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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지【재홍】에게 답함 答鄭敬之【在洪】 두보(杜甫)의 시(詩)에 "봄이 오면 오래도록 회포를 펼치리라고 생각했건만, 늙어가면서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 얼굴 보기 드물다."96)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궁벽한 골짜기에서 움츠리고 지내서 찾아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매번 이 노인의 시는 오로지 저를 위해서 마련하고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한번 읊조리고 한번 탄식하면서 그럭저럭 자신을 위로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노형(老兄)께서 뭇사람이 버린 상황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고 글과 술로 저를 맞이하고 뛰어난 시로 저에게 넌지시 간하며 저에게 안부를 묻고 강론과 토의로 저를 면려하는 것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정겨움이 넘쳐났습니다. 그 뜻을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그 뜻을 어찌 소홀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두보가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르러 내가 이룰 수 있으리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위로되는 마음 가득합니다. 보내신 서신에, "눈앞에 놓인 어지러운 시속(時俗)은 별달리 다스릴 방도가 없고 벗들과 의리를 강구하는 것처럼 급박한 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근심이 없는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선비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 일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추구할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외부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고, 군자가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니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남은 생애가 지금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찌 뜨락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문을 걸고 담 구멍을 막아 세상과 서로를 잊으며 내 옷을 입고 내 음식을 먹으며 내 책을 읽어 늘그막에 조그마한 공을 거두는 것이 가장 좋은 요결(要訣)입니다. 형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杜子詩曰。春來準擬開懷久。老去親知見面稀。弟跧滯窮峽。過終絶罕。踽踽凉凉。無以爲懷。每疑此老詩偏爲此生準備而作也。一諷一歎。聊以自慰。幸有老兄不棄於衆棄之中。邀我以文酒。諷我以瓊律。訊我以寒暄。勉我以講討。不徐不疾。款款津津。其義何可忘。其義何可少耶。杜子所以準擬而未就者。安知至於今日而我得就之耶。滿心慰慰。來喩以爲目今俗擾。別無所營。從友講義。莫此爲急。此固然矣。然非惟今俗爲然。雖在昇平無虞之時。士之所當求者。此事而已。外此了無一事可求者。是以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然彼求無益於得。求在外故也。此求有益於得。求在我故也。況吾輩殘生。坐在今日世界。豈容一步於門庭之外耶。杜門塞竇。與世相忘。衣吾衣。食吾食。讀吾書。以收桑楡萬一之功。此是太上要訣。想兄已諒悉矣。 봄이……드물다 두보의 〈십이월일일삼수(十二月一日三首)〉 가운데 3수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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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호조 참판 경신암 오공 묘갈명 贈戶曹參判敬愼庵吳公墓碣銘 정(鄭)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피(子皮)는 한 가구당 1종(鍾)의 곡식으로 구휼하였고,198) 송(宋)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한(子罕)이 시행하였지만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199) 군자가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가장 마지막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옛날 선민(先民)이 의리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던 기풍이 먼 후대에 늠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하네.우리 고장에 근고(近古)에 살았던 경신암(敬愼庵) 오공(吳公), 휘 만상(萬祥), 자 회일(會一)은 바로 또한 한씨(罕氏)와 악씨(樂氏)에 버금갈 것이다. 큰 흉년을 만나 곳간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구휼하였으니, 이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다. 지금까지도 향리 사이에서 미담으로 자자하게 전해진다. 자손이 번성하고 문학이 뛰어났으니, 이른바 마지막에 망한다는 말이 어찌 오직 고인에게만 해당하겠는가.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평소 부모를 시봉(侍奉)함에 지물(志物)의 봉양200)에 빠뜨림이 없었다. 하루는 밖에서 취하여 돌아오자 그 부친이 매우 꾸짖었는데, 이후로는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 생장하였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의관이 한사(寒士)와 같이 수수하였다.병자년(1876, 고종13) 9월 13일에 졸하니, 탄생한 해인 병신년(1836, 헌종2)으로부터 41년이 된다. 묘는 고을의 품평(品坪) 앞 몰니등(沒泥嶝) 병좌(丙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오씨(吳氏)는 관향이 보성(寶城)이니,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연총(延寵)이 그 시조이다. 위대한 공훈과 높은 관작은 대대로 이어졌다. 중엽에 이르러 휘 방한(邦翰)이 있었으니,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조부 휘 태유(泰有)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석규(錫圭)는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정후(政厚)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광엽(光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유순하고 얌전하여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모두 두 아들을 두었으니, 수남(壽南)과 수극(壽極)이다. 장자의 아들은 응조(應祚)이고, 차자의 아들은 경조(庚祚), 병조(秉祚)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재홍(在鴻)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느 날 그 조카 창호(昌鎬)를 시켜 지은 가장(家狀)을 지어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으로 삼았고 儉以持己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미쳤네. 惠以及人남은 명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니 遺芳萬口남은 경사 천추에 영원하리라. 餘慶千春 鄭饑而子皮賙粟戶一鍾。宋饑而子罕施而不書。君子曰鄭之罕。宋之樂。其後亡者乎。噫。古昔先民。貴義輕財之風。百世之下。凜凜然令人興歎。吾鄕近古敬愼庵具公。諱萬祥。字會一。卽亦罕氏樂氏之流亞也。遭歲大無。傾囷恤匱。賴活甚衆。至今藉藉爲鄕里間美談。後嗣蕃衍。文學蔚然。所謂後亡者。豈惟古人爲然。公性孝。平居侍奉。志物無闕。一日自外醉歸。其大人切責之。自後勺飮不入口。生長富饒。不喜華靡。冠服蕭然如寒士。丙子九月十三日卒。距丙申懸弧爲四十一。墓移窆州之品坪前沒泥嶝丙坐原。吳氏貫寶城。麗朝平章事延寵。其鼻祖也。偉勳嵬爵。奕世相望。至中葉。有諱邦翰。壬辰立憧。贈兵曹參判。曾祖世觀。贈戶曹參判。祖泰有。贈司僕寺正。考錫圭。贈左承旨。妣公州李氏政垕女。公娶昌寧曺氏。光葉其考也。柔婉靜嘉。閫範無闕。擧二男曰壽南壽極。長房男應祚。次房男庚祚秉祚。曾玄以下不盡錄。曾孫在鴻。余竹馬舊交世。一日伻其從子昌鎬。以所著家狀。來請碣銘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儉以持已。惠以及人。遺芳萬口。餘慶千春。 정(鄭)나라에……구휼하였고 정(鄭)나라 자전(子展)이 죽고 아들 자피(子皮)가 부친을 이어 상경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나라에 기근이 들었는데 아직 보리가 익기 전이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피는 자전의 명으로 백성들에게 가구당 1종(鐘)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한씨(罕氏)는 국정을 장악하여 늘 상경으로 있었다. 《春秋左氏傳 壤公29年》 송(宋)나라에……않았으니 송(宋)나라 사성(司城) 자한(子罕)이 자피(子皮)의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백성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송나라에도 기근이 들자 자한은 평공에게 공실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고, 모든 대부에게 곡식을 빌려주게 하였다. 사성씨는 곡식을 빌려준 뒤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돌려받을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이 이 말을 듣고 "정나라의 한씨와 송나라의 악씨는 아마도 가장 나중에 망할 것이다." 하였다.《春秋左氏傳 壤公 29年》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둘 다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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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경헌 홍공 묘갈명 贈通訓大夫司僕寺正敬軒洪公墓碣銘 공의 휘는 영환(永桓)이고, 자는 무경(武卿)이며, 경헌(敬軒)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고려조(高麗朝)의 직학사(直學士) 경(慶)의 후손이다. 중엽에 휘 치(治)란 분이 있었으니, 학행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일송(一松)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는 경고(景古)로, 덕을 숨긴 채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침수정(枕潄亭)이고,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천규(天奎)이다. 부친은 이수(履洙)로,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로, 두평(斗平)의 따님이다. 후비(後妣)는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통덕랑(通德郞) 정최(鄭最)의 따님인데, 영묘(英廟) 기유년(1729, 영조5) 3월 2일에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순후하고 소박하며 신중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몸소 농사지으면서도 온화한 얼굴빛과 부드러운 용모를 잠시도 어김이 없었다.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를 극진히 하였으며 제기를 깨끗이 닦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일은 반드시 직접 하였다. 세 아우와 낮에는 다정하게 마주 보며 밤에는 함께 잠을 잤다. 조용히 화락하게 지내며 일찍이 한마디 말에도 온화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이르도록 한방에서 함께 지내고 먹었으며 분가(分家)하지 못하게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경(敬)' 한 글자는 배우는 자의 시작이자 끝이니, 잠시도 내 몸에서 떠나게 해선 안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재실(齋室)에 편액을 걸어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소학(小學)》을 입신하는 터전으로 삼고 사서(四書)를 학문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삼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까지도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양(涵養)하는 공부 가운데에서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미루어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집에서나 고을에서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만날 적에 성대하게 자세하고 화평한 풍모가 있었다. 평생 깊이 스스로 명성을 감추고 남에게 자랑한 적이 없었으며 산림에서 한가하게 노닐다가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최상의 경지에서 덕을 수립하고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서 노닌 것의 풍치와 격조를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정종(正宗) 계축년(1793, 정조17) 9월 4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해하봉(海鰕峯)의 선영 오른쪽 언덕 사좌(已坐)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증손 홍필주(洪弼周)의 장수와 귀함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숙인(淑人)에 추증되었으며, 명신(命新)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별세한 18년 뒤에 생을 마감하였다. 우봉촌(牛峯村) 뒤 남산(南山)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희찬(羲纘), 낙해(樂海), 백우(百禹)이고, 딸은 문혁진(文爀鎭)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현손 우방(祐邦)이 장차 제묘(題墓)201)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며 나에게 그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미천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실로 감당할 수 없지만, 교분이 소중하여 굳게 사양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 이 넉 자의 봉분은 吁此四尺길한 분 묻힌 곳이네. 吉人之藏해하봉에 영령이 내려오니 鰕山降靈대대로 번창하리라. 永世厥昌 公諱永桓。字武卿。敬軒其號也。糸出豊山。麗朝直學士之慶後。中葉有諱治。以學行除齋郞。世稱一松先生。曾祖景古。隱德不仕。號枕潄亭。贈刑曹參判。祖天奎。考履洙。以孝著名。妣咸豊李氏斗平女。後妣晉州鄭氏通德郞最女。英廟已酉三月二日。生公于牛峯里。淳厚簡童。天稟甚粹。家貧養親。躬幹耕稼。怡色惋容。造次無違。及遭艱。泣血過毁。啜粥三年。遇忌日。極其致散。漑濯烹熟之節。必親爲之。與弟三人。晝則對床。夜則聯枕。從容湛樂。未嘗有一言失和。至老白首。一室同爨。不令析箸。嘗曰。敬之一字。是學者之成始成終。不可斯須去身。遂揭題齋顔。以爲警省之資。以小學爲立身田地。以四子爲進學蹊徑。至於程朱諸書。無不沈索硏究。體之於涵養之中。推之於踐履之際。是以其居家處鄕。應事接物。蔚然有慈詳豈弟之風。平生深自鞱晦。未嘗衒鬻於入。而婆娑邱林。聊以卒歲。其所以立於太上之門而遊於至樂之界者。風韻標致。槩可想也。正宗癸丑九月四日終。葬海鰕峯先隴右岡已坐。後以曾孫弼周壽貴。贈司僕寺正。配淸州韓氏贈淑人。命新女。有婦德。後公十八年而終。葬牛峯村後南山負乙之原。有三男一女。男羲纘。樂海。百禹。女文爀鎭。孫曾以下不盡錄。公玄孫祐邦。以將有題墓之役。請余誌其後。顧膚淺藐末。固不可以承當。而事契之重。有難牢讓。銘曰。吁此四尺。吉人之藏。鰕山降靈。永世厥昌。 제묘(題墓) 무덤에 죽은 자의 이름 등을 써서 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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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외재 김공 묘갈명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畏齋金公墓碣銘 공의 휘는 예길(禮吉), 자는 성택(聖宅), 호는 외재(畏齋)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김해(金海)에서 나왔으니, 바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 훈벌(勳閥)이 찬란하였다. 휘 서(湑)란 분이 계셨으니, 우리 태종(太宗) 때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지고, 백동사(白洞祠)에 배향되었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준손(駿孫)은 아우 휘 기손(驥孫), 일손(馹孫)과 더불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김씨삼주(金氏三珠)'라고 불렸는데,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연천군(燕川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대유(大有)를 낳았으니, 호가 삼족당(三足堂)이다. 기묘년(1519, 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는데, 소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보고 물러나 운문(雲門)의 우연(愚淵)에 은거하였으니, 바로 공의 9대조이다. 증조는 삼휘(三徽)로, 호가 취상당(翠相堂)이다.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조부는 덕항(德恒)으로 호가 매곡(梅谷)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은 술회(述會)로, 호가 죽와(竹窩)이고, 수문장(守門將)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에 추층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참봉 중화(仲華)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 1월 15일에 금릉(金陵)의 삼인리(三仁里)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재기(才氣)가 영특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견문은 넓고 시문은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상변(常變), 길흉(吉凶), 절문(節文), 도수(度數)에 대해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깊이 분변하여 훤히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근의 사우들이 예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번번이 공에게 가서 물은 다음 결정하였다. 양친을 효도로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며 뜻을 받드는 일과 물질로 봉양하는 일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매우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형제 다섯 사람 모두 문장과 덕행이 있었고, 함께 단란하게 지냈다. 형과 아우가 날로 매진하여(며) 조용히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 온화한 기운이 넘쳤다. 심지어 친척이나 벗을 대할 적에도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은혜로워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으므로 향리에 어떤 사람이 혹시 잘못을 하면 번번이 "아무 공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존중 받았다.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15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손자 재환(在煥)이 귀하게 되자 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암천방(唵川坊) 황곡리(黃谷里) 당산(堂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강릉 유씨(江陵劉氏)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치일(劉致一)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은직(殷直), 취직(就直), 응직(應直), 자직(宇直)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인대(鄭仁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재영(在瑛), 재호(在瑚), 재련(在璉), 재순(在珣)은 장남의 소생이고, 재달(在達), 재방(在邦), 재홍(在洪)은 차남의 소생이며, 재업(在業), 재선(在善), 재흠(在歆), 재민(在敏)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고, 재환(在煥)은 관직이 예조 참판으로 넷째 아들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찬석(璨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연천의 고가요 燕川古家삼족당의 어진 후손이네. 三足賢孫효우로 가업을 이었고 孝友箕裘시례는 연원이 있네. 詩禮淵源황곡리의 산기슭에 黃谷之麓넉 자의 무덤이 있네. 四尺斧堂자손들이 번성하여 螽斯兟兟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禮吉。字聖宅。號畏齋。金氏系出金海。卽駕洛國首露王之后也。至麗朝。勳閥煒燁。有諱湑。我太宗朝封盆陵君。享于白洞祠。三傳諱駿孫。與弟諱驥孫馹孫。俱登文科。稱金氏三珠。官弘文直提學。封燕川君。是生諱大有。號三足堂。已卯登賢良科。見群小用事。退隱於雲門之愚淵。卽公之九世祖也。曾祖三徽。號翠柏堂。行義著世。中司馬。祖德恒。號梅谷。有隱德不仕。考述曾。號竹窩。官守門將。贈嘉善。妣貞夫人義城金氏。參奉仲華女。英宗丙子正月十五日。生公于金陵之三仁里舊第。公天稟挺邁。才氣穎異。淹貫六經。涉躐諸家。聞見宏博。詞華斐蔚。尤邃於禮學。常變吉凶。節文度數。精思深辨。無不昭晣。是以遠近士友。禮有所疑。輒就公咨決焉。孝事二親。怡愉洞屬。志物俱至。執喪哀毁。一遵古禮。兄弟五人。皆有文行。對床連榻。爾征我邁。從容湛樂。和氣融融。以至待族戚接朋友。溫仁慈惠。各得其心。閭里間。人或有過。則輒曰。勿使某公知之。其見重如此。純廟癸未十二月十五日卒。後以孫在煥貴。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墓唵川坊黃谷里堂山丙坐原。配淑夫人江陵劉氏。同知致一女。婦德備至。生四男一女。男殷直。就直。應直。宇直。女適河東鄭仁大。孫男在瑛。在瑚。在璉。在珣。長房出。在達。在邦。在洪。二房出。在業。在善。在歆。在敏。三房出。在煥。官禮參。四房出。曾玄以下不錄。曾孫璨錫。奉家狀。請爲隧道表銘之文。辭不獲已。銘曰。燕川古家。三足賢孫。孝友箕裘。詩禮淵源。黃谷之麓四尺斧堂。螽斯兟兟。餘祿正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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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손공 묘갈명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시웅(始雄), 자는 미경(美卿), 호는 죽음(竹陰)이다. 손씨(孫氏)의 선조는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망명길에 오를 때 기린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이르러 살았다고 한다. 후손 가운데 구례마(俱禮馬)가 있었으니, 신라(新羅) 태조(太祖)를 도와 모량부(牟梁部) 대인(大人)이 되었다. 훌륭한 공적과 높은 작위는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고려(高麗) 때 휘 빈(贇)이 있었으니,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책(策)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계경(季敬)을 낳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그 백씨(伯氏) 휘 검경(儉敬)이 망복(罔僕)의 의리202)로 보성군(寶城郡)에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함께 남하하다가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정착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과 더불어 85학사에 선발되었다. 금남(錦南) 최공 부(崔公溥)와 함께 하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에서 지냈다. 대대로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고조는 휘 근로(謹老)이고, 증조 휘 대남(大南)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일(逸)이니, 공조 참판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후일(宋厚日)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이룡(以龍)으로,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부인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반명환(潘明煥)의 따님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22일에 정동(井洞)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본디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밭 갈고 가축을 길러 온갖 일을 모두 직접 하였으며, 이것으로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게다가 한가한 날에는 치웅(致雄)과 필웅(必雄) 두 아우와 함께 글방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어버이의 병이 위독해지자 낮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원을 불러오고 약을 조제(調劑)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살아 있는 잉어가 여울에서 나오고 꿩이 뜰에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효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연달아 소생(所生 친부모)과 소후(所後 양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여 상례의 형식과 내용203)이 모두 지극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자손을 거듭 경계하였다. 그 가훈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친과 화목하게 지내며, 제사를 받들고, 혼인을 가려서 하고, 학문과 문장에 힘쓰고, 농사를 힘써 짓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하지 말고, 미신을 믿지 말라."라는 뜻으로 상세히 입설(立說)한 것이 몹시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으니, 그 좋은 계책과 훌륭한 가르침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자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죽수(竹樹)의 북쪽에 집을 짓고 죽음(竹陰)이라고 자호하였다. 자호와 연관된 시 한 편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비봉산 앞 대숲이 우거졌으니 飛鳳山前竹樹陰맑은 풍취는 백세 지나도록 변치 않네. 淸風百世不移心보배인 낭간204) 옥인 양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看來愛有琅玕寶아침 해 뜨길 기다려 덕음을 보네. 留待朝陽覽德音이 시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자리 오른쪽에 써서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평소 몸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향리(鄕里)에서 여러 번 그 효성을 상위 관사에 천거하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3대가 추증되었다.경신년(1740, 영조1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천(寒泉)의 모산(牟山) 뒤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조사룡(趙士龍)의 따님이다.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4남을 낳았으니, 첫째는 명신(命新), 둘째는 흥신(興新), 셋째는 항신(恒新), 넷째는 극신(克新)으로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 손자 원효(元孝)는 장자의 소생이다. 생원 덕효(德孝), 찬효(贊孝)는 둘째의 소생이다. 순효(淳孝)는 셋째의 소생이다. 광효(光孝), 필효(必孝), 욱효(郁孝)는 넷째의 소생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6세손 영렬(永烈)과 영모(永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비석의 뒷면에 새길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충강 가 忠江之上주산의 남쪽. 珠山之陽우뚝한 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崇四尺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가훈 적은 책 한 권 家訓一書후손에게 남긴 계책 매우 창성하네. 貽謨孔彰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始雄。宇美卿。號竹陰。孫氏之先。在魯昭公出奔時。有曰承麟。浮海而東。至仇史居焉。後孫有曰俱禮馬。佐新羅太祖。爲牟梁剖大人。崇勳嵬爵。奕世不絶。至麗朝。有諱贇。封密城君。子孫乃貫焉。至諱策。文牧使。生諱季敬。入我朝。見其伯氏諱儉敬。以罔僕之義。謫寶城郡。公亦與之南下。止千扶安之葛村。三傳至諱比長。生員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八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世著文行。高祖諱謹老。曾祖諱大南。贈掌樂院正。祖諱遇節。贈戶曹參議。考諱逸。工曹參判。配貞夫人恩津宋氏厚日女。生考諱以龍。贈嘉善大夫。妣貞夫人南平潘氏明煥女。顯宗癸丑十月二十二日。生公于井洞第。公天稟醇謹。幼有至行。家素貧甚。漁樵耕牧。凡百事役。無不躬親爲之。以供甘旨之養。更於暇日。與二弟致雄必雄。入塾對案。不廢課程。親有劇疾。晝不就席。夜不就枕。迎醫合藥。誠力俱至。有生鯉出灘。投雉墮庭之異。人謂孝感致然。連漕所生所後喪。一遵禮制。易戚備至。嘗著家訓。申戒子孫。其訓以孝於父母。友於兄弟。正閨閫。睦宗族。奉祭祀。擇婚姻。務學文。力農業。勿近博奕。勿用巫覡之意。縷縷立說。極其懇惻。其嘉謨良規。皆可以爲有家者之柯則。築室竹樹之陰。自號竹陰。因有詩曰。飛鳳山前竹樹陰。淸風百世不移心。看來愛有琅玕寶。留待朝陽覽德音。此可以見其志矣。書九容九思於座右。常自鏡考。以小學大學爲平生律身之本。鄕道累薦其孝於上司。以壽陞嘉義。追榮三世。庚辰正月六日考終。葬寒泉之牟山後甲坐原。配貞夫人淳昌趙氏士龍女。閫儀無闕。生四男。長命新。次興新。次恒新。次克新。出系仲父后。孫元孝長房出。德孝生員。贊孝二房出。淳孝三房出。光孝。必孝。郁孝。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六世孫永烈永謨奉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忠江之上。珠山之陽。有崇四尺。孝子攸藏。家訓一書。貽謨孔彰。螽斯椒聊。餘祿正長。 망복(罔僕)의 의리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微子》 상례의 형식과 내용 원문은 '易戚인데, 상례가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모두 훌륭하게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낭간(琅玕)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로, 어두운 녹색이나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의 옥인데, 옛부터 장식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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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鏡城宗人禹範【昌均】 雉城何等地。相見卽同親。在昔南强士。如今北産人。磨雲難入夢。豆滿近殊鄰。此去三千路。秋風擾我神。君是邵城裔。同根百世親。圖南罵好客。還北作勞人。絶塞非宜土。淳鄕卽善隣。臨岐無所贈。努力保心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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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族侄舜根 落鄕凡幾世。淮橘絶靑雲。丹田極鹵莽。何日復耕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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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呈參奉奇丈【蘆沙】 摳衣烏次客。重踏去年程。未必愁寒沍。河南春已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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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呈邱珍先生【蘆沙】 至人秉元化。端居撫空腹。畸生作老饕。蠹魚入左毒。膏骨難治鵲。手腕未解蝮。偶得良醫卦。莧陵夬夬獨。竪子漸退舍。氛祲日碌碌。黃江一夜雨。蘇我瘡痍穀。雙鯉濕雲飛。落手心先恧。價重百硨磲。德洽千釜斛。誰能報難際。顧憐皤皤禿。何當拜門下。歸臥南山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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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朝天館安行五 南去滄溟萬里流。漢挐山色揷天頭。遙知別後相思夢。只在園林橘柚秋。十載尋源最上流。送君今日白波頭。靑天大道滄溟闢。政是男兒闊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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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茂山崔鍾衡 君從何處趼重重。探玉探珠此幸逢。載德歸程須努力。磨天嶺上更無峯。吾師謙德漸人深。雨盡瀛洲北不咸。百舍治任豈易得。感君鐵石始終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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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婿冕植 老鳳翩然止竹亭。懷中四子已飛庭。滿園叢綠春無盡。會見琅玕葉葉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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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범【권현】에게 답함 答任士範【德鉉】 병으로 궁벽한 움집에 칩거하고 세상에 버림받아 오랜 옛 친구가 안부를 묻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세상의 정취이니 감사하는 마음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편지를 받고 여름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신명이 애처롭게 여겨 기거(起居)가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실로 축원하는 바에 합치합니다. 둘째 영랑(令郞)은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지각이 열려서 성취한 바가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고 온당하니 덕문(德門)이 아직 누리지 못한 복록과 남은 희망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의탁하는 마음도 소소하지 않습니다. 아우는 지난 몇 해 동안 병에 잘 걸려서 기혈(氣血)이 날로 손상되었으니 배우지 않으면 곧 쇠하는 것이 이치상 참으로 당연합니다. 무후(武侯)가 궁벽한 집에 살면서 탄식한 것100)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수도 없건만 어찌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병입니다. 그러나 병이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는 것이지 스승이 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후생 소자(後生小子)가 어디에서 도를 듣겠습니까. 형의 염려가 지나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일부(一副)의 좋은 약제(藥劑)는, 세간에는 본래 창공(倉公)이나 편작(扁鵲) 같은 명의(名醫)가 있으니 아우처럼 천석고황(泉石膏肓 산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계책을 내겠습니까. 듣자니 저도 모르게 이마에 흐르는 땀이 발바닥까지 적십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病蟄窮竇。見漏於世。只有知舊存訊一路。此爲陽界意況。感佩曷任。仍審維夏省歡神勞。起居珍勝。實協祈祝。二郞謹勅開悟。所就穩藉。德門不食。餘望可量。區區寄意。亦爲不淺。弟年來善病。氣血日敗。不學便衰。理固宜然。武侯窮廬之歎。不能以自遣耳。奈何好爲人師。此固病也。然病在於好爲。而不在於爲師。不然後生小子。何從而聞道乎。兄可謂過慮矣。一副良劑。世間自有倉扁大手。如弟之方困於膏肓者。安能爲人謀也。聞之不覺頂汗流跖。諒恕如何。 무후(武侯)가……것 무후는 중국 삼국 시대 촉(蜀)나라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그가 지은 〈계자서(戒子書)〉에 "나이는 시시각각으로 들어가고 뜻은 해가 갈수록 사라져 버려 마침내 고락하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초라한 오두막에서 슬퍼하며 탄식한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젊은 시절에 부지런히 자신의 본업에 힘쓰지 못하여 마침내 이런 신세가 된 것이 한스럽다는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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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석【복기】에게 답함 答徐元陽【復基】 세시(歲時)의 왕래로 인하여 가까이 사는 벗들은 모두 소식을 들었지만, 영평(永平)의 고인(高人 수신인을 말함)께서는 어떤 상황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정감이 담긴 편지를 받으니 궁벽한 음지에서 햇빛을 보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곤궁한 재력(財力)으로 천애지각(天涯地角)에 살고 있으니 몸소 나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정담을 나누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곧 서신만이 서로 따르며 가깝게 지내는 방도입니다. 하물며 안부를 묻는 외에 또 강론과 사색에 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끊임없이 종이 폭을 채우니,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계발하도록 하는 방도로 볼 때 편지가 대면하는 것에 못미친다고 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여러 조항 운운한 것은 노형(老兄)의 말씀이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만물을 생(生)함과 사람의 마음이 인(仁)한 것은 본래 두 개의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현상은 만 가지로 달라도 근본은 하나【萬殊一本】이므로 본래 고정된 모습이 없습니다. '성(誠)' 자를 가지고 본다면 성(誠)이 하나의 근본【一本】이고 '경(敬)' 자를 가지고 본다면 경(敬)이 하나의 근본입니다. '인(仁)', '의(義)', '중(中)', '정(正)' 자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로 삼아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뿐입니다. 또 모든 현상에는 각각 갖추고 있는 하나의 근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효(孝)' 자나 '혜(惠)' 자 같은 부류가 그렇습니다. 나갈 때는 아뢰고 돌아와서는 고하며,101)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102) 등 시봉하는 모든 방법이 '효(孝)' 한 글자에서 나옵니다. 조존(操存)103)과 격물(格物)의 설에 대한 대답도 훌륭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것104)은 분명히 미발의 때이고 사려(思慮)만 막 싹터 나오는 때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모두가 어둡고 은미하여 남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것입니다. 계신공구(戒愼恐懼) 또한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숙하게 하며105), 생각하는 듯 엄숙한 자세를 가지고106) 감히 태만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하문하신 것은, 저처럼 과문한 소견으로는 일반적인 사례(士禮)에도 어두운데 하물며 제후의 예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후사로 나간 아들은 친생부(親生父)에 대해 살아계실 때는 감히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고 돌아가셔도 감히 예(禰 아버지의 사당))에 받들지 못하며 상복은 감히 3년을 입지 못합니다. 하물며 공자(公子)의 아들로서 입계(入繼)하여 왕통을 이은 경우야 말한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공조례(公朝禮)가 있고 가인례(家人禮)가 있습니다. 공조례는 공의(公議)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고 가인례는 사적인 은의(恩誼)를 펴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형(曺兄)이 말한 창업을 이룬 군주와 입계한 군주는 그 예가 다르다고 한 것은 옳습니다만, 입계한 군주도 가인으로서의 예가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因歲時往來。居近朋友。皆得聞信。而但未知永平高人作何狀。謂外情緘。不啻若窮陰之見陽也。吾儕俱以窮約事力。居在涯角。躬駕面穩。豈易事也。只是書尺一路。便是相從。況寒暄之外。又以講討思索多少語。娓娓盈幅。其所以令人資發。誰謂書不如面也。諸條云云。老兄之言得矣。然天地之生。人心之仁。本非兩項物事。大抵萬殊一本。本無定體。以誠字看之。誠爲一本。以敬字看之。敬爲一本。仁義中正字之類。莫不皆然。惟觀其所主而言者。如何耳。且事事物物上。有各具之一本。如孝字惠字之類。是也。出告反面。冬溫夏凊。凡百侍奉。皆是一箇孝字出來。操存格物說。所答亦善。不覩不聞。固是未發之時。獨是念慮初萌處。然凡幽暗隱微。人所不知而己所獨知者。皆是也。戒愼恐懼。亦非着意爲之。只是正衣冠。尊瞻視。儼若思。不敢慢之謂。俯詢云云。以若謏見寡聞。尋常士禮。猶且茫昧。況於諸侯之禮乎。然夫出後子之於所生。生不敢父。死不敢禰。服不敢三年。況以公子之子。而入承大統乎。是以有公朝禮。有家人禮。公朝禮者。所以正公義也。家人禮者。所以伸私恩也。曺兄所謂創業之君。入繼之君。其禮不同者。得之而但不知入繼之君。亦不無家人禮耳。更詳之如何。 나갈……고하며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은 집을 나갈 때 반드시 어버이에게 가는 곳을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인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겨울에는……해드리는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무릇 자식이 된 예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이다."라고 보인다. 조존(操存)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마음이라는 것은 잡아 두면 있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는 것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 1 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의관을……하며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五美〕'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면 그 모습이 엄숙해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외경심을 갖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대목이 보인다. 《論語 堯曰》 생각하는……가지고 《예기》 〈곡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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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낙현【재성】에게 답함 答安樂賢【載性】 일전에 보내신 서신을 열어 본 이래로, 강습(講習)하는 즐거움이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저의 정성에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학습 과정이 정명(精明)하고 세밀하여 사람을 발전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기쁘고 다행스럽기가 실로 어떻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인하여 좁은 소견 한두 가지로 감히 다시 우러러 아뢰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학(下學) 운운한 것을, 노형(老兄)께서는 '상(上)', 하(下)' 2자를 도(道)와 기(器)로 인식하십니까, 아니면 도와 기의 경계를 이르는 것입니까? 만약 곧장 도와 기라고 말한다면 하(下)에는 정녕 형상(形象)과 방위(方位)가 있으며, 다만 도와 기의 경계라고만 한다면 상(上)에 이미 형상과 방위가 없는데 하(下)에만 형상과 방위가 있겠습니까. 성인은 이(理)와 기(氣)를 나눌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형이(形而)'107) 두 자를 쓰고 이와 기가 뒤섞일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상하(上下)' 두 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역(易)》에 처음 나타나고 《논어(論語)》에서 반복되었으니108)108) 《논어(論語)》에서 반복되었으니: 《논어》 〈헌문(憲問)〉의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라는 말을 가리킨다.그 경계가 매우 정밀합니다. 학자들은 단지 일상적인 인사(人事)에 종사하면서 행해야 하는 의리를 다하는 데 힘써서 격물 궁리(格物窮理)의 깊은 뜻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렇게 지극히 비근(卑近)한 곳으로 나가지만 지극히 고원(高遠)한 곳이 생생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어찌 현묘한 곳에 나아가는 것을 미리 근심하여 도와 기의 경계를 어지럽히겠습니까. 부디 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日前手存。披閱以還。不惟講習之樂。有以慰此期仰之誠。其盛課之精明詳密。有以開發人處。區區喜幸。實難名喩。因以一二菅見。敢復仰溷。幸見敎也。下學云云。老兄以上下二字。認爲道器耶。抑謂道器之界至耶。若是直說道器。則下固有形象方位。只是說道器界至。則上旣無形象方所。下獨有形象方所乎。聖人於理氣之不可分開處。下形而二語。於理氣之不可混雜處。下上下二字。始著於大易。反復於論語。此其界至極爲精密矣。學者但當從事於日用人事之間。務盡其當行之義。而不失其窮格之蘊。則卽此至近至卑而至高至遠者。躍如矣。豈有預憂玄妙之馳而亂道器之界至哉。千萬諒之。 형이(形而)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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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애 민 참판에 대한 제문 祭沙厓閔參判文 하늘이 현철(賢哲)을 내는 것은 장차 이 세상에 쓰이고 이 사람을 진작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순박한 시대 이후로 양(陽)의 덕이 점점 박해져 비록 이룰 수 있는 자질이 있어도 능히 이룰 수 있는 지위가 없습니다.오호라! 선생은 채와(菜窩)45)의 조카이고 매문(梅門)46)의 고제로 이른 나이에 뜻을 세워 출입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니, 문로가 바르고 확실하며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습니다. 이윽고 석갈(釋褐)47)하고 조정에 올라서는 명량(明良)48)이 서로 만났고, 만년에 높이 발탁되어 아경(亞卿)49)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도를 행할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또한 천년에 한 번 만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배회하며 오래지 않아 인년(引年)50)하였으니, 오호라! 그 덕이 있고 그 지위가 없으면 그만이지만, 그 덕이 있고 그 지위가 있는데 또한 당시에 행해짐이 있지 않았으니, 모르겠으나 하늘이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한번 다스려지는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까?돌아와 전원에 누워 문을 닫고 스스로 함양하며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과 왕복하며 강마하면서 나이가 부족한 줄도 몰랐습니다. 오호라! 이와 같은 희조(熙朝)51)의 명경(名卿)과 유문(儒門)의 장덕(長德)으로 유연히 남쪽 먼 곳 산곡(山曲)의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으나 인심을 감복시키고 세도를 진정시킨 것은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현철이 세상에 쓰이고 사람을 진작시키는 것은 비록 지위에 있지 않더라도 그 이로움과 은택이 미치는 것은 실로 차이가 없습니다.오호라! 지금은 끝나버렸으니, 이 세상의 무궁한 근심을 어찌하며, 후학들의 다하지 못하는 슬픔을 어찌하겠습니까! 天生賢哲。將爲需斯世而作斯人也。淳古以降。陽德浸薄。雖有可致之質。而無有能致之位。嗚呼。先生以菜窩從子。梅門高弟。早年立志。出入薰染。門路端的。造詣精深。旣而釋褐登朝。明良相遇。晩際升擢。至於亞卿。此不可謂非行道之任。而亦不可謂非千載之一會也。然逡巡徘徊。非久引年。嗚呼。有其德而無其位則己。有其德有其位。而亦未有見行於時。未知天下使民將復見一治之美耶。歸卧田廬。杜門自養。與蘆沙奇先生往復講磿。不知年數之不足。嗚乎。以若熙朝各卿。儒門長德。悠然歛跡於南荒山曲之間。而所以感服人心鎭定世道者。爲何如哉。然則賢哲之於需世作人。雖不在位。而其利澤之及。固無間也。嗚呼。今焉己矣。奈斯世無窮之憂。奈後學不盡之悲。 채와(菜窩) 민백우(閔百佑, 1779~1851)를 말한다. 호는 교채와(咬菜窩),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저서로는 《교채와유고》가 있다. 매문(梅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하를 말한다. 석갈(釋褐) 천한 자가 입는 모포(毛布)인 갈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함을 이른다. 명량(明良)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으로,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에서 고요(皐陶)가 제순(帝舜)에게 간언하기를 "원수가 현명하면 고굉이 어질어서 모든 일이 편안할 것입니다.[元首明哉, 股肱良哉, 庶事康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원수(元首)'는 임금을, '고굉(股肱)'은 신하를 비유한다. 아경(亞卿) 조선 시대 정경(正卿)인 판서(判書)에 버금간다는 뜻으로, 육조(六曹)의 참판(參判)과 그 동급의 벼슬을 이르는 말이다. 인년(引年) 늙어서 관직을 물러나는 치사(致仕)를 뜻한다. 희조(熙朝) 잘 다스려진 왕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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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록 후 소지 信從錄後小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논란하여 말하기를 "일신재(日新齋) 정 선생(鄭先生)이 세상을 떠난 뒤에 친필의 원집(原集)을 바로 간행하였는데, 위로 종유(從遊)한 큰 덕망을 지닌 분으로부터 아래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생도에 이르기까지 성씨와 이름, 지극한 말과 요체가 되는 가르침이 책 속에 환하게 드러나 있어 당대에 두루 유행하고 아래로 먼 후세에까지 전해 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직 마땅히 원집을 돈독히 믿어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선생의 마음을 느끼는 자는 이른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지극함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도리어 이 일을 거듭 설행한다면 아름다운 명예를 구한다는 폐단이 있다고 하면서 후세에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내가 말하기를 "아,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였으니3) 상을 치른 뒤에 짐을 챙겨 각자 돌아갔다. 처음에 다시 돌아와서 집을 짓고 홀로 더 거처한 자공(子貢)처럼4) 하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자하(子夏)처럼5)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성인의 의론도 70명 제자의 반열에서 금방 괴리되었는데, 더구나 성인이 떠나고 말씀은 사라져 극도로 괴란(壞亂)된 때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에 동문의 벗 박준기(朴準基) 씨가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동문들과 함께 해진 문권을 수집하여 행장(行狀) 및 언행(言行) 약간 편을 실어서 서권을 만들어 선사(先師)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의탁하였다. 또 후세에 우리 선사의 도덕과 광휘가 온축됨과 제자가 복종하고 믿고 따른 성대함을 알 수 있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란하던 자가 잘 알았다고 하고는 물러났다. 이에 글을 쓴다.정묘년(1927) 동짓날에 문인 풍산(豐山) 홍승환(洪承渙)이 삼가 기록한다. 有人難於余曰。日新齋鄭先生奠楹後。手墨原集在卽剞劂。上自從遊長德。下及親灸生徒。姓氏名啣與至言要訓。昭烈卷中。可以旁行於一時。下達於千世。則惟宜篤信原集。學先生之學。心先生之心者。可曰報答佛恩之至。而乃者疊設斯役。有不以好名要美之弊。議之於後歟。余曰。嗚呼。山樑旣頹。治任各歸。初不得子貢之反築。後未免子夏之離索。聖人議論。將乖于七十子之列。況聖遠言湮。壞亂極矣之日耶。此同門友朴準基氏。爲是之懼。乃與同門諸雅。裒粹摩擦。弁載行狀及言行略干。成編縹緗。以寓江漢無窮之思。且使來世有以知我先師道德光輝之蘊。與夫諸弟子思服信從之盛云爾。難者唯唯而退。於是乎書。丁卯陽復。門人豐山洪承渙謹識。 태산이……꺾였으니 훌륭한 스승의 죽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신재 정의림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가리킨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 하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려 하는구나. 철인이 시들려 하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읊조렸는데, 자공(子貢)이 이 소식을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는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는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다시……자공(子貢)처럼 공자가 별세했을 때 모든 문인(門人)들이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치른 다음 모두 짐을 챙겨 떠났으나, 자공(子貢)만은 다시 돌아와서 공자의 묘의 마당에 집을 짓고 홀로 3년을 더 거처하여 6년을 지낸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자하(子夏)처럼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가 말하기를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 또한 이미 오래되었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하였다.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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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홍107)에 대한 제문 祭鄭致弘文 백아(伯牙)의 거문고에 그 줄이 끊어지고108) 영근(郢斤)에 그 바탕[質]이 없으니,109) 이것은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정이 고르게 하기 어려운 곳이라, 천년동안 흘러 전해져도 오히려 느껴 아파하며 다하지 않는 뜻이 없을 수 없는데, 더구나 오늘날에 내 몸에서 직접 보았으니 어떠하겠는가.오호라! 나는 형에게 50년의 오랜 친구가 되네. 시절이 춥거나 따뜻할 때, 길흉사에 왕래할 때, 글 짓고 술 마시며 마음대로 놀 때, 상란(喪亂)에 달려가고 숨을 때에 더불어 서로 필요로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마치 보거(輔車)110)가 의지하는 것 같고 봉마(蓬麻)111)가 도와주는 것 같았는데, 더구나 지금 노쇠한 나이에 평소의 친구들을 봄에, 열에 여덟아홉이 죽었으니, 외롭게 서로 향하여 마주할 사람이 또 몇 이나 되겠는가. 형은 어찌하여 조금 더 살지 않고 나를 버리고 잊음이 이와 같이 갑작스러운가? 형은 1월 18일의 편지에서 이 달 안에 한 번 방문하겠다는 말이 있었고, 아우는 2월 7일 편지에서 봄이 다 가기 전에 한 번 만날 기약을 하였는데, 이 달 안의 약속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봄이 다 가기 전이 우리 두 사람이 영원히 작별할 때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병들었을 때 부축해 주지 못하였고, 죽었을 때 반함(飯含)112)도 못하였는데, 모습은 이미 감추어 유명 간에 영원히 막혔네. 제문을 지어 슬픔을 드러냄에 눈물이 쏟아지는 듯하니, 영령은 아시는지요? 牙琴之絶其絃。郢斤之無其質。此是物理人情之所難平處。而流傳千載。尙不無感傷不盡之意。況在今日而於吾身親見之乎。嗚呼。吾於兄爲五十年舊要也。時節寒暄。吉凶往來。文酒遊衍。喪亂奔竄。無不與之相須。如輔車之依。如蓬麻之助。況今衰暮之年。見平昔知舊。十亡八九。而煢煢相向。又其幾人乎哉。兄何爲不之少延。而棄我亡我。若是其遽耶。兄元月十八日書。有月內一枉之語。弟二月初七日書。有春暮前一穩之期。誰知月內之約。竟未見就。而春暮之前。爲吾兩人永別之辰耶。病未擧扶。歿未飯含。儀形已閟。幽明永隔。操文泄哀。淸血如注。靈其知否。 정치홍(鄭致弘) 정기현(鄭琦鉉, 1844∼?)을 말한다. 자는 치홍, 호는 만취(晩翠),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백아(伯牙)의……끊어지고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이른 말이다. 춘추(春秋)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자기 음악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는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絶絃]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列子 卷5 湯問》 영근(郢斤)에……없으니 옛적에 영(郢)에 도끼질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의 코끝에다 백토(白土)를 조금 붙여두고 도끼질로 그 백토를 다 깎아내어도 코는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코를 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그의 기술을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코를 대주었다. 그뒤에 그 사람이 죽고 나자 도끼를 던지며, "이제는 나의 바탕이 죽었으니, 어디에 기술을 쓰랴."라고 하였다.《莊子 徐无鬼》 보거(輔車) 서로 긴밀히 의지하는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봉마(蓬麻) 봉생마중(蓬生麻中)의 준말로, 좋은 사람과 사귀면 절로 바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밭에서 자라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흰 모래가 검은 진흙 속에 있으면 진흙과 함께 검어진다.[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반함(飯含) 죽은 사람을 염습할 때에 입에다 구슬과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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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중에 대한 제문 祭文集仲文 오호라! 헤어지고 합함은 서로 의지하고 모이고 흩어짐은 서로 교대하네. 그러나 합하기는 어렵고 헤어짐은 쉬우며, 모이는 것은 짧고 흩어지는 것은 기니, 이 속진의 좋지 못한 기능과 덧없는 인생의 빚진 업보가 본래 이와 같은 것인가?지난 병술년(1886, 고종23)에 내가 그대 백씨(伯氏)와 무등산[瑞石山]에서 바람 쐬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와 강론할 집을 마련하여 끊임없이 왕래할 계획을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가 나를 버리고 돌아가시어 그 전형이 아우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은 오히려 붕우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있었네. 이번 을미년(1895, 고종32) 봄에 내가 성동(星洞)에서 가천(佳川)으로 공을 따라 가 이웃을 맺어 노년을 보내며 갚지 못한 오랜 빚을 보상하려 하였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은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는데 인하여 병마에 시달리다가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네.오호라! 서로 알았던 날을 손꼽아보니 지금 30여 년이 아니던가? 1년에 한 번 보거나 혹 두 번 보았고, 서로 보았던 시간 또한 하루 이틀에 불과 하였네. 이것으로 계산해 보면 이른바 30년이라는 것은 그 실상은 단지 2, 3개월에 불과할 따름이네. 세상에 살아 있을 대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각자 저승과 이승으로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으니 어떠하겠는가. 어찌 합하기는 어렵고 헤어짐은 쉬우며 모이는 것은 짧고 흩어지는 것은 긴 것인가?백수의 노쇠한 나이에 벗들은 신성(晨星)152)이 되어, 들어가서는 지낼 곳이 없고 나가서는 갈 곳이 없으니, 외롭고 쓸쓸한 처지 이 무슨 신세인가? 근래 보건대 영정(詠亭)153)에서 종유하던 이가 죽은 사람이 20여 명인데 모두 내보다 나이가 적으니, 나는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오래도록 죽지 않고 있는가? 생각건대 반드시 오래지않아 공의 백씨 중씨와 함께 저승에서 만나 기쁘게 교유하면서 다시는 이별하는 한이 없을 것이니, 누가 저승 또한 인간세상과 같다고 말하는가? 嗚呼離合相倚。聚散相襌。然合之難而離之易。聚者短而散者長。此塵海伎倆。浮生債業。本自如是耶。曩在丙戊。余與尊伯氏。風詠瑞石。歸開講社。爲源源之規。居無幾何。伯氏棄我而逝。其典刑之存於季難者。猶有可以慰朋友之望。是於乙未春。余自星洞從公于佳川。爲結隣終老。以償宿債之未了者矣。未幾公搬移他所。因爲二竪所苦。而竟至不起。嗚呼。屈指相知。今非三十餘年耶。一年而一。或再相見。其相見之頃。亦不過一兩日。以此計之。所謂三十年者。其實只是兩三月而已。生在世間。猶尙如此。況一幽一明而終天爲別乎。何合之難而離之易。聚之短而散之長耶。白首頹齡。知舊晨星。入無所寓。出無所適。踽踽凉凉。此何景色。近見詠亭從遊爲鬼者。二十餘人。而皆吾年下。則我獨何人。久無此行耶。想必非久。而與公伯仲。相遇於泉臺。驩然交遊。無復分離之恨。誰謂泉臺亦如人間世耶。 신성(晨星) 새벽별이라는 뜻인데, 벗들이 잇달아 죽어 마치 새벽별처럼 얼마 남지 않았음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송장관부거병인(送張盥赴擧幷引)〉에 "옛날에 함께 급제했던 벗들과 어울려 노닐 적에는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마치 병풍처럼 대로를 휩쓸고 돌아다녔는데, 지금 와서는 마냥 쓸쓸하기가 새벽 별빛이 서로들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기만 하다.[嚮所謂同年友, 當其盛時, 聯袂齊鑣, 亘絶九衢, 若屏風然, 今來落落, 如晨星之相望.]"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영정(詠亭) 영귀정(詠歸亭)으로, 정의림(鄭義林)이 강학을 위해 1893년 12월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會松里)에 건립한 건물이다. 여기에 아홉 성인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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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病中 좁은 도랑 건너는 게 마치 큰 바다와 같고 尺渠涉若大洋洲평지의 위태로움이 흡사 백척 누대와 같구나 平地危如百尺樓육신은 괴로운 매화처럼 되니 온몸이 수척하거니와 身作苦梅全體瘦정신은 짙은 안개에 빠진 듯하니 언제나 수습할꼬 神沈大霧幾時收어찌 생각했으랴 세월 따라 고황261)이 깊어질 줄을 豈料膏肓深歲月모두가 허물과 악행을 산처럼 쌓았기 때문이라네 總緣咎惡積山丘편한 마음으로 저승사자 오기를 기다릴 뿐이니 安心只待符到已서글픈 뜻이 어찌 한 점이라도 일어난 적이 있으랴 怛意何曾一點浮수는 육십육 세에 이르렀는데 壽到六十六병은 사백 네 가지262)를 겸하였다오 病兼四百四세속의 정은 노년인 줄만 알고 世情知老年저잣거리의 도263)는 처자식만 중시한다네 市道見妻子적막한 대문 앞엔 그물이 드리워지고264) 寂寂門羅垂깊고 깊은 정원엔 풀이 푸른빛을 띠네265) 深深庭草翠책 속에 좋은 스승과 벗이 있으니 卷中師友存이내 그리움을 달래줄 만하다오 卽可慰吾思쇠병함은 노인의 상사라고 누가 말했던가 誰云衰病老人常칠순에도 못 이르러 갑자기 이렇게 되었구나 未到稀齡遽此當오래 앓은 중풍으로 반벙어리가 되었고 積歲中風成半啞두 눈의 흐릿함으로 온전한 모습을 못 본다오 雙眸翳霧昧全光삼복 무더위에도 이불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褥衾不離三庚節적은 곡식으로도 수일의 양식을 댈 수 있다네 升合能支數日粮괴이해라 아침 이슬 마르듯이 죽는 게 더디니 怪底猶遲朝露溘정신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길 바라노라 神精倘有一毫芒 尺渠涉若大洋洲, 平地危如百尺樓.身作苦梅全體瘦, 神沈大霧幾時收?豈料膏肓深歲月? 總緣咎惡積山丘.安心只待符到已, 怛意何曾一點浮?壽到六十六, 病兼四百四.世情知老年, 市道見妻子.寂寂門羅垂, 深深庭草翠.卷中師友存, 卽可慰吾思.誰云衰病老人常? 未到稀齡遽此當.積歲中風成半啞, 雙眸翳霧昧全光.褥衾不離三庚節, 升合能支數日粮.怪底猶遲朝露溘, 神精倘有一毫芒. 고황(膏肓) 심장과 횡격막(橫膈膜) 사이가 고(膏)와 황(肓)으로 여기에 병이 나면 치료가 어렵다 하여 불치병 또는 고질병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의 꿈에 병마(病魔)가 두 아이[二豎]의 모습으로 나타나 고황 사이에 숨는 바람에 끝내 병을 고칠 수 없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成公10年》 사백 네 가지 사람은 오장(五臟)에 각각 81종의 병이 있어 그 총수가 405종의 병이 되는데, 여기에서 죽음[死]을 하나 빼면 404종의 병이 된다는 불가어(佛家語)에서 온 말이다. 저잣거리의 도(道) 원문의 시도(市道)는 시정(市井) 상인들이 이익만을 추구하는 도를 이른다. 적막한……드리워지고 그물은 참새 잡는 그물로, 찾아오는 빈객이 전혀 없어 참새 잡는 그물을 펼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정(門庭)이 적막하다는 뜻이다. 한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에는 빈객이 서로 찾아오는 바람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가, 파직된 뒤에는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아 대문 앞에 참새 잡는 그물을 칠 정도[門外可設雀羅]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깊은……띠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畫像贊)〉에 주돈이(周敦頤)의 인품과 기상을 기리기를 "맑은 바람 밝은 달은 끝없이 펼쳐지고, 뜰 가운데의 풀은 무성히 푸르렀네.[風月無邊, 庭草交翠.]"라고 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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