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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 송□□ 을 축하하는 문서 賀咸鏡道觀察兼巡察使宋 名缺 狀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다스림을 생각하는 법국운이 회태의 시기147)를 만났어라.겨울이 지나 봄이 오니천도는 건인의 달148)이 되었네.북쪽 땅으로 매서운 추위를 보내니남양에 아름다운 기운이 더하였어라.삼가 생각건대,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고문과 무를 구비하였네.모친의 사랑 임금의 은총에색동옷 입고 황금 띠를 찼다네.지방관과 군용은감당149)에 집을 짓고 세류영150)에 주둔하리라.삼양의 절기151)에만복을 함께 하리라.삼가 생각건대, 다행이도 유문의 하늘152)을 이면서정령위의 고을153)을 지키게 되었네.오두미를 받으니비록 도잠이 허리를 굽힌 것154)처럼 부끄럽지만한 지역의 풍속을 보니송경의 다리155)를 만난 것 같아 기쁘네. 亂極思治國運當回泰之期冬後有春天道屬建寅之月送寒威於北陸增佳氣於南陽伏惟忠孝雙全文武俱備母恩君寵着班衣而帶黃金使華軍容舍甘棠而屯細柳三陽之節萬福攸同伏念幸荷孺文之天忝守令威之郡受五斗米雖愧陶潛之折腰觀一方風欣逢宋璟之有脚 회태의 시기 비색(否塞)한 운세가 끝나고 태평한 운세가 돌아온다는 뜻으로, '태(泰)'는 《주역》의 괘명(卦名)인데 건하곤상(乾下坤上)으로 천지 음양의 기운이 조화되어 만물이 태평해지는 상(象)이다. 건인의 달 고대의 역법(曆法)에서 북두성(北斗星)의 두병(斗柄)이 십이진(十二辰) 가운데 인방(寅方)을 가리키는 때를 말한다. 하(夏)나라의 역법에서는 이때를 정월로 삼았는바, 후대에는 정월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감당 《시경 소남(召南)》 〈감당(甘棠)〉에 "무성한 팥배나무를, 자르고 베지 말라. 소백이 초막으로 삼으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하였다. 이는 주나라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며 문왕의 정교(政敎)를 펼쳤는데,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자주 쉬던 감당 나무를 베지 말자며 읊은 노래이다. 흔히 지방장관의 치덕(治德)을 칭송할 때 '감당'이란 말을 사용한다. 세류영 세류영 : 한 문제(漢文帝)가 여러 군영(軍營)을 순찰하는 중, 다른 곳에서는 모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지만, 주 아부(周亞夫)의 세류영(細柳營)에 갔을 때는, 군문 도위(軍門都尉)가 장군의 영(令)이 없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절(使節)을 보내어 주 아부에게 통한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군중(軍中)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한다고 하여, 문제가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다녔고, 본영으로 가 주 아부와 군례로 서로 인사한 다음 돌아갔는데, 문제는 아부 군중의 이러한 일을 도리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ㆍ《서한기(西漢記)》. 삼양의 절기 삼양(三陽)의 달인 정월을 이름. 《주역(周易)》에서 정월(正月)이 태괘(泰卦)가 되는데, 태괘는 삼양(三陽)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른다. 유문의 하늘 유문은 후한(後漢) 소장(蘇章)의 자(字)이다. 그가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었을 때 친구가 청하 태수(淸河太守)로 있었는데, 소장은 그의 죄를 알고서 불러 술을 마시며 즐겁게 즐긴 뒤에 "오늘 저녁 소유문이 옛 친구와 술을 마시는 것은 사은(私恩)이고, 내일 기주 자사로서 일 처리를 하는 것은 공법(公法)이다."라고 한 일을 가리킨다. 태수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하늘이 하나[一天]뿐이지만 나만은 하늘이 둘[二天]이다." 하였다. 그다음 날 소장이 친구의 죄를 들어 징계하니, 온 경내가 숙연해졌다. 《後漢書 卷61 蘇章列傳》 정령위의 고을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된 뒤, 천 년이 지나 학으로 변신하여 요동 성문 앞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았다. 《搜神後記 卷1》 함경도 지방이 요동에 가까워 이렇게 말하였다. 도잠이……것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으로 있을 적에, 군(郡)에서 파견한 독우(督郵)의 시찰을 받게 되었는데,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도잠이 탄식하면서 "내가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굽실거릴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라고 하고는, 즉시 수령의 인끈을 풀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94 陶潛列傳》 송경의 다리 당(唐)나라 송경(宋璟)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봄'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開元天寶遺事 有脚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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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문 檄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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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라는 내용으로 함경도의 열읍의 수령과 사민들에게 알리는 격문 倡義討倭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檄 -이 글은 충추 허창의 집에서 얻었다. 대개 허창의 고조인 부사 허제는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선생의 이 격문과 〈배한신대장제(拜韓信大將制)〉를 썼는데, 그의 자손들이 보배로 여겨 전해 내려왔다. 작품의 끝에 쓰기를 '정 아무개의 두 번째 격문.'이라고 했으니, 첫 번째 격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서 아울러 간행하여 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못 한스럽다.-대개 듣건대, 충신은 몸을 바쳐 주군에게 보답하고지사는 때를 살펴 공을 도모하네.시험 삼아 보건대, 성조의 신민 가운데그 누가 어지러운 시기에 충성을 바쳤는가.생각해보면, 나라를 세운 지 이백 여 년에왕위를 전한 것이 열한 임금이네.은나라 선대 철왕보다 많아대대로 덕을 잃지 않았으며주나라의 문교를 숭상하여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네.예악의 문치라전쟁이 멈추었네.어찌 생각이나 했으리, 바다 건너 왜구가감히 우리나라를 업신여길 줄을.처음에는 통신사를 보낸다는 감언을 하였고끝내는 길을 빌린다는 어려운 청156)을 내새웠어라.교린은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상국을 범하는 것을 어찌 따르리오.우리가 전쟁을 부른 것이 아니오저들이 독을 퍼트린 것이라.이에 온 나라를 동원하여이에 우리 영토를 침범하였네.만여 척의 배를 연결하니긴 창이 햇빛이 반짝였어라.접전을 벌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영가 연간에 남쪽으로 피난 간 것157)처럼 참혹하고-도(渡)는 거성으로 아마도 옮겨간다는 의미나 달아난다는 의미인데, 자세하지 않다.-파죽지세로 도성까지 몰아닥치니천보 연간에 서쪽으로 파천한 것158)과 흡사하였네.도정에서 군대를 버리고 간 이보가 있었지만159)옹구에서 병사를 일으킨 장순160)은 없어라.방태위161)는 여러 왕자를 세우자는 계책을 아뢰어왕자를 여러 도에 나눠 보냈네.악소보162)는 일찍 태자를 정하자는 계책을 올려동궁에 민심을 모았네.우리 북방은왕업이 일어난 곳이요천험의 요새라.백성들은 아들 같이 사랑해주는 은덕을 품어서응당 상나라를 떠받드는 것163)과 같이 하네.변방 사람들이 알을 품어주는 듯한 사랑에 감동하니어찌 본조를 잊으랴.지리를 보면 높은 산에 험준한 고개요물산을 보면 건장한 말과 용맹한 사내라.지금 장성한 왕자가 와 있으니늙은 재상이 보호하고 있네.곽자의164)는 북방의 정병을 거느리고 있으니감히 근왕에 게으르랴.충사도165)는 산서의 건아를 거느렸으니응당 먼저 적에게 내달려 가야 하네.한번 북령의 험지를 잃고 나서서쪽 길이 통하지 않아소릉의 규합166)이 없어졌으니제후 그 누구와 함께 걱정하랴.하양에서 임금 위해 달려감이 없으니167)관군의 지킴을 내 어디에서 구할까.진의중은 오늘밤 도망을 갔고168)송의 화원은 한밤중 들어가 힘든 상황을 고하였네.169)말을 하고보니 통곡하고픈데저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고.성상께서 어진 이를 고르고 능력 있는 이에게 일을 맡겨문무를 숭상하였으니나라 망하는 경계를오히려 태평한 시절에 다하였으며병사를 잘 다스리라170)는 가르침을항상 평안한 때에 강론하였네.장차 하늘이 우리 국운을 끊으려 함인가아니면 사람의 본성이 절로 그 떳떳함을 잃은 것인가.눈을 들어 바라보니 위국의 산하가참으로 보배 아님을 알겠어라.171)마음이 아프니, 당나라의 번진이어찌 신하가 되리오.공들은 혹 왕실의 지친이요혹 훈벌의 자손이며혹은 재상의 반열에서 관찰사가 되었고혹은 시종에서 지방관의 부신을 찼네.고관으로 총애하니낭심172) 같은 충신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오두터운 봉록을 하사하니주여숙173)을 알지 못했던 것과는 다르네.황금 인장 옆에 차고붉은 깃발 세우니그보다 큰 영광이 없어라.붉은 마음 열어서흰 칼날도 무릅쓰니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너희들 군민과 그 부로들에게 효유하노니선대왕들의 유택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반드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 하노라.군신간의 대의가 아직 남아 있으니절로 같은 생각을 지니고서 응하는 자가 있으리.맹명은 세 번 패한 이후에 공을 세웠으니174)뒤의 일이 그 앞의 허물을 덮을 만하네.소강은 십리 땅에서 왕업을 일으켜작은 고을에서 큰 공적을 도모하였어라.175)생각건대, 저 왜적은무도함으로써인을 지닌 우리를 공격하였네.그 형세를 비교하면 저들은 객이 되고그 말을 따져보면 우리가 곧도다.비록 독사처럼 독을 퍼뜨릴지라도반드시 고래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요176)천도로써 말하자면회오리바람과 소나기는 아침나절도 못가고매서운 추위 다음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은 절로 차례가 있네.인도로써 말하자면무력를 믿고 잔인함을 편하게 행함은 망하는 도요군대를 내달려 깊이 쳐들어옴은 패할 형세라네.천도와 인도에 비춰 따져보면승패를 헤아릴 수 있어라.이에 내 편폭의 격문을 날려우리 동맹에게 고하노라.임금의 수레 어디로 갔는가문천상처럼 들어와 호위하는 이 보이지 않고왕성은 누가 지키는가종택177)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어라.조정에서 신하를 대하는 것이 어떠하기에신하들이 조정에 보답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귀한 바는 다만 의리니사랑할 대상이 임금이 아니랴.심산유곡에서혹 한 때의 목숨을 건질지언정청천백일 아래한 평생의 몸을 용납받으랴.아! 너희 부로들아나라가 망하면 집안은 온전할 수 있으며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식이 어디를 가랴.너희 자제들을 간곡히 타일러서우리 국가를 저버리지 말라.공업을 이룰 수 있다면장상도 어찌 따로 정해짐이 있으랴.더구나 지금 하늘이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는데욕수178)가 가을을 맡았네.북쪽 지방은 일찍 추워남풍이 기세를 다투지 못하네.말은 살지고 활은 굳세어전사는 용맹을 떨칠 마음이 솟구치학의 울음과 바람소리에도179)적들은 승리에 익숙한 기운이 꺾였네.우리들이 작은 마을에서 충신한 이들을 모아한 지역에서 의열을 격려하노니힘이 약하고 성이 외로워비록 만전의 형세는 없더라도명분이 바르고 말이 옳으니한번 승첩의 공훈을 기약하노라.하란처럼 시기하지 말고180)원컨대 부섭의 강개함181)을 본받으시라.제공은 각자 병사와 전마를 거느리고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라.군상의 차등은조정에서 자세히 살필 것이라.아녀자처럼 연연하여끝내 장부의 웅도를 그르치지 말라.오호라! 태산과 홍모에 경중을 잘 살펴서182)강의 물고기와 곰발바닥에 취사를 정해야 하네.183)처자에게 죽음의 죄를 끼치지 말고영원히 자손에게 영광을 끼칠 것이라.나라의 법전이 엄격하니내 두 번 말하지 않겠노라.모두들 일심협력하여격문을 어기지 말라. 【此文得於忠州許昶家. 蓋昶之高祖府使稊善書, 嘗寫先生此檄及拜韓信大將制, 其子孫珍藏流傳矣. 章末書云, 鄭某再檄, 其有初檄明矣. 無由求得幷刊而傳, 殊可恨也.】蓋聞忠臣捐軀而報主志者相時而圖功試觀聖朝之臣民孰效亂日之忠志洪惟立國二百載傳序十一君多殷先哲王世無失德右周家文敎人不知兵禮樂文哉干戈休只豈意海寇敢侮我邦始有通信之甘言終發借途之難請交鄰猶可爲也犯上豈能從乎非我召兵自彼生毒乃擧其國乃侵于疆萬艘連環長戈耀日交鋒未浹于旬朔禍慘永嘉之南渡破竹已及於都城事迫天寶之西幸都亭有委師之夷甫雍丘無起兵之張巡房太尉陳衆建之謀分王子於諸道岳少保獻早定之策係民望於東宮惟我北方王業攸基天險之地民生懷子惠之德應知戴商蕃種感卵4)育之仁豈能忘漢地利則高山峻嶺物產則健馬勇夫今者長君來臨老相保護郭子儀擁朔方之精卒敢怠勤王种師道領山西之健兒宜先赴敵一自北嶺失險西路不通邵陵無糾合諸侯誰則同恤河陽絶奔問官守我之何求陳宜中有今日之逃宋華元告半夜之病言之可哭彼其何心聖上簡賢任能崇文尙武其亡之戒尙軫於豐豫之時克詰之謨恒講於恬嬉之日將天意欲絶我寶命抑人性自失其秉彝擧目魏國之山河誠知非寶痛心唐家之藩鎭何用爲臣公等或王室之親或勳閥之冑或自宰列而建節或由侍從而佩符寵以高官非狼瞫之見黜食以厚祿異柱厲之不知橫黃金建紅旗榮亦莫大披赤心冒白刃死何敢辭諭爾軍民曁厥父老祖宗之遺澤不斬必欲一擧以殲之君臣之大義猶存自有同聲而應者孟明得功於三敗後事可掩其前愆少康興業於一成大勳庶圖於小邑惟彼倭賊以其無道讐我有仁較其勢則彼爲之賓軌其辭則我爲之直雖肆蛇虺之毒必受鯨鯢之誅以天道言之飄風驟雨不終朝沍寒陽春自有序以人道言之阻兵安忍亡之道懸軍深入敗之形究諸天人卜玆勝敗飛吾片幅告我同盟乘輿何歸未見天祥之入衛王城誰守不聞宗澤之過河朝廷之待臣子者何如臣子之報朝廷者若是所貴惟義可愛非君窮谷深林或可偸一時之命靑天白日其能容百年之身嗟汝父老國破家可全父在子焉往敦諭爾子弟無負我國家功業可以成將相寧有種矧今皇天悔禍蓐收行秋北地早寒南風不競馬肥弓勁士奮賈勇之心鶴唳風聲敵摧狃勝之氣某等鳩忠信於十室激義烈於一方力弱城孤雖無萬全之勢名正言順可期一捷之勳勿以賀蘭之猜疑願察傅燮之慷慨諸公各領兵馬克期掃淸軍賞等差朝旨詳實莫以兒女之戀終誤丈夫之圖於乎審輕重於泰山鴻毛定取舍於河魚熊掌罔貽妻孥之戮永遺子孫之榮國典有嚴余言不再咸一心力無違檄文 길을……청 1591년 왜(倭)의 관백(關白)인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고 하였다. 영가……것 서진 영가 말년에 흉노가 한(漢)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뒤 낙양(洛陽)을 함락시켜 결국 서진(西晉)이 멸망하였다. 종친인 사마예가 양쯔강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같이 피난을 온 교성(僑姓)과 원래 강남에서 살았던 오성(吳姓)에게 추대를 받아서 동진을 세웠다. 천보……것 당 현종 때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현종이 서촉으로 몽진을 갔었다. 도정에서……이보 이보는 왕연(王衍)의 자이다. 왕연(王衍)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보(夷甫)이다. 당시에 시국이 어수선하였으므로 왕연은 자신을 보호할 계책을 세워 그의 동생인 왕징(王澄)을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족제(族弟)인 왕돈(王敦)을 청주 자사(靑州刺史)로 보내고는 "삼굴(三窟)의 계책이 이루어졌다."라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의 추대에 의해 원수(元帥)가 되었다가 석늑(石勒)에게 패하여 처형당하였다. 《晉書 卷43 王衍列傳》 옹구에서……장순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원 현령(眞源縣令)으로 있던 장순은 옹구(雍丘)에서 기병하여 저항하였으며, 지덕(至德) 2년(757)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장렬히 죽었다. 《舊唐書 卷187下 忠義列傳下》 방태위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 연간의 상신(相臣) 방관(房琯)을 가리킨다. 악소보 송나라 태위소보(太尉少保)인 악비(岳飛)를 가리킨다. 상나라를……것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백성들이 상나라를 떠받든 것이 오래되었네.[民之戴商, 厥惟舊哉.]"라고 하였다. 곽자의 당 숙종(唐肅宗)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덕종(德宗) 때부터 상보(尙父)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무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를 한 몸에 짊어졌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충사도 충사도는 송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흠종(欽宗) 때 금군(金軍)이 쳐들어오자 이강(李綱)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투항을 주장하는 자들의 반대에 밀려 실패하고 군권(軍權)을 빼앗겼다. 이후 금군이 다시 개봉성(開封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아우인 충사중(种師中)의 군대를 이용하여 후미를 공격해서 금군의 정예군을 말살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다시 반대론자들의 반대에 막혀 수포로 돌아갔으며, 금군이 돌아간 뒤에 차선의 대책으로 대군을 황하(黃河) 양안에 주둔시켜 금군의 2차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이 역시 반대론자들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宋史 卷335 种世衡列傳 种師道》 소릉의 규합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4년 기사에 근거하여 '邵'를 '召'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릉은 초나라의 지명이다. 제나라 관중(管仲)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가서 그들에게 왕실(王室)에 공납(貢納)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리를 따져 추문하자, 초왕이 굴복하여 굴완(屈完)을 시켜 소릉에서 제나라와 맹약하도록 하였다. 이는 싸우지 않고 맹약을 이루어 낸 사례로서 널리 일컬어진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하양에서……없으니 현종이 서촉으로 몽진 갈 때 당의 대군은 이광필(李光弼)의 지휘 아래 하양에서 사사명(史思明)의 대군을 막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이유로 현종의 몽진에 근왕하지 못함을 말한다. 진의중은……갔고 남송(南宋) 말기의 재상으로, 자가 여권(與權)이다. 육수부(陸秀夫) 등과 함께 익왕(益王)을 옹립하였으나 큰 소리만 쳤을 뿐 실제적인 대비책에는 아무것도 조처한 것이 없어 결국 송나라가 원(元)나라에 패망하였다. 남송이 멸망했을 때 식솔을 이끌고 점성(占城)으로 가서 그곳에서 군대를 빌려 원(元)나라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점성이 원나라에 점령되자 다시 섬라(태국)로 달아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宋史 卷480》 송의……고하였네 《춘추좌씨전》 〈노선공하(魯宣公下)〉에서 "초나라가 송(宋)나라를 포위하였다. 이에 송나라는 겁을 내어 화원을 보내어 밤에 초나라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나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고충을 고하게 하니 즉 우리나라가 현재 자식을 식량과 바꾸어 먹고, 해골을 쪼개어 밥을 짓는 땔감으로 쓰고 있으나 성하의 맹약[城下之盟]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따를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30리를 물러간다면 초나라가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셨다."고 하였다. 병사를 잘 다스려라 《서경》 〈입정(立政)〉에 "너의 군병을 잘 다스리라.[其克詰爾戎兵]"라고 하였다. 위국의……알겠어라 위무후(魏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오기(吳起)에게 "아름답구나,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은 위(魏)나라의 보배다.[美哉乎山河之固 此魏國之寶也]"라고 말하였다. 여기서는 이 고사의 의미를 반대로 사용하였다. 낭심 춘추 시대 진(晉)나라 장수이다. 진(秦)나라와 팽아(彭衙)에서 싸울 적에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전사하자, 진(晉)나라 군대가 이에 편승하여 진(秦)나라를 대파하였다. 그가 상관인 선진(先軫)의 조치에 분노하면서도 화풀이를 하려 하지 않고 떳떳하게 전투에 임한 것을 두고 군자라고 칭찬한 말이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2년에 나온다. 주여숙 춘추 시대 거(莒) 나라 오공(敖公)을 섬기다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그를 떠나 해변에서 살았는데, 오공이 환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목숨을 바치려고 하면서 "내가 장차 그를 위해 죽으려고 하는 것은 신하를 몰라주는 후세의 임금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吾將死之, 以醜後世之人主不知其臣者也.]"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列子 說符》 맹명은……세웠으니 맹명(孟明)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어진 신하 백리해(百里奚)의 아들로 이름은 시(視)이다. 그가 정(鄭)나라를 치다 3차례나 패했는데도 진 목공이 오히려 써주어, 뒷날에 목공이 패자(霸者)가 될 기초를 닦아 놓았다. 《春秋 文公》 소강은……도모하였어라 소강은 하우(夏禹)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이다. 요(澆)가 제상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우의 왕통이 끊어진 지 40년이 되었을 적에, 소강이 사방 십 리 되는 땅[一成]과 5백 명[一旅]의 병력으로, 마침내 과(過)와 과(戈)를 멸망시키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회복한 뒤에, 하나라 역대 왕을 종묘에서 제사 지내며 천명으로 왕이 되었음을 밝혔다.[祀夏配天]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고래처럼……것이요 고래는 흉포한 왜구를 비유한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임강왕절사가(臨江王節士歌)〉에 "장사는 분노하는데 큰 바람이 일어난다. 어이하면 의천검(倚天劍)을 얻어서 바다 건너 큰 고래를 벨거나.[壯士憤, 雄風生. 安得倚天劍, 跨海斬長鯨.]"라고 하였다. 종택 종택은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에 자주(滋州)를 맡았는데, 태원(太原)이 금(金)나라에 넘어가자 의병을 모아 금나라에 대항하였다. 휘종(徽宗)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악비(岳飛)를 장수로 등용하여 여러 차례 금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宋史 宗澤列傳》 욕수 가을을 맡은 신으로 '금정(金正)'이라고도 한다. 《예기》 〈월령(月令)〉에 "가을 3개월을 주관하는 신이 욕수이다.[孟秋三月 其神蓐收]"라고 하였다. 학의 울음과 바람소리에도 학려풍성(鶴唳風聲)은 학의 울음과 바람 소리로, 겁먹은 사람이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는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사현(謝玄)과 사석(謝石)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비수(淝水)에 진 치고 있던 부견이 명하기를, "전군을 조금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하였으나,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前秦軍)은 반격은커녕 멈춰 서지도 않아 동진군에 크게 패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갑옷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나며 '학의 울음과 바람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군사가 온 줄 알았다고 한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하란처럼 시기하지 말고 하란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하란 진명(賀蘭眞明). 숙종(肅宗) 때 하남 절도사(河南節度使)로서 임회(臨淮)에 주둔하고 있었다. 윤자기(尹子奇)가 수양(睢陽)을 포위하자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임회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장순의 명성이 높고 자기보다 공이 많은 것을 질투하여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수양이 함락당하게 하였다. 《唐書 玄宗本紀》 부섭의 강개함 후한(後漢) 때 적군이 한양(漢陽)을 포위하고 한양 태수 부섭을 향리로 보내려 하자, 부섭이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반드시 여기에서 죽으리라."라고 탄식하며 부하들을 지휘하여 싸우다가 전몰하였다. 《柳河東集注 卷5 君睢陽廟碑》 태산과……살펴서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하였다. 강의……하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물고기는 목숨을 곰발바닥은 의를 비유하였다. 원문에는 '卯'로 되어 있으나 내용상 '卵'이 맞는 것 같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장계 狀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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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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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의를 주창하여 병사를 일으켜 경성으로 들어가 지킨 뒤에 왜적을 공격하여 참수하고서 올린 장계 倡義起兵入守鏡城後擊斬倭賊狀啓 철령(鐵嶺)을 지키지 못해 서쪽길이 끊어진 뒤로 조정의 명을 듣지 못하였기에 절도순찰사 겸관찰사(節都巡察使兼觀察使) 김명원(金命元)의 관자(關子)와 유지(有旨)가 길이 막혀 전해지지 않던 차에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등이 덕만동(德萬洞) 촌민들이 전해준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삼가 유지를 보고서 행재소에서 잘 지내신다는 것과 칠도에 왜적이 거의 섬멸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기쁨에 손뼉을 치며 망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당초 북방의 일은 지난 6월 12일에 철령의 병력이 궤멸된 이후에 남도(南道) 열읍의 군민이 굳게 지키려는 뜻이 사라져 기세만 바라보고도 달아나 흩어져버렸기에, 왜놈들이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 김귀영(金貴榮)이 북도(北道)에서 병사를 징집하였고,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도 또한 자신이 맡았던 병사를 거느리고 직접 나아갔습니다. 마침 육진(六鎭)의 여러 오랑캐들이 틈을 엿보고서 휘파람을 불어 무리를 불러 모으니, 장차 앞뒤로 적을 맞닥뜨리는 근심이 있을 것 같기에 병사는 길주(吉州)에 머물러 주둔하여 남북으로 지원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에게 명하여 정병 2백 명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내달려 가게하고, 또한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에게 명하여 정병 4백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 북청(北靑)으로 가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거세 방어할 수 없어서 이영 등의 병력은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퇴각하여 북병사와 합쳤는데, 병사 1천여 명이 길주의 임명 지역에 주둔하였다가 왜적과 접전을 벌여 왜놈 7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싸우다가 죽었다'는 해괴한 말들이 떠돌게 되자 군사들은 더욱 동요되어 북쪽 정예병의 태반이 밤에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적병이 와서 습격하니 남은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병사 이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경성(鏡城)으로 물러나 수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심은 이미 흩어지고 성안은 비로 쓴 듯 텅 비어 부득이하게 이영은 회령(會寧)을 지키려고 하였고 한극함은 종성(鍾城)을 지키려고 하던 차에 지난 7월 23일에 회령 역졸 이충경(李忠卿),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향리(鄕吏) 국경인(鞠景仁) 등이 앞장서서 외쳐 난리를 일으켜서 왕자 두 분과 상락부원군 김귀영,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승지(承旨) 황혁(黃赫), 선전관(宣傳官) 조인징(趙仁),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회령 부사(會寧府使) 문몽헌(文夢軒), 함흥 판관(咸興判官) 이혜(李蕙) 등을 사로잡아 왜적에게 넘겼습니다.회령의 변란 이후로 종성 이북의 인심은 모두 이반되어서 북도 우후(北道虞侯) 이범(李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병사 한극함 등은 또한 본도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왜놈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 나머지 수령과 진장(鎭將) 등은 자신의 휘하에게 습격을 당하여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지게 되었습니다. 신도 또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 활로 공격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나서 경성의 바닷가 마을로 오게 되었습니다.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전 좌수(座首) 서수(徐遂), 당시 좌수 이기수(李麒壽), 이 고을 사람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 급제(及第) 박은주(朴銀柱), 전 권관(權管) 강수연(姜壽延), 유학(幼學) 최배천(崔配天), 정병(正兵) 강수하(姜壽遐),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미전 첨사(美錢僉使) 김범(金範),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 황자파 권관(黃柘坡權管) 함이량(咸以良), 오촌 권관 구황, 병사 군관(兵使軍官)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 전 만호 김귀장(金龜), 훈련 봉사(訓鍊奉事) 허대임(許大任), 내금위(內禁衛) 이팽령(李彭齡), 충의(忠義) 이응운(李應雲)과 이귀서(李貴瑞), 정로위(定虜衛) 손걸(孫傑), 우림위(羽林衛) 이응란(李應鸞), 보인(保人) 홍대연(洪大連), 종성 부사(鍾城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 최경원(崔慶元), 충의위 어기영(魚起瀛), 전 사복(司僕) 엄준억(嚴俊億), 정로위 정춘기(鄭春氣), 별시위(別侍衛) 이수근(李壽根), 보인 정시룡(鄭時龍), 보인 이종신(李宗信), 보인 곽사(郭俟), 종성 군관(鏡城軍官) 전 내금위 이현(李鉉), 온성 판관(穩城判官) 군관 정로위 이광진(李光辰)과 이천룡(李天龍), 유원 첨사(柔遠僉使) 군관 전 내금위 김대관(金大寬), 갑사(甲士) 최명옥(崔命玉)과 신구학(申九鶴), 훈융 천사(訓戎僉使) 군관 정로위 정려(鄭勵), 별시위 이장형(李長亨)과 김흥복(金興福)과 고영진(高永珍)과 박종례(朴從禮), 교생(校生) 한득(韓得)과 주덕남(朱德男), 미전 첨사(美錢僉使) 군관 별시위 안덕수(安德壽), 갑사 방인학(仁鶴), 충순위 장붕(張鵬), 갑사 이찬(李贊), 황자파 권관(黃柘坡權) 군관 별시위 전흥개(田興漑), 보인 최용담(崔龍潭), 갑사 이몽복(李夢福), 서올에서 피난 온 성균관 권지(成均館權知) 학유 이성길(李成吉), 전 직장(直長) 신석린(申石潾), 생원 신노(申櫓), 유학 이정려(李精李精), 유학 신부(申桴)와 신격(申格), 이 지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임정언(林廷彥), 유학 신미(申楣), 서리(書) 최언붕(崔彥鵬), 보인 오경남(吳慶男)과 오응남(吳應男) 등이 원근에서 와서 모여 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책을 세웠습니다.이에 이달 9월 16일에 경성으로 들어가 방비하기로 하였는데, 창고와 성과 해자는 왜적들이 오래 머물면서 어지럽게 헤쳐져 있어서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麒壽) 및 관노 등이 타고 남은 것들을 모았으며 더러운 것을 파묻고 부서진 것은 수리하여 신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달 18일 사시에 길주에 주둔하던 왜적 92명이 문득 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한 왜장이 앞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성문을 향해 돌진하였습니다. 미전 첨사 김범이 거느린 관노 국생(鞠生)이 검으로 팔뚝을 자르고, 그의 부친 관노 세필(世弼)이 왜장을 붙잡아 말에서 끌어내려 곧바로 사로잡아서 군중에 효수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성 아래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김범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이 활을 많이 쏘아서 왜적과 말들을 맞추자 비로소 퇴각하였습니다. 안원 권관 강문우가 앞에서 이끌고 오촌 권관 구황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 등 15명이 자원하여 추격하다가 본 지역의 전 만호 급제 김대진(金大振)과 중도에서 만나 힘을 합쳐 추격하였습니다. 일식(一式 30리) 남짓 거리를 가면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상당수의 왜적을 활로 쏴서 맞히니, 시체를 싣고서 급히 달아나 흐르는 피가 길바닥을 적셨으며 마필과 의복 등 잡물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강문우가 두 명의 왜적 목을 베었는데, 날이 어두워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수한 목과 자른 귀 둘은 함께 산길을 통해 보냈는데 관찰사또가 자신이 공이라고 위로 사신을 보내 보고하였습니다.184)본부 토병(土兵) 전 별시위 유억수(庾億壽)와 이 지역에 들어와 사는 갑사(甲士) 이태옥(李泰玉) 등은 당초 왜적이 성에서 웅거할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투하여 활을 쏘아 왜적을 사살하고서 묻어두었다가, 신이 성에 들어간 후에 유억수는 수급 둘, 이태옥은 수급 하나, 정병 강득횡(姜得璜)은 수급 하나와 아울러 빼앗은 환도를 저에게 바쳤습니다. 도내 경흥(慶興), 경원(慶源) 등지의 변방 오랑캐와 깊이 숨은 여러 왜놈의 우두머리에게 동시에 글월을 화살에 묶어 쏘아서 보냈습니다.경흥부와 그 소관인 네 보는 전부 함락되어 노략질 당하고 백성들은 거의 죽음을 당하였을 뿐더러, 경원 소관인 아산(阿山)과 건원(乾元) 두 보(堡) 및 고아산의 고건원창(古乾元倉), 유신창(有信倉), 해창(海), 온성의 덕명창(德明倉), 덕산창(德山倉), 해창(海倉), 종성 부계(俯溪) 장풍리(長豐里)와 방산리(方山里)의 녹야창(鹿野倉), 조산리(造山里)의 해창(海倉), 회령 역산창(櫟山倉), 고랑거리창(古郞巨里倉) 등도 또한 노략질을 당하였습니다.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남쪽으로 길주의 왜적을 도모하고 북쪽에 가득한 오랑캐를 막으려고 하니, 대단히 고민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경성부는 또한 육진의 요충지로 길주까지 이틀거리요 회령까지도 또한 이틀거리인데, 두 곳의 왜적 사이에 끼어 있어서 병사를 징발할 곳이 없고 군량을 계속 보급할 계책도 없으니 더욱 고민입니다.대개 왜적 숫자의 많고 적음을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성(利城)과 단천(端川), 영동(嶺東)과 길주(吉州) 네 곳에 남아 있는 숫자는 각각 4천여 명이라 하는데, 공격과 수비의 편의를 제장과 상의하여 힘을 다하여 조치하면서 주제넘게 이것저것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또한 인신(印信)이 없는 관리로써 이런 변란의 시기를 당하였는데, 백문185)으로 봉계하는 것은 부신의 증험이 없는 것 같아서 임시로 부령부의 인신을 사용하였으니 대단히 황공합니다만,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9월 20일 自鐵嶺失守, 西路阻絶, 未聞朝命爲白有如乎, 節都巡察使兼觀察使金命元關子及有旨段, 路塞不通次, 慶源府使吳應台·朱乙溫萬戶李希唐·玉連萬戶安沃·吾村權管具滉等, 以持德萬洞村氓傳書, 來到爲白是去乙。臣伏見有旨, 始知行在萬安, 七道倭賊幾盡勦滅, 不勝感泣欣抃, 罔極爲白齊。當初北方事段, 去六月十二日, 鐵嶺兵潰後, 南道列邑軍民, 罔有固志, 望風奔散, 仍致長驅之勢爲白去乙, 上洛府院君臣金貴榮, 徵兵北道爲白良在乙, 北兵使韓克諴, 亦所當領兵親赴事是白乎矣。適音六鎭諸胡伺釁嘯聚, 將有腹背受敵之患乙仍于, 兵使段留鎭吉州, 以爲南北聲援爲白遣, 卽令斜卩洞權管高敬民, 率精兵二百名, 馳赴咸興, 又令會寧府使李瑛, 率精兵四百名, 繼往北靑爲白有如乎。賊勢益熾, 不能防遏, 李瑛等兵, 退踰磨天嶺, 與北兵使合, 兵一千餘名, 軍于吉州臨溟地, 接戰斬倭七級。富寧府使元喜戰沒, 妖言流聞, 軍情益搖, 北地精銳之兵, 太半宵遁。 翌朝, 賊兵來襲, 餘軍一時自潰, 兵使以下僅以身免, 欲退守鏡城爲白良置。人心已散, 城內如掃, 不得已李瑛段, 欲守會寧, 韓克諴段, 欲守鍾城次, 去七月二十三日分, 會寧驛子李忠卿·親軍衛金世彥·鄕吏鞠景仁等, 唱首作亂, 王子君兩分及上洛府院君金貴榮·長溪府院君黃廷彧·前承旨黃赫·宣傳官趙仁徵·南兵使李瑛·會寧府使文夢軒·咸興判官李蕙等乙, 捉給倭賊。自會寧作變之後, 鍾城以北人心, 幷爲離叛, 至於北道虞侯李範·穩城府使李銖·兵使韓克諴等, 亦爲本道人所捉給乙仍于, 其餘守令鎭將, 爲其下所圖, 不能自保, 僅以身免。臣段置, 亦爲土人所射, 幾死得免, 來在鏡城海村爲白有如乎。鍾城府使鄭見龍·前座首徐遂·時座首李麒壽·本府人安原權管姜文佑·及第朴銀柱·前權管姜壽延·幼學崔配天·正兵姜壽遐·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訓戎僉使金磁·柔遠僉使李希良·美錢僉使金範·茂山萬戶李蘭·玉連萬戶安沃·朱乙溫萬戶李希唐·黃柘坡權管咸以良·吾村權管具滉·兵使軍官前監察吳命壽·前萬戶金龜長·訓鍊奉事許大任·內禁衛李彭齡·忠義李應雲·李貴瑞·定虜衛孫傑·羽林衛李應鸞·保人洪大連·鍾城府使軍官前萬戶崔慶元·忠義衛魚起瀛·前司僕嚴俊億·定虜衛鄭春氣·別侍衛李壽根·保人鄭時龍·保人李宗信·保人郭俟·鏡城軍官前內禁衛李鉉·穩城判官軍官定虜衛李光辰·李天龍·柔遠僉使軍官前內禁衛金大寬·甲士崔命玉·申九鶴·訓戎僉使軍官定虜衛鄭勵·別侍衛李長亨·金興福·高永珍·朴從禮·校生韓得·朱德男·美錢僉使軍官別侍衛安德壽·甲士方仁鶴·忠順衛張鵬·甲士李贊·黃柘坡權管軍官別侍衛田興漑·保人崔龍潭·甲士李夢福·京來避亂人成均館權知學諭李成吉·前直長申石潾·生員申櫓·幼學李精瓈·幼學申桴·申格·入居林廷彥·幼學申楣·書吏崔彥鵬·保人吳慶男·吳應男等, 遠近來會, 與臣共謀倡義, 今九月十六日, 入守鏡城, 倉穀城池, 倭賊久留板蕩之餘, 徐遂·李麒壽及官奴等, 收其餘燼, 封閉修輯, 以待臣等爲白有齊。本月十八日巳時量, 吉州留屯倭賊九十二名, 奄至城下, 有一倭將意謂如前, 突入城門爲白去乙。美錢僉使金範所領官奴鞠生, 以釰斫臂, 其父官奴世弼, 挾執下馬, 仍爲生擒, 梟示軍中爲白遣。其餘段, 列立城底爲白有去乙, 金範及朱乙溫萬戶李希唐, 多數發射, 中賊中馬爲白良沙, 始爲退還爲白去乙, 安原權管姜文佑倡首, 吾村權管具滉·朱乙萬戶李希唐等十五名, 自願追擊, 與本土及第前萬戶金大振, 中路相逢, 幷力追至一息餘程, 合戰十餘度, 多數射中倭賊, 載屍奔北, 流血濺道, 馬匹及衣服雜物乙, 幷爲棄走, 姜文佑斬首二級, 因日昏未得窮追爲白有齊。同斬馘割耳二級段, 由山路, 觀察使道以己爲上使爲白有齊。本府土兵前別侍衛庾億壽·入居甲士李泰玉等, 當初倭賊據城時, 奮不顧身, 射殺倭賊, 埋置爲白有如可, 臣入城後, 庾億壽段二級, 李泰玉一級, 正兵姜得璜一級, 幷其所奪環刀, 來納爲白齊。道內慶興·慶源等地藩胡與深處諸酋, 一時傳箭。慶興府及所管四堡, 全數陷掠, 民人殆盡爲白是沙餘良, 慶源所管阿山·乾元二堡及古阿山·古乾元倉·有信倉·海倉·穩城德明倉·德山倉·海倉·鍾城俯溪長豐里·方山里鹿野倉·造山里海倉·會寧櫟山倉·古郞巨里倉等, 亦盡爲搶掠爲白是去等。新集散卒, 以南圖吉州之倭, 北捍充斥之胡, 極爲悶慮叱分不喩。鏡城府, 亦六鎭要衝之地, 距吉州二日之程, 距會寧亦二日之程是白去等, 介於兩賊之間, 兵無徵發之處, 粮無繼運之策, 加于憫慮爲白齊。大槩賊數多少, 雖不詳知爲白良置, 利城·端川·嶺東·吉州四處留在之數, 各四千餘名是如爲白臥乎等用良, 攻守便宜, 與諸將相議, 盡力措置, 妄料爲白乎旀, 臣亦無印信官, 以當此變亂之時, 白文封啓, 似無符驗乙仍于, 權用富寧府印信, 至爲惶恐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 九月二十日。 관찰사또가……보고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자 기사에 "관찰사 윤탁연은 정문부를 시기 질투하였다. 문부가 전후로 세운 전공(戰功)을 탁연이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문부의 부하가 수급(首級)을 가지고 관남(關南)을 지나면 그가 모두 빼앗아 자기 군사에게 주었다. 그리고 문부의 행동이 불궤(不軌)스럽다고 조정에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백문 관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를 이르던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반란의 역적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말수 등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會寧鞠景仁明川末秀等狀啓 신이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계책을 내어 병사를 모집한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뱃길로 장계하였거니와, 거센 파도와 왜놈들 사이에서 혹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시 진달하옵니다. 장계에 다 올리지 못한 사연과 근래의 조처한 일 등에 대해 아뢰자면, 신이 처음에 이성인(李聖仁),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과 함께 경성(鏡城)에 들어가서 군민(軍民)들을 효유하여 함께 지킬 생각이었는데, 백성들의 의혹이 너무 심하여 백에 하나도 믿지 않을뿐더러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도 또한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대부분 남쪽으로 도망하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각자 흩어져 혹은 산길로 혹은 바닷길로 향하여 관군에게 가려고 하였습니다.신이 바닷가 마을에 와 있다가 배를 타려고 하던 차에 마침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구황 등이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북쪽으로 돌아온다 하기에 신은 곧바로 정현룡에게 통지하고지방사람 및 여러 진의 장수들과 모의하여 경성에 들어가 웅거하기로 하고서 들에 성 안의 군민을 모아 국가의 중흥을 위해 마음을 돌려 적을 토벌하자는 의리로써 효유하였으며, 공문으로 원근의 병마를 불러서 반역자를 토벌하고 왜적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기세가 바야흐로 강성하고 사람들은 두려워 주저하니 다만 모군(募軍)에 응하는 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회령(會寧)의 역적 아전 국경인(鞠景仁)은 왜놈이 주는 벼슬을 받아 판형(判刑)이라 칭하고서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며 육진의 병사를 부를 길을 막았으며 몰래 왜적과 통하여 항상 경성을 양쪽에서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명천사(明川寺)의 종 말수(末秀)는 대장이라 자칭하며 전령을 보내 물자를 끊임없이 운반하여서 길주(吉州)의 왜놈들과 결탁하였으며 지방의 호족들을 도살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기에 경성의 수비가 고립되고 약하여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오랑캐와 왜적이 협공하는 형세에 남북으로 반란의 역적이 있어서 간신히 지탱하면서 죽음으로 지킬 생각이었습니다.이번 달 2일에 회령 향소의 공문에 '본부(本府)에 거처하는 향리 국경인은 본래 악독한 놈으로 평소 일을 처리할 때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으나 대단한 일이 아니기에 내버려두고 다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경향(京鄕)의 사람들이 옷과 관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허둥대었는데, 본도(本道)의 산천은 험하고 높으며 거리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약간의 사대부 뿐 아니라 왕자 두 분과 그를 모시고 온 영부사(領府事)와 부원군(府院君), 승지(承旨) 등이 왜병을 피하고자 이 성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왜적이 부령에서 곧바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앞에 보이는 국경인이 들어 알고서 왜장에게 아첨하려고 자신의 무리들로 하여금 왜적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이에 은밀하게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역자(驛子) 이충경(李忠卿·), 관노 승수(承水)와 경이(京伊) 및 그가 아는 잡놈 등으로 하여금 왕자 두 분과 부인, 영부사, 부원군, 승지 등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자신의 처소에 있을 때 밤을 타고 돌입하여 불의에 잡아 결박하여 군영에 단단히 가두고서, 그 당시 부사와 판관으로 손을 쓰지 못하게 하며 군대의 위엄을 매섭게 펼쳐 놓았습니다. 부사(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萬戶) 이함(李涵), 내금위(內禁衛) 김덕신(金德新), 판관(判官) 군관 최덕흥(崔德興) 및 부조 방장(府助防將) 우후(虞侯) 군관 장응별(張應鱉), 정인신(鄭仁信) 등과 및 부하들을 시켜 이전에 미워하던 향리 공억복(貢億福), 관노 청룡(靑龍) 등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인 뒤에 왜적이 고풍산(古豐山)이 이르자 반란 아전 국경인은 왕자를 잡아 가두었다고 왜장이 있는 곳에 자신이 친하게 지내던 향리 임민(林岷)을 내달려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당시 성안의 군민들은 모두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향소에도 위로는 관원이 없고 아래로는 군민이 없었기 때문에 저 또한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이 성에 들어간 뒤에 돌아왔는데 군민들도 천천히 돌아왔습니다. 앞에 보이는 역적 아전 국경인이 왜장에게 벼슬을 청하여 '판형(判刑)' 두 글자라는 이름을 받아 성안에서 권세를 드날리며 자신의 무리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위세를 떨치며 무고한 군민 십여 명을 제 마음대로 참수하고서 생존한 백성들로 하여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날로 길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향소의 교생과 군민들이 비록 분통한 뜻이 있더라도 위세에 겁을 내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세언, 이충경, 승수, 경이, 한복 등은 기회를 타서 참수하였습니다.그러나 역적의 괴수 국경인은 위세가 당당하고 그 족속들은 삼대처럼 많아서 기회를 얻을 틈이 없었기에 위의 김세언 등을 벤 목을 여러 진에 효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감사의 공문에 '의병을 뽑아서 보내라.'라고 거듭거듭 분부하였지만, 위의 국경인이 또한 감사의 공문을 도외시하고 하나도 거행하지 않으므로, 온 고을의 군민이 그가 의병을 보내지 않은 것에 분통을 터드려 한곳에 모두 모여 군대의 위엄을 크게 펼쳐 이전 역적 아전 국경인과 및 그와 함께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그의 처남의 안종 박림(朴林), 김림(金琳), 그의 수양아들 최린수(崔麟水) 뿐 아니라 김윤복(金允福), 오복수(吳福水), 종 언준(彥俊) 등을 전투를 벌여 일시에 활로 쏴 죽이고 그날로 목을 베었습니다. 국경인은 손발을 자르고 박림 등은 머리를 베었는데 모두 일곱의 목을 품관 색리 등에게 주어 모두 함에 담아서 보냈으며 의병도 내일 정도에 뽑아서 보낼 것이니, 역적 아전 국경인을 잡을 때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등급을 나누어 책으로 만들어서 올려 보내겠다는 뜻으로 첩보를 올렸습니다.배후의 강한 도적은 비록 이미 죽였으나 목전의 반도들은 아직도 왜놈의 기세를 끼고서 먼저 명천을 점령하였고 다음으로 길주(吉州)를 도모하려던 차에 명천(明川)의 품관과 촌민들 수백 명이 모여서 길을 나눠 습격하였으나 반란의 역적들이 성에 웅거하면서 화포를 많이 발사하자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곧바로 무너져 뿔뿔이 달아났습니다. 이에 신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를 보내 각각 정예기병 30명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신의 군관 경원(慶源) 전 별감(別監) 정응복(鄭應福), 경성 친군위(鏡城親軍衛) 전덕룡(全德龍) 및 종성 부사 정현룡의 군관 경성 사람 급제 박은주(朴銀柱), 서자 정시룡(鄭時龍) 등도 적을 치러 갈 것을 자원하여 밤낮으로 내달려 명천에 이르니, 말수 또한 자신의 형세가 막다른 것을 알고서 몸에 무기를 차고서 산골로 도망가 웅거하였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추격하였는데, 경성 토병(土兵) 전덕인(全德仁)이 먼저 그 흔적을 찾았으며 본부 영군사(營軍士) 김천년(金千年)이 산채로 포박하였고 그의 무리 경성 안종 논손(論孫), 명천 관노 문형(文亨), 귀양 온 장응호(張應豪) 등을 잡아 목을 베어 군중에 효수하니 잔당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 혹은 왜적에게 가거나 혹은 산속으로 달아나 전부 체포하지는 못하였습니다.이전 회령에서 죽인 국경인과 명천 말수의 머리와 손발을 모두 함에 넣어 보내며, 그 나머지 목은 벤 13명의 수급은 산길이 눈에 얼어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부득이 왼쪽 귀를 베어 쪽지에 이름을 써서 올려 보냅니다. 역적의 재산은 법으로 마땅히 몰수해야 하니 마땅히 기록하여 아뢴 뒤에 처리하겠습니다만, 고을 곳간이 탕진되었기에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권장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권도(權道)로 군중의 상품으로 사용하였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밭과 집은 마땅히 계문(啓聞)하여 역적을 잡거나 토벌한 이에게 주려고 생각하였으니, 앞의 두 역적은 다만 일개 하찮은 놈들이라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을 등급을 나눠 공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울 듯하며, 또 새로 모인 병사들에게 만일 고무시키는 조치가 없으면 호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기에 전하께 이처럼 아룁니다.두 역적의 머리를 베고 난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온성 이남의 진보(鎭堡)에서 불러 모은 병사들이 차츰 올라오는데, 다만 경원의 군사는 현재 아직 방비하는 곳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진보의 여러 장수들은 경성을 방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혹은 북관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혹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북으로 돌아와 모두 경성에 들어와 신의 지휘를 받고 있으니,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영건 만호(永建萬戶) 정예국(鄭禮國), 보로지 권관(甫老知權管) 유대남(柳大男),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보화보 권관(寶化堡權管) 이언상(李彥祥), 삼삼파 만호(森森坡萬戶) 한대방(韓大防), 장군파 만호(將軍坡萬戶) 오대남(吳大南), 조산 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어유간 만호(魚遊澗萬戶) 방우주(方佑周), 세천 권관(細川權管) 박예범(朴禮範) 등이 차례대로 와서 모였습니다.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은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별해보(別害堡)에서 왔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 서성(徐渻)과 귀양 온 나덕명(羅德明)은 바깥 마을에 있다가 마을에 거주하는 군정을 타일러 모두 성으로 들어왔습니다.육진은 한번 왜적이 지나간 뒤에 군기와 창곡이 겨우 10분의 1~2정도 남았는데 각각 봉하여 닫아두었는데, 말이 모두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므로 운반하여 타지와 통할 형세가 되지 못합니다. 경성에는 다행히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각각 7백여 부와 천 명이 반 년 먹을 식량이 있으므로 군사 1천 7백여 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고을의 관군은 산료(散料)를 관에서 주고 이 고을 사람은 모두 자비로 먹게 하였습니다. 대개 앞뒤로 이 지방 사람으로 하여금 두세 번 길주의 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적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는데, 적의 숫자는 만여 명으로 관청과 개인 집에 나눠 거처하면서 성 안에 따로 깊은 해자와 높은 망루를 설치하여 주야로 망을 보면서 순찰한다고 하니, 경솔하게 병사를 일으켰다가는 욕을 볼 것을 깊이 헤아려 모쪼록 형세를 보아 기습하여 먼저 그들의 예봉을 꺾은 연후에 일거에 섬멸시키고 다음으로 영동(嶺東)과 단천(端川)에 미칠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14일. 臣與鍾城府使鄭見龍, 共謀集兵緣由, 已爲由水路, 狀啓爲白有在果, 風濤盜賊之間, 恐未得達爲白乎去, 更良陳達爲白在果。狀啓未盡辭緣及近日措置事段, 臣初與李聖仁及慶源府使吳應台等入鏡城, 曉喩軍民, 以爲共守之計爲白良置, 民惑已甚, 百不一信叱分不喩, 京來將士, 亦無固志, 多欲南出乙仍于, 不得已各散, 或向山路, 或向海道, 欲達官軍。臣來在海村, 欲爲乘舟次, 適聞道路傳言, 具滉等持巡察使關子, 北還之奇爲白遣, 臣卽通于鄭見龍, 謀與土人及諸鎭將, 入據鏡城, 庭集城中軍民, 諭以國家中興, 回心討賊之義, 帖召遠近兵馬, 以爲討叛滅倭之計爲白良置, 賊勢方張, 人心疑懼, 非但應募無幾叱分不喩, 會寧叛吏鞠景仁段, 受倭官稱判刑, 威制一府, 以塞六鎭徵兵之路, 潛通倭賊, 常爲挾擊鏡城之計爲白遣。明川寺奴末秀段, 稱大將用傳令, 輸載絡繹, 締結吉州之倭, 屠殺土豪, 以遏義旅之興爲白乎等以, 鏡城守禦孤弱不振, 胡倭挾勢, 南北有叛, 僅僅支保, 死守是計爲白有如乎。本月初二日, 會寧鄕所牒呈內, '本府居鄕吏鞠景仁, 亦本是頑惡之人, 以平時用事之日, 多般作惡爲白良置, 非大段事是乎等用良, 置而不治爲如乎次節, 倭賊猝發, 衣冠顚倒, 京外遑遑, 本道乙山川險高, 道路隔遠是去, 凡干士大夫是沙餘良, 王子君兩分及陪來領府事·府院君·承旨等, 欲避倭變, 委入此城爲有去乙, 倭賊自富寧直入之奇乙, 上項鞠景仁, 亦聞知爲遣, 欲媚倭將, 使其徒立功於倭賊爲乎矣。陰令親軍衛金世彥·驛子李忠卿·官奴承水·官奴京伊及其矣所知雜類等率良旀,同王子兩分及夫人與領府事府院君承旨等夫人敎是等乙, 各其所在處, 乘夜突入, 不意執捉結縛, 堅囚軍營爲遣, 其時府使判官以使不得下手, 盛陳軍威。府使軍官前萬戶李涵·內禁衛金德新·判官軍官崔德興及府助防將虞侯軍官張應鱉·鄭仁信等及府下人, 前月有嫌爲在, 鄕吏貢億福·官奴靑龍等, 斬首示威後, 倭賊到古豐山爲有去乙, 同叛吏鞠景仁, 亦王子執捉拘留是如, 倭將處, 其矣所厚鄕吏林岷, 以馳告爲乎矣。' 其時段, 城中軍民, 幷只避亂入山乙仍于, 鄕所等段置, 上無官員, 下無軍民是乎等用良, 亦爲入山爲有如可, 倭賊入城後, 還來爲乎亦中, 軍民等徐徐還來爲良置。向前叛吏鞠景仁, 亦要名於倭將, 受判刑二字之名, 擅權於城內, 逞一己嘯聚之計, 又立威權, 恣斬無辜軍民十餘名, 使生存之民, 不得下手, 日增道路耳目是乎等用良, 鄕所校生軍民等, 雖有痛憤之志, 亦怯於積威, 莫敢下手爲有如乎次, 金世彥李忠卿承水京伊漢福等段, 乘機斬首爲有乎矣。 同賊首鞠景仁, 亦威勢堂堂, 族類如麻, 乘機無隙是置有等以, 上項金世彥等斬首乙, 梟示列鎭不得爲有如乎。道關內義兵抄送事, 再再分付爲有乎矣。上項鞠景仁, 亦道關乙, 置之度外, 一不擧行爲去乙, 一邑軍民, 憤其義兵不送, 咸聚一處, 大陳軍威, 向前叛吏鞠景仁及同謀作亂爲如乎其矣妻甥內奴朴林·金林, 其矣義子崔麟水是沙餘良, 金允福·吳福水·奴彥俊等, 一時相戰射殺, 同日斬首爲乎矣。鞠景仁段, 處斬手足, 朴林等段, 斬首, 合七首乙, 品官色吏等準授, 幷只函送爲遣, 義兵段置, 來明日, 抄送爲在果, 叛吏鞠景仁執捉時功勞人等乙, 秩秩分等成冊, 上道爲白臥乎味, 牒呈是白有亦。背後劇賊, 雖已就戮, 目前叛竪, 尙挾倭勢乙仍于, 先定明川, 次圖吉州計料次, 明川品官及村民等, 相聚數百, 分道掩襲爲白如乎, 叛賊據城, 多放火炮, 烏合之衆, 旋卽潰散是如爲白去乙, 臣遣吾村權管具滉·安原權管姜文佑, 各率精騎三十名, 臣矣軍官慶源前別監鄭應福·鏡城親軍衛全德龍及鍾城府使鄭見龍軍官鏡城土及第朴銀柱·庶孽鄭時龍等, 自願往討, 晝夜幷行, 比到明川, 則同末秀亦自知勢窮, 身佩戎器, 竄據山谷爲白有去乙, 追至深山, 鏡城土兵全德仁, 先得其蹤, 本府營軍士金千年執縛生擒, 幷捉其黨鏡城內奴論孫·明川官奴文亨·定配人張應豪等斬首, 梟示軍中爲白遣, 餘黨四散, 或投倭賊, 或竄山間, 時未盡捕爲白有齊。向前會寧所誅鞠景仁及明川末秀段頭及手足, 幷只函送爲白遣, 自餘斬馘十三級段, 山路氷雪, 輸送甚難乙仍于, 不得已左耳割取, 小牌書名, 上送爲白齊。逆賊財產, 法當籍沒, 所當錄啓處置事是白乎矣, 唯只府庫板蕩之餘, 召募散民, 勸勵慰悅次, 以權用於軍中賞格, 不勝惶恐爲白乎旀, 田民家舍段, 從當啓聞, 給付捕討人爲乎乙去, 計料爲白在果, 向前兩賊, 特一幺麽小竪良中, 討賊人分等錄功, 恐涉煩瑣爲乎矣。新集之卒, 若無聳動之擧, 則響應甚難, 弦如冒瀆上聞爲白齊。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穩城以南鎭堡徵兵, 稍稍來到, 唯只慶源軍, 時未到防爲白齊, 鎭堡諸將等聞鏡城守禦之奇, 或自北關南出, 或自南程北還, 皆入鏡城, 受臣節制爲白在果, 防垣萬戶韓仁濟·潼關僉使李應星·永建萬戶鄭禮國·甫老知權管柳大男·高嶺僉使柳擎天·寶化堡權管李彥祥·森森坡萬戶韓大防·將軍坡萬戶吳大南·造山萬戶印元忱·魚遊澗萬戶方佑周·細川權管朴禮範等, 次次來會爲乎旀, 斜卩洞權管高敬民段, 持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爲白遣, 兵曹佐郞徐渻·定配人羅德明, 在外村, 曉諭村居軍丁爲白如乎節段, 幷只入城爲白有齊。六鎭一經倭賊之後, 軍器倉穀, 僅餘十分之一二爲白良置, 各自封閉叱分是白遣, 馬匹盡歸倭賊乙仍于, 無有轉運相通之勢爲白齊, 鏡城段, 幸有長片箭各七百餘部, 千人半年之粮爲白乎等以, 聚軍千七百餘名內, 他官軍段, 官給散料, 本府人段, 幷只自備以食爲白齊。大槩前後使土人, 再三入吉州城中, 覘賊虛實爲白乎矣。賊徒萬餘, 分據公私廨, 城內別作深溝高壘, 晝夜候望巡更爲白去等, 輕擧見辱爲白乎去, 百分詳量, 某條觀勢出奇, 先挫銳氣, 然後一擧盡殲爲白遣, 次及嶺東·端川計料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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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역적 경성의 국세필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鏡城鞠世弼狀啓 북도 지역 사람들은 왜적이 침입한 이후로 남쪽 길이 막혀 다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반란민들은 그 수령을 잡아 묶고 역적의 졸개들은 그 진의 장수를 내쫓아 버리고서 각자 스스로 장수라 칭하면서 왜적을 맞아들였습니다. 경성(鏡城)의 관노인 국세필(鞠世弼) 역시 회령(會寧)의 역적 아적 국경인(鞠景仁)과 같은 집안의 삼촌 숙부로 회령의 변란에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인하여 왜놈에게서 예백(禮伯)이라는 벼슬을 받아 왜놈과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표리가 되어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면서 왜놈을 받들었을 뿐 아니라 산골짜기에 숨은 여러 진의 장수와 서울에서 온 선비들을 육진에 통문(通文)을 보내서 사로잡아 왜놈들에게 내주었습니다.왜놈들이 길주로 물러난 뒤에 신과 이성임(李聖任) 등은 본부(本府, 경성)으로 들어와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는데, 앞의 국세필은 여전히 왜적의 위세를 빌어 매우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면서 나라에 배반하려는 잔꾀를 맘대로 부려 의병을 일으키려는 일을 방해하여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고립되어 기세가 약하였기에 그를 죽여서 효시하지 못하고 각자 흩어져 남쪽으로 나와 관군에게 가려고 하던 즈음에 별해보(別害堡)에서 오는 순찰사의 공문을 이성임은 산길에서 보았고 저는 바닷가에 와 있다가 도로에서 전하는 그 공문을 보게 되었습니다.품관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등이 먼저 신과 호응하였으니, 저희들은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 및 토병(土兵) 수십 명과 함께 경성으로 들어가 공격하여 성을 차지한 뒤 수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곳 사람들은 이미 미혹되어 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데다가 남쪽으로 명천의 역적 놈이 왜적의 기세를 배경으로 삼고 있고 북쪽으로 회령 역적의 아전이 육진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국세필은 그들과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고 있는 역적으로 은연중에 같은 배를 탄 원수처럼 다뤄야 했습니다. 만약 임기응변으로 그를 속여서 나라를 배반하려는 그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게 않게 하지 않으면 경성을 차지한 노회한 역적이 선수를 칠 걱정이 없지 않았으므로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허물을 버리고 잘못을 씻자고 깨우쳤으며, 아비와 아들의 공을 기록하여 공을 세워서 죄를 면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한편으로는 군중의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령에서 몰래 염탐하는 길을 끊은 다음에 회령과 명천(明川) 두 역적의 머리를 베니 군세가 차츰 떨치고 기강이 점차로 바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용납하지 못한 역적이 훗날 법망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곧바로 군중에서 목을 베어 조리 돌리고 함에 머리와 손발을 넣어 보내오며 그 아들 국생(鞠生)의 머리와 귀도 잘라 올려 보냅니다.대개 난리를 겪은 이래로 백성들을 제어함이 없어서 간혹 왜적을 끌어들여 촌가를 노략질하여 죽이거나 혹은 산속에서 같은 부류들을 불러 모아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지금 나라가 다시 서고 전형(典刑)이 새로워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자신이 처벌받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서 자못 주저하는 상황일 뿐 아니라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본토의 양민들이 그들의 과거 악행을 미워하여 간혹 그 때 일을 들춰내어 말을 하니, 육진의 병사를 불러 모아야 하는데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오지 않은 자들이 있어 염려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에 신이 막하의 낮은 관리로 마음대로 처리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다만 일을 맡고 있는 신하이므로 부득이 권도로써 탕척령(蕩滌令)을 시행하여 그 수괴는 없애버리고 위협을 받아 수괴를 따랐던 이들은 용서해 주어 징병에 참여하는 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문(啓聞)은 지금 길이 막혔기 때문에 올려 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장계를 가지고 갈 사람을 사람은 자원하는 자를 뽑아서 보내오며, 은전으로 상을 내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청할 바가 아니오나 그 무리들의 공로를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모일. 北道, 自倭寇之後, 南路阻絶, 不復知有國家, 亂民縛其守宰, 叛卒逐其鎭帥, 各自稱將, 以迎倭賊爲白有如乎。鏡城官奴鞠世弼, 亦以會寧叛吏鞠景仁同姓三寸叔父, 通謀會寧之變, 因受倭賊禮伯之官, 與倭同處, 相爲表裏, 威制一府, 供奉倭奴叱分不喩, 諸鎭將及京來士人避亂山谷者乙, 通文六鎭, 捉致倭賊爲乎旀。 倭退吉州之後, 臣及李聖任等來入本府, 謀欲擧義次, 同世弼尙假倭威, 黨與寔繁, 逞其反側之謀, 沮敗倡義之擧乙仍于。臣等孤立勢單, 不能顯戮, 各散南出, 圖赴官軍爲白如乎節, 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 李聖任段, 遇於山路爲白遣, 臣段, 來在海汀, 得見道路傳書爲白齊。 品官徐遂·李麒壽等, 爲先響應, 謀與京來將士及土兵數十人, 同入鏡城, 以爲攻守之計爲白良置, 當此人心已惑, 王化不究之日, 南有明川逆竪, 近挾倭勢, 北有會寧叛吏, 威行六鎭, 世弼以聲勢相倚之賊, 隱然爲舟中之敵是白去等, 若非權謀紿說, 先釋其反側之心爲白在如中, 盤據老賊, 不無逞手之虞乙仍于, 溫辭開諭, 曉以棄過滌垢之意, 父子錄功, 示以立功免罪之端。一以定羣下疑懼之心, 一以絶會寧陰伺之路爲白有如乎節, 會寧·明川兩逆授首, 軍勢稍振, 紀律漸張爲白有去等, 覆載難容之賊, 恐有他日網漏之患絃如, 卽於軍中, 處斬梟示, 函送頭級手足爲白遣, 其子鞠生段, 斬首割耳, 上送爲白齊。大槩經亂以來, 民無防禁, 或有連引倭賊, 殺掠村家, 或有嘯聚山藪, 白晝殺越者, 不知其數, 今聞國家再造, 典刑維新爲白遣, 人懷自疑, 頗有顧望之端叱分不喩, 京來將士及本土良民等, 嫉其旣往之惡, 或發指斥之言爲白乎等乙以, 六鎭徵兵, 或有畏罪而不來者, 至爲可慮爲白昆, 臣以幕下小官, 擅便爲難爲白在果, 最只當事之臣, 以不得已權行蕩滌之令, 除其首惡, 捨其脅從, 以廣應募之路爲白乎旀, 凡干啓聞事段置, 當此路塞之時, 上達甚難, 陪持人等乙, 募其願往者起送爲白去乎, 恩賞重事, 非自下所敢擅請是白良置, 其矣徒等功勞段, 不敢不達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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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직되어 경사로 돌아가는 부백 정자허와 작별하다 송계 장세경 奉別府伯鄭子虛遞歸京師【松溪 張世經】 예전에 연방을 함께 하고47)지금 이곳에서 다시 만났네용성48) 천 리 길에 달 뜨니봄에 산장서 술 한잔 하세나어찌 생각이나 했겠나 만난 곳에서되려 석별하는 사람 될 줄을습지49)에 저녁 해 기울어가니희끗희끗한 머리에 시 멈추오 疇昔同蓮榜如今更見眞龍城千里月山舘一盃春豈意相逢地翻成惜別人習池斜日暮吟斷鬢絲新 예전에……하고 연방(蓮榜)은 소과(小科), 즉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연보(年譜)〉를 보면, 정문부는 1584년(선조17)에 생원·진사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장세경은 1585년(선조18)에 생원시에 합격한 것으로 나온다. 용성(龍城)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옛 별호이다. 습지(習池) 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진(晉)나라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에 있을 적에 항상 그곳에 찾아가 만취(滿醉)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任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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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사 感懷詞 인생에 늙음이 이르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人生到老寧不悲잎 지고 풀 시드니 홀로 사립문 닫았네 落葉秋草獨掩扉어찌 세상 사람들만 찾아오지 않으리 豈特世人之不問매우 친한 자와 또한 소원하네 抑亦至親者亦踈도연명이 교유를 끊고 적공이 큰 글씨를 쓴93)까닭이니 所以淵明息交翟公大書만 겹 구름 낀 골짜기로 영원히 돌아가리 萬重雲壑永言歸歟강가의 재실은 쓸쓸하고 江齋寂寂산에 뜬 달은 창창한데 山月蒼蒼흰 갈매기 날아오니 白鷗兮飛來오래도록 그대와 소요하리 長與君兮倘佯 人生到老寧不悲, 落葉秋草獨掩扉.豈特世人之不問, 抑亦至親者亦踈.所以淵明息交翟公大書, 萬重雲壑永言歸歟.江齋寂寂, 山月蒼蒼.白鷗兮飛來, 長與君兮倘佯. 적공이 큰 글씨를 쓴 한(漢)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는 빈객이 문에 가득하더니 관직에서 축출되자 문밖에 참새 그물을 쳐도 될 만큼 썰렁하였는데, 그 후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적공이 문에 큰 글씨로 적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서 벗의 우정을 알 수 있고, 한 번 빈한하고 한 번 부유함에서 벗의 태도를 알 수 있으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서 벗의 우정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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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를 지나며 감회가 있다 북평사 신익상 過彰烈祠有感【北評事 申翼相】 새로운 창렬사 큰 이름 드러내니영원히 북방에 풍교를 수립했네누가 알았으리오 작은 어랑리가나라 지킨 공신의 만리성일 줄을 彰烈新祠表大名北方千載樹風聲誰知一片漁郞地衛國功賢萬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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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사에게 주다 贈朴進士 주량은 큰 바다를 기울일 정도이고 飮量傾滄海문필은 항왕4)과 대적할 만하구나 詞鋒敵項王어찌하여 늙을수록 씩씩한지 如何老益壯거울 속 백발 이길 수 없네 不勝鏡中霜 飮量傾滄海, 詞鋒敵項王.如何老益壯, 不勝鏡中霜. 항왕 한 고조(漢高祖)와 천하를 다툰 영웅으로 우(羽)는 자(字)이고, 이름은 적(籍)이다. 초 패왕(楚覇王)이 되었다가 5년 만에 한 고조에게 패망하여 자살하였다. 《사기(史記)》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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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사의 시에 차운하다 次朴進士韻 땅거미 지는 푸른 산 속에 日暮碧山裡채찍 멈춰 찾아오는 이 없네 無人來住鞭그대의 마음 한적하기만 하니 夫君意閑適이곳에 흥취가 유연하구나 於此興悠然 日暮碧山裡, 無人來住鞭.夫君意閑適, 於此興悠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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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옛 성주의 시에 차운하여 산재의 고요한 책상에 올리다 謹次舊城主韻仍呈山齋靜案 【韓應夢, 淸州人, 居尼山.】 【한응몽, 청주 사람으로 이산에 거주하였다.】공수와 황패73)는 청렴함으로 예전에 은택 내려 龔黃淸簡昔蒙賜일부의 백성들은 먹고 자는 일만 했었지 一部生民但食眠다시 창주에 들어가 자리 나눠 앉았으니 又入滄洲分半席층층의 푸른빛이 호숫가와 맞닿아 있구나 層層蒼翠接湖邊 龔黃淸簡昔蒙賜, 一部生民但食眠.又入滄洲分半席, 層層蒼翠接湖邊. 공수와 황패 원문 '공황(龔黃)'은 '공수(龔遂)'와 '황패(黃覇)'를 말하는데, 두 사람 모두 한(漢)나라 때 백성을 잘 다스리던 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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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장편 七言長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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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수가 공을 이루면 일만 해골이 썩나니124) 【만력 1579년 진사 합격.】 一將功成萬骨枯 【萬曆己卯進士入格】 나는 삼대125)가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我思三代不能回역사서126)를 보다가 장탄식을 하였네 目擊靑史興長吁주나라 진나라 이후 수천 년 동안 周秦以後數千載어지러운 전쟁이 어느 때든 없었겠는가 紛紛戰爭何時無예로부터 명장들은 제마다 공을 세웠으나 古來名將各立功어찌하여 일만 해골을 썩게 하였나 幾敎萬骨翻成枯적개심으로 처음에는 성 밖에서 명을 받고 敵愾初承閫外命칼을 뽑고 단에 오르면 마음이 거칠어졌네 扙劍登壇心膽麤만 리의 요망한 기운 재빨리 쓸어버리고 萬里妖氛擬迅掃하늘의 기둥을 내가 지탱하리라 여겼네 自謂天柱吾當扶웅대함과 지략을 다투는 기각의 형세127)로 爭雄鬪智勢猗角양 보루를 비바람처럼 몰아쳐 삼군이 외치네 兩壘風雨三軍呼우레 같고 번개 같으며 호령조차 엄하지만 雷騰電過號令嚴칼 끝에 뿌린 피는 모두 무고한 자의 것 劍頭洒血皆無辜그런 뒤에 장군은 큰 공훈을 세우고 然後將軍樹大勳각자의 이름이 운대도128)에 들어가네 姓名各入雲臺圖공을 탐하려고 옥문관129)을 다투어 나아가 貪功爭出玉門關어느새 수고롭게 이오130)에 이르렀네 勞勞不覺窮伊吾청해성131)에 백골이 높이 쌓여 靑海城頭白骨高반초132)의 명성에 흉노가 놀랐네 班超聲價驚匈奴삼변133)의 백발 이 비장134)은 三邊白首李飛將한때의 공업이 오랑캐를 감당하였네 一時功業堪葫蘆장평에서 사십만 군사를 한 구덩이 몰살했으니135) 長平一坑四十萬백기는 진정한 장부 되기 어렵네 白起難爲眞丈夫강동의 붉은 수염 손권 말할 것 없으니 莫道江東孫紫髥하물며 업하의 누런 수염 조조를 꼽으랴136) 況數鄴下曹黃鬚공명이 새겨진 이정137)이 어찌 귀할까 銘功彛鼎何足貴백 번의 전쟁 겪고 몸은 썩어가리138) 百戰之餘身亦枯세상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장수 없으니 不戰而勝世無將가련하구나! 어리석은 우리 백성 어육139)이 되었네 可憐魚肉吾民愚지금도 전장에 비바람 부는 저녁이면 至今沙場風雨夕흐느끼는 귀신 통곡 소리 하늘까지 닿네 啾啾鬼哭于雲衢다소간의 공을 이룬 장수들에게 말하노니 爲語多少成功將이 말을 들으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聽此寧不悲來乎원컨대 우리 임금께서 간우를 쥐고 춤추시면 願言吾王舞干羽유묘가 귀순하듯140) 대궐141)로 달려오기를 一格有苗彤墀趨장군과 사졸에게 기이한 공을 요구하지 말고 休令將士責奇功동포들의 몸을 온전하게 하기를 要使同胞全其軀 我思三代不能回, 目擊靑史興長吁.周秦以後數千載, 紛紛戰爭何時無.古來名將各立功, 幾敎萬骨翻成枯.敵愾初承閫外命, 扙劍登壇心膽麤.萬里妖氛擬迅掃, 自謂天柱吾當扶.爭雄鬪智勢猗角, 兩壘風雨三軍呼.雷騰電過號令嚴, 劍頭洒血皆無辜.然後將軍樹大勳, 姓名各入雲臺圖.貪功爭出玉門關, 勞勞不覺窮伊吾.靑海城頭白骨高, 班超聲價驚匈奴.三邊白首李飛將, 一時功業堪葫蘆.長平一坑四十萬, 白起難爲眞丈夫.莫道江東孫紫髥, 況數鄴下曹黃鬚.銘功彛鼎何足貴, 百戰之餘身亦枯.不戰而勝世無將, 可憐魚肉吾民愚.至今沙場風雨夕, 啾啾鬼哭于雲衢.爲語多少成功將, 聽此寧不悲來乎.願言吾王舞干羽, 一格有苗彤墀趨.休令將士責奇功, 要使同胞全其軀. 한 장수가 …… 썩나니 당나라 조송(曹松)의 〈기해세(己亥歲)〉 시에 "그대여 봉작의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한 장수가 공 이루면 만 해골이 썩나니.〔憑君莫話封侯事, 一將功成萬骨枯.〕"라고 하였다. 이는 전쟁을 벌여 한 장수가 큰 공훈을 세우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병졸들의 희생이 따른다는 뜻으로, 싸우다 죽은 병졸들의 뼈가 묻히지도 못한 채 전쟁터에서 말라 뒹군다는 것이다. 삼대 하(夏)ㆍ은(殷)ㆍ주(周)나라를 말한다. 이 시대를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여겼다. 역사서 원문의 '청사(靑史)'는 역사상의 기록으로, 종이가 없을 때 푸른 대껍질에 사실(史實)을 기록하던 데서 유래한다. 기각의 형세 원문은 '의각(猗角)'인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근거하여 '기각(掎角)'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기각은 의각(犄角)이라고도 쓴다. 사슴을 잡을 때에 뒤에서는 다리를 잡고 앞에서는 뿔을 잡는 것으로, 인신(引伸)하여 군사를 양편으로 나누어 적을 협공하거나 앞뒤에서 견제하는 형세를 이른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4년 조에 "비유하면 사슴을 잡을 적에 진나라 사람들은 뿔을 잡고 여러 융족들은 다리를 잡는 것과 같다.[譬如捕鹿 晉人角之 諸戎掎之]"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운대도 운대는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등우(鄧禹) 등 전대(前代)의 명장 28인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놓고 추모한 공신각(功臣閣)의 이름으로 그에 대한 그림을 운대도라 한다. 옥문관 중국과 서역(西域)의 경계에 있는 관문이다. 서역에서 옥석(玉石)을 실어 들일 때 이 관문을 지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오 이오로(伊吾盧)로, 신강성(新疆省) 합밀(哈密) 근처에 있으니, 주로 변방 지역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장궁(臧宮)과 마무(馬武)가 서역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기를 청하면서 "칼을 울리고 손뼉을 치며 이오의 북쪽에서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48 臧宮列傳》 청해성 유담(柳談)의 〈양주곡(涼州曲)〉에 "청해성 하늘에는 달이 있으나 황사가 쌓인 곳엔 봄이 없구나.〔靑海城頭空有月 黄沙磧裏本無春〕"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청해성은 감주(甘州) 장액하(張掖河)에서 남쪽 청해(靑海)까지 이른다."라고 하였다. 《唐音 卷10》 반초 후한(後漢) 때의 무장으로,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漢)나라에 복종시켰고 중국과 서역(西域) 간의 경제와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삼변 한나라 때의 흉노, 조선(朝鮮), 남월(南越)을 말하는데, 흔히 변경 지역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 비장 한나라 때의 장수 이광(李廣)을 말한다.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이광이 우북평에 있을 때 흉노가 그것을 듣고,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며 수년 동안 그를 피하여 감히 우북평에 들어가지 못했다.[廣居右北平,匈奴聞之,號曰漢之飛將軍,避之數歲,不敢入右北平.]"라고 되어 있다. 장평에서 …… 몰살했으니 장평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 군사 40만이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에게 몰살당한 곳이다. 진나라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처음에 명장 염파(廉頗)가 장수로 나와 진나라를 상대로 승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은 조왕(趙王)이 염파를 쫓아내고 싸움에 서투른 조괄(趙括)을 장수로 삼음에 따라, 백기가 이를 이용하여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조나라의 투항한 40만 군사를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하물며 … 꼽으랴 《왕유집(王維集)》 〈노장행(老將行)〉 "업하의 황수아를 꼽을 것 있겠는가.〔肯數鄴下黃鬚兒〕"에서 따온 말이다. 업하는 조조가 도읍한 업(鄴) 지역을 가리킨다. 이정 종묘(宗廟) 제사에 쓰는 제기(祭器)로 이(彝)는 술항아리이고 정(鼎)은 솥이다. 옛날에는 큰 공을 세우면 그 일을 제기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다. 썩어가리 원문의 '고(枯)' 아래에 "거듭 '고(枯)'의 오류가 의심스럽다. 혹은 '통(痛)'이 될 수 있다.〔疊枯誤疑. 或爲痛字.〕"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어육 물고기와 육고기를 통칭한 말인데, 사람들을 잔인하게 짓밟아 해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중장통전(仲長統傳)〉에 "백성들을 어육으로 만들어 그 욕심을 채웠다.[魚肉百姓, 以盈其欲.]"라는 구절이 보인다. 간우를 …… 귀순하듯 간우는 방패를 쥐고 추는 간무(干舞)와 새 깃을 쥐고 추는 우무(羽舞)를 함께 칭하는 말로, 성군의 덕화(德化)를 비유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 임금이 문덕을 크게 펴면서, 방패와 새 깃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니, 그로부터 70일 만에 유묘족이 귀순하였다.〔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대궐 원문의 '동지(彤墀)'는 붉게 꾸민 천자의 뜰로, 전하여 조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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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의 피리 소리 속에 관산의 달142) 三年笛裡關山月 옥관의 바람 쌀쌀하니 기러기 울음 구슬프고 玉關風凄雁聲酸수척한 말은 밤에 장성의 굴에서 물을 마시네 瘦馬夜飮長城窟서리 맞은 백초143)가 날리고 갑옷은 차가운데 霜翻白草鐵衣寒일천 리 밖에서 삼 년의 세월을 보냈네 一千里外三年卒처량한 피리 소리에 달은 또한 어떠하였는가 凄凉笛裡月又何이 한 밤 출정나간 사람은 머리가 다 세었네 一夜白盡征人髮마음 아프게 하는 빛 창자 끊어질 듯한 소리 傷心之色斷腸聲서풍에 분부하지만 한이 그치지 않네 分付西風恨未歇임금의 수레 닿는 곳마다 〈식미〉를 읊조리고 龍輿何處賦式微계문144)은 피비린내 옛 대궐마저 혼란하였네 薊門腥塵迷舊闕멀리 고향을 가리키니 눈가에 눈물이 나오고 家山遙指淚眼邊일만 리 변방의 구름 꿈처럼 아득하네 萬里關雲夢怳惚남쪽 동산 풀은 푸른데 서산에 눈이 내리고 南園綠草西山雪푸른 바다 아득한데 물고기는 소식145)이 없네 碧海茫茫魚信沒서릿달 비추는 곳곳마다 옷 다듬이질 하지만 擣衣幾處杵霜月규방의 여인들 꿈에 백골을 보네 半是香閨夢白骨누런 모래 쌓인 속에 화살이 눈앞에 가득한데 黃沙磧裡箭滿眼머리 세게 한 세월 치달려 돌격하듯 따라 붙네 鬂上光陰付馳突천산에 일찍 활 걸었다는146) 소식 아직 못 들었으니 天山未聞早掛弓언제나 오랑캐147)를 평정하고 개선가 부를까 凱歌何時定胡羯아득히 먼 곳에서 삼 년 동안 눈물 뿌렸지만 天涯洒盡三載淚피리 소리에 달 비칠 때 가장 마음이 아팠네 最是傷心笛裡月소리마다 슬픔이 뒤섞여 농수148)에 목이 메고 聲聲悲雜隴水咽변방의 구름 구슬프니 넋이 끊어지네 塞雲凄迷魂斷絶바람 맞으며 고향 돌아가고픈 시문 읊고 나니 臨風咏罷思歸篇외로운 새 지나가는 곳에 변방의 산 우뚝하네 獨鳥去邊陰山兀 玉關風凄雁聲酸, 瘦馬夜飮長城窟.霜翻白草鐵衣寒, 一千里外三年卒.凄凉笛裡月又何, 一夜白盡征人髮.傷心之色斷腸聲, 分付西風恨未歇.龍輿何處賦式微, 薊門腥塵迷舊闕.家山遙指淚眼邊, 萬里關雲夢怳惚.南園綠草西山雪, 碧海茫茫魚信沒.擣衣幾處杵霜月, 半是香閨夢白骨.黃沙磧裡箭滿眼, 鬂上光陰付馳突.天山未聞早掛弓, 凱歌何時定胡羯.天涯洒盡三載淚, 最是傷心笛裡月.聲聲悲雜隴水咽, 塞雲凄迷魂斷絶.臨風咏罷思歸篇, 獨鳥去邊陰山兀. 삼 년의 …… 달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세병마행(洗兵馬行)〉이란 시에 "삼 년 동안 강적(羌笛) 소리에 관산의 달 보았고, 만국의 군대 앞에 초목이 바람에 흔들리네.[三年笛裏關山月, 萬國兵前草木風.]"라는 구절이 보인다. '관산의 달[關山月]'은 한나라 때 악부(樂府)의 곡명이다.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악부시이다. 문인들이 이 제목의 악부시를 지어 병사가 오랫동안 수자리를 나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여 가족과 떨어져 있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였다. 백초 목초(牧草)의 일종으로, 건조할 때 흰색이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로 황사(黃沙)와 함께 변경 지역의 황량한 풍경을 말할 때 쓰인다. 계문 북경의 덕승문(德勝門) 밖의 지역으로, 요동과 함께 우리나라로 통하는 관문이다. 물고기는 소식 소식을 전해 주는 편지를 뜻한다. 고악부(古樂府)에 "손님이 먼 지방으로부터 와서 나에게 한 쌍의 잉어를 주었네. 아이를 불러 잉어를 삶게 하니, 뱃속에 한 자의 흰 비단 편지 있었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前集 卷3 樂府上》 천산에 …… 걸었다는 오랑캐를 평정한다는 뜻이다. 두보의 〈개부 가서한에게 드리는 시〔投贈哥舒開府翰〕〉에 "청해엔 화살을 전함이 없고, 천산엔 일찍 활을 걸어 놓았네.〔靑海無傳箭 天山早掛弓.〕"라고 하였다. 오랑캐 흉노의 별종인 오호(五胡) 중 갈족(羯族)을 일컫는 말인데, 보통 북쪽 오랑캐란 말로 쓰인다. 호락(胡狢)ㆍ호로(胡虜)ㆍ호맥(胡貊)ㆍ호학(胡貉)이라고도 한다. 농수 섬서성의 농현(隴縣) 서북쪽에 있는 농산(隴山)에서 발원하는 강인데, 이 지역은 중국 서쪽 변경의 요해처이므로 흔히 변경 지방에 있는 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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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제가 춘심을 두견새에 의탁하다149) 望帝春心托杜鵑 가을 깊은 화표150)에 학이 슬피 조문하고 秋深華表鶴悲弔세밑에 남쪽 변방 원숭이가 구슬피 우네 歲暮南塞猿哀吟사물의 본성에 유래가 있음을 알고 나니 憑知物性有自來봄 숲에서 우는 두견새가 더욱 가엽구나 更憐杜宇鳴春林어느 해에 망제는 나라 떠나 시름겨웠나 何年望帝去國愁가만히 불어오는 동풍에 마음이 한량없네 暗入東風無限心잠총은 몇 해 동안 진나라와 왕래하지 않았으나151) 蠶叢幾歲隔秦煙갑자기 시체가 있다는 보고에 강가로 왔네 有屍忽報來江潯천인이 따르고 복종함에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天人歸命豈無以선위를 받는 날 임금으로 통치함을 사양했네 禪受此日辭君臨금구152)가 이미 별령153)의 손에 떨어졌으니 金甌已落鼈靈手고국의 풍광에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네 故國風日悲難禁호화롭지만 적막한 초나라 구름 텅 비었으나 豪華寂寞楚雲空옛날에 놀던 어느 곳이든 봄빛은 깊어가네 舊遊何處春光深처량하게도 다시 대궐154)154) 대궐 : 원문의 '풍신(楓宸)'은 제왕의 궁전을 말한다. '신(宸)'은 북신(北辰)이 있는 곳으로 임금의 궁궐을 뜻하는데, 한(漢)나라 때 그곳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을 다스리지 못하여 凄凉無復御楓宸지난 일들 연기 따라 잠기니 가련하구나 可憐往事隨烟沈문득 불여귀거라는 소리가 한스러워 翻將不如歸去恨강남의 새에게 아득히 주었네 悠悠付與江南禽강남의 태양이 무성한 숲속으로 떨어지는데 江南日落樹依依봄빛은 침침한 연기 속에 일렁이네 韶光蕩漾烟陰陰화려한 옛 습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繁華舊習未全除밤마다 꽃 사이에서 길게 읊조리네 夜夜長占花間音나그네 넋 쓸쓸하나 돌아갈 기약도 없는데 羈魂零落去無期고향의 연기와 나무가 텅 비어 서늘하네 故山煙樹空森森용루155)와 봉궐156) 촉 땅 서쪽에 있으니 龍樓鳳闕蜀天西떨어진 꽃과 향초를 무슨 수로 찾겠는가 落花芳草何由尋봄이 오고 가는 것은 해마다 반복하는데 春來春去年復年부질없이 세월 빨리 흘러감에 놀라네 最驚歲月空駸駸배꽃에 내리던 비는 밤 깊은 뒤 그쳐 梨花雨歇夜深後달157)은 엄습해오는 구름을 허락지 않네 銀蟾不許雲侵侵다정해라 마음껏 울어 그치지 않으니 多情一任啼不歇소리마다 푸른 산봉우리 찢으려 하네 聲聲欲裂蒼山岑삼파협에 노두158)의 마음이 더해지니 三巴添却老杜心곳곳마다 시름겨운 사람 마음 젖시네 到處沾盡愁人襟울 때 그저 이전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니 啼時只管訴前寃애원함이 옹문자주의 금곡159)과 같구나 哀怨不啻雍門琴산속의 오늘 밤 나그네 회포 외로운데 山中今夜客懷孤듣고 나니 나도 몰래 수심 견딜 수 없네 聞爾不覺愁難任누가 슬픈 소리를 청상160)에 들였나 誰將哀響入淸商남은 한이 이어져 지금까지 전승하네 遺恨綿綿傳至今 秋深華表鶴悲弔, 歲暮南塞猿哀吟.憑知物性有自來, 更憐杜宇鳴春林.何年望帝去國愁, 暗入東風無限心.蠶叢幾歲隔秦煙, 有屍忽報來江潯.天人歸命豈無以, 禪受此日辭君臨.金甌已落鼈靈手, 故國風日悲難禁.豪華寂寞楚雲空, 舊遊何處春光深.凄凉無復御楓宸, 可憐往事隨烟沈.翻將不如歸去恨, 悠悠付與江南禽.江南日落樹依依, 韶光蕩漾烟陰陰.繁華舊習未全除, 夜夜長占花間音.羈魂零落去無期, 故山煙樹空森森.龍樓鳳闕蜀天西, 落花芳草何由尋.春來春去年復年, 最驚歲月空駸駸.梨花雨歇夜深後, 銀蟾不許雲侵侵.多情一任啼不歇, 聲聲欲裂蒼山岑.三巴添却老杜心, 到處沾盡愁人襟.啼時只管訴前寃, 哀怨不啻雍門琴.山中今夜客懷孤, 聞爾不覺愁難任.誰將哀響入淸商, 遺恨綿綿傳至今. 망제는 …… 의탁하다 망제는 전국 시대 말엽의 촉(蜀)나라 왕 두우(杜宇)로, 억울하게 왕위를 선양한 뒤에 서산(西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원통한 넋이 두견새가 되어 돌아와 봄이면 밤낮으로 애절하게 피를 토하며 운다는 전설이 있다. 당 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금슬(錦瑟)〉에 "금슬은 뜬금없이 오십 줄, 줄 하나 기러기발 하나에 꽃다운 시절 그리워하네. 장생은 꿈에서 깨어나 나비인가 어지러웠고, 망제는 춘심을 두견새에 의탁했지. 푸른 바다 달 밝은데 진주는 눈물 흘리고, 남전 따스한 햇살에 옥에선 연기 피어나네. 이 사랑 추억이 될 수 있겠으나, 그때 되면 이미 모든 것이 아득할 것.〔錦瑟無端五十弦 一弦一柱思華年 莊生曉夢迷蝴蝶 望帝春心托杜鵑 海月明珠有淚 藍田日暖玉生烟 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已惘然〕"라고 했다. 화표 화표주(華表柱)로 궁전이나 능묘 등 대형 건축물 앞에 장식용으로 세우는 돌기둥을 말한다. 과거 요동 사람으로 신선이 된 정영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화표주 위에 내려앉았더니, 한 소년이 활을 쏘려고 하자 허공으로 날아올라 배회하면서 "새여 새여 정영위로다,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바뀌었나니, 신선술 왜 아니 배워 무덤만이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한 전설이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전한다. 잠총은 …… 않았으나 잠총(蠶叢)은 옛날 촉(蜀)나라의 선왕(先王)이다. 양웅(揚雄)의 《촉국본기(蜀國本紀)》에 의하면, 촉국에는 어부(魚鳧), 잠총 등 수많은 선왕이 있었다고 하였고,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잠총과 어부 등이 개국한 지가 어이 그리 아득한고. 오늘날까지 사만팔천 년을, 진나라 변새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네.〔蠶叢及魚鳧 開國何茫然 爾來四萬八千歲 不與秦塞通人煙〕"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3》 금구 금으로 만든 사발로 흠이 없고 견고하다 하여 강토(疆土)를 비유한다. 양 무제(梁武帝)가 "나의 국토는 오히려 금구와 같아 하나의 상처도 흠도 없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梁書 卷38 朱異列傳》 별령 옛날 촉나라 망제는 별령이란 초나라 귀신에 현혹되어 왕위를 잃고 객지를 떠돌며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매년 봄바람이 불고 가을 달이 뜨면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 如歸)'라고 울면서 끝내 피를 토하였다고 한다. 용루 왕세자의 거처 및 왕세자를 가리키는 말로 조정을 의미한다. 중국 한(漢)나라 때 〈성제기(成帝紀)〉에서 나온 말로, 성제(成帝)가 태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하였다는 데서 비롯하였다. 봉궐 한 무제(漢武帝)가 세운 궁궐의 이름인데, 구리로 만든 봉황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궁궐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달 원문의 '은섬(銀蟾)'은 달을 말한다. 달에 토끼와 두꺼비가 산다는 전설이 있어 옥토(玉兔), 은섬이 달의 이칭이 되었다. 노두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같은 두씨(杜氏)로 유명한 두목지(杜牧之)가 있기 때문에 두보는 노두, 두목지는 소두(少杜)라 하였다. 옹문자주의 금곡 옹문자주는 본디 금곡(琴曲)에 뛰어나서 거문고 연주로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데, 그가 일찍이 맹상군 앞에서 인생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소재로 하여 거문고를 한 곡조 타니, 맹상군이 슬퍼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설원(說苑)》 선설(善說) 청상 악부(樂府)의 가곡(歌曲) 이름으로, 가을에 속하는 상성(商聲)의 맑고도 슬픈 노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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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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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새는 멋대로 날지 않는다 好鳥不妄飛 바람 불어 천길 높이 날아오른 봉황은 天風彩鳳上千仞훨훨 나는 날개161)로 사람에 얽매이지 않네 飄飄六翮無人鞿청전162)에서 내려온 맑고 깨끗한 외로운 학은 淸霜孤鶴下靑田멀리 나는 날개로 위기를 뛰어넘네 迢迢逸翰超危機좋은 새는 날고 멈추기를 선택할 줄 알아서 憑知好鳥擇飛止영험한 마음으로 기미를 미리 알아 해를 멀리 하네 遠害靈心先炳幾서식하여 어찌 백량대163) 연회 함께 하리 棲息寧同栢梁燕높이 날아올라 풍성한 벼와 기장 돌아보네 高超肯顧稻粱肥왕손의 담장 밖에 따르지 않나니 王孫墻外不相隨도성 거리의 꽃나무에 어찌 날겠는가 紫陌芳樹何曾飛일생을 푸른 산과 흰 구름 가에 살아가면서 生涯靑嶂白雲邊날아가고 날아오며 의지할 바를 아네 飛去飛來知所依산바람 계곡의 달과 좋은 이웃 되었으니 山風溪月好爲隣몸을 돌려 세속을 향해 가지 않네 將身不向紅塵歸길이 자유롭게 노닐리라 그윽히 맹세하니 幽盟長占自在遊허공에 깃털은 찬란한 빛 자아내네 半空毛羽生光輝조도164)에서 어찌 사람이 쏠까 걱정하리 鳥道何憂罹人射불필요한 물건은 군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네 長物不畏君王威다시 생각건대 화를 피하는 것은 사람과165) 새가 같으니 翻思避禍人與鳥모두 한결같은 이치로 서로 어긋남이 없네 全身一理無相違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진나라 법이 만들어지자 기러기 이미 날아오르고 秦法初成鴻已擧상안166)의 풍광에 안개가 미세하게 날림을 商顔風日烟飛微또 보지 못했는가 又不見부춘산 가운데에서 봉황이 나오지 않고 富春山中鳳不出동강 물가에서 양 갖옷167) 반쯤 걸쳤네 羊裘半脫桐江磯아! 저들은 살길 찾아 먹이를 다투고 탐하다가 嗟彼謀生競貪餌도리어 앞길이 그물로 에워싸임을 잊었네 却忘前程羅四圍정신없이 마시고 쪼다가 피할 줄 모르고 紛紛飮啄不知避그물에 떨어져 잡히지 않음은 예로부터 드물었네 罔墜網罟從來稀팔뚝 위 매를 동문 어디에서 다시 얻겠는가 臂鷹東門寧復得아! 화정의 외로운 학168)은 이미 글렀구나 孤鶴華亭嗟已非감회가 일어나 읊조린 이가 있으니 그는 누군가 興懷有咏彼何人만고토록 주옥같은 시문이169) 끊이지 않았네 萬古未免聯珠璣내 이제 산림에서 좋은 새에 대해 배우고 我今山林學好鳥시 한 수 읊조리며 사립문을 걸어 닫았네 題詩一嘯扃柴扉 天風彩鳳上千仞, 飄飄六翮無人鞿.淸霜孤鶴下靑田, 迢迢逸翰超危機.憑知好鳥擇飛止, 遠害靈心先炳幾.棲息寧同栢梁燕, 高超肯顧稻粱肥.王孫墻外不相隨, 紫陌芳樹何曾飛.生涯靑嶂白雲邊, 飛去飛來知所依.山風溪月好爲隣, 將身不向紅塵歸.幽盟長占自在遊, 半空毛羽生光輝.鳥道何憂罹人射, 長物不畏君王威.翻思避禍人與鳥, 全身一理無相違.君不見, 秦法初成鴻已擧, 商顔風日烟飛微.又不見, 富春山中鳳不出, 羊裘半脫桐江磯.嗟彼謀生競貪餌, 却忘前程羅四圍.紛紛飮啄不知避, 罔墜網罟從來稀.臂鷹東門寧復得, 孤鶴華亭嗟已非.興懷有咏彼何人, 萬古未免聯珠璣.我今山林學好鳥, 題詩一嘯扃柴扉. 날개 원문의 '육핵(六翮)'은 튼튼한 날개를 가리킨다. 공중에 높이 나는 새는 여섯 개의 튼튼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깃촉이 있다고 한다. 청전 학이 나는 고장의 이름이다. 《초학기(初學記)》 제30권에, "수목계(洙沐溪)가 있는데, 청전(靑田)에서의 거리가 9리이다. 이 가운데 백학(白鶴) 한 쌍이 살면서 해마다 새끼를 낳는데, 새끼들은 다 자라면 모두 떠나가고 오직 어미 백학 한 쌍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색깔이 아주 희어서 사랑스러운 바, 이는 신선이 기르는 학이라고 한다." 하였다. 백량대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성(長安城)에 건립하여 연회를 베풀고 시를 읊는 장소로 쓰던 누대를 말한다. 높이가 20장(丈)이고 향백(香柏)으로 전각의 들보를 만들어 향기가 수십 리까지 퍼졌다 한다. 조도 새만이 날아서 통과할 수 있는 좁고 험준한 산길을 이른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 〈촉도난(蜀道難)〉에 "서쪽으론 태백산에 조도가 있으니, 아미산 꼭대기를 횡단할 수 있네.[西當太白有鳥道, 可以橫絶峨眉巔.]"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卷7 蜀道難》 과 원문에는 '여(與)' 아래에 "아마도 여(如) 자의 오류인 듯하다.〔恐如字之誤〕"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상안 진(秦)나라 말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등 네 명의 은자가 은거하였던 산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상산(商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부른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부춘산(富春山) …… 갖옷 원문의 '양구(羊裘)'는 양피(羊皮)로 지은 갖옷을 말하는데,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어릴 적 학우(學友)이기도 했던 은사(隱士) 엄광(嚴光)이 광무제가 등극한 이후로는 광무제의 간곡한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면서 양구를 입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며 일생을 보냈던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 봉황은 엄광을 가리킨다. 화정(華亭)의 외로운 학 화정은 지금의 상해시(上海市) 송강현(松江縣) 서쪽에 있는데, 학의 산지로 유명하다. 진(晉)나라 육기(陸機)가 벼슬길에 들어서기 전에 동생 육운(陸雲)과 함께 이곳에서 10여 년을 살았는데, 나중에 참소를 받고 처형당하기 직전에 "화정의 학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만 그 일이 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欲聞華亭鶴唳 可復得乎〕"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尤悔》 주옥같은 시문을 원문에는 '聯珠璣(련주기)' 아래에 "아마도 오류인 글자가 있는 듯하다.〔恐有誤字〕"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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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送羅仲孚解官歸鄕 【백광훈,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며, 본관은 수원으로, 해남에 거주하였다. 시와 글씨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원접사(遠接使)의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을 지냈고, 벼슬은 참봉(參奉)에 그쳤다. 공이 금오랑(金吾郞)에서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옥봉이 이 이별시를 써 주었다.】인간 세상의 맛을 다 보더니 嘗盡人間味고향으로 돌아가는 계책이 가장 낫네 歸田策最良이미 가시덤불처럼 몸을 버렸으니 已拚身似更남은 것이라곤 서리 같은 살쩍뿐 贏得鬂成霜연못엔 마름과 연꽃 아름답고 水國菱荷足동산엔 토란과 밤꽃 향 가득 山園芋栗香유유히 베개 높이 벤 곳에 悠然高枕處대궐의 꿈 아득하네 雲闕夢蒼茫 【白光勳, 字彰卿, 號玉峰, 水原人, 居海南, 以詩調筆法, 名於世. 嘗爲遠接使 白衣從事官, 官止參奉. 公以金吾郞見遞還鄕時, 玉峰有此別章】嘗盡人間味, 歸田策最良.已拚身似更, 贏得鬂成霜.水國菱荷足, 山園芋栗香.悠然高枕處, 雲闕夢蒼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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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모임 族會 산 근처 강가에 바위가 돈대를 이루니올라가 굽어보자 아름다운 계절에 온갖 꽃이 피어 있네강산은 만고토록 조금도 금하지 않고꽃과 버들 봄 내내 웃으며 시기하지 않네사람은 흰 기러기 노니는 물가에서 이르고술은 붉은 살구 열린 동(洞)238)에서 오네더구나 상 나란히 한 이들 모두 형제이니그 속에서의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네 山近江頭石作臺登臨佳節百花開江山萬古渾無禁花柳三春笑不猜人自白鷗洲上至酒從紅杏洞中來連床况是皆兄弟箇裏歡情不自裁 붉은……동 원문은 '홍행동(紅杏洞)'이다. 살구꽃이 핀 곳은 흔히 술집을 가리킨다. 당나라 두목(杜牧)의 시 〈청명(淸明)〉에, "묻노니 술집이 어디에 있는가?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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