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역적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말수 등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會寧鞠景仁明川末秀等狀啓 신이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계책을 내어 병사를 모집한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뱃길로 장계하였거니와, 거센 파도와 왜놈들 사이에서 혹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시 진달하옵니다. 장계에 다 올리지 못한 사연과 근래의 조처한 일 등에 대해 아뢰자면, 신이 처음에 이성인(李聖仁),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과 함께 경성(鏡城)에 들어가서 군민(軍民)들을 효유하여 함께 지킬 생각이었는데, 백성들의 의혹이 너무 심하여 백에 하나도 믿지 않을뿐더러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도 또한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대부분 남쪽으로 도망하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각자 흩어져 혹은 산길로 혹은 바닷길로 향하여 관군에게 가려고 하였습니다.신이 바닷가 마을에 와 있다가 배를 타려고 하던 차에 마침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구황 등이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북쪽으로 돌아온다 하기에 신은 곧바로 정현룡에게 통지하고지방사람 및 여러 진의 장수들과 모의하여 경성에 들어가 웅거하기로 하고서 들에 성 안의 군민을 모아 국가의 중흥을 위해 마음을 돌려 적을 토벌하자는 의리로써 효유하였으며, 공문으로 원근의 병마를 불러서 반역자를 토벌하고 왜적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기세가 바야흐로 강성하고 사람들은 두려워 주저하니 다만 모군(募軍)에 응하는 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회령(會寧)의 역적 아전 국경인(鞠景仁)은 왜놈이 주는 벼슬을 받아 판형(判刑)이라 칭하고서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며 육진의 병사를 부를 길을 막았으며 몰래 왜적과 통하여 항상 경성을 양쪽에서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명천사(明川寺)의 종 말수(末秀)는 대장이라 자칭하며 전령을 보내 물자를 끊임없이 운반하여서 길주(吉州)의 왜놈들과 결탁하였으며 지방의 호족들을 도살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기에 경성의 수비가 고립되고 약하여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오랑캐와 왜적이 협공하는 형세에 남북으로 반란의 역적이 있어서 간신히 지탱하면서 죽음으로 지킬 생각이었습니다.이번 달 2일에 회령 향소의 공문에 '본부(本府)에 거처하는 향리 국경인은 본래 악독한 놈으로 평소 일을 처리할 때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으나 대단한 일이 아니기에 내버려두고 다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경향(京鄕)의 사람들이 옷과 관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허둥대었는데, 본도(本道)의 산천은 험하고 높으며 거리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약간의 사대부 뿐 아니라 왕자 두 분과 그를 모시고 온 영부사(領府事)와 부원군(府院君), 승지(承旨) 등이 왜병을 피하고자 이 성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왜적이 부령에서 곧바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앞에 보이는 국경인이 들어 알고서 왜장에게 아첨하려고 자신의 무리들로 하여금 왜적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이에 은밀하게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역자(驛子) 이충경(李忠卿·), 관노 승수(承水)와 경이(京伊) 및 그가 아는 잡놈 등으로 하여금 왕자 두 분과 부인, 영부사, 부원군, 승지 등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자신의 처소에 있을 때 밤을 타고 돌입하여 불의에 잡아 결박하여 군영에 단단히 가두고서, 그 당시 부사와 판관으로 손을 쓰지 못하게 하며 군대의 위엄을 매섭게 펼쳐 놓았습니다. 부사(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萬戶) 이함(李涵), 내금위(內禁衛) 김덕신(金德新), 판관(判官) 군관 최덕흥(崔德興) 및 부조 방장(府助防將) 우후(虞侯) 군관 장응별(張應鱉), 정인신(鄭仁信) 등과 및 부하들을 시켜 이전에 미워하던 향리 공억복(貢億福), 관노 청룡(靑龍) 등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인 뒤에 왜적이 고풍산(古豐山)이 이르자 반란 아전 국경인은 왕자를 잡아 가두었다고 왜장이 있는 곳에 자신이 친하게 지내던 향리 임민(林岷)을 내달려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당시 성안의 군민들은 모두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향소에도 위로는 관원이 없고 아래로는 군민이 없었기 때문에 저 또한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이 성에 들어간 뒤에 돌아왔는데 군민들도 천천히 돌아왔습니다. 앞에 보이는 역적 아전 국경인이 왜장에게 벼슬을 청하여 '판형(判刑)' 두 글자라는 이름을 받아 성안에서 권세를 드날리며 자신의 무리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위세를 떨치며 무고한 군민 십여 명을 제 마음대로 참수하고서 생존한 백성들로 하여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날로 길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향소의 교생과 군민들이 비록 분통한 뜻이 있더라도 위세에 겁을 내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세언, 이충경, 승수, 경이, 한복 등은 기회를 타서 참수하였습니다.그러나 역적의 괴수 국경인은 위세가 당당하고 그 족속들은 삼대처럼 많아서 기회를 얻을 틈이 없었기에 위의 김세언 등을 벤 목을 여러 진에 효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감사의 공문에 '의병을 뽑아서 보내라.'라고 거듭거듭 분부하였지만, 위의 국경인이 또한 감사의 공문을 도외시하고 하나도 거행하지 않으므로, 온 고을의 군민이 그가 의병을 보내지 않은 것에 분통을 터드려 한곳에 모두 모여 군대의 위엄을 크게 펼쳐 이전 역적 아전 국경인과 및 그와 함께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그의 처남의 안종 박림(朴林), 김림(金琳), 그의 수양아들 최린수(崔麟水) 뿐 아니라 김윤복(金允福), 오복수(吳福水), 종 언준(彥俊) 등을 전투를 벌여 일시에 활로 쏴 죽이고 그날로 목을 베었습니다. 국경인은 손발을 자르고 박림 등은 머리를 베었는데 모두 일곱의 목을 품관 색리 등에게 주어 모두 함에 담아서 보냈으며 의병도 내일 정도에 뽑아서 보낼 것이니, 역적 아전 국경인을 잡을 때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등급을 나누어 책으로 만들어서 올려 보내겠다는 뜻으로 첩보를 올렸습니다.배후의 강한 도적은 비록 이미 죽였으나 목전의 반도들은 아직도 왜놈의 기세를 끼고서 먼저 명천을 점령하였고 다음으로 길주(吉州)를 도모하려던 차에 명천(明川)의 품관과 촌민들 수백 명이 모여서 길을 나눠 습격하였으나 반란의 역적들이 성에 웅거하면서 화포를 많이 발사하자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곧바로 무너져 뿔뿔이 달아났습니다. 이에 신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를 보내 각각 정예기병 30명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신의 군관 경원(慶源) 전 별감(別監) 정응복(鄭應福), 경성 친군위(鏡城親軍衛) 전덕룡(全德龍) 및 종성 부사 정현룡의 군관 경성 사람 급제 박은주(朴銀柱), 서자 정시룡(鄭時龍) 등도 적을 치러 갈 것을 자원하여 밤낮으로 내달려 명천에 이르니, 말수 또한 자신의 형세가 막다른 것을 알고서 몸에 무기를 차고서 산골로 도망가 웅거하였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추격하였는데, 경성 토병(土兵) 전덕인(全德仁)이 먼저 그 흔적을 찾았으며 본부 영군사(營軍士) 김천년(金千年)이 산채로 포박하였고 그의 무리 경성 안종 논손(論孫), 명천 관노 문형(文亨), 귀양 온 장응호(張應豪) 등을 잡아 목을 베어 군중에 효수하니 잔당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 혹은 왜적에게 가거나 혹은 산속으로 달아나 전부 체포하지는 못하였습니다.이전 회령에서 죽인 국경인과 명천 말수의 머리와 손발을 모두 함에 넣어 보내며, 그 나머지 목은 벤 13명의 수급은 산길이 눈에 얼어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부득이 왼쪽 귀를 베어 쪽지에 이름을 써서 올려 보냅니다. 역적의 재산은 법으로 마땅히 몰수해야 하니 마땅히 기록하여 아뢴 뒤에 처리하겠습니다만, 고을 곳간이 탕진되었기에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권장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권도(權道)로 군중의 상품으로 사용하였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밭과 집은 마땅히 계문(啓聞)하여 역적을 잡거나 토벌한 이에게 주려고 생각하였으니, 앞의 두 역적은 다만 일개 하찮은 놈들이라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을 등급을 나눠 공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울 듯하며, 또 새로 모인 병사들에게 만일 고무시키는 조치가 없으면 호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기에 전하께 이처럼 아룁니다.두 역적의 머리를 베고 난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온성 이남의 진보(鎭堡)에서 불러 모은 병사들이 차츰 올라오는데, 다만 경원의 군사는 현재 아직 방비하는 곳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진보의 여러 장수들은 경성을 방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혹은 북관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혹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북으로 돌아와 모두 경성에 들어와 신의 지휘를 받고 있으니,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영건 만호(永建萬戶) 정예국(鄭禮國), 보로지 권관(甫老知權管) 유대남(柳大男),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보화보 권관(寶化堡權管) 이언상(李彥祥), 삼삼파 만호(森森坡萬戶) 한대방(韓大防), 장군파 만호(將軍坡萬戶) 오대남(吳大南), 조산 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어유간 만호(魚遊澗萬戶) 방우주(方佑周), 세천 권관(細川權管) 박예범(朴禮範) 등이 차례대로 와서 모였습니다.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은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별해보(別害堡)에서 왔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 서성(徐渻)과 귀양 온 나덕명(羅德明)은 바깥 마을에 있다가 마을에 거주하는 군정을 타일러 모두 성으로 들어왔습니다.육진은 한번 왜적이 지나간 뒤에 군기와 창곡이 겨우 10분의 1~2정도 남았는데 각각 봉하여 닫아두었는데, 말이 모두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므로 운반하여 타지와 통할 형세가 되지 못합니다. 경성에는 다행히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각각 7백여 부와 천 명이 반 년 먹을 식량이 있으므로 군사 1천 7백여 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고을의 관군은 산료(散料)를 관에서 주고 이 고을 사람은 모두 자비로 먹게 하였습니다. 대개 앞뒤로 이 지방 사람으로 하여금 두세 번 길주의 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적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는데, 적의 숫자는 만여 명으로 관청과 개인 집에 나눠 거처하면서 성 안에 따로 깊은 해자와 높은 망루를 설치하여 주야로 망을 보면서 순찰한다고 하니, 경솔하게 병사를 일으켰다가는 욕을 볼 것을 깊이 헤아려 모쪼록 형세를 보아 기습하여 먼저 그들의 예봉을 꺾은 연후에 일거에 섬멸시키고 다음으로 영동(嶺東)과 단천(端川)에 미칠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14일. 臣與鍾城府使鄭見龍, 共謀集兵緣由, 已爲由水路, 狀啓爲白有在果, 風濤盜賊之間, 恐未得達爲白乎去, 更良陳達爲白在果。狀啓未盡辭緣及近日措置事段, 臣初與李聖仁及慶源府使吳應台等入鏡城, 曉喩軍民, 以爲共守之計爲白良置, 民惑已甚, 百不一信叱分不喩, 京來將士, 亦無固志, 多欲南出乙仍于, 不得已各散, 或向山路, 或向海道, 欲達官軍。臣來在海村, 欲爲乘舟次, 適聞道路傳言, 具滉等持巡察使關子, 北還之奇爲白遣, 臣卽通于鄭見龍, 謀與土人及諸鎭將, 入據鏡城, 庭集城中軍民, 諭以國家中興, 回心討賊之義, 帖召遠近兵馬, 以爲討叛滅倭之計爲白良置, 賊勢方張, 人心疑懼, 非但應募無幾叱分不喩, 會寧叛吏鞠景仁段, 受倭官稱判刑, 威制一府, 以塞六鎭徵兵之路, 潛通倭賊, 常爲挾擊鏡城之計爲白遣。明川寺奴末秀段, 稱大將用傳令, 輸載絡繹, 締結吉州之倭, 屠殺土豪, 以遏義旅之興爲白乎等以, 鏡城守禦孤弱不振, 胡倭挾勢, 南北有叛, 僅僅支保, 死守是計爲白有如乎。本月初二日, 會寧鄕所牒呈內, '本府居鄕吏鞠景仁, 亦本是頑惡之人, 以平時用事之日, 多般作惡爲白良置, 非大段事是乎等用良, 置而不治爲如乎次節, 倭賊猝發, 衣冠顚倒, 京外遑遑, 本道乙山川險高, 道路隔遠是去, 凡干士大夫是沙餘良, 王子君兩分及陪來領府事·府院君·承旨等, 欲避倭變, 委入此城爲有去乙, 倭賊自富寧直入之奇乙, 上項鞠景仁, 亦聞知爲遣, 欲媚倭將, 使其徒立功於倭賊爲乎矣。陰令親軍衛金世彥·驛子李忠卿·官奴承水·官奴京伊及其矣所知雜類等率良旀,同王子兩分及夫人與領府事府院君承旨等夫人敎是等乙, 各其所在處, 乘夜突入, 不意執捉結縛, 堅囚軍營爲遣, 其時府使判官以使不得下手, 盛陳軍威。府使軍官前萬戶李涵·內禁衛金德新·判官軍官崔德興及府助防將虞侯軍官張應鱉·鄭仁信等及府下人, 前月有嫌爲在, 鄕吏貢億福·官奴靑龍等, 斬首示威後, 倭賊到古豐山爲有去乙, 同叛吏鞠景仁, 亦王子執捉拘留是如, 倭將處, 其矣所厚鄕吏林岷, 以馳告爲乎矣。' 其時段, 城中軍民, 幷只避亂入山乙仍于, 鄕所等段置, 上無官員, 下無軍民是乎等用良, 亦爲入山爲有如可, 倭賊入城後, 還來爲乎亦中, 軍民等徐徐還來爲良置。向前叛吏鞠景仁, 亦要名於倭將, 受判刑二字之名, 擅權於城內, 逞一己嘯聚之計, 又立威權, 恣斬無辜軍民十餘名, 使生存之民, 不得下手, 日增道路耳目是乎等用良, 鄕所校生軍民等, 雖有痛憤之志, 亦怯於積威, 莫敢下手爲有如乎次, 金世彥李忠卿承水京伊漢福等段, 乘機斬首爲有乎矣。 同賊首鞠景仁, 亦威勢堂堂, 族類如麻, 乘機無隙是置有等以, 上項金世彥等斬首乙, 梟示列鎭不得爲有如乎。道關內義兵抄送事, 再再分付爲有乎矣。上項鞠景仁, 亦道關乙, 置之度外, 一不擧行爲去乙, 一邑軍民, 憤其義兵不送, 咸聚一處, 大陳軍威, 向前叛吏鞠景仁及同謀作亂爲如乎其矣妻甥內奴朴林·金林, 其矣義子崔麟水是沙餘良, 金允福·吳福水·奴彥俊等, 一時相戰射殺, 同日斬首爲乎矣。鞠景仁段, 處斬手足, 朴林等段, 斬首, 合七首乙, 品官色吏等準授, 幷只函送爲遣, 義兵段置, 來明日, 抄送爲在果, 叛吏鞠景仁執捉時功勞人等乙, 秩秩分等成冊, 上道爲白臥乎味, 牒呈是白有亦。背後劇賊, 雖已就戮, 目前叛竪, 尙挾倭勢乙仍于, 先定明川, 次圖吉州計料次, 明川品官及村民等, 相聚數百, 分道掩襲爲白如乎, 叛賊據城, 多放火炮, 烏合之衆, 旋卽潰散是如爲白去乙, 臣遣吾村權管具滉·安原權管姜文佑, 各率精騎三十名, 臣矣軍官慶源前別監鄭應福·鏡城親軍衛全德龍及鍾城府使鄭見龍軍官鏡城土及第朴銀柱·庶孽鄭時龍等, 自願往討, 晝夜幷行, 比到明川, 則同末秀亦自知勢窮, 身佩戎器, 竄據山谷爲白有去乙, 追至深山, 鏡城土兵全德仁, 先得其蹤, 本府營軍士金千年執縛生擒, 幷捉其黨鏡城內奴論孫·明川官奴文亨·定配人張應豪等斬首, 梟示軍中爲白遣, 餘黨四散, 或投倭賊, 或竄山間, 時未盡捕爲白有齊。向前會寧所誅鞠景仁及明川末秀段頭及手足, 幷只函送爲白遣, 自餘斬馘十三級段, 山路氷雪, 輸送甚難乙仍于, 不得已左耳割取, 小牌書名, 上送爲白齊。逆賊財產, 法當籍沒, 所當錄啓處置事是白乎矣, 唯只府庫板蕩之餘, 召募散民, 勸勵慰悅次, 以權用於軍中賞格, 不勝惶恐爲白乎旀, 田民家舍段, 從當啓聞, 給付捕討人爲乎乙去, 計料爲白在果, 向前兩賊, 特一幺麽小竪良中, 討賊人分等錄功, 恐涉煩瑣爲乎矣。新集之卒, 若無聳動之擧, 則響應甚難, 弦如冒瀆上聞爲白齊。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穩城以南鎭堡徵兵, 稍稍來到, 唯只慶源軍, 時未到防爲白齊, 鎭堡諸將等聞鏡城守禦之奇, 或自北關南出, 或自南程北還, 皆入鏡城, 受臣節制爲白在果, 防垣萬戶韓仁濟·潼關僉使李應星·永建萬戶鄭禮國·甫老知權管柳大男·高嶺僉使柳擎天·寶化堡權管李彥祥·森森坡萬戶韓大防·將軍坡萬戶吳大南·造山萬戶印元忱·魚遊澗萬戶方佑周·細川權管朴禮範等, 次次來會爲乎旀, 斜卩洞權管高敬民段, 持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爲白遣, 兵曹佐郞徐渻·定配人羅德明, 在外村, 曉諭村居軍丁爲白如乎節段, 幷只入城爲白有齊。六鎭一經倭賊之後, 軍器倉穀, 僅餘十分之一二爲白良置, 各自封閉叱分是白遣, 馬匹盡歸倭賊乙仍于, 無有轉運相通之勢爲白齊, 鏡城段, 幸有長片箭各七百餘部, 千人半年之粮爲白乎等以, 聚軍千七百餘名內, 他官軍段, 官給散料, 本府人段, 幷只自備以食爲白齊。大槩前後使土人, 再三入吉州城中, 覘賊虛實爲白乎矣。賊徒萬餘, 分據公私廨, 城內別作深溝高壘, 晝夜候望巡更爲白去等, 輕擧見辱爲白乎去, 百分詳量, 某條觀勢出奇, 先挫銳氣, 然後一擧盡殲爲白遣, 次及嶺東·端川計料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