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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사의 제사 巡察使題辭 정 평사(鄭評事)의 충절과 업적은 마땅히 백 대에 걸쳐 보답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아 포상하는 일이 없으니 어찌 다만 북방 의사들만 항상 억울하게 여길 뿐이겠는가, 실로 조정의 벼슬아치들도 모두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왕명을 받고 북쪽으로 온 이후로 먼저 포상하고 애통하게 여기는 은전을 청하여 이로써 교화를 세우고 충의를 권면하려고 하였는데, 문득 유생들이 보낸 글을 보니 더욱 내 생각과 같은 사론이 있음을 알게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멈추지 않게 한다.사당을 세우는 한 가지 조목에 대해서는 계문(啓聞)의 선후는 미리 계산하지 않고 다만 공을 세운 곳에 일찍 세우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하다. 고서를 읽고 고인을 스승처럼 존모하는 후학들은 충효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으니, 즉 북방의 학자들로 하여금 사당의 곁에 서당을 세워서 학문을 강습하여 오직 평사의 충의를 스승으로 삼고 법으로 삼는다면 또한 어찌 유자의 가르침에 어긋나겠는가. 공사의 비용인 쌀과 베는 마땅히 순행할 때 넉넉하게 보조할 것이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급히 거행하고 주저하지 말라. 鄭評事忠節功業, 宜受百世之報, 而至今泯沒無表章之擧, 豈惟北方義士所常鬱抑, 實亦中朝縉紳之所共慨惜者也。受命北來, 先欲追請褒愍之典, 以之樹風聲而勵忠義, 忽見儒狀之來, 尤可見一脈士論之有在, 令人感歎不已。立廟一款, 無預於啓聞先後, 早爲營建於立功之地, 誠合事理。後學之讀古書, 師慕古人, 莫不以忠孝爲本, 則使北方學者, 設塾講習於廟傍, 惟評事忠義, 是師是法, 亦豈有違於儒者之敎也。役費米布, 當於巡過時從優相助, 宜循羣情, 急擧無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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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의 답서 老峰答書 정 평사(鄭評事)의 유사에 대해 편지로 알려주었거늘 아우는 실로 견문이 고루한데다가 동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캄캄합니다. 지금 보내준 편지를 받들고서 감개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전대 사람들의 숨겨진 덕과 감춰진 업적을 드러내어 후대의 아름다운 모범과 법을 세우니, 실로 우리 주자(朱子)가 마음속에 잊지 않았던 일인데 충효와 절의의 인물에 대해 더욱 마음을 쏟았으니 어찌 불행한 때를 만난 것에 느낌이 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형의 말씀이 정문부(鄭文孚)에 대해 언급한 것은 또한 우리 주자가 남긴 뜻과 같으니, 이는 실로 북방 20년 이래로 듣지 못한 말로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감동함이 일게 하니 즐겨 듣고서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까.그러나 사체(事體)로써 말한다면 반드시 조정에 알린 연후에 바야흐로 빛이 더할 것이며 의병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들도 또한 차례대로 포상 받게 될 것입니다. 형은 모름지기 나를 위해 글 한 편을 지어 전말을 자세하게 서술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그 당시 실상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 평사의 말년 일도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삼가 선상국(先相國)의 시어6)에 대해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시서에 능한 김종서(金宗瑞)는 훈척인 윤관(尹瓘)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또한 윤관에게는 사당이 있는 반면 김종서에게 사당이 없는데 시서에 능한 이와 훈척의 형세가 같지 않다는 뜻에서 그 시를 지은 것 같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풍자하려고 지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아우의 생각은 조정에 청을 허락받은 뒤에 육진(六鎭)에 김종서의 사당을 세우고 의병을 처음 일으켰던 어란리(禦亂里)에 정문부의 사당을 세워서 공을 포상하고 후대에 알려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所示鄭評事遺事, 弟實聞見孤陋, 而至於東史, 尤所昧昧。今承來敎, 感慨難勝。發前人之潛德鞱輝, 立後世之懿範令則, 實吾朱夫子之所嘗眷眷者, 而尤致意於忠孝節義之間, 豈非遭時不幸, 有所感而然耶。吾兄之言, 乃及於此, 亦惟吾朱夫子之遺意, 此誠北方二十年來所未聞之說, 益令人慽慽於心也, 敢不樂聞而從命。然以事體言之, 必須聞諸朝廷, 然後方爲增重光耀, 從義諸人, 亦可次第追褒, 兄須爲弟, 草作一狀, 甚悉顚末, 使朝廷明知其時實蹟如何, 鄭評事末年事, 亦可幷及也, 如何如何。謹以先相國詩語, 追想其指意所向, 則金之詩書, 不當幷祀於尹之勳戚, 又似有尹有廟, 而金無祠者, 亦出於詩書勳戚之勢不同之意, 得非譏諷世人之作耶。弟意則得請之後, 立金廟於六鎭中, 立鄭廟於禦亂里首事之地, 以之褒功示後可也。 선상국의 시어 바로 앞에 보이는 택당 이식의 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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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가 노봉에게 두 번째 올린 편지 畏齋再上老峰書 근래에 삼가 답서를 받고서 엄동에 존체가 편안하다고 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제 마음이 대단히 위로가 됩니다. 가르쳐 주신 뜻을 삼가 잘 알겠으니, 저번에 아뢴 일에 대해여 다만 흔쾌하게 허락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별도로 김종서(金宗瑞)와 정문부(鄭文孚) 두 공의 사당을 세우려고까지 하였으며 또한 이에서 나아가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그들의 업적을 더욱 빛내려고 하니, 이 지역의 인사들이 이를 듣고서 모두 고무되어 교화를 진작시키려는 공의 뜻을 우러르고 있습니다.이곳 인사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곳에 정공을 위하여 이런 일을 도모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지금까지도 일이 성취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게 되었으며 합하께서 또한 이미 허락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만약 다시 조정에 청하여 가부를 기다린다면 허락을 기필할 수 없게 되며 또다시 성취하지 못할까 하는 염려가 있으니, 이에 합하에게 글을 올려 먼저 사당을 세우려고 합니다. 원컨대 합하께서는 사당을 세우고서 뒤미처 조정에 알려 이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대개 이러한 일은 사론의 공의에 근거하였으니 비록 조정의 명이 없더라도 또한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염려하는 것도 또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청한 바를 굽어 들어주시는 것이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겠습니까. 제생들이 직접 정문(呈文)을 올리려고 하였지만 먼 곳에서 오가는 동안 일이 점차로 지체될까봐 이에 문서를 파발로 부치는 예에 의거하여 받들어 올립니다.재물이 나올 곳이 없으니 본부의 영곡(營穀)을 만약 넉넉한 숫자로 지급해 주신다면 이번 겨울에 처리하여 내년 봄에 곧바로 지을 수 있을 것이니, 합하께서 북쪽으로 순행하다가 돌아가는 날에는 제가 모시고 가서 그 성취된 일을 보고서 가신다면 어찌 천고에 통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한편 윤관에게는 사당이 있는데 김종서에게는 사당이 없다는 것에 대해, 저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김공이 죽을 때의 일로 인하여 함께 제사 지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시서에 능한 사람과 훈척은 함께 제사지내기 어렵다.'고 의심하시니, 선친의 시어가 과연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비록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보내주신 말씀은 그 의미가 절로 좋으니 또한 어찌 함께 제사를 지내겠습니까. 만약 육진 가운데 행영 근처에 별도로 사당을 세운다면 더욱 영광이 될 것입니다. 다만 김공의 일에 대해 제가 의심하는 바는 관계 되는 일이 한 도에 그치지 않고 한 나라의 윤리와 관계되는 큰 일이니, 이 일은 만약 청을 얻게 되면 온 나라에 빛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허락은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별지에서 아뢴 바를 바라건대 자세히 들으시고서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계를 초고를 지어 올렸는데 고칠 곳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한 선친이 기록한 내용을 만약 장계 안에 수록한다면 장계의 내용일 너무 산만할 듯하여 별도로 장계의 뒤에 기록하였으니, 잘 모르겠습니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또한 별도로 기록하여 공이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사당에 배향할 인물의 가부에 대해 먼저 가르침을 주시고 또 계문하여 자손을 녹용하며 혹은 본도로부터 휼전(恤典)을 더하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육진의 의사의 사적을 미처 전부 탐문하지 못하였는데, 이후로 마땅히 기록을 더하여 올려 보낼 것이니, 일단은 이것으로써 품의의 바탕을 삼으십시오. 장계는 삼가 바라건대 일단 연기하여 다시 진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日者, 伏承下復書, 伏審隆寒, 台體履萬安, 區區無任伏慰之至。且伏悉敎意, 曾所陳達之事, 不惟快蒙頷可, 至欲別立金鄭兩廟, 而又從而啓聞, 以增重光耀, 此地人士聞此, 已皆聳動, 咸仰振作風敎之至意也。第聞人士所言, 此中欲爲鄭公謀此擧久矣, 而至今未成, 今幸公議齊發, 而閤下亦已許之, 則此誠千載一時之會也。若復請於朝廷, 待其許否, 則其許有未可必, 而又有不能成之慮, 玆以呈文於閤下, 欲先立廟宇, 願閤下追聞于朝而賁餙之。蓋此等事, 根於士論之公, 則雖無朝命, 亦可爲之, 而其所慮, 亦有意見, 伏望俯從所請, 未知如何。諸生等欲躬進呈文, 而遠地往復之間, 事漸稽遲, 玆依文狀付撥之例, 收捧以上矣。物力無出處, 本府營穀, 若蒙優數題給, 則今冬可以料理, 明春卽可營造, 閤下北巡廻還之日, 端夏陪侍往觀, 見其就事而出去, 則豈非千古一快耶。且尹有祠而金無祠者, 鄙意則必是緣金公死時事, 而有難於幷祀也。今承下示, 以詩書勳戚不當幷祀爲疑, 則先人詩語, 雖未知果出於此意否也, 然來敎之意自好, 又何必幷祀也。若別立於六鎭中如行營近處, 則尤有顏1)光矣。但金公事, 端夏所疑, 則所關係非止一道事, 此係一國倫常之大者, 此事若得請, 於一國有光矣, 而但朝廷之許, 有未可必也。別紙有所稟, 幸關聽而敎之如何。狀啓草搆上, 而似多有可改處。且先人記事, 若收入於狀中, 則狀辭似太冗, 別錄於狀後, 未知如何。當時從義之人, 亦別錄以備裁擇。蓋廟享人當否, 先賜下敎, 且或啓聞, 錄用子孫, 或自本道加恤典如何。六鎭義士事蹟, 未及盡訪, 從當加錄以上, 姑以此爲稟議之地耳。狀啓則伏望姑遲之, 以待更有所達, 如何。 저본에 '顔'으로 되어 있으나 '顯'의 오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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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의 별록 從義人別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된 이붕수(李鵬壽)는 경성(鏡城)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지조가 굳셌으며 기개와 도량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임진년 역적 국세필(鞠世弼), 국경인(鞠景仁)의 반란 때 이붕수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앞장서서 도모하여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를 구하여 주장(主將)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러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정 평사(鄭評事)가 지달원(池達源), 최배천(崔配天) 두 사람과 함께 이붕수의 집에 찾아가니, 이붕수가 나와 보고서 대단히 반겨하면서 온 집안 살림을 기울여 그를 받들어 주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나아가서 역적 국씨들을 죽이고 창의별장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였으며 모두 세 차례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백탑교(白塔橋)의 전투에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습니다.정공이 길주 목사가 되었을 때 '백탑교에서 이 전중을 애통해하다.'라는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 보게 하였습니다. 경성 사람들이 《의려록(義旅錄)》을 지었는데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토벌한 그의 공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판관(判官) 민유중(閔維重)이 그를 위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판관(判官) 홍여하(洪如河)가 묘갈명을 지었습니다. 대개 정공은 붕수가 아니면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고 붕수는 정공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이붕수를 으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정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운다면 마땅히 이 사람으로 배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증손 7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빼어난 선비로 이동백(李東白), 이동영(李東榮), 이진영(李震英), 이발영(李發榮) 등이 있는데, 이동영은 일찍이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고 합니다.○판관(判官) 최배천(崔配天), 참봉(參奉) 지달원(池達源) 두 사람은 경성 사람으로 모두 의를 좋아하였습니다. 정 평사가 처음 두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이붕수의 집에 가서 의병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서 역적 국씨들을 죽이고 왜구들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시종 이 두 사람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최배천은 첩서(捷書)를 품고 행재소에 나아가 아뢰니 선조대왕께서 인견하고서 비단을 하사하고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이란 직첩을 내려주었습니다. 당시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은 정공의 업적이 자신의 업적을 가릴까 시기하여 두 가지 일을 날조하여 위에 보고하였기에 정표(旌表)와 상격(賞格)이 행해지지 않았으며, 난리에 의병을 일으켜 따르던 선비들 가운데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지달원은 후에 선원전 참봉(璿源殿參奉)이 되었는데, 이는 조정에 친한 사람이 그의 현능(賢能)함을 알아 천거한 것이지 전공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사람과 강문우(姜文佑)를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으며 또한 확실하지 않아서 어렵다는 의논이 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만 세 사람의 공은 모두 《의려록(義旅錄)》에 실려 있습니다. 판관(判官) 민유중(閔維重)이 이들 모두를 위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니 그 공은 실로 보통보다 뛰어난데, 최배천은 직접 행재소에 갔기 때문에 겨우 영직(影職)7) 오품첩을 얻었고 지달원은 전혀 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의 자손을 비록 녹용(錄用)하기 어렵지만 또한 마땅히 휼전(恤典)을 보태 주어야 합니다.지달원은 적통이 없고 성해(成海)와 학해(學海) 두 첩의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문장에 능하고 학식을 갖추어 그 부친의 풍모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모친이 내비(內婢)이기 때문에 천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애석합니다. 지달원의 군공은 참으로 뒤미처 포상해야 하므로 만약 그 두 아들을 면천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최배천의 자손에 대해서는 민유중 공이 판관으로 있을 때 조정에 보고하여 면강(免講)8)시켜 주었으며 도사(都事)가 간혹 거론할 때도 있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합하께서 가을 순행할 때 하교하기를 '무릇 의병을 일으킨 자손들은 마땅히 별도로 대우하라.'고 하였다는데, 분명하게 지시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첩문을 만들어 지급하게 된다면 마땅히 실질적인 은혜가 될 것입니다. 최배천의 손자 최익(崔瀷)은 유생으로 바야흐로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고 합니다.○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는 경성 사람이다. 전 권관(權管)으로 정공을 따라 군사를 일으켜 역적 국경인을 포박하였습니다. 선봉장으로 왜적을 토벌하여 능히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에 돌격하였으며 싸우면 반드시 공을 세웠습니다. 사람됨이 호방하고 강건한 장부로 약속한 말은 무겁게 지키며 의기를 중시하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의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손자 가운데 세상의 중망을 받는 자도 있으며 학식을 갖춘 유생도 있습니다. 또한 천한 손자도 있는데, 강민(姜敏)과 강인(姜仁) 두 사람은 관청의 종입니다.○이기수(李麒壽)는 경성 사람으로 이붕수의 형입니다. 정공이 의병을 일으킬 때 좌수(座首)로써 의병을 일으킬 것을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또한 역적 국경인이 왜적을 맞이하여 성과 해자, 창고가 다 타버리자 불에 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문을 봉하고 재물을 모아 의병을 기다렸습니다.○서수(徐遂)는 경성 사람입니다. 전 좌수로써 이기수와 함께 의를 행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천한 손자 서주(徐冑)는 바야흐로 행영의 관노로 있습니다.○충의(忠義) 허진(許珍)과 무사(武士) 김국신(金國信)은 길주(吉州) 사람입니다. 허진은 적개공신(敵愾功臣) 허유례(許惟禮)의 증손으로, 김국신과 함께 임진왜란을 당하여 충심에서 일어난 분노가 격렬하였으니, 몰래 산골짜기를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여 정공을 따라 역적을 죽였습니다. 허진은 우척후장이 되고 김국신은 좌척후장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니, 자세한 것은 《길주사적(吉州事蹟)》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전공은 경성의 강문우와 비슷하니, 서원리(徐元履)가 순찰사로 있을 때 이 사람들을 위해 또한 길주에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끝내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을 만약 사당에 배향한다면 경성의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 세 사람도 마땅히 사당에 배향하여야 하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위의 두 사람을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합당한지요.허진의 손자 허철(許喆)은 지식을 갖춘 유생이며, 김국신의 증손 김형(金衡)은 무예를 닦고 있습니다. 김형의 부친 김기남(金起男)은 두 번이나 임금을 위해 병사를 일으켜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하였습니다. 목사(牧使) 최유해(崔有海)가 소장을 올려 의병장의 자손을 거두어 쓰라고 청하니, 임금에 감사에 명하여 남은 자손들을 채록하여 녹용(錄用)하라고 하였는데 해당 관청에서 아직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허진과 김국신 두 사람의 자손이 만약 녹용하게 된다면 이붕수의 자손을 참으로 마땅히 먼저 등용해야 하며, 최배천과 지달원 그리고 강문우의 자손도 또한 마땅히 녹용해야 합니다. 대개 최유해의 소장에 대해 이미 선왕의 윤허를 받았는데 해당 관청에서 지금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은전에 흠결이 되니, 더구나 지금 국가에서 바야흐로 북변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자손을 더욱 특별히 녹용하여 장려함을 보여야 합니다.○김려광(金麗光)은 경성 사람이며, 충의위(忠義衛) 허대성(許大成)은 길주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전투에서 죽었는데 전공을 상고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다만 전투에서 죽었다고 짐짓 이붕수처럼 배향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다만 전투에서 사망한 자손은 또한 휼전을 더하지 않을 수 없는데 두 사람의 자손에 대해 세금을 감면하는 일이 없으니, 이는 원통한 일입니다. 마땅히 본부(本府)와 본주(本州)에 관문(關文)을 보내 세금을 면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대성은 공신의 후손으로 그 자손은 으레 면강을 하였는데, 김려광의 자손은 면강첩이 없으니 또한 마땅히 만들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수문장(守門將) 박은징(朴銀澄), 부장(部將) 박연주 삼형제는 경성 사람입니다. 정공을 따라 전공을 세워 선무(宣武) 3등에 참여하여 자손들이 면강되었으며 강문우도 또한 이등에 참여하였는데, 그 밖의 유생은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종공신(原從功臣)9)은 반드시 무인이었으니 공을 기록할 때 상경하여 스스로 호소하였고, 유생은 상경할 수 없어서 누락된 것입니다.○박유일(朴惟一)은 경성 사람입니다. 왕자가 왜놈에게 사로잡혔을 때 구출해 낸 공이 있는데, 왕자가 그 이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왕자가 잡힌 것을 슬퍼하여 구출하였는데, 이름은 물을 필요 없습니다."라 하고서 답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대개 그 사람됨이 효성스러워 온 마을이 칭송하였으며 정공을 따라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은 또한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자손에게 면강첩을 준다면 어떻겠습니까.○오윤적(吳允)은 회령(會寧) 사람입니다. 본래 유생으로 국경인이 난리를 일으키자 창의(倡義)를 모의하여 향교에서 유생들을 불러 모았는데 국경인이 향교를 포위하고서 위협하며 수창한 자를 나오게 하자, 오윤적이 자수하면서 나갔습니다. 마침 군인 신세준(申世俊)이 요각(鐃角)을 훔쳐서 객사 문밖에서 부니 역적 무리들이 국경인이 명령을 낸 것으로 착각하고서 일제히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유생들이 그들을 위협하여 따르게 하여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고서 나아가 국경인을 공격하였습니다. 유생들이 거짓으로 이르기를 "만약 오윤적을 풀어주면 마땅히 전투를 그만두겠다."라고 하니, 국경인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드디어 국경인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오윤적은 본래 거의를 앞장서서 수창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며, 다만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의 직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손 오준(吳鐏)과 오일(吳鎰)은 지금 향임(鄕任)을 하고 있습니다.○출신(出身) 차응린(車應麟)은 이미 권관이 되었고, 양손(養孫) 차지행(車地行)은 일찍이 향임을 지냈습니다.○출신 박극근(朴克勤)의 아들 박희열(朴希悅)과 박희발(朴希)은 일찍이 향임을 지냈습니다.○유생 김전(金銓)의 양손 김상인(金尙仁)은 장수하여 벼슬을 받았고, 그의 아들 김여익(金汝益)은 유학을 익히고 있습니다.○김경(金鏡)의 손자 김주현(金柱玄)과 김주우(金柱宇)는 장수하여 벼슬을 받았습니다.○유생 차득도(車得道)의 손자 차병(車柄)은 바야흐로 좌수(座首)로 있으며, 그의 아들 차천준(車天遵)은 유생입니다.○출신 황수(黃垂)의 손자 황중경(黃重瓊)은 바야흐로 향임으로 있습니다. 오윤적 이하는 모두 회령 사람입니다.○출신 김사주(金嗣朱)와 도훈도(都訓導) 최경수(崔敬守)는 모두 종성 사람입니다. 정 평사를 따라 거의하였으나 공이 없어서 상을 받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후에 오랑캐를 토벌한 공으로 모두 당상관에 올랐습니다. 김사주의 첩손 김수(金銖)와 최경수의 아들 득례(崔得禮)는 출신이라고 합니다.○원충서(元忠恕)는 경흥(慶興) 사람입니다. 정 평사를 따라 거의하여 전공이 뛰어나 원종공권을 받았으며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습니다. 증손 원자명(元自明)은 지금 향임으로 있습니다. 원충서의 첩의 아들 시발(時發), 시득(時得), 시길(時吉), 시말(時末)은 그 모친이 내비(內婢)이기에 지금 모친의 신분을 따르고 있습니다.○정윤걸(鄭允傑), 정응성(鄭應聖) 부자는 경성 사람입니다.○여정(余貞)은 본래 온성(穩城)의 관노입니다. 계미년에 신립(申砬) 장군을 따라 전공을 세웠으며, 정 평사를 따르다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다만 아들 하나를 남겼는데 지금은 죽었으며, 손자 송학(松鶴)이 바야흐로 관노로 있습니다. 공로를 세웠는데 전투하다가 죽은 자손을 비록 면천하기는 어렵더라도 세금을 면하고 휼전을 내리는 것도 미치지 않으니 탄식이 일어납니다.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정공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였으나 당시 사실을 채록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사적을 찾아 보내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것이 온다면 마땅히 추가로 기록하여 올리겠습니다.아! 북관을 차지한 이래로 변방을 열어 넓히고 오랑캐를 쳐서 공을 세운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당시에 모두 공로를 표창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정공은 낮은 관리로써 큰 공을 세웠음에도 당시 감사와 병사가 시기한 나머지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서 그 공을 가려 결국 난리에 거의한 사람들에게 공로의 표창이 내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하면서 "지금도 사람들이 분개하고 한탄하면서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당초에 조정에서 듣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만 한둘의 거짓 장계에 의거하여 믿게 되었다. 그 후로 20년간을 언덕과 습지를 가리지 않고 향촌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음이 없었으나 으레 이전의 일이라고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끝내 사실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할 때는 지금부터 50년 전입니다. 그 사이에 다만 민 판관만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또한 자손들을 면강해 주었습니다. 감사(監司) 서원리(徐元履)는 그 선조가 이곳에서 난리를 피하였는데 의병의 도움을 받아 재앙에서 벗어나게 되었기에 당시의 일을 마음에 두고서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옛 것을 좋아하고 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어찌 드물겠습니까. 아! 이전 일이라고 하여 마음에 두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세속 사람들이 일처리 하는 방식입니다. 옛날의 현인과 군자는 일찍이 이러한 일을 급급하게 드러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한 것과 민 판관이 제사를 지낸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선친의 기록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다행이도 합하께서 순행하는 날을 만났으니 다시 이에 힘을 쏟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된다면 사리에 있어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자세히 이렇게 썼으니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이러한 뜻을 혜량하여 이들을 널리 드날린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贈司憲府監察李鵬壽, 鏡城人, 自少時有志槩, 氣宇不凡。壬辰鞠賊之亂, 鵬壽首謀擧義, 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 而未得其人。鄭評事與池達源·崔配天兩人, 同至鵬壽家, 鵬壽出見大喜, 傾家奉之, 推爲主將。留一月, 進誅鞠賊, 爲倡義別將, 轉討倭寇, 凡三捷立功, 白塔之戰, 中丸而死,追贈司憲府監察。鄭公牧吉州, 以白塔郊哀李殿中出題試士。鏡城人著《義旅錄》, 詳錄其倡義討倭之功。閔判官維重爲文致祭, 洪判官如河撰墓碣銘, 蓋鄭公非鵬壽, 無以擧義, 鵬壽非鄭公, 無以成功。當時之士, 鵬壽當爲第一。若爲鄭公立廟, 當以此人配享。今有曾孫七十餘人, 其中儒士之俊秀者, 李東白·李東榮·李震英·李發榮, 而東榮則曾經順陵參奉云。判官崔配天·參奉池達源兩人, 鏡城人, 皆好義者也。鄭評事初遇兩人, 同至李鵬壽家, 恊謀擧義, 誅鞠賊討倭寇, 終始宣力最多。配天懷捷書奏行在, 宣祖大王引見賜帛, 給軍器寺判官職帖。時觀察使尹卓然, 嫉鄭公聲績掩己, 加以搆捏二事交上, 故旌賞格不行,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坐此故也。達源後爲璿源殿參奉, 此由朝廷有所親, 知其賢而擧之, 非以戰功也。此兩人及姜文佑, 有幷爲配享之議, 而又有疑難之議, 未知如何如何。但三人之功, 俱在《義旅錄》。閔判官維重, 皆爲文致祭, 其功實出尋常, 而配天以躬往行在, 故僅得影職五品帖, 達源全未蒙賞, 此三人子孫, 雖難錄用, 亦宜加恤。達源則無嫡子, 有妾子兩人成海學海, 皆能文有識, 有乃父風, 而以其母內婢, 故從賤役, 可惜可惜。達源軍功固當追褒, 若免其兩子, 使之奉祀, 則可無遺憾。配天子孫, 閔判官時, 報使免講, 而都事或有擧論之時。伏聞閤下秋巡時, 下敎'凡倡義人子孫, 當爲別樣處置'云, 而未有明白指揮, 若蒙成給其帖文, 則當爲實惠耳。配天之孫瀷, 以儒士方治經云耳。僉使姜文佑, 鏡城人。以前權管, 從鄭公起兵, 縛鞠賊, 以先鋒將討賊, 能冒死赴敵, 而戰必有功。爲人豪健丈夫, 能立然諾, 重義氣, 詳在《義旅錄》。其孫有世望者, 有識儒生耳。又有賤孫敏仁兩人, 爲府奴。李麒壽, 鏡城人, 鵬壽之兄。鄭公倡義時, 以座首, 共謀倡義。且鞠賊迎倭, 城池府庫板蕩之餘, 收其餘燼, 封閉修輯, 以待義兵。徐遂, 鏡城人。以前座首, 與李麒壽同事有功。有賤孫胄, 方爲行營官奴。忠義許珍·武士金國信, 吉州人。珍, 敵愾功臣惟禮之曾孫, 與國信當壬辰之亂, 忠憤激烈, 潛行山谷, 募義兵, 從鄭公誅叛賊。珍爲右斥候將, 國信爲左斥候將, 討倭立功, 詳在《吉州事蹟》。此兩人戰功, 如鏡城之姜文佑。徐巡使元履時, 欲爲此等人, 亦立廟於吉州而未果云。此兩人若廟享, 則鏡城之崔池姜三人, 亦宜廟享, 但未知右兩人廟享合當否也。珍孫喆, 有識儒生。國信曾孫衡, 業武。其父起男, 再度勤王, 終始從軍, 牧使崔有海陳疏, 請收用義兵將子孫, 上命監司, 採訪遺孫, 以裨錄用, 而該曹尙不施云。珍國信兩人子孫, 若被錄用, 鵬壽子孫固當先用, 如配天達源文佑子孫, 亦當錄用矣。大槩有海之疏, 旣被先朝允許, 則該曹之至今不施, 實爲欠典, 況今國家方軫北邊事, 此等人子孫, 尤當特爲錄用, 以示奬勸也。金麗光, 鏡城人, 忠義許大成, 吉州人。此兩人戰亡, 而無事功可考文字, 不可只以戰亡, 故廟享如鵬壽也。但戰亡子孫, 亦不可不加恤, 而兩人子孫俱無復戶之事, 此爲冤痛, 宜行關本府本州, 使之復戶也, 如何。大成則以功臣後裔, 其子孫例爲免講云, 而麗光子孫, 則無免講帖, 亦宜成給也, 如何如何。僉正朴銀柱·守門將朴銀澄·部將朴連柱三兄弟, 鏡城人也。從鄭公有戰功, 參宣武三等, 子孫免講, 姜文佑, 亦參二等, 而其他儒生, 則皆未參。原從, 必是武人, 則錄功時, 上京自訴, 儒生則不能上京而漏落也。朴惟一, 鏡城人。王子被執時, 有救解之功, 王子問其名, 則答曰: "吾哀王子救之, 名則不必問也。" 因不答而去。蓋其爲人, 有孝行, 一鄕稱之。從鄭公起兵云, 而無可考事實, 然如此人, 亦不可無褒賞, 若給子孫免講帖, 則如何如何。吳允迪, 會寧人。本以儒生, 鞠景仁之亂, 倡謀聚會儒品於鄕校, 景仁圍鄕校, 脅出首倡, 允迪自首而出。適軍人申世俊, 竊取鐃角, 吹于客舍門外, 叛徒疑景仁出令, 齊會, 儒生輩仍勒率, 斬其不從者, 進攻景仁。儒生誑謂'若給允迪, 當罷戰', 景仁從之, 遂窮討景仁斬之。允迪本首倡, 而無成功, 只授軍器主簿職帖, 其孫鐏鎰, 方爲鄕任。出身車應麟, 已行權管, 養孫地行, 曾經鄕任。出身朴克勤子希悅·希發, 曾經鄕任。儒生金銓養孫尙仁, 老品官, 子汝益業儒。金鏡孫柱玄·柱宇, 老品官。儒生車得道孫柄, 方爲座首, 子天遵儒生。出身黃垂孫重瓊, 方爲鄕任。吳允迪以下, 皆會寧人。出身金嗣朱·都訓導崔敬守, 皆鍾城人。從鄭評事而無功賞。兩人後以討胡功, 皆陞堂上。嗣朱妾孫金銖, 敬守子得禮, 出身云。元忠恕, 慶興人。從鄭評事戰功特異, 受原從功券, 官至萬戶。曾孫自明, 方爲鄕任。忠恕妾子時發·時得·時吉·時末, 以其母內婢, 故方從母役。鄭允傑·鄭應聖父子, 鏡城人。余貞, 本穩城官奴, 癸未, 從申砬有戰功, 從鄭評事死於嶺東之戰。只有一子而今死, 有孫松鶴, 方爲官奴。有功戰亡之子孫, 雖難免賤, 復戶恤典亦不及, 可歎。右人等皆從鄭公討賊, 而時未採得事實, 今方行關各邑, 使之求覓以送, 若來則當追錄以上矣。噫, 自有北關以來, 開拓土境擊胡, 有功之人何限, 而當時皆蒙旌賞, 獨鄭公以卑官立大功, 爲其時監兵使妬忌, 誣啓掩功, 以致從難之士, 旌賞闕然。先人記事曰: "至今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又曰: "當初朝聞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隰咨詢, 而例不以前事爲意, 終未有記其實者"云。先人記事時, 距今五十年矣。其間惟有閔判官爲文致祭, 且使子孫免講。徐監司元履以其先世避亂此地, 賴義兵脫禍, 故留意當時事, 欲爲立廟而未果。世間好古慕義之人, 何其鮮也。噫, 不以前事爲意, 此乃流俗之人事。古之賢人君子, 未嘗不以如此等事, 爲汲汲表章之地, 先人之記事, 閔判官之致祭, 卽出於此意, 而端夏今持先人記事而來此, 幸遇閤下巡宣之日, 而不復着力於此事, 使之永歸於泯沒, 則其於事理, 當如何也。玆以縷縷至此, 伏惟閤下諒此意, 有所褒揚, 不勝幸甚。 영직 실제로 맡아서 하는 일은 없으면서 그 직함만 빌려 가지는 벼슬을 이르던 말이다. 면강 조선시대 교생(校生)이 강경시험(講經試驗)에서 떨어져 군역에 나가게 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강경을 면제하는 것을 이른다. 원종공신 큰 공을 세운 정공신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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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가 집으로 보낸 편지 畏齋家書 근래 변방의 소식이 연달아 이르니, 오랑캐가 강을 따라 오가는 것이 평소와 다르거늘 그 까닭을 알 수 없는데 지금 비로소 답이 왔다. 어떤 이는 '후춘(厚春)이 불러 항복하였던 우지개(亏知介)의 무리들이 영고탑(靈古塔)의 오랑캐를 배반하였는데,12) 그들을 안정시켜 살게 하려고 하니 배반한 자들이 내려갔다.'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깊은 곳에 오랑캐들이 인삼을 캐기 위해 온다.'라고 하니, 두 말이 같지 않기에 일단 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데, 병사(兵使)는 계문(啓聞)을 하려고 한다.대개 눈앞에 어떤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 있어서 점점 좋지 않은데, 이것이 내가 이전부터 걱정하던 것으로 반드시 정문부(鄭文孚)의 사당을 세워 의사의 마음을 거둬서 민심을 한 곳으로 모으는 토대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방백이 지금 이미 흔쾌하게 허락하였으며 또한 공사비용까지 지급하니, 내 생각으로는 먼저 신원을 청하려고 하였는데 방백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의논하고서 조정에 계문하여 의병에 종사한 사람들의 자손을 녹용하라고 청하려고 한다.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 방백이 개인적으로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문의하였는데, 이미 정공을 위해 완벽하게 신원했다고 하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내가 이곳에 와서 이 일을 힘쓴 것이 헛되지 않게 되었다. 近日邊報續至, 胡人之沿江往來, 異於常時, 而莫知其由, 今始有所答。或云, '厚春所招降亏知介輩, 叛靈古塔之胡, 欲爲安集, 叛者而下去。' 或云, '深處, 胡人爲採蔘出來。' 兩言不同, 姑俟後報, 而兵使欲爲啓聞耳。大槩目前, 有何變故而萌兆, 漸似不好, 此吾從前所憂, 而必欲立鄭廟, 爲收拾義士心之地矣。方伯今已快許, 且給工費, 吾意欲先請伸冤, 而方伯以爲不必然。歸路欲更議, 啓聞仍請錄用從義人之子孫耳。立廟事, 方伯以私書問于領台, 則已爲鄭公伸冤甚悉, 多幸多幸。吾之此來, 得辦此事, 庶不爲虛行也。 후춘(厚春)이……배반하였는데 후춘은 만주족(滿洲族)의 이름으로, '후춘호(厚春胡)' 또는 '후춘 부락(厚春部落)'으로도 불리었다. 영고탑(靈古塔)은 청(淸)나라의 발원지로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일대에 있다. 함경도 경흥(慶興)의 건너편에 있는 야춘(也春) 지역에 살다가 점차로 경원(慶源)의 후춘강(厚春江) 건너편으로 이주하였으며, '우지개(于知介)'라는 종족(種族)이 주종을 이루었고, 토지가 비옥하고 성질이 강포하여 자주 우리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仁祖實錄 24年 8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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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에서 신을 주운 일1)을 그린 그림 圮橋取履圖 다리 위에는 한 노인 있고다리 아래에는 한 선비 있으니노인은 다리 위에서 신을 떨어뜨리고선비는 다리 아래서 신을 줍네신을 주우라는 명 이미 너무 거만한데꿇어앉아 바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그가 어른이기에 내가 어른으로 대한 것이니가지를 꺾는 듯 어려운 일 아니로다2)한나라를 보좌할 지략을 전수하니한나라가 망한 치욕을 끝내 씻었네지금까지도 그림 속에서여전히 영웅의 풍모 일어나누나 橋上有一翁橋下有一士翁墜橋上履士取橋下履命取已太倨跪進亦何意彼長我長之折枝非難事一授佐漢略竟雪亡韓恥至今畫圖中尙有英風起 이교에서……일 장량(張良)은 한(韓)나라에서 대대로 상신(相臣)을 지낸 가문의 후예로, 한나라가 망하자 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을 맹세하고 지내던 중 하비(下邳)의 이교(圮橋)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이 신발을 이교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신발을 주워오라 명하자, 장량은 신을 주워 꿇어앉아서 노인에게 신겨주고 노인으로부터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 받았다. 장량은 훗날 한 고조(漢高祖)의 모신(謀臣)이 되어 한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했다. 《史記 留侯世家》 가지를……아니로다 장량이 이교의 노인에게 신을 신겨주고 공경을 표한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왕도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맹자가 "노인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왕께서 왕도정치를 행하지 않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爲長者折枝, 語人曰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王之不王, 是折枝之類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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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에서의 연회188)를 그린 그림 瑤池宴圖 약수189) 서쪽에 왕래하는 길 끊겼으나요지는 원래 푸른 복숭아 사이에 있네희왕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 거슬러 올라 당도하니황하를 세상에 내보낸 것 후회하네190) 弱水西邊斷往還瑤池自在碧桃閒姬王却遡東流至悔遣黃河出世間 요지에서의 연회 요지(瑤池)는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하던 곤륜산(崑崙山)의 선경이고, 요지연(瑤池宴)이란 바로 주 목왕(周穆王)이 서왕모를 찾아가 요지 가에서 함께 연회를 가졌던 데서 온 말이다. 《열자》 〈주목왕(周穆王)〉에 "마침내 서왕모의 손님이 되어 요지 가에서 연회를 가졌다.[遂賓于西王母, 觴于瑤池之上]"라고 하였다. 약수(弱水) 신선이 사는 봉래(蓬萊) 섬 주위를 약수가 에워싸고 있는데, 그곳은 새털처럼 가벼운 물체도 금세 가라앉기 때문에,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전설이 있다. 《海內十洲記》 희왕이……당도하니 희왕은 주 목왕을 가리키는 말로, 주나라 왕실의 성이 희(姬)씨이므로 희왕이라 한 것이다. 황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주 목왕이 황하를 거슬러 올라 찾아왔으므로, 세상에 황하를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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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191)가 바둑 두는 모습을 그린 그림 四皓圍碁圖 바둑 한 판에서 승패가 나는 형세유희인 줄 알면서도 또한 마음 쓰네산속에 은거하면서 기략과 권모를 쓰니중원의 초한 전쟁을 부질없이 피했구려 一局圍碁勝敗形自知爲戲也關情山居亦用機權手枉避中原漢楚爭 사호(四皓)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해 상산(商山)에 들어가 은거하던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 이들 모두 수염과 눈썹이 흰 노인이었기 때문에 사호(四皓)라고 불렀다. 상산사호(商山四皓) 라고도 한다. 《史記 留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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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서241)의 시를 부기하다 附孫文恕韻 층층 얼음 쌓인 잔도를 얼마나 가고 갔는가첩첩 눈 쌓인 오랑캐 산에서 만리 밖 고향 생각나네오직 꿈속에서 그리워하다가안개 낀 달 속에 행영에 이르렀네 層氷閣路幾行行疊雪胡山萬里情惟有相思一片夢惹烟和月到行營 손문서(孫文恕) 1566~?. 본관은 안동, 자는 인부(仁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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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석316)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317) 지었다 射虎石 赴燕時作 원숭이 팔 장군318) 밤에 사냥 갔다 돌아올 때말 앞에 무엇인가 희미하게 보였어라.산의 동쪽 양들이 일어났는지319) 처음에 의심하였고흙다리 위에 다니는 사람인가320)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곧 아니어라.범이 산모퉁이 등진 것 같으니 어찌 두려워 쫓으랴점차로 길을 막으니 손으로 비키라고 할 수 있으랴.만약 나귀를 보인다면 응당 재주를 다할 것이며321)곧 여우가 온다면 참으로 위세를 빌릴 듯.눈동자 놀람에 커져 다만 내 솜씨만 믿을 뿐담이 크니 어찌 심기를 잃으랴.금복고322)를 뽑아 유성처럼 번득이니오호궁323)을 당겨 쏘니 달빛도 떨어지네.천둥이 활시위에 응하여 골짜기를 울리고귀신이 화살촉 따라 숲을 쪼개누나.오묘하게 꿰뚫으니 어찌 맨손으로 잡는다고 자랑하랴큰 사냥은 합동으로 포위하는 것과는 무관하네.다만 털 짐승으로 보이는 바위에 화살을 꽂으니324)산골이 본래 자갈로 이뤄진 것을 어찌 알랴.세 겹의 갑옷도 뚫는 사람은 적고한 발에 암퇘지를 연달아 잡는 것325)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네.용맹함으로 맹수를 잡으니 생각건대 기상이 굳세며활을 쏴 금석을 뚫으니 그 이치 어디에 의거하였나.기의 감응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원래 다르지 않으니집중으로 견고함을 꿰뚫은 것은 그 이치에 어긋나지 않네.창을 휘둘러 지는 햇빛을 되돌린 것326)을 모름지기 믿으며흐르는 피가 빈 옷을 적신 것을 의심하지 말라.어찌하면 단단한 바위에 정성이 남을까마침내 제후로 봉해질 것인데 운명이 박하였어라.327)오랑캐 변방 저절로 조용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고한나라 은총은 대단히 박하여 사관도 오히려 비난하였지.전속국 소랑은 숫양이 새끼를 낳지 못하였고328)오랑캐 금은 제후를 봉할 때 다만 말만 살지게 기르면 될 뿐.황제는 웅걸찬 재주 지녔지만 오히려 장수는 잃었으니바위는 신물이 아니지만 다만 기미를 알았네.천추 동안 안개에 숨어 유적으로 남았으니한 바위가 석양을 마주하고 있어라.지난 일 지금은 새가 지나간 듯한데행인은 옛날 조상하며 말을 멈추누나.어찌하면 연연산의 빗돌329)로 바꾸어당시 한나라 비장군의 행적 새겨 넣을까. 猿臂將軍夜獵歸馬前何物見依俙山東羊起初疑是圯上人行近却非乍似負嵎寧畏逐漸成當道可能揮若令驢見應輸技卽有狐來定假威目駭只憑吾手法膽麤那失此心機抽來金僕流星閃彎罷烏號落月輝霹靂應弦傳谷響鬼神隨鏑擺林霏妙穿何用誇徒搏大獵非關作合圍但道毛蟲能飮羽豈知山骨本成磯三重洞甲人猶鮮一發連豝古亦稀勇奪爪牙思卽壯射開金石理何依氣通物我元無間誠貫堅頑故不違須信揮戈回返景莫疑流血濺空衣如何介石精誠在畢竟分茅命道微胡塞自裁人共惜漢恩偏薄史猶譏蘇郞屬國非羝乳金虜封侯但馬肥帝有雄才猶失將石非神物獨知幾千秋霧隱留遺跡一片雲根對夕暉往事至今如過鳥行人弔古駐驂騑若爲化作燕然石銘記當年漢將飛 사호석 한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이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을 때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의 돌을 보고 호랑이라고 여겨 활을 쏘아 맞혔는데, 가서 보니 큰 바윗돌 속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漢書 卷54 李廣傳》 연경에……때 1610년 46살 때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원숭이 팔 장군 이광이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천성적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원숭이처럼 긴 팔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산의……일어났는지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서 "황초평이 15살 때 집에서 양을 키우게 하였다. 도사를 따라 금화산 석실에서 도를 닦았다. 40여 년이 지난 뒤에 형이 찾아와서 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초평이 '워이! 양들아 일어나라.'라고 하니, 이에 흰돌이 모두 일어나 수만 마리의 양이 되었다."라고 했다. 흙다리……사람인가 선인(仙人) 황석공(黃石公)을 이른다. 진(秦) 나라 말기에, 다리 위[圯上]에서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 일편(一篇)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13년 후에 네가 나를 제북(濟北)에서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 누런 돌이 바로 나일 것이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55》 만약……것이며 검주(黔州)에는 본디 나귀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귀를 싣고 들어가 그곳 산 밑에 풀어 놓았더니, 호랑이가 처음에는 나귀의 큰 체구와 큰 울음소리로 인해 그를 대단히 무서워했으나, 그 후 나귀와 점차 가까워진 다음 나귀의 발길에 한 번 채여 보고 나서는, 나귀에게 그 밖의 다른 기능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나귀를 물어 죽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柳河東集 卷19》 금복고 《춘추좌씨전》 장공(莊公) 11년 조에 "승구의 전쟁에서 장공이 금복고로 송나라 대부 남궁장만을 쏘아 맞혔다.[乘丘之役, 公以金僕姑射南宮長萬.]"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금복고는 화살 이름이다."라 하였다. 이후 좋은 화살을 가리켜 말할 때에 쓰인다. 오호궁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서 "활을 쏘는 자는 오호궁(烏號弓)을 집어 들고 기위전(綦衛箭)을 먹여 쏜다."라고 하였다. 그 주에 "오호는 뽕나무인데, 재질이 탄력성이 강하다. 까마귀가 뽕나무 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려고 하면 그 가지가 아래로 휘어졌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므로 까마귀가 감히 날지 못하고 그 가지에서 운다. 사람들이 그 가지를 베어 활을 만들어 오호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화살을 꽂으니 초나라 웅거자(熊渠子)가 밤에 길을 가다가 바위를 범으로 오인하고는 활을 쏘았는데 바위에 워낙 깊이 박혀서 화살 끝의 깃털이 보이지 않을 정도[飮羽]였다는 일화가 《한시외전》 권6 24장에 보인다. 한……것 《시경》 〈소남(召南) 추우(騶虞)〉에서, "저 무성한 갈대밭에, 다섯 암퇘지를 한 발에 쏘아 잡네.[待茁者葭, 一發五豝.]"라고 하였다. 창을……것 옛날 노 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적에 해가 마침 서쪽으로 기울자, 창을 잡고 해를 향하여 휘두르니, 해가 90리나 되돌아왔다는 '휘과회일(揮戈回日)'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마침내……박하였어라 이광은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와 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모두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그만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하였다. 전속국……소랑 소랑은 한 무제 때 전속국(典屬國)의 벼슬로 있다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이다. 흉노의 선우가 항복하라고 위협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다 땅굴 속에 구금되어 담요의 털을 눈[雪]과 뭉쳐 먹으며 연명하였다. 북해(北海)로 옮겨 양(羊)을 기르게 하며 선우가 말하기를 "숫양[羝羊]의 젖이 나오면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했다. 그 뒤 갖은 고생을 하며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면서 돌아오게 되었다. 《漢書 卷54 蘇建傳》 연연산의 빗돌 후한(後漢) 때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개선(凱旋)하여 연연산(燕然山)에 이르러 비(碑)를 세워서 그의 공업(功業)을 기술하였다. 그 글은 그를 수행했던 반고(班固)가 지었다. 《後漢書 竇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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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사의 장계 巡察使狀啓 신이 임무를 받고 북쪽으로 온 지가 벌서 1년이 지났습니다. 세 차례 여러 고을을 순행하여 본도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당장 급하게 염려되는 것은 군정을 정비하고 민심을 굳게 뭉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가운데 민심이 또한 근본이 되는데, 변방은 도성에서 대단히 멀어 왕의 교화가 미치기 어렵고 풍습이 강하고 사나우며 습속이 어리석어서 난리에 쉽게 유혹되고 이치로써 깨우치기 어렵습니다.이미 지나간 일로 말하자면, 옛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가 모반을 하고서 '조정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북방민을 모두 죽이려한다.'고 속이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미혹되어 일도(一道)가 역적을 따랐습니다. 국가에서 다섯 도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겨우 토벌, 안정시켰습니다. 임진년의 변란이 일어나 왜구들이 북방에 들어오자 지방민들이 함께 일어나 반란을 일으켜 장리(長吏)를 앞 다퉈 포박하고 온 성이 왜적을 따랐습니다.당시 좌의정(左議政) 김귀영(金貴), 부원군(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승지(承旨) 황혁(黃赫) 등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모두 반란의 역적들에게 결박되어 왜적에게 넘겨졌으며, 남북의 병사(兵使)들과 여러 진의 수재(守宰)들이 적에게 함락되어 거의 다 죽었습니다. 다만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일찍이 지방민들과 잘 지냈기에 그들의 구원에 힘입어 겨우 목숨은 면하였습니다. 장차 바닷길로 남쪽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유생들이 요청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먼저 반란의 역적을 죽이고 이어서 왜구를 토벌하였습니다. 남도의 의사들이 함께 일어나 합세하자 전투를 벌일 때마다 반드시 승리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니 함경도가 다시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당시 왜구와 오랑캐가 함께 난리를 일으켜서 배와 등으로 적을 상대하는데 반역의 백성이 그 안에서 일어나 이미 반란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왜적이 비록 물러났지만 그 형세는 응당 오랑캐를 따르려고 하였는데, 두세 유생이 일개 종사관을 추대할 줄 알아 적은 병사로 많은 적병을 격파하여 마침내 큰 공을 세워 우리 제왕이 일어났던 예전 강토가 오랑캐에게 빼앗기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열이 이와 같은데, 마침 그 도를 다스리던 신하가 그 공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공적을 숨기게 된 처사를 당하게 되어 마침내 의병을 규합했던 선비들로 하여금 드러나게 정상(旌賞)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이곳 민심은 분통을 터뜨리고 한탄하면서 '왕의 일이 이뤄질 수 없다.'고 하니, 국가에서 공훈에 보답하고 백성을 격려하는 도리로 본다면 어찌 은전에 큰 흠결이 없겠습니까.더구나 지금은 북방에 커다란 근심이 있는데, 북도에 만약 변란이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일어난다면 도내 민심은 믿기 어려움이 아마도 이전보다 심할 것입니다. 이전 의사의 공을 이처럼 가려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후대에 충의의 인물이 계속 나올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간담이 서늘합니다. 그 당시 의사가 비록 모두 타계하였더라도 뒤미처 휼전을 베푸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지금 신이 여러 고을에서 채방하여 뚜렷하게 공을 세우고서 전투에서 죽은 자 10여 명의 성명을 찾아서 뒤편에 기록하여 삼가 올려 보냅니다. 각각의 성명 아래에 대략 사실을 기술하여 조정에서 참작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습니다. 혹은 관직을 추증하고 혹은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혹은 전결을 주거나 세금을 감면하여 주고 혹은 자손을 면천하여 주는 등 경중을 나눠 휼전을 거행하여 민심을 굳게 뭉치게 하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 실로 오늘날 북방의 제일가는 급선무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저의 주제넘은 생각으로 황공하게 장계를 올립니다. 을사년 11월 모일. 臣受任北來, 已過一年。三巡列邑, 審察本道形勢, 目前緊急之慮, 不出於修治軍政, 固結人心而已。然於二者之中, 人心又爲之本, 而邊土絶遠, 王化難及, 風氣強悍, 習俗愚蠢, 易惑於亂, 難曉以理。以已往之事言之, 昔在世祖朝, 李施愛謀叛, 誘以'朝廷遣兵, 盡殺北民', 則人皆驚惑, 一道從逆, 國家悉發五道之兵, 僅討平之。至于壬辰之變, 倭寇入北, 土人幷起爲亂, 爭縛長吏, 擧城附賊。時左議政金貴榮·府院君黃廷彧及其子承旨爀等, 奉臨海·順和兩王子, 皆被叛賊縛執與賊, 南北兵使, 諸鎭守宰, 陷賊殆盡。獨評事鄭文孚, 曾與土居儒生相善, 故賴其救護, 僅以身免。將由海道南還, 儒生輩要與共起義兵, 先誅叛賊, 繼討倭寇, 南道義士, 幷起合勢, 每戰必捷, 平定大難, 咸鏡一道, 復爲我有。當時倭胡交亂, 腹背受敵, 逆民中起, 旣爲叛賊, 倭雖退, 其勢當附於胡,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箇從事, 以少擊衆, 卒就大功,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義烈如此, 而適被按道之臣恥其功不出己, 誣啓掩功, 遂使糾義之士, 未獲顯被旌賞, 至今人心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其在國家酬報激勸之道, 豈非大端欠典乎。況今北方深憂方在, 北道脫有事變出於意外, 則道內人心之難恃, 恐有甚於前日。旣往義士之功, 若是其掩蔽, 則將何以責後來忠義之繼出乎。言念及此, 心膽俱寒。其時義士, 雖盡作故, 不可無追恤之道, 故今臣採訪列邑, 得其表著立功死事者十數姓名, 開錄于後, 謹此上聞。各人名下, 略註事實, 以備朝廷裁處。或追贈官職, 或錄用子孫, 或田結復戶, 或子孫免賤, 分輕重擧行恤典, 以爲固結人心之本, 則實爲今日北方第一急務, 故敢此妄料, 惶恐馳啓事。乙巳十一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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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에 쓰다 송성명 題彰烈祠【宋成明】 파도 부서지듯 의기 떨친 곳이요마구 쳐들어온 흉도 섬멸한 전장이네공이 아니면 북도 땅 없었을 터선왕께서 공렬을 표창하셨네사당은 호숫가 내려다보고풍성은 바닷가 고을에 떨쳤네격전의 모습 골똘히 생각하니장백산처럼 높고 울창할 테지 奮義波頹地殲兇豕突場靡公無北土彰烈在前王廟貌臨湖曲風聲振海鄕永思酣戰狀鬱嵂白山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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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선교랑 보은현감 금암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宣敎郞報恩縣監錦巖羅公事實記 공의 휘는 덕준(德峻)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성은 나 씨(羅氏)이고, 호는 금암(錦巖)이다. 조상은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대대로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았고, 자손들은 고향을 벗어나지 않아 호남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그 계통의 구체적인 것은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선고(先考)의 〈사실기(事實記)〉에 실려 있다. 선고는 나사침(羅士沈)으로, 중종 때 효자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일찍이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모셔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다. 벼슬은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여러 아들은 종훈(從勳)으로 여러 번 추은(推恩)되었다.두 아내를 두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두 부인은 각자 아들 셋을 두어 육룡(六龍)이라고 일컬어졌으니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다.공이 6살이 되었을 때 윤 부인이 세상을 뜨자, 후비 정 부인은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길러 주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는데, 찬성공 또한 몸소 인륜에 독실하여 귀에 익고 눈에 젖었으니 가정에서 보고 감복한 것이 다만 글의 가르침뿐만이 아니었다. 나이 17~8세에 이미 고인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세속에 휩쓸리거나 과거공부에 개의치 않았다. 아우 나덕윤(羅德潤) 금봉공(錦峰公)과 함께 날마다 서로 학업을 갈고 닦으며 형제를 지기(知己)로 삼았다.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29)은 찬성공에게 이종형(姨從兄)이므로 그 문하에서 배우기를 청하여 선유들의 실마리를 얻어 들었다. 경저(京邸)30)에서 찬성공을 따르며 이름난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 교유하였는데,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과 더불어 《예경(禮經)》을 강론하였고, 사암(思庵) 박순(朴淳)31), 율곡(栗谷) 이이(李珥)32)가 모두 인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는 공을 전송하며 "들으니 남쪽에 정개청(鄭介淸)33)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학행이 독실하여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땅히 종유하여 학업을 마치시오."라고 하였다. 율곡은 내사한 《주자어류(朱子語類)》34) 한 질을 전별품으로 주었다. 정개청은 호가 곤재(困齋)이다. 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성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예를 갖춰 곤재에게 스승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강의계(講義契)를 맺고, 절목은 향약을 더하거나 빼어 법으로 삼고 학령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35)을 준칙으로 삼았으니, 요컨대 학문을 닦고 힘써 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곤재 선생이 늘 공을 애지중지하여 그를 추천하고 장려했던 말이 편지글에서 문답한 글에 나타나 있으니, "타고난 본성이 강하면서도 밝아 소견이 날로 발전하고 두렵고 위로됨이 모두 지극하다."라고 한 것, 또 "뜻이 성현의 공부에 돈독하여 전적으로 수양공부에 나아가 성명(性命)의 온전함을 구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라고 한 것, 또 "그대처럼 고상하고 밝고 두려워할만한 이에게 감히 스스로를 크고 망령되이 높다고 하여 후생이 예의를 지켜 대우하는 것을 기대하겠는가. 그와 함께 의심스런 예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면 탄복하게 된다."라고 한 것들이다.공은 돈후하고 정밀하며 자세하여 몸소 은혜롭고 자애로운 행동을 살펴 남들에게 추앙받았지만 그 스스로는 실례를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례가 매우 많으니, 모두 정 씨의 《우득록(愚得錄)》36)에 기록되어 있다. 집안에 간사한 부인이 유복자라 사칭하여 양자를 기르고자 도모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찬성공이 막 호읍(湖邑)에 부임하여 공의 형제들이 그 일을 가지고 윤리와 기강을 근거로 소장을 올렸으나 오랫동안 지체되어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37)이 고을에 부임하여 거짓을 밝혀내 결단하며 "세상의 쟁송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은 하늘의 이치로써 하니, 그대들은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교유하였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우고 한훤(寒暄)38), 일두(一蠹)39), 정암(靜菴)40), 회재(晦齋)41), 퇴계(退溪)42) 등 다섯 분의 선생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게 했는데 실제 공의 형제가 의논하고 학봉이 지은 것이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있었다. 정여립은 일찍이 거짓된 마음과 가식적인 행동으로 당세를 두루 속였다. 처음에는 율곡과 우계(牛溪) 성혼(成渾)43)에게 발을 들여 칭찬을 받고 인재로 뽑혀 자못 힘을 얻었으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정여립은 비로소 마음과 얼굴을 바꾸어 도리어 율곡을 배척하고 비판하였다. 선조(宣祖)가 교서에서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와 같은 자이다.44)"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개 조정의 의론이 어그러진 이래로 동서가 서로 배척함이 갈수록 격해지자 정철은 속이 좁고 괴팍하여 불평이 많았다. 또 곤재가 일찍이 정철이 주색에 빠지고 예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45) 세상의 도가 유폐될 것을 걱정했는데 이 때문에 정철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홍천경(洪千璟)과 양천경(梁千頃)은 향리에 살면서 행실이 경박하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사류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자들이었는데 오직 정철만을 우러러보면서 곤재를 업신여김이 특별히 심하였다. 공의 형제가 곤재를 따라 공부를 하는 사람 중 가장 이름이 났기 때문에 질투를 받는 것 또한 심하였다. 정여립이 옥사를 일으키기에 이르자, 정철이 위관을 맡아 때를 틈타 없는 죄를 꾸미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생각을 받들어 모함하는 상소를 지어 조야의 유명 인사 30여 명을 무고했는데 곤재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또 공의 부자의 이름을 들어 말하기를,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엄밀히 교유를 맺고 있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죄 없는 사람들을 신원해 주는 글을 꾸몄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공의 형제들의 말을 날조하여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다. 수년이 지나면 반드시 태평한 세상이 올 것이니 기다려라."라고 했으니 그 밖의 다른 말들도 흉악하고 참람하기 그지없었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이 분통함이 심하여 정암수 등이 모인 장소에 가서 면전에서 그를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들의 변란을 틈타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여 몰래 사악한 상소를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벼슬아치들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 그만둘 것이다. 이들은 반드시 간교한 사람들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정암수 등 10인을 잡아와 국문하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더욱 속이고 진실을 가리는 계획을 세워 양사(兩司)와 태학생들을 부추겨 교장(交章)으로 구제하기를 힘써 '상소한 선비는 국문할 수 없다.'라고 말하게 하니 마침내 그 명령이 그치게 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자들이 더욱 많아 향읍으로 하여금 죄인 무리, 홍천경, 품관 중 불량한 자들을 수소문하게 하였는데 유발(柳潑) 등의 무리가 그 사이에서 모함하기도 하였다.경인년(1590) 여름에 곤재가 체포당하고 공의 부자 여섯 사람도 모두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것을 도모했다는 것이 죄의 사안이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특별히 내려 "이름이 효자에 든 자는 용서하고, 증오를 쌓아 무고하게 끌어들인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마침내 곧바로 용서받았지만, 공은 차율에 따라 부령으로 귀양 갔다. 여러 형제 중 어떤 사람은 변방 고을로 옮기고, 혹은 중도에 유배 갔다. 이때 죽음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찬성공의 지극한 행동에 묵묵히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함이 있어서였다. 곤재 또한 경원(慶源)으로 장배(杖配)되어 가는 길에 공의 처소에 들러 마주했는데 근심하는 낯빛이 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에서 위패를 만들어 곡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후회하고 국시(國是)가 안정 되자, 옥사를 주관한 정철이 강계(江界)에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또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자 크고 작은 죄를 지어 귀양 간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에 공도 계사년(1593)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갑오년(1594)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46)이 영의정이 되어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10가지 조목에 따라 선비를 취하여 발생한 난리에 방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청하고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47) 등 3인을 뽑았는데, 공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재상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48)이 천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망운(望雲)49) 감목관(監牧官) 겸(兼) 장모속사(掌募粟事)의 관직을 내렸다. 예전에는 임금께서 목관의 다스림이 허술할까 걱정하여 일찍이 대관(臺官)을 거친 자들을 등용하여 감목(監牧)으로 삼아 수령(守令)들을 규찰하고 왕래하면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 당시에는 마음대로 둔전을 만들어 군대의 양식에 보충할 계획을 세웠으니 아예 사람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한 것이다. 전임 수령과 낭서(郎署)에 임명된 자들을 대부분 임명했으나 공은 초야에서 뽑아 임명했으니 어쩌면 공의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듬해 서애 재상이 나라를 막는 대책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論啟)를 올리라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50)의 종사관으로 공을 취하도록 청하여 전년에 모은 곡식을 품자하여 연변의 여러 둔전에 파종 허가를 청하였는데, 이 일은 《서애유고》에 실려 있다. 이윽고 사포서(司圃署) 별좌(別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찬성공의 나이가 70이 넘었기에 부모를 섬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상례를 치름에 예를 어김이 없었고 장례를 치를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의 배가 갑자기 앞에 있는 강에 이르자 비록 매우 위급한 때를 당하나 슬픔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더욱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 봄에 상복을 벗었다. 그해 가을에 곤재의 원통함을 상소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발탁되었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전에 그를 좋아하지 않은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공의 형제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를 매우 원통해 하며 비록 난리 속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의리상 차마 잊을 수 없어 지하에 계신 분을 위해 한번 씻어주기를 바랬다.그보다 앞서 을미년(1595)에 공의 아우 금봉공(錦峰公)이 처음 상소를 올려 바로잡으려 하였다. 비답에 "너희들의 의론이 지극하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라."라고 하며 비변사에 명을 내리셨다. 재상 서애 유성룡이 회계(回啓)하고 애통해 하면서 애당초 옥사가 너무 지나친 이유를 아뢰고 또 정개청(鄭介淸)이 학술과 검박한 행동으로 자임하다가 우연히 한 편 지은 글로 인하여 몸을 망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이러한 원통함을 하소연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께서는 훗날 얼굴을 마주하고 의논하자고 답하는 데 그치셨다. 이듬해 큰형 나덕명(羅德明) 소포공(嘯浦公)이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맺는 도를 상소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에 이르러 또한 공의 상소가 있었다. 대개 큰 옥사가 있은 뒤에는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의 형제는 위기를 피하지 않고서 소리를 내어 진심을 드러내 앞뒤로 서로 이어 거의 임금께서 생각을 되돌리기를 바랐지만 임금께서는 속으로 어렵게 여기셔서 여전히 사림(士林)들의 섭섭함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사람들 중에 정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또 공의 집안을 원망하여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지만 공은 어려움을 겪고서도 일찍이 근심과 수모 때문에 뜻을 꺾지 않은 채 평탄하게 일을 처리함이 이와 같았다.공은 가정 계축년(1553) 2월 3일에 태어나 52년을 살았다. 만력 갑진년(1604) 8월 28일에 세상을 떠나 남영산(南榮山) 간좌(艮坐)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인조 때 아들 나위소(羅緯素)가 원종(原從)에 참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현종(顯宗) 때 동추(同樞)에 오르자 다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덕을 갖추었고 순수함이 넘쳐 두루두루 교제를 하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정도를 따르면서도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화한 기운과 온후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했음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공의 뜻은 자공(子貢)이 풍부함과 절약 사이에 마음을 두었기에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여 어렸을 때부터 집안 식구들의 생산 작업을 일삼지는 않았다. 그는 학문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의를 강마하여 밝힐 수 있다고 여겼다.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로부터 사서(四書)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했고 또 여러 책에 두루 통하였는데 스승과 벗들을 섬기며 종유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수양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글을 남김으로써 가르쳤으니 마음을 보존하고 체득하며 몸을 이기고 형체를 실천하는 노력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여 그것에 힘쓰라고 했으며 분수에서 벗어나고 몸을 영화롭게 하거나 집에 편안히 거처하면서 스스로 편하게 살려는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신당부하면서 경계하고 조심하도록 하였다. 종신토록 효친의 뜻에 성의를 다하며 "효도란 천경(天經), 지의(地義), 강상(綱常), 윤기(倫紀)의 중한 것과 큰 것이요 모든 행동의 근원이며 사람 도리의 늘 해야 하는 것이니, 학자들은 이를 배울 따름이고 행하는 사람은 이것을 행할 뿐이다. 효자의 집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어 평생의 한으로 여겨 영리에는 생각을 끊고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는 데 뜻을 두었다. 타인을 만날 때도 집안에서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부모님께 음식을 올릴 때에도 그것을 나누어 드려야 되는지를 여쭈어 부모님의 뜻을 받들었다.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정 부인(鄭夫人)은 공의 집에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은 별좌(別坐)의 집에서 거처하는 것이 편안하다고 늘 말하였다.공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을 때 아우 나덕신이 막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으니 영화로움과 부모 모양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으며 공은 능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왕래하고자 하였다. 고을 사람들 중 자손을 가르치고 두 번째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보은(羅報恩)을 모범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선조의 제사가 있을 때면 반드시 3일 전부터 소복을 입고 조용히 거처하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옛사람을 사모하여 형제들과 함께 살며 당(堂)은 같지만 실(室)은 달리하려는 제도를 계획하여 장차 의전(義田)51)을 만들고자 했으나 생각지 못한 화를 당한데다가 다시 나라의 난리까지 더해져 모든 뜻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종족을 극진히 사랑하고 정다운 마음이 망운에 있었다.52) 심한 흉년을 만나 백성이 매우 곤궁해지자 공은 장랑(長廊)을 짓고 일가의 자제들을 모두 모아 기근에서 구제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서 학문을 권장하니, 전하는 자들이 미담으로 삼아 칭찬하였다. 그의 실제 행동이 집안에서 드러난 것이 대략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장수 황씨(長水黃氏) 어모장군(禦侮將軍) 황호(黃顥)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領議政)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6세손으로, 신해년(1551) 8월 9일에 태어나 45년을 누리고 을미년(1595)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렴(柳濂)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의 8세손으로 정축년(1577) 7월 22일에 태어나 30년을 누리고 병오년(1606)에 세상을 떠났다. 기일은 같은 정월 10일이다.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모두 공의 무덤에 합장하였다.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를 지냈고, 나계소(羅纘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고을에서 고생을 하다가 만년53)53) 만년 : 원문 '질대년(秩大年)'은 대년질(大年秩)과 같은 장수하여 맡은 직책을 말한다. 곧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인데, 여기에서는 만년에 벼슬함을 표현한 것이다.에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공의 첫째 딸은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가서 절의를 지키다 죽어 정려로써 표창 받았고, 둘째는 선교랑(宣敎郎)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이들은 황 씨가 낳았고, 나치소와 나경소는 유 씨가 낳았다. 또 양자로는 나함소(羅緘素)가 있다.나찬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나겁(羅衱)은 선교랑(宣敎郎)을 지냈고, 딸은 김훈(金壎)에게 시집갔다. 나계소는 아들이 없어 동추(同樞)의 셋째 아들 나진(羅袗)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위소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세 아들 중 나염(羅袡)은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냈고, 나금(羅襻)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고, 나진(羅袗)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첫째 딸은 생원 김만수(金晩壽)에게, 둘째 딸은 이만종(李萬鍾)에게, 셋째 딸은 서령(署令) 정기수(鄭岐壽)에게 시집갔다. 김잡은 후손이 없고, 최광헌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최명해(崔鳴海)와 최익해(崔翼海)가 있는데, 최익해는 생원시에 합격했고, 딸은 조종경(趙宗慶)에게 시집갔다. 나치소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장남 나기(羅褀)는 통덕랑(通德郎)을, 나겸(羅衤兼 )은 선교랑(宣敎郎)을, 나균(羅袀)은 수작(壽爵)으로서 부호군(副護軍)을, 나형(羅衤瑩 )은 통덕랑을 지냈다. 두 딸은 강석종(姜碩宗), 정두형(鄭斗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경소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적(羅襀)은 통덕랑을 지냈고, 나단(羅襢)과 나선(羅䙋)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딸은 이진교(李震嶠)에게 시집갔다. 나함소는 딸을 하나 두었는데 양변(梁忭)에게 시집갔다. 나겁은 나두천(羅斗天)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는 나두우(羅斗宇)이다. 나염은 나두삼(羅斗三)을 낳았는데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 나두장(羅斗章)은 교관을 지냈다. 나반은 아들이 없어 나두장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진의 첫째 나두춘(羅斗春)은 좌랑을 지냈고, 나두하(羅斗夏)와 나두추(羅斗秋)는 모두 통덕랑을 지냈으며, 나두동(羅斗冬)은 생원에 합격했다. 나기는 나두규(羅斗奎), 나두서(羅斗緖), 나두집(羅斗集), 나두홍(羅斗弘)을 낳았다. 나겸은 두회(羅斗會)를 낳았다. 나균은 자식이 없어 나두선(羅斗璇)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형은 나두선, 나두종(羅斗琮)을 낳았다. 나적은 나두남(羅斗南)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차남 나두창(羅斗昌), 나두형(羅斗亨)은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나단은 아들이 없어 나두형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선(羅䙋)은 첫째 나두원(羅斗元), 둘째 나두문(羅斗文)을 낳았는데 모두 통덕랑을 지냈고, 셋째 나두도(羅斗度)를 낳았다. 나두천은 나만형(羅晩亨)을 낳고, 나두우는 나만성(羅晩成)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나머지 내외의 자손들 모두 거론할 수 없다,아! 공의 재주와 학업과 품행과 도의로써도 불행한 때를 만나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하셨으며, 돌아가신 지 또 백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장차 이름이 묻혀 전하여지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동추(同樞)의 따님이다. 내가 일찍이 작은 외삼촌을 섬기고 또 여러 내종형제를 종유하여 매번 선조의 옛일에 대해 들었는데 그 말들이 마치 어제 들은 것과 같다. 내외증손들 중 뒤에 죽은 자들로 하여금 다만 몇 명 있지만 남은 사람들 또한 많이 늙었다. 이에 나두동 씨가 세월이 장차 멀어질수록 더욱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을 개탄하여 사적들 가운데 여러 문적에서 뒤섞여 나오는 것을 모으고 또 집안에서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를 가지고 증거로 삼아 후세에 볼 수 있게 도모하고자 고개 넘어 천리에 부쳐 나로 하여금 다듬고 수정하여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 삼가 이 뜻에 감격하여 감히 보잘 것 없는 말로 거절할 수가 없기에 일의 본말을 차례대로 서술하여 〈사실기〉로 삼는다.숭정(崇禎) 정축(丁丑) 후(後) 85년인 임인년(1722) 3월 16일에 외증손 전 참봉(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公諱德峻, 字大之, 姓羅氏, 號錦巖. 自上祖麗朝監門衛上將軍富以來, 世貫羅州, 子孫不出鄕, 爲湖南望姓. 其系具在先考贈贊成事實記. 先考諱士忱, 中廟世, 旌孝子之閭. 嘗師履素齋李氏仲虎, 以學行聞, 官尼山縣監, 追爵左贊成, 用諸子從勳, 累推恩也. 兩妣坡平尹氏府使彦啇之女若光州鄭氏僉使虎之女, 俱贈貞敬夫人. 兩夫人各有丈夫子三人, 有六龍之稱, 公其第二也. 生六歲, 尹夫人歿仰, 後妣鄭夫人, 撫育如所生. 公天資純美, 贊成公又躬篤人倫, 濡染耳目, 有得於觀感家庭者, 非特文字之敎而已. 十七八歲, 已有志古人之學, 不以流俗擧子事屑意. 與其弟德潤錦峰公, 日相砥礪爲業, 兄弟爲知己. 眉巖柳文節公於贊成公姨兄也, 請學其門, 得聞儒先緖論. 從贊成公于京邸, 遍遊名流間, 與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朴思庵淳 李栗谷珥, 皆許可之, 送公南歸謂曰 : "聞南中有鄭介淸者, 學行篤實, 可爲人師表, 宜從遊卒業也." 栗谷以內賜朱子語類一帙爲之贐. 鄭介淸乃號爲困齋者也. 公旣還鄕,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以禮請困齋爲師. 與同志學子, 結講義契, 節目以增損鄕約爲法, 學令以白鹿洞規爲準, 要以講磨力行, 困齋常敬重之. 其推獎之言, 發於簡牘答問者有曰 : "資稟剛明, 所見日進, 畏慰俱極." 又曰 : "志篤聖賢, 功專進修, 以求必得夫性命之全, 是所謂君子爲己之學." 又曰 : "如賢高明可畏, 其敢自大而妄尊, 待以待後生之禮乎. 至於與之論疑禮則歎服." 公敦厚精詳, 躬督恩愛之行, 能善推於人, 而示其自悔失禮之意, 凡若此類, 甚多, 俱在鄭氏愚得錄. 門有陰譎婦人, 詐稱遺孕, 謀育假兒, 時贊成公方任湖邑, 公兄弟以其事, 稟據倫紀, 申狀卞之事, 久滯未決, 金鶴峰誠一莅州, 燭其僞斷之曰 : "世之爭訟以利, 而君等所爭爲天理, 君等眞義士也." 遂心許之, 與爲交. 城西大谷洞創書院, 俎豆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五先生, 令士林有所肯式, 實公兄弟奉議, 鶴峰所經紀也. 己丑冬, 有鄭汝立獄事. 汝立者嘗僞情飾行, 以博洽欺當世, 初托迹於栗谷及成牛溪渾, 吹獎汲引, 頗得其力. 栗谷旣歿, 汝立又始改頭換面, 反攻斥栗谷. 宣廟之敎所云, 汝立今之邢恕者, 此也. 蓋自朝議睽乖以來, 東西互相排擯, 轉加層激, 鄭澈褊愎積不平. 又困齋嘗以澈眈荒酒色, 蘧蒢禮法, 惧流弊世道, 爲澈所銜. 洪千璟 梁千頃等, 居鄕里, 輕佻無行, 不齒士類. 惟澈俯仰, 嘲侮困齋特甚. 公兄弟從困齋遊, 最有名稱, 故被媢嫉亦甚. 及汝立獄起, 澈爲委官, 乘時羅織, 凡異諸己者, 靡不待以機穽. 丁巖壽 洪千璟 梁千頃等, 承望投疏誣陷朝野名流三十餘人, 困齋亦入其中. 且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爲汝立密交, 知禍及己, 譸張伸救." 又捏公兄弟曰 ; "不必應擧衰世, 過數年, 須待太平. 其他說話, 凶慘罔極." 公之弟德顯 德憲等, 忿忿甚, 往巖壽等會所, 面折之甚峻. 及其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岩壽等十人鞫之. 澈恐事覺, 益爲欺蔽計, 囑兩司及太學生等, 交章力救, 謂之疏儒不可鞫問, 遂得還寢其命. 獄又益多株累, 令鄕邑搜問罪人黨與千璟與品官不逞者, 柳潑輩媒蘖其間. 庚寅夏, 困齋被逮, 公父子六人, 亦幷就理, 以謀沮岩壽疏爲罪案, 上敎特曰: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遂卽蒙宥, 公用次律, 竄富寧, 諸兄弟或徙邊邑, 或配中道. 當是時, 得免就殞桁楊, 實賴贊成公至行, 有所默感上衷也. 困齋亦杖配慶源路, 過公所相對, 無慽慽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歿于配所, 爲位哭之. 明年, 上心追悔, 國是乃定, 主獄者澈, 栫棘江界. 又明年, 當倭亂, 命釋大小竄謫人, 公乃於癸巳赦還. 甲午, 柳西厓成龍爲首相, 建請勿拘資格, 以十條取士, 以備撥亂之用, 選韓久菴百謙等三人, 而公居其一, 斗巖金相應南薦也. 初授望雲監牧官兼掌募粟事. 前時, 上慮牧政虛疏, 嘗命用曾經臺官者, 爲監通糾守令, 往來撿察, 又時當搶攘設屯田, 爲補軍食計, 擇人幹其事, 前任守令郞署者, 率多見差, 公自草野被掄爲任, 蓋欲試公才也. 明年, 西厓相論啓防守措置事, 請令統制李舜臣從事官取公. 前年所聚穀, 以資沿邊諸屯播種, 語在西厓遺稿. 尋除司圃署別坐, 時贊成公年逾七旬, 以事親日短, 辭不就.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執喪, 無違禮, 旣葬, 廬墓下. 丁酉, 倭舡猝到前江, 雖當顚沛, 不弛哀慽, 人益稱之. 己亥春, 服闋. 是秋上困齋訟寃疏, 不得命. 已而, 擢拜報恩縣監, 未之官, 爲不悅者所嗛. 公兄弟嘗痛師至寃, 雖在亂離遑遑之中, 義不忍忘, 願爲泉壤一洒之. 先是乙未年間, 公之弟錦峰公, 始陳疏卞之, 批曰 : "爾等之論, 至矣. 當議處." 下備邊司. 西厓相回啓痛陳當初獄事, 多濫之由, 且言鄭介淸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箸論, 以至滅身, 宜此訴冤云云. 答以後當面議而止. 其明年, 伯氏德明嘯浦公, 上疏言感天意結人心之道, 而請伸己丑寃死, 至是又有公疏. 蓋大獄之後, 人心惴惴未息. 公之兄弟, 不避危機, 倡聲瀝血, 前後相繼, 庶幾有回天之望, 而上意持難, 未見施士林憾之. 人之護澈者, 又怨公家不置, 而公經歷險難, 未嘗以患辱挫其意, 處之夷如也. 公生以嘉靖癸丑二月三日, 得年五十二, 萬曆甲辰八月二十八日歿, 葬州南榮山艮坐坤向之原. 仁廟世, 以子緯素參原從追, 贈承政院左承旨, 至顯廟世, 又以躋同樞, 故加贈戶曹參判. 公稟性眞醇, 德宇粹盎, 通而不汙, 貞而不諒, 和順之氣, 溫厚之風, 令人望之, 可知也. 其志嘗以爲子貢留心於豊約之間, 故不及於顔曾也, 自少時, 不以家人生産作業爲事. 其學以爲氣質可以變化, 義理可以講明. 自小學家禮, 由四書達六經, 又以博通群書, 從事師友, 以修其可願也. 有訓諸子遺文, 以存心 體認 克己 踐形之功, 眷眷焉勸勉之, 以分外 榮身 居室 自便之恥, 申申焉, 警飭之. 終致意於孝親之意曰 : "天經 地義 綱常 倫紀之重且大者, 而百行之源, 人道之常, 所以學之者, 學此而已, 行之者, 行此而已, 求忠臣於孝子之門者, 此也." 公以早違慈顔, 爲平生恨, 絶念榮利, 專意奉養. 凡遇物, 不私於家, 獻于親庭, 聽其分與, 以承志意. 贊成公旣卒, 鄭夫人處公家爲多, 嘗言處別坐家, 得心身俱安. 公之除報恩也, 弟德愼方爲茂長, 致榮養而聞, 公得縣決意欲從往. 鄕人有訓子孫奉繼母者, 必曰以羅報恩爲法也. 遇先忌, 必前期三日素服, 靜處不接人, 以行祀事. 嘗慕古人, 兄弟同居畫同堂異室之制, 且營義田, 中罹奇禍, 加以亂離, 齋志未就, 愛宗族克盡, 情款在望雲. 値歲歉甚, 人民顚連, 公作長廊, 多聚一家子弟, 以濟其飢, 且爲之勸學, 傳者稱爲美談. 其實行之著于家, 大略如此. 初聘長水黃氏禦侮將軍諱顥之女, 領議政翼成公喜之六世孫也. 辛亥八月九日生, 四十五而歿于乙未. 繼娶文化柳氏諱濂之女, 右議政文簡公寬之八世孫也. 丁丑七月二十二日生, 三十而歿于丙午. 忌日同正月十日. 幷贈貞夫人, 葬皆祔公壟. 有五男二女, 曰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 爲怨家所中落拓州郡, 秩大年同中樞, 贈左參贊. 女長適主簿金磼, 節死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黃氏出也, 曰緻素 經素, 柳氏出也. 又有側子緘素. 贊素一男, 衱宣敎郞, 一女適金壎. 繼素無子, 取同樞第三子袗爲嗣. 緯素三男, 袡戶曺正郞, 襻成川府使, 袗禁府都事. 三女長適生員金晩壽, 次適李萬鍾, 次適暑令鄭岐壽. 金磼無后. 崔光憲二男, 鳴海 翼海生員, 一女適趙宗慶. 緻素四男, 褀通德郞, 衤兼 宣敎郞, 袀壽爵副護軍, 衤瑩 通德郞. 二女適姜碩宗 鄭斗亨. 經素三男, 襀通德郞, 襢 䙋文科掌令, 一女適李震嶠. 緘素一女, 適梁忭. 衱生斗天武科縣監, 斗宇. 袡生斗三縣監, 斗章敎官. 襻無子, 取斗章爲嗣. 袗生斗春佐郞, 斗夏 斗秋 皆通德郞, 斗冬生員. 褀生斗奎 斗緖 斗集 斗弘. 衤兼 生斗會. 袀無子, 取斗璇爲嗣. 衤瑩 生斗璇 斗琮. 襀生斗南武科宣傳官, 斗昌 斗亨, 皆通德郞. 襢無子, 取斗亨爲嗣. 䙋生斗元 斗文, 皆通德郞, 斗度. 斗天生晩亨, 斗宇生晩成, 文科持平. 自餘內外玄雲, 不可悉擧. 嗟乎! 以公之才學行誼, 遭時不幸, 未能有施于世, 歿且百有餘歲, 將名凐滅而無傳, 豈不悲哉! 重元先母, 同樞女也. 重元嘗逮事仲舅, 且從諸內兄, 每聞稱說先世故事, 其言若前日聞, 令內外曾孫之後死者, 只有若而人亦旣老矣. 迺者斗冬氏有慨於世將愈遠而愈無徵也, 裒聚事蹟之雜出諸文籍者, 證以家中舊聞, 啚所以垂示後世, 寄來嶺外千里, 使重元磨正成編. 竊感是意, 不敢以鹵莽辭, 敍次本末爲事實記. 崇禎丁丑, 後八十五載壬寅季春旣望, 外曾孫 前參奉 八溪鄭重元, 謹述.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을 말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호가 미암(眉巖)이며, 해남 출신이다. 경저(京邸) 조선 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서 그 지방의 공물(貢物), 입역(立役)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사무소를 말한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 등이 있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송대 유학의 집대성자인 주희가 강학하면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어록 모음집이다. 모두 140권이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가 훤당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말한다. 자는 백욱(伯勗)이고, 호가 일두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말한다.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가 정암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31)을 말한다.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가 회재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말한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가 퇴계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자는 호원(浩源), 호는 묵암(黙庵), 우계(牛溪)이다. 오늘날의 …… 자이다 스승을 저버리고 배반한 제자를 가리킬 때 흔히 거론하는 인물이 형서(邢恕)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형서의 자는 화숙(和叔)으로, 《근사록(近思錄)》 권9 치법류(治法類)에 자기의 스승인 정명도(程明道)를 통유(通儒)요, 전재(全才)라고 극찬한 말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보주(補註)에 "형서가 명도에 대해서는 이처럼 추앙하며 심복하였지만, 명도의 아우인 이천에 대해서는 아마도 불만스러운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배운 벗들이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많이 꾸짖게 되었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자기 …… 해석하여 원문 '거제(蘧蒢)'는 악한 병의 이름이다. 원래는 죽석(竹席)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으로 둥근 곳집〔囷〕을 만들면, 마치 종기가 나서 구부릴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추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나쁘게 만듦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厓)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망운(望雲) 전라남도 영광의 망운면을 말한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1598. 자는 여해(汝諧)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옥포 대첩, 사천포 해전, 당포 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하였다. 의전(義田) 문중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하는 전지(田地)이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처음 명명한 것으로, 범중엄은 한창 현달했을 때에 부곽(負郭)의 좋은 토지 천묘(千畝)를 마련하고 이를 의전이라 호칭하여, 여기에서 수확한 재물로 가난한 종족들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310 范仲淹列傳》 정다운 …… 있었다 원문의 '망운(望雲)'은 타향에서 멀리 떨어진 부모나 형제, 친지를 그리워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멀리 남쪽으로 흰 구름 하나가 떠가는 것을 보고는, 저 구름 아래에 부모님이 계실 것이라면서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구름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떠났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선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 금봉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錦峰羅公事實記 나 씨(羅氏)는 대대로 나주(羅州)에 살면서 덕이 두텁고 경사스러움이 쌓여 벼슬이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호남의 명문가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 씨를 말한다. 고려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가 실로 시조이며, 후대의 나진(羅璡)에 이르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어 공양왕 2년(1390) 영산(榮山)에서 조창과 축성을 감독했으니, 이 일은 《여지지(輿地志)》54)에 실려 있다.아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우왕 7년(1381)에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는데, 이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아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지냈고, 아들 자강(自康)은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아들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郎)을 지냈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행이 있어, 중종께서 정려로 표창 하셨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동문들이 모두 추대하고 중히 여겼다. 선조 초에 관찰사(觀察使) 서교(西郊) 송찬(宋贊)이 그를 학행으로써 천거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이르렀는데, 그의 거사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가 있네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두 분은 각기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도사(都事)를 지낸 나덕명(羅德明)으로, 영특하고 호걸스러워 명예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둘째는 현감을 지낸 나덕준(羅德峻)으로 곧 나의 증조부이다. 효도와 우애와 품행과 도의로 이름이 났었다. 공은 바로 셋째이다. 그 다음 넷째는 처사 나덕현(羅德顯)으로, 효행이 있어 추증되었다. 또 그 다음 다섯째는 군수(郡守)를 지낸 나덕신(羅德愼)이며, 막내는 수사(水使)를 지낸 나덕헌(羅德憲)인데, 두 분 모두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웠고, 오랑캐의 조정에서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기도 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나서, 어떤 이는 찬성공의 만사에사 씨 집안의 쌍벽55)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순호의 팔룡56)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라고 했으니, 공의 형제들을 칭송한 것이다.공의 휘는 덕윤(德潤)이다. 처음엔 자를 유지(有之)라고 했다가 훗날 성지(誠之)로 고쳤다. 금봉(錦峰)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36년인 정사년(1557) 3월 1일에 태어났다. 이듬해 9월에 어머니 윤 부인(尹夫人)이 세상을 뜨자 공은 울면서 젖을 먹지 못하여 늙은 여종에게 길러졌다. 나이 열다섯57)이 되자 비로소 학문에 나아갔다.임신년(1572)에 찬성공이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공이 따랐는데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어도 문사는 이미 통달하였다. 당시 같은 고을 사람 함양(咸陽) 이언양(李彦讓)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58)의 문인으로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난 인물이었는데 찬성공과 함께 경저(京邸)에서 생활하면서 수 년 동안 공을 가르쳐 선비의 정식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전수하니 공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이공은 그의 재주를 매우 아껴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장성하여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둘째 형과 뜻을 같이 하여 학문에 힘써 늘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에게 의심나는 것을 물었으니, 미암은 곧 찬성공의 이종형으로 학문이 넓고 들은 것이 많아 경연의 이름난 선비였다. 매번 공을 장려하여 힘쓰도록 하였고 기량이 크고 중하다고 여겼다. 또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을 종유하며 《예경(禮經)》을 강론하였는데 이로부터 벗들에게 크게 인정받았고 사암(思庵) 박순(朴淳)59), 율곡(栗谷) 이이(李珥)60) 같은 이들도 더욱 가상하게 여겨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61)의 어짊을 칭찬하며 공의 형제들이 종유하여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권장하였다. 마침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 고을 성의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곤재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 동지들과 강의계를 결성하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특히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힘썼다.정축년(1577) 무렵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막 좌막(佐幕)62)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스승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상을 당하자 달려가 곡을 하고 난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비단 방석에 앉아 관직의 일을 임하였다. 대개 김천일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일재에게 학업을 받아 실로 가르침을 받아 추천에 힘입어 세상에 중임을 맡게 되었으나, 스승이 돌아가셨는데도 상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공은 마음속으로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곤재에게 편지를 올려 스승의 상복제도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다. 김천일의 문인들 가운데 질책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공은 개의치 않았으니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이 일은 《우득록(愚得錄)》63)에 실려 있다. 이보다 앞서 공의 큰아버지 목사공(牧使公)의 후처 서 씨(徐氏)가 성격이 사납고 사람들을 잘 속이며 질투가 심하여 전처의 자손들이 이미 쫓겨나게 되었다. 아들 나덕순(羅德純)이 일찍 죽은 뒤 서 씨는 그의 부인 임 씨와 함께 몰래 남의 자식을 데려다 유복자라고 속였다. 공의 형제들은 그의 패륜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찬성공에게 자문하고 미암에게 의논하여 관에 소장을 올려 일을 밝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64)가 이른바 "나 씨 가문에서 그의 거짓됨을 변별하고 집안을 어지럽힌 것을 쟁송하였다."라고 한 것은 대개 이 일을 가리킨다. 여러 번 추핵(推覈)을 거치고 몇 년 동안 결판이 나지 않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목사로 부임함에 이르러 그 거짓이 밝혀지고 곧장 판결을 하였다. 학봉이 공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쟁송들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이 쟁송은 천리로써 하니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진심으로 교유를 맺었다. 이에 공의 형제들이 학봉에게 의논을 드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워 한훤(寒暄), 일두(一蠹),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 등 오현(五賢)을 함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는데 일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 채 학봉이 물러나게 되자, 임윤신(任允臣)65)이 와서 그 일을 대신하여 이루었다.정해년(1580) 겨울에 비로소 봉안의 예를 행했는데, 그 제문이 바로 공이 지은 것이다. 공이 스승을 따른 지 십 수 년이 되었지만 틀에 박힌 공부를 일삼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뜻에 따라 억지로 향시를 보아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하였다. 총산(葱山) 정언응(鄭彥?)은 함께 같은 시험장에 들어가 공이 지은 것을 보고 글이 근원이 있고 넓어 저절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 통하게 한다고 칭찬하였다.이듬해 무자년(1581) 봄, 진사에 급제했으니 바로 선조 21년이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나누어지고 더욱 더 격렬해지자 정철(鄭澈)은 늘 뜻을 잃고 원망하고 있었기에 나주 사람 홍천경(洪千璟)과 창평 사람 양천경(梁千頃) 등이 그의 부하66)가 되어 당을 만들고 무리를 결성하여 뜻을 마음대로 하고 바른 것을 날조하여 곤재가 더욱 천경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공의 형제가 곤재의 문하생으로 모두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여 이를 갈고 틈을 노린 것이 대개 수년이나 지속되었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의 반역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기미를 틈타 없는 죄를 꾸몄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67)이 훗날 등대(登對)68)하였을 때, 기축년의 옥사가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짓이라고 진설하였다. 동복(同福) 사람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상소를 하여 여러 이름난 사람들을 무고하니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69)와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70)은 모두 임금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인데 상소에 들어 있었고 심지어 공의 부자 이름 또한 들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정여립과 교유를 긴밀하게 하다가 일이 드러나자 거기에서 자신을 구하려 한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들이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으니, 장차 태평시대를 기다려라."고 했으니 어의(語義)의 흉악함이 극심하다. 공의 동생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무고를 받은 것을 분하게 여겨 상소한 자들이 모인 곳에 가서 지극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드러나지 않은 말을 거짓으로 꾸미고 사악하고 속이는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이나 이름 난 경(卿)들까지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 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신배들의 부추김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는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여 국문하여 죄를 밝히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걱정하여 대간(臺諫)과 태학생(太學生)들을 시켜 힘써 구제하게 하자 이미 낸 명령이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옥사가 오랫동안 끝나지 않자 옥사는 더욱 심해졌다.경인년 여름에 또 군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들과 홍천경, 품관(品官) 유발(柳潑), 정여릉(鄭如陵) 등을 염탐하게 하여 묵은 감정을 드러내 이에 따라 죄목에 묶으려 하였다. 이에 곤재가 체포되었고 공의 여섯 부자 또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전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이유로 죄목을 엮은 것이었다. 심문의 답변이 이르자 임금께서 특별히 전교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사람은 용서하고, 무고하여 미움을 받은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다행히 곧바로 사면되었지만 공의 형제 다섯은 모두 풀려나지 못하였다. 공은 회령으로 유배 갔고, 나머지 형제 중 어떤 이는 바닷가로, 어떤 이는 도형(徒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때 재앙을 예측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감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학봉(鶴峯)71)만은 홀로 편지를 써서 위로하며 "한 집안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있는 이유는 진실로 효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72)이 회령에 먼저 유배 갔었는데 공이 유배지에 이르자 마침내 서로 종유하며 마음으로 인정하고 글을 써서 회포를 풀어 시름을 보냈다. 곤재 또한 장형을 받고 유배가게 되어 북쪽으로 가다가 공의 유배지에 들렀는데 조금도 원망하는 말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서 달려가 간호했으며 초상이 나자 공서(公西)의 일73)을 행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비로소 정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아시고는 간악하고 악독한 정철에 관한 교서를 특별히 내리시고 방을 붙여 조정에 알렸다. 헌장(憲章) 이원익(李元翼) 등이 마침내 달아난 정철을 잡아야 된다는 장계를 올리고 형벌의 법률을 추가하였는데 공론이 대개 이렇게 정해졌다.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자 동강이 은혜를 입어 먼저 사면되어 시를 지어 공에게 회포를 보냈는데, 공도 그 운에 따라 답시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온갖 흉악한 자들 눈앞에 모였으니 百兇叢目下슬프다! 우리가 뒤에 태어남이여 哀哉我生後적들이 무리지어 이미 안에서 시끄러운데 賊莽旣內訌추악한 오랑캐들마저 밖에서 짓밟고 있네 醜虜又外蹂계사년(1593)에 공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혼란한 상황을 당해서도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지극한 원통함을 의리상 잊을 수가 없었다. 을미년(1595) 봄에 둘째 형님과 함께 임금께 글을 올려 몇 차례나 스승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사건이 비변사에 내려지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애당초 옥사를 다스림이 지나쳤던 이유를 모두 진설했으며 또 정개청(鄭介淸)은 호남 사람 가운데서도 더욱 이름이 난 사람으로 평소 학술과 행실의 검박함으로 자임한 자인데 우연히 한 편의 글을 지었다가 자신을 죽게 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덕윤과 무리들이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발을 싸고 대궐의 문을 두드리며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아뢰었지만, 임금께서는 처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다. 비록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았지만 화를 당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 기운을 잃고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먼저 피눈물을 토하며 마음을 드러내어 사림(士林)들로 하여금 흥기하도록 하여 점차 회복될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힘이었다. 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시자 무안(務安)의 주룡(住龍) 나루에 장사를 지내고 곧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자 비록 난리를 피해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상례를 한결같이 예를 지켜 마쳤다.기해년(1599)에 또 둘째 형님과 함께 곤재의 원통함을 거의 앞뒤로 대궐에 하소연하여 두 번 세 번 지속하자 마침내 유음이 내려졌다. 공은 처음에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사은하고 곧장 그만두었다. 또 금부 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곧이어 그만두었다.광해군 초 무신년(1608)에 왕자의 사부에 으뜸으로 의망(擬望)되었다가, 3월에 다시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그만두고 12월에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이 되었으며, 신해년(1611)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계축년(1613) 5월에 또 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경력(經歷)이 되었으며 갑인년(1614)에 사재감 주부(司宰監注簿)로 승진했다가 7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8월에 후처 정 부인(鄭夫人)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나이 60이 다 되었지만 상례를 게을리 않았고 상을 치른 뒤에는 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공이 만년에 벼슬에 나간 것은 단지 어버이를 위하여 뜻을 굽힌 것이었다. 얼마 후 어버이께서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면서 종신토록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하게 살며 스스로 편안히 지내기로 마음먹은 지 5~6년 지나 신유년(1621) 윤달 2월 28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찰방(察訪) 이극부(李克扶)는 공의 막역한 친구로서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중년에 기러기를 놀라게 할 활을 함께 만들고 中年共作弓驚鴈만년엔 눈 덮힌 소나무를 함께 보자 했었지 晩歲同爲雪後松대개 공이 험난한 일을 겪고도 지키는 바의 확고한 바를 탄식한 것이었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훌륭하고 뛰어났으며 기량이 출중했고 예를 잘 지키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효우의 가르침을 받들어 어버이 모시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하고 몸을 바로잡기를 예로 하였다. 또 스승의 문하에 올라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의리의 심오함을 강구하니 스승 곤재가 그를 칭찬하여 세상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공이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를 잃었을 때 유모의 남편이 극진하게 양육의 도리를 다 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자 함께 밥을 먹은 식구가 죽은 듯 시복(緦服)의 의리로 백건(白巾)을 쓰고 곡을 하며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는 공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작은 절개이지만 작은 것도 잊지 않는 은혜로운 마음이 또한 높이 칭송할 만하다. 형제들과 함께 화락하고 허물없이 지냈으며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자 당(堂)을 같이 하면서 실(室)만 다르게 살 계획을 세우자 찬성공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격려하였다. '너의 부모를 더럽히지 말라.'74)는 가르침을 두고 실천하려 했지만 재앙과 변란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집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 반드시 정명과 분수를 우선으로 삼았다. 집안이 엄숙하여 질서가 있으니 사람들 가운데 출입하는 자들은 모두 경외하면서 감히 분수를 넘는 사람이 없었다.약관의 나이로부터 이미 선생과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 훌륭한 스승을 얻어 귀의하였다. 처음에는 사암과 율곡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중년 이후 명성이 날로 드러나 학봉이나 동강 같은 일대의 유현들이 공을 인정하여 그냥 두지 않았다. 심지어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75)은 공을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76)는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공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알아주고 대우해준 것에 사례하였다. 유학(儒學)의 연원, 전후, 법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자들은 공과 함께 공사를 의논하여 순안(巡按)하던 날이면 그때마다 공을 머물게 하여 대접하려는 뜻을 미리 관문(官文)으로 알렸으니 고을사람들은 전하여 미담으로 삼았다. 매번 스승과 벗들이 원통하게 죽은 아픔을 생각하며 그들의 원통함을 씻어내길 바랐으나 임금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밤낮으로 마음아파 하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77),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78), 남이공(南以恭), 정협(鄭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변(申抃)하는 말을 하였다. 또 스승을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곤재의 사우를 지어 제사를 올려 덕을 숭상하는 정성을 드러내는 일을 의논하였으니 그 섬기는 바를 한결같이 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였다.공은 처음 고을의 금성산(錦城山) 북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뒤에 점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집에 이롭지 않다고 하여 병신년(1656) 3월에 현손(玄孫) 만석(晩錫) 등이 대안(大安) 동쪽의 자라바위 위 건좌(乾坐) 손향(巽向)79)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96년이 되는 해였다. 아내인 의인(宜人)80) 이 씨는 본관이 양성(陽城)81)으로, 정사년(1557) 5월 17일에 태어나 경신년(1620)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와 이천 부사(伊川府使)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을 지냈고, 나의소(羅宜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는데, 성품이 대범하고 우뚝하여 세상과 더불어 뜻이 뭉개져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부사(府使)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성(羅衤成 ) 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고, 나첨(羅襜)은 통덕랑을 지냈고, 사위 이명구(李鳴衢)는 진사에 합격하였다. 선교(宣敎)는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었는데, 아들은 나일(羅衵)이고, 사위는 윤적망(尹啇望), 임고(任暠), 조정오(曺挺五), 진사에 합격한 정헌(鄭櫶)이다. 정랑(正郎)은 후사가 없어 나첨을 후사로 삼았다. 선전(宣傳)은 아들 나두정(斗正)과 서출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나두점(羅斗占), 문과에 급제한 나두평(羅斗平)이다. 나일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두흥(羅斗興), 나두진(羅斗鎭), 나두응(羅斗應)이다. 나첨은 서출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두원(羅斗遠), 무과에 급제한 나두승(羅斗承), 나두주(羅斗冑), 나두영(羅斗盈)이다. 나두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만석(羅晩錫), 나만우(羅晩遇)이다. 나두흥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나만현(羅晩賢)이다.아! 내가 언젠가 공의 제문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증조의 제문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함께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시와 예를 공부하고82), 같은 스승을 섬겨 학문을 강습했으니,83) 마음과 덕을 함께했던 즐거움이 어찌 다만 형을 형으로 섬기고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는 대의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형제간이요 지기라고 할 만하다." 이 글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 지금 나만석이 공의 소장, 문적, 역관(歷官), 편지 등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차례로 글을 엮어 후손에게 전해지도록 요청하니 더욱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감히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의 전말을 써서 보낸다.숭정(崇禎) 병자(丙子) 후(後) 80년 병신(1716) 윤3월 모일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羅氏世居羅州, 德厚慶積, 簪紳不絶, 世之人數湖中望閥, 必稱羅氏, 在麗朝, 有監門衛上將軍諱富, 實爲始祖, 後至諱璡工曺典書, 恭讓二年, 監榮山漕倉築城, 事載在輿地誌. 子諱公彦典農寺正. 禑之七年, 從都巡問使李乙珍, 克倭有功, 事載麗史. 子諱諿式目都監錄事, 子諱自康務安縣監. 子諱繼祖將仕郞, 是公高祖. 曾祖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童而有至行, 中宗命旌閭, 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人皆推重. 宣祖初, 道臣宋西郊贊薦學行, 累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句. 贈議政府左贊成. 前聘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 長都事公諱德明, 以英傑不覇名. 仲縣監公諱德峻卽我曾王父, 以孝友行誼名, 公卽序居第三. 其次處士公諱德顯, 以孝贈職. 又其次郡守公諱德慎, 季水使公諱德憲, 俱以武擧進, 或殲倭立功, 或抗節胡庭. 兄弟六人, 俱有聞當世. 有人挽贊成公詞曰, "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者, 蓋贊公兄弟也. 公諱德潤, 初字有之, 後改誠之, 錦峰, 其號也. 嘉靖三十六年丁巳三月初一日生, 明年九月尹夫人歿, 公呱呱失乳, 養于老婢, 甫成童, 始就學歲. 壬申, 贊成公供仕京中, 公從之, 年纔十六, 文詞已達. 時同鄕有李咸陽公彦讓, 以金河西麟厚門人, 知名士類間者也. 與贊成公同舍京邸, 數歲敎公, 以士子程式, 仍授小學四書及心經近思錄, 所造日就, 李公愛其才, 以女妻之. 年旣長, 不屑擧子業, 與仲氏同志力學, 常質疑於柳眉岩希春, 眉岩卽贊成公姨兄, 而博學多聞, 爲經幄名儒者也. 每於公獎勗而器重之. 又從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自此大爲朋輩所偢倈, 如朴思菴淳 李栗谷珥 尤嘉尙焉. 仍稱鄭困齋介淸之賢, 而勸公兄弟從游以卒業. 遂南歸,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奉困齋師事之, 結同志爲講義禊, 討論經傳, 尤致力於朱子書. 丁丑間, 金倡義使千鎰, 方任佐幕, 而遭其師李一齋恒之喪, 奔哭之後, 卽返于家坐花茵, 奉官供, 蓋金早孤, 受業一齋, 實賴敎誨推薦之力, 取重於世, 及師死不爲之服, 故公心非之, 以書上困齋, 講論師喪服制. 金之門人, 多有詆責者, 而公略不介意, 時公年二十一矣. 事載愚得錄. 先是, 公之伯父牧使公之繼配徐氏, 性鷙悍多譎憎嫉, 前室子孫當已出. 子德純夭折之後, 與其婦林氏, 潛謀取他人子, 詐爲遺孕, 公兄弟憤其悖倫, 稟贊成公且議眉岩, 狀于官斥之. 鄭寒岡逑, 所謂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者, 蓋指此也. 累經推覈, 積年不決, 及金鶴峯誠一牧州, 明其爲僞卽斷之. 鶴峯謂公兄弟曰 : "世之爭訟者以利, 而君輩所爭則天理, 眞義士也." 遂結爲心交. 於是, 公兄弟奉議鶴峯, 營建書院於城西大谷洞, 以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 五賢, 竝享之, 欲爲士林模範之, 所功未及, 訖鶴峯遞歸, 任公允臣來, 代之踵成其事. 以丁亥冬, 始行奉安之禮, 其祭文, 公所製也. 公從師十數年, 不事科臼之工, 而爲順親旨, 强赴鄕解, 俱占兩場. 鄭葱山彥?同入試圍, 見公作, 稱詞源浩汗, 自令人意思通暢云. 明年戊子春, 成進士, 卽宣祖二十一年也. 時朝議, 已岐轉加層激, 鄭澈常失志怏怏. 羅州人洪千璟 昌平人梁千頃等, 爲其爪牙, 連黨結侶, 恣意醜正, 而困齋尤被千璟輩所誚詆. 公兄弟以困齋門生, 俱有令名, 奸人惡之, 磨牙俟隙, 蓋有年矣. 己丑冬, 鄭汝立逆獄起, 澈爲委官, 乘機羅織, 李梧里元翼, 後日登對時, 所陳己丑治獄, 人所不忍者也. 同福人丁岩壽與洪千璟 梁千頃等, 承澈旨, 投疏誣陷諸名流, 領相李山海 禮判柳成龍, 皆上之所倚毘者, 而入於疏中, 至於公父子之名, 亦與焉. 有曰 : "與汝立交密, 顯爲伸救." 或曰 : "不必應擧衰世, 且待太平." 語意極其凶慘. 公之弟德顯 德憲等, 憤受誣, 往疏會, 極言峻斥. 巖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來岩壽等十人, 推鞫定罪. 澈恐其情跡之敗露, 使臺諫及太學生, 力救之, 還寢成命. 獄久不竟, 鍛鍊愈酷. 庚寅夏, 又令郡邑廉問罪人黨 與洪千璟與品官柳潑 鄭如陵等, 逞宿憾, 隨而媒孽. 於是, 困齋被逮, 公之六父子, 亦就理, 蓋以前沮岩壽疏, 構成罪目也. 及置對, 上特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幸卽蒙宥, 而公兄弟五人, 俱未得脫. 公謫會寧, 餘或徙邊, 或徒配. 當是時, 禍網叵測, 人皆畏怵無敢問者, 而鶴峯獨致書慰問, 有曰 : "一家全活, 寔賴孝感"云. 金東岡宇顒先配于會, 及公到配, 遂與從遊許以心期, 論文敍懷以自遣. 困齋亦杖流, 朔北過公所, 少無嗟怨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病篤, 馳往救護, 旣喪, 仍行公西之事. 明年, 上始覺爲澈所誤, 特下奸澈毒澈之敎, 榜示朝堂. 憲長李原翼等, 遂發竄澈之啓, 仍加栫棘之律, 公論蓋於是定矣. 壬辰倭亂, 東岡先被恩赦, 以詩詠懷贈公, 公步其韻以謝有; "百兇叢目下, 哀哉我生後. 賊莽旣內訌, 醜虜又外蹂."之句. 癸巳, 公始得宥. 還時, 當搶攘而亡師至寃, 義不忍忘. 乙未春, 與仲氏上章伸卞, 縷縷甚悉. 事下備局, 柳西厓成龍, 洞陳當初治獄濫及之由, 且曰鄭介淸於湖南人中, 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裹足, 叩閽訴寃也." 云云. 上意持難事. 雖不見施, 然禍網之餘, 人皆喪氣, 無敢容喙, 而公能先傖瀝血致, 令士林興起, 稍有陽復之望, 皆公之力也.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奉襄務安住龍渡, 仍守墓下. 丁酉, 倭寇再肆, 雖在奔避顚沛中, 持喪一以禮. 己亥, 又與仲氏爲困齋訟寃, 凡前後叫閽, 至再至三, 而兪音竟閟. 公初授顯陵參奉, 謝恩卽已. 又除禁府都事, 尋罷. 光海初戊申, 首擬王子師傅, 三月再除禁府都事, 旋遞, 十二月爲靑嚴都察訪. 辛亥, 中人嗛罷. 癸丑五月, 又爲禁府都事, 轉經歷. 甲寅, 遷司宰監主簿, 七月爲司憲府監察. 八月丁繼妣鄭夫人憂, 公年迫六十, 喪禮不懈. 旣葬又廬墓, 以終三年. 公晩年從仕, 只是爲親屈也. 旣親不待養痛恨, 終身不復以世事, 爲意閑居自頤者五六年, 以天啓辛酉閏二月二十八日卒, 得年六十五. 李察訪克扶, 公之莫逆友也. 詩以哀之曰 '中年共作弓驚鴈, 晩歲同爲雪後松.' 蓋歎公經歷險巇, 所守確如也. 公禀賦英邁, 器局凝重, 生長禮法之家, 奉承孝友之訓, 事親以誠, 律身以禮. 又登師門, 好學不倦, 講究義理之奧, 困齋稱之, 以間世人物. 嘗在襁褓失恃之日, 乳母之夫, 極盡育養之道, 故及其死也, 用同爨緦服之義, 白巾以哭之, 具棺歛以葬之, 此在公爲一瑣節, 而其不忘之恩, 亦可尙矣. 與兄弟湛樂無間, 欲同居一室, 畵同堂異室之制, 贊成公深加嘉勉. 至有毋忝爾所生之敎, 而遭禍亂未就. 居家接下, 必以正名分爲先. 門庭肅然有序, 人之出入者, 擧皆敬畏, 無敢犯分者. 自弱冠時, 已見重於先生長者, 其得賢師爲依歸. 初以思菴 栗谷所指敎者, 而中歲以後聲名日益著, 如鶴峯 東岡, 皆一代儒賢推許公不置. 至於金斗岩應南則待之以國士, 鄭愚伏經世爲方伯, 公有書謝知遇, 論儒學淵源前後處臬者, 欲與公議公事. 當其巡按之日, 輒以公留待之意, 預示于官文, 鄕人傳之, 以爲美談. 每念師友寃死之痛, 期以一洒不得回天, 日夜疚心. 與李漢陰德馨 韓久庵百謙, 及南公以恭 鄭公協, 有往復書牘備, 及伸卞之語. 又與景慕者, 議建困齋祠宇, 以俎豆之庸, 表尙德之誠, 其所以事之如一者, 吁亦至矣. 公初葬于州之錦城山北麓, 其後卜人皆謂兆宅不利. 歲丙申三月, 玄孫晩錫等, 移窆于大安東鱉岩上乾坐巽向之原. 距公歿爲九十六年. 配宜人李氏, 籍陽城, 生于丁巳五月十七日, 歿于庚申十二月二十日, 合祔公墓. 生三男曰 繪素武科通政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曺正郞. 性簡伉與世抹摋, 而官未達, 人皆惜之. 府使生二男, 衤成 武科宣傳官, 襜通德郞, 一女李鳴衢進士. 宣敎生一男衵, 四女尹啇望 任暠 曺挺五 鄭櫶進士. 正郞乏嗣, 以襜後. 宣傳生一男斗正, 又有庶出子二人, 斗占斗平武科. 衵生三男, 斗興 斗鎭 斗應. 襜有庶出子四人, 斗遠 斗承武科 斗冑 斗盈. 斗正生二男, 晩錫 晩遇. 斗興生一男晩賢. 嗚呼! 斗冬嘗見公祭, 我曾王父文略曰 : "共趨鯉庭, 幾承詩禮, 同事師門, 麗澤是資, 同心同德之樂, 豈但兄兄弟弟之大義哉!云. 爾則斯可謂兄弟間知己者也."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 今者晩錫持公疏章文迹及歷官資牒, 示斗冬, 要令撰次以傳後, 尤有所感於中者, 不敢以不文辭, 謹敍顚末以歸之. 崇禎丙子後八十年丙申閏三月日, 從曾孫生員斗冬謹記. 여지지(輿地志)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펴낸 지리서이다. 사 씨 …… 쌍벽 원문 '사가(謝家)'는 진(晉)나라 때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을 말한다. 또 '쌍벽(雙璧)'은 본래 한 쌍의 옥벽(玉璧)을 말하는데, 전하여 형제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귀한 집안이나 벼슬을 한 훌륭한 자식 등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순호의 팔룡 후한(後漢) 때,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을 가리킨다. 모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므로 '순씨팔룡'이라고 불렸으며, 후세에 남의 자제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할 때 흔히 사용한다. 열다섯 원문 성동(成童)은 15세를 말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과 등이 있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좌막(佐幕) 조선 시대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견외(遣外)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이다. 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다. 6대조 정총(鄭摠)과 그 아우인 정탁(鄭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살았다. 임윤신(任允臣) 1529~1588. 자는 경룡(景龍)이다. 부하 원문 '조아(爪牙)'는 여기에서 '앞잡이', '부하'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자는 공려(公勵)이고, 호가 오리(梧里)이다. 등대(登對)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말한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공서(公西)의 일 공서(公西)는 공자의 문인으로, 공서(公西)가 씨(氏)이고 적(赤)이 이름이며, 자는 자화(子華)이다. 공자 앞에서 공자의 여러 제자들이 자신의 소원을 각자 말했는데, 공서화는 '예복(禮服)과 예관(禮冠) 차림으로 종묘의 제사를 돕는 일이 소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너의 …… 말라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노력하여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祖寐, 毋忝爾所生.]"에서 나온 말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가 우복(愚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가 한음이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건좌(乾坐) 손향(巽向) 풍수지리에서, 묏자리 또는 집터 따위가 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말한다. 의인(宜人) 조선 시대, 정육품과 종육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어지던 품계이다. 양성(陽城)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일대이다. 함께 …… 공부하고 원문 '이정(鯉庭)'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鯉)는 공자(孔子)의 아들 이름으로 자(字)가 백어(伯魚)인데, 뜰에 계신 공자의 앞을 지나다가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고사가 있으므로, 자신이 이(鯉)처럼 뜰을 지나면서 부모의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학문을 강습했으니 원문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렬사 이명환 彰烈祠【李明煥】 임진년 일에 비분강개하는이 강토에 젊은이 많았네누가 공처럼 한번 창도하여장사들 앞다투게 하겠는가의리와 공렬 변경에 떨치고풍성은 역사책에 전해졌네사당 앞 무계의 호숫물은바다로 모이듯 끝없이 넓네 慷慨龍蛇歲靑邱多少年誰如公一倡能得士爭先義烈關山振風聲竹帛傳祠前武溪水宗海浩無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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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을 방문했는데 만나지 못해 시를 남기다 訪金生不遇留詩 지붕 위 까마귀도 좋거늘8) 屋上烏猶好하물며 소나무 아래에서 만나 동자임에랴 況逢松下童동자야 나의 뜻을 전해다오 童乎傳我意밝은 달이 낚시터에 떴다고 明月釣臺中 屋上烏猶好, 況逢松下童.童乎傳我意, 明月釣臺中. 지붕 위 까마귀도 좋거늘 나덕명과 김생은 일찍이 매우 친한 사이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옥상오(屋上烏)'는 지붕 위의 까마귀라는 말로, 강태공(姜太公)이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 그 사랑이 지붕 위의 까마귀에까지 미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 그 미움이 마을 모퉁이의 바람벽에까지 미친다.〔愛人者, 兼其屋上之烏, 不愛人者, 及其胥餘.〕"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尙書大傳 大戰》 두보(杜甫)의 〈봉증사홍이사장(奉贈射洪李四丈)〉에도 "장인의 지붕 위에 까마귀가 있는데, 사람이 좋으니 까마귀도 좋네요.〔丈人屋上烏, 人好烏亦好.〕"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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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승훈랑 행 의금부도사 소포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承訓郞行義禁府都事嘯浦羅公事實記 공의 휘(諱)는 덕명(德明)이고, 자는 극지(克之)이며, 호는 구암(龜巖) 또는 소포(嘯浦)이고, 성은 나 씨(羅氏)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고려 시대 나부(羅富)는 감문위(監門衛)1) 상장군(上將軍)으로 곧 공의 시조가 된다. 이후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에 이르러 매우 귀하게 되었다. 나진은 전농시(典農寺)2) 정(正) 나공언(羅公彦)을 낳았는데 홍무(洪武)3) 연간에 왜적을 물리친 공훈이 있어 대대로 호남의 명문집안이 되었다.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져 중종(中宗)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를 받았다. 선조(宣祖) 초에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어짊을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을 지냈고 벼슬이 이산 현감(尼山縣監)4)에 이르렀다. 그의 거사비(去思碑)5)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각기 세 아들을 낳았기에 그들을 육룡(六龍)이라 불렀는데 공은 그 중 장자로 자질과 품성이 빼어나고 훌륭하여 식견을 지닌 자들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나이 8~9세에 길에서 고을 아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아전이 예로써 대하지 않자 공은 이치를 들어 꾸짖으니 아전이 곧바로 숙연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탄복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만력(萬曆)6) 기묘년(1579) 진사에 급제하니 때는 선조 12년이었다. 전조(銓曹)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는데, 임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명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두 아우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은 정곤재(鄭困齋)7)의 문인으로 모두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마침내 그들을 좋게 여기지 않은 자들의 시기를 받았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8)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위관(委官) 정철(鄭澈)9)이 기미를 틈타 있지도 않은 죄를 꾸몄다.10) 정암수(丁巖壽), 양천경(梁千頃), 홍천경(洪千璟)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세상의 유명 인사 30여명을 모함하였다.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등이 정여립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게 교유를 하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빠져나가려고 하니 모두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장을 심사하는 자리에 나가 큰 소리로 그들을 배척하였다.정암수의 상소가 임금에게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몰래 사악하고 간교한 상소를 올려 훌륭한 재상과 이름 있는 경들까지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교한 사람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이도록 하셨다. 이에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태학생(太學生)들로 하여금 혹은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혹은 글을 올리도록 하여 임금의 명이 중단되었다.얼마 후 무안 유생 배명(裵蓂)이 곤재(困齋)와 공의 부자의 원통한 상황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상소하였으나 정철은 끝내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한 것으로 죄목을 엮어 공의 여섯 부자가 일시에 심문을 받게 되었다.찬성공(贊成公)은 특별히 효로 용서받았고, 공은 경성(鏡城)11)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며, 여러 아우들은 각지에 나뉘어 유배 갔다. 공이 유배지에 이르러 시를 지어 아우에게 척강(陟岡)의 회포12)를 부쳤다.변방의 구름 높이 떠가고 기러기 무정한데 關雲迢遞鴈無情어느 곳 외로운 성에서 부모형제 그리나 何處孤城憶父兄촛불 깜박이는 깊은 밤 서리 맞은 잎 소리에 殘燭夜深霜葉響꿈속의 연못 풀은 자라나지 못하네 夢中池草不能生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들끓어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이 말을 달려 쳐들어오니, 북쪽 변방의 회령(會寧)13)사람 국경인(鞠景仁)14)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및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15) 황정욱(黃廷彧)16) 등을 잡아두고 왜적에게 대응하였다. 이에 진보(鎭堡)17)의 배반한 군졸들이 지키던 장수들을 다투어 결박하고 적들에게 항복했으니 종성(鍾城)18)사람 국세필(鞠世弼)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19),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공은 함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한백겸(韓百謙)20)과 함께 그들의 계획에 힘을 모으기로 찬성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도 역시 와서 모여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목을 베어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졌다. 이듬해 봄에 별장(別將) 이붕수(李鵬壽)21)와 만호(萬戶) 이희당(李希唐)이 왜적과 전투를 하던 도중 같은 날 죽었다. 공과 정문부가 시를 지어 이 일을 슬퍼했는데, 이 일은 택당(澤堂) 이식(李植)22)이 편찬한 《북관지(北關志)》23)에 실려 있다. 그해 공이 비로소 죄를 용서받고 풀려나 돌아왔다.병신년(1596)에 찬성공(贊成公)의 장례를 무안(務安) 주룡(住龍) 나루에서 치르고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공이 여러 동생들과 함께 주룡으로부터 은적산(銀積山)24)으로 난리를 피하려할 때 고향사람 효자 이유경(李有慶)이 공과 함께 나루를 건너고자 하였다. 공이 이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건너십시오."라고 하자, 이공이 사양하면서 "주객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비록 뒤에 떨어져 낭패를 당한다 한들 형세가 그러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내가 만약 먼저 나루를 건너간다면 우리 집의 종들이 반드시 그대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그를 먼저 건너게 하였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는 데 피차 양보함이 없음을 칭찬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주룡 소포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안히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다. 매번 선산을 성묘할 때면 회포를 노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아침마다 선산에 올라 朝朝上丘壟떠나려다 또 주저하네 欲去還躕踟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度幾侍誾誾늘 평생의 거동 보이리라 一見平生儀공은 가정(嘉靖)25) 신해년(1551)에 태어나 60세에 돌아가셨으니 만력(萬曆) 경술년(1610) 5월 28일이었다. 찬성공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은 키가 매우 크고 위용이 경외할만하여 그를 본 사람들은 산하 간의 기운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본주의 목사는 공과 나이가 비슷했으나 반드시 그를 '노형'이라고 불렀고, 대여섯 살 적은데도 반드시 '어르신'이라고 불렀으니 그 공경하고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고을 사람 문화(文化) 임환(林懽)은 재주와 기개로써 당세에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잘 지냈다. 한번은 산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임공이 먼저 도착하여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는 듯 거침없이 담론하다가, 공이 뒤이어 이르자 임공은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잃고 공이 말하기만 하면 '예, 예' 하고 대답만 하였다. 당시 절의 승려 가운데 이를 목격한 자가 이 미담을 전하였다. 성품 또한 호방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고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화장실을 가려는데, 지주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가까스로 맞아 당에 오르고는 곧장 섬돌 위에다 볼일을 보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상에 설사를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였다.공은 이미 남쪽에서도 명성이 알려져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모두 일면식이라도 있기를 원하여 여러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찾아왔는데 맞이할 때의 예모는 자못 단출하였다. 그러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26)가 영암(靈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주룡으로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문에서 응대하는 자로 하여금 곽거사가 당도했음을 들어가 전하게 하자, 공은 허둥지둥 옷과 갓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공이 평소 남에게 굽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거사에게만 공께서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곽공과 토론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 뒤 곽공이 조정으로 돌아가 임금이 원수(元帥)의 재주를 가진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을 천거했다고 한다.공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뜻과 절개로 시대를 걱정하여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방법을 상달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할 것과 잘못된 정치를 혁파하고 고역을 균등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청하였고 조목조목 나열한 바를 두어 각 영에 설치한 둔전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 병신년 상소와 기해년의 저촉은 병서와 그림을 통해 모두 징험할 수 있다.공이 한번은 여름날 주룡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산모퉁이에서 큰 뱀이 기어와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이 잠에서 깨어 그것이 뱀인 줄 알고는 끝내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스스로 떠나가기를 기다렸으니 그 기량과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또 장을 청소하는 방법에 능통하여 저녁마다 물은 한 그릇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토해내 반드시 그 그릇에 가득 찼다. 홍시 같은 과일도 삼켰다가는 한참 후에 씨와 벌레를 토해내니 사람들 중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웅대하면서도 맑고 씩씩하여 국한 되지 않는 훤칠한 기개가 있으나 이는 공에게 그저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읊조린 시 몇 수가 있기는 하지만 글자에 잘못된 것이 많아 그 진수를 전할 수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공이 돌아가시자 아우 나덕윤(羅德潤)이 글을 지어 곡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가슴에는 운몽을 삼키고27) 胸呑雲夢말은 보불을 토하도다28) 詞吐黼黻뜻은 우주를 넘고 志凌宇宙눈은 천지를 초월하네 眼空霄壤용처럼 강가에 누워 龍臥江潭자신을 관중과 제갈공명에 견주었네 自擬管葛공의 평소 뜻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공을 세상에 낼 때는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한 것인데 끝내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공의 첫째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문과에 급제하여 담양(潭陽) 부사(府使)를 지낸 김경헌(金景憲)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절(劉節)의 따님이다. 모두 나주(羅州) 장흥동(長興洞)에 장사를 지냈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와 나인소(羅因素)는 김 씨가 낳았고, 나성소(羅成素)와 나취소(羅就素)는 유 씨가 낳았다. 나성소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나이소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나인소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나결(羅袺), 나격(羅䙐)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시화(柳時華)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를 두었는데 나겹(羅裌)이다. 나성소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參奉) 이소(李韶)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나취소는 후손이 없다. 공의 자손이 대를 이어 점차 쇠락하다가 나결의 손주 나만영(羅晩榮)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올라 집안의 명성을 다시 떨치니 이를 통해 남은 경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아! 공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6년이 되었다. 그 평생 행적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증험할 것이 없으므로 간략하게나마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한다. 만에 하나라도 훗날 공에 대해서 더 논할 것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하여 공의 간략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숭정(崇禎) 병자년(1636) 이후 79년 을미년(1715) 7월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쓴다. 公諱德明, 字克之, 號龜菴, 又號嘯浦, 姓羅氏, 羅州人. 麗朝有諱富爲監門衛上將軍, 是公鼻祖也. 後至工曺典書諱璡, 最貴顯, 生典農寺正諱公彦, 洪武間, 有克倭功, 仍世爲湖之右族. 曾祖諱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師事履素齋李仲虎, 以至行聞, 中宗旌其閭復其戶. 宣祖初, 道臣薦其賢, 累除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詩, 贈議政府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人, 以六龍目之, 公卽其冢嗣, 資稟魁偉傑特, 識者, 期以遠大器. 嘗在約年八九時, 路逢州吏, 吏不爲禮, 公擧理叱責, 吏乃肅然敬服, 聞者咸奇之. 萬曆己卯擧進士, 實宣祖十二年也. 銓曺聞公名, 除義禁府都事, 罷遞歸鄕時, 公蔚有聲華, 爲人所偢倈. 二弟德峻 德潤, 以鄭困齋門人, 俱有令名, 遂被不悅者所忌嫉. 己丑冬, 有鄭汝立上變事, 委官鄭澈, 乘機羅織, 丁岩壽 梁千頃 洪千璟等, 承澈旨, 投誣疏陷諸名流三十餘人, 而又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與汝立交至密, 知禍及己, 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弟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其疏會, 大言斥之. 及岩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禁府, 拿鞫岩壽等十人. 於是, 澈懼使臺官及太學生, 或陳啓, 或上章, 寢其命. 俄而務安儒生裵蓂, 疏伸卞困齋及公父子寃狀甚悉, 而澈竟以謀沮岩壽疏, 搆成罪目, 公之六父子, 一時就理. 贊成公特以孝見原, 公謫鏡城, 諸弟等幷分配. 公到配, 吟詩寄弟, 以寓陟岡之懷曰 : "關雲迢遞鴈無情, 何處孤城憶父兄. 殘燭夜深霜葉響, 夢中池草不能生." 壬辰, 島夷充斥, 賊將淸正長駈至, 北邊會寧人鞠景仁, 遂作亂, 執王子臨海君珒 順和君?及宰臣金貴榮 黃廷彧等, 以應倭. 於是, 鎭堡叛卒, 爭縛守將, 相繼附賊, 鐘城人鞠世必, 卽其渠魁也. 北評事鄭文孚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彦 輸城察訪崔東望等, 謀起義兵. 公與同謫人韓百謙, 協贊其謀. 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等, 亦來會, 捕得首惡者, 斬之, 軍聲仍以大振. 明年春, 別將李鵬壽 萬戶李希唐等, 與賊戰, 同日死. 公與文孚作詩, 以哀之事, 載李澤堂植小撰北關志. 其年, 公始得宥還. 丙申, 丁贊成公憂, 奉行襄禮于務安住龍渡, 仍居墓下. 丁酉, 倭賊更熾, 公與諸弟, 自住龍將避于銀積山, 同鄕孝子李有慶, 偕公舡欲渡, 公謂李公曰 : "君可先渡." 李公辭曰 : "主客有異, 吾雖落後狼狽, 理勢固然耳." 公曰 : "吾若先渡, 吾家奴必不致誠於君." 竟使之先渡. 人稱顚沛必是之義, 彼與此無讓矣. 亂定, 作亭于住龍嘯浦上, 優游以終老. 每省拜先壟有詠懷詩曰 : "朝朝上丘壟, 欲去還躕踟. 度幾侍誾誾, 一見平生儀." 公生于嘉靖辛亥年, 六十卒, 卽萬曆庚戌五月二十八日也. 葬贊成公墓下. 公體甚長大, 威容可畏, 見之者, 以爲得山河間氣. 本州牧與公年相敵者, 必稱老兄, 少五六歲, 必稱丈, 其見敬禮如此. 鄕人林文化懽, 以才智氣槪, 知名當世, 公與之相善. 嘗約會山寺, 林公先到, 談論自若傍若無人者, 及公追, 至林公, 自不覺沮喪, 公出言輒唯唯, 其時寺僧之目擊者, 傅以爲美談. 性又豪放, 不拘小節, 傲視一世, 於人少許可. 一日, 將如厠, 地主猝至, 公僅得延之上堂, 仍卽遺矢于堦上, 處之晏然曰 : "此愈於在堂上滑泄." 人服其廣度. 公旣名重南, 服人皆願一識, 使星冠蓋歷候者絡繹, 而迎接之除, 禮貌破簡. 至於郭忘憂堂再祐之謫居靈岩也, 訪公住龍, 使應門者入傳郭居士來到, 公顚倒衣冠, 下堂迎之, 一村人皆驚曰 : "公平生未嘗屈於人, 何狀居士, 能令公致敬若是哉?" 公遂與討論, 襟懷甚相得. 其後郭公還朝, 上問元帥才, 至以公薦剡云. 雖在草野, 志切憂時, 以感天意結人心之道, 有所上達, 而請伸己丑寃死之類, 以革弊政均賦役之策, 有所條列, 而請罷各營屯田之設, 此於丙申疏及己亥抵兵書畵中, 俱可徵也. 公嘗於夏日, 晝眠于住龍, 山隅有大蛇來, 蟠于腹上, 公覺來知其爲蛇, 終不動身, 以待其自去, 其器量凝重類如是矣. 又能通洗腸之術, 每夕飮水一器, 翊朝還吐, 必滿其器. 至於紅柿等物呑下, 良久吐其核與虫屑, 人莫不異之. 爲詩語必雄放淸健, 有不局底氣岸, 然此特公之餘事耳. 其所吟詠者, 有若干首, 而字多訛誤, 不得傳其眞, 可勝歎哉. 公之歿也, 弟德潤爲文, 哭之其略曰 : "胸呑雲夢, 詞吐黼黻, 志凌宇宙, 眼空霄壤. 龍臥江潭, 自擬管葛." 可謂摹得公之平生也. 惜乎! 天之生公, 宜若有爲, 而竟未克一試, 命也. 公先聘光山金氏文科潭陽府使景憲之女, 繼娶文化柳氏節之女, 俱葬羅州長興洞. 有四男曰以素 因素, 金氏出也, 曰成素 就素, 柳氏出也. 成素武科宣傳官, 以素有四男, 褕 襑 袿 袨. 因素有二男, 袺 䙐, 一女, 柳時華. 又有庶出子裌. 成素有一女, 李韶參奉. 又有庶出子表 衤方 袁 三人. 就素無後. 公之子孫, 連世陵替, 而袺之孫晩榮, 擢文科壯元, 官至持平, 能使家聲復振, 斯可見餘慶之未艾也. 嗚呼! 公之歿, 今已百有六年矣. 其平生行蹟, 必不止此, 而久遠無徵, 略述見聞記, 其萬一後之尙論公者, 亦可因此而得公之梗槪矣. 崇禎丙子後七十九年, 乙未七月日, 從曾孫生員斗冬, 謹記. 감문위(監門衛) 고려 시대 육위의 하나로,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과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의 통솔 아래 1영의 군대가 있었다. 전농시(典農寺) 고려 말기에 국가의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당시의 연호로,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사용되었다. 이산 현감(尼山縣監) 이산(尼山)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이며,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서 현의 수장이다. 거사비(去思碑)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만력(萬歷) 중국 명(明)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부터 1619년까지 사용되었다. 정곤재(鄭困齋) 1529~1590. 자는 의백(義伯), 이름은 개청(介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나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 씨(羅氏)이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이해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임금만 볼 수 있는 비밀 장계(지방에 나간 관원이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올렸고, 글 속에는 정여립이 주도하는 세력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은 사실을 미리 알고 피했으나,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끌고 와서 포위하여 자결하였다. 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 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정철은 파직되어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있지도 …… 꾸몄다 원문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경성(鏡城) 함경북도 경성군을 말한다. 척강(陟岡)의 회포 원문 '척강(陟岡)'은 《시경》 〈척호(陟岵)〉에서 나온 표현으로, 행역(行役) 나간 효자가 "저 언덕에 올라 형을 바라보네.〔陟彼岡兮, 瞻望兄兮.〕"라고 한 것에서 파생하여, 부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함을 말한다. 회령(會寧)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의 옛 지명이다. 국경인(鞠景仁) ?~1592.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명천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김귀영(金貴榮) 1520~1593.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황정욱(黃廷彧) 1532~1607.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진보(鎭堡) 진영(鎭營)과 보루(堡壘)를 함께 이르는 말로 대개 군대의 진영을 말한다. 종성(鍾城) 함경북도 종성군을 말한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자는 중항(仲恒)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북관지(北關志) 북관 각 군의 읍지(邑誌)를 개괄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식(李植)이 북평사로 있을 때에 함경도 북부 지방의 각 군읍지를 모아 편집에 착수한 것을 그 아들 이단하(李端夏)가 계승, 완성하였다. 은적산(銀積山) 황해북도 은파군(銀波郡)에 소재한 산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로, 1522년(중종17)부터 1566년(명종21)까지 사용되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가슴에는 …… 삼키고 광대한 포부가 있음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나라에는 칠택이 있고 그중에 하나인 운몽택은 사방이 9백 리인데, 운몽택 같은 것 여덟아홉 개를 삼키어도 가슴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楚有七澤, 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말은 …… 토하도다 벼슬할 만한 재주가 있음을 말한다. 보불(黼黻)은 임금이 대례(大禮)에 사용하던 제복(祭服)이다. 구장복(九章服)에 용(龍), 산(山), 화충(華蟲), 화(火),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그림을 수놓는다. 전하여 벼슬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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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평사 숙필의 시에 차운하다 외재 이단하 次申評事叔弼韻【畏齋李端夏】 형양에서 영원할 훈명 세웠으니72)함께한 공들의 의로운 명성 드러났네묘우에 새로운 시 썼다는 말 듣고한마디 말로 다시 장성73)에게 응수하네 滎陽千載樹勳名同事諸公著義聲聞道新詩題廟宇一言應復敵長城 영원히……세웠으니 한(漢)나라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당해 위급해졌을 때, 기신(紀信)이 한나라 왕 행세를 하면서 항우에게 항복하고 유방을 탈출하게 하였는데, 항우가 그 사실을 알고 불태워 죽였다. 《漢書 卷1 高帝本紀上》 장성(長城) 중후한 사람이나 견고하여 꺾을 수 없는 역량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는 평사 신숙필(申叔弼)의 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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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를 적어 촉룡서당의 제군들에게 보내다 외재 이단하 感懷書寄燭龍堂諸君案下【畏齋】 궁벽하고 외진 변방 이곳이 내 고향인가지난날 골짝을 구르던 생활 잊지 않았네쫓겨나74) 오히려 고향 땅으로 돌아왔으니촉룡서당에서 다잡은 초심 저버렸네­공의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내가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이미 정공의 사당을 세웠고, 또 사당의 담장 밖에 서당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병사(兵使)에게 가서 보자고 요구하자, 병사가 웃으면서 '나는 이 일을 하느라 고생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내가 내 집을 지은 것은 훗날 귀양살이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골짜기에서 지낼 때를 잊지 못한다는 말도 했는데, 제군들이 함께 들었으니 또한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지금 죄를 지어 쫓겨났는데도 오히려 고향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이는 지난날에 스스로 기약한 것이 아니므로 이 절구 한 수를 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窮荒絶塞是吾鄕邱壑從來意不忘放逐尙還狐首地初心孤負燭龍堂【公自註云"生在北幕時, 旣營鄭公祠宇, 又營書堂于祠墻外。一日要兵使往見, 兵使笑'我勤苦於是役', 對以'吾營吾舍, 以備他日謫居之所', 仍有不忘在邱壑之語, 諸君同聽, 亦必記取矣。今得罪放黜, 猶得偸安田里, 非向時所自期者, 故占此一絶矣"。】 방축(放逐) 1674년에 숙종이 즉위하였는데, 외재가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에 삭직 당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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