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통이 글은 통문에 회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충·효·열 삼강은 만 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도 해내기 어려운데, 하물며 두 가지를 겸한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삼가 귀 군의 유천(儒薦)을 살펴보니, 세지면(細枝面) 오봉리(五峯里) 박씨는 본적이 밀양이고 밀성군(密城君) 언침(彦忱)의 후손이며, 사인 유삼(有三)의 딸로 효열녀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현숙한 덕을 갖추었고, 나주 망족 사인 나득수(羅得洙)에게 시집을 갔으니, 득수는 바로 금호공(錦湖公) 사침(士忱)의 후손 이자 종기(鍾基)의 아들입니다. 득수는 평소 사림의 중망을 받았고, 그 아내 박씨는 그 덕을 본받아 짝하였습니다. 박씨가 시집가자 시부모가 그 효성을 칭찬하였고 남편이 그 덕을 즐겁게 여겨 규문이 정숙하고 향당이 감탄하였습니다.남편이 불행히도 병에 걸리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백방으로 간호하고 치료하느라 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십여 년간 애써도 약은 효과가 없었고 기도는 감응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곧장 따라 죽고 싶었지만, 도리어 연로한 시부모를 염려하고 아래로는 어린 두 고아를 걱정하여 곧바로 눈물을 닦고 죽은 이를 장송하는 절차를 몸소 검속하여 조금도 여한이 없게 하였습니다.삼 년의 시간은 하루처럼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상기를 마친 후에는 미망인으로 자처하여 방적 일에 힘을 쏟아 집안일을 다스렸습니다. 또한 두 아이를 잘 교육시켜 두 아들이 착하게 자라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모두 효우로써 알려졌습니다. 만약 박씨의 효열이 아니었다면 나씨의 가문이 어찌 이와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저희는 이웃 고을에 살면서 이미 이 일을 익숙히 들었고, 또한 이렇게 통문을 보내주어 침묵할 수가 없기에 이처럼 우러러 답변합니다. 오직 바라건대, 귀 군의 여러 군자께서 의당 역사서에 크게 기록하고 서둘러 정문(旌門)을 도모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오래도록 전하고 훌륭한 사적을 널리 전파하여 풍속을 세우고 시속을 도탑게 하여 영원토록 불후하게 하기를 몹시 바랍니다. 이 글은 나주향교 유림 첨좌하께 공경히 회통한 것입니다.단기 4289년(1956) 병신년 모월 모일에 광주향교 전교 이교채(李敎釆), 장의 박정규(朴禎圭)·기우섭(奇雨燮)·고광세(高光世)·송태중(宋泰重)·이석근(李石根)·민치안(閔致安)·문현모(文顯模)·박길원(朴吉源)·고영훈(高永勲)·김진경(金鎭卿)·안종안(安鍾安)·이길우(李吉雨)·정해규(鄭海圭)·이상회(李相會), 다사(多士) 이회춘(李會春)·기근섭(奇近燮)·박승주(朴升柱)·이호경(李浩敬)·박종륜(朴鍾崙)·이교태(李敎台)·최수화(崔洙華)·고제용(高濟鏞)·민영두(閔永斗)·정순환(鄭淳煥) 回通右謹回通事 以忠孝烈三綱亘萬世不可易者也 而一猶難 况兼二乎 謹按 貴郡儒薦 則細枝面五峯里朴氏系出密陽 密城君彦忱后 士人有三女 孝烈是耳 自幼有淑德及歸于貫羅州望族士人羅得洙 卽錦胡公士忱后鍾基子也 得洙素有士林之推重 其妻朴氏式配其德 旣歸 舅姑稱其孝 君子樂其德 閨門貞肅 鄕黨欽嘆 其夫不幸有疾 暫不離側 百方調治 目不交睫 以此十餘年 藥無奏效 祝無感應 奄至屬纊 直欲下從 旋念舅姑之老 下思二孤之幼 輒收淚 而送終之節 躬自檢攝 一無少憾 三霜如一日闋制後以未亡人自處 克勤紡績 以治家伙 教戒二子 二子善長 克趾先美 俱以孝友聞 非朴氏之孝烈 羅氏之門安得如此 生等居在隣鄕 已爲稔聞 而又此來通 難可含默 故如是仰答 惟願 貴郡 僉君子宜乎大書竹帛 亟圖綽楔 壽傳美名 廣播懿蹟 以爲樹風敦俗 永世不朽 千萬幸甚 右敬回通于 羅州 鄕校儒林 僉座下檀紀四二八九年丙申[光州鄕校]月 日光州鄕校 典校 掌議李教釆 朴禎圭 奇雨燮 高光世 宋泰重 李石根 閔致安 文顯模 朴吉源 高永勲 金鎭卿多士安鍾安 李吉雨 鄭海圭 李相會 李會春 奇近燮 朴升柱 李浩敬 朴鍾崙 李教台 崔洙華高濟鏞 閔永斗 鄭淳煥[皮封] (前面) 羅州 鄕校儒林 僉座下(背面) 南原 鄕校回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