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世系 나 씨의 본관은 나주이다. 대대로 거주함에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시조 이후로 세대는 증거로 삼을만한 것이 없고 족보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12세 이하이다. • 시조 부(富) 【고려시대 정의대부(正議大夫) $주 정의대부(正議大夫) : 고려시대 정4품 문관의 품계이다.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을 지냈다.】 • 득규(得虬)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 자(子) 중윤(仲允) 【영동정을 지냈다.】 • 자(子) 송기(松奇) 【영동정을 지냈다.】 • 자(子) 수영(守永)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 자(子) 원(遠) 【통사랑(通仕郞) 사온서(司醞署) $주 사온서(司醞署) : 궁중 안에서 쓸 주류(酒類)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이다. 직장(直長) 동정(同正) $주 동정(同正) : 실제 직무를 집행하지 아니하고 벼슬자리의 명목만을 띠는 벼슬로, 차함(借銜)의 벼슬 이름 아래에 붙여 쓰던 칭호이다.을 지냈다. 묘는 나주 남쪽 송현(松峴)에 있다.】 • 자(子) 진(璡)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묘는 송현에 있다.】 • 자(子) 공언(公彦)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우왕 7년(1381) 전라도 순문사(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다. 묘는 나주 서쪽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부인은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흥위위 보승랑장(興威衛保勝郞將) 유번(柳蕃)의 따님이다.】 • 자(子) 집(諿)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주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 나라의 중요한 격식(格式)을 의정(議政)하던 기관이다.를 지냈다. 묘는 무안군(務安郡) 주룡 나루 판문치(板門峙)에 있다.】 • 자(子) 자강(自康)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다. 묘는 주룡 나루에 있다. 부인은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둘째 따님이다.】 • 자(子) 계조(繼祖)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성화(成化) 갑오년(성종 5, 1574) 5월 25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장흥동에 있다. 부인은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전라 감목관(全羅監牧官) $주 감목감(監牧官) :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의 무관 벼슬이다. 조여경(趙餘慶)의 따님이다.】 • 자(子) 일손(逸孫) 【자는 안지(安之)이다. 선무랑(宣務郞) 행(行) 전연사(典涓司) 직장(直長)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으며 3월 초파일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장흥동에 있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된 창원 공씨(昌原孔氏)로, 생원(生員) 장원(壯元) 공섬승(孔贍勝)의 따님이다.】 • 자(子) 질(晊) 【자는 백승(伯升)이다. 홍치(弘治) 무신년(성종19, 1488)에 태어나, 가정(嘉靖) 무자년(중종 23, 1528) 무과에 합격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되었다. 가정(嘉靖) 병신년(중종31, 1536) 10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 묘소는 장흥동에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강진 최씨(康津崔氏)로,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추증된 호(號)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따님이다.】 • 자(子) 사침(士忱) 【자는 중부(仲孚)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지냈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의금부 좌찬성(議政府坐贊成)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사적은 사실기와 묘문에 자세히 보인다. 첫째 부인은 경부인(敬夫人)으로 추증된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아들 셋을 두었다. 둘째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 광주 정씨(光州鄭氏)이며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 자(子) 덕명(德明)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기축년(선조 22, 1589)의 화를 당하여 경성(鏡城)으로 귀양 갔다. 임진란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변방에 사는 백성으로서 왜적에 응하여 난을 선동한 자를 포획하여 목을 베었다. 이 일은 《북관지》에 실려 있다.】 • 자(子) 이소(以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 자(子) 인소(因素)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결(羅袺)과 나격(羅䙐)이고, 서자가 하나 있는데 나겹(羅裌)이다.】 • 자(子) 성소(成素)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서자가 셋 있었으니,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 자(子) 취소(就素) 【자식이 없다.】 • 자(子) 덕준(德峻)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을 스승으로 모셨다. 품행과 도의로 천거되었으며, 벼슬은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이르렀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어버이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두 번째 어머니 모시기를 친어머니처럼 하였다. 고을 사람들 가운데 자손들을 가르치거나 두 번째 어머니를 모시는 자들은 반드시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 여(女) 사위 김잡(金磼)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숲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갑자기 밤에 깜짝 놀란 일이 생겨 부부가 서로 헤어졌는데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음으로써 열녀의 정각을 표창 받았다.】 • 자(子) 찬소(纘素) 【사위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나겹(羅裌)이며, 선교랑을 지냈다.】 • 자(子) 계소(纘素)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와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다. 서자가 있는데, 이름은 나진(羅袗)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 자(子) 위소(緯素) 【생원과 문과에 합격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염(羅袡)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정랑을 지냈고, 나반(羅襻)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부사(府使)를 지냈고, 나진(羅袗)은 출계(出繼)하였다.】 • 여(女) 사위 최광헌(崔光憲) 【선무랑(宣敎郞)을 지냈다.】 • 자(子) 치소(緻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기(羅衤基 )는 통덕랑(通德郞)을, 나겸(羅衤兼 )은 선교랑(宣敎郞)을, 나균(羅袀)은 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을, 나형(羅衤瑩)은 통덕랑을 지냈다.】 • 자(子) 경소(經素)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적(羅襀)은 통정랑(通德郞)을, 나단(羅襢)과 나선(羅䙋)은 문과에 합격하여 장령(掌令)을 지냈다.】 • 서자(庶子) 함소(緘素) • 자(子) 덕윤(德潤)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곤재(困齋)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품행과 도의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 자(子) 회소(繪素) 【무과에 합격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이천 부사(伊川府使)를 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나성(羅衤成 )은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나첨(羅襜)은 출계하였다.】 • 자(子) 유소(由素)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나일(羅衵)이다.】 • 자(子) 의소(宜素) 【진사와 문과에 합격하여 예조 정랑(禮曺正郞)을 지냈다. 서자 나첨(羅襜)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 여(女) 사위 윤항(尹沆) 【충절위(忠義衛)를 지냈다. 정유왜란 때 아우 덕윤의 부인 정 씨와 함께 치마끈을 같이 묶고서 주룡나루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열녀의 정각을 표창 받았다.】 • 자(子) 우탕(佑湯) • 자(子) 덕현(德賢) 【곤재의 문인이다. 천성이 효우를 지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죽을 먹고 물만 조금 마셨다.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달아나 숨어 엎드려 있었는데, 적들이 갑자기 이르자 그가 어머니를 안고 처연히 비통하게 울부짖으니 적들이 해치지 않고 떠나서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인조가 이 일을 듣고는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하였다. 부인은 하동 정씨(河東鄭氏)인데 또한 주룡 해구에 목숨을 바쳤기에 열녀로서 정각으로 표창을 받았다.】 • 자(子) 익소(益素)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우(羅祐)와 나호(羅祜)는 진사에 합격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태학에 추천을 받았으며,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 여(女) 사위 정오(鄭澳) • 자(子) 후소(後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직(羅衤直), 나찬(羅襸), 나탁(羅袥), 나예(羅袣)이다.】 • 자(子) 득소(得素) 【천성이 지극한 효성을 지녔다. 19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3년 동안 하면서 계속 피눈물을 흘리며 점차 야위며 $주 점차 야위며 : 원문 ‘시훼(柴毁)’는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이 몹시 여위는 것을 말한다. 《주역》 설괘(說卦)의 괘상(卦象)에 보면 ‘시(柴)’자에 ‘척(瘠)’의 뜻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으니, 인조께서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 자(子) 상소(尙素)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유(羅裕)는 무과사마(武科司果)에 합격하였고, 섬(襳)과 완(衤完)이 있다. 서자(庶子)는 한 명 있는데 ▣이다.】 • 자(子) 중소(重素)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연(羅䙇)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나식(羅衤式)이 있다.】 • 자(子) 덕신(德慎)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와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병신년(선조 29, 1596)의 어려움을 만난 뒤 재기하여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다. 무술년(선조 31, 1598)에 노량(露梁) 전투에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선봉에서 왜적과 싸운 공이 있었으니, 당시 나이가 31세였다. 선무종훈(宣武從熏)에 1등에 녹훈(錄勳)되었다.】 • 여(女) 사위 민희일 (閔喜一) • 여(女) 사위 유천(柳遷) 【충의위(忠義衛)를 지냈다.】 • 여(女) 사위 위홍주(魏弘宙).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 자(子) 산보(山寶)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다.】 • 자(子) 정보(廷寶)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 자(子) 국보(國寶) • 자(子) 덕헌(德憲)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과 경기 수사(折衝京圻水使)를 지냈다. 병자년(인조14, 1636) 봄에 명을 받들어 심양(瀋陽)으로 들어갔는데 오랑캐가 황제라고 부르고 축하하라고 하면서 참가한 하반(賀班) $주 하반(賀班) : 국가와 왕실의 경사 때 조정에서 하례하는 반열을 말한다.들을 위협하였다. 공은 절의를 지켜 굴복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소무(蘇武) $주 소무(蘇武) : 소무는 한 무제(漢武帝) 당시의 사신이다. 한무제가 흉노와의 친선을 위하여 소무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흉노 선우는 소무에게 한나라를 배반하고 자신의 노복이 되어 달라고 강요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소무는 황야로 보내져 19년에 걸친 억류생활을 하면서도 흉노에게 굴복하지 않았으며, 무제의 아들 소제(昭帝) 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에 견주었다. 가도 도독(椵島都督)이 이러한 일을 황조에 아뢰니 숙종께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표창하여 추증하였다.】 • 여(女) 사위 김용건(金用健) • 여(女) 사위 이준신(李儁臣) 【진사에 합격하였다.】 • 자(子) 수소(守素)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부인은 언양 김씨(彦陽金氏)이며 충신으로서 정려문을 표창 받았다. 안주 목사(安州牧使)이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장무공(壯武公) 김준(金浚)의 따님이다. 정묘호란 때 안주성이 함락되자, 장무공은 스스로 몸을 태워 목숨을 바쳤다. 김 씨 또한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바쳤기에 열녀로서 정각의 표창을 받았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위(羅褘)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 자(子) 정소(貞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회(羅襘)이다.】 羅氏本官羅州. 世居不出鄕, 而始祖以後世代, 無徵譜牒所詳載者, 只是十二世祖以下.始祖 富 【高麗正議大夫 監門衛上將軍.】得虬 【令同正】子 仲允 【令同正】子 松奇 【令同正】子 守永 【進士】子 源 【通仕郞 司醞署直長 同正. 墓在松峴】子 璡 【嘉善大夫 工曹典書. 墓在松峴】子 公彦 【中顯大夫 典農寺正. 辛禑七年, 從全羅都 巡問使李乙珍, 克倭有功. 墓在羅州西長興洞. 配高興柳氏, 興威衛保勝郞將 蕃之女.】子 諿 【式目都監錄事. 墓在務安南住龍渡板門峙.】子 自康 【通訓大夫 行 務安縣監. 墓在住龍渡. 配永川崔氏有中之女.】子 繼祖 【將仕郞. 成化甲午五月二十五日卒. 墓在長興洞. 配淳昌趙氏 全羅監牧官餘慶之女.】子 逸孫 【字安之, 宣務郞行典涓司直長,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三月初八日卒. 墓在長興洞. 配贈淑夫人, 昌原孔氏, 生員壯元贍勝之女】子 晊 【字伯升, 弘治戊申生. 嘉靖戊子武科, 通訓大夫 行司憲府監察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官. 嘉靖丙辰十一月初九日卒. 享年六十九. 墓在長興洞. 配 贈貞夫人, 康津崔氏, 弘文館副應敎, 贈禮曺參判, 號錦南溥之女.】子 士忱 【字仲孚, 號錦湖, 通訓大夫行尼山縣監 贈崇政大夫 議政府坐贊成 兼 判義禁府事. 事蹟詳見事實記及墓文. 前配贈貞敬夫人坡平尹氏, 有三子. 後配 贈貞敬夫人光州鄭氏, 有三子二女.子 德明 【進士, 義禁府都事. 嘗被己丑禍謫鏡城, 當壬辰亂, 與北評事鄭文孚等, 謨起義兵, 捕斬邊民, 煽亂應倭者, 事載北關誌.】子 以素 【有四子褕 襑 袿 袨.】子 因素 【有二子袺, 䙐庶子一裌.】子 成素 【武科, 宣傳官. 有庶子三表, 衤方 , 袁.】子 就素 【無后.】子 德峻 【師事鄭困齋介淸, 以行誼被薦. 官至報恩縣監. 贈戶曹參判. 天性孝友, 奉親以誠, 事繼母如事所生, 鄕人訓子孫事繼母者, 必以爲法云.】女 金磼 【主簿. 壬辰倭亂, 隱避林藪, 忽因夜驚, 夫妻相失, 自縊死, 以烈女旌閣.】 子 纘素 【宣務郞. 有一子裌, 宣敎郞.】子 繼素 【武科 通政价川郡守, 有繼子, 袗, 生員, 都事.】子 緯素 【生員文科, 同知中樞. 贈議政府左參贊, 有三子, 袡 生員正郞, 襻 生員府使, 袗出繼.】女 【崔光憲, 宣敎郞.】子 緻素 【有四子衤基 通德郞衤兼 宣敎郞, 袀折衝副護軍, 衤瑩通德郞.】子 經素 【有三子, 襀通德郞, 襢䙋 文科掌令.】庶子 緘素子 德潤 【進士, 司憲府監察. 師事困齋, 以行誼著名.】子 繪素 【武科, 通政伊川府使, 有二子. 衤成武科, 宣傳, 官襜出繼.】子 由素 【宣敎郞. 有一子, 衵.】子 宜素 【進士 文科, 禮曺正郞. 有繼子, 襜通德郞.】女 尹沆 【忠義衛. 丁酉倭亂, 與弟德顯妻鄭氏, 同結裳帶, 投死住龍海口, 以烈女旌閭.】子 佑湯子 德賢 【困齋文人. 天性孝友, 居憂之日, 啜粥疏飮. 丁酉倭亂, 負母竄伏, 賊徒猝至, 見其抱母, 悲號惻然棄去, 人謂孝感. 仁祖朝, 事聞, 贈司饔院參奉. 妻河東鄭氏, 亦投死住龍海口, 以烈女旌閭.】子 益素 【宣敎郞. 有二子, 祐 祜, 進士以孝被太學薦, 官參奉.】女 鄭澳子 後素 【有四子衤直 襸 袥 袣.】子 得素 【性至孝. 十九歲丁外憂, 廬墓三年, 泣盡繼血柴毁自盡. 仁祖朝, 事聞, 旌閭.】子 尙素 【宣敎郞. 有三子, 裕武科司果, 襳衤完. 庶子一▣.】子 純素 【有一子䘻, 庶子二▣複.】子 重素 【有二子, 䙇 武科 衤式.】子 德慎 【武科, 通政靈岩郡守. 丙申遭艱後, 起復爲茂長縣監. 戊戌露梁之役, 以統制使 李舜臣前鋒將捷倭有功, 時年三十一. 錄宣武從熏一等.】女 閔喜一女 柳遷 【忠義衛.】女 魏弘宙 【贈參議.】子 山寶 【武科縣令.】子 廷寶 【文科縣監.】子 國寶子 德憲 【武科 折衝 京圻水使. 丙子春, 奉使入瀋中, 虜稱帝需賀, 而脅使參賀班. 公抗節不屈, 人比之蘇武. 椵島都督, 以其事奏聞皇朝, 肅宗朝, 褒贈兵曹參判.】女 金用健女 李儁臣 【進士】子 守素 【宣務郞. 妻彦陽金氏旌表忠臣, 安州牧使 贈左贊成 壯武公 浚之女. 丁卯狄亂, 安州城陷, 壯務公自焚死, 金氏亦自剄死, 以烈女旌閭. 有一子褘生員.】子 貞素 【有一子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