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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의 영은동에 이르렀다가 선조 복야부군69)의 유적에 느낌이 일어 삼가 부군이 지은 시에 차운하다 소서를 아울러 기록한다. 到邊山靈隱洞 有感先祖僕射府君遣蹟 謹次府君題詩韻【幷小序】 부군의 시에 "누가 이 절을 지었는가, 숲 아래 흰 머리의 중이라네. 돌샘은 밤낮으로 내리는 비요, 솔 사이 달은 고금을 비추는 등불이라. 지상에는 도솔천이 솟아 있고, 인간 세상에는 무릉도원이 감춰져 있네. 선사와 나 두 늙은이, 높은 누각에 한가로이 기댔다오."라고 하였는데, 시의 격조가 전아하고 중후하며 맑고 깨끗하여 근 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제2연은 국중에 있는 인가의 자제를 위해 학교에서 가르치는 처음 과정이다. 대개 바른 성정이 발로되어 시가 된 것이니 그 덕행을 알 수 있다. 김의는 문정 부군70)의 성대한 도학과 문장을 열어 주셨다. 시는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71) 대체로 이 지역은 실로 부군이 선정을 베풀던 곳으로, 김의의 일이 소백의 감당72)과 같아 후인들이 애석하게 여긴 것인데 하물며 후손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비석을 세우고 정자를 짓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는데, 불행히 후손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지주가 되어 사사로이 매각하였으니 그 사람의 죄를 진실로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중에서 매각한 사람을 밉게 본 자들이 모두 환수를 요구하지 않아 공공연히 남의 소유가 되었으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내가 이곳에 이르니, 그저 보이는 것은 숲의 나무를 베어 곳곳마다 숯 구덩이가 있고 그을음이 가득한 모습이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웠다. 그렇지만 사물은 주인에게 돌아가는 이치가 있고 운수는 반드시 돌아오는 이치가 있으니, 그저 우리 종족이 합심하고 협의하여 성심으로 경영해서 기어코 옛 땅을 회복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에 삼가 시 한 수를 지어 이 같은 사실을 기록한다. 임오년(1942) 9월 그믐 문정공 시향제(時享祭) 하루 전에 택술은 쓰노라. - 훗날 비석을 세우면 '고려 은청광록대부 우복야 합문지후 김공 유적비'라고 써야 하고, 정자를 세우면 '월천정'이라고 편액을 달아야 할 것이다. 부군의 시 제 2연의 시어를 사용하였데, 이 구절은 주부자의 시73)에 '삼가 천년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을 달이 차가운 물을 비추는 듯하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어느 해던가 영은사에서 何年靈隱寺복야께서 산승을 만난 때가 僕射見山僧아직도 돌샘에는 빗소리 들리고 猶聽石泉雨공연히 솔 사이 달은 등불처럼 남아 있네 空餘松月燈신선 인연은 봉도에 있고 仙緣有蓬島승경은 파릉74)과 같구나 勝狀等巴陵유적 보니 뒤미처 감회가 이는데 遺蹟生追感아득하니 누구에게 기댈거나 蒼茫問孰憑 府君詩曰 '誰創此蘭若 白頭林下僧 石泉日夜雨 松月古今燈 地上聳兜率 人間藏武陵 與師成二老 高閣等間憑' 詩之爲調 典重淸絶 至今近千載 猶膾炙人口 第二聯則 爲國中人家子弟上學初課 蓋性情之正發而爲詩 其德行可知 宜啓文貞府君道學文章之盛也 詩載《輿地勝覽》 蓋此一區 實爲府君憇苃之所 後人愛惜宜同於召伯之甘棠 矧在後承哉 立碑作亭 不容已也 而不幸後裔一人 以己名爲地主 私自賣却 其人之罪 固不可勝言 而宗中之憎視賣却者 幷不徵還 而公然作他人有 亦獨何心 余之到此 但見斫伐林木 在在炭坑 煙煤漲天 可勝歎哉 雖然物有歸主之理 運有必返之天 只在吾宗族同意協論 誠心經紀 期於復舊耳 玆謹賦一詩以記之 壬午九月晦 文貞公歲一祀 前一日澤述識【後日立碑 則當書之曰 '高麗銀靑光祿大夫右僕射閤門祗侯金公遺蹟碑' 作亭 則當扁之曰 '泉月亭' 用府君詩第二聯語 而取朱夫子詩 '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之義】何年靈隱寺, 僕射見山僧?猶聽石泉雨, 空餘松月燈.仙緣有蓬島, 勝狀等巴陵.遺蹟生追感, 蒼茫問孰憑? 복야 부군(僕射府君) 고려 문신인 김의(金宜)를 말한다. 본관은 부령(扶寧)이고, 우복야(右僕射)를 지냈다. 우복야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김작신(金作新)의 아들이고, 지포(止浦) 김구(金坵)의 아버지이다. 문정 부군(文貞府君) 김의(金宜)의 아들인 김구(金坵, 1211~1278)를 말한다.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시는……있다 이 시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권5상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의 영은암(靈隱菴)을 설명하는 곳에 실려 있다. 소백(召伯)의 감당(甘棠) 주 문왕(周文王) 때 서백(西伯)에 임명된 소공의 선정(善政)에 감사하는 뜻에서 백성들이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 "무성한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그 그늘에 쉬셨던 곳이니라."라고 노래했다 한다. 《詩經 甘棠》 주부자(朱夫子)의 시 주희(朱熹)의 〈재거감흥이십수(齋居感興二十首)〉를 가리킨다. 《晦庵集 卷4》 파릉(巴陵) 중국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을 가리킨다. 이곳에 동정호(洞庭湖)가 있어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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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기 松峯記 능주(綾州)의 송석(松石) 마을에 오봉산(五峯山)이 있고, 오봉산 아래에 나의 벗 송봉(松峰)이 거주하고 있으니, 대체로 거주하는 곳을 표지하여 호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일찍 핀 것이 먼저 시드는 것은 일반적인 만물의 이치이고, 처음엔 부지런하다가 나중엔 나태해지는 것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니, 천 리 길을 혹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아홉 길 높이 쌓아올린 산이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무너지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하물며 사람이 늙고 남은 수명이 짧아지면 헛된 욕심이 일어나기 쉽고, 기운이 쇠퇴하고 마음이 약해지면 만년의 절개를 지키기 어려움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옹(翁)은 지금 52세이니, 젊고 장성했을 때의 화려한 시절은 이미 지난 일에 속하고,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오직 앞으로 남은 쇠잔한 시절일 뿐이다. 이는 뭇 초목들이 봄여름의 좋은 시절을 보내고 기다리는 것은 가을날의 서리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옹이 지니고 있는 호가 비록 거처를 표지한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일찍이 한편이나마 현위(弦韋)18)를 뜻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공은 어려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늙어서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도 다른 사람을 따라 둘러대는 뜻이 없었으니, 청컨대 한 가지 일로 말해보겠다. 나는 옹에게 죽마고우로서 죽고 사는 일이나 기쁘고 슬픈 일을 서로 구제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드나들며 놀고 즐길 때도 서로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서로 바로잡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재산을 경영하고 저축하는 데 서로 관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어려서부터 50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일도 서로 속이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면 다른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한(歲寒)의 약속19)을 부칠 수 있고, 스스로 호로 삼는 바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이것을 써서 송봉기(松峯記)로 삼게나. 綾之松石坊。有五峯峯之下。余友松峰翁居之。蓋志其居而號焉者也。然早發先萎。恒物之理也。始勤終怠。凡人之情也。千里之軔。或廢於半途。九仞之山。多虧於一簣。況人老年促。虛欲易動。氣衰情弱。晩節難持乎。翁今五十有二歲矣。少壯繁華。已屬過境。而坐以待之者。惟是前頭衰颯時節。如衆卉群木。閱春夏許多時。而所待者。秋霜而已。然則翁之有號。雖云志居。而亦未嘗不出於一副弦韋之意也。翁幼而孝弟。老而好義。至於凡百云爲。無有徇人回互底意。請以一事言之。余於翁竹馬舊交也。死生歡戚。無不相求。出入遊衍。無不相從。是非得失。無不相規。財産營畜。無不相關。自幼至老五十年。未嘗見其有一事相欺。推此以觀。其他可知。此可以付歲寒之約。而無愧乎所自號者矣。請書此爲松峯記。 현위(弦韋) 활시위와 다룬 가죽을 말하는 것으로, 팽팽함과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 서문표(西門豹)는 성질이 너무 급해 자기의 성질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녔고, 진(晉) 나라 때 동안우(董安于)는 자기의 성질이 너무 느슨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팽팽한 활시위를 차고 다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충하는 자료가 됨을 뜻한다. 《韓非子 觀行》 세한(歲寒)의 약속 만년의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孔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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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소년에 대한 노래 李氏少年行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산서308)의 이씨 소년들을 山西李氏諸少年효도하고 공경하며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운다오309) 孝悌餘力則學文산서의 땅은 비옥하니 山西之土肥而沃아침이면 나가 자신의 밭을 갈고 朝而出耕我田산서의 집은 깊고 조용하니 山西之屋幽而靜저녁이면 돌아와 자신의 책을 읽는다오 暮而歸讀我篇먹을 것 있어 어버이 봉양할 수 있고 有食可以養其親배움이 있어 옛사람을 바랄 수 있다네 有學可以希古人아아 산서리 한 지역은 吁嗟一區山西里흡사 옛날 안풍 마을310)과 비슷하네 宛如昔日安豊村옛날에는 동생 한 사람 뿐이었는데 抑昔董生一而已어찌하여 지금은 동생 같은 무리가 떼로 나왔나 胡今董生輩出羣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서옹311)이 의를 행하여 집안 법도에 영향 준 것을 瑞翁行義貽家謨물 맑고 가지 창달함은 근원과 뿌리 좋아서라네 流淸枝達自源根또 보지 못했는가 又不見시당312)의 인도에 좋은 방법 있는 것을 時堂導率妙有術솔선수범한지 지금까지 십 년이라오 以身先之今十年당대에도 이런 일 있다는 걸 듣지 못했으니 未聞唐代曾有此이씨 가문의 자제들 어진 이 많은 이유라오 所以李門子弟多佳賢내가 노래를 지어 후세에 드날리노니 我作歌行揚今後한창려313)의 대수필이 아닌들 어떠하랴 巨手柰非昌黎韓원컨대 저마다 스스로 더욱 노력한다면 願言各自彌努力몸 세우고 덕 이루어 좋은 명성 전해지리라 立身成德流芳芬 君不見山西李氏諸少年? 孝悌餘力則學文.山西之土肥而沃, 朝而出耕我田.山西之屋幽而靜, 暮而歸讀我篇.有食可以養其親, 有學可以希古人.吁嗟一區山西里, 宛如昔日安豊村.抑昔董生一而已, 胡今董生輩出羣?君不見瑞翁行義貽家謨? 流淸枝達自源根.又不見時堂導率妙有術? 以身先之今十年.未聞唐代曾有此, 所以李門子弟多佳賢.我作歌行揚今後, 巨手柰非昌黎韓?願言各自彌努力, 立身成德流芳芬. 산서(山西) 전라북도 남원(南原)에 소재한 마을 이름이다. 효도하고……배운다오 《논어》 〈학이(學而)〉에 "자제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는 공경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안풍(安豊) 마을 중국 수주(壽州)의 속현(屬縣)이다. 당(唐)나라 때 안풍 사람 동소남(董卲南)이 몇 차례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둔하여 주경야독하면서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모셨는데, 동시대의 문장가인 한유(韓愈)가 그를 칭송한 글인 〈동생행(董生行)〉이 《소학(小學)》〈선행(善行)〉에 실려 있다. 서옹(瑞翁) 누구인지 미상이나, 문맥상 산서(山西)에 사는 이씨의 선조인 듯하다. 시당(時堂) 이교익(李喬翼, 1830~1890)의 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858년(철종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한창려(韓昌黎) 〈동생행(董生行)〉을 지은 한유(韓愈)를 말한다. 창려는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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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조 명은공295) 수민 의 유고를 읽다 讀族祖明隱公【壽民】遺稿 명은의 기절이 온 천하를 덮으니 明隱氣節蓋九州명은 두 자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오 明隱二字足可知명나라 망한 지 벌써 이백 년이니 明亡已爲二百載명나라에 숨고자 하나 장차 어디로 갈까 欲隱於明將何之공의 마음은 천지처럼 광대하여 吾心廣大如天地일찍 존화양이의 의리296)에 종사하였네 早事尊攘華與夷본래 마음속에 대명국이 있었으니 自有心中大明國어찌 신주297)의 산하에서만 그러하랴 何獨神州河山爲선대를 추증하는 고명이 내려온 날 先世贈誥命下日위호를 받지 않고 굳게 지조 지켰네298) 不受僞號堅執持우리 김씨는 대대로 주나라를 높혔으니 吾金世世尊周家이 임명장은 사당에 들어갈 수 없었네 此紙無以入廟祠찬란하게 숭정이라고 특별히 썼으니 特書煌煌崇禎地천추를 밝게 비춰 길이 할 말이 있게 되었네 輝映千秋永有辭박학하고 뛰어난 글솜씨는 적수가 드물었고 博學雄文罕敵手천인 성명의 은미한 이치를 궁구하였네 天人性命究厥微평생 공부한 《춘추》의 엄정한 의리를 平生春秋嚴正義〈내성지〉299)에서 살짝 볼 수 있다오 柰城誌中一斑窺아아 그 포부가 이와 같은데 嗚呼抱負有如此초막에서 늙어 죽은 것은 어째서인가 老死蓬蓽胡然而조정의 관로 세계를 한번 봐 보게 請看朝著仕路界혼탁하고 어지러워 술지게미 진흙 뒤섞였다오 泯泯棼棼混糟泥어찌하여 자신의 강대한 기운을 굽히고 安能屈我剛大氣떼지어 몰려다니며 굶주림만 구제하는가 隨羣逐隊但救飢아정(雅正)한 유서가 책 상자에 가득하니 遺書爾雅滿箱架세상과 백성 구제하는 방법 모두 여기에 있네 淑世澤民都在斯어찌 이 글을 세상에 널리 알려서 盍將此篇公諸世우리 유림에 보관하고 집집마다 간직하지 않으랴 奉弆吾林家家丌 明隱氣節蓋九州, 明隱二字足可知.明亡已爲二百載, 欲隱於明將何之?吾心廣大如天地, 早事尊攘華與夷.自有心中大明國, 何獨神州河山爲?先世贈誥命下日, 不受僞號堅執持.吾金世世尊周家, 此紙無以入廟祠.特書煌煌崇禎地, 輝映千秋永有辭.博學雄文罕敵手, 天人性命究厥微.平生《春秋》嚴正義, 《柰城誌》中一斑窺.嗚呼抱負有如此, 老死蓬蓽胡然而?請看朝著仕路界, 泯泯棼棼混糟泥.安能屈我剛大氣, 隨羣逐隊但救飢?遺書爾雅滿箱架, 淑世澤民都在斯.盍將此篇公諸世? 奉弆吾林家家丌. 명은공(明隱公) 김수민(金壽民, 1734~1811)으로,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제옹(濟翁), 호는 명은(明隱)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수학하였고,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하였다. 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저서에 《명은집》이 있다.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한족이 세운 중국의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오랑캐 민족인 청(淸)나라를 물리친다는 말이다. 신주(神州) 중국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추연(騶衍)이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선대를……지켰네 김수민(金壽民)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충절이 있는 사람 7인을 조정에 상언(上言)하자 성상이 가납(嘉納)하여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때 으레 쓰던 방식으로 청인(淸人)의 연호를 썼다. 그러자 김수민이 개연하여 청인의 연호를 쓴 임명장을 선조에 고할 수 없다 하여 받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숭정기원(崇禎紀元)'이라고 특별히 쓰도록 명하였다. 《惕齋集 卷9 明隱金君墓誌銘》 내성지(柰城誌) 김수민(金壽民)의 《명은집》 권18에 실린 글로, 단종(端宗)과 명나라 건문(建文) 황제의 역사적 사건을 비판적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춘추 의리에 바탕을 둔 역사적 인물들의 잘잘못을 가려 민족의 자존 의식을 높인 문학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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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조 습정공300) 한충 의 유고를 읽다 讀族祖習靜公【漢忠】遺稿 남원(南原)의 산수 기운이 帶方山水氣모여서 습정공을 낳았네 鍾生習靜公마음은 의리의 길과 통하고 心通義理路성품은 강직한 풍모 지녔네 性帶剛直風천 리 머나먼 한강 가 千里漢之上매산(梅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네 就正梅門中세도가 날로 변하여 世道日以變향사 올리던 만동묘301)를 철거하였네 廟享撤萬東아아 잊을 수 없어라 於虖不可忘신종과 의종 두 분이여 神毅有兩宗하물며 이는 의리에 근거해 예를 제정한 것이니 矧玆義起禮우재옹302)에게서 나온 것이라네 出自尤齋翁이 일은 게다가 사문과 관계되니 事又係斯文초야의 선비들 어찌 입 닫고 귀 닫을까 韋布豈啞聾곧 나라의 선비들을 창도하여 乃倡國中士좋은 계책을 구중궁궐에 올렸네 琅玕呈九重어찌 생각했으랴 임금께서 들어주지 않고 豈料邈荃聽대궐에서 견책이 내려올 줄을 譴責降天門머나먼 초나라 산중에서 逖矣楚山中〈복조부〉303) 읊은 지 5년이라네 賦鵬五經年대로304)의 수제자였고 大老首弟子두 황조의 한 충신이었네 兩皇一忠臣조야에서 공공연히 칭송하였으니 朝野公共誦백대 기다리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혹 없으리305) 百世質鬼神일에 도움 되지 않는다 말하지 말라 莫曰事無補그저 대의를 보존한 것이라네 而但大義存훗날 다시 제향하는 날 後來復享日이 상소가 원인이 되리라 此疏爲原因만약 그 공로를 논한다면 苟可論厥功공이 실로 으뜸을 차지하리라 公實居首先아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나 嗟余生太晩직접 얼굴을 뵙지 못했네 未及拜承顔이제 남긴 글을 읽노라니 今來讀遺文흉중이 탁 트여 맑구나 豁然淸心肝만약 조정에 서게 한다면 如使立人朝어찌 이 같은 반열에 그치랴 豈止若是班임금의 덕에 흠이 있을 때는 時當君德闕장유306)처럼 간쟁하였고 長孺非別人위태롭고 망하려던 때는 時當危亡際문산307)처럼 행동하였지 文山卽其身같은 시대를 산 비평가들은 幷世月朝家이러한 뜻을 자세히 논하리라 此意合詳論 帶方山水氣, 鍾生習靜公.心通義理路, 性帶剛直風.千里漢之上, 就正梅門中.世道日以變, 廟享撤萬東.於虖不可忘, 神毅有兩宗.矧玆義起禮, 出自尤齋翁.事又係斯文, 韋布豈啞聾?乃倡國中士, 琅玕呈九重.豈料邈荃聽, 譴責降天門?逖矣楚山中, 賦鵬五經年.大老首弟子, 兩皇一忠臣.朝野公共誦, 百世質鬼神.莫曰事無補, 而但大義存.後來復享日, 此疏爲原因.苟可論厥功, 公實居首先.嗟余生太晩, 未及拜承顔.今來讀遺文, 豁然淸心肝.如使立人朝, 豈止若是班?時當君德闕, 長孺非別人.時當危亡際, 文山卽其身.幷世月朝家, 此意合詳論. 습정공(習靜公) 김한충(金漢忠, 1801~1873)으로, 자는 효백(孝白), 호는 습정(習靜)이다. 1865년(고종2)에 대원군이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자, 〈만동묘를 다시 제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請萬東廟復享疏]〉를 올렸고, 이 일로 인해 이듬해에 평안북도 초산(楚山)으로 귀양을 가서 1870년에 사면되었다. 저서에 《습정재선생유고》가 있다.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明)나라의 의종(毅宗)과 마지막 황제인 신종(神宗)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유명을 받아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1704년(숙종30)에 현재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웠다. 그러다가 1865년(고종2)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을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11)에 다시 세웠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우재옹(尤齋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복조부(鵩鳥賦)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을 때 복조(鵩鳥)가 지붕 위에 날아와 모였는데, 당시 민간에 전하는 말로는 복조가 지붕에 앉으면 그 집 주인이 죽는다고 하였으므로, 가의가 슬퍼하여 〈복조부〉를 지었다고 한다. 《史記 賈生列傳》 대로(大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을 가리킨다. 백대……없으리 진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29장에 "군자의 도는……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백대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하지 않는다.[君子之道……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장유(長孺)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신하인 급암(汲黯)의 자이다. 그는 간쟁을 서슴지 않아 무제로부터 '사직지신(社稷之臣)'이란 칭찬을 받았다. 《史記 汲黯列傳》 문산(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1276년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된 뒤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나라에 대항하다가 1278년에 사로잡혀 시시(柴市)에서 처형되었다.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宋史 文天祥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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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기 三坡記 이릉(爾陵)114)의 치소 북쪽 10리에 백암(白巖)이 있는데 대개 이름난 마을이다. 물이 동남쪽으로부터 오는 것의 천만 갈래 물길이 여기에 이르러 합해져 앞에서 멈추어 고이고, 산이 서북쪽으로부터 뻗어 오는 것의 천만 봉우리가 여기에 이르러 그쳐서 좌우로 나열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면서 시원하고, 주위를 둘러싸면서도 넓고 평평하여 이미 이름하여 형상할 수 없다. 북쪽에는 상좌봉(上座峰), 남쪽에는 발우봉(拔尤峰), 서쪽에는 응봉(鷹峯)이 있어 셋으로 나열하여 정치(鼎峙)하고 있으니, 마치 거인(鉅人)과 장덕(長德)이 밝은 거울과 그림 병풍 사이에 서로 마주하여 함께 인사하고 있는 것 같다. 대개 백암은 이릉의 빼어난 승경이고, 이 삼봉은 또 백암의 승경이다.나의 벗 삼파자(三坡子)는 이곳에 세거하여 그대로 호로 삼았다. 그러나 '봉(峰)'이라 하지 않고 '파(坡)'라고 하였으니, 또한 설명할 것이 있는가? '봉'은 높은 것이고 '파'는 낮은 것이니, 외면의 이름은 낮게 하려고 하고 내면으로 힘쓰는 실상은 높게 하려고 한다. 하늘의 높음으로 산보다 낮은 것이 축(畜)이 되고,115) 산의 높음으로 땅보다 낮은 것이 겸(謙)이 되니,116) 지금 외면으로는 파이고 내면으로는 산인 것은 또한 어찌 겸손하고 겸손한 대축(大畜)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바로 군자가 경금(褧錦)117)하는 제일의 법이니, 내 알건대 삼파(三坡)의 봉(峯)은 반드시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118)과 더불어 그 높이를 같이하고 한 지방의 빼어난 승경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爾陵治北十里有白巖。盖名村也。水之自東南來者。千派萬流。至此而合。渟滀於前。山之自西北來者。千峯萬峀。至此而止。羅列於左右。幽深而軒敝。周遭而廣平。已不可名狀。北有上座。南有拔尤。西有鷹峯。參列鼎峙。如鉅人長德。相對拱揖於明鏡畫屏之間。盖白巖爾陵之選勝。三峯又白巖之選勝也。余友三坡子。世居於此。因以號焉。然不曰峰而曰坡。抑有說耶。峯高者也。坡下者也。名之在於外者。欲其下。實之務於內者。欲其高。以天之高而下於山則爲畜。以山之高而下於地則爲謙。今外坡而內山。亦豈非謙謙大畜之義耶。此是君子褧錦第一法。吾知三坡之峯。必得與魏升卿五千仞。同其高。而不止爲一方之選勝也。 이릉(爾陵) 이릉부리현(爾陵夫里縣)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綾州面)의 옛 지명이다. 하늘의……되고 산천대축(山天大畜)의 《주역》 〈대축괘(大蓄卦)〉 형상을 말한다. 산의……되니 지산겸(地山謙)의 《주역》 〈겸괘(謙卦)〉 형상을 말한다. 경금(褧錦) 비단 옷 위에 다시 홑옷을 덧입어서 화려함을 감춘다는 뜻으로,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에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덧입었다.[衣錦褧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 잠삼(岑參)의 시 〈위승경을 전송하며[送魏升卿]〉에 "그대는 삼봉이 곧장 오천 길을 올라간 것을 보지 못했겠지만, 군의 문장을 보건대 또한 이와 같네.[君不見三峰直上五千仞, 見君文章亦如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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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암기 土庵記 토암옹(土庵翁)은 이름이 학(㙾)이고, 자가 자술(子述)이니, 이는 대체로 선친 겸와공(謙窩公)께서 개미 새끼들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들어 명명함으로써 부지런히 힘써서 성취를 이루게 한 것이다. 옹은 평소에 이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수용하여 행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 노쇠하여 혹 실추시키게 될까 염려하다가 마침내 '토(土)' 자로 암자의 이름을 짓고 항상 눈앞에 두고 돌아보면서 경계하는 계책으로 삼았다무릇 때때로 익히는 것은 징험할 길이 없지만, 흙을 쌓는 것은 자취가 있으니, 쌓인 흙의 많고 적음을 보고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알 수 있다. 아, 행실을 보면 그 상서로움을 알 수 있고, 일을 부과하면 반드시 그 공적을 바쳐야 하는데, 이는 몽사(濛汜)로 해가 저물어 갈 때20)에 마지막 결말을 지어 천지 부모(天地父母)와 교환하는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주부자(朱夫子)는 시에서 이르기를, "무두질한 가죽을 차서 부친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무가 뿌리를 감추는 듯 행하여 스승의 전수(傳受)를 삼가 받드네.21)"하였다. 또 침상에는 '위(韋)' 자를 써 놓고, 서재에는 '회(晦)' 자를 걸어 놓고서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옹의 뜻도 이러한 데에 근본을 두고 있을 것이다. 土庵翁名㙾字子述。蓋其考謙窩公。以蛾子述學含土之事。擧而命之。俾其有勤苦作成也。翁平日服膺而受肘焉。及其晩年。恐慮衰而或失墜也。遂以土名庵。爲常目顧警之計。夫時迷無徵。累土有跡。視累土之多寡。而其勤慢可知也。嗚乎。視履可考其祥。賦事必獻其功。此在濛汜殘景。所以爲究竟結杪。而交還於天地父母者。其意豈偶然哉。朱夫子詩曰。佩韋遵考訓。晦木謹師傳。又題韋於寢。揭晦於齋。以寓終身之慕。翁之意。其亦有本於此云爾。 몽사(濛汜)로……때 인생의 노년을 비유한다. 몽사는 해가 지는 곳인데,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올라 몽사로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두질한……받드네 주희(朱熹)가 만년에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의 고정서원(考亭書院)에 적어 놓은 것이다. 앞의 구(句)는 주희의 부친 주송(朱松)이 "조급한 성질이 도를 해친다."라고 스스로 경계하여 자신의 호를 '위제(韋齋)'라고 한 가르침을 이어 따를 것을 다짐한 것이다. 위(韋)는 무두질하여 부드럽게 만든 소가죽을 이르는데,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급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 이것을 차고 다니면서 느긋하게 처신했다는 고사가 전해지며, 예로부터 성급한 자들이 이것을 차고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뒤의 구는 주희의 스승 유자휘(劉子翬)가 주자에게 전수해 준 "나무는 뿌리를 잘 감추어야 봄에 잎이 무성하게 피고, 사람은 몸을 잘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찌는 것이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는 가르침을 삼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주자가 자로 삼은 원회(元晦)ㆍ중회(仲晦)와 호로 삼은 회암(晦菴)ㆍ회옹(晦翁)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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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봉321) 창렬 을 애도하다 悼崔華峯【滄烈】 깊은 산에 자취 감추고 구산322) 문하에서 배웠으니 跡晦雲山學臼門평생토록 의를 행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네 生平行義出流羣중년에 횡역 만남은 일신의 운세와 관계 있고 中經橫逆關身運늙어서는 참된 공부 배가 되어 도의 근원 찾았네 老倍眞工覓道源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배워 정의 잊기 어려운데 同座春風難忘誼그대 떠난 텅 빈 집에서 이날 무슨 말을 하랴 虛堂此日那堪言계수나무 숲에는 밤마다 늘 달이 걸렸는데 桂林夜夜長懸月초은323)의 노랫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구나 招隱歌聲更不聞 跡晦雲山學臼門, 生平行義出流羣.中經橫逆關身運, 老倍眞工覓道源.同座春風難忘誼, 虛堂此日那堪言?桂林夜夜長懸月, 招隱歌聲更不聞. 최화봉(崔華峯) 최창렬(崔滄烈, 1877~1940)로, 화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회경(晦卿)이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농산(農山) 신득구(申得求)에게서 수학하였고 그가 죽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 입문하였다.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과 교류하였다. 많은 초고를 남겼으나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화봉유고(華峯遺稿)》 2책만 전한다. 구산(臼山)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또 다른 호이다. 초은(招隱) 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에게 초빙된 인사들 가운데 소산(小山)이라고 일컫던 이들이 굴원(屈原)의 고사에 감동한 나머지 지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부(詩賦)를 말한다. 그 첫 행에 "계수나무 숲 우거져 산이 그윽하네.[桂樹叢生兮山之幽.]"라고 하였다. 《楚辭 卷8 招隱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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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송331)의 '《주역》을 읽고 우연히 짓다' 시에 차운하다 次林砥松讀易偶成 대역만을 공부하고 온갖 것들 제거하니 專門大易百爲除지송 노인의 근면한 공부 세상에 짝할 이 없네 砥老勤工世莫如사변상점332)의 현묘한 이치가 담겨 있고 辭變象占玄妙理희문주공333)의 성스럽고 신묘한 책이라네 羲文周孔聖神書강절은 수를 추산하매334) 일찍이 흠이 없었고 數推康節曾無欠이천은 도를 말하매335) 또한 여유가 있었네 道說伊川亦有餘그래도 깊이 계합함은 오직 본의336)로 귀결되니 深契惟應歸本義그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누가 알겠는가 箇中眞樂孰知歟 專門《大易》百爲除, 砥老勤工世莫如.辭、變、象、占玄妙理, 羲、文、周、孔聖神書.數推康節曾無欠, 道說伊川亦有餘.深契惟應歸本義, 箇中眞樂孰知歟? 임지송(林砥松) 임장우(林章佑)이다. 전우(田愚)의 《간재집(艮齋集)》에 그에게 보내거나 답한 편지가 다수 실려 있다. 사변상점(辭變象占) '상기사(尙其辭)', '상기변(尙其變)', '상기상(尙其象)', '상기점(尙其占)'을 줄여서 한 말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에는 성인의 도가 네 가지 있다. 역을 가지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자는 그 언사를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행동하려는 자는 그 음양 변화를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자는 역의 상을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미래를 점치려는 자는 그 점괘를 숭상해야 한다.[易有聖人之道四焉. 以言者尙其辭, 以動者尙其變, 以制器者尙其象, 以卜筮者尙其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희문주공(羲文周孔) 《주역》을 완성한 복희(伏羲),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줄임말이다. 《주역회통(周易會通)》 범례(凡例)에 의하면, 복희씨는 괘획(卦畫)을 그었고, 문왕은 괘사(卦辭)를 지었고, 주공은 효사(爻辭)를 지었고, 공자는 십익전(十翼傳)을 지었다고 하였다. 강절(康節)은 수를 추산하매 강절은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이다. 《주역》에 정통하여서, 역전(易傳)에 근거해 팔괘(八卦)를 해석하였고, 도가 사상을 참고해 '상수지학(象數之學)'을 개창하였다. 이천(伊川)은 도를 말하매 이천은 송나라 학자 정이(程頤)이다. 의리(義理)를 위주로 《주역》을 주해(註解)하여 《이천역전(伊川易傳)》을 지었다. 본의(本義) 주희(朱熹)가 《주역》의 점사(占辭)를 위주로 설명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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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화대기 望華臺記 사람은 지극히 정든 곳에 대해 그곳을 떠나게 되면 그리워함이 없을 수 없고, 그리워하면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 중에 언덕에 올라 부모님이 계신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고94), 높은 산에 올라 군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며, 개암나무와 감초를 노래하며 미인(美人)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니95), 이것은 인정상 그칠 수 없는 것이다.운암(雲巖) 어른은 사문(斯文)의 훌륭한 유학자이자 성대한 조정의 저명한 관리로서 명성과 덕망을 한 몸에 받아 조정과 재야에서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는데, 시사(時事)가 일변하자 홀연히 수레를 돌려 만 길 높이 흩날리는 속세 밖으로 멀리 떠나 10 묘(畝)의 농토 사이에서 한가로이 소요하며 편안히 지냈다. 하지만, 오직 진심어린 단심(丹心)으로 그리워하며 해[임금]를 향한 정성스런 마음만은 막을 수 없었기에 마침내 집 옆에 있는 산 정상의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에 하나의 대(臺)를 축조하고 한가한 날에 올라 서울을 우러러 바라보는 장소로 삼았다.아, 문정(文正)은 강호로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을 걱정하였고96), 횡거(橫渠)는 명아주와 콩잎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였으니97), 이는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동서양의 나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에 대한 생각98)을 그만둘 수 없는 지금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알지 못하겠지만, 어른께서 대에 올라 서울을 향해 바라보는 날에 과연 어떠한 감회에 젖어 들었을까? 천고토록 다 없어지지 않을 슬픔에 반드시 노래하고 통곡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아, 서산(西山)99)은 어디이며, 동해(東海)100)는 어느 곳인가? 구름이 깔리고 달이 밝은 산중의 망화대(望華臺)의 한 구역을 어느 누가 오늘날의 서산이 아니며, 동해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入於至情之地。離之則不能無思焉。思之則不能無望焉。古人有陟岵屺而望父母。陟崔嵬而望君子。歌榛苓而望美人。此人情之所不能已也。雲巖丈人。以斯文偉儒。熙朝名宦。聲望期注。朝野拭目。及其時事一變。而幡然回轍。乃遠引遐舉於萬丈軟塵之外。而棲遲偃仰於十畝農圃之間也。惟是赤際丹心戀戀向日之誠。遏住不得。遂就舍傍山頂可舒遠眺處。占築一臺。以爲間日登臨瞻望京華之所。嗚乎。文正江湖之憂。橫渠藜藿之戀。此在平時而猶然。況今東塵西氛。瀰漫天地。而匪風下泉之思。有不可已。未知丈人臨望之日。果作如何懷緖也。其千古不盡之悲。必有非歌哭可足者。噫。西山何地。東海何處。雲月山中一區望華臺。誰謂非今日之西山東海也耶。 언덕에…… 있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로, 《시경》 〈척호(陟岵)〉에 "저 산에 올라서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저 민둥산에 올라서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陟彼岵兮, 瞻望父兮.……陟彼屺兮, 瞻望母兮.]"라고 하였다. 개암나무와……있었으니 미인(美人)은 훌륭한 임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생각하는가, 저 미인은 서방 사람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문정(文正)은……걱정하였고 문정은 북송 초기의 명재상이자 문장가였던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에 처하면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라는 말이 보인다. 《范文正公集 卷7 岳陽樓記》 횡거(橫渠)는……그리워하였으니 횡거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그는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안석(王安石)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며 자신을 등용하고자 했던 신종(神宗)을 염려하였다. 비풍(匪風)과……생각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은 《시경》 〈회풍(檜風)〉과 〈조풍(曹風)〉의 편명으로, 모두 주(周)나라의 왕업이 쇠망해 가는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외세로 인해 점차 쇠망해가는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염려를 말한다. 서산(西山)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은거했던 수양산(首陽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으려 할 적에 불렀다는 채미가(采薇歌)〉에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었으면서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구나. 신농과 우순과 하우가 문득 없어졌으니 나는 누구를 의지해서 돌아가야 하나. 아아, 가야지. 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兮. 以暴易暴兮, 不知其非兮.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兮. 於嗟徂兮, 命之衰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동해(東海) 전국 시대 제(齊)나라  의사(義士)였던 노중련(魯仲連)이 절개를 지켜 빠져 죽고자 했던 동해(東海)를 가리키는 듯하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고서 위(魏)나라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제국(帝國)으로 섬긴다면 포위를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은 저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천자가 된다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은 되지 못하겠다고 한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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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 영모재 중수기 具氏永慕齋重修記 죽수(竹樹)106)의 동쪽 연주산(聯珠山)은 고 평장사 구공(具公)의 묘소가 있는 곳이고, 산 아래에 날개를 펼친 듯 운림(雲林)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손들의 영모재(永慕齋)이다. 대개 상재(桑梓)의 생각107)과 상로(霜露)의 감회108)를 깃들이고, 노래하고 곡하며 종족을 모으는 장소로 삼았으니, 마치 진씨(甄氏)의 사정(思亭)109)과 황씨(黃氏)의 망고정(望考亭)110)과 같았다. 오직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무궁하다면 이 재사 또한 장차 자손과 더불어 시종 함께 할 것이니 다르게 보아서는 불가하다. 이 때문에 전후로 수백 년 동안 무너지는 대로 수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후손 본수(本修)가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생각을 내어 도모가 여러 종친에게 미쳤는데, 모모가 그 일을 주관하고 모는 그 재정을 담당하고 모모는 그 일을 감독하여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5개월 만에 공사가 끝났다. 기울어진 것은 바로 세우고 느슨해진 것은 견고하게 하고 세월이 흘러 퇴색 된 것은 깨끗하게 새롭게 하여, 청(廳)·당(堂)·문(門)·무(廡)가 환하게 모습을 바꾸었으니, 《서경》의 이른바 "긍구긍당(肯構肯堂)"111)과 《시경》의 이른바 "사속비조(似續妣祖)"112)를 모두 볼 수 있다.오호라! 고심하고 정성과 힘을 다해 애써 주선하여 여기에 이른 것은 단지 조석으로 첨모(瞻慕)하여 저존(著存)의 정성113)을 지극하게 하고 밤낮으로 강론하고 수양하여 계술(繼述)할 방범을 궁구하여 안으로는 집안의 기대가 되고 밖으로는 나라의 빛이 되는 것이니, 이 재사에 노니는 사람은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는가. 竹樹之東。聯珠之山。故平章事具公衣履之藏。山下翼然。在雲林之端。卽其子孫永慕之齋也。盖以寓桑梓之思。霜露之感。而爲歌哭聚族之地。如甄氏之思亭。黃氏之望考亭也。惟是慕先之心爲無窮已。則此室亦將與子孫相終始。而不可以差殊觀也。是以前後數百年。隨敝隨補。非止一再。後孫本修。慨然發慮。謀及諸宗。某某尸其事。某掌其財。某某董其役。首尾五朔。功役告訖。傾側者峻直。縱弛者鞏固。漫漶者鮮新。廳堂門廡。煥然改觀。書所謂肯構肯堂。詩所謂似續妣祖。皆可見。嗚乎。苦心血力。拮据至此者。只是朝夕瞻慕以致著存之誠。夙夜講修以究繼述之方。內以爲門戶之望。外以爲邦國之光。遊此室者。盍相勉焉。 죽수(竹樹)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의 옛 이름이다. 상재(桑梓)의 생각 부모가 살던 고향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로(霜露)의 감회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슬퍼하며 사모한다는 뜻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씨(甄氏)의 사정(思亭) 송(宋)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인 진군(甄君)의 정자인데,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를 가리킨다. 진씨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진군 때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이에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영구(靈柩)를 여럿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그러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황씨(黃氏)의 망고정(望考亭) 오대(五代) 남당(南唐) 때 황자릉(黃子稜)이 아버지의 무덤을 멀리 바라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긍구긍당(肯構肯堂) 자손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다. 《서경》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만일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그 규모를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의 터도 마련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당을 짓고자 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속비조(似續妣祖) 자손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저존(著存)의 정성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해 사랑과 정성을 다 들이면 살아 계신 듯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공경히 제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후손이 조상에 대하여 "사랑을 다하면 혼령이 보존되고, 정성을 다하면 혼령이 드러난다.[致愛則存, 致慤則著.]"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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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기 瑞軒記 남쪽 지방의 산 가운데 혹 서석산(瑞石山)119)보다 큰 것이 있겠지만 그 모습의 단엄(端嚴)함과 기상의 명수(明秀)함은 마치 대인 장자(大人長者)가 높이 공수하여 우두커니 서 있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것은 서석산이 실로 제일이다. 옛날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120)께서 이 산을 가장 사랑하여 소싯적에 유람해 보았고 만년에 마주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 조석으로 바라보았으니, 대개 천지의 정대한 기상은 사람과 산이 차이가 없다.오호라! 하늘이 돌보지 않아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뒤에 태어나 늦게 배운 사람이 갈팡질팡하여 귀의할 곳이 없는데, 당시 첨앙하던 마음을 깃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서석산만 존재하네. 돌아보건대 이 비천한 목숨이 유랑하다 궁벽한 곳에 머물러 노쇠함과 병이 침범하여 문을 닫고 세상을 사절하다보니, 드디어 이 산과 아울러 모두 잃게 되었다.안군(安君) 공삼(公三)121)은 상서로운 사람이다. 이 산의 끝에 살면서 이 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그 전 면목을 안석과 뜰 사이에 드러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고, 심지어 기거하며 출입하고 주선하며 돌아보는 사이에도 단엄 명수한 기상이 아님이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숭악(崧岳)의 준천(峻天)은 길보(吉甫)를 찬미하기 위한 것122)이고, 태산(泰山)의 암암(巖巖)함은 자여(子輿)를 찬미하기 위한 것123)이네. 군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지만 또한 선생의 문도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산을 보고 뒤미처 상상함에 광감(曠感)124)한 마음이 없겠는가. 선생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사랑하고 선생께서 마주하시던 것을 마주하면 그 기상과 체덕(體德)이 말씀으로 가르치던 것 보다 친절한 것이 어찌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의 뒤에 있겠는가. 군은 그칠 곳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네. 내 비록 병들었지만 장차 한번 행차를 준비하여 그대를 따라 서헌에 올라 늦게 태어나 사모하면서도 우러르지 못한 무궁한 회포를 위안 받으려 하네. 南方之山。或有大於瑞石者。而若其體容端嚴。氣象明秀。如大人長者。高拱凝立。使人仰止而不敢慢焉。則瑞石固第一也。昔我蘆沙先生。最愛此山。少時杖屨及焉。晚年築室相對之地。朝夕贍望。盖天地正大之氣。人與山不異也。鳴乎。昊天不弔。泰山已頹。後生晚進。倀倀靡歸。而可以寓當日瞻仰之餘者。惟是瑞石獨存。顧此賤命。流泊僻左。衰病侵尋。杜門謝世。遂幷與此山而失之。安君公三瑞人也。居山之趾。而對山之面。使其全幅無不呈露於几席庭。石之間。以至起居出入。周旋顧眄。無非是端嚴明秀之象。此軒之所以爲瑞者歟。然崧岳峻天。所以美吉甫也。泰山巖巖。所以贊子輿也。君雖不及先生之門。亦不可謂非先生之徒。則見此山而豈無追想曠感者乎。愛先生之所愛。對先生之所對。其氣象體德。所以親切於言語之外者。豈惟不在於及門者之後而已哉。君可謂知所止矣。吾雖病。將一理巾屐。從子登軒。以慰晚慕靡仰無窮之懷云爾。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안군(安君) 공삼(公三) 안규용(安圭容, 1860~1910)을 말한다. 자는 공삼, 호는 서헌(瑞軒),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숭악(崧岳)의……것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고 높은 산악이 치솟아 하늘에 이르도다. 산악이 신을 내려 보와 신을 낳았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 시는 선왕(宣王)의 외숙인 신백(申伯)이 나가 사읍(謝邑)에 봉해지자 윤길보(尹吉甫)가 시(詩)를 지어 그를 전송한 것이다. 길보를 찬미한 것이라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태산(泰山)의……것 《근사록》 권14 〈관성현(觀聖賢)〉에서 정자(程子)가 "공자는 천지와 같고, 안자는 온화한 바람, 상서로운 구름과 같으며, 맹자는 태산에 바위가 중첩하듯 우뚝한 기상이다.[仲尼天地也, 顔子和風慶雲也, 孟子泰山巖巖之氣象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여(子輿)는 맹자의 자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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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기 省野記 성(性)은 실로 동일하여 사람에게 보존 된 것 또한 그다지 서로 멀지 않다. 그러나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의 나뉨과 길흉화복(吉凶禍福) 성패존망(成敗存亡)의 자취는 천차만별이어서 끝이 없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대개 호리(毫釐)의 즈음에 향배(向背)의 기미는 단지 성찰함과 성찰하지 못함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제순(帝舜)께서는 대성(大聖)인데도 자주 성찰하라는 경계를 받았고,125) 증자(曾子)는 대현(大賢)인데도 삼성(三省)126)의 말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 보다 못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성(省)'이라는 한 글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날마다 사용하는 제일의 참 진리여서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불가한 것이다.나의 벗 오군(吳君) 영지(永之)127)가 문미에 붙일 만한 한 마디를 청하였다. 영지는 지사(志士)인지라, 그 뜻은 반드시 보통 바라보려는 계획에 있지 않을 것이니, 표시하여 새겨서 항상 바라보는 것의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어찌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단목씨(端木氏)의 서(恕)128)와 원성공(元城公)의 성(誠)129)과 더불어 전후로 일자부(一字符)가 되고 종신토록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몽매하여 의리에 의심스러움이 있으면 비록 스스로 성찰하려고 해도 그 방법은 말미암을 것이 없을 것이다. 원컨대 영지는 독서하여 궁구하는 공부를 더욱 더하여 시비(是非)와 진망(眞妄)으로 하여금 구분되는 것이 있게 하면 성찰하는 공부를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심술(心術) 염려(念慮)의 은미함과 용모(容貌) 위의(威儀)의 사이와 사물(事物) 응접(應接)의 즈음에 무엇인들 내가 마땅히 성찰해야할 곳이 아니겠는가. 어느 곳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어 흠뻑 젖어들어 융화되어 날마다 원대함을 궁구하면 문미 끝의 한 '성' 자가 순임금의'누성(屢省)'과 증자의 '삼성(三省)'을 이어서 이 세상에 명성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性固一也。而其存乎人者。亦不甚相遠也。然而知愚賢不肖之分。吉凶禍福成敗存亡之跡。千差萬別。有不可紀極者何歟。蓋其毫釐之際。向背之幾。只在於省不省如何耳。帝舜以大聖而有屢省之戒。曾子以大賢而有三省之語。況其下者乎。然則省一字。是人生日用第一眞詮。而不可斯須去身者也。余友吳君永之。請一語可以鎭楣者。永之志士也。其意必不在於尋常觀瞻之計。所以標銘而爲常目之要者。豈有以加於此者哉。可與端木氏之恕。元城公之誠。前後爲一字符。而有終身用之者矣。然知識蒙蔽。義理有疑。則雖欲自省。其道無由。願永之更加讀書窮索之功。使是非眞妄。有所分落。可以下省之之功。凡心術念慮之微。容貌威儀之間。事物應接之際。夫孰非吾合省之地哉。無處不然。無時不然。沈浸融洽。日究遠大。則安知楣端一省字。不繼屢省三省而有聲於斯世也耶。 제순(帝舜)께서는……받았고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제순(帝舜)이 "하늘의 명을 삼갈진댄 때마다 삼가고 기미마다 삼가야 한다.[則天之命, 惟時惟幾.]"라고 하고, 이에 노래하기를, "고굉이 기쁘게 일하면 원수가 흥기하고 백공이 기뻐한다.[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熙哉.]"라고 하니, 고요(皐陶)가 "유념하시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일을 일으키시되 법도를 삼가 공경하시며, 일이 이루어지는가를 자주 살펴 공경하소서.[念哉, 率作興事, 愼乃憲, 欽哉, 屢省乃成, 念哉.]"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省) 《논어》 〈학이(學而)〉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나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 붕우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가? 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오군(吳君) 영지(永之) 오장섭(吳長燮, 1862~?)을 말한다. 자는 영지,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단목씨(端木氏)의 서(恕) 단목은 자공(子貢)의 성(姓)이고 이름은 사(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행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라고 묻자, 공자가 "서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원성공(元城公)의 성(誠) 원성공은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데 그가 원성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유안세는 성격이 강직하여 휘종(徽宗) 때 간신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에게 미움을 받고 7번이나 유배를 당하여, 멀리 광주(廣州) 및 광서(廣西) 지방을 전전하였으나 하루도 병든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비결을 묻자 "성실함[誠]뿐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스승 사마광(司馬光)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요체로 꼽은 덕목이었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宋元學案 卷20 元城學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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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0 卷之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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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遺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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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판 행 부산 첨사 오공 유사장 贈兵曹參判行釜山僉使吳公遺事狀 예로부터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있으면, 위로는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 있고 아래로는 야사(野史)에 흩어져 나오거나 혹은 쇠와 돌에 새겨져 후대에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붓을 들어 쓴 말은 부회(附會)한 것을 답습하기도 하고 혹 아부하는 것에 가깝다. 금석(金石)이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면 연기나 구름처럼 사라져 봄날의 새와 가을날의 곤충처럼 아득하여 소리가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仁)은 세상을 두루 덮어준 것이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아래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마음에 부합하여 여항의 궁벽한 곳에 자자하니, 이것이야말로 믿을 만한 사승(史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며, 오래 갈 수 있는 금석(金石)인 것이다. 우리 고을에, 옛날 오공이란 분이 있었는데 휘가 방한(邦翰)이고 자는 원중(元仲)이며, 보성(寶城) 사람이다. 묘년(妙年, 스물 안짝의 나이)에 죽천 선생(竹川先生) 박공(朴公) 광전(光前)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2)하여 벼슬이 개운 만호(開雲萬戶)를 지내고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에 정예병(精銳兵) 수백 명을 모아 행재소(行在所)3)로 달려갔는데, 임금이 위로의 말을 해 주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시며 영남을 방비하게 하니 공이 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주로 들어갔다. 그때에 같은 고을의 진사 문홍헌(文弘獻)이 최경회(崔慶會)의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공을 추천하여 막좌(幕佐)로 삼고 항상 전략을 세우는데 참여하게 했다. 성이 함락되자 공이 성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며 쏘아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자 문홍원과 같은 날 순절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계사년(1593, 선조26) 6월 29일이었다. 그 강개(慷慨)한 절개와 충렬(忠烈)의 의리는 함께 순절한 여러 공들과 그 자취가 같았는데, 다만 명성과 지위가 드러나지 못하고 후손들이 쇠락하여 오랜 세월이 흐름으로 인해 묻혀서 을사년의 녹훈(錄勳)을 받지 못하고 진주(晉州)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공조(公朝)의 사첩(史牒)과 초야의 기문(記聞)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았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만 적막하게 몇 마디 말에 그쳤을 뿐이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다만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당일의 일들을 말해줌에 눈으로 직접 보는 듯 역력하기에 부녀자나 아이들, 하인이라도 감개(感慨)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들이 없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아, 당일의 의로운 처신이 만약 명백하고 직절(直截)하지 않으면서 유전(流傳)되고 부회(附會)하여 제동 야인(齊東野人)4)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찌 오래될수록 이처럼 절실하게 되었겠는가. 사승(史乘)은 더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부로(父老)와 부유(婦孺)는 기망(欺罔)할 수 없고, 금석(金石)도 때로 사그라지는 때가 있지만 병이(秉彝)와 호덕(好德)5)의 본성은 실추시킬 수 없으니, 그 믿을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이 어찌 사승, 금석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을유년(1885, 고종22)에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아울러 병조 참판에 추증하였으니, 또한 공의 여러 사람의 칭찬이 민멸하지 않고 덕을 좋아하는 본성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는 한 세상의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죽어서는 장홍(臧洪)의 무리들6)과 지하에서 노니니 어찌 장쾌하지 않겠는가. 나는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보고 들어서 추앙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였고, 또 명보(名寶)의 구분에 우연히 느낀 바가 있어 삼가 이와 같이 기록한다. 自古人物有聞於世者。上焉則昭載國乘。下焉則散出野史。或刻之金勒之石。以壽其傳。然載筆之言。或襲附會。或沙阿好。金石雖固。而時移世變。烟消雲空。如春鳥秋蟲。漠然無聲也。惟其盛德至仁。徧覆宇宙者尙矣。下至一言一行。合乎匹夫匹婦之心。而藉藉於委巷窮曲之間者。此是可信之史乘。可久之金石也。吾鄕古有吳公諱邦翰。字元仲。 寶城人。妙年受學于竹川先生朴公。光前之門。 登武科。 官開雲萬戶。 移釜山僉使。壬辰之變募精兵數百。赴行在。上慰論之。賜弓矢。使備嶺南公拜命南下。入晉州。時同郡文進士弘獻爲崔公慶會從事官。薦公爲幕佐。常參謀畵。及城陷。公登城大呼。射殺甚多。及矢盡力窮。與文弘獻同日殉節卽。癸巳六月二十九日也。其慷慨之節。精烈之義。與同殉諸公同軌一轍。而但名位不揚。雲仍零替。時久歲移。因以堙沒。未蒙乙巳之錄勳。未配晉州之彰烈。至公朝史牒。草野記聞。皆無傳焉。而於湖南節義錄。止寂寞數語耳。豈不可憾。但鄕父老相傳。說當日事。歷歷如目擊。雖婦孺隷儓。未嘗不感慨歡仰。嘖嘖不容口。嗚呼。當日處義。若不明白直截。而流傳附會。出於齋東野人之口。則豈愈久而愈不忘。至於若是之切耶。史乘或不能盡信。而父老婦孺不可以欺罔。金石或有時銷泐。而秉彛好德。不可以失墜。其可信可久。豈史乘與金石之比耶。及夫乙酉。命旌閭。兼有兵參之。贈。亦可以見其公誦詩之不泯而好德之攸在也。生而扶一世之綱常。死而與臧洪輩遊於地下。豈不快哉。余以鄕里後生。平日瞻聞。偏切追仰之誠。又於名寶之分。偶有所感。謹述之如此云爾。 박공(朴公) 광전(光前)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항(李恒)·유희춘과 함께 호남5현의 한 사람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이 되어 싸웠다. 학문에 있어서 지행의 어느 하나만을 내세울 수는 없으며, 그 둘은 서로 의지하여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행호진의 관계를 강조했다. 저서로 《죽천집》이 있으며, 퇴계 이황과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은 그의 깊은 성리학적 식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보성 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이다. 무과에 급제 오방한은 무예가 뛰어나 경인년(1590, 선조2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무슨 일로 인하여 대궐을 떠나 있을 경우, 임금이 머물고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곳을 말한다. 제동 야인(齊東野人)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로, 그 말은 근거가 없는 황당한 이야기여서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제나라 동쪽 시골 사람의 말이다.[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병이(秉彝)와 호덕(好德) 병이는 하늘이 부여한 떳떳한 본성을 말한다. 호덕은 사람이면 모두 천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다. 《시경》 〈증민(烝民)〉에 "사람이 떳떳한 본성을 가진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장홍(臧洪)의 무리들 함께 죽은 이들을 뜻한다. 장홍은 삼국 시대 사람으로 자가 자원(子源)이다. 그가 원소(袁紹)에게 생포되어 죽을 때 평소 장홍과 동향(同鄕) 사람으로 장홍을 흠모하던 진용(陳容)이 원소에게 장홍을 죽이는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진용을 끌어내면서 "그대는 장홍의 무리도 아닌데 공연히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하니, 진용이 "대저 인의(仁義)란 어찌 일정한 기준이 있겠는가. 이를 실천하면 군자요 이를 저버리면 소인이다. 오늘 차라리 장홍과 같은 날 죽을지언정 장군과 같은 날 살지는 않겠소."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臧洪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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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선대부 호조참의 매죽헌 박공 유사장 贈嘉善大夫戶曹參議梅竹軒朴公遺事狀 공의 성은 박씨이며 휘는 성우(成祐)이고, 자는 화언(華彦)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대제학(大提學) 충의공(忠義公) 휘 첨(瞻)이 그의 비조(鼻祖)이다. 휘가 희중(煕中)이며 호가 위남(葦南)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문장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사신으로서 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다. 또 중국에 사신으로 갔으며,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문학과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다. 증조는 휘가 경호(慶顥)이며, 조부는 휘가 진해(振海), 호가 겸암(兼巖)으로 행의가 세상에 드러났다. 아버지는 휘가 동수(東壽)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병절(秉節)의 따님으로, 영조 갑진년(1724, 영조1)에 보성 마흘치(馬屹峙)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고 재능이 영특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시험을 좋아하지 않아 개연히 자기를 위한 학문에 뜻을 두었고, 책 상자를 짊어지고 폐백을 갖추어 섬촌(蟾村)의 민 선생 우수(閔先生遇洙)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함양(涵養)과 치지(致知)를 안팎으로 서로 닦고 뜻을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여 동과 정이 서로 의지하였으며,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켜 일찍이 하루라도 놓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앎이 더욱 정교하고 학업이 더욱 치밀해져 한 때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정조 신축년(1781, 정조5) 4월 21일에 생을 마쳤으며, 능주 풍류치(風流峙)의 노상(路上) 병좌(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제범(濟範)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는데, 중혁(重赫)·재혁(再赫)·명혁(命赫)이다. 현손(玄孫)인 태근(泰根)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나는 병으로 문필을 폐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다만 향리의 후생으로 선진(先進)을 사모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으므로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해서 대략 다듬고 윤색하였다. 公姓朴氏。諱成祐。字華彦。號梅竹軒。大提學忠義公諱瞻。其鼻祖也。至諱煕中號葦南道德文章。冠冕一世。奉使日本還。又使上國。封珍原君。子孫因貫焉。自是文學忠孝。世代箸聞。曾祖諱慶顥。祖諱振海號兼巖。行義著世。考諱東壽 贈軍資監正。妣興德張氏秉節女。英廟甲辰。生公于寶城馬屹峙第天稟挻異。才性穎悟。自少小不屑功令。慨然有志於爲己之學。負笈齎贄受業於蟾村閔先生遇洙之門。涵養致知。內外交進。持守力行。動靜互資。得寸守寸。得尺守尺。未嘗有一日之放過。至於晩年。知愈精而業愈密。一時士類。無不倚重焉。正廟辛丑四月二十一日考終。葬綾州風流峙路上丙坐原。配驪興閔氏濟範女。生三男。重赫再赫命赫。玄孫泰根奉家狀。謁余文爲不朽計。余病廢鉛槧。不敢承膺。而但以鄕里後生。慕仰先進之意。有倍餘人。謹据家狀。略爲之修潤云爾。 민 선생 우수(閔先生遇洙) 1694~175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庵)이다. 김창협(金昌協)ㆍ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영조 대에 등용되어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저서에 《정암집(貞菴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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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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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재기 觴山齋記 천관산(天冠山)32)은 본디 남쪽 지방의 명승지이고, 상산(觴山)은 그 산이 품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강과 산이 도와 분발하게 해서 예로부터 많은 위인(偉人)과 일사(逸士)들이 이따금 그 사이에서 머물러 지냈으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마을의 고사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죽은(竹隱) 위공 계창(魏公啓昌)은 산 아래에 사는 원로 대가(元老大家)로, 은거하며 의를 행하여 풍도와 자태가 뛰어났다. 하루는 산기슭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만년에 공부하는 장소로 삼고, 겸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는데, 대체로 달빛과 바람이 모이고, 산과 물이 합쳐져서 집의 기운이 맑고 상쾌하며, 창문에 스며드는 기운이 밝고 깨끗하였으니, 참으로 여기에서 웃고 이야기하며 거처하고 오르내릴 만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정성을 다하고 바쁘게 일한 것이 이미 본받을 만한 데 이른 것은 산수나 경치에 빠지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즐기기 위한 계책도 아니며, 또 문장을 지어 벼슬길을 구하기 위한 계책도 아니다. 단지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마음과 본성을 다스리고 길러서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정성을 다하며 그치지 않았던 뜻이다.선성(先聖 공자)이 말하기를, "무릇 효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부모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33) 하였으니, 이 집에서 노니는 자들이 각기 힘쓴다면 어찌 오늘날 도와 분발하게 하는 것이 지난날만 못할 줄 알겠는가. 天冠固南方勝區。觴山其懷抱中最勝處也。江山助發。自古多偉人逸士。往往盤旋於其間。輿地勝覽。洞中古事。班班可考。竹隱魏公啓昌。山下老宿也。隱居行義。風韻偉然。一日就山之麓。結構數椽。爲晩年藏修之所。兼爲諸子孫肄業之方。蓋其風月之會聚。山水之統合。軒宇之蕭灑。窓牖之明淨。信可以爰笑爰語。攸芋攸躋。雖然血心拮据。旣底于法者。非爲山水景物役也。又非文酒遊衍計也。又非纂組干進計也。只是講明義理。治心養性。以爲修身齊家之地。此其所以惓惓不已之意。先聖有言曰。夫孝者。善繼人之志。善述人之事。遊此室者。其各勉焉。安知今日之助發不如前日也。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무릇……것이다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달효(達孝)'라고 규정하며 말한 것으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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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하기 竹下記 죽하옹(竹下翁)은 내가 약관(弱冠) 시절에 교분을 맺었던 옛 친구이다. 임술년(1862) 봄에 서울에서 만났고, 이로 인하여 서로 따르며 여러 날 즐겁게 정담을 나누었는데, 이윽고 각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만나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 임인년(1902) 가을에 옹이 일 때문에 영귀정(詠歸亭)에 와서 만났는데, 하얗게 센 귀밑머리와 수염이 다시 옛적에 마주했던 모습이 아닌지라 슬픔과 위로의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떠나면서 죽하기(竹下記)를 부탁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옹의 뜻은 대나무에서 무엇을 취했을까?예전 모두 묘령(妙齡 스무살 안팎)의 청춘으로 태평무사한 때에 한묵(翰墨)과 문예(文藝)의 장에서 함께 상종했던 것이 어제의 일처럼 역력한데 그 사이 시속이 변한 지난 세월 동안 겪어온 풍상이 몇 번이겠으며, 상전벽해가 몇 번이나 일어났겠는가? 옹은 풍도와 기상이 시종 엄격하여 병들고 쇠약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병을 무릅쓰고 도보로 다니면서 무고를 밝히고 도를 지키는 의론을 창도하였으니, 이른바 '세한후조(歲寒後凋)34)'라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옹의 뜻은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나이와 정력이 더욱 들어가고 쇠약해질수록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마음이 바뀌기 쉽고, 세상의 변고가 끝이 없을수록 명예와 절개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때에 이러한 마음이 단청처럼 밝게 빛나니, 이 때문에 차군(此君)35)에 붙여서 마지막 자정(自靖)의 도36)로 여겼을 것이다. 이전에 이미 그러함이 이와 같았다면 이후에도 장차 그러할 것임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더욱이 절차탁마하여 날로 대나무와 같은 푸른 기상으로 나아가고, 또 위 무공(衛武公)37)처럼 늙어서도 나태하지 않는 자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나는 가죽나무나 참나무처럼 졸렬한 품질이어서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을지라도 단풍나무에 뻗어 있는 덩굴이나 겨우살이처럼 남아있는 풍교에 의지하여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데, 모르겠지만 기꺼이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竹下翁余弱冠舊契也。壬戌春。邂逅漢師。因以追從。數日款洽。旣而各還其家。不相見爲四十年。壬寅秋。翁以事來會于詠歸亭。皤然鬚髮。非復昔時相對。悲慰有不勝情。其發也。以竹下記託焉。未知翁之意何取乎竹也。曩也。俱以靑春妙齡。在昇平無事之時。與之相從於翰墨文藝之場。歷歷如昨日。而時變世劫之經過於其間者。爲幾番風霜。幾番滄桑也。翁風裁標致。終始彌礪。至於癃疾衰境。力疾徒步。以倡辨誣衛道之論。所謂歲寒後凋。非是之謂歟。但翁之意。則有不在是。正以年力愈邁。宿心易替。世變無窮。名節難保。此日此心。炳炳如丹。所以寓諸此君。視爲究竟自靖之道耳。已然於前者如是。則將然於後者。從可知矣。況切磋琢磨。日臻乎綠猗。又有如衛武公老而不怠者乎。余樗櫟劣品也雖不足惜而願得庇倚餘風以自植之如蔦蘿之施楓。未知以爲肯可否耶。 세한후조(歲寒後凋) 날씨가 추워진 뒤에 시든다는 뜻으로, 군자의 절개는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알 수 있음을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차군(此君) 대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남의 빈 집에 잠시 거처할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대나무를 빨리 심도록 다그쳤는데, 그 이유를 묻자 "하루라도 이 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자정(自靖)의 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 미자에게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사람마다 선왕에게 그 뜻을 바칠지니, 나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위 무공(衛武公)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의 제후로, 무공은 그의 시호이다. 그는 나이 95세 때에 조정에 포고문을 내려 "모든 벼슬하는 사람은 내가 늙었다고 여기지 말고 번갈아 나를 규간(規諫)하라."고 하면서 거처하는 곳마다 나태함을 경계하는 말을 붙였고, 또 〈억(抑)〉 시를 지어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였다고 한다. 《詩經 大雅 抑》 《國語 楚語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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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헌기 愚軒記 사람들은 항상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말하고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이때의 어리석음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에 대한 일컬음이다. 공부자(孔夫子)가 안연(顔淵)을 일컬어 어리석다고 하였고38), 또 영무자(寗武子)를 일컬어 어리석다고 하였는데39), 이때의 어리석음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에 대한 일컬음이다.우헌 홍공(愚軒洪公)은 천태산(天台山)40)의 작약봉(芍藥) 속에 은거하여 고요하고 말없이 지내면서 세상에 대해서는 경영하는 것이 적었고, 사람에 대해서는 맞이하여 만나는 것이 적었으며, 일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적었다. 오직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것과 시를 짓고 예를 익히며 글을 짓는 것을 자신과 가족,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삼고서 명성이나 권세, 이익, 영달에 대해서는 더욱 담담하였다.기교를 부리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고, 통달한 자의 입장에서 봐도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을 일컫는 것인가? 아니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일컫는 것인가? 오직 말을 아는 자만이 이를 알 것이니, 굳이 애써 변별하고 해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공의 손자 병희(秉憙)가 나와 여러 해 종유하였기에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人有恒言。曰賢愚曰智愚。此愚是不賢不智之稱也。孔夫子稱顔淵愚。又稱寗武子愚。此愚是爲賢爲智之稱也.愚軒洪公。隱於天台之芍藥。恬靜簡黙。於世少營爲。於人少容接。於事少表襮。惟以耕稼漁樵詩禮文墨。爲身家子孫計。而於聲勢利達。尤泊如也。以奇巧者觀之。則可謂愚矣。以通達者觀之。則可謂愚矣。然則是愚也。乃不賢不智之稱耶。抑爲賢爲智之稱耶。惟知言者知之。不必苦苦辨解也。公抱秉憙。從遊有年。請爲之記。 공부자(孔夫子)가……일컬었고 안연은 공자의 제자인데, 공자가 일찍이 안연에 대해 말기를, "내가 안회와 함께 온종일 이야기를 하였으나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더니, 그가 물러간 뒤에 그 사생활을 살펴보았는데 그대로 행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도다.[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하였다. 《論語 爲政》 영무자(寗武子)를……일컬었는데 영무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로, 문공(文公)이 도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성공(成公)이 무도함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나아가 나라를 잃을 위험에서 구제하였는데, 공자가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따라갈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라갈 수 없다.[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하였다. 《論語 公冶長》 천태산(天台山)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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