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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와 박공 유사장 德窩朴公遺事狀 공의 휘는 준원(準元), 자는 정삼(正三)이니, 박씨의 계통은 밀양에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서 휘 울(蔚)은 찰방(察訪)이고, 이분이 휘 맹성(孟誠)을 낳았으니 첨정(僉正)이며,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으니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으니 사맹(司猛)이다. 이분이 낳은 휘 지수(枝樹)141)는 감찰(監察)로 임진년(1592)에 입근(立慬 절개를 지켜 죽은 것)하였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정려(旌閭)의 명이 내려졌다. 이분이 낳은 휘 천주(天柱)는 주부(主簿)이고, 이분이 휘 성소(成素)를 낳았으며, 이분이 휘 상언(尙彦)을 낳았으니 첨추(僉樞)이고, 이분이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이분이 낳은 휘 경린(慶麟)은 첨추이니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영환(英煥)이고, 조부는 재기(在璣)이며, 부친은 규진(圭鎭)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2녀를 두었고,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모의 따님이니, 헌종 기유년(1849) 5월 6일에 능주(綾州) 벽지리(碧池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히 착한 성품이 있어 효우(孝友)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9세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 슬프게 부르짖음이 다함이 없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본 자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모친과 조부모를 섬길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으니, 몸을 편안히 해드리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는 데에 모두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모친의 성품이 엄하였지만, 공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여 간모(幹母)142)의 도를 잘 얻었다. 어느 날 상자에서 우연히 그 선인(先人)이 기록한 전권(錢券)을 손에 넣고 말하기를, "저 사람이 빌려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만일 내가 발설한다면 그가 반드시 불복할 것이니, 쟁단(爭端)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이를 불태웠다. 공의 족숙 우인공(愚忍公)과 함께 산소 아래에 있는 옛집을 청소하고 스승을 택하며 벗을 맞이하여 자손들의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는데, 가르치는 과정(課程)과 모든 절도가 분명하여 조리와 두서가 있었다. 종족이 번성하여 같은 마을에 함께 사는 자가 백여 집이었는데, 은의(恩誼)가 조화롭고 흡족하여 한 사람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하고 장중(莊重)하며 질박하고 성실하여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출입은 간소했으며, 속되고 잡스러운 장난을 눈으로 보지 않고, 진귀하고 보기 드문 물건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으며, 성기(聲伎)143)·잔치·세력과 이익·번화한 것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오직 빛을 감추고 종적을 감추어 어리석음을 안고 졸렬함을 지키는 것을 궁극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무신년(1908) 12월 24일에 고종명하였는데,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위로 구순의 늙은 어버이가 계신데 내가 이 지경이 되어 불효의 죄가 크다. 너희들은 잘 섬기고 잘 봉양하여 구천(九泉)에 있는 네 아비의 한을 무겁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같은 동네 신정리(新井里) 뒤 기슭 조부 산소 아래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정호(李貞鎬)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박경동(朴敬東)과 박시동(朴時東)이고, 딸은 전주 이근무(李根茂)와 진주 형시만(邢時萬)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중년에 공과 벗이 되었고 또 외람되게 인척이 되어 친밀하게 왕래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이에 그의 행동거지와 풍모, 마음가짐과 일 처리가 질박하고 참되며 성실하고 삼가는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조금도 거짓으로 꾸미고 속이는 뜻이 없었음을 보았으니, 옛날에 이른바 '선진(先進)'이란 자는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선진이 삼대(三代 하, 은, 주)의 말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야인(野人)'이라고 하니, 이는 공이 종신토록 침체되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유이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살고 죽는 것에 활발하고 저승과 이승에 유감이 없었으니, 이와 같을 뿐이었다. 박경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늙고 게다가 병까지 들어 받아서 감당하기 어려움이 있었지만 옛일을 생각해보고 또한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準元字正三。號德窩。系出密陽。我朝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曹參議。是生諱億瑞。司猛。是生諱枝樹監察。壬辰立慬。贈左承旨命旌閭。是生諱天柱。主簿。是生諱成素。是生諱尙彦。是生諱必益。是生諱慶麟。僉樞。是公之高祖。曾祖英煥。祖在璣。考圭鎭。世有隱德。妣公州李氏某女。有二女。妣金海金氏某女。憲宗己酉五月六日。生公于綾州碧池里。幼有至性。孝友著聞。九歲遭外艱。哀號罔極。幾絶復甦。見者嘖嘖。事慈夫人及祖父母。盡誠力。便身適口。無不畢給。慈夫人性峻。公怡色婉容。甚得幹母之道。一日篋笥中。偶得其先人所錄錢券。乃曰。彼不言借貸。若自我發口。彼必不服。非所以惹起爭端乎。遂焚之。與其族叔愚忍公。掃墓下舊構。擇師邀友。爲子孫肄業之所。而指授課程。凡百節度。的有條緒。宗族蕃衍。同住一巷者。爲百餘家。而恩誼諧洽。無一人失和。禀性沈重質慤。平居寡言笑簡出入。俚雜之戱。不接於目。珍怪之物。不入於家。於聲伎遊宴勢利紛華泊如也。惟以潛先斂迹。抱愚守拙。爲究竟家計。戊申十二月二十四日考終。臨終顧二子曰。上有九耋老親。而吾至於斯。不孝罪大。汝等善事善養。母重乃父九泉之恨也。葬同坊新井里後麓祖墓下乾坐原。配光山李氏貞鎬女。圭二男二女。敬東時東。女適全州李根茂晉州邢時萬。嗚呼。余中年得與公友。又忝瓜誼。綢繆往來數十年。見其容止風儀。處心行事。無不出於質實誠慤。而無一毫欺誣矯僞之意。古所謂先進者。公其庶幾焉。然先進在三代之末。猶謂之野人。此公所以終身沈淹而不見知於人也。然人之知不知。於公何有。生死活潑。幽明無憾。斯焉而己矣。敬東奉家狀。屬以不朽之文。余老且病。有難承堪。而撫念疇昔。又不忍終辭云。 박지수(朴枝樹) 1552~1593.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간모(幹母) 《주역(周易)》 〈고괘(蠱卦) 구이효(九二爻)〉에 "어머니의 일을 주관함이니, 곧고 굳세게 해서는 안 된다.〔幹母之蠱, 不可貞.〕"라고 한 데서 나왔다. 성기(聲伎) 궁중이나 귀족의 집에 종사하는 가희(歌姬)와 무녀(舞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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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효자 풍양 조공 병희 병필 정려기 故孝子豐壤趙公【秉熙秉弼】旌閭記 오호라! 이것은 고 효자 조공 형제 두 분의 효행에 대한 정려이다. 세종 때 명신 호조 참판 휘 주(注)의 13세손으로 가정에서 시례의 가르침을 받아 대대로 충효를 계승하였다. 태어나 이를 갈 나이 때부터 이미 지극한 행실이 드러났는데, 종일 곁에 모시며 응대함에 어김이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부지런히 물고기 잡고 나무하여 음식을 제공하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살펴 그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며 몸을 삼가고 학문에 힘써 그 뜻을 봉양하였다. 온화하고 화락하여 안팎으로 원망이 없고, 조심조심 경건하게 하여 좌우로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부모님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몸을 훼손함이 예를 지나쳐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났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 먼 조상을 추모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이 모두 지극하고 슬픔과 예에 유감이 없었다. 형제간에 화락하고 즐거워 낮에는 평상을 마주하고 밤에는 이불을 같이 덮으며, 근심과 즐거움 좋은 일 괴로운 일에 어느 곳인들 같이 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인들 함께하지 않음이 없었다. 집안일을 주관하여 일을 함에는 반드시 형을 먼저 하고 자신의 집을 뒤로 하며, 계절의 음식에 새로운 것이 생기면 반드시 형을 먼저하고 자신을 뒤로 하니, 한 집안이 화락하고 자손이 그와 같이 하였다.오호라! 이런 형이 있어 이런 아우가 있네. 위로는 그 효를 다하고 아래로는 그 우애를 다하니, 천하의 일락(一樂)220)과 군자의 삼서(三恕)221)가 여기에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마땅하도다! 고학(臯鶴)이 하늘에 들리고 임금의 포장이 융숭하여 오두적각(烏頭赤脚)222)이 백세토록 찬란함이여!정려의 명이 내린 것은 당저(當宁) 정묘년(1867, 고종4)인데 지금 30년이 되도록 아직 정려기를 짓지 않아 증손 창구(昌九)가 백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였다. 오호라! 공의 고을은 바로 우리 집안의 병주(倂州)223)여서 종유하여 인연을 맺은 것이 몇 세대가 되니, 어찌 일찍이 그 일을 익히 듣지 않았겠는가. 세대의 교분이 중하고 사모하여 우러른 지 오래여서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嗚乎。此故孝子趙公兄弟雙孝閭也。以世宗名臣戶曹參判諱注十三世孫。家傳詩禮。世襲忠孝。生自髫齔。已著至行。侍立終日。唯喏無違。稍長。服勤漁樵以供其口。定省溫淸以安其體。謹身力學以養其志。溫溫怡怡。內外無怨。洞洞屬屬。左右無關。及喪親也。哀毁過禮。杖而後起。送終追遠。必誠必信。情文俱至。哀禮無憾。兄弟湛樂。晝則對床。夜則同被。憂樂甘苦。無處不須。無時不俱。幹蠱服役。必先兄而後家。時食新味。必先兄而後已。一家和之。子孫如之。嗚乎。有是兄有是弟。上以盡其孝。下以盡其友。天下之一樂。君子之三恕。孰謂不在於是耶。宜乎臯鶴聞天。天褒隆重。而烏頭赤脚。煒燁於百世也。命旌在當宁丁卯。至今三十年。尙未有記事之筆。曾孫昌九。跋涉百里。屬諸不佞。嗚乎。公之鄕卽鄙家之傡州也。遊從綢繆數三世。何嘗不稔聞其事耶。世契之重。慕仰之久。不敢以非其人辭。 천하의 일락(一樂) 맹자(孟子)가 말한 군자삼락(君子三樂) 가운데 첫 번째 즐거움인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을 말한다. 군자의 삼서(三恕) 《공자가어》 권2 〈삼서(三恕)〉에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에게는 삼서가 있으니, 임금을 능히 섬기지 못하면서 신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서가 아니고, 어버이에게 능히 효도하지 못하면서 자식에게 보답을 요구하는 것도 서가 아니며, 형을 능히 공경하지 못하면서 아우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도 서가 아니다. 선비가 삼서의 근본을 밝게 안다면 몸을 단정히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君子有三恕,有君不能事,有臣而求其使,非恕也;有亲不能孝,有子而求其报,非恕也;有兄不能敬,有弟而求其顺,非恕也. 士能明于三恕之本,则可谓端身矣.]"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오두적각(烏頭赤脚) 윗부분은 검고 기둥은 붉은색으로 된 정려문을 말한다. 병주(倂州) 병주(幷州)의 오기인듯하다. 병주는 오래 살아 정이 든 타향을 뜻한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 〈도상건(渡桑乾)〉에 "병주의 나그네살이 십 년이 지나도록, 밤낮으로 고향 함양이 그리웠네. 무단히 다시금 상건수 물을 건너니, 돌아보매 병주가 바로 고향처럼 느껴지더라.[客舍幷州已十霜, 歸心日夜憶咸陽, 無端更渡桑乾水, 却望幷州是故鄕.]"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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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암기 耻庵記 똑같이 사람인데 순임금은 성인이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니, 이것이 부끄러워할 만함이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그 부끄러움을 안다면 분발하여 흥기하려는 마음이 생기니, 공자께서 이른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다."224)라고 한 것은 이것이 아니겠는가. 경(敬)과 태(怠) 라는 것에서 군자와 소인, 흥망과 치란이 나누어지니, 사람은 마땅히 경외(敬畏)를 항상 보존하여 동정운위(動靜云爲)에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어기지 말아야 하니, 공자께서 이른바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225)라고 한 것은 이것이 아니겠는가. 소인이 자포자기하여 꺼리는 것이 없어 금수에 이르는 것 같은 것은 모두 부끄러움을 쓰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학(進學)과 행기(行己)의 요체는 어찌 '치(恥)'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겠는가. 맹자가 이른바 "부끄러움이 사람에 있어서 매우 크다."226)라고 한 것 또한 이것이다.김윤여(金允汝) 군이 금릉(金陵)227)의 용정(龍亭)에 집을 지어 편액을 치암(恥庵)이라 하였다. 대개 경험한 것이 점점 오래되어 들뜬 생각이 사라지고 징비(懲毖)228)한 것이 이미 많아 진심이 드러나 전날의 지나왔던 광경을 돌아봄에 그 비분(悲憤) 회오(悔悟)의 절심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게시하여 표시하고 새겨서 항상 바라보며 경계하는 마음을 깃들인 것이니, 또한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오호라! 허물을 알고 그름을 아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인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 때문에 땀을 흘리는 자가 있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죄를 적게 하려는 자가 있고, 명예를 바라고 나쁜 소리를 듣기 싫어하여 그러한 자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겉으로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외면만 진작시키고 내면을 진작시키지 못한 것이니, 자주 회복하면서도 자주 잃어버리는 데 이르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다. 마음을 바꾸고 내면을 진작시켜 오래고 크게 할 만한 것은 같은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지금 윤여는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진학과 행기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여 힘쓰고 힘쓰며 순서에 따라서 문미 끝에 하나의 '치' 자로 하여금 남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均是人也。而舜爲聖。我爲愚。此非可恥之甚乎。旣知其恥。則舊迅興起之心生焉。孔子所謂知恥近乎勇。非此耶。敬怠者。君子少人興亡治亂之分。人當常存敬畏。而於動靜云爲。不敢毫忽違越。孔子所謂行己有恥。非此耶。若小人之自暴自棄而無所忌憚。以至於乃獸乃禽者。皆無所用恥焉。然則進學行己之要。豈有以外乎恥之一字乎。孟子所謂恥之於人大矣者。亦此也。金君允汝。築居于金陵之龍亭。題其顔曰恥庵。蓋其閱歷漸久。浮念剝落。懲毖已多。眞心呈露。回視前日之過境。其悲憤悔悟之切。有不可以言辭可盡。故揭之標銘。以寓常目之警者。亦可謂知恥而有恥者矣。嗚乎。知過識非。人孰不然。然有爲人而泚者。有畏威而寡罪者。有要譽惡其聲而然者。此皆革於面而不革於心。作於外而不作於內。其不至於頻復而頻失者。幾希矣。若其革於心作於內。而可久可大者。非恥不能也。今允汝之知恥而有恥如此。則其進於學行其已者。曷有量哉。顧名思義。勉勉循循。母使楣端一恥字。見恥於人也。 부끄러움을……가깝다 《중용장구》 제20장에 "학문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에 가깝다.[好學, 近乎知; 力行, 近乎仁; 知恥, 近乎勇.]"라고 한 것을 말한다. 몸가짐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보인다. 부끄러움이……크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금릉(金陵)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옛 이름이다. 징비(懲毖) 징창(懲創)되어 삼간다는 뜻이다. 《시경》 〈주송(周頌) 소비(小毖)〉에 "내 그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予其懲, 而毖後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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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와기 醒窩記 바야흐로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스스로 평소의 진경(眞境,)이라 여기고 그것이 꿈임을 모르다가 꿈에서 깨어 그 허무(虛無)하고 환망(幻妄)함을 추산하면 허탈한 웃음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호라! 온 세상사람 가운데 꿈속에 있지 않는 이가 몇 명인가? 꿈속에 있으면서 진경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또 몇 명인가? 긴 밤이 지루하여 도깨비[鬼魅]가 서로 침범하여 전도되어 미친 듯 울부짖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니, 만일 꿈꾸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곁에 있게 한다면 누군들 그를 위해 측은하게 여겨 깨어날 수 있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구주[九有]는 회양(懷襄)233)하고 육경(六經)은 쓸어버린 듯한데, 완도와 해남[莞海]의 물가에 현송(絃誦)234)이 성대하다고 들어 항상 공경하고 부러워하여 매번 그 사람을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근래에 김여회(金汝晦)를 통하여 전공서(全公瑞) 군의 어짊을 듣고 비로소 완도와 해남에 흥학(興學)의 기풍은 참으로 이유가 있는 줄 알았으니, 이가 스스로 깨어서 남을 깨우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깨우는 방법은 어떠한가? 학문사변(學問思辨)은 몽교관(夢覺關)이고 존양성찰(養省察)은 인귀관(人鬼關)이니,235) 모르겠으나 성와(醒窩)의 성(醒)은 과연 여기에 관계된 점이 있는가. 모름지기 큰 소리로 길게 불러 천만 사람들의 꿈을 깨우기를 마치 어두운 길가의 촛불같이 해야 할 것이다. 方其夢也。自以爲平日之眞境。而不知其爲夢。及醒而追算其虛無幻妄。不過爲虛發一笑。嗚乎。擧一世而不在夢中者。幾人。在夢而不以爲眞者。又幾人。長夜漫漫。鬼魅交侵。顚倒狂叫。非死非生。如使不夢人在於其側。孰不爲之惻然思有以醒覺乎。九有懷襄。六經掃如。而聞莞海之濱。絃誦蔚然。尋常欽艶。每欲求其人而不得。近因金汝晦。聞全君公瑞之賢。姶知莞海興學之風。良有以也。此非自醒而醒人者乎。然則其醒之之術若何。學問思辨。是夢覺關。存養省察。是人鬼關。未知醒窩之醒。果能有在於此乎。須大聲長呼。以醒千萬群夢。如昏衢之旁燭也。 회양(懷襄)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로, 재앙이 매우 큼을 뜻한다.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넘실거리는 홍수가 널리 해를 끼쳐 거세게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넘는다.[湯湯洪水方割, 蕩蕩懷山襄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학문사변(學問思辨)은……인귀관(人鬼關)이니 주자가 "격물은 몽교관이요, 성의는 인귀관이다.[格物是夢覺關, 誠意是人鬼關.]"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 권15 〈대학〉에 나온다. 몽교관은 꿈을 꾸느냐 잠을 깨느냐의 관문을 말하고, 인귀관은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는가의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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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5 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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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선생의 《답문류편》1) 발문 蘆沙先生答問類編跋 성현이 흥기하여 하늘의 뜻에 앞서 사람을 깨우치지 아니하였고, 또한 때를 따라 가르침을 세웠다.2) 이 때문에 풍기(風氣)가 열리자 서계(書契)가 만들어지고, 대박(大樸)3)이 흩어지자 육경(六經)이 지어지고, 세교(世敎)가 쇠퇴하자 사서[四子]가 저술되었다. 성인이 멀어지고 말씀이 인몰되자 낙건(洛建)4)의 여러 철인들의 책이 나왔고, 낙건의 뒤에 태어났으니 오직 마땅히 그 설을 삼가 지키면 되는데 어찌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 의론이 멋대로 결정되는 것이 이 때보다 심함이 있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 류편(類編)의 책이 나온 이유이다.선생의 학문은 천지를 포괄하여 한 치 한 푼을 분석하여 곧장 궁구하여 근원에 도달하고 밝게 통하여 끝이 없으니, 모든 천하 시비의 천차만별인 것이 깨끗이 씻고 다시 고쳐서 알맞고 적당하게 함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아래로는 학자들이 추향하는 문을 바르게 하고 위로는 낙건의 여러 철인, 사서, 육경의 뜻을 밝혔으니,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계되어 생민(生民)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말들이었다. 태산은 우러르기 어렵고 은미한 말은 잃어버리기 쉬우니, 여러 사람들이 수집하기를 도모하여 간행하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사문(斯文)의 깊고 원대한 사려이다.오호라! 책을 펼쳐 봄에 숙연하여 선생께서 자리에 계시는 듯하여, 당일에 듣지 못한 것이 지금 모두 여기에 있으니, 미진한 뜻을 더욱 궁구하고 옛 학업을 힘써 마쳐 대의(大義)가 70명의 제자에게서 민멸되게 하지 않는다면,5) 이른바 "부처의 은혜를 갚는다."6)라는 것이 여기에 있고, 오늘의 일이 거의 뜻은 잃고 말만 전하는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聖賢有作。不先天而開人。亦因時而立敎。是以風氣開而書契造。大樸散而六經作。世敎衰而四子著。聖遠言堙。洛建群哲之書出。生於洛建之後。惟宜謹守其說。而何義理晦塞。議論橫決。未有甚於此時。此類編之書所以出也。先生之學。包圍天地。剖析錙銖。直窮到源。洞澈無彊。凡天下是非。千差萬別。無不有以刷滌更張。稱停的當。下以正學者趨向之門。上以明洛建群哲四子六經之旨。參天地關盛衰。有生民不可無之言也。泰嶽靡瞻。微言易失。僉謀蒐輯。以至鋟梓。誠斯文深遠慮也。嗚乎。開卷肅然。先生在座。當日所未聞者。今皆在是。益究餘蘊。勉卒舊業。使大義不泯於七十子之身。則所謂報佛恩在此。而今日之役。庶不爲失意而傳言也。 노사 선생(蘆沙先生)의 답문류편(答問類編)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문인들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편지를 별도로 모아 내용을 분류해 엮은 문답서이다. 1891년(고종28) 기양연(奇陽衍)·정재규(鄭載圭)·정의림(鄭義林) 등의 문인들에 의해 목활자본으로 편집·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성현이……세웠다 정이(程頤)가 〈춘추전 서(春秋傳序)〉에 나오는 말을 변용하였다. 《近思錄 卷3 致知》 대박(大樸) 원시의 질박한 큰 도를 가리킨다. 낙건(洛建) 낙양(洛陽)과 건양(建陽)을 말한다. 낙양은 송(宋)나라 때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던 곳이고, 건양은 주희(朱熹)가 살던 곳으로, 정주학(程朱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대의(大義)가……않는다면 《대학혹문》의 "70명의 제자가 미처 죽기도 전에 공자의 대의가 이미 어그러졌다.[不待七十子喪, 而大義已乖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처의 은혜를 갚는다 《주자대전》 권36 〈답진동보(答陳同甫)〉에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진찰을 받든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명분상 부처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다.[佛者之言曰 : 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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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집》7) 발문 遯齋集跋 호남은 문헌의 고장으로 스승으로 사모할 만한 선진(先進)과 장덕(長德)이 성대하게 이어져 서로 바라보이니, 우리 고을 고 지평(持平)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선생은 일찍 김점필재(金佔畢齋)8)를 스승으로 모셔 한훤당(寒暄堂),9) 일두(一蠹),10) 탁영(濯纓),11) 추강(秋江)12)등 제현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으니, 이것은 동방연원의 한 가닥 정맥이다. 그 말과 마음으로 전수한 진전(眞詮)과 요결(要訣)은 반드시 고향 마을[鄕井] 서당[庠塾]의 선비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을 것인데, 희희양양(熙熙穰穰)13) 왕래하여 성운(聲韻)이 더욱 아득해지고 오직 지석강(支石江)14)의 청풍과 해망산(海望山)15)의 명월만이 거니시던 곳에 의연하여 나로 하여금 모습을 상상함에 끝없는 감회가 있게 한다.옛날 계해년에 후손 제공들이 시와 부, 기문 약간 편을 옛 상자와 흩어진 종이 가운데서 수습하여 목판으로 새겨 세상에 간행하였다. 이윽고 후손 재홍(在洪), 재우(在禹). 우현(禹鉉) 등이 당일 간행할 때 혹 고증과 교감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이에 더욱더 증정(證訂)하고 윤색(潤色)하여 거듭 간행하여 멀리 전할 계획으로 삼았다.오호라! 이것은 그 책을 만든 것이 엉성하고 적료(寂寥)하여 선생께서 평소 온축한 것을 발명하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 그러나 한 갈고리만 들어보아도 좋은 쇠는 와력(瓦礫)16)이 아님을 알 수 있고 한 가지만 꺾어보아도 단계(丹桂)는 저력(樗櫟)17)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고을 인사들이 추모하고 상상하는 조금의 뜻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湖南文獻之地。先進長德可師慕者。磊落相望。若吾鄕故持平遯齋鄭先生。亦其人也。先生早師金佔畢齋寒暄一蠹濯纓秋江諸賢。爲道義交。此是東方淵源一條正脈也。其口傳心授。眞詮要訣。必有流傳於鄕井庠塾襟紳章掖之間。而熙往穰來。聲韻愈邈。惟支石淸風。海望明月。依然於杖屨之所。而令人有想像不盡之感。昔在癸亥之年。後孫諸公。收拾詩賦記文若干篇於舊篋散紙中。刻之棗梨。行之于世。旣而後孫在洪在禹禹鉉。以當日之役。或不無考校未精之歎。於是更加證訂而潤色之。重行釐刊。以爲傳遠之計。嗚乎。此其爲書。零星寂寥。有不足以發明先生平日之蘊。然擧一鉤而知良金之非瓦礫。折一枝而知丹桂之非樗櫟。此可以慰鄕人士追想萬一之意云爾。 돈재집(遯齋集) 정여해(鄭汝諧, 1450~1520)의 문집이다. 1917년 1책의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정여해는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으로, 자는 중화(仲和), 호는 돈재,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일두(一蠹) 정여창(丁汝昌)의 4종제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삭주 교수(朔州敎授),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말한다. 자는 계온(季昷)ㆍ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9년(세조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은 무오사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호이다. 자는 대유(大猷),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 1480년(성종11) 사마시에 합격, 1494년(성종25)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이 된 후 군자감 주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인하여 희천(熙川)과 순천(順天)으로 유배되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사사(賜死)되었다. 관련 자료로는 《경현록(景賢錄)》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 파직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1504년에 사망한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이다. 자는 계운(季雲), 다른 호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주로 언관에 재직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 도왔다. 1498년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일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저서로는 《탁영집》이 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백공(伯恭), 다른 호는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소릉(昭陵 문종의 비 권씨의 능) 복위를 상소한 일이 있다 하여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이 좌승지에 추증하고, 숙종 때에는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다른 생육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정종(正宗) 때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희희양양(熙熙穰穰) 이익 추구를 위해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는 모습을 형용한 말인데, 여기서는 세월이 지나간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사기》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천하가 희희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양양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天下熙熙, 皆爲利來, 天下壤壤, 皆爲利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양(穰)과 양(壤)은 통용이다. 지석강(支石江)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강이다. 해망산(海望山)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에 있는 산이다. 와력(瓦礫) 부서진 기와나 벽돌 조각으로, 쓸모없거나 하찮은 것을 비유한다. 저력(樗櫟)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말하는데, 이 나무들은 재목이 될 수 없는 쓸모없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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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와 손공 유사장 松窩孫公遺事狀 공의 휘는 몽두(夢斗), 자는 원칠(元七), 호는 송와(松窩)이고 밀양 사람이다. 문효공(文孝公)의 휘는 순(順),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의 휘는 부(富), 응천군(凝川君)의 휘는 익감(翼減), 광리군(廣理君)의 휘는 극훈(兢訓), 밀성군(密城君)의 휘는 빈(贇)이니, 모두 상계(上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고, 의화(義和)는 현감을 지냈다. 비장(比長)은 호가 입암(笠巖)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 제학(弘文提學)을 지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과 15학사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금남(錦南)136) 최부(崔溥) 공과 전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다. 그러나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살았으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일(逸)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 조부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 부친 덕효(德孝)는 생원으로 호는 봉양(鳳陽)이다.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규중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고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으며, 정조 병오년(1786) 11월 11일에 정동리(井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몸가짐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8세에 입학하여 《소학(小學)》 책을 가르쳤는데 진퇴와 응대가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따랐고, 어버이의 명으로 처음에 공령(功令)을 업으로 삼아 글을 짓고 구두점을 찍었으며, 시문(詩文)이 문채 나고 아름다웠다. 갑술년(1814)에 부친 봉양공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공이 이때부터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하는 데에 마음을 오로지 하였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기를, "의리는 반드시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하니[義理須尋日用間], 정성스럽게 해 나가면 안연(顔淵)을 기대할 수 있네.[諄諄往邁可希顔]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은 모두 어떤 모습인가.[風雲月露皆何狀] 시인(時人)들이 미혹하여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네.[可惜時人迷不還]"라고 하였다.공의 부친이 일찍이 권학(勸學)의 뜻으로 칠송정(七松亭)에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이로 인해 칠송정 아래 집 한 채를 지어 '송와(松窩)'라고 편액하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소나무 아래 한 칸의 집에[松下一間屋], 맑은 바람이 옷깃에 가득 불어오누나.[淸風吹滿衣] 세한(歲寒)137)은 진중(珍重)한 뜻이니[歲寒珍重意], 내 너(소나무)와 함께 돌아가리라.[吾與爾同歸]"라고 하였고, 계신공구(戒愼恐懼)138)와 인일기백(人一己百)139) 등의 말을 자리 곁에 써 두고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렸으며,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할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병을 간호할 때에 근심을 다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집상(執喪)할 때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수척해진 나머지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으며, 제삿날이 되면 서글퍼하고 두려워하여 종신의 상(喪)140)을 부쳤고, 형제 5명과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으면서 즐겁고 매우 화목하게 지냈다. 평소에 마음가짐은 성실하고 몸가짐은 장중(莊重)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고, 겸손함과 공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으며, 남에게 선행이 있으면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사랑했고, 남에게 악행이 있으면 자기의 병처럼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의 경로와 참된 진리의 원부(元符 매우 큰 상서(祥瑞))가 사서(四書)에 있는데, 다만 근심스러운 것은 매운 고추의 껍질을 삼키듯이 숙독하지 않고 생각을 정밀하게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복은 화려할 필요가 없고 몸을 가리면 될 뿐이며, 음식은 감미로울 필요가 없고 배를 채우면 될 뿐이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은 오직 학문 이 한 가지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밝은 창 아래 책상에 우두커니 정좌(靜坐)하여 침잠(沈潛)하고 연구하며 날마다 일정한 과정(課程)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 와서 간혹 산수가 맑고 빼어난 곳을 만나면 동지들을 이끌고 가서 소요하고 시문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폈는데,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생각이 있었다. 계사년(1833)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나 고을 인량동(仁良洞) 미현(微峴)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고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이고, 딸은 서문원(徐文源)에게 출가했다. 큰아들이 낳은 손자 인용(麟鏞)은 군수(郡守)이고, 둘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진용(璡鏞)과 종용(琮鏞)이며, 셋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되었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렬(永烈)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는데, 내가 고루한 데다가 병으로 몸을 폐한 상태이지만 그 은근한 뜻을 어기는 것이 어렵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夢斗。字元七。號松窩。密陽人。文孝公諱順。淸城府院君諱富。凝川君諱翼減。廣理君諱兢訓。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入我朝。有諱策。文科牧使。至孫義和。縣監至孫比長。號笠巖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入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子孫仍居。世有隱德。高祖逸。贈工曹參議。曾祖始䧺。同中樞。祖興新。副護軍。考德孝。生員號鳳陽。妣光山金氏昌瑞女。閫儀純備有女士風。正宗丙午十一月十一日。生公于井洞里。姿性溫仁。容儀粹美。八歲上學。授小學書。進退應對。一遵其敎。以親命初業功令。綴文點句。詞華斐蔚。歲甲戌。大人鳳陽公登庠。公自是遂廢擧業。專心治學。且有詩曰。義理須尋日用間。諄諄往邁可希顔。風雲月露皆何狀。可惜時人迷不還。其大人嘗以勸學之意。命寓于七松亭。亭下因築一室。顔曰松窩。有詩曰松下一間屋。淸風吹滿衣。歲寒珍重意。吾與爾同歸。以戒愼恐懼人一己百等語。書于座側。視爲自警。事親孝。晨昏定省。朝夕滫瀡。致誠致力。俾無有憾。侍疾致憂。夜不解帶。執喪過哀。杖而後起。遇忌諱之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喪。兄弟五人。長枕大被湛樂隆洽。平居立心忠慤。持身莊重。御家以勤儉。接人以譙恭。人有善。愛之如己出。入有惡。畏之如己病。嘗戒子弟曰。學問蹊逕。眞詮元符。在四子書。但患讀之不熟思之不精。如辣椒之皮呑耳。又曰。衣服不必華麗。蔽身而已。飮食不必甘美。充腸而已。所可盡心盡力。死而後已者。惟是學問一事。明窓棐几。兀然靜坐。沈潛硏究。日有程磨。値良辰佳節。或遇水石淸絶處。携同志ㅡ逍遙酬暢。超然有出塵之想。癸巳十二月二日考終。葬州之仁良洞微峴壬坐原。齊南平文氏始奎女。有婦德生三男一女。處祥處茂處宗。女適徐文源。長房麟鏞郡守。二房孫璡鏞琮鏞。三房出爲季父後。曾孫以下不盡錄。曾孫永烈抱家狀。屬余爲文以壽其傳。余以固陋。加以病廢。而重違勤意。謹据狀而略加修潤云爾。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의 호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이고 나주 출신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저서로는 표류기인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가 1769년(영조45)에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세한(歲寒) 추운 계절이란 뜻으로, 어려운 역경에도 변치 않는 절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계신공구(戒愼恐懼)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인일기백(人一己百) 《중용장구》 제20장에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을 할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종신지상(終身之喪) 기일(忌日)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군자는 종신의 상이 있으니, 이는 기일을 말한다. 기일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날은 뜻을 오로지 하여 감히 사사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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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 김장여80)【치희】어른에게 드리다 呈愛日堂金丈章汝【致熙】 하늘이 어찌 크고 사람이 어찌 작으랴 (天何嘗大人何小)천지와 함께 유행하여81) 한 이치 진실하네 (上下同流一理眞)넓고도 넓은 흉금은 많은 시내에 비친 달과 같고 (恢廓胸襟萬川月)온화하고 인자한 기상은 온갖 꽃이 만발한 봄과 같네 (溫仁氣像百花春)마음은 장중하고 공손하여 늘 살아 움직여야 하고82) (心須莊敬常常活)도는 깊이 연구하여 나날이 새롭게 하는 데 달렸네83) (道在研窮日日新)득실과 궁달은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得失窮榮非暇念)사람이 어진 뒤에야 진정 사람이 되네 (人仁然後便爲人) 天何嘗大人何小。上下同流一理眞。恢廓胸襟萬川月。溫仁氣像百花春。心須莊敬常常活。道在研窮日日新。得失窮榮非暇念。人仁然後便爲人。 김장여(金章汝) 김치희(金致熙, 1828~?)이다. 자는 장여, 호는 애일재(愛日齋)이다. 천지와 함께 유행하여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지나는 곳에 변화하며, 마음을 둔 곳에 신통함이 있는지라, 위아래 천지의 조화와 함께 운행한다[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마음은……하고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사람의 마음은 항상 살아 움직여야 하니, 살아 움직이면 두루 유행하여 다함이 없어서 한 귀퉁이에 막히지 않는다[人心常要活, 則周流無窮而不滯於一隅.]라고 하였다.『二程遺書 卷5』『近思錄集解 卷4 存養』 도는……있네 탕(湯) 임금이 자신을 경계하기 위하여 목욕하는 대야에 새겨 놓은 글인 반명(盤銘)에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고 하였다. 『大學章句 傳2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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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거 감회【6수】 齋居感懷【六首】 천지가 한번 열린 뒤에 (乾坤一以闢)성인들이 계승하고 개도하여 밝혔네 (聖聖繼開明)주나라 쇠약하여 황극9)이 실추되자 (周衰皇極墜)하늘이 중니를 내리셨네 (天降仲尼生)진채10)에서 날이 저물었으니 (陳蔡日云暮)수레를 돌려 옛길로 돌아왔네 (回車返舊程)산정하고 조술하여 성현의 법도 보존하여 (删述存聖軌)만고에 태양처럼 밝게 드러내었네 (萬古太陽呈)사물11)로 심법을 전하고 (四勿傳心法)팔조목12)으로 학규를 보였네 (八條示學規)무성13)에서 노년을 마치려 할 때 (武城終老日)바름을 얻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得正復何爲)성손14)이 이어서 나셨으니 (聖孫來繼作)도를 근심하여 『중용』을 지을 때 (憂道著書時)치우치지 않고 바뀌지 않는 이치15)를 (不偏不易理)손바닥 가리키듯 쉽게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네 (指掌要人知)제나라와 양나라에서 초빙을 받아 유세하러 다녔지만16) (齊梁遊聘路)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다시 어디로 가랴 (不遇復何之)우리에게 넓고 편안한 집을 열어 주었으니17) (開我廣安宅)호연하여 끝이 없네 (浩然無岸涯)바른길이 이미 덤불로 막혔으니 (正路已榛塞)현능한 사람 견문에 빠졌네18) (賢才溺見聞)누가 성악설을 전파하였나 (誰傳性惡說)사람들 아름답고 신기한 문장 저술하네 (人著美新文)비록 칭찬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雖有可稱者)어그러진 것은 본원에 있네 (所差在本源)가상한 용문자19)는 (可愛龍門子)우뚝히 혼탁한 시속에서 벗어났으나 (勃然出俗昏)집을 짓는 것은 아이의 일이 아닌데 (竪屋非兒事)어떻게 함부로 잘난 체하는가 (如何妄自尊)창려20)는 저술이 많으니 (昌黎多著述)간간이 전현의 말을 확대하여 넓혔네 (間間擴前言)문인의 들뜨고 방만한 습속 (文人浮放習)공에게 남아 있는 것 애석하네 (可惜於公存)용릉21)에는 봄날 낮이 고요하니 (舂陵春晝靜)태극도22)를 새로 완성하였네 (太極圖新成)쓸쓸한 천년 뒤에 (寥落千秋下)성인을 이어 후학을 인도한 공 가볍지 않네 (繼開功不輕)이정23)은 학문을 성취하여 (二程登肄業)전수한 것이 성명에 있었네 (傳受在誠明)혼연히 원기가 모이니 (渾然元氣會)진실로 그 베풂이 넓었네 (允矣厥施宏)혁혁한 유작과 양시24)의 무리는 (赫赫游楊輩)귀의하여 모두 명성이 났네 (得歸倂有聲)동남쪽 도를 창도한 곳에서 (東南倡道地)나종언25)은 영걸 중에 뛰어났네 (羅氏出群英)빛을 감추자 남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潛輝人不識)오직 연평 이동26)만 알았네 (惟有李延平)은거한 지 사십 년 (屛居四十載)빙월27)은 광채를 드러내었네 (氷月露光精)민 땅28) 냇물 검포29)에서 나왔으니 (閩溪出劍浦)낙수와 사수30)가 근원일세 (洛泗是其源)태극의 심오한 이치를 발휘하고 (發揮太極蘊)여러 사람의 말을 모아 절충하였네 (集折諸家言)인간의 틀을 보존하게 하여 (爲存人樣子)우리를 짐승에서 벗어나게 하였네 (俾我免鷄豚)태산이 갑자기 무너지니31) (泰山忽已壞)은미한 뜻 다시 가라앉아 어두워지려 했는데 (微義復沈昏)황간과 채원정32) 등의 제자들 (黃蔡二三子)사도를 존숭할 수 있게 하였네 (能令師道尊)심의의 부탁33)을 저버리지 않으니 (不負深衣托)어떤 집안의 자손에게 전하랴 (傳之何氏孫)진실하고 각고면려한 말을 (眞實刻苦語)가슴에 새겨 늘 보존하였네 (佩服常存存)긴 휘파람34) 우리들의 일이 아니니 (長嘯非吾事)왕백35)은 늦게 문하에 나아갔네 (王公晚及門)왕공의 문하에 길보36)가 있으니 (王門有吉父)금화산에서 도를 창도하였네 (倡道金華山)어찌 모두 선하게 하려는 뜻37) 없으랴 (豈無兼善志)허형과 오징38)의 반열을 따르지 않았네 (不逐許吳班)정성스럽게 전한 의발이 (眷眷傳衣鉢)백운 처사39)에게 돌아갔네 (白雲處士還)여러 공이 힘써 준 덕택에 (賴此諸公力)오랑캐조차 공자와 안자를 알았네 (虜人解孔顏)어찌 알았으랴 육씨40)의 화가 (寧知陸氏禍)명나라 연간에 더욱 심해질 줄을 (轉劇皇明間)오직 경헌41)이 있어 (惟有敬軒子)우뚝이 속태를 벗었네 (挺然出俗寰)요어 두세 편42)은 (要語數三編)읽으면 완악함을 깨뜨릴 수 있네 (讀之可砭頑) 乾坤一以闢。聖聖繼開明。周衰皇極墜。天降仲尼生。陳蔡日云暮。回車返舊程。删述存聖軌。萬古太陽呈。四勿傳心法。八條示學規。武城終老日。得正復何爲。聖孫來繼作。憂道著書時。不偏不易理。指掌要人知。齊梁遊聘路。不遇復何之。開我廣安宅。浩然無岸涯。正路已榛塞。賢才溺見聞。誰傳性惡說。人著美新文。雖有可稱者。所差在本源。可愛龍門子。勃然出俗昏。竪屋非兒事。如何妄自尊。昌黎多著述。間間擴前言。文人浮放習。可惜於公存。舂陵春晝靜。太極圖新成。寥落千秋下。繼開功不輕。二程登肄業。傳受在誠明。渾然元氣會。允矣厥施宏。赫赫游楊輩。得歸倂有聲。東南倡道地。羅氏出羣英。潛輝人不識。惟有李延平。屛居四十載。冰月露光精。閩溪出劒浦。洛泗是其源。發揮太極蘊。集折諸家言。爲存人樣子。俾我免雞豚。泰山忽已壞。微義復沉昏。黃蔡二三子。能令師道尊。不負深衣托。傳之何氏孫。眞實刻苦語。佩服常存存。長嘯非吾事。王公晚及門。王門有吉父。倡道金華山。豈無兼善志。不逐許吳班。眷眷傳衣鉢。白雲處士還。賴此諸公力。虜人解孔顏。寧知陸氏禍。轉劇皇明間。惟有敬軒子。挺然出俗寰。要語數三編。讀之可砭頑。 황극(皇極)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천하를 경륜하는 법으로 제시한 아홉 가지 법[九疇] 가운데 다섯 번째 항목으로, 임금이 중도를 지키고 서서 천하 백성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書經 洪範』 진채(陳蔡) 진과 채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시절 온갖 고난을 겪었던 지역이다. 사물(四勿) 안연(顔淵)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바로 인이다."라고 대답하면서, 구체적인 조목으로 제시한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顔淵』 팔조목(八條目) 공자의 제자 증자가 지었다는 『대학장구』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무성(武城)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고을로,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의 읍재(邑宰)가 되어 백성들에게 예악을 가르친 일이 있다. 성손(聖孫) 자사(子思)를 가리킨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지었다. 치우치지……이치 정이천(程伊川)은 중용을 해석하기를 "치우치지 않음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음을 용이라 하니, 중은 천하의 바른 도이고 용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이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라고 하였다. 제나라와……다녔지만 맹자(孟子)는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과 제 선왕(齊宣王)의 초빙을 받아 일정한 책임이 없는 객경의 신분으로 제나라와 위나라를 왕래하였다. 『孟子 梁惠王, 公孫丑』 넓고 편안한 집 인(仁)을 뜻하는 말로,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고 하였다. 현능한……빠졌네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견문(見聞)에 빠져서 세속을 따라 일상적인 것만을 고수한다는 말이다. 용문자(龍門子) 수(隋)나라 때 경학가 왕통(王通, 584 ~617)을 이른다. 자는 중엄(仲淹)이고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이다. 촉군 사호서좌(蜀郡司戶書佐), 촉왕 시독(蜀王侍讀) 등을 역임하였다. 육경(六經)의 효용을 중시하였으며, 그 체재를 본떠 여러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고, 『논어』를 모방하여 지은 『중설(中說)』만 남아 있다. 창려(昌黎) 당(唐)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의 호이다. 용릉(舂陵) 중국 호남성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지명인데, 북송(北宋)의 철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이곳에 살았다. 태극도(太極圖) 주돈이(周敦頤)가 우주의 근본과 만물 발전의 이치를 표현한 도형이다. 이를 해설한 것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인데, 송대(宋代) 철학(哲學)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이정(二程) 송나라 때의 학자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말한다. 정호의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이고, 정이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이다. 당시에 형제가 도학군자로 칭송을 받았다. 유작(游酢)과 양시(楊時)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유작의 자는 정부(定夫), 호는 광평(廣平),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양시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검남(劍南) 사람이다. 나종언(羅從彦) 북송(北宋)의 유학자이다. 자는 중소(仲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복건성(福建省) 남검(南劍) 출신으로, 동향의 선배 구산(龜山) 양시(楊時)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흔히 예장선생(豫章先生)이라 일컬어진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온종일 단정히 앉아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구산 문하의 일인자가 되었다. 정자(程子)의 학문이 바로 양시를 거쳐 나종언에게 전해지고 다시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거쳐 주자(朱子)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연평(延平) 이동(李侗)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이다. 자는 원중(願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남검(南劍) 사람이다. 나종언(羅從彦)이 양시(楊時)에게 낙학(洛學)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종언에게 가서 배워 양시, 나종언과 함께 '남검 삼선생(南劍三先生)'으로 칭해진다. 빙월(氷月)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줄인 말로, 고결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이다. 남송(南宋)의 등적(鄧迪)이 주자의 스승인 이동(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얼음으로 된 호로병에 밝은 가을 달이 담겨 있는 것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宋史 李侗列傳』 민 땅 민중(閩中)을 가리킨다. 민중은 주희(朱熹)가 강학하던 곳으로, 주희나 주자학(朱子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검포(劍浦) 이동(李侗)이 남검주(南劍州) 검포(劒浦) 사람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낙수(洛水)와 사수(泗水) 낙수는 낙양 근처에 있는 강 이름이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는 낙양(洛陽) 사람이다. 이곳에서 두 형제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사수는 노(魯)나라 곡부(曲阜)에 흐르는 강이다. 이곳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공자가 이 지역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으므로 유교 학문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태산이 갑자기 무너지니 현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주자가 죽었다는 의미이다. 황간(黃榦)과 채원정(蔡元定) 모두 주희(朱熹)의 제자이다. 황간은 자가 직경(直卿), 호가 면재(勉齋), 시호가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채원정은 자가 계통(季通), 호가 서산(西山), 시호가 문절(文節)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심의(深衣)의 부탁 수제자로서 도통(道統)을 전해 받았다는 뜻이다. 주자가 병이 들어 위독해졌을 때 심의와 저서(著書)를 제자인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 주면서 "내 도(道)의 부탁이 여기에 있다. 이제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하였다.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副本庚申』 긴 휘파람 은자가 부는 휘파람이란 뜻으로,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유(王維)의 시 「죽리관(竹里館)」에 "깊은 대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길게 휘파람 부네.[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라고 하였다. 왕백(王栢) 1197~1274. 남송(南宋) 때 경학가로 자는 회지(會之) 또는 백회(伯會), 호는 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금화(金華) 사람이다. 왕백은 하기(何基)에게서 배웠고 하기는 주자의 제자인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서 배워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주자가 죽기 3년 전에 왕백이 태어났으므로 이렇게 말한 듯하다. 길보(吉甫) 송말원초의 학자인 김이상(金履祥)의 자이다. 김이상은 만년에 인산(仁山)에 은거하였다. 하기(何基)와 왕백(王柏)에게 정주학을 배워 주자의 학통을 이었다. 송나라가 멸망하자 벼슬하지 않고 금화산(金華山)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모두……뜻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은 뜻을 이루면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을 수양하여 세상에 드러난다. 궁하면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모두 선하게 한다[古之人, 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허형(許衡)과 오징(吳澄) 허형은 원나라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중평(仲平), 호는 노재(魯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원나라 초기의 학계에 주자학(朱子學)의 기초를 닦았으며 주자와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조화시키려 노력했고, 공담(空談)만을 일삼는 이학(理學)을 비판하였다. 오징은 원나라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유청(幼淸), 호는 초려(草慮)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자의 사전제자(四傳弟子)로, 이학(理學)을 위주로 하면서 심학(心學)을 아울러 취하여 주륙이가(朱陸二家)의 사상을 조화시켰다. 백운 처사(白雲處士) 허겸(許謙)으로, 자는 익지(益之)이다. 자호가 백운산인(白雲山人)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백운 선생이라고 불렀다. 김이상(金履祥)에게 배웠다. 동양(東陽)의 팔화산(八華山)에서 40년 동안 강학하였다. 하기(何基)·왕백(王柏)·김이상 등과 함께 금화(金華) 주자학의 중요한 전승자로, 금화 사선생(金華四先生)이라고 불렸다. 육씨(陸氏) 육구연(陸九淵)을 이른다. 육구연은 남송의 유학자로, 호는 존재(存齋) 또는 상산(象山)이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동시대 주희(朱熹)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후에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는 육학(陸學)을 정립하였다. 경헌(敬軒) 명나라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설선(薛瑄, 1389~1464)의 호이다. 자는 덕온(德溫), 시호는 문청(文淸)으로 성조(成祖) 영락(永樂) 19년(1420)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겸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에 이르렀다. 평생 독실하게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여 명대 성리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진다. 요어(要語) 두세 편 명나라의 이학가(理學家) 설선(薛瑄)의 저술인 『독서록(讀書錄)』을 가리킨다. 총 2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평소 몸소 실천하면서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기록한 책으로, 주로 이기(理氣)와 성리(性理) 문제를 다루었다. 명나라 초기 정주학의 대표적인 저술이다.『明史 儒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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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를 적다 書懷 가난한 사람은 부유하고자 하고 (貧人思欲富)천한 사람은 귀하고자 하네 (賤人思欲貴)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하고자 하고 (富人又欲富)귀한 사람은 더욱 귀하고자 하네 (貴人又欲貴)물처럼 날로 욕심 더욱 깊어지니 (如水日益深)죽을 때까지 스스로 편안하지 않네 (没身不自安)귀천을 어찌 선택할 수 있으랴 (貴賤奚須擇)가난과 부귀는 실로 한가지라네 (貧富固一般)나에게 태곳적 비결이 있으니 (我有太上訣)주어진 처지에 순응하여 절로 여유롭다네 (素位自裕然)아침에는 산속의 나물을 캐고 (朝採山中藿)저녁에는 돌 아래 샘물을 마시네 (暮飲石下泉)관솔불 피워 놓고 고서를 보며 (燃松看古書)대나무 심고 새 봄을 기다리네 (種竹見新春)문을 두드려 남에게 요구하지 않고 (不叩要人門)살찐 말 뒤를 따르는 것43) 부끄러워하네 (慙隨肥馬塵)때때로 동지들이 찾아와 (時有同志至)나를 위해 성과 이를 말하네 (爲我談性理)가슴에 새김에 남은 뜻이 있으니 (佩服有餘意)부지런히 되풀이하고 그치지 않네 (娓娓不能已)성쇠는 추위와 더위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榮悴猶寒暑)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네 (修身以俟天)우주 사이에서 부앙하니 (俯仰宇宙間)더 이상 누구를 허물하고 원망하랴 (復誰尤怨焉) 貧人思欲富。賤人思欲貴。富人又欲富。貴人又欲貴。如水日益深。没身不自安。貴賤奚須擇。貧富固一般。我有太上訣。素位自裕然。朝採山中藿。暮飲石下泉。燃松看古書。種竹見新春。不叩要人門。慙隨肥馬塵。時有同志至。爲我談性理。佩服有餘意。娓娓不能已。榮悴猶寒暑。修身以俟天。俯仰宇宙間。復誰尤怨焉。 살찐……것 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나귀 타고 삼십 년 동안, 장안의 봄을 나그네 신세로 살아 왔네. 아침이면 부잣집 문을 찾아가고, 저녁이면 살진 말의 뒤를 따랐어라. 남은 술과 식은 고깃점, 가는 곳마다 남몰래 몹시 서러웠네[騎驢三十載, 旅食京華春. 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杯與冷炙, 到處潛悲辛.]"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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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4일에 臘月初四日 오늘 아침 섣달 나흘 今朝臘初四옛날 우리 왕모의 생신이셨네 昔我王母晬왕모는 팔십 여세에도 王母八十餘하늘이 보호하고 아끼어 강녕하셨지 康寧天護愛나의 부친 평소 마음 다해 봉양하셨는데 我父素忠養이날은 더욱 마음을 쓰셨네 是日尤用意집에서 기르는 짐승의 육고기와 肉珍在家畜바다에서 공수해 온 해조류들 魚錯自海至인사하며 헌수를 올리고 唱喏上眉壽술잔에 술을 가득 담았네 有酒盈兕觶옛날 풍속은 〈빈풍〉368)에 전해지고 古俗豳風傳자잘한 예절은 《주자가례》369)에 갖추어졌네 細節朱禮備알록달록 옷 입고 재롱떠니 斑衣繞膝下봄바람이 자리에 불었네 春風動座次아득히 얼마나 지났는가 遙遙曾幾何세월 오래되어 기억하기 어렵네 歲月積難記풍수의 한탄이 너무도 지극하여 風樹恨已極손자 또한 피눈물 나누나 承重亦血淚이렇게 회갑 맞은 섣달을 만나니 値此甲年臘시 지어 한번 길게 탄식한다오 題詩一長喟 今朝臘初四, 昔我王母晬.王母八十餘, 康寧天護愛.我父素忠養, 是日尤用意.肉珍在家畜, 魚錯自海至.唱喏上眉壽, 有酒盈兕觶.古俗豳風傳, 細節朱禮備.斑衣繞膝下, 春風動座次.遙遙曾幾何? 歲月積難記.風樹恨已極, 承重亦血淚.値此甲年臘, 題詩一長喟. 빈풍(豳風)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이다. 〈빈풍〉 가운데 〈칠월(七月)〉 시는 특히 주공(周公)이 옛날 주(周)나라의 선조인 후직(后稷)과 공류(公劉)가 빈(豳) 땅에서 친히 농사에 힘써 백성들을 잘살게 하였던 사실을 노래하여 성왕(成王)을 경계시키는 내용인데, 사철의 농사일을 월령별로 서술하여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 태도를 강조하고 백성들의 처지를 잘 알게 해 준다. 주자가례(朱子家禮)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가 편찬한 책으로, 관혼상제 등 가정에서의 일상적인 예절을 모아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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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에 다시 현광과 함께 읊다 八日 復同玄狂吟 세상은 말세 되고 사람은 늙었으니 世降下梢人到翁가련하도다 이 세상 부침하며 사네 可憐乾沒此生中장년에 뜻을 둔 일은 봄꿈 되었고 壯年志事如春夢열국의 가요는 모두 변풍이구나416) 列國歌謠盡變風염량의 세상을 달빛이 씻으니 집마다 희고 月洗炎涼當戶白가난한 집을 꽃이 꾸미니 온통 뜰이 붉네 花粧貧窶滿園紅마음을 말할 때 광생의 벗417) 많이 의지하니 話心多賴狂生友굳이 같을 필요 없을 때도 도리어 다시 같아지네 不必同時却復同 世降下梢人到翁, 可憐乾沒此生中.壯年志事如春夢, 列國歌謠盡變風.月洗炎涼當戶白, 花粧貧窶滿園紅.話心多賴狂生友, 不必同時却復同. 열국의……변풍이구나 유행하는 노래가 왜색풍임을 비유한 듯하다. 원문의 '변풍(變風)'은 《시경》의 문체(文體)의 하나이다. 《모시서(毛詩序)》에서는 "왕도가 쇠함에 이르러 예의가 무너지고 정교를 잃고 나라의 정사가 달라지며 집안의 풍속이 변하여 변풍과 변아가 일어났다.[至于王道衰, 禮儀廢, 政教失, 國異政, 家殊俗, 而變風變雅作矣.]"라고 하였다. 광생의 벗 '광생(狂生)'은 현광(玄狂)을 지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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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졸의 시에 차운하다 次百拙 정이천 소동파가 다른 게 천추의 한이니49) 千秋恨事異川坡어찌하여 상종하며 강마를 돕지 않았을까 胡不相從資講磨본디 공경한 것이지 가식이 아니었으니 自是敬恭非假飾문득 타파하여 무엇을 하려고 했겠는가 便將打破欲如何의견이 같지 않으면 응당 틈이 생기지만 不同意見應爲釁또 미워하고 싫어함도 많아지게 되었네 更涉憎嫌亦已多애석하다 문장 잘하고 충의로운 선비가 可惜文章忠義士근원이 어긋난 곳에서 유파와 뒤섞인 것이 源頭差處混流波 千秋恨事異川坡, 胡不相從資講磨?自是敬恭非假飾, 便將打破欲如何?不同意見應爲釁, 更涉憎嫌亦已多.可惜文章忠義士, 源頭差處混流波. 정이천(程伊川)……한이니 정이천(程伊川)과 소동파(蘇東坡)가 평소 학문적으로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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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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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대암서사에서 臺巖書社 전에 맺은 인연을 회고하니 어언 십여 년 回憶前緣十載餘빨리 흐르는 세월은 달리는 수레와 같네 光陰迅駛若奔車다만 평소에 산수를 탐했기 때문에 只因平日耽泉石이 산에 올 때면 좀벌레366)를 쓸어냈네 每到玆山掃蠹魚젊은이들은 어찌 그리 독실한가 年少一何誠篤實이 늙은이는 본래 학문이 엉성했다네 老夫自是學疎虛풍물이 다 옛날 그대로인 게 가장 어여쁘니 最憐風物皆依舊인심을 시종일관 잘 보존하길 바랄 뿐이네 但願人心克末初 回憶前緣十載餘, 光陰迅駛若奔車.只因平日耽泉石, 每到玆山掃蠹魚.年少一何誠篤實? 老夫自是學疎虛.最憐風物皆依舊, 但願人心克末初. 좀벌레 원문의 '두어(蠹魚)'는 책이나 의복을 갉아먹는 좀을 말하는데, 백어(白魚)ㆍ의어(衣魚)ㆍ담어(蟫魚)ㆍ병어(蛃魚)ㆍ두어(蠹魚)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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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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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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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봄날의 감회 感春 호숫가의 동풍에 봄이 또 왔으나 湖上東風春又來백발로 사물 느끼니 더욱 슬퍼지네 白頭感物轉生哀온 나라 강토가 상전벽해에 잠기고 八方疆土淪桑海한 시대 의관들이 노예515)가 되었네 一代衣冠作皀臺괜히 읊조림에 시 천 수도 소용없고 謾吟無賴詩千首길이 취하려면 술 백 잔은 사야 하네 長醉須沽酒百杯방초 찾아 시 읊는 길손이 부럽나니 却羡尋芳風詠客비관을 털어내는 높은 재주 지녀서네 能排悲觀是高材 湖上東風春又來, 白頭感物轉生哀.八方疆土淪桑海, 一代衣冠作皀臺.謾吟無賴詩千首, 長醉須沽酒百杯.却羡尋芳風詠客, 能排悲觀是高材. 노예 원문의 '조대(皂臺)'는 '조예대여(皂隸臺輿)'의 준말이다. '조예'는 노복이고, '대여'는 '여대(輿臺)'ㆍ'여대(輿儓)'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천역(賤役)을 담당한 노복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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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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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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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일이 생기다 有事 근래에 일이 생겨 두서가 많아지니 有事邇來多緖頭누추한 집이 되레 그윽하지 않음을 알았네 陋居還覺未曾幽글에 답하고 강석 여는 것은 허례가 되었고 酬文設講歸虛例쌀을 사고 땔감 운반할 일도 매우 걱정이네 糴米搬薪供緊愁본래 마음은 길이 비추어 관통하는 것인데 自是靈臺長照徹어찌하여 고해에서 오래도록 부침하였던가 如何苦海久浮沈요컨대 순순히 응하여 인연 따라 가야만 要當順應隨緣去비로소 중류에 띄워 둔 빠른 배를 보리라 始見中流放快舟 有事邇來多緖頭, 陋居還覺未曾幽.酬文設講歸虛例, 糴米搬薪供緊愁.自是靈臺長照徹, 如何苦海久浮沈?要當順應隨緣去, 始見中流放快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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