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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39)의 은전을 청하는 소장 5대손 정근이 짓다. 請不祧典疏 五代孫瑾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전(禮典)은 그 한계가 정해져 있어서 봉사 대수가 다하면 마땅히 조천(祧遷)40)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도덕이 있는 사람과 공렬이 있는 신하는 백 대라도 반드시 제사를 지내니, 혹 임금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혹 문묘의 성무(聖廡)에 올라 제사를 받고 혹은 사원에서 높이 받들면서 또한 그 자손으로 하여금 영세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전형이 되어 국가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신이 다만 이에 대해 감회가 없지 않기에 외람되고 주제 넘는다는 비난을 피하지 않고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서 전하 앞에서 우러러 호소하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신의 5대조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 장렬(壯烈)과 높은 공로는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충렬공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백중(伯仲)이 되어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더구나 신의 조상에게는 더욱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선조 때 불행하게 국가에 난리가 많았는데, 관북 지방이 더욱 독한 화를 입었습니다. 토적(土賊)이 왜적을 안내하여 두 왕자 및 두서너 대신을 사로잡아 보내어 왜적에게 아첨을 하였습니다. 이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이어 유린하니 철령 이북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신의 조상이 한낱 평사(評事)로서 군사 6천 명을 모집하여 먼저 역적을 죽이고 힘을 합쳐 여러 곳에서 싸워 오랑캐를 추격하여 내쫓았으며 그 위엄으로 말갈을 항복시켰으니,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22개 고을을 항복받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만력 이래 선무 제장(宣武諸將)들이 하지 못한 바입니다.예를 들면, 장평(長坪)에서 승리할 때 싸우며 흘린 피가 강을 벌겋게 물들였고 쌍포(雙浦)에서 승리할 때 흉갑(兇甲)들이 별처럼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길주성(吉州城)을 겹겹으로 포위하였을 때와 단천(端川)에서 크게 쳐부수었을 때는 시체가 길에 가득하고 왜적의 우두머리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백탑교(白塔郊)에서 크게 무찌를 때에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어 한 척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비록 용맹한 청정(淸正)이라도 아침밥을 해먹고 겨를도 없이 시체를 태우고 갑옷을 끌며 밤을 틈타 멀리 달아났는데, 앞뒤로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이 수천 급(級)에 가까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받은 이래로 이것이 제일 큰 승리'라고 칭송하였습니다.그의 정충(貞忠)과 장렬(壯烈)이 저같이 탁월하며, 국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사람의 귀와 눈에 분명합니다. 또한 선배들의 공론으로 살펴보건대, 고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의 〈북관지(北關誌)〉에 이르기를 "국세필(鞠世弼) 등 반란을 일으킨 괴수 세 역적을 통쾌하게 죽였으며, 청정(淸正)을 크게 토벌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크게 승리하여 다섯 차례 승리하여 예전 왕의 선조들이 살던 강토를 오랑캐에게 함락되지 않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관을 안찰할 때에 계(啓)를 올리기를 "왜적과 북쪽 오랑캐가 함께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의 침입을 받았는데, 매번 싸우면 반드시 승리해서 강토를 수복하였으니 마땅히 백 대에 제향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그 사당에 사액을 내리게 되었습니다.고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북관은 윤관(尹瓘)이 처음으로 구성(九城)을 둔 이후로 3백 년 뒤에 몽고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김종서(金宗瑞)가 그 땅을 회복하여 드디어 육진을 설치한 뒤로 160여 년 만에 또다시 왜적의 손에 들어갔는데 정문부가 크게 일어나 깨끗이 쓸어버려 그 땅을 회복하였으니, 이 세 사람의 공이 같습니다."라고 하고서, 인하여 윤관의 사당에 함께 제향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말하기를 "먼저 역적 국세필을 참수하여 목을 내 건 다음에 조리돌렸으며 왜장 청정(淸正)을 토벌하고 그 군현을 회복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품계를 뛰어 넘어 증직을 청하니 이상(貳相)의 증직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고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그의 시장(諡狀)을 지으면서 "적을 요리하기를 신처럼 하니 사람들이 그에게 쓰이기를 즐거워하였다. 수천 명의 고립된 군사로써 백 만의 강한 왜적을 물리쳤으니 비록 옛 명장들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뛰어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사원을 세워야 되는지의 여부를 묻는 하문(下問)에 힘써지어야 한다고 찬성하면서 "일찍이 임진년 격문을 읽고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였는데, 옛날에 '큰 난을 항쟁한 자는 제사를 지낸다.'41)는 문장이 있으니, 의병을 처음 일으킨 땅에서 그를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또 《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북관의 난을 평정한 일에 대해 대강(大綱)을 세우고 조목(條目)을 펴니 논설이 매우 자세합니다. 그 가운데 이르기를 "대개 관북을 평정한 것은 다 정문부의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숙종 계사년(1713년, 숙종 39)에 특지로서 시호의 은전을 내렸는데 시호를 '충의(忠毅)'라 하였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공론이며 또한 조정에서 신의 조상이 세상에 드문 공렬을 세운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미 선무 일등 녹권에 들어갔고 또한 창렬사(彰烈祀)에서 백 대에 제향을 받으니, 조정에서 그 공에 융숭하게 보답한 뜻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삼가 생각해보건대, 신하 가운데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자는 반드시 제사지내되 영세토록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은 실로 교화를 수립하고 후대를 권장하는 방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헌, 고경명 같은 충렬은 국가에서 그 봉사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하지 않도록 특별히 허락하였으니 즉 신의 조부에게도 반드시 아끼지 않았을 것인데, 다만 후손이 불초한 탓으로 조정에 알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지난 갑진년 무민공(武愍公) 황진(黃璡)42)은 그 자손이 글월을 올린 것을 인하여 훈신이 예로서 특별히 명하여 조천하지 않도록 명을 받았으니, 이것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시행한 최근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인 전하께서는 신의 조부 정문부의 공렬이 저처럼 성대하니, 조헌 · 고경명 · 황진의 예에 의거하여 봉사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하지 말 것을 특별히 명하여 주십시오. 삼가 천은을 입어 이처럼 아룁니다.전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회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伏以臣竊伏念國家祀典, 厥有定限, 親盡當祧, 而苟有道德之人, 勳烈之臣, 百世必祀, 則或配享於廟庭, 或躋侑於聖廡, 或崇奉於祠院, 而亦使其後子孫, 永世不祧。此爲勻石, 載垂邦典, 臣獨不無區區所懷, 玆不避猥越之誅, 冒萬死, 仰籲於法駕之前, 以冀垂察焉。 臣之五代祖贈左贊成忠毅公臣文孚之貞忠大節, 壯烈巍勳, 與文烈公臣趙憲忠烈公臣高敬命, 相爲伯仲, 小無異同, 而況且臣祖則尤有大焉。粵在宣廟朝, 不幸國家多難, 關北一方, 偏被毒禍, 土賊嚮導, 擄送兩王子及二三大臣, 以媚于賊。于時藩胡, 又從而蹂躙, 鐵嶺以北, 非國家之有, 而臣祖以一介評事, 募兵六千, 先斬叛民, 戮力轉戰, 擊逐卉服, 威伏靺鞨, 旬月之間, 盡服卄二州, 此實萬曆以來, 宣武諸將之所未有也。若其長坪之捷, 戰血川赤, 雙浦之勝, 兇甲星遁, 吉城之重圍, 端川之大鏖, 僵尸載路, 賊酋破膽。至於白塔郊之大衂, 射矢如雨, 隻輪不返, 雖以淸正之驍雄, 亦不暇朝炊, 焚尸曳甲, 乘夜遠遁, 前後獻馘, 殆近數千級, 世皆稱'被倭以來, 此爲第一勝着。' 其貞忠壯烈, 如彼卓越, 昭載國乘, 照人耳目。又以先輩公議觀之, 故大提學臣李植〈北關誌〉曰: "快斬鞠世弼叛魁三賊, 大討淸正, 五次快捷,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故相臣閔鼎重按北關也, 啓曰: "倭胡交亂, 腹背受賊, 每戰必捷, 收復舊土, 宜受百世之享。" 遂致宣額於其祠。故相臣李端夏曰: "北關, 自尹瓘始置九城, 而三百年後, 入於蒙古部。金宗瑞復其地, 遂置六鎭, 百有六十餘年, 又入於倭奴, 鄭文孚大擧廓淸, 又復其地, 三人之功, 一也。" 仍請幷享於尹瓘之廟。故相臣鄭太和曰: "先斬鞠賊, 梟首以徇, 聲討淸酋, 復其郡縣。" 亦請超品贈職, 而至贈貳相。故判書臣閔鎭厚, 作其諡狀曰: "料敵如神, 人樂爲用, 以數千孤軍, 却百萬强寇, 雖古名將, 何以過此。" 先正臣文正公宋時烈, 仍立祠當否之問, 力贊以成, 謂以'嘗讀壬辰檄文, 想像其爲人, 古有抗大難則祀之之文, 俎豆於首事之地, 夫孰曰不可。' 又於宣廟寶鑑, 以北關靖亂事, 立綱敍目, 論說甚詳, 而亦曰: "大抵平定關北, 皆鄭文孚之力也。" 肅廟朝癸巳, 以特旨降易名之典而諡曰: '忠毅', 此皆擧國之公論, 而亦有朝家之表章臣祖有此不世之功烈, 旣入於宣武一等之券, 又享於彰烈百世之祀, 則朝家崇報之意, 可謂至矣。第伏念人臣之有大勳勞於國家者, 必祀之不祧永世者, 實出於樹風聲勸來世之方。故如趙憲高敬命之忠烈, 特許其親盡不祧, 則亦於臣祖, 不必靳持, 而只緣後孫之不肖, 未及登聞於朝家之故也。向於甲辰, 武愍公臣黃璡, 因其子孫之上言, 以勳臣例, 特命不祧, 此則聖明已行之近例也。伏乞天地父母, 特命臣祖文孚之勳烈, 如彼其盛, 一依趙憲高敬命黃璡之例, 特命親盡不祧事。伏蒙天恩謹啓。傳曰: "令該曹回啓事。" 부조 묘제(廟制)에 있어서 일정한 대수(代數)가 지나면 조(祧)라고 하여 그 신주(神主)를 묘(廟)로 옮기는 것인데, 공덕이 특출한 인물의 신주는 이를 특별히 취급하여 대수가 지나도 천조하지 않는다. 이를 부조 또는 불천(不遷)이라고 한다. 조천 묘(家廟)에서 제사를 받드는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神主)를 살아 있는 자손 중의 장방(長房)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큰……지낸다 《예기》 〈제법(祭法)〉에 보이는 말이다. 황진 1542~1606.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으면서 몽진(蒙塵)한 선조를 잘 보필하여 그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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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의 사액을 청하는 글을 올릴 때 순찰사 이공 시원의 제사 靑巖祠請額呈狀時巡察使李公【是遠】題辭 삼가 《창렬지(彰烈誌)》와 《채순록(採詢錄)》을 펼쳐 그 당시의 승전보(勝戰譜)과 계문(啓聞)을 읽고서 제현이 절개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것을 상상하니 마땅히 천 년 뒤에도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머리털이 관을 찌를 것이다. 더구나 청암(靑巖)은 맨 먼저 창의를 도모한 땅인데, 이미 조두(俎豆)와 시축(尸祝)을 지낸 곳이 있었으나 사액을 베풀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다. 만약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으로 하여금 오늘날 다시 태어나게 한다면, 어찌 숨겨진 공덕과 업적을 가려둔 체로 놔두고서 드러내지 않겠는가.전 순찰사의 제사에서도 또한 '성세(聖世)의 은전에 흠결이 되니 반드시 공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비문을 휴대하고 간 일은 즉 아마도 제공(諸公) 사이에 찬양받아 마땅한데, 노봉과 택당이 마치지 못한 안(案)을 마치려고 하는 것 같으니, 이른바 '일단 기다린다.[姑俟]'라는 두 글자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謹按《彰烈誌》《採詢錄》, 讀其時奏捷與啓聞, 想諸賢立慬之節, 當使千載之下, 淚滿襟而髮衝冠。況靑巖, 首謀之地, 旣有俎豆尸祝之所, 而未蒙宣額之典, 若使老峰澤堂, 復作於今日, 則豈使潛德幽光, 揜翳而不彰乎。前使之題, 亦以爲'聖世之欠典, 必有公議,' 至有碑文攜去之事, 則似當揄揚於諸公間, 以卒老峰澤堂未了之案, 則其所謂姑俟二字, 似不偶然向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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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卒章。絜矩之義。人以爲矩者。爲方之器。以矩度物而爲之方平者也。蓋人之以己心度物心。正類是也。是如何。 朴炳昭 其曰以己心度物心。使之方平則得矣。而但曰以矩度物不可。章句只訓矩字。所以爲方也。蓋取其方平之意而已。朱子又答江德功之問曰。今曰度物以矩。則當爲矩絜乃得其義。大凡絜矩之旨。以心絜度其所處之之道。而上下四旁。均齊方平。如矩之所以爲方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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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吉疏曰。夫婦。人倫之大綱。夭壽之萌。蓋人之夭壽在天。而以此觀之。則人之夭壽。不在天而在於人耶。 文在德 人之生也。天之降年。雖曰有永有不永。然人而傷之。則永者損而短。人而養之。則短者益而永。此其理勢之必然。而夫栽者培之。傾者覆之。亦天地氣數之所不能無者也。人豈可不謹乎哉。王吉。慮夫氣血未充。而婚姻太早。則或有疾病侵凌。故有民夭之說。語雖淺近。其爲生民慮深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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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處恭恭字。當訓何義。 君子之平居也。不怠放不嚴厲。而貌常溫恭之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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逸則淫。淫訓何義。 淫是浸淫之淫。放逸則必至於浸淫墮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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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家而遭師喪者。朝夕設位而哭。如何。 聞訃日。設位哭而加麻而已。朝夕設位哭。恐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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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子之服師者。或三年。或朞年。九月五月三月。而無定數。何也。 傳道。有近遠淺深之不同。故各盡其哀之隆殺。夫如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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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백성이 길에 가득하니 느낀 바 있어 짓다 饑民盈路。感而有作。 천하의 창생(蒼生) 나의 형제이니추위와 따뜻함, 굶주림과 배부름 또한 마음을 같이 하네만 권의 책을 읽은들 끝내 무슨 소용이리오안상문(安上門)의 유민(流民) 모습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는걸253) 天下蒼生我弟兄寒溫飢飽亦同情讀書萬卷終何用安上流民畫未成 안상문(安上門)의……못하는걸 굶주림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한 구제책을 임금에게 올리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정협(鄭俠)이 안상문(安上門)의 감문관(監門官)으로 있으면서 가뭄과 조세에 시달리는 유민(流民)들이 고생으로 파리한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려서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신종이 이를 보고 조칙을 내려 자책하고는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을 폐지하자, 하늘이 그제야 큰 비를 내렸다고 한다. 그 그림은 〈유민도(流民圖)〉라고 한다. 《宋史 卷321 鄭俠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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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의 회계 禮曹回啓 진주 유학 정근(鄭瑾)이 올린 글을 보니, 그의 오대조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가 봉사(奉祀)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祧薦)하지 말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정문부는 임진란을 당하여 평사(評事)로서 병사를 모집하여 힘을 다해 역적을 베고 왜적과 북쪽 오랑캐를 섬멸하니, 관북(關北) 지역이 그의 공에 의해 평정되었습니다. 그 높은 공과 장렬은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황진(黃璡), 이복남(李福男)43)과 마찬가지인데 이 네 사람은 이미 조천하자 않는 성대한 은전을 입었으니, 이제 그의 자손들이 이를 인용하여 청을 하니 반드시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조하지 않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신의 예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바가 아니니 대신과 의론하여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예조에서 아뢰기를 "진주 유학 정근이 글월을 올린 것으로 인하여 회계(回啓)하였는데, 충의공 정문부의 조천하지 않는 일을 대신과 논의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훈신에게 맹세를 거듭하여 영화스럽게 하고 조천하지 않고 제향하게 하는 것은 나라의 은전입니다. 임진년 섬나라 오랑캐의 전란에 반민(叛民)들이 안에서 응하여 변방의 진(鎭)이 모두 함락되었는데, 충의공 정문부가 이때 평사(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모집한 후 여러 적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의 공에 힘입어 관북이 평정되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말하니, 그의 공로가 진실로 큽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조천하지 않는 것과 훈봉(勳封)하는 것은 그가 죽은 뒤의 일입니다. 비록 그의 사후에 장려와 추증이 여러 차례 더해졌더라 하더라도 공신의 집안은 영원히 지키겠다는 약속44)을 당시에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요행의 문이 점차 열리고 전장(典章)이 날로 실추되는 때를 당하여 상법(常法) 밖의 사항을 경솔하게 허락하는 것은 아마 신중하지 않은 듯하니, 삼가 전하께서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말하기를 "예전 임진왜란에 충의공 정문부가 일개 평사로서 창의하여 토적을 섬멸하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 지역으로 하여금 평안하게 보존케 하였으니, 충성은 진실로 숭상할 만하며 공로도 또한 견주기 드뭅니다. 생전에 훈봉(勳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비록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충정과 공훈은 마땅히 특별하게 보답을 받아야 합니다. 전례를 끌어대어 조천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청한 것은 지나치지 않은 것 같으니, 삼가 전하께서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조천하지 않는 것은 공로가 있는 신하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임진란을 당하여 충의공 정문부가 토적을 쳐서 없애고 왜적과 북쪽 오랑캐를 짓밟아 북관의 강토를 보전하였으니, 이보다 큰 공이 없습니다. 조천하지 않는 것을 비록 자손이 호소한다고 하여 쉽게 허락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의공처럼 생전에 훈봉하지 않았는데 아울러 조천하지 않는 은전마저 아낀다면 아마도 큰 공을 보답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삼가 전하께서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 판부사 서명선(徐命善), 영돈녕 홍낙성(洪樂性), 판부사 김욱(金煜), 판부사 이존협(李存協) 등은 병이 나서 의견을 모으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의론이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재결하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전교하기를 "다수의 의론을 따라서 행하도록 판하(判下)한다. 계하안의 내용을 받들어 살펴 조천하지 않도록 하는 뜻을 본가에 알려서 시행하게 하고, 관문(關文)의 내용을 베껴 보내어 정근(鄭瑾)의 집에 전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관문의 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전해 주고, 일의 진행상황을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觀此晉州幼學鄭瑾上言, 則以其五代祖忠毅公文孚, 親盡不祧爲請矣。文孚當壬辰之亂, 以評事募兵, 戮力斬叛賊, 殲倭胡, 關北一路, 賴以平定。其巍勳壯烈, 與趙憲·高敬命·黃璡·李福男一般, 而四人旣蒙不祧之盛典, 則今其子孫, 援此爲請, 不必爲濫, 而不祧體重, 非臣曹所敢擅便, 議大臣稟處何如。傳曰: "允。" 曹啓曰: "因晉州幼學鄭瑾上言回啓, 以忠毅公鄭文孚不祧事, 議大臣。" 領議政臣金致仁, 以爲'國家之於勳臣, 申盟而榮之, 不祧而享之, 國典也。壬辰島夷之亂, 叛民內應, 邊鎭俱陷, 而忠毅公鄭文孚, 時以評事, 倡義募兵, 剪殲諸賊, 關北賴平, 人到于今言之, 其績固大矣。第念不祧勳封, 後事也。雖其褒贈累加於身後, 帶礪不及於當時, 則當此倖門漸開, 典章日墜之時, 法外輕許, 恐合難愼, 伏惟上裁云云。' 左議政李性源, 以爲'昔壬辰亂, 忠毅公鄭文孚, 以一評事倡義, 殲土賊破倭寇, 使關北一路, 晏然獲全, 忠固可尙, 功亦罕比。生前勳封之不及, 雖未知何故, 而以忠以功, 宜蒙殊異之報, 援例不祧之請, 似不至踰濫, 伏惟上裁云云。' 右議政臣蔡濟恭, 以爲'不祧, 所以待勳臣也。當壬辰亂, 忠毅公鄭文孚之勦滅土賊, 蹴踏倭胡, 保有北關疆土, 功莫大焉。不祧, 雖不可以子孫呼籲而容易許之, 若忠毅公以其生不勳封, 幷與不祧之典而靳之, 則恐非酬報大勳之義, 伏惟上裁云云。' 領中樞府事臣鄭存謙·判府事徐命善·領敦令洪樂性·判府事金煜·判府事李存恊, 病不收議, 大臣之議如此, 上裁何如。傳曰: "從多議施行事判下。啓下內辭意奉審不祧之意, 本家知委施行事, 以關辭謄送, 傳給於鄭瑾之家, 使之依關辭施行傳給, 形止卽爲馳報宜當者。" 이복남 ?~1597. 본관은 우계(羽溪)로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97년(선조 30)에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재임 시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김경로(金敬老),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영원히 지키겠다는 약속 '대려(帶礪)'는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게 되도록 공신의 집안을 영원히 보호해 주겠다는 맹세로서 산려하대(山礪河帶)의 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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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의 사액을 청하는 계사 순찰사 이시원45) 靑巖祠請額啓辭 巡察使李是遠 임진왜란 때 충성과 지략이 있는 선비들이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더불어 거의하여 난을 평정하였으니 그들의 공이 매우 위대하였으니, 모두 사당을 세워 사액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함흥(咸興) 13의사, 경성(鏡城) 7의사, 회령(會寧) 4의사 같은 이들을 모두 사당의 배향을 허락하였으나, 유독 부령(富寧)의 9의사에게만은 비록 의병을 일으킨 청암(靑巖)에 두어 칸 사우를 세웠으되, 사액의 은전이 누락되어 부령 선비들이 천여 리를 발을 싸매고 신의 영(營)에 달려와 호소하니 자못 해마다 의례적인 일이 되었습니다.그러므로 고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이단하(李端夏)가 편찬한 《경성창렬사지(鏡城彰烈祠誌)》를 상고하여 보니, 의사들의 창의한 사적이 그 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 중신(重臣) 이식(李植)으로부터 고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에 이르기까지 명현들이 충절을 아뢰고 포상하기 위해 조정에 아뢰었던 사적까지 캐물어서 조금도 빠트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사들에게 추증되고 배향되는 은전은 일시에 모두 거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앞뒤로 수백 년 동안 차례로 포상하고 추증하였는데, 아직까지도 청암사만 은전을 베푸는 문장에서 빠져 있으니 참으로 조정의 은전에 흠이 됩니다.이 지역은 왕의 교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이 일은 충의를 격려하는 데 관계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 하문하여 함흥, 경성, 회령 등에 이미 시행한 예에 한결같이 의거하여 한꺼번에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 성조의 교화를 수립하는 정사에 합당할 것입니다.임금이 말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기미 정월 초7일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입시하였을 때에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임진년 왜적의 우두머리가 북방에 들어올 때 평사 정문부의 공이 진실로 위대합니다. 그와 함께 맨 먼저 거사하여 능히 적을 쳐서 섬멸한 공을 이룬 자는 함흥에 13의사, 경성에 7의사, 회령에 4의사인데, 모두 공훈으로 배향하는 은전을 받았으나 오직 부령 9의사만 누락되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경성창렬사지》 중에 그 일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며,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본도를 순시하며 교화를 펼 때 조정에 올려 알렸으나, 지금까지 은전을 베풀 겨를이 없어서 북쪽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긴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연전 도신의 장계(狀啓)와 어사의 단자(單子)에서 또다시 그 근거를 많이 대었으니, 부령에 소재한 청암사에 특별히 사액을 베풀어 주고 의사 중에 그 생전의 직명이 있고 없음에 따라 포상하고 추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주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壬辰倭變時, 忠智之士, 與鄭評事文孚, 出義靖亂, 其功甚偉, 俱蒙建祠賜額之恩。如咸興十三義士, 鏡城七義士, 會寧四義士, 幷許俎豆之享, 而獨富寧九義士, 雖有數間祠宇於靑巖擧義之所, 而見漏於宣額, 富寧士人, 千里裹足, 來訴臣營, 殆成歲課。故取考故相臣文忠公李端夏所編《鏡城彰烈祠誌》, 則義士倡義事蹟, 昭載於其中。始自故重臣文靖公李植, 至於故相臣文忠公閔鼎重, 名賢所以啓忠褒節, 採詢以登聞者, 殆無餘蘊。而許多義士, 賜贈腏享之典, 非一時所可倂擧, 則首尾數百年, 次第褒贈, 而尙有靑巖闕文, 誠爲欠典。地是王化之遐遠, 事係忠義之激勸, 伏乞下詢廟堂, 一依咸興鏡城會寧已行之例, 一體褒獎, 恐合於聖朝樹風之政。上曰: "令廟堂稟處事。" 己未正月初七日, 備局堂上入侍時, 領議政金左根啓曰: "壬辰倭酋之入北也, 評事鄭文孚之功, 誠奇偉。與同首事, 克成勦殲之功者, 咸興十三義士, 鏡城之七義士, 會寧之四義士, 擧蒙勳腏之典, 而惟富寧九義士, 獨見漏焉。故相臣李端夏所撰鏡城彰烈祠誌中, 載其事甚詳。故相臣閔鼎重, 旬宣本道時, 至有登聞, 而迨今未遑, 爲北士齎鬱久矣。年前道啓繡單, 又甚根據, 富寧所在靑巖祠, 特宣恩額, 義士中隨其生前職名有無, 以爲獎贈之地, 恐好矣。伏惟上裁。" 上曰: "依爲之。" 이시원 1790~1866. 본관은 전주, 자는 사직(子直), 호는 사기(沙磯),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건창(李建昌)의 조부이다. 철종 때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향리인 강화도에서 지내던 중 1866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병인양요) 관원들은 모두 달아나고 대적할 방도가 없으므로, 울분을 참지 못해 아우 지원(止遠)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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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룡서당 판상 시에 차운하다 신임 次燭龍堂板上韻【申銋】 북방의 충의 ­원문 1자 결락­ 명성 밝으니유묘의 빛나는 모습 이 명성에 걸맞네지사들은 영원히 감개한 마음 일으키지만몇이나 뛰어난 공렬 드러내 시성 빛내나 北方忠義□英名遺廟華顔愜此聲志士千秋興感慨幾彰雄烈耀詩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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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의 전장을 지나며 느낌을 읊다 번암 채제공 過臨溟戰場感吟【樊巖 蔡濟恭】 신령한 사당에 바람 불고 벌판에 구름 짙은데정 장군의 충정 늠름하여 머리털 쭈뼛해졌네공훈 세워도 기린각114)에 화상 구하지 않고의병장들 닭 피 마시고 한마음 되었네앉아서 해내를 안정시킨 건 누구 힘이었던가기우는 하늘 지탱한 공이 지금까지 이어졌네전투하던 성루 들풀과 들꽃으로 뒤덮히니석양에 말 달리며 슬픈 마음에 시 읊어보네 靈宮風颯磧雲深鄭帥忠貞凜髮森勳不麟臺求畫面義將鷄血歃同心坐令海晏伊誰力撑得天傾也至今原草野花生戰壘夕陽驅馬一悲吟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명의 공신(功臣) 초상을 그려서 걸게 했던 전각 이름이다. 기린각에 걸렸다는 것은 곧 국가에 큰 공훈을 세워 공신에 책록된 것을 말한다. 《漢書 卷54 蘇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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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집에서 즉흥적으로 읊다 山家卽事 산속 사람이 일이 없어 산가에 누웠는데 山人無事臥山家가을 산으로 해 저무니 산 정경이 다양하네 日暮秋山山意多흥이 올라 홀연히 물가에 앉으니 乘興忽然磯上坐밝은 달 비친 푸른 물결에 흰 갈매기 가득하네 白鷗明月滿滄波 山人無事臥山家, 日暮秋山山意多.乘興忽然磯上坐, 白鷗明月滿滄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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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 임탄23)에게 부치다 寄林閑閑亭坦 학 울음24) 들리지 않고 숲속이 비었으니 鶴唳未聞林下空문을 나가 까마귀 암수 분변할 것25) 없네26) 出門莫辨烏雌雄돌아오며 흰 갈매기와 이야기 나누는데 歸來相與白鷗語밝은 달과 옅은 안개가 물에 비치네 明月疎煙水鏡中 鶴唳未聞林下空, 出門莫辨烏雌雄.歸來相與白鷗語, 明月疎煙水鏡中. 임탄 임제(林悌, 1549~1587)의 셋째 아들로 한한정은 그 호이다. 학 울음 원문의 '학려(鶴唳)'는 은거하는 굳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였다. 분변할 것 원문에는 '변(辨)' 아래에 "다른 본에는 문(問)으로 되어 있다.〔一本作問〕"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까마귀 …… 없네 하늘과 땅이 만물을 포용하듯이 모두가 조화를 이룬다면 굳이 시비와 선악을 가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시경》 〈정월(正月)〉에 "모두 말하기를 '내가 성인이다.' 하는데,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까.[具曰予聖, 誰知烏雌雄.]"라고 하였는데, 이는 까마귀의 암수를 가려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시비를 분간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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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읊다 詠梅 흰 옷 입고서 낙조 아래 서 있는 이 누구인가233)좋은 구슬 패물로 차고 둥근 옥을 옷으로 삼았네나는 알겠네 옥빛처럼 아름다운 정명도(程明道)234)의얼굴 가득한 춘풍(春風)235)에 덕스런 광채 모여 있음을【뜰에 오래된 매화 한 그루가 있었는데, 단정하고 곧게 자라 장인(丈人)과 군자(君子)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봄을 맞아 일찍 피어 온 가지에 밝은 구슬이 가득하여 지초와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 스며드는 듯한 느낌236)이 있었으니, 마침내 붓을 잡고서 감탄하며 썼다.】 素服何人立落暉良珠爲佩璧爲衣吾知玉色程明道滿面春風總德輝【庭有古梅一樹。端直整束。甚肖丈人君子之象。當春早發。萬枝明珠。有芝蘭襲人之氣。遂援筆感歎而書。】 흰……누구인가 '흰 옷'은 매화를 비유한 말이다. 수(隋)나라 때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다가 황홀한 경지에서 향기가 감도는 어여쁜 미인을 만나 즐겁게 환담하고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에 술에 취해서 누워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龍城錄 趙師雄醉憩梅花下》 옥빛처럼 아름다운 정명도(程明道) 주희(朱熹)가 정호(程顥)에 대해 지은 〈정명도화상찬(程明道畫像贊)〉에,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쟁쟁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 하였다. 또 송나라 문인 장도흡(張道洽)의 시 〈매화〉에 "옥빛은 홀로 천지의 정기를 받았고, 철석 같은 심장은 눈서리에도 놀라지 않네.[玉色獨鍾天地正 鐵心不受雪霜驚]"라 하였고, 섭옹(葉顒)의 시 〈고포매화(故圃梅花)〉에도 "신세는 수운의 고장이요, 차가운 살에 옥빛의 치마로다.[身世水雲鄕 冰肌玉色裳]"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매화의 색은 옥빛으로 자주 묘사된다. 얼굴 가득한 춘풍(春風) 정호(程顥)의 온화한 기상을 묘사한 말이다.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 권14에, "주공담이 여주에서 명도 선생을 뵈었다. 한 달을 머무르다 돌아가 사람들에게 '광정이 춘풍(春風) 속에 한 달을 앉아 있었다네.'라고 하였다.[朱公掞見明道於汝州 逾月而歸 語人曰 光庭在春風中坐了一月]"라 하였다. 지초와……느낌 훌륭한 기운에 감화된다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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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이 지내며 성찰하다【4수】 閒居省察【四首】 가슴 속에 하나의 조정을 따로 세우니주객(主客)과 군신(君臣) 간에 분의(分義)가 분명하네만물이 조정에 함께 서서 다 같이 명을 들으니온 당(堂)에 일이 없고 다만 허령(虛靈)할 뿐이네【위는 마음이 만사를 거느림이다.】아침 내내 괴롭게 다퉜으나 전공(戰功)이 없으니어지러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마치 쑥대머리와 같네승패와 흥망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으니잡아 지키는263) 방략(方略)은 원수(元帥)에게 달려 있네【위는 이욕(理欲)이 서로 다툼이다.】기린각(麒麟閣)264) 위에 공신(功臣) 그려져 있으니지수(志帥)265)의 훈공과 명성 첫 번째라네이로부터 태평한 시대 비로소 점칠 수 있으니시를 짓고 서로 이어 화답함에266) 옛 나라 새로워지네【위는 뜻이 기(氣)를 거느림이다.】많은 관원 조회(朝會)에 모였다가 일이 다 끝나 조정이 텅 비니대(臺) 위의 깊은 궁에 상서로운 해 붉네저 속에서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천 길 깊이의 옥연(玉淵) 바람도 없이 맑은 것을 보아야 하리【위는 일이 지나고 사물이 떠남이다.】 胷中別立一朝廷主客君臣分義明萬品同朝咸聽命一堂無事但虛靈【右心統萬事】終朝苦戰戰無功起滅紛紜似亂蓬勝敗興亡猶未判操存方略在元戎【右理欲交戰】麒麟閣上畫功臣志帥勳名第一人自此昇平方可占作詩賡詠舊邦新【右志以御氣】萬官朝虗【恐作處】大庭空臺臺上深宮瑞日紅那裏欲知眞箇意玉淵千仞淡無風【右事過物去】 잡아 지키는 원문은 '조존(操存)'이다. 마음을 잡아 굳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공자가 이르기를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를 향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명의 공신(功臣)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 이름이다. 후대에는 모든 공신각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지수(志帥)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지(志)는 기(氣)의 장수이다.[夫志 氣之帥也]"라 한 데서 유래한 말로, 뜻[志]을 장수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시를……화답함에 원문은 '작시갱영(作詩賡詠)'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를 권면하며 노래를 수창하는 것으로, 순(舜) 임금과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으며 공경히 직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한 노래를 '갱재가(賡載歌)'라 한다. 《書經 益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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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山寺)에 묵다 宿山寺 우두커니 단정하게 앉아 밤이 더욱 깊어지니달이 부들방석을 비춰 냉기가 스며드네네모난 못으로 걸어 나옴에 바람도 일어나지 않으니쓸쓸하게 말없이 하늘을 대하네 兀然端坐夜更深月照蒲團冷氣侵步出方塘風不起蕭然無語對天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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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비에 술을 보내 준 사람에게 사례하다 久雨謝人送酒 늙은이 병이 많아 쓸쓸한 마을에 누웠으니비바람 하늘에 가득하여 홀로 문을 닫고 있네다행히 다정한 벗 있어 좋은 술 보내주니시름으로 병든 몸 억지로 부지하며 남쪽 난간에 기대네 老夫多病臥荒村風雨漫空獨閉門賴有情人送美酒強扶愁疾倚南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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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曉 금빛 닭 울어 밝은 새벽 여니사해의 봄빛 하룻밤 지나자 환해졌네동해에 막 해가 나온 모습을 상상해 보니천 길 자줏빛 물결에서 붉은 태양 목욕하겠지 金鷄喔喔啓明辰四海春光一夜晨想見東溟初出日紫波千丈浴紅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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