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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에 쓰다 16수 題畵帖【十六首】 외기러기 무리 부를 제 달은 지려 하고갈꽃에 바람 살랑이니 밤 추위가 감도네우리들 강호의 약속 오랫동안 저버렸으니서글픈 마음에 하릴없이 그림 속 모습 보네산 밖에선 속진에서 두 영웅이 다투고308)산속에서는 네 늙은이 한가한 세월 보내네누가 알았으랴 진한이 흥망성쇠한 일이미 바둑판 위에서 볼 수 있었음을309)우연히 다리 가에 여울 소리 들으니동자가 거문고 들고 일찍 돌아오리라본래 아양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법310)거문고 곡으로 옮겨와 연주할 필요 없다오갈대 속 외기러기 울며 날아가지 않으니가을 다 가도록 아직 돌아가지 않네옛 짝들은 행렬 지어 잘 날아갔으니지금은 응당 먹이 차지하여 살졌겠지못 속의 백로 푸른 연잎 곁에 있으니잎 아래 물고기가 눈처럼 흰 백로에 놀라네세상에 누군들 배불리 먹으려 하지 않으랴마는어옹은 너와 함께하며 잊으려 하네한 사람은 피리 불고 한 사람은 들으니소리마다 귀에 맑게 들릴 줄 알겠구나시냇물과 솔바람 소리 흥취 더해주고푸른 하늘에 또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라본디 물고기를 보려고 못에 내려갔는데어찌하여 돌아보며 오랫동안 서 있는가가을 오자 매서워진 서풍 점점 느껴지니시든 연 건드리고 백로 머리 깃 손상할까 두려워라여기는 응당 맑은 위수일 터이니저 늙은이 바로 강태공 아니면 누구랴대나무 낚싯대 드리워 대인을 낚았고삼략 같은 병서로 왕자의 스승 되었지311)우리 집 어디 있는가 푸른 산 속이라나귀 타니 떠나려 한다 동자가 말하네버들 그늘은 짙고 시골길은 아득하니고개 돌려보아도 돌아올 길 모르겠구나이미 산속에 와서 잠 깊이 들지 못하니또한 꿈속에 속진의 모습 되지 않으리장난삼아 나비 따라 멀리 간 줄도 모르니중도에 소나무에 바람 불게 하지 말라이미 동자에게 술동이 지키게 하고는홀로 비파를 타니 흥취 가눌 수 없네우스워라, 심양강 어귀에서 밤중에천 번 만 번 부르자 다른 사람 나오네312)왕손의 붓끝에 거센 바람 일어나소상강313) 언덕마다 가을을 만들어 내네천 줄기 반죽에 외로운 달 비추니외로운 학이 울 제 몹시도 시름겨워라그리운 이 만나지 못해 그리움 하염없는데그림 보니 어이하여 눈이 번쩍 뜨이는가끝없이 펼쳐진 강산 부슬비 내리는 곳에학이 배회하는 죽림을 오직 좋아해서지시냇가에 낚시터 있으니 낚시터 바위에누가 이끼 낀 바위에 높이 걸터앉았나아이는 송주를 가져올 줄은 알면서도낚싯대 함께 가져오는 건 잊어버렸구나연밥 맺힐 제 연잎 시드니게와 가재 참으로 술안주에 제격이지취중이라 그림 속에 본 것인 줄 모르고오른손으로 잔 들고 왼손으로 집는구나이별하는 포구 가을 풍광에 서리 막 내리니시든 연잎 마른 갈대 날로 스산해지네아가씨는 여기 당도하여 애간장 끊어지고창자 없는 공자314)는 그만 못하여 한스럽네 孤鴈呼群月欲殘荻花風細夜生寒吾人久負江湖約惆悵虛從畵裏看山外風塵兩雄鬪山中日月四翁閒誰知秦漢興亡事已向圍碁局上看偶來橋畔聽鳴湍童子將琴合早還自是峨洋心與會不須移向曲中彈蘆中一鴈不鳴飛送盡秋風尙未歸舊侶好爲行陣去只今應占稻粱肥池中鷺傍靑蓮葉葉底魚驚白雪衣在世孰非求一飽漁翁肯與爾忘機一人吹笛一人聽知有聲聲入耳淸澗水松風添意趣靑天又是月輪明本欲窺魚下塘水若爲回首立多時秋來漸覺西風緊怕觸衰荷損頂絲此地只應淸渭是彼翁非卽太公誰一竿竹作大人釣三略書爲王者師我家何在碧山中驢背行將童子語楊柳陰濃村逕迷回頭不識歸來處已向山中睡未濃也應無夢作塵容戲隨蝴蝶不知遠中道莫敎風入松已敎童子護尊罍獨抱琵琶興未裁笑殺潯陽江上夜千呼萬喚別人來王孫筆下長風起幻出瀟湘岸岸秋千竿班竹孤輪月獨鶴鳴時分外愁懷人不見思悠哉見畵如何眼忽開無限江山煙雨處竹林惟愛鶴徘徊溪上有磯磯上石何人高距石頭苔兒童解取松醪至忘却漁竿共把來蓮子成時蓮葉衰蠏鰲眞與酒相宜醉中不覺圖中見右手持杯左手持別浦秋光霜露初敗荷枯荻日蕭疎女娘到此腸應斷公子無腸恨不如 산……다투고 초나라 항우(項羽)와 한나라 유방(劉邦)이 천하를 다투었던 것을 가리킨다. 진한의……있었음을 상산사호(商山四皓)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상산사호는 진(秦)나라 말기에 학정을 피해 상산(商山)에 들어가 은거했던 네 늙은이,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甪里) 선생으로, 바둑을 두며 소일을 하며 지냈는데 이 모습을 그린 〈사호위기도(四皓圍棋圖)〉가 전한다. 상산사호는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 유영(劉盈)을 폐위하려 할 때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계책을 써서 이들을 부르고자 고조가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 나와서, 태자를 폐위하려던 한 고조의 생각을 바꾸게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아양(峨洋)은……법 백아(伯牙)가 아양곡(峨洋曲)이라는 금곡(琴曲)을 탄 고사가 있는데, 벗끼리 마음이 통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 시대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면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 하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면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列子 湯問》 대나무……되었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며 지내다가 주나라 문왕(文王)을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했다. 《史記 齊太公世家》 강태공이 《육도(六韜)》라는 병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심양강……나오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백거이가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을 때 어느 날 분강(湓江) 포구의 배 안에서 비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누가 연주했는지 물었는데, 연주한 사람은 바로 장안(長安)의 창녀(娼女)로서 젊은 시절 호화롭게 지내다가 늙어서 용모가 쇠하여 장사꾼의 아내가 된 여인이었다. 백거이가 그 여인에게 몇 곡조를 청하여 들은 뒤 지은 〈비파행〉에 "심양 강어귀에서 밤에 객을 전송하니 단풍잎과 억새꽃 가을바람에 소슬하네.…… 천 번 만 번 부르자 비로소 나오는데, 비파를 안은 채로 얼굴 반쯤 가렸네.[潯陽江頭夜送客 楓葉荻花秋瑟瑟 千呼萬喚始出來 猶抱琵琶半遮面]"라고 하였다. 소강상(瀟湘江)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의 근처에 있는 강으로, 소상강 일대에는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 요 임금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임금의 왕비가 되어 순임금 죽은 뒤 상강에서 슬피 울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져서 반죽(斑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博物志 卷8》 창자 없는 공자 게를 비유한 말이다. 게의 별칭이 무장공자(無腸公子)이다. 《抱朴子 登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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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321)의 시에 차운하다 10수 次仁叟韻【十首】 돈 없이 술 얻길 청해도 늘 허락받으니객과 통성명 함에 명함 따위 필요 없네질그릇에 흙 평상 가난해도 즐거우니유유자적 태평한 시대에 일개 범부로다322)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 누가 잡을 수 있으며화산으로 돌아가는 말323) 누가 재갈 물리랴그저 머물다 사람과 이별하기 때문이요깃털324)이 애초 세속을 벗어나려 해서만은 아니라오여기서 그대의 집으로 돛단배 타고 가니무엇하러 수레에 기름칠하며 말에 재갈 물리랴문 위에 봉 자 쓰는 것 오히려 괜스러우니조과 범으로 굳이 파자할 필요가 없다오325)강 머리에서 곧바로 돛 내리지 말라또한 어찌 문밖에 억지로 명함을 넣는가한가하게 오가는 것이 고아한 사람의 일인데흥 다하여도 그대로 머무니 도리어 범부로다삼경을 왕래하며 지팡이 하나 -원문 1자 결락-소는 수레 메지 않고 말은 재갈 물리지 않네객은 와서 당세의 일 따위는 논하지 마오농사일 말하기 좋아하는 평범한 야인이오기린은 들이받지 않거늘 머리에 어찌하여 뿔이 있는가천마는 오랫동안 한가로워 입에 재갈 물지 않네태평 시대에 무능함이 참으로 맛이 있으니은자가 어찌 문왕을 기다리는 범인이리오326)분국에 인원 채우는 건 오늘날 사업이요한 지방의 수령 지낸 건 옛날 명함이지327)평소 의식주 오히려 만족할 줄 아노니우리들 벼슬살이 또한 범속하지 않네기나긴 밤 무슨 수로 그대 만류할거나동복은 걸음 재촉하고 말은 재갈 무네이별의 길 굳이 채찍질로 재촉할 것 없으니도성에서 내일이면 범부와 신선으로 나뉘겠지농사꾼은 기르는 소 야위어 짜증 내고나그네는 재갈 물린 말 지쳐 반갑지 않네가축 늙으면 본디 근력 쇠퇴하는 법인데억지로 분주히 부리고 노둔하다 꾸짖누나백옥으로 안장 만들어 –원문 1자 결락- 상관 않고무엇 하러 황금으로 재갈 만들었는가천리마는 덕을 일컬음이요 힘 일컫는 게 아니니사나운 말은 재주 있어도 평범한 말과 마찬가지네 無錢得酒常容乞有客通名不用銜瓦釜土床貧亦樂漫然淸世一夫凡雲路冥鴻誰可弋華山歸馬孰能銜只緣居與人相別毛羽初非獨脫凡此去君家風一帆車何脂轄馬何銜門題一鳳猶多事不必分爲鳥與凡莫向江頭便落帆亦何門外强投銜閒來閒去高人事興盡仍留却是凡往來三逕一笻【缺】牛不巾車馬不銜客到莫論當世事農談好是野人凡祥麟不觸頭何角天馬長閑口不銜淸世無能眞有味逸民寧是待文凡分局備員今事業專城作宰舊名銜平生喫着知猶足吾輩爲官也不凡留君永夕何由得僮僕催行馬嚼銜別路不須鞭太促洛城明日隔仙凡生憎耕者羸牛牿不喜行人倦馬銜畜老自是筋力退强將奔走責駑凡不關白玉爲鞍【缺】何用黃金作勒銜驥稱其德非稱力泛駕雖才等是凡 인수(仁叟) 송영구(宋英耈, 1556~1620)의 자이다. 본관은 진천(鎭川), 호는 표옹(瓢翁)·모귀(暮歸)·일표(一瓢)·백련거사(白蓮居士)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질그릇……범부로다 송나라 장재(張載)의 〈토상(土床)〉 시에 "흙 침상에 연화 족하고 명주 이불 따뜻하며, 질그릇 솥에 물맛 좋고 팥죽도 끓여 먹네. 등 따뜻하고 배불리 먹는 외엔 아무 생각 없나니, 맑은 세상에 유유자적 지내는 한 명의 한가한 사람일세.[土牀煙足紬衾暖 瓦釜泉乾豆粥新 萬事不思溫飽外 漫然淸世一閑人]"라고 하였다. 화산으로 돌아가는 말 본래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는 말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범속함을 떠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경》 〈주서(周書) 무성(武成)〉에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대목에 "말을 화산의 남쪽에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의 들판에 풀어놓아, 천하에 무력을 쓰지 않을 것임을 보였다.[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示天下弗服]"라고 하였다. 깃털 선인(仙人)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람이 득도(得道)를 하면 몸에 모우(毛羽)가 돋아난다는 전설이, 굴원(屈原)의 〈원유(遠游)〉 주(註)에 소개되어 있다. 문……없다오 '제봉재문(題鳳在門)'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진(晉)나라 여안(呂安)이 천 리 길을 달려 혜강(嵇康)의 집을 찾아갔는데 혜강이 마침 외출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자, 여안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 위에 '봉(鳳)'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그냥 갔다. 나중에 혜강이 돌아온 뒤, 혜강의 형이 혜강에게 '봉'자의 의미를 묻자, 혜강이 "봉은 평범한 새[凡鳥]이다."라고 하였다. '봉(鳳)'을 파자(破字)하면 '범(凡)'과 '조(鳥)'가 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世說新語 簡傲》 은자가……범인이리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문왕 같은 성군이 나와서 인도하기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는 자는 평범한 백성이고, 만약 호걸스러운 사람이라면 비록 문왕이 없어도 분발한다.[待文王而後興者 凡民也 若夫豪傑之士 雖無文王猶興]"라고 하였다. 분국에……명함이지 송영구는 1607년(선조40)에 성주 목사를 지내고 1616년(광해군8) 분병조 참판(分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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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막혀 기약을 어겼기에 박계길에게 부치다 阻雨愆期寄季吉 우리 집이 깊숙하고 외져서 아니라단지 비바람 때문에 찾아가지 못했다오내일이면 봄빛을 찾을 곳 없을 테니온 산에 꽃 지고 녹음이 우거지리 不是吾廬深且邃秪緣風雨阻相尋明日春光無覓處滿山花落綠成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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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율시 五言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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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응제 迎祥應製 궁궐에 상서로운 구름 모이고수많은 궁전 문에 상서로운 해 빛나네요임금 네거리에서 경양가 들렸고1)순임금 궁전에서 옷을 드리운 것 보았네2)매화 피기를 재촉하니남아 있던 섣달 눈 녹아 사라졌네궁궐의 뜰에서 신년의 경하 끝나니남아 있는 이들 술에 취해 잔을 돌리네 九闕祥雲合千門瑞旭輝堯衢聞擊壤舜殿覩垂衣催却梅花嫩消殘臘雪稀彤庭新賀罷留醉羽觴飛 요임금……들렸고 태평성대를 뜻한다. 요임금의 통치 시대에 어떤 노인이 땅을 두드리면서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며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있어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고 하였다. 순임금……보았네 무위(無爲)의 훌륭한 정치를 뜻한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황제, 요, 순임금이 겉옷을 드리웠는데 천하가 다스려졌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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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읊어 박계길에게 부치다 2수 詠雪 寄朴季吉 二首 날이 추워 오두막에 사립문 닫으니밤에 눈 내려 아침까지도 여전히 개지 않네산의 소나무에 눈 높이 쌓여 특별한 경치 펼쳐지고언 계곡을 눈이 덮어 소리만 들리누나파수의 절룩이는 나귀는 시인의 흥이요139)남관의 파리한 말은 쫓겨난 객의 마음이라140)전답의 노련한 농부에는 미치지 못하나풍년의 징조 집집마다 가득하리라 점치네유인이 일어나 게으르게 찬 이불 끌어안으니모르는 사이에 산촌에 눈이 높이 쌓였어라특별한 경치에 나무에 앉은 까마귀 멀리서 바라보고소리 듣고서야 학이 숲에 있음을 비로소 알았네겨울이 드넓은 바다엔 오지 않았으나한밤중에 깊은 골짜기를 충분히 뒤엎었네그대는 마치 나귀 탄 패수의 객처럼끊어진 다리에서 저물녘에 눈썹 찡그리며 읊조리네141) 天寒白屋掩柴荊夜雪終朝尙未晴高壓山松別有色平沈氷澗但聞聲蹇驢㶚水騷人興羸馬藍關逐客情不及老農南畝畔豐徵占得萬家盈幽人起懶擁寒衾不覺山村雪一尋別色遙看烏在樹聞聲始認鶴捿林三冬不到滄溟闊半夜能平巨壑深君似騎驢灞水客斷橋斜日皺眉吟 파수의……흥이요 당나라 맹호연(孟浩然)이 좋은 시를 지으려고 고심하다가 나귀 등에 타고서 눈발이 휘날리는 파수(灞水)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갈 때 시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남관의……마음이라 남관(藍關)은 진(秦)나라의 남전관(藍田關)을 가리킨다. 당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헌종(憲宗)의 노여움을 사서 조주(潮州)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귀양길에 남관을 넘어가며 지은 시에 "구름이 진령에 비꼈나니 집은 어디에 있느뇨, 눈이 남관에 가득 쌓여 말이 앞으로 가지 않는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10 左遷至藍關示姪孫湘》 나귀……읊조리네 당나라 맹호연(孟浩然)이 좋은 시를 지으려고 고심하다가 나귀 등에 타고서 눈발이 휘날리는 파수(灞水)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갈 때 시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초상화를 그리는 하충 수재에게 주다[贈寫眞何充秀才]〉 시에 "그대는 못 보았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느라 산처럼 어깨 으쓱인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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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207) 楡關 바다에 접하고 구름에 닿아 온통 모래톱만 보이니알지 못하겠구나, 오랑캐의 기마 몇 번 지나갔던가누런 누릅나무는 옛날에 가을 방비하는 길 둘러쌌고208)푸른 버드나무는 지금 술 파는 집을 가리고 있네들에 늘어선 곡식에 우로가 고루 내리고성안에 연월 가득하고 피리 노래 소리 울려퍼지네변방 관문에 이러한 태평성대 즐거움 넘쳐나니연경에 도착하면 더욱 어떠하랴 際海連雲一望沙不知胡騎幾經過黃楡舊擁防秋路碧柳今遮賣酒家布野禾麻均雨露滿城煙月摠笙歌邊關饒此昇平樂待到神京更若何 유관 임유관(臨楡關)으로 산해관(山海關) 축성 이전에는 관문의 기능을 담당하다가 산해관을 지은 이후로는 역참의 기능만 남아있게 되었다. 누런……둘러쌌고 진(秦)나라 몽염(蒙恬)이 느릅나무[楡]를 심어 요새를 만들었으므로 '유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날에 중국의 북방 유목 민족들이 가을철에 자주 남침(南侵)을 하였으므로, 이때 중국의 변방에서 특별 경계를 펼치고 방어던것을 '추방(秋防)'이라 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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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에 들어가 주인집 벽에 제하다 入關 題主家壁上 요동성 서쪽이요 계문209)의 동쪽이니천 리의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오네나그네 가는 길은 심상한 가을 풍경 속이요백성들 사는 곳은 대저 버드나무 그늘 속이라술이 번민을 풀어주니 시름 어디에 있으랴신이 시재를 도와주니 시어 더욱 좋아지네벽에 가득 흥건하게 취기에 쓴 글씨 남겼으니돈으로 애오라지 주인옹에게 사죄하네 遼城西畔薊門東千里風烟一望通客路尋常秋色裡人居大抵柳陰中酒排心悶愁何在神助詩才語更工滿壁淋漓留醉墨當錢聊謝主家翁 계문(薊門) 북경의 덕승문(德勝門) 밖의 지역으로,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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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 除夕 삼백육십일 다음의 여섯 번째 날경인년(1650, 27세)은 이날 저녁 밖에는 남은 날이 없네하늘의 마음 이미 움직여 매화의 뺨 희어졌고상제(上帝)의 뜻 봄 되려 하여 버들의 눈 푸르게 되었네온화한 기운 은자의 방에 먼저 찾아오고은혜로운 바람 야인의 정자에 잔잔히 불어오네한가로운 가운데 묵묵히 평생의 일 헤아려 보니28년 동안 헛되이 술에 취했다 깨었다만 반복하였구나 三百六旬第六日庚寅此夕外無零天心已動梅腮白帝意將春柳眼靑和氣先來幽士室惠風徐到野人亭閒中默數平生事二十八年空醉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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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0 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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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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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족보서 金氏族譜序 김씨는 명망있는 가문이니 계통은 당악(棠岳)1)에서 나왔다. 고려 이전은 족보가 유실되어 기술할 수 없다. 성스러운 조선이 천명을 받아 동방(東方)의 소중화(小中華)를 여니 당시에 우리 조상이 호남 병사의 막부를 보좌[佐幕]2)하였다. 금수(錦水) 서쪽 가와 백봉산(白鳳山)의 북쪽에 땅을 보고 나무를 베어 내어 이에 조종(祖宗)의 터를 잡아서 지금에 이르도록 삼백여 년 동안 대대로 귀업(龜業)3)에서 전해졌다.만력 정유년(1597, 선조30)에 한 집안이 전부 전쟁에 매몰되었는데 우리 황고(皇考) 및 종백부(宗伯父) 휘 김전(金悛)이 겨우 죽음을 면했으나 가문의 족보가 이때 유실되었다. 황고께서 우리 조선 건국 후,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에 휘자(諱字)와 세계(世系)를 손으로 써서 작은 간책(簡冊)을 만들어 전하게 되었다. 내가 어려서 선친을 잃고 고증할 곳이 없었는데 마침 오래된 책 속에서 간책을 얻었다. 손때가 아직 새로워 눈물을 가리고 받들어 열어본 나머지에, 그대로 이어서 황고(皇考) 이후 나뉜 종파와 외손 방지(傍支)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기록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었다.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누가 부모가 없겠는가마는 부모 윗대부터 친척이 다하는데 이르기까지 예(禮)가 비록 한계가 있더라도 정(情)으로 보면 부모이다. 수 대 후에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면 날아다니고 달려 다니며 꿈틀거리는 벌레들과 서로 거리가 얼마나 되겠으며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무엇을 말미암아 일어나겠는가? 이것이 문중의 족보를 만든 까닭이다. 가문에 족보가 있는 것이 나라에 역사가 있는 것과 같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종법(宗法)4)이 세워지지 못하고 오복(五服)5)의 친함이 없게 되고 추원보본(追遠報本)6)의 정성과 효우돈목(孝友敦睦)의 의리가 말미암아 세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우리 자손·형제·후손들은 선조의 가르침을 공경히 지키고 삼백 년 동안 서로 이어온 사대부의 풍을 추사(追思)하여, 영원히 만대를 전하고 추락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있는 선조의 바람이니라.황명남도후(皇明南渡後) 13년 정유년(1657, 효종8) 1월 갑자(甲子) 여절 교위(勵節校尉)7) 행(行)8)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9) 세마(洗馬) 지손(支孫) 만영(萬英) 두 번 절하고 쓰다. 金氏望族。 係出棠岳。 王麗以前。 譜逸不述。 聖鮮受命。 聿啓東華。 于時我祖。 佐幕南兵。 錦水西滸。 白鳳山陰。 相土刊木。 爰占宗基。 三百年于今而世傳龜業矣。 萬曆丁酉。 一家專沒於兵燹。 惟我皇考曁宗伯父諱 浚。 僅以身免。 門譜失守於此日。 皇考手記我朝以後南徙以下。 諱字世系。 書之小簡以傳焉。 萬英少失先人。 無所考徵。 適得是簡于舊秩中。 手澤尙新。 掩泣奉覽之餘。 仍錄皇考以後宗派所分及外孫傍支。 耳目所覩記。 幷成一冊。 以貽後昆焉。 嗚乎! 人有此生。 孰無父母。 自父母上至于親盡。 禮雖有限。 情則父母。 數代之後。 不知吾祖是爲何人。 則於飛走而蠢蠢者。 相距幾何。 而孝敬之心。 何由而起哉? 此門譜之所以作也。 是知家之有譜。 猶國之有史。 此而不明則宗法不立。 五服無親。 追遠報本之誠。 孝友敦睦之義。 無由而立矣。 惟吾子孫兄弟曁後人。 敬守先訓。 追思三百年相承士夫之風。 永傳萬世而勿墜。 匪我私言。 惟祖先在天之望云。 皇明南渡後十三年丁酉春正月甲子。 勵節校尉行世子翊衛司洗馬支孫萬英再拜謹書。 당악(棠岳) 해남의 옛 지명이다. 좌막(佐幕) 감사(監司)·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 따위에 따라다니는 관원의 하나로 비장(裨將)을 가리킨다. 막료(幕僚)라고도 하였다. 여기서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당악 김씨 시조 김인(金忍)을 가리킨다. 귀업(龜業) 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업 마을로, 김만영이 이곳에 귀향하여 살았던 곳이다. 종법(宗法) 대종가(大宗家)·소종가(小宗家)의 계통을 밝히는 규칙이다. 한 가문에서 많은 소종가가 생길 때 대종가가 소종가를 통할하기 위해 생긴 것으로, 사당 제사, 합동 잔치, 복(服) 입는 것, 같은 종파끼리 혼인하지 않는 것 등을 시행하였다. 오복(五服) 다섯 등급의 상복으로 참최(斬衰) 3년, 자최(齊衰) 1년, 대공(大功) 9개월, 소공(小功) 5개월, 시마(緦麻) 3개월이다. 추원보본(追遠報本)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말한다. 즉 선대 조상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추원은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함에 바치는 정성이라는 뜻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히 행하고 먼 조상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해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증자(曾子)의 말이 보인다. 보본(報本)은 조상의 은혜를 갚기를 생각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인데,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오직 사의 제사에는 구승으로 제물을 갖추게 하니, 근본에 보답하여 시초에 돌이키는 뜻이다.[唯社, 丘乘共粢盛, 所以報本反始也.]"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여절교위(勵節校尉) 조선 시대 종육품(從六品) 서반(西班)의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행(行) 행수법(行守法)으로, 품계와 벼슬을 서로 견주어서 관직의 앞에 붙이는 규례를 말한다. 품계가 높고 벼슬이 낮을 경우에는 관직 앞에 행(行) 자를 붙이고, 품계가 낮고 벼슬이 높을 경우에는 관직 앞에 수(守) 자를 붙인다. 1442년(세종24) 처음 실시되었고, 이듬해부터 지방 관직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국역 세종실록 24년 7월 19일, 25년 7월 17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계방(桂坊)이라고도 하며 세자를 호위하던 곳이다. 익위(翊衛)·사어(司禦)·위솔(衛率)·부솔(副率)·시직(侍直)·세마(洗馬) 등의 관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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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족계서 金氏族禊序 친족의 계(禊)10)는 무엇을 위해서 만들었는가? '계(禊)'라는 말은 '계(契)'이다. 한 집안의 마음을 묶고 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니 좌계(左契)11)를 가지고 우부(右符)12)를 합하는 것과 같다. 아! 우리 선조 부총공(副摠公)13)이 남쪽 병영(兵營)에서 임무를 받았을 때 한 아들을 금성(錦城)에 남겼는데 실로 우리 종씨가 남쪽에 거처하는 종조가 되었다. 2대를 전하여 정언공(正言公)14)에 이르렀고, 또 한 번 전하여 태학관(太學館) 상사공(上舍公)15)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고조부 삼 형제를 길러내셨다. 선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9대이고 우리 고조부를 함께 형제 된 이의 자질(子侄)가운데 초례(禮醮)16)를 한 자가 11인이다. 위로 상사(上舍) 계열에서 분파된 이와 동종(同宗)이면서 방얼(傍孼)들은 합하여 약간 인이다.서로 도모하여 말하기를 "통달한 달인은 마음에 내외(內外)가 없어서 사해가 형제이고 만민이 동포인데 하물며 우리 공조(共祖)·동종(同種)이 한 사람의 몸에서 형태가 분리되었고, 형제간에 기를 받고 하나의 터럭과 한 가닥 머리가 하나의 몸 아닌 것이 없으며 호흡하고 움직이는 기가 실로 서로 통하니, 그 친애충후(親愛忠厚)의 의리에 어찌 서로 강학하는 도리가 없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족친은 다른 지역에 흩어져서 우물을 함께한 적이 거의 없어 신의를 강(講)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도가 지금 서로 독실하지 않으니 복(服)을 면하고 정(情)을 다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찌 길거리에 사람이 되지 않음을 보장하겠는가? 한 폭에 서명하고 계목(禊目)을 나열하여 봄·가을로 연모(燕毛)17)하고 길흉에 서로 도와서 백 대의 소원한 정을 하나의 마음에 합하는 최상의 것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모두 "좋다"라고 하였다.대열에서 힐난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인정(人情)은 일정치 않으니 일은 끝마침이 드물다. 무릇 우리 형제와 자식, 조카 혹은 후손들이 만약 두 얼굴과 두 말이 있거나 입은 바로 하고 뱃속은 달라서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선조의 가르침을 실추시키는 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선조의 정상(精爽)18)이 밝고 울창하게 퍼져 천상에 임하여 곁에서 질정하니 무릇 나의 이 거사(巨事)가 또한 반드시 말없이 보살펴주는[陰騭]19) 가운데에 흔쾌히 감응하여 혹 이것에 반하거든 이것은 아비가 없고 형제가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니 우리 종친이 어찌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이런 경우를 면할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옳다."라고 하였다.이에 그 규약을 완성하여 나의 이 말들을 기록하여 책의 머리말로 삼았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하며 상심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어렸을 적[髫齔]20)에 삼가 아버지와 일가가 여러 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는 것21)을 보고 맨 먼저 이 약속을 발하여 일이 성취되지 않았는데 형제[荊棣]22)가 모두 돌아가셔서 불초한 내가 여러 어진 형제들과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뜻을 20여 년 후에 이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만하더라도 또한 어찌 형제간에 우애[蓼蕭]23)하지 못한 비애의 아픔이 없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형제의 뒤에 자제된 자들이 척연(惕然)히 감동하여 공경히 지키지 않겠는가? 인하여 모두 여기에 기록하니 후인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族禊何爲而作也。 禊之爲言契也。 束一家之心。 合而爲一。 如持左契合右符也。 粤我先祖副摠公見任南營。 一子留于錦。 實爲吾族氏居南之鼻祖。 再傳而至正言公。 又一傳至太學館上舍公。 迺育我高王父三昆季。 自先祖至于今凡九世。 而同我高王父而爲兄弟者。 並子侄禮醮者十一人。 上係上舍而分派者及同宗而傍孼者。 合若干人。 相與爲謀曰: "達人洞觀。 心無內外。 四海兄弟。 萬民同胞。 况我共祖同宗。 分形於一人之身。 受氣於兄弟之間。 一毫一髮。 無非一體。 呼吸屈伸。 氣實相通。 則其親愛忠厚之義。 豈無相講之道耶? 矧吾族氏散居異鄕。 同井無幾。 講信修睦之道。 今不相篤。 則服免而至於情盡者。 安保其不爲塗人耶? 莫若書名一幅。 列爲禊目。 春秋而燕毛。 吉凶而相扶。 百代之踈情合一心者。 其不在斯耶?" 咸曰: "諾。" 有詰于列者曰: "人情不常。 事鮮有終。 凡我兄弟若子侄或後昆。 如有兩面二舌。 口是腹非。 不守此束。 以墜先訓者。 何以處之?" 咸曰: "祖先精爽。 昭布森列。 臨之在上。 質之在傍。 凡吾此擧。 必亦欣感于陰騭瞑瞑之中。 其或反此。 是無父無兄之人。 吾族人豈有是歟。 吾知免夫。" 詰者曰: "唯。" 於是遂成其約。 咸屬余記其說以弁券首。 余有所摧感於此事者。 昔在髫齔。 伏覩先君子與一家鴈行諸公。 首發此約。 事未及就。 荊棣俱零。 而不肖孤今與諸賢兄弟。 繼先父兄未遂之志于二紀之後。 可謂幸矣。 亦豈無蓼蕭悲哀之痛歟? 况後吾兄弟而爲子弟者。 其不惕然感動而敬守之耶? 仍幷及此。 勖旃後人云。 皇明紀元龍集丁酉長至日。 勵節校尉。 前行世子翊衛司洗馬支宗萬英謹書。 계(禊) 옛사람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데, 음력 3월 상사(上巳)에 춘계(春禊)를 지내고, 7월 14일에 추계(秋禊)를 지낸다. 《사기(史記)》 49권 〈외척세가(外戚世家)〉에 이르기를, "패상(霸上)에서 불제(祓祭)를 지냈다."라고 하였는데, 배인(裴駰)의 집해(集解)에 "3월 상사(上巳)에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것을 계(禊)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물가에서 노닐면서 불길한 재앙(災殃)을 미리 막던 풍속으로,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 수계(蘭亭修禊) 고사가 유명하다. 좌계(左契) 둘로 나눈 부신(符信) 가운데 왼쪽의 것을 의미하는데, 명확한 증거를 뜻하는 말이다. 《노자(老子)》에 "성인은 좌계를 가질 뿐이지 사람을 책망하지는 않는다.[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라는 말이 보인다. 우부(右符) 둘로 나눈 부신(符信) 가운데 오른쪽의 것을 의미하는데, 원래는 군사를 징발하는 표신, 즉 발병부(發兵符)이니 발병부의 모양은 둥글다. 일면에는 발병이라 쓰고 다른 일면에는 예를 들면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광주진(廣州鎭)'이라고 썼다. 이것을 반으로 나누어 우부(右符)는 관찰사·절도사(節度使)·제진(諸鎭) 등에 내리고 좌부(左符)는 궁중에 두었다가 군사를 징발할 일이 있으면 좌부와 교서(敎書)를 내리는데, 관찰사 등은 합부(合符)하여 본 뒤에 징병에 응했다. 부총공(副摠公) 당악 김씨 시조 김인(金忍)을 가리킨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무안현(務安縣) 대굴포(大掘浦), 현 함평군 학교면 대곡리에 있을 때 좌막(佐幕)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20리쯤 떨어진 나주시 마산면 귀업리(龜業里), 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업부락에 터를 잡아 세거지로 삼았다. 정언공(正言公) 당악 김씨 시조 김인(金忍)의 손자인 김종(金琮)을 가리킨다. 정언과 현감을 지냈다. 상사공(上舍公) 김종(金琮)의 손자인 김두(金豆+斗)를 가리킨다. 성균관 진사를 지냈다. 초례(醮禮) 관례에서 빈(賓)이 관자(冠者)에게 술을 따라주는 의식으로, 술을 따라주기만 하고 수작(酬酢)이 없는 것을 '초(醮)'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관례를 가리킨다. 연모(燕毛) 고을 사람들이 연령순으로 연회의 좌석을 정하는 예(禮)로 향음주례를 말한다. 정상(精爽) 주희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마음은 기의 정상이다.[心者, 氣之精爽也.]"라고 하였는데, 정상은 일종의 신명(神明)과 같다. 마음은 이 신명이 있어서 지각운용(知覺運用)의 묘(妙)를 발현하게 된다. 음즐(陰騭) 하늘이 말없이 보살펴 주는 복을 말한다. 《서경》 〈홍범(洪範)〉 첫머리에 "하늘은 암암리에 백성의 운명을 정해 놓고 그들의 삶을 돕고 화합하게 한다.[惟天陰騭下民, 相協厥居.]"라는 말이 나온다. 초츤(髫齔)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 이를 갈 무렵의 7~8세쯤 되는 어린아이를 말한다. 어깨를 …… 것 형제가 길을 갈 때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鴈行]처럼 조금 떨어져 가야 한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예기》 〈곡례 상〉에 "나이가 두 배 많으면 부모처럼 섬기고, 10년 이상 많으면 형으로 섬기고, 5년 이상이면 나란히 가되 조금 뒤에 따라간다.[年長以倍, 則父事之, 十年以長, 則兄事之, 五年以長, 則肩隨之.]"라고 하였고, 《예기》 〈왕제(王制)〉에 "도로에서 남자는 오른쪽으로 가고 부인은 왼쪽으로 가며 차는 중앙으로 다닌다. 아버지 연배의 사람을 만나면 그 뒤를 따르고, 형의 연배의 사람을 만나면 나란히 가되 약간 뒤에 처져 따라간다.[道路, 男子由右, 婦人由左, 車從中央, 父之齒隨行, 兄之齒雁行.]"라고 하였다. 형체[荊棣] 형(荊)은 자형(紫荊)나무로 일명 박태기나무이며, 체(棣)는 상체(常棣)로, 형체(荊棣)는 형제간을 비유한다. 옛날 전진(田眞)의 삼형제가 분가(分家)하면서 집에 있던 자형나무까지 삼등분하여 나누어 갖기로 하자, 그 나무가 갑자기 시들었다. 전진의 형제가 이것을 보고 분가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자 다시 소생한 고사가 있어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로 쓰이며, 상체는 아가위 꽃으로, 《시경》 소아(小雅)의 상체(常棣)는 형제간에 우애하는 내용을 읊었기 때문에 형제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곧 교분이 두터워 형제간처럼 친하게 지냈음을 말한 것이다. 육소(蓼蕭) 육소(蓼蕭)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소(蓼蕭)의 "형에게 잘하고 아우에게 잘한다. [宜兄宜弟.]"라고 한 것을 가리킨 말로, 형제간에 화락하게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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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백헌유고서【이름은 희일(喜馹)이고 호는 매백헌(梅栢軒)이다. 한림(翰林) 오빈(吳賓)의 증손이다.】 梅栢軒遺稿序【名喜馹號梅栢軒。 翰林吳公賓之曾孫也。】 매백(梅栢) 오공(吳公)은 집 주위에 매화와 동백을 심어서 그 집을 편액하여 '매백헌(梅栢軒)'이라고 하였다. 대저 천하에서 유명한 나무와 기이한 화초로 정원을 채울 수 있는 것에 무슨 제한이 있겠는가마는 반드시 이 두 가지 나무를 편액으로 삼은 것을 통해 공의 뜻을 안다고 하지 않겠는가? 공은 낙천인(洛川人)이다. 5대의 휘 오척지(吳陟之)는 포의(布衣)의 선비24)로, 성종 조에 인정을 받아 당시에 고인(故人)으로 칭해졌다. 증조 휘는 빈(賓)으로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玉堂)25)학사에 배수되었다. 가풍과 세덕은 저절로 전함이 있어서 공의 성품은 방정·간고(幹固)하고 지조가 곧아 꼿꼿함을 짝할 자가 없었는데 일찍 정헌(靜軒) 고제봉(高霽峯)26) 공의 문하에 들어가 선생의 풍을 들었으므로 뜻이 고상하고 고아함이 예스러웠다. 자신을 검약으로 절제하여 일찍 과거의 업을 다스려 누차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마침내 예부(禮部)에 들어갔다. 늦게 시와 술을 좋아하여 세상에 뜻을 버리기를 흔쾌히 하였다.집에 거처할 때는 소박하고 번화한 문장을 섬기지 않았으며 제사에는 먼저 공경을 다 하고 항상 선친의 규약을 받들어 자제를 단속하였다. 사시(四時)의 제사27)와 기절(忌節)의 제사에 하나같이 가례를 준수하여 효사(孝事)를 다하였다. 공의 부모는 정유년(1597, 선조30) 왜의 변란에 아버지가 패하여 죽자 어머니가 절의에 순국하였다. 공은 항상 부모님 기일에 한 달 동안 소식[素食]28)하고 울기를 상을 당한 처음처럼 하였다. 항상 그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의 부모님 상에는 장례의 예를 할 수 없었으니 사람의 자식이 죽도록 그 고통이 어떠하였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 흰 두건과 흰 띠를 하고 흰 관에 주검을 거두어 대나무 수레에 싣고 돌아가 선조의 무덤에 부장(附葬)하는 게 좋겠다."라고 하였다. 자손이 마침내 남긴 유훈을 어기지 못하였다.공은 고문(古文)을 좋아하고 시 짓기를 잘하였으나 시를 지으면 번번이 원고를 버렸기 때문에 집에 전하는 시가 없었다. 공이 죽은 지 10여 년 뒤에 공의 장손이 공이 어려서 지은 정식시(程式詩) 약간 편을 난고(亂藁) 중에서 수습하여 책에 정서하여 와서 내게 보여주었다. 아! 내가 17세에 공의 문하에 들어갔고 서른에 공의 상을 입었는데, 그 사이 10년여에 공의 뜻과 행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몇 편의 과거 시[科詩]로 어찌 공의 평생을 다 엿볼 수 있겠는가? 아! 세상에 말을 기록하는 군자가 없으니 공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묻혀 초목과 함께 썩게 하여 들을 수 없으니 슬프다. 삼가 책의 끝에 경개(挭槩)를 대략 쓴다. 梅栢吳公。 環室植梅栢。 扁其軒曰'梅栢'。 夫天下之名樹奇卉。 可爲庭實者何限。 而必以斯二者爲扁擧。 此可以知公之志矣非耶? 公洛川人。 其五世諱陟之以布衣見知于我成廟。 成廟以故人稱之。 曾祖諱賓以抄年擢科。 拜玉堂學士。 其家風世德。 自有所傳。 而公性質方直幹固。 耿介不羣。 而早登靜軒高公之門。 得聞霽峯先生之風。 故志尙雅古。 律己儉約。 早治擧子業。 屢魁鄕擧而竟屈禮部。 晩好詩酒。 遺棄世意欣然也。 居家朴素。 不事藻華。 祭先極其敬。 常作奉先規儀。 以戒子弟。 四時之祀。 忌節之祭。 一遵家禮。 盡其孝思。 公之考妣。 以丁酉倭奴之變。 考逝於衂。 妣殉於節。 公常於考妣忌辰。 一月茹素。 涕泣如喪初。 常戒其子孫曰: "吾親喪不能斂以禮。 人子終身之痛如何哉? 吾死之後。 素巾素帶。 斂以素棺。 擔以竹車。 歸附先兆可也。" 子孫竟不能違遺敎焉。 公好古文善屬詩。 有所述輒棄其稿。 故家無傳焉。 公沒之後十年。 公之適孫再發搜得公少時程式詩略干篇于亂稿中。 繕寫于冊。 來示不佞。 嗚乎! 不佞十七登公門。 三十含公喪。 其間一紀。 備知公之志行。 數篇科詩。 奚足以盡公之平生耶。 嗚乎。 世無記言君子。 使夫公之操履。 泯泯焉與草木同朽而無聞悲夫。 謹略書其挭槩于卷末云。 포위(布韋) 포의위대(布衣韋帶)의 준말이다. 베로 지은 옷과 가죽으로 만든 띠로, 가난한 선비의 복식을 말한다. 여기서는 가난한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 쓰고 있다. 옥당(玉堂) 문학하는 선비들이 거처하는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고제봉(高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다. 고경명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 또는 태헌(苔軒)이다. 광주 압보촌(鴨保村)에서 출생했다. 1552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 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핵 하였다가 울산 군수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 박광옥(朴光玉) 등과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7월 왜적에 맞서 싸우다 아들 고인후(高因厚) 등과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갑자모의록 서(甲子募義錄序)》 사시(四時)의 제사 절기나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조선조에서는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冬至)·납일(臘日) 등의 속절(俗節)에 사당이나 선영(先塋)에서 제사 지냈다. 소식(素食) 죽음을 애통하여 밥을 먹을 적에 고기반찬을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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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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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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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성암29)집서【이름은 수인(壽仁)이고 호는 성암(惺庵)이다. 청련(靑蓮) 후백(後白)의 손자로 인조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역학(易學)에 침잠하여 생을 마쳤다.】 惺庵集序【名壽仁號惺庵。 靑蓮後白之孫。 仁廟朝登第不仕。 沉潛易學而終。】 호남(湖南)은 실로 우리 조선 사대부의 기북(冀北)30)이다. 현인 군자의 배출이 앞뒤로 서로 접하여 끊이지 않았다. 학자의 정전(正傳)을 칭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선배가 모두 기존재(奇存齋)31)를 수장으로 추존하였다. 존재의 학문은 퇴도(退陶)32)에서 나왔고, 퇴계의 전함은 주자(朱子)33)에 근본한다. 세상에서 도를 알지 못하고 구이지학(口耳之學)34)이나 강기(强記)를 학문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퇴계를 흠잡으면 주자에게 의양(依樣)하는 것을 병통으로 삼고, 존재를 말하면 퇴계를 신봉하는 것을 하자로 여겼으니 내가 비록 불민하나 일찍이 깊게 병통으로 여겼다. 년 전에 안정동(安靜洞)의 정은당(靜隱堂)에서 성암(惺菴) 이문(李文) 어른을 뵙고 논함이 이 일에 미쳐서 공이 추연(愀然)이 말하기를 "거경궁리(居敬竆理)는 체가 있고 용이 있는 학문이니 크게 중정(中正)하여 지극한데 그치고, 치우치고 기울지 않은 것은 공자·맹자[鄒魯]35)의 뒤에 주자가 크게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육자정(陸子靜) 형제36)와 같이 총명하고 통달·박식하여도 오히려 교수병행(交修並進)의 바름에서 중정을 얻지 못하고 일변에 치우치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오직 퇴계가 나라의 변방인 편벽한 지역에서 태어나 선생과 수백 년 떨어져 있었음에도 잔편(殘編)의 진간(陳) 중에 그 종지를 얻었다.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친히 가르침을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기존재가 한 번 만나 짧고 간단한 말 사이에서 대의를 얻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나머지에 도(道)의 전수(傳受)가 땅의 원근(遠近), 만남의 소삭(踈數)에 달려 있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알아주지 않는다는 책망은 본디 말할 것이 못 되고 후학들이 독실하게 믿고서 의심하지 않아서 마땅히 더욱 정밀하였으니 아! 누가 이 말을 알아서 학문의 요결을 주었겠는가?"라고 하였다.대개 일찍이 공의 학문을 들여다보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의 사이에서 감발한 것이 많았다. 이 때문에 주문(朱文)37)을 위주로 독송하고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38)를 귀착점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주역(周易)》39)을 묵묵히 궁구하여 주자(朱子)의 《계몽(啓蒙)》40)을 요지로 삼았고, 《역학계몽》을 읽을 때는 퇴계 이황의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41)를 지남(指南)으로 삼았다. 그 치도(治道)를 논하면 치심으로 천하의 근본을 삼고, 치심(治心)을 논하면 거경을 궁리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말이 〈사직봉사(辭職封事)〉에 대략 보인다.평소에 산수 사이에서 그윽한 정(貞)을 좋아하여 한가하게 사물을 읊은 시 구절에 나오는 것이 순수하고 단정하니 또한 마음가짐에 법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궁벽진 산골짜기에 빛을 숨기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임에도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는 본디 모난 행동이나 겉치레가 없고, 범인들과 말함에 한마디도 학문을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자들은 물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지목하였고, 공을 모르는 자들은 범연하게 이름있는 사대부(士大夫)로 논하였으나 세상에 도를 아는 자가 드물었으니 어찌 탓할 것이 있겠는가?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학에 뜻을 두고 스스로 독실하게 믿어서 장차 큰일을 할 날이 있었는데 문득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문을 맡길 곳이 없고 학문을 전할 자가 없어서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잡지(雜紙)·난고(亂藁) 가운데 섞이고 없어지고 흩어졌는데 소장(疏章)과 시율(詩律) 약간 편을 그 이웃 동자들이 뽑아 기록해 보관하였다.공의 생질 신성필(愼聖弼)42) 군이 수집하여 출판하여 전하려고 하면서 내가 일찍이 공이 학문을 논한 나머지를 미리 들었다고 하여 원고를 보내 보여주었다. 아!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으나 말은 그의 덕을 믿는 데 필요하지 않다. 공은 평소에 박학(博學)으로 이치를 궁구하고 거경(居敬)으로 마음을 보존하여 은미(隱微)하고 유독(幽獨)한 가운데에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살았으니43) 한두 문자를 전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고 전하지 않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어도 또한 좋을 것이요 알아주지 않아도 또한 해될 것이 없다. 이 때문에 공이 논한 나머지의 몇 마디 말에서 예전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이렇게 돌려보내 공의 심학(心學) 유래의 일부를 전한다. 湖南實我朝士大夫之冀北也。 賢人君子之出。 前後相接不斬。 至以學者正傳稱之則先輩皆推奇存齋爲首。 存齋之學。 出於退陶。 退陶之傳。 本之朱子。 世之不知道而以口耳强記爲學者。 疵退陶則以依樣朱子爲病。 說存齋則以崇信退陶爲玷。 愚雖不敏。 竊嘗深病。 年前拜惺菴李文丈于安靜洞之靜隱堂。 論及此事。 公愀然曰: "居敬竆理。 有體有用之學。 大中至止。 不偏不倚者。 鄒魯之後。 朱夫子爲大成。 當時幷生于一世者。 聰明達識若陸子靜兄弟。 尙不能得中於交修並進之正。 不自知其偏入于一邊。 惟退陶生于惟退陶生于邦僻海之間。 遠先生數百年而得其宗于殘編陳之中。 遊退陶之門。 親承耳提面命者。 不一其人。 而存齋能得其大意於一面片辭之間。 往來尺牘之餘。 則道之傳授。 固不在於地之遠近見之踈數者如此。 不知之誚。 固不足言。 而後學之篤信不疑。 當益密矣。 嗚呼! 誰知斯言也而與之訣哉?" 盖嘗窺公之爲學。 感發於退存之間者多矣。 是以讀誦專主朱文。 而以退陶節要爲歸重。 默究周易而以朱子啓蒙爲要旨。 讀啓蒙則以退陶傳疑爲指南。 其論治道則以治心爲天下國家之本。 論治心則以居敬爲竆理之標準。 而其言略見於辭職封事矣。 雅好山水間幽貞而出於吟閑咏物之句者。 淸粹端潔。 亦可以知其心操之有法矣。 嗚呼! 潛光於潛光於山絶壑之中。 世無知者。 而其對衆人。 固無崖異之行邊幅之修。 與凡人言。 片語未嘗强及於學文。 是以知公者。 以恬退淸淨目之。 不知公者以汎然名士大夫論之。 世之知道者鮮矣。 安足怪哉? 所可惜者。 有志斯學。 方自篤信。 將大有爲之日。 而奄忽長逝。 傳家無托。 承學無傳。 平日著述。 渾沒於雜紙亂藁之中而散失之。 其疏章及詩律如干篇。 其隣里童子抄錄而藏之。 公之甥愼君聖弼求得之。 將欲倩工剞劂而傳之。 以不佞嘗預聞其論學之緖餘。 寄稿本以示之。 嗚乎! 有德者必有言。 言不必信其德。 公之平日若能博學而平日若能博學而其理。 居敬而存其心。 隱微幽獨之中。 人所不見之地。 仰不愧俯不怍。 則一二文字。 傳亦可矣。 不傳亦可矣。 人之知之。 固亦善矣。 不知之。 亦不足傷矣。 是以書其曩日得聞于公之餘論數言于玆以還之。 以白公心學所自之萬一云。 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의 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이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이다.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 좌랑, 정언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기북(冀北) 기북은 준마(駿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인재가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온조처사서(送溫造處士序)〉에 "백락이 말의 고장인 기북 지방을 한번 거쳐 가자, 말 떼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구절이 보인다. 기존재(奇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존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이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0년에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2년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공조 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인해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에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34년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단양 군수(丹陽郡守), 풍기 군수(豊基郡守),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훈도하였다. 주자(朱子) 주희(朱熹, 1130~1200)로,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등이며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부른다. 구이지학(口耳之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을 이른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서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추로(鄒魯) 추(鄒)는 맹자의 고향이고, 노(魯)는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와 맹자를 가리킨다. 육자정(陸子靜) 형제 남송의 사상가들인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육구령(陸九齡, 1132~1180) 형제를 말한다. 육자정은 육구연으로 자정은 그의 자이고, 호는 상산(象山),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무주(撫州) 금계현(金谿縣) 사람이다. 육구연은 '심즉리(心卽理)'의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을 주창하여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에 대항하였는데, 이때부터 유학은 심학(心學)과 이학(理學)의 두 학파로 갈라졌다. 뒤에 육구연의 학문은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였다. 육구령은 자가 자수(子數)인데 세칭 복재선생(復齋先生)으로 불렸다. 동생 육구연과 사우(師友)가 되어 아호(鵝湖)에서 강학하면서 '이륙(二陸)'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교수(全州敎授) 등을 역임하였다. 유학에 깊은 성취를 거두어 당시 사람들에게 '해내유종(海內儒宗)'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주문(朱文) 주희(朱熹)의 글을 가리키기도 하고, 시호가 문(文)인 주희를 바로 지칭하기도 한다.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지은 책이다. 이상정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외조부인 이재(李栽)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11)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예조 참의 등을 지냈다. 저술로 《대산집》·《이기휘편(理氣彙編)》·《사칠설(四七說)》·《제양록(制養錄)》·《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등이 있다. 《주역(周易)》 사물의 변화하는 현상을 예측하는 점서(占筮)로, 고대로부터 《연산역(連山易)》·《귀장역(歸藏易)》·《주역(周易)》 등 세 가지의 역(易)이 있었는데, 앞의 두 가지 역은 없어지고 《주역》만이 후대에 전해졌다. 《주역》은 음양의 두 효(爻)를 세 개씩 중첩하여 만든 8개의 괘와, 8개의 괘를 겹쳐 만든 64개를 근간으로 하여, 매 괘마다 괘사(卦辭)가 있고, 괘마다 6개의 효가 있고 효마다 효사(爻辭)가 있다. 《계몽(啓蒙)》 주희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인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한다. 4권 으로 구성하여 1186년에 완성했다. 주희는 《주역본의》 12권을 통해 점서와 의리를 융합하여 《주역》의 본의를 밝히려 했으며, 《역학계몽》에서는 역의 도식, 점서에 대한 수리적 설명에 주력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일찍이 간행되어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으며 역대 왕들이 강독했다.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이황(李滉)이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대해서 변석(辨釋)한 책인데, 모두 1책으로 되어 있다. 신성필(愼聖弼) 자는 여뢰(汝賚)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다. 감사를 지낸 신희남(愼喜男)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신광익(愼光翊)이고, 형은 참봉 신성윤(愼聖尹)이다. 사람들이 …… 살았으니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仰不愧]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俯不怍]는 내용으로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보인다.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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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금강중수계서 錦江重修禊序 금강(錦江)에는 예전에 11인 계가 있었는데 대개 난정(蘭亭)의 옛일44)을 행하는 것이었다. 시대를 헤아려보면 우리 중종·인조·명종의 삼대 태평 문명 이백여 년을 당하여 남쪽의 형세에서 우리 고을이 최고였다. 때는 곧 우리 고조할아버지 백중(伯仲)씨와 정자(正字) 임붕(林鵬)45)과 주부(主簿) 나일손(羅逸孫)46) 등 여러 선비가 불계(祓禊)의 모임을 약속하였다. 난새와 봉황이 나는 듯한 것은 승정원 박우(朴佑)47)의 글씨요, 맑은 대나무, 소나무 마음이라고 한 것은 즉 사간원 나일손의 시이니 한 시대의 풍채와 운치를 상상할 만하였다. 이것을 이어서 연파(烟波)48),사암(思庵)49) 두 선생이 밭 갈고 낚시질한 여가와 공퇴(公退)한 틈에 부로(父老)들과 손을 잡고 앞 사람들이 하던 일을 잘 닦아,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돈독해졌으나 불행하게도 섬 오랑캐의 변란으로 6년 동안 전쟁을 치렀으니 대개 만력 정유년(1597, 선조 30)부터 친목을 닦는 믿음이 폐하여 강학을 할 수 없었다.지난 모년 사이에 우리 대부공(大父公)께서 개연히 향당(鄕黨)의 노소(老少)들을 불러서 옛 뜻을 대략 기술하고, 그 불계의 일을 이어서 행하니 전에 계를 받은 후손들이 비록 한 자리에 다 모이지는 못하였지만 온화하고 돈독한 풍은 고을에 진동하였다. 숭정(崇禎)의 말에 시사(時事)가 어려움을 당하여 선배 부형이 연달아 서거한 후에는 이어 가지 못한 것이 여러 해 되었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간 뒤 21년 을사년(1665, 현종6)에 만영(萬英)이 영평(永平)50)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향당의 여러 부로가 소매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내가 보니 우리 작은 아버지와 상사(上庠) 정국현(鄭國賢)51)이 구계(舊禊)를 중수(重修)한 계첩이었다. 두 번 절하고 공경히 열람해보고는 한참동안 슬퍼하였다.또 공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계(社禊)52)의 모임은 대개 주나라의 불계(祓禊)53)의 예와 낙읍(洛邑)의 유상(流觴)의 의례54)를 시조로 하였고, 위진(魏晉)시대 후에는 회계(會稽)의 승사(勝事)55)가 천고에 웅대하게 울려 퍼졌는데 그 실제를 상고해보면 청담(淸談)56)일 뿐이요, 시와 술일 뿐이니 어찌 족히 명교(名敎)의 도57)라고 하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금강(錦江)의 계(禊)는 특히 따뜻한 봄날에 복숭아꽃이나 즐기는 것을 경계로 삼았으니, 당일 군자들이 근본을 돈독히 하고 의리를 숭상하여 강마(講磨)로써 인(仁)의 실제로 삼았음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장로들 사이에서 교유하며 준조(樽俎)의 반열에서 읍양(揖讓)하던 자들이 조정에 나가서는 태평성대의 우의(羽儀)58)가 되었으니 이양(二養) 상국(相國)59)이 있었고, 뛰어넘어서는 봉황이 천인(千仞)의 절벽을 비상하는 것과 같았으니 청심(淸心)의 고사(高士)60)가 있었다. 그 향음주례(鄕飮酒禮)61)에서 오르고 내릴 즈음에 덕성을 훈도하고 장액(奬掖)·보도(輔導)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지금 공들이 백 년의 사업을 창시하여 전현(前賢)의 일을 따르니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대체 모르겠지만 봄·가을 좋은 날에 잔을 잡고 높은 곳에 올라가 풍류를 드날렸던 것뿐이었겠는가? 장차 진퇴(進退)할 때 읍하고 사양하고, 겨울에는 예를 닦고 여름에는 시를 지으며 옛 법도를 잘 닦으려고 한 것인가? 관혼상제(冠昏喪祭)의 경조사에 그 정을 다하고 착함에 힘쓰며 허물을 보완하여 출입에 심력을 다하고 우리 향당의 예의와 겸양의 풍을 빚어내어 우리 옛 선대의 부형과 제군자(諸君子)의 책임에서 죄를 얻지 않도록 한 것은 우리 11계원 중에 제공들이 아니겠는가? 또 한마디 말을 하자면 오직 옛 11계원의 자손이 우리 고을에 거처하는 데에 무슨 제한이 있겠는가마는 무슨 까닭에 선조의 금란지교(金蘭之交)와 같은 한마음으로 사귄 정을 망각하고 서로 보기를 진나라와 월나라처럼 멀게 여기는가?62) 이것을 우리 계원들이 서로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모두 대답하기를 "우리가 규약을 공경히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그 말들을 기록하여 책의 머리말로 삼는다. 錦江古有十一人禊。 盖修蘭亭舊事也。 以時世較之。 當我中仁明三聖代。 太平文明二百年餘。 南中形勝。 我州爲最。 時則我高王父伯仲氏曁林正字鵬,羅主簿逸孫諸彦。 約爲祓禊之會。 鸞翔鳳翥則有朴銀臺筆。 竹淸松心則有羅諫院詩。 一代風韻。 于可想矣。 繼此之後。 烟波,思庵二老先生耕釣之暇。 公退之隙。 相携父老。 克修前事。 久益敦厚。 不幸島夷之變六載兵燹。 盖自萬曆丁酉。 修睦之信廢而未講。 往在某年間。 我大父公慨然囑鄕黨老少。 略述古意。 繼修其事。 前修後昆雖未克盡會一席。 而和厚之風。 動曜州里。 崇禎末時事艱憂。 而先進父兄踵武而逝後。 無有繼而述之者有年矣。 皇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 萬英自永平還鄕。 鄕黨諸老袖一冊子來叩。 余目之。 卽我季父公與鄭上庠國賢重修舊禊券也。 再拜敬閱。 愴然久之。且諗于諸公曰: "社禊之會。 盖祖于成周祓禊之禮。 洛邑流觴之儀。 魏晉之後。 會稽之勝。 雄鳴千古。 而夷考其實則淸談而已。 詩酒而已。 安足爲名敎道哉? 惟我錦江之禊。 特以桃花爛春爲戒。 則當日諸君子敦本尙義。 講磨以仁之實可見矣。 是以從遊長老之間。 揖讓樽俎之列者。 出而爲聖代羽儀則有二養相國。 超而爲鳳翔千仞則有淸心高士。 其薰陶德性。 奬掖輔導於旅酬登降之際者。 爲如何哉? 今諸公刱百年之業。 遵前賢之事。 可謂美矣。 抑未知春秋令日。 把盃臨高。 漂蕩風流而已耶? 將揖遜進退。 冬禮夏詩。 克修古轍之能 一作務 爲耶? 冠昏喪祭。 慶吊之盡其情。 勖善補過。 出入而一乃心。 釀出吾鄕黨禮讓之風。 毋得罪於吾古先父兄諸君子之責。 其不在吾社中諸公耶? 抑有一說。 惟古禊一十一員之子孫。 居吾鄕者何限。 而何故忘祖先一心交契之如金蘭。 而相視之如秦越哉? 此尤吾禊中所相誡者也。" 僉曰: "敬服吾子規。" 仍錄其語。 弁諸卷首云。 난정(蘭亭)의 옛일 난정에서 수계(修禊)한 일로, 수계는 물가에서 노닐면서 불길한 재앙(災殃)을 미리 막던 풍속이다. 보통 3월 3일에 행하였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 수계(蘭亭修禊)는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353) 삼월 삼짇날, 즉 상사일(上巳日)에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 42인의 명사(名士)가 난정에서 모여 수계를 행한 뒤에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성대한 풍류를 즐긴 계회가 있었는데,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보인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古文眞寶 後集 권1 蘭亭記》 임붕(林鵬) 1486~1553. 임붕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귀래당(歸來堂),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호남병마우후(湖南兵馬虞候)를 역임한 임평(林枰, 1462~1522)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5)에 생원이 되었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일파가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구하기 위하여 상소하고 생원의 신분으로 태학의 제생(諸生) 240여 명을 거느리고 대궐 문밖에 기다리면서 명령을 기다렸는데, 사적이 기묘당적(己卯黨籍)에 있다. 1521년(중종16)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경주 부윤에 이르렀다. 나일손(羅逸孫) 나창(羅昶)이다. 신유년(1501)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5위에 합격하였고, 경오년(151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에 급제하였다. 1522년에 지평(持平)을 제수받았다가 서경(署經)할 때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체직되고, 그 뒤 형조 정랑(刑曹正郞), 사옹원 주서(司饔院注書)를 지냈다 박우(朴祐) 1476~1546.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본관은 충주이다.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고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아우이며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아버지이다. 1510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이후 내직으로는 전적(典籍)·승지·대사성·이조 참의·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남원 부사(南原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 해주 목사(海州牧使),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김안로(金安老), 허확(許確), 허항(許沆) 등 간신(奸臣)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주로 외직을 많이 지냈다. 연파(烟波) 박개(朴漑, 1511~1586)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처사(烟波處士)로 박우(朴祐)의 아들이다. 향시에 합격하고 명종 때 선공감 주부·참봉·고산 현감(高山縣監) 등을 지냈다. 선조 때 암행어사가 되었고, 김제 군수를 지냈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서경덕의 문인이다. 1553년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하여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1572년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다. 영평(永平) 전라도 나주(羅州) 남평현(南平縣)의 다른 이름이다.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었는데, 신라가 현웅(玄雄)이라 고쳐서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남평현으로 고쳐서 나주에 소속시켰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全羅道 南平縣》 정국현(鄭國賢) 1592~?. 자는 이보(而寶)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1624년 식년시 생원 3등 50위로 합격하였다. 사계(社禊)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토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불계(祓禊) 삼월 상사절(上巳節)에, 재액을 털어 버리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낙읍(洛邑)의 …… 의례 3월 삼짇날 문인(文人)들이 모여서,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잔을 띄우며 시(詩)를 짓고 노니는 잔치를 말한다. 《진서(晉書)》 〈속석전(束晳傳)〉에 "진 무제(晉武帝)가 3월 삼짇날 곡수(曲水)하는 뜻을 묻자 속석(束晳)이 말하기를 '옛날에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성을 쌓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으므로 일시(逸詩)에 술잔은 물결을 따라 흐르네.'[羽觴隨波流.]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의 모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하였다. 회계(會稽)의 승사(勝事) 영화 9년 삼짇날 왕희지(王羲之)가 당시의 명사(名士) 40여 명과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모임을 갖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를 즐겼던 일을 〈난정기(蘭亭記)〉라는 글로 기록해 놓았다. 《古文眞寶後集 권1》 청담(淸談) 육조(六朝) 시대에 유행했던 자연주의적 또는 본능주의적 사상가의 일파를 청담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조술(祖述)하여 세속의 일을 떠나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고, 유가의 도덕이나 예의를 무시하고 감정에 따라 유유자적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겼다. 《二十二史箚記 六朝淸談之習》 명교(名敎)의 도 명교는 곧 인륜 도덕의 가르침을 말한다. 진(晉)나라 말기에 이른바 팔달(八達)이라고 일컬어졌던 호무보지(胡毋輔之), 사곤(謝鯤), 완방(阮放), 필탁(畢卓), 양만(羊曼), 환이(桓彛), 완부(阮孚), 광일(光逸) 등 여덟 사람이 예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청담을 나누며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놀아서 방달(放達)하기로 유명했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옷을 다 벗고 알몸을 내놓은 자까지 있었다. 그래서 악광(樂廣)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명교 안에 절로 즐거운 땅이 있는 법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名敎中自有樂地, 何爲乃爾也?]"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우의(羽儀) 지위가 높고 재덕이 있어 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뜻한다. 《주역》 〈점괘(漸卦) 상구(上九)〉에 "기러기가 공중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그 깃이 의법이 될 만하니 길하다.[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라고 하였다. 이양(二養) 상국(相國) 이양(二養)은 이양정(二養亭)을 말하고 상국은 박순을 가리킨다. 박순의 별업(別業)인 이양정은 영평현(永平縣) 영평천(永平川) 가에 있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행장에 따르면, 박순은 1586년 8월에 휴가를 얻어 백운계(白雲溪) 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세상일을 끊었는데, 그곳에 배견와(拜鵑窩)·이양정(二養亭)·청랭담(淸冷潭)·창옥병(蒼玉屛) 등의 명승지가 있다고 하였다. 《白沙集 卷4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朴公行狀, 韓國文集叢刊 62輯》 청심(淸心)의 고사(高士) 연파처사(烟波處士) 박개(朴漑)를 가리킨다. 향음주례(鄕飮酒禮) 삼대(三代)부터 있던 예(禮)로, 한 고을의 사람 중에서 덕이 있는 노인을 빈객(賓客)으로 삼아 거행하는 의례이다. 《의례》 〈향음주례〉에 "문에 들어온 다음, 주인이 빈(賓)과 세 번 읍하고 계단에 이르러 세 번 사양하면 주인이 먼저 당에 올라가고 빈이 뒤에 올라간다. 주인이 당 위의 동쪽 계단 위쪽에서 미(楣) 아래에 위치해 북향하여 재배하면 빈은 당 위의 서쪽 계단 위쪽에서 미 아래에 위치해 북향하여 답배한다.[主人與賓三揖, 至于階, 三讓, 主人升, 賓升, 主人阼階上當楣北面再拜, 賓西階上當楣北面答拜.]"라고 하였다. 진나라 …… 여기는가 진나라는 중국의 서북쪽에 있고 월나라는 동남쪽에 있으므로, 서로 멀리 떨어져서 관계가 소원하다고 하여 관심 없이 냉담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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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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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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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고서재제생명적록서 九臯書齋諸生名籍錄序 병신년(1656, 효종7)년에 내가 비로소 도내 옛 고을 아홉 개의 언덕63)과 네 개의 샘64) 물가로 이사를 했다. 들과 언덕은 비록 소박하나 계곡의 세(勢)는 쟁반처럼 휘돌아 진실로 농부와 시골 늙은이가 여기에서 나를 곧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얻었다. 다만 언덕과 산은 멀고 궁벽지고, 이웃은 떨어져 있어 고요하고, 호미 매고 깊은 샘에서 물을 마시는 밭두둑 사이의 즐거움은 비록 있었으나 경서를 끼고 토론하여 강마(磋磨)의 보탬이 결핍된 것은 한스러웠다. 계묘년(1663, 현종5) 봄에 고을의 어린 유생들이 서실(書室)을 만들면서 몇 사람이 와줄 것을 청하였는데 내가 그들의 간청을 저버리지 못하고 이내 허락하였다.다음 해 갑진년(1664, 현종6)에 집이 완성되었는데 한 채는 건구(乾邱)의 남쪽에, 그 면을 손(巽)으로 하고 있어서 이름을 '양정(養正)'이라고 하였고, 다른 한 채는 곤구(坤邱)의 북쪽에, 그 앞을 간(艮)으로 하고 있어서 '열락(悅樂)'이라고 편액하였다. 대개 낮고 평평한 4개의 산은 쭉 뻗어 여러 빼어난 산을 받아들여 호남의 서석산(瑞石山)·월출산(月出山) 같은 명승지와 금성산(錦城山)·개천산(開天山) 같은 산의 수백 봉우리가 처마에 나열해있어 이른바 구고(九臯)·사천(四泉)이 그 사이에서 들쭉날쭉하니 이것이 지세의 아름다움이었다.초가집이 새로 완성되니 주렴과 기둥은 단정하고 곧고, 소박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야박하지 않았다. 종이창은 밝고 깨끗하고 궤안은 따라서 가지런하였으며 때때로 유생들과 조용히 마주 앉아 순정(淳正)한 《시서(詩書)》와 정결(淨潔)한 《주역(周易)》 그리고 경(經)은 같고 전(傳)이 다른 공맹[鄒魯]65)과 제자백가, 고금의 사가들의 서적에 실린 치란(治亂)을 다 거두어 함께 목전에 모아두니 비록 방의 깊은 곳[閫奧]에 잠기지는 못하더라도 그 대강을 거의 씹을 수 있어서, 맛이 없어도 맛이 있고 파하려고 해도 파할 수 없었으니66) 이것이 재당(齋堂)의 온당함이었다.게다가 관자(冠子)와 동자(童子)가 반열을 달리하여 의대(衣帶)가 가지런 하고, 액황(掖黃)과 피마(披麻)의 복장을 하고 조석으로 상종하여 유유(愉愉)하고 절절(切切)67)하게 서로 의(義)를 권장하니 이것이 내가 비록 사표(師表)의 모범은 없지만 여러 유생이 청아(菁莪)의 즐거움68)이 있다는 것이었다. 혹 봄·가을의 볕 좋은 날에는 바람과 볕이 최고 좋으니 장자(長者)가 선창하고 소자(少者)가 화답하였고, 경을 읽은 여가에 계속해서 시를 읊고, 시를 읊은 나머지에는 약간의 술 마시기를 명하여 술이 거나해지면 몇 곡조 가야금을 타고 기분이 적당해지면 그만두었다. 현악기를 따라서 즐겼으니 여기에서 유생과 더불어 서로 따르는 뜻이 세속의 비루한 것에 있지 않고 떳떳한 정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두 언덕의 서재를 합하여 이름 붙이기를 '구고서재(九臯書齋)'라고 하였다.하루는 유생들이 작성한 책을 쌓아놓고 책에 유생들의 성명을 쓰기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산야의 사람이 밭두둑 사이에서 서로 따르니 다른 가숙(家塾)·향상(鄕庠)에서 이름을 기록하는 일과는 다르다. 우선 버려두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유생들이 말하기를 "공부하는 친구가 이미 많고 규약이 조밀하지 않으니 언행이 혹 괴오(乖誤)에서 잘못되고 실덕(實德)이 방탕하고 태만함에 귀착됨이 있습니다. 이에 종이에 성명을 연명으로 기록하여 보는 자가 손가락으로 지목하면서 '누구는 학업에 부지런하고 누구는 학업에 태만하며 누구는 공손하고 누구는 믿음이 있다.'라고 하여 두려워하고 성찰하는 마음이 이것으로부터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름을 기록하는 것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서적을 갖추고 있는 당(堂)과 실(室) 사이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모든 예절을 시행하되 반드시 유사(有司)를 두어 주관하게 한다면 표를 붙여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 반드시 책에 이름을 쓰게 하는 데에서 비롯될 것이니 지금 대략 여씨향약(呂氏鄕約)69)의 문서에서 착함(善)·허물[過]을 기록하는 규칙을 대략 모방하고자 합니다. 큰 잘못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떠하신지요?"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그 책의 머리에 시말(始末)의 정황을 기록한다.갑진년(1663, 현종4) 11월 16일 남교로포(南郊老圃) 쓰다. 丙申歲。 余始移占新棲于道民古縣九臯之中四泉之畔。 郊原雖朴。 谷勢盤旋。 眞農夫野翁爰得我直之地也。 顧邱山敻僻。 隣比闃絶。 荷鋤浚泉。 雖有畎畝之樂。 挾經討論。 恨乏磋磨之益。 在癸卯春。 鄕之章甫少年請構書室而往來者如干人。 余不敢孤其懇。 乃許之。 越明年甲辰舍成。 一在乾邱之陽而巽其面。 命名養正。 一在坤邱之陰而艮其前。 扁之以悅樂。 盖四山低平。 延納羣秀。 湖中名勝若瑞石,月出。 若錦城,開天諸山數百峯巒。 羅列乎軒牖。 而所謂九臯四泉參錯其間。 此地勢之美也。 茅屋新成。 簾楹端直。 朴而不侈。 儉而不野。 紙窓明淨。 几案斯整。 時與諸生。 對坐從容。 詩書之淳正。 大易之潔淨。 鄒魯諸子。 同經異傳。 古今史氏。 載治籍亂。 具收幷擧。 擧集目前。 雖不敢深潛乎閫奧。 庶幾乎咀嚼其粗粕。 無味而有味。 欲罷而不能。 則此齋堂之穩也。 至於冠童異列。 衣帶有秩。 掖黃披麻。 曉暮相從。 愉愉切切。 相勵以義。 則此余雖無師表之範。 而諸生有菁莪之樂者也。 而或春秋景明。 風日最佳。 長者唱而少者和。 讀經之暇。 繼以哦詩。 哦詩之餘。 命以醺盃。 醺盃之極。 數聲鳴琴。 適性而止。 隨絲而樂。 則此吾與諸生相隨之意。 不在世俗之鄙陋而出於常情者也。 於是合二臯之齋而命之曰'九臯書齋'。 一日諸生疊成卷。 請書諸生姓名於冊。 余曰: "山野之人。 相隨於畎畝之間。 異他家塾鄕庠籍名之擧。 姑舍是如何?" 諸生曰: "朋友旣衆而規約不密。 則言行或失於乖誤。 實德有歸於蕩慢。 玆欲列書姓名於紙。 使見之者。 指點而目之曰: '某也勤於業。 某也慢於學。 某也悌而某也信。' 恐懼修省之心。 從玆而生。 書名不爲無助。 况乎堂室之間。 書籍之具? 凡百施爲禮節。 必有有司焉主之。 則付標眼目。 必資於名卷。 今欲略倣呂氏鄕約之籍。 錄善紀過之儀。 似不甚失何如?" 余曰: "諾。" 仍書始末于其卷首云。 甲辰至月旣望。 南郊老圃識。 아홉 개의 언덕 김만영은 태극(太極)과 팔괘(八卦)의 이름을 따 자신의 집 주변에 있는 아홉 언덕을 '구고(九臯)'라 명명하고, 그곳에 '양정재(養正齋)'라는 이름의 서실(書室)을 지었다. 이에 대해서는 《남포집(南圃集)》 권4 〈구고음(九臯吟)〉 참조. 네 개의 샘 김만영이 자신의 은거 공간에 이름을 붙이고 이에 대해 읊은 〈구고음(九臯吟)〉 서문에, "앞에는 샘이 모두 네 곳 있는데, 당 앞에 있는 것은 '소양(少陽)'이라 하고, 감고 앞에 있는 것은 '태양(太陽)'이라 하며, 손고 앞에 있는 것은 '소음(少陰)'이라 하고, 이고 앞에 있는 것은 '태음(太陰)'이라 하였다.[前有泉凡四穴, 在堂前者名曰'少陽', 在坎臯前者曰'太陽', 巽臯前者曰'少陰', 離臯前者曰'太陰'.]"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南圃集 권4》 추로(鄒魯)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이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태어나고 맹자가 추나라에서 태어난 까닭에 공맹(孔孟)이나 공맹의 예교(禮敎)와 학문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를 가리킨다. 그만두려고 …… 없었으니[欲罷不能]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 그래서 그 공부를 그만두려고 생각해도 그만둘 수 없어서 나의 재주를 다하고 보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 보이긴 하는데,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그 길을 알지 못하겠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라고 말한 것이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유유(愉愉)하고 절절(切切) 절절은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로 붕우 간에 간절히 권면하는 것을 말한다. 자로(子路)가 진정한 사(士)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자 공자가 이르기를, "간절하게 권면하고 화목하게 지내면 사라 이를 수 있으니, 벗 사이에는 간절히 권면하고, 형제간에는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 切切偲偲, 兄弟, 怡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子路》 청아(菁莪)의 즐거움 청아는 인재를 육성함을 뜻한다.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새 밭 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 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여라.[菁菁者莪, 在彼中陵. 旣見君子, 錫我百朋.]"라고 하였는데, 모서(毛序)에 "청청자아는 인재를 육성함을 즐거워한 시이다."라고 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 중국 북송(北宋) 때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이다. 1076년 섬서성(陜西省) 남전현(藍田縣)의 여씨 문중에서 만들었으며, 뒤에 주자(朱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주자여씨향약(朱子呂氏鄕約)》이 만들어졌다. 주된 강목은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등이다. 조선 중종 12년(1517)에 중앙 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관에 의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 이이의 《서원향약(西原鄕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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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재학생계권서 三學齋學生契券序 "너는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의 도를 아는가?" "인(仁)과 의(義)일 뿐이다." "인의(仁義)의 이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인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육경(六經)70)《악경(樂經)》·《역경(易經)》·《춘추(春秋)》인데, 《악경》은 진(秦)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 없어지고 지금은 오경(五經)만 남아 있다.에 실려 있다." "그렇다면 인의를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육경의 문장을 익숙하게 익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이치에 되돌려서 몸소 행함이 독실하면 인의를 회복할 수 있어서 사람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육경의 문장을 익숙하게 익히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소학(小學)》을 토대로 하여 그 기초를 세우고 《대학(大學)을 참고하여 그 문에 들어가고 《논어(論語)》로 그 뿌리를 견고하게 하고 《맹자(孟子)》로 그 변화를 통달하고 《중용(中庸)》으로 그 오묘함을 다하여야 한다. 그런 후에 《시서(詩書)》에서 성인의 성정(性情)·달도(達道)를 구하고 《춘추(春秋)》에서 성인의 대경대법(大經大法)을 법 받고 《역경(易經)》에서 천지만화(天地萬化)의 굴신소장(屈伸消長)71)을 다하고 《예악(禮樂)》에서 천하 만물의 유물유칙(有物有則)72)을 관찰하고 역사의 글과 백가의 문장을 두루 통하여 고금의 사변, 문장·기예의 핵심과 지류를 통달하여야 한다. 그런 연후에 내 마음의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검약한 데에서 돌이켜 구하고 하나로 꿰뚫어서 만 가지를 통섭한다면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이라는 것이 천지와 더불어 참여하여 셋이 되어 상하가 함께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체(四體)가 나태해지고 심지(心志)가 방탕해져서 사적인 것을 품게 되고 욕심을 따르게 돼서 자포자기하고 방벽사치(放僻奢侈)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갖게 되고 말과 소에게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놓았다.'라고 할 것이니 사람이란 이름을 얻어도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 땅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두려워할지어다! 엄격히 해야 할지어다! 세상에서 장구(章句)와 문사(文辭)를 가지고 남의 이목에 아첨하여 영욕과 행운을 취하려는 자는 말세의 인간이니 말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근래에 파평(坡平) 윤숙(尹俶) 군, 영평(永平) 문만욱(文晩郁) 군, 진양(晉陽) 정기(鄭榰) 군, 파평(坡平) 윤선기(尹先夔) 군, 양천(陽川) 허겸(許謙) 군이 고을의 관동들과 함께 서사학재(書社學齋)를 약속하고 책에 그 이름을 나열하여 써서 영구의 계책으로 삼고자 맹세하였다. 내게 머리말을 써주기를 청하여 내가 사람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뜻을 대략 말하고 머리말에 인의(仁義) 두 글자를 써주어 책의 서문으로 삼도록 하였다.기해년(1659, 효종10) 늦가을 3월 30일 쓰다. "若知夫人之所以爲人之道乎?" 曰: "仁與義而已。" "仁義之理安在?" 曰: "具於心。" "仁義之道安在?" 曰: "載於六經。" "然則行仁義如何?" 曰: "熟講六經之文。 反之吾心之理而躬行之篤。 則仁義可復而不愧於爲人之名矣。" "然則熟講六經之文如何?" 曰: "本之小學。 以立其基。 參之大學。 以入其門。 論語以固其根。 孟子以達其變。 中庸以盡其妙。 然後於詩書而求聖人之性情達道。 於春秋而法聖人之大經大法。 於易經而盡天地萬化之屈伸消長。 於禮樂而觀天下萬事之有物有則。 傍通史氏之書。 百家之文。 以達古今事變。 文章技藝之株暢支分。 然後反求於吾心之至靜至約。 一貫而統萬。 則人之所以爲人者。 可以與天地參而爲三而上下同流矣。 不然惰其四體。 放其心志。 惟私是懷。 惟慾是從。 自暴自棄。 放僻奢侈。 則所謂人面而獸心。 馬牛而衣冠。 其於得名爲人。 其可仰無愧於天。 俯不怍於心耶? 其可畏也夫! 其可嚴也夫! 世有章句而文辭。 媚人目而取榮幸者。 末矣無足言者也。" 近者坡平尹君俶·永平文君晩郁·晉陽鄭君榰·坡平尹君先夔·陽川許君謙。 與鄕里冠童。 約爲書社學齋。 列書其名於冊。 盟爲永久計。 請余爲文弁其首。 余略道人之不可不學之意。 首書仁義二字爲贈。 以爲卷序云。 歲在己亥之暮秋下浣書。 육경(六經) 유가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의 중요한 경전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예경(禮經)》· 굴신소장(屈伸消長) 굴신은 굽힘과 폄이고 소장은 사라짐과 자라남이니, 음양이 순환하고 사물이 성쇠하는 등의 변화를 말한다. 〈역설강령(易說綱領)〉에 "역은 모름지기 착종하여 보아야 하니 천하의 일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선악·시비·득실로부터 굴신·소장·성쇠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든 모두 여기에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 …… 문왕이 또 단사를 지어 그 뜻을 해석하였는데 음양이 소장하고 성쇠하고 굴신하는 이치가 아닌 것이 없으며 성인이 배우는 것은 이것을 배운 것일 따름이다.[易須是錯綜看, 天下事无不出於此, 善惡是非得失, 以至於屈伸消長盛衰, 看甚事都出於此. …… 文王又爲之彖辭, 以釋其義, 无非陰陽消長盛衰屈伸之理, 聖人之所以學者, 學此而已.]"라고 하였다. 유물유칙(有物有則) 《시경》 〈증민(蒸民)〉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 사람들이 마음에 떳떳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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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정서 峀雲亭序 큰 바다의 동쪽 땅과 웅진(雄鎭)의 서편 벌에 물은 광주(光州)와 능주(綾州)를 합하고 산은 서석산(瑞石山)과 금성산(錦城山)으로 나뉘도다. 어느 때에 조물주가 한 구역 명승(名勝)을 빚어냈던가? 오늘 명공이 서너 이랑에 정사(精舍)를 높이 여니, 추녀는 기미(箕尾)73)의 영채(英彩)에 임하고 보휘(寶輝)는 하늘을 능멸하며 문이 제나(濟羅)의 아득한 바람을 받아들이니 호방한 기운 난간에 가득하도다. 주인 영공(令公)74)은 인간 달존(達尊)75)의 반열이요, 천상에 노전(老躔)76)의 정수로다.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이 있고 가문에 효우(孝友)를 전하여 봉황의 반열에 수리처럼 서 있으니 어찌 삼어연(三語掾)77)의 맑은 품격보다 못하겠는가? 봉치(鳳峙)의 계림(鷄林)이 천년 구국(舊國)을 위무하니 중거(仲擧)78)의 긴 고삐를 잡고 거원(巨源)79)의 아무 언덕[某邱]80)을 생각하도다.구양수(歐陽脩)81)의 백발창안(白髮蒼顔)에 날렵한 고각(高閣)이요, 사안(謝安)82)의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삽상한 명창(明窓)이도다. 문미에 화려한 편액은 멀리 도연명(陶淵明)83)의 멋진 글귀를 계승하고 바위틈 걸출한 건축은 가까이 박상공(朴相公)84)의 옛터를 이었도다. 구름과 새가 서로 나니 의연히 삼경(三逕)85)의 풍미요 물과 달이 서로 비치니 얼핏 이양정(二養亭)86)【박사암(朴思庵)이 이곳에서 말년에 이양정을 지었다.】의 정신 같도다.이에 가을 만(灣)에 장마 물 잦아드니 갈대 여울에 돌 불거지고, 봄 물결에 비 더하니 버들 언덕에 조수가 평평하도다. 어부의 긴 노래에 물새들이 날개를 접고 열사(烈士)의 높은 읊조림에 고기가 비늘을 번뜩이도다. 혹 외로운 배에 노 젓고 혹 짧은 지팡이 짚고서 푸른 물결 읊조리며 달구경하고 높은 언덕에 서서 바람을 뿜도다. 이 세상에 세 가지 즐거움,87)【여기에 일구(一句)가 빠진 것 같다】 홍교(虹橋) 백 척에 이르러선 용이 파도에 눕고 월악(月岳) 천 층은 붕새가 해변에 멈춘 것 같도다.88) 바위의 분장단벽(粉嶂丹壁)을 우러르니 조석의 상서로운 광채 드러내고 봉우리의 녹옥창규(綠玉蒼珪)를 노래하니 운우(雲雨)의 기이한 자태를 바치도다. 사시(四時)의 광경을 선물하고 일실(一室)의 술잔을 마련하도다. 난간 밖 장강(長江)에 이르러선 아련히 오초(吳楚)에 이어지고 문 앞의 큰길은 멀리 경화(京華)에 접했도다. 작방용축(雀舫龍軸)의 돛대는 나루에서 익수(鷁首)89)와 교차하고 구장호부(龜章虎符)의 관개(冠盖)는 큰길에서 사마(駟馬)의 굽을 정비하니 넉넉한 정우(停宇)의 조망이요 장쾌한 유거(幽居)의 안목이로다. 오호라! 올라가 경물을 구경하니 지나간 날 아득하고 고금을 둘러보니 천지가 역려(逆旅)90)로다. 서호(西湖)91)에 학 떠나가니 처사의 풍류 이미 사라지고 동리(東里)92)에 용 올랐으니 전왕의 포부 어디에 있는가?배견와(拜鵑窩)93) 상공(相公)【사암(思庵)이 또 영평(永平)에 배견와(拜鵑窩)를 지었다.】의 청수(淸水)한 정기를 거두어들이고 배에 행장 꾸린 노선(老仙)이도다.【사암의 형 연파(烟波) 박개(朴漑)94)의 '일엽편주에 흰 달을 싣고[葉舟載素月]'라는 시구가 있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창해(滄海)의 먼 곳에 뜻 아득한데 더군다나 매창(梅窓)의 밤은 적적하고 난실(蘭室)의 봄 허허하도다. 노을이 삭막한데 명월은 홀로 오르고 새가 슬피 우는데 주옹은 어디에 있는가? 물가에 길이 있어 납극(蠟屐)95)의 유풍 알 수 있고, 길가 이끼에 흔적 없어 구장(鳩杖)96)의 자취 찾을 길 없도다. 의지하는 것은 당나라 마군(馬君)97)의 삼세이니 뜰에 옥란(玉蘭)98)이 자라고 송나라 왕씨의 쌍벽이니 집에 금우(金友)가 있도다. 평천장(平泉莊)99)의 꽃과 돌, 찬황공(贊皇公)100)의 규모에 뒤지지 않고 상락(常樂)의 솔과 대, 어이 백향산(白香山)101)의 봉식(封植)으로 하겠는가? 청상(靑箱)102)의 구업을 전하여 절로 예를 논하고 시 즐기며 묵유(墨帷)의 고장(古藏)을 간수하여 거문고 타고 피리 부는 것만이 아니도다. 나그네는 천지에 한 마리 좀[一蠹]103)이요 강호에 병마[二竪]104)가 있어 대화(大化)105)의 그침이 없음을 보겠도다. 기꺼이 물가에 임하여 전현을 좇아 미치지 못하니【글자가 빠진 듯하다】 산하에 부끄럽도다. 가벼운 갈매기의 만 리 마음은 일천(一天)의 갠 달이요. 늙은 학의 천년 의지는 백련(百鍊)106)의 맑은 파도로다. 오늘 명승을 찾아와 정자의 통활(通豁)한 데에 서서 이러한 뜻 펼치고 우주의 여풍(餘風)을 거슬리도다. 시부(詩賦)는 현사들에게서 여망 있건만 강정(扛鼎)107)의 필력 부족함 한탄하고 시는 옛 자취에서 찡그림 흉내내니[效嚬]108)어찌 자리에 도움이 될 신공(神功)을 기대하겠는가? 대략 흉금(胸襟)을 펼쳐 창과 벽을 더럽히도다. 大海東域。 雄鎭西郊。 水合光綾。 山分瑞錦。 何年造物。 孕出一區名疆? 此日明公高開數畝精舍。 軒臨箕尾之英彩。 寶輝凌空。 門納濟羅之長風。 灝氣盈檻。 主人令公 人間達尊之列。 天上老躔之精。 世有令名。 家傳孝友。 鶚立鵷序。 豈欠三語淸標? 鳳峙鷄林。 爲撫千年舊國。 按仲擧之長轡。 憶巨源之某邱。 歐公之白髮蒼顔。 翼然高閣。 謝老之靑山綠水。 爽乎明窓。 楣上華扁。 遠述晉徵士之佳句。 巖間傑構。 近襲朴相公之遺墟。 雲鳥交飛。 依然三逕之風味。 水月相暎。 怳若二養【朴思庵卜居末年。 嘗作二養亭】之精神。 於是潦落秋灣。 蘆灘石出。 雨添春浪。 柳岸潮平。 漁父長歌。 沙禽戾翼。 烈士高咏。 潛魚躍鱗。 或棹孤舟。 或扶短策。 詠滄浪而翫月。 臨斷臯而噓風。 三樂於斯世。【此一句恐缺】至若虹橋百尺。 龍臥波心。 月峀千層。 鵬蹇海浴。 仰巖之粉嶂丹壁。 呈朝暮之瑞輝。 歌岑之綠玉蒼珪。 獻雲雨之奇態。 輸四時之光景。 供一室之樽罍。 又如檻外長江。 遙連吳楚。 門前大道。 遠接京華。 雀舫龍軸之柁檣。 交鷁首於津泊。 龜章虎符之冠盖。 織駟踶於康衢。 侈停宇之睡望。 壯幽居之心目。 嗚呼! 登臨覽物。 往事蒼茫。 俯仰古今。 乾坤逆旅。 西湖鶴去。 處士之風流已空。 東里龍興。 前王之壯圖安往? 拜鵑相公。【思庵又作拜鵑窩於永平】淸水之正氣收藏。 裝舟老仙。【思庵之兄烟波漑。 有葉舟載素月之句。 故如此云云】滄海之遠意綿漠。 而况梅窓夜寂。 蕙室春虛。 雲霞索寞兮明月獨來。 禽鳥哀吟兮主翁何處? 汀沙有路。 認是蠟屐餘塵。 逕苔無痕。 難尋鳩杖遺躅。 所賴唐馬君之三世。 庭生玉蘭。 宋王氏之雙璧。 宅存金友。 平泉花石。 不墜贊皇公之規模。 常樂松篁。 焉用白香山之封植? 傳靑箱之舊業。 自有說禮諶詩。 守墨帷之古藏。 非但彈絲弄竹。 客有一蠹天地。 二竪江湖。 看大化之無停。 喜臨川上。 追前脩而莫及。 愧【恐缺】山阿。 輕鷗萬里心。 一天晴月。 老鶴千齡志。 百鍊澄瀾。 今來勝區。 立臺榭之通豁。 此意愈暢。 遡宇宙之餘風。 賦有望於衆賢。 恨乏扛鼎筆力。 詩效嚬於往轍。 豈待助席神功? 略抒胸襟。 庸塵窓壁。 기미(箕尾) 28수(宿)에서 동쪽 별자리인 기수(箕宿)와 미수(尾宿)에 해당하는 중국의 유연(幽燕) 지역, 즉 요동 일대를 가리킨다. 은(殷)나라의 명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에 그의 정신이 하늘로 올라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에 별자리를 이루었다는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이 도(道)를 얻어서 무정을 도와 천하를 모두 소유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동유성을 타고 기성과 미성을 몰아 열성과 나란하게 되었다.[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 騎箕尾, 而比於列星.]"라고 하였다. 영공(令公) 정삼품과 종이품 관리를 높여 이르던 말이다. 달존(達尊) 천하 사람이 공통적으로 존중해야 할 덕목이라는 뜻으로, 작위[爵]와 연령[齒]과 덕(德)을 삼달존(三達尊)이라고 한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하에 달존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官爵)이 하나요, 연치(年齒)가 하나요, 덕(德)이 하나이다. 조정에는 관작만 한 것이 없고, 향당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자라게 하는 데는 덕만 한 것이 없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라고 하였다. 노전(老躔) 노인성(老人星)을 가리키는 말로 노인성은 장수를 상징하는 별이다. 후한(後漢)의 진식(陳寔)이 자질(子姪)을 데리고 순숙(荀淑)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때마다 하늘에서는 덕성이 모이는 상서(祥瑞)가 보였다고 한다. 이를 보고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500리 안에 반드시 현인들의 회합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後漢書 권62 荀淑列傳》 《世說新語 德行》 삼어연(三語掾) 사도(司徒) 왕융(王戎)이 완첨(阮瞻)을 처음 만나서 성인(聖人)의 명교(名敎)와 노장(老莊)의 차이점을 물었을 때 완첨이 "아마 같지 않을 것이다.[將無同]"고 대답하자, 왕융이 한동안 감탄하다가 추천하여 연리(掾吏)로 삼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완첨을 보고 삼어연(三語掾)이라고 하였다. 《晉書 阮瞻傳》 중거(仲擧) 진번(陳蕃, ?~168)을 가리킨다. 중거는 그의 자이다. 동한(東漢) 말의 명신이다. 젊을 때 아버지의 친구가 방문했을 때, 손님이 오는데도 청소를 깨끗이 하지 않는지 이유를 묻자 "대장부가 일을 처리함에 마땅히 천하를 청소해야지 어찌 집 하나를 일로 여기겠습니까?[大丈夫處事, 當掃除天下, 安事一室乎?]"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후에 환관을 척결하려고 도모하다가 피살되었다. 《後漢書 권66 陳蕃列傳》 거원(巨源)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 205~283)의 자(字)이다. 진(晉)나라 하내(河內) 회현(懷縣) 사람으로, 죽림칠현의 일원으로 마흔이 넘어서야 관직에 나갔다. 상서 우복야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좋은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다. 대표적으로 문제(文帝) 때 참소를 입어 억울하게 죽은 혜강(嵆康)의 아들 혜소(嵆紹)를 무제(武帝) 때 천거하여 비서승(祕書丞)이 되게 하였다. 혜강(嵇康)·여안(呂安)과 친하였는데 뒤에 혜강이 처형을 당할 때 아들 혜소(嵇紹)에게 "거원이 있으니,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巨源在, 汝不孤矣.]"라고 하였다. 《晉書 권43 山濤列傳》 모구(某邱) 아무 언덕이란 뜻으로, 고향 땅의 언덕을 뜻한다. 한유(韓愈)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이제 돌아가서는 그 나무를 가리키면서 '아무 나무[某樹]'는 나의 아버님께서 심으신 것이고, '아무 물[某水]'과 '아무 언덕[某邱]'은 내가 어린 시절에 낚시질하고 뛰어놀던 곳이다.' 하면, 고향 사람들이 모두 공경할 것이다.[今之歸, 指其樹曰: "某樹, 吾先人之所種也, 某水某丘, 吾童子時所釣遊也."]"라고 하였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국 송(宋) 나라 인종(仁宗)·신종(神宗) 때의 문신·문인이다. 한유(韓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고문(古文) 부흥에 힘썼다. 추밀부사(樞密副使)·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훌륭한 고문(古文)을 많이 창작하였고, 문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오대사기(五代史記)》 등을 편찬하였다. 사안(謝安) 320~385.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 시호는 문정이다. 젊어서부터 청담(淸談)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거절하고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의 동산(東山)에서 왕희지(王羲之), 손작(孫綽) 등과 어울렸으나, 후에 벼슬길에 올라서는 공적을 쌓고 이름을 날렸다. 재상이 되었을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이를 격파하였다. 도연명(陶淵明) 365~427. 남북조 시대 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며 시인으로, 자는 원량(元亮)이며 뒤에 도잠(陶潛)으로 개명하였는데, 일설에는 연명이 그의 자라고도 한다. 팽택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80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였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박상공(朴相公) 박순(朴淳 1523~1589)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본관은 충주(忠州),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학자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으나,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사암집(思菴集)》이 있다. 삼경(三逕) 은자가 사는 집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장후(蔣詡)라는 사람이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대밭 아래에 오솔길 셋을 내고 벗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교유한 데서 유래하였다. 《蒙求 蔣詡三逕》 이양정(二養亭) 박순의 별업(別業)으로, 영평현(永平縣) 영평천(永平川) 가에 있었다. 세 가지 즐거움 맹자(孟子)께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붕새가 ……같도다 '鵬蹇海浴의 [浴]'을 '龍臥波心의 [心]'과 대(對)를 맞추기 위하여 [沿]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익수(鷁首) 익조(鷁鳥)는 백로 비슷한 새로 바람에 잘 견딘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에 "익(鷁)은 큰 새이다. 그 새의 모양을 그려서 뱃머리에다 붙이기 때문에 익수(鷁首)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역려(逆旅) 나그네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광음은 백대의 과객이다.[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역려는 천지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닌다는 뜻이다. 서호(西湖) 서호는 송나라 때 임포(林逋)가 살던 곳이다. 임포는 서호의 고산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서화와 시에 능하였고 특히 매화시가 유명하다. 장가를 들지 않아 자식이 없었으며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짝을 삼으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사후에 화정(和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世說新語 棲逸》 동리(東里)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을 가리킨다. 그가 동리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정자산은 수십 년 동안 국정을 잡고 있으면서 두 강대국인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한 정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전혀 받지 않도록 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특히 외교 문서를 잘 작성하여,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말씀하셨다. 사명(辭命)을 만들 때 비침(裨諶)이 초고를 만들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행인(行人) 자우(子羽)가 수식하고 동리(東里) 자산(子産)이 윤색하였다.[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라고 하였다. 배견와(拜鵑窩) 박순이 1568년에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머물러 살 때 지은 집의 이름이다. 배견은 두견새에게 절한다는 뜻으로, 흔히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촉(蜀)에서 지은 〈두견(杜鵑)〉에 "두견새가 늦은 봄 날아와서, 슬프게 내 집 곁에서 울었지. 내가 보고는 항상 재배했나니, 옛 망제의 넋임을 존중해서였네.[杜鵑暮春至, 哀哀叫其間, 我見常再拜, 重是古帝魂.]"라고 하였다. 박개(朴漑) 1511~1586.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처사(烟波處士), 박우(朴祐)의 아들이다. 납극(蠟屐) 밀랍을 발라서 반질반질하게 한 나막신을 말하는데, 남조 송(南朝宋)의 사령운(謝靈運, 385~433)이 산에 올라가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항상 나막신을 준비해 신고 다니면서 올라갈 때는 신의 앞굽을 떼고 내려갈 때는 신의 뒷 굽을 떼 내었다고 한다. 《宋書 권67 謝靈運傳》 구장(鳩杖) 옥구장(玉鳩杖)의 준말로, 나이 70이 되어 치사(致仕)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때 나이 70이 되면 옥장(玉杖)을 주고 그 손잡이 끝에 비둘기 모양의 장식을 하였는데, 이는 비둘기가 체하는 법이 없기에 노인도 체증(滯症)이 없기를 바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권15 禮儀志中》 마군(馬君) 마계조(馬繼祖)로, 한유는 마계조를 비롯하여 그의 부친 마창(馬暢), 조부 마수(馬遂) 삼대(三代)와 모두 친분이 있었는데, 생전에 이들 모두를 차례로 먼저 떠나보냈다. 이에 마계조의 묘문을 지으면서 이들과의 각별한 인연을 서술하고 서글픈 심정을 절절히 드러내었다.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년도 못되었는데, 그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삼세의 죽음을 곡하였으니, 인간 세상에서 어떠하겠는가? 사람들이 오래도록 죽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감을 보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自始至今未四十年, 而哭其祖子孫三世, 于人世何如也? 人欲久不死而觀居此世者, 何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韓昌黎集》 권33 〈전중소감마군묘지(殿中少監馬君墓誌)〉 옥란(玉蘭) 지란옥수(芝蘭玉樹)와 같은 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예찬하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뜰 안에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대답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평천장(平泉莊) 평천장은 당(唐)나라 때 찬황백(贊皇伯)에 봉해진 명상(名相) 이덕유(李德裕, 787~850)의 별장이다. 이덕유가 하남(河南)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평천장을 세웠는데, 둘레가 40리이고 기이한 초목과 돌이 많아 그 경치가 선경(仙境)과 같았다고 한다. 찬황공(贊皇公) 당나라의 재상인 이덕유(李德裕)를 지칭하는 말로, 그가 조군(趙郡)의 찬황(贊皇) 사람이므로 '찬황공'이라고 부른다. 백향산(白香山) 향산(香山)은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별호이다. 자는 낙천,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일찍이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한 뒤 동도(東都) 이도리(履道里)에 살면서 향산(香山)에 석실을 짓고 못을 파고 나무를 심었으며, 팔절탄(八節灘)을 만들었다고 한다. 《舊唐書 권166 白居易列傳》 청상(靑箱)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말한다. 육조 송(宋)나라 때 왕준지(王准之)의 집은 대대로 강좌(江左)의 옛일을 잘 알아서 이를 기록하여 푸른 상자[靑箱]에 넣어 두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일러 '왕씨(王氏)의 청상학(靑箱學)'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권60》 일두(一蠹) 송(宋)나라 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頥)가 일찍이 말하기를 "농부가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오곡을 농사지으니 내가 그것을 먹고, 백공(百工)이 기물(器物)을 만드니 내가 그것을 사용하고, 군사들이 갑옷에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니 내가 편안히 지낸다. 나는 사람들에게 혜택도 주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천지간에 한 마리 좀과 같은 존재이다. 다만 성인(聖人)이 남기신 글을 모아 엮어서 보충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二程遺書 권17》 이수(二竪) 병마(病魔)를 이른다.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병으로 누워있을 때 병마가 두 아이로 화신(化身)하여 왔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대화(大化)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네 단계의 큰 변화로, 유아기·청년기·노년기 그리고 죽음을 말한다. 《列子 天瑞》 백련(百鍊) 옛날 3대 보검의 하나로 꼽혔던 칼 이름이다. 강정(扛鼎) 큰 정(鼎)을 들 만한 힘을 가졌다는 뜻으로, 힘이 대단히 센 것을 말한다. 《사기》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에 "항우는 힘이 세서 세 발 달린 솥을 두 손으로 불끈 들 만하였다.[力能扛鼎]"라고 하였는데, 한유의 시에 "용 무늬 새겨 백 곡을 담은 세 발 달린 큰 솥을 홀로 불끈 들 만한 필력을 그대는 가졌다오.[龍文百斛鼎, 筆力可獨扛.]"라는 표현이 보인다. 《韓昌黎集 권5 病中贈張十八》 효빈(效嚬) 찡그리는 것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분수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남을 흉내 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서시(西施)가 가슴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자, 그 마을에 사는 추한 사람이 보고 아름답게 여겨 역시 가슴을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리니, 그 마을에 사는 부자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자는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버렸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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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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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구암서실팔영시서 龜巖書室八詠詩序 졸렬하고 우직한 우부(愚夫)는 일찍이 말을 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정양(靜養)하는 자가 팔영시(八詠詩)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대저 사람은 말을 하고자 하지 않으나 어찌 또한 뜻을 말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109) 라고 하였다. 우부(愚夫)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거북이 상서롭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자라가 신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변화해서 바위가 되고 고개[嶺]가 되고, 흥기하여 구름이 되고 노을이 되니 하늘이 장차 이 구름과 노을로 비를 만들어 창창한 생명에 미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높은 바위와 고개를 지켜 아침저녁으로 완상하게 하여 뜻을 고상하게 하려는 것인가? 적(篴)은 8번째에 죽(竹)이 되고 종(鍾)은 6번째에 궁(宮)이 되니 하늘이 장차 두 개의 음으로 소호(韶頀)110)를 연주하여 새와 짐승으로 춤을 추게111) 하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범패[漁梵]112)에 깃들게 하여 불평을 울리게 한 것인가? 이 두 가지 것은 하늘에 있고 하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마땅히 청송(晴松)으로 지조 삼고, 제월(霽月)113)로 마음가짐 삼아야 한다. 혹은 조양(朝陽)114)에서 울어서, 문왕의 서상(瑞祥)을 춤추는 것도 명이요, 택반(澤畔)에서 홀로 술 깨어115) 창랑의 돛배를 띄우는 것 또한 명(命)이다. 지인(至人)116)은 무심(無心)하여 더불어 화하여 함께 흘러가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구암서실(龜巖書室) 팔영시(八詠詩)〉에 화운하여 노래한다. 拙默愚夫嘗欲無言。 靜養子囑以八言曰: "夫人不言。 盍亦言志?" 愚夫菀爾曰: "龜吾知爲瑞。 鰲吾知爲靈。 化而爲巖爲嶺。 興起雲霞。 則天將使是雲霞爲雨澤而及蒼蒼者生耶? 抑守高巖嶺。 爲尙志朝暮之玩耶? 篴在八爲竹。 鍾在六爲宮。 天將使二音奏之韶頀。 使蹌蹌者舞耶? 抑寓於漁梵而鳴其不平耶? 斯二者在乎天。 在天者吾末如之何矣。 然則奈何? 當以晴松爲操。 霽月爲懷。 倘或鳴之朝陽。 爲舞文瑞命也。 澤畔孤醒。 泛滄浪帆亦命也。 至人無心。 與化同流。 吾何言哉?" 賡以八律而歌之。 대저 …… 않겠습니까 《서경》 〈순전〉에, 제순(帝舜)이 기(夔)에게 음악을 담당하게 하면서 "음악의 가사인 시(詩)는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歌]는 그 가사를 사람이 길게 늘여 부르는 것이고, 악기의 소리[聲]는 그 긴 목소리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이고, 율(律)은 악기의 그 소리를 조화시키는 것이다.[詩言志, 歌永言, 聲依永, 律和聲.]"라고 말한 데서 발췌한 것이다. 소호(韶頀) 좋은 음악이라는 뜻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9년 조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음악이라 하였고,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 주에 소는 순(舜)의 음악, 호는 탕왕의 음악이라 하였다. 새와 …… 추게 《서경》 〈익직(益稷)〉에 "관악기와 도고를 설치하고 축과 어를 써서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생과 용을 번갈아 울리니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소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下管鼗鼓, 合止柷敔,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다. 어범(漁梵) 어산(魚山)은 지명인데 또한 어산(漁山)이라고도 칭한다. 염불을 의미한다. 위(魏) 조식(曹植)이 이곳에 있으면서 비로소 범패(梵唄)를 제작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범패를 어범(漁梵)이라 하였다. 또 《현찬 사(玄贊 四)》에 "진사왕(陳思王)이 어산(漁山)에 올라 암수(巖岫)에서 경외는 소리를 들으니 청완(淸婉)하고 추량(遒亮)하여 먼 골짜기에까지 메아리치므로 뒤이어 그 소리에 비겨 범패를 지었다. 그러므로 지금 속중(俗中)에서 어범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제월(霽月) 광풍제월(光風霽月)을 말한다. 광풍제월은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로, 인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탁 트인 사람을 비유한다. 황정견(黃庭堅)이 《산곡집(山谷集)》 권1 〈염계시(濂溪詩)〉의 서(序)에서 주돈이(周敦頥)를 평하면서 "용릉(舂陵)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가슴속이 쇄락(灑落)하여 마치 비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다.[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하였다. 조양(朝陽) 봉명조양(鳳鳴朝陽)으로, 어진 인재가 때를 만나 일어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언덕에서 울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산 동쪽에서 자라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때에 저수량(褚遂良) 등의 간신(諫臣)이 죽은 뒤로 감히 직간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이선감(李善感)이 어느 날 상소하여 직간을 하자 당시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고 한 고사가 있다. 《新唐書 권105 韓瑗列傳》 택반(澤畔)에서 …… 술 깨어 굴원이 축출당한 뒤의 모습을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방출당해 강담을 거닐고 택반에서 읊조릴 때 안색이 초췌하고 모습이 깡 말랐다.[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라고 묘사하고, 축출당한 이유에 대해 묻자, 굴원이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만 청정하고 뭇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깨어 있기 때문이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라고 대답한 것을 원용한 표현이다. 지인(至人) 일반적으로 덕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지인은 아집이 없다.[至人無己]" 하였고, 《장자(莊子)》 〈천하(天下)〉에 "도의 대종(大宗)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을 천인이라 하고, 도의 정수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을 신인이라 하며, 도의 진수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을 지인이라 한다.[不離於宗, 謂之天人, 不離於精, 謂之神人, 不離於眞, 謂之至人.]"라고 하였다. 《장자(莊子)》의 외편 〈전자방(田子方)〉에도 백혼무인이 열자에게 도를 체험한 초월자의 절대 자유로운 경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지인이란 위로는 푸른 하늘을 들여다보고 아래로는 황천에 잠기며, 팔방으로 멋대로 날아다니되 정신이나 기백이 변치 않는 것이다.[夫至人者, 上窺靑天, 下潛黃泉, 揮斥八極, 神氣不變.]"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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