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청사(高晴沙)36)의 문집에 있는 청음(淸陰) 김 상공(金相公)37)의 시38) 한편, 이 시에 대한 원운(原韻)은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 권9에 〈봉래각에 올라[登蓬萊閣]〉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등주 고을 누관들은 허공 높이 솟아 있어, 푸른 바다 짓누르며 만 리 멀리 바라보네. 석교 이미 진 시황 시절부터 끊어졌고, 성사는 또 한나라의 신하만을 가게 했네. 하늘과 땅 큰 파도의 속에 떠서 일렁이고, 해와 달은 쌓인 기운 가운데서 나눠 뜨네. 반평생의 먼 유랑에 이제 머리 희었거니, 한평생의 기이함이 이와 같긴 어려우리.[登州樓觀跨虛空 勢壓滄溟萬里窮 橋石已從秦帝斷 星槎惟許漢臣通 乾坤盪漾洪波裡 日月分開積氣中 半世遠遊今白髮 百年奇絶此難同]" 高晴沙集中。讀淸陰金相公詩有感。步其韻 를 읽고 감회가 있어 그 시에 차운하다만 리의 창해(蒼海) 마치 텅 빈 듯 푸르니물과 하늘 서로 일렁여 아득히 끝을 알기 어렵네신하로서 복속하는39) 지극한 충성이 아니었다면어찌 풍도(風濤)의 길을 통과할 수 있었겠는가성제(聖帝)의 은혜로운 파도 푸른 바다 위에 넘실대고목릉(穆陵)40)의 시든 풀 저물녘 산속에 남아 있네숲 속 창가에서 묵묵히 조천록(朝天錄)41)을 읽으니당시에는 문물이 서로 같았음42)을 슬픈 마음으로 떠올리네 萬里蒼溟碧似空水天相盪杳難窮倘非侯服忠誠至安得風濤道路通聖帝恩波靑海上穆陵衰草暮山中林窓默對朝京集悵憶當年一軌同 고청사(高晴沙) 고용후(高用厚, 1577~?)를 가리킨다. 청사(晴沙)는 그의 호.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행(善行)이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병조 좌랑과 병조 정랑을 거쳐 1616년 남원 부사가 되었고 1624년 고성 군수에 임명되었다. 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判決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저서에 《청사집》과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청음(淸陰) 김 상공(金相公)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을 가리킨다. 청음(淸陰)은 그의 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다른 호는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예조 판서로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仁祖)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고청사(高晴沙)의……시 고용후의 《청사집》 권1에는 김상헌의 시에 차운한 〈봉래각. 청음의 시에 차운하여 장결 설재께 드리다.[蓬萊閣次淸陰韻呈張駃雪齋【可大】]〉가 실려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다. "영롱한 붉은 누각 높은 하늘에 솟았으니, 큰 파도 끝이 없어 시야 아득하네. 고향의 서신 석 달 동안 끊겼다고 탄식하지 말라, 풍도에도 다행히 배 한 척 통과하네. 연경의 공로(貢路) 아득히 먼 밖에 있고, 자라 등의 선산(仙山) 아스라한 가운데에 있네. 묻노니 상전(桑田)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아는가, 하늘의 모습과 바다의 빛깔은 고금에 똑같다네.[玲瓏朱閣壓層空 巨浸無涯目力窮 鄕信莫歎三月絶 風濤猶幸一帆通 燕京貢路蒼茫外 鼇背仙山縹緲中 借問桑田知幾改 天容海色古今同]" 신하로서 복속하는 원문은 '후복(侯服)'이다. 황제국에 대해 신하로서 복속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문왕(文王)〉에, "주에 복종하니, 천명이 일정하지 않다."[侯服于周 天命靡常]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목릉(穆陵) 선조(宣祖)와 그 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 그리고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조천록(朝天錄) 원문은 '조경집(朝京集)'이다. 원운(原韻)이 《청사집》 권1 〈조천록(朝天錄)〉에 실려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문물이……같았음 원문은 '일궤동(一軌同)'이다. 수레바퀴의 폭이 같다는 뜻으로, 문물과 풍속이 서로 같음을 의미한다. 《중용장구》 제28장에, "지금은 천하가 수레는 바퀴의 폭을 같이 하며, 글은 문자를 같이 하며, 행동은 차례를 같이 한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에는 중화와 조선의 문물이 서로 같았음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