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유생이 순찰사 민공에게 올리는 글 鏡城儒生呈巡察使閔公書 경성에 사는 전 찰방(察訪) 박흥종(朴興宗)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서 합하에게 백 번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흉적을 제거하고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신하의 대의이고 충렬을 드러내고 정려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은전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 때 무고를 당해 흉적이 이미 제거되고 난이 이미 평정되었으나 대의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구천에서 원망을 안고 있는데 충렬이 드러나고 정려되지 않아 아름다운 은전이 영원히 베풀어 지지 않고 있으니, 이에 인인(仁人)과 군자가 길이 탄식하고 깊이 슬퍼하면서 반드시 밝게 드날린 이후에야 그만두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순상(巡相) 합하께서 평사(評事) 합하와 서로 의논하여 고 평사 정문부(鄭文孚) 공을 위해 본부(本府) 어란리(禦亂里)에 사당을 세우고 아울려 같은 시기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전투에서 죽은 유생을 배향하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인인과 군자의 마음에 해당하며 풍교와 관계된 더할 수 없이 중대하고 훌륭한 일입니다.저희들은 변방에서 생장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받은 본성은 어리석지 몽매하지 않아 매번 정공의 일이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일찍이 탄식하며 대단히 한스럽게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이에 사당을 세워 제향을 지내 경모하는 마음을 부쳐보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었으며, 지난 번 관찰사도 또한 이 일을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지금 우리 합하께서 결단을 내려 이 일을 행하고서 조정에 알려 더욱 빛내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너무나 다행하게도 오늘날 훌륭한 일을 보게 되었으며 숙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인하여 삼가 생각해보니, 전대의 충현을 위하여 사우를 건립하는 일은 대부분 이 지방 인사들의 공론이 일제히 일어난 것에 말미암았는데, 간혹 방백과 고을 수령 가운데 의를 좋아하고 선을 존모하는 자들이 주장하면 그 일이 곧바로 성취되었습니다. 애초에 반드시 조정에 품의하여 허락을 기다린 뒤에 바야흐로 그 일을 성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조정이란 어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뒤섞여 있어 의논이 갈래가 많으니, 이와 같은 일은 의견이 통일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허락을 기다린 뒤에 그 일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저희들은 천하와 국내에 고금의 사원이 대단히 많게 되는 성대함은 있지 않을 것이라 저어됩니다.지금은 태평시대이니, 참으로 이와 같은 염려는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정공의 평소 사람됨이 준엄하고 강직하여 세상 사람들의 시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성취한 공훈은 또한 타인에 의해 가려지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인데, 하물며 말년에 역옥(逆獄)에 연좌되어 끝내 억울하게 죽는 것을 스스로 면치 못하였으니 또한 어찌 시기한 자가 많고 구원하는 자는 적은 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합하께서 이 일로 조정에 알렸을 때 혹시 다른 의견이 생긴다면 조정에서 이 청을 인준할 것은 기필할 수 없으며, 조정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장차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그 형세는 아마도 조정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억지로 그 일을 시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평소 마음에 담아두고 드러내지 못하였다가 다행하게도 합하를 만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것이 또다시 헛수고로 돌아가게 되며 영원히 한 지방 천년의 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은 비록 저희들의 지나친 생각이지만 그러나 일을 할 때는 처음 시작을 도모하는 것이 귀하니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저희들이 듣건대 평사의 일에 대해 합하의 선친 상국 택당공(澤堂公)께서 일찍이 태사의 붓을 잡고서 〈선조묘무사(宣廟朝誣史)〉13)를 삭제하여 바로잡으니, 세상의 의논이 모두 그 공변됨을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평사가 되었을 때 일도(一道)를 두루 다니면서 공의(公議)를 채방하여 정공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정공과는 막연히 서로 친분이 없다고 하니 그것이 지극히 공변된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또한 일찍이 이 일을 기록한 바가 있어서 지금 택당께서 기록한 것과 비교해보니 합치하지 않음이 없는데, 다만 피차간에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최유해(崔有海) 공이 일찍이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도 또한 본부(本府)의 사적을 채방하여 정공과 지역 안의 의병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자못 자상하게 기록하였는데, 합하께서 만약 가져다가 보신다면 당시 공렬의 뛰어남과 여론의 공정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공론이 사람의 마음에 꽉 막히어 오래 지나도 발하지 못하다가 오늘 합하께서 순행하는 날에 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사람을 기다려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우리 지방 사람들의 귀와 눈을 통해 얻고 선배의 기록과 대조하고 다른 고을의 사적에 증험한 것이 부절을 맞춘 것처럼 합치될 뿐만이 아니며, 일도(一道) 여론의 공정함도 또한 자세히 알게 되어 의심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변방 지역은 항상 안정되지 않으니 훗날 뜻하지 않은 변란을 예측할 수 없는데, 전대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이 무고를 당하여 그 공을 표창한 바가 없게 되었다가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부로들이 모두 죽어서 그 사실이 사라져서 영원히 없어지게 된다면, 북관(北關) 일도(一道)의 일이 잘 되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국가에서 세상 사람을 면려하고 우둔한 백성을 고무시키며 교화를 수립하는 도에 대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에 저희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공론이 일제히 일어난 지금을 이용하여 빨리 그 일을 시행하여서 우선 어란리에 사우를 세우고, 그 후에 합하께서 조정에 보고하여 혹 사당의 현판을 청하거나 혹은 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뒤미처 포상하라고 청한다면 일에 차례가 있어서 성공하지 못할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저희들은 모두 곤궁한 선비라서 재력을 모아 공사비용을 댈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합하께서 본부의 영미(營米) 약간 석과 곡식 삼백 석을 내어주어 비용으로 대 주신다면 높다란 묘우(廟宇)를 장차 짧은 시일 안에 지을 것입니다. 또한 북방의 백성들은 창고가 너무 많은 것에 고통을 받고 있으니 쌀을 내가고 들이는 사이에 도리어 백성들을 힘들게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이러한 일에 베풀어주시는 것을 합하께서는 아끼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지은 《의려록(義旅錄)》 한 책을 아울러 바쳐서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니, 저희들은 매우 황공하고 격앙된 마음을 놓을 길이 없으니 삼가 백번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저희들이 또 삼가 생각건대, 묘우를 이윽고 완성한 뒤에 지킬 이가 없어서 두어 칸의 건물이 황야 가운데 쇠락해 갈 것이니, 아니 도리어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유현을 제향 하는데 비교할 것이 아니니 비록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더라도 만약 묘우의 근처에 서당을 세워 마을의 유생들이 그 안에서 책을 읽게 하고 인하여 사당지기 2~3호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서당까지 아울러 지키게 한다면 묘우와 서당이 서로 힘입어 조심스럽게 지키지 못할까 하는 염려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을의 선비들이 많으나 읍의 관청까지는 하루 정도의 걸리는 먼 거리로 항상 향교에 가서 거처하면서 학업을 익힐 수 없었는데, 이제 사당에 제향 하는 일로 인하여 아울러 서당까지 도모한다면 실로 두 가지에 좋은 일입니다. 합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鏡城居前察訪朴興宗等, 謹齋沐百拜上書于閤下。伏以除兇靖亂, 臣子之大義, 顯忠旌烈, 國家之令典, 而如或被誣一時, 兇旣除亂旣靖, 而大義未彰, 抱冤九泉, 忠未顯烈未旌, 而令典永闕, 則此仁人君子之所以永歎深悲, 必欲其昭揭而後己者也。今我巡相閤下與評事閤下相議, 欲爲故評事鄭公文孚, 立廟於本府禦亂里, 兼以同時倡義死事之儒生配之, 此政所謂仁人君子之心, 而關係風敎莫大之盛擧也。某等生在邊陲, 無所知識。然秉彝之天, 有不容昧者, 每念鄭公事不大彰著於世, 未嘗不歎息痛恨, 思欲立廟享祀, 以寓景慕之誠, 有素矣, 而往者觀風之使, 亦有欲就此事而未果者矣。今我閤下斷然爲此擧, 至欲聞于朝廷, 以增重光耀。某等何幸, 今日得覩盛事而副宿願也。仍竊伏念, 凡爲前代忠賢, 建立祠宇之擧, 多由於鄕土人士公議齊發, 或方伯邑宰之好義慕善者, 有所主張, 則其事便就矣。初不必稟命于朝廷, 待其許, 而後方就其事也。蓋朝廷者, 賢否雜進, 議論多岐, 如此等事, 未易歸一。必欲待其許而就其事, 則某等恐天下國內, 古今祠院, 未有許多之盛也。今時則聖朝也, 固無如此之慮, 而第竊聞鄭公平生爲人峭直, 世人多有媢嫉者云。其所就功業, 亦被掩覆於人者, 爲此故也。況其末年, 絓於逆獄, 終於冤死, 其不能自免, 又安知其不由於媢嫉者多, 而救護者鮮而然耶。 然則今日閤下之以此事聞于朝廷也, 或有異議生焉, 則朝廷之準斯請, 有未可必, 而朝廷若不許, 則未知將何以處之耶。其勢恐不能違朝命, 而強擧其事。然則某等平生蘊畜而不能發, 幸遇閤下而得遂其願者, 又恐墮於虛地, 而永爲一邦千載之恨也。此雖某等之過計, 然作事貴於謀始, 不可不念及於此也。某等竊聞評事, 閤下之先相國澤堂公, 曾秉太史之筆, 刊正宣廟朝誣史, 世議咸稱其公云, 而曾爲評事時, 遍行一道, 採訪公議, 記鄭公事甚詳, 而於鄭公邈然無相知之分云。其爲至公之筆可知, 而某等亦嘗以此事, 有所記錄, 今以澤堂所記比較, 則無不合, 而但有彼此詳略之殊耳。至於崔公有海曾牧吉州時, 亦採本府事蹟, 記鄭公及境內從義人事頗詳, 閤下若取而觀之, 可知當時功烈之偉, 而物論之公也。只是公論鬱於人心, 久而未發, 發於今日閤下巡宣之日, 此豈非天意有俟而然耶。此事得之於吾土耳目, 質之於先輩記錄, 驗之於他州事蹟, 不啻如符契之合, 而一道物論之公, 亦可以詳悉而無疑耳。邊地未能常安, 日後不虞之變, 有不可測, 而前代立大功業之人, 使之被誣枉而無所表章, 時代漸遠, 父老盡喪, 消沈泯沒, 歸於永熄而已, 則北關一道事, 有不足言, 其於國家勵世磨鈍, 樹立風聲之道, 何如也。玆以某等愚慮, 莫如乘此公論齊奮之日, 亟擧其事, 先立廟宇於禦亂里, 閤下從而聞于朝廷, 或請廟額, 或請追褒從義之人, 則事有次第, 而無不成之慮矣。某等皆是窮儒, 不能收合財力, 以給功費。若蒙閤下捐給本府營米如干石穀三百石, 以資其需用, 則巍然廟宇, 將不日而成矣。且北路之民, 苦於倉積之太多, 糶糴之際, 反爲病民之資也久矣。今於此等事, 有所施給, 想惟閤下之無所惜也。某等所嘗著《義旅錄》一編, 幷此呈納, 以備參考, 某等無任惶恐激昂之至, 謹百拜上書。某等抑又伏念, 廟宇旣成之後, 無以守護, 數間屋舍, 寥落於荒野之中, 則無乃反爲傷心之歸乎。此擧非如享祀儒賢之比, 雖不可設爲書院, 若置書堂於廟宇近處, 使里中儒生讀書其中, 而仍置廟直二三戶, 使之兼護書堂, 則廟宇書堂, 可以相賴而無不謹守護之慮矣。此里士子衆多, 而距邑治一日程而遠, 常時不能來處鄕校而隷業, 今因廟享之擧, 兼謀此事, 則實爲兩幸, 閤下以爲如何也。 선묘조무사(宣廟朝誣史)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상차(上箚)하면서 선조 시기의 역사는 광해군의 권신 기자헌(奇自獻), 이이첨(李爾瞻)이 실록 등을 편찬하여 역사적 사실과 인물의 실적을 편파적으로 기술한 점을 지적하며, 사고(史庫)의 유문(遺文) 및 야록(野錄)의 가전(家傳) 등을 참고하여 바로잡아 편찬하도록 주청하였으며 이식이 직접 찬술하였다. 《國朝寶鑑 仁祖 19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