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39)의 은전을 청하는 소장 5대손 정근이 짓다. 請不祧典疏 五代孫瑾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전(禮典)은 그 한계가 정해져 있어서 봉사 대수가 다하면 마땅히 조천(祧遷)40)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도덕이 있는 사람과 공렬이 있는 신하는 백 대라도 반드시 제사를 지내니, 혹 임금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혹 문묘의 성무(聖廡)에 올라 제사를 받고 혹은 사원에서 높이 받들면서 또한 그 자손으로 하여금 영세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전형이 되어 국가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신이 다만 이에 대해 감회가 없지 않기에 외람되고 주제 넘는다는 비난을 피하지 않고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서 전하 앞에서 우러러 호소하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신의 5대조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 장렬(壯烈)과 높은 공로는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충렬공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백중(伯仲)이 되어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더구나 신의 조상에게는 더욱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선조 때 불행하게 국가에 난리가 많았는데, 관북 지방이 더욱 독한 화를 입었습니다. 토적(土賊)이 왜적을 안내하여 두 왕자 및 두서너 대신을 사로잡아 보내어 왜적에게 아첨을 하였습니다. 이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이어 유린하니 철령 이북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신의 조상이 한낱 평사(評事)로서 군사 6천 명을 모집하여 먼저 역적을 죽이고 힘을 합쳐 여러 곳에서 싸워 오랑캐를 추격하여 내쫓았으며 그 위엄으로 말갈을 항복시켰으니,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22개 고을을 항복받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만력 이래 선무 제장(宣武諸將)들이 하지 못한 바입니다.예를 들면, 장평(長坪)에서 승리할 때 싸우며 흘린 피가 강을 벌겋게 물들였고 쌍포(雙浦)에서 승리할 때 흉갑(兇甲)들이 별처럼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길주성(吉州城)을 겹겹으로 포위하였을 때와 단천(端川)에서 크게 쳐부수었을 때는 시체가 길에 가득하고 왜적의 우두머리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백탑교(白塔郊)에서 크게 무찌를 때에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어 한 척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비록 용맹한 청정(淸正)이라도 아침밥을 해먹고 겨를도 없이 시체를 태우고 갑옷을 끌며 밤을 틈타 멀리 달아났는데, 앞뒤로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이 수천 급(級)에 가까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받은 이래로 이것이 제일 큰 승리'라고 칭송하였습니다.그의 정충(貞忠)과 장렬(壯烈)이 저같이 탁월하며, 국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사람의 귀와 눈에 분명합니다. 또한 선배들의 공론으로 살펴보건대, 고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의 〈북관지(北關誌)〉에 이르기를 "국세필(鞠世弼) 등 반란을 일으킨 괴수 세 역적을 통쾌하게 죽였으며, 청정(淸正)을 크게 토벌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크게 승리하여 다섯 차례 승리하여 예전 왕의 선조들이 살던 강토를 오랑캐에게 함락되지 않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관을 안찰할 때에 계(啓)를 올리기를 "왜적과 북쪽 오랑캐가 함께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의 침입을 받았는데, 매번 싸우면 반드시 승리해서 강토를 수복하였으니 마땅히 백 대에 제향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그 사당에 사액을 내리게 되었습니다.고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북관은 윤관(尹瓘)이 처음으로 구성(九城)을 둔 이후로 3백 년 뒤에 몽고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김종서(金宗瑞)가 그 땅을 회복하여 드디어 육진을 설치한 뒤로 160여 년 만에 또다시 왜적의 손에 들어갔는데 정문부가 크게 일어나 깨끗이 쓸어버려 그 땅을 회복하였으니, 이 세 사람의 공이 같습니다."라고 하고서, 인하여 윤관의 사당에 함께 제향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말하기를 "먼저 역적 국세필을 참수하여 목을 내 건 다음에 조리돌렸으며 왜장 청정(淸正)을 토벌하고 그 군현을 회복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품계를 뛰어 넘어 증직을 청하니 이상(貳相)의 증직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고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그의 시장(諡狀)을 지으면서 "적을 요리하기를 신처럼 하니 사람들이 그에게 쓰이기를 즐거워하였다. 수천 명의 고립된 군사로써 백 만의 강한 왜적을 물리쳤으니 비록 옛 명장들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뛰어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사원을 세워야 되는지의 여부를 묻는 하문(下問)에 힘써지어야 한다고 찬성하면서 "일찍이 임진년 격문을 읽고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였는데, 옛날에 '큰 난을 항쟁한 자는 제사를 지낸다.'41)는 문장이 있으니, 의병을 처음 일으킨 땅에서 그를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또 《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북관의 난을 평정한 일에 대해 대강(大綱)을 세우고 조목(條目)을 펴니 논설이 매우 자세합니다. 그 가운데 이르기를 "대개 관북을 평정한 것은 다 정문부의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숙종 계사년(1713년, 숙종 39)에 특지로서 시호의 은전을 내렸는데 시호를 '충의(忠毅)'라 하였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공론이며 또한 조정에서 신의 조상이 세상에 드문 공렬을 세운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미 선무 일등 녹권에 들어갔고 또한 창렬사(彰烈祀)에서 백 대에 제향을 받으니, 조정에서 그 공에 융숭하게 보답한 뜻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삼가 생각해보건대, 신하 가운데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자는 반드시 제사지내되 영세토록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은 실로 교화를 수립하고 후대를 권장하는 방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헌, 고경명 같은 충렬은 국가에서 그 봉사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하지 않도록 특별히 허락하였으니 즉 신의 조부에게도 반드시 아끼지 않았을 것인데, 다만 후손이 불초한 탓으로 조정에 알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지난 갑진년 무민공(武愍公) 황진(黃璡)42)은 그 자손이 글월을 올린 것을 인하여 훈신이 예로서 특별히 명하여 조천하지 않도록 명을 받았으니, 이것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시행한 최근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인 전하께서는 신의 조부 정문부의 공렬이 저처럼 성대하니, 조헌 · 고경명 · 황진의 예에 의거하여 봉사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하지 말 것을 특별히 명하여 주십시오. 삼가 천은을 입어 이처럼 아룁니다.전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회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伏以臣竊伏念國家祀典, 厥有定限, 親盡當祧, 而苟有道德之人, 勳烈之臣, 百世必祀, 則或配享於廟庭, 或躋侑於聖廡, 或崇奉於祠院, 而亦使其後子孫, 永世不祧。此爲勻石, 載垂邦典, 臣獨不無區區所懷, 玆不避猥越之誅, 冒萬死, 仰籲於法駕之前, 以冀垂察焉。 臣之五代祖贈左贊成忠毅公臣文孚之貞忠大節, 壯烈巍勳, 與文烈公臣趙憲忠烈公臣高敬命, 相爲伯仲, 小無異同, 而況且臣祖則尤有大焉。粵在宣廟朝, 不幸國家多難, 關北一方, 偏被毒禍, 土賊嚮導, 擄送兩王子及二三大臣, 以媚于賊。于時藩胡, 又從而蹂躙, 鐵嶺以北, 非國家之有, 而臣祖以一介評事, 募兵六千, 先斬叛民, 戮力轉戰, 擊逐卉服, 威伏靺鞨, 旬月之間, 盡服卄二州, 此實萬曆以來, 宣武諸將之所未有也。若其長坪之捷, 戰血川赤, 雙浦之勝, 兇甲星遁, 吉城之重圍, 端川之大鏖, 僵尸載路, 賊酋破膽。至於白塔郊之大衂, 射矢如雨, 隻輪不返, 雖以淸正之驍雄, 亦不暇朝炊, 焚尸曳甲, 乘夜遠遁, 前後獻馘, 殆近數千級, 世皆稱'被倭以來, 此爲第一勝着。' 其貞忠壯烈, 如彼卓越, 昭載國乘, 照人耳目。又以先輩公議觀之, 故大提學臣李植〈北關誌〉曰: "快斬鞠世弼叛魁三賊, 大討淸正, 五次快捷,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故相臣閔鼎重按北關也, 啓曰: "倭胡交亂, 腹背受賊, 每戰必捷, 收復舊土, 宜受百世之享。" 遂致宣額於其祠。故相臣李端夏曰: "北關, 自尹瓘始置九城, 而三百年後, 入於蒙古部。金宗瑞復其地, 遂置六鎭, 百有六十餘年, 又入於倭奴, 鄭文孚大擧廓淸, 又復其地, 三人之功, 一也。" 仍請幷享於尹瓘之廟。故相臣鄭太和曰: "先斬鞠賊, 梟首以徇, 聲討淸酋, 復其郡縣。" 亦請超品贈職, 而至贈貳相。故判書臣閔鎭厚, 作其諡狀曰: "料敵如神, 人樂爲用, 以數千孤軍, 却百萬强寇, 雖古名將, 何以過此。" 先正臣文正公宋時烈, 仍立祠當否之問, 力贊以成, 謂以'嘗讀壬辰檄文, 想像其爲人, 古有抗大難則祀之之文, 俎豆於首事之地, 夫孰曰不可。' 又於宣廟寶鑑, 以北關靖亂事, 立綱敍目, 論說甚詳, 而亦曰: "大抵平定關北, 皆鄭文孚之力也。" 肅廟朝癸巳, 以特旨降易名之典而諡曰: '忠毅', 此皆擧國之公論, 而亦有朝家之表章臣祖有此不世之功烈, 旣入於宣武一等之券, 又享於彰烈百世之祀, 則朝家崇報之意, 可謂至矣。第伏念人臣之有大勳勞於國家者, 必祀之不祧永世者, 實出於樹風聲勸來世之方。故如趙憲高敬命之忠烈, 特許其親盡不祧, 則亦於臣祖, 不必靳持, 而只緣後孫之不肖, 未及登聞於朝家之故也。向於甲辰, 武愍公臣黃璡, 因其子孫之上言, 以勳臣例, 特命不祧, 此則聖明已行之近例也。伏乞天地父母, 特命臣祖文孚之勳烈, 如彼其盛, 一依趙憲高敬命黃璡之例, 特命親盡不祧事。伏蒙天恩謹啓。傳曰: "令該曹回啓事。" 부조 묘제(廟制)에 있어서 일정한 대수(代數)가 지나면 조(祧)라고 하여 그 신주(神主)를 묘(廟)로 옮기는 것인데, 공덕이 특출한 인물의 신주는 이를 특별히 취급하여 대수가 지나도 천조하지 않는다. 이를 부조 또는 불천(不遷)이라고 한다. 조천 묘(家廟)에서 제사를 받드는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神主)를 살아 있는 자손 중의 장방(長房)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큰……지낸다 《예기》 〈제법(祭法)〉에 보이는 말이다. 황진 1542~1606.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으면서 몽진(蒙塵)한 선조를 잘 보필하여 그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