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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형 김공 종현 송재의 시에 차운하다 次戚兄金公【綜鉉】松齋韻 정정한 칠십 일곱의 나이로 亭亭七十春사물에 기탁한 덕이 새롭네384) 託物德惟新범질은 만취로 조카에게 기대하고385) 晩翠范期姪중니는 후조로 사람에게 가르쳤네386) 後凋尼敎人눈 내린 아침에는 별난 정취가 많고 雪朝多別趣달 뜬 저녁엔 이웃 되어 외롭지 않네 月夕不孤隣내가 원하건대 더욱 부지런히 힘써서 我願彌勤勵초연히 티끌 세상을 벗어나야 하리라 超然出世塵 亭亭七十春, 託物德惟新.晩翠范期姪, 後凋尼敎人.雪朝多別趣, 月夕不孤隣.我願彌勤勵, 超然出世塵. 사물에……새롭네 호가 '송재(松齋)'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범질은……기대하고 조급히 이루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범(范)'은 곧 '범질(范質)'이다. 그가 송(宋) 나라 재상이 되자 조카인 고(杲)가 품계를 올려주도록 요구하자 시를 지어 깨우쳤다. 그 시에 "활짝 핀 정원의 꽃은 일찍 피나 도리어 먼저 시들고,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 소나무는 울창하게 늦도록 푸르름을 머금는다.[灼灼園中花, 早發還先萎, 遲遲潤畔松, 鬱鬱含晩翠.]"라고 소나무를 칭찬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小學集註 卷5 嘉言》 중니는……가르쳤네 굳은 절조를 말한 것이다. '니(尼)'는 곧 '중니(仲尼)'로 공자의 자이다.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소나무를 칭찬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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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기 玉蓮亭記 주 부자(朱夫子) 시에 이르기를 "강을 건너 연꽃 따니, 열 번이나 반복해도 마음에 싫증나지 않네. 무극옹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깊은 속마음 마침내 누가 알아주랴.[涉江采芙蓉, 十反心無斁. 不遇無極翁, 深衷竟誰識?]"라고 하였는데,161) 읽을 때마다 사물에 의탁하여 정을 붙여 감개가 무량한 뜻을 볼 수 있었다.무릇 연(蓮)이라는 사물은 《시경》에 드러나고〈이소(離騷)〉에 보이고 여러 시인들이 읊조린 작품에 섞여 나오는데, 염계 부자(濂溪夫子)의 〈애련설(愛蓮說)〉에 이르러 비로소 발휘되어 남은 뜻이 없게 되었고, 이어서 그 속마음을 깊이 얻은 것이 있으니, 바로 주 부자의 이 시이다. 이것은 양춘(陽春)의 원기는 천년에 한 맥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노사 선생(蘆沙先生)162)의 증손 눌경(訥卿) 씨가 연(蓮) 꿈을 꾸고 연을 얻어 인하여 연못에 심고는 그 가에 정자를 지어 편액을 옥연(玉蓮)이라 하였다. 옛날에 매화·소나무·꽃·풀에 대해 꿈을 꾼 것이 하나가 아니고 많이 있다. 대개 성리 사화(聲利詞華)와 유방 사상(遊放思想)의 정이 각각 그 유(類)로써 응한 것이다. 지금 눌경의 뜻이 성리 사화와 유방 사상의 사이에 있지 않으니, 힘쓰고 힘써 기대할 것은 오직 가정의 사업과 염민(濂閩)163)의 학문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꿈속에 드러남이 있는 것은 생각건대 또한 한가로운 초목에 있지 않을 것이다.오호라, 슬프도다! 이 때가 어느 때인가? 완악한 음의 기운이 긴 밤을 이루고 천지가 막혔으니, 원컨대 눌경은 그 뿌리를 깊이 숨기고 그 아름다움을 잘 감추어 박괘(剝卦)의 위164)와 복괘(復卦)의 아래165)에서 먹히지 않는 종자로 삼으면 내 장차 옥련의 한 가지를 보고서 봄이 오는 소식을 찾을 것이네. 朱夫子詩曰。涉江采芙蓉。十反心無斁。不遇無極翁。深衷竟誰識。每讀之。可見其托物寓情感慨不盡之意。夫蓮之爲物。著於詩。見於離騷。雜出於諸家歌詠之作。至濂溪夫子愛蓮說。始發揮之無餘蘊。繼之而有深得其衷者。卽朱夫子此詩也。此非陽春元氣千載一脈也耶。蘆沙先生曾孫訥鄕甫。夢蓮得蓮。因栽于池。築亭其上。題其顔曰玉蓮。古有夢梅夢松夢花夢草。不一而多矣。蓋其聲利詞華遊放思想之情。各以其類而應焉。今訥卿之志。不在於聲利詞華遊放思想之間。而所以勉勉期待者。惟是家庭之業。濂閩之學而已。然則其有以發於夢寐者。想亦不在於閒草木也。嗚乎悲夫。此時何時。頑陰長夜。九野閑塞。願訥卿深晦其根。好藏其艶。以爲剝上復下不食之種也。吾將視玉蓮一枝。以訪開春消息焉。 주 부자(朱夫子)……하였는데 주자의 시 〈봉동장경부성남십이영(奉同張敬夫城南二十詠)〉가운데 열 넷째 탁청(濯清) 시를 말한다.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염민(濂閩) 염계(濂溪)와 민중(閩中)으로, 염계는 호남성(湖南省)에 있는데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이고, 민중은 복건성(福建省)에 있는데 주희(朱熹)가 살던 곳이다. 박괘(剝卦)의 위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한 것을 말한다. 복괘(復卦)의 아래 《주역》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지라 후회하는 데 이르지 않으니, 크게 선하여 길하다.[初九, 不遠復, 毋祗悔 元吉.]"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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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기 玉山記 《예기》〈학기(學記)〉에 이르기를"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무릇 옥이라는 물건은 광물로 바탕으로 하고 있고 박옥(璞玉)으로 온축하고 있어 그 겉은 거칠고 그 본질은 희니, 반드시 숫돌로 다스리고 창(磢)으로 연마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다스리면 거친 것이 정밀해지고 오래 연마하면 흰 것이 광채가 난다. 더욱 정밀하고 더욱 광채가 나는 데 이르러 천하의 보배가 이루어 질 수 있으니, 이것이 고인이 학문을 옥에 견주었던 까닭이다. 학문이 이미 조예가 있으면 덕은 진보할 수 있는데, 옥이 온화하면서 윤택함은 인(仁)이고, 치밀하면서 견고함은 지(智)이고, 모가 져도 상처내지 않음은 의(義)이고, 드리워 떨어질 듯함은 예(禮)이고, 부윤(孚尹)이 사방에 두루 통함은 신(信)이라고 하였으니,166) 이것이 고인이 덕을 옥에 견주었던 까닭이다. 학문이 이미 성취가 있고 덕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면 출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한 보배가 몸에 있으면 실로 바깥에 아름다움을 자랑해서는 불가하고 또 남에게 팔기를 구하는 것이 불가하니,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자랑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반드시 깨진 옥인 줄 알 것이다. 이것이 고인이 출처를 옥에 견주었던 까닭이다.사문(斯文) 이영일(李榮一)은 고가(古家)의 이름난 후예이고 우리 고을의 걸출한 선비이다. 옥산(玉山)에 살기에 그것으로 재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 뜻을 취한 것은 생각건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감히 빈말로 언급할 수 없어 삼가'옥(玉)'한 글자를 거론하여 붕우 간에 절차탁마하는 뜻을 다할 뿐이다. 禮曰。玉不琢。不成器。人不學。不知道。夫玉之爲物。藉之以礦。蘊之以璞。其殼也麤。其質也素。必攻之以礛。磨之以磢。攻之勤則麤者精。磨之久則素者光。至於益精益光。而天下之寶。得以成焉。此古人所以比學於玉也。學旣有造。則徳可以進。溫而澤仁也。密而栗知也。廉而不劌義也。垂之如墜禮也。孚尹房達信也。此古人所以比德於王也。學旣有成。德無不全。則可以語出處矣。至寶在躬。固不可以誇美於外。又不可以求售於人。若有一毫自衒之心。吾見其必敗玉矣。此古人所以此出處於玉也。李斯文榮一。古家名裔。吾鄕偉儒。所居玉山。因以名齋。其意所取。想不出此。余亦不敢以謾語及之。謹擧玉一字。以效朋友切磨之義云爾。 옥이……하였으니 《예기》 〈빙의(聘義)〉에 나오는 말이다. 부윤(孚尹)에 대해 정현(鄭玄) 주(注)에는 "옥의 채색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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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기일에 밤을 세울 때 진후산의 '향래일판향 경위증남풍' 시42)를 사용하여 분운해서 절구 시 10수를 짓다 先師諱辰 達夜時 用陳後山向來一瓣香敬爲曾南豐之詩 分韻得十絶 예로부터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니 從古人生三섬기는 도리를 똑같이 해야 하네43) 事之道非兩구산44)에는 명철하신 스승 계시니 臼山有哲師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셨네 爲我正趨向지와 행은 여전히 형편없는데 知行尙鹵莽치아와 두발은 대뜸 쇠해졌네 齒髮遽衰頹초심 저버려 참으로 부끄러우니 愧煞負初心이제는 변변찮은 사람이 되었네 至今作底來근심스레 앉으니 생각이 끝없는데 悄坐思何極망연하여 뭔가 잃은 듯하네 茫然如有失내 나이 이제 59세요 吾年五十九스승 돌아가신 지 21년이네 樑折卄加一스승의 정령을 거의 첨앙할 수 있으니 精靈庶可瞻북쪽 향해 숲 골짜기로 흘러가누나 北指流林磵따라가고 싶지만 끝내 무엇으로 말미암을까 欲往竟何由멀리서 공경히 향불 사를 뿐이네 遠呈心裏瓣고개 들어 사해를 바라보고 擧頭望四海묵묵히 헤아린다오 黙爾有商量실컷 먹으며 어찌 더러움 달게 여기랴 飽飫寧甘穢야위어도 끝까지 향기 간직하리라 槁枯終抱香학문은 묻노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學問問何如마음을 전함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傳心爲究竟마음공부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心功復何如시종 경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네 終始在於敬존덕성(尊德性)의 비결이 분명한데 分明尊性訣그 일맥을 누가 붙들어 유지할거나 一眽孰扶持노유(老儒)께서 당시에 흘렸던 눈물 禪宿當年淚지극히 공정하고 작위함 있지 않았네 至公非有爲화도45)에는 꽃이 다시 피고 華島花重發월암에는 달이 절로 맑네 月菴月自澄스승께 가르침을 받았던 곳 坐春立雪處또렷하게 예전 일이 기억나네 歷歷記前曾오늘 밤은 어떤 밤인가 今夕是何夕해마다 오는 7월 3일이네 年年七月三나그네 회포에 마음까지 좋지 않은데 旅懷兼作惡가을 기운이 또 강남 같구나 秋氣又江南이내 생애 무슨 일 할거나 此生何所事부처에 보은하여 충성하려네 報佛願言忠곧장 죽음에 이른 뒤에는 直到斃而後운명의 후박과 상관 없다네 不關命嗇豊 從古人生三, 事之道非兩.臼山有哲師, 爲我正趨向.知行尙鹵莽, 齒髮遽衰頹.愧煞負初心, 至今作底來.悄坐思何極? 茫然如有失.吾年五十九, 樑折卄加一.精靈庶可瞻, 北指流林磵.欲往竟何由? 遠呈心裏瓣.擧頭望四海, 黙爾有商量.飽飫寧甘穢? 槁枯終抱香.學問問何如? 傳心爲究竟.心功復何如? 終始在於敬.分明尊性訣, 一眽孰扶持.禪宿當年淚, 至公非有爲.華島花重發, 月菴月自澄.坐春立雪處, 歷歷記前曾.今夕是何夕? 年年七月三.旅懷兼作惡, 秋氣又江南.此生何所事? 報佛願言忠.直到斃而後, 不關命嗇豊. 진후산(陳後山)의……시 진후산은 송(宋)나라 진사도(陳師道)로, 이 시는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 짓다〔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라는 제목의 시이다. 거기에 "지난날 한 줌 향을, 공경히 증남풍을 위해 살랐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고 하였다. 《後山集 卷1》 증남풍은 진사도의 스승 증공(曾鞏)을 이른다. 예로부터……하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도리를 말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구산(臼山) 어디인지는 모르나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강학했던 곳으로, 전우의 또 다른 호이기도 하다. 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의 계화도(繼華島)로, 전우(田愚)가 만년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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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보112) 【용동】에게 답함 答朴寬甫【容束】 매번 생각건대 우리 관보(寬甫)는 의용(儀容)은 단정하고 순수하며 재성(才性)은 열리고 시원하여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며 경전에 힘쓰고 학문을 쌓았지만, 부족한 점은 단지 격려하여 진작하는 뜻일 뿐이었네. 이것은 전체에 있어서는 한 가지 선이 미비한데 불과하지만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요체와 귀결을 논하자면, 어찌 다만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는 것113)일 뿐이겠는가? 보잘것없는 벗의 마음은 일찍이 이것을 염려하여 갖가지에 대해 어리석은 견해를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네. 경문(景文)이 와서 그대 편지를 받았으니, 뉘우쳐 깨닫고 근심하여 분발하는 뜻이 언사(言辭)에 넘쳐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졌네. 오호라! 이 같이 좋은 자질에 또 이러한 좋은 의사를 가지고 있으니, 이로부터 진취(進就)하는 것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전지(田地)가 이미 마련되었으니 농사짓고 수확하는 것을 바랄 수 있고, 근원이 이미 확립 되었으니 지류는 통달할 수 있네. 다시 바라건대 지금부터 이후로 이 뜻을 굳게 지켜 조금이라도 해이한 때가 없게 하여, 음식과 기거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이 일일이 이 뜻에서 나오도록 하시게. 문목은 조목대로 답하지만 어찌 오류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다시 깨우쳐 주시게.[문]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천하에 성을 말함은 고일 뿐이다.〔天下之言性也 則故而已矣]"라고 한 것은 성(性)을 형용할 수 없어 단지 이미 그러한 사적을 들어서 말한 것이니, 성선(性善)을 말함에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다114)는 뜻과 같은 것입니까?[답] 실로 그러하네.[문] "진심(盡心)"의 '심(心)' 자는 온전히 이(理)의 심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기(理氣)의 심을 가리키는 것입니까?[답] 이 심 자는 이(理)의 양(量)이네. 每念我寬甫儀容端粹。才性開爽。樂善嗜義。劬經績學。而所少者。只是激厲振發底意耳。此在全體。不過爲一善之未備。而論其進修要歸。則奚但大車之無輗。小車之無軌而已哉。區區知舊之心。曾不無以此爲慮。而種種效愚者也。景文來。得承心晝。其悔悟憂憤之溢於言辭。娓娓而不止。嗚乎。以若好資質。又有此好意思。從此進就。豈有涯量。田地旣辨。耕獲可望。根源旣立。枝流可達。更願自今以往。堅守此志。勿使少有解散時節。至於飮食起居凡百云爲。一一自此志中流出也。問目逐條奉答。安知無差謬也。幸再諭之。天下之言性也。則故而已云者。性不得形言。而只擧已然之事迹而言。如道性善。必稱堯舜之意耶。固然。盡心之心字。是全指理之心耶。理氣之心耶。此心字。是理之量。 박관보(朴寬甫) 박용동(朴容東, 1860~?)을 말한다. 자는 관보,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큰 수레에……것 《논어》 〈위정(爲政)〉에 "사람으로서 신의가 없다면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대거에 예가 없거나 소거에 월이 없으면, 어떻게 굴러갈 수가 있겠는가.〔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대거는 짐수레, 소거는 병거(兵車)나 사냥하는 수레를 말한다. 예(輗)는 수레 앞에 뻗친 두 개의 채장〔轅〕 끝에 가로로 붙인 나무인데, 이것을 소의 멍에에 묶어서 끌게 하는 것이고, 월(軏)은 원(轅)의 끝에서 위로 구부러진 것으로, 가로 댄 나무〔橫木〕에 걸어서 말의 목에 얹어 끌게 하는 것이다. 성선(性善)을……일컬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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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기 石梧記 용한당(容閒堂) 주인은 나의 죽마고우이다. 하루는 그의 족대부 석오당(石梧堂)의 당기(堂記)를 보여 주었는데, 기문을 지은 사람은 금오 산인(金鰲山人) 홍공(洪公)139)이었다.오호라! 내가 석오당에 올라 이른바 석오라는 것을 본 지 오래 되었다. 일찍이 기억하건대, 그 한 구역의 돌이 평평하게 깔려 방정하였는데 넓이는 십여 명을 용납할 만하였고, 한 그루 오동나무는 둥글기가 수레의 일산 같았고 드리운 그늘은 또 족히 그 돌을 덮을 만하였다. 주인옹은 여기에서 노닐며 읊조리고 여기에서 머물며 지냈는데, 그 그윽한 경치는 형언할 수 없었다.몇 해 전에 듣건대 주인옹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를 옹의 흥치로 지금 비록 이 돌과 오동나무를 소유할 수 없지만 새로 우거하는 문 앞에 반드시 어떤 물건이든 다시 돌과 오동나무 같은 것을 두었으리라 여겼다. 지금 당의 기문을 보건대, 바로 다시 석오(石梧)로 자처하였으니, 어찌 옹은 사물에 국한되는 것이 이와 같은가? 아!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로 통달한 것이다.무릇 사물을 완호하면 국한되고 이치를 따르면 통달하니, 돌과 오동나무는 하나의 사물이지만 돌과 오동나무가 될 수 있는 이치는 실로 하나의 사물이 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능히 지절(志節)에 힘쓰고 힘써 확고하여 꺾이지 않는다면 누가 내 마음이 돌이 아니라 하겠으며, 진실로 능히 취사(取舍)를 분별하여 그 큰 것을 확립하면 누가 그 오가(梧檟)를 버리라140)고 하겠는가. 선을 가려서 굳게 지키는 도는 그 대강이 절실하여 은연히 보통의 명물(名物)에 함축시키는 것이다. 이에 옹이 돌과 오동나무를 위한 것은 사물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안 지가 오래 되었으니, 어찌 한 구역 돌과 한 그루 나무가 있고 없는 것에 얽매이겠는가. 이것이 집을 떠나 임시로 지내는 곳에 돌과 오동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옹이 돌과 오동나무를 위하는 것은 실로 여전한 이유이니, 전날 경물의 사이에 서로 기약한 것은 그 알았던 것이 또한 너무 천박하지 않은가.의림(義林)은 비루한 사람이라 본래 족히 따질 만한 것이 없으니, 원컨대 석오옹(石梧翁)의 뒤를 따라 이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또 금오 산인과 용한당 주인과 함께하여 노년의 계획으로 삼기를 바란다. 容閒堂主人。余竹馬友。一日示其族大父石梧堂堂記。記之者。金鰲山人洪公也。嗚乎。余升石梧堂。見所謂石梧者久矣。曾記其一區石。平鋪方正。廣可容十數人。一株梧。團如車盖。所吐之陰。又足以庇其石。主人翁游詠於斯。盤旋於斯。其窈窕景致。不可名狀。數歲前。聞翁移寓他所。余謂以翁之興致。今雖不得有此石梧。而新寓門前。必有何物復有如石梧者。今見堂記。乃復以石梧自居。何翁之局於物如是耶。噫。非局也。乃所以通也。夫玩物則局。循理則通。石梧一物也。而其可以爲石梧之理。固非一物之所獨得。苟能勉勵志節。確然不拔。則孰謂我心匪石。苟能辨别取舍。立乎其大。則孰謂舍其梧檟。擇善固執之道。其梗槩切實。隱然含蓄於尋常名物之地。於是乎知翁之爲石梧。不在於物而在於己久矣。豈繫乎一區右一株木之有無哉。此所以離室僑居。不與石梧相近。而翁之爲石梧。固自若也。前日之相期於景物之間者。其爲知不亦淺乎。義林鄙生也。本不足爲有無。願從石梧翁之後。講明此義。又與金鰲山人容閒主人共之。以爲桑榆之計。 금오 산인(金鰲山人) 홍공(洪公) 홍경고(洪景古, 1645~1699)를 말한다. 호는 팔우(八愚),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오가(梧檟)를 버리라 맹자가 "지금 장사가 오동나무와 개오동나무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기른다면 천한 원예사가 되는 것이다.[今有場師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데, 이는 곧 사람이 중대한 자기의 심지(心志)는 기를 줄 모르고 사소한 구복(口腹)이나 채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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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기 瑞軒記 남쪽 지방에 헤아릴 만한 명산이 하나가 아니지만 그 체덕(體德)을 말한다면 모두 서석산(瑞石山)만 못하다. 봉우리는 기울지 않았고 돌은 거칠지 않으며 초목으로는 가시나무가 없고 벌레로는 독충이 없다. 정령(精靈)이 내린 바에 현인이 배출되고 지맥(枝脈)이 뻗은 곳에 명구(名區)가 서로 바라보인다. 아마도 천지가 열리던 초기에 일종의 정숙(禎淑)한 기운이 모여들어 응결된 것이 있을 것이다. 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백 여리를 달려 화순[爾陵]의 경계에 이르러 연화봉(蓮花峰)이 되었다. 나의 벗 사문(斯文) 김성중(金誠仲)이 연화봉 끝자락에 한 채의 정사를 지었는데 서석산과 정확히 마주하고 있다.무릇 군자는 산에 대해서 적취(積聚)한 형상을 보고 그 덕(德)을 기르고, 후중(厚重)한 형상을 보고 그 인(仁)을 돈독히 한다. 더구나 늘어선 봉우리와 여러 산들과 견줄 것이 아니고 마치 거인장자(巨人長者)가 높은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채 엄연히 창문과 궤석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아서, 출입하고 기거하며 휴식하고 한가로이 지냄에 비록 잠시라도 떨어지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된 까닭이다.오호라! 헌이 이미 상서로우니, 사람이 유독 상서롭게 되지 않겠는가. 감히 침을 뱉지 못하는 것이 청성(靑城)의 산과 같고145) 감히 거만하지 못하는 것이 남간(南澗)의 돌146)과 같아 담담하게 마주하고 묵묵히 계합하며, 가만히 수양하고 고요히 함양하여 낮은 곳으로부터 높이 올라가고 작은 것을 쌓아 큰 것을 이루어 명망과 실상이 높고 무거우며 기풍과 운치가 높고 가파른데 이른다면 한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경성(景星)과 경운(慶雲)147) 같이 우러르고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 같이 사모할 것이니, 그 사람 가운데 상서로움이 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서헌(瑞軒)의 주인이 된 것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南方名山可數者非一。而言其體德。則皆莫若瑞石焉。峯不偏側。石不麤厲。草無荊棘。虫無虺蝎。精靈攸降。賢人輩出。枝脈攸及。名區相望。蓋開闢之初。一種禎淑之氣。有以鍾聚融結者也。山之一支。南走百餘里。至爾陵界爲蓮花峰。余友金斯文誠仲。就峯之趾。築一區精舍。與瑞石的對。夫君子之於山。觀積聚之象以育其德。觀厚重之象以敦其仁。況非列峯群巒之比。而如巨人長者。峩冠博帶。儼然峙立於窓牖几席之前。出入起居。遊息燕閑。雖欲頃刻離之而不可得。此軒之所以爲瑞也。嗚乎。軒旣㙐矣。人獨不爲瑞矣乎。不敢唾如靑城之山。不敢慢如南澗之石。澹對黙契。潛修靜養。自卑而高。積小而大。以至望實隆重。風韻崢嶸。則一世之人。必將仰之如景星慶雲。慕之如祥鳳瑞麟。其爲人中之瑞。果何如哉。庶無負爲瑞軒主人也。 감히……같고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의 시 〈장인산(丈人山)〉에 "청성에서 나그네살이 하게 되면서, 청성 땅에는 침을 뱉지 못하였네.[自爲靑城客, 不唾靑城地.]"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杜詩詳註 卷10》 감히……돌 주자의 시 〈운곡26영(雲谷二十六詠)〉가운데〈북간(北澗)〉에 "흙 끊어지고 시내 또한 나누어지니, 북쪽 아래에 어두운 시내 이루어졌네. 빼어난 돌이 아름다운 이름 얻었으니, 가슴에 새겨 내 감히 거만하랴.[土斷川亦分, 北下成陰澗. 秀石得佳名, 服膺吾敢慢?]"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이 시의 주석에 "시내에 인의석이 있다.[澗有仁義石]"라고 하였다. 남간(南澗)은 북간의 착오로 보인다. 경성(景星)과 경운(慶雲) 고대에 태평 시대에 나타난다고 인식했던 상서로운 현상들이다. 경성은 대성(大星), 덕성(德星)이라고도 하고, 경운은 오색의 채운(彩雲)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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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포기 錦圃記 염계(濂溪)는 용릉(舂陵)에 있는 것이 아닌데 주자(周子)가 호로 삼았고,193) 자양(紫陽)은 건양현(建陽縣)이 아닌데 주자(朱子)가 제호(題號)로 삼았으니,194) 대개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부터 나온 바를 즐거워한 것이다.나의 벗 최 사문(崔斯文) 치화(致和) 씨는 그의 10대조 승지공(承旨公)부터 처음 강진(康津)의 금천(錦川)에 살았고 증조 때 이르러 강진의 성전(城田)에 우거하였는데, 치화는 지금 또 행정(杏亭)에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장수유식(藏修遊息)195)하는 곳을 금포서실(錦圃書室)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생각건대 몸과 집이 떨어져 그 거처가 일정하지 못해도 부터 나온 바를 잊지 않는 것이니, 염계·자양의 경우와 같다고 말하지 않겠는가.오호라! 월(越) 땅의 새와 호(胡) 땅의 말도 오히려 남쪽 가지에 깃들고 북풍에 의지할 생각이 있는데,196) 더구나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데 그 근본을 생각하고 선조를 사모함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스승이나 어른의 행차가 방문 했던 어떤 물과 언덕도 오히려 장차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더구나 선조의 지행(志行)과 도모[謨猷]가 가정에 전해지는 것은 어찌 혹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이런 뜻을 가지고 본령을 삼은 연후에야 자신의 몸을 스스로 아낄 줄 알아 포기하는데 이르지 않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아낄 줄 알면 힘써 배우고 독실하게 행하여 집안에 마땅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것은 모두 차례대로 되어갈 일이다. 나는 치화가 잘 계승하고 전술하여 앞으로 그 집안을 창성하게 날이 있을 것임을 알겠으니, 힘쓸지어다! 濂溪非春陵而周子號焉。紫陽非建陽而朱子題焉。蓋不忘其本而樂其所自生也。余友崔斯文致和甫。自其十世祖承旨公。始居康津之錦川。至曾祖寓同縣之城田。而致和則今且見居于杏亭矣。然於其修息之所。題以錦圃書室。維身家流離。不恒厥居。而不忘其所自生。得非如濂溪紫陽之謂耶。嗚乎。越鳥胡馬。猶有巢南倚北之思。況人爲萬物之靈。而其於懷本慕先。謂何如耶。杖屨所過。某水某邱。猶且記存如是。況祖先之志行謨猷。貽傳於家庭者。豈容晷刻可忘耶。人有此意。爲之本領。然後知自愛其身。而不至於暴棄。知自愛其身。則力學篤行。宜家保族。皆其次第事。吾知致和之善繼善述。昌大其門。將有日矣。勉之哉。 염계(濂溪)는……삼았고 염계는 중국 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물 이름이다. 용릉(舂陵)은 호남성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지명인데, 주돈이(周敦頤)의 출신지이다. 출신지를 호로 삼지 않고 염계를 호로 삼은 것을 말한다. 자양(紫陽)은……삼았으니 자양은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의 자양산을 말한다.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여기에서 독서하였는데, 후에 주희가 청사(廳事) 이름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고 하여 부친을 잊지 않는 뜻을 나타낸 것을 말한다. 건양현은 복건성에 있는데, 주희가 운곡(雲谷)에 회암초당(晦庵草堂)을 짓고 살았다. 장수유식(藏修遊息)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 〈학기편(學記篇)〉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월(越) 땅의……있는데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 "호 땅의 말은 북풍에 몸을 의지하고, 월 땅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짓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한다. 《文選 卷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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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고 2수 觀海【二首】 큰 바다가 서쪽으로 연주 청주와 접했는데 大溟西接兗靑濱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진정 장관임을 알았네 壯觀今朝始得眞천하의 팔십일분은 모두 물이요 八十一分都是水백만 천만의 백성들 얼마나 많은 사람인가 百千萬衆幾多人산가지 쌓여 해옥에 가득한들25) 누가 육지를 볼까 積籌盈屋誰看陸삼신산에서 약을 찾으니26) 내가 진나라를 비웃네 求藥三山我笑秦작은 나루터인양 두 바다를 건넜다 들었으니 聞涉二洋如小渡지금 세상에 새로운 전쟁을 더욱 탄식하네 更歎今世戰爭新만 리의 넓은 바다라 물가를 묻지 않으니 萬里滄溟不問濱물이 되기 어렵다27)는 말 진짜임을 알겠네 難爲水說覺爲眞배들이 왔다 가듯이 어수선한 일이 많고 舟來舟去紛多事조수가 밀려왔다 밀려가듯 늙어서 다 죽지 潮落潮生老盡人도를 잃을까 걱정한 선니는 뗏목 띄우려 했고28) 宣尼欲浮憂喪道진나라 높이길 부끄러워한 중련은 바다에 빠지려 했네29) 仲連願蹈恥尊秦바다를 보니 흉금이 탁 트인다고 누가 말했던가 誰云觀海胸懷豁안개 낀 물결이 눈에 가득하니 감개가 새롭도다 滿目煙波感慨新 大溟西接兗、靑濱, 壯觀今朝始得眞.八十一分都是水, 百千萬衆幾多人?積籌盈屋誰看陸? 求樂三山我笑秦.聞涉二洋如小渡, 更歎今世戰爭新.萬里滄溟不問濱, 難爲水說覺爲眞.舟來舟去紛多事, 潮落潮生老盡人.宣尼欲浮憂喪道, 仲連願蹈恥尊秦.誰云觀海胸懷豁? 滿目煙波感慨新. 산가지가……가득한들 장수를 축원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해옥(海屋)은 신선이 사는 해상의 집을 말한다. 노인 세 사람이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니,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바닷물이 말라서 뽕나무밭이 될 때면 내가 산가지 하나를 내려놓는데, 그동안 내가 헤아린 산가지가 열 칸의 내 집에 벌써 가득 찼다.〔海水變桑田時 吾輒下一籌 邇來吾籌已滿十間屋〕"라고 했다는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이야기이다. 소식(蘇軾)의 《동파지림(東坡志林)》 〈삼로어(三老語)〉에 나온다. 삼신산(三神山)에서 약을 찾으니 진 시황(秦始皇) 28년에 제(齊)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 바닷속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재계하고 동남동녀와 함께 신선을 찾으라고 권하자, 진 시황은 서불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딸려서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물이 되기 어렵다 큰 바다를 보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지간한 물은 물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 웬만한 물은 물이 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자에게 웬만한 말은 말이 되기 어려운 법이다.〔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하였다. 선니(宣尼)는……했고 선니는 공자의 별칭으로, 한 평제(漢平帝) 원시(元始) 원년에 공자를 추시(追諡)하여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하였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의 어지러움을 탄식하며,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중련(仲連)은……했네 전국 시대 제(齊)나라 노중련(魯仲連)의 고사이다. 전국(戰國) 시대 때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할 때, 위(魏)나라의 신원연(新垣衍)이 진나라가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진나라를 황제로 높이자고 제의하자, 당시 조나라에 와 있던 제(齊)나라 노중련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불의한 진나라가 황제가 되어 천하에 정사를 펴게 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東海)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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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지난 편지에 인편이 없어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풍영정(風詠亭)109)에서의 만남 역시 갑자기 취소되어 회포를 풀지도 못하였습니다. 편지에 있는 차문(箚問)의 뜻을 그 뒤에 생각해보니 슬픔과 서운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공부하는 정황은 연이어 편안하신지요? 그리운 마음이 깊어집니다. 의림(義林)은 옛날부터 좋지 못한 재주뿐인데, 어찌 번거롭게 이끌어주시는지요. 《신안기행록(新安紀行錄)》 근래 비로소 읽어보니 완연히 몸이 방장산(方丈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있으면서 문장과 술 사이를 노닌 듯하였습니다. 말의 배치와 취사 선택, 그리고 묘사가 어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내 벗의 문사(文詞)에 대한 공력이 근년에 더욱 발전하였으니 또한 기뻐할 만합니다. 바라건대 더욱 힘을 쓰고 더욱 정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되【矧翔】110)은 【부모의 병이 나으면】 예전처럼 회복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걱정으로 인하여 일상적인 것을 변경시키고 병이 회복하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말한 것일 뿐이니 다른 것은 족히 변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병이 들어도 감히 효를 잊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병이 나았다고 갑자기 그 효를 잊어버려서 마음대로 방탕하게 술을 마시는 데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잇몸이 드러나게 웃어 모습이 변하는 것을 꾸짖은 것이지 본래 마음대로 방탕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처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담소하던 모습을 생각한다.……"111)라고 하였는데 비록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사람은 그 슬픔과 그리움이 분명 다른 사람보다 곱절일 것입니다. 어찌 그 모습과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살아계실 때의 모습과 방불(髣髴)함이 없겠습니까? 시조(始祖)와 초조(初祖)의 제사는 체제(禘祭)와 협제(祫祭)로 하니 어찌 일찍이 그 음성과 용모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야 합니다. 向書無便稽謝。而詠亭之遇。亦坐忽撓未敍。書中箚問之意。追後思之。不勝悵缺。未審侍中經履。連衛錦安。懸溯罙至。義林昔時伎倆而已。有何煩提。新安紀行錄。近始讀之。完然身在方丈白雲文酒遊歷之間也。其措辭去就。何其模寫至此也。吾友文詞之工。近年進進。亦可喜也。願益加勉力。精之又精如何。矧翔復故云云。特言其致憂變常。與夫疾止復故之義而已。他無足辨也。且以有疾而不敢忘孝如此。則豈以疾止而遽忘其孝。以至於任情縱酒者乎。又詈矧變貌。本非任情縱酒之謂也。思其居處。思其笑語云云。雖早而孤露。未及逮事者。其哀慕感想。必有倍於他人矣。豈以未見其音容笑語。而無髣髴如在之儀乎。始祖初祖之祭。若褅若祫。何嘗逮見其音容乎。更詳之。 풍영정(風詠亭) 광주의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김언거(金彦琚)가 지은 것으로, 그는 이곳에서 김인후, 이황, 기대승 등과 교유를 나누었다.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되【矧翔】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부모가 병중일 때 몸가짐의 도리를 가리키는데,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는다.【笑不至矧, 行不翔.】"라고 하였다. 그 거처하던 …… 모습을 생각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나오는 말로, "그 거처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담소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뜻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좋아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즐기던 바를 생각한다.【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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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72) 【창섭】에게 답함 答安慶伯【昌燮】 지난번 보내준 한 통의 편지에 결국 답장도 못했는데 또 이렇게 편지를 받게 되니,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심정이 함께 생기네. 빼어나고 영특한 재주로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무고한 날에 있으니, 이것은 정히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있는 때이네. 어버이를 섬기는 한 가지 일은 자식이 입신(立身)하는 큰 절도이니, 독서와 학문은 어찌 이것을 밝혀 이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응대(應對)와 진퇴(進退), 온청(溫淸)과 정성(定省)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강구하고 실천하여 반드시 지당하고 흡족한 곳에 이르되 조금도 미적거리거나 유유범범한 뜻이 없다면, 고인이 이른바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겨난다."는 것이 거의 가까울 것이네. 더구나 그대 부친께서 이미 창시(創始)하셨고 그대 형제가 또 다시 계술(繼述)하니, 대대로 유가의 큰 집안이 되지 않겠는가?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을 뿐이네. 질문한 '격물궁리(格物窮理)' 이것은 가장 최초로 착수해야 할 것이니, '절문근사(切問近思)'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네. 이것을 놓아두고 이기(理氣)를 말하는 것은 등급과 절도를 뛰어 넘는 것이니, 실로 근래 학자들의 큰 병폐이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모사하는 것이니, 무슨 유익함73)이 있겠는가? 무릇 격물(格物)은 실로 한 가지 단서가 아니니, 혹 독서하여 그 의리를 궁구하고,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득실을 분별하고, 혹 사물과 접하여 그 당부(當否)를 처리함에 소당연(所當然)을 궁구하여 그만두지 않고 소이연(所以然)을 궁구하여 바꾸지 않는 것이 있지 않아 이렇게 오래 쌓은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절로 초탈한 곳이 있을 것이네. 초학자의 병통은 대부분 의도를 두어 조장하는데 있으니, 과연 능히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한 것처럼 하면 의도를 두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보존한 것이 절로 익숙할 것이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치지(致知)도 못하고서 갑자기 성의(誠意)를 하려는 것 이것은 등급을 뛰어 넘는 것이라, 힘써 억지로 행하는 자는 어찌 능히 오래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74) 이것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네. 向書一度。竟未謝復。而又此承貺。感與愧倂。以秀爽開悟之才。在俱存無故之日。此正可與有爲之秋也。事親一事是人子立身大節。讀書學問。豈非所以明此而行此者乎。應對進退。溫淸定省。大小凡百。一一講究。一一踐行。必至乎至當恰好之地。而無一毫因循悠泛之意。則古人所謂本立而道生者。可庶幾矣。況春府丈旣已創始之。君兄弟又復繼述之。則其不爲世世斯文大家耶。周子所謂至尊至貴者。在此而已。俯詢格物窮理。此是最初第一着。切問近思。亦不越乎此也。舍此而曰理曰氣者。末嘗不是躐等凌節。實近日學者之大獘也。捕風摸影。何所禪益哉。大抵格物固非一端。或讀書而窮其義理。或論古今人物而辨其得失。或接事物而處其當否。莫不有以窮其所當然而不容已。與其所以然而不容易。積累多後。自當有脫然處矣。初學之病。多在於着意而助長。果能實見得是。實見得非。如好好色。如惡惡臭。則無待乎着意。而所存自熟矣。程子曰。未致知。遽誠意。是躐等也。勉强行者。安能持久。此當留念也。 안경백(安慶伯) 안창섭(安昌燮, 1874~?)을 말한다. 자는 경백,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유익함 저본에는 '선(禪)'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보(補)'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정자(程子)가……하였으니 《근사록》권2에 정이천(程伊川)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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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보93) 【장환】에게 답함 答李仁甫【長煥】 세월이 멈추지 않아 여름이 또 깊어졌네.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인하여 이런 즈음에 상중의 절도를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으니, 얼마나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 지극하겠는가? 매번 생각건대, 그대가 연로한 어버이를 모심에 곁에는 형제가 없고 아래로는 자식도 적은데 크고 작은 집안일과 일상생활의 많은 실마리가 또 장차 어버이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사이에 자신을 얽매니, 그 고생하는 모습은 나를 대신 걱정스럽게 하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기수(氣數)에 관계 된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이네. 기수에 관계 된 것은 단지 심회를 너그럽고 평탄하게 하여 하늘에 맡겨야 할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은 정히 마땅히 뜻을 독실하게 하고 사려를 경책하여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해야 하니, 오늘의 곤궁함이 훗날 옥성(玉成)94)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모하는 것이 없이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는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우리 당(黨)에 종유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며 몇 년이나 되었는데, 시종 독실하여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음이 두렵네. 생각건대 그대 또한 응당 생각이 여기에 미쳐 이것을 개연해 할 것이네. 또 더구나 영귀정(詠歸亭)을 운영한 지 십 년이 못 되어 선배 중 노성한 분들이 거의 모두 돌아가셨으니, 오늘날 지켜서 이루어야할 책임은 그대 주변의 한 무리가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진학(進學)의 공부는 독서가 아니면 불가하고 독서의 방법은 경(敬)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불가하니, 수레바퀴와 새의 날개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 매우 분명하네. 일용의 사이에 단지 이 두 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간단(間斷)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세간의 만사는 잠깐 사이에 변하여 사라지니,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것이 없고, 오직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을 구경(究竟)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95) 이것은 우리들이 평소 늘 일컫던 말이 아니던가? 작은 것만 보고 큰 것에는 어두우며, 세월만 유유히 보내는 공통된 근심은 맹렬히 반성하고 통렬히 개혁하지 않으면 아마 능히 이 관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日月不住。夏令又深。承疏。因審此際哀節支衛。何等慰感之至。每念哀侍在篤老下。旁無兄弟。下乏子男。而家事巨細。日用多端。又且絆已於蒙率之間。其困苦之狀。令人代悶。然此皆氣數所關。職分所存。氣數所關者。只要寬心坦懷。而付之於天。職分所存者。正宜篤志策慮。而期於有就安知今日之困。不爲他日之玉成哉。嗚乎士生斯世。無所猷爲。而虛生虛死。豈不可惜。吾黨遊從。爲幾許人。爲幾多年矣。而終始篤實可以寄意者。恐無多焉。想哀侍亦應慮及於此。而爲之慨然也。且況詠亭經始未十年。先輩老成幾盡凋零。而今日守成之任。非哀侍一隊人乎。勉之勉之。夫進學之功。非讀書不可。讀書之方。非主敬不可。車輪鳥翼。取譬甚明。日用之間。只將此二。端無有間斷如何。朱子曰。世間萬事。須臾變滅。皆不足置胸中。惟有窮理修身爲究竟法。此非吾輩平日稱道之言耶。見小闇大。悠悠通患。非猛省而痛革之。恐不能透脫此關也。 이인보(李仁甫) 이장환(李長煥, 1874~?)을 말한다. 자는 인보,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주자가……하였으니 《회암집(晦菴集)》 속집(續集) 권4 〈답마기지(答馬奇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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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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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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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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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0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未 辛未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을묘생으로, 안장일은 신미년 7월 초5일이다. 상주는 아들과 3명의 손자들이다. 이 문서에는 또한 '凶葬不忌'라고 적혀 있다. 흉장은 옛날의 환장(還葬)을 뜻하는 것으로, 염을 마친 뒤에 곧바로 장사를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흉년(凶年), 악월(惡月), 천시(天屍), 지살(地殺)의 달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또는 역병 시에 흔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병길(南秉吉, 1820~1860)이 관상감(觀象監)의 명과학(命課學) 분야 실무관원들과 함께 편찬한 ?선택기요(選擇紀要)?의 순장법(旬葬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산(山)이 열흘〔旬〕 안에 장사를 치르기에 불리한 데 해당되어도 역시 해가 되지는 않는다. 방(方)과 향(向)의 연운(年運)은 따지지 않고 다만 명폐일(鳴吠日)을 선택하여 장사를 치르면 길하다. 세상 사람들은 3일, 5일, 7일, 9일 만에 장사를 치르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흉장(凶葬)이라고 말하는데 꺼리는 것이 없어서 세상에서는 이것을 많이 사용한다. 비록 임시변통에 속하지만 필요에 따라 이롭게 사용하는 이치가 여기에 갖추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길일을 선택하여 파토(破土)하고 하루 안에 성분(成墳)을 마쳐서 흉신(凶神)이 그 방위를 지나가게 하고 가토(加土)하고 사묘(謝墓)하면 역시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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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873년 태인현감(泰仁縣監) 첩보(牒報) 고문서-첩관통보류-첩보 정치/행정-보고-첩보 同治十二年十一月十二日 行縣監趙 兼巡察使 同治十二年十一月十二日 趙中植 兼巡察使 전라북도 태인군 14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편, 『조선시대 전라도의 감사·수령명단』,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5.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873년(고종 10) 11월 12일에 태인현감(泰仁縣監)이 겸순찰사(兼巡察使)에게 올린 첩보(牒報). 1873년(고종 10) 11월 12일에 태인현감(泰仁縣監) 조중식(趙中植)이 겸순찰사에게 올린 첩보이다. 태인현에 사는 이태한의 의송(議送)에 대해 순찰사는 태인현감에게 도형을 그려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태인현감이 이태한의 소장을 보니, "작년(1872) 4월에 고부(古阜)에 사는 권달진(權達鎭)에게 남촌면 반룡촌의 산지를 사서 아버지를 장사지냈는데 전주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이 자기가 치표(置標)해 둔 곳이라면서 송사를 벌였고, 또 작년 9월에는 경상도 산청에 사는 김홍건(金弘健)이 자기의 선산이라고 정소(呈訴)하였으므로 다시 값을 물어주고 입지(立旨)를 바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진택이 그곳은 전에 정소하여 투총(偸塚)을 파낸 곳이라는 이유로 금장(禁葬)을 하였다. 김홍건의 선산 아래나 권달진의 3기의 무덤 아래에는 부지기수의 고총이 있고, 송진택의 묘는 김홍건과 권달진의 묘 아래 55보 떨어진 곳이었다. 월총금장(越塚禁葬)이 법전에 실려 있고, 서로 입장(入葬)할 수 있는 곳이라도 지사(地師)가 불길하다면 아침에 묘를 쓰고 저녁에 파내기도 하는데 송진택은 이런 곳을 모두 자기가 정소하여 파낸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정소하여 도형을 그리게 된 것인데 예리(禮吏)가 그린 도형이 자기가 본 것과 달라 다시 정소하였더니 관에서 적간하기 위해 보낸 좌수(座首)의 말만 믿는 바람에 낙과하여 한계를 정하겠다는 고음(侤音)을 바치게 되었으니 억울하다. 송사를 좋아하는 송진택의 버릇을 엄히 징계하고, 관을 기망한 좌수 김영두(金永斗)의 죄를 엄히 다스려 달라."고 하였다. 태인현감이 판결하면서 양쪽의 문권을 상고하니 송진택이 산소를 쓸 때 조각조각 일곱 사람에게 산지를 사들였음이 드러났고, 산소를 쓴 뒤에 범장(犯葬)한 4기의 무덤을 파낸 상황도 문적에 남아 있어서 이 산의 한 부분은 송진택의 산임이 확실하였다. 그러나 이태한의 문권은 김·권(金權) 두 사람의 두어 장 수표뿐이니 경중(輕重)이 현격히 달라 이태한이 낙과(落科)한 것이었다. 현감은, 이태한의 정소 내용 중에 좌수가 도형을 잘못 그려 관에 보고했다는 등의 말은 송관(訟官)을 은근히 핍박하는 것이니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순찰사에게 첩보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송진택의 문권이 이처럼 분명하니 이태한이 억지를 부린 것이므로 즉각 독굴(督掘)하라고 형리(刑吏)에게 제음(題音)을 내렸다. 조중식(趙中植)은 1871년(고종 8) 8월부터 1875년 2월까지 태인현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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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令 首校李太漢之 營題之下一向逃避萬萬痛駭今則別定汝矣出送卽刻捉來是矣此是督掘之事渠答不必入官庭卽其地移去汝看掘去形地▣▣告若一向頑拒▣▣官見辱於渠被誣於渠豈有一毫容恕之意乎依營題必掘乃已汝亦不善擧行當汰去矣十分惕念擧行事癸酉至月卄五日官[着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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