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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유고》 서문 《可石遺稿》序 맹자가 이미 당세의 군자를 얻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말하기를,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천고의 사람과 벗한다."128)라고 하였고, 양웅(揚雄)도 또한 현 시대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후대의 자운(子雲)을 기다렸으니129), 아, 고금 상하에 자기를 알아주는 한 명의 사람을 얻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은 것130)이 진실로 이 때문이다.옛적을 추억하건대, 나와 공은 요행히 같은 세상에 태어났고, 학업도 또한 유학으로 같았기에 서로 다투어 따르고 쫓으면서 글을 주고받고 술잔을 나누는 즐거움에 유람하며 완상하는 정취를 더하여 경전(經傳)의 대지(大旨)와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을 변별하고 분석하는 이치에 이르렀으니, 나는 공이 군자다운 사람임을 알아보고서 스스로 지기(知己)라 이르며 후대의 자운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은 이미 구천(九泉)에 있고, 나도 또한 노쇠하였으니, 난세에 선인 군자(善人君子)를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울 뿐만 아니라, 친구와 지기가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 어찌하여 이와 같단 말인가.얼마 뒤에 유고(遺孤) 진호(珍浩)가 부친이 평생토록 저술한 것들을 모아 나에게 주고 교정하게 하니, 내가 교정과 편찬을 마치고 진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훌륭하다! 옹의 문장이여. 대저 문장을 알기 어려움은 사람을 알기 어려움만 못하니,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오히려 능숙하게 통달했는지도 모르는데, 사람에 대해 또한 어찌 참으로 군자인지 알 수 있겠는가. 지난날 지기라 일컬으며 자운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자못 스스로를 속인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아, 옛적에 알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에 알게 되었고, 당시에 보지 못했던 것을 죽은 뒤에 보게 되었으니, 공으로 보면 후대의 자운 한 명을 얻게 되어 구천에서 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또한 알지 못했던 잘못을 조금이나마 보상하여 종자기와 백아의 풍모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것인가? 훗날 이 문집을 보는 사람들이 그의 간결한 시문(詩文)을 보고서 의론이 바르고 확실함을 자세히 살핀다면 거의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孟子旣難得當世君子而曰: "尙友千古. " 楊雄亦未見現代知己, 以待後世之子雲. 嗚呼, 古今上下, 得一知己, 若是之難耶? 鍾子期死, 伯牙不復彈琴, 良以是也. 夫憶昔余與公, 幸生一世, 業亦同儒, 爭相追逐, 文墨杯酒之歡, 加以游賞之情, 以至辨柝經傳大旨、天人性命之理. 吾知公爲君子人, 而自謂知己, 不待後世之子雲也. 於焉轉眄之頃, 公已九原, 而余亦衰老矣. 不惟亂世善人君子, 難得易失, 而朋舊知己之凋落, 何如是也? 未幾, 遺孤珍浩, 輯厥考生平著作, 投余而較之. 余旣校旣編, 授珍浩而告之曰: "善哉! 若翁之文. 夫文之難知, 不若人之爲難知, 而所謂文者, 吾尙未知其能達焉, 人亦安知其眞爲君子耶? 向稱知己焉, 不待子雲者, 殆不近於自誣耶? 噫, 昔年之所未知也, 而知之於今日, 當時之所不見也, 而見之於死後. 不惟公之得一後世子雲, 可以無憾於九泉之下, 而在余亦可以少償不知之過, 而無愧於鍾、伯之風也耶? 後之覽是集者, 見其詩文之簡, 而委議論之正且確, 庶知余言之不誣也. " 옛 …… 벗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양웅(揚雄)도 …… 기다렸으니 양웅은 전한 시대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자운은 그의 자이다. 한유(韓愈, 768~824)의 글에 "양웅이 《주역》에 비겨서 스스로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나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자,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오면 반드시 이 글을 좋아할 것이다.〔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必好之.〕'라고 했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唐宋八大家文抄 卷4 與馮宿論文書》 종자기(鍾子期)가 …… 것 춘추 시대에 백아(伯牙)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우뚝 솟은 것이 태산 같도다.〔善哉! 峩峩兮若泰山.〕"라고 하고, 백아가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물이 넘실넘실하는 것이 강하 같도다.〔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여 그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음을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고 버려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해진다.《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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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종락에게 답함 정해년(1947) 答金周伯 宗洛 ○丁亥 일전에 형님께서 오사익(吳士益)과 함께 보낸 안부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최근에 권모씨가 방문하여 나에게 간재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는 통문에 서명할 것을 청하기에 내가 후창과는 서로 상의했냐고 물으니, 권씨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하였소. 내가 지척 간에 있는데 어찌하여 미처 하지 못하였느냐고 말하였으나 마음속으로 몹시 이상하게 여겼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형님이 우리 문하에서 발생한 호남과 영남의 시비에 대하여 일찍이 대강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 곡절을 깊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선사께서 간행을 인가하는 교시를 하였고, 유서는 위조되었다고 하면서 스승의 원고를 고쳐서 어지럽게 만들고 끝내 간행을 인가받는 것이고,【권순명은 오씨와 강씨가 고소한 변고에 검찰국에 가서 그들의 증인이 되었다】호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스승의 무함을 분별하고 원고의 혼란을 바로잡으며, 유훈을 지켜서 원고를 베껴 받들어 보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얼음과 숯처럼 서로 의견이 상반되어서 양립할 수 없게 된 지가 20여년이나 되었습니다.몇 해 전에 영남으로부터 시비를 덮어두고 화해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의논하러 오지 않는 것은 바로 거절하면서 만나주지 않을까 두려워서인데 그들은 "우선 미처 만나지 못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게 거짓을 꾸며 속입니까? 저의 의리로는 저 무리들이 마음을 고쳐 죄를 인정하기 전에는 절대 함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는다면 마땅히 "도의는 중대한 사안이고 사후의 문집 간행은 사소한 사안인데 저들이 이미 스승의 큰 것을 깨뜨렸으니 어찌 작은 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과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피차간의 시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承尊駕同吳士益枉存, 語弟曰"近權某見訪, 請余參名, 爲艮翁建祠通文, 余問已與後滄相議乎? 權曰姑未及, 余曰咫尺之地, 有何未及也? 然心甚恠之云云." 此盖兄於鄙門湖嶺是非 雖曾畧聞, 尚不深知其曲折故也. 盖嶺之所主謂先師有認教, 謂遺書偽造, 改亂大稿而終於認刊也.【權於吳姜告訴之變, 往檢局爲其證人】湖之所主, 辨師誣, 正稿亂, 守遺訓而鈔出奉藏也. 水炭相反, 不能兩立者, 爲二十餘年.年前自嶺有盖是非講和之請, 而竟不得矣. 今不來議者, 正恐拒不相見, 乃曰"姑未及." 何其糊塗而詐僞也? 在吾之義, 則彼輩革心服罪之前, 斷不與同事. 被人問則當曰"道義大者, 後事少者, 彼既破師大者, 則安可爲成其少者, 而合之乎云矣?" 於此益可見彼此之是非也, 未知兄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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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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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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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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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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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노동에게 보냄 경신년(1920) 與金聖九 魯東○庚申 저는 일찍이 그대가 순씨(筍氏)의 용1)이며 사씨(謝氏)의 보배2)라고 들었는데, 진실로 묘령(竗齡)의 영재로서 그 재주와 뛰어난 식견과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이 탁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를 채워 전진한다면 사씨의 보배나 순씨의 용도 비루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문(儒門)에서 석진(席珍)3)을 중시하고 문명의 세계에서 현룡(見龍)4)을 우러르니, 한 집안의 경사스러운 복은 굳이 축하할 필요도 없고, 축하할 만한 것은 세도(世道)에 다행스럽다는 것입니다. 아, 도가 천하에 밝혀지기 어려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여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기 어렵고, 의론의 동이(同異)가 부류에 따라 달리하여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과불급의 차이 때문에 대도가 실행되지 못하고, 의론의 동이에 대해 자신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밀한 의리가 항상 어둡습니다. 지금 그대는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은 재주로 편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는 마음을 보존하고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는 절반 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를 행하는 사람도 또한 학문을 좋아해야 하고,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또한 반드시 견해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자질은 아름다운데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큰 도를 깨우치기 어려우니 이것이 근심거리이고, 마음은 공평한데 견해가 바르지 않으면 쇳덩이를 은이라 부르게 되니 이것이 두려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재주가 치우쳐 중도를 잃은 자, 스스로 옳다고 하여 이치에 어두운 자와 더불어 똑같이 도를 밝힐 수 없는 데에 귀결됩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견해를 바르게 하는 바탕이 되고 견해가 바른 것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하나의 이치도 궁구하지 않음이 없는 수준에 이르고, 견해가 바르게 되어 터럭만큼도 오차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를 밝힌 지극한 공이요, 우리 유자들의 능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일생의 많은 일들 중에서도 큰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힘쓰기를 바라니 그대는 이를 도모하기 바랍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학문을 논하자면 빙산의 일각처럼 초라하고 그림속의 떡처럼 실질이 없으며, 그 병폐를 말하자면 구멍이 백 개이고 상처가 천개입니다. 외람되게 교유하게 되었으니, 경계의 말을 기다릴 겨를도 없어야 합니다. 다만 그대에게 일시의 금란지교(金蘭之交)5)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세한송백(歲寒松柏)6)을 의탁하기 때문에 참람됨과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작은 정성을 바쳐 애오라지 종신토록 학업을 권면하고 과실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너그럽게 헤아리고 꾸짖지 않기를 바랍니다. 僕曾聞足下爲荀氏之龍、謝氏之寶, 實未圖竗齡英材, 超識敦行, 若是其卓卓也.充此而進, 謝寶荀龍, 陋矣奚道? 儒門之席珍是重, 文明之見龍是仰, 一家慶福不須賀, 所可賀者世道幸.鳴呼, 道之難明於天下也久矣.知愚之過不及也, 而中行之難得, 同異之殊倫也, 而公心之罕覯.過不及之差也, 故大道不行; 同異之自是也, 故精義常晦.今足下以不偏不倚之材, 存無黨無偏之心, 其於明道也, 思過半矣.然中行矣, 又須好學; 公心矣, 又須正見.質美而不好學, 則大道難聞是患; 心公而見不正, 則喚鐵作銀可畏, 其與偏材之失中、自是之昧理者, 同歸於不能明道一也.蓋好學者, 所以爲正見地也; 見正者, 乃好學之驗也.好學而至於無一理之不究, 見正而至於無一毫之或差, 然後始可謂明道之極功、吾儒之能事.此是一生大小大事, 不容不加勉者, 故敢以仰勗, 惟足下圖之.至如僕者, 論其學則氷山畵餅, 語其病則百孔千瘡, 既蒙辱交, 宜俟箴砭之不暇, 而特於足下不欲以一時之金蘭相擬, 惟歲寒之松柏是託.故不覺僭妄, 先效微忱, 聊作終身業勸過規之地, 惟冀恕究不讁. 순씨의 용 후한(後漢)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인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을 가리킨다. 이 여덟 사람이 모두 재덕(才德)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팔룡(八龍)이라고 일컬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2 〈순숙열전(荀淑列傳)〉이후 다른 사람의 재주 있는 자제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씨의 보배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의 자질들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훌륭한 자제가 많음을 뜻한다. 《진서(晉書)》 권79 〈사현전(謝玄傳)〉 석진(席珍) 좌석 위에 앉아 있는 보배[席上之珍]라는 뜻으로, 아름답고 뛰어난 재주와 학문이 있는 유자(儒者)를 뜻하는 말이다. 《예기(禮器)》 〈유행(儒行)〉에 "선비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갖추어 두고 나라의 초빙을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 以待聘〕" 하였다. 현룡(見龍) 아직 뜻을 얻지 못한 인재를 상징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이효(九二爻)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아야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니, 그 날카로움이 쇠를 절단한다. 마음을 함께하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세한송백(歲寒松柏) 추운 계절을 꿋꿋이 견뎌내는 절조(節操)를 말한다. 추운 계절에도 늘 푸른 송백처럼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간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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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경신년(1920) 答金聖九 庚申 편지에서 말한 것을 받들어 살펴보니 지행이 해이하여 빼어난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스스로 겸양하는 의례적인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여 보탬이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를 통하여 참된 마음을 바쳐서 서로 함께 하는 일단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뜻을 굳건히 세워서 해이해지지 않게 하고 행실을 독실이 정진시켜 느슨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찌 학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어찌할 수 없이 이치와 의리를 드러내는 것은 미약해지고 은미해졌으며 기욕의 폐단은 강성해지고 무성해져서, 하루아침에 분발한다고 한들 긴 시간 동안에 안이하게 지낸 것을 이길 수 없고, 천리를 가는 배는 항상 대부분 도중에 그쳐서 잠시 뜻을 세웠다가도 곧바로 해이해지고 또 잠시 나갔다가도 곧바로 느슨해지는 사이에 유유한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이것은 천고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제가 옛날 약관이었을 때 뜻한 바와 행한 바는 비록 말할 것은 못되지만, 일찍이 옛사람에 뜻을 두고 배우려 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매번 마음속으로 스스로 믿어 말하기를 "옛날에 특별히 통달한 사람은 비록 일찍 성취했다 하더라도 모두 장성한 이후에 세운 것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약관의 젊은 나이이니 또한 십여 년의 공부를 한다면 옛사람을 따라잡는 데 있어서 반절은 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식간에 십 년이 흘러서, 가만히 내가 한 말과 행위를 옛사람이 30세 때 했던 성취와 비교해보니, 언덕이 태산과 화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후회하고 한탄하며 "내가 가졌던 옛날의 지행은 진실로 대부분 해이해졌다."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옛 사람들이 덕을 완성한 것은 대부분 40세 때나 50세 때였으니, 내가 비록 몇 년 어그러졌으나 이제라도 힘써 정진한다면 오히려 미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선이 될 금단의 소식은 아직 없고 서릿발 같은 흰 머리가 먼저 침범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40세 전에는 아득하고 망망하였으니 한문공(한유)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묘한 도와 정미한 의리는 비록 기미를 살피고 마음에 깨닫고 싶으나 이미 젊은 날의 총명이 아니요, 중임과 대업은 비록 멀리 끝까지 궁구하고 싶었을지라도 장년의 역량이 없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지난날에 떠돌며 논 것을 슬퍼하고 초심에 부합하기 어려움을 개탄하여, 때때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레가 뒤집힌 이후에 큰 길을 살피는 것이니 팔이 부러지기 전에 좋은 의사를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 한량이 경험한 바를 거울과 경계로 삼아서, 세월이 많다는 것을 믿는다 말하지 말고, 지극한 도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여, 더욱 큰 뜻에 힘을 쓰고 큰일을 궁구하여, 가깝게는 부모의 유체를 보존하고, 멀리는 성현의 일맥을 잇기를 바랍니다. 저는 비록 때를 잃었지만, 속으로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나 삼대 속의 쑥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대에 대해 얼굴은 비록 새로이 알았을지라도 마음만은 옛날부터 사귄 것 같습니다. 헛된 칭찬으로 사람에게 아첨하고 싶지는 않고, 거듭 참된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준다는 비유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다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해하여 잘 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奉審書中所自道, 有志行懈弛, 無以聳拔等語, 知是出自撝謙例語.然既係下問而求益者, 則請得以因此, 而效實心相與之一端也.夫志之欲其堅立而不懈, 行之欲其篤進而不弛, 豈不是學者之所願? 終無奈理義之發弱而微, 氣欲之蔽強而繁, 一日之奮發, 不能勝長時之燕晏, 千里之輈, 常多半途之廢, 乍立乍解乍進乍弛之間, 悠悠歲月不待我矣, 此千古之通患也.僕之昔在弱冠也, 所志所行, 雖不足道, 亦未嘗不欲古之人是志是學, 每有自恃于中者曰: "往昔特逹之人, 雖云夙就, 皆壯而後有立焉.我尚弱而少矣, 且用十許年工夫, 其於追古人也, 思過半矣." 焂忽之間, 十霜已周, 靜把己之云爲, 視古人三十時所就, 則懸乎若丘垤之於泰華矣.乃自悔懊曰: "我向來志行, 固多解弛也." 然猶有所自慰者曰: "古人之成德, 多在於四十五十, 我雖蹉, 却幾年迨此, 勉進尚可及也." 孰知金丹無信霜白先侵? 四十前茫茫蒼蒼, 非獨韓文公然也.竗道精義, 雖欲研幾悟, 心而已, 非少日之聰明.重任大業, 雖欲遠致極究, 而奈無壯年之力量, 悼往日之游泛, 慨初心之難副, 有時乎泫然而泣下.覆轍之後, 坦途亦審, 折肱之前, 良醫何求? 幸足下以此漢之所經歷者爲鑑戒, 勿謂富年之可恃, 恒懼至道之難聞, 益勵大志, 勉究大事, 近以成父母之遺體, 遠以紹賢聖之一脈也.僕雖失時, 竊願爲驥尾之蠅, 麻中之蓬也.僕於足下, 面雖新知, 心惟舊交.既不欲以虛譽媚人, 而重有感於實心相與之喩, 不覺罄竭至此, 想亦見諒而樂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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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현명하고 도량이 넓으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집사 한 명뿐이다."고 하였는데, 어쩌다가 현명한 견해가 있는 당신에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어리석고 비루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났는데, 다만 타고난 성격이 가볍고 재빨라서 한두 가지 얻어들은 것이 있으면 곧장 감히 강론의 말석에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터득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감히 자신도 독실하게 믿고 타인을 급박하게 배척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는 그대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현명하고 도량이 넓다는 것으로 저를 잘못 칭찬한 것이니, 사실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 제가 다른 사람을 속인 죄입니다.치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경우는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유문(儒門)이 찢어지고 의론이 대립되었는데, 윗사람은 이미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일의 시비와 말의 득실을 규명하지 않고, 자기 스승에게서 나왔다면 높이고 떠받치는 것이 너무 지나쳐 태산과 화산도 오히려 낮다고 의심하고, 다른 문하에서 나왔다면 씻어내고 불어내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여 단점이 혹시라도 숨겨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제가 깊이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징계하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덕을 살펴서 시종 바뀌지 않는 것은 어찌 그대가 저에게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입니다.화도(華島)7)의 차서(車書)8)에 대해 지난번에 줄곧 의심했던 것은 그것이 다만 서로를 친애하는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에게 여쭈자 과연 생각한 바와 같았지만, 선생은 '그 편지에서 한 말이 너무나 무거우니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유자가 삭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결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가 의를 취했는지를 여부를 허여할 뿐입니다. 일찍이 선생에게 여쭈었는데, "비록 문묘에 배향할 수는 없어도 사숙(私塾)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9)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허여했는데, 어찌 일찍이 그 의리를 인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 삭발을 당한 것이 모두 쓸모가 없다."는 말은 아마도 전한 사람의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겁탈을 당하여 자결한 열부(烈婦)에 관한 글을 《약재집(約齋集)》에서 삭제한 것은 혹 한결같이 찬양만 하고 억양(抑揚)과 포폄(褒貶)의 뜻이 없기 때문입니까? 《약재집》을 교정할 때 유영선(柳永善)이 명을 받아 삭제했으니, 유영선이 일찍이 "때때로 한 번씩 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항상 편치 않다."라고 하였습니다.'청나라 유자[淸儒]' 운운한 것은 마땅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여 여쭈어야 합니다만 질문한 본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청나라 유자가 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본래 청나라 사람으로서 청나라 유자가 된 자입니까? 국초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는 나라를 세우고 오래 시간이 지난 뒤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한 청나라 유자가 스스로 처신한 의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후세 사람이 청나라 유자를 처리하는 의리입니까? 다음 편지에서 다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明洪不偏, 執事一人"之喩, 何以得此於明見? 殊不可曉.自惟昏滯隘陋, 最出人下, 而但姿性輕儇, 才有一二口耳之得, 輒敢傾瀉於講論之末.然惟其無實得也, 故又不敢信己篤而排人急.是故足下樂道人善, 而未及細察, 誤以明且洪稱之, 實則非足下之誤也, 乃僕欺人之罪也.至於不偏之云, 非曰能之, 而願學焉者也.近世儒門岐裂, 議論角立, 上既不免, 而下益甚焉.不究事之是非、言之得失, 出自其師, 則尊戴太崇, 嫌泰華之猶卑; 出於他門, 則洗吹太苛, 恐疵瘢之或隱, 此僕所深惡而痛懲者也.朝夕觀德, 終始不替, 豈惟足下之所望於僕? 僕之望於足下者亦此也.華島車書向固疑, 其爲只謝相愛之意, 及稟先生則果如所料, 而但以那書命語太重, 爲未穩云矣.儒者被削自裁者, 許其取義與否.曾己稟質師門, 答謂雖不可從享文廟, 而祭之私塾則可也.既許其祭之私塾, 則何嘗不與其義乎? 乃知"一被削都無用"之語, 蓋傳者之過也.若其删"遇劫自裁之烈婦"文字於《約齋集》者, 或以其一味贊揚, 而無抑揚褒貶之意故耶?《約集》之校也, 柳永善承命删出, 而柳嘗言"時一念此, 心常不安"云矣."清儒"云云, 當依敎轉稟, 而不詳發問本意, 謂自明人而爲清儒者耶? 本清人而清儒者耶? 謂國初之清儒耶? 立國久後之清儒耶? 且謂清儒自處之義耶? 後人處清儒之義耶? 後囬更示爲仰. 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간재가 이곳에 정착하여 수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차서(車書) 車氏가 보내온 편지를 이른 듯하다. 비록……가능하다 간재는 "선비가 삭발당하여 자살하는 것은 욕을 당한 부녀와 의리가 동일한 것이니, 그 문도들이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士子被削而卽自裁者.亦宜與受辱婦女同一義理.其門徒祭之私塾則可〕"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17 〈華島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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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간옹(艮翁)이 유자가 삭발을 당하여 자살하는 것10)을 의론한 설은 지난번 편지에 대략 이미 제기해 말하였으니, 보시고 다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천근하고 비루한 저는 진실로 정밀한 의리를 더불어 논하기에 부족하지만 만일 반드시 한 말씀을 해주기를 바란다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삭발을 당하여 자살한 자는, 그 덕망과 품행이 높은지 낮은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천시하는 마음은 과연 진실하고 간절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상시 말마다 반드시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고, 일마다 반드시 중화를 따르고 오랑캐를 등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삭발을 당할 때 정색하고 엄한 말로 거절하였으니, 마땅히 하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의 위협이 우레와 같고 날카로운 칼날은 번개와 같음에 속수무책이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니 어쩔 것입니까? 이때에는 만약 만 명을 당할 힘이 있지 않으면 비록 성인의 큰 덕이라 할지라도 아마도 역시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또 분노와 수치심을 깊이 품고 즉시 한 번 죽는 것으로 스스로 밝혔으니, 그 심사의 명백하고 곧음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겉모습이 억지로 바뀐 것을 이유로 더 나아가 절개를 잃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논하여 그로 하여금 너무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김씨의 일과 같은 경우는, 죽음에 임했을 때 쓴 한 장의 유언과 의론하는 자들의 조소를 모두 아직 보지 못했으니, 제가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를 참작하고 제 소견으로 헤아려 본다면 김씨의 잘못은 죽음에 임했을 때 쓴 유언에 있지 않고, 아마도 자결이 너무 늦은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의 비웃음은 삭발을 당하여 자결한 것에 있지 않고 아마도 삭발 이후에 의리를 너무 크게 말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다시 이를 다시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艮翁所論儒者被削自死之說, 向書畧已提陳, 想經覽悉.至於淺陋, 固不足與議於精義, 而如欲言之無已, 則有一焉.蓋彼被削自死者, 未論其德望品行之或高或下, 其尊華賤夷之心, 則果眞切矣.是其平日, 言言必華夷之辨別, 事事必華夷之向背也.方其被削也, 正色嚴辭之拒斥, 宜亦無所不至矣.其柰衆脅如雷, 利械如電, 束手無策, 求死不得何? 當此之時, 如非有萬夫不當之力, 雖聖人之大德, 恐亦無如之何也.彼又深懷憤恥, 即以一死自明, 是其心事白直, 無少疑也.若以外形之強變, 進而歸之失節, 豈非論人太苛, 令人太冤乎? 至若金氏事, 其臨死之一紙、論者之嘲笑, 俱未及見, 吾何敢知? 但參之來書, 揣乎鄙見, 金氏之失, 不在於臨死之一紙, 恐在於自裁之太晚也.論者之笑, 不在於被削而自裁, 恐在於削後之大談義理也.未知盛見復以爲如何. 간옹이……것 간재는 "삭발을 당하고 대의를 말하는 자는 그 가소로운 것이 여기에 있지 훗날 자결하는 데에 있지 않다. 성구는 매우 마땅하다고 운운하는데 이는 좋다. 그 대인의 뜻도 그러한가?〔被削而談大義者, 其可笑在此, 非在後日自裁. 聖九甚當甚當之云, 善矣, 未知其大人之意亦然耶〕"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7 〈답김택술(答金澤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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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131)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사유 【한응】과 이별하며 주는 서문 【신사년(1941)】 花林洞歸路贈別李士裕【漢膺】序 【辛巳】 산과 강에서 바람 쐬고 시 읊는 즐거움에 대해 공자가 증점(曾點)을 허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이 태산(太山)과 동산(東山)을 유람하기까지 하였으니,132) 옛 현인들은 대체로 그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자가 형악(衡岳 형산(衡山))과 여부(廬阜 여산(廬山))에 오르고, 율곡(栗谷)과 농암(農巖)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또 그 중에 드러난 것이니, 이렇게 유람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증점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진실로 이미 말했고, 공자와 주자, 율곡, 농암도 그 도가 똑같으니, 성현을 배우는 자라면 어찌 그에 대한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또한 긴장만 하고 이완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완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133), 긴장과 이완 사이에 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 번씩 유람하고 즐기는 것이 일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내가 사유와 함께 화림동에 간 이유이다. 그런데 몽매한 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더러 선비로서 교만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이러한 때에 의리상 어찌 태사공(太史公)의 장대한 유람을 배울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러한가? 어찌 그렇겠는가. 상전벽해처럼 시대가 바뀐 뒤로 인심이 완전히 변하고 온 세상이 혼탁해져서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태고의 모습을 보존하고 본연의 맑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은 오직 산수뿐이다. 이로 보면 세상 사람은 무상하지만, 산수는 무상하지 않다. 이에 정(情)이 있는 것은 무상하고, 정이 없는 것은 무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정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정이 없는 것을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시에 이른바 '세상의 교제하는 도가 무정물에 있네.[世間交道在無情]'134)라는 것이 나보다 먼저 이러한 점을 알았던 것이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더욱 이러한 유람이 없을 수 없다.옛적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구름 낀 산림 속으로 떠나 은둔했던 것이나 명나라 말기에 여러 현인들이 황량한 언덕에서 통곡했던 것들이 모두 이러한 것들인데, 성현의 절의와 많은 행적들을 버려두고 태사공 한 가지 일만을 들어서 조롱하는 저 사람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것으로 그 조롱에 해명하고, 또 우리들이 앞에서 말한 성현의 바람 쐬고 시 읊는 즐거움과 이완시키고 긴장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 유람하고 즐기는 데에 일이 있는 것 및 교제의 도가 무정물에 있는 것, 은둔하고 통곡했던 것 등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데에 체득한 바가 없이 단지 조롱자의 말을 실증시킬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 글을 지어 서로 더불어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는다. 山水風咏之樂, 孔子非惟與點, 親自有泰山、東山之遊焉. 古之賢者, 蓋莫不然. 至於朱子之衡岳ㆍ廬阜、栗谷ㆍ農巖之金剛, 則又其著者. 此何以故? 曾點之樂, 先儒固已言之. 孔、朱、栗、農, 其揆一也. 學聖賢者, 豈無意乎? 且也張而不弛, 文、武不能, 弛而不張, 文、武不爲, 弛張之間, 有道存焉. 故一遊一豫, 無非事者. 此吾與士裕有花林之行也. 昧者不知, 謂我士驕而曰: "當此時, 義豈可學太史公壯觀也?" 噫, 其然? 豈其然乎? 滄桑之後, 人心百變, 擧世混濁, 無可與語者, 其存太古之顔, 帶本淸之色者, 惟山與水. 是則世人無常, 而山水有常. 乃知有情者無常, 而無情者有常, 吾寧可舍有情而取無情焉? 古詩所謂世間交道在無情者, 先獲之矣. 當此日也, 尤不可以無此行. 昔梅月堂之放遯雲林, 明末諸賢之痛哭荒岡, 皆是也. 彼之舍却聖賢節義、許多已迹, 擧一太史公事而嘲之者, 亦獨何心? 旣以此解其嘲, 又恐吾輩於所謂欲學聖賢風咏之樂、弛張有道、遊豫有事及交在無情、放遯痛哭之意, 無有所得, 而適以實嘲者之言. 故作是序, 以爲相與反省之資. 화림동 경상남도 함양군의 안의면 월림리 일대에 걸쳐있는 계곡으로, 농월정(弄月亭)ㆍ동호정(東湖亭)ㆍ거연정(居然亭)ㆍ군자정(君子亭) 등의 정자가 있는 곳이다. 산수(山水)에서 …… 유람하였으니 《논어》 〈선진(先進)〉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말하자, 공자가 그 기상에 감탄을 하며 "나는 점과 함께 하겠다.〔吾與點也.〕"라고 허여한 것과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노(魯)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太山)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긴장만 …… 것이니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긴장만 하고 이완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완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니, 한번 긴장하고 한번 이완하는 것은 문왕과 무왕의 도이다.〔張而不弛, 文武弗能也, 弛而不張, 文武弗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세상의 …… 있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4 〈답송운장(答宋雲長)〉에 "강가의 가을 산이 나를 싫어하지 않으니, 세상의 교제하는 도가 무정물에 있네〔江上秋山不相厭, 世間交道在無情.〕"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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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당계안의 서문 【무자년(1948)】 台下堂契案序 【戊子】 옛적에는 위로 정치가 융성하고 아래로 풍속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권면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선에 교화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와서는 정치와 풍속이 모두 쇠퇴하여 백성들이 흥기하여 행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이에 뜻이 있는 자가 이를 근심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감발시킬 방법을 생각하였으니, 여남전(呂藍田)이 덕업을 서로 권면한 향약(鄕約)115)과 같은 것이 이것이고, 향약을 간략히 하여 계(契)를 만든 것으로는 근대의 문회계(文會契)와 위친계(爲親契), 존사계(尊師契), 목인계(睦婣契) 등이 있다. 대체로 모두 서로 수양하여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니, 또한 성대한 일인데, 오늘날의 태하당계안(台下堂契案)과 같은 것은 더욱 말을 하면 듣기에 흡족하였다.태하 거사(居士) 심관국(沈觀國)은 경재(敬齋)의 문인으로, 연옹(淵翁 김창흡(金昌翕))을 사숙하여 은거한 채 영달을 구하지 않았고 인륜을 좋아하였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덕과 선에 감복하였다. 지난번에 고을의 나이 어린 수십 사람이 그의 자제와 조카, 친족과 인척에게 나아가 서로 함께 돈을 갹출하고 계를 세워 노년을 부양할 물자를 돕고, 일제히 당중(堂中)에 모여 격언(格言)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몸을 지키는 부절로 삼았으니, 무릇 이 계에 들어간 사람으로 자제와 조카들에게는 어버이를 위하는 계가 되고, 문도에게는 스승을 위하는 계가 되며, 친족과 인척에게는 화목의 계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른을 공경하는 계라 이르는 것도 또한 괜찮을 것이며, 강론하고 예를 펴는 것으로 총괄하여 말하면 또한 문회계라 이를 수 있다. 한 가지 일을 행함에 많은 선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는 실로 영주(瀛洲 정읍) 남쪽의 아름다운 풍속이라 하겠다. 그러나 태하당의 덕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돌아보건대, 지금 서양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밀려 들어와 떳떳한 인륜이 무너져 없어진 것은 전에 없던 일로, 국정(國政)의 초창기에 바로잡을 겨를이 없었는데, 여러 군이 먼저 효도와 공경, 신뢰와 화목의 도를 닦는 데에 이처럼 근면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아가서 고을에서 도로, 도에서 나라로 점점 다른 사람에게 미쳐 간다면 어찌 아름다운 풍속이 융성해지고 절로 교화되는 나라가 될 징조가 되지 않을 줄 알겠는가. 그렇지 않고 유명무실하거나 시작은 있되 끝이 없다면 여러 군들에게 수치일 뿐만 아니라, 태하당에게도 누가 됨이 적지 않을 것이니, 힘써야 할 것이다.나는 태하당과 어렸을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늙어서는 더욱 친하게 지냈기에 그 일을 기쁘게 듣고서 계안의 서문을 지었다. 古者, 治隆於上, 俗美於下, 人不待勸而自化於善. 降及後世, 政俗俱頹, 民之興行者鮮矣. 於是有志者憂之, 思所以導率感發之方, 若呂藍田德業相勸之鄕約是也. 自鄕約而畧之以爲契, 則有近世之文會契、爲親契、尊師契、睦婣契. 蓋皆欲交修而歸善, 亦盛事也. 若今日之台下堂契案者, 尤言足聽聞也. 台下居士 沈觀國, 以敬齋門人, 淵翁私淑, 隱居無求, 愛好人倫. 人多服其德善. 迺者鄕黨年少數十人, 就其子姪、族戚, 相與醵金樹契, 助暮年扶養之資, 齊會堂中, 服膺格言, 作自身持守之符. 凡入玆契者, 在子姪則爲爲親, 在門徒則爲尊師, 在族戚則爲睦婣, 其餘則謂敬長之契亦可, 總其講論敍禮而言, 則亦可謂文會契也. 行一物而衆善備, 是固瀛南風俗之美. 然非台下之德, 烏能致此? 顧今西潮東盪, 彛倫喪敗, 前所未有, 國政草創, 不遑救正. 諸君能先修孝敬信睦之道, 其勤如此. 由此而進, 漸及於人, 自鄕而省, 自省而國, 安知不爲兆於隆美自化之域乎? 不然而存名去實, 有始無終, 不惟諸君之可恥, 其爲累於台下也不少矣, 勉之哉. 余與台下少相知而老益親, 喜聞其事而序其案. 여남전(呂藍田)이 …… 향약(鄕約) 여남전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학자인 여대림(呂大臨, 1046~1092)으로, 그는 산서성(山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면서 자신의 형제인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과 함께 향촌(鄕村)을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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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만【동필】에게 주는 서문 【뒤에 동건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중일이다. 병인년(1926)】 贈蔡聖萬【東必】序 【後改名東建, 字中一. 丙寅】 내가 일찍이 천하의 물을 살펴보건대, 졸졸 흐르는 샘물이나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부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 세차게 흐르는 하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줄기와 물갈래가 혹 멀리 돌아 흐르기도 하고 혹 가까이 곧바로 흐르기도 하면서 비록 각기 다르게 흐르지만, 그 귀착한 곳을 궁구해 보면 천 번 만 번 휘돌고 굽이져 흐르되 반드시 동쪽 바다로 모여들었다.또 일찍이 옛적의 성현(聖賢)과 절열(節烈)을 살펴보건대, 세상의 모든 험담과 칭찬, 영광과 치욕, 기뻐할 만한 것과 슬퍼할 만한 것, 상도(常道)와 변도(變道)에서부터 도랑에 버려지고 목숨을 잃은 것에 이르기까지 비록 만나는 바가 만겁토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의리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로 만 번 굽이져도 반드시 동해로 흐르는 것은 물의 본성이고, 만겁토록 의리에 귀의하는 것은 선비의 분수이다.아, 물은 사사로운 정이 없는 사물이기에 아래로 흘러 나아가고 동해로 귀의할 때에 스스로 주저함이 없고, 스스로 그침이 없이 자연의 본성을 따라 쉽게 흘러간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밖으로는 기호와 안일에 이끌리고, 안으로는 지혜와 기교, 계략과 요량이 발생하기 때문에 천사만종(千駟萬鍾)116)과 도거정확(刀鋸鼎鑊)117)이 앞에 번갈아 다가올 때에 평탄한 한 줄기의 바른 길을 어리석게도 보지 못하니, 이것이 어짊과 절개를 얻기 어려운 이유이다.돌아보건대, 지금은 천하가 혼란하여 이욕(利欲)이 하늘까지 넘쳐나고, 의리가 땅을 쓴 듯 사라져서 마침내 자식이 번번이 부모를 버리고, 신하가 번번이 나라를 팔며, 제자가 번번이 스승을 모함하는 것을 마치 다반사처럼 여기고, 사람들도 또한 태연하게 바라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의 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채군 성만(蔡君聖萬)의 거처가 송정천(松汀川) 가에 있는데, 대저 송정(松汀)의 냇물이 줄기차게 장구히 흘러 밤낮을 쉬지 않고 동진강(東津江)118)으로 들어가니, 성만이 항상 이 냇물을 따라 거닐고, 이 냇물에서 씻으면서 사물을 보고 감흥을 일으키는 바에 어찌  스승으로 삼아 본받을 것이 없겠는가. 바라건대 성만은 홀로 가는 뜻을 떨쳐 이 일을 향해 전력하여 의리와 이욕을 매우 미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변별하고, 그릇됨과 올바름을 칼로 자르듯 구분하여 만겁토록 의리에 귀의한 현절인(賢節人)이 되게나. 나는 이미 바다에서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보았고, 또 사람에게서 고상한 선비인 성만을 보았으니, 성만이여! 힘쓸지어다. 余嘗觀乎天下之水矣. 涓涓㶁㶁之泉澗, 以至滔滔浮浮之江河, 支支派派, 或遠或近, 雖各不同, 究其歸, 則千回萬折, 而必朝宗于東海. 又嘗觀乎古之賢聖節烈人矣. 凡世間毁譽榮辱, 可欣可慽, 若常若變, 以至於溝壑喪元, 雖所遭萬劫之不同, 莫不歸乎義. 蓋萬折必東, 水之性也; 萬劫歸義, 士之分也. 嗚呼, 水無情私之物, 其就下而歸東也, 無自沮焉, 無自息焉, 順其性之自然而易如也. 至於人則不然, 嗜好安佚牽乎外, 智巧計量生乎內. 故當其千駟萬鍾、刀鋸鼎钁之迭臨乎前也, 坦然一條正路, 矇不見焉. 此其賢與節之難得者乎. 睠今天下淆亂, 利欲之滔天, 義理之掃地, 乃至於子輒棄父, 臣輒賣國, 弟輒陷師, 若茶飯然, 而人亦恬視不怪. 世道至此, 寧不寒心?蔡君 聖萬之居在松汀川上. 夫松汀之水, 滾滾長逝, 不舍晝夜, 入于東津. 聖萬之所常沿斯濯斯者, 覽物起興, 豈無所師法者乎? 願聖萬奮獨往之志, 專力向此事, 銖精乎義利之辨, 刀截乎邪正之分, 作萬劫歸義之賢節人也. 吾旣於海而見必東之水矣, 又將於人而見聖萬之高士也. 聖萬乎勉哉. 천사만종(千駟萬鍾) 많은 녹봉을 비유하는 말로, 말 네 마리를 사(駟)라 하고, 쌀 6석(石) 4두(斗)를 1종(鍾)이라 한다. 도거정확(刀鋸鼎鑊) 원문의 '鼎钁'은 문맥에 근거하여 '钁'을 '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도거정확은 죄수에게 형벌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킬 때 사용하는 기구로, 도(刀)는 궁형(宮刑)에 쓰는 칼이고, 거(鋸)는 월형(刖刑)에 쓰는 톱이며, 정확(鼎鑊)은 사람을 삶아 죽이는 가마솥이다. 동진강(東津江)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풍방산에서 발원하여 전라북도 남부를 북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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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태원【인수】에게 주는 서문 【신미년(1931)】 贈李君 台元【仁洙】序 【辛未】 주(周) 나라는 후직(后稷)과 공유(公劉)가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지 수백 년이 지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에 이르러 왕업의 자취를 닦기 시작하였으며, 문왕(文王)에 이르러 더욱 크게 성대해져서 비로소 천명을 받았다. 때문에 《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새로워졌도다."135)라고 하였다.이군 태원(李君台元)은 선대 소심재(小心齋)로부터 산오(山塢)와 남강(南岡)을 거쳐 대인(大人) 양산(陽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과 문장을 쌓고 몸가짐과 행실을 닦아 후대 자손이 대유(大儒)로서의 자취를 밟는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비록 집안과 나라의 차이가 있고 대소가 같지 않지만, 그 쌓아온 자취로 말하면 또한 한 집안에서 있어서 주나라에 해당한다. 태원이 만약 덕행을 성대히 쌓고 유학(儒學)을 대성하여 선조를 빛낼 수 있다면 어찌 이씨(李氏) 집안의 문왕이 될 수 없겠으며, "이씨는 비록 오래된 집안이지만, 그 덕은 새로워졌도다."라는 노래가 어찌 시인에 의해 지어지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그대를 위해 말해 보겠다.《시경》에서 또 말하지 않았는가. "오직 이 문왕만이 조심하여 공손하고 삼가셨네."136)라고 하였고, 또 "거룩하신 문왕이여, 아, 끊임없이 공경을 밝히셨네."137)라고 하였으니, '공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대체로 평생의 본령이었다.《서경》에 "문왕은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고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었네."138)라고 하였고, 전(傳)에 "문왕은 도를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139)라고 하였으니, '근면[勤]'이라는 한 글자가 또 공부의 시작과 끝이었다.아, 문왕과 같은 생지안행(生知安行)140)의 성인으로도 오히려 '공경'과 '근면'이라는 두 글자를 버릴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공경'을 학문의 본체로 삼고, '근면'을 학문의 작용으로 삼아야 하니, '공경'이 아니면 학문을 통괄할 수 없고, '근면'이 아니면 학문을 이룰 수 없다.맹자가 "문왕을 본받으면 반드시 천하에 정사를 하게 될 것이다."141)라고 하였는데, 나도 또한 "학문하는 사람이 문왕의 '공경'과 '근면'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천하에 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다.태원은 진실로 학문에 근면한 사람이니, 내가 '근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공경'은 성학(聖學)의 근본이 되는 핵심으로 쉽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말을 구할 때에 '공경'과 '근면'을 함께 들어 힘쓰게 하여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게 한다. 周自后稷、公劉厚民安邦累百年, 而至太王、王季, 肇基王跡, 又至于文王而益大以盛, 始受天命. 故《詩》不云乎? "周雖舊邦, 其命維新. " 李君 台元, 自先世小心齋以下, 歷山塢、南岡, 而至其大人陽山, 皆種學績文, 飭躬修行, 以基後昆大儒之迹. 雖家國有殊, 大小不同, 語其所以積累者, 則亦人家周邦也. 台元如能盛其德大其儒, 用光祖先, 則豈不得爲李門之文王? 而李雖舊家, 其德維新之頌, 安知不作於詩人乎? 吾請爲子申之. 《詩》又不云乎? "維此文王, 小心翼翼. " 又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 敬之一字, 蓋其平生本領. 《書》曰: "文王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 傳曰: "文王望道, 如未之見. " 勤之一字, 又其始終工夫. 噫, 以文王生知安行之聖, 猶舍不得敬、勤二字, 况在學者乎? 敬以爲其體, 勤以爲其用, 非敬無以統之, 非勤無以成之. 孟子曰: "諸侯師文王, 必爲政於天下. " 吾亦曰: "學者師文王之敬、勤, 必成德於天下矣. " 台元固勤於學者, 吾不須贊, 但敬爲聖學原腦而有未易言者. 故於其有求也, 幷擧敬勤而勖之, 俾其不偏云爾. 주나라가 …… 새로워졌도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오직 …… 삼가셨네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보인다. 거룩하신 …… 밝히셨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문왕은 …… 없었네 《서경》 〈무일(無逸)〉에 보인다. 문왕은 ……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들을 볼 때에 다친 데가 있지 않은가 걱정하였으며, 도를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라는 구절이 보인다. 생지안행(生知安行) 태어나면서부터 알고[生而知之], 편안하게 행한다[安而行之]는 말로, 성인의 자질을 뜻하는 말이다. 《中庸章句 20章》 문왕을 …… 것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문왕을 본받으면 큰 나라는 5년, 작은 나라는 7년이면 반드시 천하에 정사를 하게 될 것이다.〔師文王, 大國五年, 小國七年, 必爲政於天下矣.〕"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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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에게 주는 서문 【을해년(1935)】 贈李【道衡】序 【乙亥】 사람들은 항상 도(道)와 문장을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지극한 경지에 미쳐서는 도 또한 문장이고, 문장 또한 도이니, 이것을 둘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행위가 선(善)을 다한 것을 지극한 도[至道]라 이르고, 말이 이치를 다한 것을 지극한 문장[至文]이라 이르니, 문장은 도에 근본하고, 도는 문장에 나타난다. 도가 아니면 문장이 근거할 바가 없고, 문장이 아니면 도가 밝혀질 수 없다. 그러므로 행위가 선을 다한 자는 지극한 문장을 지니고, 말이 이치를 다한 자는 지극한 도가 있다.시험 삼아 살펴보건대, 육경(六經)과 사자(四子)142)의 문장은 말이 이치를 다하였으니, 그 차례는 사계절과 같고, 그 작용은 물이나 불과 같으며, 그 앎은 귀신과 같다. 때문에 그 화려한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해와 별처럼 빛나니, 당우 삼대(唐虞三代) 성현(聖賢)의 지극한 도가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또 살펴보건대,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 시대 작가들의 문장은 쟁쟁하게 울림이 있고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치를 다한 문장을 법으로 삼아 비교하면 도를 터득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터득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흠결이 사이사이 나와서 교훈으로 삼기 어려우니, 어찌 도가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나는 그래서 "양웅(楊雄)이나 왕수인(王守仁)의 문장과 같은 것은 문장이되 문장이 아니고, 창려(昌黎 한유(韓愈))나 여릉(廬陵 구양수(歐陽修))의 문장과 같은 것은 문장이되 지극하지 못하니, 천하의 지극한 문장을 구한다면 오직 육경과 사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문장을 배우는 자들은 오직 한ㆍ당 이후의 작가만을 사모하고, 옛 성현의 글에서 돌이켜 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극한 문장으로 배우지 않고, 도와 별개로 여기기 때문이다.우리 무리 중에 이군 도형(李君道衡)은 도와 문장을 배우는 자로, 두 가지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자이다. 이는 뜻이 진실한 준사(儁士)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숭상케 하였다. 그러나 도와 문장이 하나인 줄 모른 채 문장에서 문장을 구하고 도에서 구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때문에 이 말을 지어 주어서 지극한 도를 얻어 행위가 선을 다한다면 말이 이치를 다한 지극한 문장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도에 들어가는 방법과 선을 다하는 술책은 선현의 글 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돌아보건대 내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바라는 바가 같기에 그와 더불어 서로 힘쓰면서 일생을 마치기를 바란다. 人恒道道與文, 余謂及其至也, 道亦文, 文亦道, 二之則不是. 行盡善之謂至道, 言盡理之謂至文, 文本乎道, 道見乎文, 非道則文無所據, 非文則道無以明. 故行盡善者有至文, 言盡理者有至道. 試觀六經四子之文, 言之盡理, 其序如四時, 其用如水火, 其知如鬼神. 故其光華發於外者, 日星如也. 非唐虞三代聖賢之至道, 其何能爾? 又觀漢、唐、宋、明作家之文, 非不鏘然有聲, 燁然而光. 律之以理盡者, 舍曰無得乎道者, 其云有得者, 亦罅漏間出, 難以爲訓, 豈非道之未至而然乎? 余故曰: "若楊雄、王守仁之文, 文而非文也; 若昌黎、廬陵之文, 文而未至者, 求天下之至文, 其惟六經四子乎. " 然而今之學文章者, 惟漢、唐後作家之是慕, 不反求之於古聖賢書, 何哉? 曰學之不以至者而二之於道也. 吾黨中李君 道衡, 學道與文者而二者之至焉者. 是志誠儁士也, 令人欽尙, 尙恐不知道與文之爲一, 而求文於文, 而不求於道也. 故爲此說而贈之, 俾知得至道而行盡善, 則言盡理之至文, 在其中也. 若其入道之方, 盡善之術, 具在聖賢書中. 顧余雖不才, 所望則同, 願與之交勖而終身焉. 육경(六經)과 사자(四子) 육경은 《주역》ㆍ《시경》ㆍ《서경》ㆍ《춘추》ㆍ《예기》ㆍ《악기》를 말하고, 사자는 사서(四書), 즉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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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국통정변유무년표》의 서문 《中華國統正變有無年表》序 세상에서 정통(正統)이라 인식하는 것은 오직 천하를 통합한 때문이고, 그 통합이 바른지 바르지 않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어진 덕을 지닌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 기술이 이와 같고, 문장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는 어느 겨를에 일일이 거론하겠는가. 오직 주자만이 이를 되돌려 바로잡았으니, 예를 들면 촉한(蜀漢)을 제(帝)로 삼고 위(魏)를 축출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 바로잡지 못했으니, 예를 들면 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송(宋)이 천하를 얻은 것이 바르지 않음에도 정통이 될 수 있었고, 동주(東周)의 임금들이 정통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대저 《시경》에서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은 것을 정풍(正風)ㆍ정아(正雅)라 하고, 성정의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변풍(變風)ㆍ변아(變雅)라 한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 예를 들면 제왕이 바름으로 천하를 얻은 것을 정통이라 하고, 바름으로 얻지 못한 것을 변통(變統)이라 하니, 방정학(方正學 방효유(方孝孺))이 명명한 것과 같은 것이 당연히 바꿀 수 없는 의론이다. 이것은 비록 주자가 정한 것과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뜻을 적용한 것이니, 촉한을 제로 삼고 위나라를 축출한 것이 이것이다. 만약 《강목(綱目)》143)을 편정(編定)한 날에 명백하게 진술했다면 빙그레 웃으며 따르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혹자가 이르기를,"당ㆍ송과 같은 선정(善政)과 인덕(人德)으로도 또한 변통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하니, 답하기를,"바르지 않으면 비록 있더라도 매우 아니고, 인덕과 선정이 비록 일컬을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천하를 얻음이 이미 정대함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변통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이는 《시경》의 변아가 비록 현인과 군자의 충직하고 온후하며 가엾게 여기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끝내 그 이름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 이름 때문에 아울러 인덕과 선정을 취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잡겠다."144)라고 하였으니, 구구한 내가 이글을 짓는 것은 이름과 호칭 사이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을 부쳐 공자와 주자의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이다. 世之認正統者, 惟以其統合天下, 不問其正不正. 溫公之賢德筆史如此, 東坡之文章著論如此, 餘何暇枚擧哉? 惟朱子反之正焉, 如帝蜀而黜魏是也. 然猶未盡正, 如秦、晉、隋、唐、宋之得天下不正, 而得爲正統, 東周君之不得爲正統, 何也? 夫《詩》之得性情之正者, 謂之正風、正雅, 不得性情之正者, 謂之變風、變雅. 準此而例之, 帝王之得天下以正者, 謂之正統, 得不以其正者, 謂之變統. 如方正學所名, 當爲不易之論. 此雖異乎朱子所定, 實用朱子之意, 卽帝蜀黜魏是也. 如使編定《綱目》之日, 明白陳達, 安知不莞爾而從之乎? 或曰: "以若唐、宋之善政仁德, 亦可入於變統乎? " 曰: "不正, 雖有, 甚否, 德政雖有可稱, 其得之旣不出於正大, 則不得不歸於變統. 此如《詩》之變雅, 雖出於賢人君子忠厚惻怛之意, 終難得易其名也. 誰復有以其名而幷不取其德政乎?" 孔子曰: "必也正名. " 區區之編此書者, 所以寓勸懲於名號之間而體孔、朱之意云爾. 강목(綱目)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으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희(朱熹)가 강목 체제로 바꾸어 편찬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반드시 …… 바로잡겠다 《논어집주》 〈자로(子路)〉 제3장에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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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서사에서 여러 군들에게 주는 서문 【당시 최재용의 손자 동선과 김락춘이 나를 따라 학문하였다. 병자년(1936)】 臺巖書社贈諸君序【時崔載鏞孫東宣、金洛春從余遊. 丙子】 학문을 하는 것은 인도(人道)를 배우는 것이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의 학자들은 얻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없다고 해서 학문을 그만두지도 않았고, 알려지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는 바가 없다고 해서 학문에 게으르지도 않았으며, 단연코 도를 구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그러했다.다만 사람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신체를 갖추고 있어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주(周)나라 때에 빈흥(賓興)의 예145)가 있자 선비들이 학문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진(秦)나라 때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있자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꺼려했으니, 이는 인지상정이고,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아, 오늘날의 학자들은 모욕을 받고 해침을 당하니, 세상에 용납 받지 못하는 것이 어찌 진나라 시대를 기다린 뒤에만 화가 되겠는가. 제군들은 이러한 때에 도리어 경전을 끌어안고 깊은 산 속에서 머리를 맞댄 채 나에게 청하여 학문을 묻고, 제군들은 나이가 매우 적어서 아직 공부를 쌓고 뜻을 정립한 시기가 없음에도 이러한 일을 잘 해내고 있으니, 어찌 하늘로부터 얻은 본성이 남다른 점이 있어 맹자가 일컬은 호걸의 부류에 버금가지 않겠는가.나는 학문에 대해 스스로 터득한 바가 없기에 제군들의 요청에 응답할 수 없지만, 생각건대 운수에는 막힘과 형통함이 있고 때에는 어둠과 밝음이 있어 막힘이 극도에 이르면 형통하고, 어둠이 극도에 이르면 밝아지게 되는데, 지금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7일 뒤 양이 진동하고 오성(五星)이 규성(奎星)의 자리에 모이는 운수가146) 머지않은 날에 회복되어 도를 배우는 몸에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직접 보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설사 운수가 막힌 시대라 하더라도 선비의 이른바 명리(名利)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먼 훗날에 있는 것과 가까운 시기에 있는 것 등의 구별이 있으니, 집안과 나라에 처해서는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고 조정에 있게 되어서는 두터운 봉록을 누리는 것은 형통하고 밝은 시대를 만났을 때에 볼 수 있는 것으로 가까운 시기에 있는 것이며, 도가 이에 높아져서 백세토록 우러러보고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져서 천하가 은택을 입는 것은 막히고 어두운 시대를 만났을 때에 보지 못하는 것으로 먼 훗날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쇠퇴한 세상에서 얻는 것이 도리어 성대한 시대보다 큼이 있고, 세상이 더욱 쇠퇴하고 곤궁함이 더욱 심해지면 후세에 드러나는 것이 더욱 클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이 도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그런데 오늘날의 업신여김과 해침을 돌아보지 않는 제군들은 얻음이 없는 옛사람과 같을 뿐만이 아니라 분발하여 도에 뜻을 둔 자들이니, 절로 응당 위하는 바가 없되 학문을 권면하고 학문에 힘쓴다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명리의 말에 가탁하여 번거롭게 고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사람들은 애초에 교화(敎化)가 없으면 곧 금수(禽獸)가 된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아 학문에 힘써 도를 구하지 않고, 아울러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이치를 몰라 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지 않으며, 더욱이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먼 훗날에는 큰 명리가 있게 되는 줄 모르고 한갓 가까운 때에 볼 수 있는 작은 명리만을 추구한다. 때문에 이러한 말로 깨우쳐 주어서 돌아가 학문에 근면하지 못하는 예전의 동반자에게 고하게 하니, 또한 납약자유(納約自牖)147)의 뜻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제군들이 읽는 경전에 있으니, 또한 나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學者學人道, 非求名利也. 是故古之學者, 不爲其有所得而勸, 故不爲其無所得而廢; 不爲其有所聞而勤, 故不爲其無所聞而怠, 斷然惟以求道爲心, 此固然矣. 但人具血肉之身, 便有自私之理. 故周有賓興之禮, 而士無不學; 秦有焚坑之禍, 而人皆諱學. 此人之常情, 勢之必然也. 嗚呼, 今之學者, 受侮見害, 不容於世者, 豈待秦世而後爲禍哉? 諸君乃以此時, 抱經聚首於萬山之中, 請余問學, 諸君年甚少, 尙未有積功定志時節而能辦此, 豈得於天者有異, 而孟子所稱豪傑流亞歟? 余於學, 自無所得, 無以爲對. 但惟運有否泰, 時有晦明, 否極則泰, 晦極則明. 今旣極矣, 安知七日之雷、五星之奎, 行將有復, 而親見尊榮於學道之身乎? 借使否也, 士之所謂名與利者, 有可見不見在近在遠之別, 處家邦而彰令譽, 在廟堂而享厚祿, 此遭泰明之可見而在近者也; 道尊於此而百世仰止, 敎垂諸後, 而天下蒙澤, 此値否晦之不見而在遠者也. 然則衰世之所得, 反有大於盛時, 而世益衰、困益甚, 則發於後者益大矣. 蓋人之見道衰而不學者, 由不知此理也. 余於學, 自無所得, 無以爲對. 但惟運有否泰, 時有晦明, 否極則泰, 晦極則明. 今旣極矣, 安知七日之雷、五星之奎, 行將有復, 而親見尊榮於學道之身乎? 借使否也, 士之所謂名與利者, 有可見不見在近在遠之別, 處家邦而彰令譽, 在廟堂而享厚祿, 此遭泰明之可見而在近者也; 道尊於此而百世仰止, 敎垂諸後, 而天下蒙澤, 此値否晦之不見而在遠者也. 然則衰世之所得, 反有大於盛時, 而世益衰、困益甚, 則發於後者益大矣. 蓋人之見道衰而不學者, 由不知此理也. 若諸君之不顧今之侮害, 不啻若古之無得而已, 而奮發志道者, 自應無所爲, 而勸斯勤斯, 必有事在, 吾何敢託於名利之說而瀆告之? 顧今之人, 初不念無敎卽獸之戒, 而勉學求道, 幷不知物極必反之理, 而修身俟命, 尤不知有不見、在遠名利之大者, 而徒求可見、在近名利之小者. 故爲此說而喩之, 俾歸而告舊日同伴之不勤學者, 亦納約自牖之意也. 至於爲學之方, 有諸君所讀經傳在, 亦不須問余 빈흥(賓興)의 예 인재를 추천하는 예절로, 향대부(鄕大夫)가 그 고을의 소학(小學)에서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국학(國學)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들을 전송할 때에 빈객(賓客)으로 예우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周禮 地官 司徒》 7일 …… 운수 원문의 '7일(七日)'의 '일(日)'은 '월(月)'을 뜻하는 것으로, 7개월 만에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하나 생겨남을 말한다. 이는 《주역》 〈복괘(復卦)〉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한 데서 온 말이다. 오성이 규성에 모인다는 것은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별이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의 자리에 모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문운이 크게 번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ㅇ이다. 이는 송 태조(宋太祖) 건덕(乾德) 5년에 오성이 규성의 별자리에 모인[五星聚奎]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복자(卜者)가 인재가 많이 배출될 조짐이라고 점친 데에서 온 말이다. 납약자유(納約自牖) 상대방이 잘 알고 있어 받아들이기 쉬운 곳으로 이야기하여 차츰 깨닫도록 인도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감괘(坎卦)〉육사(六四)에 "인군에게 아뢸 때에는 인군이 밝은 곳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納約自牖, 終无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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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1 卷之二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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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5 卷之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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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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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입암 손공 행장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 공의 본관은 경상도(慶尙道) 밀양부(密陽府)이다. 고조의 휘는 책(策)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수주 목사(樹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비는 원주(原州) 이씨로 공인(恭人)이다. 증조부의 휘는 계경(季敬)으로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비는 ■씨로 유인(孺人)이다. 조부의 휘는 의화(義和)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냈다. 비는 ■씨로 숙인(淑人)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민(敏)이니, 통훈대부로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냈다. 비는 금산 김씨(錦山金氏)로 숙인이다.성렬(聖烈) 손동선(孫東宣) 군이 그 집안 부로(父老)의 명을 받들어 나에게 와서 청하기를 "선조 입암공(笠巖公)의 행적이 오래되어 대부분 산실되었으니 진사 이언복(李彦復) 공의 행장이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소략함을 면치 못합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 공이 지은 신도비도 이에 기초하여 지었으므로 또한 그러합니다. 근래 제가(諸家)가 편찬한 《동사계고(東史繼考)》와 《국조실록(國朝實錄)》을 보니 자세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별도로 한 행장을 만들어 그것으로 작가에게 글을 부탁하고 비석에 드러내며 문서로 저술할 것을 도모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글을 결코 감당할 수 없으나 공을 참으로 평소에 흠모하였으며 게다가 우리 선조 군사공(郡事公) 외손녀의 아들이니, 글을 지어 내 이름을 의탁하는 영광이 있으며 정의(情誼) 또한 마땅히 다져야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예전 행장과 비문, 역사와 실록을 참고, 교정하면서 다만 사실만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에 나의 견해를 덧붙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행장을 완성하였다.공의 휘는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淑)이며, 입암은 그의 호이다. 손씨는 그 선조가 중국에서 나왔으니, 손승린(孫承麟)이란 분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정박하였는데,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손구례(孫俱禮)는 신라를 도와 그 공으로 모량부대인(牟梁部大人)이 되었다. 세대가 흘러 효자 손순(孫順)이 나왔는데, 곽거(郭巨)와 같은 지성2)으로 아이를 묻다가 종을 얻었는데, 이에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모친을 봉양하였다. 중시조 손긍훈(孫兢訓)은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도와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밀양(密陽)을 채읍으로 삼았으니, 인하여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여러 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 벌열이었으니, 태학사(太學士) 손빈(孫贇)은 북쪽 정벌에 공을 세워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이 분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손광(孫洸)을 낳으셨다. 또 4대를 지나 목사(牧使) 손귀린(孫貴麟)이 나왔으니, 이 분은 수주공(樹州公)이다. 이분의 손자로 공에게 증조가 되는 은덕공(隱德公)이 비로소 부안에 거주하였는데, 3대가 지나 공이 탄생하였다. 공은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10여 세에 경서와 제자백가의 책을 환하게 이해하였다. 약관에 성균관에 올랐는데, 세조(世祖) 임오년(1462년)에 주상께서 사정전(思政殿)에 행차하여 공을 불러서 읽고 있던 책을 강하게 하고서 세자로 하여금 듣게 하였으며, 이윽고 임금에게 올리던 보리밥을 하사하였다. 갑신년(1464년)에 주상께서 온양(溫陽)에 행차하여 과거를 여니, 사론이 '이번 시험에 타도의 선비는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밖으로부터 엄하게 금하니, 공은 시를 지어 시험장에 내던졌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문단의 여러 장수가 온양에 진을 쳤는데 文林諸將陣溫陽용과 범이 내달리고 날아올라 전장에서 다투네. 龍虎奔騰走戰場도망간 병졸에 어찌 한신처럼 걸출한 이 없으랴 亡卒豈無韓信傑소하는 모름지기 한중왕에게 고해야 하네.3) 蕭何須告漢中王주상께서 직접 시를 읽고서 하교하여 '금지한 타도의 선비들도 모두 허락하라.'라 하니 공이 마침내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사간원으로 승진하여 벼슬길에 이름을 떨쳐 명성이 자자하였다.성종(成宗) 원년 경인년(1470년) 4월에 3품 이하 시강하는 신하 가운데서 선발하여 집현전의 고사를 모방하여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문장을 작성하는데 대비하라고 명하니, 공은 수찬(修撰)이 되어 부제학(副提學) 김지경(金之慶),4) 직제학(直提學) 유권(柳睠), 전한(典翰) 임사홍(任士洪), 응교(應敎) 김계창(金季昌),5) 부응교(副應敎) 최경지(崔敬止),6) 교리(校理) 노공필(盧公弼),7) 홍귀달(洪貴達),8) 부교리(副校理) 김극검(金克儉),9) 정휘(鄭徽), 수찬(修撰) 최숙정(崔淑精),10) 김종직(金宗直), 부수찬(副修撰) 김윤종(金潤宗), 남계당(南季堂),11) 채수(蔡壽)12) 등과 번(番)을 나눠 번갈아 숙직을 하면서 날마다 세 번씩 임금을 접견하여 책의 깊은 뜻을 강론하고 임금의 교화를 보필하였으니, 조정의 다른 신하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영주에 오른 학사'13)라고 일렀다.술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거듭 명하여 임금의 총애와 영화로움을 길이 보이니, 공과 제학사들은 술에 취해 기쁨에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다음날 성은에 감사하며 시를 올렸는데, 거듭 외람되이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시니, 이로부터 더욱더 학문을 연마하여 성은을 갚기를 기약하였다. 간간이 동료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과 학문으로 서로 도움을 주며 시를 수창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주상께서 또한 양성지(梁誠之)14)에게 명하여 여러 학문을 천문, 풍수, 율려, 의학, 음양, 사학, 시학의 일곱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6명을 두었는데, 나이가 젊은 문신을 각 부분에 배치시켰다. 이에 공은 음양문에 배치되었고 김점필재는 시학문에 배치되었다.신묘년(1471년)에 검토관(檢討官)이 되어 지방에서 돌아왔는데, 주상께서 민간의 질고를 물으시니 공은 전라도 조운(漕運)에서 수군을 부리는 폐단에 대해 아뢰었다. 병신년(1476년)의 중시(重試)에 갑과에 합격하여 전첨(典籤)에서 직급이 승진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에서 홍문관으로 옮겼으며 승정원에 들어갔다. 이 해 8월에 주상께서 경연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론하다가 '대성(臺城)에 유폐(幽閉)된 양나라 군주15)가 채소를 먹다가 그마저 다 떨어지자 이에 계란을 먹었다.'는 부분에 이르러 시종신에게 이르기를 "부처를 믿음이 효과가 없는 것을 이에 더욱 잘 알 수 있다."라고 하니, 공이 참찬관(參贊官)으로 참여하여 대답하기를 "불교를 저처럼 좋아하다가 재앙을 이처럼 받았으니, 후대의 임금은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는 것은 그 말이 이치에 가깝고 화복의 말이 쉽게 사람을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아뢰기를 "지금 법에 정전(丁錢)을 바쳐야 바야흐로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데, 수령들은 도첩의 유무를 묻지 않고 승려로 받아줍니다. 그러므로 돈을 내는 사람은 백에 한 둘도 없으니, 이 때문에 승도는 날로 늘어나고 군액은 날로 죽어듭니다."라 하였다. 주상께서 "이는 하루아침에 다 개혁할 수 없다."라고 하자, 다시 대답하기를 "이미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또한 원각사(圓覺寺)는 마땅히 헐어버려야 하는데, 더구나 위병으로 문을 지키게 합니까."라 하였다.이 해 또 예문관 부제학(藝文舘副提學)이 되어 소장을 올려서 재앙을 막는 방법을 논하면서 네 개의 조목을 아뢰었다. 첫 번째는 대간의 말을 즐겨 따르고 훈척들이 국법을 흔들게 놔두지 않게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조정 안팎의 여러 벼슬아치 가운데 나이가 어려 학문이 깊지 않은 자는 모두 학문에 나아가게 하고 학문이 이뤄진 뒤에 임무를 맡기는 것이며, 세 번째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깊이 생각하여 평안도에 사신의 행차할 때 정해진 법 이외의 짐을 지거나 실어서 나르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며, 네 번째는 중들에게 식량을 대주는 비용을 혁파하여 거둬들이고 정병(正兵)이 절 문을 지키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정유년(1477년) 8월에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16)가 화를 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 홍귀달(洪貴達)이 팔을 휘두르고 눈을 무섭게 뜨고서 '너'라고 부르며 꾸짖으니, 공은 대사간(司諫)으로서 그들의 무례함을 논박하였다. 10월에 승지로 있으면서 기신재(忌辰齋)의 글 첫머리에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조선국왕 성 아무개.'라고 일컫는 것을 보고서 대단히 놀라 기신재를 파하라고 청하니, 주상이 '보살계제자'라는 말을 없앴다. 11월에 유구국(琉球國)에서 원숭이를 바치자 또다시 승지로써 아뢰기를 "신이 알기로는 전하께서는 완호(玩好)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는데, 사관이 '태복시에서 원숭이를 기른다.'라고 적는다면, 훗날 전하께서 기이한 구경거리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확신하겠습니까."라 하였다.계묘년(1483년) 3월에 정희왕후(貞熹王后)17)가 승하하자, 5월에 주상께서 빈전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행하니 백관들이 곡하였다. 공이 부호군(副護軍)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행대비의 시호를 보니, 깊이 생각하여 능히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고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함에 공이 있는 것을 '희(熹)'라고 하니, 두 글자의 뜻이 비록 모두 아름답지만 다만 공효의 실상만을 드러내고 덕성의 아름다움은 나타내지 못하니 온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을사년(1485년) 7월에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을 편찬하여 진상하니 비단 한 필을 하사받았다. 이후로 두어 해 동안 부안현 요리(蓼里)에 집을 지어 영귀(咏歸)라 편액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혔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18)과 대단히 친하였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9)가 임지로 떠날 때 이별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쓸쓸한 이 신세 시서에 그르쳤나니 蕭條身世誤詩書한 평생 세상과 맞지 않음을 스스로 웃는다. 自笑平生向世疏요리에서는 매양 새 안검20)을 만날 것이고 蓼里每逢新按劎뇌계에서는 다행히 옛 지어21)에 힘입으리. 㵢溪幸賴舊知魚새벽 별은 희미한데 항상 서로 그리워하니 晨星落落長相望세월은 하염없이 흘러 이미 7년 지났네. 歲月悠悠已七除만일 걸상 마주앉아 잠깐 내게 묻는다면 對榻片言如問我늙어가며 담박한 것 다만 처음과 같다 하리. 晩來淡薄只如初이 시는 대개 은거하려는 생각22)을 읊은 작품이다.공은 마침내 요리에서 타계하여 요리의 북쪽 7리에 있는 갈촌(葛村)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판서 최여달(崔汝達)의 따님이다. 묘는 합봉하였다. 아들로 세기(世基)는 참봉(參奉)이며, 세주(世柱)와 세우(世佑)가 있고, 딸들은 송은손(宋殷孫), 최세준(崔世俊), 윤은찬(尹殷贊), 이광보(李光輔) 등에게 시집갔다. 세기의 아들로 대로(大老)와 충순위(忠順衛) 중로(重老)와 한림(翰林) 숙로(叔老)가 있다. 세주의 아들로 근로(謹老)가 있다. 세우의 아들로 판결사(判決事) 계금(繼錦)이 있다. 송은손의 아들로 홍관(洪寬)이 있다. 최세준의 아들로 륜(崙)이 있다. 윤은찬의 아들로 종원(宗元)과 종형(宗享)이 있다. 이광보의 딸은 진사 김관(金綰)에게 시집갔다. 대로의 아들로 참봉 홍우(弘祐)와 진사 홍복(弘福), 그리고 홍정(弘禎)이 있다. 중로의 아들인 홍적(弘績)은 대교로 호는 도봉(道峰)인데 을사년에 시사(時事)를 곧바로 쓴 일로 귀양을 가서 죽었으며, 홍륜(弘綸), 홍서(弘緖), 홍계(弘繼)는 모두 진사이며, 그리고 홍업(弘業)이 있다. 숙로의 아들로 별제(別提) 홍록(弘祿)의 호는 한계(寒溪)인데 임진왜란 때 태조의 진영을 옮겨 봉안하였으며 《열조실록(列朝實錄)》을 완전히 보호한 공이 있다. 근로의 아들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인 대남(大南)이 있다. 계금의 아들로 진사인 순량(舜良)이 있다.삼가 일찍이 논하건대, 공은 일찍이 문장을 성취하여 이른 나이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니, 이는 천부적인 재주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홍문관 부제학, 예문관 직제학, 좌우 승지와 동부승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것은 모두 청현직(淸顯職)으로 이 또한 문학과 중망으로 이룬 것인데, 임금의 계책을 빛내고 임금의 덕을 성심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논하는 자들이 문장은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법도를 따르고 학문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로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당시에 어찌 그러한 까닭이 없겠는가.그러나 공의 마음에 답답한 것이 있으니, 도가 밝지 못한 것은 이단이 해치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불교가 가장 심하다. 공이 조정에 서서 의논한 것으로 강의와 대문(對問)부터 진언과 소차(疏箚)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지닌 것과 말로 드러낸 것은 오직 맹자(孟子)가 말한 '힘써 그 임금을 이끌어서 도에 합하게 한다.'23)는 것에 해당하는데, 그에 해당하는 큰일은 바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다. 오호라! 불교의 해로움은 천여 년이 되었기에 성종의 시대에도 그 폐단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조정의 높은 관리로 통유(通儒)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태극의 위에 있는 무극은 불도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이 때에 공은 우뚝하게 견해를 견지하고 강건하게 올바름을 지켜 첫째도 불교는 배척해야 하고 둘째도 불교는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배척함을 그치지 않았으며, 군주로 하여금 불교에 관한 많은 것을 혁파하게 하였으니 사문에 공을 세운 것이 크다.또한 기미를 보고서 일어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니, 도에 본 것이 있지 않는 자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동한 말기에 어진 선비가 많았으나, 초연히 당고(黨錮)의 화를 면한 자는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다만 공은 욕되지 않고 위태롭지 않은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 하루아침에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그물에서 벗어나니, 무오년 제현들로 하여금 손색이 있게 하였다. 이는 소광(疏廣)이 소망지(蘇望之)가 당한 재앙을 일찍 멀리한 것이니,24) 어찌 더욱 어렵지 않으랴.이 두 가지 사실에서 공의 학문이 옛날 현인의 심법에서 전수받은 것이 있음은 속일 수 없다. 마땅히 그가 집에 거처할 때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남긴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을 많이 기록으로 남겼을 것인데, 이미 큰 난리를 겪었고 거듭 화마를 당하여 저술이 흩어지고 잃어버렸기에 그 증거가 아득하다. 예전 행장에서 효성과 우애는 천부적이었다는 한 구절 이외에 조금도 그 대략을 드러낼 수 없으며, 심지어는 생졸년도 없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으랴.다만 다행히도 역사책에 실려 있고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해와 별처럼 분명하며, 조정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옛사람의 일을 논하는 자들은 이것으로 미뤄 짐작한다면 크고 작은 삶 전체를 거의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발자취를 이어 도봉(道峰)의 어짊과 한계(寒溪)의 충절이 나왔다. 도봉은 초은(楚隱)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또한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으니, 그가 덕행을 마음으로 깨쳐서 타인에게 미치며 나아가 후손에게 전한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한갓 명성과 지위, 업적만이 환하게 빛난 것이 아니니, 오호라 훌륭하도다. 本貫, 慶尙道密陽府.高祖諱策, 文科, 樹州牧使, 妣原州李氏恭人.曾祖諱季敬, 隱德不仕, 妣■氏孺人.祖諱義和, 通訓大夫行丹城縣監, 妣■氏淑人.考諱敏, 通訓大夫行谷城縣監, 妣錦山金氏淑人.孫君聖烈東宣奉其門父老命, 來請于余曰: "先祖笠巖公事行, 舊多遺逸, 有進士李公彦復狀, 而固不免疎略, 松沙奇公宇萬神道碑, 因是而作, 故亦然.近得見諸家所編《東史繼考》·《國朝實錄》, 詳其所未詳, 竊欲別成一狀, 以之謁文作家, 顯之于碑, 著之于牒, 願有以圖之也." 余自惟以人以文, 決非可堪, 然公固平日所景仰, 且吾先祖郡事公外孫女之子, 名可託榮, 誼亦當講.以是辭不得, 終遂以舊狀與碑及史與錄, 參互訂定, 惟實是從, 末附己見, 以成文曰: "公諱比長字永淑, 笠巖其號也.孫氏, 其先蓋出中國, 有承麟浮海而東泊仇史, 今慶州.有俱禮佐新羅, 爲牟梁部大人.傳至孝子順, 有郭巨至誠, 埋兒得鍾, 王賜第米養母.中祖兢訓, 佐麗太祖南征, 封廣理君, 食采密陽, 仍貫焉.歷累世皆顯閥, 太學士贇, 北征有功, 封密陽君, 生版圖判書洸.又四傳而至牧使貴麟, 是爲樹州公.考隱德公始居扶安, 三世而公生焉.穎悟出人, 十餘歲經子百家, 靡不通解, 弱冠登上庠.世祖壬午, 上御思政殿, 召公講所讀書, 使世子聽之, 仍賜御膳麥飯.甲申, 幸溫陽設科, 士論謂'今試他道士勿許入.' 自外嚴禁, 公作詩投獻試庭, 詩曰: "文林諸將陣溫陽, 龍虎奔騰走戰場.亡卒豈無韓信傑, 蕭何須告漢中王." 上親覽下敎'禁止幷許他道士.' 公竟得擢乙科, 入槐院陞柏府, 敭于名塗, 聲譽蔚然.成宗元年庚寅四月, 命選三品以下侍講之人, 倣集賢殿故事, 以備顧問製作, 公爲修撰, 與副提學金之慶·直提學柳睠·典翰任士洪·應敎金季昌·副應敎崔敬止·校理盧公弼·洪貴達·副校理金克儉·鄭徽·修撰崔淑精·金宗直·副修撰金潤宗·南季堂·蔡壽, 分番更直, 日承三接, 講劘奧義, 協贊聖化, 同朝搢紳, 莫不跋羡, 謂之登瀛學士.宣醞賜樂, 申命圖繪, 永示寵榮, 公與諸學士醉歡舞蹈.翼日謝恩進詩, 重叨嘉獎, 自是益加淬礪, 期於報答.間與同僚金佔畢齋, 麗澤相資, 唱和相屬.是歲上又命梁誠之, 分諸學爲天文風水律呂醫學陰陽史學詩學七門, 門置六人, 以年少文臣配之, 公配陰陽門, 金佔畢配詩學門.辛卯, 爲檢討官自外還, 上問民間疾苦, 公奏全羅漕運役水軍之弊.丙申重試, 闡甲科, 以典籤陞秩, 由軍資監正移玉署東壁入銀臺.是年八月, 上於經筵講《綱目》, 至'臺城之閉, 梁主蔬茹皆盡, 乃食鷄子.' 謂侍臣曰: "佛之無驗, 於此益可見矣." 公以參贊官對曰: "好佛如彼, 而受禍如此, 後之人主, 可以鑑矣, 而猶信之者, 以其言近理, 而禍福之說, 易以惑人也." 因奏曰: "今法納丁錢, 方許爲僧, 而守令不問度牒有無, 故納錢百無一二, 是以僧徒日增, 軍額日減." 上曰: "此不可一朝盡革." 對曰: "旣知之, 當速去之.且圓覺寺, 在所當毁, 况使衛兵把門乎." 是月又爲藝文舘副提學, 上疏論弭災之方, 條陳四事, 一曰, 樂從臺諫, 勿以勳戚而撓國法.二曰, 中外庶官, 年少不學者, 幷令就學, 學成而後任之.三曰, 深念邦本, 以袪平安一道使行時法外駄載之弊.四曰, 革收廩僧之費, 罷正兵寺門之守.丁酉八月, 都承旨玄碩圭怒, 同副承旨洪貴達攘臂怒目, 至稱'爾汝'而罵之, 公以大司諫, 駁其無禮.十月, 以承旨奏忌辰齋疏頭稱'菩薩戒弟子朝鮮國王姓諱.' 見之甚駭, 請罷之, 上命去'菩薩戒弟子'語.十一月, 琉球國獻猿公, 又以承旨奏曰: "臣知殿下絶意玩好, 而太史書之曰: '太僕畜猿.' 安知後日不謂殿下好奇玩乎." 癸卯三月, 貞熹王后昇遐, 五月, 上詣殯殿行朝奠, 百官哭臨, 公以副護軍上箚曰: "大行大妃之謚, 大慮克就曰'貞', 安民有功曰'熹', 二字義雖皆美, 只著功令之實, 未見德性之善, 似爲未安." 乙巳七月, 與達城君徐居正等, 編進《東國通鑑》, 蒙賜叚子一匹.自是以後, 數歲築堂于同縣蓼里, 扁以咏歸, 決意休退.與兪㵢溪好仁甚相好, 其別曹梅溪偉赴任詩曰: "蕭條身世誤詩書, 自笑平生向世踈.蓼里每歎新按劒, 㵢溪幸賴舊知魚.晨星落落長相望, 歲月悠悠已七除.對榻片言如問我, 晩來淡泊只如初." 此蓋筮遯之作也.竟卒于蓼, 葬于蓼北七里葛村乙坐原, 配淑夫人全州崔氏, 判書汝達女, 墓合封.男世基參奉, 世柱·世佑, 女適宋殷孫·崔世俊·尹殷贊·李光輔.世基男, 大老, 重老忠順衛, 叔老翰林.世柱男, 謹老.世佑男, 繼錦判決事.宋婿男, 洪寬.崔婿男, 崙.尹婿男, 宗元·宗享.李婿女金綰進士, 大老男, 弘祐參奉, 弘福進士, 弘禎.重老男, 弘績待敎號道峰, 乙巳直書時事謫卒, 弘綸·弘緖·弘繼, 幷進士, 弘業.叔老男, 弘祿別提號寒溪, 壬辰亂有移奉太祖眞像, 保全《列朝實錄》之功.謹老男, 大南掌樂院正.繼錦男, 舜良進士.竊嘗論之, 公之夙就文章, 早捷重試, 自是天才之絶異.弘文副學藝文直提左右同副承旨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司諫院大司諫之歷盡淸顯, 亦惟文學重望, 有以致之, 而黼黻皇猷, 啓沃君德, 故論者謂文追遷固軌轍, 學得程朱門路, 此其當時, 豈無所以然哉.抑余有所槩于中者, 道之不明, 異端害之而佛爲甚.公之立朝議論, 自講義對問, 至奏啓疏箚, 心心所存, 言言所發, 惟孟子所謂'務引其君而當道'者是已, 而其大者在乎斥佛, 嗚呼, 佛之爲害, 千有餘年, 宣陵之世, 弊猶未祛, 同朝大官稱爲通儒者, 至有太極之上有無極, 佛道是也之說矣.于斯時也, 公卓然持見, 介然守正, 一則曰佛可斥, 再則曰佛可斥, 斥之不已, 而使君上多所革罷, 其有功斯文大矣.且夫見幾而作, 不俟終日, 非有見乎道者不能.是以東漢之末, 賢士多矣, 超然免於黨錮者, 無幾人焉.惟公洞見不辱不殆之理, 一朝鴻擧, 迴脫網外, 使戊午諸賢有遜色, 此疏廣所以早遠望之之禍者, 豈不尤難哉.于此二者, 公之學有所受於古賢心法者, 不可誣也.宜其居家處世之嘉言懿行, 亦多可書, 而旣經大亂, 重以回祿, 著述散亡, 徵佐遙邈.舊狀孝悌天性一節外, 不少槩見, 甚則生卒無年, 可勝歎哉.惟幸竹帛之載, 金石之藏, 昭如日星, 朝著偉蹟, 畢見無餘, 尙論者以此而反隅, 則全體巨細, 庶可周知.繩公之武而有道峰之賢, 寒溪之忠.道峰生楚隱承憬, 又殉節壬亂, 其德行之得之心及乎人, 而傳諸後承者, 亦可見矣.不徒爲名位事業之炳烺已也, 於虖盛哉."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로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고종 18년(1881)에 조정에 행정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湖南疏首)라 불리었다. 명성 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키는 등 항일 운동을 하였다. 곽거와 같은 지성 후한(後漢)의 효자 곽거가 가난한 형편에도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마침 아내가 아들을 낳아 세 살이 되었을 때 노모가 항상 자기 밥을 덜어서 손자를 먹이곤 하였다. 그러자 곽거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가난해서 어버이 봉양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우리 함께 저 자식을 묻어 버립시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소." 하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안고 가서 땅에 묻으려 하였다. 땅을 2척 남짓 파내려 가자 갑자기 황금이 가득한 가마솥〔金釜〕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솥 위에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내린 것이니, 관청에서도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아이 묻는 일을 중단하고 바로 돌아와서 어버이도 잘 봉양하고 아이도 잘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11》 도망간……하네 소하(蕭何)가 한 고조(漢高祖)에게 한신(韓信)을 여러 차례 추천하였는데도 중용하지 않아 한신이 도망치자, 이 소식을 듣고 소하가 고조에게 미처 아뢸 겨를도 없이 한신을 쫓아가서 데려왔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여기서는 과거를 보지 못한 거자(擧子) 가운데 한신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김지경(金之慶) 1419~1485. 본관은 선산, 자는 유후(裕後),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대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475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수령의 탐학을 처벌하고 성책을 보수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1485년에는 신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배려로 한직인 호군에 제수되었다. 김계창(金季昌) ?~1481. 본관은 창원, 자는 세 번(世蕃)이다. 147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역임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시문과 경사에 능통하고, 외교문서 작성과 문풍진흥에 공헌하였다. 최경지(崔敬止) ?~1479.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화보(和甫)이다. 1479년(성종 10)에는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시문에 뛰어났다. 노공필(盧公弼) 1445~1516.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이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2년 뒤 중종반정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영경연사(領經筵事)로 특진하고, 1507년(중종 2) 1차 사절이 실패했던 중종의 승습(承襲)에 관한 승인을 명나라에 가서 얻어내고 귀국, 중추부영사(領事)가 되었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함허정(涵虛亭),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올랐다. 1479년(성종 10) 도승지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좌참찬으로서 왕의 난정(亂政) 10여 조목을 들어 간(諫)하다가 좌천당하였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던 도중 단천(端川)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당하였다. 김극검(金克儉) 1439~1499. 본관은 김해, 자는 사렴(士廉), 호는 괴애(乖崖)이다. 1491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한때 언로(言路)를 주도하였다. 149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 우윤과 좌윤, 호조참판이 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학식이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다. 최숙정(崔淑精) 1433~1480.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趙遙齋) ·사숙재(私淑齋)이다. 1470년 승문원 교리로서 춘추관기주관을 겸직,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한때 탐학한 관리라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부제학이 되었다. 노사신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남계당(南季堂)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희정(希正)이다.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역임할 때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 성종이 직접 글을 내려 격려하고 포상하였다. 1486(성종 17) 겸 사헌부집의(兼司憲府執義)이 되었으며 안변부사(安邊府使)를 거쳐 1493(성종 24)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채수(蔡壽)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懶'는 보통 '라'로 읽어 '나재'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의 문중에서는 본음인 '란'으로 읽어 '난재'로 표기한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이석형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1478년 응교(應敎)가 되어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시켰다.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함창(咸昌)에 은거하여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산경(山經)·지지(地誌)·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저서에 《난재집(懶齋集)》 2권과 고전소설 《설공찬전(薛公贊傳)》이 있다. 영주에 오른 학사 '등영주(登瀛洲)'의 준말로, 영주는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태자로 있을 때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을 학사(學士)로 삼아 정사를 자문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고 비유하였다. 《新唐書 卷102 褚亮列傳》 양성지(梁誠之) 1415~1482.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이다. 우리나라 지지(地誌)에 조예가 깊어 단종 때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세조 때 《팔도지리지》와 《동국지도》를 편찬했다. 1481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고 각종 서적의 인쇄 · 출판을 건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에 능했다. 대성에……무제 양 무제에 대해서는 《자치통감》 권162 〈양기(梁紀)〉에 보인다. 참고로 양 무제에 대한 평으로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1월 3일 야대(夜對)에서 사독관 신치운(申致雲)의 말이 주요하다. 즉 "양 무제는 영웅호걸의 재주를 갖고 있었고 지려가 높고 넓었으며, 혈기의 욕심을 끊어 버리고 주색(酒色)이나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고, 독서를 하고 소찬(素饌)을 하면서 오로지 부처를 숭상하였으니, 그의 뜻이 단지 복전(福田)의 이익을 구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불학(佛學)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와는 별개의 일로 산하(山河)와 일월(日月)을 환상(幻像)으로 보아 천하 국가를 외물(外物)로 여기니, 불학을 숭상하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후경(侯景)이 이르자 상하가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끝내는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습니다."라 하였다. 현석규(玄碩圭) 1430~1480.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덕장(德璋), 호는 청단(淸湍),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정직과 청렴으로 공사(公事)를 잘 처리하여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청원으로 임기가 끝난 후 1년간 더 재직하고 어의(御衣)를 하사받았다. 정희왕후 세조(世祖)의 왕비로 예종이 죽은 뒤에 성종을 왕위에 앉히고 대왕대비로서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 또는 뇌계이다.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ㆍ문장ㆍ서예에 뛰어나 삼절(三絕)로 꼽혔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성종 때의 학자(1454~1503)로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도승지를 역임하고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어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죽었다. 저서에 ≪매계집≫이 있다. 안검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서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여기서는 조위가 자주 시를 보낸다는 의미이다. 지어 장자(莊子)와 그의 친구 혜자(惠子)가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노닐 때,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노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일세.[鯈魚出游從容 是魚樂也]"라고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겠는가.[子非魚 安知魚之樂也]"라고 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유호인과 함께 참된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은거하려는 생각 '서둔(筮遯)'은 점을 쳐서 둔괘가 나왔다는 말로 은거하려는 생각을 가리킨다. 《주역》 둔괘(遯卦)의 전(傳)에 이르기를 "둔(遯)은 음(陰)이 자라나고 양(陽)이 사라지니, 군자가 은둔하여 숨어 지낼 때이다."라고 하였다. 힘써……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군자가 임금을 섬길 때는 그 임금을 힘써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君子之事君也 務引其君以當道〕"라 하였다. 소광이……것이니 소망지는 전한(前漢)의 제10대 황제인 선제(宣帝) 유순(劉詢) 때부터 측근으로 중용되고 있던 중서령(中書令) 홍공(弘恭)ㆍ중서복야(中書僕射) 석현(石顯) 등의 중서(中書) 환관(宦官)들과 대립해 실각했다. 홍공(弘恭)ㆍ석현(石顯) 등의 환관(宦官)들은 대립하던 소망지(蕭望之)를 모함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소광은 선제(宣帝) 때의 태자 태부(太子太傅)를 지냈는데, 황태자였던 원제(元帝)가 12세에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통달하자 태자 소부(太子少傅) 소수(疏受)에게 "내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고, '공(功)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道)이다.'라고 한다. 지금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러 높은 벼슬에 오르고 명예를 확립하였는데, 이와 같은데도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주 방공의 행장 정묘년(1927) 西洲房公行狀【丁卯】 공의 성은 방씨(房氏)로 휘는 두재(斗載), 자는 망여(望汝), 호는 서주(西洲),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윗대에 휘 계홍(季弘)이란 분이 있는데, 고려 개국 공신으로 지위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그 후 8대 동안 벼슬아치가 연이어 나왔으니, 휘 사량(士良)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이 분은 휘 구성(九成)을 낳았으니, 구성은 남원(南原)에서 아내를 얻어 이로 인해 주포촌(周浦村)에 거처하게 되었으며, 벼슬은 정산 현감(定山縣監)에 그쳤다. 이분이 휘 순문(恂文)을 낳았으니, 순문은 경기도 수운판관(京畿道水運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귀화(貴和)를 낳으니,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이분이 휘 한걸(漢傑)을 낳으니, 한걸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25)이 그의 묘지(墓誌)를 썼으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응현(應賢)으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증조의 휘는 덕화(德驊)이다. 조부의 휘는 원정(元井) 호는 지족와(知足窩)로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부친의 휘는 명엽(明燁) 호는 주일와(主一窩)로 진사였다. 부인은 창녕(昌寧) 조씨 감역(監役) 황(熀)의 따님이다. 주일의 아우의 휘는 명흡(明熻)이며, 그 부인은 여주 이씨(驪州李氏 ) 별제 지일(志一)의 따님으로 공의 생부모이다.공은 숙종(肅宗) 을유년(1705년)에 태어났는데, 자태가 청수하고 자질이 뛰어났다. 어려서 어버이를 섬김에 때에 맞게 혼정신성(昏定晨省)하였으며 부드러운 낯빛으로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17살에 독자로써 백부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이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지냈는데, 정성과 의식이 모두 잘 갖춰졌다. 후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또한 부친상처럼 지냈다. 항상 생부가 후사가 없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이에 대해 말이 미치면 곧바로 눈물을 흘렸으며 매번 기일을 만나면 더욱 애통하게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효성이다. 이를 미뤄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족을 보존함에 모두 법도가 있었으니, 이로써 한 가문을 이루고 구족(九族)을 화합함에 효성과 조심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졌다.여러 번 크고 작은 향시에 합격하였다가 기묘년(1699년) 과적(科賊)의 변란26)이 일어나게 되자 과거를 그만두기로 결정하였다. 붕우 가운데 그 까닭을 묻는 자가 있으면 답하기를 "나의 재주가 그렇게 대단히 나쁘지 않고 나의 힘이 아직 과장에 드나들 수 있지만, 이는 대단히 나쁜 구리 냄새27)와 같으니 맡고 싶지 않다."라 하고는 마침내 경전과 성리에 깊이 몰두하였다. 문순공(文純公)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28) 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깊고 정밀한 이치를 파고들고 연마하여 조예가 더욱 깊어졌으니, 추구한 것은 인의의 정묘함과 천인의 깊은 이치가 아님이 없었다. 후진들을 가르침에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모두 문하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인도하였다.그가 학자들에게 가르치기를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구하는 것이다. 격물치지도 자신이 하는 것이며, 성의도 자신이 하는 것이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도 또한 자신이 하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 진실되지 못하면 어찌 자신을 이루며, 자신이 하는 일이 진실되지 못하면 어찌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랴. 밖에 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다가 안에 들어오면 방종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선을 좋아하지 않고 악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일을 처리함에 잘못을 저지르고서 그 허물을 덮으려 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에 힘쓰고 그의 뜻에 아부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밖에 사물을 대응함에 모두 공교롭게 꾸민다면 무엇을 한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에 경계하고 이에 잘 살펴서 정신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 옳다. 학문의 종지는 하나로써 꿰뚫는 것이니, 《중용》의 '성신(誠身)'과 《대학》의 '성의(誠意)'는 바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뜻이다. 성(誠)과 경(敬)은 서로 필요하니 원래 안팎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한 시대의 명사들로, 판서 민진장(閔鎭長), 감사 민진원(閔鎭遠), 참판 김우항(金宇杭), 감사 이진휴(李震休), 참판 이익수(李益壽) 등이 공과 교유하면서 시를 수창하고 학문을 문답하였는으니, 모두들 공이 왕의 계책을 보좌할 것이라 기대하였다.공은 병술년(1766년) 7월 11일에 타계하였으니 62세의 수를 누렸다. 주포의 송곡(松谷) 두 번째 높은 봉우리 임좌(壬坐)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여광(汝鐄)의 따님으로,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태관(泰觀)과 태윤(泰潤)이다. 세 딸은 안세복(安世復), 나경천(羅景天), 이수흥(李洙興)에게 시집갔다. 큰 아들은 입양한 윤보(允寶)와 안극겸(安克謙)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작은 아들은 출계한 윤보와 문과에 합격한 윤익(允翼), 윤경(允慶) 등 세 아들과 박민동(朴敏東), 김방(金磅), 조윤탁(曹允鐸)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사위 안세복은 아들로 창재(昌再)와 창의(昌毅)를 두었고, 두 딸은 백신원(白信源), 유증범(柳增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나경천은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충좌(忠佐)와 위좌(渭佐)를 두었다.공은 온 몸에 덕스런 모습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넘치며29) 바라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일며, 평소의 말은 정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니 다가가면 심취하게 된다. 평소에 의대(衣帶)를 단정하게 하고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 한 점 방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학문은 진실무위(眞實無僞)를 위주로 하였으니, 〈위학진위도(爲學眞僞圖)〉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보였다. 지은 문장은 비록 부섬(富贍)하지만 다만 뜻이 통하는 것에 주안하고 문장 조탁을 일삼지 않았다. 저술한 〈수청설(水淸說)〉, 〈조수설(潮水說)〉 등은 득의의 작품이며, 〈병계가부설(病戒可否說)〉은 세상에 대해 탄식한 것이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서주의 풍월은 본래 티끌이 없으니 西洲風月本無塵이곳에서 소요하며 봄을 즐기누나. 這裡盤桓樂有春허튼 영화 이르지 않으니 몸이 어찌 욕되랴 浮榮不到身何辱문득 태고의 희황 사람이 되누나.30) 便作羲皇太古人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남아 평소 큰 일 이루려는 뜻 지녔으니 男子平生將大爲문장의 여기는 모름지기 일삼지 않노라. 文章餘技不須爲가난을 즐김은 현인을 따르는 일이니 安貧自是遵賢事어찌 구구하게 속세에 몰두하랴. 何用區區世冗爲이 시를 보면 공의 생각을 대략 알 수 있다.오호라!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와 이백 년이 떨어졌는데,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도 고을 사람들의 존모하여 외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 가장(家狀)이 뒤늦게 후대에 나와 소략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는데, 지금 공의 6대손 환영(煥永)씨가 두 조카 동규(東圭)와 동진(東珍)을 보내 나에게 그 덕을 드러낸 글을 청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찌 자세한 행적을 찾아서 상세하게 논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내가 지족와와 주일와 및 공의 유고를 교열하였으니, 대개 방씨의 학문과 행실은 3대에 걸쳐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는데, 공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선사 간재(艮齋) 전우(田愚)31) 선생께서도 일찍이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의리를 위주로 하였다고 하니 제대로 평가하신 것이다. 이에 감히 가장 및 유고에 나타난 사실에 대략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편차한다. 公姓房氏, 諱斗載字望汝號西洲, 南陽人.上世有諱季弘, 高麗開國功臣, 位至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其後八世, 冠冕相繼, 有諱士良, 寶文閣直提學.生諱九成, 受室南原, 仍居周浦村, 官止定山縣監.生諱恂文, 京畿道水運判官.生諱貴和, 俱中生進, 官戶曹佐郞.生諱漢傑, 副司直, 盧蘇齋銘其墓, 公五世祖也.高祖諱應賢, 李月沙銘其碣.曾祖諱德驊.祖諱元井號知足窩, 文科典籍.考諱明燁號主一窩, 進士, 妣昌寧曹氏監役熀女.主一弟諱明熻, 驪州李氏別提志一女, 其本生也.公生於肅廟乙酉, 形貌淸秀, 才質超異, 幼而事親, 定省以時, 愉婉承順.年十七, 以獨子出爲伯父後, 是歲丁外艱, 葬祭以禮, 情文俱備, 後遭內艱, 亦如前喪.常以生父無後爲至恨, 語及輒流涕, 每當諱辰, 尤極哀痛, 此公之孝也.推而至於正家保族, 皆有法度, 是以行成一門, 歡洽九族, 以孝謹風聞.累中大小鄕試, 至己卯科賊之變, 決意廢擧.朋知有問者, 答曰: "吾才不至全疎, 吾力尙可出入場屋, 惟銅臭甚惡, 不欲聞也." 遂寓樂經傳性理.從學于玄石朴文純公之門, 鉤深硏精, 造詣益邃, 所求者, 無非仁義之妙, 天人之蘊.敎誨後進, 不問親疎, 皆許入門, 懇懇誘掖.其訓學者曰: "學之道無他, 求之於己也.格致己也, 誠意己也, 修齊治平, 亦己也.己之意不誠, 惡乎成其己, 己之事不誠, 惡乎食其效.居外飭躳而處內放肆, 則是自欺也.不善善而惡惡, 則是自欺也.處事乖戾而欲掩其過者, 是自欺也.務悅於人而阿附其意者, 是自欺也.其他事物之應, 皆由巧飭, 則安往而不自欺也.誠能警戒於是, 察識於是, 以爲喚醒之方, 則可也.學問宗旨, 一以貫之, 《中庸》誠身, 《大學》誠意, 莫非母自欺意思, 誠敬相須, 元無表裡矣." 一代名流, 如閔判書鎭長·閔監司鎭遠·金叅判宇杭·李監司震休·李參判益壽, 無不與之交遊, 唱酬答問, 皆期公爲黼黻王猷云.卒於丙戌七月十一日, 壽六十二, 葬于周浦松谷第二高峰壬坐, 配光山金氏汝鐄之女, 墓祔.公左1)二男, 泰觀·泰潤, 三女, 安世復·羅景天·李洙興.長房系男允寶女安克謙.次房男允寶出后, 允翼文科, 允慶, 女朴敏東·金磅·曹允鐸.安壻, 男昌再·昌毅, 女白信源·柳增範.羅婿, 男忠佐文科, 渭佐.公德容晬盎, 望之可愛, 雅言誠信, 卽之心醉.平居整朿衣帶, 斂膝端坐, 無一點安肆之態.爲學一以眞實無僞爲主, 作〈爲學眞僞圖〉以示意.其爲文雖富贍, 但主辭達, 不事雕繪.所著若〈水淸說〉〈潮水說〉, 其自得也, 若〈病戒可否說〉, 其慨世也.嘗有詩曰: "西洲風月本無塵, 這裡盤桓樂有春.浮榮不到身何辱, 便作羲皇太古人." 又曰: "男子平生將大爲, 文章餘技不須爲.安貧自是遵賢事, 何用區區世冗爲." 觀此詩文, 槩知公之所存也.嗚呼, 今去公世, 爲二百年所, 遺風餘韻, 尙徵於鄕邦人誦慕, 但其家狀晩出, 不免有疏略之歎, 今於公六世孫煥永, 遣二姪東圭珍, 請余狀德也, 何能追詳而備論乎.曾余校閱知足主一及公遺稿, 蓋房氏文行, 三世濟美, 至公益著, 而先師田艮齋先生, 嘗稱公文爲專主於義理, 可謂得當矣.乃敢略據家狀及見於遺稿者, 撰次如右云爾.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ㆍ여봉노인(茹峯老人)ㆍ암실(暗室)ㆍ이재(伊齋)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기묘년 과적의 변란 기묘년 과거는 숙종 25년(1699) 가을에 단종(端宗)을 복호(復號)한 것을 경하하여 베푼 과거를 가리킨다. 이 해 겨울에 과옥(科獄)이 일어나 여러 사람이 형(刑)을 받고, 파방(罷榜)까지 하였으나, 동왕(同王) 36년(1710)에 이르러 부정에 직접 관련된 사람 외에는 모두 복과(復科)시켰다. 나쁜 구리 냄새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것을 풍자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최열(崔烈)이 500만 전(錢)을 바쳐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도(司徒)의 지위에 오르자, 당시 사람들이 구리 냄새가 난다고 기롱한 '최열동취(崔烈銅臭)'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2 崔駰列傳 崔寔》 현석 박세채 숙종 때의 문신(1631~1695)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이다. 성리학자로서 숙종 20년(1694)에 좌의정이 되었고, 황극 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심학지결(心學至訣)≫, ≪이학통록(理學通錄)≫ 등이 있다. 덕스런……넘치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에는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넘쳐흐르며 온몸에 퍼져서 온몸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다. 태고의……되누나 희황은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그 시대의 백성들이 근심 없이 순박하고 한적하게 살았으리라 하여 은자들이 자칭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하였다. 도연명이 여름에 북창 아래 누워 있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복희씨 시대의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이를 차용하여 지은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에서 "소금은 본래 줄이 없고, 술 거를 땐 갈건을 사용하지.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네.〔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라 하였다. 간재 전우 구한말의 학자(1841~1922)로 초명은 경륜(慶倫)ㆍ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ㆍ간재(艮齋)이다. 임헌회의 문인으로, 만년에 전라도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 내어 우리나라 유문(儒門)의 최후의 대종(大宗)이라 이른다. 左는 生의 오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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