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지72)에 대한 만사【나위소이다】 挽羅同知【緯素】 지극한 효성으로 여경73)을 여니명공이 음덕으로 백 년 만에 나왔도다젊은 시절74) 부모를 거듭 여의고계방과 연방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네75)태상시에서 교외 제사를 흠향하고76)교문에서 도 강론하는 연석을 접하였다오77)성상의 노고 육부에서 나누어 맡았고78)은수는 지하에 계신 부모에게까지 미쳤도다79)이품관으로 영예롭게 금의환향하였고80)여든 넘게 장수하여 천수를 누렸네81)문은 돌아가는 새를 등지고서 열렸고처마는 피어오르는 구름 가에 기대었네낙사82)에는 관개83)가 모여들고평천84)에서 복전85)을 누렸도다북신은 갑적을 무너뜨리고86)남극성은 정전에서 빛을 거두었네87)발자국 소리는 마름 돋은 물가에 남았고지팡이 소리는 향초 자란 밭두둑 너머에서 들려오네석성88)의 보석89)을 감춰두고난옥90)같은 어진 자제들 경사를 잇는도다요행으로 외람되이 어머니의 가속으로서인하여 온전한 지우를 입었었네평생 한 줌의 눈물을저물녘 안개 자욱한 강에 흩뿌리리라 至孝開餘慶明公蔭百年深憂冠闋立通籍桂兼蓮太寺欽郊畤橋門接道筵聖勞分六府恩數逮三泉貳秩榮還錦期髦考順天門開歸鳥背軒倚出雲邊洛社傾冠盖平泉享福田北辰虧甲籍南曜斂丁躔屐齒留蘋渚筇音隔蕙阡石城藏寶舃蘭玉慶諸贒幸辱孃家屬仍蒙眷遇全平生一掬淚灑向暮江烟 나동지(羅同知) 나위소(羅緯素, 1583~1666)이다. 나주(羅州)에서 출생하여 1623년(인조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형조 좌랑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에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군량 조달에 힘썼다. 1650년(효종1) 9월부터 1652년 4월까지 경주 목사(慶州牧使)를 지낸 뒤에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살다가 80세가 되어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여경(餘慶) 조상의 은택(恩澤)으로 자손이 번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 원문의 '冠闋立'은 약관(弱冠)의 나이인 스무 살부터 이립(而立)의 나이인 서른 살 무렵까지로, 젊은 시절을 의미한다. 계방(桂坊)과……올렸다네 나위소가 34세 때이던 광해군 8년(161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5년 후 삼남(三南) 지역에서 선비를 시취(試取)할 때 장원으로 합격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되어 급제한 것을 말한다. 계방은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람을 적은 방목이고, 연방(蓮坊)은 소과(小科)인 생원과와 진사과에 입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방목(榜目)이다. 곧 여기에서는 나위소가 소과와 대과에 모두 급제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상시(太常寺)……흠향하고 태상시는 봉상시(奉常寺)이다. 이는 나위소가 인조 12년(1634)에 태상시 첨정(太常寺僉正)에 제수된 것을 가리킨다. 교문(橋門)……접하였다오 교문은 성균관을 가리키는 말로, 주위에 물이 흐르고 다리를 통해 네 개의 문으로 들어가므로 이른 말이다. 이는 나위소가 1630년(인조8)에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에 제수되고, 1644년(인조22)에 다시 사예(司藝)에 제수된 것 등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성상의……맡았고 이는 나위소가 형조 좌랑(刑曹佐郎), 공조 좌랑(工曹佐郎), 예조 정랑(禮曹正郎) 등을 두루 역임한 것을 의미한다. 육부(六府)는 이조(吏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ㆍ형조(刑曹)ㆍ공조(工曹)를 가리킨다. 은수(恩數)는……미쳤도다 나위소의 돌아가신 부모까지 추증(追贈)해주었다는 말인 듯하다. 원문의 '三泉'은 무덤 속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진시황의 무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삼천까지 뚫고 들어가 구리를 녹여 붓고 그 속에 관을 넣었다.[穿三泉, 下銅而致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품관(二品官)으로……금의환향하였고 나위소가 종2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된 일을 가리킨다. 여든……누렸네 나위소는 85세에 별세하였다. 낙사(洛社) 낙양(洛陽)에서 결성한 원로들의 모임으로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나라 때에 백거이(白居易)가 주도하여 호고(胡杲), 길민(吉旼), 정거(鄭據), 유정(劉貞), 노진(盧眞), 장혼(張渾), 적겸모(狄兼謨), 노정(盧貞) 등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후대에 이를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라 하였다. 둘째는 북송 때에 낙양 유수(洛陽留守) 문언박(文彦博)이 부필(富弼), 석여언(席汝言), 왕상공(王尙恭), 조병(趙丙), 유궤(劉几), 풍행기(馮行己), 초건중(楚建中), 왕신언(王愼言), 왕공신(王拱辰), 장문(張問), 장도(張燾), 사마광(司馬光) 등과 함께 결성한 모임으로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고 칭하였다. 여기에서는 김만영의 집에 고관이나 사대부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관개(冠蓋) 관원의 관복과 수레를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관원의 행차나 관모(冠帽)와 수레를 갖춘 사대부(士大夫)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천(平泉) 평천장(平泉莊)으로, 당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이다. 하남(河南) 낙양현 남쪽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고 기이한 초목과 돌이 많아 그 경치가 선경(仙境)과도 같았다고 한다. 《舊唐書 卷174 李德裕列傳》 여기에서는 나위소가 7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금호(錦湖) 가에 수운정(峀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지낸 일을 빗댄 것인 듯하다. 이곳은 평천장과 마찬가지로 경치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복전(福田) 봄에 씨 뿌리고 가꾸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는 것처럼, 공양(供養)하고 보시(布施)하며 선근(善根)을 심으면 그 보답으로 복을 받는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북신(北辰)은……무너뜨리고 북신은 천지(天地)ㆍ오제(五帝)ㆍ군신(群神)을 호령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가 위치하는 자리이다. 갑적(甲籍)은 명적(命籍)과 같은 말로, 상천이 사람의 생사요수(生死夭壽) 등을 기록해 두었다는 명부를 가리킨다. 곧, 여기에서는 나위소가 수명이 다하여 죽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남극성(南極星)은……거두었네 위와 마찬가지로, 나위소가 죽은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남극성은 장수를 주관하는 별로, 노인성(老人星)이라고도 한다. 석성(石城) 전설 속의 산 이름이다. 《장자(莊子)》 「설검(說劍)」에 "천자의 검은 연계와 석성을 칼날 끝으로 삼고, 제나라와 대산(岱山)을 칼날로 삼고, 진나라와 위나라를 칼등으로 삼고, 주나라와 송나라를 칼자루의 테로 삼고, 한나라와 위나라를 칼자루로 삼는다.[天子之劍, 以燕谿石城爲鋒, 齊岱爲鍔 晉魏爲脊, 周宋爲鐔 韓魏爲夾.]"라고 하였다. 보석(寶舃) 나라나 집안의 동량이 될 만한 재목을 말한다. 《시경》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조래산의 소나무와 신보산의 잣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재고 맞추어서, 커다란 재목 만드니 웅장한 궁궐이 완성되네.[徂來之松, 新甫之柏, 是斷是度, 是尋是尺, 松桷有舃, 路寢孔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난옥(蘭玉) 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들을 예찬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庭階耳.]"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晉書 卷79 謝安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