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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선생집 옛날 발문 南圃先生集舊跋[李玄逸] 호남(湖南)의 징사(徵士) 남포 선생(南圃先生) 김공(金公)이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되었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39)이 경저(京邸)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 또 그의 평생 행의(行義)에 관한 일의 전말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선사(先師)께서는 자품(資品)이 굳세고 우뚝하였으며 기상이 맑고 시원하였습니다. 젖니를 갈 무렵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 《중용》을 전수받았는데, 날로 계발됨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아버지 송호공(松湖公)40)에게 여쭙기를 '선비가 책임지는 것이 매우 크니, 명리(名利)의 사이에서 급급히 다투느라 맡은 책임을 깎아 작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41)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본받을 만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도(圖)와 설(說)을 지어 좌우에 걸어두고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살폈습니다. 나이 14, 5세가 되자 그를 본 장로(長老)들은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성덕군자(成德君子)라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하로서 사명(使命)을 받고 고을의 경내를 방문한 사람도 그를 찾아와 만나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집안이 대대로 불행하여 폐질(肺疾)을 앓아 죽은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송호공 또한 그 병에 걸렸습니다. 선생은 울면서 밤낮으로 모시고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시탕(視湯)하였습니다. 송호공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도 난처하여 통상적인 이치로는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42) 선생이 이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였는데, 선생은 독자(獨子)로 형제가 없는 데다 나이가 겨우 18세였습니다. 평생 이를 매우 애통해하며 항상 말하기를 '나는 타고난 명운(命運)이 기박(奇薄)하여 상을 당해 내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농사나 지으면서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남평(南平)43)의 선묘(先墓) 아래에 우거(寓居)하면서 그 당(堂)을 '명농(明農)'이라 편액(扁額)하고 '남포병일(南圃病逸)'이라 자호(自號)하였습니다.성현의 서책을 깊이 연구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부분이 있으면 곧 책에다 쓰고, 때로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존양(存養)ㆍ신독(愼獨)44)의 공부를 하였습니다. 향리(鄕里)의 소년 중에 와서 배우는 자가 있으면 각기 그 재주에 따라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심신(心身)을 수습하여 외물(外物)에 뜻이 유혹되고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면 자연히 지기(志氣)가 청명(淸明)해져서 성현이 즐기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배우는 자가 힘쓸 것이 어찌 사장(詞章)을 기억하고 외는 데에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은 퇴도 선생(退陶先生)45)의 학문을 존경하고 신봉하여 몸가짐은 한결같이 거경(居敬)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주고받은 것은 바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 그 외면을 제어함으로써 내면을 기르는데 있었으니, 어찌 외면이 방종(放縱)하고 제멋대로이면서 내면이 고요하고 전일(專一)한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이 당시 안방준(安邦俊)46)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편벽된 학문과 잘못된 견해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세를 호령하였습니다.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을 나누어 다른 두 갈래라고 하면서 〈우산문답(牛山問答)〉 수천 마디 말을 지어 온 힘을 다해 선현(先賢)을 기롱하고 배척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학(遊學)하는 자들은 모두 그를 신봉하였습니다. 선생은 그 설이 횡행할까 우려하여 마침내 〈질의서(質疑書)〉를 지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니, 안방준이 마음속에 앙심을 품었고, 그 무리들은 떠들썩하게 끊임없이 공척(攻斥)하였습니다.공이 비록 대문을 닫고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47) 일찍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한 적이 없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날로 드러나 조정에서 초빙하는 깃발이 여러 번 이르렀는데, 선생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기해년(1659, 효종10) 봄에 효묘(孝廟)께서 하교하여 구언(求言)할 때에 선생은 한 통의 소본(疏本)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근본으로 하고 당세의 급무(急務)에까지 이를 미루어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점괘(占卦)가 길하지 못하므로 그만두었습니다. 이때부터 제수(除授)하는 명이 여러 번 내려졌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공에게 배우러 오는 향중(鄕中)의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 세 채의 서재를 열어 그곳에 거처하게 하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48)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웠습니다.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도 많았는데, 혹자가 물리치며 돌려보내기를 청하면 곧 '경전(經傳)은 성현의 공언(公言)으로 내가 요행히 먼저 그 찌꺼기를 얻은 것이다. 성심(誠心)을 가지고 와서 배운다면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던 자가 가까운 경내에 와 있으면서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매우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날조하여 비방하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선생이 몸을 보존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이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나에 대해 본래부터 유감을 품고 있었거니와 사람을 무함하고 헐뜯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내 마땅히 근신(謹愼)하여 피해야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와서 살면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감추니 더욱 당세(當世)에 뜻이 없었습니다. 주중(州中)에서 와서 배우려는 자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또한 사양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한결같이 남평(南平)에 있을 때처럼 과정을 세워 가르쳤습니다.선생의 흉금(胸襟)은 넓고 툭 트여 일찍이 괴상한 행실이 있지 않았는데, 시세(時勢)를 좇는 무리들이 더할 나위 없이 심하게 스스로 방해하고 배척하며 모함하였으나 선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독실함은 항상 한결같았으며, 생도(生徒)를 교육함에 부지런히 하고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자리 한구석에 가야금 한 장(張)을 놓아두고 때로 현을 퉁기며 곡을 연주하니, 유연히 삼대(三代) 이전의 의취(意趣)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처하더라도 그의 풍표(風標)가 준수하고 의론(議論)이 뛰어나 비록 거칠고 무식한 보통 사람이라도 매번 선생을 대할 때면 일찍이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글에 대해서는 막히는 바가 없었으니, 비록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이라도 사람들이 혹시 와서 질정(質正)하면 얼음이 녹듯 환하게 풀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당세의 급무에 대해서도 모두 관심을 두고 이해하였습니다.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 한 부를 지어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타당하게 조치하는 것에 대해 논하였으니, 또한 일찍이 세상을 잊어 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그 평생 동안 수립한 것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세도가 날로 쇠하여 덕을 알아줄 이가 적었던 데다, 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게 헐뜯기다 보니,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대한 구분이 뒤섞여버렸습니다. 군자가 칭술(稱述)하여 드러내어 밝히지 않는다면 어찌 후세에 밝게 보여주며 그 후손을 보살펴주겠습니까. 이에 감히 재배(再拜)하고서 집사(執事)에게 청하는 것이니, 다만 공께서 애처롭게 여겨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지하(地下)에서 반드시 흔연(欣然)히 웃으면서 '세상에 과연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도다.' 하실 것입니다."현일(玄逸)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청탁(淸濁)49)이 서로 달라 비록 미처 공을 알지는 못했으나 그 행장(行狀)에 근거하고 그 글을 읽어보니 또한 그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모범적으로 한 고원(高遠)함과 학문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는 성심(誠心)과 바른 의론을 부지하고 후진을 인도한 공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이에 막 그 사실을 발췌하여 그 일을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이렇게 화를 만나 삭직(削職)되어 먼 지방에 유배되는 바람에, 감히 다시 붓을 잡아 글을 짓는 일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사면해 주시는 성은을 입어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풀려나 남쪽으로 옮겨졌을 때50) 공의 외손(外孫) 나군 경성(羅君景聖)이 한두 번 찾아와 나 간의(羅諫議)가 전날에 했던 청을 다시 반복하였다. 내 생각에는 간의의 행장이 자세하고 명백하니, 굳이 다시 사족51)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또 나는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질병으로 기력이 손상되어 다시 이 일에 바칠 만한 심력(心力)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두 군(君)의 정성스런 요청에 답하지 않을 수 없겠기에 행장의 뒤에 써서 보낸다.정축년(1697, 숙종23) 8월 무오에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은 쓰다. 湖南徵士南圃先生金公旣沒二十有八年。其門人羅諫議晩成訪余于京邸。致其遺文三卷。旣又述其平生行義事終始而言曰。先師資稟勁特。氣調淸爽。年才毁齔。言語擧止異凡兒。年十二三。受大學中庸。日有開益。一日稟於其父松湖公曰士之責任甚大。豈可營營名利間。斲而少之。古人有言曰寧學聖人而不至。不以一善成名。此最可法也。遂作圖若說。揭之左右以自警省。及年十四五。長老見之者。莫不稱歎。目之以成德君子。朝紳之銜命過州境者。亦多就見之。家世不幸。病瘵死者十餘人。松湖公又嬰其疾。先生涕泣晝夜侍。不解衣視湯。及松湖公沒。事有至難。不可以常理言者。先生於是未能卽乎其心之安。先生旣獨子無兄弟。時年才十八歲矣。平生以爲至痛。常曰吾賦命奇薄。遭喪不能盡吾心。天地間一罪人也。不如爲農圃以沒世。因寓居南平之先墓下。扁其堂曰明農。自號南圃病逸。潛心聖賢書。有會心處。輒書之冊。有時閉目默坐。做存養謹獨之工。鄕里少年有來學者。各因其才。諄諄敎誨。嘗語學者曰人能收拾身心。不爲外物所誘奪。則自然志氣淸明。聖賢樂處可尋。學者所務。豈在記誦詞章間耶。先生尊信退陶先生之學。持身一以居敬爲主。嘗曰孔顔所授受。乃在視聽言動之間。制乎外所以養其中也。安有外放肆而內靜專者乎。時有安邦俊者。以僻學左見袒臂號於一世。分節義道學爲兩歧。著牛山問答數千言。譏斥先贒不遺餘力。游其門者翕然信之。先生憂其說之肆行。乃作質疑書以明其不然。邦俊心㘅之。其徒譁然攻斥不已。先生雖杜門却掃。未嘗求知於人。而華聞日彰。旌招累至。先生皆不就。己亥春孝廟下敎求言。先生擬上一疏。本之以誠意正心。推之以及當世之務。揲蓍不吉而止。自是除命屢下而終不起。鄕中子弟來學者甚衆。闢三齋以處之。嚴立科條。倣白鹿洞遺意。出入門下者。亦多異論。家子弟或請謝遣之則曰。經傳是聖賢公言。我幸先得其糟粕。以誠心來學。何忍拒之。時號宗匠儒林者。來在近境。欲與相見。辭以病終不往。其門生子弟嫉惡之已甚。飛言造謗。勒成罪案。使不得容身。先生喟然曰此輩啣憾有素。誣毁人若是。吾當謹避之。遂挈家來居于羅州故里。杜門屛跡。益無意於當世。而州中來學者踵相尋。亦不謝遣。立科程敎誨之一如南平時。先生襟懷坦蕩。未嘗有崖異之行。而趍時赴勢之徒。自相廝捱排擯傾軋。無所不至。先生不以爲意。好學之篤。終始如一日。敎授生徒。亹亹忘倦。座隅置一張琴。有時揮絃度曲。悠然有三代上想。處稠人廣坐中。風標俊爽。論議英發。雖麁悍凡流。每對之未嘗不斂袵起敬。於書無所觝滯。雖肯綮難解處。人或就正。莫不渙然冰釋。於當世之務。亦皆經心理會。嘗著經世通典一部書。論士農工商兵僧措置之宜。亦可見其未嘗忘世也。盖其平生所樹立。章章如是。而世道日下。知德者稀。又爲不悅者所齮齕。使是非邪正。幾於溷殽。不有君子稱述而表章之。其何以昭示來世。覆露其後嗣哉。玆敢再拜以請于執事。惟公幸哀而賜之一言。則泉壤之下。必將訢然而笑。以爲世果有知我者矣。玄逸生並一世。淸濁異流。雖未及識公。据其狀讀其書。亦足見其立心制行之高。好學樂善之誠。扶正議接後進之功。方欲摭其實。直書其事。適會此?。削職投荒。不敢更有意筆硯間。迺者獲蒙恩宥。撤棘南遷。公之外孫羅君景聖一再見訪。復申羅諫議前日之請。余惟諫議之狀。該悉明白。不必更着佛頭之糞。且余罪戾之餘。疾病摧頹。無復心力可供此役。惟是兩君勤懇之意。不可以不答也。因書此于行狀之後以歸之。上之二十四年戊寅正月十八日甲午。載寧李玄逸書。 나만성(羅晩成) 1646(인조24)~?. 자는 대로(大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78년(숙종4)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國朝文科榜目 肅宗 4年 戊午 增廣試》 송호공(松湖公) 김만영(金萬英)의 아버지인 김태흡(金泰洽)을 가리킨다. 고인(古人)이……것이다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말한 내용이다. 《王文成全書 卷6 與陳惟濬》 송호공(松湖公)이……있었습니다 상세하지는 않으나, 이 당시 일가친지 십여 명이 채질(瘵疾)에 걸려 죽고 부친 또한 이 병에 걸린 상황에 김만영이 집안의 독자인 탓에, 가족들이 전염을 우려하여 시병(侍病)과 치상(治喪)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저자를 공격하는 이들이 이 일을 비난의 빌미로 삼았는데, 이 일련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남평(南平) 현재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에 해당하는 옛 고을의 지명이다. 존양(存養)ㆍ신독(愼獨) 존양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바른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신독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이다. 《대학장구》 전(傳) 6장에 "악을 미워하기는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는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자겸(自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1장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퇴도 선생(退陶先生) 이황(李滉, 1501~1570)을 가리킨다.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6)~1654(효종5).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ㆍ우산(牛山),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초에 유일(遺逸)을 등용할 때 천거되었다. 저서로는 《은봉전서(隱峯全書)》가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3 隱峯全書》 참고로, 1652년(효종3) 김만영(金萬英)은 안방준이 지은 〈우산답문(牛山答問)〉에 대해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를 지어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명현(名賢)과 진유(眞儒)의 구분, 길재(吉再)에 대한 평가 등에서 이론을 보인다. 대문을……끊고 원문의 '두문각소(杜門卻掃)'는 대문을 닫아 걸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는다는 말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밀(李謐)이 "대문을 닫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았으며, 산업은 돌보지 않은 채 독서만 일삼았다.[杜門却掃, 棄産營書.]"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魏書 卷90 逸士列傳 李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중국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 산골짝에 있는 서원이다. 주희가 남강군 태수(南康軍太守)로 있었을 때, 과거에 그 자리에 있다가 없어진 서원을 재건하여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주희는 유교의 근본 덕목인 오륜(五倫), 배움의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점, 그리고 대인 관계의 기본자세로 구성된 교칙을 세워 제자들을 엄격히 가르쳤다고 한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朱子大全 卷86 祝文》 청탁(淸濁)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당파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후 숙종조(肅宗朝)에 들어오면서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서인은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으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청탁'은 바로 청남과 탁남을 가리키는데, 이현일(李玄逸)은 청남에 속했었다. 마침……때 이현일은 72세 때이던 1698년(숙종24)에 이 발문을 썼다. 이보다 앞서 68세 때이던 1694년(숙종20) 4월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그 즉시 사헌부의 계청으로 인해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의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가, 5월에 서울로 되잡혀 와서 신문을 받고 난 뒤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ㆍ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는 1689년(숙종15)에 구언(求言)에 응한 상소에서 당시 폐비(廢妃)되어 사가(私家)에 내쳐져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별궁(別宮)에 거처하게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문(疏文)에 있는 몇 구절이 인현왕후를 모해(謀害) 하고자 한 것이라고 꼬투리 잡혀 마침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다. 이현일은 이후 71세 때이던 1697년(숙종23) 5월에 호남의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가, 72세 때이던 1698년(숙종24) 3월에 섬진강(蟾津江) 갈은리(葛隱里)에 우거(寓居)한 바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27, 128輯 葛庵集》 사족 원문의 '불두지분(佛頭之糞)'은 본래는 참새가 부처 머리에 똥을 싸는 모습을 보고 최 상공(崔相公)과 선사가 나눈 문답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오대사(五代史)》에 어떤 사람이 서문을 지어 앞머리에 붙이려 하자, 왕안석(王安石)이 이를 인용해 "부처의 머리 위에 어찌 똥을 칠한단 말인가.[釋迦佛頭上, 不堪着糞.]"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이후로는 훌륭한 글의 첫머리에 변변치 못한 서문(序文) 등을 쓰는 것을 비유하는 겸사로 쓰이게 되었다. 《景德傳燈錄 如會禪師條》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5 文章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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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언절구) 詩(五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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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정군평8)의 「제승축」 시에 화운하다9) 和東溟鄭君平題僧軸韻 물속에 하늘이 비치니천심이 또한 수심일세마음이 두 가지 근본이 있다고 여겨선림에서 벽을 마주하고 앉았들랑10) 마오 水底暎天心天心亦水心莫看心二本面壁坐禪林 동명(東溟) 정군평(鄭君平) 정두경(鄭斗卿, 1597~1673)으로, 동명은 그의 호이고, 군평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정회(鄭晦)의 아들이며,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626년(인조4) 문장으로 유명한 중국 사신의 접대에 포의의 신분으로 참여하였다. 1629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수찬과 정언 등을 지냈으나, 이후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 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 「제승축」 시에 화운하다 《동명집(東溟集)》 권2 「제승축(題僧軸)」에 "도령 이에 문을 닫고 누워 있는데, 응진 이에 석장 타고 날아서 왔네. 하루 종일 뜨락 온통 고요만 한데, 마주하여 이끼 위에 앉아 보내네.[閉門陶令臥, 飛錫應眞來, 竟日庭除靜, 相携坐碧苔.]"라고 하였고, 《동명집(東溟集)》 권3 「제승축(題僧軸)」에 "내게 시편 부탁하러 자주자주 오가느라, 수고하는 산승 모습 보니 정말 우습고야. 홀로 낙락장송 아래 고이 앉아 있으면서, 서강의 물 잔으로 떠다 마심만 못하리라.[爲索詩篇數往來, 山僧笑爾亦勞哉, 不如獨坐長松下, 吸盡西江水一杯.]"라고 하였다. 선림에서……앉았들랑 불가(佛家)에서 좌선의 수행을 통해 깨우치는 것을 말한다. 보리달마(菩提達摩)가 남조 양(南朝梁)나라 때 인도에서 중국에 온 뒤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면서 9년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면벽(面壁)하며 좌선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고 했다고 한다. 《景德傳燈錄 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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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제【해영(海英)127)】의 산당(山堂)에 부치다【무술년(1658, 35세)】 寄從弟【海英】山堂【戊戌年】 작은 정자 새로 지어 양기(陽氣) 생기는 동쪽을 향하니아득히 호수와 하늘을 눌러 기세가 웅장하네문으로 금강(錦江)의 빛 들이니 천 굽이 물이요창에 신라와 백제의 기운 머금으니 여섯 자라128)의 바람이로다나루 잃은 초(楚)나라 선박 황룡(黃龍)의 배129)요성곽 두른 오(吳)나라 조수 흰 비단이 붉어지네130)작은 정자 세 척(尺)의 땅을 내려가지 않아도사마자장(司馬子長)처럼 형승을 유람한 공효를 거둘 수 있네131) 小亭新築向陽東逈壓湖天氣勢雄門納錦光千曲水窓含羅濟六鰲風迷津楚舶黃龍舫繞郭吳潮白練紅不下小亭三尺地子長形勝可收功 해영(海英) 김해영(金海英)을 가리킨다. 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여섯 자라 바닷속에서 삼신산(三神山)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거인국인 용백국(龍伯國)의 어떤 사람이 한 번의 낚시로 이 자라 여섯 마리를 한꺼번에 낚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황룡(黃龍)의 배 우(禹)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지고 뒤집으려 하였다. 배에 탄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늘 우 임금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나는 하늘에서 천명을 받아 힘을 다해 만민을 위로하고 있으니, 삶은 이 세상에 기탁하는 것이고 죽음은 저승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하고 황룡 보기를 도마뱀처럼 하고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황룡이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며 물러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十八史略 卷1》 성곽……붉어지네 바다가 석양에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공자가 안연(顔淵)과 함께 노(魯)나라 태산(泰山)에 올라 오(吳)나라의 창문(昌門)을 바라보았는데 안연이 말하기를, "한 필의 하얀 베가 보입니다.[見一匹練]"라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그것은 흰말[白馬]이다."라 한 고사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818》 사마자장(司馬子長)처럼……있네 '사마자장(司馬子長)'은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로(齊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 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산당(山堂)의 풍광이 좋아 굳이 사마천처럼 천하를 유람하지 않아도 천지의 기운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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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여(李堪輿)【계현(啓玄)】에게 주다 贈李堪輿【啓玄】 나무 아래의 남아(男兒)85) 바닷가에서 태어나니한 마음의 천지 현비(玄扉)를 열어젖히네86)정신은 산수의 맑고 찬 굴에서 노닐고신묘함은 풍운의 변화하는 기틀에 이르네금강(金剛)의 천만 가지 모습을 다 보고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 일곱 기틀을 모두 아네87)대장부가 행하는 일은명교(名敎)88) 가운데로 절로 귀결됨을 알아야 하리 木下男兒生海圻一心天地啓玄扉神遊山水淸冷窟妙到風雲變化幾觀盡金剛千萬像智窮璇玉四三機須知大丈夫行事名敎中間自在歸 나무 아래의 남아(男兒) '이(李)' 자를 파자(破字)하여 표현한 것으로, 이씨(李氏) 남자 아이를 뜻한다. 현비(玄扉)를 열어젖히네 원문은 '계현비(啓玄扉)'다. 이계현(李啓玄)의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현비(玄扉)'는 보통 무덤의 문 또는 저승과 통하는 문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오묘한 이치를 품고 있는 문'의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아네 '선기옥형(璿璣玉衡)'은 아름다운 주옥으로 꾸민 하늘의 도수를 측정하는 기구이며, '일곱 기틀'은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을 가리킨다. 《서경》 〈순전(舜典)〉에, "선기와 옥형을 살펴 칠정을 고르게 하였다.[在璿璣玉衡 以齊七政]"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명교(名敎) 인륜(人倫)의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으로, 곧 유교(儒敎)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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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이(金丈而) 신(愼)의 시에 차운하여 김 거사(金居士)에게 화답하다 次金丈而愼韻。酬金居士。 버들 묻고 꽃 찾아 수원(水源)으로 가니교외의 집 적막하여 속세의 시끄러움 멀리하네인간 세상에서 누가 시에 곤궁한 늙은이91)를 알겠는가세상 밖에서 언제나 풀로 뒤덮인 문 잠그고 있다네두 백씨(白氏) 고심해 시 읊는 것 백중(伯仲)이 나란하고92)삼홍(三紅)의 공교한 법93)으로 아들 손자를 가르치네생각건대 두 다리 뻗고서 아름다운 구절 지을 것이니94)시 짓느라 산처럼 어깨 움츠릴 때 뜻 가득하겠지95) 問柳尋花趁水源郊居寂寂謝塵喧人間孰識窮詩老世外常關蔽蓽門二白苦吟連伯仲三紅巧法敎兒孫想當盤礴成佳句肩聳山時意十分 시에 곤궁한 늙은이 원문은 '궁시로(窮詩老)'다. '시궁(詩窮)'은 시를 좋아함으로써 곤궁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매성유시서(梅聖兪詩序)〉에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궁해진 뒤에야 시가 공교해지는 것이다.[非詩能窮人 詩窮者而後工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두……나란하고 '두 백씨(白氏)'는 당나라 때 활동한 백거이(白居易)와 백행간(白行簡) 형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백거이의 아우 백행간도 형인 백거이의 문풍(文風)이 있었고 사부(辭賦)에선 더욱 정밀하였다고 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김 거사의 형제가 모두 시에 능하였기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삼홍(三紅)의 공교한 법 시에 대한 뛰어난 재주를 말한다. 송(宋)나라 때 응자화(應子和)가 시를 잘하여 일찍이 '양안석양홍(兩岸夕陽紅)', '납거단소홍(蠟炬短燒紅)', '풍과낙화홍(風過落花紅)'이라는 세 명구(名句)를 지어 당시 사람들에게 '삼홍수재(三紅秀才)'로 일컬어졌던 데서 온 말이다. 《山堂肆考 卷103 三影先生》 두……것이니 '두 다리를 뻗는다.'는 것은 재능에 뛰어난 이가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임을 말한다.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게 하였더니, 뭇 화공들이 몰려들었던바, 그들은 모두 서로 읍을 하고 서서 붓을 빨고 먹을 갈고 하는데, 이때 경쟁자가 많아서 반수는 밖에 있었다. 그때 한 화공은 가장 늦게 와서 달려오지도 않고 천천히 들어와 읍을 하고는 서지도 않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므로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의 행동을 엿보게 했더니, 그는 옷을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나체로 있었다. 원군이 말하기를 '됐다. 이 사람이 참다운 화공이다.'고 했다.[宋元君將畫圖 衆史皆至 受揖而立 舐筆和墨 在外者半 有一史後至者 儃儃然不趨 受揖不立 因之舍 公使人視之 則解衣盤礴臝 君曰可矣 是眞畫者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시……가득하겠지 어깨를 움츠리고 시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시 〈증사진하수재(贈寫眞何秀才)〉에 나귀를 타고 파교(灞橋)를 지나가는 맹호연(孟浩然)을 읊으며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쭝긋한 어깨가 산처럼 높네.[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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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 운을 써 시를 지어 오질12)에게 보여주다 用行字韻示吳侄 곤궁함에 처해 보아야 바야흐로 형통할 수 있나니모름지기 학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네냉이 캐어 먹는 생활13) 그대는 고달파 하지 마소죽을 쪼개 아껴먹던 일14) 옛날에도 있었다오 處困方能亨須期學業成啖薺君莫苦畫粥古猶行 오질(吳侄)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냉이……생활 배고픔을 참아가며 수학(修學)하는 것을 의미한다. 송(宋) 나라 채원정(蔡元定)이 서산(西山)에서 공부할 적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냉이를 캐어 먹었다고 한다. 그 열전(列傳)에 "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배고픔을 참고 제를 캐어 먹으며 글을 읽다가, 주희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주희가 그의 학문 실력을 시험해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이 사람은 나의 오래된 벗이라고 할 것이니, 제자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登西山絶頂, 忍饑啖薺讀書, 聞朱熹名, 往師之. 熹扣其學, 大驚曰, 此吾老友, 不當在弟子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434 蔡元定列傳》 죽을……일 원문의 '획죽(畫粥)'은 죽이 식으면 칼로 선을 그어 나누어 먹는 것으로, 이 역시 배고픔을 참아가며 수학(修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 권7 「참정범문정공(參政范文定公)」에 "범중엄은 어려서 유 아무개와 함께 장백산에 있는 승사(僧舍)에 올라가 수학하면서 오직 좁쌀 두 되를 삶아 죽 한 그릇을 쑤어놓고는 하룻밤이 지나 마침내 죽이 굳으면 칼로 네 덩이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두 덩이를 먹었으며, 부추 수십 줄기를 끊어다가……약간의 소금을 넣어 익혀서 먹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3년이나 하였다.[公少與劉某上長白僧舍脩學, 惟煮粟米二升, 作粥一器, 經宿遂凝, 以刀畫爲四塊, 早晚取二塊, 斷虀數十莖,……入少鹽, 煖而啗之. 如此者三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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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비웃으며【제나라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깨닫는 자가 있다면 이 두 수의 시는 나의 찌꺼기임을 충분히 알 것이다.52)】 嘲陷中虎【齊人中若有神會者。 二詩足以知余糟粕。】 세상 사람들이 어찌 참으로 너를 원수로 여기랴너의 아롱진 무늬가 재앙의 빌미 되는 탓이 클 테지차라리 소나 개의 생가죽을 입고추우53)의 마음을 품는 것이 나으리라54) 世豈眞讎汝班文禍祟深寧被羊犬鞹抱得雛虞心 제(齊) 나라……것이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글을 읽고 있을 때, 마침 장인(匠人)이 그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환공에게 "감히 묻겠습니다. 공께서 읽으시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敢問, 公之所讀者何言耶?]"라고 하였다. 환공이 성인(聖人)의 말씀이라고 하자, 그가 또 성인이 살아 있느냐고 물으므로, 환공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已夫.]"라고 하고는, 이어서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리게 하면 헐렁해서 꼭 끼이지 않고, 빨리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는데,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 익숙해져서 마음에 호응하는 것이라, 입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신의 자식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가 없고 신의 자식도 그것을 신에게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天道》 추우(騶虞) 모양이 백호(白虎)와 비슷한데 검정 무늬가 있으며 꼬리가 몸보다 긴 짐승으로, 생물을 잡아먹지 않고 생풀을 먹지 않는다 하여 기린과 함께 인수(仁獸)로 알려져 있다. 雛 저본에는 '雛'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근거하여 '騶'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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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 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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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落花 꽃잎 무심하게 바람 따라 날리니서쪽 교외 막 지나고서 다시 동쪽을 향하네나비 은연중에 한 가닥 향기를 따르니위로 높은 가지에 올랐다가 가지 떨기로 내려오네 飛花無意信遊風纔過西郊又向東蝴蝶暗隨香一縷上穿高枝下枝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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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이 읊다 漫吟 밝고 밝은 아침 해 층층이 쌓인 그늘 흩어주니동창에서 잠 깨어 소옹(邵雍)의 시132) 사랑하네삼라만상 다 열려 하늘의 기운 광활하고온 시내 처음 개어 이슬 꽃 그윽하네난초는 서리의 무게로 인해 이지러진 잎 많고매화는 양기(陽氣) 생겨남으로 인해 은연중에 봄마음 새어 나오네원량(元亮)133)에게 어찌 세상에 구하는 뜻이 없었겠는가마는도리어 시와 술을 사랑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옷자락 풀어 헤쳤네두 번째푸른 소나무 자란 남쪽 두둑 작은 매화 핀 집반평생 부질없는 명성 안고서 홀로 문을 닫고 지내네하늘의 도(道) 예나 지금이나 유수(流水)처럼 흘러가고사람의 정 아침저녁으로 어지러운 구름처럼 바뀌네134)뜻대로 되지 않은 일 모두 하늘의 명(命)으로 인한 것이니나를 알아주는 이 없다는 탄식135) 말하지 말라근래 듣건대 시냇가에 봄이 다해 간다고 하니일찍부터 활수(活水)의 근원에서 참됨[眞]을 찾고자 하네136) 明明朝日决層陰睡起東窓愛邵吟萬象畢開天氣豁一川初霽露華深蘭仍霜重多虧葉梅爲陽生暗漏心元亮豈無求世志却憐詩酒好披襟其二蒼松南畔小梅軒半世浮名獨閉門天道古今流水謝人情朝暮亂雲翻不如意事皆由命莫我知歎須勿言近聞溪上春歸盡早擬尋眞活水源 소옹(邵雍)의 시 원문은 '소음(邵吟)'이다. 송나라 소옹(邵雍)은 〈청야음(淸夜吟)〉, 〈수미음(首尾吟)〉, 〈동지음(冬至吟)〉, 〈관물음(觀物吟)〉 등 여러 시를 읊었는데, 구체적으로 그의 어떤 시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량(元亮) 진(晉)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도연명(陶淵明)의 자다. 팽택 현령(彭澤縣令)이 되었다가 석 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아간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의……바뀌네 인정세태(人情世態)의 반복무상함을 비유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으면 구름 되고 손 엎으면 비가 된다.[翻手作雲覆手雨]"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나를……탄식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子曰 莫我知也夫]"라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일찍부터……하네 '활수(活水)'는 근원이 있어 항상 흐르는 물을 말한다. 주희(朱熹)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조그맣고 모난 연못에 한 거울이 열리어,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묻거니 어이하여 그처럼 맑은가. 근원에서 활수가 솟아 나오기 때문이라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 한 대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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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감회가 있어 長至日有感 하나의 양(陽) 돌아와 회복하는 것이 천근(天根)이니140)한밤중의 뇌성 하늘의 문을 열어젖히네삼십육궁(三十六宮)에 봄 차례로 시작되고141)천만의 가호(家戶)엔 기운이 정(貞)에서 원(元)으로 이어지네142)인간 세상에선 매서운 눈바람만 보일 뿐이니지하에서 온화한 기운 움직이는 줄 누가 알리오이날 서생은 깊이 뜻한 바 있으니창 밖에 핀 작은 매화에 은연중에 넋이 생겨나네143) 一陽來復是天根半夜雷聲啓九門三十六宮春次第萬千家戶氣貞元人間但見馳風雪地下誰知動暖暄此日書生深有意小梅窓外暗生魂 하나의……천근(天根)이니 《주역(周易)》에서 동지(冬至)에 하나의 양(陽)이 처음 아래에서 생기는 것이 복괘(復卦)인데, 이를 '천근(天根)'이라고도 한다.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관물음(觀物吟)〉에, "이목(耳目)이 총명한 남자 몸으로 태어났으니, 천지조화의 부여가 빈약하지 않구나. 월굴을 탐구해야만 물을 알 수 있거니와, 천근에 못 올랐다면 어찌 사람을 알리요. 건이 손을 만난 때에 월굴을 살펴보고, 지가 뇌를 만난 곳에서 천근을 볼 수 있으니, 천근과 월굴이 한가로이 왕래하는 가운데 삼십육궁이 온통 봄이로구나.[耳目聰明男子身 洪鈞賦與不爲貧 須探月窟方知物 未躡天根豈識人 乾遇巽時爲月窟 地逢雷處見天根 天根月窟閒往來 三十六宮都是春]"라 하였다. 삼십육궁(三十六宮)……시작되고 송(宋)나라 소옹의 〈관물음(觀物吟)〉에, "천근과 월굴이 한가히 왕래하는 중에, 삼십육궁이 모두 봄이로구나.[天根月窟閒往來 三十六宮都是春]"라 한 데서 취해 온 구절이다. '삼십육궁'은 64괘(卦)와 같은 것으로서 64괘 모두가 하나의 봄기운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삼십육궁과 관련하여, "'64괘중에 변역(變易)하는 괘가 8이니, 건괘(乾卦)‧곤괘(坤卦)‧감괘(坎卦)‧이괘(離卦)‧이괘(頤卦)‧대과괘(大過卦)‧중부괘(中孚卦)‧소과괘(小過卦)이고, 교역(交易)하는 괘가 56이니, 둔괘(屯卦)‧몽괘(蒙卦) 이하가 그것이다. 변역은 8괘가 각각 한 궁이 되고, 교역은 2괘가 합하여 한 궁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해설이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라 하였다. 《星湖僿說 卷20 經史門 三十六宮》 천만의……이어지네 원문의 '정원(貞元)'은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 가운데 정(貞)과 원(元)을 말한다. 오행(五行)에서 정은 겨울에, 원은 봄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지가 되었으므로 집집마다 봄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창……생겨나네 매화의 고결한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송풍정하매화성개(松風亭下梅花盛開)〉에, "나부산 아래 매화 마을에는, 옥설이 뼈가 되고 얼음이 넋이 되었네.[羅浮山下梅花村 玉雪爲骨氷爲魂]"라 하였다. 《東坡全集 卷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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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月皐趙先生【性家】 蘆門先進士。孰與吾親厚。普陽趙夫子。平生是執友。同事四十年。抱經老白首。有若似聖人。後生仰山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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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城訪同門知舊 一來此何晩。知友多齊等。聞我爭來集。勞我意殊逈。權家三秀美。崔有二難竝。新安江上齋。講學春霄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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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嘉慰艾山鄭哀丈【載圭】 堊室蕭然老子廬。顔丁如此善居喪。平生講學勤修功。今日尤嚴大禮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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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家二首 秋盡鴈難到。夜長人未眠。家山何處是。雲水渺南天。千里兩相憶。裯衾冷不眠。團團心一片。明月在中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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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廣石臺 石臺石穴自生風。天下奇形在此中。司馬南遊曾不到。名山恨出小邦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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