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의 기술 諸家記述 우리나라의 주군(州郡)이 임진왜란 초기에 힘이 모자라 함락되기도 하고, 패주하고 궤멸되어 지키지 못한 일은 있었지만, 한 사람도 적에게 항복하여 붙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오직 회령의 토병(土兵) 국경인(鞠景仁)만이 반역하여 부성(府城)을 점거하고 두 왕자와 재신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 북병사 한극함(韓克諴), 회령 부사 이영(李瑛) 등 수십 명을 잡아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왜적은 국경인을 회령 부사로, 국세필을 경성 부사로 삼고 길주(吉州)로 물러가 점거하였다. 이에 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을 토벌하여 죽인 뒤에야 비로소 평정되었으니, 강하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북도의 인심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공이 북쪽에서 돌아올 때 회양(淮陽) 수령에게 술을 청하자, 수령이 몇 잔의 술을 보내오기에 공이 연구(聯句) 한 수를 지어 "회양은 박하지 않은데 인정은 박하고, 철령은 높지 않은데 술값은 높다.[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라고 하였다. 상동(上同)임진년에 여러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자가 매우 많지만, 함경북도에서는 평사 정문부와 훈융 첨사(訓戎僉使) 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많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어느 날 차오산(車五山 차천로(車天輅))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우연히 '바람은 발 하나 없이 천 리를 간다.[風無一足行千里]'라는 구절을 얻었는데, 여러 날 동안 깊이 생각해도 그 대구(對句)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기를, "어째서 '달은 외바퀴로 하늘을 돈다.[月有孤輪轉九天]'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니, 오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혀를 내두르며 거의 내려가 절을 하려고 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공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을 때17) 간사한 거간꾼이 훈귀(勳貴 공훈을 세운 귀족)와 교제하여 공금을 많이 빌려 쓰고 오래도록 갚지 않았다. 이에 공이 엄하게 가두어 추징하자, 박정(朴炡)이 간사한 거간꾼을 위하여 풀어달라는 편지를 열흘에 3번이나 공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고 더욱 독촉하여 여러 해 포흠(逋欠)18)한 것을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모두 거두어들이자, 박정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원한을 품었다.19) 공이 전주에서 관을 받들고 돌아가자20) 간사한 거간꾼이 때를 틈타 원한을 갚고자 하였는데, 판관 김영구(金永耈)가 이를 듣고 이졸(吏卒)을 많이 동원하여 직접 호상(護喪)하여 공주읍(公州邑)에 이르자, 간사한 거간꾼이 감히 손쓰지 못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사관이 일컫기를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는 시가(詩歌)를 짓되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하고, 마음으로 임금을 잊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 충심을 어여삐 여긴다.'라고 하였다. 두보의 시21) 가운데 '관중의 소인배가 기강을 무너뜨리니[關中小兒壞紀綱],22) 장후23)는 즐겁지 않고 임금24)은 몹시 바쁘네.[張后不樂上爲忙] 다만 가렴주구 혁파하지 못할까 두렵거늘[但恐誅求不改轍], 총애받는 간신배 목숨 보전한다 들었네.[聞道嬖孼能全生]25)'같은 부류는 지나간 조정이나 당저(當宁 금상(今上))의 일을 지적하여 꺼리는 바가 없는데, 당시에 그 죄를 논하거나 후대 사람들이 비난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그런데 정문부의 '육리의 청산은 천하가 웃는데[六里靑山天下笑]'26), 와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27)라고 한 구절은 물론 우연히 역사를 읊은 것이니 조정의 일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설사 참으로 비난하고 풍자한 뜻이 있더라도 또한 두자미가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원년)의 첫 정사에서 중흥(中興)하리라 외쳤지만 조정의 처사가 이와 같았으니, 병자년(1636)과 정축년(1637)의 호란이 어찌 운수(運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서포만필(西浦謾筆)》정농포(鄭農圃)가 관북에서 세운 공과 강수은(姜睡隱)28)이 왜진(倭陣) 중에 보인 절개는 모두 탁월하다. 그러나 실상이 가려져 표장(表章)한 바가 없고, 당시 선조의 성명(聖明)으로 여러 명공(名公)의 보필을 받았는데도 일이 이처럼 되었으니 매우 탄식할 만하다. 농포는 백면서생으로서 좌막(佐幕)의 하료(下僚)로 있으면서 많은 병사를 규합하여 미쳐 날뛰는 왜적을 토벌하여 한 지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포상은 한 자급에만 그치고, 측근과 고관들의 이름만 높이 운대(雲臺)29) 위에 나열되었다. 당시에 순절한 의사로 송동래(宋東萊 송상현(宋象賢))와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같은 뛰어난 자가 많았으니, 수은은 장차 그들에게 가려진 것인가. 세상에서는 죽어야만 고귀하게 여기니 죽음은 진실로 고귀하게 여길 만하지만, 절개를 세우되 반드시 모두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수은의 사적이 주소장(朱少章)30)과 모두 동일하니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가 상세히 논하였다.31) 두 공이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큰 공과 큰 절개에 대해서도 다만 그 형세의 유무만 따져보니, 세상사가 으레 이와 같구나! 북헌(北軒)32)의 《노산취필(蘆山醉筆)》정농포가 공이 있으면서도 포상을 받지 못한 것은 이미 한스러운 일인데, 끝내 죄가 없는데도 화를 당하니 더욱 원통하다. 이는 계해년(1623, 인조원년) 이후의 일이다. 예로부터 원통하게 죽은 자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농포의 일은 가장 납득할 수가 없다. 그의 〈영사(詠史)〉 시에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는 망하리라[楚雖三戶亦秦亡], 예언한 남공의 말33)이 꼭 맞지 않네.[未必南公說得當] 한 번 무관34)에 들어가자 백성의 희망 끊겼는데[一入武關民望絶]35),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36)"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연좌된 죄안(罪案)이다. 비록 이 시를 왜곡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할지라도 끝내 죄가 될 사안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견강부회한 자들이 농포가 공이 있는데도 포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조를 원망하여 이에 회왕에 견주고, 인조를 잔약한 후손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선조가 어찌 일찍이 무관(武關)에 들어간 일이 있었으며, 인조의 즉위가 어찌 회왕의 손자인 심(心)에게 견줄 일인가? 당시 옥사를 다스린 자가 이 당시 원훈(元勳)이었고, 처음에 그 시를 벽 사이에서 발견한 자도 훈신 중의 한 사람이었다.37) 그러니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문사 낭청(問事郞廳)38)으로 구원해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찌 그 사이에서 풀려날 수 있었겠는가. 계해년 이후로 사대부들이 공신에게 붙지 않아서 곤액을 당한 자가 많았는데, 농포처럼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고변(告變)이 그치지 않아 고발당한 자가 풀려나는 일이 적었으니, 이는 시세가 그러했던 것이지만 농포의 화가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상동(上同) 我國州郡, 於壬辰變初, 或力屈被陷, 或奔潰不守則有之矣, 無一人降附于賊者。惟會寧土兵鞠景仁, 叛據府城, 執二王子及宰臣金貴榮、黃廷彧、北兵使韓克諴、會寧府使李瑛等數十人, 迎款于賊, 賊以景仁守會寧, 鞠世弼守鏡城, 退據吉州。評事鄭文孚, 起兵討景仁誅之, 然後始定, 可見北道人心之强悍難馭也。【《芝峯類說》】公自北歸時, 乞酒於淮陽倅, 倅送酒數盃, 公有一聯曰: "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 【上同】壬辰諸道, 起義兵討賊者甚衆, 而其在北道評事鄭文孚、訓戎僉使高敬民功最多。【西崖 《懲毖錄》】一日, 車五山語公曰: "我偶得風無一足行千里之句, 累日沈思, 未成其對。" 公卽應聲對曰: "何不道月有孤輪轉九天?" 五山瞠眼吐舌, 殆欲下拜。【《於于野談》】公尹全州也, 有姦儈交通勳貴者, 多貸公貨, 久而不償。公嚴囚以徵, 朴炡爲姦儈, 以救解之書, 一旬三抵於公, 而公終不聽, 愈督責之, 積年逋欠, 旬月之間畢捧, 炡由是大啣之。公自全州奉喪而歸, 姦儈者欲乘時報怨, 判官金永耈聞之, 多發吏卒, 躬自護喪, 至公州邑, 姦儈者不敢動。【《眉叟記言》】史稱"杜子美爲歌詩, 傷其撓弱, 情不忘君, 人憐其忠"云。而其詩如"關中小兒壞紀綱, 張后不樂上爲忙。但恐誅求不改轍, 聞道嬖孽能全生"之類, 指斥先朝、當宁事, 無所忌諱, 未聞當時論其罪, 後人以爲非也。鄭文孚"六里靑山天下笑, 孱孫何事又懷王?"之句, 無論偶自詠史。何與於朝家事? 設令眞有譏諷意, 亦與子美所云, 何異? 癸亥初政, 號稱中興, 而廟堂擧措如此, 丙丁之厄, 何可諉以天數。【《西浦謾筆》】鄭農圃關北之功、姜睡隱倭中之節, 皆卓矣。然掩昧而無所表章, 當時以宣廟之聖, 輔以諸名公, 而事乃如此, 甚可歎也。農圃以白面書生, 佐幕下僚, 乃能糾衆兵, 討狂賊以安一方。然其賞止於一階, 而宦侍、巨達, 巍然列於雲臺之上矣。當時死節之士, 如宋東萊、趙重峰卓卓者多, 睡隱將爲其所揜耶? 世俗以死爲貴, 死固可貴, 殊不知立節, 不必皆死。睡隱事, 無不與朱少章同者, 尤齋論之詳矣。兩公之掩昧無他, 以無形勢故也。於大功、大節, 獨視其形勢有無, 世間事例如此矣!【北軒 《蘆山醉筆》】鄭農圃有功不賞, 已可恨, 而終至無罪而被禍尤冤矣, 此則癸亥後事也。自古冤死者何限, 而農圃事, 最未可曉。其《詠史》詩曰"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此其所坐之案也。雖以此詩曲爲傅會, 終未見其爲罪。無乃傅會者, 以爲農圃有功不賞, 故怨望宣廟, 乃比於懷王, 而以仁廟爲孱孫云爾耶? 此不能成說。宣廟何嘗有入武關之事? 而仁廟之立, 豈比孫心耶? 當時按獄者, 當是元勳, 而初見其詩於壁間者, 亦勳臣中人也。澤堂以問事郞齟齬救解, 烏能得於其間哉? 癸亥後, 士大夫以不附功臣, 而坎坷者多, 而如農圃不免於禍。其時告變不止, 而被告者鮮得脫, 此則時勢然也, 而農圃之禍, 豈不冤哉? 【上同】 공이……때 정문부는 계해년(1623, 인조원년) 4월에 전주 부윤에 임명되었다. 《農圃集 年譜》 포흠(逋欠) 관가(官家)의 물건을 빌려서 사사로이 써 버리거나 숨기고서 돌려주지 않는 행위, 국가의 조세(租稅)를 납부하지 않는 것, 환곡을 상환하지 못한 것, 혹은 이러한 미납으로 인한 결손액을 말한다. 박정은……품었다 박정(朴炡, 1596~1632)의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靖社)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헌부의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은 간사한 거간꾼의 일로 인해 원한을 품고 있다가 1624년에 대관(臺官)이 되었는데, 정문부가 창원에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역사에 대해 읊은 10수의 시에 무슨 목적이 있다 하여 문초하였고, 결국 정문부는 문초를 받다가 죽게 되었다. 《農圃集 年譜》 공이……돌아가자 공은 1623년 7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갔다. 《農圃集 年譜》 두보의 시 〈억석 이수(憶昔二首)〉라는 시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관중의……무너뜨리니 관중의 하찮은 소인은 당나라 숙종 때의 환관 이보국(李輔國, 704~762)이다. 병권을 장악하고 대궐의 실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다가 대종(代宗)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장후(張后) 당 숙종(唐肅宗)의 폐후(廢后)로 이보국 등에 의하며 살해되었다. 上 당나라 숙종황제(肅宗皇帝)를 말한다. 총애받는……있네 원문의 '폐얼(嬖㜸)'은 당나라 숙종(肅宗)과 대종(代宗) 때의 환관 정원진(程元振)으로 정권을 농단한 인물이다. '능전생(能全生)'은 대종이 정원진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을 가리킨다. 육리의……웃는데 원문의 '율리청산(六里靑山)'은 전국 시대에 장의(張儀)가 초나라 회왕에게 상오(商於)의 땅 6백 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가 나중에 이를 6리로 번복하여 초나라 회왕을 속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당(唐)나라 때 최도융(崔道融)은 〈초회왕(楚懷王)〉 시에서 "육리의 청산은 천하가 웃는데, 장의는 용이하게 갔다가 다시 오네.[六里靑山天下笑, 張儀客易去還來.]"라고 하였다. 잔약한……되었는가 잔약한 후손은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량(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卷84 屈原列傳》 강수은(姜睡隱) 강항(姜沆, 1567~1618)으로, 수은은 그의 호이다. 자는 태초(太初)이고 영광 출신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영광에서 가족과 함께 해로로 탈출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포로 생활 동안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하여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과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운대(雲臺)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은 곳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한 명제(漢明帝)가 영평(永平) 3년(60)에 광무제(光武帝)의 공신 28인을 그려 이곳에 봉안하였다. 주소장(朱少章) 주변(朱弁, 1085~1144)으로, 소장은 그의 자이다. 남송 고종(高宗) 때의 사람으로, 호는 관여거사(觀如居士)이고 문장에 뛰어났다. 주희(朱熹)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통문 부사(通問副使)로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6년 동안 구류되었는데, 금나라에 신하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며 절의를 지켰다. 수은의……논하였다 《宋子大全 卷137 序 睡隱集序》 참조.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우(伯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노산취필》은 김춘택이 1715년(숙종41)에 노산(蘆山)에 있을 때 지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논평집이다. 예언한 남공(南公)의 말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고 한 것이다. 남공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무관 섬서성(陝西省) 상남현(商南縣)의 북서쪽에 있는 관(關)으로, 진 소왕이 초 회왕을 만나자고 하여 진나라로 끌고 간 곳이다. 한 번……끊겼는데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은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史記 卷40》 잔약한……되었는가 앞의 〈제가기술(諸家記述)〉의 《서포만필(西浦謾筆)》 출처 주 참조. 처음에……사람이었다 1624년(인조2)에 최내길(崔來吉, 1583~1649)이 농포를 찾아왔을 때, 상중에 휴지와 함께 섞여 벽에 발려져 있는 이 시를 그가 보고 가서 친구들에게 전파하였다. 《農圃集 年譜》 문사 낭청(問事郞廳) 죄인의 심문서를 작성하여 읽어주는 일을 맡아 하는 임시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