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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存齋重建記泰仁治南島洞里有翼然高而顔以著存者我十一代祖主簿公諱寧之配宜人宋氏墓齋也 高宗去戊子春不幸失火廢墟每指點咨嗟矣去丙戌秋門長老命有司璟烈錠烈敏烈氏謀所以重建稍移旧墟(址)一門欣然莫不同聲遂聯名立案各自盡心出義錠烈氏爲多越明年丁亥春興土木使遠近諸族裹飯出役晨往暮歸不遑息肩纔逾月告功若是亟成初不預算而有若神助也苟非諸宗殫誠竭力烏能致此可知以此誠力何欲不遂而竊有所告焉夫齋宿於是齋者必先知著存二字何等鄭重而顧名義其於霜露感慕極其思誠敬視聽於無形聲僾然乎如在如見然後方可謂人與齋稱也不然外飭何益哉願我諸宗須熟思實踐胥勖相勵使名不爽義則其於保守斯齋也何有焉丁酉三月 日 十一世(代)孫圭禧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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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정기(鄭琦) 사포재기(沙浦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歲庚辰蜡月下休 鄭琦 歲庚辰蜡月下休 1940 鄭琦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0년 12월에 정기가 사포재의 재건과 관련하여 작성한 기문. 1940년 12월에 정기(鄭琦)가 사포재(沙浦齋)의 재건(再建)에 즈음하여 전주최씨(全州崔氏) 후손들로부터 부탁을 받고 작성한 기문이다. 사포재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사포(沙浦) 최봉하(崔鳳河)와 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의 합장묘가 있는 승주(昇州) 관아 동쪽 앵무산 아래 월산 언덕에 있다. 이곳에는 사포의 현손 남산(藍山) 최진홍(崔振弘)도 묻혀 있다. 일찍이 남원(南原) 주암(舟巖)에 있던 선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고가(古家)에 살던 사포는 인조(仁祖) 때 불운하여 더 이상 출사(出仕)의 길이 열리지 않자 이곳 앵무산 아래 쪽으로 낙향하여 사포정(沙浦亭)을 짓고 시문과 경사 공부에 전념하였다. 정기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사포의 후손들이 그 선조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인품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후손들이 열심히 정진하여 뒷날 사포가 내게도 후손이 있었구나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사포 최봉하의 자(字)는 인서(麟瑞)로, 전주최씨 중에서는 남원(南原) 방계(芳磎)에서 승주(昇州)로 내려온 첫 인물이었다. 이곳 승주에 사는 전주최씨의 시천조(始遷祖)인 셈이다. 한편, 이 기문의 맨 앞에는 율계집(栗溪集)에는 사포재가 월산재(月山齋)로 실려 있다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율계집은 정기의 문집이다. 정기(1879~1950)는 경남 합천과 전남 구례를 중심으로 강학과 수양에 힘썼던 유학자였다. 그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이어지는 노사학맥을 계승한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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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浦齋記 栗溪集中載以月山齋故沙浦處士全州崔公之墓在昇州治東鸚鵡山下月山之坡夫人延安車氏合祔玄孫藍山諱振弘祔于下裔仍環山而居香火省掃歲久愈虔今年春建齋五楹於外麓之稍平處於公沙浦亭舊址數帿也於斯可齊明餟食於斯可寓慕羹墻顔其楣曰沙浦齋仍亭號也旣落後裔春鎬璟鎬晳鎬洛永洛仁諸氏使門秀學林君叩方丈之峽徵記于不佞曰吾先祖以龍城古家遭 長陵盛際而落拓不遇遂絶意當世嘯傲山水間撰勝玆土築亭其中蒔花栽樹庤經儲史寤寐古人窮勝事樂性靈視儻來如浮雲之無有而其趾先裕後之謨足令後世繼今我闔宗食息皆府君漑根之報也至今篁林澗岸薖軸之芬尙彷彿於朝暮而况於軆魄之妥寄精靈之陟降豈無秋霜春雨之感乎此齋之所由起也願吾子之發揮其事以諗于來永也余三辭不獲乃言曰公之所以爲公沙浦亭一律其盡之矣其曰沙浦茅齋靜琴書坐夜分牕含龜島月簷宿馬峰雲味其言蕭㪚而淸婉淵永而傲兀世間榮悴得喪可喜可驚無一攖于中而悠然有亭亭物表皎皎霞外之想矣是豈操觚能言之倫之所可與議哉發於外如此存諸中可知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在他人猶然矧矣祖先矣乎今夫過遺墟而雲月白升丘壟而霜露凄其有不思者乎登堂而肅然如聞謦欬臨祭而僾然如見著存其有不敬者乎然是皆外耳惟祖先心是心不化於時不愉於俗早夜商講使當時之流風剩馥永有輝於來世則沙浦公其不曰予有後乎竊願崔氏諸公無以齋成謂足無憾而益勉其進於是者則幸遂書此爲記歲庚辰蜡月下休瑞州鄭琦謹記 龍城古家指烟村先生所居南原舟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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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최광환(崔光煥) 승유재기(承裕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八十四年五月日 崔光煥 檀紀四千二百八十四年五月日 崔光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1년 최광환이 지은 승유재기의 전사본 1951년 최광환(崔光煥)이 지은 승유재기(承裕齋記)를 누군가 연필로 옮겨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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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송기면(宋基冕)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5년 송기면이 지은 단비중건기 1955년 송기면(宋基冕)이 지은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소자(小字)와 대자(大字)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에 새기기 위한 목적에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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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村崔先生家錄後跋昔我先君子題叙烟村崔先生家錄後四十餘年先生八世孫世榮夢與氏與其大胤邦彦就舊錄正其舛譌而重刊之尤齋宋先生續題跋語其末有曰諸序跋中澤老最詳而其所稱引者亦甚重矣只以知幾云者爲小而似若不足以稱先生者然然則易何以曰知幾其神也耶澤老必有深意幸夢與問於其胤子夢與氏以是命余且索一言噫不肖幼無知識未嘗以此義奉質於家庭今於長者之問以何辭奉對也然朱夫子解易知幾之義只以言行中節纔過些子便不是知幾爲訓而臨川吳氏乃以穆生劉柳於去就之際能見幾與否爲說未知果合於易之本義而朱子又釋詩明哲保身之義曰明哲只是曉天下事理順理而行自然灾害不及其身今人以邪心讀詩謂明哲是見幾知微先占便宜如楊雄說以此而觀先生且觀先君子所以發明先生心事者世雖稱先生炳幾保身然先生之退在景泰辛未 顯陵賓天之促 魯山遜位之遽皆天數也非明哲所可推測惟天道虧盈益謙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難云者正與朱夫子易詩兩說相符然則先君子深意其在斯歟且念先君子示兒代筆有曰中庸聖賢相傳明道之書也下位傳述兼明士君子處世處變之義如素位而行明哲保身等語皆有感於所遭之世因以著訓垂戒於此跋又以正學稱先生盖其揭樓扁以存養者以中庸戒懼爲第一義殆是有聞於聖賢相傳之道而處世處變自中其節非若見幾知微先占便宜者然此先生之所以爲高而先君子之所以發明者有異於世人之見也歟小子愚矇不敢自信敢以是復於長者仍書其說以塞夢與氏之請云歲舍甲子孟秋上澣德水後人李端夏敬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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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 박팽년(朴彭年)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 朴彭年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 朴彭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451년(문종 1) 11월에 박팽년이 연촌 최덕지를 위해 지은 송별 시문집에 부쳐 작성한 발문. 1451년(문종 1) 11월에 박팽년(朴彭年)이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를 위해 지은 송별 시문집에 부쳐 작성한 발문이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조정의 많은 사대부들이 연촌을 추모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들을 작성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이미 40여편이 넘었다.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는 박팽년에게 시는 이미 지어서 책을 만들었으니 발문이나 적으라고 권유하였다. 높은 벼슬에 올라 축하시를 구하여 책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려고 하여도 그 일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는 연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시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연촌의 높은 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박팽년은 이 발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고, 회덕(懷德) 출신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갔다. 세종 때 신숙주, 최항(崔恒),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경학을 연마하면서 명망을 얻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박팽년을 포함하여 사육신이 사면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2백여년이 훨씬 지난뒤 1691년(숙종 17)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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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村▣▣(先生)遺[退]休時送別詩跋人有功名富貴能動一世而不可以得匹夫匹婦之心者又有卑巽謙退若不自勝而有足以負天下後世之望者是豈非人心不可以勢服而公議自有所在也耶今完山崔先生上書乞歸士林相稱道知與不知莫不欽慕夫使先生在朝其名聲爵位當不止此而人之欽慕者宜於是乎在今也退休田里已不與世相關而萬口咨嗟稱頌不已者何耶其所以感人心而負物望者有不在彼而在此也余於是局從先生有年日接談論固已服其高義頃者牢於職事阻濶數年矣今還舊局也則先生已告歸離別之情詎可言歟方欲賦詩以叙其意而泛翁氏謂余曰諸公有作卷已成矣子當跋其尾余開卷奉讀詩凡四十餘篇道先生出處之高斯文眷戀之意甚詳一一皆可傳於後也盖世之人有拜大官而求賀詩以傳後者請之勤而或累年不過數篇先生一朝罷官還鄕求以自晦而人自榮之爭先歌頌其夛乃至如是其感乎人心者可知余於是益信公議之不可誣也諸公之詩已足余不作可也遂書卷端云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知製 敎 經筵侍讀官兼春秋館記注官平陽後人朴彭年仁叟跋号醉琴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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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차한벽당운(次寒碧堂韻)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李顧齋 李炳殷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고재 이병은의 한벽당 차운시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이 지은 한벽당차운시(寒碧堂次韻詩)이다. 7언으로 한벽당에 올라 풍경을 읊은 것이다. '학사(學士)의 청풍(淸風)은 백세에 울리고 옥당(玉塘)의 흰 달은 천년을 비추네'라고 하였다. 이병은(1877~1960)은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승(子乘), 호는 고재(顧齋). 전북 완주(完州) 출생이다. 1892년(고종 29)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조희제(趙熙濟)의 『염제야록(念齋野錄)』에 발문을 써준 일로 임실경찰서에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1949년 향교위패매안(鄕校位牌埋安) 사건이 일어나자 전주향교의 위패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하였다. 전주의 남양사(南陽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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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寒碧堂韻逐水而東路盡頭一堂孤立鎭雄州橕楹無地登常怕繞檻皆山生更幽學士淸風鳴百世玉塘素月影千秋南來壯觀復何處黙數湖山多小樓李顧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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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송기면(宋基冕)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5년 송기면이 지은 단비중건기 1955년 송기면(宋基冕)이 지은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소자(小字)와 대자(大字)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에 새기기 위한 목적에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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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최병조(崔秉照) 경양재기(敬養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丁酉九月九日 秉照 丁酉九月九日 崔秉照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유년에 최병조가 지은 경양재의 기문. 정유년에 최병조(崔秉照)가 지은 경양재(敬養齋)의 기문(記文)이다. 최병조는 이 기문에서 선조 연촌선생(烟村先生) 최덕지(崔德之)가 전주에서 영암(靈岩)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 여러 대에 걸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조부인 성암공(誠菴公) 최상기(崔相琦)가 부안군으로 이사를 왔으며, 그 동편의 망기산(望旗山)에는 증조부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연암의 후손들이 그 망기산 아래에 재사(齋舍)를 짓고 모두가 연암의 아름다운 사적을 생각하고 후대에 길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서로 공경함을 합치고(合敬),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르고자(存養) 하였으니, 바로 이 '合敬存養'에서 '敬養'이라는 재실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기문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자(劉子)가 말하는 '敬在養神'의 의미와도 합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최병조는 끝으로, 선덕(先德)을 더럽히지 않고 잘 받들어 계승하여 후손들이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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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養齋記昔我先祖烟村先生自全州徙居靈岩累世遺蹟多在靈西若合敬存養乃其尤也王考誠菴公又來寓于扶安郡東望旗山卽曾王考與王考墓所也頃就山下營築齋舍圖所以各者竊念烟翁懿蹟百世所不敢忘而神人攸同也謹取合敬存養揭以敬養旣以寓慕亦合於柳(劉)子所謂敬在養神之義神之享否在人之敬不敬且農翁所稱存養之功密則取舍之分益明者何以三隅於齊戒也夫聚精凝神以願如在銜恩慕烈不虧先德可不謹存養而能之乎凡我後人盍相勖哉 丁酉九月九日後孫▣▣(幼學)秉照盥手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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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당선생제공찬시(月塘先生諸公讚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월당선생을 찬미한 시에 대한 글 월당선생제공찬시(月塘先生諸公讚詩)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본 글은, 월당 공을 찬미한 여러 사람들의 시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 시들을 하나로 모아 책으로 묶고, 본 글을 그 책의 서문으로 넣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당선생(月塘先生)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최담(崔霮)을 말한다. 전주 한벽당을 지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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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十四世孫銓宇 崔銓宇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최전우가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최전우(崔銓宇)가 전북 전주 토정리 명학동에 지은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이곳은 지금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재실 주덕재(周德齋)도 이곳에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 최전우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선조들의 깊은 뜻을 살펴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한 것을 후손들은 깊이 새겨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재실의 이름 '염수(念修)'가 나왔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 이 기문의 내용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지만, 문서의 작성자인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은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역시 류절재 소장 문서의 하나인 또다른 염수재기에 따르면 간지가 '辛'자인 해에 염수재를 건설한 것으로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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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재기(念修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전북 전주 주덕산에 있는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전북 전주 주덕산(周德山)에 있는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작성연대와 작성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염수재를 지은 시기를 '辛'자인 해로 밝히고 있는데, 유절재 소장문서 중에는 같은 염수재를 대상으로 지은 기문 '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를 통해서 볼 때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이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전주최씨의 재실 주덕재(周德齋)가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의 출처(出處)를 돌아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용기를 내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이것은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따라서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건데 우리 후손들은 이같은 선조의 덕행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덕을 닦고 실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선조를 잊어버리고 도덕을 땅에 떨어뜨린 후손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가정을 다스릴 때 나라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염수(念修)'라는 편액명은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에서 나왔다.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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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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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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