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촌(道民村)282) 道民村 문공(文公)283)의 고을 안의 백공(白公)284)의 다스림천년된 아름다운 명성 야로(野老)들이 알고 있네아직도 오래된 회화나무 서너 그루 있으니285)가지 그늘 예전처럼 그림자 어지럽네 文公鄕裏白公治千載休聲野老知猶有古槐三四樹陰依舊影參差 도민촌(道民村) 김만영이 살던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남평현(南平縣)〉에, "도민부곡(道民部曲). 현에서 서남쪽으로 16리 떨어져 있다."라 되어 있다. 문공(文公) 남평(南平)을 관향으로 하는 고려 때 문신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남평, 자는 덕병(德柄)이다.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 황주 판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등을 맡았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좌정언 때 직언한 일로 화를 면하였고, 1171년에는 우승선 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였다. 이후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 태자소사(太子少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 등을 역임하였다. 백공(白公)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지낸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이다. 1537년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예조 좌랑을 지냈고, 남평 현감이 되어 학당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병조 참판, 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아직도……있으니 주(周)나라 때 궁정의 바깥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삼공이 천자를 조회할 적에 이 회화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므로, 후대에는 이를 인해 정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周禮 秋官》 과거 도민촌에서 배출된 고관(高官)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