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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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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 先考府君諱承鶴。字子和號靑皐。太宗元子讓寧大君稱東方泰伯。自朝家建至德祠以祀之。是爲始祖。三傳而至秋城守諱緖。連仲氏河源守誣獄。謫湖南之昌平縣。賜環不歸。戒子孫不仕。世襲儒業。高祖諱定魯有文行。奇蘆沙先生撰行狀。曾祖諱世容。奇先生拜床退曰。嚴毅文識。法家拂士。後題墓曰囂囂處士李公之墓。祖諱奎亨與奇先生道義相推。先生撰墓表曰。余有一知己。不能歲寒相守。棄我而逝。考諱最善號石田。師事奇先生。聞天人性命之學。爲師門高弟。哲宗己未。中進士。先皇帝丙寅夷陷江都。承宗室倡義之命。募師旅勤王。先生以詩以書獎之。大院君曰吾宗有人。配享于奇先生高山祠。妣星州李氏。贈持平箕大女。通女史。備內行。繼妣平澤林氏。哲宗丁巳三月十九日生于潭陽長田里第。石田公連生六女後。府君最後生。淸秀羸弱。如不勝衣。不早入學。九歲失恃。號泣不絶。尤憐而不就傳。十二始入學。聰慧强記。中庸一讀。九日背誦。尙書堯典。朝而釋義。終日客煩。無暇一讀。翌朝背講。俱註無一字錯誤。石田公曰才如汝。孰謂爲學之難。旣冠。謁蘆沙先生先。生爲作字。說而勉之曰夫鶴鳴而子和者。非徒然也。誠之不可掩也。不誠無物。況其鳴於幽陰之地乎。大傳所謂善則千里之外應之。亶在於此。鶴鳴子和。又何疑焉。其期望之重如此。令譽藹鬱。士友嘖嘖相道曰。先生門下。父子摳衣。世所罕有。弱冠遊洛。一戚人貴閥自恃。常曰兄主科擧。吾其周旋。一日來曰。吾外叔主試。願與三百金則可圖。拒而不授。竟不利。壬午全羅監司。趙康夏。道薦府君于朝。時朝廷選賢良之士。府君白衣。陞殿對易策。指陳天下利病。以爲天地萬物之理。窮則變。變則通。不外乎道。道之所貴者。時而已。不識時而欲有爲者。鮮不葛藤而狼貝也。備言六十四卦。變通之理。至於禮之常變。詩之正變。揖遜之變爲。征伐及財用兵備。人材取捨。無不條條對辨。而其要在乎誠之一字。而曰自上無患窮之不變。而惟患誠之未盡。罔憂變之不通。而惟恐誠之不純云云。被選爲文科初試。自上宣醞。當時以府君策。比之於太平十二策。癸未丁外艱。易戚備至。致客數千人。服闋赴會試不中。更無意於榮。與洪三泉承憲。李剛庵容植。李寧齋建昌。李二堂重夏。徐葆堂丙壽。道義相尙。談文論事而歸。寧齋以丙寅同義家。契誼益篤。常曰。靑皐君子性。文章不須讓人。而自居不能。剛庵以書請邀。曰靑皐吾道義之交。葆堂以書請曰。儒子下蕃榻。澹對至偃室。願一顧焉。閔又荷衡植爲賀壽序曰。靑皐吾老也。尹于堂喜求曰。山川鍾靈。盡述之德之行焉。蓋府君非有勢利以親其人。而能使人如此。豈非所謂行之以躬。不言而信者歟。甲午東匪大亂。巨魁全琫準。自託以義起。內而懲貪吏。外而斥倭洋。欲與淸將袁世凱合。移文無路。則莫若送胸抱萬言之士。先致植齋奇公宰於白羊寺。誘而脅之曰與李靑皐同往濟事。植齋公脫身來曰吾兩人禍將不測。遂議避亂。兩家率眷入方丈山中古武陵。蓋兩公齊名。當時彼輩亦欲以籍重也。翌年乙未四月。各還故庄。至八月而母后被害。宮車播遷天地翻覆矣。蘆沙先生肖孫松沙公爲復母后之讐。擧義於長城。府君匹馬赴義。環八域飛檄。旁午答來發送。日日太數百而松翁口號。府君揮毫一無少滯。觀者。以爲非松沙文靑皐筆不能濟大事。遂爲文祭錦城山祈國祚之興。復移陣于光州。自上命宣諭使申箕善而諭曰。義兵而起。使彼輩反速禍大。卽日罷兵。府君約與松翁。入京伏闕上章請討。爲彼人阻搪不得進。同入于潭陽受降山下山亭里。過數月而還。自乙未臘前至丙申夏。與松翁同患難。惟府君而已。秋與植齋公同被學部之辟。自道郡促行。府君呈單辭。略曰非徒聲聞過情之恥亂乎方寸。實懼擧人不謹之誚及于執事。一再三招促。有難私分之偃蹇。百千萬思量。終無一能之其可。竟不赴。府君性本剛直。不少挫於人。而好賢疾惡。異乎餘人。故門無雜客。日與文學之士。談論古今。太無虛日。自經史子集。及詩家兵家。其他地家書類。無不涉獵。文章不甚用力而工。不喜著述。筆亦不工。天然得體。多酬人樓臺屛慞。嘗刊宗事遺錄。名以薪膽。竟上言雪先世被誣。又嫺於禮學。若鄕飮酒士相見。必爲之相禮。先賢遺集。亦多參校。閒以一驢一童。出遊名山大川。北至遼薊。東至金剛。西至瀛洲。南至天冠月出。而域內名山水好樓臺。無不登覽。而傷時憫俗。對景嘯唱而歸。先是石田公大歸之夕。火出靈筵。經史子集五千餘卷。其他長物。盡入于燒。府君積以歲月之工。乃復舊堂而堂。曰迎瑞題額。作記而敍實。斥賣田土。儲書如初。由是而家計剝落。上奉異顔。下率百口。濟活極難。府君五十後始憂曰。餓死事亦所關念。遂顧産業。然不作世人謀利事。惟以務農爲本。率僮僕于野。視其勤慢。而所坐巖石。刻書明農臺。不以風雨而廢往。自奉只是鹽菜而已。如是者八年。不貸他人穀。乃止曰吾以十年爲限矣。因地之力。今可繼食。奚加爲也。更不出野外。當回甲日。付家事于不肖曰吾家世守淸貧。不墜儒業。穀腹絲身。乃次第事。讀書種子若絶。則十世家脈絶。念之念之。自後不問絲穀。別儲小數財。先世祧廟祭室祭器祭田。年歲以期成。無不備具。嘗曰自朱子至我東先儒。皆論地理。然後賢多以方外。諱而不言。吾則不然。人間實理似在乎。此且安親福後。一項貫來。豈可忽諸。平生誠力盡在此。讀堪輿書。延地師求吉地。三世六葬。雖至累遷。而誠心求之。四十年如一日。恊心然後乃已。景得完窆。皆具文埋誌。手抄葬山日記曰。玄妙之理。亦不可。知今吾心力俱竭矣。日日周行于墓。手剗雜草。瓜甲盡耗。墓貌石儀。盡精盡美。行人指點曰不問可知。某氏之阡。不肖遊京師而歸。問曰汝有何所得。京鄕出入。無善言之得善行之見。則徒費歲月而已。吾嘗觀京中薄行貴人。則付祭於妻。付墓於墓奴。付養親於傔從。只知功名。功名何補於身。汝勿效焉。聞不肖爲親求官。責之曰近日仕路。非賄賂不成。汝其勿汚我也。陽園申判書。箕善以軍部大臣。欲敍自辟主事。見微意而止。心齋李判書道宰觀察湖南來見曰。有淵明之趣。是其知言乎。不肖誤被按廉使薦。以經義問對得博士一名。幸有寅緣仕路則欲爲祿養。又未然。而徒添憂愁於父母者。曾與羅注書寅永。閔參判衡植諸公。謀討賊事覺。逮獄年餘以死論。法庭官府君曰。吾兩人五世通家。兄有一子。不忍見死。密通于獄中。日日審問之場。以初不干涉。變辭而答。則當周旋生路。答曰兒雖騃。生死以直。吾何干焉。一自繫獄論死。以至謫還。無幾微色。人謂。一子私情。何若是坦蕩。蓋嚴於淑慝之辨如此。又師門事。無不殫誠。千里齎幣。獨往抱川。謁先師神道碑銘于勉庵崔先生。又恐易名之遲遲。曾使李寧齋。書請于經香韓太史章錫。而未果。後日不肖入京。竟得請。先師被誣之日。不肖在京。止謗之策。一一指揮。建院之日。命不肖先發論。躬往董役事。得完。配以及門諸賢。喜動于色曰。吾事畢矣。乃戊辰九月也。十月周行參先墓祭。遠則輿以往還。還而疾作。無一言及家。以二十九日考終。享年七十二。翌月權窆。至庚午二月十八日。完葬于所居里聞一亭畔。乾亥之原。配孺人潘南朴氏。賢孝聞于鄕邦。壬子十二月二十七日生。壬戌九月十四日卒。墓與府君墓。隔溪相望。擧一男六女。男光秀。女適奇洛度。松沙子。次適奇人度。植齋子。次曰金學舜高在列朴弘鉉梁會昞。副室三男三女。男敦秀明秀中秀。女適朴仁喆洪起淡。餘幼。光秀娶竹山安琫煥女。生焃。焃娶海南尹秘丞敦夏女。生漢基淳基中基。嗚呼。府君早失怙恃。事親之節。不肖不及見。且不可以問。然蓋觀府君。終身一念在安親。累遷而攀和哭擗。厚斂逾初。往往讀父書而長號。飮桮棬而涕泣。對家人言必稱父母。苟以是槪之。知其至孝矣。憂念宗國。擧義未伸。常懷憤愾。聞合幷消息。竟日痛哭。若忘形骸。傍人不知何以至此也。苟以是槪之。知其不忘國矣。立家道斬斬。內外男女恒有洞屬之態。安於心。若或出嘻嘻聲。則加以秋霜之威。來觀者或謂家無和氣。或謂整家有法。至於待宗族接朋友賙窮恤貧。各得歡心。終日端坐。雖盛暑。坐於坐處。不揮扇不移席。其律身之嚴多如此類。竊觀古今之人。擧皆滯於一隅。府君之心。小大周詳於人情事物。曲盡無漏。一日幷進。不以此事而廢他。不以倉卒而廢禮。皆誠心所到。辛勤成功。行於家者。皆爲世柯則。質之神明而無愧矣。曾謂不肖曰。吾無一行可道。他日勿以溢美之辭。請行狀等文字於人而取笑也。吾所恥焉。書靑皐晩生李某之墓九字曰此吾墓石。自述墓銘數句而授之。嗚呼。痛哉。府君博學篤行。淸標峻節。未嘗求知於人。不肖雖極不孝。安敢踰越先志哉。及葬。判書海觀尹公用求。題于墓曰朝鮮逸士。不肖靡所適從。多士議曰。晩生逸士。皆是哀世意。而晩生自道也。逸士公議也。不肖不得已從公議。抑未知無悖於義否。且京湖多士之誄挽。亦足以有徵矣。不肖亦曷敢厚餙其美。重此不孝之罪耶。謹撰次其生卒梗槪。伏惟立言君子。幸垂憐而裁擇焉。不肖光秀。泣血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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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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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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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勉庵崔先生書 獻歲發春。日氣向和。未審靜養德候。履泰增重。遠外懸仰不任下情。去春冠山金生便。伏承下賜先誌之文。先世微潛之德著矣。小子平生之願遂矣。幽明感祝。百世可忘。但私故多艱。未得躬造。而因人傳托。苟簡如此。爲罪不少。如非盛德厚愛之至。何以及此。此後造謝。尤宜勇圖。而身家多病。加以世紛崢嶸。奈何奈何。視此一事之因循未遑。則其餘所謂居業一者。亦可類推。只與日新諸友。種種聚對於詠歸新塾之中。聊以捱過時日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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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小雅趙丈【性憙】 伏以生。跧伏遐峽。得聞文丈德義之日久矣。雖不能春糧負笈。獲近薰德。而瞻仰耿耿。卓然若星斗于天。嗚呼。時事至此。誠不可言。而幸有老成宿德。數三君子。往往在畿湖林樊之間。雖潛光鞱輝。極其深閟。而其儀刑風致。闇然日章。使四方人士。有所向倣。而不至遽爾淪胥。者皆其賜也。然惟藍田道庄。較他最近。則若可以旬月源。源而遲違不力。尙未有一番起居之禮。心跡之不相謀。至於如是耶。每切悚歎。伏祝天氣向寒。頤養保重。以賴世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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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小雅趙丈 疇暘一書。寔出於區區戀德之私。而跡涉猥越。第切惶恐。豈謂文丈。不以爲罪。辱賜惠復。加以慰諭奬借。覼縷鄭重哉。且感且悚。不覺背汗。秋冬之交。大擬一造。以償宿昔之願。竟以采薪之憂。未得果爾矣。夫明春與日新。胥擬聯鞭而未知更不若。已往之見戱否也。天氣向寒。千萬珍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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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重陽節)에 장병에게 연향을 베푼 시 重陽饗將士詩 태평한 시대의 천자 한번 융의(戎衣) 입으니153)흰 깃발과 누런 도끼 쥐고서 용퇴(龍堆)에 올랐네154)긴 창에 가한(可汗)155)의 머리를 높이 거니승전고로 땅을 울리며 수레를 돌리네천자께서 쇠고기와 술을 내어 육사(六師)에게 연향을 베푸니이날 맑은 가을이라 하늘이 상쾌하네통일된 산하(山河)에 일월이 밝으니만방(萬邦)에서 옥과 비단을 앞다투어 바치네흉악한 오랑캐가 어찌 감히 왕의 교화를 거부하리오156)한번 노한 천자의 군대 지휘하여 이들을 소탕하였네157)위엄이 빛나고 매서워 지축(地軸)이 뒤집히고갈석(碣石)158)이 무너지려 하여 망량(魍魎)159)을 근심시키네30일로 어찌 완악한 유묘(有苗)만 바로잡으리오160)만 리의 금수(禽獸)들이 하늘의 그물에 들어오네161)모두(旄頭)가 다 사라지고 상좌(帝座)가 밝게 빛나니162)옥장(玉帳)163) 시원하게 트여 있고 요하(遼河)가 드넓네이때는 가을 9월 9일변방의 하늘 막 개어 시원하고 밝은 기운 가득하네변경의 바람 더없이 맑고 옥장(玉仗)164) 높으니군문에 들어가 엄정하고 분명하게 오량(伍兩)165)을 배치하네명조(鳴條)166)에서 일 마치고서 〈탕서(湯誓)〉167)를 열고목야(牧野)168)에서 군대 돌아와 군사를 위한 연향을 베푸네상서(象胥)가 어지러이 모여 이리와 사슴 바치고방숙(方叔)과 소호(召虎)에게 나란히 관직과 상을 내리네169)용안이 잠시 취기로 붉어졌다가 고운 빛이 들어와 떠오르니십 만 군대의 마음 모두 우러르고 사모하네들국화를 다투어 가지고서 원문(轅門)170)에서 춤을 추니만수무강 외치는 소리 천지를 진동시키네변방의 백성 일제히 태평곡(太平曲)을 연주하니갑옷 빛이 달에 춤춰 금비늘이 번쩍이네우리 황제의 성스러운 무덕(武德) 참으로 하늘이 내려준 것이니하늘이 내려준 신령한 위덕(威德) 억지로 힘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네배와 수레 지나는 곳에 밝은 빛 떠올라 있으니보잘것없는 오랑캐의 비린 기운 속이기 어렵다네중천이 만만세토록 크게 밝으니무궁한 나라의 운수171) 천상(天象)172)에 드리우네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연경(燕京)은 오늘날 만사(萬事)가 잘못되어뜻 있는 선비 가을바람에 비분강개하는 것을 昇平天子一戎衣白旄黃鉞龍堆上長戈高揭可汗頭捷鼔殷地回輪鞅天開牛酒饗六師此日淸秋天宇爽一統山河日月明萬邦玉帛爭來享孼胡豈敢梗王化一怒天戈揮掃盪威靈赫烈地軸翻碣石欲倒愁魍魎三旬豈特格頑苗萬里禽獸來天網旄頭滅盡帝座明玉帳敞豁遼河廣是時三秋九月九塞天新晴森爽朗邊風淸澈玉仗高入門嚴明排伍兩鳴條事罷啓湯誓牧野師班開武饗象胥雜遝貢狼鹿方召聯翩行爵賞龍顔暫酡入彩浮十萬軍情皆向仰爭將野菊舞轅門萬壽呼聲動天壤邊民齊奏太平曲甲光舞月金鱗晃吾皇聖武信天授天授神威非勉彊舟車所通戴耿光蕞爾腥氛難誣罔中天大明萬萬世寶曆無算垂乾象君不見燕京今日萬事非志士秋風悲慨慷 한번 융의(戎衣) 입으니 '융의(戎衣)'는 군복(軍服)을 가리키는 말으로, '융의를 입는다'는 것은 곧 군복을 입고서 전쟁에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할 때의 일을 기록한 《서경》 〈무성(武成)〉에, "한 번 융의를 입자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一戎衣 天下大定]"라 하였다. 흰 깃발과……올랐네 원문은 '백모황월(白旄黃鉞)'이다. 군대를 지휘하는 의장(儀仗)으로, 군권(軍權)을 뜻한다. 《서경》 〈목서(牧誓)〉에, "왕이 왼손으로는 누런 도끼를, 오른손으로는 흰 깃발을 잡고 지휘하였다.[王左杖黃鉞 右秉白旄以麾]"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용퇴(龍堆)'는 서역(西域)의 천산(天山) 남쪽에 있는 사막인 '백룡퇴(白龍堆)'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변방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가한(可汗) 왕을 뜻하는 중세 몽골어 'khan'의 음역어다. '칸[汗]'이라 칭하기도 한다. 왕의 교화를 거부하리오 원문은 '경왕화(梗王化)'다. '경화(梗化)'는 완고해서 교화가 덜 된 나머지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것을 말한다. 한번……소탕하였네 '한번 노한 천자의 군대'는 명을 따르지 않는 무리를 정벌하는 천자의 군대를 말한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왕이 혁연히 노하여 군대를 정비하였다.[王赫斯怒 爰整其旅]"라는 《시경》 〈황의(皇矣)〉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왕(文王)이 한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안정시켰다.[文王一怒而安天下之民]"라 찬양한 말이 나온다. 갈석(碣石) 하북(河北) 또는 열하(熱河)에 있다고 하는 산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돌아서 황하로 들어갔다.[夾右碣石 入于河]"라 하였다. 망량(魍魎) 산하(山河)를 지키는 귀신이나 도깨비를 가리킨다. 《孔子家語 辨物》 30일로……바로잡으리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유묘(有苗)를 정벌하도록 하였는데, 30일 동안이나 항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익(益)이 우에게 덕(德)으로써 감동시키기를 권하자 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군대를 철수하였다. 순 임금이 마침내 문덕(文德)을 크게 펴서 간우(干羽)로 동계(東階)와 서계(西階)에서 춤을 추었는데, 70일 만에 유묘가 와서 항복하였다. 《書經 虞書 大禹謨》 만 리의……들어오네 천하 만물이 천자의 어진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이다. 탕(湯) 임금이 교외로 나갔는데, 사방에 그물을 치고서는 "천하의 모든 것이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비는 사람을 보았다. 탕 임금은 "아, 모조리 다 잡으려 하는구나."라 하고, 삼면(三面)에 그물을 쳐 놓고는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가되,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만 내 그물로 들어오라.[欲左左 欲右右 不用命 乃入吾網]"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제후들은 "탕 임금의 덕이 지극하구나. 그 덕이 금수에까지 미치다니.[湯德至矣 及禽獸]"라 하였다. 《史記 卷3 殷本紀》 모두(旄頭)가……빛나니 '모두(旄頭)'는 28수(宿) 가운데 하나인 묘성(昴星)을 가리킨다. 오랑캐를 상징하는 별로서, 이것이 환하게 빛나면 홍수가 지고 호병(胡兵)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한다. 《史記 卷27 天官書》 '상좌(帝座)'는 천시원(天市垣)에 속해 있는 별 이름으로, 곧 황제를 상징한다. 옥장(玉帳) 군대에서 원수(元帥)가 거처하는 막사로, 옥처럼 견고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옥장(玉仗) 임금의 의장(儀仗)을 가리킨다. 오량(伍兩) 고대의 군대 편제 단위다. 5인이 오(伍)가 되고, 5오가 량(兩), 4량이 졸(卒), 5졸이 려(旅), 5려가 사(師), 5사가 군(軍)이 되었다. 《周禮 地官司徒 大司徒》 명조(鳴條) 중국의 지명이다. 하(夏)나라 걸(桀)이 폭정을 행하자 당시 제후였던 탕(湯)이 군대를 이끌고 하나라의 도읍을 공격하여 명조(鳴條)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탕은 걸을 남소(南巢)에 유폐시키고 뒤이어 상(商)나라를 개창하였다. 《書經 仲虺之誥, 伊訓》 탕서(湯誓) 탕(湯)이 걸(桀)을 정벌하러 갈 때 탕의 국도인 박읍(亳邑)의 백성들이 전쟁을 두려워하므로 정벌의 뜻을 효시한 글이다. 《서경》 〈상서(商書)〉의 편명이다. 목야(牧野) 상(商)나라의 교외 지역으로,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기현(淇縣) 남쪽에 있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의 군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書經 周書 武成》 상서(象胥)가……내리네 소식(蘇軾)의 〈후석고가(後石鼓歌)〉에, "상서(象胥)들 어지러이 모여 이리와 사슴 바치고, 방숙(方叔)과 소호(召虎)는 나란히 홀(笏)과 검은 기장술 하사받았다오.[象胥雜遝貢狼鹿 方召聯翩賜圭卣]"라 한 데서 취해 온 구절이다. '상서(象胥)'는 역관(譯官)으로, 사방 오랑캐의 말에 능통한 자를 말한다. '방숙(方叔)과 소호(召虎)'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현신(賢臣)으로, 각각 형만(荊蠻)과 회이(淮夷)를 평정한 공이 있다. 오랑캐를 평정하여 사방에서 공물을 바쳐오고,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상을 내림을 말한 것이다. 원문(轅門) 수레의 끌채를 마주 세워 문의 모양을 만든 것으로, 병영(兵營)을 뜻한다. 나라의 운수 원문은 '보력(寶曆)'이다. 국운(國運) 또는 황위(皇位)의 뜻으로 쓰인다. 천상(天象) 천체의 여러 현상, 즉 천문(天文)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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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난 물을 바라보며 觀漲 어젯밤 곤풍(坤風)173)이 땅을 휩쓸며 일어나니검은 구름 가득하여 용이 들판에서 싸우는 듯하네174)뇌공(雷公)175)이 큰소리로 꾸짖음에 벽력이 진동하고해약(海若)176)이 어지러이 치달려 바닷물을 몰아 쏟아내네오늘 아침 큰 비로 변하여 내리니말머리에 거위 알 같은 빗방울177) 하늘에서 내려오네황하(黃河)가 뒤집어지려 하고 태산(泰山)이 무너지니돌 구르고 바위 엎어지며 지붕 기와 날아가네갑자기 큰 파도가 들판에서 일어나도랑으로 달려가고 시내에 가득하여 서로 다투네어룡(魚龍)은 몸을 숨기고 호표(虎豹)는 달아나니쓰러진 돛대와 꺾인 노가 촌사(村舍)에 이르네큰 파도와 거대한 물결 격하게 서로 부딪히니땅 위 생물이건 물 속 생물이건178) 온전한 것이 없네내 의심컨대 황천(皇天)이 오랑캐 누린내를 싫어하여은하수를 부어 말끔히 쓸어냄으로써영원히 우리 동방(吾東) 수천 리로 하여금비린 기운을 깨끗이 씻어 이아(爾雅)179)를 회복하려는 것인지그렇지 않으면 하늘 다하고 땅 다한 십이회(十二會)180)에혼돈(混沌)181)의 물이 길을 가로막아어둡고 아득하게 긴 밤을 만들었다가병자년과 정축년182) 이후로 조화(造化)를 여는 것인지또 의심컨대 삼천 리의 약수(弱水)183)를 동해(東海)로 터서여섯 자라의 삼신산(三神山)184)이 서로 베고 누웠는데나로 하여금 구천(九天) 너머로 날아오르게 하여세속의 생활과 번뇌185)와 이제부터 작별하도록 하는 것인지바람이 나의 겨드랑이에 불어오고 깃털이 나의 옷이 되니186)곧바로 낭원(閬苑)의 대사(臺榭)187)에 오르네위로 옥황(玉皇)에게 하소연하여 낭간(琅玕)188)을 바치고서자하동(紫霞洞)189)의 신령한 단약 잠시 동안 빌려다가아래로 우리 백성들과 함께 수명을 팽조(彭祖)190)와 나란히 하니세속이 질박한 대도(大道)를 회복하여 속임이 없고 싶네아, 나의 이러한 뜻 또한 슬퍼할 만하니사나운 물결 하늘까지 가득하여191) 나의 곡식을 슬퍼하네깊이 신음하고 크게 탄식하다 문득 머리를 돌리니바다에서 불어온 맹렬한 바람에 산의 나무가 쓰러지네 昨夜坤風捲地起黑雲慘惔龍戰野雷公叱咤霹靂驚海若紛騰驅海瀉今朝變作大雨來馬頭鵝卵從天下黃河欲倒泰山傾石走巖翻飛屋瓦俄然大浪起原陸走瀆豪川相搏射魚龍隱躍虎豹遁傾檣摧楫來村舍洪濤巨浪激相舂羽毛鱗介無全者我疑皇天厭胡羶决注銀河飛掃灑永使吾東數千里淨洗腥氛回爾雅不然天窮地盡十二會混沌之水相籠駕冥冥漠漠作長夜子丑以後開造化又疑三千弱水决東海六鰲三山相枕藉使我飛騰九天外烟火塵煩從此謝風吾腋羽吾衣直上閬苑之臺榭上訴玉皇呈琅玕紫霞靈丹聊暫借下與吾民壽齊彭俗回大朴無欺詐嗟我此志亦可悲虐浪滔天哀我稼沉吟太息忽回首海送獰風山木亞 곤풍(坤風) 남서풍을 가리킨다. '곤(坤)'은 방위로 볼 때 남서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이……듯하네 《주역(周易)》 〈곤괘(坤卦) 상륙(上六)〉에, "용이 들판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龍戰于野 其血玄黃]"라 하였다. 1구에서 곤풍(坤風)이 불어온다고 하였으므로 《주역》 〈곤괘〉의 이와 같은 구절을 취해 와 이 날의 날씨를 표현한 것이다. 뇌공(雷公) 전설상의 우레를 맡은 신이다. 해약(海若) 북해 약(北海若)의 준말로, '약(若)'은 바다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다. 《楚辭 卷5 遠遊》 말머리에……빗방울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의 모양과 크기를 형용한 것이다. 땅……생물이건 원문은 '우모관개(羽毛祼介)'인데, 문맥을 살펴 '관(祼)'을 '린(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곧 조수(鳥獸)와 어패류를 아울러 말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옛날에 성인이 없었다면 인류가 멸망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추위와 더위에 적응할 깃과 털, 비늘과 껍질이 없으며 음식을 다툴 발톱과 이빨이 없기 때문이다.[如古之無聖人 人之類滅 久矣 何也 無羽毛鱗介以居寒熱也 無爪牙以爭食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아(爾雅) 아정(雅正)하고 문아(文雅)함으로, 곧 문명(文明)을 의미한다. 십이회(十二會) '일원(一元)'과 같은 말로, 세상이 열린 뒤부터 소멸되기까지의 한 주기를 뜻한다.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 〈관물편(觀物篇)〉에, "1원에 12회가 있고, 1회에 30운이 있고, 1운에 12세가 있고, 1세에 30년이 있다. 그러므로 1원은 모두 12만 9600년이다.[一元有十二會 一會有三十運 一運有十二世 一世有三十年 故一元共有十二萬九千六百年]"라 하였다. 즉 한 시대의 종말을 말한 것이다. 혼돈(混沌)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 원기(元氣)가 나누어지지 않고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상태를 말한다. 《莊子 應帝王》 병자년과 정축년 청(淸)나라의 침입을 받아 항복하였던 해인 1636년과 1637년을 말하는 듯하다. 조선은 1636년 12월에 청나라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듬해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하였다. 약수(弱水) 신선이 산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이다. 길이가 삼천 리나 되며 부력(浮力)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약수가 이에 서쪽으로 흐른다.[弱水旣西]"라 하였다. 여섯 자라의 삼신산(三神山) '여섯 자라'는 바닷속에서 삼신산(三神山)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거인국인 용백국(龍伯國)의 어떤 사람이 한 번의 낚시로 이 자라 여섯 마리를 한꺼번에 낚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삼신산(三神山)'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 세 산을 가리킨다. 중국 동쪽의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한다. 세속의 생활과 번뇌 원문은 '연화진번(烟火塵煩)'이다. '연화'는 불을 때서 음식을 먹고사는 속인(俗人)이 좋아하는 생활을 뜻하며, '진번'은 인간 세상의 번뇌를 뜻하는 말이다. 바람이……되니 '바람이 겨드랑이에 불어온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신선세계로 날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노동(盧仝)의 〈주필사맹간의기신다(走筆謝孟諫議寄新茶)〉에, "일곱째 잔은 마실 것도 없이 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습습히 청풍이 읾을 느끼네.[七椀喫不得也 唯覺兩腋習習淸風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또 '깃털이 나의 옷이 된다'는 것은 깃옷을 입고서 신선이 된 것을 말한다. 낭원(閬苑)의 대사(臺榭) '낭원(閬苑)'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낭풍산(閬風山)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대사(臺榭)'는 둘레를 내려다보기 위하여 크고 높게 세운 누각(樓閣)이나 정각(亭閣) 따위를 말한다. 낭간(琅玕) 곤륜산(崑崙山)에 있다는 전설상의 나무로, 열매과 구슬과 비슷하다고 한다. 《포박자(抱朴子)》 거혹(袪惑)에, "곤륜산에 주옥(珠玉)이 열리는 나무가 있으니, 사당(沙棠)과 낭간(琅玕)과 벽괴(碧瑰)의 나무가 그것이다.[崑崙有珠玉樹 沙棠琅玕碧瑰之樹]"라 하였다. 자하동(紫霞洞) 신선이 사는 골짜기를 말한다. 도가(道家)에서 신선은 자줏빛 노을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팽조(彭祖) 요(堯) 임금 때부터 하(夏)를 거쳐 은(殷)나라 말기까지 8백 년을 살았다는 옛날의 장수한 사람이다. 《神仙傳》 하늘까지 가득하여 원문은 '도천(滔天)'이다. 홍수가 가득한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서경》 〈요전(堯典)〉에, "넘실대는 홍수가 바야흐로 해를 끼쳐서 도도하게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넘어 질펀하게 하늘까지 가득하기에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다.[湯湯洪水方割 蕩蕩懷山襄陵 浩浩滔天 下民其咨]"라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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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납 임공 묘지명 獻納任公墓誌銘 공의 휘는 기지(器之)요, 자는 국화(國華)이며, 풍천(豐川) 사람이다. 조부 휘 윤신(允臣)은 관찰사를 지냈다. 부친 휘 전(錪)은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지냈고 집의(執義)로 추증되었으며 세칭 명고(鳴臯) 선생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천성이 인후하며 문장과 학행은 세상에서 추앙받았다. 나이 겨우 약관에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무오년(1618, 광해10) 증광시(增廣試)시에 대책(對策)으로 급제하여 사헌부·사간원·이조를 거치고, 옮겨서 헌납으로 제수되었다.만년에 남평의 망산(望山)에 터를 잡았고 집에서 생을 마쳤다. 묘는 치소 남쪽 창흘(昌屹)의 국사봉(國師峯) 묘좌(卯坐) 언덕에 있고 묘갈이 있는데 선생이 지었던 묘지명은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사라지고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임서하(任西河)가 지은 행장(行狀) 가운데에서 채록하여 본집에 기록한다. 公諱器之。 字國華。 豐川人。 祖諱允臣官觀察使。 考諱錪官光陵參奉贈執義。 世稱鳴臯先生。 公天姿卓越。 稟性仁厚。 文章學行。 爲世所推。 年纔弱冠。 生進俱中。 戊午增廣。 對策登第。 歷職憲府。 諫院吏部。 轉拜獻納。 晩年卜居。 南平望山。 考終于第。 墓在治南昌屹國師峯卯坐之原。 有碣。 先生嘗製誌銘。 而風磨雨湔。 逸而不傳。 故今採任西河所製行狀中。 錄于本集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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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모장군 남도포만호 양공 묘지명【병서】 禦侮將軍南挑浦萬戶梁公墓誌銘【幷序】 우리 고을의 어모장군 만호(禦侮將軍萬戶) 양공(梁公)이 세상을 떠난 뒤 장사를 며칠 앞두고 공의 적손고(適孫孤)인 유원(有源)씨가 나에게 묘지(墓誌)를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정의(情義)상 교분이 친밀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길이 보존하는 데에 만분의 일이라도 대비하였다.《동한사쇄(東韓史鎖)》를 살펴보건대, 양씨(梁氏)의 선계는 탐라(耽羅)에서 나왔고 【▣】부(婦)의 종(種)으로 마침내 양씨 계보의 비조가 되었다. 역사가가 이미 전기(傳紀)에 쓴 것은 해와 달처럼 밝아 동방 사람들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또한 어찌 억지로 기록하였겠는가. 후손에 이르러 휘 태시(泰始) 공이 백제에서 벼슬을 하면서 대방(帶方)201)에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관향으로 용성(龍城)202)을 하사 받았고 그 후 광산(光山)으로 옮겨 살았다. 공의 증조인 직장공(直長公)에 이르러 육봉(六峯) 박우(朴祐)203) 선생과 함께 나의 선대에 사위로 들어와서 그대로 나주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바로 성균생원 김효상(金孝祥)의 사위이다. 고조의 휘는 현민(顯民)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철형(鐵衡)으로 선무랑(宣務郞) 사옹원 직장(司甕院直長)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징(澄)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복수(福壽)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배위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종사랑(從仕郞) 관(寬)의 따님으로, 명나라 만력(萬曆)기원 계유년(1573, 선조6) 정월 24일에 공을 나주(羅州)의 치소 남쪽 마산면(馬山面) 귀업리(龜業里) 별장에서 낳았으니 실로 우리나라 선묘조(宣廟朝) 6년이다.공의 휘는 시립(時立), 자(字) 【▣】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기백과 풍도가 범상치 않았다. 성동(成童) 때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의기가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국운이 중도에 비색(否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댔고, 6년이 지난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왜적이 양호(兩湖)204)를 유린했다. 공의 일가 부자형제는 모두 적의 흉포한 칼날에 희생되었는데, 오직 공 한 사람이 천지가 화를 당한 가운데서도 생명을 겨우 홀로 보존하였다. 공은 이 때 나이 겨우 20여 세였는데 부모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영 옆에 귀장(歸葬)하고 3년 거상(居喪)하면서 예절을 벗어나지 않았다.【'유(踰)'가 어떤 본에는 '위(違)'로 되어있다.】상을 마친 뒤에는 비분강개하여 무예에 뜻을 두고 문묵(文墨)에는 자잘하게 마음을 두려 하지 않았으니 대개 뜻한 바가 있어서였다. 4년이 지난 계묘년(1603, 선조36)에 국가에서 정시(廷試)를 치러 인재를 취할 때 공이 이 선발에 발탁되어 끼게 되었으니 전라병사(全羅兵使) 신경유(申慶裕)의 방하(榜下)였다.205)광해군 6년 계축년206)에 공은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었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11)에 남도보 만호(南挑堡萬戶)로 제수되었고 신유년(1621, 광해13)에 체직되었다. 당시는 혼암한 조정이라서 권귀(權貴)들이 권력을 농락하고 여우처럼 아첨하는 자들이 요직을 담당하니 아부하여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공이 홀로 호연히 초탈한 뜻을 갖고 선공(先公)이 경영하던 삼향(三鄕)의 별장으로 물러날 것을 결정하여 서호(西湖)의 물가에 집을 지었다. 세상일은 사절하고 휘파람불고 읊으면서 몸을 마치도록 변치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건너간207)지 4년 만에 위청(僞淸)이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고 개원(改元)208)하였는데, 순치(順治) 6년 무자년209) 6월 29일 삼향(三鄕)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 76세였다. 이 해 모(某) 월일에 화산(華山)의 선영에 귀장(歸葬)하였는데 묘역은 같으나 묘혈은 달리 하였고 모좌(某坐) 모향(某向)의 언덕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과단했으며 의연히 뜻을 세운 바가 있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 하며 소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도에 불행을 만나서 한 집안의 부자(父子)가 전부 왜적의 손에 함몰되자 분연히 불공대천의 원수로 삼고 마침내 무예(武藝)로 몸을 일으킨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작은 데 있었겠는가? 그러나 호산(湖山)에서 초탈하게210) 마치고 말았으니 아! 애석하도다.우승지 한호(閑好) 임련(林堜)211) 영공이 시를 지어 공을 애도하기를 "소년 시절에 붓을 던지고 봉후(封侯)에 뜻을 두고서,212) 남북의 비린내와 먼지213)를 깨끗이 소탕하려 했다네. 애석하다 초나라 벽옥214)을 알아주는 이 없으니, 차질을 빚어 흰머리 되도록 끝내 이루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그의 지조와 절개를 한 시대 사대부들이 추앙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공의 배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섬(暹)의 따님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열(悅)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학생 홍검(弘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보다 8년 먼저 세상을 떴다. 다음은 흘(忔)·협(協)·수견(秀堅)인데 후사가 없이 요절하였다. 막내아들 흡(恰)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학생 윤(玧)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학생 나치소(羅致素)에게 시집을 갔는데 보은 현감(報恩縣監) 덕준(德峻)의 아들이다. 손자는 5남으로 유원(有源)·차일(次一)·후일(後一)은 장남 열(悅)의 소출이다. 후원(厚源)·달원(達源)·국일(國一)은 막내아들 흡(恰)의 소출이다. 손녀는 셋이다. 장손녀(長孫女) 하나는 사인(士人) 김숙(金俶)에게 시집을 갔고, 하나는 선전관(宣傳官) 최원립(崔元立)에게 시집을 갔고, 하나는 유학(幼學) 김상겸(金尙兼)에게 시집을 갔다. 계손녀(季孫女)는 몇이다.유원(有源)은 전취(前娶)가 당악 김씨(棠岳金氏) 학생 태협(泰浹)의 딸이고, 재취(再娶)는 조양 임씨(兆陽林氏) 첨지(僉知) 시윤(時潤)의 딸이다. 지금 적손(適孫)으로서 거상(居喪) 중인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으며 문장이 남보다 뛰어났다. 차일(次一)은 먼저 요절하였고, 후일(後一)은 아직 미혼이다. 후원(厚源)은 금성 오씨(錦城吳氏) 학생 이망(以望)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달원(達源)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유학(幼學) 상의(尙倚)의 딸에게 장가들었다.측실에 5남 1녀가 있는데 첫째는 수()·둘째는 경(憬)·셋째는 운(惲)·넷째는 칙(恜)·다섯째는 변(忭)이다. 딸은 김덕승(金德昇)에게 시집갔다. 집에서 유원(有源)씨가 손수 기록한 가장(家狀)에 따라 대략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영해215)의 신령한 기운과방장216)의 순정한 정신 지녔으니공은 백대토록그 향기 영원하리라의연히 굳세고 과감하며걸연히 빼어나고 특출했는데칠순을 호수와 산에서맑은 복을 누렸구나신세를 돌아보니육십에도 한관이라사람들이 공을 애석해 했으나공은 도리어 편안히 여겼네화산의 옛 언덕금리의 새 묘도에사라지지 않은 영혼이 계셔서천만년 함께 하리라 吾鄕之禦侮將軍萬戶梁公下世之後。 襄事將有日。 公之適孫孤有源甫。 屬于不佞以相樹誌之使。 不佞以情義分密。 莫能辭。 略誌顚末。 以備不朽之萬一。 竊按東韓史鎖。 梁氏之先。 出于耽羅。【缺】婦之種。 遂爲梁係之鼻祖。 史氏已書于傳紀。 昭然若日月而照于東土人耳目。 又何强記? 逮至後昆。 有諱泰始公仕于百濟。 世居帶方。 賜貫龍城。 其後移居于光山。 至公曾王父直長公。 與六峯朴先生祐。 贅入于吾先代。 仍居于羅州。 乃成均生員金孝祥之女婿也。 高王父諱顯民通訓大夫弘文館典翰。 曾王父諱鐵衡宣務郞司甕院直長。 王父諱澄贈通訓大夫軍資監副正。 考諱福壽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配坡州廉氏從仕郞寬之女。 以皇明萬曆紀元癸酉正月二十四日。 生公于羅州治南馬山面龜業里別墅。 實我國宣廟朝六年也。 公諱時立字【缺】。 公生有美質。 氣度不羣。 自在成童。 儼有成人之意氣。 及至壬辰之歲。 國祚中否。 島夷外狺。 越六年丁酉。 賊兵蹂躙兩湖。 公之一家父子兄弟盡衂兇鋒。 惟公一人僅獨保生於乾坤瘡痏之中。 公時年才二十有餘。 收拾父母軆骸。 歸葬于先塋之側。 居憂三年。 不踰【一作違】禮節。 服闋慨然以弓馬爲意。 不肯屑屑留心於文墨之上。 盖意有所在也。 越四年癸卯。 國家設廷試取人。 公擢參是選。 全羅兵使申慶裕榜下也。 至光海六年癸丑。 除公守門將。 加資禦侮將軍。 己未除南挑堡萬戶。 辛酉遞職。 時當昏朝。 權貴弄柄。 狐媚當途。 阿幸市利者盈路。 而公獨浩然脫意。 卜藏于先公所營三鄕別業。 築室于西湖之涯。 謝絶世事。 嘯詠自許終其身而不變。 至皇明南渡四年。 僞淸僭號改元。 順治六年之戊子六月二十九日。 卒于三鄕第。 享年七十六歲。 是年某月日。 歸窆于華山先塋。 同兆異穴。 某坐某向之原。 公自小少。 聰明果斷。 毅然有立。 疾惡好善。 不拘小節。 中遭不幸。 一家父子全陷于賊手。 憤然以爲不共戴天之讎。 而竟以弓馬發身者。 志豈在小? 而本以湖山實4)宕見終。 嗚呼惜哉! 右承旨林閑好令公堜作詩挽公曰: "少年投筆封侯志。 南北腥塵擬掃淸。 可惜無人知楚璧。 蹉跎白首竟無成。" 盖其志槩。 爲一時士大夫所推許者如此。 公配全義李氏通禮院引儀暹之女。 有丈夫子五女子一。 長曰悅娶南平文氏學生弘儉之女。 先于公八年而卒。 次曰忔曰協曰秀堅。 無後而夭折。 季曰恰娶利川徐氏學生玧之女。 女適學生羅致素。 報恩縣監德峻之子。 孫男五人曰有源曰次一曰後一。 長子悅之出。 曰厚源曰達源曰國一。 季子恰之出。 孫女三。 長孫女一適士人金俶。 一適宣傳官崔元立。 一適幼學金尙兼。 季孫女幾。 有源前娶棠岳金氏學生泰浹之女。 再娶兆陽林氏僉知時潤之女。 今以適孫居憂。 博聞强記。 英藻過人。 次一先夭。 後一未娶。 厚源娶錦城吳氏學生以望之女。 達源娶光山金氏幼學尙倚之女。 側室子五人女子一。 一曰二曰憬三曰惲四曰恜五曰忭。 女適金德昇。 家旣仍有源甫手錄之狀。 略叙而係之銘。 銘曰: 瀛海靈氛。 方丈精純。 惟公百代。 乃永厥芬。 毅然剛果。 傑然英特。 七旬湖山。 能享淸福。 顧閱身世。 六秩寒官。 人爲公惜。 公反爲安。 華山舊隴。 錦里新阡。 不泯者存。 於千萬年。 대방(帶方) 전라도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용성(龍城) 역시 전라도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육봉(六峯) 박우(朴祐) 육봉은 박우(朴祐, 1476~1547)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방 (昌邦)이다. 151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승지·강원도 관찰사·개성 유수 등을 지냈다.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를 말한다. 신경유(申慶裕)의 방하(榜下)였다 '신경유(申慶裕)'는 '신경유(申景)'의 잘못인 듯하다. '방하'는 같은 방(榜)에 하위로 급제한 사람을 가리킨다. 《선조수정실록》 1603년 1월 1일 기사에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과(文科) 이명준(李命俊) 등 10인과 무과(武科) 신경유(申景) 등 1천 6백여 인을 선발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광해군 6년 계축년 원문에 '光海六年癸丑'으로 되어 있으나 광해군 6년은 계축(癸丑)이 아니고 '갑인(甲寅)'이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건너간 1644년 북경이 청(淸)에 의해 함락되자 명(明) 왕실의 일족이 화중 (華中)·화남(華南)에 남명(南明)을 세운 것을 말한다. 위청(僞淸)이……개원(改元) '위청(僞淸)'은 청(淸)나라를 거짓된 왕조로 폄칭한 것이다. '개원'은 연호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순치(順治) 6년 무자년 '순치(順治)'는 청(淸)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644~1661년이다. 순치 6년은 기축년(1649)이고, 무자년(1648)은 순치 5년이다. 연호와 간지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호산에서 초탈하게 끝마쳤으니 원문의 '本以湖山實宕見終'에서 '本'의 뜻은 미상이다. '實'은 '佚'의 잘못인 듯하다. 한호(閑好) 임련(林堜) 한호(閑好)는 임련(林堜, 1589~1648)의 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동야(東野)이다. 사간·집의·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붓을……두고서 문(文)을 버리고 무(武)에 종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반초전(班超傳)〉에 "반초는 집안이 가난해 항상 관리에게 고용되어 글 써주는 일로 먹고 살아 오랫동안 수고로웠다. 한번은 일을 그만두고 붓을 던지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다른 뜻과 지략이 없으면 오히려 부개자와 장건을 본받아 이역에서 공을 세워 봉후의 자리에 올라야 하거늘, 어찌 오래 붓 잡는 일에 종사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超家貧, 常爲官傭書以供養, 久勞苦. 嘗輟業投筆, 歎曰, 大丈夫無他志略, 猶當效傅介子張騫立功異域, 以取封侯, 安能久事筆硯間乎.]" 하였다. 비린내와 먼지 원문의 '성진(腥塵)'으로,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오랑캐를 가리킨 것이다. 초나라 벽옥 '초벽(楚璧)'은 양시립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초왕(楚王)에게 바쳤다는 보옥(寶玉)을 가리킨다. 《韓非子 和氏》 영해(瀛海) 큰 바다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이러한 주가 아홉 개가 있고 영해가 그 밖을 에워싸고 있다.[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하였다. 방장(方丈) 신선이 산다는 산이다. 《史記 秦始皇本紀》 實 '佚'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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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3 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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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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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의 맑은날 이내 冠岳晴嵐 뜬 이내 푸른 빛 짙으니비 갠 뒤 산허리를 휘감고 있네누가 새로 단장하게 하였나나비 눈썹을 –원문 2자 결락-177) 浮嵐積翠華雨後縈山腹誰使凝新粧蛾眉【二字缺】得 원문 2자 결락 '得'은 원문의 관계로 번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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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론〉에 대한 반론 反春秋論論 내가 생각건대 노천 소씨(老泉蘇氏)1)의 〈춘추론(春秋論)〉에 "위(位)는 공적(公的)인 것이요, 도(道)는 사적(私的)인 것이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을 이길 수 없다." 하였는데, 그 뜻은 '부자(夫子, 공자)가 비록 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지위는 얻지 못하였고 사적인 도는 공적인 것이 아니니, 한 사람의 사적인 것으로 천하의 상벌을 공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여긴 것이다. 마침내는 은연중에 스스로 해석하기를 "부자가 노나라에 천자의 권위를 빌려주고, 부자는 스스로 노나라 역사의 명칭을 빌려서 《춘추》를 지었다." 하였다. 나는 감히 그 설을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노소(老蘇)의 설은 잘못이다. 범인(凡人)의 소견으로 성인의 뜻을 역탐(逆探)하면서 에둘러서 교묘하게 왜곡하니 합당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아서 《춘추》의 본뜻을 크게 잃었다. 왜 그런가?천지에 통하고 사사롭지 않은 것을 덕(德)이라 하고, 고금에 달하고 크게 공정한 것[大公]을 도(道)라 한다. 도(道)를 사사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위(位) 또한 공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천지에 통하고 사사롭지 않기 때문에 덕이 천지에 합치하는 것이다. 고금에 달하고 크게 공정하기 때문에 도가 귀신에 합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夫子)는 천지이고 귀신인 것이다.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은 천지요, 변화하고 신묘하여 알 수 없는 것이 귀신이니, 나의 덕이 능히 그에 배합하다면 일개 작위(爵位) 따위는 얻어도 되고 얻지 못해도 되는 것이다.주공(周公)이 죽고 나니 대도(大道)가 서지 못했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이미 멀어지고 나니 왕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 난신적자들이 천하에 자취를 이으니 삼강(三綱)과 구법(九法)2)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무너지듯 하여, 천지가 천지답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자(夫子)가 천지처럼 우뚝 홀로 섰으니 부자께서 어찌 구구한 작위(爵位)를 혐의하여 도(道)로써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춘추》를 지은 것이다.그러므로 《춘추》의 법은 천지이고 귀신인 것이다. 천지와 귀신이 부자의 붓에 붙어서 상벌을 준 것이다. 부자가 상벌을 준 것은 바로 하늘이 상벌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요, 나를 죄 주는 것도 《춘추》이다."3) 한 것이다. 이것이 부자의 큰 뜻이다. 그런데 만약 '지위는 공적인 것이고 도는 사적인 것이다.'라고 한다면 걸왕(桀王)·주왕(紂王)·유왕(幽王)·여왕(厲王)4)이 공(公)이요 주공(周公)과 부자는 사(私)이니 옳겠는가.'부자가 노나라에 천자의 권위를 빌려주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 잘못을 볼 수 있다. 노나라의 체(禘)제사를 공자가 보려 하지 않은 것은5) 그것이 예(禮)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구나 천하를 상벌하는 권한을 노나라에 빌려주고 스스로 빌릴 수 있겠는가? 결단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하가 유도(有道)하면 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천하가 무도(無道)하면 도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는 천도 (天道)는 지성(至誠)하여 쉼이 없는 것이다.6) 그러니 나에게 있는 천도로써 하늘에 있는 명을 받들고 천하의 선악에 대해 상벌을 주어서 만세의 윤기(倫紀)를 바로잡도록 하늘이 부자에게 책임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을 알고서도 도리어 작위의 혐의 때문에 상천(上天)의 무거운 책임을 저버린다면 그것이 어찌 부자의 뜻이겠는가? 이 때문에 《춘추》를 지은 것이다.소자(蘇子)는 하찮은 소견으로 천지와 귀신을 역탐하여 추측하려다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사사로운 뜻으로 견강부회하고, 그럴듯한 설을 찾다가 되지 않자 노권(魯權)의 설7)을 가탁하여 성인의 뜻을 밝혀보려 했으니 아! 졸렬하고도 천박하도다. 내가 그래서 '범인의 소견으로 성인의 뜻을 역탐하여 《춘추》의 본 뜻을 크게 잃었다.'라고 한 것이다." 愚按老泉蘇氏春秋論曰: "位者公也。 道者私也。 私不勝公。" 其意以爲夫子雖有道未得其位。 私道而不公。 以一人之私。 公天下之賞罰非也。 卒乃隱然自解曰: "夫子借魯以天子之權。 夫子自借以魯史之名而作春秋。" 愚敢反其說而論曰: "老蘇之說非也。 以凡人之見。 逆聖人之意。 迂回巧曲。 不合不公。 大失春秋之本旨也何則? 通天地而不私謂之德。 達古今而大公謂之道。 道而可私。 位亦公乎? 通天地而不私。 故德合天地。 達古今而大公。 故道合鬼神。 然則夫子天地也鬼神也。 至大至廣。 不可名狀者天地也。 變化神妙。 不可知之者鬼神也。 吾之德能配合于彼。 則一箇爵位。 得亦可也。 不得亦可也。 周公旣沒。 大道不立。 文武已遠。 王綱墜地。 亂臣賊子。 接跡天下。 而三綱九法。 海渴山崩。 天地不得爲天地。 而夫子之天地卓爾獨立。 則夫子豈可以區區爵位之嫌而不援之以道乎? 此春秋之所以作也。 故春秋之法。 天地也鬼神也。 天地鬼神。 寓於夫子之筆而賞罰之。 其所以賞罰。 乃天賞罰之也。 故曰: '知我者春秋也。 罪我者春秋也。' 此夫子之大意也。 若曰: '以位爲公而道爲私。' 桀紂幽厲公也。 周公孔子私也。 而可乎? 至於借魯以天子之權者。 尤見其誤矣。 魯之禘。 夫子之不欲觀。 以其非禮也。 則况可以賞罰天下之權。 借魯而自借之歟? 決知其大不然也。 故天下有道則道在於人。 天下無道則道在於天。 在我之天。 至誠無息。 則以在我之天。 奉在天之命。 賞罰天下之善惡。 以正萬世之倫紀。 非天之所以責之夫子者耶? 知是責之在我而反以爵位之嫌。 負上天責任之重。 豈夫子之意耶? 此春秋之所以作也。 蘇子以煦煦小見。 逆測天地鬼神而不可量。 附會以私意。 求其說而不得。 假魯權之說而欲明聖人之意。 吁亦拙矣亦淺矣。 愚故曰: '以凡人之見。 逆聖人之意。 大失春秋之本旨也。'" 노천 소씨(老泉蘇氏) '노천(老泉)'은 소순(蘇洵, 1009~1066)의 호이다. 구법(九法) 《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가리킨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이다. 나를……춘추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이고, 나를 죄 주는 것도 《춘추》일 것이다.'라고 말했다.[春秋, 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 하였다. 걸왕(桀王)……여왕(厲王)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나라를 망하게 한 폭군(暴君)의 상징이고, 주(周)나라의 12대 유왕(幽王)과 10대 여왕(厲王)은 나라를 어지럽힌 혼군(昏君)의 상징이다. 노나라의……것은 《논어》 〈팔일(八佾)〉의 "체제사는 강신주를 따른 뒤로부터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禘, 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지성(至誠)하여……것이다 《중용장구》 제26장에 "그러므로 지성은 쉼이 없으니, 쉬지 않으면 영구하고 영구하면 징험이 나타난다.[故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하였다. 노권(魯權)의 설 공자가 '노나라에 천자의 권위를 빌려주었다[借魯以天子之權]'는 설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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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횡론 田橫論 내가 살펴보건대, 전횡(田橫)8)이 2빈객과 500명의 사(士)를 데리고 섬으로 들어갔을 때 한(漢)나라가 왕후(王侯)로 예로 부른 것은 그가 혹 난을 일으킬까 우려해서였다. 이에 전횡이 역마를 타고 낙양(洛陽)에 이르렀는데 조정에 도착하기 30리 전에서 자살하였다. 그가 자살한 뒤 2빈객과 사(士) 500사람도 모두 자살하였다. 가령 502사람이 목숨을 버리면서 의리를 취하여 죽음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여러 전씨(田氏) 종족들은 이미 멸망했고 전횡도 세울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저 502사람은 무슨 바랄 것이 있어 그 의리를 이룰 수 있겠는가. 호인(胡寅)의 《독사 관견(讀史管見)》9)에 이른바 "어떤 것을 위하는 바가 없이 행하였으니 참된 의사(義士)이다."10)라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비록 그렇지만 나는 일찍이 그 중도를 잡아 논하여 "전횡의 죽음은 높다고 할 만하고, 사(士)의 죽음도 의롭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저 전횡은 제(齊)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건(建)11)의 객들이 부른 송백(松栢)의 노래는 천년 후에도 사람의 이목이 살펴보는 바로 매우 답답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데 더구나 전횡의 경우이겠는가?전횡의 현명함으로 502사람의 의리를 믿고서, 패공12)이 의리를 붙들어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던 날에 검을 차고 황하를 건너 자방(子房)·소하(蕭何)·조참(曹參)13)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관대한 장자14)의 대업을 도와 이루고, 함곡관을 점거하여 한 번 호령하며 송백(松栢)과 아사(餓死)의 치욕을 씻고, 연후에 서책(署冊)에 이름을 나열해 쓰며 금궤(金櫃)15)의 맹약을 하고, 제나라 한쪽 지방에서 왕 노릇하면서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16) 전씨의 조종(祖宗)으로서 백세토록 제사를 받아먹었다면,17) 사람들 가운데 누가 대장부라 하지 않았겠는가?이렇게 하지를 않고 사나운 조무래기들과 일을 함께 하다 끝내는 전복되고 말았다. 이는 왕릉의 어미18) 같은 일개 부녀자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인데 전횡은 하였단 말인가? 설사 전횡이 한(漢)나라를 미처 섬기지 못하여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온 제나라 70여 성이 한신(韓信)의 손에 한 번 깨져서 나라가 멸망하고 군주는 죽어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니, 전횡의 큰 원수로서 한(漢)나라 또한 진(秦)나라와 같은 것이다. 전횡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통곡하며 하늘에 부르짖고 복수를 기약하면서 500인의 목숨을 내놓은 의사들과 연계해 십이(十二)19)의 강력한 제나라의 변경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다면, 백만의 무리도 한 번 호령하여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견고한 사방의 요새를 등지고 임치(臨淄)20)에서 예의를 갖추면서 천하의 선비들을 초치하고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에 격문을 전하여 의를 떨쳐 서쪽으로 갔다면, 그 당시 중원의 병사들은 유방과 항우가 서로 백전백패하는 나머지 피폐해져 부상에 신음하는 소리가 사방에 달했고, 팽왕(彭王)의 변란21)에 황제가 직접 출정을 하였으나 조(趙)나라와 대(代)나라 변경의 부대가 하나도 조정의 부름에 오지 않았으며, 백등(白登)의 포위22)에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손을 거두어 계책을 낸 바도 없었으니, 더구나 돌진해오는 500 의사(義士)들의 예봉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했다면 한 나라와 제 나라의 자웅은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오호라, 전횡의 현명함으로도 계책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가? 가령 천명과 인심이 이미 한(漢)나라로 돌아가서, 사람의 지모가 비록 훌륭한들 어쩔 수 없더라도 마땅히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 복수의 대의에 죽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漢)나라 사신을 한 번 만나보고는 '크게는 왕을 시켜주고 작게는 제후를 시켜주겠다.'23)는 이끗에 유혹되어서 천리를 역마를 타고 가면서 명을 받드는데 분주하다가, 계책이 바닥나고 형세가 곤궁해진 뒤에야 구독(溝瀆)에서 칼에 엎드려 죽었으니 이 무슨 의리인가. 내가 그러므로 "전횡은 작은 은혜로 인심을 결집한 일은 있으나, 그 대의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하는 것이다. 삼가 논한다. 愚按田橫以二人客五百士。 入于島。 漢招以王侯之禮。 盖慮其或作亂也。 橫乘傳至洛陽。 未及朝三十里死之。 死之後。 二人者與士五百皆自殺。 夫使五百二人。 捨生而取義。 視死如歸。 諸田宗已滅而橫亦無後可立。 彼五百二人者。 有何所望而能成其義歟? 胡管見所謂無所爲而爲之。 眞義士也者。 是也非耶? 雖然愚嘗執其中而論之曰: "橫之死。 可謂高矣。 士之死。 亦可謂義矣。" 彼橫者齊之公子也。 建客松栢之歌。 使千載下。 耳目所照。 莫不絶悒。 况橫者耶? 以橫之賢。 挾五百二人之義。 當沛公扶義入關之日。 仗劒渡河。 與子房蕭曹共肩而贊成寬大長者之業。 據關一號。 雪松栢餓死之恥。 然後列書署冊。 金櫃之盟。 王齊一方。 南面稱孤。 使田氏之宗。 血食百世。 則人誰不曰大丈夫哉? 此之不爲。 與慓悍小兒同事。 竟致顚覆。 此王陵母一婦女所羞而橫爲之耶? 設使橫未及事漢。 而事已至此則全齊七十餘城。 一破於韓信之手。 而國滅君亡。 宗廟邱墟。 橫之大讎。 漢亦秦也。 爲橫之計。 當痛哭號天。 期以復讎。 連五百之死士。 入據十二强齊之境。 則百萬之衆。 可一呼而得矣。 負四塞之固而揖讓臨淄之上。 以致天下之士。 傳檄韓魏。 奮義而西。 則當其時。 中國之兵。 罷於劉項百戰百敗之餘。 呻痛瘡痍之聲。 達于四境。 彭王之變。 帝自出征。 而趙代邊兵。 一不庭召。 白登之圍。 蕭曹斂手。 計無所出。 則况可當於五百義士衝突之鋒耶? 然則漢齊雄雌。 未可必矣。 嗚呼! 以橫之賢。 計未及此耶? 假使天命人心已歸於漢。 人謀雖臧。 無可奈何。 則當背城一戰。 死於復讎之大義可也。 一見漢使。 誘於大王小侯之利。 千里乘傳。 奉命奔走。 至於計縮勢竆然後。 伏劒溝瀆。 是何義耶? 愚故曰: "橫以小惠結人心則有之。 不聞其大義也。" 謹論。 전횡(田橫) 전횡은 조카인 제왕(齊王) 전광(田廣)이 한신(韓信)에게 사로잡혀 죽자 자립하여 제왕이 되었다. 얼마 뒤 한 고조 유방이 황제가 되니, 전횡은 주벌될까 두려워 500여 명의 무리와 바다 섬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유방이 사신을 보내 전횡의 죄를 용서하고 부르기를 "전횡아, 오너라. 크게는 왕으로 봉하고 작게는 후(侯)로 봉하겠지만,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주벌하겠다."라고 하였다. 전횡이 이에 빈객 두 사람과 낙양으로 가다가 30리를 남겨 두고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한왕(漢王)과 나란히 왕이라 칭하다가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망국의 포로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으니, 너무도 부끄럽다."라고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수급을 바치게 하였다. 한 고조가 왕자의 예법으로 전횡을 장사 지내 주었다. 두 빈객과 섬에 있던 500명도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권94 田儋列傳》 호인(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 원문의 '호관견(胡管見)'으로, 송(宋)나라의 학자인 호인(胡寅)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주요 사건마다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독사관견(讀史管見)》 30권을 엮었다. 어떤……의사(義士)이다 사심 없이 오직 의리에 따라 행동한 것을 말한다. 예양(豫讓)의 고사를 말한다. 예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았는데,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쳐서 멸망시키자,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양자에게 잡히자 자결하였다. 《史記 권86 刺客列傳 豫讓》 건(建)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자로 비무극(費無極)의 참소를 당해 쫓겨나서 객사한 건(建)을 말한 듯하나 확실치 않다. 《春秋左氏傳 昭公27年》 패공(沛公)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의 칭호이다. 패(沛)에서 기병(起兵)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자방(子房)·소하(蕭何)·조참(曹參) 세 사람 모두 한(漢)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으로, 그의 자가 자방이다. 관대한 장자[寬大長] 한고조 유방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지금 항우는 강하고 사나우니 지금 항우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패공만이 관대한 장자이니 그를 보내야 합니다.[今項羽彊悍, 今不可遣. 獨沛公素寬大長者, 可遣.]" 하였다. 금궤(金櫃) 금으로 만든 궤로, 옛날에 중요한 문서나 물건을 보관하던 곳인데, 흔히 공신들의 녹권을 보관하는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 하〉에 "또 공신들과 부절을 쪼개어 서사를 지어서 단서 철계를 금궤 석실에 봉함하여 종묘에 갈무리했다.[又與功臣剖符作誓, 丹書鐵契, 金櫃石室, 藏之宗廟.]" 하였다.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 군주가 된다는 말이다. 남면은 군주는 조정에서 북쪽에 앉아 얼굴을 남쪽으로 향했으므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하고, 고(孤)는 제후가 자신을 가리키던 호칭이므로 역시 군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받아먹었다면 원문의 '혈식(血食)'으로, 희생(犧牲)을 잡아 생육(生肉)을 바쳐 제사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제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왕릉(王陵)의 어미 유방이 항우와 패권을 다툴 때에 왕릉이 유방의 편이 되었다. 항우는 이에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에 붙잡아 두었다. 왕릉의 사자(使者)가 항우의 진영으로 오자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심부름꾼을 보내 "'한왕(유방)은 장자이다. 늙은 나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아라. 내가 죽음으로써 심부름꾼을 보낸다.' 하고는 칼에 엎드려 죽었다. 항우는 노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아 죽였다. 왕릉은 마침내 한왕을 따라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하였다. 《史記 권56 陳丞相世家》 십이(十二) 10분의 2라는 뜻으로 천혜의 요새지임을 말한다. 《사기》 고조기(高祖紀)에 "(제나라는) 땅은 사방으로 2천 리나 되고 제후국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제후국의 군사가 1백만이라면 10분의 2인 20만의 군사만으로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地方二千里, 持戟百萬, 縣隔千里之外, 齊得十二焉.]" 하였다. 임치(臨淄) 전국 시대 제(齊)의 수도이다. 팽왕(彭王)의 변란 '팽왕'은 팽월(彭越)을 말한다.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공신인 한신(韓信)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史記 권90 彭越列傳》 백등(白登)의 포위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묵특 선우(冒頓單于)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는데, 도리어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동안 흉노의 30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선우의 부인 연지(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겨우 포위에서 벗어났다. 《史記 권93 韓信列傳》 크게는……시켜주겠다 한 고조가 전횡에게 사신을 보내 회유하기를 "전횡은 오라, 크게는 왕을 시켜주고 작게는 제후를 시켜 주겠다[田橫來, 大者王, 小者乃侯耳.]" 하였다. 《史記 권94 田儋列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지는 해 우연176)에 가까이 가니일말의 남은 빛 붉어라황혼이 가깝다고 말하지 마라하늘 가에서 달맞이하기 좋으니 落照迫虞淵餘光紅一抹莫道近黃昏天邊好邀月 우연(虞淵) 해가 지는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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