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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졸이 예전 지은 시에 차운하다 2수 次百拙舊作【二首】 상전벽해 속의 변고 몇 년이나 지났나 滄桑變劫幾經秋산하를 보기 싫어 누대에 오르지 않았네 厭見河山不上樓조부 자식 손자의 몸은 수치 씻기 어렵고 祖子孫身難洗恥신라 고려 대한 시대에는 뿌리 깊은 근심 있네 羅麗韓代有根愁삼천리 초토에는 백성들 남아 있지 않고 三千焦土無黎首재앙으로 인한 곤경에 백발이 되려 하네 百六難關欲白頭박상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회복이 있으랴290) 未到剝床焉有復우렛소리 나는 곳291)에서 훌륭한 공 거두리라 雷聲發處妙功收상장의 옥사292)는 옛날 어느 때이던가 上章屋社昔何時저들이 정한 처음 계획은 멸종시키는 것이었지 彼定初籌滅種期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오히려 명맥을 이어왔지만 三紀猶能寬命脈결국에는 양식과 숟가락 빼앗아도 괴이할 것 없네 畢場無怪奪粮匙동포가 어찌 차마 응견293)이 되었나 同胞胡忍爲鷹犬살점이 잘려 나가 상해를 입었으니 가련하구나 割肉堪憐作瘇痍하늘이 벌줄 날 만을 기다리노니 待到天公行罰日그들의 죄악이 가득 찼음을 그들도 알리라 貫盈渠罪亦渠知 滄桑變劫幾經秋, 厭見河山不上樓.祖子孫身難洗恥, 羅麗韓代有根愁.三千焦土無黎首, 百六難關欲白頭.未到剝床焉有復? 雷聲發處妙功收.上章屋社昔何時? 彼定初籌滅種期.三紀猶能寬命脈, 畢場無怪奪粮匙.同胞胡忍爲鷹犬, 割肉堪憐作瘇痍.待到天公行罰日, 貫盈渠罪亦渠知. 박상(剝床)에……있으랴 재앙의 때가 왔으므로 순환의 원리에 따라 다시 회복되리라는 말이다. 박상은 〈박괘(剝卦) 육사(六四)〉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름이니, 흉하다.[剝床以膚, 凶.]"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재앙이 아주 가까워짐을 말한 것이다. 박괘(剝卦)는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다하는 괘인데, 다시 복괘(復卦)로 순환된다. 우렛소리 나는 곳 복괘(復卦)를 말한다. 《주역》 〈복괘(復卦)〉상전(象傳)에 "우레가 땅속에 있는 것이 복이니, 선왕이 이를 보고서 동지에 관문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고, 임금은 사방을 살피지 않는다.[雷在地中復. 先王以, 至日閉關, 商旅不行, 后不省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장(上章)의 옥사(屋社) 상장은 고대의 간지로 경(庚)이고, 옥사는 멸망한 나라의 사직을 뜻한다. 여기서는 경술년(1910) 일본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긴 일을 가리킨다. 응견(鷹犬) 사냥하는 매와 개로, 남의 앞잡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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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실248)의 식물을 읊다. 10절 詠不忘室植物 十絶 뒤늦게 시드는 나무 없지 않지만 匪乏後凋樹너와 함께 이웃이 되었구나 與之接爲隣어찌 손때 묻은 것만 하겠는가마는 豈如經手澤심신을 하나로 합할 수 있어 좋구나 好作一心身-소나무[松]-이것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하니249) 無此令人俗옛 현인은 이미 먼저 내 마음 알았네 古賢獲已先창 앞에서 날마다 마주하고 있으니 窓前日相對어찌 평안하다는 소식 기다릴 것 있으랴 何待平安傳-대나무[竹]-푸른 수염 늙은이250)와 백중간이니 伯仲蒼髥老깨끗한 향기가 엇비슷하도다 潔香反覆勝대와 함께 삼익우(三益友)이니251) 益三竹與幷벗의 덕이 크게 차이 나지 않네 友德不逕庭-삼나무[杉]-예로부터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니 從古爲人愛응당 칠절252)에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應緣擅七絶나는 하나도 능한 것 없으니 一能於我無이 나무만 못함이 부끄럽구나 堪愧不如物-감나무[柹]-마음속에 생각하는 이는 누구인가 所懷伊何人천추의 도이 늙은이253)라네 千秋陶李翁유허가 마을 골짝에 전해 오니 遺墟傳里谷억지로라도 누추한 거처에서 함께 하고 싶네 强欲陋居同-밤나무[栗]-과일이 떨어졌다 말하지 말라 莫說果爲下신선 세계가 일찍이 여기에 있었다오 仙源曾在斯어떻게 하면 땅에 가득 심어서 安能種滿地곧 무릉254)처럼 되길 기약할까 便與武陵期-복숭아[桃]-붉고 둥근 모습 사랑스러우니 紫圓形可愛달고 신 맛이 되려 신선하네 甛酢味還新오릉중자255)를 비웃지 말라 莫笑於陵子지금 시대에 또한 짝할 이 드무니 今時亦罕倫-오얏[李]-궐리에 있는 선니의 행단(杏壇)256)을 尼壇在闕里어떻게 본받을 수 있겠는가마는 胡爾效嚬爲이 나무 진실로 싫지 않으니 此固未爲嫌성신을 오히려 기약할 수 있다네 聖神尙可期-살구나무[杏]-꽃이 화사하여 《시경》에 실렸으니 韡韡登周詩천륜으로 만세를 밝혔다네257) 天倫明萬世아 지금 형제들은 嗟哉今弟兄이 나무 대하매 어찌 부끄러움 없으랴 對此寧無愧-아가위나무[棣]-호상258)에는 사람 자취 멀고 湖上人蹤遠도산259)에는 시의 운치 끊겼네 陶山詩韻絶나는 황량하고 적막한 동산에서 而余荒寂園인물이 없음을 함께 탄식하네 俱歎病人物-매화[梅]- 匪乏後凋樹, 與之接爲隣.豈如經手澤? 好作一心身.【松】無此令人俗, 古賢獲已先.窓前日相對, 何待平安傳?【竹】伯仲蒼髥老, 潔香反覆勝.益三竹與幷, 友德不逕庭.【杉】從古爲人愛, 應緣擅七絶.一能於我無, 堪愧不如物.【柹】所懷伊何人? 千秋陶李翁.遺墟傳里谷, 强欲陋居同.【栗】莫說果爲下, 仙源曾在斯.安能種滿地, 便與武陵期?【桃】紫圓形可愛, 甛酢味還新.莫笑於陵子, 今時亦罕倫.【李】尼壇在闕里, 胡爾效嚬爲?此固未爲嫌, 聖神尙可期.【杏】韡韡登周詩, 天倫明萬世.嗟哉今弟兄, 對此寧無愧?【棣】湖上人蹤遠, 陶山詩韻絶.而余荒寂園, 俱歎病人物.【梅】 불망실(不忘室) 김택술이 1944년에 지은 토실(土室) 이름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는데, 난세(亂世)에 출처(出處)와 거취(去就)를 절도에 맞게 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後滄集 卷21 不忘室記》 이것……하니 소식(蘇軾)의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에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수척하게 하지만,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라고 한 구절에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9》 푸른 수염 늙은이 소나무의 별칭이다. 창염수(蒼髥叟)라고도 한다. 대와 함께 삼익우(三益友)이니 소식(蘇軾)의 〈유무창한계서산사(遊武昌寒溪西山寺)〉에 "풍천은 양부악이요, 송죽은 삼익우라네.[風泉兩部樂, 松竹三益友.]"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소나무와 삼나무를 동일시하여 말하였다. 참고로 주희(朱熹)는 부친의 이름인 '송(宋)'을 휘하여 '삼(杉)'으로 표기하였다. 삼익우는 세 가지 유익한 벗을 말한다. 칠절(七絶) 감의 일곱 가지 좋은 점으로, 첫째 수명이 긴 것, 둘째 잎이 풍성하여 그늘이 짙은 것, 셋째 새의 둥우리가 없는 것, 넷째 좀이나 벌레가 없는 것, 다섯째 단풍이 들었을 때의 아름다운 잎, 여섯째 먹음직스러운 고운 열매, 일곱째 낙엽(落葉)이 매우 비대(肥大)하여 글씨를 쓸 수 있는 점이다. 《本草 卷30 果部 柿》 도이(陶李) 늙은이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말하는 듯하다. 무릉(武陵)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가리킨다. 오릉중자(於陵仲子)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오릉에 살았던 진중자(陳仲子)로, 아주 청렴결백하였다.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李]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그에 대해 맹자는 "나는 제나라 인물 중에서 중자(仲子)를 으뜸으로 꼽는다. 하지만 중자를 어찌 청렴하다 할 수 있는가. 중자가 견지하는 지조를 유감없이 지키자면 물만 먹고 사는 지렁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於齊國之士, 吾必以仲子爲巨擘焉. 雖然, 仲子惡能廉? 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궐리(闕里)에……행단(杏壇) 궐리는 공자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다. 선니(宣尼)는 공자를 말하고, 행단(杏壇)은 공자가 제자들과 강학(講學)하던 곳으로, 단을 쌓고 그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행단이라고 하였다. 꽃이……밝혔다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아가위의 꽃이여, 꽃받침이 화사하지 않는가.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호상(湖上)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살았던 안동(安東) 소호리(蘇湖里)를 가리키는 듯하다. 도산(陶山)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만년에 강학했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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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의 '탄식이 있어' 시에 차운하다 次尤菴有歎詩 세월이 유수 같다고 한스러워할 필요 없지만 不須歲月恨如流봄과 가을 헛되이 보내 스스로 후회되네 自悔枉過春與秋앎은 진실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지혜를 얻겠는가 識未眞時焉得智행동은 실천하지 못했으니 문득 수심 생기누나 行違實處輒生愁삼강의 체용은 공자(孔子)가 증자(曾子)에게 전수하였고282) 三綱體用曾傳孔일경의 시종은 부옹(涪翁)이 회암(晦庵)에게 열어주었네283) 一敬初終晦闡涪노년에 공을 이루는 것은 비록 늦었지만 楡暮收功雖晩矣부지런히 하면 일거284)의 무리는 면할 수 있으리 孜孜庶免逸居儔 不須歲月恨如流, 自悔枉過春與秋.識未眞時焉得智? 行違實處輒生愁.三綱體用曾傳孔, 一敬初終晦闡涪.楡暮收功雖晩矣, 孜孜庶免逸居儔. 삼강(三綱)의……전수하였고 삼강은 증자가 지은 《대학》의 세 가지 강령인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체(體)와 용(用)으로 구분하면 명명덕은 체이고 신민은 용이며 지어지선은 전체 대용(全體大用)이다. 증자는 공자의 도통(道統)을 전해 받았다. 일경(一敬)의……열어주었네 부옹(涪翁)은 부주(涪州)에 유배된 일이 있었던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별칭이다. 이천이 부주로 귀양 가면서 강을 건너는데 풍랑이 심하여 배가 거의 전복되려 하니,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으며 울었으나, 이천만은 유독 옷깃을 단정히 하고 편안히 앉아서 평상시와 같았다. 언덕에 정박하자 초부(樵夫)가 묻기를, "배가 위태로울 때에 그대만이 유독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사(舍)해서 이와 같은 것인가, 달(達)해서 이와 같은 것인가?" 하였다. 이천이 대답하기를, "마음에 성경(誠敬)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자, 늙은이가 "마음에 성경을 지닌 것도 진실로 좋은 일이나 무심(無心)함만 못하다." 하였다. 《伊洛淵源錄 卷4》 이천의 사상을 이어 받은 회암(晦庵) 주희(朱熹)는 "경은 성학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다.[敬者, 聖學之所以成始成終者也.]"라고 하여 경의 일관성을 말하였다. 《朱子語類 卷12》 일거(逸居) 일거무교(逸居無敎)와 같은 말로, 가르침을 받는 일이 없이 편안히 지내기만 해서 인간의 도리를 포기하고 금수(禽獸)와 가깝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인간에게는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면서 편안히 지내기만 하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 없으면 금수와 가깝게 되고 말 것이다.[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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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옹전〉 뒤에 쓰다 書晩悔翁傳後 지난 계유년(1873, 고종10)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면암 선생(勉庵先生) 최공(崔公)이 언사(言事)로 죄를 얻어 장차 제주도[耽羅]로 귀양 가게 되었다. 사림들은 길에 나와 전송하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거리에서 모여 구경하였으며 심지어 주막이나 시장 점포의 백정이나 술파는 아낙도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지 않음이 없어 노참(路站)은 시장처럼 북적였고 술상은 비가 내리는 듯 침울하여, 물리쳐도 떠나지 않고 금지해도 중지하지 않았으니, 지나가는 천리 길에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나루터에 도착하자 전송하는 사람들은 돌아가고 모였던 사람들은 흩어져 감히 함께 배를 타는 사람이 없었고, 가시울타리 속에 갇혀 있어 또 달려가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대개 제주도는 푸른 바다 만 리 가운데 있어 악어 같은 물결과 고래 같은 파도가 거세고 험하여 조금이라도 역풍이 불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배를 저어 왕래한 것은 예로부터 매우 드물었다.오직 고 만회 처사(晩悔處士) 최승현(崔勝鉉) 공은 선생과 일면식의 친분도 없는데 힘을 팔아 양식을 모아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선생이 제주도에서 풀려나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갔는데, 흑산도는 제주도에 비하여 더욱 험하고 멀었지만 공이 또 갔다. 옛날 채명원(蔡明遠)은 안 노공(顔魯公)이 조정에 있었던 날에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지만 강회(江淮)에서 굶주릴 때 쌀을 운반하여 대접하였고,45) 장의보(張毅甫)는 문문산(文文山)이 재상이 되었을 때 나아가지 않았으나 연옥(燕獄)에 구금되었을 때 몸을 맡겨 따랐으니,46) 지금 공의 일은 이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것은 모두 고금의 영렬한 대장부이니, 풍치를 상상함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일어난다. 탁계순(卓契順)이 해남(海南)으로 한 번의 행차를 한 것47)도 오히려 족히 백세토록 불후하였으니, 더구나 공이 힘썼던 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고 그 마음을 먹고 의에 나아간 것은 또 탁계순이 견줄 것이 아닐 것이다.공은 우리 고을 사람이다. 이 때 나는 묵계(墨溪)의 집에서 어버이 병을 시중들고 있어 선생이 도내를 지난다고 들었으나 문을 나가 전송하지 못하였고, 같은 고을에 있으면서 또 선생을 본 사람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능히 보지 못하였으니, 푸른 바다를 건넜던 사람과 비교하면 어찌 다만 황곡(黃鵠)과 양충(壤虫)48)의 차이일 뿐이겠는가. 그 뒤에 공이 나를 한 번 방문하였고 내가 공을 한 번 방문하였지만 모두 만나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돌아가셨다. 풍의(風義)를 뒤미처 생각하니 단지 슬픔과 후회만 간절하네.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공의 아들 영호(永皓) 씨가 천태 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집안에 보관하던 글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청하였다. 나는 매몰된 천한 자취로 실로 감히 받들어 응할 수 없지만 다만 평소 향하여 우러르던 처지에 이미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니, 혹 이것으로 인하여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유향(遺響)을 의탁할 수 있을 것인가.아! 인간에게 도리가 있는데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그 본령이 되니, 진실로 이 마음이 없다면 백 가지 행실 만 가지 선을 어디에 붙이겠는가. 공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단지 바다를 건넜던 한 가지 절개에서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평생 의를 행하였던 상세함 같은 것은 면암 선생이 이미 기록하였으니,49) 족히 천고에 불후할 공안(公案)이 될 것이다. 往在癸酉。戶部侍郞勉庵先生崔公。言事得罪。將貶謫于耽羅也。士林出送於道。婦孺聚觀於巷。以至店幕市肆屠夫沽媼。無不加額瞻望。路站如市。酒盤如雨。揮之而不去。禁之而不止。所經千里。接屬無間。及到津頭。送者返。聚者散。無敢與之同舟者。在棘中。又寂然奔訊之人。蓋耽羅在滄溟萬里之中。鰐浪鯨波。瀰漫洶涌。少有逆風。性命難保。是以舟楫往來。自古絶罕。惟故晩悔處士崔公勝鉉。與先生無一面之分。而賣力聚粮。冒危凌險而赴之。先生自耽羅解歸。未幾。又謫于黑山。黑山視耽羅。尤爲險遠。而公又往焉。昔蔡明遠無問於顔魯公立朝之日。而在淮飢餓。運米而餉之。張毅甫不就於文文山作相之時。而被燕獄拘幽。委身而隨之。今公之事。不其類此乎。此皆古今烈烈大丈夫。想像風致。不覺興歎。卓契順辦海南一番之行。而猶足不朽於百世。況公之所辦。非止一番。而其設心就義。又非契順比耶。公吾鄕人也。是時余侍親疾于墨溪村舍。聞先生過省內。而未得出門相送。在同鄕。又欲見見先生之人而不能得。視諸越涉滄溟者。奚但黃鵠壤虫之分耶。其後公一過余。余一過公。皆未遇而公已千古矣。追念風義。只切悲悔。歲辛卯春。公胤子永皓甫。訪余於天台寓舍。袖示家藏文字。因請一言。余以埋沒賤迹。固不敢承膺。但平日向仰之地。旣違顔範。則或可因此而托遺響於冥冥耶。噫。人之有道。好賢爲其本領。苟無此心。百行萬善。何所附着也。欲知公者。只於涉海一節。可以槪矣。若其平生行義之詳。勉庵先生已記之。足可爲千古不朽之公案。 채명원(蔡明遠)은……대접하였고 채명원은 파양(鄱陽)의 교위(校尉)고, 안 노공(顔魯公)은 노군공(魯郡公)에 봉(封)해진 당(唐)나라 안진경(顔眞卿, 709~784)을 말한다. 이 사실은 안진경이 51세 때에 채명원에게 보답의 의미로 써 준 글씨 〈채명원파양첩(蔡明遠鄱陽帖)〉에 보인다. 《顔魯公集 年譜》 장의보(張毅甫)는……따랐으니 문문산(文文山)은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장의보가 문천상의 해골을 업고 길주(吉州)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던 것을 말한다. 탁계순(卓契順)이……것 소식(蘇軾)이 유배를 당했을 때 찾아 주었던 일을 말한다. 《동파전집(東坡全集)》 권23 〈차운정혜흠장로견기(次韻定慧欽長老見寄)〉의 서(序)에 "소주(蘇州) 정혜사 장로 수흠이 그 문도 탁계순을 혜주(惠州)로 보내 나의 안부를 물었다."라고 하였다. 황곡(黃鵠)과 양충(壤蟲) 남만 못한 데 대한 탄식을 말한다. 전국(戰國) 시대의 연(燕)나라 사람 노오(魯敖)가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많은 곳을 유람한 자가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북쪽의 몽궐산(蒙闕山)에 올라 한 도사(道士)를 만나서 천상천하(天上天下)를 다 돌아다녔다는 말을 듣고는 "이 도사는 한 번의 날갯짓에 천 리를 나는 황곡(黃鵠)과 같고, 나는 땅을 기어가는 작은 벌레[壤蟲]와 같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淮南子 道應訓》 면암 선생이 이미 기록하였으니 《면암집(勉菴集)》권40〈최만회옹전(崔晩悔翁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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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53)의 《암간우록》 뒤에 쓰다 題黃景涵巖間偶錄後 하나의 태극인데 나누어 말하면 건순(健順)이고, 또 나누어 말하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다. 단지 이 네 가지는 또 무한한 조리를 함축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기(氣)나 물(物)을 말하지 않아도 이(理)의 체단(體段)은 본래 이와 같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른 곳을 말함에 한결같지 않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무릇 이른바 이(理)가 같다는 것은 구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곳이 곧 원형이정이고 이곳이 곧 원형이정이니, 성색 모상(聲色貌象)과 운운 직직(云云職職)54)이 하나라도 이 네 가지의 밖을 벗어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理)가 같다는 것이다. 물에 비유하자면, 씻고 빨며, 삶고 마심에 그 용도는 같지 않지만 그것이 물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과 같다. 물은 실로 동일한데 씻고 빨고 삶고 마실 수 있는 구분은 이미 물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른바 일(一)이라는 것은 어찌 일찍이 구분이 없는 일(一)이겠는가.그대의 의론은 대체로 모두 좋으나 다만 다섯 째 단락에서 소는 밭 갈고[耕] 말은 달리며[馳] 솔개는 날고[飛]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는[躍] 다름을 말하면서 "이미 형기(形氣)가 같지 않음이 있으면 갖춘 바의 이(理) 또한 다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어찌 형기(形氣)에 떨어진 뒤에서 분수(分殊)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견해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억양의 사이에 말투가 그러했기 때문일 뿐이네.여덟째 단락에 또 '기질성지기(氣質性之氣)'의 기(氣)를 '기질(氣質)'이라고만 말할 때의 기(氣) 자와 같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 말 또한 의아스럽네. 기질은 단지 기질이니, 어찌 일찍이 두 단계의 기질이 있었던가. 이 말은 선사(先師)55)께서 발명하신 것이 상세하니, 바라건대 취하여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또 입론(立論)은 이치를 발명하는 것일 뿐이니, 세상을 나무라는 불평한 뜻을 그 사이에 두어서는 불가하니, 바라건대 헤아려 주시겠는가? 一太極矣。而分以言之。則健順。又分以言之。則元亨利貞。只此四者。又且涵蓄無限條理在。不須說氣說物。而理之體段。本自如此。然而先覺說理同氣異處不一。其故何耶。夫所謂理同者。非無分之謂也。那底便是箇元亨利貞。這底便是箇元亨利貞。聲色貌象。云云職職。無一出乎此四者之外。此所謂理同也。比如水。漑之濯之。烹之飮之。其用不同。而其爲水則一也。水固一也。而可漑可濯可烹可飮之分。已悉具於水。則所謂一者。何嘗是無分之一耶。賢論大槪皆好。但於五段。言耕馳飛躍之異。而曰旣有形氣之不同。則所具之理亦異。此語豈不是求分殊於隨形氣之後者耶。然非是見不到。只爲抑揚之間。語勢然耳。八段又以氣質性之氣氣。與單言氣質字不同。此言亦可訝。氣質只是氣質。何嘗有兩段氣質耶。此言先師發明詳悉。幸取看之如何。且立論貴乎發明理致而已。不可有譏世不平之意於其間。惟諒之否。 황경함(黃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을 말한다. 자는 경함,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운운직직(云云職職) 운운과 직직은 모두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노자》에 "무릇 만물은 무성하다가도 각각 그 뿌리에 복귀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라고 하였고, 《장자》 〈지락(至樂)〉에 "만물이 번성하나, 모두 무위로부터 자라는 것이다.[萬物職職, 皆從無爲殖.]"라고 하였다. 저본의 '운운(云云)'은 '운운(芸芸)'의 오류로 보인다. 선사(先師)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임성주ㆍ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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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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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당명 養性堂銘 하늘이 주고 사람이 받았으니이루어진 본성을 잘 보존해야 하네56)태극은 전체이고만물은 한 근원이네천연적으로 절로 있어순함이 있고 억지로함이 없네닦음을 기다리지 않으니어찌 기르기를 일삼으랴그러나 기질은그 부곽57)이네마음을 놓아버리면 없어지고정이 성하면 뚫리게 되네가까운 곳으로부터 들으면어느 곳인들 이르지 못하랴까닭에 성인께서기르는 도를 두었네그 도는 무엇인가경이 진전이네장중 정숙하여상제를 대하는 듯하네사서와 오경이그물이 벼릿줄에 걸려 있는 것 같네58)백 가지 행실 만 가지 선이마치 집에 들보가 있는 것 같네여기에 종사하여혹시라도 폐하거나 옮기지 말아야 하네탕임금은 날로 오른다 하였고59)문왕은 계속하여 밝힌다 하였네60)덕산의 기슭에집이 날개를 펼친 듯하네편액을 양성이라 하니그 뜻이 깊고도 깊네내 명을 지어그저 소식 전하네인하여 절차탁마하여날로달로 매진하세 天與人受。成性存存。大極全體。萬物一源。天然自有。有順無强。無待於修。何事於養。然而氣質。是其郛郭。心放則亡。情熾則鑿。聽其自爾。何所不到。所以聖人。有養之道。其道維何。敬爲眞詮。齊莊整肅。對越在天。四書五經。若網在綱。百行萬善。如屋有樑。從事於斯。毋或廢移。湯云日躋。文曰緝熙。德山之趾。有室翼然。顔揭養性。其義淵淵。我作銘詩。聊以寄聲。因仍切磋。日邁月往。 이루어진……하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부곽(郛郭) 외성을 말하는데, 울타리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소옹(邵雍)의 《격양집(擊壤集)》 〈자서(自序)〉에 "심은 성의 부곽이니, 심이 상하면 성도 따라서 상한다.[心者性之郛郭也, 心傷則性亦從之矣.]"라고 하였다. 그물이……같네 옛날 성현의 말씀이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며 마음속으로 명료하게 이해된다는 말이다. 《서경》 〈반경 상(盤庚上)〉에 "그물은 벼릿줄이 걸려 있어야 가닥이 잡혀 헝클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若網在綱, 有條而不紊.]"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탕(湯)임금은……하였고 《시경》 〈상송(商頌) 장발(長發)〉에 "탕왕의 탄생이 늦지 않으시며 성경의 덕이 날로 오르시네.[湯降不遲, 聖敬日躋.]"라고 한 것을 말한다. 문왕(文王)은……하였네 《시경》 〈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에 "거룩하신 문왕이여, 아, 경을 계속하여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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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순61) 자명 吳景純字銘 천지의 덕은지극히 정성스러워 쉼이 없네사람이 그 마음을 얻어이 사는 이치 바르네기품에 구속되고 외물에 가려사욕이 만 가지로 생기네왕도와 패도 한 길이고사람과 귀신 서로 관련 있네슬퍼하고 두려워하여몸을 돌이켜 반성하길 생각하네분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아동정에 경으로 해야 하네안팎의 빈주가 되어한 치를 얻고 한 자를 얻네여유롭게 쌓고 쌓아차례로 깎아내네털끝만큼이라도 남기지 않아야심덕이 이에 순수하네순수하여 또한 그치지 않은 것이문왕이 문왕 된 까닭이네62)오씨의 아들관례를 함에 특출나네순으로 자를 삼고덕으로 의를 제어하네오직 덕과 순은그 뜻이 매우 드러나네부지런히 힘쓰고 따라우리 문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네 天地之德。至誠無息。人得其心。之生也直。氣拘物蔽。私欲萬端。王覇一途。人鬼交關。惻硏瞿然。反身思省。懲忿窒慾。動靜以敬。賓主內外。得寸得尺。優遊積累。次第刊落。毫芒不留。心德乃純。純亦不已。文王爲文。吳氏之子。冠而騰異。純以表德。德以制義。維德維純。其意孔彰。勉勉循循。師我文王。 오경순(吳景純) 오재덕(吳在德, 1874~?)을 말한다. 자는 경순, 호는 제월(齊月),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순수하여……까닭이네 《중용장구》 제26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은 아, 깊고도 멀어 잠깐의 그침도 없다네.' 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하늘이 되는 까닭을 말한 것이며, '아, 어찌 밝게 드러나지 않으랴. 문왕의 덕, 그 순수함이여.' 하였으니, 이는 문왕이 '문'이란 시호를 받은 이유가 순수하면서 잠시도 그치지 않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詩云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 純亦不已.]"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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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에서 비에 길이 막혀 배율 한 편을 짓다 箕山阻雨 賦排律一篇 기산의 관사에 빗소리 오래도록 들리는데 箕山舘裏雨聲長5일 동안 못 돌아가 공연히 애간장 끊어지네 五日未歸空斷腸바람은 동남쪽에서 살랑살랑 불어오고 風自東南來習習구름은 서북쪽에서 아득하게 흩어지네 雲從西北?茫茫행색은 흡사 외딴 섬에 갇힌 듯하고 行裝恰似囚孤島고을은 되려 큰 바다 너머에 있는 듯하네 鄕邑還如隔大洋음식 먹음은 계옥처럼 곤란하여343) 안타까운데 憫爾供飧艱桂玉누가 적료함 깨뜨릴 거문고와 술을 보내 줄까 有誰破寂送琴觴한밤중에는 모기 굴에 있어 몹시 두렵고 中宵絶怕棲蚊窟긴 낮에는 무료하여 좀 먹은 책상을 쓰네 永晝無聊掃蠹床형악에서 하늘 감동시킨 이부344)를 생각하고 衡岳感天思吏部예천에서 날이 개길 빈 구양수345)를 생각하네 醴泉祈霽憶歐陽가고 멈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님을 비로소 알겠으니 始知行止非吾致모든 근심과 기쁨을 둘 다 잊으리라 都把憂欣付兩忘담헌이 있어 이 괴로움 함께 하기에 爲有澹軒同此苦시 지어 서로 위로하며 높은 당에서 읊노라 題詩相慰詠高堂 箕山舘裏雨聲長, 五日未歸空斷腸.風自東南來習習, 雲從西北?茫茫.行裝恰似囚孤島, 鄕邑還如隔大洋.憫爾供飧艱桂玉, 有誰破寂送琴觴?中宵絶怕棲蚊窟, 永晝無聊掃蠹床.衡岳感天思吏部, 醴泉析霽憶歐陽.始知行止非吾致, 都把憂欣付兩忘.爲有澹軒同此苦, 題詩相慰詠高堂. 음식……곤란하여 계옥(桂玉)은 계수나무 땔나무와 옥으로 지은 밥이라는 말로, 물자가 부족하여 생활하기 곤란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 왕에게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비싸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형악(衡岳)에서……이부(吏部)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을 지나갈 적에 형악묘(衡岳廟)를 배알하면서 시를 지어 기원하자 날이 청명해졌다는 고사가 있다. 《韓昌黎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예천(醴泉)에서……구양수(歐陽脩) 1056년 여름에 큰비가 내리자, 구양수가 송 인종(宋仁宗)의 명을 받고 예천궁(醴泉宮)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고사가 있다. 《古文眞寶後集 卷6 鳴蟬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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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집》 가운데 '만육의 유허297)를 지나다' 시를 보고 화운하여 그 뜻을 뒤집다 3수 見梅泉集中過晩六遺墟詩 步韻而反之【三首】 행영에서 개가 마치자 일곡이 꺾이니298) 凱罷行營日轂摧소매의 도서를 정신 차리고 정리하였네 袖中圖畵倩神裁노년에 풍월 읊는 중대산의 밤에 暮年風月中坮夜우산을 매입하기를 청한 일299) 후회하리라 應悔牛山乞得來-매천의 시-만육옹의 높은 절의 누가 꺾을 수 있으랴 六翁高節孰能摧응당 근거 없는 말은 이치로 분별해야하네 合把齊東以理裁만약 우산을 매입하기를 청했다고 한다면 若謂牛山曾乞得선생이 어떻게 천년토록 법이 될 수 있겠는가 先生何足範千來근거 없는 말은 바로 한 마디로 꺾을 수 있으니 齊東卽可一言摧정밀하게 가려 분별하기를 귀하게 여길 필요 없네 不待精詳貴擇裁오히려 행영에서 신하가 되었다면 尙作行營臣子日어찌 국토를 남에게 팔 수 있었으랴 豈將國土賣人來매천 시의 예봉은 꺾기 어렵다 말하니 梅詩鋒鏑道難摧아주 정밀한 문장은 귀신이 재단한 듯 精切措辭神鬼裁나는 신중히 생각하는 학문 없이 我惜其無愼思學어느덧 옛 현인을 저버려 애석하네 居然枉了昔賢來 凱罷行營日轂摧, 袖中圖畵倩神裁.暮年風月中坮夜, 應悔牛山乞得來.【梅詩】六翁高節孰能摧? 合把齊東以理裁.若謂牛山曾乞得, 先生何足範千來?齊東卽可一言摧, 不待精詳貴擇裁.尙作行營臣子日, 豈將國土賣人來?梅詩鋒鏑道難摧, 精切措辭神鬼裁.我惜其無愼思學, 居然枉了昔賢來. 만육(晩六)의 유허(遺墟) 만육은 최양(崔瀁, 1351~1424)의 호로,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이다. 외삼촌인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진안의 중대산(中坮山, 현 팔공산)에 들어가 3년을 은거하였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그를 친구로 대우하여 재상 자리에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행영(行營)에서……꺾이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됨을 말한다. 일곡(日轂)은 해 바퀴로, 흔히 임금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우산(牛山)을……일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할 마음이 있음을 알고 최양(崔瀁)이 우산을 매입하도록 청하여 그에게 절개를 굽힌 일을 가리킨다. 《後滄集 卷13 買牛山論》 우산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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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본 것을 기록하다 9수 道中記見【九首】 세 봉우리 마치 하늘의 삼태319)와 같으니 三峰有若天三台천고의 좋은 이름 조금도 어긋나지 않네 千古嘉名不少差별의 형상과 산악의 신령이 함께 모인 곳 星象嶽靈同溱處어떤 사람이 이곳에 상공을 모았나 何人鍾得相公來-천태산(天台山)-삼신산을 여섯 마리 자리가 이고 있다 들었는데320) 聞道三山戴六鼇어찌 고개 이름을 다시 오현이라 하였나 那能有峴更名鼇자라의 골각이 높은 언덕 이뤄 가련하니 可憐骨殼成高阜무겁게 눌러 죽게 된 자라 결국 보노라 壓重終看致死鼇-오현(鼇峴)-이름만 들어도 하늘과 나란함을 알 수 있으니 聞名可識與天齊오마321) 타고 오는 새 수령은 무척이나 걱정하였네 愁煞新官五馬蹄-새로 제수된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어떻게 천치(天峙)를 넘을까 한탄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직접 보고서야 작은 언덕임을 알았으니 親見方知爲小阜사람의 헛된 명예와 같아 부끄럽구나 如人虛譽可羞兮-천치(天峙)-영주산 위에 신선이 있으니 瀛洲山上有仙靈명실상부하여 사람들 다른 말 않네 人不異辭符實名한 말 한 되와 바꾼 이 누구 집 자식이던가 換却斗升誰氏子부질없이 세속에다 마음만 길이 두게 하였네 空令長帶俗塵情-두승산(斗升山)-우뚝하도다 기암절벽의 선인봉 卓哉奇絶仙人峰옥부용322)을 깎아 푸른 하늘 지탱하였네 玉削芙蓉拄碧穹선인이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若道仙人無則已그렇지 않다면 정히 이곳에 자취 숨겼으리 不然定在此藏蹤-선인봉(仙人峰)-휴암의 손자가 들어가 숨은 해에323) 休菴肖抱入藏年옛날 전해지던 이름이 백갑산으로 바뀌었네 白甲山名變舊傳땅은 사람으로 인해 중해짐이 원래 이러하니 地因人重元如此매몰되어 어질다고 일컬어지지 않을까 두렵다오 沒不稱賢可瞿然-백갑산(白甲山)-흉년만 지속되면 풍년이 오는 법 無年偏得有年來흥덕이라는 방죽 이름 좋도다 興德堤名可矣哉수리 시설은 본래 위정의 방법인데 水利本爲爲政術우리들 일찍이 신경 쓰지 않았구나 我人曾不用心來-흥덕제(興德堤)-우뚝한 소요봉이 진세를 벗어났으니 逍遙峰屹脫塵區나 또한 소요하며 물외에서 노닌다오 我亦逍遙物外遊상칠 -흥덕현(興德縣)의 고호(古號)가 상칠이다.- 이라는 고을 이름 응당 까닭 있을 터 尙漆縣名應有以이곳에 이르니 장주를 생각나게 하누나324) 令人到此憶莊周-소요봉(逍遙峰)-화봉이 화살 모양 이루어 문명을 상징하니 火峰成矢像文明남쪽 고을 비춰 땅의 영험함을 길렀네 照得南州毓地靈다정하게 석묘를 조회하는 이 산을 늘 사랑하였는데 常愛多情朝席墓-석동산(席洞山)의 선묘(先墓)는 이 봉우리가 정면의 안산(案山)이다.-오늘 아침 이곳 지나매 두 눈이 청안이 되었네 今朝過此眼雙靑-화시산(火矢山)- 三峰有若天三台, 千古嘉名不少差.星象嶽靈同溱處, 何人鍾得相公來?【天台山】聞道三山戴六鼇, 那能有峴更名鼇?可憐骨殼成高阜, 壓重終看致死鼇.【鼇峴】聞名可識與天齊, 愁煞新官五馬蹄.【新除古阜郡守者, 歎何以踰天峙云.】親見方知爲小阜, 如人虛譽可羞兮.【天峙】瀛洲山上有仙靈, 人不異辭符實名.換却斗升誰氏子, 空令長帶俗塵情?【斗升山】卓哉奇絶仙人峰, 玉削芙蓉拄碧穹.若道仙人無則已, 不然定在此藏蹤.【仙人峰】休菴肖抱入藏年, 白甲山名變舊傳.地因人重元如此, 沒不稱賢可瞿然.【白甲山】無年偏得有年來, 興德堤名可矣哉.水利本爲爲政術, 我人曾不用心來.【興德堤】逍遙峰屹脫塵區, 我亦逍遙物外遊,尙漆【興德縣古號尙漆】縣名應有以, 令人到此憶莊周.【逍遙峰】火峰成矢像文明, 照得南州毓地靈.常愛多情朝席墓,【席洞山先墓, 此峰爲正案.】今朝過此眼雙靑.【火矢山】 삼태(三台) 삼태성(三台星)으로, 삼정승을 상징하는 별자리이다. 삼신산(三神山)을……들었는데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물에 떠 있는데, 여섯 마리의 자라가 산을 머리로 떠받들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 오마(五馬) 한(漢)나라 때 태수(太守)가 다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부임하였던 데에서 유래하여 지방 수령을 뜻한다. 옥부용(玉芙蓉) 깨끗한 산봉우리를 형용하는 말이다. 휴암(休菴)의……해에 휴암은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고, 그의 손자는 갑산공(甲山公) 백현민(白賢民, 1583~1654)이다. 백현민의 부친 백유함(白惟咸)이 정쟁(政爭)으로 부안(扶安)에 유배되자 함께 따라왔다가 덕흥(德興) 향반인 문경(聞慶) 송씨(宋氏)와 결혼하였는데, 처가에서 성내면(星內面) 당덕리(棠德里) 엄동(奄洞)에 있는 땅을 마련해주어, 정계 은퇴 후에 엄동에 정착하였고 훗날 엄골 백씨 문중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하누나 장주(莊周)가 〈소요유(逍遙遊)〉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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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고을 고부의 향교를 지나다 느낌이 일어 過古阜廢邑鄕校有感 우리 대한제국이 나라를 잃기 7년 전 我韓無國前七年이때 문화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았지 于時文化未全滅거듭 이 고을의 어진 태수 만나니 重逢玆邑賢太守문옹325)의 정치가 온 경내에 넘쳐났다오 文翁政治闔境溢향교 관원이 향약례를 크게 설치하니 校官大設鄕約禮좋은 때인 천중절을 마침 만났다오 嘉辰適値天中節많고 많은 선비들 수천 명이 오니 濟濟多士來千數박대아관326)이 어찌 그리 정결한가 博帶峨冠何鮮潔노소 구분하여 질서정연하게 절하고 읍하니 拜揖秩秩分老少위의가 의젓하여 흐트러짐이 없었네 威儀蹌蹌無闕失정히 구경하는 자가 교문 에워싼 것327)과 비견되니 定擬觀聽圜橋門위차 정해 예의 익히는 것328)을 어찌 논할 것 있으랴 何論肄習爲綿蕝이때 참석한 사람 중에 내가 가장 어려 時余參會年最少몸소 예식 행하는 홀기(笏記)가 되었네 能以身作行禮笏구경하는 사람들 입이 닳도록 크게 칭찬하니 見者嘖嘖頗賞歎선친은 자리에 계시면서 내심 기뻐하셨네 先君在座內喜悅못난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참석하였겠는가 不才何曾與有力다행히 올바른 방법으로 끊임없이 교육 받은 덕분이지 幸蒙義方敎不輟예의를 다 마치고 연례를 파한 뒤 禮儀告成樽俎罷선친 모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초승달 따라왔지 陪親歸家趁初月아아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嗚呼日月曾幾何사십일 년이 그야말로 빨리도 지나갔구나 四十一年正忽忽옛날 예식을 행하며 모인 뜰을 차마 보겠는가 忍見昔時禮會庭한 길 높이의 무성한 풀을 베는 사람 없네 草深一丈無人掇산하의 모습이 변해 속이 타들어가고 山河異觀心已腐관과 신의 위치 뒤바뀌어329) 이가 더욱 갈리네 冠屨到置齒更切이날 이곳을 지나며 비로소 시 지으니 此日過此始有詩나이 먹고 난리 극에 달해 더욱 수심겹노라 年衰亂極益惙惙 我韓無國前七年, 于時文化未全滅.重逢玆邑賢太守, 文翁政治闔境溢.校官大設鄕約禮, 嘉辰適値天中節.濟濟多士來千數, 博帶峨冠何鮮潔?拜揖秩秩分老少, 威儀蹌蹌無闕失.定擬觀聽圜橋門, 何論肄習爲綿蕝?時余參會年最少, 能以身作行禮笏.見者嘖嘖頗賞歎, 先君在座內喜悅.不才何曾與有力? 幸蒙義方敎不輟.禮儀告成樽俎罷, 陪親歸家趁初月.嗚呼日月曾幾何? 四十一年正忽忽.忍見昔時禮會庭, 草深一丈無人掇.山河異觀心已腐, 冠屨到置齒更切.此日過此始有詩, 年衰亂極益惙惙. 문옹(文翁) 한 경제(漢景帝) 때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교화를 펼치고 학교를 일으켜 문풍(文風)을 크게 떨친 사람이다. 《漢書 循吏傳 文翁》 박대아관(博帶峨冠) 헐렁한 띠와 높은 관을 뜻하는 말로, 고대 유생이나 사대부의 복장을 가리킨다. 구경하는……것 교문(橋門)은 주위에 물이 흐르고 다리를 통해 네 개의 문으로 들어가는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향사례가 끝나고 천자가 정좌하여 직접 강을 하면 제유가 경서를 지니고 그 앞에서 토론을 벌이는데, 관대를 한 진신들로 교문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饗射禮畢, 帝正坐自講, 諸儒執經問難於前,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 蓋億萬計.]"라고 한 말이 《후한서(後漢書)》 〈유림열전(儒林列傳)〉 서문에 보인다. 위차(位次)……것 한(漢)나라 초기에 숙손통(叔孫通)이 조정의 의례(儀禮)를 제정하기 위해 노(魯)나라의 유생(儒生) 30여 인을 불러들여서 그들과 함께 야외(野外)에서 띠풀을 묶어 세워 존비(尊卑)의 차례를 표시해 놓고 예(禮)를 강론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叔孫通列傳》 관과……뒤바뀌어 머리에 쓰는 갓이 아래에 있고 발에 신어야 할 신이 위에 있다는 말로, 상하(上下)와 존비(尊卑)의 위차가 뒤바뀐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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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민군 유사 新川閔君遺事 종족(宗族)들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향당(鄕黨)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한다는 그 말을33)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유유자적함을 법도로 삼으며 어진 이를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한다는 그 말을34)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고(故) 신천(新川) 민군(閔君) 우식(祐植) 세중(世仲)이 그 사람이다. 군은 가학과 법도가 있는 집안35)에서 태어나 간난신고를 겪으며 자랐고, 몸소 밭 갈고 손수 호미질하며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한가한 날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고 옛사람의 위기지업(爲己之業)36)에 종사하였다. 그 후 최면암(崔勉庵)37)ㆍ 정애산(鄭艾山)38)ㆍ정월파(鄭月波)39)ㆍ기송사(奇松沙)40)를 종유하며 왕복강마(往復講磨)하면서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아름다운 천부의 자질로 가정에서 전한 것을 이어받고 사우(師友)의 도움에 젖어서 그 마음을 세우고 처신하며, 사람을 응대하고 사물에 대처하는 데에 찬연(粲然)히 조리가 있고 의연(毅然)히 절도가 있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묵묵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고,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 세속을 따라 영합하지 않았고 시류를 좇아 아첨하지 않았다. 오직 한 표주박의 마실 것41)과 한 책상의 서책이 그 필생(畢生)의 살림살이였다. 몸을 숨기고 자취를 거두어 암연(闇然)히 스스로 닦으면서, 안으로는 그 환심(歡心)을 잃지 않았고 밖으로는 그 훌륭한 명성을 잃지 않았으니, 군을 알건 모르건 이구동성으로 추켜세우지 않음이 없었다. 임인년(1902, 고종39) 3월 28일에 생을 마쳤으니 태어난 계해년(철종14, 1863)과 거리를 따져보면, 향년 겨우 40세였다. 국수봉(菊秀峯)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신라에서 고려까지 저명한 석학이 이어져서 동방(東方)의 거족이 되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이니, 이분이 남쪽으로 낙향한 조상으로 군에게는 15세가 된다. 증조의 휘는 치록(致祿), 조부의 휘는 사호(士鎬)이다. 부친의 휘는 영곤(泳坤)이요,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모(某)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영석(泳碩)이요, 생모(生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수(棕秀)의 따님이다. 군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모(某)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계취(繼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모(某)의 따님인데 2남 병하(丙夏)와 병엽(丙燁)을 두었다. 나는 군과 나이를 잊은 막역한 교분을 맺었었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 8, 9년 되었을 때 병하(丙夏)가 벌써 관례(冠禮)를 하고 찾아와서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 한 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오호라! 군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제 그 외롭게 남았던 아이가 부쩍 자라서 관례(冠禮)42)까지 한 것을 보게 되니, 서글픈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어린 나이에 선친의 미덕을 천술(闡述)할 줄 알고 게다가 선친의 벗을 방문하였으니 기특하고 기특한 일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뜻은 장차 끝을 성대히 할 날이 있으리라.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優遊以法。慕賢而容衆。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故新川閔君祐植世仲。其人也。君生於詩禮法拂之家。長於艱難辛苦之中。躬耕手鋤。以供親旨。餘日涉獵經史。從事於古人爲己之業。旣而從崔勉庵鄭艾山鄭月波奇松沙往復講磨。以博其義理之趣。以天資之美。承襲乎家庭之傳。擩染乎師友之助。其立心行已。酬人處物。粲然有條。毅然有節。平居恬靜簡黙。不妄言笑。不妄出入。非其力不食。非其義不取。不俯仰於世。不趨附於時。惟一瓢之飮。一床之書。其畢生家計也。潛身斂迹。闇然自修。內而不失其歡心。外而不失其令聞。知不知無不一口推詡。壬寅三月二十八日考終。距癸亥寅降。得年纔四十。葬菊秀峯子坐原。閔氏系出驪興。自羅至麗。名碩相望。爲東方鉅族。至諱懷參。號義庵。是爲落南之祖。於君爲十五世。曾祖諱致祿。祖諱士鎬。考諱泳坤。妣南平文氏某女。生考諱泳碩。妣全州李氏棕秀女。吾娶宜寧南氏其女。繼娶濟州梁氏某女。二男丙夏丙燁。余與君爲忘年莫逆之契。而幽明一別爲八九年。丙夏旣冠而來。以其家狀。請爲一言之役。嗚呼。不見君久矣。今見其孤孩漸長。至於突弁。悲愴之感。不覺潛涕。且以稚妙之年。能知闡述先徽。又能訪問先友。奇事奇事。未就之志。其將有大終之日也歟。 종족(宗族)들이……말을 선비다운 인물이라는 뜻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선비의 자격을 묻는 자공(子貢)의 질문에 공자가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유유자적함을……말을 여유 있고 관대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유자는) 유유자적함 법도로 삼으며, 어진 사람을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하고 모난 점을 버리고 원만하게 지내니 그 관대함이 이와 같다.〔優游之法, 慕賢而容衆, 毁方而瓦合. 其寛裕有如此者.〕"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가학과……집안 원문의 '시례법필(詩禮法拂)'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범절을 이어오는 가문을 '시례지가(詩禮之家)'라 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공자가 아들인 이(鯉)에게 "시(詩)를 배웠느냐?〔學詩乎?〕" 하고 묻고, 또 한 번은 "예(禮)를 배웠느냐?〔學禮乎?〕"라고 하였다. '법필(法拂)'은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뜻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안으로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이런 나라는 항상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하였다. 위기지업(爲己之業)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한다.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하였다.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면암(勉菴)은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艾山)은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으로 월파(月波)는 호이다. 자(字) 백언(伯彦),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송사(松沙)는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한……것〔一瓢之飮〕 안빈낙도의 삶을 뜻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건만,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관례(冠禮) 원문의 '돌변(突弁)'으로, 20세가 되어 관(冠)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 〈보전(甫田)〉에 "예쁘고 아름다운 머리 딴 총각을 얼마 후에 보면 돌연 관을 쓰고 있다.〔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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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공즙 자명 朴公楫字銘 고종이 내를 건넘에오직 부열이 노가 되었네63)계옥64)하고 도용65)하여공훈을 드리운 것이 빛나고 빛나네박생 제동이삼가66)를 마쳤네공즙으로 자를 지으니사모하는 바가 부열이네이미 그 사람을 사모하려면먼저 그 학문을 배워야 하네그 학문은 무엇인가유적에 실려 있네사랑을 세우되 어버이로부터 하며공경을 세우되 어른으로부터 하네67)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뜻을 두면68)도가 그 몸에 쌓이리라이것을 따라 가면무엇을 건넌들 이롭지 않으리오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여오직 부열을 닮도록하라 高宗濟川。惟說作楫。啓沃陶鎔。垂勳煒曄。朴生濟東。三加告畢。字以公楫。所慕惟說。旣慕其人。先學其學。其學惟何。載在遺籍。立愛惟親。立敬惟長。終始典學。道積厥躬。率是以往。何涉不利。顧名思義。惟說是似。 고종이……되었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일찍이 현상 부열(傅說)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일 큰 냇물을 건너려거든 그대를 사용하여 배와 노로 삼을 것이며, 만일 해가 큰 가뭄이 들거든 그대를 사용하여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若濟巨川, 用汝, 作舟楫; 若歲大旱, 用汝, 作霖雨.]"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書經 說命上》 계옥(啓沃) 정성을 다 바쳐 임금을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삼고는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내 마음에 대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說命上》 도용(陶鎔)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처럼 인재를 배양해서 육성한다는 뜻으로, 보통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유로 쓴다. 삼가(三加) 삼가례(三加禮)로, 관례를 말한다. 관례에는 관을 세 차례 갈아 씌우는데, 맨 처음에는 치포관(緇布冠)을 씌우고 다음에는 피변(皮弁)을 씌우고 마지막에는 작변(爵弁)을 씌운다. 이하는 관례로 풀이하였다. 사랑을……하네 《서경》 〈이훈(伊訓)〉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부터……두면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가르침은 배움의 절반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학문에 뜻을 두면 그 덕이 닦여짐을 자신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惟斅學半, 念終始典于學, 厥德修罔覺.]"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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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동몽교관 박공 유사 贈童蒙教官朴公遺事 공의 성은 박(朴)이고, 휘는 종안(鍾安)이며, 자는 도현(道賢)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다. 신라(新羅) 밀성대군(密城大君)이 별자(別子)를 계승한 선조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울(蔚)이 찰방(察訪)을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지수(枝樹)는 감찰(監察)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는 10대 선조가 된다. 고조는 경시(慶始)이고, 증조 장환(章煥)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으며, 조부는 재희(載禧)이다. 부친 효원(孝源)은 효성으로 마을에 정문이 세워졌고, 모친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순길(順吉)의 따님으로 문강공(文康公) 광전(光前)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5월 17일에 정천리(淨川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천성이 순박하고 진실했으며,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였다. 곤궁함 속에서 나고 자라 온갖 고생을 두루 겪으면서도 응대하거나 일을 주선하는 것이 물이 흐르듯 민첩하고 넉넉하여 일찍이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형제가 넷이었는데, 서당에 가서는 나란히 함께 앉아 형과 아우가 서로 매진하며 날마다 분량을 정해 공부하였고, 밤이 되면 긴 베개와 커다란 이불을 함께 하며 애초에 서로 떠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온갖 일을 힘을 다해 주관하고 다스려서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바쳤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공이 이미 늙은 나이임에도 몸이 훼손될 정도로 너무나 지나치게 슬퍼하며 인정과 예법, 형식과 슬픔에 빠뜨린 의절이 없었다.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무익한 일이나 유람은 하지 않았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면서 근면하고 검약하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겼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기의 병통인 것처럼 여겼으며, 친척과 친구들의 좋거나 나쁜 일, 기쁘거나 슬픈 일에 안부를 묻고 도와주는 데 정성스럽고 넉넉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언제가 한번은 어떤 사람이 엽전 수십 꿰미를 빌려가고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미 돌려주었다고 속이자, 공이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서책을 살 때에는 값을 흥정하지 않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전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어찌 저자거리에서 사고파는 것처럼 하겠는가." 하였다. 이웃 사람이 밤에 집으로 들어와 조세 가마니를 훔쳐가는 것을 공이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하고서 집안사람들에게 누설하지 말도록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어찌 한 섬의 조세 때문에 남을 헤아릴 수 없는 곤경에 빠트리겠는가." 하였다. 계미년(1883) 1월 26일에 삶을 마쳤고, 묘지는 서창촌(西倉村) 왼쪽 산기슭 신좌(辛坐)이며, 갑오년(1894)에 동몽교관(贈童蒙教官)에 증직되었다. 배(配)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태원(泰元)의 따님으로 명고(鳴皐) 임전(任錪)의 후손이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경주(慶州) 이진기(李鎭基)에게 시집갔다. 계배(系配)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원(載元)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조용한데다 유순하고 착했으며 규중의 법도를 두루 갖추었다. 1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 윤동(潤東)은 군수를 지냈고, 딸은 신평(新平) 송연심(宋淵心)과 이천(利川) 서용수(徐鎔洙), 능성(綾城) 구교주(具教周)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의 평생을 더듬어 보건대 효성과 우애로 화락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약한데다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니, 이것이 뜻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법으로 가정에 훌륭한 계책을 남기고 고을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나게 한 이유이다. 계승시켜 나아갈 전통을 남김이 이미 이와 같으니, 산초 열매나 메뚜기 알처럼 번성한 자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질 경사를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윤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公姓朴。諱鍾安。字道賢號野隱。新羅密城大君爲繼别之祖。至中葉有諱蔚。察訪。四傳至諱枝樹。監察。壬辰之變。殉節旌閭。贈左承旨。於公爲十世。高祖慶始。曾祖章煥。文章鳴世。祖載禧。考孝源。孝旌閭。妣珍原朴氏順吉女。文康公光前后。純廟甲申五月十七日。公生于淨川里第。天資朴實。性氣溫仁。生長窮約。備經辛苦。而應對周旋。敏贍如流。未嘗一咈親意。兄弟四人。就塾連業。我邁爾征。日有課程。夜則長枕大被。未始有違。家間凡務。殫力幹理。以供菽水。內外艱。公已耆艾。而致毁過甚。情文易戚。未有闕儀。平居不作無益之事。不爲無益之遊。夙興夜寐。克勤克儉。見人之善若己出。見人之惡若己病。親戚知舊。吉凶歡戚。存訊賙恤。無不款洽。嘗有人貸去錢數十緡。久後誣以已還。公不與之辨。卽折其券。買書冊不上下價曰。聖經至重。豈若市井買賣之爲。隣人夜入家竊租苞。公若不見也。戒家人勿泄曰。豈以一石租而陷人於不測乎。癸未正月二十六日終。墓西倉村左麓辛坐。甲午贈童蒙教官。配豊川任氏泰元女。鳴皐錪后。有婦德。生一女適慶州李鎭基。系配河東鄭氏載元女。貞靜柔惠。閫儀備至。生一男三女。男潤東郡守。女適新平宋淵心利川徐鎔洙綾城具教周。孫以下不錄。嗚呼。迹公平生。孝友愷弟。勤儉質慤。是其立心行己之則。而所以貽佳謨於家庭。著令聞於鄉閭者也。垂統可繼。旣已如此。則螽斯椒聊。綿綿餘慶。又豈可量哉。潤東持家狀過余。託以不朽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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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 김군 유사 鳳岡金君遺事 학생 김용희(金龍熙)가 나를 따라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자기 선친의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께서는 신체가 매우 크고 모습이 매우 헌걸찼습니다. 얼굴은 넓고 입은 컸으며, 눈썹은 치켜 올라갔고, 수염은 아름다웠으며, 목소리는 우렁차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말은 어눌하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그 기상과 풍모가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하게 하였고 싫어할 수 없게 하였으며, 친근하게 하였고 소원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거처하거나 고을에서 처신할 때에 사람은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았고, 일은 쉽든 어렵든 가리지 않으셨으며, 상사(喪事)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기며 도와주셨고, 재난과 우환이 있으면 다스리고 보호해 주셨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풀어주고 구원해 주셨으니, 남의 근심을 걱정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힘이 다하도록 주선하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일을 헤아리는 데 재주가 있으셨고 사람들에게 완곡하게 말씀하시는 데에 뛰어나시어 친척과 친구, 고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선친께 자문하여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대체로 분쟁을 해결하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밖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직접 보셨던 것이 아니신지요? 가친(家親)께서 백부의 양자로 나가 양부모를 섬기실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삼감으로 그 뜻과 몸을 봉양하시어 수십 년 동안 집안에서 흠잡는 말이 없었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시고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에 남은 유감이 없으셨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을 다하시고 제기(祭器)를 씻는 일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하셨습니다. 규방 안에서는 무람없는 습관이 없으셨고, 집안에서는 사치스러운 기풍이 없으셨으며, 집안사람을 근면과 검약으로 다스리셨고, 자손들을 시서(詩書)의 학과에 힘쓰고 현숙한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안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보셨던 일이 아니신지요? 그러나 밖의 행실로 안의 행실을 미루어 본다면 또한 대략 짐작하여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머물러 있지 않아서 선친의 음성과 용모가 날로 멀어지니,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보존하고 추모의 정을 붙이기 위한 것으로 문자의 서술이 또한 없을 수 없습니다. 혹 이를 위해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시겠지요?" 하였다. 내가 그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말하기를, "나 또한 들은 것이 있다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선친과 함께 앉아 있을 적에 어떤 객이 왔는데, 그대의 선친이 친척 집안의 생계 형편을 묻자, 객이 말하기를, '근래에 매우 곤궁합니다.' 라고 하니, 그대의 선친이 말하기를, '이는 좋은 소식이군요. 가난한 선비로 분수를 지키고 상도를 편안하게 여기니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충족하다고 했다면 반드시 옳지 못한 구함이 있었을 것이니 듣기를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네. 내가 옳은 말이라 여기고 탄복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네. 또 일찍이 나를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나이가 들고 기운이 쇠약해지면 실수하기가 쉬우니, 만약 독서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공의 근래 생활을 보건대 서책을 대하는 것이 드무니 자못 염려스럽네. 사람이 술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기운으로 술을 이겨야 하는데, 지금 공은 기운이 쇠약함에도 술 마시는 것을 줄이지 않으니 술로 곤욕을 당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내가 모두 탄복하여 마음에 새겨두었다네. 이 세 가지 말은 그대가 듣지 못했을 것이네. 이것으로 보건대, 이 말 외에도 또 듣지 못한 것이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만년에 이웃 마을에서 나의 공부를 도와주는 훌륭한 벗을 하나 얻었다가 근래에 이런 규범과 경계를 듣지 못하여 벗의 마음에도 오히려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자손이 된 입장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들은 것들을 모두 기록하여 가장으로 삼게나." 하였다. 군의 휘는 권일(權一)이고, 자는 권중(權中)이며, 호는 봉강(鳳岡)이다. 김씨(金氏)의 계보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그 시조이다. 휘 충한(冲漢)은 호가 수은(樹隱)으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고려 말에 조선에 굴복하지 않아 남원(南原)으로 귀양을 갔으며,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영전(永傳)은 호가 필암(蓽庵)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고, 능주(綾州)의 신산(薪山)에 우거하였다. 이분의 손자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로 진사(進士)이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신산에서 가승동(佳勝洞)으로 옮겨 왔다가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분의 아들 명철(名哲)은 임진왜란 때 김대인(金大仁) 장군과 함께 예성산(禮聖山)에 웅거하여 적을 죽이고 이겼으니, 이 일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고조는 양욱(陽旭)이고, 증조는 사충(思忠)이며, 조부는 종만(鍾萬)이다. 양부는 석원(錫源)이고, 양모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동지(同知) 계환(桂煥)의 따님이다. 생부의 휘는 일원(鎰源)이고, 생모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상길(相吉)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정사년(1857)과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진년(1904) 4월 20일이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부인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시변(時釆)의 따님이다. 자녀는 4남1녀이니, 아들은 봉희(鳳熙)ㆍ학희(鶴熙)ㆍ용희(龍熙)ㆍ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한우치(閒牛峙)에 장묘지를 썼다가 송석면(松石面) 탄현(炭峴)의 경좌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아아, 군의 인품과 재주가 말세에 보기 드문데 나이가 오십도 되기 전에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나 평소에 가졌던 뜻과 사업을 백에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비통하고 애석한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난초 가지와 산초 가지가 무성하여 뜰에 가득하고, 용희가 또 뒤를 이어 사문(斯文)에 종사하여 한창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으니, 당시의 뜻을 계승하여 이루어 낼 날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金生龍熙從余遊。日以其先親家狀示之曰。先親身幹碩大。體相俊茂廣面大口。軒眉美鬚。聲弘而遠。言訥而詳。其氣象風度。令人可欲而不可惡。可親而不可遠。居家處鄕。人無親疏。事無難易。有死喪則扶戀之。有災患則營護之。有冤枉則伸捄之。其有以憂人之憂。樂人之樂。而周旋竭蹶者。無所不至。長於料事。優於諷人。親戚知舊。隣里鄉黨。事有未決者。無不待以咨處焉。盖其解紛剸劇。有以異於人。此行義之在外者也。非先生之所親見乎。家親出後伯父。事所後。志物之養。一於誠謹。數十年。庭無間言。喪致其哀。而時月之制。無有餘憾。祭致其誠。而漑濯之役。必自執之。閨房之中。無褻狎之習。庭除之間。無奢靡之風。御家衆以勤儉。教子孫以勉課詩書。親近賢淑。此行義之在内者。非先生之所見也。然以外推內。亦可以領略矣。日月不居。音容日遠。所以存其思而寓其慕者。文字之述。亦不可無也。或爲之不吝一言耶。余悲其意而不忍辭。因曰。吾亦有所聞。吾嘗與尊先君坐。有客至。君問其親戚家計活之狀。客曰。近日極困云。君曰。是好消息。以窮儒而守分安常。安有不困。若云充足。則必有所枉求。非所願聞也。余以爲格論。歎賞不已。又嘗戒余曰。年老氣衰。易致失墜。苟非讀書之助。何以扶持。見公近年罕對書冊。殊可慮也。人之飲酒。必須氣以勝之。今公氣衰而飲不減。其不爲酒困乎。余皆歎服而銘佩焉。此三言者。汝之所不聞也。以此觀之。此言之外。又安知無所未聞也。余晚接隣閈。得一強輔。近不聞此等規警。朋友之心。猶不能無恨。況爲子孫地乎。竝記所聞者。爲之狀。君諱權一。字權中。號鳳岡。金氏系出慶州。新羅敬順王。其始祖也。至諱冲漢。號樹隱。官禮儀判書。麗末不屈。謪南原。享開城表節祠。七傳諱永傳。號蓽庵。修義副尉。寓綾州之薪山。孫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自薪山移佳勝洞。仍居焉。子命哲。壬辰之亂。與金將軍大仁。據禮聖山。殺賊得捷。事載邑誌。高祖陽旭。曾祖思忠。祖鍾萬。考錫源。妣珍原朴氏同知桂煥女。生庭諱鎰源。妣綾城具氏相吉女。哲宗丁巳今上甲辰四月二十日。卽君生卒也。配公州李氏時釆女。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墓閒牛峙。移葬于松石面炭峴庚坐原。嗚呼。人品材局。叔世罕見。而年未五十。遽已告逝。使平日志業。百未一就。曷勝痛惜。蘭枝椒條。蕃衍盈庭。而龍熙又從事斯文。方進不已。安知當日之志。不有繼述成就之日乎。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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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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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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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심계 배군 유사 心溪裴君遺事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 중년의 벗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배군 흥묵(裴君興默)과 문군 송규(文君頌奎)가 이들이다. 두 군은 한 무리 중에서 영특함과 빼어남으로 뜻을 함께 하고 학문을 같이 하며 맹렬하게 분발하여 기세를 떨쳐나갔으나 불행히도 모두 멀리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배군의 조카 규덕(奎悳)이 찾아와 숙부의 행장(行狀)에 관한 글을 청하였다. 아, 내가 문군에 대해서는 사후의 글을 편술하여 그가 남긴 아들에게 부쳐주었지만, 유독 배군에 대해서만은 아직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매번 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나만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늙어가는 것이 염려스러울 때마다 죽기 전에 그의 지조와 행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의 집에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니, 비록 규덕의 요청이 없다 하더라도 잊지 않고 있었던 일이었다. 군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조용한데다 단정하고 자상하여 유희나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모님 곁에 있을 적에는 응대하는 것을 조심하였고, 밖으로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책을 읽는 데 매우 근면하였다. 그의 대인(大人) 은곡공(隱谷公)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어린아이를 기르는 온갖 것을 한결같이 옛사람이 학문 하던 차례를 따르게 하였고, 과거 시험을 위한 문장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거나 녹봉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지 않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여 문군과 종유하게 되어서는 서로 살펴보고 바로잡아 주면서 연마하고 훈도하여 서로 함께 날로 달로 매진하였다. 대체로 문군은 지혜가 열리어 도를 깨닫는 데 뛰어났고, 배군은 지조를 지키는 데 뛰어났으니, 이것이 서로 필요로 하고 도움이 되어 공공(蛩蛩)과 거허(駏驉)18)처럼 서로 없으면 안 되고 장님과 절름발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유였다. 살펴보건대, 군은 평소 집에 거처할 때에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뜰을 청소하였고, 온화한 말과 기쁜 낯빛으로 어버이께 잠자리와 음식을 여쭈었다. 깨끗한 방 한 칸을 두어 사방 벽에 도서를 둘러놓고 구용구사(九容九思)와 〈동명(東銘)〉ㆍ〈서명(西銘)〉ㆍ〈경재잠(敬齋箴)〉19)과 같은 글을 좌우에 걸어 두거나 붙여 놓았는데 질서 정연하여 법도가 있었다. 매번 부지런히 일하고 여가가 있을 때마다 두 손을 맞잡고 단정하게 앉아 조용히 책을 대하면서 침잠하고 연구하여 밤으로 날을 이었으니, 대체로 거경(居敬)과 치지(致知)의 공부를 잠깐 사이에도 놓은 적이 없었다. 겸손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기르고 담담함과 침묵으로 스스로를 지키면서 강론하고 토론하거나 묻고 변별하는 것 외에는 한가로이 수작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낸 적이 없었으며, 제멋대로 방자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분분하게 다투는 곳은 가지 않았다. 그의 몸가짐이 구차스럽지 않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아아,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뜻이 있고, 이러한 뜻이 있으면 이러한 학문이 있기에 앞날의 조예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하늘이 수명을 빌려 주지 않아 중도에 떨어져 꺾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군의 처음 휘(諱)는 학순(學舜)이고, 자는 정일(正一)이다. 계보가 달성(達城)에서 나왔으니,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ㆍ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ㆍ달성군(達城君) 휘 운룡(雲龍)ㆍ금헌공(琴軒公) 휘 정지(廷芝)ㆍ회은(晦隱) 선생 휘 문우(文祐)가 모두 상계(上系)의 현조(顯祖)이다. 우재(寓齋) 휘 두유(斗有)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내다 장릉(莊陵 단종(端宗))이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자 능주의 대곡(大谷)에 은둔하였고, 자손이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휴재(休齋)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내다 혼조(昏朝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조의 휘는 득효(得孝)이고, 증조의 휘는 이현(以絢)이며, 조부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부친 휘 상섭(相涉)은 호가 은곡(隱谷)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영평 문씨(永平文氏)는 익충(益忠)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정사년(1857) 8월 27일과 을축년(1889) 7월 26일이 바로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며, 묘지는 본주(本州) 동쪽 방축(防築) 안 사좌(巳坐) 언덕에 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천호(天浩)의 따님이다. 뒤를 이을 자제가 없어 규덕의 동생 규상(奎祥)을 후사로 삼았다. 규덕과 규상이 한창 학문에 뜻을 두고 있어 군이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할 사람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써 보내어 더욱 힘쓰게 하였다. 余在鄕里。有中年友二人。裴君興默文君頌奎是已。二君以一隊英秀。同志同學。蔚然奮張。不幸皆遠已久矣。一日裴君從子奎悳。來謁其叔父狀行之文。嗚呼。余於文君。身後文字。編述之。付其遺胤。而獨於裴君。尚闕焉。每念知君者莫如我。而我老矣。未死之前。思記其志行之實。以貽其家。雖靡奎悳之請。所不忘也。君自幼沈靜端詳。不好戱美。在親側。應對惟謹。就外傳。讀書甚勤。其大人隱谷公奇之。蒙養凡百。一依古人爲學之序。而不令做時文。爲覓科干祿計。稍長與文君遊。相觀相規。磨礱浸灌。我日斯邁。爾月斯征。盖文君長於開悟。裵君長於持守。此其所以相須而交資。如蛩蚷之不可以相無。瞽躄之不可以相離也。見君平日居家。夙興夜寐。灑掃庭除。溫言怡色。問寢問饍。置淨室一間。四壁圖書。如九容九思東西銘敬齋箴之類。左揭右貼。秩然有法。每於服勤之餘。高拱危坐。靜對方冊。沈潛硏究。夜以繼日。蓋其居敬致知之功。未嘗有須臾之間。謙恭自牧。澹黙自持。講討問辨之外。未嘗出一語爲閒酬酢。身不接放浪之人。足不踐紛競之地。其持身不苟。類如此。嗚呼。有是入而有是志。有是志而有是學。前頭造詣。有不可量。誰知天不假年。而中道隕折哉。君初諱學舜。字正一。系出達城。文讓公諱祗沱。武烈公諱玄慶。達城君諱雲龍。琴軒公諱廷芝。晦隱先生諱文祐。皆其上系顯祖。至寓齋諱斗有文察訪。莊陵遜位。遯綾之大谷。子孫仍居焉。再傳休齋諱尙絅。文牧使。昏朝解印。高祖諱得孝。曾祖諱以絢。祖諱廷綵。考諱相涉。號隱谷。世有隱德。妣永平文氏益忠女。有女士行。丁巳八月二十七日。己丑八月二十六日。卽君懸弧與屬纊也。墓州東防築內已坐原。配南平文氏天浩女。無嗣。以奎悳弟奎祥爲後。奎德奎祥方志于學。君未就之志。紹述有人。書此歸之。以增其勉。 공공(蛩蛩)과 거허(駏驉) 공공과 거허는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전설상의 짐승 이름으로, 둘다 말 처럼 달리기를 아주 잘하여 항상 함께 붙어 다니면서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서 달리지 못하는 짐승 궐(蟨)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궐을 등에 업고 달아나 궐에게 맛있는 풀을 얻어 먹었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구용구사(九容九思) …… 경재잠(敬齋箴) 구용은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예기》〈왕조(玉藻)〉에"발은 진중해야 하고, 손은 공손해야 하고, 눈은 단정해야 하고, 입은 무거워야 하고, 목소리는 차분해야 하고, 머리는 곧아야 하고,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자세는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고 한 것이고, 구사는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생각으로,《논어》〈계씨(季氏)〉에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경건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난 것은 묻기를 생각하고, 화를 낼 때에는 어려움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볼 때에는 의리에 맞는가를 생각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라고 한 것이다. 〈동명〉과 〈서명〉은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걸어 놓고 재생(諸生)을 경계시킨 잠명(箴銘)으로, 〈서명〉은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땅을 어머니로 삼아 우리 모두가 한 형제라는 대동(大同) 사상에 입각하여 인의(仁義)에 어긋나는 완악한 자신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완(訂頑)〉이라 했던 것이고, 〈동명〉은 어리석음을 고친다는 뜻으로 〈폄우(砭愚)〉라 했던 것인데, 이러한 이름은 논쟁의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동명(東銘)〉과 〈서명〉으로 하자는 정이(程頤)의 제안에 따라 개칭한 것이다. 〈경재잠〉은 주희(朱熹)가 장식(張栻)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경(敬)을 위주로 한 사언시 40구를 지어 자신을 경계한 글로, 《주자대전》과 《심경(心經)》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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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곡 이군 유사 竹谷李君遺事 군의 휘는 승규(承奎)이고, 자는 내권(乃權)이며, 죽곡은 호이다. 이씨(李氏)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그의 먼 조상이다. 휘 선제(先齊)는 호가 전문(蕇門)으로,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고,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며,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열(烈)은 호가 졸암(拙庵)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으니, 이분들이 모두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고조 휘 영근(永根)은 호가 사촌(沙村)이고, 증조 휘 광우(光佑)는 호가 균헌(筠軒)이며, 조부 휘 면휘(勉徽)는 호가 묵재(黙齋)이다. 부친의 휘는 문호(文鎬)이고,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지환(之煥)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임술년(1862) 12월 25일이 군이 태어난 날이다. 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며 어머니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고, 자신 또한 병이 많았지만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봉양하였는데, 부인이 군에게 병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군이 올린 맛난 음식을 간혹 도로 주면 군은 거짓으로 먹는 척하고 몰래 다른 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뒤에 다시 올렸다. 성품이 예의를 좋아하였고, 또 남의 위급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친척이나 친구의 상사(喪事)에 반드시 남보다 먼저 달려가서 온갖 의절을 몸소 직접 지휘하였으며, 관례와 혼례는 반드시 옛날 예법을 따랐고 구차스럽게 세속을 따르지 않았다. 고을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거나 의례를 강론하는 모임이 있을 때에는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가서 그 의례를 도왔다. 어떤 친척이 전염병으로 죽고, 그 가족들도 모두 한창 고통스러워하자 군이 그들을 위해 염습하여 관에 안치하였고, 영남 사람이 〈외필(猥筆)〉의 말을 가지고 노사(蘆沙) 선생을 무함하자20) 군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함을 변박하여 억울함을 푸는 일을 하려고 했다가 일이 가라앉음으로써 그만두기도 하였다. 군은 목소리가 크고 시원한데다 언사가 아름답고 뛰어나 분쟁을 해결하고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데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으며, 나이 많은 어른을 공경하고 벗을 추양함에 이르러서는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이 하였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자기의 가난함을 알지 못하고 남의 가난함을 근심하였고, 자기의 선행을 알지 못하고 남의 선행을 부러워했으니, 대체로 선행을 즐거워하고 인의를 좋아한 것은 본래 성품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병오년(1906)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나니, 중산(中山)의 선영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용희(鏞熙)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으니, 철휴(哲休)ㆍ장휴(章休)ㆍ동휴(同休)이다. 아아, 군은 빼어나고 화락한 자질로 의기가 있고 기민함이 있어 함께 공부하고 선행을 할 만하였기에 내가 의지하며 만년의 벗으로 여겼는데, 만리를 굴러갈 바퀴가 반도 가지 못하고 갑자기 꺾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그의 아들이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참담한 서글픔이 그날처럼 새로운지라 눈물로 붓을 적셔가며 그 대강을 기술하여 돌려주었다. 君諱承奎。字乃權。竹谷號也。李氏系出光山。尙書左僕射諱珣白。其遠祖也。有諱先齊。號蕇門。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生諱好善。號勉齋。文科大司成。生諱烈。號拙庵。文科承旨。皆其名祖也。高祖諱永根。號沙村。曾祖諱光佑。號筠軒。祖諱勉徽。號黙齋。考諱文鎬。妣河東鄭氏之煥女。哲宗壬戌十二月十五日。卽君之寅降也。早失所怙。未得逮養爲至恨。事母盡誠。家貧甚。身又多疾。而血力服勤。以就其養。夫人悶其有疾。所進甘毳。或反賜之。君佯若食之潛置他器。後復進之。性好禮。又好副人之急。親戚知舊之喪。必先人奔往。凡百儀節。躬親指揮。冠昏必依古禮。不爲苟且從俗。鄕坊行飮射講聚之儀。非甚病。必往以相其禮。有族人以染疾沒。其家又皆方痛。君爲之襲斂而殯焉嶺人以猥筆語。誣蘆沙先生。君不勝忿鬱。將爲辨誣伸枉之擧。以事寢而止。君聲音弘暢。言辭英發。解紛剸劇.恢恢有餘。而至於敬謹長老。推讓朋友。身若不勝衣。言若不出口。不知己貧而憂人之貧。不知己善而羨人之善。蓋其樂善嗜義。素性然也。丙午四月二十六日卒。葬中山先隴負壬原。配咸安趙氏鏞熙女。生三男。哲休章休同休。嗚呼。君以秀爽愷悌之姿。有氣義有機警。可與共學。可與爲善。余倚以爲晩年之契。豈知萬里之轍。未至半途而遽爾摧折哉。今於其遺胤不朽之託。悲愴如新。和淚泚筆。述其梗槩而還之。 영남 …… 무함하자 노사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고, 〈외필〉은 기정진이 81세 때에 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대한 답설(答說)로 지은 글이다. 기정진은 〈외필〉에서 이이가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알려지자 권봉희(權鳳熙), 권명희(權命熙) 등 영남 지역의 노론들 사이에서 율곡을 모욕했다고 하여 문집의 훼판(毁板)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해제, 노사집, 노백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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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월담 처사 장공 유사 月潭處士張公遺事 공의 성은 장(張)이고, 휘는 정규(珽奎)이며, 자는 성팔(聖八)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니, 포음(圃蔭) 선생 휘 정필(貞弼)을 비조(鼻祖)로 삼았다. 포음은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동쪽(신라)으로 와서 본국 사람 권공(權公) 행(幸)ㆍ김공(金公) 선평(宣平)과 함께 삼한(三韓)11)을 통합하는데 공적이 있어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12)에 함께 배향되었다. 휘 연우(延佑)에 이르러 벼슬이 호부 상서(户部尚書)에 이르렀고 흥산군(興山君)에 봉해지자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휘 합(合)은 조선조에 들어와 선공감 정(繕工監正)을 지냈는데,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5대를 전해 내려온 휘 희성(希聖)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냈으며, 문장과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드러났다. 이분이 낳은 휘 경한(景翰)은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갑자년(1604)에 적을 토벌하는데 공적이 있어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운구(雲衢)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병자년(1636) 북쪽 오랑캐의 변란 때 나라가 화친을 맺고 신주(神州)가 침몰하는 것을 보자 개연(慨然)히 세상을 등진 채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산중으로 들어가 과축(薖軸)13)을 꾸미며 노년을 마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숭정(崇禎)14)의 숨어 사는 백성[逸民]'이라 하였으니, 공의 5대이다. 고조 치언(致彥)은 호가 일송(一松)으로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학생을 가르치는데 성취가 많았다. 증조 효지(孝智)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조부 한신(漢臣)은 호가 추와(秋窩)이다. 부친 욱(旭)은 호가 창파(滄坡)로 세상에 은덕이 있었으며, 모친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필달(馝達)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한데다 조용하고 아름다워 규문의 범절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정종(正宗 정조) 갑인년(1794) 4월 16일에 동복(同福) 학당리(學堂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온후하고 강직한데다 총명하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좋지 않은 옷이나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농으로 하는 말이나 장난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감히 어리다고 그를 홀대하지 않았다. 7세 때 취학(就學)하여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적에 종일토록 읽지 않아도 등지고 암송하는데 매우 익숙하였는데, 글방 스승이 말하기를, "너의 재능은 참으로 영민하다. 그러나 영민하여 읽지 않고도 암송하는 것은 우둔하여 많이 읽고 암송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자, 이때부터 여러 차례 암송하는데 매우 부지런하였다. 조금 장성해서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어 글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순상(巡相 관찰사)이 도회(都會)의 시소(試所)를 설치하여 금성(錦城 나주)에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에 공이 지은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이로 인해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가려고 하자, 공이 부모님이 계시다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자자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직접 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물이 흐르듯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따랐으며, 아침에 문안인사를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거나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의절이 잠깐 사이나 창졸간에도 처음부터 어긴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이 나면 지극한 정성으로 근심을 다하여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 밤까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면서도 온갖 의절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젋은 시절에는 가난하여 봉양하지 못했고, 지금은 조금 넉넉하다고 할 만한데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서 인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며 옷을 적셨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분가할 때에 논밭과 가옥, 세간살이들을 한결같이 설포(薛包)15)가 했던 것처럼 스스로 나쁜 것만 차지하였다. 만년에 하나의 서재를 지어 '모락재(慕樂齋)'라고 쓴 편액을 걸어 놓았으니, 대체로 추모하고 화락하게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거처하는 곳에 수십 이랑을 개간할 만한 황무지가 있었는데, 공이 마을 장정들을 감독하여 제방을 쌓게 하고 이웃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간하도록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지 않았다. 평소 생활이 담박하여 명리와 영화, 온갖 기이한 물건과 완상품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을 이롭게 하고 은택을 베풀거나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급급하였다. 만년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마침내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여 격언(格言)이나 요언(要語)를 만나면 반드시 벽에 써서 항상 눈앞에 두고 보았으며, 늘 말하기를,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참으로 좋긴 하지만, 만약 기미를 살펴 혼자만의 생각을 삼가지 않는다면 좌치(坐馳)16)에 귀결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끝까지 사색하고 연구하였으며,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공부하는 것을 쇠약한 노년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았다. 규산(圭山) 조영승(曺瑩承)ㆍ상사(上舍 진사) 송정옥(宋廷玉)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여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학문을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17)이 말하기를, "말세의 분주하게 다투는 풍속에서 욕심이 적은 선비를 보지 못했는데 오직 우리 고을의 장(張) 아무개만이 거의 이러한 선비에 가까울 뿐이다." 하였다. 병이 들었을 때에 집안사람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태어나서 일컬을 만한 일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애석하랴. 또 내 나이가 예순하나로 장수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옥과(玉果) 율천(栗川)의 안산(案山) 두리봉(斗理峯) 사좌(巳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선산 유씨(善山柳氏)는 연수(年樹)의 따님으로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희춘(希春)의 후손이며, 온화하고 인자한데다 정숙하였으며, 부녀자로서의 덕행을 모두 갖추었다. 공보다 2년 뒤 7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본현(本縣) 안심촌(安心村)의 주지봉(冑地峯) 사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동식(東植) 하나를 두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동식은 4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용(聲容)ㆍ태용(泰容)ㆍ채용(彩容)ㆍ익용(益容)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구(金在鳩)에게 출가하였다. 성용이 아들이 없어 둘째 태용의 아들 기홍(基洪)을 후사로 삼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기선(基善)이다. 아아! 이처럼 빼어나고 맑은 자질로 학문의 힘을 겸하여 갈고닦으며 침잠하였기에 성취한 바가 크고 넓었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흥기되어 행해졌고, 고을에서는 신의가 드러났으며, 친척들은 공의 온정을 생각하였고, 벗들은 공의 풍모를 앙모하였으니, 남쪽 지방의 뛰어난 선비요, 말세에 고상한 인물이라 이를 만하였다. 다만 산림 속에서 배회하고 언덕과 골짜기에 묻혀 지내며 세상을 경영할 뜻을 조금도 시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남긴 덕의 향기가 집안에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퍼져 있으니, 베풀지 않은 베풂이요, 공효가 없는 공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홍이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써 한창 진보해 마지않으니 공의 뜻과 학업이 이 손자를 석과(碩果)의 씨로 삼아 후세에 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기홍이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姓張。諱珽奎。字聖八。號月潭。以圃蔭先生諱貞弼爲鼻祖。圃蔭素以中州浙江人。渡海來東。與本國人權公幸金公宣平。有統合三韓之功。共享安東太師廟。至諱延佑。官户部尚書。封興山君。子孫因貫焉至諱合入我朝。官繕工監正。命禮葬。五傳至諱希聖。文典翰。以文章行義。著聞於世。生諱景翰。主簿。甲子討賊有功。錄振武功臣。生諱雲衢。通政。丙子北虜之亂。見國家媾和。神州陸沈。慨然謝世。入福川山中。裝點薖軸爲終老計。自謂崇禎逸民。是爲公五世。高祖致彥。號一松。學行著聞。教生徒多成就。曾祖孝智。階嘉善。祖漢臣。號秋窩。考旭。號滄坡。世有隱德。妣全州李氏馝達女。端淑靜嘉。壺範無闕。正宗甲寅四月十六日。生公于福之學堂里。溫厚剛方。穎悟秀爽。自幼不恥惡衣惡食。不作戱言戱動。人不敢以幼而忽之。七歲就學。授千字文。終日不讀。而能背誦甚熟。塾師曰。汝之才固敏矣。然敏而不讀而通。不如鈍而多讀而通也。自此誦數甚勤。稍長。遍閱經史。詞藻藹蔚。巡相設都會。試士於錦城。見公所製。大加稱賞。因欲載與俱去。公以親在不許。自是聲華藉藉。家貪甚。躬執漁樵。柔聲怡色。承順如流。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造次倉猝。未始有違。親有疾。至誠致憂。露禱嘗藥。夜不解帶。及遭艱。擗踊過哀。凡百儀節。一遵家禮。嘗曰。少日貧窶。無以爲養。今則可謂稍饒而親不在焉。此余終身之恨。因泣下沾衿。與其弟友愛甚篤。及析箸。田廬什物。自取荒頓。一如薛包之爲。晩築一齋。揭顏以慕樂。盖寓追慕湛樂之意也。所居有荒野。可墾數十頃。公董邑丁築堰。命隣里貧者。分以墾之而不專。其利平居恬澹於聲利芬華。凡百技玩。一無所好。至若利人澤物。周窮恤匱。汲汲如飢渴也。晩廢擧業。遂專心爲己。遇格言要語。必書諸壁以常目焉。嘗曰。終日靜坐固善。然若不察其幾而愼其獨。則其不爲坐馳之歸乎。是以窮索研究。日有課程。至衰老而不替也。與曺圭山瑩承宋上舍廷玉。交好甚密。講磨不輟。河圭南百源曰末俗奔競。未見有寡欲之士。而惟吾鄕張某庶幾焉。及其屬疾也。家人迎醫。公止之曰。生而無述。死且何惜且吾年六十一。不可謂不壽。復何望焉。竟以二月十七日考終。墓玉果栗川案山斗理峯巳坐原。配善山柳氏年樹女。眉巖文節公希春后。溫仁貞淑。婦德甚備。後公二年七月二十六日卒。葬本縣安心村冑地峯巳坐原。擧一男。曰東植。文行著世。東植有四男一女。曰聲容泰容彩容益容。光山金在鳩。聲容無男。以仲房子基洪爲後。側室子曰基善。嗚呼。以若秀爽之質。濟以學問之力。磨礱浸灌。所就宏贍。是以在家庭孝友興行。在鄉閭信義著聞。族戚懷其情。朋友仰其風。可謂南服之偉儒。叔世之高蹈。但婆娑林樊。沈淹邱壑。使經世之志。未得有少試焉。此爲可憾也已。然遺芬餘馥。傳之在家。播之在人者。不可謂非不施之施無效之效也。基洪從師力學。方進不已。安知公之志業。不以此爲碩果之種。而將大來於來許耶。基洪抱家狀。來謁不朽之文。不敢以非其人辭。 삼한(三韓) 후삼국(後三國)인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사당으로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삼태사, 즉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삼공신 묘(三功臣廟)라 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중건과 더불어 이름을 태사묘(太師廟)라 개칭하였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과축(薖軸) 은둔 생활을 뜻하는 것으로 《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이다. 숭정(崇禎)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설포(薛包) 동한(東漢) 여남(汝南) 사람으로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은 나쁜 것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형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좌치(坐馳)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몸은 가만히 앉아 있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 치달리는 것을 말한다.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치행(穉行)·효일(孝一)이며 규남은 그의 호이다. 화순 출신의 실학자로 1803년(순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물을 뿜어 올리는 자승거(自升車)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한 공로로 세상에 알려져 1834년에 음직(蔭職)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고, 형조좌랑을 거쳐 석성현감에 나아갔으나 토호(土豪)와의 알력으로 인해 이듬해 보령으로 귀양갔다가 다음 해 바로 풀려나고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규남문집(圭南文集)》을 남겼으며, 작품으로는 〈만국전도(萬國全圖)〉·《영모화(翎毛畵)》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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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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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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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계사 강공 유사 溪沙姜公遺事 내가 시골 마을 사이에 있으면서 매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교유하며 이야기하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마치 한 입에서 나오듯 계사(溪沙) 강공(姜公)이 선인 군자(善人君子)라고 자자하게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내가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살펴보니, 사는 곳이 매우 외졌고 집은 질박하여 누추하였으나 신발이 뜰을 채우고 의관을 갖춘 사람이 자리에 가득하였으며, 공은 편한 복장에 촌스러운 두건을 쓰고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응접하여 굶주린 사람은 밥을 먹게 하고,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시게 하며, 추운 사람은 덮어주고, 병든 사람은 소생시켜 주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각기 그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손자 흥섭(興燮)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고 인하여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아아,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훌륭한 행실과 위대한 절개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저술가의 필법이니, 나의 문장이 비록 이를 감당할 수 없겠지만, 예전부터 평소 공경하고 염모했던 입장에서 어찌 차마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의영(義永)이고, 자는 인교(仁敎)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시조(始祖) 휘 이식(以式)은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수 양제(隋煬帝)의 동쪽 정벌 군사를 막았다. 휘 사진(思進)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원충(元忠)이다. 휘 구만(九萬)은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정절(正節)이며, 처음으로 진주의 대봉산(大鳳山) 아래에 거주하였다. 휘 희경(希經)은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시호가 문성(文成)이다. 휘 군보(君寶)는 봉산군(鳳山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휘 한(漢)은 호가 금재(琴齋)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휘 위구(渭龜)는 호가 모헌(慕軒)으로, 임진왜란 때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절개를 지키며 전사하였다. 이들 모두가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증조 휘 이희(爾熙)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재령(載齡)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사회(士會)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성인(聖仁)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해년(1815) 4월 12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너그러운데다 온후하며 마음이 여리고 자애로워 부모를 섬김에 효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와 친척을 대함에 은덕과 정의가 융성하고 흡족하였으며, 벗들과 사귐에 신뢰와 의리의 행실이 드러났고,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더욱 급급하여 집안의 재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지 못했다. 경서와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고 풍부하였지만 벼슬을 구해 나아가는 것에 담담하였다.조비(祖妣) 문씨(文氏)의 열행(烈行)과 8대조 교관공(敎官公)의 효행(孝行), 9대조 모재공(慕齋公)의 충절(忠節)이 우뚝하고 뛰어났음에도 오랫동안 표창을 받지 못한 것을 공이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지난 무오년(1858)에 향도(鄕道)의 추천을 통해 증직과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는 은전을 받자 여론이 경사라고 칭하면서 모두 공의 효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사곡산(沙谷山) 중에 집을 지은 것은 수석(水石)의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만년을 보내려는 마음을 부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빈객과 벗들이 매일 찾아와 글과 술이 비지 않은 채 밤낮으로 수창하며 흥취와 즐거움이 넘쳐났다. 흉년을 만나 빈객 중에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이 직접 약을 조제하여 소생시킨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또 십여 사람이었는데, 공이 습렴(襲斂)을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었다. 이웃 마을에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수시로 곡식을 빌려주어 밥 짓는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어떤 한 부인이 연로한데다 의탁할 곳이 없자 더욱 가엾게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임종할 날이 다가오자 빚 문서를 가져와 불에 태우면서 말하기를, "생전에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 것이 없는데, 어찌 죽고 나서 폐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사년(1893) 7월 18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곡의 안산(案山) 경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명천(命天)의 따님이고, 계배(繼配)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익필(益弼)의 따님이다. 안씨는 1녀를 두었는데, 공주(公州) 이계무(李季茂)에게 출가하였다. 노씨는 1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 병신(秉甡)은 참봉(參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지현(鄭祉鉉)과 제주(濟州) 양중묵(梁仲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흥섭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이것이 가장 내용의 대략이다. 아, 내가 일찍이 한 번 나아가서 보고 느낀 것은 단지 공이 쌓은 행실 중의 한 가지 일일뿐이지만, 이 한 가지 일로 가장 전체에 기술된 내용이 공에 대한 실제의 말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탐욕이 날로 불어나고 잔인함이 고질이 되어 가는 때에 공처럼 장후(長厚)하고 너그러운 풍모를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고인의 유풍을 우러러 추억하니 단지 여생의 감회가 절실해질 뿐이다. 공의 자손들이 더욱 힘써 생전의 법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 余在鄕里間。每聞群聚遊談之言。無不以溪沙姜公爲善人君子。藉藉稱道。如出一口。一日余過而拜之。見其洞宇深僻。軒室襆陋。而屣履盈庭。衣冠滿座。公以便服野巾。應接如流。使飢者食之。渴者飮之。寒者庇之。病者蘇之。無不歡悅。各充其願。後二十餘年。公之孫興變。持示家狀。因有不朽之託。嗚呼。顯微闡幽。使至行偉節。不至淪沒。此著家筆法。余之文。雖不足以當此。而在平昔欽艶之地。豈忍以非其人辭。公諱義永。字仁敎。晉州人。始祖諱以式。以兵馬元帥。禦隋焬帝東伐之師諱思進。官平章事封靑城君諡元忠。諱九萬。封陽川君諡正節。始居晉之大鳳山下。諱希經。入我朝。官直提學諡文成。諱君寶。封鳳山君諡文敬。諱漢。號琴齋。官縣監。鄕人立祠享之。諱渭龜。號慕軒。壬辰從趙重峯先生立慬錦山。皆其名祖也。曾祖諱爾熙。贈司僕寺正。祖諱載齡。贈左承旨。考諱士會。贈戶曹參判。妣南平文氏聖仁女。公以純廟丁亥四月十二日生。天性仁恕溫厚。惻怛慈愛。事父母。孝養備至。處兄弟族戚。恩誼隆洽。與朋友交。信義著行。而於賙窮恤匱。尤汲汲焉。不知家力之不逮也。博涉經史。文詞贍富。於干進泊如也。祖妣文氏烈行。八世祖敎官公孝行。九世祖慕齋公忠節。磊落卓絶。而久未見褒。公常恨之。去戊午。因鄕道剡薦。得蒙贈貤表旌之典。物論稱慶。皆以爲公誠孝致然。築室於沙谷山中。以其水石幽閒爲晩年寄敖計也。賓朋日至。文酒不空。日夕酬暢。趣樂津津。遭飢歲。客有曳病而至者。公親調藥餌。使得甦活無數。未愈而死者。又十餘人。公爲具襲斂而葬之。隣里有飢者。必隨時假貸。俾無絶火。有一婦人。年老無托。甚加哀矜。使之寄留。臨歿取債券焚之曰。生而無所利於人。豈可死而貽其弊乎。癸巳七月十八日卒。葬沙谷案山庚坐原。配竹山安氏命天女。繼配光山盧氏益弼女。安有一女。適公州李季茂。盧有一男二女。秉甡。參奉。女適河東鄭祉鉉濟州梁仲黙。孫男與變。餘皆幼。此是狀辭大略也。噫。余之所嘗一造而觀感者。特其積行中一事耳。然以此一事。而知全狀所述。無非其實際語也。貪婪日滋。殘忍成痼。如公長厚寬博之風。安得以復見之耶。追仰遺韻。只切餘生之感。願公子孫益加勉焉。使當日典刑。無墜於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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