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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친구를 애도하다 悼酒伴 술은 성령 해치니 참으로 경계할 만하나수명에 관계된다는 말은 참이 아닌 듯하네가령 하늘이 의적295)을 내지 않았더라도세상 사람이 어찌 모두 백세를 누렸으랴 酒伐性靈誠可戒謂關脩短恐非眞假令天不生儀狄世上寧皆百歲人 의적(儀狄) 우(禹)임금 때 사람인데, 처음으로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 임금이 술을 마셔 보고는 맛이 너무도 좋아서 "후세에 반드시 이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시 술을 마시지 않고 의적을 멀리하였다. 《戰國策 魏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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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계동 시에 차운하다 次楓溪洞韻 걸음마다 승경 찾느라 절로 멈추지 않으니석양 물든 산빛이 맑은 시름 일으키네가을 깊으니 그 어딘들 서리 없으랴만서리 내린 풍계는 색다른 가을빛이라오 步步尋幽自不休夕陽山色惹淸愁秋深何處無霜着霜着楓溪分外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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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 그림 畵孤竹 고죽이 야위어 마치 산택 신선 같으니멀리 수양산에서 그윽한 집에 전해졌네그윽한 집 열 개도 외려 적다고 꺼리는데그런 줄 모르겠으니 아마 그렇지 않으리360) 孤竹癯如山澤仙遠自首陽傳幽軒幽軒十介猶嫌少不識其然恐不然 그윽한……듯하여라 송나라의 시승(詩僧) 청순(淸順)의 〈십죽(十竹)〉 시 고사를 차용한 듯하다. 〈십죽〉 시에 "성안의 한 치 땅은 한 치의 황금이나 마찬가지라, 그윽한 집 뜨락 가에 대나무를 열 개만 심었네. 봄바람아 삼가서 죽순을 잘 자라게 하여, 내 섬돌 앞 푸른 이끼를 뚫고 나와 망가뜨리게 말거라.[城中寸土如寸金 幽軒種竹只十箇 春風愼勿長兒孫 穿我階前綠苔破]"라고 하였다. 《詩人玉屑 卷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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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루 百祥樓 강호의 비바람 밤새 거세었으니엎어진 돛단배는 얼마나 되는가높은 곳엔 물결 이르지 못하니백상루 위가 바로 신선 집이라 江湖風雨夜來多顚倒帆檣問幾何高處波瀾到不得百祥樓上是仙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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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의 춘첩 安州春帖 안주(安州)와 개천(价川)은 이웃 고을이요지난해 주린 까마귀 올해는 기뻐하네도리어 당시 구걸하던 자로 하여금이춘란361)에게 가서 길게 읍하게 하네 安陵介邑是隣官去歲飢烏今歲歡却使當時行乞者往來長揖李春蘭 이춘란 개천(价川)에 살던 부호(富戶)이다. 선조가 평안도 임진왜란 몽진을 가서 안주(安州)를 지날 때 식량이 부족하자 이춘란이 곡식 300석을 싣고 바쳤으며, 의주(義州)가지 따라 가서 4,000석에 이르는 재물을 바쳤다고 한다. 《宣祖實錄 25年 5月 23日》 《高宗實錄 33年 9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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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노첨과 함께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짓다 同崔魯詹重陽登高韻 중양절에 쌍성에서 술 마시니국화는 이슬 흠뻑 머금어 활짝 피었네구름은 가을 숲에 닿아 날 저물고산은 –원문 1자 결락- 강을 보내오네세상사에 양 귀밑머리 긁적이고고향 그리움에 술 한 잔 드노라종일토록 취한들 문제될 것 없으니장차 –원문 1자 결락- 옥산이 무너져리31) 九日雙城飮黃花浥露開雲連秋樹晩山送【缺】江來世事搔雙鬢鄕愁把一杯不妨終日醉且【缺】玉山頹 옥산이 무너지리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따르면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은 풍채가 뛰어났는데, 그가 술에 취하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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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襃獎 중종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였다. 【어떤 이는 정려를 세워 표창한 일이 가정(嘉靖) 갑진년(1544)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본도 감사의 계문(啓聞)과 전교(傳敎)의 글에는 모두 증거가 없다. 이후 만력 갑인년(1614) 가을에 광해군이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35) 등에게 《동국신속 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을 충신 1권, 효자8권, 열녀 8권으로 편차하여 그림을 그리고 사적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사적에 이르러서는 '사침단지(士沈斷指)'를 제목으로 삼아 그 아래 손가락을 깨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끝에 사적을 적었는데 "현감 나사침은 본관이 나주이다. 효성을 타고나 나이 16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올렸더니 병이 즉시 나았다. 중종36)께서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라고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혼탁한 조정의 간신 이이첨(李爾擔)37)의 성명 또한 일찍이 효자의 반열에 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이 세상에 유행하지 않았고 당초 간행본 중에 여전히 전해지는 것이 있어 이처럼 덧붙여 보인다.】만력 무진년38) 본도의 감사 송찬(宋贊)의 계본(啓本) 【본주의 목사 한복(韓輹)이 논하여 알린 것을 따른다. 송찬은 자가 치숙(治淑)이고, 호는 서교(西郊)이며, 진천(鎭天) 사람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경자년(154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일찍이 무진년(1568)에 호남의 방백이 도내의 훌륭한 선비를 천거했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고, 그 다음으로 같은 고을의 전 참봉 김응기(金應期), 유학(幼學) 김천일(金千鎰), 장흥(長興) 진사 유호인(兪好仁), 김윤(金胤) 등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그대로 대신들이 포장 교지를 의논하라는 일이 있었다.】생원 나사침(羅士沈)이 모친의 병이 수개월 간 치료되지 않자 의술로 낫게 할 수 없음을 슬피 여겨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약과 함께 올렸더니 어머니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중종 때 임금께 알려져 정려로써 표창을 받았다. 그 사람됨은 천성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학문과 행실을 겸비하여 그의 부모형제간에도 다른 말이 없었고 일을 처리하고 남들과 만날 때에도 믿음과 의리를 실천했고 부모의 상에도 한결같이 예를 따랐으니 시묘살이를 하는 전후에 한 번도 집에 이른 적이 없었으며 추모함에 정성스럽고 독실하게 하고 제사를 지낸 때도 반드시 삼가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할 때에도 불쌍히 여겨 지극 정성으로 했으며 일찍이 과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 명성이 알려지거나 현달하기를 구하지도 않아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행실에 모두 감복했기에 선조께서 교지에 "나사침 등의 행실은 지극히 가상하여 포장할 만한 일이니, 해당 부서는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미암일기(眉巖日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무진년 5월 15일에 나중묵(羅仲黙) 【사선(士愃)이다.】 의 형이 내게 고하기를 '아침에 이조판서 이공을 만났는데, 나사침과 유호인은 품계에 맞는 직을 내리고, 김천일에게는 식물(食物)을 내려 학업을 마치도록 하고, 김응기에게도 식물을 내리고, 김윤에게는 정려문을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줄 것이니, 이는 대개 이조와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미암은 유희춘(柳希春)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는 성은(城隱)이다. 유계린(柳桂隣)의 아들로, 공과는 이종형제 사이다. 정덕 계유년(1513)에 태어나 배움을 널리 했고 기억하는 데 힘을 쏟은 인물이다. 가정 정유년(1537) 생원에 합격하고, 무술년(1538)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1545)에 권세 있는 간신들의 재앙이 있던 날, 정언(正言) 벼슬에 있다가 대사헌 민제인(閔齊仁) 등과 함께 연좌되어 파직 당하였다. 정미년(1547)에 제주로 유배를 갔다가, 무신년(명종 3, 1548)에 종성으로 이배되어, 을축년(1565)에 특별히 은진(恩津)으로 이배되었다. 선조 초에 교리로서 부름을 받고 이어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경학을 시강(侍講)하였다. 정축년(1577) 5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中宗朝, 旌閭復戶. 【或云, 旌表在於嘉靖甲辰年而未詳. 本道監司啓聞及傳敎文字俱無徵 △後至萬曆甲寅秋, 光海命晉原府院君柳根等, 編次東國新續三綱行實, 忠臣一卷, 孝子八卷, 烈女八卷, 啚像記事. 而至於公之事蹟, 則以士忱斷指爲題目, 其下畵斷指之狀, 未端記事曰 : "縣監羅士忱羅州人, 誠孝出天, 年十六, 母病斷指, 以進卽愈, 恭僖大王朝旌門."云云. 及仁祖反正後, 以昏朝蘖臣 李爾瞻姓名, 亦嘗冒入於孝子之列, 故其書不得行世, 而當初刊出本, 猶有傳者, 附見如此.】萬曆戊辰, 本道監司宋贊啓本 【從本州牧使韓輹論報也. 宋贊, 字治叔, 號西郊, 鎭川人. 嘉靖丁酉, 生員壯元, 庚子文科, 官至贊成. 嘗在戊辰, 以湖南伯啓薦道內遺逸之士, 以公居首, 其次同州前參奉金應期 幼學金千鎰 長興進士劉好仁 金胤 凡五人也, 仍有議大臣襃獎之敎】生員羅士忱, 母病數月不瘳, 悶無醫術, 自斷手指和藥以進, 母病卽愈已. 在中廟朝, 事聞旌表. 爲人性稟眞醇, 學行俱備, 其於父母昆弟之間, 人無異言. 處事接物之際, 信義竝行, 父母之喪, 一遵禮制, 前後廬墓, 一不到家, 追慕誠篤, 祀事必謹, 賙窮恤乏, 至誠惻怛, 早廢擧業, 不求聞達. 一鄕之人, 咸服其行. 宣祖敎曰 : "羅士忱等行實, 至爲可嘉襃獎事, 令該曺議于大臣."柳眉巖日記曰 戊辰五月十五日羅仲黙 【士愃】 兄報云 朝見吏書李公則士忱與劉好仁, 相當職除授, 金千鎰賜食物勉卒學業, 金應期賜食物, 金胤旌門復戶, 此蓋銓曺與大臣議定者也. 【柳眉巖, 諱希春, 字仁仲, 善山人, 號城隱. 桂隣之子, 與公爲姨從兄弟也. 生于正德癸酉, 博學强記. 嘉靖丁酉生員, 戊戌文科. 乙巳權奸釀禍之日, 以正言, 折大司憲閔齊仁等, 仍被坐罷. 丁未配濟州, 戊申移配鐘城, 乙丑量移恩津. 宣廟初, 以校理承召, 歷官大司憲, 吏曹參判, 特陞資憲長, 以副提學侍講經學. 丁丑五月卒. 贈左贊成, 諡文節公.】 유근(柳根) 1549~1627. 자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서경(西坰)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중종 원문 '恭僖大王'은 중종(中宗)을 말한다. 공희(恭僖)는 중중의 시호이다.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자는 득여(得輿)이고,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만력 무진년 만력(萬歷) 연간에 무진년은 없다. 아마도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석을 참고하면 무진년은 선조의 원년이며 1568년에 해당되므로 융경(隆慶)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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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경인년(1590)에 심문할 때의 전교 萬曆庚寅就理時 【傳敎】 전교(傳敎)는 다음과 같다."'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39)라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자들은 용서해 주고, 무고한 혐의를 씌운 자들은 파직하라." 【지난해 기축년(1589)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으로써 옥사를 일으키자, 좌찬성(左贊成) 정철(鄭激)이 위관(委官)이 되어 옥사를 주관하고선 기회를 틈타 무고한 이들을 잡아들였다. 동복(同福) 사람 진사 정암수(丁巖壽) 등은 은밀한 뜻을 이어 여러 명사들을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함정에 빠뜨렸는데 공의 부자 이름 또한 그 안에 실려 있었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정암수 등을 잡아들이라 명하셨다. 정철이 대간(臺諫)과 태학생(大學生)들을 부추겨 그만 둘 것을 청했더니 결국 윤허를 받아냈다. 이듬해 경인년에 공과 다섯 아들 모두 끝내 체포당했으나 이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라는 전교가 있었기에 죄를 용서받게 된 것이다.또 이듬해 신묘 윤 3월에 양사(兩司)에서 정철이 조정의 기강을 제제하여 마음대로 한다는 논의로 합계(合啓)를 올려 일시에 파직을 청하였더니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조정의 당(堂)에 그의 죄목을 방문으로써 보이도록 명하였다. 6월에 대사헌(大司憲) 이원익(李元翼) 등과 대사간(大司諫) 홍여순(洪汝薛) 등이 정철은 조정을 어지럽히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며 호남의 유생들을 유도하여 명경과 사류들을 상소함으로써 역모의 무리로 몰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는 논의로 합계를 올려 멀리 쫓아내기를 청했는데,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특별히 강가로 유배를 보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양사에서는 일찍이 이전의 대간들은 권세가 있는 간신들의 사주를 받아 정암수 등을 구하라는 논의를 하여 잡아들이라는 명을 그치게 했으니 모두 파직해 주시기를 청하는 합계를 올렸는데,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전교에 "정철은 타고난 성품이 교활하고 간악하여 이미 유배를 받았고, 그와 교제하는 여러 사람들조차도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죄상이 엄중하므로 위리안치 시켜라."라고 하셨다. 2년 뒤 계사년(1593) 12월에 정철은 죽었다. 이듬해 갑오 11월에 양사와 대사헌 김우옹(金字願) 등과 대사간(大司諫) 이기(李墍) 등은 정철이 옥사를 주관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죄를 논하여 관작을 추가로 삭탈함을 청하자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다.】 敎曰 : "求忠臣, 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前年己丑十月, 鄭汝立逆獄起, 左議政鄭澈以委官主獄事, 乘機羅織. 同福進士丁巖壽等, 承其風旨, 投誣疏陷諸名流, 公父子之名, 亦載其中. 及巖壽疏入, 上震怒, 命拿鞫巖壽等. 澈嗾臺諫及太學生, 請寢之, 蒙允. 明年庚寅, 公竝五子, 竟被逮, 有此求忠孝門之敎, 而蒙宥焉. 又明年辛卯閏三月, 兩司合啓論鄭澈擅弄朝綱裁制, 一時請罷職, 依允, 命搒示其罪目于朝堂. 六月, 大司憲李元翼等 大司諫洪汝諄等, 合啓論鄭澈濁亂朝廷, 欲陷異己之人, 敎誘湖南儒生, 上疏名卿士類, 驅入逆流, 欲盡殲滅, 請遠竄, 依允, 特命配江界. 七月, 兩司合啓曾前臺諫承權奸指嗾, 論救丁巖壽等, 仍寢拿命, 請竝罷職, 依允, 傳曰 : "鄭澈賦性, 狡猾奸毒, 旣到配所, 交通雜人, 未知作何等, 罪狀嚴加圍籬." 後二年癸巳十二月, 鄭澈卒. 明年甲午十一月, 兩司大司憲金宇顒等 大司諫李墍等, 論鄭澈主獄羅織之罪, 請追削官爵, 依允.】 충신은 …… 구한다 《후한서(後漢書)》 권56 〈위표열전(韋彪列傳)〉에 "국가는 현자를 선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며, 현자인지 아닌지는 효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버이에게 효성스러운 사람은 이 효성을 임금에게 옮겨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찾아야 합니다.〔夫國以簡賢爲務 賢以孝行爲首 孔子曰 事親孝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必於孝子之門〕"라고 위표가 황제에게 건의한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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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기 事實記 공의 성은 나 씨(羅氏)이고, 휘는 사침(士忱)이며, 자는 중부(仲孚)이고, 자호(自號)는 금호(錦湖)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주성(州城)에 거주하였다. 시조는 나부(羅富)로서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이었다. 그의 후손 중 계첩(系牒)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나득규(羅得虬),나중윤(羅中允),나송기(羅松奇)로 3대가 모두 영동정(令同正)이었다. 나수영(羅守永)은 진사를 합격하였고, 나원(羅源)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동정(同正)을 지냈고, 나진(羅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홍무(洪武) 23년(1391) 이전에 판사(判事)로서 영산(榮山)에 조창(漕倉)과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일은 양촌(陽村) 권근(權近)40)의 기록에 있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홍무(洪武) 14년(1381) 이전에 소윤(少尹)으로서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己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다. 이 일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나자강(羅自康)은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郞)을,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다. 나일손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일찍이 같은 고을의 훌륭한 사람들 11명과 함께 난정(蘭亭)의 고사41)를 모방하여 금강계(錦江稧)를 만들어 풍류와 고상한 운치를 즐기니, 이 일이 전해져 호남의 미담이 되었다.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탐진 최씨(耽津崔氏)로,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냈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분의 따님이다. 금남(錦南) 선생은 "최부(崔溥)가 외할아버지인데 문학과 절개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당하였다."라고 하셨다.가정(嘉靖) 을유(1525) 2월 28일에 공이 태어났다. 타고난 기질이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고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나이 겨우 16세에 어머니 최 부인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의 피를 약에 타서 드렸더니 곧장 나았다. 이 일은 중종 임금께 알려져 정려로 표창되었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장성해서는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 선생을 종유하고,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등의 동학들과 교유하며 서로 미루어 인정해 주었다. 명종(明宗) 때 을묘방(乙卯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선조 원년 무진년(1568)에 서교(西郊) 송상 찬(宋相贊)이 호남을 순찰하다가 전라도의 훌륭한 선비 다섯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공을 으뜸으로 여겨 학문과 훌륭한 행동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칭찬하였다. 다른 네 사람은 김응기(金應期), 김천일(金千鎰), 유호인(劉好仁), 김윤(金胤)이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나사침 등은 행실이 매우 가상하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하여 포장하시오."라고 하시니, 이조에서 드디어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혹은 정려로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하도록 하자고 하였고 혹은 식물(食物)을 공급하여 학업을 마치도록 힘쓰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려의 표창과 부역과 세금 면제는 이미 선조 때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의 벼슬을 내리게 하였다. 이듬해 맏형 나사선(羅士愃) 시정공(寺正公)이 서울에서 돌아가시자, 공이 정신없이 달려가 곡을 하고서 관을 들고 남쪽으로 돌아와 안치하였다. 이 일로 고과에 관한 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종형 부제학(副提學)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은 감탄하며 "나중부는 멀리에서 와서 형의 상을 치르고 돌아갔으니 그의 체직(遞職)은 실로 훌륭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상서(尙書) 홍담(洪曇) 또한 자주 공을 칭찬하였다.신미년(1571)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고 5년 뒤(1576)에 경기전 참봉으로 관직이 바뀌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와 종묘 직장(宗廟直長)으로 옮기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외지로 나가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어 정치를 청렴하고 간소하게 하였으며 고을의 세도가와 농사꾼 간에 송사가 있으면 공이 한 마디 말로 판결하였다. 방백의 뜻을 거슬러 고과의 점수는 낮았지만 그 고을 백성들은 비석을 세우고 시를 새겨 공을 추모하였으니 다음과 같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으로 옥사를 일으키자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기미를 틈타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씌워 재앙이 넘쳤는데 그 여파는 평소 함께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그들을 몰아 일망타진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동복(同福)사람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여러 유명 인사 10여 명을 함정에 빠뜨려 무고하여 상소했는데 이를테면 재상 이산해(李山海), 재상 정언신(鄭彦信)42), 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징군(徵君)43)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등 모두 그 안에 포함되었다. 또 공의 부자를 거론하며 "나 모씨는 그의 아들과 정여립이 평소 교분이 두터웠으나,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죄를 용서받고자 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그밖에 위험한 말들은 끝이 없었다. 공의 자식 중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가 큰 소리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 등의 상소가 어느새 임금에게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감히 함정에 빠뜨리는 계책을 내고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고 거짓된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경들조차 배척하고 지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흉악하고 참혹한 상황이 매우 놀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반드시 간악한 자들의 부추기는 말을 들었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고는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이하 10명을 잡아 국문하도록 하셨다. 정철은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어 대각의 신하들을 부추겨 간쟁하게 하고 태학생들을 부추겨 어리석은 상소를 올리도록 하자 이미 내렸던 명이 그만두게 되었고 그 상소 안의 일 또한 묻지 않게 되었다. 이때 무안 유생 배명(裵蓂) 등이 역시 곤재와 공의 무고함에 대하여 자세하게 상소를 올렸는데, 옥사를 주관했던 자가 또 홍천경(洪千璟) 등으로 인하여 죄를 만들어 모해하였다. 그러다 결국 정암수의 상소를 막았다는 이유로 죄목을 날조하는 바람에 공과 다섯 아들 모두 체포되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효자로 든 자들은 용서하고 무고히 죄를 씌운 자들은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공은 곧바로 풀려났지만, 다섯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나덕명은 경성(鏡城)으로, 나덕준(羅德峻)은 부령(富寧)으로, 나덕윤(羅德潤)은 회령(會寧)으로, 나덕현과 나덕헌은 철원(鐵原)으로 도배를 당하였다가 계사년(1593)에 풀려났다. 공이 병신년(1596) 12월 23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2세였다.공의 성품은 진실하고 덕행이 순수하고 돈독하였으며 효도와 공경이 지극하였으니 신명에 통하였다고 하겠다. 상을 치를 적에도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시묘살이를 하는 전후로는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반드시 경건히 조상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지어 외증조 진사 최택(崔澤)의 묘소가 무안에 있는데 이미 대가 끊겨 대를 지키고 보호할 사람이 없자 공은 그것을 위해 묘를 정하고 성묘를 하며 곧장 나무하고 소먹이는 일을 금지시켰으니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감동하였다. 일찍이 형제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이루지는 못했으니 형제들 모두 공과 같은 거처에 살고자 하는 마음을 통한으로 여겼다. 여러 아들이 그 뜻을 잘 이어 당(堂)은 같되 실(室)은 다르게 하려는 제도를 모두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기고 힘쓰게 하여 태어난 집안의 가르침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집안에 윤리와 기강을 잇는 큰 송사가 있었으나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고을의 목사가 되어 곧바로 송사를 판결하고는 공과 여러 아들 중 송사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세상 쟁송은 대다수가 이익으로써 하는데, 이들의 쟁송은 곧 천리로써 한다."라고 하였고 또 공을 학문으로써 업을 삼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명종의 제사 때마다 공은 소식(素食)을 했는데 60여 세에 이르기까지 병을 핑계대어 혹 게을리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명종 때 인재를 두텁게 대하는 교화로써 국자(國子)에 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은 비록 늙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44)이 공에게유유히 베개 높이 벤 곳에 悠然高枕處대궐의 꿈 아득하네 雲闕夢蒼茫라는 시구를 글을 주었으니 이는 바로 공의 심경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평소 고을에 거처하며 신의를 죽을 때까지 지녀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힘썼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 또한 미물에까지 이르렀다. 한번은 주방에서 작은 물고기가 뱃속에 알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그릇에 놓아 물고기를 살리도록 명하였다. 음식을 대함에 비록 작은 예절이었지만 그의 어진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산 현감으로 있을 때 도둑질하는 아이 하나를 잡아 의리로 가르치고 놓아주니 그가 드디어 감동하여 잘못을 고쳤다. 고을 앞에 여관을 설치하고 길을 가는 사람을 대접하여 그가 자신을 부지런히 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덕화가 남에게 미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의 지극한 행동은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신편 속 삼강행실(新編續三網行實)》에 실려 있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이이첨(李爾瞻)45)의 성명 또한 효자의 반열에 섞여 있던 까닭에 그 책이 전하지 않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이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공은 무안의 주룡 나루 건좌(乾坐)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아들 나덕윤, 나덕신, 나덕헌이 모두 종훈(從勳)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여러 차례 벼슬이 더해져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네 아들을 낳았고, 별도로 본주의 장흥동(長興洞)에 장사지냈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사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나덕명은 기묘년(1579)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나덕준은 재주와 행실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나덕진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덕윤은 무자년(1588) 진사를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나덕현은 효행으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다. 부인 정씨(鄭氏)는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나덕신은 신묘년(1591)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나덕헌은 계묘년(1603)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큰딸은 충의위(忠義衛)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둘째 딸은 참의(參議)에 추증된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도사(都事)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 나성소(羅成素)는 무과에 급제를 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현감(懸監)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갔고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으며, 둘째 딸은 선교랑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감찰(監察)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이천 부사(伊川府使)가 되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宣敎郎)을,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사위 윤항(尹抗)은 아들 우탕(禹湯)을 두었다. 참봉(參奉)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素)는 효행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으며,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 등이 있다. 첫째 딸은 군수를 지낸 정환(鄭渙)에게, 둘째 딸은 민희일(閔喜一)에게, 셋째 딸은 유천(柳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위홍주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위정보(魏廷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鄒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두 딸은 주부(主簿) 정경일(鄭敬一)과 장사랑(將仕郞) 최환(崔渙)에게 각각 시집갔다. 수사(水使)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부인 김씨(金氏)는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으며,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다. 두 딸 중 첫째는 김용건(金用健)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진사 이준신(李儁臣)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안팎의 자손이 수백 수천에 이르러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아! 《예기》에 "산 사람 섬기는 것을 사랑과 공경으로 하고 죽은 사람 섬기는 것을 애도와 슬픈 마음으로써 한다면, 생민의 근본을 다한 것이요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일이 끝난다."46)라고 하였다. 또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장차 착한 일을 할 적에 부모의 아름다운 이름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하며, 불선한 일을 할 때에는 부모에게 치욕이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47)라고 하였다. 자하께서 "부모 섬기기를 능히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임금 섬길 때는 능히 그 몸을 다하며, 친구와 더불어 사귈 때는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그가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할 것이다"48)라고 하였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공은 학문을 함에 일상생활의 떳떳한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로써 선한 행동을 닦고 선한 이름을 세웠고 저 서교께서 공을 학행으로 천거하였고 학봉께서 학문을 들어 칭찬하신 데에는 진실로 이유가 있다. 여러 자식들도 훌륭한 사람의 행적을 이어 육룡(六龍)이라고 칭송받았으니, 예컨대 나덕명은 귀양 갔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북평사 정문부(鄭文孚)와 의병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바닷가 백성들 중 왜적을 이끌어 난을 선동한 자들을 붙잡아 목을 베었고,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안현(鞍峴) 전투에서 이괄(李适)49)의 무리를 물리쳤고 또 사신의 명을 받들어 심양(潘陽)에 가서 절개로 항거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나덕준과 나덕윤은 모두 의를 행하여 이름을 알렸다. 나덕현은 난리 중에 위급함을 만나 어머니를 안고 울부짖어 왜적을 감동시키고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나득소는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딸, 손녀, 며느리, 손부도 순절하였다. 또 네 아들과 손자들이 이 대에 걸쳐 충신과 효자와 열녀로 나란히 나와 세상에서 영예롭게 여겼으니, 공이 가정에서 가르침을 완성하고 그 효과가 나타난 것 아님이 없다. 《시경》에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복을 주리라."50)라는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지위가 덕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삶의 중간에 횡역을 만난 것은 운명이고 시운이지만 공의 덕에게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공께서 돌아가신 지 127년이 지나자 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세대가 더욱 멀어져 선대의 사적이 없어 징험할 것이 없을까 걱정하여 집안의 유사(遺事), 족첩(族牒), 묘문(墓文) 등을 수습하고 보고 들은 것을 미루어 한 권의 책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나는 외손의 반열에 있어 이를 산정하라는 부탁을 받고 감히 그 초고에 바탕하고 개괄적인 내용을 간략히 하여 공의 처음과 끝을 이상과 같이 적었지만 진실로 공의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선철왕(先哲王) 두 조정에서 세 번이나 포장하신 뜻을 우러러 보건대 공의 행실과 의리가 몇 백 년 뒤에도 남아있으리라는 사실을 징험할 수 있으니 또한 마땅히 효도의 교화와 떳떳함의 천성에 감발함이 있을 것이다. 옛날 도연명(陶洞明)이 외할아버지 맹장사(孟長史)를 위하여 전을 지어51) "내가 행적을 살펴보다가 혹 잘못을 범하여 훌륭하신 군자의 덕이 훼손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이와 같은 두려움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한 마디 말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질박하게 적을 뿐이다.숭정(崇禎) 정축(丁丑) 후 85년 임인년(1722) 늦봄 상현(上弦)에 외현손 통덕랑(通德郎) 전 행광릉참봉(行光陵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公姓羅氏, 諱士忱, 字仲孚, 自號錦湖, 世爲羅州人, 家州城. 始祖曰富 高麗監門衛上將軍. 其後系牒所載曰得虬, 曰仲允, 曰松奇, 三世俱令同正. 曰守永 進士, 曰源 司醞署直長同正, 曰璡 工曹典書. 洪武二十三年以前, 判事監榮山漕倉築城, 事有陽村權近所記. 曰公彦, 典農寺正. 洪武十四年以前, 少尹從都巡問使李乙珍, 有克倭功, 事在麗史. 曰諿 式目都監錄事, 曰自康 務安縣監, 曰繼祖 將仕郞, 曰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嘗與一州賢豪十一人, 倣蘭亭故事, 修錦江稧, 風流雅致, 傳爲湖中美談. 曰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爲公皇考. 妣眈津崔氏, 弘文館副應敎 贈禮曺參判. 錦南先生曰 : "溥爲外翁, 以文學氣節名世, 被燕山戊午史禍." 嘉靖乙酉二月二十八日, 公生. 稟質異凡兒, 孝愛出天. 年甫十六, 崔夫人病篤, 血指和藥卽愈, 事聞中廟, 命旌閭復戶. 長而從履素齋李仲虎, 遊與鄭南峰芝行 柳汎愛祖訒同學, 相推許. 明廟朝, 擧乙卯榜生員試. 宣廟元年戊辰, 西郊宋相贊按湖南, 薦一道遺逸之士五人, 以公爲首, 稱學行俱備, 其四人, 金應期 金千鎰 劉好仁 金胤也. 上敎有曰 : "羅士忱等, 行實甚嘉, 令該曺議大臣, 襃獎之." 天官遂與大臣議, 或旌閭復戶, 或給食物, 俾勉卒學業, 以公㫌復已在先朝, 故特擢除慶基殿參奉. 其明年, 伯氏士愃寺正公, 卒于京, 公蒼黃奔哭, 扶櫬南歸坐. 是課殿, 姨兄眉巖柳副學希春歎曰 : "羅仲孚遠來, 護兄喪以歸其遞職, 實有光." 洪尙書曇, 亦亟稱之. 辛未, 除宣陵參奉, 後五年, 復換慶基殿, 轉義禁府都事, 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出爲尼山縣監, 治尙淸簡, 邑有勢家田民訟, 公片言折之. 忤方伯考下, 其民樹石刻詩, 以追思之, 其詩曰 : "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 云. 己丑, 鄭汝立逆獄起, 委官鄭澈乘機, 羅織禍多, 波及凡平日所不與者, 無不驅之一網. 同福人丁巖壽等, 承其風旨, 投誣疏搆陷諸名流三十餘人, 如李相山海 鄭相彦信 西厓柳相成龍 困齋鄭徵君介淸, 皆入其中. 且擧公父子爲言曰 : "羅某以其子等交汝立素密, 知禍及己, 譸張其說, 欲爲伸救." 其他做語危險, 罔有紀極. 公之子德顯 德憲等, 不勝憤惋, 入其會中, 大言峻斥之. 巖壽等疏旣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敢肆搆陷之計, 捏造無形之語, 陰陳詐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凶慘之狀, 極爲駭愕. 此必聽奸人指嗾的然無疑." 命禁府, 拿鞫巖壽以下十人. 澈懼甚, 嗾臺閣爭之, 太學生迭爲之投童, 乃還寢成命. 其疏中事, 亦不問也. 時務安儒生裵蓂等, 亦上疏訟困齋及公寃狀甚悉, 而主獄者又因洪千璟等媒孽, 竟以謀沮巖壽疏捏爲罪目, 公及五子竝被逮. 上有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名. 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公卽宥, 出五子, 俱流竄. 德明鏡城, 德峻富寧, 德潤會寧, 德顯 德憲徒配鐵原, 癸巳赦之. 丙申十二月二十三日卒, 壽七十二. 公性度眞醇, 德行純篤, 孝悌至誠, 可通神明. 居喪, 一遵禮制, 前後廬墓, 足不到家. 祀享, 必致虔慤, 追遠報本, 靡不盡心. 至於外曾祖進士崔公諱澤墓在務安, 旣血孫絶, 世守護無人, 公爲之拜掃定墓, 直禁樵牧, 聞者感之. 嘗欲與兄弟同居有志, 未就, 兄弟皆盡公居常爲恨, 及見諸子能繼志, 盡進同堂異室之制, 深加嘉勉, 申以無忝爾所生之敎. 門有係倫紀大訟, 久未決, 及金鶴峯誠一爲州牧, 卽斷之, 謂公諸子就訟者曰 : "世之爭訟, 多以利, 而此所爭, 乃天理也." 且稱公以學問爲業者云. 公値明廟諱辰, 輒爲素食, 至六十餘, 不以衰病或怠, 蓋當明廟朝, 厚沐菁莪之化, 陞國子故也. 公雖老伏田園, 未嘗忘戀闕之心, 玉峰白光勳贈公以 "悠然高枕處, 雲闕夢蒼茫"之句, 此正寫出公心境也. 平居鄕里, 信義有終, 賙窮恤乏, 務極悃款, 惻隱之心, 亦及微物. 嘗見廚饌, 小魚卵滿腹, 命放盆中活魚, 將待食者, 雖一瑣節, 其仁愛所推可知也. 在尼山, 捕一偸兒, 諭以義理而釋之, 其人遂感動懲創. 設縣前旅店, 應接行路, 以效其勤身自新, 德化及人, 又如此. 公之至行, 在柳西坰根新編續三綱行實以事, 在光海世, 爾瞻姓名, 亦嘗混孝子中, 故其書不傳, 譚者或以爲憾. 公葬務安住龍渡乾坐巽向之原, 從治命也. 以子德潤 德愼 德憲, 俱參從勳, 故初贈吏曹參判, 累加至議政府左贊成. 配坡平尹氏, 府使彦商女. 生四子, 別葬本州長興洞. 繼配光州鄭氏, 僉使虎女, 生三男二女, 葬祔公. 竝追封貞敬夫人. 子德明己卯進士, 義禁府都事. 德峻薦才行, 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戊子進士, 司憲府監察. 德顯以孝, 贈司饔院參奉, 妻鄭氏節行旌閭. 德愼辛卯武科, 靈巖郡守. 德憲癸卯武科, 京畿水使 贈兵曺參判. 女長適忠義衛尹沆, 節行旌閭. 次適贈參議魏弘宙. 都事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縣監五子, 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同中樞 贈左參贊. 緻素 經素. 二女長適主簿金磼, 節行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監察三子, 繪素武科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朝正郞. 沆子曰禹湯. 參奉六子,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 以孝旌閭. 尙素 純素 重素. 一女適鄭渙郡守, 二女適閔喜一 柳遷. 魏弘宙三子, 山寶武科縣令. 廷寶武科縣監, 國寶. 二女, 適主簿鄭敬一 將仕郞崔渙. 水使三子, 守素宣務郞. 妻金氏節行旌閭. 泰素從仕郞. 貞素. 二女, 長適金用健, 次進士李儁臣. 自餘內外雲仍多至千百, 不可勝錄. 嗚呼! 禮曰 : "生事愛敬, 死事哀慽, 生民之本, 盡矣. 孝子之事親, 終矣." , 又曰 : "爲人子者,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 子夏曰 : "事親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竊觀公之於學, 不外日用彛倫之則, 以之修善行立善名. 若西郊之薦以學行, 鶴峰之稱以學問, 信有以也. 諸子趾美人稱六龍, 如德明謫中, 當壬辰亂與北評事鄭文孚, 謀起義兵捕斬邊民, 導倭煽亂者, 德愼從統制李舜臣, 殲賊露梁. 德憲從戰鞍峴, 蹙适賊, 又奉使瀋庭, 抗節不屈. 德峻 德潤, 俱行義知名. 德顯亂離中, 臨危急抱母悲號, 感倭賊, 獲免. 得素居喪, 致毁歿, 女若孫女, 婦若孫婦, 殉節. 又四人子孫, 兩世忠孝烈騈出, 爲世所榮, 莫非公成敎於家而有以致之也. 詩云; "孝思不匱, 永錫爾類." 此之謂矣. 位不滿德, 中遭橫逆, 命也時也, 於公, 何損焉. 顧公之歿, 今爲一百二十有七年, 有玄孫斗冬, 懼世代益遠, 先蹟浸至無徵, 收拾家中遺事 族牒 墓文, 凡見聞所追, 及欲具成一通文字以傳後, 以重元在外裔之列, 屬以刪定玆, 敢因其草本, 略施檃括槪, 公始終事實, 如右固知不足以揄揚德美. 然仰覵先哲王兩朝三褒之旨, 可證公行義不遠在玆百世之下, 宜亦有所感發於孝理之化秉彛之天矣. 昔陶淵明爲外王父孟長史傳, 有曰 : "按採行事, 懼或垂謬, 有虧大雅君子之德." 重元亦不能無懼於斯也, 不敢侈一辭書之以質而已. 崇禎丁丑後八十五載壬寅季春上弦, 外玄孫通德郞 前行光陵參奉 八溪 鄭重元 謹述.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이고, 호가 양촌(陽村)이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저서에는 《입학도설》,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다. 난정(蘭亭)의 고사 중국 회계 산음(山陰)에 있던 난정(蘭亭)에서 동진(東晉) 때 회계 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하여 손작(孫綽)ㆍ사안(謝安) 등 당시의 명사 42인이 그곳에 모여 계제사(禊祭祀)를 행한 뒤에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던 고사가 있다. 《蘭亭考 卷1》 정언신(鄭彦信) 1527~1591. 자는 입부(立夫)이고, 호는 나암(懶庵)이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징군(徵君) 징사(徵士)와 같은 말로 학문과 덕행이 있어 나라의 초빙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은 선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며, 관향은 수원이다. 해남에서 살았다. 시조와 글씨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일직이 원접사(遠接使),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벼슬은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자는 득여(得輿)이고,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하였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산 사람 …… 끝난다 《예기》에는 "生事愛敬, 死事哀慽, 生民之本盡矣, 死生之義備矣, 孝子之事親終矣."라고 하여 몇 글자가 더 있다. 사람의 …… 안 된다 《예기》 〈내칙(內則)〉에 보인다. 부모 …… 것이다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이괄(李适) 1587~1624.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규(白圭)이다.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으나,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이전(李栴),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서울에서 군대가 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대패하고 피신하던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효자가 …… 주리라 《시경》 〈기취(旣醉)〉에 보인다. 맹장사를 …… 지어 맹장사전(孟長史傳)〉은 도잠(陶潛)의 외조부인 맹가(孟嘉)의 전(傳)인데, 도잠은 401년에 모친 맹씨(孟氏)의 상중에 이를 지었다. 《도연명전집(陶淵明全集)》 권6에 〈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晉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는다.】 墓碣銘 【竝序】 나는 어려서부터 관직에 있는 분들과 종유하면서 호남의 나 씨(羅氏) 가문이 찬란하게 대대로 덕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노인이 되어 선비 나두하(羅斗夏)를 만났는데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돌아가신 큰형님 비문을 부탁하였기에, 내가 사모하던 마음을 표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 그 적임자가 아님에도 사양하지 못하고 애써 일을 마쳤다. 지금 또다시 그 고조와 증조 2대의 묘문을 부탁받으니 돌아보건대 나는 더욱 늙고 병들어 실로 내 힘으로 다시 나두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어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그러나 남쪽을 향하여 길 떠난 사람이 영(郢) 땅52)에 이르지도 못하고 돌아와서 "나는 이미 초(楚)나라를 다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에 마침내 억지로 일어나 마른 몸에 기운을 불어 넣어 글을 짓는다.나생의 고조부는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나사침(羅士沈)으로, 자는 중부(仲孚)이다. 그 시조는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나부(羅富)이다. 그 후손으로는 공조 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과 전농시(典農寺) 정(正) 나공언(羅公彦)이 가장 현달하였다. 나자강(羅自康)은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내고 장사랑(將仕郎) 나계조(羅繼祖)를 낳았으며, 장사랑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나일손(羅逸孫)을 낳았으며, 승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나질(羅晊)을 낳았으니, 이 분이 찬성공의 4대조이다. 어머니 최 씨(崔氏)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금남(錦南) 선생 최부(崔溥)의 따님이다. 금남 선생은 박학하고 장엄한 절의가 있어 성종 때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찬성공은 가정(嘉靖) 을유년(1525) 12월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지녀 16세에 최 부인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약에 타서 올리니 곧바로 병이 나았다. 중종께서 정려를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 명하셨다. 장성하여 이소재(屬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동문인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등 모두 서로 추대하며 인정해 주었다.명종 을묘년(1555) 국자생(國子生)이 되었고, 선조 원년 무진년(1568)에 관찰사 송찬(宋贊)이 공의 바른 행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겨 여름에 경기전 참봉(慶機殿參奉) 관직을 내리셨으나, 맏형의 상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선릉 참봉(宣陸參奉)을 맡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을 지냈다.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자, 세력이 강한 자를 억제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치를 펼치다가 방백에게 미움을 받아 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53) 그러나 고을의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여 비를 세웠으니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기축년(1589) 겨울에 역신(逆臣)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발생하자 위관 정철이 기회를 타서 죄상을 꾸몄는데 호남인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상소를 작성하여 한 시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화를 덮어씌웠으니 재상 이산해(李山海), 재상 정언신(鄭彦信), 유성룡(柳成龍),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등 모두 30여 명이 모두 한 그물에 걸려들었고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며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사귐이 지극히 친밀합니다. 아무개는 그가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여러 차례 속임수를 펴서 풀어날 것을 구할 것이니 모두 죄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정암수의 소장을 심문하는 자리에 나가서 큰 소리로 변론하고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소장이 임금께 오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반역의 변란을 틈타 부정한 소장을 진언하여 어질고 이름 있는 재상들을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사한 놈이 있어 부추긴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인을 붙잡아 심문하게 하셨다.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부탁하여 소를 올려 요구하여 임금의 명이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혜안은 대단히 밝았기에 믿고 근심하지 않았다. 또 무안(務安)의 유생(儒生) 배명(裴箕) 등이 상소를 올려 곤재와 공의 원통한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하지만 끝내 이전 정암수의 소장을 저지한 것이 죄가 되어 경인년(선조 23, 1590)에 공과 다섯 아들이 모두 연루되었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길 "효자는 용서해주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인 자는 자세히 살펴라."라고 하셨다. 공은 곧 다행히 용서를 받았지만 다섯 아들은 벗어나지 못하여 북쪽으로 귀양 갔으니 참으로 위태로웠다.만력 병신년(선조 29, 1596) 12월 23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무안 주룡(住龍) 나루 손향(巽向)에 터를 잡아 장사를 지냈는데 그것은 유언을 따른 것이다. 세 아들은 모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거듭 추증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첫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으로 네 아들을 낳았으며, 묘는 나주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둘째 부인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사도첨사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낳았으며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아들 나덕명(羅德明)은 기묘년(1579)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고, 나덕준(羅德峰)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고, 나덕진(羅德進)은 어려서 요절하였고, 나덕윤(羅德潤)은 무자년(1588)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나덕현(羅德顯)은 효행으로 알려져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고, 나덕신(羅德愼)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나덕헌(羅德憲)은 무과에 급제하고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큰딸은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나덕명(羅德明)은 아들 넷을 두었다.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가 있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나성소(羅成素)가 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나덕준(羅德峰)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합격하여 동지 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또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사위는 주부(主簿)를 지낸 김잡(金據)과 최광헌(崔光憲)이 있다. 나덕윤(羅德潤)은 아들 셋을 두었다.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와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나덕현(羅德顯)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素)는 지극한 행실이 있어 삼년상에 죽을 마시고 피눈물을 흘리다 죽었고,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가 있었으며, 정환(鄭換)은 그 사위이다. 나덕신(羅德愼)은 딸 둘을 두었다. 민희일(閔喜一)과 유천(柳遷)이 사위이다. 나덕헌(羅德憲)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을 지냈고,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郎)을 지냈고,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으며, 진사 김용건(金用健)과 이준신(李備臣)은 그 사위이다. 윤항(尹抗)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우탕(禹湯)이다. 위홍주(魏私苗)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위정보(魏廷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懸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정경일(鄭敬一)과 최환(崔渙)은 그 사위이다. 내외 자손들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순박하며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이르렀으니 부모형제간에 남들이 나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상을 당하여 치룰 때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고 부모의 삼년상에 시묘살이를 할 때 전후로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며 제사를 모실 때 정성을 다하였고 남을 구휼해 줌에 어진 마음을 다하였다.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함에 이른 것이 있다. 예컨대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쳤으며, 사신으로서의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과 같은 것은 충(忠)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가 삼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들은 효(孝)이다. 예컨대 윤항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에게 시집간 덕준의 큰딸, 수소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 받은 것은 열(烈)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網)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효로 부모를 섬기고 孝於事親청렴으로 몸을 단속하며 廉以律身의로 궁핍한 자들에게 베푸니 義施于窮乏가르침이 자손들에게 행해졌도다 敎行于子孫아! 공은 독실한 행동이 있는 분이라 할 것이다.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서우(李端雨)가 쓰다. 不侫瑞雨自少從薦紳先生, 聞湖南之羅氏彬彬有世德. 老遌羅生斗夏, 托以其先考及亡伯之顯刻, 思有以效吾慕用者, 不以匪其任爲解, 而勉焉卒事. 今又以其高曾二世之墓文見屬, 顧瑞雨益老且病, 實無以自力重副生之所須, 遲回久之. 然南面而行者, 不至郢而却返曰 : "吾已盡楚之觀" 不可也. 遂強起噓枯而爲之叙曰; 羅生之高王考, 贈贊成公諱士忱, 字仲孚. 其始祖曰高麗 監門衛上將軍諱富. 其後, 工曹典書諱璡, 典農寺正諱公彦, 最顯. 有諱自康務安縣監, 縣監生將仕郞諱繼祖, 將仕生典涓司直長 贈左承旨諱逸孫. 承旨生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諱晊, 是爲贊成公之四世. 妣崔氏司諫院司諫 贈禮曹參判錦南先生諱溥之女. 錦南以博學壯節爲成宗名臣. 贊成公生於嘉靖乙酉二月二十八日. 自幼性至孝, 十六, 崔夫人病篤, 斷指和藥, 以進卽愈, 中宗命旌閭復戶. 長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如鄭南峯芝衍 柳汎愛祖訒, 皆相推許. 明宗乙卯補國子生, 宣祖元年戊辰, 道臣宋贊以公行誼聞于上, 上嘉之, 夏除慶基殿參奉, 遭伯氏喪棄歸, 後除宣陵參奉, 再除金吾郞, 由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拜尼山縣監, 爲治抑豪強恤小民, 忤方伯居殿, 邑民追思立石,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題. 己丑冬, 逆臣鄭汝立之獄起, 委官鄭澈, 乘機羅織, 湖人丁巖壽等, 承徹旨, 將投䟽嫁禍於一時名流, 如李相山海 鄭相彦信 柳相成龍 鄭困齋介淸, 凡三十餘人, 皆入一網, 而又擧公父子之名, 曰 : "某之子某, 與汝立交至密, 某恐其株累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子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巖壽䟽會, 大言辨斥. 及巖壽疏上, 上震怒曰 : "乘逆變陳邪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欲空國而後已, 此必有奸人嗾者." 命禁府拿鞫巖壽等十人, 澈恐, 囑臺啓太學疏救之, 寢其命. 然天鑑孔昭, 恃而無虞. 又有務安儒生裵蓂等疏, 訟困齋及公寃狀甚晢. 然竟以前沮巖壽等疏爲罪. 庚寅, 公與五子, 俱就繫. 上敎若曰 : "孝子原之, 誣引者審之." 公卽幸宥, 而五子不免投北, 吁其危矣. 萬曆丙申十二月二十三日, 以疾卒, 壽七十二. 葬于務安住龍渡向巽之原, 從治命也. 以三子俱有原從功累贈至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彦商之女. 擧四子, 墓在羅州長興洞. 繼配光州鄭氏蛇渡僉使虎之女, 擧三子, 葬祔公, 皆贈貞敬夫人子. 德明己卯進士, 義禁府都事. 德峻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戊子進士, 司憲府監察. 德顯以孝聞, 贈司饔院參奉. 德愼武科, 靈巖郡守. 德憲武科京畿水使. 女長適尹沆, 次適魏弘宙. 德明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德峻五子二女, 纘素宣務郞, 繼素武科价川郡守, 緯素文科同知中樞, 緻素 經素. 主簿金磼 崔光憲, 其婿也. 德潤三子, 繪素武科咸安郡守, 由素 宜素文科禮曹正郞. 德顯六子一女,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有至行. 居憂啜粥, 血泣而圽, 尙素 純素 重素. 鄭渙, 其婿也. 德愼二女, 閔喜一 柳遷, 其婿也. 德憲三子二女, 守素宣務郞, 泰素從仕郞, 貞素. 金用健進士 李㒞臣, 其婿也. 尹沆一子, 佑湯. 魏弘宙三子二女, 山寶武科縣令, 廷寶武科縣監, 國寶. 主簿鄭敬一 崔渙, 其婿也. 內外雲仍多, 不能盡記. 公禀性眞醇, 孝友天至, 父母昆弟之間, 人無間言. 居喪盡禮, 前後廬墓, 一不到家, 祀享虔謹, 賙恤惻怛. 有子皆賢, 人穪六龍, 庭訓所及, 世濟懿行. 如德愼, 從統制李舜臣殲賊于露梁, 德憲從諸將蹙适于鞍峴, 奉使虜庭, 抗節不屈, 忠矣. 如德顯之善養, 得素之毁死, 孝矣. 如公之女適尹沆者, 德顯妻鄭氏, 德峻女適金磼者, 守素妻金氏, 竝殉節旌閭, 烈矣. 一門而三綱備, 嗚呼! 世豈多有也哉. 銘曰 : "孝於事親, 廉以律身, 義施于窮乏, 敎行于子孫." 於虖! 公可謂篤行人也. 嘉善大夫 工曹參判 兼藝文館提學 李瑞雨 撰. 영(郢) 땅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수도였다. 낮은 …… 받았다 원문 '거전(居殿)'은 성적 고사에서 하등을 차지함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다.】 墓誌銘 【竝序】 중종 경자년(1540)에 호남 나 씨의 자제들이 어려서는 상(象)에 맞춰 춤을 추고54) 정려로 표창을 받았으며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았으니 곧 손가락을 잘라 피를 올려 어머니를 소생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성하여 더욱 명성이 높아져 선조 원년 무진(1568)에 포장되어 벼슬에 천거되었다.55)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이르러 또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가르침을 널리 알렸고, 시상(柴桑)56)에서 벗어나 산중턱 학과 메추라기 사이에서 날갯짓을 게을리 했다.아! 두 임금의 조정에서 세 번이나 포장을 받은 것이 경전(經典)에서 이른바 "하늘과 땅의 바른 도리."57)인데 모두 이 사람을 말하는 것 또한 어찌 유래한 바가 없겠는가. 대개 세상에서 나 씨에게 기대를 건 것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에게서 시작되었고,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과 전농시(典農寺) 정(正) 나공언(羅公彦)이 가장 현달했다고 전한다.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나집(羅諿)이 덕의 기초를 닦아 나자강(羅自康)은 무안현감을 지냈고,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을 지냈고,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4대가 박식하고 장엄한 절개가 있었다. 성종 때 이름난 신하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금남 선생(錦南先生) 최부(崔溥)가 외할아버지이고 또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가 스승이 되어 선조들의 영광을 품고 몸으로 먼저 올바름을 깨우치니 이후는 알 만하다. 그러므로 고을에서는 일찍부터 강남에 훌륭한 효자가 있다고 일컬었고, 동학들은 마치 마문(馬門)과 정현(鄭玄)58)처럼 추존했다고 한다.명종 을묘년(1555) 국자생(國子生)이 되었으나, 기사년(1569)에 큰형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천을 받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신미년(1571) 이후 선릉 참봉(宣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에 연이어 임명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어 부호들을 억누르다가 상관을 거슬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시를 새겼으니 마치 조청헌의 거북과 학59) 같은 말들이 담겼다. 이로부터 도서(圖書)와 송죽(松竹)을 즐기며 천기가 깊었으니 이른바 기축년(1589)의 화는 장계(狀啓)와 갈문(碣文)에 상세히 있다. 당시 옥사를 다스린 자가 화로를 갖추고서 모두 해치려고 했으나 공의 부자는 형장의 귀신을 면했으니 하늘의 해가 머리에 임한 듯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다섯 아들이 모두 유배가게 되어 머리 털 한 올 마냥 쓸쓸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병신년(1596) 12월 23일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그의 태어난 해가 을유년(1525) 2월 28일이니 향년 72세다. 무안의 주룡(住龍) 나루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세 아들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공이 있어 여러 차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공의 휘는 사침(士沈)이고, 자(字)는 중부(仲孚)이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고 장지는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나덕명(羅德明)은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고, 나덕준(羅德峻)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고, 나덕진(羅德進)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덕윤(羅德潤)은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나덕현(羅德顯)은 효행으로 명성이 있어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으며, 나덕신(羅德愼)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나덕헌(羅德憲)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큰딸은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나덕명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 나성소(羅成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나덕준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는데,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 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또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김잡(金磼)과 최광언(崔光憲)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윤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와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나덕현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所)는 피눈물을 흘리며 상례를 이기지 못하는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또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가 있다. 정환(鄭換)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신은 딸 둘을 두었는데, 민희일(聞喜一)과 유천(柳遷)은 그의 사위이다. 나덕헌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郎)을 지냈고,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다. 진사 김용건(金用健)과 이준신(李儁臣)은 그의 사위이다. 윤항(尹抗)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우탕(禹湯)이다. 위홍주(魏弘宙)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와 위정보(魏廷寶)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정경일(鄭敬一)과 최환(崔渙)은 그의 사위이다. 내외의 후손이 천백 명에 이른다.이시랑(李侍郞) 서우(端雨)는 묘갈명에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함에 이른 것이 있다. 예컨대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쳤으며, 사신으로서의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과 같은 것은 충(忠)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가 삼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들은 효(孝)이다. 예컨대 윤항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에게 시집간 덕준의 큰딸, 수소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 받은 것은 열(烈)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網)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내가 이로 인하여 삼가 공의 행적을 대략 개관해 보건대, 공은 다리 살을 베어 부모님께 올리고 눈물로 무덤 가 송백나무 마르게 했으니 효의 근본이다. 부모와 형제들과 사이가 벌어진 것 없이 힘껏 인륜을 앞다투어 실행했으니 효의 가지이다. 자기를 단속하고 벼슬을 경계하며 다른 사람을 마땅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했으니 효의 잎이다. 마땅히 찬란하고 아름다워 만세토록 한 가문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제 이 글로 묘비명을 삼는다.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신묘함은 至仁至神오직 그대와 오직 하늘 뿐 惟君惟天하늘이 포상하사 명성 알려지고 褒而誼芬하늘이 도우사 경사가 영원하리니 祐而慶綿군자의 무덤이라 하노라 曰君子之阡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민창도(閔昌道)60)가 쓰다. 中宗庚子, 湖南有羅氏子裁舞象膺旌棹蠲符, 則血指甦天只故之以長而愈騫登, 宣廟元年戊辰, 薦剡牽絲於獎, 至己丑逆獄, 乃又渙發求忠孝門之諭, 脫柴桑倦翮於半山鶴鶉中. 噫! 致兩朝三褒者, 經所謂天經地義, 皆是物也, 亦豈無所自乎! 蓋世之望於羅也, 始乎監門衛上將軍富, 工曹典書璡, 典農寺正公彦, 最顯傳. 式目都監錄事諱諿, 基于德, 則以諱自康務安縣監, 諱繼祖將仕郞, 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爲四世以博學壯節. 成宗朝, 名臣司諫院司諫 贈禮曺參判錦南先生崔公諱溥爲外翁, 又以履素齋李仲虎爲師, 其胚前光, 而體先覺韙, 而後可知也. 故鄕黨早有江巨孝稱, 同學推挹如馬門鄭玄云. 明宗乙卯, 補國子生, 己巳遭伯氏喪棄若云, 薦拜慶基殿參奉歸. 辛未以後, 除命相續以宣陵參奉, 義禁府都事, 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監尼山縣坐, 抑溫戶强工, 奮髥而歸, 邑人刻碑詩, 如趙淸獻龜鶴語. 自是婆婆圖書松竹, 天機也深, 所謂己丑之禍, 則詳在狀若碣文中. 時治獄者, 烘爐叢忮, 公父子之免桁楊之鬼, 則天日之臨頭也, 五子皆流竄, 凜凜一髮, 吁其危矣. 丙申十二月二十三日, 以疾卒, 距其生乙酉二月二十八日, 得年七十二. 葬于務安住龍渡, 向巽之原, 以三子俱有原從功, 屢贈至左贊成. 公諱士忱, 字仲孚. 前配坡平尹氏, 府使彦啇之女, 擧四子, 葬在長興洞. 繼配光州鄭氏, 僉使虎之女, 擧三子二女, 葬祔公, 皆贈貞敬夫人子. 德明進士義禁府都事. 德峻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進士司憲府監察. 德顯以孝聞, 贈司饔院參奉. 德愼武科靈巖郡守. 德憲武科京畿水使. 女長適尹沆, 次適魏弘宙. 德明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德峻五子二女, 纘素宣務郞, 繼素武科价川郡守, 緯素文科同知中樞, 緻素 經素. 主簿金磼 崔光憲, 其婿也. 德潤三子, 繪素武科咸安郡守. 由素 宜素文科禮曺正郞. 德顯六子一女,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 有至行泣血不勝喪. 尙素 純素 重素. 鄭渙, 其婿也. 德愼二女, 閔喜一 柳遷, 其婿也. 德憲三子二女, 守素宣務郞, 泰素從仕郞, 貞素. 金用健 進士, 李儁臣, 其婿也. 尹沆一子, 佑湯. 魏弘宙三子二女, 山寶 廷寶, 皆武科縣監, 國寶. 主簿鄭敬一 崔渙, 其婿也. 內外雲仍多, 至千百. 李侍郞瑞雨之墓碣曰 : "公有子皆賢人, 稱六龍. 庭訓所及, 世濟懿行. 如德愼, 從李統制舜臣, 殲賊于露梁. 德憲從諸將, 蹙适于鞍峴, 奉仕虜庭, 抗節不屈, 忠矣. 如德顯之善養, 得素之毁死, 孝矣. 如公之女適尹沆者, 德顯妻鄭氏, 德峻女適金磼者, 守素妻金氏, 竝殉節旌閭, 烈矣. 一門而三綱備, 嗚呼! 世豈多有也." 不侫因是竊槪, 公雷股和糜, 玉淚枯栢, 孝之本也. 無間昆弟, 力爭倫紀, 孝之枝也. 律己箴官, 誼物孚人, 孝之葉也. 宜乎振振彬彬, 爲一門萬世棟樑哉. 是可以賁諸幽銘曰 : "至仁至神, 惟君惟天, 褒而誼芬, 祐而慶綿, 曰君子之阡."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 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閔昌道 撰. 어려서는 …… 추고 원문 '무상(舞象)'은 《예기》 〈내칙(內則)〉에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작무(勺舞)를 배운다. 15세 이상이 되면 상무(象舞)를 배우고 활쏘기 및 말 다루는 법을 배운다. 20세가 되면 관례(冠禮)를 행하고 비로소 예(禮)를 배운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 成童舞象, 學射御, 二十而冠, 始學禮.〕"라는 말이 나온다. 천거되었다 원문 '천섬(薦剡)'은 추천(推薦)이나 천거와 같은 말이다. 중국 섬계(剡溪) 지방에서 생산된 종이에 추천을 쓴 데에서 유래된 말로, 인재를 천거하는 공문서(公文書)를 말한다. 시상(柴桑) 진(晉)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와서 시상에서 은거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하늘과 …… 도리 천지간의 당연한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 조에 "대저 예라는 것은 하늘의 떳떳한 도이고, 땅의 후한 덕이며, 사람이 행하는 길이다.〔夫禮,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는 말이 나온다. 마문(馬門)과 정현(鄭玄) 마문(馬門)은 마융(馬融)을 지칭한다. 정현(鄭玄)은 후한(後漢)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둘 모두 경(經)을 주석하여 이름을 날렸다. 《南史 王僧虔列傳》 조청헌(趙淸獻)의 거북과 학 조청헌은 송(宋)나라 인종(仁宗), 신종(神宗) 때의 조변(趙抃)을 말한다.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조변이 성도지부(成都知府)를 여러 번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그가 성도로 부임할 때, 거북 한 마리, 학 한 마리를 가지고 갔고, 재임(再任) 때는 그 거북과 학마저 버리고 다만 종 하나뿐이었다. 민창도(閔昌道) 1654~1725.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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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언사운에 차운하여 又次五言四韻 그대 아들 손잡고 오니 君來携一子나까지 홀연 셋이 되었네 得我忽成三쑥이 삼속에서 자라면 곧아지고 蓬入麻中直부평초도 사슴이 먹으면 달아지는 법 萍因鹿食甘어찌 내가 감히 인을 돕고 輔仁吾豈敢그대에게 부끄럼 없이 충고하겠나 忠告子無慙마주하여 흰 머리 상심하니 相對傷頭白타향의 혼이 아름다운 연못을 휘감아 도네 羈魂繞錦潭세상살이 오랫동안 골몰하여 紅塵長汨沒자연의 차가운 맹세 저버렸네 泉石負寒盟늙어 머리는 점점 희어가고 老去頭將白수심에 꿈조차 이루기 어렵네 愁來夢不成들판에 가을 기운 움직이니 郊原秋氣動강한의 객은 마음 놀라네 江漢客心驚어느 날 형제를 데리고 何日携兄弟어머니 모시고 살아갈까 萱堂侍此生 君來携一子, 得我忽成三.蓬入麻中直, 萍因鹿食甘.輔仁吾豈敢, 忠告子無慙.相對傷頭白, 羈魂繞錦潭.紅塵長汨沒, 泉石負寒盟.老去頭將白, 愁來夢不成.郊原秋氣動, 江漢客心驚.何日携兄弟, 萱堂侍此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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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율시 七言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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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정32) 곡의 〈봉천전33)에 아침 조회를 하다〉 시에 차운하다 次李稼亭穀早朝奉天殿韻 봄 그늘 아스라이 발을 뚫고 들어와 쌀쌀하니금압의 여향이 박산에 있구나34)전각에 구름 걷혀 어좌가 열리고대궐에서 바람에 이끌려 선관에 올랐네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 기회 함께 만났으니35)하루에 용안을 세 번 뵈었어라36)조회하고 물러나 돌아올 제 꽃 밑에서 헤어지니37)성에 가득하던 패옥 소리 점차 사라지누나 春陰薄薄透簾寒金鴨餘香在博山鳳殿雲移開寶座龍墀風引步仙官淸河共際千年會晝日三承咫尺顏朝退歸來花底散滿城環佩響闌珊 이가정 이곡(李穀, 1298~1351)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초명은 운백(芸白),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봉천전 현재의 북경(北京) 자금성(紫禁城)의 태화전(太和殿)으로, 명나라 초기에 이름을 봉천전(奉天殿)이라 하고 이곳에서 황제가 조회를 받았다. 금압의……있구나 향로에 향이 남아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금압(金鴨)과 박산(博山)은 모두 향로 이름으로, 오리처럼 생긴 향로 또는 화로를 '금압로(金鴨爐)'라고 하며, 전설 속 박산의 모습을 본떠 만든 향로를 '박산로(博山爐)'라고 한다. 황하가……만났으니 태평 시대를 만났다는 뜻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출현한다.[夫黃河淸而聖人生.]"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데, 맑아지면 성인이 이때에 나온다고 세상에서 전한다.[黃河千年一淸, 淸則聖人生於時也.]"라고 하였다. 《六臣註文選 卷53》 하루에……뵈었어라 임금의 깊은 은총과 예우를 받았다는 뜻이다. 《주역》 〈진괘(晉卦)〉에 "진괘는 강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낮에 세 번씩 접견하는 상이다.[晉, 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라고 하였다. 퇴궐하여……헤어지니 당나라 두보(杜甫)의 〈저녁에 좌액에서 나오다[晩出左掖]〉 시에 "조회하고 물러나올 제 꽃 밑에서 헤어지고, 관청으로 갈 때 버드나무 가에서 정신이 어질하다. [退朝花底散, 歸院柳邊迷.]"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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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길의 원운을 부기하다 附柳寅吉韻 보내주신 아름다운 시는 한 글자도 천 번이나 단련하여 진실로 고아하고 아름다우니, 오랫동안 음미함에 마치 누런 고기 하얀 지방처럼 씹을수록 더욱 맛이 나서, 저도 모르게 항복의 깃발을 스스로 세웠습니다. 겨우 한 수를 차운하니, 크게 웃을 만합니다.황폐한 터에 옛 누대를 일으킨 이 누구인가관부에서 경영하여 작은 누각 열었네헌함엔 멀고 가까운 푸른 산이 들어오고거문고와 술잔엔 배회하는 밝은 달 머물러 있네이내 낀 강 씻어내리는 비는 하늘에 비낀 비단 같고소나무 골짝에 울리는 바람 소리 땅 속 우레 소리 같아라작은 누각 얽어 만상을 포용하니시우(詩友)와 활쏘는 객이 갔다가 도로 오네 惠來瓊韻, 一字千鍊, 信矼雅麗, 含咀之久, 如膚黃肪白, 愈嚼而愈出, 不覺降幡自竪。堇次一韻, 堪可捧腹。荒墟誰起舊亭臺明府經營小閣開軒檻納靑山遠近琴樽留白月徘徊烟江雨洗橫天練松壑風鳴隱地雷架得數椽籠萬象詩朋射客去還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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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 객관 벽에 걸린 시에 차운하다 次吉州客館壁上韻 고향 소식 어이하면 들을 수 있을거나세월 빨리도 흘러가 백발 노인에 가까워지누나가을비 쓸쓸한데 사람은 난간에 기대 있고새별 별 지려는데 기러기 하늘에 비껴 나네높고 현달한 관작 참으로 꿈과 같으니한가로이 누워 잠들어 신선이 되리라늙어감에 까마득히 태평한 운 돌아올 날 없으니책 속에서 부질없이 한나라 현인을 마주하노라 故鄕音耗嗣何緣羲馭駸駸近白顚秋雨蕭騷人倚檻曉星搖落鴈橫天尊官顯秩眞成夢高臥閒眠當作仙老去渺無回泰日卷中空對漢時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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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행적집록 行蹟輯錄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무진년(1568) 6월 20, 도목정(都目政) 나사침(羅士沈)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되었다.""8월 1일, 나사침을 불러 함께 외조부 금남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당시 공은 사은숙배(謝恩肅拜)61)를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기사년(1569) 6월에 나중부(羅仲孚)가 관직을 버리고 멀리 와서 형의 상을 지내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으니 훌륭한 행동이다. 【같은 해 6월 7일에 맏형 시정(寺正) 나사선(羅士愃)이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경기전 부임지에서 15일에 부고를 듣고 다음날 곧바로 출발하여 곡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 참봉(參奉) 최감사(最監司)가 주관했는데 관직을 버리고 멀리 떠나면 근무평가 점수가 낮기 때문에 이처럼 관직을 그만둠이 훌륭하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7월, 나사침이 27일에 보낸 편지를 길 가던 중에 보았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길목마다 각 관아에서 군인과 수레와 소를 성대하게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내어주고 노자를 도와준 곳도 있었으니 이는 모두 형님께서 편지를 써준 덕분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낱낱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처음 출발하던 날 광주(廣州)에서는 군인과 소를 또 성대하게 내어주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출발한 날에 용인의 행원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각 관아에서 감사가 노자를 소략하게나마 주어 상하 노비의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은진(恩津)62) 현감은 특별히 모두를 대접하고 또 노자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같은 달 21일에 공은 시정공을 모시고 상갓집을 가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러 편지를 썼다.】""경오년(1570) 5월 15일, 나사침의 편지를 보았는데 지난 4월 26일 무안(務安) 석진리(石津里)에 있는 외증조 최진사(崔進士)의 묘를 찾아 가서 묘지기를 정하고 풀을 베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으며 묘의 모습은 예전과 같고 무덤 앞 땅도 완전했으며 석물들도 옛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여 감개가 무량했다고 하였다. 【최진사의 휘는 택(澤)이고, 부인은 여양 진씨(驪陽陳氏)로, 태평관직(太平館直) 최용지(崔用之)의 따님이니, 곧 금남(錦南)의 어머니이다. 묘소는 석진리 어을곳(於乙串)에 있다. 미암이 일찍이 공에게 가서 성묘를 요청하니 이에 산지기를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했고 또 본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으므로 공이 요청을 따른 뒤에 이처럼 답장을 한 것이다.】 ""9월 12일, 호조판서(戶曹判書) 홍담(洪曇) 태허공(太虛空)이 지나가다 들러 조용히 말해주기를 '나사침이 형의 죽음을 듣고 급히 달려갔다가 최하의 평점을 받았습니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63)고 했는데 내년 6월이면 부임한 지 2년이 되어갑니다. 영공께서 만일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시면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홍공은 '매우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였다.""신미년(1571) 6월 5일, 중부가 나의 선조 제사를 위하여 담은 술 두 병을 보내와 냉수에 담가 두었다. 【미암이 본도의 감사로서 순행하다 나주에 도착했는데 6월 6일이 곧 부모님의 기제(忌祭)이므로 공관에서 지방을 써서 제사를 올리고자 했으니 공이 제사에 쓸 술을 걸러 보내온 것이다.】""8월 19일, 나사침이 선릉 참봉(宣陵參奉)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을 받았기에 매우 기뻐 급히 편지를 보내 축하하였다. 【곧 20일 곡성을 순행할 때의 일이다.】""갑술년(1574) 4월, 나사침이 정(正) 나중묵(羅仲默) 형의 아들 나몽남(羅夢男)이 3월 26일 상한(傷寒)64)으로 죽었다고 알려왔다. 이 사람은 바로 병사(兵使) 임진(林晉)의 사위이다. 깜짝 놀라고 슬프다. 【몽남은 바로 나덕순(羅德純)의 어릴 때 이름이다. 재작년에 겨우 혼례를 치렀는데 올해 16살로 요절한 것이다. 공이 초상을 치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매일같이 소찬을 먹었기에 미암이 공을 맞이하여 간곡히 육식을 권하며 말려놓은 꿩 한 마리를 보냈다.】""5월 6일, 나사침을 맞이하여 잘 정미한 쌀을 주고 매화시(梅花詩)를 주었다. 【이는 퇴계의 작품이다.】""7일, 황해감사(黃海監司) 민기문(閔起文)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나사침에게 보냈으니 답서를 보내왔는데 '이는 평소 경모하고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보배처럼 진주처럼 아끼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서 씨가 아들을 잃은 후 나사침에게 편지를 보내 나덕윤을 양자로 삼기를 청하였지만, 나사침은 그럴 수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가 의를 안다고 칭찬하였다. 【서 씨는 나정(羅正)의 둘째 부인이자 나몽남의 어머니이다. 6월 그믐과 7월 20일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양자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 서 씨가 부인 임 씨와 더불어 간사한 꾀를 내고서는 몰래 고을 서문 밖에 살고 있는 사노비 김서비(金西非)의 아들을 유복자라고 속이고 윤달 12월 22일 해산했다고 하였다.】""병자년(1576) 4월 20일, 나사침을 다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삼았다.""김학봉(金鶴峰)이 임 씨와 나 씨의 송사 결미의 문건에 '임 씨가 나사침을 불러 말했지만, 그의 자식을 양자로 들이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말을 지어냈다. 당초 서 씨가 나사침에게 양자를 들일 수 있도록 요구했지만, 나사침이 허락하지 않자, 서 씨는 억지로 그 일을 하고자 하여 언문으로 무식한 부인이 무슨 법을 알겠나 하고 썼으니 서 씨의 간절한 요구와 나 씨의 견고한 사양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서 씨가 간곡하게 양자를 요구했으나 끝내 도리가 아닌 말을 더했으니, 나사침은 매우 흉험함에 빠진 것이다.' 【김학봉은 김성일(誠一)이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의성 사람이며, 거주지는 안동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에 생원에 급제하였다. 융경(陰慶) 무진년(1568) 문과에 급제하였고, 계미년(1583)에 사인(舍人)으로 특별히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직을 받았다. 병술년(1586)에 임 씨와 나 씨에 대한 송사를 판결을 내려 거짓자식에 관한 복잡한 사연을 밝혔다. 그해 겨울 파직되어 체임되었다. 계사년(1593)에 경상 우감사(慶尙右監司)로 진주(晉州)에서 죽었다. 훗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라고 하였다.""학봉이 송사를 판결한 이후 추고공함(推考公緘)65)에 '나 씨의 집안은 화목한 가문이라 온 고을사람들이 감복한다. 나사침이 정려를 표창 받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은 일 또한 온 나라 사람들도 아는 것이다. 일이 드러나기 전에는 서 씨가 매번 슬픈 말과 괴로운 말로써 나사침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나사침이라는 사람은 천리나 떨어진 부임지에서 답장을 쓰면서 우선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주려는 뜻을 지극하게 했으니 이는 인정상 매우 지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부제학 유희춘은 나 씨 가문과 사촌으로서 두 번이나 편지를 써서 선처해 줄 계획을 냈다. 부사(府使) 김천일(金千鎰)은 임 씨와 서 씨의 이웃으로서 그들의 간악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 의리상 은혜를 끊어야 한다고 권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모두 《추안(推案)》에 실려 있다. 유희춘의 글에는 6~7월에 양자를 구한 일들이 분명히 실려 있고 김천일의 공함(公緘)에도 김서비(金西非)가 아이를 요구한 일이 분명히 실려 있다. 오직 이 두 사람의 말로도 옥사를 판단하기에 충분한데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아녀자의 말을 믿으니, 나 씨 가문에 대한 편지 전후가 서로 어긋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다.""3월부터 7월까지 이전에는 조금도 사악한 뜻이 없었고, 단지 나사침에게 양자를 요구할 생각만 있었다. 7월 20일 편지에는 마음을 유복자에 두어 또한 어디에 의탁하여도 따질 수 없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뜻이 정성스럽고 비통하여 양자를 구하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것이다. 나사침이 의로써 준엄하게 사양한 뒤라면 계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8월에 처음으로 거짓 임신하였다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6~7월에는 형태도 없던 임신이 갑자기 8월에 형태가 생기는 이치가 있겠는가. 그 거짓 임신한 곡절이 이러하다.""가령 나 씨 한 집안이 진실로 흉험하다 한들 반드시 남에게 혐의를 씌우고 자기에게 이익이 있은 뒤에 송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나 이들은 화목한 행실이 평소에 있고 재물로 다투는 일이 없다. 18세의 질부가 유복자가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무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기쁜 행실과 슬픈 감동의 마음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효행으로 정려를 표창 받고 학업으로 일을 삼는 자가 온 집안이 한 마디 말을 한다고 하여 반드시 죽은 조카의 후손을 끊으려고 했겠는가. 이런 일들은 법사(法司)가 이미 명확하게 살폈기에 다시 미루어 법으로 다스릴 것이 없는 데에도 굳이 여의사의 말을 믿고서 그렇게 했으니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정한강(鄭寒岡)이 쓴 〈학봉행장(鶴峰行狀)〉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계미년(1583)에 특별히 나주목사의 관직을 받았다. 고을에 임 씨와 나 씨가 있는데 모두 한 고을의 명문 집안이다. 나 씨가 임 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으나 자식 없이 죽었다. 임 씨가 몰래 다른 사람의 아이를 취하여 노비와 더불어 몰래 계획하여 유복자가 있어 자기가 낳았다고 하였다. 나 씨 집안에서 그것이 거짓임을 판별함과 동시에 그가 집안을 어지럽힌 것에 대하여 송사를 청하여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몇 년 동안 판결이 나지 않았다. 공이 한 번에 거짓임을 간파하고 그것이 거짓임을 밝혀 판결했기에, 공론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정한강은 정구(鄭逑)로, 자는 도가(道可)이고, 청주(淸州) 사람이며, 거주지는 성주(星州)이다. 한훤당(寒暄堂)의 외증손으로 도학은 대개 유래가 있었고, 퇴계(退溪) 선생과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여 더욱 학문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선조 초에 음덕으로 벼슬을 받아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 초에 특별히 대사헌(大司憲) 겸 보양관(輔養官)을 지냈다. 정사년(1617) 겨울에 〈학봉행장〉을 짓고 경신년(1620)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문목공(文穆公)의 시호를 받았다. 효종 때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무안의 유생 배명(裵蓂) 등이 상소한 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 이산 현감(尼山縣監) 나사침은 바로 중종 때 정려로 표창된 효자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에 특별히 참봉(參奉)의 관직을 내리고 승진시켜 이산 현감에 임명하셨는데, 그 고을에 많은 업적이 있으므로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를 세웠습니다. 임금과 어버이가 비록 같지 않다고 하지만, 충성과 효도가 본래 두 이치가 없습니다. 가정의 교훈이 미치는 곳에 반드시 그 근본이 있으니 그 한 집안사람이 비록 모두 충성스럽고 신의를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역적이 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전 도사(都事) 신(臣) 나덕명(羅德明)은 모두가 학문과 독실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서 상소 안에 들었으니 억울하고 또한 비참합니다. 대낮에 햇빛이 비쳐 충성심이 밝으니 진실로 신 등의 어리석은 말이 필요도 없이 잘 가려서 사실을 조사하여 주십시오.'66)""임금께서 '알았다.'라고 하셨다. 【기축년(1589) 12월에 정암수(丁巖壽)의 무고한 상소가 있었기에 배명 역시 상소를 올려 정곤재(鄭困齋)와 공의 원통함을 밝혔다.】 ""전해오는 기문(記聞)에 '나의 형님 취암(鷲巖) 【유성춘(柳成春)이다.】 은 예전 이조 좌랑(吏曹佐郎)을 지내다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손녀는 있지만 부모가 없었기에 내가 공의 형제들에게 사위를 택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공이 외5대조 최유중(崔有中)의 후손 최수경(崔秀景)이 괜찮다는 뜻을 편지로 보내왔는데 나이가 겨우 18세에 인물이 훤칠한 데다 배움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평소 공을 신뢰해 왔기에 마침내 그와 혼인시켰다.' 【최공의 실제 계파 외조(外祖)의 선조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 내력은 반드시 공의 고조인 무안 현감(務安縣監)이고, 공의 아내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선고(先考)이다.】 라고 하였다.""이산으로 부임하였을 때 도적질하는 사람 하나를 붙잡아 의리로 가르치고 놓아주었으니, 도적질을 했던 사람이 감동하여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을 앞에 객점을 설치하여 오가는 손님을 대접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땅이라며 애써 부지런히 일했으니, 사람들은 덕화가 남에게 미치는 것이 이와 같다며 칭찬하였다.""이산에 부임하였을 때 사위의 집과 종손의 집에서 모두 말을 보내와 요청하였기에 응하였다. 종가의 물품을 사위의 집보다 넉넉하게 주었으니 사람들은 종가를 중시 여기는 의리에 감복하였다고 한다.""이산현 앞길 옆에 처음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는데 임진년(1592) 병화에 손상을 입었기에 유민(遺民)들이 다시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 잊지 않는다는 뜻을 깃들이고 칠언 절구를 새겼다.시든 꽃 한 송이 외로운 학 한 마리 倭花一朶鶴一隻쓸쓸히 행리에 옛사람의 풍모 있네 行李蕭然古人風백성은 훌륭하신 당신 떠남을 안타까워 하니 齊民痛惜仁賢去소백에 대한 포장도 썩 넉넉한 건 아니리67) 召伯修褒亦不公이 시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공이 경인년(1590)에 붙잡혀 갈 때 다섯 아들까지 일시에 잡혀가 어려움이 많았기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로지 같은 고을의 효자 이유경(李有慶)만이 도움을 행하여 환난에서 서로 구제해주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듣는 자들은 그것을 바른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유경의 자는 효숙(孝叔)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일찍이 고을의 모산촌(茅山村)에 살면서 효로 이름이 났으니 곧 기묘(己卯)의 이름난 선비 생원 이해(李蟹)의 증손이다. 역시 경인년에 고을 사람들에게 무고로 체포되었으나 곧바로 방면되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두 번 사부(師傅)의 관직을 내렸지만 모두 나아가지는 않았다.】" 眉巖日記曰 戊辰六月二十日, 都目政羅士忱, 以慶基殿參奉首望受點.又曰 八月初一日, 邀羅士忱, 相與校正外祖錦南先生集. 【時公以肅謝入京】又曰 己巳六月, 羅仲孚棄官遠來, 護兄喪而得罷職, 亦有光矣. 【同年六月初七日, 伯兄寺正士愃公卒于京第. 公自慶基殿, 任所十五日聞訃, 翼日卽發奔哭之. 行舊例本, 前參奉殿最監司主之, 而以棄官遠去置下考, 故有此罷職有光之語.】又曰 七月, 見羅士忱二十七日中路書, 略曰 一路各官, 不特盛出軍人與車牛, 亦有饋餉, 而助行資處. 此皆尊兄主折簡之力, 感泣之意, 益難枚喩. 初出之日, 廣州軍與牛, 亦盛出, 故發京之日, 能到龍仁行院. 忠淸道各官, 則以監司行下略, 供饋上下奴主. 恩津宰則特盡餉一行, 又大助行資. 【同月二十一日, 公陪寺正公喪行, 自京離發到礪山, 有此書.】又曰 庚午五月十五日, 見羅士忱簡, 則去四月二十六日, 往尋務安石津里外曾祖崔進士墓, 定山直禁樵牧, 墓貌如昨, 階砌尙完, 石物依舊, 感愴不已. 【崔進士諱澤, 配驢陽陳氏, 太平館直諱用之之女, 卽錦南之考妣, 而墓在石津里於乙串. 眉巖嘗要公往省之, 仍使定山直守護, 且致書于本縣宰, 助成其事, 故公依示後裁答如右.】又曰 九月十二日, 戶曹判書洪曇太虛公過臨, 談話從容, 仍及羅士忱以奔兄之喪遭殿, 觀過知仁. 來年六月, 乃經二年令公, 若判銓曺, 幸可收拾, 則答以甚可矜念云又曰 辛未六月初五日, 仲孚爲我祭先釀酒送二甁來, 卽浸冷水中. 【眉巖以本道監司巡到羅州, 而六月初六日, 卽其親忌, 故欲以紙榜設祭于公廨, 公精釀祭酒, 以送之.】"又曰 八月十九日, 政羅士忱入宣陵參奉首望, 受點, 深喜卽馳書以賀. 【卽二十日巡到谷城時事也.】"又曰 甲戌四月, 羅士忱報羅正仲默兄之男夢男, 三月二十六日死於傷寒, 卽林兵使晉之婿. 驚悼驚悼. 【夢男, 卽德純之乳名. 再昨年, 纔成婚, 年今十六, 致夭. 公成服後, 尙累日行素. 眉巖邀致懇論勸肉▣, 送乾雉一首.】又曰 五月初六日, 邀羅士忱授粲, 贈以梅花詩. 【卽退溪所作也.】又曰 初七日, 以黃海監司閔起文所送家禮, 送于羅士忱, 答書略曰 此平日之所景慕而欲得者, 敢不寶藏而珍玩耶.又曰 徐氏哭子後, 致書于羅士忱, 請以德潤爲侍養, 士忱以不可之意回報. 希春獎其知義. 【徐氏, 卽羅正之後室, 而夢男之母也. 六月晦日及七月二十日, 兩度致書, 懇乞侍養, 而不許之. 後徐氏與其婦林氏, 幻出奸謀, 潛竊本州西門外居私婢金西非之子, 詐爲遺孕, 而謂以閏十二月二十二日解胎.】 云云.又曰 丙子四月二十日, 政羅士忱復換慶基殿參奉.金鶴峰林羅訟結尾文案曰 林氏招內羅士忱, 憤其子不爲侍養, 成此不測之言, 而當初徐氏求侍養于士忱, 士忱不許, 而徐氏則堅欲爲之其諺書內乃曰 無識婦人, 何以知法乎云云. 則徐之懇求, 羅之固辭, 於此, 可知. 初則徐氏懇求侍養, 而終以不道之言加之, 士忱極爲兇險. 【金鶴峰諱誠一, 字士純, 義城人, 居安東, 退溪門人. 嘉靖甲子生員. 隆慶戊辰文科. 癸未, 以舍人特拜羅州牧使. 丙戌, 決折林羅訟, 明卞僞子委折. 其年冬, 罷遞. 癸巳, 以慶尙右監司, 卒于晉州. 後贈 吏曹判書, 諡文忠公.】鶴峰決訟後, 推考公緘曰 羅門睦族, 一鄕之所取服, 士忱則至於旌閭復戶, 抑亦國人之所知也. 事跡未彰著之前, 則徐氏每以悲辭苦語, 抵書於士忱, 則爲士忱者, 千里仕宦, 其答書之際, 姑致慰解之意, 此人情之所必至者也.又曰 副提學柳希春, 羅門之四寸, 而兩度致書, 以示善處之策. 府使金千鎰, 林徐之比隣, 而明知奸狀, 勸其以義斷恩, 此等曲折備載推案云云.又曰 柳希春書中, 明言六七月求侍養之事, 金千鎰公緘中, 明言金西非覓兒之事, 惟此兩人之言, 足斷是獄, 不此之信, 而信妖婦之言, 謂羅門之書前後牴牾, 實所未解.又曰 自三月至七月, 前少無邪意, 只圖侍養於士忱. 七月二十日書乃曰 意謂有遺腹而亦無計較於何依托云. 則其志誠悲而求侍養之計, 益切矣. 及士忱以義峻辭之後, 則計無所出. 八月間, 始爲僞胎之狀, 寧有六七月未形之胎, 遽形於八月之理, 其爲僞胎曲折如此.又曰 設使羅家一門實爲兇險, 必有嫌於人, 有利於己然後乃可起訟, 而此則素有和睦之行, 而萬無爭財之事. 十八歲姪婦有遺腹之兒, 則雖大無道之人, 猶有喜行悲感之心, 何故以孝行旌閭, 以學問爲業者, 擧族一談必欲殄絶亡姪之後耶. 此等事狀法司旣已明察, 而不爲更加推卞, 必曰女醫之爲信, 實所未解.鄭寒岡所撰鶴峰行狀曰 癸未, 特授羅州牧使云云. 州有林氏 羅氏, 皆一邑巨族也. 羅娶於林, 無子而死, 林竊取他人家兒, 與婢陰謀詐爲遺孕而爲己出.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 累經推覈, 積年不決. 公一覰看破, 明其爲僞而斷之, 公論大快. 【鄭寒岡諱逑, 字道可, 淸州人, 居星州, 以寒暄堂外曾孫, 道學蓋有所自, 遊退溪 南冥之門, 益聞爲學之方. 宣祖初以遺逸被薦, 歷官內外. 光海初, 特拜大司憲 兼 輔養官. 丁巳冬, 撰鶴峰行狀. 庚申卒. 仁祖朝, 贈吏曹判書 諡文穆公. 孝宗朝, 加贈領議政.】務安儒生裵蓂等疏略曰 前縣監羅士忱, 乃中廟朝旌表孝子也. 殿下卽位之初, 特命爲參奉, 陞拜尼山縣監, 有茂績, 立淸德去思碑, 君親雖曰不同, 忠孝本無二致. 庭訓所及, 必有其本, 其一家之人, 雖不得皆爲忠信, 而必不欲爲逆賊之所與也. 其子前都事臣羅德明等, 皆以學行之人, 而授入疏內, 寃亦慘矣. 白日照臨, 丹心可明, 固不待臣等愚妄之說而不覈之也. 云云.答曰 知道. 【己丑十二月, 有丁巖壽搆誣疏, 故裵蓂亦陳疏仲卞鄭困齋及公之案狀.】傳來記聞曰 眉巖兄鷲巖 【成春】, 嘗爲吏曹佐郞, 早世. 有孫女無父母, 眉巖要公兄弟擇婿, 公乃以外五代祖崔公有中之後孫秀景, 合宜之意, 書以復之曰 年纔十八, 人物英明, 又有學氣. 云云. 眉巖素信公, 遂與之定婚. 【崔公實係外祖先而未詳. 其來歷必是公之高祖 務安縣監. 公配永川崔氏之考也.】又曰 尼山莅任時, 捕得一賊人, 諭以義理, 而釋之, 賊人感動而懲創之. 創設縣前旅店, 接應行客, 以爲勤苦自新之地, 人稱德化之及人如此云.又曰 尼山莅任時, 女婿家及宗孫家, 俱送馬求請而酬應. 宗家之物, 優於女婿家, 人服其重宗之義云.又曰 尼山縣前路傍, 初有去思碑, 爲壬辰兵禍所傷, 故遺民爲之更立石, 以寓不忘之義, 而奮刻七言絶句, "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 齊民痛惜仁賢去, 召伯修褒亦不公"之詩, 不傳焉.又曰 公之庚寅被拿也, 竝五胤一時發行, 事多艱辛, 而人皆畏禍, 無敢問者, 獨同鄕孝子李有慶, 以其所騎助行, 不負患難相救之義, 聞者韙之云. 【李有慶, 字孝叔, 慶州人. 嘗居州之茅山村, 以孝著聞, 卽己卯名流生員蟹之曾孫. 亦於庚寅爲鄕人所搆被逮尋宥. 後朝家聞其賢, 再除師傅, 皆不就.】 사은숙배(謝恩肅拜) 관료로 처음 임명된 자가 궁중에서 임금에게 국궁사배(鞠躬四拜)하여 은혜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은진(恩津)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을 말한다. 잘못한 …… 있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인다. 상한(傷寒) 추위로 인한 급성 열병을 말한다. 추고공함(推考公緘) 글로써 죄인을 심문하는 것 또는 그 내용을 말한다. 전 …… 주십시오 〈기축록(己丑錄)〉과 〈혼정편록(混定編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소백에 …… 아니리 거사비를 세웠지만 미진하다는 백성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원문 '소백(召伯)'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남국(南國)을 다스릴 때 선정을 펼치자 백성들이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생각하여 "무성한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머무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하였다. 《詩經 甘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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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여러 공들의 시편 諸公詩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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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구름을 보며 看雲 한 조각 뜬 구름 실처럼 가늘어푸른 하늘 만리에 천천히 떠가네잠깐 바람 일어나니 마치 교악(喬嶽)181)과 같고문득 안개 사라지니 마치 그린 눈썹과 같네본래 뭉치고 흩어지는 데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으니이를 통해 떨어지고 만나는 데에도 적당한 때 있음을 알겠네보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과 정신 상쾌해지니머리 돌려 숲속 창 바라봄에 달이 이미 기울었네 一片浮雲細若絲靑天萬里去遲遲須臾風起如喬嶽倐忽烟消似畫眉自是卷舒無定位從知離合有其時看來不覺心神爽回首林窓月已虧 교악(喬嶽) 태산(泰山)을 가리키는 말로, 높은 산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거(幽居). 사실체(四實體)186)를 본뜨다 幽居。效四實體。 5월의 남쪽 고을 보리가 익었으니물가에 가볍게 배 띄우자 저녁 바람 서늘하네안개 깊은 가는 버들 천 가닥 실처럼 연약하고비 지난 뒤 새로 돋은 죽순 만 개의 옥처럼 자랐네냇물 들어온 작은 연못엔 거울 그림자 머무르고풀 이어진 작은 길엔 봄빛이 넘쳐나네그윽한 꾀꼬리도 산속의 고요함 좋아하니띳집 향해 울며 대나무 평상에 다가오네 五月南州大麥黃渚浦輕泛晩風凉烟深細柳千絲弱雨過新筠萬璧長泉入小塘留鑑影草連微路剩春光幽鸎亦好山林靜啼向茅茨近竹牀 사실체(四實體) 근체 율시(近體律詩) 중에서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에 모두 경물의 모습을 그려낸 시체(詩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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