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횡론 田橫論 내가 살펴보건대, 전횡(田橫)8)이 2빈객과 500명의 사(士)를 데리고 섬으로 들어갔을 때 한(漢)나라가 왕후(王侯)로 예로 부른 것은 그가 혹 난을 일으킬까 우려해서였다. 이에 전횡이 역마를 타고 낙양(洛陽)에 이르렀는데 조정에 도착하기 30리 전에서 자살하였다. 그가 자살한 뒤 2빈객과 사(士) 500사람도 모두 자살하였다. 가령 502사람이 목숨을 버리면서 의리를 취하여 죽음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여러 전씨(田氏) 종족들은 이미 멸망했고 전횡도 세울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저 502사람은 무슨 바랄 것이 있어 그 의리를 이룰 수 있겠는가. 호인(胡寅)의 《독사 관견(讀史管見)》9)에 이른바 "어떤 것을 위하는 바가 없이 행하였으니 참된 의사(義士)이다."10)라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비록 그렇지만 나는 일찍이 그 중도를 잡아 논하여 "전횡의 죽음은 높다고 할 만하고, 사(士)의 죽음도 의롭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저 전횡은 제(齊)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건(建)11)의 객들이 부른 송백(松栢)의 노래는 천년 후에도 사람의 이목이 살펴보는 바로 매우 답답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데 더구나 전횡의 경우이겠는가?전횡의 현명함으로 502사람의 의리를 믿고서, 패공12)이 의리를 붙들어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던 날에 검을 차고 황하를 건너 자방(子房)·소하(蕭何)·조참(曹參)13)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관대한 장자14)의 대업을 도와 이루고, 함곡관을 점거하여 한 번 호령하며 송백(松栢)과 아사(餓死)의 치욕을 씻고, 연후에 서책(署冊)에 이름을 나열해 쓰며 금궤(金櫃)15)의 맹약을 하고, 제나라 한쪽 지방에서 왕 노릇하면서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16) 전씨의 조종(祖宗)으로서 백세토록 제사를 받아먹었다면,17) 사람들 가운데 누가 대장부라 하지 않았겠는가?이렇게 하지를 않고 사나운 조무래기들과 일을 함께 하다 끝내는 전복되고 말았다. 이는 왕릉의 어미18) 같은 일개 부녀자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인데 전횡은 하였단 말인가? 설사 전횡이 한(漢)나라를 미처 섬기지 못하여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온 제나라 70여 성이 한신(韓信)의 손에 한 번 깨져서 나라가 멸망하고 군주는 죽어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니, 전횡의 큰 원수로서 한(漢)나라 또한 진(秦)나라와 같은 것이다. 전횡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통곡하며 하늘에 부르짖고 복수를 기약하면서 500인의 목숨을 내놓은 의사들과 연계해 십이(十二)19)의 강력한 제나라의 변경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다면, 백만의 무리도 한 번 호령하여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견고한 사방의 요새를 등지고 임치(臨淄)20)에서 예의를 갖추면서 천하의 선비들을 초치하고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에 격문을 전하여 의를 떨쳐 서쪽으로 갔다면, 그 당시 중원의 병사들은 유방과 항우가 서로 백전백패하는 나머지 피폐해져 부상에 신음하는 소리가 사방에 달했고, 팽왕(彭王)의 변란21)에 황제가 직접 출정을 하였으나 조(趙)나라와 대(代)나라 변경의 부대가 하나도 조정의 부름에 오지 않았으며, 백등(白登)의 포위22)에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손을 거두어 계책을 낸 바도 없었으니, 더구나 돌진해오는 500 의사(義士)들의 예봉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했다면 한 나라와 제 나라의 자웅은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오호라, 전횡의 현명함으로도 계책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가? 가령 천명과 인심이 이미 한(漢)나라로 돌아가서, 사람의 지모가 비록 훌륭한들 어쩔 수 없더라도 마땅히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 복수의 대의에 죽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漢)나라 사신을 한 번 만나보고는 '크게는 왕을 시켜주고 작게는 제후를 시켜주겠다.'23)는 이끗에 유혹되어서 천리를 역마를 타고 가면서 명을 받드는데 분주하다가, 계책이 바닥나고 형세가 곤궁해진 뒤에야 구독(溝瀆)에서 칼에 엎드려 죽었으니 이 무슨 의리인가. 내가 그러므로 "전횡은 작은 은혜로 인심을 결집한 일은 있으나, 그 대의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하는 것이다. 삼가 논한다. 愚按田橫以二人客五百士。 入于島。 漢招以王侯之禮。 盖慮其或作亂也。 橫乘傳至洛陽。 未及朝三十里死之。 死之後。 二人者與士五百皆自殺。 夫使五百二人。 捨生而取義。 視死如歸。 諸田宗已滅而橫亦無後可立。 彼五百二人者。 有何所望而能成其義歟? 胡管見所謂無所爲而爲之。 眞義士也者。 是也非耶? 雖然愚嘗執其中而論之曰: "橫之死。 可謂高矣。 士之死。 亦可謂義矣。" 彼橫者齊之公子也。 建客松栢之歌。 使千載下。 耳目所照。 莫不絶悒。 况橫者耶? 以橫之賢。 挾五百二人之義。 當沛公扶義入關之日。 仗劒渡河。 與子房蕭曹共肩而贊成寬大長者之業。 據關一號。 雪松栢餓死之恥。 然後列書署冊。 金櫃之盟。 王齊一方。 南面稱孤。 使田氏之宗。 血食百世。 則人誰不曰大丈夫哉? 此之不爲。 與慓悍小兒同事。 竟致顚覆。 此王陵母一婦女所羞而橫爲之耶? 設使橫未及事漢。 而事已至此則全齊七十餘城。 一破於韓信之手。 而國滅君亡。 宗廟邱墟。 橫之大讎。 漢亦秦也。 爲橫之計。 當痛哭號天。 期以復讎。 連五百之死士。 入據十二强齊之境。 則百萬之衆。 可一呼而得矣。 負四塞之固而揖讓臨淄之上。 以致天下之士。 傳檄韓魏。 奮義而西。 則當其時。 中國之兵。 罷於劉項百戰百敗之餘。 呻痛瘡痍之聲。 達于四境。 彭王之變。 帝自出征。 而趙代邊兵。 一不庭召。 白登之圍。 蕭曹斂手。 計無所出。 則况可當於五百義士衝突之鋒耶? 然則漢齊雄雌。 未可必矣。 嗚呼! 以橫之賢。 計未及此耶? 假使天命人心已歸於漢。 人謀雖臧。 無可奈何。 則當背城一戰。 死於復讎之大義可也。 一見漢使。 誘於大王小侯之利。 千里乘傳。 奉命奔走。 至於計縮勢竆然後。 伏劒溝瀆。 是何義耶? 愚故曰: "橫以小惠結人心則有之。 不聞其大義也。" 謹論。 전횡(田橫) 전횡은 조카인 제왕(齊王) 전광(田廣)이 한신(韓信)에게 사로잡혀 죽자 자립하여 제왕이 되었다. 얼마 뒤 한 고조 유방이 황제가 되니, 전횡은 주벌될까 두려워 500여 명의 무리와 바다 섬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유방이 사신을 보내 전횡의 죄를 용서하고 부르기를 "전횡아, 오너라. 크게는 왕으로 봉하고 작게는 후(侯)로 봉하겠지만,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주벌하겠다."라고 하였다. 전횡이 이에 빈객 두 사람과 낙양으로 가다가 30리를 남겨 두고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한왕(漢王)과 나란히 왕이라 칭하다가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망국의 포로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으니, 너무도 부끄럽다."라고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수급을 바치게 하였다. 한 고조가 왕자의 예법으로 전횡을 장사 지내 주었다. 두 빈객과 섬에 있던 500명도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권94 田儋列傳》 호인(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 원문의 '호관견(胡管見)'으로, 송(宋)나라의 학자인 호인(胡寅)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주요 사건마다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독사관견(讀史管見)》 30권을 엮었다. 어떤……의사(義士)이다 사심 없이 오직 의리에 따라 행동한 것을 말한다. 예양(豫讓)의 고사를 말한다. 예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았는데,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쳐서 멸망시키자,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양자에게 잡히자 자결하였다. 《史記 권86 刺客列傳 豫讓》 건(建)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자로 비무극(費無極)의 참소를 당해 쫓겨나서 객사한 건(建)을 말한 듯하나 확실치 않다. 《春秋左氏傳 昭公27年》 패공(沛公)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의 칭호이다. 패(沛)에서 기병(起兵)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자방(子房)·소하(蕭何)·조참(曹參) 세 사람 모두 한(漢)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으로, 그의 자가 자방이다. 관대한 장자[寬大長] 한고조 유방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지금 항우는 강하고 사나우니 지금 항우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패공만이 관대한 장자이니 그를 보내야 합니다.[今項羽彊悍, 今不可遣. 獨沛公素寬大長者, 可遣.]" 하였다. 금궤(金櫃) 금으로 만든 궤로, 옛날에 중요한 문서나 물건을 보관하던 곳인데, 흔히 공신들의 녹권을 보관하는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 하〉에 "또 공신들과 부절을 쪼개어 서사를 지어서 단서 철계를 금궤 석실에 봉함하여 종묘에 갈무리했다.[又與功臣剖符作誓, 丹書鐵契, 金櫃石室, 藏之宗廟.]" 하였다.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 군주가 된다는 말이다. 남면은 군주는 조정에서 북쪽에 앉아 얼굴을 남쪽으로 향했으므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하고, 고(孤)는 제후가 자신을 가리키던 호칭이므로 역시 군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받아먹었다면 원문의 '혈식(血食)'으로, 희생(犧牲)을 잡아 생육(生肉)을 바쳐 제사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제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왕릉(王陵)의 어미 유방이 항우와 패권을 다툴 때에 왕릉이 유방의 편이 되었다. 항우는 이에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에 붙잡아 두었다. 왕릉의 사자(使者)가 항우의 진영으로 오자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심부름꾼을 보내 "'한왕(유방)은 장자이다. 늙은 나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아라. 내가 죽음으로써 심부름꾼을 보낸다.' 하고는 칼에 엎드려 죽었다. 항우는 노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아 죽였다. 왕릉은 마침내 한왕을 따라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하였다. 《史記 권56 陳丞相世家》 십이(十二) 10분의 2라는 뜻으로 천혜의 요새지임을 말한다. 《사기》 고조기(高祖紀)에 "(제나라는) 땅은 사방으로 2천 리나 되고 제후국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제후국의 군사가 1백만이라면 10분의 2인 20만의 군사만으로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地方二千里, 持戟百萬, 縣隔千里之外, 齊得十二焉.]" 하였다. 임치(臨淄) 전국 시대 제(齊)의 수도이다. 팽왕(彭王)의 변란 '팽왕'은 팽월(彭越)을 말한다.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공신인 한신(韓信)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史記 권90 彭越列傳》 백등(白登)의 포위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묵특 선우(冒頓單于)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는데, 도리어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동안 흉노의 30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선우의 부인 연지(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겨우 포위에서 벗어났다. 《史記 권93 韓信列傳》 크게는……시켜주겠다 한 고조가 전횡에게 사신을 보내 회유하기를 "전횡은 오라, 크게는 왕을 시켜주고 작게는 제후를 시켜 주겠다[田橫來, 大者王, 小者乃侯耳.]" 하였다. 《史記 권94 田儋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