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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곡재 족선조(族先祖) 충경공(忠景公)222)의 묘재(墓齋)이다. 風谷齋【族先祖忠景公墓齋】 남원 동쪽에 가성223)이 울울한데 佳城鬱鬱帶方東중건한 병사224)가 반공에 솟았네 丙舍重新聳半空충경공은 고금에 이름 영원하고 忠景古今名不朽요천 지척에는 승경이 그지없네 蓼川咫尺勝無窮제물에는 각자가 성심을 다하지만 苾芬各自誠心盡화수225) 아래의 우리는 근본이 같네 花樹吾曾根本同풍곡이란 편액을 지명 따라 붙였으니 風谷嘉扁因地錫후선들의 흥기도 이 속에 달려 있네 後承興起在斯中 佳城鬱鬱帶方東, 丙舍重新聳半空.忠景古今名不朽, 蓼川咫尺勝無窮.苾芬各自誠心盡, 花樹吾曾根本同.風谷嘉扁因地錫, 後承興起在斯中.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 1551~1599)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응(季膺), 호는 금릉(金陵)이다. 노진(盧禛)의 문인으로,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ㆍ능성 현령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가성(佳城) 무덤을 뜻한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발로 오랫동안 땅을 구르기에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 "가성이 울울하니, 3천 년 만에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머물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등공이 유언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이곳에 장사지내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西京雜記 卷4》 병사(丙舍) 산소 곁에 지어 놓은 재실(齋室)을 이른다. 화수(花樹) 친족의 모임을 뜻한다.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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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기 澗齋記 죽수(竹樹) 남쪽 한 고을에 연화봉(蓮華峯)이 있고, 연화봉 아래로 청량한 시냇물 한 줄기가 넘실넘실 굽이져 흐르는데, 그 깊이가 옷자락을 걷어 올려야 건널 수 있는 정도였다. 시냇가에 울타리가 쭉 늘어서 있는 마을을 간리(澗里)라 하고, 마을 곁에 맑고 깨끗한 한 가옥을 간재(澗齋)라 하는데, 나의 벗 이 사문(李斯文) 광빈보(光彬甫)가 그 주인이다.하루는 그 집을 찾아갔다가 인하여 무슨 뜻으로 집을 '간(澗)'이라 한 것이지 물으니, 사문이 웃으며 말하기를, "시냇가에 있는 마을을 간리라 하는데, 간리에 있는 집만 유독 간재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네. 무릇 이름을 유독 다르게 짓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네. 지금 시냇물이 천태산(天台山)에서 수십 리를 길게 뻗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고, 이 시냇물을 끼고 있는 집이 수백 가옥이나 되는데, 모두 간재라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사문의 은미한 뜻이 있을 것이네.아, 세상에 나가고 은둔하는 것과 도를 행하고 감추는 것은 사군자가 몸을 세우는 큰 절목이네. 한 가지 예절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달갑게 여기지 않고, 한 가지 일이라도 합당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데, 하물며 온 천지가 혼탁하여 세상이 도와 어긋나는 때임에랴.사문은 정연(挺然)히 스스로 분발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뜻을 지킨 채 홀로 자고 깨어 말하고 지내지만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면서 장차 옛사람이 은둔하며 지냈던[考槃] 시내65)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연화봉의 시내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고, 고반의 시내는 군만이 홀로 대하는 것이네.《주역》 〈규괘(睽卦)〉의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군자는 이를 본받아 함께하고 달리한다.' 하였는데, 정자가 이를 주해하여 말하기를, '크게 함께할 수 없는 자는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이고, 홀로 달리할 수 없는 자는 세속을 따라 나쁜 것을 익히는 사람이다.' 하였네. 요점은 함께하면서도 달리할 수 있는데 있으니, 이것이 여러 사람이 함께 대하는 연화봉의 시내가 군만이 홀로 대하는 고반의 시내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하니, 사문이 말없이 오랫동안 있다가 인하여 〈고반〉시 3장을 노래하고 시냇가에서 나를 전송하였다. 竹樹南一坊有蓮華峯。峯下一條清澗。透迤渟滀。其深可揭。澗之上。藩落櫛比曰澗里。里之畔。一字蕭灑曰澗齋。余友李斯文光彬甫。其主人也。一日造其齋。因問齋之爲澗何義。斯文笑曰。里之在澗上者爲澗里。則齋之在澗里者。獨不爲澗齋乎。余曰否。夫名所獨獨。所以别之也。今澗自天台。延流十數里。夾澗而家者。不下數百。皆可爲澗齋乎。必有斯文微意之存焉。噫。出處行藏。士君子立身大節目。一禮之未備。有所不屑。一事之不合。有所不就。況在九有渾渾世與道違之日乎。斯文挺然自拔。確然自守。而獨寤寐言。永矢不諼。將有慕於古人考槃之澗。然則蓮華之澗。衆所同也。考槃之澗君所獨也。易睽之象曰。君子以同以異。程子解之曰。不能大同者。亂常拂理之人也。不能獨異者。循俗習非之人也。要在同而能異。此非澗之所以爲澗乎。斯文默然久之。因歌考槃詩三章。送我於澗之濱焉。 홀로……시내 《시경》 〈고반(考槃)〉의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어 말하지만,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弗告.]"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고반은 고사(高士)가 은둔해 지내는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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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기 晚翠軒訣 천하의 식물들은 똑같지만, 그 종류에 따라 품평하여 등급을 나눈다면 하루 이틀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고, 한두 달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어 그 등급이 혹 서로 두 배나 다섯 배가 되기도 하고 혹 서로 열 배나 백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욕수(蓐收)71)가 절기를 살피고 매서운 서리가 한껏 맹위를 떨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저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던 식물들은 시름시름 빛을 잃어가고, 꺾이듯 생기를 잃어간다. 이러한 시기에 한 때의 위세에 뜻을 빼앗기지 않고, 큰 동요에 절개를 바꾸지 않은 채 울울창창하여 우뚝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은 과연 어떤 식물인가? 아, 세한(歲寒)에 대한 우리 부자의 탄식72)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이 지나도록 다 사라지지 않는 뜻을 갖게 한다.대저 절개는 혹 만년에 변하기도 하고, 행실은 혹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폐해지기도 하며, 일은 혹 마지막에 실패하기도 하니, 이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근심하는 것이다. 더욱이 위급하거나 급박한 때에 헤아릴 수 없는 재앙으로 겁박한다면 의기소침하여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주 선생(朱先生)이 말하기를, "만약 진실로 깨달음이 있어 참되게 공부한 것이 있다면 쇠로 만든 바퀴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라도 또한 어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소 한가한 때에 절차탁마하여 담금질하고 단련하더라도 위급한 때에 힘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한가로이 담소나 나누고 무리지어 논쟁이나 하면서 무르고 연약한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임에랴."하였으니, 이 말은 부자의 탄식을 드러내 밝혀서 한 해의 정경이 추워지기 전에 미리 수양하게 한 것이다.나의 벗 만취자(晚翠子)는 어렸을 때나 장성했을 때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그 고상한 뜻과 법도 있는 풍모가 충분히 믿을 만한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며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만취(晚翠)' 두 글자를 문미에 표시해 두고 늘 바라보았다. 이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가 드러내 탄미했던 은미하고 깊은 뜻을 알고서 오늘날 궁구해야 할 결말에 적합한 뜻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니,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것이 비록 지극히 덧없다 하더라도 나의 법을 행하고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찌 여유롭지 않겠는가.나는 갯버들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 기운만 바라봐도 시들어 버리는 것에 대한 경계가 절실하였으니, 만취자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아서 겨우살이나 덩굴 식물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하는 것처럼 풍상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호를 받기를 바랄 뿐이다. 天下之植物一也。然以其彙類而品第之。則有得一日二日之春者。有得一月二月之春者。或相倍蓰。或相什佰。而至於蓐收按節。嚴霜肆威。則彼林林叢叢。無不苶然而失色。摧然而喪氣矣。于斯時也。不爲時威所奪。不爲衆撓所移。而欝欝蒼蒼。挻然自守者果。何物也。噫。吾夫子歲寒之歎。令人有千載不盡之意。夫節或移於晚。行或廢於久。事或失於終。此人之所同患也。況在顚沛急遽之際。而劫之以不測之禍。其有不銷屈者乎。朱先生曰。若使眞有所見。實有下功夫處。則便有鈇輪。頂上轉旋。如何動得他。又曰。平居暇日。琢磨淬礪。緩急之際。未易爲力。況游談聚議習爲軟熟者乎。此語是發明夫子之嘆。使之豫養於歲色未寒之前也。余友晚翠子。幼壯孝悌。老而好學。其志尚風儀。有足可恃。而猶且歉斂然。恐其不及。以晚翠二字。標諸楣而常目。可謂知先聖先師發歎微奥之旨。而得今日着題究竟之義也。世路遭遇雖極無常。而所以行吾法遂吾志者。豈不綽綽然耶。佘以蒲柳殘質。常切望秋之戒。企見不棄於晚翠子。如蔦蘿之依松柏而得庇風霜之萬一耳。 욕수(蓐收)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서방(西方)의 신(神)으로,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를 주관한다. 소호(少皥) 혹은 금신(金神)이라고도 한다. 《禮記 卷5 月令》 세한(歲寒)에……탄식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말하여 혼란한 세상이나 곤궁한 때를 당하여야 군자의 변치 않는 절개를 볼 수 있다고 탄식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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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기 愚齋記 어떤 객이 주인에게 힐난하기를, "무릇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어리석다고 말하면 이는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스스로 자기가 어리석지 않다고 말하면 이는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인께서는 이미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어리석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어리석음[愚]'으로 집을 명명하셨는지요?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해명하기를, "어리석음은 지혜로움에 대비시켜 말한 경우가 있으니, 공자의 이른바 '하우(下愚)는 변화시킬 수 없다.'73)라는 것이 이것이고, 또 기교에 대비시켜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자의 이른바 '순수한 어리석음을 온전히 할 수 있다.'74)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살면서 하나의 흠과 하나의 병통이 어찌 일찍이 기교 가운데서 나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내용이 없이 겉만 화려한 문체를 숭상하고 온갖 솜씨를 펼치는 데 힘쓰는 것은 문사(文詞)의 기교이고, 남의 뜻을 받들어 맞추고 권세를 쫓아 아부하며 용의주도하게 온갖 행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공을 세워 이름을 세상에 떨치려는 자의 기교이며, 은미하고 편벽된 것을 찾아 자신만의 특이한 술책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방술사(方術士)의 기교이고, 술수와 농락으로 이익을 이루는 것은 시정(市井) 상인의 기교입니다. 심지어 언어나 필찰, 의복, 그릇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상투적인 기교들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유행하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이에 대해 우뚝 서서 돌이킬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주인은 타고난 바탕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몸가짐이 바르고 진중하며, 처신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알고, 일을 처리하는 데 근본이 있습니다. 그 말은 간략하고 어눌하며, 그 문장은 평이하고 담백합니다. 부친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되 벼슬을 구하거나 청탁하는 일이 없고, 생계를 꾀하기 위해 농사에 힘쓰되 달리 영리를 추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읽는 것은 성현의 글에 지나지 않았고, 거처하는 곳은 비바람을 막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일토록 함께 어울리면서도 쓸데없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고, 책상이나 자리 주변에 진기한 물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지만, 순수한 어리석음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지 않게 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아, 주인이 어리석다 자처하는 것은 타고난 바탕에서 얻어진 것일 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점차 많아지고, 세간의 일을 겪은 세월이 점점 오래되다 보니 세상의 병이 되는 것으로 기교만한 것이 없고 기교를 치료하는 약이 되는 것으로 어리석음만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힘을 다해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서 일신의 동정(動靜)이 모두 한결같이 여기에서 나오게 하고, 또 온 세상을 들어 치료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한 글자의 부절(符節)을 게시하여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집을 명명한 본래 의도는 아니지만, 집을 명명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뜻에 자못 도움이 될 듯하니, 바라건대 나를 위해 기문(記文)으로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客有難於主人曰。凡人自謂已愚。是不愚者也。自謂不愚。是眞愚者也。主人旣知其愚。是不愚也。奚復以愚名齋焉。傍有解之者曰。愚有對智而言者。孔子所謂下愚不移是也。又有對巧而言者。朱子所謂全其純愚是也。居今之世。一疵一病。何嘗不從巧中出也。體尙浮虛。務盡伎倆者。文詞之巧也。承迎趨附。用意百態者。功名之巧也。索隱搜僻。好自立異者。方術之巧也。機關籠絡。以濟其利者。市井之巧也。至於言語筆札衣服器用。都是此個窠臼。如水滔滔。惟恐不及。其能挺然於此而思欲反之者。有幾人也。主人天姿朴實。容儀質重。行已有耻。處事有本。其言也簡而訥。其文也平而淡。爲親應擧而不用干託。計口力穡而無他營求。所讀不過聖賢之文。所居不過風雨之庇。終日遊衍。無一剩語。左右几席。無一長物。以世之巧者觀之。固愚矣。而不知其全其純愚者。乃所以不愚也。嗚乎。主人之愚。不惟其得於天姿。讀書漸多。閱世漸久。知世之爲竊病者。莫如巧。巧之爲藥者。莫如愚。於是用力矯捄。使一身動靜。渾然一出於此。而又欲擧一世而藥之。故揭此一字符。使人人得以見之也。主人曰。此非吾名齋之本意然於名齋自警之義。頗似有補。願爲我記焉。 하우(下愚)는……없다 하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고 했는데, 상지(上知)는 이미 선(善)의 극치에 이르렀으므로 더 변화할 것이 없고, 하우는 선을 믿지 않고[自暴] 선을 행하지 않으므로[自棄] 변화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순수한……있다 주희(朱熹)는 과거 공부의 폐해를 지적하며 "그들이 익히는 것이 과거 공부에 지나지 않아서 기량이 더욱 정밀해질수록 마음씨는 더욱 나빠지니, 이는 가르치지 않아서 오히려 그 순수한 어리석음을 보전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한다.[其所習不過科擧之業, 伎倆愈精, 心衍愈壞. 蓋不如不敎猶足以全其純愚之爲愈也.]"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27 答詹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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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와기 謙窩記 높기만 하고 낮추지 못하며, 존귀하기만 하고 굽히지 못하는 것을 교만이라 이르니, 교만하면 흉하게 된다.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을 알지 못하며, 보존하는 것만 알고 망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거만이라 이르니, 거만하면 후회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하늘의 높음으로 땅에 낮추는 것은 〈태괘(泰卦)〉가 되고75), 산의 존귀함으로 땅에 굽히는 것은 〈겸괘(謙卦)〉가 되니76), '겸(謙)'의 시의(時義)가 크지 않은가.지위가 천하에 으뜸이되 필부를 예우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은 제왕(帝王)의 겸이고,77) 때에 맞추어 대유(大有)에 올라 천자에게 향응하는 것은 공후(公侯)의 겸이며,78)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입 안의 음식을 뱉어내며 선비에게 몸을 낮춘 것은 재상(宰相)의 겸이다.79) 지혜가 천만 사람보다 뛰어나면서도 나무꾼에게도 묻는 것은 성인(聖人)의 겸이고,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치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춘 채 담박하고 검소하여 안으로 쌓아 두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학자(學者)의 겸이다. 덕이 넓어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다스려진 세상에서의 겸이고, 주머니 끈을 묶듯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아서 허물이 없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의 겸이다.나의 벗 겸와옹(謙窩翁)은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별호)의 북쪽에 은거하여 백발이 되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그 겸손의 의리를 터득함이 깊었으니, 이를 가져와 호로 삼은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주역》의 여러 괘 중에 순전히 길하여 흉함이 없는 것은 오직 〈겸괘(謙卦)〉만이 그러하니, 그렇다면 옹이 만년에 누리게 될 복은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高而不能下。尊而不能降。是謂驕。驕則凶。知得而不知喪。知存而不知亡。是謂亢。亢則悔。是故以天之高而下於地則爲泰。以山之尊而降於地則爲謙。謙之時義。不其大矣乎。位加四海而禮下匹夫。帝王之謙也。時躋大有。而享于天子。公侯之謙也。位極人臣。而吐哺下士。宰相之謙也。智出千人。而詢于芻蕘。聖人之謙也。絅錦淡簡。內而不出。學者之謙也。德博而不伐。治世之謙也。括囊而無咎。亂世之謙也。余友謙窩翁。隱居爾陵之北。白首窮經。囂囂自樂。其有得於謙謙之義者深矣。引而號之。不亦宜乎。易諸卦純吉無凶。惟謙爲然。然則翁晚境所享。不占而可知。 하늘의……되고 《주역》 〈태괘(泰卦)〉의 괘상(卦象)을 말한 것으로,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 ☷)가 위에 있고,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 ☰)가 아래에 있어 하늘이 땅에게 몸을 낮추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산의……되니 《주역》 〈겸괘(謙卦)〉의 괘상(卦象)을 말한 것으로,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 ☷)가 위에 있고,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 ☶)가 아래에 있어 드높은 산이 평평한 땅에 자신을 굽히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지위가……겸이고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황제에 오른 뒤에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하였던 엄광(嚴光)에게 두터운 예물을 보내 초빙하고 벼슬을 주었지만, 엄광은 끝내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며 종신토록 은거하였는데, 훗날 범중엄(范仲淹)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서 "〈둔괘 초구〉에 '양덕이 바야흐로 형통하거늘 능히 귀한 사람으로서 천한 사람에게 몸을 낮추어 민심을 크게 얻는다.' 하였으니, 광무제가 이것을 따랐다.[在屯之初九, "陽德方亨, 而能以貴下賤, 大得民也". 光武以之.]"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83 嚴光列傳》 《古文眞寶 後集 卷6》 때에……겸이며 대유(大有)는 《주역》 64괘 중 14번째 괘의 이름으로, 소유한 것이 많다는 뜻이다. 〈대유괘(大有卦) 구삼(九三)〉에 "공이 천자에게 향응하니. 소인은 하지 못한다.[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라고 하였는데, 《역전(易傳)》에 이르기를, "삼효가 크게 소유한 때를 당하여 제후의 지위에 있으면서 풍부하고 성대함을 소유하면 반드시 이로써 천자에게 향응한다. 이는 자신의 소유를 천자의 소유로 여김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신하로서의 떳떳한 의리이다.[三當大有之時, 居諸侯之位, 有其富盛, 必用亨通于天子. 謂以其有, 爲天子之有也, 乃人臣之常義也.]라고 하였다. 신하로서……겸이다 옛적에 주나라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필하면서 천하의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는 데 급급하여 "머리를 한번 감는 동안에도 세 번이나 젖은 머리를 움켜쥐고서 나갔고, 밥 한 끼를 먹는 동안에도 입 안의 음식을 세 번이나 뱉어냈다.[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卷33 魯周公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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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이르러 열재 어른54)을 배알하려 했으나 하지 못하다 2수 到益山 擬拜悅齋丈 未果【二首】 형문55)에서 절하고 작별할 때를 돌이켜 생각하니 回憶衡門拜別時한 추위 두 더위의 세월이 흘렀구나 一寒二暑歲華移노년의 질병은 하늘이 응당 보호할테지만 老年疾病天應護백 리의 소식 전하는 기러기 돌아오지 않네 百里音書鴈未歸정신과 외모가 씻은 듯 맑다는 걸 들어 기쁘고 神觀喜聞淸似洗붓과 시가 나는 듯 빠르다는 걸 흔쾌히 본다오 筆詩快看迅如飛거처할 곳을 되려 정하지 못해 한탄스러우니 爲歎棲息還未定멋진 포구 구름 낀 마을에 문안함이 더디다오 佳浦雲村面候遲금마56)의 맑은 가을 나그네 이른 때 金馬淸秋客到時강가에는 수위 낮아지고 고개 구름 옮겨가네 江干水落嶺雲移길 따라 보이는 건 모두 새로운 모습인데 沿途觸目皆新態어느 곳에 마음 논할 옛 지기가 있을까 何處論心有舊知자주 머리 들어 선옹을 서글피 바라보니 悵望仙翁頻擧首문득 날개 돋아 높이 날고 싶은 생각이 드네 飜思生翼欲高飛배회하며 온갖 상념 물리치기 어려운데 徘徊萬想排難遣영주산57)으로 돌아가는 백 리 길이 더디네 歸路瀛山百里遲 回憶衡門拜別時, 一寒二暑歲華移.老年疾病天應護, 百里音書鴈未歸.神觀喜聞淸似洗, 筆詩快看迅如飛.爲歎棲息還未定, 佳浦雲村面候遲.金馬淸秋客到時, 江干水落嶺雲移.沿途觸目皆新態, 何處論心有舊知?悵望仙翁頻擧首, 飜思生翼欲高飛.徘徊萬想排難遣, 歸路瀛山百里遲. 열재(悅齋) 어른 소학규(蘇學奎, 1859~1948)로, 열재는 그의 호이다. 자는 화지(化知)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서 태어났다. 형문(衡門) 나무를 가로로 걸쳐서 만든 소박한 문으로, 은사(隱士)의 집을 뜻한다. 《시경》 〈진풍(陳風)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에서 편안히 살 만하네.[衡門之下, 可以棲遲.]"라고 하였다. 금마(金馬) 전라북도 익산의 옛 이름이다. 영주산(瀛洲山) 선경(仙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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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열 어른이 화답한 시에서 자신의 나이는 연로한데 시는 노성하지 않음을 탄식하다 得悅丈和詩 歎其年老而詩不老 득열 노인의 시 호방하여 젊을 때보다 나으니 悅叟詩豪勝少時마음과 정신은 나이가 든다고 쇠하지 않는다네 心神不逐邵齡移자산은 명성이 강관에 진동하였고63) 子山名字江關動노두는 공부가 기촉에서 돌아와 노성해졌네64) 老杜工程夔蜀歸이치를 보았으니 참으로 초목을 평할 수 있고 觀理正宜評草木기미를 살폈으니 또한 잠비65)를 읊을 수 있네 玩機亦可詠潛飛후생은 부럽지만 아 어찌 미치겠는가 後生健羡嗟何及시상은 먼저 쇠하고 평소 바람은 더디구나 藻思先衰素望遲 悅叟詩豪勝少時, 心神不逐邵齡移.子山名字江關動, 老杜工程夔蜀歸.觀理正宜評草木, 玩機亦可詠潛飛.後生健羡嗟何及? 藻思先衰素望遲. 자산(子山)은……진동하였고 자산은 북주(北周)의 문장가 유신(庾信)의 자이다. 두보(杜甫)의 〈영회고적(詠懷古跡)〉에, 유신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은 것에 대해 "유신은 평생토록 몹시 쓸쓸했는데, 늘그막에 시부가 강관을 진동했네.[庾信生平最蕭瑟, 暮年詩賦動江關.]"라고 하였다. 강관(江關)은 강남과 같은 말이다. 노두(老杜)는……노성해졌네 노두는 두보(杜甫)를 이른다. 두보가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를 피하여 처음에는 촉(蜀) 땅으로 들어가서 성도(成都)에 살면서 엄무(嚴武)의 참모로 있다가 대력(大曆) 초년에 엄무가 죽고 촉 땅이 혼란에 빠지자 강을 따라 내려와서 기주(夔州)의 동쪽 지역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시가 더욱 노성해졌다고 한다. 잠비(潛飛)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준말이다.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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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雨 雪消山見色。氷解水聞聲。洗到塵埃盡。仁心乃發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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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람재 정공 유사장 碧嵐齋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환(英煥), 자는 내실(乃實), 호는 벽람재(碧嵐齋)이니 하동 사람이다. 밀직(密直) 휘 국룡(國龍)과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모두 상계(上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중엽에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를 사사(師事)하였고,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 일컬었으니, 공에게 10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복채(復采), 증조의 휘는 탁(鐸), 조부의 휘는 양엽(陽曄)이고 부친의 휘는 원상(元相)이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김복헌(金復憲)의 따님이니, 순조 병자년(1816)에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개와 도량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성품과 도량이 겸손하고 검약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성인(成人)의 위의(威儀)와 모양이 있어 다른 사람과 장난치지 않고 다투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았고, 발은 분잡(紛雜)한 곳에는 이르지 않았다. 고기 잡고 나무한 뒤에 한가한 날이면 조용히 곁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고, 제멋대로 편한 곳으로 나아간 적이 없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때에 게으르지 않고 과정(課程)을 따르자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형제 4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으니 화기(和氣)가 집안에 가득 찼고,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좁쌀도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으며, 제부(諸婦)도 이처럼 하자 가정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부모상을 당해 몹시 슬퍼하여 수척하고 야위었으며, 정문(情文 인정과 예문)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 평생토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분수를 지켜 천진한 성품대로 산림에서 한가로이 지냈지만, 여휘(餘輝)가 은은하게 날로 그 빛이 드러나119) 원근의 인사들이 자자하게 칭송하여 군자로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벽람(碧嵐)' 두 글자를 편액으로 써서 걸어 자신의 뜻을 부쳤다. 정축년(1877) 8월 8일에 세상을 떠나 신산(莘山) 계월봉(桂月峯)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운규(李雲奎)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헌(在憲)이고 딸은 문종휴(文鍾休)에게 출가했다. 계배(系配)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이신(文以新)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오른 재관(在寬)·재탁(在卓)·재의(在義)이고, 딸은 홍우전(洪祐銓)과 이성재(李成在)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손자 복현(福鉉)이 가장(家狀)을 들고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여 불후하게 전하려고 했을 때, 내가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英煥。字乃實。號碧嵐齋。河東人。密直諱國龍。文忠公諱芝衍。皆上系顯祖也。中葉有諱汝諧。師事金佔畢齋。世稱遯齋先生。於公爲十世。高祖諱復釆。曾祖諱鐸。祖諱陽瞱。考諱元相。妣淸道金氏復憲女。純祖丙子。生公于莘山里。氣字端嚴。性度謙約。自在幼稚。凝然有成人儀樣。不與人戱狎。不與人爭競。身不着華麗之服。足不到紛雜之地。漁樵餘日。從容侍側。應對惟謹。未嘗私自就便。就傳執業不怠。遵循課程。文理日就。兄弟四人。友悌甚篤。長枕大被。和氣滿室。尺布斗粟。有無共之。諸婦亦如之。庭無間言。遭內外艱。哀毁欒欒。情文兩至。一生沈晦。推分任眞。婆娑林樊。而餘輝闇章。遠近人士。藉藉稱誦。無不以君子人推之。揭碧嵐二字以寓其意。丁丑八月八日終。葬莘山桂月峯甲坐原。配全州李氏雲奎女。一男一女。男在憲。女適文鍾休。系配南平文氏以新女。三男二女。男在寬壽陞同中傴。在卓在義。女適洪祐銓李成在。孫以下不錄。公之孫福鉉以家狀。過余謁文爲不朽計。辭不獲。謹據狀而略加修潤焉耳。 은은하게……드러나 대본의 '암장(闇章)'은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의 준말로, 군자의 도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아 은은하지만, 도가 내면에 있기에 날로 그 빛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中庸章句 第33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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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처사 정공 유사장 新泉處士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수현(洙鉉), 자는 성첨(聖瞻)이고 계통은 하동에서 나왔다. 휘 도정(道正)은 평장사(平章事), 휘 국룡(國龍)은 도첨의(都僉議),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이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충공이 낳은 휘 익(翊)이 우리 조정에 와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였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 선생(金佔畢齋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분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이고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으며,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중(德中), 증조의 휘는 명윤(命潤), 조부의 휘는 구원(矩元), 부친의 휘는 재대(在大)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으로 드러났다. 모친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순조 계유년(1813) 1월 24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고 시원하며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어려서부터 모든 장난과 저속한 말은 입에서 내지 않았고, 음란한 물건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가서는 장상(長上)을 섬기되 공경하고 삼가기를 한결같이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학문하는 절도와 몸가짐의 위의(威儀)와 모양은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점차 자라면서 동향(同鄕)의 만희재(晩羲齋)120)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121) 박영주(朴永柱) 공과 종유하여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하였다. 중년에 와서 하석(霞石)122) 성 선생(成先生)과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고 평소에 간직했던 경전의 은미하고 심오한 뜻과 전례(典禮)의 의심스럽고 난해한 절목을 의논하여 확정 짓고 헤아려 질정하였으니, 확충시켜 나아간 바가 많았다. 일찍이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 근체(近體)의 문장에 비록 매우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시속을 따라 부지런히 노력하여 가문의 바람에 응하였는데, 이때 와서 드디어 한 번에 모두 사양하여 물리치고, 두문불출하여 세상과 사절한 것은 고요함을 지키고 한가롭게 지내려고 해서였다. 이에 한 구역에 정사(精合)를 짓고 물을 끌어와 샘을 만들어 '신천(新泉)'이라 편액하고, 날마다 마을의 뛰어난 자들을 데리고 와서 글을 읽었다. 고을에서 매번 예회(禮會) 및 문예(文藝)의 연회를 베풀 때면 반드시 공을 빈객으로 맞이했는데, 공이 유건(儒巾)과 유복(儒服)으로 풍의(風儀)가 매우 훌륭하여 이 때문에 온 좌중이 숙연하였고, 고을 자제들을 대하여 자상하게 이끌어 깨우쳐 주되 성의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듣는 이들이 절로 감복하였다. 평소에 온화하고 어질고 자애로워 화기(和氣)가 사람을 감동시켰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려 빠지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속세와 단절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모든 이들이 원망함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이 서로 믿었으며, 똑같은 말로 추켜세우고 이간하는 말이 없어 사림(士林)에서 공을 조정에 추천하는 데에 이르렀다. 무자년(1888) 12월 26일에 세상을 떠나 부등(釜嶝)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모(某)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8남을 두었으니, 순철(淳哲)·순기(淳基)·순귀(淳龜)·순룡(淳龍)·순원(淳䲶)·순별(淳鱉)·순홍(淳鴻)·순필(淳弼)이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정병국(鄭炳國)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요청하였다. 아, 내가 어렸을 때에 이분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일이 어제처럼 또렷한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한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향방(鄕邦)에서 당시의 덕망 높은 어른들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여생에 다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그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洙鉉。字聖瞻。系出河東。平章事諱道正。都僉議諱國龍。贊成事文忠公諱芝衍。皆顯祖也。文忠生諱翊。入我朝。官兵曹判書。六傳諱汝諧。受學于金佔畢齋先生。以學行薦。拜司憲府持平。世稱遯齋先生。是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五傳諱殷河號六松。隱德不仕。以孝旌閭。於公爲六世。高祖諱德中。曾祖諱命潤。祖諱矩元。考諱在大。世著文行。妣晉州姜氏某女。有婦德。純廟癸酉正月二十四日。生公于綾之車洞里。氣宇秀爽。性度至孝。自幼。凡嬉戱俚近之語。不出諸口。淫邪之物。不接於目。入事父兄。出事長上。克敬克謹。一如成人。爲學節度。持身儀樣。一以古人爲法。稍長從同鄕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講討問辨。至中歲。往拜霞石成先生蘆沙奇先生。以平日所蓄經傳微奧之旨。典禮疑難之節。商確裁質。多所展拓。嘗於功令近體之文。雖不甚屑意。而隨俗黽勉以應門戶之望。至是遂一令掃斥。杜門謝世。爲守靜養閒計。築一區精舍。引流爲泉。顔曰新泉。日引村秀才子。尋行數墨。鄕中每設禮會及文藝之遊。必邀公爲賓。公以儒布儒服。風儀甚偉。一座爲之肅然。對鄕子弟。諄諄提諭。誠意懇至。聽者自服。平居溫仁慈愛和氣動人和而不流貞不絶俗是以內外無怨。遠近相信。一辭推詡。無有間言。至有士林剡薦。戊子十二月二十六日考終。葬釜嶝子坐原。配驪興閔氏某女。系配密陽朴氏某女。有八男。曰淳哲淳基淳龜淳龍淳䲶淳鱉淳鴻淳弼。孫以下不盡錄。曾孫炳國抱家狀來。謁不朽之文。嗚呼。余在小少。陪從杖屨。承奉聲咳。歷歷如昨日。而奄然千古之隔。已二十餘年。鄕邦間。不復見當日耆舊人物之盛。其爲餘生不盡之恨何如。玆不敢以非其人辭。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하석(霞石) 성근묵(成近黙, 1784~1852)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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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양공 유사장 華庵梁公遺事狀 공의 휘는 재성(在成), 자는 대집(大集)이다. 양씨는 계통이 제주(濟州)에서 나왔고 대대로 성주(星主 제주 목사)를 물려받았다. 고려 의종(毅宗) 때에 와서 휘 원준(元俊)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휘 문성(文聖)은 우리 조정에서 벼슬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휘 팽손(彭孫)123)은 교리(校理)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혜강(惠康)이니, 세상에서 학포 선생(學圃先生)으로 불렀다. 증조의 휘는 한영(漢永), 조부의 휘는 상기(相麒), 부친의 휘는 제묵(悌默)이니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광산 이씨는 이용하(李龍河)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 무신년(1848) 12월 25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선량한 성품이 있었기에 부모를 섬길 때에 오직 삼가서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 여러 아이와 놀 때도 입으로는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손으로는 경솔하고 잡된 장난을 치지 않았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진퇴와 응낙(應諾)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매우 부지런히 독서하여 과정(課程)에 흠결이 없었다. 평소에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것을 몸소 주관하지 않음이 없어서 구체(口體)의 봉양(奉養)124)에 모자람이 없었다. 거처할 때에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에 즐거움을 다하여 온 집안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는데 늙어서도 여전하였고, 재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여 굶고 배부른 것이 고르지 않은 탄식이 있은 적이 없었다. 모든 혼례비용과 출입할 때의 재물과 빈객의 대접을 모두 자력으로 공급하였고, 미루어 족친과 인척, 친구와 종유하는 자에게까지 모두 기쁘게 은혜를 베풀고 찬연(燦然)히 예로 대하였다. 계미년(1883)에 화학산(華鶴山)에 살면서 몇 칸짜리 집을 짓고, 형제가 서로 마주 대하며 말하고 웃으며 화락하게 지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자식과 조카들이 곁에서 모시면서 독서하고, 친한 벗들이 책상을 둘러싸고 수창(酬唱)하였으니, 그 세속을 끊은 모습과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었다. 상(喪)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늙었다고 하여 스스로 용서하지 않고, 빈궁하다 하여 스스로 기운을 잃지 않아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에 유감이 없었다. 갑오년(1894)의 난에 이웃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이 정도를 지키면서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고,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하늘을 거스르면 화가 발생하고 하늘을 따르면 복이 이르며, 선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은 좇아서는 안 되니,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들이 살고 죽는 명맥(命脈)이다. 공은 동생 양재해(梁在海)에게 천 리 밖의 스승에게 배우고 사방에 유학(遊學)함으로써 거의 헛되게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권하고, 피와 땀으로 힘써 일하여 그 비용을 감당하자 향리(鄕里)에서 탄복하고 칭찬하여 '이러한 형이 있어서 이러한 동생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그리워하지 않고 명성과 위세를 바라지 않았으며, 거친 의복과 거친 음식에도 고궁(固窮)125)하고 안빈(安貧)하였지만, 흠모한 것은 선인(善人)과 정사(正士)이고 힘써 노력한 것은 경사(經史)와 서적(書籍)이었다. 시냇가와 산 사이에서 소요하고 쑥대 우거진 궁벽한 곳에 파묻혀 유유자적하면서 애오라지 인생을 마쳤으니, 그 고상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세상에서 진실로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공과 같은 땅에 살면서 비록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친밀함은 조석으로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백발의 노년에도 앙모하는 바가 적지 않았는데, 어찌 공이 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계묘년(1903) 12월 21일에 세상을 떠나 장흥(長興) 장서면(長西面) 운곡(雲谷) 삼개봉(三開峯) 아래 정방(丁方)을 향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찬휴(文粲休)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회중(會中)·회연(會沇)·회구(會求)이고, 딸은 하동 정순봉(鄭淳鳳)에게 출가했다. 양재해가 가장(家狀)을 지어 나에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기에, 삼가 가장의 말을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在成。字大集。梁氏系出濟州。世襲星主。至高麗毅宗朝。有諱元俊。門下侍郞平章事。有諱文聖。仕我朝皆其顯祖也。至諱彭孫校理贈吏判諡惠康。世稱學圃先生。曾祖諱漢永。祖諱相麒。考諱悌默。皆有隱德。妣光山李氏龍河女。公以憲宗戊申十二月二十五日生于綾之莘山里。幼有至性。事親惟謹。未嘗有違。與群兒遊。口不出鄙俚之言。手不作浮雜之戱。七歲上學。進退唯諾。不類他兒。讀書甚勤。課程無闕。家素貧甚。漁樵耕牧。無不躬幹。口體之養。不至見乏。居致其敬。養致其樂。二家之內。和其藹如也。與弟友愛甚至。長枕大被。老而猶然。有無共之。未嘗有飢飽不均之歎。凡皆嫁之用。出入之資。賓客之供。皆自力以給。推以至於族親姻戚。知舊遊從。皆驩然有恩。燦然有禮。癸未僑寓於華䳽山中。構數椽屋子。兄弟相對。言笑湛樂。日以爲常。子侄侍傍讀書。親朋繞床酬唱。其絶俗之標。出塵之象。可艶而不可忘也。遭喪哀甚。不以耆艾而自恕不以貧寠而自沮。情文無憾甲午之亂。戒隣里人曰。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戒子弟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違。惡不可從。爲善去惡。此是民人生死命脈也。勸其弟枉海。從師千里。遊學四方。殆無虛歲。而血力拮据以應其費。鄕里歎賞。以爲有是兄有是弟。平生不慕名利。不赳聲勢。惡衣菲食。固窮安貧。而所慕者善人正士。所務者經史書藉。徜徉於溪山之間。沈淹於蓬蒿之中。優哉游哉。聊以卒歲。其高韻逸躅。世固有知之者矣。余與公居在同壤。雖未能源源相聚。而襟期之密勿。未嘗非朝夕合席也。白首歲寒。所仰不細。豈知公不少延而遽至於此耶。以癸卯十二月二十一日觀化。葬長興長西面雲谷三開峯下向丁之原。配南平文氏粲休女。有婦德。先公一年而終。生三男一女。會中會沇會求。女適河東鄭淳鳳。在海撰家狀示余。因有一言之托。謹据狀辭。略加修潤焉。 양팽손(梁彭孫) 1488~1545.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1519년(중종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구체(口體)의 봉양(奉養)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양지(養志)의 효도와 상대되는 말로,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孟子 離婁上》 고궁(固窮) 군자는 곤궁할 때에도 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진실로 곤궁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제멋대로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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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 생원 봉양 손공 유사장 成均生員鳳陽孫公遺事狀 공의 휘는 덕효(德孝), 자는 왈현(曰賢), 호는 봉양(鳳陽)이니, 손씨는 계통이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신라 문효공(文孝公) 휘 순(順)이 그 시조(始祖)인데, 고려에 와서 훈벌(勳閥)126)이 혁혁히 빛나 우리나라의 거성(巨姓)이 되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책(策)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경(敬)은 그의 백씨(伯氏 맏형) 휘 검경(儉敬)이 뜻을 굽히지 않아 보성(寶城)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홍문 제학(弘文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호는 영귀당(詠歸堂)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일(逸)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이고, 부친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이다.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양효영(梁孝永)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대구 서씨(大邱徐氏)는 서문강(徐文綱)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워 부덕(婦德)이 매우 갖춰졌으니, 영조 무인년(1758)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재성(才性)이 총명하여 스스로 말의 뜻을 알았고, 한 번 들으면 매번 잊지 않았으며, 나아가 배워 공부할 때에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 매우 민첩하였다. 어느 날 종가(宗家)에 가서 사당이 불완전하여 제사를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돌아와 부친에게 고하여 묘우(廟宇)를 수선하고 종가를 구휼(救恤)하자고 청하자, 부친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이와 같으니 가문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글방을 열어 스승을 맞이하여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및 백가(百家)의 책을 쌓아놓고 강학(講學)을 도와주었으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방기함이 없게 하였다. 부친이 질병에 걸려 임종할 때 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가문의 계책은 다만 독서에 달려 있으니, 내가 죽은 후에 네가 일심(一心)으로 향학(向學)하여 한결같이 변함없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 운명(殞命)하였다. 공은 슬프고 비통함이 끝이 없어 여러 번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송종(送終 장사(葬事))의 절차와 집상(執喪)의 법은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친이 임종할 때에 부탁한 것을 생각하여 더욱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잠시도 편안히 한가하게 지내지 않았고, 문장이 성대하고 명성이 매우 자자하여 순조 갑술년(181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영귀(榮歸)127)함에 미쳐 친척과 친구들이 환영하면서 축하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공이 기뻐하는 얼굴빛 없이 말하기를, "부모를 잃은 처지로 외람되이 과거에 합격하여 귀가하여 문으로 들어왔는데 기쁨을 드릴 곳이 없으니, 정경(情景)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서럽고 슬플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밤에는 나란히 누워 자고, 낮에는 책상을 맞대며 기뻐하면서 화락하게 지냈으며, 재산과 집물(什物)은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다. 병술년(1826) 4월 4일에 졸(卒)하여 인량동(仁良洞) 좌곡사동(左谷寺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5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두(啓斗)·몽두(夢斗)·필두(弼斗)·채두(采斗)·인두(寅斗)이고, 딸은 남원 윤필창(尹必昶)·탐진 최주효(崔柱孝)·탐진 최홍규(崔弘奎)·광산 김모(金某)에게 출가했다. 손자 처호(處護)·처진(處震)·처팔(處八)·처수(處修)는 장남이 낳았고,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권(處權)과 처영(處英)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처범(處範)은 넷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종은 다섯째 아들의 뒤를 이었다. 현손 영렬(永烈)이 그의 부친 군수공(郡守公)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그의 8촌 동생 손영모(孫永謨)로 하여금 나에게 가문에 길이 전하려고 하는 글을 요청하게 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처럼 말한다. 公諱德孝。字曰賢。號鳳陽。孫氏系出密陽。新羅文孝公諱順。其鼻祖。至麗朝。勳閥烜爀。爲東方巨姓。我朝有諱策文。牧使。生諱敬。見其伯氏諱儉敬。以不屈謫寶城。公亦與之南下。三傳至諱比長文科重試官弘文提學吏曹參議。燕山朝退休扶安。號詠歸堂。世有隱德。高祖諱遇節。贈戶曹參議。曾祖諱逸。贈工曹參判。祖諱始䧺。同中樞。考諱興新。副護軍。妣濟州梁氏孝永女。系妣大邱徐氏文綱女。溫仁柔嘉。婦德甚備。以英宗戊寅十月十四日生。公才性穎悟。自能解語。一有所聞。輒不忘。就學授課。記誦甚敏。一日往宗家。見廟貌不完。祭儀未備。歸告大人。請爲之修繕廟宇。周恤宗家。大人心奇之。語人曰。有兒如此。家戶有望矣。遂開塾延師。貯四子六經及百家書以資講學。朝夕戒勅。俾無放闕。大人遘疾臨終。顧謂公曰。門戶之計。只在讀書。我死之後。汝若一心向學。終始無替。則我之目。可以瞑矣。言訖而終。公哀痛罔極。屢絶而甦。送終之節。執喪之儀。一遵禮制。念大人臨沒之託。益加刻勵。暫不暇逸。文瀾藹蔚。聲華藉甚。純廟甲戌中司馬。及其榮歸也。親戚知舊。無不歡迎稱慶。公無喜色曰。風樹餘生。猥參科名。而歸家入門。獻悅無所。追念情景。只切悲愴而已。與其弟友愛甚篤。夜則連枕。書則連床。怡怡湛樂。財産什物。有無共之。丙戌四月四日卒。葬仁良洞左谷寺洞子坐原。齊光山金氏昌瑞女。五男四女。男啓斗夢斗弼斗采斗寅斗。女適南原尹必昶耽津崔柱孝耽津崔弘奎光山金某孫處護處震處八處修長房出。處祥處茂處宗二房出。處權處英三房出。處範四房出。處宗系五房。玄孫永烈以其大入郡守公所撰家狀。使其三從弟永謨。請余文爲傳家不朽計。辭不獲。謹据狀爲之說如是云爾。 훈벌(勳閥) 국가에 공훈(功勳)이 있는 문벌(門閥)을 말한다. 영귀(榮歸) 과거에 급제한 후 근친(覲親)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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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처사 정공 유사장 松坡處士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순영(淳榮), 자는 현여(顯汝), 호는 송파(松坡)이다. 정씨는 하동(河東)을 관향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평장사(平章事) 휘 도정(道正)이 처음으로 보첩(譜牒)에 오른 선조가 된다.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휘 익(翊)은 중현 대부(重顯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휘 인귀(仁貴)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휘 여해(汝諧)는 호가 돈재(遯齋)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겨 학행(學行)으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모두 중계(中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지평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니 문행(文行)이 세상에 드러났고, 참봉의 현손 문상(文翔)은 호가 화은(華隱)으로 병자년의 난에 의병을 창도하였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명윤(命潤)은 호가 잠곡(潛谷)이고, 증조 휘 구원(矩元)은 호가 농암(聾巖)이며, 조부 휘 재칠(在七)은 호가 죽와(竹窩)이고, 부친의 휘는 국현(國鉉)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으니, 순조 신묘년(1831) 8월 12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살이 쪘으며, 풍모는 장중(莊重)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웃지 않았다. 정성(定省)128)과 감취(甘毳 맛있고 연한 음식)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삼갔으며, 성품이 독서하는 데 부지런하여 날마다 과정(課程)이 있었고, 많은 서적과 경서를 교대로 섭렵하였으며, 문사(文詞)의 각 체는 지은 글이 넉넉하고 시원스러워서 한 시대의 거벽(巨擘 대가(大家))들이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만 운명에 막혀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공론이 원통하게 여겼지만, 공은 편안히 처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다. 만희재(晩羲齋)129)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130) 박영주(朴永柱) 공은 모두 고을의 덕망이 높은 선비이니, 공이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계속해서 학문을 익히고 닦았다. 늘그막에 선거(選擧)의 폐단을 보아 마침내 관리가 되려는 뜻을 끊고, 한결같이 요약(要約)함으로 돌아와 근원(根源)을 궁구할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이에 《중용》·《대학》·《논어》·《맹자》 등의 책을 가지고 밤낮으로 이치를 연구하고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날에 보았던 것은 매독환주(買櫝還珠)131)일 뿐만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늙으면 지혜로워지지만, 모(耄)132)가 뒤따른다.133)'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장흥(長興)의 어곡리(漁谷里)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산이 깊고 마을이 후미져서 세속의 경계가 요원하고, 마을의 뛰어난 선비 몇 사람만이 문정(門庭) 사이에서 글을 읽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여 빛을 감추었으니, 은은하게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 것134)과 같았다. '송파(松坡)'라고 자호(自號)하고 시를 지어 뜻을 보였으니, "추워진 뒤에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보았으니[特立坡松寒後見], 애오라지 만년의 절조를 지키면서 서로 같아지고자 한다.[聊持晩節願相如]"라고 하였다. 정미년(1907) 2월 18일에 졸(卒)하여 부등(釜嶝) 정좌(丁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낭주 최씨(朗州崔氏)는 최한신(崔漢信)의 따님으로 6남을 두었으니, 우채(瑀采)·봉채(琫采)·학채(䳽采)·필채(弼采)·발채(發采)·기채(琪采)이다. 손자는 찬협(燦協)·찬주(燦宙)·찬일(燦佾)·찬홍(燦弘)·찬회(燦懷)·찬의(燦宜)·찬명(燦明)·찬직(燦直)·찬석(燦錫)이다. 아, 공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배이다. 내가 상숙(庠塾)135)에서 연회(宴會)하는 자리와 사우(士友)들이 글을 짓고 술 마시는 장소에서 인연으로 종유(從遊)하여 감화를 받았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헤어지고 가난과 질병으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어곡리 산중으로 찾아가 그가 덕을 진전시킨 공(功)을 보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영원히 세상을 떠난지라 따라가려 해도 오직 미치지 못하니 매우 통한스러울 뿐이다. 정찬협이 한창 부모상 중에 있으면서 가장(家狀)을 들고 찾아와 불후(不朽)의 글을 청했을 때,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진실로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가장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눈물이 줄줄 흘러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淳榮。字顯汝。號松坡。鄭氏本河東人。平章事諱道正。爲登譜之祖。諱芝衍。贊成事諡文忠公。諱翊重。顯大夫贈兵曹判書。諱仁貴戶曹參判。諱汝諧。號遯齋。師事佔畢齋金先生。以學行除司憲府持平。皆中系顯祖也。持平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文行著世。參奉玄孫文翔。號華隱。丙子亂倡義旅。生諱殷河。號六松。孝旌閭。於公爲七世也。高祖諱命潤。號潛谷。曾祖諱矩元。號聾巖。祖諱在七。號竹窩。考諱國鉉。世有隱德。妣淸道金氏某女。壼範純備。純廟辛卯八月十二日。生公于綾之車洞里。公面圓體厚。風儀莊重。自幼不好戱美。不妄言笑。定省甘毳。必誠必謹。性勤讀書。日有課程。群書群經。輪流涉獵。文詞各體。栽述贍暢。一時巨擘。無不推先。但厄於命。未得有遇於時。物論稱屈。而處之恬然。未見有不平之意。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皆鄕裏宿德也。公隨時省候。講磨不輟。晩年見選擧之敝遂絶意干進。一以反約窮源爲究竟計。將庸學論孟等書。日夜硏理。乃歎曰。前日之見。不帝爲買櫝而還珠也。古人所謂將知而耄至者。非此之謂耶。寓居長興之漁谷里。山深洞僻。俗境遙遠。惟有村秀才子多少人。尋行數墨於門庭之間。閉戶塞竇。潛光鏟輝。誾然如尙絅之錦。自號松坡。賦詩以見志。有曰。特立坡松寒後見。聊持晩節願相如。丁未二月十八日卒。葬釜嶝丁坐原。配朗州崔氏漢信女。擧六男。瑀采琫采䳽采弼采發采琪采。孫燦協燦宙燦佾燦弘燦懷燦宜燦明燦直燦鍚。嗚呼。公吾鄕先進也。余於庠塾樽俎之地。士友文酒之場。得以夤緣遊從。有所薰染。曉暮分離。貧病苟活。未能一造漁谷山中得觀其進德之功。而公已千古矣。追惟靡逮。只切痛恨。燦協方在重哀之中。以家狀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知不敢承膺。而撫狀釀涕。有不忍終辭云。 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면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매독환주(買櫝還珠) 상자만 사고 구슬을 돌려준다는 뜻으로,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천히 여기고, 천하게 여겨야 할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春秋) 시대 정(鄭) 나라 사람이 초(楚) 나라 사람에게서 궤[櫝]를 살 때, 그 궤에 장식된 좋은 구슬들은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궤만 차지했던 고사에서 나왔다. 《韓非子 外儲說》 모(耄) 80세 노인이 늙으면 정신이 혼미하여 노망이 든다는 말이다. 늙으면……뒤따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 원년(昭公元年)〉에 나온다. 은은하게……것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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覽菊思古人 遠思牛醫兒。近憶尨村老。出處雖不同。天機中自保。常思陶靖節。搴菊悵無酒。苟食非吾心。一朝棄五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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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陽日與輪巖【宋璟玉】摘菊盈酒 黃花能保節。白髮獨違時。書劍平生志。人知物不知。尊迴龍峀節。客到沛溪時。東籬千古露。黃滿我盃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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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승환】에게 답함 答洪士拯【承渙】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단지 공부하는 과정에서의 득실을 예전처럼 면려하여주셨고, 부모와 어른을 섬기는 도로 책망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전에 서로 경계하여주던 뜻을 생각해보면, 과연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실질에 힘쓰자는 뜻을 더욱 우러러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문과 효제(孝弟)는 본디 두 가지의 일이 아니니 존심(存心)은 효제(孝弟)를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며, 치지(致知)는 효제의 이치를 이해야 하기 때문이고, 역행(力行)은 효제의 실질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하(子夏)가 이른바,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자신에게 있는 것부터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100)는 뜻과 같습니다. 어찌 노새를 타고 있으면서 노새를 찾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마음 속이 어지러우면 이치를 끝까지 따지지 못하여, 정심(正心)이 격치(格致)의 앞에 있다는 것도 의심하기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그 이전에 거경(居敬)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때는 먼저 《소학(小學)》 가운데에서 함양하고 수렴하여 잡스럽고 어지러운 마음을 제거한 이후에, 《대학(大學)》에 나아가 이 세상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이를 일컫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앞의 편지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권하였던 것은 또한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주경(主敬)이 아니라면 치지(致知)를 할 수가 없으며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이 아니라면 마음과 몸 역시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대학(大學)》의 차례이니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에 혼정신성(昏定晨省)101)하지 않고 돌아가시면 밤낮으로 곡하는 자는 비록 거짓된 것 같으나 돌아가시기 전에도 실수하고 돌아가신 뒤에 끝내 헤매는 것은 불가합니다. 示喩只以功程得失。從前勉勵。而未聞以事親事長之道。責之。追念前日相規之意。果有是矣。其內省務實之意。尤可仰認。然學問孝弟。本非兩件物事。存心所以爲孝弟之地也。致知所以解孝弟之理也。力行所以踐孝弟之實也。如子夏所謂博學篤志。切問近思。仁在其中之意也。何其騎驢覓驢乃爾耶。又云。胸次撓亂。不能窮理。而至疑正心之不在格致之先。此則從前無居敬之功故也。古人敎人先有以卽夫小學之中。涵養收斂。以去夫雜亂之心而後。卽夫大學。以窮其天下事物之理者。非謂是耶。愚於前書。勸之以靜坐者。亦此意也。非主敬。不能致知。非知至意誠。則心體亦不可得以正。此大學之序。不可誣矣。生不定省。而死爲朝夕哭者。雖似矯僞。然不可以失於前。而又終迷於後也。 학문을 …… 그 가운데 있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오는 말이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는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보살핀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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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한 통의 편지에 위로와 감동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이어 어버이께서 병환이 들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래 묵은 증세인지요? 아니면 별도로 생긴 병환인지요? 성효(誠孝)가 지극하니 신명(神明)이 도우셔서 병환이 낫는 경사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에 시탕(侍湯)하는 여가에 예전에 배우 학업을 다시 익히기를 바라니, 아마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을 듯합니다. 형제(兄弟)와 숙질(叔侄)이 책상을 마주하여 강습하는 즐거움104)은 어떠한지요? 보내온 편지에서는, "끊어지기는 쉬우나 잇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근심하는 예증(例證)입니다.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여러 선생님도 오히려, "한 달에 한 번 인(仁)에 이르렀다."105)고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마땅히 이것에 대하여 용맹하게 정채(精彩)를 발하도록 노력하여 이어질 때는 많게 하고 끊어질 때는 적게 하되, 많은 것은 더욱 많아지게 하고 적은 것은 더욱 적어지게 하여 타성일편(打成一片)106)한다면 안자(顔子)가 석 달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은 경지에도 거의 가까워질 것이니 어떠하겠습니까? 의림(義林)은 깨진 항아리와 같아 쌓이기가 어렵고 찢어진 북처럼 울리지 않으나 다만 묵묵하게 세월을 보내며 갑작스레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이러한 정경(情景)을 생각하면 어찌 슬프고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우리 벗이 전철로 삼을 경계가 여기에 있으니, 오직 제때에 미쳐 힘쓰고 힘쓰기를 바랍니다. 앞서 선생님의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107)이 다음 달로 정해졌는데 이미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집을 판각하는 일은 영남에서부터 통문(通文)을 보낸 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장성(長城)의 회소(會所)에서 다시 통문이 이어져서 여러 읍에 돌았고 저희 고향에는 두 차례 글이 도착하였기에 일찍 귀하에게 전하려고 하다가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중용(中庸)》의 「귀신장(鬼神章)」에서 '사(使)'라는 글자는108) 바로 귀신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理)의 묘처(妙處)입니다. 게으름은 마음을 두지 않아 생겨나는 병통이고, 어지러움은 마음을 두어 생겨나는 병통이니 이 말이 아마 마땅할 것입니다. 물러난 뒤에 자주 돌아보는 것은 두루 성찰한다는 뜻이고, 손님이 물러갈 때 뒤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손님의 예(禮)로써 예의에 맞는 태도【容儀】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一書何等慰感。仍審堂候違和。此是宿證耶。抑別有所愼耶。誠孝之至。神明扶佑。而天和之慶。必有其日。以是祈祝侍湯之餘。溫理一着。想不歇后。兄弟叔侄。聯床麗澤。其樂何如。來諭易間斷而難接續。此是通患例證。在孔門諸子。猶云日月至焉。況吾輩乎。只當於此。猛着精彩。使接續時多。間斷時少。至於多之又多。少之又少。而打成一片焉。則顔子之不違。庶乎幾矣。如何如何。義林敝甕難儲。敗鼓不響只得隱忍捱過。以俟溘然而已。撫念情景。寧不悲歎。吾友前車之戒。有在於此。惟及時勉勉。先先生易名之典。定在來月。想已聞之耶。文集鋟板事。自嶺中發通。已有月矣。其後長城會所。又有繼通。輪於列邑。而吾鄕所到二度文。早欲傳去貴中。姑未之耳。鬼神章使字。是鬼神使之。此便是理之妙處。昏惰爲無心之病。紛撓爲有心之病。此說恐當。退時頻顧。是周旋省察之意也。賓退不顧。是賓禮容儀之則也。 강습하는 즐거움 원문은 '이택(麗澤)'으로,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주는 것을 뜻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고 하였다. 한 달에 한번 인에 이르렀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안회(顔回)는 그 마음가짐이 석 달 동안 인(仁)의 도리를 어기지 않는다. 그 밖의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쯤 인의 경지에 이를 뿐이다.【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라는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불교(佛敎)의 용어로, 피아(彼我), 주객(主客), 선악(善惡), 호오(好惡) 등 모든 상대적 대립 관념을 타파하여 차별이 없는 평등의 세계로 조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 원문은 '역명지전(易名之典)'으로, 시호(諡號)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시호는 정2품 이상을 지낸 인물의 사후(死後)에 생존 시의 행적을 바탕으로 하여 국왕으로부터 받게 된다. 사(使)란 글자는 《중용장구》 제16장으로, '사(使)'라는 글자는 다음 문장에 나온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여 깨끗이 하고 성대하게 차려 입게 하여 제사(祭祀)를 받들게 한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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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성【기경】에게 답함 答金子惺【箕敬】 전일에 그대 아버님께서 찾아와서 감사하는 마음이 무척 큽니다. 돌아가는 길은 평안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편지지에 가득한 긴 이야기는 간절한 질문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떠한 감격이 이와 같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서 "사사로움을 따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뜻을 세우지 못한 병통입니다. 진실로, "순(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90)와 같이 비상한 큰 뜻을 세워서 분발하고 격려하여, 천 명이나 만 명의 장부도 꺾을 수 없는 뜻을 둔다면 구구한 외부의 유혹에도 자연스레 얽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경(居敬)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마음에 안정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혹 그렇지 않다면 외부의 유혹이 있을 때, 한갓 구구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동쪽에서 없어지면 서쪽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날마다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어떠합니까? 나머지는 별지(別紙)에 있습니다.독서할 때에는 먼저 옷깃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상제(上帝)를 대하듯 해야 하니, 그렇게 하면 심지(心地)가 자연스럽게 전일(專一)하게 됩니다. 만약 몸이 흔들리거나 기울어져서 어지러워져서 검속하지 못하다면 그 마음이 전일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혼매(昏昧)하면 반드시 광명(光明)이 필요하고, 나태하고 게으르면 반드시 엄숙함과 공손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광명과 엄숙함과 공손함은 다만 천리(天理)에서 화합하여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뜻을 둠이 있겠습니까? 겨우 뜻을 둔다면 문득 두서가 여러 갈래로 되어 번잡함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보내준 편지에서, "대단히 힘을 쏟는다."고 한 것이니 아마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대저 함양(涵養)이라는 것은 범범하게 붙잡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익숙하게 되고, 힘써 행하고 실천함으로써 길러내야 합니다. 안팎으로 서로 도와주니 그 덕이 있어 외롭지 않을 것이고, 그 근본이 자연스럽게 순수하고 단단해질 것입니다.유능하면서 무능한 자에게 물어보는 것은 안자(顏子)가 큰 뜻을 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의리(義理)가 무궁하다는 것만을 알고 물아(物我)의 간격이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았을 따름입니다.무릇 엄숙(嚴肅)한 것은 예(禮)이며, 화평(和平)한 것은 악(樂)입니다. 이것들은 잠깐이라도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니, 예(禮)를 통해 원칙을 세우고. 악(樂)을 통해 덕성을 완성하는 것91)에 이르러서는 사물에서 드러난 절문(節文)과 도수(度數)를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고, 남이 한 번 하면 본인은 백번 하는 것은 근면한 뜻입니다. 성인(聖人)은 원하면서도 욕심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向日春府丈枉顧。感戢良多。未審返旆安寧。馳溯無任。滿幅縷縷。無非切問。何感如之。示諭循私云云。此皆志不立之病。苟能立得舜何我何非常大志。奮迅激勵。有千萬夫不可回撓底意。則區區外誘。自然惹絆不得。而所謂居敬。所謂亦行。亦有所頓放處矣。苟或不然。而徒爾規規於外誘之除。則所謂滅東生西。日亦不足矣。如何。餘在別幅。讀書時。先須正襟肅容。如對上帝。則心地自然專一。若身體搖動攲斜。漫不檢束。而求其心之一。不可得矣。昏昧則須要光明。怠慢則須要肅恭。然光明肅恭。只是天理合下如此。何着意之有。纔着意。便是三頭兩緖。不勝其擾擾矣。來喩所謂大段着力者。恐不得。大抵涵養。不是凡然把捉之謂。須是讀書窮理以浸灌之。力行實踐以培養之。內外交資。其德不孤。而本源自然純固矣。以能問於不能。可見顔子衿懷大處。惟知義理之無窮。不見物我之有間。故如此耳。凡嚴肅抵是禮。和平底是樂。此不可斯須去身者也。至若立於禮成於樂。兼指節文度數著於事物者而言之。欲上人。是驕矜之心。人一己百。是勤勵之意。聖人所謂欲而不貪也。 순 임금은 …… 어떤 사람인가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안연(顔淵)은,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 임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또한 순 임금과 같이 될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하였다. 예를 통해 …… 완성하는 것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시를 통해서 마음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서 원칙을 세우고, 음악을 통해서 덕성을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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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성에게 답함 答金子惺 지난 편지는 인편이 없어 답하지 못하였는데, 뜻밖에 또다시 보내준 안부 편지를 받았으니 받은 감동을 말로 다 하기 어렵습니다. 삼동(三冬)이라 공부하여 얻은 것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 실마리를 물어볼 길이 없으니 이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대저 그대는 타고난 자품(資品)을 확실하여 재능과 품성을 깨달음이 종종 서로 넘어서서 매번 진보함이 있고 물러남이 없었으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문인 중에서 젊은 한 무리의 사람들로 뜻을 부칠 수 있는 이는 일찍이 이 사람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절도(節度)에 있어 친절하고 용이하게 해야 할 지점에서 만약 조금이라도 다잡지 않고 범범하게 한다면 일을 해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이 외에 묘한 해답을 별도로 구한다면 또한 아득할 뿐이고 의거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또한 마땅히 일상생활 속에서 하학(下學)의 공부를 지극히 하고 독서하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정을 세세하게 세워서 번거로움을 이겨내며 착실하게 하되 빠르게 이해하기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보존하고 지키면서 때와 장소에 따라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을 것이니 가까운 공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계속 축적하여 3~5년 동안 공부한다면 자연스럽게 심의(心意)가 점점 순조로워지고 근본이 대략 서게 되어 근거할 만한 곳이 있게 될 것이다. "92)라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일찍이 이러한 말을 보셨는지요? 이는 초학자에게 있어서 실로 통행할 법칙이라 할 수 있으니 지금 그대를 위한 모의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으로 보이니 어떠한지요? 자그마한 견해로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오직 독실하게 담당하고 중간에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야만 도(道)에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의림(義林)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일전에 과연 손자 하나를 얻었는데, 일찍이 만년에 조금은 마음 붙일 만한 곳을 얻었으니 큰 위로가 됩니다.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다만 지극히 없으면서 지극히 있는 것이고, 지극히 비어있으면서 지극히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어찌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 경계로 말한다면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천주(天主)가 물(物)을 나게 하고, 지주(地主)는 물(物)을 완성시키며, 인주(人主)는 물(物)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음양(陰陽)과 강유(剛柔)와 인의(仁義)의 구별이 있게 됩니다.보통 사람의 마음은 어둡지 않으면 혼란스럽고, 대략 사물을 접하지 않으면 미발(未發)한다고 개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연히 순후(淳厚)한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물(萬物)이 아직 생성되지 않았을 때 한 줄기 양(陽)의 첫 움직임을 가장 볼 만한 단서(端緖)는 이 밖에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니 생물지심(生物之心)93)이 아닙니다.【질문】아직 응하지 못함과 이미 응한 것을 선후(先後)로 보지 않고 체용(體用)으로 보는 것은 어떠한지요?【대답】아직 응하지 못함과 이미 응한 것은 진실로 하나는 체(體)이고 하나는 용(用)입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체와 용은 근원이 하나라는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질문】기발(旣發)은 정(情)이라고 이를 만합니다.【대답】기발(旣發)한 것은 정(情)인데 또한 심(心)이라 이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성(性)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발(未發)한 것은 성(性)인데 또한 심(心)이라 이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정(情)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총괄하기 때문입니다.【질문】횡거(橫渠) 선생이 말하기를, "떠돌아다니는 기운이 어지러이 뒤섞이며 합쳐져 형질(形質)을 이루는데, 이것이 만 가지로 다른 인과 물을 생성되게 한다."94)라고 하였습니다. 천지 사이에는 음양(陰陽)의 기(氣)가 아님이 없으니 떠돌아다니는 기운은 어떤 기입니까?【대답】봄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더우며, 가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 추운 것이 바로 음양(陰陽)의 양단(兩端)이며, 천지(天地)의 원기(元氣)입니다. 온갖 만물이 계속하여 생겨나니 이것이 천지의 떠돌아다니는 기운입니다.【질문】'정성(定性)'은 《대학(大學)》에서, "그칠 곳을 안 뒤에 정한다."라고 하였으니 '정(定)'이라는 글자는 어떠한 것입니까?【대답】《대학(大學)》에서의 '정(定)'이란 지(知)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정성(定性)'은 행(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그 얕고 깊음이 같지 않습니다.【질문】대인(大人)은 비록 말에 신용이 없고 행동이 과감하지 않더라도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말의 신용과 행동의 과감성을 얻지 않겠습니까?【대답】의(義)를 위주로 삼는다면 말의 신용과 행동의 과감성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질문】적자(赤子)의 마음은 미발(未發)하여도 진실로 맞아떨어지는 것입니까?【대답】적자(赤子)의 마음은 순일(純一)함과 무위(無僞)함을 취할 뿐이니 맞아 떨어지는 것의 여부는 진실로 논하기에 부족합니다.【질문】"천하에서 성(性)이라고 말하는 것은 발현된 현상을 유추한 것일 뿐이다."95) 발현된 현상이란 이미 그렇게 된 자취이니, 어찌 기(氣)가 아니라고 이르겠습니까?【대답】물(物)은 이(理)가 운행하는 손이나 다리와 같습니다. 물(物)이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이(理)가 그렇게 된 이유와 같으니 어진 이의 뜻을 살펴보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뜻이 있는 듯하다면 당시 선비들의 구기(口氣)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질문】공자(孔子)께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린다.……"96)라고 하셨습니다.【대답】구하는 것과 잡는 것은 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하여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시절이니 공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向書無便未復。謂外復承委存。感感難喩。三冬所得。想必不少。而無由叩其緖餘。是所紆鬱。大抵左右天姿確實。才性開悟。種種相過。每見其有進而無退。私竊喜幸。以爲吾黨少年一隊人。可以寄意者。未嘗非此人也。然其日用節度親切近易處。如或有小小悠泛。則足以害事。若外此而別求妙解。則又浩浩茫茫。無依據矣。朱子與人書曰。且當就日用間。致其下學之工。讀書窮理。則小立課程。耐煩着實。而勿求速解。操存持守則隨時隨處。收斂省覺而無計近功。如是積累。做得三五年功夫。自然心意漸馴。根本粗立。而有可據之地。未知曾見此語否。此在初學。實爲通行之典。而今爲左右謀。亦恐無過於此矣。如何。小小見解。不濟事。惟篤實擔當。無所間斷者。可與適道也。義林勞劣。姑遣。日前果得一孫。未嘗不是晩景一副寄懷處。慰慰。無極而太極。只至無而至有。至虛而至實之義。豈有太極陰陽互爲表裏之理。若言其界至。則說形而上下可矣。天主生物。地主成物。人主應物。故有陰陽剛柔仁義之別。常人之心。不昏則亂。不可槪以不接物爲未發也。然亦不無偶然回淳底時節。萬物未生。一陽初動。最是可見之端。非謂此外。非生物之心也。未應已應。不是先後看。而以體用看。如何。未應已應。固是一體一用。然須知體用一源之義。旣發則可謂之情云云。旣發情也。而亦可謂之心。但不可謂之性未發性也而亦可謂之心。但不可謂之情。心統性情故也。橫渠先生曰。遊氣紛擾。合而成質。生人物之萬殊。蓋天地之間。莫非陰陽之氣。而遊氣者。是何氣也。春溫夏熱秋涼冬寒。是陰陽兩端。天地之元氣也。品物庶類。化化生生。天地之遊氣也。定性。與大學知止后有定定字。如何。大學之定。是知上說。定性之定。是行上說。淺深不同。大人雖不信果。而在學者。豈不由於信果。所主者義。則信果在其中。赤子之心。其未發則固是中也。赤子之心。取其純一無僞而已。中不中固不足論。天下言性也。則故而已矣。故是已然之跡。則豈非氣乎云云。物是理之運行乎脚也。物之所已然。是理之所已然。觀賢意。似有牽强底意。不免於時儒口氣。孔子曰。操則存。捨則亡云云。求與操。是儼然肅然。不二不三時節。功夫要處。正在於此。 또한 마땅히 …… 있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근사록(近思錄)》 25장 〈교학(敎學)〉에 나오는데, 주자가 손인보(孫仁甫)에게 답한 편지를 인용한 것이다. 생물지심(生物之心) 만물을 낳아 기르는 마음을 가리킨다. 떠돌아다니는 …… 생성되게 한다 《정몽(正蒙)》 〈태화(太和)〉에 나오는 구절이다. 《근사록(近思錄)》 〈도체(道體)〉에도 소개되어 있다. 천하에서 …… 것일 뿐이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구절이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린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구절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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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남과 내 집에서 수계할 때 김정재 종락 가 마침 이르렀다. 밤이 깊도록 몹시 즐기다가 정재가 비로소 돌아가다 與吳斗南修契弊廬, 金貞齋【宗洛】適到, 歡甚夜久, 貞齋始歸 적적하게 송장처럼 지내 이승이 아닌데 尸居寂寂界非陽고상한 자취가 찾아주어 새벽빛 얻었네 高躅來臨得曙光누가 사문 일으켜 실추된 단서를 전할까 誰起斯文傳墜緖세상 병폐에 좋은 방도 처치하기 어렵네 難將世瘼處良方마음은 늙어서도 서로 더욱 친밀하지만 寸心到老交加密가까운 곳에 약속하기도 형세가 방해하네 尺地留期亦勢妨이제부터 산중의 고사를 남기고 從此山中遺故事달 기우는 매화 길에 바삐 돌아가네 月殘梅徑去歸忙위 시는 정재에게 준 것이다.두남이 봄볕에 유람하러 나와서 斗南遊屐適春陽고맙게도 내 집이 자색 빛을 입었네 感我茅廬被紫光신중하며239) 북학240) 못함을 깊이 한탄하고 木谷深歎無北學진령에서 그리움 간절해 서방을 바라보네241) 榛苓思切望西方눈앞의 풍물은 한결같이 얼마나 좋은가 眼前風物一何好술 마신 뒤의 애환은 둘 다 무방하다네 酒後悲歡兩不妨오늘의 진솔한 모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知否今日眞率會벌써 삼기242)가 지났으니 세월이 바쁘네 已經三紀歲華忙위 시는 두남에게 준 것이다. 尸居寂寂界非陽, 高躅來臨得曙光.誰起斯文傳墜緖? 難將世瘼處良方.寸心到老交加密, 尺地留期亦勢妨.從此山中遺故事, 月殘梅徑去歸忙.【右贈貞齋】斗南遊屐適春陽, 感我茅廬被紫光.木谷深歎無北學, 榛苓思切望西方.眼前風物一何好? 酒後悲歡兩不妨.知否今日眞率會? 已經三紀歲華忙.【右贈斗南】 신중하며 원문의 '목곡(木谷)'인데, 높은 나무나 깊은 골짜기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처럼 실수가 없도록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완(小宛)〉에 "우리는 온유하고 공손해야 한다, 나무 위에 아슬아슬 앉아 있는 것처럼. 우리는 무서워하며 조심해야 한다,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전전긍긍해야 한다, 얇은 얼음을 밟고 있는 것처럼.〔溫溫恭人, 如集于木; 惴惴小心, 如臨于谷; 戰戰兢兢, 如履薄氷.〕"라고 하였다. 북학(北學) 중국에서 배운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의 "진량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주공과 중니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으로 중국에 와서 학문을 배웠다.〔陳良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진령(榛苓)의……바라보네 전성기를 구가한 훌륭한 임금을 사모하여 서울 쪽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시경》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서방의 미인은 서주(西周)의 훌륭한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현자(賢者)가 나쁜 세상의 하국(下國)에서 태어나 주나라가 성할 때의 훌륭한 왕을 그리워하여 지은 것이다." 하였다. 삼기(三紀) 36년이다. 고대에는 목성의 태양 공전 주기인 12년을 기준으로 시간을 이해하였는데, 이 12년이 1기(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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