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정서 峀雲亭序 큰 바다의 동쪽 땅과 웅진(雄鎭)의 서편 벌에 물은 광주(光州)와 능주(綾州)를 합하고 산은 서석산(瑞石山)과 금성산(錦城山)으로 나뉘도다. 어느 때에 조물주가 한 구역 명승(名勝)을 빚어냈던가? 오늘 명공이 서너 이랑에 정사(精舍)를 높이 여니, 추녀는 기미(箕尾)73)의 영채(英彩)에 임하고 보휘(寶輝)는 하늘을 능멸하며 문이 제나(濟羅)의 아득한 바람을 받아들이니 호방한 기운 난간에 가득하도다. 주인 영공(令公)74)은 인간 달존(達尊)75)의 반열이요, 천상에 노전(老躔)76)의 정수로다.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이 있고 가문에 효우(孝友)를 전하여 봉황의 반열에 수리처럼 서 있으니 어찌 삼어연(三語掾)77)의 맑은 품격보다 못하겠는가? 봉치(鳳峙)의 계림(鷄林)이 천년 구국(舊國)을 위무하니 중거(仲擧)78)의 긴 고삐를 잡고 거원(巨源)79)의 아무 언덕[某邱]80)을 생각하도다.구양수(歐陽脩)81)의 백발창안(白髮蒼顔)에 날렵한 고각(高閣)이요, 사안(謝安)82)의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삽상한 명창(明窓)이도다. 문미에 화려한 편액은 멀리 도연명(陶淵明)83)의 멋진 글귀를 계승하고 바위틈 걸출한 건축은 가까이 박상공(朴相公)84)의 옛터를 이었도다. 구름과 새가 서로 나니 의연히 삼경(三逕)85)의 풍미요 물과 달이 서로 비치니 얼핏 이양정(二養亭)86)【박사암(朴思庵)이 이곳에서 말년에 이양정을 지었다.】의 정신 같도다.이에 가을 만(灣)에 장마 물 잦아드니 갈대 여울에 돌 불거지고, 봄 물결에 비 더하니 버들 언덕에 조수가 평평하도다. 어부의 긴 노래에 물새들이 날개를 접고 열사(烈士)의 높은 읊조림에 고기가 비늘을 번뜩이도다. 혹 외로운 배에 노 젓고 혹 짧은 지팡이 짚고서 푸른 물결 읊조리며 달구경하고 높은 언덕에 서서 바람을 뿜도다. 이 세상에 세 가지 즐거움,87)【여기에 일구(一句)가 빠진 것 같다】 홍교(虹橋) 백 척에 이르러선 용이 파도에 눕고 월악(月岳) 천 층은 붕새가 해변에 멈춘 것 같도다.88) 바위의 분장단벽(粉嶂丹壁)을 우러르니 조석의 상서로운 광채 드러내고 봉우리의 녹옥창규(綠玉蒼珪)를 노래하니 운우(雲雨)의 기이한 자태를 바치도다. 사시(四時)의 광경을 선물하고 일실(一室)의 술잔을 마련하도다. 난간 밖 장강(長江)에 이르러선 아련히 오초(吳楚)에 이어지고 문 앞의 큰길은 멀리 경화(京華)에 접했도다. 작방용축(雀舫龍軸)의 돛대는 나루에서 익수(鷁首)89)와 교차하고 구장호부(龜章虎符)의 관개(冠盖)는 큰길에서 사마(駟馬)의 굽을 정비하니 넉넉한 정우(停宇)의 조망이요 장쾌한 유거(幽居)의 안목이로다. 오호라! 올라가 경물을 구경하니 지나간 날 아득하고 고금을 둘러보니 천지가 역려(逆旅)90)로다. 서호(西湖)91)에 학 떠나가니 처사의 풍류 이미 사라지고 동리(東里)92)에 용 올랐으니 전왕의 포부 어디에 있는가?배견와(拜鵑窩)93) 상공(相公)【사암(思庵)이 또 영평(永平)에 배견와(拜鵑窩)를 지었다.】의 청수(淸水)한 정기를 거두어들이고 배에 행장 꾸린 노선(老仙)이도다.【사암의 형 연파(烟波) 박개(朴漑)94)의 '일엽편주에 흰 달을 싣고[葉舟載素月]'라는 시구가 있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창해(滄海)의 먼 곳에 뜻 아득한데 더군다나 매창(梅窓)의 밤은 적적하고 난실(蘭室)의 봄 허허하도다. 노을이 삭막한데 명월은 홀로 오르고 새가 슬피 우는데 주옹은 어디에 있는가? 물가에 길이 있어 납극(蠟屐)95)의 유풍 알 수 있고, 길가 이끼에 흔적 없어 구장(鳩杖)96)의 자취 찾을 길 없도다. 의지하는 것은 당나라 마군(馬君)97)의 삼세이니 뜰에 옥란(玉蘭)98)이 자라고 송나라 왕씨의 쌍벽이니 집에 금우(金友)가 있도다. 평천장(平泉莊)99)의 꽃과 돌, 찬황공(贊皇公)100)의 규모에 뒤지지 않고 상락(常樂)의 솔과 대, 어이 백향산(白香山)101)의 봉식(封植)으로 하겠는가? 청상(靑箱)102)의 구업을 전하여 절로 예를 논하고 시 즐기며 묵유(墨帷)의 고장(古藏)을 간수하여 거문고 타고 피리 부는 것만이 아니도다. 나그네는 천지에 한 마리 좀[一蠹]103)이요 강호에 병마[二竪]104)가 있어 대화(大化)105)의 그침이 없음을 보겠도다. 기꺼이 물가에 임하여 전현을 좇아 미치지 못하니【글자가 빠진 듯하다】 산하에 부끄럽도다. 가벼운 갈매기의 만 리 마음은 일천(一天)의 갠 달이요. 늙은 학의 천년 의지는 백련(百鍊)106)의 맑은 파도로다. 오늘 명승을 찾아와 정자의 통활(通豁)한 데에 서서 이러한 뜻 펼치고 우주의 여풍(餘風)을 거슬리도다. 시부(詩賦)는 현사들에게서 여망 있건만 강정(扛鼎)107)의 필력 부족함 한탄하고 시는 옛 자취에서 찡그림 흉내내니[效嚬]108)어찌 자리에 도움이 될 신공(神功)을 기대하겠는가? 대략 흉금(胸襟)을 펼쳐 창과 벽을 더럽히도다. 大海東域。 雄鎭西郊。 水合光綾。 山分瑞錦。 何年造物。 孕出一區名疆? 此日明公高開數畝精舍。 軒臨箕尾之英彩。 寶輝凌空。 門納濟羅之長風。 灝氣盈檻。 主人令公 人間達尊之列。 天上老躔之精。 世有令名。 家傳孝友。 鶚立鵷序。 豈欠三語淸標? 鳳峙鷄林。 爲撫千年舊國。 按仲擧之長轡。 憶巨源之某邱。 歐公之白髮蒼顔。 翼然高閣。 謝老之靑山綠水。 爽乎明窓。 楣上華扁。 遠述晉徵士之佳句。 巖間傑構。 近襲朴相公之遺墟。 雲鳥交飛。 依然三逕之風味。 水月相暎。 怳若二養【朴思庵卜居末年。 嘗作二養亭】之精神。 於是潦落秋灣。 蘆灘石出。 雨添春浪。 柳岸潮平。 漁父長歌。 沙禽戾翼。 烈士高咏。 潛魚躍鱗。 或棹孤舟。 或扶短策。 詠滄浪而翫月。 臨斷臯而噓風。 三樂於斯世。【此一句恐缺】至若虹橋百尺。 龍臥波心。 月峀千層。 鵬蹇海浴。 仰巖之粉嶂丹壁。 呈朝暮之瑞輝。 歌岑之綠玉蒼珪。 獻雲雨之奇態。 輸四時之光景。 供一室之樽罍。 又如檻外長江。 遙連吳楚。 門前大道。 遠接京華。 雀舫龍軸之柁檣。 交鷁首於津泊。 龜章虎符之冠盖。 織駟踶於康衢。 侈停宇之睡望。 壯幽居之心目。 嗚呼! 登臨覽物。 往事蒼茫。 俯仰古今。 乾坤逆旅。 西湖鶴去。 處士之風流已空。 東里龍興。 前王之壯圖安往? 拜鵑相公。【思庵又作拜鵑窩於永平】淸水之正氣收藏。 裝舟老仙。【思庵之兄烟波漑。 有葉舟載素月之句。 故如此云云】滄海之遠意綿漠。 而况梅窓夜寂。 蕙室春虛。 雲霞索寞兮明月獨來。 禽鳥哀吟兮主翁何處? 汀沙有路。 認是蠟屐餘塵。 逕苔無痕。 難尋鳩杖遺躅。 所賴唐馬君之三世。 庭生玉蘭。 宋王氏之雙璧。 宅存金友。 平泉花石。 不墜贊皇公之規模。 常樂松篁。 焉用白香山之封植? 傳靑箱之舊業。 自有說禮諶詩。 守墨帷之古藏。 非但彈絲弄竹。 客有一蠹天地。 二竪江湖。 看大化之無停。 喜臨川上。 追前脩而莫及。 愧【恐缺】山阿。 輕鷗萬里心。 一天晴月。 老鶴千齡志。 百鍊澄瀾。 今來勝區。 立臺榭之通豁。 此意愈暢。 遡宇宙之餘風。 賦有望於衆賢。 恨乏扛鼎筆力。 詩效嚬於往轍。 豈待助席神功? 略抒胸襟。 庸塵窓壁。 기미(箕尾) 28수(宿)에서 동쪽 별자리인 기수(箕宿)와 미수(尾宿)에 해당하는 중국의 유연(幽燕) 지역, 즉 요동 일대를 가리킨다. 은(殷)나라의 명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에 그의 정신이 하늘로 올라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에 별자리를 이루었다는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이 도(道)를 얻어서 무정을 도와 천하를 모두 소유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동유성을 타고 기성과 미성을 몰아 열성과 나란하게 되었다.[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 騎箕尾, 而比於列星.]"라고 하였다. 영공(令公) 정삼품과 종이품 관리를 높여 이르던 말이다. 달존(達尊) 천하 사람이 공통적으로 존중해야 할 덕목이라는 뜻으로, 작위[爵]와 연령[齒]과 덕(德)을 삼달존(三達尊)이라고 한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하에 달존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官爵)이 하나요, 연치(年齒)가 하나요, 덕(德)이 하나이다. 조정에는 관작만 한 것이 없고, 향당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자라게 하는 데는 덕만 한 것이 없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라고 하였다. 노전(老躔) 노인성(老人星)을 가리키는 말로 노인성은 장수를 상징하는 별이다. 후한(後漢)의 진식(陳寔)이 자질(子姪)을 데리고 순숙(荀淑)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때마다 하늘에서는 덕성이 모이는 상서(祥瑞)가 보였다고 한다. 이를 보고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500리 안에 반드시 현인들의 회합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後漢書 권62 荀淑列傳》 《世說新語 德行》 삼어연(三語掾) 사도(司徒) 왕융(王戎)이 완첨(阮瞻)을 처음 만나서 성인(聖人)의 명교(名敎)와 노장(老莊)의 차이점을 물었을 때 완첨이 "아마 같지 않을 것이다.[將無同]"고 대답하자, 왕융이 한동안 감탄하다가 추천하여 연리(掾吏)로 삼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완첨을 보고 삼어연(三語掾)이라고 하였다. 《晉書 阮瞻傳》 중거(仲擧) 진번(陳蕃, ?~168)을 가리킨다. 중거는 그의 자이다. 동한(東漢) 말의 명신이다. 젊을 때 아버지의 친구가 방문했을 때, 손님이 오는데도 청소를 깨끗이 하지 않는지 이유를 묻자 "대장부가 일을 처리함에 마땅히 천하를 청소해야지 어찌 집 하나를 일로 여기겠습니까?[大丈夫處事, 當掃除天下, 安事一室乎?]"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후에 환관을 척결하려고 도모하다가 피살되었다. 《後漢書 권66 陳蕃列傳》 거원(巨源)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 205~283)의 자(字)이다. 진(晉)나라 하내(河內) 회현(懷縣) 사람으로, 죽림칠현의 일원으로 마흔이 넘어서야 관직에 나갔다. 상서 우복야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좋은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다. 대표적으로 문제(文帝) 때 참소를 입어 억울하게 죽은 혜강(嵆康)의 아들 혜소(嵆紹)를 무제(武帝) 때 천거하여 비서승(祕書丞)이 되게 하였다. 혜강(嵇康)·여안(呂安)과 친하였는데 뒤에 혜강이 처형을 당할 때 아들 혜소(嵇紹)에게 "거원이 있으니,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巨源在, 汝不孤矣.]"라고 하였다. 《晉書 권43 山濤列傳》 모구(某邱) 아무 언덕이란 뜻으로, 고향 땅의 언덕을 뜻한다. 한유(韓愈)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이제 돌아가서는 그 나무를 가리키면서 '아무 나무[某樹]'는 나의 아버님께서 심으신 것이고, '아무 물[某水]'과 '아무 언덕[某邱]'은 내가 어린 시절에 낚시질하고 뛰어놀던 곳이다.' 하면, 고향 사람들이 모두 공경할 것이다.[今之歸, 指其樹曰: "某樹, 吾先人之所種也, 某水某丘, 吾童子時所釣遊也."]"라고 하였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국 송(宋) 나라 인종(仁宗)·신종(神宗) 때의 문신·문인이다. 한유(韓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고문(古文) 부흥에 힘썼다. 추밀부사(樞密副使)·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훌륭한 고문(古文)을 많이 창작하였고, 문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오대사기(五代史記)》 등을 편찬하였다. 사안(謝安) 320~385.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 시호는 문정이다. 젊어서부터 청담(淸談)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거절하고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의 동산(東山)에서 왕희지(王羲之), 손작(孫綽) 등과 어울렸으나, 후에 벼슬길에 올라서는 공적을 쌓고 이름을 날렸다. 재상이 되었을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이를 격파하였다. 도연명(陶淵明) 365~427. 남북조 시대 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며 시인으로, 자는 원량(元亮)이며 뒤에 도잠(陶潛)으로 개명하였는데, 일설에는 연명이 그의 자라고도 한다. 팽택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80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였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박상공(朴相公) 박순(朴淳 1523~1589)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본관은 충주(忠州),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학자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으나,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사암집(思菴集)》이 있다. 삼경(三逕) 은자가 사는 집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장후(蔣詡)라는 사람이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대밭 아래에 오솔길 셋을 내고 벗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교유한 데서 유래하였다. 《蒙求 蔣詡三逕》 이양정(二養亭) 박순의 별업(別業)으로, 영평현(永平縣) 영평천(永平川) 가에 있었다. 세 가지 즐거움 맹자(孟子)께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붕새가 ……같도다 '鵬蹇海浴의 [浴]'을 '龍臥波心의 [心]'과 대(對)를 맞추기 위하여 [沿]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익수(鷁首) 익조(鷁鳥)는 백로 비슷한 새로 바람에 잘 견딘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에 "익(鷁)은 큰 새이다. 그 새의 모양을 그려서 뱃머리에다 붙이기 때문에 익수(鷁首)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역려(逆旅) 나그네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광음은 백대의 과객이다.[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역려는 천지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닌다는 뜻이다. 서호(西湖) 서호는 송나라 때 임포(林逋)가 살던 곳이다. 임포는 서호의 고산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서화와 시에 능하였고 특히 매화시가 유명하다. 장가를 들지 않아 자식이 없었으며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짝을 삼으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사후에 화정(和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世說新語 棲逸》 동리(東里)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을 가리킨다. 그가 동리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정자산은 수십 년 동안 국정을 잡고 있으면서 두 강대국인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한 정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전혀 받지 않도록 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특히 외교 문서를 잘 작성하여,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말씀하셨다. 사명(辭命)을 만들 때 비침(裨諶)이 초고를 만들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행인(行人) 자우(子羽)가 수식하고 동리(東里) 자산(子産)이 윤색하였다.[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라고 하였다. 배견와(拜鵑窩) 박순이 1568년에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머물러 살 때 지은 집의 이름이다. 배견은 두견새에게 절한다는 뜻으로, 흔히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촉(蜀)에서 지은 〈두견(杜鵑)〉에 "두견새가 늦은 봄 날아와서, 슬프게 내 집 곁에서 울었지. 내가 보고는 항상 재배했나니, 옛 망제의 넋임을 존중해서였네.[杜鵑暮春至, 哀哀叫其間, 我見常再拜, 重是古帝魂.]"라고 하였다. 박개(朴漑) 1511~1586.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처사(烟波處士), 박우(朴祐)의 아들이다. 납극(蠟屐) 밀랍을 발라서 반질반질하게 한 나막신을 말하는데, 남조 송(南朝宋)의 사령운(謝靈運, 385~433)이 산에 올라가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항상 나막신을 준비해 신고 다니면서 올라갈 때는 신의 앞굽을 떼고 내려갈 때는 신의 뒷 굽을 떼 내었다고 한다. 《宋書 권67 謝靈運傳》 구장(鳩杖) 옥구장(玉鳩杖)의 준말로, 나이 70이 되어 치사(致仕)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때 나이 70이 되면 옥장(玉杖)을 주고 그 손잡이 끝에 비둘기 모양의 장식을 하였는데, 이는 비둘기가 체하는 법이 없기에 노인도 체증(滯症)이 없기를 바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권15 禮儀志中》 마군(馬君) 마계조(馬繼祖)로, 한유는 마계조를 비롯하여 그의 부친 마창(馬暢), 조부 마수(馬遂) 삼대(三代)와 모두 친분이 있었는데, 생전에 이들 모두를 차례로 먼저 떠나보냈다. 이에 마계조의 묘문을 지으면서 이들과의 각별한 인연을 서술하고 서글픈 심정을 절절히 드러내었다.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년도 못되었는데, 그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삼세의 죽음을 곡하였으니, 인간 세상에서 어떠하겠는가? 사람들이 오래도록 죽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감을 보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自始至今未四十年, 而哭其祖子孫三世, 于人世何如也? 人欲久不死而觀居此世者, 何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韓昌黎集》 권33 〈전중소감마군묘지(殿中少監馬君墓誌)〉 옥란(玉蘭) 지란옥수(芝蘭玉樹)와 같은 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예찬하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뜰 안에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대답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평천장(平泉莊) 평천장은 당(唐)나라 때 찬황백(贊皇伯)에 봉해진 명상(名相) 이덕유(李德裕, 787~850)의 별장이다. 이덕유가 하남(河南)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평천장을 세웠는데, 둘레가 40리이고 기이한 초목과 돌이 많아 그 경치가 선경(仙境)과 같았다고 한다. 찬황공(贊皇公) 당나라의 재상인 이덕유(李德裕)를 지칭하는 말로, 그가 조군(趙郡)의 찬황(贊皇) 사람이므로 '찬황공'이라고 부른다. 백향산(白香山) 향산(香山)은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별호이다. 자는 낙천,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일찍이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한 뒤 동도(東都) 이도리(履道里)에 살면서 향산(香山)에 석실을 짓고 못을 파고 나무를 심었으며, 팔절탄(八節灘)을 만들었다고 한다. 《舊唐書 권166 白居易列傳》 청상(靑箱)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말한다. 육조 송(宋)나라 때 왕준지(王准之)의 집은 대대로 강좌(江左)의 옛일을 잘 알아서 이를 기록하여 푸른 상자[靑箱]에 넣어 두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일러 '왕씨(王氏)의 청상학(靑箱學)'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권60》 일두(一蠹) 송(宋)나라 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頥)가 일찍이 말하기를 "농부가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오곡을 농사지으니 내가 그것을 먹고, 백공(百工)이 기물(器物)을 만드니 내가 그것을 사용하고, 군사들이 갑옷에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니 내가 편안히 지낸다. 나는 사람들에게 혜택도 주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천지간에 한 마리 좀과 같은 존재이다. 다만 성인(聖人)이 남기신 글을 모아 엮어서 보충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二程遺書 권17》 이수(二竪) 병마(病魔)를 이른다.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병으로 누워있을 때 병마가 두 아이로 화신(化身)하여 왔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대화(大化)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네 단계의 큰 변화로, 유아기·청년기·노년기 그리고 죽음을 말한다. 《列子 天瑞》 백련(百鍊) 옛날 3대 보검의 하나로 꼽혔던 칼 이름이다. 강정(扛鼎) 큰 정(鼎)을 들 만한 힘을 가졌다는 뜻으로, 힘이 대단히 센 것을 말한다. 《사기》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에 "항우는 힘이 세서 세 발 달린 솥을 두 손으로 불끈 들 만하였다.[力能扛鼎]"라고 하였는데, 한유의 시에 "용 무늬 새겨 백 곡을 담은 세 발 달린 큰 솥을 홀로 불끈 들 만한 필력을 그대는 가졌다오.[龍文百斛鼎, 筆力可獨扛.]"라는 표현이 보인다. 《韓昌黎集 권5 病中贈張十八》 효빈(效嚬) 찡그리는 것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분수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남을 흉내 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서시(西施)가 가슴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자, 그 마을에 사는 추한 사람이 보고 아름답게 여겨 역시 가슴을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리니, 그 마을에 사는 부자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자는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버렸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