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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金聖九 丙寅 오늘 아침은 새 해 중에서 가장 길일입니다. 그대는 가장 절실히 도리로써 교유하는 사람입니다. 이 날에 그대의 편지를 받았으니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한 가지 즐거운 일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형제와 이별한 듯한 정이 두루 가득했는데, 간곡히 도를 걱정하고 의리를 장려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부지런히 이치로 판단하고 중도를 구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감동할 만하고 경계로 삼을 만한 점이 있었으니, 어찌 오직 한때의 즐거움일 뿐겠습니까? 몸을 마칠 때까지의 큰 은혜입니다. 다만 간옹의 '한 때의 고초는 매우 짧고 백세의 영광은 매우 길다'41)는 말씀을 인용했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최근에 자처하는 바는 겨우 선사의 은혜를 저버리거나 부모가 남기신 몸을 욕되게 하는 죄인을 면하고자 할 따름이니, 그대의 성대한 장려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로 인하여 지난번 여쭈었던 소지(所志)를 인가를 받았다는 것을 우러러 알았으니,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나무를 안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나물을 먹고 계곡의 물을 마시며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대가 이런 청풍(淸風)과 지절(志節)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저도 따르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만약 재앙을 후회하여 저 음성 사람이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면 후일에 구름 자욱한 창가와 돌 의자에 혹 또한 저 김택술을 하나를 받아줄 자리가 있겠습니까? 얼굴을 마주보고 속마음을 쏟아낼 길이 없어 바람결에 그저 한숨을 쉽니다.유원성(劉元城)이 귀양 가는 재앙을 당한 것42)은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한 것은 다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로 과도한 것이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회옹(晦翁 주희)이 시중(時中)의 도에 맞았다고 허여했던 것은 아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의 심양(潘陽)에서의 문답은 지금 묘지명(墓誌銘)에 실린 내용으로 논해본다면,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우리 임금에게 고한 것이니 타국이 알 바 아니다."43)라고 말한 것은 그 강유(剛柔)가 중도를 얻은 것이니, 그 작용이 《주역》의 도에 맞음을 진실로 감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항복할 때 따르지 않은 것"을 물었을 때에 "늙고 병들어서 따를 수 없었다."44)고 대답한 것은 아마도 유약한 것 같습니다. 어떠합니까?회옹(晦翁)이 소장을 불태운 것45)과 우옹(尤翁)이 상소를 올린 것46)의 차이는 아마 우옹의 지위가 높고 예우가 융숭하여 회옹과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에 대처하는 의리가 회옹과 달랐던 것입니까? 아니면 우옹 때의 원자의 위호(位號) 일은 국가의 대본과 관련되어 단지 회옹 때엔 간사한 무리가 군주를 가리고 재상 조여우가 억울함을 받은 것에 비할 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까?화양노자(華陽老子)가 후명(後命)47)이 있자 차분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여유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수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동파(蘇東坡)가 삶과 죽음에 기로에서 담소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체포됨에 이르러서는 똥오줌을 모두 싸고 얼굴은 사람기색이 없었던 것은 그가 평소에 수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맹자는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정직함으로 길러서 해침이 없다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찬다."라고 하였고, 또 "이 기는 의와 도에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위축된다."라고 했습니다.48)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험한 세상에 태어나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마땅히 의리로써 이 기운을 길러 천지에 가득 차도록 성취해야지 홀쭉이 위축되는 상황을 초래하지 말아야 하니, 우옹에 미치는 것을 기약해야 하고 동파의 수준에 이르지 말아야 합니다.포은(圃隱 정몽주)의 죽음은 마땅히 창왕(昌王)을 세웠을 때 있었어야 하니, 실로 선현들의 말씀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포은이 창왕을 쫓아내고 요왕(瑤王)을 세울 때에 좌명 훈록(佐命勳錄)에 참여하면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의론에 참여했다는 것은 더욱 의심할 만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고려 말엔 권신이 정권을 장악하여 형세를 이미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우왕과 창왕 및 요왕이 모두 왕씨의 자손이라면 차라리 아픔을 숨기고 시일을 끌면서 뒷날의 공을 거두는 것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태조가 천운에 응하게 되어서는 왕씨는 이미 끊어져 더 이상 남은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몸을 죽여 인을 이룬 것입니까? 그렇다면 포은은 오히려 공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의 말씀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현들의 말씀과 그대의 질문과 저의 대답은 현자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선을 다하여 격물치지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일을 찾은 것이니,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목은(牧隱 이색)의 의리에 대한 처신이 앞에는 잘못을 했고 뒤에는 기다렸다고 했는데, 저도 그대의 의견에 감히 달리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산백(韓山伯) 일은 아마도 이와 같이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이 어른의 이 일은 미결된 채로 의심스런 안건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 번은 받고 한 번은 받지 않음이 서로 증거가 있습니다. 견문이 적은 제가 어찌 탁견이 있겠습니까? 다만 중간(重刊)한 《목은집(牧隱集)》에 쓴 선사의 서문을 기억하는데, 그 중에 "공민왕이 일찍이 양부(兩府)를 거느리고 예불을 했는데 선생만 홀로 절하지 않았고, 태조가 그로 하여금 벼슬하게 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죽었다. 사관(史官)이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빌고 절개를 고쳤다.'고 한 것은 어찌 믿을 수 있는 말이겠는가. 우옹(尤翁)이 선생의 비음기(碑陰記)를 지어서 통렬하게 그것이 무함임을 변론했는데도 문인 중에서는 이견이 있었다. 후에 믿을 만한 역사 기록인 운곡(耘谷 원천석)의 일기가 나왔는데 비음기와 부합했으니, 선생이 선생으로 받들게 된 까닭은 운무를 헤치고 청천을 보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니다."49)【서문은 여기까지이다.】 대개 운곡의 일기는 세상에서 일컫는 직필(直筆)로서 사람들이 벽경(壁經)50)이나 총노(冢奴)51)처럼 믿는 것이니, 선사가 그것에 근거하여 증거로 삼은 것은 틀림없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한산백을 받은 일이 있었다면 "그로 하여금 벼슬하게 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죽었다.'고 했으니, 사관이 변절했다고 한 것은 어찌 믿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어느 것이 맞는 것이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옹은 운곡의 일기가 나오기 전에 변론했고 선사는 운곡의 일기가 나온 뒤에 증명했으며, 지호(芝湖 이선), 남당(南塘 한원진), 도암(陶庵 이재)은 모두 운곡의 일기가 나오기 전의 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산백을 받은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어떠합니까?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의 안설(按說)에 "〈이색전〉에 보면, 이색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는데, 이에 대해 치당(致堂 호인(胡寅))이 논하기를 「원제의 성은 우씨(牛氏)인데 진나라의 종통을 무릅쓰고 이어받았으니 동진(東晉)의 군신들이 어찌 편안히 여기고 바꾸지 않으려 했겠는가? 오랑캐와 말갈이 번갈아 침범하여 강좌(江左)가 미약해져서, 만약 옛 왕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붙들어 맬 수가 없으니, 이런 방법을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은 그 난이가 현격히 다르다고 필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형세를 이용하여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이제 내가 신씨(辛氏)를 세우는 것에 대해 감히 이의를 않았던 것은 또한 이런 뜻이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인용은 여기까지이다.】 저의 견해에는 이것은 목은의 마음이 전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가 우왕, 창왕, 공양왕 시대에 아픔을 참고 시일을 끌었던 것은 또한 저가 포은을 논한 것과 같으니 다만 왕씨 자손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 마음이었을 뿐이고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은이 우연히 동진의 일을 논한 호치당의 말을 인용한 것을 가지고 그 마음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포은과 목은이 우왕과 창왕이 신씨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는데도 오히려 또한 이처럼 했다면, 어떻게 포은과 목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야은(冶隱 길재)의 일은 저가 또한 평상시에 명쾌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산(牛山)이 논한 것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고려사》를 보니, "길재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아서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본조의 부름에 대해 죽음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끝내 달려 나온 것은 노모가 집안에 살아 계셨기 때문이니 사첩산(謝疉山)이 정문해(程文海)에게 답한 편지52)와 같은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다면 상론(尙論)하는 자는 참작하여 헤아릴 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臣)'이라 칭하고 '전하(殿下)'라고 칭한 것은 사첩산이 '대원황제(大元皇帝)'라고 칭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서 대의(大義)와 관련이 있었으니, 끝내 어떻게 후세의 비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일찍이 듣기로 선제(先帝)의 시호(諡號)를 고종(高宗)으로 한 것은 태극교(太極敎)의 회의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제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고 그것이 전적으로 피인(彼人)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호는 진실로 그 실제와 맞아야 하니, 명나라 의종(毅宗)의 호칭은 오랑캐 청나라로부터 나왔지만 이전의 현인들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제의 시호가 만약 실제와 부합한다면 비록 피인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쓰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후세에 시호를 의정(議定)할 때에는 대부분 전대에서 뜻을 취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나라에는 창업한 태조(太祖)가 있었고 우리 조선에도 태조가 있었으며, 송나라에는 복수의 뜻을 둔 효종(孝宗)이 있었고 우리 조선에도 효종이 있었습니다. 이제 고종의 호칭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은나라에는 중흥한 고종이 있었는데 선제의 실상과 맞지 않습니다. 당나라 때에는 전성기를 누린 고종이 있었는데 선제의 실상과 맞지 않습니다. 오직 송나라 고종이 금나라 오랑캐에게 핍박을 받아 국세가 위태롭고 허약했으니, 선제의 처지가 그것과 비슷합니다. 저들의 뜻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선제는 을사늑약 때에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겠다.'는 하교가 있었고, 몰래 나라를 회복하려 도모하다가 마침내 무오년(1918)의 해를 당했습니다. 비록 그 바탕이 유약하고 그 운수가 떠나가서 큰일을 해낼 수는 없었지만, 그 뜻과 그 행동은 결코 금나라 오랑캐에게 신하라 자칭했던 조구(趙構 고종)와 같은 차원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편지에서 차마 '고종'이라고 쓰지 못한 것은 그 역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그러니 고신(故臣)과 유민(遺民)은 마땅히 장차 하나의 공의를 세워서 실제와 부합하는 시호를 오래지 않아 받들어 올려야 합니다. 그 동안에 글을 짓는 사람의 문장에서 선제를 칭하는 곳에는 마땅히 다만 '선제'라고만 칭해야 합니다. 역사를 편찬하는 경우에는 매 대의 묘호(廟號)를 쓸 때 진실로 그 호칭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다면 한나라 후주(後主 유선(劉禪))가 선제(先帝 유비(劉備))에 대해 호칭을 세운 예에 의거하여 다만 우선 '선제'라고만 쓰고 뒷날 시호가 정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겠습니까? 옥사(屋社)53)한 뒤의 날짜 표기는 선현들이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 숭정(崇禎)을 쓴 예에 의거하여 '융희(隆熙) 몇 년'이라고 쓰는 것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今朝新年最吉日.賢執道交最切人, 以此日獲賢執書, 可謂生來一快事, 而原別周備, 惓惓乎憂道奨義之發, 兢兢乎裁理求中之歸, 有可以感可以警者, 豈惟一時之快? 抑亦終身之惠歟.但其引艮翁"一時苦楚, 百世光華"之說, 則何敢當? 此漢近日所處, 僅求免負師恩辱遺體之罪人而已.於盛奨也何敢當? 然因此而仰認向稟所志之得蒙印可, 則深所幸也."抱木入山, 木食澗飲, 無慕人知", 久知賢執之有此清風志節, 而竊所願從者.天若悔禍, 彼陰人其無奈何, 則他日雲牕石榻之間, 倘又容得一箇金澤述否? 面瀉無梯, 臨風一唏.劉元城竄謫之禍, 正色立朝, 知無不言, 言無不盡, 爲之祟也.此爲臣道之過度則已, 不然, 晦翁之許以時中者, 恐無可疑.石室潘陽問答, 今以全誌所載者論之, 如"吾守吾志, 吾告吾君, 非他國所知"之云, 剛柔得中, 誠服其作用合於《大易》之道.至於"不從下城"之問, 答以"老病不得從", 則恐涉遜弱, 未知如何?晦、尢兩翁焚章、上疏之異, 豈以尢翁位重禮隆, 有異於晦翁者, 故其所處之義, 與晦翁異歟? 抑以尢翁時, 元子位號事, 關國家大本, 非但晦翁時姦邪蔽主、趙相受冤之比故歟?華陽老子之後命在, 卽從容整暇, 由其有素養也.東坡之自信談笑於死生, 而及其被逮, 便液俱下, 面無人色, 由其無素養也.孟子曰: "浩然之氣,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又曰: "其氣也配義與道, 無是, 餒也." 顧今學者, 生丁險世, 死亡無日, 當以義理配養此氣, 成就得塞天地者, 毋致得欿然而餒, 期及乎尢翁, 無至乎東坡也.圃隱之死, 當在立昌之時, 誠有如先賢之云.其參佐命勳錄於放昌立瑤之時, 而與聞於禑昌非王氏之議, 尢涉可疑.然竊意當麗之季也, 權臣執命, 勢既莫遏.且禑昌及瑤俱是王氏子孫, 則無寧隱忍遷就, 以收後功.及至太祖應運, 則王氏已絕, 無復餘望, 故殺身而成仁歟? 然則圃翁猶未免於計功謀利, 有如盛喩者.然先賢之云、高明之問、淺陋之答, 蓋出於責備賢者, 求其盡善以資格致之一端, 豈有他哉?牧隱處義之失前待後, 鄙亦不敢貳於盛喩矣.然至於韓山伯事, 恐不可如此斷定.蓋此老此事, 爲未決之疑案久矣.一受一否, 互有證佐, 顧此謏寡, 何曾有超見? 但記得先師序重刊《牧陰集》有曰: "恭愍嘗率兩府禮佛, 而先生獨不拜.太祖使之仕, 不屈而死.史氏之謂侫佛改節, 豈可信之言乎? 尢翁作先生碑陰記, 痛辨其誣, 而門人有携貳之論.後來耘谷信史出, 而與陰記合, 則先生之所以爲先生, 不啻如披雲霧而覩青天矣."【止此】 蓋耘谷日記, 世所稱直筆, 而人之信之如壁經冢奴者, 先師據以爲證, 必有所以.果有受伯之事, 則其曰"使之仕, 不屈死", 史氏謂改節, 豈可信者? 何所當乎? 鄙則以爲尢翁辨之於耘記之先, 先師證之於耘記之後, 而芝湖、南塘、陶庵又皆未見耘記前說, 故曰不可以受伯斷之也.未知如何?《麗史提綱》按說曰: "《李穑傳》, 穑語人曰: '昔晋元帝入繼大統, 致堂論曰: 「元帝姓牛而冒續晉宗, 東晉群臣, 何以安之而不革耶? 必以爲胡羯交侵, 江左微弱, 若不憑依舊業, 安能係屬人心? 捨而創造, 難易絕矣.此亦承勢就事, 不得已而爲之者也.」今穑於立辛氏, 不敢有異議者, 亦此意也.'"【止此】 淺見以爲此則大非牧老之心也.其隱忍遷就於禑、昌、恭讓之際者, 亦意只如鄙論圃老, 但要不絕王氏子孫之心而已, 非有他意也, 不可執其偶引致堂論東晉事而論其心也.若使圃、牧明知禑、昌之爲辛氏, 而猶且如此, 則何以爲圃、牧哉? 是不可以不辨也.冶隱事, 鄙亦尋常未快.牛山所論, 孰能非之? 嘗見麗史曰: "吉再知麗將亡, 奉母南歸." 其於本朝徵召, 不能死抗而終赴者, 爲其老母在堂, 如謝疉山答程文海書歟? 如此則尚論者可有斟量者存矣.然其稱臣稱殿下者, 亦如疉山之稱大元皇帝同, 而有關於大義, 則終何以免後世之議哉?曾聞先帝謚高宗, 出於太極敎會議, 今承盛喩, 乃知其專出於彼人也.謚茍當其實, 毅宗之稱出自虜人, 而前賢無異辭.先帝之謚, 若當於實, 雖出於彼, 無不可書.但後世議謚, 多取意於前代, 故漢有創業之太祖, 而我朝亦有太祖, 宋有志存復讎之孝宗, 而我朝亦有孝宗.今高宗之稱, 果何意哉? 殷有中興之高宗, 而非先帝之實.唐有全盛之高宗, 而非先帝之實.惟宋高宗見逼金虜, 國勢危弱, 先帝之所遭似之.彼人之意, 意出於此也.然其實有大不然者.先帝有寧殉社稷之敎於乙巳之勒約, 密圖復國而竟遇戊午之害.雖其質柔運去, 不能有爲, 其志其行, 決非與稱臣金虜之趙構, 可同日語也.盛喩有所不忍書之者, 其亦以此歟.故臣遺民宜將有一副公議, 奉上當實之謚於非久矣.其間撰人文字者, 其稱先帝處, 固宜只稱先帝, 至於編史者, 則書每代廟號處, 誠難其稱.然無已, 則依漢後主對先帝立稱之例, 只姑書以先帝而俟之, 未知如何? 屋社後甲子, 依先賢書崇禎例, 書以隆熙幾年, 亦如何. 한……길다 《간재집 후편(艮齋集後篇)》 권3 〈여장재학(與張在學)〉애 보인다. 유원성이……것 북송(北宋) 시대의 직신(直臣) 유안세(劉安世)가 일찍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 추밀도승지(樞密都承旨) 등을 역임하면서 장돈(章惇), 채경(蔡京) 등 간신(姦臣)들을 신랄히 탄핵했던 결과, 그들의 미움을 사서 끝내 이리저리 유배되다가, 마침내 매주(梅州)로 이배(移配)되었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나는……아니다 묘지명에 보면, "또 묻기를 "근래의 관작은 어째서 받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군사를 원조할 때는 어찌하여 저지하였소." 하고 하니, 선생은 답하기를,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우리 임금에게 고한 것이니 타국에서 알 바 아니오.〔又問比年官爵, 何以不受? 助兵時, 何以沮撓乎?' 答曰, '吾守吾志, 吾告吾君, 非他國所知也.〕"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卷182 〈석실김선생묘지명 병서(石室金先生墓誌銘 幷序)〉 항복을……없다 묘지명에 "노의 차사가 묻기를 '국왕이 항복할 때 유독 청국은 섬길 수 없다 하고 항복할 때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무슨 뜻이었소?' 하니, 답하기를 '내 늙고 병들었으므로 따를 수 없었소.'라고 하였다〔虜差問曰, '國王下城之時, 獨以爲淸國不可事, 不從下城, 是何意也?' 答曰, '吾老病, 不得從耳〕"라고 하였다. 회옹이……것 송 영종(宋寧宗) 때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재상 조여우(趙汝愚)를 축출하자 군소(群小)들이 날뛰므로 주희(朱熹)가 소장을 올려 극언하려 하였다. 이에 문인들이 안위를 걱정하여 극구 말렸지만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자, 채원정(蔡元定)이 점을 쳐서 결정하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점을 쳐 둔괘(遯卦)가 가인괘(家人卦)로 변하는 불길한 괘가 나오니 주희는 그 상소를 불태워 버리고 둔옹(遯翁)이라 자호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 연보(年譜)》 우옹이……것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관련된 것으로 뒷날의 경종(景宗)인 왕자 윤(昀)의 위호(位號)를 원자(元子)로 정하고 그의 생모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책봉한 것에 대하여 송시열을 비록한 서인들은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사건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사사(賜死)되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年 2月 1日, 6月 3日〉 후명(後命) 귀양을 간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암이 사사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우암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하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맹자는……했습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공민왕이……아니다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6 〈목은선생문집중간서(牧隱先生文集重刊序)〉에 보인다. 벽경(壁經) 공자 구택의 벽 속에서 발견된 경전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30 〈예문지(藝文志)〉에 "한 무제(漢武帝) 말년에 노공왕(魯共王)이 집을 넓히려고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고문상서(古文尙書)》 및 《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등 수십 편을 얻었는데, 모두 고자(古字)였다."라고 하였다. 총노(冢奴) 무덤 속에서 나온 종으로,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희(朱熹)가 《춘추(春秋)》를 공부하는 많은 학자들이 근거 없이 억측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춘추(春秋)》를 배우는 사람들은 견강부회가 너무 많다. 《후한서(後漢書)》 권10 〈오행지(五行志)〉 사부생(死復生)의 주석에 '한나라 말에 범명우(范明友)의 가노(家奴)의 무덤을 판 일이 있었는데 가노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범명우는 곽광(霍光)의 사위인데, 그 가노가 곽광 집안의 일과 황제를 폐위시키고 즉위시켰던 일을 이야기 한 것 중에 《한서(漢書)》의 기록과 부합하는 것이 많았다.'라는 말이 실려 있다. 내가 예전에 《춘추(春秋)》를 배우는 사람에게 '지금 이처럼 견강부회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어느 날 땅속에서 공자의 가노가 나와 당시 공자의 뜻이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까 걱정될 뿐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3 〈춘추강령(春秋綱領)〉 사첩산(謝疉山)이……편지 사방득이 다판(茶坂)으로 가 우거(寓居)하면서 건양(建陽)의 역교(驛橋)에다 점집〔卜肆〕을 차려 놓고, 간판을 의재역괘(依齋易卦)라 하였는데, 어린아이와 천례(賤隷)도 그가 사 시랑(謝侍郎)인 줄 알았다. 【사방득이 일찍이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그때 세조가 남방 사람 중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매우 급하게 구하자, 어사(御史) 정문해(程文海)와 승지(承旨) 유몽염(留夢炎)이 번갈아 소(疏)를 올려 사방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사방득은 극력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고서, 정문해에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옛날의 예(禮)를 상고해 보면, 자식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임금의 명령이 3년 동안 그의 가문에 하달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사람들에게 효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저 사방득이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장례(葬禮)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상복(喪服)을 입은 지 3년이 되지 않았는데, 만약 예절과 법도를 어기고 집사(執事)의 뜻에 따라 세상에 나간다면 이보다 더 큰 불효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첩산집(叠山集)》 5권 〈첩산선생행실(叠山先生行實)〉 옥사(屋社) 멸망한 나라의 사직을 뜻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大社)는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는데 이것은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까닭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天子大社, 必受霜露風雨, 以達天地之氣也. 是故喪國之社屋之, 不受天陽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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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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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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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金聖九 丙寅 나라가 파괴된 것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오히려 다행히 우리 군주가 병이 없어서 신민(臣民)의 희망을 보존할 수 있고 광복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승하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무어라 해야 하겠습니까? 소식을 들은 즉시 서재 뒤의 이른바 망제봉(望帝峯)에 올라가서 벗들과 함께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였고, 성복(成服)한 날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마치 부모를 여윈 것 같았습니다. 고인(古人)의 지극한 정이 골수에 사무친 것을 진실로 느끼었고 실로 나라가 망한 깊은 원한이 더해졌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와 같은데 그대로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이하로 대대로 국은을 입었고 선영감(先令監)이 나라를 바로잡아 회복하는 뜻을 품었다가 한을 품고 죽었으니, 그 통곡하는 심정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다행히도 타고난 성품은 오래되어도 실추되지 않아 온 나라 백성들이 쓰러져 울면서 가슴을 치고, 심지어 천한 기생도 소복을 입고 어린 아이들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또 소식을 듣고는 독약을 먹고 일을 꾀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만 번 죽을 고비에서 하나의 생기가 되는 것이니, 하늘의 뜻은 또한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설사 세상에 큰일을 해낼 수는 없더라도 마땅히 힘써서 '의(義)' 자 하나를 가지고 후진들의 마음속에 퍼뜨려서 인륜을 부지하고 하늘의 뜻을 받드는 하나의 도를 도와야 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보여주신 상제(祥祭)를 뒤로 물려서 행하는 절목은 삼가 보고서 잘 알았습니다. 그대의 고명함으로 지금 변례(變禮)의 대절에 대하여 널리 상고하고 정밀히 살펴 인정과 예법이 모두 완벽하기를 기약했으니, 식견이 부족한 제가 어찌 감히 더불어 논하겠습니까. 다만 그 중에 약간 타당치 않은 점이 있는데도 우러러 묻지 않는다면 실로 굽어 보여주신 훌륭한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대체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뒤로 물려서 행함에 있어 능묘(陵廟)에서 제향을 올리지 않으면 사가에서도 감히 성대히 제사지낼 수 없는 것은 진실로 그대의 말씀과 같아서 관례와 혼례에 길흉이 서로 교섭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능묘에서 이미 제향을 했는데 사가에서 제사를 폐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황제를 왜가 낮추어 왕이 되었고, 왕의 예도 오히려 금지시키고 겨우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는 사대부의 예를 사용하게 하였으니, 어찌 이루 통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국가가 망하지 않았다면 이번 대상(大喪)에 어찌 황제의 예를 완전히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다만 황제의 예로써 우리 황제를 존중하는 것을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때처럼 하는 것을 알 뿐 다른 것은 따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만약 우리 군주가 살아있는데 혹여 정례(正禮)를 사용하지 않아 기한보다 빨리 장례를 치르고 기한보다 빨리 졸곡을 행한다면 신하들의 집에서는 연제와 상제를 졸곡 후에 행할 수 있습니다. 오직 왜에게 압박을 받아서 기한보다 빨리 장례를 치르고 기한보다 빨리 졸곡을 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서 연제와 상제를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신문을 보니, 인산(因山)은 5월 2일에 있고, 졸곡은 7월 2일에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기일보다 빨리 장례를 치른 자가 졸곡은 반드시 예월(禮月)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인하여 겨우 제후가 5개월 만에 졸곡하는 예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만 잘 모르겠으나, 선제를 황제로 칭한 이후에 상례와 관련된 모든 절목을 황제의 예를 순수히 사용했습니까, 아니면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까?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근거하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인산 때 구우(九虞)54)를 지냈으니, 그것은 황제의 예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한을 넘긴 장례이니 5개월과 7개월의 구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후 명헌태후(明憲太后)의 상에 대해서는 성복 날짜와 인산의 개월 수를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7개월의 제도를 행할 겨를이 없음을 정확히 알았다면 차라리 조정에서 5개월 만에 인산을 행한 전례를 따라서 연제와 상제를 행하는 것은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번에 정한 인산, 우제, 졸곡 일자를 따라서 인산은 인산이고 우제는 우제이고 졸곡은 졸곡이라 하고서 연제와 상제를 행한다면 대단히 구차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어떤 사람이 《예기》 〈잡기(雜記)〉에 "대부는 3개월에 장사를 지내고 5개월 에 졸곡하며 제후는 5개월에 장사지내고 7개월에 졸곡한다."는 문구에 근거하여 천자는 마땅히 7개월에 장사지내고 9개월에 졸곡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대는 이것에 대해 일찍이 어떻게 보았습니까? 다른 예서(禮書)와 지난 역사를 고증해보건대, 기한보다 빨리 장례를 치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례를 지낸 뒤에 즉시 우제를 지냈고 우제를 지낸 후에 즉시 졸곡을 했는데, 〈잡기〉의 설이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노주(老洲 오희상)는 "어떤 선배가 상제 당일에 술잔을 한 번 올린다는 의론을 하였는데, 내 견해로는 이것은 사가의 상례에서 제사를 폐한 그 날에 약간의 제수를 진설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왜가 금한 것이 없고 이는 분명하게 금지하는 조목이 있으니, 비록 서운하다고 해도 다만 날짜를 미루어 거행하는 사유를 고하는 것이 옳다."55)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설이 가장 타당하니 따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세상에 더 이상 금령의 시행이 없으니 굳이 일체의 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단지 감히 하지 못할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하지 못할 것이 있을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國破雖久, 尚幸吾君無恙, 可以保臣民之望, 可以藉興復之機, 孰知一曙龍馭遽賓天? 實爲之謂之何哉? 承報即時, 上齋後所稱望帝峯, 同諸友生北望慟哭, 成服日亦然, 如喪考妣.良覺古人至情, 通塡骨髓, 實添亡國深恨.如賤子者且如此, 而在足下念仙清以下, 世受國恩, 先令監志存匡復, 齎恨泉下, 其痛其哭, 又當如何哉? 惟幸天彜久而罔墜, 舉國含生顚倒號擗, 至於賤娼服素, 童穉泣血.又有聞報仰藥, 圖事至死者, 踵相接也.此爲萬死中一點生氣, 而天意亦非偶然.吾儕縱不能有爲於世, 要當勉將一箇義字, 布播後進心田中, 用助扶人紀奉天意之一道而已, 如何如何?俯示祥祭退行節目, 謹悉.以足下之高明, 今於變禮大節, 博考精覈, 期於情禮之俱盡, 顧此謏寡何敢與論? 但有些未穩于中者, 而不以仰質, 實負俯示盛意也.蓋退行練祥, 以陵廟廢享, 私家不敢盛祭者, 誠如盛喩, 而非有如冠昏之吉凶相涉也.陵廟已享, 而私家廢祭無義者, 非曰不然.但吾之帝, 彼降而爲王, 王禮猶禁, 而僅用士大夫三月葬禮, 則曷勝痛迫? 如使國家未亡, 則今番大喪, 其不純用帝禮乎? 吾但知以帝禮尊吾帝, 如國家未亡時而已, 不問其他可也, 未知如何?若使吾君在, 而或不用正禮, 有赴葬赴卒之舉, 則臣庶家練祥, 卒哭後可行也.惟其爲彼所壓而赴葬赴卒, 故不可因行練祥也.見新聞因山在五月初二日, 卒哭在七月初二日云.此因赴葬者卒哭必俟禮月之意, 而僅得爲諸侯之五月卒哭矣.但未知先帝稱帝後, 凡干喪禮純用帝禮乎? 抑未遑乎? 據《文獻備考》, 明聖皇后因山時, 九虞則知其用帝禮矣.然此是過期之葬, 則五月、七月之分, 不須言也.其後明憲太后之喪, 成服日數、因山月期無所考, 若的知朝家不遑七月之制, 無寧依朝家五月因山前例, 而行練祥可也.若依今番所定因山、虞卒日子, 而曰因山則因山, 虞卒則虞卒, 乃行練祥, 則大涉茍且, 未知如何?或有據《雜記》, 大夫三月而葬, 五月而卒哭, 諸侯五月而葬, 七月而卒哭之文, 謂天子當七月葬, 九月而卒哭, 高明於此, 曾如何看? 定考他禮書及往史, 除赴葬者外, 皆葬而即虞, 虞而即卒哭, 惟雜記說如此, 何也?老洲曰: "先輩有本祥日一獻之論, 愚見則此與私喪廢祭本日畧設有異.彼無所禁, 此則明有條禁, 雖缺然, 只告退行之由, 得正." 淺見以爲此說峻正可從.如謂今之世無復禁令之行, 不必用一切法, 則非惟有所不敢, 恐亦有所不忍者耳, 未知如何? 구우(九虞) 천자가 지내는 아홉 번의 우제(虞祭)를 말한다. 천자의 경우에는 아홉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9일마다 한 번 지내고, 제후는 일곱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7일마다 한 번 지내고, 대부는 다섯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5일마다 한 번 지내고, 사는 세 번의 우제를 지내는데 3일마다 한 번 지낸다. 어떤……옳다 《노주집(老洲集)》 권12 〈답박명벽(答朴命壁)〉에 보인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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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金聖九 丙寅 근래에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상제(祥祭)를 뒤로 미루어 거행하는데 그 시기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제가 망령되게 의견을 말씀드린 것은 다만 이미 의심이 있으면서 감히 스스로 도외시할 수 없었고, 제가 다시 그대 형제가 선영감(先令監)의 대사(大事)에 최선을 다하고 아울러 사민(士民)의 표준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또한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지만 더는 이치에 맞는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70일이 지났는데도 막막하게 답장이 없었으니, 아마 혹 저의 의론을 취하여 다시 의논할 일이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평소에 그대의 견해가 이미 정해져서 더는 저의 설을 따질 것이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까? 우리들의 여러 해를 함께 공부했던 것은 바로 이런 곳에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충분히 상의하여 끝내 하나의 의견에 귀결시켜야 하고, 만약 하나의 의견에 귀결되지 않는다면 또한 각각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여 학문이 진보하고 이치가 밝아지는 날을 기다리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이 의리는 이미 상하로 관철되고, 이 몸의 심사(心事)도 또한 내외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대도 이 의리와 이 마음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속에서 정한 졸곡 후에 상제를 행한다고 말한 것은 인정과 예법을 참작하여 우리 어버이에게 미안함이 없게 함으로써 인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월(禮月)56)에 졸곡한 후에 상제를 행한다고 말한 것은 순수하게 황제의 예를 사용하여 우리 군주를 폄하하는 것을 멀리 함으로써 의리를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완벽하고 어떤 것이 완벽하지 않은 지는 실제로 알 수 없으나, 다만 신하와 자식이 군주와 어버이의 변례(變禮)를 당함에 누군들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대 집안의 일은 남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선영감께서는 평생 군신의 의리를 다한 것으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이제 죽은 뒤에 상사(祥事)를 치를 때에 마침 군주의 상을 만났으니 더욱더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박한 선비들이 길흉의 대사에 모두 예월에 졸곡하는 것으로 단정한 것은 선사가 무오년(1918) 대상(大喪) 때에 이미 행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에 우러러 고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상을 당한 뒤 8일에 성복하는 것은 마땅히 《예기》 〈단궁(檀弓)〉에 "천자가 붕어한 지 7일에 도성 안의 남녀는 모두 상복을 입는다'57)고 한 문장을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단궁〉에는 7일이라 하였는데 이제 그것을 가지고 8일의 근거로 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은 다음 날부터 계산하기 때문입니다.58) 《예기》 〈왕제(王制)〉에 '천자는 7일 만에 빈소를 마련한다.'59)는 것은,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망한 날로부터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단궁〉의 소(疏)에 "천자는 7일 만에 빈소를 마련하니 빈소를 마련한 이후에는 사왕(嗣王)이 성복을 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성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산 사람의 입장과 죽은 사람의 입장으로 계산한다면, '빈소를 마련한 이후'라고 했을 때의 '이후'는 마땅히 하루 뒤로 보아야 합니다. 이전 편지에서 저의 말은 다만 빈소를 마련한 다음날 성복한다는 것만 본 것입니다. 이는 아무개가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은 다음날부터 계산하니 〈단궁〉편에서 7일이라고 한 것이 곧 오늘날 8일이다'라고 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데, 제가 아무개의 증명이 타당하지 않다고 했던 것은 대충 생각하여 잘못 판단했던 것입니다.군주가 정례(正禮)를 사용하지 않으면 신하와 백성들이 비록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단상(短喪) 등과 같은 경우에는 따를 수 없으니, 고려 말의 명신이 따르지 않은 선례가 있습니다. 당시의 왕은 단상을 했는데 명신 홀로 국상을 3년 동안 행하였으니, 이는 옳은 것 같습니다.【명신의 성명을 잊었는데 이 일은 《문헌비고》에 실려 있습니다.】 이전 편지에서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가로 질문합니다.〈단궁〉, 〈상대기〉, 〈상복사제〉 등편에 실려 있는 천자, 제후, 대부, 사의 상(喪), 염(殮), 빈(殯), 장(杖), 복(服)의 날짜를 산 사람의 입장에서 죽은 다음 날로 계산하고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망한 날로부터 계산한다는 것으로 따져보면, 일체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상대기〉에 "사(士)의 상은 2일째에 빈을 하고 3일째 아침에 주인이 지팡이를 짚는다.'는 문장이 있는데, '3일째 아침'은 바로 산 사람의 입장에서 죽은 다음 날로 계산하면 4일째입니다. '2일째에 빈을 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망한 날로부터 계산하면 바로 2일째입니다. 사 또한 지위가 있으니, 어찌 이제 막 죽었을 때로부터 2일만에 곧바로 빈을 하겠습니까? 또한 어찌 빈을 한 이후에 하루를 걸러서 성복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이 문장은 마땅히 어떻게 보아야만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여기에 조종(祖宗)을 이은 대종자(大宗子)가 있다고 합시다. 그 고조를 이은 종자가 가난하여 집이 없기 때문에 대종자가 그 고조 이하 4대의 제수를 갖추어서 매번 시기(時忌)를 당할 때마다 대종손이 와서 주축(主祝)이 되는데, 조종을 이은 대종자가 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뒤 3년 이내의 기간이라면 그 고조, 증조 2대의 시제(時祭)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마땅히 수제(受胙)60)만 폐지하고 행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마땅히 전부 폐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맞는지 모르겠으니, 제대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頃蒙不鄙, 詢及退行祥祭, 時期不量.寡陋妄有獻白者, 徒以既有所疑不敢自外, 而區區復欲賢執昆弟, 盡善於先令監大事, 幷令爲士民準則, 亦不敢自是, 而不復俟理到之敎也.迨茲七旬, 漠無覆誨, 豈以或取鄙論而無事乎更議? 抑以雅見既定, 不復校淺說? 吾人幾多年麗澤, 正爲此等處用, 要爛漫商確, 終歸于一, 如不歸一, 且各陳所見, 以待學進理明之日, 未晚也.此箇義理既貫徹上下, 此身心事亦表裹無間.竊想賢執不以此義此心爲不然也.蓋謂行祥於時定卒哭後者, 欲其參酌情禮, 無未安於吾親而盡乎仁也; 謂行之於禮月卒哭後者, 欲其純用帝禮, 遠貶嫌於吾君而盡乎義也.其孰爲盡孰未盡, 實不可知, 但臣子當君親間變禮, 孰不可以不愼? 至於尊家事, 有異乎人者.先令監平生, 以盡君臣之義名聞天下, 今於身後祥事, 適值君喪之日, 尢不容不加愼也.鄙近士子, 則吉凶大事, 皆以禮月卒哭爲斷, 似以先師戊午大喪已行之風攸及也.茲以仰告, 幸惟鑒裁.八日成服, 當以《檀弓》"天子崩七日, 國中男女服"之文爲據.《檀弓》曰七日, 而今以之爲八日之據者, 何也? 以生與來日故也.《王制》所謂"天子七日而殯"者, 死與往日故也.《檀弓》疏曰: "天子七日而殯, 殯後嗣王成服, 故民得成服." 蓋以生與死與計之, 則殯後之後, 當作後一日看.前書鄙說, 但看殯之翼日成服, 與某人生與來日,《檀弓》七日即今八日之云, 正脗合爲一也, 而鄙謂某人之證不襯貼, 此爲麤思所誤耳.君不用正禮, 臣庶雖不得不從, 然若如短喪等事, 則不可從, 麗末名臣有不從.時王短喪, 而獨行國恤三年喪者, 此似得之.【名臣忘其姓名, 事載《文獻備考》.】 前書未及言此, 故追質.凡《檀弓》、《喪大記》、《喪服四制》等篇所載天子、諸侯、大夫、士之喪、斂、殯、杖、服日子, 以"生與來日, 死與往日"計之, 則無不一切皆通.但《喪大記》有"士之喪, 二日而殯, 三日之朝, 主人杖"之文, "三日之朝", 固是"生與來日"之四日也."二日而殯", 計以"死與往日", 則正只是二日.士亦有位者, 焉有始死二日而卽殯者乎? 又焉有殯後間一日成服者乎? 此文當如何看可通乎?有繼祖之宗於此, 以其繼高祖之宗, 貧無家屋, 爲具其高祖以下四世祭饌, 每當時忌之時, 其宗孫來爲主祝, 及繼祖之宗遭親喪, 葬後三年內, 其高曾二代時祭, 或云當廢受胙而行之, 或云當全廢之.未知何者爲得, 幸誨破. 예월(禮月) 장례를 치르는 달을 뜻한다. 천자가……입는다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편에서는 "천자가 붕어하면 3일째에 천자의 후계자와 축관이 가장 먼저 상복을 입을 때 짚게 되는 지팡이를 짚는다. 그리고 5일째가 되면, 천자에게 소속된 대부와 사들이 모두 지팡이를 짚게 된다. 7일째가 되면 천자의 수도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이 자최복을 착용하게 된다〔天子崩三日, 祝先服, 五日, 官長服, 七日, 國中男女服〕"라고 했다. 산 사람은……때문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산 사람은 죽은 다음 날로 따지고 죽은 사람은 그날로 따진다[生與來日死與往日]"라고 하였다. 상례에서 산 사람에 해당하는 성복 등의 일은 죽은 다음날부터 따져서 행하고, 죽은 사람에 해당하는 염(殮) 등의 일은 죽은 그 날부터 셈한다. 이는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지극한 마음에서 하루라도 날짜를 아끼려는 뜻이다. 〈왕제〉……마련한다는 것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서는 "천자는 7일 후에 빈소를 마련하고 7개월 후에 장례를 치른다. 제후는 5일 후에 빈소를 마련하고 5개월 후에 장례를 치른다. 대부·사·서인은 3일 후에 빈소를 마련하고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른다.〔天子七日而殯, 七月而葬. 諸侯五日而殯, 五月而葬. 大夫士庶人三日而殯, 三月而葬〕"라고 했다. 수제(受胙) 제례가 끝난 후 제관이 제물 일부를 집사(執事)로부터 받아 맛보는 것으로, 제사를 모시고 나서 복을 받는 것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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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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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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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金聖九 丙寅 4월에 제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7월 3일에 비로소 받았으니, 저를 끝내 멀리 버리지 않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6월 보름쯤에 드린 두 번째 편지는 그 날짜를 계산해볼 때 마땅히 그대의 답장보다 며칠 앞서 도착했을 것 같은데 그대가 보낸 편지에서는 그 편지를 보았다는 말씀이 없으니, 아마 근래의 우체부가 진나라의 은공(殷公, 殷羨)을 배웠기 때문61)인 듯합니다. 이 편지에서 이미 제가 진심을 바친다는 뜻과 순수하게 제왕의 예를 쓴다는 의리를 토로하였고, 이전 편지에서 미진하거나 미안한 곳도 대략이나마 다시 진술하여 질문 드렸으니, 이것을 보면 거의 저의 뜻을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가 만약 끝내 중도에 사라진다면 대단히 애석할 것입니다. 얼마 있다가 저의 족형인 김익술이 당신 댁으로부터 와서 지산(志山, 金福漢) 영감의 상사(祥事, 大祥)는 7월 초 정사일에 거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 누누이 말씀드린 것은 다만 선친 영감이 평소에 군신의 의리를 다한 몸으로서 죽은 뒤에 군신의 예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굽어 저에게 물은 일로 인하여 그대의 귀를 시끄럽게 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이니, 감히 대항하며 의논함으로써 이기고자 했던 건 아닙니다. 삼가 생각할 때 이미 그 상사를 지냈다면 굳이 다시 이 말을 일삼아 훗날에 결국 둘 모두에게 무익하게 될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편지에서 이른바 '강론할 즈음에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살피지 않으면 이것은 사심이고, 스스로 자세히 궁구하지 않고 구차하게 상대방에게 승낙하면 역시 공리가 아니니, 한 점의 사심도 없이 안정된 마음으로 서서히 살피고 피아를 공평히 해야만 오직 옳은 것을 옳다 여길 수 있다'는 말은 물아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의리를 구하는 훌륭한 뜻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복하게 합니다. 만약 결국 의심을 놓아두고 질문하지 않으면 진실로 도외시하여 정성스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시 대략 거론하여 가르침을 구하니, 잘 살펴서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보내신 편지에서는 "능묘에서 제향을 하여 사가에서 제사를 멈추고 시일을 미루어 2개월 후에 이른다면, 이것은 아마도 의리에 따라 새로 만든 예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천자는 7개월 만에 장사지낸다는 것은 예경에 보이고, 장사지내고 졸곡 한 이후에 크고 작은 제사를 행한다고 한 것은 국전에 보입니다. 예경과 국전의 명확한 근거가 있으니, 어찌 의리에 따라 새로 만든 예가 되겠습니까? 대단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굳이 5개월과 7개월을 말할 필요는 없으니 능묘에서 제향을 행했다면 신하와 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평순하여 미안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저 사람이 강제로 3개월이나 혹은 1개월 뒤에 졸곡을 하라고 했을 때, 능묘에 제향을 했다면 또한 마땅히 '능묘에서 이미 제향을 했으니, 굳이 1개월과 3개월을 말할 필요가 없고 신하와 민가에서는 연제와 상제를 행하더라도 미안한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런데도 오히려 미안함이 없다 한다면 제가 어찌 감히 다시 말하겠습니까?편지에서는 "저 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혐의가 있어 그대로 연제와 상제를 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부장과 부졸을 말할 필요가 없고. 비록 예를 갖추어 장례와 졸곡을 하는 것이 오로지 저쪽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도 꺼릴 것이 없지 않다."고 했는데, 이 또한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쪽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겸연쩍다 말한 것은 그들이 47일장과 105일 졸곡을 강제로 명함으로써【지금은 비록 3개월 장과 5개월의 졸곡을 말하더라도 사실은 47일과 105일입니다.】 우리 군주를 폄하하고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7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고 아홉 차례의 우제를 한 이후에 졸곡을 하여 제왕의 예를 순수하게 사용하기를 한결같이 우리가 우리 군주를 존중하는 것처럼 한다면, 어찌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그것을 어기고 반드시 9개월 만에 장사지내는 것을 기간으로 삼고 우제를 11번 지낸 이후에 졸곡을 하여 예경에도 없는 내용으로 존중을 표한 이후에야 저들을 따른다는 혐의가 없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반드시 간옹(전우)이 사적으로 장례와 졸곡의 날짜를 배격한 것처럼 한 연후에야 비로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천자가 7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고 우제를 아홉 번 한 이후에 졸곡을 하는 것은 성인이 만든 예경의 상례입니다. 선사가 무오년의 대상에서 다음해의 늦여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예경에 근거하여 우리 천자를 존중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사적으로 배격했다고 말하며, 어찌 타당하지 못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간옹이 행한 것이 마음에 불안하다면 반드시 저 사람이 명령한 것을 공정하다 여겨 마음이 편안하다 여기는 것인가?"라고 한다면 장차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보낸 편지에서는 제 편지에서 '차라리 조정의 5개월이라는 전례에 따르는 것만 못하며, 만약 이번에 정한 것을 따르면 크게 구차하게 된다'는 설에 대해서, 저들이 정한 제도를 쓰는 것이라고 이르고, 조정의 전례를 따르는 것은 왕통(王通)의 심적론(心跡論)62)에 가깝다 하고, 또 구차하게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역시 제가 아직 견해가 철저하지 못하고 의론이 확실하지 못한 것으로, 단단한 제1등의 도리로써 다른 사람에게 고하지 못하여 그대의 꾸짖음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대는 오래도록 상사(祥事)를 정지하고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반드시 저들이 정한 졸곡을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효성스런 생각을 안타깝게 여겨 '기왕에 5개월을 사용하여서 졸곡을 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조정의 전례를 따라서 쓰고 이번에 정한 것을 따라 써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무녕(無寧, 차라리)'이라는 두 글자는 이미 '지극히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니, 구차하게 다른 사람을 따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로 실상에 맞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는데 행동은 저기 가서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행적이 같지 않은 것은 이미 유자의 일이 아니니, 제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런 내용을 당신에게 교시하겠습니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의리로 말한다면'이라는 부분으로부터 '구차하게 잠시 경황이 없을 때 하는 예를 따를 수 없다'라는 부분에 이르는 말씀이 바로 이른바 제1등의 지당한 도리이니, 삼가 승복합니다.보내 온 편지에서 "간옹은 저들이 인산을 정하고 하관을 하는 때에 과연 망곡의 예를 했는가? 했다면 저들이 정한 장례를 인정한 것이고 행하지 않고 기다렸다면 인정과 예법의 결여가 무엇이 이것보다 심하겠는가?"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대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불현 듯 말한 것입니다. 성복과 졸곡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니, 우리의 도로 본다면 다만 타당함만 구할 뿐입니다. 하관의 경우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관하여 땅으로 들어갔다면 천리의 관점으로나 인정의 관점으로나 어떻게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번의 통곡은 더욱 심한 측면이 있으니, 그것은 예월(禮月)에 미치지 못하고 저들에게 핍박을 당하여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의리는 분명해서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 그날에 망곡한 것을 가지고 저들이 정한 장례를 인정했다고 여기니, 그대의 밝은 견해가 잠시 흐려져 이 지경에 이르렀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또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집에 초상이 났는데 저들에게 핍박을 당하여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제도를 강행했다면 통곡하며 울부짖고 가슴을 치면서 죽고자 해도 죽을 곳이 없겠습니까? 아니면 태연히 통곡하지 않으면서 나는 저들이 우리 부친을 장례지내는 걸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통곡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한번 답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七月初三日, 始拜所答四月惡札, 深感不終遐之惠, 而六月望間所呈再書, 計其日, 應逮惠覆前幾多日, 而示中無見書之敎, 豈近日郵吏, 學得晉之殷公耶? 是書也既暴區區效忠之意, 純用帝禮之義, 前書中未盡未安者, 亦畧更陳奉質, 觀此, 庶可悉賤子意見.此若終歸浮沈, 則殊可惜也.既而鄙族兄翊述氏, 從仙庄來言 志山令監祥事, 以七月初丁巳行云.蓋鄙之初度縷縷, 只恐以先令監平日, 盡君臣之義之身, 身後之有未盡君臣之禮者, 故因俯詢之及, 而不憚煩聒, 非敢與抗論求勝也.竊自以爲既已過祥, 則不必復事此言, 以求後時無益之歸一也.近偶更諦觀, 示中所謂講論之際, 自有己見, 不察人言, 是私心, 自不細究, 茍相然諾, 亦非公理.無一點間氣, 平心徐察, 公彼我, 惟是是之之語, 其不校物我, 但求義理之盛意, 令人感服.若遂置疑而不質, 實爲自外而不誠, 故茲復畧舉求敎, 幸惟清鑑卒惠.來書曰: "陵廟有享而私家廢祭, 遷延至于二箇月, 則恐涉義起." 蓋天子七月而葬, 見於禮經, 葬而卒哭後, 行大中小祀, 著於國典, 禮經․國典之明據, 胡爲義起? 深所未喩也.又曰: "不須說五月七月, 陵廟有享, 則臣庶家祭之, 平順無未安." 假使彼人勒令三月或一月而卒哭, 而陵廟有享, 則亦當曰陵廟既有享, 不須說一月三月, 臣庶家練祥行之, 無未安乎? 此而猶曰無未安, 則鄙何敢復言?來書曰: "從彼之令有嫌, 不可因行練祥, 則莫須說赴葬赴卒, 雖備禮葬卒, 此專出於彼人, 亦不無嫌, 此又不省所喩也.嫌於從彼之令云者, 正以其勒令四十七日葬百五日卒哭,【今雖曰, 三月葬, 五月卒哭, 其實四十七日百五日.】 而貶壓吾君故也.若七月而葬, 九虞後卒哭, 純用帝禮, 一如吾之所以尊吾君者, 則何必以出於彼而違之, 必如九月而爲葬期, 十一虞後卒哭, 加尊以禮經所無者, 然後乃無從彼之嫌乎? 又曰: "必如艮翁之私排葬卒之日, 然後乃安於心乎?" 此又不然.天子七月而葬, 九虞後卒哭, 聖人禮經常典也.先師於戊午大喪, 用翼年季夏者, 正所以據禮經, 而尊吾天子也, 何可謂私排? 何可謂不安乎? 若有人曰: "以艮翁所行而不安於心, 則必以彼人所令爲公定, 而安於心乎?" 則將何以答之?來書以鄙書無寧依朝家五月前例, 若依今番所定, 大涉茍且之說, 謂用彼定之制, 而云依朝家前例者, 近於王通心跡之論, 又謂未免茍且徇人, 此亦賤子未能見徹論確, 不以斷斷第一等道理告人, 而以來高明之誚也.蓋高明以久停祥事爲未安, 而必欲用彼定卒哭, 故區區憫其孝思, 而曰既欲用五月而卒哭, 則無寧依朝家前例而用之, 不可遵今番所定而用之云尒, 無寧二字, 已非至當之意, 則其謂茍且徇人, 誠著題, 而謂之心於此而迹於彼則未也.心跡不同, 已非儒者事, 鄙雖無狀, 安敢以此敎高明也? 來書自以執事所執之義言之, 至不可茍從一時未遑之禮也, 正所謂第一等至當道理者, 敬服敬服.來書曰: "艮翁於彼定因山下玄宮時, 果行望哭禮耶? 行之則許彼之卜葬, 不行而留俟, 情禮之缺, 孰甚於此?" 此殆高明不思而遽發也.成服卒哭, 自我行之, 在我之道, 只求其當而已.至於下玄宮, 非我力之所能, 如何? 然玄宮入地, 其在天理․人情, 安得不痛哭? 况此痛也, 尢有甚焉, 爲其不及禮月, 而爲彼所迫也.此義昭然, 不難知也.今乃以此日望哭, 爲許彼卜葬, 不圖明見之乍蔽至此也.且道人家有喪, 爲彼所迫, 強行二十四時埋葬之制, 將痛哭號擗, 欲死無地乎? 抑將恬然不哭, 而曰吾不許彼之葬吾親, 故不哭也乎? 願下一轉語. 우체부……때문 인편에 부친 편지가 도중에 사라졌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은선(殷羨)이 예장군(豫章郡)의 태수(太守)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사람들이 100여 통의 편지를 주면서 경성에 전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석두(石頭)까지 와서 모조리 물속에 던져 놓고는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떠오를 것은 떠올라라. 내가 우편배달부 노릇을 할 수는 없다.〔沈者自沈, 浮者自浮, 殷洪喬不能作致書郵〕" 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왕통(王通)의 심적론(心跡論) 수나라의 학자인 왕통이 동상(董常)에게 "마음과 행적이 다른지 오래되었다.[心迹之判久矣.]"라고 말한 것으로, 왕통의 저서인 《중설(中說)》 권5 〈문역(問易)〉에 보인다. 이 주장은 정이(程頤)에게 난설(亂說)로 배척되었는바, 정이의 말은 《근사록(近思錄)》 권13 〈변이단(辨異端)〉에 보인다. 왕통(584~617)은 수나라의 학자로 자는 중엄(仲淹), 시호는 문중자(文中子)로 당나라의 천재시인 왕발(王勃)의 조부이다. 문제(文帝) 인수(仁壽) 연간에 장안(長安)에 와서 태평십책(太平十策)을 상주했는데, 채택되지 않자 하분(河汾) 일대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쳐 설수(薛收)와 방교(房喬), 이정(李靖),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등 1천 명이나 되는 제자를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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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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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질 문경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族姪文卿 丙寅 그대가 물었던 도를 밝히는 방법은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우리들이 말세의 세상을 만나서 이 이론은 임금과 재상의 치교(治敎)가 없고, 아래로는 사우(師友)의 이끌어줌이 없습니다. 오직 마땅히 스스로 그 뜻을 우뚝하게 세우고 그 힘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뜻이 서면 견해가 높아지고, 힘을 굳세게 하면 사사로움을 이기게 됩니다. 견해가 높아지고 사사로움을 이기게 되면, 도가 그 밝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속에 휩쓸려가는 무리들은 내가 말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근일에 오당(吾黨) 중에 가히 믿을만한 자를 보아도, 또한 대부분 심력을 굳게 세우지 못합니다. 항상 생각할 때마다 마음의 회포가 사나워집니다. 나의 경우 죽음이 눈앞에 있고 호랑이가 밖을 먹어대니,168) 구사일생의 경우라 할지라도 또한 다행입니다. 그러나 나의 뜻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실수를 할지언정 내 자신을 속이기를 원치 않고, 차라리 힘이 미치지 못할지언정 스스로 선을 긋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외물의 유혹된 사사로움으로 나의 본심의 밝음을 어둡게 하지 마십시오. 이제 문경의 요청에 내가 스스로 힘쓰고자 하는 바로써, 족질에게 고하니, 이미 안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 리가 다 환히 밝아져서 호연지기가 유행한다는 오묘함에 대해서는, 그것은 오히려 족질과 내가 애써 힘써 백 번 천 번169) 노력한 후를 기다려 각각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문장으로 논하여 저술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所詢明道之方, 豈易言哉.雖然吾輩當末極之世, 上無君相之治敎, 下無師友之指引.惟當自卓其志, 自强其力.志卓則見高, 力强則私克.見高而私克,道其有不明者乎.世之滔滔者流, 吾下欲說.竊觀近日吾黨中可恃者, 亦多不能强卓心力於利害之際.每一念之, 心懷作惡.如余者溝壑在前, 虎食于外, 得一生於九死.則亦幸矣, 然乃若其志, 則寧失於不知, 不欲其自欺, 寧力之未至, 不欲其自畵.勿以外誘之私, 昧吾本心之明也.今於文卿之請, 以所欲自勉者奉告, 吾知文卿之不以己見昭陵而不加意也.至於萬里明盡浩氣流行之妙,尙待兩家困勉百千之後,各以自然之文論著者,有日也否. 호랑이가 밖을 먹어대니 《장자》 〈달생(達生)〉에 "노(魯)나라에 단표란 자가 있어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물만 마시고 속세의 이익을 다투지 아니하여, 나이 70이 되어도 얼굴이 마치 어린애와 같았는데, 불행히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서 잡아먹혔다. 또 장의(張毅)라는 사람은 부잣집, 가난한 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명리를 얻기에 급급했는데, 나이 40에 속으로 열병이 나서 죽었다. 단표는 내면의 정신만을 기르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혔고, 장의는 외면의 몸만을 기르다가 열병이 그 안을 침범한 것이니,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뒤쳐진 것을 채찍질하지 못한 것이다.〔魯有單豹者, 巖居而水飮, 不與民共利, 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 不幸遇餓虎, 餓虎殺而食之. 有張毅者, 高門縣薄無不走也, 行年四十而有內熱之病以死. 豹養其內而虎食其外, 毅養其外而病攻其內, 此二子者, 皆不鞭其後者也.〕"라고 보인다. 백천(百千)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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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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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질 문경에게 보냄 경오년(1930) 與族姪文卿 庚午 듣자하니 역사책을 기술하는 일로 우당(藕堂)과 말을 하였다고 하니, 크게 나의 뜻을 굳건하게 합니다. 지난번에 우당이 나를 대면하여 말하기를 "우암(尢菴)170)이 사국(史局)171)에 편지를 보내어 수옹(睡翁)172)의 일을 기재하기를 청한 것을 증거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우암이 선열을 선양하는 것이 본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았지, 오늘날의 세상이 우암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우암 당대에 수옹의 일을 기록한 사람이 청나라 사람173)으로 도독부를 우리나라에 설치하고 그 가운데에 사국을 설치했다면 우암은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저들 총독부의 역사를 믿을만하다고 하여 그 가운데에 기입되기를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대저 《통감집람(通鑑輯覽)》은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친히 비평한 것이니, 믿을만한 문자로써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만, 대명(大明)의 유민(遺民)으로서 그 조상의 일을 이 《통감집람》에 기입되기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聞以史事與藕堂有言, 大强人意.向藕對余言, 以尢菴與書史局, 請載睡翁事爲證, 然是但知尢菴闡揚先烈之足法, 而不知今之世與尢庵時異也.使愛新氏置督府於我邦, 設史局於其中, 尢庵決不爲此也.又以彼史爲可信而求入其中, 夫通鑑輯覽淸帝康熙親批也, 可信文字, 孰加於此, 然未聞大明遺民之求入其祖事於是編也. 우암(尢菴) 송시열이다. 사국(史局) 고려와 조선시대 사관이 사초를 꾸미던 곳으로 예문관과 춘추관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로 송시열의 아버지이다. 자는 원유(元裕)이고 호가 수옹(睡翁)이다. 본문의 애신씨(愛新氏)는 청나라 때의 성씨이다. ≪한한대자전≫(2004)에서는 청 태조 누르하치를 난 만주족의 한 부족 이름이었는데, 뒤에 청 임금의 성씨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곧, '애신각라(愛新覺羅)'는 본디 만주족 가운데 한 부족 이름이었는데, 그 부족에서 성장하여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업적을 기리고자 그 후대 임금이 부족명을 성씨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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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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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고 천태 부군 묘표 曾祖考天台府君墓表 우리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문정공(文貞公)과 충선공(忠宣公)부터 비로소 현달하였고,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나와 선조의 업적을 계승하였으니, 우리 집안의 선조로 말하면 매죽당공(梅竹堂公)과 죽계공(竹溪公)이 바로 이분이다. 죽계공 이후로는 나의 증조고인 천태 부군이 높은 재주와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 네 선조의 사업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빌려주지 않아 을미년(1835, 헌종1) 4월 9일에 졸(卒)하였으니 부군이 태어난 순묘(純廟) 갑자년(1804, 순조4) 1월 17일로부터 누린 수명이 겨우 32년이다. 아, 공자(孔子)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천명이다."57)라 하고, 맹자(孟子)는 "불우(不遇)는 하늘의 뜻이다."58)라고 하였으니, 부군이 만난 것은 아마도 또한 천명이고 하늘의 뜻일 것이다.부군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기억력이 아주 좋아 약관이 되기 전에 경전(經傳)과 제자서(諸子書), 역사를 모두 꿰뚫었고, 문사(文辭)가 크게 성취되어 과거 시험에서 사용하는 여섯 가지 문체59)에 해당하는 작품까지도 모두 오묘함을 다하였다.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반드시 오를 수 있었지만 달갑게 여기지 않고 향상(向上)60)하는 한 가지 일에 힘을 쏟았으니, 《주역(周易)》 전권(全卷)이 오랫동안 공부한 책이고, 나아가 천문(天文), 지리(地理), 태을(太乙), 산법(算法), 삼기(三奇), 팔문(八門), 병모(兵謀), 사율(師律), 의약(醫藥), 침구(針灸)61)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여 환히 알았다.천태산 아래 장춘동(長春洞)의 만송(萬松) 가운데에 별장을 짓고 밝은 창문 아래 고요한 궤안에 앉아서, 티끌 한 점 닿지 않았다. 대개 조용한 곳에 거처하고 일을 줄여 장차 정밀한 것을 골라 핵심으로 돌아가 도학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려고 한 것이 순수하였으나 수명이 막아서 도달하지 못하였다.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는데, 어려서 모친상을 당했을 적에는 몹시 애통하게 곡하였고, 아버지와 계모를 섬길 적에는 뜻에 맞추었으며, 이복 동생 4인과 서제(庶弟) 3인을 사랑하여 환심을 얻었다. 자신을 단속하는 데 매우 엄격하여, 소싯적에 여럿이 모여 공부하는데 이때 날씨가 더워서 다른 사람은 모두 편한 곳으로 갔는데도 홀로 관대(冠帶)를 착용한 채로 날을 마치니, 여름 내내 한결같이 하였다. 부군의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고 예에 부합하는 것이 대체로 이러하였다.부군의 휘는 석규(錫圭)이고, 자는 내삼(乃三)이며, 천태거사(天台居士)는 자호(自號)이다. 또 다른 호는 유죽헌(幽竹軒)이다. 고려 이부 상서(吏部尙書)62) 휘 경수(景修)가 시조이다. 이 분이 휘 춘(春)을 낳았으니,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져 자손이 마침내 본관으로 삼았다. 4세를 전해 평장사(平章事) 휘 구(坵)가 있으니 이 분이 문정공이고, 형부 상서(刑部尙書) 여우(汝盂)를 낳았으니 이 분이 충선공이다. 고부군사(古阜郡事) 휘 광서(光敘)에 이르러서는 고려가 망했기 때문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 등 제현과 의(義)를 함께하여 관향(貫鄕)으로 아주 돌아와 절개를 지켜 삶을 마쳤다. 이 분이 휘 취{玉+就}를 낳았으니, 본조에서 직장(直長)을 지냈다.3세를 전하여 생원(生員) 휘 종(宗)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을 닦고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 분이 매죽당이다. 다시 2세를 전하여 휘 횡(鋐)은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생원시에서 2위를 차지하였고 학문으로 천거되어 선릉 참봉(宣陵參奉)이 되었으니, 이 분이 죽계이다. 각각 부군에게 10세, 8세, 7세조가 된다. 휘 정길(鼎吉) 또한 학문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다. 5세조인 통덕랑(通德郞) 휘 세광(世光)은 부안에서 고부로 이사하였다.부친 휘 인성(麟成)은 효로 정려(旌閭)되었으니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모친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영국공신(寧國功臣) 중일(仲一)의 5세손이다. 계모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재빈(再彬)의 딸이다. 배필은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석현(錫顯)의 딸이니 도봉(道峰) 세정(世貞)의 후손이다. 배필로서의 덕에 어긋남이 없어 효행과 열행이 모두 드러났다. 공의 묘소는 부안 주산면(舟山面) 둔계리(遯溪里) 상천동(上泉洞) 선영 안 자좌(子坐) 언덕에 있고, 배위(配位)의 묘소는 그 동쪽으로 25보(步)쯤 떨어진 곳에 있다.장남 경순(景淳)은 효로 정려되었으니 《삼강록》에 실려 있다. 차남은 의순(義淳)이다. 딸은 최준수(崔焌秀)에게 시집가 열행이 있었으니 《삼강록》에 실려 있다. 장남의 아들 낙진(洛進)은 학행(學行)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간행되어 배포되었다. 큰딸은 광산(光山) 김재호(金在浩)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의성(義城)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가 열행이 있었으니 《삼강록》에 실려 있다. 셋째 딸은 함안(咸安) 조기용(趙琪鏞)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은 낙준(洛俊), 낙동(洛東)이다. 사위 최준수의 아들은 병성(秉星)이고, 딸은 행주(幸州) 기우번(奇宇蕃), 울산(蔚山) 김요경(金堯敬), 연일(延日) 정해심(鄭海心) 울산 김만주(金晩柱)에게 시집갔다. 증손자는 택술(澤述),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 태술(兌述), 갑술(甲述)이고, 증손녀는 광산 김재봉(金在鳳), 고흥(高興) 유동기(柳東起), 밀양(密陽) 박채환(朴彩煥), 광산 김기현(金璣鉉)에게 시집갔다.아, 부군 사후 1개월이 지나 나의 고조고(高祖考) 역시 별세하셨으니 이해에 여덟 번의 상이 연이어 나와 집안이 삭막하였다. 나의 조고는 당시 11세였는데 이 때문에 평소의 저술이 흩어져 사라지고 남은 것이 없으니 거듭 한스럽다.돌아보건대 이 불초한 나는 60년 동안 학문하면서 하나도 소득이 없으니 이는 모두 둔한 자질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만약 재주를 지닌 부군이 나만큼 사셨다면 또한 위로 선조 네 분의 업적을 계승하기에 충분했을 터인데, 아, 그렇게 되지 못하였구나. 현명한 조상은 재주는 높으나 장수하지 못하고 잔약한 손자는 재주가 없는데도 애써 학문하니 운명을 어찌하겠는가. 지금 선고(先考)께서 지은 가장에 근거하여 묘표를 지으니 통한을 이기지 못해 이상과 같이 삼가 써서 말을 아는 군자가 논정(論定)하기를 기다린다.경진년(1940) 중춘(仲春) 모일에 증손 택술이 삼가 짓다. 我扶寧之金, 自文貞公、忠宣公始顯, 厥後輩出繩武。若吾家所蒙, 則梅竹堂公、竹溪公是已。竹溪公以後, 我曾祖考天台府君, 有高才美質, 可以繼述四祖, 而天不假年, 卒於乙未四月九日, 距其生純廟甲子正月十七日, 壽僅三十有二。嗚呼! 孔子謂"道廢爲命"也, 孟子謂"不遇天也", 府君所値, 其亦命也天也歟?府君聰明絶人, 記性强博, 弱冠前, 經傳子史, 無不融貫, 而文辭大就, 至於功令六體之作, 皆極其妙。捷蓮桂拾靑紫, 在所必得, 而不屑也, 乃致力於向上一事, 《羲經》全部, 積功所在, 推而及於天文、地理、太乙、算法、三奇、八門、兵謀、師律、醫藥、針炙・(灸), 無不硏究而曉通焉。卜別業于天台山下長春洞萬松中, 明牕靜几, 一塵不到。蓋處靜省事, 將以擇精反約, 至乎道學要妙者, 純如也, 而年壽限之, 未達焉。性孝友, 幼遭內艱, 哭甚哀, 事父及繼母, 稱其意, 愛異母弟四人、庶弟三人, 得歡心。律己甚嚴, 少時衆會攻業, 時天熱, 人皆就便, 而獨冠帶竟晷, 三夏如一。其天資之近道合禮, 類如此。府君諱錫圭, 字乃三, 天台居士, 自號也, 又號幽竹軒。高麗史・(吏)部尙書諱景修爲始祖。生諱春, 封扶寧君, 子孫遂貫焉。四傳而有平章事諱坵, 是爲文貞; 生刑部尙書諱汝盂, 是爲忠宣。至古阜郡事諱光敘, 則麗亡矣, 與圃、牧諸賢同義, 大歸貫鄕, 罔僕終身。生諱[王+就], 本朝直長。三傳而生員諱宗, 逮己卯禍, 杜門修學, 徵辟不就, 是爲梅竹堂。又再傳而諱鋐, 進壯生二, 以學薦爲宣陵叅奉, 是爲竹溪。於府君爲十世、八世、七世祖。諱鼎吉亦以學薦爲叅奉, 丙子亂擧義旅。五世祖通德郞諱世光, 自扶安移于古阜。考諱麟成, 以孝表宅, 事在《三綱錄》。妣漢陽趙氏, 寧國功臣仲一五世孫。繼妣晉州姜氏, 再彬女。配礪山宋氏, 錫顯女, 道峰世貞后。配德無違, 孝烈俱著。墓在扶安舟山面遯溪里上泉洞先塋內子坐原, 配位墓在其東二十五步許。男長景淳, 孝旌閭, 載《三綱錄》。次義淳。女適崔焌秀, 有烈行, 載三綱錄。長房男洛進, 有學行, 遺集刋布。女長適光山金在浩。次適義城金貴載, 有烈行, 載三綱錄。季適咸安趙琪鏞。次房男洛俊、洛東。崔壻男秉星, 女幸州奇宇蕃、蔚山金堯敬、延日鄭海心、蔚山金晩柱。曾孫男澤述、鳳述、萬述、億述、兌述、甲述, 女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密陽朴彩煥、光山金璣鉉。嗚呼! 府君歿一朔, 我高祖考亦下世, 蓋是歲八喪連出, 家戶索然。我祖考時年十一, 以故平日著述, 散亡無遺, 重可恨也。顧玆不肖, 六旬爲學, 一無有得, 總爲鈍根致然。如以府君之才得不肖之年, 亦足以上繼四祖之業矣。嗚呼! 其未也。賢祖才高而無壽, 孱孫不才而强學, 柰何乎運? 今據先考所撰家狀, 而爲阡表也, 不勝痛恨, 而謹書之如右, 以俟知言君子論定焉。歲次庚辰仲春日, 曾孫澤述謹撰。 도가……천명이다:《논어》 〈헌문(憲問)〉에 "앞으로 도가 행해진다 해도 천명이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 해도 천명이다.[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불우(不遇)는 하늘의 뜻이다:《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맹자가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吾之不遇魯侯 天也]"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는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과거……문체:시(詩), 부(賦), 표(表), 책(策), 의(疑)의 여섯 가지 문체를 말한다. 향상(向上):위를 향한다는 뜻으로 심향상거(尋向上去)의 줄임말이다. 정호(程顥)가 존양(存養) 공부에 대해 "성현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씀은 다만 사람들이 이미 잃어버린 마음을 단속하여, 돌이켜서 다시 몸에 들어오게 하고자 할 뿐이니, 스스로 위를 향해 찾아가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게 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침구(針灸):원문은 '針炙'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炙'를 '灸'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부 상서(吏部尙書):원문은 '史部尙書'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史'를 '吏'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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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조고(祖考) 우신재 부군(又新齋府君) 묘표 –경진년(1940)- 祖考又新齋府君墓表【庚辰】 부군의 휘는 경순(景淳)이고, 자는 명헌(明憲)이며, 우신재는 호이다. 우리 김씨는 고려 이부 상서(吏部尙書) 휘 경수(景修)를 시조로 삼으니 부령(扶寧 지금의 부안(扶安))을 본관으로 삼은 이유는 상서공의 아들 휘 춘(春)이 부령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 후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으니 불교와 오랑캐를 배척한 것은 천추에 공이 있다. 아들 형부 상서(刑部尙書) 충선공(忠宣公) 휘 여우(汝盂)가 가학을 계승하고 국가에 공훈이 있어 동방의 명족(名族)이 되었다. 5세를 내려와 고부군사(古阜郡事) 휘 광서(光叙)에 이르러서는 고려가 망하자 의리상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하여 팔판동(八判洞)63)에 들어가 은거하였다가 후에 관향(貫鄕)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는데 자손이 그대로 그곳에 살았다.이 분이 휘 취({玉+就})를 낳았으니 본조에 들어와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 분이 휘 보칠(甫漆)을 낳았는데 16주(州)의 수령을 두루 맡고 도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으니 관직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2세를 내려와 휘 종(宗)은 생원(生員)이니,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뒤 은거하여 강학(講學)하면서 조정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고,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다. 다시 2세를 내려와 휘 횡(鋐)은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생원시에서 2위를 차지하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호는 죽계(竹溪)이다. 사림(士林)에서 추모하여 유천서원(柳川書院)에 모셔 제향(祭享)한다. 이 분이 휘 정길(鼎吉)을 낳았는데 역시 학행으로 참봉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다. 이 분들이 부군의 8세조 이상이다.6세조인 통덕랑(通德郞) 휘 세광(世光)이 처음 고부에 거처하였다. 조부 휘 인성(麟成)은 효로 정려(旌閭)되었으니,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부친 휘 석규(錫圭)는 식견이 넓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나 일찍 별세하여 드러나지 못했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석현(錫顯)의 따님으로 도봉(道峰) 세정(世貞)의 후손이다. 효행과 열행(烈行)으로 모두 알려졌다.부군은 순조(純祖) 을유년(1825, 순조25) 11월 24일에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조부의 복까지 중첩해 입고 승중(承重)하여 슬픔을 지극히 하여 어른처럼 상제(喪制)를 지켰다. 또 모부인이 여러 달 중한 병을 앓을 때는 밤마다 북두성에 간절히 기도하니, 이웃 마을에서 진실한 효도라고 감탄하며 칭찬하였다.이미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성심을 다하여 뜻을 어기지 않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드렸으니, 대체로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온청(溫凊)을 알맞게 하는 것으로 간략한 예절이었다. 이 때문에 모부인이 항상 칭찬하기를, "효성스럽구나, 내 아들아! 나는 일찍 과부가 되었고 또 매우 가난하지만 효도에 편안하여 걱정이 없구나."라고 하였다.부군은 고조의 종통을 계승하였기에 남은 유산이 자못 넉넉하였으나 일찍 고아가 되어 집안일을 담당하지 못한 탓에 전부 숙부의 차지가 되어버려 수전(水田) 6마지기만 남고, 조부의 묘지와 여러 대 조상을 제사 지낼 제수(祭需)를 마련하는 것도 거절을 당하였다. 열 식구가 죽만 먹으면서 온갖 고생을 겪었으나 원망하는 말은 전혀 없고 도리어 새 터에 거처를 정해 부부가 서로 가계를 다스려 농사에 힘쓰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니 20년 사이에 형편이 조금 여유로워졌다.소싯적부터 같은 고을의 유사(儒士)인 옥계(玉溪) 김문규(金文奎) 공에게 나아가 수학하여 일찍 본원의 공부가 있었다. 거처를 정한 날에 《대학》 반명(盤銘)64)의 뜻을 취하여 '우신(又新)'이라 서재에 편액하고 "은거가 좋다는 것 일찍 알았는데 오늘에야 새로운 곳에 거처 정하였네. 명리(名利) 구하는 일에 마음 없으니 우리는 안빈(安貧)할지어다.[早知潛跡好 今日卜新隣 無心名利事 吾輩固窮貧]"라는 시를 짓고는 더욱 학문에 전심하여 부지런히 힘써 확연하게 날로 얻는 바가 있고 성대하게 달로 진전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홍릉(洪陵) 4년 정묘년(1867, 고종4) 2월 21일에 갑자기 졸(卒)하였으니 누린 수명이 43년에 그쳤다. 이때 나의 선고는 9세였다.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달천리(達川里) 뒤쪽 선영 아래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부인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통정대부(通政大夫) 택려(宅麗)의 따님이자 순절신(殉節臣)인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세손이다. 부인의 덕에 어긋남이 없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으니, 남편 상을 당한 뒤에도 조상의 제사를 공경히 받들고 정성껏 자손을 가르쳐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일남 낙진(洛進)은 학행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간행되어 배포되었다. 장녀는 광산 김재호(金在浩)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의성(義城)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가 열행이 있으니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막내딸은 함안(咸安) 조기용(趙琪鏞)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택술(澤述),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이고, 손녀는 광산 김재봉(金在鳳), 고흥(高興) 유동기(柳東起)에게 시집갔다. 희현(熺鉉), 태현(泰鉉)과 밀양(密陽) 박진엽(朴鎭燁), 제주(濟州) 고동희(高東晞), 의성 김달우(金達宇)에게 시집간 딸은 맏사위의 자녀이다. 진렬(鎭冽)은 둘째 사위의 양자이고, 딸은 파평(坡平) 윤상국(尹相國), 광산 김오수(金鰲洙)에게 시집갔다. 제원(濟元), 제선(濟善)과 연일(延日) 정천원(鄭天源), 강진(康津) 김환복(金煥復), 광산 이주성(李周星), 전주(全州) 이▣▣(李▣▣)에게 시집간 딸은 막내 사위의 자녀이다. 형복(炯復), 형태(炯泰), 형관(炯觀), 형겸(炯謙), 형귀(炯龜), 형수(炯洙), 형락(炯洛), 형방(炯坊), 형식(炯湜), 형주(炯澍), 형호(炯濩), 형부(炯溥)는 증손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부군은 효제(孝悌)하고 충후(忠厚)한 성품을 지니고, 순수하고 신중하며 바르고 장중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정밀하고 상세하며 명민한 재주를 가졌고, 조심하고 부지런히 힘쓰는 공부가 있었다. 평소 마음을 쓰고 행실을 단속하는 것은 모두 이 네 가지를 체용(體用)으로 삼아 하늘이 규정한 예법과 유문(儒門)의 법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드물었는데 지금 하나하나 논할 겨를은 없다. 또 무릇 효란 모든 행실의 근원이고 인(仁)을 행하는 근본인데 부군은 이미 이를 극진히 하였으니 도가 이로부터 생겨났음을 의당 알 수 있다. 그러니 또 어찌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지난 계미년(1883)에 선고께서 부군의 효행을 들어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여 갑신년(1884)에 정려(旌閭)의 은전을 받았으니 일이 《삼강록》에 실려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족려기(族閭記)〉를 지어 준 것도 유감이 없을 만하다. 그러나 감개가 드는 점이 있다. 지파(支派)가 종파(宗派)의 가산을 차지하는 짓이 어찌 사람이 할 일이겠으며, 또한 어찌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부군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 일에서 찾아보더라도 그에 짝하는 일이 드물다.일찍이 듣건대 "음덕(陰德)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되, 살아서 보답을 받지 못한 사람은 복이 응당 그 후손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이미 살아서는 부귀영화를 보지 못하고, 40여 세에 별세하였으며 외아들이 어렸다. 후손으로 말하면 나의 선고는 수명이 겨우 중년(中年)으로 그쳤고 나의 형제와 자손 중에는 가문을 번창하게 할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는 부군의 덕이 생전이나 사후에 하나도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는 어떤 법을 따른 것인가. 삼가 통한을 이기지 못한다.예전에 현감 이정직(李定稙) 공이 지은 묘표가 있는데 소략한 문제가 있기에 삼가 다시 완성된 글에 근거해 거의 조금이나마 상세하게 하여 훗날 이것으로 비석 뒷면에 새기게 한다.경진년 2월 부군의 기일을 10일 앞둔 날에 손자 택술이 삼가 짓는다. 府君諱景淳, 字明憲, 又新齋, 號也。我金氏以高麗吏部尙書諱景修爲始祖, 其籍扶寧者, 以尙書公子諱春封扶寧君也。其後平章事文貞公諱坵, 以道學文章大顯于世, 斥佛劾胡, 功存千秋。子刑部尙書忠宣公諱汝盂, 繼家學有國勳, 爲東方名族。五傳至古阜郡事諱光叙, 而麗亡則義當罔僕, 入八判洞遯跡, 後歸貫鄕而終, 子孫因家焉。生諱[王+就], 入本朝直長。生諱甫漆, 歷典十六州, 討賊有功, 官至僉知。再傳而諱宗, 生員, 己卯禍後, 隱居講學, 不就徵辟, 號梅竹堂。又再傳而諱鋐, 進壯生二, 學行薦爲叅奉, 號竹溪。士林追慕, 立祠柳川。生諱鼎吉, 亦以學行爲叅奉, 丙子亂擧義旅。是爲府君八世以上。六世祖通德郞諱世光, 始居古阜。祖諱麟成, 以孝旌閭, 事載《三綱錄》。考諱錫圭, 識博行敦, 早世不彰。妣礪山宋氏, 錫顯女, 道峰世貞后, 孝烈俱著。府君生以純祖乙酉十一月二十四日。十一歲遭外艱, 疊服祖考, 承重致哀, 持制如成人。又當母夫人累朔沈疾, 每夜深禱北辰, 隣里歎賞誠孝。旣早失怙, 專誠養母, 以不違志, 遂所欲爲, 大致則甘旨之備、溫凊之適。乃疏節也。以故母夫人常稱之曰: "孝哉吾子也! 吾早寡且貧甚, 而安其孝, 無虞矣。" 府君爲繼高祖之宗, 世業頗饒, 而早孤未幹家, 盡爲叔父所占有, 只存水田六斗種落, 亦斥營祖考墓地、累代粢盛。十口饘粥, 備嘗艱苦, 而絶無怨言, 乃卜居新基, 內外交治, 明農勤績, 節食縮衣, 二十年間調度稍裕。自少從同郡儒士玉溪金公文奎學, 早有本源工夫, 卜居之日, 取《大學》盤銘義, 扁齋以"又新", 有詩曰: "早知潛跡好, 今日卜新隣。無心名利事, 吾輩固窮貧。" 尤專意學問, 俛焉孜孜, 犁然日有所得, 沛然月有所進, 而遽以洪陵四年丁卯二月二十一日卒, 壽止四十三。時我先考九歲。葬于井邑郡德川面達川里後先塋下丙坐。配靈光金氏, 通政宅麗女, 殉節臣大護軍該九世孫。配德無違, 治家有法, 晝哭後, 敬承宗祀, 誠敎子孫, 樹立門戶。一男洛進, 有學行, 遺集刋布。女長適光山金在浩。次適義城金貴載, 有烈行, 載《三綱錄》。季適咸安趙琪鏞。孫澤述、鳳述、萬述、億述, 女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熺鉉、泰鉉, 密陽朴鎭燁、濟州高東晞、義城金達宇, 長壻男女。鎭冽次婿繼男, 坡平尹相國、光山金鰲洙, 其女。濟元、濟善, 延日鄭天源、康津金煥復、光山李周星、全州李▣▣, 季婿男女。炯復、炯泰、炯觀、炯謙、炯龜、炯洙、炯洛、炯坊、炯湜、炯澍、炯濩、炯溥, 曾孫也。餘不錄。嗚呼! 府君有孝悌忠厚之性, 有淳謹端莊之資, 有精詳明敏之才, 有戰兢勤勵之功, 平生宅心制行, 皆以是四者爲體用, 鮮有不槩乎天秩之禮、儒門之規者, 今不暇枚論。且夫孝, 爲百行之源、爲仁之本, 府君旣盡此, 則道自此生, 宜可知矣, 又何待於論? 往在癸未, 先考擧府君孝行, 上言駕前, 甲申蒙旌閭之典, 事載《三綱錄》。艮齋田先生愚, 撰〈族閭記〉, 亦可以無憾矣。抑有所感慨者, 支占宗業, 豈人所爲? 亦豈人所堪? 然而府君不惟不以爲事, 幷不使人知有其事, 雖求之於古, 亦罕其儔。嘗聞有陰德者, 天報以福, 生不食報者, 應在其後。然而府君旣生, 不見富榮, 沒于强年, 而一子幼。其在於後, 則我先考, 壽僅中身, 不肖兄弟子姪, 無一人賢能以昌門戶者, 是則府君之德, 於前於後, 一不見報矣, 是遵何典? 竊不勝痛恨也已。舊有縣監李公定稙所撰墓表, 而病其疎略, 謹更據成文, 而庶得稍詳, 俾後日以是刻于碑陰。歲次庚辰二月府君諱辰前十日, 孫澤述謹撰。 팔판동(八判洞):〈송암 김공 묘표(松菴金公墓表)〉에는 팔판시동(八判寺洞)이라 되어 있다. 서희순(徐憙淳)이 편찬한 개성부(開城府)의 읍지인 《송경지(松京誌)》에 팔판시동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개성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고 고려 신하 8인이 이곳에 들어와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반명(盤銘):탕(湯) 임금의 반명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2장에 "하루 새로워졌으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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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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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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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김공 묘표 병자년(1936) 學生金公墓表【丙子】 아, 이 정읍군(井邑郡) 산내면(山內面) 종석산(種石山) 을좌(乙坐) 언덕에 자리한 네 자 높이의 봉분(封墳)은 학생인 언양(彦陽) 김공 휘 재행(栽行), 자 내오(乃五)와 부인인 이천 서씨(伊川徐氏)를 합장한 무덤이다. 공의 선조는 고려 때에 위열공(威烈公) 휘 취려(就礪), 익대공(翊戴公) 휘 전(佺), 문신공(文愼公) 휘 변(賆), 정렬공(貞烈公) 휘 륜(倫)이 있으니 높은 관직을 거친 유명한 선조이다.본조 초기에는 충경공(忠敬公) 휘 경직(敬直)이 있으니 관직은 대제학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서(典書) 휘 복생(福生), 참판 휘 윤(潤)을 거쳐 군수 휘 약흠(若欽)에 이르러 비로소 고부(古阜)에 거처하였다. 그 후 인묘(仁廟) 때 도헌(蹈軒) 휘 태운(泰運)은 군부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포위된 날에 의병을 일으키고, 청(淸)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벼슬하지 않아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히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뜻을 드러내었으며, 하지 말아야 할 열 가지 일에 대한 가르침을 만들어 자손에게 남겼다. 이 때문에 세대를 이어 가르침을 계승해 충효(忠孝)를 행하고 문학을 익혀 국려(菊廬) 휘 용(墉), 송곡(松谷) 휘 만상(萬祥), 현곡(玄谷) 휘 명(溟), 영모재(永慕齋) 휘 주성(柱成), 성재(省齋) 휘 신(賮)의 품행이 있었다.공은 성재의 차남으로 도헌에게는 6세, 군수에게는 11세, 위열공에게는 18세손이다. 모친은 통덕랑(通德郞) 밀(䛑)의 딸인 고흥 유씨(高興柳氏)와 성엽(星燁)의 따님인 금성 나씨(錦城羅氏)인데, 공은 나씨의 소생이다. 공은 영묘(英廟) 갑신년(1764, 영조40) 9월 15일에 태어나 정묘(正廟) 기해년(1779, 정조3) 12월 14일에 별세하였으니 향년이 겨우 16세이다.훌륭한 조상을 둔 후손으로서 멀리 향기를 전파해야 하건만 하늘이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드러난 것이 없다. 오직 김이재(金履載)65) 공이 지은 성재의 묘명(墓銘)에서 공에 대해 언급하여 "아들 아무개는 나이가 겨우 10세가 되었을 때 부친상을 당했는데 거상하면서 어른처럼 애도를 극진히 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기록할 만한 점은 이것이다. 효는 모든 행실의 으뜸이니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다. 어려서 이렇게 할 수 있었으니 장성해서는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서씨는 사인(士人) 취학(就學)의 따님으로 성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상을 당했으나 송백(松栢)과 같은 정절과 빙옥(氷玉)과 같은 깨끗한 지조를 평생 동안 굳게 지켰다.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 고부간에 사랑이 더욱 굳어졌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가계를 꾸리는 데 힘썼으니 한(漢)나라 때의 진씨(陳氏) 부인66)과 같은 점이 있었다. 만약 후세의 주자(朱子)가 나타나 〈선행(善行)〉 편을 엮는다면 서씨는 반드시 먼저 거론될 인물일 것이다. 남편 아우의 아들인 용헌(龍憲)을 후사로 삼아 교육하여 재목으로 만들어 가문의 명성을 세웠다. 서씨는 순묘(純廟) 경진년(1820, 순조20) 8월 20일에 별세하였는데 태어난 영묘 계미년(1763, 영조39) 8월 18일로부터 누린 수명이 58년이다.손자는 세열(世烈), 세훈(世勳), 세형(世亨)이고, 손녀는 여흥(驪興) 민주호(閔周鎬), 충주(忠州) 박원항(朴源恒)에게 시집갔다. 증손자는 원석(源錫)은 진사(進士)이고, 봉석(奉錫), 홍석(弘錫), 형석(炯錫), 기석(璣錫)이며, 증손녀는 문화(文化) 유병철(柳炳喆), 연일(延日) 정희원(鄭喜源), 해평(海平) 윤계선(尹桂善), 전주(全州) 이호선(李鎬善), 전주 최경렬(崔暻烈), 울산(蔚山) 김희수(金希洙), 의령(宜寧) 남정옥(南廷玉)에게 시집갔다. 내외 후손은 지금 100여 인이다.공자가 말하기를,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은 복이 있다."67)라고 하였다. 무릇 선행으로는 효행과 열행(烈行)이 가장 큰데, 삼가 생각건대 공의 내외 두 분의 효행과 열행은 지극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어서 양자의 후손의 숫자가 많고 대대로 선대의 가업을 전하여 그 복이 끝이 없으니 어찌 하늘이 당일에 누리지 못한 복을 보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김한경(金漢鏡) 구상(求相)이 학문을 성취하고서 가문의 논의로 나에게 글을 청하고 무덤에 묘표를 세우고자 하여 사적과 행실을 상세히 말해 주었는데 내가 듣고 감탄하였기에 이와 같이 써서 일을 돕는 의리를 담는다. 嗚呼! 此井邑郡山內面種石山負乙之岡四尺之封者, 學生彦陽金公諱栽行、字乃五及其配利川徐氏合封之藏也。公之先, 在麗而有威烈公諱就礪、翊戴公諱佺、文愼公諱賆、貞烈公諱倫, 俱經大官之名祖。本朝之初, 忠敬公諱敬直, 其官大提學, 贈右議政。歷典書諱福生、叅判諱潤, 至郡守諱若欽, 始居古阜。厥後仁廟時, 蹈軒諱泰運, 倡義於君父被圍之日, 不仕於冠屨倒置之後, 以明《春秋》之義, 擧尊攘之意, 作十勿之訓, 以遺子孫。是以連世繼述, 課忠孝績文學, 有菊廬諱墉、松谷諱萬祥、玄谷諱溟、永慕齋諱柱成、省齋諱賮之行義。公省齋之仲子, 於蹈軒六世, 郡守十一世, 威烈十八世。妣高興柳氏, 通德郞䛑女; 錦城羅氏, 星燁女。公, 羅氏出也。生以英廟甲申九月十五日, 終以正廟己亥十二月十四日, 年僅十六。醴源之派, 靈根之苖, 宜其流遠芬播, 而天不假年, 無所著見, 惟金公履載所撰省齋墓銘, 語及公云: "子某年甫十歲, 遭外艱, 居喪盡哀如成人, 鄕里稱之。" 可書者此也。孝冠百行, 餘可以推。幼能如此, 長何可量? 惜乎其未也。徐氏, 士人就學女。成婚未幾, 遭晝哭, 松栢之貞, 氷玉之潔, 固其生平, 誠於養姑, 慈愛愈固, 勤於紡績, 以致家業, 有若漢時陳氏之婦。使後朱子作而編〈善行〉之書, 則在所先擧也必矣。以夫之弟子龍憲爲後, 敎育成材, 樹之家聲。以純廟庚辰八月二十四日終, 距其生英廟癸未八月十八日, 壽五十八。孫男女: 世烈、世勳、世亨, 驪興閔周鎬、忠州朴源恒。曾孫男女: 源錫, 進士, 奉錫、弘錫、炯錫、璣錫, 文化柳炳喆、延日鄭喜源、海平尹桂善、全州李鎬善、全州崔暻烈、蔚山金希洙、宜寧南廷玉。內外後孫, 今爲百餘人。孔子曰: "積善之家, 必有餘慶。" 夫善之大者, 莫如孝烈, 竊念公之外內兩位孝烈, 出於至性, 而所後子姓, 其麗蕃庶, 世傳箕裘, 厥慶未艾, 豈非天所以報當日之不食者歟? 今漢鏡求相成學, 以門議請余文, 表刻斧堂, 而具言其事行。聞而感歎, 爲之著論如此, 庸附相役之義云爾。 김이재(金履載):1767~1847.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공후(公厚)이며, 호는 강우(江右)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 김시찬(金時粲)이고, 아버지는 김방행(金方行)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이다. 우의정 김이교(金履喬)가 그의 형이다. 검열(檢閱), 개성 유수(開城留守),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형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파(時派)로 역량 있는 중신이었으나 벽파(辟派)와의 싸움으로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했다. 판서로 있을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법전에 실린 금고조(禁錮條)를 삭제하거나 바로잡아 백성의 신원안(伸寃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저서로 개성 유수 재임 시에 지은 《중경지(中京誌)》가 있다. 진씨(陳氏) 부인:16세에 시집을 왔다가 수자리 서러 떠난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는데, 늙은 시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개가하지 않고 정성으로 모셨다. 《小學 善行》 선행을……있다:《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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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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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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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복재 김공 묘표 병술년(1946) 復齋金公墓表【丙戌】 나는 17세에 처음으로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성재(星齋) 종중(宗中)에 가서 문미(門楣) 사이에 적힌 문자 하나를 보았는데 선조를 사모하고 종족과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뜻을 간곡하게 말하였으니 온화한 군자의 말씨였다. 이는 남원 김씨(南原金氏)로 자가 태숙(泰叔)인 김석균(金錫均)이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68) 선생을 모시고 여기에 이르러 쓴 글귀라고 하여 마음속으로 기억하였다.4년이 지나서 사우(師友)를 따라 남원을 유람하였는데 남원 사람이 "우리 마을의 학문은 복재 김공을 선진(先進)으로 삼습니다."라고 하기에 상세한 내용을 물었는데 왕년에 성재에 글귀를 적은 분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마침내 목동리(木洞里)에 나아가 공을 알현하였는데 소탈하고 중후하며 위엄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쁜 탓에 말씀을 온전히 받들어 공이 간직한 바를 전부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30년 뒤에 다시 목동리를 들렀는데 공은 이미 갑자년(1924)에 돌아가고 옛날에 거처했던 간운정(澗雲亭)은 빈터가 되고 후손은 곤궁하여 스스로 먹고 살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개탄하고 돌아왔다. 지난가을 공의 차자(次子)인 김문철(金文喆)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묘소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가장은 김문철의 형 김인철(金仁喆)이 지었는데 내용이 소략하고 군더더기가 많아 근거로 삼아 글을 짓기가 어려웠기에 평소의 저술을 보고 싶었으나 역시 그럴 수 없었다. 이에 "공을 아는 사람에게 좋은 가장을 얻어서 오면 응당 요청한 대로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끝내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였으며 김문철은 지금 또 갑자기 죽었다. 아, 슬프다. 두 세대의 생사를 보면 인사(人事)에 대한 감개가 어떠한가. 가장이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가 어찌 차마 말 한마디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가장 가운데 근거할 만한 점을 근거하고 삼가 나의 뜻을 덧붙여 드러내 논하니 거의 괜찮을 것이다.가장에 이르기를 "공의 본관은 부안으로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의 후손이며, 충경공(忠景公) 휘 익복(益福)의 12세손이며, 효자(孝子) 휘 병규(炳奎)의 장자이고, 모친은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다. 헌종(憲宗) 정미년(1847, 헌종13) 5월 24일이 공이 태어난 날이고,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부인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덕과 학문을 서술한 내용으로 말하면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봉양하니 이웃 마을이 감화되었고, 집안을 엄숙하게 다스리니 내외가 정숙(整肅)하였다. 연재의 문하를 출입하여 마음과 행실이 진실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평소 공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경(敬)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진실로 유자(儒者)에 행실을 단속하고 덕을 증진하는 정해진 법도이니, 전날 뵙고 안 것 외에도 공을 알 수 있는 점이 많았다.그러나 한 가지 공이 지킨 절조와 들어간 학문의 문로(門路)로 말하면 끝내 상세하지 못한 면이 있었는데 공이 지은 간운정의 원운(原韻)에 "마음을 다스려 도를 듣는 것은 경전을 궁구하는 데 있다네."라는 시구(詩句)를 본 뒤에야 공의 학문이 주자의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며 순서를 따라 점차 나아가는 뜻을 진정으로 얻어, 세속의 단계를 뛰어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깨달아 육왕(陸王)69)의 뒤를 잇기를 꺼리지 않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학계(學界)에 알려 공의 이전 자취를 밟아 폐단이 없게 할 만하다. 이에 써서 김문철의 아들 김옥열(金鈺烈)에게 주어 목동 앞 방사평(防沙坪) 건좌(乾坐) 묘소에 새기게 한다. 余年十七, 始至扶風之星齋宗中, 見楣間所題一文字, 懇懇言思慕祖先, 親睦宗族之意, 藹然君子人辭氣云。是南原族, 名錫均, 字泰叔, 陪淵齋宋丈席, 到此而題, 心識之。越四年, 從師友遊于南原。原之人言: "吾鄕之學, 復齋金公爲先進。" 問其詳, 往年題文星齋者, 是其人也。遂造謁于木洞之里, 則簡重有威, 令人可敬。顧以凌遽未能穩承論旨, 盡得所存爲恨。後三十年, 又過木洞, 公已以甲子六月觀化, 而舊居澗雲亭爲墟, 後承窮不能自存, 爲之慨歎而歸。去年秋, 公次子文喆, 以狀來請銘墓之文。狀則其兄仁喆撰, 而疎略賸贅, 難可據而爲文, 欲見平日著述, 而亦不得。乃報以更得善狀於知公者以來, 當如請, 則謂竟無可得之路矣, 而文喆今又遽沒。嗚呼悲夫! 兩世幽明, 人事之感, 顧何如也? 吾何忍以狀之未完而無一言乎? 乃據其可據者, 竊附己意而表論之, 庶其可乎! 狀云: "公系出扶安, 文貞公諱坵後, 忠景公諱益福十二世孫, 孝子諱炳奎長子, 妣陜川李氏。憲宗丁未五月二十四日, 其生也; 全州李氏, 其配也。" 至敘德學, 則曰: "事親養志, 隣里化之。齊家以肅, 內外斬斬。出入淵門, 得眞心實行之贊。平生工程, 無速無緩, 在於一敬。" 是固儒者制行進德之定法。知公於前日觀瞻之外者亦多矣。然若乃一副當所主欛柄, 所入門路, 則終有未悉者。及讀公澗雲亭原韻"治心聞道在窮經"之句, 然後知公之學, 正得朱子讀書窮理、循序漸進之意, 與世之欲躐階越梯, 一朝頓悟, 而不憚躡陸、王後塵者異矣。是可以聞之學界, 蹈公之轍而無弊也。於是乎書之, 以授文喆子鈺烈, 刻于木洞前防沙坪坐乾之阡。 송병선(宋秉璿):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화옥(華玉)이다. 호는 연재(淵齋)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회덕(懷德) 출신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기용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박탈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건의하고 나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저서로 《연재집(淵齋集)》 등이 있다. 육왕(陸王):송(宋)나라 육구연(陸九淵)과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키는데 육구연의 학문을 왕수인이 발전시켰기 때문에 병칭하였다. 주희(朱熹)는 경서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육구연은 마음의 실체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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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와 배공 묘표 임오년(1942) 栗窩裵公墓表【壬午】 나는 이해 봄에 만성(晩醒) 정규병(丁奎炳)70)의 육위문(六偉文)71)으로 인해 율와 배공의 정(亭)에 기문(記文)을 지어72) 공의 외증손(外曾孫) 정유진(丁有鎭) 군의 요청에 부응하였다. 1년이 되지 않아 정군이 다시 와서 공의 현손(玄孫) 배창일(裵昌日)의 뜻으로 공에 대한 가장을 가지고 나에게 묘표를 구하였다. 내가 "나는 문장에 솜씨가 없어 이미 율와정에 흠결을 남겼는데 어찌 묘소에 감히 거듭 흠결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군이 굳게 그치지 않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사양할 수 없었고 가장도 간명하고 소박하여 믿을 만하기에 살펴보고 서술한다.공의 휘는 종철(宗哲)이고, 자는 정서(正瑞)이다.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무열공(武烈公) 현황(玄黃)이 이름이 드러난 조상이고 달성(達城)이 본관이다. 증조는 참봉(參奉)을 지낸 재철(再喆)이고, 조부는 동연(東淵)이며, 부친은 성엽(聖燁)이고, 모친은 장흥 고씨(長興高氏)이며, 성담(聖淡)과 광산 김씨(光山金氏)가 본생부모이다. 순조(純祖) 계해년(1803, 순조3)과 고종(高宗) 정축년(1877, 고종14)이 생몰이다.타고난 성품이 청렴하고 개결하여 평소 자신의 힘이 아니면 먹지 않고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며, 명성과 부화(浮華)를 제거하고 성실을 근본으로 삼았다. 항상 자식을 경계하여 "충(忠)과 효(孝)는 하나의 이치이다. 선비가 세상에 살면서 출사(出仕)하여 임금의 녹(祿)을 먹으면 청렴하고 부지런히 직분을 받들어 행해 배운 것을 나라에 행하며, 은거하여 임금의 땅에 농사지어 먹으면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봉양하여 배운 것을 집에 행해야 한다. 나는 녹을 먹을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들과 농사짓고 독서하는 것이다. 비록 매우 곤궁하나 그 사이에 자연히 충과 효를 병행하는 방도가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언행의 대략이다.아,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습속이 변해 임기응변의 술수로 기교를 부리고 허위(虛僞)가 풍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편취(騙取)하여 의롭지 않은 짓을 자행하며, 절도를 넘고 분수를 범해 분에 넘치는 부귀를 바라며, 어버이를 속이고 임금을 속여 충도 없고 효도 없어서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무슨 일인지 모른다. 온 동토(東土)가 도도(滔滔)히 모두 이러하여 점점 심해져 끝내 관자(管子)의 "사유(四維)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이에 멸망한다."73)라는 탄식에 이르고야 말았으니, 공처럼 본성 안에서 근본을 돈독히 하고 뜻을 면려하며, 인륜과 강상 사이에서 처한 지위에 따라 의를 행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다."74)라고 하였으니 만약 사람마다 모두 스스로 자신의 분수를 다했던 공처럼 할 수 있다면 나라와 천하가 평안해지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삼가 감개와 탄식을 이길 수 없기에 공의 행적을 써서 무안군(務安郡) 청계방(淸溪坊) 용흥동(龍興洞) 간좌(艮坐) 언덕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글을 읽고 은거하여 실지에 힘썼던 선비가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공의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니 창포(滄蒲) 가 인좌(寅坐)에 따로 장사 지냈다. 아들은 학채(學采), 학수(學洙), 학현(學賢)이고, 딸은 김해(金海) 김방민(金邦珉)에게 시집갔다. 지금 글을 청한 배창일은 배학현의 증손이라고 한다. 余於是年春, 因丁晩醒奎炳六偉文, 記栗窩裵公之亭, 而副其外曾孫丁君有鎭之請矣。未一朞, 丁君再至, 以公玄孫昌日意, 抱公家狀, 求余表阡之文。余曰: "僕不文, 旣病于亭, 阡豈敢重之?" 丁君固以請未已, 辭旣不獲, 狀又簡質可信, 乃按而敘之。曰: 公諱宗哲, 字正瑞。高麗太師武烈公玄黃, 其顯祖, 而達城, 貫也。曾祖叅奉再喆, 祖東淵, 考聖燁, 妣長興高氏, 而聖淡及光山金氏, 其所生也。純祖之癸亥, 高宗之丁丑, 生卒也。天質廉介, 平生非其力不食, 非其義不行, 銷聲祛華, 誠實爲基。常戒其子曰: "忠孝一理, 士之於世, 出而食君祿, 則廉勤奉職, 行其所學於國; 處而食君土, 則盡誠養親, 行其所學於家。我則非食祿之器, 故與若曹從事耕讀。雖甚窮約, 其間自有忠孝幷行之道, 汝其勉之!" 此言行梗槩也。噫! 世降俗渝, 機變爲巧, 虛僞成風。釣名騙利, 恣行不義; 踰節犯分, 希覬富貴; 欺親罔上, 無忠無孝, 不知禮義廉恥之爲何事者。環東土滔滔皆是, 而駸駸竟至管子"四維不張, 國乃滅亡"之歎而後已。若公之敦本勵志於性分之內, 素位行義於倫常之間者, 凡幾人哉? 孟子曰: "人人親其親, 長其長, 天下平。" 如使人人皆能如公之自盡其分, 則於國天下乎何有? 竊不勝感歎, 而爲之書, 使人之過務安郡淸溪坊龍興洞艮坐之原者, 讀此文而知其爲隱居務實士藏焉。公之齊, 密陽朴氏, 別葬滄浦上寅坐。男學采、學洙、學賢, 女適金海金邦珉。今昌日, 學賢曾孫云。 만성(晩醒) 정규병(丁奎炳):1870~1960.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태첨(泰瞻)이며, 만성은 호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를 사사하고 사서오경과 한(漢)․당(唐)․송(宋)나라 학자들의 서적을 두루 익혔다. 1894년(고종31) 갑오경장 이후 은거하였고, 1910년(융희4) 경술국치 이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끝까지 거부하였으며 일제의 신학문교육에 맞서서 후학들의 유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만성유집(晩醒遺集)》이 있다. 육위문(六偉文):상량문(上樑文)을 말하는데, 상량문에는 아랑위(兒郞偉)라는 말이 여섯 번 들어가므로 이렇게 칭한다. 율와……지어:《후창집(後滄集)》 권21에 〈율와정기(栗窩亭記)〉가 실려 있다. 관자(管子)의……멸망한다:《관자(管子)》 〈목민(牧民)〉에 '사유는 첫째는 예, 둘째는 의, 셋째는 염, 넷째는 치인데, 사유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四維不張 國迺滅亡]'라고 하였다. 사람마다……것이다:《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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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金聖九 丁卯 제가 생각할 때 오늘날 선비가 법도를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의 입장으로 말하면 진실로 인사의 실수이지만, 천하의 입장에서 말하면 또한 운수와 관련이 있으니 인력으로는 간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부형이 된 자들은 비록 자기 혼자 이런 일을 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천하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진실로 방지하고 막는 방법을 다해야 하고, 이미 그렇게 되어서 돌이킬 수 없다면 또한 이치대로 순응하여 처리할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대 동생의 일과 같은 경우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본디 하나의 춘추대의와 같은 사업이 있어서 사람들이 들을 만한 점이 충분히 있으니, 결단코 도도하게 시류를 쫓는 자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문(儒門)의 영광(靈光)63)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선생을 아버지로 삼고 국사(國士)로 촉망받는 김노동(金魯東)을 형으로 삼았는데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그대 동생이 생각하지 못하여 생긴 실수이고 그대가 마음을 어떻게 가누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선친의 신령이 지하에서 인도하고 그대의 동생이 밝게 깨달을 것이니, 저는 그가 번연히 생각을 바꾸어서 구업(舊業)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장차 오래지 않을 것임을 장담합니다. 그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빠른 시일 내에 그가 마음 돌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성현이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을 경계한 것이 있고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근심한다.'64)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만 마땅히 나의 정성을 쌓아서 감동을 시켜야 할 뿐이고 결코 계속 애태우면서 성정의 바름을 잃어 혹여 건강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대가 조금이라도 이 점을 소홀히 한다면 위로 선영감(先令監)이 부탁한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 그대가 식견이 높고 수양이 두터워서 반드시 맞닥뜨린 거슬림으로 인하여 원대한 사업을 방해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서로 친애함이 깊은 까닭에 멀리 염려한 것입니다. 부디 잘 살피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대 동생에 대해 몇 마디 충고를 하여 이렇게 아울러 동봉하여 보내니, 이는 교제의 우의로 볼 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를 닦으며 행적을 숨긴지라 얼굴을 뵐 길이 없음에 바람결에 슬퍼합니다.근래에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철거된 사액서원을 다시 세운다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미 조정의 명으로 철거되었는데 임금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다시 세우는 것은 매우 온당치 않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도의 흥망은 나라의 흥망보다도 중요하니, 도의 흥기를 바란다면 나라가 망한 것으로 혐의를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 세우는 것은 괜찮지만 다시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니, 또 어떤 사람이 "옛 서원도 오히려 이미 철거되었다는 이유로 감히 복구하지 못하는데, 새로 세우는 것을 더욱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또 새 서원을 허락하고 옛 서원을 금지한다면 이것은 근래의 현인은 후대하고 선대의 현인은 박대하는 것이니 옳겠는가?"라고 합니다. 이 일은 어떻게 판단해야만 중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훼철된 서원에서 단을 차려 제향을 지낼 때에 제관(祭官)을 요청받아도 일찍이 가서 참석하지 않았으니, 서원을 복구하는 것은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적이 의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근세 유문(儒門)의 대가(大家)에서 많이들 새 서원을 창건하여 근래의 현인을 받들어 모시는데 비난하는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유독 선현의 서원에 대해서만 감히 복구하지 못한다면 어찌 치우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새로 창설하는 것과 아울러 모두 옳지 않아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유문이 거행한 바가 비난을 받지 않은 것을 예법에 타당하다고 여깁니까? 제대로 알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竊以爲今日士子之改度, 自一人而言, 固人事之失也, 自天下而言, 則亦運氣之關, 而非人力所與.爲其父兄者, 雖若自我獨當, 其實天下之通患也.未然之前, 固當盡防杜之道; 既然而不可回, 則亦可以理遣而知所處矣.若令弟之事, 又有異焉.蓋其胸中亦自有一副《春秋》一般事業, 足以聽聞於人者, 決非滔滔趍風者比.然以儒門靈光志山先生爲父, 以國士屬望金魯東爲兄而有此, 則是令弟不思之失, 而宜足下之不知爲心也.雖然, 先靈之所冥誘, 令弟之所明悟, 吾知其幡然改圖, 能復舊業者, 將非久也, 足下可勿慮矣.如未及早見其回, 聖賢有有所不正之戒、父母唯憂之訓, 但當積吾誠而致其感而已, 決不可一向焦灼, 有失性情之正而或致損攝之歸也.若足下少忽於此, 則非所以上念先令監付託之重也.吾又知足下識高而養厚, 必不以所遇之拂逆妨遠大之業.然猶且云然者, 以其相愛也深, 故獻慮也遠, 庶可知照不讁? 令弟許有數語忠告, 茲幷胎往, 是在情契, 不得不然.道修跡蟄, 欲面無由, 臨風沖悵.近日此省多人, 復立既撤之賜額院.有云"既以朝令撤, 而幸其無君而復設, 大未安者", 有云"道之興亡, 重於國之興亡, 欲道之興, 不以國亡爲嫌者".有云"新設可也, 復設未可"者, 則又有云"舊院尚以既撤, 而不敢復, 則新設尢豈敢乎? 且許新而禁舊, 則是厚近賢而薄先賢, 其可乎"者.未知此事如何評斷, 則得其中乎? 澤述則於毀院壇享祭官之請, 不曾往參, 則其復院也, 又何論? 然竊有所疑者, 近世儒門大家, 多新創院宇, 尊奉近賢, 而未見有非議者, 獨於復先賢之院也不敢爲, 則豈不爲偏乎? 抑幷與新創者, 非是而不可, 以儒門所行未見非議, 爲得當於禮法耶? 示破之爲幸. 영광(靈光) 세상에 얻기 어려운 훌륭한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한다. 부모는……근심한다 맹무백(孟武伯)에 효도를 묻자, 공자는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한다.[父母唯其疾之憂]"라고 하였다. 《논어》 〈위정(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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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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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金聖九 丁卯 편지를 받은 지 이미 60일이 되었습니다. 편지에서 매미가 이제는 적막하여 소리가 없고 시물도 이미 변했다고 했으니, 인생도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회옹(주희)이 매미소리를 듣고 여백공(여조겸)을 그리워하고 다시 세월이 유수 같다고 한탄한 것65)은 진실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갈대에 흰 이슬이 내렸다66) 한 것이 바로 이때이니, 시인이 내 마음을 먼저 알아챘음을 깨달았습니다. 멀리 생각할 때 신령한 골짜기를 점쳐 옮겨가 은둔하여 고반을 잊을 수 없다는 것67)을 기뻐한 것이고 벌단68)의 자신의 힘으로 먹고69) 사는 것을 달게 여긴 것이니 그대의 학력이 이에 굳세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욱 길이 막혀 한탄을 느끼게 되니, 시인이 친히 경험했던 것입니다. 나의 생계는 가을인데도 봄처럼 식량이 떨어져 죽어서 구렁에 나뒹구는 것은 기대하지 않고 망각하지 않아도 바로 여기 있으니 우스울 뿐입니다. 물으신 영재에게 의탁한다는 것은 근심이 끝이 없어 제자를 바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학사에 있는 젊은이 중에서 구해보면 계란을 보고 새벽에 울 닭을 구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바둑소리를 들으면서도 고니를 잡을 생각을 하는 자도 있고, 날카롭게 나갔다가 재빨리 물러나는 자도 있으며,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하는 자도 있어서, 3년 동안 온 마음으로 오로지 하는 자는 적으니, 어떻게 이른바 맡길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매번 귀 학사의 학자를 떠올려볼 때 고상한 뜻과 법도 있는 행동으로 떨치고 닦아서 정해지고 행동에 법도가 있어서 변동이 있지 않습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배우는 자는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상도 천루하고 가르치는 기술도 매우 소홀합니다. 추론하여 말하면 가르치는 자가 기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국면도 이미 바뀌어 위에서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없습니다.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향인이 이를 매우 천시함에 이르렀고 부모도 미워함에까지 이르렀으니, 시세가 이와 같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매번 스스로 생각할 때 오늘날 넓은 소매와 상투는 훗날에 깎이고 좁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기 어렵고, 오늘날 암송하고 읽는 책은 훗날 방언이 되지 않는다고 보증하기 어려우니,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꼭 원수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쌀을 싸다 주는 격입니다. 나 또한 장차 그만두는 것이 옳겠습니까. 갑자기 다시 스스로 해명하길, 《예기》에는 이르지 않은 것은 억측하지 말라는 문장이 있고, 《논어》에는 믿지 못할 사람을 억측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으니, 오늘 일은 오늘 해야 되는데 또한 이것을 만약 그만둔다면 독서하는 자와 종자는 끊어질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시세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히려 머리를 굽히고 구하러 왔으니, 또한 특이합니다. 다시 힘써 서로 함께 이와 같이 하여 몇 년을 지냈는데도 피차간에 보충되는 것이 없었으니, 부끄러워 땀이 납니다. 그대가 이미 시험한 하나의 묘책을 보여주셔서 저로 하여금 종사토록 하면 어떠하겠습니까.서원은 복원이든 신설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부당합니다. 오늘 보내신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매우 바르니, 제가 일찍이 단을 설치하여 제향하는 것에 참가하지 않은 것도 이런 뜻입니다. 일찍이 《연재집》을 보았는데 서원의 유지(遺址)에서 단을 설치하여 제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선사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두 문하의 사람들이 대부분 복원한 서원의 제사에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어떤 학인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데 만약 삭발하여 모양을 바꾸면 소원을 이룰 수있지만 중화와 오랑캐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삭발하면 원수는 보복하겠지만 오랑캐가 되고, 삭발하지 않으면 중화의 모습은 보존하겠지만 불효자 된다고 말하니, 이 사람의 의리에 처함은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奉書已浹六旬矣.書中清蟬, 今寂無聲, 時物既變, 人生安得不然? 昔晦翁之聞蟬而懷伯恭, 復嘆歲月之如流者, 良有以也.蒹葭白露, 此正其時, 方覺詩人之先獲我心.遙想移卜靈谷, 嘉遯自得, 樂考槃之不諼, 甘伐檀之食力, 足下學力, 於是爲壯.尢覺道阻之嘆, 詩人親經歷也.鄙人計活, 秋亦春也, 溝壑之歸, 不待不忘, 而即在好笑.所詢英才可託者, 可見憂無疆, 望弟子之意.然欲求乎鄙社少輩, 則不幾乎見卵而求時者乎? 蓋聽奕而思鹄者有之矣, 進銳而退速者有之矣, 強其所不欲者有之矣, 三年久而一心專者, 亦寡矣, 安有所謂可託與否? 每舉貴社學者, 志尚之定, 動止之法, 以振厲之, 而殊未有動變者.蓋總而言之, 非惟學之者無志, 其實淺陋, 敎術之全疎也.推而言之, 亦非惟敎者之無術, 世局已革, 無有在上而勸懲.非惟無勸懲, 至於鄉人賤之甚, 而至於父母惡之, 時勢如此, 亦柰如之何哉? 每自思今日袖髻, 難保他日不爲薙窄, 今日誦讀, 難保他日不爲侏離, 則吾之所敎, 適所以藉寇兵, 而齎盜糧也.我且已之可乎? 忽復自解曰,《記》有毋測未至之文,《語》有不億不信之訓, 今日事可今日爲之, 且此若已之, 讀書者和種子也絕.且以此日時勢, 渠猶屈首來求, 亦可異也.乃復鼂勉相與, 如此之間, 悠悠數年, 彼此無補, 足爲赧汗.足下幸示以一副妙策於已試之餘, 俾知從事如何?書院, 不問復設新設, 幷不當.今日來敎甚正, 鄙之曾不參於壇享者, 亦此義也.曾見《淵齋集》, 不許院址壇享, 先師亦然.今聞兩門人多參於復院之祭, 此又何哉?有學人欲報父讐, 若削髪變形則可得遂願, 而華夷之防又不可毀, 削之則讐雖復, 而陷夷狄, 不削則華雖保, 而陷不孝云云, 此人處義, 如何則可? 엣날에……한탄 한 것은 "수일 이래로 매미소리가 더욱 맑으니, 이를 들을 때마다 고상한 풍모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數日來 蟬聲益淸 每聽之 未嘗不懷高風也〕"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3 〈답여백공(答呂伯恭)〉 갈대에……내렸다 《시경(詩經)》 〈진풍(秦風)〉·〈겸가(蒹葭)〉에 "긴 갈대 푸르른데, 흰 이슬이 서리가 되었네. 저기 바로 저 사람이 물 저편에 있도다. 물길 거슬러 올라가나, 험한 길이 멀기도 하네. ……〔蒹葭蒼蒼, 白露爲霜 所謂伊人. 在水一方, 遡洄從之. 道阻且長 ……〕" 한 데서 온 말이다. 고반을……없다는 것 산림에 은거하며 안빈낙도하는 은사의 생활을 즐긴다는 말이다. 고반(考盤)은 고반(考槃)과 같다. 《시경(詩經)》 〈위풍(衛風)·고반(考槃)〉에 "산골 시냇가에서 한가히 소요하나니, 현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라는 말이 나온다. 벌단 《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篇名)이다. 이 시의 뜻은 관원이 직무를 태만히 한 채 국록(國祿)을 축내면 안 된다고 풍자한 것이다. 그런데 시 속에는 "심지 않고 수확하지 않으면, 어떻게 벼 삼백 다발을 거두리오.〔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兮〕"라는 표현이 있는데, 김택술은 이 시구를 단장취의하여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삶을 긍정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먹고 《시경(詩經)》 〈벌단(伐檀)〉에 "끙끙 박달나무를 베어 왔거늘 하수 물가에 버려두니, 하수가 맑고 또 물결이 일도다. 심지 않고 거두지 않으면 어찌 벼 300전을 취할 것이며, 수렵하지 않으면 어찌 너의 뜰에 매달려 있는 담비를 보겠냐고 하니, 저 군자여, 공밥을 먹지 않도다.〔坎坎伐檀兮 寘之河之干兮 河水淸且漣 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 不狩不獵 胡瞻爾庭有縣兮 彼君子兮 不素餐兮〕"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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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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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金聖九 戊辰 편지에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를 창설한다고 했는데, 세상을 부지(扶持)하고자 하는 고심이 존경스럽습니다. 취지 및 규약은 모두 정당하고 견실하니, 이 마음으로 이 규약을 행한다면 어찌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음이 극성하면 반드시 되돌아오고 난리가 극성하면 반드시 다스려진다는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건대 한심한 저에게까지 이 논의가 미친 것은 이미 타인으로 여기지 않는 은혜를 내려준 것인데, 미처 먼저 여쭈지 못하였으니 일을 가벼이 처리했다는 죄를 면하지 못했다고 하였고, 또 많은 선비들에게 촉망을 받고 있으니 제가 사양하지 않고 일을 함께 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어찌 그대가 지나치게 공손하여 저를 잘못 선택한단 말입니까? 또한 어찌 제가 염치없이 받아서 외람되이 감당할 것이겠습니까? 아, 천하가 생긴 지 오래되어 시세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세도의 흥망성쇠를 군주와 재상이 주도했지만 지금 세상은 사회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주역》의 도는 때가 중요합니다. 성현이 제시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유교회를 세우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변통을 모르는 구애된 의론입니다. 만약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 유림의 사회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사회는 화복의 보답으로 유혹하고 요행을 이루는 기회라고 의탁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바르지 않은 주장이라도 대부분 확장이 됩니다. 반면에 우리 유림의 사회는 너무도 평담하여 놀랄만하고 기뻐할 만한 모습이 전혀 없고 한갓 도덕과 윤리의 설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고하니, 사람들이 이 설을 보고 진부하다고 말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장차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정당한 주장하더라도 삐걱대어 성공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백성들의 타고난 본성이 실추되지 않았고, 믿을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니, 진실로 먼저 스스로 한계를 긋는 의론을 만들어 앉아서 멸망하게 되는 것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가장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있으면 어찌 시대의 제약이 없겠습니까? 만약 근래의 모모 단체처럼 시령(時令)을 듣는 것을 면치 못한다면, 유교를 부지하여 세운다는 것이 남보다 앞서 유교를 더럽히고 파괴하게 될 것이니, 결단코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비록 신경 쓰지 않더라도 일이 중도에 확장되는 단계에 이르러 그 즉시 그만두기 어렵게 되면 혹 결과적으로 더럽히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부디 대단히 살피고 신중히 하여 후회하는 상황에 이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잠시의 삭발을 부끄러워하여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식이 아니니, 어찌 자식 노릇 못하는 중화의 도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머리를 잘라야만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훌륭한 의론이 아니니, 어찌 오랑캐를 따르는 유교가 있겠습니까. 요컨대 당사자는 때에 맞게 권도(權道)를 쓰고, 의론하는 자는 사후에 옳다고 인정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어떻습니까?양화(陽貨)가 대부(大夫)로 자처한 것은 군주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화가 공자에게 집에 없는 것을 살펴보아 돼지고기를 보낸 것은 사(士)가 대부에게 절하는 예를 사용한 것이니,70) 이는 진실로 양화가 스스로 잘난 체하며 분수를 잃어버린 버릇이었습니다. 공자 또한 그 예를 사용하여 참람한 자에게 절을 했으니, 정밀한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후세에 어떤 권력자가 고관으로 자처하는데 선비 된 자 선비가 고관을 찾아뵙는 예를 사용하여 찾아가 절을 한다면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어찌 의리에 고금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선성(先聖 공자)이 행한 것을 감히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변란에 대처하시는 정밀함과 예의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밝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허형(許衡)에 대해 논자들이 혹은 실절(失節)했다고 하고 혹은 실신(失身)했다고 합니다. 실절과 실신은 어떻게 분별합니까? 게다가 이미 문묘에서 출향(黜享)하였고 심지어 법에 따라 처형해야 한다는 의론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문묘에서 출향한 것은 당연하지만, 법에 따라 처형하는 것은 반드시 합당하겠습니까? 또 "허형이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그 몸이 오랑캐 사람이고 오랑캐 조정에서 벼슬했으니, 또 무슨 실신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이 설은 또한 어떠합니까? 所示剏設儒敎扶植會, 可仰扶世之苦心.趣旨規約, 皆正當完實, 以此心行此規, 豈有不成之理? 非所謂陰極必反亂極當治底消息歟? 自惟無似蒙此議及, 已是惠出不彼, 而乃承以未及先稟, 不免輕事爲罪, 又以多士屬望, 欲賤子之不辭同事, 是何高明之過恭謬取? 亦豈賤子之冒受猥當者乎? 噫, 天下生久, 時勢異前.古之世, 世道汙隆, 君相主之, 今世則社會主之.《易》之道, 時爲大, 其以無聖賢前據, 謂不當立儒敎之會者, 拘曲之論也.茍有可成之道, 吾林杜會, 何可已也? 但今之社會, 皆誘之以禍福之報, 投之以希覬之機, 故雖不正主義, 多至擴張, 吾林之會則平平淡淡, 無一切色相可驚可喜, 徒以道德倫理之說, 守而告之, 人之視此說爲陳腐也久矣.將何以皷人心新人目哉? 此所以雖以正當主義, 戞戞乎難成也.雖然, 所幸者民彜罔墜, 所恃者至誠感神, 固不當先爲自畫之論, 坐待滅亡之至也.第有最大慮者, 有會則有衆, 有衆則豈無時拘乎?茍不免聽時之令, 如近日某某之會, 則其所以扶植儒敎者, 先歸於汙壞儒敎, 决不可爲也.始雖無關, 事至中張, 有難旋輟, 則或不免後瀆之歸.幸惟千萬審愼, 勿至有悔之地, 如何?恥暫削不復讎, 非人子也, 焉有不子之華道乎? 必斷髪乃復讎, 非至論也, 焉有從夷之儒敎乎? 要之, 當之者臨時用權, 論之者事後許可耳.如此立說, 未知如何?陽貨自處以大夫者也, 非受君命也.其於孔子, 瞰無饋豚, 使用士拜大夫之禮者, 固貨自大忘分之習也.孔子之亦用其禮而拜僭竊者, 精義何居? 使後世有權力者, 自處以大官, 而爲士者用士見大官禮而往拜之, 則是豈成說? 豈義亦有古今之不同耶? 此非敢疑先聖所行, 欲知聖人處變之精、禮義隨時之異也.幸明敎焉.許衡, 論者或以爲失節, 或以爲失身, 失身失節, 何以分之? 且既有黜從祀之舉, 又至有正法之論, 黜祀宜然, 正法必當乎? 又有謂衡生長胡地, 身爲胡人而仕胡朝, 所失又何身者, 此說又何如? 양화(陽貨)가……것이니 양화가 공자를 자기에게 찾아와 보게 하고자 하였으나 무례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리하여 대부가 사(士)에게 물품을 내려주면 사가 그 집에서 받지 못했을 때 대부의 집에 찾아가 사례하는 예에 의거하여, 공자가 집에 없을 때 양화가 공자에게 증돈(蒸豚)을 내려주었고, 이에 공자도 또한 양화가 없을 때 찾아가 사례하였다. 이 사실을 두고 맹자가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양화가 먼저 공자에게 와서 예를 행했더라면, 어찌 공자가 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當是時, 陽貨先, 豈得不見?〕"라고 하여 공자가 양화를 볼 수 있는 이치가 있음을 말하였다.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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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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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기사년(1929) 答金聖九 己巳 음성의 오진영이 김성장(金聖章)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괴이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선영감(先令監)이 연원(淵源)을 비난하여 배척했으니 마땅히 절교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본디 저쪽에서 이미 만들어놓은 화두입니다. 이 때문에 오진영은 옥동(玉洞)이 홍성(洪城)을 방문한 것으로 배척하여 연원을 저버리고 선사를 배신했다고 죄목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한 줌 일판향(一瓣香)을 공경히 증남풍(曾南豐)을 위해 살랐네."71)라는 말을 인용하여 존문(尊門)과 절교하지 않은 것으로 저를 배척한 자는 또한 그의 혈당(血黨)인 권순명(權純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우호를 강구하고 의리를 사모하여 부고를 보내지 않았다고 꾸짖고, 유감을 풀자고 청하면서 그대를 끌어들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괴상한 일입니다. 또 그가 처음에는 절교를 당할 죄가 없었는데 두 사람의 참소로 인하여 원수와 같아졌기 때문에 그대 선영감 부자에게 죄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심술이 어떠한가를 논하지 않고 먼저 선영감을 식견이 밝지 못한 부류로 돌린 것이었습니다. 선영감이 충의(忠義)의 대절(大節)에는 밝지만 사정(邪正)의 대분(大分)에는 어둡게 될 것이라고 일찍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로 괴상한 것입니다. 또 제가 전(傳)을 변환하여 표(表)로 만들었는데 그가 고쳐 바로잡은 것으로 인하여 원수로 삼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선사의 원고 친필에 매우 분명하게 "전을 고쳐서 표로 하라."는 말이 있는데, 무엇을 보고 변환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대체로 그는 곧 전에 있던 내용을 표에 넣고 표에 있던 것을 전에 넣었지만, 나는 전에 넣고 표에 넣어 애당초 가감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부의 묘문(墓文)을 고쳤다가 오히려 그의 당에게 괴상하게 여겨져 진주본(晉州本)에서 빼버린 것과 어찌 같겠습니까? 지금 마침내 원고의 인가와 관련하여 선사를 무함한 것, 선사의 원고를 어지럽힌 것, 문인을 고소하여 화를 일으킨 것 등 그의 허다한 실제 죄안을 놔두고 전혀 단서도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것을 억지로 거론하여 원수로 삼게 된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괴상한 것입니다. 대저 옛날부터 간사한 자는 남을 모함하는데 교묘하였기 때문에 그 정상이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그대가 "오진영의 평생 학문은 원수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라고 한 것은 타당한 단안(斷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으로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그 편지를 본다면 틀림없이 부당한 일을 많이 했다고 꾸짖을 것입니다.선사가 선영감과 절교하지 않은 것은 본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답한 편지에 "나도 기쁘게 들었다.'는 말도 있으니, 굳이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진영이 이미 연원을 저버리고 선사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옥동이 그대 선영감과 절교하지 않은 것을 죄주었으니, 그가 지키는 것은 무참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편지를 써서 선영감을 칭찬하기를 "홍류(洪流) 가운데 하나의 지주(砥柱)이다."라고 하였고, "스스로 생각건대 평소에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에는 이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상(喪)을 듣고는 누차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세상에 양기가 없는 것을 통탄하고 우리 당이 더욱 더 외로워짐을 슬퍼한다."라 하고, 또 "성구(聖九)가 참소를 경솔하게 믿어서 상을 당했는데도 부고를 보내지 않았으니, 사람과 절교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근거가 없는데도 오로지 그대에게만 편지를 보내서 유감을 풀자고 하였으니, 그의 법으로 그의 죄를 다스린다면 참으로 연원을 저버리고 선사를 배신한 자입니다. 말과 일이 모순되어 실상이 드러나는 것은 진실로 소인의 실태입니다. 그러니 위에서 세 가지 괴상하다고 한 것은 또한 괴상한 일도 아닙니다. 다만 이로 인하여 그가 "입수한 무고 안건은, 호남 두세 사람의 날카로운 말과 가혹한 글 외에는 포착할만한 진상이 없다.'라고 한 것을 헤아려보면, 수고하지 않고 알아챌 수 있습니다. 연원을 저버리고 스승을 배반한 죄는 이미 호남 두세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이 편지 가운데 그의 날카로운 말과 가혹한 글을 가지고 진상을 포착할 수 있으니, 선사를 무함하고 선사의 원고를 고치고 사림에 재앙을 일으킨 허다한 죄안도 마땅히 그의 날카로운 말과 가혹한 글로 표현한 허다한 언어와 문자 속에서 진상을 포착할 수 있고 호남의 두세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진영의 전수 제자(傳授弟子) 김세기(金世基)의 〈우기(偶記)〉를 최근에 보았는데, "선사가 홍(洪)과 김(金)을 끊은 것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 증거가 있는데, 전(田), 최(崔), 송(宋)가 이미 편지로 화해했다고 하면서 갖은 수단으로 보호하였다. 어찌 선사를 무함하고 가르침을 배반한 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김세기가 오진영의 이 편지를 보았다면 어쩔 수 없이 선사를 무함하고 가르침을 배반한 죄를 성토하여 방몽(逄蒙)72)이 도리어 자신의 스승을 쏜 것처럼 행동하였을 터인데, 아직까지 적막하게 들리는 말이 없으니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오진영이 별지의 말단에 이미 "성구에게 보여주어 나로 하여금 부자 사이에서 난처하게 하지 말라.'고 김성장에게 부탁하고는 마침내 그 문도를 시켜 그대에게 전하게 했던 것은 어찌 부자간을 이간질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스승과 제자 관계는 만법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잔인하게 돌아가신 선사를 무함했으니, 또한 어찌 부자 사이의 윤리를 알겠습니까? 陰震答金聖章書見之, 可怪者不一.謂先令詆斥淵源而當絕, 自是彼邊一副見成話柄.故震既斥玉洞以伏謁洪城, 罪之以負淵源背先師; 引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之語, 斥此漢以不絕尊門者, 又渠之血黨權純命也.今忽講好慕義而責其不訃, 請釋憾而援引足下, 此一可怪也.又謂渠初無見絕之罪, 而因二人行讒同仇之故, 得罪於先令監父子, 是則未論二人者之心術如何, 先歸先令監於不明之科, 曾謂先令監明於忠義大節, 暗於邪正大分乎? 此二可怪也.又謂此漢幻傳爲表, 因渠改正而作仇.師稿親筆, 明明有改傳爲表之語, 何所見而謂之幻耶? 蓋渠乃自傳而入表, 自表而入傳, 我則入傳入表, 初無損益, 故不與之爭矣, 豈若渠之改祖墓文, 卻被渠黨見怪, 而拔去晉本也乎? 今乃舍卻渠之誣認、亂稿、訴禍許多實案, 強舉了無端緒了無關涉者, 而作作仇之由, 此三可怪也.大抵自古宵人者, 工於陷人, 故其情狀多類此, 而足下所謂震之平生學問, 以告訴讎庭結局者, 可謂斷案得當矣.人而至此, 又何足論哉? 足下覽此, 應誚其多事也.先師之不絕先令監, 自有下世前數日答書有"某亦喜聞"之語者在, 不必復言.但震既以負淵源背先師, 罪玉洞之不絕先令監, 則渠之所守, 可謂斬截矣.今作此書, 稱先令監曰"洪流一柱", 曰"自諒平日不至爲見絕之罪", 則故聞志令之喪, 屢與人書曰"痛斯世之無陽, 傷吾黨之益孤", 又曰"聖九輕信讒言, 遭喪不赴, 絕人不當." 若是無據, 專致於座下而求其釋憾, 以渠之法治渠之罪, 眞負淵源背先師者也.言事矛盾, 肝肺綻露, 固小人情態, 向所謂三可怪者, 亦非怪事.但因此而勘渠所謂"所得誣案, 湖南二三人舌尖筆尖外, 無可捉贜"者, 更覺省事.負淵源背先師之罪, 既不待湖南二三人而已.就此書中渠之舌尖筆尖而可捉贜, 則誣先師、改大稿、禍士林許多罪案, 亦當於渠之舌尖筆尖許多言語文字中捉贜, 而不待湖南二三人矣.近見震之傳授弟子金世基《偶記》曰: "先師絕洪、金, 厥有六證.田、崔、宋之謂已以書許解而萬端扶護.豈非誣師背訓者乎?" 其見震之此書也, 不得不討誣背之罪, 而作逄蒙之反射矣.尚寥寥無聞, 何也? 震於別紙之末, 既託聖章以勿示聖九, 使人難處於父子之間, 竟使其徒專致座下者, 豈非欲間人父子者耶? 夫師生者, 萬法之原, 渠既忍陷死師者, 則亦安知父子之倫乎? 남풍(南豊)을 …… 못하였네 일판향(一辦香)은 오이씨 비슷하게 생긴 향으로, 존경하는 어른을 흠앙(欽仰)할 때 사용한다. 남풍(南豊)은 송나라 때 증공(曾鞏)을 말한다. 그의 제자 진사도(陳師道)가 시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 짓다〔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에서 "지난날 한 줌 향을, 공경히 증남풍을 위해 살랐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고 하였다. 《後山集 卷1》 방몽(逄蒙) 하(夏) 나라 사람으로 활을 잘 쏜 사람이다. 예(羿)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웠는데 천하에서 자기보다 나은 자는 오직 예라 생각하고 스승인 예를 쏘아 죽였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 여기서는 김세기가 오진영을 공격한다는 의미로 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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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보냄 기사년(1929) 與金聖九 己巳 근래에 제 마을 사람이 영백씨(令伯氏)를 방문하고 내친 김에 홍성(洪城)으로 가서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를 보았는데, 간판을 높이 달고 학교를 크게 열어서 강송하는 소리가 자자하고 규모가 가지런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본회는 점점 신장할 것을 상상할 수 있었고, 또한 오도(吾道)가 다시 왕성해질 것을 점칠 수 있었습니다. 어진 그대 형제의 지극한 정성과 일을 감당할 능력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유림사회는 옛날에 근거한 데가 없다고 하면서 풍조를 좇아가는 것이라 배척하였는데, 그 견해가 얼마나 고집스럽습니까. 대저 시세(時勢)는 변천하고 천수(天數)는 무상합니다. 성현이 일을 처리하는 것도 때에 따라 의리에 맞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탕왕과 무왕의 정벌은 이미 요임금과 순임금의 선양과 똑같지 않았고, 정자와 주자가 조정에서 물러나 겸손히 한 것은 또한 공자와 맹자가 여러 나라를 두루 방문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큰 일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는 또한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확고하게 정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은 오직 천리와 백성의 떳떳한 본성으로부터 나와서 사람과 짐승,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과 관련된 것뿐입니다. 만약 옛 근거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시세를 좇아가는 것이라 배척한다면 이전 현인들이 세속에 따라서 정한 모든 예법은 폐지하여 행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의 유회는 바로 옛날 공문(孔門)의 문회(文會)와 같은 것이고, 그 규모와 조목은 주공(周公)의 독법(讀法)에 근거하고 여씨(呂氏)의 향약(鄕約)을 참조했으니, 또한 어찌 옛 근거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사람들의 의론 때문에 혹시라도 주저하지 말고 더욱 더 노력하여 전진함으로써 세도(世道)가 의지할 수 있게 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바르지 않은데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없었으니, 자신의 몸을 굽혀 도를 신장시켰다는 말은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염려되는 것은 오직 저 왜에 핍박을 당하여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한 가지 일뿐입니다. 본회의 성패가 달린 기미와 백세의 포폄에 관한 안건은 모두 여기에서 판가름이 나니, 이것은 마땅히 엄정하게 해서 철저하게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는 지극한 바라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왕자(王者)의 도는 인의(仁義)를 제창하고 밝히는 것이니, 한 가지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는다면 그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패자(覇者)의 사업은 인의를 빙자하니, 반드시 지모 있는 사람을 취하고 공이 될 말한 일을 찾아서 성공을 구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왕도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패업은 오히려 볼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논자들은 왕도를 유자의 일이라 여기고 패업을 영웅의 일이라 여기고는, 번번이 "유자가 영웅의 일을 하면 사업을 이룰 수 없고, 영웅이 유도를 쓰면 또한 영웅의 사업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천고의 이 한 마디는 단단하여 깨부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자가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하며 깊은 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은 듯이 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73)라고 한 것은 나를 속인 것입니까? 이는 변론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이미 그렇습니다. 다만 삼대 이후로 왕좌(王佐)의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서 군주의 신임을 얻어 정치를 전적으로 행했던 자는 오직 제갈무후(諸葛武侯)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라도 불의를 행하여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하지 않는다."는 도리에 있어서는 유추하여 모두 따져보면 모면하지 못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율곡선생은 제갈무후에 대해 신불해와 한비자의 습관을 가졌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한나라 왕실은 미약하고 역적은 강성했으니, 만약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법을 순수하게 사용했다면 형세로 볼 때 한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역적을 토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불해와 한비자의 방법을 썼던 것입니다. 율옹(栗翁)이 죄가 없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을 탄핵한 경우는 비록 큰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따져서 말하면 의리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눈 없습니다. 그러나 왕도를 순수하게 쓴 율옹으로서도 자신을 굽혀서 행함을 면치 못했던 것은 그 주된 뜻이 조정을 보합(保合)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에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경우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군자가 일을 처리할 때에 그 주장하는 대체가 이미 정당하다면 그 사이에 작은 절개는 전부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자세히 헤아려 가르쳐주기 바랍니다. 近有鄙鄉人, 爲訪令伯氏, 趁至洪城, 見儒敎扶植會, 高揭牌號, 廣開庠舍, 講誦孜孜, 規模井井者, 因此想得本會漸張, 亦可占得吾道復旺.非仁執兄弟盡誠幹力, 安能辦此? 有謂儒林社會於古無據, 斥之以趨風潮者, 其見何太執也? 夫時勢變遷, 天數無常, 聖賢處事, 亦因時而合義.是故湯、武征伐, 已與堯、舜禪授不同; 程、朱退遜, 又與孔、孟歷聘有異.大者如此, 其餘又何待論哉? 其鐵定不可易者, 惟出於天理民彝之中, 而關於人獸華夷之分者爾.若以無見古據, 斥之以趍時, 凡前賢因俗所定之禮, 廢之不行可也, 豈其然哉? 而況今之儒會, 即古孔門之文會也, 其規模節目, 則本之於周公之讀法, 參之於呂氏之鄉約, 又烏可以全無古據斥之哉? 惟願勿以人議而或沮, 益加努力前進, 俾世道有賴焉.但有一焉, 未有己不正而能正人者也, 屈身而伸道, 吾未之聞也.則前頭可慮者, 惟在於爲彼所迫, 不得自由一欵爾.本會成敗之機, 百世褒貶之案, 皆決於此, 此當十分嚴截, 到底清楚.區區不勝顒望之至.王者之道, 倡明仁義, 行一不義, 殺一不辜, 而得天下不爲.伯者之業, 假借仁義, 取必智謀, 事求可功, 求成而已.是以王道多不見成, 而伯業還有可觀.後世論者, 乃以王道爲儒者之事, 伯業爲英雄之事, 輒曰: "儒者做英雄, 事業不得; 英雄用儒道, 亦做不得英雄." 千古一談, 牢不可破.若然則朱子所謂"眞正大英雄, 從戰兢臨履上做出來"者, 乃欺余耶? 是不可以無辨也.此既然矣.但自三代以後, 王佐之才得君專政者, 惟諸葛武侯是已.然其於行一不義得天下不爲之道, 充類盡之, 則有不免焉者, 故栗谷先生譏之以申、韓之習.然當是時也, 漢弱賊強, 若純用一切法, 勢難扶漢而討賊, 故不得已而用之也.至若栗翁之彈駁無罪之沈青陽, 雖云非大事, 究言之則未可謂合義也.然而以栗翁之純用王道, 不免俯行者, 豈非主在保合朝廷, 故亦出於不得已耶? 然則君子之處事, 所主之大體既正, 則其間小節有不暇盡顧者歟.幸細商而敎之也. 진정한……만들어진다 주자가 진동보(陳同甫)에게 보낸 편지에 "진정한 대영웅의 사람은……도리어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은 듯이 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真正大英雄人……却是從戰戰兢兢、臨深履薄處, 做將出來〕"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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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金聖九 戊寅 두 달이나 답장을 늦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감히 못할 일인데, 하물며 제가 존경하는 그대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섣달 그믐날 편지가 온 이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던 관계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체로 가난이 오래 되면 병이 되고 병이 오래되면 더욱 가난해져서 마침내 구제할 길이 없게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말할 것도 못되지만, 그대의 인품과 문벌로도 쌀과 소금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서 이 도시에서 거주하게 되었으니, 세상풍조의 야박함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읽고 매우 슬프니 무슨 말로 위로하겠습니까. 하늘이 사민(四民)을 낳음에 각각 그 맡은 직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말하면 사는 농·공·상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비록 농·공·상이라도 모두 마땅히 선비의 마음과 선비의 행실이 있어야 하고, 비록 선비일지라도 또한 농·공·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대순(大舜)은 질그릇도 빚고 농사도 지었으며, 부열(傅說)은 판자로 성벽을 쌓았고, 교격(膠鬲)은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팔았으며, 태공(太公)은 백정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풍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에게 꼴을 먹이는 것을 물어보면 청렴한 관리가 되는 것이 막히고, 기장 밭의 참새를 쫓으면 은일로 천거 받는 것이 저지되니, 말을 하매 우습습니다. 이런 폐단이 유행하기 때문에 비록 넓은 학문과 고상한 행실이 있더라도 가난을 없애려고 생계를 경영하기만 하면 대번에 손가락질하며 가혹하게 비평하고, 점점 기금(箕錦)74)이 되며, 마침내 선비의 반열에 끼워주지 않고서야 그치니, 매우 어질지 않고 대단히 지혜롭지 않은 것입니다.【최근에 음성의 무리인 정운한(鄭雲翰)과 김세기(金世基) 등이 내가 신해년(1911) 겨울에 황금을 가지고 있다가 도둑이 두려워 베를 사서 돌아온 일을 가지고 장사치라고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또 더 나아가 상중(喪中)의 일을 억지로 만들어 '거상에 무례하다.'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배척하는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말할 거리도 못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또한 말에게 꼴을 먹이는 사람을 막고 참새를 쫓는 사람을 저지하는 의론에서 따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선비로서 법도를 바꾸어 생계를 경영하는 자는 단지 마땅히 선비의 마음과 선비의 행실을 잃지 않아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자 해야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마땅히 그가 선비의 마음과 선비의 행실이 있는 것으로 그 이름과 실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되면 도시와 산림을 어찌 구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평범한 사람의 입장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대는 평소 수양이 이미 두터운지라, 저는 그대가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인내하여 능하지 못했던 것을 잘하게 되고75), 더 나아가 대순과 부열 이하의 성현의 덕업을 완성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대가 도모하기를 바랍니다. 兩朔稽覆, 他猶不敢, 况座下僕所敬乎? 臘晦報至, 無日不痛, 以至於此.蓋貧久爲病, 病久益貧, 竟不可救.如僕者不足言.以座下人地, 亦縁米盐之艱, 而有此城市之住, 世風薄惡, 即此可見.奉簡戚戚, 何辭而慰? 天生四民, 各有其職.然專言則士可以包農、工、商, 雖農、工、商, 皆當有士心士行; 雖士亦可爲農、工、商也.是故大舜陶稼, 傅說版築, 膠鬲魚盐, 太公皷刀. 特東俗不然.問秣馬而清官枳, 揮黍雀而逸薦沮, 言之可笑.此獘之行, 雖有博學高行, 才涉救竆營生, 輒指摘苛評, 轉成箕錦, 至不齒於衣冠之列而後已, 其爲不仁不知也甚矣.【近日陰黨鄭雲翰․金世基輩, 以此漢辛亥冬, 帶金畏盜, 買布歸放事, 指爲行商.又輾轉勒作喪中事, 號曰居喪無禮.此則出於擠人惡意, 雖不足道, 其所以有此口者, 亦未嘗不藉於枳問馬、沮揮雀之論也.】 僕竊謂今日士子之變規營生者, 只當不失士心士行, 求不自愧, 人之觀者亦當以其有士心士行而許其名實, 則城市雲林, 何足別也? 雖然, 此以常調者言.若座下則素養既厚, 吾以動心忍性, 增益不能, 進而成舜、傅以下聖賢之德業望之, 惟座下圖之. 기금(箕錦) 작은 허물을 부풀려서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항백(巷伯)〉에 이르기를,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 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 하고, 또 "조금 벌어진 것으로, 남쪽의 기성을 이루는도다.〔哆兮侈兮, 成是南箕〕" 한 데서 온 말이다. 마음을……되고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의 성내는 것을 굳게 참고 버티도록 하여, 그가 잘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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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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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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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경진년(1940) 答金聖九 庚辰 오궁(五竆)76)과 병마가 함께 도모하고 합세하여 온갖 근심을 끌어다가 이 몸을 공격하여 답답한 심정은 감옥에 들어간 듯하고 숨이 끊어져서 황천에 있는 것 같아 살아있는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변란이 더욱 심하여 날마다 들리는 얘기는 차마 듣지 못할 것들이니, 원컨대 빨리 죽는 게 낮을 듯합니다. 뜻밖에 이때에 욕되게도 생사를 묻는 편지를 받으니, 그 즐거움은 마치 칠흑 같은 방안에 앉아 있다가 한줄기 서광을 보는듯합니다. 근래에 좋은 일 중에 어떤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다시 책을 읽으며 옛날에 배운 것을 보충한다는 등의 말이 있어 또 그 날마다 독실하게 힘쓰는 낙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혼탁한 퇴조 속에서 또한 크게 경발됩니다. 근래에 벽촌으로 옮겨 가서 고요하게 익히고 한가로이 수양하며 부모와 처자식이 모두 편안하여 마을의 택한 때와 의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이루 다 흠앙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또한 작년 봄부터 소나무 숲속에 흙집을 짓고 황량한 밭 사이에 마를 심어 먹으려 했는데, 하필이면 큰 가뭄을 만나 먹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송진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서실 속에 숨고 책속에 몸을 숨겨서 집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대가 벽촌을 점쳐 사는 의리와 부합되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물으신 옛사람은 생사와 우환에 대해 두 마음을 가지지 않고 수양의 꺼리로 삼는 다는 것이 어찌 크게 헤아릴 만큼 별도의 공부가 있겠습니까. 단지 두 마음을 먹지 않을 뿐이니, 두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이것만 있는 것을 알고 다른 것이 있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임금과 부열의 재주로도 만약 조금만 그 도를 굽혔다면, 어찌 그들이 밭도랑과 판자로 성을 쌓는데서 곤란을 겪었겠습니까. 오직 그들은 도리를 보았고 이해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그 덕을 수양하여 완성을 했습니다.즉 밭도랑에서 김을 매고 판자로 성을 쌓아도 편안하게 여겨 장차 몸을 마칠 듯하고 조금도 도를 굽혀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는 것, 이런 것이 바로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의 용렬하고 비루함으로 혼란이 극에 달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때를 당했으니, 비록 굶어 죽어 그 시체가 골짜기에 나뒹굴더라도 큰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양하여 덕을 이루는 것은 비록 감히 바라지는 못할지라도 혹여 차라리 옥이 되려다 깨질지언정 온전한 기왓장이 되지 않는 방법을 얻었기 때문에 이 방법만 보고 이것만 힘쓰고 있는데 마침 굽어 물어주신 편지를 받아서 질문을 올리니, 잘 모르겠으나, 고견은 어떠합니까? 五竆二竪, 同謀合勢, 請援百憂, 攻此一身, 鬱鬱如入獄中, 奄奄若在泉下, 絕無生.況加以世變益甚, 日聞所不忍聞, 惟願速死之爲幸.乃以此時, 辱崇牘問死生, 其爲欣慰, 如坐漆室, 得一線曙光.近來佳況, 孰加於此? 矧復有佔畢簡編, 補綴舊聞等語, 則又知其有日有所事, 胡不慥慥之樂? 其於昏頹警發, 亦大以審.近已移占僻村, 習靜養閒, 奉率俱安.尢得擇里之時義, 豈勝欽仰? 賤子亦自昨春, 築土室於萬松裏, 荒田間種薯爲食, 適值大旱, 無薯可食.獨餐松飲水以度日, 藏書室中, 藏身書中, 不出戶外一步, 自幸偶與賢座占僻之義, 相合也.所詢古人之不貳心於死生憂患, 用作玉成之資者, 豈有別項工夫如盛料哉? 亦只是不貳心, 不貳者何? 只知有此, 而不知有他之謂也.夫以大舜傅說之才, 若少屈其道, 則豈其困於畎畒版築乎? 惟其所視者道理, 而不見利害, 故卒至於玉成其德.即此安於畎築, 而若將終身, 少無屈道求利之心者, 乃是工夫也.況以吾之庸陋, 當亂極無前之時, 雖眞至於餓死而填溝壑, 可謂優幸, 玉成之德, 雖不敢望, 或得爲寧爲玉碎, 不爲瓦全之道, 故見此方, 以此自勉, 而適承俯問, 舉而奉質, 未知高見云何? 오궁(五窮)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종류의 궁귀(窮鬼)로,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보인다.《창려집(昌黎集)》 권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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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중일에게 답함 기사년(1929) 答蔡中一 己巳 그대가 이름과 자(字)를 고친다고 어지러이 정하지 못하여 남들이 어떻게 부를지 모르게 하니, 그것이 원래 이름과 자를 쓰지 못하는 이유에서 나왔는지는 제가 비록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지금 세상 술인(術人)들의 '글자를 고르고 괘를 뽑아 복록(福祿)을 추구한다.'라는 설에 현혹되셨다면 착각하신 것입니다. 《시경(詩經)》에서 "길이 천명에 짝함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다.72)"라고 하였고,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함이 삿되지 않도다.73)"라고 하였습니다.큰 덕을 세우고 큰 명성을 얻고 큰 복을 누린 옛 사람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그 마음 씀씀이와 처신이 반드시 광명정대하였고, 글을 짓고 이치를 궁구한 것이 반드시 성실하고 정밀하였으며, 잡아 지킨 절의는 확고하여 뽑히지 않았고, 남들에게 베푼 혜택은 주변에 두루 미쳐 천하의 모든 사업을 조처하기까지 하였으니, 순수하게 한결같이 도에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달하여 임금과 재상의 자리에 앉아 당세에 부귀 영화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였고 빈궁하여 큰 스승이 되어 백대까지 우러러보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대개 모두 고되게 심력(心力)을 쓰고 스스로 쉬지 않고 힘써서 이룰 수 있었고 신통한 술법과 그윽한 도에 기묘한 길상(吉祥)을 바라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및 송대(宋代)의 정선생(程先生)과 우리나라의 석담(石潭) 이선생(李先生)의 이름을 한 번 살펴보면, 모두 평범하여 특별할 게 없는 글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덕업의 존숭이 저처럼 우뚝하고 부귀의 복이 저처럼 장구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를 지금 세상의 괘를 뽑아 결단하는 법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서 하나하나 어긋나지 않고자 하더라도 싶어도 필시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주공(周公)께서는 《역(易)》의 효사를 다셨고, 공자께서는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으로 부연하셨으니 괘를 뽑아 결단하여 길(吉)을 취하는 정밀함은 응당 주공과 공자만한 분이 없고 그 후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응당 성인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의 이름을 보면 숭대(崇大)하고 광후(廣厚)하고 광명(光明)한 뜻을 가진 현달하고 기약할 만한 등의 좋은 글자들을 버리고 동물 중에 하찮은 금(禽)과 리(鯉)자를 쉽게 취하여 이름 지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백금(伯禽)의 어짊은 명철함에 미치지 못하고 백어(伯魚)의 수명은 요절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사람의 복덕이 모두 이름 짓는 데 달렸다면 성인께서 그 자식에게 무엇을 아까워하여 일찌감치 지어주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글자를 골라서 이름을 지어 흉(凶)을 피하고 길(吉)로 나아간다는 설이 허망함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대저 착한 일을 하고 나쁜 일을 하면 상서(祥瑞)와 재앙(災殃)이 각각의 부류에 따라 이르는 것은 이치의 상(常)이고 간혹 이와 반대로 화복을 거꾸로 시행하거나 잘못 내려주는 것은 운수의 변(變)입니다. 상은 본디 천명이거니와 변도 천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맹자께서 "요절과 장수에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자신의 덕을 닦아 천명을 기다려야 하니, 이것이 바로 천명을 지키는 방법이다.74)"라고 하였으니, 아! 지극한 말씀입니다.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지나친 우려를 말씀드리니 행여 비정하다면서 괴이하게 보지는 않으시겠지요. 賢之改名改字, 紛然無定, 使人莫知所呼, 其出於不得然之故, 吾雖不可知, 如或眩於今世術人擇字作卦求取福祿之說, 則誤矣. 《詩》曰: "永言配命, 自求多福." 又曰: "豈弟君子, 求福不回." 歷觀古人之立大德、得大名、享大福者, 其用心行己, 必光明正大也: 修辭硏理, 必誠實精到也. 秉節守義, 確乎其不拔也: 惠人澤物, 洽乎其周徧也, 以至措之天下一切事業, 其不粹然一出於道? 故或達而位君相, 享富榮之樂於當世: 或窮而作宗師, 受瞻仰之尊於百代矣. 然蓋皆勞其心力, 自强不息, 而有以致之, 非希覬奇慶妙祥於神術窈冥之間而得之也. 試觀孔子、顔子、曾子、子思、孟子, 及宋之程先生、我國石潭李先生之名諱, 幷不過尋常非表著字而止, 德業之崇, 如彼巍巍也: 尊榮之福, 如彼其久也. 雖欲以之强合於今世卦斷之法, 而求其一一不差, 必不可得也. 周公繫《易》之爻辭, 孔子贊〈彖〉、〈象〉, 斷卦取吉之精, 宜莫周、孔若也: 欲昌厥後, 宜亦聖人心也. 乃名其子也, 舍却崇大廣厚光明底許多美好可顯可期等字, 容易取動物微細底禽鯉字而名之, 何也? 伯禽之賢, 不及睿哲: 伯魚之年, 未免短夭. 若人之福德, 盡繫命名, 聖人何所惜於其子而不早施之也? 於是乎益知擇字作名避凶趨吉之說之妄也. 大抵作善作惡, 祥殃各以類至者, 理之常也: 其或反此, 而倒施錯降者, 數之變也. 常固天命也, 變亦不可不謂之命也. 孟子曰: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噫其至矣. 相愛之心, 貢此過慮, 幸不以非情而見怪否? 길이……길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서 인용하였다. 화락한……않도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인용하였다. 요절……방법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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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중일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蔡中一 戊寅 봄에 당신의 재종씨가 와서 "중일(中一)이 요즘 큰 일을 이끌고 있다하여 물어보니 '원재[遠齋, 이희진(李喜璡)]의 원고를 간행하는 일에 크게 힘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제가 듣고서 스승을 위하는 정성에 삼가 감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음흉한 무리인 권(權)에게 교감을 맡겨 스승의 무함(誣陷)을 변석(辯析)한 글들이 한꺼번에 산삭되었다고 들었습니다.당신이 이미 크게 힘쓰니 또한 이 일을 전적으로 주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큰 잘못을 저지르십니까? 음흉한 무리들을 토죄하는 통문에 원재 어른께서 이름을 넣지는 못했지만 따로 무함을 변석한 문장을 지었으니 명백하고 엄정한 내용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권(權)이 원재 어른께 보낸 편지에서, 존장께서 호남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 말이 이것입니다. 허나 지금 모두 산삭되었으니 더 이상 당시 원고의 모습이 아니게 되었습니다.원재 어른께서 평소 진주본(晉州本) 《간재집(艮齋集)》75)이 더 이상 원래 체제의 말이 아니라 【《제진본고변록(題晉本考辨錄)》】고 탄식하면서 하신 말씀이 원재 어른 사후의 원고에 다시 해당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문생 중에 당신 같은 분이 그릇된 이들에게 교감을 맡겨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대개 이 한 가지 일은 스승에게는 치욕이고 제자에게는 죄가 됩니다. 사문에서 무함의 큰 변고를 알았음에도 원고에서 한 마디 명백하게 변별하는 말을 볼 수 없으면 이미 원재 어른을 욕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후세에 원재 어른이 스승의 무함을 변별하지 않았다는 치욕을 받는다면 또 어찌 당신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아끼는 마음이 깊으므로 저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충고하니, 바라건대 모쪼록 빨리 계획을 바꾸어 원고의 본래 모습을 완전히 회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春間令再從氏來言: "高明近營大事業, 問之則云'大出力於遠齋稿刊事也.'" 鄙聞之, 竊歎其爲師之誠. 今聞託校於陰黨之權, 而辨師誣文字一幷刪去云. 高明旣大出力, 則亦可謂專主此事, 而胡乃鑄錯之至此? 討陰之通, 遠丈雖不參名, 其自爲辨誣之文, 則明白嚴正者, 不勝其多, 權與遠丈書所謂丈丈非湖則恐難爲說者此也. 而今皆刪去, 則非復當日遠稿面目矣. 夫孰知遠丈平日所歎《艮稿》晉本, 非復原來體制【《題晉本考辨錄》】之語, 復當於其身後之稿也乎? 又孰知有門生如高明輩託校非人, 而致失本面也乎? 蓋此一事, 師爲病而生爲罪, 當師門認誣之大變, 而無一言辨明之見於稿, 則旣足以病遠丈矣. 使遠丈得不辨師誣之病於後世者, 又豈非高明之罪乎? 鄙於高明愛之也深, 故不覺忠告至此, 望須幡然改圖, 使之快復本面如何? 진주본 《간재집》 1926년 10월, 문인 오진영(吳震泳),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에서 활자로 간행한 문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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