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선생집 옛날 발문 南圃先生集舊跋[李玄逸] 호남(湖南)의 징사(徵士) 남포 선생(南圃先生) 김공(金公)이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되었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39)이 경저(京邸)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 또 그의 평생 행의(行義)에 관한 일의 전말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선사(先師)께서는 자품(資品)이 굳세고 우뚝하였으며 기상이 맑고 시원하였습니다. 젖니를 갈 무렵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 《중용》을 전수받았는데, 날로 계발됨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아버지 송호공(松湖公)40)에게 여쭙기를 '선비가 책임지는 것이 매우 크니, 명리(名利)의 사이에서 급급히 다투느라 맡은 책임을 깎아 작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41)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본받을 만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도(圖)와 설(說)을 지어 좌우에 걸어두고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살폈습니다. 나이 14, 5세가 되자 그를 본 장로(長老)들은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성덕군자(成德君子)라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하로서 사명(使命)을 받고 고을의 경내를 방문한 사람도 그를 찾아와 만나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집안이 대대로 불행하여 폐질(肺疾)을 앓아 죽은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송호공 또한 그 병에 걸렸습니다. 선생은 울면서 밤낮으로 모시고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시탕(視湯)하였습니다. 송호공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도 난처하여 통상적인 이치로는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42) 선생이 이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였는데, 선생은 독자(獨子)로 형제가 없는 데다 나이가 겨우 18세였습니다. 평생 이를 매우 애통해하며 항상 말하기를 '나는 타고난 명운(命運)이 기박(奇薄)하여 상을 당해 내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농사나 지으면서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남평(南平)43)의 선묘(先墓) 아래에 우거(寓居)하면서 그 당(堂)을 '명농(明農)'이라 편액(扁額)하고 '남포병일(南圃病逸)'이라 자호(自號)하였습니다.성현의 서책을 깊이 연구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부분이 있으면 곧 책에다 쓰고, 때로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존양(存養)ㆍ신독(愼獨)44)의 공부를 하였습니다. 향리(鄕里)의 소년 중에 와서 배우는 자가 있으면 각기 그 재주에 따라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심신(心身)을 수습하여 외물(外物)에 뜻이 유혹되고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면 자연히 지기(志氣)가 청명(淸明)해져서 성현이 즐기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배우는 자가 힘쓸 것이 어찌 사장(詞章)을 기억하고 외는 데에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은 퇴도 선생(退陶先生)45)의 학문을 존경하고 신봉하여 몸가짐은 한결같이 거경(居敬)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주고받은 것은 바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 그 외면을 제어함으로써 내면을 기르는데 있었으니, 어찌 외면이 방종(放縱)하고 제멋대로이면서 내면이 고요하고 전일(專一)한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이 당시 안방준(安邦俊)46)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편벽된 학문과 잘못된 견해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세를 호령하였습니다.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을 나누어 다른 두 갈래라고 하면서 〈우산문답(牛山問答)〉 수천 마디 말을 지어 온 힘을 다해 선현(先賢)을 기롱하고 배척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학(遊學)하는 자들은 모두 그를 신봉하였습니다. 선생은 그 설이 횡행할까 우려하여 마침내 〈질의서(質疑書)〉를 지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니, 안방준이 마음속에 앙심을 품었고, 그 무리들은 떠들썩하게 끊임없이 공척(攻斥)하였습니다.공이 비록 대문을 닫고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47) 일찍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한 적이 없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날로 드러나 조정에서 초빙하는 깃발이 여러 번 이르렀는데, 선생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기해년(1659, 효종10) 봄에 효묘(孝廟)께서 하교하여 구언(求言)할 때에 선생은 한 통의 소본(疏本)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근본으로 하고 당세의 급무(急務)에까지 이를 미루어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점괘(占卦)가 길하지 못하므로 그만두었습니다. 이때부터 제수(除授)하는 명이 여러 번 내려졌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공에게 배우러 오는 향중(鄕中)의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 세 채의 서재를 열어 그곳에 거처하게 하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48)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웠습니다.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도 많았는데, 혹자가 물리치며 돌려보내기를 청하면 곧 '경전(經傳)은 성현의 공언(公言)으로 내가 요행히 먼저 그 찌꺼기를 얻은 것이다. 성심(誠心)을 가지고 와서 배운다면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던 자가 가까운 경내에 와 있으면서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매우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날조하여 비방하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선생이 몸을 보존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이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나에 대해 본래부터 유감을 품고 있었거니와 사람을 무함하고 헐뜯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내 마땅히 근신(謹愼)하여 피해야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와서 살면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감추니 더욱 당세(當世)에 뜻이 없었습니다. 주중(州中)에서 와서 배우려는 자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또한 사양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한결같이 남평(南平)에 있을 때처럼 과정을 세워 가르쳤습니다.선생의 흉금(胸襟)은 넓고 툭 트여 일찍이 괴상한 행실이 있지 않았는데, 시세(時勢)를 좇는 무리들이 더할 나위 없이 심하게 스스로 방해하고 배척하며 모함하였으나 선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독실함은 항상 한결같았으며, 생도(生徒)를 교육함에 부지런히 하고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자리 한구석에 가야금 한 장(張)을 놓아두고 때로 현을 퉁기며 곡을 연주하니, 유연히 삼대(三代) 이전의 의취(意趣)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처하더라도 그의 풍표(風標)가 준수하고 의론(議論)이 뛰어나 비록 거칠고 무식한 보통 사람이라도 매번 선생을 대할 때면 일찍이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글에 대해서는 막히는 바가 없었으니, 비록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이라도 사람들이 혹시 와서 질정(質正)하면 얼음이 녹듯 환하게 풀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당세의 급무에 대해서도 모두 관심을 두고 이해하였습니다.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 한 부를 지어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타당하게 조치하는 것에 대해 논하였으니, 또한 일찍이 세상을 잊어 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그 평생 동안 수립한 것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세도가 날로 쇠하여 덕을 알아줄 이가 적었던 데다, 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게 헐뜯기다 보니,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대한 구분이 뒤섞여버렸습니다. 군자가 칭술(稱述)하여 드러내어 밝히지 않는다면 어찌 후세에 밝게 보여주며 그 후손을 보살펴주겠습니까. 이에 감히 재배(再拜)하고서 집사(執事)에게 청하는 것이니, 다만 공께서 애처롭게 여겨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지하(地下)에서 반드시 흔연(欣然)히 웃으면서 '세상에 과연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도다.' 하실 것입니다."현일(玄逸)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청탁(淸濁)49)이 서로 달라 비록 미처 공을 알지는 못했으나 그 행장(行狀)에 근거하고 그 글을 읽어보니 또한 그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모범적으로 한 고원(高遠)함과 학문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는 성심(誠心)과 바른 의론을 부지하고 후진을 인도한 공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이에 막 그 사실을 발췌하여 그 일을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이렇게 화를 만나 삭직(削職)되어 먼 지방에 유배되는 바람에, 감히 다시 붓을 잡아 글을 짓는 일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사면해 주시는 성은을 입어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풀려나 남쪽으로 옮겨졌을 때50) 공의 외손(外孫) 나군 경성(羅君景聖)이 한두 번 찾아와 나 간의(羅諫議)가 전날에 했던 청을 다시 반복하였다. 내 생각에는 간의의 행장이 자세하고 명백하니, 굳이 다시 사족51)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또 나는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질병으로 기력이 손상되어 다시 이 일에 바칠 만한 심력(心力)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두 군(君)의 정성스런 요청에 답하지 않을 수 없겠기에 행장의 뒤에 써서 보낸다.정축년(1697, 숙종23) 8월 무오에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은 쓰다. 湖南徵士南圃先生金公旣沒二十有八年。其門人羅諫議晩成訪余于京邸。致其遺文三卷。旣又述其平生行義事終始而言曰。先師資稟勁特。氣調淸爽。年才毁齔。言語擧止異凡兒。年十二三。受大學中庸。日有開益。一日稟於其父松湖公曰士之責任甚大。豈可營營名利間。斲而少之。古人有言曰寧學聖人而不至。不以一善成名。此最可法也。遂作圖若說。揭之左右以自警省。及年十四五。長老見之者。莫不稱歎。目之以成德君子。朝紳之銜命過州境者。亦多就見之。家世不幸。病瘵死者十餘人。松湖公又嬰其疾。先生涕泣晝夜侍。不解衣視湯。及松湖公沒。事有至難。不可以常理言者。先生於是未能卽乎其心之安。先生旣獨子無兄弟。時年才十八歲矣。平生以爲至痛。常曰吾賦命奇薄。遭喪不能盡吾心。天地間一罪人也。不如爲農圃以沒世。因寓居南平之先墓下。扁其堂曰明農。自號南圃病逸。潛心聖賢書。有會心處。輒書之冊。有時閉目默坐。做存養謹獨之工。鄕里少年有來學者。各因其才。諄諄敎誨。嘗語學者曰人能收拾身心。不爲外物所誘奪。則自然志氣淸明。聖賢樂處可尋。學者所務。豈在記誦詞章間耶。先生尊信退陶先生之學。持身一以居敬爲主。嘗曰孔顔所授受。乃在視聽言動之間。制乎外所以養其中也。安有外放肆而內靜專者乎。時有安邦俊者。以僻學左見袒臂號於一世。分節義道學爲兩歧。著牛山問答數千言。譏斥先贒不遺餘力。游其門者翕然信之。先生憂其說之肆行。乃作質疑書以明其不然。邦俊心㘅之。其徒譁然攻斥不已。先生雖杜門却掃。未嘗求知於人。而華聞日彰。旌招累至。先生皆不就。己亥春孝廟下敎求言。先生擬上一疏。本之以誠意正心。推之以及當世之務。揲蓍不吉而止。自是除命屢下而終不起。鄕中子弟來學者甚衆。闢三齋以處之。嚴立科條。倣白鹿洞遺意。出入門下者。亦多異論。家子弟或請謝遣之則曰。經傳是聖賢公言。我幸先得其糟粕。以誠心來學。何忍拒之。時號宗匠儒林者。來在近境。欲與相見。辭以病終不往。其門生子弟嫉惡之已甚。飛言造謗。勒成罪案。使不得容身。先生喟然曰此輩啣憾有素。誣毁人若是。吾當謹避之。遂挈家來居于羅州故里。杜門屛跡。益無意於當世。而州中來學者踵相尋。亦不謝遣。立科程敎誨之一如南平時。先生襟懷坦蕩。未嘗有崖異之行。而趍時赴勢之徒。自相廝捱排擯傾軋。無所不至。先生不以爲意。好學之篤。終始如一日。敎授生徒。亹亹忘倦。座隅置一張琴。有時揮絃度曲。悠然有三代上想。處稠人廣坐中。風標俊爽。論議英發。雖麁悍凡流。每對之未嘗不斂袵起敬。於書無所觝滯。雖肯綮難解處。人或就正。莫不渙然冰釋。於當世之務。亦皆經心理會。嘗著經世通典一部書。論士農工商兵僧措置之宜。亦可見其未嘗忘世也。盖其平生所樹立。章章如是。而世道日下。知德者稀。又爲不悅者所齮齕。使是非邪正。幾於溷殽。不有君子稱述而表章之。其何以昭示來世。覆露其後嗣哉。玆敢再拜以請于執事。惟公幸哀而賜之一言。則泉壤之下。必將訢然而笑。以爲世果有知我者矣。玄逸生並一世。淸濁異流。雖未及識公。据其狀讀其書。亦足見其立心制行之高。好學樂善之誠。扶正議接後進之功。方欲摭其實。直書其事。適會此?。削職投荒。不敢更有意筆硯間。迺者獲蒙恩宥。撤棘南遷。公之外孫羅君景聖一再見訪。復申羅諫議前日之請。余惟諫議之狀。該悉明白。不必更着佛頭之糞。且余罪戾之餘。疾病摧頹。無復心力可供此役。惟是兩君勤懇之意。不可以不答也。因書此于行狀之後以歸之。上之二十四年戊寅正月十八日甲午。載寧李玄逸書。 나만성(羅晩成) 1646(인조24)~?. 자는 대로(大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78년(숙종4)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國朝文科榜目 肅宗 4年 戊午 增廣試》 송호공(松湖公) 김만영(金萬英)의 아버지인 김태흡(金泰洽)을 가리킨다. 고인(古人)이……것이다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말한 내용이다. 《王文成全書 卷6 與陳惟濬》 송호공(松湖公)이……있었습니다 상세하지는 않으나, 이 당시 일가친지 십여 명이 채질(瘵疾)에 걸려 죽고 부친 또한 이 병에 걸린 상황에 김만영이 집안의 독자인 탓에, 가족들이 전염을 우려하여 시병(侍病)과 치상(治喪)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저자를 공격하는 이들이 이 일을 비난의 빌미로 삼았는데, 이 일련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남평(南平) 현재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에 해당하는 옛 고을의 지명이다. 존양(存養)ㆍ신독(愼獨) 존양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바른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신독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이다. 《대학장구》 전(傳) 6장에 "악을 미워하기는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는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자겸(自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1장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퇴도 선생(退陶先生) 이황(李滉, 1501~1570)을 가리킨다.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6)~1654(효종5).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ㆍ우산(牛山),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초에 유일(遺逸)을 등용할 때 천거되었다. 저서로는 《은봉전서(隱峯全書)》가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3 隱峯全書》 참고로, 1652년(효종3) 김만영(金萬英)은 안방준이 지은 〈우산답문(牛山答問)〉에 대해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를 지어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명현(名賢)과 진유(眞儒)의 구분, 길재(吉再)에 대한 평가 등에서 이론을 보인다. 대문을……끊고 원문의 '두문각소(杜門卻掃)'는 대문을 닫아 걸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는다는 말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밀(李謐)이 "대문을 닫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았으며, 산업은 돌보지 않은 채 독서만 일삼았다.[杜門却掃, 棄産營書.]"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魏書 卷90 逸士列傳 李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중국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 산골짝에 있는 서원이다. 주희가 남강군 태수(南康軍太守)로 있었을 때, 과거에 그 자리에 있다가 없어진 서원을 재건하여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주희는 유교의 근본 덕목인 오륜(五倫), 배움의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점, 그리고 대인 관계의 기본자세로 구성된 교칙을 세워 제자들을 엄격히 가르쳤다고 한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朱子大全 卷86 祝文》 청탁(淸濁)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당파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후 숙종조(肅宗朝)에 들어오면서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서인은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으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청탁'은 바로 청남과 탁남을 가리키는데, 이현일(李玄逸)은 청남에 속했었다. 마침……때 이현일은 72세 때이던 1698년(숙종24)에 이 발문을 썼다. 이보다 앞서 68세 때이던 1694년(숙종20) 4월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그 즉시 사헌부의 계청으로 인해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의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가, 5월에 서울로 되잡혀 와서 신문을 받고 난 뒤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ㆍ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는 1689년(숙종15)에 구언(求言)에 응한 상소에서 당시 폐비(廢妃)되어 사가(私家)에 내쳐져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별궁(別宮)에 거처하게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문(疏文)에 있는 몇 구절이 인현왕후를 모해(謀害) 하고자 한 것이라고 꼬투리 잡혀 마침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다. 이현일은 이후 71세 때이던 1697년(숙종23) 5월에 호남의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가, 72세 때이던 1698년(숙종24) 3월에 섬진강(蟾津江) 갈은리(葛隱里)에 우거(寓居)한 바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27, 128輯 葛庵集》 사족 원문의 '불두지분(佛頭之糞)'은 본래는 참새가 부처 머리에 똥을 싸는 모습을 보고 최 상공(崔相公)과 선사가 나눈 문답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오대사(五代史)》에 어떤 사람이 서문을 지어 앞머리에 붙이려 하자, 왕안석(王安石)이 이를 인용해 "부처의 머리 위에 어찌 똥을 칠한단 말인가.[釋迦佛頭上, 不堪着糞.]"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이후로는 훌륭한 글의 첫머리에 변변치 못한 서문(序文) 등을 쓰는 것을 비유하는 겸사로 쓰이게 되었다. 《景德傳燈錄 如會禪師條》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5 文章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