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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운(寒碧堂韻)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崔再榮 전라북도 전주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한벽당에 대해 지은 시.○ 내용 한벽당(寒碧堂)에 대해 지은 시(詩)로, 전주최씨(全州崔氏)15세손 최재영(崔再榮)을 비롯하여, 16세손~20세손까지 후손들의 시가 실려 있다. 한벽당(寒碧堂)에 대해 지은 시(詩)로, 전주최씨(全州崔氏) 15세손 최재영(崔再榮)을 비롯하여, 16세손~20세손까지 후손들의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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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최전우(崔銓宇) 주덕재기(周德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九十一年 再榮 檀紀四千二百九十一年 崔再榮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8년 최전우가 지은 주덕재기의 전사본 1958년 최전우(崔銓宇)가 지은 주덕재기(周德齋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주덕재의 건립 시기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주덕재는 전주에 있던 전주최씨(全州崔氏) 재실(齋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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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石愚序昔張南軒有言曰有所爲而爲者利也無所爲而爲者義也朱夫子贊之以擴前聖所未發大抵凡人臨事也預揣其得喪利鈍然後做將去此常情之所不能免矣自國變來士大夫之仗節循義思復君父讐者不無其人焉而如報私讐者盖鮮矣噫余自甲午以來連罹世禍仍蹈不測之淵而吾族石愚翁不我時諱以遐棄曰目今 宗社垂墟 二聖蒙塵吾輩雖老且病不可一日偃臥之秋也思所以圖報涓埃者遂與之周旋血誠戮力無所不究而甚至以廣訪乎智勇之士或入山誓天雖鱷浪豹窟隆寒酷暑沐雨踏白憊矣䟡矣形容焦然當少壯者難當底事財匱力殫則傾家刮橐尙患不贍飢焉啖松渴焉飮澗如是行色間關乎十餘載進退周章必先於我而翁不自居亦不求人知雖家人莫知盡瘁向所謂無所爲而爲之而如報私讐者非斯人而誰余適再被虜於畿海之永宗島時則戊午春也翁之遠訪於千里孤島者豈徒爲我私必有深意矣而奈彼奴移乙之虐何由是而挽不得數日暇僅一夕而熲熲歸袖翩然儻無怊悵底色以余之怊悵於翁知翁之怊悵於余也於其臨別贈此數語而贐之云戊午春三月 日族從崔銓九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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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권홍수(權鴻洙) 영창당기(永昌堂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歲上章攝提格淸和節 權鴻洙 歲上章攝提格淸和節 1950 權鴻洙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0년에 권홍수가 작성한 영창당의 기문. 1950년에 권홍수(權鴻洙)가 작성한 영창당(永昌堂)의 기문(記文)이다. 영창당은 승주군(昇州郡) 해룡방(海龍坊) 앵무산(鸚鵡山) 남쪽 죽동(竹洞)에 있는데,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선조들이 묻혀 있는 세장지(世葬地)이다. 예전에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가 처음 지었고, 그 뒤 정축년에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이 중수(重修)했다. 원문에는 또한 그 죽천의 아버지 귀산(龜山)이 성우산(成愚山)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였다. 한편 기문의 저자 권홍수(1882-1972)는 자가 한거(漢擧), 호는 석하(石荷)이며, 일찍이 형 지촌(芝村) 권봉수(權鳳洙)와 함께 매천(梅天) 황현(黃玹)에게 사사하였다. 권홍수는 매천사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창이라는 현판의 이름은 우리 성씨가 영원히 더욱 창성하리라(吾姓永世彌昌之道)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권홍수는 전주최씨의 후손 최학림(崔學林)이 자신을 조상의 문적을 가지고 찾아와서 기문을 부탁하자 선대의 아름다운 사적을 자세하게 기술하면서 이곳 전주최씨들이 조상이 쌓은 업적을 이어받아 힘써 도를 닦고 실천하여 그들이 더욱 창성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최학림이 이 기문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최씨가의 현조들을 살펴 보면,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를 필두로 하여,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연촌의 증손 이조참판 암계공(巖溪公) 최연손(崔連孫), 암계의 8대손 사포(沙浦) 최봉하(崔鳳河), 사포의 아들 삼성헌(三省軒) 최영필(崔英弼), 삼성헌의 아들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 송재의 아들 동정(桐亭) 최익문(崔翼文), 익문의 아들 남산(藍山) 최진홍(崔振弘), 남산의 아들 청계(聽溪) 최광현(崔光顯), 청계의 아들 성암(誠菴) 최상기(崔相琦), 성암의 아들 농은(農隱) 최규선(崔圭善), 농은의 아들 귀산(龜山) 최춘호(崔春鎬), 귀산의 아들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 등이다. 이들의 자와 호, 활동상황이 적혀 있어서 승주에 살았던 전주최씨의 현조들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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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최병수(崔秉銖) 영모재기(永慕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崇禎紀元後六壬申三月 日 秉銖 崇禎紀元後六壬申三月 日 崔秉銖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2년 최병수가 지은 영모재기문의 전사본 1932년 최병수(崔秉銖)가 지은 영모재기(永慕齋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영모재의 건립 시기와 목적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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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碧堂韻豐沛之東玉洞頭古今歌勝冠南州山川精釆風猶在天地神工境且幽自適優遊閒日月急流勇退正春秋回回仰止誠何及千載翼然碧一樓十五世孫再榮 謹稿沛城東畔玉流頭告老月翁休退州登臨不淺江山興捿息任他水石幽翠巘當簷渾似畵淸風灑面解生秋頤養心神今百世後仍想像有斯樓十六世孫斗洪謹稿築得迢迢百丈頭湖南形勝跨雄州憑天危檻三淸近捲地嗚川一曲幽明月幾回絃管夜白雲遙憶退休秋孫孫子子無窮思萬億年過有此樓十六世孫在洪謹稿完府以東絶壁頭翼然堂立鎭雄州愁人使上憂將遠騷客登臨興不幽優遊勝事傳千古勇退遺風度幾秋至今觀感是何處山水之間寒碧樓十五世孫銓鶴謹稿得意翼然壓石頭名其第一動南州寒山列揖峯峯秀碧水交流谷谷幽嗣葺繼承孫百世退休遙憶月千秋先生遺蹟今安在翁去江流空有樓十八世孫相烈謹稿揭顔寒碧斷崖頭甲府湖南豊沛州邀月坮高奇岩曲尋梅逕出茂林幽騷人耽勝每多日塘老遺風五百秋四子淸班猶未艾中身勇退讀書樓十八世孫暘烈謹稿淸寒一閣碧溪頭名播海東三百州塘老而今靈若在沛城自古境非幽花禽烟月午朝夕詩酒管絃春夏秋嗣葺無窮來裔責應同天地久玆樓十八世孫敏烈謹稿山寒水碧石層頭百尺高堂冠完州玉洞絃聲千古美金城月色一塘幽笙歌穿耳鶯花日客杖摩肩楓菊秋得見先生淸趣蹟光風霽月滿斯樓十九世孫圭禧謹稿紫翠千峯始畵頭勝觀南服古雄州晟時天府金城闢昔日園林玉洞幽江白忽橫飜出鏡地寒常帶獨行秋緋衣赤舃徒形役歸臥殘年此有樓十九世孫圭才謹稿麒麟削出壓東頭人說湖南第一州黿鼉吹沫春江動桃竹編靑古洞幽命車理屐尋邱壑摘葉餐英驗夏秋睢園梓澤俱荒寞三百年垂勝此樓十八世孫樟烈謹稿絶崖丹壁立頭頭一道如虹白石州簫鼓賞春花裡動麒麟消刦景中幽二疏漢代添圖繪四棣韓朝乞骸秋何處洞天三十六未曾加得寒碧樓二十世孫斗鎬謹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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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년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은재소서(沙隱齋小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戊寅三 戊寅三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무인년에 전주최씨의 누군가가 작성한 사은재소서. 무인년(戊寅年)에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누군가가 재(齋)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사은재(沙隱齋)라고 명명하고 지은 서(序)다. 저자는 이 소서에서 자신의 8세조 사포공(沙浦公)이 남원에서 이곳 하사리(下沙里)로 이거해 왔다고 하였다. 유절재 소장문서 가운데 '1940년 정기(鄭琦) 사포재기(沙浦齋記)'에 따르면, 사포재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사포(沙浦) 최봉하(崔鳳河)와 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의 합장묘가 있는 승주(昇州) 관아 동쪽 앵무산 아래 월산 언덕에 있에다. 이곳에는 사포의 현손 남산(藍山) 최진홍(崔振弘)도 묻혀 있다. 일찍이 남원(南原) 주암(舟巖)에 있던 선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고가(古家)에 살던 사포는 인조(仁祖) 때 불운하여 더 이상 출사(出仕)의 길이 열리지 않자 이곳 앵무산 아래 쪽으로 낙향하여 사포정(沙浦亭)을 짓고 시문과 경사 공부에 전념하였다. 사포 최봉하의 자(字)는 인서(麟瑞)로, 전주최씨 중에서는 남원(南原) 방계(芳磎)에서 승주(昇州)로 내려 온 첫 인물이었다. 이곳 승주에 사는 전주최씨의 시천조(始遷祖)인 셈이다. 추측컨대 사은재도 사포재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포공의 9대손이라고 한다면 귀산(龜山) 최춘호(崔春鎬)와 같은 항렬의 인물로 추정되지만 문서의 끝 부분이 훼손되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서문의 내용은 문답식으로 작성되었다. 예컨대 자신이 별도로 재명(齋名)을 쓰지 않고 자신의 호(號)를 따서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에 대하여 재와 재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한 몸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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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谷序余老且病閣筆硯久何敢人號哉然得聞鄭友寅韶之口則崔處士秉禹眞君子人序號春谷烏可辭夫春其氣和谷其地幽幽谷和春乃萬物發生之始餘何可量也盖嘗聞秉禹氏卓然湖南名士容用余老毫贊然不阿好故爲之序系之以詩曰谷有盤君子之居李愿去矣秉禹攸廬谷有口君子之扃鄭眞去矣秉禹攸耕號始鬼春谷亦谷我有所祝幽遷喬木己巳冬十一月旣望資憲大夫掌禮院卿弘文館學士碧珍李愚冕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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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隱齋小序吾齋成吾以名吾齋以沙隱者固以據吾本號而推及之也客有登齋而叩之曰何不別擇齋名惟以本號加之乎吾應之曰齋是吾身爰居之所則身與齋同一吾也故如此云矣客曰隱固今日十分義諦則切宜乎僻岡窮峽時人不知之處何必爲此歷歷沙上人而但借跡於隱乎吾曰吾之隱於沙不敢追跡於河武海襄之擇地避世以八隱也盖吾八世祖沙浦公自龍城之芳磎始移家於此下沙里因爲世居故追慕先蹟之在玆且身爲漁釣之侶於斯也客曰齋居何事爲了當吾曰魚鳥爲隣觴咏自娛以終餘年計也客曰噫爲人父祖者其於日用動作固當貽謨於子孫也奚止於一生閒逸乎昔柳節度中門東小齋固美其家法百原山書齋必正其衣冠而篤學武夷山隱求齋必求長其道心遂成千古典型今此齋主人亦爲隱此而熟講其先祖沙浦公所讀書以求道心之長以篤學業之正以治家法之美要得師法乎彼三齋之凖的豈非立齋之嘉猷乎吾聞客言而惴惴以自警省且詳道其言於家弟與兒孫輩使之激勵因爲序次當日主客立論庶欲有補於垂世成立之…▣矣…▣申中戊寅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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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이식(李植) 연촌선생가전시문록후서(烟村先生家傳詩文錄後叙)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崇禎丙子七月之望 李植 崇禎丙子七月之望 李植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36년(인조 14) 7월에 이식이 연촌 최덕지의 가전시문록에 쓴 후서. 1636년(인조 14) 7월에 이식(李植)이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에 쓴 후서(後叙)이다.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연촌이 귀향할 때 조정의 명사(名士)들이 시부(詩賦)를 지어주며 전별했으며, 존양루에도 제문을 지어주었다. 또 장수를 누리고 많은 후손을 두고 있는 연촌의 부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칭송하는 시문도 많이 지어 주었다. 전주최씨 문중에서는 이들 시문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지켜왔지만 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존양루가 훼손되고 시문도 산일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제 향리의 사람들이 연촌을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연촌의 7대손 전 참봉 최정(崔珽)은 남아 있는 시문 90여 수를 수습하여 시문집을 간행하면서 이식에게 발문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이식은 연촌이 순실하고 순덕한 학자로 백세(百世)의 사표가 되는 분이라고 하였다. 또한 당대에 고관에까지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결과적으로는 곧바로 불어닥칠 문종의 죽음과 노산군의 양위(讓位)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얼핏 보기에는 기미를 알아채고 화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하다고 하여 어찌 그같은 천수(天數)를 미리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식은 ?주역(周易)?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구절과,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모든 일이 연촌의 순수한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관계에서 갑자기 물러난 것은 연촌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 최광지(崔匡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연촌을 비롯한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후서를 지은 이식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등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설서(說書), 북평사(北評事), 선전관(宣傳官) 등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지평(砥平)으로 낙향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좌랑에 기용되었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그 뒤 탈출하여 귀국했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문집으로는 『택당집(澤堂集)』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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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한긍호(韓肯鎬) 사은재기(沙隱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歲庚辰九月下澣 韓肯鎬 歲庚辰九月下澣 1940 韓肯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0년 9월에 한긍호가 최의호의 사은재를 위해 지은 기문. 1940년 9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한긍호(韓肯鎬)가 최의호(崔義鎬)의 사은재(沙隱齋)를 위해 지은 기문이다. 순천(順天) 남쪽에 앵무산이 있고, 앵무산 아래에는 죽동촌(竹洞村)이 있다. 이곳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가 낙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시가를 짓고, 예법을 지키며 대를 이어가며 효우(孝友)를 전하였던 명문 완산최씨(完山崔氏)의 고향이다. 그 후손 사은(沙隱) 최의호가 뛰어난 덕행(德行)으로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는데, 나이를 먹었지만 성품이 순수하고 더욱 건장하자 그 아들 최낙영(崔洛永)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몇 칸 집을 새로 지어 사은재라고 편액을 달았다. 그리고는 최낙영이 먼 길을 달려와 한긍호에게 사은재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화답하여 한긍호가 이 기문을 써서 준 것이다. 한긍호는 초명이 한인호(韓麟鎬)였으며, 고종 말년에 학부협판(學部協辦)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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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隱齋記湖南之順天古昇平府也郡南一舍有鸚鵡山山下有竹洞村卽完山崔氏烟村先生後裔沙浦公以下世居之鄕而詩禮家法孝友相傳蔚爲一鄕望族矣今者沙隱崔翁義鎬箕裘繼業孝友俱篤隣里咸稱其德行翁則至老所〔不〕衰粹而益壯胤君洛永克承親志嘗搆數椽于一處扁其齋曰沙隱齋盖其志非取山林泉石之勝風花雪月之媚乃怡養靜修之所左有智異之逶迤前臨瀛海之渺茫笙鶴之影有時髣髴乎雲端此眞烟火上可道之資也隱居雖非絶世一切處遊語對之事似出世外書史作師係竹石資友朋花爲僮僕鳥當笑談優哉沙翁之樂也崔君千里行駕來請余一辭難孤其誠意玆摭刱築之梗染焉歲庚辰九月下澣嘉善大夫宮內府特進官前成均舘大司成海石韓肯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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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최주홍(崔朱洪) 봉덕재기(奉德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丁酉冬 朱洪 丁酉冬 崔朱洪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유년에 최주홍이 봉덕재의 재건을 바라면서 작성한 기문. 정유년에 최주홍(崔朱洪)이 봉덕재(奉德齋)의 재건(再建)을 바라면서 작성한 기문이다. 봉덕재는 최주홍의 10세조인 최선립(崔善立) 때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서쪽으로는 봉악산이 서 있고, 동쪽으로는 영주(瀛州)로 나가고, 앞쪽으로는 전주최씨가의 선조들이 묻힌 석동산(席洞山)이 바라보이는 명당 터이다. 봉덕재는 단지 몸을 닦고 수련하는 곳뿐만 아니라 선조들이 쌓은 업적을 계승하고 그 덕업에 누를 끼치지 않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후손들이 그동안 때마다 찾아오고 일년에 한 번 제사를 드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중간에 변고가 생겨 묘재(墓齋)와 인사(人事)가 겨우 형태만 남아 내실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최주홍은, 기문의 끝에서 이제 오늘에 이르러 사나운 풍랑은 사라지고 평안한 시기가 찾아와 다시 대본(大本)을 떨칠 시점에 이르렀으니, 동족들끼리 사사로운 감정을 잊고 서로 격려하고 사랑한다면, 조상에 보답하고 후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위의 최선립은 전주최씨(全州崔氏)로서 부안에 처음 들어온 옹암공(瓮菴公) 최생명(崔生明)의 현손(玄孫)이다. 최생명의 아들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은 뒤에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을 만큼 이름난 학자였으며 부안 전주최씨의 재실인 유절암(留節庵)을 창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또 그의 다섯 아들 가운데 둘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넷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아들 중 최계성(崔繼成)이 최선립의 조부이며, 아버지는 최활(崔活)이다. 보통의 기문이 새로 지은 서재나 재실을 대상으로 그 재실의 주인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형식으로 쓰여진 것과는 달리, 이 봉덕재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된 재실을 재건하려는 염원으로 쓰여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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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최익현(崔益鉉)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永曆二百五十年丁酉 崔益鉉 永曆二百五十年丁酉 崔益鉉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면암 최익현이 1897년에 지은 전주 한벽당중수기의 전사본 1897년(고종 24)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전주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의 전사본(轉寫本)이다. 연필로 쓰여 있지만, 누가 전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수기에는 한벽당을 다시 건립하게 된 내역 등을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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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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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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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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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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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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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德齋記扶治南數弓許有曰內基三圍壠一面野蓬岳西立瀛洲東出前與席洞瓮菴公先塋瓮井固窮堂祖墟地脉相連勢起伏而氣明麗居者稱道行人指點此維我十世祖諱善立奉事府君以下繼葬之域窃惟府君古家英才好學察埋處世由道當時到今人猶慕善况在後孫乎奉德爲齋貌然簡素非徒止於齊宿等例而已要必使其來裔奉承先業不累祖德之謂時必省歲一祀之典遠近宗支世世肅行中年天變墓齋人▣事僅形欠實一般悵歉雖然顧吾祖靈想山與川淑氣依舊自著矣何幸風浪之餘思潮復常將此而去可期昇平及時振起擴立大本忘私相勵同根互愛則報先昌後幷可得也僉族盍夫共勉乎此丁酉冬 不肖后孫朱洪謹撰注意之餘下入思潮復常四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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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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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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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 김제(金濟) 용강기(龍崗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己巳小春之下浣 金濟 己巳小春之下浣 金濟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기사년 10월 하순에 김제가 용강이라는 자호를 지은 최공을 위해 지은 기문. 기사년 10월 하순에 김제(金濟)가 용강(龍崗)이라는 자호(自號)를 지은 최공(崔公)을 위해 지은 기문이다. 최용강은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수강산(水崗山) 기슭에 살고 있었다. 산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땅이 기름지고 풍속이 순박하고 효자 효녀들도 많이 나오는 곳이어서 군자가 은거하며 현자가 노닐기에 좋은 선경(仙境)이었다. 바로 이곳이 최공이 사는 마을이며 그 마을의 이름이 바로 용강이었다. 최공은 그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던 그는 나이 90에 홍안(紅顔) 백발(白髮)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산수의 사이에서 사는 자신을 용강이라고 부른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김제는 찬탄하고 있다. 김제는 당시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춘추관사(春秋館事) 성균관사(成均館事)의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 적혀 있는 최용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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