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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주다 贈人 그대 일찍이 자하동 객 되었는데 君曾紫霞客나는 또한 무엇이 될지 我亦何爲者해 저물자 매화가 지고 日暮落梅花초당에 구름이 드리우려 하네 草堂雲欲下 君曾紫霞客, 我亦何爲者.日暮落梅花, 草堂雲欲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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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서문(1) 農圃集重刊敍 농포 정 선생은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왕자의 수레를 돌리고 역적의 수급을 바쳤으며, 왜적을 무찌르고 변방 오랑캐를 위협하여, 관북 일대가 안정되었다. 일이 이미 평정된 뒤에는 한미한 관직에 떠돌고 외직에서 분주히 일하며 20여 년을 보냈다. 인조(仁祖) 갑자년(1624)에 대간의 논핵을 받아 옥에서 운명하셨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에 공을 이상(貳相)에 추증하였고19) 특별히 사당에 편액을 내렸으며 공의 자손을 녹용하라고 명했고, 숙종(肅宗) 계미년(1703)에 시호를 하사했다. 아! 여기에 이른 뒤에야 공의 훌륭한 공적이 드러나고 지극한 원통함이 풀려서, 소인배의 입을 다물게 하고 지사(志士)의 담력을 키워줄 수 있게 되었도다.공의 유집은 예전에 2책이 있었는데, 공의 후손들이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공의 일고(逸稿) 약간 편을 수습하고 연보를 덧붙여 4책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나는 후대에 태어나 공이 대장기를 잡고서 적들을 소탕한 광경을 미처 보지는 못했으나, 야사(野史)에서 상고하고 사람들에게 들어, 공의 일생의 훈공을 삼가 개괄한다.대개 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곽 충익공(郭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비견될 만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의 한때 공로는 공에게 견줄 수 없으니, 충훈부(忠勳府)에 기재된 사람이라도 의당 혹여라도 공을 앞서지 못한다. 그런데 법률 담당 관원의 탄핵문서가 대뜸 나와서 뒤에서 비난하였도다. 어찌하여 하늘이 한 시대의 준걸을 내어 한 시대의 사업을 정돈하되, 그를 좌절시키고 곤란에 빠뜨려 이렇게까지 아껴주지 않는가. 아마도 충무공이 등자룡(鄧子龍)의 전함에서 불 속에 뛰어든 것20)과 충익공이 비슬산(琵瑟山)에서 벽곡(辟穀)한 것21)은 모두 공이 한 수 접어주더라도 공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로다. 천도(天道)가 아득히 멀어서 옛날에 이른바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준다'는 것22)은 시대마다 기약하기 쉽지 않으나, 공적이 있는데 드러나지 않고 억울함이 있는데 신원되지 않는 경우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선 이런 내용으로 적어 후대사람들을 면려하노라.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경인년(1890, 고종27) 중춘에 일선(一善) 김익용(金益容)이 서문을 쓰다. 農圃鄭先生, 以穆陵壬辰咸鏡北道兵馬評事, 倡義旅, 王子旋軌, 逆胥授馘, 蹂倭慴胡, 一路帖然。旣事平, 而浮沈散班, 捿遑外符, 二十餘年。長陵甲子, 被臺評, 隕身圜扉中。崇陵甲辰, 贈貳相, 特宣祠額, 命錄用子孫, 明陵癸未, 賜諡 嗚呼! 至此而後, 茂烈章至冤白, 有足以關宵人之喙, 張志士之膽歟! 公遺集舊有二冊, 公諸孫綴拾公逸稿散在京鄕者若干編, 附年譜爲四冊, 徵序於不侫。不侫生晩, 未及見公握蝥弧掃除攙搶, 而稽之外乘聽之輿人, 竊槪公始卒勳庸。蓋李忠武·郭忠翼之伊呂伯仲, 而餘人一時之勞, 未足倫擬, 則盟府丹書, 宜莫之或先, 而文吏白簡, 遽從而議後歟! 何天之生一代魁碩, 整頓一代事業, 而挫折之顚擠之, 不相惜至此歟? 豈忠武之蹈火鄧船、忠翼之辟穀瑟山, 皆所以贏公一着而爲不可以幾及者歟! 天道遼遠古, 所謂報施善人者, 未易以世代相期, 而有積無發, 有絀無伸, 卽不佞所未聞也。姑識此以勖後人。崇禎紀元後五庚寅仲春, 一善金益容敍。 이상(貳相)에 추증하였고 이상은 좌찬성과 우찬성을 일컫는 말이다. 《현종실록》 7년 5월 23일에 기사에서는 정문부를 우찬성에 추증했다고 했으나, 《숙종실록》 39년 3월 15일 기사 및 《농포집》의 〈시장(諡狀)〉·〈증직교지(贈職敎旨)〉 등에서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고 하였다. 충무공이……것 등자룡(鄧子龍)은 명나라 장수로 1598년에 조선으로 출병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등자료과 함께 적을 포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宣祖實錄 31年 12月 21日, 32年 2月 2日》 충익공이……것 곽재우는 1602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여, 솔잎을 먹으면서 벽곡(辟穀)하였다. 《葛庵先生文集 卷29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옛날에……것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안연(顔淵) 같은 선인은 비참하게 살다 죽고,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천하를 횡행하며 오래 살다 죽었음을 대비하면서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해 준 것이 어떻다고 하겠는가.[天之報施善人, 其如何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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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 卷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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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언고시) 詩(五言古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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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봉 호민3)의 사한정4) 시에 차운하다 3수 次李五峰好閔四寒亭韻 三首 천지 사이에 물아가형체는 다르나 절개는 같아라소나무는 추위에 서리를 견딜 수 있고대나무는 추위에 달빛을 띠는 법이지겨울 매화와 한미한 선비는모두 정신이 빙설처럼 정결하네이토록 추운 지경에 이르렀는가5)서로 마주하며 백발에 이르렀네상산사호 같은 은자가 되려 하니그 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지정자는 어느 때가 좋은가엄동설한이 좋다네소나무 대나무는 본래 사시사철 푸르고매화 또한 섣달에 핀다오정자 주인은 또 옥과 같으니눈서리 속에서 함께 늙어가네푸른 잎 노쇠한 얼굴에 비치고흰빛은 백발을 재촉하누나옛사람 중 그 누가 흡사할까구양수가 육일이라 자호했지6)섣달 겨울 천지의 기운 막힐 제차군의 절개 사랑스러워라또한 얌전한 여인의 혼령 있어저물녘 달 아래에서 기약하누나7)십팔공8)은 이 중 가장 굳세어우뚝하게 눈 서리에 서 있도다타고난 성품이 서로 부합하니털끝만큼의 틈도 용납못하네묻노니, 누가 정자 주인인가한미한 선비 김창일이라오 物我天地間殊形而一節松寒解凌霜竹寒宜帶月寒梅與寒士精神兩氷雪一寒如此哉相對至白髮擬作四皓隱不可無其一亭到何時好好是嚴冬節松竹自四時梅花亦臘月主人又如玉相與老霜雪蒼者映蒼顔白者催白髮古人誰得似歐陽號六一窮冬天地閉可愛此君節亦有靜女魂期在黃昏月十八公最勁亭亭立霜雪所性有相符間不容毫髮借問誰爲主寒士金昌一 오봉 이호민 1553~163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이다. 임진왜란 때 왕명으로 각종 글을 도맡아 작성하는 등 문장에 뛰어났고, 저서로 《오봉집》이 있다. 사한정 시 이호민(李好閔)의 〈사한정 시에 차운하다[次四寒亭韻]〉 시로, 《오봉집》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사한정은 김창일(金昌一, 1548∼1631)의 정자로, 김창일이 송한(松寒)·죽한(竹寒)·매한(梅寒)과 자신의 한미함[己寒]을 함께 묶어 '사한(四寒)'이라 하였다. 이토록……이르렀는가 《사기》 〈범저열전(范雎列傳)〉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추위를 견디는 소나무·대나무·매화처럼 자신 역시 몹시 한미한 처지에 있음을 형용한 것이다.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수가(須賈)가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범수(范睢)를 만나 보고는 "범숙이 이토록 한미한 지경에 이르렀는가?[范叔一寒如此哉?]"라고 하고, 명주 솜옷 한 벌[一綈袍]을 주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范雎列傳》 구양수가 육일이라 자호했지 김창일이 '사한'이라 자호(自號)하고 대나무·소나무·매화 사이에서 늙어간 것이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책·금서군·거문고·바둑판·술 사이에서 늙어가며 '육일'이라 자호한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구양수가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자호를 '육일거사'라 하였는데, 구양수의 〈육일거사전(六一居士傳)〉에 "우리 집에 책 1만 권이 있고, 삼대 이래의 금석유문 1천 권을 모았고, 거문고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고 항상 술 한 병이 놓여 있다.……나 한 늙은이가 이 다섯 가지 물건 사이에 늙어가니, 어찌 여섯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吾家藏書一萬卷, 集錄三代以來金石遺文一千卷, 有琴一張, 有棋一局, 而常置酒一壺……以吾一翁, 老於此五物之間, 是豈不爲六一乎?]"라고 하였다. 얌전한……기약하누나 매화의 정령을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수나라 조사웅(趙師雄)이 추운 겨울 저물녘에 나부산(羅浮山)의 솔숲 사이의 술집에 들렀다가, 소복(素服) 차림에 옅게 단장한 여인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조사웅이 고운 향기와 청아한 말에 매료되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五百家注柳先生集 龍城錄 卷上 趙師雄醉憩梅花下》 십팔공 소나무를 의미한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생겨나는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풀이하기를 "송(松) 자를 파자(破字)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는 공(公)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皓傳 裴松之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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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비에 대한 탄식 苦雨歎 하늘에서 오랫동안 비 내리지 않자예전에는 상림에서 비를 빌었네11)늘 쨍쨍해도 진실로 재앙이요늘 비만 오는 것도 어찌 좋으랴그러기에 여러 달 계속되는 비가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밤낮없이 주룩주룩 비 쏟아져강하가 끝없이 불어났으니평지는 배 타고 노 저어가고높은 산은 섬이 되었으며산꼭대기 나무는 꺾여 버리고언덕 위 풀은 문드러졌네초목이 상하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이 기장과 벼는 어이할꼬회상하노니, 처음 파종했을 때농지는 아직 이른 봄이었네노인과 아이 쟁기질하고아낙네들은 들밥을 내왔지땅이 척박하고 인력 부족하여잡초만 무성하고 모는 말랐네컴컴한 새벽에 잡초를 김매고12)하얀 달빛 받으며 돌아왔네장차 풍성한 가을걷이 기다렸으니고생 따위야 어찌 말할 것 있으랴어찌 짐작했으랴, 비바람 몰아쳐-원문 1자 결락- 벼가 다 쓰러질 줄을-원문 2구 결락-한 번 장맛비가 지나간 뒤로흙 무너져 웅덩이로 흘렀네이미 올해 수확 점쳐지니쌀 한 말이 노호 값 되리라13)-원문 1자 결락- 우리 집 여덟 식구위아래로 아이와 노인 돌아보네-원문 2구 결락-배고픔과 추위에 내몰리니쇠락한 가세 끝내 어찌 보존할거나말없이 앉아 -원문 3자 결락-이를 생각하니 마음 방아 찧는 듯하여라그 누가 이 허물을 책임질꼬나는 하늘에 돌리고자 하노라하늘이 어찌 그리했으랴만물이 모두 만든 결과로다또 우리 -원문 1자 결락- 임금과 재상백성 사랑을 보배로 여기네음양을 조화롭게 잘 다스리니훌륭한 정치가 환히 빛나리라하늘 탓도 아니요 사람 탓도 아니니이 이치는 궁구하기 어렵구나단지 천지 사이에뜬구름 날마다 자욱했기 때문이니때때로 삿된 기운을 타고서흙비가 변방과 도성을 덮었네이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니사람 애태우며 근심 시키네뇌사가 그 형세를 도왔으니풍백도 진정시키지 못했도다소상강 대나무14)를 베어다가빗자루로 엮어 마음껏 쓸어냈으면그런 뒤에야 하늘에 구름 없어져쨍쨍한 햇빛 시원히 보겠지 皇天久不雨昔有桑林禱恒暘固云灾恒雨亦豈好所以連月雨使我傷懷抱淫淫罔晝夜川原漲灝灝平地用舟楫高山作嶼島摧殘嶺頭樹糜爛原上草傷草木尙可奈此粱與稻憶初播種時西疇春尙早扶犂翁與兒饁耕姑及嫂地瘠人力綿草盛苗則槁埋穢侵晨黑歸來帶月皓且待秋穀登辛勤何足道豈料風雨漂【缺】禾盡傾倒【二句缺】一自霖雨後沙汰流行潦已占今年秋斗米直魯縞【缺】我八口家俯仰有幼老【二句缺】飢寒之所迫零落終何保黙坐【三字缺】念此心如擣伊誰執此咎我欲歸蒼昊蒼天豈其然萬物皆所造復我【缺】君相仁民以爲寶燮理陰陽化至治期凞皞非天亦非人此理難可考祗緣天地間浮雲日浩浩有時乘戾氣霾翳秦與鎬作此雨淋淋令人憂懆懆雷師助其勢風伯不能討願斫瀟湘竹束箒恣揮掃然後天無雲快覩日杲杲 상림에서 비를 빌었네 기우제를 지냈다는 뜻이다. 은(殷)나라에 여러 해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기도하며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 수천 리에 큰비가 내렸다. 《荀子 大略》 잡초를 김매고 대본에는 '埋穢'로 되어 있는데,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전원거(歸田園居)〉 시에 "새벽에 일어나 잡초를 김매고, 달빛 띠고서 호미를 메고 돌아오네[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埋'를 '理'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노호 값 되리라 쌀이 귀하여 매우 비쌀 것이라는 의미이다. 노호(魯縞)는 노(魯)나라 땅 곡부(曲阜)에서 생산된 흰색의 비단으로, 촘촘하면서도 두께가 얇기로 유명했다. 소상강 대나무 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 즉 소상반죽(瀟湘斑竹)이 자란다. 전설에 의하면 순(舜) 임금이 승하하자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져 얼룩이 생겼다고 한다. 《博物志 卷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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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에 지 참봉 달원186)과 입으로 읊다 雪夜 與池參奉達源 口號 객지의 밤은 본디 잠들지 못하니밝은 눈과 달 어이할꼬고향 돌아가는 꿈 꾸고 싶건만밤새도록 끝내 꾸지 못했네 客夜元無寐如何雪月明欲作還家夢終霄竟不成 지달원(池達源) 1566~1638. 함경북도 경성(鏡城) 사람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사진(士進)이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활약했으며, 이때의 공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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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정자에서 즉흥적으로 읊다 江亭卽事 바람은 강가의 풀에 고요하고 風靜江湄草물고기는 달 아래 물결에서 밭을 가네 魚耕月下波추운 밤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데 夜寒愁不寐안개 너머로 어부의 노래 소리 들려오네 煙外起漁歌 風靜江湄草, 魚耕月下波.夜寒愁不寐, 煙外起漁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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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읊다 偶吟 어떤 사람인지 묻지 마오 莫問何爲者나는 천상계 신선 아니라네 吾非天上仙그림 같은 호수와 산에서 湖山盡圖裡길이 백구를 마주하여 잠을 잔다니 長對白鷗眠 莫問何爲者, 吾非天上仙.湖山盡圖裡, 長對白鷗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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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학봉79)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 上鶴峰金副題提學誠一書 성주80)께서 왜국에 사신의 임무를 받드신 뒤로 마음이 온통 걱정스러워 일찍이 먹고 쉬는 사이에도 감히 잊지 못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거센 파도를 잘 건너시고, 또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81) 돌아와서 임금의 은혜에 감응하고 임금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셨더군요. 이는 실로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신물(神物)이 호위한 바이니, 변변찮은 저는 공경히 박수를 보낼 뿐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저는 행실이 신명(神明)을 저버려서 이런 기이한 화를 만나 칠십이 되신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삼천리 밖에 유배되었습니다. 불효의 죄는 스스로 속죄할 길이 없고, 엎어지고 고꾸라지는 고통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 겨우 죽음만 모면했으니 다른 일이야 어찌 말씀 드리겠습니까. 믿을 것은 하늘의 태양 같은 임금의 밝고 밝음이 엎어진 항아리의 속의 어둠82)을 비추어 주시는 일 뿐입니다.별지(別紙)에 적은 슬픔과 간절함은 오로지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마음을 믿고 사사로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니, 한 번 보시고 불에 태워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쯤 다시 빛나는 모습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고 나니, 다만 더욱 목이 메일 뿐입니다.별지기축(己丑 1589)년 겨울에 있었던 일83)을 생각하니 여섯 부자(父子)84)가 함께 중대한 옥사로 모함을 받을 적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한마디 말도 위로해준 적이 없었으나 오직 우리 성주께서 편지를 내려 위로해주셨고, 우리 일가족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기에 이르자 그것을 효성이 응한 소치로 돌리셨으니, 군자의 마음이 평탄하거나 어려움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은 점에 삼가 탄복하고, 또한 보잘것없는 제가 어찌 성주의 지우를 입어 이와 같기에 이르렀는지 감탄하였습니다.스스로 도깨비나 살 것 같은 시골에 들어가 흙집에서 흙덩이처럼 엎드려 살면서 예전의 잘못들을 들추어보니, 대체로 평생의 제 행실은 단지 선(善)을 좋아하나 밝게 분별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나 미워함이 지나치게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소인배들이 농간을 부리고 말을 만들어내며 기회를 엿보아 모함에 빠지게 하여 그 재앙이 장차 친족을 모조리 죽일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남쪽 지방 선비들의 습속이 괴팍하고 심술이 그르다고 알려져 여우와 쥐새끼85) 같은 무리가 우르르 모여 벼룩이 호랑이나 표범에 달라붙은 형세를 이루어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웠거늘, 성상께서 위에서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86) 보이지 않는 곳까지 통촉하시어 감히 그 흉악한 생각을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이요, 사림(士林)의 행운입니다.아! 정적(鄭賊)87)은 애초에 마을 입구를 막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둑이 아니라 진실로 고상한 말로 사람을 속이는 간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박학다식하여 사물의 이치에 막힘이 없다는 명목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벼슬이 청요직에 이르렀으니,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숨겨진 흉악함과 간특함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저와 같이 어둡고 아둔한 자야 어찌 그 사람이 거짓을 꾸며 온 세상을 속일 줄 알았겠습니까.예전 도성에서 노닐 적에 율곡 선생께서 일찍이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쪽 지방에서 학문하는 선비 중에 정철이 최고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평소 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그 사람됨을 보고 싶어서 을유(乙酉 1585)년 봄에 어버이를 뵈러 도성에 올라갔다가 비로소 한번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과장되고 허황되었으며, 급기야 경연(經筵)에서 율곡 선생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일찍이 형제간에 말하기를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옛 사람도 경계한 일88)인데 빛과 어둠처럼 서로 등지게 되었으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그를 매우 의심하였기 때문에 왕래하고 지나면서 일찍이 한 번도 그 문에 이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술(丙戌 1586)년 사이에 쇠약한 가문에 괴이한 변고가 있고 의론이 분분할 때 정적이 상도(上道)89)에 있으면서 시비를 주장하므로 도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과연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그 일의 전말을 논하였을 뿐이니, 어찌 받들어 존중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성주께서 나주에 계실 때 일찍이 정적의 심술을 논하였는데 제가 추종하여 그의 단점을 지적했던 일이 또한 많았습니다. 결국 한 번 얼굴을 보고 한 번 편지를 보낸 일로 마침내 큰 재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실로 운명이 기구해서이니 어쩌겠습니까. 이 한 몸의 길흉화복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겠지만, 다만 연로하신 아버지의 노년을 생각하면 밤낮으로 통곡하게 될 것이니 자식 된 입장으로 마땅히 어떤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대개 겸허하고 선을 좋아하는 선비 중에 세상을 속이는 사람에게 연루되어 큰 참화를 입은 사람이 많으니, 조정에 어찌 그 원통함을 마음으로 아파하고 한랑(寒朗)90)처럼 다스려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속으로 이해를 따지는 마음이 있고 겉으로 행적을 의심하여 그러한 일을 좌시하며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구원하지 않으니,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비록 소득이 있는듯하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오직 성주께서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키고 믿음은 신명과 통하여 이해와 행적을 초월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신다면 반드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갖고 한랑으로 하여금 앞시대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실 터인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주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곁에서 듣기로 조정에서 관대한 법을 적용하고 성스러운 덕이 또한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을 수 있는 한 번의 큰 기회입니다. 원컨대 성주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고 빠르게 도모하소서. 서애 유성룡 상공(相公)께서 조사하여 국문하시는 것이 공평하고 분명하여 잘 처리되어 석방된 자 또한 많으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고 민심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도(斯道)를 붙들고 나라의 명맥을 연장하는 책무를 더욱 사양하셔서는 안 됩니다. 원컨대 성주께서 협력하여 세상에 없던 공적을 도모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自城主奉使海國, 一心憂虞, 未嘗食息之敢忘, 今聞利涉鯨濤, 又能專對, 歸膺明恩, 受天寵光. 是實誠貫金石, 而神物所拱衛, 區區欽抃, 豈可以言語形容. 某行負神明, 遘此奇禍, 違七十老父, 拘三千里外, 不孝之罪, 無以自贖, 顚沛之苦, 殆不可堪, 僅免一死, 他何足言. 所恃者, 天日昭明, 應照覆盆之幽耳. 別紙悲懇, 專恃愛念之眷, 直討幽蘊之私, 一覽付丙, 毋掛他眼. 安得更接儀光? 訟此幽鬱, 但增嗚咽而已.別紙憶在己丑冬, 六父子俱陷重獄, 所識朋舊無一言以慰者, 而惟我城主賜書存撫, 至於保全一家, 歸之於孝感所致, 欽服君子之心不以夷險易操, 而又歎無狀何以見知於明公, 至於如是耶. 自入魑魅之鄕, 塊伏土宇, 抖擻前愆, 大槪平生行己, 只是好善而卞之不明, 惡惡而嫉之太甚, 故群小輩, 作弄造語, 乘機傾陷, 其禍將至赤族之地, 而況又南方士習壞心術誤知見, 群聚狐鼠之輩, 虱附虎彪之勢, 上自搢紳, 下及韋布, 盡爲網打之計, 而聖明在上, 离明燭幽, 不敢恣其胸臆, 是則宗社之福, 士林之幸也. 噫! 鄭賊初非逄州劫人之盜, 而實是高談罔人之奸. 故在當世以博洽鳴世, 而官至淸要, 雖智者, 不能逆探包裝凶慝, 況如生之昏愚, 豈知僞情飾冒, 以誣一世也哉. 在昔遊洛時, 栗谷嘗謂生等曰: "南中學問之士鄭爲最云." 以生平日好善之心, 嘗欲見其爲人, 而乙酉春覲親上洛, 始一見焉. 聽其言論浮誇, 及聞筵中攻栗谷已甚之語, 嘗語兄弟間曰: "不遺故舊, 古人所戒, 幽明相負, 乃至是耶." 心甚疑之, 故往來經過, 未嘗一至其門. 而丙戌間, 衰門怪變, 議論紛紜時, 鄭賊在上道, 主張是非, 故自京歸路, 果爲一書以論其事之顚末而已, 有何推重之意. 城主在羅時, 嘗論此賊之心術, 生之從以短之者, 盖亦多矣. 竟以一面之分一度之書, 而終陷大禍, 是實氣數之奇蹇, 奈何奈何. 一身禍福, 且當聽天, 而只念老父臨年, 日夜號痛, 爲人子者, 當作如何懷抱. 大抵虛恢好善之士, 坐誣欺世之人, 最被慘禍者多矣, 朝廷之上, 豈無心傷其寃, 欲其理出如寒朗者, 內有利害之心, 外爲形跡之疑, 坐視其然, 而不敢出一言以救之, 其於保身之道, 雖似得矣, 愛君憂國之誠, 恐不若是也. 惟明公正色立朝, 誠足以動天地, 信足以通神明, 能超乎利害形跡之外, 而一以愛君憂國爲己任, 則其必思有以昭雪幽寃之責, 而不使寒朗專美於前, 不審明公其亦念及否. 仄聞朝廷用寬典, 聖德又日新, 此正昭雪幽寃之一大機. 願明公深量而亟啚之. 西厓相公按鞫平明, 理出且多, 衆志咸服, 人心屬望, 扶斯道壽國脈之責, 益不可以辭也. 願明公恊贊之, 以圖不世之功, 幸甚幸甚.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8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ㆍ초유사ㆍ경상 우도 관찰사ㆍ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학봉집(鶴峯集)》 등이 있다. 성주(城主)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가리킨다.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 원문의 '전대(專對)'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시경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사신 가서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말이 보인다. 엎어져서 …… 속까지 원문의 '복분(覆盆)'은 태양이 밝아도 땅에 엎어 놓은 동이 속에는 태양빛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억울한 사정을 윗사람이 몰라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해와 달도 비치지 못하는 곳이 있고,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찌 이 때문에 성인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천하에 신선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삼광이 엎어 놓은 동이 안을 비추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격이다.[日月有所不照, 聖人有所不知. 豈可以聖人所不爲, 便云天下無仙. 是責三光不照覆盆之內也.]"라고 하였다. 기축년(1589) 겨울에 있었던 일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났으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동인이 서인의 박해를 받은 옥사를 말한다. 여섯 부자(六父子) 아버지 나사침(羅士忱), 첫째 나덕명, 둘째 나덕준(羅德峻), 셋째 나덕윤(羅德潤), 넷째 나덕현(羅德顯), 다섯째 나덕신(羅德愼), 여섯째 나덕헌(羅德憲)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우와 쥐새끼 원문의 '호서(狐鼠)'는 여우와 쥐를 이른다. 본래는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안에 사는 여우와 사당에 사는 쥐[城狐社鼠]'라는 고어(古語)에서 온 말로, 흔히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소배(奸小輩)에 비유된다.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 원문의 '이명(离明)'은 곧 일월(日月)의 밝음을 말한 것으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 상(象)〉에는 "밝은 것 둘이 이를 만드니, 대인이 그것을 인하여 밝음을 이어서 사방에 비추니라.[明兩作離 大人以 繼明 照于四方]" 하였다. 정적(鄭賊) 기축옥사를 이끌었던 정철(鄭澈)을 말한다. 오랜 …… 경계한 일 《論語》의 〈泰伯〉에 나오는 말로 "군자가 친족에게 두터이 하면 백성들이 인에 흥기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투기하지 않는다.〔君子 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고 하였다. 상도(上道) 남원(南原)ㆍ순천(順天) 일대의 전라도 동반(東半) 지역을 말한다. 한랑(寒朗)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가 백기(伯奇)이다. 명제 때 초왕(楚王) 유영(劉英)의 역옥이 발생하였는데, 유영의 무리인 안충(顔忠)과 왕평(王平) 등이 함께 역모를 하였다고 끌고 들어간 사람 가운데 수향후(隨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郎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리(鄧鯉),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建) 등이 있었다. 한랑은 이때 알자수시어사(謁者守侍御史)로서 이 옥사를 다스렸는데,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들 황제가 몹시 노한 데 겁을 집어먹고서 이들이 역모를 하였다는 내용으로 조서를 꾸몄으나, 한랑만은 이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사실대로 말하여 풀려나게끔 하였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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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참의 구암 명길 한백겸91)에게 보낸 편지 與久庵韓參議鳴吉百謙書 지난번 공께서 우연히 찾아오셨을 때 비록 식사하며 정담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지만, 당상의 존귀함에 압도되어 자세히 대화를 나누며 평온하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더욱 답답합니다. 요즘 날씨가 맑고 화창한데 삼가 몸조리를 조용히 보중하고 계신지요?제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지만, 백발로 세상 풍진을 겪었으니 무슨 심정이겠습니까? 몸소 큰 환란을 겪고, 또 노모와 오랜 벗들이 모두 신원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하여 이에 감히 평소 소신을 바꾸고 변변치 않은 일들로 분주하였으나 결국 이룬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초복(初服)92)에 부끄러워 참으로 몹시 절로 슬픕니다.우리 조선 200년간 유학93)의 근원을 밝게 탐구하고 정주학(程朱學)94)을 계승한 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성리학을 처음 열었고, 그 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네 분의 선생께서 서로 계승하여 도학을 일으켜 비로소 세상을 밝혔는데, 모두 뜻밖의 재앙을 면치 못하시어 그 도가 크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95)와 을사사화(乙巳士禍)96)의 참혹함을 차마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어 죽이고 소멸시킨 나머지 자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그 사이에서 출현하여 사문(斯文)을 창도하여 일으키셨습니다. 성상께서 초년에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시어 일대의 어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무성히 세상을 위해 등용되니 사람들은 모두 선을 지향하게 되고 세상의 도(道)가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무리 또한 이러한 풍조를 듣고 흥기한 자들이고, 우리 형께서 이런 마음을 제기하셨으니 어찌 선현(先賢)들의【아마도 글자가 빠진 듯하다】 풍조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아! 기축(己丑 1589)년의 변고가 진신(搢紳)들로부터 나왔을 때 만약 조정에서 협력하여 같은 마음으로 함께 분노하며 간적(奸賊) 정철(鄭澈)이 세상을 속였던 상황을 극진히 간언하였다면 어찌 사림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간적 정철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때를 틈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려 이미 조정에 섰던 명사들을 죽이고, 산야에 은거하던 선비들마저 살해하였습니다. 벼슬길의 풍파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산림에 숨어 수양하면서 도학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자들까지 아울러 역모를 꾸몄다는 화(禍)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참으로 원통함이 심합니다. 율곡은 비록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밝지 못하였으나 본심은 선량하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살육의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간적 정철처럼 사납고 강퍅하며 화를 잘 내는 사람과 같겠습니까.곤재(困齋) 선생께서 평생 사도(師道)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성리학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여 사도(斯道)를 창도하고 밝히셨으니, 후생 소자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 나아가면 반드시 예법으로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저 정철은 해학하고 방종하였으니 절의로 맑고 담박하며 스스로 고상한 자들을 몹시 시기하는 바가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배절의론(排節義論)을 지어내어 때를 틈타 모함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鄭大淸)은 형이 비명에 돌아가심을 애통해하여 상복을 입고 슬피 울부짖다가 14년 만에 말라 죽게 되었으니,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십여 년 이래로는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하고 인심(人心)을 속이기 어려워 초야의 선비들이 자주 상소를 올려 은혜를 바랐고 조정에서도 대신들이 자주 진언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차자(箚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서로 먼저 죽자고 하는 친구가 조정에 없었고 지성으로 힘써 간쟁(諫爭)하러 나서는 자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통곡이 나올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삼가 생각건대 고명(高明)께서 반드시 함께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며 계실 것인데 그 또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존형께서 서관(庶官)97)의 반열에 있어 손을 쓸 처지가 아님을 알지만, 상서(尙書)의 두 대인(大人)께서 때때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도를 논하는 책임이 있으시니, 형님께서 조용히 그 사이에서 억울한 죄상을 뒤집어쓴 원한을 풀어주신다면 무덤 속에서 감읍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도(斯道)를 붙들고 국가의 명맥을 연장하는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 형님의 깊은 계책을 믿고 성기(聲氣)98)에 의탁할 뿐입니다. 감히 마음속의 일을 진술하였으니 불쌍히 여기고 살펴 주시어 지극한 뜻에 부합되기를 바랍니다. 크게 바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向也, 仍公偶進, 雖得一餉之款, 而壓尊堂上, 不克細話, 穩承緖論, 迨增憒憒. 卽日淸和, 令攝理毖重潤. 年踰五十, 始霑一命, 白首風埃, 有甚心情. 身經大患, 又有老母知舊, 咸謂伸雪階梯, 乃敢輒渝素守, 碌碌奔走, 未知畢竟所成何事, 有愧初服, 良切自悼. 我朝二百年間, 灼然有以探源乎洙泗, 接響乎洛建者, 有幾人哉. 麗末鄭圃隱始闡性理之學,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四先生, 相繼而起道學, 始明於世, 而皆不免奇禍, 其道不得大行, 己卯乙巳士禍慘矣, 尙忍言哉. 斬伐消鑠之餘, 退溪南冥出於其間, 倡起斯文. 聖明初年崇儒重道, 一代賢才, 蔚爲世用, 人皆向善, 世道可觀. 如吾輩亦聞風而興起者, 吾兄之提起此心, 豈非有賴於先正【恐缺遺字】風耶. 嗚呼。己丑之變, 出於搢紳, 如使朝廷諧協, 同懷共憤, 極陳鄭賊欺世之狀, 則豈有延及士類之理. 奸澈挾憾乘時, 陷人於機穽, 旣殺立朝名流, 又殺山野高蹈. 宦海風波, 古亦有之, 安有藏修林下以道學自任者, 幷被弑逆之禍耶. 古今天下, 寃亦深矣. 栗谷雖知人不明, 素心良善, 使斯人當此事, 必無殺戮之禍. 夫豈如奸澈狠愎悻悻者乎. 困齋平生, 以師道自任, 硏精性理之源, 倡明斯道, 後生小子, 咸造其門, 必以禮法自持, 彼其恢諧放曠, 以節義淸淡自高者, 深有所忌克至. 是乃出排節義之說, 乘時傾陷, 至於竄死朔北. 其弟大淸, 痛兄非命, 服喪悲號, 十四年而枯死, 人有秉彝, 孰不動心於斯乎. 十許年來, 公議至嚴, 人心難誣, 草野之士, 累上章乞恩, 朝廷亦有大臣敷奏, 玉堂陳箚. 而却緣無相先相死之友於朝, 不見出血誠力爭者, 可謂長痛哭處也. 竊念高明, 必同病相憐, 其亦念及於此否. 固知尊兄在庶官之列, 無下手地, 尙書兩大人有銓時論道之責, 令兄可從容其間, 以解覆盆之寃, 則豈但爲竁中之感泣, 抑亦扶斯道壽國脈之一大機. 惟吾兄熟計之恃, 有聲氣之托. 敢陳心裏之事, 幸加憐察, 以副至意. 不勝大願. 한백겸 1552~1615.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157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1589년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되고, 다시 벼슬에 기용되었다. 특히 선조가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에 정탁은 한백겸을 재략(才略)이 있는 인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역》에 뛰어났으며,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학술 경향이 있다. 저술로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기전고(箕田考)》와 문집 《구암유고(久菴遺稿)》가 있다.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떠나 처음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의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유학 원문의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학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정주학(程朱學) 원문의 '낙건(洛建)'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희(朱熹), 또는 그들의 학문인 정주학을 가리킨다. 정호와 정이는 낙양(洛陽)에서, 주희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사화.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士林派)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을 말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일어난 사화. 윤형원이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윤임과 함께 했던 사림(士林)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서관(庶官) 6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이르는 말이다. 성기(聲氣)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나온 말로, 뜻이 맞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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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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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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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한음 이덕형99)에게 올린 편지 【1610년】 上領相李漢陰德馨書 【庚戌】 가을 기운이 싸늘한데, 삼가 대감의 기거가 평안하고 강녕하십니까?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 대감의 덕스러운 모습을 흠앙하였던 한결같은 제 마음은 감히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 가문은 불행히도 흉화(凶禍)가 거듭 닥쳐와서 아우의 초상을 치른 지 오래되지 않아 형이 또 세상을 등졌으니 슬프고 참혹하여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연로한 어머니의 노년에 양식을 마련할 길이 없어 구차하게 우관(郵官)100)을 보전하며 보잘것없는 것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가만히 들으니 상국께서 밀어주고 끌어주신 뜻이 매우 크다고 하는데, 용렬한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지극한 뜻에 부응하겠습니까? 한갓 감회만 깊을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원통함을 푸는 일은 이윽고 임금의 뜻을 돌려 이승과 저승을 지극히 감동시켰으며 경사가 사림(士林)에 관계되는 일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 중에 누구인들 흔쾌히 여기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조정의 처리와 결말이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관직만 회복시키고 적몰(籍沒)101)했던 재산만 지급해주는 정도라면 어떻게 민심을 기쁘게 하고 정기가 펼쳐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경함(景涵)【이발(李潑)의 자(字).】 형제는 효성스럽고 공손한 사람인데 대궐문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원통함이 아마도 천지에 다 하였을 것입니다. 곤재(困齋) 선생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항상 스승의 도리로 자임하였으나 함께 잔혹한 수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아우 정대청은 슬픔을 머금고 상복을 입은 채 결국 말라 죽게 되었으니 천고의 고통 중에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수우당(守憂堂) 최영경(崔永慶)은 오로지 기상과 의리를 숭상하여 한결같은 절조를 지닌 고상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포증(褒贈)102)이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곤재 선생께서 평생토록 이룩한 학문의 조예는 한 가지 절조만 지닌 선비와 견줄 수 없거늘, 세상에 도(道)를 아는 자가 없으니 누가 이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생각건대 상공께서 선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사랑하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왔고, 억울함을 슬퍼하며 풀어주심은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절로 나왔으니, 이러한 큰 기회를 맞이하여 마땅히 몸과 마음을 다해 덕을 드러내고 후세에 밝히심이 좋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고명께서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선진(先進)들께서는 쇠락(衰落)하거나 거의 다 돌아가셨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03), 두암(斗巖) 조방(趙垹)104), 사순(士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자(字).】, 숙부(肅夫)105)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자(字).】와 같은 여러 현인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으니 한 시대의 인물들을 돌아보면 아득해지니, 적을 물리쳐 깨끗이 소탕하는 공(功)을 상공께 바라지 않으면 누구에게 기대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시되 빨리 도모하시어 사우(士友)들의 마음에 부응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저처럼 온갖 걱정과 환란 속에서 갖가지 염려들을 덜어내려면 죽음을 각오할 뿐이며 다른 것에는 겨를이 없습니다. 【두 글자가 결락되었다.】 사우(師友)들의 뜻이 중하고 인정상 차마하지 못하였는데 황공하게도 알아주시고 장려해주셔서 마음속에 하나의 떡처럼 맺힌 부분을 직접 토로한 것이니, 다시 바라건대 너그러이 포용하시고 헤아려주십시오. 삼가 절하며 드립니다. 秋氣凉肅, 伏惟台候起居神相休福. 久不聞問, 仰德一心, 不敢少置. 德潤私門, 不幸凶禍荐至, 喪弟未久, 兄又見背, 哀傷慘惻, 不自堪忍. 老母臨年, 辦養無由, 苟保郵官, 碌碌逡巡, 他無足喩者. 仄聞相國推輓之意甚盛, 自惟蹇劣, 將何以副至意? 感懷徒深. 竊念伸寃事, 已得回天, 感極幽明, 慶關士林, 凡有血氣, 孰不欣忭. 第未知朝家處置結末如何, 只復其官, 只給籍沒, 則奚足以快人心, 而伸正氣乎. 景涵【李潑字也】兄弟, 以孝悌之人, 閤門騈首就戮, 其爲寃抑, 窮天極地. 至於困齋, 白首窮經, 常以師道自任, 而並爲毒手所陷. 其弟大淸, 含哀服素, 竟至枯死, 千古之痛, 孰甚於斯. 守愚堂專尙氣義, 不過一節之高士, 而褒贈已極. 困齋平生, 學問造詣, 非一節之可擬, 世無知道者, 誰能識此人. 惟相公好善愛士, 發於赤心, 悼屈伸枉, 出自悃愊, 當此大機會, 宜盡心力, 暴揚其德, 昭揚後世, 可也. 不審高明之秤量如何. 先進凋落殆盡, 如鵝溪斗巖士純【金鶴峯字也】肅夫【金東岡宇顒字也】諸賢, 皆已作古人, 顧瞻一世人物渺然. 摧陷廓淸之功, 非有望於相公而何願. 熟思而亟圖之, 以副士友之心, 幸甚幸甚. 如德潤憂患叢中, 百念消歇, 分死而已, 他無暇.【缺兩字】 師友義重, 情不自忍, 辱荷知獎, 直吐出胸中一餠結, 更冀寬容以裁之. 謹拜以聞.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우관(郵官) 우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로, 역(驛)의 찰방(察訪), 역승(驛丞)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적몰(籍沒) 적록(籍錄)하여 몰수(沒收)하는 일을 말하는데, 중죄인의 재산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을 관가의 문적(文籍)에 적고 모두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 포증(褒贈) 나라에서 포창하여 관직을 추증하는 것이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로, 156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1591년(선조24) 서인 측 대신인 좌의정 정철(鄭澈)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게 만들고, 이를 빌미로 정철,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의 주요 인물들을 대거 축출하고 권력을 잡아 서인으로부터 소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방(趙垹) 1557~1638.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이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현손이다. 숙부(肅夫)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자(字)이다. 호는 동강(東岡)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조식(曹植)의 문인이며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조선시대 병조참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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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랑 목대흠에게 보낸 편지 與睦左郞大欽書 겨울에 남대문 밖으로 나가 형께서 손수 쓰신 편지를 보고 저를 외면하지 않으신 마음에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북에서부터 남쪽까지 길은 멀고 인편도 드물어 편지 한 통 부칠 심부름꾼을 구할 수 없었을 터인데 두터운 마음으로 답장을 주시니, 부끄러움과 서운함이 마음속에 교차하여 사뭇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저는 노모를 봉양하는 데 다급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구차하게 보전하느라 초심을 등졌으니 절로 슬플 뿐입니다. 선배들께서 쇠락하거나 거의 다 사라져 주장할 사람이 없으니, 사문(斯文)은 순치(馴致)106)하고 인심(人心)은 둘로 나뉘며 사론(士論)은 분명치 못합니다. 서로 대립하여 굽히지 않은 근심이 조정이나 재야나 똑같으니 어찌 식자(識者)가 깊이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우리 형님께서 변화의 기미를 깊이 살피셔 야윈 돼지가 진실로 날뛰지 못하게 하신다면107) 국가에 매우 다행한 일이며 우리 도(道)에도 역시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외람되이 보살펴주심을 입어 감히 주제넘은 말을 토로하였으니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冬中出南大門外, 見兄委惠手翰, 荷不外之感. 自北而南, 道遠便稀, 不得倩一書, 以謝厚意, 愧憾交集于中, 殆無以爲諭. 潤迫於奉老, 苟保碌碌, 有負初心, 自悼而已. 先輩凋落殆盡, 無人主張, 斯文馴致, 人心携貳, 士論不明. 角立之患, 朝野同之, 豈非識者之所深懼. 願吾兄深察消長之機, 勿使贏豕孚躑躅, 則國家幸甚, 吾道幸甚. 猥荷知照, 敢吐出位之言, 幸寬財. 謹狀. 순치(馴致) 점차로 나쁜 결과가 오는 형세로 그 조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상(象)〉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곧 이르게 됨은 음이 비로소 얼기 시작함이니, 그 도를 순조로이 점차로 익히어 가서 단단한 얼음에 이르는 것이다.〔履霜堅氷,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氷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야윈 …… 하신다면 《주역》 〈구괘(姤卦) 초육(初六)〉의 "약한 돼지가 날뛰고 싶은 마음이 진실하다.〔羸豕孚躑躅〕"에서 나온 말이다. 이시(羸豕)는 파리한 돼지이고, 척촉(躑躅)은 도약(跳躍)인데, 이시가 비록 강맹(强猛)하지 못하지만 항상 도약할 뜻을 품고 있듯이 소인(小人)이 기세가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항상 군자(君子)를 해치려는 뜻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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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도 孤山圖 소리로 눈 속 학인줄 알겠고향기로 달 아래 매화 알겠네187)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리니어찌 시에 들어올 수 있으랴 叫認雪中鶴香知月下梅不然看不見那得入詩來 소리로……알겠네 송나라 은사 임포(林逋)의 고사를 읊은 것이다. 임포는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막을 짓고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독신으로 은거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서호처사(西湖處士) 혹은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일컬었다. 《宋史 林逋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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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절구 七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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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에 이르다 2수 到慶源【二首】 이곳에 세 번 병마절도사 따라 왔었는데지금 오니 도리어 고향 생각 나네내일 아침 어찌 차마 남쪽으로 돌아갈까여전히 세류영238)에 피리소리 들리네밝은 달은 사람 따라 만 리 길을 가니한 조각 달은 두 고향 다 비추겠지239)고향에선 다만 오늘 밤 달빛만 보일 테니복파영240)에도 나누어 비추는지 어찌 알랴 此地三從閫帥行今來却有故鄕情明朝何忍南歸路依舊鳴笳細柳營明月隨人萬里行氷輪一片兩鄕情故國但看今夜色豈知分照伏波營 세류영(細柳營) 세류영은 한나라의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군영으로, 한 문제(漢文帝)가 시찰을 왔을 때에도 군사들이 장군의 명령만 따르면서 황제를 제지한 고사로 유명한데, 이후 군기가 엄한 진영을 뜻하게 되었다. 《史記 絳侯周勃世家》 한……비추겠지 정문부가 현재 있는 경원과 고향에 모두 달이 비출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1수에서 경원이 마치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복파영(伏波營) 원정 간 사람이 머물러 있는 군영을 상징한다. 당나라 심여균(沈如筠)은 〈규원(閨怨)〉 시에 "외로운 달그림자를 따라, 복파영에 그 빛을 비춰줬으면.[願隨孤月影, 流照伏波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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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의 원운을 부기하다 附德哉韻 장군은 병 없는데 나는 걸음 더디고장군은 무정한데 나는 그리움 있네적막한 객방에서 매우 초췌해졌으니행영 비추는 외로운 달 따라가고 싶어라 將軍無疾我遲行將是無情我有情寥落客房憔悴盡願隨孤月照行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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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275)에서 유인길을 그리워하다 東昌 有懷柳寅吉 날이면 날마다 서쪽으로 가고 또 가니어지로운 이별의 심사 괴롭게도 다스리기 어렵구나분명 이는 단지 하교276)의 이별이니어찌 꿈에서 벗을 찾아 헤맬 뿐이랴 日日行行西復西參差離思苦難齊分明只是河橋別豈獨心知夢不迷 동창(東昌)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에 갈 때 경유하던 역(驛)의 하나인 동창보(東昌堡)로, 일명 동창포(東昌鋪)라고도 한다. 《增補文獻備考 卷177 交聘考7 附朝聘雜儀 燕京路程》 하교(河橋) 하량(河梁)과 같은 말로 황하의 다리인데, 아쉬운 이별의 장소를 뜻한다. 당나라 송지문(宋之問)의 〈별두심언(別杜審言)〉 시에 "하수 다리에서 전송도 못하다니, 강가 나무에 멀리 정이 어렸네.[河橋不相送, 江樹遠含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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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277) 강가에서 먼저 건너가는 천추사 일행을 전송하다 龍灣江上 送千秋使一行先渡 떠나가 점점 아득해지는 그대 바라보니문득 이별한 혼 반쯤 사라지는 듯하여라나머지 절반의 혼이 남아 오래 견딜 수 있으니이곳 주민이 내일 아침 또 나를 전송하리라 眼看君去漸遙遙斗覺離魂一半銷餘一半存能耐久居人送我又明朝 용만(龍灣) 평안도 의주(義州)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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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상 우복 정경세108)에게 올린 편지 上巡相鄭愚伏經世書 작별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떠난 지 여러 세월이 지났는데 온통 대감의 덕을 우러르는 제 마음은 감히 조금도 그치질 않습니다. 지금 늦더위로 여전히 괴로운데, 삼가 시절에 마땅히 순응하며 기거는 강녕하십니까?저는 몸조리에 어두워 질병이 번갈아 침투하였는데 다행히 조금 나아져 몸을 이끌고 역(驛)으로 돌아와 적막한 우정(郵亭 역관)에서 예전에 했던 공부를 복습하고 연구하고 있다가 지우(知遇)109)의 은혜에 감격하였으나 달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사색하여 한 가지 어리석은 생각을 얻었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오니, 별지에 기록한 것을 부디 한 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바라건대 너그럽게 받아주시고 헤아려주십시오. 삼가 격식을 갖추지 못한 채 편지를 드립니다.별지지난번 그대110)에게 인사드렸을 때 합하(閤下)를 처음 뵈었습니다. 합하께서는 공문서로 일이 많아 바쁘신 중에도 주자의 서책을 읽고 의리(義理)를 궁구하며 토론하시니 이는 이른바 옛 사람이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한다.111)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앙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칭송하면서 우러러보게 하여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글을 써서 즐거움을 취할 자료를 갖추어보았는데, 제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니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무릇 사람이 천지 사이에 서서 삼재(三才)112)에 참여한 까닭은 마음이 한 몸을 주재하여 온갖 변화에 수작(酬酌)하며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을 화육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113) 그러나 마음이라는 물건은 홀연히 나갔다 홀연히 들어오고, 있는 듯 하면서 없는 듯 하며, 연못에 빠졌다가도 하늘로 날아오르고,114) 불처럼 뜨겁다가도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리니115) 힘써 제어할 수 없고 억지로 제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오사(五事)116)를 공경히 하고 사물(四勿)117)을 지켜서 겉으로 희롱하는 것에 방탕하게 현혹되지 말고, 안으로 살펴서 구차하게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動)과 정(靜)을 아울러 기르고 표(表)와 리(裏)에 간극을 없게 하며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118) 제어하여 기(氣)가 개인적인 사욕을 쫓지 않게 하며, 성찰하고 깨달아 일이 반드시 의리를 따르게 하여 수작(酬酢 응대(應對))하고 참여해 돕는다면 어찌 가는 곳마다 마땅함을 얻지 않겠습니까.그러나 사물에는 선악의 차이가 있고 일에는 옳고 그름의 구별이 있으니, 만약 학문(學問)과 사변(思辨)의 공부에 우선적으로 힘쓰지 않고 천리와 인욕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바가 다만 지엽적인 일에 자질구레하게 얽매입니다. 비록 혹시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우연히 도리에 합치되더라도 그 과정과 근본은 진실로 성현의 모양(模樣)이 아니니 어찌 천지와 그 큼을 함께하여 사물의 마땅히 그러함을 따르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학(大學)》의 가르침은 반드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먼저 한 뒤에 성의(誠意), 정심(正心)하고, 수신(修身)한 이후에 미루어서 제가(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미치는 것이니,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119)】의 소재를 먼저 알게 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땅함으로 채워야 합니다. 삼가 그 염려하는【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120)】 마음을 항상 육체에 보존하고 몸이 한쪽으로 빠지지 않게 한 이후에 집안과 국가와 천하가 이로써 제자리에 놓이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학문이며, 자기를 이루고 남을 이루어주는 도(道)입니다. 성인과의 거리가 비록 멀더라도 남아 있는 경전은 아직 존재하고 있으니 그 책을 읽고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어찌하여 옛 사람들에게 미칠 수 없겠습니까.우리 조선 200년간 유학의 근원을 밝게 탐구하고 정주학을 계승한 이가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성리학을 처음 열었으나 입언(立言)121)의 공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원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다섯 분의 선생께서 서로 계승하여 도학을 일으켜 세상에 크게 밝혔는데, 모두 때를 만나지 못하여 그 도가 크게 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유풍과 남은 공렬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근세의 풍습이 경박스럽고 거짓되어 갑자기 20년 전의 규모로 변하여 예법을 천하게 여겨 버려두고 오로지 부화(浮華)한 것만을 일삼아서 말 잘하는 것은 숭상하나 덕은 숭상하지 않으며, 이익은 아나 의리는 알지 못하니, 인심이 둘로 나뉘고 시론(時論)이 분열된 것이 어찌 괴이하게 여기기에 족하겠습니까. 선배들께서 쇠락하고 다 돌아가셔서 주맹(主盟 주장(主掌))이 없으니 한 세대를 돌아보아도 인물이 묘연한데, 붕당은 나뉘어 대립하면서 오직 이익만 추구하고 세도(世道)는 오랑캐와 금수(禽獸)로 귀결되니, 오히려 어떻게 유가의 대업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오직 합하께서 지위가 높으신데 독서를 그만두지 않으시고, 지혜가 밝은데도 겸양의 덕에 더욱 힘쓰시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확고하고 세상을 붙들려는 뜻에 독실하시니, 이는 모두 부귀하고 현달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나 오직 합하께서만 능하시므로 여기에서 유래한 연원을 볼 수 있고 반드시 남다른 명성이 있습니다. 스스로 책임을 중히 여기고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니 거의 속세에서 견줄 바가 없어 구구한 마음으로 경탄하며 제 자신은 하루도 마음속이 석연(釋然)치 않았습니다. 이에 미치광이나 소경[妄靈]의 말로 시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던 정성을 대신하고, 또한 은혜로 보살펴 주신 데 대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합니다. 삼가 살펴보시고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어질고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독서에 공력을 더 가하시며,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다시금 겸허함에 힘쓰시며, 의리를 살펴 사물에 처하시고, 눈과 귀를 넓혀 시비(是非)를 살피시며 사람들의 폄훼나 칭찬으로 평생의 정해진 뜻을 바꾸지 말고 자신의 이익과 해로움으로 천하의 공변된 도(道)를 폐하지 않으시면, 내 마음을 제어할 수 있어 허물이 없어지고 들릴 만한 것이 있을 것이며, 천리(天理)를 회복할 수 있어서 더 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니, 저승에서는 반드시 말없이 도움이 있을 것이고 이승에서는 반드시 드러나는 도움이 있을 것이며,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키고 올바름으로 사악함을 제압하며,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나란히 서는 책임을 거의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합하의 덕은 한 집안의 덕이 아니라 천하의 큰 덕이 되며, 합하의 영광은 한때의 영광이 아니라 만세토록 길이 전해지는 영광이 되리니, 원컨대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유념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拜違命席, 屢轉駒陰, 一心仰德, 不敢少置. 目今老暑猶苦, 伏惟順時之宜, 起居休吉. 某昧於攝理, 疾病軼侵, 幸得少蘇, 扶曳還驛, 寂廖郵亭, 溫繹舊學, 感蒙知遇, 稱效無他. 思以一得之愚,冀其萬一之補, 別紙所記, 幸賜一覽. 伏惟寬容以裁之. 謹狀不備.別紙向也得拜, 下風創見. 閤下於簿牒倥傯中, 讀朱子書, 窮討義理, 是所謂古人仕優之學. 令人欽聳, 不覺讚仰, 久而不能忘也. 因爲之說, 以備樂取之資. 愚不自揆, 竊冀少垂察焉. 夫人之所以立乎兩間, 而參爲三才者, 以其心能主宰一身, 酬酢萬變, 而可以位天地贊化育也. 然而心之爲物, 忽出忽入, 若存若亡, 淵淪而天飛, 焦火而凝氷, 不可以力而御, 不可以强而制. 唯能敬用五事, 守以四勿, 勿蕩眩於外玩, 勿苟恕於內省. 動靜交養。表裡無間, 操存攝伏而氣不逐於己私, 省發警悟而事必循於義理, 以之酬酢, 以之參贊, 何所往而不得其當者乎. 然而物有善惡之殊, 事有是非之別, 若不先務學問思辨之功, 而不知天理人欲之所在, 則寅夕所爲, 徒規規於事爲之末. 雖或一言一行, 偶合於道, 而其田地本領, 則固非聖賢模樣, 安能與天地同其大, 而順事物之當然乎. 是以大學之敎, 必先致知格物而后, 誠意正心, 修身而后, 推而及於齊治平者, 欲使學者, 先知【缺二三字】之所在, 而實其好惡之當. 謹其念慮【缺三字】心常存於軀殼, 身不陷於一偏而后, 家國天下以是而措之耳. 此所謂明德新民之學, 而成己成物之道也. 去聖雖遠, 遺經尙存, 讀其書以治其心, 則何古人之不可及哉. 我朝二百年間, 灼然有以探源乎洙泗, 接響乎洛建者有幾. 麗末鄭圃隱, 始闡性理之學, 而不見立言之功.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退溪五先生, 相繼而起道學, 大明於世, 而皆不遇時, 其道不得大行, 其遺風餘烈, 猶有存者. 近世風習澆訛, 頓變二十年前規模, 賤棄禮法, 專事浮華, 尙言而不尙德, 知利而不知義, 人心之携貳, 時論之分裂, 何足怪也. 先進凋落殆盡, 主盟無人, 顧瞻一世, 人物渺然. 朋分角立, 唯利是趨驅, 世道於夷狄禽獸之歸, 尙奚足與論儒家之大業乎. 惟閤下, 位高而不廢讀書, 智明而益懋謙德, 斷斷乎憂國之念, 眷眷乎扶世之志, 此皆貴達所不能, 而惟明公能之, 於此可以見淵源所自, 必有異聞. 自任之重, 逈出常情, 殆非流俗之所可擬. 區區敬歎, 自不能一日釋然於中也. 玆將狂瞽之言, 以代詩人授粲之誠, 且以效其恩顧之萬一. 伏願垂察留意. 不自賢智而加功讀書, 不自矜滿而更勉謙虛, 審義理而處事物, 廣聰明而察是非, 勿以人之毁譽而易平生之定志, 勿以己之利害而廢天下之公道, 則吾心可制而無過可聞, 天理可復而無已可克, 幽必有黙佑, 明必有顯比. 誠足以格天, 正足以壓邪, 參三竝立之責, 庶可塞矣. 然則閤下之德, 非一家之德而爲天下之大德, 閤下之榮, 非一時之榮而爲萬世之長榮, 願明公熟計之加之意, 千萬幸甚. 정경세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숙(文肅)에서 문장(文莊)으로 개시(改諡)되었다. 1586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이 되었고,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과 반목 끝에 삭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발탁되어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경전에 밝았고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지우(知遇) 인격(人格)이나 학식(學識)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해 주는 것을 뜻한다. 그대 원문의 '하풍(下風)'은 자신이 상대방의 교화 아래에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상대방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옛 사람은 …… 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 삼재(三才) 우주를 구성하는 세 가지 바탕, 곧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말한다. 천지가 …… 때문입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서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 하였는데, 집주(集註)에, 이것을 일러 학문(學問)의 극공(極功)이요 성인(聖人)의 능사(能事)라고 하였다. '參天地 贊化育'은 '參贊化育'의 의미이다. 즉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돕는다는 뜻으로, 제왕(帝王)의 덕화(德化)가 자연과 부합됨을 일컫는 말이다. 연못에 …… 날아오르고 마음의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한다. 《주자시집》 권4 〈재거감흥(齋居感興)〉에 "인심의 오묘함은 예측할 수 없어, 드나들 때에 기를 타고 나오네. 얼음처럼 얼었다가 불처럼 타오르며, 연못에 빠졌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네.〔人心妙不測, 出入乘氣機. 凝冰亦焦火, 淵淪復天飛.〕"라고 하였다. 불처럼 …… 얼어버리니 《장자》에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뜨거워지면 불처럼 타올라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차가워지면 얼음장처럼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其熱焦火 其寒凝冰]"고 한 말이 나온다. 희로애락 등 인간의 마음속에 이는 번뇌(煩惱)를 뜻하는 표현이다. 오사(五事)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이다. 《서경》 〈홍범(洪範)〉에 "오사(五事)이니, 첫째는 모(貌), 둘째는 언(言), 셋째는 시(視), 넷째는 청(聽), 다섯째는 사(思)이다."라고 하였는데 외모는 공손히, 언어는 조리 있게, 보는 것은 밝아야하며, 듣는 것은 분명해야하며, 생각은 지혜로워한다고 했다. 사물(四勿)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論語集註 顔淵》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원문의 '조존(操存)'은 마음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공자가 이르기를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를 향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하였다."라고 한 데서 나왔다. 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 《우득록(愚得錄)》 〈與崔監司書〉에 의거하여 '선악(善惡)' 두 글자가 결락한 것으로 보인다. 두어 글자가 결락하였다 《우득록(愚得錄)》 〈與崔監司書〉에 의거하여 '지발이(之發而)' 세 글자가 결락한 것으로 보인다. 입언(立言)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하거나 저술 또는 불후의 학설을 남긴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 조에 "가장 뛰어난 것은 덕을 세움이고,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며, 그 다음은 후세에 전할 만한 말을 남겨서, 비록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면 이를 일컬어 영원히 썩지 않는다고 한다.〔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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