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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석67) 叱石 금화산 속 양 치는 소년바로 금화산 아래 집에 있네하루아침에 양을 치러 산속으로 떠나금광초 잘못 먹고 넋을 단련했지형이 말하길 "아, 우리 아우 돌아오지 않고날 저무는데 양 또한 어디 갔는가?" 하였네찾아가자 아우만 보일 뿐 양은 보이지 않고아지68)에 봄풀은 절로 푸르네형은 아우가 이미 신선이 된 줄 몰랐으니양이 지금 돌로 변했을 줄 어찌 알았으랴산 동쪽에 드러누워 있는 것 내 양이니내 양을 내가 부르고 이어 채찍 휘두르네잠깐 사이에 우뚝한 돌부리 긴 수염으로 변하니더 이상 예전의 가지런한 흰 돌 아니어라삼백 마리 양 떼가 한꺼번에 일어나니소와 바꿀만한 양 없다고 누가 말하랴69)양이 처음에 돌로 변했을 적엔 이끼만 꼈었는데돌이 도리어 양이 되자 다시 털과 가죽 생겼네선가에선 양과 돌로 형체와 정신 뒤바뀌고이 세상에선 해와 달이 고금을 이루네천년 전 자취 양은 없어지고 말았으니돌인지 양인지 끝내 어떻게 가려내랴이교의 사람70)과 북평의 호랑이71)이 같은 괴이한 설은 풀기 어려울 듯하도다 金華山中牧羊兒乃在金華山下宅一朝牧羊山中去誤飡金光草鍊魄兄曰嗟余季不歸羊亦何之日之夕尋惟見季未見羊春草阿池自在碧阿兄不料弟已仙那識羊今化爲石山東僵臥是我羊我羊我叱仍揮策須臾犖角變長髥非復從前齒齒白三百維羣一時起誰謂無羊牛可易羊初化石但莓笞石反爲羊更毛革仙家羊石幻形神世界日月成今昔千年遺跡歸亡羊石耶羊耶竟何擇圮橋爲人北平虎一般怪說疑難釋 질석 돌을 꾸짖어 양을 만들었다는 '질석성양(叱石成羊)'의 고사를 말한다. 황초평(黃初平)이 15세에 양을 치다가 신선술을 닦으러 도사(道士)를 따라 금화산(金華山) 석실 속에서 수도하였는데, 40년 뒤에 형이 찾아와서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황초평이 백석(白石)을 향해 "양들아, 일어나라![羊起]"라고 소리치니, 그 돌들이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後集卷39 初平叱羊》 아지 가축을 기르는 곳을 의미한다. 《시경》 〈소아(小雅) 무양(無羊)〉에 "혹은 언덕에서 내려오고 혹은 못에서 물을 마시며[或降于阿, 或飮于池], 혹은 자고 혹은 움직이도다. 네 목동이 오매 도롱이를 메고 삿갓을 썼도다."라고 하였다. 삼백……말하랴 《시경》 구절과 《맹자》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시경》 〈소아(小雅) 무양(無羊)〉에 "누가 너더러 양이 없다 하리오? 삼백으로 떼를 지었도다.[誰謂爾無羊? 三百維群.]"라고 하였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선왕(齊宣王)이 흔종(釁鍾)에 끌려가는 소를 보고 측은히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한 고사가 있다. 이교의 사람 장량(張良)이 하비(下邳)의 이교(圮橋)에서 한 노인을 만나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 받았다는 고사가 있다. 북평의 호랑이 한나라 이광(李廣)이 어느 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우북평(右北平)의 바위를 범으로 보고서 활을 쏘았더니, 화살이 돌에 박혀 버렸다고 한다. 《史記 李將軍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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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무사로 연경에 가는 월사 이 상국 정귀 에게 주다351) 2수 贈辨誣使月沙李相國 廷龜 赴京【二首】 우리 성왕의 충정 중국 성황도 아시니변무사가 어찌 다시 갈 필요가 있으랴괜스럽게 우리 어진 정승 월사공께서일생토록 수고스럽게 시를 외워서지이번 사행 무슨 일로 또 이런 때 떠나는가어려운 일에 그대가 잘 변설할 줄 알아서지나 같은 이는 근년에 벙어리 되었으니말도 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시 지일 수 있으랴 聖王衷悃聖皇知辨使何須再去爲多事月沙賢相國一生勤苦誦夫詩斯行何事又斯時多難知君善說辭如我年來作喑啞不能爲語況能詩 변무사로……주다 1598년(선조31)에 명나라 사람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무고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양호가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이 있다고 하면서 비호하였다. 그러자 정응태가 이에 반감을 품고 우리나라를 무고하기를 "왜를 꾀어서 함께 중국을 침범하고 요하(遼河) 동쪽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왕의 칭호를 가지고 무고하였다. 이때 이정귀가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 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가 무고한 사실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宣祖修正實錄 31年 9月 1日》 《燃藜室記述 楊鎬劾去遣使 辨誣條》 《月沙集 戊戌辨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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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의 〈광릉사〉 시18)에 차운하다 次歐陽公廣陵寺韻 온갖 전투 겪은 장군 늙었지만허리에 찬 검은 아직도 남아있네돌아와 작은 방에 앉아비바람 부니 겹겹 문을 닫네강 가까워 안개 막 자욱하고산 깊어 해가 이미 저물었네일편단심으로 국가를 근심하여하나하나 살쩍이 희끗희끗 해지누나 百戰將軍老腰間劍尙存歸來坐一室風雨掩重門江近烟初瞋山深日已昏丹心憂大國一一鬢生痕 구양수의 〈광릉사〉 시 구양수가 쓴 원운의 제목은 〈광애사(廣愛寺)〉인데, 《농포집》에는 〈광릉사〉로 잘못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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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산 杏山 들판 드넓고 또한 언덕 높으니올라가 굽어보니 눈 가득 가을빛이네구름은 천 리 멀리 연이어 있고달은 고향과 타향의 근심 함께 비추누나담력은 검에 남아 있건만용모는 거울에 부끄럽네평소 사방을 경영할 뜻 두었는데오늘에서야 비로소 두루 살펴보노라 曠野亦高丘登臨滿目秋雲連千里色月共兩鄕愁膽氣龍刀在容華鵲鏡羞平生四方志今日始觀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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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에서 최노첨을 작별하다 雙城別魯詹 말없이 그윽한 회포에 한 잔 술 드니용흥강 가에 해가 서쪽으로 지는구나만 겹 산에서 남쪽으로 떠나는 이 전송하는데천 리 떨어진 고향의 봄이 기러기 따라 북쪽으로 왔네계절의 경물과 세상 물정 모두 변했으니나라 은혜와 고향 생각에 함께 서성이네시국이 위급한데도 오히려 쌍성 다스리는 관원 되었으니명철한 임금이 재주 없는 자 버린다고 누가 말하랴 脈脈幽懷酒一盃龍興江上日西頹萬重山送人南去千里春隨鴈北來節物世情同變換國恩鄕思共徘徊時危猶佩雙城印誰道明君棄不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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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건원보에 이르러 옛일을 회상하다 到古乾元 懷古 선리88)의 강토가 철목89)과 잇닿아 있는데예전부터 화이(華夷)가 강 하나로 나뉘었지얼음 단단하니 어룡도 추위에 떨 줄 알겠고보(堡) 오래되었으니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네발해는 바람이 거세 흰 파도가 많고음산은 해가 멀어 날이 쉬이 어두워지네권하노니, 그대 다시 술 한 잔 드시고세상만사에 상심한 것 다시 말하지 마오 仙李疆連鐵木元向來夷夏一江分氷堅認有魚龍冷戍古惟聞鳥雀喧渤海風高多白浪陰山日遠易黃昏勸君更進一盃酒萬事傷心勿復言 선리 '선리'는 오얏나무 아래서 태어난 노자(老子)를 시조로 삼은 모든 이씨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완산 이씨(完山李氏)인 조선 왕실을 가리킨다. 철목 몽고족을 가리킨다. 몽고국을 건국한 칭기즈칸의 이름이 테무친(鐵木眞)이므로, 원나라 또는 몽고족을 '철목(鐵木)'이라 일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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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 제하다 題柱 금우89) 가는 길 옥루90) 동쪽에서 나오고진나라 변새는 만 겹 숲으로 멀리 이어졌네남아의 가슴 속에 한 자루 장검 지녔으니이제 떠나면 공명은 손바닥 가리키듯 분명히 취하리라다시 올 적에 의당 비단옷 입고 오리니내 그렇지 못하면 다리 기둥의 글귀처럼 하리라91)아미산의 빼어난 기운이 인재를 낳았으니사마상여의 문재(文才)에 누가 짝하랴글솜씨는 삼협의 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하고92)필력은 천근의 쇠뇌를 당길 듯하였으니풍류 있는 운치에 녹기금을 하사받고93)양대의 한줄기 비를 훔쳤네94)집은 그저 사방 벽만 있고 숙상구95) 헤졌는데가슴 속 문자는 오히려 기세가 성대했네곤붕96) 장차 벽해에 올 것이요봉황이 어찌 단혈산에 숨으랴97)동쪽으로 장안 바라보자 험한 길 이어지니어찌 돌아가 성주에게 구하지 않으랴채색 구름 사이의 백제성98) 돌이켜 생각하니한 필 말로 가는 행장 어찌나 쓸쓸한지물결에 누운 용처럼 긴 다리 가로 놓여 있는데다리 밑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사람이 살아감에 어찌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물을 배우랴죽기 전에 돌아오는 것은 운수 있음을 알겠네지금 천자께서 현자를 급히 구하시니바람과 구름이 용, 범과 성대히 만났네99)하늘이 내게 주신 재주 필시 쓸 곳 있으리니어찌 울울하게 촉 땅에 있을 수 있으랴이번에 가면 마땅히 큰 금인 얻을 것이요100)허리춤에 한 장 두 자의 인끈 늘어뜨리리101)이 다리 곁에 수레가 나는 듯이 지나가면구경하는 자들이 담처럼 빙 둘러싸니고향 이웃은 옛 견자102)인줄 알아보고백성들은 지금의 수령 되었다 소리치리다시 찾아가면 응당 예전 자취 –원문 1자 결락- 있을 테니자획이 희미해도 발꿈치와 팔꿈치 분별하네103)아, 뜻을 두어 사업 끝내 이루었으니훗날 높은 수레 타고 물가에 왔네참으로 다리는 저버리지 않았는데 사람만 홀로 저버렸으니백발로 읊조리는 소리 참으로 괴롭구나 金牛路出玉壘東秦塞遙連萬重樹男兒肝膽一長釰此去功名指掌取重來當作衣錦人余所否者如橋柱峨嵋山秀鍾豪英司馬才華誰與伍詞源倒流三峽水筆力挽回千斤弩風情付與綠綺絃偸得陽臺一片雨家徒四壁鷫鸘弊文字胸中猶鬱怒鯤鵬將儀碧海鱗鳳凰寧藏丹穴羽長安東望鳥道通盍歸乎來干聖主翻思白帝彩雲間匹馬行裝何踽踽長橋橫作臥波龍橋下東流自今古人生肯學水不迴未死歸來知有數當今天子急賢良盛會風雲龍與虎天生我才必有用鬱鬱安能久西土玆遊當取印如斗腰下仍垂丈二組翩翩四蓋此橋邊會使觀者如墻堵鄕鄰識得舊犬子士女喚作今明府重尋應有往跡【缺】字畫依俙辨跟肘于嗟有志事竟成他日高車來水滸眞無負橋獨負人白頭之吟聲正苦 금우 촉(蜀) 지역의 금우협(金牛峽)을 말한다. 전국 시대 진 혜왕(秦惠王)이 촉을 정벌하고 싶었으나 길이 험해 정벌하지 못하자, 돌로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어 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우고 소의 항문 아래에 황금을 놓아두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돌 소가 황금 똥을 눈다고 하자, 이 소문을 들은 촉왕은 천여 명의 군사와 다섯 명의 역사(力士)를 동원하여 성도(成都)로 운반해 갔다. 이 때문에 촉으로 들어가는 길이 뚫렸다. 《水經注 沔水》 옥루 촉나라 수도인 성도의 서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내……하리라 공명을 이루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나라 때 촉군 성도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갈 적에 성도의 승선교(昇仙橋) 기둥에 "고거사마(高車駟馬)를 타지 않고는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라고 썼다. 《水經注 江水》 글솜씨는……듯하고 삼협에서 쏟아져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고 웅장한 문장을 말한다. 삼협은 양자강(揚子江) 상류의 험난하기로 유명한 세 협곡으로,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의 합칭이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취가행(醉歌行)〉 시에 "글 솜씨는 삼협의 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하고, 필력은 천 명의 적군을 홀로 쓸어낼 기세로다.[詞源倒流三峽水, 筆陣獨掃千人軍.]"라고 하였다. 풍류……하사받고 사마상여가 〈옥여의부(玉如意賦)〉를 지어 양왕(梁王)에게 바치자, 양왕이 기뻐하여 사마상여에게 녹기금(綠綺琴)이라는 명금(名琴)을 하사했다. 《古琴疏》 양대의……훔쳤네 사마상여가 탁문군(卓文君)을 꾀어 부부가 된 일을 초 양왕(楚襄王)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초 양왕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꿈속에서 무산(巫山)의 신녀를 만나 잠자리를 함께하였는데, 이별하는 즈음에 신녀가 "저는 무산의 양지쪽 언덕에 사는데, 아침이면 떠가는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내리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양대(陽臺)의 아래로 내려옵니다."라고 하였다. 《文選 卷19 高唐賦》 숙상구(鷫鸘裘) 숙상이란 새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으로, 사마상여가 몹시 가난할 때 입었던 옷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부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고향인 성도(成都)로 돌아갔을 적에 워낙 가난했던 탓에 자기가 입고 있던 숙상구를 전당 잡히고 술을 사서 탁문군과 함께 마시며 즐겼다는 고사가 있다. 《前漢書 司馬相如傳》 곤붕(鯤鵬) 북명(北溟)에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고 한다. 《莊子 逍遙遊》 봉황이……숨으랴 훌륭한 인재가 숨지 않을 것이란 의미이다. 단혈산(丹穴山)은 봉황이 산다고 하는 전설적인 산으로 단산(丹山)이라고도 한다. 《山海經 南山經》 백제성(白帝城)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백제산에 있는 성으로, 매우 높고 가파른 모습이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최고루(白帝城最高樓)〉에 잘 나타나 있다. 바람과……만났네 성군(聖君)과 어진 신하가 만났다는 의미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는 말에서 나왔다. 큰……것이요 높은 관직에 오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진(晉)나라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주의(周顗)가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도적놈들을 죽이기만 하면 말만큼 큰 금인을 팔뚝에 차리라.[今年殺諸賊奴, 取金印如斗大繫肘.]"라고 하였다. 《晉書 卷69 周顗列傳》 허리춤에……늘어뜨리리 지방관이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서》 〈엄조전(嚴助傳)〉에 "폐하는 사방 한 치의 도장과 한 장 두 자의 인끈[丈二之組]으로 외방을 다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견자(犬子) 사마상여의 아명(兒名)이다. 사마상여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하여 훗날 스스로 '상여'라고 개명하였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자획이……분별하네 글씨가 마멸되어 온전하지 않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석고가(石鼓歌)〉 시에 "흐릿하여 반은 이미 흉터나 굳은살 같고, 구불구불한데 그래도 발꿈치와 팔꿈치는 분별할 수 있네.[模糊半已似瘢胝, 詰曲猶能辨跟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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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고 꽃 지는데 또 황혼이 드네72)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을 한 시이다. 月明花落又黃昏【十四歲陞補壯元】 금옥에 주렴 드리우니 제비가 춤 멈추고사창에 해지니 이제 막 문을 닫네미인이 눈썹 찡그리며 황혼을 근심하니홀로 난간에 기대 눈물 머금은 흔적 있네임 그리워 차마 밝은 달 보지 못하는데낙화는 어째서 다시 황혼에 흩날리는가꽃이 오래된 가지에서 떨어짐은 첩의 신세 같고달이 찼다가 이지러짐은 임금 은혜와 같아라둥근 달 한번 이지러졌으니 언제나 차오를거나가지에서 떨어진 꽃 도와주기 어려워라이별한 마음 사물을 보고는 긴 생각에 잠기니묵묵히 그리워하는 마음 남모르게 녹이누나창 앞에 오랫동안 임금님의 왕래 끊겼으니궐의 뜰 적막하고 푸른 이끼만 가득하네오늘 밤에 어젯밤 뜬 달 다시 마주하고지난해 피었던 꽃 올해의 정원에 피었구나꽃 끝없이 피고 달빛 매우 밝은데몇 번이나 외로운 방에서 짝 잃은 원앙 슬퍼했나누가 새끼줄 끊어진 뒤 은병을 끌어올려 주려나73)한스럽게도 남은 목숨 한낮의 촛불처럼 꺼져 가누나74)앞뜰에선 노래하고 뒤뜰에선 춤추는데따로 그 누가 있어 임금님을 따르는가달 밝을 때 꽃 구경하며 즐거움 그지없으니깊은 궁전 외로운 첩의 원통함 누가 알랴문밖에 어가 지나가는 소리 어이 견딜꼬부질없이 왕림하신 임금님 서글피 바라보노라요금 소리 그치자 밤 더욱 깊어가고지는 달 희미하고 꽃은 말이 없구나 簾垂金屋燕舞罷日落紗窓初掩門佳人眉斂薄暮愁獨倚雕欄含淚痕思君不忍見明月落花何更飄黃昏花辭故條似妾身月有盈虧同主恩圓光一虧幾時盈落紅辭條難可援離心觸物結長想脈脈暗銷相思魂窓前久斷鳳輦來玉階寥落靑苔繁今宵還對昨夜月去年花發今年園花開無限月明多幾度孤房悲隻䲶銀甁誰引斷繩後晝燭恨殺殘生存前庭歌吹後庭舞別有何人隨至尊看花趁月樂未央深院誰知孤妾冤那堪門外度金輿悵望空自臨高軒瑤琴彈罷夜又深落月依依花不言 달……드네 당나라 두목(杜牧)의 〈궁원(宮怨)〉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새끼줄……주려나 임에게 버림받은 신세를 비유한 말이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우물 밑 은병을 끌어올리다[井底引銀甁)]〉 시에 "우물 밑에서 은병을 끌어 올리는데, 은병이 올라오려 하나 줄이 그만 끊어졌네.[井底引銀甁, 銀甁欲上絲繩絶.]"라고 하였다. 남은……가누나 한낮에 촛불을 켜도 그 불빛이 희미하듯 인생의 의미가 전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나라 장적(張籍)의 〈남편이 전장에 나간 부인의 원통함[征婦怨]〉 시에 "남편은 전장에서 죽고 자식은 배 속에 있으니, 첩의 몸이 살아 있은들 대낮의 촛불 같구나.[夫死戰塲子在腹, 妾身雖存如晝燭.]"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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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무를 대신하여 이릉을 부르다75) 代蘇武招李陵 아, 나의 벗 이소경76)이여나라에 목숨 바치는 일 그대가 능한 바로다때가 불리하여 일이 이미 어그러졌으니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으나 다가올 일은 징계할 수 있네부르고 부르는데 어찌하여 일찍 돌아오지 않는가전화위복이 되어 시의를 타게 되리라그대 집안 진농에 굳센 기운 넉넉하니하물며 비장군의 손자임에랴77)만 리에 창 휘두르며 호랑이 굴에 들어갔으니천상에 날아오르는 가을 매와 같았네오천의 천자 군대는 의용을 지녔고십만의 오랑캐 기병은 날쌤을 자랑했지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듯 대적할 수 없는 형세이니나라에 충성을 바치려는 초심에 괜스레 가슴 쳤네어찌 위율78)을 따라 목숨을 보존하랴조말79)과 명성 같아지길 맹세했다네형법에 연좌할지 말지는 어찌할 수 없으니성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은 얼마나 사사로운가음산80)은 본래 한나라 일광과 떨어져 있는데기인은 이미 하늘이 무너질까 곡을 했네81)임금께 충성하지도 어버이께 효도하지도 못했으니오랜 세월 흐르며 나그네 근심만 더하였네그대 아는 이 없는데 하물며 그대 마음을 알랴그대 알고 그대 마음 아는 이는 오직 이 벗 뿐남들은 모두 의심하나 나는 불러주니그대를 믿지 않으면 내가 누구에게 기대랴천 마디 말이 간절한 충고만 못하니어찌 굳이 임금님의 조서로 부를 것 있으랴그대가 오고 안 오는 건 다시 말하지 않겠으니그대에게 또한 내 일찍이 말했었지포로 되었으니 신하의 절개 지켰다 감히 말할 수 있으랴사명(使命)을 저버렸으니 국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네남은 목숨 아침이슬과 함께 사라지지 않아대뢰로 선황의 능에 와서 알현하네투항하도록 회유해 일찍이 육가의 공을 능멸했고82)관작과 포상은 미워하는 옹치에게 먼저 내렸네83)조정은 본래 공신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나니그대 같은 이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을 어찌 의심하랴돌아와 한나라 신하가 되고 오랑캐 되지 말지니차마 전취를 걸치고 비단옷을 버릴 수 있으랴84)천산85)에는 자고로 세 길이나 눈이 쌓여 있고발해는 봄이 없이 천 척 얼음이 얼어 있네종남산과 위수를 꿈에서도 보지 못하리니지금 꽃과 버드나무의 봄 풍광 어려 있다오바람에 의지하는 말의 본성 진실로 빼앗을 수 없고해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 오히려 늘 있다네사람 마음이 어찌 사물만 못해서야 되겠나그대 마음 생각하니 슬픔 가눌 수 없구나숫양 젖 않 나와도 또한 돌아올 수 있었으니86)그대 높은 누대에 올라 고향 바라볼 것 없다오올 적에 미리 편지로 내게 알려 주게나흰 기러기는 층층 관산에 막히지 않으리만나서 이별할 때의 옷 다시 잡으리니십구 년의 일이 등잔 아래로 돌아가네그대와 함께 태사공87)을 같이 위로하니술동이 안의 술 승수(澠水)88)처럼 깊네 吁嗟吾友李少卿許國忘身君所能時乎不利事已謬往者難追來可懲招招胡不早歸來轉禍爲福時宜乘君家秦隴勁氣饒況是飛將之雲仍橫戈萬里入虎穴有如雲路揚秋鷹天兵五千負義勇虜騎十萬誇驍騰强呑弱肉勢不敵報國初心空撫膺寧從衛律保軀命誓與曺沫同名稱常刑無奈毋隨坐聖主何私應見矜陰山自隔漢日光杞人已哭皇天崩忠君孝親兩孤負歲月坐與羈憂增無人知子況知心知子知心惟爾朋人皆見疑我見招子如不信吾誰憑千言不如忠告切十行何須恩詔徵君來不來言不再爲君聊亦陳吾曾爲俘敢言臣節全辱命宜將王法繩殘生不與朝露晞大牢來謁先皇陵招降曾蔑陸賈功爵賞先於雍齒憎朝廷本非薄功臣如子何疑雲路登歸爲漢臣否爲夷忍荷氈毳遺紈繒天山自古三丈雪瀚海無春千尺氷終南渭水夢見未只今花柳韶光凝依風馬性固莫奪向日葵心猶有恒人情豈可不如物想子心懷悲不勝羝羊不乳亦可歸望鄕高臺君莫升來時豫將書報我白鴈不阻關山層相迎重把別時衣十九年事歸挑燈與君同慰太史公尊中有酒深如澠 소무를……부르다 한나라 장군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억류되어 있다가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갈 때, 흉노에 항복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과 시를 주고 받았다. 《前漢書 李廣傳》 이소경 소경(少卿)은 이릉의 자이다. 이릉은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와의 전쟁에 기도위(騎都尉)로 출전해서 5000명의 보병으로 흉노의 8만 기병과 8일 동안 싸웠는데, 결국 중과부적인 데다 무기와 식량도 떨어져서 흉노의 선우에게 투항하여 오랑캐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前漢書 李廣傳》 그대……손자임에랴 이릉이 농서(隴西) 출신이므로, 진농이라 한 것이다. 이릉의 조부인 이광(李廣)도 한나라의 명장으로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렸다. 위율(衛律) 위율은 소무의 벗으로, 흉노에 투항하여 부귀를 누렸다. 소무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위율이 소무에게 흉노에 투항하여 안락하게 살자고 회유하자, 소무는 회유를 거절하고 위율을 꾸짖었다. 《前漢書 蘇建傳》 조말(曹沫) 조말은 춘추 시대 노나라 장수이다. 제 환공(齊桓公)이 노나라를 침공했을 때, 조말이 제나라 군대와 세 차례 싸워 모두 패배하자, 노 장공(魯莊公)이 수읍(遂邑)을 바치는 조건으로 화해를 청하였다. 제 환공이 그 뜻을 받아들여 규구(葵丘)에 모여 맹약을 막 체결하려 할 때, 조말이 단상(壇上)에서 제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협박하여 빼앗긴 노나라 땅을 돌려받았다. 《史記 曹沫列傳》 음산(陰山) 흉노족의 땅에 있던 산으로, 현재 내몽고(內蒙古)의 자치구(自治區) 남쪽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내흥안령(內興安嶺)까지 뻗어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을 가리킨다. 기인은……했네 앞일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의미이다. 기(杞)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침식(寢食)을 전폐했다는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투항을……능멸했고 흉노의 선우가 이릉에게 항복을 종용하여, 이릉이 사신으로 온 것을 능멸했다는 뜻이다. 육가(陸賈)의 공은 사신의 임무를 완수했음을 뜻하는 말로, 사신으로 남월(南越)에 가서 남월의 왕 위타(尉他)로 하여금 칭신(稱臣)하도록 한 일이 있다. 《史記 李將軍列傳》 《史記 陸賈列傳》 관작……내렸네 소무가 자신을 옹치(雍齒)에게 빗대어 자신이 먼저 한 소제(漢昭帝)의 부름을 받아 한나라로 돌아가게 된 것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옹치(雍齒)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었는데, 아직 제후로 봉해지지 못한 여러 장수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장량(張良)의 계책에 따라 그를 먼저 십방후(什方侯)에 봉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차마……있으랴 오랑캐가 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전취(氈毳)는 모전(毛氈)으로 지은 털옷으로, 중국 북방의 융적(戎狄)이 입었던 옷이다. 천산 기련산(祈連山)으로, 흉노족이 주로 살던 북쪽 변방에 있는데 흉노족은 이 산을 천산(天山)이라 하였다.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숫양……있었으니 소무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금되어 있을 때, 선우가 소무를 북해(北海)로 옮기고 양을 기르게 하며 "숫양[羝羊]의 젖이 나오면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했다. 그 뒤 소무는 갖은 고생을 하며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한 소제 때 고국으로 돌아왔다. 《漢書 蘇建傳》 태사공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자 모든 사람이 이릉을 비난하였는데, 오직 사마천만 그의 신의를 인정하여 변호하다가 한 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당했다. 승수(澠水) 술이 많음을 형용한 말이다. 춘추 시대에 진후(晉侯)가 제후(齊侯)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때 투호(投壺)를 하면서 서로 응답하며 제후가 "술은 승수와 같고 고기는 언덕과 같다.[有酒如澠 有肉如陵]"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 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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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에서 의주로 떠나는 부경사에게 시를 부쳐 작별하다 在江界 寄別赴京使發義州 사헌부 사간원 제공들 다 시를 잘 외니밝은 시대에 관원이 되어 문사가 성대하구나나처럼 재주 없는 자는 끝내 쓸모없고사신 임무는 그대가 아니면 또 그 누가 있겠나세상사는 본래 구름 따라 변하기 쉬우니객지의 소회에는 오직 술이 제격이네멀리 이별의 눈물 가져다 강가에 뿌리니의주에 이르렀는지 아는가 모르는가 臺省諸公盡誦詩策名昭代盛文詞不才如我終無用專對非君更有誰世事自隨雲易變客懷惟與酒相宜遙將別淚臨江灑到得龍灣知未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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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으로 가는 서장관 박호188)를 증별하다 贈別書狀朴箎赴京 문채와 풍류 세상에 보기 드문 영웅이니젊은 나이에 성가가 도성을 진동했도다명성 높아 황금방에서 일등을 차지했고189)길은 아득히 백옥경190)까지 삼천리라요동 바다는 기운 무더워 궂은비 많이 내리고연경 산은 달 어두워 장기(瘴氣) 비껴 있네작별할 제 이별의 한 말할 필요 없으니단지 평안하라 말하며 먼 긴 증별하네 文彩風流間世英妙年聲價動王城名高第一黃金榜路逈三千白玉京遼海氣蒸蠻雨濕燕山月黑瘴雲橫不須臨別談離恨唯說平安贈遠行 박호(朴箎) 1567~1592.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대건(大建)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26세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상주에서 싸우다가 윤섬(尹暹)·이경류(李慶流)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황금방에서 일등을 차지했고 황금방은 과거 급제자 명단을 게시하는 방(榜)이다. 박호는 1584년(선조17)에 치러진 갑신친시(甲申親試)에서 갑과(甲科) 장원을 차지했다. 백옥경 황제가 거처하는 도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명나라 황제가 사는 북경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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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잃다 失題 검은 머리의 재상을 옛날에 영광이라 칭하였나니더구나 태평시절 제일가는 명성으로 손꼽힘에랴예전엔 은대를 맡아 북궐에 -원문 1자 결락-거듭 옥절 지니고서 영남을 다스렸네민풍은 일찍이 감당의 집을 노래하였고238)군무는 세류영239)을 겸하여 행하였네한번 형주를 알게 된 것240)도 지금 이미 늦었는데만약 헤어진다면 그 마음 더욱 아쉬우리 黑頭之相古稱榮況策淸時第一名舊掌銀臺【缺】北闕重携玉節按南溟民風曾詠甘棠舍軍務兼行細柳營一識荊州今已暮若爲離別更關情 감당의 집을 노래하였고 《시경·소남(召南)》 〈감당(甘棠)〉에 "무성한 팥배나무를, 자르고 베지 말라. 소백이 초막으로 삼으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하였다. 이는 주나라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며 문왕의 정교(政敎)를 펼쳤는데,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자주 쉬던 감당 나무를 베지 말자며 읊은 노래이다. 흔히 지방장관의 치덕(治德)을 칭송할 때 '감당'이란 말을 사용한다. 세류영 한 문제(漢文帝)가 여러 군영(軍營)을 순찰하는 중, 다른 곳에서는 모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지만, 주 아부(周亞夫)의 세류영(細柳營)에 갔을 때는, 군문 도위(軍門都尉)가 장군의 영(令)이 없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절(使節)을 보내어 주 아부에게 통한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군중(軍中)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한다고 하여, 문제가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다녔고, 본영으로 가 주 아부와 군례로 서로 인사한 다음 돌아갔는데, 문제는 아부 군중의 이러한 일을 도리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ㆍ《서한기(西漢記)》. 한번……것 훌륭한 현인을 만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당(唐)나라 원종(元宗) 때 사람인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번 한 형주를 알기 원한다."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與韓荊州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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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가는 그림194) 騎驢過橋圖 산을 벗어나자마자 다시 냇물 건너니저녁에 위태로운 다리에서 나귀 가는 대로 건너가네아이종아 나귀에게 서두르자 재촉말라좋은 시구 가슴 속에서 아직 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纔出山來又涉川危橋落日信歸鞭僕童且莫催驢急好句胸中半未圓 나귀를……그림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좋은 시를 지으려고 고심하다가 나귀 등에 타고서 눈발이 휘날리는 파교(灞橋) 위를 지나갈 때 그럴듯한 시상이 떠오른 고사를 말한다. 《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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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가 무정하니 애도한들 어찌 알까104) 湘水無情弔 豈知 원수와 상수 초 땅을 감돌아 흐르니105)밤낮으로 도도히 흘러 멈추는 때 없네강남은 옛날에 쫓겨난 신하가 간 곳으로한 줄기 안개 낀 물결 천고에 슬프구나사람은 감회 일어 옛사람 조곡하나강은 본래 무정하니 어찌 알 수 있으랴삼려대부는 일찍이 초나라 대부였으니송백의 고결한 품성에 난봉 같은 자태 지녔지영로106)에서 고난 겪고 세월 저물었으니아, 미인은 중도에 어디로 갔는가저 멀리 어가는 진나라 변경에 들어가니연월 속 장화대107)에 왕기 쇠했도다-1구 결락-택반 거닐며 읊조린 이108)의 귀밑털 새었네-2구 결락-장사왕의 태부는 낙양 사람이니109)나이 어리고 재주 뛰어난 천하의 기재라당시 강후 관영과 같은 반열에 있음을 부끄러워했으니성군 만났다면 요순의 다스림 일으켰으리외로운 방초가 뭇 풀들의 능욕 견디지 못했으니계책을 아뢰었다 되려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네상심했으니 어찌 차마 멱라수를 지날꼬110)충신의 넋에 애도하고자 두 눈에 눈물 흘렸네좌천된 이 남쪽으로 가는 일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흐르는 강물 동쪽으로 흘러가도111) 누가 알아려주려나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모여드니112) 또한 무슨 마음인가물고기가 시신 삼키도록 내버려 두었도다113)진나라 산은 육리의 부끄러움 씻어내지 못하고114)초나라 사람은 괜스레 천년의 그리움 부쳤네115)쏟아낼 수 없는 객수 같이 강물 깊고돌아올 기약 없는 성은처럼 강물 흘러가네강가에서 애도한들 끝내 무슨 보탬이 되랴주옥같은 시문 낭비한 것 애석하여라당시의 남은 자취 찾아보는 사이에고금에 길이 흘러가는 것 이와 같도다지금 사람이 또한 장사에 애도하려 하나강의 무정함 마찬가지니 애도해 무엇하랴애도할 만한 다정한 곳 따로 있으니북저의 반죽 가지에 눈물 흔적 있네116) 沅湘之水繞楚流日夜滔滔無歇時江南舊是竄臣路一帶烟波千古悲人生有感弔古人水自無情那得知三閭曾是楚大夫松栢孤標鸞鳳姿風霜郢路歲月暮美人中道嗟何之迢迢龍駕入秦關烟月章華王氣衰【一句缺】澤畔行吟生鬢絲【二句缺】長沙太傅洛陽人年少才華天下奇遭時羞與絳灌列得君庶興唐虞治孤芳不耐衆草凌策奏翻謫天南陲傷心忍過汨羅水欲弔忠魂雙淚垂遷人南去古猶今逝水東流知爲誰東流朝海亦何心一任魚腹藏人屍秦山未洗六里羞楚人空寄千年思深如客愁不可寫去似君恩無返期臨流一弔竟何益可惜浪費瓊琚詞當年遺跡俯仰間逝者今古長如斯今人亦欲弔長沙等是無情何弔爲別有多情相弔處北渚啼痕班竹枝 상수가……알까 당나라 유장경(劉長卿)의 시구로, 유장경의 〈장사에서 가의의 집을 지나가며[長沙過賈誼宅]〉 시에 "한 문제는 도는 있어도 은혜는 박했구나, 상수가 무정하니 애도한들 어찌 알까.[漢文有道恩猶薄, 湘水無情弔豈知?]"라고 하였다. 원수와……흐르니 초나라 굴원(屈原)이 초 회왕(楚懷王) 때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다가,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나 초췌한 몰골로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사이를 유랑하면서 〈이소(離騷)〉를 지었다. 영로(郢路)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의 길거리를 말한다. 장화대 초 영왕(楚靈王)이 사치를 좋아하여 높이가 30여 길이나 되는 '장화대(章華臺)'라는 별궁을 지었는데, 장화대에 오르려면 세 번 쉬어야 했다고 한다. 《新書 退讓》 택반을……이 조정에서 참소를 받아 쫓겨나 택반을 거닐었던 초 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장사왕의……사람이니 한나라의 문신 가의(賈誼)는 낙양 사람으로,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서 여러 개혁을 주장했다가,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참소를 입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前漢書 賈誼傳》 상했으니……지날꼬 굴원이 초나라 경양왕(頃襄王) 때에 다시 참소를 받아 장사(長沙)로 좌천되자,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가의도 참소를 맡고 장사왕 태부로 좌천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흐르는……흘러가도 임금에 대한 충심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자》 〈유좌(宥坐)〉에 "물이 만 번 꺾이어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은 굳은 의지가 있는 것 같다.[其萬折也必東, 似志.]"라고 하였다. 동쪽으로……모여드니 신하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모여든다.[江漢朝宗于海]"라고 하였다. 물고기가……두었도다 굴원이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차라리 소상강으로 달려가, 물고기의 배에 장사 지내리라[葬於江魚之腹中]."라고 한 구절이 있다. 진나라……못하고 초 회왕이 장의에게 속은 고사를 말한다. 진 혜왕(秦惠王)이 제나라와 초나라가 동맹하는 것을 근심하여 초 회왕에게 장의를 보내, 초나라가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진나라 상오(商於)의 600리 땅을 주겠다고 하였다. 초 회왕이 이 말을 믿고 제나라의 동맹을 파기한 후 장의에게 사신을 보내자, 장의는 봉읍(奉邑) 6리를 주겠다고 조롱하였다. 《史記 張儀列傳》 초나라……부쳤네 초 회왕이 굴원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武關)의 회맹에 참석했다가 진(秦)나라에 억류되어 3년만에 죽자, 초나라 사람들이 진나라를 원망했다. 《史記 項羽本紀》 북저의……있네 소상반죽(瀟湘斑竹)을 말한다. 순 임금이 별세하자, 순 임금의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소상강 가에서 통곡하다 죽었는데, 두 비가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묻어 얼룩이 졌다고 한다. 굴원의 〈상부인(湘夫人)〉에 "황제의 따님들이 북쪽 물가에 빠졌으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내 수심을 자아내네.[帝子降兮北渚, 目眇眇兮愁予.]"라고 하였다. 《楚辭 九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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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결을 세 번 들어 보이다117) 三擧玉玦 백만 군대에 이만 군사로 충분한 요새요118)바람 탄 범과 구름 몬 용이 교전하던 곳이라우레와 천둥 노한 듯이 몰아치던 사이에늠름한 위엄있는 얼굴로 연회 마주했네술통 앞 광경 다 의심할 만하니다시 옥결 들어 보인 이 어떤 사람인가포어 실은 수레 어젯밤 사구를 지나갔으니119)초나라 삼호에서 벌떼처럼 많이 일어났네120)장군이 손수 팔천 병사 지휘해 이끌고서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니 누가 막을 수 있으랴121)신안 구덩이에 묻힌 자 반은 진나라 사람이니122)눈앞의 사슴 있지만 썩은 쥐와 같구나함곡관 이미 주머니 속 물건 되었으니먼저 들어가 종거123)를 취한 이 누구인가분기탱천하기로는 장수나 병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그 형세 금도124)를 압도하여 막기 어려웠네누가 파상에서 목숨 부지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와서 홍문에서 주빈의 차례 짓게 하였나125)남아가 서로 만나 또 기쁘게 연회 즐기니만 마리 소고기 안주에 만 곡 술이로다천지가 암암리에 콧대 우뚝한 이에게 들어가니126)부월만 공연히 왕의 처소에 남아 있누나모신이 이때 간담이 찢어질 듯하였으니우리 군주의 대사 어긋남을 차마 볼 수 있었으랴힘이 없으니 목을 베어 피 뿌리지 못하고훌륭한 말 있어도 누가 말을 전하겠나허리춤에 옥결을 차고 있는 사람옥결 차고 군주 앞에서 기다리니정신은 눈에 있고 옥결은 손에 있어눈으로 신호를 보낼 적에 옥결도 들었네명칭을 통해 내포된 뜻 생각할 수 있고작은 사물이 예로부터 큰일을 깨우친다네임금의 마음 하루 안에 결정되길 어이 기다릴꼬이 기회는 하늘이 준 것임을 알아야 하거늘번거롭게도 내가 두 번 세 번 다시 들었건만어찌하여 장군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가달콤한 말에 월나라 구천을 이미 믿었으니원대한 계책 세운 오자서를 누가 따르랴127)속내 감추고 나와 검무 추고도 베지 못했으니128)그 작은 인이 어찌 아녀자에게 부끄럽지 않으랴마침내 연회 끝나고 옥술잔 부서졌으니옥결 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한갓 의심만 했네129)관옥이 재물로 이간질하여버림받아 팽성에서 근심 품게 하였네130)범증 같은 사람도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늘하물며 너는 기물이니 누가 너를 보배로 여기랴어찌하여 면목 없이 강동으로 건너가리오오강 가에서 한 자루 칼로 용감히 자결했네131) 百萬軍容百二關風虎雲龍交會處雷驚霆怒叱咜間凜凜威顔對樽俎樽前物色儘堪猜更有擧玦人何許鮑車昨夜過沙丘蜂起多從三戶楚將軍手提八千兵渡江西來孰能禦新安一坑半秦人鹿在眼中如腐鼠函關已爲囊中物先入何人取鍾衝冠怒髮將士同勢壓金刀難自沮誰敎灞上假遊魂來作鴻門賓主序男兒相見且爲歡萬牛之肴萬斛醑乾坤暗入隆準袖斧鉞徒然在王所謀臣此時膽欲裂忍見吾君大事去無力難將頸血濺有言誰憑口耳語腰間寶玦之子佩佩向君前爲延佇神惟在目玦在手目送神時玦又擧因名可思有意存小物從來可喩巨君心何待日中決此機須知天所予煩吾再三擧復擧胡乃將軍不我與甘言已信越句踐遠圖誰從吳子胥藏來舞釰亦不斷小仁能無愧兒女終然宴罷玉斗碎玦不取決徒疑阻從敎冠玉用間金受玦彭城抱憂緖人如范增不能用況汝器也誰玉汝夫何無面渡江東一釰勇決烏江渚 옥결을……보이다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劉邦)을 죽이자는 암시로,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눈짓을 하며 옥결(玉玦)을 세 번 들어 보였으나, 항우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유방은 번쾌(樊噲)의 도움으로 그곳을 탈출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백만……요새요 난공불락의 요새를 말한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秦)나라는 지세(地勢)가 뛰어난 나라로,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띠고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창을 가진 백만 군대를 진나라는 그 100분의 2로 막을 수 있다.[持戟百萬, 秦得百二焉.]"라고 하였다. 포어……지나갔으니 진시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진시황이 순행을 하던 도중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죽었는데, 정승 이사(李斯) 등이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시신을 싣고 갔는데,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므로 수레에 포어(鮑魚)를 실어서 냄새를 감추었다. 《史記 秦始皇本紀》 초나라……일어났네 초나라 삼호는 초나라 유민(遺民)을 뜻하는 말로, 초 회왕(楚懷王)이 진(秦)나라에 억류되었다가 3년 만에 죽은 일로 인해 초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몹시 원망하여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분명히 초나라 사람들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는 말까지 나왔다. 《史記 項羽本紀》 진시황이 죽은 뒤에, 진승(陳勝)이 오광(吳廣)과 난을 일으켜 스스로 초나라 왕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각처에서 봉기가 일어나 진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史記 陳涉世家》 장군이……있으랴 항우가 강동(江東)의 자제 8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서초 패왕(西楚覇王)이 되었다. 《史記 項羽本紀》 신안……사람이니 항우가 하북(河北)을 평정하고 진나라 관중(關中)에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들이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항우는 밤에 이들을 공격하여 진나라 병졸 20여 만 명을 신안(新安)의 성 남쪽에 파묻어 죽였다. 《史記 項羽本紀》 종거 진나라 궁궐의 상징적인 기물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咸陽)에 모은 뒤 이를 녹여서 종거(鍾鐻)와 12개의 동인상(銅人象)을 만들어 궁전 안에 놓아 두었다. 《史記 秦始皇本紀》 금도(金刀) 한나라 유방을 가리킨다. '유(劉)'를 파자(破字)하면 '묘(卯), 금(金), 도(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금도'라 한 것이다. 누가……하였는가 항우와 유방이 함양(咸陽)을 두고 쟁탈할 당시,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한 뒤 파상(灞上)에서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해 있었다. 항우는 유방이 함양을 함락했단 소식을 두고 격분한 나머지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홍문에 진주하여 유방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의 조정으로 서로 화해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유방이 직접 홍문으로 찾아가서 사과하니, 항우가 연회를 베풀어 유방을 접대했다. 《史記 項羽本紀》 천지가……들어가니 천지가 한 고조 유방의 손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콧대가 우뚝한 자는 유방을 가리킨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의 위인을 보면 콧대가 우뚝하고 용의 얼굴이었다.[高祖爲人 隆準而龍顔]"라고 하였다. 달콤한……따르랴 항우가 범증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부차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일에 빗댄 것이다. 춘추 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배한 뒤 항복하고 오나라에서 노복으로 있을 적에, 구천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월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자서(伍子胥)는 부차에게 월왕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백비의 말을 들어 구천을 놓아주었으며, 훗날 백비의 참소를 듣고 오자서를 죽였다. 이 때문에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멸망을 당했다. 《史記 伍子胥列傳》 숨어……못했으니 홍문의 연회에서 범증이 항장(項莊)을 시켜 검무(劍舞)를 추다가 유방(劉邦)을 찔러 죽이라고 하였다. 이에 항장이 나와 검무를 추며 기회를 노렸다. 《史記 項羽本記》 마침내……했네 항우가 범증에게 옥술잔을 주었었는데, 홍문의 연회에서 항우가 유방을 죽이지 않자 범증이 노하여 옥술잔을 깨뜨렸다. 후에 유방의 반간계(反間計)로 인해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자 범증은 화가 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중도에 화병으로 등창이 나서 팽성(彭城)에서 죽었다. 《史記 項羽本紀》 관옥이……하였네 관옥(冠玉)은 유방의 책사 진평(陳平)을 가리키는 말로, 용모가 수려하여 '관옥'이라 불렸다. 항우가 진평에게 황금 4만 근을 가지고 초나라로 들어가 항우와 신하들 사이를 이간질하게 하여, 결국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게 되었다. 범증은 항우의 의심에 분노하여 고향으로 떠났는데, 팽성(彭城)에 이르러 등창이 나서 죽었다. 《史記 項羽本紀》 어찌하여……자결했네 항우가 해하(垓下)의 전투에서 패한 뒤 한나라 병사에게 쫓겨 오강(烏江)에 이르자, 정장(亭長)이 배를 대주며 강동으로 건너가 권토중래하라고 권유했는데, 항우는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을 데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지금 한 명도 돌아가지 못하니, 비록 강동의 부들이 불쌍이 여겨 나를 왕으로 세우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 今無一人還, 縱江東父兄憐而王我, 我何面目見之?]"라고 말하고, 정장에게 오추마(烏騅馬)를 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史記 項羽本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융중에서 사제와 유별하다132) 隆中留別舍弟 산사람이 옛 〈양보음〉 읊기를 그만두니133)한나라 해가 사립문 동쪽에 붉게 떠오르네풍도와 모략이 홀연 제주와 들어맞았으니134)더이상 예전의 시골 늙은이가 아니어라갑옷 두른 말을 따라서 산속 떠나가니전원에서 오직 자신의 몸 잘 보존했었지유가의 빛나는 업적 건안에 달려 있는데병권 통재하는 권력 간웅에게 돌아갔네135)산동의 큰 귀 우뚝한 콧대 지닌 후예136)가군막에 들어가 오랫동안 기공으로 있었으니천지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며풍진 속에서 세월을 보냈네못 안에서 오랫동안 운우의 형세 잃었으니137)적룡138)을 하늘에 날아오르게 할 이 누구인가융중은 본래 한나라 산하이니여기서 살아가는 건 나와 네가 마찬가지구나몸소 밭 갈며 신야 노인139)을 사모했으니산 밖의 시끄러운 속세 소리에 내 귀 닫았네한가로운 사람 그저 와룡이라 자호했는데명철한 임금 어찌하여 인재를 점쳤는가140)추운 날 빈한한 집에 바야흐로 눈보라 칠 제귀한 분이 누추한 집에 번거롭게도 왕림하였네충정에 쉬이 격발하여 감동의 눈물 흘리니몇 마디 말로 뜻이 맞아 도리어 융화되었어라임금 은혜가 칠 척 이 몸을 허여해 주셨으니가업은 작은 터전에 사는 그대에게 남기노라봄 언덕에서 밭 가니 손으로 쟁기 잡고안개 낀 언덕에서 소를 치니 집에 아이종 있누나산수의 그윽한 정취 나눠주기 좋으니최씨 마씨 좋은 이웃141)과 줄곧 지냈네언덕에서 척령이 헤어짐142)을 한스러워하지 말라이제 떠나면 마땅히 중흥의 공 세우리라은하수로 한번 씻어내어 천지 사방 맑아지리니143)염령에 기를 불어 넣어144) 다시 융성하길 기약하네남양의 아름다운 기운 옛 황제의 고향이요145)탕목읍의 은혜로운 물결146) 응당 다하지 않으리라공 이루면 마땅히 병 많던 자방처럼 사직하리니147)재산이 어찌 꼭 도주공148)처럼 부유할 것 있으랴이별에 임해 또 말하노니, 아, 우리 아우여삼가 본분을 지켜 가풍을 실추하지 말라 山人吟罷古梁甫漢日赤臨柴門東風期忽與帝冑親非復當年田舍翁身隨甲馬出山去好保田園惟爾躬劉家赤業屬建安太阿之柄歸奸雄山東大耳隆準孫入幕多年爲寄公飄零蹤跡宇宙間荏苒歲月風塵中池中久失雲雨勢赤龍誰使飛蒼穹隆中自是漢山河一區生涯吾爾同躬耕竊慕莘野叟山外塵喧吾耳聾閒人秪自號臥龍明主如何占匪熊天寒白屋正風雪玉武頗煩臨蓽蓬危忱易激感淚零片言契合還昭瀜君恩許我七尺身家業留君三畝宮畊田春壠手把犂牧牛烟郊家有童溪山幽趣好分付崔馬芳隣爲始終原頭莫恨鶺鴒分此去當樹中興功天河一洗六合淸噓氣炎靈期再隆南陽佳氣舊帝鄕湯沐恩波應不窮功成當謝子房病産業何必陶朱豐臨分且曰嗟余季愼勿分事墜家風 융중에서 사제와 유별하다 융중(隆中)은 양양(襄陽)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를 만나기 전에 은거하던 곳이다. 산사람이……그만두니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양보음(梁甫吟)〉 길게 읊었다고 한다.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풍도와……들어맞았으니 제갈량이 제주(帝胄), 즉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비(劉備)에게 발탁된 것을 말한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양보음〉에서, 강태공이 10년 간 낚시질하며 지내다 문왕을 만난 고사를 읊어 "무려 삼천육백 번 낚시질하는 동안, 풍도가 은연중에 문왕과 들어맞았다오.[廣張三千六百釣, 風期暗與文王親.]"라고 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유가의……돌아갔네 건안(建安)은 한나라 헌제(獻帝)의 연호로, 196년~220년까지이다. 간웅(奸雄)은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건안 연간에 한나라 황실이 쇠하여 전국이 혼란했는데,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토벌하며 세력을 얻은 조조가 헌제를 허도(許都)로 맞이하여 옹립하고, 승상(丞相)을 거쳐 위왕(魏王)이 되는 등 세력을 키워 가며 실권을 장악했다. 《三國志 光武帝紀》 《後漢書 獻帝紀》 산동의……후예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킨다. 못……잃었으니 유비가 오랫동안 재주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삼국 시대 오나라 주유(周瑜)가 유비를 경계해야 한다면서 "교룡이 운우를 얻으면, 끝내 못 속의 물건이 아니게 될까 두렵다.[恐蛟龍得雲雨, 終非池中物也.]"라고 하였다. 《三國志 吳書 周瑜傳》 적룡(赤龍) 적룡은 전설 속에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용으로, 한 고조 유방은 적룡(赤龍)의 정감(精感)을 받아서 태어났다 하여 그를 적제자(赤帝子)라 칭했다. 여기서는 유방의 후예인 유비를 가리킨다. 신야 노인 은나라의 명신인 이윤(伊尹)을 가리킨다.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왕(湯王)의 초빙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어 왕업을 성취시켰다. 《孟子 萬章上》 명철한……점쳤는가 유비가 초야의 제갈량을 찾아온 일을 주나라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을 만난 일에 비유한 것이다. 문왕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쳤더니 "잡을 것은 범도 곰도 아니고[匪熊] 왕패(王霸)를 보좌할 인물이다."라는 괘(卦)가 나왔다. 그 뒤 문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강태공 여상(呂尙)을 만나 수레에 태우고 함께 돌아왔다. 《史記 齊太公世家》 최씨……이웃 한나라 최인(崔駰)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남조 시대 양(梁)나라 유준(劉峻)의 〈변명론(辯命論)〉에 "그 치욕을 당한 것이 어찌 최씨 마씨의 부류이겠는가?[其爲詬恥, 豈崔馬之流乎?]"라고 하였다. 언덕에서 척령이 헤어짐 제갈량과 그 아우가 이별한다는 의미이다. 척령은 우애있는 형제를 뜻하는 말로,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듯, 위급한 때에는 형제가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고 하였다. 은하수로……맑아지리니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를 평정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세병행(洗兵行)〉 시에 "어찌하면 장사가 은하수를 끌어와서, 갑병을 깨끗이 씻어 영원히 쓰지 않게 할꼬.[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라고 하였다. 염령에……넣어 한나라를 부흥시킨다는 의미이다. 염령은 화덕(火德)으로 왕이 된 한(漢)나라를 가리킨다. 아름다운……고향이요 남양(南陽)은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가향(家鄕)이다. 술사(術士)인 소백아(蘇伯阿)가 남양 용릉(舂陵)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상서로운 기운이 울창하고 성대하다.[佳氣哉! 鬱鬱葱葱然.]"라고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 탕목읍의 은혜로운 물결 한 고조의 고향은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인데, 고조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 고향에 갔을 때 풍읍을 탕목읍으로 삼아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史記 高祖本紀》 공……사직하리니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의 자이다. 장량은 체구가 작고 지병(持病)이 많았는데, 훗날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한나라의 건국 이후 장자방은 공훈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은퇴하였다. 도주공 도주공(陶朱公)은 춘추 시대 월나라 대부 범려(笵蠡)의 별칭이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도(陶) 땅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으로 행세하며 거금을 벌었다. 《史記越王句踐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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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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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운대가 어찌 조대보다 높으랴149) 雲臺爭似釣臺高 한나라의 스물여덟 장군150)세상을 뒤덮은 명성 준걸이라 칭해졌네동강 오두막의 일개 낚시하는 늙은이151)맑은 풍모 오랫동안 도도히 흐르네당시 만승의 천자를 한 번 굴복시켰으니탁월한 행적 운대보다 훨씬 높았도다선생은 일찍부터 유문숙152)을 알았으니반평생 속진 속에서 함께 노닐었지천지가 갑자기 진인153)의 손에 들어갔는데선생 집의 좋은 물건은 오직 작은 배 뿐이었네양 갖옷 처사의 몸에서 벗기지 못했고154)곤룡 무늬 천자의 옷에 새롭게 더해졌네같은 침상에서 비록 하룻밤 기쁨 나누었으나155)안개 낀 강 백구와 맺은 약속 이미 굳건했네156)차라리 기산 영수에서 소보와 허유를 배울 지언정157)어찌 조정에서 이윤과 고요158) 같은 신하 되랴돌아와 부춘산에 한가로이 누워새장 떠나버린 신선의 학처럼 지냈네중흥의 장수들이 또한 일시에운수에 응하여 다행히도 풍운과 만났도다159)용 붙잡고 봉황에 붙어 그 기세 당할 수 없었으니160)한나라를 보좌한 공 소하와 조참161)보다 높았네땅을 나누어 제후에 봉하는 것일 관심 없으니태상162)과 홍종으로 어찌 기릴 것 있으랴스물여덟 장군 초상 별자리에 따라 배열하니엄연히 영웅호걸의 진짜 모습 그려냈네오직 나머지 객성163)은 모사할 수 없었으니어찌 화공의 솜씨로 붓 휘두를 것 있으랴걸출한 모습 우뚝하여 지주164)와 같으니깎아지른듯 우뚝 서서 큰 파도와 다투네남궁 운대의 장군들 다 한 수 아래이니예전에 전장을 누비며 부질없이 수고했네몸소 수많은 전쟁 겪은들 끝내 무슨 보탬이랴한 가닥 낚시줄로도 오히려 금도를 부지할 수 있거늘165)동도의 절의166)는 이백 년 동안 이어졌는데업하에서 늙어 죽은 이는 누런 수염의 조조라167)누가 은자에게 공업이 없다 말하랴구정이 약해지면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오아, 나는 문무(文武) 모두 이루지 못하고평생토록 부질없이 용호도168)만 읽었네지금 기린각에 걸릴 사람 따로 있으니육오169)가 떠받친 바다로 돌아가 낚시질하련다 漢家二十八將軍蓋世之名稱俊髦桐廬一介垂釣翁淸風千古江滔滔當年一屈萬乘主卓軌逈出雲臺高先生早識劉文叔塵埃半世同遊遨乾坤忽入眞人手自家長物惟輕舠羊裘不脫處士身龍袞新加天子袍同床雖做一宵懽白鷗烟波盟已牢寧從箕穎學巢由肯向廊廟爲伊臯歸來高臥富春山有如仙鶴辭籠絛中興諸將亦一時應運幸與風雲遭攀龍附鳳勢莫當佐漢功高蕭與曺分茅裂土等閒事太常洪鍾安足褒圖形四七應列宿儼然幻出眞英豪唯餘客星模不得豈容畵手煩揮毫高標落落砥柱同截然屹立爭洪濤南宮介冑盡下風汗馬從前徒自勞身經百戰竟何補一絲猶可扶金刀東都節義二百年鄴下老死黃鬚操誰言隱者無功業九鼎微爾輕鴻毛嗟余書釰兩無成平生浪讀龍虎鞱今代麒麟別有人歸釣滄溟連六鰲 운대가……높으랴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조대시(釣臺詩)〉에 나오는 구절로, 공을 세우는 것보다 은거하여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운대는 후한(後漢) 때의 공신각(功臣閣) 이름이고, 조대(釣臺)는 후한의 은사 엄광(嚴光)이 낚시하던 곳이다. 한나라의 스물여덟 장군 광무제(光武帝) 때 공을 세운 등우(鄧禹), 오한(吳漢) 등 28명의 공신을 말한다.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 남궁(南宮)의 운대에 28수(宿)의 순서대로 걸어 놓았다. 《後漢書 馬援列傳》 동강……늙은이 엄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엄광은 광무제의 출사 요청을 뿌리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은거하고 동려현(桐廬縣)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유문숙(劉文叔) 문숙은 광무제 유수(劉秀)의 자이다. 엄광과 광무제는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한 친구 사이였다. 진인(眞人) 진인은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일한 황제를 이르는 말이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진 시황이 '나는 진인을 사모한다.'라고 하며, 자신을 진인이라 하고 짐이라고 하지 않았다.[始皇曰, 吾慕眞人, 自謂眞人, 不稱朕.]"라는 하였다. 여기서는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를 가리킨다. 양……못했고 광무제가 엄광을 벼슬에 나오게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광무제가 제위(帝位)에 오른 뒤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는데, 광무제가 엄광을 찾기 위해 온 나라에 명을 내리자 제국(齊國)에서 "어떤 사람이 양 갖옷[羊裘]을 입고 못에서 낚시질합니다."라는 제보가 올라왔다. 《後漢書 嚴光列傳》 같은……나누었으나 광무제가 숨어 사는 엄광을 찾아내어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 엄광이 광무제와 함께 잠을 자던 중에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렸다. 그 다음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범하였습니다."라고 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옛 친구인 엄자릉과 함께 잤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嚴光列傳》 안개……굳건했네 백구와 벗하며 강호에서 은거하기로 결심했다는 의미이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시 〈숙흥(夙興)〉 시에 "학의 원망은 누굴 의지해 풀거나, 백구와의 맹세 이미 식었을까 염려되네.[鶴怨憑誰解 鷗盟恐已寒]" 하였다. 기산……지언정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는 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로,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자, 허유가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潁水)의 물에다가 귀를 씻었다. 소보가 영수에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은 이유를 듣고는, 소에게 이 물을 먹이면 소의 입이 더럽혀진다고 하면서 소를 상류로 끌고 올라가 물을 먹였다. 《高士傳 許由》 이윤(伊尹)과 고요(皐陶) 탕(湯)임금의 신하 이윤과 순(舜)임금의 신하 고요의 병칭으로, 재상을 뜻하는 말이다. 풍운과 만났도다 호걸이 훌륭한 임금을 만나 의기투합했다는 의미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하였다. 용……없었으니 당나라 두보(杜甫)의 〈세마행(洗兵行)〉 시에 나오는 구절로, 제왕을 도와 공업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다. 소하와 조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한나라 건국 초기의 명재상이다. 태상(太常) 태상은 해와 달을 그린 왕의 정기(旌旗)로서, 거기에 공신(功臣)의 이름을 새겨 공을 기렸다. 《周禮 夏官司馬 司勳》 객성 엄광을 말한다. 지주 중국 삼협(三峽)의 지주산(砥柱山)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황하의 세찬 물결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고 서 있으므로, 세상 풍파를 견디며 굳센 지조를 지키는 선비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흔히 쓰이다. 한……있거늘 금도(金刀)는 한나라 왕실의 성인 '유(劉)' 자를 파자한 것으로, 엄광이 광무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지조를 지킴으로써 한나라 선비들의 기개를 높여 나라를 지탱했다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엄광을 칭송하며 "동강의 한 가닥 낚싯줄이 한나라의 국통을 부지하였다.[桐江一絲, 扶漢九鼎.]"라고 하였다. 《古今源流至論後集 卷6 氣節》 동도의 절의 동도(東都)는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이다. 후한 때에는 엄광(嚴光)을 비롯하여, 광무제 때의 주당(周黨), 환제(桓帝) 때의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절의를 지킨 선비들이 있었다. 《後漢書 卷8 孝靈帝紀》 업하에서……조조라 업하(鄴下)는 위(魏)나라의 도읍이다. 누런 수염[黃鬚]은 성품이 강용(剛勇)함을 비유하는 말로,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창(曹彰)이 '황수아(黃鬚兒)'라 일컬어진 데서 유래하는데, 여기서는 조조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三國志 魏志 任城威王彰傳》 용호도(龍虎鞱) 병법서를 말한다. 주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병서 《육도(六韜)》에 〈용도(龍韜)〉과 〈호도(虎韜)〉라는 편명이 있다. 육오 육오(六鰲)는 바다에 삼신산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여섯 마리의 자라이다. 예로부터 섬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을 큰 자라가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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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제목 누락 題缺 오류선생 본래 산에 살았는데우연이 객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가돌아가 날마다 술에 취해 깨지 않으니버들 다섯 그루가 봄빛을 다투는 줄 몰랐네170)천년의 동방에 -원문 3자 결락-불상 앞에서 손가락 꼬며 –원문 2자 결락-171)근래 수염이 삼천 길이나 자라 나니큰 아이 작은 아이 모두 아버지 불러대누나애써 사립문 밖에 버들 다섯 그루 심어172)옛사람과 높은 명성 나란히 하려 하네옛사람은 벼슬 버리고 강호에서 은일했는데지금 사람은 참선 피해173) –원문2자 결락- 전하네도끼 잡고 나무 베어 땔나무 만들고콩죽과 명아주국 끓여 먹는 것만 못하니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집을 떠날 적에긴 가지 꺾어 이별의 정 나타냈겠지 五柳先生本在山偶然爲客人間行歸來日日醉不醒不知五柳爭春榮千載東方【三字缺】佛前撚指堅【二字缺】邇來長髮三千丈大兒小兒呼爺聲强裁五柳柴門外欲與古人齊高名古人投簪逸海山今人逃禪傳【二字缺】不如操斧斫爲薪煮取豆粥與黎羹不然生妻去室時折得長條表離情 오류선생……몰랐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2》 원문 2자 결락 '堅'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심어 대본에는 '裁'로 되어 있는데, 문맥에 의거하여 '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참선 피해 도선(逃禪)은 좌선(坐禪)을 도피한다는 뜻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신 소진(蘇晉)이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소진은 수불 앞에서 장기간 재계를 했는데, 취중에는 가끔 좌선을 도피하기 좋아했다네.[蘇晉長齋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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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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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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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산수 사이에서 거문고를 타는 그림 山水彈琴圖 고요하면 깊은 못되고 울면 여울 되니거문고를 안은 사람 이 안에 앉아 있네이미 마음으로 소리 없음의 오묘함 깨달았으니아양 곡조193)를 탈 것 없다네 靜作深潭鳴作湍抱琴人坐此中間已將心會無聲妙莫把峨洋絃上彈 아양 곡조 아양곡(峨洋曲)은 백아(伯牙)가 탔던 금곡(琴曲)을 말한다. 옛날에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그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높다란 것이 마치 태산과 같구나.[善哉, 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또 말하기를 "좋다, 광대한 것이 마치 강하와 같구나.[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 버리고 종신토록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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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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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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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은계에서 묵고 철령을 넘으며, 다시 앞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지어서 최노첨에게 부치다 2수 宿銀溪 逾鐵嶺 復用前韻 寄魯詹【二首】 기러기는 금하246) 건너 오랑캐 활 피했으니그 울음소리 변경 하늘로 높이 들어가네이때 놀라 고향 그리는 꿈에서 깼으니날 밝도록 앉아서 잠들지 못하노라-원문 1자 결락247)-오솔길 시내 따라 활줄 처럼 곧고협곡 안은 둥근 동천248)인 듯하여라본래 가을산은 그림 속 풍경 같으니용면249)의 솜씨 빌려 베껴 그릴 필요 없네 鴈度金河避虜弦一聲高入塞天圓此時驚罷相思夢坐到天明不得眠【缺】逕沿溪直似弦峽中惟覺洞天圓自是秋山如畫裡不須摹寫借龍眠 금하(金河)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는 강 이름으로, 지금은 대흑하(大黑河)라 한다 원문 1자 결락 '逕'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동천 도가(道家)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인간 세상에 36개의 동천이 있다고 한다. 《述異記 卷下》 용면(龍眠) 송나라의 뛰어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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