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재15)가 조정으로 돌아와 북방의 일에 대해 아뢴 소장 畏齋還朝陳北事疏 신이 삼가 살펴보니, 북방 지역은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에 대해 중신(重臣)이 이제 막 탐문을 마쳤고 또한 지금 관찰사가 두루 묻고 살펴서 여러 고을의 큰 폐단을 빠트린 것이 없는데 그 대강은 이미 장계(狀啓)로 알렸으니, 신이 지금 세세한 일까지 낱낱이 거론하여 다시 전하의 귀를 더럽히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국가의 현재의 근심거리는 참으로 북쪽 변방에 있으니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군정(軍政)은 그 다음입니다.지금 도신(道臣)의 장계를 보니, 그 글에서 임진년의 의사들을 추포(追褒)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결속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이 아뢰고 싶은 말로, 또한 일찍이 도신과 함께 토론하여 확정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 걱정할 만한 상황은 이미 장계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니 신이 다시 아뢸 필요가 없으나, 다만 정문부(鄭文孚)에 관한 일은 신이 그 전말을 대단히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개 신의 부친 신 이식(李植)은 일찍이 만력 병진년(1616년)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함경도 남북의 사실을 널리 채집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찬술하였지만 잃어버렸는데, 다만 손수 초를 잡은 잡기(雜記) 두어 장만 남겨지게 되었으니, 바로 정문부가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한 일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당시에 북도의 성읍은 모두 반란의 역적들이 차지하여 원융(元戎) 이하 장수와 관리들은 적에게 함락되어 거의 죽음을 당하였는데, 유독 정문부만이 죽음을 면하고서 유생들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우선 경성(鏡城)을 회복하고 반란의 역적들을 죽이고 왜구들을 물리쳤다. 또한 장수와 병사를 선발하여 보내서 여러 고을의 반란의 괴수를 추격하여 토벌하고 아울러 13명의 목을 참수하여 군중에 조리를 돌렸다. 마침내 명천(明川), 길주(吉州) 지역까지 군사를 진격하여 연달아 적과 만나 싸웠으며 장덕산(長德山)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쌍개포(雙介浦)에서 다시 승전하였다. 길주성(吉州城)과 영동책(嶺東柵)을 수차례 포위하였으며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하였고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앞뒤로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당시 관찰사인 윤탁연(尹卓然)은 정문부의 업적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시기하여 그 실상과 반대로 행재소에 알렸으며, 항상 군법으로 정문부를 죽이려고 하였고 정문부의 장수와 보좌관들은 이따금 추포(追捕)되어 매로 고문을 당하여 죽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으니,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면서도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 정문부가 또다시 북쪽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오랑캐를 불러 복종시키고 반당(叛黨)을 찾아 주벌하였으니, 관북이 마침내 평정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경인(鞠景仁)을 주벌한 공으로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3품의 자급에 겨우 올랐고, 그를 따라 난리에 참여했던 군사들은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각하며 왕사(王事)가 완성되지 못하였다고 여긴다.'신의 부친이 기록한 바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신이 북쪽으로 들어간 이후에 도내의 여론을 들으니, 모두 정문부의 공열을 칭송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북방 사람들이 정문부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여 당시에 창의하여 죽음으로 절개를 바친 유생을 배향하려고 하지만, 정문부가 역옥에서 장살 당해 죽은 소식을 듣고서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신이 편지로 조정 안의 친구들에게 탐문하여 정문부가 죽을 당시의 실상에 대해 알아내었는데, 그의 죽음은 참으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정문부의 충절은 위란의 시기에 밝게 드러났으며, 혼조(昏朝, 광해군)에 있을 때 비록 벼슬을 하였지만 전부 외직이었으며 조금도 더러운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반정 후 원수(元帥)에 천거되어 조정에서 크게 쓰려 할 때에 마침 박래장(朴來章)의 옥사16)에 무고되어 끌려들어갔는데,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으므로 끝내 억울하게 형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시안이란 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詠史)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초회왕(楚懷王)의 일을 읊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17) 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18) 백성은 절망하였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19) 孱孫何事又懷王이는 본래 혼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정축년(1637)의 난리20) 이후에 이름이 단서(丹書)21)에 올라간 사람들은 그 죄를 전부 씻어주었는데, 정문부도 또한 그 안에 들어 있지만 별다른 은전은 없었다고 합니다. 북방 사람들이 이런 실상을 알고서 여론이 더욱 격렬하여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렸으며, 감사는 이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한 뒤에 허락을 받아 도내 의사의 사적을 탐문하였습니다. 이에 이렇게 계문(啓聞)하오니, 청컨대 휼전(恤典)을 더해 주시면 한 도의 백성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다만 생각건대 정문부의 큰 공은 이미 당시에 가려졌었고 또한 원통함을 안고서 죽었는데 아직 신원하는 은전이 없으니 또한 어떻게 북방 사람들의 추모하는 정성을 깊게 위로하며 후대에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이 의논을 묘당에 물어서 먼저 정문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이어서 높은 직급을 포증하라고 명하시고 여러 의사들에게 뒤미처 베푸는 휼전을 동시에 거행하게 한다면, 장차 북방에 교화가 수립되는 것을 볼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지사(志士)의 기운을 감격시킬 것이니,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 묶는 계책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臣竊觀北路纔經重臣採訪民弊, 又今按道之臣咨諏, 殆無所遺列邑大段弊瘼, 槩已啓聞, 臣今不敢毛擧細故, 更瀆於宸聽也。惟是國家今日之憂, 正在北邊, 而人心最可憂, 軍政次之。今見道臣狀啓請追褒壬辰義士, 以爲固結人心之本, 此正臣所欲陳者, 而亦嘗與道臣而商確者也。人心可憂之狀, 已悉於其狀啓中, 不須臣更達, 而第惟鄭文孚事, 臣最詳顚末。蓋臣父臣植, 曾於萬曆丙辰歲, 爲北評事, 博採南北道事實, 述〈北關志〉而見佚, 適手草雜記數紙見遺, 卽記文孚倡義討賊事者也。'當此時, 北道城邑, 悉爲叛賊所據, 元戎以下將吏, 陷賊殆盡, 獨文孚脫免, 乃與儒生謀起義兵, 先復鏡城, 誅叛賊却倭寇。又發遣將士, 追討列邑叛魁, 倂斬十三人以徇。遂進兵明吉界, 連與賊遇, 大輮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柵,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是時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反其實以聞行在,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 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愈奮,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也。文孚又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叛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同陞三品秩,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 臣父所記, 大略如此。臣入北後, 聽於道內輿論, 咸誦文孚功烈, 嘖嘖不已。又北人欲爲文孚立祠宇, 以當時倡義死節之儒生配之, 而聞文孚死逆獄杖下, 以此不敢云。臣以書求訪于朝中親舊, 得文孚死時實狀而來, 其死誠爲至冤痛矣。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其在昏朝, 雖或從仕, 皆是外任, 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 朝廷將大用, 而朴來章之獄, 適被誣引, 置對辨明, 將見釋, 而適又臺諫, 有以詩案深論者, 竟不免梧棘之冤。所謂詩案, 卽文孚曾爲昌原府使時, 有詠史十絶, 其一卽楚懷王事, 而其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云云。" 此本昏朝時所作, 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覆其詩意, 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 國人莫不傷之。丁丑亂後, 凡名在丹書之類, 悉加蕩滌, 文孚亦必在其中, 而別無顯典云矣。北人得此實狀, 羣議益激, 呈文于監司, 監司仍通議于大臣而後許之, 仍採訪道內義士事蹟, 有此啓聞, 請加恤典, 庶可慰一道人心, 而獨念文孚大功, 旣被掩蔽於當時, 又抱冤而死, 未有伸雪之典, 則亦何以大慰北人追慕之誠, 而激勸於方來也。伏願殿下特將此議, 下詢于廟堂, 先伸文孚之冤, 仍命褒贈崇秩, 與諸義士追恤之典, 一時擧行, 則將見風聲樹立於北方, 愚民之心, 有所鎭服, 志士之氣, 有所感勵, 其爲固結根本之圖, 非少補也。 외재 이단하(李端夏, 1625~1689)의 호이다.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계주(季周), 호는 송간(松磵)으로, 택당 이식(李植)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북평사(北評事)가 되었으며 1669년에 훈련별대(訓鍊別隊)의 창설을 제안하였다. 좌의정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래장의 옥사 인조 2년 10월 박홍구의 조카인 박윤장이 이대온, 이대윤, 이필헌 등과 발의하였고, 박홍구의 아들 박지장, 박래장과 조카 박진장, 박성장, 박일장 등이 모두 참여한 반란이다. 기찰하는 무리를 먼저 제거하고서 반란이 성사 뒤에는 광해군을 상왕으로 받들어 인성군(仁城君)에게 전위하게 하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중국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인조2년 11월 8일》 예언한 남공의 말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무관에 들어가자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이다.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정축년의 난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이른다. 단서 옛날 제왕이 공신에게 대대로 면죄(免罪) 등의 특권을 부여할 때 내리던 증서이다. 붉은 글씨로 썼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