 正大光明。 儼然惟德。 正內粹外。 表裏端肅。 心廣軆胖。 聖賢同域。 勖哉小子。 敬佩訓戒。【右立容德】溫溫其氣。 凜凜其色。 和而有嚴。 肅而寬奕。 毋不敬矣。 充內粹面。 勖哉小子。 莊敬是勉。【右色容莊】 음악 원문의 '율려(律呂)'로, 원래 성음(聲音)의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를 바르게 정할 목적으로 죽통(竹筒)의 길이를 각각 길고 짧게 해서 만든 12개의 악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음악을 뜻한다. 만종의 녹 원문의 '만종(萬鍾)'으로, 종(鍾)은 곡식을 담는 도량형기인데 여기서는 많은 녹봉을 말한다. 어눌하되 민첩하려 하고 《논어》 〈이인(里仁)〉에서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실천은 민첩하려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하였다. 입을……하라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에 "입을 지키기를 병처럼 하고, 뜻을 막기를 성처럼 한다.[守口如甁, 防意如城.]" 하였다. 공손하되 원문의 '익익(翼翼)'은 공손하고 신중한 모양이다. 《시경》 〈대명(大明)〉에 "오직 이 문왕이 조심하고 공손하여 상제를 밝게 섬기시어 많은 복을 오게 하셨도다.[維此文王, 小心翼翼, 昭事上帝, 聿懷多福.]" 하였다. 보옥을……하라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연임하(履淵臨河)'는 《시경》 〈소민(小旻)〉에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한결같이……있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군자가 경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롭게 하여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한 데서 원용한 것이다. 마음이……펴지니 마음속이 널찍하게 관대해지고 신체가 여유 있게 펴진다는 뜻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전6장에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해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게 한다.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윤택하게 얼굴에 드러나니 원문의 '수면(粹面)'은 '수면(睟面)'과 같은 말로, 내면에 축적된 것들이 윤택하게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가득 넘치는 것을 뜻하는 '수면앙배(睟面盎背)'의 준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 하여 그 얼굴빛에 나타남이 맑고 온화하게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가득 넘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盎於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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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량문 上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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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녹동서원에 최산당150)을 추배하는 제문 祭鹿洞書院崔山堂追配文 명도의 저명한 망족으로곤육의 경사를 쌓으니151)어진 선비와 큰 학자가대대로 후손152)에 이어졌네금서를 즐기는 명절이요존양153)하는 숙덕으로밝고 진실한 선생은집안에서 정학을 전했도다물고기와 시내처럼 새와 구름처럼의탁할 때 친할 사람을 잃지 않았고154)단비처럼 교화하니위대한 현인의 가문이로다아 대동에서어진 현인의 은택이 끊어졌는데155)신라에서 고려까지도학은 오천156)을 종조로 삼네금오157)가 재전하여점필재158)가 사숙하였고수옹과 훤옹159)은학문을 더욱 닦고 입실했네160)선생의 심법은사문에 오묘하게 나아가서그 도가 넓고 넓어손쓰고자 해도 끝이 없었네윤리를 밝히고 가르침 세움에장님처럼 밤길을 더듬을 때161)선생을 존숭하고 믿음은부모와 천지신명 같았네성과 명162)은 형체가 없으나존양성찰에는 법도가 있었으니경과 성을 규칙으로 삼아사씨처럼 부연하고 정자처럼 본받았네163)선생이 가슴에 새겨황연히 스스로 터득하고산당으로 물러나서이윤에 뜻을 두고 안자를 희구했네164)전은 무명165)에 견주고시는 격양166)을 사랑했으며한가로이 역리를 탐구했고167)내가 그칠 바를 알았네이단의 교를 힘써 배척하고바른 이치를 앞장서 밝혔네체가 확립됨은 형체의 뒤요용은 형체가 시작되기 전에 갖춰졌다고 한168)분명한 한 마디의 말은근본이 하늘에서 나온 것이네안생169)처럼 일찍 세상 떠나격언은 전해지지 않고백순170)처럼 먼저 떠났으나이름은 사람에게 알려져서남은 향기가나약한 자 세우고 완악한 자 깨우치네황폐한 고을이 비루하여성대한 의전을 오래 미뤄왔는데백대의 공론은시대가 멀어져도 변하지 않아선비들171)이 모두 찬사하여묻지 않았어도 도모함이 맞았네영봉172)의 서쪽 산기슭덕수의 남쪽 물가에우뚝한 사당이 있으니명조의 신령스런 사우로다분향할 날을 가려 배향하고같은 사당에서 함께 제사하여덕을 존숭하고 절개 숭상하니길이 전해져 끝이 없으리라두 공께 사사로이 대함이 아니고후세를 모두 권면하려 함이라네 名都著望。 慶積坤六。 吉士弘儒。 世襲蘭玉。 琴書名節。 存養宿德。 顯允先生。 家傳正學。 魚川鳥雲。 因不失親。 時雨而化。 鉅賢之門。 於惟大東。 澤斬仁賢。 降羅迄麗。 學祖烏川。 金鰲再傳。 齋私淑。 睡翁暄翁。 操戈入室。 先生心法。 妙詣師門。 斯道浩浩。 下手無垠。 明倫立敎。 摘埴冥行。 先生尊信。 父母神明。 形命1)無形。 養省有法。 敬惺規則。 謝衍程式。 先生服膺。 怳然自得。 卷懷山堂。 志莘希巷。 傳擬無名。 詩愛擊壤。 寬閑弄丸。 得我攸止。 力排異敎。 倡明正理。 軆立形後。 用具未始。 一言昭晣。 原本出天。 顔生早世。 格言無傳。 伯淳先亡。 名聞播人。 餘芳遺馥。 立懦惺頑。 荒鄕鄙汚。 久稽褥2)儀。 百代公論。 愈遠不淄。 縫掖咸辭。 不咨謀諧。 靈峯西麓。 德水南滸。 有堂巋然。 名祖神宇。 配享涓苾。 合祀同室。 崇德尙節。 永傳無極。 非私二公。 幷勸來億。 녹동서원에 최산당 '녹동서원'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에 있는 서원이다. 1630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존양(存養)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713년에 '녹동(鹿洞)'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산당(山堂)'은 최충성(崔忠成, 1458~1491)의 호이다. 최덕지의 손자이다. 곤육(坤六)의 경사를 쌓으니 군자의 도를 실천하고 선행을 쌓은 것을 말한다. '곤육(坤六)'은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공경히 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롭게 하여 밖을 방정하게 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원문의 '경적(慶積)'은《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게 마련이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남은 재앙이 돌아오게 마련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후손 원문의 '난옥(蘭玉)'으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를 예찬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들에게 어떤 자제가 되고 싶은지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과 옥수가 뜰에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 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뜻이다. 《孟子 盡心上》 의탁할……않았고 《논어》 〈학이(學而)〉에 "의탁할 때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종주로 삼을 수 있다.[因不失其親, 亦可宗也.]" 하였다. 은택이 끊어졌는데 원문의 '택참(澤斬)'으로,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의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어지고, 소인의 영향도 5대가 지나면 끊어진다.[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대(先代)의 일이 후손에게서 끊어졌음을 말한다.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이다. 오천은 연일(延日)의 옛 이름으로, 정몽주의 본관이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으며, 유학을 크게 진흥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끝까지 고려 왕조를 받들며 절의를 지키다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 금오(金鰲) 길재(吉再, 1353~1419)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는 조선 왕조의 부름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그의 학맥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졌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수옹과 훤옹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다. 정여창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이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학문을……입실했네 원문의 '조과입실(操戈入室)'로, 본래는 《후한서(後漢書)》 〈정현열전(鄭玄列傳)〉에서 유래하여 상대의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스승의 학문을 더욱 더 닦았다는 뜻이다. 원문의 '입실(入室)'은 도(道)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뜻한다. 《論語 先進》 장님처럼……때 학문의 나아갈 길을 잘 모름을 비유한 말이다.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수신편(修身篇)〉에 "소경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길을 찾아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게 될 뿐이다.[擿埴索途, 冥行而已矣.]" 하였다. 성과 명 원문의 '形命'은 문맥상 맞지 않아, 최충성(崔忠成)의 《산당집(山堂集)》 〈산당선생 배향축문(山堂先生配享祝文)〉을 참고하여 '性命'으로 번역하였다. 경과……본받았네 '경(敬)'은 유가의 가장 중요한 수양법인데 정이(程頥)가 강조한 것이다. '성(惺)'은 항상 깨어 있는 것으로, 《심경부주(心經附註)》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사양좌(謝良佐)가 "경은 항상 성성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윤에……희구했네 '신(莘)'은 유신(有莘)으로 옛날 명재상 이윤(伊尹)이 이곳에 살았다. 이윤은 농사를 짓다가 탕왕(湯王)의 정중한 초빙을 받고 세상에 나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추방하고 상(商)나라 왕조를 건립하였다. 《孟子 萬章上》 '항(巷)'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의 안빈낙도했던 누추한 곳이다. 《論語 雍也》 무명(無名) 송(宋)나라 소옹(邵雍)을 말한다. 《주역》의 이치에 정통하고 상수학(象數學)에 능하였다. 낙양(洛陽)에 살 때에는 공중누각(空中樓閣)을 지어 자호를 무명공(無名公)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는 〈무명공전(無名公傳)〉을 지어 명리와 차별을 초월하겠다는 자신의 지향을 전(傳)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性理大全 권13 無名公傳》 격양(擊壤) 송나라 소옹(邵雍)의《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에 나오는 시를 말한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담아서 노래한 시가 많다. 역리를 탐구했고 원문의 '농환(弄丸)'으로 태극(太極)과 같은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말로, 역리(易理)를 탐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송나라 소옹(邵雍)의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권12 〈자작진찬(自作眞贊)〉에 "구슬을 가지고 노는 여가에, 한가로이 왔다 갔다 하노라.[弄丸餘暇, 閑往閑來.]"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주(自註)에 "환(丸)은 태극이다."라고 하였다. 체가……한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 〈도체(道體)〉에 "邵子가 말하기를 "용(用)은 천지 이전에 일어나고 체(體)는 천지 이후에 확립되었다.[邵子曰, 用起天地先, 體立天地後.]"라는 내용이 보인다. 안생(顔生)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를 말한다.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32세에 요절하였다. 백순(伯淳) 송나라 학자 정호(程顥)의 자이다. 신종(神宗) 때에 왕안석(王安石)과의 불화로 언직(言職)을 버리고 외관말직으로 물러났었는데, 그 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종정승(宗正丞)의 벼슬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부임하기 전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宋史 권427 程顥列傳》 선비들 원문의 '봉액(縫掖)'으로 유자(儒者)들이 입은 옷소매가 넓은 복장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비를 지칭한 것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저(공자)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영봉 전라도 영암(靈巖)의 월출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形命 문맥상 '性命'의 잘못인 듯하다。 최충성(崔忠成)의 《산당집(山堂集)》 〈산당선생배향축문(山堂先生配享祝文)〉에 '性命'으로 되어있다。 褥 '縟'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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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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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금성향교 대성전 상량문 錦城鄕校大成殿上梁文 천지를 관(棺)으로 삼고 일월을 장지(葬地)로 삼아도 사십 분의 덕의(德儀)는 쫓아가기 어렵다.【어떤 본에는 '모두 우러른다[咸仰]'로 되어 있다.】 북두성을 향하고 화산과 숭산55)을 당길 듯한 이곳에 어찌 삼백년 구전(舊典)을 창건하지 않겠는가. 이에 택궁(澤宮)56)의 제도를 본받아서 마침내 고을에 학교의 규범을 세웠다. 생각건대 이 고을은 기미성 남쪽 분야57)이며 영해(瀛海)58)의 동쪽 지역으로, 영산강이 바다와 접해 있어 승부(乘桴)의 밝은 교화59)를 부여잡을 수 있고, 금성산이 허공에 서렸으니 소로(小魯)60)의 지극한 뜻을 거의 계승할 만하다.돌아보건대 신라 말엽에 비루해져서61) 바른 학문이 전해지 못했고, 고려조에 경박해져서 쇠퇴한 뒤로 성스러운 은택이 다 미치지 못하였다. 공사(公私) 간에 좌도(左道)62)의 시주(施主)를 다투어 본뜨고, 주군(州郡)에서는 바른 학문을 일으키는 데 매우 어두웠다. 진정한 성인이 5백년의 주기에 응하여 나와서63) 유도(儒道)를 존중하고 학문을 숭상하였는데 다행히도 이 땅에 천재일우의 운수를 만나서 학교를 건립하게 되었으니, 한계(寒溪)의 동문(洞門)은 궐리(闕里)에서 읊조리고 외우는 것과 유사하고64) 광탄(廣灘)의 원파(源派)는 기우(沂雩)에서 목욕하고 바람 쏘이는65) 것과 방불하였다.그러나 명협(蓂莢)이 시들어66) 세월이 흐르니 대부분 이끼가 먹어 비가 세었다.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신지 12년 되는 경술년(현종11, 1670) 봄에 향을 전하께서 내려주니 혼령이 훈호(薰蒿)67)하여 기둥 사이의 제수(祭需)에 접한 듯하고, 물이 땅속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68) 소명(昭明)하여 성령이 이곳에 임한 듯하다. 옛 날 그대로 터를 닦으니 장부(長府)는 민손(閔損)에게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69) 학궁 설계에 제도가 있으니 산절(山節)이 어찌 장문중(臧文仲)보다 못하겠는가.70) 증삼(曾參)처럼 재용에는 방도가 있었고71) 맹가(孟軻)처럼 농사철을 빼앗지 않았다.72)상하의 동우(棟宇)는 《주역》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하였고73) 동서의 서영(序榮)74)은 주나라 제도의 유풍(霤風)을 본뜬 것이다. 승당(升堂)한 십철(十哲)이 열석(列席)해 있고 입실(入室)한 사성(四聖)이 동렬에 있다.75) 우조의란(虞操猗蘭)76)은 제나라에서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던 음악77)을 듣는 듯하고, 희란하행(姬亂河荇)78)은 노나라로 돌아온 칠순의 공자79)를 접하는 듯하다. 쇠퇴한 주(周)나라가 저무는 때에 요순(堯舜)의 기상을 품고, 말기의 송(宋)나라가 스러져가는 날에 우리 정주(程朱)의 정통 학맥을 열었도다. 【단구(短句)가 빠진 듯하다.】 도(道)는 오랑캐와 중화(中華)의 차이가 없으니 사유(四儒)가 동한(東韓)에서 지극한 가르침을 따랐고, 덕이 옛날과 지금이 어찌 다르겠는가, 오현(五賢)은 지결(旨訣)을 북학(北學)80)에서 받들었도다.연이어 합한 궁실에서 함께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니81) 좌우전후에 계신 듯 양양하고82) 우러러 뵈오니 심원하도다.83) 삼강(三綱)이 모두 확립되어 전각과 더불어 하늘을 경영하고 구법(九法)84)이 모두 조화롭게 되어 들보 기둥과 나란히 땅을 다스릴 것이니, 이는 모두 성세(聖世)의 명교(明敎)를 따르고 또한 현부(賢府)의 중창에도 관계되는 일이다. 주자(周子)는 소주(邵州)에서 고명(高明)함이 복서(卜筮)에 부합되었고85) 문옹(文翁)도 금리 (錦里)에서 유학의 교화를 성취하였었다.86) 전당(鱣堂)87)에 경사가 넘치고 접역(鰈域)88)에 환희가 펼쳐지니 이에 아랑(兒郞)의 축문89)을 진술하여 감히 들보 올리는 일을 돕는다.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져라90)서일이 막 솟아 쌓인 기운 토하네성신의 진묘한 자취 알고자 하니바다 하늘에 단비 내리고 춘풍에 화육되네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져라수사의 참된 근원이 바닷가에91) 접했구나조석으로 밀물이 통하여 금수92)에 이어지니이로부터 곧바로 하늘 사다리에 오르리라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져라남극에서 추성93)이 바다로 들어가 잠기네밤낮으로 천지의 축을 부지하고북극성을 마주하며 삼성과 함께 하네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져라뭇별들이 빙 둘러서 북극성을 도네하늘과 사람을 어찌 둘로 나눠 보랴성화는 작위가 아니라 덕에 있다네어영차 들보 위로 떡을 던져라칠요와 삼광94)이 만상을 나누네성스러운 도는 하늘 같으니 어찌 오르랴95)어리석은 무리는 백대토록 흠앙할 뿐이네어영차 들보 아래로 떡을 던져라유생들은 봄가을로 시서를 일삼네육경96)에 분명 도의 진수가 실려 있으니의리에 깊이 잠기면 친자한 것과 같으리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로는 집마다 예의를 말하고 집마다 시서를 외우며, 금석사【어떤 본에는 '사(絲)'가 '생(笙)'으로 되어 있다.】황97)으로 만대토록 제사를 길이 올리고, 문(文)·행(行)·충(忠)·신(信)으로 4교(敎)98)의 법도를 길이 남기며, 많은 선비들이 난새처럼 비상하여 멀리 옛 성인의 전통을 잇고, 여러 현인들은 기러기처럼 점진하여99) 일어나 우리 조정의 유종(儒宗)을 진작할지어다. 棺天地葬日月。 難追【一作咸仰】四十表之德儀。 拱星斗挽華嵩。 盍創三百年之舊典? 玆倣澤宮之制。 聿建州序之規。 竊惟玆州。 箕尾南分。 瀛海東域。 靈江接海。 乘桴之睿化可攀。 錦岳蟠空。 小魯之至意庶述。 顧咮㒧於羅季。 正學無傳。 洎澆喪於麗朝。 聖澤未究。 公私爭效左道之施捨。 州郡專昧右文之作興。 唯眞聖膺五百之期。 重儒崇學。 幸玆土値千一之運。 建塾立庠。 寒溪洞門。 依俙闕里之絃誦。 廣灘源派。 髣髴沂雩之浴風。 逮蓂老而歲遷。 多蘚蝕而雨漏。 維嗣王甲子一紀。 乃歲星庚戌三春。 降香自天。 薰蒿乎楹奠若接。 如水在地。 昭明乎聖靈臨玆。 仍舊修基。 長府無譏於閔損。 畫宮有制。 山節豈歉於臧文? 曾參之財用有方。 孟軻之農時不奪。 上下棟宇。 取雷天於羲經。 東西序榮。 學霤風於周制。 升堂之十哲在列。 入室之四聖班行。 虞操猗蘭。 若聞在齊之三月。 姬亂河荇。 怳接返魯之七旬。 衰周暮天。 孕此堯舜氣象。 晩宋殘日。 啓我程朱嫡傳。【恐闕短句】道無間於夷夏。 四儒遵至敎於東韓。 德何殊於今古。 五賢奉旨訣於北學。 連宮合室。 共苾同芬。 洋洋乎左右後先。 穆穆乎鑽仰瞻忽。 三綱並立。 與殿隅而經天。 九法偕和。 齊杗桷而緯地。 皆仍聖世之明敎。 亦係賢府之重新。 周子邵州。 高明協卜。 文翁錦里。 儒化可成。 慶溢鱣堂。 歡開鰈域。 式陳兒卽之祝。 敢助梁欐之升。 兒郞偉抛梁東。 瑞日初昇積氣融。 欲識聖神眞妙跡。 海天時雨化春風。 兒郞偉抛梁西。 洙泗眞源接海倪。 日夕通潮連錦水。 從玆直到上天梯。 兒郞偉抛梁南。 南極樞星入海涵。 日夜扶持天地軸。 北辰相對共參三。 兒郞偉抛梁北。 衆星連繞環樞極。 天人豈可兩分看。 聖化無爲唯在德。 兒郞偉抛梁上。 七曜三光分萬象。 聖道如天豈可階。 羣蒙百代徒欽仰。 兒郞偉抛梁下。 章甫詩書春及夏。 六籍分明載道眞。 沉潛義理如親炙。 伏願上梁之後。 家談禮義。 戶誦詩書。 金石絲【一作笙】簧。 永奠萬代之樽俎。 文行忠信。 長留四敎之規矩。 羣彦鸞翔。 遠紹往聖之統緖。 諸賢鴻漸。 起作本朝之儒宗。 화산과 숭산 '화숭(華嵩)'은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의 병칭이다. 택궁(澤宮) 주나라 때 활쏘기를 하여 사(士)를 선발하던 곳인데, 전하여 태학(太學)을 말한다. 《周禮 夏官 司弓矢》 기미성 남쪽 분야 기미(箕尾)는 28수(宿) 별자리 중 동쪽 별자리인 기수(箕宿)와 미수(尾宿)에 해당하는 즉 조선을 가리키고 남쪽 분야는 나주를 지칭한 것이다. 영해(瀛海) 큰 바다인데 여기서는 황해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이러한 주가 아홉 개가 있고 영해가 그 밖을 에워싸고 있다.[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하였다. 황해는 중국 쪽에서는 동쪽이다. 승부(乘桴)의 밝은 교화 공자의 교화를 가리킨다.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니, 이때 나를 따라올 사람은 아마 중유일 것이다.[道不行, 乘桴, 浮于海, 從我者, 其由與.]"라고 하였다. 《論語 公冶長》 소로(小魯) 큰 포부를 비유한 것이다. 나주(羅州)의 금성산에 오르면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는 것과 같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비루해져서 원문의 '주리(咮㒧)'로 주리(侏離)와 같은 뜻인데, 오랑캐의 언어 문자를 가리킨다. 공자의 유학을 벗어난 것을 가리킨다. 좌도(左道) 이단(異端)의 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이다. 진정한……나와서 '500년의 주기[五百之期]'란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나면서 "500년마다 반드시 왕자가 나온다.[五百年, 必有王者興.]"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즉 요순(堯舜)에서 탕왕(湯王)까지, 탕에서 문왕(文王)·무왕(武王)까지 성현이 태어나는 주기를 500년으로 본 것이다. 궐리(闕里)에서……유사하고 나주 한계동에서 글읽는 소리가 마치 공자의 제자들이 궐리에서 글읽는 소리와 유사하다는 뜻이다. '궐리'는 지명으로 《공자가어(孔子家語)》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 "공자가 궐리에서 처음 가르쳤다.[子始敎學于闕里.]" 하였다. 기우(沂雩)에서……쏘이는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曾點)이 마침 비파를 타다가 쟁그렁 소리와 함께 비파를 놓고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5, 6인,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한 데서 온 말이다. 명협(蓂莢)이 시들어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은 것을 말한다. '명협'은 요 임금 때 조정 뜰에 났다는 서초인데, 매월 1일부터 15일까지 매일 한 잎씩 나오고, 16일부터 그믐날까지 매일 한 잎씩 떨어졌으므로, 이것으로 날을 계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竹書紀年 卷上 帝堯陶唐氏》 혼령이 훈호 '훈호(薰蒿)'는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생물들은 반드시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귀라고 이른다.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되고 이것이 야토가 되면 그 기는 발하여 위로 올라가서 소명, 훈호, 처창이 된다.[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 그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훈호, 사람의 정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 하였다. 물이……것처럼[如水在地]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의 신이 천하에 있는 것은 마치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아 어디로 간들 있지 않음이 없다.[公之神在天下者, 如水之在地中, 無所往而不在也.]" 하였다. 《東坡全集 卷86》 옛……것이고 원문의 '장부(長府)'는 재화(財貨)를 넣는 창고인데 여기서는 향교의 건물을 가리킨다. 《논어》 〈선진(先進)〉에 "노나라 집정자가 장부를 고쳐 짓자, 민자건이 말하기를 '옛 일을 따르는 것이 어떠한가. 어찌 꼭 고쳐 지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魯人爲長府, 閔子騫曰, 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 하였다. 산절(山節)이……못하겠는가 장식을 제도에 맞게 했다는 뜻이다. '산절(山節)'은 두공(斗栱)에 산 모양을 새기는 것인데, 여기서는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장문(臧文)'은 춘추 시대에 노(魯)나라의 대부인 장문중(臧文仲)이다. 장문중이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을 만들면서 너무 호화스럽게 꾸미자, 공자는 "장문중이 거북껍질을 보관하되, 두공(斗栱)에 산을 그리고 동자기둥에 마름을 새기니, 어떻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라고 질책하였다. 《論語 公冶長》 증삼(曾參)처럼……있었고 향교를 짓는데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증삼(曾參)'은 증자(曾子)의 이름이다. 《대학장구》 전 10장에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가니, 덕이 있으면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영토가 있고 영토가 있으면 재물이 있고 재물이 있으면 씀이 있다.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그렇기 때문에 재물을 모으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들이 모이는 것이다.[君子先愼乎德, 有德, 此有人, 有人, 此有土, 有土, 此有財, 有財, 此有用. 德者, 本也, 財者, 末也.……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하였다. 맹가(孟軻)처럼……않았다 향교를 짓는데 농사철은 피했다는 뜻이다. '맹가(孟軻)'는 맹자(孟子)의 이름이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농사철을 빼앗지 않으면 곡식을 이루 다 먹을 수 없고……왕도 정치의 시작이다.[不違農時, 穀不可勝食也,……王道之始也.]" 하였다. 상하의……취하였고 집을 튼튼하게 짓는 것을 말한다. '희경(羲經)'은 《주역》의 별칭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시대에는 사람들이 굴에서 살고 들판에서 살았다. 후세에 성인이 이것을 집으로 바꾸어 위에는 들보를 얹고 아래에는 서까래를 얹어 비바람에 대비하였다. 이것은 〈대장괘〉에서 취하였다.[上古, 穴居而野處. 後世聖人, 易之以宮室, 上棟下宇, 以待風雨. 蓋取諸大壯.]" 하였다. 서영(序榮) '서(序)'는 상(廂)을, '영(榮)'은 처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동서에 세워진 건물을 말한 것이다. 승당한……있다 원문의 '승당(升堂)'은 학문이나 도의 경지가 어느 정도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을, '입실(入室)'은 승당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뜻한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학문 수준을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升堂矣, 未入室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십철(十哲)'은 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계로(季路)·자유(子游)·자하(子夏)·자장(子張)을 일컫는다. '사성(四聖)'은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를 말한다. 우조의란(虞操猗蘭) 상량식에 연주했던 음악을 비유한 것이다. '우조(虞操)'는 우순(虞舜)의 금곡(琴曲)을 가리키고, '의란(猗蘭)'은 공자가 지었다는 금곡(琴曲)인 의란조(猗蘭操)를 말한다. 제나라에서……음악[齊之三月] 매우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실 때에 순 임금의 소악을 들으시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 하였다.[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하였다. 희란하행(姬亂河荇) 상량식에서 읊었던 시를 비유한 것이다. '희란(姬亂)'은 뜻이 미상이고, '하행(河荇)'은 《시경》 〈관저(關雎)〉에 "들쭉날쭉한 마름을 이리저리 물 따라가며 취하도다.[參差荇菜, 左右流之.]라고 하였다. 노나라……공자[返魯之七旬] '반로(返魯)'는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로 음악이 바루어져서 아와 송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하였다. '칠순(七旬)'은 그 당시의 나이가 칠순이었다는 뜻인 듯하다. 공자는 68세 때인 노나라 애공(哀公) 11년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오현(五賢)은 지결(旨訣)을 북학(北學) '오현'은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다섯 명의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북학'은 북쪽으로 가서 배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중국의 학문을 비유한 것이다.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니 '필(苾)'과 '분(芬)'은 제물에서 나는 향기를 말하는데 제사의 뜻으로 쓰인다. 《시경》 〈초자(楚茨)〉에 "향기로운 효사에 신이 음식을 즐기네.[苾芬孝祀, 神嗜飮食.]" 하였다. 좌우전후에……양양하고 원문의 '양양(洋洋)'은 신령이 곁에 있는 듯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중용장구》 제16장에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는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우러러 뵈오니 심원하도다 원문의 '찬앙첨홀(鑽仰瞻忽)'은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의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도를 깊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보면 앞에 있는 듯하다가, 홀연히 뒤에 계시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하였다. 《論語 子罕》 구법(九法) 《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가리킨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으로, 곧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이다. 주자(周子)는……부합되었고 주자(周子)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頥)를 가리키는데 그도 소주(邵州)에서 학교를 중수하는 데 관련이 있었다는 뜻인데, 미상이다. 문옹(文翁)도……하였었다 '문옹(文翁)'은 중국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의 문신이다. 촉(蜀) 땅의 군수가 된 후 성도(成都)의 시장 가운데에 관학(官學)을 설치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다 배우게 하였다. 입학자는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고을의 관리로 보임하였다. 이에 촉군에 교화를 펼치고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인재를 대거 배출하였다. 이는 무제(武帝) 때 전국의 고을에 관학을 설치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漢書 권89 文翁傳》 전당(鱣堂) 강학하는 장소를 말한다. 한(漢)나라 양진(楊震)이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서도 여러 차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황새가 강당(講堂) 앞에 전어(鱣魚) 세 마리를 물고 날아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전어는 대부들이 입는 옷의 무늬이고, 세 마리는 삼태(三台)의 조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양진이 과연 태위(太尉)에 올랐다. 《後漢書 권54 楊震列傳》 접역(鰈域) 가자미가 생산되는 지역이란 뜻으로, 조선을 가리킨다. 아랑(兒郞)의 축문 상량문(上樑文)를 말한다. 원문의 '兒卽'은 '兒郞'의 잘못이다. '아랑(兒郞)'은 아량위(兒郞偉)인데 '어영차'의 의성어로, 어영차 올린다는 뜻이다. 들보……던져라 '포량동(抛樑東)'은 상량문 말미의 축송에 상투적으로 붙는 말로, 상·하·사방의 여섯 방위 중 첫째로 동쪽을 든 것이다. 이 같은 투식은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 건축물의 기본 골격이 완성된 뒤에 길일(吉日)을 골라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음식을 싸와서 축하하고 목수들을 대접한다. 그러면 도목수가 대들보 위에 걸터앉아 만두·떡 등을 상·하·사방으로 던지며 상량문을 읽어 축원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량식도 이와 유사했다. 수사의……바닷가에 나주에 향교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수사(洙泗)'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공자가 이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바닷가'는 나주(羅州) 영산강이 닿는 서해를 가리킨다. 금수(錦水) 나주의 영산강(榮山江)을 가리킨다. 추성(樞星) 북두칠성의 첫 째 별인데, 북두칠성을 말한 것이다. 칠요와 삼광 '칠요(七曜)'는 일(日)·월(月) 및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별을 말한다. '삼광(三光)'은 해와 달과 별을 말한다. 성스러운……오르랴 공자의 위대함을 말한 것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스승인 공자의 위대함을 일컬으면서 "우리 선생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마치 사다리를 타고서 하늘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육경 원문의 '육적(六籍)'으로 육경(六經)과 같은 말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의 중요한 경전인 《역경》·《시경》·《서경》·《춘추》·《예경》·《악경》을 말하는데, 이 가운데, 《예경》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책을 가리키기도 하며, 《악경》은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거치면서 없어졌다. 금석사황(金石絲簧) 각종 악기를 가리킨다. 금은 쇠로, 석은 옥으로 만든 악기이며 사는 현악기, 황은 관악기이다. 4교(敎)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4가지로 가르쳤으니, 문(文)·행(行)·충(忠)·신(信)이었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한 것을 이른다. 기러기처럼 점진하여 원문의 '홍점(鴻漸)'으로, 기러기가 낮은 곳에서 점차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점괘(漸卦) 상구(上九)〉의 "상구는 기러기가 공중으로 점점 날아가는 것인데, 그 깃이 의표(儀表)가 될 만하니, 길하다.[上九, 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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