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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48)가 지난봄 화답한 시를 보여주었는데 도기서향49)의 말이 있기에 삼가 차운하여 은혜에 사례하다 貞齋示以昨春所和詩 有道氣書香之語 奉次謝惠 누가 청산에 머물며 양기 회복 기다린다고 하였나 棲碧誰言俟復陽눈앞의 상황은 그저 빛을 감추기에 알맞다네 眼前只可自韜光원회가 세 번 핀 영지 슬퍼한 일50) 흉내내고 效嚬元晦悲三秀파선이 하늘 한쪽 미인 바라본 일51) 공연히 생각하네 空憶坡仙望一方어떻게 도기로 지극한 즐거움을 생기게 하겠는가 道氣那將生至樂서향으로 풍진을 씻어내기 어렵다네 書香難把掃塵妨시정이 진중하니 어찌 부응할 수 있으랴 詩情珍重何能副남은 생애 공부하기 바빠 한탄스럽구나 堪嘆餘年著力忙 棲碧誰言俟復陽? 眼前只可自韜光.效嚬元晦悲三秀, 空憶坡仙望一方.道氣那將生至樂? 書香難把掃塵妨.詩情珍重何能副? 堪嘆餘年著力忙. 정재(貞齋) 김종락(金宗洛, ?~1953)의 호로, 자는 주백(周伯)이다. 김택술이 그를 위해 지은 제문이 《후창집(後滄集)》 권16에 보인다. 도기서향(道氣書香) 도기는 도인(道人)의 기상을 말하고, 서향은 학문의 기풍을 말한다. 원회(元晦)가……일 원회는 주희(朱熹)의 자이다. 주희가 젊은 날 운당포(篔簹鋪)에서 쉬다가 벽에 "빛나는 영지여, 한 해에 세 번이나 피었네. 나는 홀로 무엇을 하였기에, 뜻이 있으나 이룬 게 없는가.[煌煌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고 한 혜강(嵇康)의 〈유분시(幽憤詩)〉가 적힌 것을 보고는 자신의 뜻과 같다고 비통해하였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파선(坡仙)이……일 파선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별칭이다. 그가 지은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인을 바라보도다.[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古文眞寶後集 卷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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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에. 농암의 시20)에 차운하다 除夕 次農巖韻 눈 남아 있고 달 흐린 섣달이 끝나는 때 雪殘月黑臘窮天가물거리는 찬 등불에 근심스레 앉았네 耿耿寒灯坐悄然수세함은 내가 옛일 따른 것 아니나 守歲吾非追故事오십팔 년의 세월이 지나니 서글프구나 堪悲五十八過年밤 깊은 하늘에 과암 노인 찾다가 果叟相尋夜久天농암 시의 여운을 들으니 귀에 쟁쟁하네 農詩遺韻聽鏗然은근히 밤을 새는 것은 무슨 뜻인가 殷勤達曙知何意육십의 나이 동갑이기 때문이라네 爲是同庚六十年옛날 청년 시절 생각하니 어제 같은데 憶昔靑年如昨天되려 머리털 보니 하얗게 분분하구나 却看鬢髮雪紛然어찌 생각했으랴 하나도 성취한 것 없이 豈料無一成就日칠십 가호 마을에서 가장 노년일 줄을 七十家村最老年생사를 모두 하늘에 맡겼으니 都將生死聽於天한 생각으로 앞으로는 평탄하리라 一念前頭坦蕩然오직 삼려는 소원 잊기 어려우니 惟有三閭難忘願구가편에서 불로장생하고 싶어 했지21) 九歌篇上度長年 雪殘月黑臘窮天, 耿耿寒灯坐悄然.守歲吾非追故事, 堪悲五十八過年.果叟相尋夜久天, 農詩遺韻聽鏗然.殷勤達曙知何意? 爲是同庚六十年.憶昔靑年如昨天, 却看鬢髮雪紛然.豈料無一成就日? 七十家村最老年.都將生死聽於天, 一念前頭坦蕩然.惟有三閭難忘願, 《九歌篇》上度長年. 농암(農巖)의 시 농암은 김창협(金昌協)의 호이다. 이 시는 그의 《농암집(農巖集)》 권4에 실려 있는 〈석실에서 섣달그믐 저녁에 중유가 홍생 세태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에 차운하여 감회를 서술하다[石室除夕 次仲裕次洪生世泰韻 述感]〉라는 제목의 2수를 말한다. 오직……했지 삼려(三閭)는 삼려대부(三閭大夫)의 벼슬을 지냈던 굴원(屈原)이다. 그는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여 신선과 함께 멀리 돌아다니며 장생을 노래한 내용의 〈원유(遠游)〉를 지었는데, 거기에 "인간 세상을 초월하여 돌아갈 생각 잊으려 함이여, 뜻이 자유로워 한껏 부푸네.[欲度世以忘歸兮, 意姿睢以擔撟.]"라고 하였다.  《楚辭 卷5》 구가편(九歌篇)이라고 한 것은 김택술의 착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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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재 이공 유사장 默齋李公遺事狀 내가 일찍이 우리 지방의 선배 인물의 성대함을 보았더니, 고(故) 묵재(默齋) 이공(李公)의 집안이 가장 성대하였다. 공의 동조 형제(同祖兄弟 4촌)가 8명에 이르는데, 모두 체격과 용모는 훌륭하고 뛰어나며 문학은 풍부하여 사람들이 고양팔룡(高陽八龍)94)에 견주었다. 공의 휘는 면휘(勉徽)이고 자는 중서(仲敘)이니, 총명하고 빼어나며 시원한 자질로 가학과 법불(法拂)95)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영향받고 훈도(薰陶)받았으며, 보충하여 증장하고 넓혀나가 일찍이 효우(孝友)로 널리 알려졌고, 만년에 행의(行義)로 널리 알려져 위대하게 말세의 일사(逸士)96)가 되었다. 공이 부모를 섬길 때에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모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드렸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나아가 봉양하여 부모의 입과 몸에 맞게 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먼저 알아차리고 받들어 순종하여 그 마음과 뜻을 편안히 해드렸다. 전후의 상(喪)은 애훼(哀毁)에 지나쳤지만 정문(情文)97)을 빠뜨림이 없었고, 동산에 맛 좋은 복숭아가 있었으나 부모님이 즐겨 드시는 것이었기에 끝내 차마 입에 넣지 못했다. 공은 형제들과 온화하고 화락하게 지내어 분가할 때에 밭은 거칠고 척박한 것을, 기구는 썩어 문드러진 것을 자신이 취하고, 품질이 좋은 것을 미루어 그의 아우에게 주었다. 중부(仲父)의 아들이 환포(還逋 환곡의 포흠)를 범하자, 공이 중부에게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몰래 자기의 토지를 팔아서 이를 갚아주었다. 늦게 아들 한 명을 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공이 매우 사랑하였기에 집으로 안고 돌아오라고 명하여, 10여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하였으니, 이는 효우의 실상이다. 천성이 간략하고 중후하며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어리석은 듯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했지만 《소학》과 《대학》에 더욱 정통(精通)하였다. 문사(文詞)는 화려하면서도 실속이 있고, 식견은 넓으면서도 정밀하였으며, 비방과 칭찬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고, 득실(得失) 때문에 느긋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바른말을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자,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어려워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금품을 보내오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사지금(四知金)98)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어린아이가 곁에 있으니, 어찌 오지(五知)99)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집안에 불이 난 것을 보았는데 손해 본 것이 적지 않았으니, 대개 여비(女婢)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이 여비를 보고 이르기를, "너는 화상을 입은 곳이 없느냐?" 하고는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족척과 친구의 길흉(吉凶)과 경조(慶弔), 기근(饑饉)에 구하여 도와주되, 때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정의와 예의를 모두 흡족하게 하였다. 향방(鄕邦)의 상숙(庠塾)100)과 연회 석상의 문단(文壇)에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의 처리하는 일은, 그 위의(威儀)가 엄숙하고 말하고 웃는 것이 정다워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히 마음으로 기쁘게 하고,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대문에 이르는 걸객(乞客)을 보면 후하게 베풀어 주었는데, 불쌍히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으니, 이는 행의(行義)의 실상이다. 경신년(1860) 8월 23일에 졸하였으니, 태어난 신유년(1801)과의 시간적 거리를 계산해보면 향년 60세이다. 주(州) 남쪽 풍류재[風流峙]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비사등(飛沙嶝) 부신(負申)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내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것이 어제처럼 역력한데, 부모를 잃고 외롭게 된 지 지금 5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태평한 문문(文物)의 시대에 향당(鄕黨)의 큰 덕망을 지닌 원로의 풍채를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의 일을 생각하면 절절하여 끝없이 슬플 뿐이다. 이씨는 관향이 광산(光山)으로, 고려조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이순백(李珣白)을 등보(登譜)의 조(祖)로 삼는다. 중엽에 휘 선제(先齊)는 경창군(慶昌君)으로 호는 화문(華門)이고, 휘 조원(調元)은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불러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니,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대대로 많았다. 고조 필광(必光)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 언규(彦規)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영근(永根)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부친 선우(先佑)는 호가 균헌(筠軒)이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상규(文祥奎)의 따님이다. 공은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이긍(朴履兢)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낳았으니, 동한(東漢)·문호(文鎬)·지호(贄鎬)·인호(仁鎬)이고, 딸은 죽산인(竹山人) 안의환(安義煥)에게 출가했다. 손자 승두(承斗)와 혁회(赫會)·현규(現圭)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규(承奎)와 기백(琪白)·배한숙(裵漢淑)에게 출가한 손녀는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손자 승우(承愚)·승일(承一)과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한 손녀는 셋째 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지(承祉)·승태(承泰)와 박제영(朴齊英)·손사규(孫士圭)·문모(文某)에게 출가한 손녀는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글을 요청한 자는 승우이다. 余嘗及見吾鄕先輩人物之盛。而故默齋李公之家。最爲蔚然。公同祖兄弟。至爲八人。而皆體相峻茂。文學宏贍。人以高陽八龍擬之。公諱勉徽。字仲敘。以頴悟秀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擩染薰陶。充長展拓。早以孝友著。晚以行義聞。偉然爲叔世之逸士。其事親也。怡色柔聲以樂其耳目。服勤就養以適其口體。先意承順以安其心志。前後喪。過於哀毁。情文無闕。園有好棰。以親之所嗜。終不忍入口。其處兄弟也。溫溫湛樂。析箸時。田取荒薄。器取朽敗。而推其品好者。以給其弟。仲父之子嘗犯還逋。公恐貽憂於仲父。潛賣已土以償之。有一妹晚有一子。公甚愛之。命抱還於家。育之敎之十餘年。如己出。此孝友之實。天性簡重沈默。終日如愚。淹貫經史而尤邃於。小學大學。文詞華而實。見識博而精。不以毁譽而爲喜怒。不以得失而爲舒慘。正言正色。人皆敬憚。嘗有人饋以錢物。公笑曰。古人不受四知金。今吾稚兒任側。豈非五知乎。一日自外還。見家中失火。見損不少盖女婢不謹致然。公顧謂婢曰。汝無所爛乎。終無一言。族戚知舊。吉凶慶弔。饑饉賙恤。隨時無闕。情禮俱洽。鄕邦庠塾之地。樽俎翰墨之場。所以出入風儀。左右酬應者。其威儀抑抑。言笑款款。令人怡然而心悅。肅然而心服。見乞客臨門。厚加施及。而矜惻之意。刑於色。此行義之實。庚申八月二十三日卒。距寅降辛酉得年爲六十。葬州南風流峙。後移于飛沙嶝負申原。呼嗚。余在童艸。侍先人側。得聞公之賢。歷歷如昨日。風樹孤露。今五十有餘年矣。昇平文物。鄕黨長德之風。不可得以復見。俯仰今古。只切無窮之悲而已。李氏貫光山。以勝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登譜之祖。中葉有諱先齊。慶昌君號華門。諱調元。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號淸心堂。文學仕官。奕世相望。高祖必光贈掌樂院正。曾祖彦規贈吏曹正郞。祖永根贈戶曹參判。考先佑號筠軒。妣南平文氏祥奎女。公娶咸陽朴氏履兢女生四男一女。東漢文鎬贄鎬仁鎬。女適安義煥竹山人。孫承斗。孫女李赫曾李現圭。長房出。承奎李琪白裴漢淑二房出。承愚承一吳桂泳三房出。承祉承泰朴齊英孫士圭文其。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謁文者承愚也。 고양팔룡(高陽八龍) 동한(東漢) 때에 순숙(荀淑)의 아들 8명이 모두 재주가 뛰어났기에, 상고(上古) 시대의 제왕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재주가 뛰어난 아들 8명에 비겼다. 그리고 그가 살던 마을은 본래 서호리(西豪里)였는데 고양리(高陽里)로 변경하여 부르게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순숙의 8명의 아들을 팔룡(八龍)이라 불렀다. 《後漢書 卷92 荀淑列傳》 법불(法拂) 〈초은 손공 유사장(楚隱孫公遺事狀)〉 주 참조. 일사(逸士) 절의가 빼어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선비를 말한다. 정문(情文)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말한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자식으로서 부모를 잃은 슬픔과 초상을 치르는 데 있어 정해진 예법을 말한다. 사지금(四知金)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昌邑)에 도착했을 때,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 10근을 바치며 "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오지(五知) 사지(四知)인 천지(天知)·신지(神知)·아지(我知)·자지(子知)에 어린아이가 아는[稚兒知] 것을 더한 것을 말한다. 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집에는 숙을 두고 당에는 상을 두며, 술에는 서를 두고 나라에는 학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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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당 윤공 유사장 養閒堂尹公遺事狀 공의 휘는 방형(邦衡), 자는 완여(完汝), 계통은 파평(坡平)에서 나왔으니, 소정공(昭靖公) 휘 곤(坤)61)의 후손이다. 증조 동정(東貞)은 문학과 효우가 있어 세상에서 남호 처사(藍湖處士)라고 불렀고, 조부는 인탁(仁坼), 부친은 면은(勉殷)이고 호는 학암(學庵)이며, 생부는 중은(重殷)으로 정조 정사년(1797) 6월 1일에 남평(南平) 남석리(藍石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빼어난 외모에 총명하였고 타고난 자품은 뛰어났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봉양할 때 지물(志物)62)을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남은 힘으로 글을 배웠는데 이치를 연구함이 날로 향상되었다. 능주(綾州 화순(和順))로 장가가서 이로 인해 처가살이한 것은 외로이 형제가 적어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났지만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분명히 정해진 계획이 있었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집안일이 절로 안정되어 일과 재력이 점점 풀렸다. 고난 속에서 형통하고 우환(憂患) 속에서 살아 만년(晩年)에 먹고 쓸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그 규모와 경영을 모두 본받을 만하다. 금오산(金鰲山) 아래 집을 지었는데, 삼경(三逕)63)에는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았으며, 날마다 평상복을 입고 그 사이를 소요하였다. 학규(學規)를 세워 마을의 수재들을 가르치고, 동약(洞約)을 세워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부터 상서(庠序)와 학교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에서 지시하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여러 유생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고, 학문의 도는 다만 사람이 일상 생활하면서 마땅히 행하는 것이지만,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이치의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학》의 8조목64)에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처음이고, 《논어》의 사교(四敎)65)에서 문(文)과 행(行)이 우선한다."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 윤규석(尹奎錫) 공이 그 집을 '양한(養閒)'이라고 명명하였으니, 대개 그 뜻을 기록하여 칭찬한 것이다. 계유년(1873) 8월 13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여 고을 동쪽 부춘면(富春面) 대억동(大億洞)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풍산 홍씨는 홍일우(洪一禹)의 따님이고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의진(誼鎭)이고 딸은 송규진(宋奎鎭)에게 출가했다. 의진은 8촌 의진(儀鎭)의 아들 자영(滋英)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고, 딸은 양성종(梁性鍾)에게 출가했다. 자영은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상의(相義)·상석(相奭)·상호(相浩)·상연(相淵)이고, 딸은 홍돈희(洪敦憙)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아, 나의 선인 3명의 형제가 건복(巾服 옷과 갓)과 장구(杖屨 지팡이와 신) 차림으로 서로 왕래할 때마다 먹고 마시며 웃고 담소하면서 지극히 정겨웠는데, 어찌 상해(桑海)66)의 광경이 갑자기 눈앞에 있게 되며 쓸쓸한 여생도 또 몽범(濛氾)67) 시절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예와 지금을 돌아봄에 슬픈 감회를 견디지 못하여 이에 상의의 요청에 끝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邦衡。字完汝。系出坡平。昭靖公諱坤后。曾祖東貞。文學孝友。世稱藍湖處士。祖人坼。考勉殷號學庵。生考重殷。正宗丁巳六月一日。生公于南平藍石里。秀爽穎悟。天姿不群。居貧養親。志物俱至。餘力學文。硏理日就。委禽于綾州地。因以贅寓。盖孤露終鮮。無以爲計也。煢煢漂泊。百苦拂亂。而凡百料理。的育成算。未嘗見其有後役之私。而家務自集。事力稍舒。其所以亨於險阻。生於憂患。爲晩景餉用之地者。其規模經紀。皆可爲法築室金鑿山下。三逕花竹。四壁圖書。日以便服。逍遙其間。立學規以課村秀。設洞約以和隣保。以至庠序學校之地。爲出入風儀。左右指晝者。未嘗不爲鄕人之倚重焉。每誨諸生曰。人生斯世。非學問。無以爲人。而學問之道。只是人生日用所當行者但不學問無以知其理之所在。故大學八條。格致爲始。論語四敎。文行在先。州倅尹公奎錫題其室曰養閒。盖志其意而嘉之也。癸酉八月十三日卒于正寢。葬州東富春面大億洞丙坐之原。配豐山洪氏一禹女。一男一女。男誼鎭。女適宋奎鎭。誼鎭取三從儀鎭子滋英爲後。女適梁性鍾。滋英四男二女。男相義相奭相浩相淵。女適洪敦憙。餘幼。嗚呼。我先人三昆季。巾服杖屨。每相經過。飮食笑語。極其款款。豈知桑海光景。遽在目前。而孤露餘生。又是濛氾時節耶。俯仰今古。不勝悲感之私。玆於相義之請。有不敢終辭。 윤곤(尹坤) ?~1422.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아우 윤향(尹珦)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은 윤곤이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지물(志物) 지(志)는 양지(養志)로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물(物)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8조목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사교(四敎)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네 가지로 가르쳤으니,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하였다. 상해(桑海)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준말로,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될 정도로 세상이 몰라보게 바뀌었다는 뜻이다. 몽범(濛氾) 만년(晩年)을 말한다. 몽범은 해가 지는 곳으로,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몽범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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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 조공 사실 遯齋曺公事實 돈재(遯齋) 조공(曺公)의 휘는 일리(一履)이니, 바로 내가 사는 고을의 근고(近古) 사람이다. 타고난 자태가 빼어나고 시원하며 화락하고 단아하여 어려서부터 의젓하였다. 가난하게 살면서 어버이를 봉양할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했고,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받들어 모시면서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잘 갖추었다. 고기 잡고 나무한 뒤에 여가가 있으면 매번 책상을 마주해 단정히 바르게 앉아 시가를 읊고 학문을 궁구하니 문사(文詞)가 날로 진보하였다. 어버이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분수를 지키고 뜻을 구했지만 가난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명예와 화려한 겉치레, 기호(嗜好)에 담박하였고, 출입을 간략히 하였으며, 교제 맺는 것을 신중히 하였다. 부춘(富春)에서 성 동쪽 필봉(筆峯) 아래로 우거하여 소요하고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노년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아, 광휘(光輝)를 숨겨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평소에 마음속으로 깊이 품은 포부를 조금도 시험하지 못했으며, 세상을 떠난 뒤의 유고(遺稿)도 화재로 재앙을 입어 사람들에게 전해 보여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필봉은 뾰족하고 빼어나며 용산(龍山)이 둘러 있으며, 공이 오가던 곳을 지나감에 정채(精彩)가 여전하였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뛰어난 자취를 볼 수 있다. 많은 자손이118) 번성하고 화목하며 시와 예를 가업으로 계승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유교(遺敎)를 볼 수 있다. 효자의 영예와 처사의 훌륭한 운치가 전후 2백 년 동안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고 자자했으니, 이러한 데에서 공의 진실한 행실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분수를 닦고 자신의 천진한 성품에 맡긴다면,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얻은 것이 많을 것이니, 저 4천 마리의 말과 만종(萬鍾) 같은 부귀함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돈재공답게 되는 이유이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서 선생을 사모함하고 있었는데, 지금 조필승(曺弼承)의 청에 대해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을 서술하여 공의 사실(事實)로 삼았다. 遯齋曺公諱一履。卽吾鄕近古人也。天姿秀爽愷弟。自幼凝然。居貧養親。殫竭血力。蔀室斗屋。承歡甚備。漁樵之餘。輒對案危坐。諷詠溫繹。文詞日就。爲親應擧。不以得失累意。守分求志。不以貧窶動心。泊於聲華。淡於嗜好。簡出入。愼交結。自富春寓於城東筆峯之下。徜徉婆娑爲終老之計。嗚呼。潛光鞱輝。世莫我知。素所蘊抱。未得少試。而至於身後遺稿。亦且厄於回祿。未有以傳示於人者。然筆峯尖秀。龍山繞匝。杖屨經過。精彩如古。於此而見公之遐躅也。螽斯椒聊。蕃衍雍睦。箕裘詩禮。藹蔚有聲。於此而見公之遺敎也。孝子令譽。處士高韻。前後二百年。藉藉不絶於里老巷竪之口。於此而見公之實行也。修吾分。任吾眞。雖擧一世不知而所得多矣。彼千駟萬鍾。於我何加哉。此所以爲遯齋公也。余以卿里後生。竊有慕於下風。今於弼承之請。不敢牢讓。謹以所嘗聞知者。述以爲公之事實。 많은 자손이 대본의 종사(螽斯)와 초료(椒聊)는 각각  《시경》 〈주남(周南)〉과 〈당풍(唐風)〉의 편명으로, 여기서는 자손이 많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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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용한 오공 유사장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容閒吳公遺事狀 오씨(吳氏)는 동방(東方)의 거성(鉅姓)인데, 패릉(貝陵)을 관향으로 삼은 자가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고려조에 휘 연총(延寵)101)은 벼슬이 평장(平章)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으로, 영토를 확장한 위훈(偉勳)이 있었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현필(賢弼)이 패릉에 봉해져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5대를 전해 내려와 충을(忠乙)은 우리 조정에서 찬성(贊成)을 지냈고,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익손(益孫)은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며, 침랑공이 패릉에서 능주로 그의 부모를 장사지냈는데, 여묘(廬墓)하면서 이로 인해 거주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창도하여 진주(晉州)에서 입절(立節)102)하였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만상(萬祥)은 효행으로 여러 번 추천에 들었고,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엽(曺光葉)의 따님이니 바로 공의 부친과 모친으로, 정조 정사년(1797) 2월 14일에 부춘방(富春坊)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어렸을 때에 남다른 자질이 있어 말하고 웃으며 즐겁게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스승에게 나아감에 미쳐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항상 무릎을 모아 단정히 앉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였고, 산사(山寺)에서 책을 읽을 때에 집과 1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매일 한 번씩 반드시 안부를 살피자, 부모가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매우 엄하게 저지하였다. 이후부터 부모의 소식이 격조하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났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주선하여 소식을 들은 뒤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니, 그 독실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에 큰 흉년을 만났는데, 공이 이웃 사람들을 진휼(賑恤)하여 이에 힘입어 살게 된 자가 많았다. 약관(弱冠)에 부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집상(執喪)의 모든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행하였고,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갖추어 다했다. 늘그막에 우봉(牛峯)에서 오봉산(五峯山) 아래에 우거하였으니, 대개 고요한 데로 나아가 한가롭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문규(門規)를 세워 종족과 친하게 지내고, 향약(鄕約)을 수행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과 잘 지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가엾게 여겨 잘 보살폈으되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았고, 여러 조카를 보살펴 기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하였으며, 집안이 화목하고 형제가 즐겁게 지내니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준행했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감동하였다. 을해년(1875)에 우로은(優老恩)으로 통정(通政)에 올랐고, 병자년(187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통덕랑(通德郞) 양중현(梁中鉉)의 따님으로 어질고 예가 있어 부도(婦道)를 잘 지녔는데, 공보다 1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자질은 침착하고 무게가 있으며, 기상은 온화하고 아담하며, 언어는 간략하고 어눌하며, 행동거지는 차분하고 세심하였다. 경(經)의 뜻에 심오하고 일 처리하는 데 밝으니, 향려(鄕閭)에 의심나는 일이 있거나 알지 못하는 행정상의 사무가 있으면 매번 공에게 나아가 해결하였다. 아, 공은 바로 선친의 벗이다. 기억하건대 공과 선친께서 백발과 태배(鮐背)103)의 모습으로 평상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시고, 소자(小子)는 그 앞에서 추주(趨走)104)하고 예예[唯諾]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 모두 천고의 이별을 이루었고, 이렇게 애처롭고 외로운 내가 마침내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狀德之文]을 짓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의 손자 오왕홍(吳枉鴻)이 장차 유사(遺事)를 수습하여 후대에 오래 전하려고 할 때, 내가 곁에서 모신 날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대략의 줄거리를 서차(序次)하게 하였을 뿐이다. 吳東方鉅姓。貫貝陵者。爲尤著。勝朝有諱廷寵。官平章諡文襄。有拓地偉勳。六傳諱賢弼。封貝陵。因以爲貫。五傳至忠乙。我朝官贊成。三傳諱益孫。以孝除寢郞。寢郞公自貝陵。葬其親於綾。盧墓而因居焉。三傳至諱邦翰。倡義壬辰。立節晉州。七傳諱萬祥。以孝累入剡薦。夫人昌寧曺氏光葉女。卽公考妣也。以正廟丁巳二月十四日。生公于富春坊七松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不類凡兒。及就傳。文理日就。常斂膝端拱。昕宵不怠。讀書山寺。距家十餘里。每日必一番省候。父母憂其妨功。止之甚嚴。自後音聞有曠。憂形於色。必周旋得聞。然後乃安意讀書。其誠孝之篤如此。遭甲戌大無。賑恤隣保。多所賴活。弱冠連遭考妣喪。執喪諸節。一遵家禮備盡情文。晩年自牛峯。寓居五峯山下。盖就靜養閒計也。立門規以親宗族。修鄕約以和隣里。矜養寡妹。老而不衰。撫育諸姪。同於己出。室家雍睦。兄弟湛樂。子孫遵其敎。鄕里感其義。乙亥以優老恩陞通政。丙子正月六日棄世。夫人濟州梁氏通德郞中鉉女。賢而有禮。甚得婦道。先公十二年而終。公姿質沈重。氣容溫雅。言語簡訥。動止安詳。邃於經義。明於料事。鄕閭之間。事有所疑。政有未達。輒就決焉。嗚呼。公卽先人友也。曾記其䳽髮鮐背。對床款款而小子趨走唯諾於前豈知行未幾何俱成千古。而哀此孤露。乃述其狀德之文耶。公孫枉鴻。將欲收拾遺事。以壽來世。以余侍側日久。使之序次梗槩云耳。 오연총(吳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1096년(숙종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07년(예종2) 부원수(副元帥)로 원수(元帥)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입절(立節) 절개를 지켜서 죽은 것을 말한다. 태배(鮐背) 복어의 등이란 뜻으로, 늙은이를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복어의 등에 있는 얼룩 같은 검버섯이 피부에 생긴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추주(趨走) 윗사람의 앞을 지날 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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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처사 조공 유사장 希庵處士趙公遺事狀 공의 휘는 두열(斗烈), 자는 의지(義之), 호는 희암(希庵)이니, 조씨는 계통이 함안(咸安)에서 나왔다. 중엽에 휘 승숙(承肅)105)은 세상에서 덕곡 선생(德谷先生)이라고 불렀고,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106)하였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종례(從禮)는 호가 율정(栗亭)이고 벼슬은 직제학(眞提學)이며, 휘 림(琳)은 호가 신재(愼齋)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참봉(參奉) 휘 희광(希匡)이 동복(同福)에 거주하였고, 4대를 전해 내려와 감정(監正) 휘 옥생(玉生)이 능주(綾州)에 거주하여 자손들이 이로 인해 이곳에 살게 되었다. 증조 중국(重國)은 통정(通政)을 지냈고, 조부는 달운(達運)이며, 부친은 시복(時福)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이 있었고,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광수(金光洙)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정유년(1777)에 능주 오산리(鰲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녔고 학문의 과정은 가정의 가르침을 따랐다. 점차 성장하면서 고을의 사우(士友) 가운데 어진 자를 좇아 종유하여 강구하고 연마하여 스스로 넓혀나갔다. 효우의 행실이 가정에 드러났고 돈독한 친목의 풍조가 종족에게 알려졌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재난과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으니, 자상하고 측달(惻怛)함이 두텁지 않음이 없었다. 집 한 채를 지어 '망미(望美)'라고 편액하여 걸고, 오직 은은하게 날로 닦되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생도들을 가르칠 때에 과조(科條)가 찬연했다. 때로 좋은 손님 및 벗과 함께 시냇가와 산, 바람과 달 사이에서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놀며 마음을 시원하게 펴면서 유연(悠然)히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있었다. 중년에는 한가한 날에 병학(兵學)을 섭렵하여 대략 대치(大致)를 알았지만 또한 시험해보지 못했다. 철종 병진년(1856) 7월 28일에 고종명하여 산음(山陰) 후록(後麓)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인(曺光仁)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용희(鏞熙)·용기(鏞起)·용직(鏞直)·용순(鏞珣)·용후(鏞厚)이고, 사위는 광산(光山) 이장휘(李章徽)와 공주(公州) 이문현(李文現)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107)"라고 하였으니, 자손의 남은 복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공의 장손 조익제(趙翼濟)는 훌륭한 선비이고, 그의 사촌 형제와 여러 자질(子侄)도 모두 근칙(謹勅)한 사람들이니, 이는 공이 선을 쌓은 데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조씨의 가문에 반드시 번창하고 성대할 날이 있을 것이다. 公諱斗烈。字義之。號希庵。趙氏系出咸安。中葉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麗亡罔僕。我朝有諱從禮。號栗亭官直提學。諱琳。號愼齋大司成。皆顯祖也。諱希匡參奉。寓居同福。四傳至諱玉生。監正。寓綾州。子孫因居之。曾祖重國通政。祖達運。考時福。世有文行。妣光山金氏光洙女。正廟丁酉。公生于州之鰲山里。幼而就塾。學問課程。遵循庭訓。稍長。從鄕裏士友之賢者。遊從講曆。以自展拓。孝友之行。著於家庭。敦睦之風。聞於宗族。賙窮賑匱。赦災恤患。慈詳惻怛。無不款洽。築一室。揭顏以望美。惟以闇然日修。不求人知爲究竟計。訓迪生徒。科條燦然。時與佳賓良朋。觴詠遊暢於溪山風月之間。悠然有出塵之標。中年以餘日。涉獵兵學。略曉大致。而亦未有所試。哲宗丙辰七月二十八日終。葬山陰後麓酉坐原。夫人昌寧曺氏光仁女。生五男二女。鏞熙鏞起鏞直鏞珣鏞厚。光山李章徽公州李文現。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餘祿。而其人可知。公之長孫翼濟善士也。其群從諸子侄。皆謹勅人也。此非公積累之報耶。余謂趙氏之門。必有昌大之日。 조승숙(趙承肅) 1357~1417.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덕곡(德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저서로는 《덕곡집(德谷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書經 微子》 선(善)을……있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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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 조공 유사장 溪庵曺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曺), 휘는 학신(學臣), 자는 내권(乃權), 호는 계암(溪庵)이다. 휘 계룡(繼龍)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108)와 혼인하여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고, 이로 인하여 창녕(昌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으니 바로 그 시조이다.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뛰어난 공훈과 현달한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조정 초에 이르러 휘 서(庶)는 시호가 청간(淸澗)이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상국(上國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황제(高皇帝 주원장(朱元璋))가 특별히 총애하여 도핵배(桃核杯)를 하사하였다.109)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국병(國柄)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능성(綾城)에 살았고,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고조 휘 봉인(鳳人)은 호가 동파(桐坡)이고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증조의 휘는 동근(東覲)이고, 조부의 휘는 현묵(賢默)이며, 부친의 휘는 명화(命貨)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한봉(張漢鳳)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순수하게 갖춰졌으니, 순조 12월 20일에 청계리(淸溪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후(淳厚)하고 활달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곁에서 어버이를 모시면서 응대하고 대답하며 잘 받들어 따르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였으며, 맛있는 것을 구하면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드렸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을 때 번거롭게 지휘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약관에 널리 제가(諸家)를 섭렵하여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 나고 아름다웠으며,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여 죽을 먹고 물을 마셨으며, 삭망(朔望)마다 성묘하여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형제 3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산을 매입하여 과일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고기를 길러서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 이로써 봉양을 올렸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로써 제수를 올렸다. 늘그막에 청계(淸溪) 가의 한 구역에 정사(精舍)를 지어 그 편액에 '벽류(碧流)'라고 쓰고, 사촌 형제들과 밤낮으로 서로 마주 대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정을 다하였다. 또 집안 자제와 마을의 수재를 모아 학업을 익히게 하자, 사방의 친구들이 그 일을 노래하여 화답하였다. 평소에 삼가고 경계함으로 몸가짐을 하였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공손함과 용서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때 덕이 있는 자를 친근하게 하여 절차(切磋)의 유익함이 있게 하고자 하였다. 일찍이 자식을 가르치는 시를 짓고 말하기를, "이미 옛것을 익히고 또 새것을 알아야 하니[旣溫其故又知新], 성인 되고 우자 되는 건 본디 자신에게 달려 있다네.[爲聖爲愚自在身] 그 가운데 진실하고 분명한 곳을 알고자 한다면[欲識箇中眞的處], 내가 어른을 어른으로 존경하는 것과 친척을 친히 하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明吾長長與親親]"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마음속에 보존된 것을 알 수 있다. 계사년(1893) 4월 12일에 졸하여 천운산(天雲山) 아래 부임(負壬)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윤성연(尹聲淵)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모두 지극하였고 4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승(仁承)·의승(義承)·예승(禮承)·지승(智承)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동호(李東鎬)·하동(河東) 정장현(鄭章鉉)·양성(陽城) 이봉기(李鳳基)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누적한 행실과 풍부한 재능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에 시험되지 못하여 빛을 숨기고 아름다움을 속에 품은 채 멀리 황량하고 누추하며 적막한 물가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공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손상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동향(同鄕)에 있으면서 미적거리고 일이 많아 미처 찾아뵙지 못했는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였다. 노년에 비로소 공의 유장(遺狀)을 구해 읽었는데, 간절하게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생(李生) 승복(承福)은 바로 공의 외손으로 나와 종유(從遊)했는데, 공의 큰아들이 낳은 손자 병규(秉圭)의 명으로 나에게 행실을 기록하는 글을 요청하였다. 公妣曺。諱學臣。字乃權。號溪庵。有諱繼龍。尙眞平王公主。封昌城君。因以昌寧爲貫。卽其始祖也。自羅至麗。名勳達爵。奕世不絶。至我朝初。有諱庶。號淸澗官直提學。奉使上國。高皇帝寵異之。賜桃核盃。六傳而諱國柄。濟用監正。退寓于綾城。子孫世居焉。高祖諱鳳人。號桐坡中司馬。文行著聞。有遺集。曾祖諱東覲。祖諱賢默考諱命貨。妣興德張氏漢鳳女。閨範純備。以純廟十二月二十日。生公于淸溪里。姿稟淳厚開爽。自幼不好戱美。不好爭競。日侍親側。應封唯諾。承順如流。得一味不入口。必袖而供之。就傳受業。不煩提督而文理日就。弱冠博涉諸家。詞藻斐蔚。執喪哀毁。啜粥飮水。朔望省掃。風雨不廢。兄弟三人。友愛純篤。買山種果。鑿池蓄魚。親在以供其養。親沒以供其奠。晩年築一區精舍於淸溪之上。題其顏曰碧流。與群從昆季。日夕相對。以盡湛樂之情。又聚門子弟村秀才。使肄業。四方知舊歌其事而和之。平居持身謹勅。御家勤儉。接人恭恕。敎子孫。欲其親近有德。俾有切磋之益。嘗有訓子詩曰。旣溫其故又知新。爲聖爲愚自在身。欲識箇中眞的處。明吾長長與親親。此可以見其所存矣。癸巳四月十二日卒。葬天雲山下負壬原。配咸安尹氏聲淵女。婦德備至。生四男三女。男仁承義承禮承智承。女適光山李東鎬河東鄭章鉉陽城李鳳基。孫以下不錄。嗚呼。有積累之行。贍富之才。而不見知於人。不見試於世。潛光含章。遐擧遠引於荒陋寂寞之濱。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爲何如也。余在同鄕。因循多故。未及拜床。而奄隔千古。衰暮之日。始得其遺狀而讀之。區區追仰之情。尤切罔喩。李生承福。卽公之外孫。而從余遊。以其長房孫秉圭命。謁誌行之文。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된 덕만 공주(德曼公主)를 말한다. 사명(使命)을……하사하였다 1398년(태조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를 만나 공물(供物)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가 참소를 당해 수년간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명나라 황제는 강직한 충절에 탄복하여 사면해주었고, 복숭아 씨앗에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해서 만든 도핵배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다. 《高麗列朝登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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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재 정공 유사장 求心齋鄭公遺事狀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유(先儒)이니, 김점필재(金佔畢齋)의 문인으로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훌륭하게 세상에 유명해져 자손들이 계승할 만한 바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후손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때때로 유학(儒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근고(近古)의 호는 구심재(求心齋), 자(字)는 성언(成彦)인 처사(處士) 휘 양훈(陽勳)도 그중 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모습이 있어서 장난치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뛰어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날마다 곁에서 어른을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책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서 그 뜻을 듣고 인하여 말하기를, "만일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의리를 알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한가한 틈을 타서 이웃 마을 경암(敬庵) 정공(鄭公)의 문하로 나아가 배웠으니, 경암은 바로 그의 친족 장로(長老)이다. 정공(鄭公)은 평소에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가르치는 데에 법이 있었는데, 공이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준수하여 어긴 적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서부터 제사(諸史)와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순조롭게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문리(文理)와 시문(詩文)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고, 의리의 근원에 침잠하여 핵심적인 깊은 뜻에서 실마리를 뽑아내어 찾았으니, 이는 마치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마음에 보존되어 몸에 체득한 것과 남에게 시행하여 일에 조처한 것이 찬연히 조리가 있고 엄연히 법이 있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 과거 공부를 하여 시문(時文)110)의 각 체가 풍부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 종적을 감추고 전원에 빛을 숨겼으며, 삼경(三逕)111)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러니 그 뛰어난 운치와 지취, 고아한 풍격과 뛰어난 자취를 또 어찌 보잘것없이 부침하는 것으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막힌 데에서 형통한 곳으로 변하여 가고112)[否之亨], 곤란한 데에서 통하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113)[困之通] 애초에 사군자(士君子)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 아님이 없다. 공은 하동(河東)의 저족(著族)이다. 고조 휘 흘(忔)은 호가 송암(松庵)으로 정동계(鄭桐溪)114)의 문인인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이가 돈재 선생의 4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문참(文參)이고, 조부의 휘는 세채(世采)이며, 부친의 휘는 집(鏶)이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모친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조상민(趙尙敏)의 따님이니, 영조 정사년(1737) 6월 7일과 순조 기사년(1809) 8월 6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고, 묘는 신산(莘山) 응막동(鷹幕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흥상(興相)과 필상(必相)이고, 딸은 제주(濟州) 양은호(粱殷浩)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족손 정재우(鄭在禹)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저술이 적지 않았는데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어 한 글자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 있는 유풍(遺風)과 여열(餘㤠)은 고을 인사들이 전송(傳誦)한 말뿐입니다. 연대가 더욱 멀어질수록 전송(傳誦)이 점점 미약해지면 백세(百世) 뒤에 누가 다시 공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마디 은혜로운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추앙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遯濟鄭先生。吾鄕先儒也。以金佔畢齋門人。文學行義。偉然名世。而爲子孫可繼之地。是以詵詵來許。紹休趾美。往往以儒學著聞。近古求心齋處士諱陽勳。字成彦。亦其人也。自幼凝然有成人儀樣。不好戱嬉。不事遊走。日侍長者側。應對惟謹。一日見入授讀。從傍聽其義。因曰。若不讀書。何以知此等義理乎。遂挾閒就學于隣閈敬庵鄭公之門。敬庵卽其宗黨長老也。平日持守有方。敎授有法。公一遵其敎。未有違越。年弱冠。自四書五經至諸史百家。無不輪流淹貫。文理詞華。斐然成章。沈潛乎義理之源。紬縪乎肯綮之蘊。如冰解而凍釋。是以其存於心而體於身。施於人而措諸事者。燦然有條。儼然有則。每以餘日。游於功令之業。時文各體。無不贍麗。而不以得失關心。斂迹窮荒。潛光畎畝三逕花竹。四壁圖書。婆娑徜徉。聊以自遣。其偉韻逸趣。高風遐躅。又豈可以區區陞沈而差殊觀哉。否之亨。困之適。未始非士君子安身立命處也。公河東著族。高祖諱忔。號松庵。鄭桐溪門人。丙子擧義。贈判尹。是遯齋先生四世孫也。曾祖諱文參。祖諱世采。考諱鏶參奉。妣咸安趙氏尙敏女。英宗丁巳六月七日。純祖己巳八月十六日。卽其懸弧與屬纊也。墓莘山鷹幕洞亥坐原。齊淸道金氏。擧二男一女。男興相必相。女適濟州粱殷浩。孫以下不錄。族孫在禹。持家狀過余曰。著述不爲少矣。而屢失回祿。隻字不遺。其遺風餘㤠所可想象者。鄕人士傳誦之語而已。年代愈遠。而傳誦浸微。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乎。願勿悋一言之惠也。聞之不勝追仰之私。有不敢多辭云。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막힌……가고 비(否)는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비색하고 막히는 때이니, 이러한 때에는 절개를 굳게 지키면 길하여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전(象傳)〉에 "천지가 사귀지 않음이 비이니, 군자가 보고서 덕을 검약하여 난을 피해서 녹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天地不交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라고 하였다. 곤란한……것은 곤(困)은 곤란하고 험난한 때이니,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의를 잃지 않으면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곤괘(困卦) 단전(彖傳)〉에 "험하지만 기뻐하여 곤란하여도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일 것이다.〔險以說, 困而不失其所亨, 其唯君子乎.〕"라고 하였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동계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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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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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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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좌승지 송류정 민공 유사장 贈左承旨松柳亭閔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방(榮邦),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류(松柳)이니 계통은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휘 칭도(稱道)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의 봉어(尙衣奉御)였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휘 영모(令謨)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문경(文景)이고, 휘 지(漬)는 도첨의 정승(都僉議政承)으로 시호는 문인(文仁)이며, 휘 근(瑾)은 여산 부원군(驪山府院君)이니, 모두 여사(麗史)에 드러나 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중립(中立)은 판전교령(判典校令)을 지냈고, 휘 소생(紹生)은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를 지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으로, 세조조(世祖朝)에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고115), 풀려나 마침내 능주(綾州) 월곡(月谷)에 살았으니 이분이 11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해익(海翼), 증조의 휘는 수귀(壽龜), 조부 휘 정수(挺洙)는 교관(敎官)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상록(相祿)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인(淑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언규(李彦珪)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계비(系妣) 숙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광흡(李光熻)의 따님이니, 영조 을미년(1775)에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고 조숙하여 엄연히 성인의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점차 자라면서 개연히 고인(古人)의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고, 도가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고, 《소학(小學)》으로 전지(田地)를 정하고, 《대학》으로 규모를 세우며, 《논어》와 《맹자》로 조리(操履 몸가짐과 마음가짐)를 밝혔다. 그래서 매우 부지런하게 여러 번 독송하고 깊이 사색에 잠겨 이를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하였으니,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처럼 편안히 자득하였다. 자리 곁에 구용(九容)116)과 구사(九思)117)를 써놓고 출입하고 기거할 때에 늘 거울삼아 살폈다.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때 분명하게 과정(課程)을 두고 차근차근 질서 있게 매진하여 성취한 것이 많았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과 장례를 치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인정(仁情)과 예문(禮文)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늘그막에 집 한 채를 지어 편액에 '송류정(松柳亭)'이라 쓰고, 자유롭게 소요하면서 날마다 서적을 스스로 즐겼고, 명예와 이익, 화려함에 관해서는 담박하였다. 문규(門規)를 정하여 친척 간의 두텁고 화목한 정을 익혔고, 향약(鄕約)을 세워 예속(禮俗)의 사귐을 밝히자 내외의 사람들은 원망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였으니, 몸이 집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친 이익과 혜택이 많았다. 경자년(1840)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나 선하동(仙荷洞)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고암촌(鼓巖村) 앞 반룡산(盤龍山) 북쪽 기슭 정좌(丁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계사년(1893)에 손자 민덕호(閔德鎬)의 귀함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희대(文喜大)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매우 갖춰졌고 묘는 합장했으며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치형(致衡),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치승(致昇), 호조 참판에 추증된 치화(致華)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시창(金時昌)과 달성(達城) 배원태(裵元台)에게 출가했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욱(泳郁)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했을 때,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니기에 진실로 감히 받들어 감당하지 못하지만, 단지 민영욱과는 조부, 아들, 손자 3대의 가깝고 두터운 정분이 있었기에 차마 결국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榮邦。字季彬。號松柳。系出驪興。諱稱道。仕麗朝官尙衣奉御。是爲鼻祖。諱令謨平章事文景。諱漬都僉議政承文仁。諱瑾驪山府院君。竝著麗史。我朝有諱中立判典校令。諱紹生三陟都護府使。諱懷參號義庵。世祖朝謫守大靜。解放。遂寓于綾州之月谷。是其十一世祖也。高祖諱海翼。曾祖諱壽龜。祖諱挺洙贈敎官。考諱相祿贈司僕寺正。妣淑人慶州李氏彦珪女。有女士行。系妣淑人光山李氏光熻女。英宗乙未。生公于松石坊五柳村。生有異質。穎悟夙就。嚴然有成人儀度。稍長。慨然有志於古人爲己之學。嘗自警曰.非學無以知道。非道無以爲人。以小學定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明操履。誦數甚勤。思索甚苦。存之於心。體之於身。氷解凍釋。怡然自得。書九容九思於座側。出入起居。常常鏡考。敎誨生徒。的有課程。循循征邁。多所成就。性孝。生事葬祭。一遵禮制。情文兩至。晩築一室。題其顔曰松柳亭。寄敖徜徉。日以書籍自娛。至於聲利芬華泊如也。定門規以講敦睦之誼。立鄕約以明禮俗之交。內外無怨。遠近胥悅。身不出家。而利澤之及人者多矣。庚子五月十八日考終。葬仙荷洞。後移窆于鼓巖村前盤龍山北麓丁坐原。癸巳以孫德鎬之貴。贈承政院左承旨。配淑夫人南平文氏喜大女。壹儀甚備。墓祔。三男二女。男致衡。致昇出爲季父后。致華贈戶曹參判。女適光山金時昌達城裴元台。孫曾以下不盡錄。曾孫泳郁奉家狀來。有不朽之託。余以非其人。固不敢承當。而但於泳郁。有祖子孫三世契分之厚。不忍終辭云爾。 세조조(世祖朝)에……좌천되었고 1456년(세조2)에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盷)에게 송현수와 판관 권완(權完)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했는데, 민회삼이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 《梅山集 卷40 義菴閔公墓誌銘》 구용(九容)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진중하게[足容重], 손은 공손하게[手容恭], 눈은 바르게[目容端], 입은 무겁게[口容止], 목소리는 조용하게[聲容靜], 머리는 곧게[頭容直], 숨소리는 엄숙하게[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이 있게[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하는 것이다. 《禮記 玉藻》 구사(九思)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마음가짐으로,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귀 밝음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함을 생각하고[色思溫], 모습은 공손함을 생각하고[貌思恭], 말할 때는 충성스러움을 생각하고[言思忠], 일할 때는 경건함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스러울 때는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疑思問], 화를 낼 때는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재물을 얻을 때는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것이다. 《論語 季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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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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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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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편지에 답하지 못한지 또한 며칠이 지났으니, 늘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곁에서 모시는 상황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정(貞)이라는 시호(諡號)는,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을 연구하고 분비(憤悱)한다."102)는 뜻입니다. 의심스럽고 답답한 말이 끊임없이 편지에 가득하니 아끼고 우러러 보는 마음은 더욱 보통의 편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말하기는 쉽지만 그 실상을 보기는 어렵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비유입니다. 대저 한 가지 일을 함양하는 것이 공부의 본령(本領)이니 반드시 착실하게 체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것이 쌓이고 힘을 오래 쏟은 후에야 볼 수 있으니 어찌 안배하고 배치하는 것을 하여 생각하고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천여 장(丈)의 혼탁한 물이 어찌 그 중간에 한 한기만 홀로 맑을 이치가 있겠으며, 사면이 암흑같이 어두운 상황에서 어찌 중간에 한점만 밝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설혹 그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이포새(伊蒲塞)103)가 눈을 부릅뜨며 만들어내는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고 하니, 반드시 그 의리를 궁구하여 연구하여 항상 마음속에 침잠하여 스며드는 것이 있으면 또한 날마다 실천하는 사이에 성실함을 기르고 참된 것이 쌓여서 선한 힘이 점차 채워지고 자라날 것입니다. 이른바 미발(未發)의 경지로 쉽게 힘이 되어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평소에 구구하여 아직 나아가지 못한 경지이니, 이번의 나의 벗이 질문한 것에 대해 가만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괴로움을 안고 일찍이 겪어온 모습이 이와 같으니 부디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承書未復。又幾日矣。每庸耿耿。未審侍傍節宣貞謚。餘力鑽硏。而憤悱之意。疑鬱之辭。娓娓盈幅。愛仰之私。尤非尋常書尺之比。所謂言之甚易。見之實難者。眞善喩也。大抵涵養一事。是功夫本領。必着實體認。眞積力久而後。可以見之。豈希望懸想安排布置之爲哉。如千丈渾濁之水。豈有中間一條獨淸之理。四面黑窣之地。豈有中間一點獨明之理。設或有之。亦不過伊蒲塞撑眉努眼之術也。其德其不孤矣乎。必須窮硏義理。常常浸灌胸次。又於日用踐履之際。養誠積眞。使善力漸次充長。則所謂未發之地者。易以爲力。而明淨純固矣。此是愚者平日區區未就之地。而今於吾友之問。竊有同病之憐。故玆布其辛苦嘗試之狀如此。惟諒會。 분비(憤悱)한다 몰라서 분하게 여기고 표현을 못해서 답답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학자가 몰라서 분하게 여기지 않으면 나는 알려 주지 않고, 표현을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틔워 주지를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이포새(伊蒲塞) 범어(梵語) '우바새(優婆塞 ; Upāsaka)'의 이역(異譯)으로, 속세에 있으면서 오계(五戒)를 받은 남자 불교도를 뜻하며, 불교를 믿는 남자의 총칭으로도 쓰인다. 여기에서는 사술을 부리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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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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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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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婦吳氏實記烈婦▣(吳)氏系出羅州襄平公諱自治之後幼學敬喆之女▣(也)▣▣(吳氏)自幼天性至孝閨範夙著年才十九爲梁相龍妻事舅姑以誠御婢僕以恩里隣咸稱有婦德焉未期年歸寧遭親母朴氏喪哀毁盡節而待其綺制与舅姑送婢催皈則告以弟男幼雉朝夕上食之節朔望其祭之需非不肖女則無可任使者云舅姑宜其言止之至戊申十二月其夫相龍偶得一疾已過旬朔而吳氏尙在親家未能卽歸者盖其親夫人祥期不遠故也終祥急還則夫病彌留万方無效吳氏不避寒暑食飮藥餌之節無不先嘗以進每隨舅姑審其動靜後獨處小室心褠手祝願以身代而涕泣沾襟舅姑見之則輒愉色怡聲恐貽舅姑之憂亦不敢擅延於病夫之側召有睱則惟動紡績以備艱難焉及其夫病轉至難救而己酉四月初七日奄忽殞命則吳氏出門索刀斷左手中指灌血於其夫中口中而指血已盡矣旋而又斫指乃墮地流血淋漓遂洽灌口果延一時之命而是日竟逝焉吳氏乃盡哀大哭因欲自到以從爲左右所止累陷泥中將有投井之擧家人守之竟不得仗其志矣吳氏泣嘆曰吾不見君子之斂殯而期於必死者非義也卽開篋出布帛欲自制襲衣則血指已斷恐其沾汚使人代之曰君子之服皆用帛而所乏者袴妾之婚時所着袴改制則似無妨矣乃出視之曰斜幅之改製亦不正不如用布袴云及其斂日謂其治喪諸族曰姑勿葬以待數日云其舅姑慮其必死絶不使留之戶傍矣入棺之時託以永訣出門而落於層階下以額叩地以石擊祠曰何必禁我之死乎死人固當然而同日同壙則豈不解吾之至寃乎因臆塞氣絶焉左右力救僅生其舅姑不忍慘景至於絶飮吳氏乃親執粥器以勸進舅姑曰汝飮則吾當飮之吳氏遂先飮含口而待舅姑强飮後必僭吐襟懷間蒼黃之際諸族出殯相龍棺於先塋下五里之地吳氏後覺大嚀曰妾將死於君子棺側而今已出殯死失其所死於何處乎因向壁臥㪅無一言盖自其夫終時所着衣常爲塵垢及指血所染者至於再三自投於泥中則形容之慘已無可言而終不㪅衣其親家婢子來侍焉吳氏曰我將死不必來云其弟男來見而終無苦辭悲語卽爲還送焉自其夫殯後知舅姑左右之晝夜相守必致其生畧示不死之志而至於食飮則絶不下咽者已過五日至十一日朝呼婢曰余之日前斷指出於罔指而父母遺体不覺藉地余甚不肖汝或收拾置乎婢果埋庭中矣卽訪褁衣帶間徐言曰此皆無益之事欲死不得亦將奈何且謂其姑曰前日每營移居矣今至此境雖明日當移居云其舅姑只信其言曰汝之所欲吾當一一從之云是夜若有不勝困睡之狀而頹臥寢房其姑同室相守者已過四夜只信其婦之昏倒而於爲假寐之間吳氏僭起出門矣一家遑遑追蹤則廊門四開而自廊門有徒跣至江邊痕故卽往相尋霜月照崖有半天裳帶而絆以褁指之囊置之小石上矣乃知其投而中央旣深莫知所在舟纜且絶繫在北崖急呼溪村人棹舟以來而審視則烈烈之光尙留於十步之波凜凜之風忽起於一丈之水乃吳氏視死如歸之地也其舅家庶從相結授以短棹則衣裳半濕若有一片清氷宛然如封而無一兩水入口云乃運尸入家則雞已鳴矣翌日午遷尸于床而野人望見則自吳氏尸房之上有一段白氣橫亘半空如匹練長虹而直貫于相龍之殯漸漸消盡矣因衆會相指曰吳氏尸體昨夜始援而已爲出殯耶此必燒衣服尸床等物之烟氣而天以風吹送于其夫之新殯者可怪少異傳相互聞之則吳氏之尸尙在床上而家無烟火之擧衆乃驚嘆曰此乃吳氏之正氣云自是日遠近村女聚街集道相限其不識吳氏之生時韻面矣十四日載吳氏樞啓相龍殯同壙于山汰洞艮唑之原道路觀之涕泣相送雖愚夫愚婦莫不感義嘖舌焉余州相龍之四從矣自吳氏來嫁閾其善事舅姑之節每欲一見息服盡情踈竟未果焉余作而行之時往見相龍之病則似不起矣安知五六問有此不忍之事乎閏四月初六日余始落京城十一日到全州境聞行人言曰羅州松山梁氏爲三綱故家而今又出一烈云余乃驚問則不答去曰南下則當詳知云十三日至蘆嶺則行人相言曰梁氏家烈婦壯哉壯哉瑞氣橫亘云余又問其詳則亦不答而去余乃知吳氏之必死者已有先服故也果到長城聞之則是矣自不覺嗚咽興嘆而至北倉則爭言白氣之亘天如是之云皈家則一家老少及一村男女以其聞見詳言其顚末曰烈婦之行不可不記余乃乃宲畧記因節節痛惜而觧之曰吳氏誠孝吾已欽艶而孝爲百行之源則其烈也固矣若夫正直之節物異之事不可不論也盖斷指事乃愚婦倉卒之或爲而指血已盡旋出又斫者丈夫猶難也果延其夫一時之命而命乃在天烈婦亦何哉因欲自頸累滔泥井者不分天地不擇水火之時也若無家人之扶護則烈婦之死輕於鴻毛矣旣不得侄其决志則爲見君子之斂殯而開篋出帛恐其血指沾汚不能自制者悿不忍言斜幅之袴不正不用云者此古女士所謂斜之有餘不若正之不足也孰謂婦人之不知禮姑勿葬以待數日云者此是已决之言而舅姑私情慮其必死使不留尸房者無或怪矣若先知其幾則必不使累日不食之軟弱躬婦盡力投江而爲一遺限也其夫入棺之時以額叩地以石手朗者同日同壙之意而意不觧烈婦之至寃者其非常情之所恥乎親執粥器勸進舅姑之誠而以若崩城之痛不失出天之性吳氏之孝且烈此可險矣强爲先飮惟復舅姑之旨而潜吐襟懷不欺者心其誰知乎舅姑無他子女則吾劣不死已有血肉則亦劣不死云者此是私語其老婢而亦得中矣今已出殯死失其所死於何處云者其夫之殯在於五里之地而山回谷深不知去路之嘆也終不更衣終不飮水則自盡乃已孰能回匹婦之志乎將死之日必訪其墮指者乃全般之意孰謂夫人之不學也請舅姑移居之語欲緩其晝夜相守之意耶婚時資裝衣服可以免未亡前飢寒而棄若獘屣潛起出廊洞開其門者以其夫病終之隨而就欲自頸且恐其舅姑之覺尋决赴大江則將示其昭昭之跡而使知其死取之意也及其臨江潦指之烈指之裂絶裳帶亦盡死力而路之以褁指之囊置于石上者且慮其尸身之難尋斷指之漂失故也自閨至江不過牛鳴之地而踞則迷矣松影㭗㭗於層崖柳陰翳翳於長堤雖男子剛腸夜深犻行自不覺流汗而况閨中一婦豈欲必投於此水而爲死哉然而莫知烈婦之心者冀其或生而使不得死於其夫之尸傍又不得死於其夫之殯下鐵石如是從容豈不壯哉將欲投水之際必擇其深而波底步痕卽夜可驗則何其勺水之不入口耶始知烈婦之心已决於未投之水而旣投則水亦不爲之深也若知如此則何必待舟乎是可悔耳其他不忍聞事不可枚擧盖片水如封之狀雖聞於相浩而吾獨將信將疑相浩之手援其嫂自有驚愕恐怕之心而眼纈於月色玲瓏之夜耶時當四月必無氷合之理不欲强卞也晩時微霜苟或然矣而是夜江崖履之者如遭此或烈婦之寃耶且聞死徃三日其親夫人來訣則吳氏之尸死如生時而及其出門頃刻忽変云此乃平生愛親之心有感於冥冥之中而欲以好面相菿也至若白氣亘天直貫于相龍之殯者此非一人之犻見而水店溪村觀者如市聞者側耳此不待吾言而由是驗之片氷之封嚴霜之降其亦近理乎嗚呼吾梁氏有八旋而忠一孝二烈有五矣今此吳氏亦以我松川外裔又添一烈于有光焉恨不得旋其模範於閨門而惜乎其無嗣也惟此堂堂之義卓卓之烈爲女於吳門而生色爲婦於梁門而生色烈婦之死眞兩門之表著何必待棹楔而爲榮哉吳氏生於丙戌而在世僅二十四年矣其情則慽矣而其烈也與日月爭光夫何恨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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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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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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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암 형을 찾아가다 3수 訪省菴白兄【三首】 물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매양 한탄하나니 光陰每恨水流如만났다 헤어진 지 어느덧 여러 해 지났네 逢別於焉閱歲餘오직 책상머리에서 서책을 가까이했을 뿐 惟有案頭親簡冊언제 문 밖에서 신발과 수레 손질했던가 何曾門外理鞋車곤궁해도 서로 면려하여 절조가 견고했고 窮居胥勖節强固늙어갈수록 더욱 정이 도타워짐을 알겠네 老去愈知情不疎새로운 시 차지하고도 미처 쓰지 못했으니 占得新詩題未及나중에 편지에 써서 보내도 무방하리라 無妨他日羽鱗書머리털이 온통 하얘진 것은 탄식하지 않고 不歎鬢髮白紛如공부 과정이 여유롭지 못함을 한할 뿐이네 只恨工程未裕餘빈곤한데 어찌 소리232)에 편안함을 잊으랴 貧困豈忘安素履실패해도 앞 수레의 경계를 범하기가 쉽네 敗顚易犯戒前車이치를 연구함에 실낱처럼 정밀해야 하니 要須硏理絲毫密어찌 마음 다스림에 준칙을 엉성하게 하랴 怎使治心準尺疎번거롭게 그대가 자주 채찍질 해주었기에 煩子頻加鞭策力나는 나이고 글은 글임을 모면하게 되었네 免敎我我復書書누가 다시 성암 옹의 강건함과 같을까 省翁康健復誰如몸이 윤택하니 덕이 넉넉한 줄 알겠네 身潤方知德有餘경계 절실한 절간처럼 호화롭지 않았고233) 戒切桑門不衣馬흥이 높은 율리에서는 건거234)를 탔네 興高栗里命巾車윤리는 일찌감치 집안에서 돈독했고 理倫早向家中篤세태는 일찍 책을 통해서 멀리했네 世態曾從卷裏疎다시금 만년에 더욱 수립하여 更願晩齡彌樹立유림전에 특별히 더 써넣길 바라네 儒林傳上特加書 光陰每恨水流如, 逢別於焉閱歲餘.惟有案頭親簡冊, 何曾門外理鞋車?窮居胥勖節强固, 老去愈知情不疎.占得新詩題未及, 無妨他日羽鱗書.不歎鬢髮白紛如, 只恨工程未裕餘.貧困豈忘安素履? 敗顚易犯戒前車.要須硏理絲毫密, 怎使治心準尺疎?煩子頻加鞭策力, 免敎我我復書書.省翁康健復誰如? 身潤方知德有餘.戒切桑門不衣馬, 興高栗里命巾車.理倫早向家中篤, 世態曾從卷裏疎.更願晩齡彌樹立, 儒林傳上特加書. 소리(素履) 꾸밈이 없는 짚신이라는 뜻으로, 본분을 지키며 질박하고 청백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에 "꾸미지 않은 짚신을 신고 가니, 허물이 없으리라.〔素履往, 無咎.〕"라고 하였다. 경계……않았고 성암(省菴) 백남두(白南斗)의 생활이 검소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의마(衣馬)'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찐 말을 타는 것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서적(公西赤)이 제나라에 갈 적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라고 하였다. 건거(巾車) 휘장을 친 작은 수레로,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혹은 건거를 준비하라 명하고, 혹은 외로운 배를 노질한다.〔或命巾車, 或棹孤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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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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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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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풍곡재 족선조(族先祖) 충경공(忠景公)222)의 묘재(墓齋)이다. 風谷齋【族先祖忠景公墓齋】 남원 동쪽에 가성223)이 울울한데 佳城鬱鬱帶方東중건한 병사224)가 반공에 솟았네 丙舍重新聳半空충경공은 고금에 이름 영원하고 忠景古今名不朽요천 지척에는 승경이 그지없네 蓼川咫尺勝無窮제물에는 각자가 성심을 다하지만 苾芬各自誠心盡화수225) 아래의 우리는 근본이 같네 花樹吾曾根本同풍곡이란 편액을 지명 따라 붙였으니 風谷嘉扁因地錫후선들의 흥기도 이 속에 달려 있네 後承興起在斯中 佳城鬱鬱帶方東, 丙舍重新聳半空.忠景古今名不朽, 蓼川咫尺勝無窮.苾芬各自誠心盡, 花樹吾曾根本同.風谷嘉扁因地錫, 後承興起在斯中.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 1551~1599)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응(季膺), 호는 금릉(金陵)이다. 노진(盧禛)의 문인으로,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ㆍ능성 현령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가성(佳城) 무덤을 뜻한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발로 오랫동안 땅을 구르기에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 "가성이 울울하니, 3천 년 만에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머물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등공이 유언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이곳에 장사지내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西京雜記 卷4》 병사(丙舍) 산소 곁에 지어 놓은 재실(齋室)을 이른다. 화수(花樹) 친족의 모임을 뜻한다.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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