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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암242) 兄弟巖 아우가 형을 업신여기지 않고 형은 침해하지 않으니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져 반씩 산그늘 만드네단단한 암석이 풍교에 관계된 줄 누라 알랴비슷한 사물 살펴보니 바야흐로 조화옹의 마음 알겠네 弟不凌兄兄不侵同根分作半山陰誰知頑石關風敎觸類方看造化心 형제암(兄弟巖)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작은 시내가 그 사이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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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서 천추사의 시에 차운하고, 먼저 떠나는 이들을 송별하다 遼東 次千秋韻 先行送別 객이었다가 다시 객의 행렬 전송하게 되었으니이별함이 그 누가 서쪽으로 가는 나만 하랴이 뒤에 만난 날 알고자 한다면북경에서 한양으로 돌아갈 때이리라 作客翻成送客行別離誰似我西征欲知此後相逢處待到燕京返漢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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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서 사람을 만나다 그 아버지가 요동 유격(遼東遊擊)이다. 逢峽西人【其親爲遼東遊擊】 그대는 산 서쪽 지방의 제일가는 명사요나는 저 멀리 해동 구성 사람이라오요양성 밖에서 마찬가지로 객살이 하니하늘 끝 양쪽 땅의 근심을 나누어 가졌구나 君是山西第一流儂家遙隔海東陬遼陽城外同爲客分占天涯兩地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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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부윤이 천추사 서장관을 증별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次義尹贈別千秋書狀韻 그대에게 먹인 술을 내가 어찌 사양하랴술자리 떠나자 곧바로 길 갈라지네갈림길에서 이별하는 서글픔 표현할 수 없으니술 깬 뒤에 시 읊는 것이 어찌 취하여 시 없는 것만 하랴 飮君之酒我何辭離却樽前便路岐岐路別愁摸不得醒吟爭似醉無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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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함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汝涵韻【二首】 압구정 가 달 밝은 가을에마름 끝에 맑은 바람 일어 객선 보내네세상에 오늘 밤처럼 술 마실 날 없으랴만평생에 이런 곳에서 노닐기는 어렵다오기이한 돌 높다란 벼랑 고목에 가을 드니깊은 밤 풍로 속에 돌아오는 배 가득하네달 밝은 삼경에 긴 피리 소리 들려오니봉래산 섬 속에 들어와 노니는 듯하여라 狎鷗亭畔月輪秋蘋末淸風送客舟人世豈無今夜飮百年難向此間遊奇石巉巖老樹秋夜深風露滿歸舟一聲長笛三更月疑入蓬萊島裏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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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尹國韻【二首】 동한의 장사 모두 서쪽 변방으로 가니아녀자들 멀리 남편 걱정에 애 타리라무슨 일로 산중에서도 이별이 있는가하의를 백의로 바꿔 입고 길 떠나네318)왕의 군대가 오랑캐 소탕한다 들었으니나라 은혜 받고서 어찌 사정 돌아보랴이제부터 오랑캐 사로잡을 날 점칠 수 있으니백면서생도 칼 지니고 길 떠나는구나 東韓壯士盡西征可是閨人惱遠情底事山中亦有別荷衣換着白衣行聞道王師有濯征國恩那得顧私情從今可卜擒胡月白面書生杖劍行 하의(荷衣)를……떠나네 하의는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의 옷차림을 뜻하며, 백의(白衣)는 벼슬하지 않는 일반 백성의 옷차림을 뜻한다. 은거하던 사람도 일반 백성으로서 전장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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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유사》의 뒤에 쓰다 題錦峰遺事後 나의 외가인 나주 나 씨(羅州羅氏) 상사(上舍)84) 나두동(羅斗冬) 종형과 삼종 나두흥(羅斗興) 아우가 함께 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선고조(先高祖) 금호공(錦湖公), 증조 금암공(錦巖公), 금봉공(錦峰公) 형제의 행적에 대해 추술(追述)한 일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지극한 뜻과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감히 임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내준 여러 기록을 상고하여 외람되이 그 사이를 고쳐85), 금호와 금암 2대의 〈사실기(事實記)〉를 지었다. 돌아보건대 금봉의 사적은 상사 종형이 장초(狀草)한 것으로 절로 편의 체제를 이루어 처음과 끝이 차서가 있고 어의(語義)에 흠이 없었다. 끝부분에 증조 금암공의 제문을 인용하고 그에 대하여 "여러 번 이 글을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라고 쓴 글 또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도외시하지 않는 뜻에서 그 가운데 나아가 더러는 한 글자를 빼기도 하고 더러는 한 글자를 바꾸기도 한 곳이 약간 있었을 뿐이니 어찌 굳이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삼가 살펴보건대 금봉은 금암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지만,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같고, 스승을 따른 바가 같고, 추구한 바의 뜻이 같고, 강론한 바의 학문이 같고, 힘쓴 바의 행실이 같고, 세상의 변란을 만난 바와 어려움을 겪은 바도 같다. 어려서는 공손하고 장성해서는 글을 짓고 늙어서는 덕을 쌓아 당세 훌륭한 사람과 군자들에게 어질다는 칭송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었으나, 다른 것이라고는 생사의 연월과 벼슬 경력과 계급 차서에 불과하였다. 옛날 이천 선생(伊川先生)86)이 명도(明道)87)의 행장(行狀)을 쓰고 문인들에게 "나의 도는 거의 명도와 같으니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글에서 구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지금 금봉의 뜻과 학업, 품행과 도의는 그 평생을 개괄해 볼 때 실로 금암과 같다. 나는 금암의 사실기를 지은 뒤 또 붓을 옮겨 금봉의 사실기를 짓고자 했으나 한 편의 같은 글로 귀결되었다.나는 상사 종형에게 장초한 글의 제목을 고칠 것을 청하며 "금봉의 사실기와 금암의 사실기가 모두 전하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 글을 합하여 서로 참고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이러한 말을 책 뒤에 써서 돌려보낸다. 나는 금암의 생증손(甥曾孫)이다.임인년(1662) 봄 3월 하순에 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 쓰다. 吾外氏錦城羅上舍斗冬從兄曁三從斗興弟, 幷抵重元書, 見層以先高祖錦湖公 曾祖錦巖 錦峰兄弟公行蹟追述事. 重元感至意勤懇, 不敢辭以非其人, 按所寄示諸錄, 猥檃括其間, 爲錦湖 錦巖兩世事實記. 顧錦峰事, 上舍兄所爲狀草, 自成篇體, 首尾有次, 語意無欠, 至末端引祭曾祖錦岩公文而爲之語曰 :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云者, 亦足令人感動. 第以不自外之意, 就其中或有省一字易一字若干處而已, 何必改作爲哉. 竊觀錦峰少錦岩四歲爲弟, 受庭訓同, 遊師門同, 所求之志同, 所講之學同, 所勉之行同, 遭罹世變, 履險涉艱又同. 幼而遜弟, 長而有述, 老而蓄德, 于躬爲當世鉅人君子之所賢, 始終無不同, 其所不同者, 不過生卒年月官歷階次焉耳矣. 昔伊川先生狀明道行, 與門人言 "我之道, 蓋與明道同, 欲知我者, 求之此文, 可也." 今夫錦峰之志業行誼, 槪其平生, 實與錦巖同. 重元旣爲錦巖事實記, 又轉其筆, 欲爲錦峰有所云云, 則歸疊一件文字也. 已請以上舍兄所爲狀草改題目曰 : "錦峰事實記與錦巖事實記, 俱傳, 使觀者, 合兩文有以互看參考之爲善也." 遂以是說書其後歸之. 重元, 錦巖之甥曾孫也. 歲壬寅春三月下澣, 外後屬八溪鄭重元題. 상사(上舍) 생원이나 진사를 일컫는 말이다. 고쳐 원문 '은괄(檃括)'은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기구를 말하니, 여기에서는 다소의 수정을 가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굽은 것을 잡는 것을 은(檃)이라 하고, 모난 것을 잡는 것은 괄(括)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에, "그 굽은 것이 발라지게 되는 것은 은괄의 힘이다.〔其曲中規, 櫽括之力.〕" 하였다. 이천 선생(伊川先生)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으로, 정이(程頤, 1033~1107)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명도(明道)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로, 정호(程顥, 1032~1085)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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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보유 【경신년 추가 간행】 附錄補遺 【庚申追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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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종 26년이다.2)】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먼 길을 내달려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關北)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 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성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4)에 숨자, 민가의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성의 현문(懸門)에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 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을 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국세필 등 13인을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보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자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노리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과 길주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那)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績)》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5)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다투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사양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노략질하여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 보낼 일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격려하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고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일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사대부들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의 장좌(將佐)가 이따금 불려가 매질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여 공도 없이 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정문부가 비로소 군병을 해산하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고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한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정예병으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으로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6) 같은 옛 영 영토가 오랑캐의 땅7)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8)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여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바가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출신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출신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출신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萬曆二十年 【宣宗二十六年】 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 明 鏡 富等鎭, 入曾寧, 擄王子, 從渡江, 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渡江, 歷入穩城 慶源 慶興 沿海路, 還趨鏡城. 於是, 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 鏡城則寺奴鞠世弼 【世弼, 乃是官奴, 寺字, 或誤, 疑卽寺奴, 而移屬官奴】 爲首,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 八月, 淸正使一偏將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 安邊 各置重兵, 以爲聲援. 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獲脫免. 遂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彥 輸城察訪崔東望 謫人韓伯謙 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 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 文孚復窘, 匿禦亂里, 民家儒生等, 聞而赴之. 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 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 及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 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 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 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糧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己者, 爲裨將. 【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 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 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斬, 以徇諸鎭. 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 "本興義兵, 國耳, 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 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 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 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 又激見龍等主文孚軍, 六易將, 軍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 其間誤戰機多, 以此故. 見龍初恇怯,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 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止之. 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 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 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嗚呼, 關北俗, 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 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 從事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 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 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反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 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濕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紀其實者. 頃於從役之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飾,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槪, 僭付于事蹟之末. 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 奉事吳大男, 鏡城出身權管姜文佑, 訓導李生鵬壽 【戰死】 朴銀柱, 儒生崔配天 池達源 朴惟一 金麗光 【戰死】 吳允迪, 富寧出身車應麟 朴克謹, 儒生金銓 金鏡 車得道, 慶源人鄭允傑 應聖父子, 鏡城出身金嗣朱 崔敬守 南繼仁 【本官奴】, 穩城余貞, 【本官奴, 癸未從申砬有戰功, 至是死於嶺東之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자는 여고(汝固)이며, 호가 택당(澤堂)이다. 장유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종 26년이다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여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팔문장가로 꼽혔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준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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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초 【농포 정문부】 狀啓抄 【農圃 鄭文孚】 장계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병조 좌랑(兵曹佐郎) 서성(徐渻)과 정배인(定配人) 나덕명(羅德明)이 외촌(外村)에서 마을에 사는 군정(軍丁)들을 잘 타이른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모두 성 【즉 경성(鏡城)이다.】 으로 들어갔습니다. 【만력 20년인 임진년 10월 14일이다.】신이 대장에서 체직된 뒤에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大將)으로 삼았습니다. 지난해 12월 그믐께 정현룡이 겸절도사(兼節度使)에 차임되어 육진(六鎭)을 순하였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로 대장을 개정(改定)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巡察使)의 관문(關文)에 오응태를 대장에서 체차(遞差)하고 전처럼 평사(評事)를 다시 대장으로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 겸 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체차되어 북쪽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1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도사가 왜적을 토벌하는 정예병을 자기가 거느리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져 왜적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이러한 때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지극히 염려되므로 신도 관문을 보내어 병사를 모아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각별히 사목(事目)을 주어 그 숫자대로 병사를 모으게 하는 일로 누군가를 방어사(防禦使)라 칭하여 정현룡에게 내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언뜻 들으니 팔도 중 남도(南道)에서는 이미 과거가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유독 이 북도(北道)에서는 과거를 보러 갈 수 없으니 진작시키려는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순찰사가 임금께 아뢰어 처치해 달라고 청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변변찮은 소관(小官)이 임금께 아뢰어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내(道內)에서 의병을 일으킨 우두머리인 경성에 사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驥秀), 경성에 정배(定配)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富寧) 좌수 김전(金銓) 등이 온 힘을 다하여 내달려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들을 잘 타일렀으니 지금까지 일을 거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바입니다.지난번에 상(賞)을 논할 때 과거(科學)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던 유생들 가운데 금위(禁衛)를 임명한 일을 원통하게 여기는 듯하여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했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본부 역시 큰 도회지라서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태반이나 마련하는데 진에 머물고 있는 가장(假將)인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은 책응(策應)하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치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잘 아뢰어 주소서. 만력(萬歷) 21년 계사(1593), 1월 16일." 略曰 兵曹佐郞 徐渻 定配人 羅德明 在外村, 曉喩村居軍丁爲白如乎, 節段竝只入城 【卽境城】 爲白有齊云云. 【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 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 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 在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 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 入歸是如爲有臥乎所,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加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 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 仄聞爲白乎矣, 八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 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 座首徐遂 李麒壽, 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 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 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厼, 詮次以善啓向敎是事. 萬曆二十一年癸巳, 正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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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산 어른의 만사 挽羅尼山丈 【김익성, 자는 유응(裕應)이며 광산 사람으로, 고을의 성서에 거주하였다, 광해군 때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사람들은 생전이 귀하다지만 人也生前貴공은 돌아가신 뒤에 영예롭네 公惟死後榮사 씨 집안의 쌍벽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순호의 팔룡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땅은 시서의 차례를 덮었고 地閉詩書秩하늘은 예의의 밝음을 감췄다네 天慳禮義明평생 충과 효로 행동하셨으니 百年忠孝事바람이 백양79)에 소리 내어 하소연한다네 風訴白楊聲 【金益成, 字裕應, 光山人, 居州之城西. 光海朝, 廢科, 詩酒自娛.】人也生前貴, 公惟死後榮.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地閉詩書秩, 天慳禮義明.百年忠孝事, 風訴白楊聲. 백양 백양(白楊)은 무덤을 가리킨다. 도잠(陶潛)의 〈만가시(輓歌詩)〉에 "황량한 풀은 어이 그리 아득한가, 백양나무 또한 쓸쓸하기만 하네."라고 하였다. 《陶靖節集 卷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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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록 師友錄 이소재(履素齋) 선생은 휘가 중호(仲虎)이고, 자는 풍후(風后)이다. 종실인 고안(高安)80) 정(正) 이정(李精)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효공(靖孝公) 이보(李補)81)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태종 때 좌의정(左議政) 충경공(忠景公) 이직(李稷)의 후손이다. 고안 정(正) 이정이 아내로 맞이하여 정덕(正德)82) 임신년(1512) 9월 무자일에 선생을 낳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 장성함에 뜻을 엄하게 하여 문장을 지음에 그 문체가 기이하고 우뚝함을 숭상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83)이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귀신이 아니면 저렇게 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서봉(西峰) 처사 유우(柳藕)84)에게 학업을 전해 받았는데 서봉은 바로 한훤당(寒暄堂)의 문인이니, 그 학문은 대개 연원이 있다.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사람들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85)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침내 깨닫는 바가 있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을 두고는 낮에는 외우고 밤에는 사색하여 잠자고 밥 먹는 것조차 잊기에 이르렀다. 죽간에 구용(九容)과 구사(九思)86)를 새겨 혁대에 꿰어 차고 종신토록 지녔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띠를 묶어 종일 강론하고 정미하게 분석하니, 서화담(徐花潭)87)이 그와 함께 수일을 강론하고 감탄하며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기묘사화(己卯士禍)88) 이후 《소학》의 가르침이 세상에서 크게 금지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후학을 가르치니 학도들이 모여들자 반드시 《소학》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으로 《근사록》을 가르친 뒤 점차 여러 경전에까지 이르렀다. 논의가 뛰어나 배우는 사람들의 학문을 북돋아 진작하는 효과가 있기에 전조(銓曹)에서 교직(敎職)에 천거하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병이 심해져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언관(言官)들이 그의 품행과 도의를 칭송하여 계속 서울에 머물도록 청하자 명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6품의 관직을 내렸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가정(嘉靖) 갑인년(명종 9, 1554) 11월 26일로 향년 43세였다. 문인들이 그의 상례를 다스리고 이듬해 정월 25일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선영에다 장사지냈다. 그의 저술은 〈심성정도(心性情圖)〉, 〈성리명감(性理明鑑)〉, 자경(自警)의 시문 수백 편이 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깊이 생각하여 곧장 이해해서 직접 제작한 물건이 조금도 도수가 어긋나지 않았다. 【〈이소재묘지유사(履素齋墓誌遺事)〉와 박상 세채(朴相世采)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보인다.】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은 자가 연지(衍之)이고, 동래(東萊) 사람이다. 봉상시 정(奉常寺正)89) 정유인(鄭惟人)의 아들이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나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였다.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은 자가 인지(訒之)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서봉(西峯) 선생 유우(柳藕)의 아들이다. 가정 계사년(1533)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의뢰할 곳이 없어 다소 무리배였으나 훗날 뜻을 고쳐 이소재의 문하에서 배워 학업에 뜻을 둔 것이 남달랐고 특히 예(禮)에 밝았으며 각기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 퇴암(退菴) 박응남(朴應男), 월담(月潭) 최황(崔滉) 등 막역한 교우를 맺었다. 만력 계미년(1583)에 남봉이 우의정에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충과 효와 큰 절개가 있어 삼군(三軍)의 장군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침내 출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자, 공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걸어서 임금을 따라가 2년을 지냈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90)은 총재(冢宰)로서 공의 충성과 절개를 알려 통정(通政)91)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599)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92)에 보인다.】홍용(洪溶)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판관(判官) 홍필세(洪弼世)의 아들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익원군(益原君) 홍경림(洪景霖)의 손자이다. 벼슬은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에 이르렀다.정유신(鄭惟愼)은 동래(東萊) 사람으로, 돈녕부(敦寧府) 정(正) 정익겸(鄭益謙)의 아들이고 참봉(參奉) 정위겸(鄭撝謙)의 양자이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이다. 벼슬은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이르렀다.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93)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살펴보니 "이소재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스승의 도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94) 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이나 되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그 문하에서 배움을 청한 선비들이 이처럼 많았을 것이나 문인 가운데 우리 선조께서 크게 인정했던 이들로는 다만 남봉, 범애, 홍공, 정공 네 사람뿐이므로 위와 같이 선별하여 기록한다.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履素齋李先生, 諱仲虎, 字風后, 宗室高安正精之子, 孝寧大君靖孝公補之玄孫. 妣星山李氏, 太宗朝左議政忠景公稷之後也. 高安正竝娶焉, 以正德壬申九月戊子生先生. 早失怙, 及長勵志, 爲文章, 體尙奇偉, 金慕齋安國見而奇之曰 : "非鬼神, 不能!" 受業於西峯柳處士藕, 而西峯卽寒暄堂門人也. 其學蓋有所淵源焉. 嘗讀孟子, 至人皆可以爲堯舜, 遂有所悟屛棄科業, 慨然有求道之志, 晝誦夜思, 至忘寢食, 刻九容九思於竹簡, 串以革帶, 終身佩服, 雖隆寒盛暑, 整冠束帶, 講論終日, 剖於精微, 徐花潭與之講論數日歎曰 : "不可及也." 自己卯士禍以後, 小學之敎, 爲世大禁, 而先生能杜門敎誨, 學徒坌集, 必先小學, 次及近思錄, 漸達諸經. 論議超詣, 致有聳動振作之效, 銓曺薦爲敎職, 累辭不就. 晩年病痼, 將欲歸田, 言官稱其行誼, 仍請留洛, 明廟嘉之, 授六品職, 不數月而歿, 卽嘉靖甲寅十一月二十六日也. 享年四十三. 門人經紀其喪, 明年正月二十五日, 葬于楊州松山先塋. 所著有心性情圖 性理明鑑 自警詩文數百篇. 至於璿璣玉衡之制, 致思輒解, 手自裁造, 度數不差. 【見履素齋〈墓誌遺事〉, 及朴相世采〈東儒師友錄〉】鄭南峰芝衍, 字衍之, 東萊人, 奉常寺正惟仁之子, 領議政文翼公光弼之曾孫也. 生于嘉靖乙酉, 隆慶己巳登第, 官至右議政. 萬曆癸未卒, 年五十九.柳汎愛祖訒, 字訒之, 晉州人. 西峯先生藕之子也. 生于嘉靖癸巳, 少無賴, 後折節, 爲學游履素齋門, 志業兼人, 尤以知禮各與鄭南峯芝衍 朴退菴應男崔 月潭滉爲莫逆交. 萬曆癸未, 南峯以右相薦公, 有忠孝大節, 可將三軍, 始出仕. 壬辰倭亂, 車駕西幸, 公適家食徒步追, 至居二年. 金斗巖應南, 以冢宰白公忠節, 陞階通政, 拜戶曹參議. 己亥卒, 年六十七. 【見東儒師友錄】洪溶, 南陽人, 判官弼世之子, 工曺判書益原君景霖之孫也. 官至掌隷院司議.鄭惟愼, 東萊人, 敦寧府正益謙之子, 參奉撝謙之繼子, 文翼公光弼之孫. 官至淸風郡守.按李芝峯睟光類說曰 : "履素齋當己卯士禍之後, 以師道爲己任, 摳衣受業者, 日數百人."云云, 則當時踵門請益之士, 若是其多矣, 而同門人中, 吾先祖所與之最相推許者, 只是南峯 汎愛 及洪公 鄭公四人, 故抄錄如右. 玄孫斗冬謹書. 고안(高安) 경기도 용인군 내사현의 옛 이름이다. 이보(李補) 1396~1486.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으로,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인 세종(世宗)에게 세자의 지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많은 불사를 주관하여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로, 중종 원년(1506)~16년(1521)까지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자는 국경(國卿)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고, 15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천녕현(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서봉(西峰) …… 유우(柳藕) 1473~1537. 자는 양청(養淸)이며, 서봉(西峰)은 그의 호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갑자사화로 스승이 죽음을 당한 뒤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심하였다. 사람들 …… 있다 《맹자》 〈고자(告子)〉하 제2장을 말한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 구사(九思)는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용모는 공손하기를, 말할 때는 충성스럽기를,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의심날 때는 묻기를,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얻을 것을 보고서는 마땅히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구용(九容)은 《예기》 〈옥조(玉藻)〉에 나오는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함에 있어서 응당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등을 말한다.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으로, 자는 가구(可久), 본관은 당성(唐城), 화담은 그의 호이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선시대 제사(祭祀)와 시호(謚號)의 의정(議定)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봉상시(奉常寺)의 정삼품(正三品) 관직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이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통정(通政) 조선조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말한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조선 후기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신라시대부터 조선 선조까지 유학자들의 사우 연원을 밝혀놓은 책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보인 학자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저술로는 문화백과사전의 성격을 띠는 《지봉유설》과 사후에 그의 글들을 모은 《지봉집》이 전한다. 옷자락을 …… 치켜들고 원문 '구의(摳衣)'는 스승이나 어른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어른이 계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 실내 구석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얼른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에 응대를 반드시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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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읊다 吟雪 세밑의 강 하늘에 눈이 펑펑 쏟아지니천지가 모두 수정 주머니 속에 들어갔네눈발 흩날리는 푸른 바다 은색 용이 꿈틀대고눈 날려 떨어지는 단산(丹山)273) 옥봉(玉鳳)이 높이 나네만 그루 배꽃 희고 고운 자태 뽐내고천 줄기 대나무 잎 푸른빛을 잃었네양원(梁園)에서 눈 읊기에는 재주가 비록 부족하나274)파수(灞水)에서 매화 찾으니 흥이 다시 생겨나네275) 歲暮江天雪正雱乾坤盡入水晶囊飄零碧海銀龍動飛落丹山玉鳳翔萬樹梨花誇素艶千竿竹葉失靑光梁園賦雪才雖短灞水尋梅興更長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 하였다. 양원(梁園)에서……부족하나 서한(西漢)의 양 효왕(梁孝王) 유무(劉武)가 양원(梁園)이란 호사스러운 자신의 원림(園林)에서 세모(歲暮)에 사마상여(司馬相如)‧매승(枚乘)‧추양(鄒陽) 등과 함께 주연(酒筵)을 베풀고 놀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먼저 시를 읊고는 종이를 주면서 사마상여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진(晉)나라 사혜련(謝惠連)이 이 일을 〈설부(雪賦)〉라는 제목의 부로 읊었다. 《文選 卷13 謝惠連 雪賦》 파수(灞水)에서……생겨나네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눈발 휘날리는 파교(灞橋)를 지나다가 그럴 듯한 시상(詩想)을 떠올렸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를 전거로 한 말이다. 《全唐詩話 卷5 鄭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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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125)의 은전을 축하하는 자리126)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7대손 정언 지선 敬次不祧典慶宴韻【七代孫 正言志善】 왕가의 제사 지내는 법 옛 사적에 상고하니부조는 충량한 선조를 기리기 위해서이네세상에 드문 깊은 은혜에 비구름마저 감동하고유묘에 은택 다했지만 초주127) 아직 향기롭네역사에 전해진 훌륭한 공적 주나라 고명128) 같고높은 공명 그림 ­원문 1자 결락­129) 에 걸렸네훈신은 대대로 복록 받는다 그 누가 말했던가재배하고 영원히 이 술잔 올릴 생각이네 祀典王家稽古方不祧所以褒忠良恩深曠代風雲感澤盡遺祠椒酒香嘉績簡垂周誥命丕名圖載漢□光勳臣世祿人誰說再拜千秋侑此觴 부조(不祧) 묘제(廟制)에 친진(親盡)이 되면 신주를 체천(遞遷)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조천(祧遷)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는 것이다. 축하하는 자리 기유년(1789, 정조13) 4월 25일에 신주를 고쳐 쓰는 행사를 하고, 진주 가곡리(佳谷里) 집에서 경축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農圃集 年譜》 초주(椒酒) 산초나무의 열매를 섞어서 빚은 술이다. 이 술로 새해 아침에 조상을 숭배하며 제사를 지내거나 웃어른에게 바쳐 축수하며 올린다. 주나라 고명(誥命) 《서경》의 〈주서(周書) 대고(大誥)〉·〈주서 강고(康誥)〉 등과 〈주서 필명(畢命)〉·〈주서 고명(顧命)〉 등을 가리키는 말로, 만세에 교훈으로 남을 만한 글이라는 뜻이다. 원문 1자 결락 원문은 '漢□光'이다. '漢'과 '光'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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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여 읊다 醉吟 흰 갈매기가 백발을 보고 白鷗見白髮스스로 환영 속 저라고 말하네 自謂影中渠날아왔다가 날아가지 않으니 飛來不飛去나 또한 세상과 멀어졌네 我亦世情疎 白鷗見白髮, 自謂影中渠.飛來不飛去, 我亦世情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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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삼아 짓다 戱題 희황씨가 죽지 않아 羲皇氏不死태고적 바람이 길게 불어오네5) 太古風長吹우습구나 어찌하여 可笑何爲者나는 이 시대에 태어났는지 謂余生此時 羲皇氏不死, 太古風長吹.可笑何爲者, 謂余生此時. 희황씨가 …… 불어오네 희황씨는 복희씨(伏羲氏)의 별칭이다. 도연명(陶淵明)이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여름철 한가로이 북창가에 잠들어 누웠다가 삽상한 바람이 불어와 잠을 깨고 나면 문득 태곳적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夏月虛閑, 高臥北窓之下, 淸風颯至, 自謂羲皇上人.〕"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원에서 한가로이 즐기는 은일(隱逸)의 정취를 말한다 《晉書 隱逸傳 陶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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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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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탄 臨河歎 하늘이 천하에 대성인(大聖人)을 태어나게 한 것은 천하를 위해서이지 어찌 한갓 옛 성인을 잇고 후학을 열어주려는170) 것뿐이겠는가? 이에 성인은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수레를 타고 팔방을 두루 다니다가 하수(河水)에 이르러 건너지 않고 탄식하셨네.171) 성인의 마음을 생각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조(趙)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음을 듣고는 이 도가 혹 시행되기를 바라 장차 먼 길을 떠나는 것에 의심이 없었으며, 서로 걸맞은 법도를 구하여 만일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1년 만에 변화를 기약할 수 있거늘172), 문득 성인의 행차가 하수에 이르니 넓고 광대한 강물에 느끼는 점이 있었네.아! 조나라 임금의 아름다운 명성도 전후로 어긋남이 있도다. 세상이 경박하여 자주 변화하니 훌륭한 자제173)173) 훌륭한 자제 : 원문의 '지란(芝蘭)'은 훌륭한 자제를 뜻한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도 믿지 못하고, 팔다리 같은 중신174)을 죽이고도 깨우치지 못하니, 어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예조(枘鑿)175)가 맞지 않아 버리고 떠났는데 다시 찾고, 한창 자라나는 것을 꺾어 인(仁)을176) 해쳤네. 기린이 머물지 않으니 둥지의 알이 엎어져도 애석해하지 않고, 봉황이 높이 날아가니 성인의 수레가 뒤돌아오던 길로 돌아가네. 그 뜻을 궁구해 보니 슬프도다. 천하를 돌아보아도 모두 조나라이니 누가 신의를 닦고 지극히 흠모하겠는가?공산필힐(公山佛肹)의 부름에 나아가고자 했으니177), 아마도 하늘이 성인에게 책임 지우신 것이 이와 같거늘 진(陳)으로 가고 채(蔡)로 가기를 황급히 한 것을178) 초광(楚狂)179)이 비웃은들 어찌 알겠는가?180) 덕이 있으나 지위가 없어 비록 한때의 봉록 없는 백성이었지만, 시서(詩書)를 산정(刪正)하고 예악(禮樂)을 제정하였으니 진실로 후세의 유학자들이 의탁하였네. 천년토록 공자를 흠앙하니, 산처럼 높고 높으며 물처럼 깊고 깊도다. 당시 하수에 이르러 탄식한 일을 생각하니 나의 마음에 더욱 걱정스러운 점이 있네. 만약 조간자(趙簡子)가 어질고 정성이 있어 그 땅에서 공자를 맞이했다면 공자는 과연 하수를 건넜을 것이고, 신하가 되어 그 재능으로 섬겼을 테니 조간자로 하여금 훌륭한 정치로181) 회귀하게 하였을 것이네. 조간자의 정사는 어질지 못하였니 어찌 시종일관 공자를 수용하였겠는가? 훌륭한 신하를 죽이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며182) 지위가 비슷하고 덕망이 비슷하다고 말하였으리라. 하늘이 큰 덕으로 임금 노릇을 못하게 하였으니 성인께서 분주히 떠돌아다닌 것이183) 마땅하여 성인은 마음을 맡길 곳이 없어 하수에 의탁하여 감흥한 것이니, 성인의 덕으로도 때를 만나지 못함이 이와 같도다. 아! 후세에 천명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이 일을 거울삼아야 한다. 天生大聖人於天下, 爲天下也, 豈特爲繼往開來. 肆聖人以天下爲己任, 環其轍周流乎八垓, 臨河上不濟而有歎, 想聖心寧不悲哉. 聞趙國之有君, 庶此道之或施, 將遠逝而無疑, 求矩矱之相宜, 如用我者有之, 化期月之可期, 忽聖行之臨河, 斯有感於洋洋. 噫! 趙君之令名, 有前後之乖張. 世澆澆而數化, 惟芝蘭亦不可恃, 戕股肱而莫悟, 夫何足與有爲. 旣枘鑿之難合, 來違棄而改求, 折方長而傷人. 猉獜兮不留, 覆巢卵而不惜, 鳳凰兮高飛, 回聖車而復路. 究厥志則可悲. 顧天下兮皆趙, 孰信修而慕之至. 欲赴公山佛肹之召, 殆天之所以責聖人者, 如斯之陳之蔡而遑遑, 可笑楚狂之何如. 有其德無其位, 雖一時生民之無祿, 刪詩書定禮樂, 實後世儒學之所托. 仰夫子於千秋, 山高高兮水深深, 想當時臨河之起歎, 尤有所慽慽於余心. 若簡子賢而有誠, 迎夫子於其地, 夫子果渡河, 臣事其能, 使簡子回至治. 簡子之爲政也非仁, 寧容夫子於終始. 殺一良輔而自智, 所謂地醜而德齊. 天不使大德而君之, 宜聖人之棲棲, 寄聖懷之無處, 托河水而興思, 以聖德不遇時如此. 嗟! 後來不知命者, 宜鑑于玆. 옛 …… 열어주는 원문의 '계왕개래(繼往開來)'는 지난 성인(聖人)의 뒤를 잇고 앞으로 올 후학을 열어주는 학문의 공을 말한다. 주자(朱子)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공자의 덕을 찬양하면서 "지나간 성인을 잇고 후세에 올 학자를 열어 준 것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堯舜)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繼往聖 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하수(河水)에 …… 탄식하셨네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 있을 때 진(晉)나라 조간자(趙簡子)의 가신 필힐(佛肹)이 중모(中牟) 땅을 근거지로 배반하여 공자를 불렀는데, 이때 공자가 가려고 하다가 결국 가지 않았고 또 조간자를 만나려고 황하에까지 갔다가 돌아선 일을 말한다. 《論語集註序說》 만일 …… 기약할 수 있거늘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孔子)가 "만약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단 1년만 정치를 담당하더라도 그런대로 괜찮아질 것이요, 3년이면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라고 하였다. 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과 옥수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庭階耳〕" 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팔다리 같은 중신 원문의 '고굉(股肱)'은 다리와 팔로, 임금이 팔다리처럼 의지하는 중신(重臣)을 뜻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순(舜)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는 짐의 다리와 팔과 귀와 눈이 되어야 한다.〔臣作朕股肱耳目.〕"라고 하였다. 예조(枘鑿) 예(枘)는 둥근 자루, 조(鑿)는 네모난 구멍을 뜻하는 것으로, 둥근 자루를 네모진 구멍에 넣으면 맞지 않듯이 쌍방이 서로 맞지 않거나 모순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초사(楚辭)》 〈구변(九辯)〉에 "둥근 자루에 모난 구멍을 뚫으니, 어긋나서 들어가기 어려울 줄을 나는 알겠다.〔圓枘而方鑿兮, 吾固知其鉏鋙而難入.〕"라고 하였다. 인(仁)을 원문에는 '인(人)'자 아래에 "아마도 인(仁) 글자의 오류인 듯하다.〔恐仁字之誤〕"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원문의 소주를 따라 국역하였다. 공산필힐(公山佛肹)의 …… 했으니 진(晉)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인 필힐이 중모(中牟)에서 반란을 일으켜 공자(孔子)를 부르자 공자가 그에게 가려고 한 일을 가리킨다. 《論語 陽貨》 진(陳)으로 …… 황급히 한 것을 《장자》 〈양왕(讓王)〉에 "공자(孔子)가 일찍이 진(陳)나라와 채(蔡) 나라의 사이에서 곤궁한 액운을 당했을 때, 7일 동안이나 밥을 지어 먹지 못하고 명아주 국에 쌀 한 톨도 넣지 못한 채로 멀건 국만 마시다 보니, 얼굴빛이 매우 초췌했는데도 방 안에 앉아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孔子窮於陳蔡之間, 七日不火食, 藜羹不糝, 顔色甚憊, 而絃歌於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보인다. 초광(楚狂)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육통(陸通)을 가리킨다. 그의 자(字)는 접여(接與)이다. 그가 난세를 만나 미친 체하니 사람들이 그를 초광(楚狂)이라 일컬었다. 접여(接輿)가 공자의 문을 지나가며 "봉이여 봉이여, 어찌 이리 덕이 쇠하였나.〔鳳兮鳳兮, 何德之衰也.〕"라고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論語 微子》 어찌 알겠는가? 원문에는 '하여(何如)'자 아래에 "아마도 지(知) 글자의 오류인 듯하다.〔恐知字之誤〕"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훌륭한 정치로 원문에 '지치(至治)'는 이상적인 훌륭한 정치를 말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지치(至治)는 향기로워서 신명을 감동시켜 이르게 한다.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명덕(明德)이 향기롭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고 하였다. 훌륭한 …… 지혜롭다고 하며 조간자(趙簡子)가 공자(孔子)를 초빙하자 공자가 하수(河水)까지 갔는데, 하수에서 진(晉)나라의 현신(賢臣)인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추조(陬操)'라는 노래를 지었다. 《사기(史記)》 47권 〈공자세가(孔子世家)〉와 《공총자(孔叢子)》의 〈기문(記問)〉 참조. 분주히 떠돌아다닌 것이 원문의 '서서(棲棲)'는 분주히 떠돌아다니는 모양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미생묘(微生畝)가 공자를 일러 "구는 어찌하여 이리도 분주한가. 아첨하는 것이 아닌가?['丘, 何爲是棲棲者與? 無乃爲佞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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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에서 최노첨에게 붙이다 2수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 金城寄魯詹【二首 乙未秋】 사람은 만 리 밖 북쪽으로 돌아가고기러기는 삼추에 남쪽으로 향하네고향 그리는 마음에 늘 멀리 바라보는데이별의 시름에 잠시 곁마를 멈추었네관가의 술 얼마간 가져왔고산의 안주 쓰고 단것 섞여있네만나는 것은 참으로 운수가 있으니종일토록 함께 노닐며 이야기하네행색은 관산 북쪽 사람이요돌아가고픈 것은 한강 남쪽이라가을바람 이별하는 소매 휘날리고지는 해 떠나는 말을 재촉하네세태는 오직 차가웠다 뜨거웠다 변하건만벗의 정은 고락을 함께 하네그 언제나 죽림 아래에서술마시며 함께 청담을 나눌거나 萬里人歸北三秋鴈向南鄕心常極目離愁暫停驂官酒隨多少山肴雜苦甘相逢良有數終日共遊談行色關山北歸心漢水南秋風揮別袂斜日促征驂世態惟寒熱朋情共苦甘何時竹林下杯酒做淸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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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연에게 주다〉 시11)에 차운하다 次贈孟浩然韻 목동의 피리 소리 안개 속에 일어나고어부의 노래 소리 달 속에 들려오네산으로 들어가 사슴과 벗이 되고문을 닫고 구름 속에 눕네계책 졸렬하니 당대 선비들에게 부끄럽고재능 미약하니 성군을 저버렸어라오호에 조각배 탄 나그네천 년 뒤에 그 맑은 향기 사모하노라12) 牧笛烟中起漁歌月裏聞入山行友鹿閉戶臥棲雲計拙慚時彥才微負聖君扁舟五湖客千載慕淸芬 맹호연에게 주다 시 당나라 이백의 〈맹호연에게 주다[贈孟浩然]〉 시를 가리킨다. 《李太白文集 卷7》 오호에……사모하노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범려(范蠡)의 풍모를 사모한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월(越)나라 대부 범려가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자(覇者)가 되게 한 뒤에, 홀로 배를 타고 오호(五湖)로 나갔다. 《史記 越王句踐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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