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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습재기 時習齋記 지극히 고요한 것[至靜]을 일러 '성(性)'이라 하고 동(動)이 있는 것을 일러 '기(氣)'라고 하며 정(靜)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을 일러 '정(情)'이라고 하고, 통괄하여 그것을 주관하는 것을 일러 '심(心)'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은미하여 비록 마음에 거처하나 그 넓은 쓰임은 천지[六合]179)를 가득 채우고도 궁핍하지 않고 육합의 넓은 것을 마음 안에 거두어들여도 사물을 각각 사물에 맡겨두어180) 만 가지 선이 갖추어지기에 족하니 배우지 않아도 능하겠는가? 육합의 광대함과 만 가지 선의 많은 것을 마음의 작은 것에 운반하여 나르면서도 가려서 지킬 수 있고, 지켜서 행할 수 있으니 익히지 않고 능할 수 있겠는가?여기에서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은 학문의 처음과 끝이 되기 때문에 궐리(闕里)181)의 무리가 《논어》 20편의 수장에서 으뜸으로 삼은 것이다.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에 비록 때때로 익히는 공부를 수용하지 않았더라도 움직임이 있고 난 뒤에 만약 일식(一息)의 익힘이 없으면 곧 배움이 아니다. 치지(致知)는 지식을 익히고자 한 것이고 역행(力行)은 실행을 익히고자 한 것이다. 만약 "나의 지식이 이미 지극하고 나의 실행이 이미 힘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여 더는 때때로 익힘의 노력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아는 것이 협소해지고 실행이 질퍽질퍽해질 것이다. 이미 협소하고 또 질퍽질퍽해지면 이른바 행동이 아는 것에 구애되어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또한 전일의 청명(淸明)함을 보존할 수 없어서 통괄하여 주관하는 것이 병주고향(幷州故鄕)182)에 귀착되는 것은 드물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이로다!우리 고을에 신여진(愼汝眞) 군이 있어 그 서재를 '시습(時習)'이라 편액하고 나에게 글을 써주기를 깊이 간청하였다. 내가 지행(知行) 두 글자를 들어 곡진하게 고했다. 나 또한 십 년 전의 사냥을 좋아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는데183)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임진년(1652, 효종3) 2월 10일 쓰다. 至靜之謂'性'。 有動之謂'氣'。 自靜而動之謂'情'。 統是而主焉之謂'心'。 是心之微。 雖宅於方寸。 其用之廣。 彌六合而不竆。 六合之廣。 收而致之方寸之內。 物各付物。 萬善俱足。 其不學而能之歟? 六合之廣。 萬善之衆。 運而輸之方寸之小。 擇而能守。 守而能行。 其不習而能之歟? 此致知力行。 爲學問之始終。 而闕里之徒。 弁之於二十篇之首者也。 至靜之中。 雖不容時習之功。 有動之後。 苟一息之不習則便非學矣。 致知欲其習於知也。 力行欲其習於行也。 若曰: "吾之知旣至。 吾之行旣力。 更不加時習之功。" 則所知者狹。 所行者泥。 旣狹且泥則所謂動之者。 拘於自知。 而至靜之中。 亦不能存其前日之淸明。 而所謂統而主之者。 鮮不歸幷州之故鄕矣。 其可畏也夫! 吾黨有愼君汝眞者。 扁其齋曰'時習'。 屬余求言甚懇。 余擧知行二字申告之。 余亦未革夫十年前喜獵之習者。 仍自警省焉。 壬辰仲春上澣書。 육합(六合)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으로 천지(天地)를 의미한다. 사물을 …… 맡겨두어 물각부물(物各付物)의 의미로, 사물을 제각각의 사물에 맡겨둔다는 뜻이다. 《근사록(近思錄)》 권4 〈존양(存養)〉에 "사람이 어떤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다른 일에 구애된 나머지 사물을 제각각의 사물에 맡겨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제각각의 사물에 맡겨두면 이는 내가 사물을 부리는 것이지만, 사물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면 이는 사물에 의해 부림을 받는 것이다.[人不止於事, 只是攬他事, 不能使物各付物, 物各付物, 則是役物, 爲物所役, 則是役於物.]"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사물을 제각각의 사물에 맡겨둔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오면 반응을 하되 과도하게 하지 않고, 사물이 가면 변화하되, 그 흔적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내가 사물을 부리게 되고 사물에 의해 부림을 당하지 않게 된다.[所謂物各付物者, 物來而應, 不過其則, 物往而化, 不滯其迹, 是則役物而不爲物所役.]"라고 하였다. 자기의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어떤 일이든 객관적으로 살펴서 그 일에 알맞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궐리(闕里)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의 옛 마을로, 공자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병주고향(幷州故鄕) 정든 타향을 고향에 비유하는 말로 당나라의 가도(賈島)가 병주(幷州)에 오래 살다가 떠나면서 지은 〈상건을 건너며[度桑乾]〉에서 "돌아서 병주를 바라보니 이게 고향인가 하노라.[却望幷州, 是故鄕.]"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오랫동안 생활하여 정든 타향을 뜻한다. 여기서는 자신이 해 오던 학문 방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냥을 …… 못했는데 정호(程顥)가 16, 7세 때에 사냥을 좋아하다가 그만두고 "저는 이미 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자, 그의 스승 주돈이(周敦頥)가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는가. 지금은 그 마음이 숨어 있어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이네. 어느 날 싹이 터 움직이면 다시 전과 같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2년 뒤 석양 무렵 집으로 돌아오던 중, 들판에서 사냥하는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즐거운 마음이 들자 비로소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줄을 알았다고 한다. 《二程全書 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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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기유기 玉峀奇遊記 면성(綿城)184)의 동쪽, 금강(錦江)의 북쪽에 하나의 기이한 봉우리가 사호(沙湖) 가에 우뚝 서 있어 이름을 '옥수(玉峀)'라고 하는데, 연파처사(烟波處士)185)가 바위틈에 하나의 작은 집을 짓고 읊은 동악백운(東岳白雲)의 시구186)가 온 세상에 빛나 산이 외롭지 않다. 내가 이 세상에서 반평생을 병마[二竪兒]187)에 시달려 아직껏 절정에 올라 고상한 자취를 살피지 못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 4월 하순에 조각배 하나를 얻기를 도모하여 물길 따라 띄워, 생각했던 대로 그 밑으로 갔다.미처 수백 궁(弓) 거리에 못 미쳐 중류에서 바라보니, 단지 첩옥(疊玉) 누경(累瓊)만이 보이는데 빼어난 세상 밖에 창송(蒼松) 취초(翠草)가 분벽(粉壁) 사이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바위 모서리에 배를 대고 언덕을 따라 올라가 구불구불 동쪽으로 돌아가다가 석대 위에서 쉬고 거듭 서쪽으로 꺾어 들자 오솔길이 있었다. 돌 비탈 6, 7보를 기어오르면서 오른편으로 백장(百丈) 층벽을 붙들고 왼편으로 천길 깊은 못을 굽어보니, 겨우 하나의 지팡이와 신발을 허용할 정도였다. 몇 걸음을 가다가 옥수암(玉峀庵) 옛터를 만났는데 면적(延袤)188)은 2장(二丈) 남짓으로 푸른 이끼와 잔디가 오래된 섬돌을 뒤덮고, 돌 사이에 오직 안석류(安石榴)189) 한 떨기가 있었는데, 처사가 손수 심은 것이었다. 그 서편 돌길에 아직도 남은 자취가 있어 풀과 가시가 자라지 않았다. 또 그 서편으로 작은 대(臺)가 있고, 작은 대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아 북쪽 가까이 올라가니 한걸음에 한 석대(石臺)가 층층 첩첩 쌓여 있어 번민과 피로를 잊었고, 높은 정상에 오르자 활연히 통창(通暢)하여 신선이 된 것처럼 상쾌하였다. 석대 위에 의자 같은 돌이 있고, 의자 위에 창송(蒼松)이 일산 같았다. 의자에 걸터앉아 사방으로 하늘 자락을 바라보니 이 몸이 티끌 세상의 인간이란 걸 깜빡하였다.인하여 연파 노선(烟波老仙)이 대나무 가마와 복건(幅巾)으로 사물을 보고 흥을 일으켜 붓을 뽑아 붉은 점을 찍어 월변승영(月邊僧影)의 시190)에 휘둘러 뿌리던 기상과 풍채를 상상하니, 눈앞의 일처럼 선하였다. 우러르고 굽어보는 사이에 감개가 이어졌으니, 모르겠지만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우리 인간의 자취가 다 민멸(泯滅)하고, 또 어떤 사람이 오늘의 일처럼 세상 밖에 뜻을 두고 나중에 나의 자취를 살펴볼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석공(石工)을 시켜 연파(烟波)의 한 절구(絶句)를 석벽 위에 새기고, 그 뒤에 누추한 나의 이름을 새겨 호산(湖山)의 질탕한 회포를 붙이고 싶었으나 산랑(散浪)의 사람이라 힘이 모자라 뜻을 이루지 못하니 서글펐다. 이에 추연(愀然)하여 즐기지 못하고 발길 따라 아래로 내려오다가 산자락에 이르러 층벽(層壁)을 돌아보니, 한 늙은 중이 있었는데 어디서 온 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등 넝쿨을 헤치며 언덕을 짚고 올라 위태로운 바위꼭대기에 앉아 있기에 내가 기이하게 여겨 부르며 오게 하였으나,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 또한 배에 올라 읊조리며 돌아가다가 해산(海山)을 돌아보니 좋은 꿈에서 깬 것만 같았다. 綿城之東錦江之北。 有一奇峯。 特立乎沙湖之上。 其名曰'玉峀'。 烟波處士構一小屋巖隙間。 東岳白雲之句。 炳燿一世而山不孤矣。 余半生斯世。 爲二竪兒所魔。 尙未克登絶頂而撫高躅矣。 庚戌淸和下澣。 謀得一小艇。 順流而泛。 腹猶果然而抵其下。 未及至數百弓。 中流而望則但見疊玉累瓊。 挺然天表。 蒼松翠草散亂乎粉壁間矣。 泊舟巖角。 緣崖而升。 逶迤東轉。 偃息乎石臺之上。 仍西折而有小逕。 攀磴六七步。 右扶百丈層壁。 左瞰千仞深潭。 僅容一杖。 數足而進。 得玉峀庵舊基。 延袤可二丈許。 靑蘚碧莎。 堙沒古砌。 石間惟有安石榴一叢。 盖處士手植也。 其西石逕。 尙有遺蹤。 草棘不生。 又其西有小臺。 自小臺又東轉。 近北而上。 一步一石臺。 層疊而升。 不覺惱疲而至高巓。 豁然通暢。 爽若登仙然矣。 石臺之上。 有石如椅。 椅上蒼松如偃盖。 踞椅而坐。 四望天倪。 不知此身是塵中人也。 仍想烟波老仙以筍輿幅巾。 覽物起興。 抽毫點朱。 揮灑月邊僧影之什。 其氣像神彩。 了了如眼中事也。 俛仰之間。 感慨繼之。 則未知幾經年而吾人此跡。 泯滅已盡。 又有何人志存物表如今日事。 而來撫我踵耶? 每思至此。 欲倩石工刻烟波一絶于石壁上。 又刻陋名字其後。 以寓湖山跌宕之懷。 而散浪之人。 力瑣不及遂則戚矣。 於是愀然不樂。 信步而下。 下至山足。 回望層壁則有一老衲。 不知自何來者。 披藤撫崖而上。 坐于危巖巓上。 余奇之。 呼之使來則不見所往矣。 余亦登舟諷詠而歸。 回頭海山。 如覺一好夢矣。 면성(綿城) 전라남도 무안(務安)의 별칭이다. 연파처사(烟波處士) 박개(朴漑, 1511~1586)의 호이다. 동악백운(東岳白雲)의 시구 동악백운의 시는 "작은 집 높이 매달려 자미성과 가까우니 달 옆의 스님 그림자 강 건너 날아왔네 서호의 거사 찾아와 묵으니 동악의 흰 구름 풀옷을 적시네[小屋高懸近紫微, 月邊僧影渡江飛, 西湖處士來相宿, 東岳白雲沾草衣.]"라는 7언 절구시인데 김만영은 이 원운을 박개(朴漑)의 시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의 문집 《청련집(靑蓮集)》에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김만영의 《남포집》 〈부원운(附原韻)〉 참조 이수아(二竪兒) 병마(病魔)의 별칭이다.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10년 조에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병이 심하여 진(秦)나라의 명의(名醫)를 청하였는데, 그가 오기 전에 경공의 꿈에 두 수자(豎子)가 서로 말하기를 '내일 명의가 오면 우리를 처치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膏)의 밑과 황(肓)의 위로 들어가면 명의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명의가 와서 진찰하더니 '병이 고황의 사이에 들어갔으니 치료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연무(延袤) 연(延)은 가로로서 동서(東西)의 길이, 무(袤)는 세로로서 남북(南北)의 길이를 뜻한다. 여기에서는 면적을 뜻한다. 안석류(安石榴)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안석국(安石國)에서 가지고 왔다는 석류나무이다. 월변승영(月邊僧影)의 시 《남포집》 〈부원운(附原韻)〉에 나와 있는 박개(朴漑)가 지었다는 시 구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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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과의 병민이 과거를 치르는 전례 六科兵民科擧典例 서울과 지방은 이소(二所)로 나누어 과장을 설치한다. 사병(士兵)과 농병(農兵)은 함께 일소(一所)로 나아가고, 공병(工兵)과 상병(商兵), 노병(奴兵)은 함께 이소(二所)로 나아간다. 일소에서 50인을 시취(試取)하고 이소에서 50인을 시취한다. 회시(會試)도 이소로 나누어 각 군병을 나누어 나아가게 하는 것은 위의 법처럼 하여 일소에서 100인을 시취하고, 이소에서 100인을 시취한다. 사병과 농병 가운데 무과에 입격한 자는 1년에 한 차례 어영청에 들어가 호위하는데 한 달에 한 번 번(番)을 교체한다. 변고가 있으면 모두 서울로 나아가 호위한다. 무과에 급제한 공병, 상병, 노병은 감영과 병영에 나누어 소속시킨다. 京中及外方。 分二所設場。 士兵農兵同赴一所。 工兵商兵奴兵同赴二所。 一所取五十人。 二所取五十人。 會試亦分二所。 各兵分赴如上法。 一所取百人。 二所取百人。 士農之登武科者。 一年一次入衛御營。 一月遞番。 有變則沒數進衛于輦轂。 工商奴之登武科者。 分屬于監兵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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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에서 나극지의 시에 차운하고 이어 증별하다 永興 次羅克之韻 因贈別 한 번 만나봄에 뜻이 맞아 이미 마음 쏠렸으니서로 옥 같은 얼굴로 포위된 성에 있었네털을 불어 도처에서 남들이 허물을 찾으니136)화살 꽂히니 어찌하여 돌이 정성에 감응했단 말인가137)귀밑머리엔 삼천 길 백발138)에 놀라고가슴속엔 십만 신병에 의지했네나라 중흥한 뒤로 이몸에 병 많으니전원에 돌아가 누워서 이번 길을 부러워하리 一見知心蓋已傾相將玉貌在圍城吹毛到處人求過沒羽如何石感誠鬢上三千驚白髮胸中十萬仗神兵自中興後身多病歸臥林園羨此行 털을……찾으니 남의 사소한 잘못도 샅샅이 찾아 드러냄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비자》 〈대체(大體)〉에 "옛적에 대체를 온전히 하는 자는……털을 불어가며 작은 허물을 찾아내지 않는다.[古之全大體者……不吹毛而求小疵]"라고 하였다. 화살……말인가 연이어 화살을 쏘면 돌에 화살이 꽂힌다는 말로, 여기서는 남들이 연이어 공격하여 공격이 적중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예장행(豫章行)〉 시에 "그 정성에 감동하여 돌에 화살 꽂히니, 험난한 것을 어찌 꺼리랴.[精感石沒羽, 豈云憚險艱?]"라고 하였다. 삼천 길 백발 깊은 시름 때문에 자라난 백발을 뜻한다. 당나라 이백의 〈추포음(秋浦吟)〉 시에 "백발이 삼천 길이나 된 것은, 시름 때문에 이처럼 길어졌다네.[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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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통정의 〈아침 조회를 하다〉 시46)에 차운하다 次姜通亭早朝韻 궁성의 봄 나무 새벽에 하늘거리는데궐문 앞에서 조회 기다리는 시간 더디구나빼곡히 선 조정 관원 안개처럼 늘어서 있고북극성을 우러러보며 모든 별들이 달려가네47)청릉48)에 촛불이 다하니 날이 새려 하고황도에 구름 걷히니 해그림자 옮겨가네뉘라서 영주에 오른 걸49) 성사라 자랑하는가이 몸은 광한궁의 가지를 꺾은 듯하여라50) 禁城春樹曉依依丹鳳門前待漏遲簇立鵷班齊霧列高瞻辰極總星馳靑綾燭盡天光曙黃道雲開日影移誰把登瀛誇盛事此身疑折廣寒枝 강통정의……시 통정(通亭)은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의 호로, 강회백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는 백부(伯父)이다. 강회백의 시는 《동문선》 권17에 〈봉천전에 아침 조회를 하다[奉天殿早朝]〉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북극성을……달려가네 신하들이 임금을 향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정사를 덕으로써 하는 것이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별들이 그에게 향하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고 하였다. 청릉 청릉(靑綾)은 푸른 깁으로 만든 이불로, 궁중에서 숙직하는 것을 뜻한다. 한나라 때 상서랑이 번을 서면 궁중에서 푸른 깁으로 만든 이불과 흰 깁으로 만든 이불을 주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영주에 오른 걸 선비가 총애와 영광을 입는 것을 신선의 세계에 오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영주(瀛州)는 전설 속 신선이 사는 산으로, 당 태종(唐太宗)이 태자로 있을 때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을 학사(學士)로 삼아 정사를 자문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고 비유하였다. 《新唐書 褚亮傳》 광한궁의……듯하여라 조회하여 임금을 뵌 것을 광한궁에서 노닌 것에 비유한 것이다. 광한궁(廣寒宮)은 달 속에 있다고 하는 선궁(仙宮)의 이름으로, 당(唐)나라 도사(道士) 나공원(羅公遠)이 중추절에 계수나무 한 가지를 공중에 던져 은빛 다리[銀橋]를 만들어 현종(玄宗)과 함께 월궁(月宮)에 올라 선녀들의 춤을 구경하고 돌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說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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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날이 어긋나 머물면서 자손을 기다리다 歸日有參差留待子孫 문집 가운데 원주 부사(原州府使) 권순(權淳)88)을 애도하는 만시(輓詩)가 있었는데, 옛 종이의 유묵(遺墨)이 좀먹어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오직 이 9자만은 손때가 오히려 새로워 감히 편척(片隻)이라고 하여 하찮게 여길 수 없기에 책 끝에 새겨서 사모의 뜻89)을 부친다. 集中有輓權原州淳詩, 而古紙遺墨蠹食魚幻, 惟此九字, 手澤尙新, 不敢以片隻而屑蔑, 鋟于卷尾, 用寓羹墻之慕云爾。 권순(權淳) 1564~16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화보(和甫), 호는 매오(梅塢)이다.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만오헌(晩悟軒) 경호(景虎)이다. 1589(선조22) 생원시에 합격하여 1597(선조30) 의금부 도사 등을 지냈다. 1604년(선조37)에 산음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치(善治)로 옷감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사모의 뜻 원문의 '갱장지모(羹墻之慕)'는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때는 요임금을 담장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는 요 임금을 국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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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에서 승려 시축의 시에 차운하다 頭流山次僧軸韻 석문은 중간에 끊어져 맑은 시내 쏟아지고험준한 서덜길은 높았다가 다시 낮아지네.신령한 지경이라 찾아오는 속객을 받아주지 않는데위쪽에는 오히려 절로 승려가 머무는구나.못은 차가워 용도 겨울에는 숨어 있지 못하고골짜기 깊어 두견이도 대낮에 울어대누나.무엇 때문에 입산하였다가 무엇 때문에 나왔는가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오는 구름 같아라 石門中斷瀉淸溪嶝路崎嶇高復低靈境不曾容客到上方猶自有僧捿湫寒龍未玄冬蟄谷䆳鵑常白晝啼緣底入山緣底出似雲東去復來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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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팔월 보름에 대작하다 閏八月望對酌 비 오고 맑으며 춥고 더운 날이 서로 갈마들며삼백 예순 날이 한 해가 되나니달이 차는 것은 오직 보름날 밤이요날이 맑은 것은 중추 시절이 제일이라이날 이 밤이 몇 번이나 되랴올해는 이런 밤을 거듭 보노라술을 들어 그대에게 권하다가 다시 달에게 권하니천공이 나를 위해 사사로운 은혜 베푼 듯하여라 雨暘寒燠迭相移三百六旬爲一期月滿惟當望日夜天淸最是中秋時此時此夜能何許今歲今宵再見之擧酒勸君仍勸月天公似爲我偏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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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현들의 창수 제영을 붙임 諸賢唱酬 附題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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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포에게 주다 지천 황정욱39) 贈農圃【芝川 黃廷彧】 십만의 철갑 기병 마구 몰아칠 때에재능 있는 청년 남다른 공 세웠네지금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갔으니화살 하나로 왜적40)을 숙청하리라 鐵騎橫馳十萬軍少年才子立殊勳今來獨領千人去一箭應淸漲海氛 황정욱(黃廷彧) 1532~1607.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다. 저서로 《지천집》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자 순화군과 임해군을 배종하고 관동으로 피신했는데,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의 모반으로 두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적에게 넘겨졌다. 《農圃集 年譜》 왜적 원문의 '창해분(漲海氛)'은 남쪽 바다의 요기(妖氣) 또는 재앙이다. 여기서는 문맥을 살펴 왜적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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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관과 외직에 대한 규정을 세우는 전례 內外立法典例 내관정제도청(內官定制都廳) : 당상관 3원(員), 당하관 3원이다.진공방물연혁도청(進貢方物沿革都廳) : 당상관 3원, 당하관 3원이다.외관정제도청(外官定制都廳) : 당상관 4원, 당하관 8원이다.각 도의 관원을 제정하는 법은 도어사(都御史) 각각 1원, 부어사(副御史) 각각 1원으로 한다.이상 도어사 1원, 부어사 1원은 명을 받들고 여러 도(道)로 나누어 가서 해당 도의 감사와 상의하여 재예가 뛰어난 수령을 한 도에서 4원을 뽑아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아 여러 고을에 나누어 관장하게 한다. 먼저 한 도 군현의 결복(結卜)의 수를 헤아린 뒤에 한 도에 2부(府), 2주(州)를 두고, 다음으로 남은 결복을 계산하여 각각 속현(屬縣)을 둔다. 이어서 옛 읍 가운데 줄일 만한 곳은 줄이고 병합할 만한 곳은 병합한다. 주군(州郡)이 이미 정해진 뒤에 차사원이 해당 고을 수령을 거느리고 당리(黨里)의 보호(保戶)를 나누어 정한다. 보호가 정해진 뒤에 오민(五民)을 분별하고, 오민이 정해진 뒤에 육병(六兵) 및 학교(學校), 사정(射亭)의 법을 분별한다. 內官定制都廳 : 堂上三員。 堂下三員。進貢方物沿革都廳 : 堂上三員。 堂下三員。外官定制都廳 : 堂上四員。 堂下八員。各道官制定法。 都御史各一員。 副御史各一員。右都御史一員。 副御史一員。 奉命分往諸道。 與其道監司商確。 擇守令之多才藝者。 一道四員爲差使員。 分掌列邑。 先計一道郡縣結卜之數。 然後一道置二府二州。 次計餘結。 各置屬縣。 仍其舊邑可削者削之。 可合者合之。 州郡旣定。 然後差使員率其邑守令。 分定黨里保戶。 保戶旣定。 然後分別五民。 五民旣定。 然後分別六兵及學校射亭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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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이 걸친 늙은이가 낚시하는 그림 簑翁釣魚圖 이곳은 바로 동강이란 곳이니사람은 엄자릉이 아니면 누구랴양 갖옷 입고 풍광 속에 들어가푸른 도롱이로 갈아입었네185) 地卽桐江是人非子陵誰羊裘入物色變着綠簑衣 이곳은……갈아입었네 자릉(子陵)은 엄광(嚴光)의 자(字)로, 엄광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어릴 적 벗이다. 엄광은 은거하여 양 갖옷을 입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하며 지냈는데, 광무제가 즉위한 뒤에 엄광을 찾아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엄광은 벼슬을 사양하고 동강으로 돌아가 평생 은거하며 지냈다. 《後漢書 嚴光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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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의 집에 가서 아침에 앉아 우연히 읊다 往叔正家 坐朝偶吟 아침 해가 성 동쪽에서 떠서그대의 창을 붉게 비추네진실된 마음 그야말로 이와 같으니나라에 바칠 넉넉한 충심있네 朝日出城東照君窓牖紅赤心正如此報國有餘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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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응제 迎祥應製 대궐에서 성상께 조회하니조정 백관 모두 뛰어난 이들이네끊임없이 낳고 낳는 조화옹의 공 함께 도우니어찌 밤낮으로 수고함을 사양하리오 龍墀朝聖主鵷序總英豪共贊生生化寧辭夙夜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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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에 병으로 누워 병마절도사의 활쏘기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다 病臥行營 未參兵相射會 장군이 한 발 쏘자 북이 세 번 울리니백두산이 무너지고 지축이 울리는 듯하네막객은 병들어 홀로 문 닫고 있으니높은 성에 떨어지는 석양 차마 못 보겠어라 將軍一發鼓三聲長白山摧地軸鳴幕客病來門獨掩不堪斜日下層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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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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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운창 박성양 贊 【芸窓 朴性陽】 문무의 재주를 겸하였고충효의 큰 인륜 갖추었네.관북을 거듭 회복하였고두목 청정(淸正)의 넋을 빼앗았어라.절재, 영평48)과누가 더 낫고 못할까.만년에 시안으로 죽으니무목49)보다 더욱 통탄스럽네. 文武全才忠孝大節重恢關北淸酋裭魄節齋鈴平孰爲優劣暮年詩案痛甚武穆 절재, 영평 절재는 김종서(金宗瑞)의 호이고 영평은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해진 윤관을 가리킨다. 무목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를 가리킨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 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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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卷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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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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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승기략 國乘紀略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북계(北界)에 침입하자,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왜적을 맞아 항복하자1) 관남(關南)과 관북(關北)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함경북도 병마 평사(兵馬評事)2)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착민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어갔는데, 도망친 자는 열에 한두 명도 안 되었다. 병마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기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교생들과 무사들 중에 식견이 있는 자가 정문부가 있는 곳을 듣고 모두 그에게 찾아갔고,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土兵)과 장사(壯士)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 전 만호(萬戶) 강문우(姜文佑)3)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바로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이때 국세필(鞠世弼)4)이 '예백(禮伯)'이라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부임하여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와 복을 들어 위협하자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바쳤다. 정문부가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예전에 범한 죄를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모으고, 또 그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러운 돌격 기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여 성의 서쪽에 이르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베자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함경북도 병마평사 정문부가 길주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안정되자, 군사들의 마음은 모두 적을 공격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병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고 할 때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여 말하기를,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는데 나라의 역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마침내 국세필 등 13명을 잡아서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를 돌리며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뿐이며 이들 외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들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는 정문부의 본래 계략이었다. 다시 육진(六鎭)에 격문을 보내어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의 목을 베게 하자,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5)의 목을 베었고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었으며, 반민(叛民)은 처형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군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秀)를 주벌하고 그 성을 수복하였다.길주의 왜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한 부대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기에,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군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패배시키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또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嶺東館) 책성(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추격하여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여 적병을 패주시키고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의 왜적이 주둔한 채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함경도 길주에 주둔한 적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 의병의 파병을 그만두고 북쪽으로 육진을 순행하여 반민(叛民)을 찾아내어 베었으며, 번호(番胡 여진족)를 진정시키고 여러 보(堡)를 수복하여 장수를 파견해 두어 북변이 복구되었으니, 모두 정문부의 노력이었다. ­이상은 《선묘보감(宣廟寶鑑)》에 나온다.­만력(萬曆) 20년 임진년(1592, 선조25) 7월에 평청정(平淸正)이 함경북도에 침입하였는데, 병사(兵使) 한극함(韓克諴)의 군사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회령 사람 국경인이 배반하여 가등청정에게 내응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6)과 순화군(順和君)7)을 잡았다. 경성 사람 국세필과 명천 사람 정말수가 각각 성에 점거하여 왜군을 맞아 항복하니, 함경도의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이보다 앞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에 오자 김귀영(金貴榮)이 편의를 봐주었고 부사 이영(李瑛)을 뽑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는데, 이영이 마천령(磨天嶺)에서 청정의 군사를 만나 군대가 궤멸되어 돌아갔다. 북병사 한극함이 육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여 해정창(海汀倉)에서 역습하였는데, 북도의 군사들은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기에 평지에 나아가 좌우로 번갈아 나와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대자 적이 패하여 해정창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어 제군(諸軍)이 잠시 쉬고자 하였으나, 한극함이 들어주지 않고 군사를 지휘하여 포위하게 하였다. 적들은 창고의 가마니를 꺼내 줄지어 쌓아 성을 만들어 화살과 투석(投石)을 피하면서 그 안에서 조총(鳥銃)을 마구 쏘았다. 그런데 우리 관군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굴비를 묶어 놓은 것처럼 중첩되었기에 탄환에 맞으면 반드시 관통하여 혹 적의 총알 하나에 3, 4명씩 쓰러졌다. 이에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죽고 군사가 마침내 궤멸되자, 한극함이 군사를 거두어 고개 위로 물려 진을 쳤다. 밤에 적이 잠행하여 관군을 에워싸고 풀숲 사이에 흩어져 복병하다가 아침에 짙은 안개 속에 섞여 사방에서 크게 외치면서 돌격하였다. 이에 관군이 놀라 흩어져 적이 없는 곳을 향하여 달아나다가 모두 진창에 빠지자, 적이 뒤쫓아 와서 베었으니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극함은 경성(鏡城)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토착민이 잡아서 적에게 항복하였다.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이 사나운 종들을 풀어서 민간을 어지럽히니 크게 인심을 잃었다. 23일 경진(庚辰)에 회령의 향리 국경인은 왜적이 마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성안에서 반란을 주동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영(李瑛)의 수하에 아직도 용맹한 군관 수십 명이 남아있자,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이 말하기를, "반란자들이 비록 많을지라도 난을 도모한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하니, 청컨대 관군을 거느리고 그들이 처음 모여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우두머리를 쳐서 베면 잔당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영이 두려워하고 당혹해하여 따르지 못했다. 이에 국경인 등이 마침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이영 및 임해군·순화군과 호종하는 신하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잡아 가등청정을 맞이하여 항복했는데, 유경천은 빠져나갔다.김귀영의 부인이 나이가 젊었기에 국경인이 핍박하여 겁탈하려하자, 부인이 힘써 저항하다가 병풍 틀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성의 관노 국세필과 명천의 시노(寺奴) 정말수도 모두 성에 점거하여 난을 일으켜 호응하고,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사는 곳에서 향응(響應)8)하여 모두 수령과 진장(鎭將)을 잡아서 배반하였다. 가등청정이 승승장구하여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러 육진의 성보(城堡)를 모두 빼앗고 국경인을 왜관(倭官)의 형판(刑判)으로, 국세필을 예백 겸 본도 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정말수를 대장으로 삼아 관북(關北)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으며, 자신의 장수인 직정(直正)·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都關汝文) 등을 길주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북청(北靑)으로 돌아갔다.이때 육진의 오랑캐들이 난을 틈타 모두 배반하여 야인과 군사를 연합하여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는데, 오직 온성(穩城)의 오랑캐만이 배반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상하게 여겼다. 함흥의 토병(土兵) 함덕후(咸德厚)가 흩어진 백성을 앞장서서 거느리고 서수라보(西水羅堡)를 지키고 있었는데, 오랑캐 기병들이 사방으로 들어와 포위하기에 함덕후가 모두 항거하여 물리치고, 바로 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의 빈틈을 타서 강을 건너 그 부락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돌아왔다.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고 육진을 타일러서 항복시켰다.처음에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반민(叛民)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어갔고, 국경인·국세필·정말수는 각각 큰 성을 점거하여 왜적과 군사를 연합하여 도 전체를 위협하였다. 그런데 평사 정문부가 홀로 몸을 빼내어 산중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경성의 유생 이붕수(李鵬壽)9)와 최배천(崔配天)10)이 정문부를 만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자고 청하자 선뜻 의견을 따랐다. 이에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토착민과 장사(壯士) 수백 명을 모집하니, 그곳의 소재한 수령과 변장(邊將)이 모두 합류하였다.이때 북쪽 오랑캐들이 변방을 자주 약탈하기에 국세필이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했는데, 최배천이 평소 국세필과 잘 지냈기에 혼자서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투항하였다. 국세필의 어머니가 늘 국세필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최생(崔生)은 비범한 사람이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국세필이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마침내 틈을 타서 국세필을 달래며 말하기를, "북쪽 오랑캐들가 쳐들어오면 참으로 대적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정 평사(鄭評事)는 위엄과 명망이 있으니, 오히려 그를 맞아들여 함께 지킨다면 오랑캐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네."라고 하니, 국세필이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바로 격문(檄文)을 급히 보내어 국세필을 알아듣게 타일렀는데, 국세필이 여전히 의심하고 군사를 엄하게 하여 기다렸다.16일에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에 이르러 국세필과 서로 만나고 친히 타이르자,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또 병사(兵使)의 관인(官印)을 바쳤다. 정문부가 이내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예전의 죄를 묻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장수들이 국세필을 베고자 하였으나 정문부는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성급하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고, 또 자기를 활로 쏘았던 반병(叛兵)을 기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국세필이 자기 심복에게 정문부를 좌우로 곁에서 모시며 동정을 몰래 살피게 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자기 부하들에게 사졸(士卒)들과 함께 성에 올라가 전술을 익히게 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는데 날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왜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가볍게 무장한 소수의 병력으로 갑자기 와서 성문을 두들겼는데, 정문부가 국세필에게 왜장을 유인하여 성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에게 남은 왜병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주군(州郡)에 격문을 돌려 반민(叛民)들을 타일러 항복하게 하였다. 육진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반란자11)들을 풀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차례대로 항복하고 장사와 호걸들이 다투어 와서 모병에 응하니, 이 때문에 변방의 성과 보(堡)가 이에 모두 수복되고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회령(會寧) 사람들이 국경인을 공격하여 베었다.정문부가 회령에 격문을 돌려 국경인에게 와서 항복하라고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고, 길주(吉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장과 함께 경성을 협공하였다. 회령 사람 오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서 무리를 모으고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와 호응하기를 도모하니, 국경인이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수창(首倡)한 자를 나오라고 위협하기에 오윤적이 몸을 빼서 자수하여 나갔다. 국경인이 그를 죽이려는데, 부(府)의 아전 신세걸(申世傑)이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몰래 훔쳐 객사 문 박에서 불자, 반병(叛兵)들이 국경인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의심하고 일제히 모였는데 마치 수풀과 같았다. 신세걸이 그대로 그들을 거느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를 참수하였으며, 군중을 부추겨서 앞으로 나아가 국경인에게 이르기를, "성안의 병사들이 이미 나에게 모두 귀속되었으니, 네가 오윤적을 풀어주면 나도 마땅히 병사들을 해산할 것이다."라고 하니, 국경인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국경인을 쳐서 참수하고 그 머리를 경성에 전했으며, 오윤적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계속 나아갔다.정문부가 정말수와 국세필을 사로잡고, 길주에서 왜인을 크게 패배시켜 왜장 직정(直正)과 도관여문(都關汝文)을 참수했다.명천 사람들이 또 자제들을 단결하여 정말수를 공격하여 정문부에게 응하려 했는데, 정말수에게 패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및 강문우(姜文佑)를 몰래 보내어 기병 60여 명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달려가 갑자기 명천으로 돌입하자, 정말수가 깜짝 놀라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여러 보(堡)가 모두 수복되고 오직 길주만이 왜적에게 점거되었으며, 군민(軍民)들도 모두 안정되었고 군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사람들이 모두 적을 쳐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려고 하자, 정문부가 바로 대장의 깃발을 세우고 남문의 망루에 올라 장수들을 불러들여 군례를 행하게 하였다. 장수들이 일제히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叛賊)이 아직도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좌중에서 국세필과 그의 잔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군중에게 조리돌리며 말하기를, "맨 처음 반역을 창도한 이는 이 무리뿐이고 이외에는 무관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문부의 본래 계략이었고 군성(軍聲)이 마침내 진작되고 사기는 10배 높아졌다.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12)이 경성을 보전하면서 틈을 엿보고자 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시켜 적을 치지 않으니, 반란자들의 하는 짓을 본받고자 하십니까? 청컨대 사람들 의견을 들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날이 밝자 군중을 남문 밖에 모아 놓고 두 사람의 논쟁 중에 누가 옳은지를 묻자, 사람들이 모두 정문부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이때 왜장 직정·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 등이 길주에 주둔하여 점거하고, 또 영동(嶺東 마천령(磨天嶺) 동쪽)에 군사를 배치하고 목책(木柵)을 설치해서 남북의 길을 통하여 왕래하면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 정미일(丁未日)에 정문부가 명천으로 나아가 진을 치고,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종사관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성 외곽 세 곳에 복병을 배치하여 엿보게 하였다.병진일(丙辰日) 그믐날 새벽에 적이 군사 600명을 출동시켜 가파(加坡)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는데, 해가 지자 약탈한 것을 몰고 돌아갔다. 이에 원충서가 부하 3백 명으로 먼저 달려가 이들을 요격하여 앞에서 길라잡이 왜적 2명을 참수하자 적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마침 큰 진영에 있는 왜적이 성안에서 계속 지원하기에 원충서가 산세가 험준한 곳으로 물려서 지켰다. 그리고 한인제가 구황과 강문우 등 3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와서 원충서와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싸웠다. 직정과 도관여문이 용감한 선봉대 400명으로 먼저 올라오기에 관군은 돌격 기병으로 출몰하면서 공격하였는데, 전투가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앞뒤 진(陣)이 모두 무너졌다. 유경천이 또 병력을 보내서 적의 퇴로를 끊자, 관군이 마침내 양면에서 협공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직정과 도관여문 등 다섯 장수를 참수하였으며, 갑옷을 입은 병사 800명의 수급과 군장(軍裝)・기계(器械) 천여 점을 노획했고, 약탈한 남녀를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12월에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13)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종성부사 정현룡으로 북병장(北兵將)을 대신 삼았다.정문부가 승세를 타고 길주(吉州)로 진격하여 공격한 지 며칠 동안 이기지 못하였는데, 영동(嶺東)의 적이 또 길주에 이르자 정문부가 요격(邀擊)하여 쌍개포(雙介浦)에서 패배시켰다. 군사를 옮겨 영동의 목책을 공격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길주 성 아래 줄지어 진을 치고, 왜적들이 약탈할 길을 끊고 또 군량을 원조받을 길을 막아서 지구전으로 곤궁하게 하였다. 처음에 재신(宰臣) 윤탁연이 왕자를 모시고 북변으로 들어와 갑산(甲山)으로 방향을 틀어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그대로 윤탁연을 감사로 삼았다. 이때 와서 윤탁연이 정문부의 성공을 듣고 질투하여 그 실상과 정반대로 행조에 아뢰었다. 또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아 반드시 군법으로 정문부를 얽어매어 죽이고자 장사(將士)들을 고문하자, 군중(軍中)에서 몹시 분하게 여겨 대부분 흩어져 떠나버렸다. 정문부가 마침내 병권을 내놓고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찰하며 군민(軍民)을 불러 모으고 장수를 파견해 두었는데, 오랑캐들이 자주 변경을 약탈하기에 정문부가 복병(伏兵)을 배치하여 그들을 패주시켰다.윤탁연이 다시 정문부를 북병장으로 삼자 가등청정과 모리길성(毛利吉盛 모리 요시나리)과 중륭(重隆 시게타카)이 군사를 거두어 경기(京畿)로 돌아갔다.처음에 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또 장수를 자주 바꾸어 작전을 많이 그르치자, 공을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 다시 정문부를 기용하여 장수로 삼았다. 정문부는 이에 군사를 돌려 사졸들을 먹이고, 구황(具滉)으로 하여금 기병 200명을 선발하여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14)에게 가서 돕게 하니, 적 200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다. 원충서(元忠恕)도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공격하여 베었다. 이때 평청정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패하여 경기(京畿)로 들어갔다15)는 말을 듣고 철수하여 돌아갈 것을 도모하려고 했는데, 길주의 적이 한창 정문부에게 막혀 있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마침내 2만 명으로 마천령을 넘어서 영동의 적과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정탐하여 자세히 알고 그의 군사 3천여 명이 먼저 임명(臨溟)을 점거하고 매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계미일(癸未日) 동틀 무렵에 적병이 들판을 뒤덮으며 오다가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자, 정문부가 복병을 보내 그 후미를 끊고 날랜 기병을 풀어 좌우로 에워싸며, 말달리고 활을 쏘아 살상한 것이 매우 많아 유혈이 들을 뒤덮었다. 별장 이붕수가 왜장 한 명을 쏘아 죽이고, 즉시 몸을 빼어 깃발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탄환에 맞아 죽었다.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도 힘껏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청정은 혈전(血戰)을 벌여 퇴로를 열고 관군과 함께 60여 리를 옮기며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도로가 아직 막혀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막연하여 통하지 못했는데, 정문부 등은 문득 적의 세력이 성대한 것을 보고 저들이 재차 쳐들어올까 의심하여 물러가 성보(城堡)를 지키면서 적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북우후(北虞侯) 한인제(韓仁濟)가 말하기를, "적이 돌아갈 뜻이 있는 듯하니 군사를 주둔시키고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정문부가 따르지 않고 물러나 명천(明川)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한인제가 염탐하여 알아보니, 이날 밤에 가등청정은 시체를 쌓아 불태우고 성안의 군사를 몰래 거두어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밥을 지어 먹을 겨를도 없이 도망갔다. 정문부가 급히 와서 한인제를 보고 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적군의 정세를 헤아리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신묘한가."라고 하였다. 한인제가 속히 진군할 것을 청했는데 정문부는 금방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경보가 있었기에 허락하지 않고, 한인제를 보내어 오랑캐를 쳐서 물리치게 하였다. 가등청정이 마침내 연도(沿道)의 여러 주둔군을 모두 거두었는데, 함경남도의 군사들이 절멸(絶滅)시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닷가를 따라서 달아났다. 이유일(李惟一)이 군사를 정돈하여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성윤문(成允文)16)이 허락하지 않고 그 군사를 빼앗았다.청정은 또 모리길성(毛利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여러 주둔군을 모두 거두어 함께 경성(京城)에 모였다. 한극함(韓克諴)은 구금되었다가 양주(楊州)에 와서 도망쳐 돌아왔는데, 뒤에 조정에서는 적에게 아첨하여 몸을 빼냈다고 하여 마침내 사사(賜死)하고 그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한인제는 웅위(雄偉)하고 원대한 생각이 있어 사람들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일컬었는데, 조정에서는 당하관 우후(堂下官虞侯)의 지위와 명망이 본디 비천해서 오랑캐들에게 존중받을 수 없다고 여겨, 남우후(南虞侯) 한희길(韓希吉)과 직위를 바꾸어 차임하였고, 이유일은 군공으로 겨우 보을하 첨사(甫乙下僉使)로 삼았다. 이러한 명이 내려지자 군사들은 모두 해체되었고, 오직 유응수(柳應秀)만이 뒤에 도신 이희득(李希得)의 장계로 인하여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구황(具滉)은 북변의 장수 중에서 가장 날래고 용감하다고 알려졌다. ­이상은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서 나왔다.》­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길주의 적을 토벌하여 크게 깨뜨렸다. 경성(鏡城)의 사인(士人) 등이 함께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켜, 먼저 북쪽 백성 가운데 반역하여 왜적에게 붙은 자와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토벌하여 죽이고, 왜병을 길주에서 격파하여 820여 명의 수급을 베니, 적이 모두 군대를 거두어 안변(安邊)으로 돌아갔고 관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소대연기(昭代年紀)에서 나왔다.》­북방의 목사와 군수들이 탐욕스럽고 방종하여 법도를 어기고 군사 대비가 해이했기에 다시 병마 평사를 설치하되, 반드시 전랑(銓郞) 및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차출하여 보내 통제하는 자리로 삼도록 했기에 평사 정문부가 임진년의 난을 당하여 북방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특명으로 이공(貳公 찬성(贊成))으로 월등하게 추증(追贈)하고 함께 일한 자들도 모두 추포(追褒)하도록 명하니, 그 일대가 고무되었다. ­〈현종대왕 행장(顯宗大王行狀)〉에서 나왔다.­ 倭將淸正入北界, 會寧人叛, 執兩王子、諸宰臣迎降, 關南北皆陷于賊。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時北界守將, 皆被土民執與倭將, 逃出者十無一二。評事鄭文孚, 嘗授書校生, 故變作之後, 弟子數人, 庇護得脫。校生及武士有識者, 聞文孚所在, 皆就之, 遂推文孚爲義兵將, 團集土兵、壯士數百人, 鏡城人前萬戶姜文佑, 領率居前, 卽抵府城。鞠世弼方稱禮1)伯, 莅兵使印, 治府自若, 猝聞兵至, 閉門乘城拒之。文佑等脅以禍福, 世弼知不敵, 開門迎入納印。文孚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遂傳檄南北州堡, 合兵三千人, 又抄精猛突騎爲先鋒。吉州倭賊聞之, 遣兵百餘人哨探, 至城西, 姜文佑等, 開門出擊, 斬數十人, 餘賊遁。北道評事鄭文孚, 大敗賊兵于吉州, 圍其城。文孚安集旣定, 軍情皆欲擊賊自效。乃卜日出兵將發, 壯士齊請曰: "將討倭賊, 而國之叛賊, 尙在陳中, 不可不先討之。" 遂執鞠世弼等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倡止此輩, 此外無與也, 府人可勿疑。" 衆皆歡悅, 此文孚本謀也。復檄通六鎭, 誅首倡亂者, 會寧儒生申世俊, 起兵斬鞠景仁, 餘鎭皆復, 叛民或誅或逃。文孚進兵古站驛, 遣兵誅明川叛賊鄭末秀, 復其城。吉州賊遂四出焚掠, 一枝軍掠明川海倉, 文孚進兵吉州南村, 邀其歸路, 賊兵大敗, 斬六百級。賊一屯在磨天嶺下嶺東館柵城, 焚掠臨溟村, 文孚回兵擊之, 戰于雙浦, 賊兵敗走, 斬六十級。自是兩賊屯, 皆堅守不出, 文孚分兵圍之。咸鏡道吉州屯賊, 拔城遁。鄭文孚還鏡城, 罷遣義兵, 北巡六鎭, 搜誅叛民, 撫定番胡, 收復諸堡, 派置將領, 北邊復舊, 皆文孚力也。【以上出《宣廟寶鑑》。】萬曆二十年壬辰七月, 平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軍敗被擒。會寧人鞠景仁, 叛應淸正, 執王子臨海君、順和君。鏡城人鞠世弼、明川人鄭末秀, 各據城迎降, 咸鏡道州郡皆陷。先是臨海君、順和君來往會寧, 金貴榮便宜, 擢府使李瑛爲南兵使, 瑛遇淸正兵於磨天嶺, 衆潰而還。北兵使韓克諴, 率六鎭兵, 逆戰于海汀倉, 北兵善騎射, 就平地上, 左右迭出馳射, 賊敗入倉中。時日已暮, 諸軍欲少休, 克諴不聽, 揮兵圍之。賊出倉中穀石, 列置爲城以避矢石, 從其內亂發鳥銃, 官軍櫛比而立, 重疊如束, 中必貫穿, 或一丸斃三四人。富寧府使元喜死之, 軍遂潰, 克諴收兵, 退屯嶺上。夜賊潛行環官軍, 散伏草間, 朝乘大霧, 四面大呼突起, 官軍驚散, 向無賊處奔走, 悉陷泥淖, 賊追至芟刈, 死者無數。克諴走鏡城, 土民執以降賊。時臨海君、順和君, 縱豪悍奴僕, 擾民間, 大失人心。二十三日庚辰, 會寧鄕吏鞠景仁, 聞賊踰磨天嶺, 倡亂城中。當是時, 李瑛手下, 尙有壯勇軍官數十人, 高嶺僉使柳擎天曰: "叛徒雖衆, 謀亂者不過數人, 請率官軍, 乘其初集, 擊斬渠首, 則餘黨自定矣。" 瑛惶惑, 不能從。景仁等遂盡殺官軍, 執瑛及臨海君、順和君、從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 迎降于淸正, 擎天逸去。金貴榮夫人年少, 景仁欲逼辱之, 夫人力拒之, 就屛風機, 自縊而死。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 亦皆據城作亂以應之, 各邑軍民所在響應, 皆執守令、鎭將以叛。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刑判, 鞠世弼爲禮2)伯兼本道兵使, 鄭末秀爲大將, 分統關北, 使其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屯吉州, 自引兵還出北靑。時六鎭蕃胡乘亂皆叛, 與野人連兵, 寇掠邊上, 惟穩城胡不叛, 人皆嘉之。咸興土兵咸德厚, 倡率散民, 獨保西水羅堡, 虜騎四入圍之, 德厚皆拒却之, 乃健率兒, 乘虛渡江, 攻破其部落而還。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 招降六鎭。初, 北界守將, 皆被叛民執與倭將, 鞠景仁、鞠世弼、鄭末秀各據大城, 與倭連兵威脅一道。評事鄭文孚獨脫身, 走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見文孚, 請起兵擊賊, 頓然從之, 遂推文孚爲將, 團集土民、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皆附之。是時北虜屢掠邊上, 鞠世弼頗憂懼, 崔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世弼之母, 每戒世弼曰: "吾觀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能從。配天遂乘間說世弼曰: "北虜若至, 誠難與敵, 鄭評事有威望, 尙能延入共守, 虜不足憂矣。"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孚, 文孚卽馳檄諭世弼, 世弼猶疑之, 嚴兵以待。十六日, 文孚率兵至城下, 與世弼相見, 親自說諭, 世弼始迎入, 又納兵使印。文孚乃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孚不從曰: "遽也, 非計也。" 又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使其腹心夾侍文孚左右, 伺察動靜, 文孚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皆如是。倭人未知, 以輕兵奄至叩城, 文孚令世弼誘倭將入門而擒之, 令安原權管姜文佑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民。六鎭聞文孚已釋反側, 次第送款, 將士、豪傑爭來應募, 緣邊城堡於是悉復, 北道人心稍定。會寧人擊斬鞠景仁。鄭文孚移檄會寧, 諭景仁來降不從, 與吉州屯倭將協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徒鄕校, 謀伐景仁以應文孚, 景仁急圍鄕校, 脅出首倡, 允迪挺身自首而出。景仁將殺之, 府吏申世傑, 潛偸景仁鐃角, 吹之客舍門外, 叛兵疑景仁出令, 齊會若林。世傑仍領之, 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謂景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給吳允迪, 我當罷兵。" 景仁駭懼從之。遂擊景仁斬之, 傳首鏡城, 允迪等又領兵繼赴。鄭文孚擒鄭末秀、鞠世弼, 大敗倭人於吉州, 斬其將直正、都關汝文。明川人又團結子弟, 攻鄭末秀以應文孚, 爲末秀所敗, 文孚潛遣吾村權管具滉及姜文佑,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 末秀惶駭,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諸堡盡復, 惟吉州爲倭所據, 軍民亦皆安集, 兵至三千餘人。衆咸欲擊賊自效, 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召諸將入行禮, 諸將齊請曰: "今將討倭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座中, 執鞠世弼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倡止此輩, 此外無與也。" 此文孚本謀也, 軍聲遂振, 士氣十倍。鍾城府使鄭見龍, 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以通南北路, 往來焚掠。丁未文孚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伏於吉州城外以覘之。丙辰晦平明,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日晡驅所掠而還。元忠恕以所部三百先馳邀之, 斬先導兩賊, 賊驚北, 會賊大陣, 自城中繼援, 忠恕退保山險。韓仁濟以具滉、姜文佑等三百餘騎馳至, 與忠恕連兵大戰。直正、都關汝文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 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柳擎天又遣兵截其歸路, 官軍遂兩面夾擊大敗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甲首八百、軍裝、器械千餘計, 盡奪所掠男女而還。十二月, 咸鏡監司尹卓然, 奪鄭文孚兵, 以鍾城府使鄭見龍代爲北兵將。文孚乘勝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又至吉州, 文孚邀擊, 雙介浦敗之。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摽掠, 阻其粮援, 以持久困之。初, 宰臣尹卓然陪王子入北, 轉至甲山, 至別害堡, 行朝仍以卓然爲監司。至是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實以聞行在, 又奪文孚兵, 必欲以軍法搆殺文孚, 榜掠將士,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招集軍民, 派置將領, 蕃胡屢掠邊上, 文孚設伏兵走之。尹卓然復以鄭文孚爲北兵將, 平淸正、吉盛、重隆撤還京畿。初, 尹卓然奪鄭文孚兵, 又數易將帥, 多誤戰機, 懼不能成功, 復起文孚爲將。文孚乃還軍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元忠恕又擊斬賊將於吉州城下。是時平淸正, 聞行長敗入京畿, 將謀撤還, 而吉州賊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文孚諜知之悉, 其兵三千餘人先據臨溟, 伏以待之。癸未黎明, 賊兵蔽野而至, 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伏兵截其尾, 自縱輕騎繞左右, 馳射殺傷甚衆, 流血被野。別將李鵬壽射一倭將殪之, 卽挺身出旗前, 忽中丸而死, 朱乙溫萬戶李希唐亦力戰,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轉鬪六十餘里, 日暮得入城。時道路尙阻, 兩西聲息邈然不通, 文孚等, 忽見賊勢浩大, 疑其再逞, 欲退守城堡以待之。北虞侯韓仁濟曰: "賊似有歸意, 莫若屯兵俟。" 文孚不從, 退屯明川而留。仁濟詗知之, 是夜淸正積屍焚之, 而潛撤城中兵, 乘夜跳城, 不暇炊食而走。文孚馳來, 見仁濟謝曰: "君之料賊, 何其神也?" 仁濟請亟進兵, 文孚以方有虜警不許, 而遣仁濟擊虜却之。淸正遂盡撤沿道諸屯, 恐南道兵勦絶, 不敢踰咸關嶺, 沿海而走。李惟一勒兵將追之, 成允文不許而奪其兵。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掇江原道諸屯, 俱會于京城。韓克諴被拘, 至楊州逃歸, 後朝廷以爲媚賊脫身, 遂賜死而幷殺其子。韓仁濟雄偉有遠慮, 人稱有將帥材, 朝廷以爲堂下虞侯地望素卑, 非所以見重於胡人也, 以南虞侯韓希吉換差, 李惟一以功, 僅爲甫乙下僉使。命下, 士皆解體, 惟柳應秀, 後因道臣李希得狀啓, 得拜三水郡守, 俄又陞嘉善, 具滉北將中, 最以驍勇著。【以上出《宣廟中興誌》。】北評事鄭文孚, 起義兵討吉州賊, 大破之。鏡城士人等, 共推文孚起義兵, 先討北民之叛附倭賊者、鞠世弼等十三人誅之, 擊破倭兵于吉州, 斬八百二十餘級, 賊皆捲還于安邊, 關北悉平。【出《昭代年紀》。】北鄙牧守, 貪縱違度, 戎備解弛, 復設兵馬評事, 必以銓郞及玉堂官差送, 爲彈壓之地, 故評事鄭文孚, 當壬辰亂, 大有功於北方。特命超贈貳公, 同事者悉令追褒, 一方聳動。【出《顯宗大王行狀》。】 왜장(倭將)……항복하자 선조 25년(1592) 7월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은 가등청정에게 쫓겨 회령으로 들어갔는데, 회령의 아전으로 있던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붙잡아 왜적에게 넘기고 항복하였다. 《宣祖修正實錄 25年 7月 1日》 《燃藜室記述 卷15 北道之陷鄭文孚收復》 병마 평사(兵馬評事) :병마 도사(兵馬都使)라고도 한다. 평안도·함경도에만 두는 병사(兵使)의 막료이다. 군기(軍機) 및 개시(開市)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무관의 정6품 벼슬이다. 강문우(姜文佑)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여익(汝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며 1558년(명종13)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를 거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지냈다. 국세필(鞠世弼) 경성부의 아전으로, 국경인의 숙부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국경인·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국경인(鞠敬仁) ?~1592. 본래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들어가 재산을 모았는데, 조정에 대해서 원한이 많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 함경도로 침입하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숙부 국세필, 명천 아전 정말수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1574~1609)으로, 선조의 첫째 서자이다.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갔는데,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에 의해 가등청정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협상을 통해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순화군(順和君) ?~1607. 선조의 아들로 순빈(順嬪) 김씨 소생이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민폐를 많이 끼쳐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국경인에 의해 왜군에 넘겨졌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향응(響應) 어떤 사람의 주창(主唱)에 따라 그와 행동을 같이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중항(仲恒)이다. 정문부의 별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길주 장평(長坪), 쌍포(雙浦)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1593년(선조26) 1월 함경북도 단천(端川)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왜적이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여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최배천(崔配天)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중립(仲立)이다. 판관(判官)에 증직되었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반란자 원문의 '반측(反側)'은 두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자를 가리킨다. 정현룡(鄭見龍) 1547~1600.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다. 1593년(선조26) 종성부사로 역임하면서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고령 첨사 유경천(柳擎天)과 함께 길주에 머무르고 있던 왜적을 토벌하여 잡았고, 곧바로 영동(嶺東)으로 이동하여 2백여 명의 왜병을 쫓아냈다. 1595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에 사망하였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다. 함경도에 피난했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강찬(姜燦) 1557~1603.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덕휘(德輝), 호는 동곽(東郭)이다.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으로 두 왕자가 포로가 되자 의병을 모아 싸우고, 행조(行朝)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회령사태를 보고했다. 봉산(鳳山)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들어갔다 1593년(선조26)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의 평양성 전투에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부대가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에게 패배하여 한성으로 후퇴한 것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26年 1月 6日·7日·8日·9日》 성윤문(成允文)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91년(선조24)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부임하여 재직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을 당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영(李瑛)이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부하 장수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과감한 공격을 제지하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禮 대본에는 '體'로 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년 9월 1일 기사에 근거하여 고쳤다. 禮 대본에는 '體'로 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기사에 근거하여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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