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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유소(儒疏) 통유팔역유림서(通諭八域儒林書)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當宁十年癸酉十二月十七日 當宁十年癸酉十二月十七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73년에 작성한 통유팔역유림서 1873년(고종 20)에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의 문중에서 작성한 글이다. 제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본 글은 전국 팔도에 있는 유림들에게 보내기 위하여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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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공안초(公案抄)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60년대 부안 전주최씨의 석동산 관련 산송 문서 1861년~1873년의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관련 산송문서(山訟文書)이다. 문서의 종류는 1861년(철종 12) 2월 18일 한성부의 관문, 1862년(철종 13) 6월 15일 회사관의 발사(跋辭), 1872년(고종 9)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1872년(고종 9) 8월 10일 부안현감의 서목(書目), 1872년(고종 9) 8월 8일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1873년(고종 10) 2월 19일 부안현감의 첩보, 1873년(고종 10) 2월 20일 부안현감의 서목, 1873년(고종 10) 3월 6일 부안현감의 첩보이다. 1. 1861년(철종 12) 2월 18일 한성부에서 전라관찰사에게 발송한 관문이다. 부안 최추환(崔樞煥) 등은 임금 거둥시에 위외격쟁(衛外擊錚)을 벌였는데, 김방제(金邦濟), 김홍제(金弘濟) 등이 최씨산의 송추를 작벌하고 분묘를 파내고 정려를 부순 일 때문이었다. 이에 '백년(百年)된 7개의 무덤을 한꺼번에 파낸 것은 일이 변괴(變怪)에 관계되고 정상 또한 흉악하고 참혹하니, 다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엄하고 밝게 조사하여 법대로 처치하라.'고 한성부에 판하(判下)했으니, 관찰사는 이를 봉심(奉審)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2. 1862년(철종 13) 6월 15일 회사관(會査官)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발사(跋辭)이다. 그 내용은,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송사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석동산의 산형(山形)을 살펴보면 산이 천(川) 자(字) 모양인데 동쪽 두 기슭은 김씨 산이고 서쪽 한 기슭은 최씨 산으로 누대 장사를 지내고 있다. 김소윤묘(金少尹墓)는 최산(崔山)의 서쪽 골짜기 아래에 있다. 최인감(崔仁鑑) 등의 선세(先世) 7총이 광중(壙中)이 파헤쳐져 거의 유골이 드러나고 사토(莎土)가 벗겨져 있으니 누군가 무덤을 파낸 형국이 확실하다. 김씨측에서 작벌한 최씨산의 소나무 값에 대해 최씨의 소장에는 5, 6만 냥, 김씨의 소장에는 70냥이라고 한다. 솔밭의 너비와 둘레를 볼 때 1만여 주(株)가 된다. 아름드리 소나무 1만 여주를 작벌한 것은 양심불량이고 7총을 파낸 것은 매우 패악스럽다.'고 하였다. 이어 최영권이 죄주기를 청한 김가 13사람에 대해 죄를 줄자와 용서할 자, 취조를 하지 못한 자 등으로 구분하여 조사관이 의견을 올렸다. 3. 1872년(고종 9) 2월 1일 전라관찰사가 부안현감에게 보낸 감결(甘結)이다. 형조에서 관찰사에게 보낸 관문에 대원위(大院位)가 '이 산송(山訟)은 위선(爲先)에 있지 않고 오로지 이익을 꾀하는 데에 있으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 다시 혹 이처럼 건송(健訟)하고 산송을 빙자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자는 모두 엄하게 다스리며, 징수하여 속공(屬公)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라고 하였으니, 현감은 분부대로 거행하라고 하였다. 4. 1872년(고종 9) 8월 10일 부안현감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서목(書目)이다. 김홍제 등에게 징봉할 송가(松價)를 조금 감해달라고 하자 전라관찰사는 감영에서 증감할 수 없으니 기한 내에 바치도록 하고 형지를 보고하라고 하였다. 5. 1872년(고종 9) 8월 8일 부안현감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첩보(牒報)이다. 1872년(고종 9) 8월 초8일에 부안현에서 전라감영에 보낸 첩보이다. 순찰사는 부안현에 감결(甘結)을 보내 김홍제(金弘濟)에게 송가(松價) 6만냥을 징수해야 하나 4만냥으로 줄여 주고 기한 내에 바치게 하였다. 이에 부안현에서는 김방제가 4만냥의 반도 내지 못했고 부안 김씨들의 사정도 좋지 않으니 나머지 2만냥도 일부를 줄여달라고 첩보하였다. 6. 1873년(고종 10) 2월 19일에 부안현감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첩보이다. 부안현감은 김홍제(金弘濟)와 최광권(崔光權) 등을 불러들여 관찰사의 감결대로 효유하였고, 전후의 송첩(訟牒)을 하나하나 바치도록 하였음을 보고하면서 양측의 주장을 기술하였다. 김방제는 '이번 송사는 1860년(철종 11)에 처음 시작되었고, 그때의 송사 문권(文券) 12장은 1861년 4월에 정계를 나누고 식송(息訟)을 하려고 최씨측의 문권(文券)과 함께 영문(營門)에 올려보냈다. 그 뒤에 근거할 만한 문권(文券) 6, 7장이 나와서 1872년(고종 9) 운현(雲峴)에게 정소(呈訴)할 때 원장(原狀)에 첨부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문권은 1860년(철종 11) 결송(決訟)할 때의 산지(山地) 입안(立案) 1건과 1861년(철종 12) 형배(刑配)될 때 원통함을 호소한 등장(等章) 26장(丈)이다. 이것을 현납(現納)하고 더이상 남아 있는 문권은 없다.'라고 하였다. 최광권(崔光權)은 '김홍제 등이 1860년(철종 11)에 송사를 일으킨 것은 실로 강희(康熙) 연간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최씨측이 김홍제가 수십 여장을 바쳤지만 중요한 문권은 감추고 있다는 주장에 따라 김씨 문권을 살펴보니 중요한 것은 없고 단지 영읍(營邑)에 올린 소장만이 있었다. 최씨의 주장 중 김씨측이 1860년(철종 11)에 송사(訟事)를 일으킨 것은 실로 강희(康熙) 무신년(1788 정조12)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하니 이번에 문권을 말소할 때 이것을 포함 시켜야 하며, 김홍제가 운현(雲峴)에게 호소할 때에 근거로 삼을 만한 누락 되었었던 문서를 점련하였다고 하니 김홍제를 별도로 엄히 신칙하여 문권(文券)을 현납(現納)하도록 해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7. 1873년(고종 10) 2월 부안현감의 서목과 전라관찰사의 제사(題辭)이다. 2월 20일에 부안현감은 김홍제를 가두고 문권을 현납(現納)하게 하였다고 서목으로 보고하였다. 전라관찰사는 문권을 바치는 대로 효주(爻周)하고 다짐을 받는다면 혹 감춰둔 문권이 있더라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속히 거행하라고 하였다. 8. 1873년(고종 10) 3월 6일 부안현감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첩보이다. 형조의 관문대로 소나무값 봉류전(捧留錢) 1만 냥을 조영소(造營所)에 올려보낼 것, 최광권에게 1만 냥을 받았다는 수표를 받아 영진고(營賑庫)에 둘 것, 김홍제에게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侤音)을 받고 풀어 줄 것을 지시하고 첩보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홍제를 잡아다 최광권이 보는 앞에서 효주하고 기송(起訟)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서 감영에 올리겠다고 하였다. 김홍제는 방송하고 효주한 송첩은 승소한 최광권에게 내어주려고 지통(紙筒)에 두었으니 양단간 처분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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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地圖) 피봉(皮封)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사회-지리-지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지도를 넣었던 피봉 지도(地圖)를 넣었던 피봉(皮封)이다. 문서가 흐트러져서 어느 지도를 넣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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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화수계안(花樹稧案)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사회-조직/운영-계문서 丙戌年 丙戌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6년에 작성된 전주최씨 종원들의 친목 모임인 화수계의 명단.○ 내용 1946년에 작성된 전주최씨(全州崔氏) 종원(宗員)들의 친목 모임인 화수계(花樹禊)의 명부다. 문서의 맨 앞에 병술(丙戌) 11월에 작성된 서문이 있다. 1946년에 작성된 전주최씨(全州崔氏) 종원(宗員)들의 친목 모임인 화수계(花樹禊)의 명부다. 문서의 맨 앞에 병술년 11월에 작성된 서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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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十一月 日花樹禊花樹禊序惟吾崔之居京鄕者其兼不千而相去旣遠會同又䟽生未面而死不吊者比齋在其視祖宗一視之義孰不瞿然而諸宗相與謀同盍飯一契以爲會數禮勤惇宗親族之地乎僉曰諸遂役一契各以花樹其志益深矣遠矣雖然窃有一言可以自勉而相勸者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又曰毋念爾祖聿修厥德孝友勤儉以繼先德之美頑率肆傲親爲鴆毒之戒如是久之吾門之曷不見是圖而必來取法者若如其未然酒盃以勸絃歌以樂優遊度日以爲高致抑末若然則此雖一門一族之事亦不能若補於風化之萬一之爾丙戌十一月 日古阜少尹公派 崔斗烈 字成局 癸未生 金貳拾圓 井邑郡德川面望帝里〃 崔禎烈 字乃化 乙酉生 金五拾圓 井邑郡凈雨面長順里全州烟村公派 崔圭南 字極老 癸亥生 金貳拾圓 完州郡所陽面明德里〃 崔圭珎 字化先 乙亥生 金拾圓 仝〃 崔吉鎬 字 辛卯生 金拾圓 仝〃 崔相鎬 字 丙午生 金五圓 仝〃 崔云學 字 辛丑生 金參拾圓 仝〃 崔洛善 字 丁巳生 金拾圓 仝全州烟村公派 崔秉良 字 甲寅生 金五圓 完州郡所陽面明德里崔秉先 金貳00圓 扶安郡山內面鎭西里(栢浦)崔秀洪 金五百圓 仝上崔東國 金貳百圓 仝上(蓮洞)崔東周 金參百圓 仝上崔秉鮮 租四斗 扶安郡保安面新月里崔化燮 扶安郡保安面新福里崔東廈 扶安郡山內面知西里崔東冠 扶安郡山內面雲山里崔東太 扶安郡山內面雲山里崔相南 仝上崔琇洪 仝郡仝面格浦里崔東濟 仝郡仝面堰浦崔東徹 仝上崔權烈 仝上崔秉順 金參百圓 仝上崔圭安 籾壹斗 仝郡仝面保安面新月里崔秉順 金壹百圓 扶安郡保安面新月里崔正烈 租壹斗 仝上崔圭玉 租壹斗 仝上崔順榮 金參百圓 仝郡山內面蓮洞崔斗洪 金六百圓 仝上崔尙榮 金參百圓 仝上崔成烈 金壹千圓 仝上崔允洪 金參百圓 仝上崔俊洪 金貳百圓 扶安郡山內面蓮洞崔東根 金參百圓 〃崔東元 金貳百圓 〃崔廷烈 金五百圓 〃崔東仁 金四百圓 山內面鎭西里崔朱烈 金貳百圓 〃崔福烈 金參百圓 〃崔京烈 金貳百圓 〃崔秉日 金四百圓 山內面栢浦崔翼洪 金壹千圓 〃崔東翼 金壹千壹百圓 〃崔秉坤 東翼弟 金貳百圓 山內面鎭西里崔秉周 金五百圓 山內面栢浦崔基洪 金五百圓 〃崔秉學 金參百圓 〃崔秉坤 金四百圓 〃崔秉浩 金參百圓 山內面栢浦崔東助 金參百圓 〃蓮洞崔暻烈 〃旧鎭里崔鎭烈 〃崔觀烈 〃〃崔圭甲 〃〃崔圭喆 〃〃崔圭泰 〃〃崔圭實 山內面旧鎭里崔喆鎬 〃〃崔秉斗 〃〃崔昌烈 金參百圓 保安面新月里崔圭連 〃〃崔秉哲 金壹千圓 〃〃崔成烈 〃〃崔秉濟 京城府崔秉瑢 京城府崔秉錫 茁浦面茁浦里崔秉玉 〃〃崔秉八 井邑郡井州邑水城里崔德洪 金貳百圓 扶安郡保安面外浦里崔秉燮 金貳百五拾圓 山內面蓮洞古阜少尹公派 崔秉善 金壹百圓 扶安郡茁浦面五亭里崔東權 金貳百圓 扶安郡山內面蓮洞崔圭埈 茁浦面南面里崔壬煥 〃〃崔秀洪 〃〃崔秉燮 特减 〃〃崔判奉 〃茁浦里崔秉澔 字孝明 籾五斗 舟山面聖德里崔 字允明 籾貳斗〃〃崔仁坰 籾五斗〃〃崔光烈 金貳百圓 舟山面聖德里崔 字日奉 金壹百圓 〃富谷里崔七煥 籾拾壹斗 〃〃崔暻煥 籾貳斗 〃〃崔 字贊京 籾壹斗 〃〃崔 字今石 籾拾斗 〃〃崔洪煥 籾參斗 〃〃崔圭煥 籾壹斗 〃〃崔學道 金壹百貳拾圓 舟山面富谷里崔東喆 籾壹斗 〃〃崔八煥 籾貳斗 〃〃崔秉基 金貳百圓 〃〃崔學洪 籾壹斗 〃〃崔今烈 金壹百圓 〃〃崔玉煥 籾貳斗 〃〃崔興煥 籾參斗 〃〃崔 字學先 籾拾壹斗 舟山面富谷里崔 字判南 籾參斗 〃〃崔春煥 籾貳斗 〃〃崔濟洪 金壹百貳拾圓 〃〃崔承煥 籾貳斗〃〃崔斗煥 金壹百貳拾圓 〃〃崔允煥 籾貳斗 〃〃崔龍煥 籾參斗 舟山面富谷里崔 字應八 籾貳斗 舟山面富谷里崔吉洪 籾拾斗 保安面月川里崔東宣 籾五斗 下西面月浦里崔秉斗 籾四斗 〃〃崔永烈 〃〃崔秉淵 〃金光洞崔秉燮 〃〃崔成烈 〃〃崔秉一 下西面金光洞崔孟烈 〃衣服里崔 字京辰 〃老谷里崔 字一昌 〃〃崔圭宣 〃石上里崔圭錫 〃〃崔仁洪 上西面長東里崔章洪 〃〃崔文洪 上西面長東里崔秉運 上西面通井里崔秉式 〃〃崔秉熙 〃〃崔秉玉 〃〃崔秉圭 〃〃崔秉武 〃〃崔東俊 〃〃崔汝洪 籾貳斗 上西面鳳岩里崔大洪 籾貳斗 〃〃崔守洪 金貳百圓 〃〃崔春洪 籾貳斗 〃豊浪洞崔禹洪 籾參斗 〃〃崔八洪 籾四斗 〃〃崔秉福 籾參斗 〃〃崔忠烈 籾四斗 〃〃崔福烈 籾七斗 〃〃崔興烈 籾參斗 〃〃崔亨烈 籾參斗 〃〃崔閏烈 籾貳斗 〃〃崔秉哲 籾五斗 〃〃崔秉兌 籾四斗 〃〃崔善洪 籾貳斗 〃〃崔秉錫 籾貳斗 〃〃崔秉浩 籾貳斗 上西面豊浪洞崔垌洪 金壹百圓〃〃崔秉鎰 籾拾五斗〃〃崔秉斗 籾貳斗 〃〃崔秉鶴 籾四斗 〃〃崔判烈 金四百圓 〃優德里崔 字判玉 籾貳斗 〃鳳隱洞崔秉湊 籾七斗 〃甘橋里崔石述 金貳百六拾圓 〃〃崔東月 金壹百圓 〃木浦里崔南烈 籾貳斗 〃〃崔斗洪 籾貳斗 〃竜東里崔周洪 籾壹斗 〃〃崔宗煥 籾貳斗 〃竜西里崔昌烈 籾壹斗 〃星岩里崔秉福 籾貳斗 〃長東里崔仲煥 籾四斗 下西面晴湖里崔基洪 籾貳斗 〃金山里崔東穆 籾參斗 上西面古機里崔重洪 籾壹斗 〃竜西里崔昌燮 〃甘橋里崔秉均 金參百圓 扶安邑蓮谷里崔 字守奉 金貳百圓 〃〃崔如洪 金貳百圓 〃〃崔椅洪 籾四斗 〃外葛里崔秉明 金貳百圓 〃〃崔麟洪 金貳百圓 〃內葛里崔淑洪 籾拾斗〃茅山里崔得洪 籾五斗 〃〃崔國洪 籾五斗 〃〃崔禹洪 籾五斗 〃〃崔致洪 籾參斗 〃〃崔成烈 扶安邑茅山里崔順洪 金參百圓 〃〃崔春榮 〃內葛里崔壽榮 〃瓮井里崔秉枏 金五百圓 〃〃崔致烈 〃〃崔甲龍 〃〃崔秉坤 〃〃崔丁權 〃 內葛里崔東烈 籾拾斗 〃行中里崔俊烈 金壹千五拾圓 扶安邑內崔秉文 〃 外下里崔貞烈 金貳百圓 〃瓮井里崔周烈 金貳百圓 〃〃崔乃洪 籾四斗 東津面弓月里崔三烈 籾參斗 井邑郡凈雨面山北里崔秉豊 籾七斗 東津面成根里崔秉河 籾拾斗 〃〃崔秉仁 籾拾斗 〃〃崔秉三 籾六斗 〃〃崔秉亢 籾四斗 〃〃崔相烈 籾參斗 〃〃崔甲烈 籾參斗 〃〃崔敬烈 籾五斗 〃〃崔東烈 籾壹斗 〃〃崔贊烈 籾參斗 白山面玄湖里崔雄烈 籾七斗 〃〃崔秉禹 籾五斗 〃〃崔琴烈 籾參斗 〃〃崔秉洙 籾四斗 〃〃崔水烈 籾參斗 〃〃崔俊烈 籾參斗 〃〃崔璋烈 籾參斗 白山面玄湖里崔秉玟 籾拾斗 〃〃崔洪烈 籾五斗 〃〃崔明烈 籾五斗 〃〃崔興烈 籾貳斗 〃〃崔柱烈 〃〃崔鎭洪 籾五斗 井邑郡永元面豊月里崔秉燮 井邑郡 〃〃崔象煥 籾五斗 井邑郡永元面陞士里崔在煥 井邑郡 〃〃崔正煥 籾六斗 井邑郡德川面佳井里崔秉福 籾參斗 〃〃崔周洪 籾貳斗 〃〃崔載洪 籾參斗 〃〃崔秉順 籾六斗 〃〃崔 字宗星 籾參斗 〃〃崔寬珍 籾參斗 白山面梧谷里崔秉國 籾四斗 〃平橋里崔 字長守 籾參斗 井邑郡永元面豊月里崔昌洪 金五百圓 白山面鳳洞崔鍾云 金參百圓 白山面竹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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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잠헌보감(朝鮮簪獻寶鑑) 관제편(官制篇) 초(抄)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조선잠헌보감 관제편의 내용을 베낀 문서. 조선잠헌보감(朝鮮簪獻寶鑑)의 관제편(官制篇)에 실려 있는 내용을 베낀 문서이다. 조선잠헌보감은 1914년에 초산서고암원당(楚山西考巖院堂)에서 개간(開刊)하였으며, 순흥안씨, 죽산안씨, 함종어씨, 남원양씨, 청주양씨, 여양진씨, 담양국씨 문과편, 시산경씨 음사편. 단군이래 조선까지의 역사, 인물, 각 성씨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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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전주최씨(全州崔氏) 송애공파(松崖公派) 문중규약서(門中規約書)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사회-조직/운영-계문서 西紀一九九0年 留節齋 西紀一九九0年 1990 留節齋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90년에 유절재(留節齋)에서 작성한 송애공파 문중규약서. 1990년에 유절재(留節齋)에서 작성한 송애공파(松崖公派) 문중규약서(門中規約書)이다. 송애공은 월당공(月塘公) 최담(崔霮, 1346~1434)의 아들 최광지(崔德之)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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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주덕산(全州周德山) 문성공세사단비체수비줄의록(文成公歲祀壇碑遞竪費出義錄)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용하기 全州崔氏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전주 주덕산 문성공세사단비체수비출의록 전주(全州) 주덕산(周德山) 문성공세사단비체수비출의록(文成公歲祀壇碑遞竪費出義錄)이다.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세사단비(歲祀壇碑)를 교체하여 세우는 비용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한 것이다. 출의록에는 기사(紀事)와 범례, 좌목이 있는데 종지(宗支)・노소(老少)를 구분치 않고 출연금의 다과로 인명을 작성한다고 하였다. 47명 3500원을 출연하였다. 주덕산은 현재 완주군 소양면(所陽面)에 있는 산으로 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장사 지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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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周德山文成公歲祀壇碑遞竪費出義錄紀事夫爲人之道明義理行事體踐事實而言也有事體事實之地不可無財政而吾崔之居扶安者已十餘世先事之當行者繼年續出而吾門之事情素尠貯蓄之財諸族中亦罕秒饒之力不意中年兼以山訟數百載支離財政之蕩渴已無可論惟諸族之誠意愈久益熱可以能踐事實矣吾門之事山訟進行中自全州以下兩處齋閣重修間行石役家垈重建寒碧堂及遺墟閣重修而惟玉流洞遺墟傳來草堂及附屬山坂秉心族固居數十載尙不還完故姑未修整然可謂每年一二次諸族中醵出用則孰不有惜其財之心哉是乃當行事體之故也今又 文成公歲祀壇碑歲月滋久石面硉矶今玆遞竪經費金諸族今又出義而一以來彰其誠意一以發興後來之誠心之議欲致剞刻懸板矣今且未遑故姑爲一一載錄于冊子以爲永遠周覽之資而亦不無吝其財而忘其先蔑其義理者以若如彼之人閱此冊子之時倘無愧汗于面哉後日其人之子孫者覽此而果何如乎勉之諒之凡例一文成公歲祀壇碑遞竪費金出義錄也一事當一定中合錄而各派事情不同故但以提學公派載錄事一本件以收金主意故不計宗支行之高低年之老少但以金額出義多寡收錄事但同等時循其序事一當有會計簿然錄之末端人員數及金額詳錄事一或有誤生時其幾次張幾行中以某字正誤等一一詳細記入于凡例下事座目姓名 出義額 住所崔墀洪 壹千煥 山內面栢浦崔洪麒 五百圜崔翼洪 五百圜崔秉浩 四百圜崔秉周 四百圜崔秉坤 四百圜崔秉先 四百圜崔秉龍 四百圜崔秉炫 四百圜崔道洪 參百圜崔德洪 貳百圜崔秉學 參百圜崔秉春 參百圜崔斗烈 參百圜崔今烈 貳百圜 山內面栢浦崔東仁 參百圜 山內面鎭西崔福烈 參百圜崔京烈 參百圜崔在烈 參百圜 山內面 栢浦崔昌烈 參百圜崔甲烈 五百圜 東津面成根里崔順烈 參百圜崔秉仁 貳百圜崔永烈 貳百圜崔東烈 貳百圜崔圭淳 貳百圜崔敬烈 貳百圜崔喜烈 貳百圜崔相烈 五百圜 井邑郡淨雨面墻內里崔銓奎 五百圜 永金里崔乃洪 五百圜 東津面弓月里崔銓根 五百圜 金堤郡鳳南面崔長洪 五百圜崔達洪 五百圜風浪洞崔秉日 壹千五百圓崔南淳 七百圓崔秉玉 六百圓崔秉圭 四百圓崔秉云 四百圓崔秉植 四百圓石堤門中崔秉汶 五百円崔秉吉 六百円崔東烈 壹千円崔善京 五百円崔秉仁 貳百円崔秉云 參百円崔秉八 四百円計三千五百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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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색조출급기(色租出給記)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용하기 庚戌四月 庚戌四月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경술년 4월부터 11월 10일까지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색조출급기. 경술년(庚戌年) 4월부터 11월 10일까지 부안(扶安)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한 색조출급기(色租出給記)이다. 색조를 출급한 사람들의 성명과 정조(正租)의 수량, 이자 등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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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二月十八日 漢城府關文(省略)壬戌六月十五日所招跋辭爲等如各人等招辭是置有亦蓋此山一訟厥有層節積年擾鬧無異吳楚之爭牒歷世怨嫌不啻越秦之視瘠屢犯蹕路是非各歸一邊互陳狀辭曲直不待兩招是如乎先審山形更詳輿論則席洞之山斗起一峰向南之麓列如川字東二麓爲金山西一麓爲崔山累累入葬世世聚骨是乎所今此少尹墓在於崔山之西合谷之下而東邊有崔仁鑑等先世六塚西邊有崔榮權之高祖一塚或掘壙中幾至屍骸或去莎土纔經分寸此則掘塚之形止也松楸段大者如柱小者如椽長養蓊蔚延袤廣濶樵牧之所指點行路之所健羨是去乙拓開墓門斫去山麓此多彼寡雖難準信執端折衷庶可斟量崔狀五六萬云者頗近增価金招七十兩云云者亦涉減竈執此幅圓較彼松田則竝其大小洽爲萬餘株是乎乃根之見在者少掘去者多而已掘者爲莎所塡摘奸時猝難執數以若臆料不可質言此則斫松之大槪也斫彼萬株連抱之松已是不良掘此七箇枯骨之塚尤極絶悖竊念七月短宵之時非獨辦之事而掘律恐或及已諸金具曰不知是乎乃今見崔榮權擊錚爰辭則金邦濟金弘濟金性豊金相翼金基豊亟施一律金文濟金鼎奎金道豊金致長金白烈永爲遠配云矣及査庭性豊文濟互相變幻移易首從者有違審愼分叱除良一査五首亦非穩例故想像擧措參互供辭則始終主張者金邦濟也爛漫和應者金弘濟金性豊金相翼金基豊也隨後助力者金鼎奎金道豊金致長金白㤠也金弘濟金相翼等段旣不在家託言上京而許多綢繆都在兩人此則首從之分介也金禎瑝段設如渠供旣掘席洞之七塚且掘鹽倉之一坏路固遠矣力亦單矣一猶雇人七豈獨辦於說不去於理無當爲先之心苟能畜積鳴金之時何不摸着是如隱喩敢乘當配之機有此代現之擧究其設心極爲兇獰是乎旀金白㤠段觀其貌樣聽其言辭未免蒙騃合有參恕是乎旀以被掘七塚言之世歷四五年近二百屍骸有無固難的知還爲封築各自守護恐合穩當是乎旀第其息訟亶在限界自少尹墓前後左右各定步數使之守護是乙遣松楸段屬之崔民未知何如是乙喩惟竢 處分是乎旀金順濟上京不還未得取招金用均金鎭年等自吏役隨行見擯於諸宗不得參涉於宗事故崔民擊錚原情中初不列名云者其勢似然金邦濟以下十二人段仍爲牢囚囚徒成冊修正上 使爲乎旀山形圖畵摘奸記條列粘付于査案末端緣由牒報事會査官行郡守行府使報巡營--甘結扶安卽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道內扶安縣崔光權金邦濟等山訟査案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山訟者爲先血爭之事而今此山訟心不在於爲先計專在於牟利倫理之斁絶俗習之駭悖莫此爲甚分叱除良崔松金斫營邑之査案自在是去乙敢以松価不報之計藉以金山還掘之說者究厥心腸尤極狡惡同松価刻期督捧督捧捧留報來以待 處分是遣復或以此等事健訟爲習憑藉山訟計在財利者一倂嚴繩懲捧屬公之意著爲定式事奉 分付玆以發關爲去乎到卽時星火擧行爲旀先從松価數爻而枚擧回移以爲入 鑑受處分之地宜當向事右關全羅道觀察使同治十一年二月初一日--甘結扶安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幷爲入 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萬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送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癸酉二月初四日兼使--扶安縣監書目本縣民金弘濟等所納松価幾許間裁減事處分行下狀同治十一年八月初八日行縣監鄭松價之定數營亦不可增減是在果大抵以其數不可擬議更加嚴督期於不日收屬後形止馳報向事壬申八月初十日使--壬申八月初八日爲牒報事前矣到付使甘結內節該本縣民金弘濟處崔民松楸價因當依京飭以六萬兩徵捧而二萬兩特爲減數以四萬兩期於限內畢刷後馳報亦敎是置今此松價數旣夥多京 營關飭不啻申嚴其所奉行有不敢毫忽故該門長金邦濟劃卽捉致聚會族黨同松價四萬兩依 甘敎使之官庭排數繼又嚴督靡不庸極其間所捧或爲一萬九千四百二十五兩也 甘飭之限已過屢日減定之數未滿半數自願擧行殊甚悚悶是乎矣愽收公議細探金民情勢則扶寧之金雖遍於一鄕少尹之族不過數十家而就其中僅可稱饒者只爲二三人而已餘皆貧窶之類耳今番近二萬之辦納未嘗不彈竭其力則目下事勢殆同弩末而同松價二萬兩之特減寔出於 旬宣恤隱之 德意則在渠更何希覬在邑恐難請減而以今未由之勢實無準捧之道故不避猥屑細由據實牒報使敎是參量事勢同松價幾許間 特爲截減一以爲民情生成之澤一以免邑事葛藤之弊事 處分行下爲只爲巡營--癸酉二月十九日爲牒報事卽得到貴移刑曹關據使甘結內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甘結是置有亦本縣民金弘濟崔光權等竝令招致謹將甘辭仍各曉諭前後訟牒一一責現於金弘濟處則其所告內今此訟斷始起於去庚申年間而同決訟時文券十二丈其翌辛酉四月日因營甘分界息訟次幷與崔隻文券而上送營門仍爲未推是乎乙遣其後可據文券六七丈昨年間呈籲雲峴時粘連原狀以上矣未承題敎旋有矣身押付完營之處分蒼黃赴捉之際果未知狀卷之何處下落而目今矣身處留在之卷只是庚申決訟時山地立案一卷辛酉刑配時卞誣與松価寃懲呼訴等狀二十六丈故玆以現納而更無餘存是如爲乎旀崔光權所告內金弘濟等之庚申起訟實因於康熙年間僞牒留在之故而哲廟朝判決嚴明之有刑配之典猶不知戢出沒京鄕惹起鬧端矣今番京營關敎深軫後弊前後文券現納使之爻周無敢更鬧之意捧侤音上送是去乙噫彼弘濟又生後日售奸之計前後訟牒緊者深藏歇者現納而若論其緊切之券則其一再去戊申年爲始留傳訟券也其二庚申山地圖尺本邑立案京營完文也其三前後鳴金原狀及京營關文也其四自庚申至壬申 營邑呈狀及奪去崔民議狀手標等券也一一自官庭嚴飭現納矣等所見妻使之爻周然後可杜後弊是如爲有置蓋此前後訟券之爻周寔出於杜後弊之處分則自邑擧行有不容疏忽是如乎金弘濟所納之券雖爲數十餘張而崔民所供之中旣以緊藏歇現爲告故果爲訴考金券則初無立落緊切之案只有營邑尋常之狀以若積年互相勝負之訟豈無得失可據之蹟哉緊藏歇現果如崔說分叱除良崔說中金民等之庚申起訟實緣康熙戊申僞牒留在云者於此可驗而其所日後更鬧之計不見是圖今若任他匿券不入於爻周則恐難免不審之責故前後訟牒嚴加申飭使之逐一現納則惟彼弘濟只懷落科之憾瞀不畏法自同几肉屢度督現一直抱內雖以 雲峴呈籲時可據文券粘連遺落之說觀之計出粧撰極涉痛惋而文券捧侤反致葛藤其在奉 分付擧行之道事甚憂悶乙仍于同金弘濟嚴囚緣由槪報使敎是別般 嚴飭現納文券事處分爲只爲巡營官--扶安縣監書目本縣民金弘濟嚴囚現納文券事緣由狀同治十二年二月二十日行縣監 鄭所謂文券隨所納一一爻周亦捧侤音則設或有如干藏置之文券焉敢更起卽速擧行向事癸酉二月卄三日使--癸酉三月初六日爲牒報事卽到 使甘結內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 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後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柳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亦敎是乎等以本縣民金弘濟卽全捉待其前後訟牒使之現納崔光柳所見處一一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粘付上使而同金弘濟放送爲乎旀爻周訟牒段依例出給得訟民崔光權是乎乙喩留近於紙筒是乎乙喩緣由牒報兩端間恭俟處分爲置乎事報巡營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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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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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산(席洞山) 산송청원서(山訟請願書)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3년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석동산 산송 청원서 1923년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석동산(席洞山) 청원서이다. 먼저 석동산 산송 사적(事蹟)을 기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7년(고종 34)에 김씨측에서 소송을 제기하였고, 1898년(고종 35) 관찰사 이완용(李完用)이 김씨측을 옹호하여 식송(息訟)을 핑계로 산지를 김씨측에 나누어 주게 되었다. 이때 두 집안의 송축(訟軸)은 모두 불태웠고 판결서 5건과 다짐(侤音)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 1909년 측량 지적계를 농상공부에 냄으로써 각자 경계를 지키게 되었는데, 최씨측에서 1921년 2월 간벌(間伐)을 하자 김씨측에서 군청(郡廳)에 이의를 신청하였고 7월에 경찰주재소에서 대질하여 김씨측은 최산(崔山)과 무관하다는 판명을 받았다. 8월에 신고(申告)를 하고 9월에 전지(剪枝)를 하자 김씨측이 다시 정읍(井邑) 재판관(裁判官)에게 호소하였고 5회 대질 끝에 소송은 정지되었다. 그런데 10월 18일 측량기사 박태종(朴泰鍾)이 측량을 할 때 김규상(金珪相) 등이 산을 점유하려고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1922년 2월 도청(道廳) 산림계(山林) 주임(主任)의 조사, 1923년 8월 23일에 총독부(摠督府)의 기사 량뢰(簗瀨)와 도청직원 권영욱(權寧旭)의 산형(山形) 조사, 묘소와 비문(碑文) 조사를 거쳐 24일, 25일에 군청(郡廳)에서 최씨측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였다.' 라고 하였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이 입장된 년대, 최씨 소유라는 옛 문적의 증거, 옹암 입장(入葬)시 소유 상태, 산지에서의 벌채와 식수 유무, 그간의 소송 전말에 대한 문답과 제반 증거 서류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최씨측 청원서 내용이다. '최씨측의 모든 문축은 1898년(고종 35)에 남김없이 태웠는데 그때 참관했던 신동영(辛東泳)의 귀뜸으로 김씨측이 긴요한 문축 몇 장을 감추었다가 오늘날에 사용하는 것이라며, 이것이 최・김(崔金) 양가가 다시 산판(山坂)으로 분쟁을 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조사원(調査員)이 김씨측의 문축(文軸)에 따라서 최산(崔山)의 전국(全局)을 김씨에 빼앗아 주었으니 원통함을 헤아려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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