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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제가의 기술 諸家記述 우리나라의 주군(州郡)이 임진왜란 초기에 힘이 모자라 함락되기도 하고, 패주하고 궤멸되어 지키지 못한 일은 있었지만, 한 사람도 적에게 항복하여 붙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오직 회령의 토병(土兵) 국경인(鞠景仁)만이 반역하여 부성(府城)을 점거하고 두 왕자와 재신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 북병사 한극함(韓克諴), 회령 부사 이영(李瑛) 등 수십 명을 잡아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왜적은 국경인을 회령 부사로, 국세필을 경성 부사로 삼고 길주(吉州)로 물러가 점거하였다. 이에 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을 토벌하여 죽인 뒤에야 비로소 평정되었으니, 강하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북도의 인심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공이 북쪽에서 돌아올 때 회양(淮陽) 수령에게 술을 청하자, 수령이 몇 잔의 술을 보내오기에 공이 연구(聯句) 한 수를 지어 "회양은 박하지 않은데 인정은 박하고, 철령은 높지 않은데 술값은 높다.[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라고 하였다. ­상동(上同)­임진년에 여러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자가 매우 많지만, 함경북도에서는 평사 정문부와 훈융 첨사(訓戎僉使) 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많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어느 날 차오산(車五山 차천로(車天輅))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우연히 '바람은 발 하나 없이 천 리를 간다.[風無一足行千里]'라는 구절을 얻었는데, 여러 날 동안 깊이 생각해도 그 대구(對句)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기를, "어째서 '달은 외바퀴로 하늘을 돈다.[月有孤輪轉九天]'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니, 오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혀를 내두르며 거의 내려가 절을 하려고 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공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을 때17) 간사한 거간꾼이 훈귀(勳貴 공훈을 세운 귀족)와 교제하여 공금을 많이 빌려 쓰고 오래도록 갚지 않았다. 이에 공이 엄하게 가두어 추징하자, 박정(朴炡)이 간사한 거간꾼을 위하여 풀어달라는 편지를 열흘에 3번이나 공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고 더욱 독촉하여 여러 해 포흠(逋欠)18)한 것을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모두 거두어들이자, 박정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원한을 품었다.19) 공이 전주에서 관을 받들고 돌아가자20) 간사한 거간꾼이 때를 틈타 원한을 갚고자 하였는데, 판관 김영구(金永耈)가 이를 듣고 이졸(吏卒)을 많이 동원하여 직접 호상(護喪)하여 공주읍(公州邑)에 이르자, 간사한 거간꾼이 감히 손쓰지 못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사관이 일컫기를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는 시가(詩歌)를 짓되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하고, 마음으로 임금을 잊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 충심을 어여삐 여긴다.'라고 하였다. 두보의 시21) 가운데 '관중의 소인배가 기강을 무너뜨리니[關中小兒壞紀綱],22) 장후23)는 즐겁지 않고 임금24)은 몹시 바쁘네.[張后不樂上爲忙] 다만 가렴주구 혁파하지 못할까 두렵거늘[但恐誅求不改轍], 총애받는 간신배 목숨 보전한다 들었네.[聞道嬖孼能全生]25)'같은 부류는 지나간 조정이나 당저(當宁 금상(今上))의 일을 지적하여 꺼리는 바가 없는데, 당시에 그 죄를 논하거나 후대 사람들이 비난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그런데 정문부의 '육리의 청산은 천하가 웃는데[六里靑山天下笑]'26), 와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27)라고 한 구절은 물론 우연히 역사를 읊은 것이니 조정의 일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설사 참으로 비난하고 풍자한 뜻이 있더라도 또한 두자미가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원년)의 첫 정사에서 중흥(中興)하리라 외쳤지만 조정의 처사가 이와 같았으니, 병자년(1636)과 정축년(1637)의 호란이 어찌 운수(運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서포만필(西浦謾筆)》­정농포(鄭農圃)가 관북에서 세운 공과 강수은(姜睡隱)28)이 왜진(倭陣) 중에 보인 절개는 모두 탁월하다. 그러나 실상이 가려져 표장(表章)한 바가 없고, 당시 선조의 성명(聖明)으로 여러 명공(名公)의 보필을 받았는데도 일이 이처럼 되었으니 매우 탄식할 만하다. 농포는 백면서생으로서 좌막(佐幕)의 하료(下僚)로 있으면서 많은 병사를 규합하여 미쳐 날뛰는 왜적을 토벌하여 한 지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포상은 한 자급에만 그치고, 측근과 고관들의 이름만 높이 운대(雲臺)29) 위에 나열되었다. 당시에 순절한 의사로 송동래(宋東萊 송상현(宋象賢))와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같은 뛰어난 자가 많았으니, 수은은 장차 그들에게 가려진 것인가. 세상에서는 죽어야만 고귀하게 여기니 죽음은 진실로 고귀하게 여길 만하지만, 절개를 세우되 반드시 모두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수은의 사적이 주소장(朱少章)30)과 모두 동일하니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가 상세히 논하였다.31) 두 공이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큰 공과 큰 절개에 대해서도 다만 그 형세의 유무만 따져보니, 세상사가 으레 이와 같구나! ­북헌(北軒)32)의 《노산취필(蘆山醉筆)》­정농포가 공이 있으면서도 포상을 받지 못한 것은 이미 한스러운 일인데, 끝내 죄가 없는데도 화를 당하니 더욱 원통하다. 이는 계해년(1623, 인조원년) 이후의 일이다. 예로부터 원통하게 죽은 자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농포의 일은 가장 납득할 수가 없다. 그의 〈영사(詠史)〉 시에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는 망하리라[楚雖三戶亦秦亡], 예언한 남공의 말33)이 꼭 맞지 않네.[未必南公說得當] 한 번 무관34)에 들어가자 백성의 희망 끊겼는데[一入武關民望絶]35),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36)"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연좌된 죄안(罪案)이다. 비록 이 시를 왜곡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할지라도 끝내 죄가 될 사안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견강부회한 자들이 농포가 공이 있는데도 포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조를 원망하여 이에 회왕에 견주고, 인조를 잔약한 후손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선조가 어찌 일찍이 무관(武關)에 들어간 일이 있었으며, 인조의 즉위가 어찌 회왕의 손자인 심(心)에게 견줄 일인가? 당시 옥사를 다스린 자가 이 당시 원훈(元勳)이었고, 처음에 그 시를 벽 사이에서 발견한 자도 훈신 중의 한 사람이었다.37) 그러니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문사 낭청(問事郞廳)38)으로 구원해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찌 그 사이에서 풀려날 수 있었겠는가. 계해년 이후로 사대부들이 공신에게 붙지 않아서 곤액을 당한 자가 많았는데, 농포처럼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고변(告變)이 그치지 않아 고발당한 자가 풀려나는 일이 적었으니, 이는 시세가 그러했던 것이지만 농포의 화가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상동(上同)­ 我國州郡, 於壬辰變初, 或力屈被陷, 或奔潰不守則有之矣, 無一人降附于賊者。惟會寧土兵鞠景仁, 叛據府城, 執二王子及宰臣金貴榮、黃廷彧、北兵使韓克諴、會寧府使李瑛等數十人, 迎款于賊, 賊以景仁守會寧, 鞠世弼守鏡城, 退據吉州。評事鄭文孚, 起兵討景仁誅之, 然後始定, 可見北道人心之强悍難馭也。【《芝峯類說》】公自北歸時, 乞酒於淮陽倅, 倅送酒數盃, 公有一聯曰: "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 【上同】壬辰諸道, 起義兵討賊者甚衆, 而其在北道評事鄭文孚、訓戎僉使高敬民功最多。【西崖 《懲毖錄》】一日, 車五山語公曰: "我偶得風無一足行千里之句, 累日沈思, 未成其對。" 公卽應聲對曰: "何不道月有孤輪轉九天?" 五山瞠眼吐舌, 殆欲下拜。【《於于野談》】公尹全州也, 有姦儈交通勳貴者, 多貸公貨, 久而不償。公嚴囚以徵, 朴炡爲姦儈, 以救解之書, 一旬三抵於公, 而公終不聽, 愈督責之, 積年逋欠, 旬月之間畢捧, 炡由是大啣之。公自全州奉喪而歸, 姦儈者欲乘時報怨, 判官金永耈聞之, 多發吏卒, 躬自護喪, 至公州邑, 姦儈者不敢動。【《眉叟記言》】史稱"杜子美爲歌詩, 傷其撓弱, 情不忘君, 人憐其忠"云。而其詩如"關中小兒壞紀綱, 張后不樂上爲忙。但恐誅求不改轍, 聞道嬖孽能全生"之類, 指斥先朝、當宁事, 無所忌諱, 未聞當時論其罪, 後人以爲非也。鄭文孚"六里靑山天下笑, 孱孫何事又懷王?"之句, 無論偶自詠史。何與於朝家事? 設令眞有譏諷意, 亦與子美所云, 何異? 癸亥初政, 號稱中興, 而廟堂擧措如此, 丙丁之厄, 何可諉以天數。【《西浦謾筆》】鄭農圃關北之功、姜睡隱倭中之節, 皆卓矣。然掩昧而無所表章, 當時以宣廟之聖, 輔以諸名公, 而事乃如此, 甚可歎也。農圃以白面書生, 佐幕下僚, 乃能糾衆兵, 討狂賊以安一方。然其賞止於一階, 而宦侍、巨達, 巍然列於雲臺之上矣。當時死節之士, 如宋東萊、趙重峰卓卓者多, 睡隱將爲其所揜耶? 世俗以死爲貴, 死固可貴, 殊不知立節, 不必皆死。睡隱事, 無不與朱少章同者, 尤齋論之詳矣。兩公之掩昧無他, 以無形勢故也。於大功、大節, 獨視其形勢有無, 世間事例如此矣!【北軒 《蘆山醉筆》】鄭農圃有功不賞, 已可恨, 而終至無罪而被禍尤冤矣, 此則癸亥後事也。自古冤死者何限, 而農圃事, 最未可曉。其《詠史》詩曰"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此其所坐之案也。雖以此詩曲爲傅會, 終未見其爲罪。無乃傅會者, 以爲農圃有功不賞, 故怨望宣廟, 乃比於懷王, 而以仁廟爲孱孫云爾耶? 此不能成說。宣廟何嘗有入武關之事? 而仁廟之立, 豈比孫心耶? 當時按獄者, 當是元勳, 而初見其詩於壁間者, 亦勳臣中人也。澤堂以問事郞齟齬救解, 烏能得於其間哉? 癸亥後, 士大夫以不附功臣, 而坎坷者多, 而如農圃不免於禍。其時告變不止, 而被告者鮮得脫, 此則時勢然也, 而農圃之禍, 豈不冤哉? 【上同】 공이……때 정문부는 계해년(1623, 인조원년) 4월에 전주 부윤에 임명되었다. 《農圃集 年譜》 포흠(逋欠) 관가(官家)의 물건을 빌려서 사사로이 써 버리거나 숨기고서 돌려주지 않는 행위, 국가의 조세(租稅)를 납부하지 않는 것, 환곡을 상환하지 못한 것, 혹은 이러한 미납으로 인한 결손액을 말한다. 박정은……품었다 박정(朴炡, 1596~1632)의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靖社)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헌부의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은 간사한 거간꾼의 일로 인해 원한을 품고 있다가 1624년에 대관(臺官)이 되었는데, 정문부가 창원에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역사에 대해 읊은 10수의 시에 무슨 목적이 있다 하여 문초하였고, 결국 정문부는 문초를 받다가 죽게 되었다. 《農圃集 年譜》 공이……돌아가자 공은 1623년 7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갔다. 《農圃集 年譜》 두보의 시 〈억석 이수(憶昔二首)〉라는 시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관중의……무너뜨리니 관중의 하찮은 소인은 당나라 숙종 때의 환관 이보국(李輔國, 704~762)이다. 병권을 장악하고 대궐의 실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다가 대종(代宗)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장후(張后) 당 숙종(唐肅宗)의 폐후(廢后)로 이보국 등에 의하며 살해되었다. 上 당나라 숙종황제(肅宗皇帝)를 말한다. 총애받는……있네 원문의 '폐얼(嬖㜸)'은 당나라 숙종(肅宗)과 대종(代宗) 때의 환관 정원진(程元振)으로 정권을 농단한 인물이다. '능전생(能全生)'은 대종이 정원진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을 가리킨다. 육리의……웃는데 원문의 '율리청산(六里靑山)'은 전국 시대에 장의(張儀)가 초나라 회왕에게 상오(商於)의 땅 6백 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가 나중에 이를 6리로 번복하여 초나라 회왕을 속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당(唐)나라 때 최도융(崔道融)은 〈초회왕(楚懷王)〉 시에서 "육리의 청산은 천하가 웃는데, 장의는 용이하게 갔다가 다시 오네.[六里靑山天下笑, 張儀客易去還來.]"라고 하였다. 잔약한……되었는가 잔약한 후손은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량(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卷84 屈原列傳》 강수은(姜睡隱) 강항(姜沆, 1567~1618)으로, 수은은 그의 호이다. 자는 태초(太初)이고 영광 출신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영광에서 가족과 함께 해로로 탈출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포로 생활 동안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하여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과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운대(雲臺)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은 곳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한 명제(漢明帝)가 영평(永平) 3년(60)에 광무제(光武帝)의 공신 28인을 그려 이곳에 봉안하였다. 주소장(朱少章) 주변(朱弁, 1085~1144)으로, 소장은 그의 자이다. 남송 고종(高宗) 때의 사람으로, 호는 관여거사(觀如居士)이고 문장에 뛰어났다. 주희(朱熹)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통문 부사(通問副使)로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6년 동안 구류되었는데, 금나라에 신하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며 절의를 지켰다. 수은의……논하였다 《宋子大全 卷137 序 睡隱集序》 참조.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우(伯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노산취필》은 김춘택이 1715년(숙종41)에 노산(蘆山)에 있을 때 지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논평집이다. 예언한 남공(南公)의 말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고 한 것이다. 남공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무관 섬서성(陝西省) 상남현(商南縣)의 북서쪽에 있는 관(關)으로, 진 소왕이 초 회왕을 만나자고 하여 진나라로 끌고 간 곳이다. 한 번……끊겼는데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은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史記 卷40》 잔약한……되었는가 앞의 〈제가기술(諸家記述)〉의 《서포만필(西浦謾筆)》 출처 주 참조. 처음에……사람이었다 1624년(인조2)에 최내길(崔來吉, 1583~1649)이 농포를 찾아왔을 때, 상중에 휴지와 함께 섞여 벽에 발려져 있는 이 시를 그가 보고 가서 친구들에게 전파하였다. 《農圃集 年譜》 문사 낭청(問事郞廳) 죄인의 심문서를 작성하여 읽어주는 일을 맡아 하는 임시 벼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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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초당122)의 〈무후묘〉 시123)에 차운하여 삼가 창렬사 벽에 쓰다 족증손 사성 광운 次杜草堂〈武侯廟〉詩 敬題彰烈祠壁上 族曾孫 司成廣運 위대한 자취 믿을 만한 사적에서 찾았으니위풍당당한 충렬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네산하는 아직도 우뚝한데 경관124)은 쌓여 있고원학도 여전히 들판의 곡소리에 애처로워하네의리 사모하여 지금까지 향기로운 제수 올리니돌아보건대 그날 공훈 결코 마음에 두지 않았네변방 백성도 스스로 울음 삼키며 지나가는데나라고 어찌 눈물이 옷소매 적시지 않겠는가 壯蹟曾從信史尋堂堂忠烈眼中森山河尙屹京觀築猿鶴猶哀野哭音薦苾于今由慕義顧勳當日定非心邊氓亦自呑聲過我淚如何不滿襟 두 초당(杜草堂) 당(唐)나라 두보(杜甫)를 말하는 것으로, 두보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았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무후묘시(武侯廟詩) 두보의 〈무후묘(武侯廟)〉 시가 《전당시(全唐詩)》 권229에 실려 있는데, 이 시는 오언절구이고 운자도 맞지 않아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보의 〈촉상(蜀相)〉 시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226에 실려 있는데, 이 시가 칠언율시이고 원문의 운자와도 맞다. 경관(京觀) 전공(戰功)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에 적의 시체(屍體)를 쌓아 올리고 흙을 덮은 큰 무덤을 말한다. 경구(京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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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명으로 목백 임윤신53)의 시에 대신 차운하다 以嚴君命代次牧伯任公允臣韻 수령54)이 금각55)을 떠나 鳧舃辭琴閣표연하게 산수의 사이에 있네 飄然水石間안개와 노을 낀 기다란 길 고요하고 煙霞脩逕靜술동이 있는 작은 집 한가롭네 樽酒小齋閑하늘의 밝은 태양 얼마나 아득한가 白日天何逈들녘의 푸르른 모가 스스로 위로하네 靑秧野自寬쇠약한 백성들은 흰 머리 흩날리며 殘民揚素髮두 손으로 빛나는 안장에 절을 하네 雙手拜華鞍 鳧舃辭琴閣, 飄然水石間.煙霞脩逕靜, 樽酒小齋閑.白日天何逈, 靑秧野自寬.殘民揚素髮, 雙手拜華鞍. 임윤신 1529~1588.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경룡(景龍)이다. 1559년 기미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부제학, 동래부사를 지내다가 1587년 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수령 원문의 '부석(鳧舃)'은 신선들이 신는 신발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지방의 수령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열전 상(方術列傳上) 왕교전(王喬傳)〉에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현 영(葉縣令)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臺)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니,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금각 수령이 정사하는 곳을 말하는데 금당(琴堂)이라고도 한다. 옛날 복자천(宓子賤)이라는 어진 수령이 선보(單父)라는 고을을 다스릴 때 거문고를 타면서 마루 아래에 내려온 일이 없었으나 선보현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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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1) 跋 선조(先祖)의 유집(遺集)과 부록은 지난 무자년(1708, 숙종34)에 좌윤 오중주(吳重周)2) 공이 통제사(統制使)로 있을 때 선인(先人 정구(鄭構))께서 일찍이 청하여 간행하였다. 그러나 태상시(太常寺)의 시장(諡狀)3)은 바로 그 뒤에 이루어졌고, 게다가 서문(序文)이 없었기에 항상 함께 간행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내가 민중승(閔中丞)의 서문4)을 얻어 드디어 장문(狀文) 및 선조의 격문(檄文) 중 잃어버렸다가 뒤늦게 찾아낸 것을 합쳐 이어서 간행하여 선인의 뜻을 이루고자 했지만, 다만 개인적인 힘으로는 성취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좌윤 공의 세질(世姪) 오혁(吳)5) 공이 다시 통제사가 되었기에 내가 또 선인께서 좌윤 공에게 청했던 식으로 공에게 청했더니, 공이 이내 판재(板材)와 조수(雕手 각수(刻手))를 모두 마련해 주어 열흘을 넘겨 일을 마쳤다. 이 문집이 마침내 완전하게 정돈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전후에 오공(吳公)께서 힘써주신 덕분이니,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또 선조께서 전란 중에 세운 공렬은 문집 속 제공(諸公)의 기록이 참으로 상세하고 확실하지만, 아직도 다 천명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한스러워하는 것은 아마도 함께 대항한 적장(賊將)을 거논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당시에 적장은 가등 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 소서 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끼나가) 두 놈이 수괴였는데, 가등 청정이 소서 행장에 비해 더욱 용맹하였다. 훗날 진양(晉陽 진주(晉州))을 격파한 것과 한산도(閑山島)를 더럽힌 것6)은 모두 가등 청정이 한 짓이니, 몹시 난폭하고 사나운 것이 이와 같았다. 그들이 병력을 나누어 공격하고 북쪽 지역으로 침입하여 일대를 짓밟고 해칠 때, 얼수(臬帥)7)와 진재(鎭宰)들이 달아나 숨거나 사로잡히다 보니 아무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만일 공이 백도(白徒)8)를 규합하여 거느리고 몽둥이를 만들어 떨쳐 일어나 날카로운 부리와 뒷발톱을 뽑아내고 발톱과 날개를 베지 않았다면, 적이 여러 차례 승리한 위세를 타고 석천(射天)9)할 계획을 실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곧장 서쪽으로 쳐들어가서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경계를 두렵고 놀라게 했을 것이니, 그렇게 했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끝내 빙빙 돌고 머뭇거리다가 달아나 숨을 겨를도 없게 되었다. 수많은 적을 섬멸하는데 이르러서는 더욱 여러 군진(軍陣)에서 최고였으니, 비록 평양(平壤)의 승전이라도 겨우 600명을 참수하였고 행주(幸州)와 연안(延安)10)도 더욱 이보다 적었다. 그런데 공의 장평(長坪)의 대첩(大捷) 같은 경우 한 번의 전투에서 참수한 것이 이미 800여 수급(首級)을 넘었고, 쌍포(雙浦)에서 적을 모조리 죽인 용맹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 전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렬이 참으로 탁월하다.대개 적이 강한가 약한가에 대해서는 그 장수를 따져봐야 하니, 장수가 진실로 강하면 이기기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가 노성(鹵城)에서 사마의(司馬懿)를 패퇴시킨 것에 대해 주자(朱子)가 특별히 이를 써서 그 어려움을 보였다.11) 그렇다면 공이 가등청정을 쳐부순 것이 또한 어찌 아주 어려운 상대를 이긴 경우가 아니겠는가. 충분히 전승(全勝)을 거두었는데도 누구 하나 여기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개탄스러워할 만하다. 감히 권말(卷末)에 이와 같이 드러내니, 보는 자는 후손의 사사로운 말이라 여기지 말고 부디 이로써 공의 큰 공적을 더욱 알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황명(皇明) 갑신년(1644) 뒤 115년 무인년(1758) 3월 상순에 현손 상점(相點)이 삼가 쓰다. 先祖遺集與附錄, 往歲戊子, 左尹吳公重周之莅統藩也, 先人蓋嘗請而登諸梓。太常之狀, 卽其後所成, 且未有弁卷之文, 常以不得幷刊爲恨。頃年, 相點求得閔中丞之序, 遂幷狀文及先祖檄文見佚而追得者, 欲繼入刊以遂先志, 顧私力未易就矣。適左尹公之世姪, 復持是節, 余又以先人之所以請於左尹公者請焉, 公乃倂惠板材與雕手, 踰旬而功訖。斯集之竟得完整, 皆賴於前後吳公之力, 余烏得無感哉? 且先祖龍蛇之烈, 集中諸公所記, 固爲詳實, 尙恨有未盡闡者, 蓋不論所與抗之賊將耳。當時賊將淸正、行長二酋爲魁, 而淸正視行長尤雄焉。異日晉陽之破, 閑山之衊, 摠淸正爲之, 其鷙悍有如是矣。而方其分攻北入, 蹂殘一路, 臬帥、鎭宰竄伏縛執, 無敢誰何。儻非公糾率白徒, 制梃1)奮呼, 落觜距而剪爪翼, 則賊乘累勝之威, 售射天之計, 渡江直西, 震驚乎遼廣之境, 亦無異矣, 而卒回翔躑躅, 逃遁而不暇焉。至於殲賊之夥, 尤爲諸陣最, 雖以平壤之勝, 斬馘僅六百, 幸州、延安又復下焉, 而若公長坪之捷, 一戰所斬, 已過八百餘級, 雙浦鏖殺之壯, 人至畵圖而傳之, 其功烈誠卓矣。夫敵之堅脆, 當論其將, 將苟强焉, 其勝莫難。故武侯鹵城之敗司馬懿, 朱子特書之以見其難。然則公之摧敗淸正者, 亦豈非於其莫難克者? 能取全勝, 而一無有論及此者, 是可慨也。敢於卷尾, 著之如此, 覽者勿以子孫之私言, 而尙克以是益知公之鴻績則幸矣。皇明甲申後百十五年戊寅暮春上澣, 玄孫相點, 謹識。 대본에는 제목이 없지만, 이 발문은 정문부의 현손 정상점(鄭相點)이 1758년에 추각(追刻)하고 붙인 것이다. 정상점은 초간(1708) 이후 충주 허창(許昶)의 집에서 추득(追得)한 〈倡義討倭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檄〉, 1712년에 민진후(閔鎭厚)가 지은 시장(諡狀), 1750년에 민우수(閔遇洙)에게 부탁하여 받은 서문(序文)과 1758년에 자신이 지은 발문을 추각하였다. 오중주(吳重周) 1654~173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후(子厚), 호는 야은(野隱), 아버지는 오두흥(吳斗興)이다. 1680년(숙종6)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 안무사 박사수(朴師洙)의 요청으로 통제사가 되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사퇴하였다. 태상시(太常寺)의 시장(諡狀) 태상시는 제사와 시호의 추증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1712년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지은 시장을 말한다. 민중승(閔中丞)의 서문 중승은 사헌부 집의를 가리킨다. 1750년에 사헌부 지평 민우수(閔遇洙)가 지은 〈농포집서(農圃集序)〉를 말한다. 오혁(吳) 1709~1769.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대이(大而)이다. 지평 오핵(吳翮)의 증손이다. 1734년(영조10) 무과에 급제하였다. 1752년에 충청도 수사, 1754년에 전라도 병사·삼도수군통제사·훈련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산도(閑山島)를 더럽힌 것 가등 청정이 한산도(閑山島)를 습격하여 격파하고 군세(軍勢)를 떨쳐 다시 쳐들어와 그 선봉이 호서(湖西) 지역에 이른 것을 말한다. 《宣祖實錄 30年 11月 10日》 얼수(臬帥)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통틀어 이르던 말로, 곤수(閫帥)라고도 한다. 백도(白徒) 훈련을 거치지 않은 병졸 또는 임시 소집된 장정을 말한다. 석천(射天) 하늘을 쏜다는 뜻으로, 중국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은왕(殷王) 무을(武乙)이 무도하여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매달고 천신(天神)이라 하면서 올려다보며 쏘았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史記 殷紀》 연안(延安) 임진왜란 때인 1592년 8월 28일부터 9월 2일에 걸쳐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 연안성(延安城)에서 구로다[黑田長政]의 왜군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무후(武侯)가……보였다 231년 여름 5월에 제갈량이 위(魏)나라의 사마의를 노성(鹵城)에서 패퇴시키고 그의 장수 장합(張郃)을 죽였다고 하는 주자의 기록이 있다. 《資治通鑑綱目 15卷 上》 梃 대본에는 '挺'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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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당에 쓰다 【당은 복암에 있다.】 題留仙堂 【堂在伏巖】 가을날 칠월 십육일 秋七月旣望손님이 강가의 집에 왔는데 客來江上家주인은 달빛 비추는 모래사장에 누웠고 主人臥沙月잠자는 백로는 갈대꽃 곁에 있구나 宿鷺傍蘆花팽택 동산 가운데 버드나무 같고50) 彭澤園中柳고산 눈 속51)51) 고산 눈 속 : 고산(孤山)은 송(宋)나라 임포(林逋)가 은거하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 매화를 많이 심고 학을 길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 '고산의 눈'은 고산에 핀 눈처럼 흰 매화를 말한다.의 매화나무 같네 孤山雪裡槎내일 아침 다시 머리를 돌려 明朝更回首서쪽 적성의 노을52)을 보리라 西見赤城霞 秋七月旣望, 客來江上家.主人臥沙月, 宿鷺傍蘆花.彭澤園中柳, 孤山雪裡槎.明朝更回首, 西見赤城霞. 팽택 …… 같고 은자적 삶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팽택(彭澤)은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晉書 卷94 陶潛列傳》 적성의 노을 적성은 중국 천태산(天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토석의 색깔이 붉어 항상 노을이 낀 것 같으며, 산의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晉)나라 손작(孫綽)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적성에 붉은 노을이 일어 표치를 세우고, 폭포는 날아 흘러서 길을 나누었도다.[赤城霞起而建標, 瀑布飛流以界道.]"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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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복연 시에 차운하다 次飮福宴韻 천재일우의 성세 오현금 연주하니303)봉황이 와서 춤추며 우는구나이제부터 큰 밝음이 두루 비추니만방이 시간을 다투며 즐거워하네 千年之會五弦琴祥鳳來儀噦噦音自是大明照臨遍萬邦歡樂競渾陰 오현금 연주하니 태평성세를 의미한다. 순임금이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남풍가(南風歌)〉를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辯樂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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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의 시에 차운하다 次德萬韻 변방에서 오랑캐 쫓아낸 지 몇 해 되었는가군복은 도리어 중유의 헤진 솜옷233) 같아라곤두선 머리털이 관을 삼천 길 높이 찔렀는데234)오랑캐 땅 지형 익히느라 이미 백발이 되었네 逐虜關河問幾秋蒙戎還似弊袍由衝冠壯髮三千丈學得胡山已白頭 중유의 헤진 솜옷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공자가 이르기를 "해진 솜옷을 입고[衣敝縕袍] 여우 갖옷, 담비 갖옷 입은 사람과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유(由)뿐이로다."라고 하였다. 《論語 子罕》 곤두선……찔렀는데 기개가 씩씩하고 늠름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나라 양형(楊炯)의 〈수주장강현선성공자묘당비(遂州長江縣先聖孔子廟堂碑)〉에 "공은 웅심을 품어 찢어지는 눈초리로 노려보고, 곤두선 머리털이 관을 찔렀다.[壯髮衝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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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절에 선영을 바라보며 생각하다 中秋望 憶先壠 중추 보름날은 한식과 같으니나라 풍속에 집집마다 묘에 제사하러 돌아간다네해마다 소나무 산 언덕에서 눈물 흘리니연경의 객은 갑접은 더 눈물로 옷 적시누나 中秋望日如寒食國俗家家祭墓歸歲歲松山壠上淚燕京爲客倍沾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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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관의 〈중추월〉 시에 차운하다 2수 次書狀仲秋月韻【二首】 지난해 이맘때는 고향에 있었으니달 밝은 밤 화려한 난간 곁에서 술잔 들었지형이 따라주고 아우가 권하고 실컷 즐겼는데서글프게도 오늘 밤에는 객사에 있구나항상 이지러지지도 않고 항상 둥글지도 않으니거울 같기도 빗 같기도 한 모습 누가 그리 만드는가한번 집 떠나온 뒤로 전혀 상관치 않으니여관 창에서 오직 등잔을 벗삼아 잠드노라 去歲玆辰在故鄕月明尊酒畵欄傍兄酬弟勸饒行樂惆悵今宵是客堂不常爲缺不常圓如鏡如梳孰使然一自離家渾未管旅窓惟有伴燈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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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300)가 보여준 시에 차운하다 3수 도총부(都摠府) 직소(直所)에서 지었다. 次李德哉見示韻【三首 在摠府直所】 대궐 숙직 때 분명 꿈에 야정 보았는데깨고 나니 산빛이 눈에 푸르게 들어오네이를 용면거사301)에게 말해 그리게 하고픈데다만 돌아가고픈 마음은 형언할 수 없네높은 소나무 긴 대나무 모두 꼿꼿하니굳은 절조로 세모에도 푸를 수 있구나우리 두 사람 지금 –원문 1자 결락302)-젊을 적 품은 심지가 노년에 드러나네관새에서 예전 여관에 묵었을 적에몇 번이나 함께 등잔을 밝혔던가도성의 백일과 홍진 속에서이르노니, 그리워하다 이미 늙었다오 禁直分明夢野亭覺來山色眼中靑欲將說與龍眠畫惟有歸心不可形長松脩竹共亭亭苦節能於歲晩靑吾兩人今不【缺】此少年心膽老年形關塞曾年宿旅亭幾回同伴夜燈靑長安白日紅塵裏報道相思已換形 이덕재 이성길(李成吉, 1562~1621)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洲)이다. 용면거사(龍眠居士) 송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 이공린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면산(龍眠山)에 들어가서 지내며 '용면거사'라 자호(自號)하였다. 원문 1자 결락 원문은 '不【缺】此'이다. '不'와 '此'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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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폭【이름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의심스러운 예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別幅【未詳名何人之問疑禮】 혹독한 질병으로 휴식을 한 뒤에 상에 임하여 성복(成服)하는 자는 《가례(家禮)》 분상조(奔喪條)에 '만약 할 수 없으면' 이하의 예절과 같을 듯합니다. 상(殤)의 요질(腰絰)68)은 그 띠를 묵지 않고 대공(大功)이하는 흩어 드리운다는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쇄(降殺)한 것일 것입니다.기제(忌祭)를 지내기 하루 전날이 속절 묘제(俗節墓祭)를 지낼 날이면 자제들에게 묘제(墓祭)를 행하도록 하여야 할 듯합니다. 만일 자제가 없거나 묘소가 먼 경우에는 고인(古人)들이 사당을 중요시하고 묘소를 가볍게 여기던 뜻으로 미루어서 묘제는 혹 폐하여도 될 듯합니다.묘제를 지낼 때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예기》 〈증자문(曾子問)〉의 일식(日食)이 일어나면 제사를 중지한다는 글로 미루어 보면 근거로 삼을 만합니다. 서인(庶人)은 다만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내니, 얼자(孼子)는 장방(長房)으로 체천(遞遷)69)할 수 없을 듯합니다.어떤 이가 사계(沙溪)에게 묻기를 "외숙의 처에 대해서는 복(服)이 없는데 국제(國制)에는 시마복을 입으니, 어느 복을 따라 입어야 합니까?"라고 하자, 답하기를 "외숙의 아내를 외숙모라고 한다. 옛날의 예는 미루어 볼 수 없고, 《개원례(開元禮)》70)와 국제에는 모두 시마복을 입도록 하였으니, 후한 쪽을 따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봉양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진설하기를 모두 평소와 같이 한다."라고 하였고, 선정(先正)71)이 말하기를, "사람이 막 죽었을 때에는 예로써는 그 새로운 것을 따를 겨를이 없고, 정으로써는 옛것을 다 바꾸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찬장에 남아있던 포와 육장을 제수를 올린 뒤에 올린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로 살펴보건대 《가례(家禮)》에 "습례(襲禮)를 행한 뒤에 전(奠)을 설치하며 성복(成服)한 뒤에 상식(上食)을 베푼다."고 한 것은 차례와 조리(條理)에 있어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 얕은 후학(後學)이라 미처 선정의 예제(禮制)의 본뜻을 깊이 궁구하지 못하였으니, 우선 그 이미 이루어진 절목(節目)에 따라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스스로 학문이 진보되고 식견이 투철해지게 되는 날을 기다린다면 그 은미한 뜻이 반드시 제 마음에 밝게 드러날 것이니, 어찌 굳이 먼저 천착(穿鑿)을 하겠습니까.무릇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고 나올 때에는 각기 한 상자씩을 사용하여 모시니, 기제(忌祭)에 한 신위(神位)만 모시고 올 때에도 독에서 신주를 꺼내어 받들어서 상자에 담아가지고 와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정자(程子)의 함께 제사 지낸다는 설을 따라 후하게 하여야 할 듯합니다.72)제사에는 기름으로 지진 음식은 쓰지 않는 것이 비록 옛날의 예이기는 하나, 세속의 사람들이 이 예를 쓴 지가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예를 좋아하는 선비가 용감한 뜻으로 옛날의 예를 따르는 것이 또한 어찌 불가하겠습니까.주부재배(主婦再拜)]는 주인(主人)에 대한 글을 이어받았으니, 사배(四拜)로 바로잡아야 할 듯합니다. 여러 형제들이 이미 주인과 함께 애곡(哀哭)을 한 뒤에 또 주인과 함께 배례(拜禮)를 행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을 듯합니다.윗옷의 앞쪽 옷섶을 끼운다는 것은 《가례》의 주(註)에 '삽상임(扱上袵)이란 윗옷의 앞쪽 섶을 띠에 끼우는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윗옷의 앞쪽 섶을 띠에 끼우는 것인 듯합니다.분묘(墳墓)에 화재가 난 경우에 대해서, 예에 사당을 지나면 수레에서 내리고 묘소를 지나면 경의를 표한다고 하였는데, 모든 묘제(廟祭)와 묘제(墓祭)에 어떤 일이 생기면 모두 강쇄(降殺)함이 있으니, 묘소와 사당에 화재가 났을 때에도 강쇄하는 것이 분명할 듯하나,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참배(參拜)하는 예와 사신(辭神)73)에 대해서, 《가례》 〈참례의(參禮儀)〉에 신주를 꺼낸다는 문장은 있고 신주를 거둔다는 조항은 없으니, 상세하지 못한 듯합니다. 우제(虞祭)에는 먼저 신주를 거둔 뒤에 절한다고 말한 것을 따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발인(發引)하는 날 아침에 상식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 《문공가례(文公家禮)》의 주에 '묘소가 멀면 머무는 곳마다 조석으로 상식을 올린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발인은 평조(平朝) 뒤에 있으니 그 전에 아침에 상식을 올릴 조항이 없겠습니까. 조효(早曉)에 발인을 하게 되면 미처 상식을 하지 못하니, 묘소가 멀면 길에서 상식하는 때에 널 앞에다 자리를 마련하고 상식의 예절을 행하여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동자(童子)가 제사를 주관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동자라도 축판(祝板)에 이미 자명(子名)을 썼으면 자식이 초헌(初獻)을 행하여야 합니다. 형의 상(喪)에 형의 아내가 살아 있는 경우에 대해서, 그 아내가 살아 있으면 아우가 제사를 받들어서는 안 됩니다.아우에게 고하고 아들에게 고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는 '상향(尙饗)'을 써야 하고 아우와 자식은 써서는 안 될 듯합니다. 《상례비요(喪禮備要)》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의심할 만합니다.죽은 자가 자기와 대등한 자 이하이면 전(奠)을 올리며 절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는 절하여야 하고 자식과 아우는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묘에 흙을 돋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식의 지극한 정으로는 옛날의 예를 따를 겨를이 없을 듯합니다.개장복(改葬服)을 입는 기간 내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옛날에는 복을 입은 사람이 장례 전에는 감히 상차(喪次)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감히 흉(凶)을 지니고 길(吉)을 제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개장과 초상(初喪)이 같지 않아 시제(時祭)를 지내지 않으니,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일 년이 지나 장례를 지내는 자가 초기(初忌)가 되었을 경우에 대해서, 사람의 정으로 헤아려보건대, 이미 초기가 되었으면 비록 장례를 지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날을 차마 그냥 보낼 수는 없을 듯합니다. 간략하게나마 전의(奠儀)를 베푸는 것은 예에 비록 이에 관한 글은 없으나 정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자식의 지극한 정으로 미루어 보아야 합니다. 厲疾止息後。入臨成服者。似與奔喪條若未得以下之儀同。殤之經不絞其帶。以大功以下散垂之義推之。爲其未成人。故殺之耶。忌祭前一日。値俗節墓祭。則似當令子弟代行墓祭。而若無子弟而墓遠。則以古人重廟輕墓之義推之。墓祭或似可廢耶。墓祭雷雨。以曾子問日食廢祭之文推之。似有可據。庶人只祭考妣則孼子恐不可以長房遞遷。或問于沙溪曰舅之妻無服。國制緦。當從何服。答云舅之妻謂之舅母。古禮推不去。開元禮及國制皆緦。從厚恐不妨云云。奉養之具。皆如平昔云云。先正有言曰人之始死。以禮則未暇從其新。以情則未盡易舊。故以閣上所餘脯醢。爲奠於旣奠之後。以此言觀之。家禮自襲後設奠。成服後設上食。次第絛理。必有深意。後學識淺。未及深究先正禮制之本意。則姑當從其已成之節目。以待自已學進見透之日。則其微意必逞露於吾心矣。何必經先穿鑿也。凡奉主出廟。各用一笥奉之。則忌祭一位奉來。恐可奉主出櫝。奉之以笥而來。然當從程子幷祭爲厚。膏煎不用。雖是古禮。世俗襲用已久。恐難卒變。然好禮之士。勇意從古。亦何不可。主婦再拜。蒙主人之文。恐當以四拜爲正。衆兄弟旣與主人同叙哀哭。則又與主人同行拜禮。恐無不可。扱衣前襟云云。家禮註云扱上袵。謂扱衣前襟之帶。恐是衣之前襟?帶。墳墓火云云。禮過廟則下。過墓則式。而凡廟祭墓祭。皆有降殺。則墓火廟火。亦似有殺明矣。未知如何。參禮辭神云云。家禮參禮儀。有出主之文而無斂主之節。似欠詳盡。倣虞祭先斂後拜云者。恐爲便當。發引之日。朝奠上食云云。文公家禮註云若墓遠則每舍朝夕奠上食。以此推之。發引在平朝之後。則其前烏可無朝奠上食之節也。發引在早曉。未及上食。而墓遠則似當於道上食時。設座於柩前而行上食之節。未知如何。童子主祀云云。雖童子祝板旣用子名。則子當行初獻。兄喪妻在云云。其妻在則弟不當奉祀。告弟告子云云。妻則似當用尙饗。弟與子。似不當用。而備要如此可疑。死者敵已以下。奠而拜云云。妻則當拜。子與弟不當拜。墳墓不培云云。人子至情。似不暇從古禮。改葬服內行祭云云。古者服人未葬之前。不敢違離喪次。故亦不敢冐凶祭吉。今改葬與初喪不同。不行時祭。未知如何。更詳之。周而葬者初忌云云。規之人情。旣遇初忌。雖未克葬。似不忍虗過此日。略設奠儀。禮雖無文。情可廢乎。如此等事。當推以人子之至情。 상(殤)의 요질(腰絰) 원문은 '殤之經'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經'을 '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장방(長房)으로 체천(遞遷) 장방은 최장방(最長房), 곧 4대 이내의 자손 중에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 봉사손(奉祀孫)에게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를 모셔다가 제사를 받드는데, 이를 체천이라고 한다. 《개원례(開元禮)》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말한다. 당(唐) 나라 초기에 태종(太宗)이 방현령(房玄齡)을 명하여 수(隋) 나라의 예에 의하여 예문(禮文) 1백30편을 편수하여 《정관례(貞觀禮)》를 만들고, 고종(高宗)이 또 장손무기(長孫無忌)를 명하여 거듭 편찬하여 《현경례(顯慶禮)》 1백30권을 만들고, 현종(玄宗)이 또 서견(徐堅), 이예(李銳)를 명하여 거듭 1백50권으로 찬정(撰定)해서 《개원례》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내용은 서례(序例)로 나누어 길례(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가례(嘉禮), 흉례(凶禮)까지 있다. 《唐會要 三十七 五禮篇目》 선정(先正) 방각(方慤, ?~?)을 가리킨다. 방각은 자는 성부(性夫), 송나라 동려(桐廬) 사람으로, 《예기집해(禮記集解)》를 지은 인물이다. 무릇……듯합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02 〈답이백첨(答李伯瞻)〉. 우암은 당시 '병제고비(並祭考妣)'의 설과 '제일위(祭一位)'의 설이 있으니, 고비에 모두 제사 지내는 것이 옳다면 신위가 각기 다른 독(櫝)에 모셔져 있더라도 두 독을 함께 받들고 나옴을 의심할 것이 없고, 일위(一位)에만 제사를 모셔야 한다면 합독(合櫝)이라 할지라도 한 분의 신위만 따로 빈 독에 모셔 나옴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주자의 《가례》에는 합독이 정식이므로 이를 어길 수 없다고 하면서 예를 아는 자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고 결론을 유보하였다. 사신(辭神) 제사를 마치고서 신주를 거두어 신주를 넣어 두는 궤인 주독(主櫝)에 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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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략(三略)》219)을 읽고 讀三略書 남자다운 마음과 여자 같은 용모220)왕교(王喬)221)와 같은 자품으로 기(夔)와 용(龍)222)처럼 되기를 허락하였네처음 천하를 평정할 적에는 황석공(黃石公)에게 배웠고223)만년에 공명(功名)을 이루고서는 적송자(赤松子)를 벗하였네224)한(漢)과 초(楚)의 흥망(興亡) 세치 혀에서 판가름 났고225)진(秦)과 한(韓)의 묵은 원한 긴 병기(兵器) 하나로 보여 주었네226)썰렁한 서재【'한(寒)'은 어떤 본에는 '한(閑)'으로 되어 있다.】에서 당시의 비결(秘訣)을 다 보고나니나도 모르게 천지의 장대한 기운이 따라 일어나네 男子心胷女子容王喬身世許夔龍初平天下師黃石晩遂功名友赤松漢楚興亡三寸舌秦韓讎怨一長鋒寒【寒一作閑】齋閱盡當年訣不覺乾坤壯氣從 삼략(三略)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병서(兵書)로, 상략(上略), 중략(中略), 하략(下略)의 세 권으로 되어 있다. 남자다운……용모 사마천(司馬遷)이 장량(張良)을 평한 말에, "나는 그 사람이 체격이 크고 기이하게 생긴 줄 알았는데, 그의 화상(畫像)을 보니, 마치 아름다운 여인(女人)과 같았다."라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왕교(王喬) 왕자교(王子喬)를 가리킨다.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의하면, 왕자교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으로, 피리 불기를 좋아하였는데 피리를 불면 봉황새 우는 소리가 났다.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서 노닐다가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에서 신선술을 배웠고, 30여 년 뒤에 흰 학을 타고 구씨산(緱氏山) 꼭대기에 내려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장량 역시 공업(功業)을 이른 뒤에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夔)와 용(龍) 순(舜) 임금의 어진 두 신하를 말한다. 기(夔)는 음악을 담당하였고, 용(龍)은 간언(諫言)을 담당하였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신하가 된 장량을 이들에 빗댄 것이다. 처음……배웠고 장량이 하비(下邳)의 다리에서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이 다리 밑으로 떨어진 신을 주워달라고 하였다. 장량이 신을 주워 공손히 신겨주자, 노인은 그에게 강태공의 병법서를 주었다. 장량은 이를 익혀 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만년에……벗하였네 '적송자(赤松子)'는 전설상의 신선 이름이다. 장량은 천하가 통일된 뒤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조(高祖)에게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를 좇아 놀기를 원합니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라 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한(漢)과……났고 장량이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모신(謀臣)으로 활약하며 한(漢)나라가 초(楚)나라에게 승리를 거두는 데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진(秦)과……주었네 장량은 선조가 한(韓)나라 사람이었는데, 진(秦)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당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창해역사(滄海力士)로 하여금 철퇴를 들고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저격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철퇴가 빗나가 진 시황이 탄 마차를 맞히지 못하고 다음 수레를 치고 말았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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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이 거닐며 閒行 난초 언덕과 푸른 이끼 모두 밟고서봄빛을 찾아 높은 누대에 오르네오솔길 방초(芳草)와 이어지니 향기가 나막신에서 생겨나고사람이 푸른 소나무에 의지하니 푸른빛이 잔에 스며드네십 리의 물결 빛깔 상과 도마에 일렁이고온 산의 꽃기운 술동이를 이끄네얼큰히 취해 동풍(東風)을 마주하니천 송이 만 송이의 희고 붉은 꽃들 저마다 활짝 피어 있네 踏盡蘭臯與碧苔行尋春色上層臺逕連芳草香生屐人倚靑松翠入盃十里波光搖案俎一山花氣惹樽罍薰然醉對東風面萬白千紅自在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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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발문(1)12) 重刊跋(1) 대개 문학(文學)과 충량(忠良)은 바로 나라의 정간(楨幹)13)이다. 옛날에 뛰어난 문장과 탁월한 절개가 백대에 빛나는 자가 있으면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동관(彤管)14)으로 먼저 능연각(凌煙閣)15)과 죽백(竹帛 사서(史書))에 기록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게 하였다. 또 그 자손 된 자가 혹 판각하여 길이 전하고 활자(活字)로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배포하여 그 영광과 그 공렬을 해와 달처럼 빛나게 하고 서리와 눈처럼 늠름하게 하였으니, 어찌 천년 뒤에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아! 생각건대 나의 9대조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선생은 풍부한 문학으로 일찍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선묘조(宣廟朝) 임진년(1592)을 당하여 북쪽 지역을 안정시켰으니, 곧은 충정은 백세토록 빛나서 국사(國史)에 밝게 드러날 뿐만이 아니라고 이를 만하다. 또 전후로 기실(記實)을 찾아내고 채집하여 여러 선생이 집필한 글에 자세히 갖추었으니, 이제 후손의 좁은 소견을 어찌 감히 그사이에 덧붙이겠는가.아! 나의 5대조 불우헌공(不憂軒公 정상점(鄭相點))은 바로 선생의 현손이다. 일찍부터 강개한 마음을 가지고 조상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선생이 평소 집에 소장하고 있던 본초(本草)와 유사(遺詞) 및 일고(逸稿)를 좀먹거나 교감(校勘)16)한 뒤에 수습하고, 병란과 환란을 겪은 뒤에 모아서 주선하여 판각한 것이 바로 두 권의 책17)이다.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 지가 100여 년에 이르렀으며, 각판(刻板)은 진주(晉州) 용암(龍巖)의 재실(齋室)에 보관되어 있기에 이로 인해 사모하는 마음을 부친 지가 오래되었다.그러다가 근래에 경향(京鄕)의 세가(世家)와 북쪽 지방의 유생들이 소중하게 보관한 것을 널리 채집하고 두루 찾아서 또 몇 권을 문집에 편입(編入)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바야흐로 활자로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예전대로 구집(舊集 정상점 간행본)을 속간(續刊)한다면 책 모양의 크기, 목판과 활자의 자체(字體)와 편차(編次)의 선후에 착란의 잘못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전부 활자로 하기로 논의를 결정하였다. 구집의 각판은 자연스럽게 존각(尊閣)18)에 돌려놓았을 따름이니, 우리 불우헌공의 자손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의 5대조께서 조상을 위한 일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 결국에는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완집(完集)을 간행하는 것이 도리어 구집을 속간하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 하겠다.숭정(崇禎) 기원후 5번째 경인년(1890) 3월 하현(下弦)에 9대손 혁교(奕敎)가 두 손 모아 절하며 삼가 쓰다. 蓋夫文學、忠良, 卽國之楨幹也。古有偉文、卓節, 光耀於百世者, 則太史氏彤管, 先以凌烟、竹帛, 而與天地相終焉。且爲其子孫者, 或鋟梓壽傳, 印鑄廣布, 使其光其烈, 煥乎若日月, 凜乎若霜雪者, 豈非起死人於千載之下云者乎? 噫! 唯我九代祖忠毅公農圃先生, 以贍實文學, 早登甲科, 當宣廟朝壬辰歲靖北, 貞忠可謂百世光耀, 而不但於炳著國乘。又前後採訪記實, 備悉於諸先生秉筆之下, 則今以後孫之管見, 何敢贅附於其間哉? 粵我五代祖不憂公, 卽先生之玄孫也。夙抱慷慨, 殫誠爲先, 先生之平日家藏本草與遺詞、逸稿, 收拾於蠹食、偏傍之餘, 裒葺於兵燹、患亂之後, 而周旋剞劂者, 乃兩卷冊子也。刊行傳世, 至於百有年所, 而刻板則藏于龍巖齋室, 仍以寓慕者久矣。近於京鄕世家與北儒珍藏, 博採旁搜者, 又爲數卷編集, 故今方印鑄布行, 而若仍舊續集, 則冊樣大小, 板鑄字體, 編次先後, 有失於舛錯, 故不獲而全以活字歸論。而舊集板刻, 自然歸之於尊閣而已, 則爲吾不憂公子孫者, 孰不慨惜? 而以吾祖爲先, 未遑底意, 究竟則其在繼述之道, 印行完集, 反有賢於續舊也哉。崇禎紀元後五庚寅暮春下弦, 九代孫奕敎, 拜手謹識。 대본에는 제목이 없는데, 이 중간 발문은 정문부의 9대손 정혁교(鄭奕敎)가 1890년에 7권 4책으로 편차한 뒤에 활자본으로 중간하고 붙인 것이다. 정간(楨幹) 정은 담의 양쪽 끝에 세우는 나무이고 간은 양면에 세우는 나무로, 사물의 근본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관(彤管) 자루가 붉은 붓으로, 사필(史筆)을 가리킨다. 옛날 주(周)나라 때 여사(女史)가 이러한 붓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다. 《詩經 邶風 靜女》 능연각(凌煙閣) 당 태종이 정관(貞觀) 17년(643)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두여회(杜如晦) 등 훈신(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여기에 걸어 놓게 하였다. 《新唐書 卷2 太宗皇帝本紀》 교감(校勘) 초고(草稿)를 정리하여 간행하는 과정 중에 글자의 변(偏)과 방(傍)이 비슷한 속자(俗字)를 교감하여 수정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두 권의 책 1758년에 정상점(鄭相點)이 간행한 것을 말한다. 존각(尊閣) 존경각(尊經閣)의 준말로, 지방 향교나 서원의 장서각(藏書閣)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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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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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발문(2)19) 重刊跋(2) 농포 정공(鄭公)은 왜적이 날뛰던 때에 북병사(北兵使)의 좌막(佐幕)이었는데, 유아(儒雅)한 몸으로 사시(蛇豕)의 돌진20)을 가로막아 세상에 드문 기이한 공을 세우고도 끝내 시안(詩案)의 화를 당하였다. 애석하다! 하늘이 이미 공에게 문무를 겸비한 재능을 부여하여 태어나게 하였는데, 큰 난리로 곤액(困厄)을 겪게 하고 깊은 원통함에 빠지게 한 것은 도대체 또 무슨 의도인가. 옛날에 악 무목(岳武穆)이 '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 때문에 죽자21)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였으니, 공의 충성과 원통함이 거의 옛사람과 결과가 같아 영원히 지사(志士)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열성조(列聖朝)께서 원통함을 씻어주고 공적을 포상하여 선양해 준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남은 유감이 없으니, 그 성대한 조우(遭遇)가 어찌 생사에 차이가 있겠는가.공의 유문(遺文)은 화환(禍患) 중에 잃어버려 매우 희소하지만, 그 말씀과 공업(功業)은 진실로 모두 여기에 남아있으니, 잘 관찰하는 자가 여기에 나아가 이를 반복해서 본다면 또한 평소의 모습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손이 장차 이 문집을 다시 간행하고자 하여 나에게 권미(卷尾)에 한마디 말을 써넣도록 하였다. 아, 경송(勁松)22)은 덩굴지지 않고 빛나는 해는 요기(妖氣)가 없으니, 이와 같지 않다면 그의 강직한 성정이 어떻게 흘러나왔겠는가? 나의 선자(先子)이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께서 일찍이 그 사업을 논하면서 사당터를 하사받은 곳에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23) 아름다운 칭송 같은 것에 대해서도 민 문간공(文簡公 민우수(閔遇洙))의 서문에 빠짐없이 서술하였으니, 또 어찌 나의 군더더기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럭저럭 마음에 느낀 바를 써서 돌려주었다.숭정 기원후 5번째 경인년(1890) 초봄에 덕은(德殷) 송병선(宋秉璿)이 발문을 쓰다. 農圃鄭公, 佐幕北閫於島夷陸梁之日, 以儒雅之身, 橫蛇豕之衝, 建立不世寄功, 而卒罹詩案之禍。惜乎! 天旣以文武全才乎公而生, 阨之以大亂, 沈之以幽寃者, 抑又何意歟? 昔岳武穆死於莫須有三字, 天下悲之, 則公之爲忠爲寃, 殆與古人同歸, 而足以釀千古志士之淚矣。然列聖之湔滌褒顯, 固無餘憾, 則其遭遇之盛, 奚間於生死也哉? 公之遺文, 逸於禍患, 雖甚寂廖, 而其言語也事功也, 固皆在於斯矣, 善觀者卽此而反覆之, 亦可以槪其雅素矣。後孫將欲重刊是集, 而俾余置一言於卷尾。噫! 勁松不蔓, 光日無氛, 不如此, 其何以爲剛腸之所流出哉? 吾先子文正公, 嘗2)論其事業, 許以俎豆於受賜之地。至如稱述之美, 閔文簡3)公序殫矣, 又何待余言之贅? 聊書所感於中者以歸之。崇禎紀元後五庚寅孟春, 德殷宋秉璿, 跋。 대본에는 없는데, 《연재집(淵齋集)》 권28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사시(蛇豕)의 돌진 큰 멧돼지와 긴 뱀[封豕長蛇]과 같이 끝없이 탐욕을 부리면서 포학한 짓을 하는 왜적이 함경도로 돌진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죽자 무목(武穆)은 남송(南宋) 때 충의가 뛰어난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이다. '막수유(莫須有)'는 '아마도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개연성만으로 있을 것이라고 추단(推斷)하여 근거 없이 무함하는 것을 말한다. 진회(秦檜)가 충신 악비를 죽이려고 무함하여 "악비의 아들 운(雲)이 장헌(張憲)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체로 보면 아마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자, 한세충(韓世忠)이 "'막수유' 세 글자가 어떻게 천하를 복종시키겠는가."라고 한 데서 나왔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경송(勁松) 서리나 눈에도 시들어 죽지 않는 강(強)한 소나무로, 정신(貞臣)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문정공(文正公)이……허락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48 〈이계주에게 답함[答李季周]〉에 "고서(古書)에 '큰 난을 막은 자가 있으면 이를 제사지낸다,'고 한 글이 있으니, 지금 이로써 사당터를 하사받은 곳에 제사 지내는 것을 어찌 의심하고 의심하겠는가.[古書, 有抗大難則祀之之文, 今以此俎豆於受賜之地, 何疑何疑?]" 하였다. 1665년에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단천(端川) 군수 홍석구(洪錫龜)와 경성(鏡城) 어랑리(漁郞里)에 사당터를 정하고, 이해 4월 2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공사를 마쳤다. 어랑리는 바로 농포 정문부가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다. 《農圃集 卷7 年譜》 嘗 대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는데, 《연재집》 권28에 근거하여 고쳤다. 簡 대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는데, 1758에 문간공(文簡公) 민우수(閔遇洙)가 지은 서문(序文)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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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읊다 偶吟 태고적 같은 작은 집에서 小齋如太古석양 하늘 아래 홀로 앉았네 獨坐夕陽天금강석 같은 눈은 은빛 세계 이루고 銀界金剛雪옥정56)의 안개는 얼음 비단 같네 氷紈玉井煙풍광이 밝은 태양을 씻어주고 光風洒白日비 갠 뒤 달빛은 차가운 샘물을 비추네 霽月照寒泉천지간에 나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俯仰吾無愧거문고 타고 독서하며 편안히 세월 보내리라 琴書穩送年 小齋如太古, 獨坐夕陽天.銀界金剛雪, 氷紈玉井煙.光風洒白日, 霽月照寒泉.俯仰吾無愧, 琴書穩送年. 옥정 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 있다는 연못 이름이다. 한유(韓愈)의 〈고의(古意)〉에 "태화산 꼭대기 옥정에 있는 연은, 꽃이 피면 열 장이요 뿌리는 배와 같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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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상 세 절구시는 빗소리를 들으며 지은 것이다.】 又 【以上三絶聽雨】 비 지나간 봄 산에 풀이 절로 돋지만 雨過春山草自生남은 꽃 한들한들 떨어져 나비 날아오지 않네 殘花飄落蝶無情그 모습 눈에 들어오니 온갖 정감 생기는데 森森入眼渾成感차디찬 처마에 방울방울 물소리 들리도다 滴滴寒簷更有聲 雨過春山草自生, 殘花飄落蝶無情.森森入眼渾成感, 滴滴寒簷更有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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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又 이 밤 달빛이 매우 밝고 此夜蟾光十分明이웃집 피리소리 정겹기도 해라 數聲隣笛更多情두보가 맑은 밤에 섰던 일 아득히 생각하니 遙思杜老淸宵立예나 지금이나 달빛 아래 걷는 마음은 매 한가지69) 今古心同步月行 此夜蟾光十分明, 數聲隣笛更多情.遙思杜老淸宵立, 今古心同步月行. 두보가 …… 한가지 아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한별(恨別)〉에, "고향 집 생각하며 달 아래 거닐다 맑은 밤에 서 있고, 아우를 그리워하며 구름 보다가 한낮에 꾸벅꾸벅.〔思家步月淸宵立 憶弟看雲白日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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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나루의 강가 정자 4수 楊花渡江亭 四首 천 길의 산봉우리 깎아 지른 듯 솟아있고높다란 정자 푸른 물결을 베개 삼았네물결 흔적 저물녘에도 여전히 축축하고강에는 밤에 서늘한 가을 기운 도네푸른 나무엔 꾀꼬리 보이고밝은 모래톱엔 흰 갈매기 보이지 않네내일 아침에 한양으로 떠나니티끌세상이 사람을 시름겹게 하는구나-원문 2자 결락- 높이 솟아 있고문을 열고 맑은 물결 굽어보네먼 산봉우리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평평한 밭엔 보리 이미 익었구나높은 돛은 사나운 물결 따르고흔들리는 노는 잠자는 갈매기 깨우네달 떠오르자 어망을 거두고술 마시며 또한 시름을 달래네-원문 2자 결락- 연하 드넓고장강은 하늘 끝으로 흐르네좋은 경치 구경 겨우 한낱 꿈이요밝은 달은 절로 천추에 빛나네세상 살아감에 새장 속 학과 같은 신세이니물결 굽어봄에 바다 갈매기에게 부끄러워라술 사서 마셔본들 어떠리한껏 취하여 번뇌를 씻노라산은 누에 머리처럼 이어져 있고정자는 큰 강 물결 굽어보네달의 물결 삼경에 –결자-바람 부는 난간은 오월에도 가을이라어촌은 해안을 마주하고잠든 객은 모래톱 갈매기와 짝하는구나좋은 벗은 환백3)을 맞이하고노래하는 여인은 막수4)에게 부족하네 削立千尋嶂危亭枕碧流潮痕晩猶濕江氣夜生秋樹綠看黃鳥沙明失白鷗明朝京洛去塵土使人愁【二字缺】高突凡開戶瞰淸流遠峀嵐蒸氣平田麥已秋高帆隨駭浪搖櫓起眠鷗趁月收漁網啣盃且遣愁【二字缺】烟霞豁長江天際流勝遊纔一夢明月自千秋處世同籠鶴臨波愧海鷗不妨沽酒飮泥醉滌煩愁山連蠶頭勢亭壓大江流月浪三更【缺】風欞五月秋漁村臨海岸眠客伴沙鷗良友邀歡伯歌姬欠莫愁 환백 술을 뜻한다. 한(漢) 나라 초공(焦贛)의 《역림(易林)》 〈감지태(坎之兌)〉에 "술은 기쁨의 우두머리로 근심을 없애고 즐거움을 오게 한다.[酒爲歡伯, 除憂來樂.]"에서 온 말이다. 막수 막수(莫愁)는 악부에 나오는 전설상의 미녀이다. 《구당서》 〈음악지(音樂志)〉에 "석성에 막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는데, 노래를 잘한다.[石城有女子, 名莫愁, 善歌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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