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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에 무인년(1938) 五月五日【戊寅】 때마침 오월 오일이라 時當五月五부들 푸르고 앵두가 처음 익었네 蒲綠櫻初熟사람들은 모두 명절을 기뻐하는데 人皆喜佳節누굴 위해 나는 미간을 찌푸리나 爲誰余頞蹙예전에 삼려대부가 충간했다가 在昔三閭忠참소 때문에 추방을 당했는데 以讒見斥逐조국의 멸망을 통한으로 여겨 痛恨宗國亡이날 물고기 뱃속에 장사했네1) 此日葬魚腹〈이소〉와 〈구가〉2)에서는 離騷與九歌글자마다 한 움큼 눈물 뿌렸는데 字字淚盈掬굴원을 경모하는 회옹을 만나 敬慕遇晦翁주해를 지어 읽게 되었네3) 至作註解讀아, 나는 간재 선생의 문인으로 嗟余于艮門삼려대부와 몹시 닮았으니 三閭相似酷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고친 것은 誣師與改稿그 죄가 형벌을 받아 마땅하네 厥罪宜法伏기강이 하나같이 무너졌으나 綱紀一以墮누가 감히 조금이라도 범하랴 誰敢毫髮觸내가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한 채 余不自量力분변하고 토론하여 두 눈 밝혔으나 辨討明雙目죄는 도리어 공훈이 되었고 罪反爲勳勞바름은 결국 사특함으로 돌아갔네 正乃歸邪曲비유하자면 초나라 조정에서 譬彼鄢郢朝충신과 간신의 상하가 바뀐 것 같고 忠佞到首足게다가 거기에 호응하는 자들은 亦復同聲者권세를 좇아 기회주의자가 되었네 趨勢爲蝙蝠천여 명이나 되는 수많은 무리에서 林林千餘徒혈혈단신 나 혼자뿐이었으니 孑孑惟余獨그동안에 당한 일신의 재앙은 其間一身禍말하자니 오싹 소름이 생기네 言之寒生粟천추에 스승의 도가 없어졌으니 千秋師道亡생각하면 마음이 쓰디쓰네 念之心荼毒옛사람이 먼저 터득하지 않았던가 古人先獲否한번 죽더라도 원하는 걸 하겠다고 一死寧所欲다만 두려운 건 중도에 지나치면 但恐過中處훗날 의론이 심해진다는 점이네 不無後論篤삶과 죽음은 규모가 다르지만 生死殊規模맑음과 깨어있음은 궤폭이 같으니 淸醒一軌輻명백히 분변한 수많은 서적이 多少明辨書깊은 산골에 보관되어 있네 藏在深山谷유유하게 백세가 지나고 나면 悠悠來百世나를 알아줄 사람은 누구일까 知我復有孰시절을 느끼고 고금을 슬퍼하며 感時傷今古시 짓고서 공연히 세 번 반복하네 詩成謾三復 時當五月五, 蒲綠櫻初熟.人皆喜佳節, 爲誰余頞蹙?在昔三閭忠, 以讒見斥逐.痛恨宗國亡, 此日葬魚腹.《離騷》與《九歌》, 字字淚盈掬.敬慕遇晦翁, 至作註解讀.嗟余于艮門, 三閭相似酷.誣師與改稿, 厥罪宜法伏.綱紀一以墮, 誰敢毫髮觸?余不自量力, 辨討明雙目.罪反爲勳勞, 正乃歸邪曲.譬彼鄢郢朝, 忠佞到首足.亦復同聲者, 趨勢爲蝙蝠.林林千餘徒, 孑孑惟余獨.其間一身禍, 言之寒生粟.千秋師道亡, 念之心荼毒.古人先獲否? 一死寧所欲.但恐過中處, 不無後論篤.生死殊規模, 淸醒一軌輻.多少明辨書, 藏在深山谷.悠悠來百世, 知我復有孰?感時傷今古, 詩成謾三復. 삼려대부(三閭大夫)가……장사(葬事)했네 전국 시대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 기원전 343~기원전 277)이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으나 뒤에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참언에 의해 면직되었다가 다시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湘水)로 추방당했다. 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10년간 방랑 생활을 하였는데, 진(秦)나라에 의해 조국인 초나라가 멸망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별세하였다. 이소(離騷)와 구가(九歌) 춘추(春秋)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의 편명(篇名)이다. 모두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뜻을 담고 있다. 굴원(屈原)을……되었네 주희(朱熹)가 《초사(楚辭)》를 주해하여 《초사집주(楚辭集註)》를 엮은 것을 말한다. 그는 〈초사집주서(楚辭集註序)〉에서 "굴원의 사람됨은 그 뜻과 행동이 비록 중용(中庸)을 벗어나 모범을 삼을 수는 없으나 모두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그 충성을 칭송하였다. '회옹(晦翁)'은 주희의 만년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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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절의 〈수미음〉에 차운하다 11수 次康節《首尾吟》【十一首】 강절의 시에 화락한 흥취가 많고 내 시에 우려하고 탄식하는 뜻이 많은 것은 참으로 소양(所養)의 깊이와 자득(自得)의 유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절이 태평하여 아무 일도 없는 날을 만나고 내가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진 때를 당한 것도 때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세에 논하는 자가 혹 성정(性情)의 바른 데로 똑같이 돌아간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무인년(1938) 5월 모일에 짓다.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세상을 걱정한 때라네 詩是後滄憂世時운수가 다시 오지 않아 이제 끝이 났으니 運不復來今已矣짐승과 함께 살기 어려우니 나는 어디로 갈까 獸難同處我何之비록 해는 여전히 길이 비춰준다고 하지만 縱云白日猶長照한스럽게도 광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네 可恨狂風不盡吹한 선비가 누구와 함께 하늘에 간쟁할까 一士爭天誰與此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도를 걱정한 때라네 詩是後滄憂道時명분 이치는 분분히 언쟁으로 돌아가고 名理紛紛歸口舌선비4)들은 하나하나 기만에 익숙하네 縫章箇箇慣誣欺어찌 학계가 이렇게 어지러울 줄 짐작했으랴 豈料學界斯乖亂순박한 풍속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없네 無路淳風可反移오늘날 참된 선비가 나오길 간절히 바라니 切願眞儒生此日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학문을 걱정한 때라네 詩是後滄憂學時타고난 자질은 원래 중간 이하인데도 賦質元來中下也공부할 때에 백 배 천 배를 하지 않네 用功又不百千之마음 터놓고 잡초 제거할 계책이 없고 開胸無計去茅塞욕심에 빠져 항상 물가에 임하듯 위태롭네 陷慾常危臨水湄노년에 힘써 두려워할5) 것은 이것뿐이니 乾惕餘年惟此已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분수에 편안한 때라네 詩是後滄安分時세도의 흥망은 하늘의 명에 달려있으나 世道廢興天有命심신의 치란은 스스로 기미를 보아야 하네 身心治亂自觀機구렁텅이6)가 앞에 있음을 잊지 않았거니 不忘溝壑前頭在참된 미치광이 남겨둔 걸 훗날에 알리라 留與眞狂異日知사물에 각기 부여한 걸 내 어찌 참견하랴 物各付之我何預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가소로워한 때라네 詩是後滄堪笑時염자는 계강자 곳간 늘려주는 걸 당연시 했고7) 冉子宜其增季廩소진은 망녕되이 아내가 베틀에서 내려오길 바랐네8) 蘇秦妄欲妻下機사람은 권세와 이익 좇아 혼백이 혼미해지고 人趨勢利迷魂魄귀신은 금전을 따라 지휘를 들어주네 鬼逐金錢聽指揮지금이나 예나 유유하게 이와 같으니 今古悠悠如此已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고립되었을 때라네 詩是後滄孤立時벗들의 평소 지식은 이미 그만두었고 已息交朋平日識심사를 하늘이 알아주기만 바라네 但求心事上天知《역상》9)의 두려울 것 없음을 살펴보려고 欲觀易象無攸懼먼저 《대학》의 자신 속이지 않음에 힘쓰네 先務曾經毋自欺오직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이르니 惟有淸風明月到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노쇠해졌을 때라네 詩是後滄衰老時갖가지 질병이 항상 증세를 더해가니 百般疾病恒添祟일체 영위하는 것에 기심10)을 없앴네 一切營爲幷息機이 몸을 수양하며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修得此身惟待死앞길이 공연히 기로에 임하지 않게 하리 免敎前路枉臨岐지난날을 추억하면 한바탕 꿈과 같으니 追憶經過如一夢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깊이 들어갔을 때라네 詩是後滄深入時천지가 뒤집혀 의관과 신발이 바뀌었고 天地飜傾易冠屨윤리 강상이 뒤섞여 헝클어진 삼실 같네 倫綱紛錯亂麻絲당시에 동해에서 머리털을 보존했을 뿐이니 當年東海惟存髮어느 곳 도원에서 옷을 바꾸지 않을까 何處桃源不改衣바로 지금은 당연히 이것 밖에 없으니 目下當然無此外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이치를 연구할 때라네 詩是後滄硏理時인물의 근원에는 오직 성만 있으니 人物源頭惟性在공부의 전체는 모두 마음이 한다네 工夫全體總心爲성경이 철저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고 敬誠到底方收效격치가 정밀해야 비로소 의심을 없애네 格致精來始去疑실행을 잘하고 못하냐에 달렸을 뿐이니 只在行之能否爾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분명하게 분변한 때라네 詩是後滄明辨時성은 중인, 마음은 임금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 性衆心君是何說중화인과 오랑캐 짐승은 정히 의심할 것 없네 華人夷獸定無疑거짓과 진실은 천추의 눈 가리지 못하고 假眞難掩千秋眼승패는 한 판의 바둑과 동일하지 않네 勝敗非同一局棋심문과 신사11)가 모두 이것을 위해서니 審問愼思都爲此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요체를 알아낸 때라네 詩是後滄知要時기절이 사람 놀래키는 것이 큰 것 아니고 氣節驚人非大者문장이 세상에 빛나는 것도 사소한 일이네 文章耀世亦些兒어찌 정일의 심법12)을 지니는 것만 하랴만 豈如精一持心法절로 영화가 있어 얼굴에 윤기가 돈다네13) 自有英華睟面眉이에 이르러야만 할 일을 마쳤다고 하니 到此方爲能事畢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 康節詩多和樂之趣, 余詩多憂歎之意, 是固所養淺深自得有無之異.然康節遇太平無事之日, 余當國亡道喪之際, 亦時然也.後之論者, 或可視以同歸情性之正也歟! 戊寅榴夏日.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憂世時.運不復來今已矣, 獸難同處我何之?縱云白日猶長照, 可恨狂風不盡吹.一士爭天誰與此?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憂道時.名理紛紛歸口舌, 縫章箇箇慣誣欺.豈料學界斯乖亂? 無路淳風可反移.切願眞儒生此日,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憂學時.賦質元來中下也, 用功又不百千之.開胸無計去茅塞, 陷慾常危臨水湄.乾惕餘年惟此已,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安分時.世道廢興天有命, 身心治亂自觀機.不忘溝壑前頭在, 留與眞狂異日知.物各付之我何預?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堪笑時.冉子宜其增季廩, 蘇秦妄欲妻下機.人趨勢利迷魂魄, 鬼逐金錢聽指揮.今古悠悠如此已,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孤立時.已息交朋平日識, 但求心事上天知.欲觀《易象》無攸懼, 先務曾經毋自欺.惟有淸風明月到,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衰老時.百般疾病恒添祟, 一切營爲幷息機.修得此身惟待死, 免敎前路枉臨岐.追憶經過如一夢,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深入時.天地飜傾易冠屨, 倫綱紛錯亂麻絲.當年東海惟存髮, 何處桃源不改衣?目下當然無此外,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硏理時.人物源頭惟性在, 工夫全體總心爲.敬誠到底方收效, 格致精來始去疑.只在行之能否爾,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明辨時.性衆心君是何說? 華人夷獸定無疑.假眞難掩千秋眼, 勝敗非同一局棋.審問愼思都爲此,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知要時.氣節驚人非大者, 文章耀世亦些兒.豈如精一持心法? 自有英華睟面眉.到此方爲能事畢, 後滄非是愛吟詩. 선비 원문의 '봉장(縫章)'은 봉액(縫掖)과 장보(章甫)로서 선비의 의관(衣冠)을 말한다. 봉액은 의복의 한 종류이고 장보는 관(冠)의 한 종류이다. 공자가 어린 시절 노(魯)나라에 살 때는 봉액을 입고, 자란 뒤에 송(宋)나라에 살 때는 장보를 썼다. 《禮記 儒行》 힘써 두려워할 원문의 '건척(乾惕)'으로, 항상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조심하며 자기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써 저녁에도 삼가고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無咎.〕" 하였다. 구렁텅이 원문의 '구학(溝壑)'으로 산골짜기나 계곡을 말하는데, 떠돌다가 객사한 장소나 곤궁한 처지를 뜻한다. 염자(冉子)는……했고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가 권력자인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이 된 뒤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그의 재산을 늘려 주자, 공자가 크게 노하여 제자들에게 "그는 더 이상 우리 무리가 아니니, 자네들은 북을 울려 성토하며 그를 공격해도 좋다.〔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라고 말하였다. 《論語 先進》 소진(蘇秦)은……바랐네 전국 시대 소진이 집을 떠나 돌아다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베틀에서 내려와서 그를 예로써 맞아주지도 않더니, 뒤에 육국(六國)의 재상이 되어 돌아오자 아내를 비롯한 온 집안사람이 소진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秦策上》 역상(易象) 《주역》을 설명한 단사(彖辭)와 효사(爻辭)인데, 주 문왕(周文王)과 주공(周公)이 각각 지었다고 전한다. 기심(機心) 자기의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말한다. 심문(審問)과 신사(愼思) 자세히 따져서 묻는 것과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중용장구》 제20장에서 군자가 성(誠)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박학(博學)ㆍ심문ㆍ신사ㆍ명변(明辨)ㆍ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정일(精一)의 심법(心法) 인심(人心)은 사욕에 빠지기 쉽고 도심(道心)은 밝아지기 어려우므로 정(精)으로 도심을 보존하여 기르고, 일(一)로 인심을 성찰하는 수양법이다.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제위(帝位)를 선양하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얼굴에 윤기가 돈다네 군자의 내면에 축적된 것들이 넘쳐서 몸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하여, 그 드러나는 빛이 얼굴에 윤택하게 나타나고 등에 가득하게 나타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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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산에게 부쳐 보내고 화답을 구하다 寄鄭敬山求和 해와 달14)은 분분하게 번갈아 날고 달리는데 烏兔紛紛迭走飛걸핏하면 해를 넘기도록 서신을 보내지 못했네 音書動輒隔年違강가에서 읊조리는 나는 몰골이 어찌 수척하나 我吟江上形何槁산중에 은둔한 그대는 몸이 절로 살이 쪘네 子遯山中體自肥한번 죽고 곰 발바닥 택한 맹자15) 들어보았고 一死取熊聞孟聖오래 살다가 학으로 변한 정위16)는 가소롭네 久生化鶴笑丁威서로 닦는 걸 늘그막에도 저버린 적 없었으니 交修晩節無相負이것 이외에는 더이상 바랄 것이 아니네 此外非曾更有希 烏兔紛紛迭走飛, 音書動輒隔年違.我吟江上形何槁? 子遯山中體自肥.一死取熊聞孟聖, 久生化鶴笑丁威.交修晩節無相負, 此外非曾更有希. 해와 달 원문의 '오토(烏兔)'는 일월(日月)의 별칭이다. 신화에 해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는 옥토끼가 있다고 하여 해와 달을 가리켜 오토라고 한다. 좌태충(左太冲)의 〈오도부(吳都賦)〉에 "하늘에 올라 해와 달 속의 까마귀와 토끼를 잡고, 날짐승과 길짐승의 소굴을 모두 뒤진다.〔籠烏兔於日月, 窮飛走之棲宿.〕"라는 구절이 있다. 《文選 第5卷》 한번……맹자(孟子) 맹자가 삶을 버리고 의리를 택하였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오래……정위(丁威) 정위는 한(漢)나라 때 요동 사람 정 영위(丁令威)의 약칭이다. 그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들어가 선술(仙術)을 배우고 뒤에 백학(白鶴)으로 변화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는데, 한 소년이 활을 가지고 그를 쏘려 하자, 그 학이 날아올라 공중을 배회하면서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 영위가,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 같은데 사람은 그때 사람 아니어라, 어이해 신선 안 배우고 무덤만 즐비한고."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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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당 황공8) 정려중수기 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 아, 이곳은 고(故)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명신(名臣) 양건당(兩蹇堂) 황공(黃公)의 충효(忠孝)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여 처음에는 효건(孝蹇)으로, 뒤에는 충건(忠蹇)으로서 끝내 대방성(帶方城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는 날에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킬 수 있었으니, 지극한 행실과 큰 절개, 곧은 충정과 위대한 공열은 천하에 강상(綱常 삼강오륜)을 부지하고, 백세토록 나약하거나 완악한 사람을 흥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적(事蹟)의 대략적인 내용은 야사(野史)와 국승(國乘 나라의 역사)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굳이 중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종(正宗 정조(正祖)) 을묘년(1795)에 정려문을 세우라는 임금의 명으로 7세손 진규(鎭奎)가 여러 종친과 함께 처음 건립하였고, 97년 뒤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오년(1894)에 추증(追贈)의 은전을 받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현판을 고쳐 써서 게시하는 것과 단청을 새롭게 칠하는 꾸밈은 9세손 간(柬)이 주관하였다. 14년 뒤 정미년(1907)에 세월이 오래되어 목재가 썩게 됨에 따라 무너지는 우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고쳐 건립하여 완전히 새롭게 하였으니, 10세손 경현(慶炫)과 12세손 열주(悅周)가 여러 종친들에게 제창(提唱)하여 중수한 것이다.아,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져 온 천하가 닫히고 막혔으니, 공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도 이 일을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중건이 애당초 세상의 교화를 돕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嗚乎。此故宣廟朝名臣兩蹇堂黃公忠孝褒旌之閭也.公事親至孝。事君盡忠。始以孝蹇。後以忠蹇。卒能殞身立。慬於帶方城陷之日。至行大節。貞忠偉烈。足以扶綱常於天下。起懦頑於百世。若其事蹟梗槩。野史國乘。昭載備錄。此不必架疊焉。至正宗乙卯。棹楔成。命七世孫鎭奎與諸宗創始之。後九十七年。今上甲午。承贈貤之典。因以改題揭板及新丹雘之飾。蓋九世孫柬尸之也。後十四年丁未。以歲久材朽。慮有頽圮之患。將改建而一新之。蓋十世孫慶炫十二世孫悅周。倡諸宗而經營之也。嗚乎。世衰道微。九野閉塞。未知公之忠魂義魄。其亦有以鑑此耶。今日之重建。未始非裨補世敎之一助云爾。 양건당 황공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던 황대중(黃大中, 1551~1597)으로, 양건당(兩蹇堂)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정숙(正叔)이며, 전라남도 강진(康津) 출신이다.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 약재로 사용하면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효건(孝蹇)이라는 호를 얻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壯士)로 뽑혀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해상 전투 중 총탄을 맞아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절게 되자 이순신으로부터 "효건(孝蹇)이 이제 충건(忠蹇)이다."라는 찬탄을 받으며 효건과 충건, 즉 양건당으로 불려졌다. 정유재란 때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남원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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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모선록》 서문 曺氏慕先錄序 스스로 생각건대, 서계(書契)147) 이후로 예전의 말과 지나간 행적들을 모두 갖추어 기록하지 않음이 없게 되면서 서적을 겹겹이 쌓아 놓으며 그 많음을 싫어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읊고 외우면서 그 익숙함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현인을 사모하는 마음은 타고난 본성에서 나와 그치지 않음이 이와 같다.아, 옛날의 현인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선조(先祖)에게 법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칭송하며 기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공류(公劉)의 풍화(風化)에 대한 기술148)이 자기의 집에서 나오고, 공백(龔伯)의 술동이나 대접에 새겨진 명(銘)149)이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다면 작게는 보존하여 한 집안의 계책과 교훈으로 삼고, 크게는 전하여 한 시대의 모범과 법식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효자와 어진 사람의 마음이다.나의 벗 조군 석준(曺君錫俊)이 선대의 사실을 기록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조씨(曺氏)는 충의(忠義)의 큰 절개와 효우(孝友)의 지극한 행실로 혹 나라에서 빛나기도 하고, 혹 고을에서 드러나기도 한 것이 전후로 수백 년이 되었지만, 유고(遺稿)가 흩어져 없어지고,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어 자손들이 세월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사라지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유실된 것들을 수습하여 세고(世稿)를 편집해 만들고서 길이 전할 계책으로 삼았다.아, 자손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근본을 사모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과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이어 나갈 생각이 어찌 성대하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로 인하여 더욱 힘써서 자신을 맑게 하여 안으로는 가족을 보호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며, 밖으로는 세상을 일깨우고 세속에 모범이 된다면, 이 책이 어찌 한 가문의 건연(巾衍 서적을 넣어두는 상자) 속에서 전해지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自惟書契以來。凡前言往行。無不備錄。連編累牘而不厭其多。朝吟暮誦而不厭其熟。蓋慕賢之心。出於秉彛而有不可已者如此。嗚呼。在先賢猶然。況在先祖而有可以爲法焉。則所欲稱述者。其心爲何如哉。公劉風化之述。出於其家。龔伯尊敦之銘。不在他人。小則存以爲一家之謨訓。大則傳以爲一世之矜式。此孝子仁人之心也。余友曺君錫俊。持其先世事實一冊。請余弁之。竊惟曺氏以忠義大節。孝友至行。或光于王國。或著于鄕里者。前後數百年矣。遺稿散逸。存者無幾。子孫懼其愈久而愈泯。收拾遺漏。編成世稿。以爲不朽計。嗚呼。爲子孫而讀此書。其懷本追遠之情。繼志述事之意。豈不油然而生乎。因此加勉以淑其身。內而保族宜家。外而牖世範俗。則此書豈止爲一門巾衍之傳而已哉。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문자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공류(公劉)의……기술 공류는 후직(后稷)의 증손으로, 하(夏) 나라의 박해를 피해 빈(豳)으로 이주한 뒤에 후직의 유업을 닦아 농사에 힘쓰며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훗날 주(周)나라가 일어날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주나라가 창업된 뒤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할 때에 공류의 풍화(風化)를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 편에 기록하여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였다. 여기에서는 세속의 교화에 공헌한 선조의 기록을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공백(龔伯)의……명(銘) 원문의 "공백준대지명(龔伯尊敦之銘)"을 국역한 것으로, 선조가 사용하던 그릇이나 물건에 새겨 놓은 글을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참고로 원문의 "공백준대(龔伯尊敦)"는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의 주에 "옛 기물에 이르기를. '?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감히 아름다운 천자의 명을 대양(對揚)하여 짐의 황고(皇考)인 공백(龔伯)의 술동이와 대접을 받드노니, ?은 미수(眉壽)를 누려 만수무강하게 하소서' 하였다.[古器物銘云 : '?拜稽首, 敢對揚天子休命, 用作朕皇考龔伯尊敦, ?其眉壽, 萬年無疆.']"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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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기 詠歸亭記 지난 정해년(1887) 가을에 나는 여러 벗들의 뒤를 따라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에서 바람을 쐬고 영강(映江)에서 목욕하고서 읊조리며 부춘(富春)의 들녘으로 돌아왔다.1) 이로 인하여 규약을 만들어서 봄가을에 모여 강습하는 일을 행하였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고, 의례가 번다했기 때문에 큰 마을에 소속시켜 돌아가며 모임을 가졌고, 한가로운 들녘을 택해 베풀어 행하였는데, 이를 설행한 지 조금 오래되면서 모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자, 촌마을의 재력으로는 계속 이어가기 어렵고, 들녘의 장소는 대부분 햇볕에 노출되어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신묘년(1891) 9월 용리(龍里)의 모임에서 집을 짓자는 의론이 제기되어 임진년(1892) 봄에 칠송(七松) 마을에 터를 잡고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겨울 12월에 낙성하였는데, 방과 대청, 문, 행랑 등이 반듯하고 치밀한데다 크고 넓어서 거처할 만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빈한한 선비들의 쇠잔한 힘으로 고생스럽게 부지런히 힘써 모아서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성취를 보게 된 것인데, 그 뜻이 장차 무엇을 위해서인가? 고요한 곳을 찾아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한 계책을 위해서인가?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돕기 위해서인가? 글을 지어 벼슬을 구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서인가?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된 도리를 구할진댄 학문이 아니면 불가하고, 학문을 하는 방도를 구할진댄 사우(師友)들이 아니면 불가하니, 사우들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말미암는 것도 또한 그 장소가 없으면 안 된다. 상ㆍ서ㆍ학ㆍ교(庠序學敎)2)가 본래 인륜을 밝히고 교육을 확립시키는 곳이었지만, 삼대(三代)3) 이후로 인도하고 통솔하는 것이 예스럽지 못하였고, 또 저자와 성곽 안에서는 분주하게 다투거나 열기로 떠들썩한 뜻이 많았고, 고요하고 한가로운 정취가 적었으니, 이것이 서원(書院)이 창설된 이유이다. 그러나 서원의 규례가 또 옛날과 같지 않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선비들이 서로 교제하며 학업을 닦는 곳으로 이곳보다 훌륭한 곳이 아마도 없을 듯하다.이 정자에서 노니는 자들은 《소학》으로 기본을 세우고 《대학》으로 규모를 정하여, 집에 들어가서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에게 공경하며, 나가서는 스승을 높이고 벗들을 가까이하며,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세우고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몸을 지키며, 강습과 토론으로 이를 밝히고 바로잡음과 경계로 이를 독려하며,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지킴을 고치지 않아서 날로 원대한 것을 궁구한다면 아래로는 가정의 법을 세우고 마을의 풍속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위로는 세도(世道)를 힘쓰게 사람들을 격려하고 나라의 영광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대 학교의 유제(遺制)이고, 또한 오늘날 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던 뜻이다. 往在丁亥秋。余從諸友後。風乎瑞石。浴乎映江。詠而歸於富春之野。因以創設規約。爲春秋講聚之擧。始以人衆儀繁。屬鉅村輪會。擇閒野設行。行之稍久。會者愈夥。村力難繼。野處多暴。人莫不病之。辛卯九月龍里之會經室之議起。壬辰春卜地于七松之里。秋設役。越明年冬十二月落之。其房室廳堂。牑戶序廂。端密宏敝。可以爰居爰處。然是擧也。以冷士殘力。辛勤拮据。積歲積年。乃始見就者。其意將欲何爲耶。爲尋寂耽閒之計耶。爲燕飮玩戱之資耶。爲作文干進之所耶。嗚乎。士生斯世。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學問之道。非師友不可。所以親師友而道問學者。亦不可以無其所。庠序學校。固明倫立敎之地。而三代以降。導率不古。且在朝市城郭之中。多奔競熱閙之意。少寂寞寬閒之趣。此書院所由起也。然書院之規。又不如古。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遊此室者。以小學立基本。以大學定規模。入則愛親敬兄。出則隆師親友。立心以忠信。持身以端莊。講討以明之。規警以督之。不厭不改。日究遠大。則下可以立家範正鄕俗。上可以勵世道補國光。此是三代學校之遺制。而亦今日經始之意云爾。 지난……돌아왔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라는 물음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하자, 공자 이를 허여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산천 유람을 표현하였다. 상ㆍ서ㆍ학ㆍ교(庠序學敎) 중국 고대의 교육기관으로, 《맹자》 〈등문공 상〉에서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이다. 하나라는 '교', 은나라는 '서', 주나라는 '상'이라고 불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다.[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중국 고대 성인이 세운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요순 시대와 함께 '훌륭한 다스림이 행해졌던 시대'라는 의미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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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휴당 선생 최공4) 정려중수기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 옛적 임진왜란의 변고에 절개와 의리를 지키다 죽은 이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우뚝하고 꿋꿋했던 기상이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처럼 천하에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백세(百世)에 회자(膾炙)되는 분으로는 삼장사(三壯士)5)처럼 더욱 성대한 이가 없었으니, 일휴당(日休堂) 최공(崔公 최경회(崔慶會))가 바로 삼장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대 사람들이 공을 위해 능주(綾州)에는 정려문(旌閭門)을 세웠고, 진주(晉州)에서는 제사를 지냈으니, 대개 능주는 공이 살았던 고향이고, 진주는 순절한 지역으로, 잊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을 부치는 데에 차이가 있지 않았다.임진년 가을에 진주의 선비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할 것을 도모하여 사문(斯文) 성복윤(成福閏)과 전주일(全柱一), 하용진(河龍辰)에게 부탁하여 호남으로 가서 의론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능주를 지나가다 정려문이 무너지고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 개탄하며 말하기를, "이번 발걸음은 본래 사우를 위해 계획한 것이지만, 지금 정려문이 이와 같으니, 어찌 사우만 중수하고 정려문은 중수하지 않겠는가."하고서 마침내 가던 길을 멈추고서 전대를 열어 목재를 모으고 장인을 모집하더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아, 선생이 삼강오륜을 일으켜 세우고 명교(名敎)6)를 창도(唱導)하여 권면한 것은 그 공이 천지와 더불어 존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니, 한 지역의 정려문만으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물을 일으켜 마음을 부치는 데에 그 장소가 없을 수 없으니, 오늘날의 역사(役事)를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후대 사람들이 진실로 사문(斯文)7)의 동지(同志)들과 함께 이어서 이를 수리하여 그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이 정려문도 선생과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삼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昔在龍蛇之變。伏節死義。前後相望。而其磊磊落落。如靑天白日。輝映於天下。膾炙於百世。未有如三壯士之爲尤盛也。日休堂崔公卽三壯士之一。後人爲之棹楔於綾。俎豆於晉。蓋綾是杖屨之鄕。而晉是殉節之地也。所以寓追慕不忘之心者。靡有間焉。壬辰秋。晉之士謀修祠宇。屬斯文成福閠全柱一河龍辰來湖南收議。因過綾。見旌閭頹敝。慨然曰。此行本爲祠宇計。而今旌閭如此。豈重修祠宇而不修旌閭乎。遂停鞭開橐。聚材募工。不幾日而一新之。嗚乎。先生所以扶植綱常。倡勵名敎者。其功可以與天壤俱敝。非一區棹楔能輕重。然興物寓情。不可無所。則今日之役。亦豈可已者耶。後之人。苟與斯文同志。繼以修之。無失其時。則此屋亦將與先生不朽。竊有望焉。 일휴당 선생 최공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일휴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선우(善遇)이며, 전라남도 능주(綾州) 출신이다. 양응정(梁應鼎)ㆍ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중(喪中)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패전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와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이 함락될 때 최경회와 함께 투신 자결했던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고종후(高從厚, 1554~1593) 세 사람을 가리킨다.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儒敎)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사문(斯文) 유학(儒學)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였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사문'을 없애려 하였다면 내가 사문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문은 도(道)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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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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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오【원례】에게 답함 答李鉉五【原禮】 외지고 누추한 호남 구석의 진부한 늙은이가 무슨 영향력이 있기에, 먼저 편지를 보내주신 은혜를 베푸시면서, 이처럼 친절하고 정성스럽습니까? 저는 그대 스승과는 외람되이 동문의 교분이 있지만 버림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옛 친구는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뿐입니다.121) 어찌 조금이라도 견줄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스승의 벗인 까닭으로 나에게 문안하는 것이라면 혹 괜찮겠지만 만약 그대의 스승을 섬겼던 것처럼 나를 섬기겠다고 한다면 실정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상황이 점점 험난해지고 스승의 학설이 분열되어서, 후배인 젊은 학생이 향해 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그대는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선생과 같은 스승을 구해 섬겨서, 밤낮으로 조용히 주도면밀하게 계도해주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것은 이 시대의 좋은 만남일 것입니다. 그대도 역시 마땅히 이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어도, 간혹 지향하는 것이 바르지 않고 식견이 고르지 않아서 편벽되고 방탕하게 되는 귀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스승을 선별하지 않아 초래된 까닭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학문에 힘쓰는 것은 스승을 구하는 데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스승을 구했다면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조예가 얕고 깊어지는 것은 다만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僻陋湖隅一腐朽。何足爲有無。而乃蒙執事者先施之惠。若是鄭重耶。愚於尊師門。猥有同門之契。而至見不棄者。以故舊之不寁也。豈可有萬一之比況哉。執事以師之友而見存。則或可而若事之如所事云耳。則非其情矣。如何如何。目今世路低險。師說分裂。後生小學。莫適所向。惟執事得師如艾山先生而事之。日夕從容。誘掖周至。此是今日之好際會。執事亦應如此否。人雖有志於學。而或趨向不正。見識不平至不免爲詖淫之歸者。無非所以不擇師之致也。古人所謂務學不如務求師者。非此義耶。執事旣已得之。則幸之又幸。而所造淺深。只在自己之勉不勉如何耳。 옛 친구는 …… 때문일 뿐입니다 《시경》 〈준대로(遵大路)〉에서 "큰길에 달려 나가 그대의 소매를 부여잡았노라. 나를 미워하지 말지어다. 옛 친구를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느니라.【遵大路兮, 摻執子之袪兮. 我無惡兮, 不寁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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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운여에게 답함 答魏雲汝 이별한 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니 나뭇가지에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리워하는 슬픈 감회는 그대보다 내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편지를 받았으니 그 지극한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 어른들이 건강하시며 부모님을 모시며 잘 지내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참으로 소식을 듣고 싶었던 제 마음에 합치됩니다. 《주서절요(朱書節要)》는 유가의 참된 진리가 담긴 글【眞詮】로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께서 이른바, "도가 넓고 커서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하는가? 오직 이 책이 입문하는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책이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께서는 이른바 "육경(六經) 이후로 그 뜻이 광대하고 분명한 것은 《주서절요》만한 것이 없다."라고 한 책입니다. 지금 그대의 과업(課業)은 이제 여기에 달려있으니, 힘쓸 곳을 알고 목표로 삼을 곳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밤낮으로 깊이 탐구하면서, 급히 보거나 많이 보기를 바라지 말고 오래도록 보며 그치지 않는다면, 저절로 딱 들어맞아 두루 이해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 유가의 풍습과 선비들의 기풍이 거의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으나, 오랫동안 알고 어울리던 이들을 보니 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 떨쳐 일어나 담당하거나 왕성하게 힘을 쓰는 자가 없어, 평상시 개탄스러워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그대는 타고난 성품과 지향하는 뜻이 사우(士友)의 기대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금 학문에 있어서의 조예도 또 이와 같으니, 벗들의 마음에 어떻게 위로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부지런히 힘써 주십시오.【질문】《대학(大學)》 전문(傳文)의 체재는, 모두 두 가지 일을 아울러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심(正心)'을 말할 때 반드시 '수신(修身)'을 아울러 말했고, 수신을 말할 때 반드시 '제가(齊家)'를 아울러 말했습니다.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6章에서 '성의(誠意)'만 홀로 말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대답】치지(致知)와 성의(誠意)에는 '아는 것【知】'와 '행하는 것【行】'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의는 '다시 자신을 닦는 것【自修】'의 처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연이어 두 조목을 들지 않고, 특별히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誠其意】'라고 말했습니다.【질문】《맹자(孟子)》 「고자(告子)」 편에서 "사람들은 '임금이 똑똑한 체 하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人將曰訑訑, 予旣已知之矣】"라고 한 것에서, 원문(元文)으로 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다.【予旣知之】'라고 한 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아는 체 한다【訑訑】'는 것을 일컫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원 보씨(輔氏)가 '내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 마음에서 싹튼 것이다.'라고 운운한 주석으로 보면, 마치 '잘난 체하는 것【訑訑】'이 자신을 일컫는 말인 듯합니다.【대답】'이이(訑訑)'에 주석에 대한 경원 보씨의 설을 별도의 한 뜻이니, 아마도 본문의 바른 듯은 아닌 듯합니다. 別後荏苒。秋風已在樹矣。悵恨之懷。賢未必非我也。謂外承書。其喜劇可知也。矧又庭候康寧。侍節衛重者乎。允愜區區願聞之情。朱書節要此是儒門眞詮。退溪所謂道之浩浩。何處下手。惟此書可以爲入頭處。蘆沙所謂六經以後。滂沛明白。無如此書。今左右課業。方在於此。可謂知所務而得所歸矣。惟願夙夜沈索。母欲速母欲多。久久不已。自有脗然浹洽處矣。嗚呼。儒風士氣。幾乎掃地。而竊觀知舊遊從。無一人爲之奮然擔當沛然用力者。尋常慨然久矣。惟左右資稟志趨。未嘗不爲士友之寄望。而今日之所造。又如此。朋友之情。安得不慰悅乎。千萬勉勉。大學傳文之體。皆兼言兩事。如言正心。必兼言修身。修身必兼言齊家。以至平天下。無不皆然而獨於六章單言誠意者。何義。致知誠意。有知行之別。而誠意又是自修之首。故不連擧兩條。而特言誠其意。告子篇。人將曰訑訑。予旣已知之矣。以元文看之。則所謂予旣知之者。似人稱訑訑者。然而以輔氏註予旣知之之意。萌于中云云看。則有若訑訑者。自稱焉。訑訑註。輔氏說。自是一義。恐非本文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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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26) 기완 를 찾아갔다가 주인의 시에 차운하다 2수 訪李元浩【起完】, 次主人韻【二首】 학업이 가난 때문이 아닌 그대 흠모하니 欽君學業不爲貧한 번 만났지만 어찌 이전 친구만 못하랴 一見何曾遜夙親옛 나라의 산하에 은둔한 선비요 舊國山河遺逸士사문의 맥락을 계승한 사람이네 斯文緖脈繼延人전신27) 풍세를 굳이 두려워할 게 있으랴 錢神風勢何須畏석우28)는 정원에서 이웃이 되기에 좋네 石友園庭好作隣늘그막에는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晩節且當成結局이곳에 이르러 속세를 멀리 초월하였네 到玆方是逈超塵한평생 천하고 가난할 줄 스스로 알았지만 自分生平合賤貧학문이 거칠어 스승과 벗 저버릴까 걱정했네 學荒只恐負師親옛 청웅동에서 고아한 선비를 만나서 靑雄古洞逢高士백발에 새로 사귀어 한 사람을 얻었네 白首新交得一人대의는 시국 상심하여 설 땅이 없으나 大義傷時無地立작은 사욕 사라진 곳은 하늘과 가깝네 纖私淨處與天隣세한에도 서로 지켜주자고 맹세한다면 歲寒相守如有誓백리 길에 후진 밟기를29) 어찌 사양하리 百里何辭躡後塵 欽君學業不爲貧, 一見何曾遜夙親?舊國山河遺逸士, 斯文緖脈繼延人.錢神風勢何須畏? 石友園庭好作隣.晩節且當成結局, 到玆方是逈超塵.自分生平合賤貧, 學荒只恐負師親.靑雄古洞逢高士, 白首新交得一人.大義傷時無地立, 纖私淨處與天隣.歲寒相守如有誓, 百里何辭躡後塵? 이원호(李元浩) 원호는 이기완(李起完, 1891~1964)의 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강재(剛齋)이다.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靑雄面) 두복리(斗福里)에서 출생하였으며,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저서에 《강재집》 4권 2책이 있다. 전신(錢神) 금전(金錢)의 힘은 신물(神物)과 같다 하여 금전을 일컫는 말이다. 진(晉)나라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 옛 속담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에 있어서랴.〔有錢可使鬼, 而況于人乎?〕"라고 하였다. 석우(石友) 벼루의 애칭(愛稱)이다. 송나라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부이섬연귀공양정(復以蟾硯歸龔養正)〉 시에 "꿈속에 누군가 〈식미〉를 노래하였는데, 깨어보니 벼루가 서재에 있네.〔夢裏何人歌式微, 覺來石友在書幃.〕"라고 하였다. 후진(後塵) 밟기를 원문의 '섭후진(躡後塵)'은 후면에 일어나는 먼지를 밟는다는 뜻으로, 존경하는 사람을 뒤따르며 모시는 것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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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년 생일에 감회가 일어 배율 1수를 짓다 戊寅生朝有感排律一首 오십오 년 전에 내가 처음 태어나 五五年前我始生하나도 이룬 것 없이 지금에 이르렀네 所成無一至今生학문 거칠어 강명함 부족한 게 한이고 學粗恨未明剛足기품이 약해 질병이 생길까 걱정이네 稟弱憂存疾病生망녕되이 백치로서 옛 현인 기약했으나 妄以白痴期古哲단결23)에 따라 장생하려는 것은 싫었네 厭從丹訣擬長生쉽게 혼미해지는 천리를 모두 잃었으니 易昏天理都歸喪다 죽어버린 인심을 누가 불러내 살릴까 盡死人心孰喚生보리 이삭 노래하며24) 고국을 슬퍼하고 秀麥有歌悲故國공경을 다해 향 사르며 선생을 지켰으니 瓣香致敬衛先生알아주지 않아도 유감없어 참으로 맛있고 不知無慍眞滋味홀로 서도 흔들기 어려우니 정히 통쾌하네 獨立難搖定快生몸에 있는 옷과 상투는 오직 본래 모습이고 袖髻在身惟本色서가에 가득한 시서는 평소의 생활이네 詩書滿架是平生남겨준 몸을 받들어 행함이 이와 같으나 奉行遺體如斯已늙을수록 생일에는 비통함이 배로 생기네 老去弧辰痛倍生 五五年前我始生, 所成無一至今生.學粗恨未明剛足, 稟弱憂存疾病生.妄以白痴期古哲, 厭從丹訣擬長生.易昏天理都歸喪, 盡死人心孰喚生?秀麥有歌悲故國, 瓣香致敬衛先生.不知無慍眞滋味, 獨立難搖定快生.袖髻在身惟本色, 詩書滿架是平生.奉行遺體如斯已, 老去弧辰痛倍生. 단결(丹訣) 신선이 먹는다는 단약(丹藥)을 제련하는 기술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술을 말한다. 보리 이삭 노래하며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터를 지나가다가 궁실이 다 허물어진 폐허에 벼와 기장 등의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은 노래인 〈맥수가(麥秀歌)〉를 불렀다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슬픔을 노래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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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영모재 중수기 密陽朴氏永慕齋重修記 이릉(爾陵 능주(綾州))은 예로부터 산수(山水)가 좋은 고을이라 일컬어졌고, 그 수려하고 맑은 기운이 서쪽 지역에 많이 모여 있었으니, 예컨대 천태산(天台山)이나 해망산(海望山), 문산(文山), 덕봉산(德峰山)처럼 헤아릴 만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덕을 체득한 중립의 모습으로 서쪽 지역의 아름다움을 다 얻은 것으로는 또 덕봉산만한 것이 없다.옛적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충신 박공(朴公) 휘 지수(枝樹)가 왕대인(王大人 조부(祖父)) 감찰공(察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산 아래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감찰공의 6세손 상언(尙彦)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산의 오른쪽 기슭에 나아가 안정(安亭)과 서로 마주보는 곳에 평탄한 한 곳을 얻어 몇 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덕봉과 안정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한편으론 덕안재(德安齋)라 일컬었고, 대대로 우러러 사모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영모재(永慕齋)라 일컬었다. 그러나 청전(靑氈)의 구물(舊物)9)이  이제 거의 200여 년이 되어 가는지라, 굳고 단단했던 것들은 풀어지고 느슨해졌으며, 칠하여 꾸민 것들은 더러워지고 흐릿해져서 다시 긍구(肯構)10)해야 할 우려를 끼치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정해년(1887) 봄에 문중(門中)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 장래에 수리할 것을 도모하였으니, 준채(準彩)가 그 일을 관리하였고, 춘진(春鎭)이 그 공역(工役)을 감독하였으며, 현수(賢秀)가 그 재무를 맡았고, 인진(麟鎭)이 그 장부를 주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8개월 만에 공역을 마쳤다. 동쪽의 방(房)과 서쪽의 실(室), 앞의 대청과 뒤의 침실이 각기 옛 규모를 따라서 환하게 경관이 바뀌었으니,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사업을 잇는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자손으로서 이 재실(齋室)에 들어가는 자들은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니, 효제(孝悌)의 마음이 어찌 세차게 일어나지 않겠는가.맹자가 말하기를, "상ㆍ서ㆍ학ㆍ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재실은 선조를 사모하는 곳이고, 겸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히기 위한 방도이니, 고을의 서당이나 글방에 비해 그 소중함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사람이 살아가며 책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으며, 선대가 자손에게 바라는 것은 무슨 일이겠는가? 한가로이 지내며 경치를 완상하는 것과 같은 무익한 유희를 경계하고, 문장을 꾸미는 것과 같은 쓸모없는 습관을 버리고서 항상 조고(祖考)를 대면하는 것처럼 엄숙하고 공경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한결같이 천서(天敍)와 천질(天秩)11)처럼 사람이 살아가는데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세운 다음에 책을 읽어 이것을 밝히고, 벗들을 모아 이것을 강습하여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함으로써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으로부터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힘써 나아가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한다면 선조를 길이 사모하고 사업을 계승하는 도리가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단지 박씨(朴氏) 한 가문의 복일뿐만이 아닐 것이다.내가 이 재실에서 노닌 지 여러 해인데, 가만히 엿보건대 메뚜기와 산초나무처럼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넘쳐나고, 시례(詩禮)를 묻고 배우는 가풍이 성대하게 한창 펼쳐지고 있으니, 그 아름답고 상쾌하며 맑고 깨끗한 기운이 반드시 도와 발현하게 해주어서 자손들이 구양자(歐陽子)12)와 같은 한 사람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재실에서 노니는 자들은 각각 힘써야 할 것이다. 爾陵古稱山水鄕。其秀爽淸淑之氣。多聚於西方。若天台海望文山德峯。可數者非一。然體德中立。而盡得西方之美者。又莫若德峯焉。昔者宣廟朝。忠臣朴公諱枝樹。葬其王大人監察公於此。子孫因居山下。監察公六世孫尙彦與諸宗。就山之右麓。得一平坦與安亭相對處。構數椽屋子。以其在德峯安亭之間。故一稱德安齋。以其世世爲瞻慕之所。故一稱永慕齋。靑氊舊物。殆二百餘年于玆矣。鞏固者縱緩。塗飾者漫漶。有不免再貽肯構之慮。歲丁亥春。門議齊發。將謀葺理。準彩尸其事。春鎭董其役。賢秀掌其財。麟鎭主其簿。首尾八個月。工役告訖。東房西室。前廳後寢。各遵舊規。渙然改觀。其繼志述事。可謂至矣。爲子孫而入此室者。必有所感而孝悌之心。豈不油然而生乎。孟子曰。設爲庠序學校以敎之。皆所以明倫也。此室是思慕祖先之地。而兼爲諸子孫肄業之方。視諸鄕黨庠塾。其所重。不亦有間乎。人生所以讀書者。爲何事。先世所以期望於子孫者。爲何事。戒燕玩無益之遊。去纂組無用之習。嚴恭寅畏。常若對越祖考。一以天敍天秩人生日用合做底道理。立定課程。讀書以明之。會友以講之。存之於心。體之於身。自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自愛親從兄。至於治國平天下。循循征邁。期有成立。則其於永慕似述之道。爲何如哉。此不但爲朴氏一門之福而已也.予遊此齋有年耳。竊覸其螽斯椒聊。至爲蕃衍。而詩禮問學之風。蔚然方張。其秀爽淸淑之氣。必有以助發。而所産將不止爲一歐陽子而已。遊此室者。其各勉焉。 청전(靑氈)의 구물(舊物) 청전은 푸른 모포라는 뜻으로 선대(先代)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영모재를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훔쳐 가려 하자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라.[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긍구(肯構)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선대가 지은 건물을 다시 중수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천서(天敍)와 천질(天秩) 천서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순서를 말하고, 천질은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등급을 말한다. 《書經 皐陶謨》 구양자(歐陽子) 송(宋)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말한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훌륭한 고문(古文)을 많이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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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당기 愚忍堂記 박 사문(朴斯文) 학중(學中)은 천태산(天台山) 사람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 여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풍모와 거동이 단지 순박하고 예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어느덧 서로 만나지 못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훌륭한 명성이 선비와 벗들 사이에 드러났다. 평상시에 우러러 사모하면서 어떻게 수양했기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생각하였다. 정해년(1887) 봄에 비로소 그의 집에 가서 보건대, 뜰과 책상, 창문 등은 말끔하게 먼지 한 점이 없었고, 주인은 날마다 평상복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우두커니 있었으며,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같은 자제들은 향기로운 목소리로 나란히 서서 곁에서 모시고 있었으니, 그 몸가짐이나 행실의 실제가 또한 들었던 것보다 뛰어났다. 내가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경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주인에게 근래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나는 노둔하고 꽉 막힌 재질로, 눈으로는 흑백(黑白)의 색을 알지 못하고, 귀로는 궁상(宮商)의 음률을 구분하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시비(是非)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이 어느 누가 나와 같겠습니까. 어리석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모든 행위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제멋대로 하는 것들이 아닌 것이 없게 되어 날마다 허물을 향해 달려갈 뿐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10여 년 이래로 통렬하게 스스로를 점검하여 세속의 맛, 예컨대 분노나 욕망, 폄훼, 명예, 재촉, 부탁, 분주함, 다툼 따위를 일체 끊어 버리고 감히 마음에서 싹틔워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분수를 따르고 역량을 헤아려 서책에 종사하며 허물이 적기를 바랐지만, 심지가 견고하지 못해 다시 풍부(馮婦)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일13)이 있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우인(愚忍)' 두 글자를 문미(門楣)에 걸어 놓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점이 있었군요. 선생의 어리석음이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에는 어리석고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에는 지혜로우며, 오늘날 세상에 대처하는 데는 어리석고 옛것을 배우는 데는 지혜로우며, 명성과 이익에는 어리석고 도의(道義)에는 지혜로우니, 이른바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14)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있는 뒤에 행함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두운 가운데 날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 내가 지금 쇠약해졌지만, 다소의 일을 돌려보내고 선생을 따라 소요하며 이 생애를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朴斯文學中。天台山人也。予少時。遇於逆旅。但見其風儀淳古。已而不相見爲二十年。而令聞著於士友之間。尋常向慕。以爲何修而得此。丁亥春。始造其門。見庭除几牑。灑然無一點塵累。而主人日以便服。嗒然其間。蘭玉芳聲。濟濟侍側。其持守操履之實。又有浮於所聞。予不勝斂衽。問主人近來作甚工夫。主人曰。予以鈍滯之質。目不知皀白。耳不分宮商。心不解是非。其爲愚。孰如我者。愚而自用。不有以忍之。則凡百所爲。無非無知妄作。日趨於愆尤而已。是以十餘年來。痛自點檢。一切世味。如忿慾毁譽趨託奔競之類。不敢萌諸心而出諸口。隨分量力。從事簡編。庶幾寡過。而但心地不固。恐復有憑婦揚臂之擧。故以愚忍二字。揭諸楣。以爲常常自警之資也。予曰有是哉。子之愚也.愚於爲人而智於爲己。愚於處今而智於學古。愚於聲利而智於道義。所謂其愚不可及也。孟子曰有所不爲而後。可以有爲。宜其闇然而日章也。嗚乎。予今衰矣。願還多少事。從子逍遙以畢此生也。 풍부(馮婦)가……일 이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풍부는 진(晉)나라 사람으로, 맨손으로 범을 잘 잡았으나 이 일이 광포한 행위임을 깨닫고 선비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판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호랑이를 모퉁이에 몰아넣고 감히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금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했지만, 선비들은 비웃었다는 고사가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그……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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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헌기 愚軒記 윤생 상린(尹生相麟)이 나를 따라 공부한 지 몇 해 되었는데, 하루는 천태산(天台山)의 내 거처를 방문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가친(家親)께서는 일찍이 별호(別號)를 자처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처럼 노년에 이르러 문을 닫고 매우 적막하게 지내시는 때에 도리어 헌(軒)에 '우(愚)'를 표제(標題)하시고 친구들의 시를 얻을 때마다 아침저녁으로 읊조리며 마음을 달래는 바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친구 중에 가친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어르신만이 계실 뿐이니, 바라건대 어르신께서 알고 계신 것을 따라 표제하신 뜻에 대해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옛사람이 그림을 가져다드린 것15)처럼 돌아가 가친께 바친다면 안색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내가 말하였다. "군의 가친께서는 젊고 장성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셨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의를 좋아하셨기에 아름다운 명성이 고을에 드러나 어진 사람으로 추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굳이 어리석음을 자처하여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미 어질게 여기는데 스스로 어질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지 않는데 도리어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비록 겸손하고자 한 것일지라도 어느 누가 믿겠는가. 다만 평소에 실속이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일삼지 않으셨으며, 명성이나 권세를 쫓는 길에서 내달리지 않으셨고, 시비를 다투는 장소에서 오르내리지 않으시면서 분수에 따라 졸렬함을 지킨 채 한결같은 모습으로 노년에 이르셨으니, 헌(軒)의 호를 취한 뜻이 혹 여기에 있을 것이네. 비록 이러한 것을 어리석게 여길지라도 사람들이 어질게 여기는 것이 또한 어찌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반드시 나이가 더욱 많아질수록 지식과 생각이 더욱 정밀해지면서 몸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과 말을 위험스럽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에 이르러 때에 따라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어 그 끝맺음을 도모하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이 어찌 옛적에 이른바 '미칠 수 없다.'16)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 때에 시험 삼아 이러한 뜻으로 받들어 질정한다면 반드시 나의 뜻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네."라고 하였다. 尹生相麟。從余遊有年。一日過天台寓舍。告余曰。家親未嘗以別號自居。及此衰暮。閉門苦寂。乃題軒以愚。隨得知舊詩和。爲日夕諷詠遣懷之資。然在知舊。知家親心者。惟丈人在。願從丈人所。得序述所題之意若干語。歸以供親。如古人致畵。而庶幾解顔也。余曰。君之家嚴。少壯孝悌。老而好義。令聞著於鄕坊。未有不以賢人推之。則何必以愚自處而至此標爲也。人旣賢之。而不自賢焉。人不愚之。而乃自愚焉。雖欲謙謙。其孰信之。但其平日。不喜浮華。不事表襮。不馳逐於聲勢之途。不上下於是非之場。任分守拙。一昧到老。軒之取號。其或在是歟。雖欲以此爲愚。而人之賢之。又何嘗不在於此耶。必其年齡益邵。知慮益精。至於身之顯晦。言之危遜。不能不隨時加謹而爲圖維厥終之計者。亶在於是。然則是愚也。豈非古所謂不可及者耶。趨庭之日。試以此意奉質焉。想必不以爲非我意也。 옛사람이……것 북송 때의 문인 소순(蘇洵, 1009~1066)의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에 "본디 나의 선친께서는 물건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평소의 생활도 재계하듯 하시고, 말씀하시고 웃으시는 것도 꼭 필요할 때에 맞게 하셨는데, 다만 일찍부터 그림을 좋아하셨다. 자제와 문인들이 기쁘게 해드릴 만한 것이 없는지라 그 좋아하시는 그림을 서로 가져와 한 번이라도 선친의 얼굴을 펴시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비록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모아진 그림이 공경들처럼 많았다.[始吾先君, 於物無所好, 燕居如齋, 言笑有時, 顧嘗嗜畫. 弟子門人, 無以悦之, 則爭致其所嗜, 庶幾一解其顔. 故雖為布衣, 而致畫與公卿等.]"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古文眞寶後》 미칠……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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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홍공 행장 聾庵洪公行狀 공은 휘가 규주(圭周), 자는 경휴(卿休), 호는 농암(聾庵)이다. 홍씨(洪氏)는 세계(世系)가 풍산(豐山)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도첨의(都僉議)를 지낸 휘 간(侃)이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중엽에 휘 치(治)는 행의(行義)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휘 준(埈)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휘 경고(景古)는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을 지녀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영한(永漢)이고 조부는 휘가 희우(羲禹)이다. 고(考)는 휘가 수모(壽謨)이고 비(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대현(大鉉)의 딸이다. 순조 을유년(1825, 순조25)에 능주(綾州)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서 백부 수영(壽榮)의 후사로 나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처음에 서당에 나아가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읽으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발전하였다. 하루는 연로한 부모님이 매우 고생스럽게 일하는 것을 보자 바로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기를, "자식 된 자라면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커다란 직분이다. 어찌 편안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 늙으신 부모에게 봉양을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등, 직접 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매번 셋째 아우 채주(埰周)에게 경계하기를, "너의 재주와 성품은 내와 견줄 바가 아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고 또 네 형이 이루지 못한 소원을 위로해다오." 하면서 유학(遊學)하여 명유(名儒)가 되기를 권하였다. 아우들, 여러 사촌 형제와 한마을에 모여 살아 대문과 담장이 서로 이어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마주하여 은의(恩誼)가 매우 두터웠으며 일찍이 한마디 말로 서로 따지면서 화합을 해친 적이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면 진휼하고 병에 걸리면 도와주고 죽어서 장례를 치르면 서둘러 달려가 같은 마을의 오랜 붕우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모두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아들과 손자들에게 경계하기를, "집안의 흥성과 쇠퇴는 자손이 현명한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고, 자손이 현명하고 그렇지 못하고는 학문에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에 달려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스승으로 삼을 만한 덕을 지닌 자가 있다면 그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더라도 응당 가까이하고 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하물며 집 안에 그런 인물이 있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너희 숙부는 평소에 입으로 하는 말에 가릴 것이 없고 몸으로 하는 행동에도 가릴 것이 없어 내가 매우 아끼고 있다. 너희들은 숙부를 모범으로 삼거라." 하였다. 숙부는 아마도 호가 봉남(鳳南)인 채주(埰周)를 가리키는 듯하다. 일찍이 해적(海賊)이 변경을 침범하여 시끄러운 소문이 크게 떠돌자 집을 버리고 도망가 숨는 백성이 많았다. 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놓고 일깨우기를, "이웃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달려가 구원해야 마땅하다. 하물며 화란이 드러나지도 않았건만 성급하게 부모와 집안을 버린다면 이것이 인정이겠는가.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이다." 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감히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행의(行義)가 사람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무자년(1888, 고종25) 7월 16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4세였다. 해하리(海鰕里)의 선영 아래에 장례를 치렀다가 나중에 우봉(牛峰) 뒤의 사좌(巳座)로 이장(移葬)하였다. 배(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광식(光植)의 딸로 좌상(左相)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 1411~1456))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뛰어났고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석(祐錫), 우전(祐銓)이고 딸은 문석휴(文錫休)에게 출가하였다. 계배(系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용(祐鏞), 우건(祐鍵)이고 딸은 최환필( 崔煥泌), 임봉우(林逢雨)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외모가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풍의(風儀)는 대범하며 언사(言辭)는 간결하고도 어눌하며 행동은 간략하고 곧았다. 다른 사람과 큰소리를 내거나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았고 일에 임하여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듯하고 이해와 득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계책이나 농락, 간계와 부정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나 가무(歌舞)나 사치(奢侈), 유랑(遊浪)이나 방탕에 관한 것에는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섞지도 않고 한 발자국도 딛지 않았다. 오직 산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의를 행하여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농사를 지으며 여유롭게 세월을 보내는 것이 곧 평생에 걸쳐 계획하고 살아가는 방도였다. 오늘날 인심은 날로 부화(浮華)해지고 선비들의 풍습은 날로 보잘것없어지는 것이 수심(水深)이 더욱 깊어지듯 하니 당시에 선배가 보여준 풍도를 다시금 볼 수 없으리라! 이에 성인(聖人)이 선진(先進)을 따랐던 뜻이 우연이 아님을 비로소 알겠다. 뒤늦게 회포를 드러내는 것이 집안 간의 교분과 대대로 교유한 우호를 끝내 잊을 수 없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우석(祐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로 세상에 영구히 전할 계책으로 삼고자 청하였다. 내가 행장을 지을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로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해 삼가 이와 같이 적는다. 公諱圭周。字卿休。號聾庵。洪氏系出豐山。麗朝都僉議諱侃爲顯祖。中葉有諱治。以行義除厚陵參奉。諱埈。中司馬兩試。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參判。曾祖永漢。朝羲禹。考壽謨。妣順天朴氏大鉉女。以純廟乙酉。生公于綾之牛峯里。旣長。出爲伯父壽榮后。天稟朴實。事親至孝。初就塾。讀擊蒙諸書。文理日進。一日見老親幹務甚勞。輒掩卷太息曰。人子之職。忠養爲大。豈安坐讀書。而被養於老親乎。於是漁樵耕稼。無不躬親爲之。以極甘旨之奉。每戒其三弟埰周曰。君之才性非我比。勉之以副父母之望。又以慰乃兄未就之願也。勸令遊學以成名儒。與羣弟諸從。聚居一巷。門墻相接。日夕聚對。恩誼甚洽。未嘗有一言相稽以失其和也。其有飢寒則賙之恤之。有疾病則扶之將之。有死喪則匍之匐之。以至隣里朋舊。無不各得其心焉。嘗戒子孫曰。人家興替。在子孫賢否。子孫賢否。在學問勤惰。又曰。有德可師者。雖在鄕隣。猶當親近遊從。況在家內乎。汝之叔父。平生口無擇言。身無擇行。吾甚愛之。汝等視爲表則也。叔父蓋指埰周號鳳南也。嘗有海賊犯邊。騷說大作。民多棄室奔竄。公招村人喩之曰。隣里有急當赴救。況禍色未形。而遽棄其父母室家者。此人情乎。曾禽獸之不若也。村人感之。無敢逃者。其行義之服於人。類如此。戊子七月十六日考終。享年六十四。葬于海鰕里先壠下。後移于牛峰後巳坐。配全州李氏光植女。左相文安公思哲后。極有婦德。生二男一女。祐錫祐銓。文錫休。系配金海金氏。生二男二女。祐鏞祐鍵。崔煥泌林逢雨。嗚乎。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辭簡而訥。施爲約而直。與人少欸曲。臨事少表襮。是非毁譽若不聞也。得失利害若不知也。凡機關籠絡詭譎回僻之人。聲技繁華遊浪曠誕之地。未嘗與之接一語着一步。惟是隱淪林樊。守吾分行吾義。使內不愧於心。外不愧於人。而山水桑麻。優哉游哉。乃其平生計活也。目今人心日就浮華。士習日就菲薄。如水益深。則先輩當日之風。不可得以復覩乎。於是乃知聖人從先進之意有不偶爾也。追言想感。非直爲通家之講。誼世之好。有不能終諼也。祐錫持家狀示余。因請一言。爲傳世不朽之計。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爲之說如是云爾。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계 문공 행장 梧溪文公行狀 행실이 돈독하면서도 문장이 화려하며 명리(名利)에 담담하면서도 바쁘게 경쟁하여 우뚝하게 일가(一家)의 법도를 이루어 대대로 이를 잃지 않고 지켜온 자를 근세에서 찾자면 오직 우리 고을의 오계(梧溪) 문공(文公)이 그런 인물이다. 문공의 휘는 봉환(鳳煥), 자는 익중(翊中)이고 오계(梧溪)는 공의 호이다. 고려조의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이름난 조상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자수(自修)는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내고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증조는 휘가 혁진(爀鎭), 호가 오재(鰲齋)이고 조부는 휘가 영덕(永德)이고 본생조(本生祖)는 휘가 영수(永壽), 호가 죽와(竹窩)이다. 고(考)는 휘가 정휴(定休), 호가 긍재(兢齋)이다. 처음에 파평 윤씨(坡平尹氏) 휘 종진(宗鎭)을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식(栻)의 딸로 철종 기유년(1849, 즉위년) 10월 3일에 부춘(富春)의 우봉(牛峯)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양씨가 꿈에서 신인(神人)이 비단 주머니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집안의 보물이니 조심해서 간직하거라." 하였는데, 이윽고 해산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자애롭고 온화하여 부모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히게 되자 매우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8세에 들에 나아가 새를 쫓다가 새 그물을 세워놓은 기둥에 "소호(少昊) 시대에는 새의 이름으로 관직을 삼았는데 네가 관명(官名)을 지니고서 어찌하여 나라의 싹을 해치는가."라고 적어놓아 보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죽와공(竹窩公)이 만년에 늘 병석에 누워 있었다. 공은 대인(大人)이 곁에서 모시면서 밤낮으로 힘을 다해 섬기는 것을 보고 매번 서당에서 돌아오면 그 수고를 대신하고 간혹 아우에게 하루씩 교대로 대신하게 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가을에 벽산재(碧山齋)에서 책을 읽었다. 하루는 마음이 갑자기 놀라고 뛰어 마침내 급히 집으로 돌아와 죽와공을 뵈었더니 병이 이미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죽와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 가운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경오년(1870, 고종7) 가을 대인(大人)이 아주 심한 이질(痢疾)에 걸리자 대인이 한 숟갈을 들어야 공도 한 숟갈을 먹고 대인이 두 숟갈을 들어야 공도 두 숟갈을 먹으면서 지극히 근심하였고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기도 하였다. 의원이 자라 탕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자, 당시에 강물도 줄고 날씨도 추웠건만 공은 그물을 마련하여 자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마침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낮은 모래밭에 나와 있어 마침내 갖다 바치자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임신년(1872, 고종9) 봄 대인이 또 병에 걸리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공에게 이르기를, "네가 약질(弱質)의 몸으로 상례를 치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다. 거처나 음식 등, 몸을 보양하는 데 관계된 모든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네 아버지가 죽어서도 걱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말라." 하자, 공은 울음을 삼키면서 승낙하였다. 대인이 운명하자 스스로 남긴 당부를 생각하여 감히 마음껏 슬픔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인정과 예를 다 갖추었다. 홀어머니를 섬길 때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반드시 여쭙고 유순하고 곡진하게 어머니의 뜻대로 모셔 어머니를 대하는 도리를 잘 갖추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기일보다 며칠 전에 집 안팎에 훈계하고 술과 고기를 금하고 쓸고 닦아 정갈하게 하도록 힘을 쏟았으며 방에 들어가거나 문을 나서면서 감개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제사를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 셋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선행으로 인도하고 학문을 면려하는 것이 너그러우면서도 정성이 가득하여 한 번도 화락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경계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그 단서가 규문(閨門)을 먼저 바로잡는 데 달려있다. 규문이 올바르지 않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부부 사이에 절대로 허물없이 가까이하지 말고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화곡(花谷)과 임동(林洞)의 일족과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수시로 친선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았다. 봉남(鳳南) 홍공(洪公)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처음 학문에 나아갈 때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의심스러운 사항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며 병이 들거나 무슨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찍이 서로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봉남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服制)인 심상(心喪)을 하였다. 구암(龜巖) 문송규(文頌奎)와는 도의(道義)로 교제를 맺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강론을 벌이고 학문을 익혔으며 서로 의기가 매우 잘 투합하였다. 고향 마을의 사우(士友)들과 모여 향음(鄕飮), 향사(鄕射), 강규(講規), 독법(讀法) 등의 예를 행하는 것을 봄가을의 상례(常例)로 삼았다. 병자년(1876, 고종13)의 흉년에는 공이 약간의 물자를 내어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인 향리(鄕里) 사람들을 진휼하였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대는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하건만 도리어 남을 우선으로 삼으니 어찌 상정(常情)을 거슬러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죽을 지경에 놓이지는 않았다. 넉넉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진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물을 중시하고 의리를 가볍게 여기는 장사치들의 상담(常談)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계미년(1883, 고종20)부터 그 이후로 공이 우연히 병에 걸리더니 앞뒤로 8~9년에 걸쳐 차도가 있기도 하고 발병하기도 하고 심해지기도 하고 좀 덜하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어버이를 섬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 붕우에게 나아가 강론하고 익히는 방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어 자기 몸에 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의 좌우 벽에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인설도(仁說圖),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기타 요언(要言)과 격회(格誨)를 걸어놓고 몸소 상관(常冠)과 일상복 차림으로 중앙에 단정히 앉아 항상 눈으로 접하며 경계하고 성찰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경인년(1890, 고종27) 8월 29일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 송석면(松石面) 성곡촌(聲谷村) 뒤에 있는 도지연(倒池蓮) 비탈 아래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능성 구씨(綾城具氏) 본수(本修)의 딸이고 계배(繼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 규환(奎煥)의 딸이다. 서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재연(載淵), 재인(載寅)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아, 문씨(文氏)는 예전부터 지금껏 대대로 유학(儒學)을 계승한 유서 깊은 집안으로 죽와공(竹窩公)과 그의 아들 긍재공(兢齋公)은 모두 효우(孝友)와 행의(行誼)로 향리(鄕里)에서 이름이 높았다. 공은 선대인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행실을 삼가고 학문을 쌓아 가정에서 효제(孝悌)를 행하고 향리(鄕里)에서 충신(忠信)으로 이름이 나 문채가 화려한 한 고장의 선사(善士)였다. 지초(芝草)에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있음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내가 보잘것없는 처지로 욕되게도 공의 지우(知遇)를 입어 타계하실 때 손수 편지를 보내 남아 있는 아들의 학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재연(載淵)이 학문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으니 대대로 계승한 학문은 또한 장차 실추되지 않을 것이다. 공이 타계하고 3년이 지난 여름 재연이 중부(仲父)가 지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先親)을 가장 잘 아시기로는 장인(丈人)만 한 분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행장(行狀)을 지어서 사가(私家)에서 대대로 전하는 실제 자취로 삼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 마음이 애처롭고 뜻이 가상하여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軒質行而輊文華。右恬退而左奔競。偉然爲一家之成法。世守而不失者。在近世惟吾鄕梧溪文公是耳。諱鳳煥。字翊中。梧溪其號也。麗朝江城君諱益漸爲名祖。至中葉有諱自修。官谷城縣監。腏享于鄕祠。曾祖諱爀鎭號鰲齋。祖諱永德。本生祖諱永壽號竹窩。考諱定休號兢齋。初娶坡平尹氏諱宗鎭女。無育再娶濟州梁氏諱栻女。以哲宗己酉十月三日。生公于富春之牛峯。先是梁氏夢神人遺以錦囊曰。此是汝家寶物。謹受而藏之也。已而解娩。天性慈詳溫雅。承順親意就傅上學。執業甚勤。八歲出野打鳥。書于鳥幕柱上曰。少昊之世。以鳥記官。爾帶官名。而何以害邦國之苗乎。見者奇之。竹窩公晩年常病在床。公見其大人侍側。晝夜服勞。每自書塾歸。輒代執其苦。或令其弟更日代之乙丑秋。讀書碧山齋。一日心忽驚動。遂急還家。見竹窩公病已危劇矣。翌日平明棄世。隣里莫不驚異之。庚午秋。大人患痢甚劇。一飯再飯。極其致憂。嘗糞甛苦。醫云鱉湯最良。時水落天寒。公擧網將求之。適有一大鱉。出在淺沙。遂持以供之。病果見差。壬申春。大人又遘疾。自知不起。謂公曰。汝以弱質。若欲執禮。必至傷生。居處飮食。凡係衛養之節。一一斟酌。不使乃父抱歸未忘之心。公飮泣諾。及遭故。自念遺托。雖不敢任情致毁。而必誠必愼。備盡情文。事偏慈。大小必稟。柔順委曲。甚得幹母之道。祭祀必先期數日。戒飭內外。絶酒肉灑掃洗濯。務令潔淨。入室出戶。愾然肅然。以致如在之誠。與弟三人友愛純篤。導之以善。勉之以學。從容懇惻。未嘗失和。嘗戒之曰。孝於父母。友於兄弟。其端在於先正閨門。閨門不正何事可行。夫婦之間。切戒狎昵之私。必以莊敬涖之。可見其效矣。與花谷林洞諸族。作花樹會。爲隨時講好之資。與鳳南洪公同里閈。自初上學。至老白首。質疑問業。疾病甚故之外。未始相離。及其沒也。服心喪之制。與文龜巖頌奎爲道義之交。往復講磨。相得甚深。會鄕坊士友。行鄕飮鄕射講規讀法等禮。春秋爲常。丙子荒年。公出若干力。以賙鄕里之濱死者。或曰。子將自救不贍。而反急他人。豈無矯情干譽之譏耶。公曰。吾雖不贍。尙不至濱死。若諉不贍而不急人。則此是賈兒販竪。重財輕義之常談也。自癸未以來。公偶然遘疾。或差或發。或加或減。首尾八九年。備經艱楚。而事親服勤之節。就友講討之方。未嘗不自力。不知病之在身也。居室左右。揭太極西銘仁說敬齋箴圖。及他要言格誨。自以常冠便服。端坐其中。常目警省。日以爲常。庚寅八月二十九日。以宿疾終于正寢。葬松石面聲谷村後倒池蓮崎下巽坐之原。配綾城具氏本修女。繼配利川徐氏奎煥女。徐氏生二男一女。男載淵載寅。女幼。嗚乎。文氏素是詩禮古家。竹窩公及其子競齋公。皆以孝友行誼。聞于鄕里。公承襲先訓。謹身績學。孝悌行於家庭。忠信著於鄕里。蔚然爲一方之善士。芝根醴源。豈不信然。余以無狀。辱爲公知。臨歿手書。致其遺孤學問之託。余固知不敢承當。而追念悲悵。不覺涕零。然載淵立志向學。刻勵不怠。其世世繼述之業。又將不墜矣。歿後三年夏。載淵奉其仲父所撰家狀。示余而言曰。知先親最密者。莫如吾丈。願狀其行以爲私家傳世之實蹟也。哀其情嘉其志。不敢以非其人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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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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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 처사 이공 행장 澗齋處士李公行狀 공의 휘는 기백(琪白), 자는 광빈(光斌), 호는 간재(澗齋)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전주(全州)에서 나왔으며 신라 시대에 사공(司空)을 지낸 휘 한(翰)이 시조(始祖)이다. 사공 이하 21대는 조정(朝廷) 왕실의 계통과 같으며 완풍군(完豐君) 휘 원계(元桂)에 이르러 처음으로 별자(別子)32)를 계승한 대종(大宗)이 되었다. 완풍군은 천우(天祐)33)를 낳았고, 천우는 관직이 병조 판서에 이르러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도공(襄度公)이다. 양도공은 굉(宏)을 낳았으며 굉은 관직이 부총제사(副摠制使)에 이르렀고 부총제사는 명인(明仁)을 낳았다. 명인은 주부(主簿)를 지냈고 담양(潭陽)의 풍서(豐墅)로 남하하여 살았다. 주부는 효상(孝常)을 낳았고 효상은 부사맹(副司猛)을 지냈으며 담양에서 영광(靈光)으로 이주하였다. 사맹(司猛)부터 8세가 지나 휘 상후(相厚)에 이르러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는데, 상후는 공의 6대조이다. 증조부는 이덕(以德)이고 조부는 윤택(潤宅)이다. 고(考)는 문계(文繼)이고 비(妣)는 화순 최씨(和順崔氏) 봉권(鳳權)의 딸이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10월 16일에 간리(澗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절조(節操)가 남달라 스스럼없이 굴거나 다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침착하고 차분하여 어른스러운 예의와 법도를 갖추었다. 스승에게 나아가34) 공부하게 되자 날마다 과정(課程)을 지켜 소소한 일로 그만두거나 거르는 경우가 없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매우 근실하여 뜻을 받들고 물품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상례(喪禮)를 봉행하는 데도 애통한 마음을 다하여 상례의 내용과 형식에 유감이 없었다. 기일(忌日)이 돌아와 산재(散齋)35)와 치재(致齋)36)를 올리면 몸을 깨끗이 하고 모든 제구(祭具)를 주관하며 밤 깊도록 단정하게 앉아 제사가 행해지기를 기다렸다.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과 슬퍼하는 안색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할 만하였다. 형제가 즐겁게 지내 화목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의지할 곳 없는 친척은 거두어 양육하기도 하고 도와주어 혼사를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향당(鄕黨)의 오랜 벗에게는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새해 첫날에 문안하는 일을 힘닿는 만큼 예를 갖추어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 외가의 선조를 섬기는 것도 집안 선조를 섬기듯 하여 기일이 되면 반드시 가서 참여하였다. 외조카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자 매우 극진히 보살피고 도와주었으며, 가업(家業)을 남에게 빼앗기자 공이 관에 알리어 억울함을 바로잡아 편안히 살도록 해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난 때는 자제와 족친들에게 사교(邪敎)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산속 골짜기로 난을 피했을 때 갑자기 적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니더냐." 하고는 즉시 소 1척(隻)을 주면서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난이 평정된 뒤 누군가가 소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나 공은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공은 평소에 담박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었다. 일찍이 아우 상백(常白)과 산에 올라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우가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참된 생각, 고상한 정취가 절로 마음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객이 찾아왔으나 안부를 묻는 것 외에는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객이 떠나자 아우가 말하기를, "객을 대접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냉랭하십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서권(書卷)을 마주하고 고인(古人)과 얘기하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금인(今人)과 얘기를 하겠는가." 하였다. 상백(常白)이 일찍이 덕성(德性)을 수양하는 요체를 묻자, 공이 즉시 주자(朱子)의 〈경제잠(敬齋箴)〉과 범공(范公)37)의 〈좌우계(座右戒)〉를 써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앉아 있는 자리에 걸어두고 항상 부사(父師)가 엄숙하게 내려다보듯 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누군가가 "부모가 안 계시니 효도하고자 하여도 미치지 못한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계실 때처럼 섬기고 안 계실 때에도 계실 때처럼 섬기며 몸을 상하지 않고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모두 효이다. 어찌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어린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집안사람이 공에게 꾸짖게 했더니 공은 아이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면서 슬프고 참담한 기색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부모에게 불효하였다. 불효자의 자식이 또 불효를 저질렀으니, 이것은 예전에 불효한 죄에 대한 보답이다. 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벌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물러나 자신을 매질하고 스스로 새롭게 변하였다. "먹는 것은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38)", "일은 원칙 없이 무턱대고 따르지 않고 물건은 구차하게 취하지 않는다[事不苟從 物不苟取]",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행동을 규범에 맞도록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39)", "신묘하게 밝히고 묵묵히 이룬다[神而明之 黙而成之]40)" 등을 벽에 적어놓고 항상 자신을 견주어 살폈다. 아들 건신(建身)이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41)를 읽자, 공이 말하기를, "격언(格言), 요어(要語)가 이것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너는 이 시 1편을 평생의 표준으로 삼아 오늘 아버지가 너에게 경계하는 것처럼 여기거라."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맺은 사우(士友)들을 재숙(齋塾)으로 불러 모아 봄가을로 모여 강론을 펼치는 규약을 정하였다. 또 이웃 마을의 6, 7동지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30일 동안 학습한 내용을 강론하였다. 아마도 늙어서 학업을 그만두는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때문에 식견은 늙어갈수록 더욱 심오해졌고 지조는 늙어갈수록 더욱 단단해져서 함께 강론을 펼친 사람들이 모두 "볼 때마다 진보가 있는 사람은 간재(澗齋)뿐이다."라고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몸은 요인(要人)과 접촉하지 않고 발길은 요문(要門)에 이르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경학(經學)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며 물아(物我)와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인간 세상에 다시 이것과 바꿀 수 있는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그 맑은 운치와 아득한 자취는 참으로 지금 시대를 살았던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42)라고 이를 만하다. 계묘년(1903, 광무7) 2월 23일 집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향리(鄕里)의 인사(人士), 부녀자, 어린아이, 노복들이 탄식하면서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서로 알게 된 지가 20년에 가깝다. 그동안 서신을 주고받고 서로를 따르며 함께 유람하며 흉금을 털어놓는 일이 끊이지 않았지만, 일찍이 한 마디의 망령된 발언이나 한 번의 망령된 행동을 보지 못하였다. 병신년(1896, 건양1) 봄 공이 거의소(擧義所)로 나를 만나러 왔다. 인하여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시사(時事)에 어두워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경거망동하는가. 하지만 평소에 서로 가깝게 지냈으니 어찌 위난 때문에 서로를 따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원수에게 함께 대적하고 같이 죽는 것은 내가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으니, 이 일로 공을 알 수 있다. 다만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골몰하는 각종 공부가 근거할만한 바탕이 있어서 장차 얼마나 높고 큰 영역으로 나아갈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이 그의 장수에 인색하고 귀신이 그의 나이를 빼앗아가서 사문(斯文)과 사림(斯林)이 이렇듯 갑자기 복을 잃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비통하다! 배(配)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문호(文鎬)의 딸이며 모두 2남을 두었다. 장남 건신(建信)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를 아내로 맞았고 차남은 아직 어리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 건신(建信)이 숙부에게 부탁하여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장례를 치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묘갈(墓碣)이나 묘지(墓誌) 등 제반 문자(文字)는 반드시 먼저 행장(行狀)을 갖춘 다음 비로소 이를 근거로 지을 수 있습니다. 선인을 잘 알고 선인의 행장(行狀)을 지을 수 있는 분은 장인(丈人)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생각하니, 실제적인 덕을 갖췄건만 세상에 드날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벗의 책임이다. 하물며 죽어서 후세에 완전히 사라지게 하겠는가. 이에 건신의 청에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琪白。字光斌。號澗齋。李氏系出全州。以新羅司空諱翰爲始祖。司空以下二十一世。與國朝璿系同。至完豐君諱元桂。始爲繼別之祖。完豐生天祐。官兵曹判書。封完山君。諡襄度公。襄度生宏官副摠制副摠制。生明仁官主簿。南下潭陽豐墅居焉。主簿生孝常官副司猛。自潭移靈光。自司猛入世而至諱相厚。移綾州。是公六世祖也。曾祖以德。祖潤宅。考文繼。妣和順崔氏鳳權女。哲宗甲寅十月十六日。生公于澗里居第。幼有異操。不好戲狎。不好爭競。凝然有成人儀度。就傅上學。日遵課程。未嘗以小小事務。有所廢闕。事親甚謹。志物俱至。執喪致哀。情文無憾。遇忌諱之辰。致散齋潔。躬執凡具。竟夕危坐。以待行祭。其嚴敬之意。哀戚之色。可以感動傍人。兄弟湛樂。未嘗失和。親戚之無依者。或收而養育之。或助而昏娶之。至於鄕黨知舊。吉凶之問。歲時之存。隨力致禮。未有闕焉。事外先如己先。忌日必往參。表侄幼孤。撫恤甚至。家業見失於人。公爲之聞官辨枉。俾安其生甲午之亂。戒子弟族戚。勿染邪敎。逃難山谷。忽遇賊。公曰。汝等所欲非此物耶。卽以牛隻與之。少無吝色。亂平後。人有告牛在處者。公笑而不應。平居恬黙寡言。嘗與弟常白。登山遊賞。過半日而無一言。弟問其故。公曰。眞想逸趣。自在其心言語何爲。一日客來。寒喧外。不交一語。良久客去。弟曰。待客何其冷耶。公曰。對卷方與古人言。何暇與今人言。常白嘗問自修之要。公卽書朱子敬齋箴及范公座右戒以與之。因曰。揭之座側。常如父師之儼臨。則不爲無助也。人或言父母不在。欲孝靡及。公曰。事死如生。事亡如存。不虧其體。不辱其身。皆是孝也。奚謂靡及耶。一日兒子輩有爭端。家人令責之。公招置於前。不誚讓。有悲慙之色。人問其故。曰吾曾不孝於親。不孝之子。又爲不孝。此所以報前日不孝之罪也。於渠何誅。兒輩退而自撾。而自新焉。書食無求飽。居無求安。事不苟從。物不苟取。敬以直內。義以方外。神而明之。黙而成之。等語於壁上。常自鏡攷。子建身信讀范魯公戒子詩。公曰。格言要語。此外何有。汝以此詩一通。看作平生弦韋。如乃父今日之戒汝也。中年以來。遊從士友。排置齋塾。定爲春秋講聚之規。又與隣閈六七同志。一月一聚。相講三十日所課之書。蓋慮其老而廢業也。是以其見識老而益精。持守老而益固。至使同講之人皆曰。每見每有進益。惟澗齋是已云。身不接要人。足不到要門。勤耕服穡以糊其口。劬經力學以求其志。于于洋洋於物我形骸之表。而不知人間世復有何樂可以易此也。其淸韻遐躅。信可謂南州今日之高士也。癸卯二月二十三日。考終于家。鄕里人士。婦孺輿儓。莫不嗟惜。至有涕下者。嗚乎。余與公相知近二十年矣。其間往復從逐。游衍傾倒。非不源源。而未嘗見其有一言妄發一事妄行。丙申春。公來見我於擧義所。因責之曰。子何昧時而輕擧至此耶。然居常相從者。豈以危難而有不相從之理。同仇一死。吾所甘心云。此可以見公矣。但存養窮索。種種功夫。方有田地可據。而將趨乎崇深遠大之域。有不可量。誰知天嗇其壽。鬼奪其年。使斯文斯林遽此無祿耶。痛哉痛哉。配光山李氏文鎬女。擧二男。長建信娶濟州梁氏。次幼。公歿未葬。建信屬其叔父來曰。營葬有日矣。墓碣墓誌諸般文字。必先有行狀而後。乃可以據此而作。知先人熟而可以狀先人行者。其非丈人乎。因念人有實德而不揚於世者。此朋友之責也。況死而使之泯然於後乎。玆於建信之請。有不敢多辭云爾。 별자(別子) 제후의 중자(衆子)를 장자(長子)와 구별하여 별자라고 한다. 제후의 중자는 새로운 대종(大宗)의 시조가 된다. 천우(天祐) 이천우(李天祐, 1354~1417)이다.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 1330∼?)의 둘째 아들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산재(散齋) 제사하기 전 외출은 하지만 말타기, 음악, 조문(弔問) 등을 하지 않음으로써 몸가짐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치재(致齋) 제사를 올리는 대상에 대하여 거처하던 곳, 말씀하던 모습, 즐기던 것, 지향하던 것, 좋아하던 음식 등 생전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범공(范公) 송(宋)나라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아들인 범충(范沖, 1067~1141)이다. 〈좌우계(座右戒)〉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먹는 …… 않는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경(敬)으로 …… 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이다. 신묘하게 …… 이룬다 《주역》 〈계사전(繫辭傳) 상〉에 나오는 말이다.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 범노공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노국공(魯國公) 범질(范質)을 가리킨다. 그 조카 고(杲)가 승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시를 지어 주며 조급히 승진하려는 것을 경계시켰던 것을 말한다. 시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로 불렸다. 이를 원용하여 간재(澗齋) 공을 서치에 빗댄 것이다. 《後漢書 卷83 徐穉列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우인당 박공 행장 愚忍堂朴公行狀 공의 휘는 인진(麟鎭), 자는 학중(學仲), 호는 우인당(愚忍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며 찰방(察訪)을 지낸 휘 위(蔚)가 그의 중조(中祖)이다. 찰방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맹성(孟誠)을 낳고, 첨정은 참의를 지낸 휘 영걸(永傑)을 낳고, 참의는 사맹(司猛)을 지낸 휘 억서(億瑞)를 낳고, 사맹은 감찰을 지낸 휘 지수(枝樹)를 낳았다. 지수는 임진년(1592, 선조25)의 충신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승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휘 천주(天柱)를 낳고, 주부는 휘 성소(成素)를 낳고, 성소는 휘 태흥(泰興)을 낳고, 태흥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휘 상언(尙彦)을 낳고, 첨지중추부사는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필익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경귀(慶龜)이고 조부는 휘 만환(萬煥)이다. 고(考)는 휘 재덕(在德)이고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생고(生考)는 휘가 재응(在應)이며 백부(伯父)의 후사로 나갔다. 헌종 병오년(1846, 헌종12) 12월 30일에 벽지리(碧池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성품과 기질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한결같이 양친을 섬겨 집안에서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부친1)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기고 부친을 추모하고 받드는 제사에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다. 온화한 낯빛으로 어머니를 모시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들었으며 집안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어머니에게 여쭙고 난 뒤 행하였다. 기미년(1859, 철종10)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조행(操行)을 갖춘 뛰어난 배우자로 내조를 잘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생고(生考 생부)가 세상을 떠나자 계부(季父)인 휘 재표(在杓)가 집안일이 학업에 장애가 될까 염려하여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 공에게는 유학(遊學)하여 학업을 성취하게 하였다. 공은 계부를 매우 근실하게 섬겨 출입과 진퇴를 오직 계부의 명에 따랐다. 생고(生考)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래된 상자 안에서 우연히 돈을 빌려준 것과 관련된 문서를 발견하자 즉시 먹칠을 해버리고 말하기를, "저쪽에서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말을 하면 기망(欺罔)의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인정에 편하겠는가."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약관(弱冠) 언저리였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처럼 남다른 면이 있었다. 종족(宗族)이 매우 번창하였으며 같은 마을에 함께 살면서 장유(長幼)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은의(恩義)가 두루 미쳐 모두가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인척(姻戚)과 옛 친구들에 대해서도 왕래하며 안부를 살피는 일을 언제나 그만두지 않았다. 외왕부(外王父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몇 묘(畝)의 땅을 사서 제사에 올릴 물품을 마련하는 데 이용하도록 하였다. 본생(本生)의 외왕부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고 외구(外舅 장인)와 외고(外姑 장모)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고 물력(物力)을 비축하여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이들을 돕고 길사와 흉사에 힘을 보태며 묘제(墓祭)와 봄가을의 시제(時祭)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그 힘을 미루어 방계 친족의 묘제에도 보탬이 되게 하였다. 육촌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살림이 어렵고 병도 나자 공이 데려다 부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뒤 가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관과 삽(翣)2)을 마련하여 도와주었다. 같은 마을에 아이를 낳게 된 부인이 굶주리다 이로 인하여 목숨이 끊길 지경이었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양식과 음식을 장만하여 돕도록 하여 어머니와 아이가 그 덕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걸객(乞客)이 왔다가 병이 들자 몇 달에 걸쳐 구호하고 치료해주는 것이 집안 식구가 병이 들었을 때와 차별이 없었고, 죽었을 때도 의복과 물건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떠돌며 빌어먹던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어서 길가에 빈(殯)3)을 하였지만 오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길에서 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다. 공이 불쌍하게 여겨 물자를 내어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가난한 일가 한 사람이 수십 민(緡)의 돈을 빌려 가 여러 해가 되도록 돌려주지 않았건만 또한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빌린 돈을 돌려주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에서 이 돈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잊어버렸는데 받는다면 어찌 쓸데없는 물건이 아니겠는가." 하고, 결국 받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검약을 실천하고 남는 재물을 보존했다가 곤궁한 자들을 진휼하여 그동안 공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한 자가 적지 않았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노비가 오래도록 역을 치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풀어주었다. 일찍이 여자 노비 1명을 샀다가 양가(良家)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는 또한 풀어주어 돌려보냈다. 한번은 날아가던 꿩이 산짐승에게 쫓기다 처마 밑에 숨어 엎드려 있었다. 자식들이 잡아 바치자 공이 말하기를, "짐승이 의지할 데가 없어 사람에게 의지했건만 어찌 차마 죽이겠는가." 하고 풀어주도록 하였다. 근세(近歲) 이래로 먼 지역에서 온 매우 공교한 물건들이 시장에 현란하게 넘쳐나 서로 앞다투어 빠져들고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건만 공은 여태껏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공은 선대의 계보(系譜)가 중조(中祖)부터 그 위로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았다. 중간에 선조 한 사람이 다른 집안의 계보를 끌어다 그 위에 붙였는데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 몹시 두려워 최면암(崔勉庵)4), 기송사(奇松沙)5)(성과 호는 붙여 씁니다. 예) 이율곡 「지침」 이하 표시만 해두겠습니다.) 등 예를 아는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뒤 종족(宗族)에게 알리고 바로잡았다. 마을에 재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 위세가 꽤 당당하였다. 그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은 끝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들 준기(準基)에게 허리에 차고 다니는 보도(寶刀)가 있었다. 하루는 그것을 잃어버렸는데 공이 말하기를, "가난한 유자(儒者)에게 보검(寶劒)은 본래 지나친 물건이니 잃어버리는 게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루는 내가 두세 명의 벗과 공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었다. 집안에 불이 나 실성(失聲)한 채로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공은 사내아이 종을 불러 불을 끄러 가도록 하더니 돌아와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공의 아우가 밖에 나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돌아와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잘못이 너에게 있으면 모욕을 당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고 잘못이 저쪽에 있으면 저쪽이 망녕된 사람이다. 망녕된 사람과 무엇을 따지겠느냐." 하였다. 아우가 말하기를, "잘못이 없는데도 모욕을 당했으니 역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공은 "모욕은 잘못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곧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동도(東徒 동학교도)의 난 때 그들의 위세가 매우 강하여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휩쓸렸다. 공이 친척과 오랜 벗들을 모아놓고 사정(邪正)과 순역(順逆),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분별을 설명하여 물드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른 일찍 과거를 준비하여 시문(詩文)을 드날렸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유람을 하면서 종종 호탕한 풍운(風韻)을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세상일을 점점 많이 겪게 되면서 덧없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세상과 교유를 끊었다. 병을 치료하는 여가에 《가례(家禮)》, 《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을 취하여 조용히 깊이 연구하고 차례대로 연역하면서 따뜻한 봄날에 얼음이 녹는 듯 유연히 스스로 즐거워하여 몸에 병이 깊고 적막하고 외로운 삶이 고생스럽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선영(先塋) 아래의 옛집을 고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마련해 놓고 일문(一門)의 자제들이 학업에 전념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년에는 본채의 서쪽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즉이재(則以齋)라 이름 붙이고 자식들이 여력이 있을 때 글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시문(時文)을 짓거나 과장(科場)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잘못은 나로 충분하다. 어찌 너희들까지 거듭 잘못되게 하겠느냐." 하였다. 날마다 독서와 궁리(窮理)로 자신을 다잡고 예법에 맞는 행실을 하고, 과정(課程)을 지도하여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현명한 사우(士友)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거리가 멀더라도 반드시 가서 종유하게 하였고 좋은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형편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사서 집에 두도록 하였다.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인간 세상에 명예와 영화, 영달(榮達)과 같이 좋은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남을 시기하거나 이기려는 생각이 마음에서 싹트지 않고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 선량함이 온 식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날을 맞을 때마다 아우들, 종형제들, 자식들, 조카들이 모시는 자리에서 모여서 마주하며 얼굴마다 표정이 화기애애한 것을 보면 마치 봄날에 온갖 꽃들이 활짝 핀 사이에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에게 만금의 재산이 있는 것은 선행 하나를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 소나 말에게 옷을 입혀 놓은 듯한 저들이 과연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홍범(洪範)〉의 오복(五福)에는 덕이 네 번째 순서에 있지만 실제로는 덕이 오복의 근본이다. 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복 가운데 덕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매번 선(善)을 행하도록 정성껏 인도하고 일깨우는 데 공력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방 안은 네 벽이 텅 비고 소박하여 편지나 서첩(書帖) 외에는 다른 여분의 물건이 없었다. 집에 바둑판 하나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물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몰래 틈틈이 바둑을 두며 노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바둑판을 가져다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성품이 예(禮)를 좋아하여 손수 제의(祭儀)를 베껴 일문(一門)의 자제들에게 주고 익히게 하였다. 속절(俗節), 삭망(朔望), 사시제(四時祭)에 대해서는 사라지고 거행되지 않던 것들을 정리하여 찬연함이 볼 만하였다. 또 언서(諺書)로도 1본(本)을 베껴 며느리와 딸들에게 주어 익히도록 하였다. 일문(一門)에서 관례(冠禮)를 치르는 자가 있으면 삼가(三加)의 예6)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매번 일문의 자제들에게 서사(書社)에 모여 향음(鄕飮), 강규(講規) 등의 의절(儀節)을 익히게 하였다.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경륜(經綸)은 대충대충 처리하지 않아 조리와 두서가 확실하였고 세속의 풍습에 얽매이지 않아 의리가 곡진하였다.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드러나고 감춰진 것이 다를지라도 요컨대 측은하게 여기고 자애롭게 대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다. 산림에 감추어진 면모가 세상에 조금이나마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을미년(1895, 고종32) 6월 25일, 우인당(愚忍堂)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원근의 인사(人士)들이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아이들, 시정(市井)의 장사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탄식하면서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8월 17일 정천(淨川) 뒤에 있는 가옥치(佳玉峙)의 술좌(戌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을 두었는데 준기(準基), 준회(準會), 준규(準奎), 준우(準遇)이다. 무릇 인(仁)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존귀한 작위(爵位)이고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누군들 이 도리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늘로부터 뛰어난 자질을 받고 학문의 공을 성취하여 가정에서는 효성스럽고 유순한 아들이고 향려(鄕閭)에서는 정직하고 신뢰받는 선비이며 남을 사랑하여 남에게 사랑받고 남을 공경하여 남에게 공경받으며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으며 지극히 너그러운 자리에 머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지에 노닐어 이르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고 삶과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을 나는 공에게서 보았다. 공은 예설(禮說)에 정통하고 경전(經典)의 본뜻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역사에 박학하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하며 세사(世事)에 밝아서 함께 얘기하면 마치 샘물이 마르지 않고 세차게 흐르는 듯하였다. 공의 행의(行義)와 풍채는 진실로 사람들마다 모두 함께 보았고 함께 들었지만, 학문의 성취에 대해서 말하자면 두문불출하며 요양(療養)하는 10년 동안 이루어졌기에 부지런히 뒤따르던 자가 아니라면 그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아, 우리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비록 매우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무너진 세상, 쇠락한 풍조 속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한 가닥 실 같이 거의 끊어진 도맥을 지키고 조만간 젊은 후생(後生)들의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건만, 공이 조금도 머물지 않고 서둘러 우리를 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남은 생이 쓸쓸하여 그저 눈물이 옷깃을 적실뿐이다. 아, 나를 아는 것이 공과 같은 사람이 없고 공을 아는 것이 나와 같은 자도 없다. 따라서 평소의 행적과 평소의 덕을 찬술하는 일에 대해서 사양을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 이에 감히 차례대로 서술하여 공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드러내지 못한 덕이나 갖추지 못한 행적은 준기(準基)가 응당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훗날 입언(立言)하는 자의 붓을 기다릴 것이다. 公諱麟鎭。字學仲。號愚忍堂。朴氏系出密城。察訪諱蔚其中祖。察訪生僉正諱孟誠。僉正生參議諱永傑。參議生司猛諱億瑞。司猛生監察諱枝樹。壬辰忠臣贈左承旨。旌閭。承旨生主簿諱天柱。主簿生諱成素。成素生諱泰興。泰興生僉樞諱尙彦。僉樞生諱必益。於公高祖也。曾祖諱慶龜。祖諱萬煥。考諱在德。妣水原白氏。生考諱在應。蓋出爲伯父後也。憲宗丙午十二月三十日。生于碧池里第。天姿朴實。性氣溫良。一事兩庭。庭無間言。嘗恨嚴庭早世。未及承顔。追遠事亡。極其哀誠。侍慈幃。色溫氣和。承順無違。家事巨細。必稟而行。己未委禽于礪山宋氏之門。女士好逑。極有內助。乙丑生考違世。季父諱在杓。慮其以家務妨學。凡百躬自幹理。而使公遊學以就其業。公事季父甚謹。出入進退。惟命是從。生考歿後。偶得出錢券文於故篋中。卽加墨抹曰。彼旣不言。自我言之。則是發其欺誣也。於人情安乎。戒家人勿言。是時公年爲弱冠左右。而其處事偉然已如此。宗族甚繁。同住一巷。長少內外。恩義周遍。各得歡心。至於姻戚故舊。往來存訊。隨時不廢。外王父沒。買爲數畝地。俾資奠獻之具。爲本生外王父亦如之。爲外舅姑亦如之。立門規蓄物力。使貧窮有助。吉凶有須。墳塋香火。春秋有賴。又推其力以及於傍親之墓。再從女弟。嫁而貧且病。公邀而養之。及沒。舁還其家。具棺翣而助之。隣里有婦人解娩。飢因垂絶。公聞之。具糧饌使救之。其母孩得以蘇活。有乞客來而病。數月救治。無間家衆。其死也具衣物而葬之。有人父子行乞。父死殯於道側。久而未葬。哀哭於道。公矜之。出力而營之。貧族一人貸去數十緡錢。積年不還。亦無一言及之。久後還之。公笑曰。吾心中忘此錢久矣。忘而受之。豈非剩物乎。遂不受。遇飢歲。必躬加儉約。而存其羸餘。以賙貧乏。前後賴活不少。家有世來奴婢。悶其久役而放之。嘗買一婢。聞其爲良家女。亦放還之嘗有飛雉爲山獸所逐。竄伏簷下。諸子拱之。公曰。物窮依人。豈忍殺之。令放之。近歲以來。遠方淫巧之物。眩溢市肆。競相耽服。公未嘗接目焉。公先系。自中祖以上。逸而無傳。中間族先一人。引他系而冒於其上。因仍未改者久矣。公大懼倫理之乖悖。往復於崔勉庵奇松沙諸識禮處。告于宗族而反正之鄕裏有豪富人。風勢頗張。累書請見。終不一往。子準基有所佩寶刀。一日見失。公曰。窮儒寶劒。本是過物。失之固當。了無追惜之意。一日余與數三朋友訪公。坐語良久。家內失火。失聲告急。公呼僮僕。使之往救。坐語如常。公弟出外。見辱於人。歸告之。公曰。曲在於汝。則見辱固當。曲在於彼。則彼是妄人。與妄人何計較之有。弟曰。直而見辱。不亦寃乎。曰辱在於曲。不在於直。東徒之亂。威虐甚熾。閭里靡然。公會親戚知舊。喩以邪正順逆利害禍福之分。使無所犯。早治功令。馳騁翰墨。以至文酒遊衍之際。往往有豪宕風韻。閱世漸久。浮想消歇。於是杜門閉帷。絶遊息交。養病之餘。取家禮心經性理等書。從容沈潛。次第紬繹。春融氷釋。逌然自樂。不知沈痾之在身。幽獨之爲苦也。修墓下舊構。儲四子五經。爲門子弟修息之所。晩築數椽於寢之西。命曰則以齋。以爲諸子餘力學文之地。敎諸子。不許作時文赴科場曰。誤我足矣。豈令再誤汝輩耶。日以讀書窮理。檢身飭行。指授課程。俾無放過。聞有賢士友。則程途雖遠。而必使往從之。聞有好文字。則事力雖艱。而必令買置之。其樂善好學。出於至誠。而不知人間世復有名華利達之爲好也。忌克之意。不萌於心。忿戾之氣。不形於色。鄙悖之聲。不出於口。溫仁子諒。闔室薰染。每閒居暇日。見其羣弟羣從諸子諸姪。聚對侍列。面面和氣。怡怡融融。如在春城萬花之中。嘗戒諸子曰。人有萬金之産。不如作一介善士。彼牛襟馬裾者。於人世果何爲也。又曰。洪範五福。德居其四。而其實德爲五福之本。吾以爲天下之福。莫過於德。每惓惓引喩所欲式穀者。無所不用其至。一室四壁。蕭散澹泊。簡墨書帖之外。無他長物。家藏一奕枰。人號寶物。一日見諸兒竊間圍戲。遂取其枰。碎而焚之。性好禮。手抄祭儀。賜門子弟習之。至於俗節朔望及四時之祭。修其廢墜。燦然可觀。又以諺書抄一本。賜婦女習之。門內有將冠者。令依三加而行之。每令門子弟。聚於書社。習鄕飮講規等儀節。平日經綸。著於施爲之間者。不涉苟簡而的有條緖。不囿俗習而曲有義理。雖大小有殊。顯晦不同。而要不出於惻怛慈愛利人澤物之心也。惜其沈晦林樊。不少槪見於世也。乙未六月二十五日考終于愚忍堂。遠近人士知不知。莫不痛惜。操文來哭者相續。至於閭巷婦孺。市井販傭。亦皆一辭嘖嘖。以爲善人逝矣。八月十七日。葬于淨川後佳玉峙戌坐原。有四男。準基準會準奎準遇也。夫仁者天之尊爵也。人之安宅。人生之初。孰不有此箇道理。而受之以姿質之美。濟之以學問之功。在家庭爲孝順之子。在鄕閭爲忠信之士。愛人而人恒愛之。敬人而人恒敬之。與世無怨。與物無競。處於至寬之地。遊於至順之境。無人不得生死活潑者。吾於公見之矣。公邃於禮說。謹於經旨。博於史學。精於物理。明於世故。與之言。滾滾若源泉之不渴也。行義風裁。固人人所共見所共聞。而若學問所就。則此是杜門養病十年間所得。非勤於從逐者。不能悉其裏許也。嗚乎。吾輩殘生。雖甚落莫。而相從於缺界頹波之中。以守一縷幾絶之脈。以待後生少年早晩消息。豈知公不少留。而遽爾相棄耶。餘生踽踽。只有淸血霑襟。嗚乎。知我者。莫如公。知公者。亦莫如我。其於述平生之行。撰平生之德。有不可辭而委諸他手也。玆敢序次以還其家。若其德之有未形。行之有未備。則準基當有以補足之。以俟他日立言之筆也。 부친 소후부(所後父)인 백부(伯父)를 가리킨다. 삽(翣) 상여에 실린 관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부채 모양의 장식이다. 불삽(黻翣, '기(己)' 자가 등지고 있는 문양을 그려 넣은 것), 운삽(雲翣, 구름의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보삽(黼翣, 도끼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이 있다. 운삽은 화삽(畵翣)이라고도 한다. 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삼가(三加)의 예 관례를 할 때 관을 세 차례 씌우는 예를 말한다. 《가례(家禮)》에 따르면,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를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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