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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묘에 배알하다 謁夷齊廟 현조의 옛 터에 기장이 자라려 하였으니216)기산에서 이미 봉황이 와 우는 것 보았네217)구주에 주나라가 삼분의 이 차지했는데신하의 절개는 은나라 형제에게 남았네말고삐 잡은 외로운 충심218) 소나무 홀로 늙고고사리 캐는 맑은 지조 두 형제의 훌륭함 이루어졌네인륜 강상을 부지하는 힘 알고자 한다면나라를 양보한 초기에 대의가 밝았다오219) 玄鳥遺墟黍欲生岐山已睹鳳來鳴九州周有三分二臣節殷餘弟及兄扣馬孤忠松獨老採薇淸操玉雙成要知扶植綱常力讓國初頭大義明 현조의……하였으니 은나라의 국운이 기울었다는 뜻이다. 상고 시대 유융씨(有娀氏)의 딸이 제곡(帝嚳)의 차비(次妃)가 되어 제비[玄鳥]의 알을 삼키고 임신하여 설(契)을 낳았는데, 설이 바로 은(殷)나라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한다. 《詩經 商頌 玄鳥》 《史記 殷本紀》 기산에……보았네 주나라가 세워졌다는 뜻이다. 《국어(國語)》 권1 〈주어(周語)〉에 "주나라가 일어날 적에 봉황이 기산에서 울었다.[周之興也, 鸑鷟鳴於岐山.]"라고 하였다. 말고삐……충심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치려고 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치지 말기를 간언했다. 《史記 伯夷列傳》 나라를……밝았다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임금 자리를 양보했던 것을 말한다. 고죽군(孤竹君)은 이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는데, 고죽군이 죽은 뒤 숙제가 백이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백이가 부친의 명이라고 하고는 마침내 도주했고, 이에 숙제도 즉위하려 하지 않고 도주했다. 《史記 伯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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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노첨에게 주다 2수 贈崔魯詹【二首】 노선의 붓 아래 옛날 한유의 문장 펼쳐지니그대는 또한 시에 능하여 리가 가르침을 들은 듯229)재주는 젊어서부터 명성이 자자하였는데운수 어긋나 흰 머리카락만 날로 어지럽구나하늘 저편 이별의 한은 봄풀에 슬퍼하고230)관새 너머에서 돌아갈 마음 흰 구름을 바라보네231)구중궁궐이 천리 멀다고 말하지 말라어진 이 대우하는 성명의 군주를 믿어보게나젊어서 약간 공맹의 경전 공부하였는데나이 오십에 명성 없어 부끄러워라벼슬은 낮다고 이르지 않지만 나의 졸렬함을 알고귀가 어두워도 어찌 슬퍼하랴만 어지러운 세상이 싫어라지금 내세울만한 것232)은 다만 백발뿐이오중년까지 오래 사귄 것은 푸른 구름이어라근래의 회포는 그다지 좋은 것 없는데관새의 길 봄바람에 또다시 그대 보내는구나 老仙筆下古韓文子又能詩鯉有聞才調少年名籍籍蹉跎衰鬢日紛紛天涯離恨傷春草關外歸心望白雲莫道九門千里遠急賢須恃聖明君少日稍爲鄒魯文行年五十恥無聞官非謂薄知吾拙聾亦何傷厭世紛長物此時惟白髮舊交中歲盡靑雲邇來懷抱無多好關路春風又送君 리가……듯 《논어》 〈계씨(季氏)〉에서 "공자가 홀로 서 있을 때 아들 리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니, 공자가 그에게 '시를 배웠느냐'라고 물으니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느니라.'라 하였다. 리는 물러나 시를 배웠다.[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라고 하였다. 봄풀에 슬퍼하고 먼 타향에서 부모를 그리는 효심으로는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어려움을 뜻한다. 당나라 맹교(孟郊)의 〈유자음(游子吟)〉 에서 "한 치의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날의 햇볕 같은 어머니의 사랑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다. 흰 구름을 바라보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로 부임하여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다가 백운(白雲)이 떠가는 것을 보고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친이 계신 곳이 저 구름 밑이다." 하고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다가 구름이 옮겨가자 이에 자리를 떴다. 그 후로 이 일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舊唐書 卷88 狄仁傑列傳》 내세울만한 것 장물(長物)은 원래 두 가지 이상 가지고 있는 물건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몸에 많이 지닌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공(王恭, ?~398)이 아버지를 따라 회계(會稽)에서 서울로 왔을 때 친한 벗 왕침(王忱)이 그를 찾아갔다가 그가 깔고 앉은 6자 너비의 대자리를 보고는 달라고 하였다. 왕공은 그가 떠난 뒤에 즉시 대자리를 거두어 보내주고 자신은 언치를 깔고 앉았다. 뒤에 왕침이 이를 알고 매우 놀라자 왕공이 "나는 평소에 남는 물건이 없네.[吾平生無長物]"라고 하였다. 《晉書 卷84 王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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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잃다 失題 옷깃을 표연히 떨치고 떠나매 붙잡을 수 없나니갈림길에서 이별의 한 끊임없이 가슴에 사무치네기나긴 밤의 정담은 누구와 나눌까저물녘 높다란 난간에 이제 홀로 기대어 있겠지능라 휘장 차가운 등불에 혼은 쉬이 흩어지고비단 창 서늘한 바람에 눈물은 얼음처럼 맺히네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가서 낭군 돌아올 길 바라보는데다만 관산의 만 겹 눈만 보이는구나 征袂飄然挽不能臨岐脈脈恨塡膺長宵軟語知誰共落日危欄想獨憑羅幌燈寒魂易散綺窓風冷淚凝氷三時出望郎歸路惟見關山雪萬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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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배율 七言排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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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와 장평에서 왜적을 쳐부수고 올린 장계 吉州長坪破倭賊狀啓 신이 경성(鏡城)에 들어와 웅거한 이후로 회령, 명천의 남북으로 역적들이 있었는데, 외로운 성을 지키는 관계로 곧바로 토벌할 수 없었는데, 두 역적의 목을 베게 되자 육진(六鎭)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10월 21일에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을 유진장(留鎭將)으로 차정(差定)하고서 7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경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신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명천현(明川縣)으로 진격하였는데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과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이 함께 와서 합쳤습니다.왜적 천여 명은 길주성(吉州城) 안에 웅거하고 3백여 명은 길주 남쪽 팔십 리 영동(嶺東) 지역에 있으면서 서로 왕래하며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였는데, 간혹 열 명, 백 명이 무리를 이뤄 산골짜기에서 나무도 하고 혹은 군사를 나눠 사방에서 출몰하며 양민을 죽이고 마을을 약탈하면서 방자하게 횡행하면서 조금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신은 중위장(中衛將)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경성 이북의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에서 머무르며 정병 4백 명을 뽑아내어 두 길로 나눠서 고참(古驂) 지역으로 진군, 주둔하여 요로에 병사를 매복하였고, 좌위장(左衛將)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은 길주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에 주둔하면서 노략질하는 왜적을 감시하였습니다. 우위장(右衛將)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는 길주의 두 마을과 서북보(西北堡)의 토병(土兵)과 그리고 본보의 장수와 함께 보에 웅거하면서 정예병을 뽑아서 마을 어귀에 병사를 매복시켜서 나무하는 길을 끊었습니다.신의 종사관 전 인의(引儀)로 과거에 급제한 원충서(元忠恕)는 정병 2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주의 북쪽 삼십 리 아간창(阿間倉)에 주둔하고서 산에 올라 왜적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같은 달 30일 이른 아침에 왜적 천여 명 정도가 깃발을 펄럭이면서 성을 나와 바닷가의 가파리(加坡里)로 향하여 가므로 앞의 원충서가 급히 각 곳의 복병장(伏兵將)에게 통보한 다음 자신의 부하를 거느리고 왜적의 귀로를 차단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적들은 마을을 불사르고 재산과 가축을 약탈하며 아녀자들을 포로로 삼고서 오후에 돌아오게 되자, 원충서가 왜적들과 접전을 벌여 앞장 선 두 놈을 참수하니 왜적이 패퇴하였습니다. 이에 기세를 타고서 추격하다가 왜적의 대군을 만나게 되자 보병에게 명령을 내려 산에 올라가 험준한 곳에 웅거하게 하고 저는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서 뒤쪽을 막은 뒤에 후퇴하여 수비하였습니다. 마침 고참의 복병장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가 소식을 듣고서 즉시 여러 장수와 병사 삼백여 기병을 거느리고서 2식(二息)186) 거리를 내달려와 원충서와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적은 여러 차례 전투에 이긴 것에 자만하여 그깟 쯤이야 하고 무시하며 노략질한 짐들을 싣고 길주를 향해 내달렸습니다.왜적의 괴수는 정승(政丞)이라 일컬으며 이름이 직정(直正)이란 자이며, 감사(監司)라 일컫는 이름이 도관여문(都關汝文)이란 자와 절도사(節度使)라 일컬으며 이름은 알 수 없는 장수 등 다섯 사람이 정예군 사백여 명을 거느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하여 철환(鐵丸)을 마구 쏘아대므로, 좌척후장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우척후장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 별장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신의 종사관 조산 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경원 사람으로 급제한 군관 황사원(黃嗣元), 종성 부사 군관으로 급제한 박은주(朴銀柱) 등이 각자 부하를 거느리고 한꺼번에 돌진하였으며 마부와 종들까지도 모두 용기를 내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왜적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평지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갑자기 조우하여 돌진하여 육박전을 벌이자 신시 초반부터 해가 지기까지 우리와 왜놈이 들락날락하면서 교전하였는데, 힘이 떨어지자 비로소 산으로 올라가 달아났습니다. 마침 좌위복병장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이 또한 부하를 거느리고서 산 위쪽을 막고 우리 정예군이 좌우로 끼고 달려 곧장 험준한 산으로 올라가 10여 리를 추격하였습니다. 일군의 왜적들은 등 위에 십여 개의 화살을 맞고서 거의 섬멸되었으며 장수 5명도 아울러 활을 쏴서 죽였는데, 화살에 맞고 벼랑에서 떨어진 자들은 너무 많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로잡힌 사람과 가축을 전부 도로 빼앗았으며 군 장비와 잡물도 아울러 획득하였습니다.참수하고 벤 왼쪽 귀 825개는 감봉(監封)하여 올려 보내며 말 118필은 각각 뺏은 사람에게 주었으며 환도는 빼앗은 군인들이 각자 차가 갔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처 전부 추심(推尋)하지 못하였습니다. 깃대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총통 26자루, 철환 646개, 화약통 15개 등의 물건은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개 전투에 지치고 날이 저물어 죽은 왜놈의 귀를 일일이 다 베지는 못하였는데, 화살을 맞고서 성으로 들어갔거나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다가 죽은 자들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안의 남은 적은 그 숫자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 잔약한 자들이므로 내일이나 모래 사이에 일거에 탕진할 생각입니다.인심이 이반되어 흩어진 뒤에 비로소 이렇게 왜적을 격파하였으니 마땅히 등급을 나눠 공을 기록하여 군의 사기를 고무시켜야 하는데, 일이 아직 평정되기 전이라 먼저 작은 공로를 기록하여 조정에 아뢰는 것은 사체(事體)가 온당치 않으니, 장부에 모두 기록하였다가 일이 평정된 이후에 계문할 생각입니다. 다만 지금 계본(啓本)을 가지고 가는 경성의 유생 최배천(崔配天)은 맨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힘을 다하여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이번에도 출전하기를 자원하여 왜적 한 놈의 목을 베었습니다. 포구 사이에 남은 왜적이 가득하여 공적이나 사적으로 왕래하는 동안 간혹 사로잡히기도 하여 사람들이 잘 다니려 하지 않는데, 스스로 활을 잘 쏘는 양민 이장춘(李長春)과 동의절 향교 종 억준(億俊)이 자원하기에 최배천과 함께 보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1월 1일. 自臣入據鏡城之後, 會寧明川南北有叛, 坐守孤城, 未卽擧事爲白有如乎節, 兩逆授首, 六鎭徵兵, 稍稍來集爲白良沙。去十月二十一日, 潼關僉使李應星乙用良, 留鎭將差定, 率軍七百餘名, 使守鏡城爲白遣, 臣率軍千餘, 進住明川縣爲白乎如中, 吉州牧使鄭煕績·輸城察訪崔東望, 幷爲來會爲白齊。倭賊千餘段, 據吉州城內, 三百餘段, 在吉州南八十里嶺東地, 相爲往來, 聲勢相倚, 或十百爲羣, 樵採山谷, 或分兵四出, 殺掠村家, 恣意橫行, 略不顧忌爲白齊。臣與中衛將鍾城府使鄭見龍, 率鏡城以北軍千餘, 留明川抄出精兵四百, 分二道, 進屯古驂地, 設伏要路爲白遣, 左衛將高嶺僉使柳擎天乙用良, 領吉州軍千餘, 屯海汀, 以伺摽掠之賊爲白遣。右衛將慶源府使吳應台段, 率吉州兩里及西北堡土兵與本堡將, 據堡抄出精兵, 設伏洞口, 以斷樵採之路, 臣從事官前引儀土及第元忠恕段, 率精兵二百餘, 屯吉州北三十里阿間倉, 登山覘賊次, 同月三十日早朝, 倭賊可千餘名, 張旗出城, 向海汀加坡里爲白去乙, 同元忠恕, 亦卽卽馳報各處伏兵將爲白遣, 率其部下, 直要歸路次, 倭賊焚蕩村舍, 劫掠財畜, 虜其婦女, 午後回還爲白去乙, 元忠恕與賊接戰, 斬其先導兩賊, 倭賊北退爲白去乙, 乘勢追擊, 遇倭賊大軍, 令其步卒, 登山據險, 身率精銳捍後退保次, 古驂伏兵將防垣萬戶韓仁濟聞報, 卽時率諸將士三百餘騎, 馳往二息程, 與元忠恕合擊倭賊, 狃於屢勝, 以爲誰何, 先驅所掠卜駄, 向吉州。巨魁政丞稱號名直正者·監司稱號名都關汝文者及節度使稱號名不知將等五人, 率精勇軍四百餘名, 敢死突戰, 多放鐵丸爲白去乙, 左斥候將吾村權管具滉·右斥侯將安原權管姜文佑·別將玉連萬戶安沃·臣從事官造山萬戶印元忱·軍官慶源土及第黃嗣元·鍾城府使軍官土及第朴銀柱等, 各率所部, 一時突陣, 廝徒下卒, 無不鼓勇, 射矢如雨, 倭賊等, 皆下馬地鬪爲白如乎。猝遇突騎, 自申初至日昏, 兩軍出沒交兵, 力屈, 始爲登山北走爲白去乙, 適音左衛伏兵將斜卩洞權管高敬民, 亦率所部, 遮絶山上爲白遣, 我軍精勇, 左右夾馳, 直上峻山, 追至十餘里, 一賊背上矢中十數, 幾盡殲戮, 將帥五名, 幷爲射斬, 中箭墜崖, 不知其數。所擄人畜, 全數還奪, 軍裝雜物, 幷以獲得爲白齊。斬割左耳捌百貳拾伍箇段, 監封上送, 馬壹百拾捌匹段, 各授所奪人爲白遣, 環刀段, 亂軍各自佩持, 時未盡追爲白有齊。旗貳拾玖, 甲伍拾部, 胄捌部, 鎗拾陸柄, 銃筒貳拾陸柄, 鐵丸陸百肆拾陸箇, 藥桶拾伍箇等物段, 留上爲白在果。大槩酣戰日昏, 未能一一斬馘爲白良置, 中箭入城, 逃竄山谷以死者, 不知其數爲白齊。城中餘賊, 厥數不多叱分不喩, 率皆殘弱是如爲白乎等乙以, 來明日間, 一擧盡蕩計料爲白有旀, 人心叛散之餘, 始此破賊, 所當分等錄功, 聳動軍情是白乎矣, 事未畢定之前, 先錄小功以聞朝廷, 事體未安爲白乙仍于, 一一置簿, 事定後, 啓聞事, 妄料爲白有在果。惟只今去啓本陪持人鏡城儒生崔配天段, 當初倡義時, 始叱盡力周旋叱分不喩節段置, 自願赴戰, 斬馘一級爲白有旀, 浦港之間, 零賊充斥, 公私往來之際, 或被擒獲, 人不樂行乙仍于, 自募能射良人李長春·董義節校奴億俊乙, 幷爲發送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一月初一日。 2식(二息) 식(息)은 거리의 단위이다. 1식은 30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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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와 임명에서 왜적을 격파한 것과 육진의 역적을 찾아 목을 베고 오랑캐들에게 항복 받은 것에 대해 올린 장계 吉州臨溟破倭賊及六鎭叛黨搜誅藩胡招服狀啓 지난 해 11월 1일에 성첩(成貼)187)하여 올려 보냈던, 길주(吉州)에 주둔한 왜적과 접전을 벌여 목을 벤 사연을 적은 장계가 12월 9일에 행재소에 도달하여 접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올해 정월 9일에 본도로 가지고 온 비변사에서 내려 보낸 다섯 통의 공문을 상고하였습니다.길주에 주둔한 왜적이 한번 패배한 뒤로는 견고한 성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 않거늘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이 각자 부하를 거느려 모두 삼천여 명의 병사가 다시 찾아가 성을 포위하고서 종일 접전을 벌였습니다. 왜적 4백여 명이 성 위에 줄지어 서서 죽을힘을 다해 방비하므로 철환과 화살에 왜놈과 아군 모두 많은 병사가 부상을 당하니 빨리 함락할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군사를 나눠 성 밖 2~3리 네댓 곳에 매복하고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왜놈이 나오면 곧바로 죽이거나 사로잡으려 하였습니다. 세 위장은 모두 병사를 영동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의 왜적을 섬멸한 뒤에 성 안의 왜적을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마침 군사를 옮기는 날, 영동(嶺東)의 왜적 사백여 명이 임명촌(臨溟村) 민가에 나와 불 지르고 노략질할 때 좌위장 유경천이 차정(差定)하여 보낸 복병장 길주 토병(土兵) 김국신(金國信)이 먼저 접전을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대군에게 급히 통보하니 삼위장이 한꺼번에 그곳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육진의 정예병이 먼저 접전을 벌여 왜적이 패퇴하였는데, 삼위의 군사들이 활로 쏘거나 참수한 왜놈과 성 안에 남았다가 드나들 때 붙잡아 죽인 왜놈까지 모두 백여 급(級)으로, 왼쪽 귀를 함에 넣어 봉하고 군공을 모두 기록하여 장계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던 차에 도순찰사(都巡察使) 윤탁연(尹卓然)이 저희들 마음대로 장계한다고 하여서 공문으로 추고(推考)하였습니다. 순찰사의 지휘를 낱낱이 거행하지 않았고 군중의 기밀도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으며 북도 오랑캐의 난리도 또한 자세히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연달아 네 차례나 추고하였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병사들은 모두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이 모집한 병사이며 공은 모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의 공이라 하면서 '패군 장수 원충서(元忠恕)를 녹공(錄功)에 참여시키고 정희적과 고경민의 온전한 공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명천 현감(明川縣監) 장응상(張應祥)을 시켜서 평사(評事, 정문부)가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인양 다짐을 받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신은 나이가 어리며 어리석고 용렬한 백면서생으로 군사 일을 잘 알지 못할 분 아니라 문서 보고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군무를 맡게 되었는데 일을 잘못 처리하여 중죄를 받게 되었으니 방황하며 근심하던 차에 순찰사의 공문에 '평사가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아울러 종사관을 거느리니 지극히 해괴하다.'라 하여 신의 대장직을 교체하고 회령 부사 정현룡으로써 대장을 바꾼다는 공문을 작년 11월 21일 성첩하여 보냈습니다. 이에 곧바로 체찰사의 지휘에 의하여 수하 장수와 병사 삼천여 명 모두를 정현룡에게 넘겨주고 신은 물러나 추고에 답하려고 하였는데, 북병사가 공문에 보내와 '평사는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울려 오랑캐를 진압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대장직에서 교체되었기에 감히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군관과 휘하 50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였습니다.경원(慶源)에 이르러 백성들을 효유하고 아울러 오랑캐들에게 음식을 보내 달랬습니다. 백성들은 왜적이 물밀 듯 밀고 올라올 처음에는 국가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면서 군민들이 그 수장을 내쫓고 드넓은 도로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피란 온 선비들을 간혹 붙잡아서 왜적에게 내주고 간혹 옷과 행장을 몽땅 빼앗았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뒤로 다른 관원들이 토착민들의 전날 악행을 낱낱이 들어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물건을 추심하는데 급급하니 민심이 불안하게 되었는데, 신은 '두 마음을 먹은[反側] 무리들을 진정시키는 처음에 이와 같은 행위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일절 금지하여도 왕의 권위를 빙자하여 이런 행위를 하니 금하여도 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마음을 먹은 무리들은 의구심이 날로 깊어져 신이 회령(會寧)에 이를 때에는 본부(本府)의 백성들이 반적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반 이상이 도망가 버렸으니, 신이 임기응변의 말로 온화하게 효유하였으니, '이미 괴수는 죽였으니 위협에 의해 협조하던 이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달래자 그제서야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경성과 온성(穩城)의 인심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자못 의심을 가지고 주저하는 기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원 좌수(慶源座首) 정사기(鄭士麒)와 그 아우 사봉(士鳳)은 당초 왜적이 북쪽에 들어왔을 때 병사 이하 관군을 잡아서 왜적을 맞이하여 투항할 생각이었는데, 신이 경성에 들어가 장악한 이후로 여덟 차례나 징병령을 내렸지만 거역하고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랑캐 난을 방어하려고 길주에 진군한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범(金範)은 회령을 겸하여 다스리기에 회령으로 들여보냈고,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은 본진(本鎭)으로 들여보내어 백성들과 오랑캐의 마음이 거의 진정되었습니다만, 정사기만은 도내의 거악(巨惡)으로 자신의 친족 무리를 군노사령(軍奴使令)으로 많이 심어놓으니 판관들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러 정사기와 사봉 및 그 당의 괴수 경흥 토병 최송(崔松)을 행영(行營)에 잡아와서 모두 참수하고서 효수하였습니다. 종성 통사(鍾城通事) 안억수(安億壽)는 전부터 변방 오랑캐들에게 토색질을 하였으며 왜란이 일어난 뒤에 나라에 기강이 없음을 틈타 온갖 물건을 토색질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통사의 눈앞에서도 오랑캐가 고한 말을 변조하여 거짓으로 전하였습니다. 신이 그 기색이 거짓되고 비밀스러움을 보고서 직접 중추하량개(中樞下良介)를 불러들여 우리나라 말로 문답을 하였는데, '육진이 왜변이 일어난 뒤 토병의 토색질로 변방의 근심을 빚어낸 것은 대개 다 비슷한데, 그 가운데서도 안억수는 가장 심하다.'고 하거늘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 돌림하여 일벌백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하량개란 놈도 흉측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오랑캐라 우리나라 사람을 나쁘게 이야기하는데 여러 오랑캐가 보는 앞이라 경솔하게 처형하는 것은 아마도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 같아서 곧바로 칼을 씌워 부령부(富寧府)로 옮겨 가두고 순찰사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오랑캐의 정세를 말씀드리자면, 회령 관내는 당시 배반하는 정황이 없으며, 경성의 오랑캐는 밖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소원하니 그들의 하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지만 또한 분명하게 도적질하는 일은 없으며, 온성의 오랑캐는 애초 왜변 때부터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흩어져 지내는 우리 백성을 한 명도 노략하지 않았을 뿐더러 판관이 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른 오랑캐들이 노략질한 사람과 물건을 먼저 돌려보내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니 다른 진(鎭)의 예에 의거하여 술과 고기를 보내고 소금과 장을 주는 이외에 별도로 공이 있는 오랑캐를 따로 불러서 한 상 물러주어 술을 주고 소금과 장을 더 주면서 왜적을 모두 평정한 후에는 상과 벼슬을 서울에 가서 각각 특별히 시행할 것으로 이치를 들어 타일렀습니다.경원은 두두족(頭頭族) 추장 10여 명이 이따금 와서 고하며 우리나라에게 복종할 것처럼 거짓 꾸며 보이지만, 부내(府內)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이미 우리나라를 배반하여 잠깐 귀순하는 척 왔다가 곧바로 떠나 함께 도적질을 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합니다. 신이 북으로 갔을 때 타이르는 명령을 듣기 위해 왔었던 추장과 학생 도합 이백여 명은 우리 쪽에서 불러서 왔을 뿐 아니라 저들도 부름에 응하여 귀순한 것이므로 숨은 악행을 들춰내서 죄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례에 의거하여 음식과 물품을 주고서 효유하기를 '도적질하는 오랑캐가 너희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침입해 올 경우 나라에서 죄를 물을 때 너희들도 함께 화를 입을 염려가 있으니 본분을 잘 지키며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각별히 유념하라.'라고 엄한 말로 타일렀습니다.경흥은 서수라일보(西水羅一堡)의 첩입군(疊入軍)과 조산보(造山堡)의 흩어진 백성과 토병을 함덕후(咸德厚)가 거느려 성을 시키고 있는데, 도둑질하는 오랑캐들이 네 번이나 성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을 뿐 아니라 도적 오랑캐의 부락 한 곳을 빈틈을 타서 불태웠습니다. 고립된 군대가 자신의 지역을 넘어 장수가 명령을 내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비록 온당함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조그마한 외로운 성이 큰 도둑에 의해 길이 끊어져 제 때 지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 성을 온전히 보호하고 왜적을 무찔러 군기(群機)를 잃지 않았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 일이기에 함덕후를 정장(定將)으로 삼고 회령 해창(海倉)에 있는 쌀 1백 석을 그쪽의 보(堡)로 운반하여 성을 지키는 군량미로 쓰게 하였습니다.경흥부와 그 관내인 조산(造山), 무이(撫夷), 아오지(阿吾地)와 경원 관내인 건원(乾元), 아사보(阿山堡)는 애초부터 지키지 못하여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이 마음대로 분탕질하고 거침없이 왕래하여 도둑들이 다니는 길이 되어버렸으니, 간혹 경흥의 바닷가에서 혹은 경원 지역에서 들어와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도둑질을 하여 산골의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육진의 정예병 2백여 명은 길주(吉州)에 나아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게다가 왜적이 침입하여 마구간이 텅 비어버려 전날 말달리며 활 쏘던 군사가 지금은 말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투 기물[軍器]도 왜놈들에게 모두 불타버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을 묶어 횃불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피난한 백성들 가운데 활과 화살을 지닌 자는 모두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민간의 전투 기물도 거의 묻혀 섞어 버렸으므로 성에 웅거하며 방어하는 것도 오히려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 먼 곳까지 추격하는 것은 형편상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촌에 사는 백성들 모두에게 성안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여 노략질 당함을 면하게 하였습니다.길주의 왜적의 세력이 이윽고 사그라지고 육진의 오랑캐의 난리가 점차 거세지므로 부득이하게 왜적과 싸우던 여러 장수 가운데 간간이 뽑아 들여보냈는데, 각 그 진장(鎭將)이 정예병을 뽑아 거느려서 요충지에 매복하여 횡행하는 길목을 끊어버렸습니다. 대개 북도는 길이 대단히 멀고 눈얼음이 쌓인 지역으로 순찰사가 있는 곳까지 10여 일이 걸리는데, 군중의 기무(機務)는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하니 한결같이 지휘에 의해서 시행한다면 아마도 임기응변하는 병가(兵家)의 도리가 아닌 듯 하기에 그 간의 급한 일은 간혹 순찰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시행하고서 후에 문서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찰사의 지휘에 '대장을 교체하여 도망병을 잡는 장수로 정했으니, 마천령과 단천 등지에서 군관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도망한 병졸을 체포하라.'라 하였습니다. 신이 하찮은 작은 관리로 조그마한 공도 없이 문득 당상관에 오르니 임금의 은혜가 망극하여 어떻게 은혜를 갚고 죽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피를 칼날에 바르고도 사양하지 않았는데, 다만 지금 길주와 영동을 아직 소탕하기 전이라 북쪽으로 도망간 우리 병사가 남쪽을 향하여 도망갈 이치는 없을 듯 하기에 일단 군중에 머물고 있습니다.신이 지난해 11월 21일 대장에서 교체되었을 때 12월 14일자로 보낸 비변사의 이문(移文)에 '평사는 바야흐로 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날짜가 24일이나 지났는데 순찰사가 저의 죄를 청하는 장계가 당시에 행재소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의심스럽습니다. 회령 부사 정현룡은 대장이 된 지 한 달도 못되어 겸절도사로 교체하여서 육진을 순행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 오응태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신은 다만 북병사의 지휘에 의하여 제 마음대로 북쪽을 순시하였다고 추고하였습니다. 각 진의 장수로 예를 들면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등 무려 수십 명은 각자 본진(本鎭)의 토병(土兵)을 이끌고 와서 왜적을 토벌함에 참여하고서 순찰사에게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름을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각 보와 진의 장수를 거의 다 교체하여 간혹 한 진과 보의 장수에 2~3 사람을 거듭 임명하여 장수들도 자신의 본래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고 병졸들도 자신의 장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정(軍情)은 흔들리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기에 대단히 염려가 되어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제 마음대로 장계를 올린다고 죄를 얻을까 염려되어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전에 올린 장계를 돌려보내는 사연과 및 비변사에서 보낸 다섯 통의 공문에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어 1등의 군공을 세운 지방 사람으로 급제한 차응린(車應轔)이 자원하기에 전례에 의거하여 바닷길로 장계를 올립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2일. 前年十一月初一日, 成貼爲白在, 吉州留倭接戰斬馘辭緣書狀, 十二月初九日得達行在所受到付, 及備邊司啓下成貼關五度, 今年正月初九日, 齎還本道爲白有去乙, 相考爲白乎矣。吉州留賊一敗之後, 入據堅城, 縮頭不出爲白去乙,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高嶺僉使柳擎天, 各率所部, 合兵三千餘, 再度圍城, 終日接戰爲白乎矣。倭賊四百餘名, 列立城頭, 抵死防備, 鐵丸射矢, 彼我俱傷, 勢難猝拔乙仍于, 分兵設伏城外數里許四五處, 晝夜候伺, 出則勦捕爲白乎旀, 三衛將幷以移兵嶺東, 先滅柵內之賊, 次及城中之寇計料爲白如乎。適音移兵之日, 嶺東倭賊四百餘名, 出來臨溟村舍, 焚蕩擄掠之際, 左衛將柳擎天, 定送爲白在伏兵將吉州土兵金國信, 爲先接戰爲旀, 一邊以馳報大軍爲白良在乙, 三衛一時馳突其中, 六鎭精兵爲先接刃, 倭賊敗奔, 三衛射斬及城中留賊出沒時捕斬, 合百餘級, 左耳函封, 軍功幷以磨鍊狀啓計料次, 都巡察使尹卓然, 亦擅自狀啓是如, 出公緘推考爲白乎旀, 巡察使節制一一擧行不冬, 軍中機務趁不馳報, 北道胡亂, 亦不這這馳報是如, 連四度推考叱分不喩, 某條以傳聞爲白乎喩, 兵皆吉州牧使鄭煕績召募之兵, 功皆斜卩洞權管高敬民之功是去乙, '敗軍將元忠恕, 亦參錄功, 鄭煕績·高敬民, 不以專功上聞'是如, 明川縣監張應祥乙用良, 評事失誤軍機樣, 以捧侤音, 上使亦爲白臥乎在亦。臣以年少迷劣白面書生, 不閑軍旅叱分不喩, 文報間曲折, 專不閒習爲白如可, 一朝臨戎, 誤蒙重罪爲白乎去, 彷徨悶迫之際, 巡察使節制內, '評事自稱大將, 兼率從事官, 至爲駭怪'是如, 遆臣大將之任,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改定大將關子, 前年十一月二十一日, 成貼到付爲白良在乙, 卽依巡察使節制, 專以手下將士三千餘名, 鄭見龍處交付, 臣段, 退答推考爲白如乎, 北兵使節制內, '評事亦巡行六鎭, 鎭定人心, 兼鎭虜情'亦爲白有去乙, 臣已遆大將之任, 不敢不從乙仍于, 率軍官及麾下五十餘人, 北行六鎭。至慶源, 曉諭人民, 兼饋藩胡爲白乎矣。人心段, 當初倭賊長驅之時, 不復知有國家, 軍民逐其守將, 衢路恣行攘奪, 京來將士及避亂士人等, 或被捉致倭賊, 或被赤脫衣裝爲白有如可, 自臣入城之後, 歷擧土人前日過惡, 使無所容叱分不喩, 急於推得失物, 因致人心不安爲白去乙, 臣以謂'鎭定反側之初, 如此擧措, 甚非事宜'是如, 一切痛禁爲白如乎節段, 憑藉王靈, 禁不能抑, 反側之輩, 疑懼日深, 至於臣到會寧之日, 本府人民, 恐爲叛賊連累, 太半逃走爲白有去乙, 臣以權辭溫諭, 諭以'已殲巨魁, 罔治脅從之意'爲白良沙, 稍稍還集爲白乎旀。鍾城穩城人心段置, 亦未翕然鎭定, 頗有持疑顧望之端叱分不喩, 慶源座首鄭士麒及其弟士鳳段, 當初倭賊入北之時, 謀捉兵使以下欲爲迎降之計爲白如可, 臣入據鏡城之後, 八度徵兵, 拒逆不送爲白乎旀, 人心虜變鎭定防禦次, 以吉州赴戰爲白如乎, 富寧府使金範段, 會寧兼官, 以入送會寧爲白遣, 潼關僉使李應星·柔遠僉使李希良·訓戎僉使金磁·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 入送本鎭爲白乎矣, 人心虜情, 太半鎭定, 而鄭士麒耳亦, 道內巨惡, 以多植族黨奴使, 判官莫敢措手爲白去乙, 臣到本府, 捉致士麒士鳳及其黨魁慶興土兵崔松于行營, 幷只斬首梟示爲白遣, 鍾城通事安億壽段, 自前始叱侵虐藩胡爲白如乎節, 倭變之後, 國無紀律爲白乎去, 向入侵徵雜物, 無所不至爲白乎矣, 眼前通事, 以胡人告訴乙, 變詐誣傳爲白去乙, 臣觀其氣色詭秘, 親引中樞下良介, 問答以我國言語爲白乎矣, '六鎭倭變之後, 土兵侵虐, 釀成邊患, 大槩同然, 其中安億壽爲甚'是如爲白去乙, 卽欲斬徇, 懲一勵百爲白乎矣, 唯只下良介段置, 桀驁難側5)之胡, 以來訴我人爲白去等, 諸胡所見處, 輕易行刑, 恐妨國體爲白乎去, 卽加枷杻, 移囚富寧府, 以待巡察使處置爲白有齊。虜情段, 會寧所管, 時無叛狀, 鍾城段, 外親內疎, 所爲叵測爲白良置, 亦無顯然作賊之事, 穩城段, 當初倭變時, 始叱接置我國, 散民一不擄掠叱分不喩, 判官還鎭聞奇, 他胡所掠人物乙, 爲先刷還, 極爲可嘉爲白乎等以。臣到本府, 依他鎭例, 饋酒肉給塩斗外, 別引有功胡人, 退床饋酒, 加給塩斗, 諭以倭賊盡平之後, 賞職上京, 各別施行, 亦擧理開喩爲白有齊。慶源段, 頭頭酋長十餘人, 間間進告, 佯示向國之狀爲白良置, 府境諸胡, 皆已叛國乙仍于, 乍去乍來, 同心作賊, 判然無疑爲白乎矣。臣北行時, 開喩聽令次以來到爲在, 酋長學生幷二百餘名段, 自我招來叱分不喩, 彼亦應招歸順爲白有去等, 摘發隱惡, 治罪不當乙仍于, 依前饋贈, 喩以'賊胡, 自汝等所居處, 由入爲在如中, 國家問罪之時, 恐有俱焚之患, 守護進告等事, 各別盡心,' 亦嚴辭開喩爲白有齊。慶興段, 西水羅一堡疊入, 造山散民土兵, 咸德厚領率守城, 賊胡四度圍城, 不勝退兵叱分不喩, 賊胡部落一處乙, 乘虛焚蕩爲白有臥乎所。孤軍越境, 不出將令, 如此擧措, 雖似乖當, 叢爾孤城, 大盜隔絶, 勢未能及期節制事良中, 全城斬賊, 不失軍機, 實爲可嘉乙仍于, 同咸德厚, 因爲定將, 會寧海倉, 運米一百石, 輸送本堡, 使爲城守之粮爲白有齊。慶興府及所管造山·撫夷·阿吾地, 慶源所管乾元·阿山堡段, 自初不守, 賊胡恣意焚蕩, 往來不忌, 因爲賊路, 或自慶興海汀, 或自慶源地境入來, 橫行作賊, 擄掠山谷人畜, 極爲痛憤爲白良置, 六鎭精兵二百餘名, 至吉州赴戰, 加以倭寇之餘, 馬羣一空, 前日馳射之士, 今爲無馬之軍叱分不喩, 軍器段置, 盡爲倭人焚蕩, 至以長片箭, 束作火炬爲白乎旀, 避亂人民等持弓箭者, 盡爲倭賊殺戮乙仍于, 民間軍器, 幾盡埋置腐敗爲白乎等以, 據城防禦, 猶患不足, 涉遠追擊, 事勢極難乙仍于, 村居人民全數, 知委疊入城內, 俾免虜掠之患爲白如乎節段。吉州倭勢已縮, 六鎭胡亂漸熾, 不得已赴戰諸將中, 間間入送, 各其鎭將抄率精兵, 要路伏兵, 以絶橫行之路爲白有齊。大槩北道, 亦道理絶遠, 氷雪積塞之地, 距巡察使所在處, 十餘日程是白去等, 軍中機務, 一日萬變, 一依節制施行爲白在如中, 恐非兵家制變之道乙仍于, 其間急務段, 或有不報巡察使施行, 從後牒報爲白如乎節段, 巡察使節制內, '大將遆改, 捕亡將定體, 磨天嶺及端川等地, 率軍官進駐, 捕捉亡卒'亦爲白有在果。臣以幺麽小官, 未有寸功, 遽陞堂上, 天恩罔極, 尤不知死所。蹀血鋒刃, 有所不辭是白在果, 唯只吉州嶺東未掃蕩前段, 我軍北地亡卒, 似無逃向南關之理乙仍于, 先可留住軍中爲白有齊。臣以去年十一月二十一日, 遆大將爲白在如中, 十二月十四日, 備邊司移文內, '評事方行主將之令'是如爲白有臥乎所, 其間日數二十四日之久是白去等, 巡察使請罪狀啓, 時未達行在爲白有臥乎喩, 事涉可疑爲白乎旀, 會寧府使鄭見龍段置, 爲大將未滿一月, 遆易以兼節度使, 巡行六鎭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爲大將, 臣段只據北兵使節制, 任意北巡是如, 推考爲白乎旀, 各鎭將如茂山萬戶李蘭等, 無慮數十人, 各率本鎭土兵, 來會討賊事乙, 巡察使處當初始叱再再, 名錄牒報爲白有矣, 各堡鎭將乙, 幾盡遆易, 或一鎭堡將, 疊差二三人, 使將不知本任, 卒不知其將, 軍情搖漾, 士氣怠惰, 未知其由, 至爲悶慮, 欲報稟朝廷爲白良置, 擅自狀啓是如, 獲罪弦如, 不敢以聞爲白有如乎節, 前狀啓回送辭緣及備邊司關子五度, 不敢不答乙仍于, 自募軍功一等土及第車應轔乙用良, 依前由海路狀啓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二日。 성첩(成貼) 문서에 서압을 하고 관인을 찍어서 마무리하는 일. 또는 그 완성된 문서를 가리킨다. 側은 測의 오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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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온성, 종성, 행영 세 진의 복병이 도적질하는 오랑캐를 격파하여 패주시킨 것과 육진의 정병을 불러서 본도에서도 다른 도의 예에 의하여 과거 시행할 것을 청하는 장계 穩城鍾城行營三鎭伏兵擊走賊胡及請徵還六鎭精兵本道依他道設科狀啓 지난해 12월 13일 순찰사(巡察使)의 지휘에 의거하여 대장에서 교체된 뒤에 또다시 북병사의 지휘를 받아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안정시켜 모으고 오랑캐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원(慶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종성의 경내에 있는 부계리(浮溪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 마을은 사통오달이라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의 요충지가 됩니다. 이에 온성(穩城), 종성(鍾城), 행영(行營) 세 진의 군사 각 50명을 뽑아 이곳에 매복시켜 적을 맞아 치게 하였습니다.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의 첩정에 '절해(節該).188) 세 진의 군사 각 오십 명을 평사의 지휘에 의하여 세 곳에 나누어 매복시켰는데, 정월 7일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오랑캐들이 온성의 군사가 매복한 곳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많은 오랑캐를 쏘아 죽이고 승전을 타서 추격하였는데, 토병(土兵) 박언주(朴彥柱)와 오득침(吳得沈)은 각각 한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안장을 갖춘 오랑캐 말 두 필과 오랑캐의 활 한 장, 화살 아홉 개, 비단 칼집 한 부 등을 모두 도(道)에 올렸으며, 고을의 통사(通事) 도막동(都莫同)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라 하였습니다. 위의 말들은 빼앗은 사람에게 주고 활과 화살, 기타 잡물은 경성영(鏡城營)에 올리고 오랑캐 머리 두 급(級)은 감봉(監封)하여 올립니다.행영과 종성의 복병장들의 보고에 '같은 날 도적질하는 오랑캐 백여 명이 매복한 곳에 쳐들어와 접전을 벌였는데, 행영과 종성 두 군대가 힘을 합쳐 추격하여 많은 오랑캐를 쏴 죽이고 오랑캐들이 붙잡아 가던 남녀 모두 33명, 말 한 필, 부(釜)와 정(鼎) 각각 두 개 등을 다시 되찾았으며, 전날 사로잡혀 갔던 역자(驛子) 박세정(朴世貞), 김억수(金億壽)는 오랑캐들과 뜻을 함께 하여 변복하고서 오랑캐가 되었다가 오랑캐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뒤에 사로잡아 경성부에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위의 복병장 토병 이운로(李雲老)와 종성의 복병장으로 왜적을 토벌한 군공이 일등인 지방 사람 급제 강언수(姜彥壽)는 행영복병장(行營伏兵將)으로서 왜적을 토벌하러 의병을 일으킬 때 제일 먼저 호응한 공로로 공명고신(空名告身)의 안릉 참봉(安陵參奉)에 임명하였습니다. 신형(辛衡) 등은 그 당시 추격하여 혹은 오랑캐의 목을 베거나 혹은 우리 사람을 되찾아오는 공을 세웠으니 조정에서 명단을 마련하여 계획하여 시행해 주십시오.○ 순찰사가 신을 대장에서 교체한 후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으로 삼았다가 지난해 12월 그믐 무렵에 정현룡을 겸절도사로 전임시켜서 육진(六鎭)을 순시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를 대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의 관문(關文)에서 '오응태 대장을 교체하고 예전대로 평사를 대장으로 다시 정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서 '겸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교체되고 북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도사는 왜적을 토벌한 정병은 자기가 통솔하는 부하라고 하면서 자신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보내주지 않는데, 요즘 날씨가 따뜻해져서 왜적의 기세가 점차 드세지는 때가 되니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대단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신은 관문을 통하여 그에게 병사를 요청하겠거니와 조정에서도 각별히 사목(事目)을 내려주고 그 숫자에 의거하여 징병할 수 있도록 방어사로 불리는 정현룡에게 분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또 요즘 듣자하니, 팔도 가운데 남도에서는 이미 과거를 보았다고 하는데 유독 북도에서는 아직도 과거를 시행하지 않으니 백성들을 고무시키는 의도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순찰사도 계청하지 않는 일을 보잘 것 없는 작은 관리가 계청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도내의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서서 한 사람으로 경성의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경성으로 정배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 좌수(富寧座首) 김전(金銓) 등이 있는 힘을 다해 분주히 노력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그 일이 성공한 것은 실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날 상을 논할 때 과거 공부한 유생과 내금위에게만 내렸으므로 억울한 것 같기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경성 판관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부(本府)도 또한 도회처라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장만하는데 유진 가장(留鎭假將)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라고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6일. -아마도 같은 조목 아래 묶인 하나의 장계가 아닌 듯하다.- 前年十二月十三日, 巡察使節制, 據遆大將後, 又以北兵使節制, 巡行六鎭, 安集散民, 鎭定虜情次以行到慶源, 還由鍾城境浮溪里爲白如乎, 同里亦四通五達, 賊路要衝之地是白去乙, 穩城·鍾城·行營三鎭軍, 各抄五十名, 同處伏兵, 要擊亦爲白有如乎節。穩城判官李訥牒呈內, '節該三鎭軍各五十名, 依評事節制, 分三處設伏爲白有如乎, 正月初七日, 胡賊不知其數, 穩城軍伏兵處, 圍犯爲去乙, 多數射中, 勝戰追擊, 土兵朴彥柱·吳得沈, 各斬一級, 胡馬具鞍二匹, 胡弓一張, 胡矢九箇, 入羅鞱一部, 幷以上道爲旀, 府通事都莫同段, 逢箭身死'是如爲白有去乙, 同馬匹段, 所奪人還給, 弓矢雜物段, 鏡城營上, 胡馘二級段, 監封上送爲白齊。行營及鍾城伏兵將馳報內, '同日賊胡百餘名, 伏兵處來犯接戰, 兩軍同力追擊, 多數射中, 賊胡擄去爲如乎男女幷三十三名, 馬一匹, 釜鼎各二等物, 還奪爲旀, 前日被擄驛子朴世貞·金億壽段, 胡賊同心, 變服爲胡爲有如可, 賊胡不勝退兵時生擒, 鍾城府囚禁'是如, 馳報爲白有齊。上項伏兵將土兵李雲老, 鍾城伏兵將討倭軍功一等土及第姜彥壽, 行營伏兵將討倭倡義時, 爲先響應功, 以安陵參奉空名告身良中, 塡差爲白有在。辛衡等登時追擊, 或斬胡馘, 或奪我人之功乙良, 朝廷以磨鍊施行爲白只爲。○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 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在, 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入歸'是如爲有臥乎,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可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仄聞爲白乎矣, 入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座首徐遂·李麒壽·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六日【疑非一啓繫圈下】 절해(節該) 문건이나 어떤 사람의 말을 전문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요지만 간추려 기재할 경우에 쓰는 용어이다. 《이문집람(吏文集覽)》에 의하면, 성지(聖旨)와 공문서에는 반드시 첫마디에 '절해(節該)'라는 두 글자를 덧붙이는데, 이는 곧 '그 구절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단천에서 왜적을 격파한 사연과 군기시 최동망과 이성길을 종사관에 임명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 端川破倭賊緣由及請軍器崔東望李成吉從事官差定狀啓 지난해 12월에 신이 북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고 올해 정월 13일에 길주(吉州)로 돌아오던 차에 경성(鏡城) 주촌(朱村) 도중에서 순찰사의 관자(關子)를 받아보니, 신을 다시 대장으로 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길주성 밖 10여 리에 있는 우위장(右衛將) 한인제(韓仁濟)의 군중으로 나아가 장수와 병졸들을 호궤(犒饋)하고 이달 18일에 본주(本州) 다신리(多信里)에 나아가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과 중위장(中衛將) 오응태(吳應台)가 거느리는 장수와 병사들을 호궤하였습니다. 그리고 본처(本處)에 머무르면서 길성(吉城)과 영동(嶺東) 두 곳의 상황을 보고서 대응하려고 하였는데,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직접 군중에 와서 말하기를 '단천에 남아 있는 왜적이 제멋대로 횡포한 짓을 하여도 군사가 모두 보병이라 겁을 먹고서 지레 궤멸되어 손을 쓸 수가 없으니 기병과 사병(射兵)을 나눠 주십시오.'라 하며 간곡히 청하였습니다.길주는 군사를 두 곳으로 나눠 왜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군사를 다른 도로 옮기는 것은 형세상 좋지 않기에 이전부터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아직 출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길주 두 곳의 왜적은 기세가 꺾여 머리를 움츠리고 있으니 강한 아군을 그대로 쉬게 하면서 한 나라 한 도의 왜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사리로 보아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에 즉시 정예 기병 이백 명을 뽑아 네 부대로 나눠 1대장은 구황(具滉), 2대장은 박은주(朴銀柱), 3대장은 인원침(印元), 4대장은 고경민(高敬民)을 나눠 정하고서 각각 50명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이달 20일에 다신리를 출발하여 산길을 따라 22일 단천(端川)에 이르렀습니다.다음날 아침에 네 부대는 성 밖 이십 리 쯤에 매복하고 단천의 군사 30명으로 성 밖 5리까지 나아가 싸움을 걸게 하였습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왜적이 연승에 자만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백여 명이 한꺼번에 성에서 나와 곧바로 단천의 군사를 추격하니, 거짓으로 패한 양 도망칠 적에 피곤한 말에 탔던 병사가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왜적은 또다시 기세를 올리며 멀리까지 추격하여 곧바로 매복한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네 부대의 복병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중간을 자르며 혹은 그 뒤를 끊어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습니다. 왜적들은 돌격하는 기병을 갑자기 만나 다급하여 어찌할 줄 몰라 철통을 마구 쏘아댔지만 모두 헛쏘기만 하고 맞히지 못하였으며,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어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밑까지 추격하여 거의 모두 활을 쏴서 죽였으며, 살아남은 자는 겨우 30여 명으로 그들도 모두 화살에 맞아 성으로 들어갔습니다.대개 죽인 왜적의 숫자는 적어도 백여 명에서 내리지 않을 것인데 북도의 군사들은 기병이라 오로지 말을 타고 활을 쏘기 때문에 일일이 목을 베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십여 리에 걸쳐 싸우는 동안 단천의 보병이 뒤를 따라오면서 귀와 목을 수습하였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네 부대가 죽인 것을 말하자면, 1대는 왼쪽 귀 21개, 2대는 14개, 3대는 15개, 4대는 11개로 모두 61개이니, 감봉하여 위로 올렸습니다.이달 19일 길주성 밖의 복병장(伏兵將) 원충서(元忠恕)의 보고에 '왜적 백여 명이 남문 밖 1리쯤에 나와 주둔하고 있는데, 왜장 한 명이 말 두 마리를 모는 두 부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나와 2리쯤 가서 말을 모는 두 명의 왜놈을 뒤에 남겨두고 홀로 말을 타고 3리쯤 갔습니다. 이에 제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십여 명을 이끌고 잠복하여 망을 보다가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니 적장이 깜짝 놀라 말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떨어졌습니다. 이에 제가 활로 쏴서 맞히고 종성의 갑사(甲士) 신수(申守)가 그 목을 베었습니다. 왜적 보병 한 명은 화살에 맞고 거꾸러졌는데 문 밖의 여러 왜놈들이 부축하고 성으로 들어가 목을 베지 못하였습니다. 적장의 왼쪽 귀를 잘라 또한 감봉하여 올려 보내며, 그가 입었던 비단 옷 3건, 환도 1자루, 비단 안장, 가죽 안장, 말은 접전을 벌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은 논하여 나눠 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의 첩정에 '고을 백성의 사노비 사랑금(思郞金)이 왜적 목 하나를 베어 바쳤으며, 복병군인 절노비 윤희(尹煕)도 또한 목 하나를 베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원충서의 보고에 '부령 정로위(定虜衛) 차덕홍(車德弘)이 목 하나를 베었습니다.'라고 하니, 모두 4개의 목을 올려 보내니 도합 65개의 목을 베었습니다. 무릇 이것은 왜적을 격파한 자잘한 일이라서 낱낱이 공을 기록하여 계문하지만, 벼슬과 상은 한계가 있고 왜놈의 귀는 한정이 없으니 조정에서 은혜 베풀 때 난처함이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였기에 전날 가부와 임명 두 곳에서의 전공은 모두 기록하여 계문하지 않았습니다.신이 대장에서 교체된 후로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이 저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었을 때 순찰사의 공문에 의거하여 모두 등급을 나눠 순찰사에게 첩보(牒報)하였으므로, 이번 단천의 전공을 아뢰지 않았다면 다만 전례를 어기며 사졸들의 희망을 어그러트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천견으로 마음대로 억누른 것이니 또한 온당치 않기에 전례에 따라 전공을 기록하여 보고합니다. 빼앗은 물건은 또한 기록하여 계문할 것인데, 군수품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군의 상품으로 내려 주려고 올려 보내지 못하니 대단히 황공합니다. 그 가운데 왜총통은 전날 비변사의 공문에 의거하여 파괴된 것 20개를 이미 올려 보냈으며, 이번에 뺏은 20개도 뒤미처 올려 보내겠습니다.본도의 군기가 탕진되어 조처하기에 급급한데, 그 중에서도 부레풀, 활시울, 화살꼭지가 가장 절실합니다만 장만할 방법이 없어 대단히 걱정되오니 조정에서 조치하여 내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군마와 병무(兵務)가 번거로운데 용렬한 낮은 관리가 오로지 문서를 맡으니 걸핏하면 일이 어그러집니다.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과 군자 직장(軍資直長) 겸성균관 권지학유(兼成均權知學諭) 이성길(李成吉)이 바야흐로 군중에 있으므로 종사관(從事官)의 칭호를 주고 문서를 맡게 할 생각이오나 보잘 것 없는 신으로서 나이가 많이 차이 나지 않는 동렬의 문관을 막좌로 임용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기에 감히 마음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문서를 지니고 가는 사람은 경성으로 귀양 온 진무(鎭撫) 김귀겸(金貴謙)으로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원, 종군하여 칼날 아래서 접전을 벌여 군공을 참록(參錄)된 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27일. 前年十二月分, 臣北行六鎭, 今年正月十三日, 回還吉州次, 以在鏡城朱村道中, 得巡察使關子, 以臣還定大將爲白有去乙, 進到吉州城外十餘里許右衛將韓仁濟軍中, 餉勞將士, 本月十八日, 進到本州多信里, 餉勞左衛將柳擎天·中衛將吳應台所率將士, 因爲留駐本處, 欲爲吉城嶺東兩處相機策應爲白如乎, 端川郡守姜燦親到軍中言內, '端川留賊, 恣意橫行爲良置, 兵皆步卒, 怯懶先潰, 下手不得, 分軍馳射,' 亦懇懇說道爲白齊。吉州段, 置兩處分兵, 與賊相持, 移兵他道, 勢似非便乙仍于, 自前諸將論議不一, 未果出兵爲白有如乎節, 思量爲白乎矣, 吉州兩賊, 勢挫縮頭爲白有去等, 坐休強兵, 不討一國一道之賊, 事理乖當爲白乎去。卽抄精兵二百騎, 分四隊, 一隊將具滉, 二隊將朴銀柱, 三隊將印元忱, 四隊將高敬民, 岐如定體, 各率五十名, 同月二十日, 多信里離發, 由山路, 二十二日到端川, 昱朝四隊藏兵於城外二十里許, 使端川軍三十名, 進次城外五里許, 挑戰爲白乎矣。城中留賊狃於屢勝, 略不顧忌, 二百餘名, 一時出城, 直追端軍爲白去乙, 佯敗還走之際, 疲馬之卒, 爲賊所殺, 賊又乘勝遠追, 直至伏處爲白去乙, 四隊伏兵, 一時突出, 或遮其前, 或截其腰, 或斷其後, 射矢如雨爲白乎矣。倭賊猝遇突騎, 倉皇失措, 多放鐵筒爲白良置, 皆爲虛放不中, 奔走無暇, 莫敢相抗。追至城底, 幾盡射斬, 僅餘三十餘名, 箇箇中箭入城爲白齊。大槩殺賊之數, 少不下百餘名是白良置, 北軍騎兵, 專以騎射, 未得一一斬馘, 轉戰二十餘里, 端川步卒, 從後拾得耳級是如爲白良置, 未知厥數幾何是白在果, 四隊所斬段, 一隊左耳二十一, 二隊十四, 三隊十五, 四隊十一, 合六十一箇, 監封上送爲白齊。本月十九日, 吉州城外, 伏兵將元忠恕馳報內, '倭賊百餘名, 南門外一里許出屯, 有一倭將, 挾兩倭雙牽馬, 向南出來, 至二里許, 牽馬二倭乙, 落後隱置, 單騎至三里許爲有去乙, 同元忠恕, 亦親率精騎十餘名, 潛伏伺候爲白有如可, 一時高聲突出, 賊將蒼黃不能制馬, 因爲墜落爲白去乙, 元忠恕射中, 鍾城甲士申守斬頭, 步倭一名中箭顚仆爲白有去乙, 門外諸倭, 扶曳入城, 斬頭不得, 同賊將左耳割取, 亦爲監封上送爲白乎旀, 所着錦衣三件, 環刀一柄, 錦鞍甲鞍馬段, 接戰有功人, 論賞分給'爲白有旀, 吉州牧使鄭煕績牒呈內, '州民私奴思郞金, 斬納一級, 伏兵軍寺奴尹煕, 亦斬一級,' 又元忠恕馳報內, '富寧定虜衛車德弘, 斬一級,' 合四耳, 亦爲上送, 都合六十五級是白齊。凡此些少破賊事良中, 一一錄功啓聞爲白在果, 爵賞有限, 倭耳無窮, 朝廷施報有所難處爲白乎去, 私自妄料乙仍于, 前日加夫臨溟兩處戰功乙, 皆不錄啓爲白有去乎。臣遆大將之後會寧府使鄭見龍代將時, 巡察使關據幷只分等, 巡察使處牒報是如爲白去等, 今此端川戰功, 不爲上聞爲白在如中, 非徒有乖前規, 士卒缺望, 一己淺見, 擅自沮抑, 亦爲未安乙仍于, 依例錄功報聞爲白齊。所奪物件, 亦爲錄啓爲白良置, 當此軍需板蕩之時, 軍賞用下次以上送不得, 極爲惶恐, 其中倭銃筒段, 前日備邊司關據破件二十箇, 已爲上送爲白有如乎節, 所奪二十箇, 追于上送爲白齊。本道軍器蕩盡, 措備急急, 魚膠弓絃弓箭帽最關爲白乎矣, 辦出無路, 極爲悶慮, 朝廷以措置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許多軍馬戎務似煩, 迷劣下吏專掌文書, 事多乖錯弦如, 輸城察訪崔東望·軍資直長兼成均權知學諭李成吉, 方在軍中爲白乎等以, 從事官稱號帶率文書次知, 亦計料爲白良置, 臣以幺麽幕下之官, 不少同列文官乙, 任爲幕佐, 事甚乖當, 不敢擅便爲白乎旀。書狀陪持人段, 鏡城定配人鎭撫金貴謙, 當初倡義時, 自募從軍, 接戰鋒刃, 參錄軍功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二十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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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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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왜적의 대군과 백탑교에서 전투를 벌여 왜적을 퇴각시킨 것에 대한 장계 與倭賊大軍戰白塔郊及倭賊退走狀啓 단천(端川)의 왜적을 토벌하고 사로잡기 위하여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해 보내니, 훈련 정(訓鍊正) 구황(具滉) 등이 밤새도록 내달려갔습니다. 정월 27일 길주(吉州)로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도의 왜적 천여 명이 이미 마천령(磨天嶺)을 넘었습니다.'라고 하니, 신이 즉시 삼위(三衛)의 병사를 거느리고 길주의 임명(臨溟) 지역에 주둔하여 정예기병 6백 명을 뽑아 매복하고서 대기하였습니다. 그 왜적이 영동(嶺東)에 머물던 왜적과 합세하여 28일 이른 아침부터 임명 들판을 가득 채워 길주를 향해 들어오므로, 복병장 훈련정 구황, 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 판관(判官) 인원침(印元忱), 고경민(高敬民), 정로위(定虜衛) 김국신(金國信) 등이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뒤를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에 삼위는 앞을 차단하고 허리를 자르며 전진하고 후퇴하면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접전을 벌이면서 60여 리를 추격하였습니다.훈련 판관(訓鍊判官) 원충서(元忠恕)는 길주성 밖 20리 정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또한 돌격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피차간에 화살과 철환을 쏘아대는 바람에 짧은 무기로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다만 경기병으로 추격하여 넓은 지역에서는 양쪽에서 공격하고 좁은 지역에서는 꼬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학유(學諭) 이성길(李成)에게 전령을 보내 적의 진영까지 추격하여 싸움을 독려하게 하니, 왜적과 10여 보의 거리에서 종일토록 내달리고 쏘아 흐르는 피가 길을 가득 덮었으며 화살에 맞고 죽은 자는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왜적들이 시체를 싣고 가버렸으므로 낱낱이 귀를 베지 못하였습니다.대개 본도의 군민들이 왜적들의 위세에 겁을 내고 있다가 갑자기 대적을 만나니 대부분 주저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대들어 결전을 벌이지 못하였다가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오게 하니 대단히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단천 군수(端川郡守)의 편지에 '왜적 이천여 명이 또 이성(利城)에 이르렀습니다.'라 하니, 먼저 온 적들과 영동, 길주의 왜적과 합세하면 이만여 명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또한 이성의 이천 명이 이어서 온다면 왜적의 계략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깊이 아군 지역에 쳐들어와 독을 퍼트릴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삼위군이 서로 모여 약속하였으니, 중위와 좌위는 명천(明川)에 웅거하고 우위는 서북보(西北堡)를 지키며, 길주 목사는 좌위(左衛)에서 정예가 아닌 병사를 골라서 다신창(多信倉)의 곡식을 바다의 섬으로 옮기고, 신은 휘하 백여 명을 거느려 경성으로 들어가 민심을 진정시켜 성을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중위와 우위에서 거느리는 군사들은 각각 위장을 따라 진영에 왔는데, 좌위군은 모두 길주의 군사들로서 목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고 핑계를 대고서 바다의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좌위장은 겨우 척후병 및 좌부 모두 백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으로 향해 들어가 버렸습니다. 여러 해 전투에 참여하여 이미 관군이 되었지만 한번 대적을 만나면 성 지키는 것을 회피하고 난을 피해 살아보려고 꾀를 내는데, 민심이 이와 같으니 대단히 한심스럽습니다.왜적들이 혈전을 벌이다가 성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어 관청에 쌓아놓고 그 시체를 불태웠으며, 다음날은 성안의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서 밤을 틈타 몰래 달아나버렸습니다. 이에 우위장(右衛將) 우후(虞候) 한인제(韓仁濟)가 병사를 거느리고 내달려가서 곧바로 성안에 들어가 불을 끄니, 성안에 남았던 곡식은 태반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삼위장이 한꺼번에 추격하여 영동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은 밥을 지어 먹을 시간도 없이 주야로 다급하게 달아나 남쪽을 향하여 돌아갔으므로 쫓아갔으나 공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 응당 다급하게 추격하여 밤낮이나 원근을 가리지 말고 적이 간 곳까지 뒤를 밟아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다만 정예병들이 단천(端川)을 오가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리는 통에 말에게 꼴도 먹이지 못하고 종일 고단하게 전투를 벌여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걸음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추격은 하루에 백오십리를 가야 하는데 마천대령을 넘을 수 없을뿐더러 단천 이남은 왜적이 이전부터 마음대로 횡행하여 민가와 곡식과 마초들이 모두 타 버리고 텅 비어서 병사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말은 먹을 풀이 없는데, 미리 준비하지 않고 경솔하게 넘어갔다가는 중대한 행군 중에 졸지에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나 굶주림만 겪게 될 것입니다.단천 군수에게 이문(移文)을 보내 꼴과 군량의 준비 여부를 물어보려 하오며, 한편으로는 북절(北卩)의 상선으로 군량과 꼴을 운반하고 정예병을 뽑아 남쪽으로 향하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왜적이 남쪽으로 급히 달아나 철령(鐵嶺)에 이르렀는데, 북도 군마의 양식과 꼴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되면 형세가 끝까지 추격하기 어려울 것이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신이 북도에 있을 때는 북병사(北兵使)가 그 당시 아직 그 지방에 오지 않았으므로 임시로 주장(主將)의 일을 맡았지만 요즘은 북병사가 남도에 있거늘 막하관이 마음대로 도내의 군마를 거느리는 것은 사체가 대단히 어그러진 것이므로 거느린 군마를 병사에게 이관할 생각입니다.28일에 전사한 자로,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은 온 힘을 다해 죽기로 싸우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경성에 거처하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는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임무를 수행하고 적진에 드나들면서 그 허실을 정탐하였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여 앞장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밖에 사졸로 죽은 자는 25명이 됩니다. 왜적은 9명의 목을 베었으니 감봉하여 올려 보내오며, 말 15필을 빼앗았습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싣고 성에 들어가 버린 것과 관청에서 불태운 시체는 무려 백여 명이 되나, 귀를 베어 올려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2일. 端川倭賊勦捕次, 以分四隊, 定將起送爲白有如乎, 訓鍊正具滉等達夜奔馳, 正月二十七日, 還到吉州言內, '南道倭賊千餘名, 已越磨天嶺'是如爲白去乙, 臣卽領三衛兵, 屯駐吉州臨溟地, 抄發精騎六百, 伏兵待候乎白有如乎。同倭賊嶺東留倭合勢, 二十八日早朝, 始叱瀰滿臨溟野中, 入向吉州爲白去乙, 伏兵將訓鍊正具滉·僉正朴銀柱·僉使姜文佑·判官印元忱·高敬民·定虜衛金國信, 各率所部, 尾擊接戰, 三衛段, 遮前截腰, 進退接戰, 自辰初至酉時, 追至六十餘里。訓鍊判官元忠恕段, 吉州城外二十里許, 伏兵爲白有如可, 亦爲突出接戰, 射矢鐵丸, 彼我俱發爲白乎等以, 未得短兵相接, 只以輕騎馳逐, 地廣則挾擊, 地窄則尾擊。從事官學諭李成吉給傳令, 迫至賊陣, 使之督戰, 與賊相距十數步, 終日馳射, 流血滿道, 中箭死者不知其數爲白良置, 倭賊載屍而去乙仍于, 未得一一斬馘爲白齊。大槩本道軍民, 爲倭賊積威所劫, 猝遇大賊, 多懷自沮, 不敢交雜快戰乙仍于, 使賊入城, 極爲痛憤爲白乎旀。同日端川郡守簡通內, '倭賊二千餘名, 又到利城'是如爲有去等, 先來之賊, 與嶺東吉州相合, 少不下二萬餘名, 又有利城二千繼至爲白在如中, 賊謀難測, 不無深入肆毒之患弦如, 三衛相會約束, 中衛左衛段, 據明川, 右衛段, 守西北堡, 吉州牧使段, 除出左衛不精軍, 移轉多信倉穀于海島, 臣段, 率麾下百餘名, 入向鏡城, 欲爲鎭定城守之計爲白如乎。中衛右衛所率軍段, 各隨衛將來到陣所, 左衛軍段, 皆是吉州軍是白乎等以, 托稱與牧使起義兵盡入海島乙仍于, 左衛將, 亦僅率斥候及左部幷百餘名, 入向明川爲白臥乎在亦, 經年赴戰, 已爲官軍爲白有如可, 一遇大賊, 謀避城守便生避亂之計, 民心如此, 極爲寒心爲白齊。倭賊等血戰入城, 收取死者, 積置官廳, 燒其屍身, 翌日, 盡燒城內公私廨, 乘夜潛遁爲白去乙, 右衛將虞候韓仁濟, 領軍馳到, 卽入城內, 滅火爲白乎矣。城中留穀, 太半全在爲白齊。三衛將一時追擊, 到嶺東爲白乎矣, 倭賊等晝夜奔忙, 不暇炊食, 南向出歸爲白乎等以, 追不及擊爲白齊。賊退之後, 所當急急追擊, 勿論晝夜遠近, 尾到賊到處爲白良音可爲白乎矣, 惟只精兵等往來端川, 倍日幷行之際, 不得秣馬, 盡日苦戰, 人極馬疲, 不能運步。又此追擊, 日行百五十里爲白有去等, 磨天大嶺, 末由踰越叱分不喩, 端川以南段, 倭賊自前恣意橫行, 閭家穀草, 焚蕩一空, 軍無依接之處, 馬無喂飼之草, 不爲預備, 輕自越去爲白有如可, 軍行大事, 猝未進退, 坐見饑乏弦如。端川郡守處移文, 蒭粮準備與否。探聽爲白乎旀, 一邊以北卩尙船輸運粮草, 選精兵南向計料爲白在果, 惟只倭賊急於南走, 至於鐵嶺爲白在如中, 北道軍馬糧草辦出無路事良中, 勢難窮追, 未知何如爲白乎旀。臣在北道時段, 北兵使時未到界乙仍于, 權行主將之事爲白如乎節, 北兵使在南道爲白有去等, 幕下之官, 擅率道內軍馬, 事體甚乖爲白乎等以, 所率軍馬乙, 移屬兵使計料爲白齊。二十八日戰亡人段, 朱乙溫萬戶李希唐, 極力死鬪, 日暮時, 中鐵丸身死, 鏡城居前訓導李鵬壽, 自初倡義時, 盡誠奔走, 出入賊中, 窺覘虛實, 忘身徇國爲白有如可節, 奮願先登, 中鐵丸身死, 其餘士卒死者, 二十五名是白遣, 倭賊段, 斬馘九級, 監封上送爲白乎旀, 奪馬十五匹爲白有齊。中箭載屍入城, 官廳燒屍段, 無慮百餘名是白良置, 割耳上送不得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二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장수와 사졸들의 군공단자를 작성한 장계 倭賊退走後將士軍功磨鍊狀啓 정월 28일 남도(南道)의 왜적이 영동(嶺東)의 왜적과 합세하여 길주(吉州)를 향해 들어올 즈음에 임명(臨溟)의 들판에서부터 길주성 아래까지 종일 접전을 벌여 무수하게 쏘아 죽였으니 힘써 싸운 장수와 사졸들은 마땅히 군공을 마련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통쾌하게 싸워 큰 승리를 이루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게 하고서 결국 밤에 달아나게 하였으며 전투 내내 귀를 벤 왜놈이 겨우 9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왜놈들이 수레에 싣고 가거나 불에 태워버렸으니, 9명의 귀를 벤 것만으로 공을 논하여 보고하는 것은 실로 온당치 않기에 왜놈의 목을 벤 사람은 등급을 나누어 나열하여 기록하지만 신은 형틀에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만일 이 왜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남쪽을 향할 경우에 단천(端川) 이남 지역은 민가가 전부 불타고 없어서 군사와 말은 길에서 자야하므로 꼴과 군량은 준비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니, 차근차근 조치를 취하여야 비로소 행군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안의 왜적을 내쫓았는데도 그대로 앉아 추격하지 못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져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본도는 여러 해 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어 남자는 전투에 참여하고 노약자는 물자는 운송하는 일을 맡았으니 장차 절로 쓰러져 죽을 염려가 있지만, 군민이 모두 왜적과 함께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생들에 이르러서도 징발한 일이 없지만 또한 애초부터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의 사목(事目)에 '자원한 사람들의 공을 논함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자원한 각각의 사람을 책으로 만들고 각자의 이름 아래 공을 논하여 올려 보냅니다.지방 사람인 급제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는 의병을 처음 일으킬 때부터 공이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지난해 11월 7일 하비(下批)189)하여 건공 장군(建功將軍) 미전 첨사(美錢僉使)로 임명하여 보냈다가 12월 8일에 또다시 창신 교위 훈련 판관(彰信校尉訓鍊判官)으로 계급을 낮춰 임명하였는데,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 감히 아뢰니 대단히 황공합니다.장계를 받들고 가는 사람은 주부(主簿) 최배천(崔配天)으로 당초 창의와 군공으로 상직(賞職)을 받은 자인데, 두 번째 받들고 갈 것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남쪽 왜적이 들어왔을 때에도 종일 힘써 싸웠기에 대단히 가상합니다. 그의 바람에 의해 두 번 보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3일. 正月二十八日, 南道倭賊與嶺東合勢, 入向吉州之際, 自臨溟野至吉州城底, 終日接戰, 無數射殺, 力戰將士, 所當軍功磨鍊, 分等啓聞事是白在果, 惟只未能快戰大捷, 使賊入城, 致有夜遁, 終始所斬只有九級, 餘皆載屍火燒爲白有去等, 斬馘九級叱分以, 論功上報, 實爲未安乙仍于, 所斬人叱分分等除良, 列書磨鍊, 臣段, 伏鑕待罪爲白乎旀。萬一此賊, 不分晝夜, 直向南路爲白在如中, 端川以南段, 一路人家全數焚蕩, 軍馬露宿是白乎乙去爲白在果, 蒭粮準備極難, 次次措置爲白良沙, 始爲行軍事是白去等, 出送境內之賊, 安坐不追, 極爲痛憤, 肝膽如裂爲白齊。本道經年爲盜賊之窟, 男丁赴戰, 老弱轉輸, 將有自斃之患是白良置, 軍民皆知不可與賊俱生乙仍于, 儒生等至亦徵發隅無, 亦當初始叱自募赴戰, 至於立功爲白有去等, 朝廷事目內, '自募人等論功有差'亦爲白乎等以, 自募各人等乙成冊, 各其名下論功上送爲白乎旀。土及第安原權管姜文佑, 自初倡義首功叱分不喩, 累次赴戰, 極力先登, 輒有大功爲白有如乎節。前年十一月初七日, 下批建功將軍美錢僉使差送, 十二月初八日, 又差彰信校尉訓鍊判官降資除受爲白有臥乎所, 未知其由, 敢此報稟, 極爲惶恐爲白齊。 狀啓陪持人段, 主簿崔配天, 當初倡義及軍功賞職, 以再次自願陪持叱分不喩節, 南倭入來時段置, 終日力戰至爲可嘉乙仍于, 依願再送爲白有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三日。 하비(下批) 삼망(三望)을 갖추지 않고 한 사람만 상주하여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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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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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순영 첩보 계사 2월 19일에 부침 巡營牒報【附癸巳二月十九日】 병마평사(兵馬評事)가 상고할 일입니다. 이달 17일에 도착한 단천(端川)의 왜적을 목 벤 장계의 사연을 첩보한 서목(書目)을 돌려 보내온 내용에 '평사가 11월 19일 패전한 뒤로 북으로 순행하려면 즉 병사(兵使)의 지휘를 순수히 받아야 하는데 귀를 베어 바칠 때 병사가 아직 그 지역에 오지 않았다고 하여 배척하여 쫓아버리고서 그 사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과 또한 정월 28일 이후의 패배는 대장의 지휘가 아닌가에 대해 또한 수로를 통하여 장계할 것을 상고하여 보고할 것이다. 한 나라의 군대로 한 나라의 적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단천의 왜적을 토벌하는 군대는 실로 평사가 사사로이 여길 것이 아니거늘, 단천에도 또한 수로가 있으니 단천에서 얻은 적의 귀는 단천 군수도 장계를 올릴 수 있는데 전부 뺏어가서 자신의 공으로 삼았으니, 이는 자못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군자의 행동이라 할 수 없다. 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으로 정한 차첩(差帖)을 급히 거두어 먼저 올려 보낼 것이다. 각사(各社)의 성책도 비변사의 관자(關子)을 등사하여 보낸 지 오래되었으므로 급속히 시행할 것이며, 왜말을 챙겨 보내라는 말은 우연히 한 것이 아니니 다시 상고하여 길주에서 포획한 왜말은 각 이름 아래 어떤 말은 누구누구에게 주고 어떤 말은 어떤 사또에게 올렸는지 하나하나 기록하여 속히 보고하라고 회송한다.'고 하였습니다.상고하건대, 11월 19일에는 평사가 명천(明川)에 있으면서 중위장(中衛將) 정현룡(鄭見龍),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 우위장(右衛將) 오응태(吳應台)를 삼위(三衛)로 나누어 영동(嶺東)의 관창(館倉)으로 보내 포위하고서 영동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졸들이 여러 차례 전투에서 이긴 것에 우쭐 거려 경솔하게 전진하다가 탄환을 맞아 죽거나 다치게 되었을 뿐 특별히 패주한 일을 없었으며, 가령 패배함으로 죄를 받는다면 일도(一道)의 명장 정현룡이 먼저 죄를 받을 것입니다. 귀를 베어 바치는 장계에 대해서는 팔도에서 병사를 일으킨 삭발승까지도 또한 곧바로 장계하여도 조정에서 금지하는 일은 없는데 평사는 귀를 바치는 장계를 조정에 직접 올리면 죽을죄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정월 28일의 일도 남쪽 지방의 전례에 의거하면 경치나 구경하면서 보내주었다면 병졸 한 명도 다치지 않았을 것인데 평사는 옳지 않은 자신의 판단으로 접전을 벌여 피차간에 모두 부상한 병사가 나왔으니 특별히 패군한 일은 없었지만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단천의 남아 있던 왜적을 무찌를 때는 단천 사람이 실로 앞장서서 목을 베었으므로 구태여 북도의 군사 청하지 않았으며, 또한 각자가 벤 귀를 그대로 각자가 가지고 갔으므로 단천 군수에게 귀를 가져가지 못하였으며, 또한 남이 벤 귀를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삼는 것은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자190)들도 차마 하지 않는 일이거늘 평사가 비록 못났을망정 훤한 대낮에 감히 이런 일은 못할 것입니다.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討捕將)으로 차첩한 것에 대하자면, 다만 눈으로 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귀로도 듣지 못하였으므로 올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각사(各社)의 성책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하나 재촉하였지만 각 관원이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왜적의 말을 빼앗은 수는 무려 수백 마리나 되는데 숨겨두고 보여주지 않으니 일일이 찾을 수도 없으며, 장부에 기록한 백여 필의 말도 간혹 군공이라 하여 그 말을 빼앗은 이에게 영영 주어버렸습니다. 서 좌랑이 전한 말은 이전에도 알 수 없다고 이미 첩보하였습니다.대개 종사는 황폐해지고 임금은 몽진을 떠났는데, 신하된 자가 조금이라도 공리의 마음을 지니고서 왜적 토벌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사람의 재앙은 면할지라도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온 마음으로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왜적을 토벌하는 이외에 세상 인간사의 곡절은 돌아볼 겨를이 없이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여야 하는데, 타인의 모함을 받아 끝내 무거운 죄에 빠지게 되었으니, 참소하는 간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어두운 벽 사이에서 낄낄거리며 웃게 하는 것은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겸도순찰사에게 보고합니다. 兵馬評事爲相考事。本月十七日, 到付端川倭賊斬馘啓聞辭緣牒報書目回送內, ' 事亦十一月十九日見敗之後, 欲爲北巡, 則順受兵使節制, 而獻馘之時, 兵使乙未到界是如, 斥而黜之, 使不得與聞於其間爲旀。正月二十八日之後敗, 則非大將節制是喩, 亦爲水路狀啓爲喩, 相考馳報爲旀, 以一國之軍, 討一國之賊爲在如中, 端川討賊之兵, 實非評事私物之見處者是去等, 端川亦有水路, 端川所獲之馘乙, 端川郡守, 亦可狀啓是去乙, 全數奪去, 以爲己功爲有臥乎所, 殊非不伐君子之所爲是齊。韓伯謙討捕將定體差帖乙良置, 急速收取, 爲先上使爲齊, 各社成冊段置, 備邊司關子乙, 謄送已久爲有昆, 急速施行爲旀, 責送倭馬之說, 必非偶然是昆, 更良相考, 吉州所獲倭馬, 各名之下, 某馬段, 某某人許給, 某馬段, 某使道上使是如, 一一懸錄, 斯速牒報向事爲等如良置, 回送是置'有亦。相考爲乎矣, 十一月十九日段, 評事在明川, 中衛將鄭見龍·左衛將柳擎天·右衛將吳應台, 分三衛, 發送嶺東館倉, 圍抱拔柵亦爲乎矣, 軍卒等狃於累勝, 輕進逢丸, 仍致死傷叱分是遣, 別無敗走之事爲旀, 假說以敗受罪爲良置, 一道名將鄭見龍爲先受罪事是旀, 獻馘狀啓事段, 八道起兵削髮僧人至亦亦爲直啓, 別無朝廷禁斷事良中, 評事耳亦直啓獻馘, 仍陷死罪爲乎乙所知不得爲旀, 正月二十八日段置, 依南關例, 觀光致送爲在如中, 不傷一卒是乎事是去乙, 評事段妄意接戰乙仍于, 彼此俱傷, 別無敗軍之事乙仍于, 亦爲昧死狀啓爲有旀, 端川留賊勦捕時段置, 端川人實爲先登斬馘爲在如中, 不必請來北軍事是旀, 各人所斬乙, 仍各持歸乙仍于, 端川郡守處, 耳級乙進排不得爲旀, 奪人所斬, 以爲己功事段, 吮癰舐痔者之所不忍是去等, 評事雖無狀, 白日之下, 不敢爲此事爲旀, 韓伯謙討捕將差帖段, 非但目所不見, 實爲耳亦不聞乙仍于, 上使不得爲旀, 各社成冊段, 件件催促, 各官時未牒報爲有旀, 倭馬所奪數段, 無慮數百是良置, 隱匿不現, 一一搜覓不得, 置簿爲在百餘匹內, 或以軍功永給所奪人叱分是遣, 徐佐郞傳言段, 自前始叱知不得是如, 已爲牒報爲有齊。大槩宗社爲墟, 乘輿蒙塵, 爲臣子者少有功利之心, 不以討賊爲急爲在如中, 雖免人禍, 必有天殃乙仍于, 一心討賊外, 世情人事間曲折乙, 有不暇顧, 直行不疑爲如乎節, 爲人所搆, 終陷重律, 使讒奸之輩, 狸笑於暗壁之間爲乎乙可, 至爲悶慮爲臥乎事是良旀。牒報兼都巡察使。 종기를……자 《논어》 〈양화(陽貨)〉에 "비루한 자들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니, 참으로 잃을까 걱정한다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의 주(註)에 "작게는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 것과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모두 부귀를 잃을까 걱정하는 데서 생길 뿐이다.[小則吮癰舐痔 大則弑父與君 皆生於患失而已]"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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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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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4 卷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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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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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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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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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 이공 단하 이 노봉 민공 정중 에게 올리는 편지 이공은 당시 이곳의 평사가 되었으며, 민공은 함경도 관찰사로 있었다. 畏齋李公【端夏】上老峰閔公【鼎重】書【李公時爲此評事, 閔公爲北伯】 제가 융막(戎幕)에 나간 이후로 재주와 학식이 어두워서 조처를 취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주장(主將)이 파면되었기에 이로 인해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장이 이미 파면되었기에 이전의 법을 굳게 지키고서 한 가지 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 병부(兵符)를 차고 장수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으니, 좌막(佐幕)의 관리가 비록 부득이하게 관찰사를 대신하는 일을 맡더라도 또한 그를 능멸하고서 명령을 내어 상하간의 체통을 손상할 수는 없습니다. 군민의 폐단을 바꿔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권한이 이미 손에 있지 않으니 일일마다 바로잡고자 하여도 월권에 가까우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그렇지만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평사인 제가 힘을 써야할 것이 있습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이곳 북평사로 도임하였을 때 관찰사의 지시를 받고 《북관지(北關誌)》를 저술하였는데 분실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이 일에 뜻을 두어 《경성지(鏡城誌)》의 초고를 이미 지었고 《구관사(九官事)》도 그와 마찬가지로 편찬하고자 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면서 《경성지》의 조목과 범례를 써서 보내어 조목 별로 사실을 기록하여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것이 오면 또한 산정(刪定)하여 이어서 편찬하려 합니다.제가 선친의 문자를 수습하면서 한쪽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경성사적(鏡城事績)〉 한 책은 본래 본부(本府)에서 이두문으로 기록한 것인데, 묵음으로 난고(亂稿)의 상자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의 임무를 받은 뒤에 잠시 고향으로 가서 이 책을 찾아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안에 선친께서 직접 쓴 잡기 두어 장이 끼어 있었으니, 수습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별지에 써서 올리오니, 대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일로 선친께서 일찍이 말씀하시며 애석하게 여긴 것입니다. 지금 이 기록을 보고 또 직접 이곳의 인사들을 찾아가 물어보니, 그의 공이 큰데도 살아서 무고를 당하여 세상에서 불우하게 지냈고 죽어서 또한 그의 공을 드러낸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이곳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사당이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김종서(金宗瑞)와 정문부는 그 공이 모두 윤공에게 뒤지지 않으니, 대개 국가의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한 것은 세 사람이 모두 같습니다. 김종서와 정문부 두 공을 윤공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려고 하는데 윤공의 사당을 비록 더 넓혀 짓지 않아도 세 분의 신위를 봉향할 수 있기에, 이런 내용으로 이곳의 인사(人士)와 장교들에게 의논하여보니 모두들 의견이 한결 같았습니다. 다만 듣기에 정공은 계해년 역옥에서 매를 맞아 죽었는데, 그가 살았을 때 사람됨이 강직하여 참으로 질시를 많이 받았다고 하니 세상의 의논이 어떠한지 잘 모르겠습니다.선친께서 〈경성십절(鏡城十絶)〉1)을 지으셨는데, 그 다섯 번째 시에서 "시서에 능한 김종서 장수의 명을 받들었고, 훈척 윤 시중이 정벌을 전담했던 곳. 남긴 사당에 지금 당장 합사하기는 어려워도, 사가로서 어찌 한 사람 공만 드높이리.[詩書命帥金宗瑞, 勳戚專征尹侍中. 遺廟卽今難倂祀, 史家那得獨褒功.]"라고 하였으니, 아래 구절의 의미를 자세히 할 수는 없지만 대개 세 사람을 함께 제향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듯합니다. 또 여섯 번째 시에서 "신공의 한 번 싸워 겹겹의 포위망 풀어 줬고,2) 정자의 지휘 세 번 만에 적을 부수고 돌아왔네. 관문 밖에 일월처럼 걸린 두 분의 충심, 부질없이 장사들 눈물 뿌리게 하누나.[申公一戰解重圍, 鄭子三麾破敵歸. 關外雙忠懸日月, 空令壯士涕交揮.]"라고 하였는데, '신(申)'은 신립(申砬) 공을 가리키는 것 같으며 '정(鄭)'은 분명 문부(文孚)를 가리킵니다. 이는 나란히 대를 맞춰서 한 말로, 이 작품은 바로 선친께서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에 지은 것입니다. 정공이 만약 광해조에 절조를 잃은 일이 있었다면 선친께서 반드시 충성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정공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죽었는데, 유몽인이 정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유몽인은 평소 하는 일이 정신이 나간 자와 같거늘 그가 죄를 승복하고서 죽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또한 가소로운 일인데, 더구나 정공을 끌어들인 것은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공의 충성과 지혜로 평생 수립한 공이 이와 같으니 반정 이후에 흉도들에게 연루될 일이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기에, 이에 합하에게 받들어 아뢰고 겸하여 조정의 친구들에게 의논하였으니, 삼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합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현재 이후로 봄에 영고탑(靈古塔)3)의 형세가 날로 강성해질 것이니 이후 뜻밖의 변고는 예측할 수 없는데, 전대에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을 세상에 밝게 드러내어 교화를 세우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 후대에 충의가 계속해서 나올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이 일은 아마도 현재 북관의 두 번째 가는 일이 아니며, 군정(軍政)을 다지는데 있어서 또한 근본이 되는 일이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와 같은 일은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조정에서도 정공의 마음가짐을 깊이 따져보지 않은 채 그가 죽을 당시의 일만 가지고서 이 일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니, 이 일은 아마도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귀결될 것인데, 합하의 생각이 만일 옳다고 여기신다면 결단을 내려 행하십시오.이 일은 예전에는 풍속을 살피고 지역을 지키는 수령도 또한 그러한 뜻이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다만 저의 소견뿐 만이 아닙니다. 또한 난리에 충성을 바친 사람 가운데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은전에 흠결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붕수(李鵬壽)는 유생으로 창의를 도모한 자이며 끝내는 또한 싸우다가 죽었거늘 지금 그의 자손 가운데 빼어난 인물이 있는데, 이와 같은 사람을 조정에서 차례대로 기용한다면 북관 지역 민심을 흥기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며 훗날 그로 인한 효력도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감사(監司) 서원리(徐元履)가 당시 공을 세운 여러 의사를 위하여 여러 고을에 사당을 세우기로 하였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 견해는 어떻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별도로 사당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으니, 일단 윤공의 사당에 정공을 제향하고 훗날을 기다려 변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숙(持叔) 형4)이 반자(半刺)5)가 되었을 때 싸우다가 죽은 인사에 대해서 제사를 했다고 하는데, 정공의 사적에 대해서는 선친께서 채방한 것만큼 깊이 알지는 못했는가 생각됩니다. 모시고 앉아서 생각을 다 펼칠 길이 없기에 이에 감히 서찰로 길게 늘어놓는데, 병이 깊어 정신이 혼미하여 글이 생각을 제대로 담지 못하였으니, 합하께서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고 재량(裁量)하여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端夏自赴戎幕以來, 不惟才識昏滯, 不能有所措畫, 適値主將見罷, 坐待拿命。彼以旣罷, 故牢守前規, 而一事不欲變通。然猶佩密符而擁將號, 佐幕之官, 雖有不得已代察之事, 亦不可凌掩而出號發令, 失上下之體統也。軍民弊瘼, 可以變通者, 似非一二, 而權柄旣不在手, 欲事事而正之, 則近於侵官而不可得矣。此有一事, 有評事稍可以容力者。先人曾莅此任時, 以方伯指, 述《北關誌》而見失。端夏之來, 有意於此事, 《鏡城誌》業已草定, 《九官事》, 欲一樣編撰, 行關列邑, 書送《鏡城誌》條件凡例, 使之逐條記實以送, 若來則亦欲刪定而續編耳。端夏於先人文字收拾, 不遺片隻, 而惟是〈鏡城事績〉一冊, 本自本府以吏文記錄者, 而束在亂稿箱籠中。端夏受此任後, 暫往故山, 搜取此冊, 而不料其中有先人手草雜記數紙挾置而不見收也。今以別紙錄呈, 蓋鄭評事文孚事, 先人嘗稱道而惜之, 今見此記, 又躬訪於此處人士, 則其功大矣, 而生旣被誣, 不遇於世, 沒又無人表章者, 誠可惜也。 此有尹文肅公瓘之遺廟, 鄙意以爲金宗瑞鄭文孚, 其功俱不下於尹公, 蓋收復國家旣失之土地, 則三人均也。欲以金鄭兩公, 幷享於尹廟, 尹廟雖不加創, 可容三位之享, 以此而議于此處人士將校, 則衆議如一, 而但聞鄭公死於癸亥後逆獄杖下, 且其生時, 爲人峭直, 固多嫉之者云, 未知世議爲如何也。先人賦〈鏡城十絶〉, 其一曰: "詩書命帥金宗瑞, 勳戚專征尹侍中。遺廟卽今難倂祀, 史家那得獨褒功。" 下句之意未詳, 而蓋似惜其不能幷祀也。一絶曰: "申公一戰解重圍, 鄭子三麾破敵歸。關外雙忠懸日月, 空令壯士涕交揮。" 申似指申公砬, 而鄭必指文孚也, 此則偶然對擧之辭, 而此乃先人丙辰年所作也。鄭公若有失身於昏朝之事, 則先人必不以忠許之矣。鄭公死於柳夢寅之獄, 而夢寅引之云然耶。夢寅常時人事, 有同失性者, 其承服被誅, 亦似可笑, 況其援引乎。以鄭公忠智, 平生所樹立如此, 則反正後必無詿誤於兇徒之理, 然此處之人, 以此爲疑, 玆以奉稟於閤下, 兼議於朝中親舊, 伏未知閤下之意如何也。卽今後春靈古之勢, 日以強盛, 日後不虞之變, 有不可測, 前代立大功業之人, 無以昭揭而樹之風聲, 則將何以責後來忠義之繼出乎。此事恐非今日北關第二件事, 而其在軍政之修, 亦有本末之序也, 如何如何。如此事, 人或不樂聞, 朝議或有不深惟鄭公之心迹, 而執其死時事而沮之者, 此事恐歸於不能成, 閤下之意, 如以爲可, 則決欲擧而行之耳。此事從前觀風守土之人, 亦有意而未果云, 非獨端夏之愚見也。且其從難之士, 不得一告身, 實爲國家之欠典。如李生鵬壽, 卽儒生之首倡義謀者, 而終又戰亡, 今其子孫, 亦有俊秀之士, 如此之人, 朝廷亦次第錄用, 則關北人心, 庶有興起之效, 而日後得力, 必不淺也。徐監司元履欲爲當時立功諸義士, 立廟於列邑而未果云, 此見則如何也。鄙意別立廟未易, 姑以鄭公祀於尹廟, 以俟他日變通, 亦可也, 如何如何。持叔兄爲半刺時, 致祭於戰亡之士云, 而鄭公事蹟, 則想或未及深悉如先人之所採訪也。末由奉陪, 盡攄懷抱, 玆敢縷縷於書札, 病痼神茫, 辭不達意, 惟恃閤下恕量, 有以裁敎焉耳。 경성십절 《택당선생집》 권1에 보인다. 신공의……줬고 신립(申砬)이 함경도 경원(慶源)ㆍ경흥(慶興)을 거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있을 때, 호추(胡酋) 이탕개(尼湯介)가 반란을 일으켜 제진(諸鎭)을 침략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했던 일을 말한다. 영고탑(靈古塔) 청(淸)나라의 발원지로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일대에 있다. 여기서는 후금(後金)을 세운 여진족(女眞族)의 범칭으로 쓰였다. 지숙 형 민유중(閔維重)의 자이다. 반자 반자는 중국의 장사(長史)나 별가(別駕) 같은 벼슬을 말하는데, 그 소임이 자사(刺史)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통판(通判)을 칭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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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근체시를 지어 동년배들에게 주다 又近體贈諸同年 푸른 눈76) 들어 무이루77) 바라보니 共擡靑眼撫夷樓붉은 얼굴78) 을묘년 가을 추억하네 倍憶紅顔乙卯秋한 시대 풍류는 길이 꿈속으로 드는데 一代風流長入夢당시 많은 사람 절반이나 무덤 이루었네 當年二百半成丘금산은 비 온 뒤 푸르러 홀 쓰기 적합하고 錦山雨後靑宜笏영수는 가을 전 녹음 있어 배 띄우기에 알맞네 靈水秋前綠可舟이 자리 소중히 여겨 저버리지나 마시오 珍重此筵須勿負내일 밤 적벽의 달빛 아래에서 놀기로 하세 明宵赤壁月中遊 共擡靑眼撫夷樓, 倍憶紅顔乙卯秋.一代風流長入夢, 當年二百半成丘.錦山雨後靑宜笏, 靈水秋前綠可舟.珍重此筵須勿負, 明宵赤壁月中遊. 푸른 눈 원문의 '청안(靑眼)'은 반가운 만남을 뜻한다.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청안을 뜨고 미운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을 떴다고 하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무이루 무이루(無夷樓)는 나주에 있는 누각의 이름이다. 붉은 얼굴 젊은 시절을 말한다. 두보의 시 〈청명(淸明) 2수〉에 "꽃을 탐하는 저 고운 새는 즐겁기만 한데, 죽마 타던 어린 시절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어라.〔繡羽衝花他自得 紅顔騎竹我無緣〕"라고 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8 淸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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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본 것을 기록하다 冬日記所見 가볍게 날리는 눈발 바람 앞에서 춤추고점점이 뭉친 작은 구름 흩어졌다 다시 이어지네몇 마리 저녁 기러기 먼 물가에서 울고어느 해엔가 이별하였던 학 긴 하늘을 건너네안개는 먼 산봉우리에 의지하여 새로운 상투를 꾸미고물은 흐르는 시내에서 울며 오래된 현(絃)을 잇네모두 한가한 가운데 품평하는 것이니참된 뜻 말하고자 하다가 이내 말을 잊었네269) 輕輕飛雪舞風前點點微雲散復連幾箇暮鴻嘶遠浦何年別鶴度長天烟依遠峀粧新䯻水咽流泉續舊絃摠是閒中題品了欲言眞意便忘筌 말을 잊었네 원문은 '망전(忘筌)'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 또는 방편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장자》 〈외물(外物)〉에, "통발은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니 일단 잡으면 필요가 없고,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니 일단 잡으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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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린찬4) 泣麟贊 너의 발굽이 둥그니누가 알랴 말이 아니라는 것을너의 머리에 뿔이 있으니사람들이 대부분 너를 소라고 하는구나너는 덕이 있으니의당 마소가 있는 들판에 대은5)이로다 爾蹄圓。 誰知其非馬。 爾頭角。 人多謂爾牛者。 爾有德。 宜大隱乎馬牛之野。 읍린찬(泣麟贊) '읍린(泣麟)'은 기린을 위해 울었다는 말로, 세상이 쇠하고 도(道)가 다한 것을 슬퍼하는 뜻이다. 《春秋公羊傳 哀公14年》 대은(大隱) 몸은 조정이나 저잣거리에 있으면서도 뜻은 높은 은자(隱者)를 말한다.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소은은 산속에 숨고, 대은은 시조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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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찬 歌鳳贊 까마귀는 애벌레를 쪼고올빼미는 썩은 쥐6)를 다투도다그래도 너는 지각이 있으니기색을 살피고는 멀리 날아가는구나7)더구나 너는 천 길의 날개가 있으니어찌 안개 노을 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랴 烏啄壤虫。 鴟爭腐鼠。 猶有知覺。 色斯遐擧。 况爾有千仞之翼。 盍歸乎烟霞之所。 썩은 쥐 원문의 '부서(腐鼠)'로, 주로 부귀와 공명을 비유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솔개가 썩은 쥐를 얻어 가지고 가다가 원추가 그 위를 날아가자 썩은 쥐를 빼앗길까 봐 '꿱' 하고 소리를 질렀다.[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 嚇.]" 하였다. 기색을……날아가는구나 기미를 살펴 대처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색사(色斯)'는《논어》 〈향당(鄕黨)〉에 "새가 사람의 기색을 보고 날아올라 한참을 빙빙 돈 뒤 내려와 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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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춘에 복원 차오산 천로의 시265)에 차운하다 暮春次車五山復元天輅韻 봄이 주렴을 몇 겹으로 에워싸니너무나도 짙은 봄빛에 잠에서 깨어나누나한가로운 꽃이 희롱하는 나비를 맞이하건 말건날리는 버들솜은 바쁜 벌을 좇아 구분할 수 없네많은 악기의 현은 다행히도 섬섬옥수로 연주하고큰 술잔은 돌무더기 쌓인 가슴에 더욱 좋아라266)만약 주인이 술빚이 없다고 한다면총마가 나는 용과 같은 것을 보시라 春圍簾幕幾重重睡起韶光分外濃一任閑花迎戲蝶不分飛絮趁狂蜂繁絃賴有纖纖手大酌偏宜磊磊胸若道主人無酒債試看驄馬似遊龍 차오산의 시 《오산집(五山集)》 권2에 실려 있는 〈漫興奉呈鄭公子虛求和〉를 가리킨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庭花受日影重重, 坐對眞成晩興濃. 擺撥無端憎啅雀, 經營多事惜遊蜂. 撲衣却勝梅粧額, 鋪地堪憐錦帖胷. 報答春光如得酒, 不妨炰鳳且烹龍." 큰……좋아라 남조 유송(劉宋)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에 왕손(王孫)이 왕침(王忱)에게 "진나라 완적(阮籍)의 주량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비교하여 어떤가."라 묻자, 왕침이 "완적의 가슴에는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기 때문에 모름지기 술로 씻어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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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다시 차복원의 시에 차운하다 初夏復次車復元韻 구십 일 봄 내내 놀라서 꿈에서 깨더니비온 뒤 짙어진 산 경치에 조금은 반갑구나넓은 길은 진흙처럼 미끄러워 바쁜 것은 제비요많은 나무 꽃이 떨어지니 쓸쓸하여 벌도 없어라붉은 빛 도는 술잔에 홍조가 얼굴에 쉬이 일고백설곡267)은 분을 바른 여인에게 주어 노래하기 좋아라내일 동호에 아름다운 약속 있나니생선회 미끼 써서 용을 잡아 삶아보아야지 一春九十驚殘夢稍喜山光雨後濃泥滑九街忙是鷰花空千樹寂無蜂紅潮易暈酣觴面白雪宜呈傅粉胸明日東湖有佳約且將魚膾當烹龍 백설곡 농포의 시가 매우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춘추 시대에 초(楚)나라에서 어떤 나그네가 하리(下里)와 파인(巴人)의 노래를 부르니 수천 명이 따라 불렀고, 양아(陽阿)와 해로(薤露)의 노래를 부르니 몇 백 명이 따라 불렀는데, 양춘(陽春)과 백설(白雪)의 노래를 부르니 몇 십 명밖에는 따라 부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文選 宋玉對楚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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