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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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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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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국슬사 鞠蝨辭 갈관박17) 선생은양쪽 옷깃이 메추라기를 매단 듯하고,18)풀로 양쪽 옷깃을 꿰매면서긴 세월 동안 가난하였지만19)고금의 서책을 한가롭게 읊으면서깊은 사고로 묵묵히 이해하네.자그마한 천지에홀연히 어떤 한 생물이그늘진 속에서 나타나모이고 모였는데 많기도 많구나.그 무리가 아주 많은데전갈처럼 가늘며개미처럼 하얗고부리는 벌의 독침과 같네.사람의 살갗을 파고들어어깨를 넘어 겨드랑이로 내려가고등에서 오금까지 이르면짧은 시간 내에온 몸이 소름이 돋네.선생은 이에 정신을 모으고 고요히 앉아서책을 거두어 덮고는원량20)의 갈옷을 풀어헤치고자릉21)의 갖옷을 벗으며나무토막을 갖추어 숯을 태우면입에서 곧 거품이 흘러내리네.솜에서부터 가선까지옷깃에서 시작하여 옷단까지터럭이나 실을 세세히 분석하여크고 작은 것 가리지 않네.이미 그 어미를 잡고또 그 동생까지 잡고는평상 아래에 펼쳐놓고이에 그 죄를 따지네."너는 천지에서가장 작은 생물로구차하게 모발에서 목숨을 연명하고살갗에 기생하며잠복하면서 알까지 기르는데무리와 벗들까지 끌어 들이구나.내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마는나의 고혈을 빼앗아가고게다가 나의 몸과 살갗은부모님께서 남겨주신 것이니어찌 기꺼이 두려워하며너에게 해를 당하겠느냐.매우 넓은 천지에서생물들이 살고 있는데커다란 곤붕22)은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리고인지의 교화는23)성인의 상서이다.작은 벌이나 개미도그 의리를 숭상할 만하고24)가는 지렁이나 거미도그 재주가 빼어나도다.하늘이 만물을 낳음에또한 각각의 쓰임이 있는데어찌하여 너라는 생물은유독 그 종이 무리를 이루느냐.이미 가두거나 갈아버렸는데도그 무리를 다 없애버리기 어렵고,아침에 네 조상을 벌하였는데도저녁이면 그 자손이 보이구나.높으신 손님이 문에 있으면죽은 꿩으로25) 예를 갖추고주인이 단정히 홀을 들고 있으면동쪽 계단을 향하여 종종걸음하며읍양을 하며 당에 올라26)도를 논하고 옛날 일을 이야기하도다.너희들은 이러한 때에가슴과 배를 멋대로 휘저으니나로 하여금 긁게 하여갑자기 예모를 잃게 하구나.한가로운 마루를 깨끗이 쓸고책상은 단정히 하며삼분오전27)은 오른쪽에 있고《주문지결(朱門旨訣)》28)은 평상에 펼쳐 놓고는아득한 옛날 것에 마음을 노닐며뜻을 거슬러 헤아리니 정신이 신묘한데,너희들은 이러한 때에나의 정돈된 틈을 타서분주하게 바삐 돌아다니며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이르구나.세상일이 비록 많아왕맹29)처럼 겨를이 없으니하물며 나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어느 겨를에 상세히 터득할까.그리고 기나긴 밤30)에범중엄처럼 걱정이 많아31)주공을 꿈꿀 수가 없었고,32)군실처럼 잠 못 이루며33)계속해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니하찮은 것이 창자와 폐에 엉켜있네.너희들은 이러한 때에더욱 그 독성이 왕성하여나의 손과 발로 하여금밤새도록 반복해서 긁게 하네.이것은 대강이니자세한 것은 다하기도 어렵도다."이에 그 무리들을 몰아서장차 맹렬한 불길에 나아가게 하니뒷걸음치며 물러나 두려워 벌벌 떨고34)원망한 듯 우는 듯하구나.이미 입술과 혀도 없어청컨대 마음을 대신 헤아렸네."내 비록 지극히 미천하지만이 또한 천하의 생물이고비록 그대에게 의지하여 살았지만또한 그대가 스스로 취한 것이네.내 그대에게 분명히 말하니청컨대 그대는 살펴보아라.크고 넓은 집 아래고운 털 담요 위서늘한 고운 삼베35)순면의 솜제나라의 비단36)과 촉나라의 비단37)영롱하며 휘황찬란한 빛38)가득한 고량진미향기로운 옥 같은 살갗내가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부여잡을 길이 없으니지금 그대는 백 번 기운 겹겹의 옷과십년 된 해진 갓으로팽택령처럼 무릎이나 들어갈 만 한 집39)에 살고사마광처럼 찢어진 이불40)을 덮도다.광문처럼 비록 가난하고41)법조처럼 허리가 크지만42)낙토여 낙토여이에 내 살 곳으로 얻었으니43)어찌 안을 돌아보지도 않고도리어 나와 원수가 되느냐.?선생은 이에 수심에 차 기쁘지 않은 듯안석에 기대어 누워 있네.이에 동자에게 손을 저어 물리가게 하니곁에 있던 객이 다음과 같이 말하네."지금 비록 하나를 들었지만도리어 세 이치를 알게 되었네.44)유방의 법45)이 문란하지 않으니위나라 적46)이 마음으로 따랐고당나라가 법을 멋대로 하지 않으니번진47)도 멋대로 하지 못하네.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어지니귀신이나 괴기한 것이 능히 멋대로 하랴송나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니간사하고 아첨한 자가 뜻을 얻었네.스스로 치면 남들도 치게 되니48)성인이 경계하셨네.″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다시 앉아엄숙히 다시 책을 읽는데낭랑한 맑은 소리가마치 금석에서 나온 듯 하였네.49) 褐寬先生鶉懸兩袵草綻雙襟蓬門永日古今閑吟玄思默會天地寸心忽有一物在著裏陰兟兟集集厥醜千億似蝎而細如蟻而白觜若蜂尾砭人膚革踰肩下脅仍背至膕俄頃之內百體生粟先生乃凝神靜坐襲撤方冊披元亮褐解子陵裘具櫍燎炭口正沫流從絮至緣始領及裔毫分縷析莫有巨細旣執其母又獵其弟布列床下乃目厥罪曰汝天地爲物最微假息毛髮寄生膚肌涵淹卵育引類連朋余何負汝浚我膏血况余軆膚父母所遺安肯伈伈爲汝所殃天地至廣物無不生鯤鵬之大澤霖于氓麟趾之化惟聖之禎蜂蟻之微其義可尙蚕蛛之細其巧可長天生萬物亦各有用胡乃爾生獨醜厥種旣鎖而屑難盡其類朝刑乃祖暮見其孫至若尊賓在門死雉禮具主人端笏從東階趍揖讓升堂論道談古爾於此時肆縱胷肚使我把搔頓失禮貌及夫淨掃閒軒几案端詳墳典在右旨訣鋪床遊心邃古泝意神妙爾於此時乘我整暇奔走馳騁自頂及踝世事雖多王猛不遑况我隱奧暇得其詳又如永夜長漏仲淹多憂周公不夢君實無寐脉脉反側寸結腸肺爾於此時益逞其毒使我手足終夜反復此其梗槩難悉委曲於是欲驅其醜將赴烈焰逡廵觳觫如怨如泣旣無唇舌請代以臆我雖至微亦是天物雖憑子生亦子自取我明語子請子咨諏廣廈之下細氊之上絺絡之凉純綿之纊齊紈蜀錦陸離輝煌膏粱所充玉膚芳香我非不欲無路攀援今子百結重裳十年蔽冠容彭澤膝破司馬衾廣文雖貧法曹腰大樂土樂土爰得我所胡不內顧反我爲讎先生乃蹙然不悅隱几而臥乃使童子麾而却之傍有客曰今雖聞一理可反三劉綱不紊魏賊腹心李法不橫藩鎭不橫主聖臣良鬼怪能逞宋辟不辟奸諛得志自伐人伐惟聖之戒先生斂袵更坐肅然復讀琅琅淸韻若出金石 갈관박 갈(褐)은 모포(毛布)이고 관박(寬博)은 헐렁한 옷으로, 천한 자가 입는 옷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증자(曾子)가 자양(子襄)에게 한 말에 "스스로 반성해 보아 바르지 못하다면 비록 천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두렵게 하겠으며, 스스로 반성해 보아 바르다면 비록 천만 사람이 있는 곳에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메추라기를 매단 듯하고 원문의 '순현(鶉懸)'은 너덜너덜 기운 누더기 옷을 이르는데, 메추리는 털이 얼룩지고 꽁지에 깃이 없으므로 이렇게 비유한다. 《순자(荀子)》 〈대략(大略)〉에 "자하가 가난하여 입은 옷이 마치 털 빠진 메추리와 같았다.[子夏貧, 衣若縣鶉.]"라고 하였다. 가난하였지만 원문의 '봉문(蓬門)은 '봉문필호(蓬門蓽戶)'의 줄인 말로 쑥대나 싸리로 만든 문이라는 뜻인데, 집이 가난하고 누추함을 이른다. 원량 도잠(陶潛, 365~427)으로, 자는 원량 또는 연명(淵明)이니,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하였다. 동진(東晉) 때의 저명한 문학가로 항상 전원생활을 그리워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이 있다. 자릉 《후한서(後漢書)》 권83 〈엄광열전(嚴光列傳)〉에 보면 "엄광은 자가 자릉(子陵)이고, 다른 이름은 준(遵)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성이 자자하였고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공부하였다. 광무제가 황제가 된 뒤에 그를 등용하고자 백방으로 찾았으나 그는 이름을 바꾸고 은신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제(齊)나라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어떤 남자가 양 갖옷을 입고 연못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有一男子 披羊裘釣澤中]'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양 갖옷'은 은자 혹은 은거 생활을 일컬을 때 쓰인다. 곤붕 《장자(莊子)》의 우화에 나오는 큰 물고기와 새의 이름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이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背]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남쪽 바다로 갈 때 9만 리를 날아올라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라고 하였다. 《莊子 逍遙遊》 인지의 교화는 《시경》 〈관저〉의 소서(小序)에 "〈관저〉와 〈인지(麟趾)〉의 교화는 왕자의 풍(風)이기에 이것을 주공에 연계시켰다.[關雎麟趾之化 王者之風 故繫之周公]"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작은 벌이나……숭상할 만하고 벌과 개미에게는 본디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중용혹문(中庸或問)》 상권(上卷)에 "범과 승냥이에게 부자간의 친함이 있고, 벌과 개미에게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승냥이와 수달이 조상에게 제사할 줄을 알고, 징경이에게 암수의 분별이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 형기가 한편으로 치우친 반면에 또 의리의 얻은 바를 보존한 것이 있다.[至於虎狼之父子, 蜂蟻之君臣, 豺獺之報本, 雎鳩之有別, 則其形氣之所偏, 又反有以存其義理之所得.]"라고 하였다. 죽은 꿩으로 《의례(儀禮)》 〈사상견례(士相見禮)〉에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예물[摯]로 겨울에는 죽은 꿩[雉]을 사용한다.[摯 冬用雉.]"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현의 주에는 "사(士)가 예물로 꿩을 사용하는 것은 꿩의 굳세고 강직한 성정을 취한 것으로, 꿩은 교미하는 것에 때가 있고 헤어져도 윤서(倫序)가 있다. 반드시 죽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산 채로는 길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士摯用雉者, 取其耿介, 交有時, 別有倫也. 雉必用死者, 爲其不可生服也.]"라고 하였다. 읍양을……올라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양보하는 예교의 풍속을 말한다. 《논어》 〈팔일(八佾)〉에 "군자는 다투는 것이 없으나 반드시 활쏘기에서는 경쟁을 한다. 상대방에게 읍하고 사양하며 올라갔다가 활을 쏜 뒤에는 내려와 벌주를 마시니, 이러한 다툼이 군자다운 다툼이다.[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인데, 다만 여기서는 활쏘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삼분오전 원문의 '분전(墳典)'은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약칭인데, 전설 중에 나오는 옛날 책 이름이다. 《문선(文選)》 〈동경부(東京賦)〉에 "옛날에 항상 삼분오전(三墳五典)이 없어져서 위로 염제(炎帝)와 제괴(帝魁)의 아름다운 의표를 보지 못하여 한스러워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설종(薛綜)의 주에 "삼분(三墳)은 삼황(三皇)의 글이고,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주문지결(朱門旨訣)》 성혼(成渾)이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각종 서신들과 대화들 및 주자의 행장(行狀)에서 주자의 사상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장들을 뽑아서 초학자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을 선집해서 출간한 서적이다. 왕맹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전진(前秦)의 승상을 지낸 인물로, 자가 경략(景略)이고 북해(北海) 사람이다. 젊은 시절 동진(東晉)의 대장(大將) 환온(桓溫)을 찾아가 만나는 자리에서 여유롭게 이[蝨]를 잡으면서 유창하게 천하를 담론했을 정도로 기백이 뛰어났다고 한다. 《晉書 卷114 王猛列傳》 기나긴 밤 원문의 '장루(長漏)'는 긴 밤을 말한다. 진여원(陳汝元)의 《금련기(金蓮記)‧동몽(同夢)》에 "침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잠을 잤고 서쪽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긴 밤을 지세웠다.[連床共宿, 話西窗同銷長漏.]"라는 말이 있다. 범중엄처럼 걱정이 많아 범문정공(范文正公)이 말하기를 "내가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 곧 하루 동안 음식으로 봉양한 비용과 한 일을 스스로 헤아려 보고 과연 자신을 봉양하는 데 든 비용과 한 일이 걸맞으면 코를 골면서 푹 잤다. 혹 그렇지 않으면 밤새도록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일 반드시 들어맞게 하기를 구하였다.[吾遇夜就寢 卽自計一日飮食奉養之費及所爲之事 果自奉之費與所爲之事相稱 則鼾鼻熟寐 或不然 則終夕不能安眠 明日必求所以稱之者]"라고 하였다. 《言行龜鑑 卷2 德行門》 문정공은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주공을……없었고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내가 너무도 쇠하였구나. 오래도록 꿈속에서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하였으니.[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말이 나온다. 군실처럼……이루며 군실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이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군실이 항상 생각이 어지러움을 걱정하여 더러는 밤중에 일어나 아침까지 자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스스로 힘썼다고 하겠다.……그러나 도리어 한 꾸러미의 구슬을 세는 것만 못하다. 밤이면 몸을 편히 하고 잠이 오면 눈을 감을 것이지 괴롭게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마음으로 주를 삼지 못하기 때문이다.[君實常患思慮紛亂, 有時中夜而作, 達朝不寐, 可謂良自苦.……却不如與一串數珠之愈也. 夜以安身, 睡則合眼, 不知苦苦思量箇甚. 只是不以心爲主.]"라고 하였다. 《心經附註 卷3》 두려워 벌벌 떨고 원문의 '곡속(觳觫)'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새로 주조한 종에 소의 피를 칠하기 위해 소를 끌고 가는 자를 보고 말하기를, "놓아주어라. 나는 그놈이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죽을 곳에 나아가는 것 같은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노라.[舍之. 吾不忍其觳觫, 若無罪而就死地.]"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1권 〈양혜왕 상(梁惠王上)〉 고운 삼베 원문의 '치락(絺絡)'은 치(絺)는 고운 갈포(葛布)를, 낙(絡)은 면주(綿紬)를 말하는데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 또는 그 실로 짠 비단을 말한다. 제나라의 비단 원문의 '제환(齊紈)'은 제(齊)나라에서 생산되는 비단을 뜻하는데, 보통 둥근 부채[團扇]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 성제(漢成帝)의 궁인(宮人) 반 첩여(班婕妤)가 시가(詩歌)에 능하여 총애를 받다가 나중에 허 태후(許太后)와 함께 조비연(趙飛燕)의 참소를 받고는 물러나 장신궁(長信宮)에서 폐위된 태후를 모시고 시부(詩賦)를 읊으며 슬픈 나날을 보냈는데, 단선시(團扇詩)를 지어서 여름철에는 사랑을 받다가 가을이 되면 버려지는 부채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추선(秋扇)의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 권27에 〈원가행(怨歌行)〉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첫머리에 "지금 막 제나라의 흰 비단을 자르니, 희고 깨끗하기가 서리와 눈 같아라. 재단하여 합환의 부채를 만들었나니, 둥글고 둥근 것이 밝은 달과 같아라.[新裂齊紈素 皎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라는 말이 나온다. 촉나라의 비단 사천(四川)에서 생산되는 채색의 비단을 지칭한다. 염색한 숙사(熟絲)로 짜서 만드는데, 색채가 화려하고 재질이 질기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조비(曹丕)의 〈여군신론촉금서(與群臣論蜀錦書)〉에 "전후로 매번 촉금(蜀錦)을 얻을 때마다 자못 가당치 않아 의아할 뿐이었고, 선비(鮮卑)도 다시금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영롱하며 휘황찬란한 빛 원문의 '육리휘황(陸離輝煌)'은 찬란육리(燦爛陸離)와 같은 말로 영롱한 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모양을 나타낸다. 팽택령처럼……집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한가롭게 살았다. 〈귀거래사〉에 "술잔을 가져다 스스로 따르고 뜰의 나뭇가지를 돌아보며 얼굴을 편다. 남쪽 창에 기대 오만함을 부치고 무릎이 용납하기 쉬움을 알겠다.[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고 하였다. 사마광처럼 찢어진 이불 〈사마온공포금명(司馬溫公布衾銘)〉은 범진(范鎭, 1008~1089)이 사마광에게 준 베 이불에 대해 범순인(范純仁, 1027~1101)이 명을 지은 것으로, 베 이불을 소재로 검소(儉素)의 덕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사마광은 늙어 병이 깊어지자 심의(深衣)와 베 이불을 가지고 시신을 염(殮)하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광문처럼 비록 가난하고 광문은 본디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으로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를 지낸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그는 일찍이 현종의 특별한 배려로 한직(閑職)인 광문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몹시 빈한(貧寒)한 데다 술을 매우 즐겼으므로, 두보(杜甫)가 장난삼아 그에게 〈희간정광문戲簡鄭廣文〉이라는 시를 지어 주기도 했다. 《杜少陵詩集 卷3》 법조처럼 허리가 크지만 한유의 〈정군증점(鄭君贈簟)〉이란 작품에서 "법조참군 말직에 아무나 함부로 대하는 자리, 허리와 배 부질없이 크니 어찌하면 좋겠는가.[法曹貧賤衆所易 腰腹空大何能爲]"라 하였다. 이 작품은 가난한 한유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낙토여……얻었으니 《시경》 〈석서(碩鼠)〉에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을 먹지 말지어다. 3년 동안 너와 알고 지냈거늘 나를 즐겨 돌아보지 않을진댄 떠나서 장차 너를 버리고 저 낙토로 가리라. 낙토여, 낙토여. 이에 내 살 곳을 얻으리로다.[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逝將去女, 適彼樂土. 樂土樂土, 爰得我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지금……되었네 《논어》 〈술이(述而)〉의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말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말되, 한 귀퉁이를 들어줌에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反證)하지 않으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방의 법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고 하는데, 한 고조 유방(劉邦)이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세 조항으로 줄여서 새로 만든 법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와 도둑질한 자에 대해서는 그 범죄 정도와 상응하는 처벌을 한다.[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라고 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위나라 적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선제(先帝)는 한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에 나오는 말로 적(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번진 당나라 초기에 중요한 주(州)에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예종(睿宗) 때 절도대사(節度大使)를 두고, 현종(玄宗) 때 또 변경의 10개소에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를 통틀어 '번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각 지역의 군정(軍政)만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권력이 점차 커져 민정(民政)과 재정(財政)까지 담당하였다. 스스로……되니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며,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패가(敗家)한 뒤에 남이 그를 패가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하는 것이다.[夫人必自侮然後 人侮之 家必自毁而後 人毁之 國必自伐而後 人伐之]"라는 말이 나온다. 금석에서……하였네 글 읽는 소리가 카랑카랑하여 쇳소리와 석경(石磬)소리와 같음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의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위(衛)나라에 머물 적에 해진 옷은 너덜거리고 얼굴은 부어서 푸석푸석하며 손발이 모두 트고 갈라져 있었다. 3일 동안이나 밥을 짓지 못하였고 10년 동안 옷을 새로 만들어 입지 못하였다. 또 갓을 바로 쓰려 하면 갓끈이 끊어지고 옷깃을 여미려 하면 옷이 찢어져 팔뚝이 보였으며 신을 신으면 신의 뒤축이 터져버렸다. 그런데도 신발을 끌면서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면 소리가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마치 금속에서 나오는 듯하였다.[聲滿天地, 若出金石.]"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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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흥부 感興賦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태워주며닭은 새벽을 맡고 개는 밤을 담당하네.밭 갈고 태워준 공로가 있는데 몸이 찢겨지고새벽과 밤에 임무를 담당했으나 마구 삶겨지네.호랑이는 털이 있고 무소는 뿔이 있으며조개는 진주를 머금고 소라는 광주리 모양의 껍데기를 짊어졌네.나를 지킨 것이 곧 나를 죽이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마는영화를 줬던 것이 결국 재앙이 됨을 비로소 깨달았네.용은 단비를 내려 사물들에게 은택을 주고기린은 때에 응하여 상서로움을 알리는데,하나라 조정은 무도하게 신이한 동물을 절여 젓갈을 담고3)노나라 교외에서는 사냥을 하여 어진 동물을 죽이네.4)나무는 무슨 공로가 있어 진나라 관직을 얻었으며5)구슬은 무슨 공덕이 있어 수후에게 은총을 입었나.6)기둥머리 두공에 산을 새겨 보관한 거북이는7) 진흙탕의 물고기만 못하고비단 입고 희생될 제물은 늙은 밭의 소만 못하네.내가 생명이 있는 만물을 살펴보니천 길의 빛나는 덕을 보는 것만 못하네.8) 牛耕兮馬乘鷄司晨兮犬司夜耕乘就功兮遭體解晨夜服任兮亂烹煮虎有毛兮犀有角蚌含珠兮蠡負筐誰知衛我者便是殺我始覺爲榮者畢竟爲殃龍興雨兮澤物麟應時兮告祥夏庭無道兮神物葅醢魯郊有狩兮仁獸傷戕木有何功兮得秦官石有何德兮寵隨侯山節之龜不若沒泥魚衣錦之牲不若老田牛吾觀萬物之有生兮莫如覽德千仞之輝 하나라 조정은……젓갈을 담고 하(夏) 나라 공갑(孔甲) 때에 상제(上帝)가 그에게 네 마리의 용을 선사하였는데, 용 한 마리가 죽자 사육사인 유루(劉累)가 남몰래 소금에 절여 젓을 담근 뒤 공갑에게 먹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左傳 昭公 29年》 노나라 교외에서는……동물을 죽이네 노나라 애공(哀公) 14년 봄에 노나라 서쪽 교외에서 사냥을 하다가 숙손씨(叔孫氏)의 거자(車子)가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하는 기린을 잡았는데, 처음에 기린인 줄을 모르고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산택(山澤)의 관리에게 주었다. 공자가 가서 보고 그것이 기린임을 인정하니, 노나라 사관이 기린을 잡았다고 기록하였다. 《春秋左氏傳》 나무는 무슨……관직을 얻었으며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러 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만나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하였는데, 그 소나무가 공이 있다하여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대부(大夫)로 봉(封)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구슬은 무슨……은총을 입었나 원문의 '수후(隨侯)'는 주(周)나라 때 한수(漢水)의 동쪽에 자리 잡은 제후인데, 그는 큰 뱀이 창자가 끊긴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약을 붙여 주었다. 그 후 뱀이 강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은혜를 갚았으므로 그 구슬을 수후(隋侯)의 구슬이라고 하였다. 《淮南子 覽冥訓》 기둥머리……거북이는 절(節)은 기둥 위의 지붕을 받치는 두공(枓栱)이고 산절은 두공에 산 모양을 새겨 넣는 것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장문중이 큰 거북을 보관하되 기둥머리 두공(斗栱)에는 산(山) 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동자기둥에는 수초(水草)를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라고 하였고, 주희(朱熹)는 《집주(集註)》에서 "절(節)은 기둥머리의 두공이고, 조(藻)는 수초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천 길의……못하네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나오는 "봉황이 천 장 높이 날다가 빛나는 덕을 보고 내려왔네.[鳳皇翔于千仞兮, 覽德輝而下之.]"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84 賈誼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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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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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유인사 一幽人辭 은자여 어찌도 그리夫何一幽人兮우활함과 졸렬함으로 서로 도모하는가.천지를 보기를 한 몸 같이 여기고만물을 가리켜 다 똑같다고 하네.평생의 두 발은 명예를 다투는 곳이라면 들어가지 않았고평생 한마디 말이라도 파당 짓는9) 고을을 언급하지 않았으니,하물며 이 한 마음의 기미가혹 얼음과 숯의 영역으로 나뉘겠는가.10)오직 두어 칸의 초가집왼쪽에는 푸른 물이 오른쪽에는 푸른 산이 있고,그 안에서 두어 번 경서를 열람하며고인의 마음과 모습을 상상하네.밝고 광활한 근원을11) 들여다보면서참 진리에 담담히 말을 잊네.한가한 때에는 예닐곱의 동자와 어른이서책12)을 손에 들고 서로 어울렸네.묵묵히 서로 마주하고 둘 다 말이 없어도저와 내가 잘 어울려 온화하였네.은자여 어찌하여서스스로는 미친 사람이라 하고 남들은 어리석은 자라 하는가.봄바람이 온화하게 펼쳐졌고가을 달이 끝없이 비추며음양과 해・달・별을 거두어 한 구역에 모아서소리 높여 노래하고 목 놓아 읊조렸으나나의 마음을 펼치기에 부족하여집으로 돌아와 입을 다물었네.역리를 탐구하여13) 도량이 크고 넓으며14)도량이 크고 넓으니 덕이 높았네.15)아침에는 이슬16)과 같아서 맑고 맑으며저녁에는 떠다니는 기운과 펼쳤다가 움츠리네.은자여 어찌도 그리조화와 합치하여 돌아가 머무는가. 夫何一幽人兮迂與拙而相謀視天地爲一體兮指萬物而同塗平生二跡兮不入爭名之場平生一言兮不及黨比之鄕况此一心之機兮或分冰炭之壃惟數楹之茅屋兮左綠水而右靑山中開數秩經書兮想古人之心顔窺昭曠之大原兮湛忘言於眞閑時童與冠六與七兮手黃卷而相從默然相對兩無言兮渾物我而雍容夫何一幽人兮自謂狂生人謂愚夫春風惠暢秋月無涯兮斂二儀三光兮收一區高歌放咏不足舒吾心兮歸一室而含默弄丸而休休兮休休而穆穆朝同沆瀣而淸淑兮暮與游氣而舒蹙夫何一幽人兮沕造化而歸宿 파당 짓는 원문의 '당비(黨比)'는 붕당을 지어 서로 어울린다는 말이다. 한(漢) 왕일(王逸)의 《구사(九思)》 〈민상(憫上)〉에 "뇌물 받고 법을 어긴 이들은 파당을 짓고, 올곧고 선량한 이들은 고독하다네.[貪枉兮黨比 貞良兮煢獨]"라고 하였다. 혹 얼음과……나뉘겠는가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일어나는 온갖 갈등과 번뇌를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기쁨과 두려움 등의 감정이 가슴속에서 싸우는데, 이는 원래 인간의 오장 속에 얼음과 숯이 한데 엉겨 있기 때문이다.[喜懼戰于胸中 固已結氷炭于五臟矣]"라는 말이 나온다. 밝고 광활한 근원을 원문의 '소광지대원(昭曠之大原)'은 밝고 넓은 본원지이다. 즉, 현상적이고 상대적 세계를 초월한 우주의 절대적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유교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성리대전(性理大全)》 권44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지금 공부를 해 보고자 한다면 우선 모름지기 단정하고 장엄한 자세로 존양을 하여 밝고 드넓은 근원의 경지를 홀로 보도록 하여야 할 것이요, 공부를 허비하여 종이 위의 말만 뚫어지게 쳐다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如今要下工夫, 且須端莊存養, 獨觀昭曠之原, 不須枉費工夫, 鑽紙上語.]"라고 하였다. 서책 본문의 '황권(黃卷)'은 책을 가리킨다. 옛날에 좀이 슬지 않도록 황벽(黃蘗) 나무의 즙을 짜서 서책에 발랐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역리를 탐구하여 원문의 '농환(弄丸)'은 태극(太極)과 같은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말로, 역리(易理)를 탐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소강절(邵康節)의 《격양집(擊壤集)》 권12 〈자작진찬(自作眞贊)〉 말미에 "구슬을 가지고 노는 여가에, 한가로이 왔다 갔다 하노라.[弄丸餘暇, 閑往閑來.]"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주(自註)에 "환(丸)은 태극이다."라고 하였다. 도량이 크고 넓으며 원문의 '휴휴(休休)'는 《서경(書經)》 〈태서(泰誓)〉에 "그 마음이 크고 넓어서 도량이 있는 듯하다.[其心休休焉 其如有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덕이 높았네 원문의 '목목(穆穆)'은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목목하신 문왕이여, 아, 공경을 계속하여 밝히시도다.[穆穆文王, 於, 緝煕敬止.]"라고 보이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목목을 '깊고 먼 모습[深遠之意]'이라고 주하였는바, 이는 덕(德)이 높은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이슬 원문의 '항해(沆瀣)'는 신선이 마신다는 밤사이 내린 맑은 이슬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노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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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교일기 상 南郊日記(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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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1649) 己丑 【기축년(1649, 인조27)부터 경인년(1650, 효종1)까지, 또 기해년(1659, 효종10)부터 을사년(1665, 현종6)까지이다.】기축년 7월 19일 병자(丙子)은명(恩命)을 받아 서울로 가기 위해 출발하였다. 이는 국상이 있어1) 감히 물러나 있지 못하고 장차 분곡(奔哭)2)한 다음 숙배(肅拜)하려고 하였으므로 병든 몸을 추슬러 출발한 것이다.8월 5일 임진(壬辰)새벽에 막소(幕所)에 나아갔다. 날이 밝을 무렵 궐문으로 들어가 분곡례(奔哭禮)를 행하여 사배(四拜)하고 빈청(賓廳)에서 쉬었다. 해가 높이 떠 진시(辰時)가 되자 숙배례(肅拜禮)를 행하였다. 저녁에 병세가 심하여 순장(旬狀)3)을 병조에 올렸다. 참판 임담(林墰),밀양(密陽)의 나위소(羅緯素)가 모두 나에게 서울에 머물라는 뜻으로 권유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신하로서 군주를 섬기고 싶지만 병이 깊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6일에 좌랑(佐郞) 권시(權諰)가 편지를 보내 묻고 대답하였는데, 이때 이 사람이 일사(逸士)로서 특명에 의해 불려왔지만 또한 병으로 순장을 올렸습니다."라고 하였다.오시(五時)에 김징(金澄)이 또 좌랑 권시의 말을 나에게 고하기를 "국장(國葬)이 임박하였으니 어찌 교송례(郊送禮)를 행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병이 깊지 않으면 어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겠습니까. 지난날 명종(明宗)의 국상을 치를 적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은 지위가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지만 국장을 치르기 전에 몸을 추슬러 지레 물러났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었는지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필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제가 비록 감히 비길 수 없지만 이처럼 병이 위독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이미 굳혔으므로 억지로 머무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11월 4일김중호(金仲浩) 군이 학문하는 방법과 기질의 병통에 대해서 묻기에 답하기를 "그대는 자품이 온유하고 기상이 안온하니 그 덕을 향상시키는 공부에 대해 굳이 비루한 나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근엄하고 온후한 사람은 혹 과단성 있고 용맹하게 나아가는 공부가 부족하기도 하다. 자양(紫陽 주희(朱熹)) 선생이 일찍이 '외(畏)' 자로 '경(敬)' 자를 풀이하였는데,4) 주일(主一)5)하는 방법은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근래 대략 그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이 마음을 다잡고 흐트러트리지 않아 해이하고 나태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모두 이 '외(畏)' 자의 힘이다.……"라고 하였다.12월 26일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땅에 화기(和氣)가 많아 동산의 송죽(松竹)이 더욱 맑고 그윽하였다. 울타리의 닭도 울지 않고 마을의 개도 짖지 않아 세속의 번뇌와 더러운 누가 전혀 없고 확연히 천고(千古)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창문은 밝고 깨끗하며, 책상은 정결하여 두서너 동자(童子)와 시서(詩書)를 담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어서 뒷동산으로 나가 솔숲 가 대숲 길을 왕래하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어린아이에게 막걸리 한 잔을 따를게 하고 파하였다. 【自己丑止庚寅。 又自己亥止乙巳。】己丑。 七月十九日。 丙子以恩命發洛行。 蓋國有大慽。 不敢退坐。 將奔哭肅謝。 故扶病發行。八月五日。 壬辰曉。 就次幕所。 平明入門。 行奔哭禮四拜。 就歇賓廳。 日高辰時。 行肅拜禮。 夕以病甚。 呈旬狀于兵曹。 林參判墰羅密陽緯素皆喩余以留京之意。 答曰: "臣子非不欲事君。 其於病篤曠職何? 六日權佐郞諰送書問答之。 是時此人以逸士。 特命招來。 亦以病呈旬云。" 午金澄又以權佐郞之言告余曰: "國葬將迫。 何不郊送而退?" 答曰: "病若不篤。 安有退歸之志哉? 昔者明廟之喪。 退溪李先生位至宰列。 而國葬之前。 奉身徑退。 當時意見。 雖未詳知。 然必有所重在此故也。 今某小子。 雖不敢擬。 病革若此。 歸意已定。 不能强留云云。"十一月四日金君仲浩問爲學之方及氣質之病。 答云: "賢者資稟溫柔。 氣象安穩。 其於進德。 必不須於陋劣者。 然謹厚之人。 或不足於剛毅勇進之功。 紫陽先生嘗以畏字訓敬字。 主一之法。 莫此爲先。 近者粗得其方。 使此心束而不散。 不得入於解弛怠惰之地者。 都是畏字力也云云。"十二月二十六日天無一雲。 地多和氣。 園林松竹。 更覺淸幽。 籬鷄聲靜。 巷犬不吠。 絶然無塵煩汚濁之累。 廓然有獨立千古之想。 紙窓明淨。 案書淸正。 與數三童子。 談講詩書移時。 仍出後原。 往來松邊竹逕。 至晩而還。 使小兒酌醪一觴而罷。 국상이 있어 기축년(1649) 5월 인조가 승하하였다. 분곡(奔哭) 임금이나 부모의 부음(訃音)을 듣고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순장(旬狀) 사직을 청원하는 문서를 말한다. 각 관아의 낭관이 사임을 원할 때는 열흘에 한 번씩 세 번 계속하여 제출하게 되어 있다. 자양(紫陽)……풀이하였는데 《심경(心經)》에 《주역》의 '경이직내(敬以直內)'를 논한 부분의 부주(附註)에 면재 황씨(勉齋黃氏)가 말하기를 "경을 주일무적이라고 한 것은 정자의 말씀이다. 그러나 스승인 주자께서 또 '경'이라는 글자는 오직 두려워함이 가장 가깝다고 하셨으니, '경'이란 이 마음이 숙연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敬者主一無適之謂, 程子語也. 然師說又以敬字惟畏爲近之, 蓋敬者, 此心肅然, 有所畏之名.]"라고 하였다. 주일(主一) 성리학의 핵심 개념 가운데 '경(敬)'을 말한다. 정이(程頥)는 "마음을 전일하게 가지는 것이 '경'이고 이리저리 옮기지 않는 것이 일이다.[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라고 하였다. 《近思錄 권4 存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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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1650) 庚寅 경인년(1650, 효종1) 4월 1일호사(胡使 청나라 사신)가 와서 혼인을 청하여 나라에서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6)을 시집보내기로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또 듣건대 호사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대제학 조경(趙絅)을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7) 나랏일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9월 23일기력이 달리고 정신이 피곤하여 안석에 기대 누워서 조카 김이상(金履相)에게 양손을 주무르게 하였다. 이어서 내 얼굴의 점을 속으로 헤아려 보니 32개였다. 내가 또 김이상의 얼굴에 난 점을 손으로 세어 보니 또한 32개였다. 마침내 기이하여 기록하였다. 대개 팔괘(八卦)가 세 번 변하면 그 수가 32이니, 어쩌면 감응한 것인가.10월 1일 신사(辛巳)일식이 있었다. 이날 듣건대, 나라에서 사대부 집안의 딸을 찾아내어 호청(胡淸)과 혼인하게 하였다고 한다. 수령이 사대부 집안 첩의 소생을 시집보내기로 하여 한밤중에 군졸을 풀어 갑자기 들이닥쳐 잡아가니 곡소리가 마을에 가득하였다. 나랏일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어찌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윤(閏)11월 19일한가로운 가운데 퇴계(退溪) 선생이 지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행장(行狀)을 읽었다. '맹자(孔孟),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덕과 재주'라는 구절8)에 이르러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과연 이와 같다면 사도(斯道)에 큰 뜻을 둔 선비가 모두 훌륭한 글을 후세에 남기는 정도에서 그칠 따름이란 말인가. 슬프고 슬프다. 이 행장을 읽고 정암이 후세에 남긴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포용하고 공손하여 모난 면을 드러내지 않고 혼연히 중화(中和)의 기상이 있으니,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다. 근세에 말을 잘하는 선비 중에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큰소리만 치는 자가 종종 있으니 어찌 정암의 경지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四月初一日聞胡使來請婚姻。 國家以錦林女子許嫁云。 又聞胡使安置領議政李景奭,大提學趙絅于白馬山城云。 國事至此。 臣子之心如何?九月二十三日氣神疲乏。 隱几而臥。 使侄子履相摩兩手。 仍默數余面上黑子。 蓋三十有二矣。 余又手點履相面痣。 亦三十有二矣。 乃奇而記之。 蓋八卦之三變者。 其數三十二。 豈其應耶?十月初一日。 辛巳日有食之。 是日聞國家搜括士族家女子。 許婚胡淸。 守令以士夫家孼産當之。 中夜發卒。 掩襲捕捉。 號哭之聲。 遍于閭里。 國事至此。 爲國家者。 寧不淚盡血繼?閏十一月十九日。閑中讀退溪先生所撰靜庵行狀。 至"孔孟程朱之德之才"一節。 不勝慨然之懷。 以爲果如是。 則士之有大志於斯道者。 皆可止於立言垂後而已歟? 悲夫悲夫! 讀此狀。 細觀其立言。 涵容遜順。 不露崖角。 渾然有中和氣象。 眞有德者之言也。 近世能言之士揚眉大言者。 往往有之。 豈能窺其涯涘歟? 금림군(錦林君)의 딸 의순공주(義順公主)이다. 청나라 구왕(九王)이 우리나라와 혼인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개윤(李愷胤)의 딸을 공주로 봉하여 보냈는데, 1650년에 청나라로 갔다가 1656년에 돌아왔고, 1662년에 죽었다. 호사가……하였다 백마산성(白馬山城)은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산 고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산성이다. 북쪽으로는 의주, 남쪽으로는 용천군(龍川郡)과 피현군 일대를 굽어볼 수 있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효종 초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북벌 계획이 탄로 나고 척화신을 처벌하라는 청나라의 요구가 거세지자 조경(趙絅, 1586~1669)과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을 이곳에 안치하였다. 맹자(孔孟)……구절 《退溪集 》권48 〈정암선생행장(靜庵先生行狀)〉의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덕(德)과 재주를 써서 왕도(王道)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텐데도 결국에 성취된 것은 교훈을 세워서 후세에 남기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夫以孔孟程朱之德之才, 用之而興王道, 猶反掌也. 而其終之所就, 不過曰立言垂後而止耳.]"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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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1659) 己亥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 5월 4일효종현인대왕(孝宗顯仁大王)이 승하(昇遐)하였다.5월 7일부음(訃音)이 이르자 즉시 본읍(本邑)의 객관(客館)으로 들어가 곡하였다. 부음을 들은 지 6일 째에 성복(成服)하였다.10월 25일궐문(闕門)에서 분곡(奔哭)하였다.10월 28일발인(發引)하였다. 다음 날 하관을 거행하였다.11월 1일동작진(銅雀津)을 건넜다. 밤에 과천(果川) 삼곡(三谷)에 투숙하였다. 듣건대, 지평 희중(希仲) 윤휴(尹鐫)가 와서 이웃 마을에 머문다고 하였다. 그의 훌륭한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찾아갔다. 진사 신경윤(愼慶胤)도 함께 와 있었다. 희중은 특지(特旨)로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선친의 묘소를 이장하는 일로 세 번 상소하여 체차되기를 청하고 좋은 묏자리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잠시 담소를 나눈 뒤에 희중과 마을 뒷산에 올라 경기의 산천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물녘에 헤어졌다.11월 26일내가 서용되어 군직(軍職)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성상의 은혜가 이에 이르렀으니 황송하고 감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12월 2일남평(南平) 수령이 조보(朝報)를 보내왔다. 그 가운데 "11월 1일에 상이 '이번 발인(發靷) 때 지방에 있는 이전에 벼슬한 관리 가운데 와서 모인 자를 일일이 서계(書啓)하도록 승정원에 분부하라.'라고 전교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었다.12월 5일승정원이 계달(啓達)하니, 전교하기를 "이 서계(書啓) 가운데 학업과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은 좌참찬 송시열(宋時烈)과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에게 물어 뽑아서 아뢰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때 좌참찬이 어떤 사유로 인혐하여 즉시 뽑아서 아뢰지 못하였다.12월 7일전교하기를 "우참찬은 병으로 즉시 서계(書啓)하지 않았으니 시기를 놓치는 것이 염려스럽다. 이조 판서의 서계를 먼저 써서 들이도록 분부하라."라고 하였다.12월 8일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 참판 이일상(李一相),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전 교리 이수인(李壽仁)은 시종신으로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사직하여 지조를 지키니 세상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사업(司業) 윤선거(尹宣擧)와 사업 윤원거(尹元擧)는 모두 실직(實職)이 있으므로 비록 원래 단자(單子)에 있던 이전 직함의 인원수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9)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다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 전 좌랑 신석번(申碩蕃), 전 좌랑 최휘지(崔徽之)는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곧장 6품으로 올렸습니다. 전 자의(諮議) 이상(李翔), 전 자의 송기후(宋基厚)는 일찍이 이미 강관의 직임에 제수되었습니다. 전 세마(洗馬) 김만영(金萬英)은 일찍이 자의에 의망된 적이 있고, 신석번(申碩蕃), 이상(李翔)은 더욱 뛰어난 사람입니다.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여기에서 뽑아 아뢴 사람은 다음번에 비록 결원이 없더라도 아울러 모두 부직(付職)하도록 분부하라."라고 하였다.12월 9일이조가 아뢰기를 "전교가 내렸습니다. 참상(參上)은 현재 실제로 결원이 있으니 즉시 의망하고, 참하(參下)는 궐원이 없는 곳은 우선 송서(送西)하여 주의(注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하라."라고 하였다. 이날 신석번(申碩蕃)은 사복시 주부에, 최휘지(崔徽之)는 활인서 별제에 제수되고, 이상(李翔)은 사직(司直)에, 송기후(宋基厚)는 사정(司正)에, 김만영(金萬英)은 사용(司勇)에 부직하였다고 한다. 성상께서 선비를 좋아하는 지극한 뜻을 숭상할 만하다. 다만 중전(中殿)께서 공주를 낳았다고 하니, 온 나라 신민들의 실망스러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12월 11일어떤 사람이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고 포의(布衣) 차림으로 와서 당상(堂上)에서 배알하였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그 이름을 물으니, 김구성(金九成)이라고 하였다. 유학(儒學)에 대해서 말하니 대략 대의가 통하였다. 음양술학(陰陽術學)과 자미지수(紫微之數)10)를 언급하였는데, 모두 그 뜻을 통달하였다. 거처하는 곳을 물으니, 본래 서울 사람인데 무장현(茂長縣) 해안에 우거한다고 하였다. 五月初四日孝宗顯仁大王昇遐。初七日。 訃至。 卽入哭于本邑客館。 第六日成服。十月二十五日奔哭于闕門。二十八日發引。 翌日下玄宮。十一月初一日渡銅雀津。 夜投于果川三谷。 聞尹持平鐫希仲來住隣村。 久聞其盛名。 而未得見。 故往訪之。 愼進士慶胤亦同來矣。 蓋希仲以特旨拜持平。 以遷卜其先親葬地。 三疏乞遞。 以求山來此云矣。 少話後。 與希仲登村後山。 望畿甸山川。 仍穩話。 日晩而別。二十六日聞余敍復軍職。 天恩至此。 惶感無言。十二月初二日南平主倅送來朝報。 其中有曰: "十一月初一日。 上傳敎曰: '今發靷時。 在外前朝官來會者。 一一書啓事。 分付政院。'"初五日政院啓達。 則傳曰: "此書啓中。 學業學行之人。 問于左參贊宋時烈吏判宋浚吉。 抄啓。" 是時參贊以事引嫌。 未卽抄啓。初七日傳曰: "右參贊以病未卽書啓。 失時可慮。 吏判書啓。 爲先書入事。 分付。"初八日吏判宋浚吉參判李一相參議趙復陽啓曰: "前校理李壽仁。 以侍從之臣。 恬退守志。 爲世所稱。 司業尹宣擧司業尹元擧皆有實職。 故雖不出於元單子前銜1)之數。 而曾於榻前備盡陳達。 前佐郞申碩蕃。 前佐郞崔徽之。 曾於先朝直出六品。 前諮議李翔前諮議宋基厚。 曾已授講職。 前洗馬金萬英。 曾擬於諮議望。 而申碩蕃李翔。 尤其表著者也。 惶恐敢啓。" 傳曰: "此抄啓之人。 後次雖非闕。 竝皆付職事。 分付。"初九日吏曹啓曰: "傳敎矣。 參上則方有實闕。 卽爲擬望。 而參下則卽無闕處。 姑爲送西注擬如何?" 傳曰: "依啓。" 是日申碩蕃除司僕主簿。 崔徽之除活人別提。 李翔付司直。 宋基厚付司正。 金萬英付司勇云。 聖上好士之至意可尙矣。 但聞中殿誕生公主。 一邦臣民之缺望。 不可言不可言。十一日有人冐蔽陽笠著藁鞋衣布衣。 來拜于堂上。 坐良久。 問其名。 則金九成。 語及儒學。 粗通大義。 語及陰陽術學紫微之數。 皆通其意。 問其所居。 則曰"本以京人。 寓居于茂長海曲云。" 비록……않았지만 원문은 '雖不出於元單子前御之數'인데, 문맥을 살펴 '御'를 '銜'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자미지수(紫微之數) 점술에 관한 용어이다. 자미(紫微)는 별의 이름으로, 제왕에 해당하는 성좌(星座)이다. 銜 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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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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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경자년(1660) 庚子 경자년(1660, 현종1) 2월 6일 소양(少陽)퇴계(退溪)와 고봉(高峯)이 주고받은 편지 몇 편을 읽고 개연(慨然)히 옛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대개 학자는 의리와 출처 사이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하여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바로 심문(審問), 명변(明辨)하는 우리 유가의 학문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근세에 세도(世道)가 사익만 추구하고 선비들은 사당(私黨)에 아부하니 편지를 주고받으며 심문하고 명변한 것을 지적하여 서로 공격하며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는 자가 드물다. 지금 이 편지를 읽고, 학통을 전수한 것을 탄복하여 여기에 기록한다.2월 20일 대양(大陽)종제(從弟) 서봉명(徐鳳鳴)이 우계(牛溪), 율곡(栗谷)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는 소[請從享文廟疏]〉 2도(度)을 소매 속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대개 호남(湖南) 유생들이 진청(陳請)하는 것으로, 하나는 전 직강(直講) 이기발(李起浡)이 지었고, 하나는 전 현감 최유지(崔猷之)가 지었다. 결국 최유지가 지은 것을 올렸다고 한다. 직강 이기발은 바로 일사(逸士) 이흥발(李興浡)의 아우이니,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난 것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최유지는 고 승지 최온(崔蘊)11)의 양자이다. 승지는 학행(學行)으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최유지는 현재 승지의 거상 중에 있다.3월 12일 소양(少陽)이문석(李文碩)이 와서 수학하였다. 이문석 군이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바로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 공의 외증손입니다. 공께서는 고행하며 학문에 힘쓰시다 거상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내부인(內夫人)께서 뵙기를 청하였지만 공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이는 거상 중에 부녀를 가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옛사람이 행실을 절제하는 엄정함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삼가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4월 3일 소양(少陽)이문석(李文碩)이 와서 수학하였다. 이문석 군이 전하기를 "부친이신 사군(使君)께서 서울에서 와서 말씀하기를 '주상(主上)께서 근래 안질을 알아 증세가 매우 나빠 사물을 보지 못하시니 대신과 경상(卿相) 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편전(便殿)으로 들어가 절하였는데 상께서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시자 여론이 애태우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의관 윤후익(尹後益)이 세 차례 침을 놓자 불현듯 나았다고 하니, 신민의 기쁨과 경사가 지극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기를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12) 「대왕대비는 선왕에 대해서 이미 적손(嫡孫)이 승중(承重)한 것이 되니 마땅히 참최(斬衰)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지금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은 예가 아니다. 주공(周公)의 제도로 말하면 기년의 상은 제후에게는 없으니 대왕대비가 기년복을 입는 것은 더욱 예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서(尙書)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허목이 잘못되었다고 논변하였지만 비답이 오래도록 내리지 않아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국상 초기에 송시열과 송준길이 '선왕이 비록 양자로 들어가 중통(重統)을 이었지만 세적(世適)이 아니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대왕대비가 이미 삼년상의 복을 입었으니, 예에는 적자(適子)가 둘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지금 다시 참최(斬衰)를 입는 것으로 거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왕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13)5월 4일 대음(大陰)4경(更) 초점(初點)에 객관으로 들어갔다. 태수(太守) 및 참봉 서행(徐荇)과 관아의 뜰에 모여서 곡하였다. 이날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대왕대비의 복제(服制)를 논하였는데 언관이 그 죄를 쟁론하여 율문에 따라 처분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예조에서 해당 관부에 공문을 보내 "소상(小祥) 뒤에 조정의 사대부는 연포(練布)로 사모(紗帽)를 싸고, 이어서 대(帶)를 띠고 이어서 최복(衰服)을 입으며, 문신과 무신 당상의 아내는 길복(吉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또다시 공문을 보내 "사대부의 정복(正服)은 칠승(七升)의 생포(生布)로 단령의(團領衣)를 만들고 의대(衣帶)는 숙마 (熟麻)로 착용하라.……"라고 하였다.능주(綾州)의 좌수(座首) 이위(李魏)가 61세로 이번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호창(呼唱)하는 4인을 거느리고 피리를 불고 고을 거리로 들어갔다고 한다. 목사 이성징(李聖徵)이 호창하는 4인을 잡아 옥에 가두고 말하기를 "나라에 국상이 나서 아직 연제(練祭)도 지내기 전인데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편안한가?"라고 하니, 이위는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고 하였다. 듣고는 한 번 웃을 만하였다. 시류와 관련 있으므로 기록한다.5월 24일 대양(大陽)정승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졸하였다고 한다. 공은 바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장자이니, 거의공신(擧義功臣)14)으로 인조(仁祖)를 섬기고 세 조정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정승의 반열에 올랐지만 살림살이가 청빈하여 일개 한사(寒士)와 같았다고 한다.5월 25일 대음(大陰)송준길(宋浚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대개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올린 상소에 비난하는 말이 있었는데, 상소가 올라가자 즉시 물러났고 윤선도도 삼수(三水)에 안치(安置)되었다고 한다.한성부 좌윤 권시(權諰)가 조정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대개 윤선도의 상소가 올라가자 양사(兩司)에서 서로 소장을 올려 처벌하기를 청하니, 권 공도 차자를 올려 윤선도를 감언지사(敢言之士)라고 논변하였는데, 양사가 인혐하였으므로 권공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8월 28일 신해(辛亥) 대양(大陽)이문석(李文碩)이 서울에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또 장령 허목(許穆)이 올린 〈의례상복도(儀禮喪服圖)〉를 보냈다.11월 23일 소양(少陽)장령 허목(許穆)이 외직인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자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12월 16일 대음(大陰)이날 저물도록 정좌(靜坐)하니 마음과 기운이 화평하였다. 밤이 되어서 자질구레한 일로 화가 치밀어 올라 한밤중까지 심기가 불편하였는데 억지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억제하자 편안해졌다. 이어서 생각해 보니, 몸의 지나친 행동은 마음의 지나침으로 말미암고, 마음의 지나침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으로 말미암는다. 형기의 사사로움은 모두 귀로는 좋은 음악을 듣고자 하고, 눈으로는 여색을 탐하고자 하고, 입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고, 사지는 편안하고자 하고, 물욕은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데에서 나온다. 다섯 가지 천성적인 욕심15)은 외물에 감응하여 마음에 동하고, 마음에서 생겨 일에 드러난다. 하루 동안 마음이 고요한 때는 적고 동요하는 때는 많으니, 이 마음이 어떻게 그 바름을 얻겠는가. 나는 매일 자시(子時)부터 오시(午時)까지, 오시부터 자시까지 이 마음을 점검하여 밖으로 달아나지 않게 한다. 하지만 이따금 잠깐 사이에 갑자기 정욕(情慾)에 끌려가니 일이 지난 뒤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내 기질의 병통은 늘 나약함에 있으니, 아는 것은 혹 민첩하지만 지킴이 굳건하지 못하여 낭패하는 근심이 있기까지 하는 것이 매양 이와 같다. 하루 동안 심지(心志)가 발현하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고 자기만 홀로 아는 것이니, 마음의 선악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는다.12월 17일 무술(戊戌) 대음(大陰)일찍 일어나 고요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못을 반성하니 부끄러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생각건대, 아침에-원문 1, 2자 결락-얼굴을 씻었다. 이어서 스스로 생각하니, 사람이 날마다 세수하는 것은 얼굴에 때가 끼었을까 두려워해서이다. 이 마음을 옮겨서 날마다 짐짓 마음에 때가 끼었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얼굴의 때는 사람들이 반드시 보고 마음의 때는 신이 틀림없이 안다. 더구나 마음속에 싹트는 것은 반드시 일에 드러나게 마련이니 사람도 끝내 속일 수 없다.낮에 해가 창에 비쳤지만 한기가 여전히 매서웠다. 이어서 생각하기를, 겨울의 해나 여름의 해나 같은 해인데, 한기와 열기가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계절의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어서 생각건대, 사람의 본성은 지극한 선을 함께 타고 났지만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다름이 있는 것은 기질이 그렇게 한 것이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기질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기질이 준수한 자는 대체로 자잘한 일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이 많고, 기질이 용렬한 자는 두려워하고 조심하기 때문에 잘못이 적다. 내가 준수한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잘못이 많은 것은 대체로 혈기가 거친 데서 생기는 잘못이니, 경계할 줄 알아야 하므로 기록한다.낮에 윤선삼(尹先三)이 와서 수학하였다. 책 한 줄을 읽는데 음을 세 번이나 잘못 읽었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마음이 경(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흩어졌는데도 거두어들이지 못하므로 마음과 입이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심경(心經)》을 보았는데 〈극기복례장(克己復禮章)〉에 이르러 스스로 해석하기를 "예를 회복하는 곳이 어떻게 인(仁)이 되는가? 인이라는 것은 곧 천리(天理)이니, 자신의 사욕을 이기면 곧 천리이므로 예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인이다. 그러므로 '예의(禮儀) 300가지와 위의(威儀) 3000가지 가운데 한 가지 물건도 인이 아닌 것이 없다'16)고 한 것이다." 하였다.이날 오전에 불편했던 심기는 오후가 되자 마음이 화평하고 기운이 편안해졌다.12월 18일 기해(己亥) 소음(少陰)새벽 이후가 되어서야 심기가 조금 편안해졌으니, 야기(夜氣)17)를 잘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동짓날에 관문(關門)을 닫는 것18)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二月初六日少陽。 讀退溪高峯往復書數篇。 慨然不勝愴古之懷矣。 蓋學者於義理出處之間。 有所疑晦。 則往復論辨。 必歸於正。 乃吾家審問明辨之學。 不可已者也。 近世世道偏私。 士阿所黨。 往復問辨。 指爲相攻。 不爲按劍相視者。 幾希矣。 今讀此書。 感歎伊塞。 而記于此。二十日大陽。 從弟徐鳳鳴。 袖示牛溪栗谷請從享文廟疏二度。 蓋湖南儒生等所陳請。 而一卽前直講李起浡所製。 一前縣監崔猷之所製也。 竟用崔製云。 直講李君卽逸士興浡之弟。 以恬退著名。 崔卽故承旨蘊之繼後子也。 承旨以學行名世。 猷之方在承旨憂艱中。三月十二日少陽。 李文碩來學。 李君自言"渠乃恥齋洪公仁祐之外曾孫也。 公苦行力學。 居憂而歿。 將歿也。 內夫人請見。 公不許而歿。 蓋以居憂不可近婦女也"云。 古人制行之嚴正終之愼如此。四月初三日少陽。 李文碩來學。 李君傳言: "乃翁使君自京來言'主上頃患眼疾。 症勢極不吉。 不能視物。 大臣卿相。 憂憫罔極。 靑平尉沈益顯入拜便殿。 上不能辨視其爲誰。 輿情遑遑。 罔知攸爲。 醫官尹後益三度下鍼。 廓然復常云。 臣民之喜慶至矣'。 又云'掌令許穆上疏。 言「大王大妃於先王。 旣爲嫡孫承重。 則當服斬衰三年之服。 而今服朞非禮也。 周公之制。 朞之喪。 諸侯絶。 則大王大妃之服朞。 尤爲非禮云云」。 宋尙書浚吉上疏。 論許公之非。 批敎久未下。 不知結末之如何'云。" 蓋國喪初。 兩宋以爲'先王雖入系重統。 非世適。 而昭顯之喪。 大王大妃旣服三年之喪。 則禮無二適固也。 今不可復擧斬衰'云。 故大王大妃服朞服云。五月初四日大陰。 四更初點。 入于客館。 與太守及參奉徐荇。 會哭于館庭。 是日聞前參議尹善道論大王大妃服制。 言官爭論其罪。 請案律處置云云。 禮曹行會: "小祥後。 朝士大夫。 練布裹紗帽。 仍垂帶。 仍衰服。 文武堂上妻。 從吉服云云。" 俄而又改行會: "士大夫正服。 以七升生布製團領。 衣帶用熟麻云云。" 聞綾州座首李魏六十一歲。 得忝今榜進士。 率呼唱四人。 吹管入于州街。 牧使李聖徵。 執呼唱四人囚于獄曰: "國有大慽。 凶服未練。 作樂遊街。 於汝安乎?" 李惕赧而歸云。 聞可一笑。 又關於時。 故記之。二十四日大陽。 聞李政丞延陽府院君時白卒。 公卽延平之長子。 以擧義元勳事仁祖。 歷三朝。 而位躋台鼎。 家業貧淸一寒士云。二十五日大陰。 聞宋公浚吉。 退歸田園。 蓋以前參議尹公善道疏中。 有指斥之語。 疏入卽退。 而尹公亦安置三水云。聞漢城左尹權公諰退朝。 蓋尹疏旣入。 兩司交章請罪。 權公亦上箚。 論尹公以敢言之士。 兩司引嫌。 故權公亦退歸云。八月二十八日 辛亥大陽。 李文碩自京送書相問。 又遺許掌令穆所上《儀禮喪服圖》。十一月二十三日少陽。 聞掌令許穆。 出拜三陟府使。 識者惜之云。十二月十六日大陰。 是日終夕靜坐。 心氣和平。 至夜仍細瑣底事。 忿懥之念起。 至夜分。 心氣不平。 强加寬制而平。 仍念身之過動。 由於心之過動。 心之過動。 由於形氣之私。 形氣之私。 皆出於耳之欲聲。 目之欲色。 口之欲味。 四肢之欲安佚。 物慾之欲快情。 五性2)之欲。 感於外。 而動於中。 生於心而發於事。 一日之內。 心靜時小。 動時多。 此心安得其正哉? 余於每日。 自子至午。 自午至子。 點檢此心。 不使外馳。 而往往造次之頃。 忽爲情慾引去。 事過之後。 不覺慚忸。 而余氣質之病。 常在於懦弱。 知之或敏。 而守之不固。 以至狼狽之患。 每每如是。 日間心志之發。 人所不見。 而已所獨知處。 一念之善惡。 隨筆箚記。 以爲警省之資焉。十七日。 戊戌大陰。 早起靜坐。 平心省愆。 有不勝愧赧底氣。 意朝-缺-頮面。 仍自念人之日日洗面。 恐面有垢也。 移此心。 日日且恐心上有垢可也。 面上有垢。 人必見之。 心上之垢。 神必知之。 况萌於心者。 必顯於事。 則人亦終不可欺也。 午日當窓。 寒氣猶慄烈。 仍念冬日之日。 是夏日之日。 而寒熱判異。 何也? 以其時氣之使然也。 仍念人之性。 同得至善而有賢愚者。 氣質之使然也。 學者當於氣質上用工可也。 氣質俊邁者。 多不拘小節。 故多過。 氣質之庸下者畏守。 故小過。 余非俊邁之質而多過者。 大抵其氣麤之過也。 不可不知戒。 故記之。 午尹先三來學。 讀過一行書。 三失字音。 余曰: "是心不敬之故也。 此心放散而不克收斂。 故心口不相應矣。" 又看《心經》。 至克己復禮章。 自解曰: "復禮處。 何以爲仁歟? 仁者便是天理。 克己之私。 則便是天理。 故復禮是仁也。 故曰: '禮儀三百威儀三千。 無一物之非仁也。'" 是日午前。 心氣有交戰之象。 午後心和氣平。十八日。 己亥少陰。 平朝之後。 心氣小斂。 以夜氣之不善養故也。 所以聖人至日閉關。 可不愼哉! 최온(崔蘊) 1583~1659.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淑), 호는 폄재(砭齋)이다. 남원 출신이다.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1659년 효종(孝宗)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두고 허목 등의 남인이 삼년복설(三年服說)을 주장하며 올린 상소를 이른다. 대개……것이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한 뒤에 기해예송(己亥禮訟)이 발생하였다. 효종의 국상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즉 조 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은 기년복을 주장했다. 효종이 차남인 데다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사망했을 때 조 대비가 이미 장자(長子)에 해당하는 상복인 삼년복을 입었으므로 기년복이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이에 허목, 윤휴 등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조 대비가 삼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고 맞섰다. 거의공신(擧義功臣)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들을 말한다. 정사공신(靖社功臣)이라고도 부른다. 다섯……욕심 원문은 '五音之欲'인데, 문맥을 살펴 '音'을 '性'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예의(禮儀)……없다 《근사록》 〈도체(道體)〉에서 장재(張載)가 "하늘이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리지 않음은 인이 일의 본체가 되어 있지 않은 데가 없는 것과 같다. 예의 300 가지와 위의 3000가지 가운데 한 가지 물건도 인 아닌 것이 없다.[天體物不遺, 猶仁體事而無不在也. 禮儀三百威儀三千, 無一物之非仁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야기(夜氣) 한밤중의 깨끗하고 맑은 기운으로, 밤중에 고요히 생각할 적에 생겨나는 양지(良知)와 선념(善念)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야기가 보존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하였다. 성인은……것 《주역(周易)》 〈복괘(復卦) 상(象)〉에 "우레가 땅속에 있는 형상이 복괘이니, 선왕이 보고서 동짓날에 관문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게 하며 임금 자신은 사방을 순시하지 않는다.[雷在地中, 復先王以, 至日閉關, 商旅不行, 后不省方.]"라고 하였다. 性 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신축년(1661) 辛丑 신축년 1월 9일 기미(己未) 소양(少陽)윤보(尹保) 씨 형제가 사는 봉산(蓬山)의 산실(山室)을 방문하였다. 윤공(尹公)과 형 윤경(尹儆)이 선영(先塋) 부근에 집을 지었는데 형제가 처자식을 데리고 터를 잡아 한 집에서 서로를 대하고 마음껏 즐기며 동문(洞門)을 나가지 않은 지 지금 10여 년이고, 나이도 70세이다. 두 사람이 비록 옛날 성현(聖賢)을 배워 실천하는 선비는 아니더라도 지행(志行)의 고상함은 숭상할 만한 점이 있다. 내가 방문하니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산의 흥취가 자못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점이 있었다.1월 11일 신유(辛酉) 소양(少陽)수령을 찾아갔다. 수령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였다. 상이 재해를 입은 해읍(海邑) 백성들의 올해 전세(田稅)을 감면해 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산읍(山邑)은 상세포(上細布), 기인목(其人木),19) 방물(方物) 등의 부세를 감면해 주었다고 한다. 남평(南平)은 비록 산읍에 속하지만 재해는 해읍과 차이가 없었으므로 본도의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해읍과 함께 거행하기를 별도로 계청하였는데, 상이 처리하라고 해당 조(曹)에 내리니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반대하는 내용으로 아뢰자, 백성들이 원망하였다고 한다.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집에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수령이 또 말하기를 "내가 부유한 백성의 곡식을 끌어 모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이 났는데 별도로 담당 약정(約正)20)의 무리가 관청의 명령을 빙자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사사로이 거두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징계하여, 바야흐로 곡식을 찾아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명을 혁파하고자 합니다."라고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부유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나누어 주고, 죽음을 앞에 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또한 이웃 마을이 서로 구제하는 의리입니다. 지금 약정이 지나친 짓을 한다고 하여 명령을 폐한다면 목이 멘다고 먹기를 그만두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며, 군주가 어려 온 나라가 불안에 싸여 있고, 세신(世臣)이 연달아 죽으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령이 말하기를 "상께서 부세를 견감한 것은 백성을 위하여 돌보아 주는 방도가 지극합니다. 다만 16개 관사에 바치는 공물은 한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막론하고 일정하여 더하고 빼는 것이 없습니다. 올해의 전결(田結)은 반 넘게 손실이 났지만 각 관사에 바치는 공물은 전례대로 감해 주지 않아 수령은 변통할 길이 없기에 굶주린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니, 근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보고하여 변통하게 할 수 없습니까?"라고 하니, 말하기를 "감사가 비록 계청(啓請)하더라도 해당 관사에서 으레 반드시 반대하는 내용을 아뢰니,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전(田) 1결(結)당 미(米) 1말을 세금으로 거두고, 1년이 지나더라도 다른 역을 지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주(海州)에 그 고사가 있어, 율곡(栗谷)이 건의하여 전국에 시행하기를 청하였지만 끝내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대동(大同)은 1결당 13말인데 또한 국가의 재용(財用)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니, 수령이 말하기를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2월 8일 무오(戊午) 바람이 차가웠다낮에 담양(潭陽)에 사는 여익길(呂益吉)이 찾아왔다. 여익길이 말하기를 "담양에 사는 사인(士人) 유진석(柳震碩)은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의 증손입니다. 올해 나이가 20남짓인데, 고학(古學)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이 은거한 곳에 집을 지어 글을 읽고 학문을 하며 산 어귀를 나오지 않은 지 지금 수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사람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 말로 인하여 기록한다.2월 27일 정미(丁未) 소양(少陽)삼학재(三學齋) 유생들이 삼학재규의(三學齋規儀)를 써 주기를 청하니, 마침내 24조(條)를 지어서 주었다.【〈경의설(經義說)〉에 자세히 보인다.】2월 28일 무신(戊申) 소양(少陽)나는 봄여름이 되면 으레 상기증(上氣症)을 앓곤 한다. 정신이 혼미하고 입이 마르고 몸이 피곤하며, 머리가 무겁고 다리가 피로한 것 등 갖가지 좋지 않은 증상들이 나타나니 매우 근심스럽다. 연전에 수양하는 요결(要訣) 1책을 정헌(靜軒) 고공(高公) 순후(循厚)의 옛 별장에서 구하여 그 비법을 시험하였는데, 올해는 기운이 자못 조금 편안하니 그 효과를 본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몸 상태를 살펴보고 이어서 질병을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기록한다.정헌은 바로 나의 처 외조부 고순후(高循厚)이니,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셋 째 아들이다. 예학(禮學)에 정밀하였으며, 기상이 질박하고 고풍스러우며 행실이 단정하고 엄숙하니, 실로 옛날의 학자이다. 내가 젊어서 그 문하에 나아가 보고 느낀 것이 실로 많았다. 그런데 어느덧 20년이 지나 귀밑머리가 세려고 하고 병들어 쓸모없고 게으른 습성 탓에 조그마한 성취도 전혀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긴 탄식이 나온다.공은 관직이 형조 정랑에 이르렀다. 72세의 나이인 경진년(1620, 인조18) 2월 10에 졸하였다.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가난해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치관(緇冠)에 거친 삼베옷 차림으로 보리밥을 먹고 초가집에 살며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지만 즐거워하며 근심하지 않았다. 조정의 신료가 앞 다투어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이 내렸지만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위해 힘을 다하려는 뜻을 품고 사인(士人) 안방준(安邦俊),조평(趙坪)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바야흐로 나라의 환란에 달려가 순절하고자 하였으니, 사의(辭義)가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이윽고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와 종신토록 편안하고 고요하게 지내며 말소리와 얼굴빛에 동요가 없어 도를 지키다가 죽었다. 아, 도가 있는 선비가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궁벽한 곳에 깊숙이 거처하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세상에 그의 지조를 아는 자가 없어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탄스럽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감개가 일어 여기에 기록한다.2월 29일 기유(己酉) 대음(大陰)고요히 앉아 종일 책을 보다가 사람의 병통은 모두 기질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기(氣)의 죄과를 굴복시켜 탁한 기를 맑게 하고, 치우친 기를 바르게 하며, 들뜬 기를 고요하게 하고, 급한 기를 느리게 하며, 게으른 기를 부지런하게 하여 치우친 바에 따라 한결같이 중도에 알맞게 한다면 기가 중도에 알맞아 성(性)이 자연히 그 중도를 회복할 것이다. 내 기질의 병통은 매양 혼미하고 유약하며 게으르고 혼탁함에서 생기는데, 또 세밀하지 않고 거칠어서 혹 화락하면 나쁜 곳으로 빠지기 쉽고, 조급하면 난폭해지기 쉽다. 양부(兩斧)21)의 해로 말하면 또한 온갖 상념이 일어남을 면하지 못한다. 지금 즐겨 마시던 술은 끊은 지 몇 년이 되었다. 여색을 멀리 하라는 경계는 비록 매양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하게 공부하더라도22)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일어나는 상념은 혹 마음에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모두 기에 부림을 당한 것이니, 이로부터 기어코 맹렬하게 반성하고 통렬하게 끊어야 한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한다.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술시(戌時)에 지진이 났다. 한밤중까지 비가 그치지 않았다. 봄에 비가 자주 오는 것은 농부들이 꺼리는 바이고, 지진의 변고는 《춘추(春秋)》에 기록된 것이니,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는가.3월 17일 병인(丙寅) 대음(大陰)윤숙(尹俶)이 태수의 말을 전하기를 "이렇게 큰 기근을 당하였는데 16사(司)에 바치는 공물(貢物)은 조금도 견감해 주지 않습니다. 제용감(濟用監)의 정포(正布)를 현재 실어다 바쳐야 하는데 본현(本縣)은 재결(災結) 외에 남은 것이라곤 겨우 200부(夫) 뿐인데 평년에 바치는 공물의 원래 수량을 그대로 적용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고갈되어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백성들의 정장(呈狀)으로 인하여 감사에게 전보(轉報)한 다음 입계(入啓)하여 우선 가을이 되면 실어다 바치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문구를 짓기 어려우니, 일전어(一轉語)23)를 내려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말단 관리라도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줄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고통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다른 말로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정장의 글을 지어 보냈다.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무등산(無等山)에 제사 지내기 위해 광주(光州)에 왔다고 하는데, 민간에서 역병이 돌기 때문에 와서 제사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3월 18일 정묘(丁卯) 소음(少陰)윤선기(尹先夔),문만욱(文晩郁)이 찾아왔다. 능주(綾州) 사인(士人)과 본 고을 사인들이 웅점사(熊岾寺)에 모여 도내와 장흥(長興)에 통문을 돌렸다고 한다. 이는 장흥 사람 김광원(金光遠)24)이 영천서원(靈川書院)에 배향되자 여론이 김광원을 비난하여 서원을 중수할 적에 그대로 위판(位板)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문치욱(文致郁),이단(李漙) 등이 먼저 통문을 돌리자, 김광원의 자손도 생원(生員) 조덕길(曺德吉)에게 부탁하여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위판을 훼손하는 것은 의리가 아님을 알렸다. 당시 배향하는 의론은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먼저 꺼냈으므로 우산의 자손들이 능주 사인에게 권면하여 통문을 돌려 원통함을 호소하였다고 한다.내가 일찍이 그 중도를 잡아 논하기를 "김공의 출처와 언행은 내가 비록 전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감히 함부로 의론하지 못하지만, 서원의 이름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니 반드시 오도(吾道)에 공이 있고 사문(斯文)에 신망을 받아 한 나라의 종유(宗儒)가 되며 백대의 사표가 되어 사림이 흠모하고 공론이 일제히 일어난 뒤에 사당을 세워 영령을 모셔야 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도학의 선정(先正)을 높이고 한편으로는 유림의 원기를 진작하여 백대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고 천하 사람들에게 성대하게 보여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한번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조금 엄격한 행실이 있다고 하여 그 자손과 친족들이 한 고을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갑자기 향사(享祀)하자는 의론을 내어 마침내 높다란 건물을 세운다. 아첨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거늘 온 세상이 모두 다 이와 같다. 저가 말하는 선유(先儒)가 비록 도덕은 진현(眞賢)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예의염치에 관한 생각은 필시 일반 사람보다 뛰어날 것이니, 행여 죽은 뒤에 지각이 있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으며, 어찌 예에 맞지 않는 제사를 흠향하겠는가. 더구나 풍속이 날로 나빠지고 사풍(士風)이 경박해져 봄가을로 제사 지내는 것을 향현(享賢)이라고 하면서 묘우(廟宇)에 모여 종일 실컷 마시고 신나게 떠들며 방자하기 그지없다. 이로 인하여 날마다 다투고 갑자기 원수가 되니, 말류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세도(世道)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가 만회하여 폐단을 깨끗이 씻어 버리겠는가. 슬프도다."라고 하였다.저녁에 삼학재(三學齋)에서 묵었다. 생도 30여 인과 함께 묵었는데, 새벽닭이 처음 울 때 생도들이 일어나 강학하니 자못 인재를 기르는 즐거움이 있었다.3월 28일 정축(丁丑)문 앞 및 대천(大泉), 소천(小泉), 음천(陰泉), 양천(陽泉) 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 일을 주관한 자는 을생(乙生)과 돌이(道乙伊) 두 어린 남자 종이다. 네 곳의 천(泉)과 언덕 가에 심은 것이 모두 30여 그루이다. 어느 때 녹음이 길에 우거져 원림(園林)에 은은히 비춰 내 대문을 보호하여 황홀하게 바람이 불고 달이 떠오르는 감흥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게 한다.나는 젊어서부터 심하게 산수를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있었다. 하나의 산이나 돌, 원림이나 시내의 승경을 보면 날이 저물어도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돌아온 지 몇 달이 되면 또한 어느새 마음이 끌리고 생각은 그곳에 있었다. 반평생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우환까지 겹쳐 아직 경치 좋은 곳을 얻어서 터를 잡고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 탄식할 만하다. 비록 그렇지만 교외의 전원은 또한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몸을 숨기고 세상을 버린 마음을 깃들일 수 있다. 지금 새로 지은 집은 비록 산수의 승경은 없지만 교외의 들판과 냇물이 흐르는 시내를 잘 가꾸어 준다면 아마 달빛 아래 호미를 메고 돌아오는 흥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전(民田)이 섞여 있어 구입할 만한 돈이 없고 풍속도 좋지 않다. 무성한 숲 높은 산을 늘 그리워하여, 새가 저녁이면 숲으로 돌아가듯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큰 은자(隱者)는 성시(城市)에 숨는 법이니,25) 진실로 나의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면 참으로 얻는 묘미가 절로 있을 것이고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 하지만 돈독하게 믿고 의심이 없는 경지로 말하면 저 산수도 일개 외물일 따름이니 어찌 그 속에 마음을 얽매이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기록하여 스스로 경계한다.4월 9일 무자(戊子)본 고을 수령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로 인하여 대부분의 불공정한 것을 제거하였다고 한다. 올해의 기근은 전고에 없던 것으로, 관문(官門)에서 굶주림을 호소하는 자가 날마다 수백 명이었다. 관도(官道)를 메워 오열할 정도인지라 태수(太守)가 10일에 한번 창고의 문을 열어 구휼하기로 하였다. 관정(官庭)에 장막을 설치하고 죽을 끓여 주린 백성을 먹이니, 와서 먹는 주린 백성이 날마다 300여 명이었다. 미리 태장(太醬) 70여 단지를 마련하고 해채(海菜) 100여 섬을 사다가 국을 끓여 먹이니 주린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또 양쪽 대로 가에 승려들로 하여금 장막을 설치하여 죽을 끓이게 하고 다른 고을에서 경내로 들어오는 유민(流民)을 진휼하여 살리니,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무수한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또 멀리 관문까지 오지 못하는 농민을 염려하여 직접 곡식을 싣고 가서 구휼하니 고을 백성들이 고을 원의 은혜에 대해 칭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수가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였으니, 태수는 바로 이정(李晸)이다.4월 11일 경인(庚寅)하늘에 구름이 일어 가랑비가 내리려 하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초목의 가지와 잎이 모두 메말라 하늘로 곧장 뻗어 마치 우로(雨露)의 은택을 받고 싶어 하는 듯하였다. 자세히 그 정경을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발하는 뜻을 일으키게 하였다. 지각이 없는 식물이지만 또한 음양이 서로 만날 때 감응하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이렇게 움직이고 지각이 있어 하늘에서 성명(性命)을 받은 존재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날 영춘재(迎春齋)에 앉아서 아이종에게 소양천(小陽泉)의 물을 길어오게 하여 솔잎을 타서 한 그릇을 마시자 정신이 나고 자못 상쾌해졌다. 나는 평소 병이 많아 방서(方書)를 탐구하여 음식을 조절하고 약물(藥物)을 복용하며 정신을 수양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솔잎을 복용하는 법을 익혀 복용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오늘 흥취가 있음을 깨달았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한다.이날 빈 재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이 적막하였다. 봄새들은 지저귀며 처마를 따라 둥지를 찾느라 기둥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앞산 언덕에는 나물 캐고 소 치는 아이들이 단가를 부르고 경쾌하게 웃으면서 이리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농부와 촌로는 소를 끌거나 호미를 메고 들밭과 수풀 사이를 찾아가니, 이 사이에 실로 참뜻이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흥이 일어났다. 인하여 일어나 냇가를 소요하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오니 빈집은 적막하였다. 봄날 낮에 몇 권의 역사서가 솔바람에 이리저리 펄럭거렸다.4월 14일이날 남교(南郊) 정사(精舍)의 지붕에 이엉을 이었다. 뜰에 무성하게 우거진 매화의 가지를 직접 치고, 동자(僮子)는 마당을 쓸고 어린 여종은 집안 청소를 하였다. 집에 먼지가 없고 초가집이 정결한 가운데 고요히 서책을 보니 더욱 맛이 있었다. 다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달파 사방에는 시름뿐이니 전원의 즐거움은 또한 얻기 어려울 듯하다. 때때로 분수를 모르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이날 밤 절구 한 수를 입으로 읊어 이루었는데 "시끄럽게 우는 개구리들 내 마음을 알까 보랴[亂叫羣蛙說箇心]"라는 구절이다. 대개 앞 교외의 논을 새로 갈아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곤충은 지각이 없는 일개 미물일 따름인데 그 우는 소리는 울어 대다가 그치다가 하여 마치 음률이 있는 듯하였다. 더구나 개천과 수렁에서 자득하여 울적에 반드시 그 즐거움이 있으니, 개골거리는 소리는 또한 서로 그 심정을 말하는 듯하였다. 천기(天機)가 절로 동하여 소리를 내는 것은 또한 똑같은 마음이다. 그 사이에 진정한 의사가 암암리에 지각의 근원에서 서로 감응하는 곳이 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절로 읊조리곤 하니, 또한 사물과 내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른바 "성대한 천리가 상황에 따라 발현한다."라는 것이다.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어 또 절구 1수를 지었다. "화평한 기운은 마음을 즐겁게 하니 잠자리를 정돈하네.[調氣怡神整枕衾]"라는 구절이 있다.4월 15일 갑오(甲午)밤에 하늘에 뜬 달이 산뜻하고 환하여 홀로 작은 창에 기대어 앉아 입으로 읊어 절구 1수를 이루었다. '홀로 소나무 드리운 창문에 기대어 앉으니 밤은 벌써 깊었네.[獨倚松窓夜已深]'라는 구절이 있다.4월 16일 을미(乙未)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니 나를 어지럽게 하는 속세의 일이 사라졌다. 묵묵히 방에 앉아 책상 위 성현을 고요히 대하였다. 이와 같은 때 어찌 참다운 의사가 없겠는가. 다만 마음을 전일하게 지키지 못하여 사물을 접한 뒤에 쉽게 끌려갈까 두려울 따름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기상을 보존하면 도에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니, 힘쓸지어다.4월 23일 임인(壬寅)단비가 막 개어 만물이 모두 기쁜 기색이 있었다. 다만 흉년에 먹을 음식이 없고 보리도 익지 않아 마을에는 시름과 탄식이 가득하였다. 나의 집은 평소 가난한데 더구나 심각한 흉년을 만나 죽조차 끓이기 어려우니 가솔들 가운데 혹 성난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나는 본래 마음이 태평하여 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넉넉하거나 부족한 것을 가지고 좋아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닥쳐 생각해 보니, 사대부에게 가족이 있는 것은 나라에 백성이 있는 것과 같다. 군부(君父)가 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군주에게 돌아가는데, 가장이 되어서 가솔로 하여금 굶주림과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유독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겠는가. 옛 사람이 양식이 자주 떨어졌지만 그 즐거움을 변하지 않았던 것26)은 가속으로 하여금 의리를 깨우치게 하여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의리가 아닌 것을 사모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인(仁)이 이미 동복(僮僕)을 교화하여 의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하였고, 그들을 굶주림과 추위, 고달픔에 떨게 하였으니, 내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측은할 뿐만이 아니라, 동복들도 항심이 없어 은연중에 불선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계책은 평세(平歲)에 동복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농사짓게 하고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여 항상 유사시에 대비하는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굶주림을 면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근본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가산(家産)을 경영하는 일을 앞세워 더 풍족하게 살려고 계산하는 마음은 손님의 자리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꼴이어서 점점 사악하고 인색하며 의리를 해치는 지경으로 점점 빠져드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본원적인 곳을 엄히 확립한 뒤에 그 나머지를 미루어 사무에 미치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근심이 없도록 경계하는 바이다.이날 비가 그친 뒤에 바람이 맑고 온화하였다. 소가 비탈진 언덕에서 졸고 보리가 바람에 물결치듯 출렁거리며, 해오라기가 들판에 내려앉고 논에 물이 가득하니 전원의 흥취를 펴기에 충분하였다. 내가 근래 매양 새로 지은 재실에 앉아 들판을 보니 작은 새가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매우 경쾌하고 간드러지며, 풀숲에서 날아올라 점점 춤추듯이 이리저리 날더니 곧장 하늘로 향해 솟아올랐다. 온갖 방법으로 혀를 놀려 약삭빠르게 요염하니, 소리가 처음에는 잠깐 낮고 느리더니만 하늘 높이 올라서는 마디마디가 가늘고 촉급해졌다. 가늘고 촉급한 소리가 극에 달하니 또 빙빙 돌면서 내려왔는데 그 소리가 조금 느려지다가 땅에 앉아서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그 새의 이름을 시속에서는 '종다리[鍾至理]'라고 한다. 내가 그 소리를 들으니 높고 낮으며, 길고 짧으며, 성기고 빠른 음률이 있었다. 그 나는 것을 보니 빙글 돌리고 나아가고 물러나며 오르내리는 조짐 있었으므로 보기에 또한 정취가 있었다.인하여 생각하기를, 무릇 천지 사이에 생겨 난 것은 모두 이(理)와 기(氣)가 발현 되지 않은 존재가 없고 각기 지각이 있다. 기(氣) 쪽에 속한 것은 지각의 근본이고 이(理) 쪽에 속한 것은 바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性)이다. 사람과 사물은 본래 다르지 않고, 다만 치우치거나 바른 구분이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렇지만 성음(聲音)은 마음에서 나오고 운동은 기(氣)로 말미암는다. 이미 지각이 있으므로 운동과 성음이 있으니, 저 새가 소리를 내어 울부짖는 것은 필시 의미가 있어 그 정(情)을 말하는 것이건만, 다만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대저 사람이란 슬프면 울고 기쁘면 노래하며, 서로 만나 정을 얘기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 소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사람은 소리에 자연히 각각 그 의미가 있지만 저 새들은 또한 들을 줄 모르니, 이는 또한 사람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사이에 지극한 이치가 담겨져 있는 것은 새들이나 사람이나 차이가 없다. 《시경(詩經)》에 '소리개는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못 속에서 뛰노누나.[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였는데, 자사(子思)가 이 말을 인용하여 군자의 도를 밝혔다는 사실을 또한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고인이 위아래에서 우는 봉황의 소리를 듣고 십이율을 만들었으니,27) 봉황과 이 작은 새는 똑같이 새이고 이와 기를 함께 얻어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이니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옛날에 지인(至人)은 하나의 사물을 보면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하였으니, 복희씨(伏羲氏)는 용마(龍馬)로 인하여 팔괘(八卦)를 그었고28) 우(禹) 임금은 신귀(神龜)를 보고 구주(九疇)를 만들었다.29) 정자(程子)가 토끼를 보고 괘를 그은 것30)도 이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물을 보거나 새의 지저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해 살피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보는 것이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지금 작은 새를 보고 부질없이 기록한다.또 "사람들이 내 마음이 천지와 통하고 만물에 두루 미쳐 내외, 피차, 물아의 구분이 없이 똑같이 한 가지 이치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마음이 천협(淺狹)하지 않고 도량도 클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갓 내가 있는 것만 알고 상대가 있는 줄은 모른다. 한 몸의 몸뚱이 외에는 기가 전혀 통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넓지 않고 도량도 좁다."라고 하였다.오후에 문 앞을 지나는 고향 친구가 있었는데 들어와 보지 않은 채 지나갔다. 이 사람은 나와 교유한 적이 있고, 나와 인척관계 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더러 고유하였으면서 지금은 문 앞을 지나면서도 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곰곰이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근래 고향에 한두 소년이 있었는데 또한 나의 외가 쪽 사람이다. 자못 빈번하게 왕래하며 글을 배워 조금 깨우쳤다. 지난번에 향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아무개가 그대에게 글을 배우는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그대는 어찌 그만두어서 비방을 멈추게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경전(經傳)은 성현의 공변된 말이다. 나는 다행히 먼저 성현의 찌꺼기[糟粕]31)를 깨우쳤다. 사람이 배우고자 하는 것 또한 천하의 공변된 마음이다. 내가 어찌 성심으로 옛 성현을 배우려는 사람을 거절할 수 있겠으며, 남들도 어찌 공변된 마음으로 배우는 사람을 비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갔다. 그 뒤에 이웃 고을의 아무개가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기를 "김 아무개와 아무개가 당론을 일삼는다고 하니, 어찌 유자의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들은 사람이 나에게 와서 전해 주었는데, 이는 향인이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당이 나뉜 뒤로 조정으로부터 향곡(鄕曲)에 이르기까지 색목(色目)을 손가락질하며 당동벌이(黨同伐異)32) 해 왔다. 광해조(光海朝)가 이 때문에 망국의 지경까지 갔는데, 그 의론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내게 와서 배운 소년도 바로 향인 가운데 당색이 다른 사람의 자제이므로 다른 쪽 사람이 꺼려서 비방하는 말을 지어서 나에게 미친 것인데, 오늘 문 앞을 지나며 방문하지 않은 것은 필시 꺼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대저 인심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다. 천리(天理)의 중정한 것을 품부받은 것이 천하의 공기가 된다. 이를테면 평평한 저울이나 맑은 물과 같으니, 만일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하늘에서 부여받은 바른 이치를 잃어버려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해치는 사악한 지경으로 빠질 것이니, 사람이고서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의견을 제시하여 말하기를 "한유(韓愈)와 범중엄(范仲淹)처럼 문장이 뛰어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처럼 학문이 훌륭하더라도 만약 지금의 이른바 한편으로 치우친 당론에 구속된다면 그 사람은 볼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만약 지금의 당론을 위해서라면 하루아침에 만종(萬鍾)의 부를 쌓고 오정(五鼎)33)의 존귀한 지체가 되더라도 나는 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가짐이 중정하여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는다면 누추한 집에서 죽더라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무릇 평소 남과 교유할 때라든지 논의를 세워 문장을 지을 때에는 평생 한마디 말도 당론에 스스로 치우친 적이 없으므로 동인과 서인이 모두 수상하게 여겼다. 혹자가 '아무개는 동론(東論)을 주장한다'고 한 것은 그가 비록 서인이라도 서인의 논리가 이치에 맞지 않으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혹자가 '아무개는 서론(西論)을 주장한다'고 한 것은 그가 비록 동인이라도 동인의 말이 의리가 아니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혹자가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다고 한 것은 양쪽이 옳지 않으면 양쪽을 비난하고 양쪽이 옳으면 양쪽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와서 배우면 어떤 사람은 꺼려서 얼굴을 가리고 문을 지나가기까지 하니, 사람의 편벽되고 인색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인가. 매우 우습다. 지극히 공정한 나의 마음으로 향당에 있으면 향인이 이와 같고, 조정에 나아가면 조정의 사람들이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세도가 이러하니 어찌 행할 수 있겠는가.내게 몇 뙈기 밭이 있으니 힘써 농사지어 풍년이 들면 처자식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새로 지은 집은 자못 정결하며 앞에는 샘이 있고 뒤에는 땔나무를 할 수 있는 산이 있다. 또 경서 몇 권이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지금부터 문을 닫고 깨끗이 청소하여 원기를 기르고 정신을 수양하여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편안히 하고 전현(前賢)의 지극한 훈계를 가슴에 새겨 천명을 따라 한가롭고 고요한 생활을 즐긴다면 한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고 죽어서는 편안할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다만 예부터 나라가 망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붕당을 지어 서로 다투었으니, 공변되지 않고 바르지 않아 나라가 따라서 멸망하였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노파심이 절실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근래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을 보았는데, 우리 동방에서 의리가 있는 문장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문집을 보니, 그 가운데 "내가 남시보(南時甫)와 화담(花潭) 학문의 문제점을 논하였는데 허태휘(許太輝)34)가 듣고서 편지를 보내 힐난하였고, 황중거(黃仲擧)35)와 학문을 논하다가 우연히 송당(松堂)의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36)를 언급하여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문인이 보고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말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다. 10년 전 우산(牛山)37) 안공(安公)이 〈우산답문서(牛山答問書)〉를 지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곳 몇 조목을 우연히 발견하고38) 우산의 문인에게 질정하는 가운데 내왕하는 사람이 적잖이 비난을 받았으니, 비난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 대개 천하의 의리에 관한 시비는 바로 공공(公共)의 일이다. 후학이 선각에 대해서 질정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혹 시비를 논란하는 것도 천하의 공도(公道)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각자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감싸며 일괄적으로 존숭하여 남들이 의혹스러운 점을 질정하지 못하게 하니, 참 우스운 일이다. 지금 이 책에서 우연히 이 논을 본 것으로 인하여 부질없이 기록한다.대개 우산(牛山)은 임하(林下)의 선비로 기상이 매우 좋다. 다만 본원과 관련된 곳에서 혹 함양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다듬는 공부에 흠결이 있으니, 전적으로 들은 것을 기록하고 서술하는 것을 학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삼으므로 격앙되어 발로한 논의가 많고 온후하여 중도를 얻은 기풍이 적다. 내가 일찍이 인심이 허령(虛靈)하다는 설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理)는 본래 허하니 기(氣)를 겸한 뒤에 신령해진다. 기는 본래 신령하지 않고 이(理)에 의지한 뒤에 신령해진다."라고 하였다. 지금 주자(朱子)의 '이(理)와 기(氣)가 합하면 곧 지각할 수 있다'는 설을 보니 과연 망녕된 나의 주장과 우연히 합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공부를 한다면 혹 도의 본체를 보는 데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지 않겠는가. 주자가 또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촛불에 기름을 부으면 많은 불꽃이 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각하도록 하는 것은 마음의 이요,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의 신령함이다."39)라고 하였다. 내가 마침내 '불에 기름을 붓는다.'는 설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기름은 스스로 불꽃을 피울 수 없고 불을 붙여야 불꽃이 일어난다. 불은 스스로 불꽃을 피울 수 없고, 기름이 있어야만 불꽃을 피울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理)와 기(氣)가 서로 합하여야 지각이 생겨난다는 말이다.저녁에 남자종들이 소를 찾지 못하고 와서 말하기를 "소를 도둑맞은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달파 우리 백성들이 장차 죽게 생겼다. 아무리 양민이라도 도둑으로 변하였으니 장차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느냐. 어찌할꼬. 더구나 나는 잃었지만 남은 얻었을 테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더 이상 찾지 말라."라고 하였다.4월 27일 병오(丙午) 소양(少陽)아침에 일어나 앉았다. 갠 하늘 날씨가 좋았고, 초목은 함초롬하였다. 두루미 한 마리가 홀로 샘의 근원에 서 있다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이어서 흥이 일어나 절구 1수를 지었는데 "검은 치마에 흰옷 차림을 한 선경의 동자라네.[玄裳素服一仙童]'라는 구절이었다. 또 절구 1수를 지었다.단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자 보리가 이미 익었으니동산엔 싱그러운 풀이 가득하여 기운 맑고 그윽하네고요히 만물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의사를 보니도리어 내 마음에서 한 이치를 구하네근래 심기가 자못 온당하니 본원의 묘리를 이로 인하여 알 수 있을 듯하였다. 늘 부지런히 힘쓰다가 혹 감흥이 발현할 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에 끌려가니, 이는 공부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사물을 관찰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읊조리기를 마지않기까지 하였다. 이를 기록하여 눈이 녹고 풀이 자라는 근심을 경계한다.낮에 홍종화(洪鍾華) 씨가 와서 새로 지은 재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향당(鄕黨)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무릇 향당에서 이웃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는 충후하고 화목한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이 있으면 반복하여 서로 경계해야지 느닷없이 비난해선 안 됩니다. 선한 행실이 있으면 차근차근 서로 권면해야지 문득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먹어선 안 됩니다. 노인은 공경하고 현자는 존경하고, 어린이는 이끌어 주고 약한 사람은 세워 주고 강자는 경계하여 힘써 서로 과실이 적게 한다면 향리의 풍속이 점점 충후한 쪽으로 변할 것입니다. 향리에서 이 일로 서로 면려하는 것은 형들 몇 분에게 달려 있으니 힘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개 근래 향리의 풍속이 나빠지는 조짐이 있는 듯하였으므로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4월 28일 정미(丁未) 대양(大陽)비가 그친 뒤의 기상이 오늘은 더욱 좋다. 걸어서 앞 시내로 나가 새로 심은 버드나무를 점검하였다. 지난달에 오래 가물었으므로 말라 죽은 것이 3분의 2이나 되었는데 살아남은 것은 새로 잎이 나 사랑스러웠다. 이어서 생각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냄에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고 생장하는 이치도 만 가지로 같지 않다. 그러나 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열매를 맺어 또 번식한다. 열매가 없는 것은 반드시 그 뿌리를 옮겨 심은 뒤에 자라는 것이니, 초목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유독 버드나무만 그 가지를 꺾어 흙에 꽂아도 살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이 나무는 천지에서 양생(陽生)의 기운을 받아 가장 먼저 싹이 돋고 또 무성하다. 그러므로 이른 봄 초목이 아직 싹트기 전에 이 나무는 먼저 잎이 돋아난다. 양기를 먼저 받기 때문에 초가을에 음기에 쉽게 감응하여 그 잎이 먼저 떨어진다. 옛사람이 글자를 만들 때 '목(木)'과 '양(昜)'을 의부로 삼았으니, 옛 '양(陽)' 자의 뜻은 이것을 본받은 것인가. 땅에 꽂아도 잘 사는 것은, 풍부한 양생(陽生)의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양기가 상승할 때 그 기운을 쉽게 얻어서 사는 것임이 분명하다. 비유하자면 타고난 기운이 청명한 사람은 천리의 본원을 먼저 깨달아 선을 행하기 쉬운 것과 같다. 그 이치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음에 느낀 점이 있어 여기에 기록한다. 혹 이 나무가 푸른 잎이 녹음을 이루고 새순이 자라 가지가 뻗어 나갈 때면 주인도 진보하는 뜻을 두어 위로 본원이 되는 곳에 도달하여 행동할 때 발양(發揚)해서 이 나무와 더불어 퍼질 것이니, 경계할지어다. 이어서 절구 1수를 지었으니40) "몇 그루 버드나무를 문 앞에 심었네.[數株楊柳種門前]"라는 구절이 있다. 또 절구 1수를 지었으니, "전원에 새로 집을 지으니 맑은 시내가 곁에 있네.[野居新卜傍淸漪]"라는 구절이 있다.이인로(李仁老)가 말하기를, "저의 고조인 생원(生員) 이응림(李應霖)은 바로 우리 태조조(太祖朝) 때의 부마도위(駙馬都尉)인 이등(李䔲)의 손자로, 풍산(楓山) 추송곡(楸松谷)에 장사 지냈습니다. 올해 2월에 술사(術士) 이계현(李啓玄)이 와서 말하기를 '이 묘지는 매우 흉하니 자손들이 참혹한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자손에게 막 그 일이 있었기에 제가 듣고서는 매우 놀라 즉시 좋은 날을 잡아 이장하였습니다. 생원 공의 묘도(墓道)에 수기(水氣)가 있었는데 마치 조수(潮水)가 막 밀려난 뒤의 형상이었습니다. 백골이 물에 떠밀려 한쪽에 쌓여있었으며 거품이 일고 질척질척 하였으니 완연히 조수가 밀려난 뒤 물가의 형상과 같았습니다. 그 내묘(內墓)는 나무의 한 뿌리가 지판(地板) 아래로 들어가 있었고 크고 작은 뿌리가 무수하게 해골을 휘감고 있어서 열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오싹하였다. 대개 자손과 선조의 관계는 지엽과 뿌리 같은 관계이니 "조상도 편안하고 자손도 편안하다"라는 정자(程子)의 말이 매우 이치에 가깝다. 지금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창질(瘡疾)에 걸려 죽었는데 온 집안이 모두 그러하였고 이인로 등 몇 사람만 살아 있을 따름이다. 비록 묘 터의 조짐과 술가의 말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알지 않아선 안 되는 일이다. 기록하여 치밀하게 무덤을 조성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는다. 또 "무덤에 석회를 사용하는 것은 장차 나무뿌리가 파고들고, 개미가 갉아 먹고, 뱀이 지나다니는 근심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길한 기운이 오르지 못한다는 지관의 말에 현혹되어 지판(地板) 밑에는 으레 석회를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그것의 그릇됨을 극렬히 말하였다. 지판 아래에 만약 석회, 황토, 가는 모래 세 가지 물질을 섞어 버무려 두껍게 쌓아 단단하게 응고시킨다면 나무뿌리가 어디로 들어가겠는가. 장사 지낼 때 효성을 다하는 자는 이런 일에 대해 알지 않아선 안 된다.오후에 《포은집(圃隱集)》을 펴서 읽었다. 중국으로 왕래할 때 지은 시편을 두루 보았는데 수천 리 길 산천의 풍경을 모조리 입으로 읊어 놓은 것이다. 후인이 나중에 장구(章句)를 읊조린다면 신주(神州)의 형승(形勝)과 수레를 타고 왕복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듯 황홀할 것이다. 시구를 얻어 읊조리는 모습과 정신을 생각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듯하여 벌써 300년이 지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이다. 공경하는 마음과 비감한 마음이 드는 끝에 생각하기를, 남아가 세상에 태어남에 사업이 매우 중하니, 위로는 천지의 무궁한 이치에 통달할 수 있고 아래로 만리 산천의 승경을 구경할 수 있으며, 앞으로는 천고의 지난 일을 통달할 수 있고 뒤로는 만대에 영원히 남을 이름을 세울 수 있다. 선생과 같은 자는 고금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이 몇 명이 있겠는가. 슬프다. 이 외로운 몸은 바다 모퉁이 누추한 고을에 태어나서 한 뙈기 황량한 밭을 궁박하고 적막한 가운데에서 지키니, 지식은 일신의 일을 주선하지 못하고 견문은 천리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안 되는 낡은 책에서조차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오두막집에서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잠을 자며 조그마한 득실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며 우매한 사람의 비방과 칭찬에 따라 좋아하고 노여워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100년이 지나 갑자기 순식간에 죽는다면 초목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질 따름이니, 이것으로 선생의 사업에 비교하면 벌레를 붕새에 비교할 정도뿐만이 아니다. 아아, 서글프고 애달프다. 비록 그렇지만 군자의 사업은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인색하지 않으니 어찌 유독 고인에게만 넉넉하겠는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또한 그다지 짧지만은 않으니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써 죽은 뒤에 그만둔다는 자세로 매진한다면 비록 만분의 일도 고인과 비슷하지 않더라도 아마 인간이라고 하는 이름을 저버리지 않아 초목과 금수처럼 되는 것은 면할 것이다. 지금 선생의 문집을 보고 홀연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붓 가는 대로 기록하였으니, 후일 공부를 게을리할 때 혹 이 기록을 보고 불현듯 깨닫고 척연히 본보기로 삼아 나태한 뜻을 경계하기를 바란다.5월 4일 신해(辛亥) 소음(少陰)서봉령(徐鳳翎) 군과 대화를 나누었다. 말할 적에 매양 절의를 강조하고 학문은 귀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예경(禮經)은 부질없는 글이라고 하였으니, 말마다 이와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학문과 예경이 과연 헛된 글이어서 귀한 것이 아니라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모두 학문 가운데 일인데 학문을 배격하고 절의를 구하는 것은 오곡을 농사짓지 않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이니 괜찮겠는가."라고 하였다. 서군이 인하여 우리나라 고금 인물의 온갖 고사를 두루 말하였다. 그 말이 잔잔한 물결처럼 슬프고 절절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선비이다. 다만 학문이 본원이 되는 곳에서 구하지 않고 매양 외면에 속박되어 고금 인물을 논하여 절의를 귀착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하고 예를 지키는 것을 근신하며 작은 일에 청렴한 정도로 치부하고, 세상일을 경영하는 것을 절의와 충신으로 여긴 것이다. 그 학문은 대개 은봉(隱峯) 안장(安丈 안방준(安邦俊))에게서 나왔고, 안장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배웠는데, 무엇 때문에 그 학문이 이처럼 너무 조리가 없이 번잡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비록 그렇지만 또한 말세의 퇴폐한 풍속을 면려할 수 있으니, 어찌 일률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 장점을 취하여 벗 삼는다면 괜찮다.5월 5일 계유(癸酉) 대양(大陽)날씨가 아까울 만큼 화창하였다. 집에서 기르는 여마(驪馬)를 앞 비탈에 풀어놓았으니, 정강이까지 자란 푸른 풀을 종일 배부르게 먹게 되었다. 이미 속박하는 재갈이나 고삐가 없어 마음대로 풀을 뜯고, 내려가 샘에 고인 물을 마시고 누웠다가 일어나고 다니면서 먹으며 편안하였으니, 그 뜻이 매우 한가로운 듯 보였다. 집에 또 적마(赤馬)가 있는데 성질은 욕심이 많은 성미라 길들이지 못하므로 마구간에 매어 놓았다. 물을 마시고 여물을 먹는 데 번번이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니, 보기에 매우 고통스러운 듯하였다. 인하여 생각하기를, 비록 기르는 가축이라도 욕심의 정도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이 이처럼 현격히 다르니, 사람이고서 일개 '욕(慾)' 자를 제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41) 욕심을 이기지 못하여 남에게 제재를 받아 수족이 묶인 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어찌 우리 집 적마와 다르겠는가. 보고서 갑자기 경계하고 일에 느낀 점이 있어 기록한다.5월 6일 갑술(甲戌) 대음(大陰)이문석(李文碩)이 찾아와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성주(城主)의 임기가 차서 돌아가야 하기에 내일 행장을 꾸려 떠나므로 나에게 작별을 고한 것이다. 이 사람과 몇 년 동안 상종해 보니 지의(志意)가 고상하였는데 지금 멀리 떠난다니 서운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나에게 묻기를 "지금 돌아가면 어떤 책을 읽어야 자립(自立)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문장을 짓거나 시구를 다듬는 것은 말류의 학문이니, 나는 감히 그대에게 권하지 않는다. 오직 원하건대, 사서(四書) 가운데 본원적인 곳을 탐구한다면 문장이 이 가운데 있고 의리도 이 가운데 있으니, 어찌 이 외의 것에 마음을 쏟겠는가. 그대를 보니 기질이 깨끗하면서 유약하여 시끄러운 성시(城市)에 오래 거처해선 안 된다. 동호(東湖)에 있는 그대의 별장은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옛 경서를 끼고 독서하여 정신을 수양하고 본원을 함양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황량하고 외진 곳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는 나 같은 자가 또 그대와 작별하니 서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자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작별하려니 석별의 정이 한층 더하였다.이문석이 말하기를 "사간 이수인(李壽仁)이 올린 사직 상소의 끝에 '본도 감사 김시진(金始振)은 아첨하면서 남의 비위를 맞추기나 하고 진휼 정사에 실효가 없으며,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지 않은 채 공미(貢米)를 독촉하여 거두어들였습니다.……'라고 하니, 감사가 바야흐로 사직 상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습니다. 사간 이수인의 이러한 행동이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은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다. 고인의 책을 읽고 얻은 것이 또한 많으니, 반드시 의리에 합당한지를 본 뒤에 군주에게 말해야 할 것이다. 다만 도덕과 신의에 대한 말을 진달하여 군주의 덕행을 증익하는 것은 비록 산림(山林)에서 출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혹 아뢸 수 있거니와 남의 장단점과 시비를 논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네."라고 하였다.5월 7일 을묘(乙卯) 소음(少陰)이문석(李文碩)에게 편지를 보내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 또 별구(別句) 세 구절을 부쳤다. 첫 번째는 '남쪽 교외에 적막한 한 초가집이 있네. [南郊寂寞一茅廬]'라는 구절이고, 두 번째는 '동호의 승경은 동쪽 지방에서 독차지 하였네.[東湖形勝擅東隅]'라는 구절이고, 세 번째는 '지각에 차이가 없는 것은 정심에 달려있네.[知覺無差在正心]'라는 구절이다. 이문석이 어제 작별을 고할 때 마음에 새길 말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끝에 언급하였다.저녁에 갑자기 시구를 얻었다.비가 그치자 푸른 하늘 광활하니흰 구름이 먼 산에 생기네외로운 촌락에 날이 저물려 하니나무 끝에는 새들이 집으로 돌아오네이어서 스스로 풀이하기를 "비가 그쳐 하늘이 광활하면 도체(道體)의 광대함을 안다. 구름이 먼 산에 생기면 생의(生意)가 무궁하다는 것을 안다. 외로운 촌락에 날이 저물면 이 몸이 늙기 쉬움을 안다. 나무 끝에 새가 돌아오면 이 마음 귀착할 곳을 깨달을 것이다. 이 시는 대개 눈에 들어오는 사물로 인하여 절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통하여 구가 이루어졌지만 깊이 생각하면 또 이처럼 음미할 것이 있다. 이 시는 성정(性情)에서 발한 것이고 성정은 천리(天理)에서 근본한 것이니, 오묘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5월 9일 소음(少陰)낮에 퇴계의 도산시(陶山詩) 서를 읽었다.42) 나도 모르게 갑자기 너무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어서 절구 1수를 지었는데 "흰 돌 펼쳐진 맑은 시내는 광풍제월 사이에 펼쳐지네.[白石淸溪光霽間]"라는 구절이 있다.43)5월 13일 신유(辛酉) 소양(少陽)새벽에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여니 맑게 갠 하늘 푸르고, 바람과 이슬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흰 구름이 산을 가리고 자는 새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일체의 경계가 아득한 가운데 오직 새벽닭이 꼬끼오 하며 서로 화답할 따름이었다. 초연히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세속의 밖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입으로 읊조려 시를 지었는데, "원기가 충만하여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네.[元氣淋漓露濕天]'라는 구절이 있고, 또 '이슬이 쓸쓸히 내리는 가운데 천지가 광활하네.[露氣凄凄天地空]'라는 구절이 있다. 아침에 차를 마시고 '잣나무 잎으로 차를 끓이니 안개가 피어오르네.[柏葉煎茶氣作霞]'라는 구절을 짓고, 또 솔잎을 복용하고 '늠름하게 곧은 마음 눈 속의 청청한 자태일세.[凜凜貞心雪裏顔]'라는 구절을 지었다.5월 14일 임술(壬戌) 대양(大陽)안일대(安一大)가 '천(天)' 자, '원(圓)' 자 운으로 시를 지으니, 그 운을 써서 절구 1수를 지었는데 '천군이 높이 앉아 단전을 세우네.[天君高拱立丹田]'라는 구절이 있다.5월 15일 계해(癸亥) 소양(少陽)새벽에 일어나려 할 때 절구의 시를 지었는데 '지게문과 창문 굳게 닫혀 어둑어둑 밤에.[戶窓深鎖夜茫茫]'라는 구절이다.낮에 안일대(安一大)로 하여금 베로 만든 관(冠)에 검은 물을 들여 직접 단정하게 여며 쓰게 하였으니, 그 관을 '양의관(兩儀冠)'이라고 하였다. 인하여 〈관설(冠說)〉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 1폭을 사용한다. 그 길이는 머리를 두를 수 있을 만큼에다 1치 8푼을 남긴다. 1치 8푼으로 첩자(㡇子)를 만든다. 첩자의 양식은 4푼 반을 일으킨 다음 오른쪽으로 접고, 4푼 반은 왼쪽으로 접는다. 실로 꿰매어 고정시키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두니 만들어진 첩자는 9푼과 흡사하다. 아직 첩자가 이루어지기 전에 베의 폭 양쪽 변과 양쪽 끝을 포개어 안으로 향하게 한 다음 폭의 한 변을 돌려 첩자를 만든다. 이마의 양쪽 눈썹 위에 맞추고 그 나머지를 머리 좌우로 둘러 뒤쪽 머리에 이르러 꿰매어 그 끝을 합한다. 실로 매어 위쪽 변에 연결하여 꿰맨다. 앞면의 첩자는 그 길이가 관의 가운데 까지 와서 가로로 두 가닥으로 나누어 각각 위쪽 양 모서리에 이른다. 양쪽 모서리에 미치기 전에 또 나누어 두 가닥을 만들고 두 가닥 끝은 두 갈래로 비스듬히 모서리를 만들면 좌우로 모두 사각이 된다. 합하여 논하면 첩자의 9푼은 태극(太極)을 본뜬 것이다. 1첩(㡇)의 끝을 나누어 두 가닥으로 만든 것은 태극이 양의(兩儀)44)를 낳은 것을 본뜬 것이다. 양쪽 가닥을 나누어 네 가닥을 만든 것은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은 것을 본뜬 것이다. 전후 4엽(葉)은 사시(四時)를 본뜬 것이다. 그 높이가 1자 2치인 것은 12월을 본뜬 것이다. 나는 태극의 체(體)가 확립된 뒤에 양의와 사상이 나누어지고, 양의와 사상의 도가 행해진 뒤에 사시와 12월의 공이 이루어지고 만물이 각각 본성을 따라 천지의 도가 이루어진다고 여겼으므로 합하여 '양의관(兩儀冠)'이라고 하였다. 100년 사이에 나의 원복(元服)45)을 만들어 그 머리에 갓을 썼으니, 이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하여 내 마음의 태극에서 돌이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갓이 완성되자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 것이 예이다. 그대는 어찌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을 입지 않고 마음대로 갓을 만드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1000년 뒤에 그 제도를 잘못 전하여 참되지 않은데, 더구나 옛날과 지금은 풍속이 달라져서 놀랄 만큼 괴상해졌다. 이 때문에 부자(夫子)가 봉액(縫掖)과 장보(章甫)를 지역에 따라 바꾸어 썼으니,46) 이는 풍속과 너무 괴리되어 놀라게 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만든 갓이 비록 옛 제도를 계승하지 못했지만 그 취한 상(象)은 모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고 기수(氣數 길흉화복의 운수)가 운행하는 것이다. 평상시 머리에 써서,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묘미와 본체는 하나로되 만 가지로 형상이 드러나는 도를 상상하면 절로 내 마음의 천리에 묵묵히 부합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내가 이 관을 만든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관은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사시(四時), 십이월(十二月)을 본뜬 것인데 굳이 '양의(兩儀)'라고 명명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태극의 이치는 매우 은미한 것이다. 사상, 사시, 십이월은 기(氣)의 분수(分殊)47)이다. 양의와 같은 것은 이(理)가 이미 나누어져 사상(四象)과 시세(時歲)가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틀어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여 본받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베 1폭을 사용하여 검은 물을 들이면 힘이 덜 들고 마련하기 쉽고, 뜻은 심원하고 이치가 갖추어지니, 가난 속에서 질박함을 숭상하는 곤궁한 선비에게 알맞다."라고 하였다. 힐난한 자가 물러나자, 아울러 그 말을 기록한다.5월 19일 을축(乙丑) 소양(少陽)집에 흰 염소가 있는데 암컷과 수컷이 교배하여 검은 염소를 낳았다. 온 몸이 청흑색이고 흰 털이라곤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모든 사물은 부모의 혈기를 받아 태어나는데 흰 염소가 검은 염소를 낳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 또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자가 궁구할 수 있는 사물의 지극한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근본을 찾아 궁구하여 말하기를 "천하에는 다만 한 음(陰)과 한 양(陽)이 있을 따름이다. 저 날짐승은 양물(陽物)이고, 달리는 짐승은 음물(陰物)이다. 음은 변하지만 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무릇 나는 새의 색은 모두 일정한 색이 있다. 이를테면 까마귀[烏], 까치[鵲], 기러기[鴈], 오리[鴨], 제비[鷰], 참새[雀], 해오라기[鷺], 황새[鸛] 따위가 모두 이것이다. 또 양 가운데 음인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병아리[鷄雛]와 같은 것으로, 검은 닭이 흰 병아리를 낳는 것이 이것이다. 무릇 달리는 짐승은 모두 그 형체와 색을 바꾸니, 이를테면 개[犬], 말[馬], 고양이[猫], 소[牛], 염소[羔], 양[羊] 따위가 이것이다. 또한 음 가운데 양인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사슴[鹿], 노루[獐], 여우[狐], 이리[狸]와 같은 따위로, 모두 일정한 색이 있는 것이 이것이다. 가축 가운데 일정한 색이 있는 경우가 있으니, 털이 달린 부류로는 돼지[猪]가 있고, 깃털이 달린 부류로는 오리[鴄]가 있다.48) 털이 달린 산짐승은 일정한 색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또한 음양(陰陽)의 뜻이다. 오직 양기(陽氣)가 귀하므로 양기를 많이 품부받은 금수의 경우는 암수에 정한 짝이 있다. 음기를 많이 품부받은 금수의 경우에는 암수에 정한 짝이 없으니, 제 짝이 있는 경우에는 일정한 색이 있고, 제 짝이 없는 경우에는 일정한 색이 없다.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하며, 양은 바르고 음은 순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저녁에 고요히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사람의 일신상 모든 행위가 모두 한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청명하면 화평하지 않은 일이 없고, 마음이 혼잡하면 어지럽지 않은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유가의 사업은 전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다. 천고의 성현이 경계한 말씀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요체는 '마음을 다스린다.[治心]'라는 2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사서(四書)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사서 가운데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더욱 긴요하다. 송(宋)나라 학자의 설 가운데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이 가장 긴요하다. 《대학》, 《중용》, 《심경》, 《근사록》, 가운데 또한 긴요한 몇 마디 말이 있으니, 위로는 요순(堯舜)의 한 '중(中)' 자49) 및 부자(夫子)의 이른바 "하나로 관통한다."라는 묘리50)를 접할 수 있다. 일찍이 그 가르침을 받았으니 내 마음의 정중(靜中)한 묘리와 묵묵히 부합한다면 천고에 전해지지 않은 비결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매양 여기에 마음을 기울이지만 더욱 깨닫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요사이 아침저녁 사이에 확실치는 않으나 참 묘미를 환하게 터득한 곳이 있는 듯하였다. 비록 공부가 익숙하지 않아 갑자기 잃어버리는 탄식이 있지만 멀지 않아 다시 올 조짐이 있었으니, 주자(朱子)가 '오래도록 힘을 쓰다가 하루아침에 환하게 관통한다.[用力之久 一朝豁然貫通]'라고 한 말을 이로 인하여 혹 그 만에 하나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이러한 곳에 이르러 한 발을 잘못 내디디면 곧 바뀌어 불교의 교리에 빠질 것이니, 알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한다.이날 홍자일(洪自一)이 금성(錦城)에서 돌아왔다. 전 현감 나염(羅袡) 자상(子尙)이 오늘 죽었다고 한다. 자상은 바로 나의 외가 경주 부윤(慶州府尹) 나공(羅公) 휘 소(素)의 아들이다. 은진현(恩津縣),태인현(泰仁縣),운봉현(雲峯縣) 등지에서 수령을 지냈는데, 재능으로 이름이 났고 고을을 다스릴 적에 치적이 있었다.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잠시 남원(南原) 수령을 겸하여 맡았는데, 남원의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감사에게 모두 청하여 나후(羅侯)를 태수로 임명해 주기를 원하였으니,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서필원(徐必遠) 군이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나 군(羅君)을 으뜸으로 여겨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 다만 고을이 작은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서군은 평소 뜻이 높아 남들을 허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일컬어지는데 이처럼 칭찬하였으니 그 사람됨이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애석할 따름이다.내 갑오년(1654, 효종5)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여염집에 역병이 돌았는데, 나군이 먼저 와서 문상하고, 부수(賻襚)51)를 마련해 주었으니, 그 후의는 숭상할 만하다. 지금 그 부음을 듣고 또한 슬퍼할 따름이다.5월 20일 무진(戊辰) 소양(少陽)낮에 종갓집 숙모 오씨(吳氏)의 부음을 듣고【바로 7촌 숙부 동추공(同樞公) 휘 김전(金悛)의 처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했을 때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공만 홀로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20년 동안 이역(異域)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수은(睡隱) 강항(姜沆) 공들과 절개를 저버리지 않고 귀향하였다. 건장한 다섯 아들을 낳아 자손이 끊기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의 절의와 용기, 정성과 효성이 드러난 결과이다. 스스로 편찬한 문집 1권이 있다. 외손인 간의대부 나만성(羅晩成)이 서문과 묘지명을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진다.】 즉시 상차(喪次)로 달려갔는데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하여 흑립(黑笠)과 소대(素帶) 차림으로 들어가 곡하고 재배하였다. 마침내 나와서 변복(變服)하고는 상주를 조문하였다. 셋째 아우 김한걸(金漢傑)이 초종(初終)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게까지 하였는데, 비록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그 효성은 숭상할 만하다. 나는 그가 이로 인하여 생명을 해치지 않을까 근심하여 직접 그 손가락을 펴서 보니, 네 번째 손가락이 다 잘렸다. 즉시 사람을 시켜 붕사(朋沙)를 구하여 발라 주게 하였다. 대개 이 아우는 평소 효성이 남달랐다. 오씨는 모두 다섯 아들을 낳았다. 모두 다 분가시키고 김한걸의 집에서 봉양을 받으며 살았는데, 오씨는 늘 효성으로 봉양한다고 그를 칭찬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러한 행실이 있었으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되지 않겠는가마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은 만에 하나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자신을 희생하여 효도를 다하는 것으로 말하면 옛날에도 이러한 사람은 드물었다. 다행히 우리 가문의 형제 사이에서 이러한 사람을 보니 공경할 만하다. 일가 사람이 다 모여 장사를 지냈다.5월 23일 신묘(辛卯) 대양(大陽)상차(喪次)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좌랑 임위(林㙔)에게 인사드렸다. 운봉(雲峯) 나염(羅袡)의 상에 가서 조문하니, 그 아들 나두삼(羅斗三),나두장(羅斗章), 그 아우 도사 나진(羅袗)이 조문을 받았다. 조문한 뒤에 그대로 수운정(峀雲亭)으로 가서 경주공(慶州公)을 위문하였다. 그 차자(次子)인 정읍(井邑) 수령 나반(羅襻)이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여든 노인이 울면서 슬픈 마음을 비치니 보기에 참담하였다.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 공이 별세하였다고 한다. 공은 청련공(靑蓮公)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벼슬하지 않았고, 두 조정에 걸쳐 정언에 제수되었지만 직임에 나아가지 않았고, 효종조(孝宗朝)에 수찬, 교리, 집의 등의 직임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초기에 선왕의 상차(喪次)에 달려가 조문하고, 이어서 국장을 치른 뒤에 부수찬에 제수되었지만 숙배하지 않고 돌아왔다. 올봄에 또 사간에 제수되었지만 사직 상소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일찍이 월출산(月出山) 아래 안정동(安靜洞)에 집을 지어 방 안 가득히 책을 쌓아 두고 고요히 정양(靜養)한 지 무릇 20년인데, 역학(易學)에 더욱 힘을 쏟았다. 내가 일찍이 가서 절하고 《계몽(啓蒙)》52)을 논하고, 또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을 질정하였다. 말이 카랑카랑하고 동정(動靜)이 편안하니, 참으로 세상을 피해 행실을 깨끗하게 한 선비였다.53) 다시 월출산의 산사에 함께 가서 조용히 학문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기약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 강론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 명칭을 싫어하니 비웃음이 따를 것이다. 그 명칭을 버리고 그 실지를 얻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 참으로 즐거운 점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우리들이 힘써야 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밖을 제어하는 것은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공자와 안자(顔子)의 학문은 먼저 시청언동(視聽言動)을 삼가 하였고,54)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은 더욱 내면과 외면을 함께 기르는 데 삼가였으니, 어찌 세상 사람들을 도외시한 채 성현의 학문으로 내면을 수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마음이 염정(恬靜)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지만 혹 외면을 단속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내가 넌지시 풍자한 것이다. 공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 뒤에 나도 병이 많아 오히려 산방(山房)에서 강론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서로 편지로 학문을 논할 따름이었다. 지금 그 부음을 들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이날 정읍 수령 나반(羅襻)과 문답하였다. 나반이 말하기를 "세속에서 초상이 나면 조석상식(朝夕上食)에 고기반찬을 올리지 않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도 선대로부터 모두 소선(素膳)을 올렸으니,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예(禮)에 조석전(朝夕奠)에 포해 (脯醢)를 쓴다고 하였으니, 상식에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나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세속에서 소선을 사용하는 것은 무슨 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옛사람은 반드시 본 것이 있어 소선을 올리는 풍속을 만들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옛날에 지방의 풍속이 전적으로 불교의 예법을 따랐다. 사람이 처음 죽으면 재를 올려 승려에게 밥을 먹였으니,55) 이 풍속은 대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유자의 집안은 지방의 풍속을 따라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나반이 수긍하였다.5월 25일 계유(癸酉) 대양(大陽)집안의 생질(甥姪) 문봉의(文鳳儀)가 영암(靈巖)에서 돌아와 신성필(愼聖弼)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편지 내용은 제 9권 〈서찰편〉에 자세히 보인다.】6월 22일 기해(己亥) 대양(大陽)남자종 말생(末生)으로 하여금 두레박으로 샘물을 퍼 올리게 하여 며칠 동안 애써서 겨우 몇 되지기의 땅에 모내기를 하였다.56) 이를 기록하여 농가의 재앙이 극심함을 드러낸다. 대개 5월 2일 비가 내린 뒤에 아직 쟁기질할 정도의 비가 내리지 않아 검붉게 타 버린 땅이 1000리이니 그 참담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우선 오늘 본 것을 가지고 말하면 백성들의 목숨이 가을이나 겨울이 되기 전까지 붙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백성들은 서로 골목 사이에 마주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이러한 때 백성들의 윗사람이 된 자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지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백성들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수령과 관찰사의 직임을 맡은 자는 바야흐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날마다 형륙(刑戮)을 가하면서 사랑하거나 돌볼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불쌍한 이 죄 없는 백성들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나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여기에 기록한다.6월 29일 병오(丙午) 대양(大陽)낮에 가랑비가 동남서쪽에서 내리다가 순식간에 그치니, 백성들의 정상이 더욱 가련하다. 정재(鄭榟)가 와서 말하기를 "이달 25일에 능주(綾州) 어느 읍의 깊은 우물에서 얼음 두 덩어리가 얼었는데, 길이가 1자 남짓이었다. 물을 기르는 사람이 보고 많은 사람이 모여 보는 가운데 끄집어내어 손바닥 위에 올리니 갑자기 녹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올해처럼 큰 가뭄은 고금에 드문 변고이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목숨이 아침에 저녁을 보장할 수조차 없는데 6월에 얼음이 얼었으니, 이것이 어떤 일의 조짐인가. 두렵고 두렵다.7월 1일 무신(戊申) 대양(大陽)오래도록 너무나 가물어 농토가 황폐해졌다. 더구나 여러 해 계속 혹독한 기근이 들었으므로 모든 백성이 다급한 나머지 토지와 재물, 노비, 노리개를 파는 자가 길에 가득하였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마다 틀림없이 죽게 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보기에 참담하였다. 아, 평생 독서하였으니 어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구제할 방법이 없다. 남을 구제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처자식조차 오히려 구제하지 못하여 굶주림에 울부짖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하니 어찌 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옛날 이윤(伊尹)은 한 백성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한 백성을 하나라도 보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떠밀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처럼 여겼으니,57) 학자는 마땅히 이윤의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하지만 재주가 없어 시행하지 못하고 뚜렷한 행실이 없어 알아주지 않으니 어찌하랴. 날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며 탄식할 따름이다. 오늘 장차 배고픔을 면하려고 종을 시켜 남에게 전답을 팔게 하였는데 팔지 못하고 왔기에 느꺼운 마음이 들어 기록한다. 자신의 궁핍함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요, 시절을 아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3일 경술(庚戌) 대양(大陽)새벽에 전 감찰 홍종문(洪鍾聞)과 관정(館庭)에 들어가 배곡례(拜哭禮)를 행하였으니, 바로 선왕의 담제일(禫祭日)58)이다. 이날 전 한성부 우윤 신천익(愼天翼) 공의 부음을 들었다. 공은 감사 신희남(愼喜男)의 손자이다. 공의 선고(先考)가 자식이 없어 선비(先妣) 아무개와 함께 지리산(智異山)에서 기도드리고서 잉태하였다. 선비가 푸른 새 한 쌍이 품속에서 나와 한 마리는 하늘로 오르고 한 마리는 바다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윽고 출산하니 바로 쌍둥이였다. 장자의 이름을 천익(天翼), 차자를 해익(海翼)이라고 지었으니, 꿈에 나타난 징조를 따라 지은 것이다. 형제는 어릴 때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다. 어려서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에게 배웠는데 아이 때부터 사부(詞賦)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맏이는 20세에 급제하였고, 차자는 21세에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차자의 관직은 원외랑(員外郞)에 이르렀고, 26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다음은 차자가 졸한 뒤의 이야기이다. 원주(原州)의 문관 최문환(崔文煥)과 아우 최문욱(崔文煜)도 어릴 적에 또한 문사(文詞)에 능하였다. 하루는 형제가 함께 고을의 향교에서 노닐었다. 달 밝은 밤에 최문욱이 나가서 마당을 거닐다가 홀연히 몽롱한 상태에서 어떤 산 위에 이르자, 문사(文士) 10여 인이 둘러 앉아 있었는데 말과 모습이 맑고 준수하였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최문욱에게 말하기를 "나는 영암(靈巖)의 신해익(愼海翼)이다. 나의 형이 지금 영암에 있으니, 그대가 나의 소식을 내 형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최문욱이 "예예"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최문욱의 집 사람들이 온 산천을 뒤져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니 최문욱이 덩굴 위에 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자락을 보니 둥근 뭉치 하나가 있었다. 깨뜨려 보니 천에 가득 사(辭)가 적혀 있었는데, 바로 신해익의 필체였다. 원주와 영암이 멀리 떨어져 있어 최문욱은 신해익이 누구인지 들은 적이 없다. 신천익 공이 이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서 그 글씨를 보니, 과연 바로 동생의 필체였다. 그 뒤에 최문환은 급제하였고, 최문욱은 진사시에 합격한 다음 더 이상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이 일에 대해서 나는 참봉(參奉) 최익(崔瀷)에게 들었다. 최익은 신씨와 한 동네 사람이어서 전말을 자세히 아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뒤에 최문환이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자 최문욱이 따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이 사실인지 묻자 최문욱이 자세히 말하였다고 한다.대개 이 일은 괴이하고 허황한 듯하다. 그리고 공에게 평소 청요직에 오르기를 기대하였지만 한번도 출사하지 않았다.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지만 보통 사람처럼 마음껏 술을 마시고 청담(淸談)59)하며 작은 절개에 구애받지 않았다. 문을 닫아걸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으니 얼굴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혹 사람을 만나면 즉시 술을 가지고 오라고 하며 함부로 말하는 것이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다. 시사에 대해 언급하면 괴이하고 허황된 말로 장난삼아 대답할 따름이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그가 자처한 도리에 필시 뜻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 부음을 듣고 고인(高人)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개탄하고 아울러 그 이야기를 기록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 이력을 알게 하고자 한다.7월 7일60) 갑인(甲寅)한밤중에 비가 내려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을 먹은 뒤에 비가 내렸다. 대개 5월 2일 이후로 오늘 내린 비가 자못 세찼다. 다만 아직 논에 심지 못한 못와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콩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내가 방서(方書)에 적힌 속담을 보니 뚜렷한 효험이 많았다.61) 방서에 "입춘(立春)이 드는 날짜가 천간(天干)으로 갑(甲)과 을(乙)에 해당하면 풍년이 든다.[立春日甲乙 則歲豐]"라고 하였다. 또 "여름 초하룻날에 비가 내리면 배가 마을까지 들어온다.[夏上甲雨下 則船入村巷]"라고 하였다. 올해 1월 5일 을묘일(乙卯日)은 바로 입춘(立春)이고, 5월 16일 상갑(上甲)62)에 잠깐 비가 내렸지만 모두 효험이 없었다. 속담에 "정월 보름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면 조만간 풍년이 든다.[元望月光澤 早晩占豐]"라고 하였는데 올해 정월 보름에 달이 떴으므로 농민들은 풍년의 조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속담에 "양맥(兩麥 보리와 밀)은 추수를 할 수 있다.[兩麥占西成]"라고 하였는데, 올해 보리농사가 풍년이 들었다고 할 수 없으니,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앞으로 옛말이 이처럼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한번 맞는 경우는 있다. 속담에 봄비가 자주 내리는 것으로 가모(家母)의 손이 커지는 것에 비유하였는데, 올봄에 봄비가 매우 자주 내려 그 말이 부합하였으나 더러 부합하지 않는 해가 있다.낮에 문입주(文入柱) 등이 방문하여 전 판서 조경(趙絅)이 작성한 상소의 초고를 볼 수 있었다. 이는 오랜 가뭄으로 상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조언을 구하자. 조경이 성지(聖旨)에 응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두려워하고 삼가서 재변을 경계하시니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만 유독 심리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윤선도의 죄악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개하는 것이고 성상께서 통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조경이 도리어 감히 방자하게 두둔하여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현혹하였고, 끌어다가 비유하는 것이 음흉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왕명을 출납하는 도리로 볼 때 흐리멍덩하게 입계해선 안 되지만 우선 봉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렇게 음흉하고 참담한 상소는 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즉시 도로 내주라."라고 하였다. 처음에 예법을 논쟁하는 일로 인하여 계속 악화되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화란(禍亂)의 기미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차마 말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나라의 일이 망극하다고 할 수 있다.7월 12일 기미(己未) 소양(小陽)낮에 동남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온갖 봉우리가 빼어남을 다투어 짙은 옥색을 띠었다. 바라봄에 예사롭지 않아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옥처럼 기이한 봉우리 수천 개가 솟아 남극성의 반허리와 나란하네.[玉作奇峯列百千 平排南極半腰天]"라는 구절이다.7월 13일 경신(庚申) 소양(小陽)한밤중에 일어나 보니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여 달의 기상이 담박하였다. 입으로 한 구절을 읊조렸으니, "폭풍우 몰아쳐 신거(神車)63)를 움직이네.[顚風急雨運神車]"라는 구절이다.7월 14일 신유(辛酉) 대양(大陽)낮부터 별안간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다가 저물녘에 그치니 달이 밝고 상쾌하였다. 또 절구 1수를 지었으니 "용이 창해의 물결을 몰아쳐 큰 바람을 타고 가네.[龍驅滄海駕雄風]"라는 구절이 있다.7월 15일 임술(壬戌) 소음(少陰)신성필(愼聖弼)이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또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翼) 공의 부음을 알렸는데 6월 15일에 별세하였다고 한다. 또 그 장인 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의 상을 애통해하였으니, 말뜻이 간절하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9권 〈서찰〉에 자세히 보인다.】 낮에 '남국 고인 이미 하늘로 올랐네.[南國高人已上天]'라는 구절을 지었다. 이는 소은을 위해 지은 것이다. "바른 도가 전하지 않은 지 이미 백 년이 되었네.[正道無傳已百年]"라는 구절을 지었다. 이는 성암을 위해 지은 것이다.7월 28일 을해(乙亥) 소음(少陰)당질(堂侄) 김이상(履相)이 묻기를 "사람이 윤달에 죽으면 기제사는 본달에 붙어 있는 달에 지내는 것이 예법에도 분명히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기일에 윤달이 든다면 윤달에 제사 지냅니까?"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는 변례(變禮)이고 옛 예법에는 상고할 것이 없어서 억측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윤달이라는 것은 천시(天時)의 일정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본달에 제사 지내야 할 듯하다."라고 하였다. 正月初九日。 己未。 少陽訪尹保氏兄弟于蓬山山室。 尹公與兄儆。 築室于其先塋之下。 兄弟率妻子卜居。 一室相對。 友于耽樂。 不出洞門。 今十有餘年。 年亦七十矣。 二人雖非學古踐跡之士。 志行之高有可尙者。 余往訪焉。 命酒。 穩話移時而來。 山趣頗有動人意思者。十一日。 辛酉。 少陽往見主倅。 主倅設酒穩話。 聞自上蠲減海邑災損人民今年田稅。 以賑飢民。 山邑則減上細布。 其人木方物等賦云云。 南平名雖山邑。 災損與海邑無異。 本道監司金始振。 別啓請與海邑一體施行。 自上下該曹。 戶判許積防啓。 人民㤪之云。 聞吏曹判書宋浚吉。 在家上疏辭職。 上命遞云。 主倅又言: "余欲括富民粟。 救濟飢民。 其事已定奪。 而別有司約正輩。 憑依官令。 私斂民財者。 多有之。 余懲是。 方欲革破括粟救民之令矣。" 余答曰: "分出富民之財。 救恤將死之民。 亦隣里相救之義。 今仍約正之濫而廢之。 則無乃近於仍噎而廢食耶?" 又曰: "歲饑民困。 主少國疑。 世臣連喪。 國將奈何?" 主倅曰: "自上蠲減賦稅。 爲民撫養之道至矣。 但十六司貢物。 則不論歲之豐凶。 而一定無進退。 今年田結過半損縮。 而各司貢物之納。 依前無減。 守令無路變通。 而飢民坐受其苦。 可憫可憫。" 余曰: "如此之事。 未可報使通變乎?" 曰: "監司雖啓請。 該司例必防啓。 奈何奈何?" 余曰: "聞我朝祖宗朝。 田一結賦米一斗。 經一年。 無他役矣。 海州地有其故事。 栗谷建請行之八方。 竟不得行。 今之大同。 則一結十三斗。 而亦不足於國用云。 何歟?" 主倅曰: "世變可知矣云。"二月初八日。 戊午。 風寒午潭陽居呂益吉來見。 呂云: "潭陽士人柳震碩。 眉庵之曾孫也。 年今二十有餘。 篤志古學。 結屋于雲巖李公興浡之隱處。 讀書爲學。 不出山口。 今數年云。" 余聞斯人之名久矣。 仍其言而記之云。二十七日。 丁未。 少陽三學齋儒生等。 請書齋規儀。 乃敍二十四條而贈之。【詳見經義說】二十八日。 戊申。 少陽余於春夏。 例患上氣。 氣神昏眩。 口焦體勞。 頭重脚憊等症。 種種不佳。 余深憫之。 年前得修養要訣一冊於靜軒高公之舊庄。 試用其法。 今年則氣頗小平。 無乃得其驗耶? 今朝點檢神氣。 仍記之以愼疾之戒云。 靜軒乃余之妻外祖諱循厚。 霽峯之第三子。 精於禮學。 氣像古朴。 行操端重。 眞古之學者。 余少登其門。 觀感實多。 而倏焉二十年。 鬂髮欲斑。 而病宂懶習。 一無小成。 言念及此。 不覺浩歎也。 公官至刑曹正郞。 年七十二。 而卒於庚辰十二月十日。 平生操履端方。 守貧不屈。 緇冠布褐。 糲飯茅屋。 未免飢寒。 而怡然不以慮。 廷臣交薦。 職命屢下。 而竟不起。 丁卯胡亂。 奮然以出義勤王爲志。 與士人安邦俊趙坪等。 召募義士。 方欲赴難而死於節。 辭義凜烈。 有不可犯之氣象矣。 俄而亂平之報至。 敗師而歸。 終身恬靜。 不動聲色。 守道而歿。 嗚呼! 非有道之士。 而能然乎? 深居僻巷。 不求人知。 世未有知其操者。 身後無聞於人。 可歎也。 仍念及而興感。 記于此。二十九日。 己酉。 大陰靜坐看書終日。 仍思人之病痛。 都由氣質上出。 若按伏得這般氣上罪過。 使氣之濁者淸。 偏者正。 躁者靜。 急者緩。 懶者勤。 隨其所偏。 一歸於中。 氣之中。 性自然復其中矣。 余之氣質病痛。 每生於昏弱懶濁。 又麤而不細。 或和則易流。 急則易暴。 至於兩斧之害。 亦未免牽慮。 今麴糱之嗜。 斷念有年。 若夫遠色之戒。 雖每用鋤割之功。 而暮歸喜獵之念。 或不能不萌于中。 此皆氣之所使。 從此定可猛省痛絶之。 仍記于此。 自午後雨作。 戌時地震。 終夜雨不止。 春雨之數。 農談忌之。 地震之變。 《春秋》所書。 爲民爲國。 其無憂乎?三月十七日。 丙寅。 大陰尹俶以太守言來言曰: "當此大饑之歲。 十六司貢物。 無一毫蠲減。 濟用監正布。 方在輸納。 而本縣災結外所餘者。 僅二百夫。 而當平歲貢物之元數。 公私俱竭。 無由出辦。 今欲仍人民等呈狀。 轉報監司。 以爲入啓。 姑請待秋輸納。 而難於措辭。 請得一轉語以助之。" 余對曰: "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必有所濟。 方今生民之困極矣。 余安敢以他辭辭也。" 遂構狀辭以送之。 聞監司金公始振。 以祭無等山來光州。 蓋以民間多厲疫來祭云。十八日。 丁卯。 少陰尹生先夔文君晩郁來見。 聞綾州士人及本縣士人等。 會于熊岾寺。 通文于道內及長興。 蓋長興人金公光遠。 配享于靈川書院。 物論短金公。 欲仍書院重修。 仍出其位板。 文致郁李漙等。 先發通文。 金公子孫又囑生員曺德吉。 通文于列邑。 告其毁出之非義。 當時配享之論。 首發於安牛山邦俊。 故牛山子若孫輩。 勸起綾州士人。 通文伸救云云。 余嘗執其中。 而論之曰: "金公之出處言行。 余雖未能詳知其首末。 不敢輕議。 然書院之名。 則所關至重。 必也有功於吾道。 任重於斯文。 爲一邦之宗儒。 作百代之師表。 士林欽仰。 公論齊發。 然後立廟妥靈。 一以崇道學之先正。 一以振儒林之元氣。 傳之百代而無愧。 倡示天下而有辭。 今則不然。 一名之士。 稍有硜硜之行。 而其子孫枝屬。 蟠據於一鄕。 則遽出享祀之論。 遂建巋然之宇。 諂祀非禮。 擧世滔滔。 彼所謂先儒者。 雖道德不及於眞賢。 廉恥一念。 必有過於凡人。 倘使已死而有知。 寧不自愧於心。 而安受其非禮之享乎? 况世習日降。 士風澆漓。 春秋之祭。 名之曰享賢。 而屯聚廟宇。 醉飫終日。 喧呼叫讙。 放縱自恣。 仍之以爭鬪日起。 讎㤪遽作。 其流之弊。 可勝言哉! 世道至此。 誰能挽回而廓淸之耶? 悲夫!" 夕宿于三學齋。 諸生三十餘人會宿。 曉鷄初鳴。 諸生起而講學。 頗有菁莪之樂矣。二十八日。 丁丑種柳于門前及大小陰陽四泉之邊。 幹其事者。 乙生及道乙伊兩童奴也。 四泉及岸邊者。 通三十餘根也。 不知何時綠陰成蹊。 隱映園林。 而護我門戶。 怳然有風來月上之懷也。 令人不覺起意焉。 余自少酷有山水之癖。 見一山一石園林澗泉之勝。 終日忘歸。 歸來數月。 亦不覺意牽而神。 半世貧病。 兼之以憂患。 尙未得一山一水之勝而卜居焉。 吁可嘆矣! 雖然。 郊野田園。 亦足以藏棲遁之跡。 而寄棄世之懷。 今新卜。 雖無山水形勝。 而郊原泉脉。 若加粧點。 庶有荷鋤帶月之興。 而民田相雜。 無資可買。 而俗亦不佳。 長懷茂林崇山。 不勝鳥歸之情。 而無可爲矣。 奈何奈何? 雖然。 大隱隱城市。 苟有吾之至樂。 自有眞得之妙。 可樂於人不及知之間。 而至於篤信無疑之地。 則彼山水亦一外物耳。 豈可牽懷於其中也哉? 自此可不勖哉? 仍記自警焉。四月初九日。 戊子聞主倅以飢民賑給事。 去于將多勿坪。 今年飢饉。 振古所無。 號饑官門者。 日數百人。 塡咽於官道。 太守定十日一開倉門賑救之。 設幕于官庭。 作粥而食飢民。 飢民之就食者。 日三百餘人。 預作太醬七十餘甕。 貿海菜百餘石。 作羹食之。 飢民大悅。 又於兩大路上。 令僧徒設幕作粥。 他鄕流民之入境者。 賑救活之。 四方聞聲雲集者。 無數矣。 又慮農民不能遠來官門。 親駄米粟。 而往賑之。 邑民誦恩不已。 太守之愛民如此。 太守卽李侯晸也。十一日。 庚寅雲升于天。 細雨欲下。 微風不動。 草木枝葉皆踈直上向于天。 有若冀蒙雨露之意。 細看其氣象。 令人起感發之意。 植物之無知者。 而亦有感應於二氣相交之際。 况此有運動知覺。 而受性命於天者哉? 是日坐迎春齋。 令兒僕取小陽泉水。 和松葉一器而下之。 精神頗覺明爽矣。 余素多病。 探考方書。 節食服餌。 以養精神。 得服松葉法于《本草》。 服之有年。 今日覺有興趣。 仍記于此。 是日空齋孤坐。 闃無來人。 春鳥聲嬌。 趁簷尋巢。 飛繞於楹棟之間。 而前山邱隴。 菜童牧竪。 短歌輕笑。 往來相戲。 耕夫野老。 牽牛荷鋤。 相尋於野田草林之際。 此間儘有眞意。 靜觀不覺起感。 仍起逍遙于泉畔。 趁興而歸。 則空堂寥寂。 春日方午數秩書史。 自能捲舒於微風之過也。十四日是日南郊精舍乘茅于屋。 手治庭梅之雜茂者。 僮子掃庭。 小婢掃室。 庭宇無塵。 茅簷齊整。 靜對書冊。 益覺有味。 但歲饑民困。 滿目愁㤪。 田園之樂。 恐亦難得。 時未免出位之憂。 可嘆可嘆! 是夜吟成一絶。 有"亂叫群蛙說箇心"之句。 蓋前郊稻田新耕。 群蛙亂鳴。 潛思彼虫無知一物耳。 其鳴聲或作或止。 若有節次。 况其自得於溝瀆之間。 其鳴也必有其樂。 噪噪之聲。 亦若相道其心情者。 天機自動。 至發於聲者。 亦一箇心也。 這間眞箇意思。 暗有相感於知覺本源之地。 吾亦不覺自發於吟哦之間者。 亦可見物我之無間矣。 是所謂藹然天理。 隨事發見者也。 夜分就枕。 又成一絶。 有"調氣怡神整枕衾"之句。十五日。 甲午夜天月爽朗。 獨倚小窓而坐。 吟成一絶。 有"獨倚松窓夜已深"之句。十六日。 乙未淨掃庭宇。 塵事不有相撓者。 默坐一室。 靜對案上聖賢。 若此之際。 豈無眞境意思哉? 但懼守之未一。 物接之後。 易爲牽去耳。 無時無處。 而存此間氣象。 則於道庶有可入之徑蹊矣。 勉夫!二十三日。 壬寅喜雨新晴。 萬物皆有歡顔。 但飢歲食絶。 麥尙未登。 閭里之間。 滿目愁嘆。 余家素貧。 况値凶歉。 饘粥難繼。 則家屬或有慍見者。 余本心慮寬緩。 居産之間。 不爲掛意。 不以豐約爲欣慼。 然到此思之。 士夫之有家屬。 猶國家之有臣民。 爲君父而使臣民未免飢寒。 責有所歸。 爲家長而使家屬至於飢怨。 獨無惻隱哉? 古人簞瓢屢空。 而能得其樂者。 能令家屬喩於義。 寧飢死而無非義之慕故也。 今我之仁。 旣不能化僮僕至於義。 而飢寒困厄。 迫乎其身。 則非但於我心有不忍之惻。 僮僕之仍無恒心。 爲不善於隱暗之際。 安可保也? 爲今之計。 在平歲。 董令僮僕。 勤耕力穡。 令家間節用尙儉。 常蓄不虞之備。 免餓餒於凶歲可也。 然在吾之大本未立。 先事於營産。 計校豐約之念。 或作仍賓作主之勢。 則浸浸然流入於邪吝犯義之歸。 大可懼也。 故記于此。 以戒於嚴立本源之地。 然後推其餘以及於事務而無過不及之患云。 是日雨後。 風氣淸和。 牛眠橫坂。 而麥浪飜風矣。 鷺下平郊。 而稻田水漲矣。 足以敍田間之興致矣。 余近日每坐新齋。 見原野間。 有小鳥。 其鳴甚輕巧。 飛自草蓬間。 漸漸飛舞。 翻翻直向于天。 百般弄舌。 便捷輕姣。 其聲初暫低緩。 高極于天。 則節節細數。 細數之極。 則又旋旋飛下。 而其聲差緩。 至于地而止。 其名俗稱鍾至理鳥。 吾聞其聲。 有高下長短踈數之節。 其飛有周旋進退上下之漸。 看來亦有理趣。 仍思凡生天地之間者。 莫非理氣之發見。 而各有知覺。 屬氣。 知覺之本。 屬理。 乃天命之性也。 吾人與物。 本無殊也。 但有偏正之分而已。 雖然。 聲音出於心。 而運動由於氣。 旣有知覺。 故有運動聲音。 則彼物之有聲而鳴呼者。 必有意味。 而道其情者。 而但人不解聽耳。 夫人哀則哭。 樂則歌。 相逢而語其情。 讀書而長其聲。 我自各有其意。 而彼鳥獸。 亦不能解聽。 亦如人之不能解聽禽語也。 而其間至理所寓。 則彼與我無間也。 詩曰: "鳶飛戾天。 魚躍于淵。" 子思引是語。 發明君子之道。 亦有見乎此也。 是以古人。 聞鳳鳴上下。 而作十二律。 則鳳與此小鳥。 其爲鳥。 則一也。 其同得理氣而生。 亦一也。 何間焉? 古之至人。 見一物必窮其理。 羲之仍馬爲圖。 禹之見龜畫疇。 至於程子之見兎起數此也。 故余每見一微物聞一禽語。 未嘗不詳致意焉。 但恨見未透。 故理難窮耳。 今仍小鳥而謾記之。 又曰: "人知吾心之通乎天地。 周乎萬物。 無內外無彼此無物我。 同是一體之理。 則自然心不淺狹。 而器量亦宏大矣。 人徒知有我。 不知有物。 一身區殼之外。 氣全不通。 故心不廣而量小矣。" 午後有鄕中知舊者過門外。 不入相見而去。 是人曾與我相從。 而與我亦有姻婭之分矣。 昔或相從。 而今過門不見。 何耶? 細思其由。 近有鄕之一二少年。 亦余之外屬族眷也。 往來學文字頗頻。 稍得解蒙。 頃者鄕人有來言: "某學書於子。 人多不好。 子何不停寢而止謗耶?" 余曰: "經傳。 聖賢之公言。 我幸先覺其糟粕。 人之欲學。 亦天下之公心也。 余安可絶人之誠心學古哉? 人亦豈可謗人之公心爲學耶?" 其人嘿嘿而去。 其後隣鄕某人。 昌言于衆曰: "金某與某人爲黨論云。 豈儒者之事耶?" 聞者來傳于余。 蓋鄕人之造訛傳播故也。 我國自東西黨分之後。 自朝廷至鄕曲。 指點名目。 黨同伐異。 光海朝以是亡國。 其論尙今不息。 右所謂少年來學者。 卽鄕人之有名目者子弟。 故他邊人忌而造謗及於余。 而今之過門不相訪者。 必含忌而然耳。 可笑可笑。 夫人心。 天下之公器也。 稟天理之大中。 爲天下之公器。 如衡之平。 如水之明。 苟有偏係於一隅。 則喪失天所賦之正理。 入於自私自賊之邪境矣。 人而尙忍此哉? 故余嘗立論曰: "文如韓范。 學如程朱。 若或拘係於今之所謂偏黨。 其人不足觀。" 又常言曰: "若爲今之黨論。 則一朝而至萬鍾之富五鼎之貴。 我不爲也。 若秉心中正。 不偏不倚。 則枯死於蓬蓽之間。 我自甘心矣。" 是以凡平日與人往來及立論措語間。 平生未嘗片言自偏於黨論。 故東西之人。 皆致疑惑。 或曰"某爲東論"。 以其雖西人。 理曲則非之故也。 或曰"某爲西論"。 以其雖東人。 非義則斥之故也。 或曰中無所主。 以其兩非則兩非之。 兩是則兩是之故也。 今者某人來學。 而某人忌之。 至於蔽面過門。 人之偏嗇。 至於此耶? 甚可笑也。 以余至公至正之心。 居鄕而鄕人如此。 立朝而朝人亦如此。 推可知矣。 世道如此。 其可行乎? 余有數畝野田。 力耕而歲豐。 則妻子不至於飢寒矣。 新構頗淨。 前有泉而後有柴矣。 又有數帙經書。 足以治吾心而復吾性矣。 從此閉門淨掃。 養氣頥神。 安父母之遺體。 服往哲之至訓。 順天命樂閑靜。 足以安過一生。 沒吾寧也。 豈不樂哉? 但自古國之將亡。 必有朋黨相傾。 不公不正。 而國隨以亡。 言之至此。 誠可寒心。 老婆心切。 奈何奈何? 近看《退溪先生文集》。 吾東義理之文。 無出於此? 今看集中。 有曰"某與南時甫論花潭之學之病處。 許太輝聞之。 有一書相詰。 與黃仲擧論學。 偶及松堂白鹿洞規解。 未免指摘其差失。 其門人見之。 多不平云云。" 今見此言。 忽憶十年前牛山安公著〈牛山答問書〉。 余偶發未解處若干3)條。 奉質牛山門下。 往來人見誚不貲。 至今不已。 蓋天下義理之是非。 乃公共底事也。 後覺之於先覺。 就質證正。 或論難是非。 亦天下之公道也。 今之人不然。 各護其所好。 而一槩崇奉。 不許人論質疑惑。 甚可笑也。 今仍此書偶見此論。 漫記之。 蓋牛山林下之士。 氣象甚好。 但本源之地。 或欠於涵養沈潛。 專以記聞敍述爲學。 故論議多激揚發露而少溫厚得中底氣意矣。 余嘗有解人心虛靈之說曰: "理本虛。 兼乎氣。 然後有靈。 氣本不靈。 資於理而有靈。" 今見朱子理與氣合。 便能知覺之說。 果與瞽說偶合。 仍此用工。 或可小進於見道耶? 朱子又曰: "譬如燭火。 因得脂膏。 便有許多光焰。" 又曰: "所覺者。 心之理也。 能覺者。 氣之靈也。" 余乃解火膏之說曰: "膏不能自光焰。 得火然後光焰。 火不能自發光焰。 得膏而光焰發。" 此理氣相合。 生知覺之說也。 夕奴輩覓牛不得而來曰: "牛之見盜丁寧矣。" 余曰: "歲饑民困。 赤子將死。 雖良民變而爲盜。 將以免死也? 奈何奈何? 况我雖失。 人則得之。 何慮焉? 毋更求也。"二十七日。 丙午。 少陽朝起而坐。 霽天氣佳。 草木滋潤。 有一野鶴獨立泉源。 俄然而飛。 仍興到成一絶。 有"玄裳素服一仙童"之句。 又成一絶: "甘雨新晴麥已秋。 滿園芳草氣淸幽。 靜看萬物生生意。 還向吾心一理求。" 近來心氣頗穩當。 本源之妙。 庶可仍此得見。 恒日孜孜。 或於發見之際。 倏覺有好意思。 而俄然之頃。 自不覺其爲他慮引去。 蓋工夫未熟故也。 今朝仍觀物而有省悟。 至發於吟詠不已。 記之以戒雪消草生之患云。 午洪兄鍾華氏來。 話于新齋。 爲陳鄕黨和厚之義曰: "凡鄕黨隣里之道。 以忠厚敦睦爲重。 有過申申相戒。 不可遽加揮斥。 有善循循相勉。 不可輒生猜疑。 老者敬之。 賢者尊之。 幼者導之。 弱者植之。 强者戒之。 務相竝至於寡過之地。 則鄕里之風。 漸可變而爲厚矣。 鄕中以此事爲相勉者。 在於兄輩數人。 其勖之!" 蓋近者鄕風似有不好之漸。 故言及之。二十八日。 丁未。 大陽霽後氣象。 此日尤佳。 步出前蹊。 點檢新栽楊柳。 前月久旱。 故枯死者三分之二矣。 生存者新葉已抽可愛。 仍思天之生物。 其品萬殊。 而其生理亦有萬不同。 然花而結實。 實而又生。 其無實者。 必移其根荄而種植。 然後乃生者。 草木莫不皆然。 獨楊柳。 刈取其枝。 扱于土而得生。 何哉? 蓋此木得天地陽生之氣。 最先且富。 故先春草木未榮。 而此木先着葉矣。 得陽先。 故初秋之日。 易感於陰氣。 其葉先零。 古人制字。 從"木"從"昜"。 古"陽"字意以此歟? 其扱地易生者。 稟得陽生之氣富盛。 故陽氣上升之時。 易得其氣。 而爲生也明矣。 譬若稟氣淸明之人。 先覺於天理之本源。 易於爲善者也。 細思其理。 有感於心。 記于此。 儻此樹綠葉成陰。 嫩茂條暢之時。 主人亦有長進志意。 上達本源之地。 而發揚於云爲之際。 與此樹而同敷也歟! 戒之哉! 仍成一絶。 有"數株楊柳種門前"之句。 又成一句。 有"野居新卜傍淸漪"之句。 李仁老言"渠高祖生員李應霖。 卽我太祖朝駙馬都尉李䔲之孫也。 葬于楓山楸松谷。 今二月術士李啓玄來言'此墓地甚凶。 子孫當有凶疾'。 蓋其子孫方有其事。 仁老聞極大駭。 卽卜日遷葬。 其生員公。 墓道有水氣。 若潮水新退之狀。 白骨爲水浮沉。 積置一邊。 浮漚濕淤。 宛然如潮退水涯之形。 而其內墓。 則有一木根自地板下潛入。 大小根荄。 締結於骸骨者無數。 纏繞不可解開"云。 聞之不覺悚然。 蓋子孫之於祖先。 若枝葉之於根本。 程子彼安此安之說。 甚爲近理。 今李姓之人。 以瘡疾致死者。 一家皆然。 只餘仁老輩數人而已。 雖不知其墓山之應。 術人之言。 適然符驗。 此亦不可不知底事也。 記之以爲塋窆不密者之戒云。 又曰: "壙中之用石灰。 將防木根螻蟻虫蛇之患也。 今人惑於地家吉氣不升之語。 地板底例不用石灰。" 余嘗極言其非。 地板之下。 若厚築三物以凝堅。 木根何從而入哉? 送終誠孝者。 不可不知云。 午後披閱《圃隱集》。 歷覽其往來中國時詩什。 數千里道途。 山川物色。 盡入吟哦牙頰之間。 使後人追詠章句。 怳若親見神州之形勝。 其馳車往還之狀。 得句呻吟之象想形神。 思若在今日之目中。 而不覺已經三百年事也。 欽愴之餘。 仍念男兒生世。 事業至重。 上可以達天地無窮之理。 下可以跡萬里山川之勝。 前可以通千古已往之事。 後可以立萬代不朽之名。 若先生者。 俛仰今古。 其人有幾? 哀此孤露之生。 生於海隅偏陋之鄕。 守一畝荒田於窮原寂寞之中。 知不周一身之事。 見不出千里之外。 殘編破冊。 尙不能通其理。 朝飮夜伏於蓬蒿之下。 未免欣慽於一毫之得失。 喜怒於愚夫之毁譽。 百年之過。 倏若一瞬之後。 草木塵土。 同歸於泯滅而已。 則以此方之於先生事業。 不翅壤虫之於鵬翼也。 嗚呼噫嘻! 可傷也已。 雖然。 君子事業。 不出於方寸間而已。 方寸一物。 在我非嗇。 豈獨豐於古人哉? 自此至于蓋棺日。 亦不甚促。 孶孶日夕。 死而後已。 雖不能彷彿於古人之萬一。 庶幾不負爲人之名。 而免於草木禽獸之同歸矣。 今見先生文集。 倏然有驚惕之心。 不覺隨筆而記。 他日進業怠惰之時。 或可目寓於此手記。 冀有翻然覺悟惕然矜式之念。 而警其頹懦之志云。五月初四日。 辛亥。 少陰與徐君鳳翎語。 語間每以節義爲言。 以學問爲不足貴。 以禮經爲虛文。 言言若是。 余曰: "學問禮經。 果是虛文。 而不足貴。 則三綱五常。 皆學問中事。 排去學問。 而求節義。 則是不耕五糓。 而求腹飽也。 而可乎?" 徐君仍歷陳吾東古今人事實累數百言。 其語輕浪慨切。 信奇士也。 但學不求之本源之地。 每每牽掣於外面。 論古今人物。 而歸宿於節義。 故以學問守禮。 爲曲謹小廉。 經涉世務。 爲節義忠信。 其學蓋出於隱峯安丈。 安丈嘗學於牛溪。 何故其學至於如此太支離也? 雖然。 亦足以勵末世頹惰之習也。 豈可以一槩非之? 取其長處而友之可也。初五日。 癸酉。 大陽日氣淸和可愛。 放家畜驪馬于前坂。 綠草沒脛。 終日飽吃。 旣無鉗勒轡銜之牽縶。 任意齕草。 下飮泉瀆之水。 臥起行齕自在。 其意看甚閑放。 家又有赤馬。 性多慾不馴。 故縶繫于槽櫪之間。 一飮一齕。 動須于人。 看甚苦楚。 仍思雖在物畜。 因其慾之多寡。 而苦樂懸殊如此。 人而不可按4)伏得一慾字耶? 不能克慾。 而受制於人。 拘縶其手足。 而不能自爲者。 何異於吾家赤馬耶? 看來忽有警惕。 而感於事者記之。初六日。 甲戌。 大陰李文碩來見敍別。 蓋以城主秩滿當歸。 以明日內行發程。 故告別于余矣。 此人相從數年。 志意雅尙。 今成遠別。 不任悵然。 問余曰: "今歸當讀何書。 以自立歟?" 余曰: "文章辭藻。 末流之學。 吾不敢相期於君。 惟願於四子中。 探其本源之地。 則文章在玆。 義理在玆。 何用馳心於餘外哉? 見君氣質淸弱。 不宜久居於城市囂鬧之中。 聞君有東湖別墅。 境極淸勝。 可抱遺經於此。 養精頥神。 涵養本源。 是吾之望也。 若余者索居荒僻。 又別吾君。 能不悵然哉?" 言竟雨作。 冒雨別去。 多有惜別之思。 李文碩言: "李司諫壽仁辭職疏末款言'本道監司金始振阿謏苟容。 賑政無實。 不恤窮民。 督捧貢米云云。' 監司方上辭職疏。 仍自分疏。 李司諫此擧如何?" 余曰: "此老高臥不出。 已十年餘矣。 讀古人書。 所得亦多。 必見合義而後。 發言於君父矣。 但進陳德義之言。 長益君德。 則雖山林未進之人。 或可爲矣。 至於論人長短是非。 則未知如何也。"初七日。 乙卯。 少陰送書于李文碩問行。 且寄三章別句。 其一有"南郊寂寞一茅廬"之句。 其二有"東湖形勝擅東隅"之句。 其三有"知覺無差在正心"之句。 文碩昨日告別之時。 請敎佩服之言。 故末篇及之矣。 夕忽得句有曰: "雨霽碧天闊。 白雲生遠山。 孤村日欲暮。 木末鳥知還。" 仍自解曰: "雨霽天闊。 則知道體之廣大。 雲生遠山。 則知生意之無窮。 孤村日暮。 則知此生之易老。 木末鳥還。 則覺此心之歸宿。 此詩蓋因寓目之物。 自不覺心會句成。 而深思之。 又有味如此。 此詩之發於性情。 而性情之本於天理者。 可謂妙乎妙矣。"初九日。 少陰午讀退陶山詩序。 不覺爽然起慕之至。 仍成一絶。 有"白石淸溪光霽間"5)之句。十三日。 辛酉。 少陽曉早起開窓。 霽天蒼翠。 風露滿空。 白雲在山。 棲鳥不起。 人聲寂然。 萬境具敻。 惟有晨鷄喔然相唱而已。 超然有俯視人寰。 獨立物表之意。 口吟成律。 有"元氣淋漓露濕天"之句。 又有"露氣凄凄天地空"之句。 朝飮茶。 有"栢葉煎茶氣作霞"之句。 又服松葉。 有"凜凜貞心雪裏顔"之句。十四日。 壬戌。 大陽安生一大。 有"天"。 "圓"字韻。 用其韻。 遂一絶。 有"天君高拱立丹田"之句。十五日。 癸亥。 少陽曉欲覺之時。 得一絶。 有"戶窓深鎖夜茫茫"之句。 午令安一大染皁冠布。 手自整疊而服之。 名其冠曰"兩儀冠"。 仍作〈冠說〉曰: "用布一幅。 其長足繞頭。 而剩一寸八分。 一寸八分爲㡇子。 㡇子之制。 提起四分半摺向右。 四分半摺向左。 用線綴住。 而空其中。 則成㡇恰九分矣。 當未成㡇之初。 布幅兩邊及兩端疊向裏。 然後就幅一邊。 而作㡇子。 當額兩眉上。 以其餘繞頭左右。 至後腦。 縫而合其端。 用線綴之。 而連上邊爲縫。 前面㡇子。 其長及冠之中。 橫分兩脉。 而各至上兩隅。 未及兩隅。 而又分爲兩脉。 兩脉之端。 作兩橫隅。 而左右凡四角也。 合而論之。 㡇子九分。 象太極也。 一㡇之端。 分爲兩脉。 象太極生兩儀也。 兩脉分爲四脉。 象兩儀生四象也。 前後四葉。 象四時也。 其高一尺二寸。 象十二月也。 余惟太極之體立而後。 二儀四象分焉。 二儀四象之道行。 然後四時十二月之功成。 萬物各遂其性。 而天地之道成矣。 故合而名之曰'兩儀冠'。 百年之間。 作我元服。 而冠其首矣。 庶可顧名思義。 反之於吾心之太極。 而有所省悟也云。" 〈兩儀冠前後分釋之圖〉 冠成。 客有難者曰: "非先王之法服。 不敢服。 禮也。 子何不服先王之法服。 自作冠制耶?" 曰: "先王法服。 非不美也。 千載之下。 其制承訛而不眞。 况古今異俗。 駭矚取怪。 是以夫子縫掖章甫。 隨地而變。 以其不欲大異於俗以取駭也。 今余冠雖不能祖述古制。 其所取象者。 皆至理之所寓。 而氣數之流行者也。 居常戴之於元首。 象想其天理流行之妙一本萬殊之道。 自有嘿符於吾心之天者。 此吾之所以製是冠者也。" 難者曰: "子之冠。 取象太極二儀四象四時十二月也。 而必名之以兩儀者。 何居?" 曰: "太極理之至隱者也。 四象四時十二月。 氣之分殊者也。 若兩儀者。 理之旣分。 而四象時歲含在其中也。 故統之以名之者也。 然此非欲廣傳於人而取法者也。 用布一幅而緇染之。 功省而易備。 意遠而理具。 合乎守貧尙質之窮儒矣。" 難者退。 竝記其語云。十九日。 乙丑。 少陽家有白羔。 牝牡相交。 生黑羔。 滿體靑黑。 無一白毛。 有問者曰: "凡物得父母血氣而生。 則白羔之生黑羔。 何耶? 此亦格物者之所可窮至底理也。" 余索其本。 而格之曰: "天下只有一陰一陽而已。 彼飛禽。 陽物也。 走獸。 陰物也。 陰變而陽不變。 故凡禽鳥之色。 皆有常色。 如烏鵲鴈鴨鷰雀鷺鸛之屬皆是也。 又有陽中之陰者。 如鷄雛。 黑鷄生白雛是也。 凡走獸皆變化其形色。 如犬馬猫牛羔羊之屬是也。 亦有陰中之陽者。 如鹿獐狐狸之屬。 皆有常色是也。 家畜有常色者。 毛族有猪。 羽族有鴄6)。 山之毛族有常色者多。 亦陰陽之義也。 惟陽氣爲貴。 故禽獸之稟陽氣多者。 雌雄有正配。 稟陰氣多者。 牝牡相混。 正配者多常色。 混雜者無常色。 陽貴陰賤。 陽正陰駁者。 可見矣。" 夕嘿坐自思。 人之一身凡百事爲。 皆係於心之一本。 一心淸明。 無事不和。 一心渾雜。 無事不亂。 是以儒家事業。 專在治心。 千古聖賢垂戒之言。 不勝其多。 而其要不過治心二字。 治心之法。 莫要於四書。 四書之中。 學庸尤緊。 宋氏諸說。 《近思》 《心經》爲最緊。 《學》《庸》《心》《近》之中。 亦有緊要數語。 上可接堯舜一中字及夫子之所謂一貫之妙者。 嘗授其語。 默符於吾心靜中之妙。 可達千古不傳之秘矣。 余每留心於此。 而益覺其難悟。 近日朝暮之間。 依依然若有透得其眞妙處。 雖用工不熟。 俄頃有失去之歎。 不遠而似有來復之狀。 朱子所謂"用力之久。 一朝豁然貫通"者。 仍此或可得窺其萬一耶? 雖然。 到此地頭。 蹉一足。 則便化爲禪空去矣。 不可不知。 故記于此。 是日洪自一自錦城歸。 聞前縣監羅袡子尙今日亡逝。 子尙卽余外族慶州府尹羅公緯素之子也。 仕守恩津泰仁雲峯等縣。 以才能名。 治郡多聲績。 爲雲峯時。 以兼官暫守南原。 南原人民老少咸乞於監司。 願得羅侯爲太守。 其得民心可見。 徐君必遠爲方伯。 以羅君爲最曰: "牛刀割鷄。 但恨邑小云。" 徐君素稱高亢小許可。 而見稱如此。 其爲人可見其才矣。 聞其死。 可惜也已。 余於甲午年丁內憂時。 厲氣滿于閭閻。 羅君趁先來問。 賻襚備至。 其厚意可尙。 今聞其訃。 亦可哀也已。二十日。 戊辰。 少陽午聞宗家叔母吳氏【卽七寸叔父同樞公諱悛之妻。 當壬丁之兵燹。 全門殘破。 公獨被擄于倭。 卄年異域。 萬死千生。 與姜睡隱沆諸公。 全節歸鄕。 有五丈夫子。 以永其嗣續。 此皆公義勇誠孝之致也。 有自叙文集一卷。 外孫羅諫議晩成作序誌。 行于世。】訃。 卽奔赴喪次。 臨夕而至。 以黑笠素帶入哭再拜。 乃出變服。 與諸哀相吊。 第三弟漢傑於初終時。 斷指出血以進。 雖不見效。 其孝心可尙。 余憂其仍此傷生。 手開其指見之。 則第四指斷割已盡矣。 卽遣人得朋沙塗之。 蓋是弟於平日。 誠孝出人。 吳氏凡五男子。 皆有室居産。 而依養於漢傑家。 吳氏每以孝養稱之。 至是有是行。 人誰不爲人子? 而以孝事親者。 萬不有一。 人誰不欲以孝事親? 而至於忘身盡孝。 古亦罕見其人。 幸於吾一家兄弟之間而得是人。 可敬也夫! 一家咸會治喪。二十三日。 辛卯。 大陽自喪次歸家。 來時歷拜林佐郞㙔。 往吊羅雲峯袡喪。 其子斗三,斗章。 其弟都事袗受吊。 吊後仍赴峀雲亭。 致慰于慶州公。 其次子井邑倅襻侍側焉。 八十老人。 涕泣陳哀。 見之慘矣。 聞惺菴李公壽仁下世。 公靑蓮李公後白之曾孫。 登第後不仕。 仁祖朝除正言。 不拜職。 孝宗朝拜修撰校理執義等職。 皆不就。 今上卽位初。 奔赴先王喪次。 仍經國葬。 除副修撰。 不拜而歸。 今春又拜司諫。 上疏辭不起。 嘗築室月出山下安靜洞裏。 滿室圖書。 沉潛靜養者。 凡二十年。 尤用力於易學。 余嘗往拜。 論至啓蒙。 又質《心經》《近思》中疑義。 言語淸朗。 動靜恬淡。 眞遯世7)淸修之士也。 期以更與相就於月出山寺。 穩討所學。 且曰: "若稱以講論。 則世厭此名。 嘲笑隨之。 去其名。 而得其實。 同世人。 而有所眞樂。 此吾輩之所可勉也。" 余曰: "制乎外。 所以養其中。 孔顔之學。 先謹乎視聽言動。 程朱之學。 尤愼於內外交養。 則安有外世人。 而內聖賢之學乎?" 蓋公恬靜好學。 而或不致念於檢束外貌。 故余微諷焉。 公微笑而頷可之。 其後余亦多病。 尙未踐山房之約。 而相致書論學而已。 今聞其訃。 不勝痛悼。 是日與羅井邑襻語問。 羅曰: "世俗於喪初。 朝夕上食不用肉膳。 吾家亦自先世皆用素膳。 此事如何?" 余曰: "禮朝夕奠用脯醢。 則上食之不用肉。 甚似無謂矣。" 羅曰: "然則世俗之用素。 未知甚道理耶。 古人必有所見。 而爲用素之俗矣。" 余曰: "我國古者土俗。 專用佛敎。 人之初死。 設齋8)飯僧。 此俗蓋仍於此矣。 儒者之家。 不宜遵俗。" 羅頷可。二十五日。 癸酉。 大陽家甥文鳳儀歸自靈巖。 寄愼聖弼書。【辭義詳見第九卷書札類。】六月二十二日。 己亥。 大陽令奴末生桔槹泉水。 數日致力。 扱秧僅數升地。 記之以見農家災殃之極。 蓋自五月初二日雨下之後。 尙未注一犁之雨。 赤地千里。 其慘不可言。 姑以今日之所見言之。 生民之命。 保生於秋冬之前。 不可必也。 人民相與偶坐於閭巷之間。 仰天垂泣而已。 當此時。 爲民上者。 所當竭心殫志。 至誠感天。 以求活民之道。 而任專城之責。 寄司牧之道者。 方且剝民之財。 刑戮日加。 而小無字恤之念。 可勝痛哉? 哀此無辜之赤子。 擧將何依? 不覺惻隱之發。 記于此。二十九日。 丙午。 大陽午微雨自東南西方來。 霎然而止。 民情尤悶。 鄭榟來言: "今月二十五日。 於綾州邑深井中。 結二條氷。 長可一尺餘。 汲水人見之。 多人聚看。 摘之置于掌上。 俄然而解云。" 今年大旱。 古今所罕之變。 人心危懼。 朝夕難保。 而六月堅氷。 是何影耶? 可懼可懼。七月初一日。 戊申。 大陽久旱之極。 田野已荒。 况連年饑甚。 四民遑遑。 田財奴僕寶玩鬻賣者盈于道路。 而人無求買者。 人人有必死之心。 而無樂生之氣。 見之慘矣。 嗚呼! 半生讀書。 豈無愛物之心? 而無術以濟之。 非徒不能濟物。 自己妻孥。 猶且不能濟。 飢嘆之聲盈室。 豈勝嘆哉? 昔伊尹見一民之不得其所。 若己推而內之溝壑。 學者當志伊尹之志可也。 而無才不可施。 無行不見知。 奈何? 日對飢民。 嘆咄而已。 今日將以救飢。 使奴賣田于人。 不售而來。 仍感而記。 非惜己之窮也。 不無傷時念也。初三日。 庚戌。 大陽曉與前監察洪鍾聞入館庭。 行拜哭禮。 乃先王禫日也。 是日聞前右尹愼公天翼之訃。 公監司喜男之孫。 公考無子。 與妣某氏禱于智異山而孕。 妣夢靑鳥一雙從懷中出。 一上天一入海。 而已解胎。 乃㝈也。 長曰天翼。 次曰海翼。 蓋從夢徵也。 兄弟自孩提神表異凡。 丱年。 從趙玄洲纘韓學。 自童時。 以詞賦名世。 伯年二十登第。 次年二十一擢謁科壯元。 官至員外郞。 年二十六而卒。 卒後。 原州文官崔文煥及弟文煜。 在童年。 亦能治文詞。 一日兄弟俱遊于州校。 月夜文煜出步于庭除間。 忽於怳惚身到一山上。 文士十餘人羅坐。 言貌淸俊。 其中一人言文煜曰: "余靈巖愼海翼也。 余兄今在靈巖。 君幸傳我消息于余兄。 如何?" 崔"唯唯"。 因忽不見。 翌日崔之家人。 遍求山澤。 深入山中。 則崔坐于藤蘿上。 歸家見衣裾中。 有一圓石子。 綻而視之。 滿裾書辭。 乃海翼筆也。 原與靈地遠。 崔曾不聞愼姓名爲何。 愼公天翼聞其事。 跟尋而至。 見其書。 果乃弟筆也。 其後文煥登第。 文煜中進士。 不復科。 此事。 余聞于參奉崔瀷。 崔乃愼同閈人。 審知始終無疑。 其後文煥爲靈巖郡守。 文煜從焉。 人皆問其事虛實。 崔丁寧言之云。 蓋此事似涉怪誕。 而覬公平生。 官極淸要。 而一不出。 名藉一時。 而若凡人。 縱酒淸談。 不拘小節。 杜門深居。 人罕識面。 或對人。 卽命酒放言。 傍若無人。 語及時事。 以詭言戲答而已。 以此見之。 其自處之道。 必有所志矣。 故今聞其訃。 慨高人之化去。 而竝記其語。 使後人知公之大槩云。初七日9)。 甲寅自夜半雨作曉止。 朝食後雨作。 蓋自五月初二日後。 今日之雨頗沛然也。 但秧未扱疇。 菽未立苗者也。 已無及矣。 余看方書諺語。 多有明驗。 方書云: "立春日甲乙。 則歲豐。" 又曰: "夏上甲雨下。 則船入村巷。" 今正月初五日乙卯。 是立春也。 五月十六日上甲乍雨。 而皆不驗。 諺曰: "元望月光澤。 早晩占豐。" 而今年元望之月。 農民贊其有豐象。 諺曰: "兩麥占西成。" 而今年麥農。 不10)可謂登熟。 皆不符。 今而後。 知古言不相符也如此。 但有一驗。 諺以春雨頻數。 譬家母手大。 今年春雨頗頻而符其言矣。 然或有不符之歲矣。 午文入柱等來拜。 得見前判書趙絅疏草。 蓋以久旱。 自上避正殿求言。 趙應旨封疏。 其大略曰: "殿下側身警災。 審理冤獄。 第一義也。 尹善道之獨不入審理。 何哉?" 疏入。 政院啓曰: "尹善道之罪惡。 國人之所共憤。 聖明之所洞燭。 而趙絅。 乃敢肆然扶植。 譸張眩亂。 引喩陰慘。 略無忌憚。 其在出納惟允之道。 不當矇然入啓。 故捧入之意。 敢啓。" 傳曰: "如此陰慘之疏。 覽之何益? 卽爲還出給云。" 初因論禮之故。 而轉輾至此。 駭機之不測。 有不忍言者。 國家之事。 可謂罔極矣。十二日。 己未。 小陽午雲起東南方。 千峯競秀。 色若濃玉。 望之非常。 口成一律。 有"玉作奇峯列百千。 平排南極半腰天"之句。十三日。 庚申。 小陽夜半起視。 天月淸霽。 氣象澄湛。 口成一絶。 有"顚風急雨運神車"之句。十四日。 辛酉。 大陽自午雷雨甚急。 至暮而止。 天月明快。 又成一絶。 有"龍驅滄海駕雄風"之句。十五日。 壬戌。 少陰愼聖弼專人以書來問。 且告素隱愼公天翼之訃。 六月十五日下世云。 又痛其舅惺菴之喪。 辭意懇惻。 卽答書以送。【詳見第九卷書札中。】 午有"南國高人已上天"之句。 右爲素隱作也。 有"正道無傳已百年"之句。 右爲惺菴作也。二十八日。 乙亥。 少陰堂侄履相問"人之死於閏月者。 忌祭用本月。 所付之月。 禮有明文。 若遇閏月於忌日。 以閏月祭之否?" 曰: "此變禮而古無考。 難以臆決。 然閏者非天時之常也。 恐當以本月爲祭。" 기인목(其人木) 기인(其人)이 바치는 무명을 이른다. 기인은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 궁중과 관청에 숯과 땔감 등을 공물(貢物)로 바치던 공인(貢人)을 말한다. 《大典會通 工典 京役吏》 약정(約正) 향약(鄕約)의 임원(任員)으로 도약정(都約正)과 부약정(副約正)이 있다. 양부(兩斧) 주색(酒色)을 가리킨다. 술은 창자를 가르는 도끼이고, 여색은 심성(心性)을 가르는 도끼이다.《宋子大全隨箚 권5 隨箚》 다른……하더라도 관녕이 어릴 적에 친구인 화흠(華歆)과 함께 채마밭을 매다가 황금을 발견하였는데, 관녕은 마치 돌을 본 듯 개의치 않으며 호미로 밀쳐 내고 밭을 맸으나, 화흠은 한번 집어 보고서야 내던졌다.《世說新語 德行》 어려서 화흠과 자리를 함께하여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보러 나가자 관녕은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았고 그 후로는 그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일전어(一轉語) 선가(禪家)에서 선승(禪僧)이 선기(禪機)를 드러내는 한마디 말로, 사람의 심기(心機)를 깨우치는 것을 가리킨다. 김광원(金光遠) 1478~1550).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봉이다. 교리(校理) 김괴(金塊)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賜死)되자, 장흥(長興) 월봉산(月峰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영변(寧邊)에 유배되었고, 1533년 고향에 돌아와 후진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큰……법이니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작은 은자는 산림 속에 숨고, 큰 은자는 조시에 숨는 거라, 백이는 수양산에 숨었고, 노자는 주하사 벼슬에 숨었네.[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 伯夷竄首陽 老聃伏柱史]" 하였다. 옛사람이……것 《논어》 〈옹야(雍也)〉에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는다.[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라고 하였다. 고인이……만들었다 십이율은 음악의 표준인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이다. 황제(黃帝)가 악관(樂官) 영윤(伶倫)에게 악률(樂律)을 만들라고 명하자, 영윤이 해계(嶰谿) 골짜기의 대나무를 취하여 12개의 통(筒)을 만들고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12음률을 구별했는데, 수컷 울음소리로 육률을 삼고 암컷 울음소리로 육려를 삼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복희씨(伏羲氏)는……그렸고 복희씨가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하도(河圖)를 등에 지고 나오자 그것을 보고 팔괘(八卦)를 그었고 이를 다시 64괘로 만들었으며, 그 뒤에 문왕(文王)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었고, 공자(孔子)가 십익(十翼)을 지어서 《주역》이 완성되었다. 우(禹)……만들었다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이른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우(禹) 임금이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이 실려 있다. 구주는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 육극(六極)이다. 정자(程子)로……것 정자는 정이(程頥)를 말한다. 정이가 어떤 사람이 토끼를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보고 8괘를 그으셨다. 그러나 이 어찌 하도와 낙서를 보고서만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 토끼만 보고도 8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수(數)는 이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곧 평범한 사물에도 역수(易數)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二程遺書 권18》 《易經蒙引 권11 상》 옛사람의 찌꺼기 글로 전해진 성현의 말씀을 뜻한다. 남포가 겸사로 쓴 표현이다. 당동벌이(黨同伐異)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 돕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오정(五鼎) 소, 양, 돼지, 생선, 순록의 다섯 가지 고기를 다섯 솥에 각각 담아 먹는 것을 이르는 말로, 고관 귀족의 대단히 호사스러운 진찬(珍饌)을 뜻한다.《儀禮 少年饋食禮》 허태휘(許太輝) 허엽(許曄, 1517~1580)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 호는 초당(草堂)이다.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아버지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황중거(黃仲擧) 중거는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자이다. 호는 금계(錦溪), 이황의 문인이다. 송당(松堂)의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조선 중종 때의 무신(武臣)인 박영(朴英, 1471~1540)으로,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사직 후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호이다. 1573~1654.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 또는 우산(牛山), 시호는 문강이다. 1591년 성혼(成渾)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우산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내가……발견하고 원문은 '余偶發未解處若千條'인데, 문맥을 살펴 '千'을 '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각하는……영특함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이다. 절구 1수를 지었으니 본서 권4에 수록된 〈양류음(楊柳吟)〉이다. 〈양류음〉은 칠언절구 2수로 되어 있다. 사람이고서……있겠는가 원문은 '人而不可案伏得一慾字耶'인데, 《심경(心經)》에 근거하여 '案'을 '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퇴계의……읽었다 《퇴계집》 권3에는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제하에 칠언절구가 18편, 오언절구가 26편 실려 있다. 〈도산잡영〉에 병기(幷記)가 있는데, 이를 서문이라고 한 듯하다. 흰……지었다 원문은 '有白石淸溪光霽問之句'인데, 문맥을 살펴 '問'을 '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양의(兩儀) 음양(陰陽)을 가리킨다. 태극(太極)에서 음(陰)과 양(陽)의 양의가 생기고, 양의에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 등 사상(四象)이 생긴다. 원복(元服) 관례(冠禮)를 치를 때 착용하던 어른의 의관이다.《儀禮 士冠禮》 부자(夫子)가……썼으니 봉액(縫掖)과 장보(章甫)는 선비의 의관(衣冠)을 말한다. 봉액은 의복의 한 종류이고 장보는 관(冠)의 한 종류이다. 공자가 어린 시절 노(魯)나라에 살 때는 봉액을 입고, 자란 뒤에 송(宋)나라에 살 때는 장보를 썼다.《禮記 儒行》 분수(分殊) 이는 '이일(理一)'이 전제된 말로, 보통 '이일분수(理一分殊)'로 많이 쓰인다. '이일'이란 우주의 근원은 유일(唯一)의 이치 한 가지라는 뜻이고, '분수'란 이 유일의 이치가 나뉘면 천만 가지 현상으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형태와 성질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朱子語類 권1 理氣上 太極天地上》 털이……있다 원문은 '羽族有匹家鵝'인데, 문맥을 살펴 "匹"을 "鴄"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家鵝'는 연문인 듯하여 번역하지 않았다. 요순(堯舜)의……자 '중(中)'이라는 것은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전해 준 도통(道統)의 심법(心法)을 이른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만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부자(夫子)의……묘리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공자가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하느니라.[參乎! 吾道, 一以貫之.]"라고 한 데에 나오는 말이다. 부수(賻襚) 부의(賻儀)의 명칭은 보내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재화는 '부(賻)', 수레와 말은 '봉(賵)', 의복은 '수(襚)', 가지고 노는 물건은 '증(贈)', 패옥은 '함(唅)'이라 한다. '부'와 '봉'은 살아 있는 이를 돕는 데 쓰는 것이고, '증'과 '수'는 죽은 이를 송별하는 데 쓰는 것이다. 계몽(啓蒙) 주희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인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한다.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186년에 완성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일찍이 간행되어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으며 역대 왕들이 강독했다. 참으로……선비였다 원문은 '眞遯士淸修之士也'인데, 문맥을 살펴 '士'를 '世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공자와……것이고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를 억제하여 언어 행동으로 하여금 예에 합치하도록 하는 것이 인(仁)을 한 것이다.'라고 하니, 안연이 그 조목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재를……먹였으니 원문은 '設齊飯僧'인데, 문맥을 살펴 '齊'를 '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겨우……심었다 원문은 '扱秧僅數升地'인데, 문맥을 살펴 '扱'을 '移'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윤(伊尹)은……여겼으니 또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들을 떠밀어 구렁텅이에 집어넣은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思天下之民匹夫匹婦, 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담제일(禫祭日) 상제(祥祭) 후 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초상에서 27개월 만이다. 청담(淸談) 중국의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시대에 예법을 무시하고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상하여 현묘한 이치를 담론하는 것을 이른다. 진나라 말기에 팔달(八達)이라고 일컫던 호무보지(胡毋輔之), 사곤(謝鯤) 등 여덟 사람이 예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청담을 나누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7일 원문은 '初七夕'인데, 문맥을 살펴 '夕'을 '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뚜렷한 효험이 많았다 원문은 '多有明驗'인데, 문맥을 살펴 볼 때 '多'는 '未'의 오자로 추측된다. 하지만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상갑(上甲) 상갑(上甲)은 춘·하·추·동 각 철마다 첫 번째에 든 갑자일을 가리키는데, 농가에서는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해의 풍흉 등을 점친다고 한다. 신거(神車)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신선의 수레를 이른다. 干 千 按 案 間 問 원문은 羽族有匹家鵝인데。 "匹"은 "鴄"의 오기이고。 "家鵝"는 연문인 듯하다。 世 士 齋 齊 日 夕 不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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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5 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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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권응인 附次韻 權應寅 산 기운 저녁에 더욱 아름다우니해 질 무렵에 찾아갔네청안179)으로 반갑게 맞이해주니시내 굽어보며 함께 돌로 양치질하네180) 山氣晩逾佳幽尋趁日夕藍眼喜相迎臨流同漱石 청안 반가워하는 눈빛을 말한다.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달갑지 않은 사람에게는 백안(白眼)을 보이고 반가운 사람에게는 청안(靑眼)을 보였다고 한다. 《晉書 阮籍列傳》 돌로 양치질하네 산수 좋은 곳에서 숨어 사는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고사(高士) 손초(孫楚)가 장차 숨어 살려고 하면서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련다.[枕石漱流]"라고 말해야 할 것을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하련다.[枕流漱石]"라고 잘못 말했는데, 왕제(王濟)가 그 말을 듣고서 잘못을 지적하자, 손초가 "물을 베는 것은 속진에 찌든 귀를 씻어 내기 위함이요,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연화(煙火)에 물든 치아의 때를 갈아서 없애려 함이다."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排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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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교일기 하 南郊日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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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1661) 辛丑 1661년(현종2) 윤7월 8일 을유(乙酉) 대음(大陰)종제 나선(羅䙋)1)이 와서 절하였다. 이 편에 그의 종질 나두삼(羅斗三)2)이 편지를 부쳐 그 선친인 운봉(雲峯) 군3)을 임시로 안장하는 예법에 대해 질문하였다. 대개 산운(山運)이 길하지 않아 임시로 안장해야 한다는 지관의 주장에 대해 그 부형의 논의가 합일되지 않았으므로 서신을 띄워 질문한 것이다.윤7월 9일 병술(丙戌) 소음(少陰)나선이 돌아갔다. 나두삼의 별지(別紙)에 대해 이렇게 답하였다."풍수가의 금기설이 마구 횡행하고부터 임시로 안장하였다가 길운이 들기를 기다리는 시속이 비로소 생겨났습니다. 위로 형장(兄長)을 둔 인인(仁人)과 효자는 독단할 수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닦아야 속기도 범하지 않고 경례(經禮)에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이러한 경우에 처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대부분 관례에 따라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효(大孝)4)는 고례(古禮)를 근거로 삼아 반드시 대사를 극진히 치르고자 하니 순수한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하여 평소 예학에 밝지 못하니 어찌 감히 망녕되게 한마디 말을 내어 대효의 큰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성스러운 효성에 감격하여 감히 끝내 효자의 애절한 간청을 거절할 수 없겠기에 한두 가지 억설을 대략 갖추어 아래에 열록(列錄)합니다.이미 송빈(松殯)이나 토빈(土殯)이라고 한다면 유고하여 빈소를 옮기는 예와 같습니다. 또 이미 빈소를 옮긴다고 한다면 조전(祖奠)을 올려 영결하는 절차가 없은 뒤에야 비로소 빈(殯)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임시로 안장한다고 하였으니, 상여 줄을 잡고 발인한 다음 풍비(豐碑)를 세우거나 폄석(窆石)에 매달아 하관(下棺)하는 절차는 온전히 장례를 준용하면서 예증(禮贈)과 제주(題主) 두 조목만은 제외하고 거행하지 않고 '이는 빈례(殯禮)이다.'라고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제(虞祭), 졸곡(卒哭), 부례(祔禮) 또한 없애고 거행하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광중(壙中)을 파서 하관하고 흙을 채우고 봉분하면 이는 유택(幽宅)이고 둔석(窀穸)인 것이니 반혼(返魂)하고 우제를 지내 신(神)을 편안하게 하는 예를 어찌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제주하고 나서 축문을 품는 의절도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대효가 지금은 장례를 준용하고 뒤에 개장례(改葬禮)를 준용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수도에서 관료로 생활하다가 사망한 중국 사람의 경우 만 리 길을 돌아와 장례를 치르는 것이 형편상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송빈이나 토빈의 풍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경은 토질이 건조하고 기후가 차서 벌레나 뱀, 습기로 인한 시신의 손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해양국이라 벌레나 뱀, 개미 떼의 소굴이니 어찌 벌레나 뱀, 습기로 인한 시신의 손상이 정녕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정녕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효자와 인인의 마음은 끝끝내 틀림없이 꺼림칙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반년 동안 임시로 안장하더라도 대략 석회와 격판(隔板)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광중이나 유실(幽室)은 택(宅)이라 하고 묘지나 영역(塋域)은 조(兆)라고 합니다. 비록 수개월 동안 임시로 안장하더라도 수개월 동안은 택조가 되는 것이니 토지신(土地神)에게 고유하는 글에 언급하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퇴도(退陶 이황(李滉))는 구경산(丘瓊山 구준(丘濬))의 학설을 바꿀 수 있으나 일반인이 주자(朱子 주희(朱熹))의 학설을 쉽게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르기를 '대공(大功) 이하의 상에는 윤달을 계산하고, 기년(朞年) 이상의 상에는 기년으로 끊고 윤달은 계산하지 않는다.'5) 하였고, 제복(除服)한 자가 장례에 참석하는 경우는 응당 〈상복소기 (喪服小記)〉의 주설(註說)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옥조(玉藻)〉 주석의 '아버지가 상중에 있으면 자식은 순길복(純吉服)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6)는 설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보내온 편지에 상측(喪側)에서 백대(白帶)를 착용한다는 말은 시공복(緦功服)7)에서 적용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제사에 참석하는 경우는 조복(弔服)을 착용하고 참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장지가 비록 지근거리라고 해도 대여(大轝)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신중함과 공경을 지극히 다하는 태도가 아닐 듯합니다. 더구나 자제가 부형을 섬기는 것은 부형이 자제를 장사 지내는 예와는 크게 다르니 모든 의절(儀節)과 도수(度數)는 구차하게 사용하여 편의를 좇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장례를 치르기 전 지구(知舊)들에게 서신을 띄워 상례(喪禮)의 어려운 점을 질문하는 것은 옛 학자도 그렇게 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였다.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가 당상관 품계에 처음 가자(加資)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포상하기를 청한 어사 김수흥(金壽興)의 서계(書啓) 때문이었다.8) 원두추가 부임한 초기에는 엄명하다고 일컬어졌으나 근래에는 온 고을이 떠들썩하게 증오하고 있다. 지금 당상관의 품계에 가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고을 사람들은 원두추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수 대하듯 김수흥을 거명하며 욕하고 있다.6월 군민들이 한창 굶주려 고생하던 시기에 민간에 양맥(兩麥)을 독촉해 징수하면서 수도 없이 매질을 가하였다. 또 소금에 절인 조그마한 물고기 덩어리 한 개를 민간에 분배해 주고 대맥(大麥) 3말을 독촉하여 징수하였는데, 3말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군민들은 6말을 썼다. 또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한 자가 발생하자 40여 명을 작은 방 하나에 가둬 놓고 그 문을 잠근 다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돌에 불을 지펴 사람들이 모두 초주검이 된 뒤에야 꺼내 옥에 수감하니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한다.이런 무자비한 일이 한두 사례만 들리는 게 아니라 이루 다 기록하지도 못할 정도이다. 과거에 듣기로 이 자가 과거 유종(儒宗)의 문하에서 공부하고9) 더러 청렴하고 강직하며 공정하다고 호평한 자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고을의 정사가 이러하니 무슨 이유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다.윤7월 25일 임인(壬寅)아침에 윤숙(尹俶)10)이 편지를 보내 "지강(砥江)의 가을 흥취가 한창 아름다우니 어찌 구경 가지 않을쏜가." 하였다. 이에 식후에 나는 말채찍을 휘둘러 가서 강가의 송정(松亭)에서 종일 소요하였다. 윤생 등은 나를 위해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흥치가 매우 적의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이날 강가에서 절구(絶句) 2수11)를 읊어 이루었는데 "수면은 명징하여 텅 빈 듯이 맑다.[水面澄明湛若空]"와 "한 줄기 맑은 냇물은 비단처럼 푸르네.[淸流一帶翠如羅]" 등의 구절이 있다.윤7월 27일 갑진(甲辰) 대양(大陽)이방(吏房) 정우열(丁遇說)이 와서 진휼하는 일에 대한 감사12)의 장계를 보여 주었다. 장계에 수록된 9개 조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재해를 입은 고을의 전세(田稅)를 탕감하여 징수하지 않고 초실(稍實)한 산군(山郡)의 전세를 옮겨 재해를 입은 고을의 백성을 진휼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지 않는 각 읍의 공물을 각 관에서 거두어 들여 구황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 셋째는 대동법을 시행하는 각 읍에서 아직 거두지 못한 춘등미(春等米) 7말씩을 탕감하여 징수하지 않고, 추등미(秋等米) 6말씩은 거두어 각 읍에 보관해 두어 관수(官需)나 진공(進供)하는 물종(物種)의 값을 충당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대가 높은 밭으로서 재해를 입은 곳은 재결(災結)을 인정해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재해를 입은 읍의 모든 요역을 모조리 면제하고 군장(軍匠)의 가포(價布)도 모두 경감해 주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값을 내려 관직을 팔기를 청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교생(校生)의 납속(納粟)을 청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시노비(寺奴婢)나 관노비(官奴婢), 향리가 곡물을 헌납하고 면역(免役)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이 밖에 아직 고안하지 못한 건은 계속해서 장계로 보고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말이 매우 간절하여13) 백성을 사랑하고 시국을 근심하는 마음이 언외에 드러났다. 근래 이와 같이 훌륭한 감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다만 조정에서 그의 청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감사도 시종일관 그 마음을 간직할는지는 모르겠다. 이후로 응당 두고 보겠다.8월 1일 정미(丁未) 대음(大陰)신성필(愼聖弼)14)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띄워 이성암(李惺菴)15)의 장삿날을 통고해 주고 만사(挽詞)를 쓸 종이도 곁들여 보냈는데 편지의 말이 간절하였다. 아울러 질의하기를 "사계(沙溪)는 어린아이가 상사를 주관할 경우 우제(虞祭)의 축사(祝辭)에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들 때까지[夙興夜處]'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에 편안치 못하였습니다.[哀慕不寧]'라는 등의 말은 고쳐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는데16) 만약 고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장인의 계후자(繼後子)가 현재 13세이므로 감히 묻습니다." 하였다.8월 9일17) 을묘(乙卯) 대음(大陰)영암(靈巖) 문생(文甥) 봉의(鳳儀)18)로 하여금 성암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날 빗소리가 밤중까지 그치지 않았다. 홀로 앉아 있노라니 초연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입으로 읊어 이루었는데 "소슬한 가을비 소리가 초가 처마를 울리네.[蕭蕭秋雨響茅簷]"라는 구절이 있다.신성필에게 답장을 보내고 이 편에 만시(挽詩) 배율(排律) 13운(韻)과【제2권 오언배율에 자세히 보인다.】19) 제문(祭文)을【12권 〈이 성암에 대한 제문[祭李惺菴文]〉에 자세히 보인다.】 아울러 작성하여 보냈다.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8월 12일 무오(戊午) 소양(少陽)오후에 날씨가 청명하여 가을 심사가 맑고 상쾌하였다. 집안을 말끔히 소제하고 단정하게 앉아 책상을 마주하니 사념이 솟지 않고 사지육체가 평안하였다. 어찌 항상 이러한 기상을 잡아 지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한 가을달이나 차가운 얼음의 비유도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8월 22일 무진(戊辰) 소음(少陰)오시(午時)에 서풍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한참 만에 그쳤다.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어제 김중원(金仲源)20)과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았다. 중원은 내 과실에 대한 광주(光州) 사람들의 지적을 들어 하나하나 언급하였다. 그중에는 더러 결점을 너무 악착같이 찾아내려고 한 것이나 시론(時論)에 치우친 자의 비난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내가 몸단속이 엄격하지 못하고 마음 다스림이 엄밀하지 못하며 학문을 열심히 하지 않고 말 삼가기를 독실하게 하지 않아 이런 비방을 불렀으니 이 어찌 심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21)다만 세상이 한창 논의가 분열되어 인물을 끌어들이고 시비를 분변함에 각각 영합하는 바를 두어 명리를 넘보고 있는데 나는 한 몸으로 모든 세파에 부딪히는 가운데 마음가짐은 공정하게 하고자 하고 처신은 중도를 지키고자 하여 세속의 경도된 풍조로 처신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않으니 여러 사람의 구설이 집중되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잘못을 하여 남들의 비난을 얻은 것은 이제부터 통렬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의(時議)를 추종하고 그 마음을 바꾸어 유행하는 세태에 동화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기록하고 경계하는 바이다.8월 23일 기사(己巳) 소양(少陽)북풍이 살짝 일더니 날씨가 청량해졌다. 오전에는 단정히 앉아 심신을 수렴하여 다잡았다. 오후에는 동복(童僕)에게 명하여 마당에 있는 콩대와 들깨를 거두게 하고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그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낫을 들고 콩대를 베기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원경을 조망하기도 하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기도 하니 자못 지극한 즐거움이 있었다. 어느새 석양이 서산에 내려앉자 돌아가는 새가 숲에【다른 본에는 숲[林]이 처마[簷]로 되어 있다.】 깃들었다. 나 역시 유유히 돌아오니 궤안이 깨끗하고 조용한 가운데 경전이 책상에 놓여 있어 즐겁게 훑어보았다. 모두 마음을 맑히고 즐겁게 하는 것이니 어찌 굳이 외물(外物)을 사모할 것이 있겠는가.8월 24일 경오(庚午) 소양(少陽)오재발(吳再發)22)이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가을 기운이 참으로 상쾌하니 구담(龜潭)의 맑은 물결을 완상할 만합니다. 지금 오랜 벗 한두 명과 강가의 서덜 굽이에서 만나 환담하기로 약속하여 술상을 삼가 마련하였습니다. 혹 어르신을 모시고 하루 동안의 맑은 완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글을 보고 즉시 출발하여 조금 뒤 도착하였다. 사인(士人) 이소(李韶)와 그 아우 이경(李䪫),23) 오재발 형제, 이운단(李雲槫)24) 등 여러 사람이 어른, 아이 8, 9명과 함께 자리를 펴고 앉아25) 수석 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맞아들였다. 강가 서덜 위에 죽 벌여 앉아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 술을 몇 잔 마시게 하는데 아우 해영(海英)26)이 광주목(光州牧)의 처소에서 도착하였다. 뒤이어 어부가 뗏목을 이용하여 바위 가에 기대어 쏘가리, 잉어 몇 마리를 올리니 아이들에게 명하여 회를 뜨게 하였다. 술을 돌려 마시는 틈틈이 한담을 섞으니 흥치는 흡족하여 매우 즐거웠고 못은 거울처럼 명징하였다. 어슴푸레한 황혼 빛이 언덕의 한 길을 따라서 푸른 잔디에 은은히 비쳐 오자 마침내 함께 작별하고 호탕하게 돌아왔다. 풍진세상의 좋은 놀이였으니 또한 한 가지 즐거운 일이었다.9월 1일 정축(丁丑) 대양(大陽)이날 우연히 《초씨역림(焦氏易林)》27)을 펴 보고 64괘(卦) 384효(爻)를 1년 360일에 분배하는 법을 파악하였다. 64괘 가운데 진괘(震卦), 이괘(離卦), 태괘(兌卦), 감괘(坎卦)를 덜어 내어 사정(四正)28)으로 삼아 각각 1일에 분배하여 4일을 얻고 60괘는 6 X 6=36이므로 360일을 얻어 총 364일이 된다. 작년 11월 20일 동지를 복괘(復卦)의 첫 효로 기산(起算)하여 금년 11월 1일 동지에 이르면 364효를 전부 활용하게 된다. 내일부터 날짜에 분배하여 괘를 기재할 계획이다. 다만 10월 28일은 곤괘(坤卦) 상육효(上六爻)에서 분배가 끝나고 그믐날이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후로 응당 다시 상고해 봐야겠다.9월 3일 기묘(己卯)29) 간괘(艮卦) 육오(六五)이날 《초씨역림(焦氏易林)》과 소씨(邵氏)의 도(圖)30)를 참고하여 64괘를 24절기에 분배하는 도와 도설(圖說)을 만들었다. 따로 기록하고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9월 5일 신사(辛巳) 겸괘(謙卦) 초육(初六) 소양(少陽)태수(太守) 조억(趙億)31) 군이 내방하고 떠났다. 그에게 이달 24일 증광 생원진사시(增廣生員進士試)를 설행하고 10월 13일 증광 문무과(增廣文武科) 과장을 설행한다는 말을 들었다. 세자가 탄생한 경사 및 두 자전(慈殿)에게 휘호(徽號)를 올리고 선대왕을 부묘(祔廟)한 경사 때문이었다.32) 아울러 성상께서 본도 관찰사가 계청한 9개 조목으로 구성된,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대한 상소를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생이 소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성상의 은택이 하늘과 같다.효종대왕이 다섯 명의 공주를 낳아 금상은 형제가 없고 즉위한 지 3년이 되도록 세자를 보지 못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위태롭고 불안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세자가 탄생한 경사를 듣게 되니 그 기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8월 15일 진시(辰時)에 탄생하였다고 한다.9월 12일 무자(戊子) 비괘(否卦) 육이(六二) 소음(少陰)전 금성 판관(錦城判官) 유준(柳浚)33) 공이 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공은 40년 세월을 벼슬하지 않고 집안에서 지내면서 법도 있게 집안일을 처리하고 서재를 건립하여 후학을 교육하다가 올해 78세로 졸하였다. 상복을 입고 상례를 거행한 제자가 40여 인이었다. 아들 유성오(柳誠吾)는 회덕 현감(懷德縣監)으로 있고 나머지 두 아들인 유창오(柳昌吾), 유형오(柳亨吾)와 손자 유상운(柳尙運)은 문재(文才)를 갖추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9월 19일 을미(乙未) 췌괘(萃卦) 육삼(六三)가서 현감을 만났다. 접때 현감이 내방해 준 예에 사례하기 위함이었다. 옛사람들은 공적인 일이 아니면 관할 수령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 현감들이 매번 내방하여 예를 다하고 누차 예물을 보내주기도 하여 마지못해 가서 사례하였다. 나같이 거친 사람이 자주 관아에 들어가는 것은 더없이 불편하다. 그러나 선영이 이곳 남평(南平)에 있고 보면 이곳의 현감으로 있는 사람이 예의와 공경을 다하는데도 전혀 답례하지 않는다면 의리에 또한 온당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부득이한 일을 한 것이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다.10월 7일 계축(癸丑) 관괘(觀卦) 육삼(六三) 소양(少陽)경차관(敬差官) 여증제(呂曾齊)34)가 현(縣)의 백성에게 잔혹한 형벌을 자행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보다 앞서 본도는 3년 동안 기근이 매우 혹심하였는데 올해 좌도(左道)는 산읍(山邑)의 농사가 해읍(海邑)보다는 조금 괜찮았다. 그러나 본현의 농사는 해읍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감사 이태연(李泰淵) 공이 재해를 입은 군현에 본현을 함께 열거하여 장계로 보고하였다.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는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아우로 성질이 본래 잔혹하였다. 과거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재직할 당시 이태연 공이 충청 감사로 재직하면서 어떤 일로 원두추를 태거하여 쫓아내었다. 올가을에 원두추가 말미를 받고 서울에 올라와서 어느 재상에게 말하기를 "남평의 농사는 풍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남평 현감과 오랜 친구 관계이므로 재해를 입어 황폐해졌다고 꾸며 조정에 허위로 보고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재상이 성상에게 보고하니 이로 인해 좌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검증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남평의 읍정(邑井)이나 하천을 따라 위치한 몇몇 리는 조금 농사가 되었으므로 원두추가 이를 빙자하여 감사에게 화를 덮어씌워 과거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기 때문이다.9월 12일에 여증제가 영암(靈巖)에서 본읍에 도착하여 전야(田野)는 전혀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은 채 도감(都監) 윤선갑(尹先甲), 도서원(都書員) 송대춘(宋大春)에게 장을 쳤다. 송대춘은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또한 거처가 쾌적하지 않다는 이유로 매우 잔혹하게 관아 아전들에게 장을 쳤다. 어제는 또 능주(綾州)에서 현에 도착할 때 향중 인사(鄕中人士)인 전 참봉 서행(徐荇)35) 등 70여 인과 촌에 거주하는 상놈들 100여 인이 길가에 엎드려서 상서(上書)하여 애걸하고 이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실상을 진달하였다. 그러자 여증제가 크게 노하여 서행을 모욕하고 그의 종과 상놈들을 옥사에 가두고 감관과 서원(書員) 등 7, 8인에게 혹형을 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해를 입어 황폐해진 본읍의 1900여 결(結)을 모두 태거(汰去)하였으나 여증제는 다만 기존 재결(災結)에서 600여 결만 남기고 빼 버렸다. 감사는 하는 수 없이 차재읍(次災邑)으로 조정에 재차 보고하고 곡식과 부역에 대해 징수를 독촉하라고 공문을 보내 알렸다. 이에 사람들의 억장이 무너지고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다. 부랑하다가 죽는 화가 금방 눈앞에 닥쳤는데 본읍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형장이 잔혹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 또 형륙(刑戮)까지 가해지니 차마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여증제의 화가 기근보다 혹심하다." 하였다.11월 1일 병자(丙子) 복괘(復卦) 초구(初九) 소양(少陽)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냈으니 오늘은 곧 동짓날이다. 지은 절구(絶句)36)에 '야반천심(夜半天心)' 등의 시어가 있다.12월 11일37) 병진(丙辰) 무망괘(无妄卦) 구사(九四) 대양(大陽)새벽에 일어나 외조부38)의 기제(忌祭)를 지냈다. 날씨가 따사로워 제법 봄기운이 있었다. 굶주린 백성들의 고초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도로 위에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하다. 무안(務安) 고막교(古漠橋)39) 위에 한 여인이 두세 살짜리 아이를 안고 앉아서 한나절이나 통곡하다가 저녁 무렵에 다리 아래로 그 아이를 던지고는 대성통곡하고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굶주림으로 모자가 모두 생존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이었을 것이다. 듣고서 너무너무 슬프고 가여웠다.12월 12일40) 정사(丁巳)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 대양(大陽)종질(從姪) 김이상(金履相)이 능주(綾州)에서 곡식을 구입해 왔다. 내가 이르기를 "옛날 계로(季路)는 100리 밖에서 쌀을 져 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41) 자식이 어버이에 대하여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응당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대기근을 맞아 몸소 집안일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 그 어버이가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자가 많다. 네가 이러한 일을 해내어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에 뜻을 두니 내가 몹시 측연하구나." 하였다.12월 15일 경신(庚申) 명이괘(明夷卦) 육이(六二) 대양(大陽)아침에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득 채워 100보 떨어진 사물의 형상도 식별할 수 없다가 해가 높이 올라온 뒤에 그쳤다. 오늘은 곧 입춘절(立春節)인데 음산하고 독한 기운이 이러하니 이것이 무슨 징후란 말인가. 백성은 굶주려 죽지 않으면 옮겨 다니는데 전염병이 또 따라서 생겨났다. 첫 절기에 음울한 기운이 어둑하게 가득 차니 결코 길한 조짐이 아니다. 놀라운 마음으로 기록한다.12월 16일 신유(辛酉) 명이괘(明夷卦) 구삼(九三) 대양(大陽)날씨가 푹하여 중춘과 다를 바 없었다. 낮에 충의(忠義) 윤경(尹儆)42)의 상에 조문하였다. 반혼(返魂) 때 쓰는 유거(柳車)의 제도는 《가례(家禮)》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나 세속에서는 상고해 내어 그것을 제작하는 자가 없다. 내가 김재화(金載華)를 시켜 상가에 말하게 하여 그 제도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그것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 제도가 더없이 좋아서 호상(護喪)한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고맙다는 뜻을 표하였다.다만 복토(伏兎)의 제도는 본문을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긴 장대에 별도로 작은 기둥을 세우고 대의 위쪽 부근에 널의 높이를 헤아려 둥근 구멍을 만들어 작은 방형의 평상43)에 세운 작은 기둥의 둥근 구멍과 서로 맞게 한 다음 가로 빗장을 만들어 끼우면 기울기가 매우 심한 언덕이나 비탈을 오르내려도 널이 항상 수평을 이루고 반듯하게 된다. 자식 된 자들이 상사를 치르는 대사에 이로부터 그 제도를 서로 전하여 잘못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12월 29일 갑술(甲戌) 기제괘(旣濟卦) 육사(六四) 소음(少陰)집안을 청소하고 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냈으니 오늘은 곧 섣달 그믐날이다. 한 해 농사의 전체적인 상황을 두루 상고하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봄비가 적기에 내려 백성들이 풍년을 기대하였으나 여름 가뭄이 극성을 부려 농경지가 재해를 입고 황폐해졌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하고 도적이 제멋대로 날뛰는 데다 전염병까지 따라서 치성하였다. 유랑민과 노약자들이 쏟아져 나와 도로가 저잣거리 같았다. 그러나 혹리(酷吏)와 탐관(貪官)은 형륙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은 날로 심화되고 달로 증가하였다. 훌륭한 정사가 비록 밝으신 성상에게서 나오더라도 혜택이 아래로 백성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나같이 재야에 있는 자의 근심이 비록 간절하더라도 어쩌겠는가.붓 가는 대로 사실을 기록하고 또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1년 300일 동안 허송세월하여 낮에는 일어나 있고 밤에는 엎드려 있었으니 무슨 일을 이루었겠는가. 엄밀하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학문은 조금의 진전도 없고 엄격하게 스스로를 단속하지 못하여 비방은 산처럼 쌓였다. 나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생각해 보니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럽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다. 내년에는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과거의 허물은 얼음이 녹듯이 사라지고 새로운 지식은 점점 진전되기를 바란다. 그리한다면 노경에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다.이날 미시(未時), 신시(申時)에 신방(申方)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번갯불이 일더니 이내 비가 내리고 햇빛이 어두워졌다. 폭풍과 소나기가 잠깐 사이 그쳤다 쳤다 하고 천둥소리와 번갯불이 별안간 일었다 사라졌다 하였다. 아주 괴상한 현상이었다. 閏七月初八日。 乙酉。 大陰從弟羅䙋來拜。 其從侄羅斗三付書。 仍問其考雲峯君權葬之禮。 蓋以地家山運不吉權葬。 而其父兄論議不一。 故發書來問。初九日。 丙戌。 少陰羅䙋還。 答羅斗三別紙曰: "自堪輿家拘忌之說肆行。 權厝待吉之俗始起。 仁人孝子之上有兄長。 不得自專。 將何修而無犯於俗忌。 不悖於經禮耶? 世之遭此者不一。 而擧皆循例行之。 大孝援據古禮。 必欲極盡於大事。 足見純孝之至也。 但鄙人識淺見陋。 素眛禮學。 何敢妄容一言。 以塞大孝之盛望哉? 感孝意之勤。 不敢終孤哀懇。 略具一二臆說。 列錄于左。 旣曰松殯土殯。 則與有故移殯之禮等矣。 旣曰移殯。 則無祖奠永訣之節。 然後方可謂之殯。 今旣曰權葬。 則牽紼發引。 樹豐懸窆之節。 全用葬禮。 而獨於禮贈題主二條。 棄而不行。 曰是殯禮云爾。 則未知如何耶? 然則。 虞卒哭祔禮。 亦可廢而不行耶? 穿壙下棺實土封塋。 則是幽宅。 是窀穸也。 返魂虞安之禮。 何可廢哉? 卽題主懷祝之節。 不可不擧。 反復思之。 大孝今用葬禮。 後用改葬者。 似爲得宜。 中國之人宦遊京師。 萬里歸葬。 勢不可易。 故有松殯土殯之俗。 然北京土氣寒。 無虫蛇水濕之患矣。 吾東窮海之陬。 乃虫蛇螻螘之窟。 安保虫蛇水濕之必無乎? 設使必無是事。 孝子仁人之心。 終必有未安者矣。 故愚意以爲雖半年權葬。 略用石灰隔板。 可也。 未知如何? 壙中幽室。 謂之宅。 墓地塋域。 謂之兆。 雖數月權葬。 尙可爲數月之宅兆。 告土之詞云云。 似無所疑。 况退陶之於丘瓊山。 可得改也。 凡人之於朱子。 容易改換耶? 張子曰: '大功以下筭閏。 自朞以上以朞斷。 不計閏云。' 除服者之會。 葬者當從喪服小記註說。 但以〈玉藻〉註'父有喪。 子不可純吉'之說推之。 來喩在喪側白帶之說。 似不可施於緦1)功之服矣。 然來參祭祀。 則似可以吊服來與矣。 未知如何? 葬地雖至近。 不用大轝。 恐非致謹致敬之至。 且子弟之事父兄。 與父兄葬子弟之禮大異。 凡儀節度數。 恐不可苟用從便。 葬前發書。 問難喪禮於知舊。 古之學者亦有行之者。" 聞錦城縣監元斗樞。 新加堂上階。 蓋用御使金壽2)興褒啓也。 斗樞莅官之初。 以嚴明稱。 近來一境譁然仇㤪。 今聞階加堂上。 闔州之人不怨斗樞。 號辱壽3)興如讎矣。 六月民方飢苦之日。 督捧兩麥於民間。 笞鞭狼藉。 又頒鹽魚一小塊于民間。 督收大麥三斗。 三斗之納。 民費六斗。 有不及納者。 囚四十餘人于一小房。 鎖其戶。 以火烘其突。 自朝至暮。 人皆垂死。 然後出囚于獄。 哭聲徹天云。 如此酷烈之事。 非一二聞之。 不可勝記。 前聞此人曾從事於儒宗之門。 或有以淸介公正稱之者。 邑政如此。 未知何故而至此。 可嘆可嘆。二十五日。 壬寅朝尹俶以書來言: "砥江秋興方佳。 盍往觀之?" 食後余揮鞭赴之。 終日逍遙於江上松亭。 尹生等爲余設網得魚。 興致甚適。 日暮而歸。 是日。 江上吟成二絶。 有"水面澄明湛若空"及"淸流一帶翠如羅"等句。二十七日。 甲辰。 大陽吏房丁遇說。 以監司賑救狀啓來示。 啓中九條。 一。 請災邑田稅蕩減不捧。 而以稍實山郡之稅。 移賑災邑之民。 一。 請未行大同各邑貢物。 收捧於各官。 以爲救荒。 一。 請行大同各邑未收春等米七斗。 蕩滌不收。 秋等六斗之米。 則捧留各邑。 以爲官需及進供物種之價。 一。 請高田之被災者給災。 一。 請災邑一應徭役。 盡皆蠲免。 軍匠價布。 亦皆許減。 一。 請減價賣官。 一。 請校生納粟。 一。 請寺奴婢官奴婢鄕吏許納糓免役。 一。 請此外未及思得者。 連續啓聞。 辭意懇惻4)。 愛民憂時之心。 見於言外。 近來監司之賢者。 未聞如此。 但未知朝廷。 何以處其請? 而監司。 亦終始保守此心否? 從當觀之。八月初一日。 丁未。 大陰愼聖弼。 專人致書。 告以李惺菴葬日。 且送挽紙。 書辭懇切。 且問沙溪云: "小兒主喪者。 於虞祭祝辭。 '夙興夜處'。 '哀慕不寧'等語。 改書無妨。" 如改之。 其詞何以書之耶? 舅氏繼後孤。 今十三歲。 故敢問云。初九5)日。 乙卯。 大陰使靈巖文甥鳳儀致祭于惺菴。 是日雨聲至夜不止。 獨坐悄然。 口成一絶。 有"蕭蕭秋雨響茅簷"之句。 愼聖弼答書。 且製送挽詩排律十三韻【詳見第二卷五言排律。】及祭文。【詳見十二卷〈祭李惺菴文〉。】 不錄于此。十二日。 戊午。 少陽午後。 日氣晶明。 秋思淸爽。 淨掃堂宇。 端坐對案。 思慮不起。 百體靜泰。 安得恒持此氣象乎? 古人所謂秋月寒氷之譬。 能如此否?二十二日。 戊辰。 少陰午西風雨作。 移時而止。 闔戶獨坐。 仍思昨日與金仲源語。 仲源。 仍擧光州人等指摘余過擧處。 一一言之。 其間。 或多有吹毛者之已甚。 偏時者之斥言。 然皆余律身不嚴。 治心不密。 爲學不勤。 愼言不篤而致此口舌。 此豈非6)可戒可懼之甚者耶? 但世方論議分歧。 引物辨色。 各有所阿。 希覬利名。 而余以一身。 當衆流之衝。 持心欲公。 處身欲中。 不以世俗所偏自處。 而特立不倚則衆口之集。 安得免乎? 至於自失而得非於人者。 自此痛加繩墨可也。 至於仍時議而易其中。 混於流俗。 余忍爲哉。 仍書而警之。二十三日。 己巳。 少陽北風微起。 日氣淸凉。 午前端坐收束。 午後命兒僕收園中豆箕水荏。 杖屨往來于其間。 或手鎌刈豆。 或住杖望遠。 或擧頭仰天。 頗有至樂。 而已夕陽下山。 歸鳥投林。【一作簷】 余亦悠然而還。 几案淨靜。 經傳在床。 欣然寓目。 無非澄心悅意之具。 何必外慕爲哉?二十四日。 庚午。 少陽吳再發以書來曰: "秋氣良爽。 龜潭之澄浪可玩。 今與一二知舊。 相約會敍于江磯澳。 具酒樽。 謹以辦矣。 倘倍杖屨而爲一日之淸賞乎?" 余聞言卽駕。 俄頃而至。 士人李韶其弟䪫。 吳再發兄弟,李雲槫諸人。 竝童冠八九人。 班荊而坐。 開樽于水石之涯。 迎余而入。 列坐于江磯之上。 叙寒暄訖。 命酒數酌。 而海英弟自光州牧所至矣。 而已漁人因筏。 而倚于巖邊。 進錦鱗赤鯉數箇。 命童子切膾。 傳酒之暇。 雜以閑談。 興致佳適。 澄潭若鏡。 暝色依微。 循岸一路。 隱暎靑莎。 遂與別。 浩然而歸。 塵中一良遊。 亦爲一樂。九月初一日。 丁丑。 大陽是日。 偶披《焦氏易林》。 得以六十四卦三百八十四爻。 分配一年三百六十日之法。 六十四卦。 除震離兌坎爲四正。 各配一日。 得四日六十卦。 六六三十六得三百六十日。 共三百六十四日。 起前年十一月二十日冬至。 復之初一爻。 至今年十一月初一日冬至。 三百六十四爻盡用矣。 自明日配日爲記是計。 而但十月二十八日。 坤之上六畢配。 而晦日爲剩。 是則未可知也。 從當更考。初三日。 己7)卯。 艮六五是日。 參考《易林》及邵氏圖。 作六十四卦配二十四氣之圖及說。 別錄不記此。初五日。 辛巳。 謙初六。 少陽太守趙君億。 來訪而去。 聞以今月二十四日設增廣生進試。 十月十三日文武科設場云。 蓋以世子誕生慶及兩慈殿上徽號及先王祔廟之慶也。 又聞聖上從本道方伯啓請九條賑民之狀。 民生可甦。 聖恩如天。 孝宗大王誕五公主。 今上無兄弟。 卽位三年。 世子未育。 一國人心危疑。 今聞世子誕生之慶。 其喜可言? 蓋八月十五日辰時始誕云。十二日。 戊子。 否六二。 少陰聞錦城前判官柳公浚卒。 柳公不仕家居四十年。 處家事有法。 立書齋敎養後學。 年今七十八而卒。 弟子持服行喪者四十餘人。 子誠吾懷德縣監。 二子昌吾亨吾。 孫尙運。 具有文才。 皆登司馬。十九日。 乙未。 萃六三往見邑宰。 蓋謝頃日主倅來見之禮也。 古人非公事不見邑宰。 余居鄕。 邑宰每有來見致禮。 或累致禮物。 不得已有往謝之禮。 踈野之蹤。 頻入官門。 極有非便。 而先塋在此土則爲此地主者。 屈禮致敬。 而寞然無慰答之禮。 於義亦未安焉。 故有此不得已之擧。 可嘆可嘆。十月初七日。 癸丑。 觀六三。 少陽聞敬差官呂曾齊肆虐刑于縣人。 先是。 本道三年饑饉甚酷。 而今年左道山農稍勝於海邑。 然本縣之農。 無異於海邑。 故監司李公泰淵以本縣同列於災郡啓聞。 錦城縣監元斗樞。 乃右相斗杓之弟。 性本殘虐。 曾於忠州牧使時。 李公泰淵爲忠淸監司。 以事汰斗樞而逐之。 今年秋。 斗樞受由抵京。 言于宰執曰: "南平之農。 無異豐年。 而監司與南平倅故舊。 故冐以災荒。 瞞報朝廷。" 於是。 宰執白上。 仍遣敬差官于左道以檢之。 蓋南平邑井沿水數里。 稍得成農。 故元藉此。 欲嫁禍於監司而報往日之㤪故也。 九月十二日。 呂曾齊自靈巖抵本邑。 全不審覈田野。 杖都監尹先甲都書員宋大春。 大春抵死而甦。 又以居處不適。 杖官吏甚酷。 而昨日。 又自綾州到縣時。 鄕中人前參奉徐荇等七十餘人。 村漢等百餘人。 伏于路傍。 上書哀乞。 仍陳飢寒之狀。 曾齊大怒。 僇辱徐荇。 囚其奴及常漢等于獄。 酷刑監官書員等七八人。 先是。 本邑災荒一千九百餘結盡汰去。 只存六百餘結而去。 監司不得已以次災邑更報于朝。 食糓及賦役。 懲督行會。 人心若崩。 怨瀆徹天。 流死之禍。 迫在朝夕。 非徒本邑。 到處刑杖殘酷。 飢寒之民。 又加以刑戮。 不忍言不忍言。 人皆曰: "曾齊之。 酷於饑饉。"十一月初一日。 丙子。 復初九。 少陽齋居終日。 今日。 乃冬至日也。 有絶句"夜半天心"等語。十二月十一8)日。 丙辰。 无妄九四。 大陽晨起。 行外祖考忌祭。 日氣溫和。 頗有春氣。 飢民之苦。 日復日深。 道路之上餓殍相望。 聞務安古漠橋上。 有一女抱二三歲兒而坐。 半日哭泣。 臨夕投其兒于橋下。 大哭而去云。 蓋以飢餒勢不能母子兩活故也。 聞極悲憐悲憐。十二9)日。 丁巳。 无妄九五。 大陽從侄履相。 貿糓于綾州。 余謂曰: "昔季路百里負米以養親。 人子之於親。 力之可及者。 皆所當自盡。 今人値此大饑。 不肯躬執家事。 使其親至於飢餒者多矣。 汝能辦此事。 以奉親爲意。 余甚惻然云。"十五日。 庚申。 明夷六二。 大陽朝陰霧四塞。 不能辨百步物色。 日高而止。 今日。 乃立春節也。 陰毒之氣如此。 此何影也? 生民飢饉不死而徙。 而厲疫又從而起矣。 首節之陰霾之氣。 昏塞否暗。 決非吉象。 憮然而記。十六日。 辛酉。 明夷九三。 大陽日氣和煦。 無異仲春。 午吊尹忠義儆。 返魂柳車之制。 詳載《家禮》。 而世俗無有考出而製之者。 余使金載華言于喪家。 詳敎其制度。 而造之。 其制極好。 護喪諸人。 皆致謝於余矣。 但伏兎之制。 似有難從本文。 故別立小柱於長杠。 杠之近上。 度柩高而設圓鑿。 與小方狀10)小柱圓鑿相當。 而設橫扃通貫之。 上下原坂傾側甚偏。 而柩常平正。 庶使爲人子送終大事。 自此相傳其制而不失云。十二月二十九日。 甲戌。 旣濟六四。 少陰灑掃庭宇。 終日齊居。 今日乃歲除日也。 歷考一年歲功之終始。 而記之曰: "春雨時降。 人民望豐。 夏旱亢極。 田畝災荒。 秋冬之間。 餓莩相望。 盜賊恣橫。 厲疫又從而熾發。 流民老弱。 道路如市。 酷吏淫官。 刑戮縱肆。 而生民之困。 日深月滋。 美政雖發於聖明。 膏澤不究於赤子。 林下之憂雖切。 奈何? 信筆記事。 又反而思之。 一年三百日。 虛度光陰。 晝起夜伏。 所成者。 何事? 治心不密。 學無寸進。 律己不嚴。 積謗如山。 反躬自思。 仰愧俯怍。 庶幾來歲改心易慮。 舊過氷解。 新知漸進。 庶可作晩景小過之人耶? 可嘆可嘆。 是日未申時。 雷聲電光申方。 仍下雨。 日光晦暝。 顚風急雨。 乍止乍作。 雷聲電光倏起倏滅。 勢甚非常。" 나선(羅䙋) 1634~?. 자는 정경(整卿),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정개청(鄭介淸)의 문인인 나덕준(羅德峻)의 손자이고, 나경소(羅經素)의 아들이다. 167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사헌부 장령, 용강 현령(龍岡縣令), 마전 군수(麻田郡守) 등을 지냈다. 나두삼(羅斗三) 1635~?. 자는 태서(台瑞), 본관은 나주이다. 나염(羅袡)의 아들이다. 1666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제원 찰방(濟源察訪), 사섬시 직장, 공조 좌랑, 태인 현감(泰仁縣監) 등을 지냈다. 운봉(雲峯) 군 나두삼의 부친인 나염(羅袡, 1611~1661)이다. 자는 자상(子尙)이다. 생부는 나위소(羅緯素)인데, 나위소는 나덕준의 아들로 남포의 외친이다. 나염은 1642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공조 정랑, 태인 현감(泰仁縣監), 운봉 현감(雲峯縣監) 등을 지냈다. 현감으로서 치적을 많이 쌓았고, 특히 운봉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남원(南原)의 수령을 잠시 겸직하였는데 남원 주민들이 그를 남원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해 달라고 관찰사에게 청원하기도 하였다. 대효(大孝) 간찰 등에서 상을 치르고 있는 상대방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공(大功)…… 않는다 《장자전서(張子全書)》 권8에 수록된 〈제사(祭祀)〉에 보인다. 아버지가…… 된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의 "호관에 검은 무를 다는 것은 아버지가 상중에 있을 때 자식의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也.]"라는 구절에 대한 진호(陳澔)의 주에 "호로써 관을 만듦은 흉복이고, 무가 검은색인 것은 길복이다. 길복과 흉복이 서로 반씩 인 이유는 아버지가 상중에 있으면 자식은 순길복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以縞爲冠, 凶服也, 武則玄色, 吉也. 所以吉凶相半者, 蓋父有喪服, 子不可用純吉.]"라고 하였다. 시공복(緦功服) 원문은 '腮功之服'인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腮'를 '緦'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금성 현감(錦城縣監)……때문이었다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에 의하면, 원두추는 1660년 8월 14일에 도임하여 1663년 4월 16일에 이임하였다. 또 《현종실록(顯宗實錄)》 2년 6월 4일 기사에 의하면, 어사 김수흥의 서계로 인하여 금성 현감 원두추 등이 포상을 받았다. 한편 김수흥의 원문은 '金守興'인데, 《현종실록》 이 기사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2년 3월 22일 기사에 근거하여 '守'를 '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 '金守興'은 모두 동일하게 처리하였다. 이 자가……공부하고 원두추는 원두표(元斗杓)의 동생으로,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에게 수업하고 이의길(李義吉), 김극형(金克亨) 등과 종유하였다. 《南溪集 권73 廣州府尹贈左贊成元公墓碣銘》 윤숙(尹俶) 1612~1669. 자는 태초(太初), 호는 양진재(養眞齋),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종형 윤검(尹儉)과 함께 병자호란 때 의병을 결성하여 근왕하고자 하였다. 만년에 도이봉(道伊峯) 아래 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절구(絶句) 2수 본서 권4에 수록된 〈맑은 가을날 지강에 배를 띄우다[淸秋泛舟砥江]〉이다. 감사 1661년 6월 5일 전라 감사에 임명된 눌재(訥齋) 이태연(李泰淵, 1615~1669)이다. 《承政院日記 顯宗 2年 6月 5日》 말이 매우 간절하여 원문은 '辭意懇測'인데, 문맥을 살펴 '測'을 '惻'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신성필(愼聖弼) 1626~1674. 자는 여뢰(汝賚), 호는 경암(敬庵),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생원 신광익(愼光翊)의 아들이다. "신 효자(愼孝子)"라고 불릴 정도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성암(李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이다.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이며, 이태길(李泰吉)의 아들이다. 1624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33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졸기에 의하면, 천성적으로 관직을 좋아하지 않아 고향에 물러나 지내면서 소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역학(易學)을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신성필은 그의 사위이다. 사계(沙溪)는……하였는데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 제39권 〈의례문해(疑禮問解) 상례(喪禮) 제주(題主)〉에 보인다. 9일 원문은 '初十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十'을 '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문생(文甥) 봉의(鳳儀) 남포의 생질인 문봉의(1638~1709)이다. 자는 성서(聖瑞), 호는 송구(松邱),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우상(文遇尙)의 아들이다. 영암 장암리(場巖里)에 거주하였다. 제2권……보인다 본서 제2권 오언배율 〈만이성암 수인(挽李惺庵 壽仁)〉을 가리키며, 이 외에도 본서 제4권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남포가 지은 동일 제목의 만시가 보인다. 김중원(金仲源) 김오(金浯, 1617~1676)이다. 자는 중원, 호는 칠매(七梅),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명암(鳴巖) 김형(金逈)의 손자이며, 진사 김성로(金成輅)의 아들이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문인이다. 1660년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것이……아니겠는가 원문은 '此豈可戒可懼之甚者耶'인데, 문맥을 살펴 '豈' 뒤에 '非'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오재발(吳再發) 본관은 낙안(樂安)이다. 남포의 장인 매백헌(梅栢軒) 오희일(吳喜馹)의 손자이다. 사인(士人)……이경(李䪫) 이소 형제는 본관이 전의(全義)로,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의 손자들이다. 이소는 이신의의 장남인 이정길(李貞吉)의 둘째 아들이고 이경은 셋째아들이다. 《宋子大全 권159 石灘李公神道碑銘》 이운단(李雲槫) 이소(李韶)의 큰형인 이호(李頀)의 아들이다. 자리를 펴고 앉아 원문의 '반형(班荊)'은 풀을 펴고 앉은 것으로, 길에서 옛 친구를 만나 싸리를 깔고 앉아 정담을 나눔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襄公26年》 아우 해영(海英) 남포의 종제인 김해영(金海英)이다. 호는 광곡자(廣谷子)이다. 초씨역림(焦氏易林) 전한(前漢)의 초연수(焦延壽)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점서이다. 《초공역림(焦貢易林)》 혹은 줄여서 《역림》이라고도 한다. 64괘를 겹쳐 4096개의 변괘(變卦)를 만들어 풀이하였다. 사정(四正) 《주역(周易)》의 8괘 가운데 감괘, 이괘, 진괘, 태괘로서 곧 4개의 정괘(正卦)이다. 겨울, 여름, 봄, 가을의 사시(四時)를 각각 나누어 주관한다. 기묘(己卯) 원문은 '乙卯'인데, 전후 간지를 살펴 '乙'을 '己'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씨(邵氏)의 도(圖) 소옹(邵雍)의 〈선천도(先天圖)〉를 가리킨다. 조억(趙億) 남평 현감(南平縣監) 조억(1615~1670)이다. 자는 자수(子壽), 호는 환성자(喚醒子),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의 아들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는 1661년 6월 29일 남평 현감에 임명되어 7월 12일에 하직하였다. 세자가……때문이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 2년 8월 20일 기사에 의하면, 당시 네 가지의 경사 즉 숙종의 탄생과 효종의 부묘 및 장렬왕후(莊烈王后)와 인선왕후(仁宣王后)에게 휘호를 올린 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책례(冊禮)를 기념하여 대증광시(大增廣試)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유준(柳浚) 1584~1661. 자는 징원(澄遠), 호는 사교당(四矯堂),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유몽익(柳夢翼)의 아들이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감찰, 판관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여증제(呂曾齊) 자는 여로(汝魯), 호는 동은(洞隱),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형조 판서 여이재(呂爾載)의 아들이다. 164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1년 8월 25일에 전남좌도 경차관(全南左道敬差官)으로 부임하였다. 서행(徐荇) 자는 이택(而澤), 호는 용악(龍岳),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 사재를 다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진사 조수성(曺守誠)과 함께 여산(礪山)에 집결하였다가 청주(淸州)에 이르러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돌아왔다. 절구(絶句) 본서 권4에 수록된 〈동지(冬至)〉이다. 11일 원문은 '十二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二'를 '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외조부 나원길(羅元吉)이다. 자는 길재(吉哉),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나경(羅絅)의 아들이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남평에 거주하였다. 1615년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막교(古漠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나주목(羅州牧) 교량(橋梁)〉에는 '古幕橋'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고막포(古幕浦)에 있는 다리로 소개되어 있다. 현재 함평의 고막천 석교(古幕川石橋)가 이것이다. 12일 원문은 '十三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三'을 '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옛날……봉양하였다 자로(子路)가 일찍이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예전에 제가 양친을 섬길 때는 항상 명아주와 콩잎만 먹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버이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곤 했습니다.[昔者由也, 事二親之時, 常食藜藿之實, 爲親負米百里之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致思》 윤경(尹儆)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귀와정(歸臥亭) 윤정훈(尹廷勳)의 둘째 아들이다. 작은 방형 평상 원문은 '小方狀'인데,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에 의거하여 '狀'을 '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腮 緦。 守 壽。 守 壽。 測 惻 十 九 非 보충 乙 己 二 一。 三 二。 狀 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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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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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임인년(1662) 壬寅 1월 26일 경자(庚子) 동인괘(同人卦) 구오(九五) 소양(少陽)근래 일이 없어 고요히 앉아 심신을 수렴하는 여가에 한가로이 《송사(宋史)》를 읽어 보았다. 광종(光宗)과 영종(寧宗) 연간에 이르러 간신이 권력을 장악하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지목하니44) 이를 살펴보고 견딜 수 없이 답답하였다. 이를 보면 오늘날의 일과 같아서 수백 년 전의 일인 줄도 모를 정도이니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1월 27일 신축(辛丑) 동인괘(同人卦) 상구(上九) 소양(少陽)나는 전에 인심(人心)의 오묘함은 본래 하늘에 부합하나 다만 한 겹의 사심을 뚫고 위로 천리를 통달해야 세상만사를 총괄하여 꿸 수 있고 이를 이루지 못하면 비록 모든 역사를 두루 살펴보더라도 결국은 나의 일에 유익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책을 읽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 한가로이 지내는 여가에 《송사》를 두루 읽어 보니, 엄숙하여 마치 내 자신이 조정에 있으면서 위로는 군부를 따르고 아래로는 재상의 반열에 들어 안으로 각종 정무를 처결하고 밖으로 국경의 변란을 방어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정신은 안정되고 숙연해지며 외면은 단정하고 엄숙해져서 태만한 기운이 심신에 일지 않고 궤안(几案)과 당실(堂室)이 엄숙하여 마치 조정인 것 같았으니 내가 학문을 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이는 역사책을 읽는 방법으로 삼을 만하므로 기록해 둔다.1월 28일 임인(壬寅) 임괘(臨卦) 초구(初九) 대음(大陰)동풍이 때때로 일고 비가 내릴 기미가 다분하였다.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미 지나간 세월을 때때로 되돌아보니 사소한 허물과 큰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하늘에 부끄러워졌다. 이제부터 우뚝하게 뜻을 세우고 의연하게 분발하여 옛 습속을 제거하고 날마다 새롭게 터득한다면 죽기 전에는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몸의 과실을 없애기는 쉽거니와 마음의 과실을 없애기는 어렵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몸의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책망할 수 있거니와 마음의 과실이 있으면 신이 비난할 수 있다." 하였으니,45) 이 말은 응당 종신토록 외워야 한다.1월 30일 갑진(甲辰) 임괘(臨卦) 육삼(六三) 소양(少陽)하루 종일 조용히 지냈다. 오후에 일어나 동쪽 언덕에서 매화를 구경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절구(絶句) 한 수46)를 읊었다.듣건대 동산에 벌써 매화가 폈다 하기에지팡이 짚고 이끼 덮인 길을 한가로이 거닐었네꽃 찾는 흥취를 아무도 아는 이 없어서나 혼자 소매 가득히 맑은 향기 담아 돌아왔네봄비가 막 개니 고아한 정취가 이와 같았다.2월 14일 무오(戊午) 절괘(節卦) 구오(九五) 소양(少陽)문팔주(文八柱)가 와서 삼인도(三寅刀)를 주었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제련하여 주조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세 번의 인일에 걸쳐 제련하여 주조한 것입니다. 금년 1월 4일이 무인일이고 16일이 경인일이고 28일이 임인일이니 이 3일에 걸쳐 이 도를 완성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임인년, 임인월, 임인일에 완성하고 또 중간에 무인일과 경인일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무(戊)는 중앙의 정색(正色)47)이고 경(庚)은 서방(西方)의 정금(正金)48)이고 임(壬)은 북방(北方)의 매서운 기운49)인 데다 5개의 인(寅)은 맹호의 신(神)이다. 그 기운들을 합하여 이 도에 모았으니 신물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장차 주옹(主翁)의 쓰임이 되려는가.2월 19일 계해(癸亥) 중부괘(中孚卦) 육사(六四)한식절(寒食節)에 큰 비바람이 치던 날씨가 오늘에야 갰다. 그러자 따사로운 기운이 충만하여 만물의 형상이 드러났다. 언덕의 매화는 반이나 떨어지고 정원의 풀은 막 돋아났다. 사물을 관찰하여 이치를 고찰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아 마음을 살피니 새롭게 터득하는 재미가 있고 옛 습속의 싹이 없어졌다. 《심경(心經)》을 강학하러 온 사인(士人)이 있어 단정히 공수(拱手)하고 조용히 읽으니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었다. 가령 내가 이와 같은 기상을 길이 보존하여 본심을 보존하고 주장하여 잃지 않는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신체에 질병이 많아 외모가 장엄하지 않고 마음이 본래 나약하여 속의 뜻이 확고하지 않은지라 마음이 다스려지는 날은 적고 어지러운 날은 많으며 공경하여 깨어 있는 상태는 적고 혼매하고 나태한 기운은 공경하는 마음을 이김으로써 천리가 발현함은 매우 드물고 외물에 유혹됨은 매우 많게 하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마음이 발하는 바를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갖추는 바이다. 다만 붓을 거두고 일기책을 덮은 뒤에 이 생각이 이미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또 생겨나는 것이 두려우니 삼가고 삼가야 한다.이날 화제(花堤)의 평민이 와서 배알하고 말하기를 "본현에 적을 두고 있는 기민에게 죽을 쑤어 먹였습니다. 그런데 기민의 수가 1000명을 헤아릴 정도라서 먹을 사람들은 이미 대단히 많으나 먹을 죽은 매우 적은 데다 관아의 아전들이 또 이를 악용해 농간을 부려서 죽에다 물을 부어 불려서 먹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황달을 앓고 사망자도 매일 1, 2명씩이나 됩니다. 다른 현에서 흘러들어 온 백성들은 죽을 먹이는 것이 또 본현 사람만 못하므로 길가에 버려진 굶어 죽은 시신들이 즐비합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 참담해졌다.이어 기억하건대 며칠 전 내가 광주 목사(光州牧使)50)와 대화할 때 굶어 죽은 기민의 시신이 낭자한 문제를 언급하자 광주 목사는 대답하기를 "이들은 비록 풍년이 들더라도 농사와 길쌈에 즐겁게 종사하지 않고 하는 일이 없으니 산다고 해도 세상에 유익함이 없고 죽는다고 해도 국가에 손해가 없습니다." 하니, 내가 이르기를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각각 자기 아들이라 말할 것입니다.51) 저들이 비록 잔민(殘民)이라 하더라도 부모 된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휼의 정은 백성이 현명하거나 우매하거나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목민관이 되어서 그 언사가 이와 같고 속리(俗吏)의 견해가 늘 이런 식으로 나오니 이 곤궁한 이들이 가엾다52)고 할 만하다.2월 25일 기사(己巳) 귀매괘(歸妹卦) 구사(九四) 소양(少陽)광주(光州)의 송후(宋垕)53)가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박치도(朴致道)54)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치도는 고 진사 박충정(朴忠挺)의 아들이다. 박충정의 아비55)가 부유하여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박충정은 도적이 한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3년 뒤 박충정이 그의 종을 시켜 도적 집에서 세포(細布)를 구입하게 하였는데 그 서명을 보니 곧 그 아비의 수표(手標)였다. 또 다른 종을 시켜 도적을 미행하게 하였더니 가게에 의복을 팔았는데 바로 그 아비의 의복이었다. 박충정은 몰래 주관(州官)에게 가서 그 사유를 울면서 고하였다. 이에 주관이 급히 도적들을 체포하여 형신하니 도적들이 곧 자복하였으므로 그 무리를 사형에 처하였다. 박충정은 그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해하여 그 아비가 이식을 낸 재물 문권을 가져다가 소각하였다. 또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고 거의 외출하지 않으니 향리에서 그 얼굴을 본 자가 드물었다.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3년 동안 염탐하여 차분하게 도리를 다함이 이러한 데까지 이르렀다. 문권을 소각하고 과거를 그만두어 영리(榮利)를 초탈하였다. 또 난적에게서 그 아비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여 종신토록 자책하여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니 그 독실한 효성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그 아들 박치도는 젊은 나이로 소과에 합격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사람들이 장차 원대하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마 박충정이 행한 효행의 보응인 듯하다.각 읍에서 기민들에게 죽을 쑤어 주는 곳에 시신이 쌓여 있는데 본읍이 한층 심각하여 사망자가 날마다 4, 5인 이상이므로 관아 거리와 골목길에 쌓인 시신이 낭자하여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서 참담해졌다.2월 29일 계유(癸酉) 규괘(睽卦) 구이(九二) 소양(少陽)현리(縣吏)가 이조의 관문(關文)을 받들고 와서 배알하였다. 그 관문의 내용을 살펴보니 '이달 9일 정사(政事)에서 신(臣) 만영(萬英)을 거두어 서용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였으므로 제때 공무를 행하도록 독책하라.'라는 내용이었다. 성상의 하늘 같은 은혜가 미친 바이니 황감하기 그지없다.3월 2일 을해(乙亥) 규괘(睽卦) 구사(九四) 소양(少陽)스스로 생각건대 초야의 어리석고 비루한 내가 관직에 임명된 것이 지금까지 세 조정에 이르렀으나 평소의 자취는 조정과 동떨어져 있었다.56) 그런데 관직에 임명하는 과분한 은혜를 외람되이 누차 받게 되니 비록 순박함을 지키면서 분수에 만족하여 감히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항상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이로 인하여 경계하여 밤낮없이 전전긍긍 삼가면서 글을 읽고 허물을 반성하며 나태한 태도를 채찍질하여 죽기 전에 혹 비루한 기질을 변화시켜 미세하게나마 진보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만분의 일이나마 누조(累朝)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선량한 품성을 회복한다면 행여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사람이 된 도리57)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하여 마음과 뼈에 새기는 경계로 삼는다.3월 4일 정축(丁丑) 규괘(睽卦) 상구(上九) 소양(少陽)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맛이 없는 가운데의 맛을 음미하였다.58)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59)를 이루니 "고요함을 주장해야 마음이 비고 전일해진다.[主靜方虛一]"라는 구절이 있다.3월 7일 경진(庚辰) 이괘(履卦) 육삼(六三)60)하루 종일 북풍이 불어 누런 먼지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낮에 임면(任冕)이 내방하였다. 그를 통해 우암(尤庵)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송준길(宋浚吉))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공은 효종의 지우를 입어 작위가 지극히 높아졌으나 금상이 즉위하고 나서 칩거하며 소명에 응하여 나아가지 않은 지가 지금까지 4년이 되었다. 이번에 큰 관직에 임명되어 과연 수레에 멍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갈 것인지 모르겠다.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때에 하늘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 기근이 거듭 닥친 결과 들에는 굶어 죽은 시신이 쌓여 있다. 인심은 이반되고 조정의 기강은 문란하고 대신은 연달아 사망하였다. 그러니 기왓장이 깨지듯 흙이 무너지듯 나라가 망하는 형세가 머잖아 닥칠 것이다. 초야의 천하고 어리석은 나 같은 자도 나도 모르게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선왕의 특별한 지우를 입어 작위가 이미 삼공에 오른 두 공은 오히려 오두막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들보를 쳐다보며 장탄식을 하게 된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해 둔다.3월 8일 신사(辛巳) 이괘 구사(九四)61)날씨는 어제와 같되 북풍과 뿌연 먼지는 더욱 심하였다. 몸이 편치 않아 문을 닫고 꼼짝 않고 앉아 신심(神心)을 완양(完養)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읍에 마련된 죽을 쑤어 주는 곳에서 하루 동안 사망한 자가 7명이나 되고 두 처를 둔 이웃 마을 백성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두 처가 달아나서 마을의 개가 그 시신을 다투어 물어뜯는데도 족인(族人)들 역시도 수습하지 않았으며, 또 두 아들을 둔 어미가 길가에서 사망하여 개 떼가 다투어 물어뜯는데도 그 아들들이 상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참혹한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곧 죽어 가는데도 부자와 부부조차 서로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까.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3월 22일 을미(乙未) 대축괘(大畜卦) 상구(上九)남구만(南九萬) 공이 진휼 어사(賑恤御史)62)로 영남에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인재를 발굴하라고 명하였다. 남구만은 물러나 상소63)하여 아뢰기를, "이전에 신이 조정에 김만영(金萬英)을 천거하였으나64) 상께서는 임용하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록 인재를 발굴하더라도 결국 나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상이 특별히 전조(銓曹)에 전지(傳旨)를 내려 조속히 관직에 붙이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동몽교관을 제수한 것이고, 이조 참의 유계(兪棨) 공도 논하여 천거하였다는 말을 들었다.5월 5일 정축(丁丑) 구괘(姤卦) 초육(初六)5월은 벽괘(辟卦)65)가 구괘66)인 때이면서 이번 단오는 또한 구괘의 초육이 되니 천시(天時)와 괘기(卦氣)67)가 이와 같이 절로 서로 부합하였다. 천도(天道)의 유행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하나의 음(陰)이 막 싹트는 초기에 대해 옛사람이 경계하는 말을 세운 것이 지극하였다. 엄동설한의 매서움은 한여름에 음(陰)이 처음 생겨나는 초기에 싹트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크게는 국가의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 소장(消長)의 기미와 은미하게는 내 마음의 천리와 인욕의 공사(公私)와 사정(邪正)의 구분과 그대로 합치하지 않음이 없다. 그 단서는 매우 은미하여 보기 어렵고 그 자라남은 천지에 가득 미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오묘하고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의 음(陰)의 숙연한 기운이 여러 양(陽)의 아래에 이미 조짐이 드러났다. 돌이켜 나의 마음에서 찾아볼 때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이 홀로 아는 곳이 몇 번 음이 자라고 몇 번 양이 회복되었는지 모르겠다. 순 임금이 말한 유정(惟精) 공부68)는 이때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천시를 대하여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스스로를 성찰하는 바이다.5월 19일 신묘(辛卯) 정괘(鼎卦) 구삼(九三) 대음(大陰)아침에 종가에서 연제(練祭)를 거행하였는데 나는 몸이 편치 않아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푸른 소나무가 골짝에 가득하고 푸르른 나무가 섬돌을 따라 서 있었으니 옛일을 생각하여 감개에 젖는 회포를 가누지 못하였다. 나의 고조이신 진사공(進士公)69)의 생질인 박사암(朴思庵 박순(朴淳))이 선묘조(宣廟朝) 때 정승이 되어 휴가를 청해 귀향하여 외선조의 묘소를 살폈다. 진사공께서 이를 영예롭게 여겨 이곳에 재소(齋所)를 건립하여 흥경사(興慶寺)라고 명명하셨는데 정유재란 때 사찰이 병화로 무너졌다. 나의 조부공70)께서 터의 동북쪽에 작은 집을 짓고 벽송당(碧松堂)이라고 명명하셨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현재의 이 벽송당은 내가 여러 족인과 함께 도모하여 건립한 것이다. 인하여 생각건대 어릴 적에 선부형(先父兄)과 여러 어른을 따라서 선대의 묘소를 왕래하며 보살피고 이곳에 나아가 묵었던 것이 완연히 어제 일 같은데 벌써 30년이 지난 옛 자취가 되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하매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6월71) 27일 무진(戊辰) 송괘(訟卦) 구사(九四) 소음(少陰)저녁에 문삼고(文三古)72)가 영암(靈巖)에서 와서 절하였는데 곧 나의 외가 친척 동생이다. 그가 묻기를 "형께서 전에 강진(康津)의 청련(靑蓮)을 모신 사우(祠宇)73)에 보내는 통문(通文)을 작성하여 성암(惺庵) 이수인(李壽仁)을 본사(本祠)에 배향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영암의 사인(士人)들은 대부분 성암은 본사에 배향할 만한 인물이 못 될 뿐더러 권하여 배향하도록 한 것은 또한 지나친 처사라고 하면서 비난하는 말을 시끄럽게 전하고 들은 자들도 휩쓸리고 있습니다. 형께서는 그 비방에 대해 해명할 말이 없습니까?" 하니, 내가 이르기를 "그럴 만도 하겠지.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을 어두운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던져 줄 경우 칼을 어루만지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은 어째서이겠나?74) 과거에 드물게 보던 것을 갑자기 대하면 마음이 떨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도 모르게 대로하기 때문이니 이는 곧 인지상정이라네. 지금 이공(李公)은 궁벽한 골짜기에 깊이 은거하여 사람들이 공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고 비록 어쩌다 사람들과 접하는 경우라도 말하고 웃거나 행동하는 것이 남들과 같고 음식을 먹거나 기거하는 것이 남들과 같아서, 공을 본 자들이 평소 내심 공을 만만하게 봤다가 이제 큰일을 도모하는 나의 말을 듣고 모두들 놀랍고 괴이쩍게 여기는 것이니 또한 인지상정이네. 지금 속인들은 속으로 유자(儒者)의 생김새나 안색, 먹는 음식이나 행동은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판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막상 만나보고 다른 사람들과 같으면 '저 사람 역시 평범한 사람이지 유자가 아니다.' 하니, 이것이 맹자(孟子)가 부득이 요순(堯舜)도 일반 사람과 똑같으셨다75)고 발언한 까닭이네. 저 이공은 만년에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문을 닫아걸고 뜻을 구한 인물이라네. 그 행위와 언동은 본래 세속을 놀라게 하는 사업은 없었으니 오늘날 속인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유자는 일반 사람들과 다를 수는 없습니까?" 하니, 내가 이르기를 "깊이 은벽(隱僻)한 이치를 찾은 뒤라야 속인의 마음을 놀라게 할 수 있다거나 지나치게 괴이한 짓을 행한 뒤라야 세인의 이목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말은 유가(儒家)가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일세. 그래서 군자의 말은 일반인과 같으면서도 같은 가운데 절로 같지 않은 것이 있고, 군자의 행실은 일반인과 같으면서도 같은 가운데 또한 같지 않은 것이 있네. 같은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같지 않은 것은 어찌 일반인의 이목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겠나. 미처 알지 못한 이상 그들이 공을 폄훼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공을 폄훼한 것은 아니네." 하였다.8월 13일 계축(癸丑) 돈괘(遯卦) 초육(初六)날씨는 환하고 상쾌하며 당실은 한갓진 가운데 홀로 책상 앞에 앉거나 누워서 고서를 보았다. 절구(絶句) 한 수76)를 입으로 읊었는데 "푸르고 맑아라 가을 하늘 개니[碧淨秋天霽]"라는 구절이 있다.9월 10일 경진(庚辰) 점괘(漸卦) 육사(六四)《역도설(易圖說)》77)을 보고 느낌이 있어 이런 절구(絶句) 한 수를 이루었다.주역의 도 밖에 존재하는 천지는 없거니와복희와 문왕은 그림자와 형체를 그렸을 뿐이네모름지기 천지의 이면을 따라서괘획의 이름을 점검해 보아야 하리《주역》의 도는 천지간에 유행하여 모든 초목금수와 멀게는 고금, 가깝게는 한순간까지 한 물건, 한 시각도 역이 아닌 것이 없으니 역의 전체가 천지에 깃들어 있거니와 저 복희의 괘획(卦劃)과 문왕의 괘사(卦辭)는 다만 그림자와 형체를 그려냈을 따름이다. 상지(上智)는 괘획과 괘사가 없어도 진실로 하늘에 있는 역을 묵묵히 알 수 있고, 중지(中智) 이하의 선비 또한 괘사를 통해 괘획을 알고 괘획을 고찰하여 하늘을 알 수 있다.10월 18일78) 무오(戊午) 췌괘(萃卦) 육이(六二) 대양(大陽)금성(錦城)의 유점(柳簟)이 내방하였는데 효자 유공신(柳公信)79)의 아들이고 나에게 외가 8촌이다. 유공신은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자 장성해서 6년 동안 추복(追服)하고 종신토록 묘소 아래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성묘하되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그만두지 않으니 묘전(墓前)의 부복(俯伏)한 곳은 이 때문에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목사 이여익(李汝翊)80)이 그의 효행에 대해 듣고서 그를 내방하고 문밖에 있는 고송(孤松)을 봉하여 효자송(孝子松)이라고 명명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그의 효행에 대해 보고를 받고 그 문에 정표(旌表)하였다.10월 29일 기사(己巳) 관괘(觀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종을 시켜 황두(黃豆) 4말을 가지고 시장에서 목(木)을 구입해 오게 하였으나 구입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굶어 죽은 시신이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인 가운데 목 1필에 대해 미(米) 2되 값을 쳐 주고 두(豆) 4되로 교환하고자 해도 사람들이 오히려 구입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런데 몇 달 뒤 작황이 평작보다 조금 나아지니 목 1필이 조(租) 8, 9말 값이 되고 두 5, 6말에 교환되며, 물고기 1미(尾)는 곡물 몇 말 값이 되었다. 또 시장에 주육(酒肉)이 넘쳐나고 여항(閭巷) 구석구석에서 떼 지어 가무를 하니 낭비하기 좋아하고 안일해지기 쉬운 인정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현재는 농사가 비록 평작보다 조금 낫다고 해도 다년간 체납된 공채(公債)며 사채(私債)에 대해 일시에 징수를 독촉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이 시기에 또 시행하여 다년간 거두지 못한 각 관사의 공물(貢物)에 대해 또 긴급하게 규정대로 독촉하고 있다. 백성들이 먹을 식량의 여유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민심이 우매하여 미거(未擧)하게도 경계할 줄 모르니 국사와 민심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보인다. 서글픈 마음으로 기록한다.11월 11일 신사(辛巳) 복괘(復卦) 육삼(六三)동짓날이니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다. 눈보라가 아주 매서워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아 미양(微陽)을 길렀다.81) 지은 시에 "일양이 회복된 것이 천근이다.[一陽來復是天根]"82)라는 시구가 있다.12월 7일 병오(丙午)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 대음낮에 이서(里胥)가 와서 환곡을 매우 절박하게 독촉하였다. 또 산성에 쌀을 운반하고 경대동미(京大同米)를 납부하고 관사에 땔감을 납부하는 등의 역(役)에 대해 매우 철저하게 독촉하였다.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장기간 관곡(官穀)을 거두지 않다가 올해 농사가 조금 잘되었다고 하여 다년간 체납된 빚에 대해 일시에 징수를 독촉하고 다른 군에 옮겨 진휼하거나 산성에 운반하는 쌀과 대동의 무거운 부세를 중첩적으로 각박하게 거두고 있다. 올해 농사가 다소 풍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아직 안착하지 못하였고 굶주려 고달픈 고통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올해 목화 농사가 또 너무도 시원찮아 굶주림을 겪고 난 백성들이 몸에 온전하게 옷을 갖추어 입은 자가 없다. 군현의 감옥은 꽉 차 있는데 더군다나 한정(閑丁)을 색출하여 충정(充定)하라는 명령이 아침저녁으로 성화처럼 다급하여 일족들까지 침탈을 당하는 화가 소란스럽게 여염에 가득하다. 근심에 젖어 탄식하는 얼굴빛과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도로에 넘쳐나고 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르기를 "연전의 기근 때 죽지 못하여 이런 온갖 재앙에 걸려들게 된 것이 한스럽구나." 한다. 아, 민생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도 은택을 베풀기를 건의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고 심지어 견감(蠲減)해 주라는 명령이 비록 성상의 하교로 내려지더라도 부세 징수가 주현에 극도의 해악을 끼치고 있으니 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갓 칠실(漆室)의 이부(嫠婦)가 한탄하는 마음83)을 품고 누추한 집에서 탄식만 할 뿐이니 말해 무엇 하랴.12월 30일 기사(己巳) 비괘(賁卦) 육이(六二) 대음(大陰)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내면서 세밑을 보내었다. 올해는 봄여름에 대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신이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였다. 또 농사가 비록 평작보다 조금 낫다고 해도 부세 징수가 너무도 가혹하여 여염에는 해를 넘길 거리가 없다. 대체로 여름 동안 주현에 쌓인 시신이 낭자하고 곤경에 처하여 떠도는 유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는데도 수령은 감사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감사는 한갓 수령의 말만 믿고 또한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채(官債)의 상환이나 대동법의 설행, 군정(軍丁)에 대한 다급한 수괄(搜括)로 위태롭게 독촉하고 그 화가 일족이나 이웃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군현의 감옥에는 수감된 자가 시장에 몰려든 사람처럼 많고 관정 (官庭)에는 매 맞아 흘린 피가 흥건하였으니 차마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한 해가 장차 저물어 가는 이때 나의 한 해 동안의 몸과 마음의 일이 일상생활에 드러난 것을 묵묵히 생각해 보면 비록 큰 허물은 없었으나 은미한 사려나 학문을 진전시키는 공부, 물들어 버린 기질, 비루한 구습의 측면에서 보자면 확연하게 변화시킨 공효가 없었다. 방 안에 고요히 앉아 이미 지나간 일을 점검해 보니 나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럽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워진다.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내년에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근본으로 삼는 바이다.나는 어릴 때 서책의 면지(面紙)나 공행(空行)에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열일곱 살 때 정헌(靜軒) 고공(高公)84)을 뵈었는데【공은 선생의 부인의 외조부이고 제봉(霽峯)의 셋째 아들로 관직은 정랑이다.】 공은 예학(禮學)에 심오하고 기풍이 매우 단중(端重)하였다. 공을 모시고 이야기할 때 마침 서책의 면지에 난잡하게 쓰인 초서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공이 대뜸 이르기를 "나는 평소 서책을 더럽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더구나 성현의 경전은 신명처럼 공경하고 부모처럼 존경해야 하거늘 어찌 묵필(墨筆)로 긁적일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씀이 단정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만하구나."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두려워지고 얼굴이 발개진 채로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이때부터는 서책에 점 하나도 함부로 찍지 않았다. 아, 내가 만약 일찍 현명한 스승을 따라서 배움에 힘썼더라면 오늘에 이르러 사람됨이 이와 같겠는가. 우연히 옛일이 생각나서 서글픈 마음으로 기록한다. 正月二十六日。 庚子。 同人九五。 少陽近日無事。 靜坐收斂之暇。 閑閱《宋史》。 至光寧之間。 奸鬼用事。 指道學爲僞。 寓目不堪鬱。 見之若今日事。 不覺累百年前事。 掩卷咄嗟。二十七日。 辛丑。 同人上九。 少陽余嘗以爲人心之妙。 本與天合。 但透一重私己。 上達天理。 人間萬事。 可以總貫。 此而不得其成。 雖歷覽萬古。 竟無益於吾事。 是以余未暇及於讀史。 近者齋居之暇。 閱遍《宋史》。 肅然若身處本朝。 上應君父。 下班宰列。 內辦庶務。 外禦邊事。 自不覺其心神定肅。 外體端嚴。 惰怠之氣。 不起於心身。 而几案堂室。 儼然若朝廷。 於吾爲學。 所補大矣。 此可爲讀史法。 故記之。二十八日。 壬寅。 臨初九。 大陰東風時起。 多有雨勢。 靜坐潛心。 時或念及已往年月。 微愆大過。 不一而足。 追思不覺有愧于天。 自此庶可挺然立志。 毅然發憤。 消除舊習。 日有新得。 未死之前。 得爲寡過之人歟! 先正有言曰: "無身過易。 無心過難。" 又曰: "有身過。 人得而責之。 有心過。 神得而非之。" 此語當終身誦之可也。三十日。 甲辰。 臨六三。 少陽終日靜處。 午後。 起而看梅于東臯。 故吟一絶。 "聞道東山已放梅。 一筇閒步穿莓苔。 無人識得尋芳興。 滿袖淸香獨自回。" 春雨新晴。 雅意如此。二月十四日。 戊午。 節九五。 少陽文八柱來贈三寅刀。 寅年月日所鑄冶。 或曰: "經三寅日鑄冶者也。 今年正月初四日戊寅。 十六日庚寅。 二十八日壬寅。 經此三日而成此刀云。" 然則以壬寅年壬寅月壬寅日成之。 而中經戊寅庚寅。 戊爲中央正色。 庚爲西方正金。 壬爲北方慄烈之氣。 而五箇寅爲猛虎之神。 合其氣鍾于此刀。 其爲神物宜矣。 其將爲主翁之用乎!十九日。 癸亥。 中孚六四寒食之節。 大風雨氣候。 至今日開霽。 和氣藹然。 萬象逞露。 原梅半落。 庭草初生。 觀物察理。 反己省心。 有新得之趣。 無舊染之萌。 士人有來講《心經》者。 端拱靜讀。 益覺深味。 使我長存似此氣象。 存主不失。 其進豈可量哉? 而身多疾病。 外貌不莊。 心本懦弱。 內志不固。 治日少而亂日多。 敬惺寡而昏惰勝。 使天理之發。 一薜居州。 而外物之誘。 衆於宋人。 可勝痛哉? 心之所發。 隨筆而記。 以備警箴。 但恐斂筆掩卷之後。 此念已消而他念又生。 愼之愼之。 是日花堤平人來謁言: "本縣籍飢民設粥飼之。 其數以千計。 口旣煩多。 而所喫之粥稀而小。 官吏又因緣作奸。 和水於粥飼之。 人皆黃病。 而死者日一二人。 他縣之流民。 飼之又不如縣人。 路傍之殍相望云。" 聞之慘矣。 仍記日者。 余與光牧言。 言及飢民之餓殍相藉。 光牧答曰: "此輩雖在豐年。 不能樂業耕織。 無所事爲。 生無益於世。 死無損於國。" 余曰: "才不才。 各言其子。 彼雖殘民。 自其父母者見之。 愛恤之情。 何間於賢愚哉?" 至今思之。 爲牧民之官。 其言如此。 俗吏之見。 每出如此。 可謂哀此煢獨也!二十五日。 己巳。 歸妹九四。 少陽聞光州宋垕參生進兩科。 朴致道參進士。 致道。 故進士忠挺之子。 忠挺之父富給。 爲盜所殺。 忠挺知盜在同閭。 三年後。 忠挺。 使其僕貿細布于盜家。 見其署。 乃其父手標也。 又使他僕潛從盜。 而市衣於肆。 乃其父衣也。 忠挺。 潛往州官。 泣言其故。 急捕盜屬。 而刑之。 盜乃服之。 大戮其類。 忠挺。 痛父非命。 取其父出息資財文券焚之。 終身不赴科試。 杜門罕出。 鄕里見其面者鮮矣。 其爲父報讎。 三年伺察。 從頌盡道。 至於如此。 焚券廢科。 杜絶榮利。 痛不能救其父於亂賊之中。 終身引罪。 閉門囚跡。 其篤於誠孝。 可尙也已。 其子致道。 少年登庠。 而其才也。 人將期於遠大。 或者。 忠挺孝行之報應歟! 聞各邑飢民設粥之所。 死人相積。 本邑尤甚。 死者日不下四五人。 官街巷路。 積屍相藉。 慘不忍見云。 聞之酷矣。二十九日。 癸酉。 暌九二。 少陽縣吏奉吏曹關文來謁。 考其關辭。 以本月初九日政。 收敍臣萬英除童蒙敎官。 責以及期行公云云。 天恩所曁。 惶感無地。三月初二日。 乙亥。 暌九四。 少陽自念余以畎畝愚陋。 獲竊祿秩。 于今三朝。 平生蹤跡。 隔絶朝市。 而除拜誤恩。 猥蒙累次。 雖守愚安分。 不敢冐進。 每念及此。 不覺惶愧。 庶或仍此警惕。 夙夜兢戰。 讀書省愆。 鞭辟頹惰。 未死之前。 或有變化陋質。 進步尺寸。 一以報累朝盛恩之萬一。 一以復天賦本然之良性。 倘無愧於得名爲人之道耶? 仍記于此。 以爲銘心鏤骨之戒。初四日。 丁丑。 暌上九。 少陽靜坐終日。 有味乎無味之中。 仍成一絶。 有"主靜方虛一"之句。初七日。 庚辰。 履六11)三北風終日。 黃塵四塞。 午任冕來見。 聞尤庵宋公拜兵判。 同春堂宋公拜都憲。 二公遭遇孝廟。 位極顯隆。 今上當宁。 杜門不赴命者今四年矣。 未知今蒙大除拜。 果不俟駕耶否? 以余見之。 方此之時。 天心未豫。 饑饉荐臻。 野積餓殍。 人心解離。 朝綱陵替。 大臣連喪。 瓦解土崩之勢。 朝暮且迫。 若余之畎畝賤愚。 不覺中夜起嘆。 有瞻烏爰止之痛。 况二公蒙先王之殊遇。 位已極於台鼎。 尙能安眠於蔀屋之下耶否? 言之至此。 自不知仰樑長吁。 仍記于此。初八日。 履九12)四日氣如昨。 而北風昏塵益甚。 心氣不平。 閉戶凝坐。 完養神心。 夕聞邑中設粥所。 一日死者七人。 隣村民有兩妻者。 以染病死。 兩妻出走。 村犬爭咬其尸。 而族人亦不收。 又有兩子母死于道傍。 群犬爭咬。 而其子不顧云。 人心之慘至此耶? 痛痛。 蓋以死亡將迫。 父子夫妻。 亦不相保故也。 古亦有如是事否? 痛痛。二十二日。 乙未。 大畜上九聞南公九萬以賑恤御史13)往嶺南。 上引見。 命以採訪人才之意。 九萬退。 而上疏言: "臣曾薦金萬英于朝。 自上無採用之意。 今臣雖採訪人才。 竟何補於國哉?" 上特下旨銓曹。 命斯速付職。 故有敎官之除。 而吏曹參議兪公棨。 亦有論薦云矣。五月初五日。 丁丑。 姤初六五月在辟卦爲姤。 今端午又爲姤之初六。 天時卦氣。 自相符合如此。 天道流行。 安可誣也? 一陰初萌之始。 古人之設戒也至矣。 氷雪融寒之慘。 未嘗不萌於夏半陰始之初。 則大而國家君子小人進退消長之幾。 微而吾心天理人慾公私邪正之判。 無不合。 其端甚微而難見。 其長漫天而極地。 可不懼哉? 今日妙冥難測之中。 一陰肅然之氣。 已兆於衆陽之下矣。 反而求之吾心。 人所不知。 己所獨知之地。 未知幾姤而幾復也。 舜之所謂惟精工夫。 可用力於此際矣。 嘿對天時。 用識于此以自省云。十九日。 辛卯。 鼎九三。 大陰朝。 宗家行練祭。 余以氣未平不能參祭。 朝開戶視之。 蒼松滿壑。 綠樹循除。 不勝感古之懷。 蓋我高祖進士公甥侄朴思庵。 作相於宣廟朝。 乞暇還鄕。 參省于外先墓山。 進士公榮之。 作齋所于此地。 仍名曰"興慶寺"。 丁酉之亂。 寺毁于兵火。 我王父公構小屋于基東北。 名之以碧松堂。 歲久而毁。 此室則余與諸族人謀建者也。 仍念兒時陪先父兄諸丈。 往來參省于先墓。 仍就宿此地。 完然昨日事。 而已作三十年舊跡矣。 俯仰思惟。 難以爲懷也。二14)十七日。 戊辰。 訟九四。 少陰夕文三古自靈巖來拜。 卽余外眷戚弟也。 問曰: "戚兄曾作通文抵康津靑蓮祠宇。 喩以李惺菴壽仁配享於本祠云。 然耶否?" 曰: "然。" 曰: "靈巖士人。 多以有惺菴不足配於本祠。 勸而配之。 亦過矣。 口舌喧傳。 聞者附和。 戚兄其無以解其誚乎?" 曰: "固矣。 明月夜光。 以暗投人。 人莫不按劍。 何哉? 曾所罕見。 猝然遇之。 心駭目動。 不覺怒魄。 乃人之情也。 今李公深居窮谷。 人罕其面。 雖或與人接者。 言笑動靜同於人。 飮食起居同於人。 見之者心忽之於平日。 今聞余大言。 莫不驚怪。 亦常情也。 今俗人之心。 以爲儒者之形貌顔色。 飮食事爲。 必頓別於衆人。 及見之。 與別人同。 則曰: '彼亦凡人。 非儒者也。' 此孟子之所以不得已而發堯舜與人同之之語也。 彼李公晩悟志學。 杜門求志之人也。 其事爲言動。 固無驚俗動世之事業。 則俗人今日之此言。 不亦宜乎?" 曰: "儒者。 不能不同於人哉?" 曰: "深求隱僻之理。 然後可以驚俗人之心。 過爲詭異之行。 然後可以動世人之耳。 此二者。 儒家之諱言者也。 是以君子之言。 同於衆人。 而所同之中。 自有不同者。 君子之行。 同於衆人。 而所同之中。 亦有不同者。 其所同者。 人人之所可見。 其不同者。 則豈凡耳目之所可瞻聆者也? 旣不能及知。 則其毁之也。 非故毁之也。"八月十三日。 癸丑。 遯初六天氣明爽。 堂室蕭然。 獨坐牀上。 或臥看古書。 口吟一絶。 有"碧淨秋天霽"之句。九月初十日。 庚辰。 漸六四看《易圖說》。 感成一絶曰: "易外無天地。 羲文畫影形。 須從天地裏。 點檢畫中名。" 蓋大易之道。 流行於天地之間。 一草一木。 一禽一獸。 遠之古今。 近之瞬息。 無一物一時之非易。 則易之全體。 寓於天地。 而彼羲之畫文之辭。 特畫出影形而已。 上智不待畫與辭。 而固可默識在天之易矣。 中智以下之士。 亦可因其辭而知畫。 考其畫而知天矣。十月初15)八日。 戊午。 萃六二。 大陽錦城柳簟來見。 孝子公信之子。 於吾外眷八寸也。 公信少喪父母。 及長六年追服。 終身居于墓下。 晨昏省墓。 寒暑不廢。 墓前俯伏處。 草爲之不生。 太守李汝翊。 聞其孝。 而往見之。 封其門外孤松。 名曰"孝子松"。 後朝廷聞其行。 旌表其門。二十九日。 己巳。 觀九五。 少陰使奴將黃豆四斗買木于市。 不得買而來。 今年春夏間。 積莩成邱。 一匹之木。 直米二升。 易豆四升。 而人猶恐不及買。 數月之後。 得農稍稔。 一匹之木。 直租八九斗。 易豆五六斗。 一尾之魚。 其直數斗。 市場之間。 酒肉狼藉。 閭巷之曲。 歌舞成群。 人情之好糜費而易怠安。 一至此耶! 今農雖曰稍稔。 積年逋欠。 公私之債。 一時懲督。 而大同法又行於此時。 各司積年未捧之貢。 程董又急。 民之所食所餘者幾何。 而民心愚闇。 昏不知戒。 國事民心。 似無可爲者。 悵然而記。十一月十一日。 辛巳。 復六三冬至日也。 晨起。 參拜于家廟。 風雪慘烈。 終日閉關而坐。 以養微陽。 有"一陽來復是天根"之句。十二月初七日。 丙午。 噬嗑六三。 大陰午里胥來。 督還糓甚切。 且以山城運米,京大同納米,官司納柴等役。 董刻甚至矣。 蓋以三年大侵。 久未收官糓。 以今年小稔。 積年逋欠。 一時懲督。 而他郡移賑及山城運米大同重賦。 層疊刻捧。 今農雖曰稍登。 而流徙之民。 尙未安集。 飢困之毒。 尙未蘇健。 而今年綿種之農。 又極不實。 飢餘之民。 體無完衣者。 郡縣之獄。 充塞矣。 加以括充閑丁之令。 朝暮星急。 一族侵漁之禍。 擾塡閭里。 愁嘆之色。 號泣之聲。 道路相望。 人人相謂曰: "恨不死於年前之飢。 而逢此百罹也。" 嗚呼! 民事至此。 國將奈何? 而無一人建白施恩者。 至有蠲減之命。 雖下於聖敎。 而懲輸極毒於州縣。 可勝嘆哉! 徒懷柒室嫠婦之嘆。 而咄咄於蓬蓽之下。 謂之何哉?三十日。 己巳。 賁六二大陰終日齊居。 以送舊歲。 是歲也春夏大饑。 積殍成邱。 農雖稍稔。 賦斂極苛。 閭里之間。 卒歲無資。 蓋夏間州縣積尸相藉。 流民㒹徙者。 塡塞道路。 而守令不以實報于監司。 監司徒信守令之口。 亦不以實聞于朝廷。 是以官債之償。 大同之設。 括丁之急。 水火督董。 延及于一族。 隣里郡縣之獄囚者如市。 官司之庭。 杖血淋漓。 不忍言矣。 一年將暮。 默念余一年身心上事。 著之于日用事爲者。 雖無大過。 思慮之微。 進學之工。 氣質之染。 舊習之陋。 未有能廓然變化之效。 靜坐一室。 點檢已往之事。 不覺仰愧俯怍。 持筆于此。 以爲明年恐懼修省之本云。 余少時。 於書冊面紙。 或空行處。 好寫文字。 年十七歲。 拜靜軒高公。【公卽先生內夫人外祖。 霽峯第三子。 官正郞。】公深於禮學。 氣甚端重。 陪話之際。 適見書冊面紙有雜書草字。 公遽曰: "吾平生甚惡點汚書冊。 况聖經賢傳。 敬之如神明。 尊之如父母可也。 其可以墨筆塗抹耶? 足見其用心不端矣。" 余聞言卽懼然。 面發赤色。 大覺前日之非。 自是。 未嘗妄加一點於書冊。 嗟夫! 使余早從明師而勉學。 則至于今日。 作人如此哉? 偶思古事。 愀然而記。 광종(光宗)과……지목하니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주희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금단한 이른바 경원당금(慶元黨禁)의 사건을 말한다. 영종 경원 연간에 한탁주와 조여우(趙汝愚)가 권력 쟁탈전을 벌일 적에 주희 등이 조여우 편을 들었는데, 한탁주가 득세한 뒤 승상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한편, 도학을 위학이라고 규정하고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宋史 권434 蔡元定列傳, 권474 韓侂胄列傳》 선정(先正)이……하였으니 앞 구절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2 〈관물편(觀物篇)〉에 보인다. 뒤 구절은 정확한 출전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관물편〉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 몸으로 행하는 것만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만이 아니 사람의 총명도 오히려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신의 총명에랴.[言之于口, 不若行之于身, 行之于身, 不若盡之于心, 言之于口, 人得而聞之, 行之于身, 人得而見之, 盡之于心, 神得而知之. 人之聰明, 猶不可欺, 況神之聰明乎?]"라는 구절이 있는데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불원복장(不遠復章)에 인용되어 있다. 또 《장자(莊子)》 제23편 〈경상초(庚桑楚)〉에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불선을 저지르는 자는 사람들이 그를 처벌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악을 행한 자는 귀신이 처벌한다.[爲不善乎顯明之中者, 人得而誅之, 爲不善乎幽閒之中者, 鬼得而誅之.]"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인용한 첩산 사씨(疊山謝氏)의 말이 《심경부주》 권1 시이우군자장(視爾友君子章)에 나온다. 절구(絶句) 한 수 본서 권4에 수록된 〈동쪽 언덕에서 매화를 구경하다[看梅東臯]〉이다. 무(戊)는 중앙의 정색(正色) 정색은 간색(間色)의 반대말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다섯 가지 순정한 오방색(五方色)을 가리킨다. 천간(天干) 무는 황색에 해당하며 황색은 오방색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다. 경(庚)은 서방(西方)의 정금(正金) 천간 경은 오방색 가운데 백색에 해당하며, 백색은 서쪽에 위치한다. 또한 오행으로 보면 정금에 속한다. 임(壬)은……기운 천간 임은 오방색 가운데 흑색에 해당하며, 흑색은 북쪽에 위치한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승정원일기》 현종 2년 7월 12일 기사 및 《광주읍지(光州邑誌)》 등을 참조할 때 이광재(李光載)라는 인물로 보인다. 자는 계장(季章),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재주가……것입니다 이 말은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그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외관(外棺)을 만들기를 청하자, 공자가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즉 공자는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또한 각각 자기 아들이라 말할 것이니,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에도 관만 있고 외관은 없었다.[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남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고 하더라도 보살펴 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말을 인용하였다. 이……가엾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부자들은 괜찮거니와, 이 곤궁한 이들이 가엾다.[哿矣富人, 哀此煢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구절은 다시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도 인용되어 있다. 송후(宋垕) 이 당시 생원시와 진사시 방목(榜目)에 의하면 후(垕)가 후(堠)로 되어 있다. 자는 자후(子厚),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송수(宋燧)의 아들로 1608년에 출생하여 광주에 거주하였다. 박치도(朴致道) 1642~1697.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662년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광주에 거주하였다. 박충정의 아비 박언감(朴彦瑊, 1578~1644)이다. 자는 시헌(時獻)이다. 관직에……있었다 남포는 인조 때 내시교관(內侍敎官), 효종 때 세마(洗馬), 현종 때 동몽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는……도리 《심경부주(心經附註)》 서문(序文)에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삼재에 참여하여 만 가지 조화를 낼 수 있는 것은 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人之得名爲人, 可以參三才而出萬化者, 以能不失其本心而已.]"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맛이……음미하였다 경전(經傳)을 읽어 음미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절구 한 수 본서 권1에 수록된 〈주정(主靜)〉이다. 육삼(六三) 원문은 '九三'인데, 전후 간지와 효의 순서에 근거하여 '九'를 '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구사(九四) 원문은 '六四'인데, 전후 간지와 효의 순서에 근거하여 '六'을 '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진휼 어사(賑恤御史) 원문은 '賑恤御使'인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使'를 '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소 《승정원일기》 현종 3년 2월 2일 기사에 부사과 남구만이 올린 이 상소의 대개(大槪)가 보인다. 김만영(金萬英)을 천거하였으나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제3 〈인성변진소회소(因星變陳所懷疏)〉에 남구만이 남포와 담양(潭陽)의 유학(幼學) 유진석(柳震錫)을 천거한 내용이 보인다. 벽괘(辟卦) 벽(辟)은 임금[君]이란 말로, 주관 혹은 통솔의 의미이다. 1년 12개월을 《주역(周易)》의 괘에 배치시키는 것으로, 자월(子月)인 11월은 양(陽) 1획인 복괘(復卦), 축월(丑月)인 12월은 양 2획인 임괘(臨卦), 인월(寅月)인 정월은 양 3획인 태괘(泰卦), 묘월(卯月)인 2월은 양 4획인 대장괘(大壯卦), 진월(辰月)인 3월은 양 5획인 쾌괘(夬卦), 사월(巳月)인 4월은 양 6획인 건괘(乾卦), 오월(午月)인 5월은 음(陰) 1획인 구괘(姤卦), 미월(未月)인 6월은 음 2획인 돈괘(遯卦), 신월(申月)인 7월은 음 3획인 비괘(否卦), 유월(酉月)인 8월은 음 4획인 관괘(觀卦), 술월(戌月)인 9월은 음 5획인 박괘(剝卦), 해월(亥月)인 10월은 음 6획인 곤괘(坤卦)에 각각 배치시키는 것이다. 구괘 이는 '음이 처음 생겨 장차 자라는[陰始生而將長]' 괘이다. 괘기(卦氣) 《주역》의 괘를 사시(四時), 월령(月令), 기후(氣候) 등에 배치한 것을 말하며, 서한(西漢)의 맹희(孟喜)가 처음 창안하고 경방(京房)이 발전시켰다. 유정(惟精) 공부 유정은 정(精)하게 살핀다는 의미이다. 《심경부주》 권1 서인심도심장(書人心道心章)에 순임금이 말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나의 고조이신 진사공(進士公) 김두(金㪷)이다. 자는 가균(可均), 호는 모암(慕庵), 본관은 당악(棠岳)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나주(羅州)의 진사 11명과 함께 조광조를 신원하는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조부공 김원록(金元祿)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으로 일가가 화를 입게 되자 이로부터 과거를 단념하였다고 한다. 6월 원문에는 없는데, 간지에 근거하여 '六月'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문삼고(文三古) 1633~1699. 자는 태초(太初),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현(文玹)의 아들이다. 강진(康津)의……사우(祠宇) 강진 서봉서원(瑞峯書院)을 가리킨다. 청련(靑蓮)은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의 호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이수인(李壽仁)은 이후백의 증손이다. 명월주(明月珠)나……어째서이겠나 이는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의 "신은 들으니, 명월주나 야광벽을 어두운 밤 길 가는 사람에게 던져 줄 경우, 칼을 어루만지며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까닭 없이 보물이 앞에 이르기 때문입니다.[臣聞明月之珠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수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다는 의미이다. 요순(堯舜)도……똑같으셨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절구(絶句) 한 수 본서 권1에 수록된 〈책을 보다[看書]〉이다. 역도설(易圖說) 남송 오인걸(吳仁杰)이 지은 책으로, 《주역(周易)》의 괘와 효의 변화 및 점치는 법을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18일 원문은 '初八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初'를 '十'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유공신(柳公信) 1579~1655.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이여익(李汝翊) 1591~1650. 자는 비경(棐卿), 호는 수봉(秀峯),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이응원(李應元)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27)에 나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재임 중 관소에서 사망하였다. 미양(微陽)을 길렀다 미양은 곧 동지에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아주 미약한 양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안정시켜 기른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우뢰가 땅속에 잠재한 것이 복이니, 선왕이 그것을 인하여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雷在地中復, 先王以, 至日閉關.]"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이(程頥)는 "양이 처음 생겨남에 매우 미미하니 안정한 뒤에야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복괘의 상사에 '선왕이 이것을 보고서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 하였다.[陽始生, 甚微, 安靜而後能長. 故復之象曰'先王以, 至日閉關.']"라고 하고, 주희는 "하나의 양이 처음 회복함에 양기가 매우 미미하니, 수고롭게 동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안정하여 미미한 양을 길러야 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선한 마음이 막 싹트려고 할 적에 바로 안정하여 기르고자 하여야 비로소 성대해지는 것과 같다.[一陽初復, 陽氣甚微, 不可勞動. 故當安靜以養微陽, 如人善端方萌, 正欲靜以養之, 方能盛大.]" 하였다. 일양이……천근이다 본서 권5에 수록된 〈동짓날에 느낌이 있어 읊다[長至日有感]〉에 보이는 구절이다. 천근(天根)은 소옹(邵雍)의 말인데 그의 시 〈관물음(觀物吟)〉에 "건이 손을 만난 때 달의 굴을 보게 되고, 지가 뇌를 만난 곳에 하늘의 뿌리를 볼 수 있다.[乾遇巽時觀月窟, 地逢雷處見天根.]" 하였다. 천근은 양효(陽爻) 하나가 맨 밑에서 생겨난 지뢰복(地雷復)괘를 뜻한다. 칠실(漆室)의……마음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이라는 읍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의 근심이지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권3 漆室女》 정헌(靜軒) 고공(高公) 고순후(高循厚)이다. 자는 도상(道常), 호는 정헌,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남포의장인인 매백헌(梅栢軒) 오희일(吳喜馹)이 그의 사위이다. 그는 고경명의 넷째아들인데 삼남인 고준후(高遵厚)가 일찍 사망한 관계로 본서에서 셋째아들이라고 일컬은 듯하다. 九 六 六 九 使 史 앞에 六月을 보충해야 함 初 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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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1663) 癸卯 2월 8일(정미) 임괘(臨卦) 육삼(六三)3경(更) 4점(點)에 일어나 손과 얼굴을 씻었다. 공복(公服)을 입고 홀(笏)을 쥐고 성묘(聖廟)에 나아가 석전례(釋奠禮)를 행하였다. 늘어선 성현의 모습이 엄숙하여 향을 피우고 술을 붓자니 양양(洋洋)히 앞에 계신 기상을 뵌듯하여 내 마음이 저절로 공경스러워졌다. 예를 마치고 문을 나서니 날이 이미 새벽이 되었다. 공복을 벗고 다시 재(齋)로 나아가 앉았다. 한낮에 생도들과 준여(餕餘)를 조금 마시고 돌아왔다.7월 13일 무인(戊寅) 승괘(升卦) 상육(上六) 대양(大陽)광주 부윤(廣州府尹)85) 원두추(元斗樞)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사람은 평소에 혹리(酷吏)라고 일컬어졌다. 금성(錦城)에서 광주(廣州)로 옮겨 제수되자 이졸(吏卒)들이 형벌로 죽은 자가 많았다. 적도(賊徒)들이 한밤중에 도성(都城)에서 소리치며 그가 금성에 있을 때 보낸 사운선(私運船) 2척이 막 경강(京江)에 정박했다고 하자 잡아오라는 명이 비로소 내려졌다. 원두추는 은밀히 먼저 듣고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의 사인(舍人)은 그가 상한(傷寒)을 앓았는데 땀을 내지 않아 죽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길가에 떠도는 소문이라 믿기 어렵지만 두 번 세 번 거듭 전했기 때문에 우선 적어 둔다. 다만 금성 사람들은 백성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가 크게 인심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월 4일 무진(戊辰) 둔괘(遯卦) 육이(六二)금성 현감(錦城縣監) 윤부(尹)가 대간(臺諫)에게 논척을 당해 돌아가려 한다고 들었다. 공은 관직을 맡은 지 몇 달 만에 치적(治績)으로 명성이 크게 일어났다. 백성들과 조례를 정하고 권계(勸戒)를 게을리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정언(正言) 소두산(蘇斗山)86)이 공의 나이가 많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탄핵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시자 사간원의 계사(啓辭)가 그치지 않았다. 공은 기별을 듣고 즉시 수레를 내어 돌아갔다. 고을 사람들이 문을 지키고 수레를 붙잡아 문을 나서지 못하였다고 한다.봄 무렵 무관(武官) 홍우익(洪宇益)이 영암(靈巖)을 다스리면서 치적으로 인한 명성이 도내에 으뜸이었는데 탄핵을 당해서 떠나고, 윤공도 엄중한 탄핵을 당하였다.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좋은 수령이라는 명성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백성들에게 학정을 펼치는 것이 상책이라네. 그대는 홍우익과 윤부를 보게나. 백성을 사랑하면 엄중한 탄핵을 당한다네.[欲保美守令 虐民爲上策 君看洪與尹 愛民被重劾]"라고 하였다.10월 5일 기해(己亥) 건괘(蹇卦) 구삼(九三) 대양(大陽)경차관(敬差官) 이관징(李觀徵)이 오늘 현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올해 재해로 인한 손실이 참혹하였지만 나라에서 재결(災結)을 처리하는 정사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관리들이 동정을 살피느라 두려워하여 과반(過半) 정도 재해로 손상을 입은 화곡(禾糓)은 전혀 재결에 넣지 않았고 10분의 7 이상인 경우만 겨우겨우 장부에 적어두었다. 본읍의 재결이 겨우 700여 결(結)이었지만 감사는 오히려 재전(災田)이 지나치게 많다고 화를 내고 재해로 손상을 입은 것이 10분의 8 이하인 경우는 모두 제외하였다. 백성들의 실망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나머지 다른 고을도 모두 그러하였다. 가을 무렵 혹독한 가뭄의 여파로 주상께서 특별히 애통한 마음을 담은 하교를 내려 백성을 위로하시니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히 솟아나 듣는 자들이 감격하고 기뻐하였다. 하지만 백성을 보호하는 실제 일이 이처럼 공허하니 이른바 지극한 은택이 백성들에게 이르지 않는 것이 어찌 우리 임금의 잘못이겠는가. 통탄스럽다.12월 30일 계해(癸亥) 수괘(隨卦) 상육(上六)이날은 제석(除夕)이다. 한 해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니 날씨가 절기에 맞지 않아 삼농(三農)이 여물지 못하여 백성이 먹고살기가 어려웠고 포흠(逋欠) 난 것을 갚으라는 독촉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재이(災異)가 자꾸 발생하고 우역(牛疫)이 매우 심하고 조수(鳥獸)가 저절로 죽으니 이것이 무슨 영향일까?돌이켜 내 몸과 마음을 점검해 보았다. 1년 동안 행위가, 이 마음은 고요한 때보다 흔들리는 때가 많았고 안정된 순간보다 혼란스러운 순간이 많았으며 일을 하는 순간마다 겉으로 드러났다. 집안을 다스리는 예법도 남을 대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허물은 없었더라도 자질구레한 생각이나 혼자 한가하게 있을 때면 간혹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평소에 힘을 쓴 것이 한 치의 마음과 일곱 자의 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위로 하늘의 뜻을 받들고 주변 사람에게 물어서 바로잡는 일에도 여전히 집안 가득한 부끄러움이 있다.삼가 죄의 근원을 살펴보자면, 그 싹은 실로 입심(立心)이 견고하지 못하고 기질(氣質)에 편협함이 많아 찌꺼기를 없애지 못하고 외물(外物)에 쉽게 이끌리는 데서 나오고, 병의 근원이 오로지 심지(心志)가 분명하지 않고 이치를 정밀하게 밝히지 못한 데 있어 선악의 기미에 대해서 용맹하게 표준을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헤아려 보건대 내년이면 41세가 되니 척연(惕然)함이 심해져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二月初八日。 丁未。 臨六三三更四點。 起坐澡洗。 服公服執笏。 入就聖廟。 行釋奠禮。 聖賢列位肅穆。 上香酹爵。 若或見乎洋洋如在之氣象。 此心自然主敬莊一矣。 禮畢出門。 日已昧爽。 釋公服。 復就齋坐。 日午與諸生。 小酌餕餘而歸。七月十三日。 戊寅。 升上六。 大陽聞廣州府尹元斗樞之死。 是人素稱酷吏。 自錦城移拜廣州。 吏卒多死於刑。 賊夜呼都城。 告其錦城時私運船二隻。 方泊京江。 拿命始下。 斗樞潛先聞之。 仰藥自死。 其舍人稱傷寒不汗而死云。 此言塗聽難信。 而傳之者再三。 故姑書之。 但錦城之人。 一夫一婦。 聞其死。 無不快之。 可見其大失人心矣。九月初四日。 戊辰。 遯六二聞錦城縣監尹。 被臺論將歸。 公莅官數月。 治聲大起。 與民條約。 勸戒不怠。 邑人大悅。 正言蘇斗山劾年老不治。 自上不允。 而院啓不止。 公聞奇。 卽駕而歸。 邑人守門擁車。 不得出門云云。 春間武官洪宇益宰靈巖。 治聲最于道內。 被劾而去。 尹公又被重劾。 人謠曰: "欲保美守令。 虐民爲上策。 君看洪與尹。 愛民被重劾云云。"十月初五日。 己亥。 蹇九三。 大陽聞敬差官李觀徵。 今日入縣。 今年災損慘矣。 而國家切禁用災。 官吏望風畏慴。 禾糓過半災傷者。 全不入災。 七分以上者。 僅僅置藉。 本邑之災。 才七百餘結。 而監司猶且怒其災田之過多。 八分災以下。 盡汰之。 民望如喪。 其他餘邑盡然矣。 秋間苦旱之餘。 自上特下哀痛之敎。 慰問生民。 藹然生意之發見。 聞者感悅。 而至於保民實事。 如此空踈。 則所謂至澤不止於民者。 豈吾君之過歟? 可歎!十二月三十日。 癸亥。 隨上六是日除夕。 歷計一年之事。 雨暘不節。 三農不登。 民食艱難。 逋欠督償。 人心洶懼。 災異層出。 牛疫酷甚。 鳥獸自斃。 此何影也? 反檢吾身心上。 一年事爲。 此心動多於靜。 亂多於治。 發之於事爲之間。 家法之際。 雖無對人形顯之過。 一念之微。 閒居之獨。 或未免仰愧俯怍之擧。 則平生用力。 不出於一寸之心七尺之軀。 而對越在上。 質之在傍。 猶有屋滿之羞。 按伏罪源。 其萌實出於立心不堅。 氣質多偏。 査滓未化。 外物易牽。 病根專在於心志未明。 燭理不精。 善惡之機。 不能勇立標準故也。 默計明年四十一歲。 可不惕然甚懼哉! 광주 부윤(廣州府尹) 원문은 '廣州府君'인데, 문맥을 살펴 '君'을 '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두산(蘇斗山) 1627~1693.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 서인 집권하에서도 처신이 근신하지 못하여 공의(公議)에 버림받았고, 향촌에 있을 때는 무단(武斷), 수령 재임 때에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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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1664) 甲辰 1월 5일 무진(戊辰).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유생 홍일뢰(洪一耒)가 말하기를 "지난해 12월 24일에 중수하고 봉안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한 황산 서원(黃山書院)의 모임에 저도 가서 참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원에서는 이전에 이 문원(李文元 이언적(李彦迪)),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 성 문간(成文 성혼(成渾)) 세 분 선생을 배향하였다. 이번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중수하는 일을 주관하여 이문순(李文純 이황(李滉))과 조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 두 분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였다. 함께 모인 양호(兩湖) 지방의 인사가 200여 인인데 송 판서[송시열]가 수헌(首獻)하고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부헌(副獻)하고 공주 목사(公州牧使) 정영한(鄭英漢)이 종헌(終獻)하였다. 송시열, 이유태 두 공은 심의(深衣)에 복건(幅巾)을 쓰고 제례를 거행하고 정군(鄭君)은 시복(時服) 차림으로 일을 거행하였다고 한다.1월 21일 갑신(甲申)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새벽에 일어나 제례를 행하였다. 이 지방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나고 자란 마을이라서 어버이의 넓고 큰 은혜가 평소보다 만 배나 크게 느껴진다. 이날 선조의 산소를 하나하나 배알하였고 벽송당(碧松堂)에서 형제와 조카들이 모여 하루를 묵었다.1월 27일 경인(庚寅)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서울의 사인(士人) 이로(李潞)가 나를 만나러 왔다. 전 이조 판서 조경(趙絅)의 외손자인데 말솜씨가 온당하여 예전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허목(許穆)이 예를 논한 시말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의 외조부 역시 한마디 말을 한 뒤에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는데 때마침 포천(抱川)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숙부인 이군 성징(李君聖徵)이 현재 동래(東萊)의 이군 성징 임소(任所)에 있는데, 전해 겨울 진봉(進封)하는 행렬을 영솔해 온 왜인(倭人)을 접대할 때 주량을 다투느라 도리를 어기고 교만하였다. 이군이 시종일관 굽히지 않자 왜인이 검을 뽑아 난동을 부려 부산 첨사(釜山僉使)와 부사(府使)의 군관(軍官) 이하는 모두 달아나 숨고 하리(下吏) 1인만 죽음을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진정되자 달려가 보고하였고, 첨사는 잡혀가 곧장 옥에 갇혔다."고 하였다.2월 2일 갑자(甲子) 손괘(損卦) 상구(上九) 소양(少陽)읍리(邑吏)가 다음 날 수령인 채후(蔡侯) 충립(忠立)의 여츤(旅櫬 객사한 사람의 널)이 내일 발인을 하여 돌아온다고 고하였다. 가서 만났더니 상주가 만사(挽詞)를 부탁하기에 그를 위해 율시 한 편을 지었다. 대체로 채후는 꾸밈이 없고 관대하고 검소하였지만 정사(政事)에는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가 사납지 않은 것은 좋아했지만 융통성이 없는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상(喪)을 치를 때 고을 사람인 윤선갑(尹先甲), 홍종화(洪鍾華)가 치상(治喪)을 주관했는데, 베로 만든 이불과 짧은 바지 외에는 관아에 보관된 옷이 없어 염관(斂棺)할 방도가 없었다. 향인(鄕人)들이 함께 부의(賻儀)를 보내 주어 이불과 바지를 사서 염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만사를 지었는데, 3, 4구는 "정사에 부드러운 채찍을 사용하여 은혜를 우러러보았으며, 관을 채울 옷이 없으니 비로소 청렴했음을 알겠구나.[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이고, 7·8구는 "제주배(齊州盃)87)의 물을 술잔에 붓고, 거듭거듭 만가(挽歌)를 부르며 떠나는 공을 전송하네.[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이다. 대체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2월 15일 정축(丁丑) 귀매괘(歸妹卦) 초구(初九) 대양(大陽)율지곡(栗枝谷)에서 외조부와 외조모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대체로 내 외조부께서 만년에는 번잡한 성시(城市)에 염증을 느껴 일년 내내 도촌면(道村面)의 농사(農舍)에 머무셨다.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며 숭정(崇禎) 연간 신미년(1631, 인조9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나이라서 고향에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이곳에 임시로 장사하였다. 나 또한 형제나 아들, 조카가 없어 봄가을로 성묘하되, 어버이의 산소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절일(節日)에 제사를 치르지 못하고 흔히 하듯이 날짜를 가려 거행하였다. 나는 여덟 살에 처음으로 외조부에게 《천자문(千字文)》과 당송 시문(唐宋詩文)을 배웠다. 그해 12월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곧고 굳은 뜻과 고고한 자태를 우러러보고 있다. 오늘 향을 사르자니 처연한 감회가 마음에 가득하지만 또한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서글프기만 할 뿐이다.윤6월 21일 신사(辛巳) 미제괘(未濟卦) 구이(九二)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졌다. 남풍이 천천히 불어오고 조금 지나서 북풍도 함께 일기 시작하였다. 남쪽과 북쪽 방향에서 구름이 일시에 풍산(楓山)의 서쪽으로 모였다. 내 집 동쪽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큰비가 쏟아 붓듯 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였다. 남쪽과 북쪽에서 바람이 마주하고 함께 불어와 사방의 구름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거센 빗줄기를 이루었다. 신의 공능(功能)과 귀신의 자취를 찬란하게 엿볼 수 있었다. 아, 그중에는 이 일을 주장하는 자가 없는 듯하건만, 호령하여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변화무쌍한 굴신(屈伸)이 어찌 이처럼 신묘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난 뒤 시원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역시 신묘하였다. 그대로 묵묵히 바라보다가 적어 둔다.이날 이조 참판 유공 계(兪公棨)88)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군(兪君)은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일 때문에 금산(錦山)으로 귀양을 가 골짜기에 직접 서까래 몇 개로 된 초가집을 지었고 기장밥과 나물국조차 아침저녁으로 잇지 못하였지만 독서를 멈추지 않고 편안하였다. 해배(解配)되어 돌아와서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고 근실하며 공정하고 검소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현의 직임을 떠나서는 간관(諫官)에 제수되었다. 인조(仁祖)의 시호(諡號)를 올리는 날에는 직언하여 성상의 위엄을 범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산(因山) 뒤에 부령(富寧)으로 유배 되었다.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효묘(孝廟)를 뵙고 그의 죄가 아니니 풀어 주어 돌아오게 하도록 상소하였다. 곧이어 왕을 보필할 인재로 천거되어 차례차례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금상이 왕위를 계승하자 오래도록 옥당(玉堂)에 있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참의로 이조에 들어가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체차되었다.유군(兪君)이 무안에 있을 때 내게 편지를 보낸 뒤 줄곧 왕래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여러 해였다. 당시 내가 조모의 상을 당하여 장례와 제사 일에 얽매어있어서 찾아뵙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공은 관직을 그만두고 떠났다. 그래서 이름을 듣고 그 사람을 보기를 원하였는데 지금 그의 부고를 들으니 나를 처연하게 하였다.12월 14일 신미(辛未) 명이괘(明夷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지방관을 매우 공경스럽게 대하여, 회덕 수령(懷德守令)과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찾아오면 반드시 뜨락에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며 용모와 말투가 매우 공손하였다고 들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주(城主)가 군부(君父)에게 명을 받아 나를 다스리기 위해 왔으니, 성주에게 거만한 것은 곧 군부에게 거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夫人)의 조카가 서원현(西原縣)【청주(淸州)의 명호(名號)가 강등되었을 때이다.】을 다스릴 때 그가 찾아오자 역시 뜨락으로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여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속인이 아내의 조카를 자기 친족처럼 대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12월 20일 정축(丁丑) 비괘(賁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이계현(李啓玄)은 경기 고양(高陽)에 사는 상놈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 승려가 되었고, 고(故) 상국(相國) 남이웅(南以雄)89)의 산재(山齋)에 우거하였다. 남 상국은 그가 지닌 재주를 아까워하여 독서를 권하였다.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암기하였으며 많은 책을 널리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자 남 상국이 그에게 환속(還俗)을 권하였다. 풍수학으로 시속(時俗)에 이름이 나자 어버이의 장례를 치르는 공경대부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전한(典翰) 이수인(李壽仁)의 집에서 북으로 돌아올 때 나도 조부의 장지가 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옮겨 묻을 자리를 골라 달라고 하였지만 내 뜻에 만족스럽지 않아서 아직 그 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올해 서봉령(徐鳳翎)이 자기 부모를 이장하려고 경기, 강원 지역 등을 뒤져서 그를 맞이하여 왔다. 그의 사람됨을 보았더니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겨울인데도 홑옷만 입고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차가운 샘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기도 하고, 길을 갈 때는 말을 타지도 않고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리고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던 옛 마을이나 선산(先山)을 찾아가 지난 길흉을 말하면 마치 부절을 맞춘 듯이 정확하였다. 그래서 경사(卿士) 이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미혹되어 도인(道人)이라 일컬었다. 내가 보기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고 시골의 늙은 창기(娼妓)에게 빠져서 생각이나 행적이 모두 드러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풍수에 관한 술법이 평범한 지관(地官)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도 한두 번 그를 불러 선산(先山)을 점쳐 보았지만 역시 가볍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2월 30일 정해(丁亥) 기제괘(旣濟卦) 상육(上六) 소양(少陽)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일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논해 보니,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비가 내리고 해가 뜨는 날이 심하게 어긋나지 않은 것이 남쪽 지방의 들판에 있는 약간의 고을뿐이었다. 7, 8월 간에는 윗사람들이 농가의 득실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풍년이라고 일컬었다. 서리가 내린 뒤 벼가 태반은 여물지 않았건만 윗사람들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들판에는 흉년의 조짐이 있지만 부세는 풍년이 든 해처럼 징수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많았다. 골짜기에 있는 군(郡)에서는 수재(水災)가 모두 심해서 백성들은 산이 무너져 압사당하고 오곡은 거센 계곡물에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목면(木綿)이 재해를 입어 손상된 것은 산이나 들판이나 똑같건만 대동미(大同米)를 포(布)로 환산하여 거두어들였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민심이 소란스럽고 몸에 제대로 된 옷을 걸치지 못하였다.상천(上天)이 경계를 보여 일월성신이 동요되고 서로 부딪치는 변화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가 보았으며, 산천초목과 짐승이 벌이는 괴이한 증상이 모두 드러났다. 인심이 놀랍도록 잘못되고 세도가 추잡하고 야박하기가 얘기할 가치도 없었다. 수령은 일락(逸樂)에 빠져 귀에 들리는 게 없는 듯하고 조정은 인원만 갖추었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였다. 덕행을 갖춘 사대부들은 당론(黨論)만 숭상할 뿐이고, 혼탁한 관리들은 뇌물에만 힘쓸 뿐이어서 300년 종사(宗社)를 비호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무슨 시대인가.민간의 비루한 사람인 데다 문지(門地)도 미천하고 자취도 소원하니 뜨거운 심정이 뱃속에 가득하여 분격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또한 어찌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날씨의 맑고 흐림을 적어 두는 조그만 책자 끝에다 오직 심정의 만 분의 일만 적으면서 마음에 쌓인 기분을 펼쳐 놓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의 일은 나만 홀로 근심할 바도 아니고 또한 내 심력(心力)으로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심신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 수양이 됐는지 그렇지 않은지만이 내 분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1년 동안 있던 일을 돌이켜 보니 보아줄 만한 실상이 백에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를 모르지도 않고 수신의 공부를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일이 괴리되고 일상의 동정(動靜)이 어긋나 360일 가운데 헛되이 떠돌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내 나이를 손꼽아 보니 이미 42세가 되었다. 묵은해를 보내는 이 밤에 나도 모르게 놀라고 깨달아 삼가 여기에 적어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을 꾸짖는 도구로 삼는다. 正月初五日。 戊辰。 无妄九五。 少陰洪儒一耒言: "前年十二月二十四日。 黃山書院重修奉安之會。 渠亦往參云。" 院前享李文元李文成成文三先生。 今宋尤菴時烈。 主事重修。 以李文純趙文正二先生主享。 兩湖人士會齊者。 二百餘人。 宋判書首獻。 李參議惟泰副獻。 公州牧鄭英漢終獻。 而宋李二公。 以深衣幅巾行祭。 鄭君以時服行事云。二十一日。 甲申。 旣濟九三。 少陽晨起行祭。 此地乃先君子榟桑之鄕。 昊天罔極。 萬倍于常。 是日歷謁先祖群塋。 兄弟侄子會宿于碧松堂。二十七日。 庚寅。 家人九三。 少陽京中士人李潞來見。 前吏判趙絅之外孫。 言語頗穩。 能道曩日二宋二尹一許論禮始末。 其外祖。 亦一言之後。 尙擯於時。 時方退居于抱川村舍云。 又言: "其叔父李君聖徵。 時在東萊任所。 去年冬。 倭人進封領來者接待時。 爭酒悖慢。 李君終始不屈。 倭人拔劍作亂。 釜山僉使及府使之軍官以下。 皆遁走。 惟下吏一人死守不去。 事定走聞。 僉使拿就繫獄云。"初二日。 甲子。 損上九。 少陽邑吏告明日主倅蔡侯忠立。 旅櫬發引而歸。 往見之。 喪主請挽辭。 爲賦一篇律語。 蓋蔡侯質朴寬儉。 而無才於政事。 故民雖愛其不猛。 而短其無變通。 及其喪也。 邑人尹先甲洪鍾華。 典治其喪。 布被短袴之外。 衙無所藏。 無以斂棺。 鄕人共賻。 買被與袴而斂之云。 故余挽辭三四云: "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 其七八云: "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云。" 蓋記實矣。十五日。 丁丑。 歸妹初九。 大陽祭外祖考妣墓于栗枝谷。 蓋余外祖。 晩年厭煩城市。 終年於道村農舍。 旣無嗣胤。 而逝於崇禎辛未。 余在冲年。 不能返葬故山。 權窆于此。 余亦無兄弟子侄。 春秋掃塋。 以親塋遠在。 故不能行祭于節日。 例常擇日行之。 余於八歲。 初受千字文及唐宋詩文於外祖。 其年十二月下世。 猶及望見貞固之守介特之姿。 薰蒿今日。 凄感滿懷。 亦有人所不及知余意者。 可哀也已。閏六月二十一日。 辛巳。 未濟九二日卯辰。 南風徐徐而起。 俄而北風竝起。 南北方雲氣。 一時會翕于楓山之西。 我家之東。 雷電從中起。 大雨如注。 信奇觀也。 南北之風。 相對竝起。 四方之雲。 囊括一處。 合成沛然之澤。 神功鬼跡。 賁然可窺。 噫! 其中若無主張是者。 其號令聚散變化屈伸。 安能若是之神也? 旣然已。 爽風一聲。 雲捲雨收。 而斂無迹矣。 吁! 亦神矣。 仍默觀而記。 是日聞吏曹參判兪公棨之逝。 兪君剛直好學。 嘗以事謫錦山。 手結數椽草舍于峽中。 黍飯菜羹。 朝夕不給。 而不撤讀書怡如也。 放還調務安縣事。 以廉謹公儉稱。 去職拜諫官。 當仁祖進謚之日。 直諫觸犯雷霆之威而不撓。 因山後配富寧。 尤齋宋公。 遭遇孝廟。 䟽其非罪放還。 尋薦以王佐之才。 歷陟淸要。 今上嗣服。 久在玉堂。 爲副提學。 入東銓以參議。 拜參判。 未久而遞。 君之在務安。 以書抵余。 仍往來通簡數年。 而時余遭王母之喪。 罹葬祭之故。 未遂執贄相就之約。 而羆官而去。 故聞其名。 而求見其人。 今聞其訃。 令人悽然。十二月十四日。 辛未。 明夷六二。 少陽聞尤齋宋公於地主。 待之甚敬。 懷德倅淸州牧來謁。 必下庭送迎。 容辭極恭。 嘗曰: "城主受命君父。 來治我也。 慢城主。 卽慢君父也。" 夫人之侄。 治西原縣。【淸州降號時】來謁。 亦下庭送迎。 無異他人。 蓋甚非俗人之視妻侄如己族故也。二十日。丁丑。 賁六二。 少陽李啓玄。 京畿高陽常漢之子。 少時爲僧。 寓於故相國南以雄山齋。 南相惜其有才。 勸之讀書。 一覽輒誦。 博觀群書。 無不通焉。 南相勸之還俗。 以堪輿之術鳴於時。 公卿大夫之葬其親者。 爭延接焉。 丁酉年間。 自李典翰壽仁家北歸時。 余亦以祖考葬地不吉。 故邀占移樹之地。 不滿余志。 尙不用其地。 今年徐鳳翎。 欲移葬其親。 追蹤於京畿江原等地邀來。 看其爲人。 當冬盛寒。 衣單衣不寒。 或入洌泉浴焉。 行不騎馬。 日走數百里而不疲。 過人舊村先山。 已往吉凶。 言之若符契。 故卿士以下。 人皆惑焉。 以道人稱之。 以余見之。 所行多乖誤。 而近溺於鄕之一老娼。 心跡盡露。 無可取者。 但地術稍勝於庸士而已。 是以余亦一二邀占先山矣。 而亦不可輕信。 故尙不用其說矣。三十日。 丁亥。 旣濟上六。 少陽今日。 歲除日也。 歷計一年已然之事而論之。 春夏之交。 雨暘無甚愆忒者。 南中野邑若干地而已。 七八月之間。 上之人。 不詳考驗農家之得失。 而以豐年稱之。 至於霜降之後。 嘉糓過半不實。 而上之人。 亦不審察。 故野有凶歉之象。 而賦有豐年之徵。 民多苦怨。 至於山峽之郡。 水災備甚。 人民壓死於山崩。 五糓漂淪於激湍。 而况木綿災損。 山野同然。 而大同米作布之擧。 民心騷然。 體無完衣矣。 上天示警。 日月星辰。 震蕩相薄之變。 有目皆覩。 山川草木鳥獸之怪。 莫不畢見。 而人心之駭僻。 世道之汚澆。 有不足言者。 守令荒淫。 而耳若無聞。 朝廷備員。 而目若無見。 淸流之所尙。 黨論而已。 濁吏之所務。 財賂而已。 至於三百年宗社。 無一人顧護者。 此何時哉? 山野陋人。 地賤迹踈。 滿腹丹悃。 無日不激。 而亦無如之何矣。 聊書萬一于記陰晴小冊之末。 以敍五內之積氣焉。 雖然。 國家之事。 非吾之所獨憂。 而亦非吾之心力所可及矣。 若夫吾之一箇身心正不正治不治。 乃吾分內事也。 而回首一年之事。 百無可觀之實。 治心之道。 非不知也。 正身之學。 非不講也。 而心與事乖。 動與靜違。 三百六十。 無非浮泛底日子。 屈指吾年。 已至四十二矣。 送舊此夕。 不覺驚悟。 謹書于此。 以爲補過自訟之具焉。 제주배(齊州盃) 제주(齊州)를 다스리면서 청렴함으로 이름 높았던 조궤(趙軌)의 고사를 빌린 시어(詩語)이다. 《隋書 趙軌列傳》 유공 계(兪公棨) 1607~1664.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남이웅(南以雄) 1575~1648.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했고 그 공으로 좌찬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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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락 題缺 땅이 비옥해 잎 길게 자라나고비 흠뻑 내려 싹이 돋아나네굳이 금단을 단련할 것 없으니도랑물 삼켜 흑발 남기네 土肥抽葉長雨足生芽茁不必鍊金丹呑渠留漆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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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삽 메고 영험한 뿌리 베어광주리에 잘 자란 풀 담는다체에 걸러 비결대로 하니거울 속에 흰머리 없어졌네 帶鍤斲靈根領筐貯肥茁篩和依秘方鏡裏除華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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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 이붕수209)를 애도하다 哀李監察鵬壽 문에 들어서자 혼백이 아른아른하는데늙은 형을 남겨두고 어머니도 저버렸구나천년 뒤의 장순과 허원210)이니구중의 저승길 혹여 함께 가려나 入門魂魄想依依有老兄存母亦違千載張巡與許遠九重泉路倘同歸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자는 중항(仲恒)이다. 그의 형인 李麒壽와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별장(別將)이 되어 부령(富寧)을 수복하고 반역자 국경인(鞠景仁) 등을 처형하였다. 이듬해 패퇴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옥탑평(玉塔坪)에서 싸우다가 유탄(流彈)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순과 허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인물이다. 장순은 안록산의 난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당시 수양 태수(睢陽太守)였던 허원은 수양성으로 온 장순에게 자신이 통솔하던 병사와 물자를 모두 넘겨주고 함께 수양성을 지켰다. 적에게 포위되어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몇 달을 버티었으나 끝내 적에게 함락되어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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