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명장전 이계 홍양호 海東名將傳 【耳溪洪良浩】 정문부(鄭文孚)의 자는 자허(子虛)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선조 무자년(158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속하였다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나갔다. 임진란에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임진강을 건너 임금의 수레가 혹시 북관(北關)에 들어간 것을 예상하고서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약속하였다. 행장은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청정은 북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용맹은 왜적 중에 제일이며 거느린 병사는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으로부터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으로 나아가니 북방을 지키던 군사가 궤멸되었다. 청정은 하루에 수백 리를 다녀 형세가 비바람과 같았는데 지나간 곳은 노략으로 닭과 개는 물론 땅 위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은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는데, 반민(叛民)들이 왜병을 인도하여 그를 붙잡았다. 북청부(北靑府) 사람 김응전(金應田)이 거짓으로 감사의 종[奴]이라고 칭하고 적중에 들어가 밤에 틈을 타서 업고 도망하여 행재소에 돌아왔다. 판관(判官) 유희진(柳希津)은 반민에게 잡혀 항복하였고, 병사(兵使) 이혼(李渾)은 갑산(甲山)으로 달아났으나 반민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갑산 사람들은 또 부사(府使)를 죽이고 왜적에게 항복하였다.왕자 순화군(順和君)이 철원(鐵原)에 들어갔다가 왜적이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남도에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따랐었다. 이에 이르러 두 왕자는 또 남도로부터 군사를 피하여 북도(北道)에 들어갔다. 청정이 함경북도에 들어오자 병사(兵使) 한극함이(韓克諴)은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도 마천령(磨天嶺)에서 패하게 되자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 이전에 두 왕자는 사나운 종놈을 풀어서 민간을 소란스럽게 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회령(會寧) 향리 국경인(鞠景仁), 경성(鏡城)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 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 등이 각각 성을 점거하고 두 왕자 및 배신(陪臣)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맞아들여 항복시킨 뒤에 붙잡아 두었다.청정이 승승장구하며 두만강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성보(城堡)를 다 빼앗았다. 그리고 국 경인을 왜의 관직인 판형(判刑)으로 삼았고 국세필은 예백겸본도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삼았고 말수도 대장(大將)으로 삼아 북관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정문부가 평사(評事)로서 경성(鏡城)에 있다가 난을 만나 탈출하여 산중에 숨어 있었는데,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와 최배천(崔配天)이 정문부를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정문부가 흔연히 그 말을 따랐다. 드디어 정문부를 장수로 추대하고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장사(壯士)가 수백과 현지 수령의 변장(邊將)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북쪽 오랑캐가 기회를 틈타 여러 번 변방을 노략질하니 국세필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배천은 원래 국세필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자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의탁하는 것처럼 하니 국세필의 어미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최생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 하였으나 국세필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틈을 타서 달래기를 "북쪽 오랑캐가 만약 크게 쳐들어오면 진실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 평사는 위엄과 덕망이 있으니 능히 맞아들여 함께 오랑캐를 지키면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국세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곧 격문을 보내어 타일렀다. 국세필이 의심을 하여 군사에게 엄명하고 기다리니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 이르러 국세필을 보고 친히 달래고 타이르니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병사의 부신(訃信)을 바쳤다. 그러자 정문부가 영을 내리기를 "높거나 낮은 백성과 병사들에게 예전에 법을 범한 것은 묻지 말라."라 하고 세필로 하여금 전같이 군사를 맡도록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국세필을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반병(叛兵) 가운데 일찍이 자기를 쏘아 상처를 입힌 자를 발탁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세필은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으며 그 심복으로 하여금 정문부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어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그 무리를 시켜 사졸과 함께 성에 올라 전투를 연습하게 했는데, 밤에 이르러 파하였으며 매일 이렇게 하였다.왜인이 경기병(輕騎兵)으로 문득 와서 성을 두드리거늘 정문부가 국세필을 시켜 왜장을 꾀어 문에 들어오도록 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官) 강문우(姜文祐)에 명령을 내려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게 하고 드디어 주군에 격문을 돌려 반병(叛兵)의 항복을 받았다. 육진(六鎭)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배반한 자들을 석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차례로 투항하였다. 이에 장수와 군사, 호걸들이 서로 다투며 모집에 응하였다. 이에 주변의 성보(城堡)를 다 회복하니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정문부가 회령(會寧)에 격문을 보내 국경인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하도록 타일렀으나, 국경인은 따르지 않고 길주에 주둔한 적과 더불어 경성을 협공하려고 꾀하였다. 한편 회령 사람 오 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 모여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에게 호응할 것을 꾀하였다. 국경인이 염탐하여 알고는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주모자를 나오라고 위협하므로, 오윤적이 몸을 빼어 자수하니 국경인이 그를 체포하였다. 그런데 부(府)의 아전 신세준(申世俊)이 몰래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훔쳐 객사 문 밖에서 부니 반병(叛兵)들은 국경인이 영을 내렸나하고서 일시에 모여드니 숲을 이룬 듯했다.신세준 등이 그들을 통솔하여 그의 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인 다음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켜 나아가 국경인에게 말하기를 "성 안의 병사가 이미 다 나한테 귀속되었다. 네가 오윤적을 내놓으면 마땅히 군사를 파하겠다."라 하니, 국경인이 겁을 먹고 이를 따랐는데, 드디어 국경인의 참수하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해주었다. 오윤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문부에게 간 뒤에 명천 사람들이 자제를 단결시켜 말수를 치고서 정문부에게 응하기로 했는데 말수에게 패하였다. 정문부가 몰래 오촌 권관(吾村權官)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 강문우를 보냈다. 이들이 60여 기병을 거느리고 주야로 행군하다가 갑자기 명천(明川)에 쳐들어가니 말수가 겁을 내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지만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죽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성과 읍은 다 회복하였으나 오직 길주만 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정문부가 이에 군민(軍民)을 편안하게 모여 살게 하니, 모집된 병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여러 병사들이 다 적을 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여러 장수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장차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이 아직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드디어 앉은 자리에서 국세필을 체포하고 아울러 그 무리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리면서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서서 반란한 놈들은 이 무리들이므로 나머지는 문책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정문부가 본래 계획한 것이었다. 군대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사기가 십 배나 되었는데, 곧 장계를 갖추어 최배천(崔配天)을 행재소로 보내어 아뢰니 주상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정문부에게 옷과 신, 환약을 내리었다.부사(府使) 정현룡(鄭見龍)이 경성에 머물러 틈을 기다리고자 하므로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함이다. 이제 다만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하여 왜적을 격파하지 않으니 반도들을 본받으려 함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봅시다."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을 남문 밖에 모이게 하여 이 두 사람의 다툰 바를 말하고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은가 결정하라 하니, 여러 사람이 다 정문부가 옳다고 하였다.이 당시 왜장 직정(直正), 도문(道文), 도관(都關), 여문(汝文) 등이 길주를 점거하여 주둔하고 또 영동(嶺東)에다가 군사를 배치하고 책(柵)을 설치하여 남북도의 길을 통하게 하고서 왕래하며 불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명천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종사관(從事官)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 성 밖 세 곳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엿보게 하였다.병진일 먼동이 틀 무렵 왜적이 병사 6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 가파리(加坡里)를 불 지르고 노략질하고서 노략질 한 것들을 핍박하며 돌아오는데, 원충서가 2백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왜적의 선도(先導)를 격파하니 왜적이 놀라 달아났다. 이 때에 적의 대진(大陣)이 성 안에서 계속 지원하니 원충서는 산이 험한 곳으로 물러갔다. 한인제가 구 황, 강문우 등 3백여 기병으로 달려와서 원충서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직정(直正), 도관(都關), 여문(汝文)이 선봉의 정예 군사 4백 명으로 앞장서 올라가니 관군이 돌기병(突騎兵)으로 출몰하면서 격파하였다. 전투가 날이 저물 때쯤 되자 왜적의 앞뒤 진들이 다 궤멸되었다. 유경천이 군사를 보내어 그 귀로를 차단하고 관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직정, 도관, 여문 등 다섯 장수의 목을 베었고 8백 여 수급(首級)과 군 장비 기계 1천여 점을 노획하였고, 노략당한 것을 다 빼앗아 돌아왔다. 구황과 강문우는 북방의 장수 가운데 가장 날래고 용맹한 자들이다.정문부가 싸움에서 이긴 여세를 타고 길주를 진격하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영동(嶺東)의 적이 대규모로 몰려오니 정문부는 쌍개포(雙介浦)에서 맞아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군사를 이동하여 영동책(嶺東柵)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길주성 아래에 줄지어 진을 치고서 왜놈의 약탈을 막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어 지구전을 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신(宰臣)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들어오다가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써 중도에 뒤쳐져 머물렀다가 방향을 틀어 갑산(甲山)으로 들어와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윤탁연을 본도 감사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윤탁연은 정문부가 왜적을 물리친 공에 대해 듣고 시기하여 사실과 반대로 행조에 알렸으며, 또한 정문부의 병권을 빼앗고서 경성 부사 정현룡을 대신 북병장(北兵將)을 삼으니 군중(軍中)이 울분을 토하며 흩어져 떠나가 버렸다. 정문부가 드디어 병권을 놓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면서 군민(軍民)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모여 살게 하였다. 북쪽 오랑캐들이 여러 번 변방에 들어와 약탈하므로 정문부가 매복했다가 그들을 격파하매 북쪽 오랑캐가 모두 귀순하였으니, 또 납지(蠟紙)로 그런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유생 이회록(李希祿)과 김응복(金應福)이 윤탁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므로 윤탁연이 행조에 치계하고서 무과를 열어 백여 명을 취하였다. 무과 출신 유응수(柳應秀), 이유일(李惟一), 박중립(朴中立), 정해택(鄭海澤), 생원 한경상(韓敬商) 등이 군사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윤탁연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히 적을 토벌하였으니 적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갑산 부사 성윤문(成允文)으로 대장을 삼고 묘파(廟坡) 권관 백응상(白應祥)을 함흥 판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獨山) 아래로 나아갔는데, 왜적이 밤에 관군을 습격하니 성윤문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몸을 빼내어 달아나니 일군(一軍)이 다 함락되었다.이유일, 유응수, 박중립, 정해택 등이 별도로 진을 치고 적을 치는데 간혹 돌격하여 왜놈의 머리를 베어왔다. 한인제(韓仁濟), 유응수, 이유일은 다 함흥 사람이다. 전공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들을 지목하여 함흥 삼걸이라 하였다. 한인제는 공으로써 북우후(北虞侯)가 되었다. 백응상은 연안(延安) 사람으로, 용맹함을 지녀 잘 싸웠는데 마침내 진에서 죽었다. 당시 북변을 수토하는 신하들은 물러서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남북의 사이에 끼어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이 없으므로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쳤으니, 당시의 의론이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자주 대장을 바꾸어 전투의 기회 그르친 것이 많았으니, 그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정 문부를 기용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정문부가 대장으로 직임에 나아가 사졸을 실컷 먹이고서 구황으로 하여금 2백 명의 기병을 선발하게 하여 단천 군수 강찬을 돕게 하니 그가 왜적 2백 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으며, 원충서가 또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죽였다.청정(淸正)이 행장의 패전한 통보를 듣고 경기(京畿)에 들어와서 장차 철군하여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길주는 정문부에게 제압되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드디어 2만의 군졸로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영동(嶺東)의 왜적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는데, 정문부가 이를 염탐하여 알아내고 군사 3천여 명을 먼저 임명(臨溟)에 웅거하여 매복시켜 기다렸다. 계미일 날이 밝아올 때 왜적의 군대는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서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움직여 그 뒤를 차단하고 좌우로 포위하여 날쌘 기병을 풀어서 내달리며 활을 쏘니 살상(殺傷)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피가 흘러 들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붕수와 이희당(李希唐)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청정이 혈전을 벌이면서 퇴로를 열려고 관군과 더불어 60여 리에 걸쳐 접전을 벌였다. 이때 길이 막혀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두절되었는데, 정문부 등이 적의 형세가 다시 거세진 것을 보고 그들의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걱정하여 명천(明川)으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 날 밤 청정이 시체를 쌓아 불 지르고, 몰래 군사를 거두어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밥 지을 겨를도 없이 달아나는데, 남쪽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퇴로를 끊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다를 따라 달아났는데, 이유일이 병사를 거느려 그들을 추격하였다. 청정은 길성(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모든 주둔군을 다 철수시켜 함께 한양에 모였다.정 문부가 장계를 올려 장수와 병졸에게 상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탁연이 중간에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유일은 군공(軍功)으로써 볼하 첨사(乶下僉使)가 되었고 유응수는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정문부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어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북로(北路)의 장사(壯士)들은 모두 의병을 풀고 떠났으며, 난이 평정됨에 정문부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정문부는 한직에서 한가하게 지냈다.인조 때에 이르러 북방의 경계46)가 발생하니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명하였는데 정문부를 원수로 천거하였다. 정문부가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문부가 지은 시를 습득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북방 사람들이 그것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북평사가 되어 북방 사람들의 칭송을 채집하여 조정에 알리게 되니, 공론이 비로소 돌아 그의 원통함을 씻고 그의 공을 포상하였으며, 북방 사람들이 경성(鏡城)에 나아가 사원을 세우고 제사지냈는데, 사액하기를 '창렬사(彰烈祠)'라 하였다. 鄭文孚, 字子虛, 海州人也。少好讀書, 善屬文。中宣廟戊子文科, 隸槐院, 出爲北道兵馬評事。壬辰之亂, 行長與淸正, 渡臨津, 慮車駕或入北關, 約分路, 行長向西, 淸正向北, 勇冠諸倭, 所領兵尤精悍。從谷山踰老里峴, 出鐵嶺, 北守兵潰。淸正日行數百里, 勢如風雨, 所過赤地, 鷄犬不遺。監司柳永立避入山峽, 叛民引賊兵襲執之。北靑府人金應田, 詐稱監司奴, 入賊中, 乘夜竊負, 逃歸行在。判官柳希津, 爲叛民所執降, 兵使李渾, 奔入甲山, 爲叛民所殺, 甲山人, 又斬府使而降賊。王子順和君入鐵原, 聞賊入江原道, 遂踰鐵嶺, 入咸鏡南道。隨臨海君。至是兩王子, 又自南道避兵入北道。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 戰敗被擒, 南兵使李瑛, 亦敗於磨天嶺, 州郡皆陷。先是兩王子, 縱豪奴擾民間, 大失民心, 會寧鄕吏鞠景仁·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等, 各據城, 迎降兩王子及陪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被執。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判刑, 鞠世弼爲禮伯兼本道兵使, 末秀爲大將, 分統北關。是時, 文孚以評事, 在鏡城, 遭亂脫身, 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 見文孚請起兵討賊, 文孚欣然從之。遂推文孚爲將, 團集土兵, 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 皆附之。北虜乘機, 屢掠邊境, 世弼憂懼, 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 弼母戒曰: "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從。配天遂乘間說曰: "北虜若大至, 誠難與敵。鄭評事有威望, 苟能延入共守, 虜不足慮也。"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浮, 卽馳檄諭之, 世弼持疑, 嚴兵以待。文浮率兵至城下, 見世弼親自說諭, 世弼始迎入, 納兵使符信。文浮下令曰: "大小民兵, 勿問舊犯。" 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浮不許, 又擢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猶未放心, 使其腹心, 夾侍文浮左右, 伺察動靜。文浮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如之。倭人以輕兵奄至叩城, 文浮命世弼誘倭將入門擒之, 令安原權官姜文祐, 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兵, 六鎭聞文浮已釋反側, 次第送款。將士豪傑, 爭先應募, 於是悉復緣邊城堡, 北道人心稍定。文浮移檄會寧, 諭敬仁來降, 敬仁不從, 與吉州屯賊謀夾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鄕校謀伐敬仁, 以應文浮, 敬仁諜知, 急圍鄕校, 脅出首唱, 允迪挺身自首, 敬仁囚之。府吏申世俊潛偸敬仁鐃角, 吹於客舍門外, 叛兵疑敬仁出令, 齊會如林。世俊等仍領之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 謂敬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出吳允迪, 當罷兵。" 敬仁駭慄從之。遂斬敬仁, 傳首鏡城, 允迪領兵繼赴 後明川人團結子弟攻末守欲應文浮, 爲末守所敗, 文浮潛遣吾村權官具滉·安原權官姜文祐,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末守惶怯,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城邑盡復, 惟吉州, 爲倭所據。文孚乃安集軍民, 募兵至三千餘人, 衆咸欲擊賊自效。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受諸將齊進曰: "今將討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坐席, 執世弼, 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唱, 止此輩, 餘無問。" 此文孚本謀也。軍聲大振, 士氣十倍, 卽具啓遣崔配天, 聞行在, 上嘉之, 賜文孚衣履丸藥。府使鄭見龍欲住鏡城, 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 孰可孰不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 以通南北路, 往來焚劫。文孚率所部, 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覆於吉州城外, 以覘之。丙辰昧爽,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驅所掠而還, 忠恕率二百騎, 先馳邀之, 擊賊先導, 賊驚北。會, 賊大陣, 自城中繼援,忠恕退保山險。仁濟以具滉文佑等三百餘騎, 馳至與忠恕連兵大戰, 直正·都關·汝文, 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 擎天遣兵截其歸路, 官軍兩面夾擊大破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首八百, 軍裝器械, 千餘計, 盡奪所掠而歸。具滉·姜文佑, 北將中最驍勇者也。文孚乘勝, 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大至, 文孚邀于雙介浦敗之, 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剽掠, 阻其粮道, 以爲支久之計。先是, 宰臣尹卓然, 陪王子入北, 以詭計落留中道, 轉入甲山, 至別害堡, 行朝以卓然爲本道監司。至是, 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功以聞, 又奪文孚兵懽, 以鏡城府使鄭見龍, 代爲北兵將,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拊集軍民。蕃胡累寇邊, 文孚設伏破之, 胡蕃皆歸順, 又以蠟紙馳啓。儒生李希祿·金應福請卓然起義兵, 馳啓行朝, 設武科, 取百餘人, 武出身柳應秀·李惟一·朴中立·鄭海澤·生員韓敬商, 募兵得三千餘人, 屢戰皆捷, 卓然曰: "此輩尙能討賊, 賊不足憂也。" 以甲山府使成允文爲大將, 廟坡權管白應祥爲咸興判官, 統諸軍進于獨山下, 賊夜襲官軍, 允文不知所爲, 脫身逃走, 一軍盡陷。惟一·應秀·中立·海澤等, 別屯勦賊, 或突擊斬馘。韓仁濟·柳應秀·李惟一, 皆咸興人也。以戰功知名, 目爲咸興三傑, 仁濟以功爲北虞侯, 應祥, 延安人也, 勇果善戰, 竟殉於陣。當時北邊守土之臣, 莫不以退避爲得計, 而端川郡守姜燦, 介於南北之間, 四顧無援, 而能募兵討賊, 時論嘉之。尹卓然奪文孚兵, 數易將帥, 多誤戰機, 懼其得罪, 復起文孚爲將。將就職犒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 元忠恕又擊殺賊將於吉州城下。淸正聞行長敗報, 入京畿將謀撤還, 吉州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 文孚諜知之, 悉兵三千餘人, 先據臨溟, 設伏以待。癸未黎明, 賊兵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兵, 截其尾, 繞左右, 縱輕騎馳射, 殺傷甚衆, 流血被野。李鵬壽·李希唐,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戰鬪六十餘里。時, 道梗, 兩西消息隔絶, 文孚等見賊勢更盛, 疑其再逞, 退屯明川。是夜, 淸正積尸燒之, 潛撤兵, 乘夜跳城, 不暇炊爨而走, 恐南兵勦絶, 不敢踰咸關嶺, 循海走。李惟一勒兵追之, 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撤江原道諸屯, 俱聚于京城。文孚又馳啓, 請賞將士, 而卓然從中沮抑, 李惟一, 以軍功爲乶下僉使, 應秀得拜三水郡守, 文孚陞通政拜吉州牧使。北路壯士, 無不解體, 亂平, 無人言文孚事者。優遊散地, 至仁祖朝有北警, 命擧將才, 有以文孚應元帥薦, 文孚聞之歎曰: "吾其死矣。" 未幾, 有摭文孚詩句, 成案逮獄栲死, 北人無不冤之。後澤堂李植爲北評事, 採北人之頌, 聞于朝, 公議始行, 雪其冤而褒其功, 北人就鏡城, 建祠祭文, 賜額曰彰烈祠。 북방의 경계 이괄(李适)의 난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