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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기 種菊記 유거(幽居)를 일삼는 것은 아니지만, 외물의 잡념에 부림을 받는 것을 면치 못하여, 당 아래에 흙으로 모두 3등급의 계단을 만들었다.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또 사이에 잡초가 자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급의 상단에는 황국(黃菊) 몇 뿌리를 심고, 오른쪽과 남쪽 끝에는 백국(白菊)을 한 줄로 심고는 좌측은 비워놓고 걸으면서 감상에 편리하도록 했다. 중간 계단 남쪽 끝과 하급 계단 서남쪽에는 한 줄로 홍국(紅菊)을 심고 왼쪽을 모두 비워두었다. 상단 좌우에는 서로 마주 보게 매죽(梅竹)을 각각 한 그루씩 심고, 중간 계단도 똑같이 심어서 모두 황국(黃菊)을 향하게 하여 손을 당겨서 읍하고 공경히 복종하는 것 같은 형상이 있게 하였다. 또 향란(香蘭) 한 뿌리를 심어 채웠다.대개 누런 것[黃]은 중정(正中)하고 온윤(溫潤)한 아름다움이 있기에 상단 남쪽의 아래에 있게 하였다. 흰 것[白]은 순수하고 청결한 지조가 있기에 그 다음 계단에 심었고, 붉은 것은 비록 정순(貞純)의 자태가 있다고 하더라도 풍부(豐富)의 자태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단에 올릴 수 없어서 중간층에 거처하게 하였다. 각 줄에는 모두 사이사이에 흰 것 한두 그루를 심어서 그 향기로운 꽃의 깨끗한 기(氣)를 모두 북쪽에서 사람들이 완상하도록 하였다. 물(物)에 등급을 두어서 상하(上下) 중절(中節)의 분수를 잃지 않도록 하였다. 이것은 비록 한가한 사람이 즐기는 외물의 유희이지만 그러나 우연이 아닌 뜻이 있는 것 같으므로 그대로 기록해서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기축년(1649, 인조27) 5월 10일 쓰다. 幽居無所事。 未免爲外物之念所役。 堂下仍土爲階凡三級。 使不塵汚。 又不許凡草生其間。 上級上種黃菊數根。 右及南端。 列植白菊。 虛左以便步玩。 中級南端下級西南。 列植紅菊皆虛左。 上級左右。 互植梅竹各一本。 中級亦如之。 使皆向黃菊。 有如控揖敬服之狀。 又種香蘭一査以實之。 盖黃者有正中溫潤之美。 故居上級上南下焉。 白者精粹潔淨之操。 故次之。 紅者雖有貞純之姿。 未免豐富之態。 故不得上上級而居中下焉。 各行皆間植白者一二根。 以淸其芬華之氣。 皆北上焉。 使人玩之。 有品制而不失上下中節之分。 此雖閒人外物之戲。 然似有不偶然之意。 故仍錄以示志焉。 己丑端陽上澣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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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매기 盆梅記 매화는 초목 중에 하나의 식물일 뿐이다. 봄에 자라나 가을에 낙엽이 지니 천시(天時)를 따라서 자라고 죽는 일반적인 초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사람은 그 향기롭고 정결하고 일찍 피고 곧음을 아껴서 당실(堂室) 사이에 심어서 정원의 실제로 삼았다. 오래되어 등걸이 되고, 기이하고 오래되고, 뿌리는 말리고 가지는 파리한 것과 기괴한 것 또한 전지를 가하여 화분에 심어져 당(堂)에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간다.우리 집에 또한 고장(古莊) 한 뿌리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그 이치를 미루어 장점을 말하기를 "사물이 처음 생겨남에 만 가지 품목이 모두 땅에서 자라나니 귀천(貴賤)·청탁(淸濁)의 이치는 본래 다르지 않다. 다만 매화의 성품은 정결로 사람에게 취함을 받으니 숲 덤불의 가운데를 사양하고 특별하게 뜰 정원에 서 있다. 뿌리를 견고하게 심어서 줄기가 멀리 뻗어 화실(花實)이 잡스럽지 않으니 비유하면 둘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혈기(血氣)가 체를 갖춘 것은, 그 종류가 한둘이 아니지만, 오직 우리 인간이 둘 사이에서 인의를 귀하게 여기니 어버이를 친히 하고 남을 사랑하고 은혜가 있고 의리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식물의 무리 중에서 더러운 곳에 거처하는 것은 분양(糞壤)에 뿌리를 내리고 형극(荊棘)에 가까이 살면서 그 줄기가 지나치게 무성하면서도 성기지 않고, 그 잎이 무성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며 그 혹 비·바람·서리·눈이 때에 맞지 않고, 꽃과 열매 또한 그 절기를 잃으며 도끼든 나무꾼과 양·돼지가 혹 침범하여 생기 또한 시들게 된다. 오직 분재(盆栽)만이 뿌리가 번다하지 않고도 가지가 더욱 성기며 토양이 오염되지 않고도 입이 더욱 청초하며 서리·눈이 내리지 않고도 꽃이 일찍 피며 양·돼지가 이르지 않고 그 생을 이룬다. 봄에 자라도 무성해지지 않고 가을에 서리가 시들게 하여도 시듦을 알지 못하고 정정(亭亭)하니 우뚝 서서 사람이 친애(親愛)하지 않음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뭇사람 가운데에 지인(至人)191)이 있는 것과 같다. 그 생을 양성하고 그 욕심을 절제하여 번화(繁華)하고, 부귀(富貴)로 그 몸에 더하지 않고도 세상에 남아 독립하여 천고(千古)를 표출(表出)하고 물(物)이 진번(塵煩)을 끼쳐도 모두 나를 더럽히지는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그 열매는 혹 대갱(大羹)192)에 간으로 쓰이는데 다섯 가지 맛이 잘 섞어지니 이윤(伊尹)193)·태공(太公)194)이 이에 해당한다. 물(物)이 비록 미약하지만, 그 이치는 원대한 것에서 미루어 볼 수 있으니 물이 이것에 더없이 가까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내가 지극히 아껴 그 말들을 기록한다. 梅林林中一植物耳。 春生秋落。 順天時而生死。 與凡草木何異焉? 古人愛其香而潔早而貞。 樹之堂室之間。 爲庭實焉。 其老而査奇而古根拳而枝瘦者。 巧者又加芟治。 栽之盆器。 升堂而入室焉。 余家亦有古莊一根。 余嘗推其理而長之曰: "物之初生。 萬品皆土之毛。 貴賤淸濁。 理本不殊。 獨梅之性。 以潔貞見取於人。 辭林莽薈蔚之中而特立於階庭。 植本固而條枝遠揚。 花實不雜。 譬若生之兩間。 血氣具軆者。 厥類不億。 而惟吾人以仁義貴於兩間。 親親而仁人。 有恩而有義者也。 雖然其羣於植物而處於汚下者。 根於糞壤。 近乎荊棘。 其枝過茂而不踈。 其葉蘩蔓而不淸。 其或風雨霜雪之不時。 而花實又失其節。 斧斤羊豕之或侵而生氣亦至薾爾。 惟盆栽者。 根不煩而其枝益踈。 土不汚而其葉尤淸。 霜雪不及而其花早。 羊豕不至而其生遂。 春生而不加茂。 秋殺而不知謝。 亭亭獨立。 人莫不親愛。 譬若衆人之中。 有至人者。 養其生節其慾。 不以繁華富貴加其身。 而遺世獨立。 表出千古。 物累塵煩。 渾不我浼者矣。 雖然其實或和之大羹。 五味具和則伊尹,太公當之。 物雖微而其理可推於遠者。 物莫近乎此者。" 是以吾愛之至而記其說。 지인(至人) 일반적으로 덕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대갱(大羹) 양념을 하지 않고 맹물로 끓인 고깃국을 말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대갱에 간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은 맛을 두기 위한 것이다.[大羹不和, 有遺味者矣.]"라고 하였다. 이윤(伊尹)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어진 재상이다. 신야(莘野)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에 탕왕이 세 번이나 폐백을 보내어 출사하기를 간곡하게 청하자, 마침내 탕왕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천자국으로 만들었다. 태공(太公) 중국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로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여(呂) 나라에 봉해져 '여상(呂尙)'이라고도 하고 '태공망(太公望)'이라고 한다. 백이, 숙제와 달리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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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재권후발 三學齋券後跋 해[歲舍]195)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의 늦가을에 영평(永平)의 삼학재(三學齋)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날에 서재의 제군들이 재생(齋生)의 명적(名籍)을 취하여 나에게 글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은 이미 책 머리말을 쓰셨으니 어찌 또 한마디 말로 발문(跋文)을 쓰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그들의 뜻을 마치자 내가 의리상 구차한 변명으로 면하기 어려워 바로 삼학재의 설을 추연(推衍)하여 제생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를 "학(學)은 하나일 뿐인데 그것을 삼(三)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하남(河南) 정숙자(程叔子)196)께서 말하기를 '옛날의 학은 하나인데 지금의 학은 셋이니 첫째는 훈고학(訓詁學)이고, 둘째는 문장학(文章學)이며, 셋째는 유자학(儒者學)이다. 도(道)에 빨리 도달하려고 유학을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으니 아! 유학이 세상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저 유방(劉邦)의 한나라가 과거로 선발하여 사람을 취하면서부터 이(李)씨의 당(唐)나라와 조(趙)씨의 송(宋)나라에 미쳐서는 학문이 날로 이목(耳目)에 달려가서 삼분의 학문이 시작되었다. 대저 자구(字句)나 해석하고 명분·의리나 탐구하고 오로지 기문(記聞)의 업(業)을 숭상한 것이 훈고(訓詁)의 학이니 지금에 '강경과(講經科)'197)를 말한다. 시구를 장식하고 장구(章句)를 꾸며서 한묵(翰墨)의 마당을 달리는 것이 문장(文章)의 학이니 지금에 이른바 '문예과(文藝科)'이다. 학문이란 한 구절은 곧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니 그 이치를 알면 곧 독실하게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마음에 근본 하여 몸에서 실행하는 것은 쇄소(灑埽)로 말미암아 천리(天理)에 도달하고198) 가정에서 시작하여 천하에 미치는 것이니 유자의 학이다. 삼대(三代)가 이미 멀어지고 옛 도를 회복하기 어려우니 지금 비록 주공(周孔)의 덕(德)과 안자·증자의 학(學)이 있더라도 과업(科業)을 통하지 않고 군주에서 신임을 얻어 도를 행하기 어려우니 문장(文章)·훈고(訓詁)의 학문을 어찌 전부 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서재를 삼학(三學)이라고 이름 붙인 뜻이다. 무릇 이 서재에 들어가 이 학문을 강(講)하는 자들은 동몽(童蒙)들은 먼저 훈고(訓詁)를 배우고 조금 자란 자는 문사(文辭)를 학습하고 성인은 전적으로 의리(義理)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 박문약례(博文約禮)199)는 먼저 그 큰 것을 세운 연후에 내가 소유한 것을 미루어 문사(文辭)의 사이에 도달하고, 그 남긴 가르침의 나머지에 응당 진취의 도구를 들어서 그 큰 근본을 확충하고 효친(孝親)·경형(敬兄)·충군(忠君)·제장(悌長)의 도(道)로 삼는다면 학문을 하는 도가 거의 원류가 혼탁하지 않아서 본말이 서로 닦이게 될 것이다. 만약 말(末)에 치달리고 근본을 버려서 투박하고 사치스럽고 장단(長短)을 다툼에 힘쓰며 명예에 치달리고 영리(榮利)에 뜻을 두어 그 본체를 상실한다면 서재를 이름 붙인 본래의 의미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예"라고 대답하였다.인하여 그 말들을 기록하여 책의 끝에 써서 경계로 삼는다. 아침저녁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 서생들을 이끌고 장구(章句)를 가르치는 자는 영평(永平) 문만욱(文晩郁) 군, 진양(晉陽) 정지(鄭榰) 군, 파평(坡平) 윤선기(尹先夔) 군이 그들이다. 장자후(張子厚) 선생200)의 이른바 '교인사익(敎人四益)'201)을 세 사람이 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太歲舍己亥之暮秋。 永平之三學齋成。 成之日。 齋之諸君取齋生名籍屬余曰: "子旣序其券首矣。 盍又一言以跋之?" 以卒其意。 余義難以辭苟免。 乃推衍三學齋之說。 嘏于諸生曰: "夫學一而已矣。 謂之三者何也? 竊嘗聞河南程叔子有言曰: 古之學者一。 今之學者三。 一曰'訓詁之學'。 二曰'文章之學'。 三曰'儒者之學'。 欲趍道。 舍儒學不可。 嗚呼! 儒學之不明於世久矣。 粤自劉漢氏以科選取人。 逮李唐趙宋。 學日趍於耳目而三分之學作矣。 夫字解句釋。 探賾名義。 專尙記聞之業者。 訓詁之學也。 今之所謂講經科也。 藻語葩辭。 繡章錦句。 馳騁翰墨之場者。 文章之學也。 今之所謂文藝科也。 學一句便知其理。 知其理便篤行之。 本之心而行之身。 由灑埽而達之天理。 始於家而及於天下者。 儒者之學也。 三代旣遠。 古道難復。 今雖有周孔之德顔曾之學。 不由科業。 難於得君而行道。 則文章訓詁之學。 安可專廢也? 此命斯齋三學之義也。 凡入是齋講斯學者。 童蒙者先學訓詁。 稍長者學習文辭。 成人者專以義理爲主。 博文約禮。 先立其大者。 然後推吾所有。 達之文辭之間。 以其緖餘。 爲應擧進取之具而擴充其大本。 以爲孝親敬兄忠君悌長之道則爲學之道。 庶乎源流不渾。 本末交修矣。 若夫趍末而棄本。 以標竊偸靡。 爭長競短爲務。 馳心於聲譽。 騖意於榮利。 喪失其本軆則非名齋之本意也。" 僉曰: "唯。" 仍記其說。 書于卷末以警之。 朝暮整衣冠入齋中。 引諸生訓章句者。 永平文居晩郁,晉陽鄭君榰,坡平尹君先夔其人也。 張子厚先生所謂敎人四益。 三君亦不可不知云。 세사(歲舍) 세재(歲在), 세차(歲次)와 같은 말이다. 정숙자(程叔子) 북송(北宋)의 학자 정이(程頥, 1033~1107)로, 자는 정숙(正叔)이고 이천(伊川) 선생으로 불린다. 형 정호(程顥)와 함께 이른 나이에 주돈이(周敦頥, 1017~1073)에게 수업하여 북송 이학(理學)의 터전을 다졌고, 오랜 기간 낙양(洛陽)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낙학(洛學)'이라 불렸다. 후인들이 그들의 논설과 저작을 정리하여 《유서(遺書)》·《문집(文集)》·《경설(經說)》 등을 편찬하였고, 이를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하였다. 강경과(講經科) 과거 시험에서 시험관이 지정하여 주는 경서의 대목을 외던 일을 말한다. 주로 오경(五經)인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좌전(春秋左傳)》과, 사서(四書)인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에서 출제(出題)되었다. 성적은 등급 중 통(通)이 첫 번째이다. 다음은 약(略), 조(粗), 불(不)이다. 쇄소(灑埽)로 …… 도달하고 쇄소응대(灑掃應對)는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소학(小學)의 공부이다. 대학(大學)에서 최종 목표인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소학(小學)에서 강조한 물 뿌리고 쓸고 응답하는 쇄소응대(灑掃應對), 즉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부터 그 공부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학(下學)을 통해 상달(上達)한다는 말은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 뒤에 위로 천리(天理)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박문약례(博文約禮) 글을 통하여 지식을 넓히고 예를 통해서 행동을 검속하는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장자후선생(張子厚先生)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횡거(橫渠)는 그의 호이다.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조화시켜 우주의 일원적 해석을 설파함으로써 이정(二程)·주희(朱熹)의 학설에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정몽(正蒙)》, 《장자전서(張子全書)》 등이 있다. 교인사익(敎人四益)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네 가지 유익함을 말한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으니, 자신을 얽어매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남에게 자주 가르쳐 주다 보면 자신도 글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어린이를 대할 적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의젓하게 갖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기로 인해서 남의 재주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걱정하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니 네 번째의 유익함이다.[敎小童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必正衣冠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人之才爲憂則不敢惰, 四益也.]"라고 하였다. 《近思錄 권10 政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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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집성202)서발 農家集成書跋 우리 인간이 찬수(鑽燧)203)이후에 불에 의해 먹고, 뇌누(耒耨)의 이익을 대개 익괘(益卦)204)에서 취하였다. 천하의 근본은 여기에 달려있다. 옛날에 백성의 부모가 된 자는 이것에 힘써서 흥하고 소홀히 하다가 망했음을 역사를 상고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백성이 드리운 지 삼백 년에 이익을 즐기고 생을 편안히 여기고 성화(聖化)의 가운데에서 경착(耕鑿)205)하여도 누구의 힘인지 알지 못한 것은 《농가직설(農家直說)》의 반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백 년을 앞서서 이 백성이 이익을 즐기고 생을 편안히 한 것이 《농가직설》에 있었다면 이후의 억 만년을 누릴 태평성대의 근본이 또한 우리 성상께서 이 책을 반포하는 데 있지 않았겠는가? 나 같이 어리석으면서도 밭고랑의 가운데에서 요순(堯舜)을 즐거워하는 자는 반포한 이 책을 공경히 받아서 훈화(勛華)206)의 은택에 친히 목욕하였으니 흔연(欣然)히 이 글을 써서 함포(含哺)의 노래207)를 바치고자 한다. 自吾人鑽燧之後。 食之以火而耒耨之利。 盖取諸益。 天下之本。 其在是矣。 古之作民父母者。 務此而興。 忽之以亡。 考前史班班可見。 東民之垂三百年。 樂利安生。 耕鑿於聖化之中。 不自知而誰之力者。 在於農家直說之頒非耶? 前三百而使斯民樂利安生者在於直說。 則後此億萬年無彊之本。 亦不在於我聖上此書之頒耶? 若余之愚。 樂堯舜於畎畝之中者。 敬受是書之頒。 親沐勛華之澤。 遂欣然書此。 以效含哺者歌。 농가집성 효종 때 신속(申洬)이 편찬한 책이다. 세종 때 정초(鄭招)와 변효문(卞孝文)이 엮은 《농사직설(農事直說)》,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이 금양(衿陽) 곧 시흥(始興)에서 농사지으면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금양잡록(衿陽雜錄)》, 중국 당나라의 한악(韓鄂)이 지은 《사시찬요(四時纂要)》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고 조선의 농업 관련 사항을 추가하여 펴낸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등 세 농서를 기본으로 하고, 세종의 〈권농문(勸農文)〉과 주희(朱熹)의 〈권농문〉 등을 보태고, 신속 자신이 지은 《구황촬요(救荒撮要)》까지 포함하여 편찬하였다. 1655년 왕명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개정되거나 증보되었다. 찬수(鑽燧) 찬수개화(鑽燧改火)의 준말로, 철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의 나무를 비벼 대어 새로 불을 취하는 일이다. 뇌누(耒耨)의 …… 익괘(益卦)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신농씨가 나오시어 나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고 나무를 휘어 쟁기 자루를 만들어, 쟁기와 호미의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가르쳤으니 대개 〈익괘〉에서 취하였다.[神農氏作, 斲木爲耜, 揉木爲耒, 耒耨之利, 以敎天下, 蓋取諸益.]"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경착(耕鑿) 밭 갈고 우물 판다는 뜻으로, 태평 시대를 구가한다는 말이다. 요(堯) 임금 때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샘을 파 물 마시고 밭을 갈아서 밥 먹을 뿐이니, 임금님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는 말이 나온다. 훈화(勳華) 상고 시대의 성군이었던 요 임금과 순 임금을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을 방훈(放勳)이라 하였으니, 요 임금이 일찍이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아서 백성들에게 인륜(人倫)을 가르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순전(舜典)〉에서 순 임금을 중화(重華)라고 하였으니, 중화는 순 임금의 문채가 요 임금과 거듭 합치되었다는 뜻이다. 함포(含哺)의 노래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준말이다.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태평성대에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을 표현할 때에 주로 사용하였다. 《장자》 〈마제(馬蹄)〉에 "옛날 혁서씨(赫胥氏) 시대에는, 백성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따지지 않았고 길을 갈 때는 어디로 가야 할지 요량하지 않았다. 음식을 입안 가득 넣고서 즐거워하였으며 배를 두드리며 놀았다."라고 하였다. 이는 또한 요 임금 때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와도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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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서사암집후 謹書思菴集後 《사암선생집(思菴先生集)》은 모두 2책 6권으로, 부록은 백사(白沙)208)의 찬(撰)과 장(狀), 상국(相國) 청음(淸陰),209) 백헌로야(白軒老爺)210)가 실제로 서문과 발문을 썼으니 경편(瓊篇)211)·옥결(玉訣)212)이 빛나 서로 비추고 남의 이목을 빛나게 하니 아! 위대하도다. 다만 한마디 말이 있으니 덕 있는 선비에게 있어서 귀한 것은 말을 세우고 글로 써서 길이길이 세상에 드리우는 것으로, 이는 비단 문장과 시문뿐만이 아니다. 세도(世道)에 관련이 되고 풍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실제로 그 근본 뜻이다. 선생이 조정에 선 사십 년 동안 제상의 자리에 10여 년을 출입하면서 군덕(君德)을 보필하고 치도(治道)를 도와서 반드시 크게 건명하고 크게 수립한 것이 필시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편집 사이에 적막하게 장주(章奏)와 고계(告啓)에 대해 언급한 것이 한두 문자가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선생은 어려서 화담(花潭)213)을 섬겨 학문이 그 통서(통서)를 이었으니 선사(先師)의 여지(餘旨)를 소술(紹述)해서 음영(吟咏)에서 발하고 장구(章句)로 전파하여 발명(發明)한 작품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편자(片字)·척언(隻言)도 문집 중에 보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편집한 것은 산수(山水) 사이의 풍영(諷詠)에 불과하고, 치문(緇門)214)의 축율(軸律)은 유독 상세하게 기재하였으니 아! 한창려(韓昌黎)215)의 이른바 '별 같은 시들은 주워 모으고 해와 달 같은 석고문(石鼓文)은 빠뜨렸네.'216)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아! 이것은 어찌 선생이 의탁할 만한 자제가 없어서 집안 대대로 전할 보배를 잃어버려서가 아니겠는가? 애석하도다! 아니면 대대로 전할 선생의 지위가 영상(領相)에 이르렀는데도 '좌상(左相) 사면(辭免)의 비답'이라고 했고, 율곡(栗谷)217)이 홍문관 대제학[文衡] 때에 지은 백사(白沙)의 행장에 임신년(1632, 인조10) 우상(右相)이라고 하는 데에 그쳤으니 또한 의심할 만하다. 모두 기록해서 바름을 구하기를 기다린다. 思菴先生集凡二冊六卷。 附白沙撰狀。 淸陰相國,白軒老爺實首尾之。 瓊篇玉訣。 炳琅相暎。 照人耳目。 嗚呼! 偉矣。 第有一言。 所貴乎有德之士。 立言著書。 垂示永世者。 非但文詞華藻而已。 其有關世道。 左右風化者。 實其本意。 先生立朝四十年。 出入相位一紀有餘。 輔弼君德。 羽翼治道。 必多大建明大樹立矣。 編集之間。 寂無一二文字及於章奏告啓之書何耶? 先生早事花潭。 學傳其緖。 則紹述先師之餘旨。 發於吟咏。 播之章句。 以發明之者。 必有其作。 片字隻言不見於集中何耶? 其所輯者。 不過山水間諷詠。 而緇門軸律。 獨加詳載。 嗚呼! 韓昌黎所謂掎摭星宿遺羲娥者。 非此之謂耶? 噫! 此豈先生階庭無托。 而家傳之寶。 有所遺失耶? 惜哉! 抑世傳先生位至領相。 而左相辭免批敎則栗谷秉文衡時所撰。 白沙之狀。 止於壬申右相。 亦可疑矣。 幷錄之。 以待求正云。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등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80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이후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병조 판서가 되어 전란을 지휘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후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 삭탈관직되고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저서로 《백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등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아우이며,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 문과 중시에 급제한 후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으며, 1639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 풀려났다. 저서에 《청음집(淸陰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백헌로야(白軒老爺) 이경석(李景奭, 1595~1671)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상보(尙輔)이며, 호는 백헌(白軒)이다. 종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1649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었다. 효종의 구명으로 목숨을 건지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西溪集 卷12 領議政白軒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34輯》 경편(瓊篇)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뜻한다. 《시경》 〈모과(木瓜)〉에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아름다운 옥으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옥결(玉訣) 도가(道家)의 주문(呪文), 비결(秘訣) 등에 대한 미칭(美稱)이다.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글 〈동야어수주자양선생찬하루송연자원연은선성산서(冬夜於隨州紫陽先生餐霞樓送煙子元演隱仙城山序)〉에, "우리 몇 사람을 맞이하여 혼원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금서와 옥결이 모두 여기에 있다.[延我數,子 高談混元, 金書玉訣, 盡在此矣.]"라고 하였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호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복재(復齋),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松都)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하였다. 문집에 《화담집》이 있다. 치문(緇門) 승려는 치의(緇衣)를 입으므로 승문(僧門)을 이른다.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768~824)을 가리킨다. 한유는 당(唐)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한창려(韓昌黎)라고 불린다. 유가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으며, 특히 요(堯)·순(舜)에서 공(孔)·맹(孟)으로 전해 내려오던 학문의 전통을 주장하여 송대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는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한창려(韓昌黎)의 …… 빠뜨렸네 한유(韓愈)가 주 선왕(周宣王) 때의 것이라고 전하는 석고문(石鼓文)을 발견하고서, 공자(孔子)가 《시경(詩經)》에 이 글을 채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가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노래한 가운데, "공자는 서쪽으로 진 나라를 가지 못하여, 별 같은 시들은 주워 모으고 해와 달 같은 석고문은 빠뜨렸네.[孔子西行不到秦, 掎摭星宿遺羲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 또는 석담(石潭), 시호는 문성이다. 저서에 《율곡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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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권1 附錄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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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1) 附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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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家狀 [羅晩成] 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인데 뒤에 군실(羣實)로 고쳤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선계는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정유년(1597, 선조30)의 전란 때 가보(家譜)를 지키지 못해 고려(高麗) 이상은 징험할 수가 없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서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정언의 아들 휘 효정(孝禎)은 진사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는데 선생에게는 5대조가 된다.고조 휘 두(㪷)는 진사(進士)로 호가 모암(慕庵)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당해서 본주[羅州]의 진사 11인과 함께 성균관에서 의리를 주창하며 특별히 정암(靜菴)1)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관직이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에 이르렀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사암(思菴) 박 상공(朴相公)2)에게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몸을 삼갔는데 왜노(倭奴)의 변란에 참혹하게 일가의 화를 당했고 이때부터 과거(科擧) 공부에 대한 뜻을 끊었다. 부친 휘 태읍(泰洽)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향해(鄕解)3)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광해군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한 번도 복시(覆試)에 나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개연(慨然)히 생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4) 2월17일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태어나던 밤, 모친의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明珠) 하나를 주니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장중하였으며 말을 배울 때부터 이미 문자를 알았다. 나이가 7~8세 되자 말과 행동이 차분하고 무거웠으며 시를 지으면 항상 놀랄만한 시어가 있었다. 비록 남이 보지 않는 방에서도 반드시 종일토록 바르게 앉았고,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싸우거나 빠르게 달린 적이 없었다. 12세에《대학》과 《중용》을 읽었는데 깊이 잠기고 반복하면서 한밤중까지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는 과거공부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권하면 웃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하루는 송호공에게 여쭈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거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선비의 포부는 매우 중대한지라 진실로 이것에 전념할 수는 없습니다. 옛 사람 중에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善)으로만 이름을 이루지 않았던 자가 있으니5) 이것이 가장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다시는 사장(詞章)을 강제하지 않았다. 손수 《용학도(庸學圖)》6)를 그리고 또 설을 지어서 자리에 걸어 두고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다.13세에 《논어》·《맹자》·《주역》 등 여러 책을 가지고 차례로 읽으면서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의리가 귀착되는 취지에 대해 하나라도 알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새도록 자지 않고 반드시 끝까지 연구한 뒤에야 그쳤다. 또 《시경》·《서경》·《예경》·《춘추》 및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에도 널리 통하여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 그러나 요점은 심오한 뜻을 깊이 찾는 데 있는 것이니 훑고만 지나가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이로부터 학업이 날로 성취되고 덕이 날로 높아졌으며 그 학문은 《주역》에 더욱 깊어졌다. 나이 겨우 14세 때, 만나본 자들이 더욱 공경하여 성덕군자(成德君子)로 지목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고을의 관아를 지나는 선비들도 만나보려는 자가 많았다.이 때 선생 일가의 남녀노소가 폐병으로 죽는 자가 이미 십여 인이었다. 송호공도 마침 남평(南平)의 집에서 그 질병에 걸렸다. 선생은 약물로 시봉(侍奉)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더욱 심해지자 송호공이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안 형제와 숙질들이 사망하여 다 사라지게 되었고 나 또한 불행히도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는 형제가 없다. 너는 나이가 어리고 자녀도 없으니 너는 의당 멀리 피해서 살기를 도모해야 한다. 네가 차마 나로 하여금 후사(後嗣)가 없는 죄를 지게 하려느냐?" 하고는 마침내 강제로 떠나게 하였다. 선생이 울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자 공은 또 계속 화를 내며 꾸짖었다. 선생은 그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항상 몸을 숨기고서 좌우에서 약을 드렸다.급기야 공이 위독해지시니7) 모친이 선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으니 폐병에는 병충이 있어서 항상 절명할 때 남을 감염시킨다고 한다. 너는 우선 잠시 피해 기다리고 있어라." 하였다. 선생이 놀라서 울며 말하기를 "사람 자식이 죽게 되면 죽을 뿐이지 어찌 차마 부친을 버리고 저만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하면서 모친이 누차 말해도 선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모친이 울면서 밖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남편8)을 이미 살릴 수가 없는데 하나 있는 아들도 장차 보전할 수 없게 되니 박복한 이 몸은 죽어버려서 모르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바로 줄을 당겨 스스로 목을 맸다. 선생이 황급히 구하여 풀고는 울면서 또 간했으나 모친은 띠로 선생의 손을 묶어놓고 또 칼로 스스로를 겨누며 떠날 수 없음을 보였다. 이 때 조모 서씨(徐氏)도 집에 있었는데 선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 어미가 너로 인해 죽게 되면 네가 어찌 자식이 되겠느냐." 하고는 외손인 나적(羅襀) 등으로 하여금 굳게 지키게 하고 다시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선생이 머리를 땅에 찧어 혼절했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그 날 송호공을 과연 구할 수 없었다. 선생은 호곡(號哭)을 상례대로 하고 정침(正寢) 문 밖에 상차(喪次)를 설치하였다. 상복을 입고 곡용(哭踊)을 하며 슬퍼하는 모습에 조문한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상복이 이루어졌을 때 모친이 또 꾸짖으며 선생에게 떠나게 하며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있으면 내가 진실로 나갈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만이지만 장차 나를 어느 곳에 두려 하느냐." 하였다. 선생이 붙들어 안고 울면서 간하기를 종일토록 하였는데도 끝내 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곧바로 모친을 모시고 다른 마을에서 우거했다. 자신 또한 산암(山菴)에서 거처했는데 이 때 선생의 나이 15세였다.거처한 지 수 개월이 되었을 때 선생도 이 질병에 걸렸다. 선생이 울면서 말하기를 "죄를 지은 고아가 상차(喪次)를 떠났던 것은 감히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분부를 어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이 들었으니 밖에 있은들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 이어 모친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알리고 즉시 도보로 상차로 돌아와서 장구(葬具)를 준비하고 날을 잡아 장례를 치렀다.아침저녁 사이로 호곡을 하고 지나치게 슬퍼하니 병이 점차 심해져서 몸이 앙상하게 야위었으나 여전히 잠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에 의원을 불러 침을 맞으며 뜸을 뜨고 또 천초환(川椒丸)을 복용하면서 3~4년이 흘러서야 죽음을 면하였다. 이에 탄식하기를 "운명이 기박하여 거상(居喪)에 예도 다하지 못했으니 천지간에 죄인이다. 농사를 지으며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낫다." 하고는 그 당(堂)에 '명농(明農)'이라 편액하고 '남포병일(南圃病逸)'이라 자호(自號)하였다.병으로 폐기된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두문불출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한 숨이라도 남아있으면 잠시라도 태만하고 방기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혹은 책을 펴고 익숙히 반복하여 성현의 경계에 마음을 쏟고, 혹은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에 대해 마음을 기울였다. 마음에 계합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책에 썼는데 당시에 기록한 것으로 《완물편(玩物篇)》이 있다. 향리의 관동(冠童)들이 왕래하며 학업을 물으면 그 재질에 따라 자상하게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놓쳐버린 마음을 거둬들이고 외물(外物)을 끊으면 심기가 넓고 평탄해져 저절로 즐거운 경지가 있다. 어찌 꼭 외우고 쓰는 것을 익히는 데에만 전력하겠는가." 하였다.선생은 외따로 살면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명예가 원근에 퍼졌고, 사람들은 친소 없이 일제히 '임하제일인(林下第一人)'이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아치들과 장자(長者)들도 비록 서로 대면하지는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그 명성을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기축년(1649, 인조27)에 향천(鄕薦)으로 선생을 교관(敎官)으로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마침 인묘(仁廟)가 승하9)하였다. 선생은 분곡(奔哭)을 하러 한양에 도착하여 다음 날 분곡의 예를 행하였다. 또 다음 날엔 사은숙배(謝恩肅拜)의 예를 행하고는 바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경인년(1650, 효종1)에 판서 민정중(閔鼎重)10)이 본도의 어사(御史)가 되었는데 선생을 한 번 보고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서 선생을 포계(褒啓)하였다. 그러나 당시 당동벌이(黨同伐異)11)의 풍조가 심하여 아래로 민간의 사서인(士庶人)들까지도 또한 사람들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엿보아서 지지와 반대, 비방과 칭찬의 징후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선생을 추천하는 일12)이 마침 용주(龍洲) 조경(趙絅)13)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선생을 헐뜯으려 했다가 이유를 찾을 수 없자 이내 말하기를 "선생의 부친상 때 선생은 밖에 있었다." 하였다. 이어 서로 더하고 늘리며 모으고 보태서 날조하고 구설을 만들어 내니 식자들이 통탄하였다.선생이 집안에 거처할 때 모친을 모시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비록 집이 가난하여 자주 쌀독이 비었어도14)"안회(顔回)는 도(道)에는 거의 이르렀으나, 쌀독이 자주 비었다.[回其庶幾乎, 屢空.]"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先進》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드렸다. 갑오년(1654, 효종5)에 모친상15)을 만나서는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가례(家禮)》16)를 따르면서 3년 동안 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17) 상을 마치고는 더욱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고 오직 청정한 마음을 지키고 본성을 기르는 것을 일삼았다. 때로 봄가을 좋은 절기를 만나면 산수 사이에서 노닐고 시를 읊으면서 그윽한 정을 후련하게 풀었다. 초목과 금수 하나하나까지도 따라 보면서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며 스스로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으로 《남교일기(南郊日記)》가 있다.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였다.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들어가서 분곡(奔哭)의 예를 행하고 돌아왔다. 현종(顯宗)이 처음 즉위하여 분곡한 현사(賢士)들에 대해 묻자 재신(宰臣)들이 팔현(八賢)18)을 가려서 아뢰었는데 선생도 그 가운데 끼어있었다. 이 때는 대송(大宋)과 소송(小宋)19)의 명망이 조정을 기울일 정도였으니 사류(士流)로 칭하는 자들이 모두 분주히 달려갔으나 선생은 끝내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이윽고 돌아왔는데 선생을 사용(司勇)에 제수했으나 선생은 나아가지 않았다.향리에서 선생을 공격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나 선생은 또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조정의 권력을 쥔 자들도 대부분 불쾌하게 여겼다. 마침 호남 어사(湖南御史)가 된 자가 있었는데 친히 선생의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함께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군자다운 사람이다." 하면서 단번에 보고 판가름하였다. 마침내 그 행실을 상소하여 진술하였고 또 조정에서 크게 소문을 내면서 찬탄하고 애석해 마지않으니 선생을 미워하는 자들도 막지 못하였다.신축년(1661, 현종2)에 과연 선생을 의망(擬望)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았으나 선생은 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앞서 대비(大妃)의 복제(服制)에 대한 의론으로 조야에서 큰 싸움이 벌어져 시비를 다투었다.20) 문생 중에 선생에게 논란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인사가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당시에 예 (禮)를 논한 여러 차자(箚子) 및 미야(眉爺)와 백호(白湖)21)의 장서(長書)를 꺼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히 그 시비를 판정할 만하다." 하였다. 또 송시열의 차자 가운데 있는 '문최(免衰)의 설22)'에 대해 묻자 선생은 실망한 듯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있다가 말하기를 "공론(公論)이 정해지는 데에 꼭 백년을 기다릴 것도 없다. 너희들도 따라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다." 하고는 낯빛을 바꾸며 불쾌해 하였다. 향리에서 시세(時勢)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 말을 듣고는 이때부터 선생을 공격하는데 날로 더욱 힘을 썼다.황산서원(黃山書院)을 창건할 때에 대송(大宋 송시열)이 여산(礪山)에서 벗들과 만났는데 봉안(奉安)하는 날에 도내(道內)의 지조를 아끼는 사류들도 알현(謁見)을 청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선생에게 고하기를 "유림의 큰 행사입니다. 선생께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송시열의 뜻도 선생께서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 병이 많아 친구의 상장(喪葬)에도 달려갈 수 없다. 더구나 지금 수 백리 밖인데 달려 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 송시열이 그 뜻을 알고는 크게 유감스럽게 여겼다.이때 고을 친지들이 자제들을 위하여 세 재실(齋室)을 건립하고 선생을 추대하여 학업을 마쳐줄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그 재실의 이름을 삼학(三學)·몽양(蒙養)·열락(悅樂)이라 짓고 강규(講規)를 엄격히 세웠는데 대략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23)를 본뜬 것이었다. 초하루와 보름날에 분읍례(分揖禮)를 행하고 그 배울 것을 부과하니 청아(菁莪)24)의 교화가 얼마 되지 않아 진작되었다. 마침 송공(宋公)의 동생 송시걸(宋時杰)이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되어 또한 선생을 크게 해쳐서 세상에 용납을 받지 못하게 하려 했다. 애초에 선생의 부인 오씨(吳氏)가 잉태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선생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부인이 해산을 했을 때는 마침 상중(喪中)이었다. 이에 옛 일들을 주워 모으며 손뼉을 치고 서로 축하하면서 상동 (喪童)25)의 설을 만들어 냈다. 선생의 죄안(罪案) 하나를 더 지어낸 것이다.선생이 문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감정을 쌓아온 것이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다. 끝내는 반드시 집을 헐고 흔적을 없앤 뒤에야 그칠 것이니 내가 근신하여 피하는 것이 낫겠다. 너희들은 내가 떠난다고 해서 강규(講規)를 태만히 하여 폐기하지 말고, 의당 끝까지 그 학문을 스스로 성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날 문도들은 엎드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마침내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나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5)이었다. 고을의 자제로 다시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여전히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선영(先塋)26) 아래에 서재를 세우게 하였다. 일가 사람이 혹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남녘에 이론(異論)을 가진 자들이 그대를 종장으로 여긴다.'라고 하여 다투어 서로 비방을 만들어낸다. 지난 번 영평(永平 남평)에서 화를 입었으니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생도들을 사절해 보내서 사람들의 말을 잠재우지 않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저들이 배우러 오는 데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혹시 다시 화를 당한다 해도 문을 닫고 구멍을 막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어서 조용히 생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정곤재(鄭困齋)27)가 귀양을 갈 때 그 문하에서 종유하던 자들도 그 화를 맞이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너희들이 장차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렵다. '홀로 걸어갈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부자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28)는 것이 바로 우리 당의 십자부(十字符)29)《주역》에서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을 얻었으니, 이른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이란 구절이 나의 '삼자부(三字符)'이다."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이다. 너희들은 의당 이를 가슴에 새기고 잃지 말라." 하였다. 궁고(竆苦)와 곤액(困阨)을 당해 한 번도 그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다.선생의 종족으로 본주[羅州]에 있는 몇 사람이 마침내 약속하여 계(契)를 만들고, 서로 우호하자는 뜻으로 권면하였다. 한 해 봄가을로 매번 한 번 종족을 모아 스스로 즐기면서 혹 자질(子姪)들로 하여금 좌우에 서서 지은 시가를 읊고 술을 권하게 하니, 온 자리에 숙연히 감흥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선생이 비록 일찍 쇠약하고 병이 많았으나 배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아서, 거처하는 몇 칸 집에는 쌓인 책자가 수 백여 편이었다. 선생은 반드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았고 종일토록 부지런하였다. 붓과 벼루·책과 책상 및 국화화분 외에는 적막하여 다른 물건이 없었다. 자리 모퉁이에는 한 장의 단금(短琴)을 두고 때로 간혹 술대를 뽑아 현을 탔다. 악보(樂譜)를 따라 옛 곡조를 연주하면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도 화평하였다. 손님이 오면 당 아래로 내려 공경을 다해 맞이하였다. 서로 마주하면 말이 그침이 없었으나 일언반구도 인간 세상에 대한 비평30)은 하지 않았다.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병이 깊어져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31) 향년 48세였다. 문생들이 모두 상차(喪次)에 모여 서로 마주하고 곡을 하는데32)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 같았다. 이 해 모월 모일에 남평(南平)의 장암산(墻巖山)에 안장하였다.선생은 덕성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풍도가 맑고 시원스러웠다. 사람들과 말할 때면 온화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많은 사람이 넓게 앉은 가운데서 애초 반면(半面)의 친분조차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접하면 선생의 됨됨이를 알았고, 거칠고 사나운 무뢰배들이라도 만나보고는 절로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서모(庶母)을 대우하는 데 그 정성을 다하였다. 서제(庶弟)를 가르치는 데도 애정을 지극히 하였고, 전장(田庄)과 노비도 균평하게 나눠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디 외가(外家)에서 받은 전답과 노비가 있으니 정말 차마 너희를 굶주리고 춥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족인(族人)에게는 먼 친족33)이라도 형제처럼 대하였다. 종가(宗家)의 아비를 여읜 조카를 보살펴 기르면서 자기 자식처럼 하여 혹시라도 질환이 있으면 아침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치료하는 방도를 다하였다.매번 선대(先代)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 날 밤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기다렸다. 제수(祭需)는 모두 친히 점검하여 지극히 정결하게 하였다.그 학문은 마음에서 터득하고 스승을 거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심오한 뜻으로 난해한 것과 변례(變禮)로서 난처한 것을 사람들이 혹 질정을 구해오면 얼음이 풀리듯 명확히 해석해주고, 근거로 끌어댄 설이 각각 합당하니 듣는 자들이 기뻐하고 설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명예와 현달을 추구하지 않아 사람들과 접촉은 드물었으나 당세의 일에 대해서 꿰뚫어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정 일의 대체와 내용 및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 마치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그 자품(姿稟)이 고상하고 재품(才品)은 호방하여 하는 일마다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선생이 지은 〈만언소(萬言疏)〉를 보았는데, 성정(誠正)34)의 요체에 근본을 두고 세상의 일 10가지에 미루어 나간 것이었는데, 점괘가 불길하여 결국 상소하지는 않았다. 또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 한 부를 지어서 사(士)·농(農)·공(工)·상(商)·병(兵)·승(僧)의 제도를 논하였는데, 만일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거행하여 조치하겠다는 뜻이었으니 선생이 과연 세상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난 때가 좋지 못하여 광채를 품어 감추고 누추한 집35) 가운데서 스스로 즐겼으니 이른 바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36) 것은 선생이 이에 해당된다. 저술한 《완물편(玩物篇)》·《남교일기(南郊日記)》·《경세통전(經世通典)》 및 《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답문질의서(牛山答問質疑書)〉 및 시와 문 약간 편이 집안에 간직되어 있다.아! 선생은 어려서부터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37)을 할 줄 알았고 장성해서는 문을 닫고 성리서(性理書)를 읽은 것이 거의 40년이다. 그 조예의 깊이는 후학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고 그 행동거지와 위의(威儀) 사이에 드러난 것은 덮을 수가 없다. 그 학문은 오현(五賢)38)의 적전(嫡傳)에 기치를 세우고, 평탄하고 드넓은 길로 법도에 맞게 나아간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선생의 생전에는 자기를 알아주는 선비가 없고 죽어서는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이 없었다. 중년에 선생을 헐뜯는 말이 실로 초년에 선생을 칭찬했던 사람에게서 나왔고 결국엔 간사한 자의 무함을 당해 폐해지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선생은 평생 퇴도(退陶)39)를 특히 독실하게 믿어서 말을 세우고 마음을 쓰는 데 계승한 바가 많았다.숭정기원(崇禎紀元) 후 기미년(1679, 숙종5) 10월 보름에 문인 통덕랑 전 행 성균관 학유(通德郞前行成均館學諭) 나만성(羅晩成)40)이 삼가 쓰다.【문인인 도사(都事) 이석삼(李錫三)·진사(進士) 홍최일(洪最一)이 선생의 학문과 행실이 오래되면 사라지고 희미해 것을 매우 염려하여 행장(行狀)을 지어 완성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중론으로 나를 추대하여 말하기를 "그대가41) 일찍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서 몸소 친히 그 거동과 법도를 보았고, 또 덕업과 행의(行義)를 훈도 받은 것이 두텁고도 오래되었다. 그러니 그대가 사실을 모으고 선양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기에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썼다.】 先生諱萬英字英叔。 後改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丁酉之亂。 家譜失守。 麗以上無徵。 入我朝有諱忍官副摠管。 墓羅州。 子孫仍家焉。 副摠之孫諱琮文科正言。 正言之子諱孝禎。 俱中進士生員不仕。 於先生爲五代祖。 高祖諱㪷進士號慕庵。 性至孝。 當己卯之禍。 與本州進士十一人。 倡義泮中。 特卞靜菴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 官止內資寺主簿。 祖諱元祿受業於思菴朴相公。 篤志謹身。 倭奴之變。 慘遭一家之禍。 自是絶意擧業。 考諱泰洽以文名世。 累魁鄕解。 爲光海時人所斥。 一不得赴覆試。 遂慨然以敎授生徒爲業。 自號松湖。 松湖公娶羅州羅氏生員元吉之女。 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先生于龜業里第。 生之夜。 母夫人夢人授一明珠。 光耀滿室。 旣覺而先生生。 先生形容端莊。 自學語已知文字。 年七八歲。 言動沉重。 賦詩輒有警語。 雖暗室必危坐終日。 與羣兒遊。 未嘗爭鬪疾走。 十二歲讀大學中庸。 沉潛反覆。 不舍中夜。 遂不復留念於科業。 人勸之則笑而不答。 一日稟于松湖公曰: "世之人皆業科。 然士之抱負甚重大。 固不可專意於此。 且古人有寧學聖人而未至。 不以一善成名者。 此最可爲法也。" 公嘉其意。 遂不復强以詞章。 手畫庸學圖。 又作說揭之座。 以自警省焉。 十三歲取論語孟子周易諸書。 次第讀之。 頃刻不懈。 至於義理歸趣。 一有未達。 則終夜不寐。 必極其究硏而後已。 又博通詩書禮春秋及諸子史。 一覽輒記。 然要在探賾蘊奧。 不以涉獵爲事。 自是業日就德日卲。 其學尤邃於易。 年纔十四。 見之者莫不加敬。 以成德君子目之。 搢紳之過州家者。 亦多求見。 是時先生一家男女長少以瘵疾殞者。 已十有餘人。 而松湖公又適遘其疾于南平之寓舍。 先生侍藥物。 晨夕不懈。 夜未嘗脫衣。 疾且甚。 公謂曰: "吾家兄弟叔侄。 死亡殆盡。 而吾又不幸至此。 汝未有弟兄。 汝年少且無子女。 汝宜遠遁以圖生。 汝忍使我負無後之罪耶?" 遂勒使去。 先生涕泣不忍則公又繼之以怒呵。 先生恐傷其志。 常隱身左右以供藥。 及大漸。 母夫人謂先生曰: "吾嘗聞瘵有虫。 常以絶命時染人。 汝姑小避。 以俟。" 先生驚且泣曰: "人子死卽死耳。 安忍棄父而自謀?" 累言而先生終不可。 母夫人哭出於外曰: "所天已不可救。 一子又將不保。 薄命之身。 不如死而無知。" 卽引索自縊。 先生顚倒救解。 哭且諫。 母夫人以帶結先生手。 且以刀自擬。 以示不可離。 時王夫人徐氏亦在堂。 謂先生曰: "汝母由汝而死。 汝何以爲子?" 使外孫羅襀等固守。 使不得復入戶。 先生以頭叩地。 悶絶復蘇者累矣。 其日松湖公果不救。 先生號哭如禮。 設喪次於正寢門外。 以成服哭踊。 哀戚之狀。 吊者莫不流涕。 服且成。 母夫人又責先生去曰: "汝在此。 吾固不出。 死父已矣。 將欲置吾何地也?" 先生扶抱泣諫者盡日。 終不得請。 卽奉母夫人寓于別村。 身且棲于山菴。 時先生年十五矣。 居數月。 先生又得是疾。 泣而語曰: "罪孤之離喪次。 非敢以逃死重違父母之戒也。 今病如此。 在外何爲?" 乃伻告于母夫人。 卽徒步歸喪次治葬具。 卜日永窆。 朝夕之間。 號哭過哀。 病且漸劇。 以至柴毁。 而猶未嘗暫脫衰麻。 於是延醫鍼且灸。 且服川椒丸。 迨三四年得免死。 乃嘆曰: "賦命奇薄。 不能居喪盡禮。 天地間罪人也。 莫如爲農圃以終世。" 乃扁其堂曰明農。 自號南圃病逸。 自任病廢。 閉門不出曰: "人生一息尙存。 不可暫時怠惰放過。" 或開卷熟覆。 玩心聖賢之戒。 或閉眼嘿坐。 游心天人之際。 心有所契。 必書之冊。 當時所記。 有玩物篇焉。 鄕里冠童往來問業。 則莫不隨其才而諄諄。 且曰: "人能收得放心。 剗却外物。 則心氣寬平。 自有樂地。 何必專力於記誦著述之習哉?" 先生索居不求聞。 而名譽騰播遠邇。 人無親踈。 翕然稱林下第一人。 至於搢紳長者。 雖不相面。 亦皆歆艶其名而稱道之。 歲己丑用鄕薦除先生敎官不就。 未幾又除翊衛司洗馬。 時適仁廟賓天。 先生奔哭到京師。 翌日行奔哭禮。 又明日行肅謝禮。 卽以病辭歸。 歲庚寅閔判書鼎重爲本道御史。 一見先生器重之。 卽褒啓先生。 然時黨同伐異之風甚。 下及委巷士庶。 亦莫不覘人一動一靜。 以爲向背毁譽之候。 而先生吹噓適出於龍洲趙公絅之手。 由是人多猜惡。 始欲訾毁先生而不得說。 乃曰: "先生父喪。 先生嘗在外。" 仍相與增衍裒益。 構捏作口語。 識者痛之。 先生家居養母夫人至孝。 雖家貧屢空而朝夕必有甘旨。 歲甲午遭終天之痛。 喪祭一遵家禮。 三年未嘗見齒。 服闋益無意仕進。 惟以守靜養性爲事。 時値春秋佳節。 則逍遙吟詠於山水之間。 以暢敍幽情。 以至一草一木一禽一獸。 莫不隨覽而反求諸己。 以爲竆格自警之資。 其所錄則有南郊日記焉。 歲己亥孝廟昇遐。 先生扶病入洛。 行奔哭禮而歸。 顯宗初卽位。 訪問賢士之奔哭者。 宰執揀八賢以奏之。 先生參其中。 是時大小宋名望傾朝。 以士流稱者皆奔波。 先生終不造其門。 旣歸除先生司勇。 先生不赴。 鄕之攻先生者益衆。 而先生又不求知於人。 由是秉朝權者亦多不快。 會有爲湖南御史者。 親造先生廬一宿。 與語大悅曰: "此君子人也。" 一見決矣。 遂疏陳其行。 且揚言於朝。 歎惜不置。 惡先生者亦莫之沮。 歲辛丑果擬先生爲敎官。 先生又不赴。 先是大妃服制之論大鬨朝野。 爭其是非。 門生有難于先生者。 先生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仍出當時論禮諸箚及眉爺白湖長書曰: "此足以定其是非矣。" 又問宋箚中免衰之喩。 先生憮然不答。 久乃曰: "公論之定。 必不待百年。 爾輩從當知之。" 因愀然不樂。 鄕中趍時之徒。 得聞其說。 自是攻先生日益力。 及黃山書院之刱。 大宋會儕朋于礪山。 奉安有日。 道內自好之流。 莫不干謁。 人或告先生曰: "儒林大擧也。 子不可不往。 宋意亦欲先生來。" 先生曰: "我平生多病。 親舊喪葬。 且不能匍匐。 况今數百里外。 其能馳赴乎?" 竟不往。 宋知其意大憾焉。 是時鄕中親知爲子弟立三齋。 推先生請卒業。 先生名其齋曰三學曰蒙養曰悅樂。 嚴立講規。 略倣白鹿洞遺意。 朔望行分揖禮。 課其所學。 菁莪之化。 將不日而振。 會宋公弟時杰爲南平守。 亦欲大害先生。 使不容於世。 初先生夫人吳氏有孕。 未久而先生丁內艱。 夫人解胞適在喪中。 於是捃摭舊事。 拍手相賀。 做出喪童之說。 添作先生一罪案。 先生謂門徒曰: "此人輩畜憾。 非一朝一夕之故。 終必毁舍削迹而後已。 吾不如謹避之。 爾等勿以我去。 怠棄講規。 宜終始其學。 以自成就焉。" 是日門徒無不俯伏流涕者。 遂挈家歸于羅州之故里。 時則顯宗乙巳歲也。 州之子弟復多來學者。 先生猶敎之不倦。 使立齋于松楸之下。 一家之人或曰: "人皆謂南中異論。 以子爲宗。 競相造謗。 向也永平之禍。 宜可以懲。 何不謝去生徒。 以息人言耶?" 先生曰: "彼以學來。 何忍拒之? 儻復有禍患。 非閉門塞竇所可避也" 仍從容謂生徒曰: "昔鄭困齋之竄。 遊其門者無不延其禍。 爾等將恐不免。 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乃吾黨十字符也。 汝等宜服膺而勿失之矣。" 未嘗以竆苦困阨。 一動其心。 先生宗族之在本州者幾人。 遂約束立契。 勉以相好之意。 歲春秋每一合族以自娛。 或使子侄左右立。 詠所製歌詞以侑酒。 滿座無不肅然起感者。 先生雖早衰多病。 而好學之心。 始終不倦。 所居數架屋。 積冊子累百餘篇。 先生必昧爽而起。 整衣巾端坐。 終日矻矻。 筆硯書床及菊盆外。 蕭然無他物。 座隅置一張短琴。 時或抽匙撫絃。 按譜作古調。 其聲雄遠和平。 客至則下堂迎致敬。 相對語亹亹。 一言半辭。 未嘗及人世雌黃。 辛亥之五月初十日寢疾。 易簀于正寢。 得年四十八。 門生皆會于喪次。 相向而哭若斬齊焉。 是年月日。 葬于南平之墻巖山。 先生德性嚴整。 風度淸爽。 與人語則和氣盎然。 雖稠人廣坐之中。 初無半面之分者。 一接皆知爲先生。 雖麤悍無賴之徒。 見之自不覺屈膝。 待庶母盡其誠。 敎育孼弟。 情愛備至。 田庄臧獲平均分給曰: "我自有外家田民。 誠不忍汝飢寒也。" 其於族人。 雖緦免之親。 待之如同氣。 撫育宗家孤侄若己出。 或有疾患則達朝不寢。 以盡救療之方。 每遇先代諱日。 雖隆冬必澡浴。 將祭之夜。 必整衣冠。 危坐以待。 祭需無不親檢。 以致精潔。 其學得於心而非由師傅。 然奧旨之難解者。 變禮之難處者。 人或就正則莫不渙然明釋。 援引各適其當。 聽者悅服。 雖不求聞達。 罕與人接。 而其於當世之務。 無不通解。 以至朝廷軆例及外國風土。 有若目擊而親驗之者。 盖其姿稟之高。 才品之豪。 觸處無所不長。 嘗觀先生著萬言疏。 本之誠正之要而推而及乎世務十事。 以筮不吉不果上。 又嘗著經世通典一部。 論士農工商兵僧之制。 盖如有用我者。 擧而措之之意也。 則先生果非無意於世者。 而遭時不淑。 含光晦彩以自樂於蓽門圭竇之中。 所謂不見是而無悶者。 先生足以當之矣。 所著玩物篇·南郊日記·經世通典及易象小訣·牛山答問·質疑書及詩若文若干篇藏于家。 嗚呼! 先生自幼少。 已知爲爲己之學。 及長閉戶讀性理書。 盖將四十年。 其造詣淺深。 有非後學所可推度。 而其見於動止威儀之間者。 有不可掩。 其學盖立幟乎五賢之嫡傳。 而繩趍尺步於坦蕩之途者也。 惜先生生無知己之士而死無傳鉢之人也。 中年毁先生之言。 實出於初年譽先生之人。 而畢竟爲壬人所構陷以廢悲夫! 先生平生尤篤信退陶。 其立言處心。 多所祖述云。崇禎紀元後己未陽月望日。 門人通德郞。 前行成均館學諭羅晩成謹狀。【門人李都事錫三,洪進士最一深懼先生之學問橾行。 久而泯晦。 議所以撰成行狀。 僉議咸推於晩成曰: "尹1)早趍先生之門。 身親見其動作䂓矩。 且薰炙於德業行義。 旣厚且久。 則惟君捃摭揄揚。 以視來後。 不亦宜乎?" 晩成不獲辭。 乃撰次如右。】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사암(思菴) 박 상공(朴相公) 박순(朴淳)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이다. 1572년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했다. 향해(鄕解) 향시(鄕試)를 말한다.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 (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옛……있으니 이 말은 여대림(呂大臨)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애사(哀詞)를 지으면서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차라리 한 사람이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병통을 삼을지언정 일시적인 이익으로 자신의 공을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寧學聖人而未至, 不欲以一善成名, 寧以一物不被澤, 爲己病, 不欲以一時之利爲己功.]"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近思錄 觀聖賢》 용학도(庸學圖) 《중용》과 《대학》의 이치를 도표로 그린 것을 말한다. 위독해지시니 원문의 '대점(大漸)'으로, 《서경》 〈고명(顧命)〉에 "아, 병이 크게 번져 위태하다.[嗚呼, 疾大漸, 惟幾.]"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남편 원문의 '소천(所天)'으로, 하늘처럼 받들면서 의지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로, 여기서는 남편을 말한다. 승하 원문의 '빈천(賓天)'으로, 하늘에 손님이 되었다는 뜻인데, 임금의 승하를 가리킨다.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1649년에 문과에 장원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당동벌이(黨同伐異)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은 편들고, 뜻이 다른 사람은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추천하는 일 원문의 '취허(吹噓)'로, 입으로 불어 바람을 일으켜서 깃털을 날려 보내는 것으로, 남을 칭찬하고 장려하여 추천함을 이른다.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주봉(柱峯)이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 받아 형조 좌랑 등을 지냈고, 1626년 정시 문과에 장원하여 지평·헌납 등을 역임했다. 대제학 및 각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자주 쌀독이 비었어도 원문의 '누공(屢空)'으로, 살림살이가 빈궁한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모친상[終天之痛] 몸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는 슬픔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상을 가리는데 여기서는 모친상을 말한 것이다. 가례(家禮)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일반 사가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절차와 예법을 정리한 책이다. 이를……없었다 매우 슬퍼하여 웃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고자고가 어버이의 상을 집행할 적에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고 일찍이 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高子皐之執親之喪也, 泣血三年, 未嘗見齒.]"라고 보인다.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대송(大宋)과 소송(小宋) 대송(大宋)은 송시열(宋時烈), 소송(小宋)은 송준길(宋浚吉)이다. 대비(大妃)의……다투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느냐, 삼년복을 입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서인(西人)의 송시열(宋時烈) 등은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 (尹善道) 등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당의 극렬한 논쟁은 서인이 주장한 대로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미야(眉爺)와 백호(白湖) 미야(眉爺)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가리킨다. 백호(白湖)는 윤휴(尹鑴)의 호이다. 문최(免衰)의 설 송시열이 허목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거론한 이른바 단궁의 문(免)과 자유 최(衰)[檀弓之免 子游之衰]의 설인데,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6 헌의(獻議) 〈대왕대비복제의(大王大妃服制議)〉에 나온다. 문최(免衰)는 노(魯)나라 공의중자(公儀仲子)의 상사 때 단궁이 예가 아닌 단문(袒免)을 한 채 조문하여 공의중자가 맏손자를 상주로 세우지 않고 서자를 상주로 세운 것을 기롱했던 고사와,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사 때 자유가 예가 아닌 마최(麻衰)를 입고 조문하여 혜자가 맏아들을 폐하고 서자를 상주로 세운 것을 기롱했던 고사를 가리킨다. 《禮記 檀弓上》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이다. 청아(菁莪)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청아(菁莪)는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상동(喪童) 부모 상중(喪中)에 아이를 가졌다는 뜻이다. 선영(先塋) 원문의 '송추(松楸)'로, 소나무와 가래나무인데 주로 묘 둘레에 심었기 때문에 무덤이나 선영(先塋)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정곤재(鄭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으로, 자는 의백(義伯)이며, 곤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홀로……한다 송대(宋代)의 유학자인 채원정(蔡元定)이 도주(道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훈계하기를 "홀로 걸어갈 때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부자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니, 내가 죄를 얻었다고 하여 해이해지지 말라.[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勿以吾得罪故遂懈.]" 하였다. 《宋史 권434 蔡元定列傳》 십자부(十字符) 10개의 글자로 된 신표인데, 좌우명이나 학문의 요결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초년 시절에 스승인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에게 성인의 도(道)로 들어가는 차례를 묻자 "내가 비평 원문의 '자황(雌黃)'은 원래 유황(硫黃)과 비소(砒素)를 혼합하여 만든 안료(顔料)이다. 자구(字句)를 첨삭(添削)할 때 쓰는데, 여기서는 세상에 대한 평론을 말한다. 세상을 마치니 원문의 '역책(易簀)'으로, 스승이나 현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禮記 檀弓上》 서로……하는데 원문의 '상향이곡(相向而哭)'으로 제자들이 스승의 상에서 서로 마주하고 곡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옛날에 공자가 죽자 제자들이 3년이 지난 후 행장을 꾸려 돌아갈 때 "서로 통곡하면서 모두 목이 쉬었다.[相嚮而哭, 皆失聲.]"라는 말이 나온다. 먼 친족 원문의 '시문(緦免)'으로, 상례(喪禮) 때 상복 가운데 가장 가벼운 복(服)인 시마복(緦麻服)과 그 아래인 문복(免服)을 가리키는데 관계가 먼 친족을 말한다. 성정(誠正)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이른다. 누추한 집 원문의 '필문규두(蓽門圭竇)'로, 필문(蓽門)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을 말하고, 규두(圭竇)는 담장을 뚫어 만든 규(圭) 모양의 창문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옳다는……없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論語 憲問》 오현(五賢)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다섯 명의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퇴도(退陶) 이황(李滉)의 호이다. 나만성(羅晩成) 1646~? 자는 대로(大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78년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國朝文科榜目 肅宗 4年 戊午 增廣試》 그대가 원문의 '尹'은 '君'의 잘못인 듯하다. 尹 '君'의 잘못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행장 行狀 [任遠] 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인데 군실(羣實)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로 선계가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전란 때 가보(家譜)를 지키지 못하여 먼 선대는 징험할 수가 없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 분이 휘 효정(孝禎)을 낳았는데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선생에게는 5세조가 된다.고조 휘 두(㪷)는 호가 모암(慕庵)인데 이른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효행으로 누차 어사의 포계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당해서는 본주[羅州]의 여러 진사 공과 특별히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지냈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박사암(朴思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몸을 삼가면서 과거 공부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친 휘 태읍 (泰洽)은 문장으로 세상이 이름이 났고 향해(鄕解)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광해군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한 번도 복시(覆試)에 나가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개연(慨然)히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42) 2월17일 나주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이날 밤 모친이 꿈에서 명주(明珠) 하나를 얻었는데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준수하였으며 기민하게 깨닫는 것이 범상치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말을 배울 때부터 이미 문자를 이해하였다. 나이 겨우 7세일 때도 말과 행동이 신중하고 법도가 있었다. 아이들과 놀 때도 싸우거나 장난질을 한 적이 없었다.12~3세 때 처음 《대학》과 《중용》을 읽고는 깊이 잠기고 반복하면서 반드시 궁격(窮格)43)을 위주로 하였다. 손수 〈중용도(中庸圖)〉44)를 그리고 또 설을 짓고는 자리에 걸어 두고 항상 보았다. 또 《논어》·《맹자》·《시경》·《서경》 및 《주역》 등 책을 차례로 읽는 데도 부지런히 하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자서(諸子書)와 사학(史學)에 이르러서도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고 널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시 본 사람들이 모두 성덕군자(成德君子)로 지목하였다.무인년(1638, 인조16)에 송호공이 역병에 걸리자 선생은 손수 탕약을 달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함이 예제를 넘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한 집안의 남녀노소 가운데 이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거의 십여 명이었다. 이에 조모와 모친이 남은 화가 선생에게도 미칠까 깊이 두려워하여 성복(成服)한 날에 억지로 이웃집으로 나가 머물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선생도 이 병에 걸렸다. 선생이 울면서 일러 말하기를 "죄지은 고아가 상차(喪次)을 떠난 것은 본디 스스로를 아끼려는 계책이 아니라 두 분의 분부를 어길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이 들었으니 밖에 있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하고는 두 부인께 고하고 돌아가서 궤연(几筵)을 모셨다. 그 곡읍(哭泣)의 절도와 궤전(饋奠)의 예를 병독(病毒)을 이유로 한 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삼년 안에 여러 번 침과 뜸을 놓고 천초환(川椒丸)을 복용하니 병든 몸이 소생했다.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부여받은 명이 기박하여 거상(居喪)하면서 예도 다하지 못했으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하였다.마침내 당세에 뜻을 끊고, 스스로 농사를 업으로 삼았다. 그 당(堂)에 남포(南圃)라고 현판을 걸고 밝은 창과 조용한 책상에서 날마다 경적(經籍)을 탐구하였다. 혹 때로 눈을 감고 말없이 앉아서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에 대해 마음을 두었고, 마음에 계합한 바가 있으면 그때그때 반드시 기록하였다.선생은 평소 명예와 현달을 추구하지 않았으나 명예가 원근에 퍼지니 사람들이 친소 없이 일제히 '임하고사(林下高士)'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아치와 장자(長者)들도 모두 그 명성을 부러워하며 흠모하였고 고을을 지나가는 인근의 관장(官長)은 반드시 와서 만나기를 구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향천(鄕薦)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용주(龍洲) 조경(趙絅) 공이 추천한 것이다. 이 때 인묘(仁廟)가 승하하니 선생은 분곡(奔哭)하러 한양에 도착해서 은명(恩命)에 숙배(肅拜)한 뒤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경인년(1650, 효종1)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공이 본도의 어사(御史)로서 선생을 한 번 보고는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서 성대하게 계문(啓聞)하여 포장(褒奬)하였다.갑오년(1654, 효종5)에 모친상을 만나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르면서 허물이 없었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자 선생은 또 분곡(奔哭)하고 돌아왔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여 초야의 선비로서 분곡을 한 자들에 대해 물으니, 조정에서는 팔현(八賢)45)을 가리어 아뢰었는데 선생도 그 한 사람이었다. 이에 군직(軍職)을 부여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에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46) 공이 어사로서 친히 선생의 집으로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군자다운 사람이다." 하였다. 마침내 그의 행의(行誼)를 상소로 진술하여 포계(褒啓)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2)에 다시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이에 앞서 예송(禮訟)이 일어나서 조야가 어지러웠는데 선생에게 논란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의 사람이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어 미천(眉川)47)의 장서(長書)와 회천(懷川)48)의 차록(箚錄)을 꺼내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시비가 저절로 정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미천(眉川)의 뜻을 주로 삼는 것이었다. 선생은 다시 한양으로 들어가 당시 사문(斯文)의 장자(長者)를 두루 찾아보지 않음이 없었는데, 다만 회천(懷川) 송 상국(宋相國)에게는 끝내 가보려 하지 않았다.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창건할 때에 회천이 여산(礪山)에 와서 머물자 도내의 지조를 아끼는 사류들도 대부분 분주히 달려갔다. 사람들이 선생에게 권하기를 "유림의 큰 행사이니 선생께서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송공(宋公)의 뜻도 또한 오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 병을 안고 사는데 어떻게 수 백리 지역에 달려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선생이 이전에 상기(喪期)를 마친 후부터 남평(南平)의 석면촌(石面村)에 우거하였는데49) 향리의 사우(士友)들이 세 재실(齋室)을 세워 강습소로 삼았다. 선생은 그 재실의 이름을 삼학(三學)·몽학(蒙養)·열락(悅樂)이라 짓고 강규(講規)를 엄정히 세웠는데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50)를 본뜬 것이었다. 초하루와 보름날에 분읍례(分揖禮)를 행하고 날마다 그 배울 것을 부과하니 문사(文士)들이 부쩍 흥기하고 청아(菁莪)51)의 교화가 얼마 되지 않아 진작되었다. 이 때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고을 수령이 되자 고을 사람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관장(官長)에게 부탁하여 선생을 해치려 하였다. 선생이 문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근신하여 피해야겠다. 너희들은 내가 떠난다고 해서 태만히 하지 말고 의당 끝까지 노력해서 성취를 보아야한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였다.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나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현묘(顯廟) 을사년(1665, 현종5)이었다. 고을의 자제로 다시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고 선생은 여전히 가르치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선생의 거처는 부서진 가옥 몇 칸에 불과하고 허름한 집52)은 쓸쓸하였으니,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지만 선생의 처신은 여유로웠다. 반드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몸가짐에 조금도 태만한 기운이 없었다. 서적과 책상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질서정연하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제를 대하듯53) 홀로 의리(義理)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뜰에는 노란 국화 수십 본을 심고 율리(栗里)54)의 한가하고 담백한 아취를 깊이 얻었으며, 현금(玄琴) 한두 곡조를 손수 타면서 옛사람의 〈양보음(梁甫吟)〉55)을 본떠 추구하였다. 매번 좋은 때와 아름다운 철이 되면 반드시 대여섯 관동(冠童)과 함께 산수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였는데 이때 쓴 《남교일기(南郊日記)》가 있다.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48세였다. 같은 해 모월 모일에 남평의 장암산(墻巖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낙천 오씨(洛川吳氏) 희일(喜馹)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는데 한림(翰林) 빈(賓)의 증손녀로서 군자의 덕성과 짝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선생보다 4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여기에 합장하였다. 딸 다섯을 두었다. 장녀는 나재흥(羅再興)에게, 다음은 나재우(羅再祐)에게, 다음은 문과에 급제한 도사(都事) 이석삼(李錫三)에게, 다음은 이사존(李師存)에게, 다음은 정만규(鄭萬奎)에게 시집을 갔다. 아! 백도(伯道)처럼 후사가 없었고56) 외손 약간 명이 있다.무오년(1678, 숙종4)에 문인과 자제들이 향리의 이웃 사우(士友)들과 앞장서 논의하여 재물을 모으고, 풍산(楓山)에 사우(祠宇)를 세워서 제물을 갖춰 제사를 올렸다. 아! 선생은 유서 깊은 집안의 쇠퇴한 종족으로 호남의 한쪽 누추한 고을에서 태어났다. 가정에 물려받은 가업57)이 없었고 사우연원(師友淵源)의 학통이 없었지만, 걸출하게 우뚝 서서 사도(斯道)를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진실의 영역에 발을 붙였다.그 사생활을 살펴보면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처럼 진중하였고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봄바람처럼 화기가 넘쳤다.58) 많은 사람이 널리 앉은 자리에서 애초에 본디 반면식도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접하면 모두 선생의 됨됨이를 알게 되었다. 부모를 모시는 데는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어버이 상을 지낼 때는 그 예를 다하였다. 서모(庶母)을 대우할 때는 그 마음을 감동시켰고 서제(庶弟)를 기를 때는 애정을 지극히 하였다. 일가의 먼 친족59)이라도 동기(同氣)60)처럼 대하였다. 종가(宗家)의 아비를 여읜 조카를 보살펴 기를 때는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게 하였다. 매번 선조의 기일에는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고 제수(祭需)는 친히 점검하며 힘써 정결하게 하였다. 제삿날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바르게 앉아서 밤이 샐 때까지 기다리면서 슬피 사모하여 부여잡고 울부짖음이 초상 때와 같았다.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평생 학문을 하며 퇴도(退陶)61)를 독실하게 믿어서, 말을 세우고 마음을 씀에 계승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질의(牛山質疑)〉 등 글을 저술하였다. 그 난해한 깊은 뜻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해 얼음이 풀리듯 명확히 해석하여 각각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당세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일마다 훤히 꿰뚫어서 조정의 고사(古事)나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도 마치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 여기에서도 선생의 높은 재주와 식견이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일찍이 선생이 지은 〈만언소(萬言疏)〉 한 편을 보았는데 대개 성정(誠正)62)의 요체에 근본을 두고서 세상의 일 10여 가지로 미루어 나가 지극하게 말하고 남김없이 논하였는데, 모두 조리가 있었으나 둔괘(遯卦)가 나와63) 결국 상소하지는 못했다. 만약 이 말이 임금의 귀에 한 번 들어가서 시행되었다면 풍화(風化)의 다스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소장은 상달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격언과 훌륭한 의론도 한갓 먼지 낀 상자 속의 빈 말이 되게 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또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을 지어서 사(士)·농(農)·공(工)·상(商)·병(兵)·승(僧)의 부류를 논하였는데, 대개 만일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거행하여 조치하겠다는 뜻이었다. 아! 이 몇 가지로 본다면 선생이 과연 당세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난 때가 좋지 못하여 광채를 품어 감추고 누추한 집64) 가운데서 스스로 즐겼으니 이른 바 '옳다고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65) 것은 실로 선생을 이른 것이다.아! 하늘이 호남의 한 도에 선생을 낸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수명을 늘리고 그 역량을 채워서 대현(大賢)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무슨 까닭인가? 세상에 뜻을 달리하는 자들은 선생이 상려(喪廬)를 지키지 않았다고 문제를 삼아, 거짓을 퍼뜨리며 비방을 만들어 내고 참소하는 혀를 시끄럽게 놀려서, 지난날의 화를 점차 이루게 했던 것이다. 아! 애통하다. 말세의 인심이 험악하도다. 선생 집안의 화가 이미 세속에서 이른 바 채질(瘵疾)에서 비롯되어 한 집안이 사망하고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기에 두 대부인(大夫人)이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권유한 것은 남은 고아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혹 울면서 이끌고 혹 붙잡아 떠나게 하면서 밧줄을 당기고 칼로 찌르려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때를 당해 선생의 입장에서 어찌 감정을 억제하고 애써 복종하여 두 부인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선생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평일에 어버이를 모시면서 한결같이 뜻을 따르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비록 엄중한 상사(喪事)에 슬피 울며 가슴을 치는 중에 있더라도 두 분 늙으신 자당(慈堂)께서 몹시 다그치는 명령이 그지없이 절절한데에야 어찌하겠는가?화변(禍變)이 황급한 즈음에 설사 의(義)에 대처함이 지극히 좋지는 못한 점이 있었더라도 선생의 당시 나이는 15세였다. 아! 경도(經道)와 권도(權道)66)를 중도(中道)에 맞게 하는 것은 노성(老成)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아동 때의 일로 성덕(成德)한 뒤에까지 뒤미처 흠을 잡는다면 공자께서 '그의 진보를 허여할 뿐 지난날의 잘잘못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67) 라고 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심하구나, 소인(小人)은 남의 미덕을 이뤄주기를 좋아하지 않도다.아! 선생은 나에게 멀리 외재종척조(外再從戚祖)가 되고, 나의 백부(伯父)와 중부(仲父) 및 동당 제부(同堂諸父)들이 모두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백부(伯父)인 상상공(上庠公)이 가르치기를 "남포(南圃)는 남녘의 도학지사(道學之士)이다." 하였고, 중부(仲父) 또한 말하기를 "바라보면 진중하여 참된 군자이다." 하였으며, 동당 제부들도 일찍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내가 옛날 명재(明齋)68) 윤 선생(尹先生) 문하에서 유학할 때 (명재)선생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녘 고을에 김만영(金萬英) 군이 있는데 참으로 호걸지사이다." 하였다. 나는 어려서 한양에서 자랐고 선생에게 세대가 뒤이며 지역도 멀어서 비록 선생의 언행 사이에서 친히 훈도를 받을 수 없었으나, 부형과 사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미 익숙하게 들었다. 남쪽의 전리(田里)로 돌아갈 때에 한 번 사우(祠宇)를 참배하고 또 선생의 가장(家狀)69)과 행록(行錄) 및 유문(遺文) 여러 편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선생의 심오한 학문과 무거운 명망이 일세의 표준으로 후학들이 우러르는 태산북두(泰山北斗)가 되어서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가령 국자 사유(國子師儒)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 인재70)를 인도했다면 인재를 육성하는 효과가 꼭 여기에만 그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제는 죽어 묻혀서 배운 바를 펴지도 못한 채 몽매한 이를 기르고 교도하는 공효가 단지 한 문하의 선비들에게만 미치고 말았으니 그 또한 개탄스러울 뿐이다.아! 나의 선친께서 선생보다 연세가 조금 어린지라 종유하지는 못하였으나 평일에 사모함이 또한 많았다. 일찍이 선생이 지은 〈중용훈해(中庸訓解)〉을 보고 조금 윤색을 가하여 저술하신 일설(一說)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이론(異論)이 없지 않지만 그 큰 개요를 말하자면 똑같이 도리는 하나였다.지난 모년(某年)에 사론(士論)이 일제히 목소리를 내어 선친을 풍우(楓宇)에 함께 제향하였다.71) 이때부터 매년 봄가을 제향 때 항상 제사에 달려가 참여하였으니 소자(小子)의 구구한 애모의 정성을 어찌 다른 사람들에 비하겠는가?선생은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일찍이 사장(詞章)에는 힘을 쏟지 않았지만, 무릇 읊은 시들은 모두 성정(性情)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중 〈사시가(四時歌)〉는 가사의 기운이 온통 온화하여 바로 정백순(程伯淳)의 기상이 있으니, 한 번 읊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일었다. 내가 일찍이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72)를 보았는데 선생의 시가 【서술(叙述)에 자세히 보인다.】 또한 그 가운데 들어있어서, 비로소 선생의 문장이 풍아(風雅)73)의 반열에 뽑혔음을 알게 되었다.또 명재(明齋) 선생의 유집을 살펴보니, (명재)선생이 일찍이 탄옹(炭翁) 권시(權諰)74) 공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위포(韋布)75)로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 김만영군 같은 사람은 더욱 태학(太學)에 두어 그 재능을 성취할 수 있게 함이 좋다." 하였다. 또 〈임사가를 보내는 서[送林士駕序]〉에서 말하기를 "내가 남녘의 선비에 대해 들은 사람은 김만영 군이니 그대가 돌아가면 그를 찾으라." 하였으니, 그 평일에 유문(儒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일전에 선생의 서종자(庶從子)인 국상(國相)이 와서 말하기를 "제 숙부의 행장(行狀)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으니 그대가 기록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비록 사람이 미천하여 선생의 덕을 찬양하는 글을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다만 나의 제부(諸父)들이 이미 문생(門生)의 반열에 있었고, 나의 선친 또한 따라서 한 사우(祠宇)에서 함께 배향되었으니, 정으로나 의리로나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는 없었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평일에 가정과 사우들에게 들은 것을 간간히 덧붙여서 세상의 상덕군자(尙德君子)가 사실을 고찰하는 바가 있기를 기다리노라.경신년(1680, 숙종6) 2월 하순에 후학 서하(西河) 임원(任遠)이 삼가 짓다. 先生諱萬英字英叔。 一曰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丁酉兵燹。 家譜失守。 遠代無徵。 入我朝諱忍官副摠管。 墓在羅州。 子孫仍家焉。 摠管之孫有諱琮。 官正言。 是生諱孝禎生進俱中。 於先生爲五世祖也。 高祖諱㪷號慕菴。 早登司馬。 以孝行累登繡褒。 當己卯士禍。 與本州進士諸公。 特卞靜庵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官內資寺主簿。 祖諱元祿受業於朴思菴門下。 篤志謹身。 不屑擧業。 考諱泰洽以文名世。 屢魁鄕解。 爲光海時人所擯。 一不得赴覆試。 遂慨然以敎授爲業。 自號松湖。 松湖公娶羅州羅氏。 生員元吉之女。 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先生于羅州龜業里。 是夜母夫人夢得一明珠。 光輝滿室。 旣覺而娩解。 先生生而英秀。 警悟異常。 人皆見而奇之。 自學語已解文字。 而年甫七歲。 言動擧止。 沉重有度。 與羣兒遊。 未嘗爭鬪嬉戲。 十二三歲。 始讀大學中庸。 沉潛反覆。 必以竆格爲主。 手畫中庸圖。 又作說揭之座右。 常目焉。 又取論孟詩書及周易等書。 次第讀之。 孜孜不懈。 至於諸子史學。 一覽輒記。 靡不博通。 當時見者咸以成德君子目之。 歲戊寅松湖公遘病癘。 先生手自煎湯。 夜不解帶。 及喪哀毁踰禮。 先是一家男女老少。 以是疾致殞者幾十餘人。 兩世慈堂深恐餘禍之及於先生。 服成之日。 强令出寓隣舍。 未幾先生又得是疾。 泣而謂曰: "罪孤之離喪次。 本非自愛計。 惟兩親之戒莫違。 而今病如此。 在外何爲?" 仍告于兩夫人而歸侍几筵。 其哭泣之節。 饋奠之禮。 未嘗以病毒而一廢焉。 三年之內。 多試鍼灸。 且服川椒丸。 病得蘇。 常歎曰: "賦命奇薄。 不能居喪盡禮。 天地間一罪人。" 遂絶意當世。 以農圃自業。 扁其堂曰南圃。 明窓靜几。 日討經籍。 或時閉眼嘿坐。 遊心於天人之際。 心有所契。 輒必箚記。 先生平居不求聞達。 而名譽騰播。 人無親踈。 翕然稱林下高士。 至於搢紳長者。 亦皆艶慕其名。 而隣近官長過州里者。 必來求見。 己丑以鄕薦除童蒙敎官不就。 又除翊衛司洗馬。 皆龍洲趙公絅之吹噓也。 是時仁廟賓天。 先生奔哭至京。 肅命後卽棄歸。 庚寅老峯閔公鼎重以本道繡衣。 一見先生器重之。 盛加啓褒。 甲午遭母夫人喪。 喪祭一遵家禮罔愆。 己亥孝廟昇遐。 先生又奔哭而歸。 顯宗初服。 詢問草野士流奔哭者。 廟堂揀八賢以奏之。 先生亦其一也。 仍付軍啣不就。 其年藥泉南公九萬以御史親造先生廬下一宿。 與語大悅曰: "此君子人也。" 遂疏陳其行誼以褒之。 辛丑復除敎官又不赴。 先是禮訟作。 朝野紛紜。 有人難之于先生者。 先生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仍出眉川長書懷川箚錄而視之曰: "有見于此。 是非自定。" 盖以眉川意爲主矣。 先生再入京輦。 當時斯文長者。 無不遍尋周訪。 而但於懷川宋相。 終不肯往見。 及黃山書院之刱也。 懷川來留礪山。 道內自好之流。 擧皆奔波。 而人或勸先生曰: "儒林大擧。 子不可不往。 宋公之意。 亦欲來之矣。" 先生曰: "我素抱病。 何能馳往於數百里之地乎?" 竟不赴。 先生頃自免喪後。 矯2)居南平石面村。 而鄕中士友爲築三齋室。 以爲講習之所。 先生名其齋曰三學曰蒙養曰悅樂。 嚴立講規。 一倣白鹿遺意。 朔望行分揖禮。 日日課學。 文士蔚興。 菁莪之化。 將不日而振矣。 時有不悅先生者爲地主。 鄕人做讏言囑官長。 欲害先生。 先生謂門人曰: "禍將不測。 吾當謹避而已。 諸君勿以我去怠忽。 宜終始努力。 以見成就。 是吾之願也。" 遂挈家歸于羅州故里。 時顯廟乙巳歲也。 州之子弟復多來學者。 先生猶敎之不倦。 先生所居。 不過破屋數間。 環堵蕭然。 人不堪其憂而先生處之裕如。 必昧爽而起。 終日危坐。 設於身軆。 少無惰慢之氣。 以至書籍几案。 皆秩然整頓。 潛心對越。 獨以義理自怡悅。 庭栽黃菊數十本。 深得栗里閒澹之趣。 手彈玄琴一二曲。 擬追古人梁甫之吟。 每當佳辰令節。 必與五六冠童。 嘯詠山水之間。 有所著南郊日記。 歲辛亥之五月初十日。 以病考終于第。 得年四十八。 同年月日。 葬于南平墻巖山卯坐之原。 室洛川吳氏喜馹之女。 翰林賓曾孫女也。 配德無違。 後先生四歲而沒。 合祔于玆。 有女五。 長適羅再興。 次適羅再祐。 次適李錫三文都事。 次適李師存。 次適鄭萬奎。 嗚呼! 伯道無嗣。 有外孫若干人。 戊午門人子弟。 與鄕隣士友。 唱議鳩財。 建祠于楓山。 俎豆以享之。 嗚呼! 先生以故家衰替之族。 生湖南僻陋之鄕。 無家庭箕裘之業。 乏師友淵源之緖。 傑然特立。 以斯道爲己任。 竱心於性理之學。 着跟於眞實之域。 窺其私則凝然如泥塑。 與人語則盎然若和風。 雖稠人廣座之中。 初無半面之雅者。 一接皆知爲先生也。 事父母至孝。 居親喪盡其禮。 待庶母感其心。 育庶弟情愛備至。 雖一家緦免之親。 視之如同己3)。 撫養宗家孤侄。 無異己出。 每於祖先諱日。 雖隆冬必澡浴親檢祭需。 務致精潔。 祭之日。 必整衣冠正坐。 達宵而待之。 哀慕攀號如初喪。 皆出於至誠而非强作爲也。 平生爲學。 篤信退陶。 其立言處心。 多所祖述。 而嘗著易象小訣,牛山質疑等書。 其奧旨之難解。 變化之不測者。 莫不渙然明釋。 各適其當。 其於當世之務。 亦皆觸處洞透。 以至於朝廷古事。 外國風土。 有若目擊而親驗之者。 於此可見先生才識之高有如是夫。 嘗觀先生有著萬言疏一篇。 盖本之誠正之要。 而推而及乎世務十餘事。 極言竭論。 儘有條理而遇遯不果上。 儻使此言一徹天聽。 施以行之。 則其有補於風化之治者。 庶不少矣。 惜乎疏未達而意未遂。 至使格言徽論。 徒爲塵篋中空言。 吁! 可悲矣。 又嘗撰經世通典。 論士農工商兵僧之流。 盖亦如有用我者。 擧而措之之意也。 噫! 以此數者觀之。 則先生果非無意於當世者。 而遭時不淑。 含光晦彩。 甘老於蓽門圭竇之中。 所謂不見是而無悶者。 實先生之謂也。 嗚呼! 天之所以生先生於湖南一道者。 實非偶然。 而惜不能假之年而充其量。 以臻大賢之域。 此亦何故歟? 世之異趣者。 以先生不守喪廬爲病。 興訛造謗。 讒舌囂囂。 馴致曩日之禍。 噫噫! 痛矣。 末路人心之險巇也。 先生之家禍。 旣由於俗所謂瘵疾。 而一門死亡。 殆無餘類。 則兩大夫人所以勸移者。 盖出於保護遺孤之意。 或涕泣而導之。 或扶將而去之。 至於引索擬刃之境。 當此時爲先生者。 顧安得不抑情勉從。 以順兩夫人之心乎? 先生性至孝。 平日事親。 一以順志爲本。 雖在嚴喪號擗之中。 其於兩老慈敦迫之命切切不已何哉? 禍變蒼皇之際。 設有處義之未盡善者。 而先生時年十五歲矣。 噫! 經權之得中。 在於老成尙難。 况以童兒時事。 追疵於成德之後。 則吾夫子與其進不保其往之意。 果安在哉? 甚矣。 小人之不樂成人之美也。 嗚呼! 先生於遠爲外再從戚祖。 而遠之伯仲父及同堂諸父。 俱遊先生之門。 嘗聞伯父上庠公之敎曰: "南圃爲南中道學之士。" 仲父亦有言曰: "望之凝然爲眞箇君子。" 同堂諸父亦嘗稱頌不已。 遠昔遊於明齋尹先生門下。 先生謂余而言曰: "南州有金君萬英者。 眞豪傑士也。" 遠少長於洛中。 於先生世相後地相遠。 雖不能親炙于先生言行之間。 而嘗因父兄及師門之敎而聞之已熟。 及其南歸田里。 一者瞻拜祠宇。 又得見先生家莊行錄及遺文諸篇。 然後始知先生邃學重望。 爲一世標準而後學山斗之仰。 有不勝言者也。 誠使國子師儒之席。 爲其所據。 以迪俊造則其樂育之效。 必不但已。 而今乃沉淪埋沒。 不展所學。 蒙養敎導之功。 正及於一門之士。 其亦可慨也已。 嗚呼! 吾先子於先生。 年歲差後。 未及從遊。 而平日景慕則亦多矣。 嘗見先生所撰中庸訓解。 稍加櫽栝。 著有一說。 其間不無同異之論。 而語其大要則同一揆也。 頃於某歲。 士論齊聲。 並享先人于楓宇。 自玆以往。 每年春秋之享。 輒乃趍與於籩豆之間。 小子區區慕悅之誠。 豈餘人比也? 先生專意性理之學。 不曾致力於詞章之間。 而凡有吟詠。 皆從性情中流出。 其中四時歌。 辭氣渾和。 便有程伯淳氣象。 每一諷誦。 不覺起敬。 遠嘗見南尙書龍翼所抄箕雅。 先生之詩【詳見叙述】亦入其中。 始知先生之文章。 被選於風雅之列也。 又按明齋先生遺集。 先生嘗引炭翁權公諰之言曰: "韋布自處者有之。 如金君萬英者。 尤可使置太學成就其才可也。" 又送林士駕序曰: "吾於南中士所聞則金君萬英。 吾子歸而求之。" 其平日見許於儒門者。 亦不泛矣。 日者先生之庶從子國相來曰: "吾叔父行狀尙未成。 子其識之。" 遠雖人微不敢當贊德之文。 而顧我諸父旣在門生之列。 吾先子又從以同享一宇。 則以情以義。 不可以不文辭。 謹依家狀而序次如右。 間附平日所聞於家庭及師友者。 以俟夫世之尙德君子有所考信焉。 歲庚申仲春下澣。 後學西河任遠謹狀。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 (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궁격(窮格) 궁리격물(窮理格物)의 준말이다.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하여 물리(物理)의 극치에 도달하는 일이다. 중용도(中庸圖) 《중용(中庸)》의 이치를 도표로 그린 것을 말한다.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이다. 1656년 과거에 급제하여 교리, 대사성, 형조 판서 등을 거치고 삼정승을 역임하였다. 남구만은 1659년 4월 호남 암행어사(湖南暗行御史)로서 호남 지역을 순행하였다. 《孝宗實錄 10年 4月 18日》 《韓國文集叢刊解題 4 藥泉集》 미천(眉川) 허목(許穆)을 가리킨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회천(懷川) 회덕(懷德)에 살던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우거하였는데 원문의 '矯居'는 '僑居'의 잘못인 듯하다.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 백록동 강규(白鹿洞講規)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이다. 《朱子大全 권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청아(菁莪)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청아(菁莪)는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허름한 집 원문의 '환도(環堵)'로,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집과 환도의 방을 둔다.[儒者有一畝之宮, 環堵之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사방의 흙 담장이 각 면마다 한 발 길이가 되는 협소하고 비루한 집을 비유한다. 마음을……듯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 듯 하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율리(栗里) 동진(東晉)의 도잠(陶潛)이 은거하던 곳이다. 양보음(梁甫吟) 악부(樂府)의 곡명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이 도량이 좁아 세 명의 용사를 죽이고야 만 일을 한탄하는 내용이며, 이백(李白)의 〈양보음〉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서술한 것이다. 백도(伯道)처럼 후사가 없었고[伯道無嗣]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도(伯道)'는 진(晉)나라 때에 하동 태수(河東太守)를 지낸 등유(鄧攸)의 자이다. 그가 석륵(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하늘이 무지해서 등백도에게 아들이 없게 했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 하였다. 《晉書 권90 鄧攸列傳》 물려받은 가업 원문의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궁인의 아들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 하였다. 진흙으로……넘쳤다 원문의 '이소(泥塑)'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한다. 송나라 사양좌(謝良佐)가 스승인 정호(程顥)의 인품을 평하기를 "종일토록 앉아 있는 모습이 진흙으로 빚은 소상 같았으나, 사람을 접할 때는 온전히 한 덩어리의 화기였다.[終日坐如泥塑人, 然接人, 則渾是一團和氣.]" 하였다. 《上蔡語錄 권2》 먼 친족 원문의 '시문(緦免)'으로, 상례(喪禮) 때 상복 가운데 가장 가벼운 복(服)인 시마복(緦麻服)과 그 아래인 문복(免服)을 가리키는데 관계가 먼 친족을 말한다. 동기(同氣) 원문의 '同己'는 '同氣'의 잘못인 듯하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성정(誠正)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이른다. 둔괘(遯卦)가 나와 원문의 '우둔(遇遯)'으로, 점을 쳐서 둔괘(遯卦)가 나왔다는 뜻인데, 써놓은 상소문을 올리지 못할 때에 쓰는 표현이다. 한탁주(韓侂胄)가 정권을 잡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자, 주희(朱熹)는 수만 언(數萬言)에 달하는 봉사(封事)를 초(草)하였다. 이에 자제와 문인들이 화를 사게 될 것이라고 간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들어가서 점을 쳐서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점을 쳐서 둔지가인괘(遯之家人卦)를 만나 '둔(遯)의 꼬리이다. 좋아하지만 은둔한다.[遯尾好遯]'는 점사(占辭)가 되었다. 이에 그 초고(草稿)를 불에 넣었다 한다. 《晦庵別集 권1 劉德脩》 누추한 집 원문의 '필문규두(蓽門圭竇)'로, 필문(蓽門)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을 말하고, 규두(圭竇)는 담장을 뚫어 만든 규(圭) 모양의 창문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옳다는……없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하였다. 경도(經道)와 권도(權道) 경(經)은 변할 수 없는 도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하는 도를 말한다. 그의……않는다 공자 당시에 풍속이 나쁜 호향(互鄕) 사람들과는 같이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공자가 그곳 아이를 만나주자 제자들은 당황하였다.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그 진보를 허여할 뿐이요 그의 퇴보를 허여하는 것은 아니니, 어찌 심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 사람이 몸을 깨끗이 하여 찾아오면 그 깨끗이 한 것을 허여할 뿐이요 지난날의 잘잘못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하였다. 《論語 述而》 명재(明齋) 윤증(尹拯)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경(仁卿)·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다. 가장(家狀) 원문의 '家莊'은 '家狀'의 잘못인 듯하다. 인재 원문의 '준조(俊造)'로, 준사(俊士)와 조사(造士)를 합칭(合稱)한 말이다. 준사는 주나라 때의 학제(學制)에서 서인의 자제로 학덕이 뛰어나 태학(太學) 입학을 허가받은 사람을 말하고, 조사는 인격이 성취된 선비라는 뜻으로 특히 태학의 진사(進士)에 선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禮記 王制》 선친을……제향하였다 '풍우(楓宇)'는 '풍산사우(楓山祠宇)'를 말한다. 임원(任遠)의 선친은 임세복(任世復, 1655~1703)으로 사후에 증통덕랑(贈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남평면 풍산사(楓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 조선 숙종(肅宗) 때 남용익(南龍翼)이 엮은 시집이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조선 현종(顯宗) 때의 김석주(金錫胄)에 이르기까지 497인의 시를 모아 엮었다.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힌 시집이다. 풍아(風雅) 《시경》의 〈국풍(國風)〉 및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말하는데,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을 비유한 것이다.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 탄옹은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이다. 위포(韋布) 가죽 띠를 띠고 베옷을 입은 사람을 말하는데, 옛날에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나 빈한한 평민의 대칭으로 사용하였다. 矯 '僑'의 잘못인 듯하다。 己 '氣'의 잘못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묘지명【병서】 墓誌銘【幷序 李明迪】 남포(南圃) 김 선생은 인효(仁孝)한 세상을 만나 옥을 품고 보배를 쥐고서도76) 숲 울타리 아래에서 40여 년을 은둔하며 살았다.77) 그 덕성이 순수하게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가득 넘치며 마음속에서 발하여 겉으로 드러났으니, 야광과 명월주가 있어 절로 그 산의 광휘와 시내의 아름다움78)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명성이 자자했고 이에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79)이 추천하였다.80) 벼슬아치들과 선비들도 그 명성을 부러워하고 몸소 그의 집에 와서 선생을 보기를 바랐다. 어사(御使)로 안렴(按廉)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니 조정에서 예를 갖춰 초빙을 한 것이 두 번이었다.처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였고, 이어서 익위세마(翊衛洗馬)에 제수한 명이 있었으니,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성조(聖朝)의 숭덕상현(崇德象賢)81)의 교화가 이렇게 지극하였다. 그런데 근세의 학자들이 혹 괴이한 말에 침해를 받아, 물에 물결이 일고 거울에 먼지가 낀82) 것처럼 되었으니 따라서 모진(茅榛)83)의 탄식이 있었다. 혹 설(說)이 상세하지 않은데도 대번에 한 마디 말로 그 극단을 찾으려다가 도리어 엽등(躐等)84)의 혐의가 있었으니, 자취를 끊고 길이 은둔하여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하면서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었다.선생은 남녘에서 흥기하여 그 학문은 고정(考亭)85)에 바탕을 두었고, 퇴도(退陶)86)를 독실하게 신봉했다. 성명(性命)의 근원에 마음을 두고 의리(義理)의 분별을 연구하면서, 깊이 잠기고 반복하여 대체로 《중용(中庸)》을 귀착처로 삼았다. 고금의 치란(治亂)과 당세의 사무에 이르기까지 미루어 나가서 사소한 것87)도 빠뜨리지 않았고 하찮은 일88)도 모두 합당하게 하였다. 은거하며 한가롭게 사는89) 즐거움을 가지면서도, 이름을 날려 수제치평(修齊治平)90)의 공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임하제일인(林下第一人)"이 아니겠는가.삼가 그 행장을 살펴보니 선생은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91) 2월 27일에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태어났다. 모친의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明珠) 하나를 주었는데 꿈에서 깨어나서 선생을 낳았다. 이를 갈 무렵부터 조숙하여 총명하였고, 풍범(風範)이 단중(端重)하고 언행이 신중하여 바라보면 성덕군자(成德君子) 같았다.12세 때 《대학》·《중용》을 읽었고, 과거공부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13세 때 《논어》·《맹자》·《주역》·《예경》을 읽고 제자백가의 책에 이르러서도 한 번 보면 줄줄 외웠고 심오한 뜻을 깊이 찾으면서 훑고 지나가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남이 보지 않는 방에 있더라도 바르게 앉아서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이 이후로 강마(講磨)하여 뜻을 추구하니 학업이 날로 성대해졌다.사(士)·농(農)·병(兵)·승(僧)의 제도, 초목금수(草木禽獸)의 미물, 조정의 법도, 외국의 풍토와 같은 것도 모두 훤히 꿰뚫고 두루 포괄했음을 〈만언소(萬言疏)〉·《경세통전(經世通典)》·《남교일기(南郊日記)》·《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문답(牛山問答)〉 등 여러 편에서 볼 수 있다. 그 학력의 조예와 견문의 엄박(淹博)함은 후생 말학이 작은 소견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언소〉에서 이르기를 "마음 다스리는 법은 방책(方策)에 실려 있고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약이니 나의 병폐를 고칠 수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시종일관 한결같은 마음으로 독실하게 보좌하는 사람을92) 의심하지 말고 함께 지극한 치세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경세통전(經世通典)》에서는 "과거로 인재를 취하는 것은 본래 삼대(三代)93)의 제도가 아닌데, 과거 제도가 또 이처럼 난잡하다면 도(道)를 잃어버린 가운데 또 심히 도를 잃은 것이니, 정인군자(正人君子)가 무엇을 좇아 본조(本朝)에 서겠는가." 하였다.《남교일기(南郊日記)》에서 말하기를 "자양(紫陽) 선생이 일찍이 '외(畏)'자로써 '경(敬)'자를 풀이하였는데,94) 근래에 대략 그 방도를 터득해서 이 마음을 해이하고 태만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겨울날의 해는 여름날의 해와 같은 것인데 열기가 판이한 것은 그 때의 천기(天氣)가 그렇게 한 것이다. 인하여 생각해보건대 사람의 성품에 현우(賢愚)가 있는 것은 기질(氣質)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말이 푸른 풀을 뜯는 것에 사욕을 극복하는 경계를 붙이고, 국화를 위쪽 계단으로 옮기면서 등급을 구별하는 요점을 둔 것으로 말하면, 하찮은 것이라도 그 이치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어떤 사물도 의리에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이기(理氣)와 지행(知行)의 심오한 뜻을 도처에서 발현하여 부류에 따라 확장하였다.95)〈만언소〉도 바로 자양(紫陽)이 했던 봉사(封事)의 유규(遺規)를 추구한 것이다. 오로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성군을 만들고 충성을 다하려는 정성이 마음에 가득하였으니, 만약 현양(顯揚)하여 조정의 위에 두었다면 일세를 삼대(三代)의 경지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또 〈원리기설(原理氣說)〉·〈춘풍루기(春風樓記)〉·〈삼학재규의(三學齋規儀)〉·〈완물편(玩物篇)〉·〈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가 있다. 모두 천리와 인도(人道)의 관계에 근본을 두고, 희문(羲文)96)의 도를 묵묵히 이해하며, 태극(太極)을 연구하고 그것을 마음에 돌이켜 구하였는데 광미장밀(廣彌藏密)97)하여 만 가지 다른 일에 응접하니 거의 어디를 가도 안 될 것이 없었다. 평생의 학문의 힘은 《중용》에서 터득하였고, 행동거지는 법도에 맞았다. 반드시 평탄하고 넓은 길을 경유하고 편향되지 않는 곳에 기치를 세웠다.동인(東人)·서인(西人)을 표방할 때를 당해서는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예송(禮訟)98)이 한 번 터져 나와 시비가 분분한 때에 선생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구실을 주워 모아 공격하였다. 이에 고향의 허름한 집으로 자취를 거두고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규칙을 본떠서 생도를 가르쳤는데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항상 방을 깨끗이 소제하고 진중하게 단정히 거처하면서 종일토록 책상을 마주하고 좌우에는 경적(經籍)을 두었다. 왕왕 지은 시문에는 기수무우(沂水舞雩)의 기상99)이 있었다. 일찍이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숲은 깊으며 해 또한 더디니, 한 책상에서 서적을 읽다가 해질 녘 되었네. 화정처사(和靖處士)는 한가한 일 중에 거름을 지고 바둑 두는 일은 배우지 않았다네."100)라고 하였다. 선생이 마음에 간직하고 지킨 바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몇 송이 국화 화분 외에는 쓸쓸하여 다른 물건이 없었다. 북창에 둔 한 장의 거문고로 때로 간혹 현을 튕기며 마음을 풀었다. 사람들이 혹시 예송(禮訟)을 가지고 질정해오면 항상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인사가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지만 공론(公論)이 정해지는 데 꼭 백년을 기다릴 것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지조가 확고하여 분육(賁育)101)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기축년(1649, 인조27)에 교관(敎官)에 배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인묘(仁廟)가 승하하자 선생은 분곡(奔哭)하러 한양으로 갔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자 또 처음처럼 분곡을 하였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여 현사(賢士)로서 분곡한 자에 대해 묻자 재신(宰臣)들이 팔현(八賢)102)을 아뢰었는데 선생은 그 한 사람이었다. 경인년(1650, 효종1)에 민노봉(閔老峯)이 어사(御史)로서 선생을 칭찬하여 천거하였고, 그 뒤 남약천(南藥泉)이 또 어사로서 선생을 한 번 만나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조정에 곧장 천거하였다. 이렇게 선생의 훌륭한 명성이 크게 드러나서 두 번이나 어사의 포양(襃揚)을 받고 연이어 이름 있는 벼슬에 제수된 것이다.선생은 어버이를 모시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거상(居喪)에는 예를 다했다. 서제(庶弟)를 가르치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종질(宗侄)을 돌보기를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먼 친족을 대우하는데도 지극히 돈목하였으며 제삿날이 되면 목욕을 필히 정결하게 하였다.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상이 흠모하는 바였는데, 공격하는 자들은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설로 선생을 억지로 몰아세웠다. 선생이 약관(弱冠)의 나이 때에 한 집안이 병에 걸려 거듭 화를 당했다. 당시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모친이 선생을 누누이 타이르면서 잠깐 피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울면서 간했으나 할 수 없게 되자 잠시 산 암자에 우거했으니, 실로 모친의 뜻을 따르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인심이 험악하여 거짓말이 그치지 않았으니 심하다, 소인(小人)은 남의 미덕을 기꺼이 이루어 주려고 하지 않았도다.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 또는 군실(羣實)이다. 성은 김씨(金氏)로 선계가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이 정언(正言)을 지냈고, 이 분이 낳은 휘 효정(孝禎)은 진사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선생에게는 5세조가 된다. 고조인 휘 두(㪷)는 이른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호가 모암(慕庵)인데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에 본주의 여러 진사 공들과 특별히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지냈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박사암(朴思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몸가짐이 신중하고 독실하였으나 과거 공부는 일삼지 않았다. 부친 휘 태읍(泰洽)은 향해(鄕解)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며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배위는 낙천 오씨(洛川吳氏) 희일(喜馹)의 따님인데 후사를 두지 못했고 외손(外孫) 약간 명이 있다. 선생은 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48세였다. 남평(南平)의 장암산(墻巖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오씨는 선생보다 4년 뒤에 졸하여 공의 왼쪽에 합장하였다.아! 하늘이 이 분에게 장차 임무를 내리려고 하였는데 명이 박하여 중수(中壽)만 누렸고 관직은 처음 벼슬103)에 그쳐서 세상에 뜻을 크게 펼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무슨 까닭인가? 선생은 성대한 세상104)을 맞아 솜옷도 화려하게 여겼고 물을 마시는 것도 달게 여기며 마음을 침잠하여 도를 즐겼다. 부지런히 학문을 하여 매양 앞에 서적이 가득한 서재에 조용히 앉았을 때는 엄숙하여 마치 진흙으로 빚은 소상 같았고, 사람들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온화하여 봄바람이 자리에 넘쳤다. 성명이기(性命理氣)의 근원과 산림경제(山林經濟)의 방책은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엿볼 수 없으니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한다.이제 그 손자 병규(秉圭)씨가 비석105)을 다듬고 그 글을 나에게 쓰게 하였는데 내가 문장에 능한 자가 아니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선생을 위해 문장을 쓴 것은 평일에 경앙(景仰)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있기 때문이다. 삼가 채 중랑(蔡中郞)의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뜻106)을 부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뜻을 두텁게 하고 업을 부지런히 하며의로 적시고 인으로 다듬었네가까이는 퇴도를 숭모하고멀리는 낙민107)을 배웠네성인의 가르침은 반드시 기록하여태극도로 펼쳤네앎을 넓혀 사물의 이치 궁구하고행실을 닦아 몸을 신중히 했네명예가 남쪽 지역에 퍼지고대궐의 은혜가 융숭하니골목엔 수레가 들어차고문에는 선비들이 찾았다네가난한 살림에도 봉양을 다했고엄중한 여막에서는 예를 따랐네올리지 못한 봉사108)에서는임금에 충성했고 백성을 걱정했네표방109)하는 때를 만나서는자취를 흐려 은둔하였네처신하기는 늘 탄탄한 길을 밟았고110)두려워하기는 나루가 없는 듯했네111)성대한 저 언덕 전원에기상이 새롭구나한 책상의 경적을 대하니정결하여 티끌도 없구나시에 드러난 것은넘치는 봄기운이라아래에 처해도 근심이 없었으나말이 사라질까 두렵도다학술과 경제는숲 아래 제일인이라내가 지은 묘지명이비석에 부끄럽지 않도다숭정(崇禎) 기원후 정미년(1667, 현종8) 한 여름에 무령 태수(武靈太守) 지제교(知製敎) 연안(延安) 이명적(李明迪)이 삼가 쓰다. 南圃金先生遭際仁孝之世。 懷瑾握瑜。 肥遯于林樊之下餘四十年。 粹於面而盎於背。 發於中而著於外。 夜光明月。 自不掩其山輝而川媚。 名聲藉甚。 於是乎龍洲趙先生吹瑩4)之。 縉紳章甫亦莫不艶其名而躬造其廬。 求見先生。 持斧按廉之地。 交口尉薦。 旌招者再。 始除童蒙敎官。 繼而有翊衛洗馬之命。 於休盛哉! 聖朝崇德象賢之化。 若是乎至矣。 近世學者。 或爲異言侵牟。 水波鑑塵。 從而有茅榛之歎。 或說之未詳而遽欲一言探其極致。 反有躐等之嫌。 抑鏟迹長往。 獨善其身。 於世務茫然也。 惟先生起自南服。 其學則本諸考亭。 篤信退陶。 存心乎性命之原。 硏究乎義理之分。 沉潛反覆。 率以中庸爲歸宿。 推以至於古今治忽。 當世事務。 銖兩不遺。 履屐俱當。 隱焉而有考槃薖軸之樂。 揚焉而可以致修齊治平之功。 斯豈非林下第一人乎。 謹按其狀。 先生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于龜業里第。 母夫人夢有人授一明珠。 覺而生先生。 自在齠齔夙就穎悟。 風範端凝。 言動沉重。 望之如成德君子。 十二歲讀大學中庸。 於科業不屑意也。 十三歲讀論孟易禮。 以至於諸子百家之書。 無不寓目成誦。 探賾其蘊奧。 不以涉獵爲事。 暗室危坐。 頃刻不懈。 自是以後。 講磨求志。 學業日盛。 而若士農兵僧之制。 草木禽獸之微。 朝廷之法度。 外國之風土。 皆有以貫穿通透。 泛包該括。 觀於萬言疏·經世通典·南郊日記·易象小訣·牛山問答等諸篇。 其學力之造詣。 聞識之淹博。 有非後生末學之可以管窺。 其萬言疏。 有曰: "治心之法。 載在方策。 一字一藥。 可醫吾病。 臣願殿下終始一心。 篤棐無疑。 共成至治也。" 其經世通典。 有曰: "科擧取人。 本非三代之制。 而科擧之制。 又亂襍如是。 則失道之中。 又甚失道焉。 正人君子。 何從而立於本朝乎?" 南郊日記曰: "紫陽先生嘗以畏字訓敬字。 近者粗得其方。 使此心不得入於解弛怠惰之地。" 又曰: "冬日之日。 是5)夏日之日。 寒熱判異。 以其時氣之使然。 仍念人之性有賢愚者。 氣質之使然。" 至若馬齕綠草。 寓克慾之戒。 菊移上級。 有品別之要。 無微而不究其理。 無物而不附於義。 理氣知行之奧旨。 隨處發見。 觸類而長之。 至於萬言疏。 卽追紫陽封事遺規也。 專以正君心爲本。 其致君願忠之誠。 寸丹藹然。 使揚顯而置諸廊廟之上。 可以導一世於三代之域。 豈不偉乎哉? 又有原理氣說·春風樓記·三學齋規儀·玩物篇·德性問學圖。 皆原本於天人之際。 默契乎羲文之道。 游心於太極。 反求乎方寸。 廣彌藏密。 應接萬殊。 殆無適不可。 平生學力。 得之於中庸。 繩趍尺步。 必由於坦蕩之途。 立幟於不偏倚之域。 當東西標榜。 世無完人。 禮訟一出。 是非紛然之日。 而先生亦爲人捃摭。 乃斂跡於故里蓬圭之下。 倣白鹿規式。 敎授生徒無倦色。 常淨掃一室。 凝然端居。 竟日對案。 左右經籍。 往往發之詩文。 有沂水舞雩之氣象。 嘗口占一絶曰: "山靜林深日又遲。 一牀書史到曛時。 和靖處事閒中事。 不學擔糞與着祺。" 先生之所存所守。 此亦可驗矣。 數叢菊盆外。 蕭然無他物。 北窓一張琴。 時或拂絃以適意。 人或以禮訟就質則輒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公論之定。 必不待百年。" 其操守之確然。 雖賁育莫奪矣。 己丑拜敎官。 未幾又除洗馬。 仁廟賓天。 先生奔哭到京師。 己亥孝廟昇遐。 又奔哭如初。 顯宗卽位。 詢問賢士之奔哭。 宰執以八賢啓之。 先生其一也。 庚寅閔老峯以御史褒薦先生。 而其後南藥泉又以御史一見先生。 與語大悅。 亟薦于朝。 此先生華聞大彰。 再膺繡褒。 連除名宦者也。 先生事親至孝。 居喪盡禮。 敎庶弟而友于篤。 撫宗侄而若己子。 待踈族而敦睦備至。 遇祭日而澡浴必潔。 斯皆一世之所欽慕。 而操戈者乃勒驅先生以千不近似之說。 盖先生於弱冠。 一家染疾荐禍。 而時當嚴喪。 母夫人屢屢有敎。 使之姑避。 先生泣諫不得。 暫寓於山菴。 寔出於順志之義。 而人心險巇。 讏言不已。 甚矣。 小人之不樂成人之美也。 先生諱萬英字英叔。 又曰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入我朝諱忍官副摠管。 墓在羅州。 子孫仍居焉。 摠管之孫有諱琮官正言。 是生諱孝禎生進俱中。 於先生爲五世祖也。 高祖諱㪷早登司馬號慕菴。 當己卯之禍。 與本州進士諸公。 特卞靜庵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官內資主簿。 祖諱元祿受業於朴思菴。 持身謹篤。 不事科業。 考諱泰洽累魁鄕解。 自號松湖。 以敎授諸生爲己任。 松湖公娶羅州羅氏生員元吉之女生先生。 配洛川吳氏。 喜馹之女。 不育。 有外孫若干人。 先生以辛亥五月初十日。 考終于家。 得年四十八。 葬于南平墻巖山卯坐之原。 吳氏後先生四歲而歿。 合祔于左。 嗚呼! 天將降任於斯人。 而命嗇中壽。 官止筮仕。 使不得大展布於世。 此其故何哉? 先生當大有之世。 縕袍華而飮水甘。 潛心樂道。 孜孜爲學。 每靜坐書室。 緗帙滿前。 儼然若泥塑人。 及夫對人接物。 溫溫然滿座春風。 性命理氣之原。 山林經濟之策。 人莫窺其蘊奧。 而民到于今稱之。 今其孫秉圭甫。 治麗牲之石。 而以其文命明迪。 明迪非能言者。 而不辭爲先生言者。 以其平日景仰之心。 有倍餘人。 竊附蔡中郞獨無愧色之義焉。 銘曰:篤志勤業。 漸義磨仁。 近慕退陶。 遠學洛閩。 聖訓必箚。 極圖以陳。 知淹格物。 行修側身。 譽播南服。 恩隆北宸。 巷塡輪蹄。 門登衿紳。 寒廚養備。 嚴廬禮遵。 未徹封事。 忠君憂民。 時際標榜。 跡混隱淪。 處每履坦。 惕若無津。 賁彼邱園。 氣象維新。 一床經籍。 淨無纖塵。 發之於詩。 藹然者春。 處下无悶。 恐言斯湮。 學術經濟。 林下一人。 我爲作銘。 無愧珉。 崇禎紀元後丁未仲夏武靈太守知製敎。 延安李明迪謹撰。 옥을……쥐고서도 재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초사(楚辭)》 〈구장 회사(九章 懷沙)〉에 "옥을 품고 보배를 쥐고서도,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끝내 모르겠다.[懷瑾握瑜兮, 窮不知所示.]" 하였다. 은둔하며 살았다 원문의 '비둔(肥遯)'으로, 《주역》 〈둔괘(遯卦) 상구(上九)〉에 "살지는 은둔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 無不利.]" 하였다. 산의……아름다움 훌륭한 재덕(才德)을 품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 "돌이 옥을 간직하고 있으매 산은 빛나고, 물이 구슬을 품고 있으매 냇물은 아름답도다.[石韞玉而山輝, 水懷珠而川媚]" 하였다.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 조경(趙絅, 1586~1669)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주봉(柱峯)이다. 추천하였다 원문의 '吹瑩'은 '吹噓'의 잘못인 듯하다. 숭덕상현(崇德象賢) 본래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나오는 구절로, 숭덕(崇德)은 '덕이 있는 자를 숭상하여 제사를 받든다.'라는 뜻이고 상현(象賢)은 '선현을 닮은 어진 후손이 있으면 명하여 제사를 모시게 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덕이 있는 자를 높이고 현명한 자를 본받는 것을 말한다. 물에……낀 잔잔한 물에 물결이 일고 밝은 거울에 먼지가 낀 것처럼 마음에 평정심과 분별심을 잃은 것을 말한다. 모진(茅榛) 산길이 띠 풀에 모색(茅塞)되고 개암나무에 막히듯 사람들의 마음이 사욕에 가려진 것을 말한다. 엽등(躐等) 차례를 지키지 않고 등급을 뛰어넘는 폐단을 말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어린아이가 듣기만 하고 묻지 않는 것은 등급을 뛰어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幼者聽而弗問, 學不躐等也.]"라고 하였다. 고정(考亭) 중국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남서쪽에 있는 정사(精舍)인데,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하여 그의 별호(別號)가 되었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사소한 것 원문의 '수량(銖兩)'으로, 1수(銖)와 1량(兩)으로 아주 적은 분량을 가리킨다. 하찮은 일 원문의 '이극(履屐)'으로, 신발과 같은 하찮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진(晉)나라 극초(郄超)가 사현(謝玄)에 대해서 "내가 일찍이 환공(桓公)의 막부에서 사현과 함께 근무하였는데, 그때 그가 인재를 쓰는 것을 보았더니, 비록 신발을 담당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적임자를 구해서 쓰곤 하였다.[吾嘗與玄共在桓公府, 見其使才, 雖履屐間, 亦得其任.]"라고 하였다. 《晉書 권79 謝玄列傳》 한가롭게 사는 원문의 '고반과축(考槃薖軸)으로,《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인데 은거한다는 뜻이다. 수제치평(修齊治平) 《대학》에 나오는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독실하게 보좌하는 사람을 원문의 '독비(篤棐)'로, 《서경》 〈주서(周書) 군석(君奭)〉에 주공(周公)이 소공(召公)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독실하게 보좌할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다.[篤棐, 時二人.]"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하(夏)·은(殷)·주(周)나라 시대를 말한다. 자양(紫陽)……풀이하였는데 자양(紫陽)은 주희(朱熹)의 별칭이다. 《주자어류》 권12에 " '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외' 자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敬有甚物? 只如畏字相似.]" 하였다. 부류에 따라 확장되었다 원문의 '촉류이장(觸類而長)'으로 어떤 한 가지 사물의 원칙을 좇아 같은 부류의 사물로 확대시켜 나아가는 일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이끌어 펴며 유에 따라 확장하면 천하의 능사가 다할 것이다.[引而伸之, 觸類而長之, 天下之能事畢矣.]" 하였다. 희문(羲文) 팔괘(八卦)를 그었다는 복희씨(伏羲氏)와 괘사(卦辭)를 지었다는 주 문왕(周文王)의 병칭인데, 《주역》을 가리킨다. 광미장밀(廣彌藏密) 《중용》에서 말하는 심법(心法)에 통달했음을 뜻한다. 《중용집주(中庸集註)》에 정자(程子)가 중용을 설명하면서 "중은 천하의 정도요, 용은 천하의 정리이다. 이 책은 바로 공문이 전수한 심법이다.……이것을 펼치면 육합[天地四方]에 가득하고, 거두면 은밀한 마음속에 물러가 감추어져서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 진실한 학문이다.[中者,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 此篇, 乃孔門傳授心法,……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예송(禮訟) 1659년 효종이 승하한 뒤에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을 말한다. 기수무우(沂水舞雩)의 기상 외물에 매이지 않고 초연히 도(道)를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며, 무우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論語 先進》 화정처사(和靖處士)는……않았다네 원문의 '處事'는 '處士'의 잘못인 듯하다. 자신도 화정처사처럼 산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은사인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임포가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은거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일에 모두 능하지만 오직 거름을 지는 것과 바둑을 두는 것은 능하지 못하다.[逋世界間事皆能之, 唯不能擔糞與著棋.]" 하였다. 《夢溪筆談 人事二》 분육(賁育)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용사인 맹분(孟賁)과 주(周)나라의 역사(力士)인 하육(夏育)을 말한다. 《史記 권120 汲鄭列傳》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처음 벼슬 원문의 '서사(筮仕)'로, 옛사람이 관직에 나아가려 할 때 길흉을 점치는 일인데, 곧 처음 관직에 나아감을 말한다. 성대한 세상 '대유(大有)'는 치세(治世)를 가리킨다. 본래 《주역》의 64괘 중 하나인데, 하늘 위에 불이 떠 있는 상(象)으로 임금이 높은 자리에 있고 천시(天時)에 순응하는 괘이다. 비석 원문의 '이생(麗牲)'으로, 옛날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으로 쓸 짐승을 사당이나 묘소 앞에 세워놓은 돌에 붙잡아 매는 것인데, 전하여 비석(碑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禮記 祭義》 채 중랑(蔡中郞)의……뜻 비명을 모두 진실하게 지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채 중랑은 후한(後漢) 때 좌중랑장(左中郞將)을 지낸 채옹(蔡邕)을 가리킨다. 그가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비명을 지은 것이 많지만, 모두 부끄러움이 있었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 하였다. 《後漢書 郭太列傳》 낙민(洛閩) 낙양(洛陽)의 정자(程子)와 민중(閩中)의 주자(朱子)를 말한다. 송대 성리학을 말한다. 올리지 못한 봉사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점괘가 불길하여 실제로는 올리지 않은 것을 말한다. 표방 당파를 서로 표방(標榜)하여 당쟁을 한 일을 가리킨다. 처신하기는……밟았고 정도(正道)를 행했다는 뜻이다.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에 "행하는 도가 탄탄하니 유인이라야 곧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 하였다. 나루가……했네 매우 조심하였다는 뜻이다. 《서경》 〈미자(微子)〉에 "이제 우리 은나라가 빠져 망하는 형세는 마치 큰물을 건널 적에 나루나 물가가 없는 것과 같다.[今殷其淪喪, 若涉大水, 其無津涯.]" 하였다. 瑩 '噓'의 잘못인 듯하다。 是 '與'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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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권2 附錄 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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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2) 附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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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 敍述 선생은 고금의 일에 널리 통달하여 남쪽 지방 이학(理學)의 종장이다.【본주 《여지승람(輿地勝覽)》】조용주(趙龍洲)가 선생의 인품과 문장이 초연히 자득한 것을 보고 매양 '임하제일인(林下第一人)'이라고 칭송하였다.【문인 이문석(李文碩)의 기록】묻기를 "아래에서 빈사(賓師)로 자처하는 혐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자연히 등급이 있는 것이다. 빈사로 자처하는 경우도 있고 위포(韋布)로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정도응(鄭道應)과 김만영(金萬英)은 아직 젊으니, 더욱 태학에 두어 그 재능을 성취할 수 있게 함이 좋다." 하였다.【《명재집(明齋集) 〈남유기문(南遊記聞)〉》】내가 들으니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벗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였는데, 오늘날 이 의미를 아는 자는 대개 드물다. 독서를 하다 의심이 있을 때 벗이 아니면 누구에게 질정 (質正)하며, 행동을 하다가 잘못이 있을 때 벗이 아니면 누구에게 듣겠는가? 지금 우리 그대는 여러 책을 배운 것이 아직은 두루 넓지 못하고 행동을 하는 데에 아직은 요체를 다 갖추지 못하였다. 서둘러 자기보다 나은 이를 가까이하고 그들의 깨우침과 도움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보완해 가야지, 떨어져 지내며 독학을 하다가 몽매함에 빠지는 부끄러움1)을 자초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남쪽 지방 선비 중에 들어본 사람은 김만영(金萬英) 군이고 직접 본 사람은 유진석(柳震錫) 군이니, 그대가 돌아가 그들을 찾는다면 서로 도우며 연마하는 이익2)이 어찌 크다 하지 않겠는가?【《명재집(明齋集) 〈송임사가서(送林士駕序)〉》】선생은 남쪽 지방의 도학지사(道學之士)이다. 또 말하기를 "바라보면 진중하여 진실로 군자이다."라고 하였다.【문인 임효복(任孝復)의 기록.】명재(明齋) 윤 선생(尹先生)이 일찍이 선생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며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김만영 군이 있는데 참으로 호걸지사이다."라고 하였다.【서하(西河) 임원(任遠)의 어록】선생이 일찍이 〈서과(西瓜)〉 시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색은 가을하늘이 막 갠 뒤와 같고, 모습은 태극이 아직 나누어지기 전과 같네. 붉은 중심을 쪼개자 감로(甘露)가 흘러내리니,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이로부터 샘 찾는 일 게을러졌으리.3)"【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에 들어있다.】선생은 강하의 큰 국량(局量)이요, 사림의 종장(宗匠)이니, 세상에서 "호남부자(湖南夫子)"라고 일컬었다.【문인 이석삼(李錫三)의 기록】남약천(南藥泉)이 진휼 어사(賑恤御史)로 영남에 갈 때 상(上)이 인견(引見)하며 인재를 살펴 찾으라는 뜻으로 명하였다. 약천이 물러나서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김만영을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상께서 채용의 뜻이 없었습니다. 이제 신이 비록 인재를 찾더라도 나라에 끝내 어찌 보탬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특별히 전조(銓曹)에 교지를 내려 속히 직사를 부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므로 교관(敎官)에 제수되었고 시남(市南) 유계(兪棨) 또한 극론(極論)하여 천거하였다.【남구만(南九萬) 《약천집(藥泉集)》】남북으로 관직에 매여서 경성(京城)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더구나 남쪽 소식은 하늘 멀리 묘연하였는데 오늘 임 참봉(林參奉) 형제를 통해 지난해에 영종(令從)인 세마(洗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에서 그친 것은 운명이니 어찌 하리오 어찌 하리오, 사무치는 슬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대는 일가 형제의 의리가 있는데 그 슬픔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세마의 남은 자식들은 있는 지, 나이는 장성했는지 모르겠으니 알려주기 바랍니다. 뒷일을 처리하고 유문을 수습하는 것은 책임이 그대에게 있으니 신경을 써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그 가운데 당본(唐本) 도서(道書) 4권은 세마(洗馬) 생존 시에 보내 드렸는데 이 책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것입니다. 그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 물어볼 데가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그 집에 물어보고 찾아서 돌려주면 어떻겠습니까? 길이 몹시 멀어서 적당한 인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임 정자(林正字)가 가니 만약 그 편에 돌려보내준다면 사라질4) 염려가 없겠으니 유념해주면 어떻겠습니까? 이번 가을 과거(科擧) 때문에 반드시 한양에 가게 되어 만날 수 없을 것 같으니 더욱 그립고 서글픕니다.【약천이 남포선생의 종제(從弟) 해영(海英)에게 주는 편지】동춘(同春)5) 송준길(宋浚吉)이 이조 판서를 할 때 상(上)이 전교하기를 "이번 발인(發靷) 때 외지에 있는 전직 조관(朝官)으로 학업과 학행이 있는 사람 중에 와서 모인 자들을 일일이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이에 참판 이일상(李一相)·참의 조복양(趙復陽)과 함께 아뢰기를 "전(前) 교리(校理) 이수인(李壽仁)은 시종지신(侍從之臣)으로서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뜻을 지켜 세상의 칭송을 받으며, 사업(司業) 윤선거(尹宣擧)·사업(司業) 윤원거(尹元擧)는 모두 실직(實職)이 있으므로 비록 원단자(元單子)의 전직 관함(官銜)의 수에는 나오지는 않으나 일찍이 탑전에서 자세히 진달한 적이 있습니다. 전(前) 좌랑 신석번(申碩蕃)·전(前) 좌랑 최휘지(崔徽之)는 일찍이 선왕조 때 직출육품(直出六品)6)하였고 전(前) 자의(諮議) 이상(李翔)·전(前) 자의(諮議) 송기후(宋基厚)는 일찍이 이미 강직(講職)에 제수된 적이 있으며, 전(前) 세마(洗馬) 김만영(金萬榮)은 일찍이 자의(諮議)에 의망(擬望)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석번(申碩蕃)·이상(李翔)이 더욱 두드러진 자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초계(抄啓)한 사람들은 다음 차례가 비록 비어있지 않았더라도 모두 직사를 부여하라." 하였다. 이날 신석번은 주부(主簿)에 제수되고, 최휘지는 별제(別提)에 제수되고, 이상은 사직(司直)에 임명되고, 송기후는 사정(司正)에 임명되고, 김만영은 사용(司勇)에 임명되었다.【기해조보(己亥朝報)】약천(藥泉)이 일찍이 조정에 선생을 천거하여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감히 쳐다볼 수 없다." 하였다.【어사 때의 포계(褒啓)】민노봉(閔老峯)이 본도의 어사로서 찾아와 하룻밤을 묵으면서 대화를 나누고는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영숙(英叔)은 지금 세상의 군자이다." 하였다.【문인 홍최일(洪最一) 기록】김남포(金南圃)의 문장과 효행은 호남 제현들이 거의 미치지 못할 것이다.【상국(相國) 김덕원(金德遠)이 선생의 종질(從侄) 이상(履相)에게 보낸 편지】해옹(海翁)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만년에 나 경주(羅慶州)의 수운정(峀雲亭)7)에서 선생을 만났는데 단아한 풍의(風儀)와 고명한 재식(才識)을 한 번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호남이 이제부터 다시 적막하지는 않겠다." 하였다.【외손 나경성(羅景聖) 기록】 先生博古通今。 爲南中理學之宗。【本州輿地勝覽。】趙龍洲見先生人品文章。 超然自得。 每稱以林下第一人。【門人李文碩錄。】問: "在下無自處以賓師之嫌否?" 曰: "自有等級。 賓師自處者亦有之。 韋布自處者亦有之。 鄭道應,金萬英年少輩。 尤可使置太學。 成就其才可也。"【明齋集南遊記聞。】抑吾聞之。 程子曰: "自天子以至於庶人。 未有不須友以成者。" 今之知此義者盖鮮矣。 讀書有疑。 非友何質? 行己有過。 非友何聞? 今吾子學諸書者尙未盡博。 行諸己者尙未盡約。 急宜親勝己資警益。 以自輔助。 不可索居獨學。 自貽困蒙之吝也。 吾於南中之士。 所聞則金君萬英。 所見則柳君震錫。 吾子歸而求之。 其爲麗澤之益。 顧不大歟?【明齋集送林士駕序。】先生爲南州道學之士。 又曰: "望之凝然。 爲眞箇君子也。"【門人任孝復錄。】明齋尹先生嘗稱詡先生曰: "南中有金君萬英。 眞豪傑士也。"【任西河遠語錄。】先生嘗作西瓜詩一絶曰: "色似秋天初霽後。 形同太極未分前。 碎破丹心甘露滑。 相如從此懶尋泉。"【南壺谷龍翼所撰箕雅入。】先生江河偉量。 士林宗匠。 世稱以湖南夫子。【門人李錫三錄】南藥泉以賑恤御史往嶺南時。 上引見命以採訪人才之意。 藥泉退而上疏曰: "臣曾薦金萬英于朝。 自上無採用之意。 今臣雖採訪人才。 竟何補於國哉?" 上特下旨銓曹。 命斯速付職。 故有敎官之除。 而兪市南棨亦極論薦矣。【南九萬藥泉集。】係官南北。 離京國久矣。 矧南州消息。 渺若天外。 卽因林參奉兄弟。 得前歲令從洗馬。 奄忽捐世。 斯人而止於斯。 命也。 奈何奈何。 不勝痛悼之至。 况尊一家連枝之義。 傷怛可言? 未知洗馬有遺孤而年亦長成否。 示及爲望。 經紀後事。 收拾遺文。 責在於尊。 加意幸甚。 就中唐本道書四卷。 洗馬在世時曾送呈。 而此冊乃借得他人者。 不可不還其主。 而今無可問處。 幸望尊問于其家。 搜得惠還如何? 道路絶遠。 得的便未易。 今林正字行。 若爲付還則可無沉浮之慮。 更須留念。 如何如何? 今番秋科。 想必戾京。 而無緣相奉。 尤用溯悵。【藥泉與先生從弟海英書。】宋同春浚吉吏判時。 上傳敎曰: "今發靷時。 在外前朝官學業學行之人來會者。 一一書啓。" 與參判李一相,參議趙復陽啓曰: "前校理李壽仁以侍從之臣。 恬退守志。 爲世所稱。 司業尹宣擧·司業尹元擧皆有實職。 故雖不出於元單子前銜之數。 而曾於榻前備盡陳達。 前佐郞申碩蕃·前佐郞崔徽之曾於先朝直出六品。 前諮議李翔·前諮議宋基厚曾已授講職。 前洗馬金萬英曾擬於諮議望。 而申碩蕃·李翔尤其表著者也。" 傳曰: "此抄啓之人。 後次雖非闕。 並皆付職事。" 是日申碩蕃除主簿。 崔徽之除別提。 李翔付司直。 宋基厚付司正。 金萬英付司勇。【己亥朝報。】藥泉嘗薦啓先生于朝曰: "南中有人。 不敢仰視。"【御史時褒啓。】閔老峯以本道御史。 來訪一宿。 與語大加稱賞曰: "英叔今之君子也。"【門人洪最一錄】金南圃之文章孝行。 殆湖南諸賢之所不可及。【金相國德遠與先生從侄履相書。】海翁尹參議善道晩年遇先生于羅慶州峀雲亭。 一見風儀之端雅。 才識之高明。 歎曰: "湖南自此更不寂寞。"【外孫羅景聖錄。】 몽매함에 빠지는 부끄러움 현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 생기는 병폐를 말한 것이다. 《주역》 〈몽괘(蒙卦) 육사(六四) 상(象)〉에 "곤몽의 부끄러움은 홀로 강명(剛明)한 자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困蒙之吝, 獨遠實也.]" 하였다. 서로……이익 원문의 '이택(麗澤)'으로, 붕우가 서로 도와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태괘(兌卦) 상(象)〉에 "두 연못이 서로 붙어 있는 형상이 태이니, 군자가 보고서 붕우들과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 하였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게을러졌으리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만년에 늘 갈증을 느끼는 병인 소갈증(消渴症)을 앓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사라질 원문의 '침부(沉浮)'로 서찰이 중간에 유실되는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은선(殷羨)이 예장군(豫章郡)의 태수(太守)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사람들이 100여 통의 서찰을 주면서 전달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은선이 석두성(石頭城)에 이르러서는 서찰을 모조리 물속에 던져 버리고 "가라앉을 놈은 가라앉고 떠오를 놈은 떠오르겠지. 이 은홍교가 우체부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沈者自沈, 浮者自浮. 殷洪喬不能作致書郵.]"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호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59년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직출육품(直出六品) 바로 육품직(六品職)에 제수하는 것을 말한다. 나 경주(羅慶州)의 수운정(峀雲亭)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낸 나위소(羅緯素)가 기거한 수운정(峀雲亭)을 말한다. 《남포집(南圃集)》 권5 〈제수운정(題峀雲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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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제문[문봉의] 祭文 [文鳳儀] 정신이 순수하고타고난 자질 아름다워남쪽 땅에서 특출하고도의를 창명했도다멀리 사승도 없었으나묵묵히 깨닫고 은연중 계합하며이치를 봄이 분명하여마음으로 알고 정신으로 이해했네위로는 수사8)로 올라가고아래로는 관민9)을 이어서격물치지하고 거경하며성정10)을 근본으로 삼았네함양을 날로 새롭게 하고실천을 더욱 두텁게 하며편달하여 이치를 가까이하고11)이미 발한 뒤에는 성찰하였네12)선조를 받들 땐 효도를 생각하고사람을 대할 땐 온화하게 하며시의를 따라 중도에 처하였고사물을 보고는 조화를 살폈네《주역》의 이치를 탐구했으니선천과 후천13)이요예의 절문을 강구했으니삼백과 삼천14)이었네숙연히 정좌하고좌우에 도서를 두고내면의 미덕이 날로 드러나니풍문이 임금에게 알려졌네15)융숭한 성은으로 옥처럼 다듬어16)일명17)에 처음 임명되었으나임금에게 사은숙배에 하고는옛집으로 수레를 재촉했네부귀는 원하지 않아서가난해도 즐거워하고여유롭게 학문에 푹 잠겨날로 깊은 경지에 나아갔네뭇 입이 떠들어댄들어찌 덕을 해치리오두 번 국상을 만나서는연이어 분곡18) 하였네강습 연마에 부지런하여교학에도 게으르지 않고차근차근 잘 이끌면서정성스레 문답을 했네체질 따라 이롭게 해주니단비와도 같아서많고 많은 생도들이혹 법도를 실천했네행동과 언어도따를 바를 생각하고후학을 계도해 옛 성현 이으니큰 공이 있었네돌아보니 어리석은 내가일찍부터 강학의 말석에 끼었으나비루하게 여기지 않고정성껏 가르쳐서 계발해주었네정은 간절하여 형과 아우였고의리는 두터워 스승과 제자였네의문이 있으면 꼭 풀어서정밀하게 분석하였고주고받은 편지에서는부지런히 배우도록 경계했네재질이 노둔하고 열등하여전현의 뜻을 잇지 못할까 두려워산처럼 앙모하고하늘처럼 받드니다행히도 간혹감독하고 다듬는 은혜가 미쳤네처음을 회복하고 선을 밝혀서19)기질을 변화시켰는데어찌 생각했으랴 오늘상장 짚고 슬픈 노래 부를 줄을옛일을 추억하며눈물을 줄줄 흘리노라도는 장차 땅에 떨어지고학문은 그 정도를 잃겠구나대들보가 부러졌으니우리는 장차 누구를 의지할까20)고단한 신세로쓸쓸히 어디로 갈까내가 운명이 좋지 못하여중도에 밝음을 잃었으니21)홀로 서서 아득하여세상에 무슨 정이 있으랴조촐한22) 조문도오히려 남보다 늦었는데이승과 저승을 돌아보니저절로 마음이 상하네시내와 산은 의구한데인간사는 옛날이 아니네한 잔술 올려 곡을 하고영원히 이별을 하나니오호 영령이시여부디 강림하여 흠향하소서 神精粹然。 天質之美。 挺特南表。 倡明道義。 邈無師承。 默悟暗契。 見理分明。 心融神會。 上溯洙泗。 俯承關閩。 格致居敬。 誠正爲本。 涵養日新。 踐履益篤。 鞭辟近理。 已發省察。 奉先思孝。 接人以和。 隨時處中。 觀物察化。 探賾易理。 先天後天。 講究節文。 三百三千。 肅然靜坐。 左書右圖。 內美日著。 風聽九臯。 恩隆玉汝。 一命初除。 肅謝天廷。 促駕舊居。 富貴非願。 簞瓢可樂。 優遊厭飫。 日造閫域。 衆口雖呶。 何害乎德。 兩遭國恤。 連仍奔哭。 講劘孜孜。 敎學不倦。 循循善誘。 懇懇答問。 因軆而利。 有如時雨。 濟濟生徒。 或蹈規矩。 擧止言談。 可想所從。 開來繼往。 犬有功焉。 顧余顓蒙。 夙廁講末。 不以卑鄙。 懇誨啓發。 情切弟兄。 義毒師生。 有疑必達。 毫分縷析。 往來尺牘。 戒以勤學。 質魯才劣。 恐不承前。 景仰如山。 戴冐如天。 庶幾或者。 董甄惠延。 復初明善。 變化氣質。 豈料今日。 扶杖歌發。 追思疇昔。 有涕沱若。 道將墜地。 學失其正。 樑木其摧。 吾將安倣。 孑孑身世。 踽踽何往。 余命不淑。 中遭喪明。 獨立蒼茫。 在世何情。 漬綿之吊。 尙後於人。 俯仰幽明。 自然傷神。 溪山依舊。 人事非昔。 一盃來哭。 終天永訣。 嗚呼英靈。 庶其歆格。 수사(洙泗) 공자의 유학을 가리킨다.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공자가 이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자나 유가(儒家)를 뜻한다. 관민(關閩) 송(宋)나라 때 성리학을 가리킨다. 관중(關中)과 민중(閩中)으로, 관중은 장안(長安) 일대로 장재(張載)가 살았고, 민중은 복건성으로 주희(朱熹)가 살았다. 격물치지하고 거경하며 성정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을 가리킨다. 곧,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거경(居敬)은 경을 실천한다는 뜻으로 주자학의 학문 수양 방법의 하나이다. 편달하여……가까이하고 원문의 '편벽(鞭辟)은 탐구가 투철하여 정미한 경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송나라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학문은 다만 채찍질하여 내면에 가까이 하고 자기 몸에 붙기를 요할 뿐이다.[學只要鞭辟近裏, 著己而已.]"라고 하였는데, '편벽(鞭辟)'에 대해 주자(朱子)는 "이것은 낙양 지방의 방언으로, 어떤 곳에서는 '편약(鞭約)'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채찍질하여 안을 향해 들어가는 것이다.[此是洛中語, 一處說作鞭約, 大抵是要鞭督向裏去.]" 하였다. 《心經附註 卷2 禮樂不可斯須去身章》 이미……성찰하였네 행동을 절도에 맞게 했다는 것이다. '이발(已發)'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이 발한 것을 가리킨다. 성리학에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未發]의 정(靜)할 때에는 존양의 공부를, 이미 일어나서[已發] 동(動)할 때에는 성찰(省察)의 공부를 강조한다. 선천과 후천 주역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는 것이다. 북송(北宋)의 소옹(邵雍)이 진단(陳摶)의 학문을 터득하여 《주역》을 설명하면서 복희(伏羲)의 역(易)을 선천(先天), 문왕(文王)의 역을 후천(後天)이라 하였다. 예의……삼천 예(禮)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는 것이다.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이치는 한 가지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 하였다. 임금에게 알려졌네 원문의 '구고(九臯)'는 본래는 수택(水澤)의 깊은 곳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의 "학이 구고에서 울면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 군자의 명성이 절로 드러나 임금에게 알려짐을 비유한 것이다. 옥처럼 다듬어 원문의 '옥여(玉汝)'로, 《시경》 〈민로(民勞)〉에 "왕이 너를 옥으로 만들고자 하므로, 이 때문에 크게 간하노라.[王欲玉汝 是用大諫]"고 하였고,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근심 걱정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켜 주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 하였다. 일명(一命) 조선 시대 관직의 첫 등급인 9품직을 말한다. 주대(周代)의 관계(官階)가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까지 이른데서 유래하였다. 김만영이 세마(洗馬)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두……분곡(奔哭) 1649년 인조,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분곡한 것을 말한다. 처음을……밝혀서 '복초(復初)'는 본연의 성(性)의 선함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본연을 회복하는 것이고, '명선(明善)'은 이치를 궁구하여 선이 있는 곳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대들보가……의지할까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것은 스승이나 훌륭한 사람의 죽음을 비유한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 하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려 하는구나. 철인이 시들려 하는구나."라고 읊조렸는데, 자공(子貢)이 이 소식을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는 장차 누구를 우러르며, 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 하였다. 《禮記 檀弓上》 밝음을 잃었으니 원문의 '상명(喪明)'으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자하가 아들을 잃고 실명을 했다.[子夏喪其子而喪其明.]"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아들을 잃은 것을 말한다. 조촐한 원문의 '지면(漬綿)'으로, 술에 적신 솜인데 제물(祭物)을 뜻하는 겸사이다. 멀리 있는 친지(親知)의 무덤을 찾아가 조문(弔問)하려면 술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솜을 술에 담갔다가 말려 가지고 가서 다시 물에 담가서 술기운이 우러나게 하여 잔을 올리는 것이다. 《後漢書 권53 徐穉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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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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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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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나위] 又 [羅褘] 유세차 신해년(1671, 현종12) 10월 기묘삭 16일 갑오에 금성(錦城)의 친척 나위(羅褘)는 맑은 술과 여러 제물로 공경히 남포(南圃) 선생의 영전에 제사하나이다.아! 제가 선생의 문하에 오른 지 무릇 몇 년입니까? 홀연히 상봉했을 때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 같았고,23) 며칠을 서로 대하고는 바로 아교와 칠24) 같은 의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1년 2년 집안의 우호도 더욱 돈독해지고 친애의 정과 깊은 교분은 이미 남의 지목을 받은 것도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오늘 선생이 갑자기 떠나시어 저에게 끝없는 슬픔을 안겨줄 지를?선생의 선부군(先府君) 어르신은 바로 저의 고조부 직계 후손의 사위이셨는데 어릴 때부터 어진 소문이 났고 집안은 깊은 덕을 쌓았습니다. 선비(先妣)는 나씨(羅氏)로 시집을 와서 예를 받드는데 곤도(坤道)25)가 곧고 조용하여서 인척(姻戚)들은 빛이 나고 거동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복(福)을 끝없이 행하니 남은 경사26)로 보답이 있었습니다. 갑자년(甲子年, 1624)27)에 선생이 탄생하니 영준한 자질이 특출하였고 강하(江河)와 같은 큰 국량 있었습니다. 순수하게 화순 단정하였고 안팎으로 법도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성취가 있었습니다. 주공(周公)과 문왕(文王)의 효상(爻象)28)도 이해하고 스스로 해석하였습니다. 공자(孔子) 성인의 과목을 두루 갖춰 터득하여 돈민(敦敏)의 후예로서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었고 사림의 종장이 되니 당시에 "호남부자(湖南夫子)"라고 일컬은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겨우 관례(冠禮)를 한 뒤에 명성이 조정에 널리 퍼지고 천거하는 계문(啓聞)이 멀리 임금에게 들어가니 세자의 보필로 발탁되어 이름이 관원들 사이에서 빛났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귀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뜻이 한가히 사는 데 있었기에, 사은숙배를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산림을 굳게 지켰습니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본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습니까. 이 이후로 광채를 품어 감추고,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29) 사모하여 영평(永平)의 남쪽에 서재를 짓고 뜻있는 선비들과 날마다 성현의 경전을 강구(講究)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영평(永平)의 선비들이 모두 학문과 실천에 독실하였으므로 다른 고을에도 파급되어 경앙(景仰)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훈도와 인재 육성30)에서 거의 추로(鄒魯)31)의 유풍을 볼 수 있었습니다.말세가 되니 야박함이 많아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꺼리며,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함이 예나 지금이나 물결에 휩쓸려가듯 똑 같으니, 숙손(叔孫)이 중니(仲尼)를 비난하는32)것과 불행히도 가까웠습니다. 아 아! 심합니다. 성대한 명성 아래에 훼예(毁譽)가 많았으니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일까요?을사년(1665, 현종5)33) 초봄에 금성(錦城) 서호(西湖) 가의 집으로 옮기고 좌우에는 거문고와 책을 두고 꽃과 대나무로 스스로 즐겼습니다.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난정(蘭亭)에서 계사(禊事)를 행하여34) 돈독하고 화목한 의리를 친소간에 밝게 드러내니, 세속이 숭상하는 아름다움이 원근에 미쳐서 향린(鄕隣)의 행운이 매우 많았습니다.내가 정미년(1667, 현종8)에 반남(潘南)에서 호수로 선생을 찾은 것은 바로 가을 7월 상순이었습니다. 곤궁한 처지라서 피우(避寓)를 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선생이 이때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중(英仲)의 서실이 좁고 누추하지만 외딴 곳이라 사람도 적으니 피해 있을 만하고 독서할 만하며, 또 세상 근심을 달랠 수 있다." 하기에 즉시 영중과 함께 가서 보고는 몇 달을 머물렀습니다. 선생의 거처와 거리가 만 2리쯤도 안되니 도보로 왕래하면서 서로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시편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아양곡(峨洋曲)〉에 부치니35) 친밀한 교분과 신뢰하는 정의(情義)는 이전보다 갑절이나 더해졌습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목이 타고 굶주린 것 같았습니다. 만날 때마나 기뻐하여 마치 폐간(肺肝)을 서로 비춰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라도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말하여 숨김이 없었습니다. 친족의 의리에 분수가 있다는 것도 도리어 잊고 문득 사제(師弟)36)간이 되어 노닐었습니다.내가 이때 얻은 것은 전일과는 크게 달랐으니 요컨대 가슴속으로부터 환히 밝아져서 마음이 난초의 방에 이끌려 마치 꽃향기에 적신 것 같았습니다. 중간에 이별하여 별처럼 서로 흩어졌는데 번잡한 세상일까지 또 따라서 침범하니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벌써 여러 해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잠깐 머리를 돌리는 사이에 조물주가 많이 시기하여 백우(伯牛)처럼 병들고 안자(顔子)처럼 불행할37)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지위는 그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는 50을 넘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빼앗아 감이 이렇게 빠른 것입니까?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누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신선의 풍골이라고 하여 하늘이 풍진 세상에 오랫동안 놓아두지 않으려 한 것입니까? 아니면 시운이 쇠하려고 하니 호걸 재사로 하여금 쓰러지려는 국가를 부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도(道)가 심히 곤궁해지니 군자로 하여금 시들어가는 사문(斯文)을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하늘에 닿는 영기(英氣)와 고금을 꿰는 식견을 이내 생애 천지에서 다시 어찌 대할까요?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봄여름 사이 역병이 전화(戰禍)와 같아서 제가 임시 거소에 몸을 기탁한 지 7일 째에 선생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또 며칠 만에 흉음(凶音)이 갑자기 전해지니 꿈입니까, 참입니까? 막 밥을 먹으려다 수저와 젓가락을 던지며 슬피 부르짖고 길이 통곡하면서 한참을 얼굴을 가리고 울었습니다. 옆 사람들도 참담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데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원근에서 선생의 부음을 듣고 와서 저를 위로한 사람 또한 많았으니 평일에 저와 선생의 정의(情義)가 골육(骨肉)과 같아서였겠지요.제가 듣건대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한다던데,38) 우리 선생의 순명성덕(純明盛德)으로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제가 또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가 있다던데,39) 말세의 풍속을 돌아보면 흉한 자와 간사한 자가 늙도록 죽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우리 선생처럼 순명성덕한 사람을 빼앗아 가며 화를 참혹하게 내립니까? 이른 바 하늘이라는 것도 불인(不仁)하고 이치라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후손이 고아하고 수려한 데서 천륜(天倫)을 볼 수 있습니다. 임종할 때 한 마디 말도 끝내는 백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영중(英仲)과 사형(士亨) 또한 호우(湖右)의 명사로 칭송을 받고 있으니 훗날 집안의 명성이 더욱 커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의탁했던 옛정이 변치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 구구한 저의 바람이니 이를 믿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제 선조(先祖)의 유장(遺狀)을 선생이 기초하다가 완성하지 못했으니 천추에 이 한을 이승과 저승사이에 영원히 맺게 되었습니다. 포복하여 오늘 와서 상여 줄을 잡고 크게 통곡하며 변변찮은 술과 짧은 제문으로 정을 다할 수 없음을 선생께서는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 維歲次辛亥十月己卯朔十六日甲午。 錦城戚人羅褘謹以淸酌庶羞之奠。 敬祭于南圃先生之靈。 嗚呼! 自我登先生門凡幾年乎? 忽然相逢。 如入芝蘭之室。 數日相對。 便有膠漆之義。 一年二年。 世好益篤。 親愛之情。 契托之深。 旣爲人指者久矣。 那知今日。 先生逝之奄忽。 令我抱無涯之戚耶? 伏惟先府君尊丈。 卽我高祖考直派贅郞也。 夙歲仁聞。 家積玄德。 而先妣羅氏于歸奉禮。 坤道貞靜。 姻族有輝。 壼儀是式。 福行無彊。 餘慶有報。 歲在蒼鼠。 降生先生。 英姿特異。 江河偉量。 粹然和正。 內外規度。 髫齡志學。 不敎有成。 周文爻象。 理會自解。 孔聖科目。 紆餘備得。 敦敏之後。 遂成大儒。 爲士林之宗匠則當時稱湖南夫子者有由然矣。 甫及冠後。 聲名洋溢乎朝廷。 薦聞遠入於九重。 擢爲儲輔。 名耀縉紳。 而性不喜貴。 志在投閑。 肅謝還鄕。 固守山林。 其視富貴如浮雲。 豈偶爾哉? 自玆以往。 含光蘊彩。 慕誨人之不倦。 結書舍於永平之南。 與有志之士。 日日講究於聖經賢傳者有年。 厥後永之士皆篤於文行。 故延及他鄕。 莫不景仰。 薰陶樂育。 庶見鄒魯之風矣。 亥世多薄。 人情忌殊。 媢疾彦聖。 今古滔滔。 叔孫譏仲尼不幸近之。 噫噫! 亦甚矣。 盛名下多毁譽。 勢固然歟? 靑蛇春初。 移寓錦西湖上之宅。 左琴右書。 花竹自娛。 悅親戚之情話。 修禊事於蘭亭。 敦睦之義。 昭彰親疏。 俗尙之美。 攸曁遠近。 鄕隣之幸。 已萬萬矣。 余於丁未歲。 自潘而訪先生於湖。 卽秋七月上浣也。 竆困避寓。 無處可往。 先生時謂余曰: "英仲書室。 雖窄陋。 地僻人小。 可以爲避寓。 可以爲讀書。 亦可以消遣世慮。" 卽與英仲往觀而仍留數月。 距先生居不滿二里許。 徒步往來。 相尋者數矣。 唱酬詩篇。 付心峨洋。 交契之深密。 情義之相孚。 尤倍前矣。 一日不見。 如渴如飢。 見輒歡猶肺肝相照。 多小所懷。 必陳無隱。 而還忘族義之有分。 轉作函丈間從容。 余時所得。 與前日大異。 要自胸中豁然以明。 嬰情芝室。 如襲馨香。 中間聚散。 若星相離。 塵宂世故。 又從而侵之。 不獲承誨。 已經年所。 豈料轉頭之間。 造物多倪。 伯牛斯疾。 顔子不幸? 位不滿其德。 年不踰知命。 而天奪之速耶? 嗚呼哀哉! 嗚呼痛哉! 夫孰使然耶? 以神仙中骨。 天不欲久落於風塵者乎? 抑時運欲衰。 不令豪傑之才有扶於家國之將顚耶? 吾道竆甚。 不令君子之流。 有振於斯文之凋喪耶? 竆天之英。 貫古之識。 此生天地。 更於何相對耶? 嗚呼哀哉! 嗚呼痛哉! 春夏癘疫。 有同兵燹。 余自寓所。 寄身佛舍之七日。 聞先生遘疾。 又數日凶音忽傳。 夢耶眞耶? 方對食投匙箸。 悲呼長慟。 掩泣者良久。 傍人之慘顔出涕。 有如親戚之喪。 遠邇之聞先生訃而來慰我者亦多。 則平日吾於先生。 情義若同骨肉者然歟。 吾聞大德必得壽。 以吾先生之純明盛德。 何爲而至斯耶? 吾又聞福善禍淫之理。 顧瞻末俗。 兇者奸者老而不死者多矣。 何奪於吾先生純明盛德者而禍之慘耶? 所謂天者不仁矣。 理者難諶也。 嗚呼哀哉! 嗚呼痛哉! 嗣胤之雅麗明秀。 可見天倫。 臨終一語。 竟爲百年之型範。 而英仲士亨亦見湖右之名稱。 他日家聲。 知有更大。 舊情推托。 不替不衰。 區區所願。 惟恃而已。 况我先祖遺狀。 先生能構草而未及成章。 千秋此恨。 永結幽明。 匍匐今來。 執紼增慟。 薄醪短篇。 情不可盡。 先生其知也耶? 其不知也耶? 嗚呼痛哉! 난초의……같았고 훌륭한 인품에 감화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지초와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 같아서 오래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니 곧 그에게 동화된 것이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 하였다. 아교와 칠 '교칠(膠漆)'은 아교나 옻으로 칠을 하면 떨어지지 않으므로 깊은 우정을 비유한다. 곤도(坤道) 부녀자의 순종하는 덕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땅의 도는 그 순하도다. 하늘을 받들어 때로 행한다.[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 하였다. 남은 경사[餘慶]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이 번창함을 뜻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 원문의 '창서(蒼鼠)'로, 푸른 쥐의 해이다. 푸른 색은 천간(天干)의 '갑(甲)'에 해당하고, 쥐는 지지(地支)의 '자(子)'에 해당한다. 주공(周公)과 문왕(文王)의 효상(爻象) 《주역》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괘사(卦辭)를 짓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을……것을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성과 인으로 말하면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성(仁聖)의 도를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若聖與仁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하였다. 인재 육성 원문의 '낙육(樂育)'으로, 본래 영재(英才)를 육성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맹자(孟子)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孟子 盡心上》 추로(鄒魯) '추로(鄒魯)'는 공자가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이었고, 맹자가 전국 시대 추(鄒) 땅 사람이었던 데에서 온 말이고, 여기서는 유학을 가리킨다. 숙손(叔孫)이 중니(仲尼)를 비난하는 숙손은 노(魯)나라 대부 숙손 무숙(叔孫武叔)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숙손무숙이 중니를 헐뜯으니, 자공이 말하였다. '그러지 말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는 분이다.' 하였다.[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하였다. 《論語 子張》 을사년(1665, 현종5) 원문의 '청사(靑蛇)'로, 청색은 천간(天干)의 '을(乙)' 해당하고, 뱀은 지지(地支)의 '사(巳)'에 해당한다. 친척들과의……행하여 도잠(陶潛)처럼 전원의 흥취를 즐기고 왕희지(王羲之)처럼 명사들과 어울리며 살았다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푼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 9년 계축년 3월 초에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였으니, 계사를 행하기 위해서이다.[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라고 하였다. 마음을 아양곡(峨洋曲)에 부치니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가 된 것을 말한다. 원문의 '아양(峨洋)'으로, 거문고 곡 이름이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鍾子期)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유수 (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列子 湯問》 사제(師弟) 원문의 '함장(函丈)'인데, 본디 옛날에 스승의 자리와 제자의 자리에 일장(一丈)의 사이를 둔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曲禮上》 백우(伯牛)처럼……불행할 운명으로 단명하였다는 말이다. '백우(伯牛)'는 공자의 제자 염백우(冉伯牛)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염백우(冉伯牛)가 병을 앓자 공자가 문병할 때 남쪽 창문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보다.' 하였다.[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하였다. '안자(顔子)'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수명이 짧아 죽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하였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한다던데 《중용장구》 제17장에 "큰 덕을 소유한 사람은……반드시 합당한 수명을 누린다.[大德,……必得其壽.]" 하였다. 선인에게……있다던데 《서경》 〈탕고(湯誥)〉에 "하늘의 도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화를 내린다.[天道, 福善禍淫.]"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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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첩 응제 春帖應製 섣달 궐에 내린 눈 녹아내리고봄날 구름 비단 창에 밀려오네멍하니 새로 찾아온 제비를 보니오고 가며 쌍쌍이 저저귀네 臘雪乾瑤陛春雲撲繡窓佇看新鷰到來去語雙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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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솟은 바위 立巖 우뚝 솟아 위태로워 넘어질 듯한 형세꼿꼿하여 기울어진 그림자 없네천지신명이 지켜주는 바이니들판 강물에 깎이지 않았네 孤危勢欲仆正直影無斜神明之所護野水莫相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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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산의 창고에서 짓다 갑오년(1594, 선조27) 가을 永興山倉作 甲午秋 단풍잎 떨어지자 가을 강물 차갑고덩굴 깊어 밤 오솔길 어둡네산골은 우물에 앉은 듯 좁고밝은 달은 동서를 나누었네 楓落秋江冷藤深夜逕微峽中如坐井明月隔東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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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단 天壇 대월271)의 마음은 항상 상제 곁에 있으니남교272)에서 목욕재계하고 다시 제단 쌓네성군은 본래 하늘과 똑같이 장수 누리거늘신령께 기도한 한 무제 도리어 우습구나273) 對越心常在帝傍南郊齋沐更壇場聖君自與天齊壽却笑祈靈漢武皇 대월 '대월'은 '대월상제(對越上帝)'의 줄임말로, 상제를 우러러 마주하는 지극한 정성을 뜻한다.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에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공손하게 하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 채로 거처해서 상제를 마주하듯이 하라.[潛心以居, 對越上帝.]"라고 하였다. 남교의 천단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북경 남교(南郊)에 천단(天壇)을 쌓아 교사(郊祀)를 행하였다. 신령께……우습구나 한 무제(漢武帝)는 도가(道家)를 숭상하여 이소군(李少君)을 비롯한 방사(方士)들을 우대하였다. 이소군이 한 무제에게 조(竈)에 제사 지내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아뢰자, 무제가 친히 조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史記 孝武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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