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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산당에서 밤마다 두견새 소리를 듣다 山堂 每夜聞鵑 가엾어라 한 마리 두견새는 어디에서 와서 憐爾何來一鵑鳥밤마다 참으로 은자의 곁에서 운단 말인가 夜夜正傍幽人啼봄이 다 지나고 긴 여름이 되었는데 過盡三春屇長夏하룻밤도 울음 그친 것을 보지 못했다오 未見或闕一夜兮울음소리 참으로 괴로워 끊겼다 이어지니 聲聲正苦斷復續사람의 심장을 흔들어 더욱 서글프구나 攪人心腸轉悲悽달 지고 밤 깊어도 울음 그치지 않으니 月落更深啼未已나는 잠 못 이룬 채 닭 우는 새벽 되었네 我不成眠到唱鷄새도 수심 겹고 사람도 수심 겨우니 禽是愁禽人愁人빈산 깊은 숲에서 그저 함께 산다오 空山深林聊同棲유유상종은 이치상 본래 그러한 법 以類相聚理固然나의 고적함 달래줌은 처자식보다 낫구나 慰我孤寂勝子妻그저 밤에 괴로운 울음 줄이기를 바랄 뿐 但願減却夜苦啼막다른 길에서 좋은 벗과 보는 것이 좋으니 好是窮途良友睇이 몸 푸른 도포 차림으로 절하지 못하나 縱不此身靑袍拜어찌 남이 황금 탄환을 휴대하도록 두랴337) 豈容別人金彈携아아 嗟呼세간의 득실을 어찌 따질 것 있으랴 世間得失何足較촉나라의 지난 일338) 뜬구름처럼 희미하네 蜀國往事浮雲迷다시 시운이 있어 피할 수 없다면 更有時運逃未得당시에 사향노루가 배꼽 깨물 듯339)해서는 안 되리 不須當年麝噬臍나 또한 천만 가지 일을 겪었지만 我亦閱歷千萬事모두 아무것도 없어 잡을 수 없다오 幷皆烏有不足提봄바람 불고 가을 달 비치는 멋진 산수에서 春風秋月好山水그대와 나 동쪽 서쪽 오가며 여유롭게 노니세 爾我優遊東復西 憐爾何來一鵑鳥, 夜夜正傍幽人啼?過盡三春屇長夏, 未見或闕一夜兮.聲聲正苦斷復續, 攪人心腸轉悲悽.月落更深啼未已, 我不成眠到唱鷄.禽是愁禽人愁人, 空山深林聊同棲.以類相聚理固然, 慰我孤寂勝子妻.但願減却夜苦啼, 好是窮途良友睇.縱不此身靑袍拜, 豈容別人金彈携.嗟呼世間得失何足較? 蜀國往事浮雲迷.更有時運逃未得, 不須當年麝噬臍.我亦閱歷千萬事, 幷皆烏有不足提.春風秋月好山水, 爾我優遊東復西. 이……두랴 두보(杜甫)처럼 두견새를 위해 재배하는 시를 지을 수 없지만, 남이 두견새를 잡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두보가 일찍이 촉제(蜀帝)의 넋이 두견(杜鵑)으로 화(化)했다는 전설에 의거하여 두견행(杜鵑行)이란 시를 지어서, 외로이 피를 토하며 울어대는 두견새의 정상을 간절하게 읊었으므로, 황정견(黃庭堅)의 〈제마애비(題磨崖碑)〉에 두견행의 의미를 들어, "신 원결은 용릉행 이삼 책의 시를 읊었고, 신 두보는 두견에 재배하는 시를 지었었네.[臣結舂陵二三策, 臣甫杜鵑再拜詩.]"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前集 卷5》 촉(蜀)나라의 지난 일 전설에 촉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재상 별령(鱉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는 원통함과 한을 품고 죽었는데, 그 후 두견새 한 마리가 날아와 궁궐 앞에서 슬피 울자, 촉나라 사람들이 이 새를 망제의 혼으로 여겨 망제혼이라 하였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166》 사향노루가……듯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사향노루가 배꼽에 있는 향 주머니 때문에 사람에게 잡혔다면서 아무리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6년 조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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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은 오공 유사장 溪隱吳公遺事狀 공의 성은 오씨(吳氏), 휘는 치상(致祥), 자는 성로(聖老), 호는 계은(溪隱)이며, 그 선조는 보성사람이다. 고려조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이 그의 시조이다. 6대가 지나 휘 현필(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고, 휘 안주(安宙)는 호가 봉은재(鳳隱齋)로 율곡 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낳은 휘 방한(邦翰, 1574~1593)은 죽천(竹川) 박선생(朴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임진년 전란에 진주(晉州)에서 용맹을 떨쳐15)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진찰(震札)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후유(厚有)는 호가 석계(石溪)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장원(章元)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석윤(錫胤)이며, 생모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연(必鍊)의 따님으로 순조 기사년(1809, 순조9) 11월 8일에 능주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기량이 크고 넓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9세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이 지나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그 대인(大人)이 생명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매번 위로하여 억누르니, 이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곡을 하지 못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공이 몸소 집안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여가에 글공부에 힘써 정해놓은 과정(課程)을 폐하지 않았다. 소후모(所後母, 후사로 들어간 집의 양어머니) 김씨는 성품이 준엄하여 화합하기 어려웠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순종하니 마침내 기뻐하는 데16)에 이르렀다. 백씨(伯氏) 지상(志祥)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책을 물려받아 공부하였으며17) 서로 우애함이 매우 돈독하여 재산과 집물(什物, 집안 살림의 온갖 세간)이 있으나 없으나 공유하였다. 매부(妹夫) 김씨 집안이 공포(公逋)18)가 너무 많았으므로 공은 어버이께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자기 땅을 팔아 그 체납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밭과 집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도록 하고 함께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안에 화재(火災)를 당한 자가 있거든 공이 물력(物力)을 내어 집을 지어주고 흩어져 사는 일이 없게 하였다. 남에게 돈을 내어주었다가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한 것은 공이 대인(大人)에게 아뢰어 그 문서를 불태웠다. 전후로 상을 당하자 애훼(哀毁)함이 예제(禮制)에 지나쳐 정리(情理)로나 예법(禮法)으로나 모두 지극하였다. 글을 읽다가 격언과 중요한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못하면 곧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몸가짐이 법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예가 있으며, 사람을 접함에 의(儀)가 있고, 일을 처리함에 방도가 있어 모든 것을 시행함에 환하게 조리를 갖추었다.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고 깊이 스스로 숨어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권문(權門)에 출입하지도 않았다. 오직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닦는 것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부춘(富春)의 칠송리(七松里)에 집을 짓고 계은(溪隱)이라 자호(自號)하고는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연하에 유유자적하면서 초연히 세상을 벗어날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고산 임공(鼓山任公)19)의 문하에 한 번 찾아가서 여러 날을 강론하고 토론하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장수(長壽)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곧이어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 무인년 8월 16일에 생을 마쳤으며,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20) 마을 뒤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합봉하였다. 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경우(警禹)의 따님으로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하였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태(壽泰)·수화(壽華)·수형(壽衡)·수영(壽泳)·수기(壽奇)이며, 딸은 대구 배달진(裴達鎭)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자성(滋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몽섭(蒙燮)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장섭(長燮)과 덕섭(德燮)이며, 셋째 집의 손자는 명섭(命燮)과 경섭(景燮)이고, 넷째 집의 손자는 문섭(文燮)과 인섭(仁燮)이며, 다섯째 집의 손자는 원섭(元燮)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효우(孝友)의 행실과 삼가고 성실한 풍도가 향리 인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송(傳誦)되었으니 지금 장섭(長燮)의 청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公姓吳氏。諱致祥。字聖老。號溪隱。其先寶城人。麗朝文襄公諱延寵。其始祖也。六傳而諱賢弼。封寶城君。諱安宙號鳳隱齋。受學于栗谷李先生之門。贈吏曹參判。是生諱邦翰。受學于竹川朴先生之門壬辰之後。立憧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七世高祖。諱震花。贈戶曹參議。祖諱垕有號石溪僉樞。贈戶曹參判。考諱錫永號竹湖。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章元女。生考諱錫。妣咸陽朴氏必煉女。純祖己巳十一月八日。生公于綾之七松里。姿相粹美。器量寬弘。幼有至性。事親克孝。九歲遭生庭內艱。擗踊幾絶。其大人慮其傷生。每慰抑之。是以不敢任情號哭。家甚貧。公躬幹凡務。以供甘旨。餘力讀書。不廢課程。所後母金氏。性峻難諧.至誠承順。竟底豫。與伯氏志祥。同案連業。友愛甚篤。財産什物。有無共之。妹夫金氏家。公逋甚多。公恐貽親憂。潛賣已土以脫其逋。又備給田廬。使之安業同隣。二家有被火災者。公出力營構。俾無離散。出錢於人而積年未捧者。公稟於大人。焚其券。遭前後艱。哀毁過制。情文兩至。讀書至有格言要誨。擊節嗟賞曰。若不如此。便不成人。平居持身有法。治家有禮。接人有儀。處事有方。以至凡百施爲。莫不粲然有條。杜門斂迹。深自鞱晦。不見要人。不到要門。惟以窮經硏理。修身勅行。爲身家究竟計。築室於富春之七松。自號溪隱。逍遙文酒。徜徉煙霞。超然有遺世之象。嘗一造鼓山任公之門。講討數日而歸。以壽除僉樞。尋陞同知。戊寅八月十六日考終。契丹陽面多年富村後麓巽坐原。合封。配豐山洪氏警禹女。甚得婦道。生五男二女。男壽泰壽華壽衡壽泳壽奇。女適大邱裴達。鎭坡平尹滋城。長房孫蒙燮。二房孫長燮德燮。三房孫命燮。景燮四房孫文燮仁燮。五房孫元燮。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孝友之行。謹慤之風。爲鄕里人士所傳誦。今於長燮之請。有不敢辭, 용맹을 떨쳤고 원문의 '입근(立慬)'은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기뻐하는 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순 임금이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자 고수가 기뻐하게 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가 교화되었으며,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의 부자의 도가 정해졌으니, 이것을 일러 대효라고 하는 것이다.[舜盡事親之道而瞽瞍底豫, 瞽瞍底豫而天下化, 瞽瞍底豫而天下之爲父子者定, 此之謂大孝.]"라고 하였다. 같은……공부하였으며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 〈형제(兄弟)〉에 "자식들이 어릴 적에, 부모는 왼쪽에서 손잡고 오른쪽에서 끌며, 앞으로는 품에 안고 뒤로는 소매를 잡는다. 밥은 같은 밥상에서 먹고, 옷은 물려 입으며, 공부는 형이 보던 책을 그대로 쓰고, 놀 때는 같은 방소로 함께 간다.[方其幼也, 父母左提右挈, 前襟後裾. 食則同案, 衣則傳服, 學則連業, 遊則共方.]"라는 말이 나온다. 공포(公逋) 국가에 빚을 지거나 또는 국가의 돈을 축내는 것을 말한다. 고산 임공(鼓山任公)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ㆍ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지자 1858년(철종9)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4년(고종11) 대사헌이 되고 이어 좨주(祭酒)가 되었다. 천주학을 극력 배격했다.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ㆍ《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 단양마을은 원래 템부라 부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다년부(多年富)라고 했으며 한편으로 점촌이라 하였는데 단양마을의 원래의 뜻은 도자기를 굽던곳을 불무골 또는 불무실이라 하는데 바로 불무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불무 = 붉다 = 단(丹)」, 「골, 또는 실자는 마을을 의미하는 양(陽)자를 각각 취하여 단양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된다. 1896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전라남도 능주군 단양면이었으나, 1913년 능주군의 폐지로 화순군 단양면,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변경에 의해 화순군 춘양면(春陽面) 양곡리(陽谷里)(장곡리, 단양리, 해하리)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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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대사성 신재 조공 유사장 成均館大司成愼齋趙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씨(趙氏), 휘는 림(琳), 자는 백원(伯瑗), 호는 신재(愼齋)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고려 평장사 휘 조정(趙鼎)21)이 족보에 오른 시조가 된다. 덕곡 선생(德谷先生) 휘 승숙(承肅)이 그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종례(從禮), 호가 율정(栗亭)으로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염(琰)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경서에 밝고 행실이 조촐하여 세상에 추중을 받았다. 아버지는 휘가 계조(繼祖)이며, 세상에 풍암처사(楓庵處士)라고 불리었고 힘써 배우고 독실히 행하며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공이 태어난 간지(干支)는 산일(散佚)되어 전하지 않는다. 빼어나고 맑으며 총명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조예가 있고 자라서는 덕이 있어 우뚝하게 자신을 세움이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에 진사가 되고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병과(丙科)에 뽑혀 양덕(陽德)·흥해(興海)·무주(茂朱)의 현감을 지냈으며 재차 청성(靑城)을 맡았고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관직에 임하여서는 집안일처럼 처리하였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청송(靑松)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한가로이 지냈다. 일찍이 시(詩)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바위 곁의 초가 정자 신령한 골짜기에 있는데 (巖上茅亭洞壑靈)정자에 올라보니 비와도 좋고 개어도 좋아라 (登臨宜雨又宜晴)고향의 형승은 노년을 보낼만하니 (故國形勝堪終老)부질없이 홍진 속을 달려 온 이내 몸 우습구나 (浪走紅鹿笑此生)라고 하였다.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과 도의의 교분을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계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나 남원 견소곡(見所谷) 풍산(楓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제주 고씨(濟州高氏) 정랑(正郞) 명손(命孫)의 따님이다. 계배(系配)는 동복 오씨(同福吳氏) 원동(元童)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아들 희광(希匡)은 참봉을 지냈으며 이름이 문행록(文行錄)에 실렸고, 희정(希鼎)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다. 희문(希文)은 교리를 지냈고 호가 월계(月溪)이며, 희무(希武)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덕곡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서 연원하였는데, 도덕과 절의가 우뚝하고 밝아서 끼친 교화와 남긴 공렬이 공에게까지 끊이지 않았다. 공은 풍암처사(楓庵處士)가 아버지가 되고 하서 선생이 벗이 되며, 아들로는 월계공(月溪公) 사형제(四兄弟)가 있는데, 어질었다. 그 성대한 만남과 계술(繼述)의 아름다움이 백세(百世)에 전해졌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손이 영락(零落)하여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이 모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5대손 익제(翼濟)가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해 주길 청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公姓趙氏。諱琳。字伯瑗。號愼齋。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爲登講之祖。德谷先生諱承肅。其高祖也。曾祖諱從禮號栗亭直提學。祖諱琰參奉。明經潔行。爲世推重。考諱繼祖。世稱楓庵處士。力學篤行。隱居不仕。公寅降干支。逸而不傳。以秀爽穎悟之資。生於詩禮法拂之家。幼而有造。長而有德。靳然樹立。大異衆人。成化丙午進士。正德癸酉擢丙科。歷宰陽德興海茂朱。再莅靑城。至成均館大司成。處官如家。視民如子。淸謹廉眞。蔚有聲績。靑松民立詞享之。晩年致仕還鄕。杜門養閒。嘗有詩曰。巖上茅亭洞堅靈。登臨宜雨。又宜晴。故國形勝堪終老。浪走紅塵笑此生。可以見其志矣。與河西金先生爲道義交。往復講磨。源源。不絶。甲午十一月十三日卒。葬南原見所谷楓山癸坐原。配濟州高氏正郞命孫女。系配同福吳氏元童女。四男。希匡參奉。名載文行錄。希鼎承仕郞。希文校理號月溪。希武從仕郞。孫以下不錄。嗚呼德谷之學。淵源圃隱。而道德節義。磊落光明。遺風餘烈至於公而未斬矣。公以楓庵處士爲父。河西先生爲友。在子而有月溪公四昆季之賢。會遇之盛。繼述之美。流傳百世。曷不偉然。子孫零替。其嘉言善行。不盡傳於世。是爲可慨也。已十五代孫翼濟奉家狀。託以不朽。牢辭不獲, 조정(趙鼎) 함안 조씨 시조로, 자(字)는 우보(禹寶)이며, 호는 모당(慕唐)이다. 본래 당나라 사람이었는데, 신라 경애왕(924~927) 때 두 아우인 부(釜)와 당(鐺)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권행(權幸)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931년(태조14)에 고창성(古昌城)에서 후백제 진훤군을 대파하여 동경주현(東京州縣)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으며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咸安)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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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참판 행 군자감 주부 백담 최공 유사장 贈兵曹參判行軍資監主簿柏潭崔公遺事狀 공의 성은 최(崔), 휘는 여호(汝箎), 자는 대숙(台叔), 호는 백담(柏潭)으로 낭주(朗州) 사람이다. 휘 지몽(知夢)이라는 분은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시호가 민휴(敏休)인데, 그의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는 우리 조정에 군기소감(軍器小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며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여러 세대를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며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며 좌승지를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결(潔)로 참봉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경남(慶男)으로 판관을 지냈고, 아버지 정언(廷彦)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어머니는 장흥 위씨(長興魏氏) 형(衡)의 따님이다. 생부는 휘가 정준(廷俊)이며, 생모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희열(希烈)의 따님이다. 사나운 호랑이가 뜰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니 바로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월 5일이다. 공은 풍골(風骨)이 빼어나고 지기(志氣)가 크고 넓어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대열을 나누고 대오를 지어 포진(布陣)과 행군(行軍)의 의식을 행하였는데 뭇 아이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서당에 나아가 글을 읽고 남은 날에는 병략(兵略)을 함께 익혔는데, 일찍이 《한서(漢書)》를 읽다가 '마혁과시(馬革裹尸)'22)에 이르러서는 책상을 치고 탄식하기를,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붓을 던지고 무과에 합격하였다. 시험에 임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책략을 변론하니 여러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는데, 감독관이 높은 점수에 뽑아 두며 말하기를, "이번 시험에서 간성(干城)의 재목을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금나라 사람들이 의주를 함락하자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거둥하였다. 공은 주부(主簿)로 원사(元師) 남이흥(南以興)23)을 따라 안주(安州)에 이르러 백상루(百祥樓)24) 아래에서 진을 치고 앞장서 공격하여 적을 무수히 살상하자 적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물러났는데, 얼마 뒤 적들이 병력을 총동원해서 이르자, 공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전사(戰死)하였다. 다만 종과 말만이 그 집으로 돌아와서 지동(枝洞) 뒤 기슭 계좌(癸坐)의 언덕에 의리장(衣履葬)25)하였다. 공훈을 기록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일이 「정묘록(丁卯錄)」과 강화충절비(江華忠節碑)에 실렸다. 부인은 남원 여씨(南原盧氏) 사양(士良)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 상률(尙嵂)과 참봉 상업(尙嶪), 문과 급제한 상헌(尙巘)과 생원 상억(尙嶷)이며, 딸은 이환(李晥)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한제(漢齊)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한우(漢宇), 한주(漢宙)이며, 셋째 집의 손자 한진(漢軫)은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넷째 집의 손자는 참봉을 지낸 한익(漢翼)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금나라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중국을 삼킬 뜻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은 우리나라가 그 허점을 틈타 그 뒤를 밟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당시 의주(義州)의 전투에서 김완(金菀)의 순국이 없고, 안주의 전투에서 만약 공과 김준(金浚)26) 등 여러 현인들이 순절한 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대한 치욕은 굳이 연장되어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27) 명실(明室)의 옥사(屋社)의 화(禍)28)는 굳이 갑신년29)에 멀리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성취한 바는 한 시대와 한 나라의 공이 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의리가 또한 백세(百世)에 찬란히 빛나 길이 전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영락하여 유적이 산일되었으니 이것이 개탄스럽다. 10세손 동민(東珉)과 동섭(東燮)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부탁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公姓崔。諱汝箎字台叔。號柏潭。朗州人有諱知夢封東萊侯謚敏休。其鼻祖也。至諱安雨。我朝軍器小監。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累傳諱湫號蘭溪戶曺參判。生諱致湖號尙德齋在左承旨。公之高祖也。曾祖諱潔參奉。祖諱慶男判官。考諱廷彦別提。妣長興魏氏衡女。生考諱廷俊。妣淸州韓氏希烈女。夢猛虎入庭而産公。卽萬曆壬辰正月五日也。風骨岐嶷。志氣磊落。幼與兒戱。分隊作伍。爲布陣行軍之儀。群兒莫敢違其令。就塾讀書。餘日兼習兵略。嘗讀漢史。至馬革裹尸。擊案而歎曰。大丈夫當如是。累擧不中。投筆登榜。臨試講兵書。辨論籌略。諸人莫及。考官擢置高第曰。今試得干城之才。甲子除訓鍊院奉事。丁卯金人陷義州。車駕幸江都。公以主簿從元師南以興至興安州。陳于百祥樓下。挺身奮擊。殺傷無數。賊披靡而退。己而賊悉衆而至。公力戰不屈而死。只有奴與馬歸其家。以衣履葬于枝洞後麓癸坐原。錄勳贈兵曹參判。事載丁卯錄及江華忠節碑。配南原盧氏士良女。生四男一女。尙嵂進士。尙嶪參奉。尙巘文科。尙嶷生員。女適李晥。長房孫漢齊。二房孫漢宇漢宙。三房孫漢軫。孝行著世。四房孫漢翼參奉。曾玄以下不錄。金氏之在瀋陽也。志在於中國而先加兵於我國者。恐我國之乘其虛而躡其後。當時義州之戰。者無金菀之立憧。安州之役。若無公及金浚諸賢之死節。則我國南漢之辱。不必延在丙子。明室屋社之禍。不必遠在甲申。然則公之所就。非止爲一時一國之功。其義又足以輝映百世而不朽也。雲仍零替。遺蹟散逸。是爲可慨也。十世孫東珉東燮持家狀。謁狀行之文。牢辭不獲云, 마혁과시(馬革裹尸) '말가죽에 시체를 싼다'라는 뜻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군 마원(馬援)이 "남아는 마땅히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죽어서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야지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쏘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남이흥(南以興) 1576~16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때 후금의 주력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 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독려하여 용전하다가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백상루(百祥樓) 평안도 안주(安州) 서북쪽에 청천강(淸川江)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있는 누대로,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6년(615)에 건립되었다 한다. 의리장(衣履藏) 유골이 없을 경우 옷이나 신발 등을 가지고 장례를 지내는 것을 의리장(衣履葬)이라고 한다. 김준(金浚) 1582~1627. 본관 언양(彦陽)이며 자는 징언(澄彦)으로 정읍 정문(旌門) 출생이다. 1605년(선조38) 나이 24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발되었고 승진되어 교동 현감(喬桐縣監)으로 나갔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뒤에 여러 벼슬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에 안주 목사 겸 방어사를 지냈고, 안주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신 자결을 하였다.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1636년(인조14)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의 태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같은 해 12월, 청나라는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을 말한다. 명실(明室)의 옥사(屋社) 의 화(禍) 옥사는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1644년 3월에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이 명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의종(毅宗)과 황후 주씨(周氏)가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갑신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멸망한 1644년(인조22)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도정 박창현전 朴都正昌鉉傳 도정(都正) 박창현(朴昌鉉)은 자가 영화(永化)이고, 밀양(密陽) 사람으로 강진현(康津縣)에 살았으며, 도정은 그의 직함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칭송이 일찍 드러났다. 아버지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어머니 김씨가 풍비(風痺)를 앓아 앉거나 누울 때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자, 사방을 다니면서 훌륭한 의원을 두루 구하였고, 온갖 초목(草木)의 자미(滋味)196)와 침과 뜸의 방법을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끝내 낫지를 못했다. 이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행한 것이 몇 개월이 되었지만 또한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낭주(朗州, 전남 영암의 옛 지명)의 소금강(小金剛, 월출산을 가리킴)으로 들어가 산신령에게 기도하였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빙설이 뒤덮혀도 매달의 상례로 삼았는데, 어느 하루 저녁 꿈에는 다른 징조가 있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김씨 또한 이날 밤에 꿈속에 어떤 한 노인이 두 개의 흰 대나무로 아픈 곳을 세 번 쳤는데, 이때부터 병세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가자 김씨가 놀랍고 기쁜 마음에 갑자기 일어났는데,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소치라 여겼다.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지기가 우뚝하여 일찍이 개연(慨然)히 절의(節義)로 자부하기를, "내가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하는 것에는197) 기필할 수 없지만 절의를 위하여 죽는 일이라면 어찌 남에게 양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삼장사(三壯士)198)를 논하여 말하기를, "그 절개는 높고 아름답지만, 다만 곧장 앞으로 나아가 적을 참수하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것이 한스러운 뿐이다."라고 하였다. 중년 이후로는 문을 닫고 《삼략(三略)》과 《육도(六韜)》199), 《병학지남(兵學指南)》200)과 《연기신편(演機新篇)》201) 등의 책 읽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았고, 포진(布陣)과 행군(行軍), 진퇴(進退)와 합변(合變)하는 방도202)에 대해 연구하여 자세히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오년에 동학 교도(東學敎徒)들이 맹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이 북받쳐 가서 절도사(節度使)를 만나 소탕할 계책을 진달하고 마침내 옆 고을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민병(民兵) 700명을 얻어 나주 영장(羅州營將)과 합병(合兵)하여 전주(全州)로 향하다가 옥과(果果)의 경계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하라는 전지를 받고 돌아왔다. 적들이 전주를 함락시킨 이후로부터 곳곳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날로 더욱 불어나더니, 6월에는 적 수천 명이 장흥(長興)에서 강진(康津)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공이 절도사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저에게 포군(砲軍) 백 명을 빌려주면 가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따라주지 않자 공은 혀를 차며203)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적들은 공을 매우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사람들이 혹 피하기를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삼척의 대환도(大環刀)204)가 있어 적들을 감당할 수 있는데, 어찌 머리와 꼬리를 감추어 구구하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적들은 평소에 그 위엄과 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12월에 적이 장흥과 강진 등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병영을 침범하려고 하여 10리 떨어진 곳에서 묵었는데, 절도사가 급히 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모두 한민(閒民,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고 저들도 오합지졸이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저들이 먼저 공격하면 우리가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은 참으로 알기 쉬운 형세입니다. 오늘 밤 민병들만으로 성을 지키게 하고 포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습격한다면 썩은 것을 부러뜨리는 형세와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위험한 계획이라 여겨 쓰지 않았다. 단지 본면(本面)의 민병들만 거느리고 성 밖의 채책(寨柵)205)을 지켰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들이 일자(一字)로 포진하여 오자, 공이 말하기를, "벌건 대낮 큰 길에서 행렬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만약 선봉을 패배시킨다면 뒤에 비록 10만의 군사가 이어 온다 하더라도 형세상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중도의 요해지에서 습격하십시오."라고 하였는데, 또 따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적들이 이르자 채책을 지키던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채책은 비록 온전하나 적들이 다른 채책을 따라 들어온 지 오래되었으니,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중군과 힘을 합쳐 성을 지키는 것이 낫겠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성을 들어갔는데, 성 안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남아있는 이가 없고, 적들의 선두 기병이 이미 이따금씩 떼를 지어 거리를 휘젓고 다니니, 공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가 만나는 적들마다 베었다. 얼마 안 있어 많은 무리가 이르렀다. 공이 멀리서 바라보고 군대를 지휘하여 나가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충돌하다 갑자기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적이 죽었다고 여겨 아무 걱정 없이 왔는데,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적의 수급 몇 명을 참수하고 죽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절도영(節度營, 절도사가 있는 본영)은 바로 한 도(道) 관방(關防)206)의 요해처이며, 절도사는 바로 한 도 도독(都督)의 중대한 직임이다. 성지(城池)가 천험(天險)하고 병갑(兵甲)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5백 리를 호령하고, 기고(旗鼓)와, 부월(鈇鉞)207)이 그 손아귀에 있어 60주(州)를 조발(調發, 군사를 불러 모음)한다면 기계(器械)와 추속(芻粟, 병마(兵馬)의 군량)이 어찌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반란군208)과 유랑민, 좀도둑209)들이 쳐들어오자 넋이 나가 허둥지둥 달아나 숨어서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고 국위(國威)를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아, 사람을 얻으면 10만의 적병(敵兵)이라도 많지 않으며, 사람을 잃으면 천리의 관방(關防)이라도 웅대하지 않는 법이다. 당시에 절도영 아래에 오직 박도정 한 사람만이 있었는데, 쓰지 않았으니 패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를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이뿐만 아니라 만약 그의 계책이 일찌감치 행해지고 의병을 모집한 군대가 전주(全州)에 도달하였다면 비류(匪類)의 난이 필시 흉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라의 상황이 또한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한 도의 성을 지킴에 만전을 기하는 계책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관계된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천고 지사(志士)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창 적이 드셀 때에는 술과 고기를 갖추고 북치고 피리 불며 분주하게 보내고 맞이하는 자가 길에서 끊이지 않다가, 매우 두려워져서는 성을 버리고 고을을 떠나 몸을 빼내 구차하게 살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아, 이러한 때에 이러한 사람이 없었다면 호남 지역이 어찌 한 사람도 의로운 선비가 없다는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기품과 곧은 절개가 백세토록 칭송하기에 충분하니 뜻을 펴지 못하고 공을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朴郁正昌鉉。字永化。密陽人。居康津縣。都正其官啣也。天性至孝。稱譽夙著。考病血指。延三日命。妣金氏患風痺。坐臥須人。行四方。遍求良醫。凡草木之滋。針炙之方。無所不試。而竟不愈。於是乃沐浴齊潔。致誠行禱者數月。而亦不愈。於是入朗州之小金岡。禱於山靈。冒風雨藉氷雪。月以爲常。一夕夢有異徵。心竊喜之。金氏亦於是夕。夢有一老人。以兩紈竹。三撾痛處。自是病勢漸減。後數日。下山歸家。呼母而入。金氏驚喜忽起。因以行步如常。人以爲孝感致然。膂力過人。志氣磊落。嘗慨然以節義自許曰。吾於撥亂反正。則有不可必。若伏節死義。則豈讓於人乎哉。又論壬辰之三壯士曰。其節則高矣美矣。但恨不能直前斬賊而先自投死也。中年以來閉門讀三略六韜兵學指南演機新篇等書。晝夜不輟。於布陣行軍進退合變之方。無不硏究而詳熟焉。甲午見東匪大熾。不勝忿憤。往見節度使。陳勦滅之策。遂傳檄傍郡。得民兵七百人。與羅州營將合兵。向全州。至玉果界。得罷兵之旨而還。賊自陷全州以來。在在屯據。日益滋蔓。六月賊數千。自長興將入康津。公請於節度使曰。假我砲軍百人。可以往擒。不從公咄咄歸家。是以賊疾公甚。欲殺之。人或勸之避。公曰。我有三尺大環刀。可以當之。何藏頭隱尾作區區懦夫樣耶。賊素畏其威望。不敢犯之。十二月賊陷長康諸邑。將犯兵營。宿於距十里之地。節度使急邀公議之。公曰。我軍皆閒民彼亦烏合。我先之彼必走。彼先之我必潰此固易知之勢也今夜只以民兵守城。用砲軍。分兩路襲擊。則勢若拉朽矣。衆以爲危計而不用。只得率本面民兵。守城外寨柵。翌朝賊以一字延互而來。公曰。白畫坦路。行不成列。若敗其先鋒。後雖有十萬繼來者。勢何能相及哉。請及其未至而邀擊於中路要險之地。又不從。俄而賊至。守寨者皆遁。公曰我寨雖完賊從他寨入久矣。獨守此何爲。不如入城中軍。合力守城遂入城。城中軍無一人留者。賊先騎。已往往作隊。橫行街路。公奮劒馳逐。逢則斬之。已而大羣至。公望見之。麾軍而出。大呼衝突。忽中丸而仆。賊以爲死。無慮而來。及近。忽起身。斬數賊而死。外史氏曰。節度營是一路關防要害之地。節度使是一路都督重大之任也。城池天險。兵甲山積。號令五百里。旗鼓鈇鉞。在其掌握。調發六十州。器械芻粟。何恨不集。乃於潢池流亡鼠竊狗偸之來。魂飛魄散。蒼黃奔竄。使城池不守。國威不振。其故何哉。嗚呼。得人則十萬敵兵。不足爲衆。失人則千里關防。不足爲壯。當時節度營下。惟有一朴都正而不爲用焉。則其所取敗。勢所必至。非惟此也。若使其計。早見得行。而募義之兵。達於全州。則匪類之亂。必不至鴟張。而國家爻象。亦不至如今日也。豈止爲一路城守萬全之計而已哉。人之用舍。所係如此。詎不爲千古志士無窮之恨乎。然方賊之倔强也。具牛酒張鼓吹。奔走送迎者。絡繹於道。及其甚恐。則棄城亡郡。脫身偸生者。項背相望。噫。此時焉而不有此人焉。則全湖之地。烏得免無一人義士之責乎。偉韻直節。足以有辭於百世。不可以志之未伸功之未就議之也。 초목(草木)의 자미(滋味) 입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반드시 초목의 자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생강과 계피 등을 말한 것이다.[曾子曰: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하였다. 난세를……것에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애공(哀公) 14년조에, "난세를 다스려 그것을 정도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은 춘추(春秋)보다 좋은 책은 없다.[撥亂世, 反諸正, 莫近於春秋.]"라고 하였다. 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진주의 촉석루에 올라가 당면한 국가의 장래를 통탄(痛歎)하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세 장사를 말한다. 삼장사는 영남 삼장사, 호남 삼장사로 나누어 말하는데, 여기서는 호남 삼장사인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를 가리킨다. 영남 삼장사는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킨다. 《鶴峯集 註》, 삼략과 육도(六韜) 《삼략》은 중국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상ㆍ중ㆍ하 3권의 병서(兵書)로 조선 시대 무과 시험 과목인 무경 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이다. 《육도》는 중국 주(周)나라의 태공망(太公望)이 지었다고 하는 병서(兵書)로, 문도(文韜)ㆍ무도(武韜)ㆍ용도(龍韜)ㆍ호도(虎韜)ㆍ표도(豹韜)ㆍ견도(犬韜)의 6권으로 되어 있다. 병학지남(兵學指南) 명(明) 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 중에서 조련법(操鍊法)을 간추려 편찬한 책이다. 원래 선조(宣祖) 때에 간행되어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군사 훈련 교범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정조(正祖) 때 왕명에 의해 이상정(李象鼎)이 수정하고 주석을 첨부하여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를 만들었다. 연기신편(演機新篇) 조선 중기 안명로(安命老, 1620~?)가 편찬한 병서이다. 1660년(현종1) 진법(陣法)의 비조라 일컫는 풍후(風後)·악기(握奇)의 법에 따라 진법을 논하고, 여기에 척계광(戚繼光)의 병제를 개선하여 음양가(陰陽家)의 제법(諸法)을 덧붙여 《연기신편》 3권 3책을 엮었다. 1664년 안명로가 양산군수로 있을 때 《연기신편》을 조정에 보내어 병제의 개편을 요청하였으나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병서들과 함께 병사훈련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합변(合變)하는 방법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하는 병법(兵法)을 말한다. 혀를 차며 원문의 '돌돌(咄咄)'은 속마음은 걱정스러우면서도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으로, 혀 차는 소리를 나타낸다. 진(晉)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있다가 모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밖으로는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나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무슨 글자를 썼다. 이에 사람들이 엿보니 '쯧쯧 괴이한 일이로다'란 뜻인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黜免》 대환도(大環刀) 조선시대에는 긴 외날을 가진 칼을 대부분 환도라고 했다. 길이에 따른 분류로 소환도(小環刀), 중환도(中環刀), 대환도(大環刀) 등으로 나누었다. 환도류 무기 중에서도 크기가 큰 대환도는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채책(寨柵) 사방에 울타리를 친 방어진지를 말한다. 관방(關防) 좁고 막힌 험애(險隘)한 곳에 관소(關所)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켜 방어하는 것, 또 그러한 곳을 말한다. 기고(旗鼓)와 부월(斧鉞) 기고는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쓰이고, 부월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여기서는 절도영의 지휘를 맡은 절도사를 가리킨다. 반란군 원문의 '황지(潢池)'는 외지고 좁은 땅이란 뜻으로 반역이 일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곧 임금의 어진 정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진 곳에 사는 백성들이 지방 관리들의 폭정으로 인해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것을 비유한다. 한나라 공수(龔遂)가 선제(宣帝)의 하문을 받고 "백성은 기한에 시달리건만 관리들이 돌보아 주지 않자, 폐하의 적자들이 폐하의 병기를 훔쳐 황지 가운데서 장난을 쳐 본 것뿐입니다.[其民困于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 盜弄陛下之兵于潢池中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89 龔遂傳》 좀도둑 원문의 '서절구투(鼠竊狗偸)'는 쥐와 개처럼 몰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인데, 조선 시대에 변경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야인(野人)이나 왜적(倭敵)을 일컫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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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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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정대부 좌승지 매곡 정공 유사장 贈通政大夫左承旨梅谷鄭公遺事狀 정복현(鄭福鉉) 군이 그 부형(父兄)의 명으로 그 증대부(曾大父, 촌수가 먼 증조 항렬의 남자) 매곡(梅谷)공의 유적을 받들고 와서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군(君)은 나와 종유하였으니 그 말을 참으로 모른 척 할 수가 없었고, 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인지라 그 유풍과 여운이 귀에 익숙하고 마음으로 사모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감히 내가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는 원상(元相)이고, 자는 현직(賢直)이며, 매곡(梅谷)은 그의 호이다. 정씨의 계파는 하동(河東)에서 나왔으며, 밀직사(密直司)를 지낸 휘가 국룡(國龍)을 비조로 삼았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가 인귀(仁貴)라는 분이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참봉을 지낸 휘 주유(由周)를 낳았으며, 휘 주유가 현감을 지낸 휘 지영(之英)을 낳았다. 휘 지영이 호가 둔재(遯齋)인 휘 여해(汝諧)를 낳았는데, 점필재(佔畢齋)8)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정일두(鄭一蠹)9)와 김한훤(金寒暄)10)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4대를 지나서 호가 송암(松庵)인 휘 흘(忔)이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공에게 5대가 된다. 고조는 휘 문규(文奎)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증조는 복채(復釆)이다. 조부는 탁(鐸)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아버지는 양엽(陽曄)으로 대대로 문행이 있었다. 어머니는 선산 정씨(先山鄭氏) 내광(來光)의 따님으로, 정조 신축년(1781, 정조5)에 능주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순실하고 명민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가(名家)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가르치고 기르는 데 갖은 방법을 다 하였는데, 하나하나 그대로 따르면서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8세에 《소학》을 배우다가 7세에 남녀가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글에 이르러서 이에 말하기를, "나는 지금 8세인데 7세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녀의 예를 분별하고 잡스러운 놀이를 하지 않았으며 비루하고 속된 말을 하지 않았고 날마다 부모를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있으시면 마음으로도 근심하고 얼굴빛으로도 근심하여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약을 지으며 옷에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비록 특이한 산물이거나 구하기 힘든 약재라도 병에 이롭다는 것은 정성과 힘을 다해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이 없었다. 혼인하여 부인을 맞이함에 부모가 분가시키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분가하는 것도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부모가 살아계신데 분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매우 슬퍼하여 거의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렀고, 장례의 모든 도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라 유감이 없게 하였다. 기일을 당하여서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고, 엄숙히 재계하고 깨끗하게 하여 마치 살아계신 듯이 여기는 정성을 다하였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었고, 출입을 간소히 하였다. 재주는 문학에 뛰어났으나 부귀영달을 꾀함이 없었으며, 집이 본래 가난하였으나 봉록의 이로움에 뜻이 없었다. 오직 몸을 검칙(檢飭)하고 행실을 닦는 것으로 구경(究竟)11)의 계책을 삼았으니, 이 때문에 자손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향리에서 그 의리에 감복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군자다운 어른이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철종 계축년(1853, 철종4)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산(莘山) 건너 대방(大坊)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뒤에 자손이 장수하고 귀하게 되어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숙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 복헌(復憲)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범환(範煥)·영환(英煥)·수환(壽煥)·달환(達煥)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선을 쌓는 집안에 남은 경사가 있다."12)라고 하였다. 자손에게 남은 경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선조가 선을 쌓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종사(螽斯)13)와 초료(椒聊)14)처럼 자손이 더욱 번성하였고, 효우와 문학의 기풍이 계속해서 실추되지 않았으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鄭君福鉉。以其父兄命。奉其曾大父梅谷公遺蹟。來謁狀行之文。君從余遊。其言固難恝。公吾鄕先進也。其遺風餘韻。慣於耳而慕於心久矣。豈敢以非其人辭。公諱元相。字賢直梅谷其號也。鄭氏系出河東。以密直諱國龍爲臭祖入。我朝。有諱仁貴戶曹參判。是生諱由周參奉。是生諱之英縣監。是生諱汝諧號遯齋受。業于佔畢齋門。與鄭一蠹 金寒暄爲道義交。四傳諱忔號松庵丙子擧義。贈判尹。於公爲五世。高祖諱文奎嘉善。曾祖諱復釆。祖諱鐸。贈司僕寺正。考諱陽曄。世有文行。妣先山鄭氏來光女。以正宗辛丑生公于綾州莘山里。公以醇實開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有以早敎豫養者。無所不至。而一一遵循。未嘗有違。八歲授小學。至七年男女不同席之文。乃曰我今八歲而不知七歲之敎乎。自此別於男女之禮。不作戱雜之遊。不出鄙褻之語。日侍親側應對惟謹親有疾。心憂色沮。露禱合藥。衣不解帶。雖異產僻材。可利於病者。殫誠竭力。求無不得。及成昏納婦。父母欲爲之分炊。公曰兄弟分炊。本非美事。況父母在而可乎。父母奇而聽之。執喪甚哀。幾至傷生。送終凡具。一違禮制。俾無餘憾。遇忌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慕。齊肅明潔以盡如在之誠。平居寡言笑。簡出入才優文學而無摹乎榮貴。家素貧窶而無意乎祿利。惟以勅身修行爲究竟計。是以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知不知。無不以君子長者稱之。哲宗癸丑二月十八日卒。葬莘山越大坊坤坐原。後以孫壽貴。贈左承旨。 配淑夫人淸道金氏復憲女。生四男。範煥英煥壽煥達煥。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有餘慶。而其祖先之有積善可知也。今距公之世久矣。而螽斯椒聊。愈爲蕃衍。而孝友文學之風。繼繼不墜此豈無所自而然哉。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자는 계온(季昷) 혹은 효관(孝盥)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3년(단종1)에 진사가 되고, 1459년(대조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함양 군수,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가 백욱(伯勗), 본관이 하동이며, 일두는 그의 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다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0년(성종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었다.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강학에 전념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 되었는데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궁극(窮極) 구경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궁극에 이르는, 철저하게 체득하는, 완성에 이르는, 최후의 목적 등의 뜻을 갖는바, 여기에서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 혹은 최고의 원리(原理)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자전서(朱子全書)》 권1 학일(學一) 〈소학(小學)〉에 "세간의 온갖 일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인 만큼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궁리하고 수신하는 것이야말로 구경법이라고 하겠다.[世間萬事, 須臾變滅, 皆不足置胸中. 惟有窮理修身, 爲究竟法耳.]"라고 하였다. 선을……있다 조상의 적선(積善)에 대한 보답으로 후손이 경사(慶事)를 받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종사(螽斯) 메뚜기로, 자손들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螽斯)〉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화목하게 모여드니, 의당 네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리라.〔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초료(椒聊) 산초나무로, 열매가 많이 달리기 때문에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한다. 《시경》 〈당풍(唐風) 초료(椒聊)〉에 "초료의 열매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네. [椒聊之實, 蕃衍盈升.]"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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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호은처사 위공 유사장 湖隱處士魏公遺事狀 공의 성은 위(魏), 휘는 상리(相履), 자는 덕희(德希), 호는 호은(湖隱)이다. 시조 휘 경(鏡)은 당나라 학사로 신라에 벼슬하여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회주는 지금의 장흥이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신라부터 고려까지 높은 공훈과 높은 작위가 혁혁히 이어졌는데, 합문기후(閤門祇侯)를 지낸 휘 충(种)에 이르러서는 우리 조정이 하늘에 순응한 처음이었는데, 시중(侍中) 김종연(金宗衍) 등과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30) 곤장형을 받고 먼 지방으로 귀양에 처해졌다. 이분이 휘 진용(悳龍)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고, 휘 진용이 휘 자양(自良)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으며, 휘 자양이 휘 종복(宗復)을 낳았으니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휘 종복이 휘 유형(由亨)을 낳았으니 습독(習讀)을 지냈으며, 장릉(莊陵)31) 말에 바닷가로 은거하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32) 영천(靈川) 신잠(申潛)33)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휘 유형(由亨)이 휘 진현(晉賢)을 낳았으니, 효로 추천받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사가 없어 백씨(伯氏) 진수(晉秀)의 둘째 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진사 휘 곤(鯤)은 호가 당곡(唐谷)이며, 휘 곤이 덕의(德毅)34)를 낳았으니 병조 참의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에 임금을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별칭)까지 호종(扈從)하여 세상에 청계선생(聽溪先生)이라 일컬어졌으며, 죽천사(竹川祠)에 제향하였는데,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정헌(廷獻), 호는 국천(菊泉)으로 진사를 지냈으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동명(東蓂), 호는 상봉(觴峯)으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익무(翊武)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아버지의 휘는 ▣▣으로 문학과 행의가 있어 한 세상에 추존을 받았다. 어머니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목사 성인(成仁)의 증손녀로 유순하고 정갈하며 규범(閨範)이 매우 지극하였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 10월 6일에 부(府)의 옥산(玉山)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 서당에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문리(文理)가 날로 향상되었다. 하루는 촌사(村社)에서 잡희(雜戱,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니 달려가 구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공만이 홀로 가지 않아 서당의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 장차 사자(四子)35)와 성리학과 관련된 많은 책을 밤낮으로 연구해서 의취(意趣)를 다하는 데 힘썼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예절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며, 안부를 묻는 일과 달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여 올리는 일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갖추어드렸다. 늙어서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는데, 쇠하고 늙었다고 스스로를 관대하게 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예제를 따랐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날마다 한 번씩 성묘를 하였고,36)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으니 집안사람들이 그 오고 가는 수고로움을 가엽게 여겨 여막을 무덤 곁에 지어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시묘살이를 한다는 이름을 표방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제삿날이 되면 엄숙히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여 그 정성을 다하고,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정을 다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낮에는 책상을 나란히 하여 공부하고 밤이면 베개를 함께하며 매우 즐겁고 화락하게 지내 늙어서도 변치 않았다. 친척과 벗, 이웃과 향당 간에도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는 일을 때에 따르고 절후에 맞추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늙어서는 더욱 숨어 지내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사절하고 조용하고 묵묵히 수양하여 참다운 마음이 안에서 넉넉하였다.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히 등급37)을 두어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니 성취한 바가 많았다.매번 따뜻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이 되면 한두 명의 오랜 벗들과 한가로이 강호(江湖)에서 거닐며 시를 읊조리고 시원스레 속세를 떠날 의표를 가지고 있었다. 경물을 바라보면 감회가 생겨서 붓 가는대로 적었는데 문자를 수식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대명일월숭정유민(大明日月崇禎遺民)' 여덟 자를 벽에 써서 자신의 뜻을 기록하였다. 자손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유해지면 사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치스러워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만함이 이르게 된다. 교만과 사치가 이르면 패망이 뒤따르는 법이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반성하며 남을 보살피고 외물을 접할 때에도 털끝만큼의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자신이 화락한38) 사람이 되고 집안에 효도하고 삼가는 기풍이 있다면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음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조 병자년 9월14일에 생을 마쳤으며, 남면(南面) 장생원(長栍院) 선영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만진(萬震)의 딸로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다.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인(道仁)이며, 딸은 김봉채(金鳳彩)·윤신동(尹新東)·변정홍(卞廷弘)·마인학(馬仁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영백(榮百)·영직(榮直)·영의(榮義)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포부가 담대하고 넉넉하며 조예가 깊고 치밀하여 우뚝하게 한 시대의 촉망을 받았는데도, 바다 모퉁이에서 숨어 지내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아 확고한 뜻을 동요시킬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유운(遺韻)과 암장(闇章)39)을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하였다. 5세손 계창(啓昌)이 그 아들 대량(大良)을 시켜 행장을 청하였는데, 아, 고금의 감회에 어찌 행장을 쓸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公姓魏,諱相履。字德希。號湖隱。始祖諱鏡。以唐學士仕新羅。封懷州君。懷州今長興。子孫仍貫焉。自羅之麗。崇勳嵬爵。赫赫相承。至諱种官閤門祇侯。當我朝應順之初。與侍中金宗衍等謀復。事覺。杖流遠地。生諱悳龍通德郞。生諱自良通德郞。生諱宗復漢城參軍。生諱由亨習讀。莊陵末。遯處海濱。與南秋江孝溫申靈川潛爲道義交。生諱晉賢。以孝薦。授光陵參奉。無嗣。以伯氏晉秀第二子爲後。諱鯤進士號唐谷。生諱德毅兵曹參議。壬辰扈從龍灣。世稱聽溪先生。享竹川詞。於公爲五世。高祖諱廷獻號菊泉進士贈掌樂院正。曾祖諱東蓂號觴峯贈戶曹參議。祖諱翊武。有隱德。考諱文學行義。見重一世。妣咸陽朴氏牧使成仁曾孫女。柔婉靜嘉。閨範備至。肅廟辛未十月六日。公生于府之玉山第。幼穎悟異於凡常。就塾授課。文理日就。一日村社設雜戲。莫不奔觀。公獨不往。塾師奇之。及長專心爲己。將四子及性理群書。晝夜硏究。務盡意趣。事親至孝。晨昏定省。未嘗有闕。寒暄之節。甘腰之供。殫誠竭力。無不畢給。老而遭故。不以衰艾自恕。一從禮制。旣葬而日一展省。風雨不廢。家人閔其往來之勞。欲爲之結盧墓側。公止之曰。吾不欲有盧墓之名。遇忌諱之辰。齊肅明潔以盡其誠。悽愴怵惕以盡其情。兄弟六人。晝則連榻。夜則同枕。怡怡湛樂。老而不替。族戚朋友。隣里鄕黨。存訊周恤。隨時及節。未嘗有闕。老益沈晦。謝絶世紛。潛修黙養。眞情內腴。訓進生徒。嚴有科級。循循引誘。多所成就。每當春和秋淸。一二朋舊。逍遙諷詠於江湖之曲。灑然有出塵之標。覽物敍懷。信筆輒寫。而不有拘拘雕飾之意。嘗題大明日月崇禎遺民八字於壁。以識其志。戒子孫曰。富不期奢而奢至。貴不期驕而驕至。驕奢至則敗亡隨至。此理勢之必然。持身省己。酬人接物。亦不可存一毫驕肆之心。使身爲愷弟之人。家有孝謹之風。則其於無忝所生。不其幾矣乎。英宗丙子九月十四日考終。葬南面長柱院先隴乙坐原。配珍原朴氏萬震女。婦德醇備。生一男四女。男道仁。女適金鳳彩尹新東卞廷弘馬仁㶅。孫男榮百榮直榮義。曾孫以下不盡錄。嗚呼。抱負贍富。造詣邃密。偉然爲一時之屬望。而沈淹海曲。終始不渝。有確乎不可拔者。遺韻闇章。追仰彌至。五世孫啓昌。伻其子大良。請狀行之文。嗚呼。緬古感今。豈以非其人辭。 시중……발각되어 김종연(金宗衍, ?~1390)은 고려 시대의 무인이다. 1390년(공양왕2)에 김종연이 이방춘(李芳春)ㆍ김식(金軾)ㆍ이중화(李仲和)ㆍ윤귀택(尹龜澤) 등과 함께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이성계를 죽이기 위해 모의를 꾀하다 윤귀택의 밀고로 발각된 사건이다. 이때 김종연은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위충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高麗史 卷45 恭讓王2年》 장릉(莊陵)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능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4리에 있다. 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양 출신으로 김종직(金宗直) 의 문인이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전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고 상소한 일로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중종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숙종 때 고양의 문봉서원과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고, 다시 정조(正祖)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추강집(秋江集)》ㆍ《추강냉화(秋江冷話)》ㆍ《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신잠(申潛) 1491~155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이며, 신종호(申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파방(罷榜)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던 중에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덕의(德毅) 위덕의(魏德毅, 1540~1613)는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임금을 알현하니 군신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으로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녹훈(錄勳)되고 사후에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추증(追贈)됐다. 사후 죽천사(竹川祠) 입사(立祠)와 함께 주벽(主壁)으로 배향되고, 또 광주광역시 대촌동 황산사(黃山祠)에도 배향됐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장구》, 《중용장구》, 《맹자》를 가리키는데, 이 저술들의 저자는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로서 4명의 이름에 자(子) 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사자(四子)'라고 칭한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에 "사자는 육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요, 《근사록》은 사자로 올라가는 계단이다.〔四子六經之階梯 近思錄四子之階梯〕"라는 말이 실려 있다. 한……하였고 주희(朱熹)는 "상주가 장례를 치르고 나면 신주가 이미 집으로 돌아와 집이 거상(居喪)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상주는 더 이상 산소 옆의 여묘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끝내 잊히지 않으면 아우들에게 묘소 옆에서 머물며 때로 한 번씩 성묘하게 할 수 있다.[主喪者旣葬當居家 蓋神已歸家 則家爲重 若念不能忘 却令弟輩宿墓 時一展省可也]"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朱子大全 卷63 答胡伯量》 등급 원문의 '과급(科級)'은 단계를 밟아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근사록 서제(近思錄書題)〉에 "강학하는 방법과 일상생활에 몸소 행하는 실제로 말하면 모두 등급이 있으니, 이를 따라 나아가 낮은 데로부터 높은 곳에 오르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에 이른다면 거의 이 책을 찬집한 본의를 잃지 않을 것이다.[講學之方, 日用躬行之實, 具有科級, 循是而進, 自卑升高, 自近及遠, 庶幾不失纂集之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화락한 원문의 '개제(愷弟)'는 '개제(豈弟)'라고도 하며 기상(氣象)이 단아하고 화락함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 〈한록(旱麓)〉에서 문왕(文王)의 덕을 칭송하며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하였다. 암장(闇章)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의 준말로, 군자는 도덕이 심원하여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지만 속에 있는 도덕이 안으로부터 절로 우러나와 그 광채가 날로 드러나 빛난다는 뜻이다. 《中庸章句 第33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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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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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운와 처사 정공 유사장 贈童蒙敎官朝奉大夫雲窩處士鄭公遺事狀。 아, 호남에 사는 우리 종족은 그 숫자가 적지 않지만, 문망(門望)과 가운(家運)이 영락(零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었다.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알려지고 인망이 있으면서 근세에 훌륭한 자는 오직 운와(雲窩)40) 처사일 것이다. 공의 휘(諱)는 홍규(弘規), 자는 사건(士建)이다. 정씨는 계통이 광주(光州)에서 나왔고, 고려 찬성(贊成) 휘 신호(臣扈)41)를 비조(鼻祖 시조(始祖))로 삼는다. 대대로 높은 벼슬과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다. 국조(國朝) 중엽에 이르러서 휘 질(晊)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휘 응종(應鍾)42)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휘 서(犀)43)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휘 인녕(仁寧)44)은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휘 만근(萬謹)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니, 이들은 공의 5대 이상이다. 고조 휘 금(錦)은 참의(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득생(得生)은 벼슬이 별제(別提)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익(時益)은 수직(壽職)45)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부친 휘 광훈(光勳)은 호가 남당(南堂)인데 은덕(隱德)이 있어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세위(金世緯)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고, 모친 숙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전익겸(全益謙)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고요하고 아름다워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갖추었으니 영종(英宗) 계유년(1753) 12월 26일에 나주의 거평리(居平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전씨가 하종(下從)46)을 결의(決意)하여 전혀 음식을 드시지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간하여 마침내 정성으로 감동시켜 모친의 마음을 돌렸다. 평소에 시봉(侍奉)할 때 정성과 삼감을 모두 다하였고, 앉고 먹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하루는 모친에게 묻기를 "선고(先考)께서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을 업으로 삼았습니까?"라고 하니, 모친이 "서책을 읽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사람들이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눈물을 떨구며 "소자가 마땅히 선업(先業 선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이고 게을리하지 않아 성동(成童 15세가 된 사내아이)에 이르러 경사(經史)를 모두 통달하고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나고 아름다웠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원근의 훌륭한 명망이 있는 사우(士友)들과 종유하여 연마하고 담금질하여 더욱 확충시켜 나아갔다. 유학(遊學)하여 밖에 있더라도 반드시 열흘에 한 번은 모친을 찾아뵈었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이를 저장해두었다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드렸다. 부모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득실(得失)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 정문(程文)47)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고인(古人)의 학문하는 차례에 따라 가르쳤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불훼(不毁)의 나이로 극도로 몸을 훼손하는 데에 잘못하였고,48) 생강과 계피49)를 입에 넣지 않았고, 최마복(衰麻服)50)을 몸에서 벗지 않았으며,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여막(廬幕)에서 끊어지지 않았는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애통해하는 것이 조괄(祖括)51)하는 때와 다름이 없었고, 아침마다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묘(墳墓)에 전배(展拜)하였으며, 중월(仲月)52)에는 시제(時祭)를 행하였고, 제사를 지낸 뒤에 자손들에게는 《소학》과 《대학》을, 부녀(婦女)들에게는 〈내칙(內則)〉과 《열녀전(列女傳)》을 강하였으니, 내외가 엄격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말년에 한 구역에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雲窩)'라고 편액하고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유유자적하기도 하였으니,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글 36편을 지어 '《운와경필(雲窩警筆)》'이라 하였는데, 그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도와 사람과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은 성현이 남긴 경전을 보좌하여 이 세상을 도와 보탬이 될 수 있으니, 공의 포부와 조예도 이러한 데에서 그 대략적인 줄거리를 대강 짐작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11월 28일에 고종명(考終命)하였으니 향년 84세이고, 백룡산(白龍山) 서쪽 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35년 뒤 경오년(1870) 봄에 도내의 유생 조철호(趙喆浩) 등이 조정에 공을 천거하는 내용으로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고, 가을에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노사(蘆沙)53) 기 선생(奇先生)이 이에 대한 기문(記文)54)을 지었다. 부인 영인(令人)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양엽(李陽燁)의 따님이니 2남 2녀를 낳았고, 계배(系配) 영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이희조(李希祚)의 따님이다. 장남은 정운보(鄭運普)이고 다음은 정운호(鄭運昊)인데 효우(孝友)로 세상에 알려져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장녀는 수원(水原) 최광발(崔光發)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언양(彦陽) 김원택(金元澤)에게 출가했으며, 손자와 증손 이하 약간 명이 있다. 아, 출중하고 비상한 재능으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독서를 궁리하고 격물[窮格]하는 문으로 삼고, 경을 주로 하는[主敬] 것을 지수(持守)의 근본으로 삼았다. 궁격(窮格)을 오래 함에 조리와 두서가 모두 두루 미치고, 지수를 익숙히 함에 법도가 굳게 안정되었으며, 이를 가정에 시행함에 효제(孝悌)가 일어나 행해지고, 이를 고을과 나라에 미루어 감에 신의(信義)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광휘(光輝)를 감추고 천진한 성품대로 분수를 지켜 구림(邱林)의 한적한 물가에서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인간 세상에 천사만종(千駟萬鐘)55)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우리 가문 일대(一代)의 명석(名碩)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남쪽 지방에서 백 년 동안 유림(儒林)의 모범이 될 만하다. 신축년(1901) 봄에 현손 정위석(鄭暐錫)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나를 찾아와 인하여 한마디 부탁하는 말을 하였다. 내가 공경히 받아 삼가 보고 일어나서 "기 선생(奇先生)이 이미 저술한 것이 있고, 여력재(餘力齋)56) 장 선생(張先生)이 또 그 유서(遺書)에 발문(跋文)을 지었으니, 천만세(千萬世) 영원한 공안(公案 관공서의 문안(文案))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어찌 가문 안의 보잘것없는 한 후생(後生)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현자를 사모하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한 가문에서 철식(綴食 배향(配享))하는 상황에 있는 자에게는 어떠하겠는가. 공에게는 진실로 족히 만분의 일도 기릴 것이 못 되지만, 보잘것없는 여생(餘生)의 입장에서는 말광(末光)에 의지할 것을 사모하는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嗚呼。吾宗之居在湖南者。其麗不尠。而門望家韻之零替不振。垂二百餘年于茲矣。若其文學行義之有聞有望。而偉然於近世者。貴惟雲窩處士乎。公諱弘規。字士䢖。鄭氏系出光州。以高麗贊成諱臣扈爲鼻祖。簪纓文學。世有聞人逮至國朝中葉。贈左賛成諱晊。判書諱應鍾。地平諱犀。掌令諱仁寧。贈掌樂院正諱萬謹。寔公五世以上。高祖諱錦贈參議曾祖諱得生官別提贈參判。祖諱時益壽資憲。考諱光勳號南堂。有隱德。贈承旨。妣淑夫人光山金氏世緯女。無育。妣淑夫人天安全氏益謙女。溫仁靜嘉。閨範甚備。以英宗癸酉十二月二十六日。生公于羅之居平里第。七歲遭外艱。全氏決意下從。絶不進飮食。涕泣苦諫。卒以感回親意。平居侍奉。備盡誠謹。坐食進退。不命不敢。一日問于母氏曰。先考在。世所業何事。母氏曰。讀書勅行。人稱善士。公聞之泫然曰。小子當繼述先秦。自是就博受學。刻苦不懈至成童。淹貫經史。詞藻斐蔚。旣冠追從遠近士友有雅望者。磨礱浸淬。以益展拓。遊學在外。必十日一覲。風雨不廢。遇美味。必儲而藏之。待歸而供焉。爲親應擧。不以得失經心。敎生徒。亦不以程文爲急。必依古人爲學之序而授之。遭內艱也。以不毁之年。而過於致毁。薑桂之滋。不入於口。衰麻之服。不釋於身。哭泣之聲。不絶於次。三年如一日。遇忌日。哀痛無異祖括時。每朝謁廟。朔望展墳。仲月行時祭。祭後講子孫以小大學。講婦女以內則列女傳。內外斬斬無有間言。晩築書社一區。扁以雲窩。遊焉息焉。不如年數之不足。著者三十六編。名曰雲窩警筆。其修身齊家之道。酬人應物之方。可以羽翼乎遺經。而裨補乎斯世。公之抱負造詣。亦可卽此而領略其梗槩矣。以憲宗丙申十一月二十八日考終。享年八十四。葬于白龍山西麓甲坐原。後三十五年庚午春道內儒生趙喆浩等剡聞于朝贈童蒙敎官。秋命旋閭。蘆沙奇先生撰其記。配令人陽城李氏陽燁女。擧二男二女。系配令人咸平李氏希祚女。男長運普。次運昊。孝友聞世。贈持平。女長適水原崔先發。次適彦陽金元澤。孫曾以下若干。嗚呼。以若出類不常之才。早自覺悟。以讀書爲窮格之門。以主敬爲持守之本。窮格之久而條緖該浹。持守之熟而規秬堅定。施之家庭而孝悌興行。推之鄕邦而信義著聞。潛光蘊輝。任眞推分。婆娑徜徉於邱林閑寂之濱。而不知入間世有千駟萬鍾之樂也。其偉韻遐躅。不惟爲吾門一代之名碩。而亦可爲南土百年間儒林之標範也。歲辛丑春。玄孫暐錫奉家狀過余。因有一言之託。余祇受而謹閱之。作而曰。奇先生旣有所述。餘力齋張先生又跋其遺書矣。千萬世不朽之公案。無過於此。何待乎門內渺藐一後生之言哉。雖然慕賢好德。他人猶然。況在一門綴食之地。而爲何如耶。在公固不足爲揄揚之萬一。而在區區餘生。思附末光之情。有不能自己云爾。 운와(雲窩) 정홍규(鄭弘規, 1753∼1836)의 호이다. 7세에 부친을 잃고 모친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라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사후에 고종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동몽교관을 증직했다. 문집으로 《운와유고(雲窩遺稿)》가 있다. 정신호(鄭臣扈) 광주 정씨(光州鄭氏)의 시조로, 고려말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걸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 門下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추봉되었다.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응종(鄭應鍾) ?~? 자는 자행(子行), 호는 퇴은재(退隱齋)이다. 부친은 참봉(參奉),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질(鄭晊)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아뢰었고 정란(政亂)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정서(鄭犀) ?~? 자는 비연(斐然)이다.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정인녕(鄭仁寧) 1519~? 중종 39년(1544) 갑진(甲辰)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수직(壽職)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이다. 하종(下從)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는 것을 말한다. 정문(程文) 과거 볼 때 쓰는 일정한 법식의 문장이다. 불훼(不毁)의……잘못하여 이는 거상(居喪)하는 예절을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가 되면 몸을 극도로 훼손하지 말고, 60세가 되면 몸을 훼손하지 말며, 70세가 되면 몸에 최마(衰麻)의 상복(喪服)을 입을 뿐,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집 안에서 거처한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라는 말이 나온다. 생강과 계피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들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반드시 초목의 양념도 있어야 한다.'라고 했으니, 생강과 계피를 말한 것이다.〔曾子曰: '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한 말이 나온다. 최마복(衰麻服) 부모의 상을 당한 상주가 입는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이다. 조괄(祖括) 초상을 치르는 법도이다. 중월(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로, 음력 2월, 5월, 8월, 11월을 이른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이고, 자는 대중(大中)이다. 저서로는 《납량사의(納凉私義)》·《노사문집(蘆沙文集)》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문(記文) 《노사집(蘆沙集)》 권22에 〈효자 운와 정공 정려기(孝子雲窩鄭公旌閭記)〉가 실려 있다. 천사 만종(千駟萬鐘) 4천 마리의 말과 1만 종의 많은 녹(祿)이란 뜻으로, 부귀함을 뜻한다.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 1777~1867)의 호이다. 자는 유장(幼長)이다. 1777년(정조1) 9월 27일 나주  다시면 송촌리(松村里)의 구제(舊第)에서 태어났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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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 박공 유사장 溪庵朴公遺事狀 호남은 문헌(文獻)의 땅으로 유현들이 배출되었으니, 고(故) 왕자 사부(王子師傳) 문강공(文康公) 죽천(竹川)57) 박 선생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 선생의 후손 휘 형덕(馨德) 은 호가 완이당(玩易堂)인데 선생이 가정에서 전한 것을 얻어 산양(山陽)의 서쪽에서 도를 강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그 문하에 나아가 자신의 학업을 마친 자가 많았으니, 근고(近故)의 계암(溪庵) 박공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재무(載茂)이고 자는 내실(乃實)이니, 바로 죽천 선생의 8세손이고 완이당에게는 족질이 된다. 정조 정유년(1777) 9월 19일에 관산(冠山) 삼수리(三水里)에서 태어났는데,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고 재기(才器)가 민첩하고 풍부하였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때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과 시격(時格) 및 문장의 각 체에 이르러서는 모두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자, 사원(詞垣)에서 으뜸으로 추앙하여 훌륭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어느 날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유문(儒門)의 사업은 따로 있는데 문사(文詞)를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완이당 선생을 가서 찾아뵙고 학문하는 절도를 들었다. 이때부터 마음을 비워 뜻을 겸손하게 하였고, 전심으로 노력을 다하여 의리(義理)의 깊은 뜻에 침잠하고 본원(本原)의 요점을 잡고 보존하였으며, 연마하고 무젖으며 쌓고 확충시켜 나아가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할 때와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할 때에도 법도를 따라 일찍이 허물이 있지 않았다. 부모를 섬길 때에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고 집상(執喪)할 때에 애훼(哀毁)58)가 매우 지나쳤으며, 3명의 아우와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있고 없는 것을 함께하였다. 평소에 옷깃을 바로 하고 바르게 앉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비록 아이들과 비천한 무리일지라도 따뜻한 말로 자상하게 타일러 성난 목소리를 가하지 않았다. 생도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치지(致知)와 거경(居敬)으로서 체험하고 실천하여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었으니 분명한 성규(成規)가 있었다. 을미년(1835) 3월 6일에 고종명(考終命)하여 살았었던 마을 오른쪽 학송산(鶴松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본관은 진원(珍原)이니, 직제학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9)은 바로 국초(國初)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선비와 고관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광전(光前)에 이르렀으니, 바로 죽천 선생이다. 참봉 만하(萬廈)·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무석(武鍚)·좌승지에 추증된 수원(守遠)·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장근(章根)은 바로 고조 이하 4대의 휘함(諱銜)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세준(張世浚)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이진계(李震啓)의 따님이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니, 공은 바로 장씨의 소생이다. 공의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선정덕(宣廷德)의 따님이고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중흥(重興)과 중회(重會)이고 딸은 관산(冠山) 임채환(任采煥)·진주(晉州) 정방형(鄭邦亨)·진주 정순충(鄭淳忠)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길현(吉鉉)과 명현(命鉉)이며, 증손은 태경(泰敬)·태정(泰禎)·태업(泰業)·태과(泰科)이다. 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된 까닭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이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죽고 난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성함과 쇠함, 빈궁과 영달에 이르러서는 시운(時運)에 따라 우연히 오는 것이니, 그 사람을 논하는 방도가 아니다. 공은 덕망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일찍 스스로 스승을 만나 문로(門路)가 바르고 분명하였으며, 출입하면서 몸에 배어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훌륭하게 이처럼 수립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최고의 사업이고 생순사안(生順死安)60)한 곳이다. 비록 바닷가 궁벽한 마을에 묻혀 살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나에게 있는 것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남긴 여운과 남은 향기가 전해져 사람들에게 있으니, 백세토록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만하다. 湖南文獻之地。儒賢軰出。故王子師傅文康公竹川朴先生。卽其一世。先生後孫。諱馨德號玩易堂。得先生家庭之傳。講道于山陽之西。四方學者。多就其門。而卒其業者。近故溪庵朴公。亦其一也。公諱載茂。字乃實。卽竹川先生八世孫。在玩易堂爲族姪也。正宗丁酉九月十九日。生于冠山之三水里。天姿穎悟。才器敏贍。就傳上學。文理日進。至於功令時格。筆翰各體。無不俱極其精。詞垣推先。聲華藉甚。一日慨然歎曰。儒門事業。自有所在。文詞奚爲。遂往謁玩易堂先生。得聞爲學節度。自是虛心遜志。專意致力。沈潛乎義理之藴。操存乎本原之要。磨礱浸灌。積累展拓。一動一靜一。語一默。遵循規矩。未嘗有過。事父母。忠養備至。執喪哀毁過甚。與弟三人。怡怡湛樂。有無共之平居正衿危坐。不見有怠慢之容。平心率物。不見有暴戾之色。雖在兒侄卑賤軰。溫言諄諄。不以厲聲加之。訓進生徒。必以致知居敬。體驗踐履。循循提誘。的有成規。乙未三月六日考終。葬所居村右鶴松山子坐原。公本珍原人。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卽國初顯祖也。衿紳簪纓。奕世不絶。六傳至諱光前。卽竹川先生也。參奉萬廈。贈司僕寺正武鍚。贈左承旨守遠。贈戶曺參判章根。卽高祖以下四世諱御也。妣興德張氏世浚女。系妣仁川李氏震啓女。皆贈貞夫人。公卽張氏出也。公配寶城宣氏廷德女。生二南三女。曰重興重會。冠山任采煥晉州鄭邦亨晉州鄭涼忠也。孫曰吉鉉命鉉。曾孫曰泰敬泰禎泰業泰科也。嗚呼。人生斯世。其所以爲人者。果何事耶。此是風夜勉勉。死而後已者也.至於陞沈窮通。時爾適爾。非所以論其人也。公生長德門。早自得師。門路端的。出入擩染以至文學行誼偉然樹立如此。此是太上事業。生順死安處。雖沈溣海曲。世不見知。而何損於我之有哉。遺韻餘芬。傳之在人。足令百世起敬。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호이다.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선조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애훼(哀毁)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이다. 1406년(태종6)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에 임명됐고, 이어 세자부(世子傅)·좌정자(左正字), 이듬해에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의 은전을 입었다. 생순사안(生順死安)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가 천리에 따라 순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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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十五夜藜村獨宿 歷雲閃炙轂。映谷入秋毫。誰識明窓裏。幽人枕獨高。湧海魚驚眼。亂河免濕毫。今宵天下白。談笑幾人高。至圓難犯手。太白不加毫。晦朔何曾缺。世人見未高。啣盃忝白玉。揮筆失彤毫。起視江南夜。群山突兀高。寒梅粧舊影。瘦鶴浴新毫。耿耿刀頭意。碧天穿眼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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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南溟有詩云。翠竹披風偃。蒼松冒雪折。所以主人心。愛松不愛竹。余惜其厚於松。而薄於竹因步其韻。聊爲竹解嘲。 風竹從容偃。雪松感慨折。若尋難易辨。松自讓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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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菊吟 籬有淵明菊。樽空翟氏酒。孤負重陽節。皤然一禿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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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현【옥승】에게 답함 答曺士賢【玉承】 방문을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어 그리운 생각 정히 간절하였는데, 뜻밖에 그대 4촌이 방문하였고 그대 편지가 따라왔으니, 직접 얼굴을 보고 진진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위로되는 마음 많았네. 삼가 노친을 모시고 독서하는 체후가 넉넉한 줄 알았으니, 실로 멀리서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색동옷 입고 어버이를 기쁘게 하여100) 하루의 봉양을 삼공(三公)과 바꾸지 않으니,101) 인생의 좋은 시절은 오직 이 때가 그럴 수 있네. 다시 부모님을 모시는 여가에 고서를 읊조리고 옛날 들은 것을 익힌다면, 그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고 그 아취를 취할 만 할 것이니, 옛날에 은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했던 동소남(董召南)102)과 주인궤(朱仁軌)103) 같은 이가 어찌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겠는가? 의림(義林)은 위아래로 외롭고 곤궁하여 정경을 표현하기 어렵고, 오직 긴 백발만 있어 이것이 그 천업(倩業)일 뿐이니, 곤궁한 집에서 슬퍼 탄식한들 무슨 수로 미칠 수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교분을 맺어 뜻을 살핀 지 비록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그 공부의 절도와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모습은 또한 그 속내를 상세히 알 수 없었네. 지금 보내온 한 통의 편지에서 그 독실하고 시원함에 대해 그 만 분의 일이라도 대략 알 수 있었고, 더구나 이른바 "기질이 치우치고 뜻이 또 서지 않아 능히 구습(舊習)을 혁파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매우 치밀하고 힘을 쓰는 것에 게으르지 않음을 볼 수 있었네. 무릇 공부의 요처(要處)는 단지 그 뜻을 세우고 구습을 혁파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와 같다면 기습(氣習)이 치우친 것은 별도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또한 없앨 수 있을 것이네. 뜻이 서면 근본이 더욱 견고하고 구습을 혁파하면 덕은 더욱 진보하네. 다만 살피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비록 이 중요한 말이라도 그 요체가 됨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 어떻게 여기는가? 承枉有年。懷想政勤。料襮。令從氏委訪。惠幅隨之。與親承顔範。津津傾倒。何以異哉。慰沃多矣。謹審奉老讀書。候節沖裕。案愜遠外願聞之情。彩趨供歎。一日三公。人生好時節。惟此爲然。更於餘力暇日。諷詠古書。溫理舊聞。其樂可想。可趣可掬。古之隱居養親。如董召南朱仁軌。豈獨專美也。義林上孤下窮。情景難狀。而惟有三千丈白髮。是其倩業耳。窮盧悲歎。何計可追。吾兩人定交視志。雖已有年。而其功夫節度。進修樣轍。亦末得詳悉其裏許。今於來喩一紙。其篤實開爽。可以領略其萬一矣。況所謂氣質偏駁。志又不立。而不能革去舊習云云者。可見自省之甚密。而不懈於用力也。大抵功夫要處。只在於立其志。而革舊習。如此則氣習之偏。不用別方。而亦可銷磨矣。立志則本益固。革舊習則德益進。但恐察之不精。而行之不力。則雖是要語。而不知其爲要矣。如何如何 색동옷……하여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고, 일부러 마루에 물을 뿌려 놓고 미끄러져서 어린애처럼 울기도 하고, 새를 희롱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小學 稽古》 하루의……않으니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옛사람은 하루 동안의 부모 봉양하는 기회를 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았네.〔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臨川文集 卷9 送喬執中秀才歸高郵》 동소남(董召南) 당(唐)나라 때 안풍(安豊) 사람으로 은사(隱士)인데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한 것을 노래 하였다. 주인궤(朱仁軌)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덕용(德容)이다. 평생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자식들에게는 일생 동안 남에게 밭두둑을 양보해도 1묘(畝)의 밭도 손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小學 嘉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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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탄기 竹灘記 옛적 을묘년(1855)에 내가 어린아이로 천관산(天冠山)의 명촌(明村)에서 독서하였을 때 죽탄옹(竹灘翁)도 어린아이로 함께하였는데, 그 타고난 재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추구하는 것이 독실하여 함께 공부했던 자들이 미칠 수 없었다. 얼마 후 남북으로 흩어져서 40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기까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단지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선친을 여의고 외로운 몸으로 떠돌다가 만년에야 비로소 집안을 세울 계획으로 산양(山陽 보성(寶城))의 죽천(竹川)에 우거(寓居)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벗이 갑작스럽게 풍상을 만난 뒤에 과연 처음 지녔던 뜻을 바꾸지 않을 수 있을지 없을지 궁금하였다. 그런데 계사년(1893)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한 사람이 천태산(天台山)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였는데, 보고도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다가 묻고 나서야 비로소 옹인 줄 알았다.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댄 채 밤새도록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나누어 보니, 학문에 대한 공부와 살아오면서 이룩한 업적이 처음 지녔던 뜻을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발하여 확장하고 넓게 펼쳐서 성대하게 노성(老成)다운 풍모가 있었다.아, 옹이 '죽탄(竹灘)'이라 한 것이 어찌 단지 그가 사는 곳만을 표지할 뿐이겠는가. 세한(歲寒)45)에 힘쓸 것을 기약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부들이나 버드나무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이 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먼저 시들어 떨어질게 될까 경계하는 마음46)이 간절하였으니, 어찌하면 여울가 한 가지의 봄기운을 얻어 만년의 풍경을 의지할 수 있을까? 昔在乙卯。余以童丱。讀書于冠山之明村。竹灘翁亦以童丱。與之俱焉。其才性之聰敏。趨向之篤實。同業者莫及。旣而分散南北。至四十年之久。而未得一面焉。但聞其未冠失怙。隻身流離。晩始樹立家計。寓於山陽之竹川。余以爲此友在風霜凌遽之餘。而果能不渝初志否。歲癸巳。有皤然一老人。訪我於天台寓舍。見之不記爲誰。問之乃知爲翁。握手促膝。達夜娓娓。其學問之功。履歷之業。不惟爲不渝初志。奮張展拓。蔚然有老成風範。嗚乎。翁之爲竹灘。豈特誌其所居。所以期勉於歲寒者。可知矣。余以蒲柳孱質。常切望秋之戒。安得灘上一枝春。以庇依晩景耶。 세한(歲寒) 대나무가 엄동설한의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푸른빛을 유지하는 것처럼 만년에 초심을 변치 않고 지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이 보인다. 가을이……마음 남들보다 일찍 늙고 쇠하는 허약한 체질을 염려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열지(顧悅之)가 간문제(簡文帝)와 동갑이었는데도 이른 나이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자 황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은 포류와 같은 체질이라서 가을이 가까워지기만 해도 벌써 낙엽이 지고 맙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해진다. 《世說新語 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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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오당기 晩悟堂記 상지(上智)는 깨달을 것이 없고, 하우(下愚)는 깨닫지 못한다. 깨닫는 자는 오직 중품(中品)의 자질뿐이다. 대체로 미혹한 바가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으며, 남다른 자질이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깨달음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목소리에 드러나고 얼굴빛에 징험되어 한 가지 일에서 깨닫는 경우가 있고, 앞에서 징계되고 뒤에 삼가서 한 때에 깨닫는 경우가 있다. 한 가지 일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일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고, 한 때에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때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오직 탈연(脫然)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각성할 수 있고, 황연(惶然)히 봉사가 눈을 뜨듯 볼 수 있어야 안정되고 견고하게 지켜 넓게 펼쳐 나아갈 수 있다. 모르겠지만, 주인이 깨달은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듣기에 주인은 54세에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반드시 갖은 고생을 두루 맛보고 온갖 풍상을 실컷 겪은 다음에 뜬 생각이 사라지고 참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거듭 닦은 거울이 번연(幡然)히 묵은 때가 제거된 것과 같을 것이다. 두텁게 축적한 뒤에 드러나는 것은 그 드러남이 반드시 두텁고, 오랜 막힘 뒤에 통창하는 것은 그 통창함이 반드시 오래가며, 큰소리는 반드시 촉박하지 않고, 큰 걸음은 반드시 좁지 않을 것이니, 나는 주인의 깨달음이 앞으로 여생의 결말이 되어 절대로 한 가지 일이나 한 때의 깨달음에 비견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아, 나는 주인이 깨달음이 있었던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음에도 오히려 예전과 같이 흐리멍덩하니, 끝내 깨닫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하면 쇠잔한 힘을 채찍질하고 다스려서 주인의 뒤를 좇아 상유(桑楡)49)에 만분의 일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上知無悟。下愚不悟。悟之者。其惟中品之資乎。蓋不有所迷。何以有悟。不有所異。何以能悟。然悟有大有小。發於聲。徵於色。而有悟於一事者。懲於前。毖於後。而有悟於一時者。悟於一事者。他事未必然。悟於一時者。他時未必然。惟脫然如熟寐之得惺。怳然如蒙瞽之得視。可以守定得固。展拓將去。未知主人所悟。果何居耶。聞主人以五十有四之歲。而始有所悟。必其備喫辛苦。飽經風霜。而浮念消歇。眞心呈露。如重磨之鑑。幡然而祛塵也。發於厚積之餘者。其發必厚。暢於久鬱之後者。其暢必久。大音必不促迫。闊步必不窄挾。吾知主人之悟。將爲餘日之究竟。切非一事一時之比。嗚乎。余於主人。有悟之年。加有一歲。而尙懵然如故。其終不悟。可知也已。安得策理殘力。追從主人之後。庶幾乎桑楡萬一之悟也耶。是所望也。 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해가 떨어질 때 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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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은에 사례하다 謝李晦隱 몽매한 두 눈에 동쪽 서쪽 혼란스럽고 眛塵雙眼眩西東가슴 속은 다시 근심으로 홀연 풍파 일어나네 胸海還愁忽起風학문 쌓는데 능히 누에처럼 세밀히 맺지 못하고 績學未能蠶結細인을 쏘는데 감히 붉은 정곡 뚫었다고 말하랴 射仁敢道鵠穿紅과한 칭찬이 실정보다 지나쳐 몹시 부끄러우니 深慙過獎浮情外다만 경계하는 가르침이 실지에 맞기를 원한다네 但願規箴實地中감추고 숨어도 날로 드러나 끝내 속되지 않으리니 晦隱日章終不俗참된 사업이 그 무리에서 빼어남을 응당 보리라 應看眞業拔其叢 眛塵雙眼眩西東, 胸海還愁忽起風.績學未能蠶結細, 射仁敢道鵠穿紅.深慙過獎浮情外, 但願規箴實地中.晦隱日章終不俗, 應看眞業拔其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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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對菊 菊爲霜下傑。晩節容顔好。我作書中蠹。枯腸亦足保。淵明一愛菊。天下莫能爭。我雖百番愛。家人不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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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春雨 부슬부슬 봄비가 산 집에 내리고 紛紛細細下山家뻐꾸기309) 처음 우는데 해는 지려하네 布穀初啼日欲斜한 달째 못 돌아간 나그네 근심도 깊은데 愁煞三旬未歸客천 떨기 늦게 핀 꽃은 푹 젖어 소생하네 洽蘇千朶晩開花잠깐 가벼운 깃 젖은 제비는 장막으로 돌아오고 乍沾輕羽燕回幕한가한 잠 자다 놀란 백로는 물가로 달려가네 驚打閒眠鷺走沙비 개인 뒤에 풍광은 더욱 좋을 것이니 晴後風光應更好초연히 별경에 깃들어 남에게 자랑하리 超棲別境向人誇 紛紛細細下山家, 布穀初啼日欲斜.愁煞三旬未歸客, 洽蘇千朶晩開花.乍沾輕羽燕回幕, 驚打間眠鷺走沙.晴後風光應更好, 超棲別境向人誇. 뻐꾸기[布穀] 포곡은 뻐꾸기의 별칭이다. '뻐꾹뻐꾹[布穀布穀]' 하고 울어 마치 '씨 뿌려라, 씨 뿌려라.' 하는 듯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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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가 다시 방문하여 함께 짓다 松坡復訪同賦 봄풀은 우북히 무성하고 시냇길이 트여서 春草芊芊澗路開쑥 지팡이 짚고 멀리 저녁 안개 속에 왔네 蓬笻遠帶夕霏來굳건한 붓 놀라워라 교룡의 춤보다 낫구나 已驚健筆騰蛟舞천한 솜씨 부끄러워라 소라 술잔 기울이네 堪愧淺工傾蠡杯천년의 불겁 거쳐온 골짜기에 구름 자욱하고 佛劫千年雲鎖壑밤새 객이 근심하는 누대엔 달빛이 가득하네 客愁五夜月盈臺명산에서 한 번 만난 것도 옛 일이 되고마니 名山一會成陳跡새로 지은 시를 돌 이끼에 써서 남겨둔다오 留與新詩寫石苔 春草芊芊澗路開, 蓬笻遠帶夕霏來.已驚健筆騰蛟舞, 堪愧淺工傾蠡杯.佛劫千年雲鎖壑, 客愁五夜月盈臺.名山一會成陳跡, 留與新詩寫石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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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에게 주다 贈士狷 옥을 다듬는데 타산의 돌도 필요하고439) 攻玊須山石구슬을 던져 주었는데 목도로 보답했네440) 投瓊報木桃졸렬한 나의 법도가 부끄럽고 尺繩慙我拙높은 그대의 의표에 못 미치네 標槩讓君高이상한 학설이 우는 때까치와 다투니441) 異舌爭啼鵙예리한 눈으로 털끝까지 모두 분석하리 利眸盡析毫한 잔 술에 봄이 저물려 하는데 一樽春欲暮서로 보매 하얀 머리 괴이하네 相看怪霜毛 攻玊須山石, 投瑗報木桃.尺繩慙我拙, 標槩讓君高.異舌爭啼鵙, 利眸盡析毫.一樽春欲暮, 相看怪霜毛. 옥을 …… 필요하고 《시경》 〈학명(鶴鳴)〉에 "다른 산의 돌을 가지고도 옥을 갈 수 있다네.[他山之石 可以攻玉]"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사견을 옥으로, 후창 자신을 돌로 비유한 것이다. 구슬을 …… 보답했네 자신이 하찮은 시를 보냈는데 사견이 좋은 시로 보답하였다는 뜻이다. 《시경》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도를 보내 주었는데 내가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하고도 보답하였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길이 우호하고자 해서이다.[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상한 …… 다투니 이단의 학설이 난무한다는 뜻이다. 원문의 '이설(異舌)'과 '제격(啼鵙)'은 이단의 학설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지금 남만의 때까치 소리를 하는 사람의 말이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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