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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정211)을 지나며 過迎狂亭 마음의 병은 광이 되어서이니 心病是爲狂뜻이 큰 것도 광이라고 하네 志大亦云狂세상엔 실로 마음의 광이 많고 世固多心狂뜻의 광이 있는 건 보기 드무네 罕見有志狂또한 마음과 뜻의 광이 아니라 更非心志狂일종은 거짓으로 광이 되었으니 一種佯作狂전에는 기자의 광212)이 있었고 前有箕子狂나중에는 매월당의 광213)이 있었네 後有梅月狂상전벽해에는 풍조가 광이니 桑海風潮狂기자와 매월당의 광을 흠모해야 하리 應慕箕梅狂나 또한 광과 똑같으니 我亦一同狂정자 안의 광에 끼고 싶네 願參亭中狂 心病是爲狂, 志大亦云狂.世固多心狂, 罕見有志狂.更非心志狂, 一種佯作狂.前有箕子狂, 後有梅月狂.桑海風潮狂, 應慕箕梅狂.我亦一同狂, 願參亭中狂. 영광정(迎狂亭)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순창지방에 살고 있던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이 뜻을 같이 하는 7명의 동지들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구하고 일본에 반대하는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21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세운 정자이다. 이들 8명은 고의적으로 광인(狂人) 행세를 하면서 은밀하게 항일 투쟁을 하였다. 기자(箕子)의 광(狂) 기자는 은(殷)나라 군주인 문정(文丁)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의 폭정에 대해 간언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하여 유폐되었다. 매월당(梅月堂)의 광(狂) 매월당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그는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는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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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초하루에 여중이 찾아와 함께 시를 짓다 3수 七月一日汝重來訪共賦【三首】 이른 가을과 함께 객이 산골 집에 이르니 客到山牕伴早秋물이 동으로 흐르듯 지난 자취를 회상해보네 回思陳跡水東流정토사의 샘물과 암석은 항상 얻기 어려웠고 淨菴泉石難恒得소노71)의 두건과 지팡이를 만류하지 못했지 蘇老巾筇未可留학업은 예로부터 중도에 끊어지기 쉬우니 學業從來易間斷손님 접대를 삼가여 한가롭게 놀지 말게나 逢迎愼莫作優遊응당 돌아가 은거하며 하늘과 다투어 서면 直須孤往爭天立하나의 즐거움 끝내 온갖 시름에서 보게 되리 一樂終看在萬憂《춘추》를 읽을 곳마저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誰言無地讀春秋그래도 내 마음을 다잡아 홀로 휩쓸리지 않았네 也把吾心獨不流정련한 금과 같은 의리 머지않아 드러나겠지만 義理金精無日見물처럼 달려가는 세월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光陰水走幾時留원사는 정녕 술지게미와 쌀겨 먹어도 배불렀고72) 原思定可糟糠飽대순은 오히려 사슴이며 멧돼지와 논 적 있었네73) 大舜猶曾鹿豕遊산 북쪽 바다 동쪽에는 다행히 이웃이 있으니 山北滄東隣有幸서로 헤어져 사느라 오래 걱정 끼쳤다 말게 莫爲離索久貽憂그대와 서로 알고 지낸 지 몇 해이던가 與君相識幾春秋그 자태는 과격하지도 휩쓸리지도 않았지 不激其姿亦不流처신할 땐 법도를 따라 확립하려 하였고 行己欲從規矩立마음 다스릴 땐 사사로움 남을까 걱정했네 治心應恐妄私留만년에 구산74) 문하의 선비가 되어 晩參臼老門中士홀로 오랑캐 세상을 벗어나 노닐었네 獨出蠻夷世外遊바라노니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75) 更願竿頭加進步우리의 도를 전승시킬 책임을 떠맡게나 身任吾道失傳憂 客到山牕伴早秋, 回思陳跡水東流.淨菴泉石難恒得, 蘇老巾筇未可留.學業從來易間斷, 逢迎愼莫作優遊.直須孤往爭天立, 一樂終看在萬憂.誰言無地讀《春秋》? 也把吾心獨不流.義理金精無日見, 光陰水走幾時留?原思定可糟糠飽, 大舜猶曾鹿氶遊.山北滄東隣有幸, 莫爲離索久貽憂.與君相識幾春秋? 不激其姿亦不流.行己欲從規矩立, 治心應恐妄私留.晩參臼老門中士, 獨出蠻夷世外遊.更願竿頭加進步, 身任吾道失傳憂. 소노(蘇老) 소학규(蘇學奎, 1859~1948)를 가리킨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화지(化知), 호는 열재(說齋)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원사(原思)는……배불렀고 선비가 가난하게 살았으나 뜻이 굳고 학문을 좋아하여, 청고(淸高)하고 빈한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원사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원헌(原憲)으로, 사(思)는 그의 자이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토담집에 거적을 치고 깨진 독으로 구멍을 내서 바라지 문으로 삼았는데, 지붕이 새어 축축한 방에서 바르게 앉아 금슬(琴瑟)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대순(大舜)은……있었네 초야에 묻혀서 지내는 생활을 뜻한다. 대순은 순(舜)임금을 가리키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이 깊은 산속에 살 적에,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상종하였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野人)과 다를 바가 없었다.〔舜之居深山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라는 말이 나온다. 구산(臼山) 원문의 '구로(臼老)'는 구산의 노인이라는 말로, 간재 전우의 별호(別號)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내디뎌 이미 일정한 경지에 올라 있더라도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초현대사(招賢大師)의 게송(偈頌)에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시방세계의 이치가 이 몸에 온전해질 것이라네.〔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라고 하였다. 《書言故事 釋敎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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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 窮途 막다른 길에 생계야 견딜 수 있으나 窮途計活也能堪세상맛 달고 씀을 어찌 꼭 묻겠는가 世味何須問苦甘낙토로 돌아가 편히 살기는 어렵지만 難得爰居歸土樂어찌 탐천277) 마셔 급할 갈증 없애리 肯救急渴酌泉貪시운이 고르지 않으니 풍당278)은 늙었고 不齊時運馮唐老산하가 모습 바뀌니 은사279)는 부끄럽네 改色山河殷士慙저물 무렵 동풍이 부는 강가의 집에서 薄暮東風江上屋시름을 씻으려 그저 술잔을 머금는다오 滌愁只有酒杯含 窮途計活也能堪, 世味何須問苦甘.難得爰居歸土樂, 肯救急渴酌泉貪.不齊時運馮唐老, 改色山河殷士慙.薄暮東風江上屋, 滌愁只有酒杯含. 탐천(貪泉) 중국 광주(廣州)의 석문(石門)에 있는 샘물로, 이 물을 마시면 사람은 끊임없는 욕심을 품게 된다고 전한다. 《진서(晉書)》 〈오은지열전(吳隱之列傳)〉에 "지명은 석문인데 탐천이라는 물이 있어 마시는 자는 끊임없는 욕심을 품는다.[地名石門, 有水曰貪泉, 飲者懷無厭之欲.]"라고 하였다. 풍당(馮唐) 한(漢) 나라 때의 명신(名臣)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풍당(馮唐)이 늙은 나이로 중낭서장(中郞署長)을 거쳐 겨우 거기도위(車騎都尉)에 이르고 말았다. 무제(武帝) 때에 다시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으나, 이미 90여 세나 되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은사(殷士) 주(周) 나라에 망한 은(殷) 나라의 선비들을 말한다. 《시경》 〈문왕(文王)〉에 "은(殷)나라 선비 중에 아름답고 민첩한 자들이 주나라 서울에서 강신제를 돕는구나.[殷士膚敏, 祼將于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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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설날 회포를 쓰다 임신년(1932) 아래도 같다. 壬申元日 書懷【壬申下同】 마흔아홉 번째 설날을 맞았는데 四十九回逢日元거울 속엔 백발 점점 무성하네 鏡中漸覺鬢霜繁뜻이 우활하니 세상 사람의 눈에 버려졌고 志迂已棄時人眼거처는 궁벽지니 처사의 촌에 걸맞네 居僻還稱處士村자기를 성찰할 땐 작은 악도 다 없애는 걸 추구하고 省己要求纖惡盡미묘한 이치 연구는 바로 옛 글을 익히는 데 두어야지 硏微定在故書溫잘못을 알았다면 어찌 꼭 내년을 기다리랴 知非何必須明歲이런 뜻을 전현들에게 논해보려 한다네 欲向前修此意論 四十九回逢日元, 鏡中漸覺鬢霜繁.志迂已棄時人眼, 居僻還稱處士村.省已要求纖惡盡, 硏微定在故書溫.知非何必須明歲, 欲向前修此意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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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경 【회덕】에게 답함 答梁而敬【會德】 편지를 받고 답장을 못한 지 지금 두 달이나 되었네. 먼 곳에서 떠도느라 막혀서 인편을 찾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다 헤아려 줄 것이라 생각하네. 그대 부친께서 뜻밖에 방문해 주었으니, 지극히 위로 되고 감사한 마음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인하여 그대가 공부하는 것이 근래 《대학》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은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옳은 방법을 얻은 것인데, 다만 〈대학독법(大學讀法)〉을 먼저 읽었는지 모르겠네. 모름지기 이 독법을 한결같이 따라서 경문과 장구 및 《혹문(或問)》을 가지고 십 분의 공부를 착수하여 십 분의 도리를 투득(透得)하여 평생의 가계(家計)를 세우면 이로부터 기본이 될 것이네. 독서하면서 의심을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을 이경(而敬)이 일찍이 스스로 병통으로 여긴 것인데, 실로 그러하네. 그러나 〈대학독법(大學讀法)〉가운데 이른바 "어떠한 것이 명명덕(明明德)이며, 어떠한 것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가?"라고 한 것 같은 것은 정히 마땅히 의심해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한 곳을 타개하여 마음이 점점 익숙해지면 절로 칼을 대는 대로 잘려 나가는 것91)이 있을 것이네. 고인이 말하기를 "후생의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두려워 할 것이 없고, 오직 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92)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네. 의림(義林)은 나이가 들수록 지업은 실추되니, 슬퍼하고 후회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종유하는 입장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마땅히 나를 거울삼을 수 있을 것이네. 承書未復。今再閱月矣。旅滯迂遠。覓便不得。想爲之諒悉。春府丈料外枉過。慰感之至。如何可量。因聞盛課近在曾傳。此在發軔之初。甚爲得計。但未知先看讀法否。須一依此法。將正經章句及或問。下得十分功夫。透得十分道理。以立平生家計。自此而爲基本也。讀書而不會致疑。此而敬嘗自以爲病者。固然。然如讀法中所謂如何是明明德。如何是止至善。其非正當會疑處耶。一處透打。心路漸熟。則自有迎刃而解者矣。古人曰。後生才性過人。不足畏。惟讀書深思推究者。爲可畏。此槩可見也。義林年邁業墜。悲悔奚補。在遊從之地而年後於我者。宜可以監戒哉。 칼을……것 《진서(晉書)》 권34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대나무를 자를 때 몇 개의 마디만 지나가면 모두 칼을 대는 대로 잘려 나간다[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고인이……하였으니 《소학》권5〈가언(嘉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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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에게 답함 答安慶伯 노쇠하고 황폐하여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는 차에 벗들은 영락하여 흩어져, 온갖 감회가 생겨 고할 말이 없어, 들어와서는 지붕만 쳐다보고 나가서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어찌 우리 경백(慶伯)이 또한 한번 찾아와 이 괴로운 심정을 위로해 주지 않는가? 뜻밖에 편지를 받음에 족히 만나서 얼굴을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으니, 어떤 위로가 이만하겠는가? 인하여 어버이의 체후가 보중한 줄 알았으니, 더욱 마음에 부합하네. 혼례에 축하하지 않는 것77)은 옛날에 그런 말이 있고, 더구나 경백의 오늘 일은 어버이를 생각하는 감회가 생각건대 남들과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견디며 어떻게 부지하는가? 고맙게 초대해 주니, 비록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나의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다만 근래에 감기 때문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지가 오래 되었네. 그 때 괴로움의 가감(加減)을 헤아려 결정할 것이니, 비록 감히 잊지 않겠지만 또한 기필할 수 없네. 사당에 고하는 한 가지는 실로 폐해서는 불가하고 작은집 사당에도 또한 일례로 고해야 하네. 다만 축사는 사앙(士仰)78)이 마땅히 주관하고 속칭(屬稱)은 '사손(祀孫)'이라고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상세히 헤아리는 것이 가할 것이네.[문] 《근사록》 권1 도체류(道體類)에 "천지 사이에 정정당당하여 위아래로 곧은 바른 이치이니, 벗어나면 옳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출(出)'은 치우침을 말하는 것입니까?[답] '출'은 실로 치우침으로 말한 것이지만, 분명 이미 발한 뒤의 과불급(過不及)을 겸하여 말한 것이네.[문] 창섭(昌燮)은 '불천노불이과(不遷怒不貳過)'에서 먼저 '천노(遷怒)'를 말한 것은 대개 만약 노여움을 옮기면 이것 또한 허물이기 때문에 뒤에 '이과(貳過)'를 말하여 위로 '천노'를 포함하였다고 생각하는데, 황철원(黃澈源)79)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것도 한 가지 설이다. 사람의 정 가운데 발하기는 쉬우나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심하기 때문에 먼저 '천노'를 말하였으니, 《대학》정심장(正心章)에서 '분치(忿懥)'를 먼저 말한 것과 같다. 이것 또한 한 가지 설이다.[답] 창섭과 철원의 의론은 모두 의의가 있네. 그러나 또한 하나의 기(氣)가 있으니, '노(怒)' 자는 마음에서 말하였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고, '과(過)' 자는 일에서 말하였기 때문에 뒤에 말한 것이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맹자가 "지(知)의 실제는 이 두 가지를 알아서 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 가운데 원래 양단(兩端)이 합하니 이미 아는 것이 분명하고 또 지키는 것이 견고한데, 《근사록》권1에서 주돈이(周敦頤)는 도리어 "덕(德)은 애(愛)를 인(仁)이라 하고, 의(宜)를 의(義)라 하고, 이(理)를 예(禮)라 하고, 통(通)을 지(知)라 하고, 수(守)를 신(信)이라 한다."라고 하여 '지'에 단지 '통'을 말하고 별도로 '수'를 '신'에 말하여 각각 부합하지 않음이 있으니, 의심스럽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주돈이는 원두로부터 '성(誠)'을 말하고 '기(幾)'를 말하면서 다섯 가지 덕의 이름을 분별하였으니, 이것은 태극과 음양오행의 순서이고, 맹자는 다만 양심이 발현된 곳을 취하여 그 용공의 절도를 말하였으니, 뜻은 각각 있는 곳이 있고 말 또한 같지 않다. 또 상세히 말하자면, '지'는 이미 알아서 버리지 않기 때문에 능히 통하니, '통' 자 가운데 이미 '불거(不去)'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수를 신이라 한다고 한 것은 '수' 자는 실제로 있다는 뜻이니, '불거'와는 같지 않고 '수' 자 이면에 사덕(四德)을 포함하고 있다.[답] 본 것이 상세하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정자(程子)는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다.[鬼神造化之迹]"라고 하였고, 장재(張載)는 "두 기의 양능이다.[二氣之良能]"라고 하였는데, 정자는 기로 말하였고, 장재는 이로 말하였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양능을 곧장 가리켜 이(理)라 하는 것은 불가하니, 대개 양능 상에서 이를 볼 뿐이다. 양능은 이기가 자연히 유행하는 것이라, 안배의 뜻이 있지 않으니, 오로지 이로 보는 것은 불가한데, 더구나 확고하게 기로 간주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그러나 그 주가 되는 것은 이(理)이고 기(氣)는 이(理) 가운데의 일이니, 오로지 이로 보는 것이 오히려 확고하게 기로 보는 것보다 낫다.[답] 양능은 이(理)이네. 만약 양능을 곧장 가리켜 이라고 하지 못한다면 기가 도리어 주가 되고 이는 사용할 곳이 없을 것이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분치(忿懥)는 의(義)가 발한 것이고, 공구(恐懼)는 예(禮)가 발한 것이고, 호요(好樂)는 인(仁)이 발하는 것인데, 우환(憂患)은 무엇이 발한 것입니까?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우(憂)는 마음의 염려이고, 환(患)은 이 염려가 심한 것이니, 우와 환은 바로 지(知) 측면의 일이다.[답] 옳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근사록》권1에서 "맹자는 그 가운에 나아가 또 호연지기를 발휘해 내었다."고 하니, 흡사 기(氣)가 이(理) 가운데 섞여 있는 듯합니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기는 이 가운데의 일이니, 바로 이 이가 유행하고 운용하는 수단이다.[답] 실로 그러하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건도(乾道)는 남자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자를 이룬다."는 것은 사람과 사물을 겸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남녀는 보기 쉽고 사물의 남녀는 보기 어렵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무릇 한 사물이 있으면 문득 음양이 있으니, 비록 하나의 작은 먼지라도 등[背]과 상하가 있다. 선유가 이른바 "대나무에 자웅(雌雄)이 있고, 삼에 빈모(牝牡)가 있다."라고 하였으니,80) 또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남여' 두 글자는 본래 사람으로 인한 이름이지만 성인은 다만 사람과 사물을 겸하여 꿰뚫어 혐의로 여기지 않았다.[답] 옳네.[문] 창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사문(師門)의 답훈(答訓)에 "반드시 표리와 정추가 이르지 않음이 없어야 바야흐로 물리(物理)의 극처(極處)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사문의 뜻은 대개 반드시 표리와 정추의 사물이 이르지 않음이 없는 뒤에야 바야흐로 이치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라 여기니, '필(必)' 자와 '방시(方是)' 자를 보면 이런 뜻이 있는 듯하다.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사문의 뜻은 그렇지 않다. 표리와 정추는 바로 물리의 극처이니, 《대학》에서 말한 격물(格物)의 물은 모두 물(物)의 이(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답] 나의 뜻도 실로 그러하네. 衰索踽涼。知舊零散。百感萬懷。無可吿語。入則仰屋。出則仰蒼。豈以吾慶伯而亦未有一番相顧。以慰此苦苦耶謂外得書。足以替其顔而代其話矣。何慰如之。因審省候衛重。尤副願言。昏禮不賀。古有其語。而況慶伯今日之事。則其思親之感。想有以異於人者。何以堪遣。何以支將。俯招之惠。雖未有示。而吾之心。豈有已哉。但近日來。以感祟委頓。叫苦久矣。其時。量所苦之加減而爲之進退。雖不敢忘。而亦不可必也。告廟一款。固不可廢。而小宅祠堂。亦當一例告之。但祝辭。士仰當主之。而屬稱則云祀孫可矣。如何如何。詳諒之可也。天地之間。亭亭當當直上直下之正理。出則不是云云。出謂偏倚。出固以偏倚言。然的兼已發後過不及言昌燮以爲不遷怒不貳過。先言遷怒者。蓋若遷怒則是亦過也。故後言貳過。而上包遷怒也。黃澈源以爲此是一說。人之情易發而難制者。惟怒爲甚。故先言遷怒。如大學正心章之先忿懥。此亦一說也。昌燮澈源之論。皆有意義。然而亦有一氣。怒字。以心上說。故先言之。過字以事上說。故後言之。昌燮曰。孟子曰知之實。知斯二者。不去云云。知中元合兩端。旣知之明。又守之固。周子却云。德愛曰仁。宜曰義理曰禮。通曰知。守曰信。於知只言通。而別言守於信。各有不孚。可疑。澈源曰。周子是自原頭言誠言幾。而分別五德之名。是太極陰陽五行之序也。孟子特取良心發見處。言其用功節度。則意各有在。言亦不同。且細言之。則知旣知而不去。故能通。通字中。已含不去意。守曰信。守字是實有之意。與不去不同。守字裏面。包含四德。看得詳。昌燮以爲程子曰。鬼神造化之迹。張子曰。二氣之良能。程以氣。張以理。澈源以爲良能不可直指爲理。蓋於良能上見理耳。良能是理氣自然流行。不有安排之意。不可專作理看。況可硬作氣看乎。然其所主則理也。氣是理中事。則專作理省者。猶勝於硬作氣看者耳。良能理也。若以良能而不直指爲理。則氣反爲主。而理無所用矣。昌燮曰。忿懥義之發。恐懼禮之發。好樂仁之發。憂患何發。澈源曰。憂是心之慮。患是慮之甚。則憂患正是知邊事。是。昌燮以爲孟子去其中。又發揮出浩然之氣。恰似氣雜在理中矣。澈源以爲氣是理中事。乃此理流行運用之手脚。固然。昌燮曰乾道成男。坤道成女。兼人物而言之者也。人之男女昜見。而物之男女難看。澈源曰。凡有一物。便有陰有陽。雖以一塵之微。有背而上下。先儒所謂竹有雌雄。麻有牝牡。亦最易見者也。但男女二字。本是因人而名。然聖人直兼人物而貫之。不以爲嫌。是。昌燮以爲師門答訓曰。必表裏精粗。無不到。方是物理之極處。無不到云云。師門之意。蓋謂必表裏精粗之物。無不到而後。方是理無不到之謂耶。看必字方是字。似有此意。澈源以爲師門之意不然也。表裏精粗。卽物理極處。大學言格物之物。皆指物之理而言。鄙意固然。 혼례에……것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나오는 말이다. 사앙(士仰) 안종섭(安宗燮, 1877~?)의 자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황철원(黃澈源) 1878~1932. 자는 경함(景涵),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선유가……하였으니 《주자어류》권74〈역10(易十) 상계 상(上繫上)〉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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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순81) 【재덕】에게 답함 答吳景純【在德】 보지 못한 지 지금 얼마나 되었는가? 한 통 편지를 받은 기쁨이 백붕(百朋)82)에 대적하네. 더구나 앓던 병이 점차 화평해져 음식과 동작이 거의 평상시와 같은 줄 알게 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섭양하고 조리함에 방도가 있을 뿐 아니라 화락한 군자를 신명이 도움이 정히 응당 이와 같으니, 매우 위로되는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다시 바라건대 더욱더 자애하여 소소한 남은 증세는 마치 눈이 햇빛을 보고 녹듯이 다 사라질 수 있도록 하시게. 의림(義林)은 이전에 지나가다가 여러 차례 그대 집을 찾아갔으나 서로 어긋나 만나지 못하였네. 그러나 병중의 동정은 매번 인편을 통해 종종 물어서 알고 있었네. 고인은 병중에 이치를 보아 득력(得力)한 것이 많으니, 대개 외물과 접하지 않아 잡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네. 그대 또한 응당 알고 있는가?[문] 《중용》은 인물로부터 말하였기 때문에 도(道)가 성(性) 뒤에 있고, 《대전(大傳)》에서는 조화(造化)로부터 말하였기 때문에 도가 성의 앞에 있는 것입니까?[답] 《대전》은《주역》〈계사전(繫辭傳)〉을 가리켜 말하니, 이른바 "일음일양(一陰一陽)……"이라 한 것83)을 말하는 것인가? 계사는 천도(天道)로 말하였고, 《중용》은 인물(人物)의 도(道)로 말하였네.[문] 원두(源頭)로부터 말하면 성(性)은 만물의 한 근원[一原]인데, 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는 것은 기품(氣稟)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까?[답] 이른바 한 근원이라는 것은 본래 기를 떠나 독립한 곳에 있으니, 단지 기에 나아가 오로지 본래 없는 오묘함[本無之妙]을 가리킨 것이 이것이네. 또한 모름지기 한 근원은 또한 구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네.[문] 재(才)는 의리(義理)에 나아가 말하고 재(材)는 용(用)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까?[답] 재(才)는 덕(德)의 용(用)이니 사람의 능력이고, 재(材)는 재료를 말하는 것이네.[문] 정자(程子)가 "둘로 하면 옳지 않다.[二之則不是]……"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 성(性)만을 논하고 기질을 논하지 않으면 타고난 자질의 다름을 볼 수 없고, 기질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의리가 같음을 볼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접때 애장(艾丈)84)의 말과 서로 어긋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답] 애장의 말 또한 이와 같은데, 무엇으로 서로 어긋난다고 하는 것인가? 다만 주자가 해석한 '불시이지(不是二之)'는 '불시(不是)'의 주석인데, 경순(景純)은 생각건대 잘못 인용한 것 같네.[문] 《맹자》 〈고자 하(告子下)〉순발어견묘장(舜發於畎畝章)에서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부귀한 집안에서 생장하여 겪을 우환이 없는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안락함이 두려워 할 만함을 염려하고 천명은 일정하지 않음을 생각하여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부귀에 가려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곤심 횡려(困心橫慮)85)하여 비로소 살 수 있는 방도입니까?[답] 근심이 없었던 사람은 문왕(文王)인데도 "조심하고 공경하였다."라고 하고, "밥 먹을 겨를도 없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86) 이것은 천고 심법(心法)의 종지(宗旨)이네. 不相見今幾時。一書喜敵百朋也。矧審愼節漸次向和。飮饍興作。幾於視常者乎。此是攝理調養。不惟有方。而神相愷悌。定應如此。慰慰曷已。更願益加自愛。使小小餘證如雪見晛也。義林前此經過。累次扣扁。而交違未面。然其所愼動靜。每因便而種種問知耳。古人於病中看理。多所得力。蓋外物不接。雜慮不作故也。未知吾友亦應諒之耶中庸自人物而言。故道在性後。大傳自造化而言。故道在性先耶。大傳指易繫辭而言。所謂一陰一陽之云耶。繫辭以天道言。中庸以人物之道言。自源頭言。則性者萬物之一原也。而爲人爲物。在於氣稟之不同。所謂一原。本在離氣獨立之地。只是就氣上。專指本無之妙是也。且須知一原。亦非無分之謂。才就義理說。材就用上說耶。才是德之用也。人之能也。材是材料之謂。二之則不是云云。朱子解之曰。論性不偏氣。則無以見生質之異。論氣不論性。則無以見義理之同。與向日艾丈之言。相爲向背者何耶。艾丈之言亦如此。何以謂相背耶。但朱子所解。不是二之則不是底註脚。景純想誤引矣舜發於畎畝章。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若生長富貴。無憂患可歷者。當如之何。必也念安樂之可畏。思天命之無常。戒謹恐懼。不爲富貴之所蔽者。是乃困心衡慮方生之道也耶。無憂者文王。而其不曰小心翼翼不遑暇食乎。此是千古心法宗旨。 오경순(吳景純) 오재덕(吳在德, 1874~?)을 말한다. 자는 경순, 호는 제월(齊月),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백붕(百朋) 많은 재물을 뜻한다. 옛날에는 패각(貝殼)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5패를 1관(串)이라 하고 2관을 1붕(朋)이라 했다 한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고 보니, 나에게 백붕을 준 것 같도다.[旣見君子, 錫我百朋.]"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이른바……것 《주역》〈계사 상(繫辭上)〉 제5장에 "일음일양을 도라고 하니, 잇는 것이 선이고, 이룬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애장(艾丈)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곤심 횡려(困心橫慮) 노심초사하면서 떨쳐 일어날 계책을 세우라는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마음에 곤하고, 생각에 걸린 뒤에 분발한다.[困於心 橫於慮而後作]"라고 한 것을 말한다. 근심이……않았던가 《중용》 제18장에 공자가 "근심 없는 자는 오직 문왕이로다! 〔無憂者, 其惟文王乎! 〕"라고 한 것과《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오직 이 문왕만이 조심하고 공경하셨네.[維此文王, 小心翼翼.]" 라고 한 것과《서경》 〈주서(周書) 무일(無逸)〉에 "아침부터 한낮과 저녁이 되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민을 평화롭게 하였다.[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和萬民.]"라고 한 것을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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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87) 【기호】에게 답함 答李景元【基皓】 지난 날 찾아 왔을 때 저녁이 되어 문득 떠났으니, 뒤 미쳐 생각함에 서글프고 허전한 마음이 마치 목에 음식물이 걸린 것 같았는데, 뜻밖에 편지를 받아 감사한 마음 참으로 깊었네. 인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절도가 줄곧 많은 복을 누리고 있는 줄 알았으니, 위안되는 마음 실로 깊었네. 그대 공부가 지금 《근사록》을 보고 있다고 하니, 매우 좋네. 의리의 정미함은 이 책보다 상세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능히 익숙히 읽고 정밀히 생각하여 하나하나 체인(體認)한다면 이른바 '비상한 기질'을 반드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네. 편지에서 "춘생지(春生之)……"라고 하였는데, 봄은 봄기운이 생기고 여름엔 봄기운이 자라고 가을엔 봄기운이 성숙하고 겨울엔 봄기운을 간직해 두네. 그러므로 봄이 사시의 처음이 되는 것이 인(仁)이 사덕(四德)의 장(長)이 되는 것과 같네. 또 춘하추동의 이치는 하늘에 있어서는 원형이정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의예지가 되니, 이 이치를 밝게 터득하면 어찌 극기복례(克己復禮)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체(體)는 체용(體用)의 체가 있고 체단(體段)의 체가 있으니, 대개 귀산(龜山)88)은 만물이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인(仁)으로 여기니, 호상(湖湘)89)의 학자들이 이것을 인의 체라고 여겼네. 그렇다면 이 '체' 자는 체용과 체단을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이네. 모든 사물은 체와 용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나무의 뿌리는 체이고 그 지엽은 용이며, 물의 근원은 체이고 갈래의 물줄기는 용이네. 인심(人心)에 있어서는, 미발(未發)은 체가 되고 이발(已發)은 용이 되며, 사덕(四德)은 체가 되고 사단(四端)은 용이 되네. 체단의 체 같은 것은 그 당체(當體)의 실두(實頭)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말의 맥락이 조금 다르네. 그 아래 문장에서 주가가 말하기를 "이것은 인(仁)의 체가 아니라, 인의 양(量)이다."라고 하였으니,90) 원컨대 경원(景元)은 여기에 더욱더 생각하여 무엇이 인의 체가 되며 무엇이 인의 양이 되는지를 뚜렷하고 분명하게 한다면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네. 向日枉顧。觸暮旋發。追念悵缺。如物在喉。匪意承書。感戢良深。因審侍中節宣。連膺茂祉。慰浣實深。盛課今在近思錄云。甚善甚善。義理精微。莫詳於此書。苟能熟讀精思。一一體認。則所謂甚生氣質。必有以得之於此矣。示中春生之云。夫春者春之生也。夏則春之長也。秋則春之成也。冬則春之藏也。故春爲四時之首。仁爲四德之長者然也。且春夏秋冬之理。在天爲元亨利貞。在人爲仁義禮智。曉得此理。豈不可以克己復禮乎。且體有體用之體。有體段之體。蓋龜山以萬物與我爲一。爲仁。湖湘學者。以此爲仁之體。然則此體字。兼指體用體段而言之也。凡物莫不有體有用。木之根體也。而其枝葉用也。木之源體也。而派流用也。在人心。則未發爲體。已發爲用。四德爲體。四端爲用。若體段之體。指其當體實頭而言。語脈微別矣。其下文朱子曰。此不是仁之體。是仁之量。願景元於此。更加入思。以爲何者是仁之體。何者是仁之量。使之了了分明。想不無益。 이경원(李景元) 이기호(李基皓, 1874~?)를 말한다. 자는 경원,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귀산(龜山) 송(宋)나라 때 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이다. 자는 중립(中立)이다. 정호(程顥)ㆍ정이(程頤)의 제자로, 뒤에 도남학(道南學)을 창시하였다. 정호ㆍ정이의 학문은 양시를 거쳐서 나종언(羅從彦)에게 전해지고, 다시 이동(李侗)을 거쳐서 주희(朱熹)에게 전해졌다. 저서로는 《귀산집》이 있다. 호상(湖湘) 호는 동정호(洞庭湖), 상은 상강(湘江)을 말하는데, 호굉(胡宏)이 호상학파(湖湘學派)를 개창하였다. 주가가……하였으니 《주자어류》권6〈성리3(性理三) 인의예지명의(仁義禮智等名義)〉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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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48)가 지난봄 화답한 시를 보여주었는데 도기서향49)의 말이 있기에 삼가 차운하여 은혜에 사례하다 貞齋示以昨春所和詩 有道氣書香之語 奉次謝惠 누가 청산에 머물며 양기 회복 기다린다고 하였나 棲碧誰言俟復陽눈앞의 상황은 그저 빛을 감추기에 알맞다네 眼前只可自韜光원회가 세 번 핀 영지 슬퍼한 일50) 흉내내고 效嚬元晦悲三秀파선이 하늘 한쪽 미인 바라본 일51) 공연히 생각하네 空憶坡仙望一方어떻게 도기로 지극한 즐거움을 생기게 하겠는가 道氣那將生至樂서향으로 풍진을 씻어내기 어렵다네 書香難把掃塵妨시정이 진중하니 어찌 부응할 수 있으랴 詩情珍重何能副남은 생애 공부하기 바빠 한탄스럽구나 堪嘆餘年著力忙 棲碧誰言俟復陽? 眼前只可自韜光.效嚬元晦悲三秀, 空憶坡仙望一方.道氣那將生至樂? 書香難把掃塵妨.詩情珍重何能副? 堪嘆餘年著力忙. 정재(貞齋) 김종락(金宗洛, ?~1953)의 호로, 자는 주백(周伯)이다. 김택술이 그를 위해 지은 제문이 《후창집(後滄集)》 권16에 보인다. 도기서향(道氣書香) 도기는 도인(道人)의 기상을 말하고, 서향은 학문의 기풍을 말한다. 원회(元晦)가……일 원회는 주희(朱熹)의 자이다. 주희가 젊은 날 운당포(篔簹鋪)에서 쉬다가 벽에 "빛나는 영지여, 한 해에 세 번이나 피었네. 나는 홀로 무엇을 하였기에, 뜻이 있으나 이룬 게 없는가.[煌煌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고 한 혜강(嵇康)의 〈유분시(幽憤詩)〉가 적힌 것을 보고는 자신의 뜻과 같다고 비통해하였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파선(坡仙)이……일 파선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별칭이다. 그가 지은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인을 바라보도다.[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古文眞寶後集 卷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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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에. 농암의 시20)에 차운하다 除夕 次農巖韻 눈 남아 있고 달 흐린 섣달이 끝나는 때 雪殘月黑臘窮天가물거리는 찬 등불에 근심스레 앉았네 耿耿寒灯坐悄然수세함은 내가 옛일 따른 것 아니나 守歲吾非追故事오십팔 년의 세월이 지나니 서글프구나 堪悲五十八過年밤 깊은 하늘에 과암 노인 찾다가 果叟相尋夜久天농암 시의 여운을 들으니 귀에 쟁쟁하네 農詩遺韻聽鏗然은근히 밤을 새는 것은 무슨 뜻인가 殷勤達曙知何意육십의 나이 동갑이기 때문이라네 爲是同庚六十年옛날 청년 시절 생각하니 어제 같은데 憶昔靑年如昨天되려 머리털 보니 하얗게 분분하구나 却看鬢髮雪紛然어찌 생각했으랴 하나도 성취한 것 없이 豈料無一成就日칠십 가호 마을에서 가장 노년일 줄을 七十家村最老年생사를 모두 하늘에 맡겼으니 都將生死聽於天한 생각으로 앞으로는 평탄하리라 一念前頭坦蕩然오직 삼려는 소원 잊기 어려우니 惟有三閭難忘願구가편에서 불로장생하고 싶어 했지21) 九歌篇上度長年 雪殘月黑臘窮天, 耿耿寒灯坐悄然.守歲吾非追故事, 堪悲五十八過年.果叟相尋夜久天, 農詩遺韻聽鏗然.殷勤達曙知何意? 爲是同庚六十年.憶昔靑年如昨天, 却看鬢髮雪紛然.豈料無一成就日? 七十家村最老年.都將生死聽於天, 一念前頭坦蕩然.惟有三閭難忘願, 《九歌篇》上度長年. 농암(農巖)의 시 농암은 김창협(金昌協)의 호이다. 이 시는 그의 《농암집(農巖集)》 권4에 실려 있는 〈석실에서 섣달그믐 저녁에 중유가 홍생 세태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에 차운하여 감회를 서술하다[石室除夕 次仲裕次洪生世泰韻 述感]〉라는 제목의 2수를 말한다. 오직……했지 삼려(三閭)는 삼려대부(三閭大夫)의 벼슬을 지냈던 굴원(屈原)이다. 그는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여 신선과 함께 멀리 돌아다니며 장생을 노래한 내용의 〈원유(遠游)〉를 지었는데, 거기에 "인간 세상을 초월하여 돌아갈 생각 잊으려 함이여, 뜻이 자유로워 한껏 부푸네.[欲度世以忘歸兮, 意姿睢以擔撟.]"라고 하였다.  《楚辭 卷5》 구가편(九歌篇)이라고 한 것은 김택술의 착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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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재 이공 유사장 默齋李公遺事狀 내가 일찍이 우리 지방의 선배 인물의 성대함을 보았더니, 고(故) 묵재(默齋) 이공(李公)의 집안이 가장 성대하였다. 공의 동조 형제(同祖兄弟 4촌)가 8명에 이르는데, 모두 체격과 용모는 훌륭하고 뛰어나며 문학은 풍부하여 사람들이 고양팔룡(高陽八龍)94)에 견주었다. 공의 휘는 면휘(勉徽)이고 자는 중서(仲敘)이니, 총명하고 빼어나며 시원한 자질로 가학과 법불(法拂)95)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영향받고 훈도(薰陶)받았으며, 보충하여 증장하고 넓혀나가 일찍이 효우(孝友)로 널리 알려졌고, 만년에 행의(行義)로 널리 알려져 위대하게 말세의 일사(逸士)96)가 되었다. 공이 부모를 섬길 때에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모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드렸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나아가 봉양하여 부모의 입과 몸에 맞게 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먼저 알아차리고 받들어 순종하여 그 마음과 뜻을 편안히 해드렸다. 전후의 상(喪)은 애훼(哀毁)에 지나쳤지만 정문(情文)97)을 빠뜨림이 없었고, 동산에 맛 좋은 복숭아가 있었으나 부모님이 즐겨 드시는 것이었기에 끝내 차마 입에 넣지 못했다. 공은 형제들과 온화하고 화락하게 지내어 분가할 때에 밭은 거칠고 척박한 것을, 기구는 썩어 문드러진 것을 자신이 취하고, 품질이 좋은 것을 미루어 그의 아우에게 주었다. 중부(仲父)의 아들이 환포(還逋 환곡의 포흠)를 범하자, 공이 중부에게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몰래 자기의 토지를 팔아서 이를 갚아주었다. 늦게 아들 한 명을 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공이 매우 사랑하였기에 집으로 안고 돌아오라고 명하여, 10여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하였으니, 이는 효우의 실상이다. 천성이 간략하고 중후하며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어리석은 듯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했지만 《소학》과 《대학》에 더욱 정통(精通)하였다. 문사(文詞)는 화려하면서도 실속이 있고, 식견은 넓으면서도 정밀하였으며, 비방과 칭찬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고, 득실(得失) 때문에 느긋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바른말을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자,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어려워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금품을 보내오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사지금(四知金)98)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어린아이가 곁에 있으니, 어찌 오지(五知)99)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집안에 불이 난 것을 보았는데 손해 본 것이 적지 않았으니, 대개 여비(女婢)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이 여비를 보고 이르기를, "너는 화상을 입은 곳이 없느냐?" 하고는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족척과 친구의 길흉(吉凶)과 경조(慶弔), 기근(饑饉)에 구하여 도와주되, 때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정의와 예의를 모두 흡족하게 하였다. 향방(鄕邦)의 상숙(庠塾)100)과 연회 석상의 문단(文壇)에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의 처리하는 일은, 그 위의(威儀)가 엄숙하고 말하고 웃는 것이 정다워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히 마음으로 기쁘게 하고,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대문에 이르는 걸객(乞客)을 보면 후하게 베풀어 주었는데, 불쌍히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으니, 이는 행의(行義)의 실상이다. 경신년(1860) 8월 23일에 졸하였으니, 태어난 신유년(1801)과의 시간적 거리를 계산해보면 향년 60세이다. 주(州) 남쪽 풍류재[風流峙]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비사등(飛沙嶝) 부신(負申)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내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것이 어제처럼 역력한데, 부모를 잃고 외롭게 된 지 지금 5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태평한 문문(文物)의 시대에 향당(鄕黨)의 큰 덕망을 지닌 원로의 풍채를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의 일을 생각하면 절절하여 끝없이 슬플 뿐이다. 이씨는 관향이 광산(光山)으로, 고려조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이순백(李珣白)을 등보(登譜)의 조(祖)로 삼는다. 중엽에 휘 선제(先齊)는 경창군(慶昌君)으로 호는 화문(華門)이고, 휘 조원(調元)은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불러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니,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대대로 많았다. 고조 필광(必光)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 언규(彦規)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영근(永根)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부친 선우(先佑)는 호가 균헌(筠軒)이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상규(文祥奎)의 따님이다. 공은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이긍(朴履兢)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낳았으니, 동한(東漢)·문호(文鎬)·지호(贄鎬)·인호(仁鎬)이고, 딸은 죽산인(竹山人) 안의환(安義煥)에게 출가했다. 손자 승두(承斗)와 혁회(赫會)·현규(現圭)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규(承奎)와 기백(琪白)·배한숙(裵漢淑)에게 출가한 손녀는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손자 승우(承愚)·승일(承一)과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한 손녀는 셋째 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지(承祉)·승태(承泰)와 박제영(朴齊英)·손사규(孫士圭)·문모(文某)에게 출가한 손녀는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글을 요청한 자는 승우이다. 余嘗及見吾鄕先輩人物之盛。而故默齋李公之家。最爲蔚然。公同祖兄弟。至爲八人。而皆體相峻茂。文學宏贍。人以高陽八龍擬之。公諱勉徽。字仲敘。以頴悟秀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擩染薰陶。充長展拓。早以孝友著。晚以行義聞。偉然爲叔世之逸士。其事親也。怡色柔聲以樂其耳目。服勤就養以適其口體。先意承順以安其心志。前後喪。過於哀毁。情文無闕。園有好棰。以親之所嗜。終不忍入口。其處兄弟也。溫溫湛樂。析箸時。田取荒薄。器取朽敗。而推其品好者。以給其弟。仲父之子嘗犯還逋。公恐貽憂於仲父。潛賣已土以償之。有一妹晚有一子。公甚愛之。命抱還於家。育之敎之十餘年。如己出。此孝友之實。天性簡重沈默。終日如愚。淹貫經史而尤邃於。小學大學。文詞華而實。見識博而精。不以毁譽而爲喜怒。不以得失而爲舒慘。正言正色。人皆敬憚。嘗有人饋以錢物。公笑曰。古人不受四知金。今吾稚兒任側。豈非五知乎。一日自外還。見家中失火。見損不少盖女婢不謹致然。公顧謂婢曰。汝無所爛乎。終無一言。族戚知舊。吉凶慶弔。饑饉賙恤。隨時無闕。情禮俱洽。鄕邦庠塾之地。樽俎翰墨之場。所以出入風儀。左右酬應者。其威儀抑抑。言笑款款。令人怡然而心悅。肅然而心服。見乞客臨門。厚加施及。而矜惻之意。刑於色。此行義之實。庚申八月二十三日卒。距寅降辛酉得年爲六十。葬州南風流峙。後移于飛沙嶝負申原。呼嗚。余在童艸。侍先人側。得聞公之賢。歷歷如昨日。風樹孤露。今五十有餘年矣。昇平文物。鄕黨長德之風。不可得以復見。俯仰今古。只切無窮之悲而已。李氏貫光山。以勝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登譜之祖。中葉有諱先齊。慶昌君號華門。諱調元。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號淸心堂。文學仕官。奕世相望。高祖必光贈掌樂院正。曾祖彦規贈吏曹正郞。祖永根贈戶曹參判。考先佑號筠軒。妣南平文氏祥奎女。公娶咸陽朴氏履兢女生四男一女。東漢文鎬贄鎬仁鎬。女適安義煥竹山人。孫承斗。孫女李赫曾李現圭。長房出。承奎李琪白裴漢淑二房出。承愚承一吳桂泳三房出。承祉承泰朴齊英孫士圭文其。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謁文者承愚也。 고양팔룡(高陽八龍) 동한(東漢) 때에 순숙(荀淑)의 아들 8명이 모두 재주가 뛰어났기에, 상고(上古) 시대의 제왕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재주가 뛰어난 아들 8명에 비겼다. 그리고 그가 살던 마을은 본래 서호리(西豪里)였는데 고양리(高陽里)로 변경하여 부르게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순숙의 8명의 아들을 팔룡(八龍)이라 불렀다. 《後漢書 卷92 荀淑列傳》 법불(法拂) 〈초은 손공 유사장(楚隱孫公遺事狀)〉 주 참조. 일사(逸士) 절의가 빼어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선비를 말한다. 정문(情文)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말한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자식으로서 부모를 잃은 슬픔과 초상을 치르는 데 있어 정해진 예법을 말한다. 사지금(四知金)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昌邑)에 도착했을 때,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 10근을 바치며 "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오지(五知) 사지(四知)인 천지(天知)·신지(神知)·아지(我知)·자지(子知)에 어린아이가 아는[稚兒知] 것을 더한 것을 말한다. 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집에는 숙을 두고 당에는 상을 두며, 술에는 서를 두고 나라에는 학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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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당 윤공 유사장 養閒堂尹公遺事狀 공의 휘는 방형(邦衡), 자는 완여(完汝), 계통은 파평(坡平)에서 나왔으니, 소정공(昭靖公) 휘 곤(坤)61)의 후손이다. 증조 동정(東貞)은 문학과 효우가 있어 세상에서 남호 처사(藍湖處士)라고 불렀고, 조부는 인탁(仁坼), 부친은 면은(勉殷)이고 호는 학암(學庵)이며, 생부는 중은(重殷)으로 정조 정사년(1797) 6월 1일에 남평(南平) 남석리(藍石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빼어난 외모에 총명하였고 타고난 자품은 뛰어났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봉양할 때 지물(志物)62)을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남은 힘으로 글을 배웠는데 이치를 연구함이 날로 향상되었다. 능주(綾州 화순(和順))로 장가가서 이로 인해 처가살이한 것은 외로이 형제가 적어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났지만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분명히 정해진 계획이 있었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집안일이 절로 안정되어 일과 재력이 점점 풀렸다. 고난 속에서 형통하고 우환(憂患) 속에서 살아 만년(晩年)에 먹고 쓸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그 규모와 경영을 모두 본받을 만하다. 금오산(金鰲山) 아래 집을 지었는데, 삼경(三逕)63)에는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았으며, 날마다 평상복을 입고 그 사이를 소요하였다. 학규(學規)를 세워 마을의 수재들을 가르치고, 동약(洞約)을 세워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부터 상서(庠序)와 학교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에서 지시하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여러 유생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고, 학문의 도는 다만 사람이 일상 생활하면서 마땅히 행하는 것이지만,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이치의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학》의 8조목64)에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처음이고, 《논어》의 사교(四敎)65)에서 문(文)과 행(行)이 우선한다."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 윤규석(尹奎錫) 공이 그 집을 '양한(養閒)'이라고 명명하였으니, 대개 그 뜻을 기록하여 칭찬한 것이다. 계유년(1873) 8월 13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여 고을 동쪽 부춘면(富春面) 대억동(大億洞)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풍산 홍씨는 홍일우(洪一禹)의 따님이고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의진(誼鎭)이고 딸은 송규진(宋奎鎭)에게 출가했다. 의진은 8촌 의진(儀鎭)의 아들 자영(滋英)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고, 딸은 양성종(梁性鍾)에게 출가했다. 자영은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상의(相義)·상석(相奭)·상호(相浩)·상연(相淵)이고, 딸은 홍돈희(洪敦憙)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아, 나의 선인 3명의 형제가 건복(巾服 옷과 갓)과 장구(杖屨 지팡이와 신) 차림으로 서로 왕래할 때마다 먹고 마시며 웃고 담소하면서 지극히 정겨웠는데, 어찌 상해(桑海)66)의 광경이 갑자기 눈앞에 있게 되며 쓸쓸한 여생도 또 몽범(濛氾)67) 시절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예와 지금을 돌아봄에 슬픈 감회를 견디지 못하여 이에 상의의 요청에 끝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邦衡。字完汝。系出坡平。昭靖公諱坤后。曾祖東貞。文學孝友。世稱藍湖處士。祖人坼。考勉殷號學庵。生考重殷。正宗丁巳六月一日。生公于南平藍石里。秀爽穎悟。天姿不群。居貧養親。志物俱至。餘力學文。硏理日就。委禽于綾州地。因以贅寓。盖孤露終鮮。無以爲計也。煢煢漂泊。百苦拂亂。而凡百料理。的育成算。未嘗見其有後役之私。而家務自集。事力稍舒。其所以亨於險阻。生於憂患。爲晩景餉用之地者。其規模經紀。皆可爲法築室金鑿山下。三逕花竹。四壁圖書。日以便服。逍遙其間。立學規以課村秀。設洞約以和隣保。以至庠序學校之地。爲出入風儀。左右指晝者。未嘗不爲鄕人之倚重焉。每誨諸生曰。人生斯世。非學問。無以爲人。而學問之道。只是人生日用所當行者但不學問無以知其理之所在。故大學八條。格致爲始。論語四敎。文行在先。州倅尹公奎錫題其室曰養閒。盖志其意而嘉之也。癸酉八月十三日卒于正寢。葬州東富春面大億洞丙坐之原。配豐山洪氏一禹女。一男一女。男誼鎭。女適宋奎鎭。誼鎭取三從儀鎭子滋英爲後。女適梁性鍾。滋英四男二女。男相義相奭相浩相淵。女適洪敦憙。餘幼。嗚呼。我先人三昆季。巾服杖屨。每相經過。飮食笑語。極其款款。豈知桑海光景。遽在目前。而孤露餘生。又是濛氾時節耶。俯仰今古。不勝悲感之私。玆於相義之請。有不敢終辭。 윤곤(尹坤) ?~1422.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아우 윤향(尹珦)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은 윤곤이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지물(志物) 지(志)는 양지(養志)로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물(物)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8조목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사교(四敎)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네 가지로 가르쳤으니,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하였다. 상해(桑海)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준말로,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될 정도로 세상이 몰라보게 바뀌었다는 뜻이다. 몽범(濛氾) 만년(晩年)을 말한다. 몽범은 해가 지는 곳으로,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몽범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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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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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돈재 조공 사실 遯齋曺公事實 돈재(遯齋) 조공(曺公)의 휘는 일리(一履)이니, 바로 내가 사는 고을의 근고(近古) 사람이다. 타고난 자태가 빼어나고 시원하며 화락하고 단아하여 어려서부터 의젓하였다. 가난하게 살면서 어버이를 봉양할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했고,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받들어 모시면서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잘 갖추었다. 고기 잡고 나무한 뒤에 여가가 있으면 매번 책상을 마주해 단정히 바르게 앉아 시가를 읊고 학문을 궁구하니 문사(文詞)가 날로 진보하였다. 어버이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분수를 지키고 뜻을 구했지만 가난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명예와 화려한 겉치레, 기호(嗜好)에 담박하였고, 출입을 간략히 하였으며, 교제 맺는 것을 신중히 하였다. 부춘(富春)에서 성 동쪽 필봉(筆峯) 아래로 우거하여 소요하고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노년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아, 광휘(光輝)를 숨겨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평소에 마음속으로 깊이 품은 포부를 조금도 시험하지 못했으며, 세상을 떠난 뒤의 유고(遺稿)도 화재로 재앙을 입어 사람들에게 전해 보여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필봉은 뾰족하고 빼어나며 용산(龍山)이 둘러 있으며, 공이 오가던 곳을 지나감에 정채(精彩)가 여전하였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뛰어난 자취를 볼 수 있다. 많은 자손이118) 번성하고 화목하며 시와 예를 가업으로 계승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유교(遺敎)를 볼 수 있다. 효자의 영예와 처사의 훌륭한 운치가 전후 2백 년 동안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고 자자했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진실한 행실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분수를 닦고 자신의 천진한 성품에 맡긴다면,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얻은 것이 많을 것이니, 저 4천 마리의 말과 만종(萬鍾) 같은 부귀함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돈재공답게 되는 이유이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서 선생을 사모함하고 있었는데, 지금 조필승(曺弼承)의 청에 대해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을 서술하여 공의 사실(事實)로 삼았다. 遯齋曺公諱一履。卽吾鄕近古人也。天姿秀爽愷弟。自幼凝然。居貧養親。殫竭血力。蔀室斗屋。承歡甚備。漁樵之餘。輒對案危坐。諷詠溫繹。文詞日就。爲親應擧。不以得失累意。守分求志。不以貧窶動心。泊於聲華。淡於嗜好。簡出入。愼交結。自富春寓於城東筆峯之下。徜徉婆娑爲終老之計。嗚呼。潛光鞱輝。世莫我知。素所蘊抱。未得少試。而至於身後遺稿。亦且厄於回祿。未有以傳示於人者。然筆峯尖秀。龍山繞匝。杖屨經過。精彩如古。於此而見公之遐躅也。螽斯椒聊。蕃衍雍睦。箕裘詩禮。藹蔚有聲。於此而見公之遺敎也。孝子令譽。處士高韻。前後二百年。藉藉不絶於里老巷竪之口。於此而見公之實行也。修吾分。任吾眞。雖擧一世不知而所得多矣。彼千駟萬鍾。於我何加哉。此所以爲遯齋公也。余以卿里後生。竊有慕於下風。今於弼承之請。不敢牢讓。謹以所嘗聞知者。述以爲公之事實。 많은 자손이 대본의 종사(螽斯)와 초료(椒聊)는 각각  《시경》 〈주남(周南)〉과 〈당풍(唐風)〉의 편명으로, 여기서는 자손이 많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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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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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용한 오공 유사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容閒吳公遺事狀 오씨(吳氏)는 동방(東方)의 거성(鉅姓)인데, 패릉(貝陵)을 관향으로 삼은 자가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고려조에 휘 연총(延寵)101)은 벼슬이 평장(平章)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으로, 영토를 확장한 위훈(偉勳)이 있었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현필(賢弼)이 패릉에 봉해져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5대를 전해 내려와 충을(忠乙)은 우리 조정에서 찬성(贊成)을 지냈고,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익손(益孫)은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며, 침랑공이 패릉에서 능주로 그의 부모를 장사지냈는데, 여묘(廬墓)하면서 이로 인해 거주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창도하여 진주(晉州)에서 입절(立節)102)하였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만상(萬祥)은 효행으로 여러 번 추천에 들었고,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엽(曺光葉)의 따님이니 바로 공의 부친과 모친으로, 정조 정사년(1797) 2월 14일에 부춘방(富春坊)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어렸을 때에 남다른 자질이 있어 말하고 웃으며 즐겁게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스승에게 나아감에 미쳐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항상 무릎을 모아 단정히 앉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였고, 산사(山寺)에서 책을 읽을 때에 집과 1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매일 한 번씩 반드시 안부를 살피자, 부모가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매우 엄하게 저지하였다. 이후부터 부모의 소식이 격조하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났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주선하여 소식을 들은 뒤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니, 그 독실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에 큰 흉년을 만났는데, 공이 이웃 사람들을 진휼(賑恤)하여 이에 힘입어 살게 된 자가 많았다. 약관(弱冠)에 부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집상(執喪)의 모든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행하였고,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갖추어 다했다. 늘그막에 우봉(牛峯)에서 오봉산(五峯山) 아래에 우거하였으니, 대개 고요한 데로 나아가 한가롭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문규(門規)를 세워 종족과 친하게 지내고, 향약(鄕約)을 수행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과 잘 지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가엾게 여겨 잘 보살폈으되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았고, 여러 조카를 보살펴 기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하였으며, 집안이 화목하고 형제가 즐겁게 지내니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준행했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감동하였다. 을해년(1875)에 우로은(優老恩)으로 통정(通政)에 올랐고, 병자년(187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통덕랑(通德郞) 양중현(梁中鉉)의 따님으로 어질고 예가 있어 부도(婦道)를 잘 지녔는데, 공보다 1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자질은 침착하고 무게가 있으며, 기상은 온화하고 아담하며, 언어는 간략하고 어눌하며, 행동거지는 차분하고 세심하였다. 경(經)의 뜻에 심오하고 일 처리하는 데 밝으니, 향려(鄕閭)에 의심나는 일이 있거나 알지 못하는 행정상의 사무가 있으면 매번 공에게 나아가 해결하였다. 아, 공은 바로 선친의 벗이다. 기억하건대 공과 선친께서 백발과 태배(鮐背)103)의 모습으로 평상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시고, 소자(小子)는 그 앞에서 추주(趨走)104)하고 예예[唯諾]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 모두 천고의 이별을 이루었고, 이렇게 애처롭고 외로운 내가 마침내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狀德之文]을 짓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의 손자 오왕홍(吳枉鴻)이 장차 유사(遺事)를 수습하여 후대에 오래 전하려고 할 때, 내가 곁에서 모신 날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대략의 줄거리를 서차(序次)하게 하였을 뿐이다. 吳東方鉅姓。貫貝陵者。爲尤著。勝朝有諱廷寵。官平章諡文襄。有拓地偉勳。六傳諱賢弼。封貝陵。因以爲貫。五傳至忠乙。我朝官贊成。三傳諱益孫。以孝除寢郞。寢郞公自貝陵。葬其親於綾。盧墓而因居焉。三傳至諱邦翰。倡義壬辰。立節晉州。七傳諱萬祥。以孝累入剡薦。夫人昌寧曺氏光葉女。卽公考妣也。以正廟丁巳二月十四日。生公于富春坊七松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不類凡兒。及就傳。文理日就。常斂膝端拱。昕宵不怠。讀書山寺。距家十餘里。每日必一番省候。父母憂其妨功。止之甚嚴。自後音聞有曠。憂形於色。必周旋得聞。然後乃安意讀書。其誠孝之篤如此。遭甲戌大無。賑恤隣保。多所賴活。弱冠連遭考妣喪。執喪諸節。一遵家禮備盡情文。晩年自牛峯。寓居五峯山下。盖就靜養閒計也。立門規以親宗族。修鄕約以和隣里。矜養寡妹。老而不衰。撫育諸姪。同於己出。室家雍睦。兄弟湛樂。子孫遵其敎。鄕里感其義。乙亥以優老恩陞通政。丙子正月六日棄世。夫人濟州梁氏通德郞中鉉女。賢而有禮。甚得婦道。先公十二年而終。公姿質沈重。氣容溫雅。言語簡訥。動止安詳。邃於經義。明於料事。鄕閭之間。事有所疑。政有未達。輒就決焉。嗚呼。公卽先人友也。曾記其䳽髮鮐背。對床款款而小子趨走唯諾於前豈知行未幾何俱成千古。而哀此孤露。乃述其狀德之文耶。公孫枉鴻。將欲收拾遺事。以壽來世。以余侍側日久。使之序次梗槩云耳。 오연총(吳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1096년(숙종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07년(예종2) 부원수(副元帥)로 원수(元帥)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입절(立節) 절개를 지켜서 죽은 것을 말한다. 태배(鮐背) 복어의 등이란 뜻으로, 늙은이를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복어의 등에 있는 얼룩 같은 검버섯이 피부에 생긴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추주(趨走) 윗사람의 앞을 지날 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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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처사 조공 유사장 希庵處士趙公遺事狀 공의 휘는 두열(斗烈), 자는 의지(義之), 호는 희암(希庵)이니, 조씨는 계통이 함안(咸安)에서 나왔다. 중엽에 휘 승숙(承肅)105)은 세상에서 덕곡 선생(德谷先生)이라고 불렀고,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106)하였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종례(從禮)는 호가 율정(栗亭)이고 벼슬은 직제학(眞提學)이며, 휘 림(琳)은 호가 신재(愼齋)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참봉(參奉) 휘 희광(希匡)이 동복(同福)에 거주하였고, 4대를 전해 내려와 감정(監正) 휘 옥생(玉生)이 능주(綾州)에 거주하여 자손들이 이로 인해 이곳에 살게 되었다. 증조 중국(重國)은 통정(通政)을 지냈고, 조부는 달운(達運)이며, 부친은 시복(時福)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이 있었고,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광수(金光洙)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정유년(1777)에 능주 오산리(鰲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녔고 학문의 과정은 가정의 가르침을 따랐다. 점차 성장하면서 고을의 사우(士友) 가운데 어진 자를 좇아 종유하여 강구하고 연마하여 스스로 넓혀나갔다. 효우의 행실이 가정에 드러났고 돈독한 친목의 풍조가 종족에게 알려졌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재난과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으니, 자상하고 측달(惻怛)함이 두텁지 않음이 없었다. 집 한 채를 지어 '망미(望美)'라고 편액하여 걸고, 오직 은은하게 날로 닦되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생도들을 가르칠 때에 과조(科條)가 찬연했다. 때로 좋은 손님 및 벗과 함께 시냇가와 산, 바람과 달 사이에서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놀며 마음을 시원하게 펴면서 유연(悠然)히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있었다. 중년에는 한가한 날에 병학(兵學)을 섭렵하여 대략 대치(大致)를 알았지만 또한 시험해보지 못했다. 철종 병진년(1856) 7월 28일에 고종명하여 산음(山陰) 후록(後麓)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인(曺光仁)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용희(鏞熙)·용기(鏞起)·용직(鏞直)·용순(鏞珣)·용후(鏞厚)이고, 사위는 광산(光山) 이장휘(李章徽)와 공주(公州) 이문현(李文現)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107)"라고 하였으니, 자손의 남은 복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공의 장손 조익제(趙翼濟)는 훌륭한 선비이고, 그의 사촌 형제와 여러 자질(子侄)도 모두 근칙(謹勅)한 사람들이니, 이는 공이 선을 쌓은 데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조씨의 가문에 반드시 번창하고 성대할 날이 있을 것이다. 公諱斗烈。字義之。號希庵。趙氏系出咸安。中葉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麗亡罔僕。我朝有諱從禮。號栗亭官直提學。諱琳。號愼齋大司成。皆顯祖也。諱希匡參奉。寓居同福。四傳至諱玉生。監正。寓綾州。子孫因居之。曾祖重國通政。祖達運。考時福。世有文行。妣光山金氏光洙女。正廟丁酉。公生于州之鰲山里。幼而就塾。學問課程。遵循庭訓。稍長。從鄕裏士友之賢者。遊從講曆。以自展拓。孝友之行。著於家庭。敦睦之風。聞於宗族。賙窮賑匱。赦災恤患。慈詳惻怛。無不款洽。築一室。揭顏以望美。惟以闇然日修。不求人知爲究竟計。訓迪生徒。科條燦然。時與佳賓良朋。觴詠遊暢於溪山風月之間。悠然有出塵之標。中年以餘日。涉獵兵學。略曉大致。而亦未有所試。哲宗丙辰七月二十八日終。葬山陰後麓酉坐原。夫人昌寧曺氏光仁女。生五男二女。鏞熙鏞起鏞直鏞珣鏞厚。光山李章徽公州李文現。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餘祿。而其人可知。公之長孫翼濟善士也。其群從諸子侄。皆謹勅人也。此非公積累之報耶。余謂趙氏之門。必有昌大之日。 조승숙(趙承肅) 1357~1417.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덕곡(德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저서로는 《덕곡집(德谷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書經 微子》 선(善)을……있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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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 조공 유사장 溪庵曺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曺), 휘는 학신(學臣), 자는 내권(乃權), 호는 계암(溪庵)이다. 휘 계룡(繼龍)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108)와 혼인하여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고, 이로 인하여 창녕(昌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으니 바로 그 시조이다.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뛰어난 공훈과 현달한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조정 초에 이르러 휘 서(庶)는 시호가 청간(淸澗)이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상국(上國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황제(高皇帝 주원장(朱元璋))가 특별히 총애하여 도핵배(桃核杯)를 하사하였다.109)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국병(國柄)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능성(綾城)에 살았고,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고조 휘 봉인(鳳人)은 호가 동파(桐坡)이고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증조의 휘는 동근(東覲)이고, 조부의 휘는 현묵(賢默)이며, 부친의 휘는 명화(命貨)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한봉(張漢鳳)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순수하게 갖춰졌으니, 순조 12월 20일에 청계리(淸溪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후(淳厚)하고 활달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곁에서 어버이를 모시면서 응대하고 대답하며 잘 받들어 따르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였으며, 맛있는 것을 구하면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드렸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을 때 번거롭게 지휘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약관에 널리 제가(諸家)를 섭렵하여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 나고 아름다웠으며,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여 죽을 먹고 물을 마셨으며, 삭망(朔望)마다 성묘하여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형제 3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산을 매입하여 과일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고기를 길러서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 이로써 봉양을 올렸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로써 제수를 올렸다. 늘그막에 청계(淸溪) 가의 한 구역에 정사(精舍)를 지어 그 편액에 '벽류(碧流)'라고 쓰고, 사촌 형제들과 밤낮으로 서로 마주 대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정을 다하였다. 또 집안 자제와 마을의 수재를 모아 학업을 익히게 하자, 사방의 친구들이 그 일을 노래하여 화답하였다. 평소에 삼가고 경계함으로 몸가짐을 하였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공손함과 용서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때 덕이 있는 자를 친근하게 하여 절차(切磋)의 유익함이 있게 하고자 하였다. 일찍이 자식을 가르치는 시를 짓고 말하기를, "이미 옛것을 익히고 또 새것을 알아야 하니[旣溫其故又知新], 성인 되고 우자 되는 건 본디 자신에게 달려 있다네.[爲聖爲愚自在身] 그 가운데 진실하고 분명한 곳을 알고자 한다면[欲識箇中眞的處], 내가 어른을 어른으로 존경하는 것과 친척을 친히 하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明吾長長與親親]"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마음속에 보존된 것을 알 수 있다. 계사년(1893) 4월 12일에 졸하여 천운산(天雲山) 아래 부임(負壬)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윤성연(尹聲淵)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모두 지극하였고 4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승(仁承)·의승(義承)·예승(禮承)·지승(智承)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동호(李東鎬)·하동(河東) 정장현(鄭章鉉)·양성(陽城) 이봉기(李鳳基)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누적한 행실과 풍부한 재능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에 시험되지 못하여 빛을 숨기고 아름다움을 속에 품은 채 멀리 황량하고 누추하며 적막한 물가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공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손상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동향(同鄕)에 있으면서 미적거리고 일이 많아 미처 찾아뵙지 못했는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였다. 노년에 비로소 공의 유장(遺狀)을 구해 읽었는데, 간절하게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생(李生) 승복(承福)은 바로 공의 외손으로 나와 종유(從遊)했는데, 공의 큰아들이 낳은 손자 병규(秉圭)의 명으로 나에게 행실을 기록하는 글을 요청하였다. 公妣曺。諱學臣。字乃權。號溪庵。有諱繼龍。尙眞平王公主。封昌城君。因以昌寧爲貫。卽其始祖也。自羅至麗。名勳達爵。奕世不絶。至我朝初。有諱庶。號淸澗官直提學。奉使上國。高皇帝寵異之。賜桃核盃。六傳而諱國柄。濟用監正。退寓于綾城。子孫世居焉。高祖諱鳳人。號桐坡中司馬。文行著聞。有遺集。曾祖諱東覲。祖諱賢默考諱命貨。妣興德張氏漢鳳女。閨範純備。以純廟十二月二十日。生公于淸溪里。姿稟淳厚開爽。自幼不好戱美。不好爭競。日侍親側。應封唯諾。承順如流。得一味不入口。必袖而供之。就傳受業。不煩提督而文理日就。弱冠博涉諸家。詞藻斐蔚。執喪哀毁。啜粥飮水。朔望省掃。風雨不廢。兄弟三人。友愛純篤。買山種果。鑿池蓄魚。親在以供其養。親沒以供其奠。晩年築一區精舍於淸溪之上。題其顏曰碧流。與群從昆季。日夕相對。以盡湛樂之情。又聚門子弟村秀才。使肄業。四方知舊歌其事而和之。平居持身謹勅。御家勤儉。接人恭恕。敎子孫。欲其親近有德。俾有切磋之益。嘗有訓子詩曰。旣溫其故又知新。爲聖爲愚自在身。欲識箇中眞的處。明吾長長與親親。此可以見其所存矣。癸巳四月十二日卒。葬天雲山下負壬原。配咸安尹氏聲淵女。婦德備至。生四男三女。男仁承義承禮承智承。女適光山李東鎬河東鄭章鉉陽城李鳳基。孫以下不錄。嗚呼。有積累之行。贍富之才。而不見知於人。不見試於世。潛光含章。遐擧遠引於荒陋寂寞之濱。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爲何如也。余在同鄕。因循多故。未及拜床。而奄隔千古。衰暮之日。始得其遺狀而讀之。區區追仰之情。尤切罔喩。李生承福。卽公之外孫。而從余遊。以其長房孫秉圭命。謁誌行之文。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된 덕만 공주(德曼公主)를 말한다. 사명(使命)을……하사하였다 1398년(태조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를 만나 공물(供物)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가 참소를 당해 수년간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명나라 황제는 강직한 충절에 탄복하여 사면해주었고, 복숭아 씨앗에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해서 만든 도핵배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다. 《高麗列朝登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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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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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재 정공 유사장 求心齋鄭公遺事狀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유(先儒)이니, 김점필재(金佔畢齋)의 문인으로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훌륭하게 세상에 유명해져 자손들이 계승할 만한 바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후손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때때로 유학(儒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근고(近古)의 호는 구심재(求心齋), 자(字)는 성언(成彦)인 처사(處士) 휘 양훈(陽勳)도 그중 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모습이 있어서 장난치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뛰어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날마다 곁에서 어른을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책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서 그 뜻을 듣고 인하여 말하기를, "만일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의리를 알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한가한 틈을 타서 이웃 마을 경암(敬庵) 정공(鄭公)의 문하로 나아가 배웠으니, 경암은 바로 그의 친족 장로(長老)이다. 정공(鄭公)은 평소에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가르치는 데에 법이 있었는데, 공이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준수하여 어긴 적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서부터 제사(諸史)와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순조롭게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문리(文理)와 시문(詩文)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고, 의리의 근원에 침잠하여 핵심적인 깊은 뜻에서 실마리를 뽑아내어 찾았으니, 이는 마치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마음에 보존되어 몸에 체득한 것과 남에게 시행하여 일에 조처한 것이 찬연히 조리가 있고 엄연히 법이 있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 과거 공부를 하여 시문(時文)110)의 각 체가 풍부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 종적을 감추고 전원에 빛을 숨겼으며, 삼경(三逕)111)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러니 그 뛰어난 운치와 지취, 고아한 풍격과 뛰어난 자취를 또 어찌 보잘것없이 부침하는 것으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막힌 데에서 형통한 곳으로 변하여 가고112)[否之亨], 곤란한 데에서 통하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113)[困之通] 애초에 사군자(士君子)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 아님이 없다. 공은 하동(河東)의 저족(著族)이다. 고조 휘 흘(忔)은 호가 송암(松庵)으로 정동계(鄭桐溪)114)의 문인인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이가 돈재 선생의 4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문참(文參)이고, 조부의 휘는 세채(世采)이며, 부친의 휘는 집(鏶)이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모친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조상민(趙尙敏)의 따님이니, 영조 정사년(1737) 6월 7일과 순조 기사년(1809) 8월 6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고, 묘는 신산(莘山) 응막동(鷹幕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흥상(興相)과 필상(必相)이고, 딸은 제주(濟州) 양은호(粱殷浩)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족손 정재우(鄭在禹)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저술이 적지 않았는데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어 한 글자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 있는 유풍(遺風)과 여열(餘㤠)은 고을 인사들이 전송(傳誦)한 말뿐입니다. 연대가 더욱 멀어질수록 전송(傳誦)이 점점 미약해지면 백세(百世) 뒤에 누가 다시 공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마디 은혜로운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추앙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遯濟鄭先生。吾鄕先儒也。以金佔畢齋門人。文學行義。偉然名世。而爲子孫可繼之地。是以詵詵來許。紹休趾美。往往以儒學著聞。近古求心齋處士諱陽勳。字成彦。亦其人也。自幼凝然有成人儀樣。不好戱嬉。不事遊走。日侍長者側。應對惟謹。一日見入授讀。從傍聽其義。因曰。若不讀書。何以知此等義理乎。遂挾閒就學于隣閈敬庵鄭公之門。敬庵卽其宗黨長老也。平日持守有方。敎授有法。公一遵其敎。未有違越。年弱冠。自四書五經至諸史百家。無不輪流淹貫。文理詞華。斐然成章。沈潛乎義理之源。紬縪乎肯綮之蘊。如冰解而凍釋。是以其存於心而體於身。施於人而措諸事者。燦然有條。儼然有則。每以餘日。游於功令之業。時文各體。無不贍麗。而不以得失關心。斂迹窮荒。潛光畎畝三逕花竹。四壁圖書。婆娑徜徉。聊以自遣。其偉韻逸趣。高風遐躅。又豈可以區區陞沈而差殊觀哉。否之亨。困之適。未始非士君子安身立命處也。公河東著族。高祖諱忔。號松庵。鄭桐溪門人。丙子擧義。贈判尹。是遯齋先生四世孫也。曾祖諱文參。祖諱世采。考諱鏶參奉。妣咸安趙氏尙敏女。英宗丁巳六月七日。純祖己巳八月十六日。卽其懸弧與屬纊也。墓莘山鷹幕洞亥坐原。齊淸道金氏。擧二男一女。男興相必相。女適濟州粱殷浩。孫以下不錄。族孫在禹。持家狀過余曰。著述不爲少矣。而屢失回祿。隻字不遺。其遺風餘㤠所可想象者。鄕人士傳誦之語而已。年代愈遠。而傳誦浸微。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乎。願勿悋一言之惠也。聞之不勝追仰之私。有不敢多辭云。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막힌……가고 비(否)는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비색하고 막히는 때이니, 이러한 때에는 절개를 굳게 지키면 길하여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전(象傳)〉에 "천지가 사귀지 않음이 비이니, 군자가 보고서 덕을 검약하여 난을 피해서 녹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天地不交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라고 하였다. 곤란한……것은 곤(困)은 곤란하고 험난한 때이니,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의를 잃지 않으면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곤괘(困卦) 단전(彖傳)〉에 "험하지만 기뻐하여 곤란하여도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일 것이다.〔險以說, 困而不失其所亨, 其唯君子乎.〕"라고 하였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동계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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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좌승지 송류정 민공 유사장 贈左承旨松柳亭閔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방(榮邦),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류(松柳)이니 계통은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휘 칭도(稱道)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의 봉어(尙衣奉御)였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휘 영모(令謨)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문경(文景)이고, 휘 지(漬)는 도첨의 정승(都僉議政承)으로 시호는 문인(文仁)이며, 휘 근(瑾)은 여산 부원군(驪山府院君)이니, 모두 여사(麗史)에 드러나 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중립(中立)은 판전교령(判典校令)을 지냈고, 휘 소생(紹生)은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를 지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으로, 세조조(世祖朝)에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고115), 풀려나 마침내 능주(綾州) 월곡(月谷)에 살았으니 이분이 11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해익(海翼), 증조의 휘는 수귀(壽龜), 조부 휘 정수(挺洙)는 교관(敎官)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상록(相祿)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인(淑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언규(李彦珪)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계비(系妣) 숙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광흡(李光熻)의 따님이니, 영조 을미년(1775)에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고 조숙하여 엄연히 성인의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점차 자라면서 개연히 고인(古人)의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고, 도가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고, 《소학(小學)》으로 전지(田地)를 정하고, 《대학》으로 규모를 세우며, 《논어》와 《맹자》로 조리(操履 몸가짐과 마음가짐)를 밝혔다. 그래서 매우 부지런하게 여러 번 독송하고 깊이 사색에 잠겨 이를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하였으니,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처럼 편안히 자득하였다. 자리 곁에 구용(九容)116)과 구사(九思)117)를 써놓고 출입하고 기거할 때에 늘 거울삼아 살폈다.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때 분명하게 과정(課程)을 두고 차근차근 질서 있게 매진하여 성취한 것이 많았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과 장례를 치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인정(仁情)과 예문(禮文)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늘그막에 집 한 채를 지어 편액에 '송류정(松柳亭)'이라 쓰고, 자유롭게 소요하면서 날마다 서적을 스스로 즐겼고, 명예와 이익, 화려함에 관해서는 담박하였다. 문규(門規)를 정하여 친척 간의 두텁고 화목한 정을 익혔고, 향약(鄕約)을 세워 예속(禮俗)의 사귐을 밝히자 내외의 사람들은 원망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였으니, 몸이 집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친 이익과 혜택이 많았다. 경자년(1840)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나 선하동(仙荷洞)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고암촌(鼓巖村) 앞 반룡산(盤龍山) 북쪽 기슭 정좌(丁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계사년(1893)에 손자 민덕호(閔德鎬)의 귀함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희대(文喜大)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매우 갖춰졌고 묘는 합장했으며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치형(致衡),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치승(致昇), 호조 참판에 추증된 치화(致華)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시창(金時昌)과 달성(達城) 배원태(裵元台)에게 출가했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욱(泳郁)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했을 때,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니기에 진실로 감히 받들어 감당하지 못하지만, 단지 민영욱과는 조부, 아들, 손자 3대의 가깝고 두터운 정분이 있었기에 차마 결국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榮邦。字季彬。號松柳。系出驪興。諱稱道。仕麗朝官尙衣奉御。是爲鼻祖。諱令謨平章事文景。諱漬都僉議政承文仁。諱瑾驪山府院君。竝著麗史。我朝有諱中立判典校令。諱紹生三陟都護府使。諱懷參號義庵。世祖朝謫守大靜。解放。遂寓于綾州之月谷。是其十一世祖也。高祖諱海翼。曾祖諱壽龜。祖諱挺洙贈敎官。考諱相祿贈司僕寺正。妣淑人慶州李氏彦珪女。有女士行。系妣淑人光山李氏光熻女。英宗乙未。生公于松石坊五柳村。生有異質。穎悟夙就。嚴然有成人儀度。稍長。慨然有志於古人爲己之學。嘗自警曰.非學無以知道。非道無以爲人。以小學定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明操履。誦數甚勤。思索甚苦。存之於心。體之於身。氷解凍釋。怡然自得。書九容九思於座側。出入起居。常常鏡考。敎誨生徒。的有課程。循循征邁。多所成就。性孝。生事葬祭。一遵禮制。情文兩至。晩築一室。題其顔曰松柳亭。寄敖徜徉。日以書籍自娛。至於聲利芬華泊如也。定門規以講敦睦之誼。立鄕約以明禮俗之交。內外無怨。遠近胥悅。身不出家。而利澤之及人者多矣。庚子五月十八日考終。葬仙荷洞。後移窆于鼓巖村前盤龍山北麓丁坐原。癸巳以孫德鎬之貴。贈承政院左承旨。配淑夫人南平文氏喜大女。壹儀甚備。墓祔。三男二女。男致衡。致昇出爲季父后。致華贈戶曹參判。女適光山金時昌達城裴元台。孫曾以下不盡錄。曾孫泳郁奉家狀來。有不朽之託。余以非其人。固不敢承當。而但於泳郁。有祖子孫三世契分之厚。不忍終辭云爾。 세조조(世祖朝)에……좌천되었고 1456년(세조2)에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盷)에게 송현수와 판관 권완(權完)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했는데, 민회삼이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 《梅山集 卷40 義菴閔公墓誌銘》 구용(九容)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진중하게[足容重], 손은 공손하게[手容恭], 눈은 바르게[目容端], 입은 무겁게[口容止], 목소리는 조용하게[聲容靜], 머리는 곧게[頭容直], 숨소리는 엄숙하게[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이 있게[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하는 것이다. 《禮記 玉藻》 구사(九思)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마음가짐으로,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귀 밝음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함을 생각하고[色思溫], 모습은 공손함을 생각하고[貌思恭], 말할 때는 충성스러움을 생각하고[言思忠], 일할 때는 경건함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스러울 때는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疑思問], 화를 낼 때는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재물을 얻을 때는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것이다. 《論語 季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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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편지에 답하지 못한지 또한 며칠이 지났으니, 늘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곁에서 모시는 상황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정(貞)이라는 시호(諡號)는,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을 연구하고 분비(憤悱)한다."102)는 뜻입니다. 의심스럽고 답답한 말이 끊임없이 편지에 가득하니 아끼고 우러러 보는 마음은 더욱 보통의 편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말하기는 쉽지만 그 실상을 보기는 어렵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비유입니다. 대저 한 가지 일을 함양하는 것이 공부의 본령(本領)이니 반드시 착실하게 체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것이 쌓이고 힘을 오래 쏟은 후에야 볼 수 있으니 어찌 안배하고 배치하는 것을 하여 생각하고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천여 장(丈)의 혼탁한 물이 어찌 그 중간에 한 한기만 홀로 맑을 이치가 있겠으며, 사면이 암흑같이 어두운 상황에서 어찌 중간에 한점만 밝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설혹 그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이포새(伊蒲塞)103)가 눈을 부릅뜨며 만들어내는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고 하니, 반드시 그 의리를 궁구하여 연구하여 항상 마음속에 침잠하여 스며드는 것이 있으면 또한 날마다 실천하는 사이에 성실함을 기르고 참된 것이 쌓여서 선한 힘이 점차 채워지고 자라날 것입니다. 이른바 미발(未發)의 경지로 쉽게 힘이 되어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평소에 구구하여 아직 나아가지 못한 경지이니, 이번의 나의 벗이 질문한 것에 대해 가만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괴로움을 안고 일찍이 겪어온 모습이 이와 같으니 부디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承書未復。又幾日矣。每庸耿耿。未審侍傍節宣貞謚。餘力鑽硏。而憤悱之意。疑鬱之辭。娓娓盈幅。愛仰之私。尤非尋常書尺之比。所謂言之甚易。見之實難者。眞善喩也。大抵涵養一事。是功夫本領。必着實體認。眞積力久而後。可以見之。豈希望懸想安排布置之爲哉。如千丈渾濁之水。豈有中間一條獨淸之理。四面黑窣之地。豈有中間一點獨明之理。設或有之。亦不過伊蒲塞撑眉努眼之術也。其德其不孤矣乎。必須窮硏義理。常常浸灌胸次。又於日用踐履之際。養誠積眞。使善力漸次充長。則所謂未發之地者。易以爲力。而明淨純固矣。此是愚者平日區區未就之地。而今於吾友之問。竊有同病之憐。故玆布其辛苦嘗試之狀如此。惟諒會。 분비(憤悱)한다 몰라서 분하게 여기고 표현을 못해서 답답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학자가 몰라서 분하게 여기지 않으면 나는 알려 주지 않고, 표현을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틔워 주지를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이포새(伊蒲塞) 범어(梵語) '우바새(優婆塞 ; Upāsaka)'의 이역(異譯)으로, 속세에 있으면서 오계(五戒)를 받은 남자 불교도를 뜻하며, 불교를 믿는 남자의 총칭으로도 쓰인다. 여기에서는 사술을 부리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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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암 형을 찾아가다 3수 訪省菴白兄【三首】 물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매양 한탄하나니 光陰每恨水流如만났다 헤어진 지 어느덧 여러 해 지났네 逢別於焉閱歲餘오직 책상머리에서 서책을 가까이했을 뿐 惟有案頭親簡冊언제 문 밖에서 신발과 수레 손질했던가 何曾門外理鞋車곤궁해도 서로 면려하여 절조가 견고했고 窮居胥勖節强固늙어갈수록 더욱 정이 도타워짐을 알겠네 老去愈知情不疎새로운 시 차지하고도 미처 쓰지 못했으니 占得新詩題未及나중에 편지에 써서 보내도 무방하리라 無妨他日羽鱗書머리털이 온통 하얘진 것은 탄식하지 않고 不歎鬢髮白紛如공부 과정이 여유롭지 못함을 한할 뿐이네 只恨工程未裕餘빈곤한데 어찌 소리232)에 편안함을 잊으랴 貧困豈忘安素履실패해도 앞 수레의 경계를 범하기가 쉽네 敗顚易犯戒前車이치를 연구함에 실낱처럼 정밀해야 하니 要須硏理絲毫密어찌 마음 다스림에 준칙을 엉성하게 하랴 怎使治心準尺疎번거롭게 그대가 자주 채찍질 해주었기에 煩子頻加鞭策力나는 나이고 글은 글임을 모면하게 되었네 免敎我我復書書누가 다시 성암 옹의 강건함과 같을까 省翁康健復誰如몸이 윤택하니 덕이 넉넉한 줄 알겠네 身潤方知德有餘경계 절실한 절간처럼 호화롭지 않았고233) 戒切桑門不衣馬흥이 높은 율리에서는 건거234)를 탔네 興高栗里命巾車윤리는 일찌감치 집안에서 돈독했고 理倫早向家中篤세태는 일찍 책을 통해서 멀리했네 世態曾從卷裏疎다시금 만년에 더욱 수립하여 更願晩齡彌樹立유림전에 특별히 더 써넣길 바라네 儒林傳上特加書 光陰每恨水流如, 逢別於焉閱歲餘.惟有案頭親簡冊, 何曾門外理鞋車?窮居胥勖節强固, 老去愈知情不疎.占得新詩題未及, 無妨他日羽鱗書.不歎鬢髮白紛如, 只恨工程未裕餘.貧困豈忘安素履? 敗顚易犯戒前車.要須硏理絲毫密, 怎使治心準尺疎?煩子頻加鞭策力, 免敎我我復書書.省翁康健復誰如? 身潤方知德有餘.戒切桑門不衣馬, 興高栗里命巾車.理倫早向家中篤, 世態曾從卷裏疎.更願晩齡彌樹立, 儒林傳上特加書. 소리(素履) 꾸밈이 없는 짚신이라는 뜻으로, 본분을 지키며 질박하고 청백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에 "꾸미지 않은 짚신을 신고 가니, 허물이 없으리라.〔素履往, 無咎.〕"라고 하였다. 경계……않았고 성암(省菴) 백남두(白南斗)의 생활이 검소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의마(衣馬)'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찐 말을 타는 것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서적(公西赤)이 제나라에 갈 적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라고 하였다. 건거(巾車) 휘장을 친 작은 수레로,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혹은 건거를 준비하라 명하고, 혹은 외로운 배를 노질한다.〔或命巾車, 或棹孤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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