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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의 천은 조공 묘지명 贈兵曹參議泉隱趙公墓誌銘 공의 휘는 서규(瑞奎), 자는 경천(擎天), 호는 천은(泉隱)이다. 조씨(趙氏)는 본래 함안(咸安) 사람이다. 휘 정(鼎)은 고려에서 벼슬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을 지냈는데, 그 시조이다. 휘 승숙(承肅)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불렀다. 휘 종례(終禮)는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휘 임(琳)은 관직이 대사성이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을 지냈는데, 동복(同福)에 우거(寓居)하였다. 고조는 휘 유보(惟寶)인데, 습독(習讀)을 지냈다. 증조는 휘 호(豪)인데,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조부는 휘가 기벽(奇璧)이다. 부친은 휘 옥생(玉生)으로, 호가 청계(淸溪)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다. 인묘(仁廟) 신사년(1641, 인조19) 3월 29일에 산음(山陰)의 우거하는 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효도와 우애는 타고난 천성이었다. 나아감과 물러남, 묻고 대답하는 예절에 대해서 물 흐르는 듯이 받들고 순종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독서할 적에는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課程)을 따라 공부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통창하였다. 일찍이 동학에게 말하기를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은 비록 두 가지 길이지만 출사(出仕)하여 군주를 섬기며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는 것은 한가지이다. 수하(隨何)와 육가(陸賈)는 문학에 국한되고 강후(絳侯)와 관영(灌嬰)은 무략에 치우쳤으니,23) 그릇처럼 한 가지 쓰임새에 국한되지 않는 군자의 방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독서하는 여가에 《손오병법(孫吳兵法)》24) 같은 병서를 함께 익혀 대략 대의에 통달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여론은 모두 장차 당시에 쓰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우연히 고질병(痼疾病)에 걸려 마침내 천하사방을 평정하는 원대한 일은 접고 문을 닫은 채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평소 마음가짐은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행실은 겸손하였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공경스러웠으며, 일을 처리함에 신중하고 꼼꼼하였다. 종족과 인척으로부터 교유하는 친구에 이르기까지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기를 끊임없이 계속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임신년(1692, 숙종18) 8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장수하고 귀하게 된 손자로 인하여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득영(鄭得英)의 따님이다. 화순(和順) 천운산(天雲山) 을좌(乙坐) 위아래로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징태(徵泰), 징휘(徵徽), 상겸(尙謙)이고, 딸은 낭주(朗州) 최구익(崔久翼)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영민한 재주로 태평성대에 출사(出仕)하여 마땅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지만, 병마가 농간을 부려 끝내 궁벽한 산속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식자의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는데,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행실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孝悌之行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였네. 文武之才벼슬길에 나아갔다면 釋褐登籍훌륭한 일을 하였을 텐데. 庶乎有爲운명이 시대와 어긋나 命與時違산속에서 숨을 거두었네. 沈淹林樊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고 積累不食후손들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 公諱瑞奎。字擎天。號泉隱。趙氏本咸安人。諱鼎。仕麗朝官平章事。其始祖也。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諱從禮。入我朝。官寶文閣直提學。諱琳。官大司成。皆顯祖也。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高祖諱惟寶。習讀。曾祖諱豪。內禁衛將。祖諱奇璧。考諱玉生。號淸溪。軍資監正。妣密陽朴氏永春女。仁廟辛巳三月二十九日。生公于山陰之寓舍。公幼有至行。孝友根天。進退唯喏。承順如流。就傳讀書。不待提督而遵循課程。文理日暢。嘗語同學曰。文武雖是兩途。而其爲出身事君。經世澤民。則一也。隨陸之局於文。絳灌之偏於武。非君子不器之道也。是以讀書之暇。兼習孫吳兵略。略通大儀。丙辰擢武科。物論無不擬之以將爲時用。旣而偶得貞疾。遂還四方之事。以杜門養病爲餘日計。平居持心謹慤。行已謙恭。接人和敬。處事愼密。自宗族姻戚至於知舊從遊。問訊周恤。源源不替。各得其心。壬申八月十三日卒。後以孫壽貴。贈兵曹參議。配河東鄭氏得英女。葬和順天雲山乙坐上下兆。生三男一女。男曰徵泰徵徽尙謙。女適朗州崔九翼。孫以下不錄。嗚呼。以若挺邁之才。出身照朝。宜若有所爲。而二竪作戲。竟不免沈淹於遐曲林樊之間。其爲謙者之恨。爲何如耶。後孫翼濟。以家狀請識玄石。辭不獲已。銘曰。孝悌之行。文武之才。釋褐登籍。庶乎有爲。命與時違。沈淹林樊。積累不食。垂裕後昆。 수하(隨何)와……치우쳤으니 《진서(晉書)》 〈유원해재기(劉元海載記)〉에 "한(漢)나라 수하(隨何)와 육가(陸賈)에게는 무략이 없고, 강후 주발(周勃)과 관영에게는 문식이 없다.[隨陸無武 絳灌無文]"라고 하였다. 《손오병법(孫吳兵法)》 중국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인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오기(吳起)의 《오자병법(吳子兵法)》의 합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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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 이공 묘지명 藥圃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영복(永複), 자는 계실(季實), 호는 약포(藥圃)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다.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휘 선제(先齊) 호 필문(篳門)에 이르러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는데,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천거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종덕(種德)인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경(㯳)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조부는 휘 필광(必光)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언구(彦矩)이니,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성중(全聖中)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27) 5월 22일에 공을 화산리(華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천품이 온후하고 굳세고 방정하였다. 집안에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겨 아우와 자식 된 직분에 매우 충실하였다. 여력이 있고 한가한 날이면 등불을 밝히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여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르러 문사(文詞)가 넉넉하여 시원스레 통하였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끝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과거 공부는 접고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여 애오라지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렸으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성실한 뜻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늙은이와 젊은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믿고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흉년을 당했을 적에 수확한 벼가 논에 남아 있었는데, 밤에 가서 보니 어떤 사람이 벼를 훔쳐서 가다가 공을 보고 이랑 사이에 숨겼다. 공이 그에게 의리에 대해 말하면서 정성스럽게 깨우쳐 주니 그 사람이 사죄하고 돌아가서는 결국 착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상 군자(梁上君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간 군자(畝間君子)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웃 마을에 살인자가 있어 장차 관아에 고하려고 하였는데, 마을 사람이 모두 달아나고자 하니, 공이 엄히 금하여 농사 짓는 사람은 농사짓게 하고 독서하는 자는 독서하게 한 다음 공은 뜰을 쓸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서 관원을 맞이하자, 관원이 마음대로 침탈하는 바가 없어 마을이 마침내 편해졌다.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퍼하기를 예법에 정한 것보다 더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니, 향리에서 감동하여 마침내 상위 관아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무자년(1768, 영조44) 1월 21일에 졸하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론(公論)이 위에서 행해지지 않아 인재가 아래에서 흩어져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와 같이 의(義)를 행하고 이와 같이 원대한 뜻을 품고 외진 곳에 서 은거하여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는 실로 보탬이 되거나 손해되거나 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으로 보아서는 어떻다고 하겠는가. 바다에 빠뜨린 진주25)는 비록 열 겹으로 감싸서 광채를 숨기더라도 백세의 뒤에까지 절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배위(配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박성곤(朴聖坤)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광국(光國), 광렬(光烈), 광인(光寅), 광진(光震)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사욱(文思郁), 흥덕(興德) 장계인(張啓仁)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한휘(漢徽), 덕휘(德徽)이고, 딸은 강욱(姜旭)에게 출가하였다. 차자의 아들은 만휘(萬徽), 주국(周國), 주장(周璋), 주진(周鎭)이고, 딸은 문영기(文永璣)에게 출가하였다. 셋째는 주국(周國)을 양자로 삼았다. 넷째의 아들은 숙휘(淑徽)이고, 장녀는 경주(慶州) 김일기(金馹基)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밀양(密陽) 박영호(朴英浩)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손 태휴(泰休)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시례의 가문에 詩禮門庭효도와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네. 孝友式穀광채를 감추었으니 潛光含章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 없었네. 世莫我識선조가 공덕을 쌓고 누리지 않아 積累不食후손들이 복 받았네. 雲仍蒙福지동의 무덤에 池洞斧堂억만년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億 公諱永複。字季實。號藥圃。李氏系出光山。勝朝左僕射諱珣白爲鼻祖。至諱先齊。號篳門。官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薦至吏曹參議。皆其顯祖也。高祖諱種德。丙亂擧義。贈吏曹參議。曾祖諱㯳。贈僉中樞。祖諱必光。贈掌樂院正。考諱彦矩。同中樞。妣天安全氏聖中女。以英宗辛未五月二十二日生。公于華山里。公天稟溫厚剛方。八事父兄。出事長上。甚得弟子之職。餘力暇日。焚膏懸䯻。刻苦下功。年至成童。文詞贍暢。累捷鄕解。竟屈禮部。於是謝絶擧業。隱居求志。聊以自娛。平心率物。推己恕人。惻怛之情。孚實之意。交濟竝行。是以鄕里之間。老少上下。無不信服。嘗遇飢歲。稷禾棲畝。乘夜行視。有人竊禾以去。見公。匿於畝間。公爲陳義理。曉喩諄諄。其人服罪而去。卒爲善人。人曰。古有梁上君子。今爲畝間君子。村隣有殺人者。將告官。村人皆欲逃避。公嚴禁之。使耕者耕。讀者讀。公掃庭除。具衣冠。出迎官。官人無所肆其侵掠。村中遂晏如也。遭艱。哀毁踰節。廬墓三年。鄕里感賞。遂剡薦于上司。除童蒙敎官。戊子正月二十一日卒。葬池洞前麓午坐原。嗚呼。公論不行於上。而人才散逸於下久矣。以若行義。以若抱負。隱淪遐荒。世無知者。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謂何如耶。滄海遺珠。雖十襲鞱輝。而百世之下。自有不可得而掩者矣。配順天朴氏聖坤女。有四男二女。光國光烈光寅光震。女適南平文思郁。興德張啓仁。長房男漢徽德徽。女適姜旭。二房男萬徽周國周璋周鎭。女適文永璣。三房周國爲後。四房男淑徽。女長適慶州金馹基。次適密陽朴英浩。會孫以下不盡錄。玄孫泰休徵玄石之銘。不敢辭。銘曰。詩禮門庭。孝友式穀。潛光含章。世莫我識。積累不食。雲仍蒙福。池洞斧。堂芬苾千。億 바다에 빠뜨린 진주 보배를 모으는 사람이 바닷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여 빠뜨렸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여 등용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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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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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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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동학 교수 이당 박공 묘지명 東學敎授梨堂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승수(承洙), 자는 석여(錫汝), 호는 이당(梨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가 신라(新羅)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에게서 나왔다. 후세에 여덟 명의 대군(大君)이 분봉(分封)하게 되었으니, 그 장자가 밀성군(密城君)으로, 바로 밀성 박씨로 계보가 나누어지게 된 선조이다. 후손 가운데 휘 현(鉉)이 있으니, 고려 때 사헌부 규정(司憲府紏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문유(文有)를 낳았는데,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사경(思敬)을 낳았는데,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심(忱)을 낳았는데, 본조에 들어와 개국원종훈(開國原從勳)으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강생(剛生)을 낳았는데,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이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절문(切問)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중손(仲孫)을 낳았는데, 호는 묵재(默齋)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미(楣)를 낳았는데, 호는 존성재(號存誠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광영(光榮)을 낳았는데,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모두 합격하고 형조 참판을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난(蘭)을 낳았는데, 호가 오정(梧亭)이고,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평군(密平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인원(仁元)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전한(典翰)을 지냈다. 이분이 휘 준현(俊賢)을 낳았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호종훈(扈從勳)에 책록(策錄)되었다. 이분이 안정(安檉)을 낳았는데, 참봉(參奉)을 지냈고,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모친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유현(金有鉉)의 따님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파주(坡州)의 덕현(德峴)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재성(才性)이 영특하여 문학을 일찍 성취하였다. 일찍 성균관에 들어가 동학 교수(東學敎授)에 제수되었다. 사우(師友)들과 교유하고 출중한 사람들과 사귀어 끊임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더욱더 확충하여 훌륭한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다. 공은 퇴우당(退憂堂) 휘 승종(承宗)과 더불어 종고조(從高祖) 형제가 된다. 퇴우당이 화를 당한 뒤에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얼마 되지 않아 또 병자호란이 일어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공은 마침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전주(全州)의 봉서산(鳳棲山) 선영 아래에 이르러 거처하였다. 3년을 거처하였는데 도회지와 가까워 출세를 위해 인연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한강(韓康)26)의 이름을 아는 자가 다만 한 여자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을 보고, 이에 남쪽 변방 산골 가장 깊은 곳을 찾다가 능주(綾州) 이목동(梨木洞)에 이르러 멈추었다. 숲속에 집을 짓고 고용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름이 문밖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발은 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림자를 숨기고 자취를 없애며 교유를 끊어 세상을 버린 백성으로 자처하여 스스로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공이 어느 곳에서 떠돌아다니는지 몰랐고,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공이 귀족의 자제인 줄 몰랐다. 여유롭게 노닐면서 배운 것을 익히고 노닐면서 익히듯이 학문에 전념하여 뽕을 따는 자처럼 한가롭고,27) 대식(代食)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좋아하여28) 인간 세상에서 더이상 종경(鍾磬)과 옥백(玉帛)이 어떤 물건인지 몰랐다.정사년(1677, 숙종3)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 거처하던 곳 뒤쪽 산기슭 자좌(子坐)에 장사 지내고 부인과 합장하였다. 배위(配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참판 이무(李武)의 따님이다.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자희(自禧)이다. 손자는 일징(逸徵), 초징(楚徵)이다. 초징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이름이 성원(晟源)으로 장자의 후사가 되었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대대로 훌륭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태평성대의 명사(名士)로, 그 포부와 조예는 장차 이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가문의 운수가 떨치지 못하고 시사(時事)에 어려움이 많았다. 마침내 천애(天涯)의 머나먼 변방에 초연히 은둔하여 폐인으로 자처하여 생을 마감하였으니, 탁월한 풍격은 먼 후대에 서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 할 것이다. 다만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과 남은 향기가 파묻힌 채로 알려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자손의 무궁한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9세손 학(鶴)이 와서 깊이 개탄하며 전해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수습하여 장차 묘도(墓道)에 새기려고 하면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번다함 사절하고 고요한 곳 찾아 謝繁就靜외진 물가에 이르렀네. 止于遐濱은거할 곳 마련하였는데 菟裘是卜이곳에 새로 무덤을 만들었네. 斧堂仍新두텁게 쌓으면 반드시 발현하고 厚積必發오래도록 막히면 반드시 펴지게 마련이네. 久屈必伸후손이 번창하리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시냇물처럼 이르리라. 餘慶川臻 公諱承洙。字錫汝。號梨堂。朴氏系出新羅始祖王赫居世。後世至八大君。分封其長曰密城君。卽密城繼別之祖也。後孫有諱鉉。䴡朝官司憲紏正。是生諱文有。慶州判官。是生諱思敬。典法判書。是生諱忱。入我朝。以開國原從勳。贈戶曹典書。是生諱剛生。號蘿山耕叟。集賢殿副提學。是生諱切問。文科正字。贈左贊成封密山君。是生諱仲孫。號默齋。文科都承旨。是生諱楣。號存誠齋。文科官承旨。是生諱光榮。中司馬文科官刑曹參判。封密城君。是生諱蘭。號梧亭。中司馬兩試。北評事。贈領議政封密平君。是生諱仁元。文科典翰。是生諱俊賢。中司馬。壬辰著扈從勳。是生諱安檉。參奉。卽公之考也。妣安東金氏有鉉女。歲丙辰生公于坡州之德峴。公才性穎異。文學夙就。早上庠。除東學敎授。遊從師友。交結英雋。琢磨淬礪。愈益展拓。蜚英馳譽。藉藉一時。公與退憂堂諱承宗。爲從高祖兄弟。退憂堂遘禍後。公退歸鄕第。杜門謝客。未幾又經丙子之亂。時事大變。公遂無意於世。挈家南下。至全州之鳳棲山先壟下居焉。居三年。見地近通都。夤緣漸繁。而知韓康之名者。不止爲一女子而已。於是行尋南荒山谷最深處。至綾州之梨木洞止焉。因樹爲屋。與同傭人。名不出門。足不出山。匿影滅跡。絶遊息交。自處以遺世之民。自謂以無名之人。洛中故舊。不知公之爲流落何處。洞裏居人。不知公之爲貴遊子弟也。優哉游哉。脩焉息焉。同桑者之閑閑。樂代食之維好。不知人間世復有鍾磬玉帛之爲何物也。丁巳十月十五日考終。葬所居後麓子坐合窆。配全義李氏參判武之女。擧一男曰自禍。孫男曰逸徵楚徵。楚徵有一男曰晟源。出後長房。玄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世家華胃。照朝名士。其抱負造詣。將以有爲於斯世。而家運不競時事多難。乃超然遐擧於天涯地角之遠。自分貞廢以終其世。其風韻之偉然。百世之下。令人斂袵。但年代浸遠。雲仍零替。使其遺風餘芬。鬱而不暢。豈不爲子孫無窮之恨耶。九世孫鶴來。深懷慨歎。收拾遺間。將以揭諸墓道。因請誌銘之文。余不忍以非其人辭。銘曰。謝繁就靜。止于遐濱。菟裘是卜。斧堂仍新。厚積必發。久屈必伸。螽斯椒聊。餘慶川臻。 한강(韓康)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가 백휴(伯休)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명산의 약초를 캐다가 장안(長安) 시장에서 늘 똑같은 값으로 팔아 왔는데, 어느 날 어떤 여자가 그와 흥정을 하다가 "당신이 한백휴라서 값을 깎아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진 것을 탄식하며 패릉산(霸陵山) 속으로 들어가 숨었지냈다 한다. 《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뽕을……한가롭고 《시경》〈위풍(魏風) 십묘지간(十畝之間)〉에 "십 묘의 사이에 뽕을 따는 자가 한가롭고 한가로우니, 장차 그대와 더불어 돌아가리라.[十畝之間兮, 桑者閑閑兮, 行與子還兮.]"라고 하였다. 대식(代食)하는……좋아하여 대식은 농사짓는 소득으로 녹식(祿食)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대아(大雅) 상유(桑柔)〉에 "가색을 좋아하여, 농민과 함께 일하면서 대식하노니, 이는 가색을 보배로 여기고, 대식하는 것을 좋아함이로다.[好是稼穡, 力民代食. 稼穡維寶, 代食維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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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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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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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암 처사 고공 묘지명 遯庵處士高公墓誌銘 우리 고을에 옛날에 은사(隱士)가 있었으니, 둔암(遯庵) 고공(高公)인 휘 경리(景离), 자 광우(光宇)가 그 사람이다. 산에서 나물 캐고 강에서 낚시하여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올렸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경서를 읽었다. 함부로 교유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택하였으며, 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곳을 택하였다. 예에 맞지 않는 책은 보지도 않고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하고 받으며 얻고 주는 일에 이르러서는 합당한 의리가 아니고 합당한 도리가 아니면 만종(萬鍾)이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조금도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관찰사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국사봉(國師峰) 아래에 집을 짓고 세 갈래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엔 책이 가득하였다. 소쇄하고 고즈넉하여 그 사이에서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생활하였다. 때때로 은봉(隱峰)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경서를 강론하고 산수 간에 노닐며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는 흥취를 다하였으니, 〈천태유산록(天台遊山錄)〉과 같은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이다. 휘 신전(臣傳)은 호조 참의를 지내고, 휘 열(悅)은 호조 참판를 지냈으며, 휘 상덕(尙德)은 지평을 지냈는데, 모두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휘 익심(益深)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냈고, 조부는 휘 명진(明進)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부친은 휘 현(鉉)으로 진사를 지냈다. 모친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첨추(僉樞) 언상(彦祥)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참봉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원건(元健)이고, 차자는 인건(仁健)이다. 손자는 태제(泰濟)이고, 증손은 가한(可漢)이며, 현손(玄孫)은 명림(命霖), 명주(命舟), 명좌(命佐)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묘소는 수동(壽洞) 선영(先塋) 좌측 자좌(子坐)에 있고 쌍분(雙墳)이다. 10세손 광무(光茂)가 대인(大人)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옷 속에 옥을 품고 손에 옥 지니고 懷瑾据瑜산림에 은거하였네. 枕山樓谷한가롭게 소요하며 婆娑徜徉즐거움 알리지 않기로 길이 맹세하였네. 永矢不告커다란 운치, 은둔한 자취는 偉韻逸躅저 언덕에 있네. 在彼阿陸선조가 복을 다 누리지 않아 碩果不食후손이 대대로 복을 누리네. 世世式穀 吾鄕古有隱士曰遯庵高公。諱景离。字光宇。其人也。採山釣水以供親旨。焚膏繼晷以讀古經。不妄交遊而必擇其人。不妄出入而必擇其地。目不觀非禮之書。口不道非法之言。至於辭受取予。非其義也。非其道也。萬鍾有所不屑。一毫有所不苟。州郡擧之而不起。侯伯邀之而不赴。結廬於國師峰下。三逕花竹。四壁圖書。瀟灑幽。閴寄敖其間。時從隱峰安先生。講討墳籍。登臨水石。以償風詠之趣。如天台遊山錄諸篇可見。高氏貫長興。諱臣傳。戶曹參議。諱悅。戶曹參判。諱尙德。持平。皆其中系顯祖也。曾祖諱益深。昌陵參奉。祖諱明進。通德郞。考諱鉉。進士。妣東萊鄭氏僉樞彦祥女。公娶昌寧曺氏參奉義修女。擧二男。長元健。次仁健。孫泰濟。曾孫可漢。玄孫命霖命舟命佐。以下不錄。公墓在壽洞先兆左傍子坐雙墳。十世孫光茂。奉大人命。以其家狀。謁誌墓之文。銘曰。懷瑾据瑜。枕山樓谷。婆娑徜徉。永矢不告。偉韻逸躅。在彼阿陸。碩果不食。世世式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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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 황공 묘지명 湖隱黃公墓誌銘 무성한 꽃과 잎을 보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연원(淵源)이 깊다는 것을 안다. 사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선인의 벗 황 이랑공(黃吏郎公)은 먼 지방에서 떨쳐 일어나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쳤으니, 성대하게 밝은 시대의 어진 신하가 되고 태평성대의 명사(名士)가 되었다. 자손들이 모두 법도를 준수하여 찬란하게 시례(詩禮)의 기풍이 있었으니, 다가올 복록이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평소 흠모하여, 선조가 쌓기만 해놓고 누리지 않은 공덕이 필시 선대에 있었는데 아직 후손이 끌어오지 못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 여름에 이랑공의 맏아들 작(稓)이 증왕고(曾王考) 호은공(湖隱公)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머무는 벽산(碧山)의 집으로 찾아와 묘도에 세울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양대에 걸쳐 50년 동안 집안끼리 서로 친하게 지낸 우의로 볼 때 어찌 차마 굳게 사양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상곤(象坤), 자는 후지(厚之), 호은(湖隱)은 그의 호이다. 국초의 명재상 익성공(翼成公) 휘 희(喜)의 후손이다. 부친은 휘 자중(字中)이다. 모친은 밀양 손씨(密陽孫氏)로, 손덕삼(孫德三)의 따님인데,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에 장흥(長興)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났다. 과거 공부를 하여 문장이 넉넉하며 시원하였다. 이윽고 번연히 생각을 바꾸어 수신을 위한 학문에 종사하였으니, 대개 타고난 훌륭한 자질로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바른길로 돌이킨 것이다. 문을 닫고 휘장을 친 채 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하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날마다 학습해야 할 과정을 두었다.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고, 하늘이 부여한 명(命)과 사람이 부여받은 성(性)29)을 정밀하게 분석하였다. 예학(禮學)에 더욱 심오하였는데 《상변통고(常變通攷)》와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대학(大學)》, 〈홍범(洪範)〉 등의 말을 가지고 분류하고 강목과 조목을 만들어 자리 오른쪽에 붙여두고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다. 매일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참배하였다. 대답하고 응대함에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고, 좌우에 있거나 출입할 적에는 매우 힘써 일하였다. 하늘에 빌어 역병을 물리쳐 아버지가 끝내 탈이 없었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자 어머니도 살아났다.상례를 거행할 적에 3일 동안 미음을 먹지 않았고, 묘소에서 곡하는 것은 눈보라가 쳐도 3년 동안 폐하지 않았다. 동생과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즐거워하는 기색이 말과 낯빛에 넘쳤다. 남의 선행을 보면 자신이 선을 행한 듯이 하였고, 남의 근심을 보면 자신의 근심처럼 여겼으며, 남의 불선함을 보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다. 정성스럽게 경계하고 신칙하여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교화된 사람이 많았다.인천 이씨(仁川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이정기(李廷夔)의 따님인데, 부인의 덕을 지녀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갑인년(1794, 정조18) 5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9세이다. 어은동(魚隱洞) 연봉(鳶峯)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세 아들은 세진(世鎭), 유진(有鎭), 재진(再鎭)이다. 유진의 아들 기원(基源)이 바로 이조 정랑이다.세상에는 실로 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내면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데, 호은공(湖隱公)과 같은 분이 어찌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장담하겠는가. 내 지금 이후에 황씨(黃氏) 복록의 원대함이 유래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선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린다30)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운명이 어찌 어긋났으며 命何不揚수명을 어찌 누리지 못하였는가. 壽何不長그 보답을 받지 않고 不食其報자손에게 남겨 주었네. 貽于孫子자손들에게 좋은 일 내려주니 孫子錫類음덕이 그치지 않으리라. 餘蔭未已 見花葉之茂而知根荄之固。見派流之長而知淵源之深。物猶然矣。矧伊人乎。先友黃吏郎公。崛起遐遠。早年騰颺。蔚然爲昭代之良輔。照朝之名士。子孫皆遵守規矩。彬彬有詩禮之風。其福祿之來。尙未艾也。尋常欽艶。意其積累不食之德。必有在於其先而未之叩焉。歲乙未夏。吏郎公胤子稓。以其曾王考湖隱公狀。行訪余於碧山止舍。請墓道誌銘之役。嗚呼。兩世通家五十年久要之誼。豈忍牢辭哉。謹按公諱象坤。字厚之。湖隱其號也。國初名相翼成公諱喜後。考諱字中。妣密陽孫氏德三女。以英宗丙子生公于長興闢新洞。幼有至性。孝友著稱。治擧子業。詞藻贍暢。旣而幡然改圖。從事爲己之學。盖天資之美。不待提諭而自爾反正也。杜門下帷。斂膝加趺。讀書窮理。日有課程。經史子集。淹貫該洽。天人性命。剖析情密。尤深於禮學。常變疑禮。無不旁通。以九容九思及大學洪範等語。彙分綱條。粘付座右。常自鏡考焉。每日早起。省親謁廟。唯諾應對。極其承順。左右出入。極其服勞。祈天驅疫而父竟無恙。割指注血而母亦回甦。執喪而水漿不入口者三日。哭墓而風雪不廢者三年。與弟友愛甚篤。怡悅之氣。溢於色辭。見人之善如己之善。見人之憂如己之憂。見人之不善如己之病。諄諄警勅。不露聲氣。而人多化之。娶仁川李氏廷夔女。婦德甚備。閫範無闕。公以甲寅五月十六日卽世。得年三十九。葬于魚隱洞鳶峯子坐原。三子世鎭有鎭再鎭。有鎭之子基源卽吏郎也。世固有潛修獨善含章內腴之人。而如湖隱公者。安知非其流耶。吾今而後。知黃氏福祿之遠有自來矣。天道福善。豈不信哉。銘曰。命何不揚。壽何不長。不食其報。貽于孫子。孫子錫類。餘蔭未已。 하늘이……성(性) 원문은 '천인성명(天人性命)'이다. 《주역대전(周易大傳)》 〈건괘(乾卦) 단(彖)〉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매 각각 성과 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和氣)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본의(本義)》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하고, 물(物)이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선한……내린다 원문은 '天道福善'이다.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선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화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天道福善禍淫]"라고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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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유【재업】에게 답함 答廉敬儒【在業】 뜻하지 않게 서찰로 하신 말씀이 이처럼 간절하니 돌이켜 생각해도 감격스러워 대답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보이신 뜻에 답이 없을 수는 없기에 매번 바로잡을 방도를 덧붙이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체로 회심(會心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과 상구(上口 입에 올려 외우는 것)는 본래 칼로 자르듯이 앞뒤로 나뉘지 않습니다. 오늘 상구를 하면 내일 회심이 이루어집니다. 또 음식을 한꺼번에 씹는 것처럼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형세도 아닙니다. 언사(言辭)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면 읽는 것이 정밀하지 않을 수 없고 외우는 것이 능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한가한 낮에 단서를 끌어내고 청정(淸靜)한 밤에 침잠해야 그 의미를 터득할 수 있으니 또한 전혀 깨닫지 못하고서 상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상구와 회심의 근본은 '정(靜)' 자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정(靜)하면 심지(心地)가 맑고 깨끗해지며 정신이 막힘없이 통하게 되어 회심과 상구에 대해 모두 힘을 기울이기 쉽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주장은 선유(先儒)의 논의가 진실로 한둘이 아닙니다. 저는 일찍이 망령되게도 인(人)과 물(物)에 대해서 이(理)는 같아도 성(性)은 다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서(朱書)》를 보았더니 또한 여기에 관한 주장이 있어 "물에는 오성(五性)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이 내용을 장석(丈席)에서 물었더니 답하시기를 "인자(仁者)가 보면 인(仁)이라 하고 지자(智者)가 보면 지(智)라 한다. 단지 이러한 사물일 뿐이니 사람의 인을 가지고 저 물(物)에게 요구하는 이치는 없다."55)라고 하셨습니다. 오상(五常)은 본래 오성(五性)에 하나하나 분속(分屬)되는 것이 아니고 부부(夫婦)와 장유(長幼)는 모두 예(禮)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분속하고자 한다면 예에는 질서의 의미가 있고 지(智)에는 분별의 의미가 있으니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예(禮)에 귀속돼야 할 듯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지(智)에 귀속돼야 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謂外翰命。若是繾綣撫念感戢。不知爲對。示義不能無言。而輒付就正之計。以爲如何。大抵會心上口。本非有截然先後。如今日上口。明日會心也。且非一擧竝嚼。混無相資之勢也。得於辭而能通其義。則讀之不可不精。誦之不可不熟然後。紬繹於日間休閒之時。沈潛於夜間淸靜之際。而可以得其義矣。亦非全然不覺而能上口也。且上口會心之本。在於靜之一字。靜則心地虛明。精神流通。其於會心上口。皆易爲力。未知如何。人物性同異之說。先儒之論固不一。愚嘗妄謂人物理同而性異矣。及見朱書。亦有此說。物有五性云云。愚嘗以此問于丈席。答曰。仁者見之謂之仁。智者見之謂之智。只是此箇物事。若以人之仁。去責那物。則無是理矣。五常本非五性之逐位分屬者。而夫婦長幼。皆當屬禮。然必欲分屬。則禮有序秩底意。智有分別。底意。長幼有序。似當屬禮。夫婦有別。似當屬智。未知如何。 인자(仁者)가……없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권12 〈답정계방(答鄭季方)〉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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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문【인석】에게 답함 答趙景文【寅錫】 칩거를 자신의 분수로 삼아 서신만이 오랜 벗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노쇠함이 더욱 심해져 이마저 종종 걸렀으니 사우(士友)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좌하(座下)께서 특별히 잘못을 따지지 않는 의리52)를 진념하여 이렇게 먼저 은혜를 내리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을 뒤이어 곧바로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명령(榠欞) 나무53)가 늙지 않듯 양친께서 모두 평안하시고 화기애애하며 공경이 넘쳐 길상(吉祥)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을 알았습니다. 명운이 순조롭고 신이 좋은 복을 내려 주었으니, 천도(天道)는 인자(仁者)를 돕지 않는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창가에 놓인 책상이 고요하고 연구는 날로 깊어지며 광채가 은은히 드러나 명성이 성대하니 여풍(餘風)을 바라보면 사람이 마음을 기울이게 합니다. 의림(義林)의 천한 운명은 외롭고 고달프기만 하니 처지가 가련합니다. 이전부터 해왔던 보잘것없는 학업도 흩어지고 사라져버려 선천(先天)의 그림자가 있는 듯 없는 듯 아득한 것과 같을 뿐입니다. 지리멸렬한 결과가 참으로 합당합니다. 다만 벗들이 서신을 왕래하면서 이따금 저를 독서인(讀書人)으로 기대하시고 후생(後生)의 젊은이 한둘이 간혹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는 듯함을 보니, 이것이 어찌 꿈에서라도 저에게 견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스스로 물러나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좌하(座下)의 성실하고 충직한 풍도는 이미 익히 탄복하는 바이건만, 도리어 오늘의 서한에서는 이렇게 실정에 맞지 않고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십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어지러운 세상은 대국이 끝나가는 바둑판 같아서 정세를 예측하기 어렵고, 평소의 옛 벗들에게만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호남의 귀퉁이와 영남의 구석에서 보잘것없는 처지로 지내면서 눈앞의 시용(時用)에 절실한 모든 환락과 근심, 크고 작은 의리를 일체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 채 제쳐 두고 도모하지 않고 있습니다. 궁벽하게 살면서 길게 탄식할 때마다 끝없는 비통함만 절실할 뿐입니다. 존당(尊堂)의 수진운(壽辰韻 회갑 축하시)은 과연 잊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문득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벗 사이에 서로를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체로 이 몸은 본래 자질이 아둔하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기험(崎險)이 겹겹이 닥쳐 온갖 어지러운 일이 밖에서 공격하고 갖은 근심이 안에서 들끓고 있습니다. 일상을 겪으면서 열에서 여덟, 아홉을 잊고 있다가 먼 지방에 있는 어진 덕행을 지닌 친구의 소중한 부탁도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별지(別紙)는, 이같이 어리석은 식견으로 어찌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만 이택(麗澤)의 의리54)로 볼 때 강론과 연마의 방도가 없을 수 없기에 이에 감히 조목마다 채워 보냅니다. 회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自分貞蟄。惟是書墨一路。爲知舊相面。而年歲以來。衰索轉甚。亦不免種種廢闕。而得罪於士友者。多矣。豈謂座下特軫不較之義。而有此先施之惠哉。感感之餘。旋愧其不足承當也。因審春幃具慶。榠欞不老。怡愉洞屬吉祥湊臻。好氣數好福力。孰謂天道之不祐仁也。窓几涔寂。硏究日深。潛昭闇章。聲光藉藉。瞻言餘風。令人馳神。義林窮獨賤命。情景可憐。至於平昔之所謂區區爲業者。亦且渙散頹落。如先天影子之茫然有無耳。滅裂之報。固其所也。而但見知舊往復。種種以讀書人期待之。後生少年。或不無一二過從有若請敎者。然此豈夢寐可況者乎。竊欲引身避却而不可得也竊惟座下直諒忠慤之風。已所稔服。而乃於今日之書。亦爲此浮實過當之語乃爾耶。愧汗悚悚。不知攸答。嗚呼。缺界殘枰風色叵測。而所可聊賴者。惟是平素知舊人而已。然而零零落落於湖之隅嶺之角。凡百歡戚。大小義理。有切於目前時用者。一切置之而不問。捨之而不講。每窮居長吁。只切不盡之悲而已。尊堂壽辰韻。果忘之矣。因仍推待之頃。不知不覺。遽至於此。此豈友朋相向之道耶。大抵此身。素以鈍溯之質。至於近歲奇險層至。而百撓攻其外千慮盪其中。日用經過。十忘八九以。至遠外賢朋珍重之托。亦不免尋常遺却。愧死愧死。別紙以若謏見。何敢容喙。而麗澤之義。不容無講磨之方。玆以逐條塡去。幸回敎之爲望。 잘못을……의리 《논어》 〈태백(泰伯)〉에서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사람에게 묻고, 풍부하면서 풍부하지 않은 사람에게 물으며, 가졌는데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차 있는데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지난날 내 친구가 실천한 바 있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較,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고 한 증자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명령(榠欞) 나무 명령(冥靈)이라고도 한다. 오래 산다는 남국(南國)의 나무 이름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고 하였다. 이택(麗澤)의 의리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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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을 격려하며 勉諸生 큰 바다 동쪽이 얼마나 많이 요란한가 幾多擾攘大洋東괴이타 영웅 남아가 세상에 비었는가 却怪英男世界空원컨대 참 실력을 갖춘 청년들 얻어서 願得靑年眞實力순박한 삼대581)의 기풍을 만회하려네 挽回三代朴淳風굳센 국화처럼 서리 능멸하다 꺾일지언정 寧同勁菊凌霜折시든 단풍 되어 비친 해에 붉지 않으리라 不作殘楓照日紅경물을 보고 시절을 느끼니 무엇을 줄꼬 觸物感時何以贈푸른 산 중의 이 밤을 잊지 말아야하리 莫忘此夜碧山中 幾多擾攘大洋東, 却怪英男世界空.願得靑年眞實力, 挽回三代朴淳風.寧同勁菊凌霜折, 不作殘楓照日紅.觸物感時何以贈, 莫忘此夜碧山中. 삼대(三代) 고대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이르는 말로, 정치와 교육이 가장 융성했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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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濟州安行五【達三】 此逢眞有數。年貌倍生顔。別後相思月。漢挐萬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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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만종서사에 자정이 방문하다 翼日 萬宗書社 子貞見訪 북창의 맑은 바람이 율리의 뜰 같아서 牕北淸風似栗園때로 꿈에 헌원의 세상에 온 듯하다네239) 時將一夢到軒轅짙푸른 천 봉우리 색 유독 사랑스러운데 蒼蒼獨愛千峯色시끄럽게 떠드는 온갖 새들 가증스럽네 喙喙生憎百鳥喧흥을 타고 영해의 달 아래 서로 만나니 乘興相逢瀛海月어제 초강에 술 붓던 일로 마음 상하네 傷心昨酹楚江樽육주에 비릿한 비240)가 얼마나 내렸는가 六洲腥雨知多少이 누각에서는 그 비 흔적도 걷혔구나 也向斯樓却斂痕 牕北淸風似栗園, 時將一夢到軒轅.蒼蒼獨愛千峯色, 喙喙生憎百鳥喧.乘興相逢瀛海月, 傷心昨酹楚江樽.六洲腥雨知多少, 也向斯樓却斂痕. 북창의 …… 듯하다네 만종서사를 율리에 빗대서 말한 것이다. '율리(栗里)'는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연명(陶淵明)의 고향이다. 도연명이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서 "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다가 서늘한 바람이 잠시 불면, 스스로 희황 시대 이전의 사람이라 여기곤 한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하였다. '헌원(軒轅)'은 삼황(三皇)으로 불리는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를 말한다. 육주에 비릿한 비 '육주(六洲)'는 세계의 육대주(六大洲)로 온 세상을 의미한다. 비릿한 비는 오랑캐들이 몰려든 것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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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에서 제군에게 작별하며 주다 以承齋 贈別諸君 간밤에 내리던 강가의 빗소리 막 그쳤는데 江上初收宿雨聲서생들이 먼 길을 돌아가니 홀연 놀란다네 忽驚書客遠歸程어젯밤 밝은 달이 마음을 함께 비추었는데 前宵明月心同照남국의 가을 바람은 또 한을 생기게 하네 南國秋風恨又生배움은 반드시 탁마해야 진보함을 깨닫고 學必琢磨應覺進뜻이 법도에 부끄러우면 평안할 수 없네 志慙模範未能平흰 구름을 애오라지 가져다 줄만하니400) 白雲聊可相持贈무심한 듯해도 더욱 정이 있어서라네 也是無心更有情 江上初收宿雨聲, 忽驚書客遠歸程.前宵明月心同照, 南國秋風恨又生.學必琢磨應覺進, 志慙模範未能平.白雲聊可相持贈, 也是無心更有情. 흰 …… 줄만하니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의 시 〈조문산중하소유부시이답(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에 "산중에는 무엇이 있는가, 봉우리 위에 흰 구름이 많다네. 하지만 나 혼자만 즐길 수 있을 뿐, 임금님께는 부칠 길이 없다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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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 다음날 밤에 重陽翌夜 교교한 달이 하얀 비단 같고 皎皎月如素곱디고운 국화는 황금 같네 姸姸菊似金느긋하여 일 하나도 없으니 悠然無一事맑은 감상에 내 마음 흐뭇해 淸賞愜吾心 皎皎月如素, 姸姸菊似金.悠然無一事, 淸賞愜吾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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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윤【국조】에게 답함 答安景允【國祚】 편지를 통해 한번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또한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것에 버금하니, 그 위로되고 속시원함을 무엇에 비유하겠습니까. 이어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지내는 것이 즐겁고 화목하며 정황이 더욱 다복해짐을 알았습니다. 열흘 동안 강학을 위해 모였으니 학업에 날로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일상적인 보통의 마음과 힘으로 의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환안(還安)96)'이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이안(移安)했을 때에도 일찍이 알린 바가 없었으니 지금도 역시 고하는 말이 있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미 간략하게 하는 쪽을 따랐으므로 그대로 하는 것이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다'97)라고 하셨는데 반드시 법복을 먼저 말하고 다음으로 법언(法言)을 말한 뒤에 덕행을 말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그 법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법언을 말한 뒤에야 덕행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복을 입지 않고 법언을 말하지 않고서 그저 선왕의 덕행만을 행하고자 한다면 이른바 덕행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리(事理)의 순서와 언어의 맥락이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만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을 말하면서 몸에 간직한 바【所藏乎身】를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몸이 나라와 천하의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구(章句)에, '몸이 닦여지면 집을 가르칠 수 있다.【身修則家可敎矣】'는 것의 '신(身)'자는, 또한 원문(原文)의 '몸에 간직한 것【所藏乎身】'의 '신(身)' 자에 근본합니다. 書中一面。亦對面之亞也。慰豁何喩。仍審侍旁怡愉。候節增祉。結旬講聚。居業日就。此豈尋常心力所可議到哉。還安云云。以鄙意則移安時。曾無所告。則今亦不必有告辭。蓋旣以從簡。則因以如之。似乎可矣。非先王之法服云云。必先言法服。次言法言而後。言德行何。蓋服其法服。言其法言然後。德行可見。若不服法服。不言法言。而徒然欲行先王之德行。則所謂德行者。果何物耶。是其事理次第。言語脈絡。有不得不然。未知得否。是。言治國而言所藏乎身。便見身爲國天下之本也。章句身修則家可敎矣之身字。亦本於原文所藏乎身之身字也。然。 환안(還安)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던 신주를 제자리로 도로 모시는 것을 말한다.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다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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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지46)에게 답함 答吳永之 이전 편지에서 보내주신 문목(問目)은 참으로 천열(淺劣)한 제가 감히 입을 놀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만, 이택(麗澤)의 뜻47)에 있어서는 각각 자신의 견해를 말씀드려서 바른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략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보내오신 편지를 읽어보니 도리어 용납하여주시고 논박하면서 바로잡는 말씀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비설(鄙說)48)에 특별히 잘못된 부분이 없었던 것인지요? 비록 있더라도 차마 직언(直言)으로 공격하고 배척하지 못한 것인지요? 지금 하문하신 여러 조목(條目) 역시 감히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으니 부디 전일처럼 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제1단은 '의(義)와 짝하여 의(義)를 모은다【配義集義】'49)라고 하였으니, 대략적인 뜻이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의(義)와 도(道)에 짝한다는 것은 체(體)와 용(用)을 모두 들어서 말한 것이고 의(義)를 모은다는 것은 단지 공력을 들여야 할 부분【用功處】으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용(用)은 공부할 부분이 있고 체(體)는 공부할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어의(語意)가 두루 온전하지 못하고 공부에 누설되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체(體)와 용(用)에 비록 틈이 있더라도 어떻게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공부할 것이 없는 것이 공부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또 의(義)가 주가 되고 기(氣)가 주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의(義)를 모으는 것은 주가 되는 점으로 말하자면 의(義)이고, 의(義)에 짝하는 것은 주가 되는 점으로 말하자면 기(氣)입니다. 어떻습니까? 제2단의 '물망(勿忘)'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일삼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라.【必有事焉而勿正】'50)라고 했는데 대체로 규모와 의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心勿忘勿助長】'는 것은 친절(親切)하게 공부할 부분입니다. 이 1단은 본래 의(義)를 모으기 위해 말한 것인데 또한 이 마음의 존주처(存主處)로서 매우 절실하고 긴요합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께서는,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라는 것은,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鳶飛魚躍】'는 것과 같은 뜻이다. 더욱 체인(體認)하고 궁행(躬行)한 뒤에야 그 말의 뜻이 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시험 삼아 한 그루의 꽃나무를 보면, 생리(生理)가 두루 흐르고 조금도 쉼이 없는 것을 마음속으로 잊지 않는 것【勿忘】이라고 합니다. 털끝만 한 급박함과 억지스러움, 그리고 인위(人爲)를 받아들임도 없는 것을 억지로 조장하지 않는 것【勿助】이라고 합니다. 성인(聖人)이 덕(德)으로 들어가는 신묘함을 열어서 보여준 것이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말의 병통과 마음의 잃음을【言之病心之失】 보내주신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간(肝)에 속하고 귀는 콩팥【腎】에 속하는데 간과 신장이 조화를 잃으면 귀와 눈에 병이 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50묘(畝)의 땅에는 공전(公田)이 5묘이고, 70묘의 땅에는 공전이 7묘이며 100묘에는 공전이 10묘가 됩니다. 그리고 다만 여사(廬舍)에는 10묘, 14묘, 20묘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10의 세금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어진 자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부자는 어질지 않다는 것은,51) 대략 세운 뜻의 방향성을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부자들이 모두 어질지 않고, 어진 자들은 전부 부자가 아니라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규전(圭田)52) 역시 공전(公田)으로 백성들 사이에 있는 것인데 경(卿)․대부(大夫)의 제사에 쓰이는 경비를 대기 위해서 어떻게 세금을 다시 거둘 수 있겠습니까? 여부(餘夫)의 밭은 자력(自力)으로 경작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세금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진 사람이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직책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포괄하는 직책이 매우 넓은 것이고, 갑병(甲兵)과 전곡(錢穀)처럼 각각 하나의 직책이 있는 것과는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위와 직책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지, 지위가 있으면 반드시 직책이 없어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만 축내는 것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어진 자는 반드시 능력이 있지만, 능력 있는 자가 반드시 어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맹공작(孟公綽)53)과 같은 자는 어질지만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리(義理)의 성(性)은 좋은 도리(道理)이고 기질(氣質)의 성은 좋지 않은 도리라고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약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미 태어난 것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성(性)으로 부를 수 있으며, 이미 태어나면 어떠한 선(善)이 갖추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성선(性善) 두 글자는 1서 7편(一書七篇)54)의 강령(綱領)이니 어찌 다만 지언(知言), 양기(養氣)55)만을 일컫는 것이겠습니까? 계선(繼善)56)이라는 것은 비록 공자의 학설이지만 그저 조화(造化)가 발육(發育)하는 측면을 가지고 말하였기 때문에 성선(性善)의 설은 맹자(孟子)에게서 처음으로 나와 밝히지 못했던 의리를 확장하였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 조목의【條】 중요한 핵심에 대해서는 저같이 우매한 자가 감히 논할 바가 아니나, 저의 억측으로 논변하였으니 어찌 오류가 없음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더욱 깊이 생각하여 사실에 부합하는 논의를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前書問目。固知非淺劣所敢容喙。而其在麗澤之義。不可不各陳已見。俾歸於正。故略有云云。今讀來書。倒蒙領可而無一言駁正處。未知鄙說別無差失歟。雖有之而不忍直言攻斥耶。今於俯詢諸條。又不敢緘黙如此。幸加一一訂砭。勿似前日之爲。如何。第一段配義集義之云。大意固然。然配義與道。是統擧體用而言。集義特以用功處而言。若曰用則有做工夫處。體則無做工夫處。則語意不圓全。功夫有滲漏矣。體與用雖有間。而豈可謂專無工夫耶。所謂無工夫處是工夫者。此也。且云義爲主。氣爲主者。亦未安。當曰集義是所主而言者。義也。配義是所主而言者。氣也。如何。第二段勿忘云云。亦然。必有事焉而勿正。是大體規模。意思當如此。心勿忘勿助長。是親切下功夫處也。此一段本爲集義語。而亦於此心存主處。極爲要切。是故程子曰。勿忘勿助。與鳶飛魚躍底意同。更加體認躬行然後。方知斯言之有味也。試以一株花木觀之。生理周流。無少停息者。是勿忘也。無一毫急迫强排容其人爲者。是勿助也。此是聖人開示入德之妙。莫切於此矣。言之病。心之失。來示得矣。比如目屬肝。耳屬腎。肝腎失和。則耳目受病也。五十畝則公田爲五畝。七十畝則公田爲七畝。百畝則公田爲十畝。而但廬舍有十畝十四畝二十畝之分。故合於十一之稅耳。爲仁不富。爲富不仁。槪以立心向背言之。豈有富皆不仁。仁皆不富之理耶。圭田亦是公田之在民間者。以供鄕大夫祭祀之用。有何更征耶。餘夫之田。以其自力耕作者。則其有征必矣。賢者在位。能者在職。如三公論道經邦所包甚廣。非如甲兵錢穀。各有一職之比也。故以位與職分言之。非謂位必無職而尸位素餐也。賢必有能。能不必有賢。然如孟公綽者。可謂賢而不可謂能也。義理之性。是好底道理。氣質之性。是不好底道理。此言誠是。若以未生已生分言之。則不可未生何性之可名。而已生何善之不具。性善二字。此是一書七篇之綱領。豈特知言養氣之謂歟。繼善雖是孔子之說。而只就造化發育處言。故謂以性善爲始出於孟子。而擴所未發耳。諸條肯綮。有非愚昧昕敢上下者。而臆說取辨。安知保無疪纇。更加細思。以示稱停之論。如何。 오영지(吳永之) 오영지의 이름은 장섭(長燮)이다.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崔益鉉)의 문집에 오장섭에게 답하는 편지가 남아있어 이들 사이의 교유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택(麗澤)의 뜻 이택(麗澤)은 친구 사이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학문을 강습한다는 의미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는 이것으로 붕우 사이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다. 비설(鄙說) 자신의 학설에 대한 겸칭이다. 의(義)와 짝하여 의(義)를 모은다【配義集義】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속성을 말한 부분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의 속성은 의(義)와 도(道)에 짝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난다. 의는 어느 날 갑자기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허전함이 있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게 된다.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則餒矣.】"라고 하였다. 반드시……기대하지 말라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온 구절로,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일로 삼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는 내용이 있다. 어진 자는 …… 않다는 것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부자는 어질지 않고, 어진 자는 부자가 되지 못한다.【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라는 말이 양호(陽虎)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규전(圭田) 고대에 국가에서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가 제사를 지내는 데 소요되는 경비에 쓰도록 나누어 준 전지(田地)를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경(卿) 이하는 반드시 규전(圭田)이 있는데, 규전의 면적은 50무(畝)이다."라고 하였는데, 조기(趙岐)의 주에 "고대에 경으로부터 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규전 50무를 받았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는 경비를 제공하는 것이다. 규(圭)는 정결하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맹공작(孟公綽)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이다. 청렴하고 욕심이 적었지만 재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공자가 "맹공작이 조씨와 위씨의 가신(家臣)의 우두머리가 되기에는 넉넉하지만 등나라와 설나라의 대부가 될 수는 없다.【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라고 하였다. 1서 7편(一書七篇) 《맹자》를 가리킨다. 《맹자》는 원래 7편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한(後漢)의 조기(趙岐)가 주석을 달고, 매 편을 각각 상하(上下)로 나누어 총 14편으로 만들었다. 지언(知言), 양기(養氣) 모두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언(知言)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진의를 잘 파악하는 것이다. 양기(養氣)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양기(養氣)로써, 밖으로부터 의가 들어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행실을 쌓아 자신의 마음에 아무 부끄러움이 없는 충만함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계선(繼善)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한 번 음(陰)이 되고 한 번 양(陽)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일음일양(一陰一陽)을 계속하여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것이 선이고, 사물이 생겨나면서 갖추고 있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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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영에게 답함 答洪文寧 아득히 헤어져 만나지 못한지 얼마인가요. 애타는 심정이 너무나 간절하여 잠깐의 틈도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시성(侍省)하는 상황은 절서마다【連序】 왕성하신지요? 가르치는 데 몸이 매여 있더라도 또한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이익을 취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 뵙고자 하지만 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몸이【鼎器】84) 망가져서 한가지를 얻으면 그대로 잃어버려서 전혀 바뀌지 않는 데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슬픔이 밀려와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어보신 권경(權經)에 대한 설은 철저하게 연구한 정밀함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권(權)과 경(經)은 단지 하나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程子)의 말씀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둘로 보고 하나라고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자(朱子)의 말씀이 아니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라고만 보고, 둘이라고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두 설(說)이 서로 연관되어 그 뜻이 갖추어지게 되니 정자의 설이 잘못되었고 주자의 설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자는 경(經)을 이미 정해진 권(權)이라고 하였고, 권(權)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경(經)이라고 하였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다시 평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릇 권(權)과 경(經)은 진실로 분수(分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경이어야 할 때는 경이고, 마땅히 권이어야 할 때는 권인 것입니다. 또 일찍이 경이 아님이 없는 것이고, 또한 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對)로 말하자면 권은 스스로 권이고, 경은 스스로 권입니다. 단언(單言)하면 권은 경이 되기도 하고 경은 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의 두 가지 설을 문득 그 사이에서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경은 일정하게 획정한 것이고 권은 대상의 경중을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두가지 사물로 보신 것입니까? 자세히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蒼莽葦刀。貽阻幾時。耿耿懷逞。無間晷刻。未審侍省候節。連序茂謐。絆身斅學。亦不無相長取益之方。爲之瞻溯。不在願聞。義林昇器敝漏。隨得隨失。其爲不移之歸決矣。撫念悲悼曷以云喩俯詢權經之說足見硏窮之密然愚意以爲權與經。只是一而二而一者也。非程子之言。則人見其爲二。而不見其爲一。非朱子之言。則人見其爲一。而不見其爲二。二說相須。其義乃備。不可以程子之說爲失。而朱子之說爲得也。朱子所謂經是已定之權。權是未定之經者。已是十分明白。無容更評夫權與經。固有分數。然當經而經。當權而權。亦未嘗不是經。又不可不謂之權也。是故。對言則權自權。經自經。單言則權便是經。經便是權。不當將程朱兩說。而輒可取舍於其間也。且來諭以爲經是一定畵定。權是稱物輕重。則此果二物乎。細思之如何。 몸이【鼎器】 원문의 '정기(鼎器)'는 원래 단약(丹藥)을 고아내는 솥인데, 여기서는 육신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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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그믐날 六月晦日 한 기운이 무궁하여 사방381)으로 퍼지고 一氣無窮遍四遊저 물처럼 흘러가는 것382)을 탄식하네 却歎逝者若斯流일년도 절반이 되어 세 달 여름 지났고 半分周歲經三夏내일 아침이 되면 또 초가을이로구나 纔到明朝又早秋일천 나뭇잎들 우수수 시들어 지고 颯颯凋來千樹葉몇 사람의 머리가 성성한 백발될까 星星白盡幾人頭봄이 가면 상심 많다고 누가 말했나 誰云春去多怊悵부질없이 이제야 배나 슬피 깨닫네 懸覺如今一倍悲 一氣無窮遍四遊, 却歎逝者若斯流.半分周歲經三夏, 纔到明朝又早秋.颯颯凋來千樹葉, 星星白盡幾人頭.誰云春去多怊悵, 懸覺如今一倍悲. 사방 원문의 '사유(四游)'로 사방의 끝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대지와 별이 사계절에 따라 동서남북 4극(極)으로 옮겨 다닌다고 믿었다. 《禮記 月令 注》 저 …… 것을 공자가 물가에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도체(道體)의 유행(流行)이 흐르는 물처럼 다함이 없는 것을 느껴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하였다. 《論語 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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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한성부 판관 김공 묘지명 通訓大夫漢城府判官金公墓誌銘 공의 휘는 성준(成俊), 자는 시응(時應), 호는 금계(錦溪)이다. 김씨(金氏)의 본관은 광산(光山)인데, 신라(新羅) 왕자 휘 흥광(興光)이 지파(支派)의 시조가 된다. 이로부터 12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모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휘 류(流)에 이르러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덕룡(德龍)은 대사헌을 지냈으며 휘 신좌(信佐)는 공조 판서를 지냈고, 효충(孝忠)은 관직이 홍문관 응교를 지냈는데, 모두 본조에 들어온 이후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치섬(致銛)인데, 진사이고, 증조는 휘 철(轍)인데, 생원이다. 조부는 휘 정언(廷彦)인데, 생원이고, 부친은 휘 홍(洪)인데, 첨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생원 이학(李鶴)의 따님이다. 명종 임자년(1552, 명종7)에 나주(羅州) 장원도(壯元洞)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성격이 조용하고 풍도가 고결하여 많은 사람 속에서 운학(雲鶴)처럼 무리와 견주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물건 파는 놀이를 하였는데, 어른이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 맹자(孟子)가 이 놀이를 할 적에 학궁(學宮)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아마 장돌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어찌 맹자가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듣고 개연히 물리치고 더이상 장난하지 않고 마침내 책을 가지고 서당에 나아가 날마다 수업을 받았다. 영특한 자질로 더욱 독실하게 노력하고 계속하여 매진하니 문장이 넉넉하고 시원하여 훌륭하다는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병자년(1576, 선조9)에 문과에 급제하고 갑술년(1574, 선조7)에 주서(主書)에 제수되었다.32) 정축년(1577, 선조10)에 외직으로 나가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이 되었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청렴하고 신중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공의 중씨(仲氏) 좌랑공(佐郞公)이 일찍이 연이어 당화(黨禍)를 입어 제명에 죽지 못하였기에 공이 늘 통한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당론이 성행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않으니, 공이 스스로 과거의 일을 깊이 교훈으로 삼고는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날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으로 삼았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등나무 덩굴 비추던 달빛 사랑스러우니 愛藤蘿月아름다운 자태 옛 모습 드러내네. 娟舊面開남은 생 얼마나 될까 生能幾許시절의 경물 재촉하지 말라. 時物莫相崔하였으니, 여기에서 그의 뜻을 알 수 있다.어버이를 섬기는 효성에 있어서는 간병(看病)할 적에 지극히 근심 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이 절도를 넘었으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출사하여 군주를 섬길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주저하거나 구차한 마음이 있지 않았다. 기미를 보고 용기있게 결단하여 바닷가 산골 마을 고요한 곳으로 멀리 떠나 성내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그럭저럭 지내면서 한평생을 마쳤다. 일관된 의리와 출처의 절도는 먼 후대에서도 늠름하게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갖게 할 것이다.경신년(1620, 광해군12) 10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주의 세동(細洞) 왼쪽 산기슭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수(鄭琇)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극윤(克潤)으로 훈련원 주부이고, 차남은 방윤(邦潤)으로 통정대부이다. 딸은 원윤(裵元胤)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위(煒), 차자의 아들은 오규(五圭), 중규(重圭),신규(信圭), 환규(桓圭), 참의(參議)에 추증된 만규(萬圭)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0세손 영하(永夏)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같이 명을 짓는다.은미함도 알고 드러남도 아는 것 知微知彰고인도 어렵게 여겼네. 古人所難벼슬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投緩還山가난한 생활을 즐거워하였네. 樂我瓢簞등나무 덩굴 비추던 달빛 藤蘿之月호해의 기개가 있는 벗일세. 湖海之友시와 술로 날을 보냈으니 文酒日夕그 풍류와 운치 상상할 수 있네. 風韻可想 公諱成俊。字時應。號錦溪。金氏本光山人。新羅王子諱興光爲分系之祖。自此至十二世。在麗朝。皆官平章事。至諱流。官監察御史。諱德龍。官大司憲。諱信佐。官工曹判書。諱孝忠。官弘文應敎。皆入我朝以後顯祖也。高祖諱致銛進士。曾祖諱轍生員。祖諱廷彦生員。考諱洪僉中樞。妣完山李氏生員鶴女。明宗任子生公于羅州之壯元洞舊第。性氣恬靜。風儀高潔在稠人中。如雲鶴之在難群。幼而與群兒戱爲沽衒。長老責之曰。昔孟子作此戱。若非學宮之敎。幾不免爲市賈之人。何以爲孟子乎。公聞之慨然。絶不復戱。遂挾冊就塾。日受其業。以穎悟之資。加篤實之力。接續征邁。贍富宏暢。令聞令望。藉藉一時。丙子擢文科。甲戌除注書。丁丑出爲江華府經歷。壬午入爲漢城府判官。所至皆以淸謹見稱。公仲氏佐郞公。嘗連累於黨禍。未得考終。公常痛恨之。至是黨論盛行。朝家不靖。公深自懲毖。遂棄官歸鄕。杜門斂迹。日以文酒自娛。嘗有詩曰。可愛薦蘿月。娟娟舊面開。餘生能幾許。時物莫相催。此可以見其志矣。事親至孝。侍疾致憂。夜不解帶。執喪哀戚過節。見者釀涕。出身事君。一於誠信。未嘗有依違苟且之意。及其見幾勇決。而遐擧遠引於海山閒寂之濱。不慍不悶。聊以卒歲。其終始之義。出處之節。百世之下。凜凜然令人起敬。庚申十月十三日卒。葬羅之細洞左麓子坐原。配河東鄭氏琇女。生二男一女。男長克潤。訓鍊主簿。次邦潤。連政。女適裵元胤。長房孫煒。二房孫五圭重圭信圭桓圭萬圭。贈參議。曾玄以下不錄。十世孫永夏抱家狀來。謁誌墓之文。銘曰。知微知彰。古人所難。投緩還山。樂我瓢簞。藤蘿之月。湖海之友。文酒日夕。風韻可想。 병자년에……제수되었다 원문에는 '丙子擢文科甲戌除主書'로 되어 있다. 문맥에 근거할 때 병자와 갑술의 간지가 바뀐 듯하다. 갑술년에 급제하고, 병자년에 주서가 된 듯하나, 일단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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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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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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憶秋旅【金大源】 秋旅今何去。超然謝俗群。論經多入室。弄筆足張軍。棄似功名屣。看同富貴雲。生前無限癖。地下倘修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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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日同亨魯兄允性兄晉一甫。會金谷精舍。敍懷拈韻。共發一笑。 行年三十七。自顧蕪靈臺。九仞高還遠。半途去復回。別時慘臘柳。到日綻寒梅。此會知難忘。共傳望月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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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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翊日旣望臨分。結約暮春者往遊芙蓉菴。 春入全多事。勝遊不負心。樽仍酬酌醉。筒遞往來吟。紛綠時難得。老蒼日轉深。蓉山曾有思。休惜踏層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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