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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 김공397) 병주 을 애도하다 悼危齋金公【炳周】 성수산398) 속에는 저문 연기 자욱한데 聖壽山中鎻暮煙어찌 기미성 타고399) 갑자기 승천하셨나 胡然箕騎遽升天전념하여 추환400)처럼 학문을 즐겼으며 專心嗜學如芻豢기운 떨쳐 새매처럼 삿된 무리 공격했네401) 奮氣攻邪若隼鸇지금 세상에 다시는 진실한 선비 없으나 今世更無眞實士후세 사람들은 응당 성명을 전해야 하리 後人應有姓名傳공 생각에 시국 상심한 눈물이 더 나와 思公添發傷時淚뜻을 부친 애사를 모두 펴지 못하겠네 寄意哀詞未盡宣 聖壽山中鎻暮烟, 胡然箕騎遽升天?專心嗜學如芻豢, 奮氣攻邪若隼鸇.今世更無眞實士, 後人應有姓名傳.思公添發傷時淚, 寄意哀詞未盡宣. 위재(危齋) 김공(金公) 김병주(金炳周, 1869~1936)를 말한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위재이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으로 알려졌다. 저서에 《위재유고(危齋遺稿)》 7권 2책이 있다. 성수산(聖壽山)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에 있는 높이 876m의 산이다. 기미성(箕尾星) 타고 현인(賢人)의 죽음을 뜻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은 도를 터득하고서 무정을 도와 천하를 모두 소유하게 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동유성을 타고 기성과 미성을 몰아 열성과 나란히 있게 되었다.〔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 騎箕尾而比於列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추환(芻豢) 추는 초식(草食) 가축이고 환은 잡식(雜食) 가축으로,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와 의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나보다 먼저 알았다. 그러므로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새매처럼……공격했네 충성스럽고 용감한 자가 간악한 무리를 처벌해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그 임금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를 보면 처벌하였는데, 마치 매와 새매가 새와 제비를 쫓는 듯이 하였다.〔見無禮於其君者, 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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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앉아서 2수 夜坐【二首】 휘영청 밝은 달이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素月揚輝上碧峯들쑥날쑥 대와 잣나무는 그림자가 겹겹이네 參差竹柏影重重먼 길손은 일어나는 향수를 금할 수 없고 難禁遠客鄕愁動서동이 어떻게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겠는가 怎遣書童睡意濃지친 새처럼 높이 날아갈 생각 끊어졌고 絶意高飛同倦鳥신룡을 배워 편안히 수양할 마음 두었네392) 存心穩養學神龍외론 회포와 맑은 경치가 서로 어울린 곳에서 孤懷淸景相將處새벽종 울릴 때까지 홀로 난간 가에 앉았네 獨坐欄頭到曉鍾공자가 즐겼던 도는 정히 능하기 어려우니 宣尼樂道定難能연래에 팔 베고 눕는 것393)에 익숙할 뿐이네 但慣年來枕曲肱이미 몸을 초개처럼 가볍게 보았으나 已視身家輕似芥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하지는 못하였네 不將心地冷爲氷빈산의 나그네 심사는 외로운 달을 맞았고 空山旅思當孤月시장에 널린 새 바람은 일만 등불에 빛나네 列市新風耀萬燈또 다시 우리 유문은 갈 만한 곳이 없으니 亦復儒門無可往얼마나 많이 휘감긴 등 넝쿨을 보게 될까 幾多纏繞見蘿藤 素月揚輝上碧峯, 參差竹柏影重重.難禁遠客鄕愁動, 怎遣書童睡意濃?絶意高飛同倦鳥, 存心穩養學神龍.孤懷淸景相將處, 獨坐欄頭到曉鍾.宣尼樂道定難能, 但慣年來枕曲肱.已視身家輕似芥, 不將心地冷爲氷.空山旅思當孤月, 列市新風耀萬燈.亦復儒門無可往, 幾多纏繞見蘿藤? 신룡(神龍)을……두었네 초야에 은거할 마음을 먹었다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자벌레가 몸을 굽혀 움츠리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함이요, 용과 뱀이 숨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함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라는 말이 나온다. 팔……것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도를 누리는 즐거움을 말한다. 공자가 《논어》 〈술이(述而)〉에서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나니, 떳떳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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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 부호군 부군 행장 先考副護軍府君行狀 부군(府君)의 휘는 제현(濟玄), 자는 명서(命瑞)이다. 정씨(鄭氏)의 관향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에 이르렀으니,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두 현조(顯祖)이다. 증조의 휘는 이도(履道), 조부의 휘는 채(埰), 선고(先考)의 휘는 가석(加錫), 선비(先妣)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계해년(1803, 순조3) 5월 6일에 강진(康津) 월산(月山)의 우거하던 집에서 부군을 낳았다. 을해년(1815, 순조15)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현(縣)의 구상리(九祥里)에 우거하였다. 신사년(1821, 순조21)에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맞아들였으니, 춘채(春采)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무자년(1828, 순조28)에 어버이의 명으로 능주(綾州) 망방산(望防山)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소요를 피하여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경인년(1830, 순조30)에 주(州)의 대덕동(大德洞)으로 이사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34)에 이씨(李氏)가 졸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에 다시 진원 박씨(珍原朴氏) 치성(致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5)의 후손이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847, 헌종13)에 백씨(伯氏)와 계씨(季氏)가 강진(康津)에서 주(州)의 묵계리(墨溪里)로 와서 우거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에 대덕동(大德洞)에서 품평리(品坪里)로 이사하였다. 정묘년(1867, 고종4)에 묵계리로 이사하였으니, 백씨, 계씨와 함께 만년에 서로 의지하면서 지낼 계획이었다. 무진년(1868, 고종5)에 불초 소생을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백씨(伯氏)가 졸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에 박씨(朴氏)의 상을 당했다. 신사년(1881, 고종18)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부직(付職)되었다. 계미년(1883, 고종20) 2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4월 2일에 묵계리 화수치(火手峙) 미향(未向)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부군은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여 매우 지극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남과 담소를 나누는 경우가 적었고, 일을 만나면 꾸밈이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한가롭게 상량(商量)하는 일이 적었고, 박에 나가서는 한가롭게 벗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았다. 무릇 세간의 바둑, 술자리, 질펀하게 노는 오락에는 한 번이라도 눈길을 둔 적이 없었고, 경박하고 괴이하며 남을 속이거나 허황된 말에는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으며, 이익을 꾀하고 영화를 탐하거나 아첨하고 청탁하는 자리에는 일찍이 한발 자국도 나아간 적이 없었다. 중년에 한번 한양에 가서 성곽, 궁궐, 산천 지리, 인물 풍속을 두루 보고 돌아왔다. 어버이를 떠나 밖에 거처한 적이 있는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빠뜨리지 않고 부모님을 뵈었다.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백씨(伯氏)를 또한 어버이처럼 섬겼다. 만년에 한마을에서 세 형제가 함께 살았는데 나이가 모두 80세였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데도 함께 자고 마주 앉아 종일토록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생업이 있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비가 되어 끝내 내세울 만한 공이 없고, 농부가 되어 끝내 의뢰할 만한 재물이 없다면 이는 기물(棄物)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매우 독실하게 자식을 가르쳐 일찍이 다른 일로 학업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면서 종일 부지런하여 일찍이 나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또한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내는 때가 없었다. 불초 소생이 매번 아침 문안을 여쭐 적에 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지 누워 계신 것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선친께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자 하여 매우 일찍 갔지만 이미 엄연히 일어나 앉아 계셨으니, 4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하루라도 늦게 일어나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평생 각고의 노력으로 분발하고 진작하였기에 가계(家計)를 수립하여 가운(家運)이 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첫째 아들은 한룡(翰龍)이고,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인데 재주가 매우 영특하여 크게 될 가망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오직 불초 소생만 남아 있는데 지금 노년이 된 나이에 낡은 습관을 따르고 나태하여 당시 아버지께서 바라던 뜻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이 한 몸의 죄를 천지간에 어찌 용납하겠는가.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죄송스럽다. 바라건대, 세상의 군자는 혹 가련하게 여겨서 그 자식이 불초하다는 이유로 그 아버지의 훌륭한 명성까지 폐하지 않기를 실로 바라 마지않는다. 府君諱濟玄。字命瑞。鄭氏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其鼻祖也。七傳至諱態官弘文應敎。是生諱應奎。官節度使。是生諱演。副司直贈戶曹判書。皆其顯祖也。曾祖諱履道。祖諱埰。考諱加錫。妣光山李氏德光女。以純廟癸亥五月六日。生府君于康津月山寓舍。乙亥丁內艱。丙子僑寓顯之九祥里。辛巳聘夫人全州李氏春采女。孝寧大君補后。戊子以親命寓居綾州望防山中。蓋避擾先着也。庚寅移州之大德洞。甲午李氏卒。乙未繼娶珍原朴氏致聖女。葦南熙中后。甲辰丁外艱。丁未伯氏季氏自康津來寓州之墨溪里。丙辰自大德洞移品坪里。丁卯移墨溪。從伯季爲晩年相依計也。戊辰命不肖受業于蘆沙奇先生之門。丙子伯氏卒。丁丑朴氏喪。辛巳壽陞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癸未二月二十五日考終。享年八十一。四月二日葬于墨溪之火手峙負未之原。嗚乎。府君天性至孝。生長艱難。備經百故。而盡心盡力。備極忠養。立心忠慤。持身勤儉。與人罕笑語。遇事無表襮。居家少閒商量。處世少閒追逐。非其力不食。非其義不顧。凡世間局戱酒致曠蕩流連之娛。未嘗一寓目焉。浮靡乖僻欺誣狂誕之說。未嘗一傾耳焉。聲利繁華趨附造請之地。未嘗一濡跡焉。中年一赴漢師。周見城郭宮室山川道里風土人物而歸。嘗離親寓外。雖相距迃遠。每月朔月望。省覲無闕。有新味。未嘗先食。親歿後。事伯氏。亦如之。晩年同住一巷三昆季。年皆八十。華顔白髮。連床對榻。終日竟夕。笑語怡怡。嘗言人貴有業。業貴有成。爲士而終無可述之功。爲農而終無可賴之資。則是棄物也。是以敎子甚篤。未嘗以他業間之。平居夙興夜寐。終日孜孜。未嘗有懈怠之色。亦未嘗有暇豫之時。不肖每晨省。常見其坐而未見其臥。一日欲先府君起。早早而往。已儼然起坐矣。在膝下四十年。未嘗見其有一朝之晏起也。平生刻勵勤苦。抖擻拮据。至於樹立家計。家運不競。一男翰龍三男祥林。才性通曉。不無可望。而皆至夭折。惟不肖是在。年紀暮大。因循荒怠。未副當日一分之志。此身罪戾。天地安容。痛死痛死。惟世之君子。或爲之哀憐。不以其子之不肖而倂廢其親之令名歟。實有望焉。 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박첨(朴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홍서(朴洪瑞)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박온(朴溫)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海東筆苑》에 오를 정도로 명필이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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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집》86) 부록의 서문 晩羲集附錄序 정씨(程氏)는 중앙에서 활동하고, 영중(瑩仲)은 남동부에서 생장하여 서로의 거리가 먼데도 오히려 〈책심문(責沈文)〉을 지어 자신을 꾸짖었는데87), 나는 같은 고을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한 번도 만희(晩羲) 선생의 문하로 나아가 뵙지 못했으니, 만약 형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찌 단지 자신을 꾸짖었을 뿐이겠는가.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가 바로 내가 성동(成童 15세)이 될 무렵이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에 선생의 이름을 알았고, 장난치며 뛰어다녔을 때에 선생에 대한 풍문을 들어서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할 뿐만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하며 질병이 많아서 평소의 생활을 답습한 채 세월만 보내고 말았으니, 어찌 삼성(參星)과 진성(軫星)88)처럼 서로 마주하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을 줄 알았겠는가. 그러나 큰 종은 두드림이 끝나도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소리는 여전히 멀리 퍼지고, 사방을 비추는 촛불은 불이 꺼져도 심지에 남아 있는 불빛은 여전히 오래 탄다. 마을의 장로와 당시 문하에 있던 선비들을 따라 좇으면서 선생께서 주신 가르침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매우 얕겠는가.선생의 족손(族孫)인 재경(在慶)이 유고를 편집하고 목판에 새겨 간행하니, 이는 진실로 사림(士林)의 다행스런 일이다. 내가 변변찮은 식견으로 진실로 감히 이 일에 참여하여 들을 수 없지만, 평소의 뜻으로 헤아려보건대 또 한마디 말을 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程氏作於中土。瑩仲生長東南。相去遠矣。而猶作責沈文以自訟焉。義林居在同鄕。一未造謁於晩羲先生之門。若以瑩仲視之。則豈但自訟而已哉。嗚呼。先生卽世之日。卽義林成童左右歲也。孩提知名。遊戱聞風。不啻充然于中。而稚弱多疾。居常因循。豈知參軫不相待。蕪鴻不相及。有若是哉。然洪鍾罷叩。遺音尙遠。旁燭斂照餘輝猶久。其所以從逐於鄕里長老當日及門士。而受先生之賜。又豈淺淺哉。先生族孫在慶。編輯遺稿。鋟繡棗梨。誠士林之幸也。余以無狀。固不敢與聞於斯役。而揆以平素之意。又不可無一言以志慕仰之誠云爾。 만희집부록 《만희집(晩羲集)》은 화순 능주 출신의 조선 후기 학자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문집이고, 부록은 저자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12권, 부록 2권, 합 14권 6책이다. 1895년에 후손 재경(在慶)이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과 이건창(李建昌)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성대영(成大永)·안철환(安澈煥)·재경 등의 발문이 있다. 정씨(程氏)는……꾸짖었는데 정씨(程氏)는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程顥)로, 낙양(洛陽) 사람이고, 영중(瑩仲)은 북송의 유학자인 진관(陳瓘, 1057~1122)으로, 사현(沙縣) 사람이다. 진영중이 당대의 대학자인 명도(明道) 정호를 몰라보고 범순부(范淳夫)에게 물은 일을 부끄럽게 여겨, 공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라서 자로에게 물은 초나라 섭현의 심저량(沈諸梁)의 고사에 견주어 자신을 책하는 내용의 〈책심문((責沈文)〉을 지었다고 한다. 《書言故事》 삼성(參星)과 진성(軫星) 28수(宿) 가운데 하나로, 삼성은 서방에 있고, 진성은 남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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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1) 行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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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 통정대부 부군 행장 祖考通政大夫府君行狀 공의 휘는 가석(加錫), 자는 유경(裕卿), 또 다른 휘는 언복(彦福), 자는 자구(自求)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가 있었는데,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의 5대손 가운데 휘 만철(萬喆)이 있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는 유(瑜)이고, 조부는 이도(履道)이고, 선고(先考)는 채(埰)이며, 선비(先妣)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이택(爾宅)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영조(英祖)) 갑신년(1764, 영조40) 11월 8일에 낭주(朗州)의 우거하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황씨(長水黃氏) 익채(翼采)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가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에게 장가들었지만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다. 다시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중년에 낭주(朗州)에서 금릉(金陵)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정미년(1787, 정조11)에 부친상을 당했고, 무신년(178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객지에 떠돌아다녀 외롭고 고달픈 몸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자신의 신세가 몹시 처량하여 길을 가다가 눈물을 흘렸다. 공은 질박하고 성실하여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람을 응대하며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이라도 꾸미거나 자랑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성품이 부지런하며 농사일에 힘을 다하였고, 권세와 이익, 화려한 명성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자손을 가르치고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릴 적에 일을 분담시키고 맡겼으며1)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워서 성공하기를 책면(策免)하였다. 집안의 많은 어려움을 만나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 성현의 모훈(謨訓)과 고금의 사적에 대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히 살펴보아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부인 이씨(李氏)는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인의 도덕과 규범에 대해서 빠뜨림이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7월 11일에 이씨가 졸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 9월 27일에 공이 졸하니, 향년 81세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성산(星山)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어시랑(御侍郞) 안산(案山)의 인좌(寅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모두 3남 1녀를 두었으니 이씨의 소생이다. 첫째 아들은 제철(濟哲)이고, 차례로 제현(濟玄)과 제일(濟馹)이며, 딸은 황상현(黃祥顯)에게 시집갔다. 장방(長旁)의 아들은 종림(宗林)·창림(昌林)·동림(東林)·희림(熙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의 아들은 의림(義林)이고, 딸은 안모(安模)·이병성(李秉誠)·이광무(李光茂)·김장석(金章錫)·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삼방(三旁)의 아들은 항림(恒林)이고, 딸은 김규원(金奎源)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손자 정의림(鄭義林)은 삼가 기술한다. 公諱加錫。字裕卿。一諱彦福。字自求。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爲鼻祖。七傳有諱態。弘文應敎。是生諱應奎。節度使。是生諱演。贈戶曹判書。判書五世有諱萬喆。卽公之高祖也。曾祖瑜。祖履道。考埰。妣天安全氏爾宅女。英宗甲申十一月八日。生公于朗州寓第。娶長水黃氏翼采女。系娶金海金氏。皆無育。系娶光山李氏德光女。中年自朗州寓居金陵地。丁未丁外艱。戊申丁內艱。流離客土。孤苦無依。其情景懇惻。行路涕零。公質實誠慤。行已酬人。接物處事。未嘗有一毫修飾表襮底意。生長艱難。性勤稼穡。而於勢利聲華。泊如也。敎子孫御家衆。分之以職。授之以事。而嚴立課程。責其成功。遭家多難。辛勤來歸。而於聖賢謨訓。古今事迹。隨暇考閱。以博其義理之趣。夫人李氏溫仁勤儉。閫範無闕。乙亥七月十一日李氏卒。甲辰九月二十七日公卒。享年八十一。壽陞通政。葬星山。移窆于陵州御侍郞案山負寅之原。擧三男一女。李氏出也。長濟哲。次濟玄濟馹。女黃祥顯。長旁男宗林昌林東林熙林。女郭宗協尹滋升。次旁男義林。女安模李秉誠李光茂金章錫洪承命。三旁男恒林。女金奎源。曾孫以下不錄。孫義林謹述。 맡겼으며 일을 맡긴다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주관하는 일과 비상시의 일을 말한다. 《常變通攷 卷3 居家雜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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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 부호군 부군 행장 伯父副護軍府君行狀 우리 선대는 해양(海陽 해남(海南)에서 금수(錦水)2)의 남쪽에 세거하였다. 절도공(節度公) 휘 응규(應奎)에 이르러 한양(漢陽)에 우거하였다. 절도공으로부터 판서공(判書公) 휘 연(演), 사복공(司僕公) 휘 창문(昌門)을 지나 하남공(下南公) 휘 찬(纘)에 이르러 한양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수의 남쪽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다. 하남공으로부터 장사랑공(將仕郞公) 휘 시한(時罕), 남은공(南隱公) 휘 경통(璥通), 선랑공(善郞公) 휘 만철(萬喆), 학생공(學生公) 휘 유(瑜)·휘 이도(履道)를 지나 휘 채(埰)에 이르러 금수 남쪽에서 낭주(郞州)로 이사하였다. 통정공(通政公) 휘 가석(加錫)에 이르러 또 금릉현(錦陵縣)으로 이사하였다. 정종(正宗) 기미년(1799, 정조23) 3월 29일에 금릉현의 월산(月山) 우사(寓舍)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제철(濟哲), 자는 윤서(允瑞)이다. 천성이 낙천적이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일찍 드러났다. 9세에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영특함이 남달랐다. 1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집안에 네 번의 상사가 있어 안으로는 부엌살림을 도맡아서 할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 땔나무를 하고 농사짓는 일을 모두 공이 직접 부지런히 해서 부친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부양하여 은의(恩意)가 매우 돈독하니 향리에서 모두 찬탄하고 칭찬하였다. 18세에 통정공을 모시고 같은 현(縣) 구상리(九祥里)로 이사하였다. 19세에 경주(慶州) 이씨(李氏) 아무개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이씨는 현숙(賢淑)하여 시부모 및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섬김에 매우 은의가 있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술년(1826, 순조26)에 이씨가 졸하자 정해년(1827, 순조27)에 김해 김씨(金海金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복상을 마치고 능주(綾州) 묵계리(墨溪里)에 우거하였다. 기유년(1849, 헌종15)에 장자 종림(宗林)이 죽었다. 경술년(1850, 철종1)에 김씨가 졸하자 일가족이라곤 4세 된 아이와 20세에 과부가 된 며느리뿐이었으니, 객지에서 외롭고 곤궁한 정경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당시 공의 나이는 이미 51세였는데, 며느리 양씨(梁氏)가 후손이 미약한 것을 염려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자, 공이 거절하지 못하고 임자년(1852, 철종3)에 조양 임씨(兆陽林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병자년(1876, 고종13) 8월 6일에 졸하니, 부친의 묘소 계단 아래 장사 지내고 이씨, 김씨를 합장하였다. 공은 체상(體相)이 단아하였고, 풍도(風度)가 훤칠하고 의젓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남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화목한 정은 친척에게 흡족하게 젖었고, 화락한 기풍은 향리에 두루 퍼졌다. 선을 보면 자신에게서 나온 것같이 하고, 악을 보면 자신의 병인 것처럼 하였다. 온화하고 화순한 자태는 늘 봄바람의 온화한 기상과 같았고, 의리와 사정(邪正)을 판단할 때는 목소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는 점이 있었다. 가난한 형편에서 성장하여 몹시 근검절약하였다. 무릇 화려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고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집안 살림이 부족한지 알지 못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요역(徭役)이 있으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하였다. 경사나 상사, 병문안하거나 조문할 적에는 반드시 제때에 맞추었다. 멀리 떨어진 묘소에 성묘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사방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쇠해지자 자질(子姪)로 하여금 수시로 대신 행하게 하였다. 동규(洞規)를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향리에 살면서 만든 규약3)을 모방하였고, 문안(門案)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통합한 의리4)를 따라서 행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는 친척은 친분이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혼인을 주선하여 가계를 꾸리게 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손님과 벗이 찾아올 때면 번번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매우 환대하였다. 백발에 소년 같은 고운 얼굴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으니, 그 기상과 풍채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여 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씨는 1남 2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김씨는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종림(宗林), 창림(昌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 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임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니, 동림(東林), 희림(熙林)이고, 딸은 이항무(李恒茂)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지 200여 년이다. 게다가 타향에서 떠돌면서 살 곳을 잃어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집안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백부(先伯父)께서 평상시 길이 탄식하면서 매양 문호를 세울 계책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권계한 점이다. 백부께서 돌아가신 뒤에 몇 년 되지 않아 사상(死殤)이 잇따라 외롭고 쓸쓸함이 배로 더해졌다. 게다가 독서하는 가풍이 이로 인하여 사라져 조금의 성취도 없었으니, 이 어찌 선백부가 아이들에게 바란 것이겠는가. 선백부의 간절한 뜻을 생각하고 가문이 날로 쇠락해지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고 위축된다. 아, 우리 선백부의 감추어진 광채와 숨은 덕을 누가 수습하여 드러내서 명주(明珠)와 진완(珍玩 진귀한 기호물(嗜好物))이 푸른 바다 모래사장에 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惟我先世。自海陽。世居錦南。至節度公諱應奎。僑寓漢中。自節度公。歷判書公諱演。司僕公諱昌門。至下南公諱纘。自漢中。挈還錦南舊庄。自下南公。歷將仕郞公諱時罕。南隱公諱璥通。善郞公諱萬喆。學生公諱瑜。諱履道。至諱埰。自錦南。移寓郞州。至通政公諱加錫。又移金陵縣。以正宗己未三月二十九日。生公于縣之月山寓舍。諱濟哲。字允瑞。天稟樂易。夙著孝友。九歲就學。穎悟異常。十七歲丁內艱。是時家有四喪。內無主饋。外無執役。炊爨裁線之節。漁樵耕牧之務。無不躬親勤勞以適親體撫養諸弟。恩意甚篤。鄕里莫不嗟異。十八陪通政公。移于同縣九祥里。十九聘慶州李氏某女。李氏賢淑。事舅姑及小郞小姑。極有恩意。家有疾病。輒涕泣廢食。丙戌李氏卒。丁亥系娶金海金氏某女。甲辰丁外艱。服闋。寓居綾州墨溪里。己酉哭長子宗林。庚戌金氏卒。一家百口。只是四歲孩兒與二十歲寡子婦而已。客土孤苦。情景難狀。時公年已望六。子婦梁氏憂嗣續之微。勸之續絃。公不能拒。壬子系娶兆陽林氏某女。壽陞通政大夫副護軍。丙子八月六日卒。葬于考墓階下。李氏金氏合祔。公體相端粹。風度軒雅。立心忠慤。接物和裕。雍睦之情。洽於親戚。愷悌之風。遍於鄕閭。見善如己出。見惡如己病。溫溫愉愉。常如春風和氣。而於義理邪正之際。未嘗不聲氣嚴厲。確然有不可拔者。生長窮約。偏愛儉素。凡華麗之物。不入於家。而於施恤之節。不知家力之不足。公私徭役。必先於人。憂樂問唁。必趁其時。遠處墳墓。省掃無闕。四方知舊。存訊不替。及其衰老。使子姪隨時替行焉。立洞規以倣呂氏居鄕之約。立門案以修程子合族之義。族戚之無依者。分雖疎遠。必爲之昏娶。俾立家計者。十餘人。賓朋至。輒置酒而盡歡。紅顔白髮。言笑款款。其氣象風彩。令人可愛而不可忘。李氏生一子二女。皆夭。金氏生二子二女。子宗林昌林女郭宗協尹滋升。林氏生二子一女。東林熙林。女李恒茂。孫以下不錄。嗚乎。吾家零替二百餘年。加以轉泊失所。不自支存。此先伯父所以平居長歎。而每以門戶之計爲諸兒勉勉處也。伯父歿後。未幾年。死殤相繼。一倍孤弱。且讀書之業。因以汨沒。無有一就。此豈先伯父所望於諸兒者耶。念先志之懇惻。視家戶之日非。不覺哽塞而氣縮。嗚乎。我先伯父潛光隱德。誰能收拾而揄揚之。毋使明珠珍玩。淪落於滄海沙礫之間也耶。 금수(錦水)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과 장동면에서 시작되는 탐진강(耽津江)의 지류인 금강(錦江)을 이른다. 여씨(呂氏)가……규약 송(宋)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고 있던 여대균(呂大鈞)이 제정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이른다. 문중과 향리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약으로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서로 사귐에는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등의 조목을 정하였다. 정자(程子)가……의리 정자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가법(家法)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족인(族人)을 통합해야 한다. 옛사람에게는 화수회(花樹會)가 있었는데, 위씨(韋氏) 집 안의 종회법(宗會法)을 취할 만하다.[程子曰: '凡人家法,須月爲一會,以合族. 古人有花樹,韋家宗會法,可取也.']" 하였다. 《近思錄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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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오【규환】에게 보냄 與梁文吾【奎煥】 이장(李丈)에게 나아가 뵙고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안부가 강녕(康寧)하시다는 걸 들어 우러러 그립던 마음에 실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자신을 얽어맨 것을 벗어 버리고 문을 걸어 닫고 주변을 깨끗이 치우셨으니 참으로 우리 형께서 큰일을 하려는 뜻을 품으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 성대한 기세는 장차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근래 《삼국지(三國志)》를 소중히 하신다고 하던데, 특별하고 괴이하며 꺼리는 바가 없는 술수에 탐닉하여 좋아하고 아끼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력이 미쳐서 득실을 따져서 궁리(窮理)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려고 하시기 때문입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라면 이것은 완물 상지(玩物喪志)14)이고 귀로 듣자마자 입으로 말하는 천박한 학문이며, 나중에 말씀드린 대로라면 또한 초학자의 역량이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모두가 우리 형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독서에는 본래 순서가 있습니다.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책과 같은 신심(身心)과 일용(日用)에 절실한 것을 우선 읽어서 명백하고 평이하며 더할 수 없이 가깝고 더할 수 없이 절실한 바탕에 근거하여 지키는 것이 있도록 한 다음에 세무(世務)를 처리하고 인물을 헤아려 바로잡을 수 있게 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손대어 귀착하는 곳이 없기보다는 책 하나에 정밀함을 다하여 한 치 한 자만큼이라도 진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주자께서 "잡서를 보지 말라. 정신이 분산될까 두렵다."15)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이릅니다. 아우도 바로 이 병에 걸려 부질없이 일생을 허비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뒤미쳐 생각하더라도 걱정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완할 계책이 없어 억지로 들은 얘기를 읊어 삼가 우리 형에게 아룁니다. 혹시 광망하다고 여겨 배척하지는 않으실까요. 卽拜李丈。詢叩省候康寧。實慰瞻耿。今年擺脫絆已。杜門掃却。固知吾兄有大有爲之志。而其所沛然。將有不家禦者矣。但近所尊閣。在於三國志云。以其耽於奇偉縱橫之術。而愛玩不置耶。將以餘力及之。而商略得失以爲窮理之一助耶。如前所云。則是玩物喪志。口耳之學也。如後所云。則又非初學力量所可及處。皆非所望於吾兄者。夫讀書固有次第。先其切於身心日用如孔孟程朱之書。使明白平易至近至切之地。有所據守而後。可以經理世務。商訂人物爲未晩也。與其汎濫閒汨。而無所歸宿。曷若致精一書。得寸得尺之爲有進步處也。朱子曰。勿觀雜書。恐分精力。正謂此也。弟正坐此病。亦未免枉過一生。追念耿耿。塡補無計。聊誦所聞。謹爲吾兄陳之。或不爲狂妄而斥之耶。 완물 상지(玩物喪志) 작은 기예에 탐닉한 나머지 원대한 뜻을 잃는 것을 말한다. 송유(宋儒) 사양좌(謝良佐)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며 박학다식한 것을 자부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잘 외우고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다.【以記誦博識, 爲玩物喪志.】"고 경계한 말이 《정씨유서(程氏遺書)》 3권에 수록되어 있다. 잡서를……두렵다 《회암집(晦庵集)》 권39 〈여위응중(與魏應仲)〉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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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부에게 적어 보이다 書示尹仁夫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첫 번째 절도(節度)이다. 학문과 공부만 그러할 뿐만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것을 만들어내더라도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면서 공을 이룰 수 있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것이 맹자(孟子)가 선을 실천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해서 모두 "닭이 울면 일어난다."120)라고 말한 까닭이다.책(冊)을 마주하면 반드시 단정하고 장중하며 바른 자세로 조용히 앉아 몸을 구부리지 않고 마음을 놓치지 않으며, 보고 또 보아서 그 내용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는 듯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그 뜻이 마치 자기의 생각을 내놓는 듯하며, 반드시 욕심을 부려서 많이 알려고 힘쓰다가 소홀히 하여 서투르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앉거나 서는 것은 반드시 공경 장엄(恭敬莊嚴)하며 한쪽으로 기울거나 태만하지 말아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말수가 적으며 성급하고 경솔한 말을 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반드시 온순함과 공경스러움을 다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오만하고 고집스럽거나 상대를 꺾으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고, 터럭만큼이라도 아첨하며 따르려는 의도가 있어서도 안 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의리(義理)의 가부를 보아야 하고 이해(利害)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그것을 위해 진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이처럼 거듭하여 하루하루 쌓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이치와 익숙해져서 근거로 삼아 힘을 얻을 곳이 있게 된다. 그러나 "요(堯)는 어떤 사람이고 순(舜)은 어떤 사람인가?", "저 사람이 장부이면 나도 장부이다."121)라는 마음을 북돋아 분발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떠맡겠다는 뜻이 없다면, 앞의 저 말들 또한 억지로 안배(安排)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기름으로 그린 그림이고 얼음에 새긴 조각처럼 곧 사라질 뿐이다. 어찌 나의 소유라고 여기고 더불어 형이상(形而上)을 말할122) 수 있겠는가.윤군 인보(尹君仁夫)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데 요체가 될만한 말 한마디를 청하였다. 내가 어리석어 지닌 것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직 선현(先賢)들이 이미 한 말을 열거하여 그 마음에 답한다. 인보(仁夫)는 특별히 주의해 주기 바란다. 夙興夜寐。此是日用行己第一節度。不惟學問功夫爲然。雖小小生産作業。未有早寐晏起而能有成者。此孟子於爲善爲利。皆以雞鳴而起。言之也。對冊務要端莊。靜坐不撓體不放心。看來看去。使其辭如誦已言。思來思去。使其義如出己意。切不可貪多務廣。忽略鹵莽也。坐立務要恭莊。不可傾倚怠慢。言語務要簡黙。不可躁妄諠譁。接人務要和敬兩盡。不可一毫有傲頑忮克之心。不可一毫有阿附媚宛之意。處事當見其義理可否。不當問其利害多少而爲之前却也。如是積累。日去日來。自然心與理熟。而有得力可據之地矣。然不有堯何人舜何人。彼丈夫我丈夫。激勵振拔。抵死擔當之志。則彼所云爲。亦不過勉强安排。旋消旋滅。如脂之畵。氷之鏤而已。曷足以爲吾有而與之語上哉。尹君仁夫請一言爲日用顧諟之要。余悾悾無所有。惟是擧先賢已成底說話。以塞其意。願仁夫加意焉。 모두……일어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힘쓰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요,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고 싶은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이익을 탐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요(堯)는……사람인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성간이 제 경공에게 이르기를 '저들도 장부이며 나도 장부이니 내 어찌 저 성현들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안연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으며, 공명의가 말하기를 '주공이 문왕은 내 스승이다고 하였는데, 주공이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더불어……말할 《논어》 〈옹야(雍也)〉에 "중인 이상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 있지만, 중인 이하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런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가 없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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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우에게 써서 주다 書贈安景禹 학자(學者)는 우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매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단정하고 의젓하며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천리를 기르며150) 빈객을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체득하여 조금씩 쌓아가 세월이 깊어지면 눈앞의 사물은 이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고귀함을 비유할 수 없고 만종(萬鍾)의 녹봉으로도 부유함을 견주지 못하며 천하의 모든 사물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이로써 큰일을 처리하고 커다란 변고(變故)에 임하면 장차 그 기세가 패연(沛然)하여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하게 될 것이다.151)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상황에서 출현한다."152)라는 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늙도록 무지(無知)한 처지라 감당하지 못하여 부끄럽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또 그냥 그만둘 수가 없다. 삼가 일상생활에 절실한 학문의 절도(節度)를 적어 주어 이를 대신한다. 學者先須識得天理人欲之分。十分明白。養之於端莊靜一之中。體之於酬酢云爲之際。銖累寸積。日人月深。則眼前物事。無非此箇道理。不以三公而喩其貴。不以萬鍾而較其富。至於擧天下之物而無以尙之。以之處大事臨大變。將沛然而行其所無事矣。所謂眞正大英雄。自戰戰兢兢中出來者。豈欺我哉。白首倥倥。愧無以承當。而撫念事契。又不可以但已。謹述學問節度切於日用者。以塞之。 단정하고……기르며 주자의 《대학혹문》에 "단정하고 의젓하고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이 마음을 보존하여 리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할 때에 이 리를 궁구하여 마음을 다하는 공부를 지극하게 한다.[存此心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竆此理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工.]"라는 내용이 있다. 일삼는……것이다 맹자가 "지혜를 미워하는 것은 천착하기 때문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하듯이 한다면 지혜를 미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한 것은 일삼는 바가 없이 자연의 형세에 따른 것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또한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한다면 지혜가 또한 클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진정한……출현한다 《회암집(晦庵集)》 권36 〈답진동보(答陳同甫)〉에 다음과 같은 주자의 말이 보인다. 이를 축약한 것이다. "참으로 정대한 영웅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이라도 조심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眞正大英雄人. 然此一種英雄, 却是從戰戰兢兢, 臨深履薄處, 做將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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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용의 자에 대한 설 安子容字說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말과 행동은 군자의 추기(樞機)이다."155)라고 하였다. 또 "말과 행동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도구이다."156)라고 하였다. 성현의 수많은 말은 비록 담긴 뜻이 다르고 과조(課條)도 가닥이 많지만, 요컨대 말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일을 벗어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참된 뜻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먼저 문사(文辭)를 닦아야 하고 인(仁)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하니, 이 두 가지 일에서 공부의 선후를 또 알 수 있을 것이다.안생 규삼(安生圭三)은 자(字)가 자용(子容)이다. 대체로 남용(南容)이 백규(白圭) 편을 세 번씩 되풀이했던 뜻157)을 취하여 말을 조심하는 데 매우 유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을 시작하는 시기와 덕으로 들어가는 초기에 힘써야 할 것을 알아서 핵심을 깨달은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학문을 할 때 또한 '불망어(不妄語)'에서 시작하는 경우158)가 있었는데, 부지런히 7년을 행하자 표리가 서로 호응하여 일마다 평온하였다. 자용(子容)은 날마다 이 사람을 본받아 자신의 명(名)과 자(字)를 저버리지 말기 바란다. 易曰。言行。君子之樞機。又曰。言行。君子之所以動天地。聖賢千言萬語。雖指意不同。課條多端。而要歸則不越乎言行兩端而已。然立其誠者。必先有以修其辭。求其仁者。必先有以訒其言。則於此兩端。而其工夫先後。又可知矣。安生圭三。表德子容。蓋取南容復圭之義。而深有意於謹言者也。此於爲學之初。入德之始。豈非知所務而得其要耶。古人爲學。亦有自不妄語始者。力行七年而表裏相應。隨事坦然。願子容日鑑于玆。毋負吾名與字也。 말과……추기(樞機)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말과……도구이다 《주역전의(周易傳義)》 권22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남용(南容)이……되풀이했던 뜻 《논어》 〈선진(先進)〉에 "남용이 백규의 글을 세 번씩 되풀이하여 읽거늘, 공자가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학문을…… 경우 《심경부주(心經附註)》 권2 〈성의장(誠意章)〉에 "유 충정공[유안세(劉安世)]이 사마 온공을 뵙고는 마음을 다하고 몸을 행하는 요점 중에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묻자, 공은 '성일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이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劉忠定公見溫公, 問盡心行己之要, 可以終身行之者, 公曰其誠乎! 又問行之何先, 公曰自不妄語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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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여【승우】에게 답함 答李寬汝【承愚】 적막한 타향살이에 참으로 그리움이 절실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한 폭의 서한이 훌쩍 날아와 서안에 놓였습니다. 손을 씻고 반복해서 읽자니 한 지붕 아래 한자리에 함께 있는 듯하여 이 몸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산을 나서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 과연 말씀하신 대로이니 정처 없는 인생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나 쑥대와 같습니다. 예전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명(命)'이라는 글자를 벗어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우리 관여(寬汝)처럼 친한 벗만이 지극한 정성으로 가엽게 여기고 앞뒤로 안부를 물어주시는 것이 정중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정의(情意)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텅 빈 나머지 새로운 거처의 모든 일이 괴롭고 서글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오직 귀댁에 매우 가까워 이전에 견주어 끊임없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 위안일 뿐입니다. 서울에 가신 춘부장(春府丈)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는지요? 몹시 추운 겨울에 오가는 원로(遠路)가 노년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매우 염려가 됩니다. 서석산(瑞石山) 정상과 백암(白巖)으로 가던 길 중간에 두 차례 책망을 받았다고 운운하셨는데, 말의 맥락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혹시 제가 분별없이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는지요? "사색하는 공부가 적다.……"고 한 것은 과연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좌우(左右)께서 저를 허물하지 않고 받아들여 자신의 병통으로 여기시니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말을 들으면 기뻐했던 것이 어찌 자로(子路)뿐이겠습니까.33) 대체로 좌우께서는 독실하게 지키는 일은 확실히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일이 매우 쉽지 않지만, 현자(賢者)께서 갖추시기를 기대합니다. 모쪼록 마음을 더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寄寓離索。懷想政切。謂外一幅德音。翩然賁案盥手三復。便若同堂合席。不知身之在遠也。出山入山。果如所喩。人生無根。如飛花飄蓬。前此非不知之。而豈有如今日者耶。要之。一命字出脫不得。順受之外。有何方法。惟親如我寬汝。曲垂矜憐。前後致意。不啻鄭重。此意何可忘。蕩然之餘。新寓凡百。無非辛酸。而惟以貴庄甚邇。從逐較前源源爲慰耳。春府丈洛旆。何時返次耶。嚴冬遠征。非老年可堪之事。殊切關慮。瑞石山上白巖途中。兩次受責云云。不記其語脈云何。或不至於妄發耶。小思索功夫云云。果有此說矣。左右不以爲咎。引以爲病。其受人之量。可敬可敬。聞過則喜。豈獨子路也。大抵左右篤實持守。的有餘地。此在吾儕。甚不易得。然求備之責。於賢者。幸須加意也。 자기……자로(子路)뿐이겠습니까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로는 사람들이 그에게 허물이 있음을 말해 주면 기뻐하였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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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자후에게 답함 答權子厚 전년에 두 차례 귀중(貴中 상대방이 머무는 지역)의 여러 곳으로 서한을 보냈으나 우리 형에게만 빠트렸습니다. 대체로 뵌 지가 오래되어 갑자기 자호(字號)와 지명(地名)을 잊어버렸습니다. 골똘히 생각하여도 끝내 떠오르지 않아서 함자를 적는 봉투 표면에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내 붓을 잡았다가 도로 놓는 일을 면치 못하고 겨우 순경(舜卿)에게 답한 편지로 인하여 감히 존함을 거론하고 대략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찌 10년 동안 의기가 투합했건만 하루아침에 상대를 잊어버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마음 밖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마음 안에 있는 것은 잊지 않기 때문일까요. 부끄럽습니다. 뜻하지 않게, 혜서(惠書)가 초지(草枝)에서 왔는데 대략 편지를 보낸 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시일을 끌었고 또 끝내는 지체되지 않고 전달되었을까요. 이어서 또 지난달 4일에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 인편이 있으면 소식이 없고 편지를 보내면 답장이 없던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일반적인 인정으로 헤아리자면 누가 버림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잘못을 따지는 일도 없고 망설임도 없이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더욱 근실하시니, 이처럼 보잘것없는 처지에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겠습니까. 아우는 사문(師門)께서 돌아가신 뒤 또 대곡(大谷 김평묵(金平黙))을 잃고 쓸쓸하게 지내며 어울리는 사람이 없고 오직 영남의 몇몇 군자만 멀리서 의지하면서 우러러 받들 뿐입니다. 다만 세상의 변고가 어지럽고 처지가 얽매여 있어 도를 갖춘 이에게 나아가고 덕을 지닌 이에게 묻는 날은 아득히 멀어지고 미천한 모습은 하루하루 심하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따금 동쪽을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허탈한 마음에 한숨이 납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은 부모님 상을 당하고 풍오(豐五 김현옥(金顯玉))와 순경(舜卿 김운환(金雲煥))은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였으니 모두가 간절히 그립습니다. 회옹(晦翁 주희(朱熹))이 말한 "생존하여 살아간다.31)"는 일도 오늘날 또한 매우 쉽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前年兩次修貴中諸處書。而於吾兄獨闕焉。蓋奉接之久。遽忘其表德與地名。雖著意思想。終是不起。而於封面標題處。難以下筆。故竟未免握管還停。而只因答舜卿書。敢擧尊啣。略致意焉。豈有十年受契。而一朝相忘者耶。抑所忘在外。而所不忘在內耶。愧愧。謂外惠幅自草枝來。蓋書出已三年。何其沈滯至此。而又竟不沈滯耶。繼而又拜去月初四日書。嗚呼有便無信。有書無答非止一二。揆以常情。孰不棄斥乎。然而不較不猶。施意愈勤。顧此無狀。何以得此。弟自師門逝後。又失大谷。孑然索居。無與爲徒。而遙遙倚仰。惟在於嶺中數君子而已。但世變支離。身事局束。就道問德。茫然無日。而賤狀衰徵。日深一日。有時東望。不覺曠然發喟也。艾山遭故。豊五舜卿搬移他地。俱切關情。晦翁所謂存活得過者。在今日亦甚不易。奈何。 생존하여 살아간다 《회암속집(晦庵續集》 권4 〈답저행지(答儲行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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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유인 박씨 행장 先妣孺人朴氏行狀 선비(先妣) 박씨(朴氏)의 관향은 진원(珍原)이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의 후손이다. 증조는 만열(萬烈), 조부는 귀현(貴玄), 선고(先考)는 치성(致聖), 선비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태방(泰邦)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기묘년(1819, 순조19) 장흥(長興) 갈령리(葛嶺里)에서 태어났으니, 바로 박씨의 세거지이다. 아직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던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겨우 일을 살필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사촌 언니의 손에서 자랐다. 사촌 언니는 바로 문씨(文氏)에게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된 이였다. 성품이 엄정하여 과부로 살면서 은장도를 늘 머리맡에 두었으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매우 경계하여 비록 이웃에 있는 친척이라도 일이 없으면 간 적이 없었으니, 엄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 고아가 된 나의 선비를 보고 매우 가련하게 여겨 온 정성을 바쳐 돌보고 가르쳤다. 선비는 17세에 시집왔는데 당시 선고께서는 덕동(德洞)에 우거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이 매우 서툴렀다. 선비께서 어린 나이에 가사를 책임져 온갖 일을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처리하니 살림을 맡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조금 펴졌다. 지아비를 섬길 적에는 부인의 도리를 다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는 법이 없었고 한 마디 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전 부인의 기일이 되면 성의를 다했고, 전 부인이 낳은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시집간 딸의 경우에는 비록 사위와 외손자라도 차별 없이 대하였다. 친척과 이웃 마을에 은혜를 두루 베풀어서 모두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정결하였으며, 기물은 소박하면서도 완전히 갖추었다. 해지거나 파손된 것이 있으면 즉시 보수하였다. 옷 한 벌 버선 한 컬레를 10년 동안 바꾸지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구휼할 적에는 관대하고 넉넉하게 하는 데 힘썼고 아끼거나 인색하지 않았다. 일찍이 친가에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친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고 묘를 지키게 하였는데 은애(恩愛)와 돌봄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두터웠다. 조카며느리 양씨(梁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자 매우 가련하게 생각하여 전답을 나누어 주어서 생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 겨울에 덕동(德洞)에서 품평(品坪)으로 이사하였는데, 온 마을 부녀자들이 모두 친척을 잃은 듯이 눈물을 흘리며 10리까지 따라가 한낮이 되도록 작별하지 못하였으니, 인심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자손에게 학문을 권장하기를 매우 지극하여 현숙(賢淑)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고 장난치거나 잡담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히 경계하였다.(매우 경계하고 금지하였다. "切戒禁之") 명촌(明村) 황 처사(黃處士)와 관수재(觀水齋) 박 선생(朴先生)은 모두 소자(小子)의 어릴 적 사장(師長)인데 철마다 이분들에게 문후하는 것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민속 명절이 되어 한가하게 노니는 날이면 번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한가한 날을 만났는데 어찌 아무개 어른을 찾아뵙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을 아이들을 따라 세시풍속 놀이를 할까 염려해서였다. 소자가 14세 때 과장(科場)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느질하는 도구를 사서 바치자, 선비(先妣)께서 이르기를 "행탁(行橐)에 여유가 있으면 마땅히 서책을 구입할 것이지 바느질하는 물건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으셨다. 중년 이후로 여러 차례 이사하고 자주 혼사를 치르느라 가세가 점점 기울었지만 여유가 있게 처신하였고 남에게 집안의 옹색한 형편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별도로 약간의 물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소자(小子)가 과거를 보러 가는 때나 사우(師友)를 따라 멀리 유람하러 가는 길에는 번번이 힘을 보태 권유하여 보내서 경비가 부족하여 곤란을 겪는 근심이 없게 하였다. 생활비를 다 써 버렸다고 할 때에는 못 들은 척하였으나 종이와 먹이 부족하다고 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셨다. 소자를 따라온 객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쁜 기색이 드러나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에게 타일러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게 하였다. 소자에게 손님을 만류하도록 하고 그가 떠나갈 적에는 노잣돈을 주어서 보내게 하였다. 향리(鄕里)에 조문할 곳이 있으면 반드시 부의(賻儀)를 갖추어 가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인사는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소자가 다른 곳에서 돌아오면 "어찌 늦게 돌아왔는가."라고 하시고, 사문(師門)에서 돌아오면 "어찌 빨리 왔는가."라고 하셨다. 소자가 혹시라도 집안일을 하면 반드시 대신 그 일을 하시고는 서숙(書塾)에 가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지나치게 마음을 다른 곳에 두는가."라고 하셨다. 부인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생존한 자식은 불초 소생뿐이었으니, 애정이 지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입이 짧은 것을 근심하여 생선과 육류 등의 음식을 날마다 보내주셨고, 혈기(血氣)가 허한 것을 근심하여 막걸리를 날마다 마시게 하였다. 제사가 임박하여 장차 치제(致齊)하려고 할 때면 전혀 참견하시지 않았지만 소자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의사가 있으면 통렬하게 꾸짖으셨다. 매달 초하루 참알(參謁)하는 때 혹 초하루인지 잊어버리면 번번이 알려주시어 "오늘 삭조(朔朝)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만약 손님과 함께 앉아 있어 알리기 어려울 때면 도포(道袍)를 보내어서 깨우쳐 주셨다. 소자가 처음에 두 자식들을 두었으니 상묵(尙黙)과 상돈(尙敦)이었다. 한 아이에게는 유학을 공부하게 하고 한 아이에게는 농사짓게 하고자 하니, 선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하고 부귀한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유학이나 농사와는 상관이 없다. 설령 농사지어 부유하더라도 유학을 하여 가난한 것만 못하고, 무식하여 호의호식하는 것이 유식하여 악의악식(惡衣惡食)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흉년이 들었을 때 손자들이 물고기 잡고 나물 캐는 것을 일삼자 선비께서 그들이 학문을 그만둘까 근심하여 조금 한가한 틈이 있으면 번번이 불러서 책을 읽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완전히 그만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셨다. 혹 병중(病中)이나 조석으로 일이 없을 때 아이들로 하여금 모시고 글을 읽게 하면 번번이 즐겁게 들으셨다. 늘 소자를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난하다고 하여 딴마음을 먹지 말고 오직 독서하고 자신을 단속하여 훌륭한 자손이 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죄를 짓지 말라. 죄를 지으면 남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이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너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 6월 4일에 졸하였다. 8월 27일 기유(己酉)일에 장현(章峴)에 장사 지내고, 10년 뒤 병술년(1886, 고종23) 봄에 고묵곡(古墨谷)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선비는 자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며, 규중의 위의가 정숙하여 비속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우 곤궁하고 힘들더라도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매우 노쇠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며 온화하고 양순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였으니, 옛날의 숙원(淑媛)에 견주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아, 형편없는 불초 소생은 3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일찍이 조금도 지물(志物)의 봉양6)을 한 적이 없다. 지금 또 백발이 성성한 늙은 나이인데도 끝내 이룬 것이 없으니, 불효한 죄는 만번 죽더라도 속죄할 수 없다. 오직 끊어질 듯한 실낱같은 목숨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어찌 지하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겠는가. 천지를 우러러 보고 굽어봄에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끝이 없다. 모두 3남 7녀를 두었다. 장녀는 광산(光山) 이병성(李秉誠)에게 시집갔고, 장남 한룡(翰龍)은 지행(至行)이 있었는데 8세에 요절하였다. 둘째 아들은 바로 불초 소생이다. 둘째 딸은 공주(公州) 이광무(李光茂)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청도(淸道) 김장석(金章錫)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요절하였고, 다섯째 딸은 풍산(豐山) 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으로 5세에 요절하였다. 여섯째 딸과 일곱째 딸은 요절하였다. 겨우 1남 4녀만 성장하였다. 네 딸은 시집가서 모두 조신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소문났으니, 사람들이 선비(先妣)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先妣朴氏。貫珍原。葦南熙中后。曾祖萬烈。祖貴玄。考致聖。妣仁川李氏泰邦女。以純祖己卯。生于長興葛嶺里。卽朴氏世居地也。未省事。失所恃。纔省事。失所怙。鞠於從女兄。兄卽適於文氏而早寡者也。性嚴正。其寡居。刀劒不離於寢側。門鎖藩障。極其戒勅。雖親族在比隣。非有故未嘗往之。其衛身之嚴如此。見我先妣之早孤。甚加哀矜。撫養敎誨。務盡其心。先妣年十七于歸。時先考僑寓德洞。生理甚疎。先妣以沖齡當室。凡百幹理。無異老成。行未幾年。家力稍舒。事君子甚得婦道。無一事擅爲。無一言違異。遇前室忌日。備盡誠意。撫前室所生如己出。及適人。雖婿郞外孫。待之無間。族戚隣里。恩意周徧。皆得其心。衣服儉而潔。器用質而完。有所敝缺。隨手補治。一衣一襪。十年不易。而至於周恤匱乏。務從寬厚。無所係吝。嘗恨親家無嗣。令親族一人主祀守墓。而恩愛眷恤。終始彌篤。從子婦梁氏早寡無育。甚加哀憐。分給田地。資其生計。丙辰冬。自德洞移品坪。一村婦女。莫不號泣如失親戚。追至十里。至日中而不能別。其得人心如此。敎子孫勸學甚至。而欲其親近賢淑。至於遊戱喧雜之地。切戒禁之。明村黃處士觀水齋朴先生。皆小子幼時師長也。時節問候。勉令無闕。當俗節遊閑之日。輒曰。迨此暇矣。何不往謁某丈也。蓋恐其從村兒作俗節戲也。小子十四歲。自科場還。買針線之具獻之。先妣曰。行橐有餘。當買書冊。針線之物。何關於汝。責之不已。中年以來。累度搬移。頻經昏嫁。家力至於不贍。而處之裕如。未嘗對人言窘艱之狀。別蓄若干物。每當小子赴擧之日及從師友遠遊之行。則輒助其方而勸送之。俾無拘費難行之患。至若家用告罄。若不聞焉。紙墨告乏。輒副其急。有客從小子至。必喜形于色。戒廚人善其供具。戒小子使之挽留。其發也。具行贐使送之。鄕里有問弔處。必具賻儀。命行之曰。人事不可廢也。小子自他處還則曰。何其遲也。自師門還則曰。何其速也。小子或親家務。必代執其勞。而命之書塾曰。何其外馳之過也。夫人男子三人。所存惟不肖。其慈愛可謂至矣。憂食性之短。而魚肉之羞。日以饋之憂血氣之虛。而酒醪之物。日以飮之。至於臨祭而將致齊焉。則絶不與之。小子有欲食之意。痛責之。當月朔參謁之時而或忘其爲朔日。則輒告之曰。今日非朔朝耶。若與客倂坐而難於告之。則持送道袍以喩之。小子初有二息。曰尙黙尙敦。欲令一兒業儒一兒業農。先妣曰。貧富有命。無關儒農。設令農而富。不若儒而貧。無識而美衣美食。不若有識而惡衣惡食。丙子歲饑。諸孫以漁採爲業。先妣憂其廢學。稍有暇隙。輒招而使讀之曰。如此者其不愈於全廢乎。平日好聽讀書聲。或在病中及晨昏無事之時。使兒輩侍而讀之。輒欣然聽之。嘗戒小子曰。勿以貧窶貳其志。惟讀書勅躬。無失爲佳子孫。是吾願也。又曰。罪不可作。作罪則人雖不知。天可逃乎。汝其勉之。丁丑六月四日卒。八月二十七日己酉。葬于章峴。後十年丙戌春。移葬于古墨谷巽坐原。嗚乎。先妣天姿溫仁。閫儀貞靜。口不出鄙俗之言。身不接奢麗之物。雖困苦之極而不見有怨懟之色。雖衰老之甚而不見有怠弛之氣。從容和順。婦德備摯。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嗚乎。不肖無狀。在膝下三十餘年。曾未有一分志物之養。今且白首頹齡。而迄未有成。不孝之罪。萬死莫追。惟是一縷溘然。行在不遠。而何以見慈顔於地下乎。俯仰天地。至痛罔極。擧三男七女。一女適光山李秉誠。一男翰龍。有至行。八歲而夭。二男卽不肖也。二女適公州李光茂。三女適淸道金章錫。四女夭。五女適豐山洪承命。三男祥林。五歲而夭。六女七女夭。成長僅一男四女。四女適人。皆以謹勤聞。人以爲有先妣之風焉。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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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김 상사 행장 白波金上舍行狀 내 일찍이 시골의 부로(父老)를 모시는 자리에서 우리 고을 근고의 인물의 성대함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풍의(風儀)가 수려하고 언론이 뛰어나서 활달하여 범상하지 않은 기상이 있는 분으로는 애당초 백파(白波) 김공(金公)을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휘는 재탁(再鐸), 자는 맹경(孟警), 호는 백파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휘 추(錘)의 후손이다. 고려 말에 휘 이안(履安)이란 분이 계셨는데, 판삼사(判三司)로 절개를 세웠으니, 공에게는 1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성옥(聲玉), 호는 온면당(穩眠堂)이고, 조부의 휘는 시춘(始春), 선고(先考)의 휘는 응복(應福), 선비(先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빈(彬)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10월 7일에 도장리(道莊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장난치고 노는 것이 여느 아이와 매우 달랐다. 조금 성장하여 재종제(再從弟) 앙탁(仰鐸)과 함께 스승을 찾아가 배워서 뜻을 넓히고 학업을 넓게 펼쳤다. 이 때문에 지향하는 뜻이 넓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대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교제하기를 원했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양지(養志)와 양체(養體)7)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간호할 적에 외진 바닷가나 험한 산중에서 의원을 찾고 약을 구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첩첩산중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그의 범상하지 않는 행실은 이러한 유가 많았다. 젊었을 때 남애(南厓) 정공(鄭公)에게 수업을 받았기에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어서도 매양 그 묘소에 성묘하였고, 그 아비 잃은 자식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잊지 않았다. 종족과 이웃 마을에 대해서는 애정이 두루 미쳤고 오래된 벗에 대해서는 안부를 묻는 것이 줄어들지 않았다. 향리와 학교의 사이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가 경영하고 계획한 것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온면당(穩眠堂)을 중건하여 돌아가신 분을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8)을 부쳤고, 집 곁 시냇가 바위 위에 백파정(白波亭)을 지어서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모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노니는 장소로 삼았다. 중년 이후로 산천 구경을 좋아하였다. 동복 한 명을 대동하고 나귀 한 마리를 타고 여장(旅裝)은 단출하게 하여, 가다가 기이하고 빼어난 산과 수석이 맑게 펼쳐진 전경을 만날 때마다 이리저리 거닐며 시를 읊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숙하기도 하였다. 평생 은거하였지만 명망과 실제가 더욱 융성하였으므로 여리(閭里)에서는 그 효성에 보답하고 주군(州郡)에서는 그 재주를 천거하기까지 하여 그가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년(1827, 순조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병오년(1846, 헌종12) 5월 7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71세이다. 조치(鳥峙) 방축동(防築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동완(東完)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신중하며 온유하여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처신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익(漢益), 한창(漢昌)이고, 딸은 임처상(林處相), 이인휘(李仁徽), 고시상(高時相)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지금 쇠미한 말세에 인물이 보잘것없는데 이렇게 평지에서 돌출하듯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태어난 것은 하늘의 뜻이 우연이 아닌 듯하지만 끝내 또한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공은 병오년(1846)에 돌아가시고 나는 을사년(1845, 헌종11)에 태어났다. 이는 삼성(參星)이 막 빛을 발하자 상수(商宿)가 갑자기 사라진 것과 같아서,9) 30리 한 고을에 이렇게 어질고 덕이 있는 장로가 있었지만 세상을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남아 있는 전장(田莊)을 바라봄에 직접 뵙지 못한 한스러움만 간절해진다. 공의 현손(玄孫) 홍기(弘基)가 그의 유집 2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교감해 주기를 부탁하고,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후생이 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공의 명성을 향리의 부로들에게 들었다. 지금은 향리 부로들의 얼굴과 함께 모두 보지 못하고, 오직 이 한 책을 후생이 노년이 된 날에 얻었으니, 책을 어루만지며 서글퍼서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겠다. 이에 교정하는 일을 마치고 돌려주고 또 이어서 이처럼 행장을 서술한다. 余嘗侍鄕父老。聞吾鄕近古人物之盛。而其風儀秀爽。言論英暢。有磊落不常之氣。則未始不以白波金公爲第一焉。公諱再鐸。字孟警。號白波。新羅敬順王子諱錘之後。麗末有諱履安。以判三司立節於公爲十五世也。曾祖諱聲玉。號穩眠堂。祖諱始春。考諱應福。妣全州李氏彬女。以正宗丙申十月七日。生公于道莊里。幼而嬉遊。絶異凡兒。稍長與再從弟仰鐸。負笈從師。開廣其志。展拓其業。是以抱負博洽。聲聞藹蔚。一世名碩。無不願交。天性孝順。養志養體。無不備至。其侍疾也。尋醫求藥於窮海艱險之中。其遭故也。築室侍墓於深山萬疊之中。其偉行多此類。少時受業於南厓鄭公。至老白首。每省其墓。恤其孤。眷眷不忘。於宗族隣里。恩愛周洽。故舊朋友。存訊不替。出以風議於鄕邦學校之間。其經紀條畫。多有可觀焉。重建穩眠堂以寓羹墻之慕。結白波亭於宅畔溪石上。爲延賓會友文酒遊衍之所。中年以後。好遊山水間。以一僮一驢。裝服蕭然。行遇林巒奇絶。水石淸曠。輒徘徊吟哦。或移時焉。經宿焉。平生隱淪。望實益隆。以至閭里報其孝。州郡擧其才。莫不欲其爲世用也。丁亥中進士。丙午五月七日終。享年七十一。葬鳥峙防築洞酉坐原。配全州李氏東完女。淑愼柔嘉。甚得婦道。二男三女。漢益漢昌。女林處相李仁徽高時相。孫以下不能記。嗚乎。當今衰叔。人物藐然。鍾此出夷不常之器。天意似不偶然。而終亦沈淹何耶。公歸於丙午。而余生於乙巳。參星纔出。商宿遽沒。使同鄕一舍。有此賢德長老。而未見倂世之樂。瞻言遺庄只切罔及之恨。公玄孫弘基。奉其遺集二卷。屬余校勘。且請狀德之文。嗟惟晩生。旣失公之面。而得公之聲於鄕父老。今則倂與鄕父老之面而皆失之矣。惟此一書。得於晩生垂老之日。撫卷悲愴。有不忍終辭。玆以了還校役。又從而狀述之如是云爾。 양지(養志)와 양체(養體) 양지는 어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것이고, 양체는 물질적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해 드리는 것으로,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을 국[羹]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삼성(參星)이……같아서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있고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있어서 각각 뜨고 지는 시각이 다른 관계로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다. 《春秋左氏傳 昭公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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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와 홍공 행장 竹窩洪公行狀 공의 휘는 이수(履洙), 자는 자원(子源), 호는 죽와(竹窩)이다. 홍씨(洪氏)는 관향이 풍산(豐山)이니, 직학사(直學士)인 휘 지경(之慶)을 비조(鼻祖)로 삼는다. 조선에 들어와 휘 귀(龜)인 분이 계셨는데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고조의 휘는 애(埃)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덕우(德遇)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경고(景古), 호는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이 있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천규(天奎), 호는 오은(鰲隱)이고, 선비(先妣)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통정대부 인호(仁毫)의 따님이다. 명릉(明陵) 을유년(1705, 숙종31)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성실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어버이를 섬길 적에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10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종기를 앓아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공이 주야로 울부짖으며 백방으로 치료할 방법을 상고하여 마침내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다. 오은공(鰲隱公)이 일찍이 부증(浮症)을 앓아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두꺼비 고기를 먹는 것이 가장 효험이 있다."라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눈이 쌓여 있는 때라 사방으로 구했지만 구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큰 두꺼비 한 마리가 앞에 있었다. 이것을 잡아서 돌아가 올리니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외출하였는데 갑자기 가슴이 뛰고 몸에 땀이 나기에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오은공이 위독한 병을 앓아 실낱같은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마침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어 결국 회생하게 하였으니, 남다른 행실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몸가짐은 단정하고 정중하였고 말은 간략하면서 어눌하였다. 비록 한가할 때라도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비록 위급한 상황이라도 다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득실(得失), 이해(利害), 시비(是非), 훼예(毁譽)에 이르러서는 귀를 막아 듣지 못한 듯이 하고, 담담하게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날마다 두 아우 및 종반들과 함께 한 방에서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고 수양하였는데 신망(信望)이 사방으로 퍼져 생도들이 문하에 운집하였고 붕우들이 그를 관아에 천거하였다. 임신년(1752, 영조28) 가을에 오은공의 상을 당하여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여위었고 장사 지낸 뒤에 시묘살이하느라 수척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 해 6월 14일에 여차(廬次)에서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아, 선인 군자(善人君子)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며 은거하여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하지만 남에게 미치는 이로움과 은택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향리에서 가법이 있다고 이름난 사족(士族) 가운데 홍씨(洪氏)가 그 하나인데, 후세 자손 중에 또 성대하게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많았으니 이 어찌 유래가 없는 것이겠는가. 당대에 쓰이지 못한 것은 족히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된다.배위(配位)는 함풍 이씨(咸豐李氏) 두평(斗平)의 따님으로 부원군(府院君) 언신(彦信)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있었고, 모두 2남을 두었으니, 영환(永桓)과 영표(永杓)이다. 계배(繼配)는 진주 정씨(晉州鄭氏) 통덕랑(通德郞) 최(最)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막(永漠)과 영극(永極)이고, 딸은 정혁(鄭爀)에게 시집갔다. 공의 묘소는 주(州)의 해하리(海鰕里) 병좌(丙坐) 언덕에 있다. 이씨는 합장하였고, 정씨는 묘혈 아래 사좌(巳坐)에 있다. 6대손 승환(承渙)이 그의 숙조(叔祖) 영택(永宅)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남길 글을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公諱履洙。字子源。號竹窩。洪氏系出豐山。以直學諱之慶爲鼻祖。入我朝有諱龜。中郞將。高祖諱埃。中司馬兩試。贈掌樂院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判。祖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妣仁川李氏通政仁毫女。明陵乙酉。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至性。事親無遠。十歲。母夫人患癰幾危。公晝夜號泣。百方稽效。遂吮之得愈。鰲隱公嘗患浮症彌留。醫云。用蟾肉最妙。時天寒雪積。四求不得。忽有一大蟾當前。持之以歸。病果得差。一日出遊。忽心驚體汗。卽歸家。鰲隱公方患劇疾。奄奄垂絶。乃血指注口。竟見回甦。其出人之行。多此類。儀狀端重。言語簡訥。雖燕閒之時。未嘗有怠慢之容。雖顚沛之時。未嘗有急遽之色。至於得失利害是非毁譽。充然如不聞也。泊然如不見也。日與二弟及羣從。同處一室。讀書硏理。晦養積久。孚信旁達。生徒坌集于門。朋友薦報于官。壬申秋。遭鰲隱公喪。哀毁過甚。旣葬廬墓。以羸瘠成疾。翌年六月十四日。卒于廬次。得年四十九。嗚乎。善人君子之於世也。窮居潛藏若無所爲。而其利澤之及人。有不可誣者也。吾鄕士族名有家法者。洪氏居其一焉。而後嗣子孫。又彬彬多志學之人。此豈無所自耶。其不得試於一時者。不足爲輕重也。配咸豐李氏斗平女。府院君彦信后。有婦德。擧二男。曰永桓永杓。系配晉州鄭氏通德郞最女。貞靜端淑。閨門雍睦。擧二男一女。曰永漠永極。鄭爀。公墓州之海鰕里負丙之原。李氏祔左。鄭氏祔下巳坐。六代孫承渙。以其叔祖永宅所撰家狀。來請所以立言垂後者。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據家狀而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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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 오공 행장 農隱吳公行狀 내가 약관의 나이에 집을 떠나 상서(庠序)에서 공부할 적에 우리 고을의 인물을 보니 원로와 저명한 선비가 많았는데 유독 농은(農隱) 오공(吳公)이 풍의(風儀)와 언론이 탁월하고 곧았으므로 그를 마음에 가장 흠모하였다. 이윽고 공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 수현(壽玹)이 공이 남긴 사적(事跡)을 수록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30년 전 일이 되었다. 향당(鄕黨)에서는 풍의와 언론이 더 이상 당시처럼 인물의 성대함을 보지 못했고 젊어서 배종하던 나 같은 자도 이미 늙었다. 만약 다시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명망과 자취가 더욱 사라질 것이니 어떻게 훗날의 역사가가 사실에 의거하여 훌륭함을 드러내는 바탕으로 삼겠는가. 이것이 내가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공의 휘는 지상(志祥), 자는 성심(聖心)으로, 고려(高麗) 때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을 비조로 삼는다. 문양공의 후손 가운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진 현필(賢弼)이란 분이 있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고, 휘 방한(邦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하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된 휘 진례(震禮), 증조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휘 세관(世觀), 조부는 휘 시유(始有)이다. 선고(先考)는 휘 석윤(錫胤),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련(必煉)의 따님으로, 지족당(知足堂) 박성인(朴成仁)의 6대손이다. 순묘(純廟) 병인년(1806, 순조6) 12월 6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어서 12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한편으로 곡을 하고 한편으로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기절하였다. 대인(大人)께서 건강을 손상할까 염려하여 매양 위로하고 억제하여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대인이 출타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때마다 슬픈 마음을 다 드러내었다. 계비(繼妣) 장씨(張氏)는 성품이 매우 엄격하여 거의 용납하지 못하였지만 공은 곡진하게 받들고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니, 부지런히 봉양하는 것은 지성에서 나왔다. 장씨가 끝내 기뻐하자 마치 자기가 기쁜 듯이 여겼다. 부친 병간호를 할 적에 너무나도 근심하여 대변을 맛보고 차도가 있는지를 점검하였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소생시켰다. 부친상을 당해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수척하였으며, 정성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아우 치상(致祥)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일상생활할 적에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재산과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22세 때 함안 윤씨(咸安尹氏) 범수(範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에 추증된 기견(起畎)의 후손이다. 효성스럽고 유순하며 온화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은 평소 몸가짐에 절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며 자제를 가르치고 동복(僮僕)을 부릴 적에 모두 분명하게 조리가 있었다. 이웃 마을이나 향당, 상서(庠序)나 학교의 일에 대해 명백하지 않은 것을 판단하고 폐단을 없애 한 고을의 풍기(風紀)를 세운 데는 그가 노력하여 힘쓴 공이 적지 않았다. 타고난 품성이 기개가 있고 곧아 사사로운 마음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남들도 감히 의롭지 않다고 보지 않았다. 만년에 금오산(金鰲山)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석정(石亭)에서 가족을 데리고 가서 머물렀는데, 유연히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뜻을 두어 농은(農隱)이라고 자호하였다. 갑술년(1874, 고종11)10) 3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단양(丹陽)의 덕현(德峴)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4년 뒤에 부인 윤씨(尹氏)가 졸하자 공의 묘소 오른쪽 산등성이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수현(壽玹)·수빈(壽彬)이고, 딸은 홍우명(洪祐明)·문석홍(文錫弘)에게 시집갔다. 수현의 아들은 정섭(定燮)·창섭(昌燮)이고, 딸은 이인채(李仁采)·박두현(朴斗玹)에게 시집갔다. 수빈의 아들은 남섭(南燮)이다. 아, 공의 재주와 기개가 어찌 한 고을의 인물이 될 따름이겠는가. 향당에 매양 이러한 인물이 있다면 후생이 어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으며, 향리의 풍속이 어찌 아름답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는가. 공의 행실에 대해서 비록 대략적으로도 보지 못했지만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어서 서술하여 후세에 알리게 할 자는 또한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余在弱冠出遊庠序中。見吾鄕人物。多耆舊名碩。而惟農隱吳公。風儀言論。俊偉宏直。最有欽艶於心。旣而公沒。而其遺胤壽玹。收錄遺事以請狀德之文。嗚乎。叵耐歲月。已屬三十年前事。鄕黨之間。風儀言論。非復當時人物之盛。而陪從少年如義林者。亦已老矣。若復少加日月。則聲望風蹟。益就泯然。而何以爲後史氏据實揄光之地乎。此余所以不敢牢辭者也。公諱志祥。字聖心。以麗朝文襄公諱延寵爲鼻祖。文襄之後。有賢弼封寶城君。子孫因貫焉。至我朝。有諱益孫。以學行除靖陵參奉。諱邦翰。壬亂殉節晉州。皆顯祖也。高祖贈戶曹參議諱震札。曾祖贈戶曹參判諱世觀。祖諱始有。考諱錫胤。妣咸陽朴氏必煉女。知足堂成仁六世孫。以純廟丙寅十二月六日。生公于七松里。幼有至行。年十二遭內艱。至誠哀痛。哭踊頓絶。大人慮有傷生。每慰抑之。不敢徑情。俟大人出。輒盡哀。繼妣張氏。性甚嚴。幾不見容。公委曲承順。毫忽無違。服勤就養。出於至誠。張氏竟底豫如己出。侍親癠。極其致憂。嘗糞以試差劇。血指以甦旣絶。及遭故。過於哀毁。情文備至。與弟致祥友愛甚篤。居處出入。未始相離。財産什物。有無共之。二十二聘咸安尹氏範壽女。贈領相起畎后。孝順柔嘉。其得婦道。公平居持身有度。治家有法。奉祭祀接賓朋敎子弟御僮僕。皆燦然有條。至於隣里鄕黨庠序學校之地。所以裁決疑晦刷滌弊瘼而立一方之風紀者。其力爲不少矣。天性儻直。未嘗以私干人。人亦不敢以非義見之。晩愛金鰲山水之勝。自石亭挈家往住之。悠然有終老之意。自號農隱。甲午三月二十一日考終于正寢。葬于丹陽之德峴甲坐原。後四年夫人尹氏卒。葬于公墓右岡艮坐原生二子二女。壽玹壽彬。女洪祐明文錫弘。壽玹子定燮昌燮。女李仁采朴斗玹。壽彬子南燮。嗚乎公之才局氣槪。豈惟爲一鄕人物而已。鄕黨之間。每有此等人物。則後生何患無賴。鄕俗何患不美哉。公之行。雖不槪見。而其爲創業可繼者若是。則繼而述之使之。有聞於後世者。想亦不無其人焉。 갑오년 원문은 '甲午'인데, 《松沙集》 「농은오공묘지명(農隱吳公墓誌銘)」에 근거하여 '午'를 '戌'로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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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 봉사 농은 민공 행장 訓錬院奉事農隱閔公行狀 공의 휘는 대승(大昇), 자는 승여(昇汝), 호는 농은(農隱),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묵헌(黙軒) 선생 휘 지(漬)의 후손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저명한 선비들이 즐비하였다. 휘가 회삼(懷參)이란 분에 이르러서는 호가 의암(義庵)인데, 세조(世祖)가 양위를 받자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대정현(大靜縣)으로 좌천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나서는 능주(綾州)에 은둔하였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희점(希點)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충익(忠翼)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선고(先考)의 휘는 영우(英雨)로, 병절 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선비(先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세화(世華)의 따님이다. 선묘(宣廟) 계유년(1573, 선조6)에 주(州)의 서정리(西亭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장성해서는 문사(文詞)가 특출하고 무예까지 겸비하였다. 호방하고 강개(慷慨)하였으며, 기절(氣節)과 담략(膽略)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붓을 던지고 무과로 출신하여 관직을 옮겨 훈련원 봉사(訓錬院奉事)에 올랐다. 어느 날 상이 문관과 무관에게 재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품계를 건너뛰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권귀(權貴)의 눈 밖에 나서 관직에서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서는 외부 일에 관심을 끊고 대문을 닫고 휘장을 드리운 채 옛날에 익힌 학문을 복습하고 정리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자, 우산(牛山) 안 선생 방준(安先生邦俊)과 의병을 일으켰다.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浡), 찰방(察訪) 이기발(李起浡), 순창 군수(淳昌郡守) 최온(崔蘊),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집(柳楫), 전 찰방 김선(金旋) 등이 일시에 호응하여 기한 내에 모였다. 광주(光州)의 경계에 이르러 전군(前軍)이 지체하면서 나아가지 않자, 공이 큰소리로 매우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군주가 치욕을 받으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대의(大義)이다. 나라가 이처럼 위급한데 도리어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온 군중이 숙연하였다.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당하게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차마 머리를 풀고 좌임(左袵)하는 오랑캐가 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인하여 '원컨대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곧장 누란왕을 베어 죽였으면 한다.[願將腰下劍 直爲斬樓蘭]'라는 시구11)를 읊조리며 끊임없이 혀를 차며 애석해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대문을 닫고서는 다시 출사하지 않았다. 작은 정자를 짓고 망미정(望美亭)이라고 편액하고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산수에서 노닐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지냈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 현종5) 10월 29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주(州)의 세청면(世淸面) 개선동(改善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주준(柱俊)의 따님이다. 장자는 성(誠), 차자는 간(諫)으로, 병자년(1636, 인조14)에 아버지를 모시고 의병에 나아갔다. 측실(側室)의 두 아들은 의(誼), 계(誡)이고, 딸은 이두연(李斗延)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행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마음이 잘 맞는 때를 만났지만 산관(散官)의 반열에서 배회하여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았기에 산림으로 물러나 종적을 감추고 은거한 채 평소 포부를 조금도 드러내지 못 하였으니, 식자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오직 의병을 일으킨 일로 말하면 비록 중도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늠름한 충의, 엄정하고 분명한 기율, 신속하게 호응하여 모인 것에서 평소 수양의 깊이와 신망의 중함을 알 수 있어 먼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니, 저 한때의 부침을 가지고 어찌 경중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9세손 재호(在鎬)가 가장(家狀)을 보여 주고 인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 추앙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公諱大昇。字昇汝。號農隱。驪興府院君黙軒先生諱漬后也。世襲簪纓。名碩磊落。至諱懷參。號義庵。當光廟受禪。以定順王后親屬。謫守大靜縣。及放還也。遯于綾州。子孫因居焉。於公爲高祖也。曾祖諱希點。忠順衛。祖諱忠翼。忠順衛。考諱英雨。秉節校尉。妣水原白氏世華女。以宣廟癸酉。生公于州之西亭里。幼有至行。及長文詞出夷。武藝兼至。倜儻慷慨。有氣節瞻略。屢中鄕解。見屈禮部。於是投筆。出身遷至訓錬院奉事。一日上試藝文武官。公居第一。特命超資折衝。旣而爲權貴所忤。退歸田里。掃却外事。杜門下帷。以溫理舊業。獎進後學。爲畢生計。及丙子朔警。與牛山安先生邦俊。倡起義旅。玉果縣監李興浡察訪李起浡淳昌郡守崔蘊前翰林梁曼容前察訪柳楫前察訪金旋等。一時響應。刻期赴會。至光州界。前軍遲留不進。公揚言大責曰。主辱臣死。此是大義。國之危急如此。而乃玩愒時日乎。一軍肅然。至礪山。聞和成。北向痛哭。且曰忍令吾堂堂禮義之邦。淪爲被髮左袵耶。因誦願將腰下劒直爲斬樓蘭之句。咄咄不已。還鄕杜門。不復出仕。築一小亭。扁其額曰望美。與一時名士。遊從於山水文酒之間顯宗甲辰十月二十九日終。葬州之世淸面改善洞午坐原。夫人淸州韓氏柱俊女。長子誠次子諫。丙子侍親赴義。側室二子誼誡。女李斗延。孫曾以下不能悉記。嗚乎。公以孝友之行。文武之才。當明良會遇之際。而低廻散班。位不稱德。退休林樊。斂跡潛光。使平日所抱。不少槪見。爲識者之缺望大矣。惟其擧義一事。雖未免中途左次。而其於忠義之凜烈。紀律之嚴明。應聚之敏速。可見素養之深。宿望之重。而百世之下。足令人起敬。彼一時之低昂。何足爲輕重也。九世孫在鎬示以家狀。因請狀德之文。余以鄕里後生。追仰有素。不敢辭。 원컨대……시구 이백(李白)의 〈새하곡(塞下曲)〉에 나오는 구절이다. 《李太白集 卷4》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낙청헌 처사 위공 행장 樂淸軒處士魏公行狀 공의 성은 위(魏), 휘는 형권(衡權), 자는 중지(重之), 호는 낙청헌(樂淸軒)이다. 시조의 휘는 경(鏡)으로,12) 당(唐)나라 학사(學士)로 동방에 와서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태종(太宗)을 섬겼고, 관등은 대아찬(大阿飱)이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회주(懷州)는 바로 지금의 장흥(長興)이다. 휘 창주(菖珠)에 이르러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시중(侍中)이었다.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으니, 벌열(閥閱) 가문의 찬란함은 조야(朝野)의 전적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휘 충(种)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따라 보위에 오를 때 추대한 공이 있었다. 4대를 전하여 휘 유형(由亨)에 이르러 승문원 습독(承文院 習讀)을 지냈는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제현과 벗하여 잘 지내면서 기록한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또 3대를 전하여 휘 덕화(德和)에 이르러서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고,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13)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또 4대를 전하여 휘 명덕(命德)에 이르러 병계(屛溪) 윤 선생(尹先生 윤봉구(尹鳳九))을 사사하여 문학과 품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는데 호는 잉여옹(剩餘翁)으로 유고가 세상에 전해지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사갑(師甲), 호는 부계(富溪)로, 학문은 가업을 이었으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의 휘는 수택(守澤), 호는 묵와(黙窩)로, 족숙(族叔)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매우 칭찬하여 중히 여겼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조부의 휘는 영진(榮震), 호는 송탄(松灘)으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익조(益祚), 호는 성성재(惺惺齋)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사우(士友)와 교유하였다. 몸소 실천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선비(先妣)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재규(在奎)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며 규중의 법도에 빠뜨림이 없었다. 순묘(純廟) 기유년(1819, 순조19) 9월 16일에 공을 부(府)의 북쪽 단촌(丹村)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보통사람과는 매우 달랐으니, 할아버지 송탄공(松灘公)이 늘 애지중지하여 "우리 집안 앞날의 희망은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때 학습 과정을 감독하지 않아도 일과를 매우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사의(辭義)를 토론하고 문장을 지을 적에는 뜻이 통창하고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하여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양친을 섬길 적에는 정성과 힘을 다해 봉양하였고, 화락한 안색과 조심스럽고 경건한 위의를 잠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빠뜨림이 없었다. 18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쇠약해진 나머지 병이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위로하고 타일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김에 더욱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입맛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물건을 올림에 좌우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부족하게 한 적이 없었다. 신축년(1841, 헌종7)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자 아버지를 대신한 아픔을 더욱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리(情理)와 예법(禮法)은 일일이 예문과 같이 하였다. 모부인께서 병이 들어 잉어를 드시고자 하였다. 공이 강에 가서 울부짖으니 갑자기 한 자 남짓한 잉어 한 마리가 그물에 뛰어들었다. 잡아서 올렸는데 병이 마침내 나았으니, 사람들이 왕상(王祥)의 효성14)에 견주었다. 병인년(1866, 고종3)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여 예를 행하였는데 노쇠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15)와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은 주위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공경히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하는 것을 초하루와 보름 및 봄가을로 하여 때마다 폐하지 않았다. 기휘(忌諱)하는 때를 만나면 치재(致齋)하고 산재(散齋)하는 것16)을 반드시 삼가고 제사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반드시 직접 마련하였으며, 감개하고 숙연하여 마치 살아 계시듯이 대하는 정성17)을 다 바쳤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하여 《맹자(孟子)》의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라는 구절18)을 읽을 때면 반복해 읊조리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같은 군(郡)에 사는 남파(南坡) 이공(李公)을 스승으로 섬겨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19)에 대해 듣고 부지런히 따라 하면서 오직 부족할까 두려워하였고, 간혹 여가가 있으면 공령(功令 과거(科擧))에 필요한 시문(詩文))과 근체(近體)의 문장을 공부하여 부모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 때문에 문사(文辭)가 풍부하여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니,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두 동생을 사랑으로 보살펴 은의(恩誼)가 융성하였으므로 집 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동생들을 위해 스승을 가려 부지런히 배우도록 하여 큰 유학자가 되게 하였다. 중년 이후에 자식들에게 "내가 전일에 과거 공부하는 잘못을 면치 못한 것은 다만 구구하게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뜻이었다. 부모님을 여읜 지금에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다시 풍부(馮婦)처럼 팔뚝을 걷어붙이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는 짓20)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고 문을 닫은 채 한가로이 마음을 기르며 《논어(論語)》, 《맹자(孟子)》, 성리서(性理書) 등을 가져다 침잠하여 반복하여 읽고 이전에 연구하지 못한 것에 더욱 매진하였다. 매양 자제와 생도들에게 강의할 적에 그들을 위해서 요지를 말하되 매우 자세하고 상세하게 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병인년(1866, 고종3)에 해구(海寇)의 변고21)가 일어나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자 원근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공은 같은 군(郡) 사인(士人) 아무아무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규모가 대략 정해졌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악한 무리들이 매우 치성하니,22)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학(邪學)에 물들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도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 더구나 사학을 하는 자가 반드시 산다고 보장하지도 못하고 정도를 지키는 자가 꼭 죽는다고 보장하지도 못하는 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친족과 벗들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공이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책을 읽고 선을 밝히며 자신의 몸을 닦고 행실을 검속하여 광명정대한 곳에 그 몸을 우뚝이 세우는 것이 사람의 본분에 제일가는 사업이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속여서 구하여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본래 평탄한 길이 있다. 자신을 단속하고 학문에 힘쓰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사람들과 화합하는 것이 모두 복을 받는 길이다. 더구나 제사를 지내면 복이 내린다는 말이 《시경(詩經)》에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님에랴. 부처에게 시주하고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무당들에게 빌고 부적을 부치는 따위는 복을 받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만 있으니, 그것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망치고 가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너희들은 잘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계사년(1893, 고종30)에 본 고을 사또 이후(李侯)가 공을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샘이 흐르고 바위가 있는 고향의 승경지에 거처를 정한 다음 초가집을 짓고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에 도서(圖書)를 가득 채우고 소요하면서 유유자적하였으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에 대해 누가 말세의 완인(完人)23)이라고 하지 않겠으며,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일민(逸民)24)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금상 기해년(1899, 고종36) 12월 28일에 생을 마감하자, 부음을 듣고 사람들이 서로 조문하고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3월 무오에 본군(本郡) 용계면(龍溪面) 연하동(烟霞洞)의 충렬공(忠烈公) 묘소 아래 기슭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사(府使) 김후 택규(金侯宅圭)가 전의(奠儀)를 보냈고, 사방에서 와서 보았으며 여러 고을에서 다 모였다. 배위(配位)는 청풍 김씨(淸風金氏) 인성(麟性)의 따님으로, 모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계홍(啓宖)이고, 딸은 김방현(金邦鉉)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는 해미 곽씨(海美郭氏)로, 1남을 두었으니, 계상(啓尙)이다. 장방(長旁)은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규(性奎)이고, 딸은 조의환(曺毅煥)·신권성(愼權晟)·윤용주(尹瑢柱)·김보인(金輔仁)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은 1남을 두었으니, 수규(壽奎)이다. 성규는 아들 석룡(錫龍)을 두었다. 아, 내가 공의 두 아들과 친하게 지냈으니, 교제한 인연으로 공을 찾아뵙고 절하였다. 공은 풍채가 중후하고 고인의 풍모가 있었으며 말은 간중(簡重)하였으니, 한번 보면 덕이 있는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행실과 평생 이력은 충신(忠信)과 성실에서 벗어나지 않은 데다가 학문으로 성취하였으며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아 연마하고 펼쳐 나갔다. 다스림을 낼 적에는 광채가 있었으니, 아마 부자(夫子)가 이른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라는 것25)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의 수준이 점점 떨어져 위선이 판을 쳐서 선배들의 질박하고 성실한 기풍을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봄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의 두 아들은 노성하여 연세와 덕망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두 손자는 사우(師友)와 교유하여 나이가 젊고 학문에 힘쓰니, 공의 평소 가르침이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기에 당대에 보답 받지 못한 덕은 필시 앞으로 크게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계홍(啓宖)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선군(先君)을 아는 것이 그대만 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행장을 지어서 영원히 후대에 남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그 청을 받아들일 자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평소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公姓魏。諱衡權。字重之。號樂淸軒。始祖諱鏡。以唐學士東來。仕新羅事太宗。官大阿飱。封懷州君。子孫仍貫焉。懷州卽今之長興也。至諱菖珠。仕麗官侍中。世有聞人。閥閱煒燁。朝野載籍。班班可考。至諱种。在我太祖應順之際。有推戴功。四傳至諱由亨。官承文習讀。棄官歸鄕。與南秋江諸賢相友善。有唱酬錄。又三傳至諱德和。彦陽縣監。以扈聖錄勳。贈戶曹判書。又四傳至諱命德。師事屛溪尹先生。文學行義。爲士林所推重。號剩餘翁。有遺稿行于世。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師甲。號富溪。學襲家庭。隱德不仕。曾祖諱守澤。號黙窩。受學于族叔存齋先生之門。先生稱詡甚重。有遺集。祖諱榮震。號松灘。孝友著聞。考諱益祚。號惺惺齋。承襲家學。遊從士友。踐履行治。爲南服儒林之望。妣漆原尹氏在奎女。貞靜柔嘉。閫儀無闕。以純廟己卯九月十六日。生公于府北丹村之第。體相岐嶷。聲音弘亮。穎悟開爽。逈異凡常。王考松灘公每撫愛之曰。吾家前頭之望在此兒。及其就傅。不待程督而課日甚勤。至於討辭解義。行文綴句。通暢贍麗。無異老成。事二親。致誠致力。怡愉之色。洞屬之儀。不以須臾而有間。不以絲毫而有闕。十八丁外艱。哀毁過禮。羸瘠成疾。王考婁慰諭之。俾免傷生。事王考及慈幃。尤盡誠敬。適口之味。適身之物。左右竭蹶。未嘗見乏。辛丑丁王考憂。代父之痛。益不自勝。凡百情文。一日如禮。母夫人病。嘗欲鯉魚。公臨江號泣。忽有一鯉長尺許。躍八于網。持以供之。病乃得愈。人擬之於王祥之孝。丙寅遭內艱。執喪行禮。不以衰老而自恕。繭梅之容。柴骨之象。可以感動傍人。祗謁廟宇。展省墳墓。朔望春秋。隨時不廢。遇忌諱之辰。致散必謹。供具必親。慨然肅然以盡如在之誠。常恨早違所怙。未終其養。讀孟子終身慕之語。未嘗不三復沈咏。聲淚俱發。早師同郡南坡李公。得聞古人爲己之學。遵循娓娓惟恐不足。而間以餘日。及於功令近體之文。以爲父母門戶之望。是以詞藻藹蔚。累捷鄕解。而見屈於禮部。物論惜之。撫愛二弟。恩誼隆洽。庭除之間。無有間言。爲之擇師勤學。至成巨儒。中年以後。謂諸子曰。吾於前日。不免爲場屋之累者。只是區區供悅之意。今風樹孤露。靡所逮及。何爲而復揚馮婦之臂乎。自後不赴公車。杜門養閑。取論孟性理等書。沈潛反復。益究前日之所未究。每講子弟及生徒。爲之說道要義。縷縷詳悉。聽者感服。丙寅海寇之變。沁都失守。遠近汹汹。公與同郡士人某某謀起義旅。規模略定。聞亂靖而罷。甲午匪類大熾。公每戒人曰。與其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況邪者未必得生。正者未必得死耶。是以族戚知舊皆得免焉。公嘗戒子孫曰。讀書明善。修身飭行。卓然立其身於光明正大之地。此是人生本分第一事業。若其枉求非分。沾沾自足。吾所不取也。汝等戒之。又曰。人之獲福。自有坦道。謹身力學。孝於親忠於上和於衆。莫非福也。況祭祀降福之說。見於詩者非一乎。若其供佛飯僧巫覡符章之類。不惟無福而有禍。其爲敗世敎亂家法爲何如哉。汝等切宜識之。歲癸巳。本倅李侯以公孝行。剡薦于朝。除童蒙敎官。所居有邱林泉石之勝。結茅開逕。蒔花裁竹。四壁圖書。婆娑倘佯。其偉韻遐躅。孰不謂叔世之完人。南服之逸民乎。今上己亥十二月二十八日考終。聞者相弔曰。哲人萎矣。翌年三月戊午。葬于本郡龍溪面烟霞洞忠烈公墓下麓艮坐原。府倅金侯宅圭爲致奠儀。四方來觀。數郡畢集。配淸風金氏麟性女。擧一男一女。男啓宖。女適金邦鉉。繼配海美郭氏。擧一男。曰啓尙。長旁一男四女。男性奎女適曺毅煥愼權晟尹瑢柱金輔仁。次旁一男壽奎。性奎男錫龍。嗚乎。余與公二子相友。夤緣過從。拜公於床下。公體厚貌古。言辭簡重。一見可知爲有德君子。若其平生行治終始。履歷不出乎忠信誠慤之外。而濟之以學文師友之助。磨礱展拓。出治光采。庶幾乎夫子所謂從先進者矣。世級浸下。虛僞日滋。而先輩質慤之風。不可以復覩。俯仰今古。寧不慨然。公二子耆老年德。聲聞偉然。二孫遊從師友。年富力學。公平生之敎。可謂不墜於家。而不食之報必將有大來之日矣啓宖持家狀。泣而示余曰。知先君。孰有如吾子。願爲之狀行以垂不朽於來許也。余以殘劣。極知其非所承膺。而慕仰有素。豈忍辭諸。 휘는 경(鏡)으로 장흥 위씨(長興魏氏)의 시조는 위경(魏鏡)으로 당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으로 전해진다. 위경의 동래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신라 태종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였다는 설과,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하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위경은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상서시중(尙書侍中)에 이르렀으며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회주(장흥)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신라 말에 대각관시중(大覺官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하여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간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1604년(선조37)에 세 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2명, 2등은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 31명, 충근정량호성 공신 86명이다. 왕상(王祥)의 효성 진(晉)나라 때의 효자 왕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繼母)의 학대를 받으며 살았으나 늘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계모가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직접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 《예기》 〈옥조(玉藻)〉에 "거상할 적의 모습은 파리하고 실의해서, 낯빛의 모양은 근심스러우며, 보는 모양은 놀라서 다급하고 분명치 못하며, 말하는 모양은 낮고 미미하다.[喪容纍纍, 色容顚顚, 視容瞿瞿梅梅, 言容繭繭.]"라고 하였다. 기휘(忌諱)하는……것 《예기》 〈제의(祭義)〉에 "안에서 치재하고 밖에서 산재하여, 재계하는 날에 조상이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며, 그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뜻과 생각을 생각하며,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즐기던 것을 생각하여, 재계한 지 3일에 마침내 그 재계한 조상을 보게 된다.[祭義曰: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하였다.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 《중용》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성대하게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맹자(孟子)에……구절 《맹자》〈만장 상(萬章上)〉에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나니, 50세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것을 나는 대순에게서 보았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풍부(馮婦)처럼……짓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진(晉)나라의 풍부라는 사람이 호랑이를 잘 때려잡았는데 뒤에 마음을 바꾸어 선비가 되었다. 어느 날 들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호랑이를 산모퉁이에 몰아 놓고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가 풍부가 수레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맞이하니, 풍부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기뻐하였으나 선비들은 풍부가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孟子 盡心下》 병인년 해구(海寇)의 변고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프랑스의 로즈(Roze)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귀리에르(Guerriere)를 비롯하여 함대 7척과 6백 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14일 강화부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점령하였다. 갑오년에……치성하니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봉기를 이른다. 완인(完人)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화나 당쟁 같은 변란 속에서도 자신의 절조와 목숨을 모두 온전하게 지킨 사람을 가리킨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 활동한 유안세(劉安世)가 그런 인물이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났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일민(逸民) 뛰어난 학문과 덕행을 소유하고서도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부자(夫子)가……것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이르기를 "예악을 행함에 있어 선배들은 촌사람처럼 순박하였고 후배들은 군자처럼 문채가 나는데, 내가 만약 행한다면 나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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