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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 조공 묘명 斗北趙公墓銘 북두 조공은 斗北趙公인환이 휘이고 麟煥其諱치휴가 자일세 致休其字벽성(김제(金堤)의 옛날 이름)을 본관으로 삼았으니 貫于碧城문량(文良 조간(趙簡)의 시호)으로부터 나왔고 文良自出부친은 상렬이로다 考曰相烈모친은 누구인가 其妣維何함양 박씨와 朴籍咸陽인동 장씨이지 仁同維張부친은 가선대부에 추증되고 考贈嘉善모친은 정부인에 봉해졌으니 妣貞夫人박씨가 공을 낳았다네 朴擧公身순조 경진년(1820, 순조20)과 純祖庚辰고종 정묘년(1867, 고종4)이 高宗丁卯생몰 연표로다 生卒年表몸소 고기 잡고 나무하며 躬執漁樵몸과 마음 극진히 봉양하여 養盡體志자식의 직분 다하였네 子職克備.부모상 당해서는 內外丁艱예제를 준수하였고 遵用禮制제사도 정성 지극하였네 追遠亦至독서하고 몸 단속하였으니 劬書飭躬학문에 전심하는 서재가 藏修有室두산 북쪽에 있었다네 斗山之北세상사 관여치 않고 不關塵累시 읊으며 자적하였으니 嘯咏自適오직 풍월만이 있었도다 惟有風月젊은 유생이 배움을 청하러 오면 襟佩踵門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不倦厥誠후생에게 은혜 베풀었지 嘉惠後生의성 김씨는 義城氏金진실로 현량한 배필이라 實惟良配부덕(婦德)이 매우 아름다웠네 閨範孔懿아들은 철규요 男惟澈圭딸은 송영식과 女宋榮植김영표에게 시집갔네 金永表室달식과 일식이 達植日植두 손자이니 是曰二孫그 후손이 매우 번성하였지 其後彌蕃섭, 국, 홍, 문과 燮國洪汶봉, 경, 서, 명이 琫卿絮明손자의 아들인 증손이라네 孫之子曾'찬'을 항렬자로 삼아 以燦爲行모두 이름에 보탰으니 皆加其名나머지는 많아서 쓰지 못하노다 餘繁不登천태산 기슭 天台之麓와우 언덕에 臥牛之岡엄숙한 봉분 있다네 有肅斧堂명을 지은 자 누구인가 銘之者誰나는 실로 같은 마을 사람이라 余實同里그 말에 거짓 없도다 其言匪詭. 斗北趙公, 麟煥其諱, 致休其字。貫于碧城, 文良自出, 考曰相烈。其妣維何? 朴籍咸陽, 仁同維張。考贈嘉善, 妣貞夫人, 朴擧公身。純祖庚辰, 高宗丁卯, 生卒年表。躬執漁樵, 養盡體志, 子職克備。內外丁艱, 遵用禮制, 追遠亦至。劬書飭躬, 藏修有室, 斗山之北。不關塵累, 嘯咏自適, 惟有風月。襟佩踵門, 不倦厥誠, 嘉惠後生。義城氏金, 實惟良配, 閨範孔懿。男惟澈圭, 女宋榮植, 金永表室。達植、日植, 是曰二孫, 其後彌蕃。燮、國、洪汶, 琫、卿、絮、明, 孫之子曾。以燦爲行, 皆加其名, 餘繁不登。天台之麓, 臥牛之岡, 有肅斧堂。銘之者誰? 余實同里, 其言匪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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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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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族弟士毅 丁卯 편지에서 말한 권순명(權純命)의 일은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잃고 보름도 되기 전인 사람과 혼인을 한 것은 허물이 아니고 바로 악(惡)입니다. 하물며 김희중(金熙中)씨가 전한 바로는, 저 상중(喪中)인 사람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권씨가 강요했다는 설이 나오게 되어서는 그 정상(情狀)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증자가 말하기를, "만약 그 실정을 얻으면, 애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150)고 하셨으니 그 권순명의 행위를 궁구해보면 참으로 가련합니다. 대개 상중을 틈타서 처를 취하는 것은 이것은 아비가 없는 짓입니다. 또 더불어 동일한 죄를 받는다는 것은 예율(禮律)에 공통된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가 사라진 시대를 만나서 몸소 유자의 의관을 입고 친히 아비 없는 짓을 범하니, 그 죄를 생각하건대 가련한 것이 아니고 통분한 일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저 권순명이 오진영에게 붙어서 스승의 의리를 무함하고 사인(士仁)을 구속시키고, 또 선사의 손자에게 화를 끼치는 것은, 이는 스승을 업신여기는 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끝내 아비를 없이 여기는 것도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지요! 또 김종희(金鍾熙)가 이현기(李鉉璣)씨를 마주하여 이곳 후창 쪽 사람을 매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이완용과 조정을 함께 할지언정, 이 도적들과 세상을 나란히 하지 않겠다"고 전했는데, 참으로 비웃을 만합니다. 저 김종희가 진실로 이러한 큰 바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샘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스스로 매장하지 아니하며, 또 어찌하여 빨리 매국노의 발 아래로 달려가서 조정을 함께 하지 않습니까?아아! 스승을 위하여 변무(辨誣)한 사람을 미워하고, 매국노와 조정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법을 무릅쓰고 인산(因山)151) 전에 혼례를 행하여 무군(無君)의 자취를 즐겨 밟았던 것입니다.152) 대개 김종희 또한 오진영의 스승을 업신여김에 붙어서 권순명과 자취를 같이한 자입니다. 스승이란 만법(萬法)의 근원이니 이미 스승을 업신여기는 자라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이 어찌 일관(一串)된 일이 아니겠는지요! 오호라, 참혹합니다. 示權純命事備悉.其與喪父望者爲昏, 非過也乃惡也.而况金氏熙中所傳非彼之欲, 乃權之强之之說出, 而其情狀暴露矣.曾子曰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究厥所爲, 眞可哀也.蓋乘哭娶妻, 是爲無父.與受同罪, 禮律通然.當此蔑倫之世, 身被縫章, 親犯無父, 言念其罪, 非可哀也, 又可痛也.雖然彼黨震泳, 而誣師義械士仁而禍師孫者, 則其無師也久矣.終以至於無父者, 何足怪乎.又示以金鍾熙對李氏鉉璣罵此中人曰, 寧與完用同朝, 不與此賊幷世, 極可好笑.渠信有此所大願也, 何不掘地及泉而自葬, 又何不疾趣賣國賊脚下而同朝也.噫疾爲師辨誣人, 願與賣國賊同朝者, 非無君之心乎.此所以冒法行婚於因山前, 甘蹈無君之跡也.蓋熙亦黨震無師, 與命同轍者.師者萬法之原也, 旣爲無師者, 則無父無君, 豈非一串事乎.嗚呼慘矣. 만약……말라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맹씨의 사사로 임명된 양부(陽膚)가 증자에게 옥사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증자가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민심이 떠난 지 오래되었다. 만일 범법한 실정을 파악했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라고 하였다. 인산(因山) 조선 시대,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과 왕비,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이다. 이 때문에……것입니다 이 말은 "스승을 위해 변무한 사람을 미워하고 이완용과 조정에 함께하기를 원하니, 이러한 무리들이야말로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종황제 인산 전에 혼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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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族弟士毅 丁卯 초육일에 정재(精齋) 어른153)이 와서 말하기를, "고윤거(高允擧)에게 들어보니, 고윤거가 말하기를 '권순명이가 나의 집안의 부음을 듣고도 혼기를 물리지 않고 발행(發行)154)한 날에 가서 비로소 말을 하고 또 혼례한 후에 귀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한결같이 근자에 들은 것과 서로 부합하니, 교묘하게 하려다 도리어 졸렬하게 된 간악한 상황이 참으로 우습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죄를 돌리는 악한 태도도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듣자니 권순명은 여전히 석농(石農)155)이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이 뚜렷하게 근거가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또 권순명이 말하기를, "원재(遠齋)가 한번은 석농의 필주(筆誅)156)를 겪고 나서는 염상(鹽霜)의 풀이 되었다"고 말하니 더욱 가소롭습니다.157) 初六日靜丈來言, 聞諸高允擧, 則命也聞高訃而不退婚期, 始往言於發行之日, 又歸家於?禮之後.一與此近所聞相符, 欲巧反拙之奸狀可笑也.歸罪其父之惡態可憎也.聞權猶大言石農改師稿,鑿鑿有據.又言遠齋一經石農筆誅, 爲鹽霜之草, 尢可笑也. 정재(精齋) 어른 오병훈(吳秉勳, 1870~1964)으로 호가 정재(精齋)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 간재에게 받은 서신 40여 통이 전한다. 발행(發行) 상여가 출발한 날이다. 석농(石農) 오진영이다. 필주(筆誅) 글로 하는 성토로 필삭(筆削)과 같은 뜻이다. 죄 있는 자를 실제로 죽일 권한이 없어서, 그 죄상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세상에 남기는 것을 말한다. 죄악을 글로 써서 비판하는 것이다. 또……가소롭습니다 원재는 후창 쪽의 사람인데, 권순명은 "원재가 우리를 그렇게 성토하더니 오진영이가 한번 성토하니 풀이 소금에 절여지고 서리에 시든 것과 같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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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族弟士毅 戊寅 지난번에 보계(譜系)158)의 범례를 물어보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대보공(大輔公)에게 이미 시조라고 쓰고 또 이부공(吏部公)에게도 시조라고 쓴다면, 한 성(姓)의 계보에서 두 시조가 있게 되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이부공을 중조(中祖)라고 쓴다면 부안에 본관을 둔 김씨의 족보가 여기서 시작되는데,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마땅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이부공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시조라고 쓰고 궐초(厥初)159)를 대보공이라 쓴다면 '궐초'라는 두 글자는 살아있는 시대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원조(遠祖)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가리키는 것이 광범위하여, 그러므로 주자가 8대조까지 원조라고 칭했으니, 성씨을 얻고 관을 나눈 조상 이부공에게는 가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보공은 본디 우리 김씨를 처음 있게 한 조상이니, 시조라고 〈김씨세계(金氏世系)〉 편에 쓰고, 이부공은 모조(某祖)라고 쓰지 말고, 다만 〈부녕김씨세계(扶寧金氏世系)〉 편에 일세(一世)라고 쓰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라고 주(註)를 달면 아마 잘못이 아닐 듯한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向詢譜系書例, 竊思之, 於大輔公旣書始祖, 又書始祖於吏部公, 則一姓之系, 有兩始祖者, 固爲不可.於吏部公欲書以中祖, 則貫扶之金譜, 始於此, 而謂之中祖者, 亦恐未當.以此而書始祖於吏部公, 以厥初書於大輔公, 則厥初二字, 是指生人時代之言, 非指祖上當身之言, 亦不親貼.至於遠祖,所指泛廣, 故朱子於八代祖亦稱之, 則非可書於得姓與分貫之祖也.然則如之何而可也.大輔公固始生之祖,以始祖書之於金氏世系之篇.吏部公則不書某祖,只書一世於扶寧金氏世系之篇,而註以新羅敬順王之后, 恐不爲朱, 未知如何. 보계(譜系) 한 집안의 혈통과 역사를 적은 책이다. 궐초(厥初) 어떤 일의 맨 처음이라는 뜻이다.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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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보냄 기묘년(1939) 與族弟士毅 己卯 근일 들어 서풍이 점차 높아지니 세월이 빨리 흘러감을 개탄하고, 학업이 황폐함을 한탄합니다.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옛날 학업을 함께 하던 동지들이 시대 따라 변하기도 하고, 혹은 형편에 끌리기도 하고, 혹은 음적(陰賊)에 변화되기도 하였으니, 돌아보면 서로 상장(相將)할 사람이 없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나 혼자 스스로 마음에서 말하니 이러한 때 이러한 회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 근자에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 가득 기쁘고 위로되어 날마다 그대를 기다립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우리 아우는 좋은 자질과 좋은 재성(才性)을 지녔으니, 어찌 이것이 근자의 사람들이 칭찬하는 아무개 아무개 무리들에 미칠 바이겠습니까? 매번 상자 속에 소장된 갑을연간에 아우가 지은 오진영을 배척하는 문자를 읽을 때면, 그때마다 그 의리가 밝고 문사가 탁 트임을 감탄하여, 갑자기 가슴속이 청쾌(淸快)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고 어버이가 늙음으로 인하여, 뜻이 나뉘고 공부가 소활해짐을 면치 못했으니, 아까 이른바 '형세에 이끌린다'는 말이 이 때문입니다. 옛날에도 또한 어버이를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히고 봉록을 받기 위해 벼슬을 한 자가 있었는데, 현재의 정세도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선현이 논한바 '안자(顔子)는 도의(道義)로써 어버이를 모셨기 때문에 안로(顔路) 또한 굶주려도 기뻐했다'는 설로써 보건대, 사람의 자식으로서 어진 부모를 둔 우리 아우와 같은 자는, 피차 경중의 사이에 마땅히 취사할 바를 알아야 합니다. 하물며 맹자는 부귀영화를 얻은 것은 명(命)이 있으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지 말라는 훈계를 주셨습니다. 아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집안 살림을 꾸리다가 조금 여유를 얻으면 사십 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이제 몇 년이 지나 사십이 넘었는데도 과연 어떠합니까? 지나간 일을 인하여 미루어보면 미래를 알 수 있으니, 다시 몇 년이 지나면 세월이 너무 늦어서 단약(丹藥)을 완성할 기약160)도 없으니, 외물을 추구하다 얻지 못하고 안으로 초심만 어기게 되는 격이라 어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오직 바라노니, 아우는 오늘부터 옛 생각을 통렬하게 쓸어버리고, 새로 심력을 굳혀서 초년에 실수를 후회하고 만년의 공을 거두기를 바랍니다.161) 여기에 맹자가 말한 "구하면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162)라는 훈계가 있은 즉,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괴로워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을 버리고 그 반드시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여 끝내는 둘 다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려고 합니까? 바라건대, 하늘이 아름다운 자질을 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말 것을 생각하여, 평일에 뜻과 사업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또한 나의 고립(孤立)한 형세를 도와서 조금이나마 무너진 세상의 학문을 부축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比日來西風正高, 慨年矢之邁往, 歎學業之荒無.士之悲秋, 從古而然.加以舊學同志, 或爲時變, 或爲勢製, 或爲陰化, 環顧而無人相將.有思而獨自語心, 比時此懷, 如何形喩.際玆聞近欲一顧之報, 滿心欣慰, 惟日望之.仍念賢弟好禀質好才性,豈此近人稱某某輩之所可及者.每讀獘篋所藏甲乙年間斥陰文字, 輒歎其義明辭暢, 頓覺胸中淸快也.然而坐於家落而親老, 不免志分而功踈, 向所謂或爲勢掣者此也.古亦有爲親而屈志祿仕者, 則賢弟情勢, 安得不然.但以先賢所論顔子以道義養親顔路雖飢亦喜之說, 觀之, 人子之有賢父母如賢弟者, 於彼此輕重之間, 宜知所取舍.而况孟子有得之有命求在外者之訓乎.賢弟嘗言幾年經理, 稍得贏裕, 則四十後專意學問, 今幾年過而四十餘矣, 果如何也.因往推之, 來者可知, 更過幾年, 則歲月太晩, 成丹無期, 外求未得, 而內負初心, 豈不可恨.惟望賢弟斷從今日, 痛掃舊念, 新著心力, 悔東隅之失, 而收桑楡之功也.此有孟子求則得之求在我者之訓,則其可得也必矣.何若而舍其必得而求其不可必得,竟至於兩無所得也.願思所以不負天與美質之思, 而償得平日之志業.亦以助得淺陋孤立之勢, 少扶世擧之頹, 區區不勝懇至之心. 단약을 완성할 기약 학문의 업적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초년에……바랍니다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이고 상유는 해가 지는 곳으로, 동우는 인생의 초년을, 상유는 인생의 만년을 뜻한다. 마원(馬援)이 "처음에는 비록 회계에서 날개를 드리웠지만 마침내 민지에서 날개를 떨칠 수 있었으니, 동우에서는 잃었지만 상유에서 거두었다 이를 만하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구하면……때문이다 맹자가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이 구함은 얻음에 유익하니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함에 도가 있고 얻음에 운명이 있다. 이 구함은 얻음에 무익하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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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질 문경 형익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族姪文卿 炯翼 乙丑 족질이 근일에 진걸(震杰)163)의 변란에 곧바로 변명하여 배척하고 죄를 성토한 것은, 맹자가 변론을 좋아했던 마음164)입니다. 족질이 서검(書檢)165)으로 자수한 것은 황보규(皇甫規)166)의 장한 의리요, 분주히 소식을 전한 것은 탁계순(卓契順)167)의 고풍(高風)과 같습니다. 총괄하면 간옹(艮翁)의 한 가지 일을 위한 정성으로 분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여 틈을 주지 않았고, 호남의 선비와 환난을 함께 하겠다는 뜻이 통문에 참여되지 않았다고 하여 조금도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 그리 씩씩한지요! (족질이 간재에게 배우지 않았다. 오진영을 성토하는 통문에 이 조카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다)전일(前日)에 1500명 제자들 가운데 이름을 날려 영예를 드러낸 자와 59명의 반열에 의를 분발하고 공을 과시하는 자들과 이에 혹 두려운 마음으로 움츠리거나 또 기쁜 마음으로 연락(燕樂)만을 즐기는 자들도 족질에게 비교해보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이에 그대가 근년에 힘써 법도를 지키고 진실 되게 공부를 해 나간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은 간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효과입니다. 이로부터 더욱 극진함을 궁구해나가면 간옹의 자취가 그 장차 그대에게서 이어질 것이니, 누가 사제의 교분이 미처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여 간재의 전술(傳述)을 얻지 못했다고 이르겠습니까? 또한 어찌 사제의 교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스스로를 겸연쩍게 여기겠습니까? 원컨대 더욱 힘쓰고 힘쓰십시오. 賢於近日震杰之, 變立辨討罪, 孟子好辯之心也.書檢自首, 皇甫規之壯義也, 奔走通信, 卓契順之高風也.總之爲艮翁一事之誠, 不以分不定而有間, 與湖士同難之志, 不以通不參而小歇, 何其偉哉.彼前日之楊名榮於千五百之中, 奮義誇功於五十九之列者, 乃或惴惴然龜縮, 呴呴然燕樂, 視賢能無愧乎.於是乎益信賢之年來力守規模,實下工程,不負艮翁之敎之效也.從此益究其至也, 則艮翁之緖, 其將於賢焉見紹矣, 孰得以分未及定.謂非得其傳, 亦何可以此而自歛也.願益加勉旃. 진걸(震杰) 오진영(吳震泳)과 강태걸(姜泰杰)을 이른다. 강태걸은 오진영의 제자로, 간재의 선집을 만들어 서울에 가서 인가를 받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 일에 반대하는 김택술과 최병심 등을 진천서에 고소한 인물이다. 변론을 좋아했던 마음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도자(公都子)가 외인(外人)들이 모두 부자더러 변론하기를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런가라고 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 부득이해서이다. 천하에 인간이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하였다.〔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라고 하였다. 서검(書檢) 봉함한 곳에 도장을 찍고 글을 쓴 것이다. 황보규(皇甫規) 중국 후한의 장수로, 강(羗)을 정벌한 공을 인정받아 도요장군에 올랐다. 환제 때 당고의 화가 일어나 진번, 이응 등 당대의 명현들이 다수 체포되었는데 황보규는 이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스스로 상언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고 대사농 장환을 천거한 것은 곧 신이 당을 붙좇은 것이요, 또 옛날 신을 좌교로 좌천시킬 것을 논할 때에 태학생 장봉 등이 글을 올려 신을 변호해 준 것은 바로 당인들이 신을 붙좇은 것이었으니, 의당 신도 이 당옥에 연좌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後漢書 卷65 皇甫規列傳》 탁계순(卓契順) 당나라 정혜사 수흠의 문도이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39 차운정혜흠장로견기(次韻定慧欽長老見寄)의 서(序)에 "소주(蘇州) 정혜사 장로 수흠이 그 문도 탁계순을 혜주(惠州)로 보내 나의 안부를 묻고"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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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조 죽계 선생 묘표 기축년(1949) 十一世祖竹溪先生墓表【己丑】 죽계 선생의 묘소에는 이미 묘갈을 세우고 명을 지었는데 지금 다시 묘표를 세우고 사적(事跡)을 기록하는 것은 주자(朱子)의 편지가 실린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38)가 상세함과 간략함을 상호 보이는 것과 같다.우리나라의 문장은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호(陵號))의 세대가 가장 성대하였는데 선생은 장년(壯年)에 성균관에서 문예를 다투어 많은 유생들 중에서 두 번 급제하여 진사시(進士試)에서 수석을, 생원시(生員試)에서 2등을 차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벼슬에 나아갔다면 높은 관작으로 몸을 영화롭게 하고 훌륭한 문장 솜씨로 나라를 빛내는 것을 기필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다.궁구한 것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한 깊은 뜻이었고 힘쓴 것은 효제(孝悌)와 윤상(倫常)의 도리로, 부귀는 뜬구름처럼 여기고 인의(仁義)는 맛있는 음식처럼 여겼다. 명망과 실제가 드높았기에 조정에서 선발하였고, 후학(後學)에게 공을 남겼기에 사림이 제사를 지내니, 이는 정자(程子)가 말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은 끝내 남을 성취시키는 데 이른다."라는 것이다.저술은 임진년 병화(兵火)에 모두 소실되어 시편 약간이 있을 뿐이라, 비록 매우 한스럽지만 홍 모당(洪慕堂)39) 선생은 지혜가 덕을 알기에 충분한데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시40)를 그대로 인용하여 선생과 증별(贈別)하였다. 대저 시인이 읊은 대상은 공(公)이나 후(侯)가 될 만한 현인으로 필시 《대학(大學)》의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얻은 자일 것인데 모옹이 이런 사람에 선생을 견주었으니, 선생의 학문과 현명함을 깊이 아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평소 선생이 지은 글과 학문과 정사에 대한 정밀하고 해박한 논의가 거의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점은 기록할 만하다.선생의 휘는 횡(鋐)이고, 자는 여기(汝器)이며, 성은 김씨이다. 선조의 계보, 생몰, 배위(配位), 자손은 모두 김 참판이 지은 묘갈명에 있기에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竹溪先生之墓, 旣碣以銘之矣, 今又改竪表而識之者, 是猶朱書之《大全》、《節要》, 詳略互見也。我國文詞, 莫盛於穆陵之世, 而壯年戰藝國學, 再捷群儒, 進魁生二, 由此而進, 榮身靑紫之秩, 華國黼黻之手, 在所可必, 乃不以爲意。所究者, 天人性命之蘊; 所勉者, 孝弟倫常之道, 浮雲富貴, 芻豢仁義。望與實隆, 朝廷選之; 功存後學, 士林祀之, 此程子所謂"爲己之學, 終至成物"也。惟其著述, 蕩逸於壬燹, 只有詩什若干。雖甚可恨, 然洪慕堂先生, 智足以知德, 而純用〈白駒․小雅・(小雅白駒)〉之詩, 贈別先生。夫詩人之所爲賦, 是可公可侯之賢人, 必其有得乎《大學》治平之道者, 而慕翁乃擬先生於此, 非深知其學其賢, 豈得然乎? 可知其平日文字論學、論政之精博者, 庶在此矣, 是可以書也。先生諱鋐, 字汝器, 姓金氏。先系、生卒、配位、子孫, 俱在於金叅判撰碣, 玆不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1543년(중종38) 중종(中宗)의 명으로 이황(李滉)이 주희(朱熹)의 《주자대전》 중에서 서간문을 편집한 책으로, 20권 10책이다. 《주자대전》 가운데 1700여 편의 서간 중 1008편을 실었다. 이 책은 주희의 사상을 총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리학 발달의 근간이 되었다. 홍 모당(洪慕堂):홍이상(洪履祥, 1549~1615)으로 모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초명은 인상(麟祥)이며, 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이조 참의,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일파에게 밀려나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좌천된 뒤 그 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시:원문은 '白駒小雅'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白駒'와 '小雅'의 순서를 바꾸어 번역하였다. 백구는 현자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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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랑 양공 묘표 정축년(1937) 宣務郞楊公墓表【丁丑】 후세에서 문식을 가하기 시작한 때부터 선행을 기록하고 덕을 형용하는 부류는 되도록 내용을 상세히 갖추는 것을 으뜸으로 쳐서 걸핏하면 한 권을 넘긴 뒤에야 그쳤으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요점만 서술한 뜻이겠는가. 내가 선무랑 남원(南原) 양공 휘 여괄(汝栝), 자 직도(直道)의 가장을 읽어보니, "성품이 효성스럽고 형을 공경하였으니 선군(先君)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살아 계실 때 봉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큰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또 둘째 형이 아들 없이 죽자 몹시 비통하여 눈물로 침석(寢席)을 적시고 그 양자를 자기 아들처럼 보살피고 사랑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 의(義)로 자식을 가르쳤다."라고 하였는데 이 외에는 다른 말이 없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간략하다고 할 만하나 옛사람의 뜻을 상고해 보면 요점을 얻었다.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일단 확립되면 도는 자연히 생겨난다."라고 하고, 또 "효제(孝悌)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41)라고 하였다. 공이 이미 효성스럽고 형을 공경하였고 보면 여기에 근본하여 생겨난 많은 선(善)의 도를 의당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말은 비록 간략하나 대체로 선을 거론하였으니, 보는 사람이 간략한 말을 통해 상세한 실상을 알고 큰일을 미루어 세세한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에 "법도로 집안을 다스리고 의로 자식을 가르쳤다."라고 한 말이 어찌 일면을 보기에 부족하겠는가. 이는 기록할 만하다.상조(上祖)는 고려 때 군사(郡事)를 지낸 경문(敬文)이고, 현조(顯祖)는 대제학 이시(以時)이고, 증조부42)는 부정(副正)을 지낸 홍(洪)이고, 조부는 시강원 익위(翊衛)를 지낸 사민(士敏)이고, 부친은 생원(生員) 시성(時省)이고,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홍원(洪原)의 따님이며 석헌(石軒) 옥(沃)의 증손으로 만력 갑신년(1584, 선조17)에 태어나 효묘(孝廟) 경인년(1650, 효종1)에 졸(卒)하였다. 부인은 남원 윤씨(南原尹氏)로 참봉(參奉) 정기(廷璣)의 따님이자 문효공(文孝公) 효손(孝孫)의 6세손이며, 묘소는 순창(淳昌)의 한삼동(汗衫洞) 해좌(亥坐) 언덕에 쌍봉(雙封)으로 조성하였다. 만년에 부호군(副護軍) 대거(大擧), 수거(秀擧), 망거(望擧)를 낳았고, 딸은 진사(進士) 김지명(金之鳴), 생원 오이정(吳以井)에게 시집갔다. 이상이 공의 선계(先系), 생몰, 배위, 묘소, 자녀이다.아, 세도가 떨어지고 풍속이 무너져 인도(人道)의 큰 근본이 없어졌으니, 오늘날 어떤 사람이 다시 공처럼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자가 있겠는가. 공의 후손들이 힘을 합치고 정성을 다해 300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묘표를 세워 공의 덕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찾을 필요 없이 영원히 양씨의 다하지 않는 물건은 효제이니, 또 거듭 기록할 만하다. 이 일에서 시종 수고한 자는 양종옥(楊鍾玉) 증팔(增八)과 양남수(楊南洙), 양호영(楊鎬永)이고, 와서 글을 청한 자는 양훈영(楊薰永)과 양경수(楊慶洙)이다. 蓋自後世彌文, 紀善狀德之類, 務尙詳備, 動輒溢卷而後已, 是豈古人體要之意哉? 余讀宣務郞南原楊公諱汝栝字直道家狀, 有曰: "性孝悌, 先君早世, 恨不逮養, 事伯兄如父。仲兄無子而沒, 痛割切至, 淚沾寢席, 撫愛其所後若己子。治家有法, 敎子以義。" 外無他語。自今見之, 可謂寂寥, 稽之於古, 爲得其要。有子曰: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悌, 爲仁之本。" 公旣孝且悌, 則衆善之道本此而生者, 宜無不備。辭雖略, 而大致擧善, 觀者可因略而致詳, 推大而知細也。其云"治家法、敎子義"者, 豈不足以見一斑乎? 是可以書也。上祖高麗郡事敬文, 顯祖大提學以時, 曾祖文・(父)副正洪, 大父侍講院翊衛士敏, 考生員時省, 妣文化柳氏, 洪原女, 石軒沃曾孫。萬曆之甲申, 孝廟之庚寅。南原尹氏, 叅奉廷璣女, 文孝公孝孫六世孫, 淳昌之汗衫洞亥原雙封, 晩擧副護軍大擧、秀擧、望擧, 進士金之鳴、生員吳以井, 公之先系、生卒、配墓、男女也。嗚呼! 世降俗敗, 人道之大本喪矣, 今日何人復有如公之孝悌者? 而公之後孫, 能協力殫誠, 始竪阡表於三百年後, 而闡公之德, 然則不待求之於世, 而永爲楊氏不匱之物者, 孝悌是已, 又重可以書也。是役也始終勤勞者, 鍾玉增八、南洙、鎬永, 來請文者, 薰永慶洙, 其人也。 군자는……근본이다:모두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보인다. 증조부:원문은 '曾祖文'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文'을 '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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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시 부정 최공 묘표 무자년(1948) 司僕寺副正崔公墓表【戊子】 전주(全州)를 본관으로 삼고 고부(古阜)에 명망 있는 최씨는 고려의 시중(侍中)을 지낸 문성공(文成公) 아(阿)를 시조로 삼는다. 이후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 계속 나와 족보를 빛냈으니 청수(淸修)하고 염퇴(恬退)한 본조의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월당(月塘) 담(霮), 기미를 보고 절조를 온전히 지킨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 득지(得之), 학문과 공훈으로 사우(祠宇)에서 제향을 받는 판관(判官) 증 참판(參判) 희정(希汀), 연원(淵源)이 있는 학문을 한 사헌부 감찰(監察) 농은(農隱) 휴지(休之)43) 같은 분들이 있다. 덕촌(德村 최희정의 호)이 조부이고 농은이 증손인 사복시 부정 휘 영우(英佑), 자 수이(秀而)가 있으니, 부사과(副司果) 진홍(鎭洪)의 아들이고, 판서 광필(光弼)의 따님인 공주 이씨(公州李氏)가 모친이다.대개 공은 위로 계승한 바가 있고 아래로 전해 준 바가 있으니 마땅히 드러내 기록할 만한 덕행이 있을 터인데 족보에 보이는 내용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저 아버지가 선성(宣聖 공자(孔子))이고 아들이 복성(復聖)44)인 백어(伯魚 공리(孔鯉)의 자)가 평생 동안 수립한 것이 어찌 70제자의 반열에 미치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선을 기록한 글이 《논어》에 실리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당시에 글을 엮어 기록할 때 우연히 빠뜨린 것인가 보다. 공의 관직으로 말하면 사복시 부정이라는 중임의 반열에 들었으니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선발에 응하였겠는가. 이는 천 년 뒤에 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부인은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생원(生員) 의(猗)의 딸이다. 아들 관(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식(寔)은 주부(主簿)이고, 굉(宏)도 주부이며, 딸은 사과(司果) 강윤상(姜允常)에게 시집갔다. 관의 양자 득일(得一)은 주부이고, 식의 아들 득일은 양자로 나갔고, 복일(復一)과 덕일(德一)은 진사(進士)이다. 윤상의 아들은 영(穎)이고, 딸은 부사(府使) 김치원(金致遠)에게 시집갔다. 덕일의 이남이 바로 농은이다.지금 그 후손이 함께 도모하고 힘을 합쳐 분토동(粉土洞) 선영 안 쌍분(雙墳)으로 조성한 묘소에 다시 묘표를 세우면서 나에게 글을 짓게 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상과 같이 쓴다. 崔氏之貫全州望古阜者, 以高麗侍中文成公阿爲肇祖。自後聞人繼出, 光耀譜乘, 有若本朝集賢殿提學月塘霮之淸修恬退, 典農少尹得之之見幾全節, 判官、贈叅判希汀之學勳享祠, 司憲府監察農隱体・(休)之淵源學問, 是也。以德村爲祖, 農隱爲曾孫, 而有司僕寺副正諱英佑字秀而, 副司果鎭洪之子, 公州李氏判書光弼女, 其妣也。蓋公上有所承, 下有所傳, 宜其有德行可表書者, 譜無見焉, 何也? 夫以伯魚之父宣聖而子復聖, 生平樹立, 豈遽不及七十子之列? 而記善之文, 不登《魯論》, 是皆當時編錄之偶爾闕失也歟? 乃若公之官職, 參在〈冏命〉"僕臣正, 厥后克正"之重任, 苟非其人, 豈膺是選? 此足以想像公於千載下矣。配南平潘氏, 生員猗女。男寬僉樞, 寔主簿, 宏主簿, 女適司果姜允常。寬繼男得一主簿, 寔男得一出繼, 復一、德一進士。允常男穎, 女金致遠府使。德一第二男, 卽農隱也。今其後孫合謀協力, 改樹表於粉土洞先塋內雙兆之阡, 俾余文之。辭不獲, 而爲之書如右云爾。 휴지(休之):원문은 '体之'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体'를 '休'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아들이 복성(復聖):복성은 안회(顔回)를 가리키는 말이고, 백어의 아들인 자사(子思)는 술성(述聖)이라 부른다. 편찬 과정에서 오류가 있는 듯한데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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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진사 설공 묘표 무자년(1948) 成均進士薛公墓表【戊子】 율곡선생(栗谷先生)이 말하기를, "옛날의 학자는 벼슬하기를 구한 적이 없고 학문이 성취되면 윗사람이 선발하여 등용하였다.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비록 하늘과 통하는 학문과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과거가 아니면 도를 행하는 지위에 나아갈 길이 없다."45)라고 하였다. 아, 말세에 태어난 선비는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성균관 진사인 옥천(玉川) 설공의 휘는 세옥(世玉)이고, 자는 사익(士益)이니 명릉(明陵) 경오년(1690, 숙종16)에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질과 높은 재주를 지녔고 학문이 우수하여 벼슬할 만하였는데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마음을 바꾸고 흥기하여 말하기를,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현양하며, 어릴 때 배우고 장성하여 행하는 것은 성인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으니, 내가 어찌 이렇게 시골에서 살다가 말겠는가."라 하고는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성균관에 올라갔으니 바로 의릉(懿陵) 계묘년(1723, 경종3) 방목(榜目)이다.이로부터 나아가 벼슬했다면 거의 큰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당시는 당파 사이에 서로 알력이 있어 조정이 불안하였다. 그래서 재주를 펼치기 기대하기 어렵고 곤액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마침내 처음 먹은 뜻대로 귀향하여 옥은(玉隱)이라 자호(自號)하고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였으니 명망과 실제가 모두 부응하였고, 후학을 가르쳐 성취시킨 사람이 많았다. 원릉(元陵) 경술년(1730, 영조6) 41세에 졸(卒)하니,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더 수명을 주지 않아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다.공은 신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시호)의 후손으로, 고려 찬성사(贊成事) 문량공(文良公) 공검(公儉)의 15세손이고, 본조 대사성 위(緯)의 10세손이며, 안도(安道), 성징(星徵), 만(曼)이 증조, 조부, 부친 3세이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여경(餘慶)의 따님으로 석헌(石軒) 옥(沃)의 6세손이다. 아들은 홍재(弘再)이고, 손자와 손녀는 광문(匡文), 광형(匡衡)이고 정석원(鄭錫元)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는 유(維), 관(綰), 찬(纘), 통(統)이고 홍종섭(洪琮燮)에게 시집갔다. 현손자와 현손녀는 문오(文伍), 문승(文昇), 문한(文翰), 문겸(文謙), 문우(文祐), 문우(文佑), 문백(文伯), 문형(文馨), 문학(文鶴)이고, 김한상(金漢商), 김의수(金義洙), 유황(柳煌), 소한원(蘇漢源), 박동형(朴東衡), 박태혁(朴泰赫), 방의상(房義相), 유정식(柳正植), 방진두(房鎭斗), 양재진(楊在鎭)에게 시집갔다.공의 사후 200여 년 뒤에 7세손 봉수(琫洙)가 여러 친족과 상의하여 순창군(淳昌郡) 동전리(銅田里) 평산(平山)의 해좌(亥坐) 언덕 묘소에 다시 묘표를 세우고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가장을 살펴보고 쓰니 삼가 재주와 학문이 있었으면서도 수명과 지위가 없었던 것을 삼가 슬퍼하고 게다가 옛 도가 회복되지 못한 것을 개탄한다. 栗谷先生有言, 曰: "古之學者, 未嘗求仕, 學成則爲上者, 擧而用之。今世則不然, 雖有通天之學, 絶人之行, 非科擧, 無由進於行道之位。" 嗚呼! 士之生於叔季者, 豈不難哉? 成均進士玉川薛公諱世玉, 字士益, 明陵庚午生。以美質高才, 學優可仕, 而不肯自衒, 若將終身。旣而幡然作, 曰: "立揚顯親, 幼學壯行, 聖有明訓, 吾豈若是畎畝中已哉?" 一番射策, 獲升上庠, 乃懿陵癸卯榜也。自此進取, 庶可有爲, 而時則黨色相軋, 朝著不安, 驥展難期, 鴻罹有虞, 遂遂初歸鄕。自號玉隱, 專心爲己之學, 望實俱副, 推敎後學, 多所成就。年四十一而卒於元陵庚戌。人皆惜天不假壽, 未究大業。公新羅弘儒侯後, 高麗贊成事文良公公儉十五世孫, 本朝大司成緯十世孫, 安道、星徵、曼, 其曾祖禰三世。配文化柳氏, 餘慶女, 石軒沃六世孫。男弘再。孫男女, 匡文、匡衡, 鄭錫元。曾孫男女, 維、綰、纘、統, 洪琮燮。玄孫男女, 文伍、文昇、文翰、文謙、文祐、文佑、文伯、文馨、文鶴, 金漢商、金義洙、柳煌、蘇漢源、朴東衡、朴泰赫、房義相、柳正植、房鎭斗、楊在鎭。公沒後二百餘年, 七世孫琫洙, 協謀諸族, 改樹表於淳昌郡銅田里平山亥原之阡, 請余文之, 辭旣不獲, 則按狀書之, 竊悲其有才學而無年位, 重以慨古道之不復云爾。 옛날의……없다:《격몽요결(擊蒙要訣)》 〈처세장(處世章)〉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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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공 묘표 계사년(1953) 雲菴金公墓表【癸巳】 공의 휘는 시종(始鍾)이고, 자는 경지(敬址)이며, 호는 운암이다. 부안 김씨는 가계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태자 휘 일(鎰)에게서 나와 고려 이부 상서(吏部尙書) 휘 경수(景修)에 이르렀고 이후로는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이 서로 이어져 나라의 저명한 성이 되었으니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고려에서 가장 드러났다. 고려가 망한 뒤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휘 광서(光叙)가 망복(罔僕)46)의 뜻을 간직해 재야에 은거하여 절개를 지켰다.본조에 들어와서는 호가 죽계(竹溪)인 휘 횡(鋐)이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47)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유천(柳川)에 사당을 세워 모셨으니, 공의 5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복길(復吉)이고, 증조의 휘는 엄(淹)이고, 조부의 휘는 세적(世迪)이다. 부친 휘 참(墋)은 증(贈) 사복시 정(司僕寺正)이고, 모친 증 숙인(淑人)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자식이 없고,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대재(大載)의 따님이다.공은 선대의 공덕을 이어받아 어려서 비범한 태도가 있었고,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천성적으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항상 선조를 받들고 자식을 가르치기를 그치지지 않고 독실하게 하였다. 묘소는 부안 명당리(明堂里) 뒤 산기슭 갑좌(甲坐) 언덕에 있다.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향도(享道)의 따님이니, 각각 송학동(松鶴洞) 선영 아래 묘좌(卯坐)에 장사 지냈다.삼남을 두었으니 수택(守澤)은 선친의 뜻을 잘 계승하였고, 인택(仁澤)과 기택(基澤)이 있다. 장남의 아들 서일(瑞一)은 품행이 드러났고, 서환(瑞鍰)은 양자로 나갔으며, 서식(瑞植)은 효우(孝友)로 알려졌다. 차남의 아들은 서곤(瑞坤)이고, 삼남의 양자는 서환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군자의 은택도 5세가 지나면 끊어진다."48)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죽계 부군에 대해 은택이 여전히 끊어지지 않아 효우 두 글자가 그대로 대를 잇는 세업(世業)이 되어 공만 효우를 실천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효도하고 우애한 군진(君陳)의 덕행49)과 같은 것이다. 시대를 올라가 논하건대 공의 사적을 보는 사람은 공의 효우를 국정에 시행할 수 있음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公諱始鍾, 字敬址, 號雲菴。扶寧金氏, 系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至高麗吏部尙書諱景修, 自後簪組相承, 爲國著姓。平章事文貞公諱坵, 最顯于麗。麗亡, 知古阜郡事諱光叙, 志存罔僕, 自靖守節。入本朝, 諱鋐, 號竹溪, 生進壯元, 學行叅奉, 立祠柳川, 公五世祖也。高祖諱復吉, 曾祖諱淹, 祖諱世迪。考諱墋, 贈司僕寺正, 妣贈淑人海州吳氏, 無育, 全州崔氏, 大載女。公胚胎前光, 幼有異度, 濡染庭訓, 孝友天性, 常以奉先敎子, 慥慥不已。墓在扶安明堂里後麓負甲原。配密陽朴氏, 享道女, 各窆于松鶴洞先塋下卯坐。三男, 守澤克承先志, 仁澤、基澤。長房男瑞一, 行誼著, 瑞鍰出。瑞植孝友聞。次房男瑞坤。三房系男瑞鍰。曾玄以下不錄。嗚呼! 孟子曰: "君子之澤, 五世而斬。" 然公之於竹溪府君, 澤猶不斬, "孝友"二字, 因成連世世業, 非徒公之孝友, 則惟孝友于兄弟君陳之德行是也。尙論之, 觀公者, 其有施於國政, 亦可推而知也。 망복(罔僕):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商)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생원시(生員試)와……급제하고:진사시에서는 장원으로 생원시에서는 아원(亞元), 즉 2위로 급제하였다. 《後滄集 十一世祖竹溪先生墓表, 曾祖考天台府君墓表》 《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 군자의……끊어진다:《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효도하고……덕행:《서경(書經)》 〈군진(君陳)〉에, "군진아! 너의 훌륭한 덕은 효도와 공손함이니,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정사에 시행할 수 있기에 너에게 명하여 이 동교(東郊)를 다스리게 하겠다.[君陳 惟爾令德孝恭 惟孝友于兄弟 克施有政 命汝尹玆東郊 敬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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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서공 묘표 을해년(1935) 孝子徐公墓表【乙亥】 증자(曾子)의 효에 대해 정자(程子)는 지극하다고 하였다. 증자가 행한 효는 식사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리고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줄지 묻는 사이50)에 불과하여, 행하기 어려운 기이한 행실이나 특이한 행적이 있는 후세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극한 효라고 칭송하였으니, 증자에게는 지극하다고 하고 후세의 효에는 지극하다고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잠깐 하기는 쉽고 오랫동안 하기는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식사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다고 한다면 오랫동안 몸을 봉양했다는 뜻이고 반드시 누구에게 줄지를 여쭈었다고 한다면 오랫동안 마음을 봉양했다는 뜻이니, 그 어려움이 후세 사람의 행하기 어려운 효가 혹 한때의 특별한 정성에서 나온 것과는 견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용(中庸)은 쉽지만 어렵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은 어렵지만 쉽다."51)라고 하였으니 비슷한 예가 또한 이와 같다.근세에 장성(長城) 서씨 가문에 효자 휘 상권(象權)이 있었으니 고려 시중(侍中) 절효공(節孝公) 휘 능(稜)의 후손이며, 본조 생원(生員)으로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를 변호한 휘 태수(台壽)의 9세손이며, 진사(進士) 휘 한용(漢茸)의 아들이다. 지금 그 종자(從子)인 서문환(徐文煥)이 지은 행록(行錄)를 읽어 보니, "집이 가난하였으나 근심하지 않고, 오직 어버이 봉양을 근심하여 농사짓고 나무하여 몸을 봉양하는 데 빠뜨림이 없었다."라고 하고, 또 "진사공이 술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직접 술을 빚건 사오건 힘을 다해 계속 마련하여 집안 형편이 나빠도 그치지 않았다. 진사공이 비록 가까운 곳에 출타해도 반드시 기다렸고, 중도에 날이 저물면 진사공을 등에 업고 돌아왔다."라고 하고, 또 "모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는 데 유감이 없었고, 여묘(廬墓)하려고 하였으나 진사공이 힘써 제지하였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중문(中門) 밖에 여막(廬幕)을 설치해 거처하다가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는데, 진사공의 명으로 슬픔을 절제하여 생명을 손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평소 마음을 봉양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어느 한 집안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향당(鄕黨)에서 지금까지 공공연히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삼가 보건대 공의 효도는 모두 부모를 받드는 간략한 예절에서 나와 행하기 쉬운 듯하고 놀랄 만한 기이한 행실이 없는데 모든 사람이 감복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행하기 어려운 효도보다 깊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종신토록 오랫동안 마음과 육신을 봉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공은 또 매우 가난하였는데도 잘 해냈으니 이것이 어찌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개 듣건대 공은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어 정밀한 의리를 강구하지 않았는데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한 가지 일은 오히려 옛사람과 합치하였으니, 공의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종(高宗) 경인년(1890, 고종27) 4월 17일에 54세로 졸(卒)하였으니 진사공보다 1년 먼저 돌아갔다. 아, 효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보답이 잘못된 것이니 이는 또한 어째서인가.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제홍(濟弘)의 따님이고, 아들 승환(承煥), 증환(曾煥)과 반남(潘南) 박제옥(朴齊玉), 전주(全州) 최원호(崔元鎬)에게 시집간 딸이 있으며, 후건(厚建), 후덕(厚德), 규문(圭文), 규학(圭學), 후인(厚仁), 후찬(厚贊)은 손자이니, 자손이 번성하고 다하지 않는 것이 효도에 대한 보답이다.공의 자손이 비석을 마련해 정읍(井邑) 덕치(德峙) 서쪽 미좌(未坐) 묘소에 묘표를 세우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옛날 절효공이 효도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공의 효는 진실로 가문과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또 서문환은 미더운 사람이다. 옛날에 나라의 동맹을 믿지 않고 계로(季路)의 말 한마디를 믿은52) 고사가 있으니 나 또한 서문환이 지은 행록 한 편을 믿고서 공의 행실을 드러내 논하여 오늘날 효를 말하는 자들로 하여금 어렵고 쉬운 것의 구분을 알게 하고자 한다. 曾子之孝, 程子以爲"至矣"。其所以爲孝, 則不越乎必有酒肉、必請所與之間, 非有如後世奇行異蹟之難能者, 顧以至孝稱, 在此不在彼, 何哉? 蓋易暫難久, 常情也。謂之必有, 則養體也久; 謂之必請, 則養志也久, 其爲難不比後世之難能, 容有出於一時特誠者, 故權衡如此歟? 朱子曰: "中庸易而難, 蹈白刃難而易。" 其類例亦若是焉。近世長城徐氏之門, 有孝子諱象權, 麗侍中節孝公諱稜后, 本朝司馬伸捄栗牛兩先生者諱台壽九世孫, 進士諱漢茸子也。今讀其從子文煥所著行錄, 有曰: "家貧不戚戚, 惟以親供爲憂, 耕稼樵採, 養體無闕。" 又曰: "進士公嗜酒, 以釀以酤, 極力繼之, 家落而不輟。進士公雖近出, 必待, 中路日暮, 則背負而歸。" 又曰: "遭內艱, 送終無憾, 欲廬墓, 進士公力止之, 未遂, 廬中門外, 毁幾滅性, 以進士公命, 節哀無傷。" 此可見平日養志也, 是皆非一家私言, 鄕黨至今公誦云。竊觀公之孝, 皆出於奉承疏節若易行者, 而無奇異可驚動, 人人之感服, 深於世所謂難能之孝者, 無他焉, 以養志體終身久之難也。公又貧甚而能之, 玆豈非易而難, 難而易者乎? 蓋聞公未當博學審問, 講究精義, 而孝親一事, 乃與古人合, 其天資純實, 可知已。年五十四以高宗庚寅四月十七日卒, 先進士公一歲。嗟哉! 孝養未終, 天報有錯, 亦曷故焉?金海金氏, 濟弘女, 配也; 丞煥、曾煥, 潘南朴齊玉、全州崔元鎬, 男女也; 厚建、厚德、圭文、圭學、厚仁、厚贊, 孫也。其盛且未艾, 是則孝之報也。公之子孫伐石表于井邑德峙之西負未之阡, 請余以文。余惟昔節孝公以孝聞于世, 吾知公之孝實係世類。且文煥, 信人也。古有不信國盟而信季路一言者, 余亦信文煥一錄, 而表論公行, 欲使今之言孝者知其難易之分焉。 식사……사이:증자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적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고, 상을 물릴 때에는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고 싶으신지 여쭈었다. 증석이 남은 것이 있는지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는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중용(中庸)은……쉽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9장에 "천하와 국가를 균평(均平)히 다스릴 수 있으며, 작록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天下國家 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注)에 "세 가지는 어렵지만 쉽고 중용은 쉽지만 어렵다.[三者難而易 中庸易而難]라고 한 구절을 가리키는 듯하다. 나라의……믿은:춘추시대(春秋時代) 소주(小邾)의 대부(大夫) 역(射)이 구역(句繹) 지방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해 와서 말하기를 "자로(子路)로 하여금 와서 나와 함께 서약하게 한다면 노나라의 맹서는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한 일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14年》 자로는 계로의 다른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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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임공 묘표 갑술년(1934) 孝子林公墓表【甲戌】 내가 보건대 성현이 효도를 일컬을 때에 덕을 수립하여 어버이를 현양하는 것으로 끝맺고 혼정신성하고 음식을 올리는 일은 어버이를 봉양하는 상례(常禮)로 삼았다. 어버이에게 병이 있으면 의원을 부르고 약을 맛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있지만 허벅다리 살을 베어내거나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라는 말은 없다. 당(唐)나라 때 허벅다리 살을 베어내 병든 어머니에게 올려 정려된 사람이 있었는데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가 〈호인대(鄠人對)〉53)를 지어 비판하였다. 그러나 "인육(人肉)으로 병을 치료한다."라는 진장기(陳藏器)54)의 말이 있고부터는 자식 된 자들이 의리의 정조(精粗)와 효험의 유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말을 행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효도라고 칭송하였다.무릇 사람이 잘못으로 병기에 다쳐도 오히려 아연실색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법인데 스스로 자신의 살을 베어내면서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니 어버이를 위하는 지극한 정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런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주자(朱子)는 이를 중도를 지나쳤다고 하고 또 "혹여 명예를 위하는 자도 있으니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며, 율곡(栗谷) 선생은 "이런 행동은 상도(常道)가 아닐뿐더러 그 마음을 살피기도 어렵다. 반드시 편작(扁鵲)이나 화타(華佗) 같은 신의(神醫)가 나와 '이 병은 다른 사람의 피를 가져다 보충한 뒤에야 낫는다.'라고 하기를 기다려 그 자식이 행한다면 중도를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아주 지극하여 정론이 되기에 충분하다. 지금 효자 보안(保安) 임공 휘 상팔(相八), 자 내화(乃華)의 사적(事跡)과 행실을 보건대 진실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다.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심해지자 칼로 허벅다리를 베어내 삶아서 입에 흘려 넣어 3일 동안 회생하게 하였으니 어린아이였을 때 있었던 일이다. 이해를 따지는 세정(世情)의 사사로움이 없고 거짓 없이 순일한 마음을 간직하여 유명해지는 것이 선모할 만한 일인지 모르고 편작, 화타가 직접 지시한 것처럼 진장기의 말을 믿었으니, 공과 같은 사람은 율옹이 논한 말에 거의 합치될 만하여 감히 지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공은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가, 품팔이를 하여 아주 맛있는 음식으로 병든 어머니를 모시기를 수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장례를 치를 때는 슬픔을 다하고 힘을 다하였으니 이는 모두 억지로 하는 뜻이나 목적이 있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따뜻하고 시원하게 보살펴 드리는 것이 절도가 있었고 상제(喪制)를 잘 치렀으니 효성과 사랑이 천성이라는 사실을 더욱 알 수 있다. 어찌 이를 통해 그 세계(世系)를 논하지 않겠는가.고려 때에는 서하공(西河公) 춘(春)55)【춘은 목(木) 자를 따른다.】이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니56) 공은 그의 후손이다. 본조의 진사(進士) 우춘(遇春)이 9세조가 된다. 조부는 천경(天擎)이고, 부친은 훤(藼)이고, 모친은 무안 박씨(務安朴氏)이다. 공은 정묘(正廟) 을묘년(1795, 정조19)에 태어나 철묘(哲廟) 경신년(1860, 철종11)에 졸하였다. 부인은 부안 김씨(扶安金氏) 필상(弼相)의 따님으로 남편을 공손히 받드는 현명함이 있었다고 한다. 아들은 경희(敬熙)이고, 딸은 부안 김 아무개, 강릉(江陵) 유(劉)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기행(基{日+幸}), 기승(基昇), 기경(基暻)이다. 장손의 양자는 철진(哲鎭)이고, 차손의 아들은 형진(馨鎭)이고, 삼손의 아들은, 철진은 양자로 나갔고, 옥진(玉鎭), 하진(河鎭), 복진(福鎭), 평진(平鎭)이다.아, 공은 진실로 효자이고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니 마땅히 그 효행처럼 공의 천성에서 나온 다른 많은 선행이 있었을 터인데 들을 수가 없다. 임철진이 오랜 세월 전할 글을 청하였는데, 내가 향사(鄕士)의 추천장에 근거하고 나의 견해로 판단하여 부풍(扶風) 보안방(保安坊) 덕산(德山) 기슭 간좌(艮坐) 묘소에 기록하게 하였다. 余觀聖賢稱孝, 究竟乎立德顯親, 而定省飮食爲養親常禮。至其有癠, 則有迎醫嘗藥之訓, 而無刲股裂指之語矣。唐時有剔股以奉母疾, 得旌其門者, 而韓文公作〈鄠人對〉而非之。然自有陳藏器"人肉療疾"之說, 爲人子者, 不暇思義之精粗、驗之有無, 而行之者滋多, 人皆同辭稱孝。夫人, 誤傷兵刃, 猶失色痛楚。乃自割其肉, 而不以爲痛, 非爲親至情, 曷能至此? 此所以得是名者。雖然, 朱子以此謂之過中, 又云: "容亦有爲名者, 稱人豈不難哉?" 栗谷先生曰: "此旣非常道, 又難以察其心。必待神醫如扁華者出, 曰'此疾取補他血, 然後乃瘳', 而其子行之, 則爲得中。" 此言備盡, 足爲定論。今見孝子保安林公相八乃華事行, 知其信然矣。公早喪父, 奉慈母盡誠, 及其疾革, 以刀刲股, 煎烹注口, 得回甦三日, 事在童年。無世情計較之私, 保純一無僞之心, 不知有名之可慕, 信之若扁華親指, 若公者庶可合於栗翁所論, 而人莫敢間然矣。推是心也, 其賃傭以極滋味侍疾, 而累年不懈, 送終而盡哀殫力, 皆非出强意與有爲。其在齠齔, 而溫凊有節, 能執喪制, 益知孝愛之天性也, 盍因是而論其世? 在麗而西河公春【從木】, 以文章節行嗚・(鳴)于世, 公其後也。本朝進士遇春爲九世祖。祖天擎, 考藼, 妣務安朴氏。生以正廟乙卯, 卒以哲廟庚申。配扶寧金氏, 弼相女, 有孟光擧案之賢云。子敬熙, 女扶寧金某、江陵劉某。孫基[日+幸]、基昇、基暻。長孫系男哲鎭, 次孫男馨鎭, 三孫男哲鎭出, 玉鎭、河鎭、福鎭、平鎭。噫! 公固孝子人, 孝爲百行源, 宜公他善多出天性, 有如其孝者, 而不可得而聞也。哲鎭謁以傳久之文, 余據鄕士薦狀, 而斷以己見, 俾書于扶風保安坊德山之麓艮坐之阡。 호인대(鄠人對):《한창려집(韓昌黎集)》 외집(外集) 권4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호인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호현(鄠縣)에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호인이 어머니에게 허벅다리를 베어 먹여 병을 낫게 하였으나 자신은 죽었는데, 한유는 자식이 몸을 훼손하여 죽음에 이른 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진장기(陳藏器):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의술에 정통하였다. 《본초습유(本草拾遺)》를 지었는데 인육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 이 책에 보인다. 춘(春):서하의 이름은 '椿'이 맞다. 원문의 소주에서 오류를 밝혔으므로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알려졌으니:원문은 '嗚'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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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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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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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서당이 새로 완성되어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오늘날이 어떤 날인데 이런 즐거움을 얻었습니까? 이를 통해 그대가 자신을 수양함이 진실하여 다른 사람에게 두루 교화를 미쳤음을 알았습니다. 구라파의 풍조가 급속히 몰려오고 유학의 기풍은 끊어져서 준수한 청년들은 모두 저쪽으로 들어가고, 이쪽을 지키는 자는 노성한 몇 사람만이 외롭게 있을 뿐입니다. 노성한 사람들이 죽으면 누가 다시 이것을 계승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형세로는 노성하여 독실한 사람이 귀한 게 아니고, 연소한 사람 중에 독실한 사람이 믿을만한데, 사방을 둘러보면 나이가 젊고 학문을 돈독히 한 사람으로 미래의 표준이 될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거꾸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되돌리고 모든 냇물을 막아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였으니11), 어찌 한문공(韓文公)만이 훌륭함을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매우 자중자애하고 만 배로 면려하여 세도(世道)가 의지할 수 있게 하십시오. 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학업이 후퇴하고 세상이 혼란할수록 덕이 박해지고 있습니다. 말할 것 같으면서 말하지 않는 것과 행동할 듯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그대의 근심거리가 아니라 바로 저의 병통입니다. 그대가 어찌 저에게서 구하겠습니까. 제가 진실로 그대에게 구해야 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똑같이 근심 속에 있으니 누가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네 병통이다 내 병통이다 말하는 것도 한가한 말입니다. 그대와 내가 이미 참된 마음으로 서로 허여하고 있으니, 다만 피차간에 만약 말이 이치에 어긋나고 행동이 법도를 어기는 때가 있으면 듣고 보는 대로 그때그때 서로 바로잡고 경계한다면 아마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입으로만 하는 수선사(守善社)는 귀하지 않고, 뱃속의 수선사라야 귀하다."고 한 그대의 말씀이 바로 역시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수선사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단전(丹田)을 본소로 삼고 오성(五性)과 만선(萬善)을 조약으로 삼으며 장수인 지(志)를 사장으로 삼고 졸병인 기(氣)12)를 사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오묘한 것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문정(門庭)을 본소로 삼고 《소학》과 사서를 조약문으로 삼으며 책속의 성인을 사장으로 삼고 현인을 사원으로 삼는 것은 그 다음의 것입니다. 본소를 정하고 규례를 만들어 무리를 모아 사(社)를 조직하는 것은 가장 하책에 해당합니다. 잘 모르겠으나, 그대는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편지에 근래 학자의 큰 병통을 논한 한 단락은 진실로 아픈 곳을 고치는 하나의 침이고 귀머거리를 고치는 큰 종입니다. 세상의 만사가 모두 허위13)라는 것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말인데, 현재 삼연이 살았던 세상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이치를 강론하는 것은 실천을 돕기 위한 것인데 그 귀착점을 따져보면 구이지학(口耳之學)14)일 뿐입니다. 문장은 사도(斯道)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그 극치를 궁구해보면 화려하게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웅변은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기 위한 것인데 같은 집안에서 서로 칼부림하는 것이 능사일 뿐입니다. 이러고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아서 천하를 교화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 스스로 모욕을 초래하고 끝내는 남까지 손상시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바탕이 노둔하고 재주가 짧아서 성리(性理)에 대해 글을 지어 변론하는 것은 비록 감히 마음을 먹지 못하거니와 평소의 행실이 말에 미치지 못하니 진실로 또한 병통이 실제가 없는 자보다 심합니다. 지금 보내준 편지에서 경계를 받은 것이 많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보내준 편지에 "수치가 심하여 죽었으니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을 엄격히 한 것이 우러를 만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리는 무궁하니 아마도 더 헤아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만약 노(魯)나라와 송(宋)나라 두 나라가 모두 오랑캐에게 함락되어 머리를 깎는 것이 풍속이 되었고 공자와 주자 두 성현이 그 이후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그 풍속에 물들었다가 장성해서야 그것이 그릇된 것을 깨달았지만 풍속을 바꾸거나 다른 나라로 갈 길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반드시 부끄러움이 심하여 자결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이후로 본조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오랑캐 원나라를 섬겨 머리 깎는 풍속을 바꾸지 않았다면 정암, 퇴계, 율곡 이하의 여러 선생들도 또한 반드시 의심할 것 없이 자결하였겠습니까? 자세히 바로잡아 다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법도를 벗어나지 않고15) 인을 어기지 않는16) 경지에 이르러야 본연의 마음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법도를 벗어나지 않고 인을 어기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도 전에 갑자기 본연의 마음이라 말한다면, 본연의 마음은 마음이 이치에 맞는 것이니, 어찌 굳이 다시 법도를 벗어나지 않고 인을 어기지 않음을 기다리겠습니까. 여기의 '심(心)' 자는 아마도 마땅히 '영각의 마음[靈覺之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書屋新成, 衿佩雲集, 今日何日, 乃得此樂? 于以見足下修己者實, 而及人者廣也.歐巴潮急, 鄒魯風絕, 青年英俊, 皆入于彼, 此之守者, 獨老成幾箇人孑然在耳.老成之逝, 誰復繼之? 故今日之勢, 老成篤實者不足貴, 年少篤實者乃可恃, 環顧富年篤學, 足爲表準乎來日, 惟足下一人.回狂瀾於既倒, 障百川而東之, 豈獨專美於韓文公哉? 願十分愛重, 萬倍勉勵, 使世道有賴也.僕年進而業退, 世亂而德薄, 似說不說, 似做不做, 非公之憂, 正僕之病.公豈求僕? 僕實求公.雖然, 通患之中, 孰能超然? 只說爾病我病, 亦是閒話.公我既已實心相與, 但當彼此若有言乖理行違度時, 隨聞隨見, 既相規戒, 恐爲有益.未知如何?"口頭守善社不足貴, 肚裹守善社乃爲貴", 盛喩正亦吾言.澤述竊以爲守善社有三般, 以丹田爲本所, 五性萬善爲條約, 志帥爲社長, 氣徒爲社員者, 其最妙者也.洙泗門庭爲本所,《小學》四書爲約文, 卷中聖賢爲社長社員, 其次者也.若乃定所發例會衆結社者, 其最下者也.未知高明又以爲如何?盛論近世學者大病一段, 誠劄痛一針, 砭聾洪鐘.世間萬事都是虛僞, 三淵語也, 而今距三淵之世, 又幾何矣? 講理所以資踐履也, 要其歸則口耳而已; 文章所以發揮斯道也, 究其極則飾藻干名而已; 雄辯所以闢邪排異也, 同室戈戟乃其能事爾, 其何能治心修身, 以及天下乎? 宜其自招侮辱, 終底滅亡也.僕質魯才短, 性理文辯, 雖不敢生心, 而平日之行不及言, 則固亦病深于無實者也.今於來喩, 警發多矣, 何幸何幸.來喩: "恥甚而死, 可仰華夷之嚴." 然義理無竆, 恐容更商也.如使魯宋二國, 皆陷夷狄而行髠俗, 孔朱二聖賢生於其後, 幼染其俗, 長覺其非, 無變俗適他之路, 則果必恥甚而自裁矣乎? 我東麗忠烈以後, 至于本朝, 久事胡元, 不變剃俗, 則靜·退·栗以下諸先生, 亦必自裁之無疑乎? 幸細訂回敎.不踰矩不違仁, 然後心得其本然.若於未及不踰矩不違仁之前, 遽謂本然心, 本然心, 是心之合理者也, 何必更待不踰矩不違仁乎? 此心字, 恐當只以靈覺之心看, 未知如何? 이미……하였으니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온갖 냇물을 막아서 동쪽으로 흐르게 하여, 거센 물결을 이미 거꾸로 흐른 데서 만회하였다.〔障百川而東之, 廻狂瀾於旣倒.〕"라고 하였다. 장수인……기(氣)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뜻은 기운의 통수자요, 기운은 몸을 채워 주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우선이요, 기가 그다음이다.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라고 하였다. 세상의……허위 "오늘날 세상사는 위로 조정에서 아래로 사대부, 소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위를 숭상한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처사는모두 허위이고, 오직 봄날 들녘에서 소를 채찍하며 몸소 경작하는 것만이 조금 사람의 의기를 복돋운다.[今世事, 上自朝廷下至士夫小民, 無非皆尙虛僞. 凡人身日用處事, 無非虛僞, 惟春日野田中叱牛躬耕者, 差强人意]." 《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 권31 〈어록(語錄)〉 구이지학(口耳之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법도를 벗어나지 않고 《논어(論語)》 〈위정(爲政)〉의 "내 나이 일흔 살이 되자, 이제는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따라 해도 법도에 넘치는 법이 없게 되었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하였다. 인을 어기지 않는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따름이다.〔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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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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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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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보냄 신유년(1921) 與金聖九 辛酉 지난번 관례(冠禮)의 주인(主人), 관위(冠位) 및 고묘(告廟)의 의절(儀節)에 대해 의론하였는데, 이것에 대해 귀가하여 《가례증해(家禮增解)》와 《예의속집(禮疑續輯)》을 자세히 살펴보니, 옛날에는 관례를 모두 가묘에서 거행하였습니다. 이미 그것을 가묘에서 거행했다면 주인과 관위는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고조묘에서 거행한다면 고조를 이은 종자가 마땅히 주인이 되어야 하니, 주인의 장자 외에는 다시 감히 조계(阼階)에서 관례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증조묘에서 거행한다면 증조를 이은 종자가 마땅히 주인이 되어야 하니, 주인의 장자 외에는 다시 감히 조계에서 관례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조부와 부친의 묘에서 거행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그대가 《가례》의 "주인은 본래 고조를 이은 종자이다."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증조를 이은 종자의 장자 이하는 모두 조계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반드시 고조묘에서 거행한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고, 증조를 이은 종자가 비록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장자의 관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고조를 이은 종자가 와서 주인이 되고 조계의 자리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식견이 부족한 저로서는 의혹스러운 점입니다. 《가례》에서 고조를 이은 종자가 주관한다고 단정한 것은 진실로 선조를 높이고 종가를 중시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가례》에 "종자에게 변고가 있으면 그 다음 종자와 그 아버지에게 명하여 직접 주관하게 한다.'라고 했으니, 이미 변통의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노주(老洲 오희상)는 " 〈사관례〉의 '사당의 문에서 점을 친다.[筮于廟門]'고 구절의 주(註)에 '사당은 부친의 사당[禰廟]이다.'라고 했으며, 〈사혼기(士昏記)〉 에는 '부친의 사당에서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관례와 혼례의 행사는 모두 부친의 사당을 위주로 했습니다. 또 〈사관례(士冠禮)〉의 '주인(主人)'에 대한 주에 '관례를 치르는 자의 부형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당은 이미 부친의 사당이고 주인은 또 부형이니, 부친을 계승한 후계자가 그의 자제들의 관례를 행할 때 스스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라고 하였습니다. 매산(梅山 홍직필)은 "관례를 치를 때 기일에 앞서 사당에 아뢴다는 것은 관례를 치르는 자의 가묘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고조를 이은 종자가 비록 관례를 주관하더라도, 만약 다른 집에 거주하는 경우라면 반드시 미리 고할 필요는 없다."18)라고 하였습니다. 고례에 근거하고 주자의 뜻으로 헤아리며 여러 주장들을 참고해 보면, 반드시 고조를 이은 종자가 주인이 되어서 고조의 묘에서 관례를 거행할 필요는 없고, 증조를 이은 이하의 종자도 모두 주인이 되어서 각각 받들고 있는 사당에서 거행할 수 있으며, 증조를 이은 이하의 종자가 될 수 있는 장자는 모두 조계에서 관례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조를 이은 종자가 주인이 되어 고조묘에서 관례를 거행하면서 증조를 이은 자 이하의 종자의 장자에 대해 장자의 관위를 사용하거나, 증조 이하의 사당에서 관례를 거행하면서 고조를 이은 종자가 와서 주인이 되고 또 증조를 이은 자 이하의 종자의 장자에 대해 장자의 관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 두 경우는 모두 해당하는 바가 없습니다. 현재는 비록 사당에서 거행하지 않고 외청(外廳)이나 중정(中庭)에서 거행하지만, 예의 의미가 이미 이와 같다면 사당에서 거행하지 않는 것으로 이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미 이와 같으니, 사당에 고하는 한 조목은 유추하여 통용할 수 있습니다. 증조를 이은 자 이하의 종자가 이미 고조를 이은 종자가 있다는 이유로 주인이 될 수가 없지 않으니, 어찌 고조묘에 고한다는 이유로 증조 이하의 사당에 고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관례를 치르는 자의 모친은 비록 부위(祔位)에 있더라도 또한 고한다.'고 한 것은 바로 부위에 있기 때문에 소생(所生)에게 고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위(正位)에 있는 소생 조부에게는 고하지 않을 이치가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번에 진술한 바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변설하지 않더라도 명백할 것입니다. 다만 매산이 "비록 고조를 이은 종자가 주인이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고조묘에 고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은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다음 종자나 그 부친이 주인이 되어 고조를 이은 종자가 아닌 자로서 이미 주인이 되었다면 아마도 고조묘에 먼저 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는 아울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육예(六藝)19)가 폐지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후세의 유자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는 것은 다만 이것 때문이고, 오늘날 자제들이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달려가는 것도 진실로 이 까닭 때문입니다. 그대는 규약을 앞장서 세워서 치우친 것을 바로잡아 온전하게 만들려고 생각하니, 생각건대 유교가 장차 흥성하고 세도가 다시 융성하게 됨은 여기에서 비롯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힘쓰고 또 힘쓰십시오.육예 중에서 예와 악이 중요합니다. 〈악기〉에 "예와 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20)라 했고, 또 "예가 지나치면 정이 이반되고, 악이 지나치면 방탕하게 된다."21)고 했습니다. 공자는 "예에서 확립하고 악에서 이루어야 한다."22)라 했고, 또 "사람으로서 인하지 못하면 예와 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23)라고 했습니다. 예와 악이 반드시 병행해야 하고 어느 한쪽을 폐기할 수 없음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의 학자는 예에 대해서는 간혹 잘 말할 수 있지만 악은 전적으로 폐기했습니다. 이것은 새의 날개가 하나이고 수레의 바퀴가 하나인 것과 같으니, 어떻게 날아가고 굴러갈 수 있겠습니까. 악이 폐기된 폐해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데, 근래에 사나운 싸움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세상의 재앙이 도리로 사귄 사람들 사이에서 맺혀진 것은 더욱 심한 경우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만약 악학(樂學)을 정돈하여 거행할 수 있다면 이러한 재앙이 먼저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더욱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어떤 사람이 "악학이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비록 정돈하여 거행하고자 하더라도 어디에서 자세히 상고하겠는가."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맹자는 "지금의 음악이 옛날의 음악과 같다."24)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조화를 위주로 하는 뜻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옛 음악을 상고해서 비록 그 자세한 것은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만약 조화의 뜻만 있다면 절주(節奏)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찌꺼기를 녹여 없애는 데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이것을 통해 궁구해 나간다면, 끝내는 얻지 못할 이치가 없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向論冠禮時主人及冠位及告廟之節, 歸來細考《家禮增解》·《禮疑續輯》, 古者冠禮皆行於家廟矣.既行之于廟, 則主人及冠位不難知也.如行之于高祖廟, 則繼高之宗子當爲主人, 而主人之長子外, 更不敢冠於阼也.行之于曾祖廟, 則繼曾之宗子當爲主人, 而主人之長子外, 更不敢冠於阼也.行之于祖禰廟, 亦當如此也.高明之據《家禮》"主人自爲繼高祖宗子"之文, 自繼曾祖宗子之長子以下, 皆不許阼階位則是矣.然高明不明言必行于高祖廟, 而言繼曾以下之宗, 雖各行長子冠於其家, 必繼高之宗來爲主人, 而不許阼階位, 此淺陋所以聽瑩也.蓋《家禮》之斷以繼高之宗主之者, 誠出於尊祖重宗之義.然其云宗子有故, 命次宗子若其父自主之者, 已是開變通之路矣.老洲則曰: "《士冠禮》筮于廟門註云: '廟, 禰廟也.'《士昏記》云: '受諸禰廟.' 古者冠與昏行事, 俱以禰廟爲主也.且《士冠禮》主人註云: '將冠者之父兄.' 蓋廟既爲禰廟, 主人又是父兄, 則繼禰者冠其子弟自爲主可知也." 梅山則曰: "冠禮前期告廟者, 冠者家廟也.繼高祖之宗子, 雖主冠禮, 若是異宮, 則不必先告也." 據之古禮, 揣之朱子之意, 參之以諸說, 則不必繼高之宗爲主而行之于高祖之廟, 繼曾以下之宗皆可爲主, 各行于所奉之廟, 而其得爲繼曾以下宗子之長子, 皆當冠于阼階也.若繼高之宗爲主, 行于高祖廟, 而用長子位於繼曾以下宗子之長子, 行之于曾祖以下之廟, 而繼高之宗來爲主人, 且不用長子位於繼曾以下宗子之長子, 則二者皆無所當矣.今雖不行于廟, 而行于外廳或中庭, 然禮意既是如此, 則不可以不行於廟有所異同也.此既然矣, 則告廟一欵, 有可以推類而通者.繼曾以下之宗, 既不以有繼高宗子之故而不得爲主人, 則豈有以告高祖廟之故而不得告於曾祖以下之廟者乎? 且"冠者之母, 雖在祔位, 亦告"云者, 正慮其祔位之故不告所生也.且所生祖之在正位者, 必無不告之理, 有如區區曩日之所陳者, 此恐不待辨說而明矣.但梅山所謂雖繼高之宗爲主而不必先告高祖廟者, 未能無疑.若次宗或其父爲主, 而不以繼高之宗, 則已既爲主人, 則恐不得不先告高祖廟矣.未知高明並以爲如何?六藝之廢久矣.後世儒者之有體無用, 職此之由, 今日子弟之棄此趍彼, 實爲其故.高明倡立規約, 思欲矯偏而歸全.意者儒敎之將興, 世道之復隆, 其權輿於此乎? 何幸何幸, 勉旃勉旃.六藝之中禮樂爲重.《樂記》曰: "禮樂, 不可斯須去身." 又曰: "禮勝則離, 樂勝則流." 孔子曰: "立於禮, 成於樂." 又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其必幷行而不容偏廢也, 蓋如此矣.今之學者, 禮則或能言之, 而樂則全廢, 是鳥而一翼, 車而隻輪, 其何以飛行哉? 樂廢之害, 蓋不可勝言, 而至於近日猛戰起於講壇, 世禍結於道交者, 其尢者也.妄意以爲若能修舉樂學, 則此禍可先除也.幸於此加意焉.或曰: "樂學之壞久矣.雖欲修舉, 何所考詳乎?" 此不然也.孟子曰: "今之樂, 猶古之樂." 此言以和爲主之意, 無古今之異也.考之古樂而雖不得其詳, 茍有和意, 節奏之未盡, 何妨於蕩滌邪穢消融查滓乎? 况由此而究之, 終無不可得之理乎. 사관례(士冠禮)의……있다 《노주집(老洲集)》 권5 〈답권경지(答權敬之)〉에 보인다. 관례를……없다 《매산집(梅山集)》 권24 〈답임원회(答任憲晦)〉에 보인다. 육예(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한다. 예악은……없다 《예기》 〈악기〉에 "군자가 이르기를 '예와 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되나니, 음악을 사용하여 마음을 다스리면 평이하고 정직하고 자애롭고 선량한 마음이 뭉클뭉클 생겨난다.'라고 했다.〔君子曰: 禮樂不可斯須去身, 致樂以治心, 則易直子諒之心, 油然生矣〕"고 하였다. 예가……된다 《예기》 〈악기〉에 "악은 똑같게 하는 것이고 예는 다르게 하는 것이다. 똑같으면 서로 친하고 달리하면 서로 공경하니, 악이 지나치면 방탕한 데로 흐르고 예가 지나치면 정이 이반된다. 정을 합하게 하고 모양을 꾸미는 것은 예악의 일이다. [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 樂勝則流, 禮勝則離. 合情飾貌者, 禮樂之事也.]"고 하였다. 예에서 서고 악에서 이룬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보인다. 사람으로서……있겠는가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보인다. 지금의 음악이 옛날의 음악과 같다 맹자가 제 선왕(齊宣王)에게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얼굴을 붉히며 그저 세속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맹자가 "지금의 음악이 옛날 음악과 같습니다.〔今之樂由古之樂也〕"라고 하였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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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金聖九 乙丑 누누이 가르쳐주신 말씀은 갈수록 더욱 정성스럽습니다. 제가 치우친 데에 나아가 온전함을 버리고 작은 것에 안주하여 원대한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을 몹시 걱정하여 격려와 인도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친애함이 깊기 때문에 말이 간절하고, 헤아림이 원대하기 때문에 말이 자상합니다. 참으로 덕으로써 하고 고식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친애함이고, 자기가 서고자 함에 다른 사람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함에 다른 사람도 통달하게 하는 것26)은 인자의 마음입니다. 은혜가 더욱 두터우니, 저의 비루함을 생각하면 어떻게 고명에게 이런 은혜를 입는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권면과 경계하는 일에 속하니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다. 가상하다는 뜻을 많이 보내고 함께 거처하고 싶다는 소원을 보여주시며, 또 더 나아가 도가 호남에 있다는 칭찬을 하기까지 한 것에 대해서는 또한 적이 군자를 위해 천 번의 고려에 한 번의 실수가 있고 한 마디 말에 지혜롭지 못하게 됨을 애석히 여기면서, 부끄러워 땀이 나고 두려워 위축됨이 더욱 심해집니다. 비록 그렇지만 상중(喪中)인 그대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치우치고 막혀있는 것을 걱정하여 바로잡아 구할 때에는 휴암(休庵 백인걸)과 지촌(芝村 이희조)을 인용하여 덕이 구비되지 않음을 병통으로 여기었고, 분발에 감개하여 장려하고 칭찬할 때에는 노성한 사람이 사라짐을 개탄하고 장구한 훗날을 부탁하셨으니, 누르고 높이거나 열고 닫음이 가르침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비록 노둔하지만 감히 마음을 경건히 하여 덕에 복종하고 정을 다하여 서로 권면하여 몸을 마치지 않겠습니까. 다만 40세가 되었는데도 이름이 나지 않는 자는 이미 전진할 희망이 없고27), 또한 이택(麗澤)28)의 자질도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이 또 생각건대, 우리 대한(大韓)의 말기에 온 나라가 공공연히 칭송하며 흠잡는 말이 없으면서 우뚝하게 영광(靈光)29)으로 여긴 것은 선영감(先令監)의 절의와 간재 선생의 도학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두 어른이 서로 이어 돌아가시니 삼천대천세계가 텅 빈 것 같습니다. 서구와 아세아의 풍조가 소리치며 흔들어대지만, 이는 오히려 외환에 속합니다. 한 무리의 괴귀(怪鬼)한 무리가 선비들 사이에서 일어나 야유하거 떠들면서 존엄을 더럽히고 백성을 미혹시켜 기상이 처참하여 한심스럽게 짝이 없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그대는 가정의 의리에 푹 젖고 간옹의 덕을 보고 느꼈습니다. 바른 의론을 세우고 큰 붓을 잡아서, 중천에 떠있는 태양과 산을 부수는 벼락처럼 사설(邪說)을 확 쓸어버려 온갖 괴이한 것들이 속히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대뿐입니다. 대개 하늘은 한 세상의 빼어난 사람을 내어서 한 세상의 일을 감당하게 함에 다른 시대에서 빌려오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훌륭한 덕을 지닌 분들이 다 세상을 떠나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대의 문벌과 식견과 의리로 사도의 책임을 맡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스스로 작다 하지 말고 크고 씩씩한 힘과 정밀하고 심도 있는 공부를 더욱 힘쓰기 바랍니다. 작은 것을 축적하여 봉황의 울음과 범의 포효로 드러낸다면 온갖 사악한 것이 숨을 죽이고 모든 사람들의 눈이 시원하게 바라볼 것이니, 안으로는 선대의 뜻을 잇고 밖으로는 선현의 자취를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선영감이 살아계실 때 항상 저를 깊이 아끼셨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당일에 어떻게 밝은 견식을 크게 속였는지 모르겠지만, 추념해보면 송구스러워 땀이 줄줄 흐릅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이라도 힘써 수행한다면 혹 선영감의 안목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본령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는데 육체가 먼저 망가졌으니 스스로 송구스럽고 민망할 뿐입니다."유자의 의론은 차라리 고상하고 준엄하게 하다가 잘못이 있을지언정 한결같이 평범함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하였는데, 또한 요긴한 말씀입니다. 단지 폐단을 구하는데 이렇게 해야 할 뿐만은 아닙니다. 무릇 중등 수준 이하의 자질을 지닌 사람은 으레 중도(中道)에 미치지 못하는 우려가 많습니다. 때문에 선사(先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와 정명도(鄭明道)는 배우기 쉽지 않으니, 우선 맹자와 정이천(程伊川)을 배우는 것이 더 낫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입론을 고상하고 준엄하게 하는 것은 차라리 잘못하는 것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때에 따라 중도에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어떻습니까?"기절(氣節)은 있지만 학문이 없는 자는 오히려 하나의 절개를 지키는 선비가 될 수 있으나, 기절은 없고 학문만 있는 경우는 위학(僞學)이다.' 남당(南塘 한원진)의 이 말은 천지와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는 것으로서 이 통문(通文)에 인용한 "절의는 있고 도학이 없는 자는 있지만 도학이 있고 절의가 없는 자는 없다'는 말과 서로 표리가 됩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마땅히 가슴에 잘 새겨 종신토록 경서의 가르침과 똑같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심이 성을 근본으로 삼는다.[心本性]"는 것은 심은 마땅히 성에 근본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심(心) 자 뒤에 요(要) 자가 빠졌다고 말한 것은 또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빠졌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성사(性師)'는 《맹자집주》에서 나왔으니 처음부터 의심할 것이 없지만, 다만 '심제(心弟)' 두 글자는 새로 만든 말이기 때문에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이 이미 스승이 될 수 있다면 스승으로 삼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심이 아니겠습니까? 심이 이미 성을 스승으로 삼았다면 제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심통성정(心統性情)'에서 '통(統)' 자를 단지 겸통(兼統)의 뜻으로만 이해하고 '통솔[統帥]'의 뜻으로 보지 않으면 '성사심제(性師心弟)'라는 말과는 아마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주재하겠습니까? 일신(一身)을 가지고 말씀해보겠습니다. 천군(天君 심)은 백체(百體)에 상대해서 말한 것이지만, 궁극적 근원으로서 지극히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성은 군주 휘하의 물건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병암(炳庵 김준영)에 대해 "덕이 후중하고 지조가 견고하며, 학문이 깊고 식견이 바르다."30)라고 선사께서 평한 것은 갖추 다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의리(義利)와 사정(邪正)의 구분에 준엄하였습니다. 봄바람 같은 온화한 기운 속의 늠연한 가을 서리 같은 의리는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이것은 제가 심복한 바입니다. 만약 이 어른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우리 문하에 오늘과 같은 재앙이 있겠습니까. 다만 원고 전체가 아직 발간되지 않아 도를 논한 문장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와 주고받은 몇 차례의 편지를 기록하여 조만감 틈나는 대로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縷縷敎辭, 愈往而愈摯, 惻惻然憫其就偏而遺全, 安小而忽遠, 激厲誘掖, 靡極不至.蓋其愛之也深, 故言之也切; 慮之也遠, 故說之也詳.信乎其以德而不姑息, 君子之愛也; 己立而立人, 己逹而逹人, 仁者之心也.惠斯厚矣, 自惟卑陋, 何以得於高明? 然此屬勸勉戒勵之事, 猶不異也.至於致多少嘉尚, 而示同處之願, 又進而加道南之賛, 則又竊爲君子惜千慮之失、一言之不知, 而赧汗瑟縮之滋甚矣.雖然, 哀執之心, 吾其不知? 憂其倚滞而匡救之也, 則引休庵、芝村而病其德之不備; 欲其感奮而獎詡之也, 則慨老成之淪亡而託千載之約, 抑揚開翕無非敎也.賤子雖駑, 敢不虔心服德, 盡情交勗而終身也? 但四十無聞者, 既無前進之望, 又不足備麗澤之資, 是可恨也.因竊又念我韓之末, 舉國之所公誦而無間巋然視爲靈光者, 非先令監之節義、艮齋先生之道學乎? 天不吊世, 二翁相繼云亡, 三千大界, 虛空如也.歐風亞潮, 驅號震蕩, 猶屬外憂, 乃有何許一隊鬼恠, 起自章縫之內, 捓揄啾喧, 褻瀆尊嚴, 迷惑羣生, 氣象愁慘, 凛然寒心? 哀執淪浹家庭之義, 觀感艮翁之德, 立正論秉大筆, 廓掃邪說, 若太陽中天, 雷霆破山, 百恠千妖奔走閃遁者, 即其人焉.蓋天生一世人, 了當一世事, 不借於異代.顧今長德之盡逝, 無如之何矣, 則以哀執之人地、文識、行義, 不任斯道之責, 而誰恃哉? 願勿以年少而自小, 益加大壯之力、精深之功, 積之於蠶牛之餘, 而發之爲鳳鳴虎嘯, 羣邪屏息, 萬目快觀, 內有以繼述先志, 外有以追韻前修, 如何? 喩及先令監在世, 常惓惓於澤述, 未知此漢當日何以厚誣明鑑, 追切悚汗.然若及今勉修, 則或可以不傷先見, 而本領未立, 鼎器先敗, 竊自悚憫."儒者議論, 寧失高峻, 不可一依平溫"之喩, 亦要言也.非惟捄獘之爲然, 凡中人以下之質, 例多不及之慮, 故先師嘗謂"孔子、明道不可易學, 不如且學孟子、伊川", 亦此意也.然則立論高峻, 非可以寧失論, 乃所以因時而就中也, 如何?"有氣節而無學問者, 猶可爲一節之士; 無氣節而有學問者, 是僞學." 南塘此言, 建質無疑, 而與此中通文所引"有節義而無道學者有矣, 未有有道學而無節義者", 相爲表裹.此等言皆當佩服, 終身視同經訓也."心本性", 謂心當本乎性, 來喩"心"字下闕"要"字者, 亦是.然闕亦何傷? "性師"出《孟子集註》, 初無可疑, 但"心弟"二字, 語創故疑之.然性既得爲師, 則其師之者誰也? 其非心乎? 心既師性, 則非弟而何? "心統性情", "統"字只作兼統之意, 不以統帥看, 則與"性帥心弟"之言, 恐無逕庭, 如何主宰? 就一身而言, 天君對百體而言, 至於極本竆源至尊無對之性, 不宜作君主麾下物也.炳庵之"厚德堅操, 邃學正識", 先師之評盡之, 而最是嚴於義利邪正之分.春風和氣之中, 凛然秋霜之義, 有不可犯者, 此賤子之所心服.使此丈而在者, 豈有吾門今日之禍乎? 顧其全稿未刊, 論道文字, 不可得以詳, 只將與賤子往復幾度錄上, 續當有得隨呈耳. 자기가……것 공자가 "인자는 자신이 서고자 함에 타인도 서게 하며 자신이 통달하고자 함에 타인도 통달하게 한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40세가……없고 공자가 "후생이 두려울 만하니, 앞으로 오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못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마흔 살이나 쉰 살이 되어도 이름이 알려짐이 없으면 이는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하였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이택(麗澤)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전(象傳)에 "두 개의 택(澤)이 나란히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 하였다. 영광(靈光) 세상에 얻기 어려운 훌륭한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한다. 덕이……바르다 《간재집 후편(艮齋集後編)》 권1 〈답노인오(答盧仁吾) 계축(癸丑)〉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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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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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金聖九 乙丑 때때로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니, 회옹(주희)이 노승을 벤다는 가르침에 눈물을 흘리고, 무후가 초라한 집에서 고목처럼 쓰러진다는 탄식을 경계하며, 항우 장군이 삼일의 식량을 가지고 병졸들에게 보여주며 반드시 죽겠다고 한 등등의 용감하고 과감한 구절들에 대해, 나도 모르게 우뚝 일어나 "이런 일이 있었는가. 사람 중에서도 장사로다."라고 했습니다. 학자가 경계를 할 때 오히려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또한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마음을 먹지만 구습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잡고 세 번 한탄하니 척연하게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비록 당장 떨치고 일어나지는 못할지라도 가슴속엔 이미 삼분의 싹이 자랐으니, 이것은 그대가 만물에 미친 인이 이미 많아서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제 풍조가 뒤바뀌고 천지가 변환되어 독서하는 자들이 거의 끊어졌습니다. 생각건대, 옛날에 계화도 문하에 출입한 자가 1500명 정도 되었는데 3년간에 별과 낙엽처럼 흩어져서 유자의 옷을 입고 경서를 읽고 있는 자가 10분의 1도 되지 않으니, 이 문하가 이와 같다면 온 나라의 사정을 추리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대의 학문은 이미 고명하여 우뚝하게 나라의 선비가 되었는데, 저는 또한 귀밑머리가 서릿발처럼 세어 이렇게 몸을 마칠 것 같습니다. 피차간의 재주와 뜻은 여론으로 말해진 곳에서 서로 다 알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기린과 수사슴처럼 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날을 당하여 호서와 호남에서 멀리 상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는 그대에게 맹세하노니, 칭찬하고 겸손하며 겉을 꾸미는 말 같은 것은 일체 버리고, 다만 덕이 있으면 서로 권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서로 보충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서로 질문하고 얻은 것이 있어 서로 고한다면, 거의 실질적인 공을 거두고 경박한 풍조 속에서 순박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모와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고, 천지가 낳아 기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농암(김창협)의 사단칠정설은 이미 전편을 다 봤는데 그가 율옹(이이)과 같지 않았기 때문31)에 선사에게 질문을 드린 것이 있습니다. 선사의 원고 중에 또한 〈농암사칠설기의(農巌四七說記疑)〉가 있으니, 선사는 사칠지변에 대하여 한결같이 율옹을 따라서 빈틈이 없었습니다.32) 도암(이재)은 퇴계(이황)를 주장했으니, 비록 전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몇 년 전에 도암(이재)의 고제(高弟)인 백수 양응수의 문집을 교정할 때 그가 사칠론을 변론한 것을 보았는데, 퇴계를 주장하고 율곡을 의심했으니33), 아마도 그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심(心)이 성(性)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그 체가 선한 측면을 말하고, 심이 성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그 용이 선한 측면을 말합니다. 심의 선함은 체와 용을 막론하고 '성'자를 버리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자(소옹)는 "심이 태극이다."34)라 했고, 주자(주희)는〈관서유감(觀書有感)〉시를 지어 "묻노니 어찌하여 그처럼 맑은가? 근원이 있어서 살아 있는 물이 오기 때문이네."라고 했으니, 아마도 모두 이런 의미일 것인데, 잘 모르겠으나, 어떻습니까?어떤 사람이 '남당은 학문만 있고 기절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의심하며, "어떻게 학문이 있는데 기절이 없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것은 매우 견식이 없는 자입니다. 옛날부터 학문은 있는데 기절이 없었던 자를 어떻게 한정하겠습니까. 예를 들면 원나라의 허노재(허형)와 우리나라의 권양촌(권근)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만약 "어찌 도학은 있는데 기절이 없는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괜찮습니다. 時讀來書, 泣晦翁老僧斫去之誨, 警武侯竆廬枯落之歎, 項將軍持三日糧, 示士卒必死, 何等勇果等句, 不覺蹶然起立曰: "有是哉? 人之壯也." 學者懲發, 顧不當若是耶? 我亦以若人爲心者, 舊習不足革矣.執紙三嘆, 慼慼然有動.雖不能目下興振, 胸中已立三分根苗, 是則座下及物之仁, 不既多乎? 第今風潮翻復, 天地變幻, 讀書種子, 幾乎絕矣.念昔出入華門者, 蓋千五百之多人, 而三年之間, 星散葉落, 儒服對經者, 殆不滿十一, 此門如此, 則全邦可三隅也.座下之學已就高明, 蔚爲邦彥, 此漢亦已鬢霜星星, 抱此終身矣.彼此才志, 風論之所存所發, 非不相悉, 雖麟䴥之莫敵, 當此之日, 亦可謂兩湖西南, 遙遙相對.從茲以往, 欲與座下立誓, 凡係奨詡撝謙修邊飾幅之辭, 一切刪去, 但得有德相勸, 有闕相補, 有疑相質, 有得相告, 庶幾收功於實際, 反樸於澆風也.是爲副父師期待之望, 報天地生成之恩, 未知雅意以爲如何.農巌四七說, 曾已見得全篇, 而以其不同於栗翁, 故有所稟質於先師者.先師文稿中, 亦有《農巌四七說記疑》, 蓋先師則於四七之辨, 一從栗翁而無間然矣.陶庵主退, 雖不可知, 年前校得陶庵高弟白水楊公應秀集, 見其辨四七, 主退而疑栗, 豈有所受於其師者歟?心具性, 則其體之善也, 心師性則其用之善也.心之善, 不問體與用, 舍性字不得, 故邵子曰: "心爲太極." 朱子有詩曰: "問渠那得清如許, 爲有源頭活水來." 恐皆此意也, 未知如何?有人疑南塘有學問而無氣節之說曰: "焉有有學問而無氣節者乎?" 是無見識之甚者.從古來有學問而無氣節, 何限? 如元之許魯齋․我朝之權陽村, 是也.若曰: "焉有有道學而無氣節者乎?" 則可矣. 농암……때문 김창협은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서 "율곡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선은 맑은 기가 발한 것이고 악은 흐린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조성경(趙成卿)이 이 말을 의심하는 것을 보았으나 그때는 잠깐 듣고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깊이 논하지 않았다. 뒤에 생각해 보니 율곡의 설은 너무 단순하였다. 맑은 기가 발로되면 실로 선하지 않은 정이 되는 경우가 없다. 그렇다고 선한 정이 모두 맑은 기에서 발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악한 정은 실로 흐린 기에서 발한 것이다. 그렇다고 흐린 기가 발로되면 모두 악한 정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栗谷人心道心說.善者淸氣之發.惡者濁氣之發.曾見趙成卿疑之.而彼時乍聞未契.不復深論矣.後來思之.栗谷說.誠少曲折.蓋氣之淸者.其發固無不善.而謂善情皆發於淸氣則不可.情之惡者.固發於濁氣.而謂濁氣之發.其情皆惡則不可.深體認之可見〕"라고 하였다. 선사의……없었습니다 김창협이 "사단은 오로지 리만을 말하고,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는 율곡의 설이 명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 논쟁하는 것은 '기를 겸하 말한다'는 한 구절에 있을 뿐이다. 대개 칠정이 비록 실로 리와 기를 겸하나, 요컨대 기가 주가 되어서, 그 선은 기가 리를 따르는 것이고, 그 불선은 기가 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 선과 악을 겸한다는 것이 이와 같을 따름이므로, 애당초 그 기를 위주로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四端專言理, 七情兼言氣, 栗谷說, 非不明白. 愚見不無小異者, 所爭只在兼言氣一句耳. 蓋七情雖實兼理氣, 要以氣爲主, 其善者, 氣之能循理者也. 其不善者, 氣之不循理者也. 其爲兼善惡如此而已, 初不害其爲主氣也〕"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에 대해 전우는 "이이가 칠정은 모두 선할 수 없다는 것을 보고 전언리(專言理)를 말하지 않고 겸언기(兼言氣)를 말하였으며, 또 모두 선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보고 주기(主氣)라고 말하지 않고 포리기(包理氣)라고 말하였으니 그 리를 관찰한 것이 또한 매우 정밀할 것이다. 만일 바로 성인의 칠정이라면 기로 주인을 삼을 없다. 만일 기가 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주기라고 한다면 사단도 절도에 맞지 않음이 있는 것은 이미 주희와 이이의 설이 있다. 이제 사실로 논하면, 성현으로부터 중인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구걸하는 어린이와 병자를 보는 자는 그 측은의 발현이 아마도 책판에 글자를 박은 듯 하지만 약간의 경중과 심천의 등급이 결코 없지 않을 것이다. 도적을 보고 증오하고, 존귀한 사람을 만나 공경하고, 일의 변화에 임하여 시비의 발현도 또한 그러하다.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다. 다시 살펴보건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단몽의 기록에 '사람이 태어나 고요함은 하늘의 성품이다'는 것은 일찍이 선하지 않은 적이 없고, '사물에 느껴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구이다'는 것 이것도 선하지 않음이 아니다. '몸을 반성하지 못해 천리가 사라진다'에 이르는 것은 바야흐로 악이다"라고 하였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물에 느껴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구이다'는 한 구절은 모두 사단과 칠정을 포함하여 또한 '선하지 않음이 아니다'고 하였다면 어느 곳에서 주리와 주기의 구분을 볼 수 있겠는가? 이 곳에서 가장 마땅히 세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栗翁見七情不能皆善, 故不曰專言理, 而曰兼言氣; 又未嘗皆不善, 故不曰主氣, 而曰包理氣. 其察理亦甚精且密矣. 若乃聖人七情, 則不可以氣爲主也. 如以氣之不循理者, 謂之主氣, 則四端亦有不中節者, 已有朱子栗翁之說矣. 今以實事論之. 自聖賢以至衆人, 一時見乞兒與病者, 其惻隱之發, 恐決無如印一板而無少輕重深淺之等矣. 見盜賊而憎惡, 遇尊貴而恭敬, 臨事變而是非之發亦然, 未知如何. ○更按: 語類端蒙錄曰: "人生而靜, 天之性, 未嘗不善; 感於物而動, 性之欲, 此亦未是不善. 至不能反躳而天理滅, 方是惡." 竊謂: 感於物而動性之欲一句, 總包四端七情言, 而亦謂之未是不善, 則何處見得主理主氣之分乎? 此處最宜細覈. 如何如何?〕"라고 말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12 〈농암사칠설의의(農巖四七說疑義)〉. 백수……의심했으니 《백수집(白水集)》 권11 〈讀退溪先生論四七書問答(독퇴계선생논사칠서문답)〉. 심이 태극이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외편 하(觀物外篇下)〉에 "도가 태극이 되고, 심이 태극이 된다.〔道爲太極, 心爲太極〕"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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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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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金聖九 乙丑 제가 아룁니다. 세월이 멈추지 않아 그대 선친 영감의 상사(常事, 小祥)가 이미 지났는데도 보잘 것 없는 제가 예절을 무시하여 아직까지 문상하지 못하여 상중인 그대가 상제(喪制)를 완화하여 슬픔을 완화하기 전에 만나 뵙고 위로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배척받고 절교를 당해야 마땅하다고 스스로 여겼는데, 특별한 편지를 멀리까지 보내셔서 사문(斯文)의 변란을 절절히 근심하시고 간절히 의리에 처하는 방법을 깨우쳐 주니, 넓은 도량으로 나와 남을 공평하게 생각하는 훌륭함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하겠습니까. 우러러 감사하고 굽어 송구스러워 무슨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비록 못났지만 또한 현인을 좋아하고 벗을 친애하는, 타고난 성품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한번 달려가 찾아뵙는 것이 마땅히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마는 몽매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선사께서 끝도 없이 무함을 당한 이후로는 진실로 통한이 마음속에 사무쳤으니, 명백하게 분별하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하게 성토함에 이르렀을 때는 저들 또한 같은 동문이니, 어찌 안으로 마음이 상하고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겠습니까. 저들이 도리어 적반하장의 짓을 하여 우리를 멸시함에 이른 경우에는 길거리의 아이가 저지르는 패악질과 같았으니, 보는 자는 저절로 응당 시비를 판단하겠지만 당한 자는 어찌 이렇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만 이로 인하여 우리 일문(一門)이 외부사람들의 모욕하는 매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 지극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와서는 전혀 즐거움이 없고 문을 나서면 위축되어 달려갈 곳이 없어서 발걸음은 백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이 많은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지도 몇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상중에 있는 그대를 이처럼 저버린 이유입니다.오호라, 음성(陰城, 오진영)의 패륜과 무함은 신과 사람이 모두 분노할 일이니, 그의 바르지 못한 모든 말은 굳이 다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책을 발간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던 당초에 또 진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우쳐서 스승을 무함한 뒤에라도 뜻을 꺾어 복종시킬 수 없었던 것은 또한 저의 허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이켜 성찰하고 안으로 부끄러워하여 한 번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고, 매번 그 실상을 자세히 말하여 한 번 들음에 명쾌하게 판결되기를 원했으나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긴 편지와 짧은 쪽지를 보내오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용을 통해서 파악한 것은 명쾌하고 지킨 것은 바르며 기른 것은 두터우며, 음성의 죄를 살펴 단정한 것은 그 실정을 얻었고 천박하고 졸렬한 저에게 지시한 것은 타당성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듣기 원하고 따르기 바란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다만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물리친 것을 인용하여 오늘날의 음성을 배척하는 것을 증명하고, '어찌 일찍이 저처럼 불필요한 일을 많이 했겠는가'라고 하니, 조금 타당함이 결여된 듯합니다. 공자가 옹저와 척환을 주인 삼았다35)고 한 것은 당시의 호사가들의 말인데도 맹자는 오히려 힘을 다해 변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만약 그 말이 3천 명의 문도들이나 사숙한 항렬에서 만들어져 나왔다면, 맹자는 반드시 스승을 무함한 죄로 성토했을 것입니다. 양주와 묵적이 도를 해친 것은 진실로 크기 때문에 맹자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만약 양주와 묵적이 모두 공자를 무함했다면 맹자는 또 반드시 하나씩 변론하여 재빨리 성토하고 성인을 무함한 죄로 단정하되 학술의 폐단만을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음성 사람이 선사의 대절(大節)을 무함하여 파괴시킨 것은 이미 옹저를 주인삼은 종류와 같은 작은 일이 아닌데도 여러 학자들이 일월처럼 추대하였으니, 당지(當地)의 해로움이 되게 한 것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묵적과 양주36)에 대해 추론하여 설파할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음성의 재앙은 양주와 묵적보다 다급하고 양주와 묵적이 하지 않은, 현인을 무함하는 것까지 더했으니, 그가 무함한 것은 또한 친히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고 저 사람은 또한 훌륭한 제자였으니, 양주와 묵적의 죄에 비할 때 몇 배나 큽니다. 만약 음성 사람이 좀 더 일찍이 맹자의 세상에 출현했다면 맹자가 다만 양주와 묵적과 안건을 나란히 하여 함께 감처(勘處)할 뿐만이 아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불필요한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본디 군자가 일을 처리하는 방도가 아니고, 억지로 하는 바 없이 순리에 따라 하는 것이 바로 일처리의 도리인데, 본래 밝은 지혜가 아니면 여기에 이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바 없이 순리에 따라 하는 것은 우임금의 치수(治水)만한 사례가 없으니, 산을 따라서 나무를 베어내고 하천을 깊이 파고 땅을 배치한 것처럼 순리대로 한다면 무슨 일이 많겠습니까. 이런 측면을 통해 일이 순리에 따르면 일이 많아도 없는 것과 같고, 만약 이치를 따르지 않는다면 일이 없는 것도 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난번에 의리로 성토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니, 불필요한 일이 많다는 것으로 지목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냄새를 좇는 무리들이 하나하나 보잘 것 없는 재주를 지니고서 음성 사람의 문하에 개미처럼 모이고 이처럼 붙어서, 흑과 백을 제멋대로 주물러 이상하게 바꾸고 희한하게 꾸미고는 부처님에 보답하고 도를 전한다고 자처하고는 현인을 죽이고 바른 사람을 독살하는 데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원고를 가졌다는 것에 의지하여 일문을 옥죄고 시세에 의지하여 온 세상을 통제합니다. 앞으로 있을, 예측할 수 없는 괴이한 행동과 추잡한 말에 대해서는 주고받은 기록을 아울러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론하고 꾸짖기를 아마도 역시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오로지 이것에 연연하여 공평한 대본을 잊고 절실한 공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진실로 때에 맞는 절실하고 마땅한 가르침입니다. 주자가 경계한 '오랑캐는 쉽게 쫓아낼 수 있으나 사심은 제거하기 어렵다'37)는 것이 어찌 이런 까닭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감히 이런 병폐가 없다고 보증하겠습니까마는 역시 반성을 완전히 잊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공평한 대본을 잃고, 또 절실한 공부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천지 끝까지 가는 듯 대의를 말하고 뱀과 새를 몰아내듯 사설을 배척했으니, 우리 도를 위해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 것은 뛰어났다 하더라도, 자신의 심신을 잘 다스려서 수많은 성인이 전수한 법을 계승하고 상제가 떳떳한 마음을 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결국 하나도 보충한 것이 없으니, 선사가 후학들에게 바란 것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평생토록 힘써야 할 것인데, 이제 먼저 내려주신 정문일침을 받았으니, 마치 차가운 물을 등에 뿌린 것처럼 갑절의 경계가 됩니다. 이는 백연(百淵)의 편지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그렇습니다.선사는 그대의 선친 영감과 사귐의 도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편지에서 이른바 '스스로 간옹(전우)의 수필(手筆)을 가지고 있으니 변론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분명하다'는 것은 본래 이 세상의 공론인데 저들이 그 사이에 어떤 의도를 지녀 사실로 말하지 않고, 심지어 그대의 선친 영감을 배알한 자가 전문(全門)의 정윤영(鄭胤永)이라고 지목했으니, 진실로 어떤 마음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똑같이 배알했는데, 흠재(欽齋, 崔秉心)가 음성인을 배척할 때는 정윤영이라고 하고, 서송성(徐宋成)이 음성인을 비호할 때는 정윤영이 아니라고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공리가 있겠습니까. 더욱 어떤 마음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상중에 있는 그대가 때에 맞게 잘 버티며 경전을 연구하여 의미를 밝히며 선친의 뜻을 계승하고 정론을 주장하여 세도를 바로잡기를 바랍니다.저 사람들은 말을 할 때면 반드시 오씨(오진영)는 선사가 도를 전한 고제이니 어찌 감히 성토하고 비난하여 선사의 밝음을 손상시키느냐고 합니다. 나는 만약 선사가 오씨에게 도를 정말 전했다면 더욱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스승을 속인 죄는 어떤 것입니까. 만약 말학으로 이름 없는 자가 간혹 스승을 속이는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무지하여 함부로 말했다는 것을 알아서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다면 스승은 손상이 없고 속인 자는 죄가 있으며, 그 죄를 벌주어 복종시키는데도 그 사람이 복종하지 않아서 절교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니, 온 나라에 성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도를 전수한 것이 거짓으로 대의와 관계된 것이면 사람들은 반드시 "아무개는 그 스승이 심법을 전수한 사람이니 그의 말은 사실을 속인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속인 자의 죄는 무거워서 진실로 말할 것도 없이 스승의 도가 남김없이 깨어지고 상실될 것이니, 눈을 크게 뜨고 담력을 크게 하여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이 없다면, 어찌 지금과 훗날의 의심을 깨뜨리겠습니까. 옛날에 우암(송시열)이 군주에게 고하길, "설사 이 아무개가 진실로 이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김 아무개의 처지에서(김장생이 율곡의 제자이면서) 이를 증명한다면 이것은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38)38) 김 아무개……있겠습니까 : 송시열은 "설령 이이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김장생은 입증하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섭공(葉公)이, '우리 고장에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증인을 섰습니다.'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우리 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달라서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이 그 속에 있다.'고 했는데, 가령 김장생이 과연 그런 말을 했다면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한 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設使珥眞有此事.亦不當自長生證之.況萬萬無此乎.昔.葉公曰.吾黨有直躬者.其父攘羊.其子證之.孔子曰.吾黨之直.異於是.父爲子隱.子爲父隱.直在其中.使長生果爲此.則與證父攘羊者何異〕"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 〈진문원공유고.잉변사우지무.우걸허손주석귀전독서소.(進文元公遺稿.仍辨師友之誣.又乞許孫疇錫歸田讀書疏.)〉라고 했고, 또 "고명한 제자로서 이를 증명한다면, 아무개의 삭발은 끝내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39) 조씨【조위한이다.】와 장씨【장유이다.】가 잘못 듣고 잘못 말하고 잘못 기록한 사계(김장생)의 말에 대하여 우암은 오히려 두려워하였고, 율곡(이이)이 삭발한 것에 대해 변론하지 못한 것과 사계가 스승을 속였다고 잘못 뒤집어쓴 것을 절절히 애통하게 생각하고 증거를 끌어다가 훤히 밝혔습니다. 현재 오씨는 간옹(전우)의 고제라고 자처하면서 감히 함부로 일찍이 문집 출판을 인가받으라는 뜻이 있다고 하고, 스승의 뜻을 헤아려 구속받을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후인들에게 길이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우암이 염려했던 바로 끝내 밝힐 수 없는 것이니 그 속임수가 더욱더 깊어졌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버지가 양을 훔치지 않았는데 그 자식이 거짓으로 증명한 것이니, 그 죄가 더욱 중한데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당나라 요임금과 주공 같은 성인이 어찌 사흉·관숙·채숙을 임명하고, 남명(조식)과 율곡처럼 현명한 사람이 어찌 정인홍과 정여립을 격려했겠습니까? 만약 선사가 정말로 오씨에게 도를 전했다면 어떻게 그 밝음을 손상시키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것은 모두 저 무리의 말을 따라서 가설적으로 말했을 따름입니다. 만약 선사가 절에서 자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도한 것은 병암 김공(김준영)이 죽은 뒤로부터 말과 문장에 여러 번 나타나 있습니다. 오씨에 이르면 비록 문사로 실력을 발휘함으로써 때때로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 공리가 중할지라도 도의를 권했다고 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다시 전철(문장)을 밟아 뒤집어지니 꾸짖음이 엄하고 간절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 여러 제자는 스승에게 의망을 받지 못했고 제군은 편벽되었다는 반박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깊이 걱정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오씨가 만약 전할 만한 실상이 있었다면 어찌 근심하고 한탄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그렇다면 선사가 처음부터 오씨의 현명함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사람을 알아보았다는 현철함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 오늘날 현명함을 손상한 여부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보내신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회옹(주희)이 순씨(荀氏)를 논한 일을 거론하여 말한 한 조목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게 되었습니다. 회옹이 순씨를 논한 것은 어떠하였습니까? 처음에는 자신만을 온전히 하고 사무만 보았다고 그를 비난했고, 다시 부형과 사우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의론에 대해 그 본질을 문식하여 덮어 가렸다고 그를 꾸짖었으며, 끝내는 사설(邪說)이 멋대로 흐르는 것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보다 심하다고 그를 성토했습니다. 우리 선사의 학문에 만약 이와 같은 일로 추론하여 논할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심을 따라 의리를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친 것이 큰 경우로 그것은 기개와 절개가 없고 의리를 엄하게 따지지 않아서이니, 이미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오호라, 이런 악담을 멋대로 하는 자는 어디에서 그렇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오진영 한 명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문하 제자의 죄로써 그 스승을 의심한다면 구산(龜山)과 남명(南冥)도 일찌감치 면하지 못했을 것이니, 확실히 이것은 무리한 것입니다. 또 선사께서 평소 엄하게 의리를 강론하고 엄하게 절개를 닦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원고에 쓴 내용은 비록 외부사람들이 자세히 알 것이 못되지만, 다만 출간된 유서와 통문으로 보면 이 얼마나 절개와 기개가 있고 이 얼마나 분명했습니까? 저 악담을 하는 자는 이런 점을 버려 믿지 않고 오진영이 무함한 것만 진술하니, 그 험한 마음을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옛날에 만약 순숙의 근거할 만한 유훈과 행실로서, 원고 가운데 탁월한 부분의 인가(認可)를 철저히 금지하여 인가의 증거에 넣지 않은 내용을 회옹이 얻으셨다면 단지 순욱과 순상만 배척하고 순숙은 의심하지 않았을 것40)은 틀림없습니다.상중에 있는 그대가 선사와는 비록 사생(師生)이라는 명칭은 없었을지라도 높이 존경하며 본받은 것은 진실로 사생의 분수를 정한 자보다 낮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밝은 견식 같은 경우는 아마 이들 무리의 말을 듣는다면 당연히 사실에 근거하여 배척하기를 제가 위에서 분변한 것처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오씨에게 사기를 당했으니, 어찌 간옹에게 해롭겠는가'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저들이 기롱한 것은 선사에게 절개와 의리가 없다는 것이고, 사람을 알아보는데 밝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니, 당신의 이번 대답이 어찌 합당하겠습니까. 변론할 꺼리를 버려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말이 먼저 막힐 것을 걱정하니, 진실로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 편지를 본 자가 혹여 그대가 도리어 악담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요되어 간옹에게 조금 불만이 있다고 의심을 산다면 피차간의 불행이 클 것 같습니다. 장차 어떻게 이런 의혹을 해소하겠습니까? 빨리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澤述白, 日月不留, 先令監常事已過矣.無狀蔑禮, 尚稽匍匐, 而哀執降制釋哀之前, 面慰莫遂.自分罪戾宜遭斥絕, 乃蒙耑狀遠投, 切切憂斯文之變, 懇懇喩處義之方, 非洪度平物我之盛, 何以及此? 仰感俯悚, 無容云喩.此身雖無似, 亦具好賢親友之彛, 豈不知一趍之當急? 而昧然至此也.一自先師之遭誣罔極也, 固痛恨之在心思, 所以辨白而未遑他矣.及其不得已而行聲討, 彼亦門墻內人, 豈不內傷心而外羞人也? 至於彼反荷杖而汙衊之, 則有同街兒悖習, 見者自應有眼, 遭者何用爲意? 但因此而一門之爲局外人侮囮則極矣.故入則忽忽然無樂, 出則蹙蹙然靡騁, 跡不出百里, 座不參稠中者, 有年矣.此區區所以負何於哀執者然也.鳴呼, 陰之奸悖誣罔, 神人之胥怒, 不須盡說其諸不正言.立異於刊議之初, 又不能誠心啟喩, 使之摧服於誣師之後者, 亦不可謂無咎, 故反省內疚, 未嘗自恕, 每欲備陳其實, 一聽明決, 而不敢爾也.忽此來喩, 長牋短幅, 不憚勤勞, 有以見所見者明, 所守者正, 所養者厚, 而勘斷陰罪者得其情, 指示淺拙者得其當, 此正吾之所願聞願從者, 何幸何幸? 但其引孟子之闢楊墨, 以證今日之斥陰, 而謂何曾如彼多事, 則恐有欠的當.夫謂孔子主癰疽瘠環, 時人好事者說也, 孟子猶苦辨不已, 如使此說造自三千之從․私淑之列, 則孟子必討以誣師之罪矣.楊墨害道固大矣, 故孟子闢之.然使楊墨幷誣孔子, 則孟子又必逐一立辨, 而疾討之, 斷以罔聖之罪, 不但斥其學術之獘也.今陰之所誣破先師大節, 既非主癰之類之小者也, 誰家日月之推戴, 其爲當地之害, 不比無君父之待推說者矣.蓋陰之禍急於楊墨, 而加以楊墨所無之誣賢, 其所誣者, 又乃親灸之師, 而彼又高第足也, 則其視楊墨, 罪浮幾層? 使陰早出於孟子世, 其不但與楊墨幷案同勘也審矣.至於多事, 本非君子處事之方, 行其所無事, 乃其道也, 而自非明智, 未易及此.然行所無事者, 莫如禹之治水, 而隨山刊木, 濬川敷土, 何等多事? 是知事之順理, 多事無事, 茍不順理, 無事不足貴.竊謂向番聲討義理之不得已者, 則恐不可以多事目之也.方今逐臭之徒, 箇箇挾雕蟲末技, 蟻聚蝨附於陰門之下, 繩鉤黑白, 變幻之粉飾之, 自處以報佛傳道, 驅人於戕賢毒正.又且挾全稿而牢籠一門, 倚時勢而箝制舉世, 前頭恠舉莠言, 有不可測者, 則幷以記箚往復, 隨變辨斥, 恐亦不可以已之, 如何如何? 不可專此戀著, 失了公平大本, 妨了親切工夫之喩, 眞及時切當之敎也.朱子所戒, 戎虜易逐, 私心難除, 豈非爲此故耶? 顧何敢保無厥病? 亦不至全昧反省.區區以爲既失公平大本, 又闕親切工夫.雖說得大義, 際天極地, 斥得邪說, 驅蛇逐鳥, 其爲吾道之折衝禦侮則優矣, 至於了當自家一副身心, 承千聖傳授之法, 答上帝降衷之恩, 則究無所補, 先師之所望於後學, 豈若是而已? 此實平生所兢兢者, 而今承頂針之先發, 其爲一倍警惕, 若冷水澆背, 不待百淵書而已然也.先師之於先令監, 交道不絕, 示喩所謂自有艮翁手筆, 不待辨而明者, 自是幷世之公論, 彼輩之用意其間, 而不以其實, 至目拜先令監者, 爲全門之鄭胤永者, 誠不知其何心也.且同一拜也, 而欽齋之斥陰也, 則胤永之; 徐宋成之袒陰也, 則不胤永之, 天下安有似此公理? 尢不知其何心也.餘惟祈制體, 以時支重, 研經明義, 繼述先志, 主張正論, 匡扶世道.彼徒言必稱, 吳是先師傳道高弟, 何敢討斥以傷先師之明? 吾則以爲若先師實傳道於吳, 則尢不可不討.其誣師之罪也何也? 使末學無名者, 或有誣師之言, 人皆知其無知妄發, 而不之信.既人皆不信, 則師則無損, 而誣者有罪, 罰其罪而服其人, 人不服, 則割絕之斯已矣, 不須乎聲明國中也.至於所謂傳道者, 所誣關乎大義, 則人必曰: "某乃其師心法傳授之人也, 其言非誣實也." 於是乎誣者罪重, 固不待言, 而師之道破喪無餘, 不有明目張膽而辨討之, 何以破今與後之疑也? 昔尢庵之告君曰: "設使李某眞有此事, 若自金某證之, 是證父攘羊, 况萬萬無此乎." 又曰: "以高明之弟子而證之, 則某之落髪, 終不可辨明矣." 夫於趙【緯韓】張【維】誤聽誤說誤記之沙溪言者, 尢庵猶恐, 栗谷之落髪未辨, 沙溪之誣師誤蒙, 切切然痛之, 援證佐而昭白之.今吳也處己以艮翁高弟也, 而乃敢肆言曾有認意, 而大書料量不拘, 而永證于後.是則尢庵所慮, 終不可明者, 厥誣愈深, 不可辨哉? 是則父不攘羊, 其子僞證者, 厥罪尢重, 可不討哉? 且唐堯周公之聖, 焉而任四兇管蔡? 南冥栗谷之賢, 焉而奨仁弘汝立? 使先師實有傳於吳, 顧何傷其明哉? 雖然此皆姑從彼徒之說, 而假設言之耳.乃若先師禪宿抱淚之悼, 自炳庵金公之沒, 累發於言文.至於吳, 則雖以文辭發揮, 時見愛重, 其功利爲重, 不計道義之責勸.余復蹈覆轍之, 斥既不啻嚴切矣.逮至末年, 以諸子未有擬望, 諸君未免偏駁, 蓋嘗深憂永歎於與人之書.吳若有可傳之實, 何庸憂嘆之至此乎? 然則先師初不許吳之明, 實不愧知人之哲.尚何論今日之傷明與否哉?示喩有人舉晦翁論荀氏事, 有所云云一條, 看來不覺裂眦也.夫晦翁之論荀氏者, 何如也? 始以全身就事譏之, 又以一種議論文飾蓋覆斥之, 終說橫流洪水猛獸之害討之.我先師之學, 如有可以推此而論之者, 則徇私賊義禍世之大者, 其無氣節, 講義不嚴, 已不足言矣.鳴呼, 肆此惡口者, 于何而驗其然也? 非究不過一吳震泳乎? 如以門弟之罪而疑其師者, 龜山南冥早已不免, 的是無理也.且先師平日講義勵節之嚴, 口諸人筆諸稿者, 雖非外人之所詳, 但以遺書與通文之印布者觀之, 是何等氣節? 何等斬截? 彼惡口者, 舍此不信, 而震誣之是述, 其險心何可當也? 向使晦翁得荀淑遺訓與行事之可據, 如不入認譜, 切禁認稿之表表者, 其但斥彧․爽, 而不幷疑淑也必矣.哀執之於先師, 雖無師生之名, 尊仰取法, 實不在定分者以下, 若明見, 其聞此輩之言, 宜其據實斥之, 若區區之右辨也.顧乃不然, 而但'以見欺於吳, 何害於艮翁'答之, 彼之所譏, 先師之無節義也, 非不明於知人也, 哀執此答, 何所當乎? 舍不用可辨之資, 而自憂己言之先竆, 誠不敢知也.然哀執之偶爾未察, 豈有他哉? 但恐見此書者, 或疑哀執之反爲惡口所動, 有些不滿於艮翁, 則彼此不幸大矣.將何以解此惑也? 願亟賜囬敎. 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 삼았다 공자가 제나라와 위나라에서 옹저(癰疽)와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한 일을 말한다. 그러나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주자의 주에 의하면, 공자가 노나라 사구를 하다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는데, 송나라 대부인 사마상퇴(司馬向魋)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공자가 화를 피하려고 미복 차림으로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를 주인으로 정하신 것이다. 맹자의 말은 공자가 이렇게 곤액을 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인 삼을 사람을 가리셨는데, 하물며 제나라나 위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 어찌 옹저(癰疽)나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하는 일이 있었겠느냐고 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묵적과 양주 맹자(孟子)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과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말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오랑캐는……어렵다 주희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세상에 둘도 없는 큰 공은 세우기 쉽지만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보존하기 어렵고, 중원 땅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쉽지만 내 한 몸의 사사로운 생각은 없애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不知不世之大功易立, 而至微之本心難保; 中原之戎虜易逐, 而一己之私意難除〕" 하였다. 고명한……것입니다 송시열은 "신이 고(故) 참찬(參贊) 신(臣) 송준길(宋浚吉)과 같이 김장생의 말을 들었는데 그 말에, '일찍이 변형(變形 머리 깎는 것)의 여부에 대해 은미하게 율곡(栗谷)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답하기를 '비록 변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빠졌었으니, 변형하지 않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했으니, 율곡은 바로 이이의 별호(別號)입니다. 비록 절절히 조목조목 나누어 해명하지는 않았으나 머리 깎지 않은 실상(實狀)은 절로 드러났으니 이것이 참으로 이이의 기상(氣象)입니다. 또 헌신(憲臣)이 장유의 설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것은 조적(粗迹 불확실한 증거의 뜻)이라서 변론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므로 장생도 그렇게 말했다.'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또, '제신(諸臣)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實狀)을 갖추 진달했다.' 했겠습니까. 제신들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을 갖추 진달했는데도 김장생만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 것은 또 무슨 마음에서입니까. 신은 삼가 김장생을 위해서 원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고명(高明)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이이가 머리 깎았다는 것을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니, 이이가 당한 무망(誣罔) 역시 얼마나 극심한 것입니까.〔臣與故參贊臣宋浚吉.同聞長生之言則曰.嘗以變形與否.微稟于栗谷.則答曰.雖不變形.何益於其心之陷溺哉.所謂栗谷卽珥之別號也.雖不切切分疏.而其不爲落髮之實狀.自然形見.眞是珥之氣象也.且憲臣引張維說.以爲落髮是粗迹而不足辨.故長生亦言之若然.則何以又曰.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也.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而獨長生言之云者.亦獨何心也.臣竊爲長生冤痛也.以高明之弟子而證之.則珥之落髮.終不可辨明.珥之所遭.何其甚也〕"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진문원공유고.잉변사우지무.우걸허손주석귀전독서소.(進文元公遺稿 仍辨師友之誣 又乞許孫疇錫歸田讀書疏)〉 순욱의……않았을 것 주자는 일찍이 "순씨(荀氏)의 한 가문을 논해 보자면, 순숙(荀淑)은 양씨(梁氏 순제(順帝)의 처족)가 권세를 휘두르던 때에 바른말을 하였으나, 그의 아들 순상(荀爽)은 동탁(董卓)이 왕명을 전단하던 조정에 발을 담갔으며, 그의 손자 순욱(荀彧)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당형(唐衡 환제(桓帝) 때의 환관)의 사위가 되고 조조를 보좌하는 신하가 되었는데도 그르게 여길 줄을 몰랐다. 이는 굳세고 바르며 정직한 기상이 이미 흉학(凶虐)함에 꺾인 나머지 점점 자신만을 온전히 하고 사무(事務)만 볼 계책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서로 그 속에 빠져들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생각건대, 그 당시의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사이에 자연 일종의 의론(議論)이 있었는데, 그 본질은 문식하여 덮고 가린 채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옳다고 여기게 하여, 반드시 깊은 꾀와 기이한 계획이 있어야 만에 하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라를 살려 내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니 사설(邪說)이 멋대로 유행하는 것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보다 더 심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金聖九 乙丑 호서는, 청주(淸州)의 소심(小心) 황종복(黃鍾復) 어른이 지론이 엄정하여 사람의 뜻을 매우 복돋우고, 회덕(懷德)의 송연구(宋淵求) 어른도 그러합니다. 부고를 물리치고 죄를 성토한 것은 황장은 음성(陰城) 가까이 살고 송장은 전사인(田士仁)의 외숙이기 때문입니다.춘계(春溪)가 근래에 또 신해년(1911) 유서(遺書)의 등본을 꺼냈는데, 그 하단에 선사가 친필로 쓰기를 "공주(公州), 부여(扶餘), 진천(鎮川)에서 서산(瑞山), 태안(泰安), 청주(清州), 청안(清安) 등의 군까지 전달하라. 이것은 합당한 도리이니,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하였고, 겉봉투에는 '구산(臼山)이 호서의 제 동지에게 받들어 부친다.'고 했습니다. 선사가 문인들로 하여금 돌려가면서 서로 경계하도록 한 것이 이처럼 간곡하였는데, 몇 년 동안 숨겨두고 있다가 기꺼이 오진영의 인가설에 붙은 뒤에 비로소 이 가르침을 내놓았으니, 그 죄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오진영은 정재(靜齋)가 유서를 늦게 내놓았다고 매번 성토했는데, 이제 송춘계가 숨긴 것은 다시 일 년 반이 지났는데도 한 마디도 꾸짖는 말이 없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무릎을 맞대고서 너와 나라고 하면서 사이좋게 지낸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의 당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늦게 내놓았다고 성토한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늦게 내놓았기 때문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가의 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또 감히 방자하게 일부러 유서가 세 번 나온 이후에 인가의 죄를 범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전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때렸는데, 지금은 자기만 생각하고 스승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아, 그는 이미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 이와 같이 말하는 것도 내 입만 더럽히는 것이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湖西則清州黃小心丈鐘復, 持論嚴正, 甚強人意, 懷德宋丈淵求亦然, 而退訃討罪, 黃居陰近, 宋是田士仁內舅也.春溪近又出辛亥遗書謄本, 其下先師親筆書之曰"自公州·扶餘·鎮川, 轉致瑞山·泰安·清州·清安等郡.是合當道理, 必要行之", 皮封"臼山奉寄湖西諸同志".先師之使門人轉相告戒, 申複如此, 而乃掩置多年, 甘附震認而後, 始出此訓, 其罪果何如耶?震每討靜之晚出遺書, 今宋之掩匿, 更過一年半之久, 而無一言相訾嗷, 駢首促膝, 爾我繾綣者何也? 爲其在渠黨故也.且其討晚出者何意? 豈非曰爲晚出故也, 故我犯認罪於不知中耶? 而乃又敢肆然故犯於遺書三出之後者, 何也? 前爲護己而打人, 今爲有己而無師也.噫, 彼既非可以人理責之者, 則如此云云, 徒汙我口, 寧欲無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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