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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흥학계서(花樹興學稧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학문의 진작을 목적으로 전주최씨 문중에서 부안에 설립한 화수흥학계의 서문. 학문의 진작을 목적으로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중에서 부안(扶安)에 설립한 화수흥학계(花樹興學稧)의 서문이다. 글의 작성자와 작성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본문에서는 흥학계가 설립된 연대를 신축년 11월 초10일로 적고 있다. 그 작성시점에서 부안 전주최씨의 대수(代數)를 13대로 잡고, 연대가 4백년 되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신축년은 1901년이나 1961년 중 하나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 흉년을 거치면서 학문이 피폐되어 이를 바로 잡아 문풍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흥학계를 설립하였다. 흥학계 설립 당시 참여인원은 27명이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강신(講信)을 개최하였다. 강신 때에는 1경(經)은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하고, 시(詩)는 4율(律) 1장(章)으로 하되, 한편으로는 백대(百代) 지친(至親)의 정의(情誼)를 서술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도록 서로 권면한다면, 마침내는 추로(鄒魯)의 세상, 곧 공자와 맹자의 유풍(遺風)이 숨쉬는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해와 달은 다시 빛나고 산천은 다시 아름다운 색채로 가득하게 될 것이며, 세상 모든 곳 모든 사람들이 춘풍(春風)과 화기(和氣) 속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학문에 부디 매진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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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宋麒浩) 덕촌공휘희정사실발(德村公諱希汀事實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宋麒浩 宋麒浩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송기호가 덕촌 최희정의 사적을 모아 엮은 책자에 쓴 발문. 송기호(宋麒浩)가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의 사적을 모아 엮은 책자에 쓴 발문이다. 후손 최용성(崔龍性)이 덕촌의 사적을 모아 책자를 엮고 송기호에게 발문을 부탁하자 이에 응답하여 지은 글이다. 최희정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정지(汀之)이고 덕촌(德村)은 그의 호다.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의 후손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으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재였다. 여진족인 속고내(速古乃)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자 종성판관에 임명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적을 대파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덕촌은 사양하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그가 사는 곳 근처의 동축산(東笁山) 일대를 하사하였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 6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충과 효를 모두 극진히 한 셈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두문불출하면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일생을 마쳤다. 1878년(고종 15) 12월에 이르러 그의 뛰어난 충절을 기려 조정은 그를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 덕촌은 고부(古阜)의 서산사(書山祠)에 제향되었다. 이곳에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 권극중(權克中)을 제향하고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에 덕촌을 추배(追配)한 것이다. 그러나 서산사는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유허비만 남아 있다. 발문을 지은 송기호는 1828년생으로 고부(古阜) 출신이며, 1852년(철종 3)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에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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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村公諱希汀事實跋湖南瀛東古夛名賢而文武兼全忠孝雙行余於崔德村先生聞之詳知之實矣先生早志于學摳衣于趙先生靜菴文正公之門文正公知其爲當世偉器仍薦于 朝立功於北爲我東鎖鑰其亦學問上做出來者而先生之承 命將行養親之節貽書于家以兄孝弟忠勉之于伯兄單騎赴敵勦滅敵鋒反歸論功固辭不有乞其歸養父母 上嘉謙退特賜所居東笁山一區以尙其志先生拜辭還庭怡愉養親後連居憂廬墓六年以盡其禮忠旣著矣孝亦盡矣及夫己卯禍作之後杜門斂跡潛心性理以終其世盖其學有淵源出處得正文武兼才夷險全節昭然可知矣鄕先生沒而祭於杜已有古禮况乎先生之學也勇也節也才也後學之可以興感而崇奉者乎士林之不能忘者設俎豆於書山盖取諸德必有隣而靑霞權先生亦以沙溪金先生文元公之門人文章道德爲當世師表則兩先生幷躋其享乃是儒林之公議觀感之大體也余以崔先生之外裔僚友之記誦家庭之傳語聞之詳知之實而先生之雲仍龍性氏請余述之故不敢以不文辭而榮其爲文略述焉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宋麒浩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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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이단하(李端夏) 연촌최선생가록후발(烟村崔先生家錄後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歲舍甲子孟秋上澣 李端夏 歲舍甲子孟秋上澣 1684 李端夏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84년(숙종 10)에 이단하가 연촌 최덕지의 가록에 부쳐 작성한 후발. 1684년(숙종 10)에 이단하(李端夏)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가록(家錄)에 부쳐 작성한 후발(後跋)이다. 연촌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은 40여년 전에 간행되었는데 그때 그 서문을 지은 사람이 이단하의 부친 택당(澤堂) 이식(李植)이었다. 그 뒤 연촌의 8세손 최세영(崔世榮)이 아들 최방언(崔邦彦)과 함께 가전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중간본을 펴냈는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그 발문에서 연촌의 서발문 중에서 가장 상세한 것으로 이식의 것을 꼽으면서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우암은 다만, 그 중에서 지기(知幾)라고 하였던 부분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여 이식을 평가하면서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암은 어찌 주역(周易)에서 기미를 아는 것을 신(神)이라고 했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여기에는 택당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에 대하여는 최세영이 택당의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였다. 바로 이 글이 이식의 아들 이단하에 의해서 쓰여지게 된 연유이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당대에 고관에까지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결과적으로는 곧바로 불어닥칠 문종의 죽음과 노산군의 양위(讓位)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얼핏 보기에는 기미를 알아채고 화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하다고 하여 어찌 그같은 천수(天數)를 미리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식은 연촌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에 쓴 후서(後叙)에서 ?주역(周易)?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구절과,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모든 일이 연촌의 순수한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식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등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갔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좌랑에 기용되었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그 뒤 탈출하여 귀국했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한편 이식의 아들 이단하는 자가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 송간(松磵)이며,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에 들어가 숙종 때 서인으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난 뒤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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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권도용(權道溶) 귀후재기(歸厚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甲午梅雨節 權道溶 甲午梅雨節 1954 權道溶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4년에 권도용이 작성한 귀후재의 기문. 1954년에 권도용(權道溶)이 작성한 귀후재(歸厚齋)의 기문(記文)이다. 귀후재는 강선대(降仙臺) 아래에 있던 전주최씨(全州崔氏) 가문의 재실이다. 연촌(烟村)과 암계(巖溪)의 후손 최득호(崔得昊)와 최득화(崔得華) 형제가 천령(天嶺)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최씨가문은 그 뒤 향족(鄕族)이 되었다. 강선대는 그 아래 최씨가의 별장[崔氏莊]이 있던 곳으로, 덕유산(德裕山)의 남쪽이자 금원산(金猿山)의 북쪽에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일대로 추정된다. 계사년 봄에 최득화의 증손 최광호(崔光顥)가 아주 가까운 친척과 상의하여 이곳에 처음 들어온 이른바 입향조(入鄕之祖妣), 즉 자신의 증조부와 증조모를 위하여 묘 아래쪽에 재실을 지었다. 그리고는 권도용(權道溶, 1878-1959)에게 재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권도용은 귀후재(歸厚齋)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종추원(愼終追遠), 즉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지낸다면 백성들의 덕성이 결국에는 돈독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러한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기문을 지은 권도용은 일제 강점기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였다. 자는 호중(浩中), 호는 추범(秋帆)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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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厚齋記愼終追遠民德歸厚誠哉是訓也若單言追遠則愼終在其中矣夫盡誠於祖先廟墓一也然墓(廟)祭止於四代雖祧遷亦有限墓祭則可以下達於百世而不替故近墓之地必有一座明堂(宮)以爲齋宿之所藏器之室奠牲之廳盖不容已之事其重也可謂 於廟矣吾東尙焉其來已久近世德裕之南金猿之北降仙臺下有崔氏莊崔氏立望客山而烟村先生諱德之爲其顯祖烟村羣從兄弟遊國初儒林領袖陽村權文忠公門聞圃牧理學之訣其後有巖溪公連孫與其門孫石溪 命龍俱以文行著世居龍城十世孫得昊得華自天嶺移于此遂爲鄕族崔君光顥季公之曾孫也好學有風裁一見可知爲法拂之士也歲癸巳春與周親議爲入鄕之祖妣其墓下建數楹堅緻明敞而附翼略具介林同人盛熙請余名而記之名之曰歸厚齋諗之曰夫追遠而盡其誠則於人倫厚矣旣盡己之誠則人亦化而盡誠於其先矣如是則風俗漸趨于正矣風俗趨于正則民德安得不歸于厚乎抑又聞之祖述者遠宗其道憲章者近守其法凡爲崔氏子孫者苟能道烟村之道法巖溪之法兢兢奉持而勿失則庶稱膺(可劈)不匿永錫之慶其於齋舍維持不須言矣是又追遠之大者也其尙勉乎哉甲午梅雨節永夏權道溶撰四百二十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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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최인렬(崔寅烈) 극경재기(克敬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戊辰正月 日 九代孫寅烈 戊辰正月 日 1928 崔寅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8년 정월에 최인렬이 극경재를 중수한 뒤에 작성한 기문. 1928년 정월에 최인렬(崔寅烈)이 극경재(克敬齋)를 중수(重修)한 뒤에 현판을 새로 달면서 작성한 기문이다. 극경재는 정읍시 흑암동에 있는 두승산과 망제봉 사이에 있는 재실이었다. 특히 이 망제봉은 높이 138.8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읍현감이 부임할 때에는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서울을 향해 임금에게 배례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재실이 있던 곳은 기문을 지은 최인렬의 9세조 통사랑(通仕郎)공의 선영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비바람에 재실이 훼손되자 최인렬이 중수의 책임을 맡아 새로 재실을 지었다. 중수를 하면서 동쪽에 한 칸을 더 늘렸고, 고사(庫舍) 네 칸을 별도로 신축하였다. 그리고 처마에 달았던 예전의 현판을 새것으로 바꾸되 이름은 예전 그대로 '극경(克敬)'이라고 써서 달았다. 후손들에게 선조에게 공경하고 동족에게 공경하여 부디 공경함을 잊지 말라고 부탁하는 뜻이 담겨진 것이었다. 그래야 선조가 극경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한 뜻이 길이 후손에게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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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崗記世稱海有東三山神仙往往居焉謂其神仙云者壽考康寧能靜致遠{口+粲}霞於閬苑之謂故盤谷李愿歸焉隆中臥龍睡焉此人以歲名平家之綠野輞川之別業是因地以焉地靈與人傑若相有待以闡著者也湖之南有水崗山山不高而秀麗水不湶而淸洌地肥水甘風淳俗孝茂林脩竹擁簇左右嘉禾昇世隱映上下而况南有方丈三千粉代昇含嬌含態多笑於前東有瀛洲羅列兒孫侍立於几席間北有蓬萊磅礡雄嵬貯縕氣勢若將有所發前有涵泓大海晏不揚波上下天光證岩萬頃而風艫以艦往來浮沈舷聲漁歌有時淸亮益助逸與其可謂君子考槃之所賢人翺翔之處也於期山水之央卽龍崗崔公棲息之所里名爲龍崗也公得特秀之姿事父母克盡誠孝甘旨定省少無違誠及其愼終報本一道禮感古之稱孝者亦無過焉至几耋追思號慕無昇担括九十以慕者於斯人見之而紅顔白髮有㥜鶴襒緔絴於林泉杖屨於煙霞超然獨出於物外猗若山水間一仙儔其自號龍崗寔非偶然者夫己巳小春之下浣嘉善大夫禮曹參判春秋館事成均館事慶州金濟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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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村先生家傳詩文錄後叙昔在景泰間我 朝有淳德高節正學之士曰烟村崔先生名德之嘗由禁近出守州府又不樂而退歸靈巖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若將終身 顯陵卽位召拜藝文直提學明年冬又告老而歸同朝賢卿名士賦詩贐行以高其事且爲存養樓題識又先生家大人叅議公有壽有後一時多贊頌之作凡玆詩文筆跡崔氏子孫世守之甚謹及丁酉倭亂存養樓燬而簡編隨以散逸今其鄕人旣爲先生立祠祀之先生七代孫前叅奉珽又收拾燼餘詩文尙得九十餘首以圖不朽之傳乃以題跋之辭命植植竊惟先生純實之行著於 聖諭淳德也中歲納履遯跡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况兼有之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四年癸酉七年丙子 國家禍故相繼搢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 顯陵賓天之促而 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 世廟朝已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難豈規規焉審機逃禍者之足擬也今就是卷閱其人物則安平節齋之事不可言也若河東高靈泛翁四佳諸公勳名雖盛而靖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噫觀斯集者不但据其詩文知先生之所存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崇禎丙子七月之望德水後學 李植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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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송시열(宋時烈) 연촌선생유사발(烟村先生遺事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崇禎紀元之著雍敦牂暮春之初 宋時烈 崇禎紀元之著雍敦牂暮春之初 宋時烈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78년에 송시열이 지은 연촌선생유사 발문의 전사본 1678년(숙종 4)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연촌선생유사발(烟村先生遺事)의 발문이다. 물론 전사본(轉寫本)이다. 연촌은 최덕지(崔德之)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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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최민렬(崔敏烈)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壬申二月 日 十八代孫敏烈 壬申二月 日 1932 崔敏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2년 2월에 최민렬이 작성한 한벽당중수기. 1932년 2월에 최민렬(崔敏烈)이 작성한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이다. 한벽당(寒碧堂)은 태종 4년(1404)에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이 지은 건물로,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있으며, 전주팔경의 하나이다. 최담은 고려말 우왕 때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여 관로에 들어가 집현전 제학을 지냈다. 1398년 중훈대부 진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0년에 낙향하여 전주에 한벽당을 짓고 이곳에서 시와 글을 지으며 말년을 보냈다. 정자의 이름은 처음에는 월당루(月塘樓)라고 한다. 그 뒤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 이름이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 한벽당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건물은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1828년(순조 28), 1897년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이 중수기를 보면, 신미년, 즉 기문을 쓰기 한 해 전인 1931년 가을에 전주최씨가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중수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 공사가 완성되자 최민렬이 이 기문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문의 맨 끝에는 윤월구(尹月求)가 1933년에 글씨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한벽당 중수기에는 이 기문 외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1897년에 지은 글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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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碧堂重修記堂是寒潭上碧山隅之一小構而州三百年半千而名彌彰此曷故焉昔吾先祖月塘公之作是堂也解組歸來藏修於玉流講舍暇日逍遙管占煙霞玩心物理今觀其岩刻邀月臺尋梅逕百華潭光風霽月鳶飛魚躍等字可知已矣公之仕也旣爲賢相所知四子亦躋淸班前頭顯達盖未艾也乃中身勇退所樂者物外淸賞所交者一時名賢宜乎德孚當世福流後昆至于今輿誦是堂藉藉若前日事也堂是(之)重修歷世累度而屬玆世變不測尤當致意乃於辛未秋諸孫同議齊力因旧制而新其修益完而美矣窃嘗惟人之自修與奉先要知內外名實之分是堂之於公外也名也猶恐其墜失之若是矧乎將母誠孝接人謙恭公之生平大致爲內與實者豈敢不一心奉持寶爲世傳哉孝爲百行之源謙爲萬善之本惟孝與謙是究是圖在身身修在人人化九族雍睦子姓昌大亶其然乎願與僉宗進而念修乎公之實德永言配命自求多福祖烈孫業相得益章則是堂也安知不遍六洲久萬世而其名也因謹記而諗之云爾 壬申二月 日十八代孫敏烈謹記五百禩世守祖業而不失舊物者非賢不能耳今者崔斯文敏烈修此堂而記此文要以拙書藏之爲傳久之計懇求至三四予嘉其誠而副之癸酉八月下旬石邨癃廢人尹月求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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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敬齋記斗升之東望帝之下楚川之上卽我九世祖通仕郎公衣履所藏之地而因爲世藏之阡蜈蚣之洞舊有守齋建卽久不免有風之磨雨之洗棟搖而榱損者乃於某年月日宗議齊發俾余監重修之役役始於某年月日畢於某年月日向之搖者損者卽皆理整而又增一間房於東偏別築庫舍四間視旧益備揭扁於楣曰克敬名仍而板易盖累經重修而又修焉卽成長少以次在座乃諗于衆曰世之有此者亦多矣及其數世者盖寡及其十世則又纔難見及其百世則未之前聞豈皆其子孫之不肖而然哉秪爲一人營私百人解體一日懈怠終歲莫擧甚者尤而効轉轉至於爾我相推不復相問如有問之者不以爲痴則爲狂雖有善者亦無如之何矣請相告戒不至於此爲可也衆咸願以是言記之永垂于後余指楣揭克敬二字而曰克敬則將無不敬矣敬祖敬族尙矣至於執事而亦敬夫安有余所穪說之弊也前人名齋遺後之意備矣又何必贅爲咸曰凡人之情篤近而忽遠疑聞而信見且善言雖多而不厭亦不爲無助也於是遂撰次其言如右 戊辰正月 日九代孫寅烈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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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최규희(崔圭禧) 저존재중건기(著存齋重建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丁酉三月 日 十一代孫圭禧 丁酉三月 日 1957 崔圭禧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 3월에 최규희가 작성한 저존재중건기. 1957년 3월에 최규희(崔圭禧)가 작성한 저존재중건기(著存齋重建記)이다. 태인(泰仁) 관아의 남쪽 도동리(島洞里)에 날 듯이 높은 모양에 저존재(著存齋)라는 편액을 달아놓은 재실이 있는데, 바로 기문의 저자인 최규희의 11대조 주부(主簿) 최녕(崔寧)의 배우자 의인(宜人) 송씨(宋氏)의 묘재(墓齋)이다. 지난 1888년 봄에 실화(失火)로 재실이 소실되었는데, 1946년 가을에 문중의 장로가 유사(有司) 경렬(璟烈), 정렬(錠烈), 민렬(敏烈) 등에 명을 내려 중건을 논의하였다. 문중에서는 옛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짓기로 흔쾌히 결정을 하였고, 문중원들이 각자 출연하여 이듬해 봄에 토목공사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여만에 완공하였다. 편액에 쓴 '著存'이라는 말은, 귀신이 드러나고 존재하는 것이 마음에 잊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의미를 이 책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삿날에 방에 들어가면 애연히 자리에 모습이 보이는 것이 반드시 있고, 주선하며 문을 나가면 숙연히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고, 문을 나가 들으면 개연히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先王)의 효심으로 말하면, 눈에서 부모의 모습이 떠나지 않고, 귀에서 부모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마음에서 부모의 심지(心志)와 기욕(嗜欲)이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애모(愛慕)함이 극에 이르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고, 성각(誠慤)함이 극에 이르면 눈앞에 드러나서, 드러나고 존재하는 것이 마음에 잊히지 않는 법이니,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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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이병운(李秉運)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待中) 문성최공아지제단(文成崔公阿之祭壇)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崇禎後四庚辰三月二日 李秉運 崇禎後四庚辰三月二日 李秉運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이병운이 지은 고려문하시중문성공 최아의 비문 1820년(순조 20) 3월 2일 통훈대부행경기전령(通訓大夫行慶基殿令)을 지낸 이병운(李秉運)이 지은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待中) 문성최공아(文成崔公阿)의 옛날 비기(碑記)를 옮겨 적은 것이다. 옮겨 적은 시기는 알 수 없다. 한편 이병운의 본관은 한산(韓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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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주암종대 실기(舟岩宗垈實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君紀元四千二百八十年丁亥春澣 崔正謹 檀君紀元四千二百八十年丁亥春澣 崔正謹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7년 최정근이 작성한 주암종대실기 1947년 최정근(崔正謹)이 작성한 주암종대실기(舟岩宗垈實記)이다. 남원(南原) 북면(北面) 주암촌(舟庵村)은 연촌(烟村 崔德之 1384~1455) 선생이 일찍이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을 때 상택(相宅)하여 나무를 심고, 터를 닦고 집을 지어 자자손손 살던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암촌을 최씨주암동(崔氏舟岩洞)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808년(순조 8)에 친족 중에 간악한 자가 종기(宗基)를 방매(放賣)하여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수년 뒤에 이 터를 매입한 사람이 들어가 살게 되자 비로소 족종들이 방매(放賣) 사실을 알고 영읍(營邑)에 정소하였으나 돌려받지 못하였다. 그 뒤 100여 년 동안 서너 차례에 걸쳐 소송하였고 1934년에 최백규(崔白圭)의 주선으로 127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한편 1870년(고종 7) 주암사(舟巖祠)가 철거되면서 연촌(煙村)의 영정(影幀)을 봉안할 곳이 없었는데 종대에 1935년 새로운 각을 지어 봉안하였고 강당(講堂) 등을 일체 보수하여 모습을 새롭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주암촌은 남원도호부 지사방 이었으나 현재는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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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岩宗垈實記實記南原之北面舟庵村則文廟朝名賢先祖烟村先生嘗爲南原府使時愛其山水相宅遺后之所也而種樹成林營局養山修基作舍鑿地爲井子子孫孫繼繼承承以簪纓之族淸白傳家而世居此洞者年將至四百世已遠十三是以南原北面舟岩村惟以崔氏舟岩洞稱之有口者皆言有耳者皆聞古今帳籍昭昭載之門運不幸去戊辰年分族中有爲奸娟煽惑者以還退之意放賣宗基爲他人所有諸族漠然不知耶數年後買者突然入宅故宗族始知其放賣一齊聚會而還退之意詰之則暗買之人不肯還給故呈于營邑則題敎無非嚴截然渠自恃富行賂作奸終不還推自此以後路上行人猶有指點過墟之歎況此以崔爲姓者雖三尺童子知其人事者則無不含寃洒淚矣其後百餘年又爲訴訟數三次而未得解寃矣至誠所到金石可透理之當然也故去甲戌年族弟圭東誠力周旋者不啻數年之間而快爲復舊自戊辰至甲戌將爲百二十七年也三四世積寃之事一旦解之老少男女勿論遠近諸族咏之歌之舞之蹈之欣動天地抃躍之情豈盡形喩乎舊有烟村先祖影幀兼奉於舟岩祠而祠掇於 高宗庚午之邦禁乃別建影堂與士林俎豆者數十年矣今於宗垈之復舊也乃爲新建一閣而乙亥春告成成安影幀耳復舊之內外講堂及庫舍門廊一切修補面目一新噫玆豈非我祖先之靈黙佑於冥冥中所致乎凡我后承勿醉歡喜痛念前戒且思垂後以爲永世鞏固之計焉檀君紀元四千二百八十年丁亥春澣 后孫崔正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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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중랑장(中郞將) 최공용봉지제단(崔公龍鳳之祭壇)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崇禎紀元後四乙亥三月二日 顯宇 崇禎紀元後四乙亥三月二日 崔顯宇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최용봉의 제단 비문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최용봉(崔龍鳳) 제단의 비문이다. 비문은 1815년(순조 15) 최현우(崔顯宇)가 지었다. 글씨는 1955년 송기면(宋基冕)이 지었다. 제단을 다시 세우면서 글씨를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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