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당 김공 행장 병자년(1936) 構述堂金公行狀【丙子】 공의 휘는 용헌(龍憲), 자는 덕중(德中), 호는 구술당(構述堂)이다. 언양(彦陽) 김씨는 계통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여섯 번째 아들에서 나왔다. 휘 선(鐥)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대로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니, 휘 취려(就礪)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휘 전(佺)은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휘 변(賆)은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휘 윤(倫)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휘 경직(敬直)은 본조에 들어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휘 복생(福生)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휘 윤(潤)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휘 약흠(若欽)에 이르러 한양에서 호남의 고부(古阜)로 이사하여 거처하였으니, 비록 존귀하고 현달함은 이전보다 덜하였지만 또한 벼슬아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충효와 예의로 군수에게 알려졌다.5대인 봉사 휘 선명(善鳴)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인륜이 무너진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6대인 도헌(蹈軒) 휘 태운(泰運)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화가 맺어진 뒤에 벼슬하지 않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이로부터 대대로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국려(菊廬) 휘 용(墉)은 상을 당해 여묘 살이를 하였는데, 국화가 묘 앞에서 자랐다. 송곡(松谷) 휘 만상(萬祥)은 어버이 병에 하늘에 기도하여 곧바로 기이한 효과를 보았다. 현곡(玄谷) 휘 명(溟)은 성리에 잠심하였으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영모재(永慕齋) 휘 주성(柱成)은 효성으로 뇌우를 감동하여 송충이를 쓸어버리는 기이한 일이 있었으며, 또한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지금까지 공의 증조 이상이다.조부의 휘는 신(賮) 호는 성재(省齋)로, 효성과 학문은 선조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다. 부친의 휘는 재행(栽行)이다. 생부의 휘는 재영(栽瑛) 호는 송암(松菴)으로 내행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중형(仲兄)이 일찍 죽어 후손이 없자 공으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비는 이천(利川) 서씨(徐氏) 취학(就學)의 따님이다. 문화(文化) 유씨(柳氏)의 따님이 공의 생모이다.공은 정조 을묘년(1795년) 12월 29일에 고부(古阜)의 송산리(松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쌓은 덕을 계승하고 돈후한 자질을 품부 받았다. 입으로 시와 예의 글을 외우고 마음에는 영화와 이익의 생각을 끊어버렸으며, 다만 의리를 숭상하고 실질을 힘썼으며, 모든 행위가 사군자(士君子)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적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안한 것은 정성을 다해 선조를 받드는 것을 평생의 큰 일로 삼았으니, 이른바 '효도가 백행의 근원이며 인을 행하는 근본이란 것'을 공이 실제로 실천하였으며 이에서 여러 선들이 나왔다.부친과 조부를 장사지낼 곳을 여러 해 동안 구하였으니 멀리는 7사(舍)33)를 벗어나기도 하였는데, 묘소를 정한 곳은 끝내 길지를 택하였다. 대종, 소종계를 만들어 부지런히 그 일을 주관하여 재물을 불려서 논 20마지기 이상을 사들였다. 해마다 소작세를 거둬서 각처의 친진(親盡)34)한 묘소를 지키거나 제사지내는 도구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오래 유지할 방도로 삼았다. 도헌(蹈軒) 이하 여러 선조의 전할 만한 행적은 천 리에 발을 부릅뜨더라도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청하여 묘소에 비석을 세웠으니, 석물(石物)을 갖추지 않는 묘소가 없었다. 방친의 조상에게도 또한 각각 제전(祭田)을 마련하였으니, 모든 선조를 섬기는 일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갖춰 유감이 없게 하였다. 또한 나머지를 미뤄서 종족 가운데 빈궁한 자의 혼인과 장례, 교육의 비용으로 나눠 지급하였으며, 이를 전하여 전례(典例)로 삼게 하였으니, 대개 그가 종신 근검하여 이미 자신의 업을 이루었고 인하여 종물(宗物)을 넉넉하게 한 것은 참으로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만년에 직접 집터를 잡아 자손들이 대대로 전하며 거처할 곳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라고 하였으니, 그가 풍수지리까지 두루 통달함이 이와 같았다. 조목으로 가법을 정해 매번 여러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고하였으니, 그 요점을 들어보면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를 돈독하게 하며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학문에 힘쓰며 교만과 사치를 버리고 부지런하고 우졸함을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이 친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바로잡은 대략이다. 맹자는 "군자는 창업수통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잇게 한다."35)고 하였으니 공을 김씨 일문에 후대에 이어 나갈 통서(統緖)를 드리운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 그르겠는가. 지금 비록 바다가 뽕밭으로 변한 세상이지만 선조를 생각하고 자신의 뿌리에 힘쓰면서 정성을 다해 엄숙하게 공경하여 세속과 다르게 행하매, 사람들이 '송산의 김 아무개'라고 칭송하니 이에서 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철종 경신년(1860년) 9월 14일에 공이 돌아가셨으니, 정읍군(井邑郡) 내산면(山內面) 원덕리(院德里) 안산 토지등(兎只嶝) 해좌(亥坐)의 언덕이 공의 묘소이다. 첫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한응(漢膺)의 따님으로 공과 합봉하였으며, 둘째 부인은 연안 이씨 도풍(度豊)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와 같은 언덕에 있다. 아들 세열(世烈)은 준수하고 총명하고 강단이 있어서 능히 집안을 잘 다스렸으니, 첫 부인의 소생이다. 세훈(世勳)은 효행이 있었으며, 막내는 세형(世亨)이다. 딸들은 여흥(驪興) 민주호(閔周鎬)와 충주(忠州) 박원항(朴源恒)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둘째 부인 소생이다. 세열의 아들로 진사 원석(源錫)은 의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존모하여 더욱 집안의 명성을 날렸다. 봉석(奉錫)과 홍석(弘錫)과 기석(璣錫)이 있는데, 기석은 남의 후사가 되었다. 세훈의 아들로 형석(炯錫)이 있고, 딸들은 문화(文化) 유병철(柳炳喆), 연일(延日) 정희원(鄭喜源), 해평(海平) 윤계선(尹桂善)에게 시집갔다. 세형은 기석을 양자로 들였고, 딸들은 전주(全州) 이호선(李鎬善), 전주(全州) 최경렬(崔暻烈), 울산(蔚山) 김희수(金希洙), 의령(宜寧) 남정옥(南廷玉)에게 시집갔다. 사위 민주호의 아들은 영욱(泳旭)이며, 사위 박원항의 아들은 판주(判柱)와 정주(定柱)가 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이 타계한지 지금 팔십 년이나 오래 되었다. 이미 당시에 행장을 짓지 못하였으니 용모와 기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언론과 사적도 또한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지금 공의 증손 한경(漢鏡), 현손 구상(求相), 5대손 성학(成學)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니, 참으로 죽은 뒤에 진영(眞影)을 뒤미처 그림에 그 비슷한 모습을 얻기 어려운 것과 같다. 더구나 나의 졸렬한 문장으로 말인가. 그러나 동향의 후생으로 유풍에 대해 익숙히 들었으며 정의(情誼) 또한 사양할 수 없다. 이에 《세보》 중에 기록한 것과 여러 후손들이 구전한 것을 선술(選述), 편차한 뒤 글을 지어서 입언가가 재택하기를 대비한다. 公諱龍憲, 字德中, 號構述堂.彦陽之金, 系出新羅敬順王第六子.諱鐥以麗太祖外孫, 封彦陽君.歷世大顯, 有諱就礪, 平章事, 謚威烈.諱佺, 平章事, 謚翊戴.諱賆, 集賢殿學士, 謚文愼.諱倫, 左議政, 謚貞烈.諱敬直, 入本朝大提學, 贈右議政, 謚忠敬.諱福生, 工曹典書.諱潤, 吏曹參判, 至寶城郡守.諱若欽, 自漢師居湖南之古阜, 雖貴顯遜于前, 亦簪組不絶, 而以忠孝禮義聞郡守.五世而奉事諱善鳴, 光海時棄官居鄕, 痛彛倫之斁傷.六世而蹈軒諱泰運, 丙子亂擧義旅, 媾成後不仕, 明春秋大義, 自是連世行誼.菊廬諱墉, 遭艱廬墓, 菊生墓前.松谷諱萬祥, 親癠禱天, 輒得奇效.玄谷諱溟, 潛心性理, 遊學于遂庵權先生門.永慕齋諱柱成, 孝感雷雨, 致剝掃松蟲之異, 亦以學問著名, 公之曾祖以上也.祖諱賮號省齋, 孝學承先懿.考諱栽行.生父諱栽瑛號松菴, 內行淳篤, 仲兄早歿無嗣, 以公系後, 妣利川徐氏就學女.文化柳氏女, 其所生也.公以正廟乙卯十二月二十九日, 生于古阜之松山里第, 承積累之世德, 稟敦厚之天資, 口講詩禮之文, 心絶榮利之念, 惟義是尙, 惟實是勉, 動靜云爲, 有不遵士君子規模者蓋募.而最是竭誠奉先爲生平大致, 則所謂孝爲行源仁本者, 公實有之, 而爲衆善之出也.父祖葬地, 積年求之, 遠則出七舍之外, 佳城之占, 竟多獲吉.立大小宗契, 勤幹殖聚, 買得水田二十頃以上, 歲收佃稅, 優備各處親盡內外墓守護享祀之具, 爲久遠計.蹈軒以下累位之行治可傳者, 趼足千里, 謁文名家, 顯刻斧堂, 儀物之備, 則無墓無之.至傍親位, 亦爲各置祭田, 凡於先事, 旣皆豊美無憾.又推羨餘, 分助宗族貧窮者婚葬敎學之用, 傳以爲例, 蓋其終身勤儉, 旣致己業, 因贏宗物者, 亶爲此用也.晩年親占宅基, 爲子孫傳世之居, 人咸稱爲名基, 其旁通堪輿之術如此.條定家法, 每會衆子姪告之, 大要若曰: "正倫理, 篤恩義, 誠祭祀, 勤學問, 去驕奢, 守謹拙." 此又公保族宜家之略也.孟子曰: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公謂之垂可繼之統於金氏一門者, 非耶.今雖滄桑變遷之餘, 念先務本, 恂恂秩秩, 異於俗習者, 人稱松山之金, 斯可以知公矣.哲廟庚申九月十四日, 公之考終, 井邑郡山內面院德里案山兎只嶝亥坐原, 其藏也.前配延安李氏漢膺女祔公合封, 後配延安李氏度豊女, 公墓同原.男世烈, 秀偉明斷能克家, 前配出, 世勳, 有孝行, 世亨.女適驪興閔周鎬·忠州朴源恒後配出.長房男源錫進士, 好義慕賢, 益揚家聲, 奉錫·弘錫, 璣錫出系.次房男炯錫, 女文化柳炳喆·延日鄭喜源·海平尹桂善.三房系男璣錫, 女全州李鎬善·全州崔暻烈·蔚山金希洙·宜寧南廷玉.閔壻男泳旭, 朴婿男判柱·定柱.曾玄以下不盡書.嗚呼, 距公之沒, 爲八十年之久矣.旣未及狀行於當日, 則容貌氣像, 不可以想度, 言論事蹟, 亦無有詳說者.今於公之曾孫漢鏡玄孫求相五代孫成學之請余狀也, 正如身後之追寫眞像, 難得其髣髴, 矧以余之文拙乎.然爲同鄕後生, 習聞遺風, 而誼亦有不敢辭者.乃摭述《世譜》中所錄及諸後孫口傳, 纂次成文, 以備立言家裁擇之資云爾. 사(舍) 거리 단위로 일사는 30리이다. 친진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된 것을 이른다. 군자는……한다 《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에 보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