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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행장(2) 行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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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 처사 안공 행장 松下處士安公行狀 공의 성은 안(安), 휘는 국정(國禎), 자는 순견(舜見), 호는 송하(松下)이다. 고려조의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7)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문성공의 증손(曾孫)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훈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죽성군은 휘 면(勉), 호 쌍청당(雙淸堂)을 낳았고 쌍청당은 좌찬성을 지내고 이목은(李牧隱)8)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쌍청당은 휘 정생(挺生)을 낳았고, 정생은 본조에 들어와 관직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정생의 아들 휘 을겸(乙謙)이 영암군(靈巖郡)을 다스리게 되자 이로 인해서 남쪽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을겸의 아들 휘 여재(汝再)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장흥(長興)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자손이 이로 인해 장흥에 거주하였다. 직장공의 10대손인 휘 택인(宅仁), 호 회옹(海翁)이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는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몽원(夢元)이고 조부는 휘가 수책(壽策), 호가 덕림(德林)이며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다. 가업이 조금 넉넉해지자 선행을 좋아하고 남에게 잘 베풀었다. 고(考)는 휘 영({氵+潁}), 호 금방(錦舫)이며 비(妣)는 해주 최씨(海州崔氏) 수완(粹玩)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휘가 협(浹), 호가 춘탄(春灘)으로 곧 금방공의 아우이다. 형제가 모두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9월 9일에 능주의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와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하며 성격과 기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부모를 곁에서 모시거나 명을 따르는 것이 공손하여 물이 흐르듯 하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갑자기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반드시 단정하고 바르게 앉으며 움직임도 반드시 침착하고 차분하였으니 대체로 천품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6세에 조부상을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릴 때 반드시 참여하고 빠지는 일이 없었다. 동학(同學) 가운데 굶은 아이를 보면 반드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은 상에 함께 밥을 먹었다. 같은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깊은 밤에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같이 고생하는 사람을 대접하였다. 공의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공은 두 집안에서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니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하지만 교만하고 경솔한 습성이 일체 마음에서 싹트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독서를 하는 절도(節度)는 지시나 감독이 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을 다하여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한결같이 과정(課程)을 준수하여(였으므로,)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어서는 문장(文章)이 탁월하게 되었다. 집안이 대대로 본래 효성스럽고 근신(謹愼)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데다 집안의 영향을 받아 지켜 따르고 경륜을 키우는 것이 일반 사람과 크게 달랐다. 본생부모(本生父母), 소후부모(所後父母), 승중(承重)의 상(喪)9)을 치른 것이 앞뒤로 모두 15년이었지만 상례(喪禮)를 봉행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의절(儀節)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내외의 친족 가운데 본래 곤궁한 이가 많아 끊임없이 진휼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常例)였는데 농토와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혼인을 도와주기도 하며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잘 보살펴 주었다. 같은 동네의 오랜 친구에 이르기까지 공의 덕으로 목숨을 부지한 자가 많았다. 빈객(賓客)이 이르면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매우 넉넉하게 대우하여 앉은 자리에는 술동이가 비지 않았고 문밖에는 찾아온 이의 지팡이와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비록 옹색하고 초라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찍이 냉대(冷待)하는 기색을 하지 않았다. 아픈 곳을 얘기하면 반드시 직접 약을 달였으며 치료가 끝난 뒤에야 보내주었다. 일찍이 어떤 이가 집안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찾아와 패악한 짓을 벌였지만, 공의 말을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사죄를 하고 돌아갔다. 하루는 머슴이 소를 때려 다치게 하여 소가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공이 그 상황을 듣고는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 소가 스스로 뿔로 들이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스스로 노사(蘆沙)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받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고 마침내 선생의 손자인 송사(松沙)10)와 문인인 최계남(崔溪南)11), 정월파(鄭月波)12), 정애산(鄭艾山)13)과 편지를 주고받아 강론을 펼치면서 선생이 남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자 사숙(私淑)의 의리를 기탁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노사(蘆沙)와 벽계(檗溪) 두 선생이 뒤늦게 근세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세도가 이처럼 비루하고 스승이 전수(傳授)한 학설이 이처럼 분열되었건만,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이 동방(東方)에서 천 년이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두 선생의 힘 덕택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벽계(檗溪)의 문하14)에서는 김중암(金重庵)15), 최면암(崔勉庵)16), 홍여지(洪勵志)17) 등 여러 현자가 앞뒤로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보위하여 이 세상에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습을 따른 지 오래일 것이다. 우리 조정 500년의 강상(綱常)이 오늘날 전부 벽계의 문하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면암(勉庵)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리고 학업을 연마할 길을 열었다. 하루는 고을의 수령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이 끝내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충고하기를, "사민(土民)이 되어 거만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거만한 것이 아니라 사민(土民)으로서 분수를 지키는 것이 진실로 그러할 뿐이다." 하였다. 무릇 권세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마을 이웃에 있더라도 아득하게 대하며 상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오직 학문과 행의(行義)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만 관계가 소원할지라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서로 친숙하게 지냈다.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남전(藍田)의 향약18)과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19)를 본받아 향음(鄕飮), 향약(鄕約), 강의(講儀), 독법(讀法)에 관한 의절을 봄가을로 상례로 삼아 여러 해 동안 거행하였다. 또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벗과 서로 물자를 내어 정사(亭社)를 짓기 시작하였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공사(工事)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전부 직접 주관하였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지출과 수입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영남, 호남의 여러 벗과 실내가 넓은 재숙(齋塾), 예컨대 삼가(三嘉)의 뇌룡정(雷龍亭), 단성(丹城)의 신안사(新安社), 장성(長城)의 담대헌(澹對軒), 능주(綾州)의 영귀정(詠歸亭) 등을 골라 격년으로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규정을 만들어 한두 차례 거행했지만, 세상이 혼란해져 그만두었다. 당시에 사설(邪說)이 점차 번성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강회(講會)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를, "우리 중에서 사학(邪學)에 물든 자가 있다면 응당 성토(聲討)하고 내쳐야 한다." 하고 마침내 조례를 적어 재사(齋舍) 벽에 걸었다. 갑오년(1894, 고종31) 봄 사악한 무리가 고부(古阜)를 침범하고 연달아 주변 고을을 어지럽힌 뒤 진격하여 전주(全州)를 함락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가느다란 물줄기도 막지 않으면 결국 강수(江水), 하수(河水)가 되고 실타래도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들을 이르지 않겠는가. 쑥대같이 잔약한 인생이라 큰일을 할 수는 없으니 자기 한 몸을 수양하는 계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하였다. 가을에 사악한 무리가 더욱 기승을 부려 도처를 점거하고 모여 지내어 영귀정(詠歸亭)도 도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공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를, "한 줄기 희미한 햇살이 이곳에 의지했건만 이제는 이곳마저 빼앗겼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였다. 둘이 의논하여 적을 무찌를 계책 6~7조를 진술하여 관사(官司)에 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대규모로 본주(本州)에 침입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침내 자제, 친족, 동지(同志) 5~6인과 영평(永平) 지역으로 재난을 피하였다. 몇 달이 지나고 난이 평정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재산이나 기물이 약탈당한 것을 보고 나중에 그 상황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전혀 묻는 바가 없었다. 을미년(1895) 겨울 삭발령(削髮令)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탄식하기를,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는 머리카락을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지금이야말로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때이다." 하였다. 마침내 동지 여러 사람과 산에 들어가 자신을 수양할 계책을 세웠다. 병신년(1896, 건양1) 1월 정애산(鄭艾山)이 호남의 사우(士友)들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원수에 대적하자는 뜻을 알렸다. 얼마 뒤에는 기송사(奇松沙)가 대의소(大義所)를 설치한 뒤 도내(道內)에 통지하여 알리고 2월 30일에 각 고을의 병사를 광주(光州)에 모으기로 약속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더니 즉시 달려가 군무(軍務)를 의논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뒤이어 본주(本州)에서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나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공은 광주에서 돌아와 운영과 계획에 자못 수고를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을의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공이 여러 벗과 약속하기를, "송사(松沙)가 만 번 죽을 힘으로 이 일을 준비하였다.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가 비록 고을의 의병을 이끌고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오랜 벗 몇 명과 위난(危難)에 달려가 함께 죽을 계책도 세우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벗들과 기일을 정하였다. 기일이 되기 2, 3일 전에 관동(關東)의 의병(義兵)이 무너지고 남쪽 지방이 동요하고 광주(光州)에서도 병사들이 흩어져 전황(戰況)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은 마침내 나와 보성(寶城)의 동복(同福) 등지로 재난을 피하였다가 한 달 남짓 지나서 돌아왔다. 앞뒤로 겪은 일이 매우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급하고 급박했지만, 뜻이 확고하고 생각이 차분하여 일찍이 압박을 받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수양하려는 일념은 단청처럼 빛나 온갖 시련을 겪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단발령(斷髮令)이 잠잠해지더라도 훗날의 화를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아니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또 어찌 한스럽겠는가. 옛사람이 배 안에서 《대학》을 읽은 것20)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마침내 서숙(書塾)을 청소하고 서적을 비치하여 날마다 강론과 연구에 힘을 쏟았다. 서숙이 매우 넓고 맡은 일이 쌓여있어 종종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일을 처리하고 난 뒤에는 편안히 서안(書案)을 마주하고 평상시처럼 책을 읽어 일찍이 터럭만큼도 마음에 구애받는 일이 없었다. 바람이 시원하고 달이 밝은 좋은 날을 만날 때마다 절친한 벗들과 한가롭게 이리저리 거닐거나 시를 읊으면서 아득히 속세를 벗어난 풍도(風度)를 보이거나 격앙되어 세상을 걱정하는 회포를 드러내었다. 무술년(1898, 광무2) 봄 나이가 비슷한 벗인 정창림(鄭昌林), 윤자선(尹滋宣), 김장석(金章錫), 이병섭(李秉燮), 김기수(金基洙), 이기백(李祺白), 이인환(李仁煥), 그리고 나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강론을 열기로 규약을 정하였다. 대체로 노쇠하고 떨어져 살다 보니 규약이 해이해지는 것이 두려워 이를 단속하려고 했던 듯하다. 10월 12일이 되어 윤자선의 집에 모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한 뒤 하루를 묵고 헤어졌다. 또 하루가 지난 뒤 공이 위독하여 서둘러 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근사록》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 이처럼 변하지 않았다. 인리(隣里)와 향당(鄕黨)의 남녀노소로부터 어린아이, 비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친척이 세상을 떠난 듯이 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길에는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원근에 사는 유자(儒者)들이 끊이지 않았다. 12월 3일, 살던 마을 오른쪽에 있는 방애동(方藹洞)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 세교가 쇠퇴한 이래로 덕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 의지가 굳센 자는 온화하고(함과) 유순함이 부족하고 순후하고 신실한 자는 활달함과 쾌활함이 부족하고 원만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청렴함과 강직함이 부족하다. 조화를 이루면서도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세속과 절연(絶緣)하지 않으며 겸허하고 온화한 태도로 자신을 지키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며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수양하지만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다잡는 것은 매우 신중하지만 남을 대하는 것은 매우 너그러우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매우 간략하지만, 남에게 베푸는 것은 매우 두터워 《서경(書經)》에서 말한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다)[直而溫]21)',(는 것과) 《주역(周易)》에서 말한 '같으면서도 다르다[同而異]22)'는 것이 아마도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원망이 없고 위아래가 서로 믿으며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베풀면 화답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거만하고 사나운 자는 멈출 줄 알고 교만하고 오만한 자는 공경할 줄 알고 탐욕스럽고 인색한 자는 수치를 알게 되었다. 비록 평상시에 공의 면모를 몰랐던 자라 하더라도 흠모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다른 의견이나 헐뜯는 말도 없었다. 아, 인심(人心)을 얻고 인정(人情)을 신복(信服)하게 한 것은 고인(古人)일지라도 공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빈곤하고 지위가 미천하여 널리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뿐이다. '선행을 보면 목이 마른 듯하고 악행을 보면 뜨거운 물을 만지듯 하였다.[見善如飢渴 見惡如探湯]23)'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보았다. '마음에는 정한 바가 있고 행실에는 지키는 바가 있으며 부귀로도 더하지 못하고 빈천으로도 덜어내지 못한다.[心有所定 行有所守 富貴不足以益 貧賤不足以損]24)'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을 보았다. 만약 하늘이 몇 년의 수명을 더 내려주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면 어찌 정미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광채를 발산하여 사문(斯文)의 도맥이 오래 유지되고 세도(世道)의 희망이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애석하고 애석하다! 행실을 기록하고 덕을 형용하여 후세에 전하고 사라져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일이야말로 평소에 서로 왕래하던 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삼가 이처럼 대략을 기술하였다. 배(配)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영현(泳鉉)의 딸로 고봉(高峯) 문헌공(文憲公)의 후손이다. 3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창섭(昌燮), 종섭(宗燮), 홍섭(弘燮)이고 딸은 오재동(吳在東)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둘은 아직 어리다. 公姓安。諱國禎。字舜見。號松下。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生諱勉號雙淸堂。官左贊成。與李牧隱爲道義交。雙淸堂生諱挺生。入本朝官直提學。子諱乙謙。宰靈巖郡。因寓南土。子諱汝再官直長。寓居長興。子孫因居焉。直長公十世孫諱宅仁號海翁。積德行義。鄕里著稱。卽公之高祖也。曾祖諱夢元。祖諱壽策號德林。移寓綾州家業稍溫。樂善好施。考諱氵+潁號錦舫。妣海州崔氏粹玩女。生父諱浹號春灘卽錦舫公弟也兄弟俱以孝友文學著名。以哲宗甲寅九月九日。公生于州之七松里第。儀容端粹。性氣溫仁。左右趨諾。承順如流。不戲色不暴怒。坐必端直。行必安詳。蓋其天稟然也。六歲遭王考喪。朝夕饋奠。必參無闕。見同學有飢者。必邀至家。同案共食。見隣里有飢者。歸告父母。俾有所恤。每深夜讀書。必具雞酒。以饋同苦者其風儀自幼如此。公以兩家一子。生長富饒。其慈愛可謂至矣。而驕易之習。未嘗一萌於心。奢華之物。未嘗一近於身。至於讀書節度。不甚提督而自能刻意孜孜。一遵課程。至於丱弁。文詞斐然。家世素以孝謹聞公以天姿之美。加以擩染之助。持循展拓。大異衆人。居所生所後及承重喪者。前後凡十五年矣。而執喪之節。送終之儀。必誠必信。終始如一。內外族戚素多貧乏。源源周恤。歲以爲常。或爲之備給田廬。或爲之助成婚姻。遇飢歲。尤加眷戀。至於隣里知舊。賴以存活者多。凡賓客之來。接之甚款。待之甚厚。座上杯樽不空。戶外杖屨常滿。雖寒乞遇之。未嘗以冷色加之。告病則必親煮藥餌。待其治療而後遣之。嘗有人怒門內一人。來肆悖惡。聽公言。不覺愧謝而去。一日。雇奴打傷其牛。幾斃。公聞其狀。佯若不知曰。此必非人所忍爲。必其牛之自觸致然也。中年以後。遂廢擧子業。專心性理之學。自以未及受業於蘆沙先生之門爲至恨。遂從先生之孫松沙及其門人崔溪南鄭月波鄭艾山。往復講磨。得聞其餘論。以付私淑之義。嘗曰蘆沙檗溪兩先生之晩出於近世者。天意甚不偶然。世道若是汗下。師說若是分裂。而使程朱正脈。不絶於東方千載之後者。未必非其力也。又曰。檗溪之門。金重庵崔勉庵洪勵志諸賢之前後斥邪衛正。大有功於斯世。不然。吾輩之爲被髮左袵久矣。孰謂我朝五百年綱常。在今日而不盡出於檗溪之門耶。遂上書贄於勉庵先生。以開講業之路。一日邑宰請見。公終不往。或規之曰。爲土民而倨傲如是耶。公曰。我非倨傲也。守土民之分。是所固然耳。凡聲勢之右於己者。雖在鄕隣。邈然若相忘。惟學問行義之勝於我者。則雖在疎遠。誠心愛好。綢繆相熟。與鄕裏士友。擬藍田及鹿洞規例。行鄕飮鄕約講儀讀法之節。春秋爲常。行之有年。又患講聚之無所。與諸友互相出力。經始亭社。首尾三年。凡百功費。皆自尸之。而無一人問其出入者。其見信於人如此。又與嶺湖諸友。擇齋塾寬闊如三嘉之雷龍亭。丹城之新安社。長城之澹對軒。綾州之詠歸亭。爲間年會講之規。一再行而以世亂止。時邪說漸熾。公嘗於講會席上。颺言曰。在吾儕而如有浸染邪學者。當鳴鼓而攻黜之。遂書條約。揭于齋壁。甲午春。邪類犯古阜。連撓旁邑。進陷全州。公聞之歎曰。涓涓不壅。終爲江河。綿綿不絶。或成網羅者。非是之謂耶。蓬蓽殘生。旣不能有爲。則只爲一身自靖之計可也。秋邪類益熾。在在盤聚。詠歸亭又爲賊所據。公不勝忿憤。要余相見於中路。放聲大哭曰。一縷微陽。所寄在此。而今乃見奪。吾輩其將安往乎。議陳勦除之策六七條。獻于官司。未幾。賊大入本州。禍不可測。遂與子弟族戚及同志五六人。逃難于永平地。數月亂平歸家。見生産什物。沒被侵掠。追知其狀甚悉。而一無所問。乙未冬。削令甚急。公歎曰。與其薙髮而生。何如存髮而死。舍魚取熊。此其時也。遂與同志諸人。爲入山自靖計。丙申正月。鄭艾山寄書湖南士友。示以同仇之意。旣而奇松沙設大義所。通喩道內。期以二月三十日。聚各邑兵於光州。公聞卽馳往。贊議戎務。繼而本州又謀擧義。余亦參其謀。公自光州還頗費經畫。未幾日。以鄕議不合而罷。公與諸友若曰。松沙出萬死之力。已設此擧。而勤王有日。則吾輩雖不能以鄕兵赴之。獨不可與知舊多少人爲赴難同死之計耶。遂與定期。前期數三日。關東義兵潰。南方繹騷。光州又罷兵。火色甚急。公遂與余逃難於寶城同福等地。月餘而還。前後所遭蒼黃震越。極其區測。而志定慮靜。未嘗有怵迫萎索之氣。至於自靖一念。炳然如丹。雖千生萬受。而有所不渝也。公曰。薙令雖浸。而後日之禍。寧可測耶。固知吾輩死亡無日。而朝聞夕死。又何恨焉。古人之舟中大學。良以是也。遂掃塾儲書。日以講討爲務。家戶深闊。事務叢委。往往有難堪耐處。而處置了後。晏然對案。讀書如常。未常有一毫介滯於中者。每當風月良辰。輒與朋知逍遙吟哦。悠然有出塵之標。慨然有傷世之懷。戊戌春。與年輩友鄭昌林尹滋宣金章錫李秉燮金基洙李祺白李仁煥及余爲一朔一講之規。蓋恐衰老離索。繩約廢弛。而爲此團束之也。至十月十二日。會于尹滋宣家。講近思錄一宿而別又一宿而公病馳往見之則氣息已絶。而近思錄猶在其手矣。好學之誠。至死不渝者如是。隣里鄕黨老少男女。至於童幼卑賤。無不咨咨涕洟。如喪親戚。遠近章甫操文來哭者。屬屬於道。十二月初三日。葬于所居村右方藹洞乙坐之原。嗚乎。自世敎衰。而德之難全久矣。剛毅者欠和裕。醇實者欠開爽。圓通者欠廉介。若夫和而不同於流。貞而不絶於俗。溫溫自持而有不可犯者在焉。謙謙自牧而有不可輕者存焉。檢身甚詳而待人甚恕。奉已甚約而施人甚厚。書所謂直而溫。易所謂同而異者。公其庶幾焉。是以內外無怨。上下相信。言之而人無不服。施之而人無不和。强梗者知戢。驕敖者知敬。貪吝者知恥。雖平日之不知面貌者。無不愛慕欽欽。無異言間辭。嗚乎。得人之心。服人之情。雖古之人。恐無以過之。但其窮約布素。而所及者不廣耳。見善如飢渴。見惡如探湯。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心有所定。行有所守。富貴不足以益。貧賤不足以損。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若使天假之年。從容優游。磨礱浸灌。豈不能究極精微。出治光彩。以壽斯文之脈。以係世道之望哉。痛惜痛惜。至於記其實狀其德。以傳諸後。不使任其泯沒。則此非平日遊從者之責也耶。玆不敢付諸別人。而謹述梗槪如是云耳。齊幸州奇氏泳鉉女。高峯文憲公之後。擧三男三女。男昌燮宗燮弘燮。女適吳在東。餘二幼。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 안향(安珦, 1243~1306)을 가리킨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최초의 주자학자라 할 수 있다. 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승중(承重)의 상(喪) 가통(家統)을 잇는다는 뜻이다. 맏아들이 아버지가 사망하여 가통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할아버지 생존 중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뒤에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 즉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받아 할아버지에게 승중복으로 참최 삼년복을 하였다는 뜻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가리킨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가리킨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계남집》이 있다. 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을 가리킨다.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가리킨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벽계(檗溪)의 문하 벽계는 경기도 양근의 개울가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살던 곳이다. 이항로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성리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김중암(金重庵)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말한다.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인이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홍여지(洪勵志) 홍재학(洪在鶴, 1848∼1881)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문숙(聞叔)이다. 남전(藍田)의 향약 남전은 남전 여씨(藍田呂氏)로,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를 이른다. 이들이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으니, 이것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이다.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릴 때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동규(白鹿洞規)이다. 옛사람이 …… 읽은 것 남송(南宋) 때의 충신인 육수부(陸秀夫)는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배를 타고 도망가면서도 《대학(大學)》을 강학(講學)하기를 권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경(講經)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구덕(九德)의 하나이다. 구덕은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것[寬而栗],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것[柔而立], 성실하면서도 공손한 것[愿而恭], 가지런하면서도 공경스러운 것[亂而敬], 온순하면서도 굳센 것[擾而毅], 곧으면서도 온화한 것[直而溫], 간략하면서도 반듯한 것[簡而廉], 억세면서도 독실한 것[剛而塞], 용맹하면서도 의를 좋아하는 것[彊而義]이다. 《書經 皐陶謨》 같으면서도 다른 《주역》 규괘(睽卦)의 상(象)에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上火下澤, 睽. 君子以, 同而異.]" 하였다. 선행을 …… 하였다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마음에는 …… 못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권1 〈상로제일(相魯第一)〉에 나오는 말이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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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용암 처사 김공 행장 龍巖處士金公行狀 공의 휘는 우종(佑鍾), 자는 내선(乃善)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전리 판서(典理判書) 휘 광리(光利)가 비조(鼻祖)이다.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누대에 걸쳐 성대하였다. 고조는 휘 명천(命天)이고 증조는 휘 기성(起聲)이며 조부는 휘 윤광(潤光)이다. 고(考)는 휘가 재영(在{王+營})이고 비(妣)는 진양 정씨(晉陽鄭氏) 기택(基宅)의 딸이다. 헌종 정유년(1837, 헌종3) 1월 2일에 진해(鎭海)의 실안리(實安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총명함이 남달라서 부모가 몹시 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 능주(綾州)의 용반촌(龍盤村)으로 옮겨 살았는데, 천 리 거리를 이사하고 집은 네 벽만 서 있을 정도여서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었지만, 대인(大人)은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온 힘을 쏟았다. 서당이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돌을 치우고 나무를 베어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깊은 밤마다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스승과 동학(同學)들을 대접하여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조금 자라자 현능한 사우(士友)를 뒤따라 전국 각지를 유학(遊學)하게 하고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은 헤아리지 않았다. 공은 아버지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더욱 자신을 담금질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학문은 날로 더욱 풍부하고 해박해졌으며 문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덕망과 명성이 원근에 떠들썩하였고 같은 시대의 명사(名士) 가운데 교류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25)이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공이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고 끊임없이 배행하여, 입으로 전하거나 마음으로 전한 핵심과 오묘한 뜻은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많았다. 박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畫)에 대하여 더불어 종유(從遊)할 만하기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하였다. 대인(大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급작스럽게 집안일을 꾸려 가게 되었다. 집에 지닌 것이 없고 빚만 산처럼 쌓였지만, 집으로 찾아와 빚을 독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마도 말하기도 전에 신뢰가 이미 갖추어져 사람들이 공을 매우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빚을 모두 상환하자 비로소 말하기를, "늘 이 일로 말미암아 좋지 않은 말이 선친(先親)에게 미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겠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의 집에 가서 머물며 함께 학업을 닦았다. 하루는 공이 밖으로 나가서 저녁 무렵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곡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내가 나가서 보았더니 공이 계곡 옆 바위에 서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선군(先君)께서 술에 취해 저녁에 돌아오실 때마다 반드시 이 바위 위에서 서서 우룡(禹龍)[어릴 때 공을 부르던 이름이다.]을 불러 등에 업고 건너게 하셨다. 지금 저녁 무렵에 이곳에 이르자니 홀연히 당시의 정경(情景)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곡을 하고 눈물이 흘렀다." 하였다. 하루는 오래된 종이에서 선인의 수묵(手墨 친필)을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눈물을 쏟았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고아를 거두어 혼사를 치르고 가산을 마련해 주어 자기가 낳은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을해년(1875, 고종12)에 노사 선생(蘆沙先生)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선생이 공의 뛰어난 자질을 아끼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으로 보자면 세상에 좋은 자질을 지닌 자가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 가을 영남과 호남 양도(兩道)의 사우(士友), 예를 들어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26),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27) 등과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모여 며칠 동안 강마(講磨)를 하고 돌아갔다. 계사년(1893) 봄 계남과 애산이 능주(綾州)를 지나자 공은 그들을 영귀정(詠歸亭)으로 맞이하여 날이 저물고 밤이 다하도록 쉬지 않고 강론을 벌였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공이 먼저 가면서 석양 무렵에 묵계(墨溪)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애산 등 여러 벗이 품평(品坪)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옹점치(甕店峙)를 넘는데 고개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밀고 당기며 기어오르듯 하느라고 견딜 수 없이 목이 말랐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술과 음식 등을 장만하여 기다리는 공을 만나 일행이 모두 흠뻑 취하여 갈증을 풀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의 치밀함이 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의 책이 아니면 보지를 않았고 상도(常道)에 맞는 인간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예에 맞지 않는 곳에는 이르지 않았고 의에 맞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았으며 몸소 밭을 갈고 손수 김을 매어 자기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생도(生徒)가 사방에서 모여들자 재주의 어짊과 어리석음에 따라 차근차근 엄격하게 가르쳤다. 초야와 산림에 묻혀 지내면서도 한 시대의 문학적 기풍이 성대하여 매우 볼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탕약(湯藥) 시중을 드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로써 평소에 학문을 익힌 힘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이런 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디에 정성을 기울이겠는가.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장차 평생에 걸쳐 후회하게 될 것이다. 힘쓰거라." 하였다. 한 우인(友人)이 고을의 수령이 되자 그를 아는 사람이 현(縣)의 관아(官衙)를 매일 드나들었다. 공이 경계하기를, "옛날에 원찬(袁粲)28)이 포의 시절에 사람을 만나 그와 꽤 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찾아갔으나 원찬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알던 고을 수령이 포의 시절에 만난 원찬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사람을 정도(正道)로 바로잡은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항상 좋은 산수를 꾸미는 것을 여생을 보내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거처를 옮겨 한천(寒泉)의 산중(山中)에 은거하여 곤궁하게 지내면서 봉청리(鳳聽里)라고 이름을 붙였다. 평소 관아에 발길을 하지 않았고 고을 수령을 만나지 않았으며 모든 명예나 이익, 영예나 현달에 대하여 담박하였다. 이때가 되어서는 더욱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교유를 끊고 서적(書籍)에 정신을 집중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회포를 풀었다. 물아(物我)를 벗어나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뿌리가 감춰진 나무, 광채를 간직하고 있는 구슬과 같았다. 무술년(1898, 광무2) 10월 1일에 세상을 떠나 보성(寶城)의 복내진척(福內眞尺) 금성곡(金聲谷)의 유좌(酉坐)에 묘를 썼다. 배(配)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석진(碩鎭)의 딸로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낙부(洛富), 낙인(洛麟)이고 딸은 이서일(李瑞一), 조병채(曺秉采), 정덕홍(鄭德洪), 박선동(朴善東), 위계옥(魏啓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인 두용(斗榕), 기용(基榕)은 큰아들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공은 순후하고 성실하며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성정(性情)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다. 사람을 접하면 온화한 태도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물을 접하면 진실한 마음이 동물(사물)을 감동시켰다. 남에게 간언하여도 그가 비방으로 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만들어도 그 사람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교만한 자는 스스로 굴복하고 험담을 하는 자는 스스로 그만두었다. 공이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태이더라도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고 경박한 장난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왕래하며 친교를 맺어 진퇴(進退)에 서로를 의지하고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서로 안부를 묻고 득실에 대해서 서로 충고를 주고받았다. 인연을 끈끈하게 맺어 가장 가깝고도 오랜 관계이지만 한 번의 언행조차 의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은 사문(斯文)의 순유(醇儒)이고 요즘 세상의 일민(逸民)이라고 이를 만하다. 평소에 알고 지낸 옛날 벗들 가운데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벗의 지행(志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그들을 위하여 행적을 찬술한 것이 많았지만, 유독 공에게만 미치지 못하였다. 몸은 병들어 한 올의 실타래같이 위태로운 숨결인지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백세(百世) 뒤에 다시 공을 아는 자가 누구일지가 늘 두려웠다. 인하여 인품과 재능의 대강을 이처럼 기술하였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공에게 영합하려는 뜻이 있겠는가. 공의 풍도에 대해서 듣고 공의 의리에 탄복한 자는 응당 알 수 있을 것이다. 公諱佑鍾。字乃善。金氏系出光山典理判書諱光利。其鼻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命天。曾祖諱起聲。祖諱潤光。考諱在王+營。妣晉陽鄭氏基宅女。憲宗丁酉正月二日。生公于鎭海之實安里。生而岐嶷。穎悟異常。父母甚器之。是歲移寓于綾州龍盤村。千里遷徙。四壁徒立。調度辛勤。而大人以敎子一事爲十分專務。齋距家爲十里餘。伐石斬木。以坦其路。每於深夜。親齎酒饌。往饋其師及同學者。以慰其勤苦。稍長。令從賢士友。遊學四方。不計家力之不贍。公敬承親志。益自激勵。未始有須臾之或怠。是以問學日益贍博。詞華日益斐蔚。聞望聲輝。藉藉遠近。一時名士。無不願交。時無邪齋朴先生在同鄕。公造門肄業。源源陪從。其口傳心授。肯綮蘊奧。多人所未及者。先生嘗語人曰。翰墨間可與遊從。惟此人而已。大人歿。公猝然當家。家無所有。而積債如山。然未見有一人臨門索債者。蓋信在言前。人已信之也。未幾年。了還其債。乃曰。常恐緣此而使不美之言。及於先親。今而後。可以舒脚眠矣。余嘗往住公家。同硏一日。公出外。日昏不至。忽有哭聲自外聞。余出見之。公立於溪邊石上。問其故。公曰。昔先君每乘醉暮還。必立此石上。呼禹龍【公小字】使負而渡之。今乘昏到此。忽念其時情景。不覺哭泣之發也。一日見先人手墨於舊紙。執之泫然。伯氏早歿。撫其幼孤。爲之成昏設産。無間已出。乙亥往拜蘆沙先生。先生愛其姿質之美。因語人曰。以此一人觀之。世上好姿質何限焉。辛卯秋與嶺湖兩道士友。如崔溪南琡民鄭艾山載圭。會于方丈之華巖寺。講磨數日而歸。癸巳春。溪南艾山過綾州。公邀會于詠歸亭。講討娓娓終日竟夕。臨發公先行。約以夕陽遇墨溪。艾山諸友至品坪小憩。踰甕店峙。極峻急。扶携躋攀。不勝困渴。至嶺上。見公具酒饌等候。一行皆洽醉解渴。其處事糾密多如此。不觀非聖之書。不親非常之人。不到非禮之地。不取非義之物。躬耕手鋤。自食其力。敎授生徒。四方坌集。隨才賢愚。循循雅勅。山林巖穴之間。一時文學之風。蔚然可觀。有人在積年侍湯之中者。公語其人曰。此可以見平日學問之力。爲人子者。於此而不用其誠。惡乎用其誠。如有一毫之不盡。將爲畢生之悔。勉之。一友人爲邑宰。所知每出入縣衙。公戒之曰。昔袁粲遇人於野。頗與之款。後其人往見之。袁粲拒之不納。安知邑宰前日之知。非袁粲野外之遇乎。其勉人以正。皆此類也。常欲粧點好山水爲終老計。乙未移營薖軸於寒泉山中。名之曰鳳聽里。平日不到城府。不見邑宰。凡聲利芬華澹如也。至是益沈晦。杜門斂迹。絶息交遊。遊心於詩書之間。騁懷於風月之中。嗒然充然。如晦根之木。蘊輝之珠。戊戌十月一日卒。墓寶城福內眞尺金聲谷酉坐。配坡平尹氏碩鎭女。二男五女。男洛富洛麟女適李瑞一曺秉采鄭德洪朴善東魏啓玉。孫斗榕基榕長旁出。餘皆幼。嗚乎。公淳實謹慤。沈靜寡黙。接人而和氣薰人。接物而誠意動物。諫人而人不以爲謗。勞人而人不以爲厲。驕敖者自屈。浮放者自戢。凡公之所在。雖稠座紛雜之中。爭競不生。戲褻不作。其見重於人如此。余自童丱。至老白首。出入相友。進退相須。吉凶相問。得失相規。夤緣綢繆。最親且久。而未見其一言一行有不出於義理者。公可謂斯文之醇儒。今世之逸民。余於平生知舊先我逝者。哀其志行之無傳。爲之撰述其行者多矣。而獨於公未之及焉。常恐一縷病喘。朝夕溘然。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因以述其行治之梗槪如此。豈有一分阿好之意。聞公之風而服公之義者。當有以知之。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 박영주(朴永柱, 1803∼1874)를 가리킨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 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이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 《무사재집》이 있다.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원찬(袁粲) 420~477. 남북조 시대의 송(宋)나라 사람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묵양재 양공 행장 黙養齋梁公行狀 공은 성이 양(梁), 휘가 익환(益煥), 자가 중경(重慶)이며 관향(貫鄕)은 제주(濟州)이다. 당요(唐堯)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가 한라산(漢挐山)으로 내려와 탐라국(乇羅國)을 세우고, 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작위(爵位)와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동방(東方)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휘 팽손(彭孫)29), 호 학포(學圃)가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세상에서는 기묘 명류(己卯名流)로 일컬으며 조정암(趙靜庵) 선생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팽손은 교위(校尉)를 지낸 휘 응기(應箕)를 낳았으며, 응기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산립(山立)을 낳았다. 산립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인용(仁容)을 낳았으며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독서를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인용은 진사(進士) 휘 위남(諱渭)을 낳고 위남은 참봉에 제수되고 효성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위남은 휘 우전(禹甸)을 낳았으며 우전은 덕을 숨기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우전은 휘 지해(之瀣), 호 익우(益愚)를 낳았으며 지해는 우암(尤庵) 송(宋) 선생3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월곡(月谷)의 옛 전장(田莊)에서 송석정으로 나와서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그 지역에 집안을 이루었다. 지해는 휘 대하(大夏)를 낳았고, 대하는 현감을 지낸 휘 익조(益祖)를 낳았다. 익조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성헌(成憲)을 낳았는데,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일현(一鉉)이고 조부는 휘가 찬호(贊浩)이다. 고(考)는 휘가 식(栻)으로 문장과 덕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비(妣)는 장흥 마씨(長興馬氏) 언모(彦模)의 딸로 헌종 기해년(1839, 헌종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체구가 넉넉하고 얼굴이 둥글며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엄숙하고 장중하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다. 어려서부터 포부와 신조를 지니고 있어 말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으며 집안에서 효(孝)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을 표하는 의절(儀節)을 어기지 않았다. 집안이 평소 청빈(淸貧)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음식조차 자주 거르는 형편이었으나 몸소 농사를 지으며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시(詩)와 예(禮)에 밝은 명문가인데다 원림(園林)과 수석(水石)이 빼어난 곳에 살고 있어 평소에 왕래하는 선비나 사계절에 노닐며 즐기는 사람들로 뜨락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지만, 공은 주선하는 일에 힘을 다하고 접대에 정성과 예우를 갖추어 환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한가한 날에는 가숙(家塾)을 깨끗하게 치우고 아우인 덕환(德煥)과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학업을 연마하며 과정(課程)을 그치지 않았다. 평소에 인륜을 소중히 여기고 학식과 품행을 갖춘 선비를 숭상하며 권세나 이익에 빌붙지 않고 영예나 현달을 추구하지 않아 함께 교유한 자들은 모두 누추한 골목의 빈한한 벗들이었다. 남과 어울리는 것은 온화하면서도 정직하여 업신여기거나 예모 없이 대하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너그러워 애매하거나 대충대충 넘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종족(宗族)에게 사랑을 받고 붕우에게 신뢰를 받고 향리(鄕里)에서 흠모를 받았다. 대체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치가 의심스러우면 공에게 의지하고 자문(諮問)하여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중년에 아내를 잃었는데 여러 자녀가 모두 어린 나이였다. 그 정황이 애처로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이유로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다. 가숙(家塾)을 열고 스승을 맞이하여 자녀 교육에 매우 힘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평생의 소원은 오직 글을 읽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매번 경계할 때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독서를 하면서 나물 먹고 물 마시는 것조차 부족하였지만 학업은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들은 예전보다 배가 부르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이를 수 있건만 나태함이 더해서야 되겠느냐. 글을 읽고 행동을 삼가며 집안의 좋은 자손이 되는 것이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삼생(三牲)과 팔진미(八珍味) 같은 진수성찬으로 부모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공은 호방하고 기개가 넘쳤지만 남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늙어서는 더욱 외롭게 지내면서 묵양(黙養)을 자호(自號)로 삼아 만년에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을 기탁하였다. 원계(遠溪)로 연재(淵齋) 송(宋) 선생31)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또 면암(勉庵) 최(崔)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려 끝까지 의지하고 우러러 받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부절이 들어맞듯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았다. 선대(先代)의 전장(田莊)을 중수(重修)하여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어 아우와 노년에 이르도록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겼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을 만날 때마다 근처의 옛 친구를 불러 산 경치가 보이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은거하는 삶의 회포를 풀었다. 갑진년(1904, 광무8) 11월 23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 우봉(牛峰)의 왼쪽 기슭 선영 아래 갑자(甲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혁주(赫周)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기수(箕秀)의 딸이다. 모두 3남 5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회종(會宗), 회윤(會潤)이고 딸은 이기무(李基茂), 박재현(朴梓鉉), 임노일(林魯一), 김모(金某), 오모(吳某)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나와 공의 관계는 부친과 조부 때부터 대대로 교분(交分)이 있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다. 옛날 공의 선대인(先大人) 형제를 기억해보면 나이가 많고 덕이 깊어 풍도(風度)와 운치(韻致)가 뛰어났으며 내 선인(先人)과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불초(不肖)한 내가 만년에 이르러 또 공의 형제와 함께 늙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선대 때와 같으리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다만 공이 좀 더 세상에 남지 않고 보잘것없는 나만 뒤에 남았으니, 나의 끝없는 한이 어찌 우리 고장의 불행에서 그치겠는가. 회윤(會潤)이 조카 일승(一承)을 시켜 가장(家狀)을 지니고 나에게 와 영원히 후세에 전할 문장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보잘것없지만, 공을 잘 알기로는 진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어찌 감히 자꾸 사양하면서 서로 왕래했던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에 눈물을 훔치고 붓을 적시어 적어 보낸다. 公姓梁。諱益煥。字重慶。貫濟州。唐堯時。良乙那降于漢挐山。建國乇羅。至羅麗。世襲爵勳。爲東方著姓。至中葉有諱彭孫校理號學圃。世稱己卯名流。與趙靜庵先生。同享竹樹院。是生諱應箕校尉。是生諱山立贈戶曹參判。是生諱仁容僉正。築松石亭。以文籍自娛。是生諱渭南進士。除參奉。以孝旌閭。是生諱禹甸。隱德不仕。是生諱之瀣號益愚。受學尤庵宋先生之門。自月谷舊庄。出居於松石亭。因家焉。是生諱大夏。是生諱益祖縣監。是生諱成憲通德郞。於公爲高祖。曾祖諱一鉉。祖諱贊浩。考諱栻。世著文行。妣長興馬氏彦模女。以憲宗己亥生。公體厚面圓。風儀峻整。聲音弘亮。幼有志操。言笑不凡。入孝出恭。未有闕儀家素淸貧。簞瓢屢空。躬幹耕稼。備盡忠養。以詩禮名家。兼有園林水石之勝。平日過從之士。四時遊賞之人庭屨常滿。公周旋竭蹶。接待款厚。無一人失歡。間以餘日。淨掃家塾。與弟德煥對兀連業。不廢課程。平日愛好人倫。敦尙儒雅。不附勢利。不趨芬華。所與遊皆坊曲寒友生也。其接人和而正。不見有侵侮好狎之意。其處事公而恕。不見有依違苟且之狀。是以宗族愛之。朋友信之。鄕里慕之。凡事有所難。理有所疑。無不待以咨決焉。中年喪耦。諸子女皆幼。其情景可哀。而少有過差。不以愛憐而有所假借。開塾邀師。敎之甚力曰。平生所願。惟是文種不絶。每戒之曰。吾兄弟幼而讀書。咬菜飮水。猶爲不充。而課業不敢有懈。今汝輩比前日。可謂飽暖而怠惰過之耶。讀書勅行做人家好子孫。此是養志之大者。不然。三牲八珍。何足爲孝也。倜儻寡諧。老益踽凉。自號黙養。寓晩年自遣之意也。拜淵齋宋先生於遠溪。又上書贄於勉庵崔先生。以付究竟依仰之計。與奇松沙宇萬鄭艾山載圭。契遇甚密。往復不絶。重修先庄。栽花種竹。與其弟到老白首。日夕湛樂。每遇良辰佳節。招致備近知舊。婆娑徜徉於山色水聲之中。以敍幽逸之懷。甲辰十一月二十三日。以宿疾終。葬牛峰左麓先塋下甲坐原。配豐山洪氏赫周女。系配天安全氏箕秀女。擧三男五女。男會宗會潤。女李基茂朴梓鉉林魯一金某吳某。孫以下不盡錄。嗚乎。余於公。爲父祖世交。丱角舊遊。記昔公先大人兄弟。耆年淵德。風韻偉然。而與我先人。遊好源源。豈知不肖晩年。又得與公兄弟同衰相從如當日耶。但公不少延。而沙石在後。區區無窮之恨。豈止爲吾鄕之不幸也。會潤伻其姪一承。抱家狀。託以不朽之文。自惟無狀。而知公之深。則固不後於人矣。豈敢多讓而謂非從遊者之責乎。抆淚泚筆。書以還之。 휘 팽손(彭孫)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가리킨다. 자는 대춘(大春)이고,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1630년(인조8)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18) 순천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다. 우암(尤庵) 송(宋) 선생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이름은 시열(時烈),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에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연재(淵齋) 송(宋) 선생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말한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ㆍ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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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5) 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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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회락】1)에게 주다 與梁處中【會洛】 상단(上段)에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人生氣稟, 理有善惡】"라고 한 구절은, 품부받은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이로부터 나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단(下段)에 "악함도 또한 성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라고 한 구절은, 유행(流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과함과 모자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근본이 모두 성(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풀이하신 "품부받은 기질에는 반드시 선과 악의 차별이 있는 까닭도 또한 성의 이이다【所稟之氣, 所以必有善惡之殊者, 亦性之理】"라는 말은, 바로 '이에도 성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과 악의 분별이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애초부터 이가 아님이 없다【以爲氣有淸濁粹駁, 而爲善惡之分者, 亦未始非理】'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칫 그 '이(理)'라는 글자가 '실리(實理)'의 '이'로 간주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말하기를 "여기서 '이'는 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理當如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또한 하단을 해석한 부분에서 바로 '유행(流行)' 및 '과함【過】과 모자람【不及】' 등의 용어에 대해 말한 것은 볼 만합니다. '미발(未發)'은 본시 마음【心】의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니, 품부받은 기질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래 '미발(未發)'이라는 글자가 상단과 하단에 나뉘어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본래 나의 의견이 아닙니다.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경우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材料)이니, 때에 따라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때【未發時】의 경우에는, 다만 전고의 인용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내가 일찍이 '이치상 선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구절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시절이며, 다만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만을 언급한 것이겠습니까.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것【未發】보다 어질다고 하는 것은, 품부받은 기질에 선과 악이 없다고 한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이 오로지 이 마음을 일으켜서 유행한 후의 사물을 보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아 보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논의한 여러 조목이 혹 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어느 곳에서는 "발현이 되지 않은 때에는 기질에 청탁(淸濁)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하였고, 또한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지만 악이 본디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선과 악이 상대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잘못 이해하신 것이니, 이것은 내가 말한 뜻이 아닙니다. 기질이 일에 쓰이지 않으면 담연하고 허정(虛靜)하여서, 진실로 청탁(淸濁)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하물며 선악이 있다고 말할 만하겠습니까. 다만 그 품부받은 기질의 본질은 아주 잠깐의 미발(未發)로 갑자기 성인(聖人)과 같이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설을 멀리서 인용할 필요가 없어서, 다만 그대【高明】가 알려준 '맑고 깨끗한 기질【澄淸之氣】은 성인(聖人)이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것이나, 뭇 사람들은 홀연히 그것을 잃는다'라고 한 말을 그대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홀연히 그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별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 바로 자기의 품부받은 기질이 같지 않은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지 않은 구별이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입니다.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인가【臨發而排定耶】'란 것에 대해서는, 만약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이면, 정자(程子)는 마땅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이 동요하여 선악이 있게 된다'라고 하지, '이(理)에 선악이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理)가 비록 선하거나 악하더라도 그 이는 아직 형질을 갖추지 않는다면, 청탁(淸濁)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악(善惡)이 상대적이라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가만히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으면, 그 더러움이 발동하지 않으나, 그 맑은 것이 깨끗한 그릇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이 설명에 어찌 조금의 의심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극념(克念)과 망념(罔念), 공(公)과 사(私), 향(向)과 배(背)로써 구별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기질(氣質)의 선악으로 갑자기 성인이 되고, 갑자기 광인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안자(顔子)의 홍로지설(洪爐之雪)2)이나 시우지화(時雨之化)3)와 같다면, 한 번 맑아져서 곧바로 변화하여서 성인(聖人)의 기질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큰 근본도 또한 어찌 보면 기질을 떠나서 세운 것이니, 다만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은 상태에서 늘 맑고 고요함은, 이 큰 근본이 서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한 설은, 내가 일찍이 미발(未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단에서 유행(流行)을 설명한 곳과 비교하여서 단락이 없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올바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이에 "곧바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서 말했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봐주길 바랍니다. 변별한 것은 많으나, 구별한 것은 단지 한 곳밖에 없으니, 한 곳이 합당하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대저 '기불용사(氣不用事)' 네 글자를 상세하게 보아서 알아차린다면, 마땅히 막히고 통하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보여주십시오. 上段人生氣稟。理有善惡。是氣稟有淸濁粹駁。而爲善爲惡。於此分焉之謂也。下段惡亦不可不謂之性是就流行上有過不及之差者。其本皆出於性之謂也。朱子解之曰。所稟之氣。所以必有善惡之殊者。亦性之理。此是解理有善惡一句。以爲氣有淸濁粹駁。而爲善惡之分者。亦未始非理云爾。然怕人將此理字。作實理看。故旋又曰。此不是說實理。猶云理當如此。又於解下段處。卽以流行及過不及等語。言之此可見矣。未發。本是心上說。不當於氣稟上。下未發字。分上下段。作未發已發。亦本非愚意也。淸濁粹駁。此是氣稟之本色材料。不可以隨時有無。而於未發時。則但不用事焉耳。況愚未嘗以理有善惡爲未發時節。而特以氣稟上本色材料言之耶。賢於未發。謂無氣稟善惡則可矣。而若以淸濁粹駁。專作此心流行後物事看。恐不然矣。更詳之如何。所論諸條。或不無不諒鄙意處。有曰。未發時。氣有淸濁駁混。又曰。氣不用事。而惡自在。又曰善惡相對云云。鄙說若果如此則誠誤矣。然此非愚之言也。氣不用事。澹然虛靜。固無淸濁之可言。況有善惡之可說乎。但其氣稟本質。有不可以霎刻未發。而遽變如聖人。今不必遠引他說。只以高明所諭澄淸之氣。聖人常久而不失。衆人忽然而失之之言。言之。其常久而不失。其故何在。忽然而失之。其故何在。其故不在別處。不在別人。而在於自己氣質所稟之不同。然則其不同之分。自來已然耶。至於臨發而排定耶。若臨發而排定。則程子當曰。人生氣稟。動有善惡。不當曰理有善惡。理雖善惡。而其理未形。則不可謂淸濁混。亦不可謂善惡對矣。水雖在濁器。而止而不動。則濁不用事。而其淸與在淨器者。無異。此說何須疑也。作聖作狂。以克念罔念。公私向背言之。何嘗以氣質善惡。忽然而聖。忽然而狂耶。如顔子洪爐之雪。時雨之化。則一澄淸便渾化。却與聖人氣質無異矣。大本亦何嘗離氣質而立。但氣不用事而湛一虛靜。此大本所以立也。人生氣質理有善惡之說。愚未嘗認作未發看。但比下段說流行處。不能無段落耳。如此看。恐爲正當。而乃曰迂回耶。更詳之爲望。所辨雖多。而所分只在一處。一處合則無不合矣。大抵氣不用事四字。詳細看取。宜無許多窒礙矣。如何如何。更示至當之歸也。 양회락(梁會洛, 1862~1935)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홍로지설(洪爐之雪) 큰 불화로 속에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顏淵)이 인을 지키다가 잠시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마치 큰 화로 속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어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우지화(時雨之化) 초목이 철 맞게 내린 비에 잘 자라듯이 교화가 미침을 말한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가르침이 다섯 가지인데, 때맞게 감화하듯 한 것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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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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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직접 찾아와 준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섣달 추위에 덕을 함양하면서 신명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의 생활도 평안하신지요?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그저 궁벽한 시골집에 칩거하면서 나날이 더욱 쇠약해져만 갑니다. 단지 절절하게 그리워하며 만나 뵙지 못하는 아쉬움만 더할 뿐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러운 이 시기에 실심(實心)으로 이 일을 대하는 이는 오직 그대【高明】 한 사람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애초부터 가졌던 구구한 소원이 아님이 없었지만, 험하고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나아갈 만한 여력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보여주신 문목(問目)은 조목마다 응답해 나아갔으니, 다시 상세하고 확실하게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음양(陰陽)·강유(剛柔)·인의(仁義)에는 삼재(三才)의 도(道)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섞이지 않은 본체의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陰陽)·강유(剛柔)는 진실로 도(道)가 아니며, 체용이 떨어지지 않은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과 강유는 '도가 아니다【非道】'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理)가 이(理)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세심하게 살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말하길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장자(張子)는 "기화(氣化)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도의 체용(體用)은 음양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 모두를 참고할 만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한데, 어째서 선한지 않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성악설(性惡說)을 논파할 만한 때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先德)께서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설명하여서, 성선설(性善說)을 보완하고 성악설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인(後人)들은 이(理)가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기고, 나아가 미발(未發)도 또한 기질지성이며, 요순(堯舜)도 또한 기질지성이라 여깁니다. 오호라, 선덕(先德)들이 논리를 세워서 장차 성악설을 배척하려고 하였는데, 후인들이 이 세 글자를 가지고 도리어 성악설을 증명하는 말로 사용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만약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긴다면, 천하의 어떤 이(理)인들 기(氣)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공허한 의론에 묶이고 얽매일 것이니, 우뚝 홀로 선 연후에야 본연의 성품이 될 것입니다. 이(理)의 묘처(妙處)를 신(神)이라고 하는데, '묘(妙)' 자와 '신(神)' 자를 만약 기(氣)에 속해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理)는 완전히 공허하여 하나라도 쓸 데가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 용(用)의 측면에서 신(神)이라고 한 상단과 하단의 글들은 태극(太極)의 참다운 면목을 말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 중단(中段)의 '신(神)' 한 글자에 대해서만 홀로 기(氣)에 대해 말한 것이겠습니까. 칠정(七情)은 사람의 정(情)을 통틀어 말한 것이니, 사단(四端)은 특히 이 칠정 중에 나아가, 그 선한 것만을 끄집어낸 것입니다. 칠정과 사단은 본래 양단으로 나뉜 것이 아니니, 어찌 내외로 구별을 두었겠습니까.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4) 또한 불가한 것이니, 다만 사단(四端)과 상대되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委枉何等感荷。未審臘寒養德有相。動止珍休。馳仰不任。義林跧伏窮廬。衰索日甚。只切悠悠靡逮之恨而已。缺界滔滔。實心此事者。惟高明其人也。昕宵遊從。未始非區區之願。而崎嶇險釁。無力可就。奈何奈何。所示問目。逐條塡去。更加詳確如何。陰陽剛柔仁義。三才之道備矣。以不雜者言之。陰陽剛柔固非道也。而以不離者言之。陰陽剛柔不可謂非道也。理之爲理。正在於此。惟細心看之可得。是故孔子曰一陰一陽之謂道。張子曰。由氣化有道之名。朱子曰。道之體用。不外乎陰陽。此皆可攷也。人性本善而何故而有不善只此不善二字。若不區處。則性惡之說。無時可破。是故。先德說氣質性三字。以補性善之說。以斥性惡之論。後人以理之具於氣者。統謂之氣質之性。至以爲未發亦有氣質之性。堯舜亦有氣質之性。嗚乎。先德立論。將以斥性惡之論。豈知後人將此三字。反以爲性惡之證佐耶。若以具於氣者。統謂氣質之性。則天下何理有不具於氣者。必懸空係虛。兀然獨立然後。爲本然之性耶。理之妙處謂之神。妙字神字。若屬氣邊看。則理是空空一殼無用之長物矣。況其用則謂之神上下文段。無非太極眞面說。豈於中段神一字。獨言氣乎。七情統言人之情。四端特就七情中剔出其善者矣。七情四端。本非兩端。則何嘗有內外之別也。謂之旁榮側秀亦不可。但與四端對言云然耳。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 《심경부주》 권2 〈성의장〉에 조치도(趙致道)가 주자에게 질문한 것으로 "혹 옆에서 나와 꽃이 피고 곁에서 빼어나 기생하는 겨우살이나 사마귀와 혹과 같은 것은 이것도 비록 성이 동한 것이기는 하나 인심의 발현이요 사욕의 유행이니, 이른바 악이라는 것입니다.【其或旁榮側秀, 若寄生疣贅者, 此雖亦誠之動, 則人心之發見, 私欲之流行, 所謂惡也.】"라고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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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3월 6일에 보내온 편지를 4월 보름에 이르러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상하게 다 알려주시어,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어찌 감사할 줄 모르겠습니까. 주자(朱子)께서 성(性)을 논한 것에 대해, 어떤 이가 말하길 "비유컨대 약성(藥性)을 논하면, 오한과 발열도 또한 형상을 논한 곳이 없는데, 단지 복용을 완료한 후에야 열이 떨어지기도 하고, 열이 오르기도 하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라고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왕왕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성(性)이라고 여기니, 이는 단지 심(心)에 대해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무릇 오한과 발열은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약을 복용한 후에 곧바로 열이 내리거나 오르는 것이 바로 신(神)인 것입니다. 인성(人性)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는 것을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이(理)가 있어서 곧바로 허다한 일에서 나오게 되어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과 같은 것이 바로 신(神)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께서 신(神)자에 대해 기(氣)로 말한 경우가 있고, 이(理)로 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령(神靈)을 성(性)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신(神)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이(理)의 발용(發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혹은 이(理)가 아니라고 말하고, 혹은 기(氣)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신(神)이 바로 이(理)입니다.'라고 하면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謂神卽是理, 却恐未然.】"라고 하고, 뒤이어 "신(神)을 완전히 기(氣)로 간주하여 보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將神全作氣看, 則又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설들을 관찰해보면, 신(神)의 뜻을 분명히 알 게 될 것입니다. 전날에 있었던 한 편의 말은 이(理)로 인정하고, 다른 한 편의 말은 기(氣)로 인정한 것은, 어찌 치우친 의논이 아니겠으며, 왜곡된 견해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에 대해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로부터 그것을 삼가 지킬 것을 생각해봐야 하니, 그대도 또한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힘써 귀착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단의 절반과 하단의 절반에서 기(氣)의 신(神)과 이(理)의 신(神) 등에 대한 설명도 또한 옳지 못하니, 신(神)은 두루하여 정해진 방소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상단과 하단의 절반에 옳은 말이 있겠습니까. 신(神)은 하나이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 이(理)와 기(氣)가 각각 그 신(神)과 하나가 된다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명(神明)' 두 글자는 끝내 다 합쳐지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 또한 상세하게 연구해보면, 저절로 바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주서(朱書)에 신명(神明)은 바로 물(物)이라는 논설이 분명히 있는데, 다시 그것을 운운한단 말입니까. 저의 논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주서(朱書)의 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지난번에 〈경함에게 보내는 편지【與景涵書】〉5)가 있었는데, 아울러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三月六日書。四月望間始得見矣。縷縷纖悉。警發多矣。曷不知感。朱子論性有曰。比如論藥性寒熱。亦無討形象處。但服了後。做得寒做得熱。便是性。今人往往指有知覺者。爲性。只說得箇心。夫寒熱固不可以言神。然服了後。便做得寒熱。便是神。人性之有仁義禮智。固不可以言神。然旣有此理。便有許多事出來。如惻隱羞惡辭讓是非。便是神。是以朱子之於神字。有或以氣言。或以理言。如曰神靈不可以言性。及神者理之發用之說是也。有或言非理。或言非氣。如曰謂神卽是理。却恐未然。及以神專作氣看。又誤之說是也。觀是數說。神之爲義。若可領了矣。前日之一邊之言。認以爲理。一邊之言。認以爲氣者。豈非偏論曲見耶。區區於此。不覺瞿然自失。思以爲從此謹守之計。賢亦深思之。而勉爲歸宿也。若其上一半下一半。及氣之神理之神等說。又恐不然。神周而無方者也。豈有上下一半之可言。神一而不二者也。豈有理氣各一其神之可名。且神明二字。終有未盡合處。此亦細細詳究。自有結案之日矣。朱書明有神明是物之論。而乃復有所云爾耶。鄙說固不足道。而朱書說亦將何以區處乎。向有與景涵書。倂以照及如何。 경함(景涵) 조선 말기 유학자인 황철원(黃澈源, 1878~1932)으로, 자는 경함(景涵)이고,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입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광무 6) 전라남도 구례(求禮) 천은사(泉隱寺)에서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과 강론을 벌였고, 스승 정재규의 권유로 「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 등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광주(光州)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 10권 4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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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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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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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세월은 자꾸 흘러서 거의 한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한 번 서로 만나 토론하는 것을 여태까지 빠뜨리고 하지 못하였으니, 가슴 속에 쌓인 슬프고 아쉬운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남쪽을 바라보며 그리운 벗【停雲】6)을 떠올리니, 아침저녁으로 그리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 보내온 편지를 받고,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하시다는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트이는 것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義林】는 그저 빈집에 틀어박혀서 그럭저럭 간신히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남은 시간을 보낼 계책으로 삼고 있으나, 온전히 그것을 위해 보내고 있지 못하여서, 매번 개탄할 뿐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구구절절하신 말씀은 재차 제기해보고서 저의 미천한 식견을 알 수 있었으니, 전날의 말들은 분명치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층이층(一層二層), 미발이발(未發已發)'이라고 한 것은, 그 말의 뜻이 고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도 또한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미발이발(未發已發)'은 바로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기질(氣質)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질은 태어남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니, 진실로 때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의 성품이 혼연하여 도리(道理)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그 청탁(淸濁)과 미악(美惡)의 다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 기질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본(大本)에 저해가 되며, 어찌 성선(性善)에 해가 되어서, 반드시 이 기질이 발현되지 않는 일층과 이층의 설을 그렇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청컨대 미발(未發) 시에 '성인의 성품이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 '성인의 기질은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 다시금 더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남당집(南塘集)》7)을 보았는데, 이 가운데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부분을 '정(靜)에 속할 수 없다'고 하며, 또한 '비은(費隱)'이라고 한 부분은 '동정(動靜)으로 나누어 배속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이 말부터 「경함의 편지【景涵書】」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비은(費隱)을 동정(動靜)으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진실로 옳으나,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말이 정(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조금 더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부디 이에 대해 답변하여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歲華荏苒。洽已半年矣。而一番握討。尙此闕如。懷緖悵恨。謂何如耶。南望停雲。日夕難任。謂外承備審侍省之餘體節佳適。慰豁不可言。義林係蟄空齋。粗聊捱過。而至於尋溫舊業。以爲多少餘日之計。則全未有之。每用慨然。示喩縷縷。復此提起。可見愚陋前日之言。有未瑩也。但所謂一層二層。未發已發。不惟語意不雅。而求之於心。亦未見其可也。大抵未發已發。此是心上說。非氣質上說也。氣質與生具生。固不可以隨時有無。然在此心未發時。一性渾然。道理全俱。而不見其淸濁美惡之異者。以其氣不用事故也。此何害於大本。何害於性善。而必爲此氣未發一二層之說乃爾耶。且請未發之時。謂聖人之性與凡人同乎。謂聖人之氣質與凡人同乎。試於此而更加思省。如何。向見南塘集謂。沖漠無眹。不可便屬於靜。又謂費隱不可分屬動靜。未知此說如何。向以此語及於景涵書中矣。愚意費隱之不分動靜。固然。而至於沖漠無眹之非靜。恐有可商量者。幸爲之示及。如何。 정운(停雲) 하늘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그리운 벗을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정운(停雲)〉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한 벗을 생각해서 지은 시입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남당집(南塘集) 조선 영조(英祖) 때 문인 한원진(韓元震)의 시문집으로, 44권 22책으로 되어 있다. 잡저(雜著)에 심성론(心性論)에 관한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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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與梁處中 봄부터 멍하니 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한 번 만나 뵐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서 한 해가 이미 저물어 갑니다. 그리워하는 마음 절절하여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경함(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과 함께 논설한 바가 있었는데, 그대가 경함에게 보내온 편지도 또한 얻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또한 경함의 편지에 답하였으니, 대략 말하자면,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8)라고 하였는데,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마땅히 '일의 이치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요, '마음의 이치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생생(生生)하기 때문에 영(靈)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각(覺)하는 것이니, 상채(上蔡)9)가 말하길 "마음에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智)는 마음의 정(貞)이요, 지(知)의 이치이며, 사덕(四德 : 仁義禮智)의 근본이고, 만 가지 이치의 창고이니, 이것이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사(先師 : 奇正鎭)께서 이른바 '이치를 싣고 있는 것이 체(體)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靈)이 아니면 능히 깨닫지 못하며, 이(理)가 아니면 깨달을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깨달음의 주체【能覺】'라는 한 구절이 없이 다만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말한다면, 진실로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게 되는 혐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의 주체【能覺】와 깨달음의 대상【所覺】을 상대적으로 들어서 말하였으니, 또한 어찌 이러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혹 어떤 사람이 선사(先師)께 단지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들어서 지각(知覺)하는 것을 이치라고 여기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답하여 말하길 '어찌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깨닫는 행위 주체가 바로 영(靈)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면(下面)에서 '이치를 싣는 것이 체이다【載理爲體】'라는 한 단락의 말을 들어 채운 것입니다. 무릇 선현(先賢)의 말씀은 상대방이 묻는 것에 따라 답을 하는 것이니, 비록 그 답이 똑같이 않더라도 그 지향하는 바는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주재하는 바【所以主宰】'라는 말이 싫은 나머지 이를 두 주재함의 혐의가 있다고 여기고, 또 지각을 주재한다고 여기니, 이는 곧 소이연(所以然)입니다.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어떤 소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논변한 바가 있으나, 바빠서 미처 편지로 써서 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디 그대가 다시 한 마디 일깨움을 주는 말【一轉語】10)을 적어서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스스로의 집착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진실로 이 사람의 병이니,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특이한 것을 만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自春以來。無日不佇待一穩。而荏苒侵尋。歲已暮矣。憧憧懷思。曷有己已。近與景涵有所論說。而賢所抵景涵書。亦得以見之矣。日前又答景涵書。略曰。朱子曰。能覺者心之靈。所覺者。心之理。若賢意。則當曰事之理。不當曰心之理。生生故靈。生生故覺。上蔡云。心有知覺之謂仁。卽此意也。此非所覺者心之理乎。智者心之貞。知之理。四德之本。萬理之藏。此非所覺者心之理乎。先師所謂載理爲體。卽此也。非靈不能覺。非理無所覺。若無能覺一句。而只說所覺。則固有以理覺理之嫌。今以能覺所覺對擧言之。又安有此嫌耶。或人之問於先師。只擧所覺。而認知覺爲理。故先師答云。安有以理覺理之理乎。此言能覺者。是靈故也。是以其下面。擧載理爲體一段語以足之。夫先賢之言。隨問隨答。雖若不同。而其致則一也。云云。且駁所以主宰之語。以爲有兩主宰之嫌。又以爲主宰知覺。卽所以然。而所以之上。復有何所以云云。未知此說何如耶。愚已有所論辨。而忙未書呈耳。願賢更下一轉語以示之。如何。自執太固。固此人之病。而不知其喜新立異至於此也。 《주자어류》 권5에 "지각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질의 영(靈)입니다.【所覺者心之理, 能覺者氣之靈.】"라고 한 말이 있다. 상채(上蔡) 중국 북송 때 성리학자 사량좌(射良佐, 1050〜1130)의 호입니다. 정호(程顥)의 주요한 제자로, 여대림(呂大臨)․양시(陽時) 등과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리며, 뒷날 육구연(陸九淵)의 상산학(象山學)에 영향을 주었다. 일전어(一轉語)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 마디의 번뜩이는 선어(禪語)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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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동지【南至】11)가 장차 가까워져서 양덕(陽德)이 상승하려고 하는 시기에,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부모의 병환은 시절과 더불어 모두 회복되었는지요. 매번 치달리듯 그리워하는 마음 지극하고 절절합니다. 보내 준 편지에 구구절절한 말들은 경계시키고 계발시켜 주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에 혹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 대략 그 내용을 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주재(主宰)를 말하고 나서, 다시 주재(主宰)하는 바를 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과 태극(太極)의 주재(主宰)의 묘(妙)로서 말한 것이니, 진실로 당연하고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그대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또한 알고 있는 것이고, 나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위(無爲)이고, 사람은 유위(有爲)이니, 무위이기 때문에 이(理)가 주가 되고, 유위이기 때문에 심(心)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심(心)은 오로지 이(理)라고 부를 수도 없고, 기(氣)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理)와 기(氣)가 묘하게 합하여서 있는 것입니다. 묘하게 합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묘함【靈】'인 것입니다.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지각할 수 있고,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人能弘道】'고 한 것과 장자(張子)가 이른바 '마음은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心能檢性】'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능히 넓힐 수 있는 능력과 능히 검속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재(主宰)를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능력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용하는 바가 있게 됩니다. 만약 능력을 가지고 주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능소(能所)' 두 글자는 하나만 유지하고 하나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도리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니, 이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면, 모든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경함(景涵)이 이른바 '영묘함은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靈不主宰】'라고 한 것과 '넓게 보면 영묘함은 주재(主宰)가 되고, 상세히 보면 신묘함이 주재(主宰)가 된다'라고 한 말들이 모두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자네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기를 잘 다스려서 다시금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능히 이와 같은 경지에 합하게 되면, 이른바 여러 가지 설명들이 모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는 조목마다 따라가면서 낱낱이 들어서 말하지 말 것이니, 말단에서 위를 범하는 내용을 읽고 나서 놀랐습니다. 마음이 이미 주가 되면, 능소(能所)의 분단이 없을 수 없으니, 만약 그 능(能)을 보존하고자 그 소(所)를 폐한다면, 위를 범하는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한단 말입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에 내가 말한 '마음에는 지각이 있다【心有知覺】'와 '지혜는 지각하는 것의 이치이다【智是知之理】'라는 주장을 옳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만약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지각(知覺)하는 까닭의 이치라고 한다면, 지각하는 것은 심(心)의 영역이 아니라, 성(性)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되므로, 이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지각하는 까닭의 이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평소 지리멸렬한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정신까지 흐리멍덩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을 갈고 닦는 의리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부디 나의 말을 배척하지 마시고 끝내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南至將近。陽德方升。未審生處愼候。與時俱復。每切馳慕之至。示喩縷縷。警發多矣。但於鄙意或不能無疑請略陳之旣言主宰。不當復言所主宰。此以天命本然太極主宰之妙言之。固當固當。非但賢知之。愚亦知之。非但愚知之。人皆知之。但天無爲。人有爲。無爲故理爲之主。有爲故心爲之主。此心不可專喚做理。不可專喚做氣。必是理與氣妙合而有者也。妙合是何物。曰靈而已矣。靈故能知覺。靈故能主宰。孔子所謂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是也能弘之能。能檢之能。其非主宰之謂耶。旣有其能則必有其所。若以能謂非主宰則已。不然。能所二字。不可存一而廢一。不其明矣乎。此是道理大頭臚於此錯。則無不錯矣。景涵所謂靈不主宰。及泛看靈爲主宰。細看神爲主宰之說。皆不以此耶。願高明平心易氣。更加三思也。苟能有合於此。則所謂諸般說話。皆有下落處矣。玆不復逐條枚擧也。末段犯上之云。讀之瞿然。然心旣爲主。則能所之分。斷不可無。若欲存其能而廢其所。則犯上之患。正在於此。如何如何。但來喩以愚所云心有知覺。及智是知之理之說。謂不然。而曰若以仁義禮智之性。爲所以知覺之理。則知覺非心也乃性也云云一條。最不可曉。仁義禮智之性。非所以知覺之理而何。可試思之也。素以滅裂之學。加以昏忘。何足以上下於此等議論乎。但講磨之義。不容無言。幸勿揮斥。終以見喩也。 남지(南至) 24절기의 하나인 동지(冬至)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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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유고》 서문 竹林遺稿序 글이 세상에 전해진 경우 중, 한 가지는 의리를 밝혀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 가지는 경륜(經綸)을 펼쳐서 이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고, 달빛이나 이슬 등 아름답게 꾸며대는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비록 많다 한들 또한 무엇 하겠는가. 이 때문에 최고의 글은 천하에서 시행되어 만고에 바꿀 수 없는 경전이고, 그 다음의 글은 한 나라에서 시행되는 것이고, 또 그다음의 글은 한 집안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한 집안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한 나라에서 시행하고, 한 나라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천하에서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협소하다고 여겨 시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오직 시행한 곳이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무릇 자식은 어버이에 대해 어버이의 손때가 책에 남아 있으면 차마 손상시키지 못하고, 침이 땅에 떨어져 있더라도 오히려 반드시 거두는 법인데, 하물며 유언(遺言)과 유고(遺稿)는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고 평생토록 행한 일이 실려 있는 것이니, 조심스럽게 지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 혹 천하나 한 나라에서 시행될 수 없는 글이라면 한 집안에 보관하여 자손에게 전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에 가지셨던 뜻과 행하셨던 일을 알게 해야 한다. 또 이것이 일찍이 조상을 추모하고 사모하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죽림(竹林) 황공(黃公)은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공무로 분주하였다. 이 때문에 전해진 저술이 많지 않았는데, 맏아들 작(稓)이 상자에 남아 있는 글을 찾아 살펴보고 약간 편의 글을 모을 수 있게 되자 이를 간행하여 집안에서 시행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겸손한 마음에 두려워하고 꺼려하여 감히 사람들에게 널리 배포하지 못해서였다.삼가 살펴보건대 편질(編秩)이 협소한데다 언사가 간결하고 질박하여 구구하게 꾸며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혹 세속의 안목에 맞지 않은 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요컨대 의리의 문장과 경륜의 방책이 되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내가 생각건대 단지 한 집안의 글이 될 뿐만이 아닌 듯하니, 지금 비록 세상에서 시행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뜻이 있는 자가 취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文之傳於世也。一則發明義理。可以羽翼乎斯文。一則敷陳經綸。可以裨補乎斯世。非是二者。而出於月露組繪之口。則雖多亦奚爲也。是以上焉者。行於天下。而爲萬古不刊之典。次焉者。行於一邦。又次焉者。行於一家。以一家之文而行於一邦。以一邦之文而行於天下。則人必少之以爲不足行。此非文之過也。惟行之非其所也。夫子之於親。手澤在書。不忍傷焉。口液落地。猶必收之。況其遺言遺稿。爲精神心術之所寓。平生行事之所載者。可不思所以謹守哉。其言或不得爲天下及一邦之文。則當藏之一家。傳之子孫。使知乃祖乃父當日之志行。又未嘗不是追遠思成之一助也。竹林黃公早年釋褐。奔走靡監。是以所傳著述爲不多也。胤子稓搜閱巾衍。裒稡得若干篇。付剞劂氏。將欲行之於家。蓋其謙謙畏忌。有不敢廣布於人也。竊覸其編秩狹少。言辭簡訥。不見有區區組繪之態。此所以或不無寡諧於時眼。而其旨意去處。要不失爲義理之文經綸之策也。吾恐不止爲一家之文而已。今雖不欲行之於世。而安知有志於斯世者。不之取焉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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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경계하다 自警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은 모두 구구하니 世間可欲總區區한평생 하찮게 여겨질까 스스로 경계하네 自警平生視若無여색 연모해 호전의 절개 바뀐 것 부끄럽고66) 戀色堪羞胡節改금을 본들 어찌 관녕의 마음을 변하게 하랴67) 見金怎使管心渝벌거벗은 너 또한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68) 裸裎爾亦焉能浼함정 속 사람은 다 스스로 몰아넣은 것이네 罟穽人皆竟自驅이러한 관문을 뚫고 지나간 훗날에야 透得此關然後日천 사람을 뛰어넘는 호걸이라 일컬으리 方稱豪傑出千夫 世間可欲總區區, 自警平生視若無.戀色堪羞胡節改, 見金怎使管心渝?裸裎1)爾亦焉能浼? 罟穽人皆竟自驅.透得此關然後日, 方稱豪傑出千夫. 여색……부끄럽고 여색에 빠져 절조를 바꾸는 일이 없도록 경계한다는 말이다. 송나라 호전(胡銓, 1102~1180)이 해외에 귀양 갔다가 돌아와 상담 호씨원(湘潭胡氏園)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를 모시고 있던 기생 여천(黎蒨)을 위해 시를 지었는데, 주자(朱子)가 시를 지어 호전이 나라를 위해 죽을 만한 절개를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의 욕심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조롱하였다. 금을……하랴 황금 보기를 하찮은 돌멩이 보듯이 하겠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말기에 관녕(管寧)이 친구 화흠(華歆)과 함께 채전(菜田)을 일구던 중 한 조각의 황금이 나왔다. 그러자 관녕은 기와 조각이나 다름없이 여겨 호미질을 계속했고, 화흠은 일어나서 황금을 집어 멀리 던졌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유하혜(柳下惠)의 풍모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비록 어깨를 드러내고 옷 벗은 채 내 옆에 누워있다 한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尔爲尔 我爲我 虽袒裼裸裎于我側 尔焉能浼我哉〕"라고 했다. 裎 底本에는 "程". 《孟子》 〈公孫丑上〉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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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날에 정토사에서 놀다 2수 末庚日, 遊淨土寺【二首】 절에서 청아하게 놀며 말복 달임을 하니 淸遊蕭寺煮終庚백발노인은 옛날의 정회를 잊기 어렵네 白首難忘舊日情우사가 한발31)을 몰아낸 것이 기쁘니 堪喜雨師驅旱魃주국에서 수성을 깨뜨리는 걸 보겠네 卽看酒國破愁城천년토록 황하가 흐려 몹시 괴로우니 千年正苦黃河濁긴 밤에 누가 붉은 촛불 가지고 밝히랴 長夜誰持炳燭紅날이 저물어갈 때 시 읊으며 돌아오니 風詠歸來天欲暮옆 사람은 불평하는 소리를 내지 마소 傍人莫道不平聲가뭄 끝에 가랑비가 삼복더위 씻어내니 旱餘小雨洗炎庚풍경 대하여 옷깃 젖힘에 시원함 느끼네 對景披衿覺爽淸어진 주인 오늘의 북해32)를 반갑게 만났으나 賢主喜逢今北海졸렬한 시를 옛 장성에서 짓기가 어렵네 拙詩難作古長城온 산의 푸른 나무는 가을철에 시들지만 千山碧樹當秋病별원의 그윽한 꽃은 여름을 지나 피었네 別院幽葩過夏明세상 밖의 한 구역이 깨끗한 땅이라 物外一區乾淨土풍진에도 여기에 오면 아무 소리가 없네 風塵到此寂無聲 淸遊蕭寺煮終庚, 白首難忘舊日情.堪喜雨師驅旱魃, 卽看酒國破愁城.千年正苦黃河濁, 長夜誰持炳燭紅?風詠歸來天欲暮, 傍人莫道不平聲.旱餘小雨洗炎庚, 對景披衿覺爽淸.賢主喜逢今北海, 拙詩難作古長城.千山碧樹當秋病, 別院幽葩過夏明.物外一區乾淨土, 風塵到此寂無聲. 한발(旱魃) 가뭄을 일으키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한발이 사나워 속이 타는 듯하며 불을 놓은 듯하도다.〔旱魃爲虐, 如惔如焚.〕" 하였다. 북해(北海) 후한(後漢) 때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 153~208)을 말한다. 그는 선비를 좋아하고 후진들을 교도(敎導)하기 좋아해서 빈객이 항상 그의 집에 가득했다. 그래서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동이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근심이 없겠다.〔坐上客恒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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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제삿날에 자정이 시를 짓기에 차운하여 절구 7수를 짓다 先師諱辰, 子貞有詩, 次韻因成七絶 산이 무너진 지 어느덧 몇 년이 지났나 山頹忽忽幾經春나이 젊은 사람이 지금은 노인이 되었네 年少今爲老大人이날에 해마다 동으로 바라보고 곡하니 此日年年東望哭사문의 일마다 통탄스러움이 새롭네 師門事事痛堪新선생의 바른 학문은 천 년 가도 드무니 先生正學罕千春세상에 식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될까 識者世間凡幾人비방하는 말이 분분하여 거듭 한스러우니 謗說紛紛重可恨임금 잊고 절의 배격함이 어찌 그리 새로울까 忘君排節一何新변괴를 봄바람 속에 기거할 때35) 알았으나 變怪雖知起坐春무함을 날조한 증거는 비방하던 사람이었네 造誣證佐謗讒人선생이 만일 유고 인가받을 마음 가졌다면 先生如有認稿意주나라 높인 게 아니고 신을 찬미했으리라36) 不是尊周却美新여강의 죄는 천추에 드러날 것이니 驪江之罪著千春《중용》의 주석을 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네37) 爲是中庸易註人지금 보건대 스승의 본래 글을 바꾸었으니 今見改師本文變그 옛것을 가지고 새것을 비교해 보리라 將來厥舊較看新스승의 도와 글이 만 년에 어두워졌으니 師道師文晦萬春성벽에서 전투 관망하는 이가 천 명이네38) 戰觀壁上一千人인심과 세태가 지금 이와 같으니 人心世態今如許유문 또한 이미 변해버렸네 儒門亦復已變新태어난 지 오십오 년이 되었는데 生來五十五年春오직 스승 보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네 惟有閑師不愧人무함은 씻지 못하고 원고도 정리하지 못해 誣未洗淸稿未整가을바람에 백발이 또 새로 늘어났네 秋風白髮又添新그늘진 벼랑에서도 봄볕을 보는데 陰崖猶見有陽春하늘이 어찌 우연히 남자를 냈겠는가 天豈偶生男子人다만 소원은 존령께서 묵묵히 도와서 但願尊靈垂黙佑만년의 학업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네 晩年學業日新新 山頹忽忽幾經春? 年少今爲老大人.此日年年東望哭, 師門事事痛堪新.先生正學罕千春, 識者世間凡幾人?謗說紛紛重可恨, 忘君排節一何新?變怪雖知起坐春, 造誣證佐謗讒人.先生如有認稿意, 不是尊周却美新.驪江之罪著千春, 爲是中庸易註人.今見改師本文變, 將來厥舊較看新.師道師文晦萬春, 戰觀壁上一千人.人心世態今如許? 儒門亦復已變新.生來五十五年春, 惟有閑師不愧人.誣未洗淸稿未整, 秋風白髮又添新.陰崖猶見有陽春, 天豈偶生男子人?但願尊靈垂黙佑, 晩年學業日新新. 봄바람……때 스승의 훈도와 덕화(德化)를 받던 때를 말한다.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여남(汝南) 땅에서 뵙고 돌아와 "광정이 춘풍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光庭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하였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 선생이……찬미했으리라 저자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일제의 인가를 받아 자신의 문집이 간행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는 말이다. 원문의 '미신(美新)'은 양웅(揚雄)의 〈극진미신(劇秦美新)〉으로 진(秦)을 비판하고 왕망(王莽)이 서한(西漢)을 찬탈하여 세운 신(新)을 찬미한 글인데, 여기서는 일제에 협조하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여강(驪江)의……때문이네 윤휴(尹鑴)가 학문에 있어서 당시에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신봉된 주자(朱子)의 해석 방법을 배격하고 《중용장구(中庸章句)》ㆍ《대학장구(大學章句)》ㆍ《효경(孝經)》 등 경전(經典)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한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라고 비판하였다. '여강'은 윤휴를 가리키는데, 그가 젊은 시절 여강에 산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별칭하였다. 성벽에서……천 명이네 간재 전우의 무함을 해결하는 데에 많은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무심하였다는 말로, 항우(項羽)의 초(楚)나라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무찌를 때 그 기세에 눌린 다른 제후의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고만 있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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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광산 이씨 행장 孺人光山李氏行狀 우헌(愚軒) 윤공(尹公) 자욱(滋郁)의 배(配)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고(故) 학생 덕홍(德弘)의 딸로 청심당(淸心堂) 조원(調元)의 후손이며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중황(重黃)의 딸이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8월 10일에 광주(光州)의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 20세에 남편의 집으로 시집왔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끼니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인은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모든 규범이 하나도 잘못되는 경우가 없었다. 존장(尊章 시아버지)인 묵양공(黙養公)은 성품이 엄격하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유인은 공의 뜻을 잘 받들어 한 번도 어기는 경우가 없었다. 고(姑 시어머니) 문씨(文氏)가 나이도 많고 눈도 멀어 20여 년에 걸쳐 일상에 남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여 눈이 먼 고통을 알지 못하였다. 적장자(嫡長子)의 아내로서 누대(累代)의 기일(忌日)을 받들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기(祭器)를 매우 정갈하게 준비하고 차리는 제물도 극히 향기로웠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출입이 간결하며 사치와 화려함을 금하고 무당이나 축사(祝史)를 멀리하였다. 온화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엄격함으로 자식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일에는 검박하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두텁게 베풀어 안팎의 친족이나 같은 마을의 남녀노소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곡진하였다. 신미년(1871, 고종8) 2월 28일 향년 41세에 세상을 떠나 석채동(石菜洞) 선영의 모향(某向)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 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상룡(相龍), 상봉(相鳳), 상귀(相龜), 상린(相麟)이고 딸은 정기현(鄭琪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손자는 모두 적지 않는다. 나는 윤씨(尹氏) 집과 한 마을에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출입하면서 지켜보고 일상적인 안부부터 길사와 흉사, 기쁜 일이나 슬픈 일에 대해서 한 집안인 듯 서로 친숙하였다. 우헌공(愚軒公)이 효자임을 알았고 또 공이 효자라는 명성이 반드시 내조의 힘이 아닐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상린(相麟)이 나에게 말하기를, "제 선비(先妣)의 훌륭한 계책과 덕성은 실로 옛날의 숙원(淑媛)에 부끄러움이 없지만, 규문(閨門) 안의 드러나지 않은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장인(丈人)께서 오래도록 이웃해서 살고 계셨으니 당연히 자세히 아실 것입니다. 선비를 위해 행장을 지어 인(仁)하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아,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말이 오랠수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후손이 번성하여 훗날의 복록이 다하지 않았고 상린(相麟)이 현명한 사우(士友)들과 종유하고 있으니 장차 입신(立身)하여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날이 올 것이다. 결코 고루하고 보잘것없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상린의 부탁이 더욱 간절하여 무심하게 넘기기 어려웠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적는다. 愚軒尹公滋郁齊光山李氏。故學生德弘女。淸心堂調元后。妣水原白氏重黃女。以純祖辛卯八月十日。生于光州馬山里。二十歸于夫家。家貧甚。簞瓢枵如。孺人夙興夜處。左右靡解。凡百家政。無一闕儀。尊章黙養公。性嚴少諧。孺人克意承順一無違忤姑文氏老而盲廢起居須人爲二十餘年。而安心便體。克享其樂。不知盲廢之爲苦也。以長旁冡婦所奉累世諱辰。致誠致齊。盥濯器皿。極其精潔。饋奠籩豆。極其芳馨。平居。寡言笑簡出入。禁奢華絶巫祝。和以御家。嚴以敎子。儉於持己。厚於施人。內外族親。隣里老幼。曲有恩意。以辛未二月二十六日終。得年四十一。葬于石菜洞先隴某原。擧四男一女。相龍相鳳相龜相麟。鄭琪鉉。內外諸孫不盡述。余與尹氏家。同住一巷爲數十年。出入守望。起居寒暄。以至吉凶歡戚。若一家之相熟。而知愚軒公之爲孝子人。又知公之得此聲。又未必非其內助之力也。相麟向余言。我先妣嘉謨懿範。實無愧於古之淑媛。而閨門事隱。誰其知之。惟丈人接隣之久。計應詳悉。願爲之狀。使得免於不仁不明之罪也。嗚乎宗族之稱。鄕黨之誦。一辭嘖嘖。久愈不泯。況螽斯蕃衍。後祿未艾。而相麟從遊賢士友。立揚顯親。將有其日乎。決非固陋無狀所可承當也。但相麟之託愈懇。而有難恝然。謹据其家狀。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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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조공 행장 竹溪曺公行狀 공의 휘는 덕기(德琪), 자는 기지(器之), 호는 죽계(竹溪)이다. 조씨(曺氏)의 선계는 창녕(昌寧)에서 나왔으니, 신라 태사(太師)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그의 시조이다. 증조는 효제(孝悌)가 있어 효행으로 재랑(齋郞)43)에 제수되었고, 조부 억원(億元)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아버지 여홍(汝弘)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평택 임씨(澤林氏) 억문(億文)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 정미년(1547) 7월 13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스승에게 나아가44) 배우기 시작하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13세에 《논어》를 읽다가 자하(子夏)가 질문한 '교소천혜(巧笑倩兮)'에 이르러45)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또한 근본에 힘쓴다는 뜻이니, 배워서 본말과 선후를 알지 못한다면 마치 기름덩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힘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46) 라고 하고는, 마침내 마음을 잡아 함양(涵養)하고 근본을 바로잡아 근원을 맑게 하는 경지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 약관에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에 통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47)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절차탁마하여 날로 더욱 발전하니 선생이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줌이 매우 컸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조촐한 음식이나마 한껏 기쁘게 해 드렸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아우 덕련(德璉)과 함께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형제가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어48) 낮과 밤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종족과 붕우에게는 각각 그에 맞는 방도를 다하여 대하였다. 부춘산(富春山) 속에다 오두막집을 지어 세 오솔길49)에 꽃과 대나무를 심어놓고 사방 벽에 도서를 두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휘장을 드리우고서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니 이웃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매번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할 때에는 복건(幅巾)과 망혜(芒鞋) 차림으로 수림(水林)과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하면서 화려한 영화(榮華)를 부러워하거나 외롭고 쓸쓸함을 서글퍼할 줄 몰랐다. 유선생이 일찍이 절구(시) 한 수를 붙여 말하기를,은둔해서는 도연명과 사영운50)의 정취처럼 하고 (隱同陶謝趣)마음으로는 정자와 주자의 글을 배운다 (心學程朱書)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51)이 본도(本道)의 절도사로 있으면서 순시하다가 본읍(本邑)에 왔을 적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 만나보고 탄복하기를, "직접 보니 들은 것보다 훨씬 뛰어나도다."라고 하고서 예물을 보내왔다. 공이 일찍이 그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네가 귀인(貴人)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말을 신중히 하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도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고 학문을 진보시키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선조 때, 향도천(鄕道薦)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인조 갑자년(1624) 5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금오산(金鰲山)52)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부장(部將) 탁(倬)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명서(命瑞)는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딸은 진사 박립(朴立)에게 출가하였으며, 증손 이하로 매우 번창하였다. 숙종 때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아, 재주는 세상에 쓰이기에 충분하였는데도,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문장에 힘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학문은 다른 사람정도를 따라가기에 충분하였는데도,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급급해하지 않았으니, 공의 숭상하는 뜻이 무엇이며,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과 이름의 드러남과 가려짐으로 공을 논할 바가 아니다. 후손 석주(錫柱)가 그 집안에 전하는 문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의 행장을 청하니, 나는 행장을 지을만한 적임자가 아님으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전(家傳)을 바탕으로 대략 윤색을 가하였다. 公諱德琪。字器之。號竹溪。曺氏系出昌寧。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其鼻祖。曾祖孝悌。以孝行除齋郞。祖億元直長。考汝弘軍資監正贈吏曹參判。妣平澤林氏億文女。公以明宗丁未七月十三日生。天稟挺邁。不類凡兒。就傅上學。文理日進。十三讀論語。至子夏問巧笑倩兮。沈思良久曰。此亦務本之意也。學而不知本末先後。則如畵脂鏤氷。勞而無功。遂於操存涵養端本淸源之地。尤致力焉。弱冠通詩書六藝。聲聞藹然。廢擧業。遊於眉庵柳先生之門。薰陶切磋。日益展拓。先生稱許甚重。事父母。怡色婉容。菽水盡歡。居喪廬墓。與弟德璉友愛甚篤。長枕大被。日夕不離。宗族朋友。待之各盡其方。結廬富春山中。三徑花竹。四壁圖書杜門下帷。窮經硏理。隣里罕見其面。每良辰和煦。幅巾芒鞋。逍遙於水林泉石之間。不知芬華之爲可艶。而踽凉之爲可傷也。柳先生嘗寄一絶詩有曰。隱同陶謝趣。心學程朱書。愚伏鄭先生按節本道。巡到本邑。舍車徒入見。歎曰。所見浮於所聞。因致幣物。公嘗戒其子曰。吾願汝爲好人。不願汝爲貴人也。又曰。愼言非惟爲遠禍之道。存心進學。實權輿於此。可不勉哉。宣廟朝。以鄕道薦。除寢郞。仁祖甲子五月八日圽。享年七十八。葬于金鰲山甲坐之原。配南平文氏部將倬女。婦德純備。墓合窆。一男一女。男命瑞漢城左尹。女進士朴立。孫曾以下甚蕃衍。肅廟朝贈工曹參議。嗚乎。才足以售世而不屑屑於沽衒之文。學足以及人。而不汲汲於干進之路。未知公之所尙者何志。所樂者何事。位之軒輊。名之顯晦。非所以論公也。後孫錫柱持其家傳文字。請余狀其行。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家傳而略加潤色云爾。 재랑(齋郞) 재랑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맡은 하급 관리로, 위(魏)나라 때 처음 설치하였는데 태상(太常)에 속하였고, 당나라와 송나라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묘(廟), 사(社), 전(殿), 궁(宮), 능(陵), 원(園) 따위의 참봉을 달리 이르기도 한다. 스승에게 나아가 원문의 '취부(就傅)'는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인 10세를 말한다.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여덟 살이 되면 문호를 출입하고 자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반드시 장자(長者)보다 뒤에 하여 비로소 겸양(謙讓)을 가르친다.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바깥에서 거처하고 잠잔다." 하였다. 자하(子夏)가……이르러 자하(子夏)가 공자(孔子)에게 "옛 시에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진실한 자질이 있은 뒤에 예의와 문학을 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論語 八佾》 이……것이다 얼음을 조각한다는 것은 곧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덩이에다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다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사돈간이며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긴……덮어 형제간에 우애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서》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에, "현종이 태자로 있을 적에 큰 이불과 긴 베개를 만들어 여러 아우들과 함께 썼다[玄宗爲太子, 嘗製大衾長枕, 將與諸王共之.]."라는 고사가 있다. 세 오솔길 원문의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본디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친구인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서로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가리키는데,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도연명과 사영운 원문의 '도사(陶謝)'는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병칭이다. 두보(杜甫)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난 것을 보고 지은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어찌하면 시상(詩想)이 도연명, 사영운 같은 이를 얻어서 그로 하여금 시 짓게 하고 함께 노닐꼬.[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 정경세(鄭經世, 1563~1633)로 우복은 그의 호이고, 자는 경임(景任), 본관은 진주(晉州), 초시(初諡)는 문숙(文肅), 개시(改諡)는 문장(文莊)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1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검열 등을 거쳐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尙州)의 인사들이 의병을 규합하고 정경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과 맞닥뜨리게 되어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해 겨울에는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호서(湖西) 지역으로 가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임진왜란 후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는 용암산(聳岩山, 547m)의 옛 이름이다.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솟을 용(聳)과 바위 암(岩)자인데, 원래는 산위의 샘에 금자라[金鰲]가 있다고 하여 금오산(金鰲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산 정상에 용암이 솟아 오르듯 솟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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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 정공 행장 晩翠軒鄭公行狀 만취헌(晩翠軒) 처사 정공(鄭公)은 무신년(1908)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53) 한 달 뒤 거주지 가까운 땅 운주동(雲柱洞)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순진(淳珍)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내가 사는 봉양(鳳陽)의 누추한 집으로 찾아와서 사적(事蹟)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아, 처사는 바로 나의 50년 지기 옛 친구이며, 양세(兩世)에 걸쳐 종유하고 일심으로 의기투합하였으니 어찌 차마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공은 체구가 장대(長大)하고 훌륭한 용모에 수염도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준걸스럽고 박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성품과 기질은 온순하고 화락하였으며, 행동거지는 안정되고 자상하였다. 선행을 즐겨하고 의를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온화하고 자상하여 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드니 자상하고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가 풍부하였지만 시류를 붙좇고 사정(私情)을 따라 요행으로 벼슬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과업(科業)이 사람을 그르치는 것을 개탄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밤낮으로 두루 열람하여 의취(義趣)를 힘써 궁구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장(文章)에 발현되고 행위에 드러난 것이 늙을수록 더욱 치밀하여 찬란하게 문채가 났으니, 학문을 함에 법도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어버이를 섬길 때에 살아계실 적에는 그 기쁨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기일(忌日)54)에 이르러서는 어렴풋이 뵙는 듯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55) 마치 살아계신 듯이 모시는 정성56)을 다하였다. 그 아우와의 우애가 순수하고 독실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지냈는데,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고아가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기르면서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아이였을 적에, 노상에서 한 노인이 땔나무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그 노인을 불쌍히 여겨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갈증을 풀도록 도와주었으며, 엄동설한에 한 일가 사람이 지나가자 그 입고 있는 것이 매우 얇은 것을 보고 한 벌의 옷을 내어 그에게 준 적이 있었다. 중년에 서울에 갈 때, 동행 중 한 사람이 병이 매우 심하였는데, 동반한 여러 사람은 모두 가버리고 공만이 홀로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강도(江都)에 변란57)이 일어나 풍문이 매우 흉흉하자, 사람들이 일찍 돌아가라고 권유하여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말게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났을 때 서로 구휼함은 평상시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천 리 밖에서 위급한 상황에 닥쳤다고 버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차도가 있어 함께 돌아왔다. 하루는 한 여자가 이웃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양가의 딸로 흉년에 구걸하다가 남에게 팔려 종이 되었다는 것을 물어서 알고는 이에 산 사람에게 권유하여 마침내 속량(贖良)58)하여 돌려보냈다. 흉년을 만나면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그 남은 것을 친척과 오랜 친구 중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며, 시절마다 안부를 묻는 것과 길흉사나 경조사에도 은혜가 두루 미치고 일찍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효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들으면 공은 그를 불러다가 타일렀는데, 말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곡하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깨닫고는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변란59)에 비적의 무리가 크게 일어나자 의리(義理)와 화복(禍福)을 진달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타이르고 이해시키니 고을이 이에 힘입어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은 자가 매우 많았다. 문규(門規)를 세워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였고, 동약(洞約)60)을 만들어 예속의 사귐을 밝혔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시문(時文)61)을 지어 과거를 쫓지 못하게 하고 항상 최면암(崔勉庵)62)과 기송사(奇松沙),63) 정애산(鄭艾山)64)의 문하에서 종유하게 하였다. 불량한 사람과 접촉하지 않았고, 분잡하고 화려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빛나는 광채를 간직한 채 산수 좋은 고을에서 유유자적 지내니 그 세속을 벗어난 뛰어난 운취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할 만하게 하였다. 공은 하동(河東)사람으로 휘는 기현(奇鉉), 자는 치홍(致弘)이다. 고조 인철(仁哲)은 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수국(遂國)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조부 권열(權烈)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효성으로 정려(旌閭)의 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재일(在馹)이며 어머니는 밀성 박씨(密城朴氏) 명원(命源)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갑진년(1844, 헌종10) 2월 19일에 바로 공이 태어났다. 16세에 공주 이씨(公州李氏) 의무(宜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65), 아들 순진(淳珍)과 문일수(文日洙)에게 출가한 딸은 이씨의 소생(李氏)이며, 순학(淳學)、순룡(淳龍)、순경(淳璟)、순호(淳鎬)와 문병우(文秉禹)에게 출가한 딸은 진씨(陳氏)의 소생이다. 아 나와 공은 평생 교분을 맺어 늘그막에도 곁에서 서로 지켜보면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천고의 사람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물을 닦고 붓을 적셔 삼가 그 행실을 기술하여 돌려보낸다. 晩翠軒處士鄭公。以戊申二月二十五日觀化。踰月而葬于所居近地雲柱洞戌坐之原。遺胤淳珍奉家狀。過余鳳陽敝廬。謁不朽之文。嗚乎。處士是余五十年舊要。兩世遊從。一心密勿。豈忍以非其人辭。公身長體碩。好容顔美鬚髥。見之可知其爲峻茂朴實人也。性氣溫良。擧止安詳。樂善嗜義。愛人喜施。溫溫諄諄。和氣薰人。可知其爲慈詳愷悌人也。少業功令。文詞贍富。而未嘗趨時徇私爲僥倖干進計。晩年慨歎科業之誤人。遂將心經近思錄等書。晝夜閱覽。務窮義趣。是以其發於文詞。著於施爲者。老益邃密。斐然有章。可知其爲學問規矩人也。其事親也。生而盡其歡。死而盡其哀。至於夫日之臨。僾然愾然以盡如在之誠。與其弟友愛純篤。長枕大被。老而不替。撫育孤姪。無間已出。兒時路上見一老人負薪而行。悶其老。出囊金以資其解渴。冬雪中。一族人過之。見其所着甚薄。出一襲衣與之。中年赴京。同行一人。得疾甚劇。諸伴皆去。公獨晝夜救護。居未幾日。江都變起。風聞甚駭。人勸之早歸。毋貽親憂。答曰。疾病相恤。平時猶然。況在千里之外而可以危急相棄乎。月餘見差同還。一日有一女子逃匿隣家。問知其以良家女。凶年行乞。因以見賣爲婢於人。乃諭所買者。遂得贖良而還之。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周親戚知舊之貧者。時節寒暄吉凶慶弔恩意周遍未嘗有闕有人以不孝聞公招諭之。言極懇惻。其人感悟。卒爲孝子。甲午之變。匪類大熾。爲陳義理禍福。面面諭解。鄕里賴不染邪者甚多。立門規。講敦睦之義。設洞約明禮俗之交。敎子不令作時文覓科第。常令遊從於崔勉庵奇松沙鄭艾山之門。身不接浮浪之人。足不到紛華之地。潛光蘊輝。婆娑邱林。其偉韻逸趣。令人可敬。公河東人。諱奇鉉。字致弘。高祖仁哲贈參判。曾祖遂國五衛將。祖權烈通政。以孝命旌。考在馹妣密城朴氏命源女。憲宗甲辰二月十九日。卽公之寅降也。十六委禽于公州李氏宜茂女。男淳珍。女文日洙李氏出。淳學淳龍淳璟淳鎬。女文秉禹。陳氏出也。嗚乎。余與公爲平生之契。而到老相守。益切煦濡之情。誰知今日而奄作千古人耶。抆淚泚筆。謹述其行以還之。 세상을 떠났다 원문의 '관화(觀化)'는 만물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에 "사람의 생명은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은 주야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生者假借也. 假之而生, 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而化及我, 我又何惡焉?]"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기일(忌日) 원문의 '부일(夫日)'은 그날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기일(忌日)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에게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으니, 기일을 이른다. 기일에는 일상적인 업무를 보지 않으니, 이것은 불길한 날이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날〔夫日〕에는 내 마음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서이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보인다. 어렴풋……듯 《예기》〈제의(祭義)〉에, "제사하는 날에 묘실(廟室)에 들어가서 어렴풋하여 반드시 조상이 신위에 계심을 뵙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면서 주선하여 방문을 나올 때에 숙연하여 반드시 조상이 거동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고 방문을 나와 들을 때에 반드시 조상이 크게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마치……정성 선조의 영혼이 와 계신 듯이 정성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선조의 제사를 지내실 적에는 선조가 계신 듯이 하셨으며, 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는 말이 있다. 강도(江都)에 변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많은 사람들이 순절한 것을 말한다. 강도는 강화(江華)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속량(贖良)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매매되고 사역(使役)되던 비복(婢僕)ㆍ백정(白丁)ㆍ무격(巫覡)ㆍ배우(俳優)ㆍ창녀(娼女) 따위의 종들이 대가(代價)를 바치고 노비(奴婢)의 신분을 면제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갑오년의 변란 1894년(고종31)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통상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고 한다. 이후 민씨(閔氏) 정권은 붕괴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하여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게 된다. 이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유생(儒生)들은 갑오변란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적 개화 정권의 개혁 정책을 민족 존망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까지 전개하였다.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3권,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1989》 동약(洞約) 조선 중기(16세기) 이후 지방의 양반들이 신분질서의 유지와 결속을 위하여 만든 동단위 자치조직으로 동계(洞契)·동의(洞議)·동안(洞案)이라고도 한다. 향약이 국가 차원에서 장려되었지만, 향촌 전체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데는 비효율적이었으므로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진 동에 거주하는 양반들이 결속하여 스스로의 관심과 이해를 반영시킨 동약을 실시했다고 한다. 시문(時文) 고문(古文)에 상대되는 말로 당시에 유행하는 문장을 가리키며, 과거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문체의 글을 뜻한다.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이 있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장가들었는데 원문의 '위금(委禽)'은 혼례(婚禮)에서 납채(納采)할 때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올리던 데에서 유래하여, 장가드는 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원년 기사에 "춘추 시대 정나라 서오범의 여동생이 아름다웠다. 공손초가 그녀에게 장가들려 했는데, 공손흑이 또 심부름꾼을 보내 억지로 기러기를 맡겼다.[鄭徐吾犯之妹美, 公孫楚聘之矣, 公孫黑又使强委禽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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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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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은 정공 행장 箕隱鄭公行狀 유생 정유흠(鄭瑜欽)은 나에게 배운 지 여러 해인데, 그 사이에 선대인(先大人,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 상기를 마친 뒤에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가장의 기록에 의하면, 공의 휘는 덕주(德周), 자는 화앙(華仰), 호는 기은(箕隱)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온화하고 화락한 풍모가 있고 출중(出衆)하고 탁월한 기개가 있었으니, 그 기국과 인물을 품평하는 것이, 대개 지금처럼 쇠퇴한 세상의 인물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아가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가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66)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모에게 양육을 받으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마음이 편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이때부터 살림살이가 힘입은 바가 있어서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들을 모두 넉넉히 갖추어 드렸다. 5명의 형제 중에 공은 둘째였는데, 장가들고 나자 어버이의 명에 따라 분가하였으나, 조석으로 맛있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는 일과 나고 들며 부지런히 집안일을 맡아 다스리는 일을 분가하였다는 이유로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해서는 반드시 성심을 다하고 반드시 미덥게 하였으며,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는 마음에 유감이 없도록 하였는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는67) 예절은 예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백씨(伯氏)를 부친과 같이 섬겼으며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오직 명(命)대로 하였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의 아들 및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려서 공이 곁에서 도와주었으니, 지극한 정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한결같이 공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차례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 집안 생계를 꾸리게 했는데,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고남아있는 자제들을 어루만져 보살피기를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제기(祭器)와 제전(祭田)을 갖추고 노비를 사서 종가(宗家)에 바치고, 조상의 산소에 아직 표지(表誌)가 없는 경우에는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으며, 아직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경우는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글방을 건립하여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한 되 한 말의 혜택도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고, 절신(節辰, 명절날)을 맞아서는 고기반찬을 보낼 때에 연로한 이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을 차리는 초기에는 거친 옷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빈틈없이 준비하여68) 부지런히 일하였다.69) 중년에 이르러서는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조금 평안해지자 그 학문을 일찍 포기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자식 가르치기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다. 글방을 열어 책을 마련하고 어진 스승을 택하여 두어 그 과정과 절도를 엄격하게 조리를 두었다. 소년 중에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보면 더욱더 사랑하고 중히 여겨 반드시 불러서 자제들과 함께 종유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 중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폐백을 드리고 가서 수학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기록된 내용의 대략이다.내가 사우(士友)를 따라 공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의 가장과 당일(當日)에 들은 말이 다른 말이 없으니, 그 어버이를 속이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내가 일찍이 공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병세가 이미 극심한 상태에서 병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켜 간절하게 죽은 뒤를 부탁하였으니, 오직 그 자제를 잘 인도하여 불의(不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효제(孝弟)로 입신(立身)하며 근검(勤儉)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선(善)을 좋아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지만, 평생 쌓아온 덕행에 대한 보답은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공(公)의 후록(後祿)은 이로부터 장차 크게 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정씨(鄭氏)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충장공(忠莊公) 휘 분(苯)은 그의 중계(中系) 현조(顯祖)이시다. 증조는 택의(宅宜), 조부는 인모(仁謨), 아버지는 재충(載忠)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어머니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정채(挺采)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憲宗) 정미(1847, 헌종13)에 태어나 금상(今上, 고종) 갑진년(1904) 4월 22일에 졸하였다. 부인은 수원 백씨(水原白氏) 낙홍(樂弘)의 따님으로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글을 요청한 것이다. 딸은 광산(光山) 김세현(金世鉉), 광산 김영대(金永台), 남평(南平) 문수엽(文洙燁)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손자는 해성(海成), 해봉(海琫), 해현(海顯)이다. 공의 무덤은 본방(本坊) 서당동(書堂洞) 선조의 묘 오른쪽 산등성이 모좌(某坐)의 언덕에 있다. 鄭生瑜欽。從余遊有年。間遭其先大人喪。服闋而奉家狀來。謁不朽之文。按狀。公諱德周。字華仰。號箕隱。體相碩大容止端嚴。溫溫有愷悌之風。軒軒有倜儻之氣。其器局品第。蓋非衰世人也。幼而就塾。與兄連業。稍長。見家甚艱。甘旨不充。慨然曰。爲人子者。不能忠養父母。而反被養於父母。何忍一日安心。遂竭力服勞。暫不暇逸。自是生理有賴。而便身畢給。兄弟五人。公居第二。及其有室。以親命分炊。而朝夕甘腝之洪。出入幹理之勤。不以分炊而有少異。遭內外艱。必誠必信。時月之制。無憾於心。而擗踊之節。有過於禮。事伯氏如嚴父。進退惟命。兄歿。兄子及諸弟皆幼。公左右扶持。至情懇惻。一如所生。待其長。次第昏娶。俾立家計。次第歿。哀痛殊甚。撫恤遺孤亦如之。具祭器備祭田買奴婢。納于宗家。先世墳塋。有未表誌者。伐石以竪之。有未設享者。置田以祭之。營構齋塾。爲村子弟肄業之所。當飢歲。升斗之惠。遍及於貧乏。遇節辰。饌肉之饋。不遺於高年。設産之初。菲食惡衣。綢繆拮据。至於中身。事力稍䌥。嘗恨早失其學。敎子甚篤。開塾儲書。擇置賢師。課程節度。嚴有條緖。見少年有文行者。甚加愛重。必招延之。使與子弟遊。有老成可師者。爲贄幣。使之往從焉。此皆狀辭大略也。余從士友。聞公之名久矣。而今日之狀與當日之聞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余嘗一過於公。見病已劇矣。力疾而作。眷眷身後之託。惟是善道其子弟。使不入於不義。以忠信存心。以孝弟立身。以勤儉成家。樂善嗜義。賙窮恤匱。平生積累。不食其報。余謂公之後祿。從此而將有大來之日。鄭氏貫晉陽。忠莊公諱苯。其中系顯祖也。曾祖宅宜。祖仁謨。考載忠。世有隱德。妣珍原朴氏挺采女。公以憲宗丁未生。今上甲辰四月二十二日卒。配水原白氏樂弘女。生一男四女。男謁文者。女光山金世鉉光山金永台南平文洙燁。次幼。孫海成海琫海顯。公墓在本坊書堂洞先隴右岡某坐原。 충심으로 봉양 원문의 '충양(忠養)'은 충심으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효자가 노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그 뜻을 어기지 않으며,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해 드리고 그 잠자리를 편안하게 해 드리며, 그 음식을 가지고 충심으로 봉양해야 한다.[孝子之養老也, 樂其心, 不違其志, 樂其耳目, 安其寢處, 以其飮食忠養之.]"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가슴을……구르는 원문의 '벽용(擗踊)'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극도로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효경(孝經)》 〈상친(喪親)〉에 "벽용하며 곡읍을 하고, 슬퍼하며 보내 드린다.[擗踊哭泣, 哀而送之.]"라는 말이 나온다. 빈틈없이 준비하여 원문의 '주무(綢繆)'는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는 뜻으로, 빈틈없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미리 준비해서 환란을 예방한다는 말이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아직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너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혹시라도 감히 우리 새들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였다 원문의 '길거(拮据)'는 《모전(毛傳)》에서 "길거는 극국(撠挶)이다." 하였는데, 공씨(孔氏)의 소(疏)에 "극(撠)은 가진다[持]는 것이다." 하였다. 극국은 '손톱으로 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길거는 둥지를 만들 때 손과 입을 함께 움직이며 바삐 일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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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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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인70) 함양 박씨 행장 孺人咸陽朴氏行狀 조익제(趙翼濟) 군은 착한 선비이다. 나와 만년에 이웃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따르고 쫒은 지 10여년이 되었다. 하루는 선유인(先孺人)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이 대대로 아름다운 덕을 지녔던 것은 진실로 이미 익히 들었으나, 다만 사람이 미천하고 학문이 얕아 받들어 감당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네. 그렇지만 두터운 인연을 헤아려 볼 때 또 완강히 사양할 수 없겠네."라고 하였다. 유인(孺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상서공(尙書公) 휘 선(善)이 시조(始祖)이며, 영암군(靈巖君) 휘 통(通)이 그 중조(中祖)이다. 증조는 휘 종윤(宗允), 조부는 휘 경은(景殷), 아버지는 휘 원(源)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참봉 기대(箕大)의 따님이다. 순조 경진년(1820, 순조20) 11월 3일에 유인은 영암(靈巖) 송정리(松亭里)에서 태어났다. 유인 박씨는 정숙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장난하는 모습이 없었고, 놀러 다니는 습관도 없었으며,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때에는 순종하며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규방(閨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하였다.71) 그 몸가짐이 엄격함과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과 일을 다스리는 부지런함은 제칙(提勅)하지 않아도 한결같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16세에 고(故) 학생 조용희(趙鏞熙) 공에게 시집갔는데, 조공은 함안(咸安)의 저명한 종족이었다. 문에 들어가 시부모를 알현하자 친척 내외가 그 덕용(德容)과 예모(禮貌)를 보고는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달라서 현부(賢婦)를 얻었다고 하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잘 때까지 집안일을 살펴 일이 크든 작든 반드시 여쭈어 행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드리고 문안드리는 의식과 겨울과 여름에 온청(溫淸)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삼가서 시종 변함이 없었다. 시부모가 병이 있으면 낮에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아 지극히 근심하다가 혹 음식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시어머니 조씨(曺氏)가 몹시 늙고 병들어 사지를 가누지 못한 지 6년이나 되었는데, 유인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눕고 일어나는 것을 손수 부축하였고, 먹고 마시는 것을 손수 떠 주었으며, 머리가 가려우면 손수 빗질해주었고, 대소변을 흘리면 손수 닦아주었다. 병상을 부지런히 비질하고 병석에 입었던 옷을 자주 빨아 병실을 항상 청결하게 하니 사람들이 악취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씨가 매번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내가 근근이 목숨을 이어 죽지 않고 6년이나 된 것은 모두 새 며느리의 은덕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을 섬김에 예의가 있어 사사로이 지낼 때의 안일한 뜻을 경계하고 함부로 친압하는 태도를 끊어 공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번번이 너그러운 말로 규간(規諫)하였고, 성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차분하게 깨우쳐 주고 오해를 풀었으며, 독서하고 근칙하도록 권하여 유업(儒業)을 실추시키지 않게 하였다. 동서를 대함에 항상 굶주리고 추위에 떨까 염려하고 그 노고를 근심하여 음식과 의복은 반드시 균일하게 하였고, 재산과 기물은 반드시 빌려주었으며, 곡직(曲直)을 서로 따지지 않았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서로 겨루지 않았으므로 매우 화락하여 누구도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친족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때에 따라 안부를 묻고 일에 따라 돌보아 주며 은혜와 의리가 있어 각각 그 마음을 얻었다. 태만한 기운을 몸에 베풀지 않았고 이치에 어긋난 비루한 소리를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화려한 물건은 방에 들이지 않았고 무격(巫覡) 같은 무리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항상 어진 사우(師友)를 따라 배우게 하였는데, 예가 아닌 곳과 의롭지 못한 사람은 금하여 가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며 항상 말하기를,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는 연연해 할 것이 없고, 높고 화려한 관직은 부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인가(人家)에 좋은 자손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자기를 꾸짖는 데에 두텁고 남을 꾸짖는 데에 박하며, 스스로를 받드는 것에 검소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에 넉넉하였다. 따라서 한 집안의 안에 은의(恩誼)가 넘쳐흐르고 윤리가 정연하여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일이 거행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식자(識者)들이 옛날의 정녀(貞女) 숙원(淑媛)에 견주었다. 임진년 6월 17일에 세상을 떠나 부춘면(富春面) 담덕동(澹德洞) 뒤 기슭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익제(翼濟), 차남은 순제(順濟)이며 딸은 능성(綾城, 능주) 구치복(具致福)과 광산(光山)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내룡(來龍)과 내구(來龜)이며, 둘째 집의 손자는 내주(來柱)이다. 증손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규방의 안에 숨겨진 덕과 그윽한 행실이 상세하지 않은 듯하여도 밖에 드러난 것은 마치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열 눈이 주시하는 것처럼 밝을 뿐만 아니다. 시부모님은 그 효성을 칭찬하고, 친척은 그 자애로움을 칭찬하며, 자손은 그 가르침을 준수하고, 이웃은 그 뜻에 감동받아 고을의 오랜 벗과 원근의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씨(趙氏)를 덕문법가(德門法家)라고 일컫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72)"라고 하였으니, 나는 조씨가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임을 알겠다. 趙君翼濟善士也。余晩接隣閈。日月從逐。爲十餘年。日以其先孺人遺狀。有立言不朽之託。余曰。君家世德之美。固已稔聞。但人微學淺。有不足以承堪。而揆以事契之重。又不可以牢讓。孺人姓朴氏。貫咸陽。尙書公諱善。始祖。靈巖君諱通。其中祖也。曾祖諱宗允。祖諱景殷。考諱源。妣光山金氏參奉箕大女。純廟庚辰十一月三日。孺人生于靈巖松亭里。貞靜柔嘉。自幼無戲嬉之容。無遊走之習。侍側聽順。未有違忤。稍長不出閨旁。夜行以火。其持身之嚴。養親之誠。執業之勤。不費提勅而一如成人。十六歸于故學生趙公諱鏞熙。趙卽咸安著族也。及入門拜舅姑。親戚內外。見其德容禮貌。異於凡常。莫不賀其得賢婦。夙興夜寐以視宮事。事無大小。必稟而行。朝夕滫瀡之供。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必誠必謹。終始無替。舅姑有疾。晝不就席。夜不就枕。極其致憂。或至廢食。姑曺氏極老極病。四體不收。至爲六年。孺人晝宵在側。臥起則手扶之。飮啖則手匙之。頭癢則手梳之。遺矢則手除之。勤掃病榻。頻濯病衣。使病室常常潔淨。人不見其有臭惡之氣。曺氏每對人言曰。吾延命不死而至於六年之久者。皆新婦之賜也。事君子有禮。戒燕私之意。絶褻狎之態。敬之如賓。有過則輒寬裕以規諫之。有怒則必從容以諭解之。勸令讀書飭身。不墜儒業。待娣姒。常念其飢寒。悶其勞苦。飮食衣服必均一。財産器用必假貸。不以曲直相稽。不以利害相較。怡怡湛樂。了無間言。至於族戚隣里。隨時問訊。隨事扶恤。有恩有義。各得其心。怠慢之氣。不設於身。鄙俚之聲。不出於口。華麗之物。不入於房。巫覡之類。不納於家。敎子孫必以義方。常令從賢師友遊。至於非禮之地。非義之人。禁不得使之相接焉。常曰。良田美土。不足爲戀。嵬官華職。不足爲羨。但見人家有好子孫。是吾大願也。厚於責已而薄於責人。儉於自奉而豐於施人。一門之內。恩誼融融。倫理井井。敎無不行。事無不擧。識者以古之貞女淑媛擬之。壬辰六月十七日卒。葬富春面澹德洞後麓乾坐原。生二男二女。男長翼濟。次順濟女。適綾城具致福光山李承奎。長房孫來龍來龜。次房孫來柱。曾孫幼不錄。嗚乎。閨房之內。潛德幽行。宜若不詳而其著於外者。不啻若十手十目之爲昭昭也。舅姑稱其孝。親戚稱其慈。子孫遵其敎。隣保感其義。以至鄕邦知舊。遠近人士。無不稱趙氏爲德門法家。詩曰釐以女士。從以孫子。余知趙氏之必有後也。 유인(孺人) 9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품계이다. 밤에 횃불을 사용하였다 《소학》 〈명륜〉에 "그러므로 여자는 규문 안에서 날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백 리 먼 길의 초상에 달려가지 않는다.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없고 행실을 독단적으로 이룸이 없어서, 참여하여 알게 한 뒤에 행동하고 증험이 있은 뒤에 말한다. 낮에는 뜰에 나다니지 않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한다. 이는 부덕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是故女及日乎閨門之内, 不百里而犇喪, 事無擅爲, 行無獨成, 叅知而後動, 可驗而後言, 晝不遊庭, 夜行以火, 所以正婦徳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너에게……하리라 《시경》 〈기취(旣醉)〉에, "그 따름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其僕維何. 釐以女士. 釐以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여사는 여자 중에 선비의 행실이 있는 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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