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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질 문경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族姪文卿 癸酉 치흑(薙黑)의 변란174)에도 내가 만일 빼앗기지 않으려는 뜻만 있다면 일본인들이 강제해도 어찌 저들의 뜻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원나라와 청나라처럼 일체의 강압적인 법175)을 사용하던 시절에도 오히려 보전하여 지키는 사람이 있었거늘, 오늘날의 변란은 비록 심하다고는 하지만 원나라 청나라에 비교해보자면 어찌 조금 느슨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그 느슨함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에 오래되면 차츰차츰 그 그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대가 보낸 시에서 이른바 강한 쇠일수록 쉽게 녹는다는 것이 이 경우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맹서하고, 죽어도 변치 않겠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찌 이치와 외형 둘 다 온전히 하는 한 가지 다행함이 아니겠습니까? 유금(兪金)과 노중(盧中)이 심의(深衣)를 입고 위모(危帽)를 쓰며 무리 가운데서 홀로 걸었으니, 만일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인산(仁山)과 백운(白雲)처럼 금화(金華)176)에 은거하는 것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도 안 된다면 서동해(徐東海)처럼 바다와 산을 떠돌며 고생하면서 머리털을 온전히 하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는 가정의 편안함과 의식의 따뜻하고 배부름만을 탐하고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 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薙黑之變, 我苟有難奪之志, 彼之强勤, 胡得焉.夫以元淸用一切法之世, 猶有保守之人, 今日之變, 雖云甚矣, 比之元淸, 豈不稍緩乎.惟其緩而驅之, 故久而駸駸, 盡入其網.盛詩所謂剛鐵易鎔是也.然自誓死不變者言之, 豈非理形兩全之一幸耶.兪金盧中之深衣危帽, 獨行衆中, 如不可得, 則仁山白雲之金華隱居可爲也.又不可得,則徐東海之流轉海山.辛苦全髮可爲也, 如曰此猶不能爲, 則是貪戀於室家之宴安, 衣食之溫飽, 而不爲者也, 復何言哉. 치흑(薙黑)의 변란 머리 깎고 서양 옷으로 입으라는 단발령과 개복(改服)을 뜻한다. 일체의 강압적인 법 본문의 일체법(一切法)은 획일 양단하는 것으로 강압적인 법을 뜻한다. 금화(金華) 송나라 학자 백운(白雲) 허겸(許謙, 1270~1337)의 고향이다. 허겸이 나라가 망할 무렵 인산(仁山) 김이상(金履祥)을 따라 배워서 그 학문을 성취하였고 중외(中外)에서 두루 천거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宋元學案 卷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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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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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강목수록 讀綱目隨錄 예양(豫讓)1)은 국사(國士)의 대우를 잊지 않고 죽음으로써 지백(智伯)에게 보답하였다.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라고 하였는데 예양이 참으로 이런 점이 있다.위 문후(魏文侯)가 몸소 가서 사냥 약속을 파기한2) 것은 나라의 임금이 신의를 지킨 훌륭한 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인데 어찌 굳이 비를 맞으며 친히 가서 한 뒤에야 신의를 지키는 일이 되겠는가. 아마도 구차하고 어려운 일을 행하여 훌륭한 명성을 사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섭정(聶政)3)이 어머니가 계신다는 이유로 남을 위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괜찮으나, 결국 부모가 준 몸으로 살인하는 일을 저질러 도명(盜名)을 입었으며 몸이 살육을 당해 제사가 끊어져 만고의 큰 불효가 되었으니, 전일에 운운한 것이 결국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에 죽은 분을 살아 있을 때처럼 섬기면서 장례를 행하고 사망한 분을 생존한 것처럼 섬기면서 제사를 행하는 뜻을 알았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在德不在險]"라는 오기(吳起)의 이 말은 바로 맹자가 이른바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地利不如人和]"라는 뜻이다.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를 남에게 말한 것이 이와 같았으면서도 스스로 그 덕을 박하게 하여 자기의 몸을 보전하지 못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어찌 이른바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남을 책망하는 데에는 밝다.[人雖至愚 責人則明]"4)라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지금 선비들의 언행이 이와 같은 경우가 많으니, 오기를 보고서 경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제후(諸侯)가 천자에게 조회하는 것은 관례지만 열국(列國)이 조회하지 않는데도 제(齊)나라가 홀로 조회하자 천하가 위왕(威王)을 어질게 여겼으며,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온 세상이 효도하지 않는데도 어떤 사람이 조금 어버이를 섬길 줄을 알면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럽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성대한 세상의 현인이 되는 것은 어렵고 쇠락한 세상의 현인이 되는 것은 쉬운데, 지금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나쁜 풍속에 바람에 휩쓸리듯 하여 그 몸을 스스로 아끼지 않는 것일까?"백성과는 시작을 함께 도모할 수는 없고 결과만 함께 즐길 수 있다.[民不可與慮始而可與樂成]"라는 것과 "보통 사람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학자는 배운 바에 빠져 있다.[常人安於故俗 學者溺於所聞]"라는 위앙(衛鞅)5)의 이 말은, 말이 옳으니 그 사람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의 좋은 말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동주(東周)6)가 비록 천자는 아니지만 동주를 범하는 것도 주(周)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이 된다. 열국(列國) 중에서 한(韓)나라가 맨 먼저 범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 "한나라가 동주를 침략하였다.[韓寇東周]"라고 하지 않고 "한나라가 동주를 정벌하였다.[韓伐東周]"라고 한 것은 의심스럽다.공자는 주나라 경왕(敬王) 41년(기원전 479)에 세상을 떠났고 맹자는 현왕(顯王) 33년(기원전 336)에 위(魏)나라에 갔으니, 그 사이는 143년이 된다. 자사(子思)가 이미 공자를 생시에 섬겼으니 맹자가 늙어서 위나라에 갔다고 하더라도 또한 자사의 시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맹자가 자사에게 친히 수업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주자가 미처 자세하게 상고하지 않고 다만 옛 역사에 의거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집주서설(孟子集註序說)〉에서는 《사기(史記)》의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하였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또한 자사에게 친히 수업했다는 설을 끝내 믿은 것은 아니다.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처음 즉위했을 때 박문사(博聞師) 및 좌사과(左司過)와 우사과(右司過)를 각각 세 사람씩 두고 홀로 왕이라 칭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 실상이 없는데 감히 그 명칭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無其實而敢處其名乎]"라고 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쩌면 그리도 명쾌(明快)하였던가. 그러나 끝내는 무도(無道)하여 몸을 망치고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니, 전후가 전혀 딴판이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으나 끝까지 제대로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7)는 것은 참으로 사람들의 공통된 근심이며, 게다가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과감하면 선을 행하기가 참으로 쉽지만 악을 행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그 기틀을 두려워할 만하다.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은 모두 종횡의 술수[縱横之術]8)로써 부귀함을 이루었으니, 그 술수가 비루하여 그 사람됨 또한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소진은 그래도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와주는 뜻이 있었고 장의는 다만 나라를 팔아서 자신을 살찌웠으나 똑같이 흉역(凶逆)의 부류이다. 맹자가 장의만을 배척하여 첩과 부인의 도[妾婦之道]라고 한 것은 경춘(景春)이 말한 대장부의 뜻에 대답하면서 우선 이것으로써 돌이켜 주었기 때문이다.9)부귀한 사람이 부귀해지고 싶었던 욕심은 자신이 나라의 임금이 되는 것보다 크지는 않는데 연(燕)나라 임금 쾌(噲)는 요순(堯舜)과 명성이 같아지고 싶어서 이렇게 만승(萬乘)의 나라를 자지(子之)에게 양보하였단 말인가.10) 명예를 좋아하는 욕심이 부귀해지려는 욕심보다 심하니, 맹자가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의 나라를 양보할 수 있다.[好名之人 能讓千乘之國]"11)라고 한 것은 연나라 임금 쾌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명예도 얻지 못하고 자신은 살육을 당했으니, 무릇 세상에서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것을 보고 경계할 줄을 알 수 있을 것이다.소대(蘇代)가 자지(子之)를 위해 도모한 것은 연나라의 권력을 얻게 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능란하지 못한 세치 혀를 놀려 남의 나라를 빼앗고 임금을 죽게 하였으니 아, 그 마음이 잔인하고 그 계책이 악독하다. 변사(辯士)의 혀끝은 두려워할 만하구나.초(楚)나라 자란(子蘭)이 회왕(懷王)에게 진(秦)나라에 들어가도록 권한12) 것과 송(宋)나라 이약수(李若水)가 흠종(欽宗)에게 금(金)나라에 이르도록 권한13) 것은 모두 군친(君親)을 모해한 죄를 면하지 못한다. 다만 이약수는 한번 죽어서 겨우 그 죄를 갚을 수 있었지만, 자란의 경우에는 이미 죄과를 인정하여 자처(自處)하는 도리도 없었고 또 그 죄를 나랏법으로 바로잡지 않아 뻔뻔스레 조정에 서서 도리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참소하여 해쳤기에 초나라의 훌륭한 문장이 실추되고 경양왕(頃襄王)이 임금의 도를 행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망하지 않기를 바란들 될 수가 있었겠는가.공천(孔穿)14)이 공손룡(公孫龍)과 '노비는 귀가 셋이다.[臧三耳]'에 대해 토론했을 때에 평원군(平原君)은 이치가 말보다 낫다[理勝於辭]고 하여 공천을 인정하고 말이 이치보다 낫다[辭勝於理]고 하여 공손룡을 내쳤다. 그의 소견 또한 높았으니, 당시 열국(列國)의 공자(公子) 중에서 이러한 견식(見識)을 가진 사람은 얻기가 어렵다.왕촉(王蠋)은 의리를 지켜 강상(綱常)을 세웠고15) 왕손가(王孫賈)는 의병을 일으켜 원수를 갚았으니,16) 제나라가 부흥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의 덕분이다. 비록 그러하나 왕촉으로 하여금 협박을 당하지 않게 하였다면 필시 스스로 목을 매는 데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왕손가로 하여금 권세와 지위가 없게 하였다면 또한 거병(擧兵)할 길이 없었을 것이니, 요컨대 모두 그 몸을 자정(自靖)17)하고 만 것에 불과할 뿐이다.악의(樂毅)18)는 지략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예의(禮義)가 있었다. 그가 조(趙)나라 왕에게 답한 편지에 "지난날 소왕(昭王)을 섬겼던 일은 오늘날 대왕을 섬기는 일과 같습니다. 운운." 하고, 연(燕)나라 왕에게 답장한 편지에 "충신은 나라를 떠날 때에 자신의 명성을 깨끗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운운." 하여, 예와 의가 있었다. 참으로 그는 군자다운 사람이니 전국 시대의 여러 명장(名將)과 똑같은 예로 볼 수 없으며 후세의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가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에 견준19)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끝내 군자의 도를 듣지 못했으니 제나라를 정벌하고서 보물과 제기(祭器)를 옮겨간 것과 왕촉을 초청하면서 군대로 위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자순(子順)20)이 위(魏)나라 왕의 초빙을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왕께서 나의 방책을 믿고 쓰신다면 나의 방책은 본래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며, 만약 한낱 나를 제압하려고 많은 녹봉을 준다면 나는 오히려 일개 범부일 뿐입니다." 하고, 사신이 굳이 청한 뒤에야 나가서 초빙에 응하여 총애하던 관원을 교체하여 어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모시고 임무가 없는 관원의 녹봉을 빼앗아 공이 있는 자에게 주었다. 중대한 계책을 써주지 않은 데에 이르러서는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사람들이 그에게 떠나라고 권유하자 갈 곳이 없다고 대답하고, 또 불의한 진(秦)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탄식하기를 "20년이 지나지 않아서 천하가 모두 진나라가 될 것이다." 하였다. 그의 출처(出處)21)와 재략(才略)과 견식을 살펴보면 하나하나 도에 부합하여 탁월하게 출중하니, 공자 가문의 어진 자손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다. 이때를 당하여 노중련(魯仲連)22)을 천하의 고상한 선비라고 하였고 자순 또한 일찍이 그 다음이라고 일컬었으나, 내 나름대로 논한다면 자순이 어찌 노중련보다 못한 사람이겠는가.주자(朱子)가 촉나라 선주(先主 유비(劉備))를 한(漢)나라 계통에 잇대고 '황제가 방주에 있었다.[帝在房州]'는 것으로써 당나라 계통에 잇대었으나 유독 동주(東周)의 임금을 주나라 계통에 잇대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주자가 일찍이 《강목》을 미처 재수정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으니, 만일에 재수정을 했더라면 이러한 곳이 개정되어 의심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채택(蔡澤)23)이 한마디 말로써 범저(范雎)의 재상 자리를 빼앗고 또 다시 몇 개월 만에 재상을 사직하였으니, 이미 그 처음에 구차하게 나아가는 부끄러움이 없었고 게다가 그 마지막에 육욕(戮辱)을 당하는 것을 모면하였다. 당시의 변사(辯士) 중에서 재주가 비교적 높고 마음이 비교적 바르며 복이 비교적 완전하고 지혜가 비교적 밝아 몸과 이름을 모두 온전히 하였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에 가까우니, 채택을 또한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모초(茅焦)가 솥에 삶아 죽는 것을 피하지 않고 진(秦)나라 왕에게 간하여 비록 남의 모자(母子)의 윤리를 바르게 하는 데에 공이 있으나 한갓 곧게만 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24) 진나라 왕은 포학하여 간할 만한 군주가 아니었고 태후는 음간(淫奸)하여 또한 하늘에 죄를 얻었는데, 모초는 뜨내기 신하로서 남의 나라에서 무슨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 의리가 있다고 죽음을 잊고 돌연히 간하였는가? 그가 죽음을 모면하고 간언이 행해진 것은 요행이고 우연이었으니, 아마도 진나라 왕이 신하를 많이 죽인 뒤에 분노가 풀리고 마음이 가라앉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다만 간하다가 죽은 사람 28명의 숫자를 채웠을 것이다. 게다가 노애(嫪毐)25)가 국모(國母)와 사통(私通)한 것은 만 번 죽을죄에 해당되는 것인데 모초가 그를 의붓아비[假父]로 칭하면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한 일을 논하였으니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다.형가(荊軻)26)의 검(劍)과 장량(張良)27)의 철퇴는 동일한데 주자가 형가를 도적이라 하고 장량을 의롭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장량의 행위는 임금의 원수를 갚는 충정에서 나왔으나 연(燕)나라 단(丹)이 형가에게 시킨 일은 예우 받지 못한 것을 갚는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가는 땅을 바치고 조정에 들어간 속임수가 있었으나 장량은 이러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부소(扶蘇)와 몽염(蒙恬)이 사사(賜死)된 것은 거짓 조서[矯詔] 때문이었다.28) 만약에 다시 명을 청하여 그 실정을 파악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그들의 죄를 문책하였다면 부소의 어진 명성으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몽염이 쌓은 공으로 수만의 군사를 거느려 일을 이룰 수가 있기에 진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혹시 하늘이 진시황의 학정(虐政)을 미워하였기에 호해(胡亥)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여 그 종족을 망하게 한 것일까.한왕(漢王)이 새벽에 조나라 군영[趙壁]에 들어가 한신(韓信)의 군사를 빼앗은 것은 한신이 제멋대로 할까 의심해서였다. 게다가 한신이 이미 항복한 제나라를 격파하여 역생(酈生 역이기(酈食其))29)을 삶아 죽이게 하였으니, 한왕이 어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겠는가. 한왕이 한신을 의심하고 시기한 것은 가왕(假王)으로 세워 달라는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이때에 있었을 것이다.한왕(漢王)이 "나에게 국 한 그릇을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幸分我一桮羹]"30)라고 한 것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지극히 흉악한 말이니, 또한 남의 분노를 촉발하여 화를 재촉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만약에 항백(項伯)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태공(太公 유방(劉邦)의 부친)이 어찌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겠는가. 천하를 반으로 나누고는 강화(講和)하고 태공을 받들어 돌려보냈으니, 이때를 당하여 항우도 식량이 부족하여 곤란하였기에 한왕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장량(張良)의 평생의 뜻과 사업은 단지 한(韓)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는 데에 있었을 뿐이다. 그가 강화한 뒤에 한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권한 것은 항우가 한왕(韓王) 성(成)을 죽인 것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정자(程子)는 이를 불의(不義)한 행위였다고 논평하였으니, 장량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 것 같다.정공(丁公)31)이 고제(高帝)를 알현했을 때에 공명(功名)을 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고제를 풀어줄 때에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은 마땅하다.노(魯) 지역의 두 유생이 숙손통(叔孫通)을 더럽게 여겨 가려고 하지 않은 것32)은 참으로 출처(出處)의 대절(大節)을 얻었으나, "예악이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덕을 쌓은 지 백 년이 된 뒤에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禮樂所由起 積德百年而後可興]"라는 설에 이르러서는 너무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했다. 예악은 없는 곳이 없으니, 비록 군중(軍中)에서도 군례(軍禮)와 군악(軍樂)이 있는데 나라를 세운 초기에 어찌 조의(朝儀)가 없을 수 있겠는가. 비록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수는 없더라도 응당 대체(大體)를 잃지 않아서 그 단서가 되면 괜찮은 것이다. 그렇다면 두 유생의 출처에 대한 견식으로써 이 점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우선 그것에 의탁하여 나아가지 않은 얘깃거리로 삼은 것일까?장오(張敖)는 관고(貫高)와 조오(趙午)가 고제(高帝)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들어주지 않고서도 즉시 관고와 조오를 주살(誅殺)하지 않아서 폐위되었고,33) 팽월(彭越)은 호첩(扈輒)이 한나라에 모반해야 한다고 권유한 것을 들어주지 않고서도 즉시 호첩을 주살하지 않아 멸족(滅族)하게 되었다.34) 만일 장오와 팽월이 고제를 죽이라고 요청한 자와 한나라에 모반하라고 권유한 자를 즉시 주살하였더라면 어찌 이러한 재앙이 있었겠는가. 재앙을 면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인신(人臣)의 의리로도 의당 이렇게 해야 한다.여태후(呂太后)가 일식(日食)을 보고 불길하게 여겨 "이것은 나 때문이다." 하고서도 오히려 고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그 마음에 '하늘의 변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여겨서일 것이다.한 문제(漢文帝)가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35)에게 준 편지가 한결같이 진실한 마음에서 나왔기에 조타도 진실한 마음으로 응답하였던 것이다. '짐은 고황제 측실의 아들[朕高皇帝側室之子]'이라는 이 말이 얼마나 진실한가. 그래서 조타의 '옛 월 지방의 관리[故越吏]'라는 응답을 감득(感得)하였는데, 편지 한 통의 힘이 10만 군사보다 나을 수 있으니, 대개 천하가 모두 감응하는 이치일 뿐이다. 아, 천하의 사람들이 밖으로 열국(列國)에서부터 안으로 사림(士林)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제(文帝)의 이 편지의 뜻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어찌 쟁탈하는 재앙이 있겠는가."하동(河東)은 나의 팔다리와 같은 고을이기에 특별히 그대를 부른 것이다.[吾股肱郡 故特召君]"36) 하였는데, 이는 문제(文帝)가 허물을 꾸며댄 말이니 고제(高帝)의 "상국을 묶어 백성으로 하여금 나의 잘못을 알게 하려 한 것이다.[繫相國 令百姓知吾過]"37)라는 말과 동일하게 말을 꾸민 것이다. 문제의 어짊으로써도 오히려 이러한 실수가 있었으니 과오를 말해주면 기뻐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가의(賈誼)38)가 상소를 올린 것은 제후가 강대해지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통곡할 만한 일에 대해서는 제후들로 하여금 왕의 자손들을 분산시켜 그 세력을 약소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계책을 올렸으니, 그 충정이 지극하고 그 계책이 기이하다. 그러나 문제(文帝)가 대신을 형벌하고 욕보이는 일이 길이 탄식할 만하다는 것은 깊이 받아들여 신하를 기름에 절도가 있었지만, 제후에 대한 우환이 통곡할 만하다는 것을 살펴 미리 대비하지 않았기에 결국 칠국(七國)의 화란(禍亂)39)을 이루었으니, 누가 문제를 현명한 군주라고 하겠는가. 문제가 가의를 등용하지 않은 것이 가의의 현명함을 더욱 드러내었다.풍당(馮唐)40)이 이제(李齊)에 대한 질문과 이목(李牧)의 일을 통해서 그 임금에게 간하여 위상(魏尙)을 사면하게 한 것은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여 차츰 깨닫도록 인도해 나가는[納約自牖]' 뜻을 깊이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아, 임금에게 간하는 방법은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풍당 또한 독서한 선비였을 것이다.문제(文帝)의 훌륭한 자질로써 만일 글을 읽고 학문을 하였다면 필시 신원평(新垣平)의 미혹41)과 단상(短喪)의 조서42)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사람이 독서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깝고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 독서하지 않는 것은 더욱 아깝다는 것을 알았다.직불의(直不疑)43)가 금을 보상해 주었으니 참으로 장자(長者)지만 후세 사람들이 법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약에 그때에 금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았다면 어떻게 다 보상해 줄 수가 있었겠는가. 게다가 휴가를 갔던 사람이 만일에 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끝내 스스로 해명할 수 없었을 것이니, 사실대로 고하는 성실함만 못한 것 같다.주아부(周亞夫)44)가 운중군(雲中郡)의 도적을 몰아내고 칠국(七國)의 반란을 평정하여 이미 공을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을 간쟁하고 후(侯)에 부당한 자를 후로 봉하는 것을 만류한 것45)은 또 확실히 충직한 말이며 바른 의론이었으나 경제(景帝)가 들어주지 않은 것은 이미 사사로운 뜻이었으니, 또 어찌 차마 이전의 공로를 생각지 않고 그를 죽였는가? 한나라의 현명한 군주로 문제와 경제를 일컫지만 이러한 일에 이르러서는 걸ㆍ주(桀紂)의 포학함도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46)은 문학이 성대하여 저술에 격언과 지론(至論)이 많은데, 어찌 모반하고 자살하여 대역부도(大逆不道)한 데에 이르렀을까?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言者 不必有德]"47)라는 것이 비록 옛말에 있으나, 어찌 이렇게 심하게 상반되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너무나 괴이한 일이다.무제(武帝)가 이미 소옹(少翁)에게 기만을 당하여 그를 주살하였고 재차 난대(欒大)에게 기만을 당하여 공주의 남편인데도 또 그를 주살하게 되었다.48)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한 번 기만을 당하면 오히려 징계할 바를 아는데 무제의 명민한 판단력으로 어찌 징계할 바를 몰라서 그랬겠는가. 욕심이 지나쳐 그 밝음을 가렸기 때문에 공손경(公孫卿)에게 세 번이나 속고도 오히려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 사욕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昏迷)하게 하는 것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무제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봉래산(蓬萊山)을 찾으려고 할 때에 여러 신하가 모두 간하였으나 만류할 수 없었는데, 동방삭(東方朔)49)의 "환궁하여 조용히 거처하면 신선이 스스로 찾아올 것입니다.[還宮靜處 仙人自至]"라는 한마디 말을 듣고 중지한 것은 그 형세에 따라 이롭게 인도했기 때문이다. 사관은 "방삭은 때때로 직간을 하여 도움이 되는 바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나, 내 나름대로 보건대 동방삭은 직간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잘 간하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제(齊)나라 경공(景公)이 딸을 오(吳)나라에 시집을 보내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만이(蠻夷)와 혼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나라는 오히려 태백(泰伯)50)의 후예로서 중국 제후의 반열에 있었지만 서북쪽 호융(胡戎)의 경우에는 더욱이 황복(荒服)51)의 다른 종족이었다. 한(漢)나라 혜제(惠帝) 이후로는 호융에게 공주를 시집보내는 것을 상례로 여겼으니 비록 무제의 전성기를 오랑캐를 배격한 시절이라고 일컫는데도 오히려 그러하였다. 이는 대개 처음에 한 번 그 규례를 시행하면 인습하고 대충 해치워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전연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무제가 이광리(李廣利)52)를 보내 흉노를 공격하게 한 것은 이광리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하여 후(侯)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가령 이릉(李陵)53)이 별도로 선우(單于)54)를 공격하여 큰 공을 이루게 되면 이광리에게 시기를 받아서 재앙을 면치 못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 무제가 이릉에게 말한 "장군은 이광리에게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는가?"라는 한 마디 말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이릉은 무인(武人)이라 참으로 밝은 지혜를 요구할 수 없지만, 사마천(司馬遷)은 독서한 사람이라 패전하여 항복한 뒤에 이릉을 위해 강력히 변호하였으니, 그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죄를 면치 못한 것은 마땅하다. 글을 읽는 목적은 지혜를 늘리기 위해서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릉을 위해서가 아니고 사마천을 위해서이다.전천추(田千秋)55)가 "신이 꿈속에서 백발노인을 만났는데 신으로 하여금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운운."이라고 한 것은 분명히 임시로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중점은 임금으로 하여금 감동하고 깨달아 부자간의 윤리를 잃지 않게 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임금을 속인 것과 같았지만 위험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러하나 이 또한 마침 임금이 태자가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기에 곧바로 공효가 나타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비록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좋은 형세를 타는 것만 못하다.[雖有知慧 不如乘勢]"56)라고 하였다.호씨(胡氏)가 준불의(雋不疑)가 '성방수(成方遂)가 위(衛)나라 태자를 사칭한 일'을 처리한 것57)에 대하여 "의당 관리를 책망하여 포박하게 할 뿐이지 굳이 《춘추》를 인용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했으니, 이치는 그러하지만 형세는 그렇지 않았다. 천하가 이미 마음으로는 태자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 이렇게 만인의 눈이 둘러서서 주시하고 의문점이 결정되지 않은 때를 당하여 이전의 근거를 인용하지 않고 판단했다면 어찌 여론을 승복시키고 뭇사람의 시선을 놀라게 할 수 있었겠는가. 임기응변하는 방법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황패(黃覇)는 도를 배운 사람이 아니지만 오히려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夕可]'는 공자의 가르침을 인용하고서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58) 오늘날의 선비는 평소에 세운 뜻의 높기가 어떠하기에 잠깐 빈궁함에 구애되면 번번이 배운 도를 버리고 물욕(物慾)을 따르면서 말하기를 "비록 도를 따르고자 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되었는데 어찌하겠는가?" 하니,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황패에 비하여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곽광(霍光)이 자기의 아내가 황후를 시해한 일을 숨기고 고발하지 않은 일59)에 대하여, 호씨(胡氏)가 "시해에 참여한 것이다.[與聞乎弑]"라고 한 것은 옳다. 나는 "곽광이 임금을 보필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공로는 황후를 시해한 죄를 속죄하기에 부족하다."라고 여기니, 어째서인가? 천하에 차라리 유한(劉漢)60)이 없어도 되지만 국가에 군신간의 큰 윤리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곽광이 아내의 죄를 고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자기의 딸을 세워 황후가 되게 한 것은 바로 자기의 딸을 황후로 만들려고 허 황후(許皇后)를 시해한 것이라고 할 만하니, 비록 변호를 잘하는 자가 곽광을 위해서 엄호(掩護)하려고 하더라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정자(程子)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백숙부모라고 한다.[爲人後者 稱所生爲伯叔父母]"라는 의론은 비록 정통(正統)을 엄격하게 하는 뜻이지만 《예경(禮經)》에 이미 자기를 낳아준 분을 오히려 부모라 하였고 게다가 백숙부모는 본디 해당되는 분이 있으니, 본생부모(本生父母)라 칭하여 후세의 예론처럼 인심에 편안한 것이 나을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다.호씨(胡氏)가 소광(疏廣)61)이 떠난 것을 두고 태자는 마음이 어지러워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소광이 기미를 안 밝음은 목생(穆生)이 단술[醴] 때문에 떠난 것62)과 견주어 보면 더욱 높다.선제(宣帝) 시절에는 봉황의 상서로움이 어찌 그리도 많았던가? 아, 어찌 모두 참된 상서로움이었겠는가. 대부분 신하들이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아첨을 바치는 데에서 나왔고, 또 자기의 공을 드러내어 포상을 받으려 했을 뿐이다. 황패(黃覇)의 현명함으로도 오히려 할작(鶡雀)을 가리켜 봉황이라고 하였는데,63) 황패가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을 때에 영천에 봉황이 더욱 많았다고 했으니, 그 더욱 많았다는 것 또한 알 만하다. 황패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다른 사람이야 다시 논할 것이 있겠는가. 삼대(三代) 이후로 서한(西漢)을 가장 순실(淳實)하다고 일컫는데도 풍조가 이미 이러하였으니, 더구나 후대에는 어떠하겠는가.주운(朱雲)64)처럼 직간하는 자는 참으로 중주(中主)65)가 용납하기 어려운 법인데, 성제(成帝)는 이미 그를 죄주지 않았고 또 부러진 난간을 바꾸지 말게 하여 직간한 신하를 정표(旌表)하였다. 비록 성제가 술에 빠져 제멋대로 하여 크게 임금의 도리를 잃었지만 또한 선을 좋아하고 남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오히려 임금의 도량을 지녔으니, 만약에 어진 신하를 많이 얻어서 보좌하여 계옥(啓沃)66)하게 하였다면 법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성제(成帝)의 조정에 어진 신하가 없고 단지 유향(劉向)67) 한 사람만 있었는데 유향 또한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아 그 근본을 바르게 할 수 없었다. 자못 장주(章奏)68)의 문채를 숭상하고 먼저 예악의 의절(儀節)을 일삼았으나 이미 내외와 본말의 순서를 잃었다. 게다가 낮은 지위에 있었기에 지위가 높지 않아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 비록 큰일을 하려고 한들 어찌 이룰 수 있었겠는가.정자(程子)가 "예악은 그 사람을 기다려서 행해진다." 하였는데, 나는 또한 "제도는 그 임금이 있는 뒤에 세워진다."라고 여긴다. 한(漢)나라에서 조칙으로 백성들에게 명전(名田)69)을 제한하도록 하였으나 실제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 비록 애석한 듯하지만, 만일 실제로 시행하였더라도 애제(哀帝)와 같은 임금이 능히 그 제도를 세워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공광(孔光)70)은, 그의 평생을 추적해 보면 하나의 간사한 부류이다. 바야흐로 애제가 왕가(王嘉)71)를 죽이려고 할 적에 왕가가 나라를 혼미하게 하고 임금을 기망하여 부도덕하다고 탄핵하여 죽을죄에 둔 것은 공광이었다. 그러나 왕가가 죽음에 나아갈 적에 스스로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지 못한 것을 죄로 삼았는데 어질다고 여긴 사람이 바로 공광이었으니, 공광은 참으로 소인이고 왕가 또한 혼미(昏迷)한 사내이다.공광이 왕가를 탄핵한 말을 듣고서 왕가를 죽였고 왕가가 공광을 어질게 여긴 것을 보고서 공광을 승상으로 삼았으니, 탄핵하고 어질게 여기는 사이에 그 마음이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했음을 알 수 있겠다. 왕가를 죽인 일은 비록 만회할 수 없지만 공광을 재상으로 삼는 일을 다시금 할 수 있겠는가. 심하구나, 애제(哀帝)의 혼미함이여!포선(鮑宣)72)의 바른 말과 곧은 도는 참으로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출처(出處)의 뜻을 모르고 혼란(昏亂)한 조정에 벼슬하여 결국 곤겸(髠鉗)73)의 치욕을 당했으니, 그가 청고(淸苦)한 절개를 더욱 가다듬어 아내와 함께 수레를 끌고 가서 은거하여 도를 닦으며 일생을 마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오장(吳章)이 비록 당세의 이름난 유학자로 일컬어졌으나 사술(邪術)로 왕망(王莽)74)을 움직이려다가 참형을 당했으니, 도가 보존되어 남의 스승이 된 자라고 할 수 없다. 운창(云敞)은 오장의 문인들이 다른 스승으로 이름을 고치던 때를 당하여 유독 오장의 제자라고 스스로 탄핵하고서 오장의 시신을 거두어 염습하고 안장하였으니, 참으로 은혜를 갚고 분수를 다하는 데에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 중에 까닭 없이 도가 높고 덕을 겸비한 스승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배반하는 자는 유독 무슨 마음일까?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할 때에 태황태후가 그것을 양성하고서도 오히려 쓸데없는 옥새 하나 주는 것을 아까워하였으니 어찌 혼미하지 않는가. 가령 태황태후가 있지 않았다면 왕망이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말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비록 군자의 도라고는 하나 설방(薛方)75)이 왕망의 사신에게 사례하면서 "현명한 군주께서 막 당우(唐虞 요순(堯舜))의 덕을 높이시니, 소신(小臣)은 기산(箕山)의 절개76)를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한 경우는 지나치게 겸손하여 아첨한 것이다. 반고(班固)는 이를 두고 "바르고 곧으며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았다.[貞而不諒]"라고 하였으나 나는 믿지 못하겠다.양웅(楊雄)77)이 왕망의 대부(大夫)가 되었으니, 그 "권세와 이익에 태연하고, 옛것을 좋아하고 도를 즐거워하였다.[恬於勢利 好古樂道]"라고 한 것이 어찌 해당되겠는가. 다만 그가 조급하게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득 이렇게 칭찬하였으니, 이는 사관이 무식한 것이다.왕망은 권세가 성했을 때에 산동(山東)에서 군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문득 두려워하여 밥을 먹지도 못했다.78) 그는 애초에 슬기로운 꾀와 대담한 책략이 없었고 다만 사부(四父)79)에 의지하고 태황태후를 끼고서 그 권세를 이루었을 뿐이니, 조조(曹操)가 스스로 지모로써 절로 세력을 이룬 경우와는 같지 않다.주자(朱子)가 마적구(馬適求) 등의 일에 이미 '모주망(謀誅莽)'이라고 썼으니 '불극(不克)' 아래에 또한 '사지(死之)'라고 해야 하는데 지금 '지(之)' 자가 없는 것은 검토를 잘못한 것 같다.마원(馬援)이 이미 "광무제(光武帝)의 재주와 총명함과 용맹함과 지략과 활달함과 대절(大節)은 대략 고제(高帝)와 같다."라고 칭찬하고, 또 "학문과 정사는 비할 자가 없고 행동은 절도(節度)대로 한다."라고 칭찬하였으니, 고제보다 낫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또 "광무제는 고제만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고제는 가(可)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항상 "광무제가 인(仁)으로써 마음을 삼고 의(義)로써 일을 바로잡은 것은 고제가 미칠 바가 아니니, 고제는 다만 호걸스러운 사람이 형세를 타서 천명을 받은 것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외효(隗囂)가 이른바 "도리어 고제보다 더 낫단 말인가?[反復勝耶]"라고 한 것을 나도 그렇게 여긴다.세운 세자를 바꾸지 말고 첩을 아내로 삼지 말라고 하니, 이는 오패(五覇)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한(漢)나라의 어진 임금으로는 광무제만한 이가 없어 평소에 행한 바가 왕도(王道)에 가까운 것이 많았지만 오히려 사사로운 뜻을 이기지 못하고 까닭 없이 황후를 폐하고 세자를 바꾸었으니,80)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비록 광무제는 오패의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마원(馬援)은 연로하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사직(辭職)할 때를 당했는데도 만 리 밖에까지 공적을 세우려는 마음을 제지하지 못하고 말안장에 훌쩍 뛰어올라 좌우를 둘러보면서 공력을 쓸 수 있음을 보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죄를 얻었으니,81) 어찌 치욕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마원이 오히려 형의 아들은 겸손과 검약으로 경계시킬82) 줄 알았으면서도 자신은 야심이 큰 기운을 단속하지 못하여 이렇게 덕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자신을 반성하여 살피고 징험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광무제가 "내가 누구를 속였는가? 하늘을 속였구나.[吾誰欺 欺天乎]"83)라는 말과 "일찍이 태산의 신령이 임방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느냐?[曾謂泰山不如林放]"84)라는 말을 인용하면서까지 여러 신하의 봉선(封禪)85)을 해야 한다는 주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3년 사이에 태산과 양보산(梁父山)의 북쪽에서 봉선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가 《회창부(會昌符)》86)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서(符書)에 감동한 것은 황제에 즉위한 때가 적복부(赤伏符)87)에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도참(圖讖)을 믿어 하늘이 정하고 성인이 전하여 바꿀 수 없는 법전처럼 여기고 일종의 호사자(好事者)와 아첨을 바치는 자들의 소행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환담(桓譚)이 도참을 배격하는 데에 노하여 성인을 비난한다는 죄목으로 목을 베려고 하였으니,88) 이는 대개 학문을 강론하지 않고 이치를 밝히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 전적으로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왕(帝王)의 학문을 강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더욱 보통사람보다 간절한 점이 있다.운대(雲臺)89)에 걸린 공신의 초상화에 초방(椒房)의 혐의를 피해서 유독 마원(馬援)을 참여시키지 않은90) 것은 문제(文帝)가 두광국(竇廣國)을 승상으로 임명하지 않았던91) 일과 같은 뜻이었으니, 이는 모두 내면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광국의 어진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마원의 공적은 이미 드러났으니, 또한 같지 않은 점이 있다. 그렇다면 명제의 이 일은 내면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이 지나쳐 도리어 현혹된 경우일 것이다.명제(明帝)가 태학(太學)에 친림(親臨)하여 원로에게 절하고 스스로 강해(講解)하였으니 유학(儒學)을 존중하고 숭상함이 어찌 그리도 성대하였던가. 그러나 멀리 천축(天竺)에 가서 불도(佛道)를 구해온 것도 그의 당대에 있었으니 이단에 미혹됨이 또 얼마나 깊었던가. 한번은 이렇게 하고 한번은 저렇게 하여 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과 같은 점이 있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없고 이른바 유학을 숭상하는 것을 한갓 형식적으로만 보아 일찍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을 돌이켜 체험하여 시비의 소재(所在)를 분명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사부가 다만 장구(章句)를 전문으로 하는 것을 숭상하고 성현의 전체와 대용(大用)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니, 함께 책임이 있다.장제(章帝)가 남쪽 지역으로 순행할 때에 사공(司空)에게 명하여 직접 공도(工徒)들을 거느리고서 교량을 지탱하게 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측면에서는 지극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로와 교량은 국정(國政)에서 하나의 중대사인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때때로 수리하여 물을 건너는 데 힘들지 않게 하지 못하고 구구하게 이를 행하였다. 백성들에게 작은 혜택을 주는 것은 말단의 일이니, 맹자가 논한 "자산은 은혜로우나 정치를 하는 법을 모른다.[子産惠而不知爲政]"92)라는 말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광무제ㆍ명제ㆍ장제 3대가 서로 계승하여 현군(賢君)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은나라와 주나라 이후로 이들과 견줄 자가 드무니, 아 위대하다.황헌(黃憲)의 어짊에 대하여 사군자(士君子)가 그의 고심(高深)함을 찬술하여 안자(顔子)의 칭호가 있게 되었으나,93) 언론과 행의(行義)에 전하여 알려진 것이 없어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다. 대개 당시에 양백기(楊伯起)를 관서(關西)의 부자(夫子)라고 불렀지만 그 귀추를 상고해 보면 결국 혼란한 조정에 벼슬하여 자살하는 치욕을 당했으니,94) 그들이 칭찬한 것은 모두 헤아림이 없어 깊이 따져볼 것도 없다. 그러나 황헌이 벼슬하지 않아서 화를 면한 것이 어찌 양백기보다 어질지 못해서였겠는가. 그렇다면 황헌을 안자에 견준 것은 오히려 실상에 가깝지만, 그가 처음에 잠깐 경사(京師)에 이른 것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대개 명리(名利)에 흔들려서 이른바 높은 것은 진실로 높지 않았고 깊은 것은 진실로 깊지 않았음을 면하지 못할 뿐이니, 언행의 다른 근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믿을 수 없는 점이 저절로 나타난다.주섭(周燮)95)이 동강(東岡)의 비탈을 굳게 지키면서 "도를 닦는 자는 때를 기다려 움직이니, 움직였는데 때에 맞지 않으면 어찌 형통할 수 있겠는가.[修道者度時而動 動而不時 焉得亨乎]"라고 하였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세 번 반복하여 읽고도 남은 맛이 있게 한다. 아, 어찌 벼슬에 나아가는 자만 그러하겠는가. 동작하는 바가 있는 선비들은 모두 이것을 보고 법으로 삼아야 한다.번영(樊英)96) 같은 자는 처음에 이미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가 결국에는 나가서 관작(官爵)을 받았으며, 나가서는 또 훌륭한 지모와 깊은 계책이 없고 한갓 국가에서 존대하고 예우하는 것에만 부지런하여 민심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으니, 장해(張楷)97)가 "출사든 은둔이든 근거할 바가 없다.[進退無所據]"라고 기롱한 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은 오히려 '책망해서는 안 된다.'고 장해를 비난하였으니, 지나치게 너그럽게 평가하는 잘못을 범한 듯하다."맹달(孟達)98)이 죽었다.[孟達死之]"라고 쓴 것은 대개 그의 충성을 표창한 것이다. 선사(先師 전우(田愚))가 나에게 답장한 편지99)에 "맹달이 재차 항복하려고 했으나 위나라가 목을 벨까 두려워 죽지 않을 수 없었으니, '죽었다[死之]'고 표창한 것은 고쳐야 합당할 듯한데 주자가 미처 검토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니, 나의 얕은 소견에 더욱 의혹되었다. 가령 맹달이 한나라를 위해 죽을 마음은 없고 항복하려고 했으나 목을 벨까 두려운 마음에서 나와 죽은 것이라면, 애당초 신성(新城)을 가지고 귀순할 때에 어찌 굳이 강성한 위나라를 버리고 피폐한 한나라에 귀순하였겠는가. 그가 귀순한 것은 죄를 뉘우치고 바른 데로 돌아갔기 때문이고 그가 죽은 것은 죽음으로써 속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충성까지 버려서는 안 되니, 주자가 표창한 것은 필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사의 의론이 비록 주의법(誅意法)100)이라고는 하나 만일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면 어찌 남을 왜곡하지 않겠는가. 재차 여쭈어서 당시에 허락을 얻어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가정(街亭)에서의 패배101)는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지휘를 어긴 때문만이 아니라 제갈량 또한 위연(魏延)의 계책을 쓰지 않은 실수102)를 했기 때문이었다. 위연의 계책이 비록 위험하였으나 일이 성공하면 중원을 회복할 가망이 있고 일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장수 1명과 병사 5천 명을 잃는 데에 그치니 무슨 큰 관계가 있었겠는가.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라103)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기는 해도 바라는 것이 크고 잃는 것이 작다면 당연히 해야 할 듯하다. 이때를 당하여 위나라에서는 조금도 대비함이 없었고 불의에 출병하였으니 또한 위험한 길이라고 기필할 수가 없다. 제갈량이 비록 "편안하게 농우를 취하고 완전무결하여 반드시 승리한다.[平取隴右 十全必克]"라고 하였지만, 이렇게 시일을 허비하는 사이에 중원의 전력(全力)으로써 어찌 그들이 승리하여 취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고하면서 굳이 "한 주(州)의 땅을 가지고 적과 지구전을 벌이고자 하니, 이것은 신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잃어서는 안 되는 기이한 기회를 앉아서 잃어버렸으니 어찌하겠는가. 애석하도다.제갈공명이 마속을 베어 법을 폐기하지 않는 것으로써 역적을 토벌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제왕을 보좌할 재목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장완(蔣琬)104)이 '초(楚)나라가 득신(得臣)을 죽이자 진 문공(晉文公)이 기뻐하였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지모가 있고 계략이 있는 선비를 죽이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한 경우는 작은 것만 보고 큰 것에는 어두운 것이다.제갈공명이 가정에서 패배했을 때에 자신의 관직을 세 등급 낮출 것을 청하고 허물을 끌어다가 자신을 질책해서 잘못한 바를 천하에 공포(公布)한 것으로써 그가 힘써 배운 곳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은 왕업(王業)을 흥기하기에 충분하다. 가령 사마소(司馬昭)가 동관(東關)에서 패배했을 때에 그 허물을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 왕의(王儀)의 목을 벤105) 것으로써 그가 과실을 듣기 싫어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은 일을 망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마소가 끝내 천하를 소유한 것은 어째서인가? 형세와 운수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나 바로 이때를 당하여 한나라의 형세와 운수가 이미 지나갔으니, 가령 제갈공명이 이런 학문과 이런 마음이 없이 한갓 재략(才略)만 사용했다면 어찌 조그만 하나의 주(州)를 가지고 중원의 대중을 대적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재주가 있어서 큰일을 담당한 자가 참으로 공심(公心)으로 사람을 감복시키고 하늘을 감동시킨다면 또한 운수를 되돌리고 형세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손권(孫權)106)이 황제라고 칭하였으나 제갈공명이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게 한 것은 위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히 여기는 것이 위나라를 토벌하는 데에 있었기에 오나라는 물을 겨를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염려할 것이 없으나 오나라에 대적하면 위나라는 형세를 탈 수 있어서였다. 이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곳에서는 권도(權道)를 쓸 수가 있다.유엽(劉曄)이 교묘한 속임수 때문에 근심하다가 죽은107) 것은 정직하지 않아서 살지 못한 것이기에 마땅하나, 우번(虞翻)은 충직하고서도 귀양을 가서 죽었으니108) 안타깝다. 그러나 재주가 시킨 말과 행동이 재앙의 계기가 되었으니, 비록 정직함과 속임수가 같지는 않았으나 죽은 것은 똑같았다. 아, 재주와 뜻을 갖춘 자들이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관녕(管寧)109)이 요동(遼東)에서 검은 모자[皁帽]를 썼던 일은 얼마나 초연하였던가마는 늘그막에 위(魏)나라로 돌아가서 노육(盧毓)의 천거를 받게 되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반드시 부득이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가 천거를 받은 것은 구해서 얻은 것이 아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욱 고결하게 되는 것만 못했을 듯하니, 주자가 '위나라에서 졸하였다.[卒於魏]'고 쓴 것은 또한 폄하하는 뜻을 살짝 붙인 것이리라.하후현(夏侯玄)은 자원(子元 사마사(司馬師))과 자상(子上 사마소(司馬昭))이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미를 보아 자신을 보전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지위를 탐내고 녹봉을 생각하여 그대로 따르며 그럭저럭 지내다가 연루되어 죽게 되었으니,110) 죽어서 어리석음을 얻은 자가 아니겠는가. 공자가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지혜롭다.'라고 하지만 덫이나 함정 속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한다.[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罟擭陷穽之中 而莫之知避]"111)라고 했으니, 이는 하후현을 두고 이른 것이리라.위(魏)나라 말기에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가 그 임금을 내쫓아 시해하기를 닭이나 개처럼 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한(漢)나라를 위해 조조(曹操)에게 원수를 갚은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왕경(王經)112)처럼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신하가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시골에서 불효한 자식이 혹 효자를 둔 경우를 보았으니, 이러한 이치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면죽(綿竹)에서 패배했을 때에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아들 제갈첨(諸葛瞻)과 손자 제갈상(諸葛尙)이 모두 죽었으니,113) 이에 제갈무후의 의방(義方)114)과 훌륭한 계책을 알아보겠고 또한 실학(實學)115)과 제가(齊家)를 알아보겠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제갈무후의 충의와 재략(才略)은 모두 학문에서 나왔으니, 대개 그 '담박명지영정치원(淡泊明志寧靜致遠)'116) 여덟 글자는 평생 학문의 주본(主本)으로, 자신에게 갖추어 자손에게 미친 것이다. 담박(淡泊)한 뒤에 사사로움과 사특함이 물러나고 안정되고 고요한 뒤에 의리가 드러나니, 사사로움이 없고 이치에 밝으면 기회를 따라 계책을 결정하고 위난(危難)을 당하여 의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재략과 기절(氣節)을 유학(儒學)과 다른 것으로 여기는 자는 홀로 무엇을 보겠는가?"강유(姜維)가 종회(鍾會)를 죽이고 다시 한(漢)나라 황제를 세우려 했던 것은,117) 일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으나 뜻은 충성스러웠으니, 이미 항복했다고 해서 허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만약 이릉(李陵)과 똑같이 논한다면 서로 들어맞지 않으나, 강유는 일개 무식한 장사(壯士)이므로 여기에 나아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신하의 바른 의리에 이르러서는 어찌 후일의 공을 도모하여 먼저 절개를 굽히는 것을 용납하겠는가.곽익(霍弋)118)은 위(魏)나라에서 후주(後主)를 대할 때의 예우가 어떠한가로 항복 여부를 결정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리인가? 그가 올린 표문(表文)에 "나라가 패망하고 군주가 귀의하여 죽음으로 지킬 대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몸을 바쳐서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國敗主附 守死無所 是以委質 不敢有貳]"라고 하여, 이로써 스스로 의리에 부합한 것처럼 만든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의리가 있는 곳이 죽음으로 지킬 곳이 아니던가? 어떤 사람이 영녀(令女)119)에게 묻기를 "남편의 집안이 이미 멸망했는데 이것을 지켜 누구를 위하고자 하는가?" 하니, 영녀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은 존망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며 의로운 사람은 성쇠에 따라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仁者不以存亡易心 義者不以盛衰改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이다. 곽익은 장부이면서도 그 식견이 여자에 미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진 무제(晉武帝)120)는 흉악하고 패역한 무리로서 자신이 직접 찬탈하였지만, 전후의 거상(居喪)에 고례(古禮)를 실행한 것에 대해서는 비록 여러 신하가 저지한 것 때문에 삼년복을 입지는 못했어도 그 효성(孝誠)은 흠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떳떳한 본성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효도는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니, 위나라와 진나라가 똑같이 찬탈하였지만 진나라가 위나라와 더불어 그 멸망을 똑같이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한쪽에서 연장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양호(羊祜)121)가 비록 무인(武人)이자 장신(將臣)이었지만 부현(傅玄)과 말하면서 "주상(主上)께서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비록 상복을 벗고 계시나 실제로는 상례를 실천하고 계시니 만약에 이를 이용하여 선왕(先王)의 법도를 회복시킨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성현으로 하여금 논하게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자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有德者必有言]"122)라고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현산(峴山)의 비석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가령 부현이 여러모로 저지하고 어렵게 여겨서 양호의 의론이 행해지지 못하게 한 것은 그의 뱃속에 든 시서(詩書)에 도리어 부끄럽지 않았을까?예로부터 죄악이 지극히 큰데도 끝내 재앙을 당하지 않은 자는 드물었으니, 나는 가충(賈充)123)이 일생을 잘 마친 것에 대해 홀로 괴이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진 무제가 친애(親愛)에 치우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종족이 투기심이 있고 용모가 추하고 피부가 검은 것을 알고도 결국 그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으며 오나라 정벌의 불가함을 주로 말한 사람이 가충이었으나 오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도리어 8천 호(戶)를 더해주는 상을 내렸다. 그가 죽었을 때에는 친족이 아닌 사람을 후사로 삼으라는 유의(遺意)를 따르도록 하여 선왕(先王)의 정례(正禮) 어기기를 꺼리지 않았으며, '무공(武公)'이라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로 개정하여 기강과 법도를 혼란시켰기에 '황(荒)'으로 시호할 것을 청한다는 공론을 배척하였으니, 대저 이러한 무제의 시절에 누가 감히 그 뒤에 의론하겠는가. 대개 무제가 말한 가충의 공이 크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가충이 진나라를 위해 세운 공은 조모(曹髦)를 시해한 일보다 큰 것이 없으나, 만일 가충이 없었다면 진나라가 끝내 천하를 소유할 수 없었을까? 진나라를 위해 임금을 시해한 것은 진나라 일의 성공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다만 진나라에 대역의 죄를 이루었는데 그의 공을 어디에서 취하겠는가. 진 무제의 가리고 빠짐이 심하다. 투기심 있는 종족이 궁궐에 들어와서 황후를 시해하고 자식을 죽이며 대신을 주륙(誅戮)하여 거의 진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아, 슬픈 일이다.진(晉)나라는 예법을 팽개쳐버린 시절이었다고는 해도 공의(公議)가 그래도 남아 있어서 하증(何曾)124)과 가충(賈充)의 권세와 지위로써도 '무(繆)'와 '황(荒)'이라는 시호를 면할 수 없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달래줄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에는 예의의 나라로 불리는데도 풍습이 아첨만 하여 시호하지 않는 일은 있어도 시호를 하면 반드시 아름다운 것으로 붙여주니, 서진(西晉)과 견주어 보면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손호(孫皓)125)가 무도(無道)하니, 오(吳)나라 선비들 중에 침묵을 지키고 몸을 숨겨 등용되지 않은 자가 제일이다."라고 한 것은 오군(吳郡) 사람 육희(陸喜)의 말이니, 그 또한 《주역》의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潛龍勿用]'126)와 《논어》의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녹만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邦無道穀恥]'127)라는 도(道)를 알았을 것이다.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혼란하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으니, 이러한 식견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진 무제(晉武帝) 태강(太康) 6년(285) 을사 가을 8월 1일에 일식(日食)이 있었으며, 7년 병오 봄 1월 1일에 일식이 있었으며, 8년 정미 봄 1월 1일에 일식이 있고 태묘(太廟)의 전각이 무너졌다. 9년 무신 봄 1월 1일에 일식이 있었고, 여름 6월 1일에 일식이 있고 가뭄이 들었으며, 가을 8월에 별이 비처럼 쏟아지고 지진이 일어나, 재이(災異)가 겹쳐서 나타난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가후(賈后)128)가 시역(弑逆)을 저지르고 여러 왕이 서로 해쳐서129) 진나라가 망하는 조짐이었다. 하늘의 경고가 이와 같았는데도 무제는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기강을 똑바로 세우며 보좌할 신하를 골라 뽑아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재앙을 제거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끝내 성색(聲色)을 마음껏 즐겼다. 마침내 병이 나서 고명(顧命)130)할 즈음에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진 바람에 악한 사람이 권력을 훔쳐 점차 큰 혼란을 이루었으니 애달픈 일이다.장화(張華)가 박학한 선비로서 모략을 갖춘 것은 대중이 의지하고 우러르는 것이었으므로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 대다수가 애석하게 여겼으나, 나는 '그의 죽음은 당연하여 안타까울 것이 없다.'고 여긴다. 그는 지위를 탐하고 녹봉을 생각하여 오래도록 적후(賊后)131) 섬겼으며 친우와 작은아들이 번갈아가며 지위를 양보하라고 권했으나 끝내 수긍하지 않다가 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공자가 말한 비루한 사내[鄙夫]132)이니, 그 박학한 선비가 어디에 있겠는가.반악(潘岳)ㆍ육기(陸機)ㆍ육운(陸雲)의 문장은 당대에 탁월하였으나 혹은 적후(賊后)의 수족이 되고 혹은 반왕(叛王 황제를 배반한 왕)의 장좌(將佐)가 되어 결국 자기는 죽고 친족은 멸망하게 되었으니,133) 평소의 독서가 어떠하였기에 마침내 이와 같았는가? 만일 조금이라도 이치를 궁구하고 힘써 행하는 학문에 뜻을 두었더라면 어찌 이런 낭패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겠는가. 전일의 경계[前鑑]가 분명한데도 후세에 자식을 가르칠 때에 오히려 문장을 숭상하고 덕을 경시하는 경우가 많으니 생각이 너무나 모자라다.노자와 장자의 학문이 비록 예법을 경멸하였으나 그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위진(魏晉) 시대에 노자와 장자를 숭상한 자들은 대부분 그 이름만 훔치고 그 실상은 버렸으니 시세를 따르고 권세에 아부하며 권력을 탐하고 재앙을 즐겨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심지어 왕융(王戎)이 탐욕을 부리고 인색하여 오얏씨에 구멍을 뚫은134) 것과 유애(庾敳)가 끝없이 재물을 증식하려 한 것은 말하면 입이 더러워지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방달(放達)하고 제멋대로 하여 성문(聖門)에 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욕심에 빠져 양심을 잃었으니 노자와 장자의 죄인이 된다.혜소(嵇紹)135)는 아버지의 원수를 원망하면서도 진나라를 섬겼으니, 매우 불효한 일이다. 사마온공이 비록 "혜소에게 만약 탕음(蕩陰)에서 목숨을 바친 충성이 없었더라면 아마 군자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나는 '탕음에서의 충성'은 비록 충성스러웠으나 취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본이므로 아버지를 섬기는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것을 충성이라 이르니, 아버지도 없고 근본도 없는 충성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자로(子路)는 한갓 그 사람의 녹봉을 먹었으면 그 난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 의리가 되는 것만을 알고, 첩(輒)의 녹봉을 먹는 것이 의가 아님은 알지 못한 것이다."136)라고 하였는데, 나는 혜소에게 또한 그렇게 말한다.왕도(王導)가 온 식구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주의(周顗)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은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137) 그러나 이미 황제를 뵙고 해명하여 구원하고서도 다시 나와서 큰소리로 '역적들을 죽이고서 금인(金印)을 취하겠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왕도를 구원해 준 일이 사적인 정을 따르지 않은 공도(公道)였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비록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이니 이 또한 사심(私心)이다. 말해야 할 경우에도 때로 감히 다하지 않는 것이 재앙을 피하는 방법인데, 더구나 말하지 않아야 할 경우에 말하여 재앙을 취해서야 되겠는가. 만일 주의가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왕도가 왕돈(王敦)의 세 번 질문138)에 어찌 모두 답하지 않았겠는가.주의(周顗)의 죽음은, 왕도가 실제로 그를 죽인 것이지 '나 때문[由我]'일 뿐만이 아니다. 왕도가 비록 '역적을 죽여 금인을 취하겠다.'는 말에 원한을 품었으나, 주의는 다만 '역적을 죽이겠다.'고 말했지 '역적의 종족(宗族)을 함께 죽이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왕도는 이미 역적이 아니고 역적은 왕돈이었으니 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이 절로 달라지는데, 어떻게 이 때문에 주의를 원망하여 왕돈의 세 번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왕도가 실제로 주의를 죽였다."라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또한 "왕돈의 반역은 왕도가 실제로 이루어 준 것이다."하고 할 수 있으니, 어째서인가? 왕도의 인망은 왕돈이 꺼리는 바였지만 가까운 친족이었으니, 석두성(石頭城)에서 서로 만나던 날에 만일 왕빈(王彬)이 한 것139)처럼 의(義)에 의거하여 힐책하고 끝내 대의에 입각하여 친족의 정을 끊겠다는 뜻을 보였다면 좌절하고 뉘우쳐 스스로 개선하여 알 수 없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주의를 죽이게 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 왕빈으로 하여금 왕돈에게 절하고 사과하라고 권하여140) 그 기운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대역(大逆)을 이루어 강녕(江寧)의 일141)이 있게 되었다. 왕돈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부고를 발표하는 시시한 작은 계책으로 왕돈의 토벌을 도운 조그만 공을 가지고 어찌 전일에 역적을 비호해 준 죄를 속죄할 수 있겠는가. 왕도를 진나라의 어진 재상이라고 칭한 것 때문에 이처럼 상세히 논평해 보았다.진왕(秦王) 부견(苻堅)의 서형(庶兄) 부법(苻法)이 부견의 양위(讓位)를 받지 않으면서 "너는 적자(嫡子)인데다가 어지니 즉위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분수를 지켜 능한 것을 양보한 어진 덕이 가상하였다. 그런데 구 태후(苟太后)가 부견에게 불리할까 염려하여 그를 죽인 것은 참으로 아녀자의 사리에 어둡고 음험한 소견이다. 부견은 영명(英明)한 군주라고 할 만한데 어찌하여 그의 죽음을 구원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피를 토하기만 했을까? 어머니의 뜻에 순종하였다고 한다면 어버이를 불의에 빠뜨린 것이고, 힘이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면 위세와 권력이 자기에게 있기에 그 마음먹은 바가 사람으로 하여금 침음(沈吟)하게 함을 면치 못한다.연(燕)나라 양침(梁琛)이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행재소(行在所)의 부당함을 판단하여 들에서 임금을 뵙는 예를 거절하였으며, 제갈씨(諸葛氏) 형제의 일142)을 인용하여 종형[양혁(梁弈)]의 집에서 유숙하는 것을 사양하고, "형제의 본심은 저마다 다르다."라고 하면서 종형의 동사(東事 연나라의 일)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다른 나라의 신하를 감히 신하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예법에 의거하여 진나라의 태자에게 절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모용위(慕容暐)143)는 그의 어짊을 모르고 도리어 의심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니,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손성(孫盛)의 아들들이 그의 아버지가 지은 《진춘추(晉春秋)》에 사실대로 쓴 시사(時事)를 사적으로 고친 것은 환온(桓溫)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나,144) 만약에 손성이 별본(別本)을 베껴서 외국에 전한 것이 아니었다면 곡필(曲筆)하여 환온에게 아첨했다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 후세의 명사(名士)들 중에도 노년에 자손이 잘못한 것 때문에 절의를 망치고 명성을 잃는 경우가 많으니 오히려 여기에서 거울삼을 수 있을 것이다.주효(周虓)가 진(秦)나라에 항복하여 어머니를 온전히 한 것은 효도이고, 진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은 것은 충성이다.145) 그러나 있는 곳에 목숨을 바치는[所在致死] 의리로써 끝까지 논해 보건대 주효가 있는 곳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성지(城池)를 지키는 데에 있었으니, 비록 양쪽을 온전히 하고자 해도 그럴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게다가 주효가 처음에는 비록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굳게 지켰으나 끝내는 상서랑(尙書郞)이 되어 모반했다가 변경으로 귀양을 갔으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극초(郄超)가 죽으려 할 때에 환온(桓溫)과 주고받은 편지 1상자를 그의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한 것은 효심에서 나왔으나, 어찌 평소에 덕행을 삼가고 왕실에 충성하여 그 아버지를 계술(繼述)하는 효도만 하겠는가. 이것이 삼년상은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서 시마복(緦麻服)과 소공복(小功服)만 살피는146)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는 대개 평소에 환온에게 아부하여 권세를 탐낸 사욕이 해치는데도 어버이가 주신 몸을 불의에 빠뜨린 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죽으려 할 때 편지를 드린 것은 사람이 궁하게 되자 근본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착한 마음이 일어난 것이니, 떳떳한 본성은 실추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바야흐로 진(秦)나라 군대가 크게 이르렀을 때에 사안(謝安)147)은 태연하여 일이 없고 멍에를 매라고 명하여 산에서 놀며 바둑을 둘 때에 산장을 걸고 내기를 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이미 계책이 있었겠는가. 실제로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인심을 진정시키기 위한 계책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벌벌 떨며 두려워한다면 진나라 사람들이 싸우지도 않고 절로 혼란해지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안의 아량과 중망(重望)이 아니면 비록 이것을 하고자 해도 해볼 수가 없다. 대개 타고난 재능이 매우 높아서 절로 생사와 화복을 도외시한 한 단락은 실로 평범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겠다. 환온(桓溫)이 호위병을 크게 벌이고 왕탄지(王坦之)가 수판(手版 홀(笏))을 거꾸로 쥐었을148) 때에도 사안은 침착하게 자리에 나아가 오랜 시간 담소하였으니, 사안의 평생 정력(定力)149)은 장점이 여기에 있다.사안(謝安)이 전란에 임해서도 산에서 놀며 내기 바둑을 둔 것은 요컨대 한때의 용도에 불과하니, 나랏일을 도모하는 정법(正法)에 이르러서는 환충(桓沖)150)이 탄식했던 "장수의 지략에는 익숙하지 못하기에 놀며 얘기하느라 겨를이 없다.[不閑將略 遊談不暇]"라는 설이 정히 없을 수가 없다.비수(肥水)에서 승리했을 때에 사안은 이미 계획한 것이 없었고 사석(謝石)과 사현(謝玄) 등도 따로 모략(謀略)이 있지 않았다. 다만 진(秦)나라가 진(晉)나라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려고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니 진(秦)나라 군대가 끊임없이 후퇴하였으며, 부융(苻融)의 말이 쓰러져 진(晉)나라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주서(朱序)151)가 '진(秦)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외치자 군사들이 마침내 크게 도망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모두 요행이었으니,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만약에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강남의 한 구역이 어찌 환충의 '좌임(左袵)하게 될 것이다.'는 탄식152)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사안 또한 일을 폐하고 나라를 그르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오직 국량(局量)이 넓은 것은 억지로 할 수가 없다."153)라고 하였으니, 사안(謝安)의 넓은 국량이 어찌 억지로 한 것이겠는가. 그러나 그가 승전 보고를 듣고는 문턱을 지나면서 나막신의 굽이 부러진 줄도 깨닫지 못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도 본래의 국량이 넓은 것은 참으로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지만 일에 임하거나 일을 지나칠 때와 사람을 대하거나 혼자 있을 때에 끝내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부견(苻堅)은 당대의 난폭하고 오만한 사람으로, 동쪽을 공격하고 서쪽을 정벌할 때에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어 거의 해내(海內)를 평정하였으나 마침내 평소 포로였던 사람의 손에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덕업(德業)이 높지 않으면서도 뜻이 먼저 매우 커서 왕경략(王景略)이 임종에 한 말154)을 생각하지 않고 진나라를 도모하여 취하려다가 도리어 하늘의 재앙에 걸리고, 마침내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이 틈을 엿보게 되어 몸도 보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비명(非命)을 취했으니, 아마도 부견 또한 찬탈하고 시해하여 나라를 얻은 자이기 때문에 하늘이 이것으로 갚은 것이리라.부견(苻堅)이 비록 또한 찬탈하고 시해한 부류이지만 그 재주를 논한다면 또한 유능한 군주라고 할 만하다. 그 활달(豁達)하고 강명(剛明)하며 인물을 알아 제대로 임명하며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충절을 장려하고 포상하며 원수를 용서한 것은 모두 임금의 도량인데 오호(五胡)155) 중에서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었다. 만일 제왕을 보좌할 인재를 얻어서 보필하게 하였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못한 것이 안타깝다. 해설하는 자가 왕맹(王猛)을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여기고 부견 또한 스스로 "나에게 왕경략(王景略)이 있는 것은 유현덕(劉玄德 유비(劉備))에게 제갈공명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지만, 나는 왕맹이 제갈공명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여긴다. 제갈공명은 군자 중의 재략가이고 왕맹은 소인 중의 재략가이니, 어찌 소인이면서 제왕을 보좌할 인재가 되는 경우가 있겠는가. 만일 왕맹이 죽지 않았다면 겨우 그 나라를 강하게 할 뿐이지 천하통일을 기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연(燕)나라 군주 모용수(慕容垂)가 단후(段后)를 옮기고 난후(蘭后)를 올리려고 하자156) 유상(劉詳)과 동밀(董謐)이 근거를 들어 불가하다고 하면서 "상께서 하고자 하는 것을 신들에게 묻지 마십시오. 신은 경전을 살펴보고 예법을 받드는 것이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장석지(張釋之)가 한 문제(漢文帝)에게 대답하기를 "그 당시에 폐하께서 주살하셨다면 그만입니다."157)라고 한 것과 동일한 말뜻으로 똑같이 당시 임금이 제멋대로 자기의 뜻을 행하고 예법을 꺼리지 않는 마음을 열어주었으나 이에 더욱 심하였으니, 저것은 그래도 일이 지난 뒤에 있었지만 이것은 바야흐로 일을 만났을 무렵에 있었다. 모용수가 다시는 묻지 않고 끝내 행한 것은 유상과 동밀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대규(戴逵)158)는 조정의 부름을 피해 도망하여 숨었으니 은거하여 뜻을 구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고, 사현(謝玄)159)은 상소하여 대규를 불러들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덕으로써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범녕(范甯)160)은 항상 "왕필(王弼)과 하안(何晏)의 죄는 걸(桀)ㆍ주(紂)보다 심하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그들에 대한 폄하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자, 범녕이 말하기를 "왕필과 하안은 경전과 문헌을 멸시하고 인의(仁義)를 인멸(湮滅)시켜 불분명하고 근거 없는 말로 후세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리하여 사대부들로 하여금 갑작스레 갈 길을 바꾸도록 해서 예악이 붕괴되고 중원이 전복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남은 풍조가 지금까지도 근심이 되고 있다. 걸ㆍ주는 한때에 방종하고 포학하였지만 단지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전복시켜 후세의 경계가 될 뿐이었으니, 어찌 백성이 보고 듣는 것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한 시대의 재앙은 가볍고 역대의 근심은 무거우며 스스로를 망치는 악은 작고 뭇사람을 미혹시키는 죄는 크다고 여긴다."라고 하였다. 이 논평이 절절하여 경계할 만하니 무릇 정치를 주관하는 재상과 교학을 맡은 유종(儒宗)은 순정(純正)한 도로써 천하를 인도하여 인심과 풍속이 모두 바른 데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소홀하여 다른 길이 섞이면 한두 번 전하여 점차 범녕이 논평한 것에 이를 것이니 염려스럽다.한 고제(漢高帝)의 군대가 노현(魯縣)을 지날 때에 태뢰(太牢)161)로 공자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 일에 대하여 식자(識者)들이 "한(漢)나라 400년 왕업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였으니 이 논평을 믿을 만하며, 또한 "진(晉)나라 왕업의 쇠퇴는 공자의 사당을 수리하자는 이요(李遼)의 주청(奏請)에 답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았다."라고 할 수 있다.후(后)는 천자의 적배(嫡配 정처(正妻))가 아니면 칭해서는 안 된다. 진(晉)나라 회계태비(會稽太妃)162)는 이미 돌아가신 황제[先帝]의 대등한 짝이 아니니 '태후(太后)'라는 칭호가 어찌 마땅하겠는가. 장도(臧燾)가 간문선태후(簡文宣太后)라는 칭호와 별도로 침묘(寢廟)를 세우는 의례로써 한 번에 세 가지의 의로움을 승인하는 셈이라고 한 것은 간사한 관리가 무문(舞文)163)하는 버릇인데, 당시의 임금에게 아양을 떨어 후세에 폐해를 끼친 죄가 크다.탁발규(拓跋珪)164)가 조야(朝野)에 명하여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게 한 것은 중화의 문화로 오랑캐를 변화시킨 것이니, 그의 견식(見識)이 뛰어나 오호(五胡) 중에서는 미칠 자가 전혀 없다. 이것이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니, 그들이 나라를 200년 동안이나 향유한 것은 마땅하다. 금(金)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되었을 때에도 중국의 예의를 사용했는데, 청(淸)나라 군주 강희(康熙)는 "이렇게 문약(文弱)하게 되었기 때문에 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잘못되었단 말인가.환현(桓玄)이 크게 반역했을 때에 왕밀(王謐)이 그의 좌명원신(佐命元臣)이 되어 직접 황제의 옥새를 풀어 환현에게 주었다. 죄가 이처럼 극도에 달했는데도 젊은 시절에 인정을 받은 은혜 때문에 목을 베지 않을 수 있는가? 대개 유유(劉裕)165)가 환현을 토벌한 것은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업을 이루려고 한 것이니, 사적인 은혜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사면한 일은 괴이할 것도 없다.남량(南凉)166)이 망했을 때에 유독 위현정(尉賢政)만이 고문(浩亹)에 둔전을 설치하고 굳게 지켜서 항복하지 않았으니 그의 충성이 가상하며, 그가 호대(虎臺)의 항복 권유에 답한 말167)은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임금 욕단(傉檀)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항복한 것은 충성을 마치지 못한 것이다.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지 않은 것은 사직의 죄인이고, 신하가 이런 임금을 따라 항복한 것은 부인과 내시의 충성168)에 불과하다.위(魏)나라의 우십문(于什門)169)이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은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큰일에 당해서도 그 뜻을 뺏을 수 없는 자라고 할 만하니 가상하다.최호(崔浩)170)가 위(魏)나라 군주와 근세의 장상(將相)에 대하여 논평한 것은 모두 그 실정을 파악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으니, 나 또한 "최호가 나라를 다스린 것은 탁발사(拓跋嗣)의 관중(管仲)이었다."라고 한다.위조사(韋祖思)가 이미 발발(勃勃)의 부름에 응하고 또 공경하고 두려워함이 너무 심하였으며 심지어 절을 올렸으니,171) 어찌 은사(隱士)의 실제에 해당할 수 있겠는가. 주자가 오히려 대강(大綱)에 '은사(隱士)'라고 썼으니, 아마도 미처 재수정하지 못한 것이리라.전대(前代)의 세상이 바뀔 때를 역력히 보건대 모두 다소의 풍파에 절의에 죽은 신하가 한둘 있었지만 유유(劉裕)가 진(晉)나라를 찬탈할 때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진 경우는 없었다. 겨우 서광(徐廣)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 일이 있으나 또한 의리에 입각하여 자정(自靖)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로써 진(晉)나라의 열조(列朝)에는 어진 임금이 한 명도 없었음을 알았다.유유(劉裕)가 이미 자신이 직접 대역(大逆)을 범했으니, 그가 청의(淸議)를 범한 자를 숙청한 것은 남들이 자기의 죄를 몰래 의론할까 염려해서였다. 배자야(裴子野)가 마침내 순임금과 무왕이 흉악한 족속을 유배하고 완악한 백성을 옮긴 일을 인용하여 청의를 없앤 잘못을 의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자기의 삼년상을 팽개친 자가 남이 시마복과 소공복을 살피지 않는다고 기롱하는 것과 다르겠는가.최호(崔浩)가 노자와 장자의 책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옳다. 다만 노자를 공자의 스승이라 하고 그 책을 거짓으로 속인 것으로 귀결 지었으니, 본래 《노자》의 본서(本書)가 있어 정경(正經)으로 삼을 만하다고 인식하여 그 사람을 공자의 바른 스승이라고 한 것이야말로 바로 거짓으로 속이는 설이다. 대개 노자가 일찍이 주하사(柱下史)172)가 되어 많이 듣고 널리 알았기에 공자가 예(禮)를 묻고 취하여 고증으로 삼은 적은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노자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그에게 일정한 견해가 없음이 많이 보인다.사람에게 이미 바른 지식과 일정한 견해가 없다면, 경술(經術)을 정밀하게 연구한다 하더라도 결국 어찌하겠는가. 이러한 태도는 최호(崔浩)173)가 《도록진경(圖籙眞經)》을 성왕(聖王)이 천명을 받은 징험으로 여겨 "인신(人神)을 마주 대하고 필적이 찬연하다고 말하면서 군주에게 천사도장(天師道場)을 세우게 한 뒤에 또 도단(道壇)에 올라 부록(符籙)을 받도록 권한 것?보다 못하지 않다. 이와 같은 높은 재주를 가지고 어찌 미혹되어 아양을 떨며 임금을 그르친 죄에 빠졌는가. 그가 이렇게 된 것은 도(道)를 터득하지 못하여 바른 지식과 일정한 견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송(宋)나라는 찬탈과 시해로 나라를 얻었기 때문에 형제가 제위를 다투는 것이 이미 극도에 이르러 예(禮)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에는 그래도 양암(諒闇)174) 중에 자식 낳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서 유소(劉劭)175)가 태어남에 이를 숨겼다가 나중에야 밝혔으니, 성인(聖人)의 엄정한 예법이 이와 같았다."한(韓)나라가 망하자 장자방(張子房)이 분발하고, 진(秦)나라를 황제라 칭하는 것을 노중련(魯仲連)이 부끄러워했지."176)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절(志節)인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말은 방일(放逸)하고 광망(狂妄)한 사령운(謝靈運)177)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사람이 의리를 견지하여 절개를 지키려 하는 것 또한 떳떳한 성품에서 얻은 것이니, 이 시를 지은 것에 대하여 혹자는 평소에 뜻을 두었던 것이지 일시적인 충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였다. 다만 평소에 기른 바가 없기 때문에 탐욕을 이기지 못해 유씨(劉氏)의 녹봉을 먹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죄를 지어 죽임을 당한 날에도 이것을 고집하여 군사를 일으킬 명목으로 삼았으나, 다만 후세에 수치와 비웃음만 더할 뿐이다.유침(劉湛)178)이 상중에 있던 여릉왕(廬陵王) 의진(義眞)을 만났는데, 자신을 위하여 술상을 차리자 정색하고 말하기를 "이미 예로써 스스로 처신하지 못하고 또 예로써 남을 처신케 하지 못하는군요."라고 했으니, 이는 예절을 삼가는 모습이 엄격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미 예절을 삼갈 줄 알았다면 스스로 응당 경신(敬身)이 예절의 근본이 됨을 알아서 '자신의 사욕을 이기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179)라는 것에 귀결되었을 텐데, 어찌하여 권세를 탐하고 즐겨서 그 임금 형제의 재앙을 만들고 자신은 죽임을 당하여 천고에 악취를 풍긴 것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면 예절을 어떻게 사용하겠는가."180)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최호의 재주와 지략을 나는 일찍이 위(魏)나라의 이오(夷吾)181)와 같다고 여긴 적이 있으나 군자의 대도(大道)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 대다수가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맹자(孟子)가 분성괄(盆成括)을 논한 것182)으로 살펴보면, 태무(太武)183)가 그를 죽인 것이 지나치다 하더라도 최호가 죽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니, 또한 하늘이 사도(邪道)를 끼고 임금을 그르친 죄를 미워하여 사초의 일184)을 이용한 것이리라.송(宋)나라 문제(文帝)가 유소(劉劭)에게 시해 당한 것은 시해 당한 날에 있지 않고 이미 무고(巫蠱)185)를 처벌하지 않은 날에 있었으며, 유소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시해한 날에 있지 않고 이미 무고를 감행한 날에 있었으니, 문제(文帝)로 하여금 그 무고의 죄를 바로잡아 죽였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재앙이 있었겠는가. 성인이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186)라고 했으니, 송나라 문제에게 그런 점이 있었던 것이다.고윤(高允)187)은 학문이 하늘과 인간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나 그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고, 충성은 임금을 바로잡는 데 있었으나 그 정직함을 팔지 않았다.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는 못했으나 국사를 담당해서는 과감히 말하였고, 겸손하게 자신을 지켰으나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의가 정중하여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사람을 저버리지 않았고, 절조(節操)가 더욱 가다듬어져 가난하고 궁할 때에도 법도를 바꾸지 않았으니, 대개 평소에 굳게 지켜온 바가 '성(誠)' 한 글자에 있었기에 어디를 가나 그 도리를 얻지 않음이 없었다. 나는 고윤과 같은 사람은 위(魏)나라 200년 동안에 제일 순수한 신하였을 뿐 아니라 남북조 시대에 여러 조정의 고관대작들 중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라고 여겼다.심경지(沈慶之)188)가 파직되어 누호(婁湖)에 살면서 조정의 신년 하례가 아니면 문을 나서지 않은 것은 사람의 마음을 자못 흡족하게 하는데 어째서 오히려 마음에 잊히지 않는 것인가. 권세와 지위가 유자업(劉子業)189)과 절로 친밀하여 이미 다시 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으니, 또 당연히 종묘사직을 위해 큰 계획을 생각하여 스스로 대신(大臣)의 도리를 다해야 했는데, 또 어찌하여 채흥종(蔡興宗)190)의 계책이 좋은 줄 알면서도 끝내 듣지 않은 것인가. 그 구구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으면서 충성심을 품고 스스로 맹세한 것이 참으로 아녀자와 내시의 뜻에 지나지 않아 마침내 또 죽임을 당했으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예로부터 제왕가에 으레 골육(骨肉) 간의 재앙이 많았으나 진(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나라처럼 더욱 참혹했던 적이 없었으니 어째서인가. 그 또한 찬탈과 시해로 나라를 얻어 참혹한 짓을 많이 저질렀기에 하늘이 이것으로 갚아준 것이리라.원찬(袁粲)191)의 계책이 실패한 것은 저연(褚淵)192)에게 말하였기 때문이고, 저연이 소도성(蘇道成)에게 알린 것은 자신에게 기복(起復)193)하도록 권유한 원한을 갚기 위해서였다. 원찬은 대개 선비의 풍모를 갖추었으니 보통 사람의 모략을 억지로 행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 것이 서(恕)이다.'194)라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기복은 마땅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 텐데 어찌해 저연에게 권하였는가. 서(恕)를 행하지 않은 재앙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디에 선비의 풍모가 있는가.문방(門房)의 참살195)은 오랑캐가 적용한 참혹한 법률이었는데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비로소 문방의 참살을 혁파하여 한 번 악랄한 폐단을 씻어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문방의 참살이 많게는 16장(章)에 이르니, 어찌 이른바 먼저 병을 고쳤다가 뒤에 병이 든 경우가 아니겠는가. 효문제는 어진 임금이라 일컬어지는 자인데도 오히려 다시 이처럼 심하였으니, 임금의 사사로움을 따르고 이치에 어긋난 습성은 끝내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저연의 아들 분(賁)은 아비가 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봉작을 사양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여묘 살이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에 옳고 그름의 실상은 본디 일정한 공론이 있음을 깊이 알았고, 또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유(幽)나 여(厲)와 같은 나쁜 시호(諡號)가 붙게 되면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자손이 나온다 하더라도 영원히 고칠 수 없다."196)는 것은 저연에게 해당되고,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반듯하면 제물로 쓰지 않으려 해도 산천(山川)의 신령이 그대로 놓아두겠는가."197)라는 것은 분에게 해당된다.원위(元魏)198)는 오랑캐의 나라인데도 오히려 동성(同姓)과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하물며 예의의 나라인 우리 대한(大韓)의 경우는 어떠한가. 국법에 분명히 금령(禁令)이 있고 선현들이 말한 정론(定論)도 있거늘, 비루한 풍속을 고치지 않고서 편안하게 범상한 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사대부가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으니 어찌 원위에 부끄럽지 않겠는가.?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사이에는 죄를 서로 연루시키지 않는다.?199)는 것은 본래 천리(天理)로 보아 당연하다. 이표(李彪)200)가 이것을 임금의 두터운 은혜로 삼은 것은 어찌 임금의 사사로운 마음을 열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아버지와 형이 죄를 저지르면 그 아들과 아우가 소복(素服) 차림으로 죄를 청하고, 아들과 아우가 죄에 연루되면 아버지와 형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을 올려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려야 한다.?201)고 말한 것 또한 천리와 인정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것이다.이표(李彪)가 ?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군사 경보가 있지 않으면 상기(喪期)를 마치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 적임자가 없어서 관직을 비워두어야 할 경우에는 기복(起復)케 하여 국사를 맡아보게 해야 한다.?고 청한 것은 미진한 말이다. 국가의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이 그 몸에 달려있는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기복(起復)시키지 말게 한 뒤에야 비로소 성왕(聖王)이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에 부합한다.위(魏)나라 풍 태후(馮太后)202)는 군주 탁발홍(拓跋弘)의 어머니이다. 자식은 어미를 신하로 삼는 의리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해 보면 태후는 탁발홍에 대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경우에 쓰는 ?시(弑)?자를 써서는 안 될 듯한데, 주자(朱子)가 쓴 글이 이와 같으니 의심스럽다. -마땅히 원찬(袁粲) 조항의 위에 있어야 한다.-효심에 참되고 상기(喪紀 상사(喪事)의 법도)에 신중해야 함을 나는 진(晉)나라 무제(武帝)와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203) 두 임금에게서 터득했는데, 효문제는 끝내 여러 사람의 의론을 배척하고 삼년상을 단행하였으니, 더욱 후세의 임금이 거상(居喪)하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사관이 "효문제가 풍 태후에 대해서 옛날 풍 태후가 3일 동안 음식을 넣어주지 않고 작당하여 폐위시키려 하였으며 환관의 참언을 믿고 곤장을 때린 일에 유감을 품지 않았다."라고 일컬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마땅한 바이다. 그러나 그 아비를 독주로 죽인 일에 대해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미가 자식을 죽인 일과 관계되기 때문에 그 자손 된 자가 감히 어찌할 수 없어서 법식대로 상례를 거행했다 하더라도, 가령 5일 동안 한 숟가락의 물도 입에 넣지 않고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였다면 보통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 듯한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아니면 그 일이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효문제가 들어서 알지 못한 것인가.원위(元魏)에 현명한 임금과 의로운 임금이 때때로 서로 이어져, 머리털을 묶고 관모(冠帽)를 쓰며 오랑캐 의복과 오랑캐 말을 금지하고 삼년상을 거행하며 동성과 혼인을 금지한 것과 기타 아름다운 법령과 정사를 남긴 것은 참으로 중화(中華)의 풍속에 부끄럽지 않으니,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나라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연월을 표시한 아래에 반드시 먼저 송ㆍ제ㆍ양ㆍ진나라를 쓰고 뒤에 위(魏)나라를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晉)나라를 이미 위나라보다 먼저 썼으니 진나라를 이은 것은 송나라이고 송나라를 이은 것은 제나라이며 양나라와 진나라도 이어서 서로 전하였기 때문에 순서를 뛰어넘어 위나라를 먼저 쓸 수 없었던 것이지, 그 근본이 오랑캐에서 나왔다는 것으로써 폄하한 것은 아닌 듯하다.위나라 효문제는 성심으로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변혁하는 데 용감하였으니 참으로 숭상할 만하다. 다만 성씨를 바꾸어 족성(族姓)으로 정한 경우는 중화를 사모하는 실상이 여기에 있지 않으며 게다가 오로지 가문의 품위만을 중시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뽑지 않았으니,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204)는 뜻을 잃은 것이다. 이미 이를 중히 여겨 그 딸을 들이어 후궁으로 충당하였으니, 종족의 명망을 중히 여기는 바가 아니었다. 또 그 아우를 장가들일 때에 전처(前妻)를 시첩〔妾媵〕으로 삼게 했으니, 공문자(孔文子)205)가 태숙질(太叔疾)로 하여금 장가들게 한 일과 같지 않겠는가. 이는 모두 명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 법도로 삼을 수 없으니, 어찌 중화를 사모하는 것을 글로만 하고 실제로 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아, 송(宋)나라의 유욱(劉彧)206)이 옹립되었을 때 세조의 아들 28명은 모두 죽었고, 제(齊)나라의 소란(蕭鸞)207)이 옹립되었을 때 태조ㆍ세조ㆍ태종의 여러 아들도 다 죽었다. 나라에 귀한 것은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세토록 왕이 되고 제후가 되는 것인데, 후세에 나라를 소유한 자는 다만 스스로 그 족속을 다 죽이는 도구가 될 뿐이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앞 수레가 이미 뒤집혔으니 뒤 수레는 경계해야 하건만208) 여전히 모질게 시해와 역모를 저질러 나라를 얻었으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아, 그 미혹됨이 심하도다.제(齊)나라 사조(謝朓)209)의 아내는 사조가 그의 아비를 죽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항상 칼을 품고 사조를 찌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조는 감히 서로 볼 수 없었는데 아내가 사조를 죽였다면 그 의리는 어떠한가. 좌씨(左氏)가 기록한 바 "누구나 남편이 될 수 있지만 아버지는 한 분뿐이다."210)라는 말은 이미 옳다고 할 수 없고, 또 차마 아비를 잊을 수 없는데 그 남편을 섬겨야 한다면 자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듯하다.최언(崔偃)211)이 그의 아비를 위해 상소하여 신원(申冤)을 청하였다. 제나라 왕 소보융(蕭寶融)이 이미 은혜로운 조서를 내려 보답했다가 오래지 않아 그를 하옥(下獄)시켜 죽인 것은 어째서인가. 최언의 상소가 애통한 뜻은 부족하고 격분한 기운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신(先臣 최언의 부친을 말함)의 충성은 천년을 기약할 수 있는데 또한 어찌 폐하의 굴신(屈伸 신원해주지 않거나 해 줌)을 기다려 포폄(褒貶)이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으니, 어찌 임금 된 자가 견딜 수 있겠는가. 사람의 자식이 되어 아비를 위해서 당시 임금에게 원통함을 호소할 사람은 오히려 이를 거울삼을 수 있을 것이다.심약(沈約)212)은 일생동안 고심하여 학문에 힘써 문장을 이루었으나 결국 성취한 바는 사람들에게 나라를 빼앗고 임금을 죽이도록 권한 것이다. 학문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덕을 세워 몸을 이루기 때문인데 윤리를 무시하고 도적질을 행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나는 양자강 남쪽의 육조(六朝)213) 시대에 문장을 잘 하면서 못된 짓을 한 자 4명 곧 반악(潘岳)ㆍ육기(陸機)ㆍ육운(陸雲)ㆍ심약을 알게 되었는데, 반악과 육기ㆍ육운은 죽고 심약만 홀로 부귀한 것은 처한 경우가 달라서였다. 그러나 심약도 만년에 양(梁)나라 임금의 노여움과 유감을 얻어 고제(高帝)에게 혀를 잘리는 꿈을 꾸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죽었으니 그 응보(應報)를 알 수 있다.사굴(謝朏)214)이 처음에 도망쳐 숨은 것은 무슨 뜻이며, 하루아침에 대궐에 나아가 사도(司徒)를 받아들인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 사도를 받아들였는데 굳이 본래의 뜻을 진술한 것은 또 무슨 뜻이며, 이미 허락하지 않는다는 전교를 받았는데 직임을 살피지 않은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형편없는 짓이요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는 짓이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자는 명절(名節 명예와 절조)과 부귀(富貴)를 아울러 취하려 해도 취하지 못하고, 다만 소인의 정상(情狀)을 드러낼 뿐이다.길분(吉翂)215)은 순수한 효자이다. 순수한 효자의 명성을 사양하고 순수한 효자의 실상이 있었으니 이것이 순수한 효자가 되는 까닭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름을 내려는 마음이 그 사이에 있었다면 순수한 효자가 아닐 것이다.원위(元魏)에 태자를 세우고 나면 그 어미를 죽이는 법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오랑캐의 풍속이다. 위나라가 중국의 풍속을 준용(遵用)한 지 이미 여러 세대가 지났는데 선무제(宣武帝)가 아들 후(詡)를 세워 태자로 삼게 되자 비로소 이 법을 제거하였으니, 심하도다! 습속의 고치기 어려움이여. 혹자는 말하기를 ?위나라에서 태자의 어미를 죽이는 법을 폐지하였는데 곧바로 호 태후(胡太后)216)가 전횡하다가 어지럽혀 망하게 하는 재앙이 있었다.? 하였는데, 이는 우연히 그런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법이란 하늘의 상도(常道)와 사람의 도리로 인하여 세워지는 것이니, 화복(禍福)을 미리 예측하여 법 아닌 법을 세운다면 천하의 일에 무엇인들 못하겠는가.위나라가 호국진(胡國珍)을 태상진공(太上秦公)으로 삼았으니 이는 위나라 조정에 여러 신하들의 잘못이다. 모두 장보혜(張普惠)처럼 절실하게 간언했다면 태후도 감히 법을 뛰어넘어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것인데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총애를 얻고서 도리어 장보혜를 힐난하였으니, 이른바 ?악(惡)을 조장하고 임금의 뜻에 영합한다.?는 것이 모두 이런 부류이다.위나라의 정년격(停年格)217)은 인재를 매몰시키는 법이니, 시행할 수 없는 법일 뿐 아니라 시행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태평하여 일이 없을 때에도 말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전쟁과 기근을 당했을 때에 어찌 재능에 따라 임용하지 않고 정년격을 묵수(墨守)218)할 수 있겠는가.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두 사당에 제사 지낼 때에 좌장군(左將軍) 풍도근(馮道根)219)의 부음을 듣고 주이(朱异)220)에게 경사와 흉사를 같은 날에 지내도 되는지를 묻자, 주이가 위(衛)나라 헌공(獻公)이 유장(柳莊)221)의 죽음에 달려가서 곡(哭)한 일을 들어서 대답하고 이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경사와 흉사를 같은 날에 지내는 것은 가하겠지만, 낱낱이 이것을 준거로 삼는 것은 타당치 않다. 양나라 임금이 이미 출궁한 것은 제사에 임한 것이지 제사를 다 마친 것은 아니다. 제사를 다 마치고 달려가서 곡하는 것은 예법에 합당하니, 유장의 경우를 풍도근과 비교한다면 그 경중(輕重)은 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헌공이 제복(祭服)을 벗지 않고 달려가서 곡하고 마침내 수의(襚衣)로 입힌 것은 끝내 합당함을 넘어서서 바른 예법이 되지 못한다.양나라 소륜(蕭綸)222)이 그 아비와 닮은 키 작고 마른 자를 취하여 매질한 것과 제나라 소보권(蕭寶卷)223)이 줄풀〔菰〕을 묶어 선제(先帝)로 삼아 벤 것은 그 죄가 똑같으니 죽어 마땅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 태자가 간언하니 양주(梁主 무제(武帝))가 들어주었고, 후에 다시 죄를 짓자 신분을 박탈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가 얼마 뒤에 회복시켜 주었으니, 이는 자식을 사랑하여 한갓 작은 인(仁)으로 악을 기른 것이다. 이 때문에 끝내 후경(侯景)224)의 난리에서 아버지의 곤란함을 구원하지 못하고 회계(會稽) 땅으로 달아났으며, 또 소종(蕭綜)225)과 같은 배반과 소정덕(蕭正德)226)과 같은 패역(悖逆)에서 극에 달하였다.위(魏)나라 최해(崔楷)가 은주 자사(殷州刺史)가 되었을 때에 적들이 성에 가까이 다가오자 이미 어린 아들과 딸 하나를 피신시켰다가 뉘우치고 뒤늦게 돌아오게 한 것은 신하가 난리에 임하여 성을 지키는 법이 될 만하다. 그러나 표문을 올려 군량을 요청했다가 얻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직임을 굳이 사양하지 않았는가. 그 자신과 온 식구를 반드시 죽을 곳에 두었으니 충성은 충성이지만 어리석음 또한 심하다.방경백(房景伯)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패구(貝邱) 사람을 감화시켜 효자가 되게 한 것227)에서 사람이 양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방경백의 효성과 최씨의 자애로움에 미진한 점이 있었다면, 어찌 저 패악한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천 년이 지난 뒤에 그 모자의 자애로움과 효성을 상상해 보니 사람에게 공경심을 일으킨다.원우(元祐)와 원부(元孚) 형제가 먼저 죽여 달라고 다투자, 갈영(葛榮)228)처럼 큰 도적으로 어질지 못한 사람도 그 의리에 감동하여 함께 죽음을 면케 하였으니,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그런데 순자(荀子)의 학문을 하는 사람은 어찌해 한사코 본성이 악(惡)하다고 주장하는가.원호(元顥)가 양(梁)나라에서 위왕(魏王)의 봉작(封爵)을 받았으니 양위왕 호(梁魏王顥)라고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위왕 호(魏王顥)라고만 칭했으니 의심스럽다.소보인(蕭寶寅)229)이 위나라로 달아나 조국의 원수를 갚으려 했으니 제나라의 충신(忠臣)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말로에 이르러 위나라의 역신(逆臣)이 되어 죽은 것은 어째서인가. 복수는 날이 멀어질수록 잊히기 쉽고 몸은 날로 방자해져 스스로 잘난 체하며, 이욕(利欲)에 대한 생각은 많아지지만 의리에 대한 마음은 막히게 되기 때문이다. 아, 한 생각의 차이가 사람의 일생을 충신과 역신으로 뚜렷이 나눔이 이와 같으니,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로다.조영(祖瑩)은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회영(懷嬴)230)을 아내로 받아들인 일을 끌어와 상도(常道)에는 위배되지만 의리에는 합당하다고 여겨 위주(魏主) 원자유(元子攸)에게 숙종(肅宗)의 빈(嬪) 이주씨(爾朱氏)를 아내로 받아들이도록 권하였으니, 호씨(胡氏)가 그르다고 평한 것이 옳다. 다만 이미 상도에 위배된다고 했는데 도리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상도를 행하면서 권도(權道)를 행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헤아려 보아야 할 듯하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선유(先儒)의 상도에는 어긋나지만 도리에는 합당하다는 말을 정자(程子)는 그르다고 했으나,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구해주어야 한다231)는 맹자의 말로 살펴보면 권도와 상도 또한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한다.?232)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주장한 뒤라야 뜻이 원만해진다. 남녀 간에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은 상도이지만 손을 내밀어 구해줄 때에 어찌 상도를 위배하지 않으면서 또 상도에 맞게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도(道)에 합당하게 되면 이것은 중시하고 저것은 경시하게 된다. 대개 상도에는 위배되고 도리에는 합당하다는 말에 대해 경중을 분별하지 않고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 폐단이 끝이 없으니 참으로 염려스럽다. 또 같고 다름을 구분하지 않고 대개 권도가 곧 상도라고 말하지만, 상도를 위배하면 도가 아니고 상도를 행할 때에도 권도가 있어서 권도는 성인이 아니면 허여되지 않는 것이니, 어찌 통론(通論)이 될 수 있겠는가. 또 그 형수에게 손을 내밀어 구해주는 일이 반드시 성인이 된 뒤에야 쓸 수 있는 것인가. 어버이 곁에 모시고 서있는 것은 본래 상도이지만, 병이 들었다면 어쩔 수 없이 상도를 위배하여 어버이 곁에 누워있어야 한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구멍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본래 상도이지만, 난리를 만났다면 어쩔 수 없이 상도를 위배하여 지름길로 가고 구멍으로 나가야 한다. 병이 들어 어버이 곁에 누워있고 난리에 임하여 지름길로 가고 구멍으로 나가는 것을 상도를 위배했다고 하여 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옳겠는가. 또 어찌 성인이 된 뒤에야 이것을 쓰겠는가. 보기 쉬운 것을 들어 유추해 보면,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음이 없는데 유독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일을 처리하기 어려운 경우에 학자들은 다만 이것과 저것의 경중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을 걱정한다.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권도는 성인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이미 구분한 뒤에도 내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권도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위주(魏主) 원자유(元子攸)가 생부를 추존하여 황제로 삼고서 그 신주를 태묘(太廟)로 반입한 일은 전후로 처음 있었던 변고이다. 임회(臨淮) 왕욱(王彧) 이외에 온 조정의 신하들 중에 간언하여 중지시킨 사람이 없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위나라에 천명이 이미 떠나버렸음을 또한 알 수 있다.원호(元顥)가 이미 낙양으로 들어가 호령(號令)이 나오자 사방에서 그 풍도를 상상하였으니, 정신을 가다듬고 정치를 행하되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적을 방어하는 계책을 다하여 이주영(爾朱榮)233)을 죽일 수 있었다면, 이미 양나라에 제재 받는 것은 면치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울면서 양나라 조정에 수치를 복수하겠다는 맹세의 말을 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교만하고 게으르고 스스로 방자하여 군국(軍國)을 돌보지 않고 먼저 양나라에 모반하여 진경지(陳慶之)와 틈이 벌어져 마침내 스스로 죽임을 당했으니, 그 본말과 지계(志計)는 모두 말할 것이 없다.위주(魏主)가 이주영을 죽인 것은 다행이다. 모의가 두 번이나 누설되자 그 무리가 누차 고하였으나 이주영은 끝내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어찌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 가혹하게 죽이고 어린 임금과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저승에서 보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위주가 분연히 스스로 결단하고 큰 도적을 손수 칼로 찔렀으니 또한 영특하고 용감하다고 이를 만하며, 어리석고 나약하여 망설이다가 권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왕윤(王允)에게 징계 받아 이주영의 족속을 제거하지 않다가 끝내 시해를 당했으니, 어찌 옛일을 끌어와 비유할 줄만 알고 시세(時勢)에 어두웠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 위나라가 망하려고 함에 선정을 베푸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구조인(寇祖仁)이 성양왕(城陽王) 휘(徽)를 죽였는데234) 원한으로 덕을 갚고서 상(賞)을 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자초했으니, 보복에 징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휘가 구조인에게 이렇게 죽게 된 까닭은 또 어찌 운룡문(雲龍門) 밖에서 위주를 뵐 때에 자주 불렀으나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겠는가. 심하도다! 부귀가 너무 성하여 쉽게 남의 집안에 재앙을 끼침이여. 양파(楊播)의 집안235)은 대대로 순후(淳厚)한 기풍을 지녀 형제들은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며 8촌까지 한 집에 사는데도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주문공(朱文公)의 《소학(小學)》에 기재되어 사람들의 흠모하는 마음이 어떠했는데, 이주영의 난리에 친족이 몰살당하여 삼공(三公)ㆍ7명의 태수(太守)ㆍ32명의 자사(刺史)를 둔 성대한 집안이 없어졌으니, 어찌 재앙을 면치 못할 줄 알았겠는가."위(魏)나라 조강(趙剛)이 동쪽 형주(荊州) 땅을 위나라에 돌려주었다."에서 위쪽의 위(魏)는 마땅히 동위(東魏)가 되어야 하고, "위나라가 후경(侯景)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에서 위나라 역시 마땅히 동위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주자가 살펴보지 못한 부분인 듯하다.서인(庶人)에서 천자까지 허물을 듣기 싫어하다가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양나라 무제가 하침(賀琛)의 간언236)을 듣고 미움과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칙서를 만들어 거절하면서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자랑하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하였다. 양나라 무제가 어리석고 포악하다면 그만이거니와 문아(文雅)하고 인자하다 하면서 이러한 일을 벌이니 이것은 미워할 만하다. 그러나 어리석고 포악한 임금은 간언을 듣지 않거나 죽이거나 할 뿐인데, 오직 문아함이 있었기에 이렇게 간언을 거절하고 거짓을 꾸며대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주렴계(周濂溪) 선생이 "지금 사람들은 허물이 있어도 남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니, 마치 병을 숨기고 고치기를 꺼려하다가 차라리 그 몸을 죽음에 빠뜨리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양나라 무제에게 이런 점이 있었다.양나라 무제가 후경(侯景)을 한 번 받아들이자 큰 난리가 생겨 목숨을 잃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다. 처음 실수는 사거(謝擧)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소개(蕭介)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이고, 세 번째 실수는 파양(鄱陽) 사람인 왕범(王範)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인데, 모두 주이(朱异)237)가 시종일관 안에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중원(中原)에 미혹되어 땅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는 어수선한 꿈을 꾸었으니, 이렇게 꿈자리가 어수선한 까닭은 평소에 천하를 통일하려는 욕심을 가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불씨(佛氏)의 학문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을 위주로 한다. 양나라 무제가 불씨의 학문에 독실함이 어떠했는데, 오히려 터득한 바 없이 이처럼 한단 말인가.주이(朱异)는 간사하고 아첨하며 권력을 농단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적에게 도움을 주고 나라를 그르친 사람이다. 그래서 후경(侯景)이라 할지라도 그를 죽이도록 청한 것이니, 비록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또한 주이의 죄는 용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죽인다면 또한 신민(臣民)과 장졸(將卒)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고 떨쳐 일어날 기운을 더할 수 있었는데, 태자가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하여 그만두게 하니 이는 잘못이다.혹자가 말하기를 "후경(侯景)이 대궐을 침범했는데도 양나라 무제는 편안히 누워 움직이지 않으면서 '내가 스스로 천하를 얻었고 내가 스스로 천하를 잃었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라고 말하였고, 후경을 보고도 낯빛에 변함이 없이 '경(卿)이 군중(軍中)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수고스럽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대저 위급하고 분통한 일을 당했을 때에 두려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평상시처럼 편안하고 한가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평소에 부처를 배워 마음을 동요하지 않은 효과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리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노련하고 교활한 곳이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고 아울러 성내고 두려워해봐야 무익함을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부처를 배워 마음을 안정시킨 효과에 대해서는 애초에 힘을 얻지 못하였다. 그의 임종 때를 보면 마음이 몹시 평온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근심하고 답답해 하다가 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소륜(蕭綸)이 아비의 형상을 만들어 볼기를 때리고 아비를 난리에서 구원하지 못했으면서 자칭 도독(都督)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사람이다. 아우 소역(蕭繹)238)에게 보낸 글에서 ?사직이 위태롭고 수치스러워 상처가 크고 고통이 깊으며, 골육 간의 싸움은 이길수록 더욱 혹독하며, 군사를 수고롭게 하고 의리를 손상시켜 손실이 많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윤리(倫理)에 독실한 말인데 전후에 행한 바와 비교하면 한 사람의 언행이 아닌 듯하니 이상하다. 남의 이목을 속인 것이 아니라면 또한 어리석고 미혹함에서 잠시 깨어난 것인가.소륜(蕭綸)과 소정덕(蕭正德)은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다. 당시엔 그 군부(君父)에게 정형(正刑 사형)을 피할 수 있었으나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하늘이 그 죄를 더욱 드러내어 천하 사람들과 함께 버리고자 한 까닭이다.소역(蕭繹)이 죽을 때 고금의 도서 14만 권을 불태우며 말하기를 "만권의 책을 읽었건만 오히려 오늘 같은 미혹이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사람들이 독서를 잘 하지 않아 스스로 멸망을 초래한 줄은 모르고 마침내 죄를 글에 돌려 불태웠으니, 이는 상한 음식을 먹고 죽은 사람이 죄를 음식에 돌려 창고를 불태운 것과 무엇이 다른가.총재(冢宰) 주호(周護)가 그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 이원(李遠)을 죽였다. 이원과 주호는 똑같이 신하인데?시(弑)?자를 썼으니 의심스럽다. 이러한 곳이 이따금 있는데 이 어찌 다 우연히 잘못 기록한 것이겠는가. 사리에 밝은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제(齊)나라 고연(高演)239)이 이미 직접 찬역(簒逆)했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다. 다만 사서(史書)에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다고 하였으니, 비록 악인이지만 참으로 또한 효성이라는 한 가닥 길로 통하는 것은 있었다. 이미 원하는 바를 얻었다면 마땅히 제남(濟南)에게 다른 뜻을 두지 말라고 한 태후의 가르침을 따라야 했는데 결국 그를 시해했으니, 이른바 ?성품이 효성스럽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에 한 가닥 길과 더불어 막혀버렸다. 말에서 떨어져 죽게 되고 평생토록 폐출 당하게 되니, 어찌 그 보복이 아니겠는가.주(周)나라 무제(武帝)가 노인을 봉양하고 좋은 말을 구한 것은 비록 명성을 좋아하고 옛것을 흠모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후세 사람들이 발돋움하고 바라볼 일이다. 누가 남북조로 나뉘어 시끄러울 때에 이런 훌륭한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했겠는가. 우근(于謹)의 진언240) 또한 한결같이 성인의 교훈을 사용하여 말이 사람들의 들음에 흡족하였다. 평론자는 실상이 없으면 귀히 여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공자가 "나는 그 예법을 아끼노라."241) 하였으니, 나도 주나라 무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뿐이다.후세에 거상(居喪)을 잘한 임금으로 진나라 무제ㆍ위나라 효문제ㆍ주나라 고조(高祖)를 거론하는데, 예법을 갖추어 상을 극진히 치르기로는 주나라 고조가 가장 어질다 했으니 호씨의 말을 믿을 만하다. 대개 이 세 임금은 성품이 효성스러웠기에 그 마음을 미루어 천하를 다스렸으니 또한 어진 임금이라고 일컫는다. 진실로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니 선왕이 효로써 천하를 다스린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태자는 나라의 근본이니 마땅히 바른 가르침으로써 가르쳐야 하고 바르지 않으면 바꾸는 것이 옳다. 진(陳)나라 숙보(叔寶)242)와 주(周)나라 우문빈(宇文贇)243)은 모두 불초(不肖)한 아들들이다. 진나라 선제(宣帝)가 그 아들의 악을 깊이 알지 못한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나라 무제(武帝)가 우문빈에 대해서는 그 악을 깊이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오히려 왕궤(王軌)244)가 사직(社稷)의 주인이 아니라고 한 간언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심하도다! 제(齊)나라 후주(後主 고위(高緯)를 말함)의 시기함이여. 자신이 직접 나라를 망쳐 조상에게 죄를 지었으면서도 종실에 다행히 안덕왕(安德王) 고연종(高延宗)245)이 있어 죽을힘을 다해 한 귀퉁이나마 보존하여 나라의 명맥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음험하게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주나라로 하여금 병주(幷州)를 얻게 할지언정 안덕왕이 얻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하였으니, 어찌 사람의 마음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이미 나라를 망치고 아울러 친족을 멸하는 재앙을 초래한 까닭이다.웅안생(熊安生)246)은 이미 오경(五經)에 널리 통달했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한 시기의 명사(名士)이며, 제나라에서 이미 국자 박사(國子博士)가 되었으니 벼슬하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주나라 임금이 와서 정치의 방도를 물었을 때에 대답한 것은 괜찮지만, 대문을 쓸고 기다리다가 안거(安車)247)를 타고 따라간 경우는 명성도 있고 지위도 있으면서 나라가 망한 수치를 생각지 않고 기꺼이 두 왕조를 섬긴 것이니, 어찌 뱃속에 오경(五經)을 품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주나라 무왕이 처음 조근(朝覲)하는 예를 닦았는데 진(秦)나라 이후부터 천여 년 동안 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당연히 노인을 봉양하고 좋은 말을 구하는 것과 똑같이 훌륭한 일이었다. 대개 그 자질이 매우 좋고 옛 예법을 회복하기를 좋아하였으니, 학문을 묻고 도(道)를 알게 하였다면 어찌 크게 볼만한 것이 없었겠는가.한(漢)나라 창읍왕(昌邑王)248)이 무제(武帝)의 상(喪)에 달려가 소식(素食)249)하지 않자 곽광(霍光)250)이 그 죄를 따져서 폐출하였다. 주나라 임금 우문빈은 거상하던 초기에 슬퍼하는 기색은 없고 매 맞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선왕(先王)을 매도하였으며 궁인을 눈여겨보았다가 강제로 간음했으니, 그 죄는 족히 폐위를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齊)나라 왕헌(王憲)은 용병술에 뛰어나고 지략이 많아 장수와 병사들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다. 게다가 종실(宗室)의 경(卿)251)으로 있었으니 임금을 바꾸는 의리도 있었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끝내 죽임을 당했으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왕궤(王軌)가 주나라 무제의 수염을 잡은 것은 신하의 예법을 크게 잃은 것이지만, 또한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한 것이었다. 우문효백(宇文孝伯)은 그 일이 지나간 뒤 그 임금이 포학을 부리던 날에 그 일을 들추어 죽이도록 거드니, 걸왕(桀王) 같은 자를 도와 포학한 짓을 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해친 죄를 효백이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황후는 천자와 대등한 신분이니 다섯 명의 황후를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신언지(辛彦之)의 설은 《좌전(左傳)》의 첩이 후(后)와 나란하고 서자가 적자(嫡子)와 대등한252) 것이 난리의 원인이 된다는 말과 서로 표리가 되니, 바꿀 수 없는 정론으로 삼을 만하며 예법으로 임금을 인도한 요체를 얻었다 할 것이다. 하타(何妥)가 제곡(帝嚳)253)이 사비(四妃)를 두고 우순(虞舜)이 이비(二妃)254)를 둔 것을 인용하여 주나라 우문빈(宇文贇 선제(宣帝))이 다섯 명의 황후를 세우도록 도운 것은 임금의 악을 조장한 것이니 미워할 만하다.제곡과 순임금이 비록 한 명의 왕비를 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원비(元妃)와 차비(次妃)의 구별이 있었으니, 어찌 멋대로 구분을 없애 모두 대등한 관계를 만들겠는가. 간사한 신하들이 옛일을 인용하여 임금을 그르친 경우가 매번 이처럼 많았으니, 속담에 이른바?글자를 아는 것이 우환이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우문(宇文)의 족속이 다 수(隋)나라 임금에게 멸족 당하니 이는 고위(高緯 북제(北齊)의 후주)를 멸족시킨 데 대한 보복이다. 수나라 임금이 양광(楊廣)255)을 낳았으나 돌연 사망하니 또한 어찌 우문을 멸족한 보복이 아니겠는가.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256) 했으니, 성현의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아들이 아비를 배반하고 적에게 항복한 것을 신하가 임금을 배반한 것에 비교하면 더욱 보기 드문 죄악이다. 수나라 문제(文帝)257)가 토욕혼(吐谷渾) 태자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백성이 굶어죽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았고 인륜을 중시하였으니, 거의 효로써 천하를 다스린 하나의 실마리를 얻은 것이다.강총(江摠)258)은 임금을 그르치고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이니 공범(孔範)과 함께 변방으로 보내는 것이 마땅하지만, 원헌(袁憲)은 진(陳)나라의 충신이다. 지금 강총은 공범과 벌을 같이 받지 않고 원헌과 똑같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259)가 되었다. 선과 악이 이미 다른데 포폄(褒貶)에 구분이 없으니, 어떻게 신하들을 권면하고 징계할 수 있겠는가.양광(楊廣)이 태자가 되던 날에 천하에 지진이 일어났으니 그 경계하는 뜻이 크다. 그의 형 양용(楊勇)260)이 폐출당하지 않고 어진 신하가 있어 보좌했다면 국운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부소(扶蘇)261)가 축출당하고 호해(胡亥)262)가 총애 받자 진(秦)나라가 망하였고, 양용이 폐출되고 양광이 태자가 되자 수(隋)나라 임금이 죽었다. 이 모두는 양견(楊堅)263)이 스스로 빚은 재앙이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는가.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사형수 390명을 풀어주면서 이듬해에 돌아오라고 약속했는데 기약한 날짜에 도망친 사람이 한 명도 없자 모두 사면해 주었다. 그러자 서로 전하며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겼으나 구양공(歐陽公)은 논(論)을 지어 비난하였다.264) 이를 아름답게 여긴 사람은 덕으로써 말하고, 비난한 사람은 법으로써 말한 것이다. 수나라 왕가(王伽)가 유형(流刑) 죄수 이참(李參) 등 70명을 압송하여 경사(京師)로 가다가 그들의 형틀을 벗겨주고 압송하는 병졸을 멈추게 하니, 유형 죄수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약한 날짜에 돌아와 임금이 모두 사면해 주었다면, 이는 다만 아름답게 여길 수 있을지언정 비난해서는 안 되니, 왜 그러한가. 저들은 죄가 무거운 사형수이고, 이들은 죄가 가벼운 유형 죄수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도망치면 대벽(大辟 사형)을 실출(失出)265)하여 왕법이 시행되지 않겠지만, 이들은 도망치더라도 왕가가 대신 옥에 갇혀 죄를 받아 왕법을 손상시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왕가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태종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해의 길고 짧음은 하지(夏至)와 동지(冬至)에서 나뉘니, 희씨(羲氏)와 화씨(和氏)266)의 역상(曆象)은 바뀌지 않는 일정한 법칙이다. 경방(京房)267)의 ?해는 상도(上道)와 하도(下道)를 운행한다.?는 설은 믿을 수가 없는데, 원충(袁充)이 이것을 인용하여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개황(開皇)268) 이후로 해가 점차 길어져 태평스런 경사를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러하겠는가. 대개 하늘에는 일정한 도수가 있고 해에는 일정한 시각이 있다. 수나라 시대에 과연 해가 점차 길어졌다면 17년 동안에 천지와 주야가 모두 일정한 도수를 잃은 것이니, 경사스럽거나 상서롭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는 큰 변이(變異)라고 여긴다.수나라 양제(煬帝)가 부강하자 사방의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 복종했는데, 유독 왜왕(倭王)은 글을 보내 말하기를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부친다."269)라고 하였다. 대개 왜국이 험준한 지형을 믿고 사나운 성격으로 드러내어 스스로 대적할 나라가 없다고 여긴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으니, 오늘날에만 동양에서 제멋대로 날뛴 것은 아니다.양광(楊廣)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후궁을 간음한 것은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니, 무릇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그 조정에서 벼슬하겠는가. 나머지 사람들이야 나무랄 것도 없지만 우홍(牛弘)270)이 덕량(德量)과 학술로 고관의 신분이 되어 종신토록 안락하게 지내니, 천 년 뒤에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관대하고 두터운 마음은 남음이 있지만 정밀하고 분명한 식견은 부족했던 소치이다.논자들이 매번 우리나라는 강토가 매우 좁은데다가 재물과 병력도 매우 적어서 열강(列强)들과 나란히 달리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옛날 고구려 때에 수나라 문제가 100만 대군을 징발해 쳐들어 왔다가 패하였고, 양제(煬帝)가 30만 5천명의 군사를 징발해 다시 쳐들어 왔으나 또 패하여 2천 7백 명만 살아서 돌아갔다. 이것으로 보면, 적군을 제압하는 방도는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함이 어떠했나에 달려있지, 나라의 크고 작음에 관계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아, 강토가 다르지 않고 시운이 고르지 않으니, 옛일을 느끼고 지금 일을 슬퍼함에 어찌 마음을 가누겠는가.양광(楊廣)의 죄는 사람마다 성토할 수 있으니, 양현감(楊玄感)271)이 병사를 일으킨 것은 명분이 없지 않다. 이미 병사를 일으켰으니 마땅히 그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후궁을 간음한 죄를 들어서 천하에 널리 알리고, 멀리 정벌하러 가는 기회를 틈타서 군대를 이끌고 승승장구하여 이밀(李密)272)의 계책처럼 목구멍이 되는 요충지를 막았다면, 일이 혹 성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끝내 어찌할 수 없었다.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고 때가 제때가 아니어서 스스로 하책(下策)을 취하여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어리석지 않은가.양소(楊素)273)는 평생 사람을 많이 죽여 공을 세웠고 임금에게 신임을 얻어 태자 촉왕(蜀王)를 폐출하려고 모의하였다. 남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크게 위세를 부려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기에게 있었으니, 자신은 이미 장수하고 건강하며 자손들도 대대로 복을 누릴 것이라 스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당하는 일이 이미 생전에 있었는데 해골을 불태워버린 참혹함이 다시 죽은 뒤에 미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끝내 아들 양현감이 죽임을 당해 종사(宗祀)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이는 천고에 권세를 탐하고 즐기는 자들의 영원한 귀감이 될 만하다.호씨(胡氏)는 이연(李淵 당 고조(唐高祖)) 부자가 병사를 일으킨 것을 옳지 않다고 꾸짖었으니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이 거사는 이세민(李世民 당 태종(唐太宗))에게서 나온 것이고 이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연은 본래 거사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심지어 ?너를 붙잡아 관아에 고발하겠다.?고 말했으니, 계책으로 그 마음을 견고하게 하지 못하여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양광(楊廣)이 비록 나쁜 사람이지만 호령이 나와서 이미 그 형세를 범하기 어려웠기에 아버지를 협박하여 거짓으로 칙서를 만들게 된274) 것이다. 돌궐(突厥)에게 신하라고 칭하고 강도(江都)에 있는 양제(煬帝)를 높이며 대왕(代王)을 세운 일들을 모두 면하지 못했으니, 이세민의 총명한 지혜로 어찌 죄를 성토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핑계 댈 줄을 몰랐겠는가. 대개 이때에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다면 형세상 반드시 이와 같기 때문에 맹자가 말하기를 "한 가지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여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275) 하였다. 이처럼 한 뒤에 많은 구차한 곳이 없게 되는데, 이 어찌 이연 부자가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유문정(劉文靜)276)이 실제로 실망스럽다는 말을 남겼으니 성의를 다하여 속이지 않은 마음을 볼 수 있는데, 당나라 임금은 도리어 반역한 정황이 명백하다는 증거를 만들었으니 이미 신하들의 마음을 살피려는 뜻을 잃어서 그로 하여금 실망스럽게 한 것이다. 또 간사한 관리들이 무고를 얽는 습성을 이용하여 반드시 사지로 몰아넣었으니, 다른 신하들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나라의 큰일을 앞장서서 도운 사람인 경우이겠는가. 그 또한 어질지 못하다. 보잘것없는 재주를 지닌 배적(裴寂)277)은 유문정의 큰 계획으로 인하여 앉아서 천자의 복야(僕射)가 되었는데, 덕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모함하여 죽이니 개나 돼지조차도 장차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유문정은 공을 이루고 물러나지 못하다가 스스로 악랄한 시기를 당했으니 호씨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이것은 식견이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데 고금에 몇 사람 없으니, 유문정이 지혜롭다 하더라도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독고회은(獨孤懷恩)278)은 그 재주와 의지를 헤아려보면 결코 배반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배반한 것은 반드시 당나라 군주가 "지금은 내가 천자인데 다음은 응당 그대가 될 것이다."라고 장난삼아 했던 말이 그 단서를 연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천자는 장난삼아 하는 말이 없다." 했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당나라 고조가 이세민에게 이미 "너를 세워 태자로 삼겠다." 하였고, 또 "스스로 아들을 죽일 수 없으니 훗날 네가 취하여 바꾸어라."라고 말하였다. 이세민이 그의 형 이건성(李建成)279)을 죽인 것은 고조가 미리 자상하게 가르친 셈이다. 그래서 고조는 아버지 노릇도 못하고 임금 노릇도 못한 것이니 매우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당나라 고조는 왕위를 전한 적이 없는데 태상황(太上皇)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어느 법전에서 나온 것인가. 어찌 태자가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는 것에 불안을 느껴 이런 호칭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왕위를 전하도록 재촉한 정황은 숨길 수가 없다.태종(太宗)이 신하들과 더불어 말한 바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 되었으니 하나하나 다 이치에 맞다. 진실로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소견은 철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기에 나는 《자치통감강목》 전체 중에 오직 당나라 태종기(太宗紀)가 볼만하다고 여긴다. 아, 임금의 도리를 아는 자도 오히려 사사로운 뜻에 가려져 잘못된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애초에 임금의 도리를 모르는 자임에랴.태종은 종실의 군왕(郡王)을 현공(縣公)으로 강등시키면서280) 말하기를 ?어찌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자기의 종실을 봉양하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천하를 공평하게 다스리는 말이다. 비록 그 주된 뜻이 진(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나라가 근본은 약하고 지엽이 강하여 골육 간에서 재앙이 생겨난 것을 징계한 것이어서 전부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말은 드러내 밝혀서 천하 후세의 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오랑캐를 중국 땅에 거처케 하여 호(胡)와 월(越)이 한 집안이 된281) 성대한 모습을 과시한 것은 태종(太宗)이 원하는 바였으나, 헛된 명예를 사모하다가 실제로 재앙을 입는 경우를 모른 것이다. 오랑캐를 나라 안에 거처케 하여 한 집안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 백성들을 오랑캐 땅에 살게 하여 점차 개척하고 증식해서 모두 우리 땅과 우리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중국은 본래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오랑캐 지역에서 살게 한다 해도 또한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할 바이니, 위징(魏徵)282)의 계책처럼 모두 풀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 못하다. 다만 반드시 명분과 의리로써 얽어매고 도독(都督)을 두어 다스리고 교화해야 하니 절대로 느긋하게 할 수 없는 일이다.장현소(張玄素)283)가 낙양의 궁전을 수축하려는 것에 대해 간언하면서 수나라 양제(煬帝)보다 더 심하다고 말한 것은 이미 지나친 것인데, 태종이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에 비교하면 어떠한가라고 말한 것은 또한 격노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장현소는 이 때문에 기가 꺾이지 않고 더욱 직언을 올렸으며 태종도 이것을 죄로 삼지 않고 부역(負役)을 중지하였다. 아, 이 임금에 이 신하이니 또 어찌 탁월하여 따라가기 어려운 자가 아니겠는가.성인(聖人)의 도가 아니어서 이단(異端)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임금이 금지하고 죽이는 바인데, 하물며 중이나 도사가 놀고먹으면서 백성을 괴롭히고 부모에게서 도망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자인 경우이겠는가. 그 종교를 통렬히 배척하되 금지해도 듣지 않으면 남김없이 죽여도 괜찮다. 이렇게 하지 않고 중과 도사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부모에게 절하도록 하니, 구구하게 외양으로 배례(拜禮)하는 것은 결국 출가하여 인륜을 끊는 것에 무익하다. 그렇다면 이 어찌 그 뿌리를 보호하면서 그 잎을 따버리는 것과 다르겠는가.장온고(張蘊古)284)는 〈대보잠(大寶箴)〉285)이라는 하나의 문장으로써 갑자기 귀해졌다가 이호덕(李好德)을 구원하는 한마디 말 때문에 갑자기 죽었다. 이런 일도 있는가! 태종은 호오(好惡)의 감정이 변화무쌍하구나. 어찌해 ?나라의 임금이 현인을 등용할 때에는 마지못해서 하는 것처럼 신중히 해야 한다.?는 말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 뒤에야 죽여도 된다.?는 교훈286)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가.태종이 죄수를 풀어준 것은 재주를 너무 부린 희극인데 사형수로 희롱하는 대상을 삼았으니, 이것이 본보기로 삼을 수 없는 까닭이다.권만기(權萬紀)287)가 선주(宣州)와 요주(饒州)에 있는 은(銀)의 이로움에 대해 말하였으나, 그의 뜻은 임금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지 않았으니, 태종에게 내침을 당한 것은 마땅하다. 게다가 당시는 천하가 한집안이어서 중국은 부유하고 백성들은 각각 생업이 안정되어 또한 은의 이로움에 의지할 만한 것이 없었다. 만약 빈약한 나라에 놓여 있었다면 마땅히 이것을 흉내 내지 않고도 기꺼이 절로 멸망했을 것이다. 대저 땅을 파서 은을 캐는 것은 밭을 갈아 곡식을 얻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하나의 부류인데, 어디에 이치에 어긋남이 있어 하지 않는단 말인가.군주의 한 생각의 사특함과 바름은 천하의 화복(禍福)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큰데, 태종이 무씨(武氏)288)를 재인(才人)으로 삼은 것은 나라를 위해서인가, 백성을 위해서인가. 결국 그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사특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아, 태종은 나라를 잘 다스린 영특한 임금이지만 어찌 한 생각의 사특함이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의 빌미를 주게 될 줄 알았겠는가. 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태종은 《씨족지(氏族志)》에 대해 선대의 귀현(貴顯)을 드러내지 않고 지금 조정의 품계로 편찬했으니 지위와 명망을 서로 겨루는 습성을 징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뜻을 정했다면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도 지금 조정의 품계로 편찬하고 다시는 선대의 귀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데, 지위와 명망을 겨루는 습성은 오히려 예전과 같구나. 군주는 마땅히 재주와 덕만 취하고 대대로 내려온 덕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벼슬을 임명하고 직책을 주는 법으로 정할 뿐, 마땅히 이러한 문자에 대해 논해서 안 된다.왕규(王珪)289)가 위왕(魏王) 이태(李泰)290)의 스승이 되자 이태가 먼저 절을 하였는데 왕규는 스승의 도리로써 처신하였고, 방현령(房玄齡)291)이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자 태자가 절을 하려고 했으나 방현령은 감히 알현을 받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 겸양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러나 왕규가 스승의 도리로써 처신한 것을 어찌 감히 잘못했다 하겠는가. 모두 가르치는 도리를 다하였으니 훌륭하다. 방현령이 스승의 예법을 사양한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으나 스승이 되었으니 실로 사양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태가 태자의 자리를 엿보다가 폐출된 것을 왕규에게 돌려 모양만 갖추고 교육은 없었다고 질책하니, 호씨(胡氏)의 의론은 그럴 듯하다. 이승건(李承乾)292)이 모반하다가 폐출당한 것으로 보면, 방현령 또한 스승이 될 실상을 갖추었으면서도 겸양한 것인가.태종이 울지경덕(尉遲敬德)293)을 부주 도독(鄜州都督)으로 삼았는데 울지경덕은 무신이었다. 다른 마음을 먹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이 배반할 것이라고 한다.'는 말로 시험하니 그 말을 들었고, '딸을 경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다.'는 말로 시험하니 그 마음에 감동했는데, 참으로 배반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던 게 아니라 실제로는 사위를 삼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임기응변으로 농락한 술수인데 울지경덕처럼 호방하면서도 무식한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었다.봉건제(封建制)과 군현제(郡縣制)에 대한 논의는 서로 취송(聚訟)294)하여 천고에 정해지지 못한 안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군장(君長)을 세우는 까닭은 그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함이니,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논쟁할 필요가 없다. 두 가지 논의에서 요점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알맞은 제도를 만드는 데 있으니, 봉건제를 실시할 수 있다면 봉건제를 실시하고 군현제를 실시할 수 있다면 군현제를 실시하면 되는데, 어떤 것인들 마땅하지 않겠는가. 다만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어서 두 가지 논의가 다 그러하지만, 또한 어진 임금과 훌륭한 재상이 폐해가 생길 때마다 알맞게 고쳐서 소용없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해야 좋다.주공(周公)295)은 총재(冢宰)였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296)은 은(殷)나라를 감시했으며, 이건성은 태자였고 이세민은 번왕(藩王)이었다. 관숙과 채숙이 상(商)나라를 부추겨 주(周)나라를 위태롭게 하였기 때문에 주공이 죽였고, 이세민은 태자가 자신을 제거하려고 도모했기에 죽였다. 공(公)과 사(私)가 이미 구분되고 일이 서로 같지 않은데도 태종은 자신이 형을 죽인 것을 주공의 일에 견주었으니,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만 보일 뿐이다.봉덕이(封德彛)297)는 추후에 주벌할 만한 큰 죄가 없었는데도 단지 예전에 태자를 폐하자고 간언한 일로 조서를 내려 증시(贈諡)를 없앴으니, 태종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형을 죽인 것을 비록 공정함으로 가리고 꾸미려 하지만 가능하겠는가.위징(魏徵)이 두정륜(杜正倫)298)과 후군집(侯君集)299)에게 재상의 재주가 있다고 잘못 말한 것과 간언한 내용을 사람에게 보여준 것300)이 무슨 큰 죄가 된다고 혼사를 깨고 비석을 넘어뜨리기에301) 이르렀단 말인가. 대개 태종이 평소에는 애써 직간(直諫)을 따랐으나 마음속으로는 듣기 싫어했기 때문에 그 실수를 계기로 삼아 위징이 죽은 뒤에 유감을 푼 것이리라.임금이 대신(大臣)의 상례(喪禮)에 임하는 것은 정리(情理)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태종이 고사렴(高士廉)302)의 상(喪)에 가서 곡하려고 할 때에 신하들은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방현령(房玄齡)과 장손무기(長孫無忌)303)는 현신(賢臣)이라 불리는데도 사특하고 근거 없는 말로 조문을 저지하다가 도중에 엎드려 누워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무식함이 심하고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형산공주(衡山公主)304)가 삼년상을 마치고 혼인하니, 우지녕(于志寧)305)의 한마디 말이 예교(禮敎)에 큰 공을 남겼다. 그가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제도를 만든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다만 자녀로서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이 그 가운데에 있지 않다고 말하여 공주는 마땅히 삼년의 예법을 다해야 함을 밝혔을 뿐이지, 한나라 문제가 만든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준행할 만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범씨(范氏)가 이에 대해 논의한 것은 그 정리가 아닌 듯하다. 다만 우지녕이 공주를 위해 도모한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자신의 기복(起復)306)을 면치 못한 것은 잘못이다. 어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는가.승냥이와 이리도 오히려 그 새끼를 사랑하거늘, 무 소의(武昭儀)307)는 왕과 왕후를 이간질하기 위해 어린 친딸을 목 졸라 죽였으니, 참으로 승냥이와 이리만도 못하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 자에 대해서 다시 무엇을 아끼겠는가. 그 뒤에 이씨(李氏)의 자손들을 거의 다 도륙 낸 것도 마땅하다.고종(高宗)이 황후를 폐립(廢立)할 적에 이적(李勣)308)은 어찌해 권하여 이루어지게 하였는가. 공자가 ?임금은 예법으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309)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태종(太宗)이 이적의 문제로 고종에게 경계하기를 "지금 내가 그를 내칠 것이니 내가 죽거든 네가 그를 친히 임용하되 배회하거나 관망하거든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 어찌 조금이나마 예법으로 대우한 적이 있었는가. 저잣거리의 사귐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이 이미 저잣거리의 사귐으로 신하를 대우했으니, 신하 또한 어찌 저잣거리의 사귐으로 임금을 대우하지 않고 홀로 그 충성을 다하겠는가.선제(先帝)를 직접 모신 잔인하고 악독한 무씨(武氏)를 황후로 삼으니 국가의 큰 변고였는데, 저수량(褚遂良)310)이 이것을 간하다가 죄를 얻게 되자 온 나라가 함께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유계(劉洎)311)의 아들이 이때를 틈타 아비의 원통함을 하소연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니, 이때에 저수량이 유계를 원통하게 만들었다고 하면 반드시 거듭 죄를 얻어 죽게 되는 것이 걱정스러웠고, 유계를 원통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하면 자기의 무리를 비호한 것이라 의심받게 되었다. 악언위(樂彦瑋)312)가 ?선제 때의 일이니 추죄(追罪)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본래 어쩔 수 없이 한 말인데, 하물며 유계가 자신을 이윤(伊尹)과 곽광(霍光)313)에 견주었으니 애초에 죄가 없는 자가 아닌 경우임에랴. 호씨(胡氏)가 그 뜻으로 보면 옳지만 그 말로 보면 그르다고 악언위를 논한 것은 그 사실이 아닌 듯하다.고종이 상관의(上官儀)를 불러 무후(武后)를 폐할 것을 의논했는데 무후가 스스로 하소연하자 곧 말하기를 ?나는 애초에 이럴 마음이 없었소. 모두 상관의가 나를 가르친 것이오.? 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용렬하고 나약한 임금이다. 선비는 경전을 읽어 조금이나마 식견을 갖춘 자인데 용렬한 임금과 사나운 황후의 조정을 만나 그 지위와 작록을 탐하느라 물러나 은둔할 것을 생각지 않아 성인의 ?도가 없으면 숨는다.?314)는 가르침을 저버렸으니, 어찌 성인을 업신여긴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재앙이 미치는 것은 당연하고, 재앙이 미치지 않은 것은 요행이다.당나라는 이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역적으로 여겨 토벌한 것315)이니 ?의로운 군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들 연남생(淵男生)이 대신 막리지가 되자 또 그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켜 두 아우를 죽이는 일316)을 도왔으니, 이 군대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의롭지 않은 군대?라고 이름을 붙일 뿐이다.무후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연호를 바꾸었으며 무씨의 조상을 모시는 7묘(七廟)를 세웠으니 당나라에 막대한 변고가 생긴 셈이다. 그런데 조정에 가득한 신료 중에서 간쟁하다가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어찌 고조(高祖)와 태종(太宗)이 정벌로 천하를 얻었기에 그 덕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든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이경업(李敬業)317)이 병사를 일으켜 무후(武后)를 토벌하였으니 천하에 할 말이 있게 되었으나, 그 마음은 대공(大公)과 정의(正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관직을 잃고 원망하는 심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망령되이 자신이 천자가 되려고 하다가 자신을 죽이고 집안을 망하게 하고 재앙이 조부의 묘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또 어찌 말을 하잘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적이 고종에게 권하여 무후를 세웠으니 마땅히 무후에게 사랑을 받고 대대로 부귀를 누렸어야 했는데, 어찌해 그 손자로 하여금 관직을 잃어 원망케 하는 데 이르렀으며, 또 어찌해 무덤을 파헤치고 후사를 끊어지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여기에서 천도(天道)는 돌고 돈다는 이치를 알 수 있다. 이적이 한마디 말로 권하여 무후가 세워지고 당나라에 참혹한 재앙이 내리자, 하늘이 도리어 무후의 손을 빌려 이적의 집안에 재앙을 내린 것이니, 아, 오묘하도다.무후가 독하고 괴팍했지만 도리어 재주도 있고 도량도 있었다. 예컨대 낙빈왕(駱賓王)318)이 지은 격문(檄文)을 보고 조금도 성을 내지 않으면서 "이는 재상의 잘못이다. 이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도 초야에 묻혀 불우하게 지내게 하다니."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은 억지로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신하들을 농락하여 자신의 수하(手下)에 둔 것이다.무씨(武氏)가 당나라를 바꾸어 주(周)나라라 하고 황제에게 무씨 성을 내리니, 이경업의 시대와 비교해 보면 한층 더 심해졌다. 그러나 천하는 평온하여 문무 신하들 중에서 당나라를 위해 절의에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 무씨에게 사나운 기운이 모여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사람의 피부 속에 피가 없었음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꾸짖을 것도 없는데 적인걸(狄仁傑)319)의 현명함으로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면서 부끄러운 줄을 몰랐으니, 어찌 말을 하잘 것이 있겠는가. 뒤에 적인걸이 비록 장간지(張柬之)320)를 천거하여 나라를 중흥시킨 공을 세웠으나, 어찌 절의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속죄할 수 있겠는가.?무씨(武氏)의 아홉 가지 죄목321)을 태묘(太廟) 앞에서 따져서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무씨를 사사(賜死)하거나 무씨 일족을 멸해야 했다."고 말한 호씨(胡氏)의 의론은 당연히 바꿀 수 없는 말이다. 가령 그 어미를 죽이고 그 자식을 섬기는 일과 신하가 되어 어미를 죽이는 사람을 곤란하게 여긴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중종(中宗)322)은 고종의 승중자(承重者)323)로서 고조ㆍ태종과 체(體)가 되지만, 무씨는 조상에게 죄를 짓고 종묘와 인연이 끊어졌으니 고종의 왕후가 될 수 없다. 고종의 왕후가 되지 못한다면 어찌 중종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의리로 헤아려 보면 무슨 어려운 점이 있겠는가. 다만 혈육의 은혜가 있어서 중종은 그 일에 참여하여 듣지 못하겠지만, 이 일이 중종이 복위(復位)하기 전에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게 하였다.장간지(張柬之)는 설계창(薛季昶)324)과 유유구(劉幽求)가 무삼사(武三思 측천무후의 조카)를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세력이 강성해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식견이 밝지 못했음을 자책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씨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임금이 스스로 죽여서 천자의 위엄을 펼치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였으니, 졸렬함을 감추고 허물을 꾸며대는 말이 아니겠는가.위월장(韋月將)은 이미 처사(處士)라고 불리는데, 어찌해 무삼사(武三思)가 궁녀와 은밀히 사통한 일을 소장(疏章)에까지 드러내어 ?그 지위에 있지 않거든 그 정사를 꾀하지 말아야 하며〔不在其位 不謀其政〕?,325)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 그 침묵은 용납 받기에 충분하다.〔邦無道 其默足以容〕326)는 훈계를 범한 것인가. 재앙을 당한 것이 마땅하고, 글을 잘 읽지 못한 사람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사람들이 모두 ?오왕(五王)327)의 죽음은 무삼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사실 무삼사를 죽였다 하더라도 중종(中宗)은 어리석고 용렬하며 위후(韋后)328)는 음탕하고 포악하던 시기였기에, 오왕의 공이 높고 세력이 강성했지만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어야 옳았는가. 성공한 뒤에 일을 핑계 대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마치 범려(范蠡)329)가 배를 띄우고 장자방(張子房)330)이 벽곡(辟穀)하는 것처럼 했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았겠는가.중종(中宗)은 어리석고 용렬할 뿐 아니라 매우 잔인하기까지 하였다. 태자 이중준(李重俊)331)이 군대를 일으킨 것은 무삼사와 무숭훈(武崇訓 무삼사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였지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창졸간에 생각이 짧아 대궐을 침범했다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중종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한 소치이다.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여 부끄러움을 모른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차마 그 머리를 태묘(太廟)에 바치고 무삼사와 무숭훈의 널에 제사지내며 그런 뒤에 조당(朝堂)에 효시(梟示)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식을 죽여서 다른 사람에게 제사지내다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는가. 아, 범과 이리도 오히려 그 새끼를 사랑하거늘 중종 같은 자는 참으로 금수(禽獸)만도 못하다.왕위를 이은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에 연호를 바꾸는 것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이후의 공통된 예법이다. 예종(睿宗)의 경운(景雲) 원년과 현종(玄宗)의 선천(先天) 원년은 모두 즉위한 해에 일컬어진 것으로 선제(先帝)와 상황(上皇)의 연수를 끊어서 취하였으니, 이는 예법에 크게 어긋난 것이다. 우리 조선의 융희(隆熙)332) 원년도 광무(光武) 11년을 끊어서 취하였으니, 어쩌면 여기에서 허물을 본받았는지 모른다.위씨(韋氏 위 황후)가 직접 중종을 시해하여 스스로 신하와 아내의 도리를 끊어버렸는데 기꺼이 두 가지 윤강(倫綱)의 죄를 범하여 서인으로 폐해졌으니 정릉(定陵 당 중종의 능묘)에 장사지낼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하다. 무씨(武氏)의 아홉 가지 큰 죄가 위씨(韋氏)보다 심한데도 사당에서 쫓겨난 일이 없었으니, 이는 당나라 대신들의 잘못이다.일식(日食)이 응하지 않았으니 역서(曆書)의 허술함과 태사(太史)333)의 잘못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역서가 허술하고 태사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달이 해를 피하여 마땅히 먹혀야 하는데 먹히지 않는 것은 상도(常道)이고, 달이 해를 가려 마땅히 먹혀야 해서 반드시 먹히는 것은 변고(變故)이다. 요숭(姚崇)334)은 어진 재상이건만 상도를 상서롭다고 여겨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서책을 만들어 당시의 임금에게 스스로 성스럽다는 마음을 열어주었으니, 어찌 어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당나라는 고조부터 중종까지 겨우 4대(代)에 이르렀는데 박사(博士)들이 태묘(太廟)의 칠실(七室)이 이미 가득 찼다고 아뢴 것은 고조 이상의 3대 조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와 태종은 마땅히 세실(世室)335)의 부조지위(不祧之位)336)가 되어야 한다면 대수(代數) 안에 있지 않아 칠실이 아직 차지 못했으니 중종의 신위는 옮겨서는 안 된다. 세실의 숫자가 이미 가득 찼다면 마땅히 삼소삼목(三昭三穆)337)의 숫자 밖 신위로 옮겨야 하고 삼소삼목 숫자 안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그 뒤에 현종이 늘려서 구묘(九廟)를 만들고 중종의 신위를 다시 모셔온 것은 고종과 태종을 세실로 삼을 줄을 몰라서 대수 안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심하도다! 요숭(姚崇)의 아첨함이여. 첫 번째는 일식(日食)이 응하지 않는 것을 하례하였고, 두 번째는 무후(武后)가 정명(鼎銘)338)한 것을 하례하였고, 세 번째는 태묘(太廟)가 무너진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대신(大臣)의 도리가 모두 사라졌다. 그를 송경(宋璟)339)과 아울러 어진 재상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찌 걸맞지 않은 비유가 아니겠는가.당나라는 공자(孔子)를 추시(追諡)하여 문선왕(文宣王)으로 삼았으니 이는 성인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지만 존숭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인을 존숭하는 것은 본래 위호(位號)의 유무에 있지 않으며 또 자신이 황제가 되자 성인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으니, 어디에 존숭하는 뜻이 있는가. 다만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말하면 충분한데, 이 ?사(師)?자를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참으로 성인을 존숭한다고 말할 수 있다.태백(泰伯)340)에게는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한 지극한 덕이 있었지만 주(周)나라에서는 일찍이 추존하여 왕으로 삼지 않았는데, 당나라 명황(明皇 현종(玄宗)의 별칭)이 영왕 헌(寧王憲 예종(睿宗)의 장자)에게 양황제(讓皇帝)라고 추시한 것은 제 마음대로 처리하느라 일통(一統)의 뜻에 어두웠기 때문이다.당나라는 노자(老子)를 선조로 삼으면서부터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하였는데 새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으로 부족하여 태묘(太廟)에서 제사지내고 태묘에서 제사지내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천지와 합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아득히 먼 계통(系統)은 이미 고증할 수 없고 게다가 그 추존한 실상을 보면 방사(方士)에게 현혹되어 신선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에 나아가서는 그 선조가 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외신(外神)341)도 되지 못하니, 사전(祀典)342)에 근거가 없으며 더럽고 난잡함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다.아비의 아내가 된 사람이어야 자식의 어미가 되는 것이니, 아비의 아내가 되지 못한 사람은 자식의 어미도 되지 못한다. 남편이 죽어 개가하는 경우는 남편과 관계가 끊어져 그 아내가 될 수 없으니, 이미 그 아내가 아니면 또한 그 자식의 어미도 아니다. 그러나 아비의 후사가 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낳아 길러준 은혜로 기년복(朞年服)343)을 입으니 끝내 관계가 끊어질 수 없다. 당나라 명황(明皇)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개가한 어미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게 하였는데, 이는 어미가 있는 것만 알고 아비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금수의 도리이다. 내가 명황이 만년에 저지른 패정(悖政)에 대해서 다시 책망한들 무엇 하겠는가. 다만 초년에 정한 《개원례(開元禮)》344)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후인들이 이것을 구실로 삼을까 걱정스럽기에 논한 것이다.안고경(顔杲卿)이 안녹산(安祿山)을 맞이하여 그 금자(金紫)345)를 받고서 대사(大事)를 도모하였는데,346) 때에 따라 은인자중하다가 후일에 드러낸 충렬(忠烈)은 참으로 우뚝하여 따르기 어렵다. 그러나 정당한 도리로 논해보면, 안녹산을 맞이하여 금자를 받은 것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후세사람들이 훗날의 공을 도모하려고 그 절개를 먼저 굽히면서 이것을 구실로 삼을까 걱정스럽기에 말한 것이다.현종이 만년에 장구령(張九齡)을 쫓아내고 이임보(李林甫)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세 아들을 죽이고 양귀비〔楊妃〕에게 현혹되어 안녹산(安祿山)을 총애하였으니, 다시는 사람의 도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천하를 잃음으로써 더 이상 남은 희망이 없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좌장(左藏)347)을 태우지 말라고 하면서 ?적들이 쳐들어와 얻을 게 없으면 반드시 다시 백성들에게 거둬들일 것이니, 그들에게 주어서 백성들을 거듭 괴롭히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한 것은 백성을 살리고자하는 한 가닥 뜻이 오히려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다급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몸도 보존하지 못하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성대하게 발현하였으니, 이것이 민심을 잃지 않고 옛 문물을 회복한 까닭인가.숙종(肅宗)의 즉위는 천하가 어지러울 때여서 사람들의 여망과 관계되었고 또 현종(玄宗)의 전위(傳位)한다는 명이 있었으니, 태종과 현종이 고조(高祖)와 예종(睿宗)을 핍박한 것과 똑같이 논할 수는 없다. 배면(裴冕)과 같은 사람들이 현종에게 다시 청하여 행하였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도 순조로워 끝내 어쩔 수 없었을 텐데, 위로는 속히 이루려는 마음이 있고 아래로는 부귀에 급급한 생각이 있어 천고의 비난을 면치 못했으니, 애석하다.옛날에 임금이 그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진(晉)나라 헌공(獻公)과 한(漢)나라 무제(武帝) 이후로 모두 혐의를 축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나라 숙종과 건녕(建寧 숙종의 작은 아들)의 경우는 말할 만한 혐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정벌을 전담시키려고까지 하였는데, 갑자기 장양제(張良娣)348)와 이보국(李輔國)349)의 참소를 믿고 죽였으니, 어찌 부자(父子)의 본성을 지닌 자라고 말하겠는가.현종과 숙종은 안으로는 서로 꺼리고 의심하면서 겉으로는 인자함과 효심을 자랑하며 서로 존호(尊號)를 더하였다. 마치 시정배의 사귐처럼 얼굴은 매우 친밀했으나 마음은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었으니, 어찌 천고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또 현종은 몸소 큰 난리를 초래하여 만 리 밖으로 피난을 떠났고,350) 숙종은 겨우 양경(兩京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수복했으나 난리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는데, 무슨 공덕이 있어 존호를 더할 수 있겠는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으니 가소롭기만 하다.숙종은 이보국의 참소를 믿어 그 자식을 죽였고 이보국에게 제어를 당해서 그 아비를 유폐하여 천명을 누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아비도 없고 자식도 없어 이보국만 있는 줄만 알았으니, 천고에 나약하고 간악한 임금이다.장후(張后)351)가 이미 이보국(李輔國)과 모의하여 건녕왕(建寧王 숙종(肅宗)의 작은 아들)을 죽였는데 또 끝내 이보국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어찌 천도가 돌고 도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이 내용을 적으면서 ?시(弑)?라고 하지 않고 ?살(殺)?이라고 한 것은 혹 이 때문인가. 그러나 황후는 본래 황후이고 역적은 본래 역적이니, 이처럼 적어서는 안 될 듯하다.창업한 임금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황제로 추존하는 것은 본래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본받은 것이다. 후세에 입승대통(入承大統)352)한 임금이 낳아준 부모를 추존하는 것은 이미 예법이 아닌데, 하물며 명황(明皇)이 형을 추시(追諡)하여 양황제(讓皇帝)로 삼고 대종(代宗)이 아우를 추시하여 승천황제(承天皇帝)로 삼은 것은 어디에 근거가 있는가. 예법에 크게 어긋난 일이다. 또 ?양(讓)?은 오히려 실상에 맞지만 ?승천(承天)?은 더욱 터무니없으니, 이른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행동한"353) 격이어서 그 망령됨은 말할 것도 없다. 이필(李泌)354)이 태자(贈太子)로 추증하길 청한 것 또한 예법의 뜻을 알지 못한 경우이니, 태자는 장차 왕위를 전해 받을 사람이어서 본래 죽은 뒤에 줄 수 있는 칭호가 아니다. 현종의 기왕(岐王)과 설왕(薛王)355)에 대한 고사가 이전 시대에 이미 잘못된 것인데, 대종이 어찌 뒤에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가.덕종(德宗)은 즉위 초기에 사방에서 바치는 조공을 혁파하고 또 이원(梨園)을 없애고 길들여진 코끼리를 풀어주고 궁녀를 내보내고 환관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였다. 그래서 대종(代宗)의 잘못을 한 번 뒤집은 것이 우레처럼 진동하고 바람처럼 일어나 마땅히 정치가 맑게 이루어져 천하에 일이 없을 것 같았으나, 결국에는 상란(喪亂)의 재앙이 대종 때보다 심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공자는 ?효로써 천하를 다스린다.?356)하였고, 또 ?3년 동안 아버지의 방식을 고치는 일이 없어야 효라고 할 수 있다.?357) 하였다. 덕종은 아버지의 과실을 고칠 때에 참으면서 타협하려는 뜻은 없고 오직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내려고 했으니, 다만 이 한 생각이 이미 그 아비를 야박하게 대하여 불효케 한 것이다. 돈후하게 대해야 할 사람에게 야박하게 대하면 야박하지 않은 경우가 없을 것이니358) 행실에 그 근원이 없어 온갖 선이 다 거짓이라면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후세의 제왕들이 으레 생모(生母)를 높여 황태후로 삼는 것은 크게 예법에서 벗어난 것인데, 덕종(德宗)이 심씨(沈氏)를 아스라이 높인 것은 더욱 터무니없다.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떠맡기는 것359)은 땅의 유리한 조건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니 의당 죄가 없을 듯한데, 맹자는 마땅히 그 다음 형벌〔次刑〕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유안(劉晏)360)이 재화를 잘 운용하여 이미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또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았으니 그 공이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죽음을 면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의견을 낸 것이 아니라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서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의견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다면 그가 세금을 많이 거둬들인 것 또한 장차 백성을 이롭게 하려니와, 의견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데에 있다면 비록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 같지만 또한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것이다. 그 근본이 이미 달라 귀결되는 곳도 서로 거리가 멀어지니, 공(功)이 있고 없는 것과 죄(罪)가 있고 없는 것이 여기에서 판가름 난다.요(堯) 임금이 딸을 순(舜) 임금에게 시집보내면서 공경하라고 훈계했으니, 이는 부인의 도리를 공경히 실천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후세에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춘 이후부 공주(公主)가 하가(下嫁)361)한 경우에는 대부분 그 지아비를 업신여기고 그 시부모에게 오만하게 굴었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시부모가 절을 하고 며느리는 대답도 하지 않는 일이 극심하였다. 덕종(德宗)이 공주가 시부모를 뵙는 예를 처음 정하여 한결같이 집안사람을 대하는 모습처럼 하였으니 천고의 악습(惡習)을 한번 씻었다고 말할 만하다.세상에서 복록(福祿)을 일컬을 때에 반드시 곽 분양(郭汾陽)362)을 으뜸으로 삼으니, 그것은 복록을 얻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복록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충성과 신의에 의지하고 의리와 천명에 편안하여 위로는 의심하거나 꺼려함이 없게 하고 아래로는 참소하거나 비방함이 없게 한 것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와 학문을 닦은 힘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아버지 무덤을 몰래 파헤쳤어도 그렇게 시킨 자를 찾아내지 않은 것이나, 주현(州縣)에 관원 한 사람씩 벼슬을 내려달라고 상주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도리어 조정에서 자신을 의심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긴 것363)이나 이 어찌 평생 글을 읽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永言配命 自求多福〕" 하였으니, 아마도 곽 분양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덕종(德宗)은 시기하고 각박하며 덕이 없는 임금인데 봉천(奉天)에서 자신을 책망하는 조서(詔書) 한 장을 내자 인심이 크게 기뻐하며 감격하여 우는 사람까지 있었는데,364) 하물며 도를 지닌 임금으로서 덕이 위에서 닦여지고 가르침이 아래에서 펼쳐지면 사람이 어찌 교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내뱉는 말이 선하게 천리 밖에서도 호응한다.?365)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가탐(賈耽)이 번택(樊澤)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도록 하라는 공문을 받았으나 안으로 품고서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가 연회가 끝나자 번택에게 알린 것366)과 사안(謝安)이 사현(謝玄)의 승전보를 받았으나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다가 바둑이 끝나자 손님에게 말한 것367)은 똑같은 아량인데, 더욱 어렵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안의 경우는 조카가 적을 이겼으니 순소롭게 기쁨을 드러낼 환경이었고, 가탐의 경우는 막하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도모하니 불행하게 회를 내야할 상황이었다. 또 더구나 사안은 끝내 나막신 굽이 부러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는데, 가탐은 마침내 꺼리는 안색이 없는 경우임에랴. 이러한 일들을 학자(學者)들이 항상 생각한다면 또한 도량을 넓히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육지(陸贄)368)가 임금에게 고한 말이 무려 수천 마디였는데, 그중에서 ?자신만 옳다고 믿지 않아야 비로소 남을 쓸 수 있다.?와 ?정도에 반하는 것을 권도로 삼다가 고금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라는 두 가지 말이 가장 순수하고 바르며 정밀하고 적절하니,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가 있겠는가.대종(代宗)은 환관에게 병권을 맡지 않게 하여 어조은(魚朝恩)369)을 징계하였다. 덕종(德宗)은 왕위를 이은 뒤에 의당 전철(前轍)을 거울삼아 아버지의 방식을 고치지 않아야 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두문장(竇文場)과 왕희(王希)370) 두 환관에게 금병(禁兵)371)을 맡김으로써 임금의 폐립(廢立)이 환관에게 달려있게 되었고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된 것이니, 아, 슬프다.아비가 장차 반역하려 할 때에 그 자식이 울면서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지만, 그 음모를 임금에게 고발해서는 안 되니 어째서인가. 임금과 아비는 한 가지인데 고발하면 아비가 죽고 고발하지 않으면 임금이 위태로워지니 그 사이에서 한번은 왼쪽으로 한 번은 오른쪽으로 쏠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최(李璀)372)는 아비를 임금에게 고발하고 끝내 또 함께 죽었으니, 어찌 고발하지 않고 스스로 죽는 것만 같았겠는가. 호씨(胡氏)는 덕종이 그 자식을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면 이최 또한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으나, 이는 마땅히 그 아비를 고발하지 않은 것으로 말한 것이다. 이최의 경우는 먼저 그 아비를 고발하였으니, 죽고 실지 않았겠지만 본마음이 불안한 걸 어찌하겠는가.한황(韓滉)373)이 유현좌(劉玄佐)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이미 의리로 일깨우고 다시 재물까지 물려주어 조정에 들어가 온 식구를 안온한 곳에 두게 하였으니, 혈통상의 형제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후세에 아침에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가 저녁에 원수가 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여기에서 보고 감동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이성(李晟)374)이 장연상(張延賞)375)과 원한을 풀고자 갑자기 그 재주가 재상이 될 만하다고 천거했으니 이미 구차한 혐의를 면치 못했는데 혼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또 구차한 가운데 구차한 일이다. 대저 이성은 무재(武才)가 있어 군진(軍陣)에 나아가 적과 맞닥뜨려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쳐도 두려워한 적이 없는데, 일개 문사인 장연상을 보고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소인배로서 한창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어 구차스럽게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성으로 하여금 학식과 교양을 지니게 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이필(李泌)376)이 장차 죽으려 할 때에 두삼(竇參)과 동진(董晉)을 천거했는데, 두 사람은 재상이 되기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필은 ?두삼은 통민(通敏)하고 동진은 방정(方正)하다.?고 말했고, 역사가는 ?두삼은 권모술수가 있고 동진은 신중하다.?고 일컬었다. 통민은 한 번 변하여 권모술수가 되고 신중은 방정함과 또한 상반되지 않으니, 이필도 거의 가깝게 본 것이다. 다만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명철해야 하는데 이는 요(堯) 임금도 어렵게 여기는377) 바였으니, 이필이 어질다 하더라도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자기만 못한 사람을 택하여 자신을 드러내려했기 때문에 육지(陸贄)를 버리고 두삼과 동진을 끌어들였다고 의심한다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이필(李泌)이 초복(初服)378)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은거하니 벼슬과 녹봉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마땅히 이로써 세상을 마쳤어야 했는데, 어찌해 영무(靈武)의 부름에 달려가379) 의롭지 않게 왕위에 오른 임금을 도왔는가. 이는 필시 당나라 조정이 갑자기 망하여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한 번 나가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 하고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런데 굳이 다시 번진(藩鎭)과 내시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대종(代宗)의 조정에 나가 덕종의 위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떠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어찌 늙어서는 얻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380)는 가르침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다. 이필 또한 어진 사람의 부류이니 적어도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재주가 출중하니 그에게 부림을 당하여 비록 초심을 이루려 해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여기에서 조금 시험하여 절반이라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역사가는 ?신선과 허황한 것을 말하기 좋아했다.? 하였고 이필도 스스로 말하기를 ?신이 젊어서 도교를 신봉했습니다.? 하였는데, 이것을 핑계대어 화를 면하려고 한 것 같다.육선공(陸宣公)381)이 간쟁하고 계책을 낸 것이 적지 않아 위 문정(魏文貞)382)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애석하게도 덕종이 섬길 만한 임금이 아니어서 태종 시대의 정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육선공은 이룰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떠나지 않고 욕을 당한 것은 어째서인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논지의 본말을 따져보면 대개 학문에 전수받은 바가 있었건만, 유독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한다.?383)는 뜻을 익히지 않은 것인가.범씨(范氏)는 양성(陽城)384)이 배연령(裴延齡)385)이 재상이 되는 것을 막고 육지(陸贄)를 죽음에서 구한 것을 기대한 바가 있어 행하였다고 여겼고, 양성이 간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오래도록 간언을 하지 않은 것을 꾸짖으면서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도와주지 않는 것386)이라 여겼는데, 사건에 근거하여 논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치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호씨가 말한 ?간관(諫官)의 직위에 오른 지 7년인데 어찌 말할 만한 큰 일이 없었겠는가. 임금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은 반드시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바른 의론이다.이발(李渤)387)이 이미 벼슬을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면 이것으로 그만인데, 대뜸 국정의 득실을 논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어찌 고상한 이름과 권세의 이로움을 일거양득하려던 게 아니겠는가.이강(李絳)이 헌종(憲宗)에게 간하여 공주를 우계우(于季友)388)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오랑캐족의 서얼(庶孼)이 임금의 딸을 욕보여서는 안 된다.? 했는데, 언사가 깊지 않았고 방도에 맞지 않았으며 믿을 수도 없었으니, 어찌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당나라는 고조(高祖) 이후 대대로 공주가 오랑캐에게 시집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곧 가법(家法)을 이루었으니, 오랑캐 또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우씨(于氏)는 중국 사람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음에랴. 헌종이 들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나라는 혼인을 통하여 오랑캐를 복속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가령 이로 인하여 힘을 얻게 되었더라도 조종(祖宗)이 남겨준 몸으로 개나 양 같은 오랑캐를 유인하여 끌어들이는 미끼를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한데, 하물며 반드시 힘을 얻지 못한 경우임에랴. 게다가 오랑캐가 침략하여 어지럽히고 신하들은 반역하여 큰 욕망을 구하였으니, 어떻게 부마의 헛된 영화를 흠모하면서 큰 욕망을 구하려는 사실을 그치겠는가. 그 혼인을 중지시키려는 것 또한 혹 직면한 상황이 당연하다 해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니, 이강이 진실로 이것으로써 그 근본을 따져서 반복하여 깨우쳐주었다면 혹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재상이 어진 이를 등용할 때에 진실로 적임자라면 자제(子弟)라 하더라도 꺼리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현량과(賢良科)로 책시(策試)하였는데 거자(擧子 과거응시생)가 조정의 신하와 지친인 것이 무슨 상관인가. 이길보(李吉甫)389)가 황보식(皇甫湜)390)의 직언을 미워하여 한림학사 왕애(王涯)391)의 생질임임을 핑계 삼아 급제 명단에서 없애려고 했으니, 재상의 신분으로 기꺼이 손인 짓거리를 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이길보가 초년(初年)에 육지와 묵은 원한을 풀고 배계(裴洎)에게 어진 인재를 물었기에 선류(善類)가 될 수 있을 듯했는데, 지금 이처럼 하고 나중에 더 심해졌으니, 어찌해 잘 변화하지 못하여 여기에 이르렀는가.당나라 시대에는 번진(藩鎭)이 임금을 범해도 토벌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아장(牙將)이 절도사(節度使)를 내쫓고 죽이는 경우가 계속 이어졌다. 그 죄를 바로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절도사의 직책을 맡겨 주었으니, 대개 명분이 문란하고 법망이 무너진 것이 당나라와 같은 시대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과 아우가 되어 아버지와 형을 죽이기까지 했는데도 마침내 군무를 맡은 사람은 유총(劉總)392) 한 사람뿐이었다. 이는 만고의 큰 변고인데 군신 상하가 죄를 성토하여 토벌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천지간에 연명할 수 있게 놔두었으니, 이것은 당나라가 비록 망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은 이미 망한 것이다.사람을 죽여 부친의 원수에게 보복한 경우에는 사안이 발생하면 그 사실을 갖추어서 상서성(尙書省)에 신고하고 모여서 논의하여 보고토록 하며 그 원수에게 마땅히 보복해야하는 지 여부를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 그래서 그 정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밝혀 보복이 합당하고 진짜라면 응당 백방(白放)393)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 양열(梁悅)에게 곤장 1백대를 때리고 순주(循州)394)로 유배 보낸 것은 법으로나 이치로나 모두 타당하지 않은데, 한유(韓愈)의 의론 중에서 ?적절히 참작하여 처리하면 상도(常道)에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 또한 모호한 실수를 범한 듯하다.천자가 오랑캐와 혼인한 일은 당나라의 여러 세대에 걸친 추잡한 습속이니 천하 후세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신(大臣)이란 자가 간언하여 저지하지는 못할지언정 이강(李絳)의 현명함으로 차마 옛 법전이라면서 권한단 말인가. 아, 습속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와 같구나.한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불골표(佛骨表)〉395)는 참으로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되는 문자이기에 석조래(石徂徠 석개(石介))가 천지 사이의 정기(正氣)로 인정한 것은 옳다. 이 뿐만이 아니라, 기타 언론과 계책도 정직하고 사리에 맞아 모두 사람들의 귀를 흡족하게 할 만하며, 왕정주(王庭湊)를 효유한 한 가지 일396) 또한 매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시험 삼아 논하건대, 유가의 체(體)와 용(用)이 균형을 이룬 학문에는 당나라 300년 동안에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니, 학자들이 특별히 유의하여 숭상해야지, 이치를 논함이 정밀하지 못하다 하여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된다.천한 필부도 오히려 한 명의 아내를 두는데, 당나라 헌종은 만승의 나라를 다스리는 존귀한 몸으로 하나의 사사로운 생각을 없애지 못해 종신토록 황후를 세우지 않아 배필이 없었으니, 슬프다.붓을 운용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있으니 마음이 바르면 필체가 바르게 된다는 것은 -유공권(柳公權)의 말이다.- 글자를 쓸 때에 주일무적(主一無適)397)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범범하게 사람 마음의 사특함과 바름으로써 말한다면, 마음이 바르지 않기로 이사(李斯)398)와 조조(曹操)399) 같은 이가 없는데도 모두 글씨를 잘 썼으니, 이는 통하지 않게 된다. 활 쏘는 것으로 덕행을 살펴볼 수 있는데 또 다만 활을 잡고 화살을 쏠 때에 내면의 마음이 바르고 외면의 몸이 곧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예(后羿)400)가 임금 자리를 빼앗고 방몽(逄蒙)401)이 스승을 죽인 것을 또 어찌 설명하겠는가.곽태후(郭太后 곽 분양(郭汾陽)의 손녀)가 임조(臨朝)402)의 청을 굳이 사양하고 손수 제서(制書)를 찢어버린 것은 참으로 여인 가운데 뛰어난 식견을 지닌 것이다. 곽소(郭釗 곽 분양의 손자)가 ?만약 그들의 청을 따른다면 신은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청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외척 중에서 더욱 얻기 어려우니, 곽 분양(郭汾陽)403)이 근신(謹愼)하는 가법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장권여(張權輿)가 고금의 제왕들이 여산(驪山)에서 변고가 생겨 패망하게 된 것을 낱낱이 거론하며 경종(敬宗)의 유락(遊樂) 행차를 간언하였으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도리어 경종이 그 말을 시험해 보겠다고 길을 떠남으로서 불신을 당했으니, 누가 장성하여 군림한 자가 어린아이만도 못하다 여겨 이런 무리한 말로 꾈 수 있다고 했는가. 임금을 섬기는 정성이 부족하여 그 유락의 길을 떠나려는 뜻을 부추겼을 뿐이니, 어찌 진실한 마음과 바른 말로써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만 같겠는가.위처후(韋處厚)가 경종에게 간언하기를 ?선제께서는 술과 여색으로 수명을 단축했는데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지 않은 것은 폐하의 나이가 이미 15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황자(皇子)가 겨우 1세이니 신이 어찌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여 간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호씨(胡氏)가 불충을 면치 못한다고 논평한 것은 옳다. 대개 위처후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간절한 말로 임금을 감동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임금에게 간언하는 법은 마땅히 옛사람의 이른바 ?폐하 자신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종묘사직에는 어떠하겠는가.?라는 말과 같이 해야지, 어찌 구구하게 서민 집안의 일처럼 사자(嗣子)의 장유(長幼)로 근심거리를 삼을 수 있겠는가. 어찌 아첨을 떨어 듣기 좋게 하여 불충을 간언한 허물을 면할 수 있겠는가.배도(裵度)404)는 세상에서 일컫는 어진 재상이다. 경종(敬宗)과 문종(文宗) 교체기에 임금이 시해 당했는데도 그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임금을 세우는 것도 미리 계획하지 못했다면 병을 핑계 대고 떠나야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다시 환관의 수중에서 총재(冢宰)가 되었으니, 그가 어질다는 점이 어디에 있는가.유분(劉蕡)의 대책405)이 절실하고 곧아 낙방을 당하자 간관(諫官)이 논의하여 아뢰려고 하였으나 집정자(執政者)가 억눌렀다. 이합(李郃)은 과거 응시생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것 때문에 소를 올려 억울함을 변론했는데 ?신이 제수 받은 직책을 회수하여 유분의 곧음을 정표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저 집정자인 배위(裴韋)의 무리가 이것을 보고도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이강(李絳)406)은 재상의 업적이 매우 볼만 하였는데 나중에는 쫓겨나도 떠나지 않아 절도사(節度使)가 되기에 이렀다가 환관의 손에 죽었으니, 비록 ?작록에 연연하다가 자신의 몸을 잊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당나라 시대의 여러 군주들은 함부로 존호(尊號)를 받음으로써 곧 하나의 가법(家法)을 이루었는데, 나는 그들 모두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문종(文宗)은 존호를 받지 않았으니 떳떳한 본성은 실추되지 않는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바야흐로 구사량(仇士良)407)이 재상을 죽여 그 기염이 두려울 즈음에 정담(鄭覃)과 이석(李石)408)은 오히려 이훈(李訓)과 정주(鄭注)409)를 알지 못하다가 비로소 어떤 사람이 간언한 한 마디 말로 인하여 환관들을 조금 굴복시키자 조정의 신하들이 그들에게 의지하였다. 만약 평소에 재상이 바른말과 곧은 도리로 점차 배척하여 억누를 수 있었다면, 어찌 기염을 토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당나라 문종(文宗)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집안 종에게 제어를 당하고 있으니 난왕(赧王)이나 헌제(獻帝)410)보다도 훨씬 못하구나.?라고 하면서 눈물을 떨구어 옷깃을 적셨으니, 스스로 그 병통을 알면서도 그 병통을 치료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어째서인가. 타고난 자질이 유약하여 자신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자를 모함하여 해친 것에 대해서 어찌하여 호씨(胡氏)의 말411)처럼 양 현비(楊賢妃)가 사주한 줄을 모르고 유초재(劉楚材)와 장십십(張十十)의 무리에게 죄를 주었는가.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그 유약함 때문에 양비(楊妃)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 천하에 스스로 고통스러워 통곡할 만한 것으로는 유약함만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성인이 육극(六極)412)을 논하면서 나약함으로 끝맺음했으니, 학문을 논할 때에 아무리 유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지는 것413)을 귀하게 여겼다.이덕유(李德裕)가 "정인(正人)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지만 사특한 사람은 다투어 붕당을 만들기에 이른다."고 말했는데, 그 의중을 모르겠으나 어찌 까닭이 있어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특한 사람이야 본래 다투어 붕당을 만들지만 정인은 유독 서로 추진하지 못하는 것인가. 입언(立言)은 마땅히 구양공(歐陽公)의 〈붕당론(朋黨論)〉414)처럼 한 뒤에야 바야흐로 정론이 될 것이다.유주(維州)를 취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 그리고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415)의 의견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마음으로 말하면 이덕유는 나라를 위한 계책을 내었는데 유주는 본래 당나라 땅이니 마땅히 유주를 취하여 이덕유를 옳다고 해야 한다. 의리로 말하면 우승유는 신의를 지키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일로써 말하면 저들이 성내는 것이 근심스러우니 마땅히 유주를 버려 우승유를 옳다고 해야 한다. 두 경우에 결국 누가 옳은가? 여기에 하나의 설이 있다. 신의로 말하면 저들이 먼저 노주(魯州)에서 맹세를 저버렸고, 근심거리로 말하면 저들이 꼭 3일 만에 곧바로 함양(咸陽)에 이른다고는 할 수 없어서 당나라에서도 마땅히 대비를 했어야 했으며, 마음으로 말하면 우승유가 꼭 나라를 위했다고는 할 수 없고 이덕유를 반대하는 데서 나왔을 수도 있으니, 이것으로 논하면 두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다.당나라 시대에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의 다툼은 천고에 시비 거리가 되었는데, 논자는 유주(維州)의 일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사실이 아니다. 예전부터 이덕유와 이종민은 해묵은 증오로 원망이 깊었는데 우승유가 이종민의 당여가 되었고 또 이 일에 대해 의론이 달랐기 때문에 논자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마땅히 ?당나라에 두 이씨(李氏)의 다툼이 있었다.?라고 해야 한다.당나라 무종(武宗)이 최현(崔鉉)을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고 밤에 학사(學士) 두 사람을 불러 조서를 초안하도록 했는데, 재상과 추밀(樞密)로 하여금 모두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은 환관이 듣고서 이의를 제기할까 꺼려한 것이니, 당나라 시대에 환관의 기세가 성대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곽의(郭誼)가 유진(劉稹)에게 반역하도록 교사했다가 그 형세가 궁해지자 또 유진을 팔아 상을 구걸하니, 이덕유(李德裕)가 ?이런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악을 징계하겠는가.?라고 했으니 이 말은 바꿀 수 없는 정론이다. 사마공(司馬公)도 말하기를 ?처음에는 남에게 반란을 꾀하도록 권하고 끝에는 주인을 팔아 이익을 도모했으니, 그는 죽어도 참으로 남은 죄가 있다.? 하였다. 말이 여기에 이르렀다면 그만이지만, 곧 다시 말하기를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의가 아니니 사형을 면해주는 것이 옳다.? 하였으니, 어찌해 스스로 모순이 되는 말을 하는가. 나는 이른바 '신의'라는 것이 과연 어떤 신의인지 모르겠다.당나라 선종(宣宗)이 즉위한 초기에 친히 태후(太后)를 죽였는데 의(義)를 앞세워 죄를 성토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로 하여금 제위를 편안히 향유하고 심지어 '소태종(小太宗)'의 칭호를 얻게 하였다. 나는 이에 작은 선(善)이 쉽사리 남을 속이는 것을 가만히 탄식하였고, 또 천도(天道)의 시기는 혹 알 수 없는 것인가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사람은 끝내 하늘을 속이기 어려워 결국 죄를 드러내어 바로잡나니, 선종이 어머니를 죽인 죄에 대한 정론이 사씨(史氏)의 기록에 밝게 게시되었다. 나는 이에 또 당시의 토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만 만세의 주벌을 면하기는 어려움을 알았다.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선후의 순서로 세차(世次)를 삼고 소목(昭穆)을 따지지 않는 것이 예법이다. 그래서 노(魯)나라는 희공(僖公)의 신주를 민공(閔公) 위에 두었는데 공자는 이를 ?역사(逆祀)?416)라고 하였다. 이경양(李景讓)이 감히 형에게 절하고 조카에게 절한다는 말417)을 제기하여 선종에게 태묘(太廟)에서 목종(穆宗)ㆍ경종(敬宗)ㆍ문종(文宗)ㆍ무종(武宗) 네 임금의 신주(神主)를 출향(出享)하길 청하였는데, 조카에게 절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선군에게도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경양이 설령 ?아는 것이 없다.? 했더라도 대신(大臣)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어찌 이런 부류의 예의(禮義)를 듣지 못했겠는가. 다만 받들어 봉행한다는 말을 하여 임금에게 아첨한 것이니, 그 죄는 마땅히 선군(先君)을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논해야 한다.헌원집(軒轅集)이 영원히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느냐는 당나라 선종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왕 노릇하는 자가 욕심을 물리치고 덕행을 숭상하면 저절로 큰 복을 받을 것이니, 어디에서 다시 영생을 구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도를 깨달은 선비의 말이다. 이 때문에 도사(道士)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일종의 연단(煉丹)과 흡기(吸氣)418)를 하는 도사가 아니다. 아마도 학식이 있고 지조가 있는 선비가 세도(世道)의 혼탁함을 보고 작록(爵祿)이 몸에 닥칠까 염려되어 여기에 의탁하여 스스로를 높이 여긴 것이리라.당나라 의종(懿宗)이 동창공주(同昌公主)의 죽음을 애통해하여 의관(醫官) 20여 명을 죽이고 그 친족 300여 명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사랑에 빠져 현명하지 못했다고 논할 뿐 아니라 곧바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의당 물러나기를 구하면서 재앙을 면할 방도를 생각해야 했는데, 온장(溫璋)은 간관도 대신도 아니면서 힘껏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벼슬이 깎이고 귀양을 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기에 이르렀으니, 살아서 이미 명철(明哲)하지 못했는데 죽어서도 정종(正終)419)하지 못하였다. 슬프다.의종이 불골(佛骨 사리)을 맞아들여 경사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내가 살아서 부처를 보게 되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였고, 누대를 내려와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눈물을 흘려 가슴을 적시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과연 붕어하니, 어찌 죽을 날이 닥쳐와 마음씨가 바뀌어 내뱉은 언참(言讖)420)이 아니겠는가.고변(高騈)421)은 제도(諸道)의 원군이 그 공(功)을 나누어갈까 두려워, 이내 역적 황소(黃巢)는 머지않아 마땅히 평정될 것이라고 아뢰어 원군을 다 돌려보내, 적의 기세가 위력을 떨쳐 끝내 수도를 함락케 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몸만 있는 줄 알고 나라가 있는 줄 알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죄는 죽어 마땅하였다. 훗날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한 조짐이 이미 여기에 드러난 것이다.고변이 초년에는 적을 무찔러 공(功)을 세워 자못 구차함이 없었는데, 나중에 요괴 같은 여용지(呂用之)422)의 수중에 떨어져 산만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그 죽음의 조짐은 이미 남의 공을 시기하여 군사를 돌려보낸 날에 드러났는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이미 그 넋을 빼앗아버린 것이다.이극용(李克用)423)은 당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웠으나 장준(張濬)이 묵은 원한을 풀기 위하여 토벌을 청하여 전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자신의 몸만 알고 나라를 알지 못한 죄이다. 그가 좌천되어 소주 사호(繡州司戶)가 된 것은 오히려 악을 징계하기에 부족하다. 장준은 사족의 자제로서 환관으로 들어가 귀하고 현달하게 되었으니 근본이 이와 같은데 다시 무엇을 책망하겠는가. 통탄스러운 것은 당나라가 망조가 드리운 형세여서 아무리 능력을 갖춘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부류를 뽑아서 재상의 자리에 있게 하였으니,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유빈(柳玭)424)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문벌이 높은 사람은 자기 몸을 세우고 처신할 적에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죄를 얻음이 남들보다 무겁고 죽어서 지하에서 선조를 뵐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은 학문을 더욱 부지런히 힘쓰고 행실을 더욱 힘써 닦아야 겨우 다른 사람에게 견줄 수 있다." 하였다. 나는 높은 문벌의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만 그러할 뿐 아니라, 유교의 가정교육을 받은 자제들도 그러하여 더 노력해야 한다고 여긴다.당나라 소종(昭宗)은 이미 두양능(杜讓能)의 간언을 듣지 않고 억지로 그에게 맡겨 이무정(李茂貞)을 토벌하였다. 두양능이 패전하자 이무정은 그 죄를 두양능에게 돌리고 죽이라고 말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두양능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벼슬하는 것이 재앙을 초래하는 방도가 되는 줄 몰라서 몸을 추슬러 일찍 물러나지 않았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425)는 것은 어찌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바야흐로 왕행유(王行瑜)ㆍ이무정ㆍ한건(韓建)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했을 때에 소종(昭宗)이 "경들이 병란을 핑계 삼아 서울로 들어오니 무엇을 하고자 하는 뜻인가."라고 힐문하자, 왕행유와 이무정은 등줄기에 땀이 흘러 말을 할 수 없었다. 천자의 위엄이 이처럼 두려웠으니, 평소에 스스로 강하게 하여 위복(威福)426)을 잃지 않았다면, 번진(藩鎭)427)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어찌 이처럼 위세를 떨칠 수 있었겠는가.이극용이 삼진(三鎭)을 토벌할 적에 한건(韓建)이 성에 올라가 간절히 빌자 이무정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으니 그로 인하여 진군했다면 평정할 수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한건과 이무정을 용서하고 왕행유만 토벌하여 끝내 한건이 왕자 11명을 죽이고 이무정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케 하였는가. 이것은 참으로 소종의 현명하지 못한 허물이며 또한 이극용의 실책이 되었으니, 진실로 호씨(胡氏)의 말과 같다.온공(溫公)이 환관에 대해 논한 것은 사리에 알맞지만, 그가 "환관은 궁궐의 통행을 엄금하고 내외(內外)의 말을 소통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만약 궁궐의 통행을 엄금하고 내외의 말을 소통하기 위해 없을 수 없다고 본다면, 부인이나 동자(童子)가 유독 이 일을 맡을 수 없어서 반드시 환관의 천한 부류가 지존(至尊)을 곁에서 모신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인가. 요컨대 환관을 영원히 없애고 아울러 그 법을 폐지해야 재앙이 없어짐을 보장할 수 있다.필부(匹夫)로서 귀한 천자의 몸이 되었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경하하는 것은 당연하고 한 집안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주온(朱溫)428)이 외람되이 천자의 호칭을 사용할 적에 그 형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본래 일개 백성이다. 천자가 너를 등용하여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로 삼아서 부귀가 극에 달하였는데, 어찌해 당나라의 3백 년 사직을 없앴느냐. 훗날 우리의 가족이 멸족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으니, 부월(斧鉞)429)이 이미 집안에 있었기에 천하 사람들이 주토(誅討)하는 것 또한 말할 필요가 없으니, 슬프다. 이들은 한 때의 부귀를 탐하다가 만세의 죄인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기니, 어찌 그리도 미혹된 것인가.당나라의 번진에서 오직 이극용이 신하의 절개를 변치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는데, 지난날 한 때의 불손함을 면치 못했는데 조정의 처치가 합당치 않았으나 추주(追誅 추후에 벌을 줌)할 수도 없었다. 그가 "맹세코 지금 세상에서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말이 진심에서 나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으니, 당시에 여러 번진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장종석(張宗奭)의 아들 장계조(張繼祚)는 양주(梁主 주온(朱溫))가 그의 아내와 딸을 돌아가며 간통하는 치욕을 견디지 못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종석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저번에 하양(河陽)에 있을 때에 그의 구원에 힘입어 우리가 오늘까지 살게 되었으니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가소롭다. 장계조로 하여금 이로 인해 죽이게 하였다면 이는 당나라 천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며 또한 의로운 명성을 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는데, 그 아버지는 곧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으니 어찌 부녀를 팔아서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겠는가.촉주(蜀主) 왕건(王建)이 유지준(劉知俊)을 죽이면서 근시(近侍)에게 말하기를 "나는 늙었고 유지준은 너희들이 제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이 하기 보다는 차라리 진심을 내보여 대우해 주고 그로 하여금 은혜에 감동해서 훗날에 충성을 다하게 함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어진 이를 꺼려하고 유능한 사람을 질투함이 이와 같았으니, 한 세대가 지나서 남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마땅하다.?안에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고, 밖에는 홀아비가 없었다.〔內無怨女, 外無曠夫〕?430) 는 것은 공류(公劉)431)가 닦은 왕업의 기초이다. 촉주(蜀主) 종연(宗衍)이 시집가려는 백성의 딸을 빼앗은 것은 한 남자로 하여금 통곡하며 죽게 한 것이니, 남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마땅하다.소순(蘇循)은 주온(朱溫)이 당나라를 찬탈하여 황제라 칭하는 것을 찬성한 사람이니, 어찌 당나라의 구신(舊臣)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존욱(李存勖)432)이 소순을 얻었을 때에 그 죄를 바로잡아 죽이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그의 만세를 외치는 소리와 화일필(畵日筆)433)을 바치는 태도를 기뻐하여 하동절도부사(河東節度副使)에 임명했으니, 어찌 천하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었겠는가. 천하를 통일하여 왕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이존욱은 당나라의 찬적(簒賊)을 토벌하고 천하를 얻었으니, 그 완벽한 도리를 구하였다면 마땅히 당나라의 후손을 찾아서 옹립해야 했다. 비록 자신의 행위가 양(梁)나라에서는 얻고 당나라에서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비난하겠는가. 이존욱은 이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당나라의 구신에게 빙자하고자 소순의 무리를 보호하여 아꼈으니, 가소롭다.오대(五代)의 세상에 오직 이존욱이 나라를 얻은 게 가장 바르고 후당(後唐)이라고 칭한 것도 들을 만하였다. 그러나 소생모(所生母)를 높여 태후(太后)로 삼고 적모(嫡母)를 태비(太妃)로 삼은 것은 사심을 따르다가 예법을 없앤 것이니 성인에게 죄를 지은 것이 크다. 오랑캐 족속이 예의를 모르기 때문이니 끝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심하구나! 왕가의 형제를 시기하고 의심함이여. 양(梁)나라 임금 주진(朱瑱)은 당나라에게 멸망당한 뒤에 도망가 숨고 죽어가는 날에도 여전히 여러 형제들을 의심하여 위기를 틈타 난리를 도모하여 모두 죽였다. 이는 목숨이 거의 다해가면서도 먼저 수족을 끊은 것이니, 일찍이 사람 마음이 있다고 하겠는가. 사관이 양나라 임금의 사람 됨됨이가 온화하고 공손하고 검약하여 주색에 빠지는 잘못이 없었다고 칭찬했으나 나는 믿지 않는다.온도(溫鞱)434)는 당나라의 여러 능(陵)을 발굴한 자이고, 단응(段凝)은 간사한 무리와 당을 만들어 나라를 망하게 한 자이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장종(莊宗)은 단지 경상(敬翔)435)과 이진(李振)436) 등 몇 사람만 죽이고 온도와 단응은 죽이지 않았으니, 어찌 그리도 치우쳤는가. 명종(明宗)에 이르러 비로소 그들을 죽였으니, 비록 늦기는 했지만 끝내 바름을 잃지는 않았다.물을 함부로 대하는 자는 물에 빠져 죽는다. 장종(莊宗)은 광대와 허물없이 지내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그가 광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공로가 있거나 항복했다고 하여 대뜸 성명(姓名)을 하사하는 것은 예법에 근거가 없고 정리(情理)에도 진실하지 못하다. 성씨는 선조로부터 얻은 것이고 이름은 그 아비로부터 불린 것이니, 녹봉으로 두텁게 해주고 벼슬로 귀하게 해준다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그런데 굳이 아비와 선조로부터 얻은 성명을 바꿔준 뒤에야 친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풍습은 당나라 말기 이후로 더욱 심해졌으나, 명종(明宗) 때에 비로소 개혁하여 이미 바꾼 사람들을 모두 옛날로 회복시켰으니, 이 일은 잘했다고 하겠다.거란의 술률후(述律后 술률평(述律平))가 추장(酋長)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너희들은 선제(先帝)가 그리운가??하니, 그렇다고 대답하자, 또 말하기를 ?과연 선제가 그리우면 마땅히 가서 뵈어야 한다.?하고 마침내 그들을 죽였다. 또 좌우의 사납고 교활한 자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선제에게 말을 전해다오.?하고는 무덤에 이르면 죽였으니, 이는 사자(嗣子)가 어리고 연약하여 강신(强臣)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술률후가 보여준 한 평생의 모략은 실로 여자 중의 영웅이었는데, 나약한 신하를 제어할 적에 어찌해 그 방법을 찾지 않고서 기꺼이 이런 잔혹한 짓을 행한 뒤에 일을 이루었단 말인가. 참으로 오랑캐의 악랄한 풍속이다.?오직 임금만이 복을 줄 수 있고 오직 임금만이 벌을 줄 수 있는데, 신하가 복을 주고 벌을 준 일이 있다면 그의 나라에 해롭고 그의 집안에 화가 미친다.?437) 하였다. 후당(後唐)의 안중회(安重誨)는 나라를 위하여 죽기로 스스로 맹세하고 두 아들438)을 체포하여 표문을 올리고 대궐로 압송하기까지 했으나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의 죄가 아니기에 마땅히 원통해할 만한 것 같지만, 그 평생을 돌이켜보면 위복(威福)을 행한 경우가 많다. 이것이 죽음을 취한 길이었으니 어찌 이른바 ?그 집안에 화가 미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후당의 명종(明宗)은 밤마다 향을 사르고 하늘에 빌어 하늘에서 성인을 내시기를 원했으니 이 얼마나 공정한 마음인가. 이 마음을 미루어 확충한다면 별도로 성인을 내기를 바랄 필요가 없이 곧바로 자신이 성인이 되어 지극한 정치를 이룰 수 있었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큰 도리를 듣지 못하고 재상이 적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명종 이후에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의 이런 마음을 제왕들 중에서 볼 수 있었겠는가.설문걸(薛文傑)이 함거(檻車)439)를 다시 만든 것이 지극히 엄밀하였으나 가장 먼저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갔다. 이는 상앙(商鞅)이 법을 만들었다가 자신이 죽게 된 것을 한탄한 바와 똑같이 기이한 일이다. 되돌려주기를 좋아하는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있는데 후세의 소인들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니 슬프도다!석경당(石敬瑭)440)은 참으로 당나라의 역신(逆臣)이다. 거란에 대해 신하라고 칭한 것도 부족하여 아들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중화(中華)의 역대 제왕들에게 죄인이 되었다.오대(五代) 때의 임금들이 모두 정통(正統)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석진(石晉)441)의 경우에는 또 거란이 세운 나라이니 중국의 임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맹자가 말하기를 ?조맹(趙孟)이 존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또 천하게 만들 수 있다.?442) 하였다. 석진은 이미 거란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니 결국 거란에 의해 망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거란의 술률후(述律后)가 자신의 마음을 가리키며 ?이것은 속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요사이 의관을 갖추고 도(道)를 배우는 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기망하면서 기꺼이 천하의 죄인이 되는 경우가 또 있으니 아, 중국인으로 선비 된 자가 도리어 오랑캐의 한 여자만도 못하는가.주본(周本)은 그 아들에게 강요를 받아 비록 제(齊)나라에 권진(勸進)443)하였으나, 나중에 오(吳)나라를 보존하지 못했다 하여 부끄럽고 한스러워하며 죽음에까지 이르렀으니, 슬프다. 어찌 강건한 덕이 부족하여 절개를 잃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주역》의 도리에 유(柔)에 치우쳐 잘못되는 경우가 많고 강(剛)에 치우쳐 잘못되는 경우는 적다는 말이 있다.근세에 민가에서 현달한 집안에 달라붙어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바꾸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는 엄청난 변고이며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풍속이 쇠퇴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지금 남당(南唐)의 임금 이변(李昪)444)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두 왕의 후손들을 조사하였는데, 오(吳)나라 왕의 자손인 위(禕)가 공이 있었기에 마침내 오나라 왕을 조상으로 삼고 유사로 하여금 또 그 아비로부터 5대조까지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이변은 말할 것도 없지만 또한 왕가이다. 오대(五代)가 비록 말세로 지금부터 천여 년 전이라 하더라도 옛날 왕가에서 이미 이런 일이 있었으니 또 어찌 오늘날 궁벽한 시골에 무지한 자들의 짓거리를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경연광(景延廣)445)이 거란을 칠 것을 도모하였는데 때와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진(晉)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외세를 배척하는 의리를 주장하여 맹약을 끊고 자강(自强)을 이루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비록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에 이르렀더라도 오히려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할아버지〔翁〕?라고 칭하고 ?손자〔孫〕?라고 칭하면서 ?십만 자루의 횡마검(橫磨劍)446)이 있어 상대할 만하다.?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할아버지가 칼을 쥔 손자로 상대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이 또한 거듭 가소로운 일이다. 계책으로나 의리로나 모두 합당한 바 없으니 ?광망(狂妄)?한 사람이라고 명명해도 가할 것이다.나는 오대(五代)447) 연간에 부끄러움 없이 악(惡)을 조장한 사람으로 송제구(宋齊丘)448)를 든다. 서지고(徐知誥)의 수선(受禪 임금 자리를 물려받음)을 의논할 때에 자기의 뜻을 말하지 않다가 주종(周宗) 등이 앞장을 서자 마침내 이견을 내고 표문(表文)에 서명하지 않으며 명성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견을 낸 것이 행해지지 않고 시국이 이미 변하자 서운해 하며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임금에게 소리 높여 말하고 집으로 돌아가 죄를 청하였다. 끝내 명령을 고치지 못하게 되자 양황(讓皇)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양련(楊璉)과 혼인을 끊을 것을 청하여 이것으로 공로를 삼으려고 하였는데, 따라주지 않으면 곧바로 그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권력을 탐하여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주종에게 아첨하려고 하다가 남당(南唐)의 황제에게 박대를 당하여 돌려보내졌다. 그런데도 오히려 죄를 모른 채 집을 크게 짓고 분노와 울적함은 더욱 심해졌다. 나중에 다시 태부(太傅)가 되자 우익(羽翼)을 양성하였으나 결국 찬탈 모의를 방치했다가 구화산(九華山)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니,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워하는 본심이 없는 게 아닌가 여긴다. 그의 죄는 마땅히 일찍 벌했어야 하고 찬탈을 기다릴 것도 없었는데 남당의 황제는 오히려 차마 법을 바로잡지 못하여 목을 잘리게 하였으니, 후대하다가 실수한 것이다.진(晉)나라 출제(出帝)449)가 변방으로 나가자 거란이 아보기(阿保機)450)의 무덤에 절하게 했는데 굴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떳떳한 본성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이미 손자라고 칭했으니 무덤에 절하는 것을 어찌 치욕으로 여기는가. 오늘 치욕으로 여기는 마음을 이전에 일찍 드러냈더라면 반드시 손자의 호칭이 바뀌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였다.지혜롭다! 이숙(李肅)의 아내 장씨(張氏)여. 이숙은 다만 조사관(趙思綰)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임을 알았으나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후환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장씨가 금과 비단을 후하게 보내 조사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얼마 후에 조사관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숙은 그가 오면 더럽힘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죽으려고만 했을 뿐 그를 가르쳐서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장씨가 이숙에게 권하여 조사관의 역심을 바꾸고 나라에 귀순하도록 설득하여 집안과 나라에 재앙을 없게 하였으니, 지혜롭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지혜로운 부인이 남자보다 낫다.?고 했는데 그 말이 믿을 만하다.한(漢)나라 은제(隱帝)451)의 죽음에 대해 《강서(綱書)》에는 ?곽위(郭威)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하더니 마침내 그 임금 유승우(劉承祐)를 죽였다.?하고, 《목서(目書)》에는 ?한나라 임금이 민가에 들어갔다가 반란군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하였으니 《강서》와 《목서》의 ?시살(弑殺)?은 이 책의 범례(凡例)와 다르다. 목(目)에는 하나하나 뜻이 있을 필요가 없지만 강(綱)은 한 글자도 놓칠 수 없으므로 주자의 《춘추(春秋)》 의리로 헤아려보면 목에 ?죽이다〔殺〕?라고 썼더라도 강은 마땅히 ?시해하다〔弑〕?라고 썼어야 한다. 지금 목에 ?시(弑)?라고 쓰여 있는데 강은 도리어 ?살(殺)?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러나 상음공(湘陰公 유빈(劉贇))의 죽음에도 ?시(弑)?자를 쓴 것으로 보면 판본(板本)의 오류로 의심된다.북한(北漢)의 유숭(劉崇)452)은 고조(高祖 유지원(劉知遠))의 아우이며 은제(隱帝)의 숙부이고 상음공(湘陰公)의 아버지이다. 그를 제(帝)라고 칭한 것은 명분이 있고 정당하니 마치 촉한(蜀漢)이 한(漢)나라 계통(系統)인 것과 같다. 가만히 생각건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연조 아래에 마땅히 북한을 먼저 써서 한나라의 원래 자리를 차지하고 주(周)나라는 그 아래에 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주나라가 앞자리에 있고 북한은 여러 나라의 끝자리에 있으니 이것 또한 의심할 만하다.주(周)나라의 왕은(王殷)이 공로를 믿고 전횡하여 응당 칙서를 내려 처분해야 할 경우인데도 왕은은 첩(帖)으로써 시행했으니,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이미 임금을 업신여긴 죄에 해당한다. 태조(太祖)의 위엄으로 그 죄를 성토하고 토벌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조회를 열어 체포하고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기에 이르렀는가. 태조가 비록 찬탈하여 나라를 얻었지만 임금 된 체통에는 도리어 스스로 견해가 있었을 것인데, 지금 이 일에 대해서 사람들을 매우 만족시키지 못했으니 아마도 질병에 시달려 일처리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리라.내가 평생 가장 미워한 자는 풍도(馮道)453)이다. 아침에는 당나라의 신하가 되고 저녁에는 진(晉)나라의 노복이 되며, 오늘은 한(漢)나라에서 벼슬하고 내일은 주(周)나라를 섬기면서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나라가 바뀔 즈음에는 또 먼저 권진(勸進)하여 그 지위를 차지했으니, 이것이 더욱 미워할 만한 것이었다. 여자에 비유하자면 남들처럼 죽은 남편의 집에 살고 있으면서 먼저 그 사람을 맞이하여 남편으로 삼고, 이 남편이 또 남을 위해 죽게 되면 또 다시 먼저 맞이하여 그 사람을 남편으로 삼은 격이니, 이처럼 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말할 수도 있지만 말하면 추해지며454) 죽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없다. 그 나쁜 점은 알기 쉽고 그 죄는 보기 쉬운데, 유독 괴이하게도 저 범질(范質)455)은 덕이 두텁고 재주가 뛰어나며 도량이 크다고 칭찬하였으며 왕조와 시대가 바뀌었어도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이 없어 입이 닳도록 찬양하였다. 이것은 자기도 절개를 잃었기 때문에 사사로운 마음에 가린 바가 되어 그 나쁜 점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소견이 이와 같기 때문에 절개 잃음을 면치 못한 것인가. 비록 예로부터 절개를 잃은 자가 많다 하더라도 유독 풍도처럼 다섯 성씨(姓氏)를 차례로 섬겨 행실이 개나 돼지와 같은 자는 없었다.주(周)나라 세종(世宗)은 명철한 임금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왕득중(王得中)과 손성(孫晟)은 충절을 지킨 선비였는데 끝내 죽였다. 그리고 맹덕경(孟德卿)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사(賜死)하면서 말하기를 ?여러 사람을 징계코자 함이다.? 하였다. 이것으로써 살펴보면 어찌 명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을 다 감복시켜 왕업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세종(世宗)이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잘잘못을 극진히 말하게 하면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그 죄가 실로 나에게 있지만, 구언을 했는데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 허물은 장차 누가 책임지는가.?하였다. 말이 마음속에서 나오고 정성스러운 뜻이 넘쳐나니, 그가 명철한 임금이라는 칭송을 얻는 것은 아마도 이 부류 때문이리라. 豫讓不忘國士之遇, 以死報智伯.古語云"士爲知己者死", 讓有焉.魏文侯身往罷獵, 傳以爲國君守信之美事.然使人可也, 豈必冒雨親往, 然後乃爲守信乎? 無乃有行苟難沽美名之心歟?聶政以母在不許人以死可矣, 竟以父母遺體, 行盜事被盜名, 戮身絶祀, 爲萬古大不孝, 前日云云, 究何益哉? 若知事死如生、事亡如存之義, 則豈至是乎?"在德不在險", 吳起此言, 正孟子所謂"地利不如人和"之意也.語人以保國之道則如是, 而自薄其德而不能保其身, 何哉? 豈非所謂"人雖至愚, 責人則明"者歟? 今之士言行多如此, 請觀吳起而知戒哉!諸侯朝天王常例也, 列國莫朝而齊獨朝之, 則天下賢威王; 子之孝親當務也, 擧世不孝而有人稍知事親, 則人皆歸孝.由此言之, 爲盛世之賢者難, 爲衰世之賢者易, 凡今之人, 何苦風靡於惡俗而不自愛其身也?"民不可與慮始而可與樂成, 常人安於故俗, 學者溺於所聞", 衛鞅此言, 言則是矣, 不可以人而廢其言.東周雖非天子, 其犯東周者, 亦所以侮周也.列國之中, 韓首先犯之罪, 不可赦矣, 不曰"韓寇東周"而曰"韓伐東周", 可疑也.孔子以周敬王四十一年卒, 孟子以顯王三十三年至魏, 其間爲百四十三年矣.子思旣得逮事孔子, 則孟子雖老而至魏, 亦未及子思之世矣.孟子之不親業於子思也明矣, 朱子未及細考, 只因舊史而載之也.至《孟子集註序說》則引《史記》受業子思門人之語焉, 蓋亦非終信親受業之說也.趙武靈王初立, 置博聞師及左右司過各三人, 獨不肯稱王而曰: "無其實而敢處其名乎?" 方是時, 何其明快也? 而卒以無道, 喪身辱國, 前後若二人焉, 何哉? 靡不有初, 鮮克有終, 固人之通患, 且資稟剛果底, 其爲善也固易, 而爲惡也亦不難, 其機可畏哉.儀、秦俱以縱橫之術, 致富貴, 其術陋矣, 其人亦不足言.但秦猶有抑强扶弱底意, 儀直賣國而肥己, 一凶逆之流也.孟子只斥儀以妾婦之道者, 對景春大丈夫志而姑以是反之也.富貴人之所欲富貴之欲, 未有大於身爲國君, 而燕噲乃欲與堯、舜同名, 讓萬乘之國於子之若是乎? 好名之欲, 甚於富貴也, 孟子曰"好名之人, 能讓千乘之國", 噲之謂也.然而名且不得, 而身爲葅醢, 凡世之好名者, 尙可觀此而知戒哉.蘇代之爲子之謀者, 不過使得燕權而已.乃掉三寸不爛之舌, 以至奪人國而亡人君, 吁其心忍矣, 其計毒矣.可畏哉! 辯士之舌端也.楚子蘭之勸懷王入秦, 宋李若水之勸欽宗至金, 俱不免陷害君親之罪矣.但若水一死, 僅足以贖其罪, 至於子蘭, 旣無引罪自處之道, 又不正其罪以國典而靦然立朝, 反得以讒害忠良, 楚之玉章墮矣, 頃襄不君矣, 雖欲不亡得乎?孔穿之與公孫龍論臧三耳也, 平原君以理勝於辭與穿, 辭勝於理黜龍.其所見亦高, 當時列國公子中, 難得有此見識.王蠋守義而綱常立, 王孫賈擧義而仇讎復, 齊國復興, 賴有二人.雖然, 使蠋而不遭劫, 必不至自經, 使賈而無權位, 亦無由擧兵, 要皆不過自靖其身而止耳.樂毅非但有智略, 亦復有禮義.其答趙王之書, "疇昔之事昭王, 猶今日之事大王云云", 報燕王之書, "忠臣去國, 不潔其名云云", 有禮有義.信其爲君子人, 非可與戰國世諸名將一例看, 後來諸葛武侯之自比管、樂者, 以此也.但終是未聞君子之道, 觀於伐齊而遷寶物祭器、請王蠋而欲劫之以兵, 可知也.子順辭魏王之聘曰"王能信用吾道, 吾道固爲治世, 若欲制服吾身, 委以重祿, 吾猶一夫", 至其固請而後, 乃出應之, 而改嬖官事賢才, 奪無任賜有功.至其不用大計, 則以病致仕, 人勸其行, 則答以無所於往, 而又不入不義之秦, 因歎"不出二十年, 天下其盡爲秦".觀其出處才略見識, 一一合道, 卓然出類, 不愧爲孔子家肖孫.當是時, 謂魯仲連爲天下高士, 而子順亦嘗以抑其次者稱之, 然以余論之, 子順豈下於仲連者哉?朱子以蜀先主接漢統, 以帝在房州接唐統, 而獨不以東周君接周統者, 何也? 朱子嘗歎《綱目》未及再修, 如得再修, 此等處在所改正, 無疑.蔡澤以一言奪范雎相, 又復數月而免相, 旣無苟進之恥於其始, 且免戮辱之遭於其終.當時辯士中, 才較高、心較正、福較完、智較明, 庶幾自言身名俱全者也, 澤亦豈易得者哉?茅焦不避鑊烹而諫秦王, 雖有功於正人母子之倫, 徒直而愚莫甚焉.秦王暴虐, 非可諫之主, 太后淫奸, 亦得罪於天, 焦以賓旅之臣, 有何同休戚於人國之義而忘死驟諫哉? 其免死而諫行者, 幸爾偶爾, 豈非以秦王多殺之餘, 憤洩心定故歟? 不然, 適足以充諫死二十八人之數矣.且嫪毐1)淫於國母, 罪當萬死者, 焦乃稱以假父而論其車裂, 甚無謂也.荊軻之劍, 張良之椎, 一也, 而朱子盜軻而義良, 何哉? 蓋以良則出於報君仇之赤忠, 而燕丹之使軻, 出於報不禮之私怨也.且以軻有納土入朝之詐, 而良則無此故耳.扶蘇、蒙恬之得賜死, 矯詔也.若復請而得其情, 據義而問其罪, 則以扶蘇之賢名, 居胄子之位, 蒙恬之積功, 擁數萬之衆, 事可以成, 而秦可以不亡矣.其不能然者, 抑天惡其虐, 故使胡亥嗣位而覆其宗也歟?漢王之晨入趙壁奪韓信軍者, 疑信之自專也.且信之擊破已下之齊而致烹酈生也, 漢王其能平心乎? 漢王之疑忌, 不待假王之請, 而已在此時矣.漢王"幸分我一桮羹"之云, 旣是人子窮凶極惡之言, 亦足以挑人之怒而促禍矣.若無項伯一言, 太公豈能免乎? 中分天下, 講和奉歸, 當在此時, 羽亦困於食少, 宜無不成之理矣.張良平生志事, 只在爲韓報仇而已.其勸漢王擊楚於講和之後者, 報羽殺韓王成之仇也.程子以不義論之, 似不深知良心也.丁公之謁帝, 要功可見.其釋帝之時, 已有此心, 其見誅宜矣.魯之兩生汚叔孫通而不肯行, 誠得出處大節, 至於"禮樂所由起, 積德百年而後可興"之說, 未免太執.禮樂無處無之, 雖軍中亦有軍禮軍樂, 立國之初, 豈可無朝儀? 雖不能盡善, 要當不失大體, 以爲之兆, 則可矣.抑以兩生出處之見, 非不知此者, 則姑托此爲不出之話柄歟?張敖不聽貫高、趙午殺高帝之言, 而不卽誅高、午, 以至於廢徙, 彭越不聽扈輒反漢之勸, 而不卽誅扈輒, 以至於夷族.使敖、越卽誅請殺勸反者而奏之, 豈有此禍? 非但爲免禍計, 人臣之義, 當如是也.呂太后見日食, 惡之曰"此爲我也", 而猶不改度, 蓋其心以爲天變不足畏也.漢文帝與南越王佗書, 一出於實心, 故佗亦以實心應之."朕高皇帝側室之子", 此言何等眞實? 所以感得佗"故越吏"之應, 而一書之力, 足以勝十萬之師矣, 蓋天下都是感應之理而已.噫! 天下之人, 外自列國, 內至士林, 皆以文帝此書之意爲心, 豈有爭奪之禍哉?"河東吾股肱郡, 故特召君", 此文帝文過之言, 與高帝"繫相國, 令百姓知吾過"之言, 同一飾辭也.以文帝之賢, 猶有此失, 聞過而喜, 豈不難哉?賈誼上疏, 以諸侯强大爲患.至於痛哭, 以"各使之分王子孫, 弱小其勢", 獻計, 其忠至矣, 其計奇矣.文帝但深納其戮辱大臣之長太息者而養臣有節, 不察其憂患諸侯之痛哭者而預爲之所, 竟以致七國之禍亂, 孰謂文帝賢主乎哉? 惟其文帝之不用, 益見賈生之賢也.馮唐因李齊之問及李牧事而諫其君, 使赦魏尙者, 深得納約自牖之義.噫! 諫君之法, 顧不當若是耶? 豈唐亦讀書之士歟!以文帝之美質, 如得讀書爲學, 必無新垣平之惑、短喪之詔矣.吾以是知夫人之不讀書者, 固可惜, 而質美者之不讀書, 尤可惜也.直不疑償金, 誠長者, 然後人不可以爲法.如使其時亡金者多, 則豈可以盡償之乎? 且告歸者, 若不歸金, 則終無以自明矣, 恐不若以實告之之爲誠也.周亞夫逐雲中寇, 靖七國亂, 旣功莫與京矣.爭廢太子, 止侯不當侯者, 又斷斷是忠言正論, 景帝之不聽, 已是私意, 又何忍不念前功而殺之乎? 漢之賢主, 雖稱文、景, 然至於此事, 則桀、紂之暴, 不過此矣.淮南王安之文學盛矣, 所著多格言至論矣, 而胡乃至於謀反自殺而爲大逆不道耶? "有言者, 不必有德", 雖有古語, 豈有若是相反之甚者乎? 絶可怪也.武帝旣見欺於少翁而誅之, 再見欺於欒大, 至尙公主而又誅之.凡人之情, 一見其欺, 猶知所懲, 以武帝之明斷, 豈不知所懲而然哉? 以慾勝而蔽其明也, 故三欺於公孫卿, 而猶不見悟.噫! 私慾之昏人心, 乃至於此乎?武帝之浮海求蓬萊也, 群臣皆諫而莫能止, 聞東方朔"還宮靜處, 仙人自至"之一言而止之者, 因其勢而利導之故也.史稱"朔時直諫, 有所補益", 以余觀之, 朔非徒直諫, 可謂得善諫之術者也.齊景公之女吳而出涕者, 以其恥與蠻夷爲昏也.然吳猶是泰伯之後而列在中國諸侯, 至於西北胡戎, 尤是荒服異類也.漢自惠帝以來, 嫁與公主於胡戎, 認以爲常, 雖以武帝全盛, 稱以攘胡之時而猶然.蓋以其初一發其例, 因襲苟且, 以至於全無羞惡之心也.武帝之遣李廣利擊匈奴, 意在令廣利立功爲侯.使李陵別攻單于, 成得大功, 爲廣利所猜而不免於禍, 未可知也, 觀帝謂陵"將惡相屬耶"一言, 可知矣.陵武人, 固不可責以明智, 司馬遷乃讀書人, 爲陵盛言於敗降之後, 宜其見怒而不免罪也.讀書所以益智也, 今烏乎在? 余爲此言, 非爲陵也爲遷也.田千秋"臣夢見白頭翁, 敎臣言云云", 明是臨時撰出.然重在使上感悟, 不失父子之倫, 故雖若欺君, 而不危害也.雖然, 此亦適値上知太子無他意之際, 故卽奏功效, 不然, 豈可得乎? 孟子曰"雖有知慧, 不如乘勢".胡氏於雋不疑處成方遂詐稱衛太子事, 謂"但當叱吏收縳, 不必引《春秋》"之云, 理然而勢不然.天下旣心知太子之無罪, 且當此萬目環視疑危未決之際, 不引前據而折之, 豈可以服輿情而聳衆觀乎? 臨機處變之法, 不得不如此.黃覇非學道者, 而猶引朝聞夕可之聖訓, 受《尙書》於獄中.今之士子平日立志之高何如? 而纔爲貧窮所拘, 輒棄所學之道而徇物慾曰"雖欲從道, 其於無食而死何", 試思之, 視覇豈不愧乎?霍光匿其妻弑后而不發, 胡氏以爲"與聞乎弑"者是矣.余則以爲"光輔主安國之功, 不足以贖弑后之罪", 何也? 天下寧可無劉漢, 國家不可無君臣大倫故也.光非惟不發妻罪, 又立其女爲后, 是直可謂欲后其女而弑許后矣, 雖有善辯者欲爲光掩護, 不可得也.程子"爲人後者, 稱所生爲伯叔父母"之論, 雖是嚴於正統之義, 然《禮經》旣以所生, 猶謂之父母, 且伯叔父母, 自有其人, 則恐不若稱本生父母, 如後世禮論之安於人心也, 未知如何.胡氏以疏廣之去, 爲知太子憒憒不可敎者得之, 其知幾之明, 視穆生以醴而去, 更高矣.宣帝之時, 鳳凰之瑞, 一何多耶? 噫! 豈皆眞瑞乎? 多出於群臣之希上意而獻諂, 又以顯己功而要賞耳.以黃覇之賢, 猶指鶡雀爲鳳, 而覇守穎川時, 穎川尤多鳳云, 其尤多者, 又可知矣.霸猶如此, 他何更論? 三代以後, 西漢最稱淳實, 而風氣已如此, 而況於後世乎?直諫如朱雲者, 固中主之難容, 而成帝旣不罪之, 又使之勿易折檻, 以旌直臣.雖其沈湎放肆, 大失君道, 亦見好善容物, 猶有人君之量, 如使多得賢臣, 輔佐啓沃, 則庶不敗度之至此也.成帝朝無賢臣, 只有劉向一人, 而向亦不能格君非心, 以正其本.頗尙章奏之文采, 先事禮樂之儀節, 已失內外本末之序矣.且居下位, 不尊不信, 雖欲有爲, 安可得也?程子曰"禮樂待其人而行", 余亦曰"制度有其君而後立".漢詔限民名田而不果行, 雖若可惜, 然如果行之, 決非哀帝之君所能立其制而奏其效也.孔光, 迹其平生, 一姦邪之流.方哀帝之殺王嘉也, 劾以迷國罔2)上不道, 置之死罪者光也.嘉之就死也, 自以不能進賢退不肖爲罪, 而所賢者乃光也, 光固小人, 嘉亦迷夫.聽孔光之劾王嘉而殺之, 覽王嘉之賢孔光而相之, 劾之賢之之間, 其心之一善一惡, 可知矣.殺嘉雖不可追, 相光復可爲乎? 甚矣! 哀帝之昏也.鮑宣之正言直道, 固可敬.然不知出處之義, 仕於昏亂之朝, 竟遭髠鉗之辱, 惜其不能彌厲淸苦之節, 與妻挽車而隱居修道, 以終其身也.吳章雖稱當世名儒, 欲以邪術動莽而遭斬, 則不可謂道之所存而爲人師者矣.云敞當其門人更名他師之日, 獨自劾爲章弟子而收尸斂葬, 誠不愧爲報恩盡分矣.今人之無故而倍道尊德備之師於旣沒之後者, 抑獨何心?莽賊之簒漢, 太皇太后養成之, 而猶惜與無用之一璽, 豈不迷哉? 使太皇太后而不在, 莽猶不能至此也.言遜, 雖曰君子之道, 若薛方之辭莽使而曰"明主方隆唐、虞之德, 小臣欲守箕山之節"云者, 過遜而謟也.班固謂此爲"貞而不諒", 吾不信也.楊雄旣爲莽大夫, 則其云"恬於勢利, 好古樂道"者, 安所當乎? 但以其不欲躁進, 遽以是稱之, 此史氏之無識也.莽賊勢盛之日, 才聞山東兵起, 輒惶懼不能食, 則初無智謀膽略, 但藉四父挾太皇太后而成其勢爾, 與曹操之自以智謀自成勢力者不同矣.朱子於馬適求等事, 旣書以"謀誅莽", 則"不克"下, 亦當曰"死之", 而今無"之"字, 恐失照勘.馬援旣稱"光武才明勇略, 闊達大節, 略與高帝同", 又稱"學政無比, 動如節度", 則可謂勝於高帝.而又謂"光武不如高帝", 而曰"高帝則無可無不可", 吾不知其何說也.余常以爲"光武之仁以爲心、義以制事, 非高帝所及, 高帝特傑驁人之乘勢而受天命者爾", 隗囂所謂"反復勝耶"之云, 吾亦謂然.毋易樹子, 毋以妾爲妻, 五伯之所不爲也.漢之賢君, 無如光武, 平日所行, 多近王道者, 而猶不勝私意, 無故而廢后易子, 爲君之難, 豈不信哉? 雖謂光武, 五伯之罪人, 亦何得以辭諸?馬援年迫日索, 正當致仕之時, 而未制立功萬里之心, 據鞍顧眄, 以示可用功, 未及就, 反獲罪戾, 豈非恥辱哉? 援尙知戒兄子以謙約, 而自不檢侈大之氣, 致此累德, 反己省驗之難, 有如是夫!光武至引"吾誰欺? 欺天乎3)"、"曾謂泰山不如林放"之語, 不許群臣封禪之請, 而忽於三年之間, 封泰山禪梁陰者, 何也? 其感於《會昌符》也.此符之感, 以其卽帝位時, 決於赤伏之符也.於是信圖讖, 有若天定聖傳不易之典, 而不知一種好事獻謟者之所爲也.以故怒桓譚排讖, 罪以非聖而欲斬之, 是蓋學不講理不明而致然, 非專出於私意也.故帝王之學, 不可不講, 尤有切於凡人也.雲臺功臣之畵, 避椒房之嫌而獨不與馬援, 與文帝不相竇廣國同意, 此皆內不足故也.然而廣國之賢未見, 馬援之功已著, 則又有不同者.然則明帝此事, 非惟內不足, 其過思反惑者乎!明帝臨雍拜老, 自爲下說, 尊尙儒學, 何其盛也? 而遠至天竺, 求入佛道, 乃在其世, 惑於異端, 又何深也? 一此一彼, 有若不出於一人者, 此無他焉, 所謂崇儒者, 徒以文具, 而未嘗卽物窮理, 反躬體驗, 明知是非之所在故也.此則當時師傅, 但尙專門章句而不知有聖賢全體大用之學者, 與有責焉.章帝南巡, 命司空, 自將徒支拄橋梁, 愛民則至矣.然道路橋梁, 國政之一大事, 不能命有司以時修治使不病涉, 而區區行此.小惠於民, 末矣, 觀於孟子所論"子産惠而不知爲政", 可見.光武、明、章三代相承, 得賢君之稱, 殷、周以後, 鮮與爲比, 嗚呼偉哉!黃憲之賢, 士君子贊述其高深, 至有顔子之稱, 然言論行義, 無所傳聞, 有不可信者.蓋當時稱楊伯起爲關西夫子, 而考其歸, 則乃仕亂朝而遭自殺之辱者, 其所稱揚, 皆沒斟量, 不足深論.然憲之不仕而免禍者, 豈不賢於伯起哉? 然則擬憲於顔, 猶爲近之, 然其始之暫到京師者, 何意? 蓋未免動於名利, 而所謂高者未盡高, 深者未盡深耳, 不待言行之他據, 而其有不可信者, 自見矣.周燮固守東岡之陂而曰"修道者度時而動, 動而不時, 焉得亨乎", 令人三復而有餘味也.噫! 豈獨出仕者然? 士子有所動作, 皆當視此爲法.若樊英者, 初旣辭疾不出, 竟至出膺官爵, 出又未聞嘉謀深策, 徒勤國家尊禮, 而使輿情失望, 張楷所譏"進退無所據", 安得以辭諸? 司馬公猶以不可責望非楷, 恐失之太恕.書"孟達死之", 蓋褒其忠也.先師答澤述書, 謂"達欲再降, 則恐魏斬之, 不得而不死, 死之之褒, 恐合修改, 而朱子未及照勘", 淺見不無滋惑.使達無死漢之心而出於欲降恐斬而死者, 當初以新城來附也, 何苦去强盛之魏而歸疲弊之漢哉? 其來也, 以悔罪歸正, 其死也, 以以死贖罪.不可以前罪而廢其忠, 朱子之褒, 其必以此也.先師之論, 雖云誅意之法, 如不得眞贓, 則豈不枉他? 恨不得再稟而得許於當日也.街亭之敗, 非惟馬謖之違亮節度, 亮亦失於不用魏延之計也.延計雖危, 事成則中原之復可望, 不成止於失一將五千兵, 是何大關? 臨事而懼, 雖是聖訓, 所望者大, 而所失者小, 則恐當爲之也.當是時, 魏且略無備豫, 出其不意, 亦未可必謂危道也.亮雖曰"平取隴右, 十全必克", 然如此曠日之間, 以中原全力, 豈肯任其克取耶? 亮之告後主, 固曰"欲以一州之地4), 與賊支久, 此臣之未解也", 而於此則坐失不可失之一奇會何也? 惜哉!孔明斬馬謖而以不廢法爲討賊之本, 此所以爲王佐才也.若蔣琬之引"楚殺得臣而文公喜", 謂"天下未定, 不當戮智計之士", 則是見小而暗大也.孔明以街亭之敗, 請自貶三等, 引咎責5)躬, 布所失於天下, 可見學力處, 此心足以興王業也.若司馬昭之以東關之敗, 不任其咎, 而至斬王儀, 可見其惡聞過, 而此心足以敗事也.然而孔明不能成其志, 昭終有天下, 何哉? 勢運之不同也.雖然, 當是時也, 漢之勢運已去矣, 使孔明無此學此心而徒用才略, 安能以區區一州, 敵中原之衆哉? 然則有才而當大事者, 苟有公心之服人感天, 亦可以回運造勢也夫!孫權稱皇帝, 而孔明使吳與盟者, 以魏賊在也.所重在討魏, 故吳不暇問也, 蓋滅魏則吳不須慮, 讎吳則魏得以乘勢.此不得而不然, 不得不然處, 乃可以用權也.劉曄以巧詐憂死, 罔之不生宜也, 虞翻忠直, 而亦以竄死可惜.然才之所使言動爲厲階, 雖直詐不同, 其死一也.噫! 有才志者, 可不戒哉?管寧之遼東皁6)帽, 何等超然? 而晩歸于魏, 至被盧毓之薦.其歸必因不得已之故, 其被薦非求而得之, 然恐不如不歸故鄕之爲尤潔, 朱子之書以卒於魏者, 其亦微寓貶意歟.夏侯玄知子元、子上之不容, 而不思見幾保身之道, 貪位慕祿, 因循苟且, 至於連累而死, 豈非死得獃者? 子曰"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罟擭陷穽之中, 而莫之知避", 玄之謂矣.魏末師、昭之逐弑其君, 若鷄犬然, 此天爲漢報仇於曹操也.然而猶有王經死節之臣, 何哉? 余見鄕里間, 不孝之子或有孝子者, 此理絶不可曉.綿竹之敗, 武侯之子瞻、孫尙皆死之, 此見武侯義方嘉謀處, 亦見實學齊家處.吾故曰: "武侯之忠義才略, 都自學問中出來, 蓋其淡泊明志寧靜致遠八字, 生平學問主本, 有諸己而及其子孫者.淡泊然後私邪屛退, 寧靜然後義理乃見, 無私明理, 斯可以臨機決策, 當危取義矣.其將才略氣節, 與儒學二之者, 亦獨何見?"姜維之欲殺鍾會復立漢帝, 事雖不成, 志則忠矣, 不可以旣降而不與也.若與李陵同論, 則不倫矣, 然維是一無識壯士, 故就此而且云爾.至於人臣正義, 則豈容圖後功而先屈節也?霍弋以魏之待後主禮辱如何, 定降與不降, 此何義也? 其上表有曰"國敗主附, 守死無所.是以委質, 不敢有貳", 以此自成一副義理者然, 尤不成說.義之所在, 非守死之所耶? 或問於令女曰"夫家已滅, 守此欲爲誰", 令女曰"仁者不以存亡易心, 義者不以盛衰改節", 此眞不易之正論.弋以丈夫而其見不及女子, 可惜也.晉武帝以凶悖之種, 身親簒奪, 而至於前後居喪, 實行古禮, 雖爲群下所沮, 不服三年, 其孝誠則無間然矣.秉彛之不泯, 豈不信然? 孝爲治天下之本, 魏、晉同一簒也, 而晉不與魏同促其亡而猶延於一偏者, 豈非以此耶?羊祜雖武人將臣, 其與傅玄言而曰: "主上至孝, 雖奪其服, 實行喪禮, 因此復先王之法, 不亦善乎?" 使聖賢論之, 蔑以加此.孔子曰"有德者必有言", 宜乎後人之思其德而墮淚於峴山碑也.若傅玄之多方沮難, 使祜議不行者, 豈不反愧其腹中詩書乎?自古罪大惡極而終不逮禍者鮮矣, 余於賈充之令終也, 獨怪之矣.然其所以得免者, 晉武之辟於親愛而始終護存也.故知其種妒醜黑, 而竟以其女爲太子妃, 主言伐吳之不可者充也, 而平吳之後, 反增八千戶之賞.及其死也, 許遵非族爲後之遺意而不憚違先王之正禮, 更定武公之美諡而排昏亂紀度請諡以荒之公論, 夫如是武帝之世, 誰敢議其後也? 蓋其謂充功大者, 未知指何也.充之爲晉立功, 宜莫大於弑曹髦, 然使無充, 則晉終不得有天下乎? 其爲晉弑君者, 不甚關於晉事之成否, 而適以成晉大逆之罪, 何所取於其功也? 甚矣! 晉武之蔽溺也.妒種入宮, 弑后殺子, 誅戮大臣, 幾亡晉國, 嗚呼悲夫!晉雖云放棄禮法之世, 公議猶存, 雖以何曾、賈充之勢位, 免不得繆荒之諡, 可以差强人意.後世號爲禮義之國, 而風習一於阿媚, 有不諡, 諡則必加以美, 其視西晉, 能無愧乎?"孫皓無道, 吳國之士, 沈默其體, 潛而勿用者, 第一", 此爲吳郡陸喜之言也, 其亦有見於《大易》之"潛龍勿用"、《論語》之"邦無道穀恥"之道者歟! 三分擾攘之世, 乃有此人, 此見豈易得哉?晉武帝太康六年乙巳秋八月朔日食, 七年丙午春正月朔日食, 八年丁未春正月朔日食, 太廟殿陷.九年戊申春正月朔日食7), 夏六月朔日食旱, 秋八月星隕如雨地震, 災異之疊見, 未有甚於此時, 是爲賈后作賊, 諸王相殘, 晉國亂亡之兆也.天之警告若此, 而武帝不思恐懼修省, 立定綱紀, 選擇輔佐, 用除身後之禍, 乃極意聲色.遂至成疾顧命之際, 倉卒昏迷, 非人竊權, 馴致大亂, 哀哉!張華儒雅有籌略, 衆所依仰, 故其死也, 人多惜之, 然余則以爲"宜其死而不足惜也".貪位慕祿, 久事賊后, 親友少子迭勸遜位而終不肯, 至遭大禍.此正孔子所謂鄙夫, 烏在其儒雅也?潘岳、陸機、陸雲之文章, 卓冠一世, 而或爲賊后手足, 或爲叛王將佐, 竟至於身殞族夷, 平日讀書何如而乃若此? 使少致意於窮理力行之學, 豈至致此狼狽? 前鑑昭然, 而後世敎子, 猶多尙文而輕德者, 不思甚也.老、莊之學, 雖輕蔑禮法, 其淸淨無慾則無以尙矣.若魏、晉之尙老、莊者, 率多盜其名而棄其實, 趨時附勢, 貪權樂禍, 無所不至.至於王戎之貪吝鑽核, 庾敳之殖貨無厭, 言之汚口, 更不可說.諸如此輩, 非惟放達縱恣, 得罪聖門, 亦陷慾喪心, 爲老、莊之罪人也.嵇紹忌父讎而事晉, 不孝甚矣.溫公雖云"嵇紹苟無蕩陰之忠, 殆不免君子之譏", 余謂蕩陰之忠, 雖忠無取.孝者百行之本, 故資於事父以事君, 謂之忠, 無父無本之忠, 安足貴乎? 程子曰"子路徒知食焉不避其難之爲義, 而不知食輒之食爲非義", 吾於嵇紹, 亦云爾.王導之求救百口也, 周顗之不顧不言, 宜也.旣見帝申救, 而復出而大言"殺諸賊取金印", 何也? 此不過欲表其不徇私情之公正也.雖曰不求人知, 而實所以求人知, 是亦私心也.當言者, 有時而不敢盡, 所以避禍, 況於不當者, 言之而取禍乎? 使顗而無此言, 導於敦之三問, 皆豈不答乎?顗之死, 導實殺之, 非但由我也.導雖銜怨於殺印之言, 然顗但言殺賊, 未嘗言幷殺賊之宗族.導旣非賊, 賊者是敦, 有罪無罪, 死生自殊, 何得以此怨顗而不答敦之三問乎? 故曰"導實殺顗".不寧惟是, 亦可曰"敦之逆, 導實成之也", 何也? 導人望也, 敦之所憚, 而且在懿親, 石頭相見之日, 若據義正責如王彬之爲, 終示以大義滅親之意, 其或挫悔自新, 有不可知.乃使殺周顗而報私嫌, 勸彬拜謝而養其氣, 馴致大逆, 至有江寧之役.其以聞疾發哀, 區區小計, 助討功之一分者, 安足以贖前日護逆之罪哉? 導, 晉之賢宰稱者, 故備論之如此.秦王苻堅之庶兄法不受堅之讓位曰"汝嫡嗣且賢, 宜立", 其守分讓能之賢德可尙.苟太后之恐不利於堅而殺之者, 固女子暗險之見.堅可謂英明之主, 而何不能救其死, 但慟哭歐血也? 謂順母志乎, 則陷親不義, 謂力不及乎, 則威權在己, 其心所在, 不免令人沈吟也.燕梁琛之使於秦也, 折行在之非當而拒野見之禮, 引諸葛氏兄弟事而辭館於從兄之舍, 謂"兄弟本心, 各有所在"而不答從兄東事之問, 據不敢臣他國之臣之禮, 不拜秦之太子, 所謂使於四方不辱君命者, 非此人而誰? 慕容暐不識其賢, 反疑之而繫獄, 其亡國也宜矣.孫盛諸子之私改其父所作《晉春秋》直書時事者, 以避桓溫之禍, 若非盛之寫別本, 傳外國者, 不免曲筆而媚溫矣.嗚呼! 後世之名士, 多於老年爲子孫所誤而隳節喪名, 尙鑑於此哉.周虓之降秦全母, 孝也; 不受秦官, 忠也.然以所在致死之義, 究論之, 虓之所在, 在受君命守城池, 則雖欲兩全, 而有不可得者.且虓始雖不仕抗節, 終爲尙書郞, 而謀反徙邊, 何足言哉?郄超將死, 以桓溫往復書一箱呈其父, 令勿哀惋, 出於孝思, 然曷若平日之愼德行忠王室, 繼述其父之爲孝也乎? 此非不能三年而緦功之察乎? 蓋其平日之附溫貪權之私慾害之, 而不覺陷親遺於不義也.將死之呈書, 人窮反本, 而愛親之善心發也, 秉彛之罔墜, 豈不信哉?方秦兵之大至, 謝安夷然無事, 命駕遊山, 圍棊賭墅, 是豈眞已有措畵? 其實無如之何, 而爲鎭定人心計耳.不然而惴惴愼懼, 晉人不戰自亂, 故不得而不然也.然非安之雅量重望, 雖欲爲此, 亦不得也.蓋其天分甚高, 自有置生死禍福於度外之一段, 實見非夷所及也.桓溫大陳兵衛, 王坦之倒執手版之時, 安方從容就席, 笑語移日, 安之平生定力, 長處在此.安之臨亂而遊山賭棊, 要不過一時之用, 至於謀國之正法, 則桓沖所歎"不閑將略, 遊談不暇"之說, 定不可無也.肥水之捷也, 安旣無所措畵, 石、玄等亦非別有謀略.但秦欲及晉兵半渡而擊之, 麾兵使却, 秦兵遂退不止, 苻融馬倒, 爲晉兵所殺, 朱序呼秦兵敗, 衆遂大奔.要之皆僥倖也, 殆天意也.若無此三者, 江南一區, 烏得免桓沖左袵之歎? 安亦難辭廢事誤國之責矣.程子曰"惟量弘不可强", 安之弘量, 豈强爲者哉? 然其得捷報, 過戶限不覺屐齒之折, 何也? 豈以本量之弘, 固非强爲, 臨事過事, 對人獨在, 終有有心無心之異歟!苻堅, 一時之桀驁者, 東擊西伐, 天下無敵, 幾乎蕩平海內, 卒死於平日俘虜之手, 豈非命哉? 然德業未崇, 而志先肆大, 不思王景略臨終之言, 而圖取晉室, 反罹天殃, 遂爲垂、萇所乘而身且不保, 究是自取非命也, 豈堅亦以簒弑得國者, 故天以是報之歟!苻堅雖亦簒弑之流, 論其才, 則亦可謂有爲之主.其豁達剛明, 知人善任, 優納諫諍, 奬褒忠節, 容釋嫌仇, 是皆人君之度, 而五胡中無與爲比.使得王佐之才而輔之, 庶幾乎混一區宇, 惜其未也.說者以王猛爲武侯流亞, 堅亦自謂"吾之有景略如玄德之有孔明", 然余則以爲王之於葛, 非其類也.孔明, 君子中才略; 猛, 小人中才略, 焉有小人而得爲王佐才者? 使猛而不死, 僅足以强其國而已, 期乎一天下則未也.燕主垂欲遷段后而陞蘭后, 劉詳、董謐據以爲不可而曰: "上所欲爲, 無問於臣.臣按經奉禮, 不敢有貳." 此與張釋之對漢文帝言"當其時, 陛下誅之則已", 同一語意, 均之爲啓時君恣行己志、不憚禮法之心, 而更甚焉, 彼猶在事過之後, 此方在當事之際.垂之不復問而卒行之者, 詳、謐有以成之也.戴逵之避徵逃匿, 可謂隱居求志者; 謝玄之上疏勿召, 可謂愛人以德者.范甯常謂"王弼、何晏之罪, 深於桀、紂".或以爲貶之太過, 甯曰: "王、何蔑棄典文, 幽沈仁義, 游辭浮說, 波蕩後生.使搢紳之徒, 翻然改轍, 以至禮壞樂崩, 中原傾覆, 遺風餘俗, 至今爲患.桀、紂縱暴一時, 適足以喪身覆國, 爲後世戒, 豈能回百姓之視聽哉? 故吾8)以爲一世之禍輕, 歷代之患重; 自喪之惡小, 迷衆之罪大也." 此論痛切可警, 凡爲宰相之秉政治, 儒宗之任敎學者, 宜以純正之道, 導率天下, 使人心風俗, 一出於正.如其少忽而雜以他岐, 一再傳而駸駸至於范甯之論者, 可慮也.漢高帝兵過魯縣, 以太牢祠孔子, 識者以爲"漢家四百年王業, 基於此", 此論可信, 亦可曰"晉家王業之衰替, 由於不報李遼修孔子廟之請矣".后非天子嫡配, 不當稱.晉會稽太妃旣不伉儷先帝, 則太后之稱, 何所當乎? 臧燾9)以簡文宣太后之稱、別建寢廟之儀, 爲一擧而允三義, 此奸吏舞文之習, 而納媚時君貽弊後世之罪大矣.拓跋珪之令朝野束髮加帽, 此用夏變夷者, 其見識卓然, 五胡中絶無及者.是爲爲國以禮之本, 宜其享國至於二百年之久也.金人之入主中國也, 亦用中國禮儀, 而淸主康熙謂"因此致文弱而亡", 何其誤也?桓玄大逆也, 王謐爲其佐命元臣, 手解帝璽以授玄.罪至此極, 可以少時知許之恩不誅乎? 蓋劉裕之討玄, 非出爲國, 欲以成己業也, 報私恩赦國賊, 無足怪也.南凉之亡, 獨尉賢政屯浩亹, 固守不下, 其忠可尙, 其答虎臺喩降之言, 更快人意.然後聞其君傉檀之降而乃降者, 是爲忠不卒也.君不死社稷則是社稷罪人也, 爲臣者從是君而同降, 不過爲婦寺之忠也.魏于什門之使燕, 非惟使於四方, 不辱君命, 亦可謂臨大節而不可奪者, 其可尙也已.崔浩與魏主論近世將相, 皆得其情, 毫釐不爽, 吾亦曰"崔浩之治國, 拓跋嗣之管仲也".韋祖思旣應勃勃之徵, 且恭懼過甚, 至於納拜, 烏足以當隱士之實哉? 朱子猶書以隱士於大綱, 恐是未及再修者.歷觀前代革世, 皆有多少風波, 一二死節之臣, 未有若劉裕簒晉之順成者也.僅有徐廣流涕哀慟, 而亦不引義自靖, 奚足爲有無哉? 吾以此知晉之列朝, 無一賢君也.裕旣身犯大逆, 其蕩滌犯於淸議者, 恐人之竊議己罪也.裴子野乃引舜、武流凶遷頑事, 議除淸議之過, 是何異於譏棄己三年喪者以不察人緦功也?崔浩之不好老、莊書則是矣.但以老子爲孔子所師, 以其書歸之矯誣, 則是認以爲自有《老子》本書, 可爲正經, 而以其人爲孔子之正師者, 此正矯誣之說也.蓋老子嘗爲柱下史, 多聞博識, 故孔子問禮, 取以爲考證則有之, 以此而謂師老氏可乎? 多見其無定見也.人旣無正識、定見, 則雖云精硏經術, 畢竟柰何? 不下崔浩之以《圖籙眞經》爲聖王受命之應, 而曰人神接對, 手筆粲然, 使其主至立天師道場後, 又勸以登道壇受符籙.以若高才, 何其迷惑而陷於納媚誤君之罪也? 所以致此者, 以其無得於道, 而欠正識、定見也.宋以簒弑得國, 骨肉爭位, 旣已極矣, 言禮無地.乃以此時, 猶知諒闇生子之爲恥, 劭之生也, 秘之而後發, 聖人禮法之嚴, 有如是夫.?韓亡子房奮, 秦帝魯連恥?, 此爲何等志節? 惜其出於放逸狂妄謝靈運之口也.雖然, 人之欲秉義守節, 亦得於彛性者, 此詩之作, 或意其爲平日所志, 非出於一時倉卒也.但以其無所養, 故貪慾未克, 食劉氏之祿而不恥, 至於有罪見戮之日, 執此以爲興兵之名目, 然適足以增恥笑於後世也.劉湛見廬陵王義眞居憂時, 爲己設酒, 正色曰"旣不能以禮自處, 又不能以禮處人", 是其謹禮, 可謂嚴矣.然旣知謹禮, 則自應知敬身之爲禮本, 而歸其極於克己爲仁, 胡爲乎貪權樂勢, 成其君兄弟之禍, 身陷大戮, 遺臭千古也? 孔子曰"人而不仁, 如禮何", 信哉!崔浩之才略, 吾嘗以爲有魏之夷吾, 然未聞君子之大道也, 其死也, 人多惜之.然以孟子論盆成括觀之, 太武殺之雖過, 而浩之死實當, 其亦天惡挾左道誤君之罪, 而假手於史事也歟?宋文帝之見弑於劭, 不在見弑之日, 已在不罪巫蠱之日, 劭之弑帝, 不在於弑之之日, 已在於敢行巫蠱之日, 使文帝正其巫蠱之罪而誅之, 豈有今日之禍? 聖人云"小不忍, 則亂大謀", 宋文有之矣.高允學通天人, 而不彰其能; 忠在匡君, 而不沽其直.訥訥不辯, 而當事敢言; 謙謙自持, 而不畏强禦.信義鄭重, 而不負人於死生之際; 節操彌厲, 而不改度於貧窮之時, 蓋生平所執, 在"誠"之一字, 故無所往而不得其道也.吾以爲如允者, 非徒爲有魏二百年間第一純臣, 亦南北列朝冠冕中, 無雙人物也.沈慶之罷居婁湖, 非朝賀不出門者, 頗强人意, 而胡爲乎尙不忘情? 勢位自昵於子業也, 旣復當國, 亦當思社稷大計, 自盡大臣之道, 又胡爲而知善蔡興宗之謀, 而終不聽也? 其區區以盡忠, 抱忠自誓者, 誠不過爲婦寺之志, 而卒亦見殺, 豈非惑哉?自古帝王家, 例多骨肉之禍, 而未有若晉、宋、齊、梁之尤慘者, 何也? 其亦以簒弑得國, 多行慘酷, 故天以是報之也歟.袁粲之謀敗, 以告褚淵也, 淵之告道成, 報勸己起復之恨也.粲蓋儒雅, 中人謀略, 雖不可强爲, 豈不聞己所不欲, 勿施於人, 是爲恕乎? 起復宜非己之所欲, 胡爲而勸淵乎? 不恕之禍, 至於如此, 烏在其儒雅哉?門房之誅, 夷狄慘毒之法, 魏孝文始罷門房之誅, 一洗惡弊.不幾年, 復成新律, 門房之誅, 多至十六, 豈非所謂先瘳後病者乎? 孝文以賢君稱者, 猶復如此甚矣, 人君徇私悖理之習, 終難得而去也.褚淵之子賁, 恥父失節, 讓爵不仕, 居墓終身.余於是乎深知是非之實, 自有一定之公論, 又以知人樂有賢父兄之爲眞情也."名之曰幽、厲, 孝子慈孫, 百世不能改", 淵有焉,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賁有焉.元魏, 夷狄之國也, 猶禁同姓爲昏, 況以我韓禮義之邦? 國典有明禁, 先賢有定論, 而陋俗未革, 恬以爲常.此士大夫不得辭其責, 而豈不有愧乎元魏乎??父子兄弟, 罪不相及?, 自是天理之當然.李彪以此爲君上厚恩者, 豈非啓人主自私之心歟? 其所云?父兄有犯, 子弟素服請罪, 子弟有坐, 父兄露板引咎?, 亦天理人情之不得不爾者.李彪所請?遭父母喪者, 非有軍警, 聽其終喪.若無其人曠職, 起令視事?者爲未盡.如非國家安危存亡, 繫於其身者, 一切勿令起復, 然後乃合聖王孝治天下之道也.魏馮太后, 主弘之母也.斷以子無臣母之義, 則后之於弘, 恐不當用下殺上之"弑"字, 而朱子之筆如此可疑.【當在袁粲條上】誠於孝思, 謹於喪紀, 余得晉武帝、魏孝文二君, 而孝文終排群議, 斷行三年, 尤可以爲後世人君居喪之法.史稱?孝文之於馮太后, 不憾昔日絶食欲廢信讒杖之之事?, 此則固所宜也.至於酖殺其父之事, 豈可忘諸? 事係以母殺子, 爲其子孫者, 雖不敢如何而依式行喪, 若乃勺水不入口五日, 哀毁過禮, 恐非常情所出, 其故何也? 抑以事在秘密, 故孝文未及聞知歟?元魏賢君誼辟, 往往相繼, 如束髮加帽, 禁胡服胡語, 行三年喪, 禁同姓爲昏之類, 其他嘉法美政, 誠不愧於中華之俗, 非宋、齊、梁、陳之所及.然朱子於《綱目》表年之下, 必先書宋、齊、梁、陳, 而後魏者, 何也? 晉旣先魏而書, 繼晉者宋, 繼宋者齊, 梁、陳因以相傳, 故不得越次先魏, 恐非以其本出於夷狄而貶之也.魏孝文之誠心慕華, 勇於變革, 固可尙也.但至於改姓氏定族姓, 則慕華之實, 不在於此, 且其專重門品, 不拔才能, 失爲政在人之意.旣重之而納其女, 以充後宮, 則非所以重族望也.又爲其弟聘室, 以前妻爲妾媵, 則非孔文子使太叔疾之所爲耶? 是皆名實乖錯, 不可爲法, 豈非慕華之以文, 而不以實者乎?嗚呼! 宋之劉彧立, 而世祖之二十八子皆盡, 齊之蕭鸞立, 而太祖、世祖、世宗之諸子亦盡.所貴乎有國者, 以其本支百世爲王爲侯, 後世之有國者, 適足爲自赤其族之具, 可勝歎哉? 前車旣覆, 後車可戒, 猶且苦行弑逆而得國, 亦獨何心? 噫! 其惑之甚也.齊謝朓之妻, 以朓之告殺其父, 常懷刃欲刺朓.朓不敢相見, 妻若得殺朓, 則其義如何? 左氏所記"人盡夫也, 父一而己"之言, 旣不得爲是, 又不忍忘父, 而事其夫, 則自決之外, 恐無他道.崔偃之爲其父, 上疏請申冤也.齊王寶融旣優詔報之, 而尋收下獄殺之, 何也? 以偃之疏, 哀痛之意不足, 而忿激之氣過勝也.如?先臣之忠, 千載可期, 亦何待陛下屈伸而爲褒貶?之云, 豈爲人主者之所能堪耶? 爲人子而爲親, 訟冤於時君者, 尙可以鑑玆.沈約一生苦心力學, 以成文章, 而究竟所就, 乃勸人簒國弑君.所貴乎學者, 以其立德成身也, 乃蔑倫作賊之至此, 亦獨何心? 余於江南六朝, 得能文而作惡者四人潘岳、陸機、陸雲、沈約, 而潘、陸殞亡, 沈獨富貴者, 所遇不同也.然而沈亦晩得梁主之怒憾, 夢見高帝之斷舌, 憂懼而死, 可見其報也.謝朏之初爲逃竄者, 何意? 一朝詣闕, 取司徒者, 何意? 旣取司徒, 而固陳本志者, 又何意? 旣承不許, 而不省職事者, 又何意? 可謂反覆無狀, 進退無據, 若此者, 欲幷取名節富貴而不得, 只見其小人情狀也.吉翂, 純孝也.辭純孝之名, 而有純孝之實, 斯其所以爲純孝也.若有一毫名心涉於其間, 非純孝也.元魏有立太子殺其母之法, 此眞夷狄之俗也.魏之遵用華俗, 已歷累世, 而至宣武之立子詡爲太子也, 始除此法, 甚矣! 習俗之難變也.或曰?魏廢殺太子母之法, 而卽有胡太后專制亂亡之禍?, 此是適然, 非實際也.法者因天經民義而立焉, 若豫爲禍福, 而立非法之法, 天下事何所不至?魏號胡國珍爲太上秦公, 魏朝群臣之過也.若皆如張普惠之切諫, 太后庶不敢越法自專, 乃希旨取寵, 反詰普惠, 所謂?長惡逢君?者, 皆此類也.魏之停年格, 是埋沒人材之法, 非惟法不可行, 亦行不得者.舍曰升平無事之日, 矧當師旅饑饉之時, 豈得不隨材任用, 而墨守停年之格乎?梁武帝當祭二廟, 而聞左將軍馮道根之訃, 以問朱异吉凶可同日, 异擧衛獻公往哭柳莊事以對, 引此以證.吉凶同日則可, 欲其一一準此則未當.梁主旣出宮, 則是臨祭矣, 非已祭矣.祭畢往哭, 合於禮, 若以柳莊視道根, 則其輕重吾不得以知之.然獻公之不釋祭服往哭, 遂以襚之者, 終涉過當, 不得爲正禮.梁蕭綸之取短瘦類其父者捶之與齊寶卷之束菰爲先帝而斬之者, 同其罪, 當死無疑.而太子諫之, 梁主聽之, 後復有罪, 免爲庶人, 旣而復之, 是愛子徒以小仁而養其惡也.是以卒於侯景之亂, 不救父難, 而奔會稽, 又有如綜之叛背、正德之悖逆而極矣.魏崔楷之爲殷州, 賊逼城, 旣遣幼子一女, 而悔之追還者, 可爲人臣臨亂守城者之法.然當其表乞兵糧而不得也, 何不固辭之任? 而以其身及百口, 置於必死之地, 忠則忠矣, 愚亦甚矣.房景伯母崔氏化貝邱人爲孝子者, 可見人良心之存.然景伯之孝、崔氏之慈, 如有未盡, 豈足以感彼頑悖哉? 千載之下, 想像其母子之慈孝, 令人起敬也.元祐、元孚兄弟爭死, 雖以葛榮之巨盜不仁者, 感其義而俱免其死, 人性之善, 豈不信哉? 爲荀學者, 何苦而爲性惡之論乎?元顥受魏王封爵於梁, 恐當書以梁、魏王顥, 而《綱目》只稱魏王顥, 可疑.蕭寶寅之奔魏, 而欲復宗國之讐也, 不可不謂齊之忠臣.而及其末路, 乃作魏之逆臣而死者, 何也? 讎日遠而易忘, 身日肆而自大, 利欲之念勝, 而義理之心塞也.嗚呼! 一念之差, 人之始終, 忠逆絶判乃如此, 人心誠危險哉.祖瑩引晉文公納懷嬴事, 爲反經合義, 而勸魏主子攸之納肅宗嬪爾朱氏, 胡氏非之是矣.但其云旣已背常, 能合道乎? 及濟經而有權者, 恐合商量.朱子曰?先儒反經合道之說, 程子非之, 然以孟子嫂溺援之以手觀之, 權與經亦當有辨?, 如此立說, 然後爲圓備矣.男女授受不親, 是經常也, 援之以手之時, 豈不爲背常, 亦得爲濟經乎? 然而合道者, 爲此重而彼輕也.蓋反經合道之說, 不分輕重而誤用之, 則其弊無窮, 固可慮也.若又不分異同, 而槪曰權卽經也, 背常非道, 濟經有權, 權非聖人不與, 則豈得爲通論乎? 且道手援其嫂, 必聖人然後用之乎? 且如侍立親側, 固經常也, 有疾病, 則不得不背經常而臥親側矣.不徑不竇, 固經常也, 遇亂離, 則不得不背經常而徑竇矣.病臥親側, 臨亂徑竇, 以其背常, 而謂不合道可乎? 亦豈聖人然後可用此乎? 擧其易見者類推之, 凡事莫不皆然, 特百姓日用而不知也.至於事之難處者, 則學者但患彼此輕重之難分.以其難分也, 故曰?權非聖人不用?, 然旣分之後, 亦不可以我非聖人而不用權也.魏主子攸之追尊所生父爲皇帝, 而入其主於太廟, 前後初有之變擧也.臨淮王彧以外, 擧朝群臣無諫止者, 卽此一事, 而魏室天命之已去, 亦可知矣.顥旣入洛陽, 號令已出, 四方想風, 若能勵精爲政, 思盡內修外禦之策, 誅得爾朱榮, 則雖已不免受制於梁, 猶實其泣請梁朝, 誓在復恥之言.顧乃驕怠自恣, 不恤軍國, 而先謀叛梁, 貳於陳慶之, 卒以自戮, 其本末志計, 皆無足道者也.魏主之得殺爾朱榮幸也.謀泄至再, 其黨屢告, 而榮終不以爲意者, 豈非天奪其魄而酷殺, 幼主朝貴之冥報歟? 然魏主之奮決自斷, 手刃巨賊, 亦可謂英勇, 而足以爲昏弱猶豫, 見戮强臣者法.若乃懲於王允, 而不除爾朱之族, 卒以見弑, 豈非徒知援古, 而暗於時勢耶? 噫! 魏室將亡, 雖有善者, 亦無如之何者, 此之謂也.寇祖仁之殺城陽王徽, 以怨報德, 求賞不得, 而反以取死, 可見報復之有驗.然徽之所以得此於祖仁者, 又豈非雲龍門外見魏主, 屢呼而不顧而去之報歟? 甚矣! 富貴太盛之易禍人家也. 楊播之家世淳厚, 兄弟謙恭, 緦服同爨, 庭無間言.見載朱文公《小學》, 使人欽慕, 顧何如, 而不免夷族於爾朱之亂, 使無三公、七太守、三十二刺史之盛, 安知其不免也??魏趙剛以東荊州歸于魏?, 上魏當作東魏,?魏以侯景爲司空?, 魏亦當作東魏, 此等恐朱子未及照檢處.自庶人至於天子, 未有惡聞其過而不亡者也.梁武帝聞賀琛之諫, 不勝惡怒, 至作勅書而拒之, 護短矜長, 若是張皇.使梁武昏暴也則已, 以其文雅慈善而乃有此, 此可惡也.然昏暴之君, 不過不聽或誅殺而已, 惟其有文雅, 所以有此拒諫飾非之智也.周濂溪先生有曰"今人有過, 不喜人規, 如護疾而忌醫, 寧滅其身而無悟", 梁武有焉.梁武一納侯景, 而生出大亂, 至於喪身危國, 哀哉! 初失於不從謝擧之議, 再失於不聽蕭介之諫, 三失於不許鄱陽王範之請, 而總爲朱异始終誤之於內, 究爲惑於中原, 以地來降之亂夢也, 所以有此亂夢者, 由其平日有混一宇內之慾心也.佛氏之學, 以淸心寡慾爲主者.梁武之篤於佛學, 顧何如? 而尙無所得, 乃若此乎?朱异非惟姦佞弄權, 實助賊誤國之人也.故雖侯景亦請誅之, 雖非眞情, 亦可見异罪之不容也.因是而誅之, 亦足以快臣民將卒之心, 而增奮起之氣, 太子以貽笑止之誤矣.或曰?侯景犯闕, 梁武帝安臥不動曰?自我得之, 自我失之, 亦復何恨?, 見景神色不變曰?卿在軍日久, 無乃爲勞? 夫當危急憤痛之際, 不懼不怒, 安閒如常, 大是難事.蓋其平生學佛不動心之效, 正在於此??, 余曰:?不然.此正見其老黠處.知其無可如何, 而幷無益於怒懼, 故强忍不發.於學佛定心之功, 則初無得力.觀其將死, 心甚不平, 至於流涕, 憂鬱成疾, 可知已矣.?蕭綸像父捶笞, 不救父難, 自稱都督, 是無父無君之人也.乃致書弟繹有曰"社稷危恥, 創巨10)痛深, 骨肉之戰, 愈勝愈酷, 勞兵損義, 虧失多矣"之語.是其篤於倫理, 與前後所爲若非一人, 可異也.如非欺人耳目, 抑亦昏惑暫開歟?蕭綸、蕭正德, 覆載不容之罪人也.當日得逃正刑於其君父, 而終見戮於他人之手者, 天之所以彌彰其罪, 而與天下共棄也.蕭繹之亡也, 焚古今圖書十四萬卷曰"讀書萬卷, 猶有今日惑哉", 人也不知不善讀書, 而自取滅亡, 乃歸罪於書而焚之, 是何異於因饐而死者, 歸罪於食而焚倉廩乎?周冢宰護弑其柱國李遠, 遠之與護同是人臣, 而下"弑"字可疑.如此等處, 往往而有, 是豈盡偶誤者耶? 欲質於知者.齊高演旣身親簒逆, 固不足道.但史稱性至孝, 雖惡人, 固亦有通一條路者矣.旣得所欲, 則宜遵太后勿令濟南有它之訓, 而竟弑之, 烏在其所謂?性孝?哉? 於是幷與一條路窒塞矣.墜馬之致死, 百年之見廢, 豈非其報歟?周武帝之養老乞言, 雖出於好名慕古, 亦後世聳觀之事也.孰謂南北分擾之際, 有此盛擧哉? 于謹之進言, 亦一用聖訓, 言足聽聞.論者雖以無實不貴, 孔子曰"我愛其禮", 吾於周武, 亦云爾.後世善居喪之君, 數晉武帝、魏孝文、周高祖, 而備禮盡制, 最賢周高, 胡氏說信然.蓋此三君性於孝思, 故推之以治天下, 亦以賢君稱.信乎孝者, 百行之源, 而先王之以孝治天下者, 良由此也.太子國本也, 當敎之以正敎, 而不正則易之可也.陳叔寶、周贇俱是不肖子.若陳宣之不能深知其子之惡者, 固不須言, 周武之於贇, 則不可謂不深知其惡, 而猶且不悅於王軌非社稷主之諫, 何哉?甚矣! 齊後主之猜惡也.身親亡國, 得罪祖宗, 而宗室中幸有安德王延宗, 出死力欲保一隅, 以延國脈.而乃冥猂揚言曰"我寧使周得幷州, 不欲安德得之", 曾謂有人心乎哉? 此所以旣亡國, 幷取夷族之禍也.熊安生旣云博通五經, 則當是一時名士, 在齊旣爲國子博士, 則有異韋布矣.若周主來問治道, 而對之則可, 至於掃門待之安車隨去, 則有名有位, 而不念國亡之恥, 而樂事二姓, 豈不愧腹中五經乎?周武之始修朝覲之禮, 自奏以後, 千餘年未遑之事, 當與養老乞言同爲盛擧.蓋其資質便好, 好復古禮, 若使問學知道, 豈不大有可觀哉?漢昌邑王奔武帝喪, 不素食, 霍光數其罪廢之.周主贇居喪之初, 曾無戚容, 捫杖痕罵先王, 閱宮人而逼淫之, 其罪足以見廢而有餘矣.齊王憲是善用兵, 多智略, 得將士心者.且在貴戚之卿, 有易君之義, 而不此之爲, 卒以見戮, 可勝歎哉!王軌之將周武帝鬚, 雖大失人臣禮, 然亦出憂國至情, 而不覺至此.宇文孝伯乃於事過之後, 其君肆虐之日, 發其事, 而贊殺之, 助桀爲虐, 賊害忠良之罪, 孝伯惡得免哉? 宜其死也.?皇后與天子敵體, 不宜有五?辛彦之說, 與《左傳》幷后匹嫡亂之本也之言, 相爲表裏, 足以爲不易定論, 而正得以禮導君之體.何妥之引帝嚳四妃、虞舜二妃, 贊成周贇之立五后者, 長君之惡, 可惡也.嚳、舜雖非一妃, 旣有元次之別, 則豈漫無等分, 而幷皆敵體乎? 奸臣之引古誤君, 每多如此, 諺所謂"識字爲患"者此也.宇文之族盡滅於隋主, 夷族高緯之報也.隋生楊廣而暴亡, 亦豈非滅宇文族之報耶? 曾子曰"出乎爾者, 反乎爾", 聖賢之言, 豈不信哉?子而叛父降敵, 比於臣之背君, 尤罕覯之惡也.隋文不納吐谷太子之降, 不利民殍, 而重人倫, 庶得以孝治天下之一端也.江摠, 誤君亡國之人, 宜與孔範同投邊裔, 袁憲, 陳之忠臣也.今摠不與範同罪, 而與憲同爲開府儀同三司.善惡旣殊, 而褒貶無分, 何以爲人臣之勸懲哉?楊廣爲太子之日, 天下地震, 其警之也大矣.勇得不廢, 而有賢臣而輔之, 則可得延祚矣.嗚呼! 蘇逐亥寵, 而秦國亡, 勇廢廣立, 而隋主斃.此皆政堅之自孼, 復誰怨尤?唐太宗縱死囚三百九十人, 約以明年至, 及期無一人逃者, 皆赦之.相傳以爲美談, 歐陽公則著論而非之.其美之者, 以德言; 非之者, 以法言.若隋王伽之送流囚李參等七十人, 詣京師, 而脫枷鎖, 停援卒, 流人感悅, 如期而至, 帝悉赦之, 則但可美之, 而非可非之者, 何也? 彼則死囚之重, 而此則流囚之輕也.彼而逃, 則失出大辟, 而王法不行, 此則雖逃, 有伽之代囚受罪, 而無損王法故也.吾故曰:"伽則可爲, 而太宗則不可爲也."日永日短, 分於二至, 羲、和曆象不易定法.京房?日行上道下道?之說, 有不足信, 而袁充引此而媚君, 謂開皇以後, 日漸長爲太平之慶, 豈其然哉? 蓋天有定度, 日有定刻.隋之世, 若果日漸長, 於十七年之間, 是天地晝夜幷失常度, 莫曰慶祥, 吾以爲變異之大者.以隋煬帝之富强, 四夷莫不讋服, 而獨倭王遺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蓋其國恃險强悍, 自視無敵, 自古而然, 非直今日而恣橫於東洋也.楊廣弑父烝母, 天地不容之惡, 凡有羞惡之心者, 安忍仕於其朝乎? 餘子不足責, 以牛弘之德量學術, 身爲大官, 安樂終身, 千載之下, 猶使人代慙.是寬厚有餘, 而精明不足之致也.說者每謂我國疆土至狹, 財兵至少, 不足以幷駕列强, 此大不然.在昔高句麗時, 隋文帝發百萬之衆, 來伐見敗, 煬帝發三十萬五千人, 再伐而又敗, 唯二千七百人生還.由此觀之, 制敵之道, 在於治國練兵之如何? 不係國之大小明矣.嗚呼! 疆土不殊, 時運不齊, 感古悲今, 何以爲心?楊廣之罪, 人人得而誅之者, 楊玄感之起兵, 不爲無名.旣已起兵, 則宜擧其弑父烝母之罪, 布告天下, 乘其遠征之會, 擁兵長驅, 扼其咽喉如李密之計, 事或可成, 終無柰.人非其人, 時非其時, 自取下策, 以至滅亡, 豈不愚哉?楊素, 平生多殺立功, 得君信任, 謀廢太子蜀王.間人父子, 大張威福, 殺活在己, 自謂身旣壽康, 子孫世享.孰知厭喪之擧, 已在生前, 焚骨之慘, 復及身後? 而終以玄感誅滅, 殄絶宗祀, 此足爲千古貪權樂勢者之永鑑矣.胡氏責李淵父子起兵不正, 其說是矣.然是擧也, 出於世民, 而不出於淵.淵本無心, 至爲?執汝告官?之言, 則不以計堅其心, 事不可成.且楊廣雖惡, 號令出, 已其勢難犯, 此所以劫父作勅.臣突厥, 尊江都, 立代王, 皆不得免也, 以世民之聰智, 豈不知聲罪致討之爲可憑哉? 蓋是時不爲則已, 爲則勢須如此, 故孟子曰:"行一不義, 而得天下, 不爲." 如此然後, 無許多苟且處, 此豈李淵父子之所可及者?劉文靜實有缺望之言, 足以見盡情不欺之心, 唐主反以作反狀明白之證, 旣失體群臣之意, 而使之缺望.又用奸吏鍛織之習, 置之必死, 他臣尙不容如此, 況首贊大業之人乎? 其亦不仁矣.裴寂碌碌下材, 因文靜大計, 坐成天子僕射, 不思報德, 反事構殺, 狗彘將不食其餘矣.若文靜之不能功成身退, 自取猜毒, 胡氏之言是矣.然此則見識超然者能之, 古今無幾人焉, 文靜雖智, 安能及此?獨孤懷恩, 諒其才志, 非必反者.其反也, 未必非唐主?姑子皆爲天子, 應至舅子?之戱言, 有以啓之也.古人云?天子無戱言?, 豈其無以哉?高祖於世民, 旣語以?立汝爲太子?, 又語以?不能自誅其子, 它日汝取之易?.是世民之殺建成, 高祖豫爲諄諄然敎之也.於是乎高祖爲不父不君, 不仁之大者矣.高祖未嘗傳位, 而稱太上皇, 是出何典? 豈非不安於太子之自專國政, 而有是稱耶? 其促使傳位之情, 不可掩也.太宗與群臣所言, 爲治國之法, 一一皆中於理.雖未能允蹈于身, 所見則不可謂不到底矣, 故余謂《綱目》全部, 惟唐太宗紀可觀.噫! 知君道者, 猶爲私意所蔽, 多所失錯, 而況初不知君道者乎?太宗降宗室郡王爲縣公曰"豈有勞百姓, 以養己之宗族乎", 此公天下之言也.雖其主意所在, 懲於晉、宋、齊、梁, 本弱支强, 禍生骨肉, 而不全出於公心, 然其言不可不表章爲天下後世法.處夷狄於中國, 夸示胡、越一家之盛, 太宗之所欲, 而不知慕虛名而受實禍也.與其處夷狄於內而爲一家, 曷若居吾民於夷狄之地, 漸次拓殖, 皆爲吾土吾民乎? 然中國自有廣地, 而使吾民居夷服, 亦勢所不行, 總不如縱之使還故土如魏徵之策也.但其定名義以覊縻之, 置都督而治敎之, 則切不可虛徐也.張玄素之諫修洛陽宮, 而謂甚於煬帝者, 旣是過當, 太宗之謂何如桀、紂者, 又出激怒.然玄素不以是沮縮, 而益進讜言, 太宗不以是爲罪, 而爲之罷役.嗚呼! 是君是臣, 亦豈非卓難及者哉?非聖人之道, 而凡在異端者, 皆王者之所禁誅, 而況僧、道之遊食病民, 逃親廢祀者乎? 痛闢其敎, 禁之不聽, 則誅之無遺可也.不此之爲, 乃詔僧、道, 使致拜父母, 區區外貌之拜禮, 究無益於出家絶倫, 則是何異於護其根, 而摘其葉也?張蘊古, 以《大寶箴》一文而暴貴, 以救李好德一言而暴死.有是哉! 太宗好惡之無漸也.何不少思乎?國君進賢, 如不得已?, ?國人皆曰可殺, 然後殺之?之訓乎?太宗之縱囚, 是才勝戱劇處, 以死囚爲戱, 此所以不可爲法.權萬紀之言宣、饒銀利, 志在利君, 而不在利民, 其見黜於太宗宜也.且當時四海一家, 中國殷富, 民各安業, 亦無可藉於銀利也.若在貧弱之國, 則不當效顰於此, 而甘自滅亡也.夫掘地采銀, 與耕田得穀、煮海爲鹽, 同爲一類, 何所害理而不爲乎?人主一念之邪正, 天下禍福之所繫甚大, 太宗之以武氏爲才人者, 爲國乎? 爲民乎? 究不過悅其美色之邪念也.噫! 太宗善治之英主也, 孰知夫一念之邪, 自貽亡國之禍胎哉? 嗚呼可不畏哉!太宗之於《氏族志》, 不以先世貴顯, 而以今朝品秩者得之, 而可以懲地望相高之習.然旣定此志, 則數世之後, 今朝品秩, 其不復爲先世貴顯, 而地望之習, 猶夫前乎.人君只當以但取才德, 不取世德, 定爲任官授職之法, 不當與論於此等文字也.王珪爲魏王泰師, 泰先拜, 而珪以師道自居, 房玄齡爲太子少師, 太子欲拜, 而玄齡不敢謁見, 人美其讓.珪之自居師道, 豈敢非之? 幷盡敎誨之道, 則善矣.玄齡之讓師禮, 雖可美, 而其爲師之實不當讓.以泰之窺伺廢斥, 責珪之有其貌而無其敎, 胡氏之論, 似然矣.以承乾之謀反見廢觀之, 玄齡亦幷與爲師之實而讓之歟?太宗以尉遲敬德爲鄜州都督, 而敬德, 武臣也.慮有異心, 故試以人言卿反之說, 而聽其言; 試以以女妻卿之說, 而感其心, 非眞有反說, 實欲妻之也.此機變籠絡之術, 而得行於粗直無識如敬德之人也.封建、郡縣之論, 互相聚訟, 可謂千古未定之案.然竊意所以立君長者, 爲其安民生也, 苟可以安民生, 則不必爭論.二者之間, 要在因時制宜, 可以封建則封建, 可以郡縣則郡縣, 何所不宜? 但法久弊生, 勢所必至, 二者皆然, 又在賢君良輔, 隨弊隨調, 無至於不可用爲妙.周公冢宰也, 管、蔡監殷也, 建成太子也, 世民藩王也.管、蔡啓商以危周, 故周公誅之, 世民以太子圖己而殺之.公私旣分, 事不相類, 太宗乃以己之殺兄, 比周公之事, 多見其不知恥也.封德彛, 無大罪可追誅者, 而只以前日諫廢太子事, 詔黜贈諡, 則太宗之以私殺兄, 雖欲掩飾以公, 得乎?魏徵之誤言杜、侯有相才, 以諫辭示人, 胡得爲大罪, 而乃至於絶昏踣碑乎? 蓋其平日勉從直諫, 而心實惡聞, 故因其失, 而逞憾於旣死之後也歟.君臨大臣之喪禮也, 而情理之不容已者, 太宗將往哭高士廉之喪, 群臣將順之不暇.玄齡、無忌號稱賢臣, 而以邪諱無稽之說沮之, 以至於中道伏臥流涕, 其無識之甚, 甚可笑也.衡山公主三年喪畢而成昏, 于志寧一言大有功於禮敎也.其云?漢文帝立制, 本爲百姓?之說, 但言子女當服三年者, 不在其中, 以明公主當盡三年之禮而已, 非謂漢文短喪之制可遵也.范氏論之, 恐非其情矣.但志寧爲公主謀則得矣, 而不免自身之起復則失矣.豈其愛身不若愛人耶?豺狼猶愛其子, 武昭儀爲離間帝后, 扼殺親生幼女, 眞豺狼之不若也.其於非己出者, 復何所惜? 宜其後來屠李氏子孫殆盡也.高宗之廢立皇后也, 李勣胡爲而勸成之? 孔子不云乎?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太宗以李勣戒高宗曰?今我黜之, 我死, 汝用親任, 若徘徊顧望, 當殺之?, 是何曾有一毫禮意? 不過市道之交也.君旣以市道待臣, 則臣亦豈不以市道待君, 而獨盡其忠乎?以徑事先帝, 殘忍憸毒之武氏爲皇后, 國家之大變, 褚遂良以諫此獲罪, 擧國之所共嗟惜也.劉洎之子乘此時而訟父冤, 欲報之仇, 于斯時也, 謂遂良冤洎, 則必重獲罪, 慮其致死, 謂不冤洎, 則疑其護黨.樂彦瑋之謂?事在先帝, 不當追罪?者, 自是不得不爾之言, 而況劉洎之自比伊、霍, 初非無罪者乎? 胡氏以其意則是, 其言則非, 論彦瑋, 恐非其情也.高宗召上官儀, 議廢武后, 及后之自訴也, 則乃曰"我初無此心, 皆上官儀敎我", 此天下庸懦之主也.士讀經傳, 稍有見識者, 當庸主虐后之朝, 貪其位祿, 而不思退藏, 辜負聖人?無道則隱?之訓, 烏得免侮聖之罪乎? 其及者宜也, 不及者幸也.唐旣以蓋蘇文弑君, 賊而討之, 可謂義師也.其子男生代立, 又爲之發兵, 助殺二弟之役, 此兵當何名? 名之曰?不義之師?而已.武后廢帝改元, 立武氏七廟, 有唐莫大之變.滿朝臣僚, 無一人爭諫, 繼之以死者, 何也? 豈非以高祖、太宗以征伐得天下, 無德澤之入人深者故耶?李敬業之起兵討武后, 足以有辭於天下, 然其心不出於大公正義, 而由於失職怨望.而妄欲身爲天子, 以至戮身亡家, 禍及祖墓, 亦何足道哉? 雖然, 李勣嘗勸高宗立武后, 宜爲其所愛, 而世享富貴, 何至於使其孫失職怨望乎? 又何至於發塚絶嗣乎? 於此可見天道好還之理也.以勣一言之勸而武后立, 酷禍唐家, 天反假手武后, 以禍勣家, 噫其妙哉!武后雖毒戾, 却有才有量.如見駱賓王所製檄文, 略不忿恚, 而曰?此宰相之過也.人有如此才, 而使之流落不遇乎?者, 他人雖欲强爲而不得.此所以籠絡群臣, 置之手下也.武氏改唐爲周, 賜皇帝姓武, 比李敬業時, 又加一層矣.然天下晏然, 文武之臣, 無一人爲唐死節, 非惟武氏之爲戾氣所鍾, 亦見當時人皮裏無血也.餘子無責, 以狄仁傑之賢, 亦屈膝俯首, 而不知恥, 何足道哉? 後雖薦張柬之, 建中興之功, 安得以贖失節之罪哉??數武氏九罪於太廟前, 廢爲庶人, 賜死而滅宗?, 胡氏之論, 當爲不易之言.如以殺其母事其子及臣殺母之人爲難, 則有不然者.中宗承高宗之重, 與高祖、太宗爲體, 武氏得罪祖宗與廟絶, 而不得爲高宗之后矣.不爲高宗后, 則安得爲中宗母乎? 然則揆之於義, 有何所難? 但以有血肉之恩, 中宗不與聞其事, 而事當在中宗復位前, 而不使知之矣.張柬之不聽薛季昶、劉幽求除去武三思之言.而及其勢盛, 無可如何, 則又不自責知見不明, 而乃曰"吾所以不誅諸武者, 欲使上自誅, 以張天子之威", 得非藏拙文過之言乎?韋月將旣云處士, 則何以以武三思潛通宮掖之事, 至於露章, 而犯?不在其位, 不謀其政?, ?邦無道, 其默足以容?之戒乎? 宜其取禍, 而足爲不善讀書者之戒.人皆言?五王之死, 爲不殺武三思之故?, 此誠然矣.其實雖殺三思, 在中宗昏庸、韋后淫虐之時, 以五王之功高勢盛, 難乎其免矣.然則如之何而可也? 成功之後, 託故引退, 若范蠡之泛舟, 子房之辟穀, 則豈不快哉?中宗非惟昏庸, 其殘忍亦甚矣.太子重俊之起兵, 爲誅三思、崇訓, 非有他意, 倉卒不思, 以至犯闕而死.然苟究其故, 皆中宗不能齊家之致也.雖其昏庸不知愧恥, 亦何忍以其首獻太廟, 及祭三思、崇訓之柩, 然後梟之朝堂乎? 殺子以祭他人, 古今天下, 寧有是哉? 噫! 虎狼猶愛其子, 若中宗者, 眞禽獸之不若矣.嗣君以卽位之明年改元, 三代以後達禮也.睿宗之景雲元年、玄宗之先天元年, 皆稱於卽位之年, 斷取先帝上皇之年, 此非禮之大者.我朝之隆熙元年, 斷取光武十一年者, 豈效尤於此耶?韋氏親弑中宗, 自絶臣妻之道, 而甘犯二綱之罪, 廢爲庶人, 而絶葬定陵固也.武氏之九大罪浮於韋氏, 而未有黜廟之擧, 此唐大臣之過也.日食之不應, 安知非曆書之疎, 太史之誤乎? 如非曆史之疎誤, 月避日, 而當食不食者常也.月掩日, 而當食必食者變也, 姚崇賢相也, 而以常爲瑞, 表賀書冊, 啓時君自聖之心, 烏足謂賢哉?唐自高祖至于中宗, 才及四世, 而博士之奏太廟七室已滿者, 以高祖以上有三世也.然高祖、太宗當爲世室不祧之位, 則宜不在世數之中, 而七室尙未滿, 中宗不當遷.至於室數已滿, 則當遷三昭三穆數外之主, 不當遷於三昭三穆數之內.其後玄宗之增作九廟, 而還中宗者, 由不知以高宗、太宗爲世室, 而不入世數中故也.甚矣! 姚崇之謟諛也, 一之而賀日食不應, 再之而賀武后鼎銘, 三之而太廟之壞, 不足爲異, 於是乎大臣之道, 掃地盡矣.其得與宋璟幷稱賢相者, 豈非不倫之擬歟?唐追諡孔子爲文宣王, 是欲尊聖人, 而不知所以尊也.聖人之尊, 固不待位號有無, 且己爲皇帝, 而封聖人爲王, 烏在其尊之之義乎? 但曰至聖先師則足矣, 而此?師?字爲上自天子下至匹庶之師也.如此然後, 可謂眞尊聖人矣.泰伯雖有三讓天下之至德, 周家未嘗追尊爲王, 唐明皇之追諡寧王憲以讓皇帝者, 不免徑情而昧一統之義也.唐自以老子爲其祖, 尊爲玄元皇帝, 享新廟之不足, 而享於太廟, 太廟之不足, 而合祀天地.然其遙遙系統, 旣不可考, 且其尊之之實, 則惑於方士, 而欲求神仙也.於是進不得爲其祖, 退不得爲外神, 祀典無據, 褻瀆雜亂, 莫此爲甚.爲父之妻者, 爲子之母, 不爲父之妻者, 不爲子之母.夫死而嫁者, 與夫絶而不得爲其妻也, 旣非其妻, 則亦非其子之母.而不爲父後者, 猶服朞以生育之恩, 終不可絶也.唐明皇乃令天下服嫁母服三年, 是但知有母, 而不知有父, 禽獸之道也.吾於明皇晩年之悖政, 復何責焉? 特以其初年所定《開元禮》, 得傳于今, 則恐爲後人藉口, 故論之.顔杲卿之迎安祿山, 而受其金紫, 爲圖大事, 而隨時隱忍, 後來忠烈, 固卓卓難及.然論以正當道理, 則其迎其受, 寧死而不可爲也.余恐後世欲圖後功, 而先屈其節, 藉口於此故言.玄宗晩年, 逐張九齡, 相李林甫, 殺三子, 惑楊妃, 寵祿山, 無復人道, 以失天下, 宜其更無餘望.而其勿焚左藏而曰?賊來無所得, 必更斂於百姓, 不如與之無重困赤子?者, 可見一脈生意之猶存也.顚沛之際, 身且不保, 而愛民之仁心, 藹然而發, 此其所以不失民心, 而克復舊物也歟?肅宗卽位, 在天下亂離之時, 爲係人望, 且有玄宗傳位之命, 非可與太宗、玄宗之逼高祖、睿宗同論者.若裴冕諸人, 再請於玄宗而行之, 則名正言順, 終無柰, 上有速成之心, 下有急貴之念, 不免千古之非議, 惜哉!古之人君殺其子者, 自晉獻公、漢武帝以下, 皆因積嫌蓄疑而致.然若唐肅宗之於建寧, 則非惟無嫌疑之可言, 至欲得專征伐, 而忽信張良娣、李輔國之譛而殺之, 曾謂有父子之性者乎?玄宗、肅宗內相忌疑, 而外誇慈孝, 互相加以尊號.有若市井之交, 面膠漆而心燕、越, 豈非千古之笑囮耶? 且玄宗身致大亂, 播越萬里, 肅宗僅復兩京, 而亂尙未已, 有何功德, 可加尊號? 有靦面目, 曾不知恥, 其可笑也已.肅宗信輔國之譛而殺其子, 見制於輔國, 幽其父而不得考終.無父無子, 而只知有輔國, 是千古柔惡之君也.張后旣與輔國謀, 殺建寧王, 而又終見殺於輔國, 豈非天道好還? 《綱目》書之, 不曰弑, 而曰殺, 其或以此也歟? 然皇后自是皇后, 逆賊自是逆賊, 恐不當如此.創業之君追帝父祖, 固法乎周武王.後世入承大統之君追尊所生, 已是非禮, 而況明皇之追諡兄爲讓皇帝, 代宗之追諡弟爲承天皇帝者, 於何有據? 非禮之大者也.且也讓猶當實, 承天則尤無謂, 所謂"不知而作"者, 猶不足以道其妄也.李泌之請贈太子者, 亦非知禮意者也, 太子將以傳位者, 初非可贈於身後之號也.玄宗之岐、薛故事, 旣誤於前, 代宗豈可再誤於後乎?德宗卽位之初, 罷四方貢獻, 又罷梨園, 縱馴象出宮女, 嚴禁宦官求賂.一反代宗之失者, 雷厲風發, 宜若政淸治成, 天下無事, 而及其終也, 喪亂之禍, 甚於代宗之時者, 何也? 孔子曰"以孝治天下", 又曰"三年無改父道, 可謂孝矣".當德宗改父之失也, 無隱忍遷就之意, 而惟己之賢明是顯, 只此一念, 已是薄於其父而不孝也.於所厚者薄, 無所不薄, 行無其源, 萬善皆僞, 烏能治天下哉?後世帝王, 例多尊所生母爲皇太后者, 大是非禮, 而德宗之遙尊沈氏者, 尤屬無謂.辟草萊, 任土地, 不過爲因地之利, 宜若無罪, 而孟子以爲當服次刑.劉晏之理財, 旣裕國用, 而亦不害民, 其功可謂大矣, 而不免誅死, 何也? 以其不爲利民起見, 而爲聚斂起見故也.見在利民, 則其所聚斂者, 亦將以利民也, 見在聚斂, 則雖若利民者, 亦所以聚斂也.其本旣異, 末之所歸, 相去遠矣, 有功無功, 有罪無罪, 於斯乎判矣.堯女嬪虞, 戒以欽哉, 此言當敬執婦道也.自後世尊君卑臣之後, 公主下嫁者, 率多輕其夫子, 傲其舅姑.以至于唐, 舅姑拜之, 婦不答而極矣.德宗始定公主見舅姑之禮, 一如家人之儀, 可謂一洗千古之惡習矣.世稱福祿, 必以郭汾陽爲首, 以其得福祿之非難, 保福祿之爲難也.其仗忠信, 安義命, 使上不疑忌, 下無讒謗者, 非惟天稟然, 亦可謂有窮理之功、學問之力也.如盜犯父塚, 不究使之者, 奏州縣官不得, 而反幸朝廷之不疑者, 是豈終身讀書者之所能易易也? 《詩》云?永言配命, 自求多福?, 其汾陽之謂乎.德宗猜薄無德之君, 奉天一詔罪已責躬, 而人心大悅, 至有感泣者, 而況有道之君, 德修於上, 而敎敷於下, 則人豈有不化者哉? 孔子曰?君子出其言善, 千里之外應之?, 豈不信哉?賈耽得樊澤代己之牒, 內之懷顔色不改, 而宴罷告澤, 與謝安得謝玄捷報, 了無喜色, 而棊罷語客, 同一雅量, 而又加難焉, 何也? 在安則姪子克敵, 順境之喜也; 在耽則幕下圖己, 逆境之怒也.且況安則終不免屐齒之折, 而耽則竟無幾微之色乎? 此等事, 學者時常想得, 則亦可爲弘量之一助也陸贄告君, 無慮累千言, 而其曰?惟不自用, 乃能用人?及?反道爲權, 古今多亂?二語, 最爲純正精切, 非知道者, 孰能與於此哉?代宗之不使宦官典兵, 懲於魚朝恩也.德宗嗣位, 宜鑑前車, 不改父道, 曾不幾時, 復使竇、王二宦典禁兵, 馴致廢立係於閹竪, 國隨而亡, 哀哉!父將爲逆, 其子泣諫而不聽, 則有死而已, 不當以其謀告君, 何也? 君父一也, 告則父死, 不告則君危, 不可一左一右於其間也.李璀告父於君, 而終亦俱死, 曷若不告自死之爲得耶? 胡氏謂德宗特宥其子, 則璀亦可以不死, 此當以不告其父者言.若璀則先告其父, 雖欲不死, 其於不安本心何哉?韓滉之於劉玄佐約爲兄弟也, 旣喩之義, 復遺之財, 使之入朝, 置百口於安穩之地.雖眞兄弟, 何以過此? 後世之朝結兄弟而暮爲仇敵者, 尙可以觀感於此哉!李晟與張延賞釋怨, 而遽薦其才可相, 已不免苟且之嫌, 至於請昏, 則又苟之苟矣.夫以晟之武才, 臨陣對敵, 危亡在卽, 而曾不爲懼者, 見一箇文士張延賞, 惴惴此甚, 何哉? 以其爲小人而方見寵於上故也.雖然, 死生有命, 非苟然之可免也, 使晟而有學有養, 豈至此哉?李泌將卒, 薦竇參、董晉, 而二人爲相不稱, 故人多疑之.然泌謂竇通敏, 而董方正; 史稱竇權數, 而董重愼.通敏一變易爲權數, 重愼之於方正, 亦非相反, 則泌亦見其近可者故爾.但知人則哲, 惟帝其難, 泌雖賢矣, 豈能與此? 若疑其擇不如己者以自顯, 故舍陸贄, 而引竇、董, 則非其情矣.李泌初服, 辭官高隱, 可謂爵祿不入於心者.宜其以此終身, 胡爲而赴靈武之召, 助非義踐位之主乎? 是必不忍唐朝之遽亡, 生民之魚肉, 一出而扶之也, 然則斯可以已矣.其必再出於代宗藩寺專擅之朝, 直至於德宗危亂之世而久不去, 何也? 豈以年老不免在得之累耶? 曰非也.泌亦賢類, 汙不至此.蓋其才智出人, 爲其所使, 雖欲遂初不可得, 寧可少試於此, 救得一半分焉爾? 史稱?好談神仙詭誕?, 泌亦自言?臣少奉道?者, 蓋欲托此以免禍耳.陸宣公之諫諍謀猷不少, 下於魏文貞, 惜乎德宗之非其君, 而不能成太宗之治也.然而宣公非不知其不可, 而不去以取辱, 何哉? 愛君憂國之心勝故也.究其言論本末, 蓋學有所受者, 而獨不講於事君數斯辱之義歟?范氏以陽城, 遏裴延齡相, 救陸贄死, 爲有待而發, 以責城在職久不言者爲不成人之美, 據事而論, 則非不然矣.若據理而言, 則胡氏所謂?登諫司七年, 豈無大事可言? 開悟人君, 必有其漸?者, 自是正論.李渤旣辭官不至, 則斯已矣, 輒論朝政得失, 又何也? 豈非欲一擧而兩得高尙之名、權勢之利者歟?李絳諫憲宗, 以公主尙于季友止曰?虜族庶孼不足以辱帝女?, 不深言事, 非其道, 亦不足恃, 何其不力也? 唐自高祖以來, 世以公主嫁與戎狄, 視爲當然而便成家法, 戎狄且不恥, 況於于氏之爲華人已久者乎? 宜其憲宗之不見聽也.雖然, 唐以婚姻而服戎狄者幾何? 定使以此而得力, 其不可以祖宗之遺體, 作誘招犬羊之餌也審矣, 況未必得力乎? 且夷狄之侵猾, 人臣之叛逆, 求所大欲也, 其肯慕尙主之虛榮而止大欲之實事乎? 其以昏而止者, 亦或所値之適然, 其不足恃也明矣, 絳誠能以此究其本而反覆告喩, 則或可見聽也歟?宰相進賢, 苟其人也, 雖子弟不嫌.而況策試賢良, 何關擧子與朝臣有懿親乎? 李吉甫惡皇甫湜之直言, 託以翰林學士王涯之甥, 而欲罷其上第, 身爲宰相而甘爲小人, 乃如是乎? 吉甫初年釋舊怨於陸贄, 問賢才於裴洎, 若可以爲善類矣, 今焉若此, 後復甚焉, 一何不善變之至此?唐之世, 不惟藩鎭犯上, 而不能討, 以牙將而逐殺節度使者, 踵相接也.非惟不能正其罪, 反以節度之職授之, 蓋名分紊亂, 法綱頹敗, 未有若唐世也.然至於以子弟而幷弑父兄, 遂領軍務者, 獨劉總一人.此萬古之大變, 君臣上下, 未聞有聲罪誅討, 而使得以延命於覆載之間, 是則唐雖不亡, 而實則已亡也.殺人報親讐者, 事發具事, 申尙書省, 集議奏聞, 詳覈其讎之當報與否.其情之是眞是假, 如其當報而眞, 則自當白放, 否則依法處之可也.杖梁悅一百流循州者, 以法以理, 俱爲無當, 而韓愈議中, 酌宜處之, 經律無失之云, 亦恐失之糢糊.天子而婚夷狄, 有唐累世之醜習, 不可使聞於天下後世者也.爲大臣者, 雖未能諫止, 以李絳之賢而忍勸之以故典乎? 噫! 習俗之移人也, 有如是夫.韓文公《佛骨表》眞有補世敎文字, 石徂徠許以天地間正氣者是矣.非惟此也, 其他言論謀猷, 正直切當, 皆足聽聞, 喩下王庭湊一事, 亦大是不易.蓋嘗論之儒門體用不偏之學, 有唐三百年, 惟一人物, 學者當加意尊尙之, 不可以說理未精而忽之也.匹夫之賤, 尙有一妻, 唐憲宗以萬乘之尊, 未除一念之私, 終身不立后而無配匹, 哀哉!用筆在心, 心正則筆正, -柳公權語- 以作字時主一無適言也.若泛以人心之邪正言, 則心之不正, 未有若李斯、曹操, 而俱善書, 此爲不通.射可以觀德行, 亦只以執弓發矢時, 內志正外體直而言.不然, 后羿之簒君, 逄蒙之弑師, 又何也?郭太后之固辭臨朝之請, 而手裂制書者, 固是女中超越之見.至於郭釗, 所謂?若果徇請, 臣請納官歸田?者, 戚里中更難得也, 非郭汾陽謹愼家法之傳, 安能若是?張權輿歷擧古今帝王之有事驪山而致敗亡者, 以諫敬宗之遊幸, 不能回聽, 而反被敬宗之實驗而不信, 孰謂長成君臨者, 曾不若少兒, 而可以此無理之言誘之哉? 多見事君之不誠, 而適恣其遊幸之志也, 夫孰若以誠心正言, 引君當道而已哉?韋處厚諫敬宗曰?先帝以酒色損壽, 臣不死諫, 以陛下年已十五故也.今皇子才一歲, 臣安敢畏死而不諫乎?, 胡氏論之以未免不忠者是矣.蓋處厚此言欲以懇切之辭, 感動上聽也.然諫君之體, 當如古人所謂?陛下縱不自惜, 其於宗廟社稷何?之云, 豈可區區以嗣子長幼爲憂, 若匹庶家事哉? 烏得免獻媚好聽, 而陳諫不忠之過耶?裵度世所稱賢相也.於敬、文之際, 君弑不得討賊, 君立不得豫謀, 則似可以託疾而去矣.乃復得爲冢宰於宦官之手, 烏在其爲賢耶?劉蕡對策切直而見屈, 諫官欲論奏, 而執政抑之.李郃以擧子中一人, 爲之上疏訟屈, 至云?回臣所授, 以旌蕡直?, 彼執政之裴韋輩, 視此能無愧乎?李絳相業, 甚有可觀, 後乃見逐不去, 以至爲節度使, 而死於宦寺之手, 雖曰?非懷祿忘身?, 吾不信也.唐代列主冒受尊號, 便成家法, 吾嘗疑其皆無羞惡之心.獨文宗不受, 秉彛罔墜之言, 豈不信哉?方仇士良誅戮宰相, 氣燄可畏之際, 鄭覃、李石猶以不知訓、注, 始因何人得進之一言, 稍屈宦者, 搢紳賴之.若能於平日, 宰相以正言直道, 漸次排抑, 豈至使勢燄滋熾, 無所不至乎?唐文宗自言?朕受制於家奴, 殆不如赧、獻?, 因泣下霑襟, 可謂自知其病, 而不能攻其病者, 何也? 天質柔弱, 不能自勝故也.至於構害太子, 豈不知其爲楊賢妃所使, 而罪劉楚材、張十十之徒, 如胡氏之說哉? 雖知之以其柔弱故, 無如楊妃何也.蓋天下之自苦楚可痛哭者, 莫如柔弱, 故聖人論六極, 以弱終之, 論學問, 以雖柔必强爲貴.李德裕?正人一心事君, 至於邪人競爲朋黨?之云, 未知其意, 豈非有爲而發耶? 不然, 邪人固競爲朋黨, 而正人獨不互相推進乎? 立言當如歐陽公《朋黨論》, 然後方爲不易.維州取舍, 牛、李是非, 以心則李出爲國, 維本唐地, 當取維而是李.以義則牛主守信, 以事則彼怒可慮, 當舍維而是牛.二者竟是孰是? 有一說焉.以信則彼先有魯州之渝盟, 以慮則彼未必三日直至咸陽, 而在唐亦當有備, 以心則牛未必爲國, 而或出於反李, 以此論之, 二人是非可見矣.唐世牛、李之爭, 爲千古是非, 而說者謂因維州事, 而非其本實.從前李德裕、李宗閔有宿嫌深怨, 而牛爲宗閔黨, 又於此事異論, 故說者云然.然其實當曰?唐有二李之爭?.唐武宗以崔鉉同平章事, 夜召學士二人而草制, 使宰相、樞密皆不之知者, 忌宦官聞之而立異也, 唐世宦官勢燄之盛可想也.郭誼敎劉稹爲逆, 及其力屈, 又賣稹求賞, 李德裕?此而不誅, 何以懲惡?之言, 確不可易.司馬公亦謂?始則勸人爲亂, 終則賣主規利, 其死固有餘罪?.言至於此則已矣, 乃復云?殺降非信, 免死可矣?, 何其自相矛盾也? 吾不知其所謂?信?者, 果何信也.唐宣宗卽位初, 親弑太后, 而無一人仗義討罪, 使之安享大位, 至得小太宗之號.吾於是竊歎小善之易以欺人, 又疑天道之時或無知也.雖然, 人難終欺天, 竟彰罪宜正, 宣宗弑母之罪之正論, 昭揭於史氏之筆.吾於是又以知脫一時之討易, 免萬世之誅難.帝王家以承統先後爲世次, 不計昭穆禮也.故魯躋僖於閔, 孔子以爲?逆祀?.李景讓敢以拜兄拜姪之說, 請宣宗出穆、敬、文、武四主於太廟, 拜姪雖曰?不可", 先君亦可不拜乎? 景讓借曰?無識?, 位至大臣, 豈不聞此等禮義? 特爲此承奉之言, 以媚君也, 其罪當以不敬先君論之也.軒轅集對唐宣宗長生可學之問曰?王者屛欲而崇德, 則自受遐福, 何處更求長生?, 此眞有道之士之言也.以此而可謂之道士, 非一種煉丹吸氣之道士也.意者有學有守之士, 見世道之汙濁, 恐爵祿之逼身, 托此而自高歟.唐懿宗痛同昌公主之卒, 殺醫官二十餘人, 收其親族三百餘人繫獄, 非但以溺愛不明論, 直謂之無人理可也.仕其朝者, 宜思求退免禍之道, 而溫璋身非諫官大臣, 而力諫而犯其怒, 至於貶謫, 而仰藥自盡, 生旣不得明哲, 死又不得正終.哀哉!懿宗迎佛骨至京師曰?朕生得見之, 死亦無恨?, 至降樓膜拜, 流涕霑臆.不數月, 帝果崩, 豈非死期將至, 換易心性之言讖耶?高騈恐諸道兵之分其功, 乃奏賊不日當平而悉歸之, 以致賊勢鴟張, 終陷京師.此非只知有身, 而不知有國者乎? 其罪宜死也.他日見戮亂軍之兆, 已著於此矣.高騈初年, 破賊立功, 頗不草草, 後落於呂用之妖魔手中, 漫不醒神, 何也? 蓋其死兆已見於猜功遣兵之日, 而至是則天已奪其魄矣.李克用有大功於唐, 而張濬爲逞宿憾請討, 以致喪亂, 此亦知身不知國之罪也.其貶爲繡州司戶者, 猶不足以懲惡矣.濬以士子納閹寺, 以至貴顯, 本原如此, 復何足責? 所可痛者, 唐以垂亡之勢,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乃簡此等人, 備位宰相, 非所以促其亡者乎?柳玭戒其子弟曰:?門地高者, 立身行己, 一事有失, 則得罪重於他人, 死無以見先人於地下.故膏梁子弟, 學宜加勤11), 行宜加勵, 僅得比他人.? 余謂非惟高門之膏梁子弟爲然, 儒門之詩禮子弟亦然而有加焉.唐昭宗旣不聽杜讓能之諫, 而强任之以討李茂貞.及其敗, 而茂貞有言歸罪於讓能而殺之, 天下寧有是哉? 雖然, 讓能不知仕於亂世, 爲取禍之道, 而不奉身早退.人無遠慮, 必有近憂者, 豈非此乎?方王行瑜、李茂貞、韓建擧兵犯闕之時, 昭宗詰?以卿輩, 稱兵入京, 其志欲何爲乎?, 王、李至於汗流不能言.天子之威, 可畏如此, 若能於平時, 自强不失威福, 則藩鎭雖强, 安得鴟張若是乎?李克用之討三鎭也, 韓建登城懇乞, 茂貞懼慙, 因以進軍勢, 可以蕩平, 胡爲乎赦韓、李, 而但討行瑜, 終致韓之殺王子十一人, 李之再擧犯闕耶? 此固昭宗不明之過, 而亦爲克用之失策, 信如胡氏之說也.溫公宦官論切中事理, 但其云?寺人之官所以謹閨闥之禁, 通內外之言, 安可無也?, 此恐不然.苟以謹閨闥通內外爲不可無, 則婦人童子獨不可任此事, 而必以刑餘賤類, 侍側至尊, 然後乃可乎? 要之永去宦官, 幷廢其法, 可保無禍矣.匹夫而貴爲天子, 天下之人, 宜其慶賀, 一家之人, 有不須言.朱溫之僭號也, 其兄罵之曰?汝本一民.天子用汝, 爲四鎭節度, 富貴極矣, 柰何滅唐家三百年社稷? 他日得無滅吾族乎?, 則斧鉞已在家庭, 天下人之誅討, 又不待言, 哀哉! 此輩貪於一時富貴, 甘爲萬世罪人, 何其迷哉?唐之藩鎭, 惟李克用不渝臣節, 終始如一, 不免前日一時之不遜, 以朝廷處置未當, 不足追誅.其曰?誓於此生, 靡敢失節?者, 語出肺腑, 可質神明, 當時諸鎭聞此, 能不愧哉?張宗奭之子繼祚, 不勝梁主徧亂其婦女之恥, 欲殺之.宗奭止之曰?吾家頃在河陽, 賴其救, 我得有今日, 此恩不可忘?, 其言可笑.使繼祚因是得以殺之, 則是爲爲唐天子報仇, 而亦足以彰義聲於天下, 其父乃以恩不可忘止之, 豈非賣婦女, 以報恩者歟?蜀主王建殺劉知俊曰:?吾老矣, 非爾輩所能馭也.與其若是, 曷若推腹心以待之, 使之感恩, 盡忠於後日乎?? 忌賢嫉能如此, 宜其一傳, 而見滅於人也.?內無怨女, 外無曠夫?, 公劉王業之基也.蜀主宗衍乃奪民女之將嫁者, 使其夫一慟而死, 見滅於人亦宜哉!蘇循贊成朱溫之簒唐稱帝者也, 豈可謂唐舊臣哉? 李存勖之得循也, 正其罪而誅之可也.乃喜其萬歲之呼, 畵日筆之獻, 命爲河東節度副使, 何以服天下之心哉? 宜其不能統一區宇而成王業也.存勖討唐之簒賊而得天下, 求其十分道理, 則當求唐之遺裔而立之.雖自爲之得於梁而不得於唐, 人誰有非之? 存勖不識此, 而猶欲藉唐之舊臣, 而護惜蘇循輩可笑.五代之世, 惟存勖得國最正, 其號後唐, 亦足聽聞.然其尊所生母爲太后, 嫡母爲太妃者, 循私滅禮, 得罪聖人大矣.終無柰夷狄種類不識禮義故歟.甚矣! 王家之猜疑兄弟也.梁主瑱爲唐所滅, 奔竄死亡之日, 猶疑諸兄弟, 乘危謀亂, 盡殺之.是性命垂盡, 而先絶手足也, 曾謂有人心乎哉? 史稱梁主爲人, 溫恭儉約, 無荒淫之失, 吾不信也.溫鞱發唐諸陵者也, 段凝黨奸亡國者也, 罪不可赦.莊宗只殺敬翔、李振等數人, 而不及溫、段, 何其偏也? 至於明宗, 而始殺之, 雖失之晩, 終不失正矣.狎於水者, 溺死於水.莊宗褻狎伶人, 無所不至, 其見弑於伶人宜哉!因功因降, 而輒賜姓名, 於禮無據, 於情不實.姓者得自祖先, 名者命自其父, 厚之以祿, 貴之以官, 何所不可? 而必改其得自父祖之姓名, 然後爲親愛之乎? 此風唐末以後尤甚, 而至明宗始革, 使已改者, 幷復其舊, 此爲得之.契丹之述律后集諸酋長問曰?汝思先帝乎?, 對曰然, 曰?果思之, 宜往見之?, 遂殺之.又謂左右桀黠者曰?爲我達語於先帝?, 至墓則殺之, 此爲嗣子幼弱, 强臣可畏而然.然述律生平謀略, 實女中英雄, 制馭弱臣, 豈無其術, 而甘爲此殘酷, 然後濟事耶? 眞戎狄惡俗也.?惟辟作福, 惟辟作威, 臣之有作福作威, 則害于而國, 凶于而家?.後唐之安重誨自矢以死徇國, 至執二子表送詣闕, 終不免死, 非其罪宜若可冤, 然反顧平生, 多作威福, 則有之.此取死之道, 豈非所謂?凶于而家?者乎?後唐明宗, 每夕焚香祝天, 願天生聖, 此何等公心? 推此而充之, 不必別求生聖, 卽此可爲聖人而成至治, 卒不至然者, 以大道之未聞, 輔相之非人也.噫! 明宗以後, 安得復見此人此心於帝王中乎?薛文傑改造檻車, 極其嚴密, 而首自入焉.與商鞅所歎爲法自斃, 同一奇事.可見好還之天, 而後世小人, 猶不知悟, 哀哉!石敬瑭, 固唐之逆臣, 而其於契丹, 稱臣之不足, 至於稱子, 亦爲中華歷代帝王之罪人也.五代之君, 俱不得爲正統, 固也.至於石晉, 又是契丹所立, 則不可謂中國之君也.孟子曰:?趙孟之所貴, 趙孟又賤之.? 石晉旣爲契丹所立, 則宜其終爲契丹所亡也.契丹述律后自指其心曰:?此不可欺也.?近日之冠帶而學道者, 肆行欺誣, 而甘爲天下之罪人者, 更有之, 噫! 華而儒者, 反不如戎狄之一女子乎?周本爲其子所强, 雖勸進於齊, 後以不能存吳, 至於愧恨而死, 哀哉! 豈非剛德不足, 以致失節者乎? 故在《易》之道, 失於柔者多, 失於剛者少.近世人家, 冒附顯族, 換父易祖者, 不勝其多, 是爲莫大之變, 意謂世降俗末故也.今見南唐主李昪命有司, 考二王苗裔, 以吳王孫禕有功, 遂祖吳王, 使有司又撰其父以上五世之名, 李昪雖不足道, 亦是王家.五代雖季世距今千餘年, 在昔王家, 已有此事, 又何足怪乎今日遐陬無知者流乎?景延廣之謀伐契丹也, 不度時量力, 以至亡晉, 爲天下笑固也.然若主攘外之義, 而絶約自强, 而無愧於心, 則雖至亡國, 猶有可說.乃依舊稱翁稱孫而曰?有十萬橫磨劍, 足以相待?, 天下焉有待翁以釰之孫乎? 此又重可笑也, 以謀以義, 俱無所當, 命之曰狂妄可矣.余於五代之間, 得無恥長惡者一人曰宋齊丘也.徐誥受禪之議, 不自己發, 而爲周宗等所先, 則遂爲異議而不署表, 欲以爲名.異議不行, 時局旣變, 則愠不豫政, 抗聲天陛, 還家請罪.終不得改命, 則請遷讓皇絶昏楊璉, 欲以此爲功, 而不見從, 則斯可以知止矣.乃貪權不去, 竟欲傾謟周宗, 爲唐主所薄而遣歸.猶不知罪, 大治第舍, 憤邑尤甚.後復爲太傅, 養成羽翼, 竟謀簒竊放置, 九華自縊而死, 此等人, 余疑其無羞惡之本心也.罪當早誅, 不待簒竊, 而唐主猶不忍正法, 使身首異處, 失之厚矣.晉出帝出塞, 契丹令拜阿保機墓, 不勝屈辱, 至於泣下, 此見秉彛不泯處.然前旣稱孫, 則何辱於拜墓乎? 使今日恥辱之心, 早發於前, 則其改孫稱也必矣, 惜乎其未也.智哉! 李肅妻張氏也.肅但知趙思綰之必叛, 至於不納而未能防後患.張氏厚遺金帛, 以慰其心.旣而思綰反, 肅但知其亟來見汙, 至欲自殺, 而不能敎之自新.張氏勸肅, 說思綰改圖歸國, 使家國無禍, 可不謂之智乎? ?有智婦人, 勝於男子?, 信哉斯言也.漢隱帝之亡也, 《綱書》云?郭威擧兵反, 遂殺其主承祐?, 《目書》云?漢主入民家, 爲亂兵所殺?, 《綱》與《書》弑殺, 不同此書凡例.目不必一一有義, 綱則一字不放, 揆以朱子《春秋》之義, 目雖書殺, 綱當書弑.今目則書弑, 而綱反書殺, 何也? 然以湘陰公死亦下?弑?字觀之, 則疑板本之誤也.北漢劉崇, 高祖之弟, 隱帝之叔, 湘陰公之父.其稱帝也, 有名而正, 如蜀漢之系漢統也.竊意《綱目》年條下, 當先書北漢, 以居漢之故處, 周則書於其下矣.不然而周居先, 而北漢居諸國之末, 此亦可疑.周之王殷, 恃功專橫, 應用勅處分者, 殷以帖行之, 只此一事已是無君之罪矣.以太祖之威靈, 聲罪致討, 有何所難? 而胡至於因朝執之, 誣以非罪而殺之? 太祖雖以簒得國, 於爲君之體, 却自有見, 而今於此事, 甚不滿人意, 豈其疾病所困, 不免應事之顚錯歟?余平生最所深惡者, 馮道也.朝臣唐而暮僕晉, 今仕漢而明事周, 曾不以爲恥.其於易姓之際, 又先爲勸進, 而爲其地, 此更可惡也.譬之女子, 其猶人亡夫家, 而先迎其人以爲夫, 此夫又爲人亡, 而又復先迎而夫其人也, 而如是者累矣.所可道也, 言之醜也, 所可誅也, 天地不容.其惡易知, 其罪易見, 獨怪夫范質之稱以厚德宏才偉量, 朝代遷貿, 人無間言, 而極口贊揚也.得非以已亦失節, 故爲私所蔽, 而不見其惡歟? 抑以所見如此, 故不免失節歟? 雖然, 從古以來, 失節者何限? 特未有若道之歷事五姓, 行同犬彘者也.周世宗, 不可不謂明主也, 然王得中、孫晟, 忠節之士也, 而終殺之.孟德卿, 罪不至死, 而賜死曰?欲以懲衆?.以此觀之, 鳥足謂明哉? 由其如此, 不能盡服天下而成王業也.世宗詔群臣, 極言得失, 而曰:?言之不入, 罪實在予, 求之不言, 咎將誰執.? 言由中出, 誠意可掬, 其得明主之稱者, 其在此類歟. 예양(豫讓) 전국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신이 모시던 지백(智伯)을 조 양자(趙襄子)가 죽이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자객이다. 《史記 刺客列傳 豫讓》 위 문후(魏文侯)가……파기한 위 문후가 우인(虞人)과 사냥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약속한 날이 되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위 문후는 신하들과 술을 마시다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우인을 찾아가서 약속을 파하였다. 《資治通鑑 卷1 威烈王23》 섭정(聶政) 전국 시대 한(韓)나라의 자객(刺客)이다. 한나라 재상인 엄수(嚴遂)가 정승 협루(俠累)를 죽이기 위해 황금 100일(鎰)로 섭정을 매수하려 하자, 섭정은 모친이 계신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모친이 죽은 뒤에 엄수를 위해 협루를 죽이고 자살하였다. 《史記 刺客列傳 聶政》 사람이……밝다 《송사(宋史)》 권314 〈범순인열전(范純仁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위앙(衛鞅) 상앙(商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이라고도 한다. 춘추전국 시대 위(衛)나라 출신으로, 진(秦)나라 효공(孝公)에게 등용되어 법가 사상에 기반한 대개혁을 시행함으로써 후일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기반을 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엄격한 법치주의 통치로 원한을 많이 사 효공이 죽고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자 반역죄의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동주(東周) 주(周)나라 평왕(平王)부터 난왕(赧王)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가리키는데, 주 평왕(周平王)이 낙양(洛陽)에 도읍하여 동방(東方)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시작이…드물다 《시경》 〈탕(蕩)〉에 보인다. 종횡(縱橫)의 술수 종(縱)은 소진(蘇秦)이 주장한 합종술(合縱術)로 산동(山東) 육국(六國)이 힘을 합하여 진(秦)나라를 막자는 것이고, 횡(橫)은 장의(張儀)가 주장한 연횡술(連橫術)로 육국을 설득하여 진나라를 섬기게 하는 것이었다. 맹자(孟子)가……때문이다 경춘(景春)이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가 참으로 대장부라고 하자, 맹자가 이 두 사람은 순종을 정도(正道)로 삼았으므로 이는 첩부(妾婦)의 도(道)이기 때문에 대장부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연(燕)나라……말인가 연나라 임금 쾌(噲)는 전국 시대 연 역왕(燕易王)의 아들인데, 소진(蘇秦)의 아우 소대(蘇代)의 계략에 빠져 자지(子之)를 정승으로 삼고 그에게 정사를 이양한 다음, 자신은 도리어 신하가 되었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았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만승(萬乘)의 나라'는 보통 천자의 나라를 일컫는데, 여기서는 병거(兵車) 일만 대를 갖춰낼 만한 힘을 가진 대국(大國)을 말한다. 명예를……있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보인다. 초(楚)나라……권한 진(秦)나라의 소양왕(昭陽王)이 초나라를 공격하자, 두려움을 느낀 초 회왕(楚懷王)은 무관(武關)에서 만나 맹약을 맺자는 소양왕의 서신을 보고 진나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때 굴평(屈平), 즉 굴원(屈原)이 "진나라는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나라입니다. 갔다가는 절대로 돌아오시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였으며, 상국(相國)으로 있던 소저(昭雎) 역시 그에 동조하였다. 그러자 회왕의 작은아들인 자란(子蘭)이 "진나라와 초나라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라 이보다 더 친한 나라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가기를 권하였다. 이에 회왕이 무관으로 갔는데, 진나라에서 회왕을 억류함에 따라 초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진나라에서 죽었다. 송(宋)나라……권한 이약수(李若水)는 북송(北宋) 휘종(徽宗) 때의 충신으로,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1127년에 금나라가 재차 침입하여 청성(靑城)에 주둔하고 있을 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행차를 권유하며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호종하고 갔다가 흠종의 폐위에 반대하여 굴하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宋史 李若水列傳》 공천(孔穿) 전국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고(子高)이다. 공자의 후예로 초(楚)ㆍ위(魏)ㆍ조(趙) 세 나라에서 모셔가려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왕촉(王蠋)은……세웠고 왕촉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충신이다. 왕촉이 처음에 왕에게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농사지으며 살았다. 연(燕)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쳐서 함락할 때 왕촉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장수로 삼고 만가(萬家)의 고을을 봉해 주겠다."라고 제의했으나,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며 거절하고 목매어 죽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왕손가(王孫賈)는……갚았으니 왕손가는 제나라 민왕(湣王)의 신하이다. 민왕이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자 왕손가는 시장에 들어가 요치를 토벌할 것을 말하고는 이에 찬동하는 사람은 "오른팔을 걷어 올리라."라고 하니, 따르는 사람이 4백 명이었다. 왕손가는 이들을 데리고 요치를 공격하여 죽이고 민왕의 아들을 세워 제나라를 구하였다. 《戰國策 卷13 齊策》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와 지조를 지키며 편안히 처신함을 이른다. 《서경》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인 미자에게 "자정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先王)에게 뜻을 바칠 것이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악의(樂毅)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장수이다. 소왕(昭王) 28년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조(趙)ㆍ초(楚)ㆍ한(韓)ㆍ위(魏)ㆍ연(燕) 다섯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제(齊)나라를 토벌하였다. 수도 임치(臨淄)를 함락시키고 5년에 걸쳐 70여 개 성을 수중에 넣어 이들을 모두 연나라의 군현(郡縣)으로 소속시켰으며 제나라의 재보(財寶)를 연나라로 옮겼다. 혜왕(惠王)이 즉위한 후 제나라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조나라로 달아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史記 樂毅列傳》 제갈무후(諸葛武侯)……견준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보인다. 자순(子順) 전국 시대 때 위(魏)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6세손인 공빈(孔斌)의 자이다. 처음에 위왕의 부름을 사양하였으나, 사신의 간곡한 청으로 위나라에 가서 치세를 이루었다. 《資治通鑑 卷5 周紀》 출처(出處)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거나 집에 물러나 은거함을 이른다. 노중련(魯仲連)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이다. 위(魏)나라 신원연(新垣衍)이 무도한 진(秦)나라를 황제로 받들자고 하자, 이를 허락하지 않고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으리라는 기개를 보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채택(蔡澤)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변사(辯士)로, 사방에 유학하고 여러 국왕에게 유세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자 진(秦)나라에 들어가 당시 재상이었던 범수(范睢)를 설득하여 그의 소개로 객경(客卿)이 되었다가 곧 재상이 되었다. 《史記 卷79 蔡澤列傳》 모초(茅焦)가……없었다 모초는 진 시황(秦始皇)의 신하로서 제(齊)나라 사람이다. 시황의 모후(母后)가 노애(嫪毐)와 사통(私通)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에 노애가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자 시황이 그를 잡아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모후를 부양궁(萯陽宮)으로 옮기고 나서, 태후(太后)의 일을 거론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로 간언을 올렸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이미 27인이나 되는 상태에서, 모초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올린 다음 옷을 벗고 죽음을 기다리자, 시황이 비로소 깨닫고는 태후를 다시 감천궁(甘泉宮)으로 모셔 오는 동시에 모초를 상경(上卿)으로 삼았다. 《史記 秦始皇本紀》 노애(嫪毐) 진 시황(秦始皇)의 모후(母后)인 장양태후(莊襄太后)의 정부(情夫)인데, 환관으로 들어와 장양태후와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고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졌으나, 뒤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족멸되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형가(荊軻) 전국 시대 위(衛)나라 자객이다. 연(燕)나라의 객경(客卿)이 된 후 연나라 태자 단(丹)을 위해 번오기(樊於期)의 머리와 연나라 곡창지대 독항(督亢)의 비밀군사지도를 가지고 진(秦)나라로 가서 진왕(秦王)을 척살(刺殺)하려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장량(張良) 한(漢)나라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차지하게 한 인물인데, 이전에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사를 시켜 박랑(博浪)에서 진 시황에게 철퇴를 던져 저격하게 하였는데 실패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부소(扶蘇)와……때문이었다 부소는 진 시황(秦始皇)의 맏아들로 성품이 인자했으나, 진 시황의 노여움을 받아 북쪽으로 보내져 장군 몽염(蒙恬)의 군사를 감시하게 되었다. 진 시황이 죽자 간신 조고(趙高)가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진 시황의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태자로 삼고, 부소에게 거짓 조서를 내려 변방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과 글을 올려 비방한 것을 논죄(論罪)하며 자결할 것을 명하자, 조서를 받은 부소는 조서의 내용이 거짓인 것 같다는 몽염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몽염은 진(秦)나라의 장군으로,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고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나, 시황(始皇)이 죽은 뒤에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丞相) 이사(李斯)의 흉계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通鑑節要 卷3 後秦紀》 역생(酈生) 유방(劉邦)의 참모이자 세객(說客)으로서 한(漢)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왕(齊王) 전횡(田橫)을 만난 역생은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漢)에 투항하기로 한 제(齊)는 한군(漢軍)에 대한 방어 태세를 풀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한신(韓信)은 역생의 공을 시기하여 밤에 평원(平原)에서 강을 건너 역하(歷下)를 점령하고 제(齊)의 도읍인 임치(臨淄)로 쳐들어왔다. 한군의 공격 소식을 들은 전횡은 자신을 속였다고 분개하여 역생을 솥에 삶아 죽였다. 《史記》 〈酈生陸賈列傳〉 나에게……바란다 초한(楚漢) 쟁패기에 팽월(彭越)의 공격으로 양식의 곤란을 겪은 항우가 높은 도마를 만들어 유방의 아버지를 그 위에 올려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유방은 "내가 항우와 함께 신하로서 회왕(懷王)의 명을 받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으니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다. 꼭 너의 아버지를 삶겠다면 나에게도 국 한 그릇을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吾與項羽俱北面受命懷王, 曰約爲兄弟, 吾翁卽若翁. 必欲烹而翁, 則幸分我一桮羹.〕"라고 한 적이 있다. 《史記 項羽本紀》 정공(丁公) 항우(項羽)의 무장(武將)인 정고(丁固)로, 전쟁터에서 패하고 쫓기던 한 고조 유방(劉邦)을 살려 준 일이 있었다. 한 고조는 천하를 평정한 뒤에 항우의 신하로서 충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정공을 목 베어 죽였다. 《漢書 卷37 季布傳》 노(魯) 지역의……않은 것 한 고조(漢高祖)가 숙손통(叔孫通)을 시켜서 예(禮)를 제정하게 하여 숙손통이 노 지역의 유생들을 불렀다. 이때 두 유생이 부름에 응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예악(禮樂)은 덕을 쌓은 지 100년이 되어야 일으킬 수 있다. 지금은 전쟁이 겨우 끝나서 죽은 사람의 장례도 아직 치르지 못하고 상이(傷痍)한 사람이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무슨 예악인가." 하였다. 《史記 卷99 叔孫通列傳》 장오(張敖)는……폐위되었고 유방(劉邦)이 대(代)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진희(陳豨)를 토벌하기 위하여 조(趙)나라 땅을 지나갈 때 조나라 왕 장오(張敖)가 예의를 다하여 받들었으나 무례하게 대하며 꾸짖자, 조나라의 승상인 관고가 조오(趙午) 등과 함께 고조를 살해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자 조오 등은 자결하고 관고만이 체포되었다. 관고가 조나라 왕은 결코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혀, 왕은 풀려났으나 폐위되고 선평후(宣平侯)로 좌천되었다. 《史記 田叔列傳》 팽월(彭越)은……되었다 팽월은 한나라 고조(高祖) 때의 무신으로, 원래 항우(項羽)를 섬기다가 한나라에 귀순하여 크나큰 공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같은 개국 공신인 한신(韓信)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모반죄로 몰려 폐서인(廢庶人)되었고, 결국에는 낙양(洛陽)에서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史記 卷90 彭越列傳》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 진 시황 때 진(秦)나라 장수로 남해(南海) 용천령(龍川令)으로 파견되었다가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를 틈타 계림(桂林)ㆍ상군(象郡)ㆍ남해를 병합하여 남월(南越)을 세우고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하였다. 한(漢)나라 여후(呂后) 때 독립하여 칭제(稱帝)하고 한나라와 대립하다가 문제(文帝) 원년(기원전179)에 제호(帝號)를 없애고 신종(臣從)하는 조건으로 강화하고 나라를 유지하였으나, 무제(武帝) 때 멸망되었다. 《史記 卷113 南越列傳》 하동(河東)은……것이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하동 태수(河東太守)인 계포(季布)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려고 불러들였다가, 그가 술주정이 있어 가까이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경사에 머물게 한 지 한 달 만에 도로 하동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계포가 문제에게 나아가 불만스러운 뜻을 나타내자 문제가 부끄러워하다가 한참 만에 "하동은 나의 팔다리와 같은 고을이므로 특별히 그대를 불렀을 뿐이다." 하였다. 《史記 卷100 季布列傳》 상국(相國)을……것이다 한나라 고조가 천자의 정원인 상림(上林)의 버려진 땅을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하도록 청원한 승상 소하(蕭何)를 형틀에 매달았다가, 왕의 위위(衛尉)가 간하자 소하를 석방시키면서 "상국이 백성을 위해 한 일을 내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나는 걸주 같은 임금일 뿐인데 상국은 어진 재상이다. 내가 일부러 상국을 묶어 백성으로 하여금 나의 잘못을 알게 하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가의(賈誼) 한 문제(漢文帝) 때의 문신으로, 흉노의 변경 침입 및 제후의 발호로 인한 국가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였다. 그 상소에서 가의는 시사의 문제점을 통곡할 만한 일 하나, 눈물 흘릴 만한 일 둘, 장탄식할 만한 일 세 가지에 대한 대책 여섯 항목을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문제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漢書 卷48 賈誼傳》 칠국(七國)의 화란(禍亂) 한 경제(漢景帝) 때에 오(吳)ㆍ초(楚) 등 칠국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조조(晁錯)가 제후왕(諸侯王)들의 봉지(封地)를 삭감하려 하였는데, 그를 반란의 원인 제공자라는 이유로 참형(斬刑)하였으나 반란은 그치지 않자 주아부(周亞夫) 등 장군을 보내 난을 진압하고 오왕(吳王)을 참수하자, 다른 제후왕들은 모두 자살하였다. 《通鑑節要 卷8 漢紀 孝景皇帝6》 풍당(馮唐) 한 문제(漢文帝) 때의 명신이다. 한 문제가 그에게 염파(廉頗)와 이목(李牧) 같은 장수가 자신에게 없어서 흉노를 정벌할 수 없음을 한탄하자, 풍당이 사소한 죄로 인해 전공(戰功)이 높은 위상(魏尙)이 징역형을 살고 있는 사례를 들며, 문제는 염파와 이목 같은 장수가 있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맡겨 신임하지 못해 제대로 등용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자, 문제가 기뻐하며 위상을 즉시 사면해서 운중수(雲中守)로 삼고 풍당을 거기도위(車騎都尉)로 삼았다. 《史記 馮唐列傳》 신원평(新垣平)의 미혹 신원평이 한 문제(漢文帝) 15년에 장안(長安)의 동북쪽에 오채(五采)의 신기(神氣)가 있으니 사당을 세워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내야 한다고 문제에게 말을 올려 위양(渭陽)에 오제묘(五帝廟)를 세우게 한 일을 말한다. 《漢書 卷25 郊祀志》 원평(新垣平)은 조(趙)나라 사람으로, 망기술(望氣術)을 가지고 문제에게 등용되어 벼슬이 상대부(上大夫)에 이르렀다. 단상(短喪)의 조서 한 문제가 "대공(大功)은 15일, 소공(小功)은 14일, 시마(緦麻)는 7일 만에 복을 벗으라."라는 유조(遺詔)를 내려, 달을 날로 바꾸는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4 文帝紀》 직불의(直不疑) 한(漢)나라 때 남양(南陽) 사람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에 함께 근무하는 사람이 휴가를 가면서 같이 있는 사람의 금(金)을 자기 것으로 잘못 알고 가져갔다. 그런데 금을 잃은 사람은 직불의가 가져간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므로 직불의는 변명하지 않고 그것을 보상해 주었다. 그러나 휴가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금을 돌려주자 직불의를 의심했던 사람은 사과하며 매우 부끄럽게 여겼으며, 이 때문에 직불의가 장자(長者)라고 일컬어졌다. 《漢書 卷46 直不疑傳》 주아부(周亞夫) 한(漢)나라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의 명장이자 승상이다. 태자를……만류한 것 주아부가 경제(景帝)가 태자 유영(劉榮)을 폐위시킬 때 반대한 것, 황후의 오빠인 왕신(王信)을 후(侯)에 봉하려고 하자 반대한 것, 흉노왕(匈奴王) 서로(徐盧) 등 6명이 항복해 왔을 때 제후로 삼으려 하자 반대한 것 등을 말한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기원전 179~기원전 122. 한 고조(漢高祖)의 손자로, 아버지 유장(劉長)의 봉호를 승습(承襲)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 독서와 음악을 좋아하고 글을 잘하여 무제(武帝)가 중히 여겼으나 전분(田蚡)과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漢書 卷44 淮南厲王劉長傳》 훌륭한……아니다 《논어》 〈헌문(憲問)〉에 보인다. 무제(武帝)가……되었다 소옹(少翁)과 난대(欒大)는 방술사(方術士)로, 한 스승에게 방술을 배워 무제(武帝)의 신임을 얻어서 온갖 호사를 누리다가 뒤에 무제를 속인 일이 드러나 죽음을 당하였다. 《史記 卷12 孝武本紀》 동방삭(東方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람으로, 골계(滑稽)와 해학(諧謔)의 솜씨를 능숙하게 발휘하면서 직언(直言)을 곧잘 하여 국정을 바로잡았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태백(泰伯)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남으로, 태왕이 자신의 아우인 왕계(王季)에게 제후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는 것을 알고, 아우인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단발을 하여 자취를 감추니, 형만의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많이 따라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황복(荒服) 천자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먼 나라를 가리킨다. 중국 고대의 우(禹)임금이 구주(九州)를 정할 때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전 지역을 전복(甸服)ㆍ후복(候服)ㆍ유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의 다섯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한 구간이 5백 리씩이었다. '요(要)'는 문교(文敎)로 요속(要束)한다는 뜻이며 '황(荒)'은 정교(正敎)가 거칠고 소홀하다는 뜻으로, 요복 이내의 땅을 '내복(內服)' 또는 '내지(內地)'라고 하여 황복 이외의 땅과 구분하였다. 이광리(李廣利) ?~기원전 88. 중산(中山) 사람이며, 이사장군(貳師將軍)을 지냈다. 한 무제(漢武帝)의 총비(寵妃) 이 부인(李夫人)의 오빠로, 서역(西域)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을 정벌하였으며, 기원전 99년에 3만의 기병으로 흉노를 공격하였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이릉(李陵) 한(漢)나라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의 손자이다. 무제(武帝) 때에 기도위(騎都尉)의 신분으로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해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8만 기병(騎兵)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8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계속 싸워 승리했으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화살과 식량도 다 떨어진 끝에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한나라에 있던 처자와 노모가 죽음을 당해 가문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漢書 卷54 李廣傳》 선우(單于) 한(漢)나라 때 흉노족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칭호이다. 전천추(田千秋) ?~기원전 77. 한 무제(漢武帝) 때의 대신(大臣)이다. 위 태자(衛太子)가 모함으로 곤경에 빠진 것을 무제에게 호소하여 구해 주고, 후에 정승이 되었다. 소제(昭帝)가 즉위하였을 때에는 이미 노쇠하여 그에게 수레를 타고 입조(入朝)하는 특권을 내렸는데, 이 때문에 그를 거승상(車丞相) 또는 거천추(車千秋)라 불렀다고 한다. 《漢書 卷66 田千秋傳》 비록……못하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준불의(雋不疑)가……처리한 것 준불의는 한(漢)나라 발해(渤海) 사람으로, 벼슬은 청주 자사(靑州刺史)ㆍ경조 윤(京兆尹) 등을 역임했다. 한 소제(漢昭帝) 5년에 한 남자가 자신이 무제(武帝) 때 폐위된 위 태자(衛太子)라고 주장하므로 모든 관원들이 그 진위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경조윤(京兆尹) 준불의가 말하기를, "옛날에 괴외(蒯聵)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도망쳐 나간 뒤에 그의 아들 첩(輒)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를 《춘추》에서 옳게 여겼다. 위 태자가 선제(先帝)에게 죄를 얻고 도망쳤다가 바로 죽지 않고 이제 다시 나타났으니, 이는 죄인이다."라고 하고는, 그를 즉석에서 잡아 하옥시켜 심문하였다. 《漢書 卷71 雋不疑傳》 황패(黃霸)는……배웠다 황패는 한(漢)나라의 순리(循吏)로서, 영천 태수(穎川太守)를 지내면서 선정을 펼쳐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하후승(夏侯勝)이 선제(宣帝)가 소제(昭帝)를 위해 묘악(廟樂)을 올리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였다가 옥에 갇혔다. 이때 함께 옥에 갇힌 황패가 하후승에게 경전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하후승이 그러다간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러자 황패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라고 하였다. 이에 하후승이 마침내 한 해가 넘도록 황패에게 《상서(尙書)》를 가르쳐주었다. 《漢書 卷75 夏侯勝傳》 곽광(霍光)이……않은 일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대장군 곽광의 아내 곽현(霍顯)이 자신의 딸을 황후로 세우려고 여의(女醫) 순우연(淳于衍)을 시켜 임신한 허 황후(許皇后)에게 독약을 먹여 죽게 한 일을 말한다. 유한(劉漢)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로, 전한(前漢)을 말한다. 소광(疏廣) ?~기원전 45. 태산군(泰山郡) 거평(钜平) 사람으로, 자는 중옹(仲翁)이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황태자의 태부(太傅)를 지냈다. 황태자의 태부(太傅)가 된 지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이미 높은데도 떠나지 않으면 일이 생길 것이라며, 소부(少傅)로 있던 조카 수(受)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장안의 동쪽 성문으로 나가 고향으로 내려갔다. 《漢書 卷71 疏廣傳》 목생(穆生)이……떠난 것 임금이 신하를 대우하는 정성이 해이해지자 떠난 것을 말한다. 목생은 전한(前漢) 시대 초 원왕(楚元王)의 중대부(中大夫)인데 단술[醴酒]을 좋아했기 때문에 초 원왕이 항상 그를 위해 단술을 준비하였다. 그 뒤 원왕의 손자 무(戊)에 이르러서 단술을 준비하지 않자 목생이 "단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임금이 게을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고는 병을 핑계 대며 떠나 버렸다. 《漢書 卷36 楚元王傳》 황패(黃霸)의……하였는데 할작(鶡雀)은 새의 일종이다. 황패가 오봉(五鳳) 3년(기원전 55) 승상이 되었을 적에 경조 윤(京兆尹) 장창(張敞)의 집에서 기르던 할작이 승상부에 날아왔는데, 대부분의 관원들은 그것이 장창의 집에서 날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황패가 주변의 관원에게 묻자 모두 모르는 척하였다. 이에 황패가 아뢰기를 "신이 계책을 올리는 지방관들에게 교화를 진작시키는 조목을 물으니, 하늘이 감동하여 신작을 내렸습니다.〔臣問上計長吏守丞以興化條, 皇天報下神雀.〕"라고 하였다. 《漢書 卷89 黃霸傳》 주운(朱雲)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강직한 신하로, 자는 유(游)이다. 주운이 괴리(槐里)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성제에게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내려 주면 간신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를 참수하겠다고 하였다. 성제가 노하여 어사(御使)에게 주운을 끌어내리게 하자 주운이 난간에 매달려 버티다가 난간이 부러졌는데, 성제는 그 흔적을 그대로 두게 하여 강직한 신하의 표상으로 삼았다. 《漢書 朱雲傳》 중주(中主) 재덕(才德)이 중등 정도인 임금을 말한다. 계옥(啓沃) 신하가 자기의 식견으로 임금을 잘 계도(啓導)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그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시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유향(劉向) 전한(前漢) 말기 초 원왕(楚元王)의 현손(玄孫)으로, 초명은 갱생(更生), 자는 자정(子政)이다. 문장에 능통하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유향은 외척 왕봉(王鳳) 형제가 정권을 농단하고 큰 재변이 자주 일어나자,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을 지어 성제(成帝)에게 올리는 등 여러 번 충언을 올렸으나 성제는 한 번도 그의 말을 시행하지 않았다. 《漢書 劉向傳》 장주(章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하며, 상소(上疏) 혹은 상주(上奏)와 같은 말이다. 명전(名田) 개인의 이름으로 점유한 전지(田地)로서, 곧 백성이 소유한 전지(田地)이다. 동중서(董仲舒)는 무제(武帝)에게 "정전법(井田法)은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조금이라도 옛 제도에 가깝게 백성들의 명전(名田)을 제한해야 한다."라고 건의하였다. 《漢書 卷6 武帝紀》 《資治通監 漢紀25》 공광(孔光) 공자의 14대손으로 경학에 능통하고 학문이 높아 원제 이래로 네 황제를 모시면서 중용되어 삼공(三公)에 올랐으나, 자신과 처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직언을 하지 않았고, 왕망의 전횡을 묵인하여 결과적으로 한나라 왕실을 갉아먹고 아첨하는 기풍을 만연시켰다. 《漢書 卷81 孔光傳》 왕가(王嘉) 한나라 애제(哀帝) 때의 승상으로, 간신(奸臣)에게 식읍(食邑)을 하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간(極諫)하다 애제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다가 죽었다. 《漢書 王嘉傳》 포선(鮑宣)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의 강직한 관리로, 왕망(王莽)에게 따르지 않았다가 피살되었다. 곤겸(髡鉗) 죄수에게 머리를 깎고 칼을 씌우는 것을 말한다. 왕망(王莽)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생질로 애제(哀帝)를 폐위하고 평제(平帝)를 독살한 뒤 제위를 찬탈하고서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그 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멸망당했다. 《漢書 王莽傳下》 설방(薛方) 전한(前漢) 말기 제(齊) 지방 사람으로 자(字)는 자용(子容)인데, 왕망(王莽)이 제위(帝位)를 찬탈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기산(箕山)의 절개 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인 소보와 허유(許由)가 세상의 명리를 멀리하고 기산에 은거했던 높은 절의를 말한다. 양웅(楊雄) 한(漢)나라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태현경》과 《법언》 등의 저서를 남겼다. 《漢書 卷87 楊雄傳》 전한(前漢) 말엽에 성제(成帝)를 섬기다가 왕망이 신(新)나라를 건국한 뒤에 대부(大夫)가 되었으므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왕망(王莽)은……못했다 왕망이 어린 왕을 세워 스스로 천자의 일을 대신하자, 동군 태수(東郡太守)로 있던 적의(翟義)가 유신(劉信)을 세워 천자로 삼고 스스로 대사마(大司馬)라 칭하며 기병(起兵)하였을 때의 일을 말한다. 사부(四父) 왕망의 숙부인 왕봉(王鳳)ㆍ왕음(王音)ㆍ왕상(王商)ㆍ왕근(王根)을 말한다. 성제(成帝)의 모후인 왕정군(王政君)의 동모형제인 왕봉(王鳳)이 외척 권신으로서 대사마(大司馬)ㆍ대장군(大將軍)ㆍ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어 정권을 휘둘렀는데, 죽을 때에 왕음을 천거하여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 뒤를 왕봉의 아우 왕상이 이었고 다시 아우 왕근이 이었으며, 그 뒤를 이들의 조카 왕망이 이었다. 사사로운……바꾸었으니 광무제는 그 후(后)인 곽 황후(郭皇后)가 총애가 식은 것을 원망하자 폐하고 귀인(貴人) 음씨(陰氏)를 새 황후로 세웠으며, 곽 황후의 소생으로 일찍이 황태자(皇太子)가 된 유강(劉疆)이 모후(母后)가 폐위된 다음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자 동해왕(東海王)으로 있던 유양(劉陽)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下》 마원(馬援)은……얻었으니 마원이 62세의 나이로 전쟁터에 나가 싸우겠다고 자청하자 광무제(光武帝)가 너무 늙었다고 허락하지 않으니, 말안장에 올라타 좌우를 돌아보며 아직 건재함을 과시함으로써 광무제의 허락을 받았다. 마침내 무릉(武陵) 만이(蠻夷)의 토벌에 출정하였지만 험한 지형과 열병으로 고전하고 있었는데, 마원을 비방하는 편지를 받은 광무제가 양송(梁松)을 보내 마원을 문책하고 대신 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형의……경계시킬 마원(馬援)이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에게 경박하고 호협(豪俠)한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당시 명사인 돈후하고 신중한 용백고(龍伯高)와 호협하고 의기를 좋아하는 두계량(杜季良)을 거론하며 "용백고를 본받다가 되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삼가고 조심하는 선비는 될 것이니, 이른바 '고니를 조각하다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오리는 닮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계량을 본받다가 되지 못하면 천하의 경박한 사람으로 떨어질 것이니, 이른바 '호랑이를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개를 닮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내가……속였구나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일찍이……생각하느냐 노(魯)나라 계씨(季氏)가 참람하게 태산에 여제(旅祭)를 지내려 하는데도 그의 가신(家臣)인 공자의 제자 염유(冉有)가 말리지 못하자, 공자가 탄식하면서 염유를 나무란 말인데, 임방(林放)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論語 八佾》 봉선(封禪) 새로 나라를 세운 군주가 태산에 올라가 사방의 흙을 높이 쌓아 단을 만들고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을 '봉(封)'이라고 하고, 태산의 아래 양보(梁父)에 땅을 깎아 깨끗이 쓸고 지신(地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28 封禪書》 회창부(會昌符) 《하도회창부(河圖會昌符)》로, 일종의 도참서(圖讖書)이다. 적복부(赤伏符)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 말년에 참위가(讖緯家)가 만든 부록(符籙)으로, 여기에 "유수(劉秀)가 위로 천명에 응하여 한(漢)나라의 정통을 이어 황제가 된다."라고 하였다. 환담(桓譚)이……하였으니 환담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는 군산(君山)이다. 오경(五經)을 두루 익혀 문장에 능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도참설(圖讖說)에 의거하여 의심된 일을 결정하려 하자, 환담은 "저는 참서를 읽지 않았습니다.〔臣不讀讖〕"라고 답하였다. 광무제가 그 까닭을 묻자, 환담은 "참서는 경이 아닙니다.〔讖之非經〕"라고 직간(直諫)하였는데, 광무제가 노하여 육안군 승(六安郡承)으로 내보냈다. 환담은 육안으로 가는 도중에 병들어 죽었다. 《後漢書 卷58 桓譚列傳》 운대(雲臺) 공신각(功臣閣)을 말한다. 한나라의 명제(明帝)가 전대(前代)의 공신들을 추모해서 등우(鄧禹) 등 28명 장수의 화상을 그리고 이것을 보관하기 위하여 쌓은 대(臺)이다. 초방(椒房)의……않은 마원이 황후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공신각에 초상화를 걸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방'은 서한(西漢)의 미앙궁(未央宮)에 있었던, 황후(皇后)가 거처하던 전각 이름으로 황후를 뜻하기도 한다. 문제(文帝)가……않았던 두광국(竇廣國)은 서한 문제(西漢文帝)의 황후인 두씨(竇氏)의 동생으로, 늘 검소하고 겸손하며 자신이 부귀하다고 해서 남에게 교만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퇴양 군자(退壤君子)로 일컬었다. 문제는 어질고 덕행이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승상에 임명하고 싶었지만, 사사로운 정을 베푼다는 오해를 살까봐 결국 그만두었다고 한다. 《史記 卷96 張丞相列傳》 자산(子産)은……모른다 정(鄭)나라의 자산이 자신의 수레를 가지고 강에서 사람들을 건네준 일에 대해 맹자가 논평한 것으로,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황헌(黃憲)의……되었으나 황헌은 후한(後漢) 때의 여남(汝南) 사람으로, 자는 숙도(叔度)이다. 순숙(荀淑)이 황헌을 만나 보고 그의 덕망과 학식에 감복하고는, 자신의 벗인 원랑(袁閬)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고을에 안자(顔子)가 있는데 알고 있는가?〔子國有顔子, 寧識之乎?〕"라고 하여, 황헌을 안연에까지 견주어 극찬하였다. 《後漢書 卷53 黃憲列傳》 양백기(楊伯起)를……당했으니 백기(伯起)는 후한(後漢) 때 홍농(弘農) 사람인 양진(楊震)의 자(字)이다. 양진은 성품이 몹시 청렴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經典)에 특히 밝았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라고 칭하였다.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외방에서 태수로 전전하다가 안제(安帝) 원초(元初) 연간에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태복(太僕)과 태상(太常)이 되었으며, 영녕(永寧) 원년(120)에 사도(司徒)가 되고, 연광(延光) 2년(123)에 태위(太尉)가 되었다.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막기 위해 무진 애를 쓰다가 오히려 참소를 받고 면직되자 분개하여 음독자살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주섭(周燮) 후한(後漢)의 여남(汝南) 안성(安城) 사람으로 자(字)가 언조(彦祖)이다. 주군(州郡)에서 효렴(孝廉)ㆍ현량(賢良)으로 천거하였으나 모두 병을 핑계 대어 나가지 않았고, 조정에서 예물을 보내어 초빙을 해도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後漢書 卷53 周燮傳》 번영(樊英) 후한(後漢) 때의 남양(南陽) 노양(魯陽) 사람으로, 자는 계제(季齊)이다. 순제(順帝)가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다가 특별히 단석(壇席)을 마련하고 스승의 예로 부르자 그제야 나아갔으나 모책(謀策)을 내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後漢書 卷82上 樊英列傳》 장해(張楷) 후한 촉군(蜀郡) 사람으로, 대신(大臣) 장패(張霸)의 아들이다. 술법가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後漢書 卷66 張霸列傳 楷》 맹달(孟達) ?~228. 자는 자경(子敬)이다. 삼국 시대 촉한의 장수로, 부풍군 사람이다. 관우(關羽)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여 관우가 죽자, 위나라에 항복해서 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촉을 배반한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오(吳)와 연결하고 촉과 굳게 맺고서 중국(中國)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면 내응하기로 한 밀약이 탄로 나자,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였고, 후에 사마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선사(先師)가……편지 《간재집 후편(艮齋集後編)》 권7 〈답김택술(答金澤述)〉을 말한다. 주의법(誅意法) 공자(孔子)가 《춘추》에서 어떤 인물을 평할 때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어떠한지는 묻지 않고 그의 용심(用心)만을 보아 주벌(誅罰)을 가한 법을 이른다. 즉 그러한 사실은 없지만 그 동기가 불순한 것을 책망한 것이다. 이는 바로 《춘추》의 필법(筆法)이기도 하다. 가정(街亭)에서의 패배 촉한(蜀漢) 후주(後主) 6년(228)에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기산(祈山)으로 출병하였는데, 이때 부장으로 있던 마속이 가정에 있으면서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산상(山上)에 군을 주둔시켰다가 위군(魏軍)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참형에 처하였으며, 자신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승상(丞相)의 지위에서 우승상으로 좌천되었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위연(魏延)의……실수 제갈량(諸葛亮)이 제1차 북벌에 나섰을 때, 막하(幕下)의 장수인 위연이 정예병 5천을 데리고 자오곡을 통해 장안에 진격하겠다는 계책을 내었으나, 제갈량은 "위험한 길을 지나는 것은 안전하게 평탄한 길을 따라가서 농우를 평정하는 것만 못하니 만전을 다하면 반드시 이겨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 《資治通鑑 卷71 魏記3》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라 신중하게 일 처리를 하라는 말이다. 자로가 "부자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하수를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를 데리고 할 것이다.〔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장완(蔣琬) 촉한(蜀漢)의 상향(湘鄕) 사람으로, 자는 공염(公琰)이다. 후주(後主) 유선(劉禪)이 즉위하자 승상장사(丞相長史)가 되어 제갈량 사후에 승상의 직무를 대행하여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 《三國志 蜀志 卷14 蔣琬傳》 사마소(司馬昭)가……벤 진 문제(晉文帝) 사마소가 동관(東關)에서의 싸움에 실패하고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 묻자, 당시 사마(司馬)로 재직했던 왕의(王儀)가 "원수(元帥)에게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가 죽음을 당했다. 《晉書 卷88 孝友列傳 王裒》 손권(孫權) 182~252. 오군(吳郡) 부춘(富春)사람으로, 자는 중모(仲謀)이다. 부친인 장사 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과 형인 토역장군(討逆將軍) 손책(孫策)의 뒤를 이어 오나라 땅을 다스렸는데, 조조(曹操)의 대군이 침입했을 때 적벽(赤壁)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 뒤에 오왕(吳王)으로 봉해졌으며, 위왕(魏王)과 촉주(蜀主)가 차례로 황제를 칭하자 자신도 황룡(黃龍) 1년(229)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유엽(劉曄)이……죽은 유엽은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자양(子揚)이다. 위나라 명제(明帝) 조예(曹叡)가 촉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하였는데, 유엽은 조예를 독대할 때에는 '정벌할 만하다.'고 하고 신하들과 의논할 때에는 '정벌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비밀리에 정벌할 계략을 세웠다가 결국 조예의 신임을 잃게 되자 광병(狂病)이 나서 근심하다가 죽었다. 우번(虞翻)은……죽었으니 우번은 삼국 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손권(孫權)에게 자주 직간(直諫)을 하다가 그의 비위에 거슬리어 단양(丹陽) 경현(涇縣)으로 귀양 간 뒤에 다시 교주(交州)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죽었다. 《三國志 卷57 虞翻傳 注 翻別傳》 관녕(管寧)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의 고사(高士)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하여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서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며 40년 가까이 지내면서 명제(明帝)로부터 태중대부(太中大夫)ㆍ광록훈(光祿勳) 등의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으며, 특히 청빈(淸貧)을 달게 여겨 항상 무명옷에 검은 모자[皁帽]만 착용하고 지냈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하후현(夏侯玄)은……되었으니 하후현은 위(魏)나라 문신으로, 자는 태초(太初)이다. 사마사(司馬師)가 집정(執政)할 때 중서령(中書令) 이풍(李豐)이 그를 죽이고자 모의하였다가 사마사에게 피살되었으며, 하후현은 하후패(夏侯霸)가 촉한(蜀漢)으로 도망쳐 들어갈 적에 함께 가자고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가 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사람들은……못한다 《중용장구》 제7장에 보인다. 왕경(王經) 위왕(魏王) 조모(曹髦) 재위 때 상서(尙書)였다. 경요(景耀) 3년(260)에 조모가 사마소(司馬昭)의 위세에 대항하여 직접 칼을 들고 나서서 토벌하려다가 사마소의 부하 성제(成濟)에게 참살당한 다음에 왕경도 죽임을 당했다. 면죽(緜竹)에서……죽었으니 위(魏)나라 등애(鄧艾)가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촉한을 공격하면서 음평(陰平)으로부터 진군하여 성도(成都)를 불시에 침공하여 면죽에 주둔해 있던 호위장군(護衛將軍) 제갈첨에게 "항복하면 낭야왕(琅琊王)으로 봉해 주겠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에 제갈첨은 그 사자를 죽이고 위나라 군대를 맞아 분전하다가 아들 제갈상과 함께 죽었다.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의방(義方) 의방지훈(義方之訓)으로, 집안에서 덕의에 알맞은 교훈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실학(實學) 절실하게 유용한 학문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중용장구(中庸章句)》 머리에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이 처음에는 일리(一理)를 말하고 중간에는 만사(萬事)로 분산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일리(一理)로 합쳐진다. 놓으면 우주에 가득 차고 거두면 은밀하게 간직되어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가 실학(實學)이다."라고 하였다. 주로 성리학에서 인격 수양에 초점을 맞춘 말로 쓰인다. 담박명지영정치원(淡泊明志寧靜致遠) 제갈량(諸葛亮)의 〈계자서(誡子書)〉에 "담박(淡泊)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가 없고, 안정되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이를 수가 없다.〔非淡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라고 한 것에서 발췌한 어구이다. 강유(姜維)가……것은 강유는 본래 위(魏)나라 장수였다가 촉한으로 귀순하여 제갈량의 신임을 얻어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올랐으며 제갈량이 죽은 뒤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후주(後主) 염흥(炎興) 연간에 위나라 종회(鍾會)가 촉나라를 공격하여 후주가 항복하자 강유도 투항하였다. 나중에 종회가 위나라를 배반하는 일을 도모하자 강유도 이에 가담하여 종회를 죽이고 촉나라의 부흥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三國志 卷44 蜀書 姜維傳》 곽익(霍弋) 촉한(蜀漢) 때 건녕 태수(建寧太守)를 지냈으며, 성도(成都)가 함락되어 후주가 항복한 뒤에는 위나라 사마소에게 표문을 올려 그대로 본래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영녀(令女) 조위(曹魏) 때 하후문녕(夏侯文寧)의 딸이다. 조상(曹爽)의 종제인 문숙(文叔)에게 시집갔는데, 문숙이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자 머리를 깎아 수절의 결심을 보이고 정절을 지켰다. 친정에서 딸이 청상(靑孀)으로 늙는 것이 보기 싫어 개가시키려 하자, 칼로 두 귀를 잘라 버리고 종시숙인 조상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그 후 조상이 복주(伏誅)되어 일가가 멸문의 화를 당하자, 영녀의 친정 숙부는 조씨 집안과의 혼사를 파하고 다시 개가시키려 하였다. 영녀는 이번에는 스스로 코를 자르고 수절하다가 국가의 특명으로 양자를 들여 조씨의 대를 잇게 하였다. 《三國志 卷9 魏書 曹爽傳》 진 무제(晉武帝) 진(晉)나라의 개국황제인 사마염(司馬炎, 236~290)으로, 자는 안세(安世)이며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이자 사마소(司馬昭)의 장자이다. 265년에 위 원제(魏元帝)로부터 선위를 받아 즉위하고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며, 280년에 오(吳)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했다. 재위 기간은 265~290년이며, 진나라는 316년에 멸망하였다. 양호(羊祜) 진(晉)나라의 장군으로, 자는 숙자(叔子)이다. 일찍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난 뒤에 그 지방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현산(峴山)에 비(碑)를 세웠다. 그런데 이 비를 바라보는 이는 모두 눈물을 떨어뜨렸다 하여, 두예(杜預)는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하였다. 덕이……있다 《논어》 〈헌문(憲問)〉에 보인다. 가충(賈充) 진(晉)나라 사람으로, 무제(武帝) 때 대도독(大都督)까지 되었으나 일생을 아첨과 불의로 일관하였다. 가충이 죽어 시호를 의논할 적에 진수(秦秀)가 "가충은 아들 여민(黎民)이 요절한 뒤에 종족(宗族)을 제쳐 놓고 외손 한밀(韓謐)을 여민의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이는 예법을 위배하고 사정(私情)에만 치우친 처사이다."라고 하면서 시호법에 '법도를 혼란시키는 것이 황(荒)이다.'라고 한 것에 따라 시호를 황으로 하였다. 그런데 무제가 무(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晉書 卷40 賈充列傳》 하증(何曾) 진 무제(晉武帝) 때 태위(太尉)로 있던 인물인데, 호사하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시호는 본디 무추(繆醜)였는데 특별히 효(孝)로 고쳤으며, 또 그의 아들 하소(何邵)가 스스로 표(表)를 올려 원(元)으로 고쳤다. 《晉書 卷33 何曾列傳》 손호(孫皓) 삼국 시대 손권(孫權)의 손자로, 오(吳)나라의 마지막 임금이다.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진(晉)나라에 사로잡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三國志 吳書 孫皓傳》 잠겨……말라 《주역》 〈건괘(乾卦) 초구(初九)〉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이에 대해서 "용의 덕을 가지고 은둔한 자이니, 세상에 따라 변치 않고 명성을 이루려 하지 않아, 세상에서 은둔하되 근심하지 않으며,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여도 고민하지 않아, 즐거운 세상이면 도를 행하고 걱정스러운 세상이면 떠나가서, 뜻이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것이 잠룡이다."라고 하였다. 나라에……일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보인다. 가후(賈后) 서진(西晉) 혜제(惠帝)의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을 가리킨다. 가남풍은 황태자비 시절부터 후궁을 살해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황후가 된 이후에도 혜제와 후궁 사구(謝玖)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을 죽이고 황태후를 시해하는 등 포악한 짓을 일삼다 팔왕(八王)의 난 때 사마륜(司馬倫)에 의해 폐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살해되었다. 여러……해쳐서 서진(西晉)의 제후왕 8명이 291년부터 306년까지 벌인 권력투쟁으로, 8왕의 난을 말한다. 이로 인해 서진의 통치기반이 악화되었으며, 흉노족의 침입으로 서진은 멸망하게 되었다. 8왕은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ㆍ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ㆍ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ㆍ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ㆍ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ㆍ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ㆍ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ㆍ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을 말한다. 고명(顧命) 임금이 임종할 때 왕자나 신하들에게 최후로 남기는 말을 이른다. 적후(賊后) 서진(西晉) 혜제(惠帝)의 황후인 가후(賈后)를 가리킨다. 비루한 사내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두려워하여, 온갖 아첨과 비굴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자를 이른다. 《論語 陽貨》 반악(潘岳)ㆍ육기(陸機)ㆍ육운(陸雲)의……되었으니 세 사람 모두 서진(西晉)의 유명한 문학가이다. 반악은 당시의 권세가인 가밀(賈謐)을 아첨하여 섬겼는데, 팔왕(八王)의 난 때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에게 살해당했다. 육기는 아우 육운과 함께 낙양에 들어가 벼슬을 해서 장사왕(長沙王) 사마의(司馬懿)를 토벌하고 후장군(後將軍) 하북대도독(河北大都督)이 되었지만, 혜제(惠帝) 때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휘말려 아우 육운과 함께 사마영(司馬穎)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융(王戎)이……뚫은 왕융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완적(阮籍)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데, 사람이 너무 인색하여 자기 집에 있는 오얏[李]을 저자에 내다 팔 때 그 오얏씨를 송곳으로 뚫은 뒤에 팔았다 한다. 이것은 그 오얏 종자가 매우 좋은 것이어서 남들이 취종(取種)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晉書》 〈王戎傳〉 혜소(嵇紹)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嵆康)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혜강이 문제(文帝) 때 참소를 입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아버지의 친구인 산도(山濤)의 천거를 받아들여 무제(武帝) 때에 비서승(祕書丞)이 되었고, 혜제(惠帝) 때에는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탕음(蕩陰)의 싸움에 나가 임금을 호위하다가 순절하였다.《晉書 卷89 嵆紹列傳》 자로(子路)는……것이다 《논어》 〈자로(子路)〉의 집주(集註)에 보인다. 왕도(王導)가……일이었다 왕도와 주의(周顗) 모두 동진(東晉) 때의 명신이다. 왕도의 사촌인 왕돈(王敦)이 난을 일으켰을 때 주의는 왕도를 구하려고 크게 노력하였지만, 왕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뒤에 왕돈이 왕도에게 주의에 대해서 묻자 왕도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왕도가 중서(中書)의 서류를 조사하다가 주의가 자기를 위해 올린 글을 발견하고는 "내가 백인(伯仁)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백인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卷69 周顗列傳》 백인은 주의의 자이다. 왕돈(王敦)의……질문 왕돈은 평소 대연(戴淵)과 주의(周顗)의 재주를 시기하였는데, 여의(呂猗)가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유세하였다. 이에 왕돈이 조용히 왕도에게 '이들을 삼사(三司)에 오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영복(令僕)이 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았으며, 다시 '죽여야겠다.' 하였는데 대답하지 않아 결국 이들이 죽게 되었는데, 이 일을 가리킨다. 《資治通鑑 卷95 晉紀》 왕빈(王彬)이 한 것 왕빈은 왕돈의 사촌 동생인데, 주의를 애도하며 통곡할 때에 왕돈이 분노하자 "형님은 반란을 일으키고 충신들을 죽였으며, 무도한 짓을 자행하려 하니 재앙이 우리 가문에 미칠 것입니다."라고 꾸짖었다. 《資治通鑑綱目 卷19》 왕빈으로……권하여 왕빈은 왕돈이 주의 등을 죽인 데 대해 비판하다가 왕돈의 노여움을 샀다. 왕도가 사과하라고 하자, 왕빈은 다리에 병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다고 버텼다. 《晉書 卷76 王彬列傳》 강녕(江寧)의 일 왕돈의 군대가 강녕의 남쪽 기슭에서 황제가 보낸 군대에 패배하여 평정된 일을 말한다. 제갈씨(諸葛氏) 형제의 일 제갈근(諸葛瑾)은 오(吳)나라에 벼슬하고 제갈량(諸葛亮)은 촉(蜀)나라에 벼슬하였는데, 제갈근이 오나라를 위해 촉나라를 빙문(聘問)했을 때 제갈량과 조정에서만 서로 만나고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던 일을 말한다. 모용위(慕容暐) 전연(前燕)의 3대 군주인 유제(幽帝)의 이름이다. 손성(孫盛)의……위해서였으나 《진춘추(晉春秋)》는 진(晉)나라 역사가인 손성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손성은 환온(桓溫)이 제3차 북벌에서 전연(前燕)을 칠 때 방두(枋頭)에서 패전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춘추》에 기록하였는데, 환온이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손성의 아들에게 이대로 역사에 기록하면 그대 집안을 멸족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손성의 아들이 방두의 기록을 고치고자 하였으나 손성이 끝내 허락하지 않자 자식들이 몰래 고쳤다. 손성은 손수 필사하여 두 본을 만들어 모용준(慕容雋)에게 주었는데, 태원(太元) 연간에 무제(武帝)가 요동(遼東)에서 얻어 대조해보니 많이 달랐다고 한다. 《晉書 卷82 孫盛列傳》 주효(周虓)가……충성이다 주효는 진(晉)나라의 재동태수(梓潼太守)로, 진(秦)나라 장수 양안(楊安)의 공격을 받아 그 어머니와 아내가 적에게 사로잡히자 항복하였으며, 진나라 왕이 상서랑(尙書郞)을 삼고자 했으나 거절하였다. 삼년상은……살피는 근본적인 것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지엽적인 것만 살핀다는 뜻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시마복(緦麻服)은 오복(五服) 중에 가장 낮은 상복이며, 소공복(小功服)은 5개월 복을 가리킨다. 사안(謝安) 진(晉)나라 때의 명신으로, 자는 안석(安石),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 계속 동산(東山)에 은거하다가 대장군 환온(桓溫)의 천거에 의해 나이 40세에 처음 사마(司馬)가 되었다. 점차 중용되어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백만 대군을 격파하였고, 진나라를 찬탈하려던 대사마(大司馬) 환온의 음모를 깨뜨려 이루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나라를 반석같이 보호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傳》 왕탄지(王坦之)가……쥐었을 당황하여 허둥댄 것을 말한다. 간문제(簡文帝)가 죽자 환온(桓溫)이 나라를 차지하려는 속셈을 품고 왕탄지와 사안(謝安)에게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사안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의연하게 말하였는데, 왕탄지는 진땀을 흘리면서 허둥지둥 수판을 거꾸로 잡았다고 한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정력(定力) 본디 불교의 말로, 수양을 통하여 번뇌와 망상을 없애고 마음을 한곳에만 쏟는 힘을 뜻한다. 여기서는 평소 수양을 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굳건하여 동요되지 않는 힘을 이른다. 환충(桓沖) 동진(東晉)의 명신(名臣)으로 환온(桓溫)의 아우이다.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동진을 침입했을 때 환충이 서울을 걱정하여 정예 군사 3천 명을 뽑아 사안에게 보냈는데, 사안이 겉으로 짐짓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꾸미려고 그 군사를 돌려보내면서 변방이나 잘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벌써 사안은 조카인 사현(謝玄) 등을 보내 부견을 격파하도록 하였는데, 사현 등이 부견을 대파했다는 소식을 환충이 접하고는 부끄럽고 분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병이 발작하여 죽고 말았다. 《晉書 卷74》 주서(朱序) 진(晉)나라의 의양(義陽) 사람으로, 자는 차륜(次倫)이다. 영강(寧康) 초에 양주 자사(梁州刺史)가 되었는데, 부견(符堅)이 장수를 보내 성(城)을 공격하니, 주서가 패하여 잡혀갔다. 그 후에 부견이 비수(淝水)에서 싸우는데 주서가 진(陣) 뒤에서 "부견이 패했다."라고 외치자 군사들이 동요되어 마침내 크게 무너졌다. 그리하여 주서는 되돌아갈 수 있었다. 《晉書 卷81 朱序列傳》 환충(桓沖)의……탄식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침입했을 때 환충이 서울을 걱정하여 정예 군사 3천 명을 뽑아 사안에게 보냈는데, 사안이 그 군사를 변방이나 잘 지키라고 돌려보내자 환충이 사안의 처사를 비판하며 "나는 아마도 오랑캐가 되어 좌임(左袵)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탄한 것을 말한다. 오직……없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0 〈정사(政事)〉에 보인다. 왕경략(王景略)이……말 경략은 왕맹(王猛)의 자이다. 왕맹은 전진(前秦)의 장군으로, 부견을 도와 전진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청하 무후(淸河武侯)로 있을 때 병이 위독해지자 부견이 친히 찾아왔는데, 왕맹은 진(晉)나라가 비록 강남(江南)으로 밀려나 있으나 상하가 편안하고 화목하므로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晉書 卷114 苻堅載記下》 오호(五胡)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에 북방에서 중국 본토에 이주한 다섯 종류의 호인(胡人)들로, 흉노족(匈奴族)ㆍ선비족(鮮卑族)ㆍ갈족(羯族)ㆍ저족(氐族)ㆍ강족(羌族) 등을 이른다. 단후(段后)를……하자 단후는 전연(前燕)의 개국군주인 모용황(慕容皝)의 왕후이고, 난후(蘭后)는 모용황의 숙의(淑儀)이며 후연(後燕)의 개국군주인 모용수의 생모이다. 모용황의 다섯째아들인 모용수는 단후의 영위(靈位)를 모용황의 종묘에서 옮기고 그 자리에 난후의 영위를 올리고 배향하였다. 장석지(張釋之)가……그만입니다 장석지는 한 문제(漢文帝) 때 형벌을 관장하는 정위(廷尉)였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수레를 타고 출행할 때, 어떤 사람이 말 앞을 가로질러 가는 통에 말이 놀랐다. 이에 그자를 체포하여 정위에게 처벌하게 하였는데, 정위로 있던 장석지(張釋之)가 벌금형에 해당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문제가 몹시 노하여 "이자는 내가 탄 말을 놀라게 하였는데 벌금형만 준단 말인가." 하니, 장석지는 "법이란 것은 천자가 천하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입니다. 법령이 이러한데 중한 벌을 준다면 사람들이 법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명하였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정위에게 넘겼으면 법대로 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문제가 한참 있다가 "정위의 말이 옳다." 하였다. 《漢書 卷50 張釋之傳》 대규(戴逵) 동진(東晉) 시대의 은사(隱士)로, 자는 안도(安道)이다. 거문고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결코 왕이나 제후를 위해 연주하지 않았으며, 인품이 고상하여 당시의 유명한 인물인 사안(謝安)ㆍ사현(謝玄)ㆍ왕순(王詢)ㆍ왕휘지(王徽之) 등에게 존경을 받았다.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하지 않고 책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살았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戴逵》 사현(謝玄) 동진(東晉)의 명신인 사안(謝安)의 조카로, 자는 유도(幼度), 시호는 헌무(獻武)이다.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남하하여 진(晉)나라에 쳐들어 올 때 사안의 지휘에 따라 8만의 군사로 백만 대군을 비수(淝水)에서 격파하여 용명을 떨쳤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범녕(范寗) 339~401. 중국 동진(東晉) 때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무자(武子)이다. 효무제(孝武帝) 때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있다가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경학(經學)에 힘쓰면서, 청담(淸談)에 빠져 있던 당시 지식인들의 경박한 풍조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왕필(王弼)과 하안(何晏)이 후생들을 그르치고 있다고 극도로 배척하기도 하였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대한 대표적인 주석서인 《집해(集解)》 12권이 남아 있다. 태뢰(太牢) 제사를 지낼 때에 소ㆍ양ㆍ돼지 세 가지의 희생을 갖추어 쓰는 것을 이른다. 《청사고(淸史稿)》 82권 〈예지(禮志)〉에, "태뢰(太牢)는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다."라고 하였다. 회계태비(會稽太妃) 동진(東晉)의 초대 황제인 사마예(司馬睿)의 후궁으로, 죽은 간문제(簡文帝)의 어머니이며 당시 황제인 사마창명(司馬昌明)의 할머니인 정아춘(鄭阿春)을 말한다. 무문(舞文) 무문농법(舞文弄法)의 준말로, 붓을 함부로 놀려서 법규를 농락하며 고의로 왜곡 적용하여 폐단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탁발규(拓跋珪) 북위(北魏)의 시조(始祖)로, 본래 선비족(鮮卑族)이다. 북위를 세우고 도무제(道武帝)가 되었으며, 그 후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 성(姓)을 탁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바꾸었으므로 원위(元魏)라 불렀다. 유유(劉裕)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무제(武帝)이다. 동진 안제(安帝) 때에 손은(孫恩)과 노순(盧徇)의 난을 평정하였고, 환현(桓玄)이 황제를 자칭하자 그를 격파하여 안제를 복위시켰다. 또 남연(南燕)과 후진(後秦)을 멸망시켜 송공(宋公)에 봉해지고 원희(元熙) 초에 선양(禪讓)을 받아 송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남량(南涼) 397년 선비족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지금의 청해(靑海)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3대 18년 만에 서진(西秦)에게 멸망하였다. 호대(虎臺)의……말 호대는 남량의 태자로, 서울을 지키다가 진왕(秦王) 걸복치반(乞伏熾磐)에게 항복하였다. 위현정(尉賢政)이 항복하지 않자 진왕이 호대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는데, 위현정이 호대에게 말하기를 "너는 태자가 되어 절개를 다하지 못해 항복한 사람이 되었으며 아버지를 버리고 임금을 잊어 만세(萬世)의 기업을 망쳤으니, 어진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이 어찌 너를 본받겠느냐." 하였다. 부인과 내시의 충성 부인과 내시처럼 순종하기만 하는 충성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성한다면 가르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집주(集註)》에서 소식(蘇軾)의 말을 들어 "사랑하기만 하고 수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짐승들의 사랑이요, 충성하기만 하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부인과 내시들의 충성이다.〔愛而勿勞, 禽犢之愛也; 忠而勿誨, 婦寺之忠也.〕"라고 주하였다. 우십문(于什門) 이름은 간(簡), 자(字)는 십문(什門)인데, 자로 행세하였다. 북연(北燕)에 사신으로 가서 21년간 억류되었다가 굴하지 않고 돌아오자, 위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소무(蘇武)의 충절에 비견하였다. 《魏書 卷87 于什門列傳》 최호(崔浩)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백연(伯淵)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지모가 뛰어났으며, 벼슬은 사도(司徒)에까지 이르렀다. 뒤에 《국서(國書)》를 저술하고 비석의 글을 쓰면서 직필(直筆)했다는 이유로 복주(伏誅)되었다. 《北史 卷21 崔浩列傳》 위조사(韋祖思)가……올렸으니 위조사는 경조군(京兆郡) 두릉현(杜陵縣) 사람으로, 장안 남산에 은거하여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419년에 하(夏)의 군주 혁련발발(赫連勃勃)의 부름에 응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주하사(柱下史) 전각의 기둥 아래에서 문서를 관장하던 관원이라는 뜻인데, 주나라 때 이 관직을 맡았던 노자의 별칭으로 흔히 쓰인다. 최호(崔浩) 북제(北齊) 세조(世祖) 때의 명신으로, 천문과 역법에 능통하여 관련 분야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벼슬이 시중 특진 무사대장군(侍中特進撫事大將軍)에 이르렀는데 지모가 뛰어나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세조가 반드시 그에게 물어서 처리하였다.《北史 崔浩列傳》 양암(諒闇) 천자가 복상(服喪)하는 것을 말한다. 유소(劉劭) 남북조 시대 송(宋)나라 문제(文帝)의 맏아들로, 아버지 유의륭을 무고(巫蠱)하다가 발각되어 폐태자가 될 상황에 처하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장질(臧質)의 군대에 사로잡혀 참형을 당하였다. 《資治通鑑綱目 卷26》《宋書 卷5 本紀》 한(韓)나라가……부끄러워했지 송나라 사령운(謝靈運)이 지은 〈자서(自敍)〉에 나온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로 무도한 진(秦)나라 왕이 천하를 다스린다면 동해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절의를 지켰다. 장자방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공신인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자방은 그의 자이다. 장량의 가문은 본래 전국 시대 한(韓)나라에서 벼슬했는데, 장량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진 시황(秦始皇)이 탄 수레를 공격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史記 卷55 留侯世家》 사령운(謝靈運) 남조(南朝) 송나라 때의 문장가이며, 남북조 시대 최고의 산수시인(山水詩人)으로 강락공(康樂公)에 봉해져 사강락(謝康樂)으로도 불린다. 유침(劉湛) 남조 송(宋)나라의 개국 공신이며, 문제 때에 경인(景仁)의 추천으로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고, 신임을 받게 되자 경인과 틈이 생겼다. 이때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조정의 권세를 독차지하므로, 결탁하여 마음대로 하다가 복주(伏誅)되고 그 아들도 연좌되었다. 자신의……것이다 안연(顔淵)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으니 대답한 말 가운데 나온다. 《논어》 안연(顔淵)에 공자가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인(仁)을 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극기복례하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이 그 인에 귀의할 것이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하였다. 사람으로서……어찌하겠는가 《논어》〈팔일(八佾)〉에 나온다. 이오(夷吾) 춘추 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패업을 이루게 한 관중(管仲)의 이름이다. 춘추 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제나라가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한 재상이다. 맹자(孟子)가……것 분성괄이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자 맹자가 그의 죽음을 예언했다. 결국 분성괄이 피살되자 문인이 미리 알았던 이유를 물으니, 맹자는 "그 사람됨이 조금 재주가 있고 군자의 대도를 알지 못하니 자기 몸을 죽이기에 충분하다.〔其爲人也小有才, 未聞君子之大道也, 則足以殺其軀而已矣.〕"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작은 재주만 믿고 날뛰는 소인은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태무(太武)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이다. 중국 역사상 대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한 사건인 이른바 법난(法難)이란 것이 네 차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즉 북위의 태무제 때,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 당(唐)나라 무종(武宗) 때,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데, 이를 역사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이라 일컫는다. 사초의 일 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최호(崔浩)와 고윤(高允) 등에게 국사(國史)를 수찬하게 하였는데, 북위의 선조가 개와 교미하여 척발씨를 낳았다는 전설을 피하지 않고 써넣었다가 태무제의 눈에 거슬려 처형되었던 일을 말한다. 뒤에 태무제가 최호를 죽인 일을 후회하였다.《北史 卷21 崔浩列傳》 무고(巫蠱) 무당에 의해 사도(邪道)로써 남을 현혹하는 일을 말한다. 성인(聖人)이……어지럽힌다 《논어》〈위령공(衛靈公)〉에 나온다. 고윤(高允) 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 때에 저작랑(著作郞)으로서, 사초(史草)에 관한 일로 최호(崔浩)와 함께 잡혀 죽게 될 때, 고윤이 임금 앞에 불려 가서 자기가 관여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니, 임금이 신의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죄를 용서해 주었다. 경사(經史)ㆍ천문(天文)ㆍ술수(術數)에 박통(博通)하였다.《魏書 卷48 高允列傳》 심경지(沈慶之) 남조 송(宋)나라 오흥(吳興) 출신으로, 글자를 몰랐으나 지략이 있고 용병에 능하여 문제(文帝)와 효무제(孝武帝)를 섬겨 시흥군공(始興郡公)에 봉해졌으며, 누호(婁湖)에 광대한 장원을 경영하였다. 경화(景和) 연간에 사주전(私籌錢)의 통용을 건의하여 화폐가 어지러워졌다. 유자업(劉子業) 효무제의 장자로, 즉위 후에 유의공(劉義恭), 유원경(柳元景) 등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모를 왕비로 삼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행하다 반란으로 살해당하였다. 《資治通鑑 卷129 宋紀十一 世祖孝武皇帝下》 채흥종(蔡興宗) 남조(南朝) 송나라 명신으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급진적이고 과격한 계책 대신 온건책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태시(泰始) 2년에 설안도(薛安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역시 위무(慰撫)하도록 건의했는데, 조정에서 급히 공격하다가 참패를 당하자 선견지명이 있다는 평판을 얻기도 하였다. 《宋書 卷57》 원찬(袁粲) 남조(南朝) 송(宋)나라 명제(明帝)의 충신이다. 저연(褚淵)과 같이 명제의 유명을 받고 태자를 옹립하였다. 그때 정권을 쥔 중령군(中領軍) 소도성(蘇道成)이 태자를 죽이고 순제(順帝)를 세웠다. 원찬이 유병(劉秉)ㆍ왕온(王蘊) 등과 같이 소도성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소도성 측에 가담한 저연이 그 모의를 누설하는 바람에 부자가 모두 살해되었다. 《宋書 卷89 袁粲列傳》 저연(褚淵) 남조 송대(宋代) 명제(明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명제가 죽을 때, 저연을 중서령(中書令)과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아 상서령(尙書令) 원찬(袁粲)과 고명(顧命)을 받들고 어린 임금을 보좌하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뒤에 소도성(蕭道成)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제(齊)나라를 세우려 하자, 원찬과 유병(劉秉) 등은 그에 불복하였으나 저연은 소도성을 적극 도와 그로 인해 제나라에서 영화를 누렸다. 《南齊書 卷23 褚淵王儉列傳》 기복(起復) 부모의 상중에는 나오지 않는 것인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상주 일을 중지하고 나와서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불러내어 출사(出仕)하게 하는 것을 탈정기복(奪情起復)이라고 한다. 자기가……서(恕)이다 《논어》〈안연〉에 나온다. 문방(門房)의 참살 문주(門誅)라고도 하는데 죄인의 친족까지 죽이는 형벌이다. 중국 북조 시대에 북위(北魏)에서 시행한 일종이 잔혹한 형벌이다. "소성(昭成) 건국(建国) 2년(339년)에 대역(大逆)을 범한 자의 친족 남녀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막론하고 모두 목을 벤다." 하였다. 《魏書·刑罰志》 유(幽)나……없다 한번 붙여진 악명(惡名)을 고칠 수 없다는 말로, 《맹자》〈이루상〉편에 나온다. 얼룩소의……놓아두겠는가 자식이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함을 비유한 말로, 《논어》〈옹야〉편에 나온다. 원위(元魏) 남북조 시대의 북위(北魏, 386~534)를 말한다. 효문제(孝文帝, 재위 467~499) 때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성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기에 북위(北魏)를 원위(元魏)라고도 일컫는다. 아버지와……않는다 《서경(書經)》〈주서(周書) 강고(康誥)〉에 나온다. 이표(李彪) 북위(北魏)의 명신이다. 효문제 초기에 중서교학박사(中書敎學博士)가 되었으며, 봉사칠조(封事七條)의 표문(表文)을 올렸다. 아버지와……한다 북위(北魏) 때 이표(李彪)가 올린 봉사(封事)에 나오는 말이다. 풍 태후(馮太后) 북조(北朝) 북위 문성제(北魏文成帝) 탁발준(拓拔濬)의 황후(皇后)로, 조행이 정숙하였기 때문에 효문제 때에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존숭 받았다. 효문제(孝文帝) 북위(北魏)의 황제이다. 태황태후(太皇太后) 풍씨(馮氏)는 효문제의 적조모(嫡祖母)로 효문제의 부친을 독살하였는데, 부친이 죽자 효문제는 중화(中華)에서도 미치기 어려울 정도로 집상(執喪)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정치를……있다 《중용장구》 제20장에 나온다. 공문자(孔文子) 위(衛)나라 대부 공어(孔圉)이다. 유욱(劉彧) 남조(南朝) 송(宋)나라 명제(明帝)를 말한다. 소란(蕭鸞) 남조(南朝) 제(齊)나라 명제(明帝)를 말한다. 앞 수레가……하건만 이전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거울삼아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대대례(大戴禮)》 보부(保傅)에 나오는 말이다. 사조(謝朓) 남조(南朝) 제(齊)나라 때의 시인으로, 글씨를 잘 썼으며 오언시(五言詩)에 매우 뛰어나 시가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으면서 많은 시를 지었으므로 흔히 사 선성이라고도 칭해진다. 《南齊書 卷47 謝脁列傳》 누구나……분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환공(桓公) 15년에 "人盡夫也, 父一而已, 胡可比也?"라는 말이 나온다. 최언(崔偃) 《남사(南史)》 권45 〈최혜경열전(崔慧景列傳)〉에 "최언은 남조(南朝) 제(齊)나라 청하동(清河東) 무성(武城) 사람으로 서기(書記)에 박섭(博涉)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화제(和帝) 때에 영삭(寧朔) 장군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심약(沈約)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으며,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으며, 장서(藏書)가 2만 권에 이르렀다. 음운(音韻)을 깊이 연구하여 《사성운보(四聲韻譜)》를 지어 글자를 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 등 사성으로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육조(六朝) 후한(後漢)이 멸망한 이후 수(隋)나라 통일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읍한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의 여섯 왕조를 말한다. 사굴(謝朏) 남조(南朝) 송(宋)ㆍ제(齊)ㆍ양(梁) 삼조(三朝) 때 사람으로 자는 경충(敬冲),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벼슬은 제 무제(齊武帝) 때 의흥 태수(義興太守)를 거쳐 중서령(中書令)을 지내고, 양 무제(梁武帝) 때 사도(司徒)에 이르렀다. 《梁書 卷15 謝朏列傳》 길분(吉翂) 양(梁) 나라 때의 효자로, 15세 때 아비의 원통한 죄를 대신하여 죽기를 애걸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죽음을 면하게 한 효행이 있었다. 《梁書 卷47 孝行列傳 吉翂》 호 태후(胡太后)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의 황후이다. 정년격(停年格) 후위(後魏)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 최량이 처음 건의하여 만든 제도로서, 인재의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재직(在職) 연한에 따라 자격을 인정하여 승진 등용(昇進登用)하던 제도이다. 묵수(墨守) 전국 시대 묵적(墨翟)이 공격을 절대 하지 않는 대신 일단 성을 지키는 입장이 되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기필코 지켜 내었던 것을 말한다. 풍도근(馮道根) 양(梁)나라 찬인(酇人)으로 자는 거기(巨基), 시호는 위(威)이다.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무제(武帝)에게 알려져 무제가 기병할 때 그를 선봉으로 삼아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 좌군장군(左軍將軍)을 역임했다. 《梁書 卷18》 《南史 卷55》 주이(朱异)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사람으로, 시중(侍中) 벼슬에 있으면서 탐욕과 아첨을 일삼아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준 인물이다. 《梁書 卷38 朱异列傳》 유장(柳莊) 춘추 시대 위 헌공(衛獻公)의 신하이다. 헌공이 제사를 지내던 중에 태사(太史) 유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동(尸童)에게 청하기를 "신하 유장이란 자는 과인의 신하가 아니라 사직의 신하입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가보겠습니다.[有臣柳莊也者, 非寡人之臣, 社稷之臣也. 聞之死, 請往.]"라고 하고는, 제복(祭服)을 입은 채 달려가서 마침내 그 제복으로 유장의 수의(襚衣)를 삼게 하였으며, 또 두 고을을 채읍(采邑)으로 주고 문서를 써서 관에 넣기를 "대대로 만대 자손까지 변치 말라.[世世萬子孫毋變也.]"라고 한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下》 소륜(蕭綸) 양나라 무제(武帝) 소연(蕭衍) 여섯째 아들이다. 소보권(蕭寶卷) 남제(南齊)의 제6대 황제이다. 세금을 가혹하게 걷고 간신배와 가까이 지내다가 3년 만에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후경(侯景) 양(梁) 무제(武帝) 때에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해졌었는데, 뒤에 배반하여 대성(臺城)을 함락시키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였고 곧 또 그를 죽이고서 스스로 한제(漢帝)라고 칭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왕승변(王僧辯) 등에게 패하였다. 《梁書 卷五十六》 소종(蕭綜)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둘째 아들로, 예장 군왕(豫章郡王)에 봉해졌다. 소정덕(蕭正德) 양나라 무제의 양자인 임하왕(臨賀王)이다. 후경(侯景)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 즉위하였고, 무제는 음식을 제재당한 채 죽음을 맞았다. 《資治通鑑 卷23 梁紀》 방경백(房景伯)……것 방경백은 중국 후위(後魏) 시대 청하(淸河) 사람이다. 그가 청하군(淸河郡) 태수로 있을 때 그의 모친 최씨와 함께 살았는데, 하루는 패구에 사는 어떤 부인이 그 아들을 불효죄로 고소하였다. 경백이 이를 최씨에게 고하니, 최씨가 말하기를 "말만 듣는 것은 직접 보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산속에 사는 백성이 아직 예의를 몰라 그러니, 어찌 심히 질책할 만한 일이겠느냐."라고 하고 고소한 모친을 불러와 자신과 함께 지내고 그의 아들은 자신의 아들 경백과 함께 지내게 했다. 그러자 채 열흘이 안 되어 잘못을 후회하며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최씨가 "겉으로는 부끄러워하는 듯 보이지만 마음은 아직 아니다."라고 하며 그냥 두었다. 20여 일이 지나자 그 아들은 머리를 찧어 피를 흘렸고, 모친은 울면서 아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경백은 그제야 아들을 놓아 주었다. 그 아들은 후에 효자로 이름났다고 한다. 《資治通鑑 梁紀七》 갈영(葛榮) 북위(北魏) 말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로 526년 난을 일으켜 스스로 천자라고 칭하고 국호를 '제(齊)'라고 하였으며, 2년 뒤에 이주영(爾朱榮)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魏書 孝莊紀》 소보인(蕭寶寅) 제나라 명제(明帝) 소란(蕭鸞)의 여섯째 아들이고 동혼후(東昏侯)의 아우이다. 회영(懷嬴) 진 목공(秦穆公)의 딸로서, 진(晉) 나라 태자 어(圉)가 진(秦) 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그에게 시집갔다. 태자 어는 중이(重耳) 즉 진 문공(晉文公)의 형인 이오(夷吾 진 혜공(晉惠公))의 아들로서 진(秦)에서 도망쳐 나와 진 회공(晉懷公)으로 즉위했다가 재위 5개월 만에 중이에게 죽임을 당한다.《列女傳 節義》《春秋左傳 喜公 23, 24年》《史記 卷39》 형수가……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장에 나온다. 주자(朱子)가……한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7 〈논어19 자한편 하(子罕篇下)〉와 《회암집(晦菴集)》 권53 〈답유계장(答劉季章)〉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이주영(爾朱榮) 이주는 성이고, 영은 이름이며, 후위(後魏) 명제(明帝) 때의 장수이다. 구조인(寇祖仁)이……죽였는데 성양왕 휘(徽)는 북위(北魏)의 종실인 원휘(元徽)를 가리킨다. 효장제(孝莊帝)의 총애로 벼슬이 높이 올랐으나 이주조(爾朱兆)의 난에 황제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옛날 수하였던 구조인(寇祖仁)에게 죽었다. 《資治通鑑 卷154 梁紀 高祖武皇帝》 양파(楊播)의 집안 북위(北魏) 사람으로, 가문이 대대로 순후하여 의리와 겸양을 모두 돈독히 하였으며, 형제들이 한집안에서 서로 공경하며 화목하게 지냈다. 《小學 卷6 善行》북위(北魏) 때의 사람으로 세 형제가 모두 높은 벼슬에 오르고 우애가 지극하였다 한다. 《北史 卷41 楊播列傳》 하침(賀琛)의 간언 하침은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명신(名臣)으로, 당시의 폐단을 조목으로 진술하였던 것을 말한다. 주이(朱异)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사람으로, 시중(侍中) 벼슬에 있으면서 탐욕과 아첨을 일삼아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준 인물이다. 《梁書 卷38 朱异列傳》 소역(蕭繹) 508~554. 남조(南朝) 양(梁)나라 원제(元帝)의 이름이다.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일곱째 아들로 후경(侯景)의 난을 평정하고, 건강(建康 남경(南京))을 버리고 강릉(江陵)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 동생인 소기(蕭紀)가 촉(蜀) 땅에서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혈육 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소기가 원제에게 패하여 살해당하였다. 원제는 조카인 소찰(蕭詧)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고연(高演) 북제(北齊)의 효소제(孝昭帝)이다. 우근(于謹)의 진언 우근은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 태부(太傅)이다. 치사(致仕)한 뒤에 삼로(三老)로 추숭되어, 고조(高祖)가 태학(太學)에 양로(養老)의 잔치를 베풀 때 제자의 예(禮)로써 정치의 요체를 묻자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되는 법이니, 자고로 밝고 성스러운 임금은 모두 마음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득실(得失)을 알았기에 천하가 평안해졌던 것이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周書 卷15 于謹列傳》 공자가……아끼노라 예를 보존하기 위해 형식을 남겨 두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팔일(八佾)〉편에, 자공(子貢)이 곡삭제(告朔祭)에 쓰는 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가 "사야!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예를 아낀다.[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라는 말이 나온다. 숙보(叔寶) 남북조(南北朝) 시대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장자로, 진나라의 마지막 임금이며 숙보는 그의 이름이다. 주색에 황음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많은 누각을 짓고 비빈(妃嬪)들과 잔치를 벌이며 시부(詩賦)를 일삼았다. 수(隋)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는데도 기악과 시 짓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수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에게 잡혀 장안(長安)으로 끌려갔다가 죽었다.《陳書 卷6 後主本紀》 우문빈(宇文贇) 북주(北周)의 선제(宣帝)로, 자신을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고 칭하였으며, 대성(大成)이라는 연호를 쓰고, 천대(天臺)라는 집에 거처하였다. 왕궤(王軌) 주(周)나라 대장군(大將軍)이다. 고연종(高延宗) 고징(高澄)의 다섯째 아들이다. 제나라 왕 고위(高緯)가 명을 내려 고연종을 상국(相國)ㆍ병주 자사(幷州刺史)로 삼아 산서(山西)의 군대를 총괄하게 해서 수비와 방어를 맡겼다. 병주의 장수들이 고연종에게 청하기를 "왕이 천자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실로 왕을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고연종이 부득이하게 즉위하였다.《通鑑節要》33卷 南北朝 陳紀 웅안생(熊安生)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경학가로, 국자 박사(國子博士) 등을 지냈고, 삼례(三禮)를 제자들에게 교수하였다. 저술로는 《의례의소(禮記義疏)》ㆍ《주례의소(周禮義疏)》ㆍ《효경의소(孝經義疏)》 등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에 《예기웅씨의소(禮記熊氏義疏)》만 실려 있다. 안거(安車) 말 한 필이 끄는 앉아서 타는 편한 수레로, 수레는 서서 타는 것이 보통이지만 국가의 원로나 중망(重望)이 있는 인사를 부를 때에 조정에서 안거를 보내 예우하였다. 창읍왕(昌邑王)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손자이며 소제(昭帝)의 조카인 유하(劉賀)이다. 소제(漢昭帝)가 21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곽광(霍光)과 대신들이 황후와 논의한 끝에 무제(武帝)의 손자인 창읍왕을 황제로 세웠다. 그런데 유하가 황음무도(荒淫無道)하자 황제가 된 지 27일 만에 폐위시켰다. 《漢書 卷68 霍光傳》 소식(素食) 죽음을 애통해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을 먹는 것으로, 애도의 표현이다. 곽광(霍光) 한나라 무제 때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으로, 무제의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소제(昭帝)를 보좌하였다. 소제가 죽은 뒤 창읍왕(昌邑王)을 세웠으나 그의 음란한 행동을 보고 폐위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漢書 卷68 霍光傳》 종실(宗室)의 경(卿) 임금과 동성(同姓)이면서 친척 관계에 있는 재상을 말한다. 《맹자》〈만장하〉에, 제 선왕(齊宣王)이 종실의 경에 대해 묻자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종실의 경은 임금이 큰 잘못을 범하면 간(諫)하고, 반복해서 간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의 자리를 바꾸어 버립니다.〔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則易位.〕 "하였다. 첩이……대등한 신백이 주공에게 한 말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공(桓公) 18년 기사에 나온다. 원문의 병후(幷后)는 첩이 후처럼 예(禮)를 행하는 것이고, 필적(匹嫡)은 서자가 적자처럼 총애를 받는 것을 말한다. 제곡(帝嚳) 제곡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증손이고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의 손자이다. 호는 고신씨(高辛氏)이다. 우순(虞舜)의 이비(二妃) 요(堯) 임금의 두 딸로, 순(舜) 임금의 비(妃)가 된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양광(楊廣)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이름이다.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인데, 원래의 태자였던 맏아들을 자살하게 만들고 부왕 문제를 폐위시킨 뒤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뒤에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되었다.《隋書 煬帝紀》 증자(曾子)가……돌아간다 선과 악은 자신이 남에게 베푼 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으로,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문제(文帝) 성은 양(楊)이고 이름은 견(堅)이며 수나라의 첫 번째 임금이다. 강총(江摠) 남조(南朝) 시대 진(陳)나라 때의 문인(文人)으로, 문사(文辭)를 잘 꾸미고 오언시와 칠언시에 능하였다. 정무는 보지 않고 날마다 후주(後主)와 함께 후원(後苑)에서 놀며 색정시(色情詩)를 지었다고 한다. 《南史 卷36 列傳 第26 江夷條》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개부(開府)?는 자신의 명의로 스스로 막부(幕府)와 막부의 요속(僚屬)을 두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 '의동삼사(儀同三司)'에 가호(加號)한 것은 삼공(三公)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개부의동삼사는 중국의 위(魏)ㆍ진(晉) 시기부터 원나라 때까지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후히 내리던 은전이었다. 양용(楊勇) 수(隋)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맏아들이다. 원래 문제의 태자였으나 나중에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 문제의 병세가 위중할 무렵에 양용을 다시 태자로 복위시킬 생각이 있었는데, 태자 양광(楊廣)이 눈치를 채고 거짓 황제의 명령을 양용에게 내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부소(扶蘇) 진 시황의 큰아들로, 어려서부터 어질고 총명해서 시황제와 중신(重臣)들의 신망을 얻었다. 진 시황이 죽기 직전에 이사(李斯)와 조고(趙高)에게 부소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라고 하였으나 이사와 조고가 유서의 내용을 날조해 부소의 아우 호해(胡亥)를 황제로 즉위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거짓 조서를 보내 자살하도록 하였다. 조서를 받은 부소는 조서의 내용이 거짓인 것 같다는 몽염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해(胡亥) 진시황(秦始皇)의 둘째 아들로, 이사(李斯)ㆍ조고(趙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가 또한 조고에게 시해되었다. 양견(楊堅) 수나라 문제(文帝)의 이름이다. 그는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주(北周)의 어린 임금 정제(靜帝)를 폐하고 제위를 찬탈한 뒤에 국호를 수(隋)라 칭하였고, 후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천하를 통일하였다. 구양공(歐陽公)은……비난하였다 구양공은 구양수(歐陽脩)로, 〈종수론(縱囚論)〉을 지어 반박한 것을 말한다. 실출(失出) 죄인에게 형을 감해주거나 면해주는 그릇된 법적조치를 말한다.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요(堯)임금의 신하로, 천문을 관측하며 역법(曆法)을 제정하였다. 《서경》 〈요전(堯典)〉에 "이에 역관(曆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경히 따라서 해와 달과 별자리를 기록하고 관찰하여 백성의 농사철을 공경히 내려 주게 하셨다.[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는 말이 나온다. 경방(京房) 후한 원제(後漢元帝) 때 사람으로, 역(易)에 밝아 《경씨역전(京氏易傳)》을 지은 인물이다. 개황(開皇) 수(隋)나라 문제(文帝)의 연호(581~600)이다. 왜왕(倭王)이……전한다 기록상으로는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인 대업(大業) 3년(607)에 일본의 왕 다리사북고(多利思北孤)가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나오는 말로 되어 있다. 《隋書 卷81 倭國列傳》 우홍(牛弘) 수(隋)나라 안정인(安定人)이다. 칙명을 받아 오례(五禮)를 정리하고 신악(新樂)을 바로잡고 명당(明堂)을 세우는 논의에 참여하였다. 이부상서를 지내고 기장군공(奇章郡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저서로 《대업률(大業律)》이 있다. 양현감(楊玄感) 수 양제가 총애하는 신하로, 조정이 문란하고 시기(猜忌)가 날로 심하여진다 하여 황제를 폐하고 진왕 호(秦王浩)를 황제로 세우려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이밀(李密) 수나라 말기의 군웅(群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 양제가 고구려 침략을 위해 출병하였을 때 양현감(楊玄感)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 후 다시 적양(翟陽) 등과 함께 하남(河南)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장안(長安)의 이연(李淵)에게 투항하였다. 양소(楊素) 수나라의 재상으로,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평정할 적에 공을 세워 안현공(安縣公)에 봉해졌으나, 아버지 양부(楊敷)가 북주의 무제(武帝)에게 숙청당하자 당시 북주(北周)의 재상으로 있던 양견(楊堅)을 도와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국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여 수나라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훗날 양광(楊廣)의 시샘을 받아 파직된 뒤 결국은 사사당했다. 그의 장남 양현감(梁玄感)이 훗날 양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아버지를……된 이세민(李世民)이 아버지인 당왕(唐王) 이연(李淵)을 설득하여 작은 절개를 지킨다면 아래에는 도적 떼가 있고 위에는 준엄한 형벌이 있어서 머지않아 위태로워질 것이니, 의병을 일으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느니만 못하다고 한 것을 이른다. 맹자가……것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 가지의 불의(不義)를 행하거나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천하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모두 하지 않을 것이다.[行一不義,殺一不辜而得天下,皆不爲也.]" 하였다. 유문정(劉文靜) 수(隋)나라 말엽 진양 현령(晉陽縣令)으로 있을 때 진양궁감(晉陽宮監) 배적(裴寂)과 대사를 도모하기로 의기투합하여 당시 태원 유수(太原留守)였던 당 고조 이연(李淵)과 결탁하였다.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자 이세민(李世民)과 함께 이연을 재촉하여 거병을 이끌어 내고 당나라가 천하를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다. 고조가 즉위한 후 배적과 틈이 벌어져 평소 그를 꺼리던 고조에게 살해되었다. 《舊唐書 卷57 劉文靜列傳》 배적(裴寂) 당나라 고조 때의 신하이다. 어려서부터 고조(高祖)와 친하여, 당나라의 건국에 공로가 많았으며, 뒤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독고회은(獨孤懷恩) 584~620. 하남 낙양 사람으로, 북주(北周)의 명신 독고신(獨孤信)의 손자이며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표제(表弟)이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공부 상서(工部尚書)에 발탁되었으나 이연과 이세민을 해치려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건성(李建成) 당 고조 이연(李淵)의 장자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아우 이세민이 일으킨 현무문(玄武門)의 변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종실(宗室)의……강등시키면서 당(唐)나라 제도에 작(爵)은 왕(王)에서 현남(縣男)까지 9등급으로 되어 있고, 왕(王)은 정1품 친왕(親王), 종1품 사왕(嗣王), 군왕(郡王)이 있다. 현공은 종2품이다. 호(胡)와……된 호(胡)는 북방 민족이고 월(越)은 남방 민족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를 한집처럼 똑같이 대한다는 뜻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7년에 나오는 말이다. 위징(魏徵) 당나라 태종(太宗) 때의 재상으로, 거침없는 직간으로 유명하였다. 고조(高祖)의 장자(長子)이며 태자(太子)인 이건성(李建成)을 섬겨 세마(洗馬)가 되었으나, 뒤에는 형제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이건성이 후에 태종(太宗)이 되는 이세민(李世民)에게 살해되자 다시 태종을 섬겼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벼슬은 태자태사(太子太師)에까지 올랐으며, 그가 죽자 태종은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탄식하였다. 장현소(張玄素)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의 명관(名官)이다. 태종이 궁전을 수축하려고 할 때,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직간을 하여 중지시키자, 위징(魏徵)이 감탄하면서 "장공이 마침내 하늘을 되돌리는 힘을 발휘했다.[張公遂有回天之力]"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02 張玄素列傳》 장온고(張蘊古) 당(唐)나라 명신이며 문장가로, 태종이 즉위했을 때에 대보잠(大寶箴)을 올려 황제에게 간하다가 죽었다. 대보잠(大寶箴) 장온고가 지은 작품으로, 당 태종(唐太宗)이 즉위한 초기에 규감(規鑑)이 되기 위해 올린 글이며 6백여 마디의 전편(全篇)이 압운(押韻)으로 되어있다. 대보, 천자(天子)의 자리를 지키기가 어려움을 역설한 것이다. 나라……된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권만기(權萬紀) 당나라 태종 때에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로서 "선주(宣州)와 요주(饒州)에서 은(銀)이 많이 발견되었으니, 이를 캐면 1년에 수백만 민(緡)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당 태종은 자신을 정도(正道)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여 그날로 권만기를 내쳤다. 《資治通鑑綱目 貞觀10年》 《신당서》에는 그의 인물됨이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구당서(舊唐書)》에는 〈양리열전(良吏列傳)〉에 수록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무씨(武氏) 측천무후(則天武后)를 가리킨다. 무씨가 14세 때에 처음으로 입궁(入宮)하여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이 되었다가, 고종(高宗) 때에 소의(昭儀)가 되어 고종의 아들을 낳으니, 고종이 황후(皇后)를 폐하고 그를 정궁(正宮)으로 삼았다. 그 뒤 현경(顯慶) 5년부터 국정(國政)에 관여하여,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예종(睿宗)을 앉혔으며, 배염(裴炎) 및 당나라의 종실 이위(李褘) 등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뿐만 아니라 무씨(武氏)의 칠묘(七廟)를 세우고, 문자(文字)를 새로 바꾸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예종을 폐위하고 국호(國號)를 주(周)로 바꾸어 자칭 경신황제(經神皇帝)라고 하는 등 많은 악행을 자행하였다. 《唐書 卷4 則天皇后本紀》 왕규(王珪) 626년 현무문(玄武門) 사건 때 태자 건성(建成)의 속리(屬吏)였으므로 이세민(李世民)에 의해 유배되었으나, 후에 태종의 신임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 637년에는 위왕(魏王) 이태(李泰)의 스승이 되었다. 위왕(魏王) 이태(李泰) 당나라 태종(太宗)의 제4남이다. 태종의 총애를 받아 태자(太子) 이승건(李承乾)과 자리를 다투는 뜻이 있으므로 결국 다 폐출시켰다. 《舊唐書 太宗諸子列傳》 방현령(房玄齡) 당나라 태종 때의 명재상으로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룩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두여회(杜如晦)ㆍ송경(宋璟)ㆍ요숭(姚崇)과 더불어 당조(唐朝)의 사대현상(四大賢相)으로 일컬어진다. 이승건(李承乾) 당나라 태종의 장자이다. 울지경덕(尉遲敬德) 당 태종(唐太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수행하며 두건덕(竇建德)ㆍ왕세충(王世充)ㆍ유흑달(劉黑闥) 등을 정벌하여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에 오르고 악국공(鄂國公)에 봉해졌다. 취송(聚訟) 여러 설(說)을 가지고 분분히 서로 다투어 정론(定論)이 없는 것을 이른다. 주공(周公) 문왕(文王)의 아들이고, 무왕(武王)의 아우이며 성왕(成王)의 숙부로, 이름은 단(旦)이다. 무왕을 도와 주(紂)를 치고, 무왕이 죽은 뒤에는 어린 성왕이 어리매 섭정(攝政)하였다가, 성왕이 장성한 뒤에 정권을 돌려주고 신하의 지위로 돌아갔다.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국가의 문물제도를 완비하여 태평을 이루는 데 지대한 공이 있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로, 주공과는 형제간이다. 무왕이 죽은 뒤에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섭정하자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또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무경을 주벌하고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유배 보냈다. 《史記 卷35 管蔡世家》 봉덕이(封德彛) 수말당초(隋末唐初) 사람으로, 덕이(德彝)는 그 자이고 이름은 륜(倫)이다. 수 양제(隋煬帝)를 섬길 때에는 간신(奸臣)이었는데, 당(唐)나라에 귀화하여 당 고조(唐高祖)의 충신이 되었다. 《舊唐書 封倫列傳》 두정륜(杜正倫) 당(唐)나라 사람으로, 그가 미천하였을 때 성남(城南) 두고(杜固)의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에게 동보(同譜)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므로 내심 괘씸하게 여기고 있다가 집정(執政)한 뒤에 두고를 파서 수로(水路)를 개통시키자, 냇물이 10일 동안 핏빛으로 변하였는데, 그 뒤부터 두고의 두씨들이 점차 미약해졌다고 한다. 후군집(侯君集) 당대(唐代)의 명장으로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황제로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뒷날 태자 이승건(李承乾)과 모의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舊唐書 卷69 侯君集列傳》 간언한……것 생전에 위징은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사관(史官) 저수량(褚遂良)에게 보여 주었는데 이 사실을 안 태종은 위징이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혼사를……넘어뜨리기에 당 태종(唐太宗)은 친필로 위징(魏徵)의 비문(碑文)을 손수 지어 주었다가 나중에 의심하여 비(碑)를 넘어뜨려버리고, 또 위징의 아들인 숙옥(叔玉)에게 형산공주(衡山公主)를 배필로 주기로 하였다가 나중에 파혼하였다. 뒤에 고구려를 치러 갔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는 길에 뉘우치고 탄식하기를 "위징이 만일 살아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이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通鑑節要 卷38 唐紀 太宗 17年條》 고사렴(高士廉) 당(唐)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검(儉), 사렴은 그의 자이다. 당 고조(唐高祖) 때, 익주 대도독장사(益州大都督長史)가 되어 백성을 잘 교화한 공로로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졌다. 장손무기(長孫無忌) 당 태종(唐太宗)의 처남으로 태종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일등공신이었으나, 태종의 아들 고종이 즉위하고 무씨(武氏)를 후비로 삼으려고 하자 이를 반대한 일을 계기로 무후(武后)의 원한을 사서 모반죄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자살하였다. 《新唐書 卷105 長孫無忌列傳》 형산공주(衡山公主) 당 태종의 딸로, 위징의 아들 위숙옥(魏叔玉)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가 위징을 의심하게 되어 혼사를 파기하였다.《舊唐書 卷71 魏徵列傳》 우지녕(于志寧) 당나라 때 사람으로,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고, 오경의 소를 찬술하는 데 참여하였다. 《唐書104》 기복(起復)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줄임말로, 상중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나,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무 소의(武昭儀) 측천 무후(則天武后)를 가리킨다. 고종이 죽은 뒤, 중종(中宗)ㆍ예종(睿宗)을 폐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신성 황제(神聖皇帝)라 칭하고 국호를 주(周)로 고쳤다가 얼마 뒤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해 폐위되었다. 《唐書 卷76》 《舊唐書 卷6》 이적(李勣) 당나라의 명장으로 원래 이름은 서세적(徐世勣)인데, 이밀(李密)의 휘하에 있다가 당 고조에게 투항한 후 이씨 성을 하사받았고, 태종(太宗)의 이름을 휘(諱)하여 이적으로 바꾸었다. 고조(高祖)가 무인년(618)에 이씨 성을 하사하여 종친적(宗親籍)에 올리고 영국공(英國公)에 봉하였다. 공자가……한다 《논어》〈팔일〉 편에 나온다. 저수량(褚遂良) 당나라의 문인ㆍ학자로, 고종(高宗)이 무측천(武則天)을 후(后)로 삼으려 하자 저수량(褚遂良)이 극력 간했으나 당 고종이 듣지 않았다. 저수량은 궁전 섬돌에 홀을 내려놓고 머리를 땅에 찧어 피를 흘리면서 말하기를 "폐하께 이 홀을 돌려드립니다." 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舊唐書 卷80 褚遂良列傳》 유계(劉洎) 당 태종(唐太宗) 때 사람으로, 위징(魏徵)을 흠모하여 태종에게 직언을 잘하였으나 정적인 저수량(褚遂良)의 모함을 받고 자결하였다. 《新唐書 卷99 劉洎列傳》 악언위(樂彦瑋) ?~676. 자는 덕규(德珪),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 사람이다. 현경(顯慶) 연간에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는데 유계(劉洎)의 아들이 궁궐에 나아가 자신의 아비가 저수량(褚遂良)의 참소로 죽었다고 하소연하였고 이의부(李義府)도 그를 도왔다. 고종(高宗)이 측근 신하들에게 묻자 모두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는데 악언위만 홀로 바른말로 고하여 그 일이 잠잠해졌다. 이윤(伊尹)과 곽광(霍光) 이윤은 은(殷)나라의 어진 재상으로,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처 나쁜 버릇을 고치게 하였다. 곽광은 전한(前漢)의 명신으로, 창읍왕 하(昌邑王賀)를 폐(廢)하고 효 선제(孝宣帝)를 맞아 세웠다. 성인의……숨는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당나라는……것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의 대막리지로, 642년 자신을 제거하려는 영류왕(榮留王)을 살해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한 뒤 반대파 귀족들을 대량 숙청하고 대막리지가 되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644년에 당 태종은 고려의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에게 잔혹하게 군다고 여겨 이를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貞觀政要 卷9 議征伐》 군대를……일 두 아우는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으로, 형 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평양성을 나가 여러 성들을 순행하면서 두 아우에게 뒷일을 맡겼다. 두 아우는 연남생이 자신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어떤 자의 말에 넘어가 연남생이 보낸 사람을 억류하고 연남생을 왕명으로 불렀는데, 연남생이 선뜻 돌아오지 않자 연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일으켜 연남생을 쳤다. 연남생은 달아나서 국내성(國內城)을 근거지로 삼고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당나라에서는 666년 6월 7일 임인일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衞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안무대사(遼東道安撫大使)로 삼아 군사를 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고 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衞將軍)으로 삼아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다. 《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10 寶臧王下》 《資治通鑑 卷201 唐紀17 高宗 中之上 乾封元年》 이경업(李敬業) 당(唐)나라 태종(太宗)ㆍ고종(高宗) 때의 명장 이적(李勣)의 손자이다. 어렸을 때부터 정벌에 참가하여 용명(勇名)이 있었는데,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왕실(王室)을 찬탈할 때에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망하고, 이적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낙빈왕(駱賓王)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鄰) 등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했던 광택(光宅) 1년(684)에 서경업(徐敬業)이 양주(揚州)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무후에게 반기를 들자, 낙빈왕이 서경업을 대신하여 격문을 지어 무후의 죄를 성토하였다. 적인걸(狄仁傑) 강직한 간언(諫言)으로 이름난 당나라의 명신(名臣)이며,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 강직한 성품과 비범한 능력으로 국정을 안정시켜, 이른바 '무주의 다스림[武周之治]'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무후가 자신의 본가인 무씨(武氏) 가문에서 왕위 계승자를 택하려 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무후를 설득하여 여릉왕(廬陵王) 이현(李顯)을 태자로 세워 당나라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공로들로 인해 당대와 후대에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장간지(張柬之) 적인걸(狄仁傑)이 '재상의 재목이라'고 추천하였고,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낙주 사마(洛州司馬)를 삼았다. 후에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어 무씨(武氏)를 제거하고 당나라 사직을 회복하였는데, 이때 먼저 꾀를 내어 무후(武后)로 하여금 중종(中宗)에게 양위하게 하였다. 아홉 가지 죄목 호인(胡寅)이 측천무후의 죄상을 아홉 가지로 열거하였다. 무후가 태종의 재인(才人)으로서 뒤를 계승한 황제 고종(高宗)을 고혹한 것, 황후를 살해한 것, 아들 중종을 내치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것, 군주의 아들 세 명을 죽인 것, 스스로 황제가 된 것, 당나라 종묘를 폐한 것, 종실을 없앤 것, 더러운 덕(음탕한 행실)이 드러나 알려진 것, 혹리(酷吏)를 높이 등용하여 온 천하에 해독을 끼친 것이다. 《通鑑節要 卷39 唐紀》 중종(中宗) 측천 무후의 아들로, 어머니를 폐하고 복위하였다. 승중자(承重者) 제사를 받드는 중한 책임을 이어 받은 자를 말한다. 설계창(薛季昶) ?~706. 본명은 설통(薛通),자는 계창(季昶),당나라 명장 설인귀(薛仁貴)의 조카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 하북도 안찰사(河北道按察使),정주 자사(定州刺史) 등을 지냈다. 중종(中宗)이 복위한 뒤에 재상 장간지(張柬之)가 무삼사에게 참소를 당해 신주 사마로 좌천되었다가 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하였다. 그……하며〔不在其位 不謀其政〕 《논어》〈태백〉편에 나온다. 나라에……충분하다〔邦無道 其默足以容〕 난세(亂世)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에는 자신의 뜻을 표현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침묵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시경》에 '현명한 데다가 사려가 깊어서 자기 몸을 보전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默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라는 말이 나온다. 오왕(五王)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퇴위시키고 중종(中宗)을 복위시켜 당(唐)의 국호를 회복한 장간지(張柬之)ㆍ환언범(桓彦範)ㆍ경휘(敬暉)ㆍ최현위(崔玄暐)ㆍ원서기(袁恕己)를 가리킨다. 공로에 의해 군왕(郡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오왕으로 불린다. 《資治通鑑 唐紀》 위후(韋后) 당나라 중종(中宗)의 황후 위씨(韋氏)이다. 범려(范蠡) 중국 춘추 시대 월(越)나라의 대신이자 모략가로,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20여 년 동안 모의한 끝에 마침내 오(吳)나라를 멸망시켜 회계(會稽)에서의 치욕을 갚고 상장군에 이르렀는데, 범려는 대명(大名)의 아래는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드디어 배를 타고 제(齊)나라로 가서 성명을 바꾸어 치이자피(鴟夷子皮)라 하고 산업을 일삼았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장자방(張子房) 자방은 장량(張良)의 자이다.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항우(項羽)를 멸하고 천하 통일을 이루었으며, 만년에 황로(黃老)를 좋아하여 신선 벽곡(辟穀)의 술법을 닦았다 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벽곡(辟穀)은 화식(火食) 하지 않고 생식을 하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이다. 이중준(李重俊) 중종(中宗)의 아들로, 시호는 절민(節愍)이며 후궁의 소생이라서 역사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융희(隆熙) 조선 말기 순종황제의 연호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사용되었다. 태사(太史)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관원이다. 요숭(姚崇) 당나라의 명재상으로 문무겸전하였다. 측천(則天)ㆍ중종(中宗)ㆍ예종(睿宗) 대에 재상을 지냈고, 현종(玄宗)을 도와 '개원(開元)의 치세(治世)'를 이루었다.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ㆍ송경(宋璟)과 더불어 당조(唐朝)의 4대 현상(賢相)으로 불린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세실(世室) 영구히 신주를 모시는 종묘의 신실(神室)을 말한다. 5세가 된 신주는 종묘에서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기는 것이 예(禮)이나, 큰 공덕(功德)이 있는 군왕은 그 신주를 옮기지 않고 따로 신실을 마들어 봉안(奉安)하고 영원히 제사를 올린다. 부조지위(不祧之位) 큰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구히 사당에 위해 두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를 말한다. 삼소삼목(三昭三穆) 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차례를 소목(昭穆)이라고 한다. 왼쪽 줄을 '소(昭)', 오른쪽 줄은 '목(穆)'이라고 하는데, 시조의 신주는 한복판에 모시고 2ㆍ4ㆍ6대를 소에, 3ㆍ5ㆍ7대를 목에 모신다.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천자는 7묘로 3소 3목에 태조의 묘까지 7묘이고, 제후는 5묘로 2소 2목에 태조의 묘까지 5묘이며 대부는 3묘로 1소 1목에 태조의 묘까지 3묘이다. 사(士)는 1묘이고 서인(庶人)은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올린다."라고 하였다. 정명(鼎銘) 정은 제사 지낼 때 희생(犧牲)을 담는 솥인데, 나라를 상징하는 구정(九鼎) 같은 기명에다 공훈에 대한 찬사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송경(宋璟)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의 명재상으로, 꿋꿋하여 대절(大節)이 있고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아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쳐, 철석심장(鐵石心腸)을 가지고 있다고 칭해졌다. 임금의 뜻을 거슬러 가며 직간(直諫)을 잘하였으며, 요숭(姚崇)을 이어 재상에 올라 현종을 보좌하면서 개원 연간의 선치(善治)를 이루었다. 《舊唐書 宋璟列傳》 태백(泰伯)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남이다. 외신(外神) 자기 집 조상신 이외의 모든 신을 말한다. 사전(祀典)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의 구분을 정해 놓은 조례(條例)이다.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구분되고 각각 대상이 정해져 있다. 기년복(朞年服) 5복(五服) 중에서 두 번째 복으로, 자최복(齊衰服)을 입고 1년간 거상(居喪)하는데 장기(杖朞)와 부장기(不杖朞)의 구분이 있다. 장기는 부친이 생존해 있는데 모친의 상을 당했을 때 3년상을 낮추어 기년복을 입고 장(杖)을 짚는 것이다. 부장기는 장을 짚지 아니하는 경우로, 조부모ㆍ자ㆍ장자의 처ㆍ적손ㆍ형제자매ㆍ백숙부모ㆍ고모ㆍ질(姪) 등의 상에 입는 복이다. 개원례(開元禮)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칙명에 의해 서견(徐堅)ㆍ소숭(蕭崇) 등이 150권으로 편찬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말한다. 길례(吉禮)ㆍ빈례(賓禮)ㆍ가례(嘉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 등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舊唐書 卷21 禮儀志1》 《新唐書 卷11 禮樂志1》 금자(金紫) 금장(金章)과 자수(紫綬)로, 고관대작들이 사용하는 금으로 만든 인장(印章)과 붉은색의 인끈을 말한다. 안고경(顔杲卿)이……도모하였는데 안고경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으로, 안진경(顔眞卿)의 종형(從兄)이다. 안고경이 상산 태수(常山太守)가 되었을 때 안녹산이 고성(藁城)에 이르니 안고경이 힘으로 막을 수 없어 장사(長史) 원이겸(袁履謙)과 함께 나아가 맞아들였다. 이에 안녹산이 금자대부(金紫大夫)의 벼슬을 주고 그 자제를 볼모로 삼은 다음 그대로 상산을 지키게 하였다. 안고경이 돌아와서 원이겸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한 것을 말한다.《新唐書 忠義列傳 顏杲卿》 좌장(左藏) 국고(國庫)의 이름으로, 왼쪽에 있기 때문에 좌장이라고 칭하였으며 당나라 때에는 전백(錢帛)과 잡채(雜綵) 등을 쌓아두었다. 진(晉)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좌장과 우장(右藏)을 마련하였다. 《類選 卷4下 人事篇6》 장양제(張良娣) 당 숙종(唐肅宗)의 비(妃) 장 황후(張皇后)이다. 양제(良娣)는 여관명(女官名)으로 태자의 첩을 일컫는 말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당 숙종이 당시 태자로서 양제와 함께 진중에 종사하였는데, 이때 양제는 전사(戰士)들의 옷을 깁는 등의 일을 몸소 도왔다. 《唐書 后妃傳》 이보국(李輔國) 당나라 숙종(肅宗) 때의 환관으로, 본명은 정충(靜忠)이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원수부 행군 사마(元帥府行軍司馬)가 되어 전횡을 일삼으면서 숙종의 황후인 장 황후(張皇后)를 유폐하였다가 숙종이 죽은 뒤 살해하였다. 대종(代宗) 때에는 바깥의 일은 자신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고 지시하는 등 전횡을 자행하다가 대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新唐書 卷208 宦者列傳 李輔國》 현종은……떠났고 현종 말기에 양 귀비(楊貴妃)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촉(蜀) 지방으로 파천하게 된 일을 말한다. 장후(張后) 당 숙종(唐肅宗)의 폐후(廢后)로 이보국(李輔國) 등에 의하며 살해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태자(太子)를 폐하고자 모의했기 때문이었다. 입승대통(入承大統) 임금에게 아들이 없을 때 가까운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이 후사가 되어 임금의 대를 잇는 것을 말한다. 알지도……행동한 《논어》 〈술이〉에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있는가. 나는 이러한 일이 없노라. 많이 듣고서 그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며,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둔다면 이것이 아는 것의 다음이 된다.〔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하였다. 이필(李泌) 당나라 때 명신으로,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ㆍ덕종(德宗)을 두루 섬겼다. 현종 때 한림(翰林)의 직임에 있으면서 태자에게 매우 두터운 예우를 받았는데, 나중에 양국충(楊國忠)의 미움을 받아 영양(穎陽)에서 은거하였고,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빈객(賓客)의 신분으로 국사에 참여하였다. 후에 업후(鄴侯)에 봉해졌다.《新唐書 卷139 李泌列傳》 기왕(岐王)과 설왕(薛王) 기왕은 당나라 현종(玄宗)의 아우이고, 설왕은 현종의 형이다. 효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효경(孝經)》〈효치장(孝治章)〉에 나온다. 3년……있다 《논어》 〈학이(學而)〉에 "부친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자식의 뜻만을 볼 수가 있고, 부친이 작고한 뒤에야 그 자식의 행동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작고한 뒤 3년 동안은 부친이 해 오던 일을 고치는 일이 없어야 효라고 말할 수 있다.〔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돈후하게……것이니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만두어선 안 될 경우에 그만두는 자는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요, 돈후하게 대해야 할 사람에게 야박하게 하면 야박하지 않은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 나아가기를 빨리하는 자는 그 후퇴가 빠르다.〔孟子曰: 於不可已而已者, 無所不已, 於所厚者薄, 無所不薄也, 其進銳者, 其退速.〕"라는 말이 나온다. 황무지를……것 《맹자》〈이루상〉제14장에 나온다. 유안(劉晏)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ㆍ덕종(德宗) 때의 재정을 관리하던 재상으로, 재리(財利)에 밝았으며 안사(安史)의 난 이후 탁지사(度支使), 염철사(鹽鐵使), 전운사(轉運使) 등을 맡아 대운하(大運河)의 소통, 조운(漕運)의 개선, 염업(鹽業)의 정돈, 화폐의 통제 등에 힘써 재정 안정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舊唐書 卷123 劉晏列傳》 하가(下嫁) 공주(公主)나 옹주(翁主)가 귀족이나 평민에게로 시집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곽 분양(郭汾陽) 당(唐)나라의 명장(名將) 곽자의(郭子儀, 697~781)를 가리킨다.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때의 사람으로,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여 국가 중흥의 공이 으뜸이어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고, 덕종 때는 상보(尙父)라는 호를 받고 태위중서령(太尉中書令)에 올라 몸소 천하의 안위를 맡은 것이 20년이었다. 수(壽)와 복을 누리고 자손이 번창하였으므로 팔자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唐書 卷120 郭子儀列傳》 주현(州縣)에서……것 곽자의가 775년 1월에 주문을 올려 주현에 관원 한 사람씩 벼슬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보좌하던 장교들이 ?영공의 공훈과 품덕으로 한 명의 속리를 천거하는 주문을 올렸는데 따라주지 않으니 얼마나 재상이 체모를 모르는 것인가!?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곽자의는 ?병란이 일어나 이래로 방진의 무신들이 대부분 발호하는, 무릇 요구하는 바가 있으면 조정에서는 항상 굽히며 이를 따랐는데, 이는 다른 것이 아니고 마침내 의심하는 것이다. 지금 나 곽자의가 주문으로 올린 일은 황제께서 행할 수 없으셔서 내버려둔 것이고, 이는 무신으로 대접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친하고 사이가 두터운 것으로 대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축하를 해야지, 또한 어찌 괴이하게 생각하는가!? 하면서 오히려 기뻐했다.《唐書 卷120 郭子儀列傳》 봉천(奉天)에서……있었는데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에게 쫒겨 봉천(奉天)으로 피난하였을 때에 육지(陸贄)가 덕종에게 아뢰어 황제 자신을 자책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이성(李晟) 등이 그 조서를 보고는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적병을 쳐서 장안(長安)을 수복하였다는 일을 말한다. 공자가……호응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군자가 방안에서 하는 말이 선하면 천 리 밖에서 호응해 오지만, 선하지 않으면 천 리 밖에서 오려던 사람도 돌아선다.[君子居室, 其言善則千里之外應之, 其言不善則千里之外違之.]"라는 말이 나온다. 가탐(賈耽)이……것 가탐은 당나라의 정치가이며 지리학자이다. 그가 산남 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로 있을 때 공무로 수하인 번택(樊澤)을 경성에 보냈는데 번택이 돌아와 복명할 무렵 가탐의 부중에서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그때 번택을 절도사로 삼아 가탐을 대신하게 하라는 급한 공문이 왔는데 가탐은 내색을 하지 않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려 연회에 참석했던 관리들에게 알리고 번택에게 알현하도록 했다. 아장(牙將) 장헌보(張獻甫)는 위조문서라며 그를 죽이자고 했으나 가탐은 천자의 임명이라고 일축하고 그날 진을 떠났으며 장헌보만 그를 따랐다. 그리고 군부에는 아무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資治通鑑 卷230 唐紀46》 사안(謝安)……것 사안은 진(晉)나라 재상(宰相)이다. 그의 조카 사현(謝玄)을 보내어 진(秦)나라 병사를 막게 하였는데, 사현이 8천 명의 군사로 진나라 백만 대병을 쳐부수었다. 보고하는 글이 이를 때에 사안은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손님이 소식을 물으니 사안은 기뻐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으며 "아이들이 도적을 이미 쳐부수었군." 하고, 바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손님을 보내고 문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막신의 굽이 문턱에 걸려서 부러지는 줄도 모르게 매우 기뻐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육지(陸贄)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명신으로, 직간을 잘하였다. 주의(奏議)에 뛰어나 그가 쓴 주의를 모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라 명명하였는데, 후대 정치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舊唐書 陸贄列傳》 어조은(魚朝恩) 당나라 대종(代宗) 때의 환관으로, 현종(玄宗) 때 처음으로 환관이 되었고, 대종 때 천하관군용선위처치사(天下觀軍容宣慰處置使)가 되어 군권(軍權)을 잡고는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면서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뒤에 황제의 미움을 사 처형되었다. 《舊唐書 卷184 宦官列傳 魚朝恩》 두문장(竇文場)과 왕희(王希) 두문장을 감신책군좌상주 병마사(監神策軍左廂注兵馬使)로 삼고 왕희를 감신책군우상 병마사(監神策軍右廂兵馬使)로 승진시켜서 처음으로 환관으로 하여금 금군(禁軍)을 맡게 하였다. 금병(禁兵) 임금의 금위(禁衛)를 담당하는 군병(軍兵)을 말한다. 이최(李璀)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서 포위된 것을 부친인 이회광(李懷光)이 풀어주어, 이최를 감찰 어사(監察御使)로 삼아 총애하였으나, 이회광이 반란할 것을 황제에게 고한 후, 자신도 두 아우를 죽인 후 자살하였다. 한황(韓滉) 당나라 숙종 때 사람으로, 관리의 고적(考績)과 이재(理財)에 아주 밝아서 호부 시랑, 판탁지(判度支) 등을 지냈으며, 화가(畫家)로도 이름 높은 인물이다.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장군으로, 당시에 주자(朱泚)가 요영언(姚令言)의 난군(亂軍)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일컬으면서 수도를 장악하였는데, 서쪽으로 쫓겨 갔던 덕종이 이성을 시켜 정벌하게 하여 수도를 수복하고 사직을 보전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장연상(張延賞) 당 덕종(唐德宗) 때의 명장이다. 이필(李泌) 당(唐)나라 때의 재상으로, 숙종(肅宗) 때 환관 이보국(李輔國) 등이 참소하여 훗날 대종(代宗)이 된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을 해치려 하자 충심으로 보호하여 저지하였고, 덕종(德宗) 때에는 훗날 순종(順宗)이 된 태자가 폐위될 위기에 처하자 태자의 무죄를 주장하며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新唐書 李泌列傳》 사람을……여기는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요 임금께서도 어렵게 여기셨으니, 사람을 알아보면 명철해서 사람을 제자리에 쓸 수 있다.〔惟帝其難之, 知人則哲, 能官人.〕"라는 말이 나온다.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떠나 처음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의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영무(靈武)의 부름에 달려가 영무는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때문에 촉(蜀)으로 갔을 때 숙종이 즉위한 곳으로, 이필이 숙종을 알현한 일을 말한다. 늙어서는……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군자에게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으니, 젊을 때엔 혈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경계할 것이 여색에 있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한창 강하므로 경계할 것이 싸움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하므로 경계할 것이 얻음에 있다.[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라고 하였다. 육선공(陸宣公) 선공은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한림학사 육지(陸贄)의 시호이다. 그는 국정에 직접 참여하여 정승처럼 나랏일을 좌우하였으므로, 내상(內相)이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하였다. 그가 건의한 글을 모아 놓은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는 당 태종(唐太宗)의 《정관정요(貞觀政要)》와 함께 정치가의 필독서로 꼽혀 왔다. 《新唐書 卷157 陸贄列傳》 위문정(魏文貞) 문정은 당(唐)나라 위징(魏徵)의 시호이다. 위징은 태종(太宗)에게 전후 200여 차례의 상소문을 통해 성현의 정치를 역설하였으며, 황제가 노여워해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직간(直諫)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태종이 하나의 거울[一鑑]을 잃었다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71 魏徵列傳》 임금을……당한다 《논어》 〈이인(里仁)〉에서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친구 간에 자주 간하면 멀어지는 것이다.〔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라는 말이 나온다. 양성(陽城) 당나라 덕종(德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이다. 육지(陸贄)를 내쫓고 간신(姦臣)인 배연령(裴延齡)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할 적에 상소하여 배연령의 죄를 신랄하게 탄핵하고 육지를 극구 변호하면서 말하기를 "배연령을 재상으로 삼으면 내가 백마(白麻)를 취하여 찢어 버리겠다."라고 직언(直言)하였다. 이 때문에 덕종이 끝내 배연령을 재상으로 삼지 못하였다. 《舊唐書 卷192 陽城列傳》 임금의 조서(詔書)를 마(麻)에 썼으므로 '마'는 조서를 말한다. 배연령(裴延齡)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의 인물로, 천성이 가혹하고 아랫사람을 수탈하여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술수에 능했다. 《唐書 卷167 裵延齡傳》 남의……것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은 이루도록 도와주고 남의 악함은 이루도록 도와주지 않지만, 소인은 이를 반대로 한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라는 말이 나온다. 이발(李渤) 시와 글씨, 그림에 능하였다. 형 이섭(李涉)과 함께 백록동(白鹿洞)에 들어가 독서하였는데, 밖에 나가면 그가 기르던 흰 사슴이 그를 따랐기에 백록 선생이라 불렸다. 《구당서(舊唐書)》〈이발열전(李渤列傳)〉에는 그의 인품이 고상하고 이익을 따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대의 인물들은 직언으로 당대의 폐해를 구원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우계우(于季友) 하남(河南) 사람으로, 사공(司空) 우적(于頔)의 셋째 아들이다. 당나라 헌종(憲宗)의 영창공주(永昌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임명되었다. 문종(文宗) 대화(大和) 때에 명주 자사(明州刺史)가 되어 우주성(于州城) 서남쪽 40리에 제방을 쌓아 수 천 경(頃)의 전답에 물을 대었다. 이길보(李吉甫)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의 재상이다. 황보식(皇甫湜) 당나라의 산문가로, 한유에게 고문을 배워 이고(李翶)ㆍ장적(張籍)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왕애(王涯)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의 재상으로, 이훈(李訓)ㆍ정주(鄭注) 등과 함께 당시 용사(用事)하던 환관(宦官)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환관들이 문종을 죽이고자 했다고 계략을 꾸며 죽였다. 유총(劉總) ?~821. 자는 지헌(志軒),유주(幽州) 창평(昌平) 사람이다. 성격이 음험하고 간사했는데 원화(元和) 5년에 자사(刺史)가 되어 성덕 절도사(成德節度使) 왕승종(王承宗)을 공격하였고 노룡 절도사(盧龍節度使)를 탈취했다. 검교사공(檢校司空)에 임명되었다가 초국공(楚國公)에 책봉되었는데 나중에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어 대각사(大覺師)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백방(白放) 죄가 없음이 밝혀져 잡아 두었던 사람을 놓아 주는 것을 말한다. 순주(循州) 지금 광동성(廣東省) 혜주시(惠州市) 동쪽에 있다. 불골표(佛骨表) 819년에 헌종(憲宗)이 불골(佛骨 사리)을 대내(大內)에 맞아들이니, 왕공(王公)ㆍ사서(士庶)가 찬탄하였는데, 한유가 〈불골표〉를 올려서 부처를 신봉하는 일을 극간(極諫)하였으므로, 헌종이 이를 보고 노하여 그를 조양(潮陽)의 자사(刺史)로 강등시켜 귀양을 보냈다. 왕정주(王庭湊)를……일 당나라 장경(長慶) 2년(822)에 한유(韓愈)는 병부 시랑을 맡았는데, 당시에 진주 병마사(鎭州兵馬使) 왕정주가 난을 일으켜 이곳 절도사(節度使) 전홍정(田弘正)과 그의 막료 및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고 자신을 진주 절도사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반백이 넘은 병부 시랑 한유를 진주로 보내 선위(宣慰)케 했는데 한유는 왕정주의 협박에도 의연히 대처하고 설득하여 심주(深州)에 대한 포위를 풀고 성안의 수비 장수 우원익(牛元翼)을 풀려나게 하였다. 주일무적(主一無適)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 잡념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정이(程頤)가 경(敬)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 말로, 주일(主一)은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이고, 무적(無適)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는 것으로, 경(敬)을 하여 마음을 지켜 함양(涵養)한다는 말이다.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정이(程頤)가 "주일을 경이라 이르니, 안을 곧게 한다는 것은 바로 주일의 뜻이다.[主一之謂敬, 直內, 乃是主一之義.]"라고 하였다. 이사(李斯) 진(秦)나라 법가류(法家流)의 정치가이다. 시황제(始皇帝)를 좇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으며, 통일 시대 진나라의 정국을 담당한 실력자로, 획기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창힐(蒼頡)의 주문(籒文)을 변형(變形)해서 만든 옥저체(玉筯體)로 유명하다. 《全唐文 卷437》 조조(曹操) 후한 말기의 정치인으로 위(魏)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조비(曹丕), 조식(曺植)과 함께 삼조(三曹)로 불리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후예(后羿) 옛날 유궁국(有窮國)의 군주로 활을 아주 잘 쏘았는데, 그가 뒤에 하(夏)나라를 찬탈하여 왕 노릇을 했으나 끝내 자기 신하인 한착(寒浞)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방몽(逄蒙) 하(夏)나라의 활을 잘 쏘는 사람인데, 예(羿)에게 활 쏘는 기술을 모두 배우고서 천하에 그의 스승인 예만이 자기보다 활 쏘는 기술이 낫다고 생각하여 스승인 예를 죽였다. 예(羿)는 하(夏)나라 때 유궁국(有窮國)의 군주이다. 《孟子 離婁下》 임조(臨朝) 태후(太后)가 조정에 나아가 정무를 처리하는 일을 말한다. 곽 분양(郭汾陽) 당(唐)나라 때 무장 곽자의(郭子儀, 697~781)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많은 공로를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으므로 이렇게 불렸다. 살아 있을 때 온갖 부귀와 공명을 누렸으므로, '곽 분양의 팔자'라는 말도 생겼다고 한다. 《唐書 卷137 郭子儀傳》 배도(裵度) 중국 당나라 때의 재상으로, 절도사를 억압하고 환관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취하였다. 헌종(憲宗),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의 4조(朝)에 걸쳐 활약했다. 은퇴하고 나서 낙양(洛陽) 근교에다 녹야당(綠野堂)이라는 별장을 마련하고는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시와 술을 즐기면서 만년을 보낸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73 裴度列傳》 유분(劉蕡)의 대책 유분은 당(唐) 문종 때 사람으로, 현량과(賢良科) 대책(對策)에 응하여 환관의 화를 극론(極論)하였는데, 시관이 환관을 두려워하여 낙방시켰다. 《唐書 卷190下 劉蕡傳) 이강(李絳) 당대(唐代)의 재상이며 직간(直諫)으로 명성이 높았던 명신이다. 구사량(仇士良) 당(唐)나라 순종(順宗) 때 환관으로서 동궁을 모시다가 동궁이 헌종(憲宗)으로 즉위한 뒤 문종(文宗) 때까지 20여 년간 권력을 농단하여 두 명의 왕과 한 명의 비(妃), 네 명의 재상을 모살한 인물이다. 그리고 젊은 환관들에게 총애를 얻는 방법을 가르치며, 천자를 사치와 오락에 몰두하게 해야 환관이 뜻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新唐書 卷207 仇士良列傳》 정담(鄭覃)과 이석(李石)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의 문신들이다. 이석은 이훈(李訓)과 정주(鄭注)의 난(亂)으로 권세가 환관에게 돌아갔을 때 재상이 되어 환관을 배척하고 조정의 권위를 세우려다 구사량(仇士良)의 미움을 받았다. 《新唐書 卷131 李石列傳》 이훈(李訓)과 정주(鄭注)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의 재상(宰相)과 절도사(節度使)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결당(結黨)하여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李德裕)와 우승유의 당인(黨人)이었던 이종민(李宗閔)을 반대하고 축출하였다. 문종은 이훈(李訓)과 정주(鄭注)를 신임하여 이들을 통해 환관들을 모살하려고 '감로지변(甘露之變)'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두 사람은 도리어 환관들에게 주살 당하였다. 《舊唐書 卷17下 文宗本紀下》 난왕(赧王)이나 헌제(獻帝) 난왕은 주(周)나라의 마지막 왕이고, 헌제는 한(漢)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난왕은 제후들과 연대하여 진(秦)을 공격하다가 진나라에게 멸망당하였고, 헌제는 조비(曹丕)에게 쫓겨난 산양공(山陽公)이 되었다. 호씨(胡氏)의 말 태자를 제거하려고 한 자는 현비(賢妃) 양씨(楊氏)였고, 유초재(劉楚材)와 장십십(張十十)의 무리는 현비의 지시대로 따라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문종이 그들에게 태자를 모함하여 해친 죄로 처벌하고 양씨가 지시한 실정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의 우매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50권 상 당 문종(唐文宗) 개성(開成) 4년조의 기사. 육극(六極)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마지막 조목으로, 여섯 가지 매우 좋지 않은 일을 이른다. 《서경》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육극이란, 첫 번째는 제대로 죽지 못하는 것과 요절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질병, 세 번째는 우환, 네 번째는 가난, 다섯 번째는 악한 것, 여섯 번째는 나약한 것을 말한다.〔六極, 一曰凶短折, 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惡, 六曰弱.〕"라는 말이 나온다. 아무리……것 《중용장구》 제20장 제20절에 "과연 이 방법을 능히 행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아무리 유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라는 말이 나온다. 구양공(歐陽公)의 붕당론(朋黨論) 송나라 인종(仁宗) 중반기에 하송(夏竦)과 여이간(呂夷簡)이 구양수의 탄핵으로 인하여 전후로 정승에서 파직되고 범중엄(范仲淹),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하송 등이 범중엄 등을 공격하면서 붕당을 지었다고 몰아붙이고 구양수까지 견제하자, 구양수가 이때 간원(諫院)에 재직하면서 지은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붕당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붕당을 이룬 사람들이 군자냐 소인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역설하였다. 《古文眞寶後集》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 당나라 목종(穆宗)에서 무종(武宗) 때까지의 권신으로 서로 알력이 심했다. 그로 인해 결국 우승유와 이종민(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이길보(李吉甫)와 이덕유 부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新唐書 卷180 李德裕列傳》 역사(逆祀) 상하의 순서를 뒤바꾸어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노나라 민공(閔公)의 뒤를 이어 서형(庶兄)인 희공(僖公)이 즉위하였는데, 후에 희공의 아들 문공(文公)이 즉위하여 희공의 신위를 민공 위에 두자, 희공이 민공의 서형이지만 원래는 민공의 신하였던 만큼 위차는 희공이 민공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여 《춘추》에서 '상하의 위차를 위배한 제사〔逆祀〕'라는 평을 받았다. 그런데 문공의 아들 정공(定公) 8년에 마침내 이를 바로잡아 희공의 신위를 민공 아래로 내렸다. 《春秋左氏傳 定公8年》 이경양(李景讓)이……말 선종은 목종(穆宗)의 형이고, 경종(敬宗)ㆍ문종(文宗)ㆍ무종(武宗)은 목종의 아들들로 선종의 조카가 된다. 선종은 무종을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856년에 이부 상서(吏部尙書) 이경양이 이 점을 지적하며 "폐하께서 형에게 절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조카에게 절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며, 목종ㆍ경종ㆍ문종ㆍ무종의 신주를 태묘에서 꺼낼 것을 건의하였다. 《資治通鑑綱目 卷50 唐紀》 연단(煉丹)과 흡기(吸氣) 도교에서 불로장생(不老長生)할 목적으로, 연단은 장생 불사약(長生不死藥)인 단약(丹藥)을 굽는 것이고, 흡기는 천지의 정기(精氣)를 들이마시는 것을 말한다. 정종(正終) 임종 때까지 바른 도리를 지키다 죽는 것으로, 군자의 죽음을 뜻한다. 증자(曾子)가 죽을 때 "내가 바름을 얻어서 죽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언참(言讖) 우연히 한 말이 훗날에 예언처럼 들어맞는 것을 말한다. 고변(高騈) 당나라 유주(幽州) 사람이고 자는 천리(千里)인데, 신선에 관련된 시나 기발한 표현의 시를 많이 남겼다. 여용지(呂用之) 대대로 거간꾼 노릇을 하다가 고변(高騈)의 눈에 들어 참모가 되었으며, 고변이 신선술에 빠져 든 뒤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방자하게 굴다가 고변의 책망을 누차 받았고 고변이 필사탁(畢師鐸)에게 죽임을 당하자 도망갔다가 양행밀(楊行密)에게 목이 잘렸다. 《唐書 卷224》 이극용(李克用) 당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세력을 얻었으나, 주전충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이존욱(李存勖)은 후량(後梁)을 뒤엎고 후당을 세웠다. 유빈(柳玭) 당(唐)나라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그가 자제들을 경계한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다. 사람이……있다 《논어》〈위 영공(衛靈公)〉 편에 나온다. 이를 소동파(蘇東坡)가 해석하기를 '생각이 천리 밖에 있지 않으면 환난이 눈앞에 닥친다.'라고 하였다. 위복(威福) 위력으로 벌을 내리기도 하고 복록을 베풀어 상을 내리기도 한다는 말인데, 왕이 지닌 권력을 의미한다. 번진(藩鎭) 당나라 초기에 중요한 주(州)에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예종(睿宗) 때 절도대사(節度大使)를 두고, 현종(玄宗) 때 또 변경의 10개소에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를 통틀어 '번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각 지역의 군정(軍政)만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권력이 점차 커져 민정(民政)과 재정(財政)까지 담당하였다. 주온(朱溫)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량(後梁) 태조 주전충(朱全忠)의 처음 이름이다. 904년에 당나라 소종(昭宗)을 죽이고 소선제(昭宣帝)를 세웠으며, 907년에 소선제를 폐하고 후량을 세웠다.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많았지만 성격이 잔인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부월(斧鉞)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주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여기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안에는……없었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공류(公劉) 후직(后稷)의 증손으로, 선조의 공업을 이어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빈(豳)으로 옮겨 살면서 이곳에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시경》 〈공류(公劉)〉에 보인다. 이존욱(李存勖) 이극용(李克用)의 아들인 장종(莊宗)으로, 양(梁)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당을 건국하였다. 화일필(畵日筆) 오대(五代) 때에 진(晉)나라 왕 이존욱(李存勖)이 황제라고 칭하기를 바라니, 당(唐)나라 고신(故臣)인 소순(蘇循)이 진나라 왕을 배알하고 춤을 추면서 만세(萬歲)를 외치고 울면서 신하라고 칭하였고, 또 큰 붓 30자루를 바치면서 ?화일필?이라고 하였다.《舊五代史 唐書 蘇循傳》 온도(溫鞱) 당말(唐末) 오대(五代) 때 사람이다. 어려서 도적이 되었다가 나중에 이무정(李茂貞)을 섬겨 화원(華原)의 진장(鎭將)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자신의 관할에 있던 당나라의 능(陵)을 모두 도굴하였다. 경상(敬翔)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하자 주온(朱溫)의 군중에 달려가 신의를 얻었다. 후량(後粱)이 망하자 자살해 죽었다. 《舊五代史 卷18 敬翔》 이진(李振)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양나라를 세운 주전충(朱全忠, 852~912)의 책사이다. 진사시에 여러 번 낙방하여 조정의 선비를 매우 싫어하였다. 주전충이 조관(朝官) 30여 명을 백마역에서 한꺼번에 몰살시킨 백마지화(白馬之禍)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이다. 오직……미친다 《서경》 〈홍범(洪範)〉에 나온다. 두 아들 안숭찬(安崇贊)과 안숭서(安崇緖)를 말한다. 함거(檻車) 죄인을 사형장 또는 귀양 보낼 때 태우는 우리 있는 수레를 말한다. 석경당(石敬瑭)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후진(後晉)의 초대 황제이다.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사위로서 거란(契丹)의 도움을 받아 후진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에 거란의 임금인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신하로 복종하고 아들이라고 일컬으면서 거란의 풍속에 따라 아황제(兒皇帝)라고 자칭하며 아첨한 고사가 전한다. 《新五代史 四夷附錄 契丹》 석진(石晉)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의 별칭으로,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맹자가……있다 《맹자》 〈고자상(告子上)〉에 나온다. 조맹(趙孟)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그 직계 후손들을 이르는데, 조씨는 당시에 권력이 막강하여 작록(爵祿)을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주고 뺏고 했었다. 권진(勸進)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라고 권하여 말하는 것을 이른다. 이변(李昪) 중국 오대십국 시대 남당(南唐)의 초대 황제로, 원래 이름은 서지고(徐知誥)이다. 오(吳)나라의 건국자 양행밀(楊行密)의 부장 서온(徐溫)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씨 성을 받았고, 서온이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권력을 얻었다. 서온이 죽은 후 오나라의 중추를 장악하여 937년에 황제로 즉위하였고,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여섯 째 아들 낙윤(落胤)의 후손이라 칭하면서 이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재위 기간은 937~943년이다. 경연광(景延廣) 오대(五代)의 진(晉)나라 사람이다. 마보군 도지휘사(馬步軍都指揮使)를 지냈는데, 조정에서 거란에게 호칭을 '신(臣)'이라 하자고 의논하자, 이를 반대하고 '손(孫)'이라고 하였다. 거란이 문책하자 "진나라에 예리한 칼을 찬 10만 명의 군대가 있다. 할아버지는 싸우고 싶으면 당장 오라. 지금 손자를 제어하지 못하면 장차 천하에 웃음거리를 사고 후회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舊五代史 卷88 景延廣列傳》 횡마검(橫磨劍) 길고 큰 날카로운 칼로, 《구오대사(舊五代史)》 권88 〈진서(晉書) 경연광열전(景延廣列傳)〉에 "진나라에는 십만 개의 횡마검이 있으니, 옹은 싸우고 싶으면 빨리 오라.[晉朝有十萬口橫磨劍, 翁若要戰則早來.]" 라는 말이 나온다. 오대(五代) 후양(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나라를 말한다. 송제구(宋齊丘) 오대(五代) 시대 당(唐)나라 사람으로 원훈(元勳)을 세우기 위해 남을 무함하는 등 온갖 음험한 짓을 다 하였다. 출제(出帝) 후진(後晉)의 제5대 황제 석중귀(石重貴)이다. 아보기(阿保機) 요(遼)나라 태조(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916~926)를 말한다. 907년에 거란족을 통일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후에 국호를 요(遼)라고 칭하였다. 은제(隱帝) 오대 후한(後漢)의 마지막 임금인 유승우(劉承祐)이다. 유숭(劉崇) 오대 십국(五代十國)의 하나인 북한(北漢)의 태조(太祖)이다. 곽위(郭威)가 한(漢)나라를 찬탈(簒奪)하자 하동(河東) 땅에서 칭제(稱帝)하고 북한(北漢)을 세웠다. 풍도(馮道) 오대(五代) 때 사람으로, 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거란(契丹)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의 다섯 왕조에 걸쳐 여덟 개의 성을 가진 11명의 황제를 섬기며 재상만 20년을 지냈고, 스스로 이를 자랑스러워하였다. 지조와 염치가 없는 인물로 유명하며 장락로(長樂老)라고 자호(自號)하였다. 《新五代史 卷54 馮道列傳》 말할……추해지며 《시경》 〈장유자(墻有茨)〉에 나온다. 범질(范質) 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에 걸쳐 두루 벼슬하였고, 송 태조(宋太祖)에게 투항한 뒤에 송나라에서 벼슬하여 태부(太傅)에 이르렀으며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다. 조카 범고(范杲)가 품계를 올려 주기를 청하자 시를 지어 깨우쳐 주었는데, 그 시에 "곱디고운 정원의 꽃들은 일찍 피기에 또한 먼저 시들고, 더디고 더딘 시냇가의 소나무는 무성해서 늦도록 푸름을 간직한다.〔灼灼園中花, 早發還先萎. 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 하였다. 《소학 가언》 毐 底本에는 "毒". 《資治通鑑綱目》에 근거하여 수정. 罔 底本에는 "亡". 上同. 乎 底本에는 없음. 《論語》 〈子罕〉에 근거하여 보충. 地 底本에는 "衆". 諸葛亮의 〈後出師表〉에 근거하여 수정. 責 底本에는 "失". 《資治通鑑綱目》 卷15에 근거하여 수정. 皁 底本에는 "白". 《三國志》 卷11 〈管寧傳〉에 근거하여 수정. 食 底本에는 없음. 《資治通鑑綱目》 卷17 上에 근거하여 보충. 故吾 底本에는 "吾故". 《通鑑節要》 卷28 〈晉紀〉에 근거하여 수정. 燾 底本에는 "壽". 《資治通鑑》 卷108 〈晉紀〉에 근거하여 수정. 巨 底本에는 ?臣?. 문맥을 살펴 수정. 勤 底本에는 "尊". 《通鑑節要》〈唐紀〉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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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9 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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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선사 계미년(1943) 觀朝鮮史【癸未】 이 글은 마땅히 ?한사(韓史)?라고 해야 하는데 ?조선사(朝鮮史)?라고 한 것은 시대에 구애된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에 구애된다고 하여 바르게 쓰지 못한다면 차라리 역사를 써서 말썽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낫겠다. 나라가 대한(大韓)으로 된 것은 고종(高宗) 정유년(1897)인데 이 역사는 철종(哲宗)에서 그쳤고 대한 이후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사?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商)나라가 은(殷)나라로 된 것은 반경(盤庚)1) 이후인데 역사에서 은나라 왕 성탕(成湯)2)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저들이 우리 땅에 총독부를 두면서 굳이 조선(朝鮮)이라는 옛 이름으로 칭한 것은 고종 황제 때에 불리던 대한을 단절시키려는 것이다. 오늘날에 역사를 쓰면서 ?대한?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이라고 한다면, 이는 옛 이름을 쓴 것이 아니라 저들이 대한을 단절시킨 새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니, 앞에서 말한 것들이 어찌 정리에 맞겠는가. 나는 그래서 ?시대에 구애된다.?고 하였다. 시대에 구애되어도 오히려 본국(本國)의 전고와 사실을 없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니, 이 역사책을 편찬하는 것 또한 옛사람이 말한 것처럼 슬픈 일이로다.서문에서 위로는 환단(桓檀)부터 신라(新羅) 말기까지의 문헌을 말하고 아래로는 조선(朝鮮)의 문물이 찬란함을 말했는데 중간에 고려(高麗)를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마땅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최영(崔瑩)3)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명(明)나라를 범한 것은 계책을 그르친 것 중에 큰 것이니,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없게 하였다면 고려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충성스러우나 무모하다고 말할 만하다.배극렴(裵克廉)4)이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뀌지 않는 분명한 말이지만 태조의 영명함으로도 들어주지 않았으니 그 또한 의혹스럽다. 그렇다면 무안대군(撫安大君)과 의안대군(宜安大君)의 재앙5)은 태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훗날 비분강개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권양촌(權陽村)6)이 태조에게 돌아가 복종하자 그 아버지가 그를 핍박하였다. 하나는 아들을 불의(不義)에 빠뜨릴까해서이고, 하나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것을 효도로 여길까 해서였다.공양왕(恭讓王)7)이 태조가 등극할 때에 살해당하지 않았으나 끝내 3년 후에 보호받지 못했으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감히 태조에게 가만히 탄식해 본다.선사(先師 전우(田愚)를 말함)가 《목은집(牧隱集)》 서문에서 ?공민왕(恭愍王)이 일찍이 양부(兩府)의 관원을 거느리고 부처에게 예배할 적에 선생만 홀로 절을 하지 않았다. 또 태조가 벼슬하게 했으나 굽히지 않다가 죽었는데 역사가는 부처에게 아첨하고 절개를 바꿨다고 했으니 어찌 믿을 만한 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지금 이 역사책에 기록된 것을 보면, 상께서 말하기를 ?이색(李穡)8)은 유종(儒宗)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불씨를 믿었다. 이색을 한산백(韓山伯)으로 삼노라.?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개국하던 날에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제게 만일 알렸다면 마땅히 읍양(揖讓)하는 예절을 행하여 더욱 빛이 났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이색은 매번 나아가 뵙고 물러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성스럽고 명철한 임금이다.? 하였다. 이색이 불씨에 의탁하여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등의 말이 바로 이른바 ?불씨에게 아첨하고 절개를 바꿨다.?는 것인데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혁명할 즈음에 비록 역사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말도 한 가지 말이 아니고 일도 한 가지 일이 아니니, 어찌 하는 말마다 모두 모함이고 하는 일마다 모두 모함이 이처럼 심한 경우가 있는가. 아마도 목옹(牧翁)은 이 두 가지에 대해 굳세고 강한 풍모와 절개, 못을 끊고 쇠를 자르는 듯한 기상이 적었기 때문에 이렇게 모함을 당한 것이리라.목은의 졸년 아래에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지공(指空)9)과 나옹(懶翁)10) 두 화상의 부도(浮屠 사리탑(舍利塔))에 명(銘)을 짓게 되었는데, 그 문도들이 그 일로 문하에 왕래하자 불씨에게 아첨한다는 비방이 크게 일었다.?라는 평론이 있는데, 만일 이렇게 한 것뿐이라면 목은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주자는 송(宋)나라 황제에게 불사(佛事)로 잔치를 베풀 때에 전(箋)을 올려 축하하기도 했다.정종(定宗)11) 때에 정안군(靖安君)12)을 세우고서 왕세자(王世子)라고 칭한 것은 이름도 바르지 않고 말도 순조롭지 않다. 그런데 당시에 대신들이 의논을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모제(母弟 친동생)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皇太弟)에 봉하였고 태자를 삼은 일은 없었다.?라고 말한 것은 본래 바꿀 수 없는 정론인데, 임금이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라고 말한 경우는 더욱 남에게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되었다. 이 일이 잘못된 것은 대개 상왕(上王)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나, 세(世)라고 말한 것은 장차 대를 이어 임금이 되는 것을 말한다. 상왕이 이미 금상에게 전중(傳重)13)하였으니 정안군이 장차 이어야 할 것은 금상이고, 그 친속은 아들이 아니라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世弟)?라고 하니, 어찌 한 대를 뛰어넘어 그 친속을 상왕에게 일컬으면서 ?세자(世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당시의 임금은 그 대(代)가 없는 빈자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관(禮官)이 이 이치를 살피지 않아 이미 전에 잘못되었는데 또 뒤에 그 잘못을 답습케 하였으며, 심지어 융희(隆熙 순종(純宗)의 연호) 때에 영친왕(英親王)을 세워 황태자로 칭하였으니 아, 참으로 통탄스럽다.길야은(吉冶隱)14)이 태종에게 올린 글에는 ?아무개는 신조(辛朝)15)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첫 벼슬을 하다가 왕씨(王氏)가 복위(復位)16)함에 미쳐 즉시 고향에 돌아가 세상과 소식을 끊으려고 합니다.? 하였고, 정종에게 올린 글에는 ?신은 신조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서(注書)였습니다. 신은 듣건대 여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시골로 돌려보내 주시어 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말뜻을 살펴보면 신조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는 듯하지만 매우 이상하다. 만약 정종과 태종을 대하여 말하기 때문에 감히 곧바로 말하지 못하고 신조를 칭하여 말한 것뿐이라면, ?왕씨가 복위함에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과 소식을 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나는 의심스럽고 괴이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이 역사책에 목은을 한산백으로 삼았다는 등의 말이 있으나 다만 또 이 역사책으로 반복하여 상고해보면 ?당초에 이색과 우현보(禹玄寶)가 복위를 도모하자 우왕과 창왕이 윤이(尹彛)와 이초(李初)17)를 몰래 보내 명나라 황제〔朱元璋〕에게 하소연하였다.?하고, 또 ?태조가 하교(下敎)하기를 ?유사가 상언하기를 우현보ㆍ이색ㆍ설장수(偰長壽)등이 도당(徒黨)을 결성하고 반란을 모의하여 맨 처음 재앙의 단서를 만들었다.??하고, 또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의 신하 이숭인(李崇仁)과 이종학(李種學) 등을 죽였는데 이종학은 목은의 둘째아들로 윤이와 이초의 옥사에 부자가 같이 연루 되었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 역사책으로 보면 또한 목은은 한평생 고려를 위하여 충절을 다하다가 재앙이 그 아들에까지 미쳤으나 후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어찌 가장 만년에 뜻을 바꾸어 한산백을 받고 덕을 칭송하여 그 죽은 아들을 저버렸을 리가 있겠는가.권근과 설장수가 글을 올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참여하도록 요청하니 허락하였는데 권근은 당연하지만 설장수는 믿을 수 없었다. 태조가 하교한 ?설장수 등이 도당을 결성하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말은 이미 개국한 이후의 말이니, 설장수가 요청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조정이 어찌 허락할 리가 있겠는가. ?허지(許之)? 두 글자로 믿을 수 없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설장수의 졸년 아래에서 ?상왕(上王)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하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하였다.?고 하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정종(定宗) 때에 우현보를 단양백(丹陽伯)으로 삼았는데, 또 ?우현보에게 공신 호칭을 하사하고 밭 70결(結)을 지급하라.?고 한 것은 이방간(李芳幹)의 계획18)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만년 절개를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단 말인가. 아니면 또 이색과 설장수의 일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인가.고려 말기에 의리를 지켜 깨끗이 처신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공사(公私) 간의 문자에 뚜렷이 나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금 이 역사책으로 고찰해 보면 이색ㆍ길재ㆍ우현보는 이미 이와 같은 사람이다. 김자수(金自粹)는 태조 때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고 태종 때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고 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김약항(金若恒)은 태조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고, 조유(趙瑜)는 태종 때 영광 군사(靈光郡事)가 되고, 조견(趙狷)은 태조 때 개국공신으로 녹훈(錄勳)되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세종 때 궤장(几杖)19)을 하사받았으며, 신포시(申包翅)는 세종 때 좌사간(左司諫)이 되었으니, 이 모두 어찌된 까닭인가. 이 역사책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 당시 조선실록에서 나오고, 공사 간의 문자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 또한 여러 조정의 현인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으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마땅히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믿는 대로 전할 뿐이지만, 두 가지 경우가 나오면 또 절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차이나는 바 있으니, 반신반의하는 사이에 또한 참작하여 헤아릴 것이 있으리라.심온(沈溫)의 죽음은 죄가 명백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이로 인하여 그 딸에게 영향이 미친 경우이겠는가. 그들이 공비(恭妃)20)의 폐위를 청한 일은 실로 훗날에 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이 신후(愼后 중종비)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효시가 되었다.태조가 부처를 좋아하여 즉위한 이후부터 승하할 때까지 17년 동안 모든 불사(佛事) 중에 큰 것만 기록한 것이 거의 40건에 가까웠다. 이것으로써 후세에 본보기를 남겼는데 어찌하여 선불(禪佛)의 세계는 만들지 못하였는가. 태종이 계승하여 비록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고치지는 않았으나 그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가 명나라 태감(太監) 황엄(黃儼)의 배불(拜佛) 요청을 완강하게 거절한 것21)은 족히 천하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하륜(河崙)이 불법(佛法)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논한 것은 이미 그 바름을 얻었는데, 심지어 방주(蚌珠 진주)와 사주(蛇珠)로 사리(舍利)가 괴이한 물건이 아님을 논척(論斥)하였으니 또 명확하여 바뀔 수 없다.강거신(康居信)ㆍ손효종(孫孝宗)ㆍ조호(趙瑚)의 아내가 가혹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은 것이나 그 남편의 죄를 증명하지 않은 것이나 모두 삼강오륜의 도리를 극진히 한 것이며 그 말이 이치에 합당하여 또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열부(烈婦)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명철한 부인이라고 말할 만하니, 세상의 수염과 눈썹을 갖추고서 어버이를 버리고 임금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도록 부끄러워할 줄을 알게 할 수 있다.태종이 신하들과 목은에 대해 논하기를 ?회군(回軍)하던 날에 술을 보내어 맞이하였으니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 곧바로 중들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으니 경(卿)들도 그렇게 여기는가?? 하였는데, 태종의 이 말은 나라를 얻고 3세(世)가 지난 뒤에 있었다. 고려조에 보여준 충의는 이미 모두 포상이 끝났을 때이니 이미 꺼리고 미워할 것이 없었다. 비록 목은 행장(行狀)의 ?정권을 잡은 자가 공(公)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用事者忌公不附己〕?는 말에 분노해서 그런 것이지만, 목은으로 하여금 깨끗하고 깨끗하여 더할 수 없게 만들었더라면 또한 어찌 이처럼 굴레를 씌울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천고에 의심스러운 안건이라고 말할 만하다.태종 9년 기축년(1409)에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찬술할 적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河崙)을 불러 내전(內殿)으로 들어오게 하고 조금 있다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정이오(鄭以吾)와 변계량(卞季良)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한결같이 하륜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자 사관이 말하기를 ?옛날의 역사는 모두 3대가 지난 뒤에 이루어졌는데 지금 태조의 구신(舊臣)으로서 태조의 실록을 찬술하면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하니, 하륜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마땅히 노성(老成)한 신하가 죽지 않았을 때에 본말을 갖추어 기록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관이 또 이르기를 ?옛 제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또 사관으로 하여금 다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후세에 더욱 물의가 일어날까 걱정됩니다.?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이 일은 비밀이어서 8한림(八翰林)22)과 함께 할 수 없고 또 내지(內旨 임금의 은밀한 명령)로 두 한림을 참여케 한 것은 낭청(郎廳)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하륜은 전조에서 절개를 잃은 사람인데 불러서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마땅히 비밀리에 부탁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또 정이오와 변계량 두 사람에게만 명하여 한결같이 하륜을 따르게 하였으며, 또 하륜이 사관에게 대답한 노성한 신하가 죽지 않았을 때라는 말과 이 일이 비밀이라는 등의 말로써 헤아려 보면, 실록을 찬술한 것이 공정하고 정직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는 사람은 마땅히 이색ㆍ길재ㆍ우현보ㆍ설장수 및 제공(諸公)의 일들 가운데 반신반의한 것에 대해 짐작하여 헤아릴 바를 알아야 한다.태종 14년 갑오년(1414)에 영춘추관사 하륜이 정도전(鄭道傳)과 정총(鄭摠) 등이 찬술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禑王) 이후의 일은 사실을 숨긴 것이 많다는 것으로써 다시 수찬할 것을 청하니 이를 따랐다. 이것으로 보면 고려 말기에 제공의 일 가운데 반신반의한 것이 있다면 더욱 마땅히 짐작하며 살펴봐야 한다.우리 왕가(王家)가 명나라 왕가와 혼인하는 것에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런데 태종은 경정공주(慶貞公主 태종의 둘째 딸)를 걱정하여 즉시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보냈고 조대림이 모친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으니, 감히 알 수 없는 점이 있다.서견(徐甄)이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함이 한스럽다는 시23)를 지었는데, 신하들이 잡아다 시를 지은 뜻을 묻도록 청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전조의 신하가 전조를 잊지 못한 것은 인정이니 내버려두고 묻지 말라.? 하였다. 신하들이 다시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이 반드시 서견에게 묻고자 한다면 백이(伯夷)를 그르다고 한 뒤에야 물을 수 있다.? 하였고, 또 서견을 죄준다면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24)라는 말에 참으로 감히 한 구절도 돕지 못하게 되는데, 저 신하들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설령 태종이 미워하고 노여워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간언하여 그만두게 해야 하거늘, 어찌해 차마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태조가 의안대군(宜安大君)25)을 세워 세자로 삼을 적에 배극렴이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본디 태종을 적장자가 아니라고 여긴 것이니, 적장자가 아니면 어찌 서자(庶子)가 아니겠는가. 지금 태종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정릉(貞陵)26)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하니, 유정현(柳廷顯)이 대답하기를 ?그때에 신의황후(神懿皇后)27)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아, 이미 계모가 될 수 없다면 반드시 서모(庶母)라고 말한 뒤에야 옳겠는가.제왕가에서는 서차(序次)의 계승을 중요하게 여겨 형제간에 서로 계승하더라도 부자간의 도리가 있다. 태종이 이미 세종에게 전위하였으니 태종은 당연히 상왕(上王)이 되고 정종은 당연히 태상왕(太上王)이 된다. 또 태조와 정종의 전례가 있기에 태종의 ?상왕을 태상왕으로 삼고 내가 마땅히 상왕이 되는 것은 인륜의 질서가 그러하다.?는 하교와 변계량 등의 ?마땅히 상왕을 높여 태상왕으로 삼고 부왕을 상왕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은 본래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어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유정현 등의 ?부왕을 높여 태상왕으로 삼고 상왕은 그대로 상왕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은 더욱 사사롭고 사특한 소견에서 나온 것이다. 애석하게도 끝내 예법으로써 한결같이 재단할 수 없어 ?두 분 상왕?이라고 일컫게 되었으니 이는 매우 이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다.임금이 이미 전위하였다면 호령이 오로지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은 사리와 형세로 보아 당연하다. 태종은 이미 전위했는데도 오히려 호령이 자신에게서 나오게 하려고 애매한 사건으로 많은 대신들을 참혹하게 죽였다. 이러하다면 애초에 어째서 전위하였는가. 태조의 전위는 본래 격동된 바가 있어서 그러했지만 태종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또 어찌해서 이와 같았단 말인가. 대저 임금이 일에 싫증낼 나이28)가 아닌데도 전위하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니다.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길 적에 그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는데 명나라 황제가 매번 환관을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것은 우리를 천박하게 대우한 때문이니, 어찌 분개하지 않겠는가. 또 그 요구하는 바가 미녀(美女)와 말과 사리(舍利)의 종류를 벗어나지 않았고 해마다 요구하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 이는 그 중국의 예의(禮義)를 스스로 버리고 도리어 외국의 비난과 모욕을 받아 마침내 나라가 어지러워져 망하고 만 것이다.양녕대군(讓寧大君)29)은 스스로 그 도리를 잃고서 덕이 있는 임금에게 사양하였다. 행사(行事)로써 말하면 나라에 죄를 지은 일이 없건만, 세종의 신하들이 반드시 용납하지 않으려하고 심지어 접견도 못하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 만약 세종의 우애가 아니었다면 거의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세종 때에 생원 방운(方運)의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은 참으로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되는 글이니, 한창려(韓昌黎)의 〈불골표(佛骨表)〉30)와 서로 표리가 될 수 있다.조견(趙狷)은 세상에서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일컫는 자이다. 본명은 연(涓)이었는데 그의 형 준(浚)과 같은 항렬인 것을 부끄러워하여 물 수(水) 자를 제거하고 개 견(犬) 자를 따랐으니 이는 개가 주인을 안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지금 그 졸년(卒年) 아래에 ?견(狷)은 조준(趙浚)의 아우이고 고려 때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태조의 개국공신에 녹훈되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다른 특이한 재능은 없다. 다만 그의 형으로 인하여 훈맹(勳盟)에 참여하고 네 임금을 차례로 섬겨 지위가 1품(品)에 이르렀다. 젊어서 중이 되었는데 남들의 말이 조금이라도 거기에 미치면 대뜸 성을 내었다.? 하였다. 한 사람의 몸이 어쩌면 이토록 서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가.제왕가에서는 형제ㆍ숙질ㆍ조손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니 부자간의 도리는 있으나 부자의 명칭은 없다. 그런데 변계량이 ?세종은 정종의 사당에서 마땅히 손자라고 일컬어야 한다.?고 말했으니 예법의 뜻을 잃은 것이다.길야은(吉冶隱)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는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땅히 내가 고려를 향했던 마음으로 너의 임금을 섬겨야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이 과연 야은에게서 나온 것인가. 만일 마음마다 생각마다 오로지 고려를 향하고 있다면 이 말을 할 겨를이 없을 듯하다.?동성에게 장가들지 않는다.〔不娶同姓〕?는 법령은 세종 때부터 시작하여 정립되었고 숙종이 또 다시 거듭 밝혔는데 지금까지도 인습에 빠져 시행하지 않고 있다. 학사 대부(學士大夫)의 집안에서도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이것은 유가(儒家)의 허물이다.세종은 동방의 요순(堯舜)이라고 칭하지만 만년에 불씨(佛氏)를 좋아하였으니, -중간에 원문 빠짐- 우리나라가 유교를 숭상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심하구나! 화복(禍福)으로 사람을 깊이 선동하는 불씨의 말이여.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부처의 가르침이 공자의 도(道)보다 나은데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그르게 여기니 불도(佛道)를 깊이 알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세조 자신이 이미 불도를 깊이 알았다면 불도의 첫 번째 종지는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인데 도리어 이처럼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문종(文宗)31)이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불러서 한밤중이 지난 뒤에 세자를 부탁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으니, 이는 세자가 어려운 책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조가 이미 딴마음을 품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만약 송(宋)나라 태조처럼 태종에게 전위할 수 있었다면, 어찌 재앙을 그치고 아들을 보호하는 방도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였다.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의 귀향은 문종 때에 있었으니 우뚝하여 미칠 수 없다. 관란(觀瀾) 원호(元昊)와 직제학(直提學) 조어(趙峿)의 귀향은 단종 초에 있었으니 또한 공경할 만하다. 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같은 이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세 정승32)이 살해당한 뒤에 관직에 제수되어 품계가 올랐는데, 하위지가 상소하여 왕실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 말은 때마침 수양대군을 위한 기반이 되었고 유성원(柳成源)은 수양대군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짓기까지 하였으니, 나중에 충성을 바쳐 순절하였으나 최덕지ㆍ원호ㆍ조어에 견주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육신(六臣)33)은 충신이라면 충신이지만 후세에 본보기가 되기엔 족하지 못하다. 이미 신하로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호)을 섬겼으니, 녹봉을 먹지 않았다거나 ?거(巨)?자를 대신 사용했다는 설 따위가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롭다 할 수 있겠는가. 요행히 일이 성공되었다 하더라도 ?의리를 바로잡으면서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도(道)를 밝히면서 공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헤아려보면 숭상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일이 이루어지 못한 경우이겠는가. 병자년(1456, 세조2)의 거사34)는 그 심사를 드러내기에 족하였으나 거사하기도 전에 하루아침에 병통을 만나 끝나게 해버렸으니, 어찌하겠는가.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때에 박취금(朴醉琴 박팽년(朴彭年))이 경회루(慶會樓)의 연못에 투신해 죽으려한 것은 본래 바른 의리인데, 애석하게도 성매죽(成梅竹 성삼문(成三問))에게 설득당하여 그 바름을 얻지 못하였다.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때에 성공(成公 성삼문)이 상서사(尙瑞司)35)에 나아가 대보(大寶 옥새(玉璽))를 꺼내어 환관으로 하여금 받들고 가도록 했다고 말한 것은 더욱 괴이하니, 모함하는 말이 아니겠는가.군자가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가 일이 실패하면 비록 동료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를 숨겨주고 홀로 그 재앙을 당하거늘 하물며 임금과 아버지의 경우임에랴. 그런데 박취금은 그 아비를 숨겨주지 않았고 성매죽은 상왕에게 곧바로 고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다 모르겠다. 아니면 사관의 말에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는가.단종과 세조 교체기에 한명회(韓明澮)와 권람(權擥)은 오히려 할 말이 있겠지만, 정인지(鄭麟趾)와 신숙주(申叔舟)는 문종(文宗)의 두터운 은혜와 무거운 부탁을 받기까지 하였으면서 단종을 매우 참혹하게 대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개나 돼지도 그들이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인지는 더욱 심하다.현덕왕후(顯德王后 문종(文宗)의 비)가 사육신의 일에 무슨 상관이 있다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는가. 예컨대 의정부에서 상주한 것처럼 단종이 종묘와 사직에 죄를 얻었으니 그 어미는 명예와 지위를 보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해 문종에게는 핍박하지 않았는가. 윤리와 강상을 무너뜨린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당시 조정의 신하들 중에 한 사람도 불가함을 말하는 자가 없었고,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 소릉(昭陵)을 복위한 것 또한 누차 논의하고 누차 중지한 뒤에야 행해졌으니36) 아,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37)은 나의 돌아가신 스승이 문집의 서문을 지어38) 충의를 찬양한 사람이다. 이미 금성대군(錦城大君)39)과 더불어 상왕(上王 단종(端宗)을 말함)의 복위를 모의하였는데, 또 금성대군의 역모 모의를 급히 아뢰었다고 이 역사서처럼 말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경우가 있겠는가. 아마도 이 역사서는 믿을 수 없을 것 같다.단종과 안평대군(安平大君)40)이 재앙을 당할 적에 양녕대군(讓寧大君)41)은 매번 종친을 거느리고 죄주길 청하였으니, 양녕대군은 세상에서 지극한 덕을 지녔다고 일컬어졌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았는가. 만약 종친의 수반(首班)이 되었기 때문에 종친들이 고하지 않고 그 이름을 첫머리에 적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전후에 한 마디도 스스로 변명한 것이 없고 또 한 마디도 단종을 위하여 재앙을 제거한 바 없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역사책에 또 말하기를 ?우헌납(右獻納) 신숙주(申叔舟)는 ?양녕대군이 온정(溫井)으로 가서 목욕할 적에 길을 돌려 재미있게 놀면서 주(州)와 군(郡)을 번거롭게 하고,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을 뽑아 주도록 하여 마음대로 짐승을 사냥하였습니다. 재인과 백정 또한 군졸인데 왕자(왕자 양녕대군을 가리킴)가 군졸을 뽑아 폐단을 점차 키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중 신순(信順)이 ?양녕대군이 경주(慶州)에 이르러 장차 경주에 웅거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하였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양녕대군을 국문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세조 5년 기묘년(1459)에 있었던 일이다. 대개 양녕대군이 스스로 그 도리를 잃은 것은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는 데 뜻이 있었다. 지금은 뜻이 이미 이루어졌고 나이도 늙었으며 이미 조선조가 3대를 지났는데, 어찌하여 하는 바가 오히려 이러한가. 일부러 실덕(失德)을 행하여 이처럼 쓸모없음을 보여준 것인가. 매우 의심스럽다. 아니면 전일에 잘못한 것 또한 반드시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종친을 거느리고 죄주길 청한 것 또한 심히 괴이하지 않다. 아니면 또 양녕대군이 행한 전후의 일들에 대해 사관이 적은 것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인가.귀래(歸來) 신말주(申末舟)42)가 이미 은거한 뒤에 다시 출사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은거하니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다.〔再歸來〕?라고 기롱하였으며, 세조 5년 기묘년(1459)에 우헌납이 되었다. 그러나 신숙주가 친형이니 부귀를 바랐다면 무엇인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겠는가마는 곧 의리에 온당치 않음을 알고 은퇴하여 삶을 마쳤으니, 이것이 그가 어진 점이고 귀래(歸來)라는 호를 저버리지 않은 까닭이리라.정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곧 태종에게 선위(禪位)하니 이 얼마나 좋은 뜻이던가. 그런데 태종이 무슨 혐의를 두었기에 여러 대에 걸쳐 오래도록 묘호(廟號)를 올리지 않다가 숙종(肅宗)43)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른길로 돌아왔다. 대개 태종의 영명(英明)함과 세종의 현철함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사의(私意)와 천리(天理)를 밝히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가. 기이한 일이로다.사육신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할 적에 유공(兪公 유응부(兪應孚))이 ?일은 신속히 처리함을 귀히 여기니 천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 매우 옳았는데, 성삼문과 박팽년 두 분은 ?완벽한 계책이 아니니 멈춰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 일의 기미가 이미 드러났거늘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만전을 기한단 말인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린단 말인가. 대개 성삼문과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 가장 드러난 분이지만 이미 의(義)를 헤아리는 데에 정밀하지 못하였고 또 계획을 잘 세우는 데에도 부족하였다.성종(成宗)은 부녀자의 개가(改嫁)를 엄히 금지시켰으며,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사판(仕板 벼슬아치의 명단)에 끼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구애되는 바가 있다고 하자, ?굶주려 죽는 일은 작고, 절개를 잃은 일은 크다.?고 답하였으니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이여! 진실로 늠름한 정기(正氣)이지만 음식과 남녀의 일에는 사람의 큰 욕망이 존재하여 억지로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억지로 금했다가 혹 윤리를 어지럽히는 변고를 초래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다만 ?한 번 더불어 같이하면 죽을 때까지 바뀌지 못한다.〔一與之齊 終身不改〕?44)는 의리는 인심에 근본을 두어 옛 가르침에 드러난 것이니, 임금 된 자가 예의(禮義)를 크게 밝히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본래 마음을 잃지 않고 스스로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 절개를 지킬 것이다. 게다가 옛날에는 어진 이를 등용함에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따지지 않았으니45)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벼슬살이에 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왕도정치에 적합한 바가 아니다.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적자와 서자의 구분은, 조정에서는 재주가 다르지 않으니 마땅히 논하지 말아야 하고, 집에서는 명분이 절로 있으니 마땅히 변별해야 한다.? 하였다.조선 초기에 불교를 숭상함이 지극하여 기신재(忌辰齋)의 소두(疏頭 글의 첫머리)에 ?보살계제자 조선국왕(菩薩戒弟子朝鮮國王) 성(姓) 아무개〔諱〕?라고 일컫는 관례까지 있어 매우 부끄러웠는데,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승지(承旨) 손비장(孫比長)이 청하여 제거하였으니46) 불교를 배척한 공이 크다. 그가 일찍이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대성(臺城)의 재앙47)을 임금에게 말할 적에 ?불교를 좋아함이 저와 같은데도 재앙을 당함이 이와 같았으니 후세의 임금들이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 그런데도 불교를 믿는 것은 그 말이 이치에 가깝고 화복(禍福)의 설이 쉬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입니다.?48) 하였으니, 이것이 설득하는 참모습이라 말할 수 있다.성종이 왕비 윤씨(尹氏)를 폐하고 사사(賜死)한 후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세워 훗날 어머니를 위한 끝없는 복수의 재앙을 끼쳤으니, 어찌 사려 깊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 것인가. 만약 세자를 세운 것이 사사하기 전에 있었다면 참으로 세자를 함께 폐하기가 어려웠겠지만, 이미 사사되었는데 어찌하여 굳이 그녀가 낳은 아들을 세운 것인가. 이때 춘추(春秋)가 한창 때여서 세자를 세우는 것이 시급한 게 아니었고, 굳이 그를 세우려고 했다면 그 어미를 사사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더구나 그 죄가 죽일 만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경우임에랴. 성종이 ?장차 과인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조짐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 억측으로 한 말이다.윤씨(尹氏)의 죽음은 인수대비(仁粹大妃)49)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지금 시골마을의 인가에서도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좋게 보지 않아 쫓아내는 경우가 얼마이던가. 슬프다!연산군(燕山君) 때에 장단(長湍) 묘소 -폐비 윤씨(廢妃尹氏)- 제문의 머리말에, 국왕(國王)이라 칭하고 윤씨(尹氏)라 칭하는 것이 첫 번째요, 국왕 아무개는 삼가 자친(慈親) 윤씨에게 고한다고 한 것이 두 번째요, 아들이라 칭하고 선비(先妣)라 칭한 것이 세 번째요, 두 번째 말과 같은데 아무개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 네 번째인데, 이 의견에 따른다면 내 생각에 두 번째 말은 다시 평론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연산군이 처음 즉위해서 성종이 기르던 사슴을 직접 쏘자, 선전관(宣傳官) 박영(朴英)50)이 그 모습을 보고 병을 핑계 대며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기미를 보고 떠나되 하루가 다하길 기다리지 않았다.〔見幾而作 不俟終日〕?51)고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끝내 명유(名儒) 송당 선생(松堂先生)을 만든 까닭이리라. 아, 송당은 당시에 무관(武官)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어찌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제현들은 글을 읽은 명사(名士)로서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침내 큰 재앙을 겪은 것인가. 개탄스러울 뿐이다.김탁영(金濯纓)52)이 사초(史艸)를 만들 때에 세조의 일을 기록하면서 숨기지 않은 것이 많았고, 게다가 그의 스승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吊義帝文)〉53)을 실어 충분(忠憤)을 표현했다고 찬탄하였으니, 어찌 그 스승의 마음을 깊이 알아서 세조의 기사 아래에 실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글을 짓고 실은 것이 과연 이 뜻에서 나왔다면 한 사람은 친히 세조를 섬겼고 한 사람은 세조의 손자를 섬겼거늘, 어찌 감히 이처럼 모두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한때 우연히 지은 글에서 나와 다른 뜻이 없었는데 사초에 잘못 실린 것인가. 일찍이 거듭 생각해 보건대, 이 글은 정축년(1457, 세조3) 10월에 지은 것이어서 바로 사육신이 죽은 뒤요 또 첫 벼슬에 나가기 전이라 하니, 젊은 혈기가 왕성할 때에 아마도 우연히 지은 것이리라. 자못 매월당(梅月堂)54)과 그 행적을 같이 하려고 했으나 나중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문집에서도 오히려 마땅히 삭제했어야 했는데, 더구나 사초인 경우이겠는가.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55)은 저명한 선비이다. 점필재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점필재가 준 시에 ?우리 당에 그대만큼 아는 사람이 적다.〔吾黨如君知者少〕?56)고 찬양한 것이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점필재를 추형(追刑)57)하라는 의론에 동참했으나 그 또한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유배 가다가 길에서 죽게 됨을 면치 못했으니, 그 마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요행히 면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말할 수가 없다. 죽는 것은 같지만 어찌 시종여일한 사람과 같겠는가.연산군은 임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성품이 방탕하고 사치스러웠으나 오히려 생일에 잔치를 벌여 술을 마시고 하례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시골마을의 선비 중에 조금 자중할 줄 아는 사람 또한 생일에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니, 어찌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참혹하도다, 연산군 때 조정의 선비가 당한 재앙이여! 요행히 면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요행히 면한 사람은 아첨하여 순종한 무리였다. 《주역》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곧 얼게 된다.〔履霜堅氷至〕?58) 하였고, 또 ?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介于石 不終日 貞吉〕?59) 하였으니 아, 재앙을 당한 자는 모두 글을 읽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서리를 밝고도 기미를 보지 못했다 하나 무오년의 단단한 얼음이 언 뒤에도 오히려 태연하게 물러나지 않고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려 혹은 충성스러운 말을 진헌(進獻)하면서 자신도 죽고 종족이 전복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위를 유지하고 녹봉을 보전하려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가 ?뜻있는 선비는 자신의 시체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60) 하였다.충재(冲齋) 권발(權橃)61)은 명종 을사년(1545)에 명성과 절개가 어떠했던가. 그러나 일찍이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이 어찌 선비가 발을 내딛을 곳이던가. 비록 금기 사항을 범했다가 삭출 당하여 도리어 분명하게 되었으나, 어찌 애초에 대책문(對策文)을 짓지 않은 게 더 좋은 것만 같겠는가.유순(柳洵)62)은 연산군 때에 대신(大臣)의 신분으로 임금의 뜻에 순종하고 포악한 짓을 조장하였는데, 성희안(成希顔)과 박원종(朴元宗)이 일으킨 반정(反正)의 거사에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이 없어 기회를 틈타 찾아와 항복하였다. 그 죄악의 심보를 따져보면 목을 베어 용서할 수 없는 자인데도 사람들이 죽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와 일을 같이했으니, 이것은 무식한 소치이다.박원종(朴元宗)63) 등이 왕비 신씨(王妃愼氏)의 폐위64)를 청할 적에 중종(中宗)이 윤리와 예의로써 엄정하게 말하여 꺾었다면 저들은 반드시 말문이 막혔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다시 폐하고 세우는 일을 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세력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박원종 등이 왕비를 폐하고 세운 것은 부귀를 도모하려는 데서 나왔고 종묘사직을 위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에는 죄가 신하로써 감히 왕비를 폐위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사관이 평가한 것처럼 국가를 경륜하는 데에 어둡고 세력을 믿고 사치하여 의(義)를 멸했을 뿐이겠는가. 박눌재(朴訥齋)65)가 상소문에서 죄를 물어 관직을 삭탈해야 한다고 논한 것은 참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중종 초의 과분한 훈공에 대해 사람들이 다 마땅히 삭제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기묘제현(己卯諸賢)은 이것 때문에 화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과분한 훈공으로만 논해서는 안 되고, 유순과 구수영(具壽永)의 무리처럼 임금의 악행을 조장한 자들 또한 높은 공훈을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죄(罪)를 도리어 공(功)으로 삼은 짓을 논박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정문익(鄭文翼)66)은 세상이 칭송하는 어진 재상이니, 기묘년(1519, 중종14)에 정암(靜菴)67)과 제현(諸賢)을 구호한 일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중중이 왕비를 폐위한 일은 실로 미안하다는 전교를 합당치 않게 여겼고, 영산군(寧山君 성종의 아들)의 무죄를 알면서도 오히려 ?어찌 전혀 치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유자광(柳子光)은 죄로써 공을 가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고, 또 ?문종(文宗)의 신위를 조(祖)라 칭하거나 손(孫)이라 칭하거나 행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도량이 넓음에 대해서도 이견을 지닌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그가 종실(宗室) 네 사람이 상소하여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의 도리를 논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사대(賜對)68)하지 말라고 청한 것은 또 어째서인가. 이 밖에 많은 것들은 다 거론하지 않는다. 일찍이 지산(志山) 김공(金公 김복한(金福漢))이 조선조 5백년의 인물과 관안(官案)69)을 논하면서 ?대신(大臣)의 재목으로는 결국 문익공(文翼公)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논해본다.정암이 재앙을 당하기 전년에 이미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서한을 화살에 매어 정부(政府)와 간원(諫院)의 문에 쏘아 ?조(趙) 아무개 등이 국정을 혼란에 빠뜨려 장치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미를 내다본 것일 뿐만 아니니 마땅히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떠났어야 했다. 그런데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어서 소격서(昭格署) 혁파를 강하게 청하여 심지어 밤새도록 논주(論奏)하여 허락을 얻었고, 또 몇 마디 말로 조정에서 야인(野人)을 체포하기로 이미 정한 논의를 중지시켜 여러 신하로 하여금 모두 불평한 마음을 품게 하였으며, 또 정국공신에 문란하게 녹훈된 자를 삭제하도록 누차 주청하여 결국 허락을 얻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국가의 안위와 관련되는 큰 일이 아니었는데 어찌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였는가. 이 세 가지를 없애는 것 또한 화를 면키 어려운데 도리어 재촉하였으니, 이 또한 운수와 관련된 것이어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리라.김세필(金世弼)70)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정암(靜菴)을 위하여 한 마디 하면서 말할 때마다 눈물을 함께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의리와 기개가 어떠하였던가. 그래서 상진(尙震)71)이 말하기를 ?요사이 경연(經筵)에서 이와 같은 정론은 없었다.? 하였는데, 정암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자 갑자기 전에 한 말을 뒤집으면서 오직 정암과 연루될까 두려워하였으니, 또 겁이 많고 나약하기가 어떠하였던가. 옛날에 ?죽음에 임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72)는 것과 비교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국 곤장 맞고 유배 가는 형률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전후로 두 말 하지 않는 정직함과 같겠는가.남원(南原)에 윤씨(尹氏) 여자가 상중의 혼인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으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내가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서겠는가.? 하였다. 그 여자는 당시에 명나라에서 공녀를 뽑아가는 변고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말하기를 ?만에 하나라도 뽑혀서 다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스스로 처신할 것이고, 또 변고를 당한 줄 알았으면 죽음으로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였다. 아, 지금의 이른바 ?유자(儒者)?는 일이 없고 평안할 때에 상(喪)을 틈타 혼인을 함부로 행하고, 방관하는 유자도 태연스레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니, 어찌 모두 윤씨 여자의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남곤(南袞)73)은 죽음에 임하여 스스로 천고의 소인(小人)이라는 이름을 면하기 어려운줄 알고서 평생 동안 쓴 원고를 가져다가 모두 불태워 버렸고, 또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하였으니, 한 점의 양심이 죽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그 죄를 알았다면, 어째서 통쾌하게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하여 위로 임금에게 아뢰어 정암(靜庵)과 제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현인을 죽인 자신의 죄를 다스려 달라고 청하며 제문(祭文)을 지어 제현의 묘소에서 죄를 자복하여 명백하게 나라 안에 알리지 않은 것인가. 그렇게 했더라면 또한 한 가지 볼만한 점이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심하도다. 인종(仁宗)이 동궁에 있을 때에 험한 재앙을 당함이여! 첫 번째는 고기반찬에 독을 넣었고, 두 번째는 작서(灼鼠)의 흉함74)이 있었고, 세 번째는 식혜(食醯)에 독을 넣었고, 네 번째는 불을 지르는 변고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윤원형(尹元衡)75)의 소행이라고 의심하였으니, 어찌 근거 없는 말이겠는가. 이것은 을사년(1545) 7월에 일어난 일76)의 근거가 되었는데, 총괄해서 말하면 중종(中宗)이 명확히 결단하지 못한 잘못이다.중종의 교서(敎書)에 윤임(尹任)77)을 유배시키고 윤원형을 파직시킨다고 하였으나, 사관들은 ?임금이 과연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었다면 윤임과 윤원형에게 같은 죄를 주었어야 하는데, 한 사람은 파직시키고 한 사람은 유배 보내어 벌의 경중이 현격하게 다르니, 한쪽으로 치우친 잘못을 또한 볼 수 있다.?라고 판단하였으니, 이것이 본래 정론(正論)이다. 대개 인종의 재앙은 모두 중종이 초래한 것이니, 어찌 명확히 결단하지 못했을 뿐이겠는가. 이는 여염집의 서민들이 후처(後妻)의 소행에 미혹되는 것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당초에 한쪽 사람이 동궁을 보호하자는 의견을 김안로(金安老)78)에게 말하였는데, 그때로 말하면 또한 절로 이치가 있었으니, 김안로가 진실한 마음으로 보호하였다면 또한 절로 공도 세웠을 것이다. 다만 건의한 자가 반드시 이 마음을 지녔다고 할 수 없고, 김안로의 마음 또한 오로지 권력을 탐하고 세도 부리기를 즐김에 있었으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판서(判書) 송세형(宋世珩)이 을사년(1485) 이후에 보여준 일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지만 그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을 적에 정암(靜庵)의 관직을 복구해주길 청한 것은 어찌 가상하지 않은가. 이때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중종도 임금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겨우 한 사람 있었는데 송세형이 계속 말하여 임금의 승낙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이렇게 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마음을 지켜 변치 않았다면 어찌 군자로서 종신토록 아름다운 명성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그는 기묘사화에 대해서는 밝았는데 을사사화에 대해서는 어두웠는가. -송세형은 우리 15대조 첨지공(僉知公)79)의 외손(外孫)이기에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언급하였다.-중종 21년 병술년(1526)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변고가 있었다. 임금이 예교(禮敎)가 무너졌다며 팔도(八道)에 명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80)를 시행토록 하니, 이것은 형식 중의 형식이었다. 정암(靜菴)이 대사헌을 맡았을 때에 남녀가 길을 달리하고 정치와 교화가 바야흐로 흥성하던 일을 추억하면 마땅히 감상에 젖어 깨달았을 텐데, 이로 인해 나아가 아뢰어 그 기회를 촉발시킨 사람이 없었다.인종(仁宗) 을사년(1545)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약을 처방하는 데 동참하길 청하였는데 약방(藥房)이 그의 직책이 아니라고 거절하니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치면서 청하기까지 하였다. 또 임금이 다른 궁궐로 옮겨 조섭하고 정양(靜養)하길 청하니, 세상에서 하서를 군신 간의 의리를 다한 사람으로 칭송한 것은 이미 이때부터였다. 정유헌(丁游軒)81)도 약방에 들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허(許)나라 세자(世子) 지(止)가 약을 맛보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이 시해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82) 지금 임금의 병을 한결같이 의관에게만 맡겨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 의리를 안 사람은 오직 하서와 유헌(遊軒 정황(丁熿)) 두 분뿐이다.퇴계(退溪)는 매번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으니 그 존경하고 신뢰함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그가 전한(典翰)이 되었을 때에 조정이 모재의 집에서 왜인(倭人)이 선물로 보낸 호초(胡椒)를 받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일로 상소하기를 ?신하가 사적인 교제를 할 수 없는데 김안국이 왜인을 너무 후하게 대우하여 저들을 더욱 방자하고 탐욕스럽게 만들었으니, 김안국에게 죄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대개 저들이 선물을 보낸 것은 스스로 모재의 덕의(德義)에 감동하였기 때문인데, 곧바로 자기에게 정성을 다한 것에 보답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을 향해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서 한 말에 불과하다. 어찌해 이것으로 모재를 위하여 변명해 주지 않고 곧 ?사적인 교제이다.〔私交〕?, ?저들을 더욱 방자하게 만들었다.〔致彼益肆〕?, ?죄가 없지 않다.〔不無罪矣〕?라고 하였으니 그 존경하고 신뢰하는 도리에 과연 어떠한가.계림군(桂林君)83)을 죽이던 날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가 단자(單子)를 밀봉해 들어가 아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죽거나 귀양 가거나 삭직당하거나 파직당하는 재앙이 더욱 심해졌는데, 이때에는 명종이 이미 즉위하여 국가의 대사가 정해졌다. 밀봉 단자 속의 이른바 ?인종의 병환이 위독하던 날에 손수 종이에 글을 써서 윤흥의(尹興義)로 하여금 보게 하였다.?는 말이, 있고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기에 반드시 밀봉 단자로 아뢴 것인가. 이처럼 사실과 거짓이 추관(推官)의 형신(刑訊)으로 만들어진다면 선류(善類) 또한 저절로 같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혹 기록한 것이 사실과 어긋난 것인가.내가 일찍이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의 ?천고에 이름을 남긴 두 학사요, 구원에서 원통해하는 한 왕손이네.〔千古有名兩學士 九原含痛一王孫〕?라는 시를 읽었는데, 사람들이 두 학사는 회재와 퇴계를 가리킨다고 말하여 매우 놀랍고 의심스러웠다. 이 역사서에서 ?봉성군(鳳城君)84)이 죽을 때에 퇴계도 응교(應敎)로서 복합(伏閤)85)에 참여하였다.?는 구절을 보고서 더욱더 놀랍고 의심스러웠다. 마침내 그 책에서 인용한 야사(野史)86)에 ?이 아무개가 밖에서 들어와 의론의 본말을 알지 못하면서 또한 참여하였다.?는 것과 ?사람들이 이석(離席)하여 봉성군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으나 이 아무개만 홀로 이석하지 않아 사람들이 어렵게 여겼다?는 말을 보고서 비로소 의심을 풀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애당초 이런 시절엔 벼슬하지 않은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입암(立巖) 민제인(閔齊仁)87)이 그 잘못을 깊이 뉘우쳐 당시 소인배와는 조금 달랐고 끝내 또한 멀리 귀양 가니, 이것이 우암(尤庵)이 그의 묘문을 지은 까닭이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차마 하루아침에 죽어버리지 못하고 동네 젊은이에게 모욕을 당했다.?88) 하였으니, 마땅히 후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명종(明宗) 초년에 회재가 7조(條)의 글을 올렸는데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양성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효릉(孝陵)의 갈장(渴葬)89)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으니, 완급과 선후의 구별에 대해 어떠하였던가.소인(小人)이 악행을 함께 저질러 군자를 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마지막에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고 심하면 골육 간에도 원수가 되니, 윤원로(尹元老)과 윤원형(尹元衡)이 이런 경우이다.서얼(庶孼) 정대운(鄭大雲)이 문과와 무과에 응시하도록 허락해주길 상소하자,90) 의론들이 분분하여 옳다고도 하고 그르다고도 하였다. 그러자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이 원칙이 한 번 무너지면 서자이면서 적자를 핍박하고 천하면서 귀한 이를 멸시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니, 어찌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청한 사람이 서얼이어서 말류의 폐단을 막으려한 듯하다. 나는 일찍이 ?조정의 정치는 오직 어진 사람을 뽑아야 하고 집안의 예절은 명분이 문란해서는 안 되니,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이 마땅히 공정하게 작록(爵祿)을 베풀고 엄격하게 법령을 시행한다면 두 가지가 서로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조남명(曹南冥)91)이 두루 말하기를 ?학문에 힘을 쓰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효험을 얻게 된다.?하고, 또 ?나라를 균평하게 할 수 있고 백성도 교화시킬 수 있고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요체를 보존한다면 거울은 그대로 비추지 않음이 없고 저울은 공평하게 달지 않음이 없으며 생각은 사특함이 없을 것이다. 불씨(佛氏)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는 것은 유교와 불교가 한 가지이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불교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좋아하는 것에 맞춰 ?밝은 창문으로 들여보내는?92)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와 같다면 불교로 말미암아 또 천리에 통달할 수 있다. 천리에 통달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또 어찌 임금이 좋아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 일삼은 바가 없는 것을 행하여93) 반드시 힘껏 유교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과 같겠는가. 그 아래에 곧 말하기를 ?다만 인사(人事)에 베풀어 실천할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 유가(儒家)가 배우지 않는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불교로 말미암아 천리에 통달할 수 있다면 천리가 통달되어 앎은 참이 되고 참으로 알게 되면 실제로 행하게 되는데, 또 어찌 실천할 곳이 없다고 말하는가. 명옹(冥翁 조식)의 이 말은 자못 작은 실수가 아니다. 대개 우리 유교가 불교를 배척한 까닭은 그들의 이른바 ?천리(天理)?는 기(氣)이지 이(理)가 아니기 때문이다.국상에서 졸곡(卒哭)94) 뒤에 백립(白笠)을 쓰는 것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려 있는데 다만 폐지해버리고 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종(中宗)의 국상에 유관(柳灌)이 건의해 행하였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국상에 윤원형이 ?백립은 유관이 정한 것이니 준용할 수 없다.?95)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슴을 쫓다가 태산(泰山)을 보지 못하는?96) 격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니, 이와 같은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는 세상에 어떤 유자(儒者)가 옛날의 예법을 독실하게 행하여 본받는 자가 많으면, 대뜸 무리들이 ?이는 아무개가 새로 만든 예법이라네.?라고 비방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남명은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선주(先主 유비(劉備))와 함께 30여 년 동안 다시 나라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니 그가 정치에 나온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97)라고 매우 불만스러운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와 형세를 알고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는 유자(儒者)의 출처(出處)로 지극히 말하였다면 참으로 그럴 법하다. 다만 제갈 무후의 뜻은 당시에 조조(曹操)가 한(漢)나라의 도적이 됨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를 도와 도적을 토벌하여 대의(大義)를 밝혔을 뿐 성패의 결과를 따지지 않았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된다.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가 석 상궁(石尙宮)은 죄가 매우 극악하니 마땅히 궁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잇달아 청하자, 선조(宣祖)가 말하기를 ?석 상궁이 궁중에 있기는 하였으나 시위(侍衛)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슨 제멋대로 한 죄가 있겠는가.?98) 하였다. 이것은 그 죄가 매우 극악한 것을 제멋대로 했다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니 뜻이 그 죄를 숨기는 데 있다. 양사가 죄가 매우 극악하다는 것만 말하고 무슨 죄에 어떤 악행인지를 말하지 않은 것 또한 뜻이 그 죄를 숨기는 데 있다. 이미 죄가 매우 극악하다면 목을 베어야 되는데, 내쫓아야 한다고만 청한 것 또한 뜻이 그 죄를 숨기는데 있다. 그 죄는 무엇인가? 을사년(1545) 7월의 일99)이다. 그 죄를 숨기는 것은 석 상궁 때문이 아니고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다. 아,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것은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죄가 매우 극악한 석 상궁의 목을 베는 것 또한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명종 무신년(1548)에 내관(內官) 지한필(池漢弼)이 함께 번(番)을 섰던 내관 김준(金俊)에게 말하기를 ?인종(仁宗)께서 붕어하신 일은 김충후(金忠厚)와 석씨(石氏) 등의 소행이다. 신하의 마음으로 그 말을 듣고는 매우 미안하여 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 하달하여 추국하고 -공사(控辭)는 본래 적지 않음.- 마침내 김준은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냈으나 김충후와 석씨는 죽이지 않았다. 김준을 국문하여 귀양 보낸 것은 그 죄를 숨기려는 것이고, 공사를 적지 않은 것은 모두 말 뿌리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른바 ?덮으려 하면 더욱 드러난다.〔欲蓋彌彰〕?는 것이 아니겠는가.주세붕(周世鵬)100)이 정미년(1547, 명종2) 살육이 있었을 때101)에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의 죄는 이처럼 다스리고 난 뒤에야 공론이 정해진다.?하였다. 사람들이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자 ?이처럼 논하고 난 뒤에야 지금의 재상들이 기뻐한다.?102) 하였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은데도 그가 서원(書院)을 먼저 일으켰다는 것 때문에 세상이 모두 그를 명류(名流)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공(功)은 죄(罪)를 덮을 수가 없다.명종이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면서 당나라 희종(僖宗)이 간언하는 신하를 죽인 일103)을 논하기를 ?나라를 흥하게 하는 임금은 자신의 허물 듣기를 즐겁게 여기고, 나라를 망친 임금은 허물 듣기를 싫어한다. 직간하는 자가 죽었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104) 하였는데, 이때 춘추가 이미 19세였으니 은연중에 본조(本朝)의 일을 스스로 개탄하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나중에 순회세자(順懷世子)105)를 잃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 통곡할 수 있겠는가. 을사년(1545)의 충현(忠賢)들이 죄 없이 모두 죽는데도 나는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니, 내 집안이 어찌 대대로 임금이 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와 같은 총명한 자질로 어진 임금이 될 수 있었는데 그가 당한 불행이 애석하다.안서순(安瑞順)과 정륜(鄭綸)을 죽일 때106)에 윤원형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에게 죄를 연루시키고 사림에 재앙을 전가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으니,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 유학)을 도운 것이 아니겠으며, 또 어찌 하서가 도회(鞱晦)107)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일재(一齋 이항(李恒))가 한공(韓公)의 이 마음이 발동하여 이치에 합당한 것은 도심(道心)이고 이치에 어긋난 것은 인심(人心)이라는 설을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것은 옳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기를 ?성명(性命)의 바름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 하였는데 또한 온당치 않은 듯하다. 또 마땅히 ?성명에 근원하고 형기에서 나온다.?라고 말해야 하니 주자의 설과 같을 뿐이다. 대개 인심ㆍ도심ㆍ이발(理發)ㆍ기발(氣發)이라고 한 것은 퇴계(退溪)가 논한 사단칠정(四端七情)108)과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동일하니, 또한 기이하다.강릉(康陵)109)의 장례에 일관(日官)이 10월은 불길하다 하여 9월로 당겨서 정하였다. 그러자 대비가 말하기를 ?길하고 흉함은 천명에 달려있는데 일관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10월로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건만, 대신 중에 동고(東皐)110) 같은 어진이도 변변찮은 길흉의 설을 진달하여 결국 갈장(渴葬)으로 거행하였다. 설령 대비가 길흉에 미혹되어 갈장을 거행하려 할지라도 대신의 도리로는 오히려 예법으로 바르게 고했어야 하거늘, 하물며 대비는 예법을 행하려고 하는데 대신은 그렇게 못함에랴.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동고(東皐)가 유차(遺箚)로 올린 파붕당설(破朋黨說)111)을 두고 ?옛사람은 임종 때에 말이 선하였는데 지금 사람은 임종 때에 말이 악하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혹 이 말이 지나치게 준엄하고 비정(非情)하다고 의심하였으나 도리어 그 뒤에 당화(黨禍)가 더욱 심해지자 ?동고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동고의 의견은 원래 순정하지 않아 일찍이 말하기를 ?을사년(1545)의 일에 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많으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하여, 그 원통함을 씻으려는 것을 저지하였다. 또 사류(士類)와도 맞지 않아 모의하여 제거하려는 단서가 그의 재종아우 이원경(李元慶)의 일112)에서 드러났으니, 그가 말한 ?붕당을 깨뜨린다.〔破朋黨〕?는 것은 바로 사류를 깨뜨리는 것이다. 율곡의 말이 어찌 근거가 없었겠는가.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은 뜻이 나라에 충성하는 데 있어서 한결같은 절개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식견이 고명하지 못해 동고에게 복종하고 이원경에게 흔들려서 사림(士林)을 잘못 해칠 뻔했으니 아, 위태로운 일이로다. 이 때문에 학문은 치지(致知)113)를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가 의리를 듣고 곧 복종하여 퍼뜩 생각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휴암 선생이 되는 까닭이다.선조(宣祖)가 사육신을 논한 말이 비록 그 마음을 알지 못한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가 ?어찌하여 수선(受禪)하는 날에 통쾌하게 죽지 않았으며, 또 어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지 않은 것인가. 이미 몸을 맡겨 임금을 섬기고서 또 시해하길 구하였다.?114)고 말한 것은 인정과 의리로 헤아려 보면 사육신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스스로 변명할 수 없을 듯하다.을사년(1545)의 허물은 회재(晦齋 이언적)와 퇴계(退溪 이황)가 대략 같았는데, 율곡이 퇴계를 존중하고 회재를 폄하한 것은 비록 회재는 덕을 이룬 때이고 퇴계는 나이가 젊을 때인 것으로써 말했으나, 지금 실제 나이로 상고해 보면 회재는 당시에 55세였고 퇴계는 당시에 45세였다. 주자가 《논어》의 ?나이 마흔이나 쉰이 되도록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四十五十 無聞〕?115) 구절의 주(註)에서 모두 덕이 이루어진 시기로써 풀이했으니 나누어 말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도 율곡이 오히려 그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그가 퇴계에게 일찍이 천 리를 찾아가 절한 존경의 예절을 남겼고, 심지어 소자(小子)가 도(道)를 듣고자 한다는 중후한 말을 남겼기 때문에 체면이 있는 곳에 저절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명종의 국상에 퇴계는 공의대비(恭懿大妃)116)는 상복이 없다고 여겼다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명언(明彦 기대승의 자)의 말이 옳으니, 나는 죄인을 면할 수 없다.?하고, 또 ?어찌 기년(期年)에 그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렇다면 기년(朞年)과 3년 사이에서 결국 어디에 정해야 바른 예법에 맞을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형수(兄嫂)를 위해 입는 복은 원래 없다가 훗날 위징(魏徵)이 정한 바이지만 또한 소공(小功) 5개월의 상복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 3년을 옳다고 여긴 것은 어찌 명종이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종묘사직의 주인이 된 때문이 아니겠는가. 기년복의 경우는 또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가. 예법을 아는 학자를 좇아서 그 설명을 듣고 싶다.선조(宣祖)가 남곤(南袞)의 일로 퇴계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선조(先朝 중종을 말함)의 육신(六臣)이기에 관작을 추탈하기가 온당치 않다고 하시니 이 뜻이 매우 옳고, 공론으로 관작을 추탈할 것을 청하니 이 뜻도 옳습니다.? 하였다. 만약 선조가 ?경(卿)은 양편 모두가 옳다고 하는데 그 중 어느 편이 더 옳은가??117)라고 다시 묻지 않았다면, 반드시 정암(靜庵)을 포상하여 추증하거나 남곤의 관작을 추탈하는 일이 없어서 확정되지 못한 안건이 되었을 것이다.선조가 양사(兩司)에서 담제일(禫祭日)에 하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을 윤허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하례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의론을 제기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118) 하니, 임금의 말이 어찌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 한 마디 말만 들어봐도 이미 그 정치하는 마음을 알겠다.율옹(栗翁 율곡 이이)이 중론에 따라 탄핵해서는 안 되는 심청양(沈靑陽 심의겸(沈義謙))을 탄핵했는데 비록 그 뜻이 보합(保合)에 있었으나 ?그 옳음을 바르게 지키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로를 계산하지 않는다.?는 의리에는 이미 미진한 점이 있다. 하물며 끝내 보합에 무익한 경우이겠는가. 이것은 후세 학자들이 마땅히 거울로 삼을 만하다.유서애(柳西崖)119)의 재주로 어찌 경장(更張)의 적절함과 양병(養兵)의 다급함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율곡의 의론에 대해 강력히 비난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훗날에 율곡의 선견지명과 충근(忠勤)한 절개를 매번 칭송한 것은 또 어째서인가? 만약 전에는 미혹되었다가 나중에 깨우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서애의 재주로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바야흐로 율곡(栗谷)이 삼사(三司)의 탄핵을 당하고 삼간(三奸)120)이 귀양 가던 날에 김우옹(金宇顒)121)이 화평론(和平論)을 상주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공론(公論)임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대답은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듯이 정황을 환히 꿰뚫었고 율곡ㆍ우계ㆍ송강을 변론한 것은 해와 별처럼 밝았으니, 이 얼마나 밝은 견해이며 이 얼마나 확고한 의지인가. 그러나 훗날에는 처음처럼 이어가지 못하여 율곡에게 증직을 허락하지 않고 우계와 송강을 간사하고 악독한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아, 끝을 잘 맺는 경우가 드문 것은 고금의 공통된 근심거리이지만,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은 궁격(窮格)122)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여 사사로움과 사특함이 가렸기 때문이다.율곡(栗谷)이 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선조가 임명하던 날에 바로 정여립(鄭汝立)이 널리 배워 재주가 있다고 말하니, 이는 정여립이 쓸 만한 인재임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쓸 만한 자라고 하겠는가. 무릇 인재를 등용함에 헛된 이름만 취해서는 안 된다.?123) 하였으니, 그렇다면 율곡이 현명하다고 하지만 도리어 선조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다. 율곡이 죽은 뒤에 ?정여립이 스승을 배반했다,?는 한 구절이 있지 않았다면, 그가 복주(伏誅)된 뒤 여러 신하들과 정여립의 친구들이 모두 죄율(罪律)을 당하던 날에 또한 정여립을 끌어다 쓴 허물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세 사람이 귀양 가던124) 날에 선조가 율곡을 위해 변론한 것은 비록 그 자손과 문인으로 하여금 변론케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는데, 지금 심의겸의 죄상을 내걸 때에 율곡을 함께 기록하여 당인(黨人)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가만히 생각건대 선조는 본래 남을 포용하는 도량이 적었다. 임금이 즉위하였을 때에 심의겸이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의 비 심씨(沈氏))에게 아뢰어 임금의 기욕(嗜慾)을 줄이도록 하였으니, 이 때문에 유감을 품은 것은 어쩌면 괴이할 것도 없다. 그러나 율곡의 경우에는 이런 따위가 전혀 없었는데도 갑자기 이전의 소견을 뒤집어 생전에 베푼 것과 사후에 베푼 것이 달랐으니, 속으로 의심이 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음이 이르러 증직(贈職)을 허락하지 않을 때부터 이미 무슨 뜻을 품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선조 또한 총명하고 재주가 많은 임금이지만, 아마도 사사로운 시기심에 조금 연루된 것이리라.중봉(重峯)125)은 정직하고 진실할 뿐 아니라 그 지혜와 명철함 또한 우뚝하여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가 일본의 일로 세 차례나 상소하였는데 모두 명확하게 들어맞았으니, 만약 조정에서 활용했더라면 어찌 임진년의 참화가 있었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있다. 대개 경험해 보지 못하여 그 사람에 대해 어둡다면 오히려 할 말이 있겠지만, 선조의 경우는 중봉이 일찍이 정여립을 후예(后羿)와 한착(寒浞)126)에 견주는 소장을 올림으로 인해 그 선견지명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봉을 귀양에서 풀어준 뒤에는 오히려 일본의 일을 논한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말하기를 ?조(趙) 아무개는 간사한 귀신인데 다시 마천령을 넘고자 하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형세로 사람을 살펴보면 천고 이래로 똑같으니, 중봉이 이런 경우를 당한 것은 그 또한 지위가 낮은 것이 빌미가 되었으리라.정여립이 역모에 어찌 일찍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거나 무리를 모아 고을을 점거하였던가. 다만 반역할 마음을 품었을 뿐이니 《춘추(春秋)》의 주심법(誅心法)127)으로 베어 죽이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그가 이미 자살하였으니 또한 이미 아무런 일이 없건만, 어찌 한사코 연좌제(連坐制)로 연좌시키고 이족법(夷族法)으로 친족을 멸하여 풀처럼 베어지고 금수처럼 잡혀서 조정에 사람이 거의 빌 정도였는데 이웃의 적들이 범처럼 노려보고 고래처럼 삼키려는 형세가 조석으로 급박함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당시에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나랏일을 도모할 적에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七聖皆迷〕?128)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재상 이산해(李山海)129)가 송강(松江)과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기로 약속했다가130) 거짓 계책으로 송강을 함정에 몰아넣은 것은 옛 일에서 찾아보아도 그런 부류가 드물다.선조(先祖)가 송강(松江)의 충절을 기린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갑자기 멀리 귀양을 보내 위리안치(圍籬安置) 시켰으니, 실로 신성군(信城君 선조의 넷째 아들) 집안을 없애려한다는 참소와 인빈(仁嬪)131)의 하소연이 먹혀들었으며 다른 죄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아, 어렵도다. 물이 스며들 듯 은근하게 하는 참소와 살갗에 와 닿을 듯 절박하게 하는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데도 먼저 사랑에 빠져 사사로움에 가려진 경우가 있음에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강을 방환하고 전교하기를 ?경(卿)의 충효와 큰 절개를 알고 있다.? 하였는데,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또 누차 간철(奸澈)이다 독철(毒澈)이다 하였으니, 죽은 뒤에도 어찌 선악(善惡)이 정해지지 못한 것인가. 대저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학봉(鶴峯)132)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눈은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왜구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니 이를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133) 심지어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을 폐단이라고 하였는데 곧바로 큰 난리가 일어나 온 나라가 도륙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선비라고 할 수 있다.?134) 하였으니, 여기에 크게 관계되는 바가 어찌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에 견줄 뿐이겠는가. 학봉은 학문으로 이름난 선비이기 때문에 속으로 의심스럽게 여긴다.신묘년(1591) 3월에 일본의 회례사(回禮使)가 왔는데, 그 글에 ?일본국 관백(關白)135)이 조선 국왕 합하(閤下)에게 글을 바칩니다.?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미 이는 우리를 신하로 여긴 것이다. 저들의 관백은 우리의 영상(領相)과 같은데 양국(兩國)의 사명(詞命)136)에서 저들의 신하를 우리의 임금과 맞먹게 하였으니, 어찌 우리를 신하로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 한 마디말로 항거하며 그 글을 물리치지 못했으니, 삼도(三都 한양ㆍ개성ㆍ평양)가 유린되기도 전에 나라는 이미 망했던 것이다. 아,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서애(西崖 유성룡)가 요동으로 건너가려는 선조를 간언하여 그만두게 한 일은 진실로 중흥의 제1 공신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당초에 풍신수길은 두려워할 사람이 못되니 중국 조정에 고할 것이 없다고 아뢴 것으로 보면, 또한 사리 판단이 더디다고 말할 수 있다.신립(申砬)137)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하였던가. 조령(鳥嶺)을 지키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하였던가. 그런데 간언을 거절하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다가 크게 패배하여 적의 대군으로 하여금 곧바로 경성(京城)을 밟게 하였다. 이것은 오척 동자(五尺童子)에게 물어봐도 모두 마땅히 요해지(要害地)를 지킬 줄 알 텐데 신립만 홀로 몰랐던 것인가. 대개 신립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출발하려고 할 때에 임금이 왜적의 정세를 묻자, 신립이 매우 가볍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변협(邊協)은 말할 때마다 왜적을 제어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경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 하였다. 신립이 나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변협이 나에게 있다면 어찌 왜놈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임금은 이미 신립이 일을 성취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니 이른바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다.〔知臣莫如君也〕?138)는 것이다. 아, 패배하게 된 것은 다 가볍게 여긴 것이 빌미가 된 것이지만 강물에 뛰어들어 한 번 죽은 것은 또한 후세에 할 말을 남겼다고 하겠다.구용(具容)과 권필(權韠)이 상소하여 ?유성룡이 화친을 주장하고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치니,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139)와 양국충(楊國忠)140)입니다.? 하였다. 황정욱(黃廷彧)141)은 격서(檄書)에서 ?묘당(廟堂)이 힘써 금(金)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니 진회의 살코기를 먹고 싶고, 간신이 먼저 촉(蜀)으로 행행(行幸)하기를 주창하니 양국충의 머리를 매달아야 한다.? 하였다.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은 상소하여 ?유성룡이 화친을 주장하여 왜구를 불러들인 것은 진회보다 심하고, 이산해가 어진 이를 죽여 나라를 그르친 것은 이임보(李林甫)142)보다 심하고, 김공량(金公諒)143)이 원한을 쌓아 은혜를 판 것은 양국충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비록 지나치게 심한 듯하지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러한 의론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강화(講和)라는 것은 두 나라가 서로 대적하고 두 군대가 서로 버틸 때에 논의할 수 있다. 만약 군사가 성 아래에 이르러서 맹약을 맺는다면 이는 맹약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곧 항복과 같다. 게다가 저들이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속셈이 문자에 분명히 드러났는데 속국(屬國)으로서 상국(上國 명나라)을 침범하려는 왜적과 강화를 맺는다면 또한 어찌 상국에서 용납하겠는가. 이런 시기에 강화를 주장한다면 의리에 어두울 뿐 아니라 또한 형세를 모르는 것이다. 다만 이때 명나라도 힘이 약해 어찌 할 수 없었다.임금이 파천(播遷)하였는데 그가 궁성을 나올 때나 요동(遼東)으로 건너려고 할 적에 신하들이 거의 모두 흩어져 도망치고 달아나서 전혀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다. 이전 세상을 두루 살펴보면, 스스로 혼란과 멸망을 초래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으니 이는 평소에 은혜와 믿음으로 결속하거나 기강으로 유지하지 않은 때문이다. 비록 나라가 나라답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임금이 정곤수(鄭崑壽)144)에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도록 명하고 직접 술을 따라주며 전송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있으니 경(卿)은 노력하라.?145)하였다. 정곤수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이 나를 자기들과 다르다고 하면서 멀리 달려가게 하니, 어째서인가.? 하니, 이는 신하된 자가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남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는 것을 오히려 의리라고 말하는데, 하물며 임금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는 경우이겠는가. 그러나 마침내 지성으로 호소하여 사신의 일에 업적을 이루고 1등공신에 녹훈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성중(李誠中)이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의 말이 아니라고 한 데에 격동하여 성취한 것이 아니겠는가.김수(金睟)146)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을 꺼리고, 이광(李洸)은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무함하고, 윤선각(尹先覺)147)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저지하였는데 모두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가 어느 때였던가. 참으로 물이 새는 배에 타고 불타는 집에 앉아 있는 격인데, 차마 시기심으로 서로 헐뜯어야 하겠는가.중봉이 금산(錦山)에서 싸울 적에 그의 명철한 전략으로 어찌 칠백 명의 적은 수효로 수만 명의 군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또 이산겸(李山謙)ㆍ권율(權慄)ㆍ허욱(許頊)ㆍ영규(靈圭)가 힘껏 간쟁했으나 한 번도 듣지 않고 마침내 죽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 형세로 보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패할 것을 알 텐데 중봉이 그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 꼴이었다. 만약 성패를 따지지 않고 널리 충의롭다는 명성을 얻고자 했다고 말한다면, 중봉의 현철함으로는 또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그 당시에 체찰사(體察使) 이국형(尹國馨)은 하는 짓이 변화무쌍하여 온갖 방법으로 막아서 해쳤으니, 뜻밖의 죄로 모함하여 아뢰지 않으리라 어찌 보장하겠는가. 무함을 당하여 죽느니 차라리 전쟁터에서 순절하는 것이 나았으리라.임금의 군대는 그 죄를 바로잡을 뿐이며, 저들이 그 죄를 대한 형벌을 복종하여 받으면 용서해준다. 명나라 조정은 곧 심유경(沈惟敬)148)을 보내 왜영(倭營)과 통사(通使)하였으니 이는 먼저 스스로 강화를 청하여 수모를 받은 것이다. 더구나 이여송(李如松)149)이 명나라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한 것으로 적군을 속여 그 사신을 습격하여 죽이고 진군하여 평양에서 격파하였으니, 어찌 당당한 명나라 조정에서 할 짓인가. 비록 한 때의 승리를 얻었다 할지라도 또한 수치가 될 만하다.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의 거북선은 바로 지금의 잠행정(潛行艇 잠수함)이고, 박진(朴晉)의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는 -화포장(火炮匠)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것이다.- 바로 지금의 폭탄(爆彈)이다. 지금 외국의 새로운 풍속에 도취되어 우리나라의 옛 법식을 업신여기며 저들 것을 부러워하여 우리 것을 기롱하는 데 못하는 짓이 없으니 무식함이 심하다. 다만 우리나라에 정치가 없어 강론하여 밝혀서 더욱 정밀하게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폐기하다가 끝내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한탄스럽다.화의(和議)가 나라를 망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다. 명나라는 중국의 인구도 많고 땅도 큰 나라인데 어찌 한사코 보잘것없는 일본과 화의를 맺었는가. 풍신수길이 말한 ?봉표(奉表)?150)는 본래 관백(關白)의 몸으로 하는 짓이고, 그가 말한 ?황제(皇帝)?는 그대로 있으니 여전히 명나라 황제와 동등하다. 번왕(藩王)의 명호(名號)는 풍신수길의 몸을 가리켜 말했을 뿐이지만 명나라는 일본과 바로 동등한 나라가 되었으니, 이것은 화의의 사례(事例)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명나라 조정의 힘이 과연 이처럼 허약한 지경에 이른 것인가. 결국은 간신배가 나라를 망친 소치이니, 슬픈 일이로다.풍신수길이 이미 표문(表文)을 올려 명나라에 우호를 청하고서 곧바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진주(晉州)를 섬멸하였으니, 이는 명나라를 업신여기며 조롱한 것이다. 이런 때에 명나라는 여전히 상국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아, 화친의 일은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진주(晉州)가 비록 고립된 성이었으나 군량미는 조금 넉넉하였고 김건재(金健齋 김천일(金千鎰))의 충의와 황진(黃進)ㆍ이종인(李宗仁)의 용맹이 있었기 때문에 포위당한 지 9일 뒤에 패하였다. 그 패배의 원인은 중과부적이었다. 만약 곽재우(郭再祐)가 뒤로 퇴각하지 않고, 권율(權慄)ㆍ이빈(李薲)ㆍ이복남(李福男)이 퇴각하여 산음(山陰)으로 들어가지 않고, 낙상지(駱尙志)ㆍ송대빈(宋大斌)ㆍ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 등이 이여송의 명을 따르고, 명나라와 조선의 장수들이 일제히 달려가 구원해 주었다면 어찌 그렇게 패배하였겠는가. 아, 진주성의 참혹한 상황을 구원하지 않은 자는 죄를 지은 것이다. 사대수(査大受)가 낙상지와 송대빈 등 여러 사람을 잡아와 국문하고, 변사정(邊士貞)이 상소하여 여러 장수들의 죄를 말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가등청정(加藤淸正)이 기어코 진주성을 도륙하려고 할 때에 심유경(沈惟敬)이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말을 듣고 ?성이 비었으니 침범하지 말고 인명을 살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명나라와 조선의 장수들은 모두 서로 회피하였는데, 유독 김천일ㆍ최경회ㆍ황진 이하 제공들이 결의하여 힘을 다해 지키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도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감정이 남들과는 달라서이리라. 건재가 당시에 말한 것처럼 특히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고 진주는 호남의 방패막이였기 때문이다. 아,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睢陽)에서 죽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되었으니151) 제공이 한 번 죽어 세운 공적이 또한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임진왜란이 몇 년 동안 이어지자 우리나라의 힘뿐 아니라 명나라의 많은 병력과 큰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계(牛溪)152)는 유현(儒賢)이었지만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은밀히 화의(和議)를 주장한 것이니, 형세로 보면 그럴 법하지만 의리로 보면 온당하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의 ?의리를 바르게 하고 이익을 꾀하지 않는다.〔正誼不謀利〕?는 말이 천고의 지론(至論)이 되는 것이다.명나라 신무룡(愼懋龍) 등이 왜적의 병영에 들어가 가등청정에게 예물을 줄 때에 가등청정이 잡담으로 업신여겨 희롱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공갈치기도 하면서 이미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심지어 이번 7, 8월에 중국을 침범할 것이라고 솔직히 말했는데도 신무룡이 한 마디 말로 꺾지 못하였으니,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한 죄는 이미 이루 다 처벌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왜적이 명나라를 대하는 것은 원래 비어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겼으니, 어찌 천하의 큰 수치가 아니겠는가.이때에 명나라에는 사직지신(社稷之臣)153)이 한 명도 없었으니 어찌 머지않아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석성(石星)154)이 강화를 주장한 것은 이미 잘못된 일이었고 심유경은 천고의 간흉(奸凶)이었으며 양방형(楊方亨)은 두려워 겁내고 어리석었으니 말할 것이 없다. 심지어 이종성(李宗城)은 정사(正使)로서 도망갔으니, 어찌 중국이 멀고 작은 오랑캐나라에게 비웃음을 크게 사지 않았겠는가.세상이 모두 김 충장공(金忠壯公)155)의 죽음을 두고 서애(西崖 유성룡)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이것은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총괄하여 말하면 명성이 너무 커서 장수들이 시기한 탓이다. 이시언(李時言)ㆍ김응서(金應瑞) 같은 사람들이 모두 얽어 죽이려고 한 것은 분명하고, 윤오음(尹梧陰)과 윤월정(尹月汀) 형제에게도 이미 묵은 혐의가 있었으니156) 또한 괴이할 것이 없다. 권 충장공(權忠壯公 권율(權慄))은 일념으로 나라에 충성하느라 다른 마음이 없었지만 오히려 사소한 뜻을 면치 못하였으니, 한산도(閑山島) 전투를 이미 반드시 패배할 곳에 방치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잃게 하였다. 김 충장공이 모함을 당하자 또 즉시 상주하고 체포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그렇지만 김 충장공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였다. 신분이 나라의 흥망과 관계되는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기복(起復)157)하여 종군하였으니, 어찌 의리에 정밀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김 충장공은 유학자였다. 유학자로서 그 의리에 정밀하지 못했다면 또 누구의 책임인가. 그가 임종 때 공초(供招)에서 반역한 죄가 없음을 스스로 밝혔으나 또한 기복한 잘못을 깊이 후회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상제(喪制)의 예법을 지키고 기복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재앙이 있었겠는가.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 이것이 천고에 지극한 원통이 되고 또 천고에 큰 경계가 된다.김 충장공은 더 논할 것 없이, 충성으로나 공훈으로나 더할 것 없는 이 충무공에 대해서 명재상 윤오음(尹梧陰)이 또 임금을 속이고 공훈을 요구하는 주청을 하였으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충무공을 원균(元均)158)으로 대체하여 패배 당한 뒤에야 큰 인물인 이백사(李白沙)159)가 겨우 ?현재의 계책으로는 오직 마땅히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아야만 됩니다.?160)라는 주청을 남겼을 뿐, 무함을 받은 사실을 변론하는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당시 조정의 일을 대개 알 만하다.명나라 형부 상서 여곤(呂坤)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선은 우리의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운데 (구원병 파견을 늦출 경우)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달려 조선으로 들어가 왜적을 막지 못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일찍 큰 계책을 결단하여 힘을 합쳐서 동쪽으로 정벌을 떠나야 합니다.?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사태 파악이 명확하고 의론이 정당한가. 여곤은 곧 세상이 포독 선생(抱獨先生)이라고 일컫는 사람이니, 그 학문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아, 당론 때문에 왜구의 난리를 초래하였건만 난리가 겨우 그치자 또 다시 당론을 일삼았으니, 이름은 신하라고 하면서 자신만 있는 줄 알고 나라가 있는 줄 모른 것은 본래 일상적인 작태였다. 선조(宣祖)의 명철함으로도 또한 그 속에서 골몰함을 면치 못했으니 지난날을 경계로 삼아 앞날을 삼가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일찍이 궁구해 보니, 선조는 우계(牛溪)와 송강(松江)을 미워하여 죽은 뒤에 ?간철(奸澈)?ㆍ?독철(毒澈)?이라는 이름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더하였다. 송강에 대해 처음에는 신성군(信城君) 모자(母子)를 해치려한다는 참소를 믿었고, 다시 임금의 과오를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했다는 유언비어를 믿었다. 우계에 대해 처음에는 파천(播遷)할 때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임금을 뵈러 달려오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삼더니 ?스스로 죄가 무거운 줄 알고 죽으려 하였으나 죽지 못하였다.?는 전교를 남기기에 이르렀고, 다시 은밀히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이정암(李廷馣)161)을 힘써 돕다가 비난을 당하더니 ?조정에서 변장(邊將)들이 한 짓을 조치하였는데 성혼(成渾)의 사특한 말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전교까지 남겼다. 모두 사랑하고 미워함이 편벽되어 이처럼 엎치락뒤치락한 것이다.난리를 겪은 뒤 다시 일본과 화친을 맺던 날에 이미 왕릉을 파헤친 도둑을 묶어 보내라고 말하였는데, 결국 젊은 두 왜인의 목을 베어 보내오자 마침내 화친이 성립되었다. 그들이 진범이 아니고 기만당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으나 틈이 생길까 염려하여 구차하게 화친을 성립시켰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며 조상을 속이고 하늘을 속여 잔인한 마음으로 도리를 해친 것이니, 비웃음을 사고 기롱을 받음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옛날에 주자가 금(金)나라 사람과 화친을 맺어 재궁(梓宮)162)을 봉환하자고 논의할 적에 교활한 오랑캐가 한(漢)나라에서 장이(張耳)의 목을 베는 계책163)을 낼까 염려하여 그 화의를 모두 배척하였다. 하물며 이렇게 두 왜인은 용모와 나이를 분별하기 어렵지 않았으니 애초에 장이와 같이 놓고 논의할 수 없는 경우임에랴. 그래서 우리나라는 당시의 일을 다만 송나라 때 주자의 의리로써 두 왜인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배척하여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이 의리를 강구하지 않은 것이 애석하기만 하다.당시 조정의 논의 중에 임진년의 원수는 모두 풍신수길(豐臣秀吉)에게 있다고 말하였는데 원씨(源氏)164)가 이미 평씨(平氏)165)의 족속을 모두 없애버렸으니 이는 우리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그 집정자인 원씨는 우리에게 원수진 일이 없어 더불어 화친할 수 있으니, 이 의리를 주장한다면 ?왕릉을 파헤친 도둑을 묶어 보내라?고 한 것 또한 군더더기 말이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지만 천하가 어찌 이와 같은 의리가 있겠는가. 이전 역사에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논할 것도 없다. 바로 저들이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범하고 고려 때에 원(元)나라를 인도하여 저들을 친 일로 살펴보면, 이 논의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우리나라 다른 시대의 일에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하물며 저들이 근년의 일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수진 일이 없다고 논한 것은 한남당(韓南塘)166)도 일찍이 주장했으나, 근래의 선비 중에서 혹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기에 이렇게 함께 논하였다.선조(宣祖) 말년에 광해군(光海君)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는 덕을 잃은 일이 없었다. 게다가 나라의 큰 근본이 이미 정해진 지 오래되었고, 또 이미 소조(小朝)로 나뉘어 백관들이 신하라고 칭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이때에 세자를 바꾸어 세울 뜻을 두었으니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였다. 유영경(柳永慶)167)이 임금의 의중을 탐지하여 찬성하려 한 것은 본래 총애를 공고히 누리는 자들의 일상적인 작태이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유영경이 임금의 의중을 탐지하여 찬성하려 했던 것은 이미 영창대군이 처음 태어나 하례하던 날에 있었고, 영창대군이 교동(喬桐)에서 증살(蒸殺)된 것은 이미 세자를 바꾸어 세우려는 뜻을 가졌던 날에 있었다고 여긴다.연평(延平) 이귀(李貴)168)가 선조 때에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169)이 저지른 불법 행위를 적발하여 배척하는 데에 온힘을 다하였는데, 급기야 정인홍을 멀리 유배시키라는 명까지 듣게 되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즉위하자 머뭇거리며 관망하다가 또 그를 위해 상소하여 구원하였으니, 어째서인가. 광해군 말년에 이르러 폐모(廢母)사건의 큰 죄를 조성한 것은 정인홍이고, 그 죄를 책임 지워 광해군을 폐위시킨 것은 연평이었다. 중간에 정인홍을 구원한 한 가지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따져보았으나 결국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명나라의 문묘에서 공자를 칭할 때?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만 하고 왕작(王爵)의 칭호를 쓰지 않았으니, 본래 백년 뒤에도 의혹이 없는 바른 이치이다. 이월사(李月沙)170)가 우리 조정에 청한 것도 명나라 조정을 따른 것인데 또 이는 잘못된 관례를 한번 제거한 정론(定論)이며 백사(白沙)의 의론 또한 그와 같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윤승훈(尹承勳)은 세속적인 대신으로서 기꺼이 따르려하지 않고 핑계를 대며 훗날의 공론(公論)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인조(仁祖) 을축년(1625)에 예조(禮曹)에서 또 이 의론을 아뢰었는데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즈음이고 온 나라가 지향하여 바라보는 때였으니 바로 재상 윤승훈이 말한 ?훗날의 공론?이었으나, 또 다시 신상촌(申象村)171)이 저지하여 행해지지 못하였다. 아, 윤승훈은 본래 속된 견해를 지녔지만, 상촌의 문장과 식견으로도 역시 그와 같단 말인가. 이리하여 오랜 세월 동안 정론(正論)을 시행할 만한 날이 없었으니 매우 한탄할 만한 일이다.공자가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녹봉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邦無道 穀恥也〕?172) 하였다. 한음(漢陰)173)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는 혼조(昏朝 광해군)에서 지극히 귀한 사람이 되어 이미 부끄러움을 면치 못했는데, 이이첨(李爾瞻)174)이 광해군의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자 두 사람은 백관을 거느리고 한 달이 넘도록 정청(庭請)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하여 부끄러움 중의 부끄러움을 생각지 않은 것인가. 두 사람은 조선조의 명재상이었기 때문에 감히 속으로 의심해 본다.사관(史官)이 논하기를 ?영창대군의 폐위를 이덕형이 극력 간언하려고 하니, 이항복이 ?영창대군을 위해 죽으면 용기를 손상하는 것이니 나는 마땅히 대비를 위해 죽을 것이네.? 하였다. 두 사람이 각각 그 뜻에 따르면서 끝내 의리에 잘못됨이 없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죽인 것이 폐모의 근본이 되었으니 당시에 의리로 처신한 것은 이덕형이 올바르다.? 하였다. 대개 대신(大臣)의 직분은 임금을 인도하여 도리에 맞게 하고 도리에 맞지 않음이 있거든 간언하며 일이 큰 경우에는 죽음으로써 간쟁해야 하니 임금의 무도(無道)함 가운데 어찌 아우를 죽이는 일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아우를 죽이는 것이 폐모(廢母)보다 작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죽음을 아껴서 훗날의 바탕을 삼으려는 것이다. 사관의 논평에서 ?영창대군을 죽인 것이 폐모의 근본이 되었다.?고 한 것은 옳다. 이때에 간쟁하다가 죽었더라도 어찌 폐모의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겠는가. 무릇 군자는 그 의리를 바르게 할 뿐이다. 이때에는 훗날 폐모 사건이 있을지 없을지 따지지 않고 죽음으로써 간쟁하는 한 가지 방도만 있을 뿐이다.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75)은 어진 재상이었는데 치사(致仕)할 나이를 넘기며 오래도록 혼조에서 벼슬하며 떠나지 않다가 결국 홍천(洪川)에 부처(付處)176)되는 치욕을 당하였다.177) 아, 한 번 물러나는 일의 어려움이 이와 같구나.광해군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후금(後金)의 임금이 서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고 이이첨에게 명하여 답서를 짓게 하였는데 이이첨이 상소하여 답서 짓는 것을 사양하였다. 그가 지은 한 통의 척화(斥和) 문자는 춘추대의(春秋大義)178)를 밝힌 것이었는데 비록 청음(淸陰)179)ㆍ동계(桐溪)180)ㆍ우암(尤菴)으로 하여금 짓게 하였더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나라를 높이자는 논의는 먼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가 흉악한 반역을 저질렀기 때문이다.181) 그가 중화를 높이는 것에는 밝았으면서 반역을 저지른 데에는 어두웠으니 어째서인가. 이해(利害)가 몸과 관계됨에 절실함과 그렇지 않음이 있고, 물욕(物慾)이 마음을 가림에 두텁고 얇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 사람의 마음이 쓰이는 곳에 이끗을 좇고 욕심을 채우는 재앙이 이처럼 매서우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광해군의 부인 유씨(柳氏)가 언서(諺書)로 상소하여 화의를 배척한 것은 또한 이이첨과 견해가 같았는데 당시에 조야에서 모두 어질게 여겼다. 그러나 광해군이 매우 포악한 짓을 자행할 적에 간쟁하여 그만두게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아마도 궁중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문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처 듣지 못한 것이리라.선원(仙源)182)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대의로 보면 마땅히 혼조에서 폐모할 때에 항의한 바가 있었어야 하는데 한 마디 말도 볼 수 없고 이로 인해 기자헌(奇自獻)183)이 탄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또한 시종일관 정청(庭請)184)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원이 되는 까닭일 것이다.세상이 모두 오정방(吳定邦)이 폐모 수의(廢母收議) 때에 대답한 ?신(臣)은 무부(武夫)로 《사략(史略)》 한 권만 읽었기 때문에 ?점점 다스려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한다.?는 구절만 알 뿐, 그 밖의 글은 모릅니다.?라는 말을 칭송하고 서로 명언이라고 전하였다. 지금 이 역사서를 보면, 그의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라는 말만 적고 다시는 다른 말이 없으니, 아마도 이 역사서에 미비한 점이 있는 것 같다.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185)이 죽을 때에 당시에 국사를 맡은 자가 너무 심하였다고 말했다. 지금 이 역사서를 보면 제학(提學)으로 이이첨(李爾瞻)의 부름에 응해 입막(入幕)186)에 참여하여 폐모에 관한 글을 썼으나 다른 의견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중인(衆人)보다 훨씬 문자를 많이 아는 사람이 차마 이렇게 했는가. 단지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그가 죽음을 당하여 원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광해군 때에 벼슬한 자들 중에 폐모 사건 이전에 벼슬한 사람은 오히려 말할 수 있겠지만, 폐모 사건 이후에 벼슬한 사람은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월사(月沙 이정귀) 등 제현들에 대해 속으로 의심하고 있다.인조(仁朝) 계해년(1623)에 사친(私親)을 추존(追尊)하려는 논의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분분하였는데, 오직 월사(月沙)가 ?성상(聖上)께서 선조(宣祖)의 뒤를 잇는데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했기에 아버지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정통(正統)은 본래 문란해서는 안 되며 천륜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뒤를 이은 사람에게 이미 아버지라고 칭할 곳이 없고 생부에게 백숙(伯叔)이라고 칭하는 것은 인정과 예법에 모두 어긋납니다. 지금 고(考)라고 칭하면서 ?황(皇)?자를 더하지 않고 자(子)라고 칭하면서 ?효(孝)?자를 더하지 않는다면, 종통(宗統)을 중시하고 생부(生父)에게 보답하는 도리가 양쪽 모두 극진하게 될 것 같습니다.?라고 아뢴 것이 옳을 듯하니, 대개 천하에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제ㆍ숙질ㆍ조손간이 서로 이은 경우에 한남당(韓南塘)의 말처럼 종묘에서 ?모호 대왕(某號大王)? 및 ?사왕 신(嗣王臣)?이라고 칭한다면, 그 생부에 대해 스스로 고(考)라고 칭하고 자(子)라고 칭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별 탈 없는 도리를 행하게 될 듯한데, 어떠한지 모르겠다.이괄(李适)187)은 본래 역적이었지만 또한 조정의 조처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이괄의 공이 어찌 김류(金瑬)188)만 못했겠는가. 그런데 어찌 한사코 한 사람은 내치고 한 사람은 올리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기자헌(奇自獻)이 폐모론에 절개를 세우고 귀양 가기에 이르렀으나, 결코 이괄을 따라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고변(告變)을 믿고 내응(內應)을 끊는다는 핑계로 조사하여 국문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날 밤에 형을 집행하였으니,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은 과연 무슨 의도를 지녔던가. 반정 초기에 형정(刑政)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인심을 만족시킬 수 있었겠는가.애석하다, 기자헌(奇自獻)이여! 유배지에서 죽었다면, 함부로 씌우는 재앙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어찌 백사(白沙 이항복)에게 버금가지 않았겠는가. 사람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행운과 불행이 존재하는 것 같다.임진년(1592)의 재앙이 어찌 참혹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지난날을 경계로 삼아 앞날을 삼갈 것을 생각지 못하여 겨우 30년이 지나 인조(仁祖) 정묘년(1627)의 난리를 당했으니, 군사장비가 온통 소홀하여 도원수(都元帥)가 출정할 때에 병사가 불과 수백 명이었다. 아, 이를 두고 ?나라가 나라답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개 조선조의 국정은 이전부터 그러한 것이지, 중간에 광해군의 혼란을 겪어서일 뿐만이 아니었다.강홍립(姜弘立)189)이 〈김장군전(金將軍傳)〉190)을 보고 얼굴빛이 흙처럼 되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다.?191)는 것이나, 심하(深河)의 항복은 대개 광해군이 형세를 관망하여 결정하라는 전교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아,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에는 마땅히 의리로써 할 뿐이다. 이미 대의(大義)로써 명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또 불의(不義)로써 전교를 내렸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도리이겠는가. 그러긴 하지만 광해군에게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강홍립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확충할 수 있었다면 이 전교에 대해 마땅히 의리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간해야 하고 심하에서 항복하던 날에 또 마땅히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 그랬다면 어찌 의리가 바르고 명성이 완전하지 않았겠는가. 오직 이처럼 하지 못했기에 강홍립이 되는 것이다.심하(深河)를 넘겨주고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항복한 자들이 병사(兵使)와 부사(府使)의 직임을 받자 사헌부(司憲府)가 파면을 요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니, 이는 강홍립을 위한 때문이었다. 이미 강홍립을 사면해주고 도리어 그로 인해 재앙을 늦추었다고 하였으니, 함께 항복한 자에 대해서도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명분과 말이 서로 어긋났고, -광해군이 형세를 관망하고 행동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중간에는 형벌과 상이 뒤바뀌었으며, -강홍립의 죄를 사면하고 집안 식구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마지막에는 기강이 완전히 떨어졌으니, -강홍립과 함께 항복한 자에게 벼슬을 주었다.- 강홍립의 한 가지 사건에 갖추어져 있다.이연평(李延平)이 사친(私親 인조의 생부)을 추숭(追崇)하여 종묘에 들이기를 청하면서 큰소리로 치고 깊이 논의하는 데에 온힘을 다 쏟았다. 이는 자기 의견을 스스로 말한 것이고 겸하여 성품과 기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그런 것이지, 임금의 뜻에 영합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은 믿을 수 있을 듯하다.병자호란에 신하들이 전투와 수비의 계책을 많이 개진했으나 오직 팔송(八松) 윤공(尹公)192)만 한 번 상소하였다. 그 상소에서 ?먼저 궁액(宮掖)과 근신 중에서 젊고 건장한 자를 징발하고, 다음으로 종실(宗室)과 백관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자를 징발하고, 그 다음에 유생과 서리 및 시민과 공사천(公私賤)을 차례로 징발하면 도성 안에서 수만 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 병사를 선발하는 것도 이 방법을 써서 먼저 부유하고 세도 있는 사람을 징발하고 다음에 힘없는 백성을 징발하면 수만 명의 정병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매우 후련케 하였다. 대개 전쟁터는 죽는 곳이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인지상정인데, 국가에 일이 생기면 어째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모면하고 천하고 약한 사람들만 홀로 당해내야 하는가. 조선조의 군정(軍政)은 가난하고 천하고 권세가 없는 사람들만 편벽되게 모집하여 충당하고 또 먹는 것도 야박하게 대우하니,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하여 그 힘을 다하겠는가. 지위가 높고 권세 있는 사람을 먼저 징발하자는 윤공의 의론은 위급할 때에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평소 병사를 모집할 때에도 마땅히 이것으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병자호란에 화친을 배척함에 엄격했던 사람이 팔송(八松) 윤공(尹公)이다. 그런데 이 역사서에서는 ?윤황(尹煌)이 병들어 문밖을 나오지 못하자, 밤마다 그 아들 문거(文擧)를 불러 ?오늘 화친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물었다. 문거가 ?저들이 기꺼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니, 윤황이 ?사람들이 장차 다 죽게 생겼구나.?라고 말했다.? 하는데, 그런가, 어찌 그렇겠는가.남한산성이 포위당하던 날에 장수와 병졸들이 대궐 문 밖에 모여 큰소리로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 오랑캐에게 주길 청하였다. 군사들의 마음이 변한 것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군신과 상하가 한바탕 결사항전하려 해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평소에 윗사람을 친근히 여겨 어른을 위해서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의리를 알려주지 않아서이고, 호령과 기율까지 없었던 까닭이다.강화도가 함락되어 장수들의 죄를 논할 때에 김자점(金自點)ㆍ심기원(沈器遠)ㆍ김경징(金慶徵)이 마땅히 첫째가 되어야 하는데 대략 유배형에 처하고, 단지 장신(張紳)193)과 수사(水使)ㆍ우후(虞侯) 두 사람만 베도록 명하였으니, 어찌 이처럼 공평하지 못하단 말인가. 장신은 바로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아우이다. 계곡은 조금도 아우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말이 없었으며, 그 후에 그 자부(子婦)가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 돌아오자 힘껏 헤어지기를 청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임금이 그 아들이 다시 청한 것으로 인하여 그 집만 주도록 명하였으니, 또 어찌 이처럼 공평하지 못하단 말인가. 임금은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는데 공평하지 못한 두 가지 일이 후하고 박함은 비록 다르지만 장씨(張氏) 집안에만 집중되었으니, 이상하다.청음(淸陰)이 심양(瀋陽)으로 잡혀가서 저들의 물음에 대답할 때에 말은 공손하고 이치는 곧아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었으니, 예컨대 ?나는 나의 뜻을 지키고 나는 우리 임금에게 고하련다.?라는 말은 쉬운 것 같지만 실로 어려운 일이다. 평소에 학문하여 존양(存養)194)의 공부가 있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인조는 이미 몸소 반정(反正)의 업적을 만들어냈으니 얼마나 영명(英明)한가. 그러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중독되어 죽었음을 알지 못하였고, 김자점이 임경업(林慶業)195)을 박살낼 적에 임금이 놀라면서 ?임경업이 죽었단 말인가.?하고, 끝내 그 까닭을 묻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어째서인가. 사사로움에 가려지고 의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영명함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강빈(姜嬪)196)의 죽음은 당시의 억울한 옥사 중에서 큰 사건이고 또 임금의 잘못된 조처 중에서도 큰 것이었다. 청음(淸陰 김상헌)은 당시에 우의정으로 간언하여 그치게 하였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는데, 얼마 안 되어 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역사서에 드러내지 않은 것인가.효종(孝宗)이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한 민노봉(閔老峯)197)에게 답하기를 ?강빈의 사특한 모략은 의심할 만한 점이 없지 않으니, 이후에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부도죄(不道罪)로 논하겠다.? 하였다. 아, ?죄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가벼운 쪽으로 처벌한다.〔罪疑惟輕〕?198)라고 나는 들었고, 죄가 의심스럽다고 해서 대뜸 무거운 형률로 정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더구나 역적모의가 얼마나 큰 죄인데 ?의심할 만한 점이 없지 않다.〔不無可疑〕?는 네 글자로 판단한단 말인가. 또 마침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정치하고 형벌을 행한다면 비록 북벌하여 치욕을 씻으려고 해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직언한 김홍욱(金弘郁)199)을 죽였다. 이것은 우암이 ?근래에 김홍욱을 죽인 한 가지 일로 인심을 크게 잃었으니, 이것이 신원(伸冤)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여 이미 언급하였다.기해복제(己亥服制)200)는 이미 당시 임금의 제도를 적용하여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했는데 또 옛 제도의 기년복과 부합하였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할 만한 것도 없고 전혀 일이 없었는데, 우암은 어찌 한사코 다시 《의례(儀禮)》의 상복설(喪服說)을 인용하여 운운하였던가. 윤휴(尹鑴)201)의 귀까지 들리게 되어 한없는 논쟁을 초래하였다. 당초에도 삼년복(三年服)을 청한 적이 없었는데 무슨 부득이한 까닭이 있어서 운운했던 것인가. 속으로 의심하고 있다.대사헌 채유후(蔡裕後)202)가 부득이 강빈(姜嬪)를 폐하는 교문(敎文)을 지어 올리고 집으로 돌아와 소장하고 있던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불태워버렸다. 자신에게 피리춘추(皮裏春秋)203)가 있었지만 일에 임하여 말을 할 수 없었고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줄 알면서도 결국 지었던 것이다. 대개 ?강(剛)? 한 글자가 부족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수찬(修撰) 김만균(金巒均)은 그 할머니가 정축년(1637, 선조15)의 난리에 죽었기 때문에 마땅히 청(淸)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상소하여 정황을 아뢰고 해임되어 서로 만나지 않기를 청하였다. 자손의 지극한 정으로 보면 그럴 법하다고 여겨지지만, 이와 같이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애초에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이 더 통쾌하지 않겠는가. 대개 정축년에 하성(下城)204)한 뒤에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종신토록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 그 의리는 더욱 높고 그 풍도는 지극히 맑았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견주어 보면 과연 어떠하다 하겠는가.공정대왕(恭靖大王)205)의 묘호(廟號)를 뒤늦게 올리는 일에 대해 우암(尤庵)이 임금에게 대답하기를 ?공정대왕의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사양하는 덕성은 천고에 뛰어났는데, 태종이 평소에 공정대왕의 겸손하고 억제하는 마음을 본받아 차마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묘호를 억지로 더하지 못했습니다.?206) 하였다. 대개 태종이 공정대왕의 묘호를 더하지 않은 것은 뜻이 다른 데에 있었는데, 우암이 이렇게 말한 것은 참으로 말을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궁격(窮格)의 공부가 지극하고 존양(存養)의 공부가 깊지 않았다면 결코 이처럼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우암(尤庵)이 경신년(1680, 숙종6)에 사면을 받은 뒤에 임금을 뵙고 아뢰기를 ?신(臣)이 치사(致仕)할 나이207)가 이미 4년이나 지났으니 어찌 쇠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때에 사퇴하고 깊이 숨어서 다시는 조정에 서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대개 이때에 우옹(尤翁)도 참으로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으나 다만 임금의 곡진하기 그지없는 마음과 박현석(朴玄石 박세채)의 흠모하는 마음과 민노봉(閔老峯)의 지극한 정성 때문에 애써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인심이 너무 심하게 편벽되어 다시는 돌이킬 가망이 없었다. 나의 뜻이 참으로 결정되면 어찌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요컨대 국가와 세도(世道)를 걱정하는 마음이 많아서 그러했을 뿐이다.장계곡(張谿谷 장유)은 성품이 유순하여 그 아우 장신(張紳)만 홀로 강화도가 함락된 죄로 죽을 때에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랑캐 사신 유해(劉海)208)의 무례를 능히 논척하여 사신이 두려운 낯빛으로 예를 갖추고 나갔으니, 이것이 사람의 의지를 매우 강하게 만든다.정묘년(1627, 인조5)의 난리 때에 황해도(黃海道)에서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부녀자가 162명이었는데 황해도는 작은 도이다. 이것으로 견주어보면 온 나라에는 마땅히 3만 명도 더 될 것이며, 삼남(三南)209)의 예교(禮敎)가 밝은 곳은 또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이른바 ?예의의 나라?이며, 청나라 사람이 양주(楊州)를 도륙 낼 때에 조선 여자의 정절은 중국 여자와 견줄 바가 아니라고 말한 까닭이다. 다만 재앙이 서북 지역에 그쳤기에 그 많은 숫자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이극성(李克誠)이 사람을 죽였으니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그 아우 이극명(李克明)이 자신이 수범(首犯)이라고 말하며 형제가 서로 죽겠다고 다투니 특별히 용서하여 그 착함을 표창하고 이로 인하여 그 형의 죄도 아울러 용서해주었으나 이것은 미진한 것이다. 옛날에 명확한 근거가 있으니, 공씨(孔氏) 형제 공포(孔褒)와 공융(孔融)이 서로 죽겠다고 다투었으나 끝내 공포를 연좌시켰는데,210) 하물며 사람을 죽인 자를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착함을 표창해야 한다면 저절로 착함은 드러날 것이고,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면 저절로 죽음으로 갚을 뿐이다.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가 대사헌으로서 뇌성 번개의 변고 때문에 직언을 구해 들이는 것으로 인해 상소하여 인성군 공(仁城君珙)211)의 원통함을 변호하고 그의 늙은 처와 어린 아이들을 구휼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천리와 인정의 당연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연평(李延平 이귀(李貴))은 거듭 차자를 올려 정동계를 참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연평도 또한 이름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인가?인조가 계유년에 하교하기를, "승리와 패배는 병가(兵家)의 일상적이 일이다. 금(金)나라 사람이 비록 강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매번 싸울 때마다 모두 승리하지는 못할 것이고, 우리 군이 비록 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매번 싸울 때마다 패배하지도 않을 것이다. 옛말에 '뜻을 가진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병사가 교만하면 패배한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무사들이 만약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이 교만한 병사들을 격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자는 없으니, 치욕을 참고 구차하게 살다가 끝내 아녀자의 손에 죽어 초목과 함께 썩어 가는 것이 어찌 인의(仁義)를 향모하여 앞장서 대장부의 뜻을 이룩하는 것만 하겠는가. 이들 오랑캐가 만약 침략해 온다면 내가 직접 진군의 주둔지로 가서 장군과 병사들을 격려하고, 아울러 서쪽 지역의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다! 왕의 말이여, 장하다! 왕의 마음이여. 만약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한결같이 이렇게 해이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서 싸운들 대적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실행할 때가 말할 때와 같지 않고, 남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지 않으며,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으나 끝을 맺는 경우는 드물어서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가 있게 되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병자호란 때 김승평(金昇平 김류(金瑬))이 술사(術士)의 말을 잘못 믿고 경솔하게 적의 진영에 침범하였다가 크게 패하고서 원두표(元斗杓)에게 허물을 돌렸고, 또 많은 병사가 죽은 것을 숨기고 40인으로 아뢴 것은 어찌 위급한 때에 일을 그르치고 임금을 기망한 대죄가 아니겠는가. 한때의 작은 실수로 여겨 생략해서는 안 될 듯한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위해 큰 비석[大碑]212)을 지어 지극히 찬양하였으니, 혹시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것인가?명나라가 망하였을 때에 태학생(太學生) 범경문(范景文) 등 40인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죽고, 그 밖에 치발(薙髮)213)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그렇다면 효묘(孝廟 효종)께서 "숭정(崇禎)214)이 망할 때에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라고 탄식한 것은 단지 당시 조정의 신하로서 시종했던 자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효종(孝宗)의 상에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215)를 따라서 옛 상복(喪服)을 입고 상에 임할 것을 청한 우암(尤菴 송시열)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ㆍ만암(晩菴 이상진(李尙眞)) 등의 여러 의론이 본래 정론(正論)이고,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한편의 여러 의론은 본래 식견이 없는 것이며,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3년 동안 아버지가 행해 온 도를 고치지 않는다."216)는 것을 들어 반대의 자료로 삼은 것은 또 의도가 있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불어 말할 것이 못되니, 명분과 절의를 잃은 것으로 끝난 것이 당연하다.숙종(肅宗)이 김익훈(金益勳)의 일로 우암에게 묻기를, "내가 대노(大老)의 말에 따라 결정할 것이다."하자, 대답하기를, "김장생(金長生)은 신의 스승이고, 김익훈은 김장생의 손자인데, 신이 잘 이끌지 못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신의 죄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말했다면 죄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저 스승의 문하에 자손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들을 이끌어서 죄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신의 죄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서 구원하지 않는 구원을 한 것이다.우암이 태조(太祖)의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할 때에 "태조께서 제왕(帝王)의 기업(基業)을 세워 대통(大統)을 자손에게 전해 주셨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숭극(崇極)하는 도리가 도리어 세조(世祖)와 선조(宣祖) 두 조종(祖宗)보다 부족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말로 청한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런데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을 대의(大義)가 해와 별처럼 밝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말로 언사를 삼은 것은 삼가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논한 "신하들이 비록 감히 지적해서 배척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굳이 겉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다."라는 것도 또한 생각해 볼 만 한듯하다.관직과 작위는 귀중한 기물이니 남용해서는 안 된다. 대왕대비의 회갑 탄일로 인하여 은혜를 미루어 공ㆍ사ㆍ천(公私賤)에게까지 가자(加資)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나라의 체모란 말인가. 이와 같다면 또 무엇 때문에 관직과 작위를 귀중하게 여기겠는가. 개탄스러울 뿐이다.우옹이 〈삼학사전(三學士傳)〉217)의 말단에서 말하기를, "몸을 깨끗하게 하여 더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킨 윤선거(尹宣擧)와 같은 여러 현인들의 경우 사안은 비록 같지 않지만, 지조는 일치하니 모두 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허물이 있었던 사람이다.218) 군자가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려는 마음에서 예전의 허물을 말하지 않은 것이라면 진실로 괜찮겠지만, 어찌하여 굳이 특별히 거론하여 세 학사의 큰 절개와 같다고 한 것인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감히 알 수 없는 점이 있다.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꾀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 문하의 분명한 가르침인데,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유생들은 이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지위에서 벗어나 정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숙종의 시대에 이르러 극에 달한 것인가? 만약 사안이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이라면 관학의 유생이 혹 말할 수 있겠지만, 심지어 초야의 유학(幼學)까지도 또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조정의 형벌과 포상, 공로와 죄과, 관직과 작위의 수여와 삭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휩쓸리다시피 풍습이 되었으니, 이는 세상의 변화 중에서도 큰 것이다. 본래 지니고 있는 시비지심(是非之心)에서 나와 재앙과 복을 돌아보지 않은 자는 그래도 말할 수 있겠지만, 세력과 지위가 있는 집안의 지시와 부추김을 받아서 하는 자는 또 어찌 유자(儒者)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기 이후로 유현들이 배출되어 훈계와 가르침이 미쳤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진실로 개탄스럽다.숙종 정축년(1697)에 연이은 흉년으로 빌어먹는 사람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쌓였으며, 백성들은 서로 죽여 인육을 먹고, 또 가장(架葬)219)을 부수고 시체를 먹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다음해 무인년(1698)에는 도성에서 쓰러져 죽은 사람이 1,586명이었고, 도에서 사망한 사람이 21,546명이었다.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보고한 숫자가 열에 두셋도 되지 않은데 오히려 이렇게 많은 숫자에 이르렀으니, 이 당시 국가의 상황이 다만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오직 편당만을 일삼아 셋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갈라진 채 서로 배척하고 모함하느라 나랏일을 염려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아아, 슬프다.숙종이 단종(端宗)의 위호(位號)를 300년 뒤에 회복한 것은 천하에 말할 수 있는 것인데, 당시에 회복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한 뭇 신하들은 평소에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의리를 궁구했는지 모르겠다. 남공 구만(南公九萬)의 의론에 의거하면 지난날 윤휴(尹鑴)가 처음으로 복위에 대한 청을 펼치다가 막혔다220)고 하니, 아, 윤휴의 식견이 결국 세속보다 뛰어났다. 당시에 고명하다는 칭송을 얻은 것은 이러한 의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온릉(溫陵)221)을 복위시켜야 함은 단종의 한 가지 의론과 더불어 애초에 의심할 것이 없는데, 권수암(權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어짊으로도 오히려 옳지 않다고 여겼으니, 이른바 지자(智者)의 한 가지 실수일 것이다.계성사(啓聖祠)222)의 건립은 비록 유학(儒學)을 존중함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밀한 의리를 궁구하면 반드시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숙종조(肅宗朝)의 최상 석정(崔相錫鼎)도 또한 계성사에 대해 의의가 없는 것 같다는 의론을 두었던 것이다. 대체로 성현이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모두 그 아버지에게 공덕이 있는 것과 관련되지는 않는다. 이런 까닭에 고수(瞽瞍)와 곤(鯀)을 아버지로 두었지만 순(舜)과 우(禹)와 같은 아들이 있었으니 순과 우는 오래전 인물이다. 만약 중궁(仲弓)223)이 덕행과 학문에 더욱 맹진하여 안자(顏子)나 증자(曾子)와 같게 되었다면 또한 그의 아버지를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인가?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초기(初朞 소상(小祥))가 막 지나고 이미 재간택(再揀擇)이 정해졌는데, 조정의 신하 중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아내가 죽은 자는 3년 후에 다시 아내를 맞이한다."라는 조문을 들어 너무 빠르다고 말하니, 상의 하교에 이르기를, "경(卿)이 대례(大禮)에 대해 별도의 의견을 만들어 낸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고서 인하여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아, 《경국대전》의 조문을 별도의 의견이라 하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왕의 말이 이와 같으니, 비록 예로 풍속을 인도한들 될 수 있겠는가,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라는 옛말이 틀림없다.3년 동안 상식(上食)224)하는 것은 비록 옛날의 예법이 아니지만 《주자가례(朱子家禮)》 이후로 후대의 현인들이 이를 따르고 온 세상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인데, 박세당(朴世堂)이 자손에게 훈계를 남겨 이를 폐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옛것에 얽매여 제 생각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들어 죄를 탄핵하고 임금에게 알린 것은 지나친 것이니, 어찌 편당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숙종 계사년(1713)에 뭇 신하들이 상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었다고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숙종이 즉위한 해는 갑인년(1674)이고, 이때는 현종(顯宗) 말년이니, 을묘년(1675)이 원년(1년)이 된다. 지금 계사년을 40년으로 한다면 이는 현종의 말년을 빼앗아 합산해 40년으로 한 것이니, 이는 큰 잘못이다. 무릇 기원(紀元)을 반드시 임금이 즉위한 다음해로 하는 것은 선왕(先王)을 공경하여 감히 통치의 해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니, 경서와 사서를 두루 살펴봐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데, 지금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인가? 이는 사책(史策)의 기년(紀年)이 아니라, 단지 뭇 신하들의 일시적인 요청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전대에 잘못을 하고 후대에 폐해를 끼쳐 결국 나라의 말기에 이르러 광무(光武)의 한 해를 나누어 융희(隆熙) 원년으로 삼아 역사에 기재하였으니225), 어찌 대단히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박희진(朴煕晉)이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소윤(小尹 윤증(尹拯))에 보낸 편지에서 인용했던 《주례(周禮)》의 "아버지의 원수는 바다 밖으로 피하고, 형제의 원수는 천 리 밖으로 피하며, 임금의 원수는 아버지의 원수처럼 보고, 스승의 원수는 형제의 원수처럼 본다."라는 말을 가지고 아버지와 스승에 경중을 두었다는 증거로 삼은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단지 소윤이 우옹(尤翁 송시열)에 대해 더욱 본래 아무런 일이 없는데 억지로 사단을 일으켜서 도울지 배척할지를 한갓 아버지와 스승에 경중을 두었는가 여부의 말만으로 결단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홍방필(洪邦弼)의 처와 딸이 여러 해 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직접 칼로 찔러 남편과 아버지의 원수에게 보복한 것은 얼마나 효성스럽고 열녀다운 일인가. 숙종이 이에 대해 "절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 참되니, 위대하다! 왕의 말이여. 그런데 대신(大臣)된 자가 왕의 아름다운 말을 받들어 따르지 않고 도리어 의례적인 법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뒷날의 폐단이 염려된다고 하여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을 막았으니226), 아, 사람 속을 번잡케 한다.이미 단종의 위호를 회복시켰다면 무릇 세 재상과 여섯 신하 이하 단종을 위해 죽은 모든 사람들이야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결정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관직을 회복하자는 의론에 대해 김운택(金雲澤)이 자신의 중부(仲父)가 상소로 논박한 것을 인용하여 막은 것은227)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인가? 사람의 마음에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이치이고 의리인데, 그렇지 않으니, 또한 괴이하다.김(金)ㆍ이(李)ㆍ민(閔)ㆍ조(趙) 등 제공들이 경종(景宗) 원년에 왕세제(王世弟)를 세울 것을 청한 것228)은 갑작스럽지 않은 일이 아니며, 또한 한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대책을 정하고229), 시임 대신(時任大臣)ㆍ원임 경재(原任卿宰)와 더불어 협력하여 도모하지 않은 것은 더욱 경솔한 일이다. 이 때문에 한편의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편당이 각각 대립하고 있어 이와 같이 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유봉휘(柳鳳輝)가 상소를 올려 저사(儲嗣 왕세제)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 경솔하여 매우 모양새를 이루지 못했다고 논박한 것은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이미 일이 결정되었다면 말할 때가 아니고, 때가 아님에도 말을 하면 사람들이 원래 싫어하는데, 하물며 애초에 여러 공들과 마음이 다르고 견해가 다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끝내 면하지 못한 것이다.230)어유귀(魚有龜)가 선언(宣言)하기를, "중전(中殿)231)이 어머니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겠지만, 어찌 소목(昭穆)232)의 대를 이어갈 친 자손이 없을까 걱정하여 하필이면 세제(世弟)233)를 세워서 순서대로 대통을 계승하는 법을 어기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또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형세상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삼종(三宗)의 혈맥(血脈)234) 중에 단지 연잉군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촌수가 먼 일가였으며, 또 위로 대비(大妃)235)가 있는데, 어유귀의 말을 주장한들 어찌 행해질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견해를 바꾸어 형세를 따른 것이고, 나중에는 또 힘써 제공(諸公)을 돕기까지 하였으니, 시세를 잘 보았다고 이를 만하다.전 시대의 대신은 참으로 위태롭고 긴급한 때를 당했을 때에 잠깐 사이에 대책을 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킨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경종이 비록이 병이 있다 하더라도 당장 죽을 정도의 위급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4년의 오랜 기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고 난 뒤에 승하하였으니, 전대의 일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논평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신축년(1721, 경종1)에 세제(世弟)를 세운 일은 갑작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와 앞날의 근심을 생각한다면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아, 만약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같은 큰 덕량과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은 큰 수단이 있었다면 혹 수년 사이에 이쪽과 저쪽을 보호하고 밝혀서 함께 공명정대함에 이르러 저절로 공을 세우는 일에 급급하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경종조(景宗朝)에 한 쪽의 당파가 죄 없는 사람을 무함하여 해친 것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허벽(許璧)ㆍ오두석(吳斗錫)ㆍ이삼령(李三齡)의 무리가 신사년 옥사236)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부끄러움을 씻어줄 것을 청하면서 이로 인해 노론(老論)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계책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는 경종(景宗)의 애통하고 절박한 사정(私情)으로 볼 때 혹 들어줄 수 있었음에도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경종은 진실로 어진 임금이었다.영조는 오랫동안 조정 신하들의 당파를 짓는 관습에 괴로워하여 양쪽을 소멸시켜 융합하려고 했으나 시행할 계책이 없자 어쩔 수 없이 탕평(蕩平)에 뜻을 두었으니, 평소 마음에 두었던 일이 대체로 이 한 조항이었다. 그런데 정미년(1727, 영조3) 7월에 이르러 갑자기 전의 안을 번복하여 정호(鄭澔)ㆍ민진원(閔鎭遠) 등 여러 사람을 파직하여 내치고, 다시 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 등 여러 사람을 등용하여 일거에 조정의 반열을 바꾸면서 아무 까닭도 없이 평지풍파(平地風波)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고 현혹하게 하여 감히 다시는 옛 버릇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며 탕평에 대한 의견을 앞다투어 바쳤다. 그러나 탕평에 참과 거짓의 구분이 있으니, 당파를 혁파하는 것은 반드시 구양공(歐陽公)의 〈붕당론(朋黨論)〉이나 주자(朱子)의 〈답황상서서(答汪尙書書)〉와 같이 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참된 탕평이 된다. 그렇지 않고 한갓 한쪽을 내치고 다른 한쪽을 올린다거나 양쪽을 대등하게 천거하여 함께 행하게 하는 것을 공정한 방도로 여긴다면 이는 거짓된 탕평이니, 비록 한 시기 동안 강제로 억누를 수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다시 결렬되어 더욱 어찌 할 수 없게 된다.주현(州縣)의 크고 작음과 넓고 좁음, 이름과 위치는 한결같이 지세(地勢)와 정치에 마땅한 것인가를 보아야 하고 다른 이유로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조정에서는 크나큰 죄를 지은 사람이 나온 지역이 있으면 혹 그 고을을 혁파하여 다른 지역에 소속시키거나, 혹 그 지명을 바꾸거나, 혹 그 등급을 낮추는데, 이는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다. 그 죄인을 주살하면 그만이지, 땅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영조는 정자(程子)의 "사람이 부모가 없으면 생일에 갑절이나 슬프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생일[誕日]의 하례를 받지 않았으니, 제왕의 존귀함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필부임에랴. 근래에 보건대, 민간의 일반 백성과 저자의 상인 들이 조금이라도 돈과 재물이 있으면 번번이 술자리를 벌이고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심지어 이른바 회갑 일에도 또한 빚을 내어 그러한 일을 하다가 끝내 빈곤으로 패가하는 것은 대체로 명색이 선비란 자들이 선도함으로 인해 습속이 된 것이니, 애통하다.당파를 혁파하는 방도는 김공 흥경(金公興慶)이 아뢴 말의 한 가지 방도가 통쾌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당론도 또한 참된 시비가 없는 것이 아니니, 색목(色目 사색당파(四色黨派))을 물을 것도 없이 오직 참된 시비만을 궁구하여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따른다면 인심이 자연히 감복할 것입니다. 어찌 굳이 억지로 탕평의 방도를 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구공(歐公 구양수(歐陽脩))과 주자(朱子 주희(朱熹))의 뜻이다.영조가 두 차례나 민진원(閔鎭遠, 노론의 영수)과 이광좌(李光佐, 소론의 영수)의 손을 잡고서 절실하게 화해를 권면하기를 마치 시골 사람이 싸움을 화해시키는 것처럼 하였으니, 비록 당파를 혁파하려는 공평한 마음을 보더라도 진실로 또한 수고로웠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양쪽이 마음으로 감복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김공 흥경(金公興慶)이 아뢴 것처럼 또한 오직 "참된 시비를 궁구하여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따른다."라고 말할 뿐이다.영조가 피차의 시비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허다하게 안배하여 배치하고 포장하여 숨겨 주는 술책을 시행한 것은 도리어 숙종처럼 아는 대로 즉시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일도양단(一刀兩斷)이 비록 득과 실이 서로 반반이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곧바로 결단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유배에 편입된 사람이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에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는 것은 법에 그런 조문이 없어 글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효로 다스리는 법인데 어떻게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지 않겠는가?"237)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다! 왕의 말이여.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復位)는 명릉(明陵)의 세상 때 일찍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당시 한두 가지 다른 의론이 있었던 까닭에 영조(英祖) 때에 이른 뒤에서야 비로소 거행되었으니238), 훌륭하다! 이 일이여. 선왕의 뜻을 드러내고 훗날의 성인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영조가 5세의 왕세자에게 왕위를 전해주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조처인가? 비록 시대상황에 격분하여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동요하는 바가 있게 하여 옛 습관을 징계하고자 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효순빈(孝純嬪)239)의 상으로 인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여 장자를 위해 3년복을 입도록 명했을 때에 김상 재로(金相在魯)가 차자를 올려 중지시킨 것은 바로 우암이 기해년에 주장한 복의(服議)240)의 뜻이다. 다만 감히 곧바로 결단하여 말하지 못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거(前據)를 함께 들어 말하였으니,241) 대체로 우암의 복의는 현종(顯宗) 때 인선왕후(仁宣王后)242)의 상 이후로 숙종ㆍ경종 두 조를 거쳐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상이 힐난을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 놓고 아뢰지 못한 것이다.임금이 이조에게 명하기를, "오직 인재를 등용해야 할 것이니, 먼 지방에 있다는 것에 구애받지 말라."라고 하자, 참판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신 등이 만약 서울의 자제를 먼저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직임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실제적인 말이다. 판서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시골 사람이 벼슬에 있으면 대개 불미스런 일이 많으니, 서울의 자제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시방편으로 지어서 말한 것이다.243) 아, 관직을 위해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전형(銓衡)을 맡은 관리의 직분인데, 당시의 폐단이 그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그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는 자제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형을 맡은 관원을 쫓아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영조 정축년(1757)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상에 대비(大妃)가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에 대해 논자들이 이르기를, "이미 경종비(景宗妃)의 복으로 맏며느리의 복을 입고 있으니, 지금 중첩해서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옳다. 다만 기해년 우암의 의론244)을 기준으로 보면 경종비의 상에 대비도 또한 맏며느리의 복을 입을 수 없다.왕후가 승하하던 날에 영조가 정치달(鄭致達)의 상에 나아가 조문하였다.245) 이는 예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영조 때에 술을 금지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붙잡힌 무사에게서 술항아리를 뺏고 효시하려고 하자, 임금이 직접 살펴보고 말하기를, "식초이다."하고서 마침내 용서해 주었다. 대저 식초는 술에서 나오고, 술이 오래되면 식초가 되니, 식초가 곧 술이고, 술이 곧 식초이다. 술을 금지하면서 식초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술을 어찌 금지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술은 온갖 의례에 필요해서 만들어지고 음식과 의약에 필요한 것이라 금지할 수 없는 것이니, 비록 "그 유폐(流弊)로 재앙을 낳는다."라고 하더라도 다만 때와 장소에 따라 심한 경우를 금지하여 거리낌이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면 그만이다. 예컨대 무왕(武王)의 〈주고(酒誥)〉에서 단지 상왕(商王) 수(受 주(紂)의 이름)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자 천하 사람이 이에 변화되었는데, 매토(妹土)가 상나라의 도읍이어서 그 악습에 물든 것이 더욱 심했기 때문에 매토 사람을 불러 고하였지만, 오히려 이 술로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어찌 일찍이 온 나라에 일체의 법을 적용하고, 사당에 고하는 것까지 모두 10년의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 영묘조(英廟朝)의 일과 같은 것이 있었던가. 다른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단지 식초를 금지할 수 없었던 것으로 살펴보면 또한 술을 금지하는 것이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영조 정축년(1757)에 크게 기근이 들었을 때에 세금을 피해 떠돌아다니던 사람이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우리 가족이 끝내 살아갈 길이 없으니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만 못하다."하고서 먼저 그 두 자녀의 목을 매고, 이어서 그 아내의 목을 매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매어 4구의 시체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었으니,246) 참혹하다. 이것이 이른바 '3년을 지탱할 만한 저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않게 된다.'라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대의에 관계된 뒤에 친족의 정을 끊을 수 있으니, 세자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한 무제(漢武帝)가 여태자(戾太子)를 죽였을 때에 오히려 강충(江充)의 모함을 믿고 배반으로 죄를 삼았다.247) 그런데 영조가 임오년(1762)에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 대처분(大處分 뒤주 속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을 때에 유독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약 죄가 있어 죽였다면 또 어찌하여 임금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하고, 장사 지낼 때에 직접 가서 지켜보았으며, 친히 신주(神主)에 제사하고 수은묘(垂恩墓)라는 묘호를 내릴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대처분으로 끝난 것이 삼가 의심스럽다.세자를 죽인 모의가 모두 홍봉한(洪鳳漢)에게서 나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인가. 또 임금이 장성했을 때와 다름이 없이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홍봉한은 세자빈(世子嬪)의 아버지이니, 이 어찌 인심(人心)이 없는 것이 이렇게 심한 것인가.황이재(黃頤齋) 윤석(胤錫)이 계방(桂坊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된 것은 영조 말년에 있었는데, 이 역사적 기록이 세자의 대처분 뒤에 실린 것은 잘못된 것이다.248)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 이러한 때에 이러한 관직을 맡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사자인 이재에게 영광스럽지 못한 것이니, 이는 고쳐 바르게 해야 한다.송역천(宋櫟泉 송명흠(宋明欽))이 한 번 조정에 나아가 '삼백적불(三百赤芾)'의 말로 갑자기 임금의 우레와 같은 노여움을 받았는데,249) 비록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여 돌이켜 구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지만, 그 당시 임오년(1762, 사도세자가 죽은 해)부터 이 당시(1763)까지 세월이 얼마나 되었다고 유자(儒者)들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김약행(金若行)이 상소로 지금 중원(中原)에 제통(帝統)이 없으므로 본조(本朝)에서 황제의 칭호를 일컫고 천자의 예악(禮樂)을 사용해야 한다고 청한 것250)은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형세로 말하면 스스로 강하지도 못하면서 한갓 호칭을 가지고서 저들에게 대항한다면 어찌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단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함을 보일 뿐이었다.임진년(1592) 창의(倡義) 때에 공훈으로 보나 충성으로 보나 김건재(金健齋) 문렬공(文烈公)251)처럼 성대한 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임진년의 옛 갑자가 다시 돌아와 관원을 보내 옛 충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김 문렬공이 조 문열(趙文烈 조헌(趙憲))과 고 충렬(高忠烈 고경명(高敬命))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이 충성과 공적에 보답하는 제사에도 또한 그 사이에서 우대와 홀대가 있는 것인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부왕(父王)의 후비(后妃)가 왕대비(王大妃)가 되고 조왕(祖王)의 후비가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는 것이 본래 바른 예법인데, 지금 정조가 손자로서 조부(祖父)를 계승한 까닭으로 대왕대비를 왕대비라고 칭하고 예위(禰位 아버지의 신위(神位))에 해당시켰으니, 그 명분이 바르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은 것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예위가 없다면 또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사서인(士庶人)의 집안에서도 또한 조부(祖父)가 생존해 계시고, 부친이 생존해 계시지 않으면 손자가 조부의 중책을 계승하는 규례가 있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집안에서 손자가 조부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제와 숙질(叔姪)이 서로 왕통(王統)을 계승하는 것이 상례가 되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왕대비(王大妃)의 위호(位號)를 당시 유현(儒賢)에게 물었을 때에 유현들이 혹 잘 대답하지 못하거나 혹 대비(大妃)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왕대비(王大妃)라 칭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오직 위솔(衛率) 안정복(安鼎福)만이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황후인 상관씨(上官氏)를 존숭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삼은 일을 인용해 근거로 삼고서 대왕대비의 존호를 낮추어 왕대비라 칭하는 것은 자연히 소목(昭穆)을 어그러뜨리고 어지럽히는 죄에 귀결되는데도 온 조정에 어느 한 사람도 논박하여 바로잡은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였으니252), '봉명조양(鳳鳴朝陽)'253)이라고 이를 만하며, 어찌 유현(儒賢)보다 귀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끝내 안정복의 말에 의거하여 고쳐 바로잡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조정의 수치가 어느 것이 이보다 심하겠는가.홍국영(洪國榮)이 동궁(東宮)의 관료로 있을 때에 백방으로 세손(世孫)을 보호한 것은 본디 직분을 다한 것이니, 어찌 특별히 그 공로에 보답할 만한 것이 되겠는가. 그런데 정조(正祖)는 즉위하자 도리어 권력과 요직을 맡겨 조정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게 하여 '세도(世道)'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시작되고, 이로부터 그 뒤로 세도의 권세가 마침내 나라를 잃게 하는 데에 이르렀다. 아, 정조의 총명함과 슬기로움으로 도리어 이런 실수를 하였으니, 임금 노릇 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영조가 훗날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숭할 것을 염려하여 정조를 효장세자(孝章世子 영조의 장자로 사도세자의 이복형)의 뒤를 잇게 하였지만, 끝내 어찌할 수 없이 대를 이은 임금들이 모두 사도세자의 자손들이었으니, 후세에 결국 추숭을 하는 데에 무슨 영향을 끼쳤겠는가.254) 또 만약 당시에 효장처럼 이어받을 만한 곳이 없었다면 또한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다. 대저 제왕가(帝王家)에서 그 위통(位統)을 잇는 것은 사가(私家)에서 그 세통(世統)을 잇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응당 손자가 조부의 위통을 잇고 효장의 세통을 잇지 않게 하는 것이 득이 되는 것만 못한 듯하다.순조(純祖) 원년(元年, 1801)에 천주사교(天主邪敎)를 크게 주륙한 것은 그 성학(聖學)을 지키고 이단(異端)을 물리친 것이 엄중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무릇 원기가 쇠약해진 뒤에 백 가지 병이 들어오고, 안으로 다스림이 소략한 뒤에 외부의 적이 침범하니, 이 당시에 국조(國朝)에서 성학(聖學)을 숭상하는 것이 오로지 겉치레만 힘쓰고 실질이 없으며, 또 서양은 강성하고 우리나라는 빈약하기에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달려가는 것은 또한 정세가 그러한 것일 뿐이다. 어찌 진실하게 우리 성인의 학문을 닦고 진실하게 우리 성인의 정치를 일삼아서 도가 밝아지고 나라가 강성해지게 하여 금하지 않아도 스스로 금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만 같겠는가.이연(李綖)이 율곡(栗谷)의 종손이 된 것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속아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미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임금의 명이 있었다는 이유로 고쳐 바로잡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일이 바르지 않게 되었다면 전후의 사실을 갖추어서 다시 임금에게 아뢰어 바로잡는 것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순조 때에 이미 본손가(本孫家)의 호소가 있었으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또한 임금에게 아뢰어 추후에 고칠 이치가 있었다.255) 만약 일이 선조(先朝) 때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장릉(莊陵)과 온릉(溫陵)의 복위256)가 모두 그릇된 것인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왕돈(王敦)이 역적이 되었을 때에 왕도(王導)가 조정에 있었음에도 연좌되지 않았는데257), 하물며 애초에 벼슬한 적이 없어 혐의할 것이 없는 김정순(金鼎淳)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김익순(金益淳)의 종제(從弟)라는 이유로 초시 합격자의 명부에서 삭제한 것258)은 매우 말이 되지 않는다.순조 임진년은 왜란(倭亂)의 구갑(舊甲)259)으로 국난에 목숨을 바쳐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치제할 적에 제공(諸公)들에게 두루 미쳤지만, 유독 김건재(金健齋) 문열공(文烈公)에 대해서만은 빼 놓았다. 이는 영조 임진년 때에도 이미 그렇게 하였으니, 한 번도 말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재차 그렇게 하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시험 삼아 말해 보건대, 김공이 순절로 보나 공훈으로 보나 일찍이 한 터럭만큼이라도 제공들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 있는가. 단지 미치지 못한 것은 자손의 성대함뿐이다. 조정에서 자손의 성대함과 쇠약함에 따라 전대의 충신에게 우대와 홀대의 차별을 적용하니, 과연 무슨 일인가? 당시의 인심(人心)과 풍기(風氣)가 이처럼 치우치고 사사로웠으니, 어찌 나라다울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 이(李)ㆍ윤(尹)ㆍ박(朴)260) 세 공이 바로 순절한 상주(尙州)의 증연(甑淵)에서도 또한 제사를 지냈는데, 김(金)ㆍ최(崔)ㆍ황(黃)261) 세 공이 순절한 진주(晉州) 남강(南江)에서만은 유독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인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우리나라 말기에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는데, 각전(各殿)262)의 탄일(誕日)은 물론이고 각릉(各陵)과 각묘(各廟)의 생신이나 휘신(諱辰 기일(忌日)), 즉위한 날에도 또한 매우 융숭하게 갖추었으며, 심지어 조정에 있는 신하의 회수(回晬)ㆍ회근(回巹)ㆍ회방(回榜)263)에도 그 잔치를 넉넉하게 도와주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허례허식이 아니겠는가. 그 폐단은 도성에서 시골 마을에까지 미쳐 지금은 비록 저자의 상인이나 가난한 선비, 곤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여기저기 전전하며 빚을 내어 기어코 생일이나 돌,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행하여 다투어 볼만한 일로 만든 뒤에야 그치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경평군(慶平君) 호(晧)264)의 "오늘날의 조정이 김(金)의 조정인가"라는 한마디 말은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러나 이 한 마디 말로 인하여 온 조정이 떠들썩하여 작호를 삭탈하여 멀리 유배를 보내고 풍계군(豊溪君)의 후사에서 파양하며, 아울러 그 부친과 숙부도 내쫓을 것을 청하는 지경에 이르자, 임금이 마지못해 그대로 윤허하였으니, 당시 김씨(金氏)의 기세가 성대하였음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철종(哲宗) 말기에 각 지역에서 백성들의 소요가 크게 일어나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수백 년 동안 백성을 병들게 한 폐단이 점차 쌓여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드러난 때문이니, 이른바 "비록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다.265)"라는 것이다. 此當曰韓史, 而曰朝鮮史者, 拘於時也.然拘於時, 而不得直書, 則寧可不作史有言.國之爲韓, 在高宗丁酉, 此史止於哲宗, 而不及爲韓以後事, 故曰朝鮮史者, 此不成說.然則商之爲殷, 在盤庚以後, 而史稱殷王成湯者, 何也? 蓋彼之置府於我地而必以舊號之朝鮮稱之者, 所以絶帝時所號之韓也.作史於今日, 而不曰韓而曰朝鮮, 則是非用其舊號也, 不過爲用彼絶韓之新號也, 向所云云, 豈其情乎? 吾故曰?拘於時也?, 拘時而猶欲不泯本國故實, 而編此史亦古所謂戚矣者歟.序上言桓檀迄于羅季之文獻, 下言本朝之文物彬彬, 而中不言麗朝, 此當爲失勘處.崔瑩之攻遼犯明, 失計之大者, 使無太祖, 麗得不亡乎? 可謂忠而無謀矣.裵克廉?時平立嫡, 世亂立功?, 不易之明言, 以太祖之英明, 不見聽, 其亦惑矣.然則撫安、宜安之禍, 其非太祖使之乎? 後雖悲憤, 何益哉?權陽村之歸太祖, 其父迫之也.一則陷子於不義, 一則以從父之令爲孝也.恭讓王, 雖不遇害於太祖登極之時, 終亦不保於三年之後, 何以至此? 敢爲太祖竊歎.先師序《牧隱集》曰:?恭愍嘗率兩府禮佛, 先生獨不拜.太祖使之仕, 不屈而死, 史氏之謂佞佛改節, 豈可信之言乎? ? 今此史所記, 上曰:?李穡爲儒宗, 猶信佛, 以李穡爲韓山伯.? 穡曰:?開國之日, 何不使我知之? 我若知之, 當行揖讓之禮, 更有光.? 穡每進見退, 語子弟曰:?眞聖明之主.? 穡托佛斷酒肉等說, 卽所謂?佞佛改節?, 而不可信者也.然革命之際, 雖曰史不可信, 言非一言, 事非一事, 安得言言皆誣, 事事皆誣, 若此之甚者乎? 意者牧翁於此二者, 少矯矯風節、斬釘截鐵底氣像, 故有此誣之來歟.牧隱卒年下有論曰?嘗奉旨銘指空、懶翁二浮屠, 其徒因往來于門, 頗有佞佛之譏?, 苟以是而已矣, 何損於牧隱? 朱子於宋帝, 以佛事設宴, 亦奉箋而賀矣.定宗朝立靖安君, 而稱以王世子者, 是名不正而言不順.當時大臣獻議, ?自古帝王立母弟, 皆封皇太弟, 未有以爲太子?云者, 自是不易之論, 上曰?今予直以此弟爲子?者, 則尤不可使聞於人也.此事之誤, 蓋因上王在而然, 然其云世者, 將繼世爲君之謂也.上王旣傳重於上, 則靖安之所將繼者上也, 而其屬則非子伊弟, 故曰世弟, 安可越一世, 而稱其屬於上王而曰世子乎? 苟其然也, 當宁之王得不爲無其世之虛位乎? 禮官不察此理, 旣誤之於前, 又使襲謬於後, 至隆熙時立英親王, 而稱皇太子, 噫其可歎也哉!吉冶隱上太宗書曰?某於辛朝登科筮仕, 及王氏復位, 卽歸鄕里, 不欲與世相聞?, 上定宗書曰?臣仕於辛朝, 官注書.臣聞女無二夫, 臣無二主, 乞放歸田里, 以遂不事二姓之志?.觀此詞意, 似若爲辛朝而守節者, 然可異也.如曰對定宗、太宗, 故不敢直截, 而稱辛朝云爾, 則其曰?王氏復位, 卽歸鄕里, 不欲與世相聞?者, 又何說也? 竊不勝疑怪之至.此史雖有牧隱爲韓山伯等說, 然但又以此史反覆考之, 則有云?當初李穡、禹玄寶謀復, 禑、昌潛遣尹彛、李初, 訴于明帝?, 又云?太祖敎曰有司言禹玄寶、李穡、偰長壽等, 結黨謀亂, 首生厲階?, 又云?趙浚、鄭道傳等殺高麗臣李崇仁、李種學等, 種學, 牧隱次子, 彛、初之獄, 父子同係?.卽以此史觀之, 亦可以知牧隱一生爲麗盡節, 禍及其子而靡悔矣, 豈有最晩變志, 受伯頌德, 負其亡子之理乎?權近、偰長壽, 上書請與開國功臣之列許之, 權則固然, 偰不可信.太祖所敎偰長壽等结黨謀亂之說, 旣在開國之後, 則偰雖有請, 朝家豈有許之之理乎? 以?許之?二字, 知其不可信矣.然則偰之卒年下云?上王除門下侍中, 封燕山府院君?者, 豈其然乎?定宗朝以禹玄寶爲丹陽伯, 又云?賜禹玄寶功臣號, 給田七十結?, 以告芳幹謀也.人之晩節不可恃者, 有如此歟? 抑亦如李、偰事之不可信者歟?麗末守義自靖之人, 班班出於我國公私文字者多矣.然今以此書考之, 李、吉、禹旣如此矣.金自粹, 太祖朝爲淸州牧使, 太宗朝爲左散騎常侍, 又爲忠淸道觀察使.金若恒, 太祖朝使於明, 趙瑜, 太宗朝爲靈光郡事, 趙狷, 太祖朝錄開國功臣平城府院君, 世宗朝賜几杖, 申包翅, 世宗朝爲左司諫, 此皆何故也? 謂史不可信, 則出於國朝當日實錄矣, 謂公私文字不可信, 則亦多出於列聖群賢之手, 柰如之何? 只當以疑傳疑, 以信傳信而已, 兩出之, 又自有目覩耳聞之異, 則疑信之間, 亦豈參量者存歟?沈溫之死, 罪不明白, 況因此而及其女乎? 其請廢恭妃者, 實後來成、朴、柳請廢愼后之嚆矢也.太祖好佛, 自卽位至昇遐十有七年之間, 凡以佛事之大者書之者, 殆近四十.以是遺後世法, 其何以不爲禪佛世界乎? 太宗繼之, 雖不改父之道, 非其所好也.其牢拒明大監黃儼拜佛之請者, 足以有辭於天下矣.河崙之論佛無理, 已得其正, 至以蚌珠、蛇珠, 斥舍利之非異物, 又明確不可易.康居信、孫孝宗、趙瑚妻之雖當酷刑, 而或不告其夫所在, 或不證其夫之罪者, 俱得盡倫常之道, 而其言之當理, 又足感動人.非但爲烈婦, 亦可謂哲媛, 可使世之具鬚眉而遺親後君者, 知所愧死也.太宗與群臣論牧隱曰?回軍之日, 送酒以迎, 可謂不事二君乎? 好佛國人所共知, 乃謂絶僧徒, 卿等以爲然否?, 太宗此言, 在得國三世之後.前朝忠義, 旣皆褒賞之時, 則已無所忌憎矣.雖怒於牧隱行狀, ?用事者忌公不附己?之語而然, 然使牧隱皜皜乎不可尙已, 則亦安得抑勒如是乎? 此可謂千古疑案.太宗九年己丑, 《太祖實錄》之撰也, 召領春秋河崙入內, 旣而傳旨於知春秋鄭以吾、卞季良, 使之一聽崙指畫.史官謂?古史皆成於三代之後, 今以太祖舊臣, 撰太祖實錄, 不免後世之議?, 則崙作色曰:?宜及老成未亡, 備記本末.? 史官又謂?不依古制, 且使史官不得盡與, 恐後世尤有議焉?, 則崙曰:?此事秘密, 不可與八翰林共之, 且內旨令二翰林與之者, 以郞廳不足耳.? 崙是前朝失節人, 而召之入內, 則宜有密囑.又只令鄭、卞二人, 而一聽於崙, 又以崙所答史官宜及老成未亡及此事秘密等語揣之, 則可知所撰之不得爲公直矣.觀此錄者, 當於李、吉、禹、偰及諸公事之疑信, 知所斟量矣.太宗十四年甲午, 領春秋河崙以鄭道傳、鄭摠等所撰《高麗史》, 禑以後事多諱實, 請更修從之.以此觀之, 則麗末諸公事之在疑信者, 尤當斟酌看矣.我王家與明帝家結婚, 有何不可? 而太宗以慶貞公主爲憂, 卽嫁於趙大臨, 而幷不聽大臨之待終母喪也, 有所不敢知也.徐甄有却恨前朝業不長之詩, 而群臣請逮問詩意, 太宗曰:?前朝之臣, 不忘前朝, 其情也, 置而勿問.? 群臣再請, 上曰?卿等必欲問甄, 以伯夷爲非, 然後可?, 且罪甄, ?大哉王言?, 固不敢贊一辭, 而彼群臣者, 亦獨何心? 設使太宗不免嫌怒, 猶當諫止, 何況忍至於此乎?太祖之立宜安爲世子也, 裵克廉有時平立嫡世亂立功之言, 則固以太宗爲非嫡矣, 非嫡則豈非庶子乎? 今太宗問左右, ?貞陵於予爲繼母乎?, 則柳廷顯對曰:?于時神懿未昇遐, 豈得謂之繼母乎?? 噫! 旣不得爲繼母, 則必謂之庶母而後可乎?帝王家以繼序爲重, 雖兄弟相繼, 有父子之道.太宗旣傳位世宗, 則太宗自當爲上王, 定宗自當爲太上王.亦有太祖、定宗前例, 太宗?以上王爲太上王, 予當爲上王, 倫序然也?之敎, 卞季良等?宜尊上王爲太上王, 父王爲上王?之言, 自是當行而不可易.柳廷顯等?宜尊父王爲太上王, 上王則仍爲上王?之言, 尤出於私邪者也.惜乎終不能一裁之以禮, 致有?兩上王?之稱, 此爲不正不順之大者.王者旣傳位, 則號令專出於一處, 理勢然也.太宗旣傳位, 而猶欲號令之出己, 以暖昧之事, 慘殺衆大臣.如此則初何以傳位乎? 太祖之傳位, 固有所激而然, 太宗則出於中心, 而又胡爲乎若是? 大抵人君非倦勤之年而傳位者, 非國家之福也.我國之事明, 極其誠敬, 而明帝之每使宦侍使我國者, 所以賤待我也, 豈不憤慨? 又其所求者, 不出美女馬匹舍利之類, 而無歲無之, 是自棄其中國之禮義, 反取外國之譏侮, 而終於亂亡已矣.讓寧大君之自失其道, 讓于有德之君.以行事言之, 無得罪於國家, 爲世宗諸臣者, 必欲其不容, 至不使接見, 何也? 若非世宗之友愛, 幾乎不得免矣.世宗朝生員方運之斥佛疏, 誠有補世敎之文, 可與韓昌黎《佛骨表》相爲表裏.趙狷, 世所稱麗末忠臣.本名涓, 恥與其兄浚同行, 去水從犬, 取犬知主之義者也.今於其卒年下稱?狷, 浚之弟, 高麗時爲上護軍, 太祖開國錄功封平城府院君, 無他異能.但因其兄, 得與勳盟, 歷事四朝, 位至一品.少爲髠, 人言少及之輒怒?.一人之身, 一何彼此逕庭之至此?帝王家兄弟、叔姪、祖孫相繼, 雖有父子之道, 而無父子之名.卞季良謂?世宗於定宗廟當稱孫?, 則有失禮意.吉冶隱於其子赴召也, 命之曰?當以我向高麗之心事汝主?, 此言果出於冶隱否? 苟心心念念, 專向高麗, 則恐無暇出此言矣.?不娶同姓?之令, 始自世宗朝而立, 肅宗又復申明, 而至今因循不行.學士大夫家, 亦多有犯者, 是則儒門之咎也.世宗稱東方堯、舜也, 而晩年好佛, 【中缺】我國之號稱崇儒者, 安在? 甚矣.佛說之以禍福動人深也.世祖嘗曰:?釋敎勝於孔子之道, 而程、朱非之, 不深知佛道者也.? 身旣深知佛道矣, 則佛道之第一義, 戒在不殺, 而顧不如是者, 何也?文宗召集賢殿學士, 付託世子於夜分之後, 極其深切, 則知世子之不克負荷, 世祖之已有異志矣.若能如宋太祖之傳位太宗, 則豈不爲息禍保子之道歟? 惜乎其未也.崔煙村德之之歸, 在文宗朝, 卓矣不可及.元觀瀾昊、趙直學峿之歸, 在端宗初, 亦可敬.如河、成、李、兪計不出此, 乃拜官進秩於三相見殺之後, 而河之上疏强公室之說, 適足爲首陽地, 柳成源, 至製錄功首陽敎書, 則後雖有殉忠, 視崔、元、趙, 豈不愧哉?六臣忠則忠矣, 未足爲法於後世.旣臣事光陵矣, 其不食祿俸、代用?巨?字等說, 其可謂名正言順乎? 雖使幸而事成, 揆以正誼不謀利, 明道不計功之義, 不足爲尙, 況事未成乎? 丙子之擧, 雖足以表其心事, 如使未擧前, 一朝遇疾而終, 則柰如之何?端廟遜位時, 朴醉琴之欲投慶會樓池而死者, 自是正義, 惜乎爲成梅竹說所入, 而不得其正也.遜位時, 成公之詣尙瑞司, 出大寶, 令宦官奉進云者, 尤可怪也, 得非誣說乎?君子之與人同事而事敗, 雖在同列, 尙爲之諱, 而獨當其禍, 況於君父乎? 醉琴之不隱其父, 梅竹之直告上王, 俱不知其何義.抑史說有不可信者歟?端、世之際, 韓明澮、權擥猶可說也, 至鄭麟趾、申叔舟受文宗厚恩重託, 而極其慘毒於端廟, 眞所謂?狗彘不食其餘?者, 而鄭尤甚焉.顯德王后於六臣事何與, 而廢爲庶人? 如以端廟爲得罪宗社, 其母不宜保名位, 如政府所奏云爾, 則豈不拶逼於文宗耶? 其蔑倫敗常, 乃至乎此, 而當時朝臣無一人言其不可者, 至中宗朝昭陵之復, 亦累議累寢而後行, 嗚呼! 寧欲無言.李大田甫欽1), 吾先師所爲作文集序, 而贊忠義者也.旣與錦城大君謀復上王, 而又馳奏錦城謀逆, 如此史之云, 則天下寧有是哉? 意者史不可信也.端廟, 安平之遇禍也, 讓寧大君每每率宗親而請之, 讓寧世稱有至德, 胡爲而若是? 若曰爲宗親首班, 故諸宗親不告, 而首錄其名, 則其前後無一言自辨, 又無一言爲端廟紓禍者, 何也? 史又曰:?右獻納申叔舟奏?讓寧大君就浴溫井, 枉路遨遊以煩州郡, 抄給才人、白丁, 任情獵禽.才人、白丁亦軍卒也, 王子抄軍, 漸不可長.? 僧信順告?某至慶州, 將謀據州爲亂?.? 憲府至請鞠讓寧, 此在世祖五年己卯.蓋讓寧之自失其道, 志在讓位.今則志旣遂矣, 年亦老矣, 已經國朝三世矣, 何所爲而尙爾? 故作失德, 示不可用如此乎? 甚可疑也.抑前日所失, 亦未必有志而然耶? 然則其率宗親而請之者, 亦不甚怪.抑亦讓寧前後事史筆, 皆不可信歟?申歸來末舟旣隱居後, 復出爲全州府尹, 旣而復隱, 人以再歸來譏之, 而世祖五年己卯, 爲右獻納矣.然而以叔舟爲兄, 苟欲富貴, 何所不如其意? 而乃知不安於義, 終於隱退, 此其所以爲賢而不負歸來之號歟.定宗卽位二年, 卽禪於太宗, 是何等好意? 而太宗有何嫌介, 至於累世之久, 而不上廟號, 至肅宗朝, 而始歸正.蓋以太宗之英明、世宗之賢哲而猶如此, 私意天理之明, 若是其難乎? 竊可異也.六臣之謀復上王也, 兪公謂?事貴神速, 千載一時不可失也?者, 極是極是, 而成、朴二公謂?非萬全而止之?.噫! 事機已敗露矣, 更待何時而得萬全乎? 等是死爾, 奈之何坐而待死乎? 蓋成、朴, 六臣中最著者, 而旣不精於裁義, 又不足於好謀矣.成宗嚴禁婦女改嫁, 命再嫁女子孫, 勿許赴擧, 勿齒仕板.朝臣言其有所礙則曰?餓死事小, 失節事大?, 大哉王言! 誠凜凜乎正氣, 然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 非可以强而禁之者, 與其强禁, 而或致亂倫之變, 曷若嫁與他人之爲愈乎? 但一與之齊終身不改之義, 本之人心, 而著之古訓, 王者但得大明禮義, 則人之不失本心者, 自當知恥而守節矣.且古者, 立賢無方, 則勿赴擧, 勿齒仕, 非王政之所宜.余嘗謂?嫡庶之分, 在朝則才不殊爾, 當勿論, 在家則名分自在, 當有辨?.國初崇佛之至, 至於忌辰齋疏頭, 稱菩薩戒弟子朝鮮國王姓諱之例, 甚可恥也, 至成宗朝, 承旨孫比長請而去之, 排佛之功大矣.其嘗語梁武帝臺城之禍於上曰?好佛如彼, 而受禍如此, 後之人主, 可以鑑矣, 而猶信之者, 以其言近理, 而禍福之說, 易以惑人?, 此可謂說得眞狀也.成宗廢王妃尹氏, 旣賜死後, 立其所生爲世子, 以貽後日爲母復讎無窮之禍, 何其不思之甚也? 若使立儲, 在賜死之前日, 誠難幷廢世子, 旣賜死矣, 胡爲而必立其所生乎? 是時, 春秋鼎盛, 立儲非所急, 必欲立之, 則勿賜死其母可矣.況其罪不至於可殺者乎? 其曰?將不利於予躬?者, 是未形而億逆之言也.尹氏之死, 仁粹大妃有以致之也.今之閭巷人家, 亦以姑不善視其婦, 致其放出者何限? 噫!燕山朝長湍墓【廢妃尹氏】祭文頭辭, 其曰?稱國王, 稱尹氏?者一也, 其曰?國王姓諱, 謹告慈親尹氏?者一也, 其曰?稱子, 稱先妣?者一也, 其?與第二說同, 而不稱諱?者一也, 而從此議, 然余意第二說, 恐無容改評.燕山初卽位, 手射成宗所養之鹿, 宣傳官朴英見之, 謝病歸, 可謂見幾而作, 不俟終日者, 此其所以卒成名儒而爲松堂先生歟.嗚呼! 松堂時以武官而尙然, 何戊午諸賢以讀書之名士, 思不出此, 終蹈大禍乎? 可慨也已.金濯纓史艸, 記世祖事, 多不諱, 且載其師佔畢齋《吊義帝文》, 而贊之以以寓忠憤, 則豈不深知其師之心, 而載之於世祖事之下乎? 蓋作之載之, 果出此意, 則一是親事世祖, 一是事世祖之孫, 豈敢如此幷不知其何義也? 抑出於一時偶爾之作, 非有他意, 而誤載於史歟? 竊嘗反復思之, 是文之作爲丁丑十月, 則正在六臣死後, 又云在釋褐前, 則以少年方盛之氣, 豈其偶爾而作? 殆欲與梅月堂同迹, 而後不能然耳.然則此作於文集猶當刪去, 況史草乎?表藍2)溪沿沫, 名士也, 撰佔畢齋行狀, 佔畢齋贈詩, 有?吾黨如君知者少?之贊.而戊午禍作也, 始同於追刑佔畢之議, 亦不免拿鞠道卒, 雖使愧其心而幸免, 猶不可說.而況等是死爾, 孰若始終如一?燕山位王者, 而性荒侈, 猶不許生日燕飮受賀.今之閭巷人士, 稍欲自好者, 亦於晬辰置酒張樂, 豈不可恥哉?慘矣! 燕山朝朝士之禍也.無一人幸免者, 幸免者, 阿諛順旨之徒也.《易》曰?履霜堅氷至?, 又曰?介于石, 不終日, 貞吉?, 噫! 遭禍者, 皆讀書之人.縱不能履霜見幾, 至於戊午堅氷之後, 猶晏然不退, 爲終日之計, 或有獻進忠言, 而不顧身隕宗覆者, 此何以故? 持位保祿之念勝也.故孟子曰?志士不忘在溝壑?.權冲齋橃, 在明宗乙巳, 何等名節? 然曾於燕山朝登科, 此豈士子投足之所? 雖以犯用禁諱見削, 反得淸楚, 孰若初不對策之爲善耶?柳洵在燕山朝, 身爲大臣, 順旨助虐, 成、朴反正之擧, 靦然無恥, 乘機來投.究其罪惡心腸, 誅之無赦者, 諸人不惟不能誅, 反與之同事, 此無識之致也.朴元宗等之請廢王妃愼氏也, 中宗若以倫理禮義, 嚴辭而折之, 彼必語塞矣, 其將如之何, 能再行廢立乎? 惜乎過畏其勢, 而不能爾也.元宗等之廢立, 出於圖富貴, 而不出於爲宗社, 故其究也罪至於以人臣而敢廢王妃, 豈但昧於經國, 怙侈滅義, 如史氏所評而已哉? 朴訥齋疏中正罪奪官之論, 眞不可易者.中宗初之濫勳, 人皆謂當削, 而至有己卯諸賢之以此取禍.然余則以爲?此非可但以濫勳論, 如柳洵、具壽永輩長君之惡者, 亦居巍勳, 則當以罪反爲功論?.鄭文翼, 世所稱賢宰相, 於己卯, 救護靜菴諸賢事可見.然其以中宗廢妃事實爲未安之敎, 爲不當, 知寧山君之無罪, 而猶曰?何可全不治?.又謂?柳子光爲不可以罪掩功?, 又謂?文宗位稱祖稱孫, 行之實難?, 則此非所失之大者乎? 如曰人無異辭於量弘, 則其聞宗室四人疏, 論君子小人進退之道而不悅, 請勿賜對者, 又何如也? 此外多不盡擧.嘗聞志山金公擬論國朝五百年人物官案, 而謂?大臣之材, 竟無出於文翼公?者, 故敢論之.靜菴遭禍, 前年已有人夜半, 射書政府及諫院門, 言?趙某等變亂國政, 將危社稷?者.此不啻幾之先見者, 所當作不俟日也.不惟不作, 繼是而强請罷昭格署, 至於終夜論奏而得許, 又以片言止朝廷掩捕野人已定之議, 使諸臣皆懷不平, 又請削靖國勳濫錄者累奏, 而竟得許.此三者, 俱非係國家安危之大事, 而胡乃已甚至此? 使無此三者, 亦難乎免矣, 而乃反促之, 此亦運氣攸關, 而非人力之所致歟?金公世弼使明而還, 爲靜菴一言, 而至於言淚俱下, 何等義氣? 故尙震以爲?邇來經席, 未有如此正論矣?, 及其被鞠也, 則忽反前言, 惟恐爲靜菴連累, 又何等怯懦? 視古之?臨死不易辭?者, 豈不愧耶? 然亦竟不免杖徒之律, 孰若前後一辭之爲正直耶?南原尹姓女, 拒喪中婚嫁而曰:?非人子所可忍, 吾將何面目立於世乎?? 彼於其時, 有明朝採女之變而猶曰:?萬一被選入他國, 我當自處, 亦可知其遭變而能死拒也.? 嗚呼! 今之所謂?儒者?者, 乃於無事安平之日, 冒行乘喪婚娶, 而傍觀之儒者, 亦恬不爲怪, 豈不俱爲尹女之罪人也乎?南袞臨死, 自知難免千古小人之名, 取平生草稿悉焚之, 且令勿請諡立碑, 可見一點良心不死處.然旣自知其罪, 則何不痛自悔責, 上告君王, 伸靜菴諸賢之冤, 請治自家戕賢之罪, 爲文服罪諸賢之墓, 明白布告國中乎? 然則亦一可觀, 而惜其未也.甚矣! 仁宗在東宮時之遭險厄也.一之而有肉膳之毒, 再之而有灼鼠之凶, 三之而有食醯之毒, 四之而有衝火之變.人皆疑尹元衡所爲者, 豈其無根之言? 是爲乙巳七月之本, 而總之中宗不明斷之過也.中宗敎, 竄尹任罷尹元衡, 史臣所斷, ?上若果至公無私, 則任與元衡, 同罪可也, 而一罷一竄, 輕重懸殊, 其偏係之失, 亦可見矣?者, 自是正論.蓋仁宗之禍, 都是中宗馴致, 豈但不明斷而已? 其異乎閭閻民庶惑於後妻之爲者幾希矣.當初一邊人, 以?保護東宮?之說而進金安老者, 語其時, 則亦自有理, 安老若實心保護, 則亦自有功.但進之者, 未必實以是心, 安老之心又專在貪權樂勢, 何足道哉?宋判書世珩乙巳以後事, 雖不足言, 其爲副提學也, 爲靜菴請復官者, 豈不可尙? 是時己卯未久, 中宗在位, 人莫敢言.前此僅有一人, 而宋繼之至蒙上之首肯, 此爲尤難.若守此心而不變, 則豈不以君子終身而令名傳後哉? 何其明於己卯, 而暗於乙巳也?【宋爲吾十五世祖僉知公外孫, 故不勝歎惜而言.】中宗二十一年丙戌, 有子弑父母之變.上以禮敎敗, 命八道行鄕飮酒禮, 此文具之文具也.追思靜菴憲長日, 男女異路, 治化方興, 則宜其感傷回悟, 而無人因此進告, 觸發其機也.仁宗乙巳, 河西請同參議藥3), 藥房以非其職拒之, 則至發聲扣胸以請之.又請移御他宮以調養之4), 世稱河西盡君臣之義者, 已自是時.丁游軒亦請入藥房, 曰:?許世子止不嘗藥, 聖人以弑書之.今君父之疾, 一委醫官可乎?? 當是見得此義者, 惟河、游二賢.退溪每自言?見慕齋, 然後始知有正人君子之學?, 其尊信也如是.而其爲典翰, 以朝家勿許慕齋家受倭人所饋胡椒事, 上疏曰:?人臣無私交, 安國待倭人過厚, 致彼益肆貪縱, 安國不無罪矣.? 蓋彼之有饋, 自感慕齋德義, 而乃謂酬其忠於己者, 不過向我人侈大之言也.胡不以是爲慕齋辨明, 而乃曰?私交?, 曰?致彼益肆?, 曰?不無罪矣?, 其於尊信之道, 果何如也?殺桂林君之日, 因晦齋密封單子入奏一事, 死竄削罷之禍滋甚, 是時明宗已立, 國家大事定矣.密單中所謂?仁宗大漸日, 手書於紙, 使尹興義覽之?之說, 有無何關, 而必以密奏乎? 若此爲實事與誤作推官刑訊, 善類又自不同, 豈成說乎? 或記者爽實歟?余嘗讀權石洲?千古有名兩學士, 九原含痛一王孫?之詩, 人謂兩學士指晦齋、退溪, 余大驚疑.及見此史?鳳城君之死也, 退溪亦以應敎, 與於伏閤?, 於是尤益驚疑.終見其所引野史, ?李某自外至, 不知議論本末, 亦與焉?及?諸人離席請罪鳳城, 某獨不離席, 人以爲難?之語, 始乃釋疑.然竊以爲初不如不仕, 此時之爲盡善.閔立巖齊仁深悔其愆, 稍異時輩, 終亦遠竄, 此尤菴所以爲作墓文也.其自言?我不忍一朝之死, 見辱隣里少年?者, 宜作後人折肱之醫.明宗初載, 晦齋上書七條, 言補養幼主, 而無一言於孝陵之渴葬者, 其於緩急先後之分何如也?小人之同惡, 以害君子者, 必不相能於其終, 甚則骨肉爲讎, 元老、元衡是也.庶孼鄭大雲之疏, 請許通文武科也, 諸議紛然, 或可或否.而退溪先生言?此防一毁, 以庶逼嫡, 以賤蔑貴者多矣, 豈可輕易爲哉??, 此似因請之者是庶孼, 而杜末流之弊也.竊嘗以爲?朝廷政治, 惟賢是取, 人家禮節, 分不可紊, 君天下者, 當公施爵祿, 而嚴行法令, 則庶兩不相害矣.?曹南冥歷言?致力學問, 有得明新之效?, 而曰:?國可使均, 民可使化, 危可使安.約而存之, 鑑無不空, 衡無不平, 思無邪焉.佛氏所謂?眞定?者, 只是存心而已, 其爲上達天理, 則儒釋5)一也.? 是時上好佛, 故因其所好, ?用納約自牖?之術.然若果如是, 由佛而亦可達天理矣.達天理, 則於治國乎何有? 又孰若任上所好, 行其所無事, 而必欲極力反之於儒乎? 其下乃云?但施之人事, 無脚踏地, 故吾家不學?, 果能由佛而達理, 則理之所達, 知則眞矣, 眞知則實行矣, 又胡云無脚踏地乎? 冥翁此言, 殊非細失.蓋吾儒之所以斥佛者, 其所謂?天理?者, 是氣而非理故也.國恤卒哭後白笠, 載在《五禮儀》, 而特廢而不行.故中宗之喪, 柳灌建議行之, 文定之喪, 尹元衡乃曰?白笠柳灌所定, 不可遵用?, 是所謂?逐鹿而不見泰山?者也.朝臣知其非, 而莫敢言, 如是國之不亡幸矣.是猶世間有儒者, 篤行古禮, 而效之者衆, 則輒群訕曰?是某人所創之禮也?, 豈非可笑哉?南冥以?諸葛武侯與先主共圖興復三6)十年, 終不能成功, 謂其出未可知也?, 顯有不滿之意, 以儒者知時識勢, 諒能度分之出處, 極致言, 則誠然矣.但武侯之意, 則特以當時無有知曹操之爲漢賊者, 故佐漢討賊, 明大義而已, 不計究竟成敗, 此不可不知也.兩司連請石尙宮罪大惡極, 當迸黜于外, 而宣祖曰:?石尙宮雖在宮中, 非侍衛之人, 有何專輒之罪.? 此以其大罪極惡, 看做專輒, 意在諱其罪也.兩司之只言罪大惡極, 而不言何罪何惡者, 亦意在諱其罪也.旣罪大惡極, 則誅戮可也, 而只請迸黜者, 亦意在諱其罪也.其罪何? 乙巳七月事也.諱其罪, 非爲石尙宮也, 爲親者諱也.噫! 爲親者諱, 雖可爲也, 誅戮罪大惡極之石尙宮, 亦不可爲乎?明宗戊申, 內官池漢弼7)告同番內官金俊言曰:?仁宗上天事, 金忠厚及石氏等所爲也.臣子之心, 聞之至爲未安, 不敢不告.? 下禁府推鞠,【控辭本不書】遂流俊三千里, 不誅金、石.鞠俊而流之者, 諱其罪也, 不書拱辭者, 幷絶言根也.然此非所謂?欲蓋彌彰?者歟.周世鵬於丁未殺戮時, 大言曰:?此類之罪8), 治之如此, 然後公論乃定.? 人言其非, 則曰?如是論之, 然後時宰悅?.其爲人如此, 而以其首倡書院, 故世皆知其爲名流, 然其實功不足以掩罪也.明宗嘗慨然歎息而論唐僖宗殺諫臣事曰?興國之君, 樂聞其過, 亡國之君, 惡聞其過.直諫者死, 奚以不亡?, 是時春秋已十九矣, 似有隱然自歎本朝事之意.後喪順懷世子歎曰:?我何哭爲? 乙巳忠賢無罪騈戮, 而予不能止之, 我家安得世爲君王耶?? 以若聰明之資, 可作賢君, 而惜其所値之不幸也.安瑞順、鄭綸之死, 元衡欲連及河西, 嫁禍士林而不能得, 豈非天所以相斯文者歟? 亦豈非河西善爲鞱晦之致歟?一齋以韓公此心之發, 當理者爲道心、悖理者爲人心之說, 爲未然者是矣.然其自言曰?成命之正, 理發者也, 形氣之私, 氣發者也?, 亦恐未穩.且當曰?原於成命, 生於形氣?, 如朱子說而已矣.蓋人心、道心、理發、氣發之云, 與退溪所論四端七情者, 不約而同, 亦異哉?康陵之葬, 日官以十月不吉, 進定於九月.大妃曰?吉凶在天命, 日官何足信? 定于十月可也?, 而大臣如東皐之賢, 亦以區區吉凶之說進達, 而竟行渴葬.設使大妃惑於吉凶而欲渴葬, 在大臣之道, 猶當以禮正告, 而況大妃欲行禮, 而大臣不能乎?栗谷以東皐遺箚破朋黨之說, 謂?古人之將死, 其言也善, 今人之將死也, 其言也惡?.人或疑此言之過峻非情, 反以厥後黨禍滋甚, 謂?東皐有先見之明?, 此殊不然.東皐意見元不純正, 嘗曰?乙巳之事, 實多可疑, 不可輕議?, 以沮其雪冤.又與士類不合, 謀欲去之之端, 顯於其再從弟元慶之事, 則其所謂?破朋黨?者, 卽破士類也.栗谷之言, 豈無以哉?休菴志存忠國, 一節靡他.然識不高明, 服於東皐, 動於元慶, 幾於誤害士林, 危乎殆哉! 此所以學貴致知也.然其聞義卽服, 幡然歸去者, 所以爲休菴先生也歟!宣廟論六臣之言, 雖出於不識其心, 然其云?何不快9)死於受禪之日? 又何不掛冠而去? 旣委質北面, 又求害之?者, 揆以情義, 雖六臣更起, 恐無以自辨.乙巳之累, 晦、退略同, 而栗谷之尊退而貶晦者, 雖曰以晦在成德時, 退在年少時, 然今以實年考之, 晦時年五十五, 退時年四十五.朱子於《論語》四十、五十, 無聞註, 俱釋以成德之時, 則不當分言.而栗谷猶然者, 豈以其於退溪曾有千里往拜之尊禮, 至有小子求聞道之重詞, 故體面所在, 自不得不爾歟.明宗之喪, 退溪以爲恭懿大妃無服, 聞高峯三年服之說, 則曰?明彦之言是也, 吾不免罪人?, 又曰:?豈有不止於朞年之理乎?? 然則朞年三年之間, 竟惡乎定而可合於正禮乎? 竊疑嫂服元來無服, 後來魏徵所定, 亦不過小功五月, 而今以三年爲是者, 豈非以明宗君臨一國, 而爲宗廟社稷之主乎? 至於朞年, 則又何所當乎? 願從知禮家, 而聞其說焉.宣廟以南袞事, 問退溪對曰:?先朝六臣追削未安, 此意甚是, 公論請奪官爵, 此意亦是.? 若非宣廟?卿兩是之, 孰爲尤是之?再問, 則必無褒贈靜菴, 追奪南袞, 而爲未定之案矣.宣廟不允兩司禫日勿受賀之請曰?吾不欲受賀, 只惡異議?, 王者之言, 豈宜如此? 只此一言, 已知其政治之心也.栗翁之從衆, 彈不當彈之沈靑陽, 雖志在保合, 然於?正明誼道不計功利?之義, 已有未盡.況終無益於保合乎? 此足爲後世學者之所當鑑也.以柳西崖之才, 豈不知更張之宜, 養兵之急? 然於栗谷之議, 力非之者何也? 後日之每稱栗谷先見之明、忠勤之節者, 又何也? 如曰先迷而後悟也, 則以西崖之才, 豈其然乎?方栗谷遭三司構劾, 三奸竄逐之日, 金宇顒上和平之奏, 使上認以爲公論也.然宣廟之答, 洞燭情狀, 如見肺肝, 其所以爲栗谷、牛溪、松江辨者, 昭如日星, 是何等明見? 何等定志? 然後來不承權輿, 於栗谷不許贈職, 於牛、松有奸毒之目.嗚呼! 鮮克有終, 古今之通患, 而所以致此者, 窮格之未至, 私邪之有蔽也.栗谷復爲吏判, 宣祖委任之日, 輒以鄭汝立博學有才爲言, 則是謂汝立可用之才也.故上曰?此豈可用乎? 凡用人不可徒取虛名?, 然則雖以栗谷之明, 却不及宣祖也.若非栗谷沒後, 有?汝立反射?一節, 則方其伏誅後, 諸臣與汝立親者, 擧當罪律之日, 恐亦不免忍進之追咎矣.嗚呼! 知人之難, 豈不信哉?三竄之日, 宣祖之爲栗谷辨者, 雖使其子孫門人爲之, 無以加此, 今於沈義謙之榜罪也, 幷籍栗谷爲黨人, 何哉? 竊意宣祖固少容物之量矣.上之初立, 沈白仁順后, 裁損上之嗜慾, 以此致憾, 容或無怪.至於栗谷, 幷無此類, 而忽反前見, 生死異施, 竊可疑也.不寧惟是, 自訃至之初不許贈職之時, 已有甚麽之意, 是誠何心? 宣祖亦聰明多才之主, 其或少涉於猜巧之私歟?重峯非但正直眞實, 其智慮明哲, 亦卓然不可及.其以日本事三次上疏, 皆鑿鑿見中, 若使朝廷用之, 豈有壬辰之慘哉? 余於此有所不可曉者.蓋若以未見驗, 而昧其人, 猶可說也, 至於宣祖, 以重峯嘗有比汝立於羿、浞之疏, 知其先見之明.而爲之解竄之後, 尙以其論日本事, 怒之曰?趙某奸鬼, 欲再踰磨天嶺耶?, 此何以故也? 嗚呼! 以勢觀人, 千古一轍, 重峯之遭此, 其亦位卑之爲祟也歟.汝立之逆, 何曾稱兵犯闕, 聚衆據郡哉? 特有逆心焉, 以《春秋》誅心之法, 誅之可矣.而彼旣自死, 則亦已無事矣, 何苦連坐之連坐, 夷族之夷族, 草薙禽獮, 殆空朝著, 而不覺隣敵之虎視鯨呑, 迫於朝夕也? 當時朝廷上下之所以謀國者, 謂之七聖皆迷, 不爲過言.李相山海之約與松江請建儲, 而詐計陷之者, 求之於古, 亦罕其類.宣祖之褒松江之忠節者, 曾不多時, 忽然遠竄圍籬, 實爲滅信城家之讒, 仁嬪之愬所入, 而加以他罪也.噫難矣哉! 浸潤之讒、膚受之愬不行也, 而況先有溺愛蔽私者乎? 至壬辰之亂, 放松江還, 敎曰?知卿忠孝大節?, 及其亂平之後, 又累稱爲奸爲毒, 於身後, 何其臧否之靡定也? 大抵則哲之明, 未至也.鶴峯使日本還言?秀吉其目如鼠, 不足畏也, 而倭必不寇, 此不須慮?.至以築城練卒, 謂之弊, 而卽有大亂, 全國魚肉.孔子曰?使於四方, 不辱君命, 可以謂士矣?, 此所大關, 豈但辱君命之比哉? 鶴峯學問之名士也, 故竊疑之.辛卯三月, 日本回禮使之來, 其書有曰?日本國關白, 奉書朝鮮國王閤下?者, 已是臣視我也. 彼之關白, 猶我之領相, 兩國詞命, 以彼之臣敵吾之君, 豈非臣視我者乎? 此時, 不能一言抗拒而退其書, 不待蹂躪三都, 國已亡矣.嗚呼! 寧欲無言.西崖之諫止宣祖渡遼一事, 誠足爲中興第一功臣.然以當初秀吉不足畏, 中朝不可告之奏觀之, 亦可謂見事遲矣.申砬之任, 何等重大? 鳥嶺之守, 何等重要? 乃拒諫自聖, 以致大敗, 使敵之大軍, 直踏京城.此問於五尺童子, 皆知其要害之當守, 而申獨不知乎? 蓋申之以都巡邊使, 將發也, 上問倭情, 申頗輕之.上曰:?邊協每言倭難制, 卿何易言?? 申旣出, 上曰:?邊協若在吾, 豈憂倭哉?? 蓋上旣知申之不濟事矣, 所謂?知臣莫如君也?, 噫! 其致敗者, 總爲輕之之作祟也, 然投江一死, 亦足以有辭矣.具容、權韠疏?柳成龍之主和, 李山海之誤國, 實今日秦檜、楊國忠?.黃廷彧檄?廟堂力主和金, 秦檜之肉欲食, 奸臣首唱幸蜀, 國忠之頭可懸?.趙重峯疏?成龍之主和招寇, 甚於秦檜, 山海之戕賢誤國, 甚於林甫, 公諒之積怨10)市恩, 無異國忠?之說.雖似過重, 然當此時也, 不可無此等議論.和者, 兩國相抗, 兩軍相持時可論.若兵臨城下而盟之, 則謂之要盟, 便同降服.且彼欲犯明, 明著文字, 以屬國而與犯上國之賊和, 則亦豈爲上國之所容耶? 以此時而主和, 則非惟昧義, 亦不識勢矣.但此時明且力弱, 不能柰何耳.上之播遷, 其出宮城也, 欲渡遼也, 群臣率皆散亡奔逸, 絶不成樣.歷觀前世, 雖自致亂亡之君, 未有若此之甚者, 此以平日不以恩信結之, 紀綱維之之故也.雖謂之國不爲國, 未爲過也.上命鄭崑壽使明請援也, 親酌以送曰:?國之存亡在此一擧, 卿其勉之.? 鄭出語人曰?朝廷以我爲異己, 使之遠赴, 何也?, 此非爲人臣者, 所可言也.急人之難, 猶謂之義, 況急君之難乎? 然卒能至誠號訴, 使事成績, 至錄一等功臣, 豈非激於李誠中非忠臣義士之言而成之乎?金晬之忌忘憂, 李洸之誣霽峯, 尹先覺之沮重峯, 皆出於猜字也.此時何時? 誠乘漏船, 坐燒屋也, 忍以猜心相加哉?重峯之於錦山也, 以其明略, 豈不知七百人之寡, 不能敵數萬之衆? 又有李山謙、權慄、許頊11)、靈圭之苦爭, 而一不見聽, 竟以死之者, 何也? 以其機勢, 則雖愚者, 亦知其必敗, 而重峯爲之深所未曉.如謂不問成敗, 但要博得忠義之名, 則重峯之賢, 又不爲此矣.竊意其時體察使尹國馨, 反覆無常, 沮害萬端, 安知其不誣奏以意外之罪耶? 與其被誣而死, 寧可殉身於戰之意歟?王者之師, 正其罪而已, 彼服其罪, 則赦之矣.明朝乃遣沈惟敬通使倭營, 是先自請和而取其侮也.而況李如松紿敵以天朝許和, 襲殺其使, 進兵破之於平壤者, 豈堂堂天朝之所爲乎? 雖得一時之勝, 亦足爲羞也.李忠武之龜船, 卽今之潛行艇也; 朴晉之震天雷, 【火炮匠李長孫所製】卽今之爆彈也.今之醉倒外國之新風, 侮視本邦之舊式, 艶彼譏此, 無所不至, 無識甚矣.特我邦無政治, 不能講明而愈致其精, 顧乃廢棄之, 終至於失國, 此則可歎也.和議之誤國, 從古然矣, 以明朝中國之衆大, 何苦與蕞爾之日本議和哉? 秀吉所謂?奉表?者, 自是身任關白之所爲, 其所謂?皇帝?者自在, 則依然與明帝等耳.藩王名號定指秀吉之身而言爾, 明之與日本正爲同等國, 此和例則然.然明朝之力, 果至此弱哉? 究爲奸臣輩誤國之致, 可哀也哉!秀吉旣奉表, 請款于明, 而旋卽大發兵鏖滅晉州, 是侮弄明朝也.于此時也, 明朝尙可以上國自處也乎? 噫! 和事之不足恃也, 如此矣.晉州雖孤城, 糧餉稍足, 有金健齋之忠義, 黃進、李宗仁之勇, 故被圍至九日而後敗, 其所以致敗者, 寡不敵衆也.若使郭再祐不左次而退, 權慄、李薲、李福男不退入山陰, 駱尙志、宋大斌、劉綎、吳惟忠等從李如松之命, 明、朝諸將一齊赴援, 則豈致其敗乎? 嗚呼! 晉州之慘, 其不救者, 有罪也.査大受之拿駱、宋諸人而鞠之, 邊士貞之上疏言諸將之罪者, 豈不當然哉?淸正之期屠晉州也, 沈惟敬聞行長之言, 旣聲言?空城勿犯, 以活人命?.故明、鮮諸將皆相回避, 獨金、崔、黃以下諸公之決意力守身殲靡悔者, 何也? 豈其好生惡死, 異乎人哉? 特以湖南國家之根本, 晉州湖南之屛蔽, 有如健齋當日之言故也.嗚呼! 巡、遠死於睢陽而爲江淮保障, 諸公一死之功, 亦詎不偉哉?壬辰之亂, 連仍數年, 非惟我力, 以明朝之衆大, 亦不能如何.故雖以牛溪之儒賢於對上之問, ?微主和議12), 勢則然矣, 義則未安?.故董子?正誼不謀利?之言, 所以爲千古至論也.明愼懋龍等之入倭營, 授淸正禮物也, 淸正或雜言以侮弄之, 或大言以嚇喝之, 旣無所不至.至於直言今七八月, 犯中國, 而懋龍不能一言以折之, 其辱君命之罪, 已不勝誅.而倭之視明, 元是如虛無人也, 豈非天下之大恥哉?是時, 明朝無一人社稷之臣, 安得不不久而亡? 石星之主和, 旣誤矣, 沈惟敬千古奸凶, 楊方亨恇怯昏闇, 不足言.甚至有李宗城以正使遁去者, 豈不以中國之大取笑囮於遠夷小邦哉?世皆以金忠壯之死, 歸咎於西崖, 此固然矣.然總之爲聲名太盛, 諸將猜忌之致也.如李時言、金應瑞之皆欲構殺, 固也, 其於尹梧陰、月汀兄弟, 旣有舊嫌, 則亦無容怪焉.以權忠壯之一念忠國, 斷斷無他, 猶不免些子之意, 閑山之役, 旣置之於必敗之地, 使失衆望.及其被誣也, 又卽具奏逮捕, 如恐不及, 何也? 雖然, 忠壯, 布衣也.身非興亡所係之位, 而遽然起復從軍, 豈可曰精義也? 忠壯, 儒者也.儒者而不能精其義, 則復誰責哉? 其臨終所供, 雖自明其無反逆之罪, 亦深悔其起復之失也.蔽13)以一言, 守制而不起, 豈有此禍? 惜乎其未也, 嗚呼! 此爲千古至冤, 亦爲千古大戒.金忠壯且勿論, 至於李忠武之以忠以功, 無以上之者, 以尹梧陰之名相, 亦有罔上要功之奏, 尙復何言? 及其代以元均致敗之後, 以李白沙之大人物, 僅有?方今之計, 惟當復以李舜臣爲統制使乃可?之奏, 而無一言辨其被誣, 當時朝廷之事, 蓋可知也已.明刑部尙書呂坤上疏言?朝鮮近吾肘腋, 勢窮力屈, 不折入, 爲倭不止, 宜早決大計, 幷力東征?, 何其見事明而立論正也? 呂卽世所稱抱獨先生者, 可謂不負其學問也.噫! 以黨論而致寇亂, 亂甫已, 又復以黨論爲事, 名爲人臣, 而只知有身不知有國者, 自是常態.以宣祖之明, 亦不免汨沒於其中, 而不能懲前毖後, 何也? 竊嘗究之, 宣祖之所以惡牛溪、松江, 而加以奸毒之名, 罔赦之罪於身後者.於松江也, 始信欲害信城母子之譖, 再信上躬過失密播中朝之飛語.於牛溪也, 初以播遷時, 地近不奔致憾, 而至有?自知罪重, 欲死不得?之敎, 再以微主和議力扶李廷馣見非, 至有?朝廷處置邊將所爲, 爲渾邪說所誤?之敎.皆爲愛惡之辟, 輾轉如此也.亂後復與日本通和之日, 旣以縳送犯陵賊爲辭, 而竟斬所送年少二倭, 遂成和事.是明知其非眞犯受欺瞞, 而恐其生隙, 苟且成和.其爲自欺欺人欺祖欺天, 忍心害理, 取笑貽譏, 孰甚於此? 昔朱子於通和金人奉還梓宮之議, 以狡虜出於漢斬張耳之謀爲慮, 而幷斥其和.況此二倭容貌、年紀之不難辨, 初不可與張耳者同日論哉? 故我國當日之事, 只當用宋朝朱子之義, 還送二倭, 斥絶通和而已矣, 惜乎其不講此義也.當時朝論, 有謂壬辰之讎, 總在秀吉, 而源氏旣滅平氏之族, 是可謂爲我報仇也.今其執政者源氏則於我無讎, 可與通和, 若主此義, 則縳送犯陵賊之云, 亦是贅語, 更復何說? 雖然, 天下安有似此義理? 未論前史考據有無, 卽以彼之壬辰犯我執, 高麗時導元伐彼之事觀之, 則可決此論.彼於我, 異代之事猶然, 況於彼近年之事, 可不然乎? 無讎之論, 韓南塘亦嘗主之, 近日士子, 或有莫適所從者, 故玆幷論之.宣祖末年, 光海主在東宮, 未有失德.且國之大本, 已定久矣, 亦旣有分爲小朝百官稱臣之事矣.乃以此時有易樹之意者, 不思之甚也.柳永慶之探上意圖贊成者, 自是固寵常態, 何足道也? 余謂柳之探意圖成, 已在永昌始生陳賀之日, 永昌之蒸死喬桐, 已在有意易樹之日.李延平貴在宣祖時, 上疏摘斥鄭仁弘不法者, 無遺餘力矣, 及仁弘被遠竄之命而聞.光海卽位, 遲留觀望也, 又乃爲之疏救, 何也? 至於光海末年, 助成廢母大罪者, 仁弘也, 執其罪而廢光海者, 延平也.中間救仁弘一事, 擧始終而究之, 竟不知其何說也.明朝文廟稱孔子, 只以至聖先師, 而不用王爵之號, 自是俟百不惑之正理.李月沙之請我朝, 亦從明朝, 又是一洗謬例之定論, 而白沙之議, 亦與之同.惜乎尹承勳以流俗大臣, 不肯從之, 推托以待後日公論也.仁祖乙丑, 禮曹又奏此議, 此在新政之初, 擧國嚮望之時, 正尹相所謂?後日公論?也, 而又復爲申象村沮之以不行.噫! 尹固俗見, 以象村之文識而亦爾耶? 所以悠悠千古正論無可行之日, 甚可歎也.孔子曰:?邦無道穀恥也.? 漢陰、白沙之昏朝極貴, 已不免恥, 而爾瞻之請上光海尊號也, 二公率百官庭請, 至於逾月之久, 何其不思恥中之恥也? 二公國朝名相也, 故敢竊疑之.史臣論云?永昌之廢, 李德馨欲極諫, 李恒福曰?爲永昌死, 則傷勇, 我當爲大妃死?.二人各從其志, 終亦不失於義.然殺永昌, 爲廢母之本, 當時處義, 以德馨爲正?.【止此】蓋大臣之職, 引君當道, 有不當道, 則諫之, 大者則以死爭之, 君之無道, 豈有大於殺弟乎? 不可謂殺弟小於廢母, 而惜死爲後日地也.史論所謂?殺永昌, 爲廢母之本?者是矣.若於此時, 爭之而死, 則安知其無廢母之事乎? 夫君子正其誼而已.于斯時也, 不問後來廢母事有無, 只有死爭一道而已矣.李梧里元翼賢相也, 而年踰致仕, 久在昏朝而不去, 竟取付處洪川之辱.噫! 一退之難, 乃若是乎.光海己未, 後金主致書請和也, 朝廷許之, 命李爾瞻製答書, 爾瞻上疏辭製.其一通斥和文字, 所以爲春秋大義者, 雖使淸陰、桐溪、尤菴爲之, 無以過此矣.然則尊明之論, 先自爾瞻發之, 然而人不稱之者, 彼犯惡逆故也.彼之明於尊華, 而暗於犯逆, 何也? 以利害之關身有切否, 而物慾之蔽心有厚薄故也.嗚呼! 人心用處, 趨利充慾之禍, 其烈如此, 可不畏哉!光海夫人柳氏之以諺書陳疏斥和者, 亦與爾瞻同見, 而當時朝野皆賢之.然光海之極肆虐逆也, 未聞有諫止之言, 豈以事在宮闈, 不見文字, 故人未之聞耶?仙源觀以江都立節大義, 宜其有抗議於昏朝廢母時, 而不見一言, 至爲奇自獻之所歎, 此可異也.然亦能終始不參於庭請, 此其所以爲仙源也歟.世皆稱吳公定邦對廢母收議曰:?臣武夫只讀《史略》一卷, 但知烝烝乂不格姦而已, 不知其他?, 相傳以爲名言. 今觀此史, 記其言曰?願盡處變之道?, 更無他語, 豈史有所未備歟?柳於于夢寅之死, 嘗以爲當時任事者之已甚.今觀此史, 則以提學應爾瞻之之招, 參於入幕, 筆書廢母文字之事, 而不能立異, 以識字超衆人忍爲此乎? 只此一事, 亦可知其當死而不冤矣.仕於光海者, 在廢母以前, 尙可說矣, 廢母以後, 則訖可已矣.吾於月沙諸賢, 竊疑焉.仁朝癸亥, 追尊私親之議, 衆說紛紜, 惟月沙所奏?聖上繼宣祖後, 以孫繼祖, 禰位闕焉.正統固不可紊, 天倫亦不可闕.今於所後, 旣無稱考之地, 稱伯叔於所生, 情禮俱舛.今若稱考而不加?皇?字, 稱子而不加?孝?字, 則重宗統報本生之道, 似爲兩盡者?, 恐爲得之, 蓋以天下無無父之人故也.要之勿論兄弟叔姪祖孫相繼者, 於宗廟, 稱某號大王及嗣王臣, 如韓南塘說, 則於其生父, 自當稱考稱子矣.如是則恐爲行其無事之道矣, 未知如何.适固逆賊, 然亦以朝廷處置, 不得宜而致此也.反正時, 适功詎不若金瑬? 而何苦一黜一陟之至此哉?奇自獻立節於廢論, 至於被竄, 決非從适叛者.而遽信告變, 託以絶內應, 不待査鞠, 卽夜行刑, 昇平果何意哉? 反正之初, 刑政如此, 何以厭人心乎?惜乎! 奇自獻.若死於謫所, 則非但免橫加之禍, 其聲名豈不亞於白沙哉? 蓋人於死生之間, 有幸不幸者, 存也.壬辰之禍, 豈不慘然? 而猶不思懲前毖後, 纔經三十年, 當仁祖丁卯之亂, 則武備全疏, 都元帥之出征, 兵不過數百.嗚呼! 此所謂?國不爲國?者.蓋本朝國政自前而然, 非但爲間經光海之昏亂也.姜弘立見《金將軍傳》, 面色如土, 至於愧死, 此所謂?羞惡之心, 人皆有之?者, 而深河之降, 蓋爲光海觀勢爲之之敎所誤也.噫! 君之使臣, 當以義爾.旣以大義救明, 而又以不義敎之, 是豈人君之道哉? 雖然, 於光海也, 何足道? 弘立若能擴充羞惡之心, 則於是敎也, 當以事非其義諫之, 深河之日, 又只當戰死而已.豈不義正而名完哉? 惟其不能如是, 所以爲弘立爾.授深河, 同弘立降者, 以兵使府使之任, 憲府請罷而不允, 是爲弘立故也.旣赦弘立, 反藉以紓禍, 則於其同降者, 勢所必然.始之名言乖戾,【光海觀勢爲之之敎】中之刑賞顚倒,【赦弘立罪, 厚待家屬】終之紀綱全墜,【仕同弘立降者】於姜一事而具焉.李延平之請追崇私親入廟, 而大言深論, 無遺餘力者.是自陳己見, 而兼性氣粗厲14)而然, 非出於迎合上意, 則恐可信矣.丙子之亂, 諸臣雖多陳戰守之策, 惟八松尹公一疏.其說有曰?首發宮掖近習之少壯者, 次發宗室百官之才俊者, 次發儒生、胥吏15)及市民、公私賤, 都城之內, 所得數萬人.四方選兵, 亦用此道, 先發豪門、盛族, 次及小民, 數萬精兵, 不勞可得?者, 大快人意.蓋兵死地, 好生惡死, 人之同情也, 國家有事, 何貴勢者得免, 而賤弱者獨當也? 本朝軍政偏募, 貧賤無勢者充之, 而又薄其食下待之, 孰肯爲國而盡其力哉? 尹公先發貴勢之論, 非惟危急時可用, 有國者之平日募兵, 當以是爲準.丙子之變, 嚴於斥和者八松尹公也.此史云?尹煌病不出門, 每夕呼其子文擧曰:?今日和事, 何如?? 對曰?彼不肯許?, 煌曰?人將盡死矣??.其然, 豈其然乎?南漢被圍之日, 將卒聚闕門外, 大呼請出斥和臣以與虜.軍心之變已如此, 雖欲君臣上下, 一戰決死, 不可得矣.此由平日不能使知親上死長之義, 兼無號令紀律之故也.江都之敗論諸將之罪, 金自點、沈器遠、金慶徵當爲首, 而略加竄配, 只命斬張紳及水使、虞侯二人, 何不公之若是? 紳卽谿谷維之弟也.谿谷略無爲弟訟冤之語, 其後以其子婦被虜生還, 力請離異.及其沒後, 上因其子更請, 命只許其家, 又何不公之若是? 王者無私, 而不公二事, 厚薄雖殊, 偏華於張門, 異哉!淸陰之往瀋陽, 而答彼問也, 言遜理直, 柔中有剛, 如吾守吾志、吾告吾君之說, 似易而實難.非有平日學問存養之功, 豈能然乎?仁祖旣身創反正之業, 何等英明? 然而昭顯世子中毒而沒, 未之知也, 自點之撲殺林慶業也, 驚曰?慶業死乎?, 竟不問其故, 此皆何也? 爲私蔽疑存, 而英明不露也.姜嬪之死, 當時冤獄之大者, 亦人君過擧之大者.淸陰時爲右相, 無一言諫止之語, 已而又陞爲左相, 何也? 豈有之而史不見耶?孝宗於閔老峯訟姜嬪之冤, 答曰:?姜之邪謀, 不無可疑者, 後復有敢言者, 當以不道論.? 嗚呼! 罪疑惟輕, 吾則聞之矣, 未聞以可疑, 而遽定惟重之律也, 而況逆謀是何等大罪? 而以?不無可疑?四字, 斷之者乎? 而又竟殺直言之金弘郁?以若心志政刑, 雖欲北伐而雪恥, 安可得乎?? 此則尤菴所謂?近者殺金弘郁一事, 大失人心, 此若不伸, 似不可爲?者, 已道之矣.己亥服制, 旣以時王之制, 定爲朞年, 而亦合於古制之朞, 豈非幸哉? 更無可說, 而都無事矣, 尤菴何苦更引《儀禮》喪服說而有所云云? 至聞於尹鑴之耳, 而致無限唇舌也.當初亦無請服三年者, 則有何不得已之故而有所云云也? 竊可疑也.蔡大憲裕後, 不得已而製進廢姜嬪敎文, 歸家焚所藏《四六全書》.是有皮裏春秋, 而不能發之於臨事, 知其所不當爲, 而竟爲之.蓋爲欠?剛?之一字, 豈不可恨?修撰金巒均, 以其祖母死於丁丑亂, 當淸使之來, 上疏陳情, 請得解官, 勿與之相接16).子孫至情, 非曰不然, 然與其如此, 曷若初不出仕之爲快乎? 蓋丁丑下城之後, 當時賢士大夫, 雖無父祖之讎, 亦多終身不仕者, 其義更高, 其風至淸, 以此視彼, 果何如也?追上恭靖大王廟號也, 尤菴對上曰:?恭靖大王允恭克讓之德, 迥出千古, 太宗體平日謙抑, 而不忍以尊榮之號强加.? 蓋太宗之不加恭靖廟號, 意有他在, 而尤菴以是言之者, 眞可謂善辭令矣.如非窮格之至, 存養之深, 定不能如此道得出來.尤菴庚申蒙宥後, 見上曰:?臣致仕之年, 已過四歲, 安得不衰?? 竊恐以此時辭退深藏, 不復立朝, 似得矣, 未知胡爲而未然也.蓋於是時, 尤翁固亦有不復出世之志, 特爲上之繾綣不已, 及朴玄石之向仰, 閔老峯之誠勤, 黽勉留之.然人心之頗僻已甚, 無復可回之望矣.我志苟決, 豈有不能自遂之理乎? 要之爲國家世道之憂心勝而然爾.張谿谷, 性度柔巽, 其弟紳之獨以江都敗罪死也, 不能出一言.而能斥虜使劉海之無禮, 使色惴成禮而出, 此爲大强人意.丁卯之亂, 黃海一道婦女死節者一百六十二人, 黃海小道也.以此而例, 一國當至三萬人之多矣, 且三南禮敎明處, 則又不可量矣.此眞所謂?禮義之邦?, 而淸人所以有朝鮮女貞節不比漢女之言於屠楊州時者也.但禍止西北, 不見其多數焉爾.李克誠殺人當死, 以其弟克明, 自言爲首犯, 兄弟爭死, 特原之以彰其善, 因是而幷貸其兄罪, 此爲未盡.古有明據, 孔氏兄弟褒、融爭死, 竟坐褒, 況殺人者, 豈可無死乎? 只當彰善則自彰善, 償殺則自償殺而已矣.鄭桐溪以大憲, 因雷震求言上疏, 訟仁城君 珙之寃, 請恤其老妻穉兒.是天理、人情之所當出也.而李延平再箚, 請斬桐溪.延平亦名人也, 而胡至於此?仁祖癸酉下敎曰: "勝敗, 兵家常事.金人雖强, 未必每戰皆捷; 我軍雖弱, 未必每戰皆敗.古語云: '志士不忘喪其元.' 又曰: '兵驕則敗.' 今日武士, 若能忘身殉國, 破此驕兵, 不難矣.噫! 人生世閒, 無長生不死者.與其忍辱苟生, 終死兒女之手, 而與草木同腐, 曷若慕義當前, 以成丈夫之志? 此虜若來, 予當親征進駐, 激厲將士, 兼慰西土軍民." 大哉王言! 壯哉王心! 苟君臣上下, 一此靡解, 何往而不敵? 但做時不如說時, 人心不似我心, 靡不有初, 鮮克有終, 以至有城下之恥, 可勝歎哉?丙子之役, 金昇平之誤信術士, 輕犯賊陣, 以致大敗, 而歸咎元斗杓, 又諱其多死, 而奏以四十人者, 豈非危急之秋, 僨事罔上之大者乎? 恐不可以爲一時細失而略之.尤菴爲作大碑, 而極其贊揚.其或未詳此等事實歟?明之亡也, 太學生范景文四十人, 聞之自殺, 其外以薙髮死之者, 何限? 然則孝廟所歎"崇禎之亡, 無一人死節"者, 特以當日朝臣侍從者言.孝宗之喪, 尤菴、同春、晩菴諸議之請遵朱子〈君臣服議〉, 製古喪服以臨者, 自是正論; 一邊諸議之不從者, 自是無識; 至於李相 景奭之擧"三年無改父道"爲反對之資者, 又出有心之私, 而無足與言矣, 宜其終於名節之喪也.肅宗以金益勳事問尤菴曰: "予將以大老之言決之." 對曰: "金長生臣師, 而益勳 長生之孫也.臣不能善導, 使至於此, 臣之罪也." 旣曰: "至於此." 則不謂無罪也.夫師門許多子孫, 安得導之, 使無罪乎? 然而猶曰: "臣之罪也." 是自引其咎而爲不救之救也.尤菴之請上太祖尊號也, 以爲: "太祖創業垂統, 功烈如何? 而崇極之道, 反歉於世、宣二祖." 以是爲請, 則誠然矣; 至以威化回軍爲大義昭如日星, 而以是爲辭, 則竊恐玄石所論"臣子雖不敢指斥, 亦不必表章"者, 亦可思也.官爵名器也, 不可濫矣.因大王大妃周甲誕日, 推恩而至於公私賤, 亦得加資, 則是何國體也? 如此則又何所貴於官爵? 可嘆也已.尤翁於〈三學士傳〉末, 有曰: "潔身不汙, 以守其志, 如尹宣擧諸賢, 事雖不同, 同歸一致, 皆不可遺也." 尹是江都有累人.在君子成美之心, 不言前累, 則固可矣, 何必特擧而同之於三學士大節也? 其意所在, 竊有所不敢知也.不在其位, 不謀其政, 聖門明訓也.柰之何我國儒生, 不思此訓, 輒出位言事, 至於肅廟之世而極也? 若事關斯文, 則館學之儒, 或可言也, 至於草澤幼學, 亦無難論及於朝廷刑賞功罪與奪官爵, 而靡然成風, 此爲世變之大者.其出於是非固有之心而不顧禍福者, 猶可說也, 至若受勢位家指嗾而爲之者, 又何足謂儒者哉? 未知中葉以降, 儒賢輩出, 訓誨所及, 宜無此弊, 而却不然何也? 良可嘆也.肅宗丁丑, 連歲凶荒, 丐乞遍國, 餓殍載路, 人民相殺而噉其肉, 又破架葬而噉尸者甚多.翼年戊寅, 都城僵死, 一千五百八十六, 道死亡, 二萬一千五百四十六.京外所報之數, 十未二三, 而猶至此多, 是時國家狀況, 顧何如也? 然朝廷之上大小, 惟偏黨是事, 三分五裂, 互相擠陷, 無一人念及於國事者, 其所由來者久矣.嗚呼悲夫.肅宗之追復端宗位號於三百年之後者, 足以有辭於天下矣, 當時群臣之以爲不當復者, 未知平日讀何書究何義? 據南公 九萬議, 向日尹鑴始發復位之請而見塞, 噫, 鑴之見識, 竟高於流俗也. 當時得高明之稱者, 以其有此等議論也歟.至於溫陵之當復, 亦與端宗一義而初無可疑者, 以權遂菴之賢, 猶以爲不可, 所謂智者之一失者歟.啓聖祠之建, 雖出於尊重儒學無所不至之意.然究諸精義, 未知其必然.故肅宗朝崔相 錫鼎, 亦有啓聖祠似無意之議.蓋聖賢之生, 未必皆其父之與有功德.是故以瞽、鯀爲父而有舜、禹, 舜、禹尙矣.如使仲弓, 德學加進, 同於顔、曾, 則亦當躋其父而祀之乎?仁顯王后初朞甫過, 已定再揀擇, 朝臣有擧《經國大典》"妻亡三年後改娶"之文而言其太遽, 則上敎有曰: "卿於大禮, 創出別意見, 予未可知." 仍命罷職.噫, 以《大典》之文爲別意見, 則謂之何哉? 王言若是, 雖欲以禮導俗得乎? 古云: "法之不行, 自上犯之." 信哉.三年上食, 雖非古禮, 自《朱子家禮》之後, 後賢從之, 擧世通行, 而朴世堂之遺戒廢之, 是泥古而自用也. 然擧此而至於劾罪告君則過矣, 豈非不免黨心也乎?肅宗癸巳, 群臣以上之卽位四十年, 請上尊號.蓋肅宗卽位在甲寅, 而是爲顯宗末年, 則乙卯爲元年也, 而今以癸巳爲四十年, 則是奪顯宗末年, 而合爲四十年, 此大失也.夫紀元, 必以人君卽位之翼年者, 所以敬先王而不敢奪其年也.歷考經史, 無不皆然, 今胡爲而有此也? 此非史策紀年, 只出於群臣一時之請.然旣誤於前, 貽弊於後, 終至國末, 以光武一年分作隆熙元年, 而著之於史, 豈非無謂之甚哉?朴熙晉以玄石與小尹書所引《周禮》"父之讎, 避之海外; 兄弟之讎, 避之千里外; 君之讎視父, 師長之讎視兄弟"之語, 爲父師輕重之證者似矣.然但小尹之於尤翁, 尤自無事, 而强生事端, 其扶與斥者, 徒欲以父師輕重與否之說斷之則誤矣.洪邦弼之妻與女, 積年伺便, 手刃報夫與父之仇者, 爲何等孝烈? 肅宗之謂"節義無愧古人"者眞, 大哉王言也.而爲大臣者, 不能將順其美, 乃以例法專殺, 後弊可慮, 沮其旌閭.吁, 使人腹煩.旣追復端宗位號, 則凡三相六臣以下, 凡爲端宗死者, 不待再思而可決, 今於皇甫仁、金宗瑞等伸寃復官之議, 金雲澤之引其父疏論而沮之者, 抑何意也? 人心所同然者, 理也義也, 而不然, 亦可異也.金、李、閔、趙諸公, 於景宗元年, 卽請立王世弟者, 非不猝遽.且因一臺臣之疏, 定策於一夜之閒, 而不與時任大臣、原任卿宰協謀者, 尤涉輕率.此所以受一邊之疑也.然當是時也, 偏黨各立, 不如此則不成故也.柳鳳輝之疏論建儲太輕, 殆不成樣者, 言則是矣.旣已事定, 則言非其時, 非時而言, 人固厭之, 況初與諸公異心異見乎? 此所以終不免也.魚有龜宣言"中殿欲聞呼母聲, 昭穆之親, 何患無之, 而必立世弟, 以違順序承統之法乎?"云者, 亦非曰不然, 然勢不可也.三宗血脈 只有延礽, 而餘皆疏屬, 且上有大妃, 主之魚說 豈得行乎? 此所以改見順勢, 而後又力扶諸公, 可謂善觀時矣.前代大臣, 固有當危疑急遽之際, 定策於俄頃之閒, 而奠安國家者.然當時事機, 異於是.景宗雖則有患, 非有待變之危, 而猶得在位四年之久而後昇遐, 則有非前代事之比, 是以論者謂: "辛丑建儲, 不免急遽." 然但念當日與前頭憂虞, 則又有不得不然者.噫, 如有明道之大德量、武侯之大手段, 或可保明彼此於數年之閒, 而偕至大公, 自無所事於汲汲建功耶?景宗朝, 一邊之陷害無辜, 慘不忍言, 而許璧、吳斗錫、李三齡輩, 請伸雪辛巳獄, 因陷老論之計, 則不見售.此在景宗痛迫私情, 宜或聽從而終不然, 豈非幸哉? 景宗誠賢君哉.英祖積苦朝臣黨習, 欲消融兩邊, 而計無所施, 不得已而有蕩平之意.平生心事, 蓋此一款.至於丁未七月, 忽飜前案, 罷黜鄭、閔諸人, 復用李光佐、趙泰億諸人, 而一變朝著, 無端作平地風波, 使人顚倒眩惑, 不敢復肆舊習之見也.於是諸臣窺伺上意, 竸進蕩平之論.然蕩平有眞贋之分, 破黨必如歐陽公〈朋黨論〉、朱子〈答汪尙書書〉, 然後乃爲眞蕩平.不然而徒以一黜一陟、對擧幷行爲公道, 是爲贋蕩平, 雖得强壓於一時, 後復決裂, 益不可爲矣.州縣之大小廣狹、名號位置, 當一視地勢政治之所宜, 不可得以他故變革之也.而我朝有元惡大憝所出地, 或革其邑屬他, 或變其名, 或降其等, 是無意義.誅其人則斯已矣, 地何與焉?英祖引程子"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之語, 而不受誕日賀.以帝王之尊貴, 尙如此, 況於匹庶乎? 近觀閭巷畯氓、市井販夫, 稍有錢財, 輒置酒張樂, 至於所謂回甲日, 亦至有稱貸而爲之, 卒以困敗者.蓋因名爲士子者導之而成風也, 可哀也哉.破黨之道, 惟金公 興慶奏語一段道得快.其言曰: "黨論亦非無眞是非, 無問色目, 惟眞是非是究, 去非從是, 人心自然感服, 何必强爲蕩平之道哉?" 此亦歐公、朱子之意也.英祖再度執閔、李之手, 切勸和解, 若鄕人解鬪之爲, 雖見破黨之公心, 良亦勞矣.然何曾少益於兩邊服心也? 然則如之何而可也? 亦惟曰: "究眞是非, 去非從是." 如金公 興慶之奏已矣.英祖於彼此之是非, 非不悉也, 而施此許多安排布置、掩匿包藏之術, 却不如肅宗之隨所知卽行黜陟之嚴.一刀兩段, 雖失相半, 猶爲直截之道也.編配人遭父母喪, 許令歸葬, 法無其文, 文不備也.上曰: "王者以孝爲治, 如之何其不使歸葬." 大哉王言.端敬后之復位, 當早在明陵之世, 而當時有一二異議, 故以至英祖而後始擧行.大哉此擧.足以彰先志而俟後聖也.英祖之欲傳位於五歲之王世子者, 此爲何等擧措? 雖激於時象, 欲使朝臣有所恐動而懲舊習, 竟何益哉?因孝純嬪喪, 命復古制, 爲長子三年也, 金相 在魯上箚而止之者, 乃尤菴己亥服議之意.但不敢直截, 而幷擧中、東前據而言之.蓋尤菴服議, 自顯宗時仁宣后喪以後, 歷肅、景二朝而迄不見行. 故金相畏難而不敢顯述耳.上命吏曹曰: "惟才是用, 勿拘遐方." 參判南泰齊曰: "臣等若不先用京華子弟, 安得保居此任?"此眞實際語. 判書鄭翬良則曰: "鄕人居官, 類多不美, 不及京華子弟." 此臨時撰辭也.噫, 爲官擇人, 銓司職也, 而當時之弊, 至於恐失其位而不修其職, 勢家則以不用子弟而斥逐銓司, 何以爲國乎?英祖丁丑貞聖后之喪, 大妃服朞, 論者謂: "旣爲景宗妃服長子婦服, 則今不可疊服." 此固然也.但準以己亥尤菴之議, 則景宗妃喪, 大妃亦不得服以長子婦矣.王后昇遐之日, 英祖出吊鄭致達之喪.此是前古未聞之事, 寧可無言?英祖時, 禁酒甚嚴, 有武士被捉, 得酒缸, 將梟示.上親審曰: "醋也." 遂赦之.夫醋從酒生, 酒久成醋, 醋卽酒, 酒卽醋也, 禁酒而不禁醋, 則酒可得禁乎? 蓋酒爲百禮之所須而成, 飮食醫藥之所必要, 不可得以禁者, 雖曰"其流生禍", 只可隨時隨處, 禁其甚者, 使不至無忌憚而已.如武王之〈酒誥〉, 只以商受酗酒, 天下化之, 妹土 商之都邑, 其染惡尤甚.故呼妹土以告之, 然猶許以祀玆酒矣.何嘗環普率而用一切法, 幷告廟不用十年之久, 如英廟朝事乎? 他姑勿論, 只以醋不可禁觀之, 則亦可見禁酒之行不得也.英廟丁丑大饑, 有流逋人謂其妻曰: "吾屬終無生路, 莫如速決." 先縊其二子女, 繼縊其妻, 終自縊死, 四尸懸於樹枝, 慘矣哉.此記所謂無三年蓄, 國不爲國者也.關大義然後可以滅親, 殺世子何等大事? 漢武帝之殺戾太子也, 猶信江充之譖, 而以叛爲罪矣. 至於英祖壬午思悼世子之大處分也, 則獨不明正其罪者何也? 使若以有罪而殺之, 則又豈有自上親製文以祭, 及葬臨視, 親祭神主, 墓號垂恩之理乎? 以是觀之, 其無罪可知矣.然而其終於大處分者, 竊可疑也.殺世子之謀, 悉出於洪鳳漢, 是可忍也乎? 又贊上之能辦此事, 無異盛壯時.洪卽世子嬪父也, 是何無人心之此甚耶?黃頤齋 胤錫之爲桂坊翊贊, 在英廟末年, 此史之載於世子處分之後者誤矣.不知者以爲以此時爲此官, 於當人便不光鮮矣, 此當改正.宋櫟泉一番造朝, 以三百赤芾之言, 遽遭雷霆之震.雖其當言而言, 反求而無愧.然是時距壬午幾何? 而儒者可以出脚乎?金若行之疏請今中原無帝統, 本朝宜稱帝號, 用天子禮樂者, 揆以義理, 非曰不可, 但以勢言, 則不能自强, 徒以稱號而抗彼, 則豈不自取敗亡乎? 多見其不自量也.在壬辰倡, 宜以功以忠, 未有如金健齋 文烈公之盛者.今以壬辰之舊甲重回, 遣官祭故忠臣也, 金文烈公之不得參於趙文烈、高忠烈之列者何也? 王者酬忠報功之祭, 亦有厚薄於其閒耶? 可慨也已.父王之后爲王大妃, 祖王之后爲大王大妃者, 自是正禮.今以正祖以孫繼祖之故, 稱大王大妃爲王大妃, 以當禰位, 其爲名不正、言不順, 孰甚於此? 禰位不在, 則亦無柰何矣.士庶之家, 亦有祖在父不在, 則孫承祖重之例.況在帝王家, 非惟以孫繼祖, 亦有兄弟叔姪互相繼統之不常者乎?以王大妃位號, 問於當時儒賢也, 儒賢或不能對, 或以爲大妃位空, 當稱王大妃, 獨有衛率安鼎福, 引漢宣帝尊昭帝后 上官氏爲太皇太后事爲據, 而歎降大王大妃之尊, 稱王大妃者, 自歸乖亂昭穆之罪, 而擧朝無一人駁正, 可謂鳳鳴朝陽, 而何貴於儒賢哉? 然終未聞依安說而改正, 國朝羞恥, 孰甚於此?洪國榮之爲宮僚時, 百方扶護世孫者, 自是分職, 何足特酬其功也? 正祖卽位, 乃任以權要, 專擅朝政.至有世道之名, 始於此, 自是厥後, 世道之權, 遂以喪國.噫, 以正祖之聰睿, 乃有此失, 爲君之難, 豈不信哉?英廟慮後日追崇思悼世子, 以正祖繼孝章世子之後.然終無柰後嗣王, 皆是思悼世子之子孫, 則奚補於後世之竟爲追崇也? 且若當時, 無孝章可繼處, 則未知又將如何? 夫帝王家繼其位統, 非如私家之繼其世統, 則恐不如只合孫繼祖之位統而不繼孝章世統之爲得也.純祖元年, 大誅戮天主邪敎者, 其閑聖闢異, 可謂嚴矣.然夫元氣衰, 然後百病入; 內修疏, 然後外敵侵.當是時也, 國朝之尙聖學, 專務虛文而無其實, 且西洋强盛, 而我國貧弱, 其舍此而趨彼者, 亦情勢然爾.曷若實修吾聖人之學, 實事吾聖人之政治, 使道明國盛, 而不禁自禁之爲得也?李綖之爲栗谷宗孫, 尤菴、南溪見欺而成之者也.然旣綻露之後, 以有上命而不改正者, 恐未然. 事旣不正, 則具前後事實, 再告君而正之者, 有何不可? 惜乎其未也.在純祖時, 旣有本孫家呼籲, 則在朝諸臣, 亦有告君追改之理.若以事在先朝而不敢爲, 則莊陵、溫陵之復, 皆非耶? 可歎也已.王敦爲逆, 王導方在朝而無坐, 矧於金鼎淳之初未嘗仕而無嫌疑者乎? 其以爲益淳之從弟而削科者, 甚無謂矣.純廟壬辰, 以倭亂舊甲, 致侑於殉難樹勳之臣也, 遍及於諸公, 而獨闕於金健齋 文烈公.是在英祖壬辰已然, 一之無謂, 矧再之乎? 試言之, 金公之以殉以勳, 曾有一毫不及於諸公乎? 但所不及者, 子孫之盛爾.朝廷之上, 以盛衰用厚薄於前代之忠臣, 果何事也? 當時人心風氣之偏私如此, 其何能爲國? 所謂明天理正人心者, 欲其救此爾.至於尙州 甑淵 李、尹、朴三公立殣處, 亦致祭, 則晉州 南江 金、崔、黃三公立殣處, 獨不可致祭乎? 事至於此, 寧可不言.我朝末葉, 盛尙回甲之宴, 各殿之誕日已無論, 各陵各廟之生辰、諱辰、卽位辰, 亦極其崇備, 至於朝臣之回晬、回巹、回榜, 爲之優助其宴, 此皆非虛文外節乎? 其弊自都城延及閭巷, 今雖市井販夫、貧士、窶人, 必輾轉稱貸, 期於盛行生、巹、甲宴, 竸作勝事而後已, 可勝嘆哉.慶平君 晧"今日朝廷, 是金之朝廷耶?"之一言, 失則失矣.然因此一言, 而擧朝譁然, 至請削君遠竄, 而罷豊溪君嗣, 幷黜其父與叔.上不已依允.當時金氏氣燄之盛, 亦可想也.哲宗之末, 各地民擾大熾, 莫可止遏者, 乃數百年病民積漸之弊, 至此而敗露, 所謂"雖有善者, 亦無如之何"者也. 반경(盤庚) 은(殷)나라 중엽에 엄(奄)에서 은(殷)으로 천도하여 중흥을 이룬 어진 임금이다. 성탕(成湯) 은(殷)나라 첫 임금이다. 본명은 이(履) 또는 천공(天工)이며, 하(夏)의 걸왕(桀王)을 쫓아내고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다. 탕왕(湯王). 최영(崔瑩) 고려 말기의 명장이며 충신이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배극렴(裵克廉)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장이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웠고 조선 개국에도 크게 관여하여 개국 공신 1등에 봉해졌다. 무안대군(撫安大君)과 의안대군(宜安大君)의 재앙 무안대군은 태조의 일곱째 아들 이방번(李芳蕃)이고, 의안대군은 태조의 여덟째 아들 이방석(李芳碩)인데,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에 의해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된 일을 말한다.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을 가리키며, 양촌은 그의 호이다.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학자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이 개국된 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저서에는 《입학도설(入學圖說)》ㆍ《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ㆍ《양촌집》 등이 있다. 공양왕(恭讓王) 고려 제34대 임금 왕요(王瑤)의 시호이다. 이색(李穡) 1328~1396.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고려 말 학계를 이끌었던 인물로, 조선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장단에 유배되었다가 1391년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지공(指空) 인도의 승 제납박타(提納薄陀)의 호(號)이다. 인도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왕자로, 19세에 인도를 떠나 서역을 거쳐 중국에 왔고, 1328년(충숙왕15) 우리나라에 와서 혜근(惠勤)에게 선종(禪宗)을 전수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1372년(공민왕21) 양주(楊州)에 회암사(檜巖寺)를 세워 그의 유골을 모셨다. 나옹(懶翁)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인 혜근(惠勤, 1320~1376)의 법호이며, 또 다른 호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중국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에게서 심법의 정맥(正脈)을 받아 지공ㆍ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으로 불렸다. 정종(定宗) 조선 제2대 왕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고 태종의 형으로 태조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재위 2년 만에 태종에게 선위하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19년(세종1)에 승하하였고,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공정(恭靖)이다. 정안군(靖安君)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이다. 전중(傳重) 적자(嫡子)가 죽어서 초상과 제사의 중임(重任)을 적손(嫡孫)에게 바로 전하는 일을 말한다. 할아버지 편에서 말할 때는 전중이라고 하고, 손자 편에서 말할 때는 승중(承重)이라고 한다. 길야은(吉冶隱) 야은은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학자 길재(吉再, 1353~1419)의 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ㆍ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고향 선산(善山)으로 돌아와서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은둔하였고, 고려가 망한 뒤에도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말 삼은으로 불린다. 저서로는 《야은집》이 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신조(辛朝) 고려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이 두 왕을 가리킨 말이다. 왕씨(王氏)가 복위(復位) 고려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恭讓王)의 즉위를 말한다. 윤이(尹彛)와 이초(李初) 공양왕 때 파평군(坡平君) 윤이와 중랑장(中郞將) 이초는 함께 명나라에 있으면서 명제(明帝)에게 본국의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하려 하며, 이에 반대하는 이색(李穡) 등을 처형하였다고 무함하였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가 있던 사신(使臣) 조반(趙胖)의 귀국 보고서에서 밝혀져 큰 옥사(獄事)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을 이초(彝初)의 옥(獄)이라 한다. 이방간(李芳幹)의 계획 이방간은 태조의 넷째 아들이다. 정종2년(1400)경진년 봄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을 말한다. 이때 방간(芳幹)의 계획을 이내(李來)가 우현보(禹玄寶)에게 말하여 우현보가 태종 이방원(李芳遠)에게 알려서 난을 막을 수 있었다. 궤장(几杖) 노인을 우대하는 도구인 안석(案席)과 지팡이로, 공손하게 어른을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에서 국가에 공이 있는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어른께 상의할 때에는 반드시 안석과 지팡이를 잡고 따르는 법이다.[謀於長者, 必操几杖以從之.]"라고 하였다. 공비(恭妃) 심온(沈溫)의 맏딸로, 세종의 비(妃)인 소헌황후(昭憲皇后)를 말한다. 세종이 잠저에 있을 때 태종이 심온의 맏딸을 뽑아 배필로 삼고 세종이 즉위한 뒤에 공비로 봉하였다. 명나라……것 《국조보감(國朝寶鑑)》 권3 태종(太宗) 6년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8한림(八翰林) 한림은 사관(史官)인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는 예문관의 정7품 봉교(奉敎), 정8품 대교(待敎), 정9품 검열(檢閱)을 말한다. 모두 8원(員)이라서 팔한림(八翰林)이라고도 한다. 《翰苑故事 兩館官制》 서견(徐甄)이……시 《동문선》 제22권에 실려 있으며,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제목은 〈술회(述懷)〉이다. 고려가 망한 뒤 개성에서 지은 시인데, 이조의 공신(功臣)들이 이 시를 허물로 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듣지 않았다.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상(商)나라의 재상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정사를 돌려주고 은퇴하면서 경계하는 말을 남겼는데, 그중에 "모든 백성이 다 말하기를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라고 하게 하시며, 또 말하기를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라고 하게 하소서.[萬姓咸曰: 大哉王言, 又曰: 一哉王心.]"라고 하였다. 《書經 咸有一德》 의안대군(宜安大君) 태조의 여덟째 왕자 이방석(李芳碩)으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아들이며, 태종의 이복동생이다.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에 의해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정릉(貞陵)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신덕황후(神德皇后) 강씨(康氏)의 능호이다. 신의황후(神懿皇后) 태조의 정비(正妃) 한씨(韓氏)이다. 일에 싫증낼 나이 정사를 돌보지 못할 만큼 나이가 많다는 말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짐이 제위에 있은 지 33년이나 되니, 이제는 늙어서 부지런히 행해야 할 정사에 싫증이 느껴진다.〔朕宅帝位, 三十有三載, 耄期, 倦于勤.〕"라는 순(舜) 임금의 말이 나온다. 양녕대군(讓寧大君) 태종(太宗)의 장남 이제(李禔, 1394~1462)로, 1402년(태종2)에 원자로 봉해졌고, 2년 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학문을 게을리하고 방종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매와 개 등 완물을 좋아하는 등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풍류를 즐겼고, 세종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였으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한창려(韓昌黎)의 불골표(佛骨表) 한창려는 한유(韓愈)를 말하며, 〈불골표〉는 당(唐)나라 헌종(憲宗)이 불골을 맞아들여 궁중에 안치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이다. 이 글로 인하여 헌종의 노여움을 사서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문종(文宗) 세종의 장자로서 조선 제5대 임금이다. 세 정승 영의정 황보인(皇甫仁)ㆍ좌의정 김종서(金宗瑞)ㆍ우의정 정분(鄭苯)을 말한다. 육신(六臣) 조선조 세조(世祖) 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던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을 가리킨다. 병자년(1456, 세조2)의 일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상서사(尙瑞司) 조선 태조 1년(1392)에 설치한 새보(璽寶)ㆍ부패(符牌)ㆍ절월(節鉞)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중종(中宗)……행해졌으니 소릉은 문종(文宗)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능이다. 처음에는 안산(安山) 소릉에 장사 지냈는데, 1457년에 단종이 죽은 뒤 세조(世祖)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아들을 죽인 일을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그 능을 발굴하고 폐위하여 바닷가로 옮겼다. 그 후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세 차례나 추복(追復)의 논의가 일어났는데, 그 맨 처음 나온 것이 바로 남효온(南孝溫)의 상소였다. 1513년(중종8)에 복위되어 현릉(顯陵)으로 개장하였다. 이보흠(李甫欽) 1429년(세종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를 역임하고, 1457년 순흥 부사로 있으면서 순흥에 유배 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함께 재향품관(在鄕品官) 등 이른바 영남 사인(士人)들을 규합하여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박천(博川)에 유배된 뒤 처형되었다. 문집의 서문(序文)을 지어 《간재집(艮齋集)》 후편 제18권에 실린 〈대전이선생 보흠 실기서(大田李先生甫欽實記序)〉를 말한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 이유(李瑜)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로,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ㆍ낭간거사(琅玕居士)ㆍ매죽헌(梅竹軒) 등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ㆍ서ㆍ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해졌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서풍(書風)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를 따랐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현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 등 몇 작품이 전한다. 양녕대군(讓寧大君) 태종의 장남으로, 이제(李禔)이다. 1404년(태종4)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로 매와 개 등 완물을 좋아하는 등으로 인해 폐위되고,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신말주(申末舟) 1429~1503.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다. 1454년(단종2)에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27일 기사에 원종 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하는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다. 숙종(肅宗) 底本에는 ?肅? 자가 없음. 《국조보감(國朝寶鑑)》 제44권 숙종(肅宗) 4에 의거하여 보충. 한번……못한다 한번 혼인하면 남편이 죽어도 재가하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나온다. 어진 이를……않았으니 《맹자》 〈이루하(離婁下)〉에 나온다. 성종(成宗)……제거하였으니 《성종실록(成宗實錄)》 85권 성종8년 10월 22일 기사에 나온다. 대성(臺城)의 재앙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숭상하여 대성에도 동태사(同泰寺)를 짓고 이곳에서 세 번이나 사신(捨身)을 하였으며, 모든 제사에 희생(犧牲)을 없애고 밀가루로 빚어 그것을 대신하게 하였다. 후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대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자 무제는 그곳에서 굶어 죽었다. 《梁書 卷3 武帝本紀下》 그가……때문입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70권 성종7년 8월 1일 기사에 나온다. 인수대비(仁粹大妃) 조선 덕종(德宗)의 비(妃)인 소혜왕후(昭惠王后)를 이른다.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인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서(梵書)ㆍ한문(漢文)ㆍ국문(國文)의 3종 서체(書體)로 쓴 불서(佛書)를 남겼고, 부녀자의 예의범절에 관한 교훈서 《여훈(女訓)》을 편찬하였다. 박영(朴英) 1471~1540. 본관은 밀양,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으로 어려서는 무예에 뛰어났으나, 연산군 즉위 이후 하향하여 학문에 힘썼고, 치적이 뛰어났다. 의술에도 능하여 《경험방(經驗方)》ㆍ《활인신방(活人新方)》 등 의서를 편찬하였다. 저서에 《송당집》이 있다. 기미를……않았다.〔見幾而作 不俟終日〕 일이나 상황이 자신의 신념과 어긋날 경우 지조를 지켜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돌아감을 비유하는 말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온다. 김탁영(金濯纓) 탁영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다른 호는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저서로는 《탁영집》이 있다. 조의제문(吊義帝文)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글이다. 항우가 시해한 의제를 조문한 글인데, 이 안에 세조가 단종을 죽인 일을 풍자한 뜻이 있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다른 호는 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불만을 품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표연말(表沿沫) 1449~1498.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이다.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해 썼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경원(慶源)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銀溪驛)에서 죽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저서에 《남계집》이 있다. 우리……적다.〔吾黨如君知者少〕 《점필재집(佔畢齋集)》 시집 제15권에 실려 있으며, 제목은 〈소유의 운에 차운하여 부치다〔次少游韻却寄〕〉이다. 《속동문선(續東文選)》 제7권에도 실려 있다. 추형(追刑) 죽은 뒤에 부관 참시 등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서리를……된다.〔履霜堅氷至〕 일의 조짐을 보고 미리 그 화(禍)를 경계하는 말로, 《주역》 〈곤괘(坤卦) 초육(初六)〉에 나온다. 돌처럼……길하다.〔介于石 不終日 貞吉〕 자신의 신념과 어긋날 때에는 지조를 돌처럼 굳게 지키면서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주역》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나온다. 뜻있는……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나온다. 권발(權橃) 1478~154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496년(연산군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2)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윤원형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아 파면된 뒤 1547년(명종2)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국원종 일등공신(光國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저서에 《충재집》이 있다. 유순(柳洵) 1441~1517.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노포당(老圃堂)이다. 1462년(세조8) 식년시에, 1466년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다. 성종 때 대사헌을 지냈고, 연산군 때 영의정에 올랐다. 중종반정 후 수상으로서 정국 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원종(朴元宗) 1467~1510.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백윤(伯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1486년 무과에 급제했다. 1492년 성종의 특지(特旨)로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연산군 때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했다. 1506년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反正)을 주동, 정국 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0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왕비 신씨(王妃愼氏)의 폐위 중종의 첫 번째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이다.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 등의 반정공신들이 신씨가 왕후에 오르자 불안을 느끼고는 압력을 가하여 왕후에 오른 지 7일 만에 폐위되도록 만들었다. 박눌재(朴訥齋) 눌재는 박상(朴祥, 1474~1530)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이다. 1511년(중종6) 수찬ㆍ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를 역임했다. 1515년(중종10)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죽음을 계기로 김정(金淨)과 박상(朴祥) 등이 폐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렸다. 정문익(鄭文翼) 문익(文翼)은 정광필(鄭光弼)의 시호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이다. 연산군 시절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저서에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호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훈구파(勳舊派) 남곤(南袞) 일파가 일으킨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저서에 《정암집》이 있다. 사대(賜對) 임금이 특별히 신하를 불러서 묻는 말에 대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관안(官案) 각 관청의 소관 사무 및 소속 관원의 품계와 정원 등을 기록한 일종의 관직표이다. 관안의 내용은 이를 뼈대로 하여 임명 형식과 관원의 성명을 기록하기도 한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ㆍ지비옹(知非翁),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대사헌ㆍ이조 참판을 지내고, 1519년(중종14)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를 사사(賜死)하자,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되었다. 저서에 《십청집》이 있다. 상진(尙震) 1493~1564.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ㆍ향일당(嚮日堂)ㆍ범허재(泛虛齋)이고,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1519년(중종14) 문과에 급제하였고, 좌의정ㆍ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청렴하고 관후한 명상(名相)으로 신망이 두터웠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만년에는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 등 소윤(小尹) 일파와 어울려 사림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죽음에……않았다 북위(北魏) 세조(世祖) 때 고윤(高允)의 일을 말한 것이다. 고윤(高允)은 북위(北魏) 때 사람으로 최호(崔浩)와 함께 국사(國史)를 지었는데, 그 뒤 위제(魏帝 세조)가 국악(國惡)을 드러내었다고 노여워하여 최호를 죽이고 고윤도 죽이려 하자, 태자(太子)가 자기의 스승인 고윤을 살리려고 자기가 인도하는 대로 위제에게 대답하라고 하였지만, 고윤은 위제의 물음에, ?최호는 주관했을 뿐이고 실지 저술을 신이 더 많이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위제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임금을 속이지 않는 직신(直臣)이라고 감탄하면서 그를 용서한 고사이다. 남곤(南袞) 1471~15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 또는 지족당(知足堂)이다.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고 귀국했다. 중종(中宗) 때 남곤(南袞)이 대궐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곤충이 파먹게 하여 조광조를 모함하였다. 작서(灼鼠)의 흉측함 중종 22년(1527) 2월 25일 동궁의 생일에 쥐의 사지와 사자의 꼬리를 자르고 입ㆍ귀ㆍ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북쪽 뜰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동궁을 저주한 사건을 말한다. 윤원형(尹元衡) 중종(中宗)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士林)을 제거하고 국정을 농단하다가 문정왕후 사후(死後)에 실각하여 자결하였다. 을사년(1545)……일 인종(仁宗)의 죽음을 말한 것으로, 재위 기간은 1년이며, 나이 31세에 죽었다. 윤임(尹任) 1487~1545. 중종의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로, 대윤(大尹)의 거두였다. 무과에 급제했으며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慶源大君 명종)을 낳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 보호를 둘러싸고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일파가 숙청될 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ㆍ용천(龍泉)이다. 아들 김희(金禧)가 중종의 딸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한 뒤부터 외척으로서 권력을 남용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의 밀령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첨지공(僉知公) 부령 김씨(扶寧金氏)로 김보칠(金甫漆)이다. 향음주례(鄕飮酒禮) 주대(周代)에 향교의 우등생을 중앙 정부에 천거할 때 향대부(鄕大夫)가 주인이 되어 송별연을 베풀던 의식이다. 후대에 내려와 지방관이 그 지방의 유생들을 모아 놓고 거행하는 경로의식으로 변형되었다. 정유헌(丁游軒) 유헌은 정황(丁熿, 1512~1560)의 호이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45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있을 때 인종(仁宗)의 장례를 문정왕후가 서둘러 갈상(渴喪)으로 치르려고 하자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낙향하였다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양(昆陽)에 유배되었고, 이듬해에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허(許)나라……기록하였습니다 허(許)나라 도공(悼公)이 학질을 앓다가 그의 세자(世子) 지(止)가 주는 약을 먹고 졸(卒)하였는데, 《춘추(春秋)》 소공(昭公) 19년조에 "허나라 세자 지가 그 군주 매를 시해했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신하와 자식은 군주와 부모에게 약을 올릴 적에 반드시 약을 맛보아 독성이 있는가를 시험해야 하는데, 세자 지가 약을 맛보지 않아 허나라 군주가 독한 약을 먹고 죽었으므로 세자를 꾸짖기 위하여 '그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림군(桂林君) 성종의 3남 계성군(桂城君)의 양자인 이류(李瑠)이다. 본디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2계비)의 아버지인 윤여필(尹汝弼)의 외손으로,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간에 정권 쟁탈전이 치열할 때 소윤 일파가, 대윤의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모략함으로써, 대윤이 숙청되고 계림군 역시 안변(安邊)까지 귀양 갔다가 잡혀 와서 참수되었다. 선조 때 신원되었다.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여섯 째 아들인 이완(李岏)이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파쟁 속에서 대윤인 윤임(尹任)의 조카였던 까닭에 윤임이 그가 왕위에 오르도록 획책했다는 모략을 받으면서 대윤이 몰락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 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이는 대윤 잔당들의 소행이라고 지목받으면서 1172년(명종2)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복합(伏閤) 주청할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 삼사(三司)의 관원이나 종친(宗親), 소유(疏儒) 등이 합문(閤門) 내외에 나아와 엎드려 청하는 일을 이른다. 야사(野史) 박여량(朴汝樑, 1554~1611))의 《감수재집(感樹齋集)》을 말하며, 잡저(雜著) 〈종사일기(從仕日記)〉에 내용이 보인다. 민제인(閔齊仁) 1493~1549.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이다.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할 때 대사헌으로서 언로를 장악하여 여론 형성을 주도하고 윤임(尹任) 일파의 처단에 관여하였다. 이 공로로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齊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여원군(驪原君)에 봉해졌으나, 그 후 윤원형 일파의 모함으로 녹훈이 삭제된 채 공주로 유배를 떠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입암집》이 있다. 내가……당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의 《기재잡기(寄齋雜記)》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歷朝舊聞〕〉에 나오는 말이다. 《기재잡기(寄齋雜記)》는 박여량(朴汝良)이 쓴 것이다. 효릉(孝陵)의 갈장(渴葬) 효릉은 인종(仁宗)을 가리킨다. 갈장은 일정한 기간보다 서둘러 장사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농간으로 갈장이 이루어졌다. 서얼(庶孼)……상소하자 《명조실록(明宗實錄)》 15권, 명종 8년 9월 29일 기사이다. 조남명(曹南冥) 남명은 조식(曺植, 1501~1572)의 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仲),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유일(遺逸)로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뒤에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명종 때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여 정치하는 방법과 학문하는 방법을 극력 진언하였다. 저서에 《남명집》이 있다. 밝은 창문으로 들여보내는 신하가 임금을 깨우칠 때 임금이 환히 보고서 잘 알 수 있는 것부터 정성껏 인도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감괘(坎卦) 육사(六四)〉의 "조촐한 술과 음식을 질그릇에 담아 노끈으로 묶어서 밝은 창문을 통해 들여보낸다.〔樽酒簋貳用缶, 納約自牖.〕"라는 말이 나온다. 그……행하여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치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우 임금이 물을 흐르게 한 것은 그 일삼은 바가 없이 자연의 형세에 따른 것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또한 인위적 행위가 전혀 없이 행한다면 지혜가 또한 클 것이다.〔禹之行水也, 行其所無事也, 如智者亦行其所無事, 則智亦大矣.〕"라고 하였다. 졸곡(卒哭)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이 제사를 지내면 수시로 하던 곡(哭)을 멈추고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만 곡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중종(中宗)의……없다 《명종실록(明宗實錄)》 31권, 명종20년 7월 13일 기사에 나온다. 사슴을……못하는 눈앞의 욕심에 빠져 멀리 보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남명은……없습니다 《명조실록(明宗實錄)》33권, 명종 21년 10월 7일 기사에 나온다. 선조(宣祖)가……있겠는가 《인조실록(宣祖實錄)》2권, 선조 1년 7월 12일 기사에 나온다. 을사년(1545) 7월의 일 인종(仁宗)을 독살한 일을 말한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ㆍ남고(南皐)이다. 중국 강서성 성자현(星子縣) 노산(盧山)에 있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정미년(1547, 명종2)……때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 세력이 양재역 벽서 사건을 조작하여 반대파인 송인수(宋麟壽)와 이약수(李若水) 등을 죽이고 이언적(李彦迪)ㆍ노수신(盧守愼)ㆍ백인걸(白仁傑) 등을 정배한 정미사화(丁未士禍)를 가리킨다. 《明宗實錄 2年 9月 18日》 주세붕(周世鵬)이……기뻐한다 《명종실록(明宗實錄)》 13권, 명종 7년 11월 23일 기사에 나온다. 당(唐)나라……일 후창업(侯昌業)이 글을 올려 희종이 정사를 직접 보지 않고 놀기만 힘쓰는 것을 심하게 간하자 희종이 크게 노하여 그를 죽였고, 맹소도(孟昭圖)가 글을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가 미산현(眉山縣) 동쪽 파리강(坡璃江)에 있는 마이진(蟇頤津)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던 일을 말한다. 《唐鑑 卷22 僖宗》 《大學衍義》 명종이……않겠는가 《명종실록(明宗實錄)》 17권, 명종 9년 10월 30일 기사에 나온다. 순회세자(順懷世子) 명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순왕후(仁順王后)이다. 1557년(명종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563년 13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순회는 시호이다. 안서순(安瑞順)과……것 을사년 여러 간신들의 소행을 분하게 여겨 정륜과 함께 걸어서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여 그 속이고 거짓된 일을 곧게 배척하였기 때문에 윤원형이 매우 미워하여 역당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논죄하여 함께 극형을 받았다. 도회(韜晦) 세상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는 것을 말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강릉(康陵) 명종(明宗)과 그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을 말한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호이다.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대의 명재상이다. 이준경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그의 아들 이덕열(李德悅)이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이 올랐는데, 이를 본 이준경은 "내 자식은 여기에 들 만한 자격이 못 된다."라고 하고는 그 이름을 삭제해 버린 일이 있다. 파붕당설(破朋黨說) 선조 5년 7월 7일에 이준경(李浚慶)이 죽으면서 올린 글이다. 이원경(李元慶)의 일 이원경이 실직하여 불평을 품고 있으면서 백인걸(白仁傑)과 이준경을 의지하였다. 1571년(선조4)에 이준경이 재종재 이원경을 시켜 백인걸(白仁傑), 홍담(洪曇) 등 여러 재상을 통하여 박순ㆍ박응남ㆍ이후백ㆍ윤두수ㆍ윤근수(尹根壽)ㆍ오건(吳健)ㆍ정철 등 17명을 죄주게 하려 하였는데, 그 말이 전파되어 백인걸에게 혐의가 돌아가자 백인걸이 급히 파주로 내려갔기 때문에 이준경의 계획이 무산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치지(致知) 자신의 앎을 극대화 시키는 것으로, 《대학장구》의 팔조목 중에 하나이다. 《대학장구》 경 1장에 "자신의 생각을 진실되게 가지고자 했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앎을 극대화 시켰는데, 자신의 앎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라고 하였다. 어찌하여……구하였는가 《선조실록(宣祖實錄)》 10권, 선조 9년 6월 24일 기사에 나온다. 나이……않는다.〔四十五十 無聞〕 《논어》 〈자한(子罕)〉 에 나온다. 공의대비(恭懿大妃) 1514~1577. 인종(仁宗)의 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반남 박씨(潘南朴氏)에게 올린 존호이다. 선조가……옳은가 《선조실록(宣祖實錄)》 2권, 선조 1년 9월 21일 기사에 나온다. 선조가……뿐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 13권, 선조 12년 12월 12일 기사에 나온다. 서유애(柳西崖) 서애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다른 호는 운암(雲巖),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9년(선조2)에 성절사(聖節使) 이후백(李後白)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590년(선조23) 종계(宗系)를 개정한 공으로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에 《서애집》ㆍ《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 삼간(三奸) 선조(宣祖) 16년(1583) 6월 11일에 군정(軍政)을 마음대로 행한 일 등을 빌미로 이이(李珥)를 탄핵한 동인(東人) 계열의 송응개(宋應漑)ㆍ박근원(朴謹元)ㆍ허봉(許篈) 등을 말한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宣祖) 16년 8월 28일자 기사 참조. 김우옹(金宇顒) 1540~160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제자이다. 동인(東人) 계열로 유성룡(柳成龍)과 가까웠다. 서인인 정철(鄭澈)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1579년에는 율곡 이이를 비난하는 정언(正言)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하는데,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율곡이……된다 《선조실록(宣祖實錄)》 17권, 선조 16년 10월 22일 기사에 나온다. 세 사람이 귀양 가던 선조(宣祖) 때 병조 판서로 있던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귀양 간 동인(東人)의 송응개(宋應漑)ㆍ박근원(朴謹元)ㆍ허봉(許篈)을 이른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의 호이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고, 이후 금산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저서에 《동환봉사(東還封事)》ㆍ《조천일기(朝天日記)》ㆍ《중봉집》 등이 있다. 후예(后羿)와 한착(寒浞) 모두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을 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후예는 유궁(有窮)의 임금으로 활을 잘 쏘았는데, 하(夏)나라가 쇠약해지자 하후(夏后) 상(相)을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뒤에 한착은 예(羿)와 상(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며, 뒤에 소강(小康)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2 夏本紀 注》 춘추(春秋)의 주심법(誅心法) 죄적(罪迹)이 어떠함은 묻지 않고 다만 그 용심(用心)을 보아 죄를 가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 이는 그러한 사실은 없지만 그 동기가 불순함을 책망하는 것을 말한다. 노(魯)나라 선공(宣公) 2년에 조천(趙穿)이 진(晉)나라 영공(靈公)을 도원(桃園)에서 죽였는데 당시 집정신(執政臣)인 조돈(趙盾)이 그들을 토벌하지 않았다는 것과, 소공(昭公) 19년에 허(許)나라 도공(悼公)이 병중에 있을 적에 세자 도지(悼止)가 약을 맛보지 않아 도공을 죽게 하였다는 두 가지 사건을 들어, 모두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쓴 논법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昭公19年》 일곱……잃었다.〔七聖皆迷〕 길을 잃어 갈 곳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의 "양성의 들판에 이르자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至於襄城之野 七聖皆迷〕"라는 말이 나온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ㆍ종남수옹(終南睡翁)ㆍ죽피옹(竹皮翁)ㆍ시촌거사(柿村居士) 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릴 적에 계부(季父) 이지함(李之菡)에게 수학(受學)하였다. 1591년(선조24)에는 정철(鄭澈)을 탄핵하여 강계(江界)로 유배 보냈다. 서화(書畫)에 능하여 문장팔가(文章八家)라 일컬어졌으며, 저서에 《아계유고》가 있다. 재상(宰相)……약속했다가 좌의정 정철(鄭澈)이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으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서 그 일을 도맡았다가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산 나머지 강계(江界)로 유배되고 서인들이 실각하였다. 인빈(仁嬪) 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로, 원종대왕(元宗大王)의 생모이자 인조(仁祖)의 할머니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호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23)에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학봉(鶴峯)이……하였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기사와 26권 3월 3일 기사에 나온다. 공자가……있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온다. 관백(關白) 일본 천왕을 보좌하던 막부의 우두머리이다. 사명(詞命) 문신(文臣)이 왕을 대신하여 교서(敎書) 및 외교 문장을 제술(製述)하는 것이다. 신립(申砬) 1546~159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임진왜란 때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가 되어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싸우다가 참패하여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 신하를……없다.〔知臣莫如君也〕 제 환공(齊桓公)이 병세가 위독한 관중(管仲)을 찾아가서 문병하며 적당한 후임자가 누구인지 묻자 관중이 대답한 말인데, 《사기(史記)》 권33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진회(秦檜) 중국 송(宋) 나라 말기의 유명한 간신이다.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적극 주장하여 송 나라의 중흥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충신 악비(岳飛)를 죽이고, 장준(張浚)ㆍ조정(趙鼎) 등을 찬축(竄逐)하고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결국 송 나라를 위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양국충(楊國忠)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재상을 지낸 인물로, 간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양귀비(楊貴妃)의 친척 오빠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먼저 촉(蜀) 땅으로 피난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피난 도중 마외역(馬嵬驛)에서 금군(禁軍)들에게 살해되었다. 황정욱(黃廷彧)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하였으며,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을 인정받아 광국 공신(光國功臣) 1등으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항복 권유문을 썼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 저서에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이임보(李林甫)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재상을 지낸 인물로, 간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천성이 교활하고 권모술수에 능하였는데, 사람 됨됨이가 겉과 속이 달라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불렸다. 환관 및 비빈(妃嬪)과 결탁하여 황제의 동정을 살피면서 아첨하여 총애를 얻은 뒤 19년 동안이나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러 뒤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조성하였다. 김공양(金公諒) 선조(宣祖)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았던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오빠로서 인조(仁祖)의 부친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외숙인데, 권세를 휘두르며 못된 짓을 많이 하였으므로 광해(光海) 시절에도 버림을 받았었다. 그런데 인조가 어렸을 적에 인빈의 양육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대우해 주려고 한 것이다. 정곤수(鄭崑壽) 초명은 규(逵)로, 뒤에 선조의 명을 받아 곤수로 이름을 고쳤다. 이황의 문인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형이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명(明)나라 원병을 얻어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저서에 《백곡집》이 있다. 임금이……노력하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사에 나온다. 김수(金睟) 底本에는 ?金晬?로 되어 있는데,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거하여 '晬'를 '睟'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윤선각(尹先覺) 1543~161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부(粹夫)이다. 나중에 아래 구절에 나오는 윤국형(尹國馨)으로 개명하였다. 《愚伏集 卷17 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春秋館事尹公神道碑銘 幷序》 심유경(沈惟敬) 중국 명(明)나라의 사신으로, 일본과의 강화(講和)의 임무를 띠고 여러 번 일본에 왕래하였으나 이를 성공시키지 못하였는데도 본국에는 거짓으로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고 아뢰었다. 정유재란으로 그 사실이 탄로났으나 석성(石星)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였으며, 다시 우리나라에 와서는 당시 감군(監軍)으로 와있던 소응궁(蕭應宮)을 꾀어 일본과 화의를 교섭하다가 실패하였다. 일본에 항복할 목적으로 경상도 의령(宜寧)까지 갔다가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燃藜室記述 卷16ㆍ17 宣祖朝故事本末》 이여송(李如松) 명(明)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병사 4만을 이끌고 조선에 와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대를 기습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으나,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봉표(奉表)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표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장순(張巡)과……되었으니 장순과 허원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양성(睢陽城)에서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안녹산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 張巡》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호이다. 선조 초에 학행으로 천거되었지만 거부하고, 파산(坡山) 즉 파주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저서에 《우계집(牛溪集)》ㆍ《주문지결(朱門旨訣)》ㆍ《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사직지신(社稷之臣)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重臣)을 말한다. 급암(汲黯)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불렀던 직신(直臣)인데, 무제가 그의 사람됨을 물으니 장조(莊助)가 "급암에게 어떤 관직을 맡기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군주를 보필할 경우 한 왕조의 제업(帝業)을 지키며 불러도 가지 않고 배척해도 떠나지 않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史記 汲鄭列傳》 석성(石星) 명나라 신종(明神宗) 때 신하로,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에 파병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심유경(沈惟敬)과 함께 풍신수길을 봉해 주길 간청했으며,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옥중에서 죽었다. 김충장공(金忠壯公) 충장은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다. 1596년(선조29)에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당하여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26일 동안 여섯 차례의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윤오음(尹梧陰)과……있었으니 윤오음은 윤두수(尹斗壽)이고 윤월정은 윤근수(尹根壽)인데, 도체찰사로 있던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하였던 일을 말한다. 기복(起復)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줄임말로, 부모의 상중에는 자식이 벼슬을 할 수 없었으나,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어 그 사람이 필요할 경우에는 상중에 있는 사람이라도 복귀하여 근무하도록 하였다. 《經國大典 禮典 藏文書 起復出依牒式》 원균(元均) 1597년(선조30) 1월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었다.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이 병력을 총집결하여 재차 침입하였는데 칠천량(漆川梁)에서 삼도 수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이백사(李白沙) 백사는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호이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1618년(광해군10)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백사집》이 있다. 현재의……된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31권, 선조 30년 7월 1일 기사에 나온다. 이정암(李廷馣) 1541~160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임진왜란 때 황해도 의병을 모아 활약, 황해도 초토사가 되어 연안에서 포위된 왜군 3,000여 명을 격파하였다. 선무공신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상례초(喪禮抄)》ㆍ《독역고(讀易攷)》ㆍ《왜변록(倭變錄)》, 《서정일록(西征日錄)》ㆍ《사류재집》 등이 있다. 재궁(梓宮) 왕이나 왕후의 유해를 안치한 관을 가리킨다. 한(漢)나라에서……계책 상대를 안심시켜 이용한 기만책을 말한다. 장이는 진(秦)나라 말기 사람으로 진여(陳餘)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초(楚)나라 항우(項羽)의 부하가 되었는데, 항우가 장이만 왕으로 봉한 데에 불만을 품어 조(趙)나라의 복구를 돕고 이어 장이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았다. 그러자 장이가 한나라 고조(高祖)에게로 달아났는데, 고조가 이를 받아들여 후하게 대우하였다. 한편 한나라 고조가 초나라를 치기 위하여 진여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진여가 장이를 죽이면 따르겠다고 답하니, 고조가 장이와 닮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보내자 진여가 그것을 믿고 고조를 도왔다. 그러나 뒤늦게 장이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격노하여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고조가 보낸 한신(韓信)과 장이 등에게 잡혀 죽었다. 《史記 張耳陳餘列傳》 원씨(源氏) 덕천가강(德川家康 토쿠가와 이에야스)을 말하는데, 원가강(源家康)이라고도 한다. 평씨(平氏) 풍신수길(豊臣秀吉 토요토미 히데요시)을 말하는데, 평수길(平秀吉)이라고도 한다. 한남당(韓南塘) 남당은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호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며,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저서에 《남당집(南塘集)》이 있다. 유영경(柳永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소북파(小北派)의 영수이다. 1604년(선조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동인(東人)에 속하였다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열되자 북인에 가담하였다.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당될 때 소북의 영수로서 같은 소북인 남이공(南以恭)과 불화하여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하였다. 선조 말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 대북 일파의 탄핵을 받고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귀(李貴) 1557~1632.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孤臺日錄 人名錄》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조식(曺植)의 수제자이다. 선조(宣祖)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며 광해군(光海君)을 적극 지지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대북의 영수로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였다. 광해군 5년(1613)에 이이첨(李爾瞻)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였으며, 광해군 10년(1618)에는 인목대비 유폐 사건에 적극 가담하였다.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참수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다. 《光海君日記 5年 5月 22日》 《仁祖實錄 1年 3月 19日》 이월사(李月沙) 월사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문인이다. 1590년(선조23)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이다. 문장으로 유명하여 부자가 이어 대제학이 되었다. 저서에 《월사집》이 있다. 신상촌(申象村) 상촌은 신흠(申欽, 1566~1628)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이정귀(李廷龜)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4대가(四大家)로 꼽힌다. 저서에 《상촌집(象村集)》ㆍ《야언(野言)》 등이 있다. 공자가……일이다.〔邦無道 穀恥也〕 《논어》 〈헌문(憲問)〉편에 나온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호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에 극력 반대하였다. 저술로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이이첨(李爾瞻) 대북파로 광해군 때 정권을 잡아 폐모론을 주장하고 영창대군의 제거를 주도한 인물이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 키가 작아 키 작은 재상으로 널리 일컬어졌다. 선조와 광해군, 인조조를 두루 거치면서 다섯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고, 청백리의 대명사로 꼽힌다. 1604년(선조37)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梧里集 附錄 卷2 諡狀》 저서에 《오리집》이 있다. 부처(付處) 어느 곳을 지명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의 하나이다. 홍천(洪川)에……당하였다 광해군 7년(1615)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유배된 일을 말한다. 춘추대의(春秋大義) 《춘추》에서 강조한바 주(周) 나라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의리를 이른다. 여기서는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리를 이른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이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낙향하였으며,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청음집》이 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저서에 《동계집》이 있다. 그가……때문이다 이이첨은 대북파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옹립하는 것을 주도하고 광해군 즉위 후에 정권을 잡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한 일을 주도한 인물이다. 선원(仙源) 선원(仙源)은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호이다.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仙源遺稿 仙源先生年譜》 기자헌(奇自獻) 1562~1624. 선조가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여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고, 인조반정을 모의할 때는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했다. 이괄(李适)의 난 때 내응할 우려가 있다 하여 사사(賜死)되고 일족도 몰살되었다. 정청(庭請) 세자 혹은 정승이 백관을 인솔하고 궁궐에 가서 국가의 중대한 일을 아뢴 뒤 하교를 기다니는 것을 말한다. 유몽인(柳夢寅) 명종(明宗)~인조(仁祖) 연간의 문장가이며, 호는 어우당(於于堂)이다. 광해군(光海君)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화를 면했으나, 뒤에 그가 지은 〈상부사(孀婦詞)〉로 해서 그의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다. 저서에 《어우야담(於于野談)》ㆍ《어우집(於于集)》 등이 있다. 입막(入幕) 장막 뒤에 숨어서 남의 말을 엿듣는 역할을 하는 참모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환온(桓溫)을 찾아왔을 때 환온이 자신의 참모인 치초(郗超)에게 장막 속으로 들어가서 엿듣도록 하였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와 장막이 걷히자 사안이 웃으면서 "치생은 장막 속의 손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郗生可謂入幕之賓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67 郗超列傳》 이괄(李适)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공을 세웠으나 겨우 한성 판윤이 된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그 뒤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나가게 되자 더욱 원망을 품고 인조 2년(1624)에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추대하였으나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등에 의해 모두 주륙을 당하였다. 김류(金瑬)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 1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4도 도체찰사로서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비하였고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좇아 삼전도에서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강홍립(姜弘立) 1560~1627.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후금을 쳤으나 대패하였다. 이는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후금에 억류되었다가 정묘호란 때 입국하여 조선과 후금의 강화를 주선하였으나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려 사망하였다. 김장군전(金將軍傳) 박희현(朴希賢)이 편찬한 김응하(金應河, 1580~1619)의 전기(傳記)이다. 김응하는 1619년(광해군11)에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여진의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명나라에서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을 하사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부끄러워하는……있다.〔羞惡之心 人皆有之〕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편에 나온다. 팔송(八松) 윤공(尹公) 윤황(尹煌, 1571~1639)을 말하며 팔송은 그의 호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청나라에서 척화파의 압송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척화파로 자청할 사람을 뽑았는데, 삼학사를 비롯하여 정온(鄭蘊),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갈 것을 자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배되었다. 《仁祖實錄 15年 1月 23日, 2月 19日》 장신(張紳)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장유(張維)의 동생이다. 1619년(광해군11)에 자기 소유의 집터를 왕실에 바쳐 벼슬을 얻었다. 병자호란 당시에 강화 유수였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가 강도가 함락되었다. 이에 사헌부에서 그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전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自盡)하게 하였다.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맹자집주》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임경업(林慶業) 철저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의 무장(武將)으로,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조선의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고 명성이 높았다.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와 싸우다 사로잡혔다. 국내에서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에 연루설이 돌자,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되어 친국을 받다 장살되었다. 강빈(姜嬪)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9년 동안 볼모로 있다가 돌아왔다. 1645년 돌아오자마자 소현세자는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에 급서하였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서인으로 폐해져 사약을 받았다. 다음해인 1627년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민노봉(閔老峯) 노봉은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9년 희빈 장씨 소생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에서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저서에 《노봉집》ㆍ《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ㆍ《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있다. 죄가……처벌한다.〔罪疑惟輕〕 법관인 고요(皐陶)가 순(舜) 임금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을 찬양하면서 "죄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고, 공이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중한 쪽으로 상을 주었다.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형법대로 집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감수하려고 하였다.〔罪疑惟輕, 功疑惟重. 與其殺不辜, 寧失不經.〕"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김형욱(金弘郁) 1654년(효종5) 황해도 관찰사 재임 시에 천재(天災)로 인해 효종(孝宗)이 구언(求言)하자, 8년 전 사사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강옥(姜獄)이라는 사건이다. 이 문제는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친국을 받다가 장살되었다. 《鶴洲全集 附錄 卷3 尊周彙編》 저서에 《학주집》이 있다. 기해복제(己亥服制)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뜬 뒤, 인조 왕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가 효종에 대해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전례논쟁을 말한다. 정태화, 송시열의 기년복설(期年服說)에 대해, 허목은 차장자설(次長子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고, 윤휴(尹鑴)는 신모설(臣母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다. 윤휴(尹鑴) 1660년(현종1)에 복상(服喪) 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여 송시열(宋時烈)과 논쟁을 벌였으나, 패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제2차 예송으로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복직되었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가 허견(許堅)의 옥사에 관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채유후(蔡裕後) 1623년(인조1) 개시 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중년 이후 술을 좋아하여 때때로 주실(酒失)을 저질러 인조의 눈 밖에 났으나, 1646년에 강빈폐출사사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지어 다시 현용(顯用)되었는데, 글을 지은 뒤 집에 돌아와서는 글을 지은 것을 후회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책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1653년(효종4)에 대제학이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8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겸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술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가 뛰어나 중용되었다. 저서에 《호주집(湖洲集)》이 있다. 피리춘추(皮裏春秋)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시비를 가려 포폄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때 소준(蘇峻)을 평정한 공신으로 벼슬이 정토 대도독(征討大都督)에 이른 저부(褚裒)의 자가 계야(季野)인데, 대신(大臣) 환이(桓彛)가 일찍이 그를 지목하여 말하기를, "계야는 가죽 속의 《춘추》가 있다.[季野有皮裏陽秋.]"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3 褚裒傳》 정축년에 하성(下城) 하성은 성에서 내려간다는 의미로 항복하는 것을 말한다. 병자호란(1636, 인조14) 때 남한산성에 파천(播遷)한 인조가 이듬해인 정축년(1637)에 청나라에 항복한 일을 말한다. 공정대왕(恭靖大王) 조선(朝鮮) 제2대 정종(定宗)의 시호(諡號)로, 오랫동안 묘호(廟號)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숙종(肅宗) 7년(1681)에야 정종의 묘호를 받았다 공정대왕(恭靖大王)의……못했습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2권, 숙종 7년 9월 14일 기사에 나온다. 치사(致仕)할 나이 대부(大夫)는 나이 70이 되면 벼슬을 그만두게 되어 있다. 《禮記 曲禮》 유해(劉海) 요동(遼東) 사람으로 오랑캐에 투항하여 신임을 받고 포학하게 굴었으므로, 명 나라 조정에서 형주 자사(荊州刺史)의 직책과 은(銀) 1만 냥을 내걸고 붙잡으려고 하였다. 정묘호란 이듬해에 이름을 흥조(興祚)로 고치고, 자기 집을 불살라 타죽은 것처럼 꾸민 뒤 가도(?島)의 명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에게 투항하였으며, 문룡이 원숭환(袁崇煥)에게 복주(伏誅)된 뒤에는 숭환을 따라갔다가 영평부(永平府)가 함락되면서 전사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故事本末》 삼남(三南) 충청도(忠淸道)ㆍ경상도(慶尙道)ㆍ전라도(全羅道) 지방을 말한다. 공씨(孔氏)……연좌시켰는데 공포는 공융(孔融)의 형이다. 후한 때 장검(張儉)이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의 미움을 받아 체포령이 내리자 도망하여 평소에 친하던 공포를 찾아갔는데, 이 때 마침 공포는 없고 동생 공융이 이를 맞아들였다가 나중에 탄로나 잡혀갔다. 그러자 동생은 자기가 받아들였으니 자기죄라 하고, 형은 자기를 찾아왔으니 또 자기 죄라 하고, 어머니는 또 집안일은 어른의 책임이니 어른인 자신의 죄라고 하면서 서로 죽기를 주장하였다 한다. 그래서 결국 공포가 죄를 받았다.《後漢書 卷70 孔融列傳》 인성군 공(仁城君珙) 선조의 후궁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인 이공(李珙, 1588~1628)으로, 1625년(인조3) 이괄(李适)의 난 때 잡혀 들어온 자들이 모든 혐의를 이공에게 뒤집어 씌워 강원도 간성(杆城)에 안치되었다가 어머니 민씨의 병이 위독한 것을 이유로 석방되었으나 1628년(인조6)에 유효립(柳孝立) 등이 대북파의 잔당을 규합하여 모반을 기도할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다시 진도(珍島)에 유배되었고 자결을 강요받아 죽었다. 《仁祖實錄 3年 2月 25日, 4年 11月 1日, 6年 1月 21日ㆍ5月 14日》 《仁祖實錄 6年 5月 14日》 《承政院日記 英祖 5年 3月 16日》 큰 비석[大碑] 〈승평부원군김공신도비명(昇平府院君金公神道碑銘)〉을 말하는 것으로, 《송자대전(宋子大全)》 160권에 실려 있다. 치발(薙髮) 앞머리는 짧게 깎고 뒷머리는 땋아서 뒤로 늘어뜨린 변발(辮髮)로, 청나라 만주족의 풍습이다. 숭정(崇禎)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군신복의(君臣服議) 주희(朱熹)가 1187년 고종(高宗)의 상(喪) 때 지은 것으로, 군왕(君王)의 상중(喪中)에 임금과 신하의 복제(服制)에 관해 서술한 것이다. 《晦庵集 卷69 君臣服議》 3년 …… 않는다 《논어》 〈학이(學而)〉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행실을 살피니, 3년 동안 아버지가 행해 온 도를 고침이 없어야 효라고 말할 수 있다.〔子曰: '父在, 觀其志; 父没, 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삼학사전(三學士傳) 1671년(현종12)에 송시열(宋時烈)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척화를 주장하다 청나라에 잡혀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한 것이다. 《宋子大全 卷213 三學士傳》 윤선거는 …… 사람이다. 병자호란 때 윤선거는 어머니, 부인 등 가솔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란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李氏)는 자결하였으나 본인은 사절(死節)하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부친과 함께 죽겠다고 핑계를 대며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한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장(架葬)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에 우선 임시로 매장을 하여 두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가장(假葬)이나초빈(草殯)과 같은 말이다. 남공 구만(南公九萬)의 …… 막혔다 《약천집(藥泉集) 제13 노릉신씨추복의(魯陵愼氏追復議)》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온릉(溫陵) 중종의 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호(陵號)이다.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그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燕山君)의 처남으로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다가 1739년(영조15)에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었고, 묘소는 온릉(溫陵)으로 추봉되었다. 계성사(啓聖祠) 대성전(大成殿)에  모신 다섯 성인의 아버지, 즉 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의 아버지를 추존하여 모신 사당이다. 중궁(仲弓) 공문 사과(孔門四科)에서 덕행(德行)으로 거론되는 염옹(冉雍)의 자이다. 《논어(論語)》 〈옹야(壅也)〉에서 공자는 중궁에 대해 논하기를, "얼룩소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바르면 비록 희생으로 쓰지 않으려 한다 해도 산천의 신들이 내버려두겠는가.〔犂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라고 하여 그의 아버지의 행실에 비해 그의 덕행이 매우 훌륭하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는데, 한 것이다. 상식(上食) 삼년상을 지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영좌(靈座)에 음식을 차려 놓고 곡을 하는 것을 말한다. 광무(光武)의 …… 기재하였으니 1907년의 연호를 8월 12일을 전후로 광무 10년과 융희 1년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을 말한다. 광무는 고종의 연호로 1897년(고종 34) 8월 17일부터 순종에게 양위한 1907년 8월 11일까지 사용하였으며, 융희는 순종의 연호로 1907년 8월 12일에 공포하여 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 사용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방필(洪邦弼)의 …… 막았으니 《국역 숙종실록 36년 10월 19일》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지금 …… 것은 《국역 숙종실록 45년 4월 30일》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김창집(金昌集)과 …… 것 《국역 경종수정실록 1년 8월 20일》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등이 저사(儲嗣)를 세우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 …… 정하고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1721년(경종1) 8월 20일에 올린 상소를 계기로 같은 날 대신들이 청대하여 입시한 자리에서 인원황후(仁元王后)의 밀지(密旨)를 개봉하며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기로 결정한 일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景宗 1年 8月 20日》 이 …… 것이다. 왕세제의 책정이 사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경종의 노여움을 받아 신문(訊問)을 받았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국역 경종수정실록 1년 8월 23일》 중전(中殿) 어유귀의 딸이 경종(景宗)의 계비(繼妃)인 선의왕후(宣懿王后)로, 어유귀의 딸이다. 소목(昭穆)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이르는 말로, 시조의 1세(世)를 가운데 모시고 2ㆍ4ㆍ6세를 왼쪽 줄인 소에, 3ㆍ5ㆍ7세를 오른 줄인 목에 모신다. 세제(世弟)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가리킨다. 삼종(三宗)의 혈맥(血脈) 효종(孝宗)ㆍ현종(顯宗)ㆍ숙종(肅宗) 세 임금의 정통을 이은 혈손을 말한다. 대비(大妃) 숙종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인원왕후(仁元王后)로, 경종이 즉위한 이후에 왕대비가 되었다. 1721년(경종1) 8월 20일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로 삼을 때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主上)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는 언찰(彦札)의 하교를 내려 지지하였다. 《국역 경종수정실록 1년 8월 20일》 신사년 옥사 1701년 인현왕후를 모해한 장희빈(張禧嬪)이 사사(賜死)되고 그와 관계된 족당(族黨)이 귀양 간 사건을 말한다. 왕도로 …… 않겠는가 《영조실록 영조 대왕 행장(行狀)》에 보인다. 단경왕후(端敬王后)의 …… 거행되었으니 단경왕후는 중종의 원비(元妃) 신씨(愼氏)를 말하고, 명릉은 숙종(肅宗)과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ㆍ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으로, 여기서는 숙종을 가리킨다.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연산군의 처남인 친정아버지 신수근(申守勤)이 중종반정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살해된 뒤에 역적의 딸이라 하여 공신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숙종 때에 신씨의 복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예에 합당하지 않는 점이 있다 하여 이루어지 못하다가 1739년(영조15)에 복위(復位)되어 시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였다. 《中宗實錄 1年 9月 2日, 9日》 《肅宗實錄 24年 10月 24日》 《英祖實錄 15年 3月 28日》 효순빈(孝純嬪) 1715~1751.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부인으로, 뒤의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하여졌고, 죽은 뒤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효장세자가 10살에 요절하여 소생은 없었으나 1776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장남(뒤의 정조)을 입양 받아 승통세자빈(承統世子嬪)의 호를 받았고, 정조의 즉위로 왕비로 추존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암의 …… 복의(服議) 1659년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아들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두고 벌어진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송시열이 효종을 적장자가 아닌 서자(庶子)로 간주하여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이 타당하다고 주장한 의론을 말한다. 《宋子大全 獻議 大王大妃服制議》 단지 …… 것 《국역 영조실록 28년 7월 27일》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효종의 비인 덕수 장씨(德水張氏)이다. 임금이 …… 것이다 《국역 영조실록 32년 윤9월 5일》에 보인다. 기해년 …… 의론 기해년(1659)에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제에 대해 우암 송시열이 《의례(儀禮)》 〈상복(喪服) 참최(斬衰)〉의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서 언급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네 가지 경우를 들어 기년복을 주장한 것을 말한다. 네 가지 경우는, 첫째는 '적(嫡)이고 친아들이지만 적통을 계승하지 못하는 경우[正體而不得傳重]'로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를 주관할 수 없는 경우이고, 둘째는 '승중은 하였지만 적도 아니고 친아들도 아닌 경우[傳重非正體]'로 서손(庶孫)이 후사(後嗣)가 된 경우이고, 셋째는 '친아들이기는 하지만 적이 아닌 경우[體而不正]'로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경우이고, 넷째는 '적이기는 하지만 친아들이 아닌 경우[正而不體]'로 적손(嫡孫)을 후사로 삼은 경우이다. 《儀禮注疏 卷29 喪服 賈公彦疏》 왕후가 …… 조문하였다 왕후는 영조의 정비(正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이고, 정치달은 영조에게 가장 깊은 사랑을 받았던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부마이다. 정치달의 부고 소식이 들어오고 뒤이어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의 손을 붙잡고서 "경들은 이 가슴속의 슬픔을 이해하여 한 번 덜 수 있게 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여 정치달의 상에 조문할 뜻을 보이고 이를 만류하는 많은 신하들을 체차시키며 연영문(延英門)으로 나갔다가 밤 4경에 궁궐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국역 영조실록 33년 2월 15일》에 보인다. 영조 …… 있었으니 이와 관련된 내용이 《국역 영조실록 33년 1월 19일》에 실려 있다. 한 무제(漢武帝)가 …… 삼았다 여태자는 무제의 장남인 유거(劉據)로, 여는 그의 시호이다. 무제 말년에 간신 강충이 무제 승하 후에 태자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무제가 병든 틈을 타서 궁중에 나무 인형을 묻어 두고 "상의 병환은 무고(巫蠱)가 빌미가 되었습니다."라고 무고하자, 무제가 강충을 사자(使者)로 삼아 무고옥(巫蠱獄)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태자가 강충을 죽이고 군사를 동원해 5일간 장안성(長安城)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에 무제는 태자가 반란한 것으로 알고 잡아 죽이게 하니, 태자는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뒤늦게 무고임을 알게 된 무제는 강충의 집안을 멸족하고 죽은 태자를 불쌍히 여겨 사자궁(思子宮)을 짓게 하고 귀거망사지대(歸去望思之臺)를 호숫가에 세우게 하였다. 《漢書 武五子傳》 황이재(黃頤齋) 윤석(胤錫)이 …… 것이다 이재 황윤석(1729~1791)이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이 된 때는 1776년(영조52) 1월이고, 사도세자가 죽은 때는 1762(영조38)년 윤5월이다. 《한국문집총간 이재유고(頤齋遺藁) 해제》 《국역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송역천(宋櫟泉)이 …… 받았는데 삼백적불은 《시경》 〈후인(候人)〉에 "저 소인이여, 붉은 슬갑을 찬 자가 삼백 명이나 된다.〔彼其之者 三百赤芾〕"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군주가 소인들을 많이 등용함을 비판한 내용이다. 송명흠이 1763년(영조39)에 올린 상소 내용 중에 적불(赤芾)의 비유가 외척과 근신의 중용과 탕평책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엄한 하교를 받고 전리(田里)로 방축되었다. 《한국문집총간 역천집(櫟泉集) 해제》 김약행(金若行)이 …… 것 《국역 영조실록 44년 6월 11일》에 "숭정 갑신년의 뒤로는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고,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모두 우리 동방에 있으니, 청컨대 교체(郊禘)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인조(仁祖)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라는 상소 내용이 보인다. 김건재(金健齋) 문렬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1537~1593)로, 건재는 그의 호이고, 문렬은 시호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高敬命) 등과도 협의하였다. 나주에서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여 강화도에서 관군과 합류한 뒤에 장례원 판결사(掌禮院判決事)가 되어 강화ㆍ양천ㆍ김포 등지의 적군을 공격하였으며,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하는 것을 도왔다. 진주성에서 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 촉석루에서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직 …… 한탄하였으니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14권 〈자전칭호사의(慈殿稱號私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 봉명조양(鳳鳴朝陽) 현신이 때를 만나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직간(直諫)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메에서 하도다. 오동나무가 자라니, 저 아침 해가 뜨는 동산에서 하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영조가 …… 끼쳤겠는가 고종황제가 1899(광무 3년)년에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고, 1901년에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숭하였으니,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은 것이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말이다. 순조 …… 있었다 《국역 순조실록 23년 4월 9일》에 해주(海州)의 유학(幼學) 이원배(李源培)가 "저는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9세손인데, 당내간(堂內間)에 별안간 종통을 앗아간 변을 당하였습니다."라고 호소하자, 이용(李鎔)이 "저의 10대조 문성공 이이의 증손 이후시(李厚蒔)가 아들 이계(李繼)를 낳았는데, 이계가 아들이 없이 일찍 죽고 양자로 삼을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ㆍ 문익공(文翼公) 김수흥ㆍ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ㆍ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ㆍ 문충공(文忠公) 이단하(李端夏) 등이 이후시의 종제 이후수(李厚樹)의 아들 이연(李綎)에게 선대 제사를 받들게 하자고 임금께 건의하여 지금 6, 7대에 1백 40여 년을 내려왔다."라고 반박하니, 호조에서 "당초 이연이 들어가서 봉사하게 될 때에 선정신 송시열ㆍ박세채가 고 상신(相臣) 김수흥ㆍ김수항ㆍ이단하와 상의하여 건의한 전후 사실이 모두 공사간의 문적에 실려 있고 보면, 지금 백여 년이 지나고 6, 7대를 계승한 뒤에 이원배가 바로잡아 달라고 운운한 것은 의논할 수 없으니, 모두 덮어두소서."라고 아뢴 내용이 보인다. 장릉(莊陵)과 …… 복위 장릉은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端宗)의 능호(陵號)로, 단종은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가 1681년(숙종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숙종24)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온릉은 중종(中宗) 원비(元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호로,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그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에 반대했다 하여 왕후에 오른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가 1739년(영조15)에 단경왕후로 복위하고 능호를 온릉이라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돈(王敦)이 …… 않았는데 왕돈과 왕도는 종형제 사이로 동진(東晉)을 건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왕돈이 정남대장군(定南大將軍)으로 있을 때에 공을 믿고 권세를 전단하면서 무창(茂昌)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군이 오기 전에 병으로 죽은 뒤에 부관참시(剖棺斬尸)를 당하자, 왕도는 친족을 이끌고 대죄하며 "역신(逆臣)과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습니까마는 지금 가까이 신의 친족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여 스스로 의절하여 연좌되지 않았다고 한다. 《晉書 卷98 王敦列傳》 김익순(金益淳)의 …… 것 김익순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재직 중에 난을 일으킨 홍경래 군에 항복하여 참형을 당한 인물로, 그의 손자 김병연(金炳淵)이 장원급제의 시제에서 조롱했던 인물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고서 조상을 욕되게 하여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하여 삿갓을 쓴 채 전국을 유랑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순의 이름을 초시 합격자 명부에서 삭제한 일은 《국역 순조실록 31년 3월 18일》에 보인다. 왜란(倭亂)의 구갑(舊甲) 구갑은 60년마다 돌아오는 같은 갑자를 말하는 것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로부터 240년이 되는 임진년(1832, 순조12)을 가리킨다. 이(李)ㆍ윤(尹)ㆍ박(朴)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인 이경류(李慶流, 1564~1592)ㆍ윤섬(尹暹, 1561~1592)ㆍ박호(朴箎, 1567~1592)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상주 증연에서 왜적을 만났을 때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하여 '3종사관'으로 일컬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金)ㆍ최(崔)ㆍ황(黃)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경상우도 병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충청 병사 황진(黃進, 1550~1593)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1593년(선조26)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촉석루(矗石樓)에서 남강으로 투신하여 촉석루의 '삼의사(三義士)' 또는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어졌다. 각전(各殿) 왕과 왕비, 왕대비, 세자 등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회수(回晬)ㆍ회근(回巹)ㆍ회방(回榜) 회수는 회갑과 같은 말로 태어난 지 예순 돌이 되는 날을, 회근은 혼인한 지 예순 돌이 되는 날, 회방은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된 날을 이르는 말이다. 경평군(慶平君) 호(晧) 이세보(李世輔, 1832~1895)로, 1851년(철종 2) 풍계군(豊溪君) 이당(李塘)의 양자가 되어 이호(李晧)로 개명하였고, 뒤에 다시 이인응(李寅應)으로 개명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혼미했던 철종 때의 종친으로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함께 조정에서 가장 뚜렷한 인물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록 …… 없다 《대학장구》 전 10장에 "국가에 어른이 되어 재용을 힘쓰는 자는 반드시 소인으로부터 시작되니, 저 소인으로 하여금 국가를 다스리게 하면 천재(天災)와 인해(人害)가 함께 이르러 비록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나라는 이(利)를 이롭게 여기지 않고, 의(義)를 이롭게 여긴다.'라고 하는 것이다.〔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小人之使爲國家, 災害必幷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보흠(甫欽) 底本에는 ?欽甫?. 오기(誤記)로 보아 수정. 表藍 底本에는 ?表濫?. 《남계집(藍溪集)》에 근거하여 수정. 藥 底本에는 없음. 《하서집(河西集)》에 근거하여 보충. 以調養之 底本에는 없음. 상동 則儒釋 底本에 없음. 《남명집(南冥集)》 제2권에 근거하여 보충. 三 底本에는 ?二?. 《명조실록(明宗實錄)》 제33권, 명종 21년 10월 7일 기사에 근거하여 수정. 漢弼 底本에는 ?弼漢?. 《명종실록(明宗實錄)》 8권, 명종 3년 8월 30일 기사에 근거하여 수정. 之罪 底本에는 없음. 《명종실록(明宗實錄)》 13권, 명종 7년 11월 23일 기사에 근거하여 보충. 快 底本에는 ?決?. 《선조실록(宣祖實錄)》 10권, 선조 9년 6월 24일 기사에 근거하여 수정. 怨 底本에는 판독불가. 문맥을 살펴 보충. 許頊 底本에는 ?許瑣?.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년 기사에 근거하여 수정. 和議 底本에는 ?和意?. 일반적인 용례를 살펴 수정. 蔽 底本에는 ?弊?. 문맥을 살펴 수정. 厲 底本에는 ?勵?. 문맥을 살펴 수정. 吏 底本에는 ?夷?.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수정. 官勿與之相接 底本에는 없음. 《송자대전부록(松子大全附錄)》 5권 〈연보(年譜)〉에 근거하여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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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0 卷之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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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수덕래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李文修德來 辛酉 당신이 지은 〈맹달77)론(孟達論)〉에서 "끊임없이 배반하여 불충(不忠)한 사람이니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잘못 살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의리는 엄격하지만 지나치게 엄격하여 중(中)을 잃고 주자(朱子)의 의도를 깊이 살피지 않은 듯합니다.군자가 남을 논함에 본디 법도가 있어 그 생애 전체를 논하는 경우가 있고, 전반부만 논하는 경우가 있고, 후반부만 논하는 경우가 있으니 세 경우가 사람의 잘잘못을 가려주지는 못합니다. 맹달의 전반부는 참으로 임금을 배반하여 불충하였다고 해야 하지만 후반부는 마음을 바른 데로 돌려 죽음으로 충성한 점을 허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전체를 통틀어 논하자면 앞은 욕되었지만 뒤는 충절을 지킨 것이 맞습니다.지금 당신의 논의에서는 구분함이 없이 개괄하여 '끊임없이 배반하여 불충하였다.[反復不忠]' 4자로 그의 평생을 결단하였으니 사실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불안한 것은 화(禍)를 두려워한 데서 나왔다는 말은 당신의 논의가 옳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른 데로 돌려 목숨을 걸고 충절을 지킨 마음까지 아울러 의심한다면 그의 마음을 깊이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그 마음이 과연 끝까지 화를 두려워 한데서 나왔을 뿐이라면 위(魏)의 임금을 아첨하여 섬겨서 총애를 단단히 받아야 옳고 원수를 제거하여 후환(後患)을 끊으려고 모의해야 옳고 신성(新城)이 오(吳)와 닿았으니 오가 위를 강하게 맞서면 오로 도망가는 것이 또한 옳으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화를 피하고자 도모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쉬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몰래 모의하여 이미 배반한 임금과 피폐해진 촉에 돌아가서 만 번 죽을 상황에서 살길을 찾고자 했겠습니까?대개 그의 불안한 마음이 화를 두려워한 데서 나왔을지라도 촉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죄를 뉘우친 데서 나왔으니, 죄를 뉘우치는 것은 의리(義理)의 바른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었으므로 성이 함락될 때 목숨을 잃으면서도 절의를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주자가 이에 어찌 전날의 죄로 오늘날의 절의를 가려서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포장(褒獎)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자께서 직접 《통감강목(通鑑綱目)》의 범례(凡例)를 정하면서 "장수가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경우 '죽었다.[死之]'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의례(義例)가 정밀합니다.78)"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의도를 깊이 탐구하지 않고 사실을 자세히 구하지 않은 채 "주자께서 이 부분은 혹 잘못 보신 듯하다."라고 한다면 어찌 신중하게 생각하고 스승을 믿는 도리이겠습니까?이로 말미암아 당신께 깊이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릇 군자가 남을 책망하는 것은 자기를 책망하는 것과 다릅니다. 자기를 책망하는 경우는 지극한 선(善)에 머물고자 하기 때문에 과오를 매우 섬세하게 살피지만, 남을 책망하는 경우는 이끌어 도(道)에 이르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취할만한 선이 있으면 죄과를 뒤미처 기록하지 않아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도록 더욱 권면하였습니다. 전인(前人)이 만년에 세운 절의가 앞서의 허물을 충분히 덮을 점이 있다면 그 속에 속임수와 반역이 있다고 의심을 품어 마음을 해치고 게다가 후인들에게 권면하는 것을 막아서는 더욱 안 됩니다.여곤(呂坤)79)만 유일하게 "공정한 논의는 율령(律令)보다 엄격하고 공정하게 논의하는 사람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벼슬아치보다 엄격하니, 율령으로 원통한 바는 공정한 논의 덕분에 밝혀지지만 공정한 논의로 원통한 바는 만고에 반안(反案)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경솔히 남을 논의해서는 안 된다.80)"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외울 때마다 남을 논의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를 아울러 보내드리니 밝게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盛作《孟達論》 謂之"反覆不忠之人, 而以《綱目》爲失照勘者" 義則雖嚴, 恐過嚴失中, 而又不深悉朱子之意也. 君子論人, 自有其法, 有論其全體者焉、有論其前一截者焉、有論其後一截者焉, 三者不可得以相掩也. 孟達之前一截, 固當謂之叛主而不忠也. 後一截則不得不許其反正而死忠也. 統其全體而論之, 則先黷而後貞可也. 今盛論無所區分, 而槪以反復不忠四字, 斷其平生, 則非其實也. 至於其心不自安, 出於畏禍, 則盛論是矣. 然幷與其反正死節之心而疑之, 則未知深得其情否也. 若使其心果始終出於畏禍而已矣, 則諂事魏主以固寵可也. 謀除讐隙以絶後患可也. 新城接吳, 吳强敵魏, 逃之吳, 亦可也. 凡所以圖免禍者, 宜無不至也. 何苦而密謀通書, 歸已背之主、疲弊之蜀, 求一生於萬死之中哉? 蓋其不安之心, 雖出於畏禍, 歸蜀之心, 乃出於悔罪, 悔罪者, 義理之良心也. 惟其有是心也, 故城陷之日, 能殞身而立節也. 朱子於此安得以前日之罪, 掩今日之節 而不褒之於《綱目》也. 朱子親定《綱目》凡例曰: "將帥死節曰死之." 又嘗曰: "《綱目》義例精密." 今不深原其意而詳求其實, 乃曰: "朱子於此, 或失照勘." 則豈謹思信師之道哉? 因此而深有所仰告於高明者. 夫君子之責人也, 與責己不同, 責於己者, 欲其止於至善也, 故省過察惡, 極其纖悉: 責於人者, 欲其引而至道也, 故其人有可取之善, 則不追錄罪過, 使之有以自新而益勸, 至於前人之晩節樹立, 有足以蓋前愆者, 則尤不當致疑逆詐於其間, 以害心術, 重沮後人勸也. 呂抱[坤]獨有言曰: "淸議酷於律令, 淸議之人酷於治獄之吏, 律令所冤, 賴淸議以明之, 淸議所冤, 萬古無反案矣. 是以君子不輕議人." 每誦此言, 未嘗不兢兢乎其論人也. 幷玆奉似, 幸唯亮炤. 맹달 삼국시대 때 장수이다. 처음에는 유장(劉璋) 휘하에 있었다가 유비(劉備)에게 항복하였다. 관우(關羽)가 오나라 손권(孫權)과 전투를 벌이다가 포위되었는데도 성의 수비를 핑계로 구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비의 원한을 사서 위(魏)에 투항하였다. 위나라에서는 조비가 그를 잘 대우하였지만 그의 사후 입지가 좁아지자 다시 촉에 귀순하려고 난을 일으켰다. 결국 사마의(司馬懿)에게 간파되어 기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통감강목》……정밀합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5 〈답유자징(答劉子澄)〉에 "《강목(綱目)》 역시 약 20권 정도 수정했는데 의례가 더욱 정밀해져서 상하 약 천 여년 동안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참으로 행적을 숨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곤 원문은 '呂抱'이다. 문맥을 살펴 '抱'를 '坤'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여곤은 자 숙간(叔簡). 호 심오(心吾) 또는 신오(新吾)다. 만력 연간에 진사가 되었으나 국사를 걱정하여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문하생과 함께 학문을 탐구하고 저술에 힘썼다. 저서에 《신음어(呻吟語)》가 있다. 공정한……된다 《신음어(呻吟語)》 권2 〈수신(修身)〉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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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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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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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李▦▦道衡 己卯 《순자(荀子)》를 읽은 적이 있는데 〈궤시(佹詩)〉81)는 두루 살피지는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아 학문에 힘쓰라. 하늘이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굳이 제자들이 학문에 힘쓰라고 하여 천추(千秋)의 명운을 반드시 되돌리는 책무를 제자의 어깨에 지운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제자는 가정의 부형(父兄), 유문(儒門)의 사장(師長), 조정의 경대부(卿大夫)의 근본이니 제자가 학문을 하여 훗날 어진 부형, 어진 사장, 어진 경대부가 된다면 정치, 교술, 풍속이 모두 바르게 되어 천하가 태평해지기 때문입니다.오늘날 온 나라의 유가 자제 중 부형의 뜻을 이어 부지런히 학문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당신 한 사람 뿐입니다. 오늘날처럼 천리가 막히고 인심이 바르지 않은 적이 없고, 우리 문하에는 시비와 흑백이 분명하지 않아 간재 어른의 춘추 대의가 거의 매몰되었으니 더욱 한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때 동문(同門) 동지(同志)의 자제 중에서 당신을 얻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늘상 존대인께 축하를 드리고 이어서 그 재주를 제가 지닌 것처럼 좋아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아, 축하드리고 좋아하는 것이 어찌 사사로운 마음으로 하였겠습니까? 한마디로 사문과 세도를 위하여 장래에 보탬이 있으리라 바라니 당신께서는 10배는 더 힘쓰소서. 덕으로 자기를 이룬 자가 드러나 쓰인다면 가까이는 한 가문부터 멀리는 한 나라까지 천리를 아뢰고 인심을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고 춘추의 엄격한 공을 확고하게 할 것이니 이때가 천명이 되돌아오는 때이고 제자의 책무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깊이 아끼기 때문에 간절히 바라니 혹 장려하고 추켜올리는 예사로운 말로 알고서 소홀히 한다면 이 길고 자세한 내용이 좋은 말로 남을 기쁘게 하는82)는 결과로 가지 않겠습니까? 부디 유념하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嘗讀《荀子》, 〈佹詩〉不泛, 言"士子勉學, 天不忘也." 而必曰弟子勉學, 以千秋必返之責, 擔在弟子 肩上者 何也? 竊思之弟子者 家庭父兄、儒門師長、朝庭卿大夫之本也. 弟子有學而爲父兄、師長、卿大夫之賢者於他日, 則政治敎術風俗皆得其正, 而天下平故也. 今日全國中儒家子弟繼父兄而勉學者, 未知有幾多人乎否? 而以吾所知, 獨高明一人. 天理晦塞、人心不正, 未有若此時, 其在吾門, 則是非不明, 黑白未分, 艮翁春秋之義幾乎昧焉, 尤爲寒心, 乃以此時, 得高明於同門同志間子弟中, 豈非幸哉? 故尋常爲尊大人獻賀, 繼而有不啻若己有之之好矣. 噫, 賀之好之, 豈以私哉? 總之爲斯文世道, 而望其有補於將來也, 願高明十倍加勉. 以德成乎己者, 發而用之, 近自一門, 遠至一國, 奏天理、明人心、正是非、定春秋嚴之功焉, 則卽此是天返之日, 而塞得弟子責矣. 愛之也深故望之也切, 如或認作獎詡例語, 而少忽之, 則凡此覼縷, 不適爲好言悅人之歸乎? 千萬留省焉. 궤시 이는 《순자(荀子)》 권18 〈성상편(成相篇)〉에 보인다. 좋은……하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이 인(仁)한 이가 적다.[巧言令色, 鮮矣仁.]"라는 구절의 주석에, "말을 좋게 하고 그 얼굴빛을 좋게 하여 외면에 꾸미기를 지극히 해서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인욕(人慾)이 횡행하여 본심(本心)의 덕(德)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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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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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4 卷之二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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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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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오공 묘갈명 병서 병술년(1946) 龍隱吳公墓碣銘【幷序丙戌】 내 동문 선배인 소심재(小心齋) 황공(黃公 황종복(黃鐘復))은 식견이 바르고 덕이 충실한 순유(醇儒)이고, 그 문인인 오원홍(吳源弘)군도 독실하게 학문하는 선비이다. 어느 날 오군이 천 리 밖에서 왕고(王考)인 용은공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눈길을 걸어와 나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평소 오군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선조를 속이는 짓을 경계하는 일에 대해 마땅히 깊이 두려워할 줄 알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이 가장에 지적을 하겠는가.공의 휘는 재인(載仁)으로 초명은 인권(仁權)이고, 자는 사극(士克)이며, 용은은 호이다. 고려 낙안군(樂安君) 사룡(士龍)을 본관을 받은 시조로 삼는다. 본조(本朝)에는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척지(陟之)가 있다. 흰 옷을 입고 입시(入侍)하니 상이 귤 모양의 술잔에 술을 담아 하사하였으므로 귤배(橘盃)를 호로 삼았다. 이분이 대제학 백안(伯顔)을 낳았다.4세를 내려와 임진년(1592, 선조25)의 공신인 석성군(石城君) 련(連)에 이르러서는 묘소가 문의(文義) 구룡리(九龍里)에 있으니 자손이 이곳에서 살았다. 진사(進士) 광장(曠將)․도훈(導訓)․여필(汝弼), 현감(縣監) 달정(達挺), 진사 산두(山斗), 통덕랑(通德郞) 서옥(瑞玉),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만추(萬秋), 학생(學生) 대진(大進)․인채(仁采)를 거쳐 이기(爾起)에 이르러 청주(淸州) 오창(梧倉)의 용소리(龍沼里)로 이사하였으니 공의 7세조이다. 증조는 지운(之運), 조부는 천석(天錫), 부친은 시철(時哲)이고, 모친은 파평(坡平) 윤씨(尹氏)로 재손(再孫)의 딸이다.공은 철종(哲宗) 임술년(1862, 철종13) 3월 15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인후(仁厚)하며 지기(志氣)가 굳세고 분명하였다. 약관(弱冠) 남짓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같은 군에 사는 용암(勇菴) 김사우(金思禹)1) 공의 문하에서 도를 배웠다. 김공 역시 간옹(艮翁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의 고족제자(高足弟子)인데 매번 온화하고 공손하며 자애롭고 자상하다고 공을 칭찬하고 안부 서신이 끊이지 않았으며 가르치고 배움에 서로 신뢰하여 공의 왕부(王父)에게 귀한 손자를 얻었다고 하례하였다.공이 용암공을 따라 음성(陰城)에서 간옹을 배알하였는데 간옹이 "봉황이 천 길을 날아오른다.[鳳飛千仞]"라는 네 글자를 써서 주고, 이윽고 또 서신에서 품은 뜻이 높고 굳세다고 칭찬하여 누차 공의 집을 방문하여 친애하였다. 공도 성심으로 간옹을 섬겼는데 이 때문에 집과 전지를 구해 주선하여 거처를 옮기기까지 하였다.대개 그 아름다운 자질과 부지런히 학문하는 점은 두 스승의 기대를 받았고, 민첩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점은 사우(士友)의 칭찬을 받아 20년 동안 학문에 힘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눈에 병이 걸려 이로 인해 실명하는 바람에 독서하는 공부는 폐해지고 교유하는 자취는 끊어졌다. 그러나 학문에 힘쓰는 일념은 변하지 않고 분명하여 존양(存養)과 성찰(省察) 공부를 엄밀히 해 병이 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차이를 둔 적이 없었다.천성이 성실하고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 여름의 낮이건 겨울의 밤이건 날마다 약을 올리면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상을 치를 때는 몹시 슬퍼하여 건강을 훼손하였으며 제사할 때도 공경하기를 이와 같이하였다. 그러므로 용암공이 편지에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효성을 지녔다고 칭찬하였다.지조가 맑고 깨끗하여 안빈낙도하며 자적하여 남이 재산을 쌓아 치부(致富)하는 일을 마치 장차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처럼 보았다. 신학(新學)을 배울 학도를 모집할 때 공의 손자를 억지로 데려가니 공이 이치로 밝게 타이르고 힘써 엄하게 거절하여 마침내 흔들림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이로 인해 황공에게 귀의하게 하였으니 이 한두 가지 사례를 보면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공은 경오년(1930) 7월 2일에 졸(卒)하였으니, 오창 사적동(士蹟洞) 신좌(辛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규복(圭復)의 따님이니, 묘소는 보학현(寶鶴峴)의 자좌(子坐)로 공의 묘소에서 북쪽으로 3리 떨어진 곳이다.장남 광호(光鎬)는 공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은 면호(冕鎬)이며, 딸은 진주(晉州) 강만형(姜滿馨), 경주 김정달(金正達), 경주 이상옥(李相玉)에게 시집갔다. 손자 원홍, 원동(吳源東)은 장남 소생이고, 원달(源達)은 차남 소생이다. 외손은 강정희(姜貞熙)․강채희(姜采熙), 김우식(金宇植), 이동희(李東熙)이다. 증손 기식(麒植)은 오원동의 소생이다.아, 공은 온화한 자질을 타고났고 드러나지 않는 덕을 닦았기 때문에 이미 항상 내면에 온축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40세 이후에는 갑자기 병으로 폐하니 생각을 드러낸 저술을 대략이라도 볼 수 없는 것은 또한 형세가 그러해서였다. 이 때문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 공을 아는 자가 드물다. 이는 비록 슬퍼할 만한 듯하지만 공이 자손에게 "명리(名利)를 좇지 말고 오직 도의(道義)에 힘쓰라."라고 경계한 말을 삼가 보면 도는 보존되고 이름은 민멸되는 것이 진실로 공이 평소 스스로 원하던 일이니 또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학문에 연원이 있으니 學有淵源간재와 용암의 문하라네 艮勇之門은거하여 도를 구하였으니 隱居以求옛사람과 같은 사람이었네 古人之流덕이 한량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德不充量병에 걸린 두 눈을 어찌하겠나 柰如疾恙하늘이 마침내 보답하였으니 天終有報후손이 어질고 효성스럽다네 嗣孫賢孝 我同門先進小心齋黃公, 識正德實醇儒人, 其門人吳君源弘, 亦篤學士。日, 吳君千里雪程, 抱王考龍隱公家狀, 謁余墓文。余素信君之有得乎師傳, 其於誣先之戒, 宜知深懼, 是狀也, 吾何敢間然?公諱載仁, 初諱仁權, 字士克, 龍隱, 號也。以高麗樂安君士龍爲受貫初祖。本朝有司馬兩試陟之, 白衣入侍, 上以橘盃賜酒, 故以橘盃爲號, 是生大提學伯顔。四傳至壬辰功臣石城君連, 墓在文義九龍里, 子孫家焉。歷進士曠將․導訓․汝弼、縣監達挺、進士山斗、通德郞瑞玉、贈嘉善萬秋、學生大進․仁釆, 至爾起, 移淸州梧倉之龍沼里, 公之七世也。曾祖之運, 祖天錫, 考時哲, 妣坡平尹氏, 再遜女。公生于哲宗壬戌三月十五日, 資性仁厚, 志氣剛明。弱冠餘, 舍擧子業, 學道于同郡勇菴金公思禹之門。金公亦艮翁先生高足, 每稱公溫恭慈祥, 書問不絶, 敎學相孚, 而賀公王父得寶孫。隨勇菴謁艮翁于陰城, 艮翁寫贈"鳳飛千仞"四字, 旣又書稱所志高堅, 累訪其家而親愛之。公亦誠事艮翁, 至爲之問舍求田, 周旋移居。蓋其美質勤學, 爲二師之期待; 敏解實履, 得士友之稱道, 俛焉孶孶者二十年。不幸病目, 因致失明, 功廢於尋數, 跡斷於遊從。然勉學一念, 炳然不渝, 存省密切, 曾不以病健有間矣。天性誠孝, 親有積癠, 夏晝冬夜, 課供藥餌, 絶無倦色。居憂過慽致毁, 祭祀敬亦如之, 故勇菴書稱以過人之孝。操執淸潔, 安貧自適, 視人之居積致富, 若將浼焉。新學募徒, 强致其孫, 則理喩之明, 力拒之嚴, 竟得無擾專工, 因使依歸黃公, 觀此一二, 可推其餘矣。卒于庚午七月二日, 葬于梧倉士蹟洞辛原。配慶州李氏, 圭復女, 墓寶鶴峴子坐, 公兆北三里。男長光鎬, 先公歿。次冕鎬。女適晉州姜滿馨、慶州金正達、慶州李相玉。孫源弘、源東, 長房出; 源達, 次房出。外孫姜貞熙․釆熙、金宇植、李東熙。曾孫麒植, 源東出。嗚呼! 公稟溫然之姿, 而修闇然之德, 故旣常內而不出矣, 强年以後, 遽爾病廢, 則論著發揮之不少槪見, 亦勢然也。以是名之不彰, 知之者鮮。雖若可慽, 然竊觀公戒子孫"勿趨名利, 惟勉道義"之語, 則道存名泯, 實公平日所自願者, 又何憾焉? 銘曰: 學有淵源, 艮勇之門。隱居以求, 古人之流。德不充量, 柰如疾恙? 天終有報, 嗣孫賢孝。 김사우(金思禹):1856~1907. 본관은 안동(安洞), 자는 인부(仁父)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주성리(主城里) 인곡마을 출신으로 아버지는 김호벽(金好壁)이다. 학문이 뛰어나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저서에 《용암집(勇菴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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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농은 채공 묘갈명 병서 農隱蔡公墓碣銘【幷序】 채씨(蔡氏)가 부안(扶安)에 거주한 것은 예조 판서 충경(忠敬)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손 진사(進士) 달주(達周)가 농암(礱巖) 김 선생(金先生)2)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학문은 성(誠)과 경(敬)을 위주로 하고 효성은 신명에게 통하였으니 학자들이 "신재(新齋) 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정에서 호조 낭청에 추증하고 사림(士林)이 옹정사(甕井祠)3)에서 제향(祭享)하였다. 신재에서 5세를 내려와 지영(智永)이 있으니 군익(君益)은 자이고 농은은 호이다. 효의(孝義)와 덕과 선행을 계승하여 군자의 유택(遺澤)이 끊어지지 않았다.4)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가난하여 형과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을 앓을 적에는 극진하게 조리(調理)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자년(1876, 고종13)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어머니를 위해 관청에 나아가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곡식을 먹지 않고 온전히 가지고5) 돌아오니 사람들이 지극한 성품이라고 칭찬하였다. 중부(仲父)의 후사로 들어가서도 잘 섬겨 환심(歡心)을 얻었다. 장성해서는 힘써 밭을 갈고 또 쌀을 팔아 이득을 취하여 봉양하였으니 생모(生母)와 양부모에 모두 마음을 다하여 26년 동안 이렇게 하였다.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성심을 다하였고 부친상이 끝나기 전에 생모 상을 당했을 때도 똑같이 하였다. 또 3년 뒤에 형을 곡하였는데 조카들을 길러 장가를 보내고 분가시켰다. 뒤미처 넉넉하게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제사지낼 적에는 정성을 다하고 제수(祭需)를 풍족하게 하였으며, 본생부모의 기일에도 제수를 갖추어 보내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반드시 제사에 참석하였다. 맏조카를 위해 전지(田地)와 집을 마련해 주어 제사를 받들 원대한 계책을 세웠다. 종질(從姪)인 채동민(蔡東玟)과 함께 계(契)를 만들어 조부를 위한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선영에는 석물(石物)을 많이 세웠다. 종족에게 은의(恩誼)가 돈독하여 항상 말하기를, "서로 잘 지내고 해칠 생각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사람을 사귈 때는 공경하고 미더워 승낙하면 반드시 실천하였다. 좌도(左道)를 깊이 배척하여 갑오년(1894, 고종31) 동란(東亂 동학혁명) 때 누차 위협을 받았으나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상도(常道)를 범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비록 친하더라도 절교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절도가 있어 천금(千金)을 쌓았으나 자신을 돌보는 데는 매우 박하였다. 평소 "항심(恒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일찍 일어나 대소사를 점검하였는데 종신토록 부지런히 하고 집안이 여유롭다 하여 초심을 잊지 않았다.세제(歲除) 때마다 이웃 마을의 궁핍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헤아려 나누어 주고, 전인(佃人)을 대하고 나그네를 접대할 때는 힘써 너그럽고 후함을 위주로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각박하게 재물을 모으는 일을 마치 자신이 더럽혀질 것처럼 보았으니, 이야기 하는 자들이 태고옹(太古翁)이라고 칭하였고, 유리걸식하는 무리들도 서로 고하기를 "아무개 공은 적선하는 사람이니 나의 옷을 벗어서 보장(步障)6)을 만들어 드릴 수 있다."라고 하였다.공은 을해년(1935) 1월 7일에 졸(卒)하였으니, 본리(本里)의 전곡(傳谷) 서쪽 기슭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태어난 고종 갑자년(1864) 10월 19일부터 누린 수명은 72년이다. 병이 심해졌을 때 일일이 명을 남겼는데 "가난한 사람이 금을 빌리면 장부를 태워 정의(情誼)를 보존하라."라고 한 말이 그중 하나이다. 사람을 시켜 얼굴과 발을 씻기게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윽고 숨을 거두었으니, 바르게 임종한 일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본관은 평강(平康)이니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경평공(景平公) 송년(松年)이 공의 시조이고, 용서(龍瑞), 석의(碩義), 윤하(允夏), 홍복(弘復)이 공의 4세조이며, 의성(義城) 김경운(金景雲)이 외조부이고, 홍택(弘澤), 진천(鎭川) 송학주(宋學周)의 딸, 평택(平澤) 임상하(林相夏)의 딸이 공의 본생부모이다. 임씨는 열행(烈行)이 있었고 공을 낳았다.공의 사람됨은 소탈하고 진실하여 겉치레가 없었다. 성심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부지런히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후하게 남을 대하고 개결하게 처세한 것은 한결같이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응당 해야 할 일을 행하고 애당초 목적을 두고 한 적이 없으니, 이는 대개 천성이 그러한 것이다. 또한 학문할 겨를도 없었으니, 그렇다면 이는 바로 "나는 반드시 그가 학문을 했다고 할 것이다."7)라고 한 자하(子夏)의 말에 해당하는 분이다. 그러나 가문이 어진 데에는 자연히 그러한 이치가 있으니 신재의 효성과 학문을 이어받은 것이고, 나의 말은 또한 옛사람이 '근본이 있다.'라고 한 뜻이다.공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병호(炳浩)의 딸을 맞이하여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동연(東淵)은 문장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차남 동건(東建)은 바로 지금 묘갈명을 청한 사람이다. 딸은 여산 송영화(宋榮化), 경주(慶州) 이창우(李彰雨), 김해(金海) 김근배(金根培), 전주(全州) 이이관(李以錧)에게 시집갔다.공은 소싯적에 학문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힘을 다해 자식을 가르쳤으니 동연이 죽은 뒤에는 다시 동건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아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도록 명하였다. 집안일을 계승할 수 있도록 면려하여 허물이 있으면 번번이 "너는 명색이 학문을 하면서 도리어 이렇게 하느냐?"라고 나무랐다. 그러나 종전의 가규(家規) 가운데 완전히 좋지는 못한 것을 고쳐 예를 따르기를 청하면 공은 또 흔연히 허락하였다.항상 "나는 집안일을 맡고 있으니 너는 학문에 힘쓰라. 학문은 지극한 보배이다."라고 경계하고, 또 "분수와 검약함을 지키고 재화를 불리기를 도모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남을 대할 때도 간곡하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자식을 부유하게 하는 방법은 책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덕과 행실 외에 식견도 매우 높았다. 동건은 마땅히 덕을 완성하고 어버이를 현양(顯揚)하기를 그쳐서는 안 된다.공의 사후 6개월이 지나 동건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염조(念祖)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공이 평소 손자를 보고 싶어 했던 바람에 비로소 부응한 것이다. 나는 "덕이 있는 자는 후손이 번창한다."라고 들었는데 아마 하늘의 보답이 이제 비로소 시작되어 무궁할 것이다. 나는 이미 누차 공을 배알하였고 동건도 신중한 사람이라 그 가장(家狀)이 믿을 만하기에 가장을 살펴보고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아름다운 자질 얻기 쉽지만 美質易得지극한 도에 대해 말하였으니8) 對至道言아, 공처럼 현명한 분이 嗟公之賢어찌 세간에 많으리오 豈多世間저 거짓된 학문을 일삼는 자들은 凡厥僞學공을 보고 부끄러워 죽으리니 視公愧死비석에 공의 행적 새겨 鐫之于石오늘날의 선비에게 고하노라 以告今士 蔡氏之居扶安, 始自禮曹判書忠敬。其後進士達周, 師事礱巖金先生, 學主誠敬, 孝通神明, 學者稱"新齋先生"。朝家贈地部郞, 士林享甕井祠。新齋五世, 而有諱智永, 君益, 其字, 農隱, 號也。孝義德善, 有所承襲, 而君子之澤, 有不斬矣。公幼失怙, 貧甚, 與兄奉母。母淹病, 極其調養, 漁樵不懈。丙子大荒, 爲母赴官, 賑飢不食, 完錢・(全)而歸, 人稱其至性。出系仲父, 善事得歡心。及長力田, 又貿米取羡以爲養, 所生所後, 咸盡心焉, 如此二十六。居外憂盡誠, 未畢, 遭生母喪亦然。又三年哭兄, 撫育諸姪, 娶婦析箸。追恨養親不贍, 及祭, 殫誠致豊, 本生親忌, 備送粢牲, 風雨必進參。爲長姪立田屋, 爲奉祀遠計。與從姪東玟樹契, 置祖考祭田, 先阡多竪石儀。於宗族篤恩誼, 常曰: "相好無猶。"交人敬信, 有諾必踐。深斥左道, 甲午東亂, 屢經威脅, 竟不動。有犯常作惡者, 雖親, 絶之。理家有節, 致累千金, 自奉甚薄。雅言"無恒心非人", 早起點檢巨細, 終其身以勞, 不以贏饒忘其初。每歲除, 鄰里艱乏者, 量分以穀, 待佃人接賓旅, 務主寬厚, 視世之刻薄聚財者, 若將浼焉, 談者稱太古翁。流丐之徒, 亦相告曰: "某公積善人, 可脫吾衣作步障。"卒於乙亥正月七日, 葬於本里傳谷西麓某坐原。距其生高宗甲子十月十九日, 壽七十二。病革, 遺命歷歷, "貧者借金, 焚簿存誼", 其一也。使人頮面洗足, 更新衣, 已而屬纊, 其臨終之正, 亦異於衆矣。系出平康, 高麗太師景平公松年, 其上祖; 龍瑞、碩義、允夏、弘復, 其四世; 義城金景雲, 其外祖; 弘澤、鎭川宋學周女、平澤林相夏女, 其本生父母。林有烈行, 擧公。公爲人簡眞無邊幅, 其事親行己接物處世之誠勤厚介, 一用實心去行當然, 初無有所爲而爲者, 蓋天性然也, 亦不暇乎問學, 則乃子夏所稱"吾必謂之◀(學)"者。然而世類之賢, 自有其理, 承襲乎新齋孝學者, 余之言亦古人有本之意也。公娶礪山宋氏, 炳浩女, 生二男四女。長東淵, 有文, 早歿。次東建卽今請文者。女礪山宋榮化、慶州李彰雨、金海金根培、全州李以錧。公恨少失學, 致力敎子。旣喪東淵, 復以施東建, 命受學艮齋田先生門。勉以克家, 有過輒責之曰: "汝名爲學問, 而乃爾耶?" 請改先規之未盡善者從禮, 則又欣然許之。常戒之曰: "吾在幹家, 汝則勉學。學乃至寶。" 又曰: "持分守約, 勿營殖貨。" 對人亦眷眷言: "父之厚子, 無如以書。" 是其質行之外, 見識又煞高矣。此在東建, 宜成德顯親, 不但已也。公歿六朔, 生一子名念祖, 始副公平日見孫之願。吾聞有德者昌後, 意者天報之方始而無窮也。余旣累拜公, 東建且謹愼人, 其狀爲可信, 乃按狀而爲之銘。美質易得, 對至道言。嗟公之賢, 豈多世間? 凡厥僞學, 視公愧死。鐫之于石, 以告今士。 농암(礱巖) 김 선생(金先生):김택삼(金宅三, 1619~1703)으로 농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용(季用)이다. 주부(主簿)를 지냈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능통하였으며, 부안의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옹정사(甕井祠):옹정서원으로, 1694년(숙종2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생명(崔生明), 최계성(崔繼成), 손홍적(孫弘積), 김석량(金錫良), 최활(崔活), 최명룡(崔明龍), 김단(金湍), 채달주의 위패를 모셨다. 1778년(정조2)에 중건하였다가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유허지에는 팔현(八賢)의 위패매안기념비만 남아 있다. 군자의……않았다:《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의 은택도 5세가 지나면 끊어진다.[君子之澤 五世而斬]"라고 하였는데, 채지영은 신재로부터 5세가 지났는데도 선대와 똑같이 효의와 덕과 선행을 지녔다는 말이다. 온전히 가지고:원문은 '完錢'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錢'을 '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보장(步障):귀족들이 출행할 때 바람과 먼지를 막기 위해 사용하던 이동식 가리개이다. 나는……배웠다:원문은 '吾必謂之'이다.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근거하여 '之' 뒤에 '學'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우하면서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고, 부모를 섬기면서 자기의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면서 자기의 몸을 바치고, 붕우와 사귀면서 말하되 신의가 있으면 그가 비록 학문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가 학문을 했다고 할 것이다."라는 자하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아름다운……말하였으니:《논어집주(論語集註)》 〈공야장(公冶長)〉 십실지읍 장(十室之邑章)의 주석에 "아름다운 자질은 얻기 쉬우나 지극한 도는 듣기 어렵다.[美質易得 至道難聞]"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채지영이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을뿐더러 학문 역시 지극하였다는 뜻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연심재 전공 묘갈명 병서 을유년(1945) 鍊心齋田公墓碣銘【幷序乙酉】 옛날 고려 말에 담주(潭州 담양(潭陽)) 전씨(田氏)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과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두 선생이 나와 세상에 크게 이름을 드러내었다. 500년이 지나 한말(韓末)에 이르러 야은의 후손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있으니 덕이 높고 학문이 발라 대종장(大宗匠)이 되었고, 경은의 후손에 연심재 거사(居士)가 있으니 순수한 덕과 실지의 학문으로 간재의 문하에서 칭송을 받았다. 동종(同宗)의 사제(師弟)가 비록 지위와 덕에는 차이가 있으나 모두 선조의 공렬을 빛내었으니, 아, 이는 칭송을 받을 만하다. 어느 날 연심재의 윤자(胤子) 전안곤(田安坤)이 아버지를 위해 신헌(愼軒) 이공(李公 이기환(李起煥))이 지은 가장을 얻어 나에게 묘갈명을 짓게 하니 정의(情誼)상 사양하지 못하였다.공의 휘는 희순(熙舜)이고, 자는 사준(士濬)이다. 윗대에 대대로 공경(公卿)이 있었다. 경은의 7세손인 직장(直長) 귀(龜)가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처음으로 김제(金堤)의 죽산(竹山)으로 이사하여 거처하였다. 아들인 장사랑(將仕郞) 경란(慶蘭)은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였다. 4세를 지나 가선대부(嘉善大夫) 화규(和圭)가 부안(扶安)의 후산(后山)으로 이사하였는데, 공에게는 6세조이다.증조부 상직(相稷)은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다. 조부 복수(福秀)는 간옹(艮翁)이 찬(贊)을 지어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부친 제풍(濟豊) 역시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모친은 부안 김씨로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손인 용학(龍學)의 따님으로, 간옹이 여사(女士)라고 칭송하였다.공은 고종 정묘년(1867, 고종4) 2월 14일에 태어났다. 7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슬퍼하였다.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는데, 무자년(1888) 흉년 때 호중(湖中)에서 쌀을 지고 수천 리 길을 지나 돌아왔으나 어머니가 작고한 지 이미 10여 일이 지났으니 곡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어 집안일을 담당했기에 학업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총명함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문리(文理)가 일찍 성취되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300리 길을 지나 폐백을 가지고 선생을 배알하니 선생이 매우 아껴 호를 내려 주고 명(銘)을 지어 권면하였다. 공은 사문(師門)에 귀의한 때부터 오로지 실지에 힘을 쏟았다.투장(偸葬)을 당해 산지(山地)를 빼앗긴 선묘(先墓)가 있었는데 누차 영읍(營邑)에 호소하여 마침내 투장한 무덤을 파고 산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담양에 있는 선조의 유허(遺墟)는 종중(宗中)의 위임을 받아 비석을 세우고 비각(碑閣)을 지어 3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부모의 신주(神主)를 추후에 만들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족친(族親)에게 가규(家規)를 세워 은의(恩誼)를 돈독히 하였으며, 부부가 공경히 대하기를 손님처럼 하여 출입할 적에 반드시 서로 절하였다. 공의 학문은 먼저 이륜(彛倫)을 독실히 행하는 것이었으니 대체로 이와 같았다.고금의 서적은 한번 보면 곧바로 기억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았고, 복서(卜筮), 성명(星命), 풍수(風水)에 대한 학문도 모두 능통하였으니 진실로 박식하였으나 교만하거나 뽐내는 뜻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과 논변할 때는 자기가 이기기를 구하지 않았다.평소에는 말을 빨리하거나 다급한 안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니 비록 자기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분노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우(親友)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규계(規戒)하면서도 환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기꺼이 따랐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좋은 인상으로 대하여 정성스럽게 일러 주었기 때문에 열복(悅服)하였다.대개 공은 덕성이 순박하고 심기(心氣)가 화평하여 온화한 봄날 같은 기상이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보는 자는 심취하고 말을 듣는 자는 분노가 풀려 공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악을 미워하는 것은 엄하여 세력에 의지하여 남을 배척하는 자는 원수처럼 보고 상도(常道)를 범하고 사학(邪學)에 물든 자는 관계를 멀리하고 끊어 용서하지 않았으니 거의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和而不流]9)"라는 말에 해당하는 분이다.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이해(利害)나 칭찬과 비난에 상관없이 힘을 다해 마쳤고 의가 있는 곳에는 비록 칼날과 화살촉이 앞에 있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으니 또한 의연히 지조가 있다고 할 만하다. 병으로 임종할 적에는 정신과 기운이 평상시와 같아서 직접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서거하였으니 계미년(1943) 3월 23일이고, 선영 아랫자리에 장사지냈다.부인은 장성 서씨(長城徐氏)로 절효공(節孝公) 능(陵)의 후손인 상철(相哲)의 따님이다.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겨,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 남편이 없었는데도 장사를 치르는 데 빠뜨리는 것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삼남은 안곤, 정곤(正坤), 성곤(成坤)이고, 삼녀는 진주(晉州) 강교수(姜曒秀), 강릉(江陵) 유재룡(劉載龍), 부안 김형태(金炯泰)에게 시집갔다. 손자 동배(東培), 갑배(甲培)는 전안곤의 소생이고, 춘배(春培), 신배(信培), 문배(文培)는 전정곤의 소생이고, 인배(仁培), 석배(錫培)는 전성곤의 소생이며, 외손 대길(大吉), 대언(大彦), 대선(大善), 대견(大堅), 대영(大永)은 강교수의 소생이고, 원종(元鍾), 해종(海鍾)은 유재룡의 소생이고, 백중(百重), 노중(魯重)은 김형태의 소생이다.아, 말세라 거짓이 늘어나는데 유문(儒門)이 더욱 심해 점점 세교(世敎)가 쇠락하고 도술이 망해가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직 공은 덕을 존숭하고 문사(文詞)를 숭상하지 않았으며 실지를 힘쓰고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 말과 행실이 서로 똑같고 마음과 일이 일치하여 조금도 겉치레를 하는 태도를 볼 수 없었다. 만약 온 나라의 인사들이 공처럼 한다면 세상과 도는 아마 거의 회복될 것이다.공이 일찍이 나에게 "근래에 아무개가 글을 지어 책을 만든 것을 보니 손수 편집하고 정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어지럽게 하고 머리를 흔들게10)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비웃은 것이다. 내가 공을 정성으로 곡할 때 공의 유고(遺稿)가 있는지 물었는데 한 편도 남은 것이 없었으니 또한 문사의 폐단을 깊이 미워한 비범하고 독특한 견해였다. 그러나 공의 시문이 또한 본래 아름답고 좋은데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지난번에 내가 스승의 무고를 변론한 일 때문에 저쪽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였는데11) 사람들은 모두 나를 나병(癩病)에 걸린 사람처럼 보고 피했으나 공만이 홀로 취하여 두 집안이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우호를 맺게 되었다.12) 이로 인하여 강유(剛柔), 완급(緩急), 과불급(過不及)의 사이에서 규계하고 권면하여 처의(處義)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기약하여 피차간에 보탬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 공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학문의 길을 몰라 차질이 많으면 누가 나에게 길을 지시해 주겠는가. 옛날과 지금을 생각해 보건대 그리움을 이길 수 없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예절로 화합하여 和以禮節표리가 일치하였네 表與裡一사람들은 어찌하여 거짓을 행하는가 人胡售僞공은 몸소 실천하였네 公則蹈實임종할 적에 바름을 얻었으니 臨終得正분명한 징험이 해처럼 밝도다 明驗如日내 말은 과장이 아니니 我辭匪溢백세 뒤에도 증명할 수 있으리 百世可質 昔夫有麗之季, 潭州田氏野隱、耕隱二先生出, 大顯名于世。閱五百年, 逮我韓末, 野隱之後, 有艮齋先生, 德尊學正, 爲大宗師; 耕隱之後, 有鍊心齋居士, 以淳德實學, 稱於艮門。同宗師生, 雖位德有殊, 而俱光祖烈。於虖! 是可以有辭矣。日, 鍊心胤子安坤, 爲其考得愼軒李公狀, 俾余銘其墓, 誼不可辭。公諱熙舜, 字士濬。上世世有公卿。耕隱七世孫直長龜, 自京畿龍仁始居金堤之竹山。子將仕郞慶蘭, 殉龍蛇亂。歷四世, 嘉善和圭, 移扶安后山, 於公六世。曾祖相稷, 有孝友行。祖福秀, 艮翁作贊稱賢。考濟豊, 亦有至行。妣扶安金氏, 文貞公坵后龍學女, 艮翁贊以女士。公以高宗丁卯二月十四日生。七歲丁外艱, 哀若成人。事母盡誠, 戊子大無, 負米湖中, 累百里而還, 則母氏下世, 已十餘日, 其哭擗慟慽之狀, 人不忍見。早孤當室, 未專課業, 然聰明過人, 文理夙就。有志爲己之學, 越十舍, 贄謁先生, 先生甚愛之, 錫號爲銘而勖之。公自歸師門, 專用力於實地。先墓遭偸塜而見奪山地者, 累訴邑營, 竟得掘冡而復地。先祖遺墟在潭陽者, 受宗中委任, 立碑建閣, 三年而完。追造考妣神主而行正祭。設規於族親, 用敦恩誼, 夫妻敬待如賓, 出入必相拜。公之學先從彝倫上篤行, 類如此。古今書籍, 一覽輒記, 久不遺忘, 卜筮、星命、風水之學, 亦無不能, 實博識也, 而絶無驕矜意。與人論辨, 不求己勝。平居無疾言遽色, 雖遭忤意人, 不發忿言。親友有過, 必規戒而不失歡, 故樂從之; 敎諸生, 接以好顔而諄諄, 故悅服焉。蓋公德性渾厚, 心氣和平, 有藹然陽春之像, 故覿容者心醉, 聽言者慍解, 不欲捨之而去。然疾惡則嚴, 憑勢擠人者, 視若仇敵; 犯常染邪者, 疏絶不貸, 庶所謂"和而不流"者。事之當爲, 不關利害稱譏, 而殫力成之; 義之所在, 雖鋒鏑在前, 不少畏㤼, 亦可謂毅然有守也。病將終, 神氣如常, 親自沐浴, 易衣而逝, 癸未三月二十三日也, 葬于先塋下坐。配長城徐氏, 節孝公稜后相哲女。事姑孝, 姑沒之日, 夫不在, 而送終無闕, 鄕里敬服。三男安坤、正坤、成坤, 三女晉州姜曒秀、江陵劉載龍、扶安金炯泰。孫東培、甲培, 安出; 春培、信培、文培, 正出; 仁培、錫培, 成出; 外孫大吉、大彦、大善、大堅、大永, 姜出; 元鍾、海鍾, 劉出; 百重、魯重, 金出。嗚呼! 末劫滋僞, 而儒門尤甚, 馴致世敎衰而道術亡, 寧不寒心? 惟公則尊德而不尙文, 務實而不近名, 言行相顧, 心事一致, 未見一毫外飾態。如使擧國人士皆如公爲, 世與道其庶幾乎!公嘗語余曰: "比見某人著書成秩, 手自編理, 令人意亂騷首。" 蓋笑之也。及余哭公象生, 問其遺稿, 則無一篇存者, 亦深憎文弊之超世獨見也。然公之詩文, 亦自佳好而不傳, 可惜也已。曩, 余以辨師誣被一邊人汙衊也, 衆皆視爲癩癘而避之, 公獨取之, 成秦晉之好。因與互相規勸於剛柔緩急過與不及之間, 期盡處義之方, 而不無彼此之益, 今公遽九原矣, 冥行多躓, 孰指我途? 俯仰今昔, 不勝感思, 而爲之銘。銘曰: 和以禮節, 表與裡一。人胡售僞? 公則蹈實。臨終得正, 明驗如日。我辭匪溢, 百世可質。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10장에 보이는 말이다. 흔들게:원문은 '騷'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搔'의 착오로 보이는데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스승의……당하였는데:스승의 무고를 변론한 일은 전우(田愚)가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김택술의 동문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유언을 무시하고 오히려 전우가 생전에 문집을 간행하려는 의향이 있었다고 하면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하자 이를 성토한 일을 말한다. 모욕을 당한 일은 오진영이 자신을 성토한 사람들을 검사국(檢事局)에 고소한 사건을 말하는 듯하다. 《後滄集 徧告同門僉公, 敬告同門諸公, 輪告同門同志》 집안이……되었다:두 집안 이 혼인으로 맺어졌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의 진(秦)나라와 진(晉)나라 왕실이 대대로 인척관계였던 데서 유래하였다. 본문 위쪽에 보이는 전희순의 셋째 사위인 부안 김형태가 김택술의 아들이므로 전희순과 김택술은 사돈 관계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숙부인 유씨 묘갈명 병서 贈淑夫人柳氏墓碣銘【幷序】 과거 장릉(長陵) 정축년(1637, 인조15)과 갑신년(1644)13) 이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의촌(義村) 김남식(金南式) 공이 존주 대의(尊周大義)를 사모하여 고창현(高敞縣)에서 고부군(古阜郡)의 모조리(毛助里)로 이사하여 은거하니, 원근에서 숭정 처사(崇禎處士)라 부르고 공이 거처하는 곳을 모의촌(慕義村)이라고 일컬었다. 공의 부인인 증 숙부인 유씨는 부덕(婦德)을 갖춘 현명한 분으로 공의 청덕(淸德)을 도와 이루었으니, 모조는 숙부인의 기천리(淇泉里)14)이다.유씨는 고흥(高興)의 대족(大族)으로, 가계(家系)는 영밀공(英密公) 청신(淸臣)에게서 나왔다. 건국 초기에 사직(司直) 저(渚)가 정읍(井邑)에서 고부로 이사하였다. 3세를 내려와 처사 호(滸)가 역학(易學)으로 영릉(寧陵 효종(孝宗))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 분이 유씨의 부친이다. 모친은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주(珘)의 따님이다.유씨는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 1월 9일에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질이 있고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글에 능통하고 예를 배웠다. 장성해서 의촌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공이 은거하여 스스로 폐인이 되어 독서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숙부인이 집안일을 다스리면서 항상 내칙(內則)을 준수하여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것이 모두 도리에 맞으니 종족이 칭송하였다. 공이 어버이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하면서 3년 동안 집에 머물지 않을 때는 더욱 삼가고 부지런히 하여 공으로 하여금 애도에 전념하고 집안일에 대한 염려를 끊게 하였다.숙종(肅宗) 계해년(1683, 숙종9) 남편 상을 당했을 때 이미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상을 마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만년에 두 아들이 모두 죽자 과부가 된 며느리와 아버지를 잃은 손자를 잘 보살펴 두 아들이 죽은 뒤의 일을 알맞게 처리하였다. 무인년(1698) 12월 5일에 졸(卒)하였으니, 집 뒤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의촌은 광산(光山)의 세가(世家)로 장영공(章榮公) 진(稹)의 후손이다. 선조의 덕행과 행적은 고창 전불산(殿佛山) 묘문(墓文)에 상세하다. 장남은 이성(履成)으로 호는 시은(市隱)이고,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차남은 이수(履綏)이다. 딸은 함종(咸從) 어이중(魚吏重), 영광(靈光) 정문거(丁文擧)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양자는 한광(漢光)이고, 딸은 전주(全州) 이명식(李命植), 부안(扶安) 김서(金墅)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장남은 하광(夏光)이고, 한광은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다.삼가 생각건대 옛날부터 임금과 대부(大夫)가 집과 나라를 다스려 종파(宗派)와 지파(支派)가 번창하고 국운이 영구한 데 이른 것은 대부분 후(后)와 부인의 내조로 말미암아 할 수 있었다. 지금 의촌이 살았던 세대와 300년이 떨어졌는데도 자손이 더욱 번창하고 행의(行義)를 서로 계승하여 성대하게 고부 남쪽의 명망 있는 종족이 된 이유가 어찌 숙부인의 선과 아름다움이 공과 나란하여 하늘의 복을 받아서가 아니겠는가. 이는 대서특필하여 세상에 고할 만하다.나는 김씨와 평소 친한 사람이 많아 숙부인의 행실과 사적(事跡)을 상세히 알고 있다. 지금 묘갈을 세우는 날에 그 현손(玄孫)인 인일정(引逸亭) 김성은(金性溵)이 지은 묘지(墓誌)를 살펴보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일을 돕는 의리를 담는다. 묘갈문을 청한 사람은 9세손 김재봉(金在鳳)과 김재룡(金在龍)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아, 의옹이여! 嗟義翁兮이런 현처(賢妻)를 두었으니 有是賢齊백란과 덕요15)가 伯鸞德耀광채를 서로 비추었네 其光相照옥산의 남쪽은 玉山之陽명철한 부인의 묘소이니 哲媛之藏후손이 둘러싸 살면서 雲仍環居정성으로 제사지낸다오 蒸嘗虔且산 높고 물 깊으니 山高水深남은 은택 끊어지지 않았네 餘澤不斬먼 훗날 천 년 뒤에 有來千齡어찌 나의 명을 보지 않겠는가 盍視我銘 往在長陵丁丑甲申之後, 贈通政大夫、吏曹叅議義村金公南式, 慕尊周大義, 自高敞縣隱居于古阜郡之毛助里, 遠近號以崇禎處士, 稱其居爲慕義村。而其配贈淑夫人柳氏, 內範之賢, 助成淸德, 毛助, 淑夫人淇泉里也。柳爲高興大族, 系出英密公淸臣。國初, 司直渚自井邑移于古阜。三傳而處士滸, 以易學受知寧陵而不仕, 是其考也。妣晉州姜氏, 珘女。生于天啓癸亥正月九日。有美資承庭訓, 通書學禮。長而歸義村公, 則公遯而自廢, 劬書誨人, 外無餘事。淑夫人理家, 動遵內則, 奉先率下, 咸得其道, 宗族稱頌。及公遭艱廬墓, 三年不家, 則益致謹勤, 俾公專哀斷家慮。肅宗癸亥, 當晝哭時, 已望七, 而終喪不肉。晩年, 二子俱歿, 撫寡媳孤孫, 處後事不失宜。卒于戊寅十二月五日, 葬于家後子原。義村, 光山世家, 章榮公稹後。先德事行, 詳在高敞殿佛山墓文。男長履成, 號市隱, 尤庵宋先生門人, 以孝旌閭。次履綏。女適咸從魚吏重、靈光丁文擧。長房繼男漢光, 女全州李命植、扶安金墅。次房男長夏光, 漢光出系伯父。竊惟從古君大夫治其家國, 以致宗支熾昌, 運祚永長者, 多由后夫人內贊而得之。今距義村之世爲三百年, 而子姓彌蕃, 行義相承, 菀爲阜南望族者, 豈非淑夫人之媲善匹美而受天慶福乎? 是可大書而告諸世矣。余於金氏, 多親雅素, 詳淑夫人行治, 今於樹碣之日, 按其玄孫引逸亭性溵所撰誌, 而敬爲銘, 以附相役之義。請文者九世孫在鳳、在龍也。銘: 嗟義翁兮! 有是賢齊。伯鸞德耀, 其光相照。玉山之陽, 哲媛之藏。雲仍環居, 蒸嘗虔且。山高水深, 餘澤不斬。有來千齡, 盍視我銘? 정축년, 갑신년 정축년은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淸)나라 군대에 포위를 당해 항복하여 삼전도(三田渡)에서 신하의 예를 올린 해이고, 갑신년은 명(明)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한 해이다. 기천리: 친정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죽간(竹竿)〉에 "천원이 왼쪽에 있고 기수는 오른쪽에 있도다. 여자가 시집감이여, 형제 부모를 멀리 하였도다.[泉源在左 淇水在右 女子有行 遠兄弟父母]"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백란과 덕요:백란은 후한(後漢) 양홍(梁鴻)의 자이고, 덕요는 양홍의 아내인 맹광(孟光)의 자이다. 양홍은 벼슬하지 않고 맹광과 함께 패릉산(霸陵山)에 들어가 농사와 길쌈을 업으로 삼아 지냈는데 부부가 서로 공경하여 예가 있었다. 《後漢書‧ 逸民傳 梁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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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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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유인(孺人) 김씨(金氏) 묘갈명 –병서(幷序)- 孺人金氏墓碣銘【幷序】 내가 삼가 기억해 보건대 옛날 내가 겨우 10세가 되었을 때 선군(先君)께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를 계승하였고, 시집간 여자들도 현명함과 열행(烈行)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최준수(崔焌秀) 공 배언(拜言)의 배필이 된 너의 대고모(大姑母)가 특히 그렇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기억해 보건대 최씨 어른 아무개가 선군에게 "제가 어릴 적에 종숙모(從叔母)께서 남편이 병에 걸려서 허벅다리 살을 베어 낼 때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두려워서 떨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사람이 칼에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번번이 이전 일이 생각나서 기가 요동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선군이 말씀하신 너의 대고모와 아무개 어른이 말씀하신 종숙모가 바로 이 유인 김씨이다. 나는 나이가 어려 무지할 때였는데도 진실로 이미 선군 및 최씨 어른의 말씀을 마음으로 이해하였고, 장성해서는 이전에 듣지 못한 유인의 행실과 사적에 대해 더 듣게 되었다.대저 사람에게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면 비록 시대가 멀고 교분이 소원하더라도 그를 위해 포양(褒揚)하고 논찬(論贊)하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유인과 친족이고 시대가 가까움에 있어서이겠는가. 이에 글 한 편을 지어 후세에 전해 흠모하는 마음을 담으려고 한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유인의 손자 최정렬(崔政烈)이 그의 선고(先考)가 지은 가장(家狀)과 송사(松沙) 기공(奇公 기우만(奇宇萬))이 기술한 유사(遺事)16)를 나에게 보여 주고 묘갈명을 청하니, 나는 이에 평소의 뜻을 이루게 된 것을 기뻐하여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한다.유인은 태어나면서 몸집이 풍만하고 컸으며 단정하고 장중하였다. 15세에 부친상과 조부 상을 함께 당했을 때는 슬픔을 극진히 하고 궤전(饋奠)을 정성스럽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최공에게 시집가서는 최공이 병을 많이 앓아 누차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유인의 정성스러운 간호에 힘입어 번번이 효험이 있었다.훗날 다시 병이 심해져 이미 혼절하였는데 유인이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었으나 효험이 없자 다시 손가락을 째어 또 똑같이 하니 점차 의식이 깨어나고 기가 회복되었다. 이에 오른쪽 허벅다리를 베어 탕을 끓여 올리니 회생하였다. 이윽고 공이 다시 위태로워지자 왼쪽 허벅다리를 베어 똑같이 하니 완쾌되어 10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50세에 남편 상을 당하고 장지가 20리 밖에 있었는데 여묘(廬墓)하려고 이미 상차(喪次)를 만들었으나 다른 사람이 "부인이 여묘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시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한 것을 항상 한으로 여겨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으니, 1년 동안 자주 뵙고 속절(俗節)과 생신에도 반드시 옷과 음식을 갖추어 올려 노년에 이르러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고비(考妣)의 기일에는 제물(祭物)을 마련해 보냈다. 아들 광각(光珏)이 요절하자 아내 고씨(高氏)가 수절(守節)하였는데 유인이 이를 가엾게 여겨 더욱 은의(恩誼)를 베풀고 고씨도 효성스럽고 공손하게 섬기니 고부(姑婦)가 서로 마음이 맞아 매우 사이가 좋았다. 광각은 최공의 전 배필의 소생이고 며느리도 시어머니보다 겨우 몇 살 어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유인이 며느리를 잘 대우하여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더욱 삼간 것이다."라고 하였다.식견이 통명(通明)하여 사리(事理)를 말하면 대체(大體)를 알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의(義)에 맞는 견해를 잃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옛날의 서적이나 역사서에 기록된 어질고 효성스러운 인물의 일과 행실을 말하면 기쁘게 듣고 마음에 잊지 않았으며, 우리나라 명문가와 훌륭한 사람들의 계파에 이르러서도 모두 상세히 설명하였다.재산이 자못 넉넉하였는데 만년에 이를 담당할 사람이 없어서 전곡(錢穀)의 수량과 길사와 흉사에 드는 비용을 직접 관리하고 살펴 정연하게 조리가 있었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유인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리는 이웃 마을 사람이 10여 집이었다. 비복(婢僕)17)에게도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고 고르게 옷과 음식을 주니 모두 부인을 경애하고 우러르며 경외하여 복종하였다. 고종 정해년(1887, 고종24) 12월 26일에 졸(卒)하였으니, 태어난 순묘(純廟) 신사년(1821, 순조21) 8월 19일부터 누린 수명이 67년이다. 묘소는 옥산(玉山) 뒤 해좌(亥坐) 언덕에 있다.김씨의 본관은 부령(扶寧 부안(扶安))이다.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구(坵)는 도덕과 문장으로 고려 때 이름이 드러났다. 고려 말기에 군사(郡事) 광서(光叙)는 망복(罔僕)의 절개18)를 지켰다. 본조에 들어와 매죽당(梅竹堂) 종(宗), 죽계(竹溪) 횡(鋐)은 도학(道學)으로, 참봉(參奉) 정길(鼎吉)은 충의(忠義)로 모두 세상에 알려졌으니, 유인의 8세 이상 선조이다. 조부 인성(麟成)은 효성으로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부친 유죽헌(幽竹軒) 석규(錫圭)는 비범한 자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석현(錫顯)의 따님으로 도봉(道峰) 세정(世貞)의 후손이고 효부(孝婦)로 알려졌다. 대개 유인 같은 분이 태어난 데에는 진실로 가문과 관계가 있다.최씨는 전주(全州)의 명망 있는 종족으로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다. 본조의 증(贈) 참판 덕촌(德村) 희정(希汀)은 학행(學行)과 충훈(忠勳)이 있었고, 그 후손은 대대로 충효를 서로 계승하였다. 유인은 덕촌의 12세손부(世孫婦)가 되었으니 유인이 시집간 곳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다.아들 한 사람과 딸 네 사람을 낳았는데 아들은 병성(秉星)이고, 사위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인 행주(幸州) 기우번(奇宇蕃),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울산(蔚山) 김요경(金堯敬),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인 연일(延日) 정해심(鄭海心), 하서의 후손인 울산 김만주(金晩柱)이다. 손자는 광각의 양자로 나간 경렬(暻烈), 희열(喜烈), 정렬(政烈), 진열(鎭烈), 성렬(成烈), 승렬(承烈)19), 호열(鎬烈)이다. 외손은 기준도(奇駿度), 김흥중(金興中)․김현중(金玄中)․김택중(金宅中), 정영원(鄭榮源)이다.아, 유인의 실제 행적은 유사와 천장(薦狀) 및 《삼강록(三綱錄)》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진실로 나 같은 친족의 말은 필요 없다. 오직 여러 번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다리를 베어 낸 일은 남편을 섬기는 큰 절조인데 선배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헤아려 보면 또 도를 아는 군자는 어떻게 볼지 모르겠다.그러나 내 생각에 이 말은 자식이 이효상효(以孝傷孝)20)하는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는 의(義)를 위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未亡人)이라 칭하니, 이는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했다는 말이다. 죽는 것도 오히려 당연한데, 하물며 남편을 위해 몸은 훼손해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어버이를 위하는 것과 남편을 위하는 것의 차이를 정할 수 있으며, 유인의 행실이 순수했음을 볼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위해 열행 있었으니 孝親烈夫이것이 유인의 큰 행적이네 是其大者은혜로운 덕과 밝은 식견 지녔으니 德惠識明온갖 선이 갖추어졌도다 衆善備也옛날의 명철한 부인과 비교하면 視古哲媛유인은 이러한 반열에 들리라 若是之班누가 묘갈명을 지었는가 誰其銘墓이 귀손21)이 지었네 有玆歸孫행여 아첨하지 않았으니 庶不阿好내 말을 믿을 수 있으리 可信其言 澤述竊記昔甫就傅時, 先君有言, 曰: "吾家世以文學行義相繼, 女適人亦多以賢烈聞, 而近則汝大姑爲崔公焌秀拜言之配者尤焉。" 又記崔丈某氏語先君曰: "吾少日適見從叔母, 夫病刲股時, 血淋漓狀, 恐懼戰栗不已。自後見人刀傷血流處, 輒思前事, 氣爲之動。" 先君所稱汝大姑, 某丈所稱從叔母, 卽此孺人金氏。余在幼騃, 固已心識先君及崔丈語矣。及長, 益聞孺人行治之前所未聞者矣。夫人有懿行, 雖在時遠而分疎, 尙爲之欽賞而論贊, 况余於孺人, 爲屬之親時之近者乎! 思欲立一文, 傳後而寓慕者久矣。日, 孺人孫政烈, 以其先考撰家狀、松沙奇公述遺事1)示余, 而請墓銘, 余乃喜遂素志, 不辭而敘之。曰: 孺人生而豊偉端莊, 年十五遭父祖偕喪, 能盡哀慽誠饋奠, 人咸異之。及歸崔公, 崔公多病累濱危, 賴孺人誠救輒效。後復病革旣絶, 孺人斷指注血, 無效, 再裂指亦如之, 漸覺氣復, 於是割右股湯進, 回甦。已而復危, 割左股亦如之, 乃得快復以延十年之壽。五十當晝哭, 葬在二十里外, 欲廬墓, 已作喪次, 人以爲"婦人廬墓, 非禮", 遂止之。常以不逮事舅姑爲恨, 專誠事母, 一歲累覲, 俗節晬辰, 必具獻衣食, 至老不倦, 考妣諱辰, 備送粢牲。子光珏夭, 妻高氏守義, 孺人憐之, 加以恩誼, 高亦事以孝謹, 姑婦相得甚宜。光珏, 崔公前配出, 婦又少姑僅數歲, 人皆稱"孺人之善視其婦, 以致事姑愈謹"。識解通明, 談事理知大體, 遇事難決處, 不失義見。人言往古書史賢孝事行, 喜聞而心不忘, 至於我東名家先德派系, 亦皆詳說之。貲産頗饒, 而晩年無人幹當, 錢穀之數, 吉凶之費, 親自管視, 井井有條。喜施與, 鄰里待而擧火者十數家。於俾・(婢)僕, 幷施恩威, 均給衣食, 無不愛戴而畏服者。高宗丁亥十二月二十六日卒, 距其生純廟辛巳八月十九日, 壽六十七。墓在玉山後亥坐原。金氏貫扶寧。平章事文貞公坵, 以道德文章顯于麗。麗季, 郡事光敘, 守罔僕之節。本朝梅竹堂宗、竹溪鋐, 以道學; 叅奉鼎吉, 以忠義, 俱聞於世, 孺人八世以上。祖麟成, 孝聞表宅。考幽竹軒錫圭, 有異資純行, 妣礪山宋氏, 錫顯女, 道峰世貞后, 以孝婦聞, 蓋其所生固係於世類。崔氏全州望族, 文成公阿后。本朝贈叅判德村希汀, 有學行忠勳, 其後世以忠孝相承。孺人爲德村十二世孫婦, 則其所歸亦得宜矣。擧男一人、女四人, 男秉星, 女壻幸州奇宇蕃, 蘆沙正鎭孫; 蔚山金堯敬, 河西麟厚后; 延日鄭海心, 松江澈后; 蔚山金晩柱, 河西后。孫暻烈, 光珏系男, 喜烈、政烈、鎭烈、成烈、▣◀(承)烈、鎬烈。外孫奇駿度、金興中․玄中․宅中、鄭榮源。嗚呼! 孺人實蹟, 具載遺事、薦狀及《三網之錄》, 固無待乎親屬如余者之言。惟是斷指刲股, 再四而不已者, 爲事夫大節, 而揆以先輩所論不一, 則又未知知道君子作如何觀? 然余則以爲此以人子以孝傷孝者言。若婦人之於夫則主義, 故夫死, 稱未亡人, 謂其當死而不死也。死且猶當, 况於其夫, 行毁不至死之事者, 不亦宜乎? 斯可以定爲親爲夫之異, 而見孺人之行純也。銘曰: 孝親烈夫, 是其大者。德惠識明, 衆善備也。視古哲媛, 若是之班。誰其銘墓? 有玆歸孫。庶不阿好, 可信其言。 송사(松沙)……유사(遺事):《송사집(松沙集)》 권49에 실려 있는 〈유인 김씨 유사(孺人金氏遺事)〉를 가리킨다. 비복(婢僕):원문은 '俾僕'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俾'를 '婢'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망복(罔僕)의 절개: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개를 뜻한다. 상(商)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승렬(承烈):원문은 '▣烈'이다. 《송사집》 〈유인 김씨 유사〉에 근거하여 '烈' 앞에 '承'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효상효(以孝傷孝):효성이 지극한 나머지 부모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지나치게 하여 병이 나거나 죽는다는 뜻이다. 귀손:여자가 자신의 조카의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 《爾雅 釋親》 孺人金氏遺事 松沙先生文集卷之四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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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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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유인 최씨 묘갈명 병서 孺人崔氏墓碣銘【幷序】 부인이 목숨을 버려 절조를 수립하는 것을 열행[烈]이라 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절하는 것을 정절[貞]이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절조를 수립하는 열행만 칭송하고 수절하는 정절이 어려운지 모르며, 사별한 뒤에 수절하는 것이 어려운 줄만 알고 생이별한 뒤에 수절하는 것 역시 어려운 줄 모르니, 요컨대 정론이 아니다.당(唐)나라 가직언(賈直言)이 영남(嶺南)에 귀양 가자 그 아내 동씨(董氏)가 머리를 비단으로 싸매고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20년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다.22) 이것이 바로 생이별한 뒤의 수절로, 왕 절부(王節婦)23)가 《여범(汝範)》 〈정렬(貞烈)〉 편에 이 고사를 실어 목숨을 버려 절조를 수립하는 것과 동등하게 보았으니 오직 이것이 정론이다.우리 마을에 유인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있는데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며 판관(判官)을 지낸 증(贈) 참판 덕촌(德村) 희정(希汀)의 10세손이다. 부친은 영모(永模)이고,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김택려(宅麗)의 딸이다. 최씨는 철종(哲宗) 경술년(1850, 철종1)에 태어났다. 어려서 비범한 자질이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평택(平澤) 임기태(林基兌) 공에게 시집갔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으로 받들어 규문(閨門)이 화목하고 엄숙하니 온 집안이 크게 기뻐하였다.무자년(1888, 고종25) 봄에 임공이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아울러 소식도 없어, 유인이 어린 네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에 곡기(穀氣)를 끊고 죽으려 하자 아들이 울면서 "어머니가 죽으면 아들은 어떻게 성장하여 아버지를 찾겠습니까?"라고 고하니, 유인이 선뜻 마음을 돌리고 울면서 아들에게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내가 살아 있으면 네가 성장하여 네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내가 죽으면 너는 성장할 수 없고 네가 성장하지 못하면 네 아버지는 영영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니 네 말이 참으로 옳다."라고 하였다.이에 부지런히 길쌈하여 집안의 생계를 꾸렸는데 세시 명절이 되면 남편이 입을 새 옷을 만들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비록 채소일지라도 맛이 있으면 또한 찬장에 보관해 두고 기다렸다. 매일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할 때마다 목 놓아 슬피 우니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면 바람과 눈을 맞으며 뜰에 서서 "이런 때 남편이 객지에서 겪는 괴로움이 어떠할까?"라고 하였다. 평상시에는 따뜻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 않아 항상 자신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하였다. 남들 대할 때는 후하였고 빈궁한 사람에게는 더욱 마음을 썼으니 객지 생활하는 남편의 곤궁함을 상상하여 남에게까지 은혜가 미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시부모의 기일에는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는데 몹시 연로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은 정성이고, 또한 남편을 대신하여 공경을 더욱 지극히 한 뜻을 알 수 있다. 남을 만나 볼 때는 정답게 웃으며 이야기한 적이 없고, 본가의 지친(至親)은 만나 보기 드물고 어려운데도 역시 기뻐하는 뜻을 안색과 말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이 천성이 되어서 비록 기뻐할 만한 일을 보더라도 그것이 기쁜 일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만년에 병이 심해지자 손자인 승옥(承玉)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네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행적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는데 내가 죽기로 맹세했으면서 죽지 않은 이유는 네 아버지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끝내 할아버지를 찾게 하려고 해서였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장성한 뒤 더욱 부지런히 찾아도 찾기가 더욱 요원해져서 마침내 초심을 저버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아득한 천지에 이 한이 어찌 다하겠느냐. 지금 그 나이를 계산하고 타고난 체질을 헤아려 보면 전혀 살아 있을 리가 없다. 또 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나도 곧 죽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는 일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졌으니 네 할아버지를 위해 상복을 입고 제사를 행하라. 또 마을 뒤에 제단(祭壇)을 쌓고서 그 곁에 나를 장사 지내고 세시마다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라."라고 하였다.병자년(1936) 10월 17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87세이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현명한 부인이 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읍군(井邑郡) 고부면(古阜面) 죽산리(竹山里) 뒤쪽 산기슭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임공의 제단은 그 서쪽에 있다.아, 유인은 이런 사변을 당하여 수절한 정절이 당나라의 동씨와 아름다움이 같았으나 남편이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은 차이와 행운과 불행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유인이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몸은 따뜻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 않기를 50년 동안 하루처럼 지속한 일은 비단 동씨가 20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남편을 기다린 것에 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여범》의 속편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유인의 사적과 행실에 대해 마땅히 기록할 것이고, 고금의 평가 역시 장차 그 사이에서 저울질할 것이다.이뿐만 아니라 손자에게 일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졌으니 이후에는 상과 제사를 치르고 부부의 묘소와 제단을 반드시 같은 곳에 마련하라고 명한 것은 변고를 만나 의를 얻고 시의에 따라 예에 부합하였으니 예와 의로 볼 때 유인의 식견 또한 높다. 마을 사람들이 칭한 '현명한 부인[賢媛]'이라는 말도 역시 자연스러운 공론임을 볼 수 있다.아들은 재호(在鎬)이고, 딸은 김해(金海) 김사범(金士範)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승옥, 승언(承彦), 승연(承衍), 한봉(漢鳳)24)이고, 증손은 선동(善東)이다. 임승옥이 장차 묘갈을 세우려 하여 유인의 오빠의 손자인 최민열(最敏烈)에게 가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고 함께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유인은 나에게 선군의 이모의 딸이다. 이 때문에 그 일을 익히 들었는데 지금 가장을 통해 더욱 상세한 내용을 알았기에 마침내 가장을 살펴본 다음 글을 완성하고 명(銘)을 이어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두악의 서쪽 죽산의 남쪽이 斗嶽西兮竹山陽현명하고 정절을 지닌 부인 최씨의 묘소라네 賢貞婦兮崔氏藏후세를 감화하고 인륜과 강상 부지하였으니 風來世兮扶倫綱사녀가 지나가면 이곳을 서성이리 士女過兮爲彷徨 婦人之損生立節, 謂之烈; 一心守節, 謂之貞。然人皆稱立節之烈, 而不知守節之貞爲難; 知守節於死訣之後者爲難, 而不知守節於生離之餘者亦難, 要非定論也。唐賈直言謫嶺南, 其妻董氏封髮以待夫歸, 二十年不施膏沐, 是乃生離之守節, 而王節婦載之於《女範》之書〈貞烈〉之篇, 與損生立節同科, 惟此爲論定矣。吾鄕有孺人全州崔氏, 文成公阿后, 判官、贈叅判德村希汀十世孫。考永模, 妣靈光金氏, 通政宅麗女。生以哲宗庚戌, 幼有異質, 及笄, 歸于平澤林公基兌。養舅姑以誠; 奉君子以敬, 閨門和肅, 一家大悅。戊子春, 林公有事, 出外而不還, 幷無音信, 孺人率其穉子四, 求不得, 乃絶穀欲死, 其子泣告曰: "母死, 子何以生長求父乎?" 孺人幡然回心, 泣謂子曰: "汝言良是。吾在汝長, 汝父可求, 吾死則汝無以長, 汝不能長, 則汝父永無可求之道, 汝言良是。"於是勤於紡績, 以爲家業, 歲時名節, 裁成夫子新衣, 以待其歸, 雖蔬菜, 有異味, 亦庋閣而待之。每日晨夕祝天, 涕泣悲咽, 人不忍見。風寒雨雪, 則露立于庭曰: "此時夫子, 客苦何如?" 平居不溫處不飽食, 常若罪戾在己。待人則以厚, 貧窮者尤加意焉。可見想像夫子旅瑣之困而惠及於人矣。舅姑諱辰, 夜不交睫, 隆老不解, 是固孝養餘誠, 而亦見代夫子, 益致其敬之意。見人未嘗笑語款洽, 本家至親, 稀見濶逢, 亦無喜意見於色辭, 蓋思念夫子之恨, 習與性成, 雖見可喜, 而自不知其爲喜也。臨年病革, 謂孫承玉曰: "昔年, 汝祖不還, 而求之未得也, 吾誓死而不死者, 欲待長成汝父, 俾竟求得, 夫孰知汝父旣壯, 求之愈勤, 而得之愈遠, 遂負初心哉? 悠悠天地, 此恨曷極? 今計其年壽, 料其稟質, 萬無生存之理。且汝父已亡, 吾將死矣。今焉而後, 事窮望絶, 爲汝祖服喪行祭, 又築壇里後, 葬我其傍, 歲時同日祭之。" 以丙子十月十七日卒, 享年八十七。鄰里驚嘆曰: "賢媛逝矣。" 葬于井邑郡古阜面竹山里後麓某坐原。林公祭壇在其西。嗚呼! 孺人遭此事變, 其守節之貞, 與唐之董氏齊美, 而其夫之歸與未歸、幸與不幸之異也。然孺人之晨夕祝天, 身不溫飽, 五十年如一日, 不但爲董氏封髮二十年之比, 則後有續編女範之書者, 於孺人事行, 宜有所處, 而古今品藻, 亦將有權度於其間矣。不寧惟是, 其命以事窮望絶, 而後行喪祭, 內外墓壇, 必於同所者, 處變而得義, 因宜而合禮, 禮義所在, 其見識亦高。鄰里所稱賢媛之稱, 亦見其爲自然之公論也。男在鎬, 女金海金士範。孫承玉、承彦、承衍、漢鳳, 曾孫善東。承玉將樹墓碣, 託孺人兄孫敏烈爲狀, 而偕來請銘。孺人於余爲先君從母之女, 以是稔聞其事, 而今因狀而益知詳, 遂按狀成文, 而繼之以銘曰: 斗嶽西兮竹山陽, 賢貞婦兮崔氏藏。風來世兮扶倫綱, 士女過兮爲彷徨。 당(唐)나라……않았다:가직언이 영남으로 귀양갈 적에 아내와 이별하면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니 내가 떠나면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말고 속히 재가하시오."라고 하였는데 동씨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끈으로 묶은 다음 비단으로 감싸고서 가직언에게 "당신의 손이 아니면 비단을 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0년이 지난 뒤 가직언이 집에 돌아오니 동씨의 머리에 감싼 비단이 그대로 있었는데 가직언이 그 비단을 풀고 머리를 감으니 동씨의 머리가 모두 빠졌다. 《新唐書‧ 列女傳 ‧賈直言妻董》 왕 절부(王節婦):명(明)나라 때 사람으로 왕정중(王正中)의 아내인 유씨(劉氏)이다. 시집간 뒤 4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으나 평생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였다. 《王節婦劉氏碑陰書》 한봉(漢鳳):문맥에 근거할 때 앞에 '外孫'이 빠진 듯하다.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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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의인 홍씨 묘갈명 병서 宜人洪氏墓碣銘【幷序】 송(宋)나라 속수 선생(涑水先生 사마광(司馬光))이 "며느리는 집안이 이로 말미암아 흥성하거나 쇠락하게 되는 존재이다."25)라고 하였는데 논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합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천 년 뒤에 건상(巾箱) 안에서 말 한마디를 얻었는데, 속수 선생의 말과 은연중에 부합26)하면서도 한층 더 진실하고 절실하였다. 그 말에 "집안의 흥망은 며느리에게 달렸으니, 며느리가 현명하지 않으면 가정교육이 독실하지 못하다. 나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이런 문제를 모두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식견과 행실이 어찌 뛰어나지 않겠는가. 바로 호남 임실현(任實縣)의 유인(孺人)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그 사람이다.지금 의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휘 교희(敎熙)는 권씨의 장녀이다. 부친은 재기(在祺)이니 호은(湖隱) 연(淵)의 후손이다. 홍씨는 18세에 평해(平海) 죽헌(竹軒) 황종팔(黃鍾八) 공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공은 이재(頤齋) 선생 윤석(胤錫)27)의 5세손이자 한천(寒泉) 재학(在學)의 아들이다.의인은 일찍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식의 직분에 부지런하였고, 시집가서는 부도(婦道)를 다했다. 집안이 청빈하여 쌀과 보리를 나누어 밥을 지은 다음 쌀밥은 어른에게 올리고 보리밥은 자녀와 달게 먹었다.시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의인이 약을 전담하여 잠시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고, 죽을 쑤는 데 쓰는 쌀을 씻느라 손톱이 다 벗겨지니 시어머니의 성품이 엄하였는데도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동서 간에 화목하고 공경히 대하니 집안이 절로 엄숙하였고, 비복(婢僕)에게 허물이 있으면 온화한 말로 잘 타일러 기어코 잘못을 뉘우쳐 고치게 하였다.아들과 조카가 밤에 글을 읽으면 매번 음식을 나누어 주고 이어 "집안의 자손이 독서를 멀리하면 무엇을 하려고 하겠느냐. 재화를 탐하고 의(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반드시 부지런히 공부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버리지 말라."라고 경계하였다.남편이 손님 만나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수십 사람을 초대하였으나 마음을 다해 음식을 제공하였는데 비록 끼니가 지난 뒤라도 다시 밥을 짓기를 꺼리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집에 손님이 끊어지면 볼 만한 것이 없다. 진실로 좋은 손님이 있으면 하루에 열 번 밥을 짓더라도 나는 수고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길쌈에 힘써, 집안에 혼인하는 남녀가 많았으나 베 한 자를 사지 않아도 충분하였고, 시부모를 염습(殮襲)할 때 사용할 수의(壽衣)도 모두 손수 짜서 마련하였다. 대개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려, 편안히 자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멀쩡한 옷이 없는 채로 20년을 하루처럼 살아 이에 가계(家計)가 조금 여유로워졌다.융희(隆熙) 정미년(1907, 순종즉위) 9월 27일 43세에 졸(卒)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하여 말하기를, "어진 부인이 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읍군(井邑郡) 소성면(所聖面) 춘수리(春水里) 불등치(佛燈峙) 곤좌(坤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아들은 상익(尙翼), 휴익(休翼), 환익(奐翼), 건익(鍵翼)이고, 딸은 울산(蔚山) 김상태(金相泰), 수원(水原) 백남용(白南用), 나주(羅州) 오영수(吳翎洙), 진주(晉州) 정태환(鄭台煥)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은 영구(榮九), 완구(浣九)28)이고, 딸은 전주(全州) 이강언(李康彦)의 아내이다. 차남의 아들은 경구(炅九)이고, 딸은 탐진(耽津) 최순환(崔順煥), 신평(新平) 송익수(宋益洙), 전주 이용▣(李容▣)의 아내이다. 삼남의 아들은 용구(瑢九), 준구(駿九)이다. 사남의 아들은 양구(亮九), 억구(檍九)이고, 딸은 전주 이병연(李秉淵), 울산 김진수(金鎭洙), 창녕(昌寧) 성▣▣(成▣▣)의 아내이다. 사위 백남용의 아들은 상기(祥基), 한기(漢基)이고, 사위 오영수의 아들은 병근(秉根)이고, 사위 정태환의 아들은 재철(在哲), 재홍(在洪)이다. 내외 자손이 모두 30여 명인데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아, 성대하도다! 이는 하늘이 의인의 현명함과 선(善)에 보답한 것이니 "집안의 흥망성쇠가 며느리에게 달렸다."라는 말이 옳지 않은가.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서는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의인의 아름다운 행실 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다. 한 집이 쌓여 한 세상이 되니 그렇다면 온 세상의 쇠망을 알 수 있다. 속수옹과 권 유인의 말에 또 어찌 감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황건익이 가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갈명을 요청하였는데 나는 의인이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현명한 부인임을 이미 믿고 의인이 종신토록 시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잠시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나의 선자(先慈) 최씨(崔氏)와 비슷한 점이 있는 데 거듭 감동하였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하고서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매 母訓是受남편 집안 번창하였으니 夫家是昌부인의 도를 다하는 것은 婦道之盡오히려 의인의 일상이었네 猶是厥常의로 아들을 면려하고 勖子以義당에 손님 가득하길 바랐으니 願賓滿堂이 넓고 큰 도량 보면 見斯遠大남은 운수 한량없네 餘運未量울창한 저 불등치는 鬱彼燈峙여사의 안식처이니 女士攸藏지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疇不過者공경을 표하고 서성이리 致敬彷徨 有宋涑水先生有言, 曰: "婦者, 家之所由盛衰。" 論者以爲至言。後千載而得一言於巾幃中, 則與之合・(暗)暗・(合), 而更進一格眞切。其言曰: "人家興亡在婦人, 而婦人之不賢, 家庭敎育之不篤, 吾有五女, 皆可免矣。" 此其所見所行, 豈不卓乎哉? 卽湖南任實縣孺人安東權氏, 其人也。今宜人南陽洪氏諱敎熙, 權氏長女。其考在祺, 湖隱演後。年十八歸于平海氏竹軒黃公鍾八, 頣齋先生胤錫五世孫, 寒泉在學子。宜人早承母訓, 勤於子職, 及歸, 婦道是盡。家力淸貧, 分炊米麥, 米進於所尊, 惟麥, 己與子女甘之。姑久癠, 專擔藥餌, 暫不替人, 淅磨粥米, 爪甲盡禿。姑性嚴而稱孝婦。和敬妯娌, 家內自肅。婢僕有過, 溫言善喩, 期至悔改。子姪夜讀, 每以食物分給, 仍戒之曰: "人家子孫外讀書, 有何所欲? 不過貪貨財、作非義而已。必須勤做, 毋替令名。" 夫子喜賓客, 日致數十, 盡心供饋, 雖飯後, 不憚再炊, 常曰: "家絶賓客, 無可觀。苟有嘉賓, 一日十炊, 吾不勞也。"務紡績, 男女婚嫁多矣, 一尺布不貿而足, 舅姑時月之制, 皆出手織。蓋勤儉治家, 寢不穩, 食不甘, 衣無完, 二十年如一日, 而調度稍裕矣。年四十三卒以隆熙丁未九月二十七日。人皆嘆惜曰: "賢婦人逝矣。" 葬于井邑郡所聲面春水里佛燈峙坤坐原。男尙翼、休翼、奐翼、鍵翼, 女適蔚山金相泰、水原白南用、羅州吳翎洙、晉州鄭台煥。長房男榮九、浣◀(九), 女全州李康彦妻。次房男炅九, 女耽津崔順煥、新平宋益洙、全州李容▣妻。三房男瑢九、駿九。四房男亮九、檍九, 女全州李秉淵、蔚山金鎭洙、昌寧成▣▣妻。白婿男祥基、漢基, 吳壻男秉根, 鄭壻男在哲、在洪。內外子孫摠三十餘人, 而繁不盡錄。嗚虖盛矣哉! 此天所以報宜人賢善, 則所謂"人家興亡盛衰在婦人"者, 不其然乎? 顧今之世, 倫理墜地, 如宜人懿行, 絶不可覯矣。一家之積爲一世, 則擧世之衰亡, 可知已, 又安得不感慨乎涑水翁、權孺人之言也? 鍵翼抱家狀, 要余銘墓, 余旣信其爲淑世之賢媛, 重感其終身奉姑, 不獲暫暇者, 有似乎吾先慈崔氏也, 遂不辭而敘而銘。曰: 母訓是受, 夫家是昌。婦道之盡, 猶是厥常。勖子以義, 願賓滿堂。見斯遠大, 餘運未量。鬱彼燈峙, 女士攸藏。疇不過者? 致敬彷徨。 며느리는……존재이다:《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은연중에 부합:원문은 '合暗'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暗合'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윤석(胤錫):1729~1791.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1759년(영조3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直長)·별제(別提)를 거쳐 익위사(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3) 목천 현감(木川縣監)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 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 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처음에는 이학(理學)에 힘쓰고 《주역(周易)》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저서로는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수신편(理藪新編)》, 《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완구(浣九):원문은 '浣'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浣' 뒤에 '九'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묘명 墓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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