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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에서 짓다 昌原作 태백산의 남쪽 지리산의 동쪽환주311)의 승경은 호봉312)과 같아라민가 울타리의 천년 벽도화관사 문정의 백일홍원의 장수 황폐한 행성에서 바람을 맞이하였고최선은 텅 빈 고대에서 달을 구경하였지313)지금 이곳에 머물고서 어부, 목동과 노래하는데술을 반절로 나눠 취옹에게 주노라. 太白山南智異東還珠勝致似壺蓬人家離落千年碧官舍門庭百日紅元將候風行省廢崔仙翫月古臺空只今留與漁樵唱一半平分屬醉翁 환주 창원의 옛 이름이다. 호봉 방호(方壺)를 가리키는데 봉래산을 지칭한다. 방호는 달리 방장산이라고도 한다. 원의……구경하였지 창원에는 원나라 때 정동행성이 있었으며, 월영대는 최치원(崔致遠)이 머물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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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원야정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昌原野亭韻【二首】 그윽한 경치 찾아와 아직 숲에 가지 않았는데먼저 정자의 제시(題詩)가 앉은 자리에 들어오네버들 저자의 주막 깃발에서 술이 익은 줄 알겠고도원의 붉은 꽃이 봄날 물결에 떠옴을 보누나바둑 두던 객은 피곤하여 대숲을 바라보고학 지키던 아이 한가로워 또한 소를 먹이누나거문고와 책, 음식 이외에무엇이 맑은 근심 일으킬지 잘 모르겠어라유씨 집안 정자는 높은 언덕을 베고 있어십리 먼 곳의 나무 꼭대기를 평평하게 바라보누나수면의 햇빛은 맑게 일렁여 반짝이고산허리의 남기는 저물녘에 뭉개뭉개 피어오르네꽃밭 뚫고 날아가니 새끼 거느린 새를 보겠고풀에 누워 우니 송아지 잃은 소인 줄 알겠어라우습구나, 매일 분주한 나어찌하면 돌아가 번뇌를 깨끗이 씻을까 尋幽曾未到林丘先得楣題入案頭柳市靑帘知酒熟桃源紅浪見春浮彈碁客倦仍看竹護鶴童閒且牧牛除却琴書料理外不知何事惹淸愁柳家亭子跨高丘十里平臨遠樹頭水面日華淸灔灔山腰嵐氣晩浮浮穿花飛見將雛鳥臥草鳴知失犢牛笑我倥傯無日了若爲歸去滌煩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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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에 관한 전례 僧民典例 상승(上僧) : 불교의 교리 및 유서(儒書)에 통달하거나 산으로 들어가 곡기를 끊은 채 참선하는 자를 상승(上僧)으로 삼는다. 이러한 부류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하승(下僧) : 큰 사찰에 거처하는 무리로서 비록 산사(山寺)에 거처하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일삼는 자는 모두 하승(下僧)으로 삼는다. 본관(本官)이 모두 명부를 작성하여 호조에 올린다. 1인당 해마다 육승포(六升布) 1필(匹)을 바친다. 모든 승려마다 각각 도첩(度牒)을 발급하니,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도첩이 없이 출입하는 자는 참수한다. 군병이 된 자는 포를 바치는 것을 면제한다.신은 삼가 살피건대, 오랑캐의 가르침은 사람을 미혹시켜 양민의 자제로 하여금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게 하니, 승려들이 많은 것이 요즘 더욱 심합니다. 농가의 백성들은 일 년 내내 고생스럽게 일하여 모두 세금으로 바치기에 거울에는 추위에 떨고 봄에는 굶주리며 도로에서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저 산속의 무뢰한(無賴漢)은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으며 시가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저 고달픈 농민들은 바라보고 부러워하며, 지친 군졸들은 일찍 머리를 깎지 않은 것을 매우 한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승도(僧徒)는 대개 일반 백성과 비교하면 비록 이교(異敎)라 하더라도 그들이 믿는 도에 전심전력하여 암혈(巖穴)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파리한 몰골로 수도하는 자는 납세에 얽매이게 할 수 없지만 나머지 제멋대로 행동하며 거리낌이 없이 군역을 피하는 것을 일삼는 자에 대해서 어찌 합당한 역을 지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저들도 우리 국토에 사는 우리 백성인데 병영과 수영 및 군읍에서 으레 사적인 일을 그들에게 시켜 마음대로 이익을 독차지하니 이는 그릇되었습니다. 앞으로는 호조에서 장부를 살펴 포를 거두는 외에는 베 한 자 종 한 장이라도 마음대로 거두지 말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上僧 : 通曉釋敎及儒書。 或入山絶粒者爲上僧。 此流無所貢。下僧 : 居于大刹之徒。 雖居山寺。 不事其道。 以遊食爲事者。 皆爲下僧。 本官皆錄于簿。 上于戶曹。 一人歲各貢六升布一匹。 凡僧人人各有度牒。 無度牒而出入一步之地者斬。 爲兵者除貢布。臣謹按夷狄之敎。 令人縻惑。 使良民子弟落髮入山。 緇徒之衆盛。 惟此時孔極。 農家男女。 終歲勤苦。 盡輸貢稅。 冬寒春餒。 叫號道路。 而蠢彼林藪之無賴者。 飽食煖衣。 橫行街市。 而無所賦貢。 彼農民之困苦者。 樂觀而健羡。 兵卒之疲勞者。 大恨其落髮之不早。 故今之僧徒。 大率與凡民比數。 雖曰異敎。 專心其道。 入于巖穴。 絶粒而形瘦者。 不可羈縻於征賦。 其他放縱自恣。 以避兵爲事者。 安可無其役哉? 雖然。 彼亦吾民之生于吾土者。 兵水各營及郡邑。 例以私事。 橫加漁括。 此則非也。 自今以後。 戶曹按簿輸布之外。 尺布寸紙。 毋得橫斂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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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민에 관한 전례 兵民典例 사상병(士上兵) : 하사(下士)로서 강등되어 군병이 된 자 가운데 나이가 50 이하면 사상병(士上兵)으로 삼는다.사중병(士中兵) : 하사로서 강등되어 군병이 된 자 가운데 나이가 50 이상이면 사중병으로 삼는다.사하병(士下兵) : 하사로서 강등되어 군병이 된 자 가운데 나이가 비록 50 이하라도 혹 현재 질병이 있거나 체력이 약하여 적진으로 뛰어드는 데 합당하지 않은 자는 사하병으로 삼는다.이상은 사병(士兵)에 관한 규례이다. 상병(上兵) 1인에게는 중하병(中下兵) 4인(人)을 주어서 봉족(奉足)으로 삼게 하되, 3인은 전마(戰馬)를 갖추어 평상시에 극진히 기른다. 진법(陣法)을 연습하고 수자리 서러 갈 때라든지 적진을 향해 나아갈 때 상병은 말을 타고 달려 나갈 따름이다. 봉족 1인은 활과 화살, 창과 총 등의 병기를 마련하여 잘 정비한 다음 상병에게 공급한다. 상병은 평소에 맡은 일이 없고, 뛰고 돌격하며 활을 당겨 사냥할 따름이다. 위급한 일이 있으면 즉시 뛰어나간다.신은 삼가 살피건대, 하사(下士)의 무리는 비록 미욱한 일개 농부이지만 평소 시골에서는 양반으로 일컬어집니다. 종이나 노비들은 모두 높은 사람으로 대우하고, 사대부도 당에 올라앉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강(講)에서 낙제하여 군병으로 강등되면 향당(鄕黨)에서 무시하고 노비들도 멸시하니 부모형제가 모두 울부짖으며 애석하게 여깁니다. 짐짓 강에서 낙제하여 군병이 된 이 무리들은 죽고 싶을 만큼 분개하는 마음은 있어도 정교하게 군무를 연마할 용기는 없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나라에서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 너무 각박하게 한 잘못입니다. 대저 병영은 사지(死地)이니, 사람을 죽을 수밖에 없는 곳으로 몰아넣어 우리 종사를 편안하게 보호하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사람을 평소에 대우할 적에 넉넉하게 보살펴 주는 것이 좋겠습니까? 각박하게 다그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병사로 하여금 평소에 굶주림과 추위, 험난한 곳에서 날마다 몸이 고달프게 하다가 위급한 일이 닥칠 경우에 "너는 어찌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지 않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남의 살갗을 도려내어 자신이 아끼는 몸을 구제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괜찮겠습니까? 지금 사민(四民) 가운데 오직 병사가 가장 고달픕니다. 변장(邊將)과 변수(邊帥)는 오직 제 한 몸만 이롭게 할 줄 알고 아끼는 군졸을 염려하지 않고, 오직 혹독하게 채찍질할 줄만 알고 무예를 가르치지 않으며, 더욱 가포(價布)16)를 독촉하여 징수하고 고혈을 다 짜내어 처첩과 친구들을 먹여 살리니, 사(士)는 사람의 행색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나라에서 병영을 설치한 것은 바로 무장(武將)을 부귀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지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신은 날마다 아래에서 이익을 챙기고 나라는 날로 망해갑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신은 원하건대, 지금부터 각 도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에게 해당 고을을 겸하여 지키고 그 고을에서 녹봉을 받게 하며 군졸의 가포는 일절 징수하지 말게 하고, 만일 사졸(士卒)에게 함부로 불법을 자행하여 불의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대죄(大罪)로 다스리게 하소서. 또 강에서 낙제하여 군인이 된 하사(下士)를 '하사병(下士兵)'이라고 하고 장수가 된 자가 그를 대우하되 천한 신분의 군졸과 서로 섞이지 않게 하소서. 1년에 한 차례 번(番)을 나누어 군영에 들어가면 장수가 된 자는 무서(武書)와 사예(射藝)를 가르치는 것 외에는 다른 부역을 지워 독촉하지 않으며, 집에 있으면 수령이 한 달에 한 차례 무서를 가르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여 재예가 뛰어난 자에게는 많은 상을 내려 영화롭게 해 주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하사(下士)의 무리는 병사들이 영화를 누리는 것을 보고 문장의 장구나 짓는 진부한 선비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가 필시 또한 많을 것입니다. 병이 된 자는 좋은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고 사냥하며 말을 달리니, 반드시 또한 익힌 기예를 펼쳐 보고자 하여 변경으로 가서 일전을 벌여 만리의 공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가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북(東北)의 근심은 어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이상 사병(士兵)은 모두 마병(馬兵)이니, 궁술을 익힌다.】농상병(農上兵) : 농가의 정(丁)은 나이 40세 이하는 상병(上兵)이 되니, 10결(結)의 전지를 경작하는 1호(戶)는 상병 1인을 낸다.농하병(農下兵) : 농가의 정은 나이 40세 이상은 하병(下兵)이 되니, 10결의 전지를 경작하는 1호는 하병 1인을 낸다.위에서 이른바 '농(農)'이라는 것은 비단 농민뿐만이 아니다. 삼사(三士), 삼공(三工), 삼상(三商)의 무리로서 또한 자신의 생업에만 전념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리를 통틀어 농민(農民)이라고 하더라도 괜찮다. 경대부(卿大夫)로 말하면 자신은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지만 그 전토(田土)의 결부(結負)17)가 군현에 흩어져 있는 부류 및 시골에 사는 삼사인(三士人)은 모두 농업에 종사한 뒤에 부모와 처자식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으니, 이러한 무리는 자신이 농병(農兵)이 될 수 없기에 모두 노복(奴僕)으로 충당한다. 농사일을 겸하는 공인(工人) 및 선박을 이용하여 판매하지 않고 농사일을 겸하는 상인(商人)으로 말하면 모두 농병이 될 수 있다.신은 삼가 살피건대,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제도는 전지(田地)의 부세(賦稅)에 따라 군사를 냈으니,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이른바 '자국의 군대를 다 거느린다.[悉索弊賦]'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민과 천민만 군졸이 되니, 한 집안에 부자와 형제가 모두 군역에 충정되어 평생 고생하지만 전토(田土)를 많이 소유하여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는 자는 편안히 앉아서 홀로 그 즐거움을 누립니다. 오민(五民)이 아님이 없지만 고생과 즐거움이 균등하지 않고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현격히 다르니, 왕자(王者)가 천하를 고르게 다스리는 방도가 전혀 아닙니다. 신은 원하건대, 앞으로는 옛 제도를 말끔하게 씻어 내고 한결같이 전지의 부세에 따라 군사를 내는 하·은·주 삼대 때의 제도를 따라 10결(結) 내에서 상병(上兵) 1인, 하병(下兵) 1인을 정하고, 상병 1인의 군복과 군기(軍器)는 10결 내에서 일일이 마련해서 지급하고 전쟁에 나아갈 때 필요한 군량은 10결에서 함께 마련하고, 하병 1인이 군량을 운반하여 따르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아마 삼대 때의 제도에 가까워 민심이 안정되고 군병의 허실에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이상 농병은 모두 보병(步兵)이다. 이들의 기예는 모두 화포를 연습한다.】공병(工兵) : 공방에 거처하는 각 색(色)의 공인은 부유한 정장(丁壯)을 가려서 상병(上兵)으로 삼고, 그다음 3인을 봉족(奉足)으로 삼아 경포수(京炮手)에 충정한다.18)상병(商兵) : 배에서 장사하는 상인 및 사로잡혀 백성으로 편입된 사람들은 정장(丁壯)을 가려 수군(水軍)에 충정하고, 그다음은 조군(漕軍)에 충정한다.이상은 대선 수군(大船水軍)은 4인(人), 조군(漕軍)은 3인이다.【그 군기(軍器)와 군복은 같은 배의 사람이 함께 마련하여 지급한다. 아래도 같다.】중판선 수군(中販船水軍)은 3인, 조군은 2인이다.소판선 수군(小販船水軍)은 2인, 조군은 1인이다.금저(錦苧)와 금동(金銅) 등을 파는 상인은 성실한지 성실하지 않은지를 헤아려 성실한 자는 경포수(京炮手)의 호수(戶首)에 충정하고 성실하지 않은 자는 경포수의 봉족에 충정한다.신은 삼가 살피건대, 상판(商販)의 이익은 농부보다 열 배나 많지만 판매하는 물자는 모두 농가에서 나옵니다. 더구나 농부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흙덩이처럼 미련하지만, 상인은 도로를 집처럼 여기며 험난한 길을 다니고 걸음이 빠르니 사정을 헤아리는 것이 농부보다 열 배나 뛰어납니다. 농부보다 열 배나 많은 재산에다 농부보다 열 배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니, 사졸로서 치밀하고 민첩함이 이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 더구나 배를 타고 장사하는 상인(商人)과 연해(沿海) 포구의 백성19)은 그 부류가 매우 많고 강이나 바다에서 나고 자라 섬과 넘실거리는 바다를 농토로 삼으니, 풍랑이 이는 바닷길을 다니는 것이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 무리를 수군(水軍)에 충정한다면 스스로 전함을 갖출 것이니, 무예를 시험하고 정밀하게 조련하여 비상시를 대비한다면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주사(舟師 수군(水軍))만 어찌 강동(江東)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할 따름이겠습니까.논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선상(船商)의 무리는 바다에 기생하며 아침 저녁으로 사방을 떠돌아다녀 일정한 거처가 없으니, 평상시에도 군인의 수효를 채우게 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위급할 때 정처 없이 떠나버린다면 어느 곳에서 찾아다 막아 지키게 하겠습니까. 금은(金銀)과 비단을 파는 상인은 남쪽에서 모아 북쪽에서 파니 하루도 집에 있지 않는데, 또한 어찌 이 무리들을 데리고 위급함을 대비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답하기를 "선박을 이용하여 장사하는 사람은 비록 배를 타고 남북으로 옮겨 다니며 장사하지만 거처하는 데는 본래 일정한 곳이 있습니다. 더구나 옮겨 다니며 장사하는 곳은 북쪽으로 오랑캐 지역이거나 남쪽으로 왜인들이 사는 곳이 아니고 우리나라 천 리 땅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평상시에 기강을 엄하고 분명히 하며 지극한 은혜를 내린 다음 반드시 본관에서 증명서를 발급한 뒤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장사하게 해야 합니다. 변고가 있을 때 일시에 연변의 각 고을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곳에 급히 전령을 보내고, 본읍에서는 감압관(監押官)으로 하여금 본영(本營)에 영부(領付 부속)하게 하되, 미적거리며 지체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즉시 군율(軍律)을 시행하게 한다면 어찌 일을 당해 모이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부모와 친지가 강촌에 살고 있으니, 어찌 징발하는 데 어려운 일을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금은과 비단을 파는 상인으로 말하면 몸은 비록 사방으로 떠돌아다니지만 집은 일정한 곳이 있으니, 만약 위급한 일이 닥치면 부모를 가두고 사방에 공문을 보내 일시에 조발하여 보내게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평상시라면 항상 입번(入番)하는 달을 정해 비록 사방으로 멀리 나가서 장사하더라도 정한 기일에 와서 모이게 하고, 만약 기일을 어긴다면 친족에게 책임을 물어 대죄(大罪)로 논죄한다면 또한 어찌 징발에 응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士上兵 : 下士之降而爲兵者。 年五十以下。 爲士上兵。士中兵 : 下士之降而爲兵者。 年五十以上。 爲士中兵。士下兵 : 下士之降而爲兵者。 年雖五十以下。 或有見在疾病及體力孱弱。 不合赴敵者。 爲士下兵。右士兵。 上兵一人。 給中下兵四人爲奉足。 三人備戰馬。 而平時芻養備至。 及其習陣及赴戍。 或赴敵時。 爲上兵者。 跨出馳驅而已。 奉足一人。 備弓矢鎗炮等器械。 極其精銳。 以給上兵。 爲上兵者。 在平日無所事。 躍突鳴弓䠶獵而已。 及其有急。 則應聲躍出而已。臣謹按下士之徒。 雖蠢然一農夫。 然平日在其鄕中。 以兩班稱之。 僕隷贓獲之徒。 皆得尊待人。 士大夫亦許升座。 一朝落講。 而爲軍人。 則鄕黨賤侮之。 奴肄慢蔑之。 父母兄弟皆號泣而痛悼之。 故是輩落講爲兵者。 有欲死之憤心。 無精銳之勇氣。 其故何哉? 此則國家養兵刻甚之過也。 夫兵。 死地也。 驅人於必死之地。 以求吾宗社之安保。 待其人於平昔之日。 接之以厚恤可乎? 迫之以煩刻可乎? 使斯兵居於平日。 飢寒水火。 日苦其身。 及有緩急。 則曰爾何不爲社稷死乎? 是則無異於割人膚。 而求愛我也。 可乎? 目今四民之中。 惟兵最瘁。 邊將邊帥惟知肥己。 不念愛卒。 惟知鞭毒。 不敎武藝。 加之以懲督價布。 浚盡膏血。 以爲妻妾親舊之奉。 而士無人色。 以此觀之。 國家設營置兵。 乃所以爲武將致富貴也。 非爲宗社計也。 然則武臣日肥於下。 而國家日趍於危亡。 臣未知此何等事也? 臣願自今以往。 各道兵水使。 使之兼守其邑。 食其邑之俸。 而軍卒價布一切勿懲。 如有橫侵士卒。 以非義者。 律以大罪。 且下士之落講爲軍者。 名之曰下士兵。 爲將者待之。 不與賤卒相侔。 一年一度分番入營。 則爲將者敎以武書及射藝之外。 不得侵督以他役。 在於其家。 則守令一月一度講敎武書。 鍊習騎䠶。 才藝優等者。 多用賞給。 使之芬華。 若此則爲下士之輩。 望見其爲兵者之榮幸。 而恥作章句腐儒者。 必亦多矣。 其爲兵者。 肥馬輕衣。 弋䠶馳驟。 必亦爲才藝所使。 切欲出邊一戰。 以樹萬里之功者。 必不少矣。 然則東北之憂。 其足慮乎?【右士兵皆馬兵也。 以弓射爲習。】農上兵 : 農家之丁。 年四十以下爲上兵。 十結一戶內。 上兵一人。農下兵 : 農家之丁。 年四十以上爲下兵。 十結一戶內。 下兵一人。右所謂農者。 非但農民而已。 三士三工三商之徒。 亦不專厥業。 而務於農者有之。 如此之徒。 通稱之曰"農民"可也。 至於卿大夫。 身雖立朝。 其田土結負。 散在州郡之類及三士人之鄕居者。 皆就農業。 然後父母妻子免於飢寒。 則如此之徒。 不可身作農兵。 皆以奴僕充之。 至於工人之兼治農務者及商人之非船販而兼治農務者。 皆得爲農兵。臣謹按三代之制。 兵出以賦。 春秋傳所謂"悉索弊賦"是也。 今則不然。 良民賤漢。 獨爲軍卒。 一家之內。 父子兄弟皆充軍役。 終世辛苦。 而富有田土。 飽食煖衣者。 安坐而獨享其樂。 莫非五民。 而苦樂不均。 勞逸懸殊。 甚非所以王者均平天下之道也。 臣願自今以往。 永洗舊規。 一遵三代兵出以賦之法。 十結之內。 定出上兵一人下兵一人。 上兵一人之軍服軍器。 十結之內。 一一備給。 而赴戰之時軍糧。 則十結共備。 下兵一人運其糧而隨之。 則庶近三代之制。 而民心均平。 兵無虛實之不齊矣。【右農兵皆步兵也。 其所藝。 皆以火炮爲習。】工兵 : 各色工人之店居者。 擇其富實丁壯者爲上兵。 次者三人爲奉足。 充定2)于京炮手。商兵 : 船販商人及捕作民人等。 擇其丁壯者。 充定水軍。 其次者。 充定漕軍。右大船水軍四人。 漕軍三人。【其軍器軍服。 一船人共備而給之。 下同。】中販船水軍三人。 漕軍二人。小販船水軍二人。 漕軍一人。錦苧金銅等商人。 諒其實與不實。 實者。 充定于京炮戶首。 不實者。 充定于京炮奉足。臣謹按商販之利。 十倍於農人。 而其所販之財。 皆出於農家。 况農人生長畎畝。 蠢然若土塊也。 商人則以道路爲家。 涉險履艱。 行步輕捷。 揣事度情。 過農人十倍。 以農人十倍之財。 兼農人十倍之才。 士卒精敏。 無過於此。 况船販商人沿海浦民3)。 其類甚繁。 生長江海。 以島嶼洋溟爲其町畦。 出沒風濤。 若走平地。 若以此輩充定水軍。 自裝戰艦。 試藝精鍊。 以備不虞。 則吳楚舟師。 豈但專美於江左而已? 議者曰: "船商之徒。 寄生洋海。 朝東暮西。 居無定所。 在於平日。 亦難羈縻以軍額。 况在急難。 飄篷而去。 則何處推回。 以防守禦哉? 金銀錦綾之商。 收南販北。 一日不在於家。 亦安能以此輩以備緩急哉?" 臣謹答曰: "船販之人。 雖泛梗漂檣。 行販南北。 其所居之地。 則自有定處。 况其行販之地。 亦非北胡南越之地。 不出於吾邦千里之內。 則在於常時。 紀綱嚴明。 惠懷備至。 必有本官公文。 然後行販四方。 及其有變之日。 一時急令于沿邊各邑船商行販之地。 本邑使監押人領付本營。 如有遲回等待者。 卽行軍律。 則安有臨事未集之理哉? 况其父母親屬居在江村。 則何難於調發之有艱哉? 至於金銀錦綾之商。 身雖四方。 家有定本。 若臨急難。 堅囚父母。 四方行會。 一時調送。 則亦不難矣。 若在平時。 則常定入番之月。 雖遠販四方。 及期來會。 若未及期。 責其親屬。 論以大罪。 則亦何難於調發哉?" 가포(價布) 국가에 일정한 신역(身役)을 치러야 할 사람이 동원되어 나가지 않고 그 신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목(布木)을 말한다. 결부(結負)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여 정한 토지의 면적 단위이다. 조선 시대에는 1결을 35보 평방으로 확대하고 보척(步尺)의 기준을 주척(周尺)으로 정하였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두어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에 따른 양전척(量田尺)을 정하였다. 경포수(京炮手)에 충정한다 원문은 '充丁于京炮手'인데, 문맥을 살펴 '丁'을 '定'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포구의 백성 원문은 '捕民'인데, 문맥을 살펴 '捕'를 '浦'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定 丁 浦 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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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 僧兵 승상병(僧上兵) : 40세 이하인 승려는 상병으로 삼는다.승하병(僧下兵) : 40세 이상인 승려와 비록 40세 이하라도 체력이 약한 승려는 하병으로 삼는다.이상 승상병 1인에게는 하병 4인을 봉족(奉足)으로 삼아 군기(軍器), 군복, 군량을 일일이 마련하여 지급하게 한다.신은 삼가 살피건대, 양민(良民)의 적자(赤子)를 빼앗아 부자의 인연을 끊고 후손을 낳지 않으며, 농민의 오곡을 빼앗아 화복(禍福)으로 현혹하고 궁각(宮閣)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자는 승려입니다. 그 정상을 따져 보면 국법상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수행하는 도량과 큰 사찰이 10리마다 들어서 백성들을 현혹하고 세도(世道)에 해독을 끼치는 것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300년이나 이어 온 맑고 성스러운 조정에서 이 일에 대해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삼가 매우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신은 삼가 청하건대, 우리나라에 사는 승려는 모두 명부에 기록하여 사람마다 인패(印牌)를 주고, 인패가 없이 길을 다니는 자에 대해서는 대벽(大辟)으로 논죄하게 하소서. 그런 뒤에 그 가운데 건장한 자를 가려 상병(上兵)으로 삼고, 늙고 연약한 자는 하병(下兵)으로 삼습니다. 그 가운데 조금 글을 알아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자를 가려 100사람을 거느리는 장수로 삼으며, 또 그 가운데 조금 뛰어난 자를 가려 1000사람을 거느리는 장수로 삼으며, 또 가장 호걸스러운 자를 가려 한 도(道)의 장수로 삼습니다. 평상시에는 다른 병사들처럼 한결같이 행진(行陣)과 무재(武才)를 익히게 하다가 변고가 생기면 독자적으로 한 방면을 담당하게 한다면 비단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평민들의 자손들 또한 병역을 기피하여 승려가 되어 오륜을 끊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僧上兵 : 僧人之四十歲以下。 爲上兵。僧下兵 : 僧人之四十歲以上。 雖四十歲以下。 體力病弱者。 爲下兵。右僧上兵一人。 下兵四人爲奉足。 軍器軍服軍糧一一備給。臣謹按奪良民之赤子。 斬棄五倫。 絶滅滋息。 奪農民之五糓。 迷眩禍福。 僭宮侈閣者。 僧人也。 原其情狀。 在王法難赦。 叢林巨刹。 十里相望。 淫惑生靈。 蠹害世道。 有不可勝言者。 而三百年聖代淸朝。 無一人言及此事者。 臣切痛之。 臣伏請令僧人之在于邦內者。 悉數簿錄。 人各授印牌。 無印牌而出于道者。 論以大辟。 然後擇其壯者。 爲上兵。 其老弱者。 爲下兵。 擇其中稍知文字而知事要者。 爲百人之將。 又擇其稍勝者。 爲千人之將。 又擇其最雄傑者。 爲一道之將。 在於平時。 習肄行陣武才。 一如他兵。 及其有變。 使之獨當一面。 則非但有助於禦賊之道。 良家子枝。 亦無避兵爲僧斬絶五倫之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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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에 과감하게 물러난다'348)는 부 急流勇退賦 아득하여 육지와 바다가 끝이 없으니바로 벼슬길이요.거센 물결이 출렁이니강물 중앙에 있는 것 같아라.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대그 물러남이 과감한가.뜻은 이미 기미를 보고 결정하였으니349)내 어찌 임금의 총애를 탐하랴.일찍이 신선의 풍모 속세를 벗어나그리운 사람은 화산에 있도다.350)나날이 계속 찾아갔는데진귀한 비결을 어찌 그리 아끼는가.속세 인연이 다하지 않음이 안타까워하니부질없이 도원에서 도끼자루 썩어 가누나.송나라 다스리는 하늘 아래로 돌아와서금문351)에 숨었어라.적송자를 따라간 유후를 존모하고352)녹야당의 진공을 사모하였네.353)돌아보건대 벼슬길은 큰 강을 건너다가중류의 떠서 풍파를 만난 것과 같아라.-이하 빠짐- 浩浩乎陸海無垠名宦之場滔滔者是在水中央彼何人斯其退也勇志已決於色擧吾何貪夫天寵夙仙風之超世所懷人兮華之山日復日兮再往何寶訣之是慳悵俗緣之未磨空爛柯於桃源歸來宋日之中天于以隱乎金門慕赤松之留侯思綠野之晉公顧宦遊若涉大水浮中流而遇風波【以下缺】 급류에 과감하게 물러난다 전약수(錢若水)는 북송(北宋)의 저명한 문신이다. 소년 시절 거자(擧子)일 당시에 화산(華山)에서 진단(陳摶)을 만나 관상을 부탁했더니,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평하였는데, 과연 그가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갓 40세 된 젊은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송나라 소백온(邵伯溫)이 지은 《문견전록(聞見前錄)》 권7에 나온다. 이 고사에서 유래하여 벼슬자리에서 과감히 물러나는 것을 급류용퇴(急流勇退)라고 칭하기도 한다. 기미를 보고 결정하였으니 '색거(色擧)'는 색사거의(色斯擧矣)의 준말로, 사람이 어떤 기미를 보고서 신속하게 행동을 취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향당(鄕黨)〉의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라고 하였다. 그리운……있도다 전약수가 그리는 사람은 화산의 진단임을 말한다. 바로 앞의 각주 참조. 금문에 숨었어라 궁궐에서 벼슬하며 이은(吏隱)한다는 말이다. 금마문(金馬門)은 한대(漢代)의 궁문으로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인데 궁문 옆에 동마(銅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낭관(郞官)으로 있던 동방삭(東方朔)이 술이 거나할 때면 "속세에 숨어도 지내고,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기도 하네. 궁전 안에서도 세상 피하고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깊은 산속의 띳집 아래에 숨어 살겠는가?[陸沈於俗, 避世金馬門. 宮殿中可以避世全身, 何必深山之中蒿廬之下?]"라고 노래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적송자를……존모하고 유후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장량(張良)이 진(秦)나라를 멸망시켜 고국의 원수를 갚으려던 소원을 이루자 공명(功名)을 버리고 신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속세를 멀리 떠났다고 한다. 녹야당의 진공을 사모하였네 진공은 당나라 헌종(憲宗) 때의 현상(賢相)인 배도(裴度)로 녹야당(綠野堂)은 그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배도는 헌종 연간에 도원수(都元帥)로서 오원제(五元濟)가 일으킨 회서(淮西)의 난(亂)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지고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는데, 여러 번 물러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만년에 은퇴하여 낙양(洛陽)에 녹야당을 지어 놓고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밤낮으로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세상의 일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新唐書 卷173 裴度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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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산41)에서 황지천의 시에 차운하다 택당 이식 長德山次黃芝川韻【澤堂 李植】 일찍이 이 곳에서 오랑캐 군대 격파했으니관북에서 누구의 공을 제일로 논하는가지금까지 기로들은 대수42)를 사모하니변방의 요기는 언제쯤 깨끗해지려나장덕산은 바로 정문부가 왜적을 격파한 곳으로, 중흥(中興)한 이래로 이 승리와 견줄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에 대한 포상이 없었고 뒤에도 전술한 자가 없었는데, 다만 황지천이 정공에게 준 시의 내용으로 조금이나마 실상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曾於此地破蠻軍關北誰論第一勳耆老至今思大樹塞門何日淨妖氛長德山, 卽鄭文孚破賊處, 中興以來, 未有此捷比, 而當時沒其賞, 後亦無人傳述, 獨黃芝川贈鄭公詩曰云云, 稍爲得實云。 장덕산(長德山) 길주성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있다. 1592년 9월 19일에 정문부가 길주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유경천(柳擎天)·고경민(高敬民) 등과 함께 크게 깨뜨렸다. 《農圃集 年譜》 대수(大樹) 군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이다. 후한 광무제 때의 장군 풍이(風異)가 겸손하여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큰 나무 밑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일컬으며 칭송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 여기서는 농포 정문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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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에 머물며43) 농포에게 주다 동계 정온 留吉州贈農圃【桐溪 鄭蘊】 포상과 배척은 은혜가 비록 다르나군친 그리는 마음은 다르지 않네요충지 막아 지켜낸 공이 부럽고본디 어리석고 못난 내가 부끄럽네변방 밖에 차가운 눈 많이 내리고관문에 괴상한 바람 한껏 불어대네떠나고 머무는 이 모두 말이 없으니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褒黜恩雖異君親戀則同羨公堪鎖鑰愧我素愚慵塞外多寒雪關中足怪風去留俱脈脈何處更相逢 길주에 머물며 1596년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이 고을로 귀양 와서 농포와 서로 친분이 두터웠고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農圃集 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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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감회 2수 택당 이식 鏡城感懷【二首 澤堂】 시서에 능한 김종서50) 장수에 명 받고훈척 윤 시중51) 정벌 전담하였네유묘에 지금 바로 합사하기 어려워도사관이 어찌 한 분의 공만을 기리겠는가­아마도 그들을 합사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듯하다.­신공은 화살 한 대로 겹겹의 포위 풀고52)정공은 지휘 세 번에 왜적 격파하고 돌아왔네53)두 분의 충절 관외에 일월처럼 걸렸으니부질없이 장사들에게 눈물 뿌리게 하누나54)­신(申)은 신립(申砬, 1546~1592) 공을 가리키는 것 같고, 정자(鄭子)는 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詩書命帥金宗瑞勳戚專征尹侍中遺廟卽今難幷祀史家那得獨褒功【蓋惜其不能幷祀也。】申公一箭解重圍鄭子三麾破敵歸關外雙忠懸日月空令壯士涕交揮【申似指申公砬, 鄭子指先生也。】 김종서(金宗瑞) 1383~1453.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윤 시중(尹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윤관(尹瓘 ?~1111)을 가리킨다. 고려 예종 때의 학자·장군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이다. 어사대부·한림학사 등을 지냈으며,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았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아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였다. 1130년(인종8년)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신공은……풀고 1583년(선조16)에 이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을 때, 신립이 온성 부사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했던 일을 말한다. 《宣祖修正實錄 16年 5月 1日》 지휘……돌아왔네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과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기며 투항을 하자,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 대장이 되어 경성을 수복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왜적을 격파한 것을 말한다. 《農圃集 年譜》 부질없이……하누나 신립은 임진왜란 때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왜적에게 참패하여 남한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했고, 정문부는 인조(仁祖) 2년(1624)에 초 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역사 시로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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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허정48) 시에 차운하다 【정자는 고을의 복암천 가에 있다.】 次凌虛亭韻 【亭在州之伏巖川上】 손님이 큰 강가 어귀에 오니 客來大江口달은 청명한 가을 하늘에 가득하네 月滿秋天淸다만 흰 갈매기 모습만 보일 뿐 但見白鷗面패옥49) 소리는 들리지 않네 不聞環珮聲구름이 날리니 산이 움직이려 하고 雲飛山欲動물결 치니 바위도 가벼이 움직일 듯 浪蹴石如輕그대 아니면 나는 누구와 짝하리오 非子吾誰侶한담 나누는 말마다 정이 담겼네 閑談箇箇情 客來大江口, 月滿秋天淸.但見白鷗面, 不聞環珮聲.雲飛山欲動, 浪蹴石如輕.非子吾誰侶, 閑談箇箇情. 능허정 능허처사 나종소(羅宗素)가 건립한 강학소 겸 휴식처로 사용한 정자였는데 나덕명이 왕래하면서 영시담론(詠詩談論)을 하였다. 나주시 노안면 복암강(伏巖江) 위에 있었던 정자이다. 패옥 조복(朝服) 좌우에 늘인 옥줄로 조정 신하들이 차고 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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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부의 시에 차운하여 선릉재소에 올리다 次羅仲孚韻 仍呈宣陵齋所 【이언양, 자는 경례(景禮)이고, 양성(陽城) 사람으로, 흥룡동(興龍洞)에 거주하며 자호를 용강(龍江)이라 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68)의 문인이며 공과 더불어 을묘(乙卯) 사마(司馬) 정묘(丁卯) 문과에 합격하고, 벼슬은 함양 군수에 이르렀다. 공이 일찍이 선릉 침랑으로 함께 벼슬하고 있을 때 "이공과 함께 객지에서 벼슬하며 같은 집에서 살 적에 셋째 아들 나덕윤(羅德潤)이 나를 따라 왔다. 중학(中學)에 이름을 걸고 《소학》, 《심경》, 《근사록》을 이공에게 배웠다. 그래서 사운시에서 '그대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공은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딸을 시집보냈다."라고 하였다.】풍우에 차가운 창 흰 머리에 수심 가득한데 風雨寒窓鶴髮愁남쪽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네 南天杳杳白雲悠사람 없는 호수 너머 봄옷을 전하니 無人湖外傳春服천리 밖 여름에 응당 그대 고생하리 千里應勞爲子夏 【李彦讓, 字景禮, 陽城人, 居州之興龍洞, 自號龍江. 金河西麟厚門人, 與公同中乙卯司馬 丁卯文科, 官至咸陽郡守. 公嘗於宣陵寢郞, 供仕之曰 : "與李公同舍旅宦, 第三子德潤, 亦從焉. 托名中學而受小學 心經 近思錄於李公. 其四韻詩所云君來携一子者, 此也. 李公愛其才, 以女妻之."云】風雨寒窓鶴髮愁, 南天杳杳白雲悠.無人湖外傳春服, 千里應勞爲子夏.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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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내리쬐는 햇볕 한여름이요빽빽한 그늘 바야흐로 짙푸르네정자 위에서 들새 우짖으니제호181)와 니활활182)이로다 畏景屬朱明繁陰正濃綠上有野禽啼提壺與泥滑 제호(提壺) 새 이름으로, 제호조(提壺鳥) 혹은 제호로(提壺蘆)라고 한다. 니활활(泥滑滑) 자고새와 비슷하나 약간 작은 새로, 죽계(竹鷄) 혹은 계두골(鷄頭鶻)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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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당의 맑은 향기 竹塘淸香 –원문 8자 결락-근원은 샘솟네대나무 빛이 연꽃 향기를 마주하니밝은 달빛 더해진들 어떠한가 【八字缺】源活竹色對荷香如何添素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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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반이랑 방당을 여니근원에서 활수가 솟아나네183)대나무 그림자와 연꽃 향기휘엉청 밝은 달에 유독 어울리누나 池開半畝方水貯原頭活竹影與荷香偏宜涵夜月 반이랑……솟아나네 송나라 주희(朱熹)의 〈관서유감이수(觀書有感二首)〉에 "반 이랑 네모난 연못 거울처럼 열렸는데, 하늘빛 구름 그림자와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이하여 저처럼 맑은 것인가? 근원에서 활수가 솟아나기 때문이라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하였다. 이는 학문에 연원이 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죽당의 못을 형용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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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에 이르러217) 다시 앞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짓다 2수 到穩城復 用前韻【二首】 옆으로 북극에 임하여 높은 성 지었으니낚시로 자라를 낚고 검으로 고래 베려 하네내가 실컷 술마시게 하면 청해 물을 다 마시고그대와 담소 나누며 백두산을 기울이리칼 짚고 만리성에 올라 굽어보니용을 삶고 봉황을 굽고 큰 고래를 회치네푸른 바닷물을 한 잔 술 삼아장군의 가슴 속에 부어 볼거나 平臨北極作高城釣欲連鰲釰斷鯨容我飮酣靑海渴爲君談笑白山傾倚釰登臨萬里城烹龍炮鳳膾長鯨滄溟水作一杯酒倒向將軍胸裡傾 온성에 이르러 정문부는 1595년(선조28)에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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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창의행 창곡 최유해 壬辰倡義行【蒼谷 崔有海】 요성이 밤하늘 비춰 흰 서슬 비끼고광풍에 땅 진동하니 짙은 안개 비리네포악한 오랑캐 비선55) 성난 고래처럼 날뛰고흰 무지개 피 토해 깊은 바다 물들이네병화의 불길 치솟으니 임금님 몽진하고살기 가득하니 하늘은 어두컴컴 해졌네공신의 후손들 피맺힌 정성 바치려고높고 큰 담력으로 서릿발 도검 뽑았네쓰러져가는 큰 집 한 손으로 떠받치며주먹 불끈 쥐고 소리쳐 오정 독려하네56)세상 바로잡는 의병 기치 들고 혈맹하니나라에 보답하는 정성 바쳐 경성57) 비추네위대한 정 장군 문무의 재능 뛰어나고늠연한 정충은 골수에 사무쳤네범처럼 노려보며 군영서 지휘가 정교하니곰처럼 포효하면 의병들 귀 기울여 듣네기밀 탐지해 대소의 깃발 은밀히 세우고병장기 들고 장단의 정자 몰래 에워쌌네알유58)가 이를 갈며 포위된 성 나서자맹렬한 불길 바람 타고 앞 들판 태우네긴 팔로 활을 당기니 벽력 울리는 것 같고신속하게 조장59) 들어 치병60) 연결시켰네왜적이 행군하는 길에 은밀히 복병 숨기고구름 속 용의 형세로 종횡무진 전투 대형 갖췄네우레 울리듯 적의 선봉 갑자기 꺾어버리고엄히 단속하여 서슬 퍼런 창칼로 포위하네왜적61)들 도마 위 생선처럼 목숨 구걸해도민둥머리 뒤통수에 칼침 놓으라 재촉하네귀를 베고 골수를 부수니 구덩이 빨리 차고살갗 벗겨 비린내 풍기며 세월 바뀌었네길섶의 시체 하늘 높이 쌓여가는데밤마다 도깨비불은 반딧불처럼 빛나누나머리 숨긴 숫뱀 음흉한 간담 서늘해지고둥지 그리워하는 기이한 새 다친 날개 근심하네왜적62)들 말끔히 숙청해 즐겁게 귀대하니의병 군문에 혁혁한 승전보 큰 우레 같았네구름 걷힌 변방에 한나라 달빛63) 밝고매화 놀리는 피리 소리에 하늘과 바다 푸르네백성들 앞다투어 나라 염려하는 마음 일어적의 앞잡이 먼저 베어 신령한 위엄 떨쳤네들판에서 격렬히 싸우며 말 타고 지나가니갈라진 배 끊어진 창자 물가 모래밭에 가득했네까마귀 떼 먹이 다투며 새벽부터 울어대고쌓인 주검 밤에 태우니 불꽃 환히 밝았네화산처럼 맑은 강문우 창끝에 전사하니서쪽 하늘 바라보고 슬퍼서 피눈물 흘렸네마음 열어 의리로 투합하여 기병 가려 뽑고약점 보여 적을 유인해 석병64) 부수었네창 휘두르고 떨쳐 나서니 누가 우열 다투랴피가 흘러 공이 떠가니65) 혼탁한 경수66) 같았네왜적67)들 손가락 깨물며 남몰래 울음 삼키고위세에 떨고 속으로 근심하며 진문 굳게 닫았네돌아가려는 왜적 선봉대 은밀하게 요격하려고회군하는 수레에 밤새 기름칠하여 길 재촉했네전란 평정됨에 우리 강토68) 이미 온전하고임금 고향69) 뜰에 상서로운 구름 아름답게 모였네공렬 포장 되레 부족하고 포상과 은전 가벼우니70)누가 충의를 북돋아서 국법을 밝히겠는가먼 자손까지 경사 이어져 성취할 것이니찬란한 금방71)에 향긋한 명성 드러나겠지사실 모아 문장 지어 나라의 기강 세우니의로운 풍모 널리 퍼뜨려 전형을 전하네 妖星照夜白橫獰飆震地黑氛腥蠻猘飛鷁踔怒鯨陰虹吐血赭重溟兇燹㸌㸌玉輦行殺氣漫漫天晦冥凌烟遺裔控血誠斗膽輪囷發霜硎傑廈垂傾隻手擎張拳雄呼鞭五丁匡時仗義託血盟報國輸忱照景星魁梧鄭帥文武英凜烈精忠髓骨銘雄壇虎視指敎精義旅熊咆傾耳聽探機密樹大小㫌荷戟潛環長短亭猰㺄磨牙出重城烈炎煽風爛前坰猿臂彎弧霹靂鳴鳥章掣電連輜輧陰密藏兵鳥蛇程縱橫排陣雲龍形奸鋒急頓震雷轟霜鋩環匝嚴拘囹染齒爭祝几上生禿頭催加腦後釘刵耳椎髓亟塡坑剝膚揚臭延變蓂枯骴杈路逼霄崢燐火連宵燦流螢雄虺竄首凶膽驚怪雀思巢愁鎩翎貔貅整肅樂還營義門燀爀殷奔霆雲消關塞漢月明笛弄梅花海天靑黎氓競奮戀國情賊囮先磔宣威靈搶鏖騎踏臨野平刳腹劌腸撑沙汀羣烏曉噪啄食爭積尸夜燒焰靑熒端刺姜侯華岳晶衋傷西望血淚零協義披肝揀奇兵示弱誘凶蹴石屛揮矛奮挺孰爭衡蹀血漂杵混濁涇斑衣咋指暗呑聲怵威癙憂牢閉扃先隊籲旋密將迎還輪夜脂催行鈴金甌旣完劃塵淸瑞雲䓗籠豐沛庭褒功還歉賞典輕培義誰張明國經慶蔓雲仍應底成金榜輝煌標名馨拓實構詞植邦紘播揚義風垂典刑 비익(飛鷁) 원문의 '익(鷁)'은 익새로, 백로와 비슷하며 물귀신이 이 새를 두려워한다고도 하고 바람을 잘 견디는 새라고 전해져, 뱃머리나 돛대 끝에 이 새를 만들어 달았다고 한다. 뒤에 비유하여 '배[船]'를 의미하였다. 여기서는 문맥을 살펴 '비선(飛船)'으로 번역하였다. 오정 독려하네 원문의 '오정(五丁)'은 전국(戰國) 시대 촉(蜀)나라의 뛰어난 역사(力士) 다섯 사람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촉왕본기(蜀王本紀)》에 의하면, 하늘이 촉나라 왕을 위해 오정 역사를 보내주어 촉산을 옮기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농포 정문부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모집한 것을 의미한다. 경성(景星) 상서로운 별이다. 경운(慶雲)·감로(甘露)·기린(麒麟) 등과 함께 경사스러운 일이나 태평성대를 표시하는 징조를 말한다. 알유(猰㺄)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고대 전설 속의 맹수 이름으로, 흉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왜적을 의미한다. 조장(鳥章) 새 모양을 그려 장식한 깃발로, 비탈진 길을 갈 때 들고 가는 깃발이다. 《관자(管子)》 〈병법(兵法)〉에 군대 행렬에 드는 깃발이 아홉 가지[九章]가 있는데, 그중에 '다섯 번째 조장(鳥章)을 들면 비탈길을 행군한다.[五曰擧鳥章則行陂]'라고 하였다. 치병(輜軿) 치거(輜車)와 병거(軿車)로, 보통 귀족의 부녀자들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비바람이나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사방을 병풍처럼 막고, 또 누워서 쉴 수 있도록 안락하게 꾸며져 있다. 왜적 원문의 '염치(染齒)'는 왜인의 풍속이 이빨을 검게 물들인 데서 온 말이다. 비휴(貔貅) 고서에 나오는 범과도 같고 곰과도 같은 맹수 이름이다. 한나라 달빛 조국의 산하를 비추는 달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전출새(前出塞)〉 7에 "이미 한월을 멀리 떠나왔는데, 언제나 성을 쌓고 돌아갈거나.[已去漢月遠, 何時築城還?]"라는 표현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석병(石屛) 병풍처럼 둘러싸인 바위를 말한다. 공이 떠가니 전투가 격렬하여 사상자가 많다는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과 목야(牧野)에서 전투할 때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血流漂杵]"라고 한 데서 나왔다. 《書經 武成》 경수(涇水)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강으로, 하류에서 위수(渭水)와 합친다. 위수는 맑고 경수는 혼탁하기에 종종 탁한 물의 대명사로 쓰인다. 반의(斑衣) 아롱 옷을 입은 왜인의 풍속에서 온 말이다. 금구(金甌) 금으로 만든 사발로, 흠이 없고 견고하다 하여 강토에 비유된다. 양 무제(梁武帝)가 일찍 일어나 무덕각(武德閣)에 이르러 혼자 "나의 국토는 금구와 같아 하나의 상처나 흠도 없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梁書 卷38 朱異列傳》 풍패(豐沛)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인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으로, 제왕(帝王)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조선 태조의 고향이 함경남도 영흥(永興)이기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공렬……가벼우니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은 정문부의 공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고, 북도의 호란을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실정을 뒤집어 그의 공을 숨기고 거짓으로 행재소에 아뢰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막연히 알지 못하여 공에게 제대로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農圃集 年譜》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의 명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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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삼고(錦城三稿) 錦城三稿 錦城三稿 고서-집부-별집류 문집 국역 錦城三稿 羅德明 羅德俊 羅德潤 목판본 금성삼고(錦城三稿) 1 미상 미상 나덕명(羅德明)의 소포유고(嘯浦遺稿), 나덕준(羅德俊)의 금암습유(錦巖拾遺), 나덕윤(羅德潤)의 금봉습고(錦峯拾稿)를 한데 모아 세고(世稿) 형태로 편찬한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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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삼고 錦城三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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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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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1) 三稿合部序 【一】 금성 나씨(錦城羅氏)의 가숙(家塾)1)에서 새로 간행한 《소포유고(嘯浦遺稿)》에 금암(錦巖)2)과 금봉(錦峰)3)의 약간의 유고를 덧붙여 한 부로 합편하였으니, 금암의 증손 상사(上舍) 나두동(羅斗冬)4) 씨가 실로 수집한 것이다. 소포(嘯浦)5)의 현손 나만운(羅晩運)과 금봉의 증손 나두흥(羅斗興)이 그와 함께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도모하고는 소백산(小白山) 아래로 편지를 보내어 나6)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주(羅州)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금암은 내 선비(先妣)의 할아버지이니 내가 이에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장차 행여 글재주가 없다고 바로 사양하여 그만둘 수 있겠는가?생각건대 외고조 금호공(錦湖公)7)은 행실로 이름이 났고, 그의 장자 휘 덕명(德明)은 자가 극지(克之)로 금오랑(金吾郞) 벼슬에 나아갔다가 곧바로 그만두고 호수나 바다를 방랑하였으니 뛰어나고 걸출한 사람이었다. 이분이 소포이다. 차남의 휘는 덕준(德俊)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벼슬은 지현(知縣)이었다. 셋째의 휘는 덕윤(德潤)이고 자는 유지(有之) 또는 성지(誠之)이며 벼슬은 전중(殿中)이었다. 모두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8)의 제자가 되어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였다. 금암과 금봉은 그들의 호이다.소포는 시격이 매우 빼어나서 당세에 명성이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시는 단지 고율(古律)·절구(絶句)·근체(近體)·장편 총 50여 수와 부(賦) 2편, 서(書) 3편, 소(疏) 1편뿐이다. 금암과 금봉은 사문(斯文)을 강론하고 연마하여 저술한 글이 마땅히 또한 적지 않을 텐데, 금암은 소(疏) 1편, 서(書) 1편, 자식을 경계하는 글 2편뿐이고, 금봉은 소(疏) 1편, 서(書) 7편, 〈五賢祠揭虔文(오현사게건문)〉 1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9)의 시에 차운한 시 1수뿐이다.대개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형제가 멀리 떨어진 북쪽 지역으로 함께 유배되었고, 이윽고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 위급한 상황에서 삼천리를 떠돌아다녔으니, 6, 7년 동안 병란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평소에 지은 글이 망실되어 이미 모두 사라졌을 터이다. 소포는 만력(萬曆) 경술(庚戌 1610)년에 죽었고, 금암이 죽은 것은 소포보다 6년 전이었으며, 금봉이 가장 뒤에 죽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이다. 그의 시문은 겨우 백 분의 일만 남았으나 백여 년 뒤에라도 수습하였으니, 장차 후세에 완전히 민멸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아! 이는 참으로 감격스러우면서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대체로 고금 사람들의 문집이 세상에 간행되어 많은 것은 수십 권, 작은 것은 한두 권이나 더러는 흩어지고 남은 몇 편의 글귀에 불과하여 유사(遺事) 사이에 덧붙여 전해질 뿐이다. 그 시를 외우고 그 문을 읽어 그 사람을 살피고 그 시대를 논하고자 한다면 수십 권도 넉넉한 것이 아니지만, 또한 두어 편도 부족한 것은 아니다. 만일 세상에서 세 현인의 주옥 같은 책 한 권을 보배로 여긴다면 그 사람의 평생을 상상해 보는 데 또한 충분하니, 어찌 반드시 많은 것만 귀하다고 하겠는가? 한 점의 고기로 큰 솥의 고기 맛을 알 수 있다는 것10)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이 유고를 살펴보니 대체로 소포의 말은 기개가 있어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으며, 금암의 말은 간절하고 진실하면서 차례가 있고, 금봉의 말은 곧고 정확하면서 구차하지 않은데,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삼음은 똑같았으니 어찌 한 기운으로 태어나 한 가정에서 얻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곤재 정개청,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동강 김우옹,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11),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2),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13), 목승선(穆承宣) 등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여러 현인들이 그 사람됨을 덕망있다 여기고, 논변한 것은 의리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아! 기축옥사 때 조정 대신은 논할 것도 없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던14) 선비조차 꾸며낸 죄15)로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재앙의 그물에 걸린 나머지 금봉이 먼저 을미(乙未 1595)년에 선혈을 뿌려16) 수천 언(數千言)의 상소를 올려 죽은 스승17)을 위하여 원통함을 변론하고 아울러 그 당시 억울한 자들을 언급하여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 모함한 상황을 모두 서술하였다. 계속해서 소포의 병신(丙申 1596)년 상소는 하늘의 뜻을 돌리고 인심을 결속시키는 도리를 말하여 구천의 원통함을 풀어주도록 거듭 반복하였고, 이어 분발하여 오랑캐를 막자는 계책을 올렸다. 또 이어서 금암의 기해(己亥 1599)년 상소가 있었으니 말이 더욱 격렬하고 간절하였다. 이는 사제 간의 의리로 마땅히 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시비(是非)의 소재가 세도(世道)와 관계되는 일이니, 귀신에게 질정해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훗날 기축년의 사건에 대해 알고자 하는 자는 이 세 상소를 읽고 반드시 감개(感慨)하여 탄식할 것이다. 아울러 글을 써서 《소포금암금봉삼고합부(嘯浦錦巖錦峰三稿合部)》의 서문으로 삼는다.숭정(崇禎) 정축 후 85년 임인(壬寅 1722)년 4월 초하루 외후손 3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이 삼가 쓰다. 錦城羅氏家塾, 新刊嘯浦遺稿, 附以錦巖錦峰若干稿, 合成一部, 錦巖曾孫上舍斗冬氏實收輯之. 嘯浦玄孫晩運, 錦峰曾孫斗興, 與之同圖所以壽其傳者, 走書小白山下, 屬重元序之. 羅吾自出也, 錦巖吾先妣之王父也, 重元於此, 烏可不爲之感. 且幸直讓以不文而止乎. 粤惟外高祖錦湖公, 以行誼聞, 其長子, 諱德明, 字曰克之, 筮任金吾郞, 旋已之, 放迹湖海, 卓犖傑魁人也. 是爲嘯浦. 第二諱德俊, 字曰大之, 官知縣. 第三諱德潤, 字曰有之, 亦曰誠之, 官殿中. 俱爲困齋鄭氏弟子, 篤學力行, 錦巖錦峰其號也. 嘯浦詩格超逈, 有聲當世, 今其遺什, 只有古律絶句近體長作, 摠五十餘首, 及賦二書三疏一而已. 錦巖錦峰, 講磨斯文, 所著於文字間者, 宜亦不少, 而錦巖疏一書一戒子文二而已, 錦峰疏一書七五賢祠揭虔文一次東岡韻語一而已. 蓋當己丑禍, 兄弟竝投極北絶域, 已又有龍蛇寇亂, 三千里流離顚沛之際, 六七年兵革搶攘之中, 平日文字亡失, 固已盡矣. 嘯浦以萬曆庚戌歿, 錦巖之歿先六年, 錦峰最後歿, 距今百有二年. 其詩文之僅存十一於千百者, 得追拾於百餘年之後, 將不至全泯于來世. 嗚呼! 此誠可感, 亦可幸也. 凡古今人文集行于世, 多者累數十卷, 小者一二卷, 或不過零章瑣篇, 附傳遺事間焉耳矣. 至於頌其詩讀其文, 以觀其人論其世, 則不以累十卷而有餘, 亦不以數篇而不足. 如世所珍三賢珠玉一卷, 其人平生, 亦足想見, 奚必多之爲貴哉. 一臠可以識大鼎之味, 信乎其有是也. 試以斯稿, 槪之嘯浦之言, 倜儻自奇, 錦巖之言, 懇實有倫, 錦峰之言, 貞確不苟, 其本之以孝弟則一也, 庸非共氣而生得乎家庭者爲然歟. 且觀書翰所與若梧里困齋鶴峯東岡久庵漢陰愚伏茶山睦承宣, 諸賢德其人, 而所論卞無非出於義理, 是豈可以等閑視也. 噫嘻! 己丑之獄, 亡論朝紳, 卽林下藏修之士, 竝被羅織而死. 當禍網之餘, 先有錦峰乙未疏瀝血數千言, 爲亡師訟寃, 竝及一時群枉, 備盡奸人乘機陷害狀. 繼而有嘯浦丙申疏, 言回天意結人心之道, 申申於雪寃泉壤, 仍獻勵志禦戎策. 又繼而有錦巖己亥疏, 言益激切. 此非特師生之義, 所宜爲也, 是非所在關係世道, 可以質諸鬼神而無疑. 後之欲知己丑事者, 於此三疏, 其必有感慨而喟然者矣. 竝書之以爲三稿合部序.崇禎丁丑后八十五年壬寅孟夏初吉, 外後屬三世孫八溪鄭重元謹稿. 가숙(家塾) 글방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가(家)에는 숙(塾)을 두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술(術)에는 서(序)를 두고, 국(國)에는 학(學)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黨有庠、術有序、國有學.〕"라고 하였다. 금암(錦巖) 나덕준(羅德峻. 1553~1604)의 호를 말한다. 자는 대지(大之), 호는 금암이다. 금봉(錦峰) 나덕윤(羅德潤, 1557~1621)의 호를 말한다. 자는 유지(有之)·성지(誠之), 호는 금봉이다. 나두동(羅斗冬) 1658~1728. 자는 간이(幹而), 호는 약헌(藥軒)이다. 부친은 중직대부(中直大夫)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나진(羅?)이다. 저서로 《약헌유고(藥軒遺稿)》, 《의예집록(疑禮輯錄)》, 《사예요람(四禮要覽)》, 《동사(東史)》 등이 있다. 소포(嘯浦) 나덕명(羅德明, 1551~1610)의 호를 말한다. 자는 극지(克之), 호는 소포·귀암(龜菴)이다. 나 정중원(鄭重元, 1659~1726)을 말한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선장(善長), 호는 천천옹(喘喘翁)으로, 1678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정희량(鄭希亮)의 아버지이다. 금호공(錦湖公) 나사침(羅士忱, 1525~1596)을 말한다. 자는 중부(仲孚), 호는 금호이다. 155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과 이성 현감(尼城縣監)을 지냈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이며, 나주 출신이다. 예학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김우옹(金宇顒) 1540~160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이고,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한 점의 …… 것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김취문(金就文) 1509~1570.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에 《구암집》이 있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 《우복집》,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朱文酌海)》가 있다. 목대흠(睦大欽) 1575~1638.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湯卿, 호는 다산(茶山)ㆍ죽오(竹塢)이다. 160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 참의ㆍ강릉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다산집》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던 원문의 '장수(藏修)'는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로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에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하였다.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꾸며낸 죄 원문의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선혈을 뿌려 원문의 '역혈(瀝血)'은 상소를 올려 간곡하게 호소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시 〈귀팽성(歸彭城)〉에 "간을 파내어 종이를 만들고, 선혈을 뿌려서 글을 쓰네.[刳肝以爲紙 瀝血以書辭]"라고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죽은 스승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유배 중에 죽은 정개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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