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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1591, 선조24) 7월 그믐에 북평사에 제수되어, 8월에 길을 떠나 저녁에 누원에 묵었는데, 홍이신이 술과 과일을 대접하고 4운시 세 수를 지어 증별하기에. 내가 그중 한 수에 차운하여 주고 작별하였다 이하 32수는 북로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辛卯七月晦 除北評事 八月發程 暮投樓院 洪而信待以酒果 作四韻三首 贈別余次其一酬別【以下三十二首 北路時作】 한 번 만나봄에 의기 호방하다 서로 추양(推讓)했으니친밀한 정 어찌 꼭 오래 사귄 벗이어야 하랴술잔 앞에서 정담 나눌 제 함께 주미를 휘둘렀는데79)변경으로 떠나는 행장 홀로 깃발을 잡았네80)잿마루의 나무는 서리 맞아 바람에 잎 떨구고변새 기러기는 빗속에 길 잃고 빈 해자에 내려온다병든 뒤로 큰 술잔 마시기 두려우니누런 국화와 흰 막걸리 헛되이 저버렸네 一見相推意氣豪情親何必舊同袍樽前細話雙揮麈關外行裝獨擁旄嶺樹經霜吹落葉塞鴻迷雨下空壕病來㥘殺深杯飮虛負黃花與白醪 주미를 휘둘렀는데 청담(淸談)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주미(麈尾)는 이야기를 나눌 때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털어내던 일종의 먼지떨이로, 옛날에 청담을 하던 고사(高士)들이 주미를 손에 들고 담론하였다고 한다. 깃발을 잡았네 군대를 통솔한다는 의미로, 정문부가 함경북도 병마평사로 부임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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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 감회 농암 김창협 彰烈祠感懷【農巖 金昌協】 예전에 왜구가 난 일으켜병진이 이 땅에 가득했지정공은 좌막으로 분발해단에 올라 깃발 세우고 북 울렸네진들을 감격시켜 발동하니의병들 구름처럼 모여들었네눈물 흘리며 행재소 바라보고담소하며 역도 잡아 참수하였네75)쉬지 않고 승승장구 나아가비바람 몰아치듯 적을 격파했네공 높아지자 모함76)도 받고사실 가려져 아는 이 드무네충성과 공적 막혀 드러나지 않다가숨겨진 울분 오래되어서야 분출하네해변에 우뚝한 새로운 사당에영원히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후세에게도 장려할 만하니하늘에는 본래 정해진 운수가 있다오 島夷昔構患兵塵彌茲土鄭公奮幕佐登壇建旗鼓感激列鎭動雲蒸義旅聚涕淚望行在談笑取逆竪長驅無留行破敵若風雨功高有媒蘖事昧限聞覩忠績鬱不揚幽憤久乃吐新廟抗海堧椒荔永終古來者亦可勸天定固有數 담소하듯……참수하였네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과 경성의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대신들을 잡아 왜적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정문부가 강문우·최배천 등과 합세하여 이들을 참수한 일을 말한다. 《農圃集 年譜》 매얼(媒蘖) 죄를 양성하여 모해(謀害)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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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룡당을 지나며 감회가 있다 2수 한포재 이건명 過燭龍堂有感【二首 寒圃齋 李健命】 무계호의 유묘 이름 예전에 들었으니지금 참배하며 의로운 명성 우러르네당시 열군에 개결한 사람 하나 없었으니뛰어난 공로 변성만 빛내지 않으리라선군께서 변방에서 기문78) 보내시니평생 꿈속에서도 감히 잊지 못하겠네지금까지 풍수의 여한79)이 남아있으니서당 지나며 흐르는 눈물 어이 참으랴­서당의 기문은 바로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가 지었으므로 시에서 언급한 것이다.­ 武溪遺廟舊聞名瞻拜于今仰義聲列郡當時無一介奇功不獨耀邊城先君記語寄遐鄕夢想平生未敢忘風樹卽今餘恨在可堪揮涕過書堂【堂記, 卽西河所作, 故詩語云云。】 기문 이민서(李敏敍)의 《서하집(西河集)》 권13에 〈경성촉룡서당기(鏡城燭龍書堂記)〉가 실려 있다. 풍수의 여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부모를 여읜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韓詩外傳 卷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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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우연히 읊다 乘舟偶吟 달은 천황씨6)의 눈 같고 月似天皇目산은 공자의 인자함 같네 山如孔子仁조각배 타고 강물을 건너니 片舟過江水나 또한 무릉도원7) 사람일세 吾亦武陵人 月似天皇目, 山如孔子仁.片舟過江水, 吾亦武陵人. 천황씨 중국의 태고 시대를 살았던 전설상의 임금이다. 삼황(三皇), 즉 천황씨(天皇氏)와 지황씨(地皇氏)와 인황씨(人皇氏) 가운데 으뜸으로, 12명의 형제가 각각 일만 팔천 년씩 살았다고 한다. 무릉도원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을 가리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진(秦)나라 때 피란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陶淵明集 卷6 桃花源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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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으로 가는 도중에 〈경성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다〉 시에 차운하다 在富寧道中 次鏡城觀獵韻 충신에 의지해 유관85)을 나서니임지는 어찌 맥과 만을 나누랴예로부터 강물은 발해로 흘러가고일찍이 봄빛은 음산에 당도한 적 없어라물가 모래톱엔 눈 쌓이고 어촌엔 눈 적고비탈길에 석양이 지니 사냥간 이들 돌아오네집이 한강 가에 있으니 그 언제나 가려나부질없이 풍월만 절로 한가롭게 있을 뿐 仗來忠信出楡關任地何分貊與蠻從古江流通渤海不曾春色到陰山沙汀積雪漁村少磴路斜陽獵騎還家在漢濱何日到漫敎風月自閒閒 유관 임유관(臨楡關)으로 산해관(山海關) 축성 이전에는 관문의 기능을 담당하다가 산해관을 지은 이후로는 역참의 기능만 남아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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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의 원운을 부기하다 附德哉韻 사기가 무지개처럼 뻗쳐 북쪽 변방에 빛나니위엄이 이미 퍼져 남만86)을 복종시켰네성안의 혼백은 시퍼런 칼에 노닐고다리 위 암수 새는 백두산에 날아오르네날쌘 기병이 어지러이 따르고 사냥개는 -원문 1자 결락-조각배는 멀리서 저물녘에 돌아오네인연 따라 매양 시 읊느라 괴로워했으니도리어 우습구나, 이내 삶 잠시도 한가롭지 않은 것이 兵氣成虹耀北關威稜已播服南蠻城中魂魄遊靑釰梁上雌雄掣白山輕騎亂從田犬【缺】片帆遙趁夕陽還隨緣每被吟詩苦却笑吾生暫不閒 남만 남쪽 지방의 오랑캐라는 말로,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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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부사로 부임하는 김이경180)을 보내다 送金而敬赴原州 고을이 명산 가까이 있으니 어찌 우연이랴지방 관원으로 나아가서 속세 인연 털어내네사또가 좋아하는 것은 거문고와 책과 학이요조화옹의 기묘한 솜씨 일만이천봉 빚었구나봄나물이 쟁반에 오르니 약물 넉넉하고고승이 좌중에 있으니 시편이 충분하네도화원 냇물 세상으로 흘러나와 강이 되니편지 한 번 두 번 전하는 것 아끼지 마오 邑近名山豈偶然一麾歸去擺塵緣使君長物琴書鶴造化奇功萬二千春菜登盤饒藥餌高僧在座足詩篇仙源出世爲江漢休惜魚書一再傳 김이경 김정목(金庭睦, 1560~1612)으로,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이경(而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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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181)의 시에 차운하여 북쪽으로 가는 박열지182)를 보내다 次敬叔 送說之北行 이별에 임해 웃음 머금고 간장183)에 기대니나도 모르게 돌아가는 길에 변방 땅을 지났네초목은 그래도 나와 오래 알고 지냈으니강산 저 머나먼 변방이라 말하지 말라그 당시 부러진 창이 모래에 묻힌 곳지금은 꽃 피어 길 양쪽 향기로워라이곳은 젊은이가 객살이 해도 좋으니춘풍이 이별의 애간장 녹일 것 없네 臨分含笑倚干將不覺歸程度塞隍草木猶爲吾舊識江山莫說彼要荒當時折戟沈沙處今日開花夾路香此地少年爲客好春風不用斷離腸 신경숙 신흠(申欽, 1566~1628)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옹·상촌(象村)·방옹(放翁),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박열지 박동열(朴東說, 1564~1622)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ㆍ봉촌(鳳村)이다. 간장(干將) 오나라에 있었다는 명검(名劍)인 간장검(干將劍)이다. 춘추 시대 오나라 오나라의 간장(干將)과 막야(莫邪) 부부가 두 개의 칼을 만들어 하나는 간장검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막야검이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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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재의 원시를 첨부하다 附德哉韻 약을 훔쳐 언제 월궁에서 내려왔나236)아리따운 선녀의 자태 더할 나위 없구나두 눈썹은 구름에 덮인 푸른 산빛 같고양 뺨은 빗속의 붉은 복사꽃 같았네해로 한다 맹세해 놓고 홀로 되었으니젊을 때는 무리보다 못해 부끄러워했지천금으로 사마상여의 소갈병을 살 수 있다면저자에서 기꺼이 숙상구 입은 노인237)이 되리라 竊藥何時下月宮仙姿綽約態無窮雙蛾山色雲邊綠兩頰桃花雨裏紅偕老誓言成獨處少年羞恥讓稠中千金可買相如渴市上甘爲鷫被翁 약을……내려왔나 옛날 하(夏)나라 때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일찍이 선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놓았는데, 그의 아내인 항아(姮娥)가 그것을 먼저 훔쳐 먹고 신선이 되어 달 속으로 달아나서 달의 정기(精氣)가 되었다고 한다. 《說郛》 여기서는 그 전설을 반대로 구사하였다. 저자에서……노인 한(漢)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입었던, 기러기와 비슷한 숙상이라는 새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 이름인데, 흔히 가난한 사람이 입는 옷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부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고향인 성도(成都)로 돌아갔을 적에 워낙 가난했던 탓에 자기가 입고 있던 숙상구(鷫鸘裘)를 전당 잡히고 술을 사서 탁문군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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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길의 〈김군실이 전사한 것을 애도하다〉 시에 차운하다 次朴季吉哀金君實戰亡 기억하노니, 지난번에 쌍성에서 술자리 열고그대를 전송하고 아울러 잘 돌아오라 축원했지그 당시 허리에 용도를 차고 떠났는데지금은 몸이 말가죽에 실려 돌아왔네157)생각건대 그대의 성음과 용모 꿈속처럼 아련하니차마 그대의 몸을 저 멀리 산귀퉁이에 둘 수 있으랴쓸쓸히 밤비 내리는데 사립문 닫으니등잔 아래 어찌 굳이 홀로 술잔 들 것 있으랴 憶昨雙城尊酒開送行兼祝好歸來當時腰佩龍刀去今日身從馬革回想得音容如夢裏忍敎形魄隔山隈蕭蕭夜雨柴門掩燈下何必獨把盃 몸이……돌아왔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여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한나라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는 변방의 들판에서 쓰러져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와 땅에 묻히는 것이 마땅하다.[男兒要當死於邊野, 以馬革裹屍還葬耳.]"라고 하였다. 《後漢書 馬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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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길의 시에 다시 차운하여 답하다 再次答朴季吉 붕새는 하늘을 향해 만 리를 날아가는데158)그대가 지금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탄식하네명리의 장은 와각 싸움159) 수많은 변화 겪었으니나그네 길 굽이굽이 몇 번이나 꺾였던가초나라 지역에 눈이 내려 진령 밖에서 온통 길 헤매니나그네의 넋은 때로 –원문 1자 결락- 고향의 모퉁이당시의 일을 심상하게 말하지 말라술동이 앞 한 잔 술에 마음 부치노라 霄漢鵬程萬里開歎君今向此中來名場蝸角經千變客路羊腸度幾回楚雪全迷秦嶺外旅魂時【缺】故山隈等閒莫說當時事付與尊前酒一盃 붕새는……날아가는데 원대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에 물을 삼천 리나 치고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날아올라 여섯 달을 날고서야 쉰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와각의 싸움 사소한 이익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달팽이 뿔 왼쪽의 나라 촉(燭)과 오른쪽의 나라 만(蠻)이 날마다 서로 땅을 놓고서 다투었다.[有國於蝸之左角者曰觸氏 有國於蝸之右角者曰蠻氏 時相與爭地而戰]"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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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길의 〈삼월삼짇날〉 시에 차운하다 4수 次朴季吉三月三日韻 四首 만남이 무슨 일로 이토록 늦어졌는가함께 그윽한 회포를 술잔에 부치네옥을 안은 그대는 마치 초나라로 가는 것 같고162)거문고 타는 나는 종자기를 만난 듯하여라163)문단에서 문예 겨루어 삼협을 기울였고164)교우의 도는 마음을 터놓아 온갖 의심 끊어냈네시내와 산 나누어 갖고 지척 거리에 있으니소박한 평민 차림으로 서로 잘 어울려 지내네산속에 약속 있으니 돌아감이 어찌도 이리 더딘가계주의 짙은 향이 술잔에 가득하누나백 년 세월 아득히 꿈처럼 지나가고석 달 봄이 갑자기 기약한 듯이 찾아왔네장주인지 나비인지 나는 분별 못하는데어목과 수주165)는 사람들이 혹 의심하네종일토록 오직 많이 마시고 취할지니또 장차 청풍 명월과 어울리리새는 짹짹 지저귀며 봄 낮 더디게 가고유인은 시상이 깊은 술잔 속에 있네좋은 날은 흘러가는 물과 같으니 어찌할 수 있으랴좋은 벗은 구름과 같아 본래 기약할 수 없는 법버들 구경 꽃 구경하니 온통 흥이 일고갈매기와 맹세하고 백로와 어울리니 서로 의심하지 말라도화원에서 돌아갈 길 잃을까 두려워 말라흐르는 강에 고기잡이배 절로 따라가면 될 뿐변방 성 봄날 저녁에 나그네 걸음 더디고끊임없는 공연한 시름 한 잔 술에 부치노라두우화엔 울면서 토한 피 묻어 남아있고166)왕손초는 푸르러 떠나서 돌아올 기약 없네167)나그네 회포 마치 술과 같아 절로 취하고세로엔 갈림길 많으니 참으로 의심스럽구나남국의 미인 저 하늘 끝에 있으니편지 혹여 기러기 행렬 따라 올거나 相逢何事太遲遲共把幽懷付酒巵抱玉君如遊楚國彈琴我似遇鍾期詞場戰藝傾三峽交道論心絶九疑分占溪山咫尺地黃冠野服好追隨山中有約歸何遲桂酒濃香滿斗巵百歲茫茫去若夢三春忽忽來如期莊周蝴蝶我無別魚目隋珠人或疑終日惟須酩酊醉且將明月淸風隨鳥語喃喃春晝遲幽人詩思在深巵良辰似水能何許勝友如雲本不期問柳尋花渾漫興盟鷗羣鷺莫相疑仙源休怕迷歸路流水漁舟自可隨邊城春暮客行遲脈脈閒愁付一巵杜宇花殘啼有血王孫草綠去無期羈懷如酒自成醉世路多岐眞可疑南國美人天一畔緘書倘與鴈行隨 옥을……같고 나라에 재주를 바치려 한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초왕(楚王)에게 바쳤다가 임금을 속인다는 누명을 쓰고 두 차례나 발이 잘렸으나, 나중에 초나라 문왕(文王)에게 진가를 인정받고서 천하 제일의 보배인 화씨벽(和氏璧)을 만들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거문고……하여라 마음을 알아주는 벗을 만났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탔는데, 종자기(鍾子期)는 그 소리를 잘 알아들어, 백아가 산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높은 산이 우뚝 솟았도다."라고 하였고, 물을 두고 타면 종자기가 "물이 넘실넘실 흐르도다."라고 했다. 《呂氏春秋 本味》 삼협을 기울였고 박길재의 문장이 힘차고 뛰어나다는 뜻이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취가행(醉歌行)〉 시에 "문장의 근원은 삼협의 물을 기울인 듯하고, 필력의 전진은 천군을 쓸어 낼 기세로다.[詞源倒流三峽水, 筆陣獨掃千人軍.]"라고 하였다. 어목와 수주 참과 거짓을 혼동함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이다. 어목(魚目)은 물고기의 눈이고, 수주(隋珠)는 수후(隋侯)의 보배로운 구슬로, 한나라 위백양(魏伯陽)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 "어목이 어찌 구슬이 될 수 있으랴. 쑥은 오동나무가 되지 못하네.[魚目豈爲珠, 蓬蒿不成檟.]"라고 하였다. 두우화엔……남아있고 두우화(杜宇花)는 곧 두견화로, 두견화에 얽힌 고사를 인용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형용한 것이다. 촉나라 망제(望帝)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피를 토하면서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몹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견새가 토한 피가 묻어 붉게 된 꽃을 두견화라고 한다. 《華陽國志 卷3 蜀志》 왕손초……없네 왕손초(王孫草)는 궁궁이[蘼蕪]의 별칭으로, 고향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형용하는 말로 쓰인다. '왕손초'라는 이름은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이 떠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봄풀은 자라서 무성하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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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함께 귀양 갔던 영남 사람으로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 6월 일 회령 귀양지에 있을 때이다.】 與人書 【嶺南人同被謫者, 而姓名無傳. 壬辰六月日在會寧謫所時】 호남과 영남으로 떨어져 살다가 변방 너머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여러 해를 어울리며 함께 가슴 속까지 내보였으니 인정과 의리의 친분이 혈육을 뛰어넘습니다. 지난번 방문하셨을 때에 사랑하고 염려하시는 뜻을 크게 입어 더욱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강(東岡)73) 선생께서 떠나신 뒤로【아마도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 우리들의 처지가 더욱 쓸쓸한데,74) 그대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나 각자 쓸데없는 일들에 얽매여 조석으로 정답게 만날 수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번민에 잠기게 합니다.근래에 듣기로는 적의 형세가 기세등등하여 임금께서 수례를 타고 또 서경(西京)75)으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안변(安邊)76)이 함락되어 방백(方伯)들은 몸을 숨기고 왕주(王胄)77)처럼 깊이 들어오려는 계책이 있으니, 고금 천하에 오늘날과 같은 참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본래 인재를 모아 양성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큰 환란을 당하여 누가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하며78)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또한 몸을 숨겨 달아날 곳이 없어 하루아침에 화가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걱정이니 한번 오셔서 의논하시기를 바랍니다.〈부제학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 한 통을 숨기지 않고 찾아 부칩니다. 이 편지의 첫 부분은 남들이 보면 번거로운 일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품고 있는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 끝내 동지에게 침묵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차운시 또한 지어 올리니 아울러 헤아려주십시오. 틀림없이 만날 테니 일일이 쓰지 않겠습니다. 湖嶺分住, 塞外相遇, 數年遊從, 共輸心肝, 情義之親, 有逾骨肉. 頃日之訪, 多荷眷眷之意, 尤不知所喩. 自東岡先生出【恐脫字】, 吾儕益自踽踽, 與君相去, 亦不相遠, 而各有宂絆, 未得朝夕之款, 令人憒憒也. 近聞賊勢長駈, 乘輿又移西京, 且破安邊, 方伯遁身, 王冑有深入之計, 古今天下安有今日之慘禍耶. 我國素不儲養人才, 當此大禍難, 孰有麤拳大踢, 可以戡定耶. 吾輩亦無藏身之所脫, 一朝禍迫, 何以爲之, 甚可慮也, 幸一來謀之. 上金部提學書一通, 不隱搜付. 此書在初頭, 恐煩人見, 不敢罄其所懷, 然亦足以知其所存, 不欲終默於同志也. 次韻亦錄呈, 幷惟采之許多. 須面不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ㆍ직봉(直峯)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며, 외손서이다. 1558년 진사가 되었고 1567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이조 좌랑,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저술로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경연강의(經筵講義)》, 《동강집》이 있다. 쓸쓸하고 원문의 '우우(踽踽)'는 친한 사람이 없어 쓸쓸한 모습을 뜻한다. 《시경》 〈당풍(唐風) 체두(杕杜)〉에 "쓸쓸히 홀로 길을 가니, 어찌 타인이 없으랴마는, 내 형제만 못하니라. 아 길 가는 사람들은, 어찌 도와주지 않는고.[獨行踽踽, 豈無他人. 不如我同父. 嗟行之人, 胡不比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경(西京) 고려시대 사경(四京)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평양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안변(安邊)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함경도에 속한 도호부였다. 지금은 북한의 강원도에 속한 군(郡)이다. 왕주(王冑) 수(隋) 나라 시인이다. 수 양제(隋煬帝)보다 시가 낫기 때문에 늘 미움을 받다가 그로 하여 해침을 당했다. 거친 …… 발길질하며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럽지 않았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하지 않았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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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를 읊다 詠琴 가냘픈 손으로 한 곡조를 타는데 一曲生纖指돌아가는 구름이 석양을 가리네 歸雲遏夕陽가야산으로 떨어진 태양은 伽倻山下日응당 늙은 신선 곁에 있겠네 應在老仙傍 一曲生纖指, 歸雲遏夕陽.伽倻山下日, 應在老仙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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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 5월 일, 부령32) 유배지에 있을 때.】 與人書 【姓名不傳. ○壬辰五月日, 在富寧謫所時.】 지난번 한 통의 편지는 진실로 그리워하던 차에 받았습니다. 봉함을 뜯고 반복하여 읽어보니33) 마치 맑은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근래 무더운 여름 날씨가 되었으니 정신을 굳게 하며 서로 의지하고 있는지요? 비록 한창 무더울 때를 마주하여 쉽게 그대 계시는 곳으로 의리상 달려갈 수 없으니 단지 그리움만 더할 뿐입니다. 아름다운 봄날에 객지에서 시름으로 한결같이 초조하고 애가 타니 정신이 어지럽고 산란합니다. 지난날 학문을 헤아려 보니 아직 평생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금 얻은 것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떠하겠습니까? 남쪽 지방은 왜적의 변란으로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니 부모와 형제가 어떻게 몸을 보전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음식을 먹어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에 나아가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당당했던 나라로 다시 안정되어야 할 텐데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차라리 죽어 인간 세상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귀댁의 하인이 돌아와서 도성의 소식들을 어떻게 말하였는지요? 바닷가에서 가졌던 아름다운 만남을 다시 마련할 수는 없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紆一札, 實値想際. 開緘圭復, 若承淸誨. 卽日夏熱爲況, 神介相須. 雖殷際晤, 未易向風馳義, 只增悠悠. 三春佳節. 客裡愁過, 一向焦枯, 神精昏憒. 商量舊學, 亦未爲平生之志, 些子之得, 到此如何? 南方賊變, 令人驚瞻, 父母兄弟, 想何保全, 食不下咽, 寢不能寐. 堂堂國家更安, 有如此事, 寧欲一死而不願聞人間消息也. 貴奚入來, 洛中諸奇, 何以云. 然海上佳會, 更未謀做乎. 以爲如何. 부령(富寧) 함경북도의 부령군 지역이다. 본래 본래 경성군(鏡城郡)의 석막성(石幕城) 지역이었는데, 1449년에 부거현(富居縣)과 회령부(會寧府)의 땅을 떼어 붙여 부령 도호부(富寧都護府)로 삼았다. 반복하여 읽으니 원문의 '규복(圭復)'은 《논어》 〈선진(先進)〉에 "남용이 백규의 글을 세 번씩 되풀이하여 읽거늘, 공자가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南容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상대방의 시문을 정성스럽게 읽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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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습고 錦峰拾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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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봉사 【선조 28년(1595).】 乙未封事 【宣祖二十八年】 삼가 아룁니다. 《서경(書經)》에 "하늘이 듣고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따르는 것이며, 하늘이 밝고 두려운 것은 우리 백성의 밝고 두려움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1) 이 말은 하늘이 듣고 보는 것은 보고 들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 인하여 보고 들음을 삼고, 하늘이 밝고 두려운 것은 좋아하고 미워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밝고 두려움으로 인하여 밝고 두려운 것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대개 하늘과 사람은 그 이치가 하나여서 막힘없이 통하니, 민심이 있는 곳이 바로 천리(天理)가 있는 곳이어서 기쁨으로 감동하면 복으로 감응하고, 원망으로 감동하면 재앙으로 감응하니, 그 뚜렷한 효험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빠름은 그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국가가 어렵고 위태로운 날에 백성이 도탄에 빠져 괴로워하는 것을 아파하시어 강개(慷慨)하고 분발하시며 공검(恭儉)하고 부지런히 애쓰셔서 안으로는 국정을 잘 닦고 밖으로는 적을 물리치며,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기에 힘쓰셨습니다. 처사의 원한을 특별히 신설(伸雪)하고 국가를 병들게 하는 간악하고 흉악한 자들을 드러내 배척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신 것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중흥과 회복의 큰 기회가 아니겠습니까?아!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사특함과 올바름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에 진실로 많은 반복이 있었으나, 사림에게 재앙을 끼쳐 국가의 명맥을 끊어지게 함에 이르러서는 기축(己丑1589)년의 변란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건대 국가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하는 징조가 필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음이 없으니, 혈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분격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간사한 적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성토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화살에 놀란 새처럼 두려운 마음2)은 겨우 그쳤지만 가시지 않는 두려움이 아직도 있어 입을 다물고 혀를 묶은 채 답답한 마음을 펴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어 밝은 태양3)이 널리 비추듯 시비를 분별하고 원통함을 밝게 씻겨주어 조야(朝野)의 분통한 마음을 덜어주셨으니, 지금이 바로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 말을 다할 때입니다.신들은 청컨대 그 강령(綱領)을 하나하나 들어 우러러 전하를 번거롭게 하겠습니다. 기축년에 역적의 변란이 사대부의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정여립(鄭汝立)은 당초부터 불을 지르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적이 아니라 실로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기망한 간인이었으므로 당시에는 박식하고 견문이 넓어 사림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이(李珥)와 같은 무리도 맨 처음 교유할 때 깊이 추앙하며 칭찬하였으니, 청요직에 천거되어 쓰인 것도 실은 이이가 이끌어준 힘이었습니다.계미(癸未 1583)년에 분당(分黨)이 이미 심하여 이이가 세력을 잃은 뒤로부터 정여립은 비로소 속마음을 고치지 않고 겉만 달라진 채 동인(東人)에게 빌붙었습니다. 동인은 이미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없이 한갓 일시의 헛된 명성만을 믿어 뿌리쳐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가려서 사귀지 못한 죄입니다.왕망(王莽)이 거짓으로 공손하니 당시【다른 본에는 '당시(當時)' 두 글자가 없다.】 8만 명이 그 덕을 칭송하였고, 육당(陸棠)의 속임수에 선유(先儒)가 믿어 의심치 않고 사위로 삼았으니,4)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만약 실정을 따져 그 죄를 차등한다면 교유하며 칭찬하고 인정한 책임에 대하여 스스로 먼저 죄를 받아야 하나 나머지는 마땅히 감면하여 가벼운 형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만일 조정으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게 한다면 반드시 정자(程子)가 희령(熙寧)·원풍(元豐) 때 붕당을 아울러 쓰자는 논의5)처럼 하여야 합니다. 사람 쓰는 것에 피차를 구분하여 나가고 물러나게 하지 않으며 다만 충성스러운지 사특한지로 취사(取捨)해야 합니다. 친분을 맺는 데도 또한 마땅히 그 사람이 현명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분별하여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급급하지 않으며 공정하게 보고 들어6) 대립하는 단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변란을 당하여 마땅히 각자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세상을 속이는 상황을 극력 진달하여 사림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할 것이니 이것이 군자의 책임입니다.정철(鄭澈)은 사납고 고약한 성질로 이것이 재앙을 만들려는 꾀를 내어 불령(不逞)7)한 무리를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고, 은밀히 함정을 파서 무고한 사람을 빠뜨리며, 공법(公法)에 의탁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아 평소 눈을 흘긴 조그만 원한까지도 반드시 모두 보복하는 처지에 들였습니다. 밖으로는 경박한 무리를 부추겨 한 도(道)의 선비들 의론을 가장(假裝)하여 전하를 현혹하고, 안으로는 간사하고 옹졸한 무리에게 부탁하여 대간(臺諫)의 명성과 위세를 빙자하여 불측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얽어 밤낮으로 협공하여 반드시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중천의 태양 같은 성상의 밝음이 아니었으면, 일세(一世)의 충신과 어진 사람들이 모두 반역의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것이니, 그 꾀가 참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당파의 재앙을 역대와 비교하여 증험하면 실로 위험한 기미와 패망의 징조이니 시비와 사정(邪正)의 분별에 대해 자연히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 밝게 분별하시어 잘 살피고 선택하는 것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으니, 진실로 초야에 있는 신하가 감히 알 바는 아닙니다.정개청의 경우는 당초부터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다만 산림(山林)에서 한결같이 학문에 매진하던8) 선비였습니다. 그 사람됨은 성품이 순수하고 독실하며, 조예가 정확하고 도학을 밝혀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습니다. 항상 장횡거(張橫渠)9)가 예(禮)로 사람을 가르쳤던 교훈을 지키며 구용(九容)10)의 공부를 더욱 엄밀하게 하였으니, 스스로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쓰는 선비가 아니면 그를 알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대체로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멋대로 하는 것을 즐기면서 예법으로 단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조롱하고 배척하여 그를 원수처럼【다른 본에는 '구(仇)' 자 아래에 '적(敵)' 자가 있다.】 미워하였습니다.정철은 작은 일에 청렴하고 근신함으로써11) 헛된 명성을 도둑질하고, 스스로 예법에서 벗어나 방자하게 권세와 이욕의 자리에 분주하였습니다. 급기야 그 뜻을 만족하고 기세를 얻은 뒤에는 주색을 음탕하게 즐겼으니, 함께 당파를 연결하고 벗을 맺은 사람은 모두가 품행이 없고 염치가 없는 무리였습니다. 스스로 순수한 유자(儒者)와 단정한 선비의 의론에 배척되는 것을 알고, 이에 감히 스스로 절의와 청담의 명류(名流)로 의탁하여 한결같이 형기(刑器)와 법도를 하찮게12) 여기더니 마침내 부화(浮華)한 것을 자랑하고 근본과 실질을 망각하며, 통달을 귀하게 여기고 명검(名檢)13)을 천하게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그 지식·재변(才辯)·모계(謀計)·기개를 또한 빛나게 드러내어 장황하게 하고, 후배들 중 허황되고 경망하여 선비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자들이 종횡(縱橫)과 패합(捭闔)14)의 변론으로 서로 선동하며 그의 논설을 지지하고, 막연히 예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해학과 방종으로 몸을 검속하고 물욕을 막는 예법의 밖에서 스스로 안일하였으니, 천리를 해치고 민심을 어지럽게 하며 도술(道術)을 방해하고 풍교(風敎)를 무너지게 한 것이 이처럼 극도에 달하였습니다.정개청의 학문은 항상 정자와 주자를 종주로 삼아 간신들이 세상을 그르치는 상황을 보고는 후학의 폐단이 될까 염려하여 선유(先儒)의 말을 부연한 하나의 논설을 저술하여 절의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폐단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성인의 문하에 종사할 줄을 알지 못하고, 의리의 편안함을 따르지 않으며, 의기가 발하는 대로 장황하게 하여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로 정철이 절의와 청담에 가탁(假托)한 폐단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가 "천하를 경시하고 온 세상을 오만하게 흘겨보며, 예의의 규범을 벗어나 성명(性命)의 바른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끝내는 교활한 무리와 함께 일어나 왕위15)를 흘겨보았다."라고 말한 것은 실제 주자가 주장한 동한절의(東漢節義) 한 조항의 말을 논하여 정철이 세상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정황에 정확히 적중한 것입니다. 그가 "부귀를 바라지 않고 빈천을 잊을 수 있다고 하여 한편으로는 비록 청고(淸高)한 듯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실로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면치 못하여 온 세상이 본받고 흠모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이끌어 교만하고 허탄(虛誕)하게 하여 끝내 회복할 계책을 진작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한 것도 주자의 의론을 위주로 하여 정철이 자신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까지 그르친 정황을 모두 드러낸 것입니다.그렇다면 절의에 대해 저술한 논설은 진실로 선유(先儒)가 이미 정한 공론에 의거한 것이 그 뜻은 전적으로 정철이 세상을 속이고 총애를 취하여 명교(名敎)를 어지럽힌 것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늙은 간신이 자신의 평소 심술이 남들에게 조사당하여 군자의 올바른 견해로 탄로나게 되어 그 실정을 당대 사람들에게 숨길 수가 없게 됨을 미워하여 이를 덮고 가리기 위한 계책으로 마침내 중상모략 할 꾀를 낸 것입니다. 이에 저술한 논설에 '배(排)' 자를 임의로 더하여 '배절의(排節義)'라고 지목하고 전하를 크게 기만하고, 심지어는 홍수와 맹수의 폐해에 비유하여 사방에 방(榜)을 붙여 보이고 역당의 이름을 덮어씌웠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원통한 일이 있겠습니까?그 논설의 첫머리에서 "동한절의(東漢節義)를 공명(功名)과 비교하면, 그 고상함이 오히려 완고한 자를 격동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킬 수 있으며, 진송청담(晉宋淸談)을 모리(謀利)와 비교하면, 그 기개가 또한 실정을 바로잡고 외물을 진정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학문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성현의 중화(中和)의 도(道)에 죄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명덕(明德)과 중화(中和)는 진실로 절의에서 나온 것이며, 정개청이 스스로 힘쓰고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여기에 있었으니, 정개청의 논설은 절의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절의의 근본을 북돋운 것이며, 한갓 절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과격하게 일을 그르치고 사람과 국가에 화를 입히는 자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논설은 그 자신이 처음 만든 말이 아니고, 진실로 주자의 뜻을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주자의 의론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4 〈논어해자위안연장(論語解子謂顔淵章)〉에 있으니, "동한(東漢)에서 절의를 숭상하던 때 문득 온 세상을 오만하게 흘겨보고, 조정을 더럽게 여기는 뜻을 두었다. 이런 의사에서 문득 천하를 경시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 얼마 후 청담으로 흘러 들어갔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절의 있는 선비가 진실로 그 지위에서 마땅히 할 말이 아니니 재앙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후한(後漢)의 명절(名節)이 말년에 이르러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으니, 이것이 쌓여 그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반드시 허무맹랑한 데에 이르러 노장(老莊)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송(晉宋)의 인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또 "비록 청고(淸高)한 것을 숭상하나 개개인마다 관직을 요망하여 한편으로는 청담을 주장하며 한편으로는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들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자의 논설로 인하여 한(漢) 나라와 진(晉) 나라의 폐단을 밝혀 간악한 괴수의 정황을 정확히 논파하였습니다.절의는 사람의 마음에 본래 있는 것이나, 사적인 마음이 끼게 되면 이욕에 가리어 자기 한 몸만 사사롭게 하고 의리에는 어두워 임금과 부모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현(聖賢)이 가르침을 베풀 적에 사람들에게 그 밝은 덕을 밝히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이치를 알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면 의리에 밝아 이해(利害)에 미혹하지 않고, 군부(君父)를 소중히 하여 그 한 몸을 돌아보지 않으니, 생사와 환난의 때를 당하여 절개에 복종하고 의리에 죽는 행동을 기약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한갓 절의의 이름만 알고 실제로 절의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아침저녁으로 담론하더라도 급기야 이해에 임하고 생사에 처하여서는 시비에 현혹되어 인욕을 천리로 잘못 알고 시의(時宜)에 어두워 손실을 이득으로 여겨 지키며 위의(威儀)에 굴복하고 부귀에 미혹하여 자신을 도모하는 데는 신중하고 군부(君父)는 가볍게 여기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붕당에 금고(禁錮)된 여러 어진 선비들은 대의(大義)가 마음에 근본이 되어 생사에도 그 바탕이 변하지 않으니 진실로 숭상할 만합니다. 그러나 성현의 학문을 일삼지 않고 의리의 근원에 밝지 못하여 오직 조정의 정사만을 비판하고 인물이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 평가하여 악을 배척하고 선을 장려하는16) 것만 제일가는 사업으로 삼고, 곧 성현의 도리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실제로 인(仁)에 처하고 의(義)를 행하는 것에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양기(梁冀)가 질제(質帝)를 시해했을 적에 이고(李固)는 재상으로서 그 죄상을 성토하고 공개적으로 죽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명령을 듣고 제어를 받으면서 은인자중하였습니다.17) 은총과 친압의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환관들이 전횡(專橫)할 적에 두무(竇武)는 죽이기를 도모하면서 그 경중과 선후의 차례를 스스로 잃은 나머지 마침내 선비들이 섬멸되고 나라도 따라서 멸망하였습니다.18)또 하진(何進)이 동탁(董卓)을 끌어들여 정권을 바꾸는 역모를 이루게 하고19), 두무의 한 가문에서 세 명의 제후가 나와 여러 사람의 뜻을 불평하게 만들며20), 순상(荀爽)이 간신이 날뛰는 조정에 들어오고21), 순욱(荀彧)이 당형(唐衡)의 사위가 되고 조조(曹操)의 신하가 된 일22) 등은 모두 의리를 행하고 절조를 지키는 실상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절의에 대해 진실로 얻은 바가 있었다면 그 출처와 시의(時宜)가 반드시 이처럼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니, 주자는 한(漢)나라 선비들이 의리의 학문을 외학(外學)으로 여겼다고 말하였고, 남헌(南軒) 장식(張栻)은 그들의 학문에 미진한 바가 있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아! 우리나라는 외지고 누추하여 선비들의 견문이 국한되며, 사람은 없고 학문은 끊어져 도학이 분열되고 사특한 것이 아울러 일어나니 인심을 해롭게 하는 이단 사설이 많습니다. 가령 호남 한 도(道)의 풍습은 직분을 닦지 않고 벼슬자리에 나가기를 생각하며, 항상 인물을 비난하고 조정을 비방하는 것을 선비의 풍격으로 삼아 남들이 만약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반드시 무함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정철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교묘한 임기응변까지 갖추었으니, 절의의 남은 습속을 훔쳐 의탁하고 청담(淸談)의 오류를 거리낌 없이 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식견을 그릇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술수를 부리고 괴이함을 자랑하며 급박하게 곤경에 빠트려 온 세상의 이목을 어지럽히고 역적을 심문할 때 몸을 드러내어 간신의 무리와 결탁하고 사설(邪說)을 격동시켜 기회를 틈타 함정에 빠지게 하고, 마음대로 자행하여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데에 이르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유림들에게 큰 물여우23)요 국가의 큰 간적(奸賊)으로 죄가 하늘까지 통하였으니 왕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자입니다.최영경(崔永慶)은 산림에 높은 뜻을 둔 이름을 지녔으니, 참으로 성세에 은거하는 백성입니다. 남쪽 지방의 허탄하고 망령된 무리가 정철의 조종을 받아 삼봉(三峯)의 설24)을 지어 최영경을 얽어낸 상황을 세상 사람들이 소상히 보거늘25) 권력을 잡은 괴수에게 서캐처럼 붙어 아직 머리를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 천리에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삼봉의 설을 온 나라에 퍼뜨리고 왜적의 난리를 당하자 대소 백성들이 모두 "특별한 한 신인(神人)이 있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방으로 흩어져 나오면 감히 막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몰래 거짓말을 지어내어 인심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치는 재앙을 이루게 한 것은 진실로 이 무리의 못된 짓26)입니다.유몽정(柳夢井)과 이황종(李黃鍾)은 모두 청렴하고 근신하는 선비입니다. 본도(本道)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철의 속내를 알고 반드시 강하고 편벽됨으로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고 단정하더니 역시 간악한 무리에게 무함을 입었습니다. 유몽정이 원통하게 죽은 다음해에 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예전에 예를 강론하던 뜰에서 자라나니,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한 소치라고 하였습니다. 정개청의 아우 정대청(鄭大淸)은 형이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아파하고 억울함을 한번 풀기를 바라서 복상(服喪) 중에 슬피 울며 감히 고기를 먹지 않은 지 지금까지 6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길 가는 사람들이 듣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 원통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성상께서 만 리 밖까지 밝게 내다보시고 괴귀(怪鬼)한 정황을 환히 통찰하시어 정암수(丁岩壽)27) 등 상소 첫머리에 있는 열 사람을 잡아들여 국문하라고 특명을 내리셨으나 간신들이 농간을 부려 대간(臺諫)에 부탁하고 공론을 빌려 이를 저지하여 마침내 전하께서 악을 미워하시는 뜻을 당시에 실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를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같은 도(道)에 있어 우선 눈과 귀로 보고 기억한 점을 들추어 낸 것인데, 부당하게 걸려들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당시 조정에서 시기하고 저지하는 단서가 쌓여 원한이 되어 틈을 이루었을 것이니, 어찌 악독한 수단에 해를 당한 자가 없었겠습니까? 길거리의 의론이 모두 다 상심하고 통분하여 간악한 괴수의 살점을 씹어 먹고자 하지 않는 자가 없거늘, 단지 주상전하께서만 미처 통촉하지 못하시니, 아! 조정의 신하들이 주상전하를 섬기는데 지극한 정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옛날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반란을 도모하여28) 은밀히 천하의 명사(名士)를 기록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니, 화를 장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시어사(侍御史) 한랑(寒朗)이 마음으로 원통한 것을 아파하여 온갖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다투어 천여 명을 조사하여 풀어주니,29) 그가 남긴 풍모와 공렬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최영경과 정개청은 산림에서 은거하던 선비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한 사람도 감히 전하를 위하여 한마디 말을 올린 자가 없습니까? 비록 간적의 위세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으나 또한 조정에 충직한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리(天理)가 밝고 밝아 오래되면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니, 간사한 무리가 틈을 타서 허를 이용하여 비록 간교한 꾀를 한때 자행하였으나 부월(鈇鉞)의 형벌을 만세에 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간적(奸賊)의 정황을 통촉하시고, 특별히 착한 무리들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최영경이 모함받은 한 가지 일로 밤중에 눈물을 흘리셨다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이는 천지와 신인(神人)의 복입니다.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길게 유지하는 방책은 선비의 기상을 떨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선비의 기상을 떨치게 하는 기틀은 또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기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기하지 못하면 형벌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되며, 형벌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되면 백성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30)"라고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회복하려는 초기에 진실로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일을 앞세우고 국시(國是)를 분명히 정하여 인심을 위로하면, 유신(維新)31)의 정사를 차례대로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 국시를 정하지 못하면 인심이 쉽게 흔들리고, 명분을 바로잡는 일이 미진하면 좋은 정사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만약 간구(姦宄)32)의 소굴을 소탕하여 국가의 원기를 붙들어 지키지 않으면, 군자는 믿을 곳이 없어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소인은 틈을 엿보아 악행을 이으려고 할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다스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혹은 편벽되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끌리고, 혹은 사욕의 틈에 빠져 한번 간사함에 들어가게 되면 도깨비 같은 무리에게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유인되어 저들과 함께 동화되고 맙니다. 저쪽으로 동화되면 이쪽에 둔 마음이 변하고, 좋아하는 것이 저쪽에 있으면 미워하는 것은 이쪽에 있으며, 저쪽과 당파를 결성하면 이쪽은 원수가 되어 마라를 병들어 망하게 하니, 송(宋) 나라 철종(哲宗)·휘종(徽宗)·영종(寧宗)·이종(理宗) 같은 이들이 경사(經史)에 실려 있거니와 이런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옛날 도(道)를 잃은 일을 오늘의 귀감으로 삼아,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 뜻을 가져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여 변하지 말고 일월과 같이 도를 밝혀 음흉한 기운을 소탕하여 침범하지 말며, 간괴(奸魁)의 죄상을 드러내어 원통한 사람을 밝게 신설(伸雪)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교유문(敎諭文)을 안팎으로 반포하여 나라와 혁신한다면 지난날의 사특한 무리와 간특한 잡배들도 장차 신령스러운 교화에 변화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니, 또 어찌 혹여 등용되어 우리의 우환이 되겠습니까?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성인이 그 도(道)를 오래 하면 천하가 교화되어 이루어진다.33)"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말하기를 "군자는 떳떳한 도를 회복할 뿐이니, 떳떳한 도가 바르게 되면 서민이 흥기하고 서민이 흥기하면 이에 사악하고 간특함이 없을 것이다.34)"라고 하였으니, 오직 성상은 여기에 마음을 두소서.비답하기를 "너희들의 의론이 지극하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리라." 하였다. 伏以書曰: "天聰明, 自我民聰明, 天明畏, 自我民明畏." 此言天之聰明, 非有視聽也, 因民之聰明, 以爲視聽, 天之明畏, 非有好惡也, 因民之明畏, 以爲明畏. 蓋其天人一理, 通達無間, 民心之所存, 卽天理之所在, 而感之以悅, 則應之以福, 感之以怨, 則應之以禍, 其明效之速, 如影之隨形, 其理有必然者矣, 其可誣哉? 恭惟主上殿下, 値國家艱危之日, 痛生民塗炭之苦, 慷慨發憤, 恭儉勤勞, 務以內修外攘進賢退邪爲己任. 特伸處士之冤枉, 顯斥病國之奸凶, 其所以奉答天意, 慰悅人心者, 可謂至矣. 豈非中興恢復之一大機耶? 嗚呼! 我朝自開國以來, 邪正消長, 固多反覆, 至於貽禍士林, 斬絶國脈, 則莫甚於己丑之變. 目今國破家亡之兆, 未必不由於此, 凡有血氣者, 孰不憤奮扼腕, 欲討奸賊通天之罪? 而傷弓甫已, 餘惴尙存, 緘口結舌, 鬱鬱莫伸者, 有年于此矣. 幸今天啓聖心, 离明旁燭, 辨別是非, 昭雪幽枉, 以紓朝野忿惋之懷, 此正志士仁人, 盡言之秋也. 臣等請毛擧其綱, 而仰塵淵聽焉. 己丑逆賊之變, 起於搢紳之間, 而汝立初非放火劫人之賊, 實是欺天罔人之奸, 故在當時, 博洽多聞, 爲士類所推許, 如李珥輩, 最初交遊, 推重嘉奬, 而薦用淸班者, 實珥汲引之力也. 自癸未分黨已甚, 李珥失勢之後, 汝立始改頭換面, 趨附於東, 東人旣無先見之智, 徒信一時之虛名, 不得揮以斥之, 是則未能擇交之罪也. 王莽之僞恭, 當時【一本無當時二字】八萬人頌其德, 陸棠之挾詐, 先儒信之不疑, 作爲家甥, 則知人之難, 古今通患. 若原情以差其罪, 則交游稱許之責, 自有首受之地, 而餘當從末減之科矣. 如使朝廷諧協, 講明義理, 必如程子並用煕豐黨之議, 用人不以彼此進退, 只以忠邪取舍, 交契亦當以其人之賢否分別, 而不屑屑於一己之好惡, 公聽並觀, 不有角立之端, 則其遇此變也, 正當各自引咎, 極陳欺世之狀, 無使禍及士林, 是乃君子責也. 鄭澈以狠愎之性, 乃生媒孼之計, 聚群不逞之徒, 以張其勢, 設陰穽以陷無辜, 托公法以復私讎, 挾平生睚眥之怨, 盡入於必報之地, 外以嗾浮薄之徒, 假一道之士論, 而冀惑天聽, 內以囑奸細之輩, 藉臺諫之聲勢, 而構捏不測, 思所以日夜挾攻, 而必置於死地, 倘微聖明如日中天, 一世之忠賢, 悉陷於叛逆之深坑矣, 其爲計可謂慘矣. 試以今日之黨禍, 擬驗歷代, 實是危機敗證, 是非邪正之分, 自有後世之公論, 唯在殿下明卞而審擇之如何, 固非在野之臣, 所敢知也. 至於鄭介淸, 初非與於朝紳, 而特一林下藏修之士也. 爲人稟性醇篤, 造履精確, 闡明道學, 爲世大儒, 常守橫渠以禮敎人之訓, 九容工夫, 益加嚴密, 自非篤行力行之士, 知而好之者蓋寡矣. 故世之樂放肆而惡拘檢者, 譏訶詆斥, 而疾之如仇【一本仇字下有敵字】. 澈以曲謹小廉, 盜竊虛譽, 自放於禮法之外, 奔走於勢利之場, 及其志滿氣得之後, 則耽淫於酒色之中, 所與連黨結侶者, 皆是無行檢冒廉恥之輩. 自知見擯於醇儒莊士之論, 乃敢自托於節義淸談之流, 一以刑器法度爲蒭狗, 終至於衒浮華亡本實, 貴通達賤名檢, 而其智識才辨謀爲氣槩, 又足以震耀而張皇之, 後生之浮誕佻輕, 不齒士類者, 相與扇縱橫捭闔之辨, 以持其說, 而漠然不知禮義之爲何物, 恢諧放曠, 以自逸於檢防之外, 其害天理亂人心妨道術敗風敎者, 至此而極矣. 介淸之學, 常以程朱爲宗, 目擊奸臣誤世之狀, 恐爲後學之弊, 敷衍先儒之論, 著一說以救節義之流弊, 其曰: "未知從事於聖門, 而不循義理之安, 張皇義氣之發, 以至於亡人之國者." 實指鄭澈假托節義淸談之弊也. 其曰: "高視天下而傲睨一世, 出乎禮義之規, 不屑性命之正. 使天下之人, 皆有以自是而非人, 終至於群狡竝起, 睥睨神器云者." 實主朱子論東漢節義一款之說, 而切中鄭澈欺世誤國之狀也. 其曰: "不要富貴, 能忘貧賤, 這一邊雖似淸高, 那一邊實未免招權納貨, 使一世之效慕者, 相率而爲驕虛浮誕, 卒無以振作恢復之策." 亦主朱子之論, 而畢露鄭澈自誤而誤人之狀也. 然則所著節義一說, 實據先儒已定之論, 而其志專主於攻澈之誣世取寵, 以亂名敎者也. 由是老奸惡其平生心術, 被人點檢, 敗露於君子之正見, 無以遁其情於一世之人, 欲爲閉遮之術, 遂生射影之計, 乃於所著說上任加排字, 目之曰排節義, 以厚誣聖聽, 至比之於洪水猛獸之害, 而榜示四方, 加之逆黨之名, 古今天下, 安有如此等冤痛也耶? 其說首言東漢節義, 較以功名, 則其高尙猶可以激頑起懦, 晉宋淸談, 視之謀利, 則其氣岸亦足以矯情鎭物. 又曰: "不知明德新民之學." 又曰: "得罪於聖賢中和之道." 明德中和, 固節義之所自出, 而介淸之所自勉, 而勉人者在是, 則介淸之說, 非排節義也, 乃培壅節義之根本, 而特惡其名爲節義而過激誤事禍人國家者也. 然則其爲說, 非自家創造立說也, 實祖述朱子之意, 而朱子之論在語類中三十四卷論語解子謂顏淵章, 其曰: "東漢崇尙節義之時, 便自有這箇意思了. 當時節義底人, 便有傲睨一世汚濁朝廷之意, 這意思, 便自有高視天下之心, 少間流入於淸談." 又曰: "節義之士, 固是非其位之所當言, 宜足以致禍." 又曰: "後漢名節, 至於末年, 有貴己賤人之弊, 積此不已, 其弊必至於虛浮, 入老莊." 至論晉宋人物, 則又曰: "雖尙淸高, 然箇箇要官職, 這一邊淸談, 那一邊招權納貨"云云. 因此朱子之說, 以發明漢晉之弊, 而破的奸魁之情狀矣. 節義本人心之固有, 而私意間之, 則蔽於利欲, 而私其一身, 昧於義理, 而遺其君父. 故聖賢設敎, 只是使人明其明德, 格致以知之, 誠正以修之, 如此則義理明, 而不惑於利害, 君父重, 而不顧其一身, 當其死生患難之際, 伏節死義之擧, 有不期然而自不得已也. 若徒知節義之名, 而不務節義之實, 則雖其朝夕談之, 而及其臨利害處死生, 眩於是非, 而認欲爲理, 暗於時措, 而守失爲得, 未免有屈於威義, 淫於富貴, 而自謀深君父輕矣. 黨錮諸賢, 其大義根於心, 死生不變其質, 則誠可尙也, 而不事聖賢之學, 不明義理之原, 唯以非訐朝廷, 臧否人物, 激濁揚淸爲第一等事業, 便以爲聖賢之道, 不過如是, 而其於處仁行義之實, 有所未達. 是以欲正君臣之義, 而梁冀之弑質帝也, 李固爲相, 而非但不能聲罪顯戮, 反聽命受制而隱忍焉. 欲去寵昵之弊, 而宦寺之盤錯也, 竇武謀誅, 自失其輕重先後之序, 而卒爲士類之殲滅, 國隨而亡之. 又如何進之引董卓, 馴致移鼎之逆, 竇武之一門三侯, 以致衆志之不平, 荀爽濡迹於奸臣專命之朝, 荀彧婿於唐衡, 臣於曹操之類, 是皆不知行義守節之實而然也. 若能於節義實有所得, 則其出處時措, 必不如是其乖違也, 所以朱子言漢儒以義理之學爲外學, 而南軒張氏, 亦嘆其於學有所未盡者也. 噫! 我東僻陋, 士局見聞, 人亡學絶, 道術分裂, 邪慝竝興, 他歧之害人心者多矣. 至如湖南一道風習, 則不修職分, 思出其位, 常以譏議人物誹謗朝政, 爲士子標致, 人若不知己, 則必欲殺之, 少有嫌隙, 則必致誣陷. 澈爲這輩之酋長, 濟以機變之巧, 竊托節義之餘習, 妄肆淸談之謬誤, 壞人心術, 誤人知見, 終得以舞術衒怪, 陷溺馳驟, 以惑亂一世之耳目, 呈身於案問逆賊之時, 締結奸黨, 鼔動邪說, 乘機傾陷, 恣行胷臆, 賊賢誤國, 無所不至. 此實儒林之大蜮, 國家之巨奸, 罪通于天, 在王法必誅者也. 崔永慶負山林高義之名, 而眞聖世之逸民也. 南方誕妄之輩, 承望澈之指揮, 做出三峰之說, 以構永慶之狀, 昭在十目之視, 而虱附用事之魁, 尙保首領, 豈其天理所可容乎? 以其三峰之說, 布滿一國, 當倭奴之衝突也, 大小人民, 皆謂別有一箇神人, 將兵而來, 分逬四出, 而莫之敢禦. 其陰造訛言, 惑亂人心, 以致亡國之禍者, 實此輩之作俑也. 至若柳夢井李黃鍾, 俱以淸謹之士. 身在本道, 早見澈之心曲, 必以强偏誤國斷之, 而亦被奸黨之誣陷者也. 夢井冤死之後年, 有白棗數十莖, 生於所嘗講禮之庭, 人以謂精感所致. 介淸之弟大淸, 痛其兄之非命, 冀冤枉之一雪. 服喪悲號, 不敢食肉者, 今至六年之久. 行路聞之, 莫不傷心, 其爲冤痛, 何可測乎? 自上明見萬里之外, 洞照怪鬼之狀, 特命拿鞫丁巖壽等疏頭十人, 而奸臣作弄囑臺諫假公論以沮之, 遂使殿下惡惡之志, 不行於當日, 人有秉彝, 孰不痛惋於此耶? 臣等同在一道, 姑擧耳目之所覩記, 而橫罹枉死之人, 一至於此, 則當日朝廷之上, 積有猜阻之端, 讎怨成隙, 豈無毒手所害者乎? 街談巷議, 莫不盡然傷憤欲食奸魁之肉, 而特主上未及洞燭, 嗟乎! 朝臣之事主上, 可謂非至誠矣. 昔者楚王英之謀亂也, 陰錄天下名士, 事覺被鞫, 禍將叵測. 侍御史寒朗心傷其冤, 出萬死力爭之, 理出千餘人. 其遺風餘烈, 至今照人耳目. 奈何永慶介淸, 以山林高蹈爲士類領袖, 而無一人敢爲殿下伸一喙者. 雖其畏奸賊之威勢, 噤不敢言, 亦可謂朝廷有忠鯁之臣乎? 然而天理昭昭, 未有久而不著, 憸邪之輩, 乘間扺巇, 縱售奸術於一時, 難逃鈇鉞於萬世. 而今我殿下洞燭奸賊之情狀, 特憐善類之冤枉, 以永慶被誣一事, 至有中夜泣下之旨, 此天地神人之福也. 扶斯道壽國脈之策, 莫過於振作士氣, 振作士氣之機, 又莫急於正名. 孔子曰: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方此恢復之初頭, 苟能先事乎正名, 明定國是以慰人心, 則惟新之政次第可擧. 嗚呼! 國是未定, 則人心易搖, 正名未盡, 則善政難成. 若不掃蕩姦究之囊橐, 扶護國家之元氣, 則君子無所恃, 而罔盡其忠, 小人有所窺, 而欲紹其惡, 豈非可懼之甚也? 自古人君非無願治之心, 而或牽於好惡之偏, 或漏於己私之隙, 一爲奸邪所中, 則魑魅魍魎, 百端巧鑽, 與之俱化於彼矣. 化於彼則變於此, 好在彼則惡在此, 黨乎彼則仇乎此, 以敗功殄國, 如哲徽寧理之爲者, 載在經史, 此類甚多. 伏願殿下以古之失道, 爲今之龜鑑, 執志如金石, 貫終始而毋渝, 明道如日月, 廓氛陰而罔干, 暴揚奸魁之罪, 昭雪冤枉之人, 告于宗廟社稷, 頒敎中外, 與一國更始, 則向之群邪雜慝, 亦將受變於神化之不暇, 又安有或進而爲吾患哉? 易曰: "聖人久於其道, 而天下化成." "君子反經, 經正則庶民興, 庶民興則斯無邪慝." 惟聖明之留神焉.答曰; "爾等之論至矣. 當議處." 《서경(書經)》에 …… 하였습니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하늘의 듣고 봄이 우리 백성의 듣고 봄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선한 자를 밝혀 드러내주고 악한 자를 두렵게 함이 우리 백성의 밝혀주고 두렵게 함으로부터 한다. 그리하여 상하에 통달하니, 공경할지어다! 땅을 소유한 군주들이여.〔天聰明, 自我民聰明, 天明畏, 自我民明威. 達于上下, 敬哉! 有土.〕"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화살에 …… 마음 원문의 '상궁(傷弓)'은 상궁지조(傷弓之鳥)의 준말로, 한번 화란을 겪은 사람은 화살에 상한 새처럼 매사에 놀라고 조심함을 비유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한번 화살에 상한 새는 시위의 맹렬한 소리만 듣고도 높이 난다.〔傷弓之鳥, 聞弦音而高飛.〕"고 하였다. 밝은 태양 원문의 '이명(离明)'은 밝은 해를 가리키는 말로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离)는 불이 되고 해가 된다.[离爲火, 爲日.]"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는데, 전하여 임금의 밝은 덕을 의미한다. 육당(陸棠)의 …… 삼았으니 육당은 송 나라 양시(楊時)의 사위이다. 처음에 양시가, 육당의 용모가 매우 단정하고 앉은 자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호인(好人)이라 하여 그를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에 범여위(范汝爲)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당(黨)이 되었기 때문에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朱子語類 卷133 本朝7》 희령(熙寧) …… 논의 송나라 신종(宋神宗)은 처음에 연호를 희령(1068~1077)이라 하였다가 뒤에 원풍(1078~1085)으로 고쳤다. 신종 때에 왕안석(王安石)이 시폐(時弊)를 없애고 부국 강병(富國强兵)하는 방책으로 재정(財政)ㆍ병제(兵制)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하기 위하여 청묘법(靑苗法)ㆍ균수법(均輸法)ㆍ모역법(募役法) 등 여러 법을 새로 시행하였는데, 이를 구래(舊來)의 법의 대칭으로 신법(新法)이라 하고 신법을 지지하던 채확(蔡碓)ㆍ장돈(章惇)ㆍ여혜경(呂惠卿) 등의 무리를 신법당(新法黨)이라 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던 범중엄(范仲淹)ㆍ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사마광(司馬光) 등의 무리를 구법당(舊法黨)이라 하였다. 신ㆍ구당이 처음부터 확립된 것은 아니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서로 용납하지 않아 뒤에는 함께 조정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 왕안석은 신종 9년에 죽었으나 신당이 계속하여 집권하다가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태후(太后)가 청정(聽政)하면서부터 신당은 모조리 내쳐지고 구당이 집권하였고, 철종이 친정(親政)하자 신당이 집권하고 휘종(徽宗)이 즉위하고 태후가 섭정(攝政)하자 구당이 집권하고, 또 친정하자 다시 신당이 집권하였으며, 구당은 신법에 대체하는 방안이 일치하지 않아 뒤에는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하는 촉당(蜀黨), 정이(程頤)의 낙당(洛黨), 유지(劉摯)의 삭당(朔黨)으로 분파되어 다투었다. 휘종 친정 이후 채경(蔡京)이 집정할 때에 구당을 탄압하여 그 세력을 아주 없애어 버렸으니, 왕안석 이후 구당의 집권은 태후가 정사를 보던 얼마 안 되는 기간에 불과하였다. 신법은 갑작스런 변혁에 대한 백성의 반발과 특히 유신(儒臣)들의 반대와 시행과정에서의 농간 등이 방해되는 요인이었고, 신법의 실효를 거두기 전에 신종이 자주 외정(外征)의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요(遼)나라와 다투어 도리어 북방의 군을 잃었으며, 채경이 재상이 되어서는 신법을 더욱 강행하되 재리(財利)에만 힘쓸 뿐더러 휘종에게 사치를 권하고 토목일을 자주 일으켰으므로 백성의 고통이 극심하여 민심이 이반하고 나라가 쇠약해져 마침내 남도(南渡)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공정하게 보고 들어 《한서(漢書)》 卷51 〈추양전(鄒陽傳)〉에 "공평하게 듣고 다방면으로 살피면 당대에 밝음을 드리울 것이다.〔公聽竝觀, 垂明當世〕."라고 하였다. 불령(不逞) 원한, 불만, 불평 따위를 품고서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학문에 매진하던 원문의 '장수(藏修)'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업에 매진한다는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배움에 있어 장하고, 수하고, 식하고, 유한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 "장은 마음속에 항상 학업을 품는 것이고, 수는 닦고 익히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藏謂心常懷抱學業也, 修謂修習不能廢也.]"라고 풀이하였다. 《禮記正義 卷36 學記》 장횡거(張橫渠) 횡거는 장재(張載)의 호로 자는 자후(子厚), 섬서성(陝西省) 사람이다. 정호(程顥)ㆍ정이(程頤)에게 유(儒)를 배우고, 신종(神宗) 때에 문원 교서(文院校書)가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反對)하여 벼슬을 내어 놓고 물러났다. 그의 설은 예(禮)를 숭상하고 역(易)으로 종(宗)을 삼고, 중용(中庸)으로 체(體)를 삼았으며,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主張)하였다. 구용(九容) 옛날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적에 견지해야 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걸음을 경망하게 하지 않고, 손으로 아무 데나 어지럽게 가리키지 않고, 눈은 흘겨보지 않고, 말을 경박하게 하지 않고, 목소리를 온화하게 하여 괴상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곧게 세워 마구 갸우뚱거리거나 돌아보지 않고, 기운을 엄숙하게 하고, 서 있을 때에는 바르게 서서 덕 있는 기상을 지니고, 낯빛을 장중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는 것이다. 《禮記 玉藻》 작은 …… 근신함으로써 주희(朱熹)의 〈답혹인(答或人)〉에 "향원은 일종의 작은 일에 청렴하고 근신하며, 세상에 아부하고 시속을 좇는 사람이다.〔鄕原, 是一種小廉曲謹, 阿世徇俗之人.〕"라고 한 데서 나왔다. 하찮게 원문의 '추구(蒭狗)'는 짚을 엮어 만든 개를 말하는데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추구를 진설하기 전에는 상자에 담아서 좋은 비단으로 감싸 두지만 시축(尸祝)이 재계를 한 뒤에 모셔다가 제사를 지낼 때 쓰고 나면 발로 밟기도 하고 가져다가 불을 지펴 밥을 짓기도 한다." 한 데서 나왔다. 명검(名檢) 명교(名敎)로서 말과 행실을 속박하여 조심함을 말한다. 패합(捭闔) 개폐(開閉), 억양(抑揚), 허실(虛實) 등을 끝없이 펼쳐나가는 변론술(辯論術)을 가리킨다. 《귀곡자(鬼谷子)》에 〈패합〉이 있는데, 전국(戰國) 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귀곡자를 스승으로 삼아 패합과 종횡의 술(術)을 배워 유세(遊說)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왕위 원문의 '신기(神器)'는 원래 왕위(王位) 계승에 따르는 보물인 옥새(玉璽)나 보정(寶鼎)을 이르는데, 곧바로 왕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악을 …… 장려하는 원문의 '격탁양청(激濁揚淸)'은 흐린 물을 쳐내고 맑은 물을 일게 한다는 뜻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권장함을 비유한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시교(尸佼)가 말하기를 "물은 네 가지 덕이 있으니……맑은 물을 일게 하고 흐린 물을 쳐내,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는 것이 의이다.[水有四德……揚淸激濁, 蕩去滓穢, 義也.]"라고 하였다. 《山堂肆考 卷22 水有四德》 양기(梁冀)가 …… 은인자중하였습니다. 양기는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왕후 양씨(梁氏)의 오라비로, 누이동생인 양 태후(楊太后)가 임조(臨朝)하면서 정권을 독점하였다. 충제(冲帝)가 죽자 질제(質帝)를 세웠는데, 질제가 "이 사람이 발호장군이다.〔此跋扈將軍也〕"라고 자신을 평한 것을 미워하여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세웠다. 이고(李固)는 충제 때의 태위(太尉)로 조야(朝野)의 명망이 높았는데, 충제가 죽었을 때와 질제가 시해되었을 때에 모두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옹립하려고 노력하다가 양기의 비위를 거슬러 면직되었다. 환제 건화(建和) 1년(147)에 유문(劉文) 등이 유산을 황제로 세우려다 실패하고 죽음을 당하였는데, 양기가 이고를 이 사건에 연루시켜 하옥시키자, 이고의 문생 등이 상소하여 무죄를 주장하며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였다. 이에 양 태후가 사면하여 출옥시키자 경사(京師)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만세를 부르니, 양기가 대경실색하여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시 무옥(誣獄)을 일으켜 이고와 두교(杜喬)를 죽이고 그 시신을 성 북쪽에 전시하였다. 양기는 20여 년 동안 권력을 전횡하다가 연희(延煕) 2년(159)에 양 태후가 죽자 환제가 환관 5인과 합세하여 그를 복주(伏誅)하고 그 종족을 모두 기시(棄市)하였다. 《後漢書 卷34 梁冀列傳, 卷63 李固列傳》 환관들이 …… 하였습니다. 후한 영제(後漢靈帝)가 즉위한 뒤에 두 태후(竇太后)의 부친인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진번(陳蕃)ㆍ이응(李膺) 등 이른바 청류(淸流)와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계획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어 두무가 환관들에게 먼저 살해당하자, 진번이 70여 세의 나이로 곧장 관속(官屬)과 제생(諸生) 등 80여 인을 이끌고서 칼을 빼 들고 승명문(承明門)으로 돌입했다가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100여 인이 피살을 당하였는데, 뒤를 이어 계속해서 사형과 유배를 당하고 수금(囚禁)된 자가 700여 인에 이르렀다. 두 태후는 환제(桓帝)의 황후로, 환제가 죽자 수렴청정하면서,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으로 당시 12세였던 영제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後漢書 卷69 竇武列傳》 하진(何進)이 …… 이루게 하고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우림랑(羽林郞)으로 여러 번 전공(戰功)이 있었고 영제(靈帝) 때는 병주목(幷州牧)으로 있었는데, 영제가 붕하자 동탁(董卓)이 하진(何進)의 부름에 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경사에 들어가 곧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河太后)를 시해하고서 헌제(獻帝)를 세우는 등 모든 권병을 독천하였다. 두무의 …… 만들며 두무가 태후(太后)의 명으로 영제(靈帝)를 받아들여 제위(帝位)에 앉힌 공로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문희후(聞喜侯)에 봉해졌으며, 아들과 조카들까지도 모두 후에 봉해져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었다. 순상(荀爽)이……들어오고 이응(李膺)은 명망이 높았으므로 선비 중에 그의 인정과 대접을 받은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용문(龍門)에 올랐다고 칭하였는데, 순상(荀爽)이 찾아가서 이응을 위해 수레를 몰아주고는 집에 돌아와서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오늘 드디어 이군의 수레를 몰았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67 李膺傳》 순상은 후한 때 순숙(荀淑)의 여덟째 아들로 순씨의 팔룡(八龍) 가운데 한 명이다. 순욱(荀彧)이 …… 된 일 순욱은 4세 때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唐衡)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어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되었다. 189년 27세에 원소(袁紹)의 예우를 받았으나, 대업을 이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조조(曹操)에게 투탁하였다.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자방(子房)이라고 기뻐하며 중용하였고, 순욱도 정치와 전략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조조가 찬탈 의사를 비추기 시작했으므로 후한(後漢)을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과는 자연히 틈이 생기게 되었다. 212년 50세에 손권(孫權) 정벌하는 데에 조조를 따라 출정하였으나 병으로 졸하였다. 《三國志 卷10 魏書 荀彧傳》 물여우 간악하고 음흉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물여우는 귀신과 같이 그 형태를 볼 수가 없는데, 모래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뿌리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린다고 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나 물여우였다면 볼 수가 없었겠지만〔爲鬼爲蜮̀, 則不可得.〕"이라고 하였다. 삼봉(三峰)의 설 1590년 서인들의 사주를 받고 양천경(梁千頃) 등과 함께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의 자백에서 나왔던 이른바 정여립의 친구라는 길삼봉(吉三峯)이 바로 최영경(崔永慶)이라고 무고하여 옥사하게 하였다. 그 뒤 1591년 양사(兩司)에서 무고인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탄원이 있자, 최영경을 모함한 당시의 언관(言官)이 파면되고, 무고인 양천경, 양천회(梁千會), 김극관(金克寬), 김극인(金克寅) 등과 같이 잡혀 문초당하였다. 그러자 정철(鄭澈)을 따르던 끝에 그와 같은 허위사실을 상소하였음을 자백하여, 양천경, 양천회 등과 함께 북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어 가다가 장형을 받은 후유증으로 도중에 모두 죽었다. 세상 …… 보거늘 많은 사람이 삼엄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학(大學)》 성의(誠意)에서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엄함이여!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고 하였다. 못된 짓 원문의 '작용(作俑)'에서 용(俑)은 장사(葬事)에 쓰는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인데, 이는 좋지 못한 선례(先例)를 뜻한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중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으로 용을 만든 자는 아마 후손이 없을 것이다.' 하셨으니, 이는 사람을 형상하여 장례에 사용하였기 때문이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정암수(丁巖壽) 1534∼1594.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응룡(應龍)이고, 호는 창랑(滄浪)으로,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동복(同福)에서 출생하였다. 1589년 12월 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사경(柳思敬)‧유영(柳瑛) 등과 연명하여 이산해(李山海)‧정언신(鄭彦信)‧정인홍(鄭仁弘)‧유성룡(柳成龍) 등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인(姦人)이며 역당이므로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뒤에 이 무함(誣陷)하는 상소가 실은 정철(鄭澈)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소문이 정철의 문객(門客)으로 드나들던 심희수(沈喜壽)에 의해 퍼지기도 하였다. 상소를 본 선조는 연명한 사람 모두를 잡아들일 수 없으니 정암수(丁巖壽)를 포함하여 위에서 10명만을 추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591년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이 논집(論執)하고 태학생(太學生)들도 그를 탄원하는 상소를 올려 구원받았다. 초왕(楚王) …… 도모하여 유영은 후한(後漢) 광무제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초왕에 봉해졌다. 명제(明帝)의 아우로서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는데, 연광(燕廣)이란 자가 투서하기를, 초왕 유영이 왕평(王平)·안충(顔忠) 등과 함께 불교를 신봉한다는 명목으로 도서(圖書)를 조작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하였다. 명제는 유영의 봉작(封爵)을 박탈하고 단양(丹陽)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유영은 단양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명제는 이 사건을 혹독하게 다스려 수천 명이 무고하게 연루되어 억울한 옥사가 만들어졌다. 《後漢書 卷42 楚王英列傳》 한랑(寒郞)이 …… 풀어주니 한랑은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알자수시어사(謁者守侍御使)로 초왕 영(楚王英)의 역옥을 조사하다가 이 옥사에 연루된 수향후(隧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郞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리(鄧鯉),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健) 등이 무고하게 걸린 것을 알고서 명제께 고하여 풀려나게 하였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공자께서 …… 없게 된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신(維新) 구법(舊法)을 혁신하고 새로운 정사를 펼친다는 것으로,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왕이 위에 계시어 아, 하늘에 밝게 계시니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천명은 새롭도다. 주나라가 드러나지 않을까 상제의 명이 때에 맞지 않을까 문왕의 오르내리심이 상제의 좌우에 계시니라.[文王在上, 於昭于天. 周雖舊邦, 其命維新. 有周不顯, 帝命不時. 文王陟降, 在帝左右.]"고 하였다. 간구(姦宄) 원문은 '간구(姦究)'인데 《서경》 〈순전(舜典)〉 등에 근거하여 '간구(姦宄)'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간구는 안팎에서 법을 어기고 난행(亂行)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 "제순(帝舜)이 이르기를 '고요야, 오랑캐가 중하(中夏)를 어지럽혀 사람들을 약탈하고 죽이며, 안팎으로 나쁜 짓을 하기에 너를 사(士)로 삼는다.' 하셨다.〔帝曰: 皐陶, 蠻夷猾夏, 寇賊姦究, 汝作士.〕"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 …… 이루어진다 《주역(周易)》 〈항괘(恒卦)〉의 단사(彖辭)에 있는 말로서, 성인(聖人)이 오랫동안 한결같이 항구한 정도(正道)를 지키고 있어 천하가 교화되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맹자(孟子)에 ……하였으니 원문에는 '맹자왈(孟子曰)'이 누락되어 있으나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君子反經而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를 근거하여 보충하고 국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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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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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애 유성룡35)의 회계36) 【일이 비변사에 내려져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으로써 회계하였다.】 柳西厓成龍回啓 【事下脩邊司, 西厓以領議政回啓】 근래에 대간 및 지방 유생들이 연이어 상소와 차자를 올려 기축년 역모 사건37)에 연루된 사람들 중 매우 원통한 경우가 있음을 언급하고, 또 한랑(寒朗)이 초(楚) 나라의 옥사를 판별38)했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조정 대신들이 간언하지 않은 잘못을 책하였습니다. 신들은 마땅히 머리를 찧으면서 부끄러워하고 사죄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논의하겠습니까.국운이 불행하여 역모의 변란이 대신들 사이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옥사(獄事)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파급의 환난이 있을 것임을 걱정하시어 옥석이 함께 불타는 것을 경계하여 덕음(德音)을 거듭 내리셨습니다. 만약 당시에 일을 담당하여 옥사를 다스렸던 신하가 성상께서 보이신 지극한 뜻을 미루고 넓혀서 심문을 잘하고 밝게 판단하여 그 허실(虛實)과 경중(輕重)의 실정을 얻고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하였다면, 원악(元惡)과 대돈(大憝) 및 법에 걸리는 것이 마땅한 자 외의 나머지, 즉 비록 평시에 교유하였더라도 역모를 알지 못했던 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본 적이 있거나 한두 번 서신을 왕래한 자, 고알(告訐)하던 중에 거론된 자, 풍문으로 거론된 자 등은 모두 차례로 신원되어 풀려나 실정과 죄가 서로 걸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았다면 인정이 크게 감복하고 억울함이 풀릴 수 있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천토(天討)이며 또한 왕법(王法)이나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그 근원은 실로 근년 이래 조정이 분열되어 형색을 너니 나니 하며 가르는 데서 비롯되었으니, 이른바 한편에 선 사람들이 이 일을 빌미로 하여 수사연좌(收司連坐)39)하려는 계책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기에 영합하고 풍지(風旨)를 엿보아 소차를 올려 포승줄로 사로잡으려는 자들이 관서(官署)의 앞에 줄을 지어 잇닿으니,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발을 움직이고 손을 흔드는 것조차 모두 주시해서 지켜보는 중에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있게 되면 반드시 역적을 구원하려 했다는 죄목에 빠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삼 년 동안의 큰 옥사에 원통하게 고초를 받은 일이 천태만상이었으나 한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성상께 밝게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저버림이 심한 것이니 모두에게 똑같이 죄가 있는 것이지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죄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바야흐로 사변의 초반에 성상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윤음(綸音)40)을 널리 내리시어 역적으로서 법에 응당 연좌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의 문을 열어 젖히셨으니 하늘같은 은혜가 크게 흘러넘치고 말 못한 원통함이 전부 씻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을 위로하고 하늘에 무궁한 수명을 빌어 중흥만세의 근본을 세우셨으니, 이는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이와 같이하였기에 옛날 죄적(罪籍)41)에 있는 자 중 살아있는 이는 거의 다 은혜를 입었으나, 유독 이미 죽은 사람 중 최영경(崔永慶),42) 정개청(鄭介淸), 유몽정(柳夢井)43), 이황종(李黃鍾)44) 등과 같은 이들은 당시 함께 누명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최영경은 특별히 성상의 명이 내려 대간들이 잇달아 논의하여 이미 억울함을 푼 데다 증직(贈職)을 하였으니 이를 듣고 보는 자들이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정개청과 유몽정, 이황종 등은 비록 인품의 고하가 다르고 죄를 입음에 선후가 있기는 하나 원통하고 억울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정개청은 호남인 중에서 특히 이름이 있어 평생토록 학술과 행실로서 자임하였는데 우연히 한 편의 논설을 저술한 것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나덕윤(羅德潤) 등의 무리들이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문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 당연합니다.대저 큰 병란과 큰 옥사는 한·당(漢·唐)이 망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큰 옥사의 뒤에 반드시 큰 병란이 있었던 것은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심이 이전의 일을 경계로 삼아 나라의 명(命)을 장래에 일신하고자하는데 백성들이 만약 저승에서 원통함을 품고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둡고 답답한 기운이 올라가 하늘의 조화에 간여하여 국가 형정(刑政)의 누가 될 수 있으니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들의 뜻에는 정개청과 유몽정, 이황종 등에게는 특히 유생의 소(疏)를 윤허하시어 모두 신원하여 결백을 드러나게 해주시고, 그 밖에 소차(疏箚)에서 미처 거론하지 못한 자들 또한 많이 있으니 임진년(壬辰年)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법에 마땅히 연좌되는 경우 외에는 모두 옥문을 열어 석방하는 뜻으로 의금부로 하여금 상세히 개록(開錄)45)하게 하고 관련된 실상의 경중에 따라 일체 석방하여 그물을 걷어주는 은혜를 깊은 땅 속과 엎어놓은 항아리 속까지도 고루 입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 유신(維新)의 정사(政事)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뢰옵니다.비답(批答)하시를, "이후에 마땅히 면대하여 의논하라." 하였다. 近日臺諫及外方儒生, 連上疏劄, 言己丑逆獄連累人冤濫之事, 且引寒朗論楚獄一節, 責朝臣之不言. 臣等當叩頭慚謝之不暇, 何顔更有論議. 國運不幸, 逆賊之變, 出於搢紳之間, 方獄事之始起也. 自上已慮有波及之患, 以玉石俱焚爲戒, 德音屢下. 若使其時當事按獄之臣, 推廣至意, 淑問明辨, 以得其虛實輕重之情, 不以一毫私意參錯於其間, 則除元惡大憝及律所應坐者外, 其餘雖平時交游而未知逆謀者, 及一再見面一二書往來者, 與出於告訐, 出於風聞者, 皆當次第伸釋, 使情罪相稱, 若是則人情大服, 而冤枉得伸, 夫是之謂天討, 亦所謂王法, 而當時則有不然者. 其源實出於近年以來, 朝廷分裂, 形色彼此, 所謂一邊之人, 旣假此以爲收司連坐之計. 故其投合時好, 希望風旨, 投疏羅織者, 相續於公車之下, 而上自士大夫, 下及韋布之士, 動足搖手, 擧在指目之中, 少有一言, 必陷於營救之罪, 所以三年大獄, 冤楚萬狀, 而無一人以此事狀徹聞於冕旒之下, 此則群臣負國之甚, 均有其罪, 未可專咎於一人也. 方事變之初, 自上不待人言, 渙發綸音, 除逆賊法應連坐外, 悉開放釋之門, 天恩大霈, 幽冤盡洩, 其所以慰解人心, 祈天永命, 以立中興萬世之本者, 實非偶然也. 惟其如是, 故罪籍中生存者, 幾盡蒙恩, 而獨有已死之人, 如崔永慶鄭介淸柳夢井李黃鍾等, 未得一時昭雪. 永慶則特出上命, 而臺諫繼論, 旣爲洩冤, 又加贈爵, 凡在聞見, 孰不感激, 而介淸夢井黃鍾之類, 雖人品有高下, 被罪有先後, 而其爲冤枉則一也. 介淸則於湖南人中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於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裏足叩閽訴冤也. 大低大兵大獄, 漢唐之所以亡國也. 故大獄之後, 必有大兵, 理所然也. 今則人心懲毖於旣往, 邦命一新於將來, 匹夫匹婦, 若含冤於重泉之下而不得見白, 則幽鬱之氣, 亦足以上干天和, 而爲國家刑政之累, 非小事也. 臣等之意, 介淸·夢井·黃鍾等, 特允儒生之疏, 悉加伸雪, 而此外未及擧名於疏劄者, 亦多有之, 依壬辰下敎法當緣坐外, 悉爲開釋之意, 令義禁府詳細開錄, 從其所坐輕重, 一體宥釋, 使解網之恩, 普被於窮泉覆盆之下, 則其於維新之政, 所補不細, 惶恐敢達.答曰: "後當面議." 유성룡 1542~1607.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평양과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8년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당했다가 복관되었으나 은거하며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던 일을 말한다. 기축년 역모 사건 기축옥사(己丑獄事), 혹은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한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하였는데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되었다. 한랑(寒郞)이……판별 한랑(寒郞)은 후한(後漢)때 설(薛)땅의 사람이다. 초왕(楚王) 영(英)은 소시에는 유협(遊俠)을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황로(黃老)ㆍ부도(浮屠)를 즐기며 방사(方士)와 교유하였는데 뒤에 역적으로 몰려서 자살하였다. 이 때 억울한 연루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여러 해 동안 판결을 내지 못한 것을 한랑(寒郞)이 가서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 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72. 수사연좌(收司連坐) 진 나라 상앙(商鞅)이 제정한 법이다. 10호를 1조(組)로 하여 서로 규찰하게 하고, 그 중에 한 집이 법을 어길 경우 아홉 집이 관아에 고발하되, 만일 규찰하여 고발하지 않으면 10호가 연좌되었다.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죄적(罪籍) 죄인의 죄상을 적은 도류안(徒流案)이나 형명부(刑名簿) 등을 이른다.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서울 출생.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무고로 옥사(獄死)하였는데 당시 정철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정철의 사주로 죽임을 당한 것이라 의심되었다. 유몽정(柳夢井) 1557~1590. 자(字)는 경서(景瑞). 조선시대 호남 지역 문신으로 기축옥사 때 옥사하였으며 무고로 옥사한 것이라 의심되었다. 이황종(李黃鍾) 1534~1590. 자(字)는 중초(仲初). 조선시대 호남 지역 문신으로 기축옥사 때 사망하였다. 개록(開錄) 개록이란 상급 기관에 문서를 보낼 때, 문서의 후반에 이름이나 의견을 적어 보내는 일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곤재 정개청 선생에게 올린 편지【1577년 7월 24일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上困齋鄭先生書 【丁丑七月二十四日○時公年二十一】 황면재(黃勉齋)46)는 자신의 스승 주자(朱子)의 상(喪)을 당하여 조복에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47) 제도는 심의(深衣)48)와 같았고 관질(冠絰)을 착용하였습니다. 왕백(王栢)49)은 자신의 스승 하기(何基)50)의 상에 심의를 입고 대질(帶絰)51)을 두르며 관(冠)에 사무(絲武)를 더하였습니다.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 김인산(金仁山)52)은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더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緦麻服)53)과 같이 하고 소대(小帶)는 가는 모시 베를 썼습니다.54) 황면재, 왕백, 김인산 세 군자는 모두 주자 문하의 적통이었으나 스승을 위해 조복을 입는 결정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무엇으로 준거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또 스승을 위하여 삼년상을 지냈는데 그들은 관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도사(都事) 김천일(金千鎰)55) 문인들의 말을 들으니 "선생께서는 지금 일재(一齋)56) 【이항(李恒)】의 상을 만났으나 이미 조정에 몸을 바쳤기에57) 관직을 떠나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제 생각에는 매우 편치 않아 바로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군자는 연고가 있으면 있는 곳에 따라 당시의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옛날 공자(孔子)의 문하에는 오직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만이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칠십 명의 제자들이 집을 짓고 삼년 상 치르기를 마치 아버지 상을 치르는 것처럼 하였으나 복은 입지 않았으니 칠십 명의 제자는 예를 아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까?또 몸소 최마복(衰麻服)58)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에는 슬퍼하는 감정이 있어서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은 뜻과 정자(程子)가 말한 바 안연과 민자건 같은 사람은 공자에 대해서는 비록 참최(斬衰)59)를 삼년 간 입더라도 괜찮다고 했던 뜻을 미루어 보면 진실로 평소 스승을 섬기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니, 삼년 간 관직을 떠나는 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실려 있지는 않았더라도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천일의 문하에서 저를 꾸짖고 책하는 비방이 많으니 매우 우습고 우습니다.도사 김천일과 함께 한 성(城)에 있어 본래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항 선생에게 수학하여 총명하고 언변이 좋았기에 세상의 중망을 받아 천거되어 이름난 관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항 선생이 돌아가시자, 비록 초상에 달려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조문한 뒤로는 장례의 일을 조치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는 요를 여러 겹으로 깔고 앉아서60) 관의 지공(支供)을 받고 빈객들을 응접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스승이 살아 있을 때는 달려가서 잘 모셔 명성을 낚는 미끼로 삼고, 돌아가시자 마침내 등을 돌려 배신한 것입니다. 저는 강직한 성미로 강개한 마음을 많이 표출하고, 그의 문인들과 극언으로 변론하며 간간히 거칠고 난폭한 기운을 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천일 문하에서는 방문한 향인(鄕人)에게 드러내어 말하지 않겠다고 깊이 생각하였다고들 하니, 말세의 교묘하고 험한 인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견이 과연 의리의 정당함에 부합합니까? 바라건대 또한 살펴봐 주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주자께서 연평(延平)61) 선생의 상(喪)에 복(服)을 입지 않고 조정에서 토론하셨다는데 그러합니까? 또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그 사이에 곡절이 많이 있었으나 이 사람의 행사가 뜻밖에 나오고 날까지 저물어 급하게 대략 씁니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기운이 없어 비뚤비뚤하게 쓰게 되어 매우 황공합니다. 黃勉齋喪其師朱子, 吊服加麻, 制如深衣, 用冠絰. 王栢喪其師何基, 服深衣加帶絰, 冠加絲武. 栢卒, 其弟子金仁山則加絰于白巾, 絰如緦麻, 而小帶用細苧. 黃·王·金三君子, 皆朱門之嫡傳, 而所制之師服, 不無少異, 當何爲準. 且爲師三年, 其不去官耶? 聞金都事千鎰門人言則曰: "先生今遭一齋【李恒】喪, 而旣委質于朝, 故不去官." 於愚意甚未安, 乃告以此. 無乃君有故, 以所在而致死時事乎? 昔孔子之門, 惟顔閔不仕, 及其歿也, 七十子築室三年, 若喪父而無服, 夫七十子者, 非知禮者乎? 且以身無衰麻之服, 而心有哀戚之心, 若喪考妣之義, 與程子所謂若顔閔之於孔子, 則雖斬衰三年可也之義推之, 則苟平日以師事之恩義兼至, 則解官三年, 雖不載於禮經, 乃所當爲也. 以此金門多有詆責侍生之謗, 不勝呵仰呵仰. 金都事同在一城, 固嘗的知, 早失父母, 受學李丈, 穎悟善言, 取重於世, 至薦爲名宦, 今其死也, 雖曰奔喪而來, 一吊之後, 不措襄事, 卽返于家, 累茵而坐, 至奉官供, 應接賓客, 是乃其生也, 趨走善事以爲釣名之資, 而之死遂背之也. 狷介之性, 多發慷慨之懷, 與其門人極言辨論, 間發粗暴之氣. 由此金門深懷, 不肯顯說於鄕人之來見者云, 末世人心之巧險, 不可言也, 不可言也. 然侍生之所見, 果有合於義理之正乎? 幸亦垂察開示何如? 朱子不服延平而在朝論討云然乎? 亦乞示破. 其間多有曲折, 而此人之行, 出於意外, 日暮草草, 心亂氣短, 胡寫至此, 惶恐惶恐. 황면재(黃勉齋) 남송(南宋)의 성리학자인 황간(黃幹, 1152~1221)을 말한다. 자는 직경(直卿)이며, 면재(勉齋)는 호이다. 주희(朱熹)의 문인으로, 그의 사위가 되었다.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 원문의 '가마(加麻)'는 오복제에 속하지 않지만 복을 입을 대상인 경우 머리에 환질(環絰), 즉 마(麻)로 만든 수질(首絰)만 두르는 것을 말한다. 심의(深衣)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소맷단을 두른 것으로 주로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옷이다. 왕백(王栢) 1197~1274. 송나라 때 학자이며 자는 회지(會之)ㆍ백회(伯會), 호는 장소(長嘯)ㆍ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황간(黃榦)의 제자 하기(何基)에게 배웠다. 하기(何基) 1188~1269. 남송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으로 자는 자공(子恭)이고, 호는 북산(北山). 주희(朱熹)의 문인 황간(黃幹)에게 수학하였다. 대질(帶絰) 상복에 허리에 두르는 것을 대(帶)라 하고, 머리에 두르는 것을 질(絰)이라 한다. 김인산(金仁山)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의 학자인 김이상(金履祥, 1232년~1303년)으로, 인산(仁山)은 그의 호이다. 주희(朱熹)와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시마복(緦麻服) 조선시대에 입었던 오복(五服) 중의 하나. 가는 베로 만든다. 황면재(黃勉齋) …… 썼습니다.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권51 〈치국평천하지요(治國平天下之要) 명예악(明禮樂) 가향지례(家鄉之禮)〉에 "송나라 유학자 황간이 그의 스승인 주자(朱子)의 상에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였는데 제도는 심의(深衣)와 같았고 관질(冠絰)을 착용하였으며, 왕백이 그의 스승인 하기(何基)의 상에 심의를 입고 대(帶)와 질(絰)을 더하고 관(冠)에 사무(絲武)를 더하였으며,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인 김이상이 상을 치르면서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가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의 수질과 같았고 소대(小帶)는 가는 모시 베로 만들었다. 황간ㆍ왕백ㆍ김이상 세 사람은 모두 주자 문하의 적전(嫡傳)이니, 그들이 만든 스승을 위한 복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 스승의 은혜와 의리에 보답하고자 하는 자들은 의당 이를 준하여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이항(李恒)의 제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왜적이 남으로 퇴각할 적에는 진주성(晉州城)에 주둔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투신 자결하였다. 일재(一齋) 1499~1576.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1566년 명경행수(明經行修)로 추천되어 벼슬길에 올라 1574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몸을 바쳤기에 원문의 '위지(委質)'은 처음 벼슬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예물(禮物)을 바치는 것으로 전하여 처음 벼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는 자기 몸을 임금에게 맡긴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春秋左傳 僖公24年》 《國語 晉語9》 최마복(衰麻服) 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상중에 후손이 입는 상복인 베옷을 뜻한다. 참최(斬衰) 오복(五服) 중의 하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喪)에 입는 것으로 거친 베로 짓되 아랫단을 꿰매지 않고 접는다. 요를 …… 앉아서 원문의 '누인(累茵)'은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가 "남쪽으로 초나라에서 유세하여 시종하는 수레가 백 대나 되고 쌓인 곡식이 만 종이나 되며, 자리를 겹쳐서 앉고 솥을 늘어놓고 먹었습니다.[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하였는데, 전하여 높은 벼슬을 하며 누리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연평(延平) 송(宋)나라 학자 이통(李侗, 1093~1163)을 말한다. 연평은 호이고 자는 원중(愿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양시(楊時)의 제자인 나종언(羅從彦)에 수학하였고 주자(朱子)의 스승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답서를 붙이다 【곤재 정개청】 附答書 【困齋】 스승의 상례라는 일에 대해 논변한 것이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합당하니 그대의 군자다운 정직함에 탄복하였습니다. 주자께서는 연평에게 다만 수학했을 뿐입니다. '수학'이라는 것을 주자는 "종유(從遊)하다."라고 말하였으니, 대개 존경하지만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 이항에게 수학만 하였을 뿐이라면 지금의 처신이 오히려 혹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만약 스승62)이 어리석음을 깨우쳐준 은혜가 있는데도 그렇다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도 없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친구 간에도 오히려 마땅히 복을 입고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 하물며 은혜와 의리가 무거운 스승에 대해 어찌 슬픔을 표출하는 변화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황면재(黃勉齋), 왕백(王栢), 김이상(金履祥) 세 군자가 입은 조복이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예에 정해진 복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은혜의 경중(輕重)과 슬픔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그것을 드러내 입은 것뿐이니, 이후에 스승을 위해 조복(弔服)을 입은 자는 마땅히 은혜와 슬픔의 얕고 깊음에 따라 정할 일입니다. 만약 이미 군주에게 몸을 맡겼다고 하여 심상(心喪)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고 한다면 신하된 자는 끝내 대공(大功)63)의 상례를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이 괜찮겠습니까. 이른바 오직 있는 곳에 따라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군주 곁에 있으면 군주를 위해 죽고, 부모 곁에 있으면 부모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지 군주를 모시고 있어서 삼년의 상에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되 복은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관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우리들이 마땅히 뭇 사람들의 긍휼(矜恤)함을 포용하여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지나치게 명백하고 곧은 성품으로 다툼의 빌미를 일으켜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잘 모르겠으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또 스승의 상례라는 한 가지 일에 대해 답해 보겠네. 《예기》를 상고해보면 "심상 삼 년64)"이라 하였고, 또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듯이 하면서 복을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자의 상에 제자들이 모두 수질(首絰)을 하고 나갔다."고 하였고,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주석에서는 "모두 수질을 하고 나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스승을 위해 나간 것이며 떠날 때에도 역시 수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정자께서 "안연과 민자건은 공자에 대하여 비록 참최(斬衰)를 입고 삼년상을 지내더라도 괜찮다."라고 하셨고, 주자께서는 "스승에 대한 의리는 친구와는 구별되니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만약 그 상복을 논한다면 마땅히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아야 하므로 《예기》에서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것처럼 하면서도 복은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시길 "평소에 거처할 때에는 수질을 두른다."라고 하였고, 또 《의례》 〈상복(〉 기(記)에 붕우 간에 마(麻)를 한다는 주(註)에 "붕우는 비록 친족 관계는 아니나 도(道)를 함께 하는 은혜가 있어 시마복(緦麻服) 때에 쓰는 질대(絰帶) 차림을 한다.65)"라고 하였으니 그 복은 조복(弔服)이고, 그 관(冠)은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士)는 변질(弁絰)66)을 쓰고 서인은 소위모(素委貌)67)를 쓴다고 하였습니다.조복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왕이 삼공육경(三公六卿)을 위해 입는 석최(錫衰)68), 제후를 위해 입는 시최(緦衰)69), 대부와 사를 위해 입는 의최(疑衰)70)가 있습니다. 제후와 경대부 또한 시최로 조복을 삼고, 친구 간에 서로 입는 복은 선비[士]의 조복이 됩니다. 의최와 소상(素裳)71)의 주에 "서인은 하얀 모시로 된 심의를 입는다. 석최라는 것은 석마(錫麻)중에서도 부드럽고 고운 것인데 15승(升) 중에서 그 절반을 제거하니 그 삼베[布]는 일삼음이 있고 그 올[縷]은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 시최(緦衰)는 또한 15승 중에서 그 절반을 제거하니 그 올[縷]은 일삼음이 있고 그 삼베[布]는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 의최(疑衰)는 14승이며 의(疑)라는 말은 비긴다[擬]는 말이니, 길(吉)에 비긴다는 것이다.72)"라고 하였습니다.이 몇 가지 설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심상 삼년복은 조복의 제도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스승의 은혜와 의리는 임금과 아버지에 대한 것과 같으니, 그 조복은 아마 자최(齊衰)의 승과 그 수가 같을 것이고, 질대는 아마 기공(期功)·대공(大功)의 대소(大小)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황면재, 왕백, 김인산 세 현자가 스승을 위해 입은 복은 조복의 제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예의에 준하여 본다면 미흡한 부분이 있으니, 다만 은혜와 의리의 경중은 알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옛 예의의 올바름을 가지고 논의한 것일 뿐이니, 만약 말세에서 이른바 현자들이 행했던 일들을 가지고 살펴보면 앞의 세 현자들이 스승을 위해 입은 조복의 제도가 어찌 우뚝하게 높디높아 미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아! 말세의 이른바 현자라는 이들은 반드시 모두 의리로 스승에게 구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는 공리(功利) 때문에 서로 따르는 경우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소 사우(師友)들과 강론하는 것이 언어와 문자 사이에 그칠 뿐이며 기대하는 것도 남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거나 얻을 것만 꾀하는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그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실제와 만물을 밝히고 인륜을 고찰하는 근본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일에 임하여 시행하고 조치할 때 공정하게 사리에 밝지 못하고 한결같이 이익을 도모하고 공리(功利)를 꾀하여 처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니 스승의 상에 복을 입지 않은 일이야 무슨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다만 이른바 스승이라는 것은 그 은혜와 의리가 가벼운지 중한지, 얕은지 깊은지에 따라 차등이 다르니 우선 그 한두 가지를 거론해보면, 구두(句讀)와 훈고(訓詁)의 스승이 있고, 문장(文章)과 공리(功利)의 스승이 있으며, 종유(從遊)와 수학(受學)의 스승이 있고, 수업(受業)과 전도(傳道)의 스승이 있습니다. 더러는 대성(大聖)이고 더러는 대현(大賢)이며 더러는 현인(賢人)에 버금가니, 도덕의 크고 작음과 은의(恩義)의 가벼움과 중함을 살펴보아 자신의 복(服)을 걸맞게 할 뿐이라네. 어떤 경우는 삼년복, 어떤 경우는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으로 저절로 등분(等分)이 없을 수가 없으니 이 또한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살아계실 때는 스승을 섬겨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배신하여 그 은혜와 의리를 잊어버리는 자라면 또 어찌 함께 도를 논의하기에 족하겠습니까. 師喪一事, 言論至正至當, 歎服其君子之正直也. 朱子之於延平, 但受學而已. 受學云者, 朱子曰: "從遊", 盖所尊敬, 而不爲師弟子之辭也. 彼於李丈受學而已, 則今之所處, 猶或可矣. 若有發蒙函丈之恩, 則餘無足可觀, 更何言哉. 朋友猶當吊服加麻, 況於重恩義之師, 豈可無表哀之變也. 黃王金三君子之所服不同者, 愚以爲禮無定服, 故特以恩之輕重哀之深淺, 而表之以所服爾, 後之服師服者, 當以恩哀淺深爲定爾. 若曰旣委質於君而不服三年之心喪, 則爲臣者, 終無期大功之喪, 其可乎. 所謂唯其所在則致死者, 謂如在君傍則爲君死, 在父傍則爲父死云爾, 非謂在君而不服三年之喪也. 禮曰: "若喪父而無服." 則解官可知. 但當今之時, 吾輩當以容衆矜不能爲心, 似不可太白直以起爭端也, 不審, 尊侍以爲如何.又答師喪一事. 考於禮曰: "心喪三年." 又曰: "若喪父而無服." 又曰: "孔子之喪, 二三子皆絰而出." 儀禮喪服疏曰: "皆絰而出." 是爲師出, 行亦絰也. 程子曰: "若顔閔之於孔子, 則雖斬衰三年, 可也." 朱子曰: "師之爲義, 卽朋友而分, 則與君父等." 若論其服, 則當與君父等, 故禮謂"若喪父而無服." 又曰: "平居則絰." 又按儀禮喪服記朋友麻註曰: "朋友雖無親, 有同道之恩, 相爲服緦之絰帶." 其服則吊服也, 其冠則卿大夫士弁絰, 庶人素委貌也. 吊服有三, 王爲三公六卿錫衰, 爲諸侯緦衰, 爲大夫士疑衰. 諸侯及卿大夫, 亦以緦衰爲吊服, 朋友之相爲服, 卽士吊服. 疑衰素裳疏曰: "庶人則白布深衣. 錫衰者, 錫麻之滑易者也, 十五升去其半, 有事其布, 無事其縷.緦亦十五升去其半, 有事其縷, 無事其布. 疑衰十四升, 疑之言擬也, 擬於吉也." 將此數說而觀之, 則心喪三年之服, 不可擬於吊服之制. 愚謂師之恩義, 有類於君父, 則其服疑與齊衰之升數同, 而絰帶則疑與期大功之大小同也, 而黃,王,金三賢之師服, 皆未免於吊服之制, 準禮義則有未洽, 但未知恩義之輕重爾. 然此特論其古禮義之正而已, 若以末世所謂賢者所行之事觀之, 則三賢師服之制, 豈不巍巍然高不可及哉. 嗚呼! 末世之所謂賢者, 未必皆以義理求於師, 而或未免有以功利相從者. 故其平日所與師友講論者, 不過言語文字之間, 而期望者又不出乎求聞計獲之私, 其於格致誠正之實, 明物察倫之本, 亦未知其爲何事也. 是以, 當其臨事施措之際, 未能正誼明理, 而一以謀利計功爲處之當, 其不服師喪, 尙何怪哉. 但所謂師者, 其恩義之輕重淺深, 差等不一, 姑擧其一二, 則有句讀訓誥之師, 有文章功利之師, 有從遊受學之師, 有受業傳道之師. 或大聖, 或大賢, 或次賢, 觀其道德之大小恩義之輕重, 而權其服而已. 或三年, 或期功緦, 自不能無等分矣, 此亦不可不知. 至若生而師事之, 以濟其所欲, 死而遂背之, 以忘其恩義者, 則又何足與論哉. 스승 원문의 '함장(函丈)'은 스승이나 장자(長者)가 앉는 자리를 뜻하는 말로, 함연(函筵)이라고도 한다. 제자가 스승의 자리와 한 길[一丈]의 거리를 둔 것에서 유래하였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만일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청한 손이 아니거든, 자리를 펼 때에 자리와 자리의 사이를 한 길 정도가 되게 한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間函丈.]"라고 하였다. 대공(大功) 다섯 등급의 복 중 하나로 굵은 베로 지었으며 대공친의 상사에 9개월 동안 입는 복제(服制)이다. 다섯 등급의 상복(喪服)으로, 참최(斬衰) 3년, 자최(齊衰) 1년, 대공(大功) 9개월, 소공(小功) 5개월, 시마(緦麻)는 3개월을 가리킨다. 심상 삼 년 《예기》 〈단궁 상(檀弓上)〉의 '심상삼년(心喪三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註)에 "심상은 슬퍼하는 모습이 부친상을 당한 것과 같은데, 복이 없는 것이다.[心喪戚容如父而無服也]"라고 하였다. 심상은 스승의 상을 당했을 때, 비록 상복은 입지 않더라도 슬퍼하는 마음만은 상복을 입고 있을 때처럼 하는 것을 말한다. 붕우는 ……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붕우를 위해서는 마를 한다.〔朋友麻〕"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의례주소(儀禮注疏)》 정현(鄭玄) 주에서 이르기를 "붕우는 비록 친족 관계는 아니나 도(道)를 같이하는 은혜가 있으므로 서로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 때에 쓰는 질대(絰帶) 차림을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질을 두르고, 밖으로 나갈 때에는 두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옷은 조복을 입는다.〔朋友雖無親, 有同道之恩, 相為服緦之絰帶. 檀弓曰羣居則絰, 出則否, 其服弔服也.〕"라고 하였다. 변질(弁絰) 상복 제도에서 변(弁 고깔) 위에 삼으로 꼰 끈을 더하여 두르는 것이다. 환질(環絰)이라고도 한다. 소위모(素委貌) 원문의 '위모(委貌)'란 주(周)나라의 관(冠)으로, 후대의 진현관(進賢冠)과 비슷한 모양이다. 원문의 '소위모(素委貌)'는 흰색 비단으로 만든 위모를 말한다. 《의례》 〈사관례(士冠禮)〉에 "위모는 주나라의 도이다.[委貌, 周道也.]"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의 주에 "위(委)는 편안함과 같으니, 이 관을 써서 용모를 편안하고 바르게 함을 말한 것이다.[委, 猶安也, 言所以安正容貌.]"라고 설명하였다. 위모는 보통 검은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위모'는 흰색 비단으로 만든 것이다. 석최(錫衰) 세마포(細麻布)로 지은 상복, 석(錫)은 석(緆)과 통한다. 고대에 왕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위해서 입었던 상복인데, 후대에는 대부끼리 서로 조문할 때에도 입었다. 시최(緦衰) 시최(緦衰)는 천은 빨지 않고 베를 짤 때에 실을 가늘게 뽑아서 만든다. 왕이 제후의 상에 조문할 때 입었다. 의최(疑衰) 길(吉)에 견주는 상복이라는 뜻으로 고대에 왕이 대부(大夫)와 사(士)를 위해서 입었던 상복인데, 후대에는 사끼리 서로 조문할 때에도 입었다. 소상(素裳) 흰색의 하상(下裳)으로, 길복(吉服)과 흉복(凶服)에 모두 착용한다. 서인은 …… 것이다. 《주례주소(周禮註疏)》 정현(鄭玄)의 주석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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