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언절구 五言絶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초승달 8살에 짓다. 初月 八歲作 누가 곤륜산의 옥을 깎아다듬어 직녀의 빗 만들었나견우와 한번 이별한 뒤로슬퍼하여 푸른 하늘로 던졌네 誰斲崑山玉磨成織女梳牽牛離別後愁擲碧空虛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북청의 그림 병풍에 쓰다 4수 題北靑畵屛 四首 날개 말리려 이끼 낀 낚시터에 앉아깃을 털고서 난초 물가 곁에 있네날 저물자 갈대 바람 서늘한데쌍쌍이 날아 어느 곳에 묵으려나-이상은 기러기이다.-물오리는 깊은 물에서 목욕하고참새는 높은 가지에 깃들어 있네몸을 의탁한 곳은 서로 달라도양쪽 다 알맞은 거처 얻었어라-이상은 물오리와 참새이다.-날쌘 매 하늘에서 내려오니놀란 새 가을 강물에 떨어지네붉은 비단 같은 날개 급히 돌리다가푸른 연밥을 잘못 건드렸네-이상은 날쌘 매와 놀란 오리이다.-뭇새가 높은 언덕에 모여들어서로 자신이 봉황이라 속이네배회하다가 날이 저물려 하니멀리 기산의 남쪽을 생각하네174)-이상은 봉황과 참새이다.- 曝趐坐苔磯刷毛依蘭渚日暮蘆風凉雙飛宿何處右鴈鳧鷖浴深水鳥雀捿高枝托身雖異處得地兩相宜右鳧鷖鳥雀快鶻下雲霄驚禽落秋水急迴紅錦翎誤觸靑蓮子右快鶻擊鳧衆鳥集高岡相將欺鳳凰徘徊日欲暮遠憶岐山陽右鳳凰鳥雀 기산의 남쪽을 생각하네 난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邠)에 있을 때에 적인(狄人)이 쳐들어오자 빈 땅의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떠나 기산(歧山) 아래로 도읍을 옮겼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孟子 梁惠王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금로가 사냥하는 그림 金虜獵圖 금 태조의 호화로움도 저 한때인데오랜 세월 그림에서 웅장한 자태 보이네서생도 오랑캐 짐어 삼킬 뜻 있어오산에 말을 세운 너의 시195)에 화운하네 金祖豪華彼一時千秋圖上見雄姿書生亦有呑胡志和汝吳山立馬詩 오산에……시 금나라 폐제(廢帝) 완안양(完顔亮)의 〈오산(吳山)〉 시에 "백만 군대 서호 위로 옮기어 오산 제일 높은 봉우리에 말을 세우리.[移兵百萬西湖上, 立馬吳山第一峯]"라고 하여, 중원(中原)을 병탄(倂呑)하려는 뜻을 드러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시를 그린 그림 2수 西施圖【二首】 사람들이 망국의 조짐 서시에게 있다 말했는데오직 임금은 술에 취해 알지 못했다네196)고소대에서 놀던 때는 이미 땔나무 위에서 지내던 때197) 아닌데오자서는 무슨 일로 힘써 간쟁하였나서시는 본래 월나라 미인이니와서 부차의 짝 된 건 오나라 깨뜨리기 위함이었지누가 알랴, 오호에 조각배 떠 감에공 이룬 것 도주공 뿐만이 아님을198) 人言亡國在西施惟有君王醉不知臺上已非薪上日伍胥何事強爭爲西施本自越溪姝來伴夫差爲破吳誰識扁舟五湖上功成不獨一陶朱 사람들이……못했다네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과 싸워 승리한 뒤, 월나라에서 바친 미인 서시(西施)에게 빠져 고소대(姑蘇臺)를 세우고 서시와 날마다 노닐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오자서가 간절히 간했는데도 듣지 않자, 오자서가 "이제 곧 오나라가 망하여 고소대 아래에서 사슴이 노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臣今見麋鹿游姑蘇之臺也]"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멸망했다. 《史記 淮南衡山列傳》 땔나무……날 오나라의 왕 부차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밤낮으로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궁을 출입하는 신하들에게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들이 네 아버지를 죽인 일을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하였다. 《十八史略》 오호에……아님을 도주공(陶朱公) 춘추 시대 월나라 사람인 범려(范蠡)의 별칭, 오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범려 혼자서 세운 공이 아니라는 말이다. 범려는 구천을 섬겨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로 돌아오던 길에 오호(五湖)에 이르러 월왕 구천을 작별하고 일엽편주를 타고 떠나 종적을 감추었다. 《史記 貨殖列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을미년(1595, 선조28) 추석에 온성에서 돌아와 거산역에 이르러 이덕재를 만나다 乙未秋夕 還自穩城 到居山驛 逢李德哉 오동나무 잎 막 흩날려 가을과 여름이 나뉘니고향 소식 어떻하면 들을 수 있을거나어렴풋한 꿈속에 지당에서 청초를 읖조리고91)돌아가고픈 마음에 변방에서 흰 구름 바라보노라92)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이 오래 객지살이 하였고93)허리에 칼을 비껴차고 오랫동안 종군했네하늘에 비바람 가득한 변방 길에서술자리에서 얼마나 다행히도 그대를 만났는가 梧葉初飛秋夏分故園消息若爲聞池塘殘夢吟靑草嶺海歸心望白雲囊乏一錢長作客腰橫三尺舊從軍滿天風雨關山路樽酒如何幸見君 어렴풋한……읊조리고 남조 시대 송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시상(詩想)에 골몰하다가 꿈속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蓮)을 보고 나서 "못 위에 푸른 풀이 났다.[池塘生靑草.]"라는 시구를 지었다. 《南史 謝惠連列傳》 여기서는 고향의 형제 또는 친족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흰 구름 바라보노라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 법조(幷州法曹)로 부임하였을 때 그의 부모가 남쪽 하양(河陽) 땅에 있었는데, 적인걸이 병주의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남쪽 하늘로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나의 어버이가 저 구름 아래 계신다."라고 하고, 한참 동안 흐느꼈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狄仁傑列傳》 주머니에……객지살이 진(晉)나라 완부(阮孚)의 고사를 차용하게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완부가 검은 주머니[皂囊] 하나를 차고 회계(會稽) 지방을 유람할 때, 한 나그네가 완부에게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묻자, 완부가 "다만 일전으로 주머니를 지키게 하노니, 주머니가 텅 비면 궁핍할까 염려해서이다.[但有一錢守囊, 囊空羞澁.]"라고 하였다. 《山堂肆考 卷110》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해 8월에 영흥에 있으면서 앞 시에 차운하여 북청으로 가는 이덕재를 보내다 是歲八月 在永興 次前韻 送德哉之北靑 한나라 초나라의 홍구처럼 양분될 형세요94)장군이 와룡임은 세상이 알지 못하네외로운 성에서 저물녘에 천랑성95)을 보고먼 변방에서 가을에 진운96)을 바라보네노를 두드리며 맹세하는 마음은 조적과 같으니97)밧줄을 청할 길 없으나 종군98)과 같은 나이라99)어여쁘도다, 뉘라서 그대와 교분 맺었는가허리에 찬 칼 말고는 단지 그대만 있구나 漢楚鴻溝勢兩分將軍龍臥世無聞孤城落日看天狼絶塞高秋望陣雲擊楫誓心同祖逖請纓無路等從軍可憐末契誰相托除却腰刀只有君 한나라……형세요 이덕재와 헤어지는 상황을 홍구(鴻溝)의 형세에 비유한 것이다. 홍구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형양현(滎陽縣)에 있는 운하로, 한(漢)나라와 초(楚)나라가 패권을 다툴 때 이곳을 서로의 경계로 삼았다. 《史記 高祖本紀》 천랑성 침략을 담당하는 별 이름으로, 적군이나 오랑캐의 침략을 상징힌다. 진운 층층으로 두껍게 쌓여서 마치 전진(戰陣)처럼 보이는 구름으로, 옛사람들은 이것을 전쟁의 조짐으로 여겼다. 노를……같으니 적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겠다는 다짐을 진(晉)나라 조적(祖逖)에 빗댄 것이다. 조적이 군대를 통솔하여 북벌할 때, 장강(長江) 중류에서 노를 두드리며 "중원을 맑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면 장강과 같아지리.[不能淸中原而復濟者, 齊如大江.]"라고 맹세하였다. 《晉書 祖逖列傳》 종군 대본에는 '從軍'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에 의거하여 '從'을 '終'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밧줄……나이라 한나라 종군(終軍)처럼 적을 물리치고 군공을 세우겠다는 의미이다. 종군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긴 밧줄[長纓] 하나만 주면 남월(南越)의 왕을 묶어와서 바치겠다고 말한 고사가 있다. 《漢書 終軍傳》 훗날 당나라 왕발(王勃)이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이 고사를 인용하여 "나는 석 자 띠를 띠는 낮은 관원이고 한 서생일 뿐이다. 밧줄을 청할 길은 없지만, 나이는 종군과 같은 약관의 나이이다.〔勃三尺微命, 一介書生. 無路請纓, 等終軍之弱冠.]"라고 하였다. 이때 정문부의 나이가 23세였으므로, 〈등왕각서〉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안변에서 눈을 읊다 6수 安邊詠雪【六首】 땅을 둘러싼 두터운 구름 얼어서 걷히지 않고말발굽 눈을 뚫고 가는 소리 우레처럼 진동한다유인의 찻잔엔 얼음이 –원문 1자 결락100)-공자의 화로엔 불이 재로 변했구나눈 덮인 소나무 푸른 빛 더하고기운 연이어진 –원문 2자 결락- 요란함을 돕네음만 있는지라 그야말로 삼동 추위이니단지 봄이 북두자루 따라 돌아오길 기다리노라하룻밤 사이 뜰에 만곡의 소금 쌓였으니101)촌거 살림살이 이미 청렴에 어긋나는구나행인은 길을 잃고 새벽에 말 채찍 휘두르고시인은 산을 보며 저물녘에 발을 걷네옥 같은 눈 구슬 같은 먼지가 흰빛을 다투고떨어지는 꽃 흩날리는 버들개지 매우 가늘어라시 읊조리는 혼 맹렬한 추위에 몹시 제압되니새로운 시 읊고자 해도 입이 재갈을 물린 듯하여라눈 파묻힌 변방 산에 뾰족한 봉우리 사라질 듯하니추운 기상이 어쩌면 그리도 매서운가옥루엔 소름 돋도록 추위가 가득하고은해는 어른거려 시야가 어지럽네102)산봉우리 모두 희게 된 것 애석하나송백이 홀로 푸른 것 매우 어여뻐라나라에서 바닷물 끓인 것 매우 늦었다 탄식했는데하늘이 우리 백성을 위해 이미 소금을 뿌려주었구나하늘과 땅 맑고 맑아 티끌 하나 없고육지와 물 희고 희어 옥구슬 흩어지누나땅에 들어간 누리알 어찌 찾아낼 것 있으랴구름 닿도록 자라날 보리 북돋울 필요 없네103)잠깐 속이니 문 앞 버들 여전히 눈 찡그리고몰래 질투하니 뜰안 매화 아직 뺨 펴지 않았네104)멀리서 생각노니, 호산은 발목이 잠길 정도로 깊숙하니군대는 그 언제나 괴수를 섬멸했다 알려올거나납월에 흩날리는 눈꽃 특이한 상서이니바람에 나부끼는 수 많은 눈송이 행랑에 들어오네너의 일편단심과 교결함 다투니나의 양 귀밑머리 더 희끗해졌어라월나라 개 짖는 소리 무리를 이루니105) 참으로 가소롭고영 땅의 노래에 화답하기 어려운들106) 또한 무슨 상관이랴산촌을 비추는 밤 중의 밝은 빛 덕분에큰길에 승냥이 이리 버티고 있을까107) 근심하지 않노라내년이 백곡이 풍년들지 알고자 한다면겨울에 내린 눈이 해충을 누르는지 살펴보라아름다운 벼 상서를 드러내자 한 왕조가 중흥했고108)가뭄의 재앙 제거되자 성탕을 칭송했지109)남만 바다의 운무 활짝 걷힌 것을 보니기자 나라의 온 백성 뛸 듯이 끼뻐하네예로부터 운수가 막히면 다시 트이는 법이니하늘의 뜻 사람의 계책 모두 선함을 얻었구나 匝地頑雲凍不開馬蹄衝雪動乾雷幽人茶椀氷【缺】合公子薰爐火易灰景壓霜松添鬱翠氣連【二字缺】助喧豗孤陰正耐三冬冷直待春隨斗柄回一夜庭堆萬斛塩村居生計已傷廉行人迷路揮晨策騷客看山捲暮簾玉雪瓊塵爭皜皜落花飛絮好纖纖吟魂苦被寒威制欲唱新詞口似鉗雪壓關山欲沒尖凌凌氣像一何嚴玉樓起粟饒寒凜銀海生花眩視瞻可惜峰巒皆白首最憐松栢獨蒼髥公家煮海嗟何晩天爲吾民已播塩乾坤瑩瑩絶塵埃川陸皚皚散珮瑰入地遺蝗何用捕連雲宿麥不煩培乍欺門柳猶嚬眼暗妬庭梅未破腮遙想胡山深沒脛元戎何日報殲魁臘月飛花是異祥風飄萬點入回廂與子片心爭皎潔添吾雙鬢作蒼浪越吠成羣眞可笑郢吟難和亦何傷賴得山村照夜白不愁當道有豺狼要識明年百穀穰試看冬雪壓螟蝗嘉禾呈瑞興劉漢旱魃除灾頌聖湯蠻海雲烟瞻霽豁箕邦民物喜翶翔從來否運還成泰天意人謀兩得臧 원문 1자 결락 원문은 '【缺】合'이다. '合'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만곡의 소금 쌓였으니 눈이 많이 내린 것을 가득 쌓인 소금에 비유한 것이다. 당나라 이백의 시에 "오나라 소금이 꽃처럼 쌓였는데 백설보다도 더 깨끗하다.[吳鹽如花皎白雪.]"라고 하여, 눈을 소금에 비겼다. 《李太白集 卷6 梁園吟》 옥루는……어지럽네 옥루(玉樓)는 어깨를 가리키고 은해(銀海)는 눈을 가리키는 말로, 너무 추워서 어깨에 소름이 돋고 눈이 어른거린다는 뜻이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눈 내린 뒤 북대의 벽에 쓰다[雪後, 書北臺壁]〉 시에 "얼음이 옥루에 얼어붙어 추위로 소름이 일고, 빛이 은해를 흔들어 어지럽게 어른거리네.[凍合玉樓寒起粟, 光搖銀海眩生花.]"라고 하였다. 땅에……없네 눈이 많이 와서 보리농사가 잘 될 것이라는 뜻이다. 소식의 〈눈 내린 뒤 북대의 벽에 쓰다[雪後, 書北臺壁]〉 시에 "누리 알이 땅속으로 응당 천자나 들어갈 터이니, 보리가 구름에 닿는 집 몇 집이나 되려나.[遺蝗入地應千尺, 宿麥連雲有幾家?]"라고 하였는데, '납전삼백(臘前三白)'이라고 하여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보리농사가 잘 된다는 말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2》 《農政全書 卷11 占候》 잠깐……않았네 눈이 버들을 속이고 매화를 질투하여,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봄에 처음 돋아난 버들은 사람이 잠에서 막 깨어나 눈을 뜬 것과 같다는 이유로 '유안(柳眼)'이라 하고, 한창 부풀어 오르는 매화의 꽃봉오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뺨과 같다는 이유로 '매시(梅顋)'라고 한다. 송나라 이청조(李清照)의 사(詞) 〈접련화(蝶戀花)〉에 "따스한 햇살 맑은 바람이 처음으로 추위를 깨뜨리니, 버들 눈과 매화 뺨, 벌써 춘심이 동하누나.[暖日晴風初破凍, 柳眼梅腮, 已覺春心動.]"라고 하였다. 월나라……이루니 월(越) 지방은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이 한번 내리면 개들이 마구 짖어 댄다고 한다. 《柳河東集注 卷34 答韋中立論師道書》 영……어려운들 초나라 서울 영(郢)에서 노래를 잘하는 어떤 사람이 처음에 통 유행가인 〈하리파인(下里巴人)〉을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나중에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수준 높은 노래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文選 卷28 對楚王問》 큰길애……있을까 동한(東漢) 순제(順帝) 때 대장군 양기(梁冀)가 국권을 전횡하고 있었다. 장강(張綱)을 순안어사(巡按御史)로 임명하자 수레바퀴를 땅에 파묻으면서 말하기를 "승냥이와 늑대가 지금 큰길을 막고 있으니, 여우와 살쾡이 따위야 굳이 따질 것이 있겠는가.[豺狼當路 安問狐狸]"라고 하고는 곧바로 당시의 권간(權奸)인 대장군 양기(梁冀)를 탄핵하면서 그가 속으로 임금을 업신여긴 15조목의 일을 열거하여 경사(京師)를 진동시켰다. 《後漢書 卷56 張綱列傳》 아름다운……중흥했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태어날 때 아름다운 벼가 한 줄기에 아홉 이삭이 달려 크게 풍년이 들자 이름을 수(秀)라고 지었다고 한다. 광무제는 왕망(王莽)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나라 유씨(劉氏) 왕조를 중흥하여 후한(後漢)을 세웠다. 《後漢書 光武帝紀》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19 帝系部 嘉禾之瑞》 가뭄의……칭송했지 은나라에 여러 해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기도하며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荀子 大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안변 남천에서 노닐며 유인길과 수창하다 3수 遊安邊南川 與柳寅吉唱酬【三首】 변방에서 떠돌 줄은 본래 생각도 못했으니이곳에서 노닒은 더구나 일생의 기이한 일이라국화 피고 단풍 든 산에 어찌도 이리 늦게 왔는가낚시터 바위에 앉아 느긋하게 있노라취흥은 귀하신 총마사110)라고 어찌 봐주리오한가로운 정취는 백구만이 알아주리아침에 떠올려 보자 꼭 꿈결 같으니아름다운 일은 시 백 편에 부질없이 남아 있네산성을 유람하자는 아름다운 약속 있으니올라가 바라보지 않아도 기이한 흥취 일어나네한해 북쪽엔 가을 기러기 일찍 오고설봉 서쪽엔 석양이 뉘엿뉘엿 지네학선111)의 자취 산하에 남아 있고총사112)의 위엄은 초목도 알도다태수113)의 분방함이야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술 취하자 오직 시 읊는 것 좋아하노라황혼에 미인과의 약속 한번 어겼으니만년에 기남자라 칭하기 부끄러워라세상사와 세월 모두 변하였으니장대한 뜻과 늙은이 머리털 함께 쇠하였네무릉도원에 살려는 굳은 결심114)에 혼백은 먼저 떠나갔는데기나라 사람의 깊은 근심115) 내 스스로 아노라눈앞의 허다한 일 점검하니단지 속으로 말할 뿐 시 쓰지 못하겠네 關外萍逢本不期玆遊況復一生奇菊巖楓岸來何晩釣石漁磯坐覺遲醉興肯饒驄馬貴閒情惟許白鷗知朝來想像渾如夢勝事空餘百首詩山城遊賞有佳期不待登臨發興奇瀚海北邊秋鴈早雪峰西畔夕陽遲鶴仙蹤跡山河在驄史風稜草木知太守疏狂何足道醉來惟有愛吟詩黃昏一失美人期末路羞稱男子奇世累年華同變換壯圖老鬢共衰遲桃源計決魂先往杞國憂深我自知點檢眼前多少事只能心語不能詩 총마사 어사(御史)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함경도 어사 유인길을 가리킨다. 한나라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총마를 타고 다닐 때 처사가 매우 엄정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총마어사(驄馬御史)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後漢書 桓榮列傳 典》 학선 학선(鶴仙)은 신선이 되었다가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고향인 요동(遼東)에 돌아왔다는 한나라 정영위(丁令威)를 가리킨다. 《搜神後記 卷1》 총사 총사(驄史)는 어사를 뜻하는 말로, 함경도 어사 유인길을 가리킨다. 태수 안변 부사로 있던 정문부 자신을 가리킨다. 무릉도원에……결심 세상을 떠나 은거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우연히 무릉도원에 이르렀는데,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그곳에 대대로 살고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陶淵明集 卷5 桃花源記》 기나라……근심 옛날 기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자기 몸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하여 침식을 폐하고 걱정을 했다는 '기우(杞憂)'의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기우는 보통 쓸데없는 근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왜적의 침입으로 혼란해진 나라에 대한 근심을 의미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부경사를 증별하다 贈別赴京使 -원문 1자 결락191)- 지절 세상에 둘도 없으니넓은 들 홍수에도 산 무너지지 않네스스로 성군을 믿고 벼슬길에 나아갔으니어찌 -원문 3자 결락- 상강192)에 머물리오사행가는 길은 아득히 삼 천리요옥홀을 든 반열 열두 나라 이어져 있네193)이별한 뒤 그리워하니 그 어디에 있는가변방의 밝은 달밤에 홀로 창에 기대 있노라 【缺】生志節世無雙大野洪流山不降自恃聖君蹈宦海【三字缺】滯湘江乘槎路逈三千里執玉班連十二邦別後相思何處是漢關明月獨憑窓 원문 1자 결락 원문은 '【缺】生'이다. '生'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상강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소상강(瀟湘江)으로,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다가 죽은 곳이다. 옥홀을……있네 제후국들이 천자국인 명나라에 조회한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 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방위에 따라 천하를 12개 지역으로 나누어 대응시키고 이를 '십이분야(十二分野)'하였으므로, 열두 나라라고 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영양으로 가는 서산을 전송하고, 아울러 의주로 가는 관송에게 보이다 送西山赴永陽 兼示觀松赴龍灣 가을빛 산색 모두 근심스런 모습이니서리 기운 차갑고 한 해가 저물어 가네길 남쪽으로 잡은 건 따뜻한 곳 찾아가는 것 아니요지역이 요동 왼쪽에 닿아 있으니 감히 춥다고 말하랴몸은 가벼우니 이번 이별 흩날리는 나뭇잎 같으나의리는 중하니 누가 산을 옮길 수 있으려나나는 달을 보고 괜스레 헐떡이는 오나라 소와 같으니194)십 년 동안 남쪽과 북쪽을 왕래했다오 秋光岳色兩愁顔霜氣凌凌逼歲闌路出江南非就暖地連遼左敢言寒身輕此別如飄葉義重何人可轉山我似吳牛虛喘月往來鷄鴨十年間 달을……같으니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오나라는 중국 남방의 아주 더운 지방이므로, 낮에 더위로 몹시 괴로워하던 소가 밤에 달이 뜬 것을 보고도 또 해가 떴나 생각하여 숨을 헐떡거린다고 한다. 진(晉)나라 만분(滿奮)이 평소 바람을 두려워했는데 유리병을 빈틈으로 착각하고는 "저는 오나라 소가 달을 보고도 헐떡이는 것과 같습니다.[臣猶吳牛見月而喘.]"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국 사신 주지번과 한강에서 노닐다 2수 與天使朱 之蕃 遊漢江【二首】 강물은 교룡의 집을 감춰 천 길로 푸르고산은 구름 병풍 만들어 몇 첩으로 펼쳤는가청풍명월을 어찌 살 필요 있으랴260)낚시터와 생선 잡은 여울이 곧 살 곳이지하늘이 가객에게 승경을 모두 차지하게 하니경치는 새 시로 읊어져 배나 광채가 나누나구중의 궁궐로 돌아가 숙직하게 되면또한 응당 꿈속에서 창랑에 이르겠지성곽을 나서 애오라지 한가한 날 노니는데한강 가의 휘장 치고 잠시 머무누나맑은 시 경거를 아끼지 않고 주니비속한 말을 모과라 여겨서 수응하노라261)함께 배를 타도 곽태262)가 아니어서 절로 부끄럽나니이 사람이 어찌 다행히도 형주를 알게 되었는가263)멀리서 알겠어라, 성스런 군주가 앞자리264)를 비어 놓았는데기꺼이 동인을 위하여 –원문 2자 결락- 되었어라 水藏蛟室千尋碧山作雲屛幾疊張明月淸風何用買釣磯漁瀨卽爲鄕天敎佳客收奇勝物入新詩倍最光歸去九重靑鎖直也應飛夢到滄浪出郭聊爲暇日遊幨帷暫住漢江頭淸詞不惜瓊琚贈俚語翻將木瓜酬同濟自慚非郭泰此生何幸識荊州遙知聖主虛前席肯爲東人作【二字缺】 청풍명월을……있으랴 이백의 〈양양가(襄陽歌)〉에서 "돈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는 맑은 바람 밝은 달빛 속에서, 술 취해 옥산처럼 혼자 쓰러질 뿐 남이 밀어서가 아니라네.[淸風朗月不用一錢買 玉山自倒非人推]"라고 하였다. 맑은……수응하노라 경거는 원래 아름다운 옥을 뜻하는데, 흔히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가리키며 모과는 자신의 시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시경》 〈목과(木瓜)〉에 이르기를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아름다운 옥으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함께…곽태 곽태가 낙양(洛陽)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를 전송하기 위해 나온 사류들의 수레가 수천 량이 늘어서서 성황을 이루었다. 곽태는 그들 중에서 오직 이응과 어울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자 수많은 손님들이 바라보고 그 모습이 신선 같다고 했다 한다.《後漢書 郭泰列傳》 형주를 알게 되었는가 훌륭한 현인을 만나게 되었다는 뜻으로, 당(唐)나라 원종(元宗) 때 사람인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번 한 형주를 알기 원한다."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與韓荊州書》 앞자리 '전석(前席)'은 원래 조정에 나아가 임금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뜻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다가 일 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서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한밤중에 이르렀는데도,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몸을 가의 가까이로 다가갔다고 한다. 《史記 卷84 賈誼列傳》 여기서는 주지번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덕재에 대한 만사 李德哉挽 소년 시절 문자로 명성을 다투었고장년엔 방패와 창으로 의병을 일으켰었지만 번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난 그대와 나사귀는 정 자별한 마음 술과 시를 겸하였어라기성에 자취 얽었다가 혼은 먼저 떠나고용만관의 맹서는 식어 한만 남았네어이 회상하랴, 금교278)에 사절을 멈추고서세 번 부르짖다가 목소리 끊겼던 나를 少年文字爭名日壯歲干戈倡義時萬死一生君與我交情別意酒兼詩箕城迹半1)魂先往灣館盟寒恨獨遺忍想金郊停使節三呼聲斷鄭同知 금교 이성길은 1621년(광해13년 4월 26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금교역(金郊驛-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있는 역참(驛站)에서 60세에 순직하였다. 《창주공 유고》에는 '半'이 '絆'으로 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차복원에 대한 만사 車復元輓 한양은 대단히 성대하고 송경은 기가 쇠했으니왕기가 비록 옮겨갔지만 산의 기운은 남아 있어라284)천보산의 지령에 인걸이 거처하니285)한 집안 세 준재 중의 차오산이라286)흉금의 도골에는 신선의 풍모가 있으며시격은 교룡이 솟구쳐 오르고 봉황이 나는 듯벗이 조정에 가득해도 자신의 운명은 기박하여겨우 한직인 사도로 추천되었을 뿐이구나 漢京全盛松京古王氣雖移嶽氣餘天寶地靈人傑處一家三秀五山車襟期道骨仙風在詩格騰蛟起鳳如相識滿朝身命薄冷官司導費吹噓 산의……있어라 차천로는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천보산의……거처하니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 것은 그 땅이 신령스럽기 때문이다.[人傑地靈]"라는 말이 나온다. 한……차오산이라 차천로는 아버지 식(軾),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 태의(鄭太醫)309)【후계(後啓)】에 대한 만사 挽鄭太醫【後啓】 기백(岐伯)과 진(秦)나라 화(和)310)의 심법(心法) 동방에 숨겨져 있으니근세에는 오직 허준(許浚)과 양예수(楊禮壽)311)만을 일컫네의발(衣鉢)을 전하여312) 오묘한 관건을 연 이 누구인가의대(衣帶)를 갖추고서 당당히 높은 행랑에 들어갔네313)변방에서 10년 동안 임금을 모셨고314)내의원에서 세 임금 모시며 태양빛 가까이하였네서산(西山)에 해 기울었다고 노년을 한탄할 필요 없으니315)뜨락 가득한 난초 싹에 남은 향기 넉넉하다네316) 歧秦心法秘東方近代惟稱許與楊傳鉢孰能開妙鍵拖紳公得入崇廊邊塵十載陪龍御內局三朝襯日光離昃不須嗟大耋滿庭蘭茁剩餘芳 정 태의(鄭太醫) 정후계(鄭後啓, ?~1670)를 가리킨다. 효종~현종 연간에 의관(醫官)으로 활동하였다. 기백(岐伯)과 진(秦)나라 화(和) 모두 고대의 명의이다. 《한서(漢書)》 30권 〈예문지(藝文志)〉에, "태고 때에는 기백(岐伯)과 유부(兪拊)가 있었고, 중세에는 편작(扁鵲)과 진(秦)나라의 화(和)가 있었다.[太古有岐伯兪拊 中世有扁鵲秦和]"라 하였다. 허준(許浚)과 양예수(楊禮壽) 모두 조선의 명의이다. 허준(許浚, 1539~1615)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30여 년 동안 내의원의 어의로 재직하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의서(醫書)를 집필하였다. 또한 양예수(楊禮壽, ?~1597)는 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경보(敬甫), 호는 퇴사옹(退思翁)으로, 1565년 어의(御醫)를 지내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명종이 죽자 의관들이 처벌당할 때 투옥되었다가 곧 복직되었고, 이듬해 태의(太醫)로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 선조 초에 박세거(朴世擧)‧손사명(孫士銘) 등과 함께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하였다. 의발(衣鉢)을 전하여 원문은 '전발(傳鉢)'이다. '의발'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말하는데, 학문 따위를 전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흔히 사용된다. 의대(衣帶)를……들어갔네 정후계가 의관이 되어 대궐에 출입하였음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변방에서……모셨고 이에 관한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으나, 효종이 대군(大君)의 신분으로서 청나라에 8년 간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정후계가 의관으로서 그를 모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서산(西山)에……없으니 생사(生死)의 도리를 알아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로, 죽음을 지나치게 슬프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주역》 〈이괘(離卦) 구삼(九三)〉에, "기운 해가 걸려 있음이니, 질장구를 두드려 노래하지 않으면 죽음을 서글퍼 하는 것이므로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뜨락……넉넉하다네 원문의 '난(蘭)은 훌륭한 남의 집 자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들에게 어떤 자제가 되고 싶은지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뜰 안에 자라는 것처럼 하고 싶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정후계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 자식들이 훌륭하게 자랐음을 말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예조의 계사 禮曹啓辭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문부의 사우에 사액과 치제의 일은 마땅히 거행해야 되는데 흉년을 만나 경관(京官)을 내려 보내면 폐단이 있을 것이다.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금방 조정에 하직인사를 하였으니 향과 제문을 내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께서 아뢴 대로 행하라고 윤허하였다. "贈左贊成鄭文孚祠宇賜額致祭事, 當爲擧行, 而値此荒歲, 京官下送有弊, 本道都事, 今方辭朝, 香祭文下送, 使之設行, 何如。" 啓依允。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치체관 성명 致祭官姓名 도사(都事) 정화제(鄭華齊), 전사관(典祀官)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지형(李之馨), 대축(大祝) 수성 찰방(輸城察訪) 김진한(金振漢), 찬자(贊者) 전 찰방(察訪) 박흥종(朴興宗), 알자(謁者) 전 참봉(前參奉) 지천석(池天錫)은 실제 와서 제사를 올렸다. 都事鄭華齊, 典祀官鏡城判官李之馨, 大祝輸城察訪金振漢, 贊者前察訪朴興宗, 謁者前參奉池天錫, 實來行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시호를 청한 소장 증손 전 주부 정삼(鄭杉) 지음 請諡疏【曾孫前主簿杉】 신이 삼가 아룁니다. 공적을 보답하고 충성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을 격려하는 큰 방도이고, 선을 한 가지로 드러내고 이름을 바꾸는 것32)은 죽은 이를 높이는 성대한 은전입니다. 진실로 탁월한 업적을 세워 명성과 공훈이 크게 드러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의 의론은 통례에 한정하지 않고 자손의 청은 친족이라는 혐의에 구애되지 않은 것이 또한 고금의 통의입니다.신의 증조부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문부(鄭文孚)는 일찍이 문예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선조 임진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만나 북평사(北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적 국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정청(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관찰사가 그 공을 가려 공적에 그에 대한 상이 걸맞지 않았으며, 후에 다시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 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으니, 당시 여론은 큰 벼슬에 임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불행히 옥사에 잘못 연루되어 마침내 시안(詩案)으로 곤장을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신의 증조부의 대략적인 본말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같은 집안사람의 사사로운 말로써 찬양하지 못하고, 대중이 존숭하여 믿을만한 근대 명신(名臣)과 선배들의 말을 대략 들어 그 한두 가지를 증명하기를 청합니다.관북의 적을 토벌한 일은 고 판서(判書)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의 평사가 되어 채록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가장 자세합니다. 그 내용에 "임진년 6월 왜장 청정(淸正)이 승승장구하여 북방을 노략질하니 병마사(兵馬使)의 군대는 궤멸되어 달아났다. 적이 드디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지역에 들어갔으며, 회령에 들어가 왕자를 사로잡아 경성 진보(鎭堡)에 돌아오니 반란의 병사들이 앞 다퉈 수령과 장수를 결박했으므로 온 성이 적을 따랐다. 그러나 평사(評事) 정문부 혼자 탈출하여 유생 두서너 명과 함께 근처의 뭇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등이 다 와서 모여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정문부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아 역적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진에 조리 돌리고, 명천과 길주 지역으로 진격하는데 계속하여 적을 만나 장덕(長德)에서 크게 짓밟았고 재차 쌍포(雙浦)에서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柵)을 여러 차례 포위하였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원하였다. 청정(淸正)과 더불어 백탑교(白塔郊)에서 싸워서 앞뒤로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북으로 육진(六鎭)을 다니면서 변방 오랑캐를 복종시켰으며 반란한 무리를 찾아 토벌하니, 관북이 마침 평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개 모두 그의 힘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쪽 지방을 안찰할 때 포상과 추증, 사당을 세워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당시 왜적과 북쪽 오랑캐가 번갈아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의 침입을 받았으며 반역하는 주민들도 그 가운데서 일어나 이윽고 역적이 되었다. 왜적은 비록 물러갔으나 역적들은 북쪽 오랑캐를 붙따랐는데, 두세 유생이 일개 종사관(從事官)을 추천하여 적은 군사로 많은 역적을 격파하고 마침내 큰 공을 세워 예전 왕의 선조들이 살던 강토를 오랑캐에게 함락되지 않게 하였다. 그 의열이 이와 같았으나 마침 관찰사가 그 공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공을 숨겼으므로 세상에 드러나 정상(旌賞)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통해 하면서 왕사(王事)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그가 시안으로 억울하게 죽은 일은 선왕조(先王朝) 을사년에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서 그 원통함을 변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정문부의 충절은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난리에 드러났으며, 광해군 때에 있어서 조금도 더러움에 물든 일이 없었습니다. 반정 뒤에 원수(元帥)로 추천되어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는데 박래장(朴來章)의 옥사에 무고를 입고 끌려 들어가서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습니다. 정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십절(詠史十絶)〉이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바로 초회왕(楚懷王)의 일을 읊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33) 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34) 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35) 孱孫何事又懷王이는 본래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원하시고 벼슬을 추증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그 당시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 등이 입대할 적에 같은 말로 극력 진달하여 신의 조부가 공이 있고 죄가 없으며 억울하게 죽은 곡절을 밝혔고, 또 고 상신(故相臣) 조익(趙翼)이 그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어 항상 그 원통한 정상을 말한 것을 인용하니, 이에 선왕이 품계를 뛰어 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방의 사람들이 신의 조부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 지역에 사당을 세워 함께 거의한 사람들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의 계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아! 국가에서 신의 조부에게 보답하여 주는 것이 어찌도 이같이 잘 갖추어 주십니까! 이미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씻어주었으며 작질(爵秩)을 더하였고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며, 이어 그 사당을 정포(旌褒)하여 길이 교화를 세웠습니다. 사방에서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들 고무되었으니, 조부가 황천에서 이를 안다면 반드시 감읍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시호를 하사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청을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비록 후손들이 잔미한 소치라 할지라도 어찌 성조(聖朝)의 한 가지 미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신이 들으니 국조 고사에 실직(實職) 정 2품 이상이라야 시호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것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경우는 이 한계에 관계치 않습니다. 도학이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예를 들면 참봉(參奉) 신 서경덕(徐敬德)의 시호가 '문강(文康)'인 것이 그것이며,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예를 들면 제독(提督) 조헌(趙憲)의 시호가 '문렬(文烈)',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시호가 '충렬(忠烈)'인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최진립(崔震立)36) 같은 경우에는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수사(水使)인데도 시호를 내렸고, 정온(鄭蘊)37)과 김권(金權)38)은 강직하여 감히 간언하고 높은 절조로 윤리를 수립하였으므로 다 참판(參判)인데도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선대 조종(祖宗)께서 선(善)을 포상하는 법이 애초부터 작질의 고하에 구애받지 않은 것입니다.지금 신의 조부가 국가에서 은전으로 시호를 주는 벼슬에서 한 등급이 부족하며 유현을 숭상하고 권장하는 체제에 견주면 비록 차이는 있더라도 국가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창의하여 난리에 항거하였으니, 그 충성과 공훈을 어찌 앞의 두어 사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세상에서는 간혹 순직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예부터 나라를 위하여 죽을 신하가 혹 죽기도 하고 간혹 죽지 않는 것은 다만 한 때의 행과 불행에 관계될 뿐이며, 본래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만 번 죽을 각오로 한 번 살아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생각이 이미 그 처음에 결정이 되었으면 필경 일의 성패와 자신의 존망을 가지고서 그 충성의 경중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성명(聖明)께서 신의 조부의 공을 가상히 여기고 신의 조부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겨 누대 조정에서 포상하는 뜻을 따라 맡은 부서에 급히 명하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의론하게 하신다면 후진들을 밝게 권장하고 무너진 풍속을 격동시킬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다만 지하에 계신 조부의 영광이 되고 자손의 다행만 되겠습니까?신은 미천한 정성으로 우러러 임금의 위엄을 더럽혔으니 광망하고 참람한 죄는 실상 피할 곳이 없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비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고 내용을 다 알았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臣伏以酬功顯忠, 勵世之大方, 節惠易名, 崇終之盛典。苟有樹立卓異, 聲烈表著者, 則有司之議, 不限於常格, 子孫之請, 毋拘於親嫌者, 亦古今之通誼也。臣之曾祖父贈左贊成臣文孚, 早以文藝著名, 擢第登仕, 當宣廟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 倡義起兵, 誅土賊鞠世弼等, 破倭將淸正兵, 關北以定, 而被臬司掩蔽, 功賞未稱, 復値昏亂, 屛斥於外。反正之後, 卽拜全州府尹, 時議大用, 而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 枉死於桁楊, 此臣祖本末大致也。然而臣不敢輒以一家私言, 有所揄揚, 請略擧近代名臣先輩衆所崇信之說, 以證其一二焉。其關北討賊事, 則故判書臣李植, 曾爲評事於北幕, 多所採訪, 最得其詳。有曰: "壬辰六月, 倭將淸正, 長驅寇北, 兵馬使軍潰而走, 賊遂入吉明鏡富等境, 入會寧擄王子, 還趨鏡城鎭堡, 叛兵爭縛守將, 擧城附賊, 而評事鄭文孚獨脫免, 與儒生數輩, 號召近境, 鍾城府使鄭見龍等, 皆來會。衆推文孚爲大將, 斬叛賊鞠世弼等十三人, 以徇諸鎭, 進兵明吉界, 連與賊遌, 大蹂于長德, 再捷于雙浦, 屢圍吉州城及嶺東柵。踰嶺, 捄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討叛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故相臣閔鼎重, 按察北路時, 啓請褒贈立祠。有曰: "當時倭胡交亂, 腹背受敵, 逆民中起, 旣爲叛賊, 倭雖退, 其勢當附於胡,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從事, 以小擊衆, 卒就大功,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義烈如此, 而適被按道之臣, 恥其功不出己, 誣啓掩功, 未獲顯被旌賞, 至今人心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其詩案枉死事, 則先王朝乙巳年, 儒臣李端夏疏, 卞其冤。有曰: "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其在昏朝, 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 將大用, 而朴來章之獄, 適被誣引, 置對辨明, 將見釋, 而適又臺諫有以詩案深論者。文孚曾爲昌原府使時, 有〈咏史十絶〉, 其一卽楚懷王事, 而其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此本昏朝時所作, 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復其詩意, 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 國人莫不傷之, 請伸冤贈爵。" 其時, 大臣鄭太和等, 因登對, 同辭極陳以明臣祖有功無罪枉死委折, 且引故相臣趙翼, 爲其時問事郞廳, 常言其冤狀, 先王命超品贈職, 錄用子孫。先是北人, 爲臣祖立祠於起義之地, 而配以同事之人, 相與俎豆之。又因司諫呂聖齊啓請, 特令賜額致祭。嗚呼, 國家之於臣祖, 所以酬報之者, 何其備歟。旣已雪其冤枉矣, 加其爵秩矣, 錄其子孫矣, 又從而旌其祠而永樹風聲矣。四方觀聽, 莫不聳動, 九原有知, 其必感泣, 而惟是贈諡一事, 迄未上請, 此雖後嗣殘微之致, 而亦豈非聖朝之一闕事也。臣聞國朝故事, 實職正二品以上, 乃得諡。然有所取而諡之者, 亦不係此限, 有道學則諡, 若參奉臣徐敬德之諡文康, 是也。有節義則諡, 若提督臣趙憲之諡文烈, 招討使臣高敬命之諡忠烈, 是也。至如崔震立之力戰死事, 則以水使而諡焉, 鄭蘊金權之勁直敢言, 抗節扶倫, 則皆以參判而諡焉。然則祖宗彰善之規, 初不拘於爵秩之高下也。今臣祖於國典例諡之秩, 未準一階, 視儒賢崇奬之體, 雖或差異, 而乃若爲國忘身, 倡義抗難, 則其精忠勳烈, 豈必多讓於前數人哉。世或以死事爲重, 而自古徇國之臣, 或死或不死者, 特係一時之幸與不幸耳, 其心則一也。夫萬死不顧一生之計, 已決於其初, 則畢竟事之成敗, 身之存亡, 蓋有不必論其輕重矣。倘蒙聖明嘉臣祖之功, 愍臣祖之冤, 追累朝奬餙之意, 亟命所司, 議易名之典, 則足以昭勸方來, 激勵頹俗, 豈獨泉塗之榮耀, 子孫之私幸而已哉。臣以螻蟻微懇, 仰瀆宸嚴, 狂僭之罪, 實無所逃。臣不勝惶隕感激, 涕泣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선을……것 '절혜(節惠)'는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여 주고 사적을 절취(節取)하여 그 선(善)을 전일하게 한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하였으니, 시호를 뜻한다. '역명(易名)'은 이름을 바꿔 시호를 내린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공숙문자(公叔文子)가 졸(卒)하자 그의 아들이 임금에게 시호를 청하기를 "세월이 흘러 장사 지낼 때가 되었으니 이름을 바꿀 것을 청합니다.[日月有時 將葬矣 請所以易名者]"라고 하였다. 예언한 남공의 말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무관에 들어가자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 여린……됐다더냐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최진립 1568~163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생포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고 도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용인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정온 1569~164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참수(斬首)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촌으로 낙향하였다. 김권 1549~1622.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중(而中), 호는 졸탄(拙灘),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17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강계 ·무안 등지에 유배,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설을 듣고 식음을 전폐 ·자결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예조의 회계 禮曹回啓 전 주부(主簿) 정삼(鄭杉)의 상소를 계목(啓目)에 의거하여 증거 서류를 덧붙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전 주부 정삼의 이 상소 내용을 보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신의 증조부 정문부(鄭文孚)가 일찍이 문예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선조 임진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만나 북평사(北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적 국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정청(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관찰사가 그 공을 가려 공적에 그에 대한 포상이 걸맞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제수되었으니, 당시 여론은 큰 벼슬에 임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불행히 옥사에 끌려 들여가 마침내 시안(詩案)으로 곤장을 맞아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것이 신의 증조부 본말의 대략입니다. 그 후에 판서(判書) 신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의 평사가 되어 채록한 것이 많았으며,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쪽 지방을 안찰할 때 장려하여 벼슬을 추증하고 사당을 세워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을사년 이르러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서 그 원통함을 변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정문부의 충절은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난리에 드러났습니다.'라고 하니, 선왕이 품계를 뛰어 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의 계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시호를 하사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청하여 올리지 않았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해당 관청에 명하시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의논케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정문부의 충절에 대해 그 자손이 찬양하는 말은 비록 믿을 수 없더라도 선배 명신들이 혹은 그 의열을 아뢰고 혹은 그 억울하게 죽은 것을 따졌으며, 혹은 증직을 주고 그 자손을 채용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한 사원을 세워 사액하고 치제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렬과 절의는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의 고사에 실직(實職) 정 2품 이상이라야 이에 시호를 얻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것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자에게는 이 한계에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렸으니, 제독(提督) 신 조헌(趙憲)과 초토사(招討使) 신 고경명(高敬命)의 시호가 '문렬(文烈)', '충렬(忠烈)'인 것이 그것입니다.세상에서는 간혹 순직 여부를 중히 여기는데, 예부터 나라를 위하여 죽을 신하가 혹 죽기도 하고 간혹 죽지 않는 것은 다만 한 때의 행과 불행에 관계될 뿐이며, 본래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땅히 소장의 내용에 의하여 특별히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어지러운 풍속을 격려하게 하소서. 이 일은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신의 예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가하여 주심이 어떻습니까?계하(啓下)하기를 "회계(回啓)한대로 시행하라"라고 하였다.계미년 10월 7일. 前主簿鄭杉上疏, 據啓目粘連啓下是白有亦。觀此前主簿鄭杉疏辭, 則以爲"臣之曾祖父贈左贊成文孚, 早以文藝著名, 擢第登仕。當宣廟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倡義起兵, 誅土賊鞠世弼等, 破倭將淸正兵, 關北以定, 被臬司掩蔽, 功賞未稱。逮仁廟反正之後, 卽拜全州府尹, 時議大用, 而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冤死於桁楊, 此臣祖本末大致也。在後判書臣李植, 曾爲評事於北幕, 多所採訪, 故相臣閔鼎重, 按察北路時, 啓請褒贈立祠。及至乙巳年, 儒臣李端夏疏, 卞其冤。有曰: '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先王命超品贈職, 錄用其子孫。又因司諫呂聖齊啓請, 特令贈額致祭, 而惟是贈諡一事, 迄未上請, 伏願聖明亟命所司, 議易名之典亦爲白有臥乎所。" 文孚忠節, 以其子孫揄揚之言, 雖不可取信, 而前輩名臣, 或陳其義烈, 或訟其枉死, 或請贈秩錄其子孫, 又令立祠而贈額致祭, 其功烈節義, 無復可議者矣。國家故事, 實職正二品以上, 乃合得諡, 然有所取而諡之者, 亦不拘此限, 有節義則諡, 若提督臣趙憲·招討使臣高敬命之諡文烈忠烈, 是也。世或以死事爲重, 而自古徇國之士, 或死或不死者, 特係一時之幸與不幸, 其心則一也。所當依疏辭, 特贈嘉諡, 以激頹波是白乎矣。事係恩典, 臣曹不敢擅便, 上裁何如。啓依回啓施行。癸未十月初七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왕고 범옹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홍중일 敬次先王考泛翁韻【洪重一】 태평 시대에 병마가 객이요승지에는 촉룡서당 서있네산봉우리에 초승달 비끼고호수 빛이 술잔에 비치네수양112)에는 의병 있었고통덕은 본래 유향이었네조부님의 시 벽에 걸려화답하니 두랑에 부끄럽네 淸時兵馬客勝地燭龍堂峀勢橫新月湖光映綠觴睢陽曾義旅通德本儒鄕王父詩懸壁賡吟媿杜郞 수양(睢陽) 《농포집》 권6 〈임명대첩가(臨溟大捷歌)〉 주 참조.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