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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의 객관에 지달원211)과 머무르며 吉州客館 留池達源 관문에 정오되자 한낮의 닭이 우니꼬끼오 소리 한밤중 닭소리와는 사뭇 다르네진나라의 법이 주법보다 엄하였다면응당 관문 열고 맹상군 내보내지 않았으리212) 關門日午午鷄鳴咿喔殊非夜半聲秦法若嚴於酒法不應開出孟嘗行 지달원(池達源) 1566~1638. 함경북도 경성(鏡城) 사람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사진(士進)이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활약했으며, 이때의 공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맹상군……않았으리 맹상군(孟嘗君)은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이다.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나올 때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하였으나 한밤중이어서 관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마침 식객(食客) 한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어 성문을 열게 한 덕분에 무사히 탈출했다. 《史記 孟嘗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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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에서 〈향사당에서 활 솜씨를 겨루다〉 시에 차운하다218) 5수 穩城射堂挑戰韻【五首】 강한 힘 지닌 그대는 함곡관 가진 듯하고승리 취한 나는 북산을 차지한 듯하네219)다만 날 저물면 한 번 겨루길 기다리니황금을 걸더라도 또한 어찌 아까우랴한 번 가서가 동관을 잃은 뒤로220)오랑캐 말을 오산에 세우도록 내버려 두었네어여뻐라, 서북쪽 중흥의 땅은하늘이 우리 동방 성군을 위해 아껴둔 곳이로다앞에 늘어선 용사 장비와 관우 같으니한량 없는 술과 안주 산해진미로다붉은 색 보고 푸르다 하는 지경221)에 이르렀으니구기자와 국화로 가난을 읊지 말라222)옥문관에 들어오지 못한 반초 같은 신세요223)산에서 제사 지낸 곽거병 같은 공 없네224)남아로 나라에 충성 바치는 것 평소 뜻이니일편단심 아끼지 않고 바치리한양의 형승 변경보다 나으니억 길 높은 성에 만길 산이로다그 당시 조정에서 좋은 계책 없었으니경예225)에게 빌려주고 조금도 아끼지 않았네 負強君似擁函關取勝吾如據北山直待晩來爭一戰黃金爲注亦何慳一自哥舒失潼關從敎虜馬立吳山可憐西北重興地天爲吾東聖主慳猛士羅前張與關酒肴無量海兼山到得看朱成碧處休將杞菊賦寒慳身似班超未入關功微去病可封山男兒報國平生志輸了一丹心不慳漢都形勝勝秦關億丈高城萬仞山當時廊廟無長策借與鯨鯢不少慳 온성……차운하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농포집》 후쇄본에는 제목이 〈덕재의 '향사당에서 활솜씨를 겨루다' 시에 차운하다[次德哉射堂挑戰韻]〉로 되어 있고, 5수 중 제1수와 제2수만 실려 있다. 북산을 차지한 듯하네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가 진(秦)나라 대치하고 있을 때, 군사(軍士) 허력(許歷)이 조사에게 "먼저 북산(北山)에 올라가서 점거하는 자는 이기고 뒤에 오는 자는 패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조사가 그 말을 따라 먼저 북산을 차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한……뒤로 가서는 돌궐 출신의 장군 가서한(哥舒翰, ?~757)이고, 동관(潼關)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다. 안녹산(安祿山)이 일어났을 때 병마부원수 가서한이 동관을 지키고 있다가 안녹산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적에게 항복하고 적중에서 죽었다. 붉은……지경 안화(眼花)로 인해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술에 취해 눈이 어른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구기자와……말라 구기자와 국화는 은자의 소박한 음식을 일컫는 말로, 송사나 소식(蘇軾)이 당나라 육귀몽(陸龜蒙)의 〈기국부(杞菊賦)〉를 모방하여 〈후기국부(後杞菊賦)〉를 지었다. 옥문관에……신세요 정문부가 외직에 있다는 말이다. 반초(班超)는 후한의 장군이고, 옥문관(玉門關)은 서역(西域)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인데, 반초가 서역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뒤 정원후에 봉해져 19년 동안 서역에 있었는데, 훗날 고향 생각이 나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신은 주천군(酒泉郡)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고 다만 살아서 옥문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班超列傳》 산에서……없네 변경을 지키는 관리로서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곽거병(霍去病)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으로, 수십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대군(代郡)으로 나가 흉노를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운 뒤 낭거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한서》 〈곽거병전(霍去病傳)〉에 "낭거서산에 돌라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 봉선(封禪)을 했다.[封狼居胥山, 禪於姑衍.]"라고 하였다. 경예 경(鯨)과 예(鯢)는 둘 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고래인데, 악인의 괴수나 약소국을 병탄하려는 무도한 나라에 비유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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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요동성에서 감회가 일어 追記 遼城有感 한 조각 외로운 성에 석양이 비추니지금 남겨진 성첩에 나는 까마귀만 보이네만약 선학을 다시 찾아오게 한다면사람이 변했을 뿐 아니라 성도 또한 변했네263)-성첩(城堞)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一片孤城當落暉只今殘堞見烏飛若令仙鶴重來訪不獨人非城亦非 선학이……변했네 정령위의 고사를 끌어와 쓴 것이다. 한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인 정 영위(丁令威)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하여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옛사람 아니구나, 어찌 신선술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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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관의 시에 차운하다 이때 연산관(連山關)의 경보를 들었다. 次書狀韻 時聞連山警報。 밤에 느릅나무 잎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들렸으니새벽에 일어나 칼집 속 칼을 새로 가네연산의 가을풀 난 길 잘 아니오랑캐 이제 막 활 당기고 말도 이제 날뛰는구나 夜聞楡葉墜蕭蕭曉起新磨匣裏刀慣識連山秋草路虜弦初勁馬初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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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주하 八洲河 가을 강은 맑고 얕으니 참으로 좋아할 만한데게다가 그물에 걸린 은빛 물고기도 신선하네문득 생각건대, 한강의 낚시질하는 벗들몇 사람이나 달밤에 배에 올랐을거나 秋河淸淺正堪憐更有銀鱗入網鮮却憶漢濱釣魚侶幾人乘月上江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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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촌 흠 의 원운296)을 부기하다 附申象村 欽 元韻 세상사 분분하여 몹시 쉬지 못했는데중양절에 입직하니 더욱 시름겨워라사람에게 풍계동을 다시 생각나게 하니단풍잎 국화로 가을빛 가득할테지 世事紛紛苦未休重陽滯直更堪愁令人却憶楓溪洞赤葉黃花滿意秋 상촌 신흠의 원운 《상촌고(象村稿)》 권19에 〈중양절에 입직하면서 김상헌에게 부치다[重陽滯直寄仙源]〉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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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승려의 시축에 차운하다 2수 次金剛僧軸韻【二首】 꿈속에서 금강산 몇 번째 봉우리 갔는가깨고 보니 진경이 별안간 허상이 되었네세상에 그 무엇이 실체가 있다 하랴묘하게 깨닫는 것은 오직 선가와 취옹이라흰 구름 일 많아 기이한 봉우리 만드니본디 비어있는 선심에는 미치지 못하네구하는 바 없다면서 시구 다급히 구하니나는 농포이지 어찌 시 짓는 늙은이랴 夢到金剛第幾峰覺來眞境忽成空世間何物能爲有妙悟惟禪又醉翁白雲多事作奇峰不及禪心本自空可是無求求句急我爲農圃豈詩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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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시축에 짓다 題僧軸 우리의 유도(儒道)는 참으로 큰 길과 같으니또한 황로학이 무엇이며 신선이 무엇인가세간에 작은 길 많은 것 안타까우니다시 산림에서 그릇되게 선학을 배우는구나 吾道眞如大路然亦何黃老亦何仙世間若恨多磎逕更向山林枉學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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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로 사람을 보내며 送人關西 관서까지 천 리 먼 길 아득하니시든 풀 쓸쓸한 구름 시야 가득 가을이라그대 이별한 뒤에 자주 돌아볼 줄 알겠으니밝은 달밤에 홀로 어느 누각에 오르려나 關西千里路悠悠衰草寒雲滿目秋知君別後頻回首明月獨登何處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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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응제 迎祥應製 새벽 대궐에 자욱하게 아침 이내 깔려 있는데인풍이 화창하여 옷깃에 퍼지네태평성대 문명의 교화 알고자 하면태사의 신년 점괘에 규성에 모일 조짐362) 있다네 曉闕葱葱曉靄迷仁風條暢播襟黎欲知昭代文明化太史新年占聚奎 규성에 모일 조짐 북송(北宋) 5년에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성이 규성(奎星)에 모이는[五星聚奎] 길조가 있었다. 오성이 문창성(文昌星)인 규성(奎星)에 모이면 문운(文運)이 크게 번창한다고 한다. 《宋史 卷1 太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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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원일의 아침 조회〉 시에 차운하다 次稼亭元日早朝韻 임금께서 구중궁궐에 팔짱 끼고 계시니38)백관이 함께 칼과 패옥 차고 조회에 나왔네화려한 의장 그림자 섬돌 위아래로 옮겨가고상서로운 구름 빛이 전각 동서에 반짝이네봄은 버들빛이 맑은 경치에 알맞도록 재촉하고향기는 매화 흔들어 어둑한 바람 속에 풍겨오누나참으로 궁전에 즐거운 일 많으니임금께서 하늘과 나란히 만수무강 하시리 玉旒深拱九重宮列辟趨朝釰佩同綵仗影移階上下祥雲光閃殿西東春催柳色宜晴景香動梅花裊暗風正是金宮多樂事齊天聖壽保無窮 구중궁궐……계시니 성군(聖君)이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 〈무성(武成)〉에 "의상을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垂拱而天下治.]"라고 하였으며,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도 "황제와 요순은 의상을 드리우고 있으매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건괘, 곤괘에서 취하였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 蓋取諸乾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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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역의 제영시에 차운하다 次磨谷驛題咏韻 관산을 두루 다님에 만사가 뜬구름과 같으니천리의 풍광이 상세한 논의에 들어오네꽃은 눈물 흔적을 띠고 촉백을 슬퍼하고134)풀은 이별의 한 더해져 왕손을 원망하네135)하늘 높이 솟은 고목 벼랑길 따라 있고강 저편 외로운 연기는 강기슭 곁 마을이라고향을 돌아보아도 돌아가지 못하니남쪽으로 가는 건 오직 꿈속의 넋뿐이로구나 關山踏盡萬事雲千里風烟入細論花帶啼痕傷蜀魄草添離恨怨王孫參天古木緣崖路隔水孤烟傍岸村回望故園歸不得南飛惟有五更魂 꽃은……슬퍼하고 두견화 고사를 차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촉백(蜀魄)은 두견새의 별칭으로, 촉나라 망제(望帝)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피를 토하면서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몹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견새가 토한 피가 묻어 붉게 된 꽃을 두견화라고 한다. 《華陽國志 卷3 蜀志》 풀은……원망하네 고향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형용한 것이다.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이 떠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봄풀은 자라서 무성하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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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山海關 뛰어난 지형 예로부터 가장 명성 독차지했으니요동과 연경의 옛 경계 여기서 서로 부딪쳤지하늘은 삼천 리 발해에 닿아 있고땅은 일만 겹 음산에 접해 있네태평성대엔 진시황처럼 원망 쌓을 것 없고204)뛰어난 공업은 도리어 한 무제 등봉을 비루하게 여기네205)관문 방비할 자 지금 누구일꼬듣건대 수만 군대가 소범의 흉중에 있었다지206) 形勝從來最擅雄遼燕舊界此交衝天連渤海三千里地接陰山一萬重聖代不勞秦築怨豐功還陋漢登封關門鎖鑰今誰是見說兵藏小范胸 태평성대엔……없고 진 시황(秦始皇)처럼 굳이 만리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진 시황이 만리장성을 쌓느라 백성들을 고된 부역에 동원하자 이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뛰어난……여기네 등봉(登封)은 황제가 산에 올라가 봉선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한 무제(漢武帝)가 봉선(封禪) 많이 행한 것을 비루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泰山)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그밖에도 사방 여러 곳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했다. 《漢書 卷6 武帝紀》 수만……있었다지 소범(小范)은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을 일컫는다. 범중엄이 지연주(知延州)에 제수되어 서하(西夏)를 방비할 계책을 갖추자, 서하 사람들이 "연주에 뜻을 두지 말라. 지금 소범노자(小范老子)의 가슴속에는 수만의 군대가 있으니[胸中自有數萬甲兵], 대범노자(大范老子) 범옹(范雍)처럼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경계했다고 한다. 《宋史 范仲淹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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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루. 서장관의 시에 차운하다 觀海樓 次書狀韻 만리장성 앞 백 척 높이 누대객이 올라 바라보니 아득하여 시름을 더하는구나요동과 연경이 할거하니 산하는 그대로 있고진나라 한나라가 경영했으니 세월 아득하여라넓은 바다 저 먼 끝에 오직 태양 떠오르고푸른 하늘 나직한 곳에 더이상 모래섬 없네취기 올라 갑자기 일어서니 추사에 슬퍼지고서풍에 고개 돌리니 흘러가는 강 보이네 萬里城頭百尺樓客來登眺逈添愁遼燕割據山河在秦漢經營歲月悠滄海窮邊惟日出碧天低處更無洲酒酣忽起悲秋思回首西風見水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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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원에 대한 만사 林德源輓 당당하고 장대한 평생의 뜻구구한 책상물림이 아니어라고기 먹을 호랑이 머리270)인줄 일찍이 알았는데원숭이 팔뚝으로 제후에 봉해지지 못할 줄271) 뉘 알았으리늙어 외려 죽기 각오하니272) 장군은 건장하였고청렴함은 현어273)에 비교되니 태수는 뛰어났어라남긴 한은 방촌의 인끈 버리지 못한 것이니꿈속에서 금산으로 몇 번이나 돌아갔던가 昂昂落落平生志不是區區翰墨流早識虎頭當食肉誰知猿臂未封侯老猶裹革將軍健淸比懸魚太守優遺恨未抛方寸印幾回歸夢錦山秋 고기……머리 후한(後漢) 반초(班超)가 집이 가난해서 관청의 문서를 베껴 쓰며 모친을 봉양하던 중에,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라서 날아다니며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곧 만리후가 될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분발한 결과, 서역(西域)에 나아가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원숭이……줄 원비는 원숭이 처럼 팔이 길어서 무릎 아래로 내려온다는 뜻으로, 활을 잘 쏘는 위엄 있는 무부(武夫)를 지칭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이광(李廣)은 '원비장군(猿臂將軍)'으로 불렸는데 북평 태수(北平太守) 등 여러 변방의 태수를 지냈고, 특히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와 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모두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그만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했으므로,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는 '이광미봉(李廣未封)'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죽기 각오하니 원문의 '과혁(裹革)'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와 묻혀야 하니,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소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현어 생선을 걸어 놓는다는 뜻으로, 관리의 청렴결백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양속(羊續)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요속(僚屬)이 생선을 바치자, 이 생선을 뜰에 걸어 놓아 다시는 바치지 말라는 뜻을 보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31 羊續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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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척에 대한 애사 申滌哀詞 천상에 누대가 완성되자 적선이 돌아가니279)시혼은 지금 옥황상제의 앞에 있어라양주의 학280)이 떠나자 구름은 부질없이 서늘하고오동나무 난새 외로워지자281) 달은 홀로 둥글구나안개 속에서 몇 해나 범의 가죽을 윤택하게 하였는가282)갑 속 세 척의 용천검은 울어대누나283)영여에 멍에를 매던 날 내 장차 보내려니젊어서 종유했던 이들 가련하게 여기는 세상을 부끄럽게 여기네 天上樓成返謫仙詩魂今在玉皇前楊州鶴去雲空冷梧樹鸞孤月獨圓霧裏幾年鞱豹炳匣中三尺吼龍泉靈輿駕日吾將送少小從遊辱世憐 천상의……돌아가니 진(晉)나라 때 소소(蘇韶)가 죽은 뒤에 넋이 돌아와 그의 아우에게 "저승에 갔더니 공자의 제자 안회와 복상(卜商)이 지금 지하 세계의 조정에서 수문랑을 맡고 있더라."한 고사와 당(唐)나라 이하(李賀)가 27세로 병들어 죽으려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옥황상제가 지금 그대를 불러와 새로 지은 백옥루(白玉樓)의 기문을 짓게 하라 하였소." 하고서 천상으로 데리고 갔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흔히 문인 재사(才士)가 일찍 죽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뜻으로 쓰인다. 《太平廣記 卷319 鬼四 蘇韶》 《李義山文集箋註 卷10 李賀小傳》 양주의 학 인간이 바라는 여러 가지 것을 신척이 다 지닌 것을 말한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소원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경치 좋은 양주의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자, 이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많은 돈을 허리에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 고을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淵鑑類函 鳥部三 鶴》 오동나무 난새 외로워지자 신척을 사별한 뒤 부인이 홀로 슬퍼하며 지냈다는 말이다. 옛날에 계빈왕(罽賓王)이 난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난새가 우는 소리를 매우 듣고 싶었으나 울게 할 방도가 없었다. 금으로 된 울타리를 쳐주고 진귀한 먹이를 주어도 시름시름 앓기만 하고 삼 년 동안을 울지를 않았다. 그러자 계빈왕의 부인이 말하기를 "새는 자기 무리를 본 뒤에 운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거울을 걸어서 비치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에 따라 거울을 걸어 주었더니, 난새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하늘에 사무치도록 슬피 울다가 숨이 끊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에 이를 '난경(鸞鏡)' 또는 '고란조경(孤鸞照鏡)'이라 하여 금슬 좋던 부부가 배우자를 사별(死別)한 뒤 쓸쓸하게 지내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卷916 鸞鳥詩序》 안개……하였는가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에 도답자가 도(陶) 지역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는데, 명성은 들리지 않고 집안의 재산만 세 배로 늘었다. 그의 아내가 간하기를 "남산에 검은 표범이 사는데,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면 칠일 동안 먹이를 먹으러 내려오지 않으니, 그것은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표범의 무늬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개와 돼지는 음식을 고르지 않고 먹어서 그 몸을 살찌우지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갑……울어대었네 용천검이 주인을 잃고 우는 것으로 신척의 죽음을 비유하였다. 진(晉)나라 때 장화(張華)가 일찍이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감도는 것을 보고 예장(豫章)의 점성가(占星家) 뇌환(雷煥)에게 물으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다. 이에 풍성(豐城)의 감옥 터에서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보검인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을 발굴했다고 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2 滕王閣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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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의 계축에 제하다 題寧邊契軸 관서는 멀리 오랑캐 땅과 이웃하고 있으니장성은 예로부터 사람에게 달렸어라장군은 절로 흉중에 철갑이 있고막객은 항상 좌상의 봄이 되누나한가한 날 계산에서 두루 유상하나니훗날 그 모습 그림으로 볼 수 있으리강주의 늙은 수령 어찌 그리 늦게 왔는고노둔하여 후배들에게 낄 수가 없구나 西土遙將虜境鄰長城從古在於人將軍自有胸中甲幕客常爲座上春暇日溪山遊賞遍他年面目畵圖新江洲老守來何暮駑劣無由仄後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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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받고119) 느낌을 읊다 2수 증손 진사 집 延諡感吟【二首 曾孫 進士楫】 은혜롭게 연이어 내린 글 바삐 봉함 열어보니증조부께 시호 내려질 거라 알려 왔네다투어 피는 뜰의 꽃도 기쁜 마음 알고지저귀는 산새도 즐거운 심정 아네오늘 밤 잔약한 자손은 손뼉 치며 기뻐하니어느 때 영광스런 시호 공경히 맞이하려나이 늙은이의 짧은 여생 스스로 생각해보니소년들아 관직의 성취 기대한다 하지 말라일찍이 임진년과 계사년 변란 당한 선조홀로 무한한 북방의 공적 거두었네당시의 풍렬 아직까지 관북에 남아 있고여사로 지은 문장 해동 밝게 비추네선왕의 관작 추증 영광 이미 지극한데오늘 내리신 시호 은총 새롭고 성대하네임금의 은혜 갚고자 해도 나는 노쇠했으니아이들에게 각각 충성 바치라고 권할 뿐이네 惠連書倒坼緘忙報道曾公已易名爭笑庭花知喜氣解歌山鳥識歡情孱孫此夕惟忻忭榮號何時得祗迎自念老夫餘日短少年休說待官成先祖曾丁壬癸中獨收無限朔方功當時風烈留關北餘事文章照海東贈爵先朝榮已極易名今日寵新隆君恩欲報吾衰矣只勉兒曹各效忠 시호를 받고 계사년(1713, 숙종 39)에 '충의(忠毅)'라는 시호의 비준을 받았다. 《農圃集 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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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에서 경차관에게 주다 江界贈敬差官 근래 술에 젖어 해가 늦도록 잠을 자는데일어나 봄 경치 찾았으니 분수 넘어 드문 일이라네밤비는 방초에 흔적을 남기고저물녘 바람은 낙화를 하늘거리며 떨어지게 하누나경차관은 웃으며 말하니 따뜻한 옥과 같고곱게 단장한 기녀는 걸음걸음 연꽃 같아라다시 백 잔 술 들어 한 번 취하니내가 노강309)가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겠구나 近來中酒日高眠起訪韶華分外鮮夜雨餘痕芳草地晩風新態落花天繡衣笑語溫溫玉粉面梳粧步步蓮更擧百杯成一醉不知身在魯江邊 노강 강계에 있는 독노강(禿魯江)을 가리킨다. 봄철의 유흥을 즐기니 변방에 와 있는 줄 알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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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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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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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명장전 이계 홍양호 海東名將傳 【耳溪洪良浩】 정문부(鄭文孚)의 자는 자허(子虛)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선조 무자년(158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속하였다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나갔다. 임진란에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임진강을 건너 임금의 수레가 혹시 북관(北關)에 들어간 것을 예상하고서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약속하였다. 행장은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청정은 북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용맹은 왜적 중에 제일이며 거느린 병사는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으로부터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으로 나아가니 북방을 지키던 군사가 궤멸되었다. 청정은 하루에 수백 리를 다녀 형세가 비바람과 같았는데 지나간 곳은 노략으로 닭과 개는 물론 땅 위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은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는데, 반민(叛民)들이 왜병을 인도하여 그를 붙잡았다. 북청부(北靑府) 사람 김응전(金應田)이 거짓으로 감사의 종[奴]이라고 칭하고 적중에 들어가 밤에 틈을 타서 업고 도망하여 행재소에 돌아왔다. 판관(判官) 유희진(柳希津)은 반민에게 잡혀 항복하였고, 병사(兵使) 이혼(李渾)은 갑산(甲山)으로 달아났으나 반민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갑산 사람들은 또 부사(府使)를 죽이고 왜적에게 항복하였다.왕자 순화군(順和君)이 철원(鐵原)에 들어갔다가 왜적이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남도에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따랐었다. 이에 이르러 두 왕자는 또 남도로부터 군사를 피하여 북도(北道)에 들어갔다. 청정이 함경북도에 들어오자 병사(兵使) 한극함이(韓克諴)은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도 마천령(磨天嶺)에서 패하게 되자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 이전에 두 왕자는 사나운 종놈을 풀어서 민간을 소란스럽게 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회령(會寧) 향리 국경인(鞠景仁), 경성(鏡城)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 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 등이 각각 성을 점거하고 두 왕자 및 배신(陪臣)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맞아들여 항복시킨 뒤에 붙잡아 두었다.청정이 승승장구하며 두만강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성보(城堡)를 다 빼앗았다. 그리고 국 경인을 왜의 관직인 판형(判刑)으로 삼았고 국세필은 예백겸본도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삼았고 말수도 대장(大將)으로 삼아 북관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정문부가 평사(評事)로서 경성(鏡城)에 있다가 난을 만나 탈출하여 산중에 숨어 있었는데,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와 최배천(崔配天)이 정문부를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정문부가 흔연히 그 말을 따랐다. 드디어 정문부를 장수로 추대하고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장사(壯士)가 수백과 현지 수령의 변장(邊將)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북쪽 오랑캐가 기회를 틈타 여러 번 변방을 노략질하니 국세필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배천은 원래 국세필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자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의탁하는 것처럼 하니 국세필의 어미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최생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 하였으나 국세필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틈을 타서 달래기를 "북쪽 오랑캐가 만약 크게 쳐들어오면 진실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 평사는 위엄과 덕망이 있으니 능히 맞아들여 함께 오랑캐를 지키면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국세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곧 격문을 보내어 타일렀다. 국세필이 의심을 하여 군사에게 엄명하고 기다리니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 이르러 국세필을 보고 친히 달래고 타이르니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병사의 부신(訃信)을 바쳤다. 그러자 정문부가 영을 내리기를 "높거나 낮은 백성과 병사들에게 예전에 법을 범한 것은 묻지 말라."라 하고 세필로 하여금 전같이 군사를 맡도록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국세필을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반병(叛兵) 가운데 일찍이 자기를 쏘아 상처를 입힌 자를 발탁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세필은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으며 그 심복으로 하여금 정문부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어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그 무리를 시켜 사졸과 함께 성에 올라 전투를 연습하게 했는데, 밤에 이르러 파하였으며 매일 이렇게 하였다.왜인이 경기병(輕騎兵)으로 문득 와서 성을 두드리거늘 정문부가 국세필을 시켜 왜장을 꾀어 문에 들어오도록 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官) 강문우(姜文祐)에 명령을 내려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게 하고 드디어 주군에 격문을 돌려 반병(叛兵)의 항복을 받았다. 육진(六鎭)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배반한 자들을 석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차례로 투항하였다. 이에 장수와 군사, 호걸들이 서로 다투며 모집에 응하였다. 이에 주변의 성보(城堡)를 다 회복하니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정문부가 회령(會寧)에 격문을 보내 국경인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하도록 타일렀으나, 국경인은 따르지 않고 길주에 주둔한 적과 더불어 경성을 협공하려고 꾀하였다. 한편 회령 사람 오 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 모여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에게 호응할 것을 꾀하였다. 국경인이 염탐하여 알고는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주모자를 나오라고 위협하므로, 오윤적이 몸을 빼어 자수하니 국경인이 그를 체포하였다. 그런데 부(府)의 아전 신세준(申世俊)이 몰래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훔쳐 객사 문 밖에서 부니 반병(叛兵)들은 국경인이 영을 내렸나하고서 일시에 모여드니 숲을 이룬 듯했다.신세준 등이 그들을 통솔하여 그의 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인 다음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켜 나아가 국경인에게 말하기를 "성 안의 병사가 이미 다 나한테 귀속되었다. 네가 오윤적을 내놓으면 마땅히 군사를 파하겠다."라 하니, 국경인이 겁을 먹고 이를 따랐는데, 드디어 국경인의 참수하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해주었다. 오윤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문부에게 간 뒤에 명천 사람들이 자제를 단결시켜 말수를 치고서 정문부에게 응하기로 했는데 말수에게 패하였다. 정문부가 몰래 오촌 권관(吾村權官)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 강문우를 보냈다. 이들이 60여 기병을 거느리고 주야로 행군하다가 갑자기 명천(明川)에 쳐들어가니 말수가 겁을 내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지만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죽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성과 읍은 다 회복하였으나 오직 길주만 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정문부가 이에 군민(軍民)을 편안하게 모여 살게 하니, 모집된 병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여러 병사들이 다 적을 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여러 장수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장차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이 아직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드디어 앉은 자리에서 국세필을 체포하고 아울러 그 무리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리면서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서서 반란한 놈들은 이 무리들이므로 나머지는 문책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정문부가 본래 계획한 것이었다. 군대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사기가 십 배나 되었는데, 곧 장계를 갖추어 최배천(崔配天)을 행재소로 보내어 아뢰니 주상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정문부에게 옷과 신, 환약을 내리었다.부사(府使) 정현룡(鄭見龍)이 경성에 머물러 틈을 기다리고자 하므로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함이다. 이제 다만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하여 왜적을 격파하지 않으니 반도들을 본받으려 함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봅시다."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을 남문 밖에 모이게 하여 이 두 사람의 다툰 바를 말하고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은가 결정하라 하니, 여러 사람이 다 정문부가 옳다고 하였다.이 당시 왜장 직정(直正), 도문(道文), 도관(都關), 여문(汝文) 등이 길주를 점거하여 주둔하고 또 영동(嶺東)에다가 군사를 배치하고 책(柵)을 설치하여 남북도의 길을 통하게 하고서 왕래하며 불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명천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종사관(從事官)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 성 밖 세 곳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엿보게 하였다.병진일 먼동이 틀 무렵 왜적이 병사 6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 가파리(加坡里)를 불 지르고 노략질하고서 노략질 한 것들을 핍박하며 돌아오는데, 원충서가 2백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왜적의 선도(先導)를 격파하니 왜적이 놀라 달아났다. 이 때에 적의 대진(大陣)이 성 안에서 계속 지원하니 원충서는 산이 험한 곳으로 물러갔다. 한인제가 구 황, 강문우 등 3백여 기병으로 달려와서 원충서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직정(直正), 도관(都關), 여문(汝文)이 선봉의 정예 군사 4백 명으로 앞장서 올라가니 관군이 돌기병(突騎兵)으로 출몰하면서 격파하였다. 전투가 날이 저물 때쯤 되자 왜적의 앞뒤 진들이 다 궤멸되었다. 유경천이 군사를 보내어 그 귀로를 차단하고 관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직정, 도관, 여문 등 다섯 장수의 목을 베었고 8백 여 수급(首級)과 군 장비 기계 1천여 점을 노획하였고, 노략당한 것을 다 빼앗아 돌아왔다. 구황과 강문우는 북방의 장수 가운데 가장 날래고 용맹한 자들이다.정문부가 싸움에서 이긴 여세를 타고 길주를 진격하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영동(嶺東)의 적이 대규모로 몰려오니 정문부는 쌍개포(雙介浦)에서 맞아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군사를 이동하여 영동책(嶺東柵)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길주성 아래에 줄지어 진을 치고서 왜놈의 약탈을 막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어 지구전을 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신(宰臣)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들어오다가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써 중도에 뒤쳐져 머물렀다가 방향을 틀어 갑산(甲山)으로 들어와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윤탁연을 본도 감사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윤탁연은 정문부가 왜적을 물리친 공에 대해 듣고 시기하여 사실과 반대로 행조에 알렸으며, 또한 정문부의 병권을 빼앗고서 경성 부사 정현룡을 대신 북병장(北兵將)을 삼으니 군중(軍中)이 울분을 토하며 흩어져 떠나가 버렸다. 정문부가 드디어 병권을 놓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면서 군민(軍民)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모여 살게 하였다. 북쪽 오랑캐들이 여러 번 변방에 들어와 약탈하므로 정문부가 매복했다가 그들을 격파하매 북쪽 오랑캐가 모두 귀순하였으니, 또 납지(蠟紙)로 그런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유생 이회록(李希祿)과 김응복(金應福)이 윤탁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므로 윤탁연이 행조에 치계하고서 무과를 열어 백여 명을 취하였다. 무과 출신 유응수(柳應秀), 이유일(李惟一), 박중립(朴中立), 정해택(鄭海澤), 생원 한경상(韓敬商) 등이 군사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윤탁연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히 적을 토벌하였으니 적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갑산 부사 성윤문(成允文)으로 대장을 삼고 묘파(廟坡) 권관 백응상(白應祥)을 함흥 판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獨山) 아래로 나아갔는데, 왜적이 밤에 관군을 습격하니 성윤문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몸을 빼내어 달아나니 일군(一軍)이 다 함락되었다.이유일, 유응수, 박중립, 정해택 등이 별도로 진을 치고 적을 치는데 간혹 돌격하여 왜놈의 머리를 베어왔다. 한인제(韓仁濟), 유응수, 이유일은 다 함흥 사람이다. 전공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들을 지목하여 함흥 삼걸이라 하였다. 한인제는 공으로써 북우후(北虞侯)가 되었다. 백응상은 연안(延安) 사람으로, 용맹함을 지녀 잘 싸웠는데 마침내 진에서 죽었다. 당시 북변을 수토하는 신하들은 물러서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남북의 사이에 끼어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이 없으므로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쳤으니, 당시의 의론이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자주 대장을 바꾸어 전투의 기회 그르친 것이 많았으니, 그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정 문부를 기용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정문부가 대장으로 직임에 나아가 사졸을 실컷 먹이고서 구황으로 하여금 2백 명의 기병을 선발하게 하여 단천 군수 강찬을 돕게 하니 그가 왜적 2백 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으며, 원충서가 또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죽였다.청정(淸正)이 행장의 패전한 통보를 듣고 경기(京畿)에 들어와서 장차 철군하여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길주는 정문부에게 제압되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드디어 2만의 군졸로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영동(嶺東)의 왜적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는데, 정문부가 이를 염탐하여 알아내고 군사 3천여 명을 먼저 임명(臨溟)에 웅거하여 매복시켜 기다렸다. 계미일 날이 밝아올 때 왜적의 군대는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서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움직여 그 뒤를 차단하고 좌우로 포위하여 날쌘 기병을 풀어서 내달리며 활을 쏘니 살상(殺傷)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피가 흘러 들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붕수와 이희당(李希唐)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청정이 혈전을 벌이면서 퇴로를 열려고 관군과 더불어 60여 리에 걸쳐 접전을 벌였다. 이때 길이 막혀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두절되었는데, 정문부 등이 적의 형세가 다시 거세진 것을 보고 그들의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걱정하여 명천(明川)으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 날 밤 청정이 시체를 쌓아 불 지르고, 몰래 군사를 거두어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밥 지을 겨를도 없이 달아나는데, 남쪽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퇴로를 끊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다를 따라 달아났는데, 이유일이 병사를 거느려 그들을 추격하였다. 청정은 길성(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모든 주둔군을 다 철수시켜 함께 한양에 모였다.정 문부가 장계를 올려 장수와 병졸에게 상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탁연이 중간에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유일은 군공(軍功)으로써 볼하 첨사(乶下僉使)가 되었고 유응수는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정문부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어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북로(北路)의 장사(壯士)들은 모두 의병을 풀고 떠났으며, 난이 평정됨에 정문부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정문부는 한직에서 한가하게 지냈다.인조 때에 이르러 북방의 경계46)가 발생하니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명하였는데 정문부를 원수로 천거하였다. 정문부가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문부가 지은 시를 습득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북방 사람들이 그것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북평사가 되어 북방 사람들의 칭송을 채집하여 조정에 알리게 되니, 공론이 비로소 돌아 그의 원통함을 씻고 그의 공을 포상하였으며, 북방 사람들이 경성(鏡城)에 나아가 사원을 세우고 제사지냈는데, 사액하기를 '창렬사(彰烈祠)'라 하였다. 鄭文孚, 字子虛, 海州人也。少好讀書, 善屬文。中宣廟戊子文科, 隸槐院, 出爲北道兵馬評事。壬辰之亂, 行長與淸正, 渡臨津, 慮車駕或入北關, 約分路, 行長向西, 淸正向北, 勇冠諸倭, 所領兵尤精悍。從谷山踰老里峴, 出鐵嶺, 北守兵潰。淸正日行數百里, 勢如風雨, 所過赤地, 鷄犬不遺。監司柳永立避入山峽, 叛民引賊兵襲執之。北靑府人金應田, 詐稱監司奴, 入賊中, 乘夜竊負, 逃歸行在。判官柳希津, 爲叛民所執降, 兵使李渾, 奔入甲山, 爲叛民所殺, 甲山人, 又斬府使而降賊。王子順和君入鐵原, 聞賊入江原道, 遂踰鐵嶺, 入咸鏡南道。隨臨海君。至是兩王子, 又自南道避兵入北道。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 戰敗被擒, 南兵使李瑛, 亦敗於磨天嶺, 州郡皆陷。先是兩王子, 縱豪奴擾民間, 大失民心, 會寧鄕吏鞠景仁·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等, 各據城, 迎降兩王子及陪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被執。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判刑, 鞠世弼爲禮伯兼本道兵使, 末秀爲大將, 分統北關。是時, 文孚以評事, 在鏡城, 遭亂脫身, 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 見文孚請起兵討賊, 文孚欣然從之。遂推文孚爲將, 團集土兵, 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 皆附之。北虜乘機, 屢掠邊境, 世弼憂懼, 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 弼母戒曰: "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從。配天遂乘間說曰: "北虜若大至, 誠難與敵。鄭評事有威望, 苟能延入共守, 虜不足慮也。"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浮, 卽馳檄諭之, 世弼持疑, 嚴兵以待。文浮率兵至城下, 見世弼親自說諭, 世弼始迎入, 納兵使符信。文浮下令曰: "大小民兵, 勿問舊犯。" 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浮不許, 又擢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猶未放心, 使其腹心, 夾侍文浮左右, 伺察動靜。文浮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如之。倭人以輕兵奄至叩城, 文浮命世弼誘倭將入門擒之, 令安原權官姜文祐, 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兵, 六鎭聞文浮已釋反側, 次第送款。將士豪傑, 爭先應募, 於是悉復緣邊城堡, 北道人心稍定。文浮移檄會寧, 諭敬仁來降, 敬仁不從, 與吉州屯賊謀夾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鄕校謀伐敬仁, 以應文浮, 敬仁諜知, 急圍鄕校, 脅出首唱, 允迪挺身自首, 敬仁囚之。府吏申世俊潛偸敬仁鐃角, 吹於客舍門外, 叛兵疑敬仁出令, 齊會如林。世俊等仍領之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 謂敬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出吳允迪, 當罷兵。" 敬仁駭慄從之。遂斬敬仁, 傳首鏡城, 允迪領兵繼赴 後明川人團結子弟攻末守欲應文浮, 爲末守所敗, 文浮潛遣吾村權官具滉·安原權官姜文祐,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末守惶怯,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城邑盡復, 惟吉州, 爲倭所據。文孚乃安集軍民, 募兵至三千餘人, 衆咸欲擊賊自效。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受諸將齊進曰: "今將討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坐席, 執世弼, 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唱, 止此輩, 餘無問。" 此文孚本謀也。軍聲大振, 士氣十倍, 卽具啓遣崔配天, 聞行在, 上嘉之, 賜文孚衣履丸藥。府使鄭見龍欲住鏡城, 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 孰可孰不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 以通南北路, 往來焚劫。文孚率所部, 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覆於吉州城外, 以覘之。丙辰昧爽,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驅所掠而還, 忠恕率二百騎, 先馳邀之, 擊賊先導, 賊驚北。會, 賊大陣, 自城中繼援,忠恕退保山險。仁濟以具滉文佑等三百餘騎, 馳至與忠恕連兵大戰, 直正·都關·汝文, 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 擎天遣兵截其歸路, 官軍兩面夾擊大破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首八百, 軍裝器械, 千餘計, 盡奪所掠而歸。具滉·姜文佑, 北將中最驍勇者也。文孚乘勝, 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大至, 文孚邀于雙介浦敗之, 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剽掠, 阻其粮道, 以爲支久之計。先是, 宰臣尹卓然, 陪王子入北, 以詭計落留中道, 轉入甲山, 至別害堡, 行朝以卓然爲本道監司。至是, 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功以聞, 又奪文孚兵懽, 以鏡城府使鄭見龍, 代爲北兵將,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拊集軍民。蕃胡累寇邊, 文孚設伏破之, 胡蕃皆歸順, 又以蠟紙馳啓。儒生李希祿·金應福請卓然起義兵, 馳啓行朝, 設武科, 取百餘人, 武出身柳應秀·李惟一·朴中立·鄭海澤·生員韓敬商, 募兵得三千餘人, 屢戰皆捷, 卓然曰: "此輩尙能討賊, 賊不足憂也。" 以甲山府使成允文爲大將, 廟坡權管白應祥爲咸興判官, 統諸軍進于獨山下, 賊夜襲官軍, 允文不知所爲, 脫身逃走, 一軍盡陷。惟一·應秀·中立·海澤等, 別屯勦賊, 或突擊斬馘。韓仁濟·柳應秀·李惟一, 皆咸興人也。以戰功知名, 目爲咸興三傑, 仁濟以功爲北虞侯, 應祥, 延安人也, 勇果善戰, 竟殉於陣。當時北邊守土之臣, 莫不以退避爲得計, 而端川郡守姜燦, 介於南北之間, 四顧無援, 而能募兵討賊, 時論嘉之。尹卓然奪文孚兵, 數易將帥, 多誤戰機, 懼其得罪, 復起文孚爲將。將就職犒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 元忠恕又擊殺賊將於吉州城下。淸正聞行長敗報, 入京畿將謀撤還, 吉州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 文孚諜知之, 悉兵三千餘人, 先據臨溟, 設伏以待。癸未黎明, 賊兵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兵, 截其尾, 繞左右, 縱輕騎馳射, 殺傷甚衆, 流血被野。李鵬壽·李希唐,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戰鬪六十餘里。時, 道梗, 兩西消息隔絶, 文孚等見賊勢更盛, 疑其再逞, 退屯明川。是夜, 淸正積尸燒之, 潛撤兵, 乘夜跳城, 不暇炊爨而走, 恐南兵勦絶, 不敢踰咸關嶺, 循海走。李惟一勒兵追之, 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撤江原道諸屯, 俱聚于京城。文孚又馳啓, 請賞將士, 而卓然從中沮抑, 李惟一, 以軍功爲乶下僉使, 應秀得拜三水郡守, 文孚陞通政拜吉州牧使。北路壯士, 無不解體, 亂平, 無人言文孚事者。優遊散地, 至仁祖朝有北警, 命擧將才, 有以文孚應元帥薦, 文孚聞之歎曰: "吾其死矣。" 未幾, 有摭文孚詩句, 成案逮獄栲死, 北人無不冤之。後澤堂李植爲北評事, 採北人之頌, 聞于朝, 公議始行, 雪其冤而褒其功, 北人就鏡城, 建祠祭文, 賜額曰彰烈祠。 북방의 경계 이괄(李适)의 난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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