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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용강 송공의 행장 경인년(1950) 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龍岡宋公行狀【庚寅】 어느 날, 송흥진(宋興鎭) 군이 광산(光山)에서 찾아와서 자신의 5대조 용강공(龍岡公)의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의 족형 우진(宇鎭), 사익(士翼)이 함께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사익은 단정한 선비이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랴. 이에 가장(家狀)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공의 휘는 인하(寅夏), 자는 군칠(君七)이며, 그 선조는 홍주(洪州) 사람이다. 시조의 휘는 계(桂)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세상에서 은둔하여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았던 두문동(杜門洞) 제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에 들어와 휘 평(枰)은 별시위(別侍衛)를 지냈으며, 휘 기손(麒孫)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휘 구(駒)는 열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청덕비가 세워졌다. 휘 정황(庭篁)은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으며, 휘 제민(齊民)은 호가 해광(海狂)으로 임진란 때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휘 타(柁)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또한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이상이 공의 5대조이다. 휘 수(燧), 연(烻), 석견(錫堅), 해흠(海欽) 등은 공으로부터 위로 4대인데, 대대로 학문과 행실이 갖추었다. 선비(先妣)는 함평(咸平) 노씨 일(鎰)의 따님으로 덕과 지식을 갖추었으며, 규방의 법도가 엄정하였다.공은 경종(景宗) 갑진년(1724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육적(六籍)과 제자백가를 많이 외웠으며 이따금 중요한 뜻을 초선(抄選)하여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법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때 뜻과 몸을 모두 잘 받들었고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변(便)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여, 병이 나으면 이에 그만 두었다. 술(戌)과 자(子)년 가을에 거듭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애곡(哀哭)하며 가슴을 치다가 기절한 것이 여러 차례이며, 염습을 하고 빈소를 차리며 음식을 올려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힘써서 예에 맞춰 거행하였다. 이윽고 장사 지낸 뒤에 묘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곡을 하니 눈물이 흐르는 곳에 풀이 시들었으며 무릎을 댄 곳은 구덩이가 파였다. 손수 심은 소나무가 묘소를 덮어 보호하고 온 산이 울창하였는데, 병충해가 잎을 갈아먹어 사람의 힘으로는 금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이 글을 지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숲을 돌아다니며 울부짖으니, 문득 까치 떼가 날아와 벌레를 쪼아대니 얼마 되지 않아 충해가 멈췄다. 산 아래 사람들이 지금도 미담으로 전하고 있다.일찍이 한양에 들어가 교유하던 사람들을 두루 만났는데, 모두 그의 풍모와 위의를 사랑하고 그 국량을 중시하면서 "호남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일찍이 한번도 권문세가에 가까이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의를 행함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도사(道司)가 선비를 추천할 때 공도 또한 그 안에 들어갔다.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법으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니, 정조 을묘년(1795년)이었다. 공은 덕이 없는데 성은을 받았다고 여겨 황공하며 감격한 뜻을 자주 시문에 드러내었다.등룡산(登龍山) 아래 선영의 곁에 집을 지어 용강정사(龍岡精舍)라 편액한 뒤에 서적을 사서 쌓아두고서 날마다 고을의 벗이나 이웃의 제자들과 학문과 예에 대해 논하였으니, 세상에 득실이나 영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손수 가문의 규범 한 권을 써서 해마다 한 번 제사 지내는 제수와 친족의 집과 관의 재목을 직접 심은 소나무 숲에서 마련하게 하였으니, 정연하게 조리가 있어 대대로 지켜 쇠퇴하지 않고 그대로 지키게 하였다.신유년(1801년)에 공의 나이 78세였는데, 아름다운 안색에 학 같은 머리카락이어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다. 숙부인과 해로하여 자손들이 회근연(回巹宴)을 여니 많은 사우들이 시로 읊어 감탄하였다. 향년 81세인 순조 갑자년(1804년) 정월 2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광주(光州) 대촌면(大村面) 등룡산 북쪽 산기슭 곤좌(坤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은 철원 주씨(鐵原周氏) 욱(頊)의 따님으로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묘는 분토산(粉土山) 유향(酉向)에 있다. 세 아들은 일영(日榮)과 일제(日躋)와 일선(日璿)이다. 장남은 아들이 없어 의규(懿奎)를 양자로 들였다. 둘째는 심규(心奎), 대규(大奎), 생규(生奎)를 낳았다. 셋째는 도규(道奎), 출계한 의규, 내억(來億), 내만(來萬)을 낳았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은 천성에 바탕한 효도로 봉양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으며, 선영의 소나무를 잘 길러 신령한 까치를 감동시켜 벌레를 쪼아 먹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으며, 실제의 학문으로 도를 강론하여 스스로 즐겨 도사의 추천을 받았으며, 선을 쌓은 몸으로 수작(壽爵)의 영광과 회근(回巹)의 경사를 누렸으니, 이는 참으로 공의 덕을 징험할 수 있다. 해광 선생(海狂先生)32)이 〈만언소(萬言疏)〉, 〈와신기(臥薪記)〉, 〈명경제대책(明經濟大策)〉, 〈복수대의(復讐大義)〉 등을 저술하였지만 그 뜻을 행하지는 못하였는데, 선생으로부터 공까지는 6대로 유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이 한양에 들어가 벗들을 두루 만난 것은 선생의 뜻 아님이 없다. 당시 교유했던 이들이 공의 국량을 중시하였으니 또한 의리와 계책을 행할 수 없지 않았는데, 한번도 권문세가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자신을 굽혀 쓰이기를 구하지 않는 선생의 법문이다. 이것은 선조의 뜻과 일을 계술하는 효도가 되니 더욱 기록할 만하다. 日, 宋君興鎭, 自光山來, 謁其五世祖龍岡公狀行文, 因其族兄宇鎭士翼共爲介.士翼莊士也, 吾何敢辭諸.乃按家狀而敘之曰: "公諱寅夏字君七, 其先洪州人.始祖諱桂, 以高麗侍中, 麗亡遯居罔僕, 杜門洞諸賢之一也.入韓朝, 有諱枰, 仕爲別侍衛, 諱麒孫司憲府監察, 諱駒歷郡十二, 皆有淸德碑.諱庭篁, 文科, 弘文正字, 諱齊民號海狂, 壬辰亂, 與金文烈高忠烈倡義旅, 贈司憲府持平.諱柁, 宣武原從功臣, 亦贈持平.公之五世以上.諱燧烻錫堅海欽, 其四世, 世傳文行, 妣咸平魯氏鎰女, 有德識, 閫範嚴正.公以景宗甲辰生, 自幼聰敏, 六籍百家, 多所通念, 往往抄選要義, 爲修身治家之用.事親志體俱養, 愛敬備至, 親癠嘗糞祝天, 癠平乃已.戌子秋, 荐遭兩喪, 哭擗絶蘇者屢, 而斂殯饋奠, 必自强如禮.旣葬, 廬墓, 晨夕伏哭, 淚處草枯, 膝處坎成.手植松庇幽宅, 滿山蓊蔚, 而蟲災傷葉, 人力莫禁, 公爲文祭神, 巡林號哭, 忽有群鵲來啄, 不日災息, 山下人至今傳爲美談.嘗入京周觀交遊, 皆愛其風儀, 重其器局曰: "湖南乃有此人也." 然不曾一近權門, 歸來故山, 以講學行義爲樂.至於道司薦士, 公亦與焉, 朝家以優老典, 授以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 時正祖乙卯也.公以無德受恩, 惶恐感激之意, 屢見於詞章.築室登龍山下先塋側, 扁曰'龍岡精舍', 貿貯書籍, 日與鄕朋隣子, 論文談禮, 若不知世間有得喪榮辱焉.手寫門規一卷, 歲一薦祀之供, 族人屋棺之材, 自手植松中辨給, 井井有條, 俾世守無替.辛酉之歲, 公年七十八, 韶顔鶴髮, 望若神仙, 淑夫人偕老, 子孫爲設回巹宴, 士友多以詩咏歎之.享年八十一, 而純祖甲子正月二日終, 墓光州大村面登龍山北麓坐坤原.配鐵原周氏頊女, 生與公同年, 歿後公四年, 墓粉土山酉向.三男, 日榮·日躋·日璿.長房無男, 懿奎繼.二房生心奎·大奎·生奎.三房生道奎·懿奎出·來億·來萬.曾玄以下不錄.嗚呼, 公以根天之孝, 養送以禮, 護養丘松, 感靈鵲啄蟲之異, 以實地之學, 講道自樂, 得道司之薦, 以積善之躳, 致壽爵之榮, 回巹之慶, 是固所以徵公之德也.海狂先生著〈萬言疏〉〈臥薪記〉〈明經濟大策〉〈復讐大義〉, 而不得行其志, 自先生至公六世, 而澤猶不斬, 其入京周觀, 未嘗非先生之志也.當時交遊, 重其器局, 則亦未嘗無義與策之可行, 而一不近權門者, 先生不枉己求售之法門也.是爲繼述先祖志事之孝, 而尤可書者也." 해광 선생 이름은 제민(齊民)으로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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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당 김공 행장 병자년(1936) 構述堂金公行狀【丙子】 공의 휘는 용헌(龍憲), 자는 덕중(德中), 호는 구술당(構述堂)이다. 언양(彦陽) 김씨는 계통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여섯 번째 아들에서 나왔다. 휘 선(鐥)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대로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니, 휘 취려(就礪)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휘 전(佺)은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휘 변(賆)은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휘 윤(倫)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휘 경직(敬直)은 본조에 들어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휘 복생(福生)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휘 윤(潤)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휘 약흠(若欽)에 이르러 한양에서 호남의 고부(古阜)로 이사하여 거처하였으니, 비록 존귀하고 현달함은 이전보다 덜하였지만 또한 벼슬아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충효와 예의로 군수에게 알려졌다.5대인 봉사 휘 선명(善鳴)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인륜이 무너진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6대인 도헌(蹈軒) 휘 태운(泰運)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화가 맺어진 뒤에 벼슬하지 않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이로부터 대대로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국려(菊廬) 휘 용(墉)은 상을 당해 여묘 살이를 하였는데, 국화가 묘 앞에서 자랐다. 송곡(松谷) 휘 만상(萬祥)은 어버이 병에 하늘에 기도하여 곧바로 기이한 효과를 보았다. 현곡(玄谷) 휘 명(溟)은 성리에 잠심하였으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영모재(永慕齋) 휘 주성(柱成)은 효성으로 뇌우를 감동하여 송충이를 쓸어버리는 기이한 일이 있었으며, 또한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지금까지 공의 증조 이상이다.조부의 휘는 신(賮) 호는 성재(省齋)로, 효성과 학문은 선조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다. 부친의 휘는 재행(栽行)이다. 생부의 휘는 재영(栽瑛) 호는 송암(松菴)으로 내행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중형(仲兄)이 일찍 죽어 후손이 없자 공으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비는 이천(利川) 서씨(徐氏) 취학(就學)의 따님이다. 문화(文化) 유씨(柳氏)의 따님이 공의 생모이다.공은 정조 을묘년(1795년) 12월 29일에 고부(古阜)의 송산리(松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쌓은 덕을 계승하고 돈후한 자질을 품부 받았다. 입으로 시와 예의 글을 외우고 마음에는 영화와 이익의 생각을 끊어버렸으며, 다만 의리를 숭상하고 실질을 힘썼으며, 모든 행위가 사군자(士君子)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적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안한 것은 정성을 다해 선조를 받드는 것을 평생의 큰 일로 삼았으니, 이른바 '효도가 백행의 근원이며 인을 행하는 근본이란 것'을 공이 실제로 실천하였으며 이에서 여러 선들이 나왔다.부친과 조부를 장사지낼 곳을 여러 해 동안 구하였으니 멀리는 7사(舍)33)를 벗어나기도 하였는데, 묘소를 정한 곳은 끝내 길지를 택하였다. 대종, 소종계를 만들어 부지런히 그 일을 주관하여 재물을 불려서 논 20마지기 이상을 사들였다. 해마다 소작세를 거둬서 각처의 친진(親盡)34)한 묘소를 지키거나 제사지내는 도구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오래 유지할 방도로 삼았다. 도헌(蹈軒) 이하 여러 선조의 전할 만한 행적은 천 리에 발을 부릅뜨더라도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청하여 묘소에 비석을 세웠으니, 석물(石物)을 갖추지 않는 묘소가 없었다. 방친의 조상에게도 또한 각각 제전(祭田)을 마련하였으니, 모든 선조를 섬기는 일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갖춰 유감이 없게 하였다. 또한 나머지를 미뤄서 종족 가운데 빈궁한 자의 혼인과 장례, 교육의 비용으로 나눠 지급하였으며, 이를 전하여 전례(典例)로 삼게 하였으니, 대개 그가 종신 근검하여 이미 자신의 업을 이루었고 인하여 종물(宗物)을 넉넉하게 한 것은 참으로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만년에 직접 집터를 잡아 자손들이 대대로 전하며 거처할 곳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라고 하였으니, 그가 풍수지리까지 두루 통달함이 이와 같았다. 조목으로 가법을 정해 매번 여러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고하였으니, 그 요점을 들어보면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를 돈독하게 하며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학문에 힘쓰며 교만과 사치를 버리고 부지런하고 우졸함을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이 친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바로잡은 대략이다. 맹자는 "군자는 창업수통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잇게 한다."35)고 하였으니 공을 김씨 일문에 후대에 이어 나갈 통서(統緖)를 드리운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 그르겠는가. 지금 비록 바다가 뽕밭으로 변한 세상이지만 선조를 생각하고 자신의 뿌리에 힘쓰면서 정성을 다해 엄숙하게 공경하여 세속과 다르게 행하매, 사람들이 '송산의 김 아무개'라고 칭송하니 이에서 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철종 경신년(1860년) 9월 14일에 공이 돌아가셨으니, 정읍군(井邑郡) 내산면(山內面) 원덕리(院德里) 안산 토지등(兎只嶝) 해좌(亥坐)의 언덕이 공의 묘소이다. 첫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한응(漢膺)의 따님으로 공과 합봉하였으며, 둘째 부인은 연안 이씨 도풍(度豊)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와 같은 언덕에 있다. 아들 세열(世烈)은 준수하고 총명하고 강단이 있어서 능히 집안을 잘 다스렸으니, 첫 부인의 소생이다. 세훈(世勳)은 효행이 있었으며, 막내는 세형(世亨)이다. 딸들은 여흥(驪興) 민주호(閔周鎬)와 충주(忠州) 박원항(朴源恒)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둘째 부인 소생이다. 세열의 아들로 진사 원석(源錫)은 의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존모하여 더욱 집안의 명성을 날렸다. 봉석(奉錫)과 홍석(弘錫)과 기석(璣錫)이 있는데, 기석은 남의 후사가 되었다. 세훈의 아들로 형석(炯錫)이 있고, 딸들은 문화(文化) 유병철(柳炳喆), 연일(延日) 정희원(鄭喜源), 해평(海平) 윤계선(尹桂善)에게 시집갔다. 세형은 기석을 양자로 들였고, 딸들은 전주(全州) 이호선(李鎬善), 전주(全州) 최경렬(崔暻烈), 울산(蔚山) 김희수(金希洙), 의령(宜寧) 남정옥(南廷玉)에게 시집갔다. 사위 민주호의 아들은 영욱(泳旭)이며, 사위 박원항의 아들은 판주(判柱)와 정주(定柱)가 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이 타계한지 지금 팔십 년이나 오래 되었다. 이미 당시에 행장을 짓지 못하였으니 용모와 기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언론과 사적도 또한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지금 공의 증손 한경(漢鏡), 현손 구상(求相), 5대손 성학(成學)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니, 참으로 죽은 뒤에 진영(眞影)을 뒤미처 그림에 그 비슷한 모습을 얻기 어려운 것과 같다. 더구나 나의 졸렬한 문장으로 말인가. 그러나 동향의 후생으로 유풍에 대해 익숙히 들었으며 정의(情誼) 또한 사양할 수 없다. 이에 《세보》 중에 기록한 것과 여러 후손들이 구전한 것을 선술(選述), 편차한 뒤 글을 지어서 입언가가 재택하기를 대비한다. 公諱龍憲, 字德中, 號構述堂.彦陽之金, 系出新羅敬順王第六子.諱鐥以麗太祖外孫, 封彦陽君.歷世大顯, 有諱就礪, 平章事, 謚威烈.諱佺, 平章事, 謚翊戴.諱賆, 集賢殿學士, 謚文愼.諱倫, 左議政, 謚貞烈.諱敬直, 入本朝大提學, 贈右議政, 謚忠敬.諱福生, 工曹典書.諱潤, 吏曹參判, 至寶城郡守.諱若欽, 自漢師居湖南之古阜, 雖貴顯遜于前, 亦簪組不絶, 而以忠孝禮義聞郡守.五世而奉事諱善鳴, 光海時棄官居鄕, 痛彛倫之斁傷.六世而蹈軒諱泰運, 丙子亂擧義旅, 媾成後不仕, 明春秋大義, 自是連世行誼.菊廬諱墉, 遭艱廬墓, 菊生墓前.松谷諱萬祥, 親癠禱天, 輒得奇效.玄谷諱溟, 潛心性理, 遊學于遂庵權先生門.永慕齋諱柱成, 孝感雷雨, 致剝掃松蟲之異, 亦以學問著名, 公之曾祖以上也.祖諱賮號省齋, 孝學承先懿.考諱栽行.生父諱栽瑛號松菴, 內行淳篤, 仲兄早歿無嗣, 以公系後, 妣利川徐氏就學女.文化柳氏女, 其所生也.公以正廟乙卯十二月二十九日, 生于古阜之松山里第, 承積累之世德, 稟敦厚之天資, 口講詩禮之文, 心絶榮利之念, 惟義是尙, 惟實是勉, 動靜云爲, 有不遵士君子規模者蓋募.而最是竭誠奉先爲生平大致, 則所謂孝爲行源仁本者, 公實有之, 而爲衆善之出也.父祖葬地, 積年求之, 遠則出七舍之外, 佳城之占, 竟多獲吉.立大小宗契, 勤幹殖聚, 買得水田二十頃以上, 歲收佃稅, 優備各處親盡內外墓守護享祀之具, 爲久遠計.蹈軒以下累位之行治可傳者, 趼足千里, 謁文名家, 顯刻斧堂, 儀物之備, 則無墓無之.至傍親位, 亦爲各置祭田, 凡於先事, 旣皆豊美無憾.又推羨餘, 分助宗族貧窮者婚葬敎學之用, 傳以爲例, 蓋其終身勤儉, 旣致己業, 因贏宗物者, 亶爲此用也.晩年親占宅基, 爲子孫傳世之居, 人咸稱爲名基, 其旁通堪輿之術如此.條定家法, 每會衆子姪告之, 大要若曰: "正倫理, 篤恩義, 誠祭祀, 勤學問, 去驕奢, 守謹拙." 此又公保族宜家之略也.孟子曰: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公謂之垂可繼之統於金氏一門者, 非耶.今雖滄桑變遷之餘, 念先務本, 恂恂秩秩, 異於俗習者, 人稱松山之金, 斯可以知公矣.哲廟庚申九月十四日, 公之考終, 井邑郡山內面院德里案山兎只嶝亥坐原, 其藏也.前配延安李氏漢膺女祔公合封, 後配延安李氏度豊女, 公墓同原.男世烈, 秀偉明斷能克家, 前配出, 世勳, 有孝行, 世亨.女適驪興閔周鎬·忠州朴源恒後配出.長房男源錫進士, 好義慕賢, 益揚家聲, 奉錫·弘錫, 璣錫出系.次房男炯錫, 女文化柳炳喆·延日鄭喜源·海平尹桂善.三房系男璣錫, 女全州李鎬善·全州崔暻烈·蔚山金希洙·宜寧南廷玉.閔壻男泳旭, 朴婿男判柱·定柱.曾玄以下不盡書.嗚呼, 距公之沒, 爲八十年之久矣.旣未及狀行於當日, 則容貌氣像, 不可以想度, 言論事蹟, 亦無有詳說者.今於公之曾孫漢鏡玄孫求相五代孫成學之請余狀也, 正如身後之追寫眞像, 難得其髣髴, 矧以余之文拙乎.然爲同鄕後生, 習聞遺風, 而誼亦有不敢辭者.乃摭述《世譜》中所錄及諸後孫口傳, 纂次成文, 以備立言家裁擇之資云爾. 사(舍) 거리 단위로 일사는 30리이다. 친진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된 것을 이른다. 군자는……한다 《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에 보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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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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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1911년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이다. 1500분의 1 축척이다. 산림 소재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 뒤의 기동산(基洞山)이다. 면적은 7반(反) 2무(畝) 27보(步)이다. 소유주는 이교성(李敎成)이다. 소재지는 여러 기호와 자번(字番)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여러 기호는 범례라고 하여 소개하고 있다. 끝에는 날짜가 있다. 피봉이 있는데, 삼림가지번건(森林假地番件)이라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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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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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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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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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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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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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11년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이다. 3천분의 1 축척이다. 산림 소재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 뒤의 요동산(堯洞山)이다. 면적은 10정(町) 5반(反) 4무(畝) 21보(步)이다. 소유주는 이교성(李敎成)이다. 소재지는 여러 기호와 자번(字番)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여러 기호는 범례라고 하여 소개하고 있다. 끝에는 날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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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이다. 1200분의 1 축척이다. 산림 소재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 뒤의 신각금산(新閣今山)이다. 면적은 5반(反) 6무(畝) 14보(步)이다. 소유주는 이교성(李敎成)이다. 소재지는 여러 기호와 자번(字番)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여러 기호는 범례라고 하여 소개하고 있다. 끝에는 날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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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李鐺)의 소유토지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李鐺 李鐺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이다. 가지번(假地番)과 면적으로 구분하여 일곱 곳의 현황을 적어놓았다. 아래와 옆에는 면적당 가격을 적어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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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도(地籍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지적도(地籍圖) 지적도이다. 산(山)120림(林) 아래에 좌우로 길게 퍼져있는 토지를 주홍색으로 칠해 표시하였다. 글씨와 선이 흐려 분간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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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之二月五日 尹璂燮 壬之二月五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2월 5일에 사제 윤기섭이 가천의 사돈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생활을 대략 알려준 간찰 1902년 2월 5일에 사제(査弟) 윤기섭(尹璂燮)이 가천(可川)의 사돈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생활을 대략 알려준 답장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2월에 아드님이 직접 편지를 가지고 와서 위로가 되었다고 하고, 형제분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어버이는 다행히 편안하신데, 맏형이 아프셔서 여러 지방의 약이 되는 음식을 부수적으로 먹고 있다. 일간 나아가 뵈올 계획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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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寅二月五日 尹璂燮 壬寅二月五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2월 5일에 사생 윤기섭이 양가의 가족 안부를 여쭙는 간찰 1902년 2월 5일에 사생(査生) 윤기섭(尹璂燮)이 가천의 사돈댁에 보내 양가의 가족 안부를 여쭙는 편지이다. 사돈의 안부를 여쭙고, 자신은 어버이께서는 겨우 편안하시고, 형님은 치발(致發)한 지 오래되어 앙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며느리이자 자신의 딸이 무탈하다니 매우 다행이고, 아드님은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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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종(戚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戚從 戚從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척종 아무개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내년 봄에 만나기를 갈망한다는 간찰 모년 척종(戚從) 아무개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내년 봄에 만나기를 갈망한다는 편지이다. 어린 날의 깊은 정을 느끼지만 두 곳이 떨어져 있어 만나 이야기할 기약이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고, 독서에 흠은 없는지 궁금해 하였다. 여름 동안 끽긴(喫緊)하게 공부하여 주옥같은 글귀를 달빛 이슬 아래서 소리 내어 읊조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한다고 하고, 자신은 부모님이 편찮으시고 형님은 아프셔서 근심으로 속이 매우 타고 있으나 대소가는 무탈하여 다행이라고 하고, 새봄에 만날 수 있기를 갈망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군데 수정한 곳이 있으며, 말미에 문장 종결이 되지 않아 낙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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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미상인이 상대방의 빛나는 재주에 앞길이 창창하기를 빌고 그동안 회포를 풀지 못했으나 다음 달초에 찾아가겠다고 한 간찰 모년에 미상인(未詳人)이 상대방의 빛나는 재주에 앞길이 창창하기를 빌고 그동안 회포를 풀지 못했으나 다음 달초에 찾아가겠다고 한 간찰이다. 날짜와 발·수신자는 미상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情)이 아니면 이렇게 편지를 써서 정서를 펴지도 못할 것이며, 이것은 몇 백 리에 떨어져 있는 안범(顔範)을 대신할 수 있어서 매시간 읽고 두터운 우의를 느끼고 실감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 여러분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원외에서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나갈 수 없는 처지다. 빛나는 재주를 논하자면 축하할 것도 없지만, 정원의 난초가 계속 피는 가운데 독서하고 새집을 지은 것을 돌아보면 그대의 앞길은 춘색이 더욱 아름다워 끝이 없을 것이니 정으로 두 손 모아 빈다. 진즉 직접 가서 막혔던 회포를 풀어야 했는데 못했다. 저 좋은 땅을 골라서 집을 지었는가 물어보고, 노인을 모시는 인사는 매번 뜻과 같지 못하다고 하고서 다음 달 초에 미리 기약할 수는 없지만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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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이남섭(李南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辰陰閏二月八日 李南燮 李生員日彦宅 戊辰陰閏二月八日 李南燮 李生員日彦宅 전라남도 곡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8년 윤2월 8일에 상중인 족종 이남섭이 아무개에게 묘각과 면사무소 담 수선과 기와에 대한 구매 상황을 전하는 간찰 1928년 윤2월 8일에 상중인 족종 이남섭(李南燮)이 아무개에게 묘각(墓閣)과 면사무소 담[墻垣] 수선(修善)과 기와에 대한 영업 상황을 말한 편지이다. 상중인 자신은 비봉(飛鳳)의 묘각(墓閣)의 모든 일을 이미 상의하는 중에 판매(販賣)할 계획인데 아직 적절한 방도가 없다. 가까운 곳에 면사무소의 담을 수선하는 것에 대하여 매도할 결의를 타협하고, 수키와와 암키와 3천 장을 바라고 있지만 9, 10월에 내지 못할 것이니 깊이 헤아려 계산해야 한다. 지금의 소액(少額)은 뒤에 쓸모가 없는 것 보다는 낳으니 만약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이 약속을 잊지 말고 사람을 보내어 대신 수습하게 한 뒤에 줄 계획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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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辰落梧日 尹在晉 甲辰落梧日 尹在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04년에 척질 윤재진이 바로 답장하지 못한 죄송함과 학문의 발전에 대한 축하, 가을에 왕림 요청, 보내준 석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 간찰 1904년 가을에 척질(戚姪) 윤재진(尹在晉)이 보낸 답장 편지이다. 바로 답장하지 못한 죄송함과 학문의 발전에 대한 축하, 가을에 한 번 왕림하여 함께 글을 짓기를 바라고, 보내준 석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석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피봉이 있다. 타지에 있어 답장을 못하였다. 금을 정련하고 옥을 쪼듯 학업을 하여 광명(光明)하고 순숙(純熟)한 지경에 나아간 것을 축하하고, 긴 여름장마와 더위가 지나고 가을에 날씨가 맑고 길이 평평할 때 빨리 한 번 왕림해 주길 청하였다. 다만 천운(川雲)과 산월(山月)에게 분부하여 각각 그 경치를 드리고자 문장의 앞길에서 기다릴 터이니, 미리 옥을 연마하여 풍광에 누(陋)를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보내주신 석매(石梅)는 책상 위에 두고 감상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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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梧秋旬七 尹璂燮 東床 乙梧秋旬七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5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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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梧月十七日 尹在晉 乙梧月十七日 尹在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25년 7월 17일에 족질 윤재진이 수신자의 안부를 물은 후에 가을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면 학문하는 여가에 한 번 왕림해 달라고 한 간찰 1925년 7월 17일에 족질(族姪) 윤재진(尹在晉)이 수신자의 안부를 골고루 물은 뒤에, 자신은 점점 게을러져서 전진(前進)함에 가망이 없어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탄식한들 어찌하겠는가 하고, 오직 다행인 것은 긴 여름 이래로 거듭 숨이 막히는 것은 면했다는 것이다. 가을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면 학문하는 여가에 부디 한 번 왕림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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