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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 조촐한 술자리에서 이원배의 시에 차운하다 蓮池小酌 次李源培韻 장난삼아 나비 따라 봉래산에 들어가니괜스럽게 선녀들이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누나이십구 년간 속진 속에 있었으니번다한 시름 달랠 길 없어 술잔만 들었네 戱隨蝴蝶入蓬萊多事仙娘問我來二十九年塵土裡煩愁無賴酌金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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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관의 칠석 시에 차운하다 次書狀七夕韻 천상에 누가 은하수 흐르게 하였나선계에도 본래 이별의 시름 있어라남은 물결 내려와 용만의 강280) 되었으니동서로 떨어져 두 곳에서 가을 맞네 天上誰敎河漢流仙居亦自有離愁餘波下作龍灣水解隔東西兩地秋 용만의 강 용만은 의주(義州)의 별칭으로, 용만의 강은 압록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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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관281)으로 가는 길에 連山道中 남쪽 사람 북으로 가면 근심 일어나고북쪽 나그네 남쪽 오면 떠돌이 신세 한탄하지본디 인정은 각기 고향 그리워하기 마련이니연산이 굳이 시름겹게 할 필요 없네 南人北去動離憂北客南來歎旅遊自是人情各懷土連山不必使人愁 연산관(連山關) 구련성(九連城)과 심양 사이에 설치된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 중 하나이다. 현재는 요녕성 본계시(本溪市)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봉성시(鳳城市), 서쪽으로 요양시(遼陽市)를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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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포 쓴 아가씨 面紗娘 안개 속 꽃 보듯이 병든 눈 탄식하니푸른 깁 무슨 일로 다시 머리에 썼나흐릿해도 오히려 추파282) 던진 줄 아는데춘심을 팔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네 霧裏看花歎病眸碧紗何事更籠頭矇矓猶認秋波動賣與春心不自由 추파 미인의 눈빛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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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 승지공이 차운한 시를 덧붙이다 2수 附伯父承旨公次韻【二首】 숲 정자 모여 얘기하다 돌아가길 잊으니돌 베고 누운 민둥머리 취한 뒤 들어보네봄꽃 피었다 다 졌어도 안타까워 마오뜰앞에 도성에서 옮겨 심어 놓았으니꽃이 진 사월에 옅은 녹음 있으니임하의 맑은 술동이 깊고 더욱 깊어라노래는 저녁에 부르게 하지 마오늙은이 고금의 감회 이기기 어렵다오 林亭會話却忘回枕石童頭醉後擡莫恨春花開落盡庭前移得洛陽栽無花四月有輕陰林下淸尊深復深歌曲莫敎當夕唱老翁難勝古今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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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의 〈최노첨을 경계하다〉 시에 차운하다 次德哉警魯詹韻 노두가 어느 때에 〈북정〉을 읊었던가87)고향에선 봄빛이 매화를 저버렸네집 없이 삼 년이란 오랜 시간 객지살이 하였는데벗이 있어 그런대로 고향 그리는 정을 풀었노라돌아가는 꿈속에선 매양 하늘 밖에서 게으름 피웠는데여정은 대부분 눈 속에 가는구나서쪽 소식 누구에게 물을거나오직 변경 산에 뜬 밝은 조각달만 볼 뿐 老杜何時賦北征故園春色負梅兄無家久作三年客有友聊寬萬里情歸夢每從天外懶旅程多在雪中行西方消息憑誰問惟見關山片月明 노두가……읊었던가 노두(老杜)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별칭이다. 〈북정(北征)〉 시는 두보가 46세 때 지은 오언고시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났을 때 행재소(行在所)인 봉상(鳳翔)에서 처자가 있는 부주(鄜州)로 가는 동안의 정경과 감회를 읊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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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나무 접붙이기 接桃 봄바람이 네게 봄 꽃가지 하나 중매하니다른 나무에 시집가서 새 꽃을 피우네꽃은 말하지 않더라도 열매는 맺으니초궁의 식부인349)에게 비길 수 있겠네 東風媒汝一枝春嫁與他根作態新花縱不言猶有子楚宮堪比息夫人 초궁의 식부인 식부인은 식후(息侯)의 아내인 식규(息嬀)이다. 초자(楚子)가 식국(息國)을 멸망시킨 후 식규를 데리고 돌아왔다. 식규는 초나라로 온 뒤에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초자와 말을 하지 않았다. 초자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한 여자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할망정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1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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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 벗에게 부치다〉 시에 차운하다 次寄淮南友韻 고향 그리는 마음에 높은 누각에 기대고봄 생각에 풀향기 나는 물가에 서 있노라가고자 하지만 갈 수 없으니잠깐 떠나왔는데 오래도록 떠돌게 되었네풍진 세상 고향과 떨어져 있고노래하고 춤추는 이들 청루에 흩어져있네세상사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흘러가 붙잡을 수 없으니 어이하랴 鄕心倚高閣春思立芳洲欲往不得往薄遊成久遊風塵隔故國歌舞散靑樓世事將流水如何去莫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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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한양에게 부치다〉 시에 차운하다 次寄王漢陽韻 남쪽 마을과 북쪽 성곽술 익자 서로 부를 줄 아네신 거꾸로 신고17) 맞이하는 주인 반가워하고옷깃 당기며 손 붙잡는 여자아이 어여쁘구나잔치를 열어 푸른 풀 속에 앉으니달을 기다리며 파란 하늘 바라보네크게 취하여 돌아오는 저물녘사립문 건너에 강이 멀리 흐르네 南隣與北郭酒熟解相邀倒屣主人喜牽衣兒女嬌開筵坐碧草待月望靑霄大醉歸來暮柴門隔水遙 신 거꾸로 신고 급히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느라 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는 뜻으로, 매우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권21 〈위서(魏書) 왕찬전(王粲傳)〉에 "왕찬(王粲)이 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달려가 맞이하였다[倒屣迎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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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서의 원운을 부기하다 附孫文恕韻 백만 호위군이 북쪽 변방을 진동시키니성대한 위엄을 먼저 길성 오랑캐에게 떨치네깃발은 동틀 무렵에 염천의 달을 가리고고각 소리는 새벽에 탑야의 산을 놀라게 하네군졸도 오히려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는데장군이 어찌 감히 살아서 돌아가려 하랴한나라의 옛 공업 이제부터 회복하리니미천한 신하 잠시도 한가롭지 못하다 어찌 한스러워하랴 百萬羽林動北關天聲先振吉城蠻旌旗曉蔽鹽川月鼓角晨驚塔野山士卒尙能甘死戰將軍何敢樂生還漢家舊業從今復肯恨微臣不暫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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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황269)의 서당 梁榥書堂 양군의 식감으로 하늘이 숨겨 놓은 장소를 찾아내어깊은 숲에 자리 잡아 초당을 지었어라천 년의 구름과 이내는 학을 타던 곳이요한 지역 산수는 와룡의 집이라겹겹의 띠집이라 성난 가을바람 두렵지 않고푸른 나무라 긴긴 여름날에 정말 좋아라독서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나니제비의 진흙이 텅 빈 들보에서 떨어지는 것을 때로 보노라 梁君眼力破天藏爲卜林幽作草堂千載雲煙乘鶴地一區山水臥龍庄重茅不怕秋風怒綠樹偏宜夏日長除却讀書無一事燕泥時見落空樑 양황 1575~159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학기(學器)이고, 호는 진우재(眞愚齋)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양홍주(梁弘澍)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8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경상도의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에게로 가서 힘을 합하여 왜적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그는 몽진한 왕을 호종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임을 역설하여 의주행재소에 가서 왕에게 가져간 곡식과 물품을 바쳤다. 이후 경상도초유사 김성일(金誠一)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가재를 팔아 많은 화살을 준비하여 군비확충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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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운하되, 수구에는 운자를 쓰지 않다 再次 不用首韻 이번에 마천령 밖으로 가니시중대와 원수대184) 있다오밥 짓는 연기 예로부터 남쪽으로 통했으니봄빛이 어찌 북쪽 변방에 이른 적 없으랴세류에 군영 열었으니 적을 물리친 이 누구인가185)낙매곡 피리로 부니 향기 나지 않네186)무심히 오고가는 것 내 우스우니옛일에 감회 일고 이별이 슬퍼 애간장만 끊어지네 此去磨天大嶺外侍中元帥有臺隍人烟從古通南國春色何曾到北荒細柳開營誰却敵落梅吹笛未聞香等閒來往吾堪笑感舊傷離秪斷腸 시중대와 원수대 시중대(侍中臺)는 함경북도 북청(北靑)에 있는 누대이고, 원수대(元帥臺)는 함경북도 학포현(鶴浦縣)에 있는 누대이다. 세류에……누구인가 세류영(細柳營)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흉노가 침범하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주아부(周亞夫)가 세류(細柳)에 주둔했는데, 문제가 시찰을 왔을 때 군령(軍令)이 없다는 이유로 황제의 출입을 제지할 정도로 군율(軍律)이 엄격했다. 이후 군율이 엄격한 군영이라는 뜻에서, 군영을 세류영 또는 유영(柳營)이라 하였다. 《史記 絳侯周勃世家 周亞夫》 낙매곡……않네 매화가 떨어져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낙매곡은 한나라 때 적곡(笛曲)에 〈매화락(梅花落)〉으로,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에 "황학루 위에서 옥젓대를 부니, 강성 오월에 매화가 떨어지는구나.[黃鶴樓上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라고 하였다. 《李太白文集 卷20 與史郞中飮聽黃鶴樓上吹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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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 부사의 시에 차운하다 次江界韻 높은 누대에 고금의 시름 다하지 않으니중화와 오랑캐 나누는 한 줄기 강 흐르네청해정은 만리 밖에서 불어 온 바람을 맞고백두산엔 천년토록 녹지 않는 눈 쌓여 있네장군은 본래 튼튼한 장성을 믿는데지사는 오히려 나라를 근심하네멀리 바라보니 도성 그 어디에 있는가구중궁궐에서 어전 젓가락 빌려 아뢸 길 없네187) 高樓不盡古今愁漢虜橫分一水流靑海亭臨風萬里白頭山戴雪千秋將軍自倚長城壯志士猶爲大國憂遙望日邊何處是九重無路借前籌 구중궁궐에……없네 임금 앞에서 계책을 아뢸 길이 없다는 뜻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식사하는 도중에 장량(張良)이 밖에서 들어와 배알을 하자 유방이 역생(酈生)의 말을 들려 주며 의견을 묻자, 장량이 "신이 앞에 있는 젓가락을 가지고 대왕을 위해 계책을 세워 보겠습니다.[臣請借前箸, 爲大王籌之.]"라고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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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양포268)의 시에 차운하다 再次楊浦韻 강 위의 푸른 산, 산 위의 누대누대 앞에 달이 나와 강물에 비추누나사람은 오호의 일엽편주 타고 떠나는 객과 같고돛배는 강동 만 리 가을을 찾아가는 듯하네몸은 명성의 굴레에 얽어 묶여 있는 천리마와 같은데꿈에서 진세의 그물 벗어나 모래밭 갈매기 좇누나만약 향기로운 봄 술을 가져올 수 있다면흉중 만고의 근심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을 텐데 江上靑山山上樓樓前月出見江流人如五湖扁舟客帆似江東萬里秋身絆名韁同縶驥夢超塵網逐沙鷗若爲換得芳春酒滌盡胸中萬古愁 양포 최전(崔澱, 1567~1588)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으며, 학문의 진도가 남달리 빨라 스승으로부터 크게 총애를 받았다. 1585년(선조18) 18세에 진사시에 입격하여 시문과 박학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크게 모았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21세에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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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15)가 조정으로 돌아와 북방의 일에 대해 아뢴 소장 畏齋還朝陳北事疏 신이 삼가 살펴보니, 북방 지역은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에 대해 중신(重臣)이 이제 막 탐문을 마쳤고 또한 지금 관찰사가 두루 묻고 살펴서 여러 고을의 큰 폐단을 빠트린 것이 없는데 그 대강은 이미 장계(狀啓)로 알렸으니, 신이 지금 세세한 일까지 낱낱이 거론하여 다시 전하의 귀를 더럽히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국가의 현재의 근심거리는 참으로 북쪽 변방에 있으니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군정(軍政)은 그 다음입니다.지금 도신(道臣)의 장계를 보니, 그 글에서 임진년의 의사들을 추포(追褒)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결속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이 아뢰고 싶은 말로, 또한 일찍이 도신과 함께 토론하여 확정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 걱정할 만한 상황은 이미 장계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니 신이 다시 아뢸 필요가 없으나, 다만 정문부(鄭文孚)에 관한 일은 신이 그 전말을 대단히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개 신의 부친 신 이식(李植)은 일찍이 만력 병진년(1616년)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함경도 남북의 사실을 널리 채집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찬술하였지만 잃어버렸는데, 다만 손수 초를 잡은 잡기(雜記) 두어 장만 남겨지게 되었으니, 바로 정문부가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한 일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당시에 북도의 성읍은 모두 반란의 역적들이 차지하여 원융(元戎) 이하 장수와 관리들은 적에게 함락되어 거의 죽음을 당하였는데, 유독 정문부만이 죽음을 면하고서 유생들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우선 경성(鏡城)을 회복하고 반란의 역적들을 죽이고 왜구들을 물리쳤다. 또한 장수와 병사를 선발하여 보내서 여러 고을의 반란의 괴수를 추격하여 토벌하고 아울러 13명의 목을 참수하여 군중에 조리를 돌렸다. 마침내 명천(明川), 길주(吉州) 지역까지 군사를 진격하여 연달아 적과 만나 싸웠으며 장덕산(長德山)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쌍개포(雙介浦)에서 다시 승전하였다. 길주성(吉州城)과 영동책(嶺東柵)을 수차례 포위하였으며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하였고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앞뒤로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당시 관찰사인 윤탁연(尹卓然)은 정문부의 업적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시기하여 그 실상과 반대로 행재소에 알렸으며, 항상 군법으로 정문부를 죽이려고 하였고 정문부의 장수와 보좌관들은 이따금 추포(追捕)되어 매로 고문을 당하여 죽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으니,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면서도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 정문부가 또다시 북쪽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오랑캐를 불러 복종시키고 반당(叛黨)을 찾아 주벌하였으니, 관북이 마침내 평정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경인(鞠景仁)을 주벌한 공으로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3품의 자급에 겨우 올랐고, 그를 따라 난리에 참여했던 군사들은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각하며 왕사(王事)가 완성되지 못하였다고 여긴다.'신의 부친이 기록한 바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신이 북쪽으로 들어간 이후에 도내의 여론을 들으니, 모두 정문부의 공열을 칭송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북방 사람들이 정문부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여 당시에 창의하여 죽음으로 절개를 바친 유생을 배향하려고 하지만, 정문부가 역옥에서 장살 당해 죽은 소식을 듣고서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신이 편지로 조정 안의 친구들에게 탐문하여 정문부가 죽을 당시의 실상에 대해 알아내었는데, 그의 죽음은 참으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정문부의 충절은 위란의 시기에 밝게 드러났으며, 혼조(昏朝, 광해군)에 있을 때 비록 벼슬을 하였지만 전부 외직이었으며 조금도 더러운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반정 후 원수(元帥)에 천거되어 조정에서 크게 쓰려 할 때에 마침 박래장(朴來章)의 옥사16)에 무고되어 끌려들어갔는데,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으므로 끝내 억울하게 형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시안이란 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詠史)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초회왕(楚懷王)의 일을 읊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17) 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18) 백성은 절망하였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19) 孱孫何事又懷王이는 본래 혼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정축년(1637)의 난리20) 이후에 이름이 단서(丹書)21)에 올라간 사람들은 그 죄를 전부 씻어주었는데, 정문부도 또한 그 안에 들어 있지만 별다른 은전은 없었다고 합니다. 북방 사람들이 이런 실상을 알고서 여론이 더욱 격렬하여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렸으며, 감사는 이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한 뒤에 허락을 받아 도내 의사의 사적을 탐문하였습니다. 이에 이렇게 계문(啓聞)하오니, 청컨대 휼전(恤典)을 더해 주시면 한 도의 백성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다만 생각건대 정문부의 큰 공은 이미 당시에 가려졌었고 또한 원통함을 안고서 죽었는데 아직 신원하는 은전이 없으니 또한 어떻게 북방 사람들의 추모하는 정성을 깊게 위로하며 후대에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이 의논을 묘당에 물어서 먼저 정문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이어서 높은 직급을 포증하라고 명하시고 여러 의사들에게 뒤미처 베푸는 휼전을 동시에 거행하게 한다면, 장차 북방에 교화가 수립되는 것을 볼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지사(志士)의 기운을 감격시킬 것이니,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 묶는 계책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臣竊觀北路纔經重臣採訪民弊, 又今按道之臣咨諏, 殆無所遺列邑大段弊瘼, 槩已啓聞, 臣今不敢毛擧細故, 更瀆於宸聽也。惟是國家今日之憂, 正在北邊, 而人心最可憂, 軍政次之。今見道臣狀啓請追褒壬辰義士, 以爲固結人心之本, 此正臣所欲陳者, 而亦嘗與道臣而商確者也。人心可憂之狀, 已悉於其狀啓中, 不須臣更達, 而第惟鄭文孚事, 臣最詳顚末。蓋臣父臣植, 曾於萬曆丙辰歲, 爲北評事, 博採南北道事實, 述〈北關志〉而見佚, 適手草雜記數紙見遺, 卽記文孚倡義討賊事者也。'當此時, 北道城邑, 悉爲叛賊所據, 元戎以下將吏, 陷賊殆盡, 獨文孚脫免, 乃與儒生謀起義兵, 先復鏡城, 誅叛賊却倭寇。又發遣將士, 追討列邑叛魁, 倂斬十三人以徇。遂進兵明吉界, 連與賊遇, 大輮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柵,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是時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反其實以聞行在,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 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愈奮,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也。文孚又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叛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同陞三品秩,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 臣父所記, 大略如此。臣入北後, 聽於道內輿論, 咸誦文孚功烈, 嘖嘖不已。又北人欲爲文孚立祠宇, 以當時倡義死節之儒生配之, 而聞文孚死逆獄杖下, 以此不敢云。臣以書求訪于朝中親舊, 得文孚死時實狀而來, 其死誠爲至冤痛矣。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其在昏朝, 雖或從仕, 皆是外任, 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 朝廷將大用, 而朴來章之獄, 適被誣引, 置對辨明, 將見釋, 而適又臺諫, 有以詩案深論者, 竟不免梧棘之冤。所謂詩案, 卽文孚曾爲昌原府使時, 有詠史十絶, 其一卽楚懷王事, 而其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云云。" 此本昏朝時所作, 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覆其詩意, 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 國人莫不傷之。丁丑亂後, 凡名在丹書之類, 悉加蕩滌, 文孚亦必在其中, 而別無顯典云矣。北人得此實狀, 羣議益激, 呈文于監司, 監司仍通議于大臣而後許之, 仍採訪道內義士事蹟, 有此啓聞, 請加恤典, 庶可慰一道人心, 而獨念文孚大功, 旣被掩蔽於當時, 又抱冤而死, 未有伸雪之典, 則亦何以大慰北人追慕之誠, 而激勸於方來也。伏願殿下特將此議, 下詢于廟堂, 先伸文孚之冤, 仍命褒贈崇秩, 與諸義士追恤之典, 一時擧行, 則將見風聲樹立於北方, 愚民之心, 有所鎭服, 志士之氣, 有所感勵, 其爲固結根本之圖, 非少補也。 외재 이단하(李端夏, 1625~1689)의 호이다.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계주(季周), 호는 송간(松磵)으로, 택당 이식(李植)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북평사(北評事)가 되었으며 1669년에 훈련별대(訓鍊別隊)의 창설을 제안하였다. 좌의정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래장의 옥사 인조 2년 10월 박홍구의 조카인 박윤장이 이대온, 이대윤, 이필헌 등과 발의하였고, 박홍구의 아들 박지장, 박래장과 조카 박진장, 박성장, 박일장 등이 모두 참여한 반란이다. 기찰하는 무리를 먼저 제거하고서 반란이 성사 뒤에는 광해군을 상왕으로 받들어 인성군(仁城君)에게 전위하게 하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중국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인조2년 11월 8일》 예언한 남공의 말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무관에 들어가자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이다.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정축년의 난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이른다. 단서 옛날 제왕이 공신에게 대대로 면죄(免罪) 등의 특권을 부여할 때 내리던 증서이다. 붉은 글씨로 썼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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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로 함께 밤에 숙직하다 문신 정시의 장원 작품 白首同夜直 文臣庭試壯元 회상해보니, 예전 남쪽으로 갔을 때 나와 공은계산을 지척에 두고 동과 서에 있었지.맑은 술동이 미주(美酒)로 흉금을 토로하고오래된 웅장한 검에 간담을 함께 의지했네.떠돌아다니느라 선실330)이 멀어져 오랫동안 탄식하였는데이름이 올라가 지금 다시 궁궐로 돌아왔어라.남쪽의 물고기 북쪽의 새처럼 중년에 이별하였다가상서성의 화로를 오늘밤 함께 하누나.담소하는 사이에 근심은 천리 밖으로 사라지고십년 전의 일은 꿈속 같구나.근심하니 이미 천 가닥 머리 희게 되었지만군주 사모하여 아직도 일편단심의 충정이로다.기이한 만남은 참으로 가로막은 안개를 열어젖힌 듯하고살아 돌아옴은 바로 임금 총명에 힘입음이라.흉금을 여니 완연히 황학루의 달을 대한 것 같고흥을 타니 더욱 적벽의 바람이 생각나누나.어촉의 빛을 나눠 주어 옥전에서 내려오고선호의 술을 하사하여 금궁에서 나오네.임금 은혜 갚으려 해도 방법이 없으니앉아서 남은 시간 헤아리며 부질없이 몸을 어루만지는구나. 憶昨南遷我與公溪山咫尺占西東襟期共付淸樽美肝膽同憑古釰雄浪跡久歎宣室遠策名今復紫宸通南鱗北羽中年別畵省香爐此夜同千里外愁談笑裏十年前事夢魂中憂時已白千莖髮戀主猶丹一片衷奇遇正如披霧隔生還自是荷天聰開襟宛對黃樓月乘興還思赤壁風御燭分光來玉殿仙壺賜醞出金宮皇恩欲報知無路坐數殘更浪撫躬 선실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정전(正殿)이다. 가의가 좌천되어 장사왕의 태부로 있다가 1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여기서는 궁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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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대왕 만장 宣宗大王輓章 큰 덕은 분명코 큰 명에 응하니구오의 비룡에서 때로 용을 타는 것331)을 보누나.크고 어려운 선대의 업 물려준 것332)을 참으로 알아초기부터 더욱 전전긍긍하였어라.몸소 만기를 다스려 한가로운 때가 없고구중궁궐에 거처하며 봄날의 얼음을 걷는 듯하였네.333)충성을 다한 진언을 받아들여 유악에서 도움을 받았고도를 논하여 나라를 다스림은 고굉의 신하에 책임 지웠네.다스림을 지극히 하면서도 온화함에 힘썼고때에 맞는 정사하여 태평성대 기약하였어라.임금의 정성 영토의 한계에 막히지 않아황제의 돌아봄을 많이 받아 하사함이 많았네.열 줄의 조서에서 보전334)을 겸하여 선포하였고아홉 층의 하늘에서 용포를 또 내려주었어라.삼한이 모두 인륜이 펼쳐진 것을 경하하였으며만 백성이 함께 고귀한 호칭 칭송함을 기뻐하였네.길흉은 다만 자신이 초래하는 것335)이라 누가 말하였는가어찌 막힘과 형통함이 서로 갈마드는 것과 같겠는가.고래336) 헤엄쳐 풍파가 일어나니 잠시 놀랐지만번개 후려쳐 우주가 맑아짐을 곧바로 보았어라.성덕을 옥처럼 다듬어서 아름다움이 이에 이르고황은이 하늘처럼 덮어주니 감사함을 어찌 이길 수 있으랴.오직 대의 따라 중하를 높이더니마침내 커다란 토대로 중흥의 기틀 마련하였어라.봉황 수레는 창오의 들판337)을 순수(巡狩)하지 못하고용의 누대에서 기나라 하늘이 무너진 것338)을 통곡하누나.어떤 신하가 금등의 점339)을 본받을 것인가유명은 옥궤340)에 기대어 밝게 드리우셨네.비전341)으로 창덕궁을 중수하였고유궁은 건원릉342)의 옆에 두었어라.천박하고 미천한 신하가 지우를 받아예전 궁궐에서 벼슬살이 하였었지.늙고 병듦을 속이고 동패를 몇 년 찼었던가중년에 은혜로운 부름에 은대로 달려갔었네.변부의 영광을 내려줌도 참으로 분수 넘치는 일이라초상에 달려가 통곡하여도 애통을 풀길이 없어라.대전에서 새로운 해와 달을 처음 보았을 때안중에 오히려 옛날의 법도인가 하였네.다행이 지금 성상의 효도가 전대 왕보다 빛나니다만 영령께선 만만대 이어질 걸 도모해주길 바라네. 大德端宜景命膺飛龍九五睹時乘迪知先業投艱大粤自初年倍戰兢躬御萬機無暇日身居九闕若春氷盡忠納誨資帷幄論道經邦責股肱致理務令和氣在措時期見大猷升宸誠不隔封疆限帝眷偏承錫賚增寶典兼宣十行詔龍袍又下九霄層三韓均慶彝倫敍萬姓同欣顯號稱誰道吉凶惟所召爭如否泰有相仍鯨奔暫駭風波動電掣旋看宇宙澄聖德玉成休式至皇恩天覆感何勝只緣大義尊中夏竟致丕基有再興鳳駕不因梧野狩龍樓已哭杞天崩有臣誰效金縢卜遺命昭垂玉几憑閟殿重修昌德闕幽宮側近健元陵微臣譾薄承知遇禁闥趨蹌記昔曾銅佩幾年欺老病銀臺中歲赴恩徵紆榮邊府誠非分奔哭初哀痛未能殿上載瞻新日月眼中猶是舊觚棱幸今聖孝光前烈惟祝靈圖萬萬承 구오의……것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에서 "나는 용이 하늘에 있는 것이니, 대인을 만남이 이로우니라.[飛龍在天 利見大人]"라 하였고, 그 〈단사(彖辭)〉에서 "때로 여섯 용을 타고서 천도를 운행하나니라.[時乘六龍, 以御天.]"라고 하였다. 선조가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을 말한다. 크고……것 《서경》 〈대고(大誥)〉의 "짐에게 크고 어려운 짐을 맡긴다.[遺大投艱于朕身]"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왕위를 잇는 것을 가리킨다. 봄날의……듯하였네 《서경》 〈군아(君牙)〉에 "내 마음의 근심되고 위태로운 것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은 듯, 봄날의 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心之憂危 若蹈虎尾 涉于春氷]"라는 말이 나온다. 보전 종계변무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즉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명에서 고쳐준 것을 가리킨다. 길흉은……것 《춘추좌전》 양공(襄公) 23년조에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르는 대로 온다.[禍福無門, 惟人所召.]"라고 하였다. 고래 흉포한 왜구를 비유한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임강왕절사가(臨江王節士歌)〉에 "장사는 분노하는데 큰 바람이 일어난다. 어이하면 의천검(倚天劍)을 얻어서 바다 건너 큰 고래를 벨거나.[壯士憤 雄風生 安得倚天劍 跨海斬長鯨]"라고 하였다. 창오의 들판 '창오(蒼梧)'는 순(舜) 임금이 승하한 곳이다. 《사기(史記)》 〈오제기(五帝本紀)〉에 "순이 제위(帝位)에 오른 지 39년에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죽었으므로 강의 남쪽 구의산(九疑山)에 장사 지냈다."라고 하였다. 기나라……것 원래는 기우(杞憂)의 의미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이 죽은 것을 가리킨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기나라의 사람 중에 천지가 무너져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질까 걱정하여 침식을 폐한 사람이 있었다.[杞國有人 憂天地崩墜 身亡所寄 廢寢食者]"라고 하였다. 금등의 점 금등은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이다. 《서경》 〈금등〉에 의하면, 무왕(武王)이 일찍이 병들어 위독했을 때, 주공(周公)이 무왕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고 선왕(先王)께 기도할 적에 먼저 남향으로 세 단(壇)을 만들고, 세 단의 남쪽에 또 단 하나를 만들어 주공이 여기에 북향하고 서서 손수 규(珪)를 잡고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에게 기도를 마친 다음, 세 거북으로 점을 쳐 보니 길하여, 바로 그다음 날에 무왕의 병이 나았던 바, 사관(史官)이 그 축책(祝冊)을 쇠사슬로 동여맨 궤(匱)에 넣어 두었던 데서 이 글의 편명을 〈금등〉이라 했다고 한다. 옥궤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임종(臨終)할 때 옥궤(玉几)에 기대어 강왕(康王)에게 유명(遺命)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비전 원래 깊은 궁궐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왕의 궤연(几筵)을 뜻한다. 건원릉 태조 이성계의 왕릉으로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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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의 회계 備邊司回啓 임진왜란 때 북방 사람들이 나라를 배반하고 왜적을 맞이하였는데, 왕자가 사로잡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당시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고 평정하는데,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공이 으뜸이었습니다. 본도에서 함께 의병을 일으켜 충성을 바친 인사들이 비록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을 입었지만, 어떤 이는 공은 큰데 상은 가볍고 어떤 이는 누락되어 은혜를 받지 못한 자도 있기에 조정의 관료 사이에서도 이것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감사가 변방을 순행할 때 공론을 채방하여 이렇게 계문 하고서 그들을 뒤미처 포상하여 이곳 민심을 고무시키려 하니, 그 의도가 참 훌륭합니다.뒤에 기록한 내용 가운데 감찰(監察)에 추증된 이붕수(李鵬壽) 등 일곱 사람과 참판(參判)에 추증된 유응수(柳應秀) 등 세 사람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증직(贈職)14)하도록 하고, 그 봉사(奉祀) 자손 가운데 기용할 만 한 자를 지명하여 계문하라고 하였습니다. 유생 김려광(金麗光) 등 다섯 사람과 출신 주응무(朱應武) 등 다섯 사람의 집에 세금을 면해 주는 일은 본도에서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자손 가운데 천역을 하는 중에 봉사하는 한 사람은 또한 지명하여 계문한 뒤에 품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으로써 이문(移文)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아뢴 대로 윤허한다.을사년 12월 20일. 壬辰倭亂時, 北邊之人, 背國迎賊, 至於王子被執, 其時倡義討平, 評事鄭文孚爲首功, 而本道同事效忠之士, 雖蒙國家褒賞之典, 或有功鉅而賞輕者, 或有見漏而未霑者, 朝紳之間, 亦多以此爲言。監司巡歷邊上, 採訪公論, 有此啓聞, 欲爲追奬激勸之擧, 其意有在。後錄中贈監察李鵬壽等七人, 贈參判柳應秀等三人, 令該曹贈職, 其奉祀子孫可用者, 指名啓聞, 儒生金麗光等五人及出身朱應武等五人復戶事, 自本道擧行, 其子孫之爲賤役中奉祀一人, 亦爲指名啓聞後, 稟處宜當。以此回移何如。啓依允。乙巳十二月二十日。 증직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또는 충신, 효자 및 학행이 높은 사람에게 사후에 벼슬과 품계를 추증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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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가 있어 有感 농 땅 위의 늙은 제갈량9) 隴上老諸葛위수 가의 젊은 강태공10) 渭濱少太公호랑이처럼 한번 휘파람을 부니 如令虎能嘯차가운 긴 바람이 일어났네11) 冽冽起長風 隴上老諸葛, 渭濱少太公.如令虎能嘯, 冽冽起長風. 농 땅 …… 제갈량 〈출사표(出師表)〉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깊이 불모의 땅으로 들어갔다.[五月渡瀘, 深入不毛.]"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농(隴) 땅으로 제갈량이 위나라를 북벌하면서 농에서 출병하였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 위수 …… 강태공 위수는 섬서성(陝西省) 대려현(大荔縣)에 있는 강으로 태공(姜太公)이 낚시질하던 곳이다. 강 태공의 이름은 상(尙)인데, 위수 가에서 낚시질하다가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만나 사부(師傅)로 기용되고, 문왕이 별세한 뒤에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만들었다. 호랑이처럼 …… 일어났네 호랑이가 한 번 으르렁거리면 바람이 일고 한기(寒氣)가 생긴다는 뜻으로, 전하여 영웅이 때를 만나서 분기(奮起)하는 것을 비유한다. 왕포(王褒)의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호랑이가 울부짖자 골짜기에 찬 바람이 일어난다.〔虎嘯而谷風冽〕"는 표현이 나오고, 이백(李白)의 시에 "호랑이가 골짜기에서 포효하자 바람이 일어난다.〔虎嘯谷而生風〕"는 표현이 나온다. 《李太白詩集 卷6 鳴皐歌送岑徵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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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추증할 당시의 경연 대화 贈職時筵說 을사년(1665년) 12월 27일 인견할 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수찬(修撰) 이단하(李端夏)의 상소 가운데 정문부(鄭文孚)의 일은 문자로 전례에 따라 회계(回啓)22)할 수 없으니, 지금 마땅히 어탑 앞에서 아뢰겠습니다. 일찍이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민정중(閔鼎重)의 장계로 인하여 정문부와 함께 의병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벼슬이 추증되었고 어떤 이는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며, 그 가운데 천역에 종사하는 자손들은 면천하라는 것은 이미 전하께서 결정을 내리셨는데, 정문부만은 유독 융숭히 장려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았으니 전하의 어진 정치에 흠결인 듯합니다.임진왜란 때 북도의 백성들이 왕자와 대신을 붙잡아 왜적에게 내어준 뒤에 주군(州郡)을 장악하였는데, 그 당시 정문부는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고 그 군현을 수복하였으니 그 공이 큽니다. 그러나 실권을 잡은 사람에게 미움을 당하여 공이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 혼조(昏朝, 광해군)에 이르러 향촌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반정한 이후에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습니다. 여막에 거처할 때 어떤 훈신이 그를 찾아갔다가 일찍이 정문부가 읊었던 〈영사시(詠史詩)〉가 벽 위에 도배된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역옥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갔다가 장차 풀려날 때 대간이 그 시의 의미가 가리킨 저의가 있다고 하여 다시 신문할 것을 논하여 장형(杖刑)을 맞다가 죽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23)이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있었기에, 일찍이 그 억울한 상황을 잘 알고서 자주 언급하였습니다.'부제학(副提學) 조복양(趙復陽)24)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신의 부친이 자주 그 억울한 상황을 말하였기에 신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정문부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체포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박홍구(朴弘耇)의 옥사입니다. 그의 아들 박지장(朴知章) 등의 공초에서 또한 '정문부가 장수의 재목이기에 뜻을 두고 찾아가 만났으나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부친이 문사낭청으로 있었기에 또한 그 억울한 상황을 국청 당상관(鞫廳堂上官)에게 말하였는데, 끝내 혼조(昏朝) 때 지은 시로써 대간에서 계를 올려 억울하게 죽었습니다."우의정 허적(許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정문부의 임진년 공적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으며 자신의 죄가 아닌 것으로 죽은 정상(情狀)을 또한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설령 그 시가 반정 이후에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다만 역사를 읊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은밀히 내포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벼슬을 추증하여 북방 사람들을 격려하시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영의정 정태화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정문부는 장형을 받다가 죽었을 뿐 죄적(罪籍) 가운데에 이름이 있지 않는데 별도로 신원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같이 의거하였던 사람은 이미 판서 급에 추증되었으니, 그렇다면 정문부의 첫 번째 가는 공은 더욱 마땅히 관직을 추증하고 자손은 녹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주상께서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을 추증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는 것이 좋겠다."라 전교하였다. 乙巳十二月二十七日引見時, 領相鄭太和所啓, '修撰李端夏上疏中鄭文孚事, 不可以文字循例回啓, 今當陳達於榻前矣。曾因咸鏡監司閔鼎重狀啓, 與鄭文孚同事諸人, 或贈職, 或錄用其子孫, 其中子孫之爲賤役者, 免賤等事, 已爲定奪, 則文孚獨無崇奬之典, 果似欠缺。壬辰之亂, 北道之民, 執王子大臣, 投賊之後, 因據州郡, 其時文孚以北評事, 倡義討賊, 復其郡縣, 其功大矣, 而見忤於當路之人, 而功不大顯。及至昏朝, 棲遲州縣, 反正之後, 卽除全州府尹, 未幾遭其母喪。居廬之時, 有一勳臣, 往見其壁間所塗文孚曾所賦〈詠史詩〉, 傳說於人矣。及其被逮逆獄, 將釋之時, 臺諫以其詩意有所指, 論啓刑訊, 死於杖下。故相臣趙翼爲問事郞廳, 嘗知其冤枉之狀, 常常言之矣。' 副提學趙復陽曰: "臣父常言其冤狀, 臣亦聞之矣。文孚名出賊招, 不免被逮, 此是朴弘耇獄事也。朴知章等招辭中, 亦言'知文孚之有將材, 故有意往見, 而不得發言云云。' 臣父爲問事郞廳, 亦言其冤狀於鞫廳堂上, 而竟以昏朝時所賦之詩, 因臺啓冤死矣。" 右相許積曰: "文孚壬辰之功, 赫赫在人耳目, 死於非罪之狀, 亦人所共知也。設令其詩作於反正之後, 不過詠史而已, 有何指斥之意乎。特爲贈職, 激勸北路之人, 似不可已也。" 領相曰: "文孚死於杖下而已, 不在罪籍中, 別無伸冤之事。但同事之人, 旣贈判書, 則文孚以首功, 尤當贈職, 子孫亦宜錄用矣。" 上曰: "超品贈職, 錄用其子孫, 可也。"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對)하여 신하(臣下)들이 심의하여 대답(對答)하는 것을 이른다. 조익(趙翼) 1579~1655.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49년 좌의정이 되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음률·병법·복서(卜筮)에도 능하였다. 조복양(趙復陽) 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익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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