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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문자성【형】에게 답함 答文子惺【炯】 마음을 수렴하고 함양하는 것은 참으로 가장 으뜸가는 법문인데, 다만 오랫동안 놓아버린 마음을 갑자기 가둬서 안정시키는 것은 아마도 싹을 뽑아 조장(助長)하는 근심39)이 없을 수가 없네. 이것이 가장 걱정이 되니, 이는 자신이 스스로 헤아리고 노력하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옆 사람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주자는 "리(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심(心)과 성(性)도 또한 그와 같네. 이른바 '한 가지'로서 말한다면 심을 리(理)라 불러도 누가 그르다고 하겠는가. 이른바 '두 가지'로서 말한다면 심과 리는 경계를 나누지 않을 수가 없네. 선철들이 말을 한 것이 같지 않은 것이 대개 이 때문이네. 보내준 편지에서 "리(理)가 있으므로 신령한 것이지, 신령한 것이 곧 리라고는 할 수 없다."40)라고 한 것과 또한 "기의 신령한 곳은 즉 리가 부린 것이다."라 한 것은 모두 대단히 옳은 말로서 다시 평할 것이 없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은 근대 리(理)를 주장한 사람인데, 항상 기를 주장함에 혹 크게 어긋난 폐단이 없지 않음을 걱정하였으니, 예를 들면 그가 '성(性)과 정(情)을 합하여 심(心)이라 명명한다.……'41)라고 한 것은 또한 그의 잘못된 곳이네. 대개 그 의도는 심으로 리를 삼고 지각으로 심을 삼고 싶지 않아서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네. '하늘에 사람 마음[人心]이 있다.'는 말은 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욱 심한 자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그 기를 주장하는 폐단이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탄식이 이네. 사람은 형체가 있으므로 인심(人心)이 있지만, 하늘에 어찌 일찍이 사람과 같은 형체가 있어서 인심이 있겠는가. 심포(心圃)42)의 명문(銘文)은 마땅히 힘이 닿으면 도모하되 그 시기를 기필하지 말게나. 收斂涵養。固是太上法門。而但恐久放之心。猝然窒定。或不無揠苗之患。此最可慮。此在自家自斟酌自着力如何耳。非傍人所可容言之地也.朱子曰。理與氣。一而二。二而一.惟心與性亦然。以所謂一者言之。則喚心爲理孰云不可以所謂二者言之。則心與理不可無界分。先哲之立言不同。蓋以此耳。來喩所謂有理故靈。而不可靈便是理。又曰。氣之靈處。卽理之所使。此言皆親切的當。無容更評。寒洲是近世主理之人。而每慮其主氣。或不無太過之敝。如所謂合性與情有心之名云云。亦其過處也。蓋其意以心爲理.而不欲以知覺爲心故云然耳。天有人心。此說出於主氣尤甚者之口。而其主氣之敝。一至於此。可歎。人有形體故有人心。天何嘗有形體如人而有人心乎。心圃銘當隨力圖之。其早晏姑未必也. 싹을……근심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송나라의 어느 농부가 밭에 가서, 곡식을 빨리 성장시키기 위하여 그 싹을 뽑아 자란 것처럼 해 놓고,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자랑하기를, '내가 오늘 곡식을 조장(助長)하였다.' 하기에, 아들이 다음 날 밭에 가서 보니 싹은 말라 죽어 있었다."라 하였다. 리가……없다 《노사집(蘆沙集)》 〈답김경범문목(答金景範問目)〉 2에서 김경범이 "주자가 말하기를 '기(氣) 속에는 절로 영령한 물사(物事)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영(靈)이 곧 이(理)입니까?"라 물으니, 노사가 "이(理)가 있으므로 신령하다고 한 것이지 영을 곧 이라고 할 수는 없네."라는 대답이 보인다. 성과……명명한다 《한주선생문집》 권8 〈답윤사선별지(答尹士善別紙)〉에서, 윤사선이 "다만 성(性)자만 들고 지각(知覺)을 겸하여 들지 않으면 심자를 말하는 것이 다하지 못합니다.〔單擧性字, 而不兼擧知覺, 則說心字不盡.〕"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를 "주자가 일찍이 횡거의 이 말을 논하기를 '명도로 형상하게 하였다면 결단코 이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명도가 만약 이에 대해 논하였다면 '성과 정을 합하여 심이란 명목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을 것이다. 지금 성밖에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심과 성이 두 근본이 된다.〔朱子嘗論橫渠此說曰, 使明道狀出, 決不如此. 愚謂明道若論此則當曰, 合性與情, 有心之名, 今謂性外有知覺, 乃心性二本也.〕"라 하였다. 심포 문형(文炯)의 호이다.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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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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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문자성에게 답함 答文子惺 심(心)은 기의 정밀하고 맑은 것으로 허령과 지각이 그 본체이며 본질이네. 지금 허령과 지각을 버려두고 다만 일곱 구멍50)이나 다섯 구멍,51) 또는 피지 않은 연꽃 같은 것52)을 가리켜서 기질지심이라고 이르는 것인가? 잘 모르겠네만 이럴 때의 마음은 무슨 마음인가? 형질의 이면에서 오르내리며 유통하는 것은 하나라도 기가 아님이 없으며, 안으로 오장부터 밖으로 모든 신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라도 질(質)이 아님이 없네. 지금 온 몸의 기질 이외에 특별히 심의 기질을 들었으니, 잘 모르겠네만 이 기질은 무슨 기질인가? 편지 내용 중에 '몸의 주재가 된다.'는 말을 '리의 오묘함'으로 고친다면 좋을 것 같네. 만약 임군(任君)의 말과 같다면 기의 신령함은 다만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질문 : '리(理)는 구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달빛은 본래 넓고 좁음의 구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리는 구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창틈으로 넓거나 좁게 받아들인 것이 달빛 아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53)53) 리는……같습니다 : 이에 대해 노사는 "본연(本然)은 달빛과 같고, 품부(稟賦) 받은 편전(偏全)은 창틈의 크고 작음이 있는 것과 같네. 그러나 달빛을 받은 것은 때에 따라 같지 않고 본연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마치 창문의 크고 작은 틈에서 받은 것이 모두 달빛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네. 이치의 본연을 말하지 못한 것은 달빛이 본래 대소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네.〔本然如月光, 所受偏全如窓隙有大小. 而所受月光隨而不同, 本然之理無乎不在者, 如云窓隙大小之所受罔非月光也. 爲理之本然則不可云者, 如云月光本無大小之分也.〕"라고 하였다. 《노사집 권9 답민극증(答閔克中)》 두 번째.그렇다면 구분이 없다고 한 곳은 구분이 없는 것으로 보고 구분이 있다고 한 곳은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괜찮겠습니까.답변 : 성(性)이란 만물의 한 가지 근원이니 과연 구분이 있겠는가.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니, 과연 구분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구분이 없는 가운데 구분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하니, 과연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이르지 않아야 하네.질문 : '천리(天理)'라고 하고 또는 '천명(天命)'이라고 하는데, 리(理)라고 하는 것은 주재처로써 말한 것이며, 명(命)이라고 하는 것은 유행처로써 말한 것입니까.답변 : 존재한 것으로 말하면 리라고 이르고 부여받은 것으로 말하면 명이라 말하네. 유행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라고 하고,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면 상제라고 하네.질문 : 본연지성은 진흙이 혼탁한 가운데 나아가 전적으로 물이 맑은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요, 기질지성은 물과 진흙을 겸하여 말한 것입니까.답변 :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 성이 아니네. 예를 들면 그릇으로 물을 담을 때 물은 참으로 본연지성에 해당하고 물과 겸하여 그릇까지 가리키면 바로 기질지성에 해당한다네.질문 : 심(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기질지성이 있거나 기질지성이 없거나에 대하여 묻습니다.답변 : 내가 일찍이 물로써 비유하였네. 물이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동(動)하지 않으면 그 맑음은 깨끗한 그릇에 담겨 있는 것과 다르지 않네. 그러나 그 그릇을 더러운 그릇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며, 또한 더러운 그릇을 가지고서 물에 더럽고 깨끗한 분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네.질문 : 소자(邵子, 소옹)가 "성이란 도의 형체이다.……"54)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묻습니다.답변 : 도는 만물에 담겨 있지만 소리와 색깔도 없고 일정한 장소도 없는데, 성(性)은 도가 주머니에 담겨져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도의 형체라고 한 것이네.질문 : 주자는 "심(心)은 물과 같으며 성(性)은 물이 고요한 것과 같으며, 정(情)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55)라고 하였으며, 사계는 "심은 그릇과 같고, 성은 그릇 안의 물과 같으며, 정은 물이 밖으로 쏟아진 것과 같다."56)라고 하였는데, 두 말이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답변 : 소자는 "심이란 성의 외성[郛郭]이다."57)라고 하였는데, 외성은 그릇이 아닌가? 심이 성을 갖춘 것으로 말하자면 심은 그릇과 같고 성은 물과 같네. 심이 성정을 거느린 것으로 말하자면 심은 물과 같으며 물이 고요한 것은 성과 같으며 물이 움직인 것은 정과 같네.질문 : 경(敬)과 의(義)의 공부는 참으로 마땅히 함께 나아가야 하니, 정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고 하였으니, 곧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58)고 하였으니, 방정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답변 : '정(靜)할 때는 마음이 깃 들일 곳을 찾을 수 없으며 동(動)할 때는 억지로 안배할 수 없다.'59)고 하였네. 그러므로 '이(以)'자가 '의(義)'자 위에 있으면 또한 억지로 안배하는 병이 없을 수 없네.질문 : 명덕(明德)을 심(心)으로서 말하면 도심(道心)이요, 인심(人心)이 아닙니다. 성(性)으로서 말한다면 본연지성이요, 기질지성이 아닙니다. 정(情)으로서 말한다면 천리요, 인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심이 올바른 곳을 얻으면 곧 도심이요, 기질이 법도를 따르는 곳은 즉 본연지성이요, 인욕이 물러난 곳은 즉 천리입니다.답변 : 두 말이 모두 좋네. 다만 인심은 본래 좋지 않은 것이네.성인이 도의 체용(體用)을 말할 때 대부분 체에 대해 먼저 말한다.성현의 말은 대부분 유행(流行)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가리킨다.'심(心)이 태극이 된다.'60)는 것은 하나로 합치하여 말한 것이고, '성(性)은 태극과 같고 심(心)은 음양과 같다.'61)고 한 것은 따로 분리하여 말한 것이다.영(靈)과 신(神)62)은 비록 두 물건이지만 서로 약간 분수의 차이가 있다.지각은 심(心) 상에 나아가 동정(動靜)을 겸하여 말한 것이고, 정(情)은 다만 동처(動處)로서 말한 것이다.'정허(靜虛)'63)의 '허(虛)'는 미발의 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요, '허령(虛靈)'64)의 '허(虛)'는 미발과 이발을 통틀어서 본심(本心)의 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하늘의 명은,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65)는 말은 하늘의 경을 이르고, "해와 달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시가 어긋나지 않는다."66)는 말은 하늘의 신을 이른 것이다. "천지의 상도(常道)는 그 마음이 만물에 두루 미쳐도 사심(私心)이 없는 것이다."67)라고 하였으니,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만 경은 굳게 잡는다는 의미이니, 대부분 사람의 일에 나아가서 바야흐로 말한 것이다. 아마도 어진 그대는 경(敬)자의 본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봄이 부족한 듯하다.천명과 오상(五常)이 어찌 두 사물이랴. 오상은 다만 천명의 조목이다. 만약 천명을 뒤섞이지 않는 사물이라 하고 오상을 떨어지지 않는 사물이라 여긴다면, 태극은 과연 흐리멍덩하여 골자가 없는 사물이란 말인가。이에 이층, 삼층의 설이 일어나게 된 까닭이다.그대가 '계신(戒愼)'68)에 대해 말하였는데, 주자도 또한 동정(動靜)을 관통하여 말한 것이 있으며, 오로지 정(靜)으로써 말한 것이 있다. 천리는 인사(人事)의 밖에 있지 않으니, 인사상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 바로 천리이다. 그러므로 소당연(所當然)과 소이연(所以然)은 모두 리(理)이다. 心是氣之精爽。而虛靈知覺。其當體也本旨也。今舍虛靈知覺。而但指其七竅五竅如未敷蓮花者。而謂之氣質之心。未知此心何心也。升降流通於形質之裹面者。無一而非氣也。內自五臟。外至百體。無一而非質也。今外周身氣質。而特擧心之氣質。未知此氣質何氣質也.主於身。改以理之妙爲好。若如任君之言。則氣之靈。獨非主於身者耶。有言理無分者。如云月光本無大小之分也。有言理有分者。如云窓隙大小之所受。無非月光也。然則無分處以無分看。有分處以有分看。可乎。性者萬物之一原。果有分乎。乾道變化。各正性命。果無分乎。須知無分中有分。果不至爲一偏之見也。曰天理曰天命。理以主宰處言。命以流行處言。以其所存在而謂之理。以其所賦畀而謂之命。以其所流行而謂之道。以其所主宰而謂之帝.本然之性。就泥濁中。全指水之淸者而言。氣質之性。兼水與泥而言。本然性氣質性。非二性也。如以器貯水。水固本然之性。而兼指其器。則氣質之性也。未發。有氣質性無氣質性云云。愚嘗以水喩之。水在汚器而不動。則其淸。與在潔器者無異。然其器則不可謂非汚器。亦不可以其汚器而謂水有分數也。邵子曰。性者道之形體云云。道在萬物。無聲色無方所。而性其結褁處也。故謂之道之形。朱子曰。心如水。性猶水之靜。情則水之流。沙溪曰。心如器。性如器中之水。情如水瀉出於外。兩說不同何。邵子曰。心者性之郛郭。郛郭非器乎。以心具性言。則心猶器也。性猶水也。以心統性情言。則心猶水。而水之靜猶性也。水之動猶情也。敬義用功。固當倂進。程子曰。以敬直內則。不直亦可。曰以義方外。則不方乎。靜不可尋覓。動不可安排。以字在義字上。則亦不無安排之病。明德以心言。則道心也非人心也。以性言。則本然也。非氣質也。以情言。則天理也非人欲也。然人心之得正處。卽道心也。氣質之循軌處。卽本然也。人欲之退縮處。卽天理也。兩說皆好。但人心。本非不好底。聖人言道之體用。多用先於體。聖賢之言。多沿流而指源。心爲太極。是合一說。性猶太極。心猶陰陽。是分開說。靈與神。雖非二物。而煞有分數。知覺就心上。該動靜而言。情特以動處說。靜虛之虛。指未發之體而言。虛靈之虛。統未發已發。而指本心體而言。維天之命。於穆不已。天之敬也。日月不過。而四時不忒。天之信也。天地之常以其心普萬物而無心。可謂之有意乎。但敬是把捉底意。多到人事上方說得者。恐賢於敬字本旨。欠消詳。天命五常。豈二物乎。五常只是天命之條理。若以天命爲不離底物。五常爲不離底物。則太極果是儱侗無骨之物。而二層三層之說所以起也。戒愼云云。朱子亦有以貫動靜而言者。有專以靜而言者。天理不在人事之外。人事上當然底。是天理也。是以所當然所以然。皆理也。 일곱 구멍 심장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말한다. 이 외에도 사람의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 곧 귀ㆍ눈ㆍ코에 각각 두 개씩 있고 입에 하나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인체가 외부와 통하는 일곱 개의 구멍 곧 눈ㆍ코ㆍ귀ㆍ혀ㆍ입ㆍ항문ㆍ요도를 말하기도 한다. 다섯 구멍 간(肝)은 눈으로 구멍이 나 있고, 심(心)은 혀로 구멍이 나 있고, 비(脾)는 입으로 구멍이 나 있고, 폐(肺)는 코로 구멍이 나 있고, 신(腎)은 귀로 구멍이 나 있다는 한의학 이론이다. 피지……같은 것 심장의 형상을 표현한 말인데, 이 속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천진(天眞)한 기운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성이란 도의 형체이다 소옹(邵雍)의 〈격양집서(擊壤集序)〉에 보인다. 심은……같다 《주자어류》 권5에 보인다. 심은……같다 《사계선생유고》 권10 〈어록(語錄)〉에 보인다. 심이란 성의 외성이다 〈격양집서(擊壤集序)〉에 보인다. 경으로써……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는 '경이직내(敬以直內)'라고 하였는데 정자는 '이경직내(以敬直內)'라고 하였다. 《근사록》 권4에 정자가 말하기를 "경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하여 밖을 바르게 하는 것은 인이다. 만약 경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바르지 않게 될 것이다. 반드시 어떤 할 일을 두고 효과를 예기치 않으면 곧게 될 것이다.[敬以直內, 義以方外, 仁也. 若以敬直內則便不直矣, 必有事焉而勿正, 則直也.]"라고 하였다. 정(靜)할…… 없다 《주자대전》 권64 〈호남의 여러 사람들과 중화를 논한 첫 편지[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에 "아직 발하기 전에는 찾을 수 없으며, 이미 발한 뒤에는 안배할 수 없으니, 오직 평소에 엄숙하고 공경하며 함영(涵泳)하는 공부가 지극하다면 그 발하기 전엔 거울처럼 밝고 물처럼 고요한 것이며, 그 발할 때엔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평소에 쓰는 본령의 공부이다.〔未發之前, 不可尋覓, 已發之後, 不容安排. 惟平日莊敬涵養之工至, 則其未發也鏡明水止, 而其發也無不中節矣. 此是日用本領工夫.〕"라고 하였다. 심이 태극이 된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4 〈관물 외편 하(觀物外篇下)〉에 보인다. 성은……같다 《주자어류》 권5 〈성리(性理)〉에 보인다. 영(靈)과 신(神)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을 가리킨다. 정허(靜虛)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권20 〈성학편(聖學篇)〉에 보인다. 즉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요체가 있는가? 있다。그 요체가 무엇인가? 일(一)이 요체이니, 일이라는 것은 무욕을 말한다。무욕이 되면 정(靜)할 때에는 허(虛)하고 동(動)할 때에는 직(直)하다。정할 때에 허하면 명(明)하고 명하면 통(通)하며, 동할 때에 직하면 공(公)하고 공하면 부(溥)한다。그리하여 명해서 통하고 공해서 부하면 거의 가깝게 될 것이다。[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 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라는 말에서 추출한 것이다. 허령(虛靈) 《대학장구》 경 1장의 주에서 주자는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라고 하였다. 하늘의……않는다 《시경》 〈주송(周頌) 유천지명(維天之命〉에 보이는 말이다. 해와……않는다 《주역》 〈예괘(豫卦)〉의 단전(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천지의……것이다 《근사록》 권2 〈위학(爲學)〉에서 정호(程顥)가 한 말이다. 계신(戒愼) 《중용장구(中庸章句)》 1장(章)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아도 조심하는 것이요,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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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겸에게 답함. 答姜子謙 작심삼일(作心三日)은 참으로 모든 사람이 겪는 걱정거리라네. 그러나 이로 인해 마음을 다잡아 간단(間斷)이 없게 한다면 이것이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72)의 단방(單方)73)이니, 어찌 마치 나귀 등에 타고서 나귀를 찾는 것74)처럼 엉뚱하게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하는가. 젊은이들 가운데 자겸처럼 빼어나게 재주가 좋으면서도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자는 또한 몇 사람 되지 않으니, 바라건대 모름지기 때늦지 않게 힘써 노력하여 집안의 무겁게 기대하는 마음과 작고한 큰 형이 이루지 못한 숙원을 풀어주기 바라네. 생가(生家)의 상에 만약 형제가 없다면 어찌 자신이 타인의 후사로 출계하였다고 해서 그 상의 상주가 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의심할 것이 없네. 다만 큰 형의 상제와 담제75)는 아버지의 장사 이전에는 지낼 수가 없으니, 장사를 치른 뒤에 날을 정하여 상제를 지내는데 담제는 행할 수 없다네. 아버지 장사를 치른 뒤에 형의 상제를 행할 때 상주될 사람이 없다면 자신이 또한 어찌 타인의 후사로 출계하였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겠는가. 같은 집에 살던 사람이 죽었을 때는 비록 신첩(臣妾)이라도 장사 지낸 뒤에 제사를 지내는데,76) 더구나 아버지 상임에랴. 대공복을 입는 자라도 타인의 상주가 되었을 때 반드시 두 번 제사를 지내는데, 더구나 형제의 제사임에랴. 다시 자세히 살펴보게나.질문 : 사람의 본성이 모두 착한 것은 천명지성(天命之性) 때문이며, 깨달음에 선후가 있는 것은 기질지성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인에게는 마땅히 '선각(先覺)'의 '각(覺)'자를 놓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답변 :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기질지성이라고 이를 수 있는데, 이미 깨달은 것을 또한 기질지성이라 이르겠는가. 성인이 선각자가 아니라면 천하에서 선각자는 누구인가.질문 : 원두(原頭)에서 보면 근본이 한 가지이며 조리(條理)에서 보면 만 가지로 다른 것입니까.답변 : 또한 모름지기 원두도 만 가지로 다른 것이 아님이 없음을 알아야 하며 조리도 한 가지 근본인 것을 알아야 하네.질문 : 동(動)은 정(靜)으로써 주(主)를 삼고 정은 동으로써 주를 삼으면 거의 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답변 : 정으로써 주를 삼는다고 이른다면 괜찮겠지만 동으로써 주를 삼는다고 이른다면 옳지 않네. 다만 동과 정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이치가 없지는 않네.질문 : 책을 읽을 때 바깥 사물이 나를 가리면 다만 마땅히 맹렬하게 정력을 기울여 의리를 구하여야 합니다. 만약 가렸는지, 가리지 않았는지를 따져서 그 가림을 제거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가리면 가릴수록 제거하려고 노력하여도 더욱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답변 : 천리를 보존하면 인욕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네. 이는 불을 끄려고 때리는 것과 서로 비슷하니, 불을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거세지네. 다만 물을 끼얹으면 절로 꺼질 것이네.질문 : 총명과 예지는 음양으로써 말한다면 명(明)과 예(睿)는 양이고, 총(聰)과 지(知)는 음입니다. 정신으로써 말한다면 명과 예는 신(神)이고, 총과 지는 정(精)입니다.답변 : 아마도 그럴 것이네. 三日作心。固通患。然因此提掇。母令間斷。此是肘下單方。豈有枉尋別算。如騎驢覓驢也。少年輩流。其秀爽謹勅如子謙者。亦無幾人。望須及時勉力。以慰家庭責望之重。及先伯氏未就之願也。生庭之喪。若無兄弟。則身豈以出後於人而不主其喪乎。此固無疑.而但其伯兄之祥禫。則不可行於其父之葬前。葬後卜日行祥。而禫則不可行也。葬後行祥。而無主喪之人。則身又豈以出後而不爲之祭乎。同宮。則雖臣妾。葬而後祭。況父喪乎。大功者。主人之喪。必爲之再祭。況兄弟之祭乎。更詳之人性皆善。天命之性也。覺有先後氣質之性。然則言聖人。不當下先覺之覺字未覺者。固可謂氣質之性。而已覺者。亦可謂氣質之性耶。以聖人而非先覺。則天下先覺者誰歟。自其原頭而看。則一本。自其條理而看。則萬殊。又須知原頭非無萬殊。條理非無一本。動則以靜爲主。靜則以動爲主。庶幾無過不及。謂以靜爲主則可。謂以動爲主則不可。但動靜不能無交資之理。讀書。外物交蔽。則只當猛着精力。以究義理。若計其蔽不蔽。而要去其蔽爲心。則愈蔽愈不消。存天理則人欲自消。此與撲火相似。愈撲愈熾。但以水投之則自熄。聰明睿智。以陰陽言。則明睿陽也。聰知陰也.以精神言。明睿神也。聰智精也。恐然。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 진(晉)나라의 갈홍(葛洪)이 겨드랑이에 끼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하게 만든 의서(醫書)의 이름이다. 단방(單方) 한 가지 약재만으로 조제되어 병을 고치는 약을 이른다. 나귀……찾는 것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밖에서 구하는 것을 비유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지공화상대승찬(志公和尙大乘贊)〉에서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진실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과 같다〔不解卽心卽佛 眞似騎驢覓驢〕"라고 하였다. 상제(祥祭)와 담제(禫祭) 상제는 죽은 지 두 해 만에 지내는 대상(大祥)을 말하고, 담제는 상복을 벗는 제사로, 대상을 지내고 한 달을 건너서 지낸다. 같은 집에……지내는데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서 "한집에 살던 사람이 죽은 경우, 죽은 사람이 비록 신첩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장사를 치른 뒤에 제사를 지낸다.〔如同宮則 雖臣妾 葬而後祭〕"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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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언【준동】에게 답함 答朴子彦【俊東】 이전에 돌아가는 인편이 있어서 바쁘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뒤미처 생각해보니 마음이 편치 않네. 이후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객지에 머물면서 경서 공부하는 건강은 어떠한지 물어보지 못하였으니, 그리워하는 마음 그치지 않네. 나는 노쇠한 몸이 더욱 노쇠해지고 병든 몸에 또 다른 병이 생겨 정신과 기력이 텅 비듯 모두 빠져나가 남아 있는 것은 다만 허깨비 같은 껍질뿐이니, 무슨 말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문목 한 통에서 책을 읽고 이치를 연마함에 착실하여 멈추지 않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니 대단히 가상하네. 삼가 나의 어리석은 말로 조목에 따라 답변할 것이니, 그 오류가 분명히 많을 것이네. 바라건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근래 우리 벗의 편지를 얻어 보니 문사(文辭)가 더욱 발전한 것을 알게 되었네. 이는 반드시 실제 공부가 계속 발전하여 문사에 드러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니, 어찌 찬탄하지 않겠는가. 더욱 더 채찍질하기를 깊이 바라네.질문 : 《맹자》 〈노오노장(老吾老章)〉에서 "은혜를 미루어 나가면 사해(四海)를 보호할 수 있다"77)라 하였고 〈불인심장(不忍心章)〉에서 "참으로 능히 확충하면 사해를 보호할 수 있다."78)라 하였습니다. '미뤄 나간다[推]'와 '확충한다[充]'는 말은 서로 분별이 없는데, 구분하여 말한다면 혹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까.답변 : '미뤄 나간다[推]'는 것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간다는 의미이며, '확충한다[充]'는 것은 조금씩 쌓아서 큰 것을 이룬다는 의미이니, 그 실상은 같다네.질문 : 《맹자》 〈경공열장(景公說章)〉에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즐거워하는 음악을 만들라고 하니, 치소(徵招)와 각소(角招)가 바로 이것이다."79)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치소와 각소만 말하고 궁소와 상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임금과 신하가 서로 즐거워하는 음악이 됩니까.답변 : 임금이 한번 유람하고 한번 즐기는 것과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의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것이 모두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닌가. 前者回便。忙關修答。追念未安。繼而有日。未詢旅居經履更何如。瞻溯無已。義林衰上添衰。病上添病。精神氣力。枵然澌脫。而所餘者一箇虛殼而已。夫何可喩之有。問目一紙。可見讀書硏理慥慥不已之意。可䙡可䙡。謹以瞽說。逐條供答。其紕繆必多矣。幸加詳焉如何。近來得吾友書。見其文辭益進。必其實地功夫。長長而見於文辭者如此。曷不贊歎。惟益加鞭策。是望是望。老吾老章。推恩。足以保四海。不忍心章。苟能充之.足以保四海。推與充相似無分辨。而分而言之。或有不同然耶。推是自近及遠之意。充是積小成大之意。其實一也。景公說章。君臣相說之樂。徵招角招是也。但言徵角而不及宮商。何以爲君臣相說之樂耶。一遊一豫。與興發補不足。皆非爲民爲事者耶。 은혜를……있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우리 어른을 어른으로 섬겨서 남의 어른에게 미치며, 우리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해서 남의 어린이에게 미친다면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움직일 수 있다. 《시경》에 '처에게 모범이 되어서 형제에 이르고 집과 나라를 다스린다.' 하였으니, 이 마음을 들어서 저기에 놓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미루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은혜를 미루지 못하면 처자식도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옛사람이 일반인보다 크게 뛰어난 까닭은 다른 것이 없으니, 그 하는 바를 잘 미루었을 뿐이다.[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 天下可運於掌 詩云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 言擧斯心 加諸彼而已 故推恩 足以保四海 不推恩無以保妻子 古之人所以大過人者 無他焉 善推其所爲而已矣]" 하였다. 참으로……있다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을 모두 넓혀서 채울 줄을 알면, 마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다. 만일 사단을 채운다면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라고 하였다. 임금과……이것이다 《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에서 "경공이 기뻐하며 나라 안에 크게 경계령을 내리고 교외로 나가 머물면서, 이에 비로소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부족한 것을 보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악관인 태사(太師)를 불러 '나를 위하여 군신(君臣)이 서로 즐기는 음악을 지어 보라.' 하였는데, 지금의 치소(徵招)와 각소(角招)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가사에 '임금 욕심 저지한 게 그 무슨 잘못이랴.' 하였으니, 임금의 욕심을 저지한 것은 임금을 사랑한 것입니다.〔景公說, 大戒於國, 出舍於郊, 於是始興發, 補不足, 召大師曰爲我作君臣相說之樂, 蓋徵招角招是也. 其詩曰畜君何尤. 畜君者, 好君也.〕"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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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립에게 답함 答安良立 편지를 받아보고 인하여 부모를 모시면서 건강하다고 하니 마음에 많은 위안이 되네. 서당을 열어 벗을 맞아들여서 날마다 금옥 같이 뛰어난 형제들과 책상을 마주하고 나란히 학업을 하다니, 이 세상에 과연 이러한 일이 있는가. 선대인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세 부자가 함께 책을 읽었으므로 사람들이 복이 많은 집안이라 칭송하였는데, 오늘 또다시 세 형제가 이처럼 책을 읽으니 전날의 복이 많은 집안이 오늘의 복이 많은 집안이 되지 않겠는가. 힘쓰고 또 힘써야 하네. 보내준 편지를 보면 약간 우울하고 답답하며 싫증을 내서 포기하는 뜻이 보이며 두루 무젖어서 통쾌한 맛이 없으니, 이는 초학자에게 있어서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괴로움을 참아가며 오랫동안 공부를 쌓는다면 저절로 마땅히 통쾌하게 되리니, 《주역》에서 말한 "거듭된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함이 있어서 마음이 형통하다."80)라는 것이 이에 해당하네. 통쾌하지 못하다고 해서 싫증을 내서 포기하는 마음을 지녀서는 안 되며, 또한 통쾌한 효과를 빨리 기대하다가 싹을 뽑아 조장(助長)하는 폐단81)을 야기해서는 안 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다만 같은 사물인데, 그 체용을 말하면 허령이 체가 되고 지각이 용이 되네. 그러나 또한 체용이 나뉜다고 해서 허령과 지각을 두 사물로 보아서는 안 되네. 비유하자면 불의 밝음은 체요, 빛[光輝]은 용이네. 그러나 밝음과 빛이 어찌 서로 다른 사물이겠는가. "이전 성인의 책을 전부 하나하나 뽑아본다."82)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자사(子思)를 주어로 본다면 말도 되지 않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을 통틀어 말한 것이요, 측은수오(惻隱羞惡)는 정의 한 부분만을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자사는 "희노의 정이 숨겨진 것보다 더 드러남이 없으며 은미한 것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83)고 하여,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을 대응시켰네. 그 의미는 대략 가리키는 바가 있으니 마땅히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得書。因審侍事貞謐。慰仰實多。開塾延朋。日與金昆玉季。對床連業。此世果有此事否。先大人在時。三父子讀書。人稱福家。今日又三昆季讀書如此。前日之福家。未始非今日之福家也。勉之勉之。示中有少間有鬱塞厭棄之意。無浹洽爽快之味。此在初學。安得不然。須耐辛耐苦。積累久久。自當有爽快處。易所謂習坎心亨是也。不可以不爽快而生厭棄之心。又不可徑萛爽快而生揠苗之蔽也。如何如何。虛靈知覺。只是一物。而言其體用。則虛靈爲體。知覺爲用。然亦不可以體用而認虛靈知覺爲二物也。比如火之明體也。其先輝用也。然明與光輝。豈二物哉。歷選是何義。而乃以子思看耶。不成說矣。喜怒哀樂。是統言之情。惻隱羞惡。是偏言之情。故子思言喜怒之情。莫見乎隱。莫見乎微。隱與見對。微與顯對。其意略有攸。當更詳之如何。 거듭된……형통하다 《주역》 〈감괘〉 괘사(卦辭)의 "습감은 신실함이 있어서 마음만은 형통하니, 계속 나아가면 가상(嘉尙)함이 있으리라.〔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싹을……폐단 억지로 빨리 이루려다가 오히려 해를 자초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어떤 송나라 사람이 밭의 싹을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위로 뽑아 올렸다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전……뽑아본다 《중용》 〈서문〉에서 "옛 성인(聖人)들의 책을 하나하나 뽑아 보건대, 강유(綱維)를 끌어 잡으며 깊은 내용을 열어 보여 주심이 《중용》처럼 분명하고 다한 것은 있지 않다.〔歷選前聖之書 所以提挈網維 開示蘊奧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라고 하였다. 희노의……없다 《중용》 〈수장〉에 보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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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지난 번 편지에 대해 답장을 적어 책상에 두고서 인편을 기다린 지 오래였는데, 편지를 보내기 전에 또 그대가 보내준 편지를 받았으니, 불안한 가운데 또 다시 불안하였네. 심이 이가 되고 령이 되는 것은 결안(決案)을 얻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는데, 지금 보여준 것을 받아보니 편지 가득 자세하고 긴 내용은 절실하고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족히 오래 동안 울적했던 심회를 깨드릴 수 있었네. 말단에 이른바 "당체(當體)를 취하여 바로 말하지 않으면 주리(主理)가 너무 지나친 폐단이 있고, 근본에 나아가 극도로 말하지 않으면 주리가 너무 무거운 폐단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설은 지극히 옳네. 이와 같이한 이후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정당한 안목이 될 수 있네. 옛날 성현이 혹 심을 이로 여기고, 혹 심을 기의 신령함으로 여긴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설을 견지한 것이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로는 그대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멀리로는 애장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니, 개인적으로 불안하여 말할 만한 곳이 없었는데, 난만하게 함께 귀결됨이 오늘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위로와 다행함이 실로 많네. 그러나 의리는 무궁하니, 오늘 스스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백대의 정론이 되어 폐단이 없을 줄 어찌 보장하겠는가?무릇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떠나지 않고 원래 서로 섞이지 않네. 원래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하면, 이에 나아감에 기는 이미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기에 나아감에 이는 실로 그 위에서 누르고 있으며,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하면, 이를 기라고 부를 수 없고 기를 이라고 부를 수 없어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네. 이것은 전날의 편지에서 '전언(專言)'과 '대언(對言)'의 설이 있었던 까닭이네. 보내온 편지에서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 위에서 누르고 있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네. 이미 그 위에서 누르고 있다는 것을 불가하다고 여긴다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것 또한 불가해야 할 것이니, 어찌 동일한 말과 뜻인데 하나는 가하고 하나는 불가한 것이 있겠는가? 그대의 뜻은 어쩌면 기는 본래 이를 띠고 있는 물이니 그 위에서 누르고 있음을 다시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인가? 하문에 "《태극도》……"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겠네. 만약 《태극도》로 말하자면 위의 한 개 권(圈)을 제거하고 음양의 권(圈)으로만 보면 또한 말할 수 있는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이 없지 않으니, 어찌 이 한 개 권(圈)은 다시 불상잡의 오묘함이 없고 단지 불상잡만 있어 국한된다고 이르겠는가? 또 '음양' 두 글자가 경전에 드러나는 것이 한번이 아니고 많으니, 어찌 반드시 심이 음양과 같다는 것으로 바로 이 권(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겠는가? 이면에 태극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용하여 심을 풀이하려는 것이네. 그렇다면 심은 기의 정상이니, 정상의 이면에 또한 태극이 있는가? 아니면 정상을 이로 인식하기를 마치 면우(俛宇)의 설처럼 하는가? 일찍이 애장이 심은 음양과 같다는 것을 해석한 뜻을 보니, 음양으로 해석하여 동정으로 삼고 동정으로 해석하여 신(神)으로 삼고 신으로 해석하여 이(理)로 삼았으니, 이것이 그 본의이겠는가? 무릇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다는 것은 절로 평탄한 말인데, 어찌 지루하게 끌어 인용해서 말과 설을 허비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주리가 너무 지나쳐 심이 이가 될 수 없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네. 무릇 불상리 불상잡은 이와 기가 모두 그러하니, 어찌 이에 불상잡이 있고 기에 유독 불상리가 있겠는가? 기에 유독 불상리가 있을 뿐이라면 이는 또한 무엇으로 말미암아 유독 불상잡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두 개의 태극이 있어 하나는 불잡(不雜)하고 하나는 불리(不離)하는 것인가? 불리 불잡은 이것은 이와 기가 대대(對待)하는 경계인데, 만약 주복(主僕)과 수역(帥役)의 구분으로 말하면 이는 기를 통솔할 수 있고 기는 이를 통솔할 수 없으니, 이것은 선사께서 권상리(權上里)33)와 변론한 것에 "유소(有所)……"라고 하였던 것은 당시 사람의 주기의 폐단을 배척한 것으로, 그 말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네. 그대는 "음양권(陰陽圈)……"이라고 한 설에 대해 독실히 믿은 지 오래인데, 어찌 나의 고설(瞽說)로 능히 따질 수 있겠는가? 하단의 기질지심(氣質之心)과 본연지심(本然之心) 등 여러 가지 설은 모두 인용한 것이 정밀하고 합당하여 의리가 조창(條暢)하니, 그대가 근년에 진보한 것이 보통이 아님이 있음을 볼 수 있겠네. 作前書之答。留案俟便有日矣。書未發。而又承惠幅。不安之中。又復不安。心之爲理爲靈。未得決案久矣。今承來示。其盈幅覼縷。無非切實正當。足以破積鬱之懷。末段所謂不取當體而正言。則有主理太過之敝。不就本根而極言。則有主理過重之敝。此說極是。如此而後。可以不偏於一邊。而爲正當眼目。古昔聖賢。或以心爲理。或以心爲氣之靈者。其非爲是耶。愚之持此說。非不久矣。而近不見可於左右。遠不見可於艾丈。私竊耿耿。無可告語。誰知爛漫同歸在於今日乎。慰辛實多。然義理無窮。今之自謂不偏者。安知果爲百世之定論而無敝否也。夫理與氣。元不相離。元不相雜。以元不相離者言。則卽理而氣已包在其中。卽氣而理固壓在其上。以元不相雜者言。則理不可喚做氣。氣不可喚做理。理自理。氣自氣矣。此於前日之書。所以有專言對言之說。來書以包在其中爲甚當。而以壓在其上爲不可。旣以壓在其上爲不可。則包在其中。亦爲不可豈以同一語意而有一可一不可者乎。賢意豈以爲氣本帶理之物。不可復言壓在其上云耶。觀下文太極圖云云之說。可見矣。若以太極圖言之。則除了上一圈。只以陰陽圈觀之。亦不無不相離不相雜之可言。豈謂此一圈。更無不相雜之妙。而只有不相離者。爲之局定乎。且陰陽二字之著於經傳者。不一而多。何必以心猶陰陽。爲之正指此圈乎。以其裏面有太極。故欲援之以訓心也。然則心者氣之精爽。精爽裏面。亦有太極乎。抑認精爽爲理。如俛宇之說乎。嘗見艾丈解心猶陰陽之義。以陰陽解作動靜。以動靜解作神。以神解作理。此其本義乎。夫性猶太極心猶陰陽。自是平坦語。何其支離牽引。費了辭說乃爾耶。此非他故。以主理太過。而恐心之不得爲理也。夫不相離不相雜。理氣皆然。豈理有不相雜。而氣獨有不相雜乎。氣獨有不相離而己。則理亦何由而獨爲不相雜乎。抑有兩太極。一則不雜。一則不離者乎。不離不雜。此是理氣對待之界至。而若以主僕帥役之分言之。則理可以統氣。氣不可以統理。此先師與權上里辨者。所以有所云云。而斥時人主氣之敝。其言不得不如是也。賢者於陰陽圈云云之說。篤信之久矣。豈區區瞽說所能上下哉。下段氣質之心本然之心諸般說。皆援引精當。義理條暢。可見吾友近年進業。有不尋常也。 권상리(權上里) 권우인(權宇仁)을 말한다. 자는 신원(信元),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전라북도 정읍의 상리(上里)에서 살았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이기논변(理氣論辨)을 치열하게 전개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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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지난번 편지에서 "양원(兩元)……"이라 한 것은 아마 그렇지 않는 듯하네. 이미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다.[元不相雜]"라고 하고 문득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元不相離]"라고 하였으니, 단지 이 두 구는 함께 거론하여 이룬 문장으로 이기의 묘함을 형용한 것은 완전하고 두루 족하여 남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네. 만약 단지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면 그 아래에 마땅히 "또한 말할 만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라고 해야 하고, 만약 단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면 그 아래에 마땅히 "또한 말할 만한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네. 지금 이미 원래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또 원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사이에 또 다시 "역자(亦字)……"더하여 보태었으니, 상 위에 다시 상을 올려놓고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올려놓은 것과 유사하지 않겠는가? 두 개의 원(元) 자가 만약 각각 방소(方所)가 있고 각각 시절(時節)이 있다면 천만 조각이라 해도 가하고 진흙에 물을 탔다고 해도 가할 것이네. 지금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 가운데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너무 분개(分開)하였다."라는 것은 무슨 일인가? 여기에 또한 "원래 아니다.[元不]"라고 하고 저기에 또한 "원래 아니다.[元不]"라고 하였으니, 서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는 오묘함을 더욱 볼 수 있네. 또 "원불상잡 원불상리(元不相雜元不相離)" 이 여덟 글자는 나의 창설(創說)이 아니고 이미 선유들이 말해 놓은 것으로 호락(湖洛)의 사이에 자자한 것인데 그대는 보지 못했던 것인가? 이(理)는 허공에 매달린 물이 아니고 단지 음양오행이 착종(錯綜)해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말하면 기는 실로 그 가운데 있네. 지금 "운행의 수각(手脚)이라 말할 수 있어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하니, 이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만일 사람이라 말한다면 이른바 수각이라는 것은 유독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건도 각정(乾道各正)"을 말함에 만물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천명 솔성(天命率性)을 말함에 사람과 사물이 그 가운데 포함 되어 있으니, 이것을 모두 화니대수(和泥帶水)34)라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대는 이러한 곳에 혹 너무 살피는 단서가 없지 않은 듯한데, 너무 살피면 천착하기 쉬우니, 어떻게 여기는가? 내가 "그 위에서 누르고 있다."라고 한 것은 나의 뜻에도 실로 우아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여 고치려 하였지만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실로 마땅하고 마땅하네. 이미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말하였다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이가 바로 기이고 기가 바로 이이다."라고 하고, 서로 섞이지 않음을 말하였다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라고 하니, 이른바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라는 것은 어찌 이와 기가 각각 한 곳에 있어 각각 스스로 용사(用事)한다는 것을 말하겠는가? 이를 기라 부를 수 없으니 이것이 이는 스스로 이라는 것이고, 기를 이라 부를 수 없으니 이것이 기는 스스로 기라는 것이네. 위아래의 단락은 단지 하나의 뜻인데 바로 위 한 단락은 옳게 여기고 아래 한 단락은 옳게 여기지 않는가?가만히 보건대 그대는 종종 같은 것을 기뻐하고 다른 것을 싫어하며 합하는 것을 기뻐하고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뜻이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일찍이 애장(艾丈)은 "심은 음양과 같다.[心猶陰陽]"는 한 구를 음양권(陰陽圈)에 배합하여 해석한 것을 보았는데, 그대 또한 이 권(圈)을 바로 가리킨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나의 설에서 운운한 것이 있었던 것은 위의 태극권(太極圈)에 연결하여 말한 것이 아니었네.기가 이미 그 가운데 포함 되어 있다고 한 것은 나의 뜻은 이와 기를 합하여 일물(一物)이 된 것이 마치 금과 동과 철을 합하여 하나의 기물이 되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노자와 부처가 합하여 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을 말한 것이 아니네. 단지 이를 말하면 기는 이가 포함한 안에 있다는 말일 뿐이니, 그대가 인용한 선사(先師)의 "기는 이 가운데의 일이다."라는 말과 무슨 구별이 있는가? 동일한 말과 뜻인데 그 취사(取舍)와 향배(向背)가 어찌 이와 같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가? "월파(月波) 어른35)……"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근세 주기(主氣)의 남은 의론이네. 이 어른의 견해는 본래 이와 같으니, 수십 년 전의 설과 여전하네. 그대의 말은 모두 옳겠지만 그러나 "심은 이의 주재이고 기의 정상이니, 그 덕을 형상하면 '허령'이라 하고 그 실제를 가리키면 '신명'이라 합니다. 미발일 때 중리를 갖춘 체가 있고 이발일 때 만사에 응하는 용이 있습니다. 주재는 그 골자의 실체이고 정상은 그 경계의 지반입니다. 동정을 꿰뚫고 적감(寂感)에 통하는 것입니다.36)"라고 하였으니, 이 단락의 문사는 오직 번잡한대도 줄이지 않았을 뿐 아니고, 주재·정상·허령·신명이라 한 것은 그 층절이 외람되이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과 허령은 실로 두 가지 물이 아니고, 신명과 주재 또한 어찌 두 건이겠는가? 만일 혹 수정한다면 "심은 기의 정상이고 이의 주재이니, 주재는 그 골자의 실두(實頭)이고 정상은 지반의 당체(當體)이다. 미발일 때 중리의 체를 갖추고 있고 이발일 때 만사에 응하는 용이 있어 동정을 꿰뚫고 적감을 갖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또 말하기를 "발자(發者)는 기이고 발지자(發之者)는 것은 심이고 소발자(所發者)는 성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단락 또한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네. 심 자를 가지고 이와 기에 상대하여 삼두(三頭)로 만들면 심은 이인가, 기인가? 아니면 이기의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심이라는 것이 있는가? 또 혹 수정한다면 위의 구절 "발자기야(發者氣也)" 네 글자를 삭제하면 가할 듯하네. 그렇지 않다면 가운데 구절"발지자심야(發之者心也)" 다섯 글자를 삭제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다시 더 신중히 생각하여 깨우쳐 주시게.전날 나의 편지에서 "정상과 허령은 실로 두 가지 물이 아니고, 신명과 주재 또한 어찌 두 건이겠는가?"라고 한 것은 그 뜻이 이것으로 저기에 짝하여 확정(確定)하고 적대(的對)하다는 것이 아니네. 다만 그 두서가 외람되이 많음을 보고 이에 총괄하여 요약하면 대개 이와 같을 뿐이네. 대저 정신·정상·허령·신명 등의 말은 비록 대략 정추가 있지만 그 실제는 두 가지 물이 아니니, 어찌 유독 허령과 신명만이 분별하는 것이 없겠는가? 기·심·성을 환치(換置)한 설은 비록 이전의 설보다 나은 듯하지만 끝내 삼두의 혐의가 있음을 면치 못하고, 심이 이기를 합한 의가 있음을 보지 못하니, 어찌 그대의 뜻은 두 조목의 설 아래에 주재의 의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발자는 기이고 소발자는 성이다."라고 한다면 소발자가 주재가 되니, 바로 장자(張子)가 이른바 "기가 유행함에 성이 주재가 된다."라는 것이고, 만약 "발지자는 심이고 소발자는 성이다."라고 한다면 발지자가 주재가 되니, 바로 장자가 이른바 "성이 유행함에 심이 주재가 된다."라는 것이니, 시험삼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일간에 우연히 《남당집(南塘集)》을 읽어보았는데, "천리가 주재하는 오묘함을 밝힌다면 그 말이 작용에 저촉되기 쉽고, 도기(道器)의 간격이 없는 오묘함을 밝힌다면 그 말이 혹 주재에 소략하다.37)"라고 한 것이 있었으니, 이 말은 처음 보았을 때 좋은 듯하여 절실하고 지극한 의론이라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 봄에 남당의 어긋난 곳은 모두 여기에 근원한 것이었네. 무릇 이가 천변만화하는 것은 모두 그 주재의 오묘함이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 것을 말함에 건도가 변화한다는 설과 같은 것이 이것인데, 다시 어디에 작용한다는 혐의가 있는가? 다만 사람의 몸에서는 작용을 성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하니, 심이 있기 때문이네. 석씨(釋氏)는 성을 령으로 여겨 불생불사(不生不死)한다는 미혹이 있었기 때문에 남당이 이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조화 본원의 바탕에 의심하였으니, 가하겠는가? 또 그 아래 단락에 주재에 대해 소략한 것 또한 분명히 알 수 없네. "도기(道器)가 합일하였다."는 곳에 이르러서는 그 주재의 오묘함이 마치 "일음 일양을 도라고 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음을 보겠네. 남당의 오성(五性)은 기로 인하여 있다는 설 및 한 층의 본연을 본연 위에다 별도로 세운 것은 작용의 혐의가 있을까 두렵지 않은 것이 없네. 이미 작용이 있을까 두려워한다면 주재에 대해 소략한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 설이 어떠한가?차설(劄說)에 "성(誠)은 성(性)에서 말한 것이고, 경(敬)은 심(心)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있으니, 봄에 그 기상과 의사가 실로 그럴 듯한 점이 있었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봄에 그렇지 않은 점이 있네. 무릇 성은 실리(實理)로 말하고 실심(實心)으로 말하네. 만약 성은 실리의 자연스러운 명칭이라 한다면 모두 실리로 말하니 그 성은 실로 의논할 것이 없고, 만약 성과 경을 상대하여 말한다면 성은 실심의 의인데 "성(誠)은 성(性)이고 경(敬)은 심(心)이다."라고 하면 성과 경에 체용과 본말의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성의(誠意)의 학문과 성신(誠身)의 공부는 반드시 잡을 것이 없고 손 댈 것이 없는 곳으로 귀결될 것이네. 더구나 성(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라는 한 단락의 말은 본래 성인의 마음에서 말한 것인데 지금 도리어 이라고 이르는 것인가? 또 무망(無妄)과 무위(無僞)는 본래 모두 사람의 마음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실로 말할 만한 무망과 무위가 없는데 어찌 무망을 이(理)라고 하여 성인의 분수에 소속시키고, 무위를 심이라고 하여 현인의 분수에 소속 시키는가? 무망(無妄)과 불기(不欺)는 비록 성인과 현인의 구분이 있지만 또한 이와 심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네. 미진한 뜻이 있어서 다시 이렇게 대략 말하네.[문] 도암(陶庵)38)이 말하기를 "장지(葬地)가 비록 종가와 가깝더라도 행상(行喪)한 뒤에 뒤 좆아 조조(朝祖)39)의 의식을 두는 것은 고례의 본의를 어김이 있으니, 사사로운 견해로 만들어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조조는 사자(死者)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사자가 생시에 종가를 지나가면서 어찌 조조의 예를 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의로 일으킬 군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답] 만약 종가의 문을 지나면서 사시(已時)라고 해서 지나치는 것은 불가하네.[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맹자》를 통해 《주역》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의리(義利)의 구분이 음양 숙특(陰陽淑慝)과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답] 왕도(王道)를 권하고 잠룡(潛龍)을 사용한 류와 같은 것이 모두 이러한 것이네. 前書兩元云云。恐不然。旣曰元不相雜。旋曰元不相離只此兩句。倂擧成文。而其形容理氣之妙。可謂完全周足。無所餘欠。若只言元不相雜而已。則其下當曰亦有不相離之可言。若只言元不相雜而已。則其下當曰亦有不相雜之可言。今旣言元不相雜。又言元不相離。而其間又復添補亦字云云。則其不類於床上之床。屋上之屋乎。兩元字。若各有方所。各有時節。則謂之千萬片可也。謂之和泥水可也。今元不相雜之中。而有元不相離焉。元不相離之中。而有元不相雜焉。則所謂太分開者。何事耶。此亦曰元不。彼亦曰元不。而其不離不雜之妙。尤可見矣。且此八字。非愚之創說也。已經先儒口語。而藉藉於湖洛間者。其未之見耶。理非懸空之物。只是陰陽五行所以錯綜而不差者。則言理而氣固在其中矣。今曰可以言運行手脚。而不可以言包在其中。此未知何說也。如言人。則所謂手脚者。獨不包在其中耶。言乾道各正。而萬物包在其中。言天命率性。而人物包在其中。此皆可謂和泥帶水耶。恐賢於此等去處或不無太察之端太察則易鑿如何如何壓在之云鄙意固疑其未雅而欲改未果今賢言如此固當固當旣言不相離。則不相離爲主。故曰理卽氣。氣卽理。言不相雜。則不相雜爲主。故曰理自理。氣自氣。所謂理自理氣自氣者。豈理與氣各在一處。各自用事之謂耶。理不可喚做氣。則是理自理也。氣不可喚做理。則是氣自氣也。上下段落。只是一意。而乃以上一段爲是。以下一段爲不是耶。竊觀賢者。種種有喜同惡異。喜合惡分底意。未知何故耶。當見艾丈以心猶陰陽一句。配陰陽圈而解之。賢亦以爲正指此圈。故鄙說有所云云。非連上太極圈而言之也。氣已包在其中云者。鄙意非謂合理與氣爲一物。如合金銀銅鐵爲一器。合蘇張老佛爲一人之意也。只是言理。則氣在理所包之內云爾。與賢所引先師氣是理中事之語。何別矣。同一語意。而其取舍向背。何若是遙絶耶。月波丈云云。此是近世主氣餘論也。此丈之見本如此。依舊是數十年前說話也。賢言恐皆得之。然其曰心者理之主宰。氣之精爽。狀其德則曰虛靈。指其實則曰神明。未發而有具衆理之體。已發而有應萬事之用。主宰。其骨子。精爽。其界至地盤。貫動靜。通寂感者也。此段文辭。不惟爲繁而不殺。而曰主宰曰精爽曰虛靈曰神明。其層節不爲猥多乎。精爽虛靈。固非二物。神明主宰。亦豈兩件。如或修潤。則曰心者。氣之精爽。理之主宰。主宰。其骨子實頭也。精爽。其地盤當體也。未發而有具衆理之體。已發而有應萬事之用。而貫動靜該寂感者。則何如耶。又曰發者氣也。發之者心也。所發者性也。此段亦有未穩。將心字對理與氣。而爲三頭。則心是理歟氣歟。抑於理氣之外。別有所謂心者耶。又或修潤。則刪去上句發者氣也四字。則似可矣。不然。刪去中句發之者心也五字。如何。更加三思。却以見喩也。前日鄙書。精爽虛靈。固非二物。神明主宰。亦豈兩件者其意不是以此配彼。而爲確定的對也。但見其頭緖猥多。而乃總而約之。大槩如斯耳。大抵精神精爽虛靈神明等說。雖約有精粗。而其實非二物也。豈獨虛靈神明無所分別耶。氣心性換置之說。雖若勝似前說。然終未免有三頭之嫌。而未見有心合理氣之義。豈賢意以爲以兩條說下。則未見有主宰之義故耶。若曰發者氣也。所發者性也。則所發者爲主宰。卽張子所謂氣之流行。性爲之主者也。若曰發之者心也。所發者性也。則發之者爲主宰。卽張子所謂性之流行。心爲之主者也。試思之如何。日間偶閲南塘集。有曰。明天理主宰之妙。則其言易涉於作用。明道器無間之妙。則其言或略於主宰。此言初看似好。以爲切至之論。更思之。南塘差處。皆原於此夫理之千變萬化。皆其主宰之妙。如言太極生兩儀。乾道變化之說。是也。更安有作用之嫌。但放人身上。不可以作用爲性者。以其有心故也。釋氏認性爲靈。有不生不死之惑。故南塘因此而反疑於造化本原之地。可乎且其下段略於主宰者。亦不可曉。到道器合一處。尤見其主宰之妙。如言一陰陽之謂道是也。南塘五性因氣有之說。及别立一層本然於本然之上者。無非怕有作用之嫌也。旣怕作用。則其略於主宰。勢所必至矣。夫知此說如何。劄說有曰。誠是性上說。敬是心上說。看來其氣象意思。固有似之。然細思之。有不然焉。夫誠以實理言。以實心言。若曰誠是命之道。若曰誠是實理自然之名。皆以實理言。其爲說。固無議爲。若以誠敬對言。則誠是實心之義。而曰誠是性。敬是心。則不惟誠敬有體用本末之嫌。而誠意之學。誠身之功。必歸沒把捉無下手處矣。況誠者天之道一段語。本以聖人心上說。而今反謂之理耶。且無妄無僞。本皆就人心上說。則固無無妄無僞之可言。豈以無妄謂理。而屬乎聖人分上。無僞謂心。而屬乎賢人分上乎。無妄不欺。雖有聖賢之分。而亦恐不必分理與心也。竊有未盡之意。復此略申。陶庵曰。葬地雖近於宗家。行喪後。追有朝祖之儀。有違古禮。本意不可以私見創行。止朝祖。所以順死者之孝心。則死者於生時過。宗家。豈有不朝祖之禮乎。後世必有義起之君子。若過宗家之門。恐不可以已時而戞過。程子曰。由孟子可以觀易。蓋言義利之分。如陰陽淑慝。如勸王道用潛龍之類。皆是。 화니대수(和泥帶水) 선(善), 악(惡), 시(是), 비(非) 등이 뒤섞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음을 뜻한다. 월파(月波) 어른 정시림(鄭時林, 1837~1912)을 말한다. 자는 언백(伯彥), 호는 월파,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월파집》이 있다. 심은……것입니다 《중헌집(重軒集)》권2〈일신재 정 선생께 올리다[上日新齋鄭先生]〉제4서에 보인다. 천리가……소략하다 《남당집》권34〈한수재 권 선생 행장(寒水齋權先生行狀)〉에 나오는 말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로의 호이다. 자는 희경(煕卿), 호는 도암ㆍ한천(寒泉),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 형조 참판ㆍ이조 참판ㆍ양관 대제학ㆍ공조 판서ㆍ의정부 좌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중부(仲父) 이만성(李晩成)이 노론 사대신(四大臣)의 당으로 몰려 피살되자 벼슬을 버리고 인제(麟蹄)의 설악(雪岳)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닦는 데 힘썼다. 1725년(영조1) 여러 번 소를 올려 군흉(群凶)을 몰아낼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용인(龍仁)에 퇴거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조조(朝祖) 발인하기 하루 전 조전(朝奠)을 마친 뒤에 영구(靈柩)를 모시고 사당에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뵙게 하는 의식으로, 조묘(朝廟)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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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기 愼庵記 학문함에 요체를 알지 못하면 범람하기만 하고 공이 없고, 덕을 닦음에 요약함을 지키지 못하면 한만하여 힘이 없다. 그렇다면 이른바 요(要)와 약(約)은 어떤 일인가? 《대학》에 이르기를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간다.[必愼其獨]"라고 하였고,《중용》에 말하기를 "그 보지 못하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듣지 못하는 바에 두려워한다.[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하였으니, 《대학》의 신(愼)은 이미 발하였을 때 성찰하는 공이고 《중용》의 신은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존양(存養)하는 공이다. 까닭에 체용(體用)을 통합하고 동정(動靜)을 갖추어 지요(至要) 지약(至約)의 의가 되니, 신이라는 한 글자에 더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선철(先哲)이 이른바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요점이 다만 홀로를 삼가는 데 있다."라고 한 것209)은 바로 이 뜻이다.지금 주인 윤치화(尹致化)210)가 재사의 편액으로 내 걸어 밤낮으로 경계하고 힘쓸 바탕으로 삼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면 그 이른바 지요(至要) 지약(至約)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체를 아는 것은 그 넓음[博]을 다하는 바이고, 요약함을 지키는 것은 그 용(用)을 지극히 하는 바이다.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편고(偏枯)하고 고루(固陋)한 구덩이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논어》 〈자장(子張)〉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먼저 그 큰 것을 확립하면 그 작은 것이 능히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주인은 힘쓸지어다! 學不知要。泛濫無功。德不守約。汗漫無力。然則所謂要所謂約。是甚底物事耶。大學曰。必愼其擉。中庸曰。戒愼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大學之愼。是已發時省察之功。中庸之愼。是未發時存養之功。所以統體用該動靜而爲至要至約之義。孰有加於愼之一字乎。先哲所謂天德王道。其要只在愼獨者。正此意也。今主人尹致化所以標揭齋顔。而爲日夕警勉之地者。乃在於此。則其非所謂知要守約者耶。然知要所以盡其博也。守約所以致其用也。不然。必不歸於偏枯固陋之科也哉。子夏曰。愽學而篤志。切問而近思。仁在其中。孟子曰。先立乎其大者。則小者不能奪。願主人勉乎哉。 선철(先哲)이……것 《심경부주(心經附註)》 〈서(序)〉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말이다. 윤치화(尹致化) 윤병현(尹秉玹, 1857~?)을 말한다, 자는 치화 호는 신암(愼庵),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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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재기 修俟齋記 갑진년(1904) 가을에 백경인(白景寅) 군이 영귀정사(詠歸亭社)211)로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제 부친께서 근래 부춘산(富春山) 산속에 한 채의 집을 지어 만년에 지내실 장소로 삼으려 하니, 원컨대 편액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네. 천하의 모든 일은 각각 주관하는 바가 있으니, 분수를 넘고 직분을 침범하면 나라에 떳떳한 형벌이 있는데, 더구나 사람이면서 하늘의 명을 대신하고 하늘의 직분을 침범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승침(升沈)과 헌지(軒輊),212) 영고(榮枯)와 궁통(窮通)은 모두 하늘의 명이고 조물주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요절하거나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아서 몸을 닦아 기다린다."라고 하여 자신에게는 닦는 것을 말하고 하늘에는 기다리는 것을 말하였으니, 단지 이 두 글자는 많은 의리를 함축하고 있어 우리들이 몸을 편안히 하고 명을 바르게 확립할 곳이 된다. 더구나 온 천하가 도도하여 도가 시대와 어긋나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힘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분수의 일일 뿐이다. 또 듣건대, 그대 부친께서는 은거하여 행실을 쌓은 지가 수십 년이니, 백발의 노년에 이르러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반드시 수신(修身)하는 것을 여생을 마칠 계획으로 삼을 것이니, 부친에게 배우는 날에 시험삼아 '수사(修俟)'두 글자를 나를 위해 올려 드리면, 생각건대 반드시 빙그레 웃으며 애초에 자신의 뜻이 아님이 없다고 하실 것이네. 甲辰秋。白君景寅。過余於詠歸亭社曰。家親近構一區屋子於富春山中。以爲晩年樓息之所。願賜所以題其顔者。余曰。然。天下萬事。各有所管。越分侵職。邦有常刑。況人而代天之命侵天之職乎。升沈軒輊。榮枯窮通。皆上天之命。造物之職也。故孟子曰。殀壽不貳。修身以竢之。於己言修。於天言竢。只此二字。涵蓄多少義理。而爲吾人安身立命處也。況大宇滔滔。道與時違。杜門塞竇。所可勉。惟己分事而已。且聞大人丈隱居積行數十年。至老白首。而有何所求哉。必以修身之爲餘日究竟計。趨庭之日。試以修俟二字。爲我而獻焉。想必莞爾而笑。以爲未始非吾意也。 영귀정사(詠歸亭社) 영귀정(詠歸亭)을 말한다. 정의림(鄭義林)이 강학을 위해 1893년 12월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會松里)에 건립한 건물이다. 여기에 아홉 성인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다. 헌지(軒輊) 고저(高低), 경중(輕重), 우열(優劣)을 의미한다.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수레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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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금양정사에 이르러 到全州錦陽精舍 존망은 예나 지금이나 번갈아 이어지는데 存亡今昔迭相尋찾아가서 오히려 옛 사림을 의지하네 尋訪猶依舊士林이요재를 생각하니 난초가 빼어났고 憶二要齋蘭有秀삼효동에 들어서니 초심이 생기네467) 入三孝洞草生心더위 먹은 행인은 매우468)를 생각하고 行人病暑思梅雨속세에서 깬 서객은 대 그늘에 앉았네 書客醒塵坐竹陰새 벗과 옛 친구가 회포 논하는 자리라 新交舊契論懷席방관자가 깊고 얕음 따지는 건 허락지 않네 不許傍觀較淺深 存亡今昔迭相尋, 尋訪猶依舊士林.憶二要齋蘭有秀, 入三孝洞草生心.行人病暑思梅雨, 書客醒塵坐竹陰.新交舊契論懷席, 不許傍觀較淺深. 초심이 생기네[草生心] '초심(草心)'은 자식의 마음을 비유하는데, '삼효동(三孝洞)'에 들어가므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한 치 풀의 마음을 가지고 삼춘의 햇볕에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다. 매우(梅雨) 매실이 익는 계절인 초여름에 내리는 장맛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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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정사에서 이사유 한은ㆍ임병일ㆍ병렬 제군에 화답하다 錦陽精舍 和李士裕【漢膺】ㆍ林【秉一秉烈】諸君 세속 티끌이 계속 괴로이 찾아드는데 俗塵滾滾苦侵尋공연히 허명을 갖고 사림에 들어있네 枉把虛名在士林옛날 이별하고 몇 번이나 푸른 눈 씻었나 昔別幾何靑拭眼새 친구도 도리어 붉은 마음 통하구나 新知還可赤通心모름지기 장년때 참된 학업을 연마해서 須從壯歲硏眞業태평성대에 뭇 음기 물리침을 보아야지 佇見昌辰退衆陰세간의 끈끈한 교분469) 도리어 우습나니 却笑世間膠漆契황금이 다하는 곳엔 우정도 깊지 않다네 黃金盡處不交深 俗塵滾滾苦侵尋, 枉把虛名在士林.昔別幾何靑拭眼, 新知還可赤通心.須從壯歲硏眞業, 佇見昌辰退衆陰,却笑世間膠漆契, 黃金盡處不交深. 끈끈한 교분 원문의 '교칠(膠漆)'은 우정이 매우 두터운 것을 말한다. 교칠은 아교와 옻인데, 아교와 옻을 합하면 매우 견고하게 결합한다.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의 우정이 매우 두터웠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교와 칠이 단단하다고 하지만 뇌의와 진중 두 사람의 우정만은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81 雷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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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축하하며 春祝 봄 축하하는 진실한 뜻을 헛되다 하지 말라 祝春誠意莫云虛바라는 바를 구구하게 다음과 같이 쓰노라 所願區區列左如세상에 성현이 나와 해와 달처럼 밝여주고 世出聖賢明日月집에 효순한 아이 태어나 시서에 힘쓰기를 家生孝順勉詩書파랑 이는 육주에 바람이 다시 잠잠해지고 六洲波浪風還靜인민은 오전50)을 익혀 예를 소홀히 않기를 五典人民禮不疏이를 도부51)에 써서 상제가 보길 기원하니 寫得桃符祈帝鑑공적인 일을 위한 일념이요 다른 뜻은 없네 爲公一念更無餘 祝春誠意莫云虛, 所願區區列左如.世出聖賢明日, 月家生孝順勉詩書.六洲波浪風還靜, 五典人民禮不疏.寫得桃符祈帝鑑, 爲公一念更無餘. 오전(五典) 다섯 가지 윤리 도덕을 이른다. 《서경》 〈순전(舜典)〉에 "오전을 삼가 아름답게 하라 하시니 오전이 능히 순하게 되었다.[慎徽五典, 五典克從.]"라고 하였는데, 채침(蔡沈)의 《집전》에 "오전은 오상(五常)이니,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라고 하였다. 도부(桃符) 복숭아나무가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입춘이나 단오에 문에다 부적으로 복숭아나무 조각을 붙였으며 이를 도부(桃符)라고 한다. 후대에 여기에 상서로운 글귀를 적은 것이 입춘첩(立春帖)이나 단오첩(端午帖)의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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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정원】에게 답함 答李泰卿【正遠】 앞뒤로 두 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도착하였는데, 연달아 봉투를 열고 읽어보니 마주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네. 인하여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면서 건강하여 몸에 병이 없으며 또한 더욱 좋아진다고 하니, 대단히 위로가 되네. 동서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곤궁함을 견디는 본래 모습이니, 자신을 옭아매어 출입하지 않는 것이 비록 목전의 어떤 일에는 괴로워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나 또한 네 가지 이익99)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농사를 대신하여 음식을 마련하는 방법은 이것을 놔두고서 다시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보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네. 영남 사람 아무개 등이 의리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서 거취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의논하면서 애매모호한 것을 지적하고 황당무계함을 널리 퍼트려서 모함100)하는 계책으로 삼으려 하니, 이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없네. 애초에는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지 않고 도외시하려고 하였는데, 곧 부모와 스승이 모욕을 받으니 한 마디 변론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 영남에 소리 높여 책망하였으며 사방에 무고를 변론하였네. 이로부터 다시 말없이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들의 행동이 어떤가를 살펴보려고 하였네. 그러나 이는 또한 사문(斯文), 세도와 중대한 관계가 있는 곳이니, 저 공백료(公伯寮)와 장창(臧倉)101) 같은 저들이 그에 대해 어찌할 수 있겠는가. 보내준 편지에서 자세히 길게 말한 것은 안에 쌓인 의기가 분출한 것으로 읽으매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올라오네. 다만 바라건대 드러내지 않고 함양하며 남몰래 수신하는 공부를 더욱 실천하여 깊은 땅속 일양(一陽)으로 하여금 발전하여 하늘에 밝게 빛나게 한다면,102) 저 하찮은 무지개103)가 그 빛에 사라지지 않겠는가. 더욱 더 노력하게나. 前後兩書。一時倂至。續續披玩。可敵對穩。仍審重省康寧。體上莫痾。亦且向和。慰仰萬萬。東西往敎。此固固窮本色。絆已不出入。雖於目前甚事。苦爲可憾。然亦非四益之一端耶。況代耕供旨之方。舍此更安有別筭耶。素其位。而爲吾所當爲而已。嶺人某某軰。不知義理可否。議論去就之爲何如。而指摘其疑似。傳衍莫謬妄。以爲萋斐貝錦之計者。無非出於猜嫌之私。初不欲與之辨焉。而置之度外。旋念父師受誣。不可無一言之辨。故己有所聲責。嶺中又有所辨誣於四方。自此更欲守靜無言。以觀彼輩擧措之如何耳。然此亦斯文世道一大關數處。彼伯寮臧倉。焉能爲甭也。示中縷縷。無非自義氣蓄積中出來。讀之不覺腔血盪激。惟願益加晦餋濳修之工。使窮泉一脈。進而爲中天之明。則彼么麽蝶蝀。不其見晛乎。勉之。 네 가지 이익 《근사록(近思錄)》 권10 〈정사(政事)〉 64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도 또한 유익함을 취할 수 있으니, 자기를 옭아매어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사람을 여러 번 가르침에 자신도 글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아이들을 대할 적에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공경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신으로 인해 남의 인재를 파괴함을 근심한다면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유익함이다'[人敎小童, 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 必正衣冠, 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 人之才爲憂, 則不敢墮, 四益也.]"라고 하였다. 모함 '처비금패(萋斐貝錦)'는 《시경》 〈항백장(巷伯章)〉에 보이는 말로 "반짝반짝 작은 무늬 자개 비단 이뤘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소인들이 처음부터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어 군자를 모함한다는 뜻이다. 공백료(公伯寮)와 장창(臧倉) 공백료는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즉 "공백요가 계손씨에게 자로를 참소하였는데, 자복 경백이 이 일을 공자에게 고하고 말하기를 '계손씨가 틀림없이 공백료의 참소에 마음이 현혹되었습니다마는, 내 힘은 오히려 공백료를 처형하여 주검을 시장에 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장차 행하여지는 것도 운명이고, 도가 장차 폐기되는 것도 운명인데, 공백료가 운명을 어찌하겠는가?' 하였다.〔公伯寮愬子路於季孫 子服景伯以告曰 夫子固有惑志於公伯寮 吾力猶能肆諸市朝 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其如命何〕"라 하였다. 장창은 《맹자》 〈양혜왕하〉에 보인다. 전국 시대 노 평공(魯平公)이 맹자(孟子)를 만나려고 했을 때, 폐인(嬖人) 장창이 맹자가 예(禮)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공으로 하여금 맹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맹자의 제자인 악정자(樂正子)가 그 사실을 맹자에게 고하자, 맹자가 이르기를 "가는 것도 누가 시켜서 갈 수 있고, 못 가는 것도 누가 막아서 못 갈 수 있지만, 가고 못 가는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후를 만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거니, 장씨의 자식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하겠는가.〔行或使之, 止或尼之, 行止非人所能也. 吾之不遇魯侯天也, 臧氏之子焉能使予不遇哉?〕"라고 하였다. 깊은……한다면 주자는 〈감흥(感興)〉에서 "추운 위엄이 온 세상을 덮었어도 양맥(陽脉)은 궁천(窮泉)에서 밝아온다.[寒威九野閉 陽德昭窮泉]"라 하였다. 복괘(復卦)에서 일양(一陽)이 오음(五陰)밑에 있으면서 양(陽)이 커져 가는 모양을 지니니, 즉 난세가 치세로 변해가는 모습을 형상한다. 무지개 원문의 '접동(蝶蝀)'에서 접은 체(螮)의 오자이다. 체동(螮蝀)은 무지개의 이칭이다. 무지개는 천지의 음기(淫氣)가 뭉쳐서 된 것이므로 음흉하고 간사한 사람을 가리킨다. 《시경》 〈체동(蝃蝀)〉에 "무지개가 동쪽에 있으니, 감히 이를 가리킬 수 없네.〔蝃蝀在東, 莫之敢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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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심숙에게 답함 答魏心叔 편지를 받들어 보매 참으로 지난해 왕림하였을 때와 같으니, 나의 고마운 마음은 오랫동안 답답했던 것을 풀어내는 것 같네. 더구나 부모를 모시면서 기거하는데 건강이 좋은 것도 알았음에랴. 편지 가득히 써놓은 내용을 보면, 마음 세움의 돈독함과 학문을 향한 부지런함을 볼 수 있으니, 이제부터 어찌 발전하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비록 눈을 부비고 무릎을 맞대며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지만, 멀리서 기대하는 마음은 더욱 커지네. 약을 쓰지도 않고 병이 낫는 약은 어찌 특별한 방법이 있겠는가. 보내준 편지에서 말한 '성실(誠實)' 두 글자가 바로 그 참된 처방이니,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노둔하고 저열한 하근(下根)104)으로 늙을수록 더욱 상태가 나빠져 가니, 아마도 이러한 의체(義諦)에 대해 헤아려서 답할 수 없는데, 그대의 근후한 뜻에 감동하여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혜량해 줄 수 있겠는가. 문목은 또한 조목에 따라 대답할 것이니 바라건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시비를 다시 알려주기 바라네. 《대학》은 《예기》의 편 가운데 하나로 있어서 세상 선비들은 〈내측(內則)〉이나 〈곡례(曲禮)〉 등 여러 편 등과 함께 똑같이 보았네. 그러다가 비로소 《예기》에서 뽑아내서 한 책으로 드러낸 자는 바로 정자(程子)라네. 그러므로 〈서문〉에서 특별히 정자 형제에 대해 말하였고,105) 주자(周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네. '공자'라고 하지 않고 '공씨'라고 하였는데, 증자와 자사가 모두 공씨라는 말 안에 포함되니, 전(傳) 10장이 자사가 지은 것이 아닌가.'초학자의 입문'은 공부의 발단을 가리켜서 말하고, '대인(大人)의 학문'은 도리(道理)의 처음과 끝을 총괄하여 말한 것이네106). '물(物)'은 체이고 '사(事)'는 용이네.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은 남과 나에 대해서 말한 것이기에 물(物)이라고 이르고, 지지(知止)와 능득(能得)은 공부의 과정에 대해서 한 것이기에 사(事)라고 이르네. '종(終)'을 먼저 말하여야 문장이 순하네.107) 承書。正是去年承枉時。區區感沃。足令積菀釋然。矧審侍省之餘。起居百福。滿紙臚列。可見立心之篤。向學之勤。率是以往。何患不進。雖不能拭眼促膝.參聽緖餘。而遙遙期仰。於玆尢至。勿藥之藥。有何別方。來喻所謂誠寶二字。是其眞詮。如何如何。義林魯劣下根。老益荒廢。恐不足以上下於此等義諦。而感服勤意。有不能無言。倘諒恕耶。問目亦且逐條答去。幸爲視至。而回示其可否爲望。大學在禮記篇中。世儒與內則曲禮諸篇。一例等視。而始簡別而表出之者。程子也。則於序文特言兩程而不及周子者。此也。不曰孔子而曰孔氏。則會子子思皆在其中。傳十章。其非子思所述耶。初學之門。指功夫發端而言。大人之學。統道理終始而言。物體也事。用也。明德新民。是人我上說。故謂之物。知止能得。是功夫邊說。故謂之事。先言終。順文也 하근(下根) 불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한 사람을 가리킨다. 특별히……말하였고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천운이 순환하여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기에 송(宋)나라의 덕이 융성하여 정치와 교화가 아름답고 밝았다. 이에 하남(河南) 정씨(程氏) 양부자가 나와서 맹자의 전함을 이어 진실로 이 책을 존신(尊信)하고 표장(表章)하셨다."라 하였다. 초학자의……것이네 초학지문(初學之門)이란 말은 《대학》 수장의 첫 구절 들어가기 전의 정자의 말에 보이니 "《대학》은 공씨가 남긴 책으로 초학자들이 덕에 들어가는 문이다.〔大學 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라 하였다. 대인지학(大人之學)이란 말은 수장 첫 구절의 주에서 "대학이란 대인의 학문이다.〔大學者 大人之學也〕"라는 말에 보인다. ​명덕과……순하네 문장이 순하다는 것은 "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종시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則近道矣.〕"라는 《대학》 수장의 구절을 가리킨다. 명덕과 신민은 물(物)이라 하고 지지와 능득은 사(事)라고 한 것은 위 구절의 주에서 "덕을 밝히는 것은 근본이 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끝이 되며, 머무를 곳을 아는 것이 시작이고 머무를 곳을 얻는 것이 마지막이다.〔明德爲本 新民爲末 知止爲始 能得爲終〕"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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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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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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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정 선생 조공찬 병서 老稼亭先生曺公贊【幷序】 여양(汝陽)에는 옛날 독행의 선비가 있었으니, 노가(老稼) 선생 조공(曺公)이 그 사람이다. 나는 근방의 후생으로 높은 산처럼 우러른 것이 지금 40년이 되었다.기축년(1889, 고종26) 여름 그의 손자 회계옹(晦溪翁)100)이 선생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벽산(碧山)의 숙소로 나를 방문하여 보여주었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은 평소에 독서는 실천을 위주로 하고 실천은 어버이 섬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근본이 확립되어 도가 생겨나 차례로 확충하였는데 한마디 말과 한 가지 행실이 순수하여 법도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성대한 덕과 지극한 행실은 전날 사우들의 입을 통해 들은 것과 더불어 부절을 맞춘 것 같았고 그 시종의 섬세한 것은 더욱 상세하였다. 회계옹의 문학과 명망이 세상에서 추중 받는 것은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러하겠는가. 《시경》〈대아(大雅) 기취(旣醉)〉에 "군자가 효자를 두었도다.[君子有孝子]"라고 하였고, 《주역》〈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찬(贊)은 다음과 같다.은거하여 효성으로 봉양함에 隱居孝養상제의 법칙 힘써 따랐네 勉循帝則물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지어 漁樵耕稼숙수101)가 끊이지 않았네 菽水不絶지극한 정성이 감응하는 바에 至誠攸感하늘이 상서를 내리네 天翁生祥하루의 봉양을 一日之養삼공과 바꾸지 않네102) 不換三公광채를 숨겨 베풀지 않았지만 潛光不施여풍은 사람에게 남아있네 餘風在人많은 사람들의 칭송 쇠하지 않아 輿誦不衰후백이 서로 천거하네 侯伯交薦포증하는 일명이 貤褒一命돌아가신 뒤에 더욱 융숭하네 身後彌隆서석산103) 남쪽에 瑞石之陽여수가 넘실거리네 汝水洋洋물가에 한 언덕 있으니 濱有一邱화목이 무성하네 有亭瀟灑선생께서 지내시던 곳이네 先生遺庄노가라 편액을 걸었으니 揭以老稼은미한 뜻 더욱 드러나네 微意愈彰후손이 아름다움 계승하여 有孫趾美문과 담장이 공허하지 않네 門墻不空나의 숙소로 방문하여 過我旅榻유문을 보여 주네 示以遺文두 손으로 받들어 장엄하게 읽어보니 雙擎莊讀글자마다 전훈이네 字字典訓생전에 미처 뵙지 못한 것 한스러우니 恨不及時이것을 보고 스스로 힘쓰네 鑑此自勵실추시킨 고아가 失墜孤苦슬피 눈물 흘린들 어찌 쫒을 수 있으랴 哀霣曷追아, 너희 후생들은 嗟爾後生이 유장을 보아라 視此遺狀한마디가 하나의 약석이니 一言一藥어찌 공경한 마음 일으키지 않으랴 曷不起敬 汝陽古有篤行士。老稼先生曺公其人也。余以傍近後生。高山仰止。爲四十年于玆矣。己丑夏。其孫晦溪翁。持先生遺狀。過余於碧山旅舍而示之。謹覵先生。平日讀書以踐履爲主。踐履以事親爲先。本立道生。次第充拓。而一言一行粹然。無不出於規矩繩墨之中。其盛德至行。與前日得於士友之口者。如合左契。而其始終纖悉。則爲加詳矣。晦溪翁之文學聲望。見重於世者。豈無所自而然耶。詩曰。君子有孝子。易曰。碩果不食。曷不偉哉。贊曰。隱居孝養。勉循帝則。漁樵耕稼。菽水不絶。至誠攸感。天翁生祥。一日之養。不換三公。潛光不施。餘風在人。輿誦不衰。侯伯交薦。貤褒一命。身後彌隆。瑞石之陽。汝水洋洋。濱有一邱。花木蔥籠。有亭瀟灑。先生遺庄。揭以老稼。微意愈彰。有孫趾美。門墻不空。過我旅榻。示以遺文。雙擎莊讀。字字典訓。恨不及時。鑑此自勵。失墜孤苦。哀霣曷追。嗟爾後生。視此遺狀。一言一藥。曷不起敬。 회계옹(晦溪翁) 조병만(曺秉萬, 1829~1895)을 말한다. 자는 흠일(欽一), 호는 회계(晦溪),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전라도 화순에 살았던 유학자로 흥선대원군이 실세하여 직곡산장(直谷山莊)으로 은퇴하자 1875년(고종12) 대원군을 고종이 직접 모셔와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위리안치되었다. 저서로는 《회계집》이 있다. 숙수(菽水) 콩죽과 맹물이라는 뜻으로, 가난하지만 효자가 어버이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자로(子路)가 집안이 빈궁해서 효도를 제대로 행하지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극진히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효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하루의……않네 왕안석(王安石)의 시 〈송교집중수재귀고우(送喬執中秀才歸高郵)〉에 "고인이 하루 동안이라도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았네[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라고 하였다.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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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정찬 병서 枕潄亭贊【幷序】 천지 일종의 청수(淸秀)한 기(氣)가 흐르고 솟아 명산(名山)과 호수(好水)가 되고, 배태하여 일인(逸人)과 달사(達士)가 된다. 일인과 달사가 명산과 호수를 만나면 그 취미가 합하는 것은 비록 관포(管鮑)의 교분104)이라도 그 뜻을 넘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만나면 반드시 올라 임해보고, 올라 임해보는 것이 부족하면 반드시 거닐어보고 거닐어보는 것이 부족하면 반드시 그 땅에 나아가 정자를 지어 마치 장차 거기서 몸을 마칠 것 같이 한다.호남에 금오산(金鰲山)105)이 있으니, 대개 남쪽 지방의 승구(勝邱)이다. 중고에 향 선생(鄕先生) 팔우(八愚) 홍공(洪公)106)이 일찍이 이곳에서 장수유식(藏修遊息)107)하였다. 선생은 일찍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할 뜻을 품었으나 결국 등용되지 못하였고, 뜻을 얻은 것은 오직 이 한 구역 수석(水石)일 뿐이었다. 지극한 정은 무정(無情)에 있고, 지극한 맛은 무미(無味)에 있어 여기에서 잠자고 양치하면서 그저 여생을 마쳤다. 오호라! 흥폐(廢興)는 일정하지 않고 유무(有無)는 서로 바뀌니, 사람과 정자는 볼 수 없으나 오직 바위에 걸린 구름, 고개 위의 달, 시냇가의 새, 강가의 원숭이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옛날을 회상하며 다하지 않는 정을 갖게 한다.을유년(1885, 고종22) 봄에 6대손 채주(埰周) 씨108)가 여러 종친들과 도모하여 옛터의 조금 북쪽에 나아가 중건하여 한 번 새롭게 하였으니, 그 계술(繼述)109) 긍구(肯構)110)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은 또 산수를 만난 것 때문만이 아니다. 어진 주인을 만난 것은 금오산의 다행이고, 어진 자손을 만난 것은 침수정의 다행이다. 나는 비록 불민하지만 우선 금오산을 위해 축하하고 이어서 침수정을 위해 축하한다.찬(贊)은 다음과 같다.금오산 아래는 維鰲之下홍씨의 토구111)이네 洪氏菟裘초연히 멀리 떠나 超然遐擧조용히 수양하는 것에 힘썼네 俛焉潛修정자가 황폐해 진 지 이에 오래 되었으니 亭廢斯久후손들이 도모하였네 雲仍是圖이미 정자를 지어 旣肯其構그 도모를 전술할 것 생각하네 思述厥謨종족을 모아 기뻐하고 合族懽忻벗을 불러 절시112)하였네 聚友切偲강습에 과정이 있고 誦習有程가곡113)을 때로써 하네 歌哭以時감화가 미친 곳에 濡染攸曁종유하니 또한 영광일세 從遊亦榮오호라! 세세토록 嗚乎世世그 명성 실추시키지 말지어다 無替厥聲 天地一種淸秀之氣。流峙而爲名山好水。胚胎而爲逸人達士。以逸人達士而遇名山好水。則其趣味之合。雖管鮑之契。不足以兪其意。是以。遇之必登臨焉。登臨之不足。必徜徉焉。徜徉之不足。必卽其地結其亭。若將終身焉。湖之陽有金鰲山。蓋南方勝邱也。中古鄕先生八愚洪公。嘗藏修於此。先先夙抱經濟。竟不見用。而所以相得。惟此一區水石。至情在於無情。至味在於無味。枕焉潄焉。聊以卒歲。嗚乎。廢興不常。有無相禪。人與亭不可得見。而惟有巖雲嶺月。溪鳥江猿。令人有懷古不盡之情。歲乙酉春。六代孫埰周氏。謀與諸宗。就舊址之稍北。重建而一新之。其出於繼述肯構之至意者。又不但爲山水之遇而已也。遇賢主人。金鰲山之幸也。遇賢子孫。枕潄亭之幸也。余雖不敏。先爲金鰲山賀。繼以爲枕潄亭賀。贊曰維鰲之下。洪氏菟裘。超然遐擧。俛焉潛修。亭廢斯久。雲仍是圖。旣肯其構。思述厥謨。合族懽忻。聚友切偲。誦習有程。歌哭以時。濡染攸曁。從遊亦榮。嗚乎世世。無替厥聲。 관포(管鮑)의 교분 춘추 시대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우정을 말한다. 《열자(列子)》 〈구명(九命)〉에 "관중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내가 젊어서 곤궁했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하였는데 내 몫으로 많이 이익을 취해도 포숙은 나를 욕심 많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는 용암산(聳岩山, 547m)의 옛 이름이다.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솟을 용(聳)과 바위 암(岩)자인데, 원래는 산위의 샘에 금자라[金鰲]가 있다고 하여 금오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용암이 솟아오르듯 솟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향 선생(鄕先生) 팔우(八愚) 홍공(洪公) 홍경고(洪景古, 1645~1699)를 말한다. 호는 팔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장수유식(藏修遊息)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채주(埰周) 씨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호는 봉남(鳳南)이다. 계술(繼述) 조상의 하던 일이나 뜻을 끊지 아니하고 이어 가는 것을 말한다. 긍구(肯構)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이다. 기꺼이 집터를 닦고 집을 짓는다는 뜻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아들이 잘 계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은 당(堂)의 터도 만들려고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건물을 만들려고 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토구(菟裘) 춘추 시대 노 은공(魯隱公)이 왕위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려고 한 곳인데, 전하여 은거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春秋左氏傳 隱公11年》 절시(切偲)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이다. 절절은 간곡하고 지극한 것이고, 시시는 자상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붕우 간에 강마하고 권면하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어떠해야만 선비라고 할 만한가를 묻자, 공자가 답하기를 "간곡하고 지극하며 자상하고 부지런하며 화락하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子路》 가곡(歌哭) 신령에게 노래하고 곡(哭)을 하는 것이다.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에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니 노래와 곡을 하기를 청합니다.[凡邦之大烖 歌哭而請]"라고 하였는데, 정현의 주(注)에 "노래하는 자가 있고, 곡을 하는 자가 있는 것은 슬픔으로써 신령을 감동시키고자 한 것이다.[有歌者, 有哭者, 冀以悲哀感神靈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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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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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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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보름밤에 九月望夜 달이 아주 둥근 보름에 국화가 막 피니 月正圓輪菊發初중구일이 마침 조금 지난 때라오 時當重九適過餘부슬비에 먼지 씻겨 일천 산이 깨끗하고 塵晴小雨千山淨된서리에 잎 떨어져 일만 나무 성글구나 葉脫嚴霜萬木疏가을 경치 참으로 유람하며 즐길 만하고 秋景正堪遊賞樂산 사람 또 조용히 거처함을 좋아한다오 山人且喜自幽居맑고 진솔한 의미를 누가 알 수 있으랴 淸眞意味誰能識빈 창가에 조용히 앉으니 노승 같구나 靜坐空窓老釋如 月正圓輪菊發初, 時當重九適過餘.塵晴小雨千山淨, 葉脫嚴霜萬木疏.秋景正堪遊賞樂, 山人且喜自幽居.淸眞意味誰能識? 靜坐空窓老釋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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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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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 초당에 홀로 앉다. 주자의 시에 차운하다 重陽日 草堂獨坐 次朱子韻 적적한 초당 중구일에 寂寂草堂重九時대문 나섰는데 함께 돌아갈 이 없네 出門無與可同歸술을 사서 가절에 보답할 필요 없으니 不須沽酒酬佳節병든 몸 이끌고 석양빛 대하며 스스로 웃네 自笑扶疴對晩暉축 늘어진 정원의 솔은 푸른 빛이 문을 덮고 落落園松靑遮戶우뚝 솟은 창가의 국화는 향기가 옷에 스미네 亭亭窓菊馥沾衣내 마음 아는 것은 되려 정 없는 물건이니 知心却在無情物은자를 이끌어 움직이매 흥이 적지 않아라 惹動幽人興不微 寂寂草堂重九時, 出門無與可同歸.不須沽酒酬佳節, 自笑扶疴對晩暉.落落園松靑遮戶, 亭亭窓菊馥沾衣.知心却在無情物, 惹動幽人興不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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