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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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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송곡 이군 유사 松谷李君遺事 군의 휘는 승일(承一)이고, 자는 성만(成萬)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송곡(松谷)은 그의 호이다. 고려조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을 비조(鼻祖)로 삼아 4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선제(先齊)는 호가 필문(蓽門)으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연산조(燕山朝) 때에 상소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들이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영복(永複)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증조는 광국(光國)이며, 조부 한미(漢微)는 호가 송와(松窩)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 남호(南鎬)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장택 고씨(長澤高氏)는 진오(鎭五)의 따님으로, 철종(哲宗) 병진년(1856) 3월 13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군을 낳았다. 군은 용모와 체구가 대단히 크고 성격과 기질이 호쾌하게 시원스러워 그야말로 천인(千人)을 능가하는 기상이 있었는데, 성동(成童)이 되자 서책을 시렁에 묶어 놓은 채 날마다 젊은 협객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매를 날리며 놀이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대인(大人)이 이를 근심스럽게 여기고 족제(族弟) 지남공(芝南公)에게 말하기를, "옛적에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으니, 군이 그를 타일러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지남공이 이에 군을 불러 말하기를, "소는 밭을 가는 동물인데, 만약 밭을 갈게 할 수 없고 사람을 들이받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소를 좋아하겠느냐? 말은 타는 동물인데, 만약 사람을 태울 수 없고 사람을 차고 무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말을 좋아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해만 있고 유익함이 없으면 소나 말조차도 없애버리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상에 해만 있고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다면 성인(聖人)의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느냐? 또 너에게 자식이 있는데 효도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너에게 동생이 있는데 공경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너의 마음이 이미 편안하지 않은데, 너의 부모와 형만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느냐. 옛적에 마 복파(馬伏波)는 만 리 먼 곳에서 편지를 보내어 형의 아들이 경박한 협객들과 소통하는 것을 훈계하였고21), 제갈 무후(諸葛武侯)22)는 대군을 손에 쥐고 몸이 전쟁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그의 아들에게 몸을 닦고 덕을 기르도록 훈계하였으니, 대체로 진실로 정대한 영웅들은 깊은 못 앞에 선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전전긍긍한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 너는 경박한 협객의 부류들과 떠돌아다니며 노는 습관을 만들어 위로는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처자식에게 고통을 주며 집안의 화를 불러들이고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모두 다 편안함을 바라고 위험을 바라지 않으며, 복을 구하고 재앙을 구하지 않는 법인데, 너는 참으로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위험을 편안하게 여기고 재앙을 이롭게 여기느냐?" 하니, 군이 다 듣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빨리 깨달아 마침내 말은 저자로 돌려보내고 매는 들로 날려 보내주었다. 머리를 숙이고 기운을 가라앉힌 채 책을 끼고 학업을 청하여 《소학》부터 시작해서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미쳐갔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여러 해 동안 밤에 베개를 베지 않았다. 닭이 울 때에 일어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침소에 문안을 드리며 추운지 더운지를 반드시 조심스럽게 살폈고 응대는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으며,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고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식사를 올리고 내림에 때에 맞추어 나아가고 물러났다. 평소에 한가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묵은 솜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며 담박한 것을 분수에 달게 여겼다. 여기저기 드나들며 집안일을 돌보고 곁에서 시중들며 물심양면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무자년(1888)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의절에 예법과 슬픔이 모두 지극하였다. 다음해에 병을 얻어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4세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미좌(未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아!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뜻이 고원하거나 고지식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狂狷]과 함께할 것이다.23)"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고원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의지와 기개는 우뚝하게 견고하고 강인하여 함께 나아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사업과 공명이 위대했던 인물은 이와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베어버린 김 각관(金角干)24)과 검을 꽂아 놓은 채 정진했던 이일재(李一齋)25)와 같은 사람이 모두 이러한 인물들이다. 군은 뛰어난 자질로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침이 우레처럼 맹렬하고 선으로 옮겨감이 바람처럼 신속하였고, 한번 주장을 세워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전일의 잘못은 햇빛에 나타난 눈이나 금옥(金玉)에 난 흠조차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그 자질이 옛날 광견(狂狷)이라 일컬었던 사람과 부합한 점이 있었지만, 지남공이 그를 지도하여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끝내 혼미하여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을 줄 또 어찌 알겠는가. 학문을 연마하고 침잠하여 확충하고 분발해 간다면 앞으로 수립할 것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운수가 궁박하고 수명이 짧아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지도하여 이끌어줌을 얻지 못하거나 천수를 얻지 못한 사람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이끌어줌을 받지 못하고 천수를 얻는 것은 천수를 얻지 못하고 이끌어줌을 받는 것만 못하니, 공자의 이른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26)"라는 말을 보건대, 군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후(在厚)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으니, 계휴(桂休)ㆍ옥휴(玉休)ㆍ태휴(泰休)이다. 태휴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君諱承一。字成萬。貫光山。松谷其號也。以麗朝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四傳諱先齊。號蓽門。官至大提學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燕山朝。抗疏不用。卽日賦歸。生諱好善。號勉齋。官至大司成。皆其顯祖也。高祖永複。贈禮曹參判。曾祖光國。祖漢微。號松窩。贈工曹參判。考南鎬。贈戶曹參判。妣長澤高氏鎭五女。哲宗丙辰三月十三日。生君于薪山里。容體碩大。性氣豪爽。鬱鬱有凌駕千人之氣。至成童。束閣書冊。日與俠少輩。馳馬飛鹰。流連不返。其大人憂之。謂族弟芝南公曰。古者易子而敎。君未可爲之諭之使返於正耶。芝南乃招以語曰。牛耕者也。若不可耕而善博觸人。則汝愛之乎。馬乘者也若不可乘而善踶囓人。則汝愛之乎。對曰未可也。曰有害而無益。牛馬且去之。況乎人而有害於世。而無益於人。則其可免於聖人之誅乎。且汝有子而不孝。則汝心安乎。汝有弟而不恭。則汝心安乎。對曰未可也。曰汝之心旣不安。則爲汝之父兄者。獨可以安於心乎。昔馬伏波萬里致書。以戒兄子之通輕俠。諸葛武侯手握重兵。身在戰陣。而戒其子以修身養德。蓋古之眞正大英確。無非自戰戰兢兢臨深履薄中出來也。今與輕俠之流。作浮浪之習。上以貽父母之憂。下以貽妻子之苦。招家戶之禍。速己身之亡。夫人之情。莫不欲安而不欲危。求福而不求災。汝乃何人。獨安其危而利其災也。聽未了。蹶然而驚。幡然而悟。遂歸馬於市。飛鷹於野。屈首降氣。挾冊請業。自小學爲始。及於四子六經。冬不爐。夏不扇。夜不枕者數年。雞鳴而起。問寢重廷。寒暄必謹。應對必恭。八廚滫灑。備辦甘毳。食上食下。進退須時。平居不接閒人。不打閒話。縕袍麤糲。分甘淡泊。出入幹蠱。左右服勞。以致志物之養。戊子遭內艱。執喪之節。易戚兩至翌年得疾。以十二月十日終。得年三十四。葬池洞前麓負未之原。嗚呼。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蓋狂狷志氣。磊落堅忍。可與進取也。自古人物。有大事業大功名者。無不有這般氣象。在我東如金角干之斬馬。李一齋之揷釼。皆是也。君以魁傑之姿。能自覺悟。改過如雷之猛。遷善如風之迅。一立脚跟。底死不退。回視前日之失。不足爲見睍之雪。金玉之瑕也。此其姿質。有合於古所稱狂狷者。而非有芝南公爲之指引.則又安知終不遠復也耶。磨礱浸灌。充拓而奮張之。則前頭樹立。有不可量。而運窮數局。中途夭閼。豈不可惜以此觀之。世之有英材。而不得其指引。不得其年壽者。又何限焉。然失指引而得年壽。不若失年壽而得指引。觀孔子所謂朝聞夕可之語。君可以無憾矣。齊河東鄭氏在厚女。擧三男。桂休玉休泰休。泰休奉家狀。有不朽之托。 마 복파(馬伏波)는 …… 훈계하였고 마 복파는 후한(後漢)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을 지낸 마원(馬援)으로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 경박한 유협(遊俠)들과 사귀며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하자 편지를 보내어 호협(豪俠)한 두보(杜保)를 본받지 말고 신중(愼重)한 용술(龍述)을 본받으며 입을 조심하라고 간절하게 훈계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小學集註 卷5 嘉言》 제갈 무후(諸葛武侯)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제갈량(諸葛亮)으로, 무후(武侯)는 그의 시호이다. 중도를 ……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말을 …… 김 각관(金角干) 김 각관은 신라 진평왕 시대에 각간을 지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김유신이 화랑시절에 기녀 천관녀(天官女)에 정신이 팔려 수련을 게을리하였다가 어머니 만명부인의 훈계(訓戒)를 듣고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는데, 어느 날 밤 말이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우고 예전 습관처럼 천관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김유신이 술이 깬 뒤에 검(劍)으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破閑集》 검을 …… 이일재(李一齋) 이일재는 이항(李恒, 1499~1576)으로, 일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항지(恒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젊은 시절에 무관에 뜻을 두었다가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고,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한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일재에 관한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로 무관으로서의 뜻을 접고 학문할 당시 칼을 옆에 꽂고서 정신일도하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침에 …… 괜찮다 《논어》〈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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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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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운계 김공 유사 雲溪金公遺事 공의 휘는 기현(奇鉉)이고, 자는 선화(善華)이며, 호는 운계(雲溪)이다. 김씨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신라의 왕자 휘 흥광(興光)이 처음으로 광산에 거주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대(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는데,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과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이 가장 유명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여정(厲精)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처겸(處謙)은 호가 육행당(六行堂)으로 성균관에 올랐고, 부호군(副護軍)를 지냈으며, 광산에서 추성(秋城 담양(潭陽))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응(應)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분이 낳은 휘 대기(大器)는 호가 만덕재(晩德齋)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겨 경학(經學)과 행의(行義)로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며, 구산사(龜山祠)27)에 배향되었다. 이분으로부터 2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성준(聲駿)은 병자란(丙子亂) 뒤에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성산(星山) 아래에 은둔하여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은 채 산수(山水)에 자취를 의탁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이초(履初)는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이분이 낳은 휘 광속(光涑)은 의로운 행실로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조(德祖)이고, 증조 휘 백일(百鎰)은 호는 난산(蘭山)이며, 조부 휘 문추(文秋)는 호가 월천(月川)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 휘 재택(在澤)은 호가 애산당(愛山堂)으로,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시에 중망을 받아 여러 차례 천거에 올랐으며, 응교(應敎) 정희(鄭㵙)28)가 그의 행장을 짓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29)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모친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방옥(邦玉)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갑인년(1854) 7월 27일에 복천의 난산리(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이미 성인으로서의 의절과 모습이 있었으니, 7세 때 대인공(大人公 부친)이 부모의 상을 당하고 다른 형제가 없었는데, 그의 물 뿌리고 씻는 의절과 제기를 진설하는 의식이 한결같이 대인의 뜻과 같았다. 평소에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을 반드시 부지런히 하였고, 응대할 때에는 반드시 공손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는 자신의 몸으로 궤안을 대신하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사(喪事)를 치를 때에는 애통함이 의례보다 더하였고, 인정과 형식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제사지내는 날을 만났을 때에는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제사지내게 한 적이 없었고, 정성과 정결을 다하여 여재(如在)30)의 뜻을 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대해 성대하게 암송하는 부분이 매우 많았고 연구가 매우 정밀하여 강학과 토론에 드러나고 저술에 나타난 것들이 모두 찬연히 빛나 볼 만하였다. 처음에는 공령(功令 과거 공부)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추어 서적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의복 띠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용모를 반드시 단정히 하였으며, 책상의 서책은 가지런하게 정돈하였고, 비록 벼루와 먹, 편지처럼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곳에 두어 어지럽게 놓아둔 적이 없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과 집기는 힘써 질박함을 따랐고, 즐기며 좋아할 만한 화려한 물건이나 먼 곳에서 나는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일찍이 한 번도 몸에 접하지 않았고 한 번도 집안에 들인 적이 없었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31)을 모방하여 동내 사람을 권면하고 이끌었으며, 항상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사방으로 유학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 만년에 송사 기공(기우만)을 따르며 이택(麗澤)32)의 뜻을 붙였다. 원근의 분묘(墳墓)를 빠짐없이 살피고 청소하였으며, 묘갈(墓碣)을 갖추어 표지(表誌)하고 묘전(墓田)을 두어 향사(享祀)하였으며, 묘실(墓室)을 수선하여 우러러 사모하였다. 벗을 사귐에 그 사람의 선(善)ㆍ불선(不善)만을 볼 뿐, 부귀와 빈천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으며, 말과 낯빛을 바르게 하여 일찍이 아부하는 뜻이 없었고, 또한 특이한 행실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서로 믿고, 먼 사람이든 가까운 사람이든 모두 따랐다. 갑오년(1894) 비류(匪類)의 난(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난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여 사람들이 많이 그에게 힘입었다.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충신근근(忠信勤謹)' 네 글자는 진실로 몸을 지키는 데 으뜸인 부적이니, 절대로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는 의로운 행실을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문예의 명성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된다 한들 어찌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년(1892)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고, 다음해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며, 병오년(1906)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본방(本坊)의 서촌(西村) 금옥동(金屋洞) 건좌(乾坐)에 안장하였다. 부인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양홍(陽鴻)의 따님으로, 2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계(永桂)ㆍ영학(永鶴)이고, 딸은 창원(昌原) 정장섭(丁章燮)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는 모두 어렸다. 아아, 나는 공과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음에도 하늘 끝과 땅 모퉁이처럼 떨어져 지내다 갑자기 오늘과 옛날처럼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그의 가장(家狀)을 읽게 되니 미치지 못한 추앙의 회포가 곱절이나 절실해진다. 영계가 나에게 글을 청하여 세상에 길이 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대략 전말을 서술하였다. 公諱奇鉉。字善華。號雲溪。金氏系出光山。新羅王子諱興光。始居光山。自此官平章事者爲十餘世。文安公諱良鑑。文正公諱台鉉。最著焉。入本朝。有諱厲精。登科官漢城判尹。三傳至諱處謙。號六行堂。登庠官副護軍。自光寓于秋城。三傳諱應中。司馬官訓導。是生諱大器。號晩德齋。師事沙溪金先生。經學行義。望重一世。配享龜山祠。二傳諱聲駿。丙子亂後。遯于福川星山之下。絶意仕進。托跡山水。是生諱履初。孝行著聞。是生諱光涑。以行義聞于朝。贈童蒙敎官。於公爲五世祖也。高祖諱德祖。曾祖諱百鎰。號蘭山。祖諱文秋。號月川。世有隱德。考諱在澤。號愛山堂。孝友文學。見重於時。累登剡薦。鄭應敎㵙奇松沙宇萬撰狀與碣銘。妣廣州安氏邦玉女。有婦德。以哲宗甲寅七月二十七日生公于福川之蘭山里。公幼而岐嶷。已有成人儀樣。七歲大人公遭艱。而無他兄弟。其灑濯之節。陳設之儀。一如大人之意。平居晨昏必勤。應對必恭。得一味。未嘗先食。侍親癠。以身替几。晝夜不離。執喪哀毁踰禮。情文俱至。遇忌諱之辰。非有疾病。未嘗代人。致誠致潔。以盡如在之意。自少專心學問。於四子六經。誦殷甚多。硏究甚精。以至著於講討。發於著述者。皆粲然可觀。初業功令。親沒之後。遂不復應擧。杜門斂迹。以書籍自娛。常居衣帶必正。容貌必端。几案書冊。秩秩整勅。雖硯墨札翰之微。置有常處。未嘗混亂。若其器用什物。務從質樸。至於華麗玩好及遠方珍異之物。未嘗一接於身。一入於家。倣藍田呂氏鄕約。勸導坊內。嘗以家貧親老。不得遊學四方爲恨。晩從松沙奇公以附麗澤之義。遠近墳墓。省掃無闕。具墓碣以表誌之。置墓田以享祀之。修墓室以瞻慕之。其交朋友。視其人之善不善而已。不以富貴貧賤而有所取捨焉。正言正色。未嘗有阿附之意。亦未有崖異之行。是以內外相信。遠近咸服。甲午匪類之亂。公戒鄕里勿染。人多頼之。嘗戒諸子曰。忠信勤謹四字。實爲持身之元符。切不可斯須去身。又曰。士君子。當先行義而後文藝。不然。文名冠一世。何足貴哉。壬辰除義禁府都事。翌年陞敦寧府都正。丙午四月十五日考終。葬于本坊西村金屋洞乾坐。配新安朱氏陽鴻女。生二男一女。男永桂永鶴。女昌原丁章變。孫男皆幼。嗚呼。余與公同世矣同省矣。而厓角落落。遽作今古隔世之人。今讀其家狀。倍切追仰靡逮之懷。永桂請余文爲不朽計。辭不獲已。略敍顚末云爾。 구산사(龜山祠) 송순(宋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에 창건한 뒤에 송정순(宋庭筍)과 김언욱(金彦勗) 송희경(宋希璟)·김응회(金應會)·이안눌(李安訥)·송징(宋徵)·김대기(金大器)나무춘(羅茂春)임광필(林光弼)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응교(應敎) 정희(鄭㵙, 1821~?) 고종2년(1865)에 식년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고종 22년(1885) 응교에 제수되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회일(會一)이며, 송사(松沙)는 그의 호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조부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으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재(如在) 부친이 계신 듯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는 제사를 지낼 적에 선조가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가 고을 사람들과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 예의의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라는 네 조항으로 되어 있다. 《小學 卷6 善行》 이택(麗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못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물을 대주듯이 붕우 간에 서로 강습하며 도움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象)〉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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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을 상심하여 우연히 적다【7수】 傷時偶題【七首】 재앙의 단서는 외부에 있지 않으니 (厲階不在蕭墻外)오직 날로 부지런히 패망을 자초하네 (速敗招亡惟日勤)어찌하여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자제가 (如何喬木世家子)오랑캐가 되어 개국의 공훈을 세우고자 하는가 (甘作仇戎開國勳)입 다물면 누가 시집 안 간 처녀라고 하겠나 (緘口誰稱未嫁女)글을 보내면 혹 원수와 같은 사람이라 배척하네 (發文或斥同仇人)유문의 의리 이미 이와 같으니 (儒門義理已如此)다시 누가 있어 어버이를 저버리지 않으랴 (復有阿誰不後親)노사 선생의 병인년 상소174)는 (蘆沙夫子丙寅疏)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네 (大義森嚴日月明)당시 두세 가지 대책을 썼더라면 (當時若用二三策)어찌 오늘날 사직이 기울어졌겠는가 (安有今朝社稷傾)앞에는 긴 뱀이 있고 뒤에는 사나운 범이 있으니 (前有長蛇後猛虎)부모 잃은 어린 아이는 응응 우네 (孩兒失母泣呱呱)믿을 것이라곤 다만 위에 있는 하늘인데 (所恃只惟天在上)누가 원통하고 애통함을 청도 호소할까 (誰將哀怨訴淸都)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鳴乎今日是何日)만백성이 절명할 때라네 (萬萬生靈絶命辰)천 리 망망한 해내에 (環海茫茫千里地)어찌 한 대장부가 없는가 (胡無一箇丈夫人)마루 위의 서생은 이미 백발이 되었으니175) (堂上書生已白頭)어찌 이 때문에 이부 칠실의 근심176)을 지으랴 (何須爲此漆嫠憂)애석하구나, 요순 삼대의 문물이 (可惜唐虞三代物)도도히 흐르는 큰 물결에 다 쓸려가네 (盡歸洪水滔滔流)예부터 나라를 잃음이 어찌 오늘과 같았으랴 (自古喪邦孰若今)천지가 뒤집히고 해와 별이 어두워졌네 (天翻地覆日星沈)다만 문을 닫고 자정할 계책을 세울 뿐 (惟有杜門自靖計)서산이나 동해로 찾아갈 필요 없네177) (西山東海不須尋) 厲階不在蕭墻外。速敗招亡惟日勤。如何喬木世家子。甘作仇戎開國勳。緘口誰稱未嫁女。發文或斥同仇人。儒門義理已如此。復有阿誰不後親。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前有長蛇後猛虎。孩兒失母泣呱呱。所恃只惟天在上。誰將哀怨訴清都。鳴乎今日是何日。萬萬生靈絶命辰。環海茫茫千里地。胡無一箇丈夫人。堂上書生已白頭。何須爲此漆嫠憂。可惜唐虞三代物。盡歸洪水滔滔流。自古喪邦孰若今。天翻地覆日星沈。惟有杜門白靖計。西山東海不須尋。 병인년 상소 기정진이 1866년(고종3)에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즉 프랑스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한강 연안과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 올린 소(疏)를 이른다. 마루……되었으니 두보(杜甫)의 시에 "마루 위의 서생은 공연히 머리만 세었을 뿐, 바람결에 몇 번이나 향내 맡으며 우노매라.[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3 芻虞歎』 이부(嫠婦) 칠실(漆室)의 근심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 고을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의 근심이지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이다. 서산(西山)이나……없네 은(殷)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서산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가 있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동해 바다를 밟고서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였다. 『史記 伯夷列傳,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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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1) 【철원】에게 답함 答黃景涵【澈源】 신여(新汝)2) 편에 갖가지 소식을 들었네. 삼가 묻건대 당상의 체후는 모두 평안하신가? 그대 아우는 관례와 혼례를 무사히 치렀다고 하니, 어떤 위안이 이만 하겠는가? 호설(湖說)의 삼층(三層)3)에 대한 변론은 옳지만, 나의 설에 삼층이 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지나치네. 그대는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人與人同 物與物同]"라고 한 것은 본래 좋은 말이 아니라고 여기고, 나는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라고 한 것은 본래 좋지 않은 말이 아니라고 여겼네. 다만 호설로 인하여 좋지 않게 여긴 것일 뿐이니,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것은 이른바 "각각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라는 곳이 아니겠으며,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萬)'과 '일(一)'의 동이(同異)는 비록 서로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궁구하여 말하자면, '일본(一本)'을 말할 때는 인물(人物)의 성이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고, '만수(萬殊)'를 말할 때는 인물의 성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네. 또 만수는 이분(理分)에 속하고 기분(氣分)에 속하는 것이 있으니, 호설의 사람마다 같지 않고 동물마다 같지 않다는 것은 마땅히 기분이어서 성(性)을 말할 수 없네. 그렇다면 나의 설은 단지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된다."는 뜻인데, 어찌 일찍이 호설과 같은 삼층이 있었던가? 그대가 간장(澗丈)4)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통 편색(正通偏塞)을 성으로 여기면서 유독 인동 물동(人同物同)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간장이 인물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누누이 말을 하였는데 인동 물동의 설을 하는 사람을 기롱한 것은 유독 인물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가? 정통 편색을 이(理)가 소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가하지만, 참으로 정통 편색을 성(性)으로 여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으니, 이것은 실로 인물이 한 번 정해진 분수이고 만수가 이분에 속하는 것이네. 단지 이 만수는 실로 이미 이일(理一)의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지만 벌집이나 석류 알처럼 되는 것이 아니니, 같다고 해도 가하고 같지 않다고 해도 가하네. 더구나 '성(性)과 도(道)는 비록 같지만'이라는 '성도수동(性道雖同)'이 '사람과 사물이 각각 그 성의 자연을 따른다.'는 '각순기성(各循其性)'의 아래에 있으니,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고 말함에 어떤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대는 솔성지도(率性之道)를 만수로 여기면서 유독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설을 취하지 않으니, 또한 무슨 곡절인가?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바깥에 어떤 별도의 만수가 있는가? 이것은 비유하자면 자규(子規)를 귀하게 여기면서 두우(杜宇)를 천하게 여기고, 창경(倉庚 꾀꼬리)을 싫어하면서 황리(黃鸝 꾀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네. 《중용집주》에서 이른바 "기품이 혹 다르다."는 것 이것은 실로 사람마다 같지 않고 물물마다 같지 않아 만수가 기분에 속하는 것이네. 그대가 이른바 "관맹 강약(寬猛强弱)"이라 한 것은 옳네. 간장이 그대가 정통 편색을 이(理)로 여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理)는 실로 이와 같다고 여긴다면, 어찌 본연의 이(理)에 교구(矯捄)하는 공을 더함이 있겠는가? 의심스러운 것이 정히 여기에 있다면 변론하여 해설할 때 마땅히 "만수에는 이분이 있고 기분이 있으니, 이분은 실로 교구할 수 없으나 교구할 수 있는 것은 기분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적막한 물가에 벗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것이 매우 심하여 이러한 설로 서로 고쳐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오직 그대가 나를 멀리하지 않고 갖가지 보여주는 것이 이와 같이 곡진하니, 나의 위안됨과 감사함이 어떠하겠는가? 조금이라도 노년에 거둘 수 있는 희망은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의론하는 사이에 소소한 위합(違合)을 혐의로 삼지 말고 더욱더 부지런히 제기하여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기약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新汝便。承信種種。謹詢堂候萬安。令弟冠娶利行。何慰如之。湖說三層之辨得矣。而至以鄙說謂有三層則過矣。賢謂人與人同。物與物同。本非好語。愚謂人與人同物與物同。本非不好語。但因湖說而爲不好耳。人同物同。非所謂各正性命處乎。非所謂一本之所以萬殊者乎。萬一同異。雖曰相涵。而究而言之。言一本時。不可曰人物之性不同。言萬殊時。不可曰人物之性不異。且萬殊有屬理分底。有屬氣分底。湖說人人不同物物不同。當氣分。而不可以言性。然則鄙說只不過一本萬殊之義。而何嘗有三層如湖說乎。賢抵澗丈書。以正通偏塞爲性。而獨以人同物同爲不然。何也。以澗丈壞人物之分。縷縷爲言。而譏人同物同之說者。獨非壞人物之分耶。以正通偏塞爲理之所有則可。眞以正通偏塞爲性則不成說矣。人與人同。物與物同。此固人物一定之分。而萬殊之屬於理分者也。只此萬殊固已涵於理一之中。而非如蜂房榴核之爲。則謂之同可也。謂之不同亦可也。況性道雖同在於各循其性之下。則謂之人與人同。物與物同。有何不可乎。賢以率性之道爲萬殊。而獨不取人與人同物與物同之說。抑何曲折耶人與人同物與物同之外。有何別般萬殊乎。此比如貴子規而賤杜宇。惡倉庚而愛黃鸝者也。集註所謂氣稟或異。此固人人不同。物物不同。而萬殊之屬於氣分者也。賢所謂寬猛强弱者得矣。澗丈見賢以正通偏塞爲理。故以爲理固如此。則安有本然之理。而加矯捄之功乎。所疑正在於此。則其辨而解之之說。當曰萬殊有理分底。有氣分底。理分固不可以矯捄。而所可矯捄者。氣分云爾。則何如耶。寂寞之濱。離索殊甚。無一人以此等說相規。而惟吾友爲之不遐。種種示及。若是繾綣。區區慰感。謂何如耶。一分收棄之望。惟吾友是倚。幸勿以議論間小小違合爲嫌。益加勤提。期有所就。如何。 황경함(黃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을 말한다. 자는 경함,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신여(新汝) 황승현(黃承顯)의 자이다. 호설(湖說)의 삼층(三層) 호론(湖論)의 좌장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 주장한 학설로, 성삼층설(性三層說)이라고도 한다.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한 것이다. 간장(澗丈) 이기백(李琪白, 1854~1903)을 말한다. 자는 광빈(光彬), 호는 간재(澗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권19〈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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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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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人與人同 物與物同]는 설은 일찍이 한 벗의 질문으로 인하여 창졸간에 답한 것이 이와 같아 한 생각이 허전하여 십분 알맞은 뜻이 아니라고 여겼네. 그 뒤 돌이켜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 점을 보지 못하여 생각할수록 더욱 그 설에 들어가니, 이것이 경함(景涵)의 말이 전후로 누누이 이어졌지만 끝내 옳다고 수긍하지 못한 까닭이네. 일전에 우연히 《중용》을 가지고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한가로이 보다가 《중용집주》에 이른바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 받은 바의 이(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 오상(五常)의 덕(德)을 삼는다."라는 한 단락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황연히 깨달았네.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됨은 분수는 비록 다르지만 건순 오상을 덕으로 삼는 것은 동일하네. 하문에 "성과 도는 비록 다르지만"이라고 한 것은 어찌 이 구절에 응하여 붙여서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고집하는 것은 과연 이유가 있고, 나의 견해를 고집하는 것은 혼미함을 돌리기 어려우니, 매우 부끄럽네. 그러나 분변하기를 힘쓰지 않는다면 앎이 견고하지 못하니, 전날 다소의 허비한 설이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매우 감사하네. 또 '만수(萬殊)'라고 하는 것은 '일본(一本)'의 안산(案山)이니, 오로지 이분(理分)으로 말하였지 어찌 일찍이 기분(氣分)으로 설명하였던가? 그러나 일변의 논의에 이를 혼연하여 구분이 없는 물로 여겨 주재와 구별은 모두 기로 말미암는다고 여기니, 이것은 성악(性惡)의 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설의 오류를 보고 돌이킬 수 있기를 생각한다면 분수(分數)의 단락이 이미 이(理)에 갖추어졌다고 여겨야 하니, 이 설은 일변의 설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네. 그러나 한갓 분수의 단락이 이미 갖추어진 것만 알고 절충함이 있지 않으면 이른바 악(惡)이라는 것이 귀속(歸屬)할 곳이 없어 도리어 성악의 논의에 점점 빠져들 것이네. 그렇다면 장차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 반드시 분수 상에서 절단하여 이기(理氣)를 보아야 바야흐로 귀착할 곳이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횡측(橫側)으로 치달려 천차만별한 것을 똑같이 이(理)가 가진 것이라 이르겠는가? 이것이 만수(萬殊)에 이분(理分)과 기분(氣分)의 설이 있는 까닭이네. 정통 편색(正通偏塞)은 인물(人物)의 큰 구분이고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것이 되니, 비록 기(氣)이지만 이(理分)이라 하는 것이 가하네. 내가 이른바 이분은 실로 교구(矯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이 뜻이 아님이 없는데, 그대는 도리어 끝까지 힐난하여 "금수를 교구하는 것이 사람의 정통(正通)이 된다.……"고 하니, 어찌 남의 말을 믿지 않음이 이와 같은가? 선사(先師)5)께서 이른바 "형기를 떠나서 분(分)을 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理)가 일찍이 분(分)이 없지 않음을 볼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또한 그 이분의 설을 가리킨 것이네. 사람이 불선을 하는 것과 금수가 치고 깨무는 것과 초목이 요얼(妖孼)이 되는 것 같은 것을 어찌 일찍이 이(理)가 가진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던가? 이분과 기분은 그 설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자못 힘을 들여 구처(區處)한 것이 이와 같으니, 과연 전현에게 죄를 얻지 않을지 모르겠네. 지난번 보여준 책자는 연이어 어지럽고 쓸데없는 일로 인하여 미처 살펴보지 못하다가 지금 겨우 한 번 보았을 뿐이네. 삼가 나의 뜻으로 대략 말한 것이 있으니, 살펴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네. 다시 더욱 자세히 생각하여 인편에 따라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도리어 생각건대 보잘것없는 나는 벗들을 떠나 쓸쓸히 지내며 노쇠하여 옛 학업이 황폐해진 지 오래 되었으니, 만일 그대가 나를 위해 단서를 열어 주지 않으면 어찌 한 생각이 이러한 의체(義諦)에 미치겠는가? 감사한 마음 끝이 없네. 바라건대 모름지기 부지런히 힘써 더욱 높고 깊은 경지에 나아가시게. 사옥(士玉)6)은 요즘 함께 지내고 있는가? 독실하고 근칙(謹勅)하니,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네. 밤낮으로 서로 지켜주면 도움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네. 人與人同物與物同之說。曾因一友生之問。倉卒酬答者如此。而一念缺然。以爲非十分稱停之義。其後反而思之。未見其不然。愈思而愈入其說。此所以景涵之言前後縷縷。而終不肯可者也。日前。偶將中庸早晩閒看。及到集註所謂人物之生。因各得其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一段語。不覺怳然而覺悟也。爲人爲物。分則雖殊。而其爲健順五常則一也。下文性道雖同。豈非所以應貼此句而言者乎。賢之固執。果有以。而鄙見之執迷難回。可愧可愧。然辨之不力。則知之不固。前日之多少費說。爲何傷也。謝謝。且萬殊之云。是一本之案山。專以理分言。何嘗以氣分說也。然一邊之論。以理爲渾然無分之物。而以爲主宰區別。皆由於氣。此非性惡之說而何。見其說之差謬。而思有以反之者。則以爲分數段落。已具於理。此說比一邊之說。不啻天淵。然徒知分數段落之已具。而不有以折衷之。則所謂惡者。無所歸屬。而反有以駸駸乎性惡之論矣。然則將何以折衷哉。必於分數上。折斷得理氣看。方有着落處。不然橫側奔逸。千差萬錯。槪謂之理之所有耶。此所以有萬殊理分氣分之說也。正通偏塞。是人物之大分。而爲萬世不可易底。則雖氣也而謂之理分可也。鄙所謂理分固不可以矯捄者。未始非此意。而賢反窮詰之。以爲矯捄禽獸爲人正通云云。何不諒人言之若是耶。先師所謂雖不離形氣言分。而理之未嘗無分可見云者。亦指其理分底說也。若人之爲不善。禽獸之爲搏囓。草木之爲妖孼何嘗言理之所有耶。理分氣分未知其爲說何如。而區區所以頗費區處者如此。果不知獲罪于前賢否耶。向來所示冊子。連因紛冗。未及繙閱。今纔一番看過耳。謹以鄙意略有云云。考可悉矣。更加三思。隨便示及。如何如何。顧惟無狀。離索衰替。而舊業之荒廢久矣。如非吾友爲之發端。則安有一念及於此等義諦耶。感感亡已。望須勉勉益造崇深也。士玉近日同處否。篤實謹勅。所望非細。昕夕相守。資益想不淺淺。 선사(先師)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임성주ㆍ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사옥(士玉) 정순진(鄭淳珎, 1878~?)의 자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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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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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일본만수(一本萬殊)는 이(理)로 말하면, 하늘의 이가 바로 땅의 이이고 사람의 이가 물의 이여서 실로 말할 만한 계위(界位)가 없으며, 분(分)으로 말하면, 만물은 하늘에 통솔 되고 만사는 마음에 통솔 되고 만민은 임금에게 통솔 되고 만지(萬枝)는 뿌리에 통솔 되고 만류(萬流)은 근원에 통솔 되니, 이것이 유독 일본만수의 의가 아닌가? 보내온 편지에서 "어찌 한 개의 일본만수인데 이(理)에 있고 심(心)에 있는 다름이 있겠는가?"라고 여겼으니, 어찌 그 설이 너무 명쾌하고 변론이 너무 심한 것인가? "천하의 악은 따로 근두(根頭)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스스로 한 단락을 제기한 것이고 윗 문장의 뜻과 연루시킨 것이 아니네. 보내온 편지에서 '심(心)' 자를 바꾸어 '기(氣)'라 하여 기를 심에 해당 시킨 등의 말은 남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할 만하네. 경(敬)은 인(仁)을 구하는 요체가 되니 이것은 인을 체득하는 공으로 말한 것이고, 서(恕)는 인을 구하는 방법이 되니 이것은 인을 행하는 공으로 말한 것이니, 《논어》에 '이것은 인의 근본이다[是仁]'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行仁]'라는 구별이 있는 것과 같네. 그러나 서(恕)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려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하는 뜻인즉, 경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은 적이 없으니, 경을 말하면 서가 그 가운데 있다는 것과 같네. 영남으로 행차하였다가 간소(刊所)에서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 자신의 사정은 실로 움직이기 어려우니 매우 불안하네. 사옥(士玉)과 근래 상대하고 있어 외롭고 쓸쓸한 처지가 매우 위로 되네. 순실(淳實)하고 근칙(謹飭)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향학(向學)하는 것이 사옥과 우경(宇卿)7) 같은 이는 매우 쉽게 얻을 수 없으니, 그대의 말이 또한 나의 뜻이네. 책자는 가을과 겨울이래로 한결같이 어수선하여 펼쳐 볼 여가가 없었고, 근래 비로소 한 번 보았는데 종종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이 많아 나로 하여금 절로 심취하게 하였네. 가숙(家塾)이 새로 이루어졌으니, 그대의 공부하고 휴식하는 계획을 얻었을 것이네. 다만 마땅히 편액을 붙일 것을 생각하여 그대가 밤낮으로 면려하려는 뜻에 만 분의 일이라도 부응해야 할 것이니, 우선 기다려 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명덕(明德)……"이라 한 것은 선유의 설이 아마 해롭지 않을 듯한데, 다만 "이것은 하늘의 인의예지에서 받았다."라고 하니, '성(性)' 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이 흠결이 될 뿐이네.무릇 합일분수(合一分殊)는 성(性)으로 말하면 마땅히 성에서 보아야 하고, 심(心)으로 말하면 마땅히 심에서 보아야 하네. 다만 합일분수를 심과 성에 분속시켜 보는 것은 불가하네. 합일분수도 오히려 분속시키는 것이 불가한데, 더구나 편전(偏全)을 심과 성에 분속시킬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인용하여 비유한 것은 지극히 그 단서가 많지만 단지 긴 행랑의 기둥을 다시 세는 것8)에 불과하네. '신명(神明)' 두 글자는 절로 '심(心)' 자의 본 뜻이니, 신명을 놓아두고 심을 말하면 공적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이후로는 마땅히 성을 말해야 하고 심을 말해서는 부당하네. 애산(艾山)9)이 말한 "심은 성정(性情)의 통명(統名)이다."라고 한 것을 그대는 어떻게 여기는가? 나는 심이 성정을 통솔한다고 하는 것은 가하다고 여기고, 심이 성정의 통명이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기네. 왜 그런가? 성정의 바깥에 심이 없기 때문이네. 신명은 심의 본 뜻이고 신명하게 하는 것은 이(理)가 아닌가? 이와 같은 설은 이가 주재가 되지 못할까 근심이 없을 것이네. 그대는 심 자를 보는 것이 애산의 설과 같아 종종 이런 갈등을 이루게 되니, 다시 상세히 살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一本萬殊。以理言之。天之理卽地之理。人之理卽物之理。固無界位之可言。以分言之。萬物統於天。萬事統於心。萬民統於君。萬枝統於根。萬流統於源。此獨非一本萬殊之義乎。來喩以爲豈一箇一本萬殊。而有在理在心之異。何其說之太快。而辨之太深也。天下之惡。非別有根頭云云。此是自起一段。非所以連累上文之意。來喩換心爲氣。以氣當心等語。可謂不諒人意矣。敬爲求仁之要。此以體仁之功言。恕爲求仁之方。此以行仁之功言。如論語有是仁行仁之別。然恕是己立立人己達達人之義。則敬未嘗不在其中。如言敬而恕在其中。嶺行。自刊所催促。非一非再。而身故姑難動作。不安不安士玉近與相對。頗慰孤索。淳實謹飭。一意向學如士玉宇卿。甚不易得。賢言亦吾意也。冊子秋冬來。一向紛汨。未暇披看。近始一覽。往往多格言至論。令人不覺心醉。家塾新就。吾友修息之計得矣。第當思其所以扁揭者。以副吾友日夕警勉萬一之意。姑俟之如何。明德云云。先儒說恐無害。而但曰是所受於天之仁義禮智云。則與性字何別。此爲所欠耳。大抵合一分殊。以性言之。則當於性上看之。以心言之。則當於心上看之。但不可以合一分殊。分屬心性看也。合一分殊。猶不當分屬。況以偏全分屬心性乎。賢所引喩。極其多端。而只不過再數長廊桂也。神明二字。自是心字本旨。舍神明而言心。則其不近於空寂乎。過此以往。則當言性。不當言心。艾山所言心是性情之統名者。賢以爲何如耶。愚以爲心統性情則可。以爲心是性情之統名則未可也。何者。以性情之外。無心故也。神明是心之本旨。而所以神明者。非理乎。如此說。不患理不爲主宰矣。賢看心字如艾山說。種種致此葛藤。更詳之如何。 우경(宇卿) 임태주(任泰柱, 1881~1944)의 자이다.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성재집》이 있다. 긴……것 공연히 의심하여 다시 문제 삼는 것을 말한다. 《근사록》〈존양(存養)〉에 "정명도(程明道)가 예전에 장안의 창고 안에 한가로이 앉아서 긴 행랑의 기둥을 보고 마음속으로 세었다. 이미 의심이 없었으나 다시 세어 보니 부합하지 않자 사람으로 하여금 일일이 소리 내어 세어 보게 하였는데, 결국 처음 세었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伯淳昔在長安倉中閑坐, 見長廊柱, 以意數之. 已尙不疑, 再數之不合, 不免令人一一聲言數之, 乃與初數者無差.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또 다른 호는 노백헌(老柏軒)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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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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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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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애장(艾丈)의 심설(心說)은 실로 좋지만 '주재(主宰)는 이(理)'라는 한 구절은 조금 경약(徑約)10)한 듯하네. "그 주재를 말하면 심이고 그 주재하는 것을 말하면 이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근래 이른바 주기론(主氣論)은 실로 말할 것이 없고, 주리자(主理者)도 또한 종종 설이 너무 고상하여 오로지 '심'을 '이' 자로 간주하고 심지어 성은 치우치고 심은 온전하며 성은 영쇄(零碎)하고 심은 총회(總會)라고 하여, 심과 성 두 물이 대치하여 병립한 것 같이 여기고 또 별도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이 여기네.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니니, 어찌하고 어찌 하겠는가? 합일분수(合一分殊)는 당초 나의 뜻은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뜻으로 보아 인력으로 끌어다가 합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네. 지금 동계(東溪)와 경함(景涵)의 말을 보고 과연 그것이 온당하지 않은 줄 알았으니, 어찌 경계할 줄 모르겠는가?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두 가지 의가 있으니, 곧장 생(生)을 가리켜 성(性)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인 설이고, 생한 뒤를 성이라 하는 것은 전후의 설인데, 어찌 전혀 구분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남과 계교하기를 좋아함은 사욕이 앞선 폐단이네. 그 사용이 앞서는 것을 버리는 것이 인을 구하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세속에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지 않아 나의 의(義)를 행할 수 있고 의사를 홀로 세움이 있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과 더불어 계교하지 않는 것은 인을 구하는 방법이니 학자의 공부이고, 남과 계교함이 없는 것은 안자(顔子) 이상의 일이네. 艾丈心說固好。但主宰則理一句。稍涉徑約。如曰言其主宰則心。言其主宰底則理。何如耶。近日所謂主氣之論。固無足道。其主理者。亦往往說得太高。專以心看作理字。至以性爲偏。心爲全。性爲零碎。心爲總會。似若心性二物對峙竝立。又若別有無位眞人。坐在冥冥之中此非小疵。奈何奈何。合一分殊。當初愚意。看作理一分殊之義。非待人力牽合之謂也。今得東溪及景涵之語。果知其未穩。曷不知戒。生之謂性有二義者。眞指生謂性是對待說。生而後謂之性。是前後說。何謂專然無分耶。好與人校。是私勝之敝也。去其私勝。非求仁之方耶。不同流合汚。可以行吾義。有獨立意思。非所以爲義耶。不與物校。是求仁之方。學者之功也。與物無校。是顔子以上之事也。 경약(徑約) 박문(博文)하고서 약례(約禮)해야 하는데도 박문은 거치지 않고 바로 약례에만 치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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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암을 방문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다 2수 訪白省菴口占【二首】 강호에서 이별한 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一別江湖歲月長행로의 험난함이 구절양장 같다오 其如行路險羊腸초가을 물색은 비로소 소슬한데 新秋物色初蕭颯사해의 연진은 더욱 아득하구나 四海煙塵更渺茫시가 없을 수 없어 한 수 짓고 詩不可無題一首술까지 폐하기 어려워 세 잔에 취하네 酒難幷廢醉三觴그대는 몸 편히 쉴 곳을 알고자 하는가 吾人欲識安身處천명을 따르는 것이 딱 좋은 침상이라오 義命端宜作褥牀서로 만나니 깊은 감회가 일어나는데 相逢惹出感懷長노년에 몇 굽이 창자를 다 끊었던가 斷盡衰年幾曲腸바다의 파도 소리는 비로서 요동치고 海上濤聲方擾盪구름 사이 햇빛은 참으로 흐릿하구나 雲間日色正微茫부질없이 〈북풍〉 시346) 읊지 말고 不須謾詠北風賦우선 두공부처럼 술잔을 조금 기울이세347) 且得細傾工部觴세상 살아가는 신묘한 방법을 그대는 아는가 度世神方君識否스스로 힘써 부디 병들어 침상에 눕지 말게 自强愼勿病頹床 一別江湖歲月長, 其如行路險羊腸.新秋物色初蕭颯, 四海煙塵更渺茫.詩不可無題一首, 酒難幷廢醉三觴.吾人欲識安身處, 義命端宜作褥牀.相逢惹出感懷長, 斷盡衰年幾曲腸.海上濤聲方擾盪, 雲間日色正微茫.不須謾詠北風賦, 且得細傾工部觴.度世神方君識否? 自强愼勿病頹床. 북풍(北風) 시 《시경》 〈패풍(邶風)〉의 편명으로, 국가에 위란(危亂)이 닥쳐 좋아하는 사람과 서로 손을 잡고 급히 피란할 것을 노래한 시이다. 두공부(杜工部)처럼……기울이세 두공부는 두보(杜甫)를 말한다. 그의 시에 "성도에 어찌 술이 없어서겠는가, 나라가 걱정되어 잔을 조금 기울일 뿐이네.[成都豈無酒? 憂國只細傾.]"라는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補注杜詩 卷14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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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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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효부 정씨 유사 烈孝婦鄭氏遺事 내가 옛날 강가에서 노사(蘆沙)43) 선생을 모시다가, 어느 날 "문천상(文天祥)44)이 국가가 패망한 날에 죽지 않고 연옥(燕獄)45)에서 붙잡힌 지 수 삼년 만에 죽음을 내린 이후에야 죽었으니 왜 그랬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생은 "옛날에 개가(改嫁)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개가하지 않는 것을 '열(烈)'로 여겼지만, 우리나라에는 개가하는 법이 없으므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열(烈)'로 여겼으니, 어찌 시부모를 받들고 자식을 길러서 그 집안을 보존하는 것을 '열(烈)'로 여겼겠는가?"라고 하셨다. 내가 듣고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어 평소 잊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열효부(烈孝婦) 정씨(鄭氏)의 행장 한 편을 보고 과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씨는 고(故) 사인(士人) 이문욱(李文郁)의 처인데 친영(親迎)46)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으니 따라 죽기로47) 맹세하고 절대로 먹고 마시지를 않았다. 시부모가 백방으로 누그러뜨리고 타이르자 정씨는 번연(幡然)히48) 마음을 바꾸고 일어나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죽은 남편의 마음입니다."라고 하고는 억지로 미음을 먹고 곡읍(哭泣)과 벽용(擗踊)49)을 예(禮)에 맞게 그쳤다. 시부모를 섬길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기쁜 낯빛으로 극진하게 뜻을 받들어 따랐고, 맛있는 반찬과 정갈한 음식으로 극진하게 정성스런 봉양을 하였다. 병구완을 할 때 약물을 널리 구했는데 그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이 많았다. 몸소 부지런히 길쌈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모든 경비가 덕분에 넉넉해졌다. 조카인 익무(翊茂)를 데려다 후사(後嗣)로 삼고 스승에게 나아가게 하였으며 올바른 교육50)을 다하는 데 힘쓰니 끝내 성취하게 되었다. 오호라! 죽은 남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으니 남편을 따라 죽은 경우보다 나은 것이 훨씬 크지 않겠는가. 이것이 향리의 보고와 사림의 천거가 의당 계속되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부인은 하동(河東)의 저명한 성씨로 고(故) 충의공(忠毅公) 지(地)의 후예이자 효자 준(浚)의 따님이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교화에 젖어 습성을 이룬 것이 어찌 그 유래가 없겠는가? 하루는 그 손자 병규(秉奎)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또 울면서 "우리 선조비(先祖妣)의 지극한 행실과 탁월한 절조는 옛날 어진 부인51)에게 견주어도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지금 세도(世道)가 옛날 같지 않아 진위(眞僞)를 구별하지 못하니 훗날에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전해질 한 편의 문장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간청해 마지않았다. 내가 듣고 흠모하고 부러워하여 감히 고루(固陋)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余昔侍蘆沙先生于江上。一日問文天祥不死於國家敗亡之日。而被執燕獄數三年。至於賜死而後死之。何耶。先生曰。古有改嫁。則以不嫁爲烈。在我東法無改嫁。則以從死爲烈。曷若奉舅姑養嗣息。以存其家之爲烈也。余聞之感悟。尋常不忘。今見烈孝婦鄭氏行狀一篇。果知有其人也。鄭氏故士人李文郁妻。親迎未幾而死。誓以下從。絶不飮食。舅姑寬譬百端。鄭氏幡然而起曰。奉養父母。是亡夫心也。强進餰粥。哭泣擗踊。止於禮。事舅姑。柔聲怡色。極其承順。馨饍潔羞。極其忠養。其侍疾。旁求藥餌。多有孝感之應。躬勤織紝。晨夜不懈。凡百調度。賴以紓焉。取從子翊茂爲嗣。命就傳。務盡義方之敎。卒至成就。嗚呼。心亡夫之心而賢於下從者。不其遠矣乎。此鄕里之報。士林之薦。宜其續續而弗一也。夫人河東著姓。故忠毅公地後。孝子浚女。生長法家。所以擩染而成性者。豈無所自耶.一日其孫秉奎抱狀示余。且泣曰。我先祖妣至行卓節。方古淑媛實無愧焉。而目今世道不古。眞贋莫別。則可以證信於日後者。其獨非一副文字之傳耶。固懇不已。余聞之欽艶。不敢以固陋辭焉。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1831년(순조31) 사마시에 합격하여 호조 참판을 지냈고,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이진상ㆍ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천상(文天祥) 송(宋) 나라 충신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원(元)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벼슬을 간곡히 권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결국 사형을 당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연옥(燕獄) 문천상이 수감되었던 연경(燕京)의 감옥을 말한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이다. 따라 죽기로 원문의 '하종(下從)'으로, 남편이 죽으면 자신도 죽어서 지하(地下)로 따라간다는 뜻이다. 변연(幡然)히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탕 임금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자, 이윽고 마음을 바꾸었다.〔湯三使往聘之, 旣而幡然改.〕"라고 하였다. 벽용(擗踊) 상을 당하여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교육〔義方之敎〕 '의방(義方)'은 올바른 도리로 바르게 가르치는 가정교육을 말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어진 부인 원문의 '숙원(淑媛)'으로, 《후한서(後漢書)》 〈열녀전(列女傳) 조세강처(曹世叔妻)〉에 "만약 숙원하고 겸순한 부인이라면 의를 따라 우호를 돈독히 한다.〔若淑媛謙順之人, 則能依義以篤好.〕"라고 하였는데 이현(李賢)의 주에 "숙은 선함이고 아름다운 여자를 완이라고 한다.〔淑, 善也. 美女曰媛.〕"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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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재 윤공 유사 慕義齋尹公遺事 공의 휘는 학모(學模), 자는 중현(重賢)이다. 윤씨(尹氏)의 선계는 파평(坡平)에서 나왔다.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 영평군(鈴平君) 휘 보(珤)는 모두 상계(上系)의 현달한 조상들이다. 호가 광수(狂叟)인 휘 덕생(德生)에 이르러 우리 장릉(莊陵)52)이 양위(讓位)를 할 즈음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분이 휘 만(蔓)을 낳았는데 감찰(監察)을 지냈고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ㆍ한재(寒齋) 이목(李穆)ㆍ매계(梅溪) 조위(曺偉)와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이분이 휘 자중(自中)을 낳았는데 좌랑(佐郞)이고, 이분이 휘 승문(承文)을 낳았는데 사과(司果)이고 승지(承旨)로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형유(衡柚)를 낳았는데 별제(別提)이고, 이분이 휘 해(海)를 낳았는데 여절교위(勵節校尉)이고 정유(丁酉)의 난 때 순절하였다. 5대를 전하여 휘 효동(孝東)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일서(日瑞), 호는 계송당(桂松堂)인데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조부의 휘는 상진(商鎭)이요, 호는 동은(東隱)이다. 부친의 휘는 일(溢)이요, 호는 학재(鶴齋)인데 문장과 덕행을 대대로 계승하였다. 모친은 개성 차씨(開城車氏) 명철(明轍)의 따님으로 부도(婦道)에 흠결이 없었다. 순묘(純廟) 임오년(1822, 순조22) 5월20일 함평(咸平) 모양리(牟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모가 헌걸차고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응대와 진퇴 간에 일찍이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7세 때 어버이의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는 밤낮으로 부축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울고 부르짖다가 거의 생명을 상할 뻔했으니 보는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했으나 부지런히 일하고 힘을 다해 모친을 봉양하면서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드리는 일과 따뜻하고 시원하게 보살피는 예절을 갖춰 드리지 않음이 없었다. 연로한 어버이가 노쇠하여 걷기 어렵게 되니 공이 매번 업고 뜰을 걸어 다녔다. 하루는 병이 나서 위태로울 뻔했는데 공이 넓적다리를 베어 드려 3일간 목숨을 연장하였다. 집상(執喪)을 할 때는 늙었다고53) 하여 스스로 핑계대지 않고 애훼(哀毁)함이 끝이 없었으며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다. 중년에 화곡리(花谷里)에 우거하며 작은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 거문고와 서적을 대하며 밤낮으로 한가로이 노닐었다. 공은 어려서 독서하고 겸하여 무예를 익혔다. 진을 펼치고 군대를 운용하는 법과 말을 달리고 활을 당기는 방도에 대해 대략 큰 이치를 깨우쳤다. 병인년(1866, 고종3) 강화도의 변란54)으로 조야가 흉흉할 때 김인기(金仁基) 공과 한 고을을 창도하여 장차 의거를 일으키려 하였다. 전략을 보좌하고 계획하여 출발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변란이 평정되니 그쳤다. 만년에는 스스로 재덕(才德)을 깊이 숨겨 감추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빈객과 벗이 들르면 기분 좋게 마시면서 즐거움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숙(家塾)을 열어 자손을 가르쳤고 문규(門規)를 만들어 족친(族親)들을 통합하였다. 이웃 마을 친구에 대해서 까지도 위문과 구휼을 갖추어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해년(1887, 고종24) 4월 13일 생을 마치니 단양면(丹陽面) 동막(東幕) 뒤편 불당동(佛堂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기수(起樹)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으로 명성이 났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병희(炳熙)ㆍ병룡(炳龍)ㆍ병문(炳文), 병호(炳豪)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공휴(文功休)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병인년(1866,고종3)에 거사를 했던 공(公)들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고을에서 연세가 높고 명망이 무거운 분들이었다. 인물이 빼어나고 걸출하였으며 의론은 뛰어나고 시원스러웠다. 계모는 자세하고 빈틈이 없어서 원근 간에 호응하고 대소 간에 감동하였다. 비록 한 때에 공적을 기록할만한 업적은 없더라도 민심을 진작하고 국위(國威)를 조장(助壯)하여 적을 꺾는 원대한 계책을 세웠으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오호라! 이제는 40년 전의 일이 되었구나. 당시의 인물들은 홀연 모두 떠나시고 하늘에 넘치는 거대한 물결55)만 이처럼 가득 찼으니 곧바로 구천(九泉)으로 달려가 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도다. 병희(炳熙)가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글 한 편을 부탁하는지라 옛날을 회상하며 오늘을 슬퍼하니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公諱學模。字重賢。尹氏系出坡平。太師諱莘達。鈴平君諱珤。皆其上系顯祖也。至諱德生。號狂叟。我莊陵遜位之際。棄官南下。累徵不就。生諱蔓。監察。與權睡軒五福李寒齋穆曺梅溪偉爲道義交。生諱自中。佐郞。生諱承文司果。贈承旨。生諱衡柚。別提。生諱海勵節校尉。丁酉亂殉節。五傳諱孝東。卽公之高祖也。曾祖諱日瑞。號桂松堂。孝行著稱。嘉善。祖諱商鎭。號東隱。考諱溢。號鶴齋。世襲文行。妣開城車氏明轍女。壺儀無闕。以純廟壬五月二十日生公于咸平牟陽里器宇軒昂性氣溫良。事親至孝。唯諾進退。未嘗有違。七歲見親疾危劇。晝夜扶持。暫不離側。遭艱擗踊啼呼。幾於傷生。見者嘖嘖。家素貧甚。服勤致力以奉慈闈。甘毳之供。溫凊之節。無不備給。親年衰癃。艱於行步。公每負之而行於庭除。一日屬疾幾危。公割股以進。得延三日。執喪不以耆艾自恕。哀毁罔極。情文俱至。中年寓花谷里築小屋子。花竹琴書。日夕徜徉。公少年讀書。兼習武藝。布陣行軍之法。馳馬挽弓之方。略曉大致。丙寅江都之變。朝野洶洶。與金公仁基倡一鄕。將設義擧。贊畫方略。行發有日。亂平而止。晩年深自鞱晦。不出戶庭。然賓朋過之。未嘗不酣暢以盡其娛。開家塾以敎子孫。設門規以合族親。至於隣里故舊。問訊賙恤。無不備擧。丁亥四月十三日考終。葬丹陽面東幕後佛堂洞乾坐原。齊文化柳氏起樹女。婦德著稱。生四男一女。曰炳熙炳龍炳文炳豪。南平文功休。孫以下不錄。余嘗及見丙寅擧事諸公。皆鄕裏耆舊宿碩也。人物俊偉。言議英暢。謀畫綢密。遠近響應。大小風勤。雖未有一時紀功之蹟。而所以振勵人心。助壯國威。而爲折衡千里之計。不亦大矣乎。嗚呼。今爲四十年前事耳。當時人物。遽皆零落。而陷天巨浪。瀰漫如此。直欲奔告九泉而不可得也。炳熙持遺狀。託以一言之役。緬古傷今。豈忍辭諸。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능으로 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 늙었다고 원문의 '기애(耆艾)'로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艾)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세를 기(耆)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강화도의 변란 1866년(고종3) 9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하늘에……물결 일제의 침입 등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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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임씨 유사 孺人林氏遺事 조군(趙君) 익제(翼濟)는 자가 사빈(士彬)이요, 함안인(咸安人)이다. 효우(孝友)하고 돈목(敦睦)하며 선(善)을 즐거워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군과 나는 중년의 벗인데 만년에 비로소 이웃에 접하여 서로 어울렸다. 이 때문에 부인의 아름다운 부덕(婦德)과 많은 내조(內助)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부인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고(故) 충절공(忠節公) 팔급(八汲)의 후손으로 경인(景仁)ㆍ수길(守吉)ㆍ준원(俊源)이 그 증조 이하 3세의 휘이다. 모친은 한산 정씨(韓山程氏) 석조(錫祚)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기유년(1849, 즉위년) 11월 20일에 태어났다. 부인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16세에 시집을 와서56) 시부모를 받들어 모시면서 정성과 봉양을 다하여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올리고 신혼(晨昏)57)의 예절에 날마다 일정한 규정을 두었다. 시할머니 조씨(曺氏)의 깊은 병환이 오래되어 10년에 이르도록 부인은 마음으로 걱정하며 낯빛도 풀이 죽었다.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58)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선잠도 자지 않을 정도였다. 남편을 섬길 때는 화순(和順)하고 공경함을 모두 지극히 하여 한 마디 말도 따지지 않았고 규방에서는 온화하고 조용하여 사람 소리가 없는 것 같았다. 자손을 가르치고 기를 때는 의로운 방도를 다하기에 힘썼고, 상스러운 놀이를 경계하며 화려한 꾸밈을 금하였다. 취학시킬 때가 되면 반드시 어진 사장(師長)을 택해서 보내고, 매양 술과 음식을 갖춰서 사장에게 바치게 하고 정성을 다하였다. 족척(族戚)과 이웃에게는 은혜로운 뜻을 두루 흡족하게 하였고, 안부를 묻고 보내 주는 것을 때에 따라 변치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더욱 더 불쌍히 여겨 구제한 바가 많았다. 기해년(1899, 고종36) 12월에 남편이 병이 들어 위중해지자 부인은 매일 밤에 기도를 올리면서 자기 몸으로 대신할 것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병은 조금 차도가 있었는데 부인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임종할 때 자식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의 부친이 이미 차도가 있으니 내가 죽는 들 어찌 한스러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글을 배우는 데 힘써서 가업을 폐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니 바로 경자년(1900, 고종37) 정월 6일이었다. 안장하였다가 가승동(佳勝洞)의 안산(案山) 활인봉(活人峰)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내룡(來龍)ㆍ내귀(來龜)이다. 두 딸은 여흥(驪興) 민사호(閔社鎬)ㆍ경주(慶州) 김용희(金龍熙)에게 시집 갔다. 오호라! 부인의 훌륭한 지모와 아름다운 풍범은 옛날의 어진 부인들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이 때문에 조씨의 집안이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서 향리에 자자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표장하여 당세에 열녀전(烈女傳)을 편찬하는 자에게 알리기를 원했었는데 내룡(來龍)과 내귀(來龜)가 나를 따라 종유하다가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비록 형편없으나 다만 정의(情誼)가 깊은지라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전일에 들은 것과 오늘의 가장에 근거하여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이 글을 짓노라. 趙君翼濟。字士彬咸安人。以孝友敦睦。樂善嗜義。見稱于鄕里間。君余中年友也。而晩始接隣相從。是以聞其壺範之美。內助之多。其夫人平澤林氏。故忠節公八汲之後。景仁守吉俊源。其曾祖以下三世諱也。妣韓山程氏錫祚女。以哲宗己酉十一月二十日生。溫仁慈柔。幼有至性。十六于歸。承奉舅姑。備盡忠養。甘毳之供晨昏之節。日有常程。王姑曺氏沈疾彌久。至於十年。夫人心憂色沮。露禱嘗藥。晝不離側。夜不儼寐。事君子。和敬兩至。未嘗以一言相稽。閨房之間。雍容幽靜。若無人聲。敎養子孫。務盡義方。戒鄙俚之戱。禁華麗之餙。及其就學。必擇師長之賢者而送之。每具酒饌。使獻之而致誠焉。族戚鄰里。恩意周洽。問訊贈遺。隨時不替。遇飢歲。曲加矜恤。多所濟活。己亥十二月。其夫遘疾危劇。夫人每夕行禱。請以身代。未幾夫病少差。而夫人遘疾。臨終顧諸子曰。汝父親旣得向差。吾死何恨。又曰。孝於親。友於兄弟。勤於學文。勿替家業也。言訖而逝。卽庚子正月六日也。葬而移窆于佳勝洞案山活人峰巽坐原。擧二男。曰來龍來龜。二女適驪興閔社鎬慶州金龍熙。嗚呼。夫人之佳謨懿範。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此趙氏之家所以著有令聞而藉藉於鄕里者也。吾願表以出之以諗于世之編烈女傳者。來龍來龜從余遊。一日以家狀屬余爲文。顧以無狀。但以事契之重。有不忍牢讓。謹据前日之聞今日之狀。爲之說如此云爾。 시집을 와서 원문의 '우귀(于歸)'로,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것이다. 《시경》 〈도요(桃夭)〉에 "야들야들 복사꽃, 열매가 주렁주렁. 이분 시집감이여, 집안을 의당 화목하게 하리로다.〔桃之夭夭, 有蕡其實. 之子于歸, 宜其家室.〕"라는 말이 나온다. 신혼(晨昏)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약을 맛보면서 윗사람에게 약을 올리기 전에 먼저 맛보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하(曲禮下)〉에 "임금이 병이 들어 약을 마실 때에는 신하가 먼저 맛을 보며, 어버이가 병이 들어 약을 마실 때에는 자식이 먼저 맛을 본다.〔君有疾, 飮藥, 臣先嘗之, 親有疾, 飮藥, 子先嘗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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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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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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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 민공 유사 梅史閔公遺事 공의 휘는 치규(致圭)요, 자는 우문(遇文), 호는 매사(梅史)이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고 상의봉어(尙衣奉御) 휘 칭도(稱道)가 그 비조(鼻祖)이다. 호가 의암(義庵)인 휘 회삼(懷參)에 이르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우리 세조(世祖) 때 대정 현감(大靜縣監)에 전보되었다가 방환(放還)되어 그대로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 거주하였다. 증조의 휘는 정사(挺泗)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상일(相一)이다. 부친의 휘는 향방(響邦)이고, 모친은 평택 임씨(平澤林氏) 수중(守重)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신묘년(1831)59) 3월 11일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이 좋았다. 언사는 온화하고 선량했으며 행동은 안정되고 조용하였다. 그 용모를 쳐다보면 근칙(謹勅)한 선비임을 알 수 있고, 그 말을 들으면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산에서 땔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갖춰 드렸다.한가한 날에는 경전(經典) 공부에 힘썼는데 확실하게 과정(課程)을 두었다. 구용구사(九容九思)60) 및 경재잠(敬齋箴)61)을 자리 옆에 걸어놓고 보면서 몸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하는 것과,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62)는 선비의 본분과 실지(實地)이다. 이 밖으로는 이단이요 사설(邪說)이다."라고 하였다. 평소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함부로 교유하지도 않았다. 몸가짐은 담담하고 조용하여서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것 같았고, 남을 대할 때는 관대하고 여유로워서 취하고 버리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63) 오솔길을 내서64) 글방을 짓고 꽃을 가꾸며 대나무를 심어서 빈객과 붕우들이 글 짓고 술 마시는 장소로 삼았다. 묘실(墓室)을 중수하여 서적65)을 쌓아놓고 가문 자제들이 노닐며 학업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향당(鄕黨)의 학교66)에도 출입하며 마음껏 의론하고67) 도우면서 가리킬 수68) 있었으니 우뚝하게 한 고을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갑신년(1884, 고종21) 4월 8일에 세상을 뜨니 본방(本坊)의 풍정(風亭) 계좌(癸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명수(明樹)의 따님으로 2남 방호(方鎬)ㆍ찬호(璨鎬)를 두었다. 찬호는 출계(出系)하여 당숙인 치은(致殷)의 후사가 되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사원(詞垣)과 한묵(翰墨)의 마당ㆍ학교와 연향의 자리에 출입하며 모시고 따르면서 적셔진 여훈(餘薰)이 충만할 뿐만이 아니었다. 오호라! 선배와 숙유(宿儒)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 향리에서 다시는 당일의 풍도와 의용을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보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제 그 남은 후손 영언(泳彦)의 부탁을 받고 보니 차마 내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公諱致圭。字遇文。號梅史。閔氏系出驪興。尙衣奉御諱稱道。其鼻祖也。至諱懷參。號義庵。仕至兵判。我世祖朝。補大靜縣監放還因居綾州月谷里。曾祖諱挺泗。贈司僕寺正。祖諱相一。考諱響邦。妣平澤林氏守重女。憲宗辛卯三月十一日。生公于松石坊之五柳村。美鬚髥。好容顔。言辭溫良。動止安詳。瞻其容。可知其爲謹勅士也。聽其言。可知其爲愷弟人也。家貧甚。樵山釣水。備供親旨。餘日劬經。的有課程。九容九思及敬齋箴揭之座側。視爲律身之本。嘗曰。愛親敬長。隆師親友。誠意正心修身齊家。是士子本分實地。外此則異端也邪說也。平居不妄言笑。不妄交遊。持身恬靜。若無所營爲。處物寬裕。若無所取舍。開逕結塾。栽花種竹。爲賓朋文酒之所。重修墓室。貯積墳典。爲門子弟遊業之地。至於鄕黨庠序之間。有以出人風儀。左右指畫。偉然爲一鄕之儀表。甲申四月八日卒。葬本坊風亭癸坐原。妣文化柳氏明樹女。擧二男。方鎬璨鎬。璨鎬出爲堂叔致殷后。余自小少。猥爲公辱知。詞垣翰墨之場。黌宮樽爼之席。出入陪從。擩染餘薰。不啻充然。嗚呼。先進宿儒。擧皆千古。而鄕井之間。不復見當日之風儀。俯仰今古。有淚如注。今於其遺孫泳彦之託。不忍以非其人辭。 헌종(憲宗) 신묘년(1831) 원문에 '헌종'으로 되어 있으나 헌종의 재임기에는 신묘년이 없으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구용구사(九容九思) '구용(九容)'은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예기》 〈옥조(玉藻)〉에 "군자의 용모는 펴지고 느려야 하니, 존경할 사람을 보고는 더욱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 발 모양은 무겁게 하며,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하며, 눈 모양은 단정하게 하며, 입 모양은 그치며, 소리 모양은 고요하게 하며, 머리 모양은 곧게 하며, 숨 쉬는 모양은 엄숙하게 하며,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며, 얼굴 모양은 장엄하게 해야 한다.〔君子之容舒遲, 見所尊者齊遫. 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고 하였다. '구사(九思)'는 또한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마음가짐으로, 《논어》 〈계씨(季氏)〉에 "보는 데 밝게 볼 것을 생각하며,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며, 낯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며,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며, 말은 충직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일은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난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하며, 분이 날 때는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며,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라고 하였다. 경재잠(敬齋箴) 주희(朱熹)가 '경(敬)'에 관련된 글을 모아 자신을 경계하는 뜻으로 지은 글이다. 《朱子大全 卷85 敬齋箴》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 《대학》에 나오는 8조목을 가리킨다. 8조목은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이다. 취하고……같았다 상황에 따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솔길을 내서 원문의 '개경(開逕)'으로, 한(漢)나라 때의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일찍이 정원에 세 오솔길을 내고 오직 좋은 친구 구중(求仲), 양중(羊仲)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도잠(陶潛)의 〈귀전원(歸田園)〉에 "내 본심이 정히 이와 같으니, 오솔길 내고 좋은 친구만 바라노라.〔素心正如此, 開逕望三益.〕"라고 하였다. 서적 원문의 '분전(墳典)'으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준말인데, 여기서는 유교 서적 등을 말한다. 학교 원문의 '상서(庠序)'로, 지방의 학교를 말한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맹자가 양혜왕에게 왕자(王者)의 다스림에 대해 논하면서 이르기를 "상서의 가르침을 삼가서 효제의 의리로써 거듭한다면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길에서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을 것입니다.〔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養,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라고 하였다. 출입하며……의론하고 저본에는 '出人風儀'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出入風議'의 잘못인 듯하다. 《시경》 〈북산(北山)〉에 "혹은 출입하며 마음껏 말하거늘 혹은 하지 않는 일이 없도다.〔或出入風議, 或靡事不爲.〕"라고 하였다. 가리킬 수 원문의 '지획(指畫)'으로,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며 가리키는 것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 제장(諸將)의 의견이 엇갈리자, 농서(隴西)에서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자문을 구했는데, 마원이 '쌀을 모아 쌓아서 산과 골짜기의 모양을 만들어서 지형을 가리켜가며 여러 군대가 경유할 곳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자〔聚米爲山谷, 指畫形勢, 開示軍衆所從道徑.〕' 광무제가 "오랑캐가 내 눈 안에 들어왔다."고 기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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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조공 유사 孝子趙公遺事 지난 정유년(1897, 고종34)에 내가 듣건대 향리의 많은 선비들이 천거장에 연명(聯名)하여 조경제(趙慶濟)와 그의 처 이씨(李氏)의 효행을 관사(官司)에 보고했는데 항간의 여론이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다. 13년 후인 기유년(1909, 순종2)에 효자 후손 내성(來成)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요청하기에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경제(慶濟)는 집이 몹시 가난해서 품팔이로 어버이를 모시면서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과 입에 맞는 음식을 모두 해드리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기이한 병이 있어서 3년이 되도록 낫지 않자 부부가 번갈아 모시면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았다. 눕고 일어날 때면 부축하고, 옴으로 가려워하면 문질러 긁어드리며, 변을 보시면69) 움켜서 치웠다. 의원에게 묻고 약을 조제하며, 북두성에 기도하고 하늘에 축원하며, 정성을 다하고 힘을 쏟기를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하루는 홀연 올빼미가 꿩을 쳐서 뜰에 떨어뜨리니 가져다 드린 일이 있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실로 효성에 감응한 소치였다. 운운." 이 가장(家狀)의 내용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면 어찌 당일의 칭송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실행(實行)과 실적(實蹟)에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70)을 알 수 있다. 효자 조씨는 함안(咸安)의 저명한 성씨로 덕곡(德谷) 선생 휘 승숙(承肅)이 그 중조(中祖)이다. 휘 종례(從禮)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직제학(直提學) 벼슬을 지내고, 휘 희광(希匡)이 참봉(參奉) 벼슬을 지내면서 동복(同福)에 우거하였다. 4대를 전하여 휘 옥생(玉生)은 호가 청계(淸溪)인데 감정(監正) 벼슬을 지내고 동복에서 또 능주(綾州)로 옮기면서 자손들이 그로 인해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가 달운(達運)이다. 증조는 휘가 시복(時福)인데 호는 가정(嘉亭)이다. 조부는 휘가 두열(斗烈)인데 호는 희암(希庵)이다. 부친의 휘는 용후(鏞厚)로 세상에 문장과 덕행으로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 돈효(敦孝)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용필(鏞弼)인데 소후부(所後父 양부)의 오종(五從) 형제이고, 생모(生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영철(英哲)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 12월 23일에 공은 산음리(山陰里)에서 태어났다. 지극한 효성은 천성으로 타고났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근(鍾根)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유순하며 정숙하고 아름다워 지극한 부덕(婦德)이 있었다.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어김이 없었으니 친척과 이웃들도 이구동성으로 찬탄하며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라고 하였다. 효자는 갑진년(1904, 고종41) 6월 15일 세상을 마쳤고 단양면(丹陽面) 천곡(泉谷) 오른쪽 기슭 방축동(防築洞) 좌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이 글을 요청한 자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채호(文彩浩)에게 시집을 갔다. 내가 늙고 병들어 남의 집안의 글을 짓기가 어렵지만 평소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往在丁酉。余聞鄕裏多士。聯名擧狀。以報趙慶濟及其妻李氏孝行于官司。而閭巷物議。莫不稱愜焉。後十三年己酉。孝子遺胤來成持其狀。謁不朽之文。按狀有曰。慶濟家貧甚。行傭供親。而其便身之物。適口之味。無不畢給。親有奇疾。三年彌留。夫妻替侍。晝夜不離。臥起則扶持之。苛癢則抑搔之。遺矢則掬除之。問醫合藥。祈斗祝天。殫誠竭力。三年如一日。一日忽有鴟鴞。摶稚墜庭中。持以供之。此非適然。實是孝感所致云云。夫此狀之辭。如其浮實。則豈當日之稱愜。有如是耶。于以見其實行實蹟。有不可誣耆矣。孝子咸安著姓。德谷先生諱承肅。其中祖。至諱從禮。入我朝。官直提學。諱希匡。官參奉。寓居同福。四傳諱玉生。號淸溪。官監正。自同福又移綾州。子孫因居焉。高祖諱達運。曾祖諱時福。號嘉亭。祖諱斗烈。號希庵。考諱鏞厚。世著文行。妣咸豊李氏敦孝女。生考諱鏞弼。於所後爲五從兄弟也.妣密陽朴氏英哲女。哲宗丙辰十二月二十三日。公生于山陰里。誠孝根天。遭內外艱。一遵禮制.配李氏全州人鍾根女。溫柔靜嘉。極有婦德。善事舅姑。無違夫子。親戚隣里。一口歎賞以爲是夫是婦。孝子以甲辰六月十五日終。葬丹陽面泉谷右麓防築洞子坐原。有一男一女。男卽謁文者。女適南平文彩浩。余老且病。有難犯手於人家文字。而觀感有素。有不忍牢辭云爾。 변을 보시면 원문의 '유시(遺矢)'로 시(矢)는 똥〔屎〕이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염 장군이 늙었어도 아직 밥을 잘 먹습니다. 하지만 신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변소에 갔습니다.〔廉將軍雖老. 尚善飯. 然與臣坐, 頃之三遺矢矣.〕"라고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에 "자주 일어나 변소에 갔음을 말한 것이다. 시(矢)는 어떤 본에는 시(屎)라고 되어 있다.〔謂數起便也, 矢一作屎.〕"라고 하였다. 속일……것 저본은 '有不可誣耆'로 되어 있는데 '耆'는 '者'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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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신종록 日新齋信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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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今島 今古古今島。往來幾薦紳。崖州從此大。直接漢江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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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古今島駕馬峙。望漢挐山。 漢拏雲外立。雲外更無山。天地雖云廣。只存方寸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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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上喜金子中【?】晩到 一雨秋江漲。樓前不見君。銀魚空出沒。白鷺自平分。地勢南傾海。天光北掃雲。夕亭催健筆。揮灑足張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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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錫齋會吟 八十四年翁。兀然滿座中。文章辭愈拙。學術道彌窮。處世無良策。居家少正風。跳丸旣往事。畵脂費虛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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